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판타지 속 헌터가 되었다 (연재)">10화 사악한 인형술사 (3)
다가오는 인형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아니, 초점이 마치 렌즈처럼 커지고 작아지길 반복했다.
대상 타겟을 집중하듯이.
'지금!'
아무 행동하지 않는 적을 두고 가만히 있을 게일이 아니다.
인형에게 가까이 접근한 게일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콰직!
베어 내는 감촉이 뼈보다 무거웠으나, 왼팔을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그에 더해 오른팔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지잉, 지이잉-
인형의 무기질적인 눈이 게일에게 쏠렸다.
"창조주의 적은 저의 적. 배제합니다."
마주한 상대로부터 짜릿한 살기가 풍겼다.
게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대가 이제껏 겪은 강대한 적들에게 지지 않을 만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이를 인지한 순간, 게일은 가까이 붙었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그러다 무심코 한번 눈꺼풀을 깜박인 사이, 눈앞에서 사라진 신형이 순식간에 게일의 옆을 파고든 것이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화한다!'
게일이 미세하게 몸을 비틀어 중요 장기를 보호했을 때,
후욱!
능숙하게 자세를 잡은 인형이 그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등을 노리고 들어오는 발차기.
함께 이뤄지는 공격은 위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다행히도 게일은 여러 직업을 가진 적수들을 상대한 적 많은 노련한 용병이었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돌린 찰나.
"...!"
종잇장 차이로 연격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게일이었으나, 마지막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앞선 두수는 본 공격을 숨기기 위한 허수였던 것이다.
그의 등 뒤로 묵직하게 들어오는 한방!
"커헉!"
쿠웅-!
큰 충격을 받은 게일이 일순 피를 토하며 밀려 나가 나무에 부딪혔다.
"쿨럭! 무슨, 힘이...."
정신을 차린 게일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공격받을 때 자세를 틀었는데도,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까딱 잘못했다가 정통으로 맞았으면 쪽도 못 쓰고 기절할 뻔했다.
"그랬으면 죽었겠지. 아니면... 미치광이의 다음 작품 재료가 되었던가."
부르르 몸을 떤 게일이 이내 침착한 태도로 다음 수를 생각했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먹이나 발차기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치명상.'
마치 거대한 마차가 다가와 부딪치는 것 같은 위력이었다.
권각술의 달인이라 하니, 그 몸 자체가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체만 문제가 아니지....'
아까 전 꼬맹이랑 있을 때, 보지 않았던가.
미치광이가 만든 미친 인형들에는 여러 기이한 장치들이 들어 있었다.
기괴한 각도로 굽히며 회피하고, 분리되었다 합체되어 공격하는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데다가....
불시에 툭툭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무기들!
"이거, 만만치 않네."
비록 자이고의 아들을 베이스로 만들었다고 한들 기본 능력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러니 그런 능력들도 전제해야 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했다!
방심했다가 맞으면, 뒤지거나 뒤지게 아플 건 게일 본인이었으니까!
"끄응. 이거, 나 추가수당 받을 거야. 엄청나게 요구할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그를 향해 쏘아지는 바늘침 세례를 튕겨 내면서 게일이 소리쳤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몹시 억울한 듯했다.
"...하, 일이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평범한 줄 알았던 마을 탐색 의뢰가 어째서 전쟁터보다 피 튀기는 전투로 변모한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답은 하나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엘윈이라고 해요.
꼬맹이!
그 꼬맹이 때문이 틀림없다!
엘윈을 만난 뒤, 게일의 무난하고 평탄했던 생활은 보다 스펙타클하게 변했다.
'추격전에 마을 방화, 시체 인형, 헌터.... 여기서 뭐가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아저씨, 무서워지려고 한다. 되바라진 꼬맹이!'
...물론, 게일도 알고 있다. 꼬맹이가 원인일 리 없다는걸.
어쩌다 꼬이고 꼬인 일이 스노우볼처럼 굴려져서 이렇게 된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아저씨한테 잔뜩 뜯길 준비나 해라. 망할 꼬맹이! 어른이 얼마나 치사할 수 있는지 보여 주마!"
그건 그저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이런 고된 전투 뒤엔 달콤한 보상이 올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최면.
인형에게 나이프를 투척하며 잠깐의 시간을 번 게일이 근처 속이 빈 나무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적의 위치를 재탐색합니다. 적의 위치를 재탐색합니다."
인형이 그를 지나친 걸 느끼곤, 힘이 빠진 게일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크윽!"
그에 따라 나무 기둥에 피가 묻어났다.
"제길.... 첫 타격이 컸어."
또 한 가지, 불리한 요소가 더 있었다.
이미 죽어 소모되지 않는 인형과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은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는 것.
치지직.
상의를 찢어 붕대를 만든 게일이 상처 부위를 대충 동여매며 응급 처치했다.
그리곤 늘 상비하고 있는 물약을 들이켰다.
강력한 지혈제 및 진통제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절대로!'
게일이 이를 악물며 강박적으로 되뇌었다.
그는 피를 보면 볼수록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광증(狂症)을 앓고 있었다.
피아 구분 없이 공격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나름 쓸 만한 공격수단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용병은 이 광증을 가지고 필살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나는 인간이야.'
하지만 게일은 이 광증을, 정말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다.
미쳐 날뛴 뒤 보게 되는 참상, 마치 본인이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
-괴물, 괴물이야...!!!
그리고... 항상 그를 쳐다보는 두려움과 공포가 섞인 시선들.
이유는 몰랐다. 그가 언제부터 광증을 앓게 되었는지.
과거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언젠가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게일 가리브'라는 이름 또한 누군가 이름 붙여 준 것.
언젠가부터 그의 것이 돼 버린, 본래 그의 이름이 아닌 이름.
뿌리를 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그중에서 낯설고 낮은 것들이 모이고, 또 고이는 곳이 바로 용병판이었을 뿐이다.
"...남 말할 때가 아니잖아. 너야말로 정신 차려, 게일 가리브."
잠시 흐려졌던 게일의 눈빛이 이내 냉철하게 빛났다.
"너는 인간이야. 괴물이 되지 말자."
다시금 되뇌며, 게일이 일어섰다.
휴식은 짧아야 했다. 이 이상의 휴식은 독이었으니까.
"나보다 상대의 조건이 유리해. 그렇다면... 상대를 나보다 아래로 끌어내리면 되지."
예리한 눈으로 주변 지형을 살핀 게일이 품 안에서 은색의 실뭉치를 꺼냈다.
백사의 거미줄. 일전에 고생고생하면서 얻었던 특품. 투명하면서 질기고, 끈적해서 포박에 제격이었다.
물론, 고작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파바바밧!
숲속 깊숙이 들어가면서, 게일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미줄을 걸었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정교하게 함정을 짰다.
"적을 탐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추격 개시합니다."
마침 멀리서 인형이 그를 발견했다. 무서운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옳지."
게일이 씩 웃었다.
"계속 쫓아오라고."
콰직. 쿠지직, 파지직!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뚫고서 돌진하는 인형. 아마 그의 몸체에 거미줄도 붙어 있으리라.
계속해서 거미줄을 풀어내며 도망치던 게일은 계곡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돌발 상황 발생. 돌발 상황 발생. 관련 데이터가 없습니다. 다음 지시에 대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돌아보니 인형이 질긴 거미줄에 칭칭 감겨 옴짝달싹 못 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살육본능만 남아 있던 인형들보단 나았지만, 완성작 인형 또한 이성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목표를 발견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할 거란 예상이 들어맞았다.
"근데 처음 마을에 있던 인형들은 이성이 있지 않았던가? ...뭐가 뭔지. 아무튼, 다음 순서는."
치이익.
게일이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허공에 던졌다.
"즐거운 불꽃놀이 시간~!"
풍덩-!
히죽거리며 웃은 게일이 재빨리 계곡 안으로 몸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진 라이터가 인형에게, 아니 인형을 감싼 거미줄에 닿았을 무렵.
이변은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이제껏 게일이 지나온 숲길이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그 대상에는 인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의 정도가 가장 심했다.
부글부글.
폭발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계곡 안에서 게일이 올라왔다.
"푸하! 예상대로 됐나?!"
기린처럼 목을 쭉 빼고는 일의 경과를 살폈다. 그 결과....
"예이! 성공이다아아아!"
산산이 부서져 있는 인형 조각들이 보였다.
게일의 작전은 간단했다. 백사의 거미줄을 활용한 폭발 공격.
백사의 거미줄은 용병들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으로, 홀로 쓰면 밧줄로 쓸 수 있으나,
거미줄에 불을 붙이면 폭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게일이 가지고 있는 건 품질이 뛰어난 상등품으로 폭발의 강도가 월등히 높았다.
"기왕 의뢰 맡은 거, 사지 멀쩡히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전부 다 따로 놀게 됐구만."
아무리 살해당한 뒤 고인 모독을 당했긴 했으나, 한때 인간이었던 인형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되도록 멀쩡한 신체를 전달해 주면 좋을 것 같았는데.
"거, 헌터 양반도 이해하겠지. 본인 아들이 얼마나 강한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니."
머리를 긁적인 게일이 이리저리 떨어진 인형의 몸통과 사지를 주웠다.
그리고 근처에 안전하게 모아 두고선, 야생동물들이 가져가지 않도록 큰 잎사귀로 덮어 두었다.
"허이고. 죽겠구만...."
게일이 앓는 소리를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곧이어 그는 자이고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장소로 되돌아왔다.
기억하던 광경과 현재의 광경을 비교해 보던 그가 이내 혀를 찼다.
"여기도 꽤 치열하게 싸웠나 본데."
인형과 함께 숲의 일부를 태워 버린 게일처럼, 자이고와 몰가의 교전도 주변 환경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송곳이 꽂힌 나무, 횡으로 갈라진 나무, 마력에 의해 터져 나간 나무....
어쩐지 자연에게 심히 송구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전투의 흔적들을 따라가던 게일은 이내 한 사람을 발견했다.
우뚝 선 산처럼 큰 키와 우람한 체격, 흰색이 섞인 회갈색 머리카락.
그 옆에 이정표 같이 꽂혀 있는 거대한 대검.
하급 헌터, 자이고였다.
"어이! 헌터 양반!"
그를 향해 달려가던 게일이 크게 손을 흔들며 불렀다.
"헌터 양반! 아들 복수는 잘 끝냈어?"
"...."
"이보쇼! 내 말 안 들려? 또 무시하는 거!?"
발끈한 게일이 후다닥 그의 근처로 달려가선 어깨를 짚었다.
"아니, 어떻게 됐는지는 말해 줘야...."
게일을 돌아보는 자이고의 표정에는 넋이 나가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덩달아 게일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아들의 죽음에 크게 흔들리긴 했으나, 그가 보기엔 본디 이 자이고란 헌터는 심지가 강한 유형의 사람 같았다.
그런 자이고가 다시 넋이 나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말을 해야 알지. 내 의뢰를 실패하게 만들 셈이야?"
"으으음. 그, 그게 말이지요."
자이고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정말 말씀드리기에 면이 안 살지만 말입죠. 그게요...."
그 모습이 일견 굉장히 머쓱한 사람처럼 보였다.
"도, 도망쳐 부렸으야...."
"으엥?"
게일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방금 들은 말이 외계어라도 된다는 듯이.
이윽고 해석이 끝난 후, 그는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에에에에엥?!"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는 걸 미리 밝혀 둔다.
11화 사악한 인형술사 (4)
잠시 시간을 돌려 게일과 자이고가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엘윈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에취!"
그는 짐짓 평화로운 모습으로 앉은 채...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코를 훌쩍거리며 손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하찮기 그지없었다.
"먼지가 많아서 그런가. 킁, 공기가 영 안 좋네. 에, 에에에취-!"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
재채기하는 엘윈의 뒤로는... 완전히 초토화된 현장이 보였다.
마을은 물론이며, 한때 인형이었던 것들의 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물경 수백을 넘는 인형들을 해치운 것이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인형들의 산 앞에서 짧은 기도를 올리는 엘윈은,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는지 처음 상태 그대로 멀끔했다.
기도를 마친 그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이면 몰가를 찾았겠지?"
갑자기 던져서 놀라긴 했겠지만, 게일은 다방면으로 능력이 있는 용병이었다.
탐색 기능이 있는 망토가 대략적인 방향을 안내해 줬을 테니, 몰가의 아지트를 발견하는 건 쉬웠을 것이다.
"그럼 자이고를 구출했을 테고.... 함께 힘을 합쳐서 교전 중일지도 모르겠네."
「람파스」의 튜토리얼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몰가는 꽤 쉬운 상대였다.
앞으로 등장할 다른 보스들과 비교하자면... 제대로 된 마력 사용법을 모르는 용병이나, 평범한 하급 헌터라도 충분히 상대함 직한 보스.
그러나 「람파스」 속 게일은 몰가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가 상당한 강자임에도 말이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연유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는데....
아무튼, 패배한 게일은 '헌터'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를 살려 준 생명의 은인, 자이고를 구하기 위해.
"...뭐, 아무래도 거기는 게임이었으니까 그랬겠지만."
원래 튜토리얼에서 주인공은 그렇지 않은가?
재능 있는 생초짜이거나, 아니면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데 변심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경우.
그중 후자는 개연성을 위해 주인공에게 큰 시련을 안겨 주곤 한다.
"...."
일단 패배한 뒤, 성장하여 적을 이기는 전개.
여러 이야기에서 많이들 보는 전개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쪽은 생각이 달라서 말이죠."
