Chapter 2 - 10-20

10화

'심심한데.'

아픈 곳이라고 해 봤자 손목과 발목이 살짝 저릿한 게 전부이건만, 종일 침대 신세다.

오후 내내.

해가 저물어서 어둠이 드러날 때까지 병원 침대에만 박혀 있었단 말이다.

멀쩡한 사람을 가둬 두다니, 너무 과도한 조치 아닌가.

잎에 보이는 건 순백색 커튼.

오른쪽에 보이는 건 커튼.

왼쪽에 보이는 건 커튼.

뒤는?

벽.

'꼼짝없이 갇힌 신세군.'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배가 차니 부수적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지옥에 있는 동안 워낙 예민해졌던 신경이 차츰 가라앉으며 뇌세포들이 여유를 찾은 거다.

-촤락.

"아, 안녕하세요."

찰랑거리는 백금색 머리카락. 똘망똘망한 눈. 어리바리한 동작.

몇 번이나 들러서는 상태를 확인하는 아이리스였다.

"어디 부, 불편한 곳 있으세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아, 으으, 그,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나가고 싶으신 거라면 워, 원장님께 외출 허락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떨까요?"

"외출 허락? 받을 수 있나요?"

아이리스는 작게 끄덕였다.

"중상인 것도 아니고, 사, 산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저 떨리는 목소리에서 신뢰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일단 부딪쳐 보자.

"에피오네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워, 원장님이라면 아마 왼쪽 끝에 있는 원장실에 계실 거예요."

곧바로 이불을 걷어 낸 다음 신발을 신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네에에.... 조심하세요오."

간호사를 뒤로하고 복도를 걸었다.

아침과는 다르게 한층 여유로워진 병원.

크게 소란스럽지도 않고 급박한 음성이 들려오지도 않는다.

다만, 화면 너머로만 보던 NPC들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그 잔향에 젖어 있었다.

아침에 에피오네를 향해 달려들었던 남성은 붕대에 속박된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 에피오네. 에피오네에에!"

무섭다.

'저런 사람이랑은 상종하지 말자.'

길드의 본 건물만큼이나 커다란 병원. 한참을 걸어서야 '원장실'이라고 쓰인 문 앞에 도착했다.

손잡이에 걸려 있는 팻말에는 '재실'이라는 글자가 작게 각인되어 있었다.

손을 말고 노크를 두 번.

문을 통해 둔탁한 소리가 퍼졌다.

"들어와."

건너편에서 들려온 먹먹한 목소리.

방음이 잘되는 방인 건지 소리가 상당히 작게 들렸다.

"실례합니다."

나무 문 너머로 펼쳐진 작은 공간.

길드장이 있던 방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물건들이 있었다.

너무 어질러져 있었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닌 사람이 살아 있을 뿐인 장소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질문 조가 아닌 단조로운 어조. 꽤 업무적인 느낌이었다.

에피오네는 잡다한 물건들로 어질러진 탁자 위에 커다란 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외출 허가증 받으러 왔습니다."

"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책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림인가?'

색이 바랜 종이.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성인 남성과 10대 중후반의 소녀 한 명이 그려져 있다.

눈을 얇게 뜨고 자세히 보았다.

다른 부분은 흐릿해서 잘 모르겠지만 소녀가 그려진 부분은 선명했다.

눈에 익은 모습. 앳된 에피오네였다.

추억이라도 회상하고 있던 걸까.

아니, 잠깐. 이게 아니라.

"산책만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책을 탁, 덮고는.

"몸 상태는 어때?"

"살짝 뻐근한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살짝 뻐근한 게 안 괜찮은 거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그래도 산책 정도라면 문제없으려나."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작은 종잇조각을 꺼냈다.

"걷는 건 괜찮지만 뛰는 건 안 돼. 전에도 말했다시피 몸에 여러모로 문제가 많으니까. 특히 발목 관절 조심하고."

일한은 종이를 건네받았다.

외출증이라는 글씨 아래에 마르지 않은 잉크로 '8~9'라고 쓰여 있었다.

"1시간만 있다 와."

"네, 감사합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 뭉치를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빠져나왔다.

'길드 좀 둘러보고 공원에 앉아 있어야겠다.'

카운터에서 확인받은 뒤, 3층의 구름다리를 건너 길드 건물로 이동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길드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밝히는 곳. 사람들은 저마다 무리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은 미궁이라도 가 볼까?"

"좋아. 마침 골드도 필요했어."

"딜러 한 명 더 필요하지 않아?"

─라든지.

"으으,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걸까."

"이거 꿈이겠지? 게임이 되어 버리다니 미친 게 분명해."

"이제 받아들여. 열흘이나 지났다고. 살아서 길드로 온 게 어디야."

등등.

벌써 저마다 친분을 쌓아 파티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무리를 이룬다는, 살아가는 데 유리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더워.'

사람이 많으니 복사열이 장난 아니다.

만원 버스를 탄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선선한 바람.

그러고 보니 1월일 텐데 별로 춥지 않다. 계절마저 달라진 걸까.

'지난해는 엄청 추웠는데.'

작년 이맘때쯤에는 회사에 있었다.

아니, 집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컴퓨터를 했던가?

여하튼.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일한은 공원 중앙을 가로지르며 커다란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가운데, 분수의 물줄기가 반짝였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수많은 별들.

서늘한 바람과 몽환적인 분위기.

조금씩 사념에 물들어 갔다.

'리스폰에 대해 안 물어봤네.'

다음에 길드장을 만나게 되면 물어보자.

"여어, 또 만나는군."

앞에서 커다란 남성이 걸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트레이닝복을 입은 길드장이었다. 아침에 만났을 땐 잘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상당히 거구다.

키는 2미터 정도 되어 보이고 어깨가 엄청나게 넓다.

운동선수 활동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비율.

"그런데 길드장께서 여기는 왜...."

"아아, 항상 이 시간에 공원을 달린다네."

일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자네는 여기에서 왜 그러고 있나?"

"잠시 바람 좀 쐬러 나왔습니다. 병원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요."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건 좋지. 쉬엄쉬엄하게."

"저기."

떠나려는 길드장을 멈춰 세웠다.

"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길드장은 커다란 몸을 분수대에 기댔다.

"말하게."

"리스폰 된 사람이 있습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 길드장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단 한 명도 없었네."

일한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렇다는 건...."

"그래, 아마 리스폰 시스템은 없는 거겠지."

즉,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 영혼과 데이터의 소멸.

솔직히 말해서 알고는 있었다.

불에 타 버린 후에 직접 봤으니까. 그런데 막상 남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을 당하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실망하게 해 버린 것 같아 미안하군."

"아뇨, 차라리 사실을 듣는 게 낫습니다."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음이 내킨다면 말해 보게. 혼자 끌어안지 말고."

깜짝 놀라 고개를 확 들어 올리니 인자한 얼굴이 맞이해 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길드로 오는 와중에 한 주택가에 들렀습니다. 목소리를, 희미한 목소리를 좇아갔어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딱 한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주택을 향해서 다가갔죠. 무너져 내린 입구 쪽 벽 아래에 누군가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간절히 살려 달라 외쳤고, 저는 손을 내밀며 조금씩 다가갔습니다."

깊게 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망설였어요. 정말로 구해 줘도 되는 건지, 걸림돌이 되진 않을지. 제정신을 차렸을 땐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잔해에 깔린 사람의 부탁대로 집에 들어가서 기절해 있던 아이를 먼저 구했죠. 아이의 어머니까지 구하려 했는데."

길드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스가 새고 있었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신음.

"그걸 본 저는 아이만 데리고 최대한 멀리 도망쳤고, 결국 집은 폭발해 버렸어요. 근처에 있던 모든 걸 지워 버리고서."

"그 아이가 자네와 함께 온 소년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화를 내던가? 어머니를 살려 주지 않았다고."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거지?"

"그야──."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을 끊는 길드장.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일상은 항상 불길에 휘말려 있었어. 사이렌 소리가 매일같이 귓가를 맴돌았지. 수많은 사람을 살렸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네."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다.

"늙은이의 헛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목숨은 너무나 무거워. 그 하나를 살리려면 상황이 허락해야 했고 시간이 허락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내가 허락해야 했다."

목소리가 약간 고조되었다.

"사람이란 생물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서 상황을 바꿀 수도, 시간을 조작할 수도 없다네. 자기 자신을 허락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하고 말을 잇는다.

"반대로 말하면 자기 자신을 허락하는 게 전부다. 인간으로서 사람을 구하는데 할 수 있는 전부가 용기를 내는 거라고. 그리고 망설임을 용기로 바꾸는 게 가장 어렵지."

이야기를 들으니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그럼에도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자만이자 오만이자 기만이겠지. 그 누구 하나 전지(全知)하지도, 전능(全能)하지도 않아."

길드장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세월을 뛰어넘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자기 자신을 책망해도 되는 건 상황과 시간이 허락했음에도 용기를 내지 못했을 때뿐이야."

일한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길드장께선 자책하신 적 있으신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아스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딱 한 번, 20년 전에 딱 한 번 있었지. 한 주택에서 불이 났었어. 그날 불은 유독 붉게 보였다. 무서웠던 게지."

그날을 회고한다.

"결국, 11살짜리 남자애를 구조한 나는 더 이상 용기를 낼 수 없었다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악마 같은 불길을 등지고 아이를 달래는 것뿐이었어. 이상한 일이었지. 다음 날부터는 또 멀쩡했으니까."

툭. 어깨에 두꺼운 손이 올라왔다.

"이야기가 길어졌네만 자네는 망설임을 용기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되, 자책하지 말도록."

한두 걸음 내디뎌서 일한을 등졌다.

"혹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면 길드 뒤편에 있는 봉안담에라도 가 보게. 비어 있는 칸에 고인의 이름을 적을 수 있으니 한결 낫겠지."

그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던 일한은 마른세수를 했다.

'자책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길드장에게는 언제 한번 따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지고 몸의 떨림이 멈췄다.

"슬슬 돌아갈까."

울렁이던 속이 가라앉았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실에 돌아갔다.

"아, 왔다."

"응?"

비어 있는 침대에 앉아 있는 흑발 소년. 15살이라는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이 일한에게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왔어?"

"그냥, 괜찮으신가 해서요. 아침에 오려 했는데 누나한테 이곳저곳 끌려다니느라 이제야 왔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하여간, 유 주임. 적응력 하나는 끝내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을 뻔했으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유진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앉아 있어."

그의 옆에 털썩, 하고 앉았다.

무슨 말을 꺼낼 줄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께 리스폰 여부에 관해 물어봤어."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가벼워진 몸이 다시 무겁게 느껴졌다.

"없었대. 단 한 명도."

"아."

낮은 탄식이 울렸다.

"미안하다."

"형이, 형이 사과를 왜 해요."

고개를 한껏 숙인 유진의 목구멍에서 딸꾹질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지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감정을 억누르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윽, 으으."

뚝뚝.

무릎에 둥근 무늬를 새기는 응어리들.

쌓아 왔던 마음들.

"으으, 아아아아."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참고 있던 거겠지.'

길드로 오는 내내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

유진이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열흘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배려심 많고 주위를 신경 쓰는지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으윽,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울어 버리면 불편하실 텐데...."

일한은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울 수 있을 때 많이 울어 둬."

이 말에 유진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서러운 소리 때문에 주변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지만 일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위로의 한마디도 없이 기다렸을 뿐이다.

-촤락.

"선배 몸은 좀──."

울고 있는 유진을 보고 굳어 버린 은하. 그녀의 시선이 일한에게 고정되었다.

"애를 울리시면 어떡해요."

아냐. 아니, 아닌 게 아닌 건 아니지만 아무튼 아니라고.

"형은, 형은 잘못 없어요. 고마워요. 엄마 말대로 저를 구해 줘서. 으으, 윽."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은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한 거겠지.

그녀는 조용히 일한의 옆에 앉았다.

흘끔 보니 붉어져 있는 눈시울. 활발하게 행동하는 유 주임 또한 호소하지 못한 감정이 있으리라.

시끄러우면서도 다소 적적한 밤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일한은 은하와 유진을 데리고 길드 뒤편으로 향했다.

"여기 이런 데가 있었구나."

짤막한 숲 너머에는 정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있었고, 수십 개의 돌담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울적해진다.

"빈칸에 이름을 적으면 된다고 하셨어."

어느새 앞서가는 건 유진.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두리번거리다가 드디어 빈 부분을 찾은 건지 멈춰 섰다.

직사각형의 칸. 좁은 틈에는 얇은 펜이 끼워져 있었다.

조심조심 펜을 꺼내 이름 석 자를 칸에 신중히 적어 넣었다.

펜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름이 음각으로 파이면서 주위에 꽃 모양 무늬가 새겨졌다.

유진은 흠칫, 놀라면서도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았다.

"선배?"

은하는 펜을 집어 드는 일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칸에 채워지는 이름.

[김 신 우]

"그러고 보니 친하셨죠, 김 대리님이랑."

작게 끄덕였다.

'회사 생활을 처음부터 함께한 절친이지. 마지막 정도는 미련 없이 편하게 갔으면 한다.'

두 손을 모았다.

'짜식, 뭘 멋대로 죽고 난리야. 어디냐고 물어본 문자, 아직 답장도 못 해 줬는데.'

돌담에 새겨지는 음각과 꽃무늬.

공허한 마음속, 친구를 위한 애도의 글귀가 맴돌았다.

'잘 가라, 김신우.'

제11화

11화

"흐음."

손거울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정체 모를 감정이 정신을 사로잡았다.

깨끗해진 얼굴과 흰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 됐든 위화감이 엄청난 건 사실이다.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화려한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며 전형적인 양아치 상이 됐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거리를 뒀고, 유은하가 '선배가 무섭게 생겼나 봐요.'라는 말로 치명타를 넣었다.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건 그렇고, 이 상처는 멀쩡하네."

육체가 재구축되고 나서 상처나 흉터가 사라졌다. 단 두 개를 제외하고.

하나는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새하얀 흉터.

양아치처럼 만들어 주는 주범 중 하나였다.

또 다른 하나는 팔의 화상 자국.

크진 않지만 불그스름한 색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어째서 이 상처들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런 고민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뜨려 봤자 도움 될 건 없으니, 굳이 머리를 쥐어짜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뭐 하냐."

추상같이 들려온 목소리. 어이없다는 감정이 듬뿍 담긴 음성이었다.

손거울에서 벗어난 시선은 커튼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멈춰 섰다.

"나르시시스트도 아니고 대체 몇 분 동안 거울을 보고 있는 거야. 정신병 검사도 해 줄까?"

"정신병 검사는 무슨. 멀쩡합니다."

코웃음 치는 에피오네. 청록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반사하여 희미하게 빛났다.

"아닌 것 같은데."

"진지하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이런 대화를 하자고 온 건 아니고."

발걸음에 맞춰 타일을 두드리는 또각또각 소리가 울렸다.

에피오네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숨결이 느껴지고 동공 속 혈관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일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뭔가 문제라도...?"

튕기듯 허리를 편 에피오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응, 아니네."

"뭐 가요?"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야."

그녀는 가운의 안쪽 주머니에서 둘둘 만 종이를 꺼냈다.

곱게 모은 양손 위로 툭 떨어진 종이. 펼쳐 보니 '퇴원서'라는 글자가 두툼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아직 손목, 발목 관절이 불안하긴 한데, 팔팔해 보이니까 괜찮겠지. 아무튼, 축하합니다."

자못 진지한 표정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드디어 병실 생활 탈출이네.'

에피오네는 팔짱을 꼈다.

"모쪼록 조심하고, 다시 병원에 오는 일은 없게 하도록."

"가끔 빵 먹으러 올게요."

미친 듯이 맛있으니까.

"빵을 먹는 거야 딱히 상관은 없지만."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맞댔다.

"무료 봉사 같은 게 아니니까."

그녀는 옆구리에 손을 올렸다.

"돈만 낼 수 있으면 마음대로 먹어도 돼."

"얼마이길래?"

활짝 펴진 다섯 손가락.

"5골드?"

"500이다, 바보야."

하아?

'플레어 울프 같은 중형 몬스터 한 마리를 처치할 때마다 1골드, 최하급 던전 클리어 보상이 50골드. 1층 식당의 스테이크가 13골드.'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그러고 보니까 너, 종종 아이리스가 빵 갖다주지 않았나?"

"...."

그 간호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빵을 가져다준 거야.

천진난만한 미소 뒤에 타인을 파산시킬 계략이 숨어 있던 게 분명하다.

"퇴원서 좀 봐 봐. 더 놀랄 수 있을걸?"

불안한 시선을 내린다.

'병원비, 4,400골드.'

에피오네는 이 공포스러운 숫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입원비랑 진료비가 1,000골드. 빵 한 개에 500골드인데 다섯 개 먹었으니까 2,500골드. 기본 제공 외에 추가로 마신 차 세 잔이 900골드."

서둘러 인벤토리를 열었다. 보유 코인 430골드.

처참하다.

저번에 광물산 주위의 몬스터는 부장의 아이템으로 죽었으므로 계산되지 않았다.

지금껏 중형 몬스터만 30마리 이상 잡았는데 병원비조차 낼 수 없다.

날아가 버린 인벤토리 데이터 생각에 측은해지는 순간이다.

일한은 이마를 짚고 숙연하게 말했다.

"저기, 이런 건 먹기 전에 말해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움찔.

"안 했었나?"

"안 했습니다."

"아이리스가 말 안 해 줬어?"

일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가져다주는 걸 먹었을 뿐입니다."

