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1화 God Knows (1)
람파스에서 '밤(夜)'이란 불온의 대상이다.
죽음, 어둠, 공포, 그림자.... 밤은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연상시키게 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밤은 '그것들'이 판치는 시간이다.
인간과 그 형태가 닮았으나,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하고 사악한 크리처.
아주 오래전부터 어둠 속에서 기생하면서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괴물들.
「괴마(怪魔)」
삶보다 죽음과 더 가까운 그것들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특히, 밤이 깊어질수록 활발히 움직이며 인간 사냥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이 되기 전에 반드시 집이나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침이 밝아 오기 전까지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것이다.
만약 밤이 되기 전에 집이나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간이 있다면, 그날부로 그 사람은 고인으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따사롭게 내리쬐던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는, 대부분 그 뒤로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소중한 이를 '죽은 목숨'인 셈 치고 곧장 가슴에 묻을 수 있겠는가.
그건 여기, 마울리 마을의 여인도 그랬다.
친구들과 놀다 오겠다던 그녀의 딸이 자정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아, 어떡하지. 어쩌면 좋아."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이 람파스에서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터득해야 하는 지침을 배웠다.
그중에서는 누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행동 강령도 있었다.
그 또한 같았다.
걱정된다고 밤에 나갔다가 희생자를 더 늘리지 않기.
안다. 알고 있다.
"...."
그렇지만, 자꾸만 딸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이다.
누구보다 소중한 딸아이가 어딘가에서 혼자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역시 안 되겠어요! 나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안된다, 노라! 지금 나간다면 너까지...!"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며, 여인이 막 나가려는 그 순간.
"엄마아-!"
문밖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아이의 목소리를 어미가 어찌 몰라볼까.
벌컥!
"엘리!"
품 안 가득, 사랑하는 딸을 끌어안으며 여인이 흐느끼며 말했다.
"어디 갔었니!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라고 했잖아. 너마저 그렇게 되면, 엄마는...!"
"흐아앙, 죄송해요...."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보듬으며 재회를 만끽하던 여인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기쁨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아이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엘리 어머니이신가요?"
"...당신은, 누구?"
금발의 소년이었다.
앳돼 보이는 것이 성년은 됐을까 싶었으나, 빙긋 웃는 얼굴이나 견고한 기세가 어쩐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다음으로는 소년의 복장에 눈길이 갔다.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옷과 긴 망토. 허리춤에 달린 검집.
'...모험가인가?'
여인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훑고 있는데, 돌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근처 동굴에 어린애들이 숨어 있더라고요. 다들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줬고, 엘리가 마지막 아이예요."
"맞아, 엄마! 저 금발 오빠가 나랑 친구들 구해 줬어!"
그에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낯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머나! 그, 그러셨군요. 딸의 은인이신 줄도 모르고...."
낯선 이방인의 모습에 무심코 무례한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여인이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마땅히 해야 했던 인사를 전했다.
"엘리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별거 아닌데요."
소년이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엘리,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렴."
"네에-!"
마을 안이라도 안전하진 않았다. 그것들이 인간 냄새를 맡았다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므로.
안도한 여인의 눈길이 이내 소년에게도 닿았다.
"...저기, 누추하지만 들어오시겠어요? 집에 남은 방이 있어요. 하룻밤, 아니 며칠이라도 좋으니 푹 쉬었다 가세요."
람파스에서는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기꺼이 방 한 칸을 내어 주는 환대 문화가 있었다. 서로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물론, 아무나 받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국가나 협회에 의해 검증받은 신분패를 확인해야 했으나....
딸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고, 한창 괴마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이 밤에 홀로 보내는 것도 꺼림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소년은 어려 보였다. 아직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
"이래 봬도, 제 요리 솜씨가 꽤 괜찮답니다. 감사의 표시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게요."
"맞아, 금발 오빠! 엘리랑 놀다 가!"
잠시간 조용히 모녀를 내려다보던 소년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거절의 의미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갈 길이 바빠서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엘리, 다음에는 저녁 늦게까지 놀면 안 돼. 잘 있어."
"잠깐만요! 적어도, 아침이 밝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때, 집안으로부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그만해라. 바쁜 사람 잡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아버님!"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저 녀석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니까."
"...예?"
묘한 뉘앙스의 말에 여인이 당황해하고 있으니, 소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곤 금세 멀어져 갔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님, 혹시 저 소년을 알고 계세요?"
"...모르진 않지. 예전에 마울리 마을에 살았던 녀석이거든. 내가 한때, 촌장이지 않았느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에 여인이 '그럼 왜 보내셨어요' 하고 말하려는 찰나,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왜냐하면, 저 녀석은...."
긴 연기를 내뿜은 노인이 남은 담배를 바닥에 떨구곤 꾹, 지르밟았다.
"괴물이니까."
우거진 나뭇가지와 수풀로 인해, 유난히 어둡게 보이는 깊은 숲속.
인적 없이 고요한 숲길에는 이따금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
새벽 어스름을 헤치며 소년이 발을 내디뎠다.
"...촌장님, 잘 지내시는 것 같았지."
직접 마주하진 않았지만, 괜찮게 사는 것 같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느낌이었다.
"여기도 되게 오랜만이네."
마울리 마을은 소년이 나고 자란 고향이었으나, 10년 전에 떠난 이후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깜깜한 주변을 대낮처럼 이리저리 구경하던 소년이 제 뿔에 화들짝 놀랐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사실, 소년에겐 그를 기다리는 동료가 있었다.
지금 소년이 고향에 온 것도 빠듯한 일정 중, 따로 시간을 뺀 덕분이었다.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목적만 이루고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바쁘게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길 잃은 아이들을 발견했고,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 버리고 말았다.
"서두르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고작 낡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걸음을 내딛는 소년은, 만인이 두려워하는 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강단 있는 태도와 달리 소년은 어렸고 연약해 보였다.
어리고 연약하다는 건 죽이기 쉽다는 뜻이었고, 죽이기 쉽다는 것은 먹잇감으로 삼기 좋다는 의미였다.
과연.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 숨어 있던 것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소년을 먹잇감으로 낙점한 것이다.
"크르르르...."
적막한 밤길 사이로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리고... 바스락, 바스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느껴지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기척.
땅을 움푹 밟는 듯한 발걸음과 낮게 으르렁대는 울음소리가 점차 소년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다.
미지의 공포란 그 자체로 사람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그대로 졸도할 것이었다.
그리고 한 입 거리로 그 일생을 마쳤을 터.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돌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휘이이잉-
바람에 등불이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흔들렸다.
좌우로 움직이는 불빛 사이로 소년의 얼굴이 비쳤다.
"...."
무표정한 낯의 소년은 이럴 줄 알았다는 양 차분하기만 했다.
...아니, 등불에 의해 생긴 망토의 그림자 탓인지 다소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불빛이 꺼지고 소년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샌가 소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괴인....
아니, 괴마(怪魔)가 있었다.
"인간, 인간이구나─!"
인간과 야수의 모습을 섞어 놓은 듯한 외형.
인간의 얼굴과 몸통, 사지(四肢)를 가졌으나, 이빨과 손발톱이 뾰족한 창처럼 날카로웠고 전신이 풍성한 털로 뒤덮여 있었다.
소년보다 몇 배는 커다란 크기의 괴마는 거대한 몸을 옹송그리며, 충혈된 눈을 굴려 댔다.
그의 먹잇감이 얼마나 싱싱한지 살피는 것이었다.
"흐, 흐흐흐! 인간.... 그중에서도 어린 인간...! 살집은 없어 보이지만... 야들야들해 보이는 것이 참으로, 맛있겠어...!"
인간도 고기를 고를 때 어린 것의 육질을 보다 선호하듯 괴마 또한 그랬다.
"자, 어느 부위부터 먹어 볼까...!"
맛을 상상한 듯 군침을 질질 흘리며 말한 괴마에 소년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린 인간아, 두려워하지 마라...."
괴마는 생각했다.
이 어린 인간은 아마, 여타 인간들처럼 겁에 질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 거라고.
곧 있으면 살려 달라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빌 것이라고.
곧 있을 미래를 상상한 괴마가 히죽 웃었다.
그가 잡아먹은 여느 동족처럼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유형은 아니었으나, 공포 섞인 비명은 언제나 감미로웠으니까.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허기가 졌다. 배가 고팠다.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먹어야겠다.
"어차피 너희는, 태생이 먹잇감으로 만들어진 종족.... 그러니 얌전히 먹히면 된다...! 크히하핫!"
괴마가 살기를 뿌리며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괴마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맛있게 먹어 주마-!"
날카로운 이빨이 소년에게 박히고, 곧 입안 가득 달콤한 맛이 느껴질 거라고.
그러나 괴마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소년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에...!?"
이상했다. 분명 방금까지, 앞에 있었는데?
"운명이라.... 기분 나쁜 말을 잘도 지껄이네."
그때였다.
"다시 말씀해 보시겠어요?"
괴마의 등 뒤에서 선명한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속삭인다.
"누가, 누구의 먹잇감이라고요?"
대체 언제 그곳에?!
괴마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소년이 말했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요."
웃음기가 섞인 낭랑한 목소리. 어린 인간.
괴마가 쉽게 죽일 수 있는 피식자의 것.
"우리 괴마 친구."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아가 있네요?"
소년의 푸른 눈과 마주친 괴마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괴마의 생존 본능이었다.
강한 포식자를 피해, 더 오래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감각!
─저것은 위험하다!
괴마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을 뒤로 물리며 외쳤다.
"...너, 너는 뭐냐!?"
알 수 없는 것은 두렵다. 그건 비단, 인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지?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죽일 수 없다'라고 확신한 적은 괴생 처음이었다. '죽임당한다'고 확신한 적도... 마찬가지로 처음이었다.
"크하아악, 죽어라! 죽어어어─!"
괴마는 공포에 휩싸여 소년을 향해 달려들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쾅, 콰앙-!
보통의 인간이라면 금방 곤죽이 될 법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
하지만 이번에도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움푹 팬 자리만 보일 뿐.
"헉, 허억...! 뭐, 뭐야. 대체 어디 있는 거...!"
어느새 괴마의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소년이 방긋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저 불렀어요?"
"히, 흐히히이익!"
소년이 한 발짝 다가가기 무섭게, 꼬리가 빠지도록 도망가기 시작하는 괴마.
"제가 궁금한 게 아니었나요? 도망치지만 말고 거기 좀 서 봐요!"
"오, 오지 마아아아, 이 괴물...!"
"...괴물이라니 너무해요!"
괴물한테 괴물 소리를 듣다니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선량한 인간인데."
잠깐 울상을 짓던 소년이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겁을 먹었나 보네.
'하긴. 어설프게나마 자아가 생겼으니까 당연하려나. 중급 정도로 보이던데.'
괴마들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힘과 능력도 강해지고, 자아도 뚜렷해졌다.
그래 봤자 저건 언행이 어딘가 어수룩한 것이 승급한 지 얼마 안 된 개체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지만."
스릉-
소년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캄캄한 어둠 속, 은색의 검신(檢身)이 마치 달빛 같은 광채를 뿜었다.
어차피 여기서 싹을 뽑으려던 참이었다.
"...괴마 따위가 사람을 해치게 둘 순 없지."
낮게 중얼거린 소년은 검을 빠르게 도망치는 괴마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첨단으로부터 강력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 물으셨죠. 제가 누구냐고. ...저는 말이죠."
그리고 씩 미소 지었다.
"헌터(Hunter). 당신 같은 괴물을 사냥하는 사람이랍니다."
소년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결과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검신에서 쏘아진 황금빛의 참격!
그 참격은 직선상으로 쭉 이어지는 지형을 파괴하면서 빠르게 나아갔다.
"크, 크에엑! 사, 살려...!"
쩌억-!
도망치던 괴마가 반으로 갈라졌다. 비명조차 남지 않은, 완벽한 죽음이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갈라진 괴마의 시체가 땅에 떨어지고 그로부터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아침이 된다면 저 시체와 핏자국은 전부 잿가루로 화(化)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괴물들의 결말이 그렇듯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잠시간 그 광경을 보던 소년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아가 있는 걸 보니 아마 주변에 있던 괴마들을 모조리 흡수한 개체였겠지.'
그러니 한동안은 요 주변에 괴마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래 봤자 괴마는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족속인지라 언젠가는 또 새로운 괴마가 탄생하겠지만.... 적어도 얼마 간은 평안을 누리겠지.
"...아, 맞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소년이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둥지둥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르에게 해가 다 뜨기 전까지 돌아간다고 약속했는데. 으아아, 늦겠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괴마를 죽이는 것. 적어도 소년에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소년의 이름은 엘윈 크라이거.
전 세계에서 오직 5명뿐인 '특급 헌터'였으니까.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2화 God Knows (2)
머지않아 소년, 엘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쏴아아아-
드넓은 하늘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해안 절벽.
아직 다 지지 않은 어스름 탓에 주변이 어두웠으나, 그럼에도 탁 트이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후, 하."
엘윈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것은 꼭, 먼지가 가득 찬 세상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맑은 공기를 쐰 사람처럼 보였다.
터벅터벅.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노엘 헤일로 크라이거(Noel Halo Creiger)]
그곳에는 작은 묘비가 하나 있었다.