그런 왕도적인 전개도 싫진 않았지만, 그보다는 이미 훌륭하게 성장해 있던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적을 깨부수는 쪽이 더 입맛에 맞는다.
엘윈은 그의 목적을 위해 주인공의 조력자, 동료 역할을 맡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끝장나는 버스, 아니 비공선을 태워 줄 생각이었다.
"나름의 빚 갚기라고 여겨 주세요, 게일. ...아마 이제 당신은 모르게 됐지만."
앞으로 게일에겐 여러모로 신세를 질 예정이었으니, 엘윈은 먼저 호의를 베풀어 주려 했다.
원작 속 게일이 가장 사무쳐 했던 사건을 사전에 없애 주는 방식으로.
"슬슬 결착이 날 것 같은데.... 게일, 자이고. 내가 그렇게 도와줬으니 그 정도는 쉽게 이기겠죠?"
이미 엘윈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잡히는 불상사를 방지해 줌은 물론이요,
몰가가 마을을 흔적도 없이 지우기 위해 보낸 인형들까지 모조리 처리해 주었다.
원작에서 게일이 패배한 주된 원인,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초반에 잘라 낸 것이다.
"아마 몰가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이제껏 공들여 제작한 인형들이 전부 쓸모없어졌다는걸."
엘윈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믿는 구석이 사라진 몰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진 않았다. 곧이어 더한 표정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콰아아아아앙─!
그때, 숲 저편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승리의 소리였다.
"끝났군."
게일과 자이고가 이겼으리라고 엘윈은 확신했다.
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몄다.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슬퍼할 언정,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바라 마지않던 결말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엘윈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까지 아름다운 결말로 마치기 위해선, 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몰가는 교활한 자였다.
지명수배가 걸렸음에도, 한 번도 수사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잔꾀가 잘 돌아갔다.
게일과 자이고에 의해 수세에 몰린 데다가, 믿고 있던 비장의 수까지 없어졌단 걸 알게 된 그가 할 행동이란....
"뻔하지."
엘윈이 비죽 웃었다.
* * *
"어, 어째서.... 어째선데에에에에!"
몰가는 달음박질치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다 나무뿌리에 걸려 데굴데굴 굴렀다.
"어흑!"
본래도 그리 멀끔하지 않은 복장이었으나, 흙투성이가 된 지금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땅을 내리치며 분노를 토하는 몰가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약간의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위협적인 검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파괴적인 힘을 뽐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몰가가 처량한 몰골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는 자신만만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이고라는 하급 헌터는 이미 한번 이긴 상대였다.
-히히힉! 허, 헌터도 별거 아니네. 역시 하급들... 약하잖아! 다, 다음에는 헌터를 재료로 삼아 볼까.
몰가는 모르고 있었다.
자이고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한 인형을 공격할 수 없어서 패배를 선택했단 사실을.
그리고 그전의 네이슨 역시도 몰가에게 위협받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한 것뿐이었단 것을.
쉽게 굴러온 두 차례의 승리에 젖어서, 몰가는 이제껏 경계해 오던 '헌터'란 존재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아들의 원수...!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갚아 주마, 몰가!
아들이란 약점이 사라진 자이고는 난적이었다.
강력한 힘으로 휘두르는 대검의 일격은 바위를 두부처럼 부숴 댔고, 무쇠같이 억센 팔과 다리로 달라붙는 근접 공격은 식은땀이 절로 나게 했다.
-저, 저리 가...! 다가오지 마아아아!!!
그와 교전하는 내내, 몰가는 마치 노련한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초조해진 그는 무심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비축한 마력을 하나의 마법에 모조리 사용해 버린 것이다!
주변 일대를 검은 마력으로 휩쓸어 버리는 광역 마법은 강력했으나, 발동 이후 시전자는 탈진 상태에 빠진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아, 안 돼...!
마법을 발동한 즉시, 본인의 실수를 인지한 몰가는 그대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나.
이제껏 그가 일구어 놓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취향대로 꾸며 뒀던 공방부터 하나하나 정성껏 모아 둔 귀한 재료들....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작품들!
"아아아아악! 내 완성품! 내 희대의 역작!"
원통스럽다는 듯 절규한 몰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이 이리 눈물을 떨구는 모습은 숫제 기만처럼 보였다.
"주, 죽일 거야. 내가 죽일 거야.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몰가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저주를 중얼거렸다. 비단 그 대상은 자이고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남의 공방에 쳐들어와선, 재료를 풀어 주고 달아난 침입자.
-거 머시냐. 그거다, 그거. 네놈의... 적.
부지불식간에 몰가에게 나이프를 던졌던, 잿빛 머리의 남자!
흐리멍텅한 눈에 날백수 같이 껄렁한 첫인상이었으나, 몰가는 그를 얕보지 않았다.
결계로 감춰져 있던 그의 공방을 찾아낸 것부터가 비범함을 알리고 있지 않던가.
방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맞붙었다.
그러나... 졌다.
"인정 못 해...! 내 작품이 질 리 없어!"
바닥을 쾅쾅 내려찍으며 하찮게 화풀이하던 몰가는 이내 기묘한 손동작을 취했다.
엄지와 엄지를 겹치고, 검지는 엑스자로 교차하는....
놀랍게도 그 동작을 취한 몰가는 빠르게 흥분 상태에서 벗어났다.
"후우....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금방 추격해올 테니 임시 도피처로 몸을 숨겨야 해."
몰가는 땅에 쭈그려 앉으며, 정체불명의 물약을 손가락에 묻혔다.
그러곤 익숙하다는 듯이 기묘한 형태의 마법진을 그렸다.
"나, 나는 위대한 신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구도자! 아, 아, 아직 내 작품에 부족한 점이 많아서 진 게 분명해."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고를 돌린 몰가가 바삐 손을 놀렸다.
"작품들은 그, 그래... 처음부터 다시 만들면 돼! 한번 해 봤으니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을 테지. 초,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히히힉!"
이윽고 마법진을 완성시킨 그는 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마법진 위로 올려놓았다.
짙은 보라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보석 목걸이였다.
몰가가 자나 깨나 늘 빼지 않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히히힉! 이, 이것만 있으면...! 나, 나는 잡히지 않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 정체는 바로 이동형 아티팩트로, 미리 '마크'해 둔 곳이라면 거리에 상관없이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학과 마도공학의 결정체!
여러 국가와 연방체에 의해 지명수배가 걸린 몰가가 치밀한 수사망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하게 도망칠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저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역시 가지고 오길 잘했어.... 덕분에 계속, 계-속 예술을 할 수 있게 됐잖아?"
몰가가 히죽거리며 보석을 쓰다듬었다.
한때, 몰가는 시계탑에 소속된 학자였다.
연구에 열중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던 그는 어느 날,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는 광적인 예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곤 시계탑을 배반하고 아티팩트를 탈취, 도주한 것이다.
"오오오오-! 이 모든 것이 위대한 신께서 인도하심이다!"
마법진에 올라서기 전, 몰가가 그가 도망쳐왔던 길을 노려보았다.
"기다려라, 헌터! 그리고... 침입자! 다음번에야말로 나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네놈들을 찢어 죽이겠다!"
몰가가 극심한 증오와 광기를 끌어안으며 부르짖었다.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요?"
누군가, 몰가의 뒤에서 나타나 급습한 것이다.
그는 몰가의 배를 걷어차며 마법진으로부터 떨어지게 했다.
"커헉-!"
그리고 나무에 세게 부딪친 탓에 컥컥거리는 몰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법진 중앙에 놓인 아티팩트를 들어 올렸다.
"이 톱니바퀴 안의 독수리 문양.... 확실하네요. 시리네 씨의 것이 틀림없어요."
햇빛에 비추어 보며 아티팩트를 살피는 듯했던 그는 이내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시리네...? 그 이름을 어떻게! 네놈, 시계탑에서 보낸 추격자인가?!"
"글쎄요. 뭐, 비슷하긴 해요. 손버릇 나쁜 도둑놈을 잡아 달라고 부탁을 받긴 했거든요. 그것보다... 범죄자 씨, 혀가 기네요?"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한번 눈을 깜박했을 뿐이었는데.
서걱─!
"...어?"
몰가의 양팔과 다리,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던 몰가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으아아아아아악!"
한발 늦게 찾아온 고통에 몰가가 울부짖었다.
"흐으, 허어억! 내 팔, 내 다리...!"
"함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쓰나요. 그걸 악용해 타인을 죽이고 사람 마음에 대못을 박고 고인의 시체를 모독하면, 안 되죠. 범죄자 씨, 당신은 벌을 받아야 해요."
그런 몰가를 내려다보며,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입을 열었다.
"팔다리를 잃는 건 당신이 치를 대가의 아주 일부분이랍니다. 비유하자면... 맛보기랄까요? 당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는 작지 않으니까요."
빙긋 웃는 얼굴. 그와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몸을 움츠리게 하는 위압감!
몰가는 일순 압도되는 걸 느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나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에 있는 이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저요?"
몰가를 급습한 이가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그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요?"
엘윈이었다.
12화 Tutorial: Happy End (1)
[<단독> 침묵의 마을 학살범 "몰가"...드디어 잡혔다!]
["시체로 만든 살육 인형"... 몰가가 저지른 각종 만행은?]
[시계탑의 주인, 변절자 몰가에 관해 "내 알바냐?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답해... 또다시 인성 논란]
몰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언론을 통해 널리, 그리고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사지가 뜯겼다고? 꼴좋다!"
"맞아요!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범죄자는 더 고통받아야 해요."
"그래서 저놈은 누가 잡은 거라던가요? 파랑새 신문에선 또 다른 소식 없나요?"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마다, 술집마다 온통 그 일로 떠들썩했다.
몰가는 국지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탓에, 그가 저지른 범죄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으나....
[몰가의 새로운 피해자 중 헌터가 있다고 알려져... 세계인들, 충격!]
몰가의 피해자 중 헌터가 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헌터'가 누구인가!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들을 물리치는 용사가 아니던가!
람파스 사람들이 헌터에 가진 인식은 그랬다.
─구원자(救援者).
그런데, 그런 구원자가 살해당한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희생된 헌터가 비록 헌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이라곤 해도, 헌터는 헌터.
한낱 범죄자 따위가 감히 하늘을 떨어뜨린 것이다.
"여, 여기! 새로운 속보예요! 헌터 협회가 움직였대요!"
게다가 이 사건에 헌터 협회가 직접 개입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본디 헌터 협회는 범죄자를 잡는 일에는 협조했으나, 그 이후 이어지는 행정 절차까지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으흐흑! 아버지의 원수...!"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아아, 람파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세계 4대륙, 여러 나라로부터 일련의 사절단이 비르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총 279명, 전부 몰가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긴 피해자들이었다.
몰가가 잡힌 곳이자 마지막으로 범죄를 저질렀던 비르가 마을에서,
유족들은 몰가와 몰가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해 요목조목 상세히 발표했고, 언론은 이 또한 신속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저희 형제 앞에서 어머니를 죽이고 신체를 조각 냈습니다.... 흐으윽! 저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죄스럽습니다....]
[살려 달라며 엄마, 엄마...! 저를 부르는 딸아이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요. ...내가,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는데!!]
[사랑하는 연인이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가까스로 도망친 후, 배신감에 미치도록 원망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건 제 연인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 당시, 이미 죽었던 거였어요. 전, 저는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깊게 공감을 한 모양이었다.
"어떡하죠? 나 눈물 날 것 같아요...."
"유족분들 심정이 어떠실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힘드시겠지만, 기운 내시길 바랍니다."
"수사관님들. 저 천인공노할 작자에게 꼭 강한 처벌 내려 주십시오!"
세간의 이목이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수사 절차도 꼼꼼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
"그래서 대체 누가 몰가를 잡은 거냐고요!!"
여전히 그 공적을 달성한 이에 대한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이었다.
* * *
하늘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는 비공선의 위.
"이야,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게일이 오늘 자 신문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 위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미궁에 빠진 의인의 정체]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위와 같은 뉴스가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 며칠 전, 게일을 비롯한 세 사람이 활약했던 그 사건 말이다!
"크크큭!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할까? 몰가를 잡은 사람들이 정말 하늘 위로 솟았단 걸! ...아악!"
그때, 게일의 옆에서 잠자코 앉아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파랑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파바바박 쪼아 댔다.
짹!
새가 항의하듯 큰 날개를 펼치며, 불만스러운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 파랑새는 특이하게도 빵모자를 쓰고, 신문이 잔뜩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새가 세계적인 신문사, 눈티우스의 신문 배달부였기 때문이었다.
일명 '배달새'로 불리는 이 새는 먼 거리를 워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법 동물이기에, 지능이 몹시 뛰어났다.
화폐의 가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값을 지불하는 정상 고객과 값을 내지 않는 불량 고객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째애애액!
도발적으로 날개를 펼친 배달새가 이내, 불량 고객의 머리를 연속으로 쪼아 대기 시작했다.
"아파파팟-! 아프다고! 아프다니까!? 이 망할 새 새끼! 확 구워 버릴라! ...아아아악!"
콕콕콕콕!
"미안해! 인간이 미안해! 잘못했어! 그냥 장난 좀 친 거야. 어차피 돈 줄 생각이었다고. 정말이라니까?"
결국 꼬리를 내린 게일이 주섬주섬 품 안을 뒤졌다.
"자자, 돈 줄게. 돈 준다~ 여기 나 꺼낸다? 보이지? 나, 돈 꺼낸다고... 어라?"
