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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제1화. 원탁의 주사위 (1)

베론이 자작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파이렌 가문에서 아버지는 막내아들이었고 쟁쟁한 형들 때문에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역시 어려서부터 농부가 되겠다고 호들갑이었던 아버지를 배제한 채 피 튀기는 모략을 이어 갔다.

이에 아버지는 권력 다툼에 환멸을 느껴 가문을 등지고 가문의 시골 땅으로 내려와 농부가 되셨다.

베론이 처음 환생했을 때는 정말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집에는 벌레가 득실거렸고 조금 머리가 큰 후에는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당시만 해도 전생에 입었던 가호는 다 사라진 줄 알았다.

'가호는 분명 영혼에 스며든다고 하였는데, 한번 기다려 보자.'

가호가 사라졌다고 보기에 그는 특별한 아이였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는 시름시름 앓았고 돈이 필요할 때는 상인이 흘리고 간 금화 꾸러미를 주워 오기도 했다.

평범한 인간의 운이라고 보기에는 심상치 않았으므로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가호가 영혼에 각인된 것이 맞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다른 가호들은 어떨까?

다섯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를 졸라 목검을 하나 구입하고 휘둘렀는데 전생의 기억들이 스며들면서 웬만한 용병들은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눌러 버리는 미친 재능을 보였다.

그 소문은 후계 경쟁을 하던 삼촌들에게도 들어갔으므로 암살자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오던 도중에 몬스터를 만나거나, 뭘 잘못 주워 먹어 객사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것으로 베론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가호와 검술의 신 '루'의 가호가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낙천의 여신 '라크슈미'의 가호까지 발동되면서 베론은 이 시대에는 죽기 딱 좋은 긍정적인 생각이 바닥에 깔리게 되었다.

라크슈미의 가호로 어마어마한 멘탈과 정신력을 얻게 된 것은 덤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반추해 보면 어떠한 정신계 공격도 면역이 되므로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다.

확인을 끝낸 베론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다.

베론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에 가문의 기사들이 아버지를 영주로 추대하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영주님! 성으로 돌아가셔서 작위를 이어 주십시오!"

충직한 기사단장 오르트 경의 말에 의해 베론과 가족들은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촌들의 경쟁은 심각해졌고, 결국 자신의 가족들까지 엮이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양측이 서로 상잔을 해 버리고 작위를 이을 모든 일가친척이 몰살된 것이다.

이는 가문 내부의 일이라 주변 영주들이나 왕실에서도 크게 개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부지리를 취한 아버지를 두고 최고의 행운아라 말했다.

땅이나 파먹고 살던 아버지가 자작 가문의 영주가 되고 베론이 소영주가 된 이면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베론은 소영주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검술과 정치, 역사 등을 공부하였는데 다른 부분은 몰라도 검술에 대해서만큼은 압도적인 두각을 드러냈다.

12세에 아카데미를 조기 입학하고 14세에 조기 졸업, 16세가 된 해에는 기사단장을 순수한 검술로 눌러 버리는 미친 기예를 선보였다.

그리고 18세가 된 지금은.

"곧 '극'에 이르겠네."

전생의 경지에 비유하자면 극은 마스터에 해당한다.

베론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생의 기억과 감각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루의 가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검을 들기만 해도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 올지 선이 그어지며 머릿속에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약점을 꿰뚫어 보는 눈 역시 가졌으며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인간을 초월한지라 상대가 검을 사용하는 순간 어떤 묘리가 숨어 있는지 파악하며 기술을 흡수했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후배와 교관들이 베론과 대련하거나 검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굉장히 꺼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작 가문이 아닌 백작 가문이나 후작 가문 정도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하지만, 대귀족 가문의 가주가 되면 줄줄이 딸린 봉신도 있어 관리하기가 매우 빡셀 것이라고 여겼다.

낙천적인 성격의 베론에게는 굉장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었으므로 이 역시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소영주로 살다 보니 가끔은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베론이 이 시대에 보기가 드문 호인이자 긍정파라 인기가 꽤 좋았기에 병사들과도 서슴없이 지냈으므로 별의별 상담이 다 들어왔다.

"소영주님. 저 이혼할 것 같은데 어쩌죠?"

"오! 우선은 축하한다. 그런데 이유가 뭐야?"

"어.... 마누라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는 건데 이게 축하받을 일입니까?"

"당연하지. 네게 유책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굴레를 벗게 되었으니까 축하할 일이잖아?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라."

"그....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이 시대에 18세면 가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어린 병사들이 주로 여성 문제를 상담했고.

"소영주님. 가론 녀석이 10골드를 빌려 가서 갚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올해는 굶게 생겼어요."

"어? 주겠지. 친구라면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냐?"

"하.... 소영주님은 너무 긍정적인 것 아닙니까? 사람을 그리 쉽게 믿으면 뒤통수 맞으십니다."

기사의 매우 충정 어린 충고였지만 베론은 웃으며 흘려들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적 없고, 돈 떼먹은 인간 없었다.

그런 인간들은 급사하거나 돈을 갚을 때까지 불운한 일이 계속 일어났으므로 '낙천의 가호'를 받은 베론에게는 이것이 매우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러다 보니 베론은 영지 내에서 매우 인기가 좋았지만, 웬만해서는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귀족 생활에 적응해 가고 이번 삶은 걱정 없이 살다가 가겠다고 여기던 차에 전생에서나 보던 투명한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원탁에 참여하시겠습니까?]

[Y/N]

"원탁?"

오늘도 귀족적으로 놀고먹으며 가끔 검이나 잡고 휘둘러 주는 하루를 끝낸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였으나 베론은 의심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한 행운이 깔린 그에게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전생의 시스템을 닮은 메시지에 반가움을 느끼면서 베론은 망설임 없이 Y를 눌렀다.

* * *

원탁의 게임.

통칭 데스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열한 개의 의자에는 고작 다섯 명의 영웅만 참여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영웅들이 죽은 것인지, 모종의 이유로 참여하지 못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원탁의 관리자는 긴장한 얼굴의 영웅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캬캬캬! 이번 회차에 영웅 한 명이 죽었군요! 아주 훌륭해요!"

경박스럽게 웃어 대는 관리자 앞에 영웅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탐색을 이어 갔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약간의 틈이라도 보였다간 현실에서 카르마 주머니가 되어 사라질 테니까.

원탁의 게임은 신을 육성하기 위한 보조 프로그램이다.

주사위를 굴려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성장에 필요한 물건을 얻어 강해질 수 있었다.

무조건 참여하여 주사위를 한 번이라도 더 굴리는 것이 이익이었으나 원탁 자체가 서로를 죽이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므로 한마디를 하더라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영적인 공간인 원탁에서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으나 얻은 정보를 토대로 상대방의 정체를 추리해 현실에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데스 게임을 벌여 왔다.

상대방을 죽이면 성장에 필요한 카르마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최후에 남은 승자가 신위를 받고 승천한다.

도대체 몇 년을 이어져 내려왔는지는 오직 관리자만 알았으며 이번 회차도 막바지에 접어들어 고인물만 남게 된 게임.

각자 거대한 세력을 일군 것으로 추측되며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됐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으므로 갑갑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관리자가 깨방정을 떨며 공지한다.

"오늘은 뉴비가 옵니다! 대체 이게 몇 년 만이죠? 한 200년 만의 뉴비인가요?!"

"...!"

영웅들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 상황에 뉴비?'

'원탁이 끝나면 바로 찾아가 죽여야겠군.'

다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고인물들끼리는 함부로 손댈 수 없지만, 뉴비가 등장했다면 카르마 주머니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쿨렁!

도대체 어떤 식으로 뉴비를 꾀어내 죽여야 하나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주인공이 등장했다.

뉴비를 본 영웅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로 온 영웅에게서 신격이 느껴진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다중신격?!'

'어찌 이럴 수가?!'

'이미 완성된 신격이라고?! 이러면 우리가 다 죽는 거 아닌가?! 씨발, 게임 운영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말이 안 됐다.

원탁의 게임은 신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이자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창구였다.

고인물만 남아 있는 게임 판에 신격이, 그것도 고위 신으로 보이는 자가 등장한 것이다.

관리자마저 깜짝 놀라 뉴비에게 달려갔다.

"마, 마, 마, 마스터!!"

'미… 미친!'

원탁의 게임을 설계하고 만든 차원의 주인이 등장했다.

* * *

베론의 몸은 여전히 침대에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눈을 떠 보니 거대한 원탁에 의자 열한 개가 있었고 천장에서는 빛이 내려와 비추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원탁 위에는 대륙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지형지물과 그 둘레에 보드게임에서나 보던 칸이 나뉘어져 있어 의문을 더한다.

원탁의 상석에는 도깨비를 닮은 악마가, 원탁의 의자에는 드문드문 앉은 다섯 명의 사람이 일제히 베론 쪽을 바라봤다.

베론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거울이 없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현생의 베론이 아닌 혈투로 얼룩졌던 전생 '이진수'가 틀림없었다.

아무렴, 한국에서 40년 동안 보고 살았던 손의 모양과 형태, 상처 등을 모를 리 없었다.

베론이 원탁을 바라보자 다섯 명의 남녀는 뭐가 그리 놀랐는지 끊임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깨비 악마 녀석은 베론을 바라보더니 달려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마, 마, 마, 마스터!!"

"...!"

도깨비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평소의 베론이었다면 유들유들하게 질문을 던졌겠지만, 여기서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몸은 영주성에 있고 영혼만 이곳으로 전송되었다. 그 말은 눈앞에 있는 자들이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괜히 입을 함부로 열어 밑천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무한히 긍정적인 인간도 이 정도 분위기에 압도되면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베론의 상태가 그랬다.

원탁 한자리에 앉아야 할 것 같은 기분.

아무 자리에나 앉으려는데 도깨비가 자신을 상석에 안내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며 몸을 움츠렸다.

의문이 들었으나 묻지는 않는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도저히 다들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베론처럼 전생에 위대한 업적을 세웠거나 초월자의 격이 느껴졌다.

대략적인 느낌을 표현해 보자면.

'저 마법사는 냉혈마녀의 인상이고 저기 보이는 군주는 사자심왕에 어울리는군. 오만한 기사와 모략의 암살자, 수전노 거상인가.'

"꺄하하하! 정말 기쁜 날이군요! 마스터께서 오시다니. 정말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저 깨방정을 떠는 놈은 도깨비 정령이다.

베론은 최대한 말을 자제하려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위압적으로 말한다.

"내가 왜 마스터인가?"

쿵! 쿵! 쿵!

도깨비 녀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머리를 박아 대며 사죄했다.

"과연! 그렇군요! 플레이어로 참여하시는 겁니까?"

'플레이어?'

원탁 위에 보이는 것은 어떤 게임을 연상케 했다.

고개를 끄덕인 베론은 도깨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룰을 말해라."

"아아, 그렇지요. 뉴비가 오시면 간단하게 룰을 설명하는 것이 맞습니다. 헤헴. 저는 관리인이고 태초신의 의지에 따라 여러분의 성장을 돕기 위해 오랜 시간 파견 근무를 해 왔습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되겠고.... 앞으로 1만 년만 더 관리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겠죠?"

도깨비는 정확하게 베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몰라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러자 놈은 다시 지랄발광하며 날뛰었다.

원탁에 앉은 사람들은 복잡한 눈빛이었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베론을 바라본다.

"여기 보이는 지형지물은 대륙의 축소판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정보를 취득하거나 아주 드물게 이런저런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보도 얻고 성장도 하고, 참여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주사위는?"

"네, 네! 그것도 물론 설명드립니다. 영혼의 본질을 꺼낸다는 느낌으로 주사위 모양을 형성하시면 되겠습니다. 새로 오신 뉴비분도 일…단은 영…웅…이시니 가능하시죠?"

