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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제10화. 극진한 대접 (1)

드넓게 펼쳐진 평야.

다소 따듯한 기후의 남부라고는 해도 한겨울에 접어든 이상,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검게 칠해진 마차 지붕은 꽤 따듯했으므로 베론은 이곳에 누워 주변의 풍경을 한가로이 감상하고 있었다.

"마부가 운전을 참 잘하는군."

"아이고, 소영주님. 칭찬 감사합니다!"

베론의 칭찬에 마차를 몰고 있던 마부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어머니는 집사 할배에게 마부를 부탁했지만, 굳이 후작이 보냈다며 말을 몰겠다는 남자가 있었다.

후작은 일곱 명의 하인까지 딸려 보냈는데, 그들을 거절할 명분은 마땅히 없었다.

후작의 은혜(?)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으니 그가 보낸 마부와 하인을 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베론으로서는 반강제로 마부와 하인들을 부리게 되었는데 이게 웬걸?

마부는 말과 혼연일체가 된 듯이 몰았고 그와 함께 온 하인들은 미리 앞서 나가면서 길가에 큰 돌멩이라도 없는지 살피며 치우고 다녔다.

평소 짱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베론이었지만 벙어리는 아니었으므로 심심풀이 삼아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굳이 마부를 하지 않아도 잘살 것 같은데 왜 말을 몰고 있나?"

"어려서부터 동물이 잘 따랐습죠. 천생이 마부인 것 같습니다. 혹여 소인이 말을 모는 데 불편한 것은...."

"그럴 리가? 내가 타 본 마차 중 최고다."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공자님을 모실 수 있다면 일생일대의 행운이라 생각할 것이옵니다만."

"에이, 됐다. 그랬다간 후작 각하의 마부를 내가 빼앗은 모양새가 되지 않느냐. 은혜를 입고서 그런 짓을 하면 천벌 받지."

"딱히 그러지는 않아도...."

끄아아악!

"...!"

마부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 도중에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악! 끄아아악!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는데, 싸움이 난 것 같았다.

마차를 몰던 마부는 말을 멈추고 풀쩍 뛰어내렸다.

"헤헤, 공자님. 제가 가서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응? 위험할 것 같은데?"

"제 오랜 여행 경험으로 보니 어디서 고라니가 우는 것 같습니다. 곰이 있을 수도 있으니 기피제를 뿌리고 오겠습니다!"

"그런 것도 있었어?"

"물론입지요!"

곰 기피제라니.

여긴 화학 쪽으로는 젬병인 세계관이 아니었던가?

마부는 하인들과 함께 잠시 숲으로 사라졌다.

"오르트 경!"

"예, 소영주님!"

"이 근처에 곰이 살고 있나?"

"곰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고라니는?"

"글쎄요. 고라니라면 이 부근에서 가끔 발견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래?"

베론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포르투나의 가호를 입은 그가 여행하는데 도적이나 몬스터가 습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10분쯤 흘렀을까.

피가 군데군데 튀어 있는 마부와 하인들이 돌아왔다.

"괜찮나?"

"아이고, 괜찮습니다. 곰 한 마리가 달려드는 바람에 석궁으로 쏴야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문제없었습죠."

"고라니가 맞던가?"

"예, 예. 원래 고라니가 사람처럼 울기는 합니다."

"그건 맞지."

여기서나 고라니가 희귀하지, 한국 땅에서는 심심하면 도로에 뛰어드는 놈이 고라니였다.

그만큼 흔했고,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외곽으로만 나가도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고라니들이 울었다.

'그런데 고라니가 대낮에 울기도 하나?'

잠시 의문이 떠오른 베론이었으나 곧 그런 기색을 지웠다.

* * *

붉은 서약의 지배자 율리우스 베스타는 태초신을 모시며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도저히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는 볼 수 없는 긍정적인 마인드, 뭐든 가볍게 생각하는 신격 특유의 여유까지.

과연 신격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율리우스는 바로 마차의 운행을 멈추고 그분에게 허락을 구했다.

신께서도 이 비명이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고 계셨지만, 귀찮아하시며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붉은 기사들과 함께 바로 숲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웬 도적놈들이 암살 년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주변에 수백이나 되는 시신이 널려 있었으며 이리저리 잘려 나간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율리우스는 이 꼴을 보더니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이런 병신 같은 년을 봤나! 지금 누구를 모시고 가는 것인지 잊었더냐!"

"아, 그게."

"닥쳐라! 어둠의 암살자고 다크 섀도고 아주 병신 집단이구나!"

"...."

다크 섀도 조직원들은 사자의 추상과 같은 일갈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존심 상한다고 동맹과 싸운다?

'전부 극의를 뛰어넘은 절대자들이다.'

'붉은 서약이 나섰다더니 마스터가 직접 온 것이었군!'

그들이 모시는 '그분'의 유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동맹의 이유였는데, 잘못하면 날파리가 꼬여 일을 그르칠 뻔했다.

평소 같으면 욕을 처먹고 가만히 있을 안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감정을 다스릴 뿐.

부스럭!

그 순간, 수풀 쪽에서 인간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수십에 달하는 도적들이 습격해 오자 율리우스와 붉은 기사들이 나서 단숨에 도륙을 내 버렸다.

공간이 왜곡되며 푸르고 선명하게 나아가는 검격.

극에 이른 검객의 상징이었으며 차원의 힘까지 관여되며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주군! 모두 처리했습니다!"

"바로 돌아간다. 그분께서 기다리신다."

"예!"

"피는 최대한 닦고 가라!"

파밧!

율리우스는 한참 성질을 내고 돌아갔다.

그 역시 안센이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긴 했다.

'천 명이 넘어가는 자들을 도적으로 위장해서 보내? 이것들이 아주 미쳤구나?'

혹여 영지전이 끝나 가럿 자작이 무사하더라도 그 가문은 반드시 절단날 것이다.

시체가 즐비한 숲.

안센 트루엔은 사자에게 욕을 한창 처먹고 기분이 나락까지 떨어졌다.

다크 섀도 제1 조장 라크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피가 질척거리고 있는 대지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죽여 주십시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일어나라."

"하오나!"

"일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인다."

라크와 조원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걱! 서걱!

안센의 살기가 유형화되어 주변의 잔가지들이 잘려 나간다.

따끔한 예기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작 변방 영주 따위가 이 안센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영지전이 그분의 유희거리만 아니었다면 바로 조직을 총동원해 영지 전체를 몰살시켜 버렸을 것이다.

가럿 자작에게 명령을 내린 왕실은?

왕족 전체가 참살되어 진즉 성문 앞에 걸렸다.

"후우. 라크."

"예, 수장님!"

"특수조를 불러라."

"명에 따릅니다!"

다크 섀도의 진정한 사신, 특수조장 일레인.

암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하였으며 독에 정통하여 아예 깊게 연구하는 것이 취미인 미친 인간이었다.

그런 놈이 직접 온다.

빠르게 달려가던 라크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렸다.

'설마 가럿 영지군 전체를 중독시켜 버릴 작정인가?'

* * *

버켄 후작령까지 대략 두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웬 기사단과 함께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모여 있었다.

깃발을 보니 버켄 가문의 문양이었는데 왜 여기서 죽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자 버켄 후작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하하하! 이게 누구야? 우리 세력 최고 유망주인 베론 공자 아니신가? 그래,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으헉!"

"히이이잉!"

버켄 후작은 멋들어진 자세로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국 낙마하였는데, 오랜 시간 검술을 수련했기에 크게 다치는 일은 없었다.

"후작님! 괜찮으세요?"

"으아! 으허헉!"

"...."

버켄 후작은 뭔가를 보며 벌벌 떨었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마부와 하인들밖에 없었다.

후작의 눈깔이 살짝 돌아가며 그들의 위쪽을 바라봤는데, 베론과 기사들은 그가 환각을 본 것으로 생각했다.

'치매 말기인가?'

'그 추상같은 위엄을 가졌던 후작께서 어쩌다 환각까지 보게 되셨지?'

베론은 버켄 후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작님. 여긴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억! 허억! 미안하네. 요즘 자꾸 헛것이 보여서."

"설마 환청도 들리십니까?"

"말도 말게! 이제 갈 때가 된 것인지 자꾸 유령이 보이는 것이...."

'치매에 풍도 모자라서 정신병까지 걸렸다니. 고작 중년을 넘긴 나이에 어쩌다가.... 쯧쯧.'

베론은 선물로 가져온 약을 내밀었다.

"치매와 풍에 좋은 약입니다.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걸 마시고 조금이라도 건강해지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오! 이리 주게!"

후작은 그 자리에서 베론이 가져온 정체불명의 액체를 원샷 했다.

후작 측 기사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이었다.

봉신 가문의 선물이라도 독은 들어 있지 않은가 확인이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후작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웃었다.

"으하하하! 이제 좀 살 것 같군! 자네가 은인일세!"

'그거 그냥 약초 달인 물인데요?'

제11화. 극진한 대접 (2)

그 시각, 파이렌 영지.

해가 질 무렵이 되어 부기사단장 마르헨은 일상적인 점검을 위해 영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록 경! 혹시 그 뺀질이 년 못 봤나?!"

"소영주님께서 나가신 이후에는 못 봤는데요?"

"아오, 이걸 그냥!"

허세만 잔뜩 들어가 있는 허당 마법사 라시엔이 인챈트 마법을 할 줄 안다고 '사기'를 친 사건은 영지에서도 유명했다.

어쩌다 중력 마법과 아공간은 깨우쳤지만 2천 벌에 달하는 무구를 일주일 만에 인챈트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허풍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아크메이지를 뛰어넘었다는데, 그가 보기에는 개소리였다.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

중력 마법을 할 줄 안다면 영지 곳곳의 공사 현장에 투입해 뽕을 뽑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키려고 보니 또 어디에 짱박혔는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부단장님이 일을 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 아닐까요?"

"지가 소영주님이야, 뭐야! 감히 어디서 짱박힐 생각을 해!"

'매일 뺀질거리는 부단장님이 하실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사들은 괜히 길길이 날뛰는 부단장을 코미디 연극 보듯 봤다.

"공짜니까 데리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면 벌써 내쳤다."

"뭐, 언젠가는 오겠죠."

"에이, 마법사 인력을 부려 먹어 보나 했는데 이래서야 원."

부단장은 마법사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 부려 먹겠다는 뜻이 꺾이지 않은 것이다.

그 시각, 라시엔 아르마는 붉은 서약의 비밀 기지를 박살(?) 내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네놈들 마스터가 빵도 안 챙겨 주더냐!"

"예, 예! 갑니다!"

이 천연 동굴은 붉은 서약에서 그분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자금을 쏟아부어 만들어 낸 비밀 장소였다.

마탑의 미친 마법사는 그렇게 돈을 바른 기지를 던전으로 개조하겠다며 날뛰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마탑과 붉은 서약은 동맹 관계였고 마스터 역시 그녀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다.

'여기에 던전을 만들어 마검을 놓으려고 한다.'

'마검을? 그냥 선물로 드리면 될 텐데 굳이 내 비밀 기지를 망가뜨리는 이유가 뭐냐?'

'이런 천하에 멍청한 놈을 봤나! 그분은 유희를 원하신다. 드래곤 하트로 재련한 검을 그냥 선물로 준다고? 그분이 그걸 원하실까.'

'그도 그렇군.'

'추후 논공행상에서 네가 기지를 제공했다는 공로도 참작이 될 텐데. 싫으면 말고.'

'아, 아니다. 마녀 네 뜻대로 하지.'

결국 마스터는 붉은 서약의 조직원들을 수십이나 동원해 주었고, 마녀는 신나게 동굴을 개조하고 있었다.

"꾸에에엑!"

"끼에에엑!"

동굴 입구에서는 끊임없이 몬스터가 잡혀 들어오고 있었다.

고블린이고 오크고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는데, 붉은 서약 조직원들이 놈들을 생포하는 과정에서 꽤 맞았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끄으어...!"

철푸덕!

몇몇 개체는 내장이 완전히 망가져 녹색 피를 주룩주룩 게워 내더니 절명하기도 했다.

이 마녀는 그때마다 붉은 서약 조직원들을 타박했다.

"이런 무능한 새끼들! 그런 지능을 가진 놈들이 무슨 킹 메이커라고!"

'씨발, 마녀 년이...!'

'어째서 마스터께서 이 빌어먹을 년을 마녀라고 틈만 나면 씹는 줄 알겠구나!'

그놈의 성깔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라시엔 아르마 역시 이들의 불순한(?) 눈빛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공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던전을 완성해 마검을 쥐여 드려야 하는 것이다.

* * *

베론은 후작령에서 귀빈실을 배정받았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금장식과 미술품은 후작의 재력을 실감하게 했다.

문 앞에는 시녀들이 항시 배정되어 있었으며 마부와 하인들이 항상 뒤를 따랐다.

"너는 후작 각하의 마부일 텐데 어찌하여 계속 쫓아다니느냐?"

"각하께서 공자님을 모시는 데 한 점 모자람이 없게 하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그래?"

"예! 저 역시 이렇게 인품이 훌륭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영지를 나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마차 지붕 위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이었다.

심심해서 입이나 좀 털어 준 것이 다였는데 어딜 봐서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마부와 하인들은 베론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전혀 불편함이 없게끔 풀 케어(?) 서비스를 제공했다.