게일이 자신만만하게 꺼낸 지갑에는 지폐는 물론이고, 동전조차 없었다.
탈탈 털어도 잔돈은커녕 먼지조차 없었다.
일순간 게일과 배달새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어, 얼레? 이상타... 내가 여기다 돈을 넣어놨 던 거 같은데. 하, 하하...."
배달새의 눈이 날카로워지고 게일이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무렵.
게일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내가 대신 내도록 하지."
막 선실에서 나온 자이고였다.
"얼마였지? 여전히 3시클?"
동전을 건네받은 배달새의 눈이 급속도로 유순해졌다.
배달새가 애교 있게 울며 자이고의 손가락에 부리를 비볐다.
짹!
"허허, 그래그래. 항상 좋은 뉴스 고마우이. 조심히 돌아가게나."
마지막으로 배달새는 게일을 보며 한번 눈을 부라리곤, 금세 자취를 감췄다.
만약 그 새가 인간이었다면 '어우.... 새조차 피할 거지새끼. 퉤!'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불손한 시선이었다.
"아오, 내 머리야. 저 새대가리 성질머리 보소."
게일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하하! 그러니까 돈을 제대로 상비하고 다녀야지. 배달새도 제 일에 충실한 것뿐이잖나."
"쩝. 나도 있는 줄 알았다고. 언제 다 썼던 건지...."
자이고는 더 이상 게일에게 깍듯이 대하지도, 존댓말을 쓰지도 않았다.
그가 상대를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윽.
"한 대 피울 텐가?"
"그럼 고맙지."
두 사람은 잠시 담배를 태우며 조용히 서 있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후우우우."
별안간 게일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가 연기의 움직임을 따라 옮겨졌다가, 이내 작게 뜨였다.
"...아, 벌써 해가 지는군."
온 사방이 주홍빛이었다.
저물어 가는 저녁 하늘과 불그스름한 빛의 구름 물결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절로 넋을 빼게 만들 만큼 황홀한 광경이었다.
해질녘은 모든 람파스인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밤이 되면 괴마라는 이름의 공포가 언제 그들을 덮칠 줄 모르니까.
"쯧! 거 더럽게 아름답구만."
그런데 여기 비공선에서는 노을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벌써 며칠이나 비공선 위에서 보냈는데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저런 비현실적인 광경이나, 상공에 떠 있는 부유감이나.
"내가 왜 이런 곳에...."
왕족이나 귀족 같은 '높으신 분'도 쉬이 누릴 수 없는, 비공선을 타는 이런 호사 말이다.
"너무 그러질 말게나."
크게 연기를 뿜어낸 자이고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분께선 자네를 퍽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야. 평생의 운을 다 쓴 거나 다름없네. 감사하게 여기라고."
게일이 코웃음 쳤다.
"시커먼 남정네한테 받는 관심, 이 아저씨는 필요 없는데 말이죠. 헌터 양반이 가져갈래?"
"껄껄! 그럴 수 있다면 나야 좋지!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이 될 걸세!"
게일의 이죽거리는 말에도 자이고는 넉살 좋게 넘어갔다.
"대체 그 녀석의 정체가 뭔데.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흠.... 그분께서 아무 말씀 없으신데, 감히 내가 초를 칠 순 없지. 어차피 곧 말씀하실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나."
자이고가 다 태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털어 내며 말했다.
"자네, 어차피 예상하고 있지 않은가?"
"...."
그렇다.
...아니, '그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게일은 그런 간단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강자.
그 귀한 아티팩트를 마음껏 제공해 줄 수 있는 데다가, 왕족도 쉽게 가질 수 없는 비공선을 소유한 주인.
거기다 무려 헌터 협회를 움직일 정도의 권력자.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이들을, 세간에선 이렇게 부른다.
─천외천(天外天), 특급 헌터.
이미 네 명의 특급 헌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이다. 이름이든 외형이든.
그러니 남는 것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유일한 특급 헌터....
'다섯 번째 특급 헌터.'
다시 한번 게일의 입에서 거나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젠장. 난 진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음? 자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아니, 그냥 이쪽 문제.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흠, 그렇군."
휘이이잉-!
차가운 돌개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슬슬 밤이 되려는 듯했다.
자이고가 물었다.
"언제 이야기하자고 하시던가? 본의 아니게 아까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야.... 계약인가 뭔가, 같이 의논하자고 하시던데."
게일이 슬쩍 그를 살폈다.
용병 사이에 의뢰 대상에 대한 사항은 기밀이었으나, 아직 정식으로 수주한 것도 아니고....
얼핏 광신도 같은 자이고에겐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
애초에 자이고가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면, 그 치밀한 꼬맹이는 미리 손을 써 두었을 것이다.
자이고가 둘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부터가 전부 엘윈이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한테 뭐, 의뢰할 게 있으시다나."
"금방이군. 마음은 정했나?"
"...글쎄다. 모르겠다."
어물쩡거리는 게일의 말에 자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호통치고 겁박을 해서라도 긍정의 답을 얻어 냈겠네만."
"...당신, 헌터 아니었어? 무슨 골목 깡패도 아니고!?"
게일이 기겁하자, 자이고가 조금 머쓱하게 말했다.
"그분은 우리 헌터들에겐 절대적인 우상과도 같아서 말이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라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은 달랐다.
"...헌데, 이번만은 자네의 편이 되고 싶네."
"응? 왜? 내 편 들어봤자 나는 뭐 없다? 가난한 용병이라고. 그러니까...!"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던 게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맙네!"
자이고가 무릎을 꿇은 채, 절을 하고 있었다.
게일을 향해서.
13화 Tutorial: Happy End (2)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때마침 자네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들을 죽인 복수도 채 갚지 못하고 원수의 발을 닦아 주며 생이 끝났을 테고. 원통하고 원통해서 제대로 눈을 갚지도 못했겠지."
자이고가 바닥에 머리를 쿵! 부딪치며, 절절히 외쳤다.
"게일, 자네 덕분에 살았어! 고맙네, 고마워...! 내 평생의 은인이야."
그에 게일이 '나 당황했어요'를 여실히 드러내며 허둥지둥거렸다.
평소 능글맞게 구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이래? 아저씨들끼리 쑥스럽게. 됐고! 빨리 일어나셔!"
게일이 그를 억제로라도 잡아 일으키려 했으나, 자이고는 힘으로 버티며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충 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 주게나. 자네는 이럴 자격이 있네. 생판 처음 보는 남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냐."
"거참 고지식한 양반 같으니."
이윽고, 쓰게 웃은 게일이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순전히 선의로 나선 게 아니거든. 감사 인사받을 자격 없어."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던 게일이 이내 엄지와 검지를 모은 후, 가볍게 흔들었다.
"요, 요거. 아까도 봤지? 내가 요게 좀 궁하걸랑. 돈 때문에 한 일이었어. 당신 구한 거. 감사 인사할 거면 나 말고 꼬맹이한테나 해. 걔가 당신을 구해 주라고 의뢰한 거였든."
"그분께서?"
자이고는 몰랐던 사실인지 놀란 기색이었다.
"...아아, 그렇군. 일평생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졌어. 다시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구만."
"얼씨구? 나한테처럼 무릎이라도 꿇게? 관두셔. 그거 엄청 부담스럽거든? 꼬맹이도 싫어할걸."
"에잉. 진심은 전력으로 표현해야 전해지는 법이야! 이래서 젊은이란...."
꼬장꼬장하게 호통을 치던 자이고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역시 자네한테도 고맙네."
"뭐? 아까 말 못 들었어? 나는...."
"제대로 들었어. 자네에게 고맙다는 뜻, 맞네. 여전히. 결국 돈을 받고 하는 일 아니던가? 외면할 수도 있었고, 도망칠 수도 있었네만... 그래도 나를 구해 줬지 않은가?"
게일의 말을 끊은 자이고가 단호히 말했다.
"구원받은 입장에서 구원자의 목적이 뭐가 중요하겠나. 결국... 구해졌다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남지."
"...정말, 완고하시구만. 헌터 양반. 내가 졌어. 그 인사, 감사히 받을게."
"옳거니! 그래야지! 자네 참 대단허이. 요즘 용병답지 않은 기개가 있어."
자이고가 껄껄 호탕하게 웃어 재끼자, 게일이 항변했다.
"이봐, 잊고 있나 본데 나도 용병이거든? 듣는 요즘 용병 좀 그렇다?!"
"떼잉. 그건 감안하게나! 요즘 용병들 하는 꼴이 영 보기 싫어서 그렇지. 신의가 없어, 신의가.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그렇게 한창 게일과 아웅다웅하던 자이고가 작게 웃었다.
"자네, 내 아들 녀석과 닮았구만. 그 녀석도 늘 같은 소리를 해 댔거든."
-아버지! 너무 원칙주의자세요. 나이도 드실 대로 드셨으니, 가끔은 굽힐 줄도 알고 휠 줄도 아셔야죠. 좀 약삭빠르게 굴기도 하시고.... 계속 이러시면 아버지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다고요. 아-! 또 딴청 피우신다!
"어찌나 잔소리하던지...."
쓸쓸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게일은 자이고의 아들, 네이슨에 대해 떠올렸다.
처음 몰가의 꼬리를 잡은 건 자이고가 아니라 그 신출내기 헌터였다고 한다.
비르가 마을처럼 외진 어느 마을을 습격하려던 몰가를 찾아냈고.
그 즉시 죽이려고 했으나... 곧바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저기 아이들이?!!
헛간에 숨어서 떨고 있던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남매로 보이는 소년과 소녀는 금방이라도 몰가에게 적발될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을 제물 삼아 몰가를 죽이고, 이 이상의 피해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그 아이들을 살리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인가.
-만약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선택했다.
몰가를 심판하는 대신, 아이들을 구하기로!
-헌터 아저씨가 저희를 구해 줬어요. 앞만 보고 달리라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흐윽!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요? ...죽었어요?
아이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버티고 버티다...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헌터적인' 죽음이었다.
모든 헌터는 헌터가 되기 전, 람파스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일명, 프로테우스 선서.
─인류를 위협하는 괴마와 투쟁하는, 위대한 헌터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수호에 헌신할 것을, 광명의 신 람파스의 이름으로 엄숙히 서약합니다.
프로테우스 선서에는 여러 서약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도 있었다.
─하나,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우선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한테는 원칙주의자로 살지 말라면서 입버릇처럼 잔소리하던 녀석인데.... 마지막 순간엔, 정작 본인이 더하더군."
"그 아버지의 그 아들 답네."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자이고는 이내 콧수염을 뽐내며, 썩 멋들어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암! 누구 아들인데!"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 * *
다음 날, 점심.
게일은 나르한의 안내를 받으며 비공선의 깊숙한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곧이어, 그는 어느 방의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 저희 비공선의 응접실입니다. 안에서 엘윈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르한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멍하니 우두커니 서 있는 게일의 모습에 나르한의 의문을 표했다.
"게일 님?"
"어? 아, 벌써 도착했네. 안내 고맙수다, 집사 양반."
나르한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제 기쁨일 따름입니다. 자, 들어가시지요. 엘윈 님께서 아침부터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윽. 갑자기 더 긴장되는데...."
게일이 퀭한 안색으로 배를 문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밤을 꼬박 지새운 참이었다.
'특급 헌터가 평범한 용병 나부랭이한테 대체 무슨 의뢰를 하려는 걸까?!'
'대충 쓰이고 버려지는 건 아니겠지? 왕족 암살이라던가, 상급 괴마의 시선을 끄는 미끼 역할이라던가...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아니겠지!?!'
자꾸만 오만 걱정거리가 뇌리를 가득 채워서 차마 잠을 이룰 수 없던 것이다.
작게 각오를 다진 게일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야. 무슨, 대귀족의 저택보다 더 훌륭하잖아?"
비공선의 응접실은 이제껏 게일이 봐 왔던 어떤 공간보다 호화로웠다.
간혹가다가 관련 의뢰가 들어온 탓에 그는 용병 주제에 예술품에 대한 지식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이건 엘프 왕국의 도자기. 저건 야아히의 풍경화. 와, 앙제 문명 조각도 있잖아? 경매에 몇 점 출품되지도 않는 건데.... 거 꼬맹이, 어린 나이부터 엄청난 부자네, 부자."
응접실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게일이 혀를 내둘렀다.
일순 긴장했단 사실도 잊고서, 박물관을 관람하듯 주위를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던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의외로 예술품에 대해 잘 아시네요? 다 선물로 받은 거예요. 창고에 두기엔 아깝다며 나르한이 장식해뒀답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몇 점 가져가도 좋아요. 선물로 드릴게요."
"...꼬맹이."
"그 대신, 먼저 제 의뢰를 들어주셔야겠지만."
엘윈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게일. 좋은 점심이에요. 식사는 입에 맞으셨나요?"
"어어, 덕분에.... 최고였어."
"다행이네요. 나르한의 요리 솜씨는 몹시 뛰어나거든요."
엘윈이 뚜벅뚜벅 게일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럼 한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
"제가 누군지는 이미 예상하시겠지만,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세계 헌터 협회, 본부 총괄 헌터이자 사령관, 중앙섬 메디알레의 수호자. 그리고...."
엘윈이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황의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라고 합니다."
그 순간 엘윈의 푸른 눈이 맑게, 강렬하게 빛났다.
은연중에 풍기는 위압감에 게일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뭐야."
그가 가까스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역시, 엄청 높으신 분이잖아...."