도깨비는 베론을 영웅으로 부르는 것이 매우 황송하다는 듯이 자세를 낮추었다.

베론은 정신을 집중했다.

심상의 단계.

한때 한계를 돌파해 세상을 구원했던 그에게 심상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스스슷!

스아아아!

"헉!"

"컥!"

강렬한 빛과 함께 오색의 빛이 모이더니 찬란한 주사위가 완성됐다.

도깨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더욱 오두방정을 떨었다.

"대단합니다! 과연! 이런 아름다운 초월급의 주사위를 보게 되었으니 이 그록.... 허험. 관리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도깨비가 이글이글하는 눈으로 베론을 바라봤다.

"그럼 새로 오신 기념으로 굴려 보시겠습니까?"

베론은 시키는 대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 순간, 대륙 전체를 찬란한 빛이 휘감으며 쓰리 콤보가 터졌다.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던 영웅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시, 신께서 강림하셨다!'

제2화. 원탁의 주사위 (2)

팡파르였다.

대륙 축소판 보드게임, 베론이 생각하기에 통칭 '원탁의 게임'의 룰이 어떻게 되는지는 씨앗 사의 부루X불을 플레이 해 본 사람이라면 대략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거의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며 희박한 확률로 '플레이'에 도움을 주는 아이템 등이 출현한다.

베론의 눈앞에 어마어마한 것들이 떴다.

[크림슨 왕국 남부 파이렌 영지 경계에 금광이 출현합니다.]

[플레이어의 근력이 10% 상승합니다.]

[효율적인 방어 '오토 가드'를 습득합니다.]

"...!"

이름만 들어 봐도 대단했다.

일단 금광.

파이렌의 이름이 직접 거론된 것이 문제일 것 같지만, 도깨비의 설명에 의하면 이건 친목 게임이니 신경을 껐다.

자작령은 아버지의 농업 덕후(?) 기질을 그대로 적용해 그런대로 먹고살 만한 곳이었다.

수탈도 적었고 병력도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그럼에도 어디론가 뻗어 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였는데 금광이 출현해 주면 빠르게 자금을 모을 수 있을 터였다.

근력의 상승은 당연히 이익이었고 사기적인 스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오토 가드.'

스킬을 준다고 하니 시스템 범벅이었던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구에서도 오토 가드 스킬은 A급으로 취급되었다.

적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해 오면 오토 가드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되었는데, 자다가도 암살자가 검을 찌르면 방어를 해 주니 사기 스킬이라 볼 수 있었다.

전투를 벌일 때에도 인지를 초월한 영역으로 검이 움직이며 회심의 일격을 방어해 주기도 한다.

오토 가드는 특히 고수들과의 싸움에서 큰 효율을 발휘하곤 했다.

지구의 영웅이자 구원자였던 베론은 검술 전문으로 여러 스킬을 주렁주렁 가지고 있었고, 그중 오토 가드 스킬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체득하고 있었다.

'운이 여기서도 작용하나?'

아무래도 그래 보인다.

그렇다면 더욱 걱정을 놓아도 된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수상했으므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싶었다.

베론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마법사가 침음을 흘렸다.

"초월급 주사위에 쓰리 콤보라니...."

"커, 커흠. 축하드립니다."

강력한 군주의 풍모를 가진 사자심왕의 어색한 한마디였다.

오만해 보이는 기사는 갑자기 충성심 싶은 봉신으로 빙의(?)하며 따봉을 날려 주었고 암살자처럼 보이는 남자는 잘 웃어지지도 않는 미소를 짓기 위해 입가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전노로 보이는 뚱뚱한 사내는 상인의 전형적인 자세로 손을 부비며 베론에게 은근히 접근해 어깨를 주물렀다.

"어디 불편하시거나 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

영웅들이 아부를 떤다.

베론은 속으로 연신 물음표를 남발했지만, 원래 생각하는 것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

고대신의 삼대 가호를 몸에 둘렀고 그것이 원탁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상, 지나치게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남성체다만."

"아이쿠! 이거 실례했습니다. 미천한 종이 존안을 뵙게 되어 눈이 멀었는지라."

"네가 왜 내 종인가?"

"네, 네, 그러믄요. 이해했습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베론은 '남성체'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영웅들의 시선이 냉혈마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자세를 낮추었다.

톡톡톡.

"시원하세요?"

"앉아라."

"넵!"

영웅들로 보이는 자들이 저자세였지만, 베론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포르투나의 가호가 발현하여 지상에서처럼 또 무슨 착각을 했으리라 여기며 넘어가는 것이다.

영웅들이 자리에 앉자 냉혈마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허락을 구했다.

"저, 그. 뉴비님? 제가 주사위를 던져도 될까요?"

"내게 허락을 구할 일인가?"

"아니죠. 엄연히 플레이어로 참여하셨는데. 그럼 던질게요?"

냉혈마녀의 주사위는 자신의 외모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대륙에 한기가 몰아치며 잔상을 남긴다.

콤보 따위는 뜨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가 자르칼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합니다.]

"전쟁이라."

베론의 한마디에 주변의 분위기가 굳었다.

'이런 식으로 정보가 흘러나오는 건가.'

황제가 전쟁을 준비한다.

그 대상은 자르칼 왕국이었지만, 잘못하면 이웃 왕국인 크림슨 왕국이 말려 들어갈 수 있었다.

제국에서는 크림슨 왕국에 참전을 압박할 것이고 자르칼 역시 도움을 청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제 전쟁을 준비하는 단계였지만 터졌다 하면 베론의 아버지가 귀족의 의무로 참전해야 한다.

운이 없으면 베론까지 끌려갈 수 있었다.

사자심왕이 그 정보를 보더니 분노했다.

"뉴비님! 제국 황제가 미쳤나 봅니다. 죽여야겠습니다!"

"그걸 왜 내게 묻나."

"아...! 그렇지요. 그럼 그냥 죽이겠습니다."

베론은 잠시 동안이지만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황제가 뉘 집 닭도 아니고 어찌 간단하게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이곳의 영웅들은 베론보다 더 대단한 인물들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가호를 입은 이상 상대방은 결코 자신에게 위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황제의 죽음이 확정됐다.

이번에는 사자심왕의 턴이었다.

[제국 남쪽에 드워프가 출현합니다.]

"드워프라.... 있으면 좋긴 하겠지."

베론이 중얼거리자 암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반드시 잡아다 바치겠나이다.'

암살자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대륙 어디에서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가뭄이 든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크림슨 왕국과는 동떨어져 있어 완전히 유효한 정보는 아니었다.

한 턴을 모두 마친 후 도깨비가 나섰다.

"자, 다음 게임은 3개월 후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참여하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오늘 참가하지 못한 영웅들도 굉장한 손해를 보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베론도 도깨비의 말에 동의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드워프가 출현했다는 이야기 등은 확실히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나 영지를 경영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주옥같은 정보들이었다.

재해가 일어날 것이다?

식량을 비축했다 팔아도 되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철이나 전쟁 물자의 가격이 오를 것이니 큰돈을 벌 수 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들.

영웅들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 빼고는 만족스러웠다.

"뉴비님. 오늘 플레이를 해 보셨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원래 고인물 게임은 뉴비가 진입하기 힘든데 원탁의 게임은 지원 정책이 잘 마련되어 있군."

"아무렴요. 당연합니다. 결코 뉴비님께 피해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3개월 후 오지."

베론은 여유롭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자칭 뉴비(?)가 나간 자리.

원탁에 앉아 있던 영웅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원탁의 마스터.

이러한 체계를 만들어 신을 양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주체가 등장한 것이다.

도깨비가 호들갑을 떨었다.

"다들 보았을 겁니다! 그 어마어마한 신격을! 신중의 신께서 강림하셨습니다아!"

"대체 태초신께서 왜 강림하신 거지?"

냉혈마녀가 말했다.

아까 뉴비에게 보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말투였다.

한기가 풀풀 날렸으며, 실제로 그녀의 주변에는 살얼음이 맺혀 있기도 했다.

당연히 도깨비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원탁의 관리자로서 2만 년의 유배형을 받아 이것에 감금되었다.

신격 비슷한 존재인 그는 조금이라도 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를 처단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원탁은 너무 오래되어 점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점검?"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죠. 종종 차원의 균열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대륙에 피바람이 몰아치지요. 태초신께서는 그 현상이 원탁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를 하기 위해 오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리가 있어."

진실은 베론이 고대신의 삼대 가호를 다 받아들인 덕분에 어마어마한 신격으로 보이는 것뿐이지, 엄연하게는 진짜 신격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깨비의 말은 이어진다.

"기왕 내려오신 김에 유희를 즐기려는 의도도 있어 보이네요. 차원의 균열이고 나발이고 그분께서 오셨으니 해결되신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뭐겠어요? 1만 년 만에 플레이어로 '콘셉트'를 잡으신 거죠."

"데스 게임을 유희로 즐기신다니.... 과연 그분답군."

암살자의 한마디에 다들 격한 공감을 드러냈다.

도깨비는 데스 게임이라는 말에 사색이 됐다.

"데스 게임은 관리자 권한으로 중지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분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했다간 예외 없이 몰살입니다. 원탁이 아닌 다른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실 수도 있어요."

원탁의 승리자는 신위를 받으며 해당 차원의 관리자 중 하나가 된다.

또한 원탁 자체가 차원의 균열을 막아 주는 역할도 하였으나, 모든 것은 태초신의 의지에 따른 것.

본인이 만들어 낸 차원 따위, 역으로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영웅들은 일단 '몰살'과 차원의 삭제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꼈다.

게임에 참여한 순간,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가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아늑하게 뛰어넘은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도깨비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1만 년 전에도 태초신께서 유희를 나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눈치껏 행동했던 참가자들은 전원 신위를 받아 승천했죠."

"...!"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잘하면 제 유배도 풀릴 수 있을 테고. 그러니 우리는 협력해야 합니다!"

수전노 거상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분께서는 유희를 하겠다고 하셨으니 너무 티 나게 아부를 떨면 곤란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티가 나지 않게. 그분의 콘셉트를 존중해 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해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어제의 적이었던 자들은 동료가 된다.

학살을 배제하고 오직 태초신이신 '뉴비'께서 꽃길만 걷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충성 경쟁의 서막이었다.

오만의 기사가 말했다.

"아까 보니.... 크림슨 왕국이라던데 아마도 태초신께서 그곳에 광산을 하나 만드신 거겠지?"

"그럼요."

"클래스는 군주이거나 그럴 예정이로군. 정보에 의하면 파이렌 영지의 소영주의 재능은 인간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그가 소영주가 된 배경을 보면 지나치게 운이 좋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분의 개입이었던 것 같다."

"유희를 즐기려 해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있어야 하니?"

"맞다."

"티가 나지 않게 지원한다고 하였는데, 대체 그분이 원하시는 난이도가 무엇일까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내야지."

저번 모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모략과 배신, 뒤통수가 난무하던 원탁의 게임은 이제 하나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게 되었다.

제3화. 파이렌 금광 (1)

원탁의 게임이 끝났다.

안센 트루엔이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원탁에서 살벌한 암살자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의 육체는 원래 여성이었다.

최후의 1인만 살아남는 데스 게임에서 위장은 기본이었으므로 일부러라도 남성성을 강조했다.

아마 원탁에 참여한 영웅 중, 본인에 맞는 성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태초신께서 강림하셨다라...."

그녀는 정좌한 채로 생각에 잠긴다.

지금까지 안센은 모략을 즐겨 왔다.

원탁에서 거짓 정보를 흘려 유인하고 암살해 버리는 것이 그녀의 특기였다.

보통은 함정을 파 두고 기다리는 것을 선호하지만 잠입하여 상대를 죽여 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둠의 암살자.

