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동서고금 막론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는 망상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생기고 부유한 데다 재능 넘치는 권력가의 자제로 다시 태어나면 어떨까.
그 외에도 수많은 망상이 있지만, 유독 유준상의 흥미를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게임 속 세상에서 살아 보고 싶다.'
FPS, 그러니까 총질하는 게임에 나름 일가견이 있는 유준상이다.
국산 FPS '기습공격'과 최근 PC방 점유율 2위 게임인 '밸러란트'는 물론, 스토리가 가미되거나 다른 장르와 혼합된 수많은 FPS 게임까지.
무수한 FPS 게임을 클리어하며 네임드로서 온라인상에 발자취를 남긴 그였다.
그렇기에 그 어떤 난이도의 게임이라 한들 FPS 게임에 들어간다면 클리어는 당연한 거고 군복 한가득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 자신이 있었다.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리는 없겠지만.
그러니 어디까지나 한낱 망상일 뿐인 이야기다.
망상이 실현될 일은 없었고, 누군가 진짜로 게임 속으로 들어가겠느냐 제안한다면 단연코 거절할 유준상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그런 곳에 몸을 던지라니.
소총 들고 돌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죽어도 리스폰되지 않는가?
설령 리스폰되더라도 죽음을 겪는 행위는 본능적으로 꺼려지기 마련이다.
분명 그런 쓸데없는 망상을 하고 있을 터였을 텐데….
[신개념 초현실 RPG '램페이지 스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망막 위에 떠오른 알림창.
분명 한낱 망상에 불과했을 텐데 정말로 게임 속에서 눈뜨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문제는 게임 속에서 눈을 떴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뭐…."
진짜 문제는 그가 그토록 자신 있어 하던 FPS 게임이 아닌, 망겜으로 유명한 모바일 육성 RPG 게임 '램페이지 스톰'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
신이 실수를 해도 단단히 실수한 모양이다.
1.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각거리는 풀잎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바람을 타고 흐르는 달짝지근한 꽃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화창한 하늘 아래 흩날리는 신록, 나무 사이를 오가는 사슴들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청춘과 같으니 나들이 가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야말로 지친 현대인들이 휴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
그러나 유준상은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딱딱히 굳은 얼굴로 멍하게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그러했다.
[신개념 초현실 RPG '램페이지 스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망막 위로 떠오른 알림창이 여기가 지구가 아닌 '램페이지 스톰'의 세계라 알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유준상은 황망한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눈앞의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그의 정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알림창이 눈에 뜨는 경우는 단 한 경우밖에 없었다.
이세계에 소환됐을 경우.
웹소설이나 웹툰,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지금 그에게 도래한 것이었다.
이세계 소환이 아니라면 그의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이었으니, 뭐가 되었든 좋지 않은 상황임엔 분명하다.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정신적으로 이상해진 것이 낫지 않을까?
이세계는 개고생과 다름없는 동의어였으니.
유준상은 고개를 털었다.
가만히 있어 봤자 좋을 거 없다.
움직이고 시도하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법.
그는 무작정 들판 위를 걸었다.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다.
자동차라든가, 전선주라든가, 전봇대라든가, 아니면 송신탑이라든가.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으니 무엇이 되었든 현대 문명의 이기를 마주했으면 했다.
그렇다면 눈앞에 떠 있는 이 알림창을 정말로 환각으로 치부할 수 있을 테니.
하나 그의 바람은 걸음을 옮긴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산산이 박살 났다.
"...돌아 버리겠네."
멀지 않은 들판 한가운데 피를 쏟은 채 쓰러진 거대한 멧돼지 사체가 있었다.
얼마나 큰지 보고 있노라면 마을버스가 전복된 것이 아닐까 싶은 크기.
유준상의 상식에서 멧돼지란 아무리 커 봐야 사람만 한 것으로 버스 크기만큼 성장할 수 없는 포유류다.
그 외에도 한없이 단단해 보이는 발굽이라든가 거대한 엄니라든가.
눈앞의 고깃덩이는 그가 알고 있는 멧돼지의 형상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감이 없는 것은 멧돼지 몸통에 박혀 있는 수많은 창과 검.
얼굴이 절로 구겨진다.
백 보 양보해서 돌연변이의 돌연변이를 일으킨 거대 멧돼지가 등장할 수 있다고 치자.
현대인이 그런 멧돼지를 냉병기로 처리할까?
대량의 마취총을 쏜다든지 엘리펀트 건으로 처리하든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눈앞의 멧돼지는 증거였다.
그의 정신은 매우 멀쩡하며 그가 이세계에 소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 말이다.
현기증이 남과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침착한 자가 승부에서 승리한다는 옛 현인의 격언을 떠올리며 유준상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가 여기에 온 거지?'
침착함을 되찾으니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기억의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래, 야근 중이었지.'
그는 야근 중이었다.
새로운 컨설팅 계약을 따기 위해 200장 분량의 PPT를 제작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렇게 하염없이 PPT를 제작하다 낯선 알림음이 들렸더랬다.
알림음이 들린 곳엔 작은 태블릿이 있었다.
[피로도가 전부 회복되었습니다.]
['고독한 늑대' 용사님! 여행을 떠날 시간이에요!]
뭔가 해서 봤더니만, 새로 들어온 신입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정신 놓고 하던 게임의 알림음이었다.
'램페이지 스톰'이라는 모바일 게임으로 망겜 중에서도 손에 꼽는 망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금을 유도하는 데다 하라고 만든 건지 의심스러운 난이도, 뉴비 배척과 빈번한 서버 다운, 친목질과 파탄 난 성격의 고인물 등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게임이었다.
그래도 게임 자체의 시스템과 세계관 설정은 튼튼해 무법과 다름없는 운영에도 충성 유저가 많은 신기한 게임이었다.
화면이 눈에 들어온 순간, 호기심이 동해 신입의 캐릭터를 살펴봤다.
캐릭터의 이펙트가 화려하고 효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척 보기엔 상당히 강해 보였다.
쌓여 있는 부재중 메시지가 그의 생각에 신빙성을 보탰다.
―병신 새끼, 종결급 캐릭터로 200위 ㅋㅋㅋ
―님, 돈지랄 작작하고 랭킹 자리 비워요.
―딜찍누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죠? 쪼렙한테 개발리죠?
―아재요. 랭킹전 그만하고 마누라랑 협동 전이나 하슈. 받아 주는 길드도 없으면서 랭커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게 뭔 민폐요.
―어떻게든 대균열 팟에 끼려는 거 추하니까 적당히 해.
아재 소리까지 듣는 걸 보면 신입은 컨트롤이 어지간히도 안 좋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신입은 회사에서도 반응이 빨랐던 건 아니었다.
단순 FPS뿐만 아니라 조작이 요구되는 모든 게임에서 느린 반응은 치명적이다.
0.1초는 고사하고 어떤 게임은 0.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기도 하니.
'내가 했으면 잘했을까.'
남의 캐릭터를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든 유준상이었다.
비록 FPS를 파고들었던 유준상이었지만, 게임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자신에게 신입의 캐릭터를 플레이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름 잘할 자신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알림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고독한 늑대'님! 곧 있으면 대균열이 시작되어요! 그 전에 튜토리얼을 하시겠어요?]
[YES/NO]
갑작스러운 메시지.
아마도 흔히 말하는 돌발 퀘스트, 긴급 퀘스트인 것으로 보인다.
대개 이렇게 DM이 갑작스레 내주는 퀘스트는 보상 또한 후하기 마련.
때마침 흥미도 동했겠다, 자신도 있었겠다.
유준상은 이것이 신입의 계정이라는 사실도 잊고 YES 버튼을 눌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아아아!! 절대 누르면 안 됐는데!!"
회고를 마친 유준상의 입에서 육성이 터져 나왔다.
그 외침이 얼마나 처절한지, 유준상이 뭘 하건 말건 신경도 안 쓰던 사슴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어째서 그날 야근이 있었고, 어째서 그날 신입이 자신의 태블릿을 놓고 갔으며, 어째서 그날 묘하게 게임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YES 버튼을 누른 자신의 손가락을 탓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보단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었다.
문제는 그 방법을 궁리하기엔 그가 램페이지 스톰에 대해 아는 것이 지극히 적다는 것.
요리도 재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게임 커뮤니티를 하다 보면 알게 되는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지식이 전부.
심지어 그 지식도 대개 게임에 대한 비하나 폄하, 밈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실제 플레이엔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
아무것도 모른 채 게임 속 수많은 몬스터와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유준상은 앞길이 막막해졌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차, 묘한 위화감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그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나무는 바람을 따라 춤추며 태양을 머금은 초원은 눈이 부시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
새들의 지저귐.
뛰어다니던 사슴들의 발굽 소리.
꿀을 찾아 떠도는 벌들의 날갯짓.
그 무엇하나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그저 바람과 수풀 소리만이 분분한 적막을 달랠 뿐.
무언가 이상하다.
본능이 어서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라 이야기한다.
그는 혹시 몰라 멧돼지에 꽂혀 있는 검 한 자루를 챙겨 이동했다.
빠른 걸음으로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빠른 걸음은 이내 달리기가 되었고 달리기는 곧 전력 질주가 되었다.
고요를 대신해 찾아온 말발굽 소리.