"하아아아아. 아이리스가 이런 걸 챙길 애가 아니지."

그녀는 갑자기 퇴원서를 뺏어 들었다. 가운에서 볼펜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끄적인다.

"빵값이랑 찻값은 차감한다."

볼펜으로 대충 수정된 퇴원서.

에피오네의 두 눈이 서글퍼 보인다.

"그럼, 저는 1,000골드만 지불하면──"

"아니."

또 무슨 일이야.

"그건 지불됐어. 몸만 나가면 돼."

"지불됐다니? 어떻게요?"

"너랑 같이 온 여자가 내고 갔어."

은하 씨가?

'1,000골드나 되는 돈을 어디서 구한 거지?'

에피오네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1층 로비에 있을 거야.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는 게 어때?"

"당연히 해야죠."

퇴원 수속을 마친 일한은 곧장 길드 1층 로비로 향했다.

카운터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겁니까."

카운터 너머에 앉아 있는 유은하가 해맑게 웃었다.

"저 취직했어요!"

"취직? 길드 직원으로?"

붉은 옷을 보아하니 어떻게 봐도 길드 직원. 흔히들 말하는 접수원의 모습이다.

그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후배.

"돈 벌 수 있는 방법 찾다가 신청서 넣어 봤는데, 합격했어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합격을 해요?"

당혹감에 젖어 있을 때, 모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구? 지인이야?"

적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여자였다.

"아, 언니! 이쪽은 제 전 직장 선배예요."

전 직장. 맞는 말인데 오묘한 기분이 든다.

"흐응, 전에 말했던 그 사람이구나."

그녀는 일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여기에서 취직했다는 게 믿기질 않아서."

"제가 뽑았어요. 손발 빠르고 열정 넘치길래."

일한은 이마를 짚었다. 리트리버 같은 후배가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이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언니'라고 불린 여자는 은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쪽 가서 퀘스트 접수 좀 받아 줄래? 사람이 한꺼번에 너무 몰렸어."

"맡겨 주세요!"

후다닥. 긴 치마를 나풀거리며 끝에 있는 카운터로 달려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은하가 얘기 엄청 하던데요."

"저에 대해서요?"

"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 병원비를 내주고 싶다면서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왔는데, 얼마나 어이없던지."

그녀는 얼마 전 일을 회상하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뭐, 일은 잘해서 불만 없지만요. 특히 차를 잘 타, 차를."

"탕비실 만렙...."

"네?"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병원비 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는데, 가 버렸네."

"아, 아아, 미안해요. 저거 시간 꽤 걸릴 텐데."

"괜찮습니다. 조금 이따 오죠 뭐."

그동안 간단한 퀘스트라도 할까.

"메이린!"

"저 부르네요. 이만 가 볼게요."

"네, 수고하세요."

벽면에 붙어 있는 게시판을 향해 다가가는 와중에 큰 환호 소리가 들렸다.

"체크메이트라고!"

"대단하잖아, 이 꼬마. 벌써 13연승이야."

슬쩍 보니, 역시나.

"아, 형!"

"여어, 건강해 보이네. 체스야?"

작은 원형 테이블을 가득 채운 체스판과 말들.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엄청 몰려 있었다.

"네. 대회 같은 걸 하고 있길래 와 봤어요."

유진이는 좌절한 상대를 앞에 두고 활짝 웃었다.

"형씨, 이 꼬마 대단하다고. 대회 같은 건 진작에 이기고 도전자들을 하나하나 깔아뭉개고 있어."

남성은 흥분했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는 삐쭉삐쭉 튀어나온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감탄했다.

"천재다, 천재! 크하하!"

보아하니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 같은데,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박장대소했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유진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상금 탔어요. 저녁은 제가 살게요.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

일한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너나 많이 먹어라."

그때, 유진에게 체스 대결을 신청하는 이름 모를 아저씨.

일한은 적당히 빠져나와서 다시 게시판으로 향했다.

일일 퀘스트와 길드 의뢰.

두 분류로 나눠진 게시판에는 A4 사이즈의 갈색빛 종이가 수두룩하고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임무로 구성되는 일일 퀘스트.

게임에서 봤던 것처럼 약초나 광물 모아 오기, 몬스터 처치가 대부분이었다.

길드 의뢰는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길드에서 직접 내리는 임무다.

대부분이 던전 클리어.

던전을 오래 방치하면 게이트 너머의 몬스터들이 나오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클리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길드는 던전이 확인되면 즉시 의뢰서를 붙인다.

'보상이 좋다 보니 의뢰서를 보게 쉽지 않지만.'

지금도 길드 의뢰는 텅텅 비어 있는 상태.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일일 퀘스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침대에만 누워 있기만 했던 몸을 풀고 싶으니까 채집 임무는 패스.

몬스터 처치 의뢰서를 떼어 냈다. E급.

F랭크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퀘스트였다.

'예외적으로.'

다른 플레이어에게 의뢰서를 양도받을 경우에는 D급 퀘스트까지 할 수 있다.

'뭐, 그런 기회는 거의 없지만.'

손에 든 종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기 봐. F랭크인가 봐."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아저씨였다. 딱 봐도 과금으로 얻은 아이템이었다.

"최약체네."

옆에 있던 여자가 맞장구쳤다.

둘은 중얼거리며 일한을 비웃었다.

'레벨이 높아도 랭크가 낮으면 이런 상황이 자주 있지.'

이유는 뻔하다. 길드 랭크가 높을수록 다양한 버프를 받을 수 있으니까.

설정에 따르면 길드에서 내려 주는 축복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이런 요소 때문에 랭크가 강함의 기준이 되었다.

만렙이라 하더라도 F랭크라면 길드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반면에, 랭크가 B다? 그럼 각종 능력치가 상향되는 상시 버프를 받는다.

레벨도 중요하지만 요점은 랭크.

알파벳 따위에 목매는 이유가 이거다.

일한은 뒤에서 떠들어 대는 둘을 무시하고 의뢰서를 읽었다.

'슬라임 30마리라. 잘 아는 명당이 있지.'

질척거리는 게 상상 이상으로 성가신 몬스터지만, 불로 증발시키면 한결 수월하리라.

80렙쯤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슬라임 왕국이라 부를 만한 노다지를 발견했었다.

그곳에서라면 30마리 정도야 순식간에 끝낼 수 있을 거다.

카운터로 가니 적갈색 머리칼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조금씩 보이는 주근깨와 주황색 눈.

여타 NPC와 다를 것 없이 특이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아까 대화를 나눴던 메이린이었다.

"다시 뵙네요. 퀘스트 하시게요?"

"네.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도 뭣하니까요."

"그것도 그렇네요. 의뢰서랑 길드 카드 주시겠어요?"

길드 카드. 잊고 있었다.

인벤토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길드 카드가 없으면 어떻게 되죠?"

"분실하신 건가요?"

"사라졌네요."

잔잔한 미소를 띤다.

"그런 거라면 딱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다시 뽑으면 되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3분? 아마 그 정도 지났을 거다.

메이린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카드를 보며 카운터로 돌아왔다.

"길드 랭크가 F네요? 몬스터 처치 의뢰를 맡아도 괜찮으시겠어요? 채집부터 시작하는 게 안전할 텐데.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가거나."

근심 한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일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의뢰서로 할게요."

종이를 받아 든 그녀는 느릿느릿하게, 주저하며 도장을 찍었다.

"모쪼록 조심해 주세요. 에피오네 씨가 환자가 많다며 투덜거리시거든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길드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바위 언덕. 광물산이 있는 방향이다.

'준비 운동도 할 겸 달려갈까.'

다리를 쫙 펴서 스트레칭을 한 후에 지면을 밀어내며 달린다.

몸이 가볍다. 피로도 0일 때만큼은 아니지만 회사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컨디션이 좋다.

몸이 쭉쭉 뻗어나가는 느낌과 바람이 뺨을 보듬고 지나가는 감촉.

예전이었다면 그저 힘들다고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상쾌할 따름이었다.

'슬슬 보인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처참하게 부서진 광물산이 보였다.

폭발이 일어날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야말로 폭탄을 떨어트린 수준.

휘말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 주변이었던 것 같은데."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곳.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동글동글하고 반투명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슬라임.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 와서일까 거대한 떡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엔 하나둘 보이던 녀석들이 안쪽에서는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게임이랑 달라진 게 없네.'

뽀잉뽀잉 뛰어다니는 귀여운 모습.

"태워야지."

귀여움은 정의라던가.

어림없다.

-화륵.

발치에서 치솟는 불길.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다.

정신을 집중하자 일렁일 뿐이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일대를 뒤덮었다.

화들짝 놀란 슬라임들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뽈뽈 기어간다.

성깔 있는 한 놈은 몸을 크게 부풀린 다음 일한에게 달려들었지만, 순식간에 증발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몇 마리 정도 죽였으려나.'

외뢰서를 꺼내 들었다.

도장 옆에는 '6 / 30'이라는 숫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6은 7로, 7은 8로 바뀌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자릿수를 돌파했다.

이윽고.

[30 / 30]

숫자의 빛이 사라졌다.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뜻이다.

"10분도 안 걸린 것 같은데."

힘을 빼자 사그라드는 불꽃.

주위에 슬라임은커녕 새싹 하나 보이지 않았다.

뜨겁게 달궈진 바위만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새하얀 연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돌아가서 다른 퀘스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성 네 명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어이어이, 이거 진짜 할 거냐? 길드 직원도 걱정하던데."

"당연하지, 그만 좀 투덜대라. 너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것도 오래 걸렸잖아."

"새끼. D급 던전이 뭐가 무섭다고."

"야, 우리 다 D랭크잖냐. 못 깰 리가 없어."

뚱뚱한 남자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것 같은 남자. 거기에 근육이 두툼한 녀석과 둥근 안경을 낀 녀석.

4인 파티로 활동하는 듯했다.

"그, 그래도 지옥에 있는 던전이잖아."

"쫄리면 빠지든가. 대신 너한테 나눠 주는 건 없다."

"좀 빨리 가면 안 되냐. 거기 클리어 보상 중에 마석이 있다고 적혀있는데."

점점 멀어지는 말소리.

짤막한 대화를 들은 일한이 턱을 짚었다.

'지옥에 있는 던전. 보상으로 마석이 나올 수 있는 곳이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던전은 세 개.

하나는 지옥의 안쪽 깊은 곳에 있으므로 제외. 다른 하나는 A급 던전이므로 제외.

남은 건 하나.

'지옥 외곽에 있는 던전이군.'

일정 확률로 나오는 마석은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찾아갔었다.

그런데.

'D랭크 넷?'

그들이 향하는 던전은 재빠른 몬스터 때문에 엄청난 플레이를 요구한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말이다.

몬스터 패턴도 거의 공략본을 달달 외우고 들어가야 하는 수준.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끔살 엔딩을 볼 수 있는, D등급 중에서도 최상급 난도의 던전.

과연 저 넷이 현실에서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제는 손가락이 아니라 몸이 빨라야 한다.

설령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사람인 만큼 언젠가는 지치게 되어 있다.

'네 명이면 너무 적은 것 같은데. 보스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서 뻗을 거야.'

저 넷이 던전을 클리어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나는 클리어할 수 있지."

일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12화

12화

멀찍이 보이는 협곡 지형.

황토를 연상케 하는 붉은 바위들과 모래, 그리고 화염.

지옥에서는 흔하디흔한 색조였다.

그런 캔버스 위에 거뭇거뭇한 점 몇 개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점 세 개는 지옥의 몬스터, 원숭이.

나머지 네 개는 플레이어.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던전을 향하던 이들이 힘겹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원숭이가 뛰어들면 몸을 뒤로 빼다가 넘어지고.

검을 휘두르다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고.

합이 안 맞아서 서로에게 마법을 쓰는 모습은 정말이지 망막에 깊이 새기고 싶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그래도 D랭크 플레이어라고, 아이템은 나쁘지 않아서 원숭이들을 죽이기는 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해 보이진 않았지만.

넷은 잠시 기뻐하다가도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저래서 던전 클리어는 하겠나.'

한편, 그들이 향하고 있는 포털 주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유일한.

길드 랭크 F 주제에 훨씬 앞질러 온 남자.

'여기는 지름길이 있으니까 몬스터도 안 만나고 올 수 있는데.'

마주치는 몬스터들과 일일이 대치하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마치 정석적인 모험가 파티 같지 않은가.

'언제쯤 도착하려나.'

협곡의 윗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에 있는 네 명에게는 이쪽이 보이지 않겠지만. 일한은 그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보고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지루할 정도로 말이다.

일한은 잠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

이런 던전의 입구는 1년을 주기로 다시 생성된다.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면 저번 주와 이번 주에는 아무도 안 건드렸다는 뜻이다.

'세상이 뒤바뀌었는데, 그럴 정신도 없었겠지.'

이런 의미에서 저 넷의 무모한 도전에는 찬사를 보낸다.

"그래도 처음부터 1계열 던전은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네."

엘리멘트의 던전에는 S~F까지의 등급이 있다.

하지만 높은 등급이라고 무조건 몬스터가 강한 건 아니다.

던전 중에서도 전투가 메인인 곳과 길 찾기가 메인인 곳으로 나뉜다.

전자는 길이 쉬운 대신 강력한 몬스터가 나오는 1계열 던전.

후자는 길이 미로처럼 꼬여있거나 함정이 많고, 몬스터가 약한 2계열 던전이다.

'하지만, 이건 A등급까지의 던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3계열 던전.

다른 이름으로는──

"레드 게이트."

등장 몬스터는 보스몹 하나지만, 그 한 마리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크기며, 능력, 지능까지.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뿐이랴?

던전 내부는 상상 그 이상으로 험난하다.

게다가 레드 게이트는 생성 위치까지 불특정해서 대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엘리멘트 역사상 딱 한 번 나타났다는 것.'

당시의 일은 차마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1등급은 생성된 지 약 1~3일, 2등급은 4~14일이 지난 던전으로 각각 게이트가 흰색과 푸른색을 띤다.

흰색, 그러니까 1등급 던전은 몬스터들이 온순하고 난도가 낮은 반면에 보상이 별로다.

반면 2등급 던전은 적당한 난도에 보상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

보통 2등급을 지나 14일째가 되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아주 가끔 붉은색 게이트가 등장한다.

몬스터들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서 난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던전으로, 종종 엄청나게 희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난도가 너무 높아서 클리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붉은 게이트가 열려서 몬스터가 나온다?

그 흉포함이며, 개체 수며...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때문에 3등급 던전은 길드 단위로 클리어하는 게 정석이다.

'애초에 레드 게이트를 볼 일이 거의 없지만.'

일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쩍 가까워진 네 명. 일한은 근처의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고개만 빼꼼 내밀고 조금씩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을 주시했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조금 기다렸다가 따라가야겠어.'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던전을 클리어하고 싶다만, 의뢰서 없이 그랬다가는 길드 측에서 어떤 조치를 할지 모른다.

남의 밭에서 허가 없이 농작물을 수확하는 꼴이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게 하나.

'적당히 위험한 순간에 다가가서 의뢰서를 양도해 달라 하는 거지.'

의뢰서라는 건 쌍방의 동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양도가 가능하다.

물론 어렵게 구한 의뢰서를 양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싶다마는.

'뭐 어쩌겠어. 목숨이 더 소중하겠지.'

생사의 갈림길 앞에선 얄짤없다.

"와 씨, 게이트 더럽게 크네."

"5미터는 되겠지?"

"돼지 쌔꺄 그만 떨어."

"아, 안 떨 거든?"

일한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포션 넉넉하게 챙겼지?"

"당연한 말씀."

"보스 방에 들어가면 클리어할 때까지 못 나오니까 조심하자고."

"으, 으응."

몸을 기울여서 슬쩍 봤다.

다들 게이트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쪽은 보지도 않는 상황.

일한은 네 명 모두 들어가고 나서야 몸을 폈다.

'10분 정도 뒤에 들어가면 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일한은 주저 없이 게이트에 몸을 들였다.

무언가가 육체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과 속이 울렁이는 감각이 짧게 지나간 후, 지옥과는 상당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넓디넓은 동굴.

중간중간 벽에 꽂혀 있는 횃불만이 주위를 밝히며 일렁이고 있었다.

-샤삭.

바닥을 긁는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를 낮추고, 거뭇한 형체가 보이자마자 화염을 휘갈겼다.

-치이익.

타 버린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보니 턱이 큰 개미의 형태.

크기가 성인 허벅지만 하다.

'이미 지나간 자리에 몬스터가 있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곳곳에 있는 구멍들. 대부분이 불에 그슬리거나 무언가로 막혀 있었지만 온전한 것들도 몇몇 있었다.

'파이어볼로 개미굴을 통째로 태운 건 현명하지만 뒤처리가 미흡하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자 멀쩡한 구멍이 보였다.

"사각지대를 하나도 확인 안 한 건가?"

뭐가 됐든, 데빌 엔트는 위험하다.

유독 약해진 플레이어가 보이면 단체로 달려들어 목숨을 끊고 먹어 치울 게 분명하다.

일한은 양손에서 화염을 뿜어 입구를 지졌다. 안쪽에서는 타닥, 타닥, 소리가 났다.

전기 파리채로 벌레를 잡았을 때 나는 것과 비슷한 소리.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얼추 된 것 같고.'

데빌 엔트의 사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열에 의해 갈라진 껍데기 사이로 타 버린 내장과 돌 같은 형태의 무언가가 보였다.

바로 마철석.

마석의 하위 개념으로, 던전 속 몬스터에서만 얻을 수 있다.

어째서 던전의 몬스터만 마철석을 가지고 있을까.