그녀의 예명이었으며 대륙 최대의 암살 길드 다크 섀도를 이끄는 수장이다.

암살할 때를 제외하면 평범한 용병으로 가장해 살았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지극히 꺼렸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대륙에서 네임드로 불리는 자 중, 원탁에 참여하는 영웅이라면 웬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그 대신 바지 사장을 내세우고 막후에서 힘을 휘둘렀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정보의 공유라니. 믿기지는 않지만."

관리자가 인정했다.

그 소악마 녀석은 가벼워 보여도 안센 같은 영웅 따위야 손가락 하나로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리자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되어 있었고, 관리자 권한을 사용해 데스 게임을 중지시켜 버렸다.

태초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판을 깔아 주면 모두가 보상을 얻는다.

신위를 받고 영생할 수 있었으니 그 누가 협조하지 않으랴.

그런 놈이 있다면 모든 영웅의 공격을 받아 제명에 살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복면을 쓰고 비상했다.

파바밧!

그녀는 가볍게 지붕과 지붕을 뛰어다니며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누군가가 신형을 발견했더라도 그저 달빛이 여울져 흐릿하게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제국 수도에 사는 그녀였기에 황궁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잠시 원탁에서의 일을 떠올린다.

'모략, 네가 움직여야겠다.'

'양보하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아까 그분의 얼굴을 못 봤나? 황제 놈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니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가능하면 빠르게 처분해야 하는데 네가 수도에 있지 않나?'

'....'

'어떻게 알았냐고? 거기서 거만 그놈이 죽었으니까. 네가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지.'

'사자 네놈의 정보력은 못 당하겠군.'

'영광인 줄 알아라.'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태초신께서 가시는 길에 첫 다리가 될 수 있으니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추후 있을 논공행상에서 가장 유리한 고점을 취할 수도 있을 테니.

어느덧 그녀는 황궁의 담을 넘고 있었다.

각종 알람 마법과 방어 장치, 수많은 병력이 깔려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안센을 감지할 수 없었다.

입구를 통과했다면 일사천리다.

근위병들의 그림자에 숨고 지형지물을 이용한다.

그녀가 바로 눈앞을 스치지만 그저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될 뿐이다.

마침내.

황제의 처소에 이르렀다.

사자 놈은 그녀에게 황제를 죽일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제공했다.

100개의 방에 대역을 배치해 두고 매일 거처를 옮기는 황제가 오늘은 어디서 자는지, 누구와 잠자리에 들었는지 모든 정보를 받았다.

의심의 여지는 없다.

창문에도 각종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마녀에게 받은 마도구로 전부 해제했다.

스슷.

툭.

황제와 잠자리에 든 후궁을 완전히 기절시킨 후 검을 꺼낸다.

"으읍!"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사일런스를 쳤기에 기척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목젖을 뚫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만든 상태기는 했다.

"네가 무슨 이유로 죽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단순히 전쟁을 결심했을 뿐이지 아직 발표되기 전인데 말이야."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면 전쟁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황제의 목숨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젊은 황제가 죽어 버리고 제국이 내전에 휘말리든 말든.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분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퍼억!

황제는 황당함과 경악이 서린 얼굴 그대로 목에서 피를 뿜어냈다.

잠시 후, 황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되어 버린 침실을 유유자적하게 나왔다.

'이걸로 그분의 관심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 * *

상쾌한 아침이었다.

베론은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은 얼굴로 일어났다.

"정말로 근력이 늘어났잖아?"

그는 희희낙락했다.

운이 좋다는 정도는 전생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원탁에 초대되어 대박이 터질 줄이야.

근력의 10%가 증가했고 오토 가드를 얻었으며 금광이 발견된다고 한다.

근력의 증가로 원탁이 꿈이 아니었음은 증명되었다.

원탁에 대해 떠올리자 그에게는 익숙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탁에서 얻는 것만 표시되었다.

[근력 10% 증가]

[오토 가드]

[금광 출현]

원탁에 있던 영웅들의 반응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운이 좋은 주사위를 뽑았기에 부러워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다.

도깨비 녀석과 다섯 명의 영웅도 뉴비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고인물들이기에 뉴비를 이끌어 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론은 습관처럼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루 두 시간.

루의 가호가 있는 그는 이 정도 수련만으로도 곧 극의 단계. 즉 무아(無我)에 접어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오토 가드 스킬이 있다면?

굉장히 효율적이라고 생각은 되는데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기사들이 나올 때까지 잠시 명상에 잠겼다.

'의식적으로 검을 다루지 않음이 무아의 단계이지. 무협지에서는 신검합일로 이야기가 되지만 여기서는 의식과 연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현대보다 떨어진다.'

베론이 어려서부터 검의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것도 현대의 검술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주먹구구식으로 깨달음만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깊게 연구를 거치며 다듬어져 탄생하였으니, 당연하게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무아의 경지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검이 곧 의식이 되기에 영혼의 힘 일부를 끌어올 수 있지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방어를 조금 도외시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현대 검술은 이 부분을 최대한 가드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화했고 이곳 세계에서도 각 가문에 비전으로 내려온다.

오토 가드 스킬이 더해지면 자동으로 이 부분을 극복할 수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억세게 좋았다.

"소영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햐, 오늘도 부지런하시네요."

"아침만 그렇지."

"그건 그렇습니다."

기사들은 베론에게 격의 없이 다가왔다.

늘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그는 이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부류였고 충분히 호감을 불러올 만했다.

"자자, 오늘은 대련이다! 단장과 부단장은 앞으로!"

"명에 따릅니다!"

"예? 왜 또 접니까!"

충직한 기사단장 오르트 경은 군말 없이 따랐고 머리는 좋아도 좀 뺀질거리는 부단장은 과장된 몸짓으로 엄살을 피웠다.

베론과 대련했다 피떡이 되도록 맞은 적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막기만 할 거니까 덤벼! 설마 그것도 무섭다고는 하지 않겠지?"

"후회하기 없깁니다?"

베론은 아예 가드를 내렸다.

오토 가드의 성능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다.

다들 목검을 들고 있었기에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정통으로 들어가면 뼈 정도는 부러진다.

두 기사는 망설임 없이 쇄도했다.

베론이 허술해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의 궤적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상대방의 약점도 다 드러났다.

루의 축복을 입으며 얻게 된 심안이었다.

우선은 오르트 경의 검부터 막고 마르헨 경의 검은 그냥 방치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따다다닥!

마치 검이 분화된 것처럼 베론의 의지는 거스르지 않은 채 마르헨 경의 검을 자동으로 막아 낸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따닥! 따다닥! 따닥!

"와, 무슨 소영주님께서는 눈을 감고 다 막으시지?"

"왜, 극에 이른 자들은 저런 식으로 수련한다고 하더라고."

10분째 대련이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베론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심지어 발조차 움직이지 않았으니 지쳐 가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허억! 허억! 대단하십니다."

"아오, 실력이 더 느셨군요!"

'정말 끝내 준다.'

전생에도 오토 가드 스킬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만하면 어디 가서 검이나 화살에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법이 날아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베론은 씩 웃으며 두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다."

"다음에 또 합시다!"

"그러든지."

땀은 나지 않았지만 시녀가 가져온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데, 집사 할배가 달려왔다.

"아이고, 헉, 헉!"

"할배. 좀 천천히 다녀. 나이도 있는데."

"소, 소영주님! 빨리 영주님께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불이라도 났어?"

"그게 아니라 제국 황제가 암살당했다고 합니다!"

"...!"

웅성웅성.

꽤 충격적인 소식.

황제의 죽음은 이웃하는 국가인 크림슨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제국은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베론이 놀란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제 원탁에서 황제를 죽이겠다고 사자심왕이 말하긴 했는데, 정말로 죽여 버렸어?'

베론은 영웅들의 놀라운 면모에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라는 인간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던가?

'나 때문은 아니겠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할 때 놀라서 한마디 한 것뿐인데 그것 때문에 제국의 지배자를 단칼에 죽여 버린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었다.

"충격이긴 해도, 뭐. 당장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문제인데 우, 우리 영지에서 금광이 발견됐답니다!"

"헉!"

"허억!"

이번에는 기사들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금광의 출현.

어제 그 내용도 나오긴 했었다.

자신이 굴린 주사위에서 말이다.

[크림슨 왕국 남부 파이렌 영지 경계에 금광이 출현합니다.]

분명히 영지 경계라고 했다.

영지 내부에서 금광이 나타나도 문제가 심각했는데 그게 경계에서 발견된다면?

당연히 소유권 문제가 불거진다.

"일단 가 보자고."

"예!"

베론은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했다.

"잘됐네."

"아이고, 소영주님.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별일 없을 거야. 정 불안하면 금광을 포기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우리 손에 들어올 것 같다는 말이지."

'포르투나의 가호가 있으니 누군가가 우리 영지를 노린다면 전염병이 돌든 전쟁이 나든 해서 망하겠지.'

제4화. 파이렌 금광 (2)

영주성 식당.

이토록 중요한 회의를 뭔 놈의 식당에서 하나 싶지만, 밥은 식구들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특유의 가풍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 충격을 주는 화두가 나오면 밥 먹다 체하지만, 농부 출신에 푼수 끼가 다분한 아버지였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우리 아들 왔느냐!"

"예, 아버지. 오늘은 일찍 식사하네요?"

"왜 아니겠느냐? 황제는 죽었다고 하지, 금광은 발견됐다고 하지.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별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물론이죠."

"으하하! 여보, 봤소? 우리 장남도 별일 아니라고 하지 않소?"

아버지의 너스레에 어머니가 찌릿한 시선을 주었고, 바로 이 불쌍한 가장은 깨갱했다.

원래 아버지는 권력 다툼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자작가 영주가 된 것도 어부지리(?) 때문이었지 땅을 파고 작물을 키우는 데 진심인 남자였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몰락 귀족 출신에 권력이 없으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는 것을 잘 아셨기에 속 편한 아버지에 비해서는 사고가 깊은 편이었다.

여자 치맛바람에 영주가 휘둘린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마저 정치에 손을 놓아 버리면 가문이 망하기 딱 좋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다.

그나마 베론이 장성한 후에는 어머니도 그에게 의지하는 편이었다.

"아들, 어쩌면 좋니?"

"네? 뭐가요?"

지금 왕국 내부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황제의 죽음으로 벌벌 떠는 와중, 자작 가문의 부자(父子)는 아침부터 고기를 뜯는 데 여념이 없었다.

히키코모리 여동생이야 원래부터 인간사에 관심이 없었으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황제가 죽었으니 분명히 내전이 벌어질 테고 그 불똥이 우리에게도 튀지 않겠니?"

"이쯤 되면 어머니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제가 유달리 운이 좋은 편입니다."

"단순히 운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황제가 죽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가문에 도움이 될 겁니다. 생각보다 제국 내 정권이 빠르게 안정될 수도 있는 일이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무사안일주의의 끝판왕이었다.

전생에 세계 멸망도 겪어 봤던 베론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순간도 있었지만, 누구도 베론을 어쩌지 못했다.

고작(?) 황제 따위가 그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너는 정말 누굴 닮아서 그러니."

"현명한 어머니와 지혜로운…은 아니고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아버지 덕분이죠. 저만 믿으세요!"

베론은 가슴을 탕탕 쳤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이쯤 되니 어머니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황제에 대한 문제는 넘겼다.

하지만 광산의 발견은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광산은 어떻게 된 거죠?"

황제의 죽음과 광산까지 모두 베론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쳤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없었기에 나름의 위장을 했다.

"갑자기 광산은 어떻게 발견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단다. 그 위치가 주변 두 개 영지와 겹치는 바람에 난리가 날 상황이라 후작께서 세 개 가문을 호출하셨지."

"언젠데요?"

"보름 후에."

"음...."