"하하! 그래 봤자 말석이에요. 저 말고 다른 특급들은 훨씬 대단하신 분들이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 못 이겨 봤다니까요?"
"그런 천외천들을 이길 생각하는 게 더 대단한데."
이 세상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헌터들은 인간의 평균 수명을 아득히 뛰어넘는 삶을 살았다.
'이번 세대의 특급들은 나이가 꽤 어린 편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특급'이 된 것은 람파스 안에서도 굉장히 드문 경우였다.
게다가 눈앞에 금발 꼬맹이는 무려 역사상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던 희대의 천재가 아닌가?
'그럼 앞으로 더 성장할 일만 남아 있단 뜻이잖아. 무섭구만.'
특급 헌터는 언제나 람파스에 파란을 몰고 왔다.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사람들은 그 격랑에 속절없이 휘둘려지곤 했다.
'...궁금하네.'
게일은 문득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이 꼬맹이는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경지를 이루게 될지.
어떤 파란만장한 사건 사고를 일으키게 될지.
"자, 앉으세요. 차는 아라드산 홍차로 좋으신가요?"
"뭐든 괜찮아. 막입이거덩."
"그래요? 나르한은 맛을 즐길 줄 아는 분이라며 칭찬하던데요."
엘윈이 자연스럽게 응접실 쇼파의 상석에 앉고선, 서 있던 게일에게도 앉으라 손짓했다.
그러곤 여유롭게 한 손에 얼굴을 기대면서 말했다.
"...어떻게, 계약 조건은 정하셨나요? 제가 미리 생각해 두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다소 오만하게 보이는 그 태도가 제 옷인 양 어울렸다.
비르가의 첫 만남에서 순박한 차림새를 했던 것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으, 전에...."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에, 게일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슬슬 알려 주지 그래. 나한테 의뢰하고 싶단 게 뭔지. 의뢰 내용을 알아야 할지 말지 답을 줄 거 아니야."
"...아 참! 그렇네요. 그걸 깜빡 잊었어요. 계속 타이밍이 안 맞아서."
멋쩍게 웃는 엘윈을 보며 게일은 어젯밤 자이고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일 오후에 내릴 예정이네. 아들을 고향에 묻어 주려고. 그리고... 아들이 구해 준 그 애들을 거둘 생각이야. 아직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 나이가 아닌가. 서로 가족을 잃은 처지에 의지하고 살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분과 얘기가 잘되지 않으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어쩌면 게일에겐 좋은 기회였다.
만약 그 혼자, 이곳에 있었다면 거절하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주겠다는 자이고가 있으니, 천군만마와 같은 기분이었다.
'정 위험할 것 같은 의뢰면 재빨리 튀자...!'
그리 다짐한 게일이 마른침을 삼키며, 엘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엘윈이 말했다.
"저와 계약해서... 헌터가 되어 주시지 않을래요?"
14화 두 번째 동료
"...예?"
그건 게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뢰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헌터?"
"네! 게일이 헌터!"
"...왜?"
게일의 생각으로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의뢰였다.
아니, 누가 헌터가 되어 달라고 의뢰를 해. 헌터가 되도록 도와 달란 의뢰를 하면 몰라.
"꼬맹아.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환청, 뭐 그런 거지?"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자, 엘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일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내가 잘못 들었구나! 내가 착각한 거구나!'
하긴 그렇다.
한낱 용병 나부랭이뿐인 그를 누가 신임하여 헌터 같은 중책을 맡기겠는가?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금발 머리 소년은 그런 헌터 중에서도 최고위 직책에 있는 사람이었다.
'...특급 헌터. 아직까지 믿기 어렵지만.'
그런 이가 함부로 낯선 인간한테 '헌터'가 되라며 제안을, 아니, 의뢰를 할 리가 없지 않나.
어디 사는 미친놈도 아니고.
'아니면 그냥, 가볍게 농담한 걸 수도....'
그걸 내가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나머지, 무거운 의미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게일이 한숨을 쉬었다.
"이 꼬맹이가, 진짜."
이 아저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심장 멎을 뻔했다.... 그렇게 그가 막 너스레를 떨려는 찰나.
엘윈이 그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제 제안이 그렇게 마음에 들으세요? 설마 게일이 재차 확인할 정도로 헌터에 진심이 될 줄 몰랐어요!"
뭐요?
게일은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며 혈압이 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하하! 언제부터 헌터가 되고 싶으셨던 거예요?"
"...어억!"
소통의 오류였다.
'원작에서 게일의 신념에 영향을 줬던 자이고 씨 덕분일까? 게일이 헌터 일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더 정확히는, 이 세계가 게임 속임을 알고 있는 환생자와 그런 메타적인 진실은 꿈에도 모르는 평범한 이세계인의 차이였다.
"잠시, 잠시만. 이 아저씨 생각엔 말이야. 서로 의사소통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뒷목을 부여잡고 있던 게일은 가까스로 정신줄 끄트머리를 잡아챈 후, 잠시 양자 간에 오해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까 했던 제안이 진심이란 거지?"
"네!"
"정말로, 진짜로, 100%로?"
"네!"
"끄응...."
게일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 있었다. 미친놈.
"대체 왜?"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꼬맹아. 우리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거 알지?"
"그렇죠."
"그럼 내가 할 말, 대충 짐작하겠네."
엘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뭘 믿고 그런 의뢰를 하냐는 뜻이죠?"
"그래."
웬일로 게일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이, 네가 올해로 성년? 그럼 20살 아니냐."
평소 글러 먹은 언행과 태도로 글러 먹은 사람 취급을 받는 그였지만, 간혹 무섭도록 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잘 와닿지 않은 것 같은데 괴마보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사람이...."
본인은 알고 있을까?
언뜻 차갑고 무감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 속에는 미약한 온기가 담겨 있단 것을.
문득, 엘윈은 유쾌해졌다.
"하핫!"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게조차 선뜻 마음을 내미는 것이... 역시 '주인공'인가, 싶어서.
그리고 그런 게일에게서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떠올리고 말아서.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거네요. 고마워요!"
"...이보쇼. 지금 누구를 새침데기로 만들고 계십니까? 꼬맹이 널 걱정한 거 아니거든?!"
게일이 펄쩍 뛰었다.
"까딱 잘못했다가 모종의 거대한 사건에 휘말릴 것 같은, 가여운 이 몸을 걱정하는 거라고! 이 아저씨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선량한 민간인 배려 좀 해 주쇼!"
"하지만 게일.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예요."
"제 말 들리십니까!? 아니, 그보다 내 목숨줄은 걱정해 줘!"
게일의 말을 무시한 엘윈이 눈썹을 휘었다.
그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끄으으윽."
갑자기 이곳의 중력이 몇 배나 무거워진 것 같았다. 게일이 침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용병이잖아요?"
하지만 엘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게일의 앞에 서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마치 말 안 듣는 개새끼 훈육하듯.
"언제부터 의뢰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셨죠?"
"그, 그건...!"
"괜한 참견이에요."
싱긋 웃으며 하는 엘윈에, 게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개 취급을 받았다는 모멸감조차 고개 들이밀지 못했다.
백번 천번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실례했어."
본디 용병이 하는 일이 그랬다.
용병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오직 두 가지 부류로만 나누어졌다.
'위험하거나, 또는 불법이거나.'
그래서 용병들은 의뢰 내용과 의뢰인에 대한 비밀 유지가 필수적이었고,
한 용병이 맡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사건이라면, 보수를 돌려주고 의뢰를 파기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당신은 의뢰에 대한 대가를 듣고, 제 의뢰를 받을지 말지 선택하시면 되잖아요? 예전부터 하던 대로 말이죠."
그 과정에서 의뢰인의 사정은 불문.
같잖은 호기심에 이리저리 들쑤시는 용병은 명줄만 재촉할 뿐이었다.
의뢰인들은 대개 권력자였고, 용병은 그들보다 무력이 강할지언정 약자였다.
'보아도 보지 않은 듯, 들어도 듣지 않은 듯.'
그렇게 눈멀고 귀먹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게, 바로 용병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오지랖을...?'
비르가 마을의 사건은 원작이나 지금이나 '게일 가리브'라는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고....
그 일련의 경험 자체가 게일에겐 새롭기 그지없었다.
다만 이번엔 그 누구도 게일 대신 희생하거나 비극적으로 죽지 않았기에, 그 내면에 벌어진 사소한 변화는 작게 웅크려 있었다.
본인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래서 현재의 게일은 몰랐다. 그에게 자라난 변화의 씨앗을.
'...저 꼬맹이를 한순간 동료 같다고 여겨서 그런가?'
엘윈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럼, 의뢰 도중 파기도 되는 건가?"
게일은 딱 달라붙은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말했다. 엘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의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위험한 건이라 당신 마음대로 파기하는 건 곤란해요."
엘윈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한번 얽히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편이 저에게도 게일에게도 안전할 거예요."
게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로서는 특급 헌터가 '위험하다'고 단언하는 의뢰가 무엇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대신!"
하지만 엘윈은 새파랗게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목숨을 담보하는 만큼,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보수를 드리죠. 게일도 마음에 들 거예요."
엘윈의 어조에는 은근히 묻어나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며,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그에겐 자신의 의뢰를 게일이 결코 거부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설마!"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있구나!'
불현듯 그런 직감이 뇌리를 스치자, 게일이 전신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 자신조차 모르는 비밀을, 저 금발의 소년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너, 너 뭐야....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지!?"
게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숫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워워, 진정해요. 지금부터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게일이 동요하든 말든, 엘윈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이.
"하, 하...! 대체 언제부터?"
게일은 일순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엘윈 크라이거, 그는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짠 것일까.
비르가 마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비르가 마을의 이상을 알았을 때?
몰가를 발견했을 때? 자이고를 찾았을 때?
"너 같은 사람이 비르가 마을에 찾아온 목적이... 나였나?"
아니면... 처음부터? 애초에 의도적인 접근이었나?
"고작 나 따위를, 왜?"
그는 제 분수를 알았다.
용병들 사이에 알아주는 네임드 용병이라 해도, 헌터 같은 초인과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있다는 것을.
"그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예요."
엘윈은 게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말했다.
"게일 가리브, 당신이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죠."
그가 잃은 과거, 또는... 이 끔찍한 광증을 해소할 방법에 대해.
기꺼이 알려 주겠다고.
"그러니 제 손을 잡으세요. 나를 도와줘요. 저도 당신을 도울게요."
게일은 어쩐지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엘윈이 악마 같다고 느꼈다.
아주 먼 과거, 지옥이란 이계(異界)에 살았다는... 인간을 끌어들여 파멸시켰다는 악마를.
'...아니야. 내가, 아니야.'
하지만 저 악마가 인간이 노리는 대상은 게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저렇게 원한에 사무친 눈빛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복수자가 할 법한 눈이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있는 건가.'
노련한 용병답게,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챈 게일이 일순 멈췄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동시에 그는 엘윈이 그토록 증오하는 자들을 동정했다. 아주 잠시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 괴물의 원한을 샀는지.
"자, 가까이."
엘윈이 손짓했다. 잠시간 바닥에 붙박은 듯 서 있던 게일이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건...."
이 넓은 비공선에 타 있는 사람은 고작 4명이 전부.
그들 중에서 엘윈의 적이라 할 만한 이는 없었으나, 두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꽤 가까워졌을 무렵, 엘윈이 게일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잠자코 그 말을 듣던 게일의 눈동자가 한계까지 커졌다.
"...무, 무슨!?"
게일이 경악했다.
"그게 사실이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거지?!"
"프로테우스에게 맹세코."
엘윈이 심장 부위에 손을 올리며, 유려한 선으로 눈꼬리를 접었다.
그 미소에는 강렬한 승리감이 묻어 있었다.
"그러니 게일, 당신은 고개만 끄덕여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게일이 허탈하게 실소했다.
"...좋아, 내가 졌어."
꼼짝없이 거미줄에 걸린 신세였단 걸, 이제야 깨닫게 된 나비가 체념했다.
"그 의뢰, 내가 수주하지. 목숨 걸고 받은 일이니까 계약서는 제대로 써 줘야 할 거야. 보수 모자라면 용서 안 해!"
"하하, 물론이죠!"
엘윈이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제 두 번째 동료님?"
그 손을 마주 잡으며, 게일은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껏 경험상, 체감한 불변의 진실을.
'헌터 중에 제정신 박힌 인간은 없다.'
사명감, 신념, 인류애, 성취 등.
헌터마다 달랐으나, 무언가 한 가지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었다.
그 정도가 언뜻 광인(狂人)에 견줄 수 있는 만큼.
'그렇다면....'
헌터 중 가장 뛰어나다는 특급 헌터는 얼마나 미친 걸까.
15화 특별 훈련
구우우우웅─!
드넓은 들판 위로 비공선의 거체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에 따라 들판에 일순 거센 바람이 퍼졌다.
지이이잉-
곧이어, 해치가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음! 드디어 도착했군!"
그는 바로 하급 헌터, 자이고였다.
오랜만에 맡는 흙냄새와 바람 냄새를 만끽하는 듯, 양팔을 벌리는 그의 뒤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고 씨.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고향에 가는 것이 기쁘신 모양이십니다."
비공선을 내리는 자이고를 마중 나온 엘윈과 나르한이었다.
"아, 엘윈 님! 나르한 씨도 오셨군요. 두 분의 호의로 잠시 머문 것뿐이었는데, 이리 마중까지 나와 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뭘요. 자이고 씨는 제 손님이었는 걸요. 주인된 입장에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엘윈이 슬쩍 눈짓하자, 나르한이 앞서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자이고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그가 바구니 위에 덮인 보자기를 열어 보니, 갓 만든 듯 모락모락 김을 뿜는 음식들이 정성껏 포장되어 들어 있었다.