묘비에 다가간 엘윈이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이에요, 노엘. 잘 있었나요?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해요."
엘윈이 인사하듯 묘비를 쓰다듬고서, 매고 온 가방 안에 있던 것들을 꺼냈다.
포도주 한 병과 술잔 두 개였다.
"당신은 꽃이나 음식보다 술을 더 좋아할 것 같아서요. 이제 저도 성인이니까 대작해 줄 수 있다고요?"
꼴꼴꼴, 두 잔에 술을 따른 엘윈이 하나는 묘비 앞에.
"자, 짠."
나머지 하나는 본인이 들고서, 잔을 맞부딪쳤다.
"...윽."
한 번에 포도주를 털어 넣은 엘윈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왜 당신이 그렇게 술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어요. 성인이 되면 술맛을 알게 된다면서요? 맛없기만 한데...."
투정 부리듯 중얼거린 엘윈이었으나, 대작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술을 마시고 따르기를 반복했다.
"...아, 이게 마지막 잔이네요."
빈 술잔에 남은 포도주를 탈탈 쏟아 내던 엘윈이 먼바다를 바라봤다. 잠시간 파도가 철썩거리며 적막한 공간을 메아리쳤다.
마지막 잔을 들이켠 그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엘, 천국에 있을 당신이라면 아실 거예요. 내가 뭘 하려는지.... 분명 나를 말리고 싶어 하겠죠. 당신은 피를 싫어하니까."
탁!
내팽개치다시피 술잔을 내려놓은 엘윈의 눈이 크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날 말리고 싶었다면... 살아 있었어야죠."
두 눈을 곱게 접은 엘윈이 말했다. 이전과 달리 엄동설한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노엘. 당신을 위한 복수가...."
소년의 말간 낯 위로 소름 끼치도록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그의 칼은 마땅한 자들을 향할 것이다.
"천국에서 외롭지 않게, 곁으로 보내 줄게요."
당신을 죽인 범인이든, 당신의 죽음에 일조한 방관자이든, 남김없이.
"내가...!"
그때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다소 엔틱한 벨 소리가 날 선 분위기를 부수며 울려 퍼졌다.
"앗."
잠깐 머쓱하게 웃던 엘윈이 품 안을 뒤적이다, 네모난 모양의 통신기기를 꺼내 들었다. 넥시온. 전생에 있던 휴대폰과 채팅창의 기능이 혼합된 이 세계의 신문물이었다.
순식간에 아이처럼 온순해진 표정. 은은하게 내뿜던 살기는 어느새, 싹 갈무리한 채였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의 엘윈을 봤다면, 일 찰나에 바뀐 그 이중적인 면모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여보세요. 전화 받았...."
[엘윈, 이 머저리가!]
중년 남성의 쩌렁쩌렁한 노호성에, 엘윈이 잠깐 넥시온을 귓가에서 뗐다.
"아하? 이 성격 급한 목소리! 역시 판이었군요!"
[역시, 판이었군요...? 엘윈, 너라는 녀석은 어른 공경은 못 하는 거냐!]
"에이, 제가 얼마나 예의 바른데요. 판에게만 그러는 거예요. 어른 공격. 특별 취급받으니 기쁘죠?"
[너 이──!]
엘윈이 다시금 넥시온을 귓가에서 뗐다.
"미안해요, 판. 장난이었어요, 장난!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네놈이 다음 달 일정을 잊지 않았을까 확인차 전화했다!]
"...판.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당연히 잊지 않았어요. 아직도 절 어린애로만 보시고....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고, 또 헌터인데요."
엘윈이 어린아이처럼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한 달 뒤, 중앙섬 메디알레! 잊지 않았다고요. 늦지 않고 시간 맞춰서 갈게요. 절 못 믿어요?"
[흥! 네 말을 믿는다면 내가 엘프로 종족을 바꾼다.]
"판은 드워프잖아요...."
엘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이참, 잊지 않았다니까 그러시네."
[네가 쓸데없이 오지랖 부리다가 본 목적을 까먹는 걸 한두 번 보는 줄 아느냐?]
"제 곁에는 나르도 있잖아요. 저를 못 믿으시면, 나르를 믿어 봐요. 일 처리 한번 꼼꼼하잖아요?"
넥시온 너머로, 판의 성질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르한? 그놈이 있어 봤자 뭔 소용이 있는 줄 아느냐! 결국, 그놈도 너한테 약해서 휘둘리기만 하지! ...아니, 아니지. 오히려 네놈과 그놈이 합세해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놓지 않느냐...!]
"아, 하하.... 그랬던가."
[그랬던가아아아?! 이놈아! 네놈들 뒤처리하는 드워프 생각 좀 해라. 아이고 두야...! 인간 녀석들이 드워프 잡네, 잡아!]
엘윈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판이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오지랖도 적당히 부려라. 아예 안 부리면 더욱 좋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꼬마야, 괜찮니?
엘윈은 아주 어릴 적, 추레한 행색의 사내가 내밀던 손을 기억했다. 흉터투성이에 먼지가 묻어 더럽던 손.
하지만... 따뜻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이 잔혹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선의로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을.
벌써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엘윈은 동경하고 있었다.
엘윈은 결코 노엘이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역시, 그건 곤란해요. 이제 제게는 마땅히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외면할 수도 없잖아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래도 당분간은 자제할게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쯧! 노엘, 그놈이 아주 안 좋은 버릇을 남겼어.]
쓴웃음을 지은 엘윈이 말했다.
"하지만 그 오지랖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걸요. 어릴 때 노엘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 죽었을 테니까."
[...아, 그, 미안하다.]
그 말에 판이 즉각 사과의 말을 전했다.
자칫 실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발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괜찮아요! 판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두 사람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다.
엘윈에게도, 그리고 판에게도 '노엘'이란 이름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저에게도 이번 임무는 특별한 거, 아시잖아요."
중앙섬, 헌터 본부에 상주하는 엘윈은 한 대륙에 붙어 있어야 하는 다른 특급들과 달리, 이따금 임무를 맡아 대륙 곳곳에 파견되곤 했다.
이번 외출도 그러한 목적이었다.
"제가 '파밀리아' 휘하의 빌런 조직들을 소탕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의 증거를 찾아오면 헌터 협회 차원에서 제 복수를 지원해 준다고 하셨으니까요. 잊지 않으셨죠? 회장님?"
엘윈이 짓궂게 묻자, 전화 속 상대... 그러니까 엘윈의 오랜 지인이자 세계 헌터 협회 회장이기도 한, '판 트바론'이 발끈했다.
[당연하지! 드워프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믿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시킬 거예요. 이번 임무."
노엘의 원수, 파밀리아는 엘윈이 홀로 격파하기엔 지나치게 강대한 조직이었다.
엘윈은 강한 헌터였으나,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개인의 힘은 무용(無用)이었다. 게다가 파밀리아 보스와 그 간부진은 그조차 방심하지 못할 강력한 적수였다.
엘윈은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노엘의 복수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협회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판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임무를 성공시키면 헌터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준다고 맹세한 데다, 그 임무의 내용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파밀리아 휘하 조직들을 괴멸시키는 것.
파밀리아는 마피아 조직답게 극도로 수직적이었고, 연결된 새끼 조직이 많았다.
비밀리에 연합한 곳도, 협력하고 있는 곳도 상당할 터.
이를 달리 말하자면, 보스와 그 간부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많다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아.'
실로 그랬다. 파밀리아의 수족을 잘라 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엘윈이 시리게 웃었다.
[...그렇지만, 잊진 않았겠지. 아무리 너와 나르한이 뛰어나다고 한들, 고작 2명으로는 힘들 거다. 소탕해야 하는 조직의 수도 많고, 무엇보다 파밀리아는.]
"강력한 적이죠. 알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잘."
[...그, 엘윈. 역시 나는 네가....]
엘윈이 우물쭈물 뱉으려는 판의 말을 끊어 냈다. 듣지 않더라도 무슨 말인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동료부터 구하려고요!"
그는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저도 슬슬, 제 단원들을 구할 시기이기도 하잖아요? 다른 특급들처럼 직속 단체 하나 만들긴 해야죠. 이번 일도 그렇고, 후일을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니까."
[...뭐, 크흠! 괜찮은 녀석들 좀 알선해 주랴?]
"괜찮아요.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마침 이 근처에 한 명 있으니까... 바로 스카우트해서, 다음 달에 만날 때 소개해 줄게요!"
[...그거 믿을 만한 사람인 게냐?]
"물론이죠."
엘윈은 '그가 바로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요.'라는 뒷말을 삼켰다.
그건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어요. 그 사람은 용병이라서, 엇갈리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하거든요."
[그렇군. 그럼 가 봐라. ...아, 잠깐. 이 말을 깜박했군. 엘윈.]
"네?"
[너 다음부터는 노엘 보러 갈 때, 청승맞게 혼자 가지 말고... 크흠! 나르한 녀석이라도 데려가던가 해라. 네 말이라면 검은 것도 희다고 하고, 흰 것도 검다고 할 녀석 아니냐. 분명히 기뻐하면서 따라갈 거다.]
"...음, 비유가 너무 극단적인데요."
나르한 페르딕.
엘윈은 잠시 그의 조수이자 집사인 남자를 떠올렸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항상 그에게 충성스럽고,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내였으나.
-엘윈 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일단 다 죽이신 뒤...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제 말, 아시겠습니까?
지금보다 어릴 때 처음 만난 탓인지, 간혹 극성 부모처럼 구는 면이 있었다.
"아, 아무리 나르라고 해도 그러겠어요?"
엘윈이 애써 부정했다.
"저도 성인이 됐으니까, 이제 과보호는 안 하지 않을까요?"
[쯔쯧. 아직도 녀석을 모르느냐. 뭐어... 아니면, 크흠! 나라도 뭐, 같이 가 줄 수 있고 하니까....]
판이 이런 감정 표현을 낯 간지러워 하는 걸 아는 엘윈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럴 걸 그랬네요. 다음번에는 같이 와요, 판. 노엘도 좋아할 거예요."
[커허험! 그, 그럼 늦지 말고 와라! 1초라도 늦으면 벌점 부과할 거다─!]
뚝.
갑자기 끊긴 전화에는 통화가 끊겼다는 신호음만 들렸다.
"하여간, 판도. 여전히 부끄럼이 많으시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은 엘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어 번 묘비를 매만지며 인사했다.
"저 가 볼게요, 노엘. 한동안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어쩌면 다시 못 올 수도 있지만... 그건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마지막 말을 속삭이고 자리를 떠나던 엘윈은 순간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 참! 이 말을 잊었네요."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느덧, 어스름이 지고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떠나는 엘윈의 등 뒤로 밝은 햇살이 비추었다.
그 빛이 엘윈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엘윈이 걸어갈 피가 얼룩진 길에 안타까워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3화 추락
엘윈 크라이거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바로, 그가 '환생자'라는 것.
처음 전생을 자각한 순간, 엘윈은 또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엘윈이 다시 태어난 이 세상이 사실 게임 속이었다는 것이다...!
무려, 전생의 그가 푹 빠져 있던 게임.
「람파스(LAMPAS)」
다크판타지를 기반한 SRPG(Simulation Role-playing Game) 게임.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으로 유명한 게임이었다.
거기다, 충격적인 사실이 한 가지 더.
이 「람파스」에는 '엘윈 크라이거'라는 존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엑스트라. 또는 배경.
그것도 아니면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존재.
-....
누구라도 한동안 충격에 젖어 있을 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엘윈의 반응은 남달랐다.
-...다크판타지. 아, 그래서 이렇게 암울했구나.
당시 10살이던 엘윈은 그 즉시 순응했다. 다소 무감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전생의 자아보다 현생의 자아가 강했던 엘윈은 람파스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가 결코 바꿀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대항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그렇다면 역시 원작에 합류하는 게 편하겠지. 주인공의 조력자... 아냐, 동료가 되는 쪽이 낫겠다.
그리고 이를 철저히 이용하기로 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 가지고 있는 이점을.
-목적을 위해 100% 활용해 주겠어. 그것이 뭐든 간에.
당연히 엘윈의 목적이라 함은 '복수'였다. 그것 외에 없었다.
하나의 게임에는 무릇, 주인공이 있는 법이다. 주인공이 있으면, 그와 대비되는 아치 에너미.
악당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중에서 거대 빌런 단체,
「파밀리아(FAMIGLIA)」.
메인 악역인 만큼, 주인공 일행과 파밀리아는 챕터 진행마다 빈번한 대치를 이뤘다.
그리고... 파밀리아는 엘윈의 원수이자 숙적.
노엘을 죽인 범인이었다.
엘윈에게 있어서 노엘은 '특별'했다.
무채색 같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사람.
친부모에게조차 버려진 그를 주워서, 온 정성을 다해 길러준 사람.
흰 도화지처럼 비어 있는 엘윈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르쳐 준 사람.
-노엘은 내게 은인일 수도, 스승일 수도, 구원자일 수도 있었어. 어쩌면... 가족이었을 수도, 있었겠지.
엘윈은 노엘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순간은 이미 빼앗겼다.