베론은 잠시 고기를 씹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광산이 세 개 영지가 인접하는 경계에 발견됐다?

각 가문이 맺은 수백 년 전의 약속이나 조약까지 전부 동원해 어떻게든 광산을 쟁탈하려 할 것이다.

사이좋게 광산의 개발권을 나눠 먹는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나올 설정.

금광이라면 영지전을 벌여서라도 쟁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그건 일반인의 시각이었고 포르투나의 가호 때문이라도 가문에 위해가 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를 것 같지 않았다.

광산에 대한 건은 원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기에 고인물들이 뉴비를 지원한다고 치면 영웅들의 선에서 두 가문이 컷 당할 수도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니?"

"후작님이 우리 가문의 편을 들어 주실 것 같거든요."

"…그런가?"

"지금까지 쭉 그랬으니까요."

다른 가문이 가족회의의 탈을 뒤집어쓴 이 희극을 봤다면 미친 인간들의 모임이라 할 법했다.

무사안일주의에도 정도가 있는 것인데 베론이 강력하게 말을 하니 그 현명한 어머니조차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수상할 정도로 운이 좋았던 베론을 직접 보아 온 그녀였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죠."

"으하하! 회의 끝났으면 식사나 마저 합시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는 농지를 돌보러 가셨고 여동생은 방구석에 처박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짬처리(?)한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는데, 베론까지 어디 짱박혀 빈둥거리기 전에 호출됐다.

아버지의 집무실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농사 덕후인 아버지는 아예 집무에서 손을 놔 버렸기에 어머니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가문을 말아먹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해. 유희와 같은 삶을 즐기려면 나 대신 업무를 볼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아내의 등골을 뽑아 먹는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능력 있고 일 잘하는 노예를 들여와 바지 사장으로 앉혀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부르셨어요?"

"아들. 동생에게 가 보거라."

"샤론이 왜요?"

"곧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 저러고 있으니 답답해서 그래."

"결혼을 꼭 해야 할 필요 있을까요?"

"무슨 말이니? 귀족 가문의 영애면 당연히 결혼해야지."

"어머니는 결혼해서 행복하십니까?"

"...."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만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전가하고 농사에만 전념하는 것을 보면, 시집을 잘못 와서 망한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베론의 현대식 사고에 어머니는 말문이 막히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내버려 두세요. 그게 행복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 그런가?"

"네."

"어쨌든 동생이 뭘 하는지 좀 들여다보렴. 애가 너무 방구석에서 나오질 않으니 걱정되는구나."

"알겠어요."

부모의 마음으로는 그럴 수 있다.

사실 본질을 따져보면 여동생이나 자신이나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집안 유전자가 그런 것인지 하나씩 덕후 기질이 있었다.

베론이야 검술 덕후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기기로 다짐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검에 미쳐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무실을 빙자한 어머니의 집무실을 나온 베론은 여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

샤론은 아침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절대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그녀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은 베론이 유일하였기에 그의 말은 잘 듣는 편이었다.

"나다."

"오라…버니?"

"그래."

샤론은 잠시 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베론의 손을 낚아채 쉭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아 버린다.

'발명 덕후라니.'

샤론의 방 안에는 각종 설계도가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이 시대에 정해진 설계 양식도 없을 텐데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형식을 개발해 수많은 물건을 만들어 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다소 음침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어머니를 닮아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발명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어마어마한 활력을 뿜어냈다.

바로 지금처럼.

"와, 이건 쓸 만해 보이는데?"

"그, 그렇죠?! 그건 대수로 프로젝트예요! 영지 지하에 하수 처리 시스템을 만들고 정화하는 건데, 집마다 물을 공급할 수 있어요. 물을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하면 물레방아를 달아 자동으로 탈곡기도 만들 수 있고 여러 동력으로 쓸 수 있겠죠!"

한 눈에도 미친 수준의 도시 계획이었다.

복잡한 마법 장치를 다루어야 했기에 샤론이 마도구를 다루는 수준도 상당했다.

발명한다고 직접 마법에 매진해 간단한 마도구 정도는 스스로 제작하였으니 그 열정이 대단했다.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어머니의 걱정이 지나친 것이다.

베론은 샤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고 있다."

"저, 정말인가요?"

"그럼. 나는 태어나서 너처럼 똑똑한 애는 본 적이 없거든."

"애라뇨.... 매일 어머니는 결혼하라고 성화인데."

"그 지옥에 왜 끌려 들어가려고? 어머니 사는 꼴을 보고서도 그러면 양심이 없는 거지. 내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어."

"그랬더니요?"

"아무런 말도 못 하시더구나."

"헤헤, 역시 오빠가 최고예요!"

"샤론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방구석이 편하면 굳이 나갈 필요는 없는 거야.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 백수이지만 너처럼 대단한 발명을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

"위, 위대한 사람?"

"그래. 위대한 사람. 결혼은 하고 싶을 때 해라. 한 서른쯤에 열 살 어린 남자 물어 와도 내가 협박해서 남편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그,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든든해요!"

"열심히 해라!"

베론은 여동생을 응원해 주고는 방을 나왔다.

그는 짱박힐 곳을 찾아가며 생각했다.

"애가 나름 잘살고 있는데 어머니도 참 걱정이 많아. 그보다 어머니가 열받아 이혼을 거론하기 전에 영지를 관리해 줄 노예를 한 명 찾아야 하긴 하는데...."

* * *

보름이 지났다.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제국의 젊은 황제가 암살당하면서 그 책임론이 정치적인 파장으로 번졌다.

제국의 각 파벌에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몰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떤 파벌도 만만치는 않았으므로 내전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비어 버린 황좌.

황태자는 어렸기에 크게 황태자파, 대공파, 중립 파벌로 나뉘어 피가 튀기 일보 직전이다.

이에 주변국들도 긴장한 채로 사태를 주시했다.

크림슨 왕실 역시 제국 내전이 시작되면 괜히 헛바람이 들어간 주변국에서 영토를 넓힌답시고 이웃 나라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버켄 후작가의 봉신 가문인 파이렌 자작령에도 왕실의 서신이 들어왔다.

[현재 정세가 불안하니 언제라도 출병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제국의 힘이 빠지는 순간에 크림슨 왕국 역시 타국을 침공할지, 아니면 방어 일변도로 갈지는 몰라도 전쟁이 터지기는 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어머니는 또 우려를 표했지만.

"괜찮을 겁니다. 제국은 피를 흘리지 않고 내전을 끝낼 거거든요."

"어찌 그리 확신하니?"

"느낌이 그래요. 언제 제 느낌이 틀린 적 있어요?"

"…없지?"

제대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어머니는 베론의 말이 맞으리라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오늘.

금광을 쟁탈하기 위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이 역시 큰 걱정은 없었다.

후작이 직접 중재한다고 하니 감히 봉신 가문들이 설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후작이 금광을 꿀꺽할 수도 있었지만, 베론의 말도 안 되는 운을 생각하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베론은 아버지를 따라 금광이 발견된 블루 마운틴으로 향하기로 하였는데, 출병을 준비하던 도중에 급보가 도착했다.

"소영주님! 후, 후작께서 직접 오셨는데요?"

"응? 후작님이 왜?"

"그게 저도 영문은 알 수가 없는데.... 함께 올라가자고 하십니다."

평소 오만한 맛에 살고 죽는다는 인간이 고작 봉신 자작과 함께 가자고 찾아온다?

설마 영웅들이 수작을 부렸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던 베론이었기에 후작의 돌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5화. 파이렌 금광 (3)

현재로부터 시간을 돌려 일주일 전.

크림슨 왕국 남부의 지배자인 버켄 후작은 자신이 다스리는 봉신 가문들의 경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신들과 논의해 한 가지 계획을 수립했다.

금광이 봉신 가문 영지 한복판에서 발견된 것이라면 아무리 봉신을 거느린 제후라도 강탈하기가 까다로웠다.

오래전 자신의 가문에서 영토를 나누어 주어 봉신이 된 가문의 땅에서 발견된 것이니 후작의 것이라는 논리는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이면 왕가에서 금광을 강탈한다고 해도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묻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후작님. 어차피 그 정도 규모의 금광은 일개 봉신 영주가 감당하기는 힘듭니다."

"대체 어느 정도로 묻혀 있기에?"

"노천 금광에 금맥이 다 드러날 정도라고 합니다."

"허! 그걸 지금까지 몰랐다고?"

"약초꾼이 깊은 산속에서 우연히 덤불을 치워서 발견한 것이라니까요."

참모들은 금광을 반드시 후작 가문이 가져와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따로 영지를 개척해 분가하기도 쉽거니와 후작의 입장에서도 막대한 부를 쌓아 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을 테니까.

후작과 가신들의 이해가 일치하였으므로 그들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계획을 논했다.

금광을 손에 넣고 권력을 키워 나갈 생각만 하던 후작에게 붉은 손길이 뻗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는 자던 도중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했다.

"감히 누가 후작을 납치한다는 말이냐!"

"황제조차 우리의 힘으로 옹립되었다 몰락했는데 고작 크림슨 왕국의 변경 후작 따위야."

눈을 떴을 때, 후작은 붉은 가면을 쓴 사람들과 대면했다.

하나같이 느껴지는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왕국의 후작으로서 극의 경지를 이룬 기사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기사도의 나라답게 후작 역시 검술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곳에 모인 일곱 명의 붉은 가면은 극의 경지를 밟은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 이상.'

후작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붉은 가면을 쓴 자들.

전 대륙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막후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세력.

그들은 붉은 서약이라는 조직으로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제국을 포함한 대부분 왕국 왕가에 손을 뻗었다고 하여 킹 메이커로 불렸다.

어디로 끌려온 것인지 주변은 매우 어두웠으며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공포 분위기를 더했다.

끼이이익!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가 천천히 걸어와 옥좌에 앉는다.

붉은 기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으며 후작 역시 무형의 힘에 짓눌려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왕국 후작 버켄."

"...."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예...."

"금광은 파이렌 자작가의 소유다."

"예?"

"질문은 받지 않으며 이를 어긴다면 네놈을 포함한 일가친척 모두를 몰살시킬 것이다. 영지는 박살 나고 그 땅은 죽음이 강림할 것이니 경고를 무시하지 말지어다."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파이렌 자작?

그곳은 농사에 미친 반푼이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다.

쓸데없이 공처가이며 마누라 치맛자락에 놀아나는 영주의 배후에 붉은 서약이 있다고?

이 정도의 분위기면 조직의 수장이 직접 행차한 것으로 보인다.

"대관절 자작이 누구기에...."

"자작? 마땅히 그분의 아비이기에 존중을 받아 마땅하지."

"허."

후작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확실히 파이렌 자작이 탄생한 배경은 수상한 점이 있었다.

당시 삼남이었던 자작은 농사를 짓겠다고 귀촌하였는데 갑자기 경쟁자들이 상잔하더니 일가친척 하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 과정에 붉은 서약이 개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운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후작이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이제 보니 자작이 아닌 그 후계자의 배후에 대륙을 움직이는 붉은 서약이 있었군!'

충격적인 일이었다.

대관절 베론 소영주가 누구기에?

붉은 서약의 마스터는 소영주를 '그분'이라고 칭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황송해하고 있었으며 말투에서는 두려움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소영주가 거론될 때마다 붉은 기사들이 몸을 움찔움찔 떨었으니 그 권위를 짐작게 했다.

"우리는 그분이 가는 길에 꽃을 깔아 주는 것이 생존의 의의일 뿐이다."

"서, 설마 황제의 죽음도...?"

"네놈은 영광스럽게도 그분의 유희 상대이니 이 정도는 알려 주마. 황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파가 크림슨 왕국에 미칠 수밖에 없고 이제야 유희 준비를 마친 그분께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죽였다. 제국의 내전 역시 곧 종결될 것이다."

"허어...!"