그가 지나온 방향에서 거대 멧돼지와 비슷한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제기랄…!'
누가 망겜 아니랄까 봐 시작부터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덮쳐든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노리며 달려드는 것 같다.
그는 이 악물고 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하고 전신의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단 한 번도 계주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몸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로다.
네발 달린 짐승을 상대로 아무리 발을 빨리 놀린다 한들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우우―!
거친 투레질과 함께 얄쌍한 황소 한 마리가 유준상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어찌나 빠른지 황소가 아니라 트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황소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서둘러 동기화를 진행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기화하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외칩니다!]
성좌? 동기화?
이게 무슨 메시지란 말인가.
아니,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죽는 것은 기정사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는 속으로 '동기화'를 외쳤다.
이어진 푸른색 알림창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려 왔다.
['고독한 늑대'와의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캐릭터 '고독한 늑대'의 능력치와 아이템의 가치를 측정합니다.]
[가치 측정 완료.]
[가치 측정 결과 '종결급']
[등급에 따른 초기 능력치와 스킬, 고유능력을 획득합니다.]
2. 시작은 위기와 함께 (1)
알림창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초기 능력치 설정을 완료하였습니다.]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내구: 10]
[마력: 10]
[모든 능력치가 초기 설정 한곗값에 도달했습니다.]
[이후의 성장은 GP를 사용해 주세요.]
능력치가 신체에 반영됐는지 몸에 힘이 돌고 땅을 박차는 다리가 가벼워졌다.
덕분에 빠르게 가까워지던 황소와 유준상의 거리가 한순간 유지된다.
[스킬을 획득합니다.]
[스킬 '무기 연마'를 획득합니다.]
[스킬 '손재주'를 획득합니다.]
[고유능력을 획득합니다.]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을 획득합니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을 획득합니다.]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을 획득합니다.]
[고유능력 '???'을 획득합니다.]
스킬이나 고유능력 등.
많은 정보들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갑작스레 상승한 능력치 덕에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어찌어찌 면했지만, 괴물들이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제기랄. 어떻게 하지?'
심장은 터질 것 같고, 허벅지와 종아리에선 바늘로 찌르는듯한 고통이 인다.
급속도로 떨어지는 체력.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그의 눈앞으로 불안한 미래가 스쳐 지나간다.
황소의 뿔에 등을 꿰뚫리고 괴물들에게 밟혀 무참히 짓이겨지는 모습.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갑자기 이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거늘,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때, 알림창이 떠오르며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이 활성화됩니다.]
"?!"
들판 위에 나 있는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
참호를 연상케 하는 좁은 구덩이에 유준상은 나자빠졌다.
"크윽…!"
아프다.
갑작스레 나자빠진 탓에 구덩이를 굴러 몸 여기저기에 타박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유준상은 몸 여기저기에 퍼지는 고통보다도 자신의 머리 위를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구덩이 위로 지나가는 수많은 괴물들.
머리 위로 괴물들이 구덩이를 뛰어넘어 지나가고 있었다.
'산 건가…?'
천운이었다.
마약 이곳에 구덩이가 있지 않았다면, 자신이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면, 체력이 떨어진 자신은 짐승들의 돌진에 짓밟혀 그대로 목숨을 달리했을 터였다.
유준상은 미친 듯이 격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악착같이 달렸는지, 전신은 땀 범벅에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다.
그래도 뇌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고통도 피로감도 덮어 버려 당장은 괜찮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유준상은 고개를 들어 구덩이를 올려다보았다.
괴물들은 사라지고, 괴물들의 발 구르기에 진동하던 지면도 잠잠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그는 숨을 죽이고 한참을 더 기다렸다.
조금씩 들려오던 괴물의 울음소리도 지면의 떨림도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유준상은 가슴 깊이 고여 있던 숨을 내뱉었다.
마침내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걸 실감한 것이었다.
"푸하―!"
살아남았음이 전해 주는 안도감이란.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습관적으로 죽겠다는 소릴 달고 살지만, 진짜로 죽을 상황에 직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괴물들에게 쫓기다니.
현대 문명에 찌들어 있던 그에게 있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았으면 된 거다.
살았으면.
호흡을 고르며 몸을 추스르고 있자니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무사해서 다행이라 이야기합니다.]
[다쳤으면 매우 슬펐을 거라 이야기합니다.]
이 성좌는 뭐 하는 존재이길래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인가.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이 성좌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것은 사실이다.
동기화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분명, 이 구덩이까지 오지도 못하고 황소 괴물에게 등을 꿰뚫렸을 테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 맹인의 수호천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다 말합니다.]
[서둘러 상태창을 확인해 보라 합니다.]
[곧 있으면 퀘스트가 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퀘스트?
아무래도 무언가 추가적인 이벤트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무엇인진 알 수 없었으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는가.
동기화된 자신에 대해선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속으로 상태창을 외치니 눈앞으로 익숙한 창이 나타났다.
이름: 유준상
클래스: 없음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내구: 10
마력: 10
<스킬>
무기 연마 lv. 3
손재주 lv. 3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
초심자의 행운
초보자의 직감
???
<소지 GP>
없음
게이머라면 익숙하기 그지없는 창.
상태창.
이 창을 모니터를 통해서가 아닌 육안으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아주 오래전 게임을 처음 접했을 적 감각이 떠오른다.
"역시, 전부 초기화됐네."
능력치와 스킬, 고유능력이 게임에 들어오기 전 캐릭터와 큰 차이가 있었다.
태블릿에 떠 있던 캐릭터인 '고독한 늑대'와 동기화한 건 분명한데.
아무래도 게임 속에 들어오면서 전부 리셋된 모양이다.
그 대신 재시작 특전으로 스킬과 고유능력이 주어졌다.
그는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상태창을 훑어보았다.
[클래스: 없음]
클래스는 없다.
능력치는 전부 10.
[모든 능력치가 초기 설정 한곗값에 도달했습니다.]
초기 설정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듣기로 램페이지 스톰은 밸런스를 너프를 통해 잡는 게임이었다.
그 말인즉, 스킬이나 고유능력은 물론 능력치 하나하나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말.
그런 상황에서 최대치의 능력치를 지니고 시작하는 건 크나큰 이점이었다.
보통은 1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니.
능력치는 운동으로 치자면 그야말로 기초체력과 같은 것이니, 무엇을 하든 기반은 갖춰진 셈이다.
그는 능력치 아래, 스킬로 눈을 내렸다.
그가 지닌 스킬은 두 개.
무기 연마와 손재주.
어떤 스킬인지 궁금해하자니, 알림창이 정보창을 띄웠다.
[스킬: 무기 연마 lv. 3]
[효과: 모든 무기의 숙련도가 무기 연마 레벨만큼 추가 상승합니다. 모든 무기의 숙련도 경험치 획득량이 20% 증가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범용성이 매우 높은 스킬이었다.
효과 설명에 따르면 어떤 무기든지 일정 이상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무기라면 본래의 실력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량을 선보일 수 있다는 말.
생각보다 훨씬 좋은 스킬이다.
램페이지 스톰에 어떤 스킬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단순히 범용성이 좋다는 선에서 끝날 스킬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해당 등급 가치에 따라 스킬과 고유능력을 획득한다고 했었지.'
알림창에 따르면, 유준상과 동기화한 캐릭터인 '고독한 늑대'의 가치 등급은 '종결급'.
그에 걸맞은 스킬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상급 스킬은 되지 않을까.
유준상은 다음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 손재주 lv. 3]
[효과: 제작, 수리, 도축, 정비, 요리 등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숙련 보정을 획득하며 숙련도 경험치 획득량이 20% 증가합니다. 단, 무기 숙련의 경우 보정치가 스킬 레벨의 1/3로 제한됩니다.]
무기 연마와 마찬가지로 범용성이 매우 높은 스킬.
다른 것이 있다면 전투에 유용한 무기 연마와 달리 이쪽은 비전투 쪽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손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건 매한가지라 제한적이나 무기 숙련에도 보정이 가해진다.
매우 만족스러운 스킬이었다.
'그다음은….'
사실상 이쪽이 메인이었다.
램페이지 스톰이 망겜이라 불리게 된 주원인 중 하나.
'고유능력.'
스킬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능력으로, 하나만 있어도 게임 진행의 난이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오버 스펙의 능력이었다.
어느 유저의 말에 따르면, 고유능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호랑이를 사냥할 때 총을 드는 것과 맨손으로 뛰는 것만큼의 차이가 있다던가.
그런 사기적인 고유능력이 지금 유준상에게 무려 4개나 있었다.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
[효과: 마력 회복력이 1,000% 상승합니다.]
[특정 조건 만족 시 상위 능력으로 변화합니다.]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
[효과: 행동과 선택이 유리한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처음 하는 행동 시 큰 행운 보정이 따릅니다.]
[특정 조건 만족 시 상위 능력으로 변화합니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
[효과: 낮은 확률로 죽음, 부상, 상해 등 신체적 위험에서 벗어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직감을 전달합니다.]
[특정 조건 만족 시 상위 능력으로 변화합니다.]
[고유능력: ???]
[해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괜히 고유능력이 아닌 건지, 상당한 효과를 가진 능력들이다.
하나가 미해방이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효과를 지닌 고유능력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두 번째와 세 번째 고유능력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초심자의 행운'과 '초보자의 직감'.