앞으로도 엘윈은 노엘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진실로 엘윈은 이 세계가 게임 속이든, 그가 엑스트라든 먼지든 상관없었다.
전생의 그가 좋아하던 주인공과 동료들. 기상천외한 사건들. 그 끝에 얻을 엄청난 부와 명예....
모두 별 관심 없었다.
타고나길 엘윈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많지 않은 성정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파밀리아'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내 몫이야.... 빼앗길 수 없어.
파밀리아를 괴멸시키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엘윈이어야 했다.
노엘을 죽게 만든 이들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그의 목표를 빼앗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감히,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이....
다행스럽게도 엘윈에게는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기도 전에 열을 깨닫는.
불세출의 천재라고 칭해도 모자랄 법한 잠재력을 품고 있던 것이다.
또한, 인복도 있었다.
-꼬마야. 네가 노엘의 아들이더냐?
노엘을 잃고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준 은인은, 엘윈의 포부에 기꺼이 손을 보태 주었다.
-앞으로 내가 네 스승이다. 검을 들 거라. 자,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엘윈은 새 보다 일찍 일어나고 쥐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만인이 기함할 만한 성장세였다.
이윽고, 엘윈은 수련의 성과를 훌륭히 증명했다.
가볍게 보러 갔던 헌터 시험에서, 전 평가 항목 S급으로 만점. 그리고.
-마, 맙소사! 여러분,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로운 특급 헌터의 탄생입니다아아─!
그 파장은 엄청났다. 전 세계가 술렁거렸다.
이제껏 특급 헌터는 한 시대에 한두 명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적은 탓이었다.
현시대는 무려 특급들이 4명이나 있는 황금기였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의 특급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몹시 타당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다섯 번째' 특급 헌터의 등장한 것이다!
아주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특급 헌터는 그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정도로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굴까?
사람들은 새로운 특급에 대해 궁금해하며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했다.
하지만 세계 헌터 협회는 새로운 특급 헌터의 탄생만 밝히고 그 후로 침묵했다. 이름, 성별, 나이... 그 무엇도 밝히지 않은 채로.
새로운 특급, 엘윈 역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잠적을 선택했다.
-엘윈, 얼굴이라도 내미는 건 어떠냐?
-아니요, 그러면 곤란해요. 놈들이 저를 알게 되잖아요. 아직은... 아니에요. 때가 되지 않았어.
엘윈은 수련에만 열중했다. 향상심이 높은 헌터들조차 학을 뗄 만큼 고된 수련의 연속이었다.
-...아직, 모자라. 그놈들을 다 죽이기에는 부족해!
모든 것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드디어, 때가 왔다.
엘윈이 20살, 성년이 되는 해.
본격적으로 모든 사건이 시작되는 날, 원작이 시작된 것이다!
엘윈은 그토록 고대하고 있던 복수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10년을 웅크리며 준비한 복수의 시작에 눈을 반짝이고 있을까. 아니면 참지 못하고 벌써 움직이고 있을까.
...아쉽게도 둘 다 아니었다.
"으으움...."
역사상 최초의 다섯 번째 특급 헌터. 유례 없는 재능의 소유자.
엘윈 크라이거는 현재,
"나, 5분만 더.... 음냐."
보송한 잠옷을 입고서 이보다 편안할 수 없다는 양, 단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기념비적인 복수의 첫날부터 지각(?)해 버린 것이다.
엘윈이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매만지며 슬금슬금 중앙홀로 나왔다.
홀의 가운데에 있는 기다란 식탁.
그 위로 음식을 차리던 남성은 그런 엘윈을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늦으셨습니다, 주인님."
"...윽, 나르."
연미복 형태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은 바로 엘윈의 집사이자 조수인 나르한 페르딕이었다.
그는 집사답게 연미복 형태의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일찍 일어나신다는 분이 어디 사는 누구셨죠?"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지자 엘윈이 눈을 피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책망하는 말은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늦잠 잔 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엘윈이 볼을 긁적거렸다.
"괜히 네게는 일찍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 놓고서.... 미안해."
"엘윈 님께서는 제게 아무것도 미안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앉으시지요."
입가에 미소를 띤 나르한이 가장 상석의 의자를 앉게 좋게 뒤로 뺐다. 익숙하다는 듯 엘윈이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상하게 여기서 잘 때는 푹 자게 되더라고."
"이런 환경이 잘 맞는 것일까요? 평소 깊이 못 주무시는 엘윈 님이셨으니, 어쨌든 좋은 일이네요. 다음부터 주거 환경에 참고하겠습니다."
나르한이 엘윈 앞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여기요. 아침은 간단한 메뉴로 했습니다."
"역시, 나르. 맛있겠는데?"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옥수수 스프와 햄이 가득 들어 있는 샌드위치, 신선한 허브 샐러드.
거의 마시다시피 음식을 해치운 엘윈이 벌떡 일어났다. 자리에 앉은 지 1분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잘 먹었어, 나르!"
"으음. 천천히 드시는 편이 건강에 좋은데 말이죠.... 가끔은 맛을 음미해 주세요."
"그건 다음에! 지금은 한시가 바쁘니까."
나르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어린 주인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숙련된 집사답게 능숙히 표정을 갈무리한 나르한이 엘윈에게 물었다.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착륙시킬까요?"
팔다리를 쭉쭉 늘리며 스트레칭 중이던 엘윈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미리 꾸려 둔 가방을 메고 벨트에 칼집을 채우며, 출발 준비를 마친 엘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 엘윈과 나르한이 있는 곳은 하늘 위.
정확히는 구름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는 비공선(飛空船) 안이었다.
"너무 눈에 띄거든."
비공선의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애초에 비공선을 단독으로 운행할 수 있는 이들은 몇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착륙할 때의 엄청난 소음과 비공선의 존재감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되고 말 것이다.
오직 한 국가의 최고 권위자, 또는 세계 헌터 협회만이 하늘 위를 운항할 수 있는 점유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엄청난 금권을 가진 거부라고 해도 비공선을 소유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예외적으로 개인이 비공선을 온전히 소유하는 경우는.
'특급 헌터뿐.'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그런 구분은 무의미했다.
비공선을 소유한 이들을 뭉뚱그려서 속히 '높으신 분'으로 보았다.
'그건 곤란해.'
사람들의 시선에 별다른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엘윈이지만, 이번에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경계심 높은 주인공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정 안 되면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올 생각이지만.... 가능하면 사이가 원만한 편이 좋겠지.'
엘윈은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공을 동료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목적지에 가실 생각이신지...?"
"응? 나르도 알고 있잖아. 더 빠른 방법. 지금 목적지 바로 위에 있잖아, 우리."
엘윈이 짓궂게 웃자, 말에 담긴 함의를 알아챈 나르한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무모하신 건지, 대담하신 건지.... 늘 생각하지만 저는 정말 놀라운 분을 모시고 있군요. 여기, 받으십시오."
"오, 고마워. 역시, 나르. 척하면 척이네."
신속히 움직인 나르한이 비공선 어디선가에서 금빛 망토를 꺼내 왔다.
"일이 다 끝나면 연락할게. 며칠 걸릴지도 몰라. 그래도 2주 안으로 돌아올 테니까. 비공선을 투명 모드로 전환한 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예, 분부대로."
엘윈은 나르한이 건네준 금빛 망토를 어깨에 걸친 뒤,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엘윈의 손이 닿자, 망토가 일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망설임 없이 비공선의 왼쪽 벽면으로 다가간 그가 말했다.
"열어."
엘윈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벽면에 그려진 마법진이 크게 요동쳤다.
쿠우우웅.
이윽고, 철컥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비공선의 해치의 문이 열렸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엘윈의 머리카락에 잠시 내려앉았다.
나르한이 미소 지으며 배웅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승보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엘윈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추락하는 엘윈의 시야에 지평선 너머까지 새파란 하늘이 담겼다.
휘이이이잉─!
온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 중력과 공기의 저항 사이에서 느껴지는 부유감.
엘윈은 지금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상공 수천 미터라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하나 없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엘윈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미소.
하늘이 내 집인 것처럼 안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엘윈의 시선이 아득한 아래에 있을 목적지에 못 박혔다.
잠시 미간을 좁히며 집중하던 엘윈이 씩 미소를 지었다.
"...보인다."
비르가 마을.
「람파스」의 기념비적인 첫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그곳에 엘윈이 애타게 찾는 인물이 있으리라.
"가 볼까, 주인공을 찾으러."
엘윈의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비르가 마을, 외각에 위치한 낡은 술집.
"으, 아침부터 손님이 왜 이리 많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온 한 소년이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젖히며 하늘을 보았다.
"...어? 저게, 뭐지?"
입을 떡 벌린 소년이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못 믿겠다는 듯 부릅뜨던 그가 눈을 세게 비볐다.
그러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잘못 본 건가?"
결론을 내렸음에도 뭔가 찜찜함이 남은 소년이 붙박이처럼 선 채로 기웃거렸다.
"...이봐, 너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술 더 달라는 말 못 들었어?!"
"아, 죄송합니다! 바로 갈게요!"
술집 주인의 호통에 찔끔한 소년이 재빨리 그가 일하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이 중얼거렸다.
"하긴, 망토가 날아다닐 리가 없겠지...."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4화 비르가 마을 (1)
비르가 마을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서대륙 끄트머리, 깊은 산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특별함'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오늘도 그러려나?"
"그러겠지! 벌써 해가 중천에 떴으니까."
그런데, 최근에는 이 따분하기 그지없는 비르가 마을에 재미있는 볼거리가 생겼다.
평소에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던 마을 사람들은 은근히 이 시간을 기다렸다.
"오! 고블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들 오는구만."
한 남성이 가리킨 손끝에서부터 먼지구름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동시에 후닥닥거리는 발걸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지척에서까지 다가오자, 비로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잿빛 머리카락의 남성이었다. 언제부터 달리고 있던 건지, 남자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흘렀다.
"이놈의 꼬맹이! 쫓아오지 말라니까!"
그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꼬맹이가 아니라, 엘윈이라니까요! 게일, 어차피 또 술집 가려는 거잖아요! 같이 가자니까요! 제가 사 줄게요. 저 돈 많아요!"
하지만 그를 맹렬히 쫓던 금발의 소년은 흔들림이 없었다.
소년은 바로 엘윈. 그는 해맑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으니까...! 난 솜털 보송한 어린 녀석이랑 한잔하는 취미 없다고!"
게일이라 불린 잿빛 머리의 남성은 환장하겠다는 듯 가슴을 치며 외쳤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이 아저씨는 어린애 코 묻은 돈 빼앗는 취미도 없어요, 요 녀석아!"
"솜털 보송하진 않아요! 이제 저도 성년이라고요! 코 묻은 돈도 아니고...! 그보다, 왜 계속 도망치는 건데요. 그만하고 거기 서요, 게일!"
엘윈이 소리치자, 게일이 발악하듯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싫다! 너야말로 그만 쫓아와라...!"
"저도 싫어요! 게일이 저랑 함께 일한다고 할 때까지 쫓아갈 거예요!"
"으윽...! 그 건은 몇 번이나 거절했잖냐! 거절했으면 좀 들어먹어라! 이 고집불통 꼬맹아!"
두 사람은 올 때처럼 먼지구름을 몰며, 순식간에 저편으로 사라졌다.
"쯔쯧! 게일 녀석, 고생하는구만."
"뭘. 따지자면 엘윈이 더 고생이지.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자는 거 같은데, 게일이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그보다 앞으로 며칠 더 갈 것 같은가?"
"한... 이틀 정도? 엘윈, 저 녀석 끈질기기가 엘더 가죽 못지않아."
"에이, 이 사람아! 게일의 근성을 얕보지 말게나! 적어도 나흘 정도는 더 버틸 걸세!"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만 남아서 내기를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이어진 광경이었다.
한편, 엘윈은 생각했다.
'이거, 쉽지 않네.'
여전히 다리는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게일을 쫓는 채였다.
일주일 전, 엘윈은 무사히 비르가 마을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마을 인근의 숲에.
상공에서 수직 낙하한 덕에, 예정보다 늦은 출발에도 저녁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읏챠."
깃털처럼 가뿐히 착지한 엘윈이 양어깨에 올려진 버클을 두드렸다.
촤르르륵.
그러자 거대한 날개처럼 펼쳐져 있던 금빛 망토가 엘윈의 신장에 맞게끔 줄어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긴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좋아, 이 정도면 떠도는 여행자 같겠지."
마지막으로 근처 냇가에서 제 모습을 한 번 점검한 엘윈이 걸음을 옮겼다.
[비르가 마을]
폐쇄적인 산골 마을이 으레 그렇듯, 낯선 이방인이 들어서자 시선이 쏠렸다.
"실례합니다만, 근처에 술집이 있나요?"
"어어, 여기에 술집은 한 곳뿐인데.... 저, 저기라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경계하는 마을 주민에게 무해 하다는 듯 웃어 보이며, 목표로 점찍은 인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이거 참.'
아까 마을에서도 그렇듯, 다시금 침묵과 함께 이목이 집중됐다.
떨떠름한 속마음과 달리 미소를 유지한 엘윈이 바로 다가갔다.
그러자 유리잔을 닦던 주인장이 힐끔 쳐다보았다.