"현명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도록."

퍼억!

후작이 마스터를 올려다보자 보이지 않는 손이 날아와 뒤통수에 작렬했다.

그는 기절했다가 눈을 떴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에서 깨어났다.

"꿈인가?"

아니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무릎이 까져 있었다.

후작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붉은 서약이었지만 몇 가지 정보를 풀었다.

붉은 서약 같은 괴물 같은 조직을 휘두르는 자가 자신의 세력 안에 박혀 있다?

황제조차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내전조차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힘을 가진 괴물 같은 막후의 지배자가 베론 소영주였다.

"유희.... 유희라고 했지. 황제를 죽였을 정도면, 설마 어둠의 암살자와 다크 섀도도 손에 넣고 있나?"

정보가 있기에 추리할 수 있다.

붉은 서약 마스터의 말에 의하면 최소 두 개 세력이 베론 소영주를 받들어 모셨고 다른 여러 조직이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대륙의 막후라 불리는 세력들의 진정한 수장.

"말이 되나?"

그의 고민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지만 마땅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베론 공자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황제가 죽은 것처럼 자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100%라는 점이다.

여기까지가 후작이 자작 가문에 직접 베론 공자를 모시러(?) 오게 된 배경이었다.

* * *

다시 현재.

베론은 눈앞에서 벌벌 떨면서 불안해하는 비루한 중년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국 남부의 지배자로서 당당해야 할 후작은 풍 맞은 환자처럼 몸을 떨어 댔다.

목소리는 더듬거렸으며 행동도 대귀족이라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웠다.

'아버지. 후작은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그, 글쎄다? 분명히 호랑이 같은 분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되셨지?'

오죽하면 베론과 아버지가 속닥거리고 있음에도 그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자, 자, 자네가 자, 자 자작 가문의 후계자인가?"

"그렇습니다, 후작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 영광이라니! 내가 더욱더 영광일세!"

"예?"

"허험. 말이 헛나왔군.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잠깐씩 정신도 왔다 갔다 한다네."

"아, 그렇습니까?"

베론은 대충이나마 후작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면 조기 치매를 겪는 환자들이 가끔 있다.

풍까지 맞았다면 몸이 떨리고 기억조차 드문드문 끊기는데, 인간관계가 매우 어려운 상태로 변할 수 있었다.

'쯧쯧.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었군.'

"그럼 가시죠.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아, 아닐세! 감히 어떻게 그런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누추한 마차로 모실 뻔했네요."

"누추하다니! 제발 그런 말 말게."

"...."

가문의 기사들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씹…! 그럼 어쩌라고?'

'이 인간이 정말 치매가 왔나?'

후작은 한참을 횡설수설하더니 잠시 눈을 감고 제정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본래의 말투가 나왔다.

"미안하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네. 기왕 여기까지 와서 피해를 끼쳤으니 내 마차로 함께 가지."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아버지는 좋은 마차에 타게 생겼다며 좋아했고, 베론은 약간 의심이 들었지만 곧 긍정적인 마인드로 전환했다.

후작이 조기 치매에 걸린 것도 어쩌면 포르투나의 가호가 발동된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후작은 원래 금광을 강탈할 예정이었다. 그러다 치매는 물론 풍까지 온 거지.'

과연 포르투나의 가호는 강력했다.

베론 부자는 편안하게 고급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베론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후작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그는 뜬금없이 금광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참고로 금광은 자네의 것일세!"

"제 것이라고요?"

"그래! 가문에 내가 선물하는 형태가 되겠지만 진심은 자네에게 내 마음을 보이는 것일세!"

"어째서요?"

"그러니까 어째서냐면...."

후작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 이유를 설명했다.

평소 후작은 베론에게 크게 관심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검에 두각을 드러냈으니 머지않아 극에 이르고 무아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단다.

그 재능이라면 초월의 단계에 접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므로 통 크게 후원하는 것이라고.

후작의 말에 아버지는 희희낙락했다.

"으하하! 아들 하나 잘 둬서 금광을 얻겠습니다."

"추, 축하하네. 정말 장한 아들을 두었어."

"그 돈으로 열대 지방 작물을 심어 보려 합니다. 요즘 후추가 그렇게 잘나간다면서요?"

"후추...? 재배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가능만 하다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겠지."

"벌써 피가 끓는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 베론이 전에 말했던 유리온실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유리값을 생각하면 미친 수준의 돈지랄이었지만, 영주가 한다는데 딱히 말릴 수도 없었다.

'뭐, 후추가 재배되면 좋긴 하지.'

아버지와 샤론의 콜라보라면 정말로 후추를 영지에서 재배할 것 같았으니 되레 밀어주어야 하는 일이다.

어머니야 뒷목 잡고 쓰러지겠지만 고작(?) 그런 일에 휘둘릴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응원합니다."

"오냐, 내 아들! 내가 아들딸을 잘 둬서 꿈을 이루며 사는구나."

"어떻게든 지원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 그래."

그때, 우물쭈물하던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네가 후추를 키운다고 하면 나도 거액의 투자를 함세!"

"투자요? 딱히 수익금을 나눌 생각은...."

"아니, 아니! 감히 어찌 수익금을 나눈다는 말인가! 그냥 지원을 좀 한다는 거지. 돈은 갚지 않아도 되네!"

"정말 그래도 됩니까?"

"봉신에게 지원해 주는 것은 주군의 신성한 의무가 아니겠나? 자네가 큰 뜻을 펼친다면 결국 우리 세력과 왕국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니 이런 때는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것이 맞아."

"감동했습니다, 후작님. 깨어 있는 분이셨군요."

"나만 믿게!"

베론은 아버지-후작의 대환장 파티에 머리를 긁적였다.

후작령으로는 항상 아버지만 다녀서 후작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런 모지리 같은 지능으로 어찌 남부의 호랑이라는 허명을 얻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역시 가호가 좋긴 했다.

제6화. 파이렌 금광 (4)

블루 마운틴 앞.

이 땅은 영지의 주인이 애매한 곳이었다.

현대 지구와 같은 경우에는 정확한 측량을 통해 같은 국가 내 행정 구역이라도 몇 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중세의 접경지는 기록에 따라, 역대 군주들이 상대방과 맺은 약속에 따라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 블루 마운틴 부근은 토양이 산성이라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고 괜히 국경 역할을 하는 지역에 군대를 가져다 놓으면 영지전의 징조다 뭐다 해서 말이 많았으므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주인이 애매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여기서 금광이 발견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도 블루 마운틴과 인접한 세 개 가문의 가신들은 역대 기록들을 뒤져 후작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었다.

'눈깔들 봐라.'

베론은 가럿 자작과 볼케인 남작의 눈동자에서 숨길 수 없는 욕심을 읽었다.

금맥이 발견되다 못해 노천으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개발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이익을 취하게 될 것이다.

물론, 주변 모든 영주들의 시샘을 받을 것이며 잘못하면 전쟁에 휘말릴 수 있는 만큼 리스크가 존재했지만 커다란 이익은 그러한 위험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았다.

후작이 나타나자 봉신들은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께서 중재를 서 주신다고 하니 영지전의 걱정은 덜었습니다."

"허허허. 다들 간만이군. 앉지."

"...?"

후작이 베론 부자를 상대할 때만 해도 치매 끼 때문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정상인(?)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 파이렌 가문의 기사들이나 후작 가문 가신들은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애매해졌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듣긴 했는데.'

중세에는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치매가 올 때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기사들이나 가신들은 그저 치매라는 병이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추수기가 끝나고 슬슬 겨울이 오는 시기.

왕국 남쪽은 전형적인 사계절 날씨를 보이므로 바깥에서 회담을 갖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야외 막사로 들어서자 피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좀 더 자세히 보면 파이렌 가문의 부자는 후작이 가져온 술이 맛있다며 홀짝거리기에 바빴고 나머지 두 가문의 가주들은 눈치를 보며 언제 본론에 들어가야 할지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후작은 베론에게 맞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으니 이게 술판인지 회담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가럿 자작이 입을 열었다.

"각하! 오늘 각하께서 중재해 주신다고 하여 기대가 큽니다!"

"하하하! 내 정신 좀 보게. 여기 베론 공자와 술을 마시고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군."

후작은 베론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베론은 이게 다 가호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상황을 직접 겪고 있는 두 가문의 영주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후작께서 언제부터 저 애송이와 친했지?'

'그러고 보니 파이렌 가문과 여기까지 함께 왔군. 우연인가, 의도인가?'

후작과 베론의 관계와 복잡한 정치적인 계산까지.

그들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짝짝!

후작은 휘하 기사를 시켜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자, 그럼 본인이 정리하지."

"경청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베론은 어차피 금광이 가문의 소유가 될 것이기에 편안하게 술을 탐닉했고 나머지 영주들은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후작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블루 마운틴은 파이렌 가문의 소유일세."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본인이 '공정하게' 사료를 조사해 본 결과 그리 판단했네. 경들의 땅은 후작 가문에서 봉토를 내린 것이고 제후가 결정하였으니 이쯤에서 정리하세."

"...!"

후작은 지금까지 숨겨 왔던(?) 기세를 드러냈다.

베론과 파이렌 자작에게는 깨갱하며 배를 드러낼 정도로 과한 친절을 베풀었지만, 붉은 서약의 수장은 딱히 저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므로 힘으로 찍어 누를 작정이었다.

"아, 아니 그리 일방적으로! 저희들의 말도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본인의 결정에 반발한다면 제후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고 축출할 것이야."

"헉!"

"추, 축출?!"

후작은 어마어마하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축출이 뭔가?

제후의 뜻을 거스른 봉신 가문과의 계약을 해지한다는 뜻이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왕실도 관여하기 힘들었다. 관여하더라도 왕실로서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후작의 세력권 안에 있는 땅은 개국 초, 버켄 가문에 봉토로 하사된 것이었으므로 거기서 분봉된 땅을 회수할 수 있는 것도 버켄이었다.

그런 경우는 잘 없었지만 후작이 척살령을 내리는 순간 사실상 가문이 무너진다고 봐도 좋았다.

이 강경한 처사에 남작은 꼬리를 내렸다.

"…각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자네는?"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번 건에 한해서는 왕실에 분쟁 조정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뭣이?!"

버켄 후작은 자작의 결정을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감히 왕실을 끌어들여?'

후작으로서도 생각지 못한 수였다.

버켄 후작은 2왕자 파벌의 거두로 이미 왕실과는 적대 관계였지만 가럿 자작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관계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민감한 문제를 국왕이 윤허했다는 것은.

'자작이 왕실과 광산 운영권을 나누기로 했군.'

광맥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기는 했다.

보름이면 조사를 하고도 남았고 전서구로 국왕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어차피 버켄 후작은 적이므로 그걸 공식화할 뿐이지 실익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터다.

"독립 영지가 되겠다는 선언인가?"

"죄송하지만 왕국의 모든 땅은 국왕 폐하의 것. 폐하의 허가를 득한 이상,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네! 자네, 정말 미쳤나?!"

"지극히 정상입니다만?"

"이놈!"

쾅!

후작은 본래의 성격을 드러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던 베론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치매만 아니면 아주 훌륭한 제후인데.'

베론은 술을 마시면서도 아주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자작은 독립 영지가 되어 왕실에 붙을 모양이었다.

남작은 금광 쟁탈전에서 탈락하였으니 파이렌 가문과 해결을 보아야 할 문제였다.

가럿 자작이 선심 쓰듯 말했다.

"파이렌 자작! 자네가 금광을 포기하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네!"

"금광을 포기해...?"

"유혈 사태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럼 내 유리온실은?"

"유리…온실?"

"후추는?!"

"자네 지금 무슨 말을...."

"나는 반대일세!"

아버지는 재빨리 베론을 앞세웠다.