능력치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얼핏 보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효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 두 고유능력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능력이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운이 없으면 되는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초심자의 행운은 손에 들어온 행운을 더욱 크게 만들고 극한의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초보자의 직감은 아예 그런 극한의 상황을 방지해 줄 수 있고.
게임이라면 한차례 고민해 봤을 능력이었을 테지만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지금 이렇게 구덩이에 넘어져 목숨을 부지한 것도 초심자의 행운이 작용한 것이었으니.
나름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던 순간, 수호천사가 다급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지금 당장 그곳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니?
차디찬 한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신변의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활성화된 초보자의 직감이 가만히 있으면 목숨을 잃는다 강하게 경고한다.
유준상은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던졌다.
쿠웅―!
고질량의 무언가가 떨어지더니 흙먼지를 피어 올리며 그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박살 냈다.
"뭔가 했더니만…!"
그는 서둘러 구덩이를 빠져나와 검을 들었다.
구덩이를 박살 낸 건 다름 아닌 유준상의 뒤를 바짝 추격했던 황소 괴물.
제 갈 길 찾아 떠난 줄 알았던 황소는 되돌아와 그를 노렸다.
"부우우우―!"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콧김까지 뿜어내는 녀석.
그와 동시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맹인의 수호천사가 말했던 퀘스트창이었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1: 생존]
[설명: 혼란과 질서, 번영과 쇠퇴가 공존하는 램페이지 대륙에서 눈을 뜬 당신. 움직이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고 후일을 도모하세요.]
[보상: 1,000 GP]
"이걸 말이라고…."
말이 쉬워 생존이지.
이미 그는 저 괴물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운이 좋아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저것을 상대로 다시 한번 살아남으라니.
유준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힘들어 보인다.
경차 정도 되는 덩치에 성이 날 대로 나 땅바닥을 긁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금이 저려 온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도망치라 조언합니다. 이제 막 동기화를 끝마친 당신이 상대하기엔 무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수호천사의 말대로 상대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냐고 한다면 그건 더 힘들어 보인다.
아까도 따라잡혔는데, 한 번 더 도망친다 한들 뿌리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체력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지.
유준상은 검을 들고 싸울 자세를 취해 보였다.
[스킬 '무기 연마 lv. 3'이 활성화됩니다.]
[검술 lv. 0 → 3]
처음 쥐는 검인데도 여러 번 사용했던 것처럼 손에 익는다.
그가 싸우려고 하자 맹인의 수호천사가 염려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정말로 싸워 이길 수 있냐고 묻습니다. 자신은 불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안한 건 그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도망치는 것과 싸우는 것 중 좀 더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랐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
[효과: 행동과 선택이 유리한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처음 하는 행동 시 큰 행운 보정이 따릅니다.]
도망치는 행동은 아까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싸우는 건?
"저 검 휘두르는 거 처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3. 시작은 위기와 함께 (2)
FPS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무기는 단연코 총이다.
당장 FPS라는 단어만 봐도 First Person Shooter의 줄임말로, 슈터(Shooter), 즉 쏘는 사람을 뜻했다.
총이야말로 쏜다는 Shoot의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무기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FPS에서 총 다음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무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弓)이나 투석류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또배기 FPS 유저라면 입을 모아 이야기할 것이다.
바로 '칼'이라고.
칼은 근접전의 꽃이자 헤드샷과 함께 불리한 상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일발 역전의 무기였다.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칼을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곧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인간만이 아니라 괴물에게도 유효한 법칙이다.
유준상은 칼, 그러니까 검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무기 연마로 상승한 검술 덕에 자세가 꽤 봐 줄 만하다.
손에 쥔 그립감도 처음 쥐어 본 것답지 않게 익숙하다.
'실제로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는 그가 해 왔던 수많은 게임을 떠올렸다.
대부분이 FPS였지만, 그중에는 지금처럼 근접 무기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비록 게임일지라도 수많은 플레이 중 필요한 경험만을 추려 낸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쉽게 생각하자.
결국엔 타이밍이다.
놈이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면 되는 이야기다.
필요한 동작은 3레벨에 달하는 검술로 어찌어찌 행할 수 있길 바랄 뿐.
집중했다.
콧김을 뿜으며 발을 구르는 황소.
놈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집중이라는 필터에 걸려 사라진다.
"부우우우―!"
울음소리와 함께 황소 괴물이 달려들었다.
실로 위압적인 돌진이다.
어찌나 위압적인지 처음 봤다면 꼼짝도 못 한 채 얼어붙어 그대로 치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놈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전부 눈에 잡힌다.
다리 관절의 움직임이, 목의 주억거림이, 허공을 휘젓는 꼬리가.
타이밍을 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다리를 옆으로 밀고 동시에 몸을 크게 회전시켜 황소의 몸통 위로 기다란 선을 긋는다.
촤아악―!
터져 나오는 핏줄기.
유효타.
성공적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느껴진 손맛이 그리 깊지 않다.
유효타지만 치명상이라 하기엔 어렵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황소 괴물은 그새 몸을 돌려 다시금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피하는 게 늦어 황소의 뿔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간다.
뜨거운 열통과 함께 바지가 붉게 물든다.
하지만 집중력이 깨지거나 신체 동작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다.
여전히 해볼 만했다.
"부우우―!"
황소는 다시금 땅을 긁으며 달려들 준비를 한다.
상처 입을 줄 몰랐던 걸까, 유준상을 바라보는 눈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방금은 봐준 거라는 듯 이번엔 제대로 할 생각인지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왕 봐주는 거 끝까지 봐줄 것이지.
놈이 또 한 번 땅을 박차 달려든다.
확실히 속도도 박력도 조금 전보다 더 뛰어나다.
'반응할 수 있을까?'
싸우기로 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검을 세우고 놈이 다가오는 타이밍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가상의 선을 그어 놓고, 놈이 그 가상의 선을 넘어서길 기다리던 찰나였다.
"...?!"
녀석의 속도가 갑작스레 늦어졌다.
그와 동시에 놈이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얼굴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방금 전 검이 만들어 냈던 상처에서 갑작스레 피가 터져 나왔다.
얕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전 일격이 중요 부분을 베고 지나갔던 모양이다.
절호의 기회.
"으아아아아!!"
그는 함성과 함께 황소 괴물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부우―!"
자신의 등에 유준상이 올라타니 황소가 그를 떨어뜨리고자 몸을 흔든다.
"떨어질 줄 알고!"
유준상은 등에 검을 박고 어떻게든 버텨 냈다.
오히려 날뛰면 날뛸수록 등에 박힌 검이 흔들려 황소 괴물의 몸 안으로 점점 파고든다.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분명 이길 수 있을 테니.
그러나 힘이 다한 것은 유준상이 먼저였다.
그는 결국 검을 놓치고 저 멀리 들판 위로 날아갔다.
"큿…!"
초심자의 행운이 터진 덕에 풀잎이 무성한 곳에 떨어져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적다.
천만다행으로 떨어진 곳 근처에 단검이 떨어져 있기까지.
거대 멧돼지 사체도 그렇고 여기서 싸움이라도 있던 것인가.
뭐가 되었든 지금 유준상에겐 단도가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유준상은 단검을 쥐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황소 괴물은 얼굴엔 피가 흐르고 등에 검이 박혔음에도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또 한 번 달려온다면 승산은 없었다.
한차례 심장이 터져라 달린 데다 날뛰는 놈의 등 위에서 버틴 탓에 대부분의 체력을 소진했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는 와중이다.
"앞으로 소고기 안 먹을 테니까, 제발… 그대로 쓰러져라. 제발."
충분히 쓰러질 법도 하건만.
그의 바람이 무색하게 황소 괴물은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긁으며 재차 돌격을 준비한다.
"니미럴…!"
이래서야 각오를 굳힐 수밖에 없다.
유준상은 어떻게든 공격을 받아 낼 생각으로 상체를 숙였다.
마침내 황소 괴물이 땅을 박차고 그에 따라 유준상 또한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쿠웅―!
전원 꺼진 컴퓨터처럼 황소 괴물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녀석이 다시 일어서는 일은 없었다.
한계인 건 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황소 괴물에게 다가갔다.
피를 얼마나 흘리는지 놈이 쓰러진 곳에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피가 부족한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황소.
상처를 보자면 가만히 놔둬도 죽을 테지만 놈은 괴물이다.
재생한다든지 죽기 직전 마지막 발버둥을 펼친다든지,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판타지 세상이지 않겠는가.
굳이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다.
그는 단도를 들고 힘껏 놈의 관자놀이에 꽂아 넣었다.
오르락내리락하던 녀석의 가슴이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팡파르와 함께 나타나는 알림창.
[마수 '발렌토로'를 제거하였습니다.]
[20 GP를 획득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1 '생존'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1,000 GP가 수여됩니다.]
[첫 번째 튜토리얼에서 이벤트 마수를 처리했습니다.]
[히든 업적 '물러서지 않는 자'를 클리어.]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정신없는 알림.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이제 와서 축하 메시지라니.
뭐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살아남았다.
* * *
"으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알림창을 확인하니,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몸에 힘이 풀렸다.
그는 그대로 황소 괴물의 몸뚱어리 위에 드러누웠다.