"나르한의 음식이 입에 맞은 것 같아서요. 고향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시장하실 때 이걸로 요기를 채우세요."
"오오오-! 저를 위해 도시락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이 자이고, 평생의 영광으로 보존하겠습니다!"
자이고가 감동한 듯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부짖었다.
마치 생명의 은인이라도 만난 것 같은 격한 반응이었다.
아니, 실제로 엘윈이 자이고의 생명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자이고는 과해도 너무 과했다.
"아뇨, 바로 드세요. 그냥 두면 음식 쓰레기가 될 뿐이니까요."
"아아아, 정성껏 요리해 주신 요리를 저따위가 무용하게 만들어 버릴 수는 없죠!"
요리를 만든 주체는 엘윈이 아니라 나르한이었다.
"그럼 이 음식은 제가 아주, 매우, 몹시 맛있게! 먹겠습니다! 제 피와 살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도록...!"
"아, 예."
순간적으로 단호히 대답한 엘윈이었으나, 실상은 꽤 당황했다.
며칠 동안 자이고와 지냈지만, 그는 이런 반응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난감하네.'
엘윈은 10살 이후로 고립되어 살았다.
오직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대면할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았고, 그들은 엘윈에게 과하게 반응할 정도로 가벼운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지?'
그래서 엘윈은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특급 헌터가 평범한 람파스인에게, 그와 같은 헌터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 저.... 이거라도 쓰세요."
"오오오오-! 이 자이고, 또 한 번 은혜를 입습니다! 감사에, 감사를!"
엘윈이 조심스레 손수건을 건네자, 그 또한 영광이라며 자이고가 눈물을 짜냈다.
중년의 남성이 뒤가 없다는 듯 오열하는 모습은 보기에 그리 좋지 않았다.
"아, 하하.... 건강해 보이니 좋네요."
때문에 그것이 엘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로서는 자이고가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참, 그렇지. 그 녀석은 어디 있습니까?"
"그 녀석? 아, 게일이요?"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지 원. 이래서 젊은 것들이란! 떼잉!"
습관적으로 꼰대 발언을 하는 자이고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엘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아침 식사 때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아직 자고 있나? 나르, 한번 확인해 줄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나르한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무렵.
"이런. 저 녀석, 괴마는 못 되겠군."
람파스에는 '괴마도 제 말 하면 온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딱 그 말대로 마침 게일이 등장한 것이다.
"여, 늦잠꾸러기! 드디어 일어났...."
문득 게일을 돌아본 자이고가 할 말을 잃었다.
딱, 딱, 딱.
기다란 지팡이를 짚은 게일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었다'라는 표현보다는 '기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으어어어어."
어쩐지 그는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입에서는 넋 비스무리하게 희끗희끗한 것이 반 정도 나와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 저런 모습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좀 흐리멍텅한 인상이긴 했으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꼭, 미라형 괴마 같군요."
자이고가 혀를 찼다. 엘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어제 제가 게일에게 훈련을 시켰거든요. 예상보다 잘 따라오길래 그만...."
범인이 이실직고했다.
"읍읍읍읍!"
그에 붕대로 입까지 막힌 게일이 억울하다는 듯, 마찬가지로 붕대로 싸맨 팔로 가슴팍을 내려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에는 피해자보다는 범인의 편만 있었다.
"뭐, 이 어린 녀석아. 엘윈 님께서 직접 지도해 주시는 수련이니 영광인 줄 알고 받아라!"
"저는 보양식을 준비해야겠군요."
"엘윈 님께서도 저 모자란 놈을 지도하느라 힘드실 텐데.... 수고하십시오."
"하핫! 응원 고마워요! 저 열심히 가르칠게요!"
범인과 공범, 방관자가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자, 피해자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젠 정말 가 봐야겠습니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자이고의 아들, 네이슨이 구한 남매.
그들은 헌터 협회의 보호 아래, 근처 마을에서 자이고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만난 뒤, 제 고향에 내려가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그 애들도 좋다고 해 주더군요. 헌터 일은 완전히 그만두진 않겠지만... 조금씩 일을 줄일 예정입니다."
슬쩍 입매를 올리며 말하는 자이고의 얼굴에는 절망이란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인하시네요, 자이고 씨는."
"허허. 이래 봐도 올해로 80살이 넘어갑니다. 다른 헌터들과 비교하자면 어린 나이지만, 연륜이 꽤 찼지요. 어른에겐 나름대로 상실을 이겨 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무너지지 않으셔서."
엘윈과 나르한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처음으로 자이고의 나이를 들은 게일의 턱은 빠질 듯이 벌어져 있었다.
그 경악 어린 표정에 자이고가 성을 내며 삿대질을 했다.
"이봐, 자네. 뭘 놀라고 있어! 난 아직 한창 청춘이라고!"
"으으으읍! 읍읍!"
"흥! 시끄럽긴. 이래서 젊은것들이 문제라니깐."
서로 소통은 되나 싶은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은 이내, 씩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이렇게 됐구만."
"으으읍."
"괜찮다네. 별로 서운하진 않아. 세상은 넓고, 시간은 길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자이고가 콧수염이 도드라지는 웃음을 지었다.
"내 고향은 벨포일세! 언제 놀러 와! 융성하게 대접해 줄 터이니."
게일을 향해 호탕하게 말한 자이고가 이내 엘윈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급 헌터, 자이고! 황의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 님께 감히 되갚을 수도 없는 크나큰 은혜를 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례를 하는 자이고를 보며, 엘윈 또한 마주 경례했다.
펄럭-!
그리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엘윈의 금빛 망토가 펼쳐지며 곡선을 그렸다.
"이륙한다!"
아직 그들이 가야 할 장소는 멀었으므로.
* * *
"이제, 몸 좀 움직일 만한가요?"
"덕분에. 고맙다."
온몸에 붕대로 칭칭 감고 있던 게일은 어느새 멀끔해져 있었다.
"뭘요. 게일이 초급자인 걸 뻔히 아는데, 힘 조절에 실패한 제 탓도 있으니까요."
투덜거리면서도 설명한 대로 착실히 따라오는 학생에, 엘윈은 무심코 손속에 힘을 더해 버렸다.
'이래서 스승님이 나를 그렇게 굴렸던 걸까?'
당시에는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다.
나보다 약한 존재가 강해지겠다며 바둥바둥거리는 것이 가엾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감사 인사는 저 말고 나르한테 하세요. 그가 치료해 준 거니까."
"뭐어, 그렇긴 하지. 형씨한테도 고맙수다."
게일이 나르한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그는 이미 눈치 빠르게 나르한이 엘윈 한정으로 무슨 일이든 한다는 걸 알아챈 상태였다.
반대로 엘윈의 명령이 없다면,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냉정한 성정의 소유자란 것도.
"설마하니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는데."
"엘윈 님을 보필할 집사 겸 조수가 되려면 이쯤은 기본 소양이지요."
"기본 소양...?"
애매한 얼굴이 된 게일을 향해 엘윈이 화제를 전환하며 말했다.
"그럼, 어제에 이어서 가 볼까요."
"어, 부탁한다."
비공선 안에 있는 넓은 훈련장 위.
엘윈과 게일이 마주 보며 섰다.
"그럼 2일 차, 훈련 시작하겠습니다."
땡.
나르한이 들고 있던 작은 종을 치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그들의 마력이 부딪치며 발생하는 기파가 널리 퍼졌다.
이렇게 게일이 갑자기 훈련을 받게 된 첫 계기는 간단했다.
-게일은 너무 약해요.
엘윈의 다소 도발적인 발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게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네네. 저는 연약한 용병입니다요. 강하디강하신 특급 헌터님께서 보호해 주십쇼.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게일은 강해요.
-뭐야. 아깐 약하다며?
-맞아요. 약한데, 강하거든요.
그 모순적인 말에 게일이 의아해하자, 엘윈이 말했다.
-신체나 기술적인 부분은 상당히 완성도가 높아요. 실전으로 다져진 트릭키한 전술도 훌륭하고요. 다만....
-다만?
-마력 운용도가 형편없어요. 아카데미 입학생만도 못해요. 게일, 마력 사용법에 관해 제대로 배운 적 없죠?
게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없지. 마력 사용법은, 헌터 협회나 유서 깊은 무가(武家)의 전유물이잖아? 나 같은 용병이 배울 수 있을 리가.
마력 사용법은 마력에 관하여 연구한, 고유한 운용 방식이었다.
헌터마다, 가문마다 쌓아 올린 업적이나 역사와 같았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외부인에게는 절대로 마력 사용법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 진짜 시험 봐? 그것도 헌터 시험?
-네!
-어째서어어어어!?
-곧 있을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지 못하면, 내년에 봐야 하니까 그러죠!
게일은 절망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특별한 마력 사용법을 전수해줄 테니까.
파아아아앗!
엘윈이 한 손을 펼쳤다.
그 손 위에 금빛 마력이 아롱지며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제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력식을.
그래서 두 사람은 특별 훈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곧 있을 헌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아직 메디알레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남았죠. 훈련하기에 충분해요!
-...그건 즉, 죽어 나가는 건 나란 뜻이지? 도망쳐도 돼?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죠. 저는 술래잡기 좋아해요. 대신 잡히면 형량, 아니 훈련량은 두 배예요. 알았죠?
-젠자아아아아앙!
-잘 부탁해요, 제자님.
그렇게 며칠간의 지옥 훈련이 시작됐다.
부드럽게 운행하던 비공선에서 게일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인다. 중앙섬, 메디알레."
그리고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16화 중앙섬, 메디알레 (1)
동서남북에 위치한 거대한 4대륙과 달리, 중앙에는 딸랑 섬 하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섬이 모여 이룬 하나의 집합체.
그것이 바로 '중앙섬, 메디알레'였다.
투명화한 비공선이 메디알레에 가까워지자, 이를 감지한 것인지 섬 곳곳에 있던 첨탑에서 여러 광선이 쏘아졌다.
곧이어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입국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 이건 또 뭐야?"
쑤욱.
게일이 허공에 뜬 글자를 건드렸으나, 그것은 형체가 없다는 듯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다.
"이것도 마탑과 시계탑의 합작으로 탄생한 최첨단 마도공학 시스템이에요. 메디알레를 전체를 관리해 주죠."
"오오! 신기하구만."
지이이이이잉-!
광선이 비공선과 엘윈 일행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중앙섬, 메디알레의 수호자이자 총사령관. 황의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님, 신원 확인되셨습니다.]
['엘윈 크라이거'님의 비서이자 최상급 헌터 '나르한 페르딕'님과 기타 인간 1명, 신원 확인되셨습니다.]
"어이! 나는 왜 기타 인간인데!?"
잠자코 있던 게일이 발끈했다.
[황의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 님. 다시 한번 메디알레에 귀환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윽고, 메디알레를 감싸고 있던 돔이 활짝 열렸다.
화악-!
그들의 시야에 메디알레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 오오오!"
게일이 탄성을 질렀다.
"풍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메디알레의 광경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메디알레의 가장 큰 섬인 땅섬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각각 7개의 하늘섬과 바다섬들.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환상적인데? 꼭 마법을 보는 것 같아. 톱니바퀴 같기도 하고...."
잠시간 풍경에 눈이 멀었던 게일은 이내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나저나 메디알레가 무역 거점이기도 한 건 알았는데 말이지.... 원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이던가?"
웬만한 대도시마냥 섬 내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이다.
여러 가지 머리 색으로 알록달록한 거리를 내려다보던 게일의 곁으로 엘윈이 다가왔다.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에요. 메디알레는 세계 헌터 협회 본부가 있는 곳이니만큼, 출입 가능 인원이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럼 저 사람들은 뭔데?"
"다, 헌터 시험에 지원한 사람... 일걸요."
게일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하하! 물론, 농담이죠!"
"아, 아휴. 농담이었구나. 난 또 뭐라고...."
그가 안심하기도 전에, 엘윈이 이어 말했다.
"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에요! 아마 저 사람들 대부분, 이전 시험에서 탈락한 사람들일걸요."
"탈락했다고? 이전 시험? ...시험이 하나가 아니야?"
꽁꽁 얼어 버린 게일이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엘윈이 이어 말했다.
"네. 당연하죠. 이제 남은 시험은 3차 시험, 무력 평가와 최종 시험, 인성 평가뿐이니까요."
엘윈이 난간에 기대며 따분한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밖에 합격자와 탈락자들의 가족들도 꽤 있을 테고. 내년 시험을 대비해 참관하러 온 사람도 있을 테죠."
"...오, 참관까지 한다고?"
"어찌 됐건 대부분 다 루스람 아카데미 출신이니까요. 아카데미 생도에게는 참관 권한이 주어지거든요. 안 그래도 헌터 시험의 합격률은 극악으로 낮은데, 재학할 때 뭐라도 얻어 가야지 않겠어요?"
"극악...."
"그렇게 말하는 저는 아카데미를 다닌 적이 없지만요! 하하!"
그러다 문득, 엘윈이 게일을 돌아보았다.
"아, 맞다. 인성 평가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단순 면담일 뿐이니까요. 어차피 게일은 프리패스거든요. ...게일?"
새하얗게 질려선 어벙하게 눈을 깜박이는 게일을 보며, 엘윈이 의아해했다.