지금까지도 유리온실을 만들어 후추를 심을 생각만 가득하던 아버지였기에 이런 정치적인 판단은 무리였다.

딱히 정치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어려서부터 농사만 지어 왔던 진성 덕후의 한계였다.

베론은 생각했다.

'영지전이 벌어져? 이득인데?'

긍정 회로가 펌프질을 시작한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베론의 적이 어떤 식으로 나자빠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영지전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예상되는 것이다.

베론은 히죽 웃었다.

"아버지. 재밌겠는데요?"

"으응? 그런가?"

"제가 검을 좀 쓰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 아들은 최강의 기사이지."

"단순히 금광이 아니라 영지 전체를 걸고 영지전을 수행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양측의 병력 제한이 2천이니 거기에 맞춰 이곳 블루 마운틴에서 전쟁하는 것이 어떨까요?"

"괜찮겠느냐?"

"다 방법이 있습니다."

"으음...."

이번에는 아버지도 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농부에게 전쟁?

피를 보아야 한다면 차라리 금광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으므로 아버지에게 귓속말했다.

"아버지. 저는 반드시 이깁니다. 승리하여 저놈의 영지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럼 농지도 두 배로 느는 것이지요."

"자신 있느냐?"

"예."

아버지가 농사 덕후이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다.

"가럿 이놈아. 내 아들이 하는 말 들었느냐?"

"당연히 들었다."

"그럼 진행하자!"

이 상황에 후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멀리 있는 법보다 가까운 주먹이 무서운 법인데 정신 나간 가럿 자작이 감히 그에게 반항했다.

아무리 왕실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괘씸한 일이었다.

예전의 후작이었다면 이 버릇없는 놈을 당장 징치해 버렸겠지만 '그분'의 의도가 문제였다.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붉은 서약과 다크 섀도는 물론이고 어떤 세력을 발아래 두고 있을지 짐작도 못 할 사람이 고작 자작 가문 하나에 고전할 것 같지는 않다.

황제도 갈아 치우는 판에 자작 가문과 영지전 정도는 식후 운동 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꽃길을 깔아 주는 것뿐이다.'

후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도 붉은 서약에 할 말이 생겼다.

"내가 직접 증인이 되지!"

"왕실에서도 증인이 나올 겁니다."

후작은 베론을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후작은 모종의 '지시'를 받아 가결했다.

* * *

블루 마운틴 부근.

원탁에서 통칭 '사자'라고 불리는 남자는 전 세계 수많은 왕국을 막후에서 휘두르는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었다.

예전에는 조직 전체를 데스 게임에 사용했지만, 그분이 나타난 이후에는 완전히 양상이 달라졌다.

이번 회차 원탁에 참여하지 못한 인원은 몰라도 그 자리에 있었던 영웅들은 모두 동맹을 맺고 그분의 행보에 꽃길을 깔아 주기로 한 것이다.

동맹을 맺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모략이 여자라든가, 그 돼지 수전노 자식이 엄청난 미인이라든가 하는 일이었다.

각자의 세력들도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한지라 이대로 데스 게임이 이어졌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자는 제국 정계를 압박해 내전의 불꽃을 진화하면서도 잽싸게 크림슨 왕국으로 이동해 왔다.

모략 년이 황제를 죽이는 대공을 세웠으므로 사자 역시 그분에게 눈도장을 찍을 요량이었다.

태초신께서 계시는 영지가 금광 이슈에 휩싸였기에 사자는 바로 상위 귀족을 납치해 정체를 밝히고 회담에서 힘을 쓰게 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그분에게 영지전을 신청하였다고 하였느냐!"

"죄, 죄송합니다!"

버켄 후작은 연신 머리를 박아 댔다.

사자의 차가운 심장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여차하면 심기를 거스른 후작 가문은 몰살시키고 가럿 자작 가문을 영지째로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후작은 머리를 조아린 채로 말했다.

"그, 그분께서 재밌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재밌겠다고 하셨나?"

"예! 영지도 늘어날 겸 쓸어버려야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사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분은 유희를 즐기고 계신다. 영지가 더 필요하시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영토를 늘리려는 것이다.'

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봐라!"

"예, 주군!"

"어서 마녀 년에게 연락해 이쪽으로 넘어오라 전해라!"

"마, 마녀라면...?"

"마탑 수장 년 말이다!"

"헉!"

사자의 말에 버켄 후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마, 마탑까지 휘두르는 분이라고?!'

제7화. 영지전 준비 (1)

마법사의 탑.

줄여서 마탑이라 불리는 이곳은 전통적으로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을 지켜 왔다.

이 세계의 마법은 '차원의 파편'이라 불리는 무형의 에너지원에서 비롯된다.

이 파편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흘러 들어와 현실과 교차하는 특정 지점에서 마법사들이 끌어 썼으므로 매우 불안정한 힘이었다.

그러나 마법이 경지에 이르면 다소 안정적으로 힘을 구현할 수 있었고 차원이 완전히 뒤틀려 튀어나오는 '차원의 괴수'들을 감지할 수 있었으므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임무를 짊어진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느 편을 들면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어떤 국가도 마탑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마탑의 탑주는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었다.

혹자는 수백 년을 산 노괴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탑주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중이라고 했다.

진실은 전자였다.

"이 정도면 됐을까?"

마탑주 라시엔 아르마는 멋들어진 검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은 그녀를 베일에 휩싸인 마탑주라고 불렀으나, 마탑 내에서는 냉혹한 마녀라고 불렀다.

그녀는 원탁에서 태초신을 뵙고 온 이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암살 년은 황제를 죽이는 데 공을 세웠고 사자 놈은 그분이 계시는 크림슨 왕국 남부의 제후를 휘두르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간 그녀가 뒷전이 될 수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차원의 마검.

마법사들이 다루는 차원의 힘이 응집되어 있었으며 휘두를 때마다 차원이 왜곡되며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한다.

한 달 내내 제련해 완성했으니 이제 공양(?)할 차례였다.

"그분은 유희를 원하고 계시니 그냥 선물하는 것은 말도 안 돼."

드래곤 하트로 제련한 검을 마탑주가 선물로 바친다?

지상계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므로 말도 안 된다.

그렇다고 떠돌이 마법사로 위장한 채 선물을 준다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은 던전이야."

던전.

사실 지금에 이르러 제대로 된 던전은 발견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굉장한 보물이 발견되기도 했었다는 소문이 퍼져 한때 던전을 탐사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폐허에 쓰레기만 가득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꽤 가치 높은 물건이 발견되는 던전이 나오기는 한다.

파이렌 영지에 존재하는 천연 동굴을 던전으로 꾸민다면?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야!"

라시엔은 기뻐하실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도 예쁨 좀 받아 보자!"

똑똑.

그녀가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노크했다.

히죽거리던 그녀는 원래의 쌀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마탑주님께 직통 암호문이 도착했습니다!"

"가져와라."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마법사는 행여나 마탑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암호문을 내밀었다.

마법사가 살짝 몸까지 떨며 서 있자 그녀는 가볍게 차원의 파편을 움직여 날려 버렸다.

"아악!"

촤륵!

문이 닫히자 라시엔은 급하게 암호문을 열었다.

직통 암호문은 원탁의 영웅들만 알고 있다.

한때는 적이었으나 동맹을 맺은 관계.

동맹을 맺었다고 한들 경쟁 관계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감히 필멸자 따위가 그분의 영지에 영지전을 걸었다. 당장 튀어 와라!]

사자 놈의 암호문이었다.

말투는 싸가지 없었지만 이건 귀중한 정보다.

"그분의 영지에 영지전을 걸었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빠질 수 없지."

* * *

파이렌 영지에 영지전이 발발했다.

영지 기사들이 병사들을 훈련하고 어머니가 뒤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가운데, 아버지는 여전히 농사일에 바빴다.

요즘에는 금광을 마치 손에 쥔 것처럼 허파에 바람이 들어 유리온실 설계를 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빡친 어머니가 매일 아버지를 구박했다.

샤론이야 언제나 마찬가지로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았고, 베론마저 짱박혀 허송세월하니 기사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영주님! 영주성 지붕에는 어떻게 올라가신 겁니까!"

"마르헨 경도 누우라고. 햇살이 따듯해."

"아, 좋기는 한데.... 지금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기사단장의 잔소리에 베론은 귀를 후볐다.

그 뺀질거리기 좋아하는 마르헨 경이 잔소리를 할 정도면 영지 내부가 개판이라는 뜻이었다.

"왜? 뭐가 문제인데?"

"소영주님! 제발 내려오셔서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아주 영지가 엉망입니다."

"어머니가 계시잖아."

"자작 부인께서는 물자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바쁘십니다."

베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만히 두어도 적들은 알아서 꺼꾸러질 것이 확실한데 이리도 호들갑이라니.

그래도 소영주 체면에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으므로 내려와 대충대충 일을 처리했다.

"소영주님! 투구와 창의 수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든 준비가 될 테니 걱정 마."

"갑옷이 너무 허름한데요?"

"어머니가 준비하고 계신다."

"훈련은 어쩔까요? 소영주님께서 군을 지휘하시니 아무래도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 우리 영지군은 무적이야! 내가 보증한다!"

"...."

영지 전체가 대환장 파티였다.

기사들은 영주인 아버지를 아예 논외로 쳤다.

자작 부인 역시 물자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바빴기에 소영주가 영지전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소영주라는 작자는 평소의 성격대로 '어떻게든 되겠지.'를 시전하고 있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인 기사들은 정신 줄을 놓고 점점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 이게 정상으로 보인다니.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겠지?"

"언제 소영주님의 말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나. 지켜보자고."

"영지의 운명이 걸린 전쟁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기사들의 대부분도 가스라이팅에 넘어가고 있었다.

소영주의 말을 믿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베론은 이게 시찰하는 것인지 그냥 놀러 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웃으며 돌아다녔다.

그러던 와중에 기사단장 오르트 경이 달려와 보고했다.

"충! 소영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영지에 웬 떠돌이 마법사가 나타나 계약직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합니다!"

"마법사?"

"예! 어떻게 할까요?"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오르트 경을 바라봤다.

그 귀한 마법사가 여길 와?

차원의 파편을 다루는 마법사는 평범한 사람이 평생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희귀한 존재였다.

아주 가물에 콩 나듯, 차원의 진리를 탐구하겠다며 떠도는 마법사가 있긴 했으나 혼자 여행을 다니다 대부분 객사했다.

마법사가 제국도 아닌 크림슨 왕국에, 또한 이 남부 오지까지 내려왔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필이면 영지전이 시작되기 전에 나타났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쩌기는? 당연히 모셔야지."

"예! 데려오겠습니다."

웅성웅성.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는 건 아니겠지?"

"뭐, 어찌어찌 넘어갈 것 같긴 한데...."

기사들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모든 것을 안일하게 생각하는 소영주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정말로 그런 안일한 태도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고 있었으니 슬슬 사고방식이 전염되는 것이다.

마법사는 위풍당당하게 영지를 가로질렀다.

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영지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사단장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마법사가 둥둥 허공에 떠다니자, 백성들의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병사들까지 불안감을 지웠고 기사들마저 묘하게 안정감을 느꼈다.

영주성 응접실.

베론은 적발 적안의 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원탁의 마녀?'

잠시 생각을 하던 베론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탁의 마녀와는 분위기와 외모가 달랐다.

거기에 영웅이 뉴비 따위의 영지에 방문해 도움을 준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을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소영주님! 소녀 라시엔이라고 해요!"

라시엔이 베론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황송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수상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소녀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네! 제가 미쳤나 봐요. 나이가 벌써 300살이 넘었는데!"

"300살?"

"아니! 아니에요! 서른 정도 됐어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휴. 그럼 그렇지. 제정신 박힌 마법사가 여길 찾아올 리가 있나.'