죽은 짐승 위에 드러눕다니. 평소엔 상상조차 못 했는데.
지금은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널찍하고 푹신푹신한 황소 괴물의 몸뚱어리는 최고급 침대였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의 용기와 결단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한들 위험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분전에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500 GP를 수여합니다.]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봤는지 맹인의 수호천사가 GP를 보내왔다.
GP가 뭔진 모르겠지만, 준다는 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는 고개를 내려 쓰러진 황소를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만약 저 괴물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달려들었다면 상처를 내기는커녕 피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공격을 피하다 체력을 다해 목숨을 잃었을 테지.
어찌어찌 운 좋게 낸 상처가 급소를 지나쳤던 게 행운이었다.
물론, 그 행운을 믿고 도망치는 것이 아닌 싸움을 택한 것이었지만 진짜로 행운이 따르니 조금 어리둥절하다.
'평상시에는 그리도 운이 따르지 않더니만.'
당장 남이 하던 게임에 끌려온 것만 봐도 얼마나 운이 없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있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운이 없는 것보단 백 배 낫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게임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진짜로 게임 속에 떨어질 줄 몰랐다.
누군가는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 썩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엿 같은 인생이어도 지켜야 할 것은 있는 법이지 않는가?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가야 할 의무가 유준상에게는 있었다.
일반적인 클리셰대로 라면 게임을 클리어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지금 그가 떨어진 게임은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램페이지 스톰.
심지어 괴담만 많이 들었지 한 번도 플레이해 본 적이 없는 게임이었다.
'동기화한 캐릭터가 꽤 강력한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가 FPS 게임도 아니고 다양한 설정과 함정, 그리고 세력 구도가 존재하는 RPG 게임이다.
자신 있는 무기인 총이 있다면 혹시 모르겠으나, 30년이 넘는 램페이지 스톰 시리즈에서 총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램페이지 스톰 시리즈는 대부분 중세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으니.
'벌써부터 우는소리 해 봤자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활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이래저래 암울하지만 낙담해서야 좋을 거 없다.
나름 긍정적인 요소들을 생각하며 일단 살아남는 데 집중하자.
집에 돌아가든 말든 전부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생각하는 차, 맹인의 수호천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히든 업적 보상은 확인하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아, 맞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추가 보상을 확인하는 걸 깜박하고 있던 유준상이었다.
그는 대기 중인 알림창을 띄웠다.
[첫 번째 튜토리얼에서 마수를 처리했습니다.]
[히든 업적 '물러서지 않는 자'를 클리어.]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마수를 처리한 것으로 히든 업적이 클리어된 것을 보자면 원래는 도망쳐야 했던 것 같다.
척 보기에도 강해 보였지.
원래라면 상대조차 못 하는 마수가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건 이미 끝난 일이다.
앞으로의 일만을 신경 쓰자.
[추가 보상을 획득하시겠습니까?]
받겠다 생각하니 이내 그의 앞으로 5장의 고동색 카드가 떠올랐다.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카드들.
[추가 보상으로 5개의 아이템 중 하나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저 카드들이 아이템인 건가.
나쁘지 않다. 이 자그마한 단도만으로는 앞날이 막막한 차였으니.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설마 여기서까지….'
카드가 전부 뒷면이었다.
정보가 적혀 있는 앞면이 보이지 않아 어떤 아이템인지 알 수가 없다.
제기랄.
누가 사행성 게임 아니랄까 봐.
현실에서까지 뽑기 요소가 나올 필요는 없는데, 기어코 보상에 뽑기 요소가 나타났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재미있는 시스템이라며 눈을 빛냅니다.]
이게 재미있는 시스템이라니.
수호천사가 K―가챠의 맛을 보지 않아서 그렇다.
자고로 가챠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에게 폭사라는 자비를 선사하는 고도의 인간 갱생 시스템이다.
한번 K―가챠의 맛을 보면 두 번 다신 사행성 게임에 손을 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는데, 돈의 귀중함을 강제로 깨우치게 만드는 실로 훌륭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는 걸 보면 갱생 시스템으로선 실패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무엇을 골라야 잘 골랐다 소문이 날지 고민하고 있자니, 맹인의 수호천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혹시 가지고 싶은 아이템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보상에 간섭을 할 수 있는 건가.
가지고 싶은 아이템이야 정해져 있다.
총.
그저 힘으로 욱여넣은 검이 먹혔던 것을 보자면 총도 나름 쓸 만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자신 있기도 했고.
총을 가지고 싶다 이야기하니 맹인의 수호천사가 곤란한 듯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역시 없는 것인가.
그러나 확인한 메시지는 유준상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것이었다.
[어떤 총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합니다. 종류가 너무나도 많다고 합니다.]
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무 많다니?
설마 총이 존재하는 세계인 건가?
지금까지 렘페이지 스톰에 전례가 없어서 그렇지 판타지 세상인 만큼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유준상은 잠시의 고민 끝에 이야기했다.
"권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권총에도 종류가 많지만, 너무 구체적이어 봤자 선택지만 제한될 뿐이다.
그 생각이 옳았는지 빙글빙글 회전하던 카드 중 한 장 위로 빛줄기가 내려앉으며 은색으로 바뀌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설마 다른 걸 고르진 않으리라 말합니다.]
다른 것을 고를 리가.
고동색 카드 가운데 혼자만 은빛 자태를 뿜어내는 카드를 그 누가 감히 지나칠 수 있겠는가.
목숨과도 직결된 문제다.
유준상은 은빛 카드를 집었다.
4. 시작은 위기와 함께 (3)
은빛 카드가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짧은 순간 일대를 은빛으로 물들인 카드는 곧이어 그 형상을 뒤바꾼다.
강력한 빛이 가시고 난 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카드가 아닌 권총이었다.
"진짜 총이네…?"
실린더를 회전시켜 연사하는 종류의 권총.
흔히들 리볼버(Revolver)라고 불리는 권총이었다. 러시안룰렛에 사용하는 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총열 길이는 대략 8인치 좀 안 되고, 실린더에 들어가는 총탄은 6발.
구조가 간단하고 손잡이가 투박해 실용 일변도의 느낌이 나는 총기였다.
마음에 들어 뚫어지게 바라보자니 알림창이 떠올랐다.
[G―757]
종류: 리볼버
등급: 고급
공격력: 15
최대사거리: 50m
조작성: B
탄창: 6
분당 발사 수: 120
[특성]
개량된 강선
깃털 탄창
[개량된 강선: 적중률이 상승합니다.]
[깃털 탄창: 재장전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동속도가 상승합니다.]
권총과 관련된 이런저런 설명들.
하지만 한 번도 램페이지 스톰을 플레이해 본 적이 없어 능력치와 특성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는다.
직접 사용해 봐야 감이 잡힐 것 같은데….
유준상은 실린더를 밀어 약실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총알 6발이 장전되어 있다.
문제는 총을 가늠해 보기 위해선 못해도 서너 방은 쏴 봐야 한다는 사실.
여러모로 곤란하다.
총알 없는 총은 햄 없는 부대찌개와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그런 만큼 총알을 아끼고 싶지만 그렇다고 시험 사격을 안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음… 어떻게 한다.'
여러 가지 고민이 되는 유준상이었다.
그런 그의 고민을 알고 있는 것인지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자신이 보내 주는 서비스라고 이야기합니다.]
[항상 서비스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껴서 사용하라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자기.
보자기를 확인해 보니 50발 묶음의 총알 세트가 있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수호천사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원래 모든 성좌들이 저런 건가 아니면 맹인의 수호천사만 저런 건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함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보단 어서 총을 쏴 보라 말합니다.]
[마음에 드는지 궁금하다고 말합니다.]
유준상은 엄지손가락으로 권총의 해머를 당기고 쓰러진 황소 괴물을 조준했다.
정확히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뿔을.
50발이나 있으니 장전되어 있는 총알은 전부 사용해도 괜찮겠지.
이런 건 제대로 확인해야 뒤탈이 없다.
그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번의 총성.
한없이 단단해 보였던 황소의 뿔이 그대로 쪼개진다.
뒤이어 남은 세 발을 몸통에 쏘니 황소의 몸통 위로 박탈륜과 함께 구멍이 생겨났다.
유준상은 실린더를 밀고 탄피를 제거했다.
생각보다 위력이 강하다.
설마 세 발 만으로 황소의 뿔을 박살 낼 줄이야. 위력에 비해 반동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다.
조작성이 B인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다루기 쉬운 구조뿐만 아니라 나름 반동 제어가 뛰어난 것 때문.
깃털 탄창 특성이 있음에도 리볼버 특유의 장전 속도는 어떻게 못 하지만,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드는 총이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시범 사격해 본 결과가 마음에 드는지 묻습니다.]
굳이 물어볼 것까지야.
마음에 든다.
심플한 외견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한 발 한 발 강력한 게 지금의 처지에서 매우 유용했다.
탄 수가 제한되어 있는 만큼 마무리용으로 사용해야 했으니 위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무리를 위해 소비되는 탄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어 다행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다음 퀘스트가 와도 문제없겠다 말합니다.]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퀘스트라니?
[퀘스트의 등장은 일정 조건을 갖추어야만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튜토리얼이라 강제 진행되는 퀘스트가 있겠지만, 자신이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당장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가.