"다 좋은데, 하인보다는 하녀가 나은 것 같다."

쿵!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부터는 하녀로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응? 말이 그렇다고."

"예, 예! 이해했습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대충 가방 하나를 귀빈실에 던져두고 연회장으로 향한다.

연회장 바깥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테이블 위에는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산해진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디서 초빙했는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오다가 넘어져 몇 바퀴를 굴렀다.

"어이쿠!"

"후작님, 괜찮으십니까?"

"으하하하! 늘 있는 일이라네. 그래도 오늘은 상태가 좀 나아. 자네가 준 약을 먹었더니 말이야."

"아, 그러십니까?"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허헉!"

또다시 환각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파이렌 가문 기사들은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였지만, 후작가 기사들은 죽상이었다.

봉신 가문을 대표해 소영주가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정작 주군이자 제후인 후작이 이런 추태를 보이는 것이다.

베론은 어쩔 수 없이 후작을 부축했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풍이 무섭기는 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조심하라고 해야지.'

후작은 연회장 상석에 앉았는데, 그조차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약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가끔은 총명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후작님. 혹시 제국에서 온 소식은 없습니까? 잘못하면 저희 왕국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던데요."

"아직 자네 영지로는 소식이 가지 않은 모양이군! 제국 내전이 종료되었다네!"

"벌써 말입니까?"

"하하.... 몰랐나? 몰랐겠지?"

"최근 일어난 일이라면 제가 그걸 알 수는 없죠."

"암. 그렇겠지. 하여간 새로 즉위한 황제는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해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네."

"빠르네요."

"아마 제3의 세력.... 으헉! 잘못했습니다!"

후작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몸을 움츠리더니 벌벌 떨었다.

그가 진정하는 데 한참 걸렸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허험. 현 황제가 이끄는 비밀 결사대가 전부 숙청해 버린 것으로 보이네."

"잘됐네요."

"그, 그렇지?"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국은 행운으로 가득하니 말입니다."

"하하하! 그래! 모두 자네 덕분일세!"

"후작님 덕분이지요!"

베론과 후작은 덕담을 주고받았다.

한편, 이 절대적인 존재를 모시고(?) 있던 후작의 진심은.

'무서운 인간들...! 전 황제를 단칼에 죽여 버리는 것도 모자라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허수아비를 황위에 올려?'

"그건 그렇고, 영지전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아, 맞아! 오늘 제가 방문한 이유는 후작님께 감사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감사라니! 당치도 않네! 가럿 자작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은 감히 아군을 배신하고 국왕에게 붙었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후작은 오늘 처음으로 호랑이 같은 기세를 드러냈다.

그러더니 허공에서 무언가를 보고는 바로 몸을 움츠렸다.

"으헉! 잘못했습니다!"

"...."

"크흠. 어쨌든 이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네. 이대로 배신자를 방치하면 우리 세력의 결속이 무뎌질 수 있음이야. 그 때문이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니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감사합니다. 금광이 개발되면 공물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니까?"

"각하의 뜻이 굳이 그러시다면야...."

베론은 뭔가 알 수 없는 운이 연속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꼈다.

영지전을 한다고 하니 후작이 치매에 걸려 무식하게 퍼 주는 중이다.

2천 벌에 이르는 무구를 모조리 인챈트해서 보내지를 않나, 지금은 식량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했다.

'아낌없이 주는 호구라니. 역시 내 운빨이 최강이지.'

* * *

그 시각, 가럿 자작령.

가럿 자작은 요즘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파이렌 영지의 소영주가 후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고 떠났을 때, 암살자를 파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암살자로 위장한 헤롯 경과 왕실 직할 부대 100명이 영지 후문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걸 발견한 병사들은 불안에 떨었다.

[파이렌 자작이 암살단을 보냈다!]

[총 100명 규모! 그러나 다행히 모두 참살했다.]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다음 날이 되어 가럿 자작은 두 번이나 암살단을 보냈으나 이 역시 모두 실패했다.

이번에는 시신이 영주성 앞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다.

열을 받을 대로 받은 가럿 자작은 기사단의 반과 1천 규모의 병력을 도적 떼로 위장해 보냈다.

이쯤 되니 병사들은 지금껏 암살단을 누가 보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국왕 폐하의 보호를 받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광산을 차지하라는 왕명이니, 정당한 무력행사일 뿐이다!"

병사들은 찜찜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왕명이라는데 어쩔 것인가?

국왕과 정적 관계에 있는 제후들도 일단 왕명이라면 받고 봤다.

하물며 병사들 따위야.

문제는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영주님! 도적 떼로 위장한 병력이 모, 모조리 참살되었습니다!"

"뭣이?!"

가럿 자작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순식간에 왕실에서 지원한 모든 병력을 잃은 것이다.

필경 국왕이 경질할 것이다.

"광산만 손에 쥐면 된다!"

가럿 자작의 욕심은 꺼질 줄을 몰랐다.

보름 정도 후면 영지전이 벌어진다.

왕실 병력을 잃었더라도 광산만 차지하면 왕실에서도 별말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가럿 자작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주님! 병사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병사들이 어쨌기에?"

"와서 보십시오!"

군사 훈련을 받던 영지군이 갑자기 쓰러지더니 복통을 호소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얼굴이 퍼렜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절명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날 하루만 수백에 이르는 영지병이 죽었다.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지병이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자 가럿 자작은 벽을 느꼈다.

"파이렌 자작.... 도대체 너는 정체가 뭐냐?"

* * *

베론은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반쯤 취해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오전 10시.

곧바로 시녀들이 들어와 목욕시키더니 룸서비스(?)까지 제공해 주었다.

해장까지 완료한 베론은 정오가 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고급 마차는 물론 그 뒤로 금괴와 은괴, 식량이 잔뜩 실려 있는 수레가 즐비했다.

"후작님! 이게 대체 뭡니까?"

"허허허! 자네 왔나? 좀 더 자지 않고."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이건 저번에 약조한 지원금일세."

"지원…금이요?"

베론은 잠시 후작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블루 마운틴으로 향하는 도중에 후작이 마중(?)을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마차에서 함께 가면서 후작은 아버지의 사업을 지원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뭐야. 유리온실 말일세."

"아! 저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제후의 약속에 허언은 없다네. 본인이 보기에 파이렌 영주의 사업은 수익성이 높아 보이고 성공할 가능성도 커."

'유리온실과 후추가? 십중팔구 실패하고 시작할 텐데.'

아버지가 농사 전문가라고 해도 생전 처음 심어 보는 작물은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당장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베론이 보기에는 돈지랄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지원을 마다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자네가 쓰게."

"뭐 이런 것을 다."

후작은 묵직한 금화 궤짝을 하나 선물로 주었다.

이러다 영지 거덜 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표정이었다.

"부족하면 말하게! 언제든 지원하겠네!"

"아닙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요!"

"허허허! 자네가 기뻐하니 그걸로 되었네."

도대체 누가 버켄 후작을 남부의 호랑이라고 하였나!

그는 불쌍하게 꿀통을 강탈당하는 꿀벌 신세일 뿐이다.

베론은 고작 약초 달인 물 하나 가지고 들어와 주머니가 터져 나갈 정도로 묵직하게 돌아갔다.

"역시 치매가 좋아. 어디 악화하는 약은 없나?"

제12화. 수상한 던전 (1)

버켄 후작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가셨군.'

마지막까지 '그분'은 만족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를 받아 보아야 한다.

만일이라도 그분을 모시는 데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면 후작의 모가지는 당장 내일이라도 비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잔뜩 빠져나간 금은보화.

영지의 기사단장은 아무리 배신자의 처리 문제가 중요해도 이렇게까지 퍼 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각하. 너무 무리를 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무리를 해?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나."

"너무 과한 지원입니다."

"저 금은보화 중 일부는 후작령의 자원이 맞다. 하나 이는 통상적으로 배신자를 처단하는 비용이라고 봐야겠지.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지원이 왔다."

"다른 곳이라면...?"

"경은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은 궁금해하였으나 묻지 않았다.

그조차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라면, 정보를 습득하는 즉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오랜 시간 후작을 모셔 온 단장은 그렇게 확신했다.

기사들과 헤어진 후작은 몰래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평가를 위해서였다.

후작 가문 사냥터에 떡하니 붉은 서약 비밀 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언제 설치하였는지 후작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붉은 서약의 은밀함에 소름까지 끼쳤다.

비밀 장소 안에는 붉은 기사들이 바뀌어 있었다.

전에는 전원 남성이었지만, 이번에는 전부 여성이었다.

'서, 설마 그분께서 하인은 싫다고 하여 시녀로 교체한 것인가?!'

시녀로 위장했다고 하여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붉은 기사들은 기본이 극에 다다른 경지를 지녔다.

시녀들이라고 한들, 기세를 감추지 않으니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어둑어둑한 동굴 안에는 웬 창백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로서 눈이 뒤집힐 정도로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으나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륙상단의 주인.'

이번에 자작가에 지원된 자금의 대부분은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붉은 서약은 물론 다크 섀도와 마탑까지 움직이는 사람이 대륙상단이라고 움직이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여자의 곁에 서 있는 자의 기도조차 심상치 않았다.

'미친...! 얼굴에 난 긴 칼자국, 그레이트 소드를 다루는 거한. 설마 용병왕인가?'

후작은 이 압도적인 스펙(?)의 인간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창백한 미녀가 입을 열었다.

"잘했어요. 실수가 있었다면 당신의 가문은 멸문했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자금은 동결되고 기사단부터 하나씩 몰살이 됐겠죠. 가문 사람들은 실종되고 당신은 최종적으로 마녀의 실험체로.... 아니지. 하나씩 사지가 절단되고 최후에는 키메라가 됐을 수도."

"...!"

백치미가 있어 보이는 미녀는 극악한 형벌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마치 길 가다가 돌멩이가 있어서 치워 버렸다는 농부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후작의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그저 그분께서 가시는 길에 자양분이 되어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온데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뭔가요?"

"왕실이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국왕이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가 뭔데 움직이겠어요?"

"예...?"

"움직이는 순간 제국과 전면전인데?"

후작은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면서도 이 인간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제국의 정권이 뒤집혔다.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우고 막후에서는 이 괴물들이 조종하고 있었으니 제국군을 움직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자타 공인 대륙 최강국 마이언 제국.

무려 대륙의 3할을 삼키고 있는 거대한 국가였으나 나라가 큰 만큼 파벌 싸움은 웬만한 국가가 명함을 들이밀지 못할 정도였다.

최소 다섯 개 파벌이 서로가 미는 황자를 즉위시키겠다고 난리였으니 지금까지 분열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최근 마이언 제국은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황권 강화에 성공한 젊은 황제가 즉위해 국정을 잘 운영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암살당했다.

제국 내 수많은 파벌이 난입하고 잘못하면 국가가 조각날 위기에 처했었다.

그걸 모조리 정리하고 피의 황좌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12황자 제논이었다.

황태자파, 중립파, 귀족파, 2황자파, 3황자 파벌의 수장들을 한꺼번에 치워 버린 황제.

심신 미약으로 유명했던 12황자가 숙청을 거듭해 등극하니 제국은 공포에 떨었다.

지금껏 뒤에서 힘을 키우고 있다가 갑자기 실력을 드러낸 것이었으니 제국 정계는 살얼음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는 안전하지 않았다.

'너는 우리들에 의해 옹립될 것이다. 황위에 올라 명령에 따르도록.'

처음에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극도로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고 소심한 자신이 황위에 올라?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문제는 정말로 정적들이 숙청되면서부터였다.

[엔티크 가문 몰살. 배후에 12황자가 있어.]

[라데인 가문 몰살. 배후에 12황자가....]

정적을 제거하는 수준을 넘어 가문을 통째로 뿌리 뽑아 버린다.

제논은 이 말도 안 되는 무력을 가진 자들이 붉은 서약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가 황위에 오르자 붉은 서약의 수장은 황제에게 목적을 밝혔다.

'네가 황제가 된 이유는 하나. 오직 우리의 왕을 위해서였다. 당장 크림슨 왕국 왕가에 압박을 넣어 국왕 놈이 남부에 신경을 끄도록 유도하라. 첫 임무에 실패하면 네놈은 선황이 그랬던 것처럼 모가지가 꺾일 것이다.'

선황의 죽음과 본인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그 뒤에 붉은 서약이 있었다.

그는 죽음이 무서웠으므로 즉위 첫날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황명을 하달했다.

"크림슨 왕국에 연락해 당장 왕국 남부 지역에 신경을 끄라고 전해라. 이를 어길 경우에는 전면전이다."

* * *

제국으로부터 시작된 나비 효과가 크림슨 왕가를 타격하든 말든, 베론은 유유자적하게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고급 마차 뒤에는 줄줄이 금은보화가 가득 실린 수레가 딸려 왔으므로 영지민 모두가 나와 구경했다.

금괴와 은괴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베론을 맞이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저번에 아버지께서 유리온실 사업을 후작님께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후작께서 지원해 주신다고 했는데 이게 그 지원금입니다."

"그게 정말이니?"

"영지전에 대한 지원 자금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업 지원금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유리온실에 사업성이 있었다고...?"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가 유리온실 사업을 한다고 하였을 때, 뒷목을 잡고 잠시 쓰러졌던 어머니였다.