"뭐가 어쨌다고? 무력 평가? 인성 평가는 또 뭐야?"
게일이 패닉에 빠진 채, 읊조렸다.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 게일. 헌터 시험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자격 요건이라던가, 몇 차시로 이뤄졌다던가...."
"그게 뭔데?"
엘윈이 조용히 경악했다.
게일은 헌터 시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곧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험자인데도...!
게일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 몰랐지. 누구나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만 시선이 가곤 하잖아?"
"그렇죠.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엘윈이 온화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그 세상에 제일가는 똥 멍청이 보는 듯한 눈빛 좀 거둬 주쇼."
언행 불일치도 아니고 뭐야.
투덜거리는 게일을 향해 엘윈이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하하, 미안해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헌터에게 관심이 많잖아요."
엘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헌터 시험이 치러지는 연초가 되면, 올해 합격한 헌터가 몇 명이나 되는지 내기를 걸기도 하니까요."
"...그랬던가?"
게일이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이번 기수 합격자는 10명이 넘을 게 분명해! 내 친구의 아버지의 사촌의 이웃의 사돈이 루스람 아카데미 관계자인데, 올해 도전하는 후보생들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더군!
-에이! 그럴 리가! 황금 세대가 그렇게 빨리 태어날지 알아?
-왜 그러셔. 황금 세대가 탄생한 지 벌써 5년이나 지났다고! 슬슬 굉장한 신예들이 혜성처럼 등장할 시기야.
광장이나 술집 따위에 모인 사람들이 열띠게 입씨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헌터 합격자 수 가지고 한 거라고? 세상에, 사람들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남한테 관심은 엄청 많네."
"하하.... 그, 사람들이 관심 갖는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게일인데요."
혀를 차는 게일의 모습에 엘윈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아, 그랬지. 참...."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남은 시험은 두 개뿐인데, 게일은 무력 평가만 통과하시면 돼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인성 평가는 프리패스니까."
게일은 어째서 본인의 인성 평가는 프리패스란 건지 궁금해졌으나, 곧 이어진 질문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던 거 잊지 않았겠죠, 제자님?"
"오, 오우...."
힘없이 말하는 게일을 엘윈이 지긋이 쳐다봤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외면하려고 애썼다.
"뭐예요? 제가 손수, 직접, 일대일 밀착 수업까지 지도했는데.... 설마 불합격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그, 그게 말입죠.... 아, 아! 맞다! 나나나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합죽이처럼 입을 앙다물고 땀만 흘리던 게일이 화제를 전환했다.
"꼬맹님, 헌터 시험 말이야. 이미 3차 시험까지 왔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사흘 뒤에 무력 평가가 시작되네요."
"그런데... 중간 응시가 가능해?"
엘윈이 산뜻하게 단언했다.
"아니요!"
그 순간, 게일의 뇌리에 그동안의 고난과 역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갸아아아아악!
지난 며칠 동안, 먹은 밥도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하고, 신물이 날 정도로 앞뒤옆옆으로 굴려졌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 제발 그만...! 이러다 다 죽어!
-괜찮아요! 안 죽어요. 사실, 제가 이미 다 겪어 봤거든요!
-...롸?
-걱정 마세요. 죽을 만큼 힘들 뿐, 죽진 않아요! 저도 해냈으니, 게일도 할 수 있어요!
그때, 엘윈의 표정을 떠올린 게일이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일말의 웃음도 없이, 초점도 사라진 채 내려다보던 흰 얼굴은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날 믿어 봐요, 게일. 죽더라도 합격할 수 있게 해 줄게요.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동안 했던 수련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도 아까웠지만... 시험을 보지도 못한 그를 엘윈이 어떻게 구워삶게 될지 두려웠다!
"그럼 어, 어떻게 하려고?!"
"다 방법이 있죠."
엘윈이 빙긋 웃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게일, 기억해요. 이 세상은 돈과 권력이 전부예요."
"...아?"
머지않아, 게일은 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이번에는 용케도 지각하지 않았군, 엘윈. 웬일로 네놈의 그 망할 오지랖이 발동되지 않았나 보지?"
"아하하.... 말했잖아요. 이번에는 절대 늦지 않을 거라고. 제 말 좀 믿어 줘요."
"네놈 말을 믿는다면, 종족을 바꾼다고 말했을 텐데? ...뭐, 크흠! 이번엔 약속을 지켰으니 칭찬해 주지."
어색하게 웃는 엘윈을 보며 근엄하게 훈계하던 드워프.
"나르한. 너도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그동안 문안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무탈히 지내셨는지요."
"나야 뭐, 큼! 언제나 좋지. 너야말로 까탈스러운 주인 모시느라 고생이 많다."
"엘윈 님을 모시는 것이야말로 제 기쁨인걸요."
"쯧쯧! 중증이야, 중증."
혀를 차던 드워프의 시선이 이내 천천히 그 옆으로 옮겨졌다.
"그보다... 자네구만? 엘윈 녀석이 선택한 두 번째 동료가."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받는 이, 게일 가리브는 움찔거렸다.
"엘윈에게서 얘기는 익히 들었다네. 이름이... 게일 가리브, 라고 하던가? 용병?"
"예, 예엡!"
"만나서 반갑군. 나는 부족한 몸이나마 세계 헌터 협회 협회장이 된 자, 판 트바론이라고 한다네."
강렬한 눈빛의 드워프가 정중하게 악수를 청해 왔다.
'뉴, 뉴스에서나 보던 유명인...!'
게일은 혼란에 빠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뉴스에 얼굴이 실리는 저명한 인사들에게 취약했다.
* * *
"본래, 헌터 시험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루스람 아카데미'의 졸업생이라는 신분이 필요하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또 졸업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조건이지."
지이이잉-
어느새 그들은 자동으로 움직이는 길의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자네도 그렇고, 여기 있는 엘윈도 아카데미 졸업생이 아니라네."
"그렇다면... 어떻게?"
게일이 의아해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엘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특급 헌터에겐 특별한 권한이 있어요. 일생 3번,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헌터 시험을 응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답니다."
"...! 그렇다면, 설마 꼬맹이 너도?"
엘윈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스승님이 특급 헌터 중 한 분이시거든요."
"아아, 그렇구만."
게일은 그제서야 이 꼬맹이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디서 하루아침에 엘윈 같은 규격 외 재능 덩어리가 떨어졌나 했더니.
이건 뭐, 괴물이 괴물을 길러 낸 격 아닌가.
"그건 시험이 완전히 끝나지만 않으면 언제든 사용 가능하지. 그리고 다행히도, 아직 3차 시험 전이야."
"제 추천장, 게일에게 쓸 예정이었어요."
"...나한테?!"
깜짝 놀란 듯한 게일을 보며, 판 트바론이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저 녀석이 안 말해 줬나 보군? 걱정 말게나. 이미 한참 전부터 얘기가 되어 있던 건이었으니까. 자네의 응시에 저촉될 건 없다네."
"그, 그렇습니까...?"
게일이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기 바빴다.
그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를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판 트바론의 말에 은근히 함축된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엘윈은 게일을 동료로 낙점해 두었고, 이번 시험에 그가 참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를.
엘윈이 판의 몸을 툭 쳤다.
'괜한 말 하지 마세요.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다고요.'
'내가 뭐 어쨌다고? 동료에게 솔직하지 못한 네놈 탓이지!'
두 사람은 무언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치지지지직.
서로를 보는 눈빛에 스파크가 터지는 듯했다.
"...?"
그저 그걸 모르는 게일만이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17화 중앙섬, 메디알레 (2)
"뭐, 크흠! 기왕 녀석의 추천장을 받았으니, 자네도 우리 자랑스러운 헌터 협회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군."
"가, 감사합니다."
게일을 향해 나름 다정하게 덕담하던 판 트바론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엘윈을 차갑게 응시했다.
"엘윈. '그' 용건에 관해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와라."
"네네, 알겠습니다. 암요. 누구 말씀이신데요. 위대하신 상사님의 말씀은 당연히 따라야죠."
"흥! 네놈이 언제 나를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했다고! 빈말은 필요 없으니, 하는 말이나 잘 들어라!"
그러곤 제멋대로 성질을 부리고서 먼저 자리를 떴다.
엘윈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반응이 꽤 재밌죠?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요."
"어이, 꼬맹이.... 그러다 혈압 오르시겠다."
"하하, 알아요. 적당히 조절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이런. 협회장님도 고생이구만."
게일이 다소 희한하다는 듯, 흘금흘금 엘윈을 바라봤다.
그동안 저 금발 꼬맹이는 나이에 비해 꽤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비르가 마을에서의 사건을 보면, 상황 판단력도 지략도 뛰어났지.'
그런데 판 트바론이라는 드워프 앞에선 천진하고 장난스러운 면모를 드러냈다.
의식적인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친밀한 사이란 건가.'
게일이 속으로 수긍했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랜 세월로 엮인 신뢰감이 엿보였다.
'괴물 같은 인간도 인간이긴 한가 보네.'
인외 같은 모습에 은근히 거리감을 느끼던 엘윈에게도 인간적인 부분도 있다는 것이....
문득,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저는 잠시 다녀올게요. 두 사람은 먼저 가 있어요."
"뭐 어디를 가?"
"당연히, 제 숙소요! 제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에 왔는데, 굳이 다른 곳에서 잘 필요는 없잖아요?"
엘윈이 나르한을 향해 눈짓했다.
"나르, 내 숙소로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게일의 안내를 부탁해. 그리고 네 할 일을 다 마치면, 게일의 수련도 좀 도와줬으면 해."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엘윈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게일, 내 개인 훈련장은 마음대로 써도 좋으니 먼저 훈련하고 계세요."
"나 말이야, 메디알레에 온 건 처음인데 말이지. 조금만 관광하고 하면 안 되나...?"
게일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였다.
괜히 기분만 나빠진 엘윈이 스산하게 입매를 올렸다.
"게일. 혹시나 해서 묻는데, 영원히 관광만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그렇죠? 구천을 떠돌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해 주세요. 이따 와서 검사할 테니까."
게일이 허수아비 인형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꼬맹이 무서워....'
티끌만큼 생겼던 친밀감은 공기 중으로 증발한 채였다.
그렇게 게일과 나르한은 한참을 걷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정체 모를 운송 도구도 타고....
돌고 돌며, 이동에 이동을 계속했다.
"헉, 허억! 이봐,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이제 도착했습니다, 게일 님."
나르한이 공손하게 한 손을 펼치며 앞쪽을 가리켰다.
"여기가 엘윈 님의 숙소입니다."
"...저게 뭐시여."
게일이 입을 떡 벌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앞에는....
"아니, 이건 궁이잖아!?"
왕국에서나 볼 법한 휘황찬란한 궁궐이 있었다!
"네, 그 표현도 옳습니다."
나르한이 말끔한 얼굴로 덧붙였다.
"엘윈 님은 편의상 숙소라고 부르시지만, 본래 명칭은 '황의 궁'입니다. 엘윈 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라 그리 이름 붙여졌습니다."
"...하아, 이 아저씨는 이제 하나하나 놀랄 기운도 없다. 이번에도 꼬맹이가 꼬맹이 한 거지?"
"엘윈 님이시니까요. 일일이 놀라시면 기운만 빠지십니다."
"거, 충고 고맙수다. 좀 더 일찍 알려 줬으면 더 고마웠겠지만."
게일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엘윈 님의 말씀대로 훈련을 시작하셔야지요?"
"윽...."
"자자, 어서 가시죠."
나르한이 떫은 표정을 짓는 게일을 밀어내며 궁의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은밀히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지? 이제껏 조사했던 목록에 없던 대상이야."
정체 모를 이의 눈매가 의심으로 갸름해졌다.
"저 사람들, 왠지 새로운 변수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켜봐야겠어."
곧이어, 몰래 숨어 있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호화로운 궁전을 미처 다 구경하기도 전에, 게일은 나르한의 은근한 등쌀에 밀려 훈련장에 섰다.
"어휴.... 저, 저 주인님 바라기 같으니라고. 집사 양반, 꼬맹이 말이라면 되게 완고해진다니까."
게일이 습관적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다 이내 그의 눈빛이 진지한 모양으로 일변했다.
"후웁!"
게일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천천히 산만했던 정신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집중했다.
"먼저 마력을, 분출한다...."
그의 몸에서부터 일렁일렁, 마력이 흘러나왔다.
온통 새하얀 색의 마력이었다.
"그다음에는 옷을 한 겹 입는 것처럼, 마력을 얇게 펼친다.... 이것이 기본 운용."
헌터들은 마력을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거나, 필요 부위에 덧씌우며 신체를 강화하곤 했다.
"와, 이게 되네!"
이제껏 게일은 그들의 동작을 눈으로 훔치며 어설프게 따라 했다.
마구잡이로 마력을 주입한 것이다.
"이러니 효율이 나쁘지. 이제야 꼬맹이가 내 마력 다루는 법이 형편없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가."
이것도 적절한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마다 마력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정해진 한도를 얼마나 능률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했다.
상식적으로 적은 인풋으로 최대한 많은 아웃풋을 내는 이가 어느 방면에서든 유리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면 될지 감은 잡았긴 잡았는데.... 그래도 아직 멀었구만."
게다가 마력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선, 능숙한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생초짜가 독학으로 익히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윈 크라이거는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자, 천천히 호흡하고...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는 거예요. 낯선 힘이 아니에요. 애초에 게일의 것이니, 밀어내지 말아요. 받아들이세요. 다스려요. 잘하고 있어요. 옳지.