"...여행자? 별일이군. 이런 데까지 오다니."
"하하! 이 근처에 고대 시대의 유적지 터가 있다면서요? 그거 보러 왔어요. 유적에 관심이 많거든요."
"실제로 보면 실망할 텐데. 나라에서 유물이란 유물을 싹 긁어 가고,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서."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남다른 여운을 주니까요."
미리 생각해 둔 구실을 꺼내 드니, 주인장이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마실 텐가?"
"으음, 술은 잘 몰라서요. 추천 메뉴가 있나요?"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담금주가 맛있게 숙성되었다네. 비르가의 특산품이지. 어떤가?"
"아, 그럼 그걸로 주세요."
조금 특이한 사람을 보는 듯하긴 했으나 경계심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고개 숙인 엘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술을 홀짝거린 그가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칼 찬 사람이 꽤 많네요?"
사실 엘윈 정도의 실력을 지닌 헌터는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척은 물론, 그들의 무력 고하까지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아아,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비르가가 외지긴 했지만 평화롭거든. 왠지는 모르겠지만 괴마 출현율이 극히 낮아서."
"헤에, 그거 신기하네요."
"그래서 은퇴한 용병들이 여생을 보내려고 정착하곤 하지. 마을 입장에서도 자경단 역할을 맡아서 해주니 불만은 없고. 자네처럼 유적지 터를 보러 온 사람도 가끔 있기도 하고."
쪼르륵.
주인장이 엘윈이 들어 올린 잔에 술을 한잔 더 따랐다.
"혹시 의뢰를 받는 용병분도 있나요? 유적지 터까지 안내를 맡기고 싶어서요."
"음? 혼자 여행하는 걸 보니 무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
"하하.... 사실, 제가 길치라서요. 여기까진 어떻게 왔는데, 산에서 길을 안 잃을 자신이 없어요."
"뭐? 하하하하! 처음부터 느꼈는데 말이야, 자네 참 특이한 사람이군 그래!"
잇몸을 만개하는 술집 주인장을 마주 보며 엘윈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다 거짓말이지만.'
엘윈은 헌터였다.
헌터는 괴마를 죽이는 것 외에, 인류 수호의 의무를 가졌다. 그건 달리 말해, 사람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탐색에는 도가 텄다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접근해야지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주인공이.
예상보다 길어진 의뢰에 한창 예민해져 있을 터였다. 섣불리 친한 척했다가 경계 대상으로 찍혀선 곤란했다.
술집 주인이 고민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흐음. 이 마을에 의뢰를 받는 녀석은 한 놈밖에 없을 텐데...."
"괜찮아요! 소개해 주세요. 중개료도 넉넉히 드릴게요."
그 '한 놈'이 엘윈의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술집 주인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그게 말이지.... 아무리 돈 받는 일이라고 하지만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할까. 직접 보고 결정하게나. 마침 저기 들어오는군. 게일!"
주인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막 술집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어, 제이크!"
전체적으로 너저분한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한 30대 정도일까.
언제 빤 건지 시커멓게 보이는 짙은 회색 로브나 제멋대로 자란 까슬한 수염, 눈 밑을 차지하고 있는 다크서클 같은 것이 그런 인상을 만드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무슨 일이야?"
"아, 이 손님이 의뢰를 맡기고 싶다고 하셔서."
"...손님? 희한하네. 이럴 때에."
중얼거린 사내가 엘윈을 바라보았다. 엘윈의 눈빛에, 일순 이채가 일었다가 자취를 감췄다.
"안녕하세요. 저는 엘윈이라고 해요."
"게일."
남자가 짧게 답했다. 열린 창문으로부터 들어온 바람에 의해 잿빛 머리카락이 솜털처럼 나풀거렸다.
길게 기른 앞머리로 오른쪽 눈이 덮어져 보이지 않았으나, 왼쪽 눈은 가려져 있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색.'
엘윈은 확신했다. 저 사내다.
게임 「람파스」의 주인공이었고, 이젠 이세계 람파스의 주인공이 된 자.
'게일 가라브.'
그리고 첫 동료로 낙점한 사람.
"흐으으음."
한편, 바 의자에 걸쳐 앉은 게일은 엘윈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인간을 살피듯,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시선이었다.
"하하.... 그렇게 보시면 부담스러운데요."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엘윈은 사람 좋게 웃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특기였다.
다만, 본인이 진열대에 올려진 상품 같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닌가.'
실제로 엘윈은 게일에게 동료 제안을 하기 위해서 그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
"...."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영 대화에 진전이 없는 게 아닌가.
'친분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
뭐니 뭐니 해도 엘윈의 목적은 게일 가리브의 영입이었으니까.
그렇게 판단을 마친 엘윈이 막 대화의 물꼬를 틀려는 무렵.
"저기, 저는...."
"켁, 뭐냐 너."
그때, 게일이 인상을 팍 구기자 엘윈은 심장 한 편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들킨 건가?'
게임 속 주인공은 은근히 감이 좋았다.
평소 느슨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몹쓸 아저씨 취급받는 주제에, 중요한 순간에는 예리한 직감을 발휘하곤 했다.
'지금 시점에도 게일은 상당한 강자니까.'
설정상, 게일은 게임 초반부터 완성에 가까운 주인공이었다.
온갖 형태의 전투나 수작질에는 이골이 난 네임드 용병이자 현상금 사냥꾼.
게임에서야 무조건 레벨 1로 플레이를 시작하기에 잊기 쉬운 사실이었으나, 여기는 현실.
게일 정도로 강한 용병이라면 엘윈의 수준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이거, 곤란한데.'
첫 만남부터 이렇게 될지 몰랐던 엘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애써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있는데, 게일이 입을 열었다.
"고난과 역경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단숨에 극복할 것 같은 햇살계 미소년이잖아? 심지어 금발이야. 완전 주인공 상!"
"...예?"
엘윈이 멍해졌다. 그리고 착실한 성격답게 속마음으로 항변했다.
'아니요, 주인공은 당신인데요....'
"같이 다니는 동료가 엇나가면 오글거리는 대사로 제정신으로 만들 것 같고, 별의별 사건 사고에 다 휘말릴 것 같고...!"
엘윈은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한 구석에 미뤄 두곤, 잠깐 생각해 봤다.
그건 원작 속 게일이 한-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이었다.
엘윈은 왠지 억울해졌다.
"게다가, 왠지 감이 안 좋아. 뭔가 너랑 엮였다가는 규칙적인 생활은 물론이고, 도박과 알코올, 니코틴을 금지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
...어음, 그런 건 금지당해도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예시가 왜 이리 구체적이지?
"그래!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해! 나는 이미 찌들 대로 찌든 어른인데!"
"...."
"이 아저씨는 다 알아요."
아무리 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콧대를 높여 우쭐거린 게일이 이어서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 같은 꼬맹이는 온갖 사건을 몰고 다니는 태풍의 핵이란 걸! 세상 풍파 다 맞은 아저씨가 감당하기엔 무리야, 무리. 생리적으로 불가능!"
게일이 작위적인 한숨을 뱉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엇보다, 어린애는 딱 질색이걸랑. 의뢰는 거절하지. 딴 사람 찾아보라고. 그럼 이제 이 아저씨, 술 먹게 꼬맹이는 저리 가서 놀아라, 훠이훠이~"
게일이 보리를 쪼아 먹는 새를 쫓듯 대충 손을 휘적였다.
"...."
엘윈의 그림 같은 미소에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5화 비르가 마을 (2)
게일이 바를 탕탕 내리치며 술집 주인을 재촉했다.
"이봐, 제이크! 빨리 럼주 달라니까. 시원한 걸로."
"저, 저...! 어휴. 말해 봤자 입만 아프겠군. 옛다. 이거나 먹어라. 이 주정뱅이야."
"오, 땡큐."
꿀꺽꿀꺽꿀꺽-!
술집 주인이 가져다준 럼주 병을 그대로 목구멍에 꽂아 넣었다.
"크으! 역시 이 맛이지!"
"...."
"으음.... 내 이럴 줄 알았지. 게일, 저 망나니 같은 녀석...."
터무니없는 구실로 의뢰를 거절하고선, 혼자 흥청망청 마시기 시작한 게일과,
터무니없는 구실로 의뢰를 거절당한 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엘윈.
"쯔쯔쯧.... 정말 간절했나 보구만. 그렇게 길치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두망찰 서 있는 것이 여간 실망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되려 찔끔한 술집 주인이 둘 사이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엘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 여행자 양반.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저 녀석, '용감한 엘리엇'의 엄청난 팬이거든."
「용감한 엘리엇」
람파스에 전해지는 전설이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용사가 바로 금발이었다. 마치 엘윈처럼.
엘윈이 그저 미소 지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뭐, 여행자 양반. 바쁜 일이 없다면 이 마을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는 것은 어떤가? 다음 주에 방랑극단이 올 예정인데, 그때 상행도 함께 온다고 했거든. 거기에 이 주변 지리에 빠삭한 놈도 있으니까, 내가 잘 말해 줌세."
술집 주인이 투박한 손길로 엘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나름, 위로의 표시인 듯했으나 엘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현재 엘윈은....
'저 글러 먹은 아저씨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게일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눈앞에 있는 소년이 평범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엘윈은 10살이란 어린 나이에 복수를 다짐하고, 그를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낸 사람이었다.
아직 세상에 밝혀진 사실은 아니었으나, 그는 최연소 헌터가 됨으로써 어린 나이에 역사를 뒤바꾼 사람이기도 했다.
언제나 세기의 천재로서,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살아왔던 그였다.
'짜증 나....'
환생자임을 자각한 이후,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무시'당한 적이 없었단 것이다.
게일은 의도치 않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엘윈의 신경을 긁었다.
그야말로 해맑게 웃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다. 그리고 본디 사자는 포악한 생물이다.
"으흐흐, 럼주 최고~!"
미래의 게일이 알았다면 피눈물을 흘릴 일이었으나, 현재의 게일은 예지 능력 따위 없었고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그런 게일을 노려보는 엘윈의 눈빛이 어두웠다.
"하, 하하...!"
이윽고, 차가운 웃음을 터트린 엘윈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역사를 앞서가는 선구자들이 으레 그렇듯, 엘윈 역시 끈기와 근성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엘윈은, 단 한 번도 본인이 정한 목적 달성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게일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건 이번에도 그랬다.
"저도 참, 얕보였네요."
엘윈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더는 얕보지 못하게 해 주겠다.
"이보게나, 듣고 있나? ...여행자 양반?"
술집 주인이 부르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엘윈이 게일에게 바짝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게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아직 더 볼일이 남았어? ...어, 저기. 너 괜찮냐? 동공이 풀렸는데."
빙긋 웃은 엘윈이 주먹을 꽉 쥐더니 게일이 있던, 바 테이블을 내리쳤다.
콰앙!
쩌저저적, 거친 소리와 함께 바 테이블이 갈라졌다.
-이 바 테이블은 단단하기로 유명한 모로고르 목재를 사용한 특제라고. 어중간한 힘으로는 생채기도 안 나지! 오히려 그 상대 손만 아플 거다!
그 순간, 게일의 뇌리에서 술집 주인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게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떨리는 시선이 그걸 사과 쪼개듯 쉽게 부순 쪽을 향했다. 완전 멀쩡해 보였다.
"바, 방금 맨손이었지?! 마력도 안 썼잖아! 무슨 괴력이냐고!"
"게일."
경악하는 게일을 향해, 엘윈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처 제 소개를 안 했더라고요. 저는 엘윈. 엘윈 크라이거라고 해요."
"...저기요, 꼬맹이, 님? 자기소개는 왜, 하시는지?"
엘윈이 마력을 쓰지 않고도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란 걸 알게 된 게일의 말투가 어쩐지 비굴해졌다.
"그거야, 앞으로 게일은 제 의뢰를 들어주셔야 하니까요."
"그 건은 분명 거절 했는, 뎁쇼."
"거절은 거절할게요."
엘윈이 스산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 의뢰를 맡아주셔야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
게일은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엘윈이 술집 주인에게 가서 배상금을 건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게일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대로,
"시발, 내가 왜 그랬지...."
벌써 일주일째 게일은 금발의 불청객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엘윈을 피해서 도망치던 게일은 나무 그림자 뒤에서 숨을 골랐다.
주변에 기척이 없는 걸 감지한 그는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피곤해."
그리고 생각했다. 본인을 엘윈 크라이거, 라고 소개하던 소년을.
그는 마른세수하며, 착잡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괴물이냐고."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엘윈과 다르게, 게일은 그의 특이함을 이미 알아챈 상태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게일은 본인이 강자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볼 때 말이다.
그는 용병이었고, 보수에 따라 어떤 임무도 가리지 않고 받았다. 그중에서도 그가 유난히 돋보이는 장소가 있다면.
─전장.
새빨간 피를 온몸에 적시고선 피아구별 없이 미칠 듯이 날뛰는 그를,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잿빛 악마'라고 불렀다.
적대하는 적들도, 잠깐 손을 맞추는 아군들도.
전부 게일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그러던 중 여기 이 작은 마을의 술집에서, 감히 그가 상상도 못 할 강자를 만난 것이다.