후작이 지원할 것이라며 아버지는 큰소리를 탕탕 치셨지만, 어머니의 분노에 깨갱한 후 남몰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후작의 지원이 도착했다.

어머니로서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사실 후작에게 치매가 와서 그래요. 제정신이면 미쳤다고 망할 사업에 투자하겠습니까?'

베론은 차마 가정의 평화 때문이라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밀어주어야 한다.

'이혼은 막아야지.'

"아버지의 혜안이 드디어 빛을 발했습니다!"

"오래간만에 영주다운 일을 하셨네요?"

"에헴! 내가 이런 사람이오!"

"오늘 밤에 기대하세요."

"그, 그건...."

"남편 노릇은 그만두시게요?"

"으아아아...!"

아버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셨다.

베론을 비롯한 기사들은 영주 부부의 관계 개선(?)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가뜩이나 어머니는 폭발을 하기 직전이었는데 이번에 어마어마한 지원금이 들어오면서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어머니. 저는 피곤해서 좀 쉬겠습니다."

"오냐, 내 아들! 고생 많았다!"

사실 베론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하루 종일 마차에 누워 햇볕을 쬐며 후작령에 도착해 술만 퍼마시다 온 것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뻐 보이는 법.

아버지가 관여했다지만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마땅히 짱박힐 자격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베론의 일과는 검술 수련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영주가 되어야 하고, 전쟁도 겪어야 할지 모른다.

그때, 애먼 칼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두 시간 정도는 꾸준하게 검을 수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수련을 명목으로 기사들을 적당히 두들겨 팬 후에는 씻고 식사를 한다.

오전 8시 정도가 되면 어머니가 업무를 시작할 때가 되었으므로 튈 준비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늘은 비밀 별장으로 가야겠군."

귀족 하면 또 별장 아닌가.

차곡차곡 쌓아 온 용돈으로 재작년에 비밀 별장을 지었다.

작은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 수준으로 지금 와서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베론은 어머니가 부르기 전에 마구간을 찾았다.

"어?"

"안녕하십니까, 소영주님!"

"쉿. 나 끌려가는 꼴 보고 싶은 건 아니지?"

"아이고, 소인이 왜 그러겠습니까?"

"너는 후작 가문 마부가 아니냐. 왜 여기서 말똥을 치우고 있나?"

"잠시나마 공자님을 모시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여기 아름다운 시녀들도 골라 왔습니다!"

마부는 자신 있게 가슴을 탕탕 쳤다.

확실히 마부와 함께하는 시녀들은 아름다웠다.

고작 말똥이나 치우고 있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험험. 굳이 후작 각하의 뜻이 그렇다면야 봉신 가문의 후계자로서 거절할 수는 없지."

"헤헤,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 마차도 반짝거리게 치워 놓았습죠!"

마부는 타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마차를 꺼내 놓았다.

당연히 각하.

"몰래 영지를 빠져나는데 이런 것을 타라는 거냐!"

"아이고,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부는 말똥 냄새가 가득한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일어나라. 누가 보면 내가 사람 잡는 줄 알겠다."

"소인이 소영주님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딱히 그럴 필요는...."

"말 관리인으로 가겠습니다!"

"뭐, 그러든지."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더 이상 마부와 실랑이할 여유가 없었다.

이러다 어머니에게 잡히면 하루 종일 후계자 교육을 빙자한 서류 고문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호숫가 비밀 별장.

베론은 평소에도 숨어서 빈둥거릴 곳이 없나 찾아다닌다.

그렇다고 그냥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놀거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낚시도 베론의 취미 중 하나다.

첨벙!

"읏차!"

거대한 송어 한 마리를 낚아 올린다.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마부와 시녀들이 물개 박수를 쳤다.

"와아! 공자님, 최고예요!"

"멋져요!"

"꺄아아악! 결혼해요!"

"그건 너무 갔다."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

마부와 시녀들은 별장을 찾아와 묵혀 있는 먼지를 청소하고 베론이 놀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였다.

그 덕분에 편해지긴 했는데 가끔 이들이 오버 액션을 하는 것이 문제였다.

송어 한 마리 잡은 것이 뭐라고 박수를 치며 난리인 것이다.

몇 마리 잡았으면 구워야 한다.

한창 요리를 하는 와중에 허당 마법사 라시엔이 달려왔다.

"소영주님!"

"마법사님은 어디 짱박혀 있다가 이제 오시는 겁니까?"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뭔 일이라도 터졌어요?"

"제가 산속을 헤매던 도중에 던전을 발견했어요!"

"던전?"

"제가 던전 입구를 해석해 보니 신화시대의 것으로 보여요!"

"신화시대의 것이라고요?!"

베론은 깜짝 놀랐다.

던전은 쓰레기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던가?

영지에 신화시대 던전이 발견됐다고?

놀람이 가시자 베론은 자연스럽게 상황이 유추됐다.

'쯧쯧, 이 허풍 심한 마법사가 또 도주하려다 던전을 발견한 모양이군. 거기서 죽을 뻔했다가 쫓겨 온 곳이고.'

포르투나의 강력한 가호가 발동한 듯 보였다.

제13화. 수상한 던전 (2)

영주성 집무실.

어머니는 베론이 갑자기 찾아오자 깜짝 놀라셨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영지 업무에 집중하려는 거니?!"

이런 일은 매우 드물다.

보통은 어머니가 베론을 책상머리에 앉히기 위해 갖은 수를 썼으나 쉽지 않았다.

강제로 불러오려 치면 기사들이 온 영지를 뒤지고 다녀야 했다.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역시 네 애비와는 근본이 다르구나! 암. 그래야지. 이 어미를 닮았다면 마땅히 권력의 귀중함을 알고 지킬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았단다. 네 동생은 방구석에서 나오지를 않고 너는 항상 놀기에 바쁘니 어미의 속이 터졌느니라."

아무래도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다.

베론은 어머니가 괜히 '은퇴'를 거론하시기 전에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우리 영지에서 던전이 발견됐어요!"

"응? 그러니? 일단 앉아서 서류 정리부터 하자. 이번에 영지전을 하려면 꽤 고생해야 하지 않니."

"어머니. 던전이라니까요?"

"그냥 늑대 굴이겠지."

베론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인식하는 던전의 인식은 이 모양이었다.

포상금을 노린 약초꾼들이 던전으로 추정되는 동굴 등을 신고하였는데, 이게 한 해에만 열 건이 넘었다.

실제 뭔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고, 대부분은 동물이나 몬스터 소굴이라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가 던전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결이 다르다.

"무려 신화시대의 던전이라고 합니다. 고대 문자들이 입구부터 새겨져 있다던데 한번 탐사할 필요는 있어 보여요."

"누가 발견했는데?"

"여기 마법사님이요."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영지 내에서 마법사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두 번이나 도주했다가 간신히 객사를 면하고 돌아왔다.

그런 여자가 내뱉은 정보에 신뢰성 따위는 없는 것이다.

"에휴. 네가 찾아온 이유가 새로운 놀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구나?"

"그 무슨 참담한 말씀이세요? 저는 영지의 발전을 위해...."

"마르헨 경과 영지병 50명을 붙여 주마. 토벌하고 오거라. 대신, 돌아오거든 내일 하루는 이 어미와 함께 업무를 돌보기다. 너도 이제 슬슬 영주가 되어야 하니 준비해야지."

"던전이 마물 소굴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속이다?"

"물론이죠."

"당장 다녀오거라! 다만 결과에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신화시대 던전.

그 말이 마법사로부터 나왔다는 것부터 신뢰성이 바닥이었다.

그러나 정작 던전을 개발(?)한 마법사의 내심은.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던전으로 향하는 길.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는 마르헨 경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아오, 저 뺀질이 마법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지?"

"저는 비번이었습니다."

"크윽. 저녁에 마레나 양과 데이트가 있는데 고작 마물 토벌 때문에 미루어야 한다니...!"

병사들도 불만이 많았다.

뻔히 소영주가 곁에 있음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평소 베론과 병사들의 사이가 막역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 귀찮아하지 말자고. 혹시 알아? 막대한 보물이 발견될지. 그럼 나도 너희도 팔자 펴는 거야. 잭 팟 터져서 집이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르잖아. 집 없는 남자 인기 없다?"

"하하하! 소영주님. 뺀질이 마법사가 발견한 던전은 박쥐소굴일 겁니다. 던전이라는 신고가 들어와 출동해 보면 대부분 박쥐 똥이 가득하거든요."

"나도 알지. 근데 신화시대 던전이라잖아?"

"저 마법사의 나불거림 이외에는 증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실패해도 오늘 수당 빵빵하게 준다! 나 돈 많거든."

"오오! 소영주님 만세!"

병사들의 사기가 단번에 치솟았다.

군인이라고 돈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먹고살기가 힘들어 군인이 된 사례가 많았으므로 돈에 환장하는 용병 못지않았다.

수당이 나온다는 소리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잠시 쉬는 시간.

산 중턱에서 간식을 먹으며 20분 휴식을 명했는데, 마부와 시녀들이 바쁘게 베론의 시중을 들었다.

"너는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고생이냐?"

"헤헤, 공자님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입지요!"

"위험할지도 모른다니까 그러네."

"별일 있겠습니까? 부기사단장님과 영지군 여러분들이 계시는데 말이죠."

마부와 시녀들은 베론이 굳이 만류하는데도 쫓아왔다.

처음에는 만류도 했지만, 함께 다니면 꽤 편안해지는 것이 사실인지라 더 이상 거절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던전 입구.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던전은 확실히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놀랍게도 차원 왜곡장에 입구가 가려져 있기까지 하다.

병사들은 분명히 넝쿨이 즐비한 입구인데 부드럽게 몸이 통과하는 것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던전이잖아?"

"세상에 이런 던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던전에는 차원 왜곡장이 기본이다.

베론의 식으로 해석하면 환영 마법.

천연 동굴과 다르게 인위적인 티가 역력하였으며 아직 깨끗하게 던전이 보존되어 있었다.

"설마 이건."

"네! 유지 결계까지 펼쳐져 있어요. 신화시대 그대로 깨끗하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죠."

허당 마법사의 설명이었다.

던전에 먼지 한 톨 없다.

천연 동굴은 확실해 보였는데 마치 조금 전까지 쓸고 닦으며 광을 낸 듯한 흔적이 가득하였다.

던전이 박쥐투성이라고?

그딴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으며 매우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쿠엑!"

하지만 이곳도 던전은 던전.

웬 좀비같이 보이는 몬스터가 비적비적 걸어왔다.

"좀비 오크...?"

베론은 검을 손에 쥐었다.

영지 내에서 그보다 검을 잘 쓰는 이는 없었다.

왕국 아카데미 교관들조차 모조리 베론에게 꺾여 졸업할 즈음에는 적수가 없었으니 고작 좀비 오크에게 당할 리는 없는 것이다.

파밧!

베론이 몸을 날렸을 때, 갑자기 좀비 오크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꾸억!"

"...."

검조차 닿지 않았음에도 쓰러진 후 피를 질질 흘리는 좀비 오크.

자세히 살펴보니 좀비도 아니었다.

온몸에 멍이 든 것은 기본에, 내부가 진탕된 채 걸어 다니다 베론에게 발견된 즉시 죽어 버린 것이다.

"오오! 역시 공자님입니다!"

마부가 잽싸게 앞으로 나오며 아부했다.

함께 온 시녀들도 물개 박수를 친다.

"꺄악! 공자님, 대단하세요!"

"기세만으로 몬스터를 척살하다니, 멋져요!"

'운이 좋았군.'

베론은 당연히 운으로 치부했다.

방금 나타난 개체는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지켜보던 부단장과 병사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다.

"소영주님 운빨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뭐."

"그러게 말입니다. 마법사님! 여기가 신화시대 던전이 맞기는 한 겁니까? 몬스터가 너무 허접한데요."

"무, 물론이죠! 저는 이래 봬도 아주 뛰어난 마법사랍니다?"

"개뿔."

병사들도 마법사를 무시했다.

두 번이나 도주했다가 얼마 못 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영지 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오크는 기본에 미노타우로스, 오우거까지 존재하였는데 하나같이 허약해 빠졌다.

베론을 발견하자마자 발작을 일으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던전 공동과 이어진 방.

곳곳에서 금괴가 발견되었다.

"영주님! 금입니다!"

"여긴 은이 가득하군요!"

"헉! 이건 미스릴 아니야?"

"정말로?"

"와서 보십시오!"

병사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신기하게도 정말로 던전에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금과 은만 발견해도 베론의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미스릴까지 있었으니 병사들은 정말 거액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베론은 허당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득의양양했다.

"어떠세요? 정말 신화시대 던전이죠?"

"이햐, 마법사님! 알고 보니 허당이 아니었군요?"

"이게 끝이 아니에요."

마법사는 베론을 어디론가 안내하였다.

동굴 가장 깊숙한 곳.

하늘에 박혀 있는 차원석에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아래, 검 한 자루가 박혀 있다.

"이건?!"

"마검 같아요."

"마검이라.... 마법으로 차원을 왜곡시키는 검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베론은 마검을 뽑았다.

검을 통해 강렬한 기운이 체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백광을 냈고, 내재된 힘은 베론이 지금까지 쌓아 온 차원의 힘을 뛰어넘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영지전을 앞두고 막대한 양의 재화와 마검이 존재하는 던전이 발견되었다?

누군가 조작을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베론은 포르투나의 가호를 입은 자.