크게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던전의 공기에 함유된 성분이 체내에 축적돼서 만들어진다나 뭐라나.

길드에 가면 1g당 1골드로 전환해 주니 안 챙길 이유가 없다.

'빨리 쫓아가자.'

마철석을 인벤토리에 저장한 다음, 횃불의 정렬을 따라 달렸다.

"포션 좀 줘!"

"적당히 처먹어라! 별로 다치지도 않았잖아!"

"더럽게 아프다고!"

머지않아 남자 넷이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포션 얼마나 남았어?"

"다섯 개!"

"야아, 얘들아. 적당히 마셔라! 절반이나 줄었잖아!"

아무래도 민첩성에 대한 걱정보다는 통증에 대한 걱정을 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포션을 쓸데없이 많이 쓰고 있어.'

일한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몬스터 또 온다!"

"뭐? 와 씨. 여기 D급 던전 맞아?"

"준비해!"

"히, 히익!"

또다시 등장한 데빌 엔트 무리. 힐긋 보기에는 고블린도 몇몇 보였다.

"끄윽! 피, 피다! 포션!"

"그만 처마시라고!"

"고블린이 왜 이렇게 강한 건데?!"

"오, 오지 마!"

포션이란 말을 오십 번 넘게 외치는 안경.

싸우진 않고 화만 내는 근육남.

긴 머리카락이 방해되는 풍성이.

겁먹은 채 파이어볼을 이리저리 쏴대는 뚱뚱이.

손가락만 움직여 봤지, 다들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넷의 꽁트가 멈춘 건 수십 분 후였다.

"헉, 허억."

"죽는 줄 알았네."

"그, 그냥 나가자...."

"뭔 개소리야. 마석은 들고 가야지."

그들은 비틀거리면서도 더욱 어두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한도 그들을 따라가려는데.

-껙, 끼긱.

검으로 배를 찔린 고블린 한 마리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일어나고 있었다.

'또 뒤처리를 제대로 안 했어.'

게임과는 다르게 체력바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재확인은 필수 불가결한 것.

앞선 네 명은 자신감만 넘치는 게 분명하다.

-끼엑! 끼에엑!

비틀비틀 걸어오는 고블린.

일한은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고 화염을 뿜었다.

축 처진 사체에서 마철석을 채취한 뒤 안쪽으로 나아갔다.

"끄아아악!"

"포션 다 떨어졌어!"

"미, 미쳤어. 이건 미친 거야."

"아, 으아아아."

거대한 무언가가 셋. 8미터는 되려나.

"오, 오크 자식들! 게임에선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잖아!"

"으윽!"

"검을 놓치면 어떡해, 이 새끼야!"

"아, 어, 어어어쩌지, 우리...?"

넷은 벽에 몰린 채 오크들에게 둘러싸였다. 일반 오크보다 훨씬 큰 자이언트 오크였다.

"X, X발! 어떤 새끼가 오자고 했어!"

"너잖아, 이 자식아!"

"마석 얘기는 네가 꺼냈잖아!"

"제발 닥쳐! 너희 목소리 들으면서 죽고 싶지 않다고!"

뚱뚱이는 쭈그려서 울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서로에게 거친 말을 쏟아 냈다.

"다, 다음 생에는 행복하고 싶다...."

"오는 게 아니었어."

"으으, 으윽."

"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오크가 걸음을 멈춘 순간.

일한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몬스터의 뒤를 달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가운데 녀석.

"히익!"

"싫어!"

일한은 몸의 무게를 실어 검을 세로로 내리쳤다.

-촥!

허공에 흩날리는 피. 오크의 손목을 깊게 벤 검이 붉게 물들었다.

-쿠르륵!!!

당황한 녀석. 고통에 울부짖으며 주춤주춤 물러섰고, 이를 본 두 마리도 거리를 벌렸다.

"아, 안 죽었어?"

"뭐지...?"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일한은 몸을 숙여 그들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살고 싶어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격한 끄덕임을 선보이는 넷.

"사, 살려 주세요!"

"으으윽! 윽, 으으."

"살았다...!"

"뭐든 할게요!"

일한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뭐든지 하겠다고 했으니까, 하나만 부탁할게요."

이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뢰서. 양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 당연하죠!"

머리카락이 풍성한 남자가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들었다.

돌돌 말려 있는 걸 펼쳐 보니 확실히 의뢰서였다.

"양도하겠습니다."

의뢰서에 쓰여 있는 '내용: 던전 클리어'라는 글씨가 빛을 잃었다.

이제 양도받을 사람 이름만 말하면 되지만.

'이 사람들 앞에선 말하고 싶지 않은데.'

일한은 오크들이 아직 당황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넷을 보았다.

"우선 빨리 나가시죠."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네, 넵!"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 살았다!"

그렇게 달려 나간 세 명.

'응?'

한 명이 부족하다.

"왜, 왜 안 빠지지?"

풍성이였다. 긴 머리카락이 바위틈에 낀 모양.

빨리 빼내지 않으면 오크들이 공격한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일한은 머리카락 끝부분을 잡고 힘을 줘서 당겼다.

쑥, 하고 빠진 머리카락. 한데, 뭔가 다른 이질감이 들었다.

"앗! 내 아들이!"

"아들?"

남성은 일한에게서 머리카락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소중하다는 듯 품에 꼭 안았다. 반질반질한 머리가 반짝였다.

"아, 아아.... 그,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그는 머리카락을 품에 안고 달려 나갔다. 빛났다.

-크르륵!

오묘한 여운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다.

일한은 자세를 낮추고 오크를 향해 돌아섰다.

8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 흉측한 송곳니와 질척한 분위기의 안광.

-크르르.

오른쪽 놈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쿵쿵 울리는 지면. 거대한 주먹을 내리친다.

일한은 재빨리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했다.

"흡!"

바닥에 꽂힌 주먹에 올라갔다.

두꺼운 팔 위를 달린다.

당황한 오크.

하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녀석은 반대 팔을 들었다.

자기를 밟고 오르는 인간. 그것을 잡으려는 심산이 분명하다.

-화륵!

두툼한 손이 몸을 휘감기 직전에 뛰어올랐다.

뜨거운 열기와 갑작스러운 빛에 오크 녀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발에서 뿜는 불길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킨 다음, 그 반동까지 끌어모아 검을 휘둘렀다.

-서걱.

마치 무를 써는 소리.

목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쏟아져 나오는 피.

거구의 몬스터는 눈알을 뒤집고 쓰러졌다.

'나머지 두 마리도 빨리 끝낸다.'

생각하기 무섭게 두 오크는 일한에게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날아드는 거대한 주먹.

움직임이 빠른 편은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피한 뒤, 전처럼 팔을 타고 올라갔다.

검을 꽉 움켜잡은 뒤 오크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수직으로 휘둘러 가슴팍을 벤다.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선혈이 녹색 피부를 물들였다.

-크르르르!!!

왼쪽 오크가 고통과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마치 벌레라도 잡듯이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일한을 뭉개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큿!"

아슬아슬하게 피한 덕에 몸이 납작해지는 일은 없었다.

녀석의 왼쪽 발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달린다.

순식간에 아킬레스건을 벴다.

꽤 깊은 상처.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거대한 몸이 무게중심을 잃었다.

뒤로 쓰러진 오크의 목에 검을 쑤셔 박는다.

-쿠륵, 컥.

'하나.'

마지막 오크는 기세 좋게 팔을 휘둘렀다.

하나,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쿠륵?

뒤를 돌아보는 녀석.

"그쪽이 아니야."

-!!!

그제야 발견했다.

어깨 위에 서 있는 인간을.

-쿠륵!

녀석이 무언가를 할 새도 없이 검을 휘두른 일한.

"윽!"

그런데.

검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순간 당황하면서도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거리를 벌렸다.

'칼날이 너무 무뎌졌어.'

그는 날붙이에 손을 올렸다.

'피부를 녹일 수 있을 때까지 달군다.'

엄청난 열기가 손을 통해 검에 전도(傳導)되기 시작했다.

발에서 불을 뿜을 수는 없지만 오크 녀석들의 패턴은 익숙해졌다.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치이익!

붉게 변한 검날.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다.

식기 전에 목을 친다.

-화륵!

엄청난 화력과 함께 지면을 박찼다.

사선으로 치솟음과 동시에 검을 오크의 목에 박아 넣었다.

'끝.'

일한은 오크의 목에서 검을 빼냈다.

'비슷한 방법으로 한 번 정도는 더 쓸 수 있겠는데?'

다른 무기야 몇 개 챙겨 왔지만, 이왕 남의 거 쓰는 김에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으면 좋지 않은가.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고는 쭈욱 갈랐다.

칼날이 무뎌서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마철석 3개를 무사히 회수했다.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

보스 방이다.

'들어가면 보스를 죽이기 전까진 나올 수 없어.'

들어가기 전에.

"이거부터 해야지."

아까 전해 받은 의뢰서를 꺼내 들었다.

"유일한으로 변경."

'던전 클리어'라는 글씨가 몇 번 깜빡이더니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됐다. 양도됐다는 뜻이다.

일한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 볼까.'

문을 밀자 저항감 없이 가볍게 열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부. 발을 들이자.

-쾅!

문이 닫혔다.

입구 쪽부터 차례대로 켜지는 횃불.

마지막 것이 켜졌을 때. 던전의 주인이 눈을 떴다.

-띠링.

[던전의 주인이 등장했습니다.]

자이언트 오크와 맞먹는 큰 키. 잿빛 피부와 붉은 문신. 빼쭉빼쭉한 이빨.

'오거.'

D랭크 던전에서 나올 수 있는 최강의 몬스터.

녀석의 흉포함과 강인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든 알고 있다.

놈은 뼈로 만들어진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빨 사이사이로 거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쿠워어어어!!!!

오거는 거창하게 울부짖으며 왕좌에 기대어 있던 메이스를 집어 들었다.

'빠르다.'

메이스에 한 번이라도 맞았다가는 즉사.

녀석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서둘러 검을 달구기 시작했다.

아까 전의 잔열이 남아 있었기에 오래 걸리진 않을 듯했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치는 돌 조각들.

거대한 메이스가 바닥을 깨부순 것이다.

'피하지 않았으면 곤죽이 됐어.'

목구멍을 통해 마른침이 지나갔다.

오크 이상의 괴력. 감히 비교하지 못할 속도.

어설프게 다가갔다간 죽는다.

공중으로 한껏 올라간 메이스.

곧 다시 바닥을 내리칠 것이다.

일한은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거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쾅!!!

천천히 메이드를 들어 올린다.

이제 그곳에 인간의 흔적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크워어어!!!

승리를 자축하며 메이스를 천장에 닿도록 들어 올렸을 때.

"시끄러워."

오거는 시야가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정신이 흐릿해지고, 힘이 빠졌다.

"머리뼈가 그리 두껍지는 않은가 봐?"

정수리에 수직으로 꽂힌 검.

그 주위의 피부가 벌겋게 익어 갔다.

비틀거리던 오거는 앞으로 쓰러지더니 메이스에 얼굴을 처박았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조금 전.

오거가 메이스를 내리치고 잠시 여유가 있었을 때, 일한은 거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녀석의 정수리가 보이자 발에서 불을 뿜어 대며 뛰어내렸다.

'솔직히 불안했지만, 어쨌든 이겼으니까.'

오거의 피부를 갈랐다.

어찌나 단단하고 질기던지, 마철석이 보일 때쯤 너덜너덜한 검이 두 동강 났다.

'붉은색. 보스의 마철석이라는 증거.'

번쩍, 하며 왕좌 앞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평범하게 생긴 보물 상자.

열쇠 구멍을 꽂는 곳에는 동그란 버튼이 있었다.

그것을 누르니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띠링.

[깨끗한 유리병]

[오거 가죽 조각]

[강철 메이스 파편]

[검은 안대]

[튼튼한 단검]

[마석]

일한은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마석 획득.'

나름 큰 사이즈. 꽤 비싸게 팔릴 듯하다.

다른 아이템들도 전부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띠링.

'응? 뭐가 더 있나?'

[레벨 상한을 돌파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0->301]

[피로도가 감소했습니다. 58->0]

[축하합니다! 첫 번째 각성자가 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최초로 301레벨 달성.]

[칭호, '첫 번째 각성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첫 번째 각성자'의 획득으로 '고유스킬 추가 슬롯 1'이 개방되었습니다.]

[500레벨 달성 시 다음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니, 뭔데 이게.

제13화

13화

거대한 세상 속 붉은 대지, 지옥.

타오르는 지옥 속 푸른 게이트.

푸른 게이트 너머 어두운 던전.

그 깊은 곳의 넓은 방.

10미터는 족히 넘을 자이언트 오거의 사체가 온기를 잃고 쓰러져 있었다.

부서져 나뒹구는 검은 차게 식은 채로 주위의 광경을 휘황찬란하게 반사한다.

반사되는 모습의 일부. 거기에 유일한이 서 있었다.

다소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혀가 꼬였다.

'아니, 뭔데 이게.'

엘리멘트에서 제한되는 레벨은 300.

즉, 300레벨이 만렙이며 그 이상은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

한데 레벨이 올랐다는 문구와 함께 301레벨이 되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지, 우주 밖의 세상을 직접 발견한 거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우주의 끝에 도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밖으로 튕겨 나간 기분이란 말이다.

"레벨 상한 돌파?"

일한은 아까 보았던 알람 메시지를 되뇌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경험치를 모으면 더 레벨업할 수 있다는 건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301이라는 숫자가 증명하고 있으니.

'히든 퀘스트도 달성했어.'

히든 퀘스트.

말 그대로 달성 조건이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퀘스트.

이는 게임상에서 단 한 번만 클리어할 수 있으며, 누군가가 먼저 클리어했다면 이벤트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즉, 게임 플레이어 중 단 한 명만이 클리어할 수 있다는 거다.

'첫 번째 각성자랑 추가 슬롯은....'

짐작하건대. '각성'이라는 건 레벨 상한 돌파를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그 첫 번째라는 거고.

'고유스킬 추가 슬롯 1'은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직관적이다.

'고유스킬을 한 개 더 얻을 수 있다.'

본래, 일반 스킬이든 고유스킬이든 보유 한도는 1.

엘리멘트에서는 그게 기본이었고 상식이었으며, 규칙이었다.

'그게.'

깨졌다. 단 한 명의 플레이어에 의해서.

'아무리 하나 더 얻을 수 있다지만 고유스킬의 발현이 그리 흔한 일인가.'

일한의 눈썹이 모였다.

코에서 깊은숨이 흘러나왔다.

'고유스킬은 유저 중 아주 소수만 가지고 있는 스킬. 문제는 그 사람들도 자기가 뭘 해서 얻은 건지 모른단 말이지.'

그저 플레이하다 보니 얻었다.

뭘 해서 얻은 건지 모르고, 어떻게 얻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이 그랬다.

이상한 인연, 기연이 선물한 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정의한다.

얻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기에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고, 일부 유저들은 고유스킬이 있는 계정을 얻기 위해 수억씩 태운다.

'특히 물 속성 길드 녀석들이 그렇지.'

일한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고유스킬 슬롯에 대한 내용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추가로 얻을 기회가 생긴 거니까 나쁠 건 없어."

일한은 바뀐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상태 창을 불러냈다.

「-유일한-

레벨: 301

직업: 없음

칭호: 첫 번째 각성자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누적 피로도: 0

소속 길드: 코퀴토스」

칭호가 생긴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태 창.

'칭호. 이것도 원래는 없던 시스템.'

'첫 번째 각성자'를 누르니 작은 홀로그램 창이 나타났다.

[체력 3% 증가, 근력 3% 증가, 민첩 3% 증가.]

'효과는 일부 능력치 증가인가.'

3%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다시 상태 창을 보았을 때, 또 다른 무언가가 일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피로도가 0이 됐어.'

짐작 가는 건 하나뿐.

레벨업.

1레벨 올리는 게 힘들지라도, 레벨업을 하면 피로도가 0이 된다.

이건 심금을 울릴 정도의 소식이었다.

피로도뿐만이 아니다.

레벨이 올랐다는 건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것.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레벨업하는 게 관건이네.'

첫 번째 각성자라는 말은 두 번째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급 아이템으로 떡칠을 한 물 속성 길드에는 벌써 각성을 향해 다가가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다.

아이템만 믿고 나대는 사람만 있다면 기우겠다 만.

'뭐가 됐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지.'

누가 아군, 적군이 될지 모르는 판에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다.

가능한 한 빠르게 레벨업하는 거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서서 생각하다 보니 사체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 불쾌한 냄새를 의식하는 순간 복잡했던 머리가 고요해졌다.

일한은 몸에 힘을 더했다.

'슬슬 돌아갈까.'

그리 생각한 참에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곧 게이트가 닫힌다는 의미였다.

터벅터벅 걸어서 밖으로 나가자, 광선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 기묘한 소음과 함께 게이트가 사라졌다.

지름길을 통해 빠르게 이동.

일한은 길드 근처에서 발길을 멈췄다.

나무 아래에 피어 있는 꽃 때문이었다.

먹물을 묻힌 붓과 닮은 보라색 꽃. 붓꽃이다.

하루 만에 지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엘리멘트에서도 보기 힘든 꽃.

이런 특징 덕분인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5월쯤에 피는 꽃 아니었나?'

일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덧없이 푸른 캔버스에 구름 몇 점. 너무 밝아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태양.

겨울에 보기 힘든 화창한 날씨.

"게임에 맞춰서 시간도 바뀌었다는 건가."

동화된 세상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착잡함 속에서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잠깐.'