유준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램페이지 스톰이라고는 하지만 튜토리얼에서까지 무자비하진 않은 모양이다.
아니지, 황소 괴물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을 보자면 무자비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설령 퀘스트가 진행된다 한들 수호천사가 지켜봐 줄뿐더러 초심자의 행운과 초보자의 직감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충분히 휴식도 취했겠다, 유준상은 벨트와 바지 사이에 권총을 꽂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단검과 권총 그리고 혹시 몰라 황소의 뿔을 챙겼다.
돈이 필요할 일이 생기면 물물교환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어디로 가야 한다."
신변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향해야 했다.
괴물에 대한 대책도 되어 있을 테고 이 세상에 대한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
다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을의 마 자는 물론 사람의 사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조금 전 괴물 무리가 달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드는 숲.
괴물들이 몰려온 곳이기도 한 만큼 위험이 도사릴 가능성이 크다.
행운과 직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뒤가 없는 상황도 아니고 두 능력에 목숨을 맡길 정도로 안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가야 할 방향은 마수들이 달려온 곳이 아닌 마수들이 달려간 곳.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푸른 초목으로 뒤덮인 언덕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는 마수들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나름 그 높이가 높다.
언덕 중간중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스위스에 온 것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괴물만 없었으면 지상낙원이라 생각했을 텐데.
이런 곳에서 집을 짓고 한적하게 노년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였다.
"음?"
언덕 너머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소리들이 작게 들려왔는데 너무 많은 소리가 겹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직감이 조심하라 작게 경고하는 것을 보자면 좋은 일로 생겨나는 소린 아닌 듯하다.
그러면서도 접근하면 안 된다는 감은 들지 않아 호기심에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 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언덕 꼭대기에 올랐을 때 유준상은 지금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 아래, 드넓은 평야에서 수천의 괴물과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 *
유준상은 가만히 괴물과 군인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전세는 어느 정도 기울어진 상태였다.
전열에 서 있던 중갑병들이 괴물들의 돌격을 버티지 못해 짓밟히고, 후열에 있던 창병들이 괴물들에게 노출되어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든다.
후방에 있는 궁사대가 다급히 일제사격을 가하지만 괴물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그대로 한쪽 열이 무너지는 궁사대.
궁사대는 검을 뽑아 들어 근접전에 들어갔다.
전열 후열 할 거 없이 난전에 돌입하니 병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제기랄! 후퇴다! 후퇴해라!"
이대론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결국 후퇴를 외치는 지휘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천천히 후퇴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기사들은 나를 지켜라! 당장 말 머리를 돌린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돌아가서는 병사들이…!"
"나보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있으란 말이냐! 닥치고 날 엄호해! 여기서 빠져나간다!"
하나 문제는 지휘관과 핵심 참모들이 그대로 고삐를 돌려 줄행랑을 쳤다는 것.
어이가 없어서 눈이 절로 휘둥그레진다.
후퇴도 작전이다.
지휘해야 할 인간이 자기 살겠다고 도망쳐버리다니?
지휘 없이 병사들만으로 마수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지휘관이 사라진 병사들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대열을 풀고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각자도생을 택한 것이다.
"도, 도망쳐!"
"빌어먹을…!"
"으아아악!"
전의가 사라진 병사들은 괴물들에게 있어 한낱 먹이일 뿐, 괴물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천천히 대열을 갖추고 후퇴한다면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한 지휘관 때문에 죽어야 하는 병사들을 보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은 맹인의 수호천사도 마찬가지였는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리석은 지휘관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 간다며 저들을 딱하게 생각합니다.]
동감이다.
지휘관의 안위를 위해 병사들을 희생시킨 것에 불과하다.
알림음이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띠링―!
[맹인의 수호천사가 '유준상' 님에게 서브 퀘스트를 제안합니다.]
[서브 퀘스트: 구출]
[설명: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딱하게 여깁니다. 그녀의 바람에 따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을 마수로부터 구해 내세요.]
[보상: 구해 낸 사람 수 * 20 GP, 맹인의 수호천사의 호의]
튜토리얼 퀘스트가 아닌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직접 내린 서브 퀘스트였다.
착한 일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 보상까지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수락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의 선택에 감명받습니다.]
[부디 무사히 퀘스트를 수행하라 당부합니다.]
아무렴.
아무리 사람들을 구하는 거라지만 자신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다.
그는 한 손에는 단도를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쥐고, 비탈길을 내려가 들판으로 향했다.
* * *
들판과 언덕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숲.
전투의 소음이 울려 퍼지는 그 한복판엔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무리가 있었다.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마수의 공세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차례 격전을 치른 뒤.
지친 그들이 늑대들을 상대로 버티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젊은 여성이 늑대의 공세를 이기지 못해 바닥에 넘어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늑대 한 마리가 그 거친 이빨을 세우며 달려든다.
그러나 늑대의 이빨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
유준상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타앙―!
그대로 늑대의 머리를 터뜨리는 탄환.
늑대 한 마리가 그렇게 쓰러진다.
위협이라 여긴 늑대들이 곧장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유준상은 권총을 집어넣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킬 '무기 연마 lv. 3'이 활성화됩니다.]
[검술 lv. 0 → 3]
상승된 검술 레벨이 어떻게 하면 단도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알려 온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거기다 직감이 늑대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지 본능적으로 알려 주기까지.
다수의 마수들이 접근함에도 유준상은 침착했다.
아까 상대했던 황소 괴물과 비교하면 무섭지도 않은 놈들이다.
그는 늑대들의 공격을 피하며 단도를 휘둘렀다.
허공 위로 다수의 선이 그어지며 늑대들의 몸 위로 핏줄기가 터진다.
단도로 처리할 수 있는 건 단도로 처리하고, 반응하기 힘든 공격은 권총을 사용해 대응한다.
"라엘! 우리도 도와주자!"
"네!"
뒤이어 늑대들과 대치하고 있던 두 병사가 가세한다.
덕분에 10마리가 넘었던 늑대들이 빠르게 처리된다.
늑대들을 전부 처리하니 버티고 있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지쳐 쓰러 주저앉았다.
그들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형씨, 정말 고맙군.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고 말았을 거야."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을 텐데, 이쪽이야말로 같이 싸워 줘서 고맙다.
"이대로 도망치세요. 다른 사람들도 구할 겸 늑대들이 뒤쫓는 일이 없도록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겠다고요?"
젊은 여성이 눈살을 찌푸린다.
자신들을 끝까지 지켜 주지 않아서 심기가 불편한 것인가.
내 착각이었다.
이어진 대답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와주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많이 지쳐 보이는데.
"괜찮나요? 휴식이 필요해 보이시는데."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저 조금만 쉬어도 금방 회복되는 체질이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많이 구하기 위해 돕는 건 당연한 거죠!"
당차게 외치는 여인.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이다.
하나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름 자신 있어 보인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이 말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 각기 따로따로 흩어져서 후퇴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병력을 모아서 후퇴하는 게 더 나아. 사람들을 이곳으로 최대한 많이 보내게. 내가 최대한 지키고 있을 테니."
중년 남성이 자리에 일어서서 자신의 망치를 들어 보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각자도생하는 것보단 단체로 뭉쳐 후퇴하는 것이 더 생존 가능성이 높다.
무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을 테니, 아무리 괴물들이라도 쉽사리 공격해 오긴 힘들다.
그것으로 방침이 정해지자 여성이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곧장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저는 라엘이에요. 그쪽은요?"
"유준상입니다."
"특이한 이름이네요. 복장도 그렇고, 무기도 그렇고."
당연히 특이하겠지.
이쪽 세상 사람이 아니니.
하지만 지금은 특이한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사소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움직이죠."
"넵, 그래야죠!"
묘하게 밝고 긍정적인 여인이다.
유준상과 라엘은 그대로 숲을 빠져나와 들판으로 향했다.
마수들에게서 도망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퀘스트 진행 과정]
[구출한 인원: 6명]
[보상: 120 GP]
5. 자신 있어? (1)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솟아오르고 괴물들은 자신들의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조금 전까지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숲 바깥에선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기, 아직 버티는 사람들이 있어요!"
라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갑을 입은 전사 하나가 동료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들고 늑대들의 공격을 버텨 내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핏물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썩 오래 버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유준상은 당장이라도 방패를 물어뜯으려는 늑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터져 나가는 늑대의 몸통.
늑대 한 마리가 그렇게 나가떨어지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늑대들이 유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라엘, 보조 부탁드릴게요."
"예!"
유준상의 단도가 또 한 번 늑대들을 베어 갈랐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늑대들은 라엘이 마무리한다.
조금이지만 나름 여유가 생긴다.
안 그래도 총알의 압박이 있던 차, 덕분에 총의 사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우리도 움직이자, 다들 일어서!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는 거야!"
두 사람이 늑대들을 상대하는 사이, 중갑 남성이 동료를 이끌고 움직였다.
라엘이 늑대들의 시선을 끌며 외쳤다.
"숲으로 가세요! 거기에 제 동료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 이름은!"
"라엘이요. 여기 옆에는…."
"유준상이다."
"나는 던컨, 이 은혜는 잊지 않지. 도와주어서 고맙다!"
던컨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동료들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라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무사히 갈 수 있겠죠…?"
중간에 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무사히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습격당하지 않길 바라야지.