엄청난 운이 작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법사가 물었다.

"공자님? 만족하셨나요?"

"만족스러운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장하십니다."

"와아, 만세!"

"크윽! 공자님께서 만족하셨다니 제가 다 감격스럽습니다!"

"마부는 왜?"

"그냥, 그렇다고요."

시녀는 질질 짜기까지 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베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인간들이 뭔가 또 착각했나?'

* * *

던전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한 베론은 영지에 전령을 보내 지원군과 수레 등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묵직하게 수레들을 채워 귀환했다.

영주성 앞까지 뛰쳐나온 어머니는 굉장히 놀라워하셨다.

"이게 다 뭐니?!"

"던전에서 발견한 것들이요."

"정말로 던전이었어?"

"제가 한 운빨하잖아요?"

"하여간 너는 정말."

어려서부터 수상할 정도로 운이 좋았던 베론.

그 운은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내려왔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머니도 부정하지 않으셨다.

"제가 어떻게든 될 거라고 했잖아요?"

파이렌 가문의 부자(父子)가 영지전을 터뜨리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

'당신! 어쩌자고 영지에 전쟁을 몰고 왔어요?!'

'우리 아들이 이익이 될 거라고 해서....'

'대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애가 판단을 잘못하면 아비라도 말렸어야지!'

'험험. 어머니?'

'너도 문제가 있다. 전쟁이 애들 장난이니?'

'어떻게든 될 것이니 걱정 마세요.'

'매사에 대충 넘기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네. 이번에 어떻게든 안 되면 제가 어머니 밑에서 매일 혹사를 당하며 일을 배우겠습니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

그게 실현되고 있었다.

후작 가문에서 갑자기 마도구를 지원하지를 않나, 던전이 발견되어 어마어마한 양의 재화를 획득하지를 않나.

모든 상황이 운명처럼 딱딱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던전에서 마검도 발견했어요."

"마, 마검?!"

"제가 운이 원래 좋잖아요."

"하....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어머니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머리를 굴려봐야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자작 부인은 깨닫는다.

'어쩌면 무사안일주의가 맞는 것 아닐까?'

제14화. 왕실의 빠른 손절 (1)

영지전까지 3일이 남은 시점, 가럿 자작은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 밑은 퀭하고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간다.

파이렌 자작 따위야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사라졌기에 시시각각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가신들은 자작이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조심조심 보고를 올렸다.

"영주님. 병사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내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탈영하고 있다고?"

"현재까지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탈영하고 제대 신청자들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이 월급 도둑놈들 같으니!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들이 감히! 도대체 이유가 뭐라더냐!"

"…자작령에 저주가 내렸다고 합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독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쾅!

"다 잡아 와! 본보기로 목을 잘라 효수하란 말이다! 설마 너희들의 목이 잘리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뭣들 하고 있느냐! 가서 탈영병들을 잡아 목을 베지 않고!"

"옛!"

가신들은 탈영병 대신 자신의 목이 날아가지 않을까 우려해 곧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자작이 미쳤구나.'

'나도 야반도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영지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자작이 벌써 이렇게 히스테리를 부려 대면, 패배의 순간 가신들의 목이 모조리 잘릴지도 몰랐다.

이미 몇몇 가신들은 도주하기도 했다.

자작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

그래도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자작님! 왕실에서 심판관이 내려왔습니다!"

"오오! 그래? 몇 명이나 되나? 설마 혼자 오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1천의 병력과 함께 왔습니다."

"왕실 정예병 천 명만 있어도 숨통이 어느 정도 트인다."

가럿 자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들어 영지병들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2천 명이나 되던 병력은 점점 줄어 반도 남지 않았다.

왕실에서 빌려 온 병력은 파이렌 소영주를 암살 기도하다 모조리 잃었으니 징집병으로 채워야 할 판이다.

이런 위기에 왕실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왕실에서 심판관으로 내세운 사람은 중앙 정계의 거두인 마르젤 백작이었다.

'국왕이 금광에 관심을 끌 이유가 없지. 금맥이 노천으로 튀어나올 정도이니 어마어마한 양이 채굴될 것이다. 이걸 무시하면 왕으로서 자격이 없음이다.'

자작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웃는 낯으로 백작을 맞이한다.

"아이고, 백작님! 이 누추한 영지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누추하긴 하더군."

"…예?"

"거리에는 빈민이 넘쳐나고 병사들의 탈영은 줄을 잇고 있다지?"

"파이렌 자작이 수를 악독한 수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독? 어디 파이렌 자작이 그럴 사람이던가? 농사일에만 신경을 쓰고 사는 선량한 영주일 뿐이다. 거기에 시비를 건 네놈의 잘못이고."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작은 불안함을 느꼈다.

이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딴 식으로 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젤 백작이 어디 보통 귀족인가?

국왕파의 핵심 인물로서, 차기 재상으로 유력하다.

수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영지를 가진 왕의 방파제이자 명문가로서의 인맥도 대단했다.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만큼 금광을 개발해 자금력을 틀어쥐어야 할 텐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으니 불안한 것이다.

"하하.... 백작께서 여독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일단은 풀고 나서 이야기를...."

"치워라! 네놈의 멍청한 술책으로 국왕께서는 수많은 병력을 잃으셨다. 그 무능함이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왕실과 함께할 수 있으랴. 이제 네놈과 우리 국왕파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이다."

백작이 일어나자 가럿 자작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상황에 국왕에게까지 손절당하면 그는 정말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거 놓지 못할까! 이러다 목 날아간다."

더 이상 항변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싸늘한 표정의 백작.

가럿 자작은 백작이 나가자마자 피를 토했다.

"우웨웩!"

"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파이렌 자작 이노오오옴!"

* * *

그 시각.

파이렌 자작은 아들과 유리온실 설계도를 검토하던 중 갑자기 귀가 가려워졌다.

"아버지. 듣고 계세요?"

"응? 당연히 듣고 있다!"

"유리온실은 말만 농업이지 마도 공학에 가깝습니다. 이해하셨죠?"

"샤론이 알아서 잘 설계했겠지."

"그건 그렇지만, 그 녀석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전문가인 아버지의 검토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도 안다. 작물에 따른 온도와 습도, 빛의 양 등이 기가 막히게 조절되어야 하지."

"그럼 됐습니다."

금광은 개발되기도 전이었지만, 아버지는 후작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벌써 프레임 제작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유리온실은 100% 유리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리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는 뼈대부터 잡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프레임 제작에 손이 많이 간다는 점이다.

"유리의 시제품을 보니 생각보다 불순물이 많고 프레임은 견고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폭설이라도 내리면 유리가 깨질 수도 있고...."

"그러면 안 되지."

"아무래도 조금 미루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럴 수는 없다! 곧 봄이 되는데 당연히 때에 맞춰 후추를 심어야지?"

아버지는 다른 분야에 젬병이라도 농사만큼은 진심인 남자다.

이미 큰돈을 들여 후추가 나는 지역의 사람들을 섭외하고 수많은 참고 서적을 모았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게 후추 재배를 이해한 것이다.

아버지는 햇빛을 고려한 지역의 설정과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 덜 받을 수 있는 안전지대에 땅을 다져 놓았다.

얼마나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는지, 유리온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기초 공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해 버렸다.

"그럼 프레임을 강철 소재에서 목재 소재로 바꾸어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어떨까요? 유리 역시 강화 유리를 택해야 할 것 같은데...."

"불가하다. 너도 알다시피 관리를 아무리 잘해 봤자 목재는 한계가 있지. 잘 지은 집은 천 년을 간다지만 그건 외장재를 잘 선택했을 때의 이야기고. 유리온실에 외장재를 쓸 수는 없느니라."

"그건 저도 인정을 합니다만."

'어디 알루미늄이라도 없나?'

베론은 반쯤 강제로 끌려왔지만 이런 큰일을 아버지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어디 유리온실이 가벼운 프로젝트인가?

영지의 사활을 걸어야 할 정도로 거액이 들었고 일이 잘못되면 베론의 유유자적한 귀족 생활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으므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베론은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보니 속이 터져 나감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고집불통이 없는 것이다.

"목재와 강철 소재 하이브리드는 어떻습니까?"

"온실은 무조건 강철이야!"

"아니, 그게 무게 때문에 설치하기가 쉽지 않다니까요."

"어떻게든 네가 해야지!"

"아오!"

어머니가 왜 아버지를 매일 바가지 긁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베론이 혼자서 참을 인을 새기고 있을 때였다.

"영주님!"

멀리서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기사.

파이렌 자작령에 이토록 몸과 입이 가벼운 기사는 한 명밖에 없었다.

"마르헨 경! 무슨 일인가?"

"우리 영지에 드워프가 찾아왔습니다!"

"응? 뭐가 찾아와?"

"드워프요! 전설의 대장장이 종족 말입니다!"

"...!"

파이렌 부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리온실 문제로 드워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방금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 드워프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다고?

아버지는 베론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으셨다.

"으하하! 말하지 않았느냐?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고?"

"어.... 그건 그런데."

분명 원탁의 게임에서 드워프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했었다.

[제국 남부에 드워프가 출현합니다.]

베론의 영지에도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도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드워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드워프가 출현했으면 제국에서 먼저 채 갔어야 한다.

어찌어찌 노예 신세를 피하기 위해 크림슨 왕국으로 내려왔어도 왕실로 가야지 남부 오지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부자(父子)는 드워프가 도착했다는 성문으로 달려갔다.

워낙에 귀한 존재이기에 평소 미적거리기 좋아하는 부자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영지를 가로지른 것이다.

성문 앞에 드워프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땅딸막한 키, 덥수룩한 수염, 굵직한 허리와 다리.

전신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드워프 특유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드워프는 영주가 아닌 소영주에게 넙죽 엎드렸다.

이건 문제가 아니다.

파이렌 영주는 영주 일을 때려치운 지 오래였으니까.

그보다는.

"드워프가 왜 여기에 있지...?"

"소영주님! 제발 저를 좀 받아 주십시오!"

"어.... 왜요?"

"아니면 저는 죽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드워프라니. 너무 부담스러운데...."

쿵! 쿵!

자신을 켈트라고 밝힌 드워프는 파이렌 영지가 아니면 안 된다고 머리를 박아 댔다.

'이것도 포르투나의 가호인가?'

드워프는 노예상에게 잡혀 제국으로 넘어갈 뻔했지만,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고 한다.

도주하던 중에 쓰러져 왕국으로 오는 상단에 다시 잡혔는데, 수도 부근에서 다시 탈출을 감행해 이 먼 오지까지 오게 됐다.

베론이라면 자신을 노예로 삼지 않을 거라나 뭐라나.

"어째서 제가 당신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고 장담하는데요?"

"그야.... 아무튼! 이곳이 마음에 듭니다! 여기서 일하게 해 주십시오!"

"제국이나 왕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드워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긴 하다.

생각해 보면 드워프의 우여곡절은 어설픈 점이 많았다.

제국에 드워프가 출현했다는 정보는 고작 한 달 전에 받았다.

그 한 달 만에 제국에서 탈출해 왕국 남부까지 왔을 정도면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야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드워프가 제 발로 찾아와 일을 하겠다고 간청하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제국과 왕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기사들까지 베론에게 가스라이팅당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고민하던 베론 역시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하하! 환영합니다, 켈트 님. 당신의 말대로 제국과 왕국 왕실이 문제이긴 해도 뭐 어떻게든 되겠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워프가 머리를 찧어 대는 와중에 마부가 있는 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이지만 베론은 그 속에서 후작의 잔재를 보았다.

'설마 치매 걸린 드워프는 아니겠지?'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든다.

'불순한 생각은 하지 말자. 이걸로 유리온실은 해결이군.'

이제 아버지는 베론과 상의할 필요가 없어졌다.

드워프라면 훌륭한 유리온실을 만들어 줄 것이다.

평소에도 운이 좋았지만, 오늘은 억세게 좋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급보가 하나 더 들어왔다.

"소영주님! 왕실에서 국왕 폐하의 친서를 든 사자가 영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폐하의… 친서?"

이번에는 베론도 무슨 일이 터진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대관절 국왕씩이나 되는 인간이 어째서 공식 명령도 아닌, 친서를 사자의 손에 들려 보낸 것인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5화. 왕실의 빠른 손절 (2)

영주성 앞.

베론을 비롯한 가문의 사람들이 국왕의 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국왕의 친서를 가진 고위 귀족.

왕의 명령을 대행하는 것은 물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즉결 처분까지 할 수 있는 권력자다.

오늘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샤론까지 반강제로 끌려와 서 있었다.

베론의 머리로는 국왕이 무엇 때문에 친서를 가져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의문은 베론의 가족들과 가신들, 기사들까지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왕국 남부 오지였고 2왕자를 따르는 제후의 봉신 영지였다.

공식적인 명령을 내릴 것이면 제국 내전에 대비했을 때처럼 달랑 한 문장으로 전서구를 날려도 됐다.

"소영주님! 왕의 사자가 옵니다!"

부단장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그는 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에 서며 입을 닫았다.

평소였다면 베론에게 농담도 던졌을 텐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멀리 위풍당당한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을 상징하는 화이트 드래곤 문양이 선명했고 그 뒤로 차기 재상으로 유력시되는 마르젤 백작 가문의 상징이 휘날렸다.

중앙군 1천에 이르는 정예 병력.