붓꽃으로 향하는 시선.

그것은 이리 오라는 듯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혹시 되려나?'

풀 내음을 밟고 천천히 다가갔다. 일한은 조심스럽게 꽃을 꺾었다.

채집한 붓꽃은 보스 방에서 얻은 깨끗한 유리병 속에 살포시 넣어서 인벤토리에 보관.

전보다 속도를 올려서 길드로 향했다.

순식간에 도착한 거대한 로비.

곧장 데스크로 다가갔다.

근처에 서 있던 메이린이 안도한 듯 웃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일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어한 퀘스트는 저쪽으로 가면 처리해 줄 거예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유은하가 앉아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발을 뗐다.

"선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잠시. 일일 퀘스트 의뢰서를 꺼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능숙하게 일 처리를 시작했다.

의뢰서를 한 번 훑고 성공 유무를 따진 다음, 커다란 도장을 찍었다.

"이건 클리어 보상금이에요."

금화 30개. 난도에 걸맞은, 딱 그 정도의 돈이었다.

"아침에 나가셨다 들었는데, 꽤 늦으셨네요?"

"이것도 하고 왔거든요."

일한은 품속에서 돌돌 말린 의뢰서를 꺼내 들었다.

"아, 하나만 하신 게 아니구나."

의뢰서 내용을 본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응? 이, 이거 D등급 던전...."

일한의 얼굴을 보고는.

"음, 선배라면 괜찮았겠죠."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요."

아무래도 그녀가 길드에 취직한 게 그리 나쁜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에이, 직접 본 게 있는데. 선배가 어떤지는 잘 알아요."

유은하는 해맑게 웃으며 도장을 집어 들었다.

"아, 잠깐!"

추상같이 끼어든 목소리.

은하의 뒤를 지나가고 있던 메이린의 것이었다.

그녀는 의뢰서를 집어 들더니 말했다.

"이건 다른 사람이 가져갔던 의뢰선데?"

"다, 다른 사람이요?"

"그래, 이상한 4인조 말이야."

당황한 은하. 일한에게 시선을 보내는 메이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걸 당신이 가지고 있죠?"

"양도받은 겁니다."

"양도? 의뢰서는 클리어하기 전에만 양도가 가능한데 당신이 D급 던전을 클리어했다고요?"

꽤 날이 선 목소리. 불신과 당혹감이 가득 차 있다.

"저기요, D등급이면 E랭크 길드원이 네 명은 있어야 해요. 그런데 F랭크인 당신이 혼자서 클리어했다고요?"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까지 친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들썩이던 입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죽였어요?"

"어, 언니?"

"앉아 있어 봐. 아예 없진 않다고. 돕고 싶다며 던전에 따라 들어갔다가 클리어 후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메이린은 눈을 부라렸다.

"당신도 그 넷이랑 같이 던전에 따라갔다가, 그 사람들이 클리어하는 걸 기다린 거죠? 은근슬쩍 죽이고 보상 혼자 다 먹으려고."

"언니, 너무 갔다. 일단 진정해요. ...응?"

일한은 한 걸음 다가가서 얼굴을 가까이했다.

"뭐, 뭐예요? 저도 죽이려고?"

"혹시."

메이린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소설 안 쓰실래요? 말 잘하시는데."

얼굴을 붉히는 메이린. 그녀는 쾅, 하고 데스크를 내리쳤다.

"장난하지 마세요!"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어라!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경쾌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장발... 아무튼, 장발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는 일한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저랑 제 머리카락이 살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해요!"

"아... 예, 뭐.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녀석들은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어요."

그는 연신 굽신거렸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뭐든 부탁하십쇼!"

일한은 메이린의 손에서 의뢰서를 빼앗아 들었다.

펄럭거리는 소리가 모두의 청각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거, 저한테 양도하신 거 맞죠?"

"아이고, 당연하죠. 보상은 나눠 주실 필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의뢰서를 메이린 앞에 들이밀었다.

"그렇다는데요?"

"어... 어?"

"제가 죽였다던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있네요. 그것도 감사 인사까지 하고."

"아, 그, 어, 어어?"

메이린은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렸다.

"응? 죽이다니요? 무슨 소립니까?"

"아아, 이 직원분께서 제가 당신들을 죽이고 보상을 혼자 차지한다고 화를 내시길래요."

장발의 남성은 고개를 팍 돌려서 메이린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화려하게 휘날리는 모습은 가히 박력 넘쳤다.

"이분께선 생명의 은인이란 말입니다! 죽이다니요?!"

이후로 이런저런 말을 쏟아 내기 시작.

점점 커지는 목소리 덕에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다.

"뭔 일이야?"

"싸움인가?"

"직원이 잘못했네."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 이건 오해가 맞는 것 같다."

메이린은 겁먹은 고양이처럼 넋 나간 표정으로 굳었다.

그러다가 움찔, 하고 어깨를 떨더니.

"죄송합니다!!!!"

직각으로 숙이며 외쳤다.

데스크에 머리가 부딪치면서 큰 소리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 제가 이상한 오해를 해 버려서.... 아... 그, 그게...."

우왕좌왕하는 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시선. 파르르 떨리는 입술.

제대로 된 사고도 못 할 지경으로 당황했다.

"그것보다, 우선 의뢰서 처리를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 할게요! 죄송해요!"

"이 마석이랑 마철석도 골드로 전환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메이린은 일한이 F랭크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도장을 쿵, 찍었다.

마석을 들고 안쪽 공간에 들어간 그녀는 잠시 후, 돈 자루 3개를 들고나왔다.

"아, 으...."

유은하가 작은 보따리를 빼앗다시피 하며 건네받았다.

"클리어 보상금 200골드랑 마석을 전환한 300골드, 마철석을 전환한 198골드예요. 음? 이 하나는 뭐예요, 언니?"

메이린은 나머지 하나의 돈 자루를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300골드 추가로 드릴게요."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눈물까지 고인 걸 보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다.

일한은 장발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어휴,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죠.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때는 다른 녀석들도 끌고 갈 테니까."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남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리를 떠났다.

"서, 선배...."

유은하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검지로 금화 보따리를 들고 있는 메이린을 슬쩍 가리켰다.

쭉 펼친 팔은 금화의 무게 때문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뇨.... 죄송합니다."

금화를 모두 챙긴 일한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래에서 죄송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살인범이 될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300골드도 더 받고 그리 나쁘진 않다.

특히, 그 300골드가 메이린의 자비라고 생각하면 동정하게 될 정도다.

"아, 맞다."

3층으로 올라가려던 일한은 다시 2층으로 내려왔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병원으로 이동.

긴 복도를 지나니, 커튼으로 도배된 병실에 도착했다.

일한이 왔을 때보다는 여유로워진 상태.

에피오네가 환자를 일일이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음? 뭐야? 다쳤냐?"

그녀는 뱀 같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일한에게 다가갔다.

"다쳐서 온 건 아니고, 사람 찾으러 왔습니다."

"누구?"

"아이리스 씨 있습니까?"

에피오네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있기야 있지만, 뭐 하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녀는 눈을 더욱 얇게 떴다.

하지만 이내 경계를 풀고는 안쪽을 가리켰다.

"사다리 가지러 갔어."

"감사합니다."

일한은 에피오네가 가리킨 창고로 들어갔다.

"아."

커다란 사다리를 들고나오던 아이리스는 작게 목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아, 안녕하세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눈이 살짝 감기며 긴 속눈썹이 부각되었다.

"그,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주고 싶은 거?"

일한은 인벤토리에서 꽃을 꺼내 들었다. 보라색 꽃, 붓꽃을.

"이거, 희귀한 꽃 아닌가요? 바, 받아도 돼요?"

"애초에 주려고 가져왔는걸요."

아이리스는 벽에 사다리를 기대어 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꽃을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아스라한 표정으로 붓꽃을 내려다봤다.

"꽃말이 좋은 아이예요. 색도 예쁘고."

"꽃말?"

"네. 좋은 소식, 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본 표정 중에 가장 맑은 얼굴이었다.

"고마워요. 언젠가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만큼 열심히 해야겠죠!"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저, 원장님이 맡겨 놓은 일이 있어서 가 볼게요!"

커다란 사다리를 들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일한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나."

그는 기지개를 켰다.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지 뭐. 나도 방으로 가야겠다. 유진이는 어디에 있으려나.'

그렇게 복도를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이리스?"

일한의 앞에 선 그녀는 숨을 헐떡이다가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제가 아침에 구운 쿠키예요! 괜찮으시면 받아 주세요."

천과 리본으로 포장한 쿠키. 일한은 미소를 띠며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네! 그럼 전 가 볼게요...!"

달려가는 그녀는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아이리스에게 붓꽃(아이리스) 선물.]

[칭호, '자신감을 북돋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어김없이 클릭했다.

[당신의 격려는 타인의 자신감을 높여 줍니다.]

글쎄, 과연 필요할까.

'뭐든 언젠가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본래 엘리멘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칭호를 얻었다는 사실보다.

버프 효과를 가진 히든 퀘스트의 보상, 쿠키를 받은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히든 퀘스트가.'

단 한 명밖에 클리어할 수 없는.

다르게 말해서, 누군가가 클리어하면 사라지는 시스템이.

'초기화됐다.'

제14화

14화

레벨 제한이 뚫렸다.

300을 초과한 레벨 제한이 생겼는지, 아니면 제한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레벨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곧 성장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300레벨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 업데이트와 관련된 걸까?'

1년 남짓한 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동안 여유롭게 지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클로즈드 베타 테스트 때 공개된 어둠의 지역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미지수.

부장이 가지고 있던 검은 단검만 생각해 봐도 NPC에 불과한 존재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얼핏 복잡해 보이나, 결론은 간단하다.

강해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1레벨을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가 어마어마하겠지만 여러모로 써먹을 수단이 있어.'

첫 번째는 아이리스에게 받은 쿠키.

히든 퀘스트의 보상인 만큼 단순히 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게 아니다.

'버프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지.'

그 내용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데, 무려 '획득 경험치 30% 증가'이다.

쿠키 1개의 지속 시간은 24시간. 3개를 받았으니 총 72시간.

철야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려 72시간 동안 이런 효과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길드 랭크.

길드 랭크가 오를 때마다 레벨이 1씩 오른다.

그것도 필요 경험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무조건 1레벨이 오르는 것이다.

'상한 돌파 상태에서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길드 랭크가 F인 만큼 승급하는 것도 쉬울 터.

'문제는 길드전이 언제 열리느냐.'

길드 랭크는 길드전에서 얻은 포인트로 올릴 수 있다.

물론 실적이 좋을수록 얻는 포인트가 증가한다.

세 가지 종목으로 이루어진 길드전은 일정 주기를 두고 진행된다.

"언제 개최될지가 관건인데...."

엘리멘트가 세상을 뒤덮고, 시간마저 바뀌었다. 이벤트 일정까지 틀어졌는지는 미지수.

길드전은 뒤바뀐 세상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올 게 분명하다.

다른 길드와 접촉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

"후우."

턱걸이를 하던 일한은 봉을 놓고 지면에 착지했다.

여러모로 능력치가 상승한 덕분인지 운동하는 것도 크게 힘들지 않고 근육도 잘 붙는다.

"하하, 요즘 여기에서 자주 보이는군."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장님?"

"음. 전에 봤을 때보다 몸이 튼튼해 보이는 것 같구먼."

"시간 날 때마다 여기에 오고 있거든요."

길드장은 슬쩍 미소 지었다.

"체력 단련실이 있어서 다행일세. 시설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목재인 기구들. 동네 헬스장과 비교하면 초등학교 놀이터로 보일 정도였다.

마감이 제대로 된 건 몇 없었기에 편하게 쓰지도 못하는 시설.

그나마 철봉이 여러모로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우리 길드도 번성한 지역에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유독 코퀴토스만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길드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 불편한 게 많아. 길드원 수도 월등히 적고. 그래서일까, 자금도 별로 없다네. 게임으로만 즐길 때는 별로 신경 안 쓰던 것들이었는데."

그는 조금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불 속성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어쩔 수 없죠."

생각할수록 참 이상한 게임인 게, 불 속성만 다른 속성에 비해 전반적인 능력치가 낮다.

뿐만 아니라 길드가 위치한 지역이 완전 시골 중의 시골이었기에 번성한 마을은 꿈도 못 꾼다.

이런 갖가지 이유로, 효율을 따지는 게이머들에게 기피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자네는 왜 불 속성을 선택했나?"

일한은 약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닥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이끌렸습니다."

"이끌렸다, 라. 종종 그럴 때가 있지. 나도 그랬고."

길드장이 가장 높은 철봉을 쥐어 잡고는 거대한 몸을 띄웠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턱걸이를 하면서 말을 잇는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2주 정도밖에 안 됐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먼 과거보다는 지금의 일밖에 생각나지 않겠지."

일한은 자기 팔뚝을 바라보았다.

핏줄이 돋고 두꺼워진 팔. 살아남기 위해, 헤쳐 나가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이미 다른 이들도 이쪽에 익숙해진 듯하더군. 가끔은 이런 습성이 무서울 정도야."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어제는 작은 문제가 있던 것 같던데."

어제.

문제라 할 만한 건 메이린의 오해로 생긴 사소한 해프닝밖에 없다.

"그게 벌써 길드장님 귀에 들어갔습니까?"

"복도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더군. 흰 머리카락이라고 했다. 우리 길드에 그런 머리 색을 가진 건 자네밖에 없잖나."

망할 머리카락. 너무 눈에 띄어서 문제다.

"그냥 오해였습니다. 사과도 받았고, 딱히 문제는 없어요."

"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큰 화재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뭐든 확실히 끝내는 게 좋지."

일한은 길게 늘어질 것 같은 용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기울였던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저는 슬슬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길 빌지."

길드의 뒤쪽, 그러니까 봉안담 방향에 있는 체력 단련실을 빠져나왔다.

왼쪽에는 길드의 중앙으로 가는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고, 오른쪽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땀에 젖은 탓일까, 쌀쌀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왼쪽을 향해 몸을 틀려고 했을 때, 오른쪽에서 들어온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

그녀는 짧게 목소리를 흘렸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의 색만 보고 알 수 있었다. 메이린이라는 걸.

그녀는 일할 때의 복장이 아니라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상하의 모두 새카만 색. 그래서일까, 분위기 자체가 무겁다.

그녀는 시든 꽃다발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옆구리에 붙인 다음.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일한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

"그만 사과하셔도 됩니다. 어제도 수십 번은 들은 것 같고, 딱히 화나지도 않았으니까요."

거기에 돈도 받았으니까.

허리를 편 메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한번 밥이라도 살게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불편하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하기가 더 힘들다.

"그렇게 하시죠. 대신, 이번 일로는 더 이상 사과하지 말아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린.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아, 조심히 들어가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메이린 씨도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틀어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겹쳐 울리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일한.

뒤에서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던 메이린이 흠칫, 놀라서는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까 방향이 같아서...."

"아...."

작별 인사가 너무 일렀군. 뻘쭘하다.

둘은 어색한 공기와 함께 길드의 중앙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나서 메이린은 직원실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간 일한은 빠르게 씻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당분간 레벨업하는 데에 집중할까.'

길드 랭크와 레벨을 동시에 올리기 위해서는 퀘스트 클리어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일 퀘스트는 하루에 10개까지, 길드 의뢰는 하루에 1개까지 할 수 있다.

시간을 잘 활용하면 꽤 많은 레벨을 올릴 수 있으리라.

'일일 퀘스트랑 길드 의뢰 초기화 시간은 매일 0시.'

오늘 12시에 총 11개의 의뢰서를 모두 클리어한 다음, 날이 지나면 또 11개의 의뢰서를 가지고 12시까지 클리어한다.

그럼 쿠키의 효과가 지속되는 24시간 동안 22개의 의뢰서를 클리어할 수 있다.

'연속으로 밤을 새웠다가는 피로도 때문에 잠들어 버릴 게 뻔하니까 적당히 간극을 둬야지.'

내일,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오면 다음 날 점심까지 푹 잔다.

그런 식으로 총 세 번 반복.

쿠키 덕에 획득 경험치가 30% 증가하므로, 어느 정도는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한은 탁자 위의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8시라. 운동까지 하고 왔는데 이거밖에 안 됐네."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하던 일한은 몸을 일으켰다.

"마을에 가 볼까."

길드의 가까운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다른 지역의 마을과 비교하면 시장에 가깝지만 필요한 시설은 대부분 있다.

지금까지는 딱히 갈 이유가 없었고, 마땅히 갈만한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고.

마침 어제 돈도 많이 벌었겠다, 던전에서 먹을 수 있도록 가공된 음식도 살 겸 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거기에도 히든 퀘스트가 있어.'

마음 같아선 하나하나 모두 클리어하고 싶지만, 나머지는 너무 멀다.

여행을 떠나기엔 아직 준비가 필요한 시기다.

'애초에 몇 개를 제외하면 전부 내가 클리어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겠지.'

정보를 공유한 적도 없으니 아는 사람은 없을 터.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하자.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1층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계단에서 유은하와 마주쳤다.

"선배, 어디 가세요?"

"마을이요."

"아~."

짧은 대화 후, 각자 갈 길을 가는가 싶더니.

"잠깐! 마을?!"

은하가 강하게 어깨를 붙잡았다.

"여기에 마을이 있어요?"

"엄청나게 작지만 없진 않습니다. 그런 것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

"저, 전 그냥 길드에서 먹고 자고 다 하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더욱 다가왔다.

"마을에 뭐 있어요?"

"없는 거 빼고 다."