'서른이나 처먹었으면서 자기를 소녀라고 소개하지를 않나. 뭐 300살? 지가 마녀야 뭐야.'

그런 생각은 베론도 하고 있었지만, 마법사는 마법만 잘 쓰면 된다.

정신 상태가 무슨 상관이랴.

"설마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마법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파편 연금술이든, 왜곡이든, 정신 접합이든 다 맡겨 주세요!"

"공격 마법은 없나?"

"원소 마법도 잘 써요! 그.... 아시죠? 에너지 방출! 파편에서 직접 에너지를 추출해서 날릴 수 있거든요!"

"노비스(초심자)인가?"

"무슨 말씀! 아크메이지의 벽을 넘은 것이 언제인데...."

"하...."

"하아."

기사들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이 붉은 머리 마법사는 허언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에는 4단계가 있다.

'노비스-어뎁트-아크메이지-트랜센던트'로 나뉘는데, 마지막 단계는 그야말로 차원의 파편과 완전히 융합된 존재를 일컫는다.

허공에 떠다니는 차원의 파편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차원의 미세한 틈으로 직접 대기를 교류하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대륙에 아크메이지만 출현해도 국가 하나 말아먹는 것은 순식간이었는데, 그걸 뛰어넘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베론은 살짝 실망스러워지려 했다.

"내가 돈이 별로 없어. 아무리 허접한 마법사라도 고용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 마세요! 저는 후작님의 소개로 왔거든요. 후작께서 돈을 다 내셨어요!"

"그래?"

"물론이죠!"

기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정신 나간 마법사에게 돈을 뜯길 바에는 그냥 내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짜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하하! 환영합니다, 마법사님!"

베론은 양팔을 벌렸다.

이 덜떨어진 마법사는 이 제스처를 뭐로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폭 안겨 왔다.

여마법사가 혼자 여행하다 객사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한편, 태초신의 품에 안긴 마법사는.

'돈이 없으시다고? 이 수전노 년은 대체 뭘 하는 거야?! 단순히 임무를 유기했다면 찢어 죽일 것이다!'

제8화. 영지전 준비 (2)

그날 밤.

라시엔 아르마는 배정된 방의 테라스로 나왔다.

파이렌 자작령은 정신없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야밤에도 훈련하고 있었는데, 어둠을 꿰뚫어 보니 병장기가 허름하고 갑옷에 구멍까지 나 있었다.

"이 망할 년!"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분께서 가시는 길에 꽃길을 깔아 드려도 부족할 판국에 신병(神兵)들을 저딴 식으로 방치해?

수전노의 지원이 아니더라도 사자 놈이라도 나서서 병사들을 무장시킬 자금을 어떻게든 그분께 쥐여 드려야 했다.

그녀는 곧장 테라스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는 사자가 운영하는 붉은 서약의 비밀 장소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넝쿨로 가려져 있어 입구가 보이지 않았지만, 트랜센던트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매우 어설픈 환영 마법으로 가려져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스스슷!

그녀의 주변으로 붉은 기사들이 접근한다.

물론 이런 허접(?)들이야 차원탄으로 모조리 날려 버린다.

콰광!

"끄억!"

"커어억!"

쿠구구구!

라시엔 아르마는 분노에 못 이겨 차원의 힘을 한껏 끌어 올렸다.

사자 놈이 그럴싸한 변명을 하지 못한다면 동굴은 물론이고 비밀 장소 자체를 왜곡장으로 뭉개 버릴 작정이었다.

스슷.

곧 사자가 걸어 나온다.

황금빛 머리가 매우 풍성한 붉은 서약의 지배자.

놈은 대륙을 막후에서 지배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무력은 다른 영웅들에 비해 뒤처졌다.

"워워, 진정해라."

"사자 놈아. 갈기를 다 뽑아 버리기 전에 설명해라. 너는 신병들의 상태를 보지 못했더냐!"

"안 그래도 수전노 년이 무구를 가져왔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다."

"흥! 핑계는?"

"들어와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붉은 서약의 마스터조차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승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야 마녀는 진정했지만, 언제라도 비밀 장소를 날려 버릴 수 있도록 차원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마다 공간이 일렁거리니 나름 극의 단계를 뛰어넘어 초월의 경지를 엿보는 붉은 기사들조차 죽상을 쓸 뿐이었다.

'마탑주가 초월의 경지를 밟고 완숙에 들어갔다. 마법사가 초월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대륙 최고의 거상에 마탑주까지. 대체 뭐 하는 모임이야?'

의문은 넘쳐났으나 붉은 기사들은 머릿속에서 상념을 지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었다.

기밀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으며 그 지식에 대해 알게 된다면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었다.

지하 동굴은 매우 음침했다.

신비주의를 깔고 가는 붉은 서약다웠다.

"하여간 음흉한 사자 놈이군. 사람 죽어도 모르겠는데?"

"자자, 마녀 너도 그만 화 풀어라. 저 수전노도 지난 원탁의 게임에서 그분을 알현한 후,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니까."

"저년 얼굴이 반반하다고 편드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느냐. 이번 회차 원탁 전에 발견했다면 바로 목을 잘랐을 텐데."

수전노라고 불리는 여자는 대륙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탁의 게임에서도 대충 정체는 짐작했었지만, 워낙 철옹성을 짓고 칩거하는 바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용병왕과 항시 계약을 맺었으며, 여기까지 오는 것도 용병왕의 호위가 있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청순가련(?)한 여자가 조곤조곤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저.... 제 목을 두고 너무 그러지 말아 주실래요?"

"너는 닥치고 있어!"

"네...."

상계에서는 최고의 거물로 통하는 하시렌 마르탄조차 성질 더러운 마녀의 기세에 콱 눌려 어떤 말도 못 했다.

상계는 물론 대륙의 어떤 국가조차 그녀의 금력에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이 미친 영웅들은 그녀라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황제의 목조차 쉽게 비틀어 버리는 초월적인 영웅들 앞에 얄팍한 검술 따위야 단숨에 파훼될 것이다.

한참 투덕거리던 마녀는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돈이 없다고 푸념하셨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수전노 얄팍한 년!"

"죄, 죄송해요."

하시렌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을일 수밖에 없었다.

더럽고 아니꼬우면 초월적인 실력을 보유해야 했는데, 그게 쉬울 리 없었다.

울상이 된 하시렌은 가져온 무구 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진상하려고 하는데...."

미스릴이 섞인 최상품의 검이었다.

그녀가 마련한 무구는 검뿐만이 아니라 창, 활, 방패, 갑옷까지 모두 2천 벌이었다.

하나같이 튼튼한 최상급에 미스릴이 섞여 웬만하면 부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시엔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듯했다.

"고작 이딴 걸 무기라고 가져와?"

"그래도 나름대로 최상품...."

"흥! 인챈트를 해야겠다."

"인챈트까지 하면 그분의 유희 난이도가 너무 낮아지지 않을까요?"

"그분은 그런 난이도를 원하신다. 말 그대로 유희인 것이지."

"인챈트까지 된 무구들을 어떻게 전달하라고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년이 알아서 하는 거지."

"아, 제발 그것만 좀 도와줘요."

밤이 깊어 간다.

마탑주 라시엔 아르마는 하시렌이 마련한 무구들을 밤새도록 인챈트했다.

* * *

전쟁 준비 일주일째.

첫날 기세등등하게 돕겠다고 찾아온 여마법사가 실종됐다.

물론, 그냥 없어진 것은 아니고 쪽지 하나를 남기긴 했다.

[일주일 후에 올게요!]

전쟁은 한 달 후였기에 시간은 넉넉했지만 기껏 찾아온 마법사가 사라졌다면 그 이유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소영주님. 아무래도 마법사는 튄 것 같은데요?"

"아니겠지. 기다려 보자."

"허험.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외람되지만 마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 영지에 붙을 이유가...."

"부단장은 왜 그렇게 사람이 부정적이야?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왕국 수도 아니면 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이런 산골 오지로 오겠어요?"

"내기할까? 10골드 빵."

"아하하! 내기는 좀 아니지 말입니다?"

베론의 자신감 있는 말에 부단장은 선뜻 내기에 나설 수가 없었다.

10골드면 기사 월급으로 거의 5개월을 모아야 한다.

운이라면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소영주였으니 힘들게 모은 돈을 털리지 않으려면 내기는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부단장은 마법사가 튀었다고 거의 확신했지만, 베론은 아니었다.

'감히 여기까지 와서 튀어? 그러다 객사하지. 고생하다 올 거야.'

아니나 다를까.

기사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소영주님! 마법사님이 오십니다!"

"하하하! 아까워라. 부단장, 10골드 안 날려서 좋겠어."

"에헴! 도대체 그 정신 나간 여자는 어디 있다가 왔대?"

"그건 모르겠지만 엄청난 글래머…가 아닌 상단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

"엄청난 글래머?"

베론과 부단장의 귀에는 오직 '글래머'라는 단어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글래머이기에?

그들은 동시에 건물 테라스로 나왔다.

영주성 성문을 통해 일단의 무리가 수레에 무구를 가득 채운 채 들어오고 있었다.

대충 봐도 수천 벌은 되어 보이는 무구들이었다.

상단을 이끄는 여자는 피부가 하얗다 못해 다소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몸매는....

"와! 끝내줍니다! 태어나서 저렇게 몸매 좋은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정신 나간 마법사도 물론 대단하지만 그 여자는 좀 모자라 보여서...."

"가 보자고."

마법사와 상단.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구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어머니에게도 들어갔다.

"아들! 후작께서 무구를 보내셨다고?"

"네. 그렇다고 하네요."

"이 은혜를 어쩌면 좋니. 이번에 금광 사건도 우리 영지 편을 들어 주셨다면서?"

"…참 좋은 분이죠."

높은 확률로 금광에 욕심을 냈다가 치매와 풍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베론은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어머니에게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이 산골 오지에 별 관심도 없던 양반이 갑자기 퍼 주기 시작하니 고마울 뿐.

아버지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샤론은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영주성 앞에서 기다리는데, 가슴이 웅장해지는(?) 미녀가 그 거대한 것을 출렁거리며 달려왔다.

"소영주님!"

"아, 네. 제가 소영주입니다."

철푸덕!

"아고고."

"...."

글래머이긴 한데 다소 허약해 보였다.

그녀는 달려오던 그대로 넘어져 완전히 대자로 뻗었다가 흙투성이가 된 채 일어난다.

머리에는 피가 줄줄 흘렀다.

"어머, 피!"

어머니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거유 글래머는 실실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아요. 항상 있는 일인걸요."

"그래, 후작님의 지원이라고요?"

"네, 네! 후작님께서는 금광 건을 막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이 물건들을 보내셨어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어머니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좋지 못한데 무구까지 엉망이었으니 걱정이 심하셨다.

전쟁을 결의하고 돌아왔다고 하니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잔소리를 퍼부을 만큼.

이런 가운데 후작이 이만한 선물을 주었다고 하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소영주님! 저도 왔어요!"

"마법사님은 어디서 뭘 하다가 지금 왔습니까?"

"헤헤, 저 무구들에 인챈트를 하느라 늦었어요."

"하하하! 허언이 심하군요."

"죄송해요! 허접한 마법사라서."

베론은 그냥 포기했다.

인챈트 마법?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어린아이도 다 알았다.

차원의 파편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그걸 자신의 몸으로 다루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그 차원의 힘을 무구에 담아?

정말로 아크메이지에 이른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것을 보니 튀다가 뭘 잘못 주워 먹은 것이 확실하군!'

기본적인(?) 가호의 작용이었다.

베론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배신하려 하면 시름시름 앓는 것이 기본.

도주하다가 배탈이 났다거나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도저히 튀는 것이 불가능하여 되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베론은 마법사는 뒷전으로 두고 글래머 상인에게 물었다.