저들이 가럿 자작 가문에 합류한다면 베론도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베론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내린 가호를 받고 있었다.

전생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도록 싸우다 가호를 입은 후 적들이 알아서 꺼꾸러지는 광경을 많이 봤다.

그 어떤 강력한 적도 베론과 대면하지 못하였는데, 왕실의 군대가 베론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변수가 생긴다면?

무한히 긍정적인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는 잠깐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드디어 마르젤 백작이 도착했다.

아직 왕의 친서를 받기 전이었으므로 예의를 차리는 것은 기본.

가문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마르젤 백작이 말에서 내리더니 부리나케 달려왔다.

"왕의 사자를 뵙습니다."

"아니, 왜들 이러시나! 일어나게!"

"예? 왕의 사자를 배알하면 당연한...."

"아닐세! 그러다 내가 경을 치네!"

마르젤 백작은 베론의 몸부터 일으켰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가문 사람들이 무릎 꿇는 것에 기겁했다.

이쯤 되자 베론은 느낌이 확 왔다.

'위해를 가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국왕께서는 자네와 자네 가문에 은혜를 베풀려 하셨네!"

"어째서요?"

베론은 자신도 모르게 위와 같은 말이 튀어 나갔다.

국왕이 미쳤다고 산골 오지 자작에게 은혜를 베풀까.

그것도 정적의 봉신에게 말이다.

마르젤 백작은 손을 휘휘 저었다.

"자네의 명성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명성…이요?"

지나가던 개가 풀을 뜯어 먹어도 이보다 어처구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기사들은 지극히 공감하지 않았다.

'소영주님께 무슨 명성? 아카데미 시절 날렸던 명성을 이제 와서 알아봐 준다고?'

'이게 말이야 방구야? 내 생전 저토록 게으른 사람은 본 적이 없거늘!'

베론이 매일 하는 일이라곤 검술 두 시간 수련하는 이외에 짱박히는 것뿐이다.

일과가 시작되면 기가 막히게 사라져 저녁이 되면 돌아오는 인간에게 도대체 무슨 명성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자네가 곧 극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은 들었네. 어쩌면 대륙 최강의 기사가 남부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말도 있더군. 이런 훌륭한 인재를 국왕께서 오랜 시간 지켜보셨네. 그러다 이번에야 기회가 온 것이야."

"…그, 그렇습니까?"

베론은 도대체 국왕이 무슨 이유로 이러나 싶었지만, 후작과 비슷한 경우라 생각하기로 했다.

후작은 베론의 금광에 욕심을 냈다가 치매와 풍, 정신병을 쓰리 콤보로 처맞았다.

국왕이 금광에 욕심이 날 것은 당연했으므로 영지전을 일으킨 상황에서 포르투나의 가호가 발동된 것이다.

도대체 왕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친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백작은 지나치게 굽실거리며 베론에게 친서를 쥐여 주었다.

[베론 경! 많이 놀랐나? 자네는 아직 작위를 받지 않아 경이라는 호칭은 무리겠으나 아카데미에서 보여 주었던 활약을 생각하니 별도리가 없더군.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영지전은 과인의 선물일세.

오래전부터 과인은 경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파를 떠나 왕국의 기둥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생겼으니 이참에 친분을 다져야겠다고 생각했지.

과인이 가럿 자작에게 병력을 보낸 것은 그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네. 영지전이 터지기 전까지 가럿 자작은 왕실 근위병들만 믿으며 전쟁 준비를 소홀하게 할 테니 말이야.

영지전이 며칠 남지 않았네.

가럿 자작령에서 중앙군을 빼고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니 아무런 걱정을 말게나.

혹여 영지전에서 패배하더라도 걱정 말게! 자네와 자네의 영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사할 것이니.

부디 과인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네.]

'그 욕심 많은 인간이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 설마 이 인간은 망상증에 빠졌나?'

베론은 생각보다 강력한 가호의 효과에 혀를 내둘렀다.

"가럿 자작은 손절된 것입니까?"

"손절이라니? 애초에 손을 잡은 적도 없네. 가럿 영지를 자네 가문에 주기 위해 조금 손을 쓴 것뿐이지."

마르젤 백작은 그리 말하면서 베론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꽤 조마조마하다.

"뭐, 국왕께서 그러시다면야. 단, 저희 가문은 버켄 후작령의 봉신이니 갑자기 정치적인 노선을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당연하지! 국왕 폐하께서 유능한 인재를 위해 자그마한 선물을 내리는 것뿐일세."

'자작령 영지를 통째로 주는 것이 작은 선물입니까?'

베론은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한 달 전, 크림슨 왕국 왕실.

국왕 파오넬 3세는 이때까지만 해도 가럿 자작을 이용해 금광을 꿀꺽 삼킬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현 정계는 국왕파, 2왕자파, 귀족파로 나뉘어 복잡한 싸움을 이어 가는 중이다.

내전을 최대한 지양한 채 주도권을 가져오려면 자금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가럿 자작이 파이렌 가문과의 영지전을 통해 금광의 반을 바친다고 하니 독립 영지로 만들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곳은 적지.

금광의 반을 받아 내고 몇 년 흐른 후, 적당한 명분을 찾아 숙청해 버리면 그 막대한 금을 국왕의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국왕파 세력의 중앙 귀족들도 왕과 같은 생각이었다.

"한 번 자신의 진영을 배신한 놈이 폐하를 배신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간신배는 언젠가 쳐내야 하옵니다. 하나 지금 당장은 금광의 반이라도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니 바로 병력을 파견해야 합니다."

"짐의 생각도 경들과 같다."

사냥을 끝내고 팽하더라도 사냥개에게 밥은 잘 줘야 하는 법이다.

국왕은 즉시 명령을 내려 왕국 중남부에 위치한 왕실 직할령에서 중앙군 1천을 추려 지원하는 한편, 중앙에서 심판관으로 내려갈 자를 골랐다.

"경이 가게. 명심해야 할 점은 추후 놈이 팽당할 것임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폐하의 명에 따르옵니다."

왕은 자신의 파벌 내에서 별다른 힘이 없는 자작급 인사를 내려보내기에 이른다.

이제 국왕과 그 파벌은 블루 마운틴의 금광에서 꺼낼 꿀만 빨면 될 일이었다.

그 이후 보름이 지나지 않아 큰 사건이 터졌다.

"폐하! 제국 내전이 정리되고 제논 12황자가 황위에 올랐습니다!"

"대인 기피증이라는 12황자가?"

"예! 반대 파벌의 가문을 뿌리째로 몰살시켰다고 하옵니다."

"허어.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크림슨 왕국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제국이 안정되면 주변국에서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어지니 왕국 내부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터다.

제국은 내부를 추스르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니 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문제가 발생했다.

"폐, 폐하! 황제가 사신을 보냈습니다!"

"사…신? 현 황제가 즉위하고 사신을 보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빠듯한데?"

"왜, 왜곡 마법을 사용하여 사신을 보낸 듯합니다."

국왕은 제국 사신이 왜곡 마법을 사용해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왜곡 마법이 무엇인가?

차원의 파편을 이용해 현실의 법칙을 뒤틀거나 변형하는 마법이다.

이 마법으로 공간을 축소하거나 확장할 수 있으며 순간이동(텔레포트)으로 쓰임을 파생시킬 수 있었다.

다만 장거리 텔레포트는 최소한 아크메이지급의 마법사가 있어야 했으므로 제국 황실이라고 한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었다.

제국 사신은 매우 급하게 국왕을 알현하고 협박을 가했다.

"황제께서 칙령을 내리셨습니다. 귀국 남부에 왕실이 압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압박이라면.... 설마?"

"짐작하시는 일이 있으시군요. 잘됐습니다."

국왕은 의아했다.

왕실이 왕국 남부에 압박을 가하는 일이라고는 블루 마운틴의 영유권 분쟁밖에 없었다.

그 말은 제국이 파이렌 자작의 편이라는 뜻이다.

'파이렌 자작이 황제의 손을 잡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급이....'

분명 노천으로 튀어나온 금광이 희귀하긴 하다.

모르긴 몰라도 광맥을 파고 들어가면 개발이 완료된 후 막대한 금괴가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제국에는 그보다 더한 금광이 여럿 있다.

황제가 크림슨 왕국 왕실을 압박하면 그만큼 리스크가 컸는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고작 변방의 자작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대충 제국 사신을 돌려보내고 은밀하게 진행해야겠군.'

왕이 그렇게 결심하는데, 제국 사신은 마치 그의 내심을 짐작했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폐하의 경고를 어기시면 전면전입니다."

"뭣이?!"

"제국의 모든 것을 걸고 크림슨 왕가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이는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뜻이며 저희 귀족들도 결의한 바입니다."

"대체 파이렌 가문이 뭐기에?!"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국뿐만 아니라 카브란, 밀레논, 바이슨, 렙톤, 어드빈 왕국까지 함께 쳐들어올 것이며 마탑에서 적극 지원합니다."

"...."

국왕은 그 무시무시한 협박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제국 하나만 해도 멸망 확정인데 5개국 연합에 마탑이 참전해?

헛소리라고 보기에 사신은 너무 진지했고 황제의 공식 문서까지 가져왔다.

문서에는 옥새까지 찍혀 있었으니 거짓말일 수는 없다.

제국 황제가 미쳤다고 거짓으로 협박할까.

진짜 위협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사신은 폭풍만 남기고 공간 왜곡 마법을 사용해 돌아갔다.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 측에 마탑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왕은 당장 파이렌 자작령에 관여할 생각을 접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파이렌 가문을 건드렸다가는 왕국 전체가 멸망할 각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폐하! 괜찮으십니까?"

"위, 위장약을!"

위경련을 일으킨 국왕은 신관의 신성력과 약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회복한 후, 명령을 철회했다.

"가럿 자작 가문을 손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대한 파이렌 가문을 돕도록 하라! 짐이 왜 이러는지는 경들도 보았을 터다."

"바, 바로 심판관으로 가는 귀족을 다시 뽑겠습니다. 하지만 대체 거기까지는 어느 세월에 갈지...."

"제가 도와드리죠."

쿨렁!

그때, 갑자기 공간이 갈라지며 적발 적안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제국에 관여했던 아크메이지였다.

국왕은 물론 모든 귀족이 깜짝 놀랐다.

마법사가 왕궁 어전에 공간을 열어?

암살자라도 넘어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 고맙소."

왕과 신하들은 깨달았다.

파이렌 자작 가문의 뒤에는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음을.

제16화. 이게 영지전?

영지전 당일.

블루 마운틴 앞에는 파이렌 자작군 2천 명이 모여 있었다.

영지 기사단 50명에 정예 병력이 인챈트된 무구를 갖추어 입었다.

일단 아버지는 영지의 명목상 주인이었으므로 나오긴 했으나, 영지전 자체는 베론이 주도할 것이다.

'적들이 과연 어떤 꼴이려나?'

전생을 돌이켜보면 베론과 적대한 어떠한 적도 운이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빈사 상태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므로 이번에도 그럴 것임을 확신했다.

덕분에 베론은 매우 여유로웠으며 다소 심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곳에는 떨거지(?)들도 함께했다.

허당 마법사와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륙상단의 백치 미인, 그녀를 모시는 용병단장, 마부와 시녀들까지 있었다.

물론, 상인과 마부 등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암살 년이 잘해 주었어야 할 텐데."

"괘, 괜히 난이도가 너무 낮아져 그, 그분께서 만족해하지 않으시면 어쩌죠?"

"그러니까 암살 년의 역할이 중요하지."

영웅들의 눈에 보이는 태초신은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째.

그는 아예 바닥에 망토를 깔고 비스듬하게 누운 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으하함. 이 새끼들이 좀 늦는데?"

"알아보고 올게요!"

베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허당 마법사가 허공에 둥둥 뜬 채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 뭔가 포착됐다.

"적들이 오고 있어요."

"그럼 준비해야지."

곧 전투에 들어간다.

베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전투에 앞서 사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두두두두!

정찰을 나갔던 마르헨 경이 도착했다.

"소영주님! 적들이 오긴 합니다!"

"오면 오는 거지, 오긴 한다? 말이 좀 이상하다?"

"상태가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상태가 이상해?"

"군대인지 난민 집단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데요?"

"하하하하!"

베론은 크게 웃었다.

그의 적은 기본적으로 저주를 깔고 간다.

포르투나의 가호를 뚫을 만큼 강력한 신격이 강림한다면 몰라도 이런 곳에 그 정도로 격이 높은 적이 있을 리 없었다.

잠시 후 나타난 적들의 몰골은 매우 처참했다.

"우웨웨웩!"

"커어억!"

"...."

고작 진군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저걸 뭐라더라? 토사곽란?'

구토하거나 행군하다 말고 숲속으로 냅다 뛰어가는 적들이 부지기수였다.

일부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전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했던 병사들은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저게 영지군?"

"웬 병신들도 아니고 이게 뭔...?"

한편, 2천은커녕 천 명을 간신히 채운 군대를 본 영웅들의 생각은.

'무서운 년! 적당히 힘을 빼라고 했더니 적들을 반쯤 시체로 만들어 왔군!'

베론은 말에 매달려 오고 있는 가럿 자작과 마주했다.

그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으으! 그만! 제발 그만...!"

"응?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졌네! 그러니까...! 커억!"