"그러니까 없는 거 빼고 뭐 있냐구요."

대답 안 하면 금방이라도 때릴 것 같은 기세다.

"뭐어, 음식점도 있고, 옷 가게도 있고, 별의별 거 다 있어요."

솔직히 '없는 거 빼고 다'라는 질문에서 음식점과 옷 가게, 이 2개만 추가된 대답일 뿐이다.

그럼에도 유은하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옷 가게?! 저도 갈래요! 더 이상 길드에서 준 옷만 입고 못 살아요!"

"일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붉은 드레스 차림. 거기다 한쪽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다.

"아...."

"그렇게 쳐다봐도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제 은하 씨 상사가 아니니까."

유은하의 표정이 토끼처럼 변했다.

"가고 싶어요."

"그러다 잘립니다."

"으으으!"

"뭘 고민하는 겁니까. 마을이야 다음에 가면 되잖아요."

우물거리는 입술.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뭘 어쩌겠어. 자기가 들어간 직장인데.

"아까 급하게 가던데,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예요?"

"치.... 아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여전히 제 상사 같으시네요."

일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를 본 은하는 작게 볼을 부풀린 상태로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아, 선배."

"네?"

"저, 이런 말 하기 조금 뭐하긴 한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옷 좀 사 입으면 좋을 것 같은데...."

옷?

길드가 지급한 옷. 거칠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다.

"평생 그것만 입을 건 아니잖아요."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갑각류도 탈피는 합니다. 옷 정도는 알아서 사 입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은하는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응?"

"맛있는 거 사 주세요!"

"50골드 주면 20골드 값어치 정도는 사 올게요."

표정을 구긴다.

"30골드는?"

"배달비."

"선배, 나쁜 사람이네요."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다행이네요."

일한은 몸을 돌려서 한 계단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난입니다. 먹을 만한 거 있으면 사 올게요."

"고마워요!"

조금씩 멀어지는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1층까지 내려왔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묘하게 많은 시선이 모였다.

'12시에는 길드 의뢰가 다 끝나고 없겠지.'

일일 퀘스트 10개. 길드 의뢰 1개를 전부 가져가자 점점 더 많은 시선이 모였다.

"이, 이걸 전부요?"

안경을 쓴 길드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의뢰서를 받아 들었다.

"네. 전부 부탁드립니다."

"길드 카드 주시면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일한의 길드 랭크를 보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11장의 의뢰서를 인벤토리에 보관한 다음 길드를 빠져나왔다.

'20분 정도 걸어가면 되려나?'

길드의 오른쪽. 낮은 언덕 몇 개를 넘으니 작은 마을이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1, 2층짜리 건물들. 화면 너머로 봤던 광경 그대로다.

'우선 전체적으로 둘러볼까.'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가물가물했기에, 이리저리 살펴보기로 했다.

양옆에 길게 줄지어 있는 각종 가게.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었으며 일부는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조금 안쪽에는 여러 상인들이 모여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아침임에도 길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가게 문을 여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부모님과 시장을 둘러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생활비를 걱정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분주하게 짐을 날랐다.

얼마 전까지 그들이 그저 NPC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울 정도의 모습이다.

일한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틈으로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대화는, 그 주제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아늑한 마을 분위기에 마음을 기대며 길을 걷다가.

"찾았다."

뒷걸음질을 쳤다. 세 걸음 정도.

멈춰 선 곳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 앞.

이글루처럼 생긴 외관이었는데, 가운데에 기다란 굴뚝이 솟아나 있어서 땅에 반쯤 파묻힌 막대 사탕 같기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선수를 뺏겼던 히든 퀘스트.'

침전된 기억의 파편이 조금씩 떠오른다.

일한은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듯 문을 열고, 엄청난 열기가 느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깡! 깡!

작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 쇠를 두드리는 청량한 소리였다.

벽 부근에는 각종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굴뚝이 솟아 있던 가운데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흘끗, 일한에게 시선을 주고도 아무 말 없이 철 두드리는 일을 계속했다.

-깡! 깡!

그 소리가 몇 번이나 메아리쳤을까. 드디어 대장장이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멀뚱멀뚱 서 있을 건가? 용건이 있으면 말을 하게."

그의 목소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쇠처럼 거칠고도 무거웠다.

"무구를 강화하러 온 겐가?"

"지금 당장은 아니고, 추후에 의뢰를 맡기고 싶습니다."

노인은 말없이 방 한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날짜랑 이름. 써 놓고 가면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게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철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가리킨 테이블 위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었는데, 일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대장장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손자분에게 의뢰를 맡기고 싶습니다."

정적. 방금까지 청량하게 울리던 쇳소리조차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한층 낮아진 목소리. 노인의 눈동자에 옅은 어둠이 드리웠다.

제15화

15화

금색 눈.

그 안에서 화염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불에 분노와는 다른 여러 감정들이 녹아내렸다.

일한은 타오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단단히 미쳤군."

남성은 붉게 달아오른 쇠를 기름에 담갔다.

치이익, 하고 피어오른 소음이 대장장이의 말을 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무기를 맡겨 봤자 득 될 게 없어. 강화는 고사하고 무기를 잃을 걸세."

그의 말은 점점 차게 식었다. 마치 기름 속 쇠처럼.

"소중한 무기를 조각내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네."

"조각내다니요. 저는 무기를 강화하고 싶습니다."

"그럼 나한테 맡기게나. 대장장이를 자처하면서 아이템이나 부수는 녀석은 찾지 말고."

"무기를 강화하고 싶기에 그를 찾는 겁니다."

일한은 물고 늘어졌다.

결코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히든 퀘스트'.

대장장이의 손자라면 풀강화를 비교적 수월하게 찍을 수 있으리라.

엄청난 실력을 가진 그가 아직 재능을 펼치지 못한 것이다.

일한은 과거, 이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사람의 게시글을 읽었다.

덕분에 지금은 대장장이의 손자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자네, 보아하니 길드 사람이지? 다들 나에게 무기를 맡기고 있어. 내 손자를 찾는 머저리는 자네가 처음이라는 말일세. 자부하지. 나라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대장장이에게 말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여 주실 수 있다고요?"

"그래, 장담하지."

"그럼."

운을 떼자 남성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풀강화, 10강화까지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장장이의 눈이 커졌다. 머리카락과 수염에 반쯤 덮여 있었지만, 휘둥그레진 동공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당혹감에 젖어 있던 시선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를 놀리려는 겐가?"

"설마요."

"그렇다면 단순히 무식한 거겠군. 특별히 알려 주도록 하지. 10강화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니, 할 수 있는 자가 있을지도 미지수지."

그는 커다란 망치를 모루 위에 올렸다.

"역사상 10강화를 성공한 대장장이는 단 한 명뿐이다."

"불카누스."

수염에 파묻힌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호오, 아무리 무식해도 들어는 봤구먼."

"그렇게 유명한 대장장이를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쯧, 요즘 애들 중에는 모르는 녀석들도 많아."

예전에 대장장이의 마을에 들른 적이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동상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감히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전설의 대장장이."

"그래, 전설로 불리는 자조차도 10강화를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뿐이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일한은 서슴없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을 날렸다.

"그 무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설의 대장장이가 만든 최초의 10강화 무기."

"모른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그것도 그렇네요."

대장장이는 잔기침을 몇 번인가 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성의회 놈들이 가지고 있다는 뜬소문이 돈 적은 있지만 확실한 건 아무도 몰라."

"신성의회?"

일한이 되묻자 대장장이는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하하!!! 거참 너무하구만. 아무리 그 녀석들이 눈에 띄는 활동을 안 한다고 해도 잊어버렸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아니, 잊은 게 맞다.

신성의회. 분명 어디에서 들어 봤는데.

"너무 그러진 말게나. 녀석들이 조용하긴 해도 할 건 다 하니까.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도 신성의회 덕분이다."

잠시 이야기가 샌 사이에, 눈에 서렸던 노기가 가라앉았다.

"뭐, 차라리 잊고 산다면 그만큼 평화롭다는 거겠지. 의회 녀석들이 사람들 눈에 띄면서까지 무언가를 한다면, 그건 세상에 종말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거니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날은 안 왔으면 좋겠군."

"아."

"음? 뭔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억났다, 신성의회.

정식 명칭은 신의 성좌 의회.

6개 월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관리 기구.

조용히 활동한다는 대장장이의 말대로, 녀석들은 엘리멘트 내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임에서 의회가 하는 일은 단 하나. 악성 유저 관리.

거대한 게임인 만큼, 유저 수가 많은 만큼 별의별 녀석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커뮤니티에 신성의회 소속 NPC한테 죽었더니 계정이 정지되었다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정지된 계정은 예전부터 사칭과 사기를 일삼던 악질 유저.

아마 이때부터였지? 신성의회가 '운영자'라고 불리기 시작한 게.

'이쪽에서는 다른 일도 하는 거려나.'

대장장이가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불카누스가 만든 전설의 무기가 아직까지 존재한다면 차라리 신성의회가 가지고 있는 게 나아. 이상한 사람들의 손에서 나뒹군다면 가치만 상하는 일이지."

그는 다시 망치를 집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만, 10강화는 못한다. 그런 게 가능한 녀석이 있을 리가 없어. 천운이라도 따라 주면 1개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천운. 정확한 비유다.

게임 내에서 무기 풀강화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극악의 확률을 자랑했다.

그 확률이 어찌나 낮은지, 돈으로 10강화를 만들려면 확률상 30억은 필요했다.

이런 확률 망겜을 대체 누가 하나 싶겠지만.

'내가 했었지.'

정이 붙은 건 쉽게 못 떼겠더라.

"장비를 풀강화하고 싶다는 마음은 꿈으로만 간직하게나."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뭐?"

남성의 긴 한숨 속에서, 일한의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당신의 손자라면 가능합니다."

슬쩍 보이는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녀석은 1강화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야! 걸음마 이전에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녀석이라고!"

"내기하시겠습니까?"

"내~기?"

상당히 어이없다는 듯이 비소한다.

"그래, 얼마든지 해 주지. 손주 새끼 실력이 안 돼서 이 대장간도 못 물려주는 참에 잘됐다. 난 이 대장간을 거마."

속사포처럼 쏟아 낸 말들. 어지간히도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뭐가 화로에서 피어오른 불꽃이고, 뭐가 대장장이의 얼굴인지 구분이 안 된다.

"넌 뭘 내놓을 거지? 이 대장간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할 게야!"

대장간에 상응하는 거라.

인벤토리를 아무리 뒤져 본들 그런 물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는 저를 걸겠습니다."

"흐음?"

고개를 한껏 내민 남성은 곧 침까지 튀기며 웃었다.

"크하하! 별짓을 다 하는구만."

"제가 내기에서 진다면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세요. 일에 얼마든지 부려 먹어도 됩니다."

이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쯧쯧, 자네 같은 인간은 수 없이도 많이 봐 왔어. 보나 마나 감당 못 하고 내뺄 게 뻔하구만."

"계약서라도 쓸까요?"

"됐네, 됐어. 이런 부질없는 짓, 뭐 하러 하겠나."

그가 단조를 위해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을 때.

"무서우신가요? 질까 봐."

-까앙!!!!!

땅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 붉게 달군 쇠가, 망치질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 파편 중 일부가 일한의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갔고, 다른 일부는 대장장이의 흰 수염을 검게 그을렸다.

일한은 눈앞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겁쟁이신가 보네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내기는 없던 걸로 하죠."

"기다리게나."

-빠각.

망치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당장 종이와 펜을 준비해 오지."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내기가 성립되었다.

이긴다면 대장간을 얻고, 진다면 자기 자신을 잃는 내기.

대가가 엄청나지만 일한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여유로웠고, 더 나아가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질 수 있는 내기가 아니니까.'

이 세상의 공략본은 머릿속에 있다. 지난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뇌리에 깊게 박아 놓았다.

그리고 그 공략본은 지금,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감으로써 또 한 페이지 넘어갔다.

"내 손자는 한 달 후에나 돌아올 걸세."

"알겠습니다. 그때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죠."

끄덕이고는.

"음, 짧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녔으니 내가 없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 잠깐, 머리카락을 길렀으려나?"

"뭐가 됐든 머리카락이 붉은 남자라는 거죠?"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이름인지까지 알고 있으니까.

"혹시나 말하는 거지만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게. 특히나 이 늙은이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딱 한 달이야.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길드로 찾아가겠어."

그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어 있었다.

"걱정 마시죠. 저야말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세계를 돌아서라도 찾아낼 테니까요."

"크하하! 젊은 것이 패기는 넘치는구만!"

대장장이는 두툼한 손으로 일한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그런 자신 넘치는 얼굴을 보고 싶군."

도발 같은 인사를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훅, 들이닥치는 시원한 바람.

대장간의 열기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감옥에서 탈출한 기분이다.

"후...."

폐 속의 공기를 내뱉어낸 일한은 두 칸짜리 계단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뒤를 돌아보니 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기 싸움은 힘들어."

말을 술술 뱉어 낸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대장장이의 눈빛은 또 얼마나 무섭던지. 떠올리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이다.

'역시 난 마음이 무른 사람이야.'

별안간 이상한 생각을 한 뒤, 본격적으로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은하의 말대로 옷 가게에서 입을 만한 옷을 몇 벌 사고, 육포나 음료를 가능한 한 많이 구매했다.

'저것도 사 갈까.'

빵집도 있었다. 유은하가 좋아할 법한 빵이 보였기에, 유진이도 줄 겸 여러 개 샀다.

어느덧 해의 위치는 10시 방향.

더 할 것도 없으니 슬슬 돌아가자.

'다음에는 다른 지역에 있는 큰 마을에 가 봐야겠어.'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일단 대장장이는 구했고.'

대장장이가 있으면 맡길 무기가 있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

물론 생각해 둔 게 있다.

'빨리 길드전이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거기에서 구할 수 있는 무기니까.'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대장장이와의 계약.

불카누스.

신성의회.

오늘 접하게 된 여러 정보들을 생각하다 보니 금세 길드에 도착했다.

데스크 너머 앉아 있는 유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뭔가 꼬리를 흔드는 리트리버 같다.

"맛있는 거 사 왔어요?"

"저한테 돈 맡겼습니까?"

은하의 표정이 흐려졌다. 어린애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다. 참고로, 가끔은 이러다가 진짜 운다.

"너무해."

"빵 사 왔는데."

"너는 무. 나는 당근.... 재밌죠?"

일한은 표정을 구겼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직원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유은하 본인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이거 유진이 다 줄게요."

"아아! 장난이잖아요!"

일한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빵을 은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유진이는? 걔 것도 사 왔는데."

"아, 맞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

"유진이 일 엄청 잘해요!"

"일? 유진이가?"

"네, 네."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진이가 장부 계산하고 있는데, 수학 엄청 잘 하더라구요. 이제 주판 두드릴 일이 없다니까요?"

이번에는 자랑스럽게 허리를 폈다.

"저, 메이린 언니한테 칭찬받았어요. 인재를 데려왔다고."

일한은 이마를 짚었다.

복잡했던 머리는 얼마 안 가 차갑게 식었다.

'뭐. 딱히 상관없으려나.'

그 아이에게는 던전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안전한 길드에서 일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럼, 이건 유진이한테 가져다주세요."

은하는 빵을 건네받았다.

"혼자 다 먹지 말고."

"안 그러거든요!"

"안 그러길 바랄게요."

"진짜! 안 그런다구!"

일한은 몸을 돌려서 손을 흔들었다.

"어? 선배 어디 가요?"

"퀘스트 하러요."

"아, 조심히 다녀오세요!"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한껏 익살스런 만담을 나눈 일한은 첫 번째 퀘스트를 위해 이동했다.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호숫가.

그 주위에는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세 마리 있었다.

고귀하게 목을 내려 물을 마시는 자태.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광경이다.

달의 신이자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가 키운 사슴이 저 몬스터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물을 마신 사슴은 옆에 놓여 있는 멧돼지 사체를 한 움큼 베어 먹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햇빛을 반사하여 빛난다.

아동용 만화 영화가 순식간에 호러 장르로 변한 느낌이다.

'확 깨네.'

뭐가 어찌 되었든, 녀석들이 처리해야 할 몬스터임은 틀림없는 사실.

일한은 아이리스에게 받은 쿠키를 입속에 던져 넣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제16화

16화

"상태 창."

「-유일한-

레벨: 312

직업: 없음

칭호: 첫 번째 각성자, 자신감을 북돋는 자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누적 피로도: 31

소속 길드: 코퀴토스」

'흐음.'

길드 6층에 있는 방.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바닥을 뒤덮었고, 따스한 공기가 고요함을 더욱 깊게 했다.

일한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허공의 상태 창을 바라보았다.

총 2일, 쿠키 1개를 소모해서 12레벨이 올랐다.

본래 레벨업이 어려운 게임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빠르다. 솔직히 말하면 놀라울 정도다.

'버프 덕이지.'

인벤토리에서 쿠키가 든 봉투를 꺼내 들었다.

얇은 종이 너머로 느껴지는 동그란 형체. 500원 동전보다 약간 크다.

봉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는 길드전이 끝나고 쓸까?"

예측하건대, 길드전은 머지않은 날에 열릴 것이다.

거기에 참여하면 길드 랭크를 올릴 수 있다.

'랭크가 오르면 더 높은 등급의 퀘스트를 할 수 있고.'

지금 개인으로 받을 수 있는 길드 의뢰는 E등급까지.

'거긴 몬스터가 적고 보상도 짜지.'

반면, 랭크를 C까지라도 끌어 올리면 B등급 길드 의뢰를 받을 수 있다.