"대륙상단의 깃발을 달고 있던데, 그쪽에서 오신 건가요?"

"네! 대륙상단의 상단주 하시렌이라고 해요."

"대륙상단… 상단주...?"

"네! 맞아요."

"하하하! 농담이 심하시네."

"농담.... 맞아요! 제가 나사 빠진 년이라는 소리를 종종 들어요. 아하하!"

'이건 또 뭐 하는 년이야?'

요즘 베론의 주변에는 이상한 인간들만 접근하는 것 같았다.

'뭐, 상관은 없나.'

마법사의 정신 상태가 이상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상인이 이러는 거야 베론에게 아무런 피해도 없는 일이었다.

되레 머리에 나사 하나가 빠졌다면 호구처럼 이용해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려 대륙상단이다.

그 위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곧 있으면 영지에 금이 가득 찰 것이고 대륙상단과 인연을 잘 맺어 두면 추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베론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환영합니다, 자매님!"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이 자칭 상단주는 마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육탄 돌격을 했다.

베론은 벌써 코가 꿰어 장가 갈 생각은 없었으므로 슬쩍 피했는데, 이 여자는 몇 바퀴나 굴러서 구석에 처박혔다.

"괘, 괜찮으십니까?"

"헤헤! 괜찮아요!"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 딱히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혈부터 좀 하시죠."

"아니요! 소영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영광의 상처!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베론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세계에도 정신 아픈 환자들이 득실거린다.

제9화. 영지전 준비 (3)

그날 저녁.

어머니는 만찬을 열었다.

마법사고 상인이고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들의 신분은 일개 영지가 무시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었다.

마법사가 부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전쟁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다.

후작의 호의로 바리바리 물자를 싸 온 상인은 말할 것도 없다.

저렇게 얼빠진 여자가 상단의 간부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원래 인간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영주님, 아 하세요!"

"이 년이? 내가 먼저 포크를 내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순서를 지키세요."

"...."

경쟁적으로 여자들이 베론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구도였는데, 전통적인 클리셰였다.

'이 여자들이 왜 이러지?'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마법사의 행동은 이해가 됐다.

도주했다 죽을 뻔했으니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다.

상인 여자는?

'후작이 내게 잘해 주니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베론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아픈 것은 자신의 머리였으니까.

"참, 소영주님! 제가 인챈트한 무기를 보실래요?"

"허언도 적당히 하시라니까. 무슨 무기에 인챈트를 했다고."

그녀는 아공간에서 검 한 자루를 쑥 꺼냈다.

"...!"

순간, 주변은 얼음이 됐다.

아공간.

차원의 파편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면 아공간을 다루는 능력을 얻게 된다.

최소한 어뎁트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가능한 기예였는데, 이 허접한 마법사는 주머니를 사용하는 것처럼 아공간을 자유롭게 다루었다.

"한번 강도를 테스트해 보실래요?"

"그, 그러죠."

베론은 아무 장검이나 가져와 힘껏 내리쳤다.

쨍캉!

"허어."

장검이 두 동강 나 버렸다.

인챈트된 것으로 생각되는 검에는 흠집 하나가 없다.

아무리 무기의 강도가 강력해도 이 정도로 강할 리는 없었다.

"이제 휘둘러서 확인해 보셔도 돼요."

"그, 그럴까요?"

후웅!

츠즈즈즛!

공간이 살짝 일렁거렸다.

아주 강력한 파동은 아니었지만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남기는 잔상과 비슷했다.

성능은 확실하다.

인챈트된 검으로 갑옷을 베어 보니 정말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이 정신 나간 마법사는 정말로 그 많은 무구에 인챈트를 해 온 것이었다.

'튀다가 배탈 나서 돌아온 것 아니었어...?'

마법사도 그렇고 상인까지 후작의 도움으로 파이렌 영지를 찾아왔다.

어머니 역시 그걸 보더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후작님이 섬망 증세가 있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네, 치매가 맞는 것 같습니다."

후작의 정신이 나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퍼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섬망 증세가 베론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는데,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머리가 돌아 버렸다.

"아들! 그리 아낌없이 퍼 주는 주군께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니?"

"물론입니다!"

"네 쓸모없는 아버지 대신 다녀오도록 해라."

"으응? 내가 뭘?"

하루 종일 농사일하다가 돌아와 고기를 씹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섬뜩한 눈빛을 준다.

"그럼 당신이 가든지요!"

"아, 아니오! 아들이 주도하는 전쟁인데 아들이 가는 것이 맞지! 암. 그렇고말고!"

후작령까지는 여기서 반나절 거리.

매우 귀찮은 일이었으나 혹시 모른다.

벽에 똥칠할 때가 된 후작이 또 뭔가 베론에게 퍼 줄지도.

* * *

가럿 자작령.

전통적으로 가럿 가문은 파이렌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같은 제후의 봉신으로 시작하였으나 허구한 날 영토 분쟁을 벌였으며 전 세대까지만 하여도 대놓고 군사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그 케케묵은 원한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니, 가럿 자작이 왕실의 편에 붙은 이면에는 그러한 과거사도 한몫했다.

"드디어 우리가 파이렌 영지를 삼킬 수 있게 되었다."

"감축드립니다, 영주님!"

"왕실의 보호를 받는 이상, 후작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을 것이야. 그 어마어마한 금맥의 반이라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다면 언젠가 후작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자작의 말에 가신들은 눈을 빛냈다.

이 시대 봉신 가문 가신들은 대부분 분가를 원했다.

작은 장원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충성 경쟁을 벌였으며 운이 좋다면 지금처럼 영주가 제후에게 독립해 새 영지를 개척할 수 있는 권리까지 쥘 수 있는 것이다.

영주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가신이 영지를 개척하면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주와 가신들의 뜻이 하나가 되니 빠르게 전쟁 준비가 되어 갔다.

그들에게는 왕실의 지원까지 있었다.

왕실에서는 티가 나지 않게 용병이나 상인으로 위장한 병력을 은밀하게 보냈고, 병장기 역시 상당한 품질을 자랑했다.

영주와 가신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축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전쟁 준비에 올인했다.

그러던 와중 세작이 소식을 전해 왔다.

"후작이 파이렌 자작에 마법사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마법사?!"

"그런데 그 마법사 상태가 정상은 아닙니다. 자신이 무슨 트랜센던트에 올랐다고 했다가 번복하고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사라졌다가 피골이 상접해 복귀했다고 합니다."

"마법을 사용할 줄은 안다던가?"

"제가 가서 보니 둥둥 떠다니기는 하던데, 그밖에는 별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법사가 왔다는 것이 좀 걸렸지만, 상관없다.

정신 상태가 썩어 빠진 마법사는 돈을 좀 벌어 보겠다고 파이렌 영지에 빌붙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돈을 받고 도주했고,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받아 간신히 살아 돌아온 듯했다.

그런 인간이 무슨 마법사?

문제는 마법사와 함께 왔다는 대륙상단이다.

"대륙상단의 지원이 확실한가?"

"후작의 지원으로 보입니다."

"후작이 드디어 미쳤군."

사실 왕실의 지원을 받는 가럿 자작이 할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왕실의 지원을 받아도 되고 파이렌 자작은 받으면 안 된다?

개똥 같은 논리였다.

파이렌 영지로 품질 좋은 장비가 넘어갔어도 이쪽에는 왕실 직할 부대가 있다.

분명 전투에 들어가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리고 후작이 지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 소영주가 직접 인사를 하러 간다고 하던데...."

"그 싸가지 없는 애송이가 직접 말이냐?"

"그렇습니다."

가럿 자작은 부아가 치밀었다.

회담장에서 자신이 이겼다는 듯 가럿 가문을 무시하던 애송이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영지를 떠난다.

영지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미련하게 움직여 주니 선물이라도 안겨 주어야 한다.

"우리 측의 기사를 보낸다."

"기사를 말입니까?"

"암살자로 위장해 놈의 목을 잘라 오도록!"

기왕 왕실에 붙은 가럿 자작은 막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파이렌 영지는 자신의 손에 떨어진다.

왕실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승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암살에 실패해 문제가 생기더라도 막아 줄 것이었다.

가럿 자작은 기사 중에서는 가장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헤롯 경에게 왕실 직할 부대 100명을 붙여 주었다.

"그 애송이의 목을 반드시 베어 오도록!"

* * *

왕국 남부에 정보망을 구축한 영웅, 안센 트루엔은 가럿 자작이 태초신을 암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감히 그분을 암살해?"

"그, 그렇다고 합니다."

"고작 필멸자 따위가 그런 생각을!"

안센의 눈이 반쯤 뒤집혔다.

수하들은 몸을 사리며 그녀의 주변 3미터 밖으로 물러났다.

잘못하면 그녀의 살기에 베인다.

최악의 경우에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므로 최대한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크 섀도 중간 간부이자 제1 조장은 그녀가 폭발하지 않도록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수장님! 그분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럿 자작가의 씨를 말리겠습니다."

"그래! 당장 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가만."

안센은 사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분께서는 재미로 이번 영지전을 하려 하신다. 그러니 괜히 자작의 목을 베거나 가문을 몰살시키는 짓은 하지 말도록. 뭐, 찍히고 싶으면 몰살하든지.'

그랬다.

그녀의 신께서는 지금의 순간을 유희로 즐기려는 것이다.

다른 영웅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난이도는 꽤 낮춰 유희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분의 적을 모조리 참살하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제국의 문제를 해결하고 왔더니 별 거지 같은 놈이 눈에 밟히는군. 암살자들의 목만 모조리 자르도록 해라."

"명에 따릅니다!"

다크 섀도 제1 조장 라크는 자신의 조를 모두 소집했다.

고작 크림슨 왕국에 조직의 1 조장이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번 일은 자신들의 주인인 수장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그들은 암살업에 종사하지만 제국 정보부를 뛰어넘는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붉은 서약과 대륙 상단, 마탑까지 동원되었음을 짐작했다.

"수장의 직통 명령이다. 실패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물론입니다."

듣기로는 대륙 용병 길드까지 가세를 했다는 말도 들렸다.

대륙을 막후에서 지배하는 절대자들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동맹을 맺고 일하고 있었다.

파이렌 가문의 소영주.

그들의 머리로는 도대체 그가 누군지 신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실패는 곧 죽음.

라크는 직접 조원들을 데리고 움직였다.

가럿 영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크는 복면으로 위장한 자들이 영지 구석에서 나오자마자 달려들어 모조리 썰어 버렸다.

"죽여라!"

"스, 습격이다!"

라크와 그의 수하들은 마치 달빛에 홀린 유령과 같았다.

가뜩이나 날이 어두운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짧은 비명만 가득할 뿐.

순식간에 복면인 100명이 도륙되었고 그들을 이끄는 수장만 남았다.

"이놈이 마지막인가?"

"그렇습니다, 조장님!"

"이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감히...!"

퍼억!

라크는 마지막 복면인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눅진한 피가 흘러내렸다.

수장이 직접 지시한 일치고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난이도였다.

"이게 끝이라고?"

"너무 싱겁습니다."

라크는 일을 마치고 머리를 긁적였다.

마탑, 다크 섀도, 붉은 서약, 대륙 상단, 용병 길드까지 움직이는 존재를 제거하는 데 고작 이 정도로 암살을 시도한다고?

"그분께 도전하려 하였다면 최소한 제국 특수 정보부 정도는 모조리 끌고 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마치...."

"마치?"

"그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소소하게 유희를 즐기려는 느낌이...."

"됐다.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명을 단축한다."

"예!"

라크와 조원들은 시신들을 아예 방치한 후 돌아가지 않았다.

이 꼴을 본 가럿 자작이 분명 제2, 제3의 암살단을 파견할 것이니, 발견 즉시 참살해 버릴 작정이었다.

제10화. 극진한 대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