[구출한 인원: 13명]
[보상: 260 GP]
유준상은 다시 고개를 돌려 구할 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상황이 난잡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름 분투하며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라엘, 저 방패 챙겨요. 저기 저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갈 겁니다."
"네, 이미 챙겼어요."
유준상과 라엘은 괴물들을 유인하고는 차례차례 괴물들을 격파해 사람들을 구했다.
죽음을 각오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도움에 눈물을 흘리고, 살았다는 안도감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이제 시작이다.
그들은 서둘러 다음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타앙―!
그들이 가는 곳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성뿐만 아니라 안도와 기쁨 어린 환호가 그 뒤를 따른다.
포기했던 병사들이 어떻게든 총성이 울리는 곳까지 오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구출한 인원: 58명]
그들이 구한 사람들은 계속해 늘어났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이들 중 여력이 남은 이들이 유준상에 합류하고, 전의를 잃거나 부상이 심한 이들은 숲으로 향한다.
그들의 조력에 힘입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낸다.
그렇게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람을 구하다 보니 어느덧 알림창에 표시된 구출한 인원수는―
[구출한 인원: 100명]
100명.
사람들을 구하고 짐승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많이 구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전장을 확인했다.
괴물들이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 이상 자신들의 식사를 방해한다면 본격적으로 덤벼들겠다는 듯 울대를 떨며 위협한다.
남은 병사들은 너무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무리해서 구하러 덤벼들었다간 고립되고 말겠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들이 더 멀리 도망치길 바랄 수밖에.
"돌아갑시다."
유준상의 말에 라엘과 병사들이 전장에서 이탈한다.
모두가 유준상의 등을 바라보았다.
전멸할 뻔했던 상황에 나타난 구세주.
유준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여기 있는 이들 전부가 죽었을 것이다.
경외 가득한 시선과 감사한 마음이 오롯이 그에게 향한다.
하나 유준상은 그저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확인할 뿐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서브 퀘스트 '구출'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총 100명의 인원을 구출.]
[보상으로 2,000 GP가 수여됩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첫 서브 퀘스트부터 자신의 등골을 빼먹을 생각이냐며 하소연합니다.]
[그래도 멋진 활약을 보여 주었으니 이번만은 참작하겠다고 합니다.]
착한 일에 보상까지.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유준상이었다.
* * *
"아오, 이제야 좀 살아남았다는 게 실감이 되네."
"진짜 죽을뻔했지…."
누가 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병사들은 숲에 도착하기 무섭게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들 격전을 펼친 터라 몸이 만신창이다.
유준상 또한 셔츠와 정장 바지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심지어 황소 괴물과 싸웠을 때 입었던 부상 탓에 옆구리는 붉게 물들어있다.
그래도 출혈이 크지 않은 것을 보자면 생각보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 지금 그를 찝찝하게 했던 것은 땀에 전 와이셔츠.
살아생전 셔츠를 입고 이렇게까지 움직여 본 적 없었는데, 셔츠가 어찌나 땀에 절어 있는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장 전투가 있는 것도 아니겠다.
유준상은 셔츠를 벗었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땀이 날아가니 조금 살 것 같다.
혹시라도 덧날까 싶어 황소에게 꿰뚫렸던 옆구리를 확인해 보았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얕긴 해도 출혈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상처가 벌어져 있어야 했는데.
옆구리 상처가 상당 부분 아물어 있었다.
당장 스킬이나 고유능력에 회복과 관련된 효과는 없다.
그런데 벌써 회복될 줄이야.
의아해하고 있자니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엘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내 얼굴이 새빨개지며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는데 무슨 이유인가 싶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과 라엘을 흐뭇하게 지켜봅니다.]
흐뭇하게 지켜볼 건 뭐란 말인가.
김칫국 마시길 좋아하는 성좌님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실비실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근육이 잡혀 있어 놀랍다고 합니다.]
본래도 근육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회사에서 근무하기 전엔 여러 가지 힘쓰는 일도 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선명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능력치가 반영된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도드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메시지까지 보내올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유준상은 메시지를 사뿐히 무시하며 무장을 확인했다.
이가 좀 빠졌지만 단도는 여전히 쓸 만했다.
권총도 아무 이상 없었고.
하지만 총알은 아니었다.
50발이 들어 있던 총알 보자기는 한없이 가벼워져 있었다.
약실에 총알을 채워 넣으려고 보니 남아 있는 총알은 고작 10발. 아낀다고 많이 아꼈는데 40발이나 사용했다.
싸움이 많았던 만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 덕분인지 새로이 얻은 것도 있었다.
[반복 숙달로 인해 검술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검술 lv. 0 → lv. 1]
검술 숙련도가 올랐다.
단검을 집어 봤다.
무기 연마가 활성화되지 않았음에도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막연하게 감이 잡힌다.
여기에 무기 연마까지 더 해지니 꽤 봐 줄 만한 자세가 나온다.
이러다 소드마스터… 는 힘들겠지.
그래도 GP를 사용하면 스킬이나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고 하니 나중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몸에 기력도 돌아왔겠다, 유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다른 이들도 그의 의도를 읽었는지 마찬가지로 움직일 준비를 한다. 목숨을 건진 덕에 유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상당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움직이죠."
"옙."
사람들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사람들과 함께 숲속을 걷고 있으니 뒤에서 몇몇 이들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 기사님?"
기사?
기사와 일만 광년은 먼 유준상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건 병사를 보았다.
병사가 작게 고개를 숙이곤 말을 이었다.
"그…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만.
감사 인사였나.
뒤에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있길래 뭐하나 싶었는데, 누가 대표로 감사를 전할지 이야기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건 당연한 거죠."
"그 도움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지 않습니까. 절대로 별일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감사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확실히.
별일로 치부할 일이 아니긴 했다.
서브 퀘스트 때문에 얼떨결에 나서긴 했으나, 괴물들, 그러니까 이들이 마수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으니.
게임 속 세상이 아닌 현실의 유준상이라면 절대로 나서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게임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과감해졌을 뿐.
그 과감함의 결과가 반짝이는 병사들의 눈빛이었다.
이거 부담스럽네.
"이렇게 감사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감격한 것 같다.
"저희 부대 지휘관이었으면 생색내느라 바빴을 텐데, 이런 겸양을…. 북부 유목민족 출신들이 대대로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유준상을 북부 유목민족이라 여기는 듯한 그들이었다.
출신이나 태생이야 멋대로 오해해 주면 나쁠 것 없다. 이계에서 왔다는 것보단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기 편했으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행기를 태워 줄 것까지야.
보통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 않나.
괜히 부끄러워 셔츠 아래로 닭살이 돋으려 한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좋으면서 뭘 그러냐고 말합니다.]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일을 했으니 떳떳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거야 맹인의 수호천사니까 떳떳할 수 있는 거다.
유준상은 이런 상황이 영 어색했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병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예. 말씀하시죠."
"혹시 등에 메고 계시는 뿔… 마수 '발렌토로'의 뿔이 아닌지요?"
발렌토로라.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그런 알림창을 띄웠던 것 같다.
이벤트 마수라고 했었지.
"이름은 확실치 않습니다만, 발렌토로가 민첩해 보이는 황소라면 맞습니다."
"그, 그렇군요! 한데… 발렌토로의 뿔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병사들이 뭔가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엄청 부담스럽지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들을 구하기 전 발렌토로와 조우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싸우게 되었고 처리한 후 혹시라도 써먹을 데가 있을까 싶어 뿔을 챙겼습니다."
"처리하셨다고요…? 그 발렌토로를?"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세상에 그 문제의 마수를 처리하시다니!"
"준상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감탄하는 병사들.
라엘이 설명하길, 그 발렌토로라는 마수는 일대 마수들의 실질적 우두머리라고 한다.
나름대로 강력한 데다 마치 인간처럼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마수였는데, 발렌토로 때문에 인근 마을과 영지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이렇게 군대가 파견된 것이었다고.
슬픈 사실은 군대가 파견되었음에도 발렌토로 토벌은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 황소가 마수 무리의 선두에 서 있었지.
다른 마수들을 이끌고 있던 것인가.
이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그런 마수를 처리했으니 히든 업적이 달성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단한 마수였군요."
"네. 엄청 똑똑해서 자기보다 더 강한 마수도 지휘하는 마수였어요. 다시 생각하면 저희 지휘관보다 몇 배나 더 똑똑한 것 같네요."
라엘의 말에 주변의 병사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휘관한테 여러모로 불만이 많은 듯하다.
불만이 아니라 원망일지도 모르겠다.
상황 불리하다고 그대로 도망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까.
그걸 누가 좋게 생각해 줄 수 있을까.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라엘이 미간을 좁히며 우려를 표했다.
다른 병사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음…. 곤란하네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라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제가 있어요. 아무래도 저희 지휘관은 준상 씨가 발렌토로를 처리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인정하지 않는 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심보가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거든요. 자긴 발렌토로에게 된통 당하기만 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방인이 단독으로 그 마수를 처리했으니, 분명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분풀이를 할 거예요."
회사 다닐 때도 그런 놈들이 종종 있었는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적당히 불편한 정도로 끝나겠죠."
"그게…."
라엘도 병사들의 얼굴도 굳었다.