보상의 격이 달라지고 얻는 경험치가 대폭 늘어난다.

그뿐이랴? 한 번에는 불가능하겠지만, A랭크가 되면 길드 의뢰 제한이 하루 1개에서 5개로 확장된다.

레벨업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게 분명하다.

'뭐, 길드전이 열릴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쿠키 봉지를 인벤토리에 넣은 후,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남겨 두자."

"뭘요?"

일한은 고개를 돌렸다. 왼쪽 방에서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소년.

룸메이트이자 지옥에서 함께 탈출한 동지, 유진이였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제는 종일 잤으니까. 더 이상 못 자겠더라."

"맞다. 퀘스트 하신다고 하루는 나가 있고, 하루는 종일 자셨죠."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유진은 여전히 졸린 목소리로 '그렇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느릿느릿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도 길드에서 일한다며?"

"네, 간단한 계산은 대부분 제가 돕고 있어요."

"은하 씨가 꼬셨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누나가 길드에 취직한 거 보고 저도 돈 벌 수 있는 방법 없나 찾아봤어요. 그때 딱 제안해 주신 거고."

"뭐가 됐든, 길드에서 일하는 건 나쁘지 않아. 월급도 딱딱 나오고 안전하고. 쭉 이 일만 해도 될 것 같아."

졸음에서 빠져나왔는지, 유진은 선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당분간만 할 거예요."

"응? 왜?"

"적당히 돈을 모으면 얼음 속성 길드에 가려고요. 삼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한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중요하지."

"있겠죠? 얼음 속성 길드에?"

유진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질문을 바꿨다.

"얼음 속성 길드든 다른 속성 길드든, 삼촌이 길드에 있겠죠?"

특정한 대답을 원하는 질문.

일한은 그런 마음에 화답해 줄 만한 착한 사람이 아니다.

"있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

"아...."

"하지만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유진의 안광이 빛났다.

"있으면 좋겠어요. 꼭 살아서, 다시 만나고 싶어요."

"네 삼촌도 엘리멘트를 했다고 했었지?"

끄덕인다.

"그럼 죽지 않은 이상 어딘가에는 있어."

"그게 엘리멘트를 했던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일한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게임 계정이 없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이, 길드의 모든 플레이어가 엘리멘트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어."

말을 덧붙인다.

"설령 플레이하지 않았다고 해도 계정만 만들었으면 되는 것 같아. 은하 씨처럼."

"그럼... 계정이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어."

짧은 대답 후에 정적이 이어졌다. 작은 테이블을 바라보던 유진이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계정이 있는 사람들만 단체로 게임에 들어온 걸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지옥에 있을 때도 캠핑카에서 잤잖아?"

"아아, 그렇네요. 분명 건물의 잔해 같은 것도 남아 있었어...."

무언가가 갑자기 생각난 건지 유진의 몸이 들썩였다.

"아!"

"왜 그래?"

"그래서, 그래서 엄마가 있던 거였어요. 삼촌이 계정을 만들어 줬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게임 계정이 있으면 이 세상에 있어."

일한의 말은 유진의 가슴에 작은 희망의 불씨를 피워냈지만, 그 안에는 자그마한 불안도 공존했다.

유진은 목소리를 작게 죽였다.

"삼촌, 무사했으면 좋겠네."

희미한 중얼거림이 째깍거리는 소음과 맞물렸다.

테이블 위의 시계를 확인한 일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렸다.

"너는 몇 시에 출근해?"

"오늘은 오후에요."

"그래, 수고해라."

유진도 탁자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가 약간 안 된 시간.

다시 일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방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기 위해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게 분명하다.

"이 시간에 어디 가세요?"

"체력 단련실에 가려고. 이제는 괴물들이랑 싸울 일이 가득한데 몸 좀 만들어야지."

유진은 일한을 위아래로 훑다가 말했다.

"어쩐지, 어깨가 넓어 보이더라. 근육도 많이 붙었고."

"벌써 티나?"

"네, 얼굴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뭐랄까, 날카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일한은 턱을 매만졌다.

미세하게 수염의 감촉이 느껴질 뿐 크게 달라진 것 없었다.

"예전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원래 자기 변화는 못 알아보잖아요."

"그것도 그렇지."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지긴 했어요."

그런가? 조금 갸름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난 가 볼게."

"네, 오늘도 조심하세요!"

"오냐."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바로 옆에서 문소리가 겹쳐 들렸다.

"어라?"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고전적인 메이드복을 개조한 듯 약간의 프릴이 달린 다홍색 원피스.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길이었다.

위에는 흰색과 붉은색이 적절히 배치된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목걸이 끝에 있는 작은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선배, 어디 가세요?"

유은하가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는 다가왔다.

"체력 단련실에."

"흐음."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서 일한의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왜요?"

"아니, 뭔가 엄청 건강해 보여요. 진짜 운동하는 사람답달까. 선배는 근육이 엄청 빨리 붙네요."

"뭔가 그런 몸이 되어 버렸지."

"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하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옷은 마을에서 산 거예요?"

"퀘스트 할 때 입으려고. 이상해요?"

"아니 아니, 반대예요. 생각보다 잘 입어서 놀랐달까?"

둘은 자연스럽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라는 건 무슨 의미야...."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랄까, 회사에서 봤던 선배는 그냥 검은 옷만 입을 것 같았거든요. 종일 축 처져서 일만 하고, 눈은 퀭하고, 제가 커피 타 드리면 순식간에 마시고. 전혀 패션에 신경 쓸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딱히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은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럼 타고난 건가?"

"별걸 다 타고나네요."

계단을 내려가다가 주제를 전환했다.

"은하 씨는 여기에서 계속 일할 거죠?"

"어어, 아마 그러겠죠?"

"그래, 그러는 게 나을 겁니다. 길드는 안전하니까."

"선배는요? 선배는 계속 여기에서 퀘스트 하면서 지낼 거예요?"

일한은 카펫이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계속은 아니지.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떠날 겁니다."

"어디로?"

"그건 정해져 있지 않아요. 어디든, 언제까지든 궁금한 것들이 해소될 때까지 돌아다닐 겁니다."

은하가 뒷말을 재촉하는 눈길을 보냈다.

"궁금한 게 뭐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예요?"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됐는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뭐라도 원인이 있겠죠."

은하는 턱을 흔들다가 시선을 위로 보냈다.

"이 정도의 짓을 할 수 있으면, 그건 신이라 불릴 만하지 않아요?"

한 치의 변화 없는 어조로 말한다.

"그럼 신을 찾을 때까지 모험을 계속하면 됩니다."

"선배는 여전하시네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세상이 변해 버린 것도,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전부 꿈."

아련한 시선이 흐려진다.

"그래서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거실로 나가면 엄마와 아빠가 소파에 앉아 있고, 출근하면 선배가 퀭한 얼굴로 엎드려 있는 거죠."

일한은 입을 움찔거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겨우 목소리를 뱉어 냈다.

"퀭한 얼굴이라니, 대체 제 인상이 어떻게 돼 있는 겁니까?"

"으음, 피곤한 사람?"

쓴웃음을 짓는다. 순수하게 웃는 유 주임을 보며 말했다.

"많이 달라졌네요."

"뭐 가요?"

"회사 처음 왔을 때에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잖아요."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많이 소심했죠."

"가성으로 말하는 데다가 더듬기도 하고, 눈 못 마주치고, 뭐만 하면 불안해하고. 어떻게 입사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그만! 그만 떠올려요!"

은하의 귀 끝이 빨개졌다. 창피해하면서도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제가 바뀐 건 선배 덕분이에요. 선배가 성격 고치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그 상태였겠죠."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바뀌려고 노력한 건 은하 씨예요."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금방 포기했을걸요? 선배가 알려 준 방법, 엄청 좋았어요."

방법?

"책 발음해서 읽는 거?"

"네, 일부러 도서관까지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때는 한가했었나 보죠."

은하는 눈웃음을 지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전날에 야근까지 했으면서."

일한은 볼을 긁적였다.

"책 읽는 게 효과적이라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잘 모르겠네요. 그냥 갑자기 떠오른 것뿐이라서."

하지만, 하고 말을 잇는다.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은하의 작은 감탄이 귀를 간질였다.

"타고난 건가?"

"또 그런다. 이젠 밥만 먹어도 타고났다 하겠어요."

"진심으로 말한 거예요."

그녀는 검지로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선배는 선생님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일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절대 아니야. 애들을 어르고 달랠 자신 같은 건 없습니다."

"유진이는 잘만 데리고 다녔잖아요."

"그건 그냥 걔가 순한 거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무조건 그래요."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1층 로비.

유은하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체력 단련실로 갔다.

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턱걸이를 했다.

3시간 정도 지나서 11시 30분.

12시에 게시되는 의뢰서를 얻어야 하기에 서둘러 씻고 나왔다.

'딱 맞춰서 내려왔네.'

게시판에는 세 명의 직원이 의뢰서를 붙이고 있었다.

일한은 곧장 길드 의뢰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E등급 던전이 3개.

'2개는 몬스터가 강한 1계열 게이트. 나머지 하나는 2계열 게이트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곳이야.'

난도 높은 쪽이 더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법.

'이걸로 하자.'

의뢰서를 챙겼다.

이번에는 일일 퀘스트. 전부 거기서 거기인 것들뿐이었기에 적당히 10개를 골랐다.

카운터로 발길을 옮겼다.

앉아 있던 메이린은 11장의 의뢰서를 건네받고 하얗게 질렸다.

"이, 이걸 다 하시겠다고요?"

"네. 며칠 전에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D등급 던전도 클리어한 남자다. E등급 퀘스트 정도는 간단하게 클리어할 터.

예전이었다면 말렸겠지만 더는 그럴 필요 없다. 이제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아니까.

"길드 카드 주시겠어요?"

카드를 건네주자,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고민 없이 일정하고 빠른 속도로 도장을 찍어 댔다.

"의뢰서 11장과 길드 카드입니다. 오늘도 조심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일한은 곧장 길드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이린이 폐 속의 공기를 뱉어 냈다.

"후우, 대체 뭐 하는 남자인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F랭크야."

그때, 주위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실례하네만."

눈앞의 거대한 남자가 소란의 원인이었다.

"기, 길드장님?"

"일하는 와중에 미안하군."

"아닙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길드장이 목소리를 작게 죽인 뒤에 메이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방금 유일한이 나가는 것 같았는데, 퀘스트인가?"

"아, 네. 지금 퀘스트 하러 나가셨어요."

"흠. 조금 있다가 돌아오면 그때 찾아가야겠군."

메이린도 목소리를 작게 했다.

"아마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응?"

"의뢰서를 11장이나 들고 가셨거든요."

"11장? 하루 최대치 아닌가?"

길드장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메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들고 가시더라고요. 아마 종일 밖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럼 내일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길드장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러셔야 할 것 같네요."

데스크에 밀착시켰던 거대한 몸을 뒤로 물렸다.

"고맙네. 오늘도 수고하도록."

"네, 들어가세요."

길드장은 유유히 계단을 올라갔다.

"길드장께서도 찾을 만한 사람...."

메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길드의 정문을 바라봤다.

"절대 평범한 F랭크가 아니야."

제17화

17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태양을 품은 채 뚝뚝 떨어진다.

토해 내는 숨결은 하늘 위로 날아오름과 동시에 미미한 온기를 남겼다.

살짝 젖은 옷과 한층 낮아진 기온 때문일까, 후끈함과 서늘함이 뒤엉키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하아, 하아...."

피를 털어내기 위해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

촤악, 소리와 함께 붉은빛을 머금은 액체가 석양을 드리웠다.

그것은 흙바닥을 기괴할 정도로 아름답게 적셨다.

지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거친 호흡 탓에 시야는 선명해졌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했다.

"후우, 여태 한 번도 안 쉬었네."

숨이 차오르면서도, 지친 마음을 다잡았다.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나무밑동에 엉덩이를 걸치고는 긴 검을 바닥에 꽂았다.

예리하게 선 날이 희끄무레한 빛을 반사했다.

"돈 들여서 사길 잘했어."

게임 내에서도 상당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검. 대신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무려 전 재산의 절반이나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단점이 있다면 인벤토리 수납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

딱히 이 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 흔히 학생들이 메는 책가방. 그것에 넣을 수 없을 법한 크기의 물건은 인벤토리에도 수납할 수 없다.

'그래도 성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들고 다닐 수 있어.'

상점에서 돈을 낼 때만 해도 손이 덜덜 떨렸는데, 직접 사용해 보니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게임에서도 많이 썼었지.'

강화하려다가 수없이 부숴 먹은 아이템이기도 하고.

검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몬스터의 피와 땀으로 적셔진 앞머리.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 온 눈가의 상처.

생기 없는 눈동자.

"달라졌나?"

아침에 들었던 유진의 말을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더 사나워져 보이는 것 같은데."

학교 일진에서 동네 일진이 됐달까.

눈매가 사납다. 눈동자는 칙칙하다.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얼굴은 아니었다.

좋은 인상은커녕 상대방에게 불쾌감마저 일게 하는 것이었다.

불쾌감.

불쾌감.

일한은 검에 비친 두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어둡다.

스스로도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꼈을까?

무섭다고. 어둡다고.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별명은 생기지 않았겠지.

『악마.』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기억이 파문을 일으켰다. 저릿해지는 전두엽.

인상을 찡그린다.

『집에 큰불이 났었대요.』

『부모님은 형체도 없이 타 버렸다지? 어떻게 저리 멀쩡할까?』

기억의 파편들이 몸을 찔러 댔다.

『자기 부모도 기억 못 하던데. 그리고 사실 저 아이. ...래요.』

『어휴, 무서워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런데 저 녀석 부모님이....』

『어머, 정말요?』

『쉿, 듣겠어요.』

눈앞이 핑 돌았다. 하지만 검게 물든 기억들은 제어를 뚫고 마구 날뛰었다.

『쟤네 이모는 무슨 죄야.』

『잠깐, 일어난 것 같은데?』

『아,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구멍 난 기억들이 날뛴다.

'진정해.'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기억을 더욱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

"조금, 피곤한가 보네."

먹어야 할 약을 먹지 않은 것 같은, 혹은 먹지 말아야 할 약을 먹은 것 같은 몽롱한 기분.

시야가 선명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손.

땀범벅인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마지막 것까지 끝내고 바로 자자.'

인벤토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일일 퀘스트 의뢰서는 전부 클리어한 상태. 남은 건 길드 의뢰뿐이다.

일한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숲 고블린 사체 세 구를 뒤로하고는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높은 절벽과 그 앞에 있는 푸른 게이트가 보였다.

"후딱 끝내 버리자고."

게이트에 들어가자 속이 울렁이는 듯한 감각이 몇 초간 이어졌다.

머리까지 어지러워질 때쯤, 던전 내부에 도착했다.

높은 벽. 천장에 있는 푸른 광물이 희미하게나마 주위를 밝혀 주었다.

정면에는 각종 무늬가 새겨진 기둥이 보인다.

똑, 똑, 하고 들려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

'코볼트가 있는 곳답게 엄청 습하네.'

한 걸음 내디디자 발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공허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작은 방. 몬스터는 없다.

좌우에 통로가 각각 2개씩, 정면에는 3개의 통로가 있다.

역시 2계열 던전이다.

'몬스터는 별 볼 일 없는데 길이 복잡하단 말이지.'

코볼트는 땅굴을 파고 사는 몬스터.

굴을 너무 많이 파놔서 종종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일도 있을 지경이다.

때문에 녀석들이 있는 던전은 개미굴처럼 꼬여서 길을 잃기 제격.

하지만.

'다 외웠다고.'

옛날 생각이 난다. 미국에서 사귄 친구와 이 던전을 클리어해 보겠다고 고군분투했었지.

길만 제대로 알면 간단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다.

물론 길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높은 허들이지만.

통로의 내부는 입구 쪽보다 좁았는데, 상하좌우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는 벌써 다 먹은 건가. 훨씬 안쪽에 있겠군.'

코볼트라는 몬스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녀석들은 광물을 먹는다.

즉, 녀석들이 광물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는 녀석들의 위액이 엄청난 산성을 띤다는 걸 의미한다.

종종 위액을 토하면서 공격하는 놈들이 있는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몸집이 작은 만큼 토해 내는 위액도 적으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닿으면 위험하겠다마는, 껙껙거리면서 웃긴 꼴로 토할 준비를 하는 걸 기다려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산성을 뱉기보다는 손톱으로 공격해 오지.'

땅을 파기 위해 진화된 두껍고 긴 손톱.

끝부분이 삽처럼 되어 있어서 강하게 맞으면 갑옷도 찌그러진다.

"음...?"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코볼트에 대해 생각하던 일한이 고개를 들었다.

"녀석들도 눈치챘네."

진동에 민감한 종족이니 아마 발을 들인 순간부터 병력을 꾸렸겠지.

10미터 남짓의 거리.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들이 보였다.

배를 벽에 딱 붙인 녀석들은 경계하면서도 거리를 좁혀 왔다.

일한은 검지를 세우고 그 끝에 작은 불꽃은 만들었다.

더욱 확실하게 보이는 몬스터. 긴장한 심장이 숨을 죽였다.

'수는 여덟인가.'

얼핏 리자드맨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작다. 1미터 정도일까.

놈들의 등과 팔다리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2중으로 이루어진 비늘은 워낙 단단하기 때문에 검으로 때려 봐야 소용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그 틈으로 날이 끼여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녀석들의 약점은 연한 피부가 있는 아랫배와.

'불.'

-화르륵!

강렬한 화염이 기다란 통로를 타고 이동했다.