보통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기(氣)가 느껴진다. 마력과는 느낌이 다소 다른, 생명이 마땅히 갖는 기운.
그런데, 그 금발의 소년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통 새하얀 백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린 외양이었으나 게일은 방심하지 않았다.
'어린 모습을 한 은거 고수인가....'
방향이 다소 틀리긴 했으나, 게일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갑자기 내 앞에 정체를 감춘 최연소 특급 헌터가 나타났다는 것보다는, 그쪽이 믿기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의뢰가 겹친 것 같진 않은데. 만약 그랬으면, 마을에 들어온 순간부터....'
판단은 빨랐다.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엮이지 않는 편이 낫겠어.'
그래서 애써 그의 무위를 모른척하며, 대충 만든 구실로 의뢰 수주를 거절했다.
'연기엔 또 자신이 있지.'
그런 것치곤, 속으로는 '네놈, 너무 건방지군. 죽어라!' 하며 칼을 빼 들지 않을까 상상하며 지레 겁을 먹고 있었으나.
내심 무사히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게일은 그 자신이 그리 신뢰감을 주는 외형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현실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 별 볼 일 없는 아저씨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일주일째 계속되는 추격전이었다.
"찾았다."
읊조리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
게일이 기겁하며 일어나기도 전에, 나무 위에서 빠르게 뛰어내린 엘윈이 게일을 제압했다.
멱살을 잡아챈 엘윈이 해맑게 외쳤다.
"게일, 잡았어요!"
"...오냐, 잡혔다."
게일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멱살... 잡지 말아 줄래?"
"그치만, 그러면 도망칠 거잖아요?"
"안 가. 안 갈 테니까."
게일이 생각했다. 어차피 또 잡힐 건데, 더 이상의 도피는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엘윈은 단호했다.
"못 믿어요."
처음에 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소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던 엘윈은 온데간데없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추격전에서 갖은 계략과 거짓말로 엘윈을 혼동시키던 게일의 탓이었다.
"그럼 적어도 다른 부위를 잡아!"
"좋아요."
멱살을 보호하는 대신, 뒷덜미를 잡힌 게일의 표정이 시들시들해졌다.
"아이고, 나 죽네...."
"하하! 게일, 체력이 너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늙어서 그런가."
끝에 가서 목소리를 줄여 중얼거렸으나, 게일이 듣기엔 충분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발끈했으나 여전히 뒷덜미를 잡혀 있는 탓에, 하찮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늙진 않았거든! 한창때라고!"
"우와. 정말 좋겠네요."
"...."
엘윈이 나름대로 진심이 담아 대꾸했다. 삶의 전성기란 좋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게일은 그런 말을 하는 엘윈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전의를 잃어버렸다.
"...됐다."
깊은 한숨을 푹 내쉰 게일이 말했다.
"이봐, 꼬맹이."
"엘윈이라니까요."
"그래, 엘윈."
엘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껏 게일은 그를 '꼬맹이'라고만 불렀지,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던 것이다.
"이제 이유 좀 알자. 너 같은 강자가 왜 나를 쫓아오는 거냐?"
게일이 이미 엘윈의 무위를 짐작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에, 엘윈은 그저 미소 지었다.
그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처음부터 말했는걸요? 의뢰를 맡기고 싶다고."
"...길 찾기?"
"하하, 아니요. 그건 그냥 구실이고요. 사실, 본 용건은 따로 있어요. '잿빛 악마'...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순간, 게일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터져 나왔다. 게일 주위로부터 피처럼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내 정체를 알고 찾아온 건가?"
위협하듯 윽박지르는 게일. 그를 내려다보며 엘윈이 가소롭다는 듯 서늘하게 웃었다.
"집어넣어요. 어차피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상대도 봐 가면서 싸워야지."
그 놀랍도록 차가운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바짝 열이 올랐던 게일의 정신이 맑아졌다.
훌륭한 용병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적수를 판단하여 칼을 겨누는 법이었고. 게일은 현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용병이었다.
그가 가볍게 묵례하며 말했다.
"...실례했다. 그래서 그 의뢰란 건 뭐냐."
"그건...."
엘윈이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말하는 편이 좋을까. 의뢰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
벌써 일주일이나 소모되었다. 스카우트까지 넉넉히 2주 정도 여유를 잡아 두었으나, 예상보다 오래 걸리긴 했다.
엘윈은 3월이 되기 전에 중앙섬, 메디알레까지 가야 했다.
물론, 게일을 데리고서.
비르가 마을에서 메디알레까지 가려면 비공선으로 약 나흘 정도 걸리는데....
역시 이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좋아, 말하자.'
엘윈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게일 가라브는 돈을 좋아하니까!'
술과 담배, 도박에 쩔어 사는 몹쓸 인간. 그만큼 돈도 무척 좋아했다.
뭐, 다크판타지 속 용병답다면 답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엮이고 싶은 인물상은 아니긴 했다.
'어쨌든, 돈으로 회유할 수 있다는 건 편하지.'
특급 헌터에게 넘쳐나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어떻게 보면 돈만 원한단 건, 가장 쉽고 순수한 조건이었다.
'또... 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기도 하니까.'
말을 정리한 엘윈이 천천히 입을 떼자, 게일이 그에게 집중했다.
"맡기고 싶은 의뢰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말할 게 있는데요. 사실, 저는...."
엘윈이 본인의 정체를 밝히고 게일을 스카우트하려던 그때!
퍼어어엉──!!!
무언가, 거대한 것이 터지는 듯 강렬한 파열음이 대기를 울렸다.
"저기는...."
"비르가 마을."
두 사람이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말없이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갔다.
사건의 시작이었다.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6화 죽은 XX의 마을 (1)
엘윈과 게일, 두 사람은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1초마다 거리가 달라졌고 시야가 정신 없을 정도로 휙휙 바뀌었다.
"잠시만 위에서 보고 올게요!"
타앗, 파바박!
말을 남긴 엘윈이 능숙하게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곤 꼭대기에 도달한 뒤, 그대로 크게 도약했다.
펄럭-!
그러자 엘윈의 망토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처음 이 마을에 내려오던 때처럼.
엘윈의 몸이 순식간에 상공 수십 미터 위로 올라왔다.
땅 위에 있든 하늘 위에 있든, 위치상으로는 똑같이 거리가 있었으나. 땅에서 가늠하며 바라보는 것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상당히 다르다.
"음...."
엘윈에겐 선명히 보였다. 마을 전체를 감싸듯, 거세게 타오르는 화마(火魔)를.
평범한 사람이 조금 전까지 머물던 마을이 불타는 걸 목격한다면,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할까?
그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향해 분노하거나 소박한 마을에 벌어진 참상에 안타까워할 것이다.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괜찮을까 염려할 수도 있겠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이거 참."
그러나 엘윈의 반응은 달랐다. 큰 여흥이 없는 듯, 냉랭한 표정.
엘윈이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곤란하게 됐는걸...."
그것은 비단 엘윈이 비틀린 사고를 지닌 정신이상자라거나, 사이코패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엘윈은 복수를 원하는 것뿐, 본인의 인간성까지 버리지 않았다.
평범하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다만,
─이 마을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엘윈이 마을과 그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보다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앞서 달리던 게일의 곁으로 태연히 합류했다.
"마을이 완전히 전소된 것 같은데요. 들어갔다간 그대로 노릇한 통구이 행이 될 거예요."
"역시, 그럴 것 같긴 했지. 굉음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이거, 증거를 지우려고 마을 채로 날려 버린 것 같은데... 쯧! 귀찮게 됐구만."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는 게일. 그뿐이었다.
게일의 반응도 엘윈처럼 여상했다.
"그보다 저희, 마을로부터 꽤 멀리 나온 것 같죠? 달려도 달려도 마을 끄트머리도 안 보이네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요 꼬맹이!"
"으음. 굳이 말하자면... 술과 도박 중독에 돈에 환장하는, 어디 사는 글러 먹은 아저씨 때문이 아닐까요?"
그에 게일이 또다시 발끈하며 돌아보았다.
본인을 정확히 지목한 게 아니면서도,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반응한 것이다.
"나는 글러 먹은 게 아니라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충실하게, 요긴하게 사는 거다, 요 녀석아!"
옆에 있을 엘윈을 흘겨보던 게일의 눈동자가 이내 홉 커졌다.
그리곤 대차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락 소리쳤다.
"너, 너!"
"왜요?"
엘윈이 순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가 아니지?! 뭐야! 꼬맹이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어째서 하늘을 나는 거냐고! 그, 그거 아티펙트지? 어마어마하게 비싼...!"
빠르게 움직이는 다리는 멈추지 않은 채였으나, 게일의 표정에서는 경악이 여실히 보였다.
엘윈의 망토가 바로, '아티팩트'였으니까!
아티팩트는 고도의 마도 기술 집약체를 일컬었다.
람파스에는 인류의 눈부신 진보를 대표하는 두 진영이 있다.
마법사들의 온상지, 마탑.
그리고 과학 기술의 정점, 시계탑.
-마탑의 고루한 샌님들이 이곳엔 무슨 볼일이실까?
-시계탑의 뇌 빠진 머저리들이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지? 불쾌하기 그지없군.
비유하자면, 견원지간.
하지만 그런 두 진영이 이따금 가물에 콩 나듯 협력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아티팩트였다.
당연하게도 그 물량은 적었다.
고작 수십 개는 될까 말까 할 정도로.
그래서였다. 게일이 이토록 경악하는 이유는.
"용병으로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대체 어느 집안의 귀한 자식님이시길래! 그 비싸디비싼 아티팩트를...!"
일반인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하기가 어려운 물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말해 주려고 했던 건데요."
엘윈이 볼을 긁적였다.
때마침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정체를 밝혔을 것이었다. 타이밍이 나빴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게일이라고 해야 할까.
「람파스」 속, 대표 불운의 사나이는 오늘도 여전히 운이 없었다.
"궁금해! 이 아저씨, 무진장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하! 아쉽게 됐네요. 좀 더 기다리셔야겠어요."
이번 일이 다 끝나면,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엘윈이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참고로, 게일이 제 의뢰를 들어준다면 이런 아티팩트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답니다."
"...갑자기 엄청나게 끌리는구만. 이봐, 꼬맹이. 너 장사하면 짭짤하겠는데. 화술이 끝내주네."
"그렇죠? 제가 꽤 수완이 좋답니다."
"아. 이미 하고 있는 거...?"
두 사람은 평소처럼 투닥거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코끝을 찌르는 냄새에 그들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버렸다.
"...피 냄새."
"그럴 리가 없는데?"
피에 흠뻑 젖은 채, 활활 불타는 마을을 보며 게일이 경악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피가 나올 리가 없잖아...!"
당연했다.
이곳, 비르가 마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비르가 마을은 「람파스」의 시작 장소. 따지자면, 튜토리얼 맵이었다.
사건은 단순하다.
어느 날, 게일 가리브가 용병 길드에서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천만 아르클! 내 전 재산을 넘겨주겠소! 그러니 내 의뢰를 받아 주시오, 잿빛 악마! 제발...!"
의뢰 대상은 유명 방랑극단의 간판스타. 전쟁이나 암살 같은 종류의 의뢰가 아닌데도, 엄청난 고액의 보상금까지 내밀었다.
"...흐음. 의뢰를 받을지 말지는 그 내용을 듣고 판단하지. 무슨 일이지?"
흥미가 당긴 게일이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엥? 고작, 그거?"
그의 고향인 작은 산골 마을 '비르가 마을'에 일어난 '이변'에 대한 원인 파악 및 제거.
원흉이 있다면, 확실한 보복까지.
하지만 그 '이변'이란 것은 참으로 모호했다. 왜냐하면 그건.
"이보쇼. 그 이변이란 거, 순전히 당신 감인 거잖아? 확실한 것도 아니고. 굳이 전 재산을 걸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은데."
"...."
"멍청한 의뢰인 등쳐먹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이 아저씨 입장이 곤란해지거든? 신뢰도 떨어진 용병은 뒷방 늙은이보다 못한 신세라고?"
근거가 고작 의뢰인의 '감'일 뿐이었던 것.
"아니! 나는 확신하네. 분명 내 고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걸...!"
"그러니까, 내 말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게일의 말을 끊고서, 의뢰인은 크게 외쳤다.
강한 확신을 담아서.
"그냥! 그냥,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네!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본능적으로 이 생각이 들더군. 이것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
"그렇다면 내 가족은? 내 친구, 내 연인, 내 이웃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떨리는 손으로 차를 들이켠 의뢰인이 말을 이었다.
"흉흉한 세상이지. 생사불명 된 마을 사람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죽인 원수를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부탁하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네뿐이야!"
억지를 부리듯 간절히 호소하는 의뢰인의 말에, 글러 먹은 아저씨이면서 의외로 정이 많은 게일은.
"거참, 고집 센 양반이네.... 환불 안 되는 거 알지? 제대로 계약서 써 줘야 할 거야."
"...! 고맙네, 정말 고마워!"
결국, 의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게, 뭐야...?"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그는 비르가 마을에 도착했고.
의뢰인의 감이 틀리지 않았단 걸 확인하게 되는데.
"전부 죽었잖아?"