설마 진짜로 죽는 건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발렌토로를 처리한 것만이라면 조금 욕먹는 정도로 끝날지도 몰라요. 준상 씨는 패잔병인 저희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포상을 받겠죠. 하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군요."
그녀가 유준상의 허리춤에 걸린 리볼버를 바라보았다.
"예. 준상 씨가 쓰셨던 화기. 저희 그라시아 제국에선 엄격히 금지된 무기거든요. 적대국인 제노비아 공화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에요. 지휘관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도 적국의 스파이라 누명을 씌우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인, 즉 최악의 경우 사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안정적인 거처를 획득할 수 있나 했더니만, 이래서야 도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라엘이 여러모로 궁리해 보는 듯하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얼굴을 구긴다.
보아하니 병사들도 마찬가지.
몇몇은 못 본 척해 줄 테니 서둘러 도망치라 눈짓한다.
아쉽다.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를 구하겠다고 나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암묵적인 동의하에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였다.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다 있냐며 두 팔을 걷어붙입니다.]
[누명을 쓰는 일도 목숨을 잃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감히 대천사의 사도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느냐 말합니다!]
[혼나는 게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6. 자신 있어? (2)
"빌어먹을…! 내가 무능한 것들 때문에 이러한 치욕을 맛봐야 하다니…!"
하르도 폰 팔롱드.
그라시아 제국의 권세가인 팔롱드가의 3남이자 서부 지대에서 암약하는 발렌토로 토벌대의 지휘관.
그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발렌토로를 처리하라는 임무를 받아 서부 지대로 파견된 지 어언 반년.
한데 몇 주도 채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토벌 임무는 몇 달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수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차례의 승전보도 울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번엔 아버지인 팔롱드 공작의 이름을 빌려 근처 마을의 백성들까지 강제 징집까지 했건만.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대패였다.
수려하게 장식된 지휘관실에 앉아 기름진 고기를 뜯던 그가 참모장에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얼마나 살아남았지?"
참모장 아라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천여 명의 병사 중 병영으로 되돌아온 자는 저희 참모단을 제외하면 1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후에 복귀하는 병사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가 절대 많지 않을 테죠."
무능한 지휘관의 판단에 병사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하르도가 참모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전술을 펼친 대가였다.
하다못해 후퇴만이라도 진형을 갖추어 행했다면 이렇게나 괴멸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을 텐데.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라…."
아라드는 인상을 썼다.
분명 참모단에게 이 책임을 물을 테지.
누군가는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라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하르도의 입에서 나왔다.
"잘됐군."
"...?"
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다.
작은 마을 하나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숫자였다.
그런데 잘됐다니?
하르도가 쌤통이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전략과 전술은 완벽했다. 형편없는 병사들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했지. 완벽한 전략과 전술에도 패배할 정도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병사라면 죽어도 싸다. 아니 응당 죽어야만 하지. 내게 패배를 안겨 줌으로써 날 모욕했으니 말이야."
"...."
"살아남은 놈들 전부 사형시켜라. 죄목은 귀족 모욕죄다. 나에 대한 모욕은 곧 가문의 모욕. 우리 팔롱드 가문은 결코 모욕을 받고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라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불가능한 전략과 전술을 수행하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병사들이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을 사형시키라니.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지휘관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을 전부 사형시킨다면 이후의 임무에 큰 지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만신전(萬神殿)의 신들이 저희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과 같이 병사들에게 자비와 기회를 베풀어 주심이 어떠한지요?"
"자비와 기회라. 만신전의 신들과 같이 말이지?"
하르도는 고깃기름이 묻은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자신이 만신전의 신과 같다는 비교에 매우 흡족한 눈치였다.
"좋군. 병사들의 충성심도 올라가고 내 명예도 드높이고. 사형 대신 채찍형으로 대신하기로 하지. 병사들에게 단단히 당부하도록. 내가 자비를 베풀어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하하하!"
그야말로 최악이다.
단순히 무능한 것도 모자라 포악하고 어리석다.
그렇게 아라드가 하르도 옆에서 적당히 입에 발린 말로 어떻게든 병사들의 처벌을 줄이려 하는 차, 병사 하나가 지휘관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아라드 참모장님. 전쟁터에서 1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복귀했습니다. 부상병들이 상당해 조속히 사제들의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곧 사제와 의무관들을 보내―"
"아니."
하르도가 아라드의 말을 잘랐다.
"본래 그들은 사형당해 마땅한 자들. 내 친히 자비를 베풀어 형을 감면해 주었으나 그렇다고 한들 그들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부상병은 방치한다. 살 놈은 알아서 살아남겠지. 만신전의 신들도 분명 나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병사가 떨리는 눈동자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아라드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부상병들에겐 그렇게 이르겠습니다."
"그래. 원래는 사형인데 내가 기회를 주는 것이라 꼭 언급하고. 좋은 것은 널리 알려야 한다."
"...예."
목숨이 위태로운 병사들을 방치하고 복귀한 병사들을 처벌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니.
정말이지 답이 없는 남자였다.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한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또 다른 병사가 와 보고를 이었다.
"하르도 님!"
"또 무엇이냐."
"그… 이번에 복귀한 병사들 가운데 저희 군 소속이 아닌 이가 껴 있습니다."
"우리 군 소속이 아니라고?"
"예. 흑발에 검은 눈동자, 그 외모로 추정컨대 북방의 유목민족 출신으로 보입니다."
"세상을 떠돌다 우연히 껴든 것 아니겠느냐."
"하나, 걸리는 것이, 그의 소지품 중에 제노비아 공화국의 화기가 있습니다."
제노비아 공화국의 화기는 다름 아닌 총.
그런 명예 하나 없는 무기는 그라시아 제국에선 취급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제노비아 측에서 보낸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겠군."
"가능성이 없진 않겠으나, 병사들이 외부인 덕에 목숨을 구했다고 하는 것을 보자면 아무래도 가능성은…."
병사의 말에 하르도가 먹고 있던 고기 뼈다귀를 집어 던졌다.
"멍청한 놈! 그게 스파이의 계략이다! 그것도 간파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내 말에 토를 단단 말이냐! 어쩌면 이번 전투의 패배는 스파이의 공작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투의 패배는 무능한 병사들 탓이라고 했으면서, 스파이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타나니 스파이 때문으로 이유를 돌리는 하르도였다.
반면 아라드의 생각은 달랐다.
'병사를 구하기 위해선 마수들과 싸워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텐데, 스파이가 그런 위험을 감수했다고? 그것도 자신의 정체를 들킬 총까지 쓰면서?'
아라드가 병사에게 물었다.
"그의 신원에 대해 파악한 게 있나. 무언가 특이한 사항이라도."
"이름은 유준상으로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라 합니다. 제노비아 공화국 양식과 비슷한 복장에 무엇보다 지닌 소지품 중…."
병사가 말을 멈추고는 하르도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니 짜증이 난 하르도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말을 못 해! 소지품 중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거냐!"
"아, 아닙니다. 그저 발렌토로의 뿔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르도와 아라드의 눈이 커졌다.
"발렌토로의 뿔?"
"예. 물어보니 자신이 발렌토로를 처리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라고…."
아라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병사들을 구해 준 것도 모자라 문제였던 발렌토로까지 처리하다니.
꽤 흥미로운 사내였다.
하지만 하르도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이 개 호로잡놈이! 감히 내 먹잇감을 가로채?!"
하르도가 있는 힘껏 책상을 내려쳤다.
군대까지 동원했건만.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이방인이 해냈다.
앞으로 사교계에선 이방인이 가볍게 처리한 마수를 반년 넘게 처리하지 못한 무능한 남자라 자신을 손가락질해 대겠지.
안 그래도 가문 내 좁았던 그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였다.
"내 직접 그 미개인의 면상을 확인하고 정체를 밝히겠다! 안내하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하르도는 병사의 안내를 따라 지휘관실을 나왔다.
아라드가 그 뒤를 따르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실패를 스파이의 방해 공작으로 덮으려는 건가. 거기에 스파이를 잡아들인다면 실패를 만회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로군.'
이방인이 정말로 제노비아 공화국의 스파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라드가 보건대 하르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스파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부디 잘 빠져나가면 좋겠지만….'
힘들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야겠다 생각하며 아라드는 하르도와 함께 병영 훈련장으로 향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그곳엔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 * *
맑은 하늘과 대조되는 험상궂은 표정.
일그러진 표정의 하르도가 등장하니, 라엘을 비롯한 복귀병들이 잔뜩 긴장한다.
몇몇은 그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봤지만, 주변의 만류에 곧장 눈을 내린다.
하르도는 안하무인이다.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설치는 그의 눈에 잘못 들어 좋을 것 없었다.
"이곳에 북방 초원에서 내려온 미개인이 있다고 들었다! 어디 있느냐!"
알아서 자신 앞으로 데려오라는 뜻.
그러나 하르도의 호령에도 병사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르도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인 반면, 유준상은 자신들을 구해 준 인물이다.
그 누가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잡아가라 내놓고 싶을까.
병사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가 난 하르도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 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지금 당장 앞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이 검으로 네놈들을 직접 처단해 주마!"
마수를 상대할 땐 뽑지도 않았던 검을 병사들 상대로 뽑는다.
그 행동에 병사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저 돼지 새끼만 아니었어도 동료들이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우릴 버리고 튄 주제에 잘도….'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상대는 그라시아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세가다.