마력은 자연처럼 변덕스럽고 난폭했고, 통제당하기 싫어하는 기질이 있었다.
그렇기에 능숙한 누군가가 날뛰는 마력을 인도해 주면서 단단히 기반을 잡아 줘야지, 이후에 더 정교한 마력 운용이 가능했다.
"움직이고, 붙잡고, 흘려보내고, 뭉치고, 발산하면서... 조화롭게."
게일의 손아귀에서 나온 마력이 그의 말에 순응하며, 쉬지 않고 형태를 바꾸었다.
엘윈이 도와준 덕분에, 이제 게일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하게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꼬맹이에 비해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격이야. 더 분발해야 해."
비교 대상이 엘윈이라 그렇지, 게일의 습득 속도도 남들이 보기에 경악하기 충분했다.
고작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급속도로 마력 운용에 능숙해졌으니 말이다.
"어우, 힘들어라...."
한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마력 운용에 열을 내던 게일이 쭉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마력 운용 연습을 했으니, 이젠 슬슬 몸 좀 풀어 보실까...."
게일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치잉-
조명구에 비친 검신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으흐흐. 언제 봐도, 마음에 쏙 든다니까!"
게일이 씩 입매를 올렸다.
그것은 그가 비르가 마을에서 사용하던 싸구려 철검과는 차원이 다른 특제품이었다.
-전에 저와 계약한다면 아티팩트를 지원해 준다고 했죠? 자, 받으세요. 게일을 위해 특제 주문한 무기들이에요.
예리한 칼날은 검의 그것이다.
하지만 이 검은 단순히 베고 찌르는 것 외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쩝. 이것도 사용해 보고 싶은데, 아쉽네."
이 검은 살상력이 극히 높은 무기인데다, 마땅한 상대도 없는 지금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듯했다.
"대신 이 녀석을 가지고 놀아 볼까."
철컥-
불현듯 게일은 가슴팍에 넣어둔 총을 꺼내며, 훈련장에 세워져 있던 과녁을 겨누었다.
탕, 탕, 타앙-!
1초의 낭비 없이, 연속적으로 쏘아진 세 발의 탄환.
"후."
세 과녁 모두 정중앙이 뚫려 있었다. 전부 명중이었다.
"역시 나야. 아직 솜씨가 죽지 않았다니깐!"
언젠가 자발적으로 마력의 존재를 깨치면서, 총보다 날붙이 쪽을 사용하게 된 게일이었으나.
기본적으로 그의 주 무기는 총기였다.
"검도 좋지만, 이것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타다다당!
끊임없이 나타나는 과녁. 그에 따라, 몸은 목표를 놓치지 않고 쉴새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훈련과 관계없는 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게일, 당신이 헌터가 되는 것. 그게 의뢰의 첫 조건이에요.
그들이 의뢰에 관해 처음 논의했던 당시의 대화가 녹음된 레코드판처럼 재생됐다.
-저는 현재 제 수족이 되어 줄 이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제 명령을 우선하는 직속 단체를 만들려고 해요.
-하지만 알다시피, 저는 특급 헌터죠. 제 단원이 되려면 우선적으로 '헌터'여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게일, 당신이 나르를 이어서, 제 두 번째 동료가 되어 주셨으면 해요.
-제 계획에 있어서 당신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망할 꼬맹이."
게일은 용병 주제에 두뇌 회전이 꽤 뛰어난 편이었다. 웬만한 계략은 쉽게 간파할 정도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공들이면서까지, 한낱 용병 나부랭이를 영입하려는 이유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용병이라고 해도, 의뢰가 본인 문제와 관련되면 궁금해지는 법이거덩?"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궁리해 봐도 떠오르는 실마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역시 그가 모르는 과거와 연관 있는 건가 싶었다.
"으으으으-! 어렵구만, 어려워."
짙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게일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그 녀석, 절대 내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엘윈은 게일을 향한 호의를 가득 품고 있었다.
문득문득, 그 본인조차 의아해질 정도로 선명하게.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얻은 것을 계산해 봤을 때, 그에게 불리한 건 없었다.
되레 받은 것들만 세어 봐도 산더미였다.
"믿어 봐도 되겠지."
게다가 그렇게도 대단한 녀석이 일생 단 세 번밖에 쓸 수 없는 기회를 그에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정도로 기대를 걸어 주는데 가능하다면 있는 힘껏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건 무슨 기분일까."
과거를 모조리 잃은 게일에게 누군가 그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감각은 낯설었으나.
동시에 가슴 부근이 무겁게 뻐근해지는 듯했다.
"동료라...."
그것이 싫지 않았다.
"...뭐,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발버둥 쳐봐야지!"
오히려 유쾌했다. 이렇게 즐거운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18화 Day-1 (1)
엘윈 일행이 메디알레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다. 내일이면 람파스 헌터 시험 3차시가 열린다.
원래 시험이란 것이 수험자의 컨디션 관리도 무척 중요하지 않은가?
"그, 그게 진짜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그런데 게일은 방금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그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네에, 정확히 들으셨어요. 저녁 전까지 마음껏 쉬고 오시라고요."
그동안 엘윈의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빡빡히 짜인 훈련 계획에 따라, 개같이 굴려졌던 게일이었다.
"훈련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반나절 정도는 자유롭게 즐기세요. 자, 이건 용돈."
엘윈이 게일에게 작은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청년이 그보다 청년에게 용돈을 주는 모습은 어딘가 위화감을 일으켰으나, 게일에겐 다행히도 이곳에는 그걸 이상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헉! 이, 이게 다 얼마야!? 하나, 둘, 석삼, 너구리...."
게일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머니 안을 확인하고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꼬맹이, 너...! 진짜 어마어마한 부자구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돈은 썩을 정도로 많다고."
"오오오오-! 찬양하라, 꼬맹님! 위대하라, 물주님!"
어느새 게일의 두 눈동자는 돈 모양으로 바뀐 것마냥 반짝였다.
'누가 수전노 아니랄까 봐.'
투명할 정도로 정직한 반응에 엘윈이 웃음을 터트렸다.
"안에 든 건 마음껏 써도 돼요. 부족함 없이 넣긴 했지만, 더 필요하다 싶으면 '판 트바론' 이름으로 외상 달아 놓으셔도 되고요."
"알겠어!"
게일이 긍정의 말을 표했다.
"단, 과도한 음주는 안 되는 거 알죠?"
이번엔 엘윈이 선생님이 학생한테 어르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게일 가리브는 소문난 애주가였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가랴. 그가 술집을 보고 가만히 지나칠 리 없었다.
"맥주는 얼마든지 마셔도 좋지만, 그밖에 독한 술은 안 돼요."
차라리 술의 종류를 제한하는 쪽이 나았다. 게일의 주량은 매우 강했기 때문이었다.
"에이! 낮에 마시는 술은 약주지. 약주!"
"안 된다고 말했어요. 뭐, 포도주 한 두잔 정도는 괜찮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돼요."
"쳇. 알았다고."
게일은 입을 삐죽거리긴 했으나 이내 수긍했다. 그 역시 내일이 시험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이따 귀가할 때는 중앙 광장으로 오시면 돼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좀 복잡해서 나르가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럼 갈까요!"
"...어? 어어."
엘윈이 게일을 이끌고, 어딘가를 향했다.
"짜잔. 여기에 포탈이!"
수많은 방 중 한 곳에 포탈이 있었다.
평범한 문처럼 생겼으나, 그 안쪽에는 새파란 빛이 일렁거렸다.
"이 포탈 안으로 들어가면, 협회 본부 1층과 연결돼요. 데스크에는 말해 뒀으니 뒷문을 통해 나가시면 돼요."
"...아니, 잠깐만.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는데, 첫날에 왜 그렇게 뺑뺑 돌아서 온 거냐!"
"에헤헤.... 저도 나르도 깜박했지 뭐예요. 메디알레에는 1년 만에 돌아온 거라."
멋쩍게 웃던 엘윈이 '아, 참!'하며 말했다.
"맞다, 게일. 나가는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 뭔데?"
"혹시...."
엘윈이 차분한 목소리로 게일에게 그 내용을 말했다.
"그 정도야, 뭐.... 어려울 건 없다만."
"고마워요, 게일! 그런 상황이 오면, 잘 부탁드릴게요!"
표정이 밝아진 그가 이내 게일의 등을 밀었다.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자자, 어서 가서 놀고 오세요!"
"자, 잠깐! 밀지 마! ...우와아아앗!"
"잘 다녀오세요~"
게일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엘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 좋은 만남이 됐으면 좋겠네요."
무언가 꿍꿍이속이 확연히 드러나는 얼굴로.
* * *
어느새, 메디알레의 중앙 광장으로 이동한 게일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술집 안으로 냉큼 들어갔다.
그러곤 음식 몇 가지와 맥주를 주문했다.
"크으! 이 맛이지!"
탕!
시원한 맥주를 한 번에 쭉 비운 게일이 나무 탁자 위로 잔을 내려치듯 내려놨다.
"이게 바로 천국이지. 그리웠다, 알코올아!"
비공선을 타고 오는 내내, 그는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했다.
아닌가, 한 모금은 댔었나?
"집사 양반, 은근히 까다롭단 말이지. 잔소리도 심하고."
나르한 페르딕은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으레 그렇듯, 그는 청결과 위생에 몹시 신경 썼다.
-게일 님, 더럽습니다.
-엘윈 님은 아직 연배가 어리신 편이니 어른으로서 모범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비공선 내에서 술은 한 병 이하로 드셔 주세요.
-니코틴은 몸에 해롭습니다. 중독성 있어 쉬이 끊지 못하는 건 알고 있으니, 하루에 한 개비 정도만 허가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제약에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처음엔 게일도 나름대로 반항을 해 봤으나, 나르한에게는 쨉도 안 됐다.
-35살이나 쳐드신... 아, 실례. 대충 되는 대로 살아오신 어른이시니 당연히 협조해 주시겠죠? 설마 나이를 재밌어서 먹은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죠, 게일 님?
비겁하게 논리와 팩트로 승부하는 나르한에게 힘도 못 쓰고 패배한 것이다.
"그 주인에 그 하인인가."
그 완고한 모습이 어딘가 엘윈을 연상시켰다.
게일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엘윈을 처음 만났을 때, 대충 지껄였던 말들이 현실이 되었다.
그걸 깨닫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어휴. 됐다, 됐어. 지금을 즐기지 뭐!"
살래살래 고개를 저은 게일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기! 맥주 한 잔 더!"
"예!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곧이어 밝은 인상의 소년이 음식을 가지고 왔다.
"여기 맥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거. 괜찮으시다면 드셔 주세요."
소년이 내민 건 갓 튀겨 낸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감자튀김이었다.
"오! 맛있겠는걸! 그런데 종업원이 이렇게 마음대로 줘도 되나?"
"하하! 이 정도야 괜찮아요. 왠지 손님은 매상을 많이 올려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재밌는 볼거리도 제공해 주실 것 같고."
"...볼거리?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묘한 뉘앙스에 게일이 묻자, 소년이 눈을 찡긋거렸다. 그의 눈이 언뜻 연보라색으로 반짝였다.
"제가 감이 좀 좋거든요. 이제껏 한 번도 틀린 적 없다고요?"
"그래? 거 편리하네."
소년이 재빠르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무튼, 맛있게 드세요! 더 주문하실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시고요!"
"어어, 튀김 고맙다!"
빙긋 웃는 얼굴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소년을 보던 게일이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메디알레 술집은 단골이 아닌, 처음 온 손님한테도 이렇게 대접해 주는 건가?"
그는 잠깐 고민했으나, 곧 술 한잔에 털어 버렸다.
"...뭐,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잘 먹겠습니다!"
와삭!
그렇게 게일이 신나게 술을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드르르륵-!
술집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맞이하며 밝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술집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술을 홀짝이던 게일은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이리 조용해졌어?"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한쪽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보이는 것은 방금 들어온 손님이었다.
"자리 있나요?"
"아, 지금은...."
게일은 습관적으로 손님의 외형을 분석했다. 그는 눈썰미가 좋았다.
'신장이나 왜소한 체격으로 보아 손님은 아마도 여자로군. 용병? 모험가? 강해 보이진 않는데....'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외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상대가 상당한 담력의 소유자란 걸 유추할 수 있었다.
"하! 불여시의 등장이시군!"
본인이 입장한 후, 즉각적으로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의미의 이방인이군. 저 여자와 손님들 간에 뭔 일이 있었나? 혹시 치정?'
게일이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주시했다. 싸움이라도 벌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원래 술 마실 때 보는 싸움 구경이 묘미이지 않은가?
"잘 마시고 있었는데. 하필 여기서 저 여자를 만나다니."
"기분 잡치게.... 쯧!"
"아- 술맛 확 떨어지네. 이래서 즐겁게 마시겠어? 어이, 자리 옮기자고."
터벅터벅.
순식간에 싸늘해진 술집의 분위기와 다 들으라는 듯 뱉는 욕설.
그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릴 법도 한데, 여자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쯧. 남자 새끼들이 한심하긴."
게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몸싸움이라도 붙을까 기대했는데, 순 입으로만 싸우는구만. 아가리 파이터야? ...재미없게.'
그에게 중요한 건 눈앞의 술과 약간의 여흥이었지, 저 사람들의 간에 얽힌 사정이 아니었다.
"크으! 좋다! 여기 한 잔 더!"
하지만 그는 의도치 않게 엮여 버리고 말았다.