비르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산자가 마땅히 갖는 기운....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시체였다.
"...혹시, 용병이신가요?"
"이런 외진 데까진 무슨 목적으로 왔지?"
"안녕, 아저씨! 비르가 마을에 어서 와!"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산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시체들이 생전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처럼!
'...애초에 본인들이 죽었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기억뿐만이 아니라, 외형도 그랬다. 의뢰인이 미리 알려 줬던 생전 그대로의 모습.
어떤 외상도 보이지 않았고, 시체 특유의 부취(腐臭)도 나지 않았다.
은근슬쩍 만져 본 살갗도 살아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사고방식도, 대화방식도 그래.'
누군가 억지로 강제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률적이지 않았고, 각자의 개성이 느껴졌으며 자연스러웠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아아악! 돌아 버리겠다아아아악!'
─라고, 엘윈을 만나기 전의 게일은 아닌 척 속으로 꽤 골머리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벌써 한 달이 흘렀는데도, 아무런 단서를 잡지도 못했으니까.
다시 돌아와서, 현재.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배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망자한테 피가 나올 리 없잖아!"
"...."
"다른 사람들의 피를 뿌려 놓은 건가? …아니, 아니야. 그렇다기엔 이건 너무 많은 양이지.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인상을 찡그린 채 애써 이성적인 추론을 시도해 보는 게일과 달리, 엘윈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사건의 전말을 모조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윈은 서늘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벌써 시작인가.'
원작대로라면, 이 시기의 게일은 그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줄 인물을 만났을 것이다.
고작 일주일이란 시간으로 자유롭게 살던 용병이 '헌터'가 되고자 결심하게 만든 인물.
'베테랑 하급 헌터, 자이고.'
하지만 엘윈의 개입으로, 게일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 마을에 방문할 때를 노려서 의도적으로 게일을 마을 밖으로 빼돌렸으니까.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마을이 불타게 된 건.'
이번 일에 한해선 참을성이 없을 자이고는 며칠을 못 버티고 마을 사람─인 척하는 시체를 공격했겠지.
게일을 만나지 못한 탓에, 그 행동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을 점령한 흑막에게 정체를 들켰을 것이고....
'흑막. 흑막이라.'
엘윈이 작게 키득거렸다.
"...재밌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심히 거칠었다.
그는 같은 인간으로서, 인륜을 져 버린 인간은 용납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엘윈으로부터 미약한 살기가 어른거렸다.
"...어이, 꼬맹이? 너 왜,"
그러자 게일이 흠칫하며 엘윈을 돌아보았으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읏챠."
갑자기 엘윈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게일이 착각하는 점이 하나 있어요. 이참에 정정해 줄게요."
그러곤 몇 발 떼지도 않은 거리에서 멈추고는 게일을 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어엉? 내가 착각하는 거?"
"그래요. 게일은 지금 이 마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누군가의 소행이 아니라, 최초로 자연 발생한 어떤 현상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던 참이잖아요?"
"...?! 꼬맹이, 너 이제 내 마음까지 읽는 거냐?"
게일은 몹시 놀라며 물었으나, 엘윈은 그저 짧게 웃었다.
"이 마을 사람들... 아니, 사람'이었던' 것들은 강제를 받고 있어요. 당연하죠. 그 누가 죽은 이를 산자처럼 둔갑시킬 수 있겠어요? 그런 고약한 일을."
엘윈이 어린아이에게 설명해 주듯 친절한 어투로 지독히 염세적인 말을 뱉었다.
"인간을 우롱하는 건, 결국 인간뿐이니까요."
"...꼬맹이, 너. 알고 있었던 거냐? 언제부터?"
함축적인 질문이다. 그에 엘윈은 짧게 답변했다.
"처음부터."
얇게 미소 지은 엘윈이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게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자,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까요. 슬슬 준비하세요, 게일."
"...뭘?"
"손님들이 오셨잖아요?"
게일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
그가 바라보는 곳의 너머로, 엄청난 물량의 '시체'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꺼이 맞이해 줘야죠?"
엘윈이 사납게 웃었다.
7화 죽은 XX의 마을 (2)
그것은 산 위로 불어오는 해일 같았다.
색색의 파도가 밀려오듯 '시체'가 지평선 너머까지 우글거렸다.
"약 수백 명, 아니 수백 마리인가...."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압도적인 물량.
아직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짜릿짜릿한 기세가 느껴졌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오, 이런."
꽁꽁 얼어 있던 게일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가 헛웃음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이 내 장례식일 줄은 몰랐는걸."
절망했다기 보다는 가벼운 어투라 얼핏 농담처럼 들렸으나, 게일은 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전장에서의 높은 공로로 '잿빛 악마'라고 불리며 본인 스스로 상당히 강하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도망갈 수 없고, 지원을 바랄 수도 없다.'
비르가 마을은 두메산골이었다. 사방이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도망칠 곳은 까마득하게 높은 산뿐인데다가, 하필 그 끝은 바다였다.
서대륙 동남쪽. 맨 끄트머리.
'거기다 마을이 불탄 지금, 시가전은 불가능해.'
그건 숲보다 움직이기 넓고, 엄폐물로 삼을 만한 지형이 없단 뜻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대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투는 그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
입고 있는 복장이나 무기 따위로도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았으니까.
누가 검사인지, 어떤 마법이 주력인지, 자랑하는 필살기라도 있는지 등.
그런 사소한 '정보'만으로 게일은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결국 항상 살아남았다.
'전쟁도 비슷하지.'
승자의 여부는 정보전에서 갈라졌다.
...사실, 전쟁 같은 장소에서 게일의 기억은 매번 휘발되므로, 구체적인 양상은 기억나지 않지만서도.
어쨌든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백지상태.
적이 누구인지, 애초에 적이 있긴 한 건지. 저 시체 같은 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게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괴마라고 하기엔 형태가 완전한 인간이던데. 혹시 변종이면 어떡하지? 아니면 설마, 수천 년 전 멸종했다던 몬스터의 부활이라던가!'
게일 또한 용병으로서 괴마 처치 의뢰를 해 본 적 있고, 야행 중에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급 괴마가 대부분이었다. 숙련된 인간이라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중급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지만.... 상급은 무리이지 않을까.'
상급 괴마의 발생률은 희귀한 편이었다. 0.001% 확률.
다만 한 번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낳았다.
헌터 협회에서도 상급 헌터들로 구성된 전담 처치반이 있을 정도였다.
이건 게일의 지론인데... 헌터란 하나 같이 또라이라는 것이다.
목숨줄과 더불어 정신줄도 한두 개 정도, 집에다가 두고 다니는 녀석들.
특히 상급 헌터부터는 '진짜'였다. 상상을 초월한 괴물들 뿐.
-음? 너는... 인간이로구나.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언젠가 우연히 한 헌터와 조우했을 때, 비로소 게일은 세간에서 떠도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이래 봐도 정의의 편이니까. 인간은 헤치지 않아. ...자아, 그럼 저쪽으로 가도록 해. 다신 길 잃지 않도록 조심하렴.
헌터는 괴물이라 괴물과 싸울 수 있다는 경외와 공포가 섞인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진 그날의 형상을 억지로 밀어내며, 게일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후우...."
게일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초조함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다.
'용병은 어느 때이건,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
마음속으로 인생 모토를 몇 번이고 중얼거린 그의 눈빛이 다시금 냉철해졌다.
그 덕분에, 잠시간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려 냈다.
'...아, 맞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게일이 불현듯 이곳에 있는 다른 존재.
그를 제외하면, 유일한 인간!
'꼬맹이!'
게일은 그동안 고독한 늑대처럼 홀로 행동했다.
딱히 원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뿐.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미쳐 날뛰는 그의... '광증' 때문이었다.
조절할 수도 자제할 수도 없는 이 저주 같은 기질로 인해서, 게일은 용병단 제의를 모조리 거절하며 단독 행동을 계속한 것이다.
아군을 죽이는 끔찍한 짓 따위, 다신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게일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다. 또, 한편으론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쩐지 가슴이 빠듯해지는 기분에, 게일은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나쁘지 않았다.
'동료라....'
비록 그와 게일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엘윈 크라이거 라는 사람은 눈앞에서 누가 죽어 가는데 가만히 지켜보는 이는 아니었다.
'...잠시만. 나 따위가, 다른 사람을 믿고 있다고?'
짧은 시간이었으나, 엘윈은 그보다 한참 약한 게일에게 무력으로써 강제하지 않았으며.
시체인 걸 뻔히 아는 마을 사람에게도 경멸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런 크고 작은 언행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 샌가부터 게일은 엘윈을 믿게 된 것이다.
한 줌에 불과한 믿음이라도 신뢰는 신뢰였다.
'거참.... 묘한 기분이구만.'
...게일조차 방금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거기다 엘윈은 강했다. 그와 감히 비교하기도 황송할 정도로.
'하핫! 이 못난 아저씨를 감동하게 하다니. 대체 뭐 하고 살던 분이신지.'
만약 게일이 싸우다 광증이 발현된다고 해도, 그가 다칠 일은 없을 터였다.
'살아남으면 영감님이라고 불러 드릴까.'
다시 말하지만, 게일 가리브는 엘윈 크라이거가 외양만 어린 은둔 고수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반말에, '꼬맹이'라고 부르는 되바라진 언행을 계속한 거였다.
물론 그 오해가 밝혀지는 순간은 그닥 멀지 않았다....
시름을 떨쳐 내어 활짝 갠 표정이 된 게일이 엘윈을 돌아보았다.
"이봐, 꼬맹아. 너는 뭐 좋은 방도라도 알고 있…."
그리고.
"...?"
별안간 할 말을 잃었다.
"읏챠읏챠."
엘윈이 제자리에서 콩콩 뛰거나 팔을 쭉쭉 펴는, 정체불명의 체조를 하고 있던 것이다.
"...아, 게일도 이리 와서 몸 좀 풀어요. 1분쯤 뒤에 엄청나게 몰려올 거라서요. 준비 운동해야죠. 게일, 국민 체조 알아요?"
"하아아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한 게일이 후다닥 엘윈에게 다가왔다.
"아니, 꼬맹아! 꼬맹님! 지금 체조나 하고 있을 땝니까요?"
엘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전 항상 그랬는걸요. 싸울 때는 제대로 준비 운동을 해야죠. 만약 싸우다가 손발이라도 저리면 어떡해요."
"아니, 그런 걸 왜 걱정해!? 체조 말고, 다른 거! 그래! 뭐라도 해 봐야지! 함정이라도 파 놓던가 하는.... 뭐냐. 꼬맹이? 왜 그렇게 봐?"
어느새, 동작을 다 끝낸 엘윈이 게일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어려운 문제를 풀은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이제 알겠어요! 껍질에 몸을 숨긴 애벌레처럼 구는 걸 보니... 게일, 겁먹은 거군요?"
"아닌데? 아닌데요?! 이 아저씨가 얼마나 용맹한데!"
"에이, 애써 부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사이에."
"우리는 무슨! 너와 나는 완전 남이거든!?"
질색하는 게일을 보며 엘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이긴 하죠. 하지만 저희는 의뢰인과 용병 관계가 될 예정이잖아요? 완전 남이라고 치기엔 나름대로 돈독하지 않겠어요?"
"...진짜 환장하겠구만. 그것보다 아직 정식으로 의뢰받지 않았거든? 멋대로 굴지 말아 줄래, 요 녀석아?"
"뭐, 그렇긴 하죠."
"엉? 네가 웬일로 이렇게 쉽게 물러가냐?"
게일이 의심 섞인 시선으로 엘윈을 흘겨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엘윈은 게일의 말에 따박따박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엘윈의 푸른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게일."
"왜."
"미리 말해 둘게요. 계약 조항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아요."
스릉-
엘윈이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천천히, 느린 동작으로.
그건 아마 게일이 볼 수 있게끔 전시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우우우우웅─
그저 칼을 뽑았을 뿐인데, 검명(劍鳴)이 메아리쳤다.
그를 꺼내 준 주인에게 반갑다는 듯, 티끌 없이 맑은소리가 너른 공간에 울려 퍼졌다.
"...와."
일순, 게일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가 강자의 반열에 올랐기에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것.
─지금 엘윈 크라이거란 포식자는 사냥을 시작하려고 한다.
"걱정 말아요. 게일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엘윈이 씩 웃었다.
"저는 이제껏, 이런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거든요."
얄미울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얼굴. 오만하도록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
...하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이 갔다.
"오냐. 이 아저씨, 기대해 보마."
게일은 그 자신이 더 이상 긴장하지 않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엘윈은 본인의 말을 훌륭히 지켜 냈다.
완벽한 승리를 통해.
* * *
움직이는 시체. 정확히는 '시체 인형'들이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거덕거렸다. 인형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어서 오세요, 비르가 마을에. 어서 오세요, 비르가 마을에. 어서 오세요, 비르가 마을에."
닥닥거리는 입에서는 늘어진 태엽처럼 같은 말이 반복됐다.
"비르가 특산품, 나무 왕관 좀 보고 가세요! 비르가 특산품, 나무 왕관 좀 보고 가세요! 비르가 특산품, 나무 왕관 좀 보고 가세요!"
그러나 불시에 온몸에 튀어나오는 무기들은 위협적이었다.