가럿 자작은 피를 한참이나 게워 내더니 그 자리에서 절명해 버렸다.

가럿 자작군 기사들도 대부분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후, 사망한 상태였는데 몇몇 생존자들이 기어와 자비를 구했다.

"부디… 살려 주십시오!"

"대체 뭘 처먹고 왔기에 저래?"

"커윽!"

차례대로 기사들이 사망한다.

이 황당해 보이는 사건은 심판관 마르젤 백작의 눈에도 들어오고 있었다.

'저 어설퍼 보이는 자작이 황제는 물론 마탑과 5개 연합국까지 움직인 장본인이다! 어쩌면 이렇게 끝나는 것이 다행일지도.'

마르젤 백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지전?

파이렌 자작 이 괴물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대방을 몰살시켰다.

이 와중에 순박한 표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소름이 다 끼쳤다.

"축하하네! 자네의 승리일세!"

"어.... 정말요?"

"정말 놀랐네! 이런 압승을 거둘 줄이야!"

마르젤 백작의 선언에 파이렌 가문 병사들은 살짝 찝찝해하는 표정이었다.

베론의 곁으로 마부와 시녀들, 백치 미녀가 달려왔다.

짝짝짝짝!

"공자님! 승리를 감축드립니다!"

"정말 멋져요!"

"적이 공자님의 눈빛을 보더니 그대로 다 쓰러져 버렸군요!"

물개 박수를 치는 바보들.

베론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씩 웃었다.

"아버지! 축하드립니다!"

"어, 응? 으하하! 내 아들 장하다!"

"우하하하!"

"하하하하!"

"...."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

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예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 버릴 정도였다.

베론의 말도 안 되는 운이야 유명했기에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그리된 것이다.

파이렌 영주성 앞.

영지군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멀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이미 승전보는 전해진 상태.

사망 0명, 부상자 0명이다.

영지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업적이 전해졌으니 백성들까지 모조리 몰려와 만세를 외쳤다.

"와아아! 소영주님 만세!"

"드디어 가럿 자작 놈이 죽었구나!"

"원수가 죽었어!"

이 시대도 지역감정이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고, 역사적으로 자주 다퉈 온 주변 영지와 원수지간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영지를 삼켜 버렸으니 백성들의 속도 시원해진 것이다.

"여보! 내가 승리하고 돌아왔소!"

"아들!"

어머니는 아버지를 지나쳐 바로 베론에게 달려왔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물론이죠!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는걸요."

"어미를 생각해서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진짠데...?"

"고생했다."

"어머니의 지원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베론의 곁에 서 있던 마르젤 백작을 바라봤다.

백작은 어머니의 시선에 겁먹은 사슴처럼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자작 부인?"

"승리했으니 공식 문서가 있겠죠?"

"물론입니다."

이번 영지전은 왕실과 후작이 보증하고 증인까지 보냈다.

문서에도 확실히 승리하는 쪽이 상대 영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제 가럿 자작령은 파이렌 자작령으로 흡수됐으니 합병 절차를 밟아야 한다.

"아들! 네가 정복한 땅이니 네가 가서 안정시키고 오렴."

"예?"

"우리 부부는 이제 곧 은퇴를 앞두고 있지 않니. 너도 경험을 쌓을 때가 됐지."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어머니께서...."

"나는 파이렌 본토의 일로도 바쁘단다. 금광도 개발해야 하고 이런저런 밀린 일이 있지."

털썩.

베론은 나라 잃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원래는 아무도 소영주의 엄살에 어울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르젤 백작을 비롯해 요즘 갑자기 나타난 허접들이 베론을 둘러싼 것이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마법사! 어서 포션이라도 가져와라! 공자님께서 위독하시다!"

"저리 비키세요!"

바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걸 지켜보는 가문 사람들과 기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찮아서 쓰러지신 건데 위독?'

'이게 걱정할 일인가?'

'매일 짱박혀 계시더니만 벌을 받으신 거지!'

베론은 승리를 해 놓고서도 정신이 혼미했다.

전생을 전쟁으로 살아온 그는 전투보다 후처리가 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점령지를 병탄하려 치면 백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으며, 피폐해진 영지를 복원하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런 미친 강행군이 최소 몇 개월은 이어질 터.

이번에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하.... 인생."

* * *

그날 저녁.

붉은 서약의 새로운 은신처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모두 긴급회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정말 심각한 사태였다.

"태초신께서 실망하셨다. 워낙에 가럿 영지가 피폐하기 때문이지."

"...."

"이 망할 암살 년! 정말 똑바로 하는 일이 없구나!"

"제길...."

안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특수암살조장 일레인을 불러 영지의 병사들을 중독시켰다.

그 결과 영지전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종결되었지만, 일반 백성들도 꽤 많은 피해를 봤다.

거리를 나가면 쓰러져 있는 백성이 많았으므로 태초신께 어마어마한 업무를 던져 준 격이었다.

"마, 맞아요! 아까 그분 표정 보, 보셨죠? 히익!"

대륙상단주 하시렌은 안센의 눈빛을 받고 깨갱했다.

영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안센을 질타하려 하였으나 그녀는 이 자리에서 피식자일 뿐이었다.

마탑주 라시엔 아르마가 팔짱을 낀 채 영웅들을 내리 깠다.

"멍청한 연놈들. 지금 이게 회의야? 당장 그분이 쓰러지실 정도로 충격이 크셨는데 도움을 드릴 생각을 해야지! 이러다간 우리 모두 죽는다!"

"제길.... 마녀 년의 말투는 더럽지만 맞는 말이다."

"그럼 어쩌죠?"

하시렌의 말에 라시엔은 사자를 지목했다.

"네가 해라, 행정관."

"뭣?!"

"너는 그래도 군주다. 지금껏 대륙 여러 나라의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러 왔으니 이런 일은 전문 아니냐?"

"붉은 서약의 지배자에게 고작 그런...."

"고작?"

"아, 아니. 말이 그렇다고."

대륙을 막후에서 지배하고 권력을 휘둘러?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렇게 치면 상계의 거물과 마탑의 마법사, 용병왕, 다크 섀도까지 만만한 인물이 없었다.

다 함께 잘살자고 뭉친 것이었으니 누구 하나는 전면에 나서 희생해야 한다.

마녀는 사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싫으면 말든가. 점수 딸 수 있는 기회인데. 나도 행정 잘한다?"

"그, 그러고 보니 저도 잘해요!"

"행정은 조직 운영의 기본이지."

"용병 길드만 할까."

영웅들이 그 자리를 꿰차기 위해 슬슬 눈독을 들였다.

위기감을 느낀 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대륙을 막후에서 지배하는 군주! 행정 처리에는 일가견이 있지! 영웅의 행정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 * *

다음 날이 되어 베론은 어머니에게 빵빵하게 지원을 받은 후 도살장(?)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비상사태다.

지역감정이 극에 달한 가럿 영지 출신 백성들이 베론의 지배를 거부하고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다.

그걸 해결하다 보면 머리가 뽀개질 것이니 벌써 걱정이었다.

어머니가 행정관 몇을 붙여 주긴 했지만, 고작 이 인원으로 자작령 전체를 장악하고 굴복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하아."

베론이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마부가 갑자기 길을 막더니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저는 본래 윌레이엄 가문의 혈족으로, 몰락 귀족입니다. 왕국 아카데미를 졸업 후, 중앙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지요. 지금은 정치에 환멸을 느껴 시골로 내려왔으나 공자님께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응? 아카데미를 졸업했어?"

"예! 차석 졸업입니다!"

"마부가 왕국 아카데미 행정학부 차석이라고!"

어디서 준비한 것인지 마부는 증명서까지 내밀며 자신의 쓰임을 어필했다.

베론은 마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내가 믿고 있었다고!"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이런 인재가 나타날 줄 짐작했다!"

'너무 기뻐하시는데?'

자신이 뛰어난 인재임을 증명한(?) 마부는 태초신의 격한 반응에 매우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제17화. 영지 운영이 너무 쉽다 (1)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가럿 영지.

베론과 기사들, 그리고 떨거지들은 멀리서부터 풍겨 오는 죽음의 기운에 슬슬 불안감을 느꼈다.

아직 본성에 도착을 하기도 전임에도 피폐한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물자를 징발하였는지 거리에는 굶주리는 자들이 가득했고 젊은 남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역감정을 걱정하던 베론은 그게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이게 거지촌이야, 마을이야?"

"가럿 자작이 영지전에 올인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올인을 했어도 이건 아니지."

"그러게 말입니다."

베론과 기사들은 파이렌 자작령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막상 그들이 한 일은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블루 마운틴으로 향했는데 적이라고 등장한 놈들이 병자들이었다.

가만히 있었는데 다들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싸울 이유도 없었다.

고작 그런 군대를 뽑아낸다고 영지를 파탄 내 버릴 정도면 평소에도 운영이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마르헨 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영지가 특별했던 겁니다."

"우리 영지가?"

"영주님께서는 관리를 포기하셨지만 농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지으셨죠."

"그건 부정할 수 없지."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자작 부인께서 훌륭히 다스리시니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던 겁니다."

"흠."

베론도 중세 유럽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매일 먹는 것은 채소뿐이고 단백질과 지방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백질을 구하려면 사냥을 해야 했는데, 영주가 이 사냥의 권리를 통제하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턱이 없었다.

하지만 파이렌 자작은 달랐다.

'사냥의 권리? 그걸 왜 통제해? 농사만 잘 지으면 되지.'

아버지는 영주가 되자 사냥의 권리부터 풀어 버렸고 수많은 백성이 강가로 몰려가 낚시하거나 동물을 잡아 기르는 등 타 영지에 비해 단백질 공급이 원활했다.

체격도 이 시대 기준에 비하면 컸고, 힘도 세다 보니 농사를 지었다 하면 풍년이었다.

세율은 계속해서 내려갔으며 최종적으로는 40%로 고정됐다.

영주 가문이 욕심을 내려놓으니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진 것이다.

타 영지에 비하면 파이렌 영지는 천국에 비견할 만했다.

"어쩐지 전쟁을 몇 번이나 치른 영지 같았다는 말이야...."

베론은 구호부터 시작했다.

이대로면 기껏 남아 있던 영지민까지 죄다 굶어 죽을 판이었다.

어머니께서 주신 물자의 3할이 구호 과정에서 날아갔다.

그의 인기는 치솟았지만, 이 영지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며 정상화해야 하는 율리우스 베르타는 죽을 맛이었다.

'이 빌어먹을 암살 년...!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우물에 독을 타고 영지병의 태반을 중독시켜 날려 버린 장본인이 바로 안센 트루엔이었다.

그녀가 아닌 부하가 잘못했다지만, 엄연히 책임은 암살 년에게 있는 법.

다 죽어 가는 영지를 살핀 율리우스는 급하게 영웅들을 호출했다.

"비상이다! 모두 모여!"

며칠 동안 베론은 대충 영지를 둘러봤다.

지역감정?

그딴 걱정은 굶어 죽을 위기가 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생각보다 지역감정이 심하지 않다는 것도 베론이 부임(?)하고 나서 알게 된 일이다.

이 시대 백성들은 지배자가 누군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잘 먹고 잘살게만 해 주면 그게 성군이자 좋은 영주였다.

전 영주는 어떻게든 백성을 수탈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데, 병탄이 되자마자 식량부터 지원해 주니 그가 지나갈 때마다 만세삼창이 절로 나왔다.

"영주님 만세!"

"와아! 베론 영주님이다!"

"나 소영주라니까?"

"영주님, 자비를!"

"소영주라고!"

다른 가문 같았으면 경을 쳤을 일.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지만, 파이렌 가문은 좀 특이한 구조였다.

아버지는 진즉 권력을 손에서 놨고, 어머니도 베론에게 어떻게든 일을 물려주고 은퇴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베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이대로 영주의 직위가 물려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 영주 아니다. 분명히 전해라!"

"이참에 영주하시죠?"

"싫다니까?"

영지 시찰을 간단하게 마친 베론은 빠르게 영지가 정상화되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행정관 출신의 마부가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함께 온 하급 관료들도 그의 일 처리 능력 하나는 인정했다.

급기야 베론은 영주 대리로 마르헨 경을 임명해 버리고 잠수를 타려 했다.

"소영주님! 또 어디 가십니까?!"

"며칠 지켜봤으면 됐지. 행정관의 능력도 증명됐겠다, 나는 필요 없잖아?"

"그건 아니죠! 지금 시국이 이 모양인데 또 짱박히신다고요?"

"마르헨 경. 믿음은 먼저 주는 것이다. 내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영지의 실태를 더욱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나서는 것뿐이야. 경이 마부에게 일을 시켜."

"믿음을 주는 것은 감사한데.... 그건 아니죠! 소영주님!"

베론은 자신의 운을 믿었다.

마부가 자신을 배신할 일은 없었고, 마르헨 경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이라면 영지를 잘 경영해 나갈 것이라 믿었다.

* * *

한편, 붉은 서약을 운영하며 대륙 스케일로 놀던 율리우스는 한정된 자원으로 영지를 경영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수전노! 식량과 자금을 대라!"

"어, 얼마나요?"

"영지가 정상화될 때까지."

"아, 알겠어요."

기사들은 병력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하느라 바빴고 태초신께서는 유희를 즐기신다고 사라졌으니 들키지 않고 자금을 수혈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가 보기에 이 영지는 개판 그 자체였다.