얇은 미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검은 로브가 그의 앞에 앉은 것이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연보라색 눈동자가 또렷한 모양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초면이지만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싫은데. 이 아저씨는 혼자 마시고 싶은 기분이거덩. 다른 자리로 가지 그래?"
게일이 능청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들이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어이쿠야. 잘못했다가 찔려 죽겠는데?"
그가 손사래를 쳤다.
"당신이랑 합석하고 싶은 사람은 널린 것 같으니 딴 데 알아보셔."
"어머. 당사자 입장도 들어 보셔야죠. 약한 남자들과 겸상하는 취미는 없답니다."
여자는 입을 가리며 유혹적으로 웃었다.
"게다가... 당신이 이 자리에 전세 내신 것도 아니시잖아요?"
스르륵, 검은 로브를 벗어 낸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같이 마셔요. 값은 제가 낼 테니까."
눈에 띄는 미소녀였다.
연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흔치 않은 미색이었고,
슬며시 미소 짓는 입술은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아스라한 분위기를 풍겼다.
"제 이름은 세르시아예요. 세르시아 오델바이스. 당신은?"
하지만 게일의 취향은 아니었다.
"아, 관심 없다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슈."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완숙한 숙녀분이 좋지, 너 같이 덜 여문 아가씨는 눈에 안 차걸랑. 젖내 나는 어린애는 취향이 아니라서."
이미 게일은 꼬맹이... 엘윈에게 크게 덴 적이 있었다.
어쩌다 엮여서는, 앞으로 인생길이 개고생길로 확정되지 않았는가?
'보아하니 연배가 꼬맹이 녀석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두 번째 꼬맹이라니, 딱 질색이다.
게다가 경험상, 이 여자랑 엮이면 되게 귀찮아질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좀 가 주쇼. 내 술잔이 외롭다고 울고 있거든."
보통의 여성이라면 게일의 그런 무례한 말에 얼굴이라도 붉힐 만한데, 세르시아는 만만치 않았다.
"어머, 잘됐네요. 괜히 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저는 눈에 띄는 편이라 그런지, 인간적인 호의를 연애 감정으로 착각하는 분이 많았거든요."
"하?"
"저도 당신 같이 수염 난 아저씨는 질색이라."
순식간에 게일을 망상병 환자로 만들어 버린 그녀가 생긋 웃었다.
"왠지 더러워 보이고, 더러운 냄새 나고... 그냥 더러운 것 같은 남자는 취향이 아니거든요. 제가 눈이 좀 높아서."
파바박!
어쩐지 게일은 그 순간, 그녀의 말들이 무형의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에 꽂히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크윽! 더럽다는 말만 세 번 하다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사나운 눈으로 세르시아를 쏘아봤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맞대응했다.
"이 되바라진 아가씨가."
"왜요? 너저분한 아저씨?"
두 사람이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쿠당탕탕!
근처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엎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망할 년이─!"
갑자기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난입한 것이다!
19화 Day-1 (2)
"남자한테 알랑거리는 걸 보니 아주 습관이었군 그래?!"
갑자기 난입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시비를 거는 남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술에 제대로 취한 것 같았다.
"이, 이봐! 크레이슨! 자네, 취했어. 진정하게!"
"저리 비켜!"
"윽...!"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남자를 말리려 했으나, 그의 거센 반항에 밀려났다.
게일이 남의 차림새에 논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크레이슨이라 불린 사내는... 심히 거지 같았다.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거지 같은 몰골이었다.
'그런데 저 옷은, 루스람 아카데미 교복이잖아?'
아카데미 졸업생인가? 생김새와 달리 평범한 길거리 왈패는 아닌 듯했다.
크레이슨이 허탈한 듯, 허무한 듯 너털웃음을 토해 냈다.
"하하.... 너란 여자, 웃기지도 않는군. 이전에는 나.... 그다음은 저 남자인가?"
남자가 충혈된 눈으로 게일을, 아니 그의 뒤에 있는 여자, 세르시아를 노려봤다.
"내 공적을 빼앗아서 헌터 시험 응시 자격을 충족했으니, 이번엔 그 남자를 발판 삼아 시험에 합격하려고 하는 거냐!?"
그리고 그 순간, 게일의 뇌리에 어떤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잠시만... 나, 지금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있는 건가?!'
치정이라니! 오늘 처음 본 여자와 치정이라니...!
게일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하! 하긴, 게일도 신체 건강한 남자니까요. 그래도 일할 때는 여타 문제없도록 자제 부탁드려요.
상상 속 엘윈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나보다 어린놈한테 따스한 시선을 받는 건 둘째치고.
-게일 님, 제가 분명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어른으로서 엘윈 님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방정한 품행을 부탁드린다고....
게일이 스산하게 웃는 나르한을 상상하곤 몸서리를 쳤다.
'무서워!'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나르한이 엘윈에게 얼마나 맹목적인지 알아챘다.
그건 단순히 주인과 고용인 관계라기보다는.
'신을 바라보는 신도와 같은....'
광신도(狂信徒).
그래, 몰가의 그것과 비슷한 시선이다.
따지자면 이쪽이 더 심했다.
몰가의 신은 실체가 없었으나, 나르한 쪽은 버젓이 살아 있었으니까.
'살해당할 거야!'
몹시 곤란했다.
"이보쇼. 나랑 이 여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전혀 아닌뎁쇼! 오늘 처음 만났다고!"
게일이 항변했으나, 두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 잠깐. 이거 왠지 익숙한데?'
어쩐지 자이고와의 일화가 오버랩됐다.
아니라고 말해도 그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착각했던 그때와.
"허허허. 이번에도, 그때처럼 되는 건가...?"
만일 엘윈이 현재 장면을 봤다면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역시 트러블메이커! 게일은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니까요!
'트러블메이커'와 더불어 '불운의 사나이'는 게임 「람파스」 속 게일을 상징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그리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게일은 그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사건의 중심이 되곤 했다.
언제나.
"대답해, 세르시아!"
곧이어 두 남녀의 대화도 끝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 시시한 남자가 되었네요, 당신."
죽일 듯한 살기를 담은 눈빛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것이다.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는 늘상 자신만만한 태도가 멋져 보였는데 말이죠. 대답에 답해 드리자면...."
세르시아가 생긋 웃었다.
"제가 당신을 이용했든 이용하지 않았든, 대관절 그게 뭐가 중요하죠?"
"뭐?"
"어차피 끝난 문제 아닌가요? 당신은 지원 자격 미달 탈락자, 나는 합격자. 결과는 이미 결정된 지 오래."
세르시아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비웃음.
"이만 결과에 승복하지 그래요? 애초에 속아 넘어간 쪽이 잘못 아닌가?"
부외자인 게일조차 알 수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가져다 써야죠. 안 그래요?"
지금 그녀의 말은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란 걸.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나는...! 네년이 모조리 망쳤어!"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내며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술집이 뒤흔들렸다.
"으아아악! 다들 피해!"
흉포하게 드러나는 기세는 그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술집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이쿠. ...여기서 더 마시긴 글렀구만."
게일이 폭발로 인해 떨어지는 자재 파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이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와락!
"어딜 가시나요? 나를 두고...."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 사건의 원흉, 세르시아 오델바이스였다.
"너는!?"
게일이 황급히 세르시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녀가 한발 빨랐다.
"부탁해요, 자기."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이며 그의 귓가에 닿았다.
"당신의 실력을 보여 줬으면 좋겠어요. 나를 위해서."
그녀의 숨결이 닿자, 게일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으윽."
머지않아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그 자리에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젠장. 허니트랩...! 그 여자, 마법사였나!"
허니트랩(Honey Trap), 정신계 마법 중 하나.
상대를 매혹함으로써 시전자의 뜻대로 조종하는 마법이었다.
요 며칠, 엘윈에게 특훈 받으며 타인의 마법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린 아가씨가 손속이 더럽네."
게일이 이를 갈았다.
"이 빚, 반드시 갚아 주겠어! 그 전에...."
그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우선, 방해꾼부터 치워야겠지만."
그곳에는 크레이슨이란 남자가 폭주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절박하게 소리쳤다.
"크으윽! 왜, 왜 이러는 거야! 멈춰, 멈춰, 멈춰! 아, 안 돼.... 크아아아악!"
그는 본인의 마력을 주체를 못 하는 듯 보였다.
애써 통제하려는 듯했으나, 그 시도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당연히 될 리가 없지.'
마력은 마력 보유자의 감정에 따라 촉발된다.
크레이슨은 현재 극심한 감정 격화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조차 마력 컨트롤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되도록 죽이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헌터들은 언제 오려나. 나보단 그 사람들이 제압을 잘할 것 같은데...."
어떤 원한 관계도, 이익 관계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건 게일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제압하도록 노력은 해 보겠지만... 안 된다면 뭐, 그건 속아 넘어간 본인을 원망하라고. 가여운 형씨."
세르시아 오델바이스.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지만, 그녀의 말에는 공감했다.
"이런 미친 세계에서는, 속은 사람이 멍청한 거거든."
게일이 무기를 꺼냈다. 엘윈이 준비해 줬던 검이었다.
스릉-
그가 검을 뽑자, 모습을 드러낸 칼날 끝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조금 아프더라도 감안하도록 해. 이건 형씨의 멍청함에 대한 대가니까. ...나도 그렇고."
게일이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최근에 꼬맹이 같은 강자랑 다녀서 위기관리 능력이 퇴화됐나? ...무섭네, 그거. 주의해야겠어."
그러곤 빠르게 크레이슨에게로 쇄도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술집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
술집의 바깥 숲속.
나무 그늘 아래에 숨은 누군가,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는 그곳을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게일이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금쪽같은 휴식 시간에 이게 웬 봉변이람. 피곤노곤혼곤~"
대충 아무 가사를 붙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게일이 돌연 히죽거렸다.
"그래도 나, 꽤 많이 강해졌잖아!?"
폭주하는 루스람 아카데미 출신 마력 보유자를 상대로, 게일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로웠다.
결국, 압도적으로 승리!
"크으, 이걸 꼬맹이가 봤어야 했는데! 이 괄목할 성장력!"
자화자찬하던 게일이 이내 태도를 전환하며 투덜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돌아가야 하는구만. 제길! 술 더 마실 수 있었는데."
그가 철없게 입술을 빼죽 내밀며 투덜거리는 무렵이었다.
"...!"
돌연 그의 등 뒤로 기척이 나타났다.
-철컥!
"거기까지."
게일의 뒤통수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무기에서 손 떼시죠. 더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제 베레타에게 머리통이 뚫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침음을 삼킨 그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 그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를 찾아올지도.
"...너, 애초에 내가 목적이었구나?"
그리고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아니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사람이 궁금한 건가?"
세르시아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꽤 둔한 남자네."
그동안 취했던 유혹적이고 모호한 태도가 환상인 양, 그녀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냉철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이것이 그녀의 본래 성정일 것이다. 차갑고 냉정한.
─마법사.
게일이 물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지?"
처음 의심한 건, 종업원 소년이 가져다준 음식을 맛봤을 때였다.
그는 직업 특성상 여러 독극물에 대한 내성이 있었는데.
-...이건?
감자튀김에서 마취 독 특유의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그때 깨달은 것이다.
-...함정이군.
현재 그는 환상 속에... 아니, '환상 마법'에 걸려 있다는 것을.
"정답. 둔하긴 하지만 눈치는 빠르시네요?"
"내가 좀 그런 편이지."
"아시겠지만, 크레이슨은 진짜였어요. 당신, 꽤 강해 보였고 힘을 빼 둘 필요가 있었거든. 끝까지 유용한 남자였지요. 이젠 쓸모를 다했지만."
게일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잔인한 여자네."
"고마워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세르시아가 웃었다.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만 해 준다면."
"무슨 답을 원하지?"
그러자 그녀가 속삭였다. 기이한 열망을 품은 목소리로.
"엘윈 크라이거."
"...!"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원해요."
지난 10년간, 세르시아 오델바이스는 '그'를 기다려왔다.
입학하기가 바늘구멍이라던 루스람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누구보다 열심히 수학하며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기까지.
그 기나긴 여정은 전부 '그'... 다섯 번째, 특급 헌터를 만나기 위한 것.
'...길었어.'
수년을 소비한 끝에 그녀는 헌터 시험에 지원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세르시아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녀가 평생을 걸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숙원'을 위해 엘윈 크라이거가 필요했으니까!
'드디어... 닿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세계 헌터 협회에 의해 완벽히 은폐되어 있었고, 조그만 단서라도 꼬리 잡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년간 끈질기게 매달려 그녀가 얻은 수확은 고작 이름 몇 글자뿐....
그밖에 얻은 정보는 전무했다.
그러다 사흘 전.
-저건, 비공선...!
은밀하게 메디알레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던 중, 세르시아는 상공에 떠 있는 비공선을 발견했다.
-찾았다!
마법 결계를 사용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세르시아는 '보통'이 아니었다.
다소 오만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녀는 마법에 한해서는 천부적이라 자신했다.
"자, 말해 주실까요. 그에 대해....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면 더 좋고."
그렇게 말하며 세르시아는 총구를 더 바짝 들이댔다.
"하아, 역시나 포상은 개뿔. 또 이용당했냐고. 쯧!"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박박 긁어 댔다.
"...네?"
어쩐지 기묘한 게일의 반응에 그녀가 잠시 당황했다.
"이봐, 망할 아가씨."
그리고 그다음, 이어지는 말에 세르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여기 그 녀석의 전언이 있는데. 듣겠나?"
20화 Day-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