칼날, 톱날, 송곳, 드릴, 낫 등.
내부에 들어 있는 무기들이 자유자재로 전환되었고, 인형이라 가능한 기묘한 자세로 변칙적인 공격을 일삼았다.
"유적지 터는 저 산 너머에 있다네! 유적지 터는 저 산 너머에 있다네! 유적지 터는 저 산 너머에 있다네!"
그것들이 가지는 한 가지 공통점은... 몹시도 기괴했다는 것.
서걱-!
엘윈은 다가오는 시체 인형들을 사선으로 베어 냈다.
살아 있는 인간과 똑같은 외형이었음에도 칼을 움직이는 동작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악질이군.'
물론 엘윈은 인간이기에, 저 끔찍하고 가여운 존재를 보며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다.
하지만 동정심과 전투는 별개의 것.
"꺄아악!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꺄아악!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꺄아악!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응애애- 응애애- 응애애-"
사아아악!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엘윈이 마력을 칼에 담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인형들이 횡으로 갈라졌다.
금세 엘윈의 주변이 비었다.
"후우. 이쪽은 끝냈고, 다음은...."
여유가 생긴 엘윈이 머지않은 거리에 있는 게일을 흘긋거렸다.
'잘 싸우고 있네.'
전장의 악마라는 명성에 맞게끔 게일은 이런 난투에 익숙해 보였다.
조금 전 나약한 모습을 보였단 것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그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펄펄 날아다녔다.
그런데, 슬슬 방해였다.
'한꺼번에 날려 버리고 싶은데 말이지....'
마력 사용자는 본인의 마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력 분출, 마력 구체화, 마력을 통한 신체 강화....
그중에서 엘윈은 마력 분출을 곧잘 사용하곤 했다.
엘윈의 마력 양은 보통의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그래서 그의 임무 중 대다수가 일 대 다수의 섬멸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마을에 생존자도 없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환경 파괴가 되지 않도록 적당히 힘 조절은 해야겠지만.
"게일은... 그래, 흑막한테 먼저 보내 둘까."
지금쯤이면 모든 일의 흑막과 자이고가 함께 있을 터였다.
엘윈은 그와 같은 입장에서, 자이고의 행위를 응원하고 싶었지만.
"응. 아무래도 하급 헌터 혼자서는 무리겠지."
조금 도움을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빠르게 게일에게 다가간 엘윈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겍?! 뭐, 뭐야! 습격인가?!"
"아뇨, 게일. 저예요."
"...어이. 이보쇼, 꼬맹이. 갑자기 왜 이래? 이 아저씨, 목이 졸리는데요. 그만 좀 놔주시죠?"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한 사람이 게일의 힘이 간절하게 필요할 것 같거든요. 그를 도와주세요. 보수는 톡톡히 쳐 줄게요."
"뭐?! 그게 뭔 말인데!"
반항하는 게일을 제압한 엘윈이 친절한 손길로 게일에게 그의 망토를 둘러 주었다.
"참고로, 어깨 부분의 버클을 누르면 날 수 있으니까요. 저도 금방 처리하고 갈 테니 먼저 놀고 계세요!"
옛적에 위기를 감지한 게일이 뒷걸음치려 했으나, 이미 사자에게 잡힌 생쥐 꼴.
어림도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요, 게일!"
엘윈이 상큼하게 웃으며, 망설임 없이 게일을 던졌다. 날려진 게일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아아아아아!"
8화 사악한 인형술사 (1)
명필가가 그린 붓글씨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산등성이. 그 가운데 교묘하게 숨겨진 동굴이 있었다.
얼마나 잘 숨어 있는지 얼핏 봐서는 무심코 지나갈 법한 위장이었다.
동굴 안은 깊숙했다.
그리고 쭉 직선으로 이어진 길의 끝에는....
'끔찍하다'라는 단어로밖에 표현되지 못할 공방이 있었다.
탕, 탕, 탕-!
천장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엉킨 밧줄 아래로, 인간의 팔과 다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각종 뼈가 한 구석에 장작처럼 쌓여 있거나, 얇게 펴진 살가죽들이 한 쇠고리에 반죽처럼 꽂혀 있었다.
한때 살아 있는 사람의 목 위로 붙어 있던 머리통을 모아 놓은 꾸러미도 평범한 바구니인 양 덩그러니 놓여 있기까지 했다.
"와, 완성인가? 어디 보자... 어? 어?"
이 괴랄한 공방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
그는 본인이 만든 무언가를 들고서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는데.
"아니야아아악!"
콰직!
돌연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그걸 뭉개 버렸다.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 이건 조금 더 가늘게 나와야 하잖아. 이, 잊었어? 그렇지만, 근육을 강조하는 편도 좋을 것 같기도...."
그는 바로, 평화로운 산골 마을을 한순간에 시체들의 마을로 만든 원흉. 사악한 인형술사, '몰가'였다.
몰가는 외형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바닥에 끌릴 만큼 긴 머리카락은 관리를 전혀 안 하는지 산발이 된 지 오래되어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먼지와 오물이 묻어서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더러웠다.
쉴새 없이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도 어딘가 스산함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몰가의 눈이 그랬다.
"흐히히힉! 히힉!"
눈은 한 사람의 성품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던가.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적어도 지금은.
누군가 그와 눈을 마주치면 몰가의 비정상을 쉬이 알아챌 수 있으리라.
탕-! 타앙! 탕!
몰가가 망치를 내려찍으며 기괴하게 웃어 재꼈다.
"히히히힉! 좋아, 좋아, 좋아─!"
유달리 툭 불거진 눈동자에는 한 가지에 미친 듯이 몰두한 사람 특유의 광기가 엿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 사내를 보았다면 입을 모아 이렇게 부르리라.
미치광이. 또는 광인(狂人)이라고.
"히히힉! 히힉!"
그는 연신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망치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내려쳤다.
그것은 인간의 살가죽이었다.
챙- 챙-
하지만 어째선지, 연약하고 부드러워야 할 그것은 망치와 부딪치면서 쇳소리를 냈다.
한참을 동작을 반복하던 몰가는 어느 순간 멈추며 그것을 살폈다.
"좋아.... 이건 꽤 괜찮게 된 것 같군! 그럼 서둘러서 다음 파츠를 작업해야지...."
몰가의 방식이란 간단하다.
일단 사람과 접촉이 적은 외진 마을을 탐색하고, 타겟으로 결정한다.
가장 어두운 밤, 마을 전체를 즐겁게 몰살시킨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베이스로 어여쁜 '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과 한없이 비슷한, 살육 인형.
"그래, 그래.... 원칙을 지켜야지. 암암,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기억과 외형은 생전과 똑같이,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인형이지만, 진짜 인간처럼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끔.
악취가 나지 않도록 특수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고방식이나 대화방식도 생전처럼 유지하되... 그가 신호만 준다면 살육 인형으로 변모하도록 체계를 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그런 인간의 여러 몸체를 '파츠'처럼 조립.
비로소 하나의 인형, 예술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모독적이다!
이 사내는 인간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륜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몰가는 그 자신이 천부적인 예술가라고 자부했다.
예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윤리와 도덕성은 알량하다.
가장 중요한 건 보다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완성이다! 내 인생의 역작!"
그의 앞에는 지금까지 만들었던 인형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 있었다!
"키히히히히힉!"
몰가가 자지러지며 기쁨을 표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카타르시스란...!
"아아...! 최고, 최고야! 역시 재료가 좋아서 그런가. 그렇지?"
또한 몰가에게는 예술품의 완성,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마침 그 취미를 표출할 수가 있었다.
"이거 고맙게 됐어. 헌터 양반? 좋은 품질의 아들을 낳아 줘서... 그 덕분에, 내 인생의 역작을 만들어 냈으니!"
몰가가 기괴하게 히죽거리며 한 곳을 향해 돌아보았다.
"안 됐어, 안 됐어. 참으로 안 됐어. 멀리서 기대하며 왔을 텐데.... 기껏 본 것이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이라 어쩌지?"
"...."
"그래도 완벽하지? 겉은 생전 네 아들과 똑같으니까! 아, 흉내도 낼 수 있다고? 생전의 그와 똑같게. 보고 싶지? 응? 보고 싶지? 내가 보, 보여 줄까? 보여 줄까?!"
쇠사슬로 온몸이 꽁꽁 묶인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뚝뚝....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몸에서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나왔으나, 눈빛만큼은 형형하기 짝이 없었다.
"흐, 흐어윽. 큭...!"
남성의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르고,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입술에서도 피가 철철 났다.
그 모습이 일견 외적 고통보다는 심적 고통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이름은 바로 베테랑 하급 헌터, '자이고'였다.
괴마와 싸우는 것이 본분인 헌터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인지, 그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사악한 인형술사, 몰가는 수십 년 전부터 여러 마을을 몰살시킨 혐의로 지명수배 중이었는데,
피해 당국의 촘촘한 수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출귀몰하게도 옷자락조차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쫓던 수사관이나 기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행적이 묘연해지는 것이다.
-이 이상의 피해가 나기 전에, 헌터의 도움을 구하는 게 낫겠군.
그 행태를 기이하게 여겨, 몰가는 헌터 협회로 이관되었다.
헌터의 주 본분은 '괴마 척살'이지만, 기본적으로 헌터 협회는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세간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악적(惡敵)이나 그런 단체가 있을 경우, 종종 헌터를 파병하여 문제해결에 일조하곤 했다.
그러나 현재, 자이고는 헌터로서 온 것이 아니었다.
1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로서 온 것이다.
"...네 이놈!!!"
그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안에서부터 솟구치는 울분을 꺼내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듯이.
자이고는 하급 헌터 중에서도 인내와 끈기가 뛰어나, 오랫동안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만큼은, 아무리 그라도 이성적일 수 없었고....
그 결과,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는커녕 붙잡히고 말았다.
'...실책이다.'
냉정해야 했다. 더 조심해야 했다. 꼬리를 잡은 즉시, 돌격하지 말고 헌터 본부에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수많은 후회와 가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결국 자이고는 그 자신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을 알았다.
혹여라도, 그 잠깐 사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원수가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그것만은, 그것만은 안 된다.
'저놈은 내 몫이다.'
이 한 몸, 지옥에 떨어져 억겁의 세월 불타도 좋았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직접 처단할 수 있다면...!
"감히, 사람의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지르느냐! 람파스의 철퇴가 두렵지도 않으냐!"
"딱히?"
몰가는 표정 변화 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예술이란 한낱 피조물이 천상에 계신 위대한 아버지께 닮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마음껏 찬양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지고한 행위! 당연히 신께서도 싫어하실 리가 없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 표정은 무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이고가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미치광이가 따로 없군."
"당연하지! 원래 예술은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이거든. 히익!"
그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봐, 헌터 양반. 이제 슬슬 만나 봐야 하지 않겠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을."
몰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평상에 가만히 누워 있던 완성작 인형. 자이고의 아들이 삐걱거리며 일어났다.
"아."
자이고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들아...."
더 이상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이성이 소리쳤다.
어차피 제 아들은 옛적에 죽었고, 지금 움직이는 저것은 그가 사랑하던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이고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뚜벅뚜벅.
점차 다가오는 인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어쩐지 자이고의 뇌리에선 자꾸만 지나간 추억이 떠올랐다.
-커서 나중에 아빠처럼 헌터가 될 거예요! 많이, 많이 강해져서 그땐 제가 지켜드릴게요!
-와아아악! 아버지! 저, 저 루스람 아카데미에 합격했어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부로 새롭게 발령받은 하급 헌터 네이슨이라고 합니다. 흐흐. 잘 부탁드려요, 아버지. 아니 선배님!
기어이, 사랑하는 아들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아버지의 앞에 섰다.
자이고가 넋을 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자이고는 마치 사신에게 심판을 받는 기분이었다. 사신의 낫이 목에 걸린 듯한.
"흐."
그리고 그것이 웃음 지었다. 한때, 그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아들의 미소를 흉내 내면서... 말했다.
"아버지."
"...!!!"
고작 한마디. 고작 그 한 단어.
늘상 들어왔고 그가 죽기 전까지 당연히 들으리라 생각했으나,
앞으로는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된 그 말이 가슴에 사무치게 꽂혔다.
─그는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
애써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진실이 칼날이 되어 박혔다.
"아, 아아.... 아아아아!"
그 순간, 무쇠 같은 의지로 버텨 내던 자이고의 표정에 지독한 절망이 어렸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견고했던 사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몰가가 창백한 낯에 홍조를 띠며 웃어 댔다.
"키히힉! 키이이힉!"
몰가의 고약한 취미, 그것은 바로─ 죽은 인형과 그것을 사랑하던 이들을 조우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절망적인 감정은 몰가의 예술 활동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예상대로 최고야! ...좋은 영감이 떠올랐어!"
친구에게 배신당할 때의 표정. 연인에게 살해당할 때의 표정.
사랑하는 가족이 이미 죽었고,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때의 표정이란...!
참으로 별미였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특히, 이번 헌터 부자는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헌터라서 그런 걸까. 아님 당신네들 부자가 특별한 걸까."
아들은 높은 품질의 재료가 되어 주었고, 아버지는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아들처럼 훌륭한 재료가 되어 주리라!