-크르륵!

-끼릭?

-끄륵!

선두에 있던 녀석들이 강한 열기에 몸을 움츠렸다.

이런 좁은 동굴에서 불이라니, 질식사하기 딱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던전. 이 기이한 공간에선 산소가 무제한이다.

-껙껙.

'온다.'

울대를 울렁이는 코볼트.

일한은 몇 걸음 물러섰다.

-쿠엑!

짧은 물줄기. 노르스름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치이익, 하고 피어오르는 연기.

코볼트의 위액은 가히 위험한 물질이다.

'그럼 뭐 해. 너무 짧은데.'

코볼트가 뱉어 낸 위액은 1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몇몇 녀석은 손톱을 세우면서도 바닥에 있는 불길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일한은 오른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쾅!

지면을 지르밟았다.

강하게 뿜어지는 화염.

마치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순간 통로를 가득 메웠다.

툭, 투둑.

코볼트의 사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멸.

벽에 붙어 있던 모든 코볼트가 검게 그을린 채 배를 드러내고 있었다.

몸에서 힘을 빼자 널리 퍼졌던 불길이 순식간에 발치로 모여들었다.

일한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체 앞으로 다가갔다.

아랫배에 검을 찔러 넣고, 생선회를 뜨듯이 검을 기울였다.

검 끝에 닿은 딱딱한 무언가. 조심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병뚜껑만 한 돌덩이. 던전의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철석이다.

세 마리까진 수월하게 채취했으나 네 마리째부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키보드 딸깍이는 거랑 차원이 다르네. 드는 시간도 그렇고.'

한 번에 수십 마리씩 나오는 상급 던전에서는 마철석만 채취할 사람이 필수가 될 듯하다.

실제로 아침에도 마철석 채취꾼을 구하던 파티가 있었고.

파티원이 몬스터를 잡으면 채취꾼이 마철석을 꺼내서 보관.

이런 적절한 작업 분배는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해 주리라.

'이게 마지막이다.'

8개의 마철석을 모두 인벤토리에 저장한 일한은 더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나타난 작은 방.

이번에는 양쪽에 각각 1개의 통로가, 정면에는 2개의 통로가 있었다.

일한은 왼쪽 통로로 들어갔다.

좌우와 위가 딱딱한 흙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닥에는 자갈이 깔린 공간이었다.

'아직 코볼트 일곱 마리랑 고블린 다섯 마리가 남았다.'

이 던전에서 고블린과 코볼트는 주종 관계.

아까 전의 코볼트가 돌아오지 않으면 고블린은 다른 녀석들도 보낼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조금 기다려야지.'

코볼트와 고블린을 따로따로 공략한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 마리의 코볼트가 벽에 몸을 밀착한 채 다가왔다.

-끼리릭!

-케륵!

-크르르.

녀석들은 잔뜩 화났는지 목을 울려 댔다.

-화륵.

바닥을 메운 화염.

코볼트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그저 뒤로 물러나기.

이번에는 위액을 뱉는 녀석이 없었다.

아는 거겠지, 소용없다는 것을.

맨 앞에 있던 놈이 손톱을 벽에 박아 넣었다.

'요놈 봐라?'

곧이어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흙을 파내고, 들어갔다.

10초. 아니 그보다 적은 시간 만에 새로운 굴을 뚫고 모습을 감췄다.

이를 본 다른 녀석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사각.

사방에서 흙을 파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일한은 검을 꽉 움켜쥐고 소리에 집중했다.

-사각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 스르륵.

왼쪽. 그쪽만 소리가 다르다.

단단한 부분이 아닌 무른 흙을 파내는 소리.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캉!

검과 맞물린 손톱.

한쪽 눈이 없는 코볼트. 녀석의 얼굴이 슬로모션으로 지나갔다.

일한은 발을 뻗어서 떨어지는 녀석의 목을 짓눌렀다.

훤히 드러난 아랫배. 한 치의 주저 없이 검을 꽂았다.

-캑!

주르륵, 흐르는 피.

느긋하게 그 광경을 볼 틈은 없다.

-사각사각사각.

-서걱서걱서걱.

-스륵, 스르륵.

'위!'

고개를 치켜든다. 두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 팔을 앞으로 뻗은 코볼트.

몸을 회전시키며 회피.

그와 동시에 검을 역수로 쥐고는 회전의 반동으로 복부를 찔렀다.

-쿠륵....

-스르륵.

이번엔 오른쪽. 검에 꽂힌 코볼트를 빼낼 여유도 없다.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허리를 이용한 스윙.

구멍에서 튀어나온 녀석의 머리를 가격했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맞은 놈은 비틀거리다가 털썩 쓰러졌다.

검에 꿰인 녀석을 빼내고는 기절한 코볼트를 확실하게 처리했다.

'남은 건 네 마리.'

-서걱서걱서걱.

-사각사각사각.

-탁, 타닥, 탁.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돌을 걷어 내는 것 같은.

돌.

'자갈이다!'

일한은 뒤로 점프했다.

-촤락!

자갈을 흩뿌리며 튀어나온 코볼트.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그렇겐 안 되지.'

놈의 머리를 밟고는 화염을 분출했다.

뜨거워져서일까. 다른 녀석들이 흙 파는 소리가 멎었다.

열기를 경계하는 것도 잠시, 다시 요란한 소음이 귀를 긁어 댔다.

-스르륵.

-스륵.

-스르르.

'동시에 온다.'

오른쪽!

검을 휘둘러 쳐 냈다.

왼쪽!

발로 걷어차면서 태워 버렸다.

위!

녀석은 발톱을 들이밀지 않았다. 대신 위액을 토해 냈다.

얼굴 바로 위에서 말이다.

위험하다.

닿았다가는 피부가 녹아 버린다.

순간 백지가 된 머리. 하지만, 그것은 단위로 나타낼 수 없는 찰나였다.

일한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바로 뒤로 떨어진 위액.

조금만 늦었어도 실명이었다.

-크르륵.

녀석은 자갈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코볼트가 굴을 파는 시간은 10초.

일한이 불을 뿜는 시간은?

0.1초.

-화르륵!

일대를 집어삼킨 화염.

그 광경은 지옥과도 같았다.

"후우."

숨을 고른 다음, 어깨의 흙을 털어 냈다.

빠르게 마철석을 채취.

얼마 안 남은 던전의 끝을 향해 나아간다.

-끼룩?

-꾸르륵!

일한을 발견한 고블린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다섯 명 중 앞에 있는 둘은 나무 방망이를, 뒤에 있는 셋은 철제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빨리 가서 쉬고 싶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끝낸다.'

일한은 검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웅!!!

뒤꿈치가 떠올랐다.

작렬하는 화염이 공기를 강하게 밀어낸다.

-크륵?

-키르르?

고블린은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이 검에 기댄 채 넘어질 것 같은 자세로 요지부동이었으니까.

하나, 이 모든 건 추진력을 위한 것.

-우우웅!

깊게 박았던 검을 조금씩 빼낸다.

-우웅! 우웅!

순식간에,

-콰앙!!!!

발진.

고블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오른쪽 벽도, 왼쪽 벽도, 뒤쪽 벽도, 작은 불꽃들이 붙어 있었다.

벽을 타고 한 바퀴 돌기라도 한 걸까?

동료들은 어떠한가.

옆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 있던 녀석의 머리가 없다.

뒤의 셋도 마찬가지. 그들의 머리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덜덜 떨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등.

인간의 등이 보인다.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흰 머리카락의 인간이 이쪽을 본다.

아아, 그의 눈은. 그 눈은.

깊은 곳의 공포를 끌어내는 눈이었다.

퇴폐적이고 기분 나쁜 눈빛.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쿠륽(악마).

"어라, 사체가... 말을 하네?"

-쿠륵?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시야가 뒤집어졌다.

갑자기 천장이 보이더니, 이내 피로 적셔진 지면이 보였다.

그게 고블린의 마지막이었다.

'보스도 바로 잡자.'

목 없는 사체에서 마철석을 회수한 일한은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

주저 없이 발을 들였다.

-띠링.

[던전의 주인이 등장했습니다.]

-쿠워어!

오크.

자이언트 오크가 아닌 일반 오크다.

이미 자이언트 오크를 죽인 경험이 있다.

눈앞의 녀석은 더욱 잡기 쉬울 터.

쿵쿵, 바닥을 울리며 달려오는 보스.

일한은 그것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시동을 걸었다.

-화르륵.

-쿠워어어!

검끝을 위로 향하게 하고.

-워어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다.

-어어어!!!

녀석이 가까이 와서 몸을 숙였을 때.

-쾅!!!

위로 솟구친다.

-컥, 쿠륵....

검은 오크의 목 정중앙에 박혔다.

피를 뱉어 내던 녀석은 팔을 들다가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후, 드디어 끝."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323->324]

[피로도가 감소했습니다. 47->0]

눈앞에 나타난 홀로그램 창을 슬쩍 본 다음 시선을 돌렸다.

방의 안쪽에 나타난 상자.

지난번 D급 던전의 상자보다는 작고 수수했다.

신속하게 마철석을 채취.

검을 빼든 일한은 상자를 향해 이동했다.

버튼을 누르니 달칵, 하고 열리는 상자.

-띠링.

[코발트]

[코볼트 비늘]

[고블린 몽둥이]

[오크의 송곳니]

"으음."

크게 쓸 만한 건 없다.

'E등급 던전에서 많은 걸 바라면 안 되지.'

아이템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었다.

기지개를 켜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

등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불길하고도.

기억의 편린을 건드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18화

18화

내장을 휘젓는 것 같은 목소리. 등골이 서늘해졌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구지?'

이 미로 같은 던전의 끝에 어떻게 들어온 걸까.

처음부터 쫓아왔다?

아니, 지금껏 인기척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알고 있는 대사다.'

두뇌를 압박해 오는 기시감.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는 말은 여기에서 들려오면 안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뒤에 있는 녀석은....'

암흑지대의 NPC.

몸은 뜨거운데도 땀샘에서는 차가운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으며, 순간 '꿈을 꾸고 있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생각을 부정하듯.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것이 멈춘 순간.

-챙!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아찔한 시야에 비치는 섬광.

저릿한 감각이 검을 타고 팔에 흘러들어 왔다.

"아아, 깜짝이야."

또다시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렸다.

일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슬아슬 흔들리던 시선이 우뚝 선 무언가에 집중되었다.

전신을 가리는 누더기. 머리마저 덮어 버린 천 조각 때문에 보이는 건 하관뿐.

그늘에 가려진 입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그렸다.

"갑자기 돌아보면 놀라잖아."

그는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일한은 그 모습을 주시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하, 하하, 하."

툭툭 끊기는 웃음소리.

거기에 일한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목소리의 떨림은 노력으로 숨길 수 없었다.

"나를 알고 있다는 말투네."

"아예 모르진 않지."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저항 없이 돌아간 머리는 몸과 수직을 이루었다.

그 기이한 광경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아, 으음."

녀석은 일정한 박자로 몸을 흔들어 댔다. 마치 툭, 밀친 오뚝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를, 안다고?"

질문보다는 혼잣말에 가깝다.

"어떻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크큭."

실소는 점점 커지고 고조되어 갔다.

"크하하하!"

머리가 한 바퀴 회전했다.

우드득, 하고 근육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앞의 존재는 여전히 웃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전신의 신경세포가 울부짖었다. 위험하다고, 도망치라고.

그런 육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한은 검을 더 강하게 쥐었다.

"나를 알고 있다. 흠, 내 기억으로는 너와 만난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녀석은 어깨를 흔들며 또다시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우드득.

또다시 머리를 돌렸다.

"그 돼지 새끼가 말한 건가."

한층 고조되고 두꺼워진 목소리.

웃음기가 싹 빠지니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었다.

'돼지 새끼?'

알고 있는 돼지는 한 마리밖에 없다.

'부장을 말하는 건가.'

누더기 NPC는 손톱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망할 새끼가. 아무것도 못 하고 터져 버린 자식이 감히 나를 거론해?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재잘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망할'이라는 단어만 수십 번씩 내지르며 기괴한 정신 상태를 선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뚝 목소리가 끊겼다.

갑자기,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이 긴장한 육체를 옥죄었다.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따끔거리는 목.

얼음장 같아진 손.

시각이, 청각이, 촉각이 극적으로 예민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긴장감에 박자감을 조성했고, 선명하게 보이는 눈앞의 존재가 모든 감정을 휘어잡았다.

살결에 닿는 옷의 감촉이 느껴진다.

검을 휘어잡은 손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흐릿한 먼지 냄새와 함께 불길한 정적이 감돌았다.

"잠깐,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아까는 잠시 놀라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일한은 명확한 적대심을 드러냈다.

날 선 검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천장의 푸른빛을 반사했다.

"맹세할게. 다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는 양손을 낮게 들어 올렸다.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손에 쥔 단검은 내려놓지 않았다.

단검.

검은 단검.

'부장이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아.'

그 검을 준 의도가 무엇인지, 어째서 부장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본능을 따라서도 배경지식을 따라서도, 위험하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친다면 죽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순간, 단검이 목에 꽂히는 허상이 그려졌다.

틈을 내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상이 아니게 되겠지.

"이래도 믿어 주지 않는 건가. 슬프네."

녀석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잠시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인데 말이야."

"그럼 할 얘기만 하고 꺼져."

"하하, 바쁜 녀석이군."

어깨를 들썩이고는.

"뭐, 좋아. 슬슬 본론을 꺼내지."

그는 단검의 날 부분을 잡았다.

그리고 손잡이를 일한에게 내밀었다.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

3초 넘는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설명을 생략하지 마라."

"하아, 귀찮은 친구네."

간드러진 한숨을 내쉬고는 보기 좋게 입꼬리를 올린다.

"낙원을 만들 거다."

"낙원?"

"그래. 그걸 위해서는 죽음으로써 구원과 탄생으로써 축복이 필요하지."

영문 모를 말.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너는 우리와 함께 구원자가 되는 거다."

"우리? 너 이외에 다른 녀석들도 있는 건가?"

일한의 지적에 작은 신음을 흘렸다.

"실언이다. 정정할게. 나와 함께 구원자가 되는 거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간단히 비웃으며 넘길 수가 없었다.

그 말의 무게가 심장을 짓눌러 왔다.

"구원자가 되면, 뭘 하지?"

"말했잖냐, 죽음으로써 구원한다고. 뻔하고 간단한 이야기다. 빙빙 돌려 생각하지 마."

"죽여? 누굴?"

"딱히 정해진 건 없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별 볼 일 없는 녀석,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죽여. 이 단검으로."

웃음소리를 한 번 낸 다음, 말을 이었다.

"대상이 인간이기만 하면 상관없어. 몇 명이든, 몇 번이든 죽여라."

그는 이상을 향해 내민 단검을 흔들었다.

위아래로 출렁이는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무거운 입술을 들어 올렸다.

"축복하는 자는?"

"아."

남성의 짧은 음성.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신이 난도질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압도당했다.

"그건 우리가 넘볼 영역이 아니야. 축복은 지고한 존재께서 내려 주신다."

낙원.

지고한 존재.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갔다.

"우리들은 그저 죽일 뿐이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아니지. 구원이다."

그는 '구원'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자, 검을 받아라. 이것은 증표가 될 것이며,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너는 영광스러운 구원자로 거듭나게 될 거다."

그는 재촉하듯, 또는 초조한 듯 손에 쥔 단검을 흔들었다.

빛조차 삼켜 버릴 정도로 검은 칼날.

거기에 손가락 하나라도 닿았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에 갇혀 버릴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거냐. 사람은 많을 텐데?"

"동감한다."

너무나 빠른 수긍에 되레 당황했다.

"이 세상에는 구원자에 어울리는 인간들이 수 없이도 많지. 피도 눈물도 없이 살인을 즐기는 그런 녀석들 말이야."

"그런──."

"그런데 왜일까."

남성이 일한의 말을 빼앗았다.

"어째서, 어째서 지고한 존재께서 너를 원하지?"

"뭐?"

"아아, 그분께서 어째서, 어째서.... 이런 나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는 눈물 훔치는 시늉을 했다.

"하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그 무엇이라도 한다."

아랫입술을 짓씹었고, 광적인 집착이 붉은 자태를 드리우며 흘러내렸다.

선혈이 똑, 똑 하고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며 어두운 바닥에 검붉은 자국을 새겼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기행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지고한 존재의 바람이다. 너는 구원자가 되는 거야."

"...거절하면?"

뒤틀리는 입꼬리. 피에 젖은 입술이 야릇한 미소를 만들었다.

"네가 상상하는 그대로 되겠지."

일한은 검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자세를 취하려던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신경을 헤집는 추상같은 목소리.

'분위기가 달라졌어.'

일한은 눈앞에 있는 남성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뭐지?'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선이 시선을 흩트렸다.

반짝, 하고 희미한 빛이 그것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을 쥔 팔을 살짝 앞으로 뺐을 때, 고통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눈알을 굴려 격렬한 통증의 근원지를 살폈다.

오른쪽 손목.

투명한 실에 휘감긴 상태로 피를 떨어트린다.

미세하게 보이는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조금 올라가니 수직으로 교차하는 실.

주위를 더욱 넓게 살폈다.

'처음엔 몰랐는데.'

눈살을 찌푸리면 희미하게 보이는 선들. 불규칙한 간격으로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것들은 벽과 벽을 연결했으며, 서로에게 뒤엉켰고, 일한의 신체 곳곳을 휘감았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누더기를 노려보았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어.'

설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갇힌 건가?