"미친 수준의 세금이다. 세율이 80%? 이걸 내면서 사람이 살 수 있나? 당장 낮춰라."

세율이 40%로 인하되었다.

여긴 파이렌처럼 농업 전문 영지가 아닌지라 세금을 그렇게까지 낮추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륙상단의 자금이 들어갔다.

잡세를 폐지하고 구휼까지 하였더니 대륙상단 크림슨 지부의 자금이 거의 거덜 날 지경이었다.

대륙상단주 하시렌은 급히 제국지부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한편, 식량을 수매했다.

병력을 재건하는 일도 시급하다.

"살아남은 병사들을 치료한다."

어디 병사들만 병에 걸렸던가?

암살 년이 지독하게 독을 푼 덕분에 영지 전체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마녀! 포션 내놓아라!"

"포션...? 그게 얼마나 비싼 것인 줄은 알고?"

"어허! 태초신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아오, 망할 암살 년 때문에 이게 뭐야?!"

영지를 피폐하게 만든 다크 섀도 전체가 욕을 처먹었다.

다크 섀도라고 가만히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곳에는 암흑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암흑가 놈들은 탈세를 기본으로 깔고 가기에 그 꼴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뒷세계 조직들이 사라졌다.

조직을 털어 거둔 자금은 모조리 재투자됐다.

포션까지 동원되어 병자를 치료하고 신관이 방문해 정화 활동을 펼쳤다.

베론이 영지를 유기해도 능력 빵빵한 자들이 합심해 재건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상황이 좋아졌다.

매일 '영주님 만세'라는 구호가 들릴 정도였으니 영웅들의 시너지는 상당했다.

이 소식은 자작 부인에게까지 들어갔다.

"마르헨 경! 이게 사실인가?"

"예? 물론이죠. 제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요."

"이 녀석이 제정신을 차렸구나!"

"그게.... 소영주님이 하신 일은 아니고 이번에 등용한 행정관이 너무 유능합니다."

"그 마부 출신 행정관?"

"마부가 영지에 손을 대기 시작한 후로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자작 부인은 처음 장남 녀석이 행정관을 등용해 영지를 관리하게 하니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때, 장남은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 유능한 군주는 직접 행정 처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존재이죠.'

처음에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믿고 맡겨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통째로 영지를 유기해 버리는 군주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장남은 결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했다.

자작 부인은 직접 가럿 영지를 시찰하기로 했다.

영주성 주변에 포진한 여러 마을에서 향긋한 냄새까지 풍겼다.

"이건 대체...?"

"마법사가 가져온 향기 나는 돌들입니다."

"향기 나는 돌?"

"소영주님이 썩은 냄새를 싫어해서요."

자작 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향기가 좋은 돌이면 영주성에 배치해도 부족할 판국인데 마을마다 하나씩 토템으로 삼고 있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영지민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다.

"얼마 전까지 피폐했던 영지가 맞나?"

천지가 개벽한 수준.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자작 부인을 보며 만세를 불러 댔다.

이쯤 되니 그녀의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일 잘하는 행정관 하나 잡아 사육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 * *

마부가 행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슬슬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 시기.

여기저기 파종을 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였다.

왕국 남부는 따듯한 아열대 기후에 속해 있는지라 파종이 빨랐다.

베론은 매일 짱박혀 있기를 반복하다가, 몸이 너무 찌뿌둥해지는 것 같아 마부와 시녀들을 줄줄이 달고 영지를 시찰했다.

"개간도 했네?"

"예! 저기 허당 마법사가 도왔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감사…해요."

허당 마법사는 꽤 피로한 얼굴이다.

가럿 평야 전체가 정사각형 바둑판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유프람 강에서 물을 끌어와 수로를 만들었고 길까지 정비되어 있었으니 어마어마한 노동력의 산물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베론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어찌 잘했군."

"어쩌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고생했다."

"저. 정말요?"

"그럼. 너희들의 고생을 내가 안다."

"마, 만세!"

마부와 마법사, 대륙상단에서 파견 나온 백치 미녀까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부의 시녀들과 마법사가 데려온 여러 인부들, 상단의 상인들까지 울고 있었으니 베론으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력은 재건했나?"

"물론입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천 명 수준까지 회복해 치안 유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무, 물론 곧 병력을 늘릴 예정이긴 합니다!"

베론이 눈살을 찌푸리자 마부는 잽싸게 말을 바꾸었다.

이제야 만족스럽다.

그 정도면 치안 유지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하는구먼."

"공자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럼 내가 취미 생활을 해도 문제없겠네?"

"물론입지요!"

베론은 낚시나 하며 놀 생각에 들떴다.

영지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가럿 자작령에 부임되었을 때만 해도 죽을 맛이었는데, 오히려 어머니의 잔소리가 없으니 천국이었다.

"하하하! 영지 운영, 참 쉽네?"

제18화. 영지 운영이 너무 쉽다 (2)

한가로운(?)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귀족의 삶.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가럿 영지를 둘러보며 경치 좋은 곳이 없나 살피던 베론은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아냈다.

숲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요새.

오두막이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부에서 행정관이 된 율리우스에게 부탁했다.

"행정관! 기가 막힌 지역을 찾아냈는데 말이야. 오두막이라도 하나 지어 줄 수 있겠나?"

"예? 오두막이요?!"

"너무 바쁘면 다음에...."

"아닙니다! 고작 오두막으로 되겠습니까? 저택을 지어 바치겠습니다!"

율리우스는 다 좋은데 충성심이 너무 강했다.

설마 영지 재정까지 건드는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일 없이 정말 저택을 지어 바쳤다.

그 안에는 가구까지 다 제작되어 있었으며 강가에는 캠핑용품을 완비했다.

보름 만에 지어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이었다.

저택이 완성된 후 이곳으로 출근하는 것이 베론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낚시나 하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부단장 마르헨이 튀어나왔다.

"찾았다! 여기 계셨군요!"

"경이 여길 어떻게?"

"제가 짱박힌 소영주님을 찾는 데 허비한 세월만 10년입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죠."

"경은 할 일도 없군. 분명히 영지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을 텐데?"

"영주님의 호출입니다."

"영주님...? 어떤 영주님? 어머니?"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영주님은 소영주님의 아버님 아닙니까?"

"그랬나?"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는 바지 사장이고 실제 영주는 어머니다.

그것도 화가 쌓일 대로 쌓여 언제 은퇴할지 모르는 시한부 영주 말이다.

"유리온실과 금광이 완성됐습니다. 행사를 한다는데 소영주님도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빠른데?"

"원래 영주님은 농사에 관련된 업무만큼은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지."

베론도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믿고 맡기는 부분이 바로 영지의 생산력.

즉, 농업에 관련된 업무였다.

후추 재배지로 선정된 농지는 바람이 불지 않고 수원지에서 가까운 비옥한 땅이었다.

딱 봐도 3천 평 규모의 유리온실이 지어져 있었는데, 어찌 이런 속도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는 미스터리.

베론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요?!"

"허당 마법사의 동료들이라고 하더구나! 덕분에 일이 수월했어."

아버지는 햇볕에 그을려 시커멓게 탄 채로 하얀 이만 드러내며 웃으셨다.

마탑에서 왔다는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햇볕에 고생했으면 피부가 망가지기 직전이다.

이 와중에 허당 마법사는 고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동료들을 얼마나 부려 먹었는지 알 법했다.

"조립은 그렇다고 치고 제작 역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응? 네가 지원을 보내지 않았느냐."

"제가요?"

"허험. 공자님. 제가 공자님의 명령을 받아 지원을 보냈습니다."

"그랬군."

베론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율리우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믿어야지.

"물론, 일등 공신은 드워프 켈트다! 우리 영지의 공방장이지."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 많았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원래 드워프는 고집이 세다고 하지 않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드워프라는 종족을 왕국에서 접할 일이 없다 보니 그 특성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었다.

베론은 각을 딱딱 맞춰 지은 유리온실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감탄했다.

"단열이 잘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후추는 25도에서 30도 정도에서 잘 자란다고 하더구나. 한여름에는 온도를 좀 조절해 줘야 하지만 그 이외에는 별로 신경 쓸 부분이 없는 것 같다."

그럴 리가.

후추는 원래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자라며, 내버려 둔다고 크는 작물이 아니었다.

파이렌 지방도 아열대 기후라고 보기에는 살짝 애매한 부분이 있어 매우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뿐이랴?

바람과 빛에 민감하고 물도 잘 주어야 한다.

산성 혹은 중성의 토양이 필요했으므로 땅이 알칼리성을 띤다면 블루 마운틴 지역에서 흙을 퍼 와서 깔기도 했다.

"발아도 되었으니 이제 심기만 하면 된다."

"진짜로 꿈을 이루셨군요. 만약 이게 되기만 하면...."

"돈방석이지."

현대에 들어서나 후추가 싸지, 이 시대에는 같은 무게의 금과 비견됐다.

이만한 설비를 하고 서적을 구매하였으며 전문가를 수배 후, 먼 지역에서 온 후추 씨앗을 파종해 심기까지.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다.

후작이 선의(?)로 지원해 준 자금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리온실도 유리온실인데 벌써 금광까지 개발했다면서요?"

"그건 내가 관심이 없지만 드워프가 다 했다더구나."

"신기한 일이군요. 혹시 강제로 일을 시킨 것은...."

"하하하! 드워프는 착한 종족이다. 이 아비가 보증하지."

"아, 예."

드워프에 대한 선입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

파이렌 영지 공방.

드워프 켈트는 샤론이 만든 설계도를 참고해 광맥을 빠르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채석기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용광로에서는 뜨거운 쇳물이 연신 쏟아져 나왔고 가럿 지방 행정관이 보낸 인부들은 바쁘게 쇠질을 했다.

카앙! 카앙!

"공방장님! 본체를 완성했습니다!"

"버, 벌써?"

"예! 이렇게 만드는 것이 맞나요?"

"인간이 만든 것치고는 어설프지만 이만하면 됐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또 시키실 일 없습니까?"

"저기 보이는 차원석에 차원의 힘을 주입해야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와야 할 것 같군."

"아닙니다! 저희도 할 수 있습니다!"

"응? 차원의 힘이라니깐?"

"별일 아니죠!"

마도구의 제작에는 필연적으로 차원의 힘이 필요하다.

차원 왜곡장이 드릴에 작용되어 빠르게 광물을 절삭하는 물건이었기에 고도의 작업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걸 하인들이 한다고?

스아아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차원의 힘.

차원석들은 순식간에 빛을 내더니 마도구로 탈바꿈되었다.

수식은 허당 마법사가 새기지만 힘을 불어넣는 것은 기사급(?)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켈트가 본 하인들은 단순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어째 하나같이 극에 달한 자들인 거지?'

물론 비밀은 발설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이었으니까.

샤론이라는 괴물 같은 발명가를 제외하더라도 이 영지에 정상적인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켈트가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런 시골에서 썩기는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특히 그 마법사!'

파이렌 영지 사람들은 적발 적안을 가진 인간 마법사를 허당이라며 무시했지만, 그녀의 손에 아크메이지급의 마도구가 줄줄이 개발되어 나왔다.

어쩌면 아크메이지 이상.

공방에 마련된 마도 공학 장비들도 전부 그녀의 손을 거쳤다.

그녀는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데려와 인부로 짱박아 버렸으니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이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약속을 지킬 능력이 된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있지.'

자존심이라면 누구보다 강한 장인의 종족이 인간의 영지에 예속된 이유.

그건 자신을 구해 준 자가 해 준 약속 때문이었다.

켈트의 고향은 제국 북쪽에 존재하는 설원이다.

대륙에 얼마 남지도 않은 드워프들은 나름대로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국의 사냥꾼들이 들이닥쳤다.

그날, 수많은 드워프가 싸우다 절명했고 남아 있는 자들은 붙잡혀 노예로 전락했다.

드워프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던 사냥꾼들은 마차 감옥에 그들을 감금했고 장인 대부분이 그 안에서 목숨을 끊었다.

켈트가 목숨을 끊지 않은 이유는 오직 가족 때문이었다.

가족이 죽은 자는 미련이 없지만, 살아서 흩어졌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를 실은 마차가 제국 남부까지 내려왔을 때, 의문이 집단이 습격해 목숨을 구원해 주었다.

켈트는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전원, 극에 이른 기사들이었지. 그런 괴물들의 수장은 내게 제안했고.'

'네 가족들을 구해 주겠다. 나와 계약한다면 비록 인간의 영지에서 살아가게 되겠지만, 자유를 주겠노라. 어찌하겠나?'

켈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극에 이른 괴물들을 이끄는 집단.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이만한 세력에 정보력이 없을 리 없었다.

켈트는 한 명이라도 가족을 구할 수 있다면 마땅히 계약을 이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이후에는 제국으로 팔려 갈 줄 알았다.

드워프가 노예로 매물이 나오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구매하려는 자들이 널려 있는 국가가 바로 제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의문의 집단은 달랐다.

'저더러 파이렌 영지의 공방장이 되라는 겁니까?'

'맞다. 파이렌 영지에 우리의 주인이 계신다.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만약 네 가족들이 죽었다면 끝까지 추격해 복수를 완성하겠다.'

그걸로 충분했다.

가족을 한 명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다못해 복수라도 완성할 수 있다면!

영혼을 갈아 넣어도 아깝지 않으리라.