"흐히히. 그런 뛰어난 아들을 생산한 아버지를 활용한다면 분명 뛰어난 예술품이 나오겠지...!!"
어쩌면 그의 역작이 또다시 갱신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대감 어린 표정의 몰가가 히죽대며 자이고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쉬이이이익!
날카로운 무언가가 몰가에게 날아왔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몰가가 방향을 틀었다.
"아악!"
나이프가 그의 어깨에 꽂혔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게 늦었다면, 나이프는 목덜미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식은땀을 흘린 몰가가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나?"
동굴의 그늘진 천장으로부터 한 남자가 뚝 떨어졌다.
게일이었다.
"지나가던 아저씨. 아니지, 정확히는 날아온 거였으니까 날아가던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어떤 미친 꼬맹이가 날 날려 보냈거든."
게일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무슨 헛소리야?"
몰가는 사상 처음으로 어처구니가 없단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광인에게 역지사지를 가르치는 업적을 세운 것이다.
"거 머시냐. 그거다, 그거. 네놈의... 적."
하지만 그걸 모르는 게일은 근처에 마실 나온 아저씨처럼 굴었다. 사실 알아도 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악당의 사정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어쩌다 보니 얘기를 다 들어버려서 말이지. 이런 아저씨라도 측은지심은 있거든. 망할 꼬맹이가 보수도 챙겨준다니까… 뭐, 대충 의뢰를 받은 셈 치겠어. 그러니까─"
게일이 살기 어린 핏빛 눈동자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어이, 빌어먹을 악당. 어디 한번 개같이 싸워 보자고. 이래 봐도 나, 용병 일에 진심이거든. 내 경력의 밑거름이 되어 주셔야겠어."
게일 가리브, 의뢰 완수율 100%를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용병.
그것은 이번에도 같았다.
9화 사악한 인형술사 (2)
"하, 함부로 남의 소중한 공방을 쳐들어와서는 뭐, 뭐가 어째?! ...이이익!"
펄펄 뛰며 화를 내는 몰가의 창백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본인만의 성역이라 여겼던 공간에 모르는 타인이 흙발로 들어오니, 굉장히 불쾌한 듯 보였다.
"내 공방을 더럽힌 침입자.... 죽여 버리겠다!"
챙그랑!
이를 악문 몰가가 어깨에 박힌 나이프를 뽑아 던졌다.
그리곤 기묘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그를 중심으로 검은 마력이 칼날 같이 소용돌이쳤고, 낯선 언어가 악보 위에 그려진 음표처럼 흘러나왔다.
게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떨어졌다.
'...불길하다!'
언제나 그의 목숨줄을 이어 준 직감이 외치는 듯했다.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지금 당장!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을 펑펑 쏘아 대는 마법사.
그들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인간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하필 저런 새끼가 마법사라니....'
개탄스러움에 게일이 혀를 찼다.
물론 그런 마법사들도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문 인챈트까지 시간이 걸리며, 그 본체는 종잇장이란 것.
그래서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먼저 상대를 죽여야 하는 치킨 게임이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공격해 봤자 안 통하겠는데."
아쉽게도 몰가의 주위를 둘러싼 검은 마력이 방해였다.
게일에겐 저 마력을 뚫고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고작 철검으론 무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구만. 전략적 후퇴다."
입술을 깨문 게일이 막 동굴 밖으로 뜀박질을 찰나.
"아차차. 깜박 잊을 뻔했네. 의뢰 대상 구해야지."
졸졸졸, 다시 뒷걸음질 친 게일이 벽면을 향해 다가갔다.
자이고가 묶여 있는 곳이었다.
"어이! 헌터 양반!"
"...."
"정신 좀 차려 봐. 내 말 들려? 이거 몇 개로 보여?"
게일의 부름이나 다급히 돌아가는 주변 상황에도, 자이고는 멍한 눈빛으로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슨.... 아가, 아빠가 미안하다. 미안해...."
몰가의 명령이 끊긴 탓에 가만히 서 있는 아들 모습의 인형을.
"이런. 완전히 넋을 놓았군 그래."
게일이 너저분한 머리칼을 긁적였다.
천상 고아인 그로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신파물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물이 취향에 더 가까웠다.
"이보세요, 헌터 양반. 외부인이 괜한 참견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찰싹!
게일이 자이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있을 건데?"
"...."
"아들 찾으러 왔다며. 아버지가 돼서는 가만히 손만 빨고 있으려고? 되는 데까지 발버둥 쳐 봐야지!"
게일 나름의 도움이었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지어내는 건 영 재주가 없었고, 딱히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복수는 스스로 해야 하는 거야. 남의 손을 빌려 하는 게 아니라."
"...!"
그래서 가장 필요한 말을 했다.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다고."
'...내가.'
게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한 사람이 게일의 힘이 간절하게 필요할 것 같거든요. 그를 도와주세요.
웃는 얼굴로 그를 상공 위로 날려 버렸던 무서운 꼬맹이를....
용병으로서 의뢰 실패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으나, 그렇다고 본인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게일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본인의 생존이었으니까.
...하지만 엘윈 크라이거의 의뢰를 실패했다가, 조금 미친 것 같은 그 꼬맹이가 저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두려웠다.
'감히 제 의뢰에 실패하셨네요. 그에 대한 대가도 생각해 두셨겠죠?'
미래를 상상해 본 게일이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결말이 하나 같이 좋지 않았다.
"으으! 어쩐지 평생 도망치지도 못하고 최저임금으로 혹사당할 것 같아! 중노동 싫다! 나에게 농땡이 칠 수 있는 자유를 달라...!"
다행히 그런 불행한 미래는 없을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때려라. 망할 녀석."
자이고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게일이 반색하며 말했다.
"오! 헌터 양반, 정신이 들었어?"
"덕분이다. 얼마나 세게 때린 거냐. 아주 얼얼해 죽겠군. 퉤!"
입안에 찬 피를 뱉은 자이고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네놈 말이 맞다. 모름지기 복수는 당사자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게일이 씩 웃었다.
"거 좋은 눈빛이네. 조금 도와줄까? 복수를 하려면 일단 무기라도 들 수는 있어야 하잖아. 그 꼴로는...."
"됐다. 이 정도는."
자이고는 온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나 혼자도 충분해!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강렬해지면서, 두툼한 흉곽이 나팔처럼 크게 부풀었다.
"흐읍!"
그의 몸을 꽁꽁 싸맨 쇠사슬이 바짝 당겨지며 살을 움푹 파고 들어갔다.
그것이 고통스러울 텐데도, 자이고는 멈추지 않았다. 되려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힘껏 저항했다.
이윽고 사슬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챙강-!
산산조각 나며 떨어졌다.
"후."
풀려난 자이고가 그의 옆에 있던 대검을 쥐며 일어섰다.
장신에 우람한 몸집을 가진 그가 우뚝 서자, 마치 태산을 올려다보는 듯했다.
"이야~ 역시 헌터 양반, 완력이 대단하신데?"
"흥!"
넉살 좋게 웃은 게일이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일단 나가자고. 여기 있다가는 저 검은 마력에 휘말려서 꽥 하고 뒈질걸. 나나 당신이나 개죽음은 싫잖아?"
그러곤 먼저 쌩하니 달려 나갔다.
"저저, 어른한테 싹 바가지 없기는."
꼰대스럽게 중얼거리긴 했으나 자이고 또한 그 뒤를 따랐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마력이 불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
당장이라도 저 씹어 죽일 원수에게 칼을 박아 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먼저 그 본인이 살아야지 아들의 복수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가만히 서 있는 아들의 인형을 애써 일별하며, 자리를 박찼다.
"...저건?"
그리고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왔을 무렵, 자이고는 게일의 어깨에 걸쳐진 금빛 망토를 발견했다.
"황금색의 망토. 그 위에 그려진 용의 문양...!"
그것은 자이고가 익히 알고 있는 상징이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너, 너 그거 뭐냐?! 설마 네 것... 아니, 당신의 것입니까?"
"뭐야. 갑자기 왜 존댓말이셔? 소름 돋게."
질색을 표한 게일이 이어서 입을 열려 했다.
얼결에 떠넘겨 받긴 했으나, 이 망토의 소유주는 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맙소사! 역시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암, 그렇고말고. 천상의 람파스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시니!"
자이고가 폭주하듯 속사포로 말을 이어 갔기 때문이다.
복수심과 증오, 절망같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얼룩졌던 그의 눈이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감격에 겨운 것 같기도 했다.
"...어엉?"
어쩐지 심상치 않은 자이고의 반응에 게일이 벙찐 채 눈만 끔벅였다.
자이고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게일의 손을 잡아채곤, 악수하듯 거세게 흔들었다.
"으어어억! 이보쇼. 갑자기 왜 이래!?"
그에 게일의 몸도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삼가 인사 올립니다. 저는 서대륙 가일론 지방, 케필 시티 지부 소속, 하급 헌터, 자이고라고 합니다. 당신을 뵙게 되다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해롱거리는 게일의 앞에 선 자이고가 오른손으로 심장께를 한번 치더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방금 전의 제 발만스러운 태도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 어어....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오-! 역시 들은 대로 하해 같은 포용력을 가지신 분이시군요! 그렇게 시원스럽게 용서해 주시다니! 이 자이고,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니 뭘. 그런 것 가지고. ...핫!"
그리고 그제야 게일은 잠깐 외출했던 정신줄이 돌아온 것을 느꼈다.
"저, 저기.... 헌터 양반? 경황이 없어서 말하는 게 좀 늦었는데 뭘 생각하든 간에 그건 아닐 거야. 왜냐하면 나는...."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반론을 말하려고 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하필 그때.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더니,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동굴이 폭발했다.
그리고 동굴의 천장을 뚫고서 몰가가 튀어나온 것이다!
"침입자! 멋대로 내 공방에 출입한 것도 모자라 내 재료까지 훔쳐 가?! 죽여 버리겠다!!!"
원수의 등장에, 자이고의 눈빛이 일변했다.
"몰가...!"
"히히힉! 안 되지, 안 돼. 도망가면 안 된다고! 아버지는 앞으로 내 역작이 되어 줘야 하잖아!"
몰가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검은 마력이 뭉쳐져 송곳이 만들어졌다.
"사, 상처가 좀 있어도 제작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히힉!"
몰가가 손을 뻗어 게일과 자이고를 가리켰다.
쐐애애액!
상공 위로 떠오른 수십 개의 송곳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자이고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게일이었다.
챙챙, 챙-!
순식간에 허리춤에 꽂아 둔 검을 빼든 게일이 날아오는 송곳들을 모조리 쳐냈다.
그 모습을 본 몰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히히힉! 치, 침입자. 너도 꽤 쓸 만해 보이네? 내 작품으로 만들어 주지!"
"허, 누가 잡혀 준대? 빌어먹을 악당 새끼야. 고작 이걸로 끝이냐?"
"설마! 그럴 리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입가를 기괴하게 찢어 웃은 몰가가 다시 검은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허공에 거대한 홀이 생겼다.
"나와라, 내 특선작들!"
"...저건!"
"허이고야. 인형이 더 있었어?"
콰앙! 쿠웅!
그로부터 '인형'들이 떨어졌다. 아까 게일이 봤던 것들과 비슷했으나, 생김새가 더욱 흉악했다.
"가라, 내 완성작!"
"창조주의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동굴에 있던 그 인형까지 등장했다.
인형을 보며 괴롭게 찡그리던 자이고가 이내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저 인형...의 상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맡기엔 어렵더군요. 각오를 다진다 해도,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겠죠."
"어어? 어차피 그건 당연히 내가 맡을 생각이었는데."
"...! 소문에 따르자면 당신께선 악인을 증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양보해 주시다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뭘, 그걸 가지고... 가 아니라! 내 말 좀 들으쇼!"
자이고가 응분에 찬 눈빛으로 몰가를 바라보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이런 조언 필요도 없으시겠지만, 늙은이의 노파심이라 생각하고 들어 주십시오. 저 인형은 생전 제 아들의 능력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제 아들은 권각술의 달인이었지요. 아비인 저보다 뛰어난."
"...고맙군. 도움이 됐어."
"도움이 되었다니 저야말로 기쁨입니다. 그럼 부디 조심하십시오. 당신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난다면, 그건 전 세계인의 슬픔이 될 테니까요."
"...."
"이번에야말로 명줄을 끊어 주겠다, 몰가─!"
말을 마친 자이고는 이내 몰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가 버렸다.
그런 그를 본 게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거참. 끝까지 오해를 못 풀었네. 뭐가 뭔지 이해도 안 되고."
그럼에도 한 가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별안간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전 세계라.... 이거, 굉장한 거물이랑 엮여 버렸잖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망토가 마치 그를 약 올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망할 꼬맹이. 엄청 높으신 분이셨냐고."
게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상 '높으신 분'과 엮이면 인생이 고달파졌기 때문이었다.
"...뭐어,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이나 시작해 보실까."
그는 시퍼렇게 번뜩이는 칼날을 몰가의 완성작─하급 헌터, 네이슨의 인형에게 겨누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둘 순 없으니까 말이지."
패륜 또한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10화 사악한 인형술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