거미의 함정에 걸려서, 운명도 모른 채 발버둥 친다.

한순간에 작은 날벌레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움직였다가는 전신이 토막 날 거다."

남성이 쫙 편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일한의 목을 감고 있던 실이 팽팽하게 휘감겼다.

"크윽...."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 선혈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보 같군. 지고한 존재의 손을 내치다니."

남성은 일한의 코앞에 섰다.

심장이 자기만이라도 도망가겠다는 듯 뜀박질을 해댔다.

방금까지만 해도 녀석에게 향해 있던 단검의 끝이 일한을 겨누고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어."

심장을 향해 검을 박아 넣는다.

일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빠직.

"...뭐?"

얼빠진 목소리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

'이게, 뭐야.'

금색으로 빛나는 조각들이 단검을 막았다.

"어이.... 이건 대체 뭐냐."

이쪽이 묻고 싶다.

-촤라락.

사방으로 날아간 조각들은 남성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컥!"

깊숙이 박힌 빛의 조각.

"컥, 끄윽...."

녀석은 피가 쏟아지는 목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집중력이 무너져서일까.

'실이 느슨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희미한 선들은 뿌연 가루로 부서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네, 네 녀석...!"

-콰앙!

일한은 망설임 없이 날아들었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다리를 쭉 뻗어 남성의 얼굴을 짓밟았다.

"크윽! 컥!"

그는 강한 충격으로 인해 벽에 처박혔다.

먼지가 피어오르며 무수한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구원자가 되라는 제안."

비틀비틀 일어나려는 NPC의 가슴팍에 발을 올렸다.

"확실하게 거절한다."

체중을 실어서 남성의 육체를 짓누른다.

"개, 개자식...."

목에 박힌 빛의 파편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걸 흘끗 보고는 발에서 불을 뿜어 댔다.

"끄아악!!!"

일렁이는 화염과 피어오르는 연기. 감히 괴롭다는 수준이 아니겠지.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린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으면 좋겠네."

정확히 심장을 겨누고 찔렀다.

-콰직.

바들바들 떨리던 몸이 경직되었다.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아까 그 조각들은 뭐였던 거지.'

마치 유리 조각 같은 게 도와줬다.

단검을 막아 주고, 녀석의 집중력을 흩트려 치명타까지의 길을 터 주었다.

그 힘은 대체 뭐였을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NPC의 가슴에서 검을 빼냈다.

검에서는 붉은 피가──

"!!!"

인정한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으며, 두 눈으로 직접 본 지금도 믿어지질 않는다.

검 끝이 떨렸다.

작게 맺힌 붉은 액체가 투명하게 변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한은 얼굴을 가린 누더기를 뜯어냈다.

'이건 대체....'

아까까지 잘도 지껄여대던 남성의 입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처음부터 핏기 없는 피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예 회색이다.

입술과 목에서 흐르던 피는 색을 잃고 투명하게 변해 갔다.

"인형...."

고통에 울부짖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분명 사람과 똑같이 괴로워했다. 울부짖었고, 피를 흘렸다.

그런데 그게 전부 인형이었다고?

정교해도 너무 정교하다.

일한은 조심스레 그것의 뺨을 만졌다.

'차가워.'

실리콘 같은 감촉. 탄력 있고 말랑하다.

"@%$@!%(%!"

인형이 소음을 뱉어 냈다.

혹시 모르기에 살짝 거리를 벌린 채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어둠에서 지켜볼 것이다."

기계음이 섞인 소리였다.

인형은 몇 초간 덜덜덜 떨리더니, 이내 검게 변했다.

'부서졌다.'

파삭, 하고 무너져 내린 형체.

모래로 만든 성처럼 너무나 부드럽게 바스러졌다.

녀석이 떨어트렸던 단검 또한 재 가루처럼 변해 버렸다.

"대체 뭐였던 거지."

일한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암흑지대.

NPC.

낙원.

구원.

축복.

다양한 단어들이 사고의 수면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이번에도 우리라는 말을 썼어.'

한 명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존재들이 낙원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다.

'인형이 NPC의 본체 같지는 않아.'

분명 다른 곳에 진짜가 있겠지.

이 정교한 인형을 만든 존재 또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쭉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감 없던 위기가 부쩍 다가왔다.

특히나 방금 일로 '구원자'들에게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대로는 안 돼.'

스스로를 지키려면,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면.

"더욱 강해져야 한다."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제19화

19화

"아, 부서졌다."

어두운 공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바닥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치 동굴 같은 장소였다.

그곳에 서 있던 여성이 중얼거렸다.

흰색 바탕에 검은 그러데이션이 들어간 가운은 그녀의 체구에 비해 너무나 길었다.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이 바닥에 끌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검지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린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기다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염색을 한 건지, 피아노 타일처럼 흑백으로 배치된 색조가 붉은 눈을 더욱 부각했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지만, 머리 위에 솟아난 두 개의 뿔보다는 아니었다.

"으음."

손가락으로 입술을 짓누른다. 입이 살짝 벌어지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기."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부서져 버렸는데?"

작은 얼굴에 소악마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부서졌다고?"

돌을 깎아 만든 의자. 거기에 앉아 있던 남성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머리를 뒤덮은 누더기가 하관까지 가려 버렸다.

"가슴에 박아 뒀던 코어가 부서졌어."

어금니를 깨무는 남성.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하하!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힘들게 만든 건 나란 말이야."

"좀 더 제대로 만들란 말이다. 내 발끝에도 못 미치잖아."

"남 탓하시는 건가요? 실은 본인이 허~접이면서!"

그녀의 시야에 얇은 실들이 무수히 비쳤다.

"어?"

뒤집어진 시야.

데굴데굴 굴렀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건 목이 없는 몸.

"아.... 아아...."

"말을 가려라. 그 능력을 누가 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육체를 휘감은 실들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잠깐──"

무 써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핏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홀로 남은 머리.

뻐끔거리던 입은 축 늘어졌다.

"저 몸, 마음에 들었는데."

머리는 데굴데굴 굴러서 어두운 공간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육체가 있었다.

"너무하네. 다시 만들어야 되잖아."

육체는 인형을 조립하듯 스스로의 목에 머리를 끼웠다.

"앗, 안 보인다."

새로운 몸의 팔을 이용해서 머리를 툭툭, 때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눈알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재료 모으는데 고생했단 말이야. 저 다리는 겨우겨우 얻은 거라고. 그 여자를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는 빨갛게 물든 옷으로 헐벗은 육체를 감쌌다.

"윽, 축축해. 찐득거려."

가운에 들러붙은 살점을 털어 냈다.

그 모습을 본 남성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쁜 년."

"여자애한테 너무하네. 가녀린 마음에 상처가 나 버린다구?"

"캬핫, 너는 구원자에 딱 어울리는 인간이다. 가녀린 마음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여성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최저야. 울고 싶어졌어."

"말은 잘하는군."

그는 몸을 뒤로 물리며 주제를 전환했다.

"빨리 다른 인형이나 만들어라. 더욱 정교하게. 나의 절반만이라도 따라오도록 말이야."

"그 남자를 죽이려고?"

"그래, 녀석은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어."

여성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직접 죽이면 되잖아."

붉은 눈에는 광기가 맺혀있었다.

"안 된다. 아직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아아, 운영자 때문인가."

남성은 튀어 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프, 프...."

"플레이어?"

"그래, 플레이어들은 모두 신성의회를 운영자라 부르는 건가?"

"아마 대부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숨을 뱉어 냈다.

"암흑지대의 결계가 깨지면 녀석들이 다시 움직일 거다. 지금으로선 의회 녀석들을 이기리란 보장이 없어."

"그치만 그치만, 구원자들이 늘어나면 의심받을 거라고? 저번에 광물산에서 일어났던 폭발도 이미 의식하고 있을걸?"

쳇, 하고 혀를 찼다.

"그 돼지 새끼는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지능이 그 정도로 떨어질 줄은 몰랐어."

그는 잠시 생각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구원자는 충분해. 제안을 거절한 남자는 한동안 지켜볼 거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지고한 존재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게 분명하니까."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그건 어떻게 됐지?"

"음? 아아!"

그녀는 벽에 붙어 있는 상자를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조금씩 완성되고 있어."

붉은색 촛농을 바른 것 같은 두개골이었다.

"아주아주 강한 녀석이 될 거야."

야릇한 미소를 짓고는.

"길드전에 풀어 버리면 재밌겠지?"

붉은색 두개골을 끌어안았다.

그것에 뺨을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아, 기대되는걸."

* * *

"그 상처는 뭐냐."

에피오네는 오도카니 서 있는 일한을 째릿, 노려보았다.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는 얼어 죽을."

성큼성큼 다가와서 일한의 턱을 밀어 올렸다.

목에 있는 상처를 뚫어져라 보다가 조심스레 매만졌다.

"아파라."

"포션은?"

"저가형으로 하나 마셨습니다."

"그래 보이네. 딱 피만 멎었어."

뒤를 돌아보더니.

"아이리스!"

"네, 넷!"

"D12, D03, D06 약재로 약 만들어!"

"네!"

아이리스는 금발을 흩날리며 벽을 가득 메운 서랍장을 향해 달려갔다.

"병원에서 뛰지 마!"

"히익! 죄, 죄송합니다!"

이거, 전에도 본 상황인데.

"하아."

에피오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랭크가 낮은 녀석들은 매일같이 다쳐서 온단 말이지. 얼씨구? 손목도 엉망이네? 대체 무슨 몬스터를 만나야 이런 꼴이 되는 거야?"

따가운 시선이 몸을 찔러 댄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미 같은 몬스터랄까. 실을 쏘아 대는 녀석이요."

"으음? 그런 몬스터가 있었나?"

그녀는 갸우뚱하다가 붕대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후우."

일한은 근심 가득한 숨을 토해 냈다.

"상태 창."

「-유일한-

레벨: 324

직업: 없음

칭호: 첫 번째 각성자, 자신감을 북돋는 자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누적 피로도: 73

소속 길드: 코퀴토스」

「찬란한 광휘의 축복: 획득 경험치 30% 증가 – 03:13」

버프 효과의 지속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는 레벨로 시선을 올렸다.

'324레벨이라.'

부족하다.

더더욱 레벨을 끌어올려야 한다.

'고유스킬도 하나 더 얻는다면 좋을 텐데.'

던전에서 만난 인형은 강했다.

아마 '진짜'는 더 강하겠지.

뿐만 아니라.

'구원자.'

웬 사이비 집단인가 싶기도 하다. 낙원을 위해서라니.

지하철 1호선에서나 들을 법한 말을 던전에서 들은 것이다.

'죽음으로써 구원한다고?'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지만 결코 좋은 뜻을 내포하고 있진 않겠지.

녀석은 사람을 죽일 구원자를 모으고 있었다.

상황은 조금씩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PK 유저들이 집단을 구성할 게 분명하다.

아니지. 차라리 그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게 낫다.

위험한 녀석을 중심으로 PK 유저가 들러붙으면 그건 더 이상 단순한 집단이 아니다.

신념과 행위의 정당성을 갖춘 종교가 된다.

'이미 위험한 게 만들어졌어.'

인형이 부서지기 직전에 했던 말에서 '우리'라는 말을 아직도 간과할 수 없다.

집단의 규모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누더기는 어떤 지위에 앉아 있는 걸까.

얼마나 강한 녀석이 있을까.

"그만하자."

일한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고민해 봤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없어.'

언젠가 다가올 위기를 대비할 방법은 강해지는 것뿐이다.

"길드전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E등급 던전이라도 돌 수밖에."

아직까지도 길드전에 대한 소식은 없다.

길드장도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개최될 거다.

'거기에서 랭크를 대폭 올려 버리는 거지. 강화할 무기도 얻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피오네가 돌아왔다.

우연일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동시에 아이리스가 으깬 약재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서 있었던 거야? 이런, 좀 앉혀 놓고 갈 걸 그랬네."

그녀는 왼쪽에 있는 침대를 향해 턱짓했다.

"일단 저쪽에 앉아."

일한은 그녀의 말대로 하얀 매트리스에 엉덩이를 걸쳤다.

"퇴원한 지 별로 안 된 것 같은데. 치료할 날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이야."

그녀는 구시렁거리면서 붕대에 으깬 약재를 얇게 펴 발랐다.

"그래도 병원에 온 건 잘했어. 가끔 포션 마셨으니까 괜찮다고 생X랄을 떠는 녀석들이 있거든."

그야 저가형 포션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고가형 포션은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면 마실 일이 없다.

차라리 저가형으로 피만 멎게 한 다음, 지금처럼 병원에 오는 편이 훨씬 싸다.

그런 의미에서, 저번에 그 4인조는 분명한 과금러다. 중급 포션을 몇십 개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거 차갑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늘한 감촉이 목을 휘감았다.

곧이어 손목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 동안 이 상태로 지내. 내일 풀어 보면 어느 정도 나아 있을 거야."

일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원장님."

"응?"

에피오네는 등 뒤에서 얌전하게 서 있는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D12, D03 약재가 거의 떨어졌어요. 아, D05도."

병원장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최근에 너무 바빠서 마을에 갈 시간이 없었으니까. 언제 한번 가긴 해야 하는데."

저 멀리에서 원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그녀는 또각또각 굽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아이리스는 슬쩍 일한의 목을 살폈다.

"괘, 괜찮으세요?"

"별로 큰 상처도 아닙니다. 멀쩡해요."

이어지는 침묵.

아이리스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듯, 에피오네가 걸어간 복도를 몇 번씩 돌아보았다.

안쓰럽기까지 한 모습.

이야기를 주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적막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는 않았기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주셨던 쿠키, 맛있었어요."

갑자기 날아든 말에 뒤집힌 목소리를 냈다.

"네, 네?! 아...."

그녀는 싱긋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요. 저, 저야말로 꽃 감사해요. 항상 보고 싶었던 아이였거든요."

"보기 힘든 꽃이긴 하죠."

"자, 자세히 아세요?"

"자세히 까진 아니고, 살짝만."

딱 게임에서 알려 준 것까지만 안다.

아이리스가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부족한 지식을 꺼내 보기로 했다.

"개화하고 하루가 지나면 바로 시들어 버리는 꽃이잖아요."

"맞아요!"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이제 대화가 좀 이어지겠지?'

잘못된 생각이었다.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일한은 갸우뚱하며 아이리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왜, 왜 그러세요?"

"뭐랄까, 붓꽃에 대한 대화가 이어질 거라 생각해서요. 하루 만에 시드는 것 말고 다른 특징이 있다던가."

"제가 아는 것도 그, 그게 다예요...."

여운 남는 목소리로 대화가 끊겼다.

일한은 죽어 버린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저번에 꽃말 알려 주지 않았어요?"

"아! 맞아. 꽃말은 알아요. 부모님이 알려 주셨거든요."

그녀는 기억을 되새겼다.

"좋은 소식, 잘 전해 주세요, 변덕스러움."

말을 멈춘 아이리스는 눈을 위로 굴리며 몇 초간 고민했지만 결국 '기, 기억나는 건 이것밖에 없네요.'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피오네가 돌아왔다.

"아이리스, 내일 오전 근무 끝나고 마을 좀 다녀올 수 있어?"

"제, 제가요?"

"다른 애들은 내일 좀 바쁜 것 같아서."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갈게요! 개인적으로 드, 들르고 싶은 곳도 있거든요."

"그래? 잘됐다."

"뭐 사 올지 알려 주시면 내일 가, 갔다 올게요."

"기다려 봐. 너 혼자서 첼레까지 가는 건 너무 위험해. 몇 명 더 갔으면 좋겠는데."

첼레?

'내가 아는 곳이겠지?'

코퀴토스에서 가장 가까운 번화가.

얼마 전에 들렀던 마을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다.

각종 희귀한 무기는 물론, 쓸 만한 아이템을 파는 곳도 꽤 많다.

'언제 한번 가 보고는 싶은데.'

에피오네는 눈을 얇게 떴다. 한쪽 뺨에 손을 맞댄 채로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바쁘다는 애들한테 다녀오라고 하기엔 너무 미안하단 말이지. 정 안 되면 길드 의뢰라도 넣어 볼까."

"저, 전 혼자서도 괜찮아요."

손날로 아이리스의 정수리를 콩, 쳤다.

"읏."

"안 돼. 너한텐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꼬여."

일한은 그녀의 말을 의식하며 아이리스를 살폈다.

뽀얗지만 창백하지 않은 피부.

햇빛을 잘라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백금발.

전체적으로 작은 얼굴과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

길지만, 너무 화려하지 않아서 고풍스러워 보이는 속눈썹.

평소에는 몰랐지만 이제 보니 상당한 미인이다.

이 세상에 미의 기준이라는 게 있다면, 아이리스는 그걸 아득히 뛰어넘은 인간이 아닐까?

"우으...."

"너는 딱 잘라서 거절 못 할 것 같으니까 혼자 두면 안 돼."

그리 말하며 팔짱을 꼈다.

'첼레.'

가 보고 싶다. 확인하고 싶은 것도 한 가지 있고.

"그냥 길드 의뢰를 붙이든가 해야지."

"저기."

두 여성의 시선이 일한에게로 향했다.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그 마을에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

에피오네는 일한을,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얼굴이면 함부로 다가가진 못할 것 같긴 하네."

잠깐. 무슨 의미야 그거.

"아이리스, 넌 어때?"

그녀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확실하게 대답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에피오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일한을 쳐다봤다.

"뭐어, 괜찮겠지."

손뼉을 짝, 친 다음.

"좋아. 그럼 내일 둘이서 첼레에 갔다 와 줘."

제20화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