켈트는 계약 후 파이렌 영지에 배속되었다.

영주 가문 사람들은 성격이 대체로 이상한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좋은 사람들이었다.

농사에 미친 영주.

그 영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려 나가는 불쌍한 아내.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발명가 소녀.

게으름뱅이 소영주까지.

도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한 달 정도 공방에서 생활하던 켈트는 이들이 평범한 귀족 가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귀족 가문이 마탑과 기사단장급으로 이루어진 기사 집단을 거느렸다던가.

대륙상단에서 지원을 오지 않나, 용병왕으로 보이는 자가 상단을 호위하지를 않나, 의문투성이였다.

얼마 전에는 의문의 집단 수장이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들 이름이 벨타인 맞나?'

'마, 맞습니다! 어찌 벨타인의 이름을?!'

'제국에서 찾았다. 한 달 안에 데려올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은혜? 감사의 인사는 그분에게 하면 된다.'

'그분이 누굽니까?'

'이 영지의 소영주님.'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여력이 닿는 대로 다른 가족들도 찾아보겠다.'

켈트의 이력을 모르는 자들은 드워프가 이 시골 오지에서 일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보기에 이상한 사람들은 바로 이 영지 백성이다.

대륙을 지배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력이 고작 이 시골에서 소꿉놀이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 * *

어둠이 내린다.

베론은 슬슬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오늘은 취침이 좀 일렀다.

이유는 하나.

[원탁에 참여하시겠습니까?]

[Y/N]

드디어 3개월 쿨이 돌았다.

첫 번째 원탁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했던가.

지금 보니 근력이 상승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오토 가드 스킬 역시 쓸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운이 좋은 나날이었으므로 그저 있으니 좋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금광은 예외였다.

이로 인해 파이렌 영지는 금광을 손에 넣는 것은 물론, 가럿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것도 국왕과 후작의 열렬한 지지 아래에서 말이다.

원탁에 참여하는 것은 무조건 이익이다.

저번에 참여하지 않았다던 영웅을 보는 맛도 쏠쏠할 것이다.

'이번에는 뭐가 뜨려나?'

베론은 기대감을 안고 Y를 눌렀다.

1회차 원탁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은 침대에 있었지만, 영혼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원탁에 의자는 열한 개였다.

의자의 주인은 두 명이 늘어나 일곱 개.

도깨비 녀석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베론에게 달려와 호들갑을 떨어 댔다.

"오오오! 뉴비님! 잘 오셨습니다! 이 관리자가 얼마나 오매불망 귀하를 기다렸는지 모를 겁니다!"

도깨비 놈의 깨방정은 가볍게 무시한다.

이번에도 베론은 자연스레 상석에 앉게 됐다.

"...."

그리고 쏟아지는 일곱 쌍의 눈빛.

그 안에서 광기가 엿보인다.

'이 사람들.... 상태가 더 이상해졌는데?'

제19화. 원탁의 게임 2회차 (1)

가이아 교단의 성녀 마르엔느 브리스는 원탁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어떤 고난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신비한 미모를 겸비하였으나 상당히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보 교류라는 가면으로 위장한 데스 게임.

참여하지 않으면 손해인 것은 맞았지만 그곳에 입장할수록 하나씩 베일이 벗겨져 정체가 탄로나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을 모시는 그녀에게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뿐이었으나, 이 세계에 남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이 또한 신의 뜻...."

그녀는 침대에 눕기 전, 기도를 올렸다.

"위대하신 태초신과 대지를 관조하시는 가이아시여, 이 불안전한 세상에 미천한 종을 보내 당신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리나이다. 오직 저를 당신의 길을 비추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소서. 그 뜻을 행함에 있어 공포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시고 당신의 은혜가 만방에 미치게 하소서."

기도를 마치자 요동치던 마음이 안정된다.

잠이 들자마자 이동하는 영혼.

마르엔느는 단단하게 각오를 다졌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원탁의 영웅들은 살기 위해 뭐든 하는 괴물이었으니까.

원탁과 열한 개의 의자가 시야에 드러난다.

하지만.

"뭐지...?"

원탁 한편에서 영웅들과 관리자가 한자리에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데스 게임에서 영웅들의 회합?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잠시 손을 잡을 수는 있어도 언젠가 서로를 죽여야 하기에 원탁에서 대놓고 뭔가 모의하는 경우는 없었다.

마르엔느는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난이도는 중하(中下)다."

"이 멍청한 암살 년! 내가 보기에는 그냥 하(下)라니까!"

"그, 그보단, 하, 하에서도 한 단계 아, 아래 아닐까요?"

"기괴한 년. 개기름 낀 남자 얼굴로 여자처럼 말할래? 토할 것 같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분?'

대체 그분이 누군데?

어디 새로운 영웅이라도 등장한 걸까?

아니다.

뉴비가 들어오면 어떻게든 쳐 죽일 생각을 했지, 이런 식으로 협력해 뭔가 도모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법칙에 의한 데스 게임.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기에 뉴비는 오직 암살의 대상일 뿐이었다.

관리자가 마르엔느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다.

"오셨군요, 성녀님!"

"...!"

관리자의 서슴없는 말에 마르엔느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교단 내에서 성녀로 활동하는 것은 맞지만, 원탁에서는 평범한 여자로 위장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으므로 관리자는 플레이어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아 왔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관리자가 오두방정을 떠는 것이 보였다.

"빨리 오세요! 데스 게임은 끝났습니다아!"

"뭐, 뭐라고요?"

그녀의 등장에 모략이 눈을 번뜩였다.

"역시 성녀가 맞았군."

"서, 성녀면 마,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뚱뚱한 수전노가 오늘따라 말을 더듬었다.

개기름 흐르는 외모에 여성스러운 손짓.

아무리 성녀라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적발 적안의 냉혈마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훑어봤다.

"저 빌어먹을 년이 저번 원탁에 참여했었으면 그분의 영지에서 더 많은 백성을 구원했을 텐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이 나태한 년아.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태초신께서 강림하셨다."

"네에?!"

성녀의 눈이 더욱 크게 확장되었다.

태초신.

감히 언급되는 것조차 성스러워 조심스럽게 기도에 끼워 넣는 것이 전부인 그 이름.

그분이 강림했다고?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영웅들이 헛소리한다고 보기에 그들의 격은 높았고, 이 초자연적인 원탁의 관리자인 소악마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한다.

"원탁이 차원의 균열을 막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걸 성녀도 아실 겁니다아!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차원의 소멸을 막기 위해 태초신께서 강림하셨고, 기왕 오신 김에 유희까지 겸하는 거죠! 협력한다면 모두가 승천할 수 있어요!"

성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중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자가 바로 관리자였다.

그의 정체는 알 수는 없지만, 신 비슷한 위치에서 잘못을 저질러 감옥 생활을 하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초자연적인 존재가 보증하는 말.

마르엔느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게...."

그녀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마어마한 광신을 뿜어냈다.

"정말인가요?"

"그러믄요. 이 관리자의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아!"

"아아, 신이시여!"

마르엔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곳은 지상계가 아닌 영혼계 비슷한 곳이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나는 신성력.

마르엔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늦게 도착한 또 다른 영웅, 통칭 '다크' 역시 관리자의 설명을 듣고는 멍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신께서 강림하셨다.

"허억!"

"이 무슨?!"

마르엔느와 다크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태초신으로 짐작되는 자의 몸에서 세 개 이상의 신격이 느껴졌다.

일개 신이 다중신격을 소유할 수 있나?

결코 불가능한 일.

이곳 차원에 진정한 태초신이 강림한 것이다.

* * *

한편, 상석에 앉은 베론은 매우 불편한 표정이었다.

"뭘 그리 빤히 보나?"

"허억!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눈 깔겠습니다!"

"...."

단체로 약을 잘못 처먹었는지 이상한 기류가 사방에 흐르고 있었다.

잠시 부산스럽던 영웅들은 자리에 앉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면서도 베론의 눈치를 보았으니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한다.

도깨비가 깨방정을 떨며 두 명의 새로운 영웅을 소개했다.

"자자, 이분은 종교인이고 이분은 암흑가에 소속돼 계십니다. '플레이어'이신 뉴비님께 자세한 신분을 밝힐 수 없지만 참고만 해 주시고...."

"헤헤, 뉴비님. 요즘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수전노가 손을 부비적거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베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번 원탁에서도 그랬지만, 개기름 피어오른 뚱뚱한 중년 남자는 역겹게 느껴졌다.

게다가 말투는 왜 저따위인가?

어째서 살갑게 구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베론의 감정을 알아본 마녀가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저리 꺼져라, 더러운 놈!"

"으윽! 저도 알고 보면 귀여운...."

"네 꼴을 보고 말해라!"

이게 뭔 일인지 몰라도 베론은 괜히 영웅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위엄(?)을 유지했다.

마녀는 수전노를 쫓아낸 후, 베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가 개발한 안마예요. 나름 마법으로 연구까지 했답니다? 이걸 상용화해도 되는지 봐주실 수 있나요?"

"음.... 상용화라."

뻐근했던 어깨가 풀어지고 있었다.

이곳의 육체는 영혼에 가깝지만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걸 지켜보던 영웅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약아 빠진 년!'

'저런 식으로 점수를 따겠다는 거지?'

그때, 종교인이라는 여사제가 바닥을 기어 왔다.

그러더니 베론의 구두를 자신의 소매를 이용해 닦았다.

"저는 구두 닦기 사업을 해 보려고 해요."

"이 미친년들을 봤나! 당장 떨어져라!"

사자가 추상과 같이 그녀들을 꾸짖더니 베론을 보며 자세를 낮추었다.

"헤헤, 뉴비님. 현실에서 불편하신 일이 있으시거든 회색 깃발을 아무 데나 꽂아 주세요. 그럼 이 고인물이 풀 케어를 해 드리겠습니다!"

'뉴비 쟁탈전?'

베론은 이상하게 행동하는 영웅들을 보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뉴비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다.

아무런 이익이 없다면 고작 뉴비에게 친절을 베풀 리 없다.

'이등병 아닌, 이등별 느낌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베론은 생초짜 뉴비였으니까.

이대로는 게임이 진행되지 않자 도깨비가 끼어들었다.

"자자, 뉴비 쟁탈은 이 정도로 하시고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아!"

"허험. 딱히 쟁탈은...."

"뭐가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뉴비님, 제 마음 아시죠?"

마녀와 성녀, 사자가 동시에 떨어져 의자에 앉는다.

오늘도 도깨비는 뉴비를 배려했다.

"뉴비님의 빠른 성장을 기원하며, 주사위를 굴리겠습니다아!"

베론은 전과 마찬가지로 심상을 빚어 만든 주사위를 꺼냈다.

그걸 본 사제와 다크의 눈이 반쯤 돌아갔다.

'이게 그렇게 부럽나?'

포르투나의 가호를 받았으니 좋은 주사위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베론은 저번처럼 쓰리 콤보가 터지길 기원하며 주사위를 게임판에 던졌다.

파아앙!

대륙을 휘감으며 터지는 무지개.

동시에 또 쓰리 콤보가 터졌다.

영웅들의 경악, 그리고 팡파르와 함께 정보가 떴다.

[민첩이 15% 상승합니다!]

[필살기 스킬, 일섬을 획득합니다.]

[신화급 아이템, 태초의 약속을 획득합니다.]

'좋은데?'

베론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보는 눈만 없어서도 당장 환호하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필살기와 신화급 아이템의 등장.

이 정도만 해도 베론의 육체는 몇 단계나 진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상이 저번보다 훨씬 증가했다.

툭.

그때, 주사위에서 마지막 빛이 나며 보너스가 떴다.

[연속 쓰리 콤보 발생으로 추가 정보를 획득합니다.]

[파이렌 영지 외곽에서 드래곤 레어가 발견됩니다.]

"헉!"

"드, 드래곤 레어?"

"설마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드래곤이 살아 있었으면 진즉에 토벌됐겠지."

"그런가?"

웅성웅성.

영웅들은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부러움을 넘어 경외의 감정을 비치는 것이다.

'부러운 수준을 넘어선 것 같군.'

베론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도깨비 놈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러다니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아 댔다.

쿵! 쿵!

"여윽시 뉴비님! 대단하시군요!"

"운이 좋았다."

"플레이어로 참여하시니 그야 당연한 일이고요."

"무슨 뜻이지?"

"아닙니다! 이 미천한 관리자 놈이 실언하고 말았군요! 그럼 다음 차례로 턴을 넘기겠습니다!"

다음은 사제의 차례였다.

그녀의 주사위는 자신의 신념대로 신성력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대륙에 휘몰아치는 성스러운 빛.

[렌족의 대이동이 시작됩니다.]

"렌족이라...."

베론은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었다.

렌족이 뭔가?

왕국 남부 국경 너머의 유목 민족이며,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 느슨한 연합체였다.

하나하나의 부족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재앙이 발생한다.

약탈 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놈들이 이동했다면.

"좋지 않군."

"...!"

베론의 말에 영웅들이 얼어붙었다.

그는 말 그대로 유목민이 어디로 튈지 몰라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영웅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이런 쳐 죽일 새끼들이!'

'감히 신께 위해를?'

'주신이여! 이단자 놈들을 잘게 다져 바치겠나이다!'

'렌족이라? 잘하면 태초신의 영지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제20화. 원탁의 게임 2회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