하극상을 벌였다간 삼대가 멸할지도 모른다.
병사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하고, 분노를 참지 못한 하르도가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이국적인 외모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 찾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뭐? 무슨 일?"
하르도는 어처구니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이 대뜸 자신에게 반말이라니?
그는 혹시 그가 어디 사는 귀족이 아닐까 싶어 용모를 살폈다.
얼굴 곳곳엔 땟국물에 흙먼지가 덕지덕지.
입고 있는 옷은 해지고 피로 얼룩져 누더기와 다름없다.
아라드를 비롯한 참모진은 그가 격전 속에서 살아남은 전사임을 알 수 있었지만, 하드로의 눈엔 그저 거지발싸개로 보일 뿐이었다.
이딴 녀석이 귀족일 리 없다 확신한 그는 대뜸 손을 들어 올렸다.
"개만도 못한 것이!"
하르도의 손바닥이 그대로 유준상의 따귀를 후려쳤다.
쫘악―!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진다.
병사들 사이에서 몇몇이 달려나가려 하지만 동료들에게 급히 제지당했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지도 모를 거지새끼가 감히 내게 반말을 내뱉느냐! 아하? 미개한 출신이어서 그라시아 제국의 예법을 모르는구나. 아니지 이 무례함 또한 스파이로서의 연기. 뭐가 되었든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유준상은 입안에 쇠 맛이 느껴졌다.
따귀를 맞으면서 볼 안쪽에 상처가 난 듯하다.
그는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말했다.
"내가 스파이?"
"왜?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이 제노비아 공화국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간파했다. 다른 놈들은 구워삶았어도 나는 구워삶진 못한다!"
라엘과 병사들에게 들어 이럴 거라 예상하곤 있었지만 설마 다짜고짜 따귀를 맞을 줄이야.
어지간히도 막 나가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저 떠돌이 여행객일 뿐이다. 내 어딜 봐서 스파이라는 거지?"
"네놈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총과 그 복장, 그리고 내가 처리해야 할 발렌토로를 처리함으로써 부대에 혼란을 야기하려 했던 점. 더한 증거도 필요 없다. 이것만으로도 네가 제노비아의 스파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지!"
"장담할 수 있나?"
"하하하! 네 따위가 내게 장담을 요구해? 그래 어울려 주마. 장담할 수 있다! 팔롱드가의 명예와 만신전의 신들이 내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동서고금, 그 어떤 신화와 전설을 보더라도 신을 언급해 좋았던 적이 없다.
하물며 그 만신전의 신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노하고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감히 어디서 자신의 사도에게 손을 대냐며 분노합니다!]
[만신전의 신들은 저딴 놈이 있는 줄도 모른다며 저딴 놈이 만신전을 들먹이는 게 기가 차다 합니다!]
[서브 퀘스트: 응징]
[설명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하르도 폰 팔롱드의 모욕적인 행동과 언사를 매우 불쾌해합니다. 그를 응징해 잘못을 깨닫게 하세요.]
[보상: 300 GP, 맹인의 수호천사의 호의]
분노 가득한 메시지와 함께 서브 퀘스트를 내려 주는 우리의 수호천사.
스파이 혐의에서 벗어나고 따귀를 갚아 줘야 하는 와중에 이런 서브 퀘스트까지 떨어지다니.
땡큐 중의 땡큐다.
유준상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하로드에게 말했다.
"만신전의 신들이 거짓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그럼 나도 마찬가지로 만신전의 신들 중 한 분께 내 결백을 부탁드리지."
"뭣이?! 북방의 초원 지대를 뒹굴던 네놈이 감히 그라시아 제국의 신을 언급한단 말이더냐!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은 지금 네가 하는 거고."
"네놈…!"
하로드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실로 머저리다운 짓을 하는 하르도.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린 것은 그가 유준상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이건…?"
너무나도 휘황찬란해 그 신성함이 느껴지는 빛줄기.
그 빛줄기가 유준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만신전의 신들이 내 편을 들어 주나 보네."
"말도 안 돼…! 이런 빛은 신화나 전설 속에서밖에…."
당황한 하르도가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가가강―!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우레와 함께 하르도의 검이 그대로 녹아 버렸다.
병사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세상에…."
"마른하늘에 날벼락…?"
"정말로 만신전의 신이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계신단 말이야…?"
누가 봐도 명백한 신의 의지에 병사들도 하르도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거, 거짓말이다! 이건 거짓말이야! 무슨 속임수가 틀림없어!"
속임수는 얼어 죽을.
마른하늘에 떨어지는 벼락이 어떻게 속임수일 수 있을까?
유준상이 주먹을 털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 아빠가 안 가르쳐 주든?"
"오, 오지 마…!"
오지 마는 얼어 죽을.
"따귀, 아프더라. 너는 더 아플 테니까 이 꽉 깨물어."
7. 자신 있어? (3)
살다 보면 좋든 싫든 깨닫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동료를 보며 세상은 실력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거나, 진심을 담은 조언보다 위선으로 가득한 공감이 인간관계에 더 유익하다거나.
사람들 사이에 부대껴 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들이다.
그러한 깨달음 중에서도 유준상의 가슴에 강렬하게 박혀 있는 것 중 하나는, 용서는 사람을 교화하는 데 있어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애들이야 용서라는 관용이 통용될지 모른다.
하지만 배울 대로 배우고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이들을 상대로는?
그들을 상대로 용서는 그저 호구 잡히기 좋은 행위일 뿐이다.
애초에 제대로 배우고 나이 먹은 양반들은 용서를 구할 만한 짓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어떤 감정을 품을지 아니까.
증오로 가득한 그들의 칼날이 언제 자신의 등을 찌를지 모르기에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악행을 저지르고 상대방의 뒤통수를 갈기는 놈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유준상이 보기에 그 이유는 이러했다.
악질이면 악질일수록 자기보다 약한 놈들을 괴롭히는 법이라고.
그저 상대방이 만만하고 우습기 때문에, 자신에게 보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거리낌 없이 사람을 매질하고 따귀를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준상은 그런 놈들을 절대 봐주지 않았다.
퍼어억―!
그의 주먹이 하르도의 얼굴에 꽂혔다.
놈의 입에서 피에 젖은 하얀 옥수수가 튀어나온다.
"아, 아버지한테도 맞아 본 적이 없는데…!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어쩐지 성격이 개판이더라니.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누군지 아주 잘 알지. 신성 모독한 놈. 그리고 만신전의 신께서 친히 경고하신 놈."
어느 종교의 경전에 보면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뺨도 내주란 이야기가 있다.
그 말인즉 때리는 사람은 필히 양쪽 모두 후려치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종교가 없는 유준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 그대로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의 반대쪽 주먹이 하르도의 반대쪽 얼굴을 후려쳤다.
그것으로 하얀 옥수수 하나가 더 빠져나온다. 입뿐만이 아니라 코에서도 피가 흐른다.
"커헉…!"
하르도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허공에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칼을 찾지만, 칼은 진즉에 녹아 사라진 뒤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유준상은 그대로 달려가 무릎을 놈의 면상에 꽂아 넣어 주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녀석. 그 모습이 담장을 넘으려다 넘지 못해 쓰러지는 돼지 같다.
주변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저 머저리를…!"
"잘한다! 이방인! 잘한다!"
"이참에 멱을 따 버려!"
이쯤 되면 제지할 줄 알았는데.
얼마나 인덕이 없는 것인지 제지하는 사람 하나 없다.
참모진들이 막으려는 시늉을 조금 해 보지만,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
굳이 보지 않아도 이 녀석의 평소 행실이 어떤지 쉽게 그려진다.
"네 이놈…!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천여 명이나 되는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은 주제에, 고작 얼굴에 주먹 몇 방 꽂힌 거 가지고 무사를 운운하다니.
심지어 하늘이 직접 벼락을 내려 경고까지 했다.
말하는 꼬락서니가 사기 치다 사기당했다 고발하는 사기꾼과 다름없다.
"아주 잘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뭣이?!"
하르도는 붉으락푸르락해져선 유준상을 노려본다.
유준상은 아랑곳 않고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놈의 코 위로 주먹을 꽂았다.
녀석이 저항하기 위해 주먹을 휘저어 보지만, 얼마나 느린지 아리랑 펀치가 따로 없다.
"그딴 펀치나 날리면서 잘도 군인을 하고 있네."
유준상의 주먹이 거침없이 하르도의 몸을 두들긴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계속해 터져 나온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 놓고, 사형을 시키지 않아 줘서 감사하라니?
저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인데.
유준상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을 대신해 멈추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근육이 뻐근하고 숨이 찰 때까지 주먹을 휘두르니 하르도는 피떡이 된 채 움찔거린다.
주먹을 한 대 더 꽂으니 기절하는 녀석.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어지간히도 맷집이 약한 놈이었다.
이딴 게 지휘관이라니.
"한심한 놈."
유준상은 질린다는 눈으로 기절한 하르도를 쳐다보았다.
알림음이 이어졌다.
[축하드립니다!]
[서브 퀘스트 '응징'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300 GP가 수여됩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이런 자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을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절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 * *
하르도가 기절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참모장이 다가왔다.
단정하고 굳건한 외모의 중년.
피떡이 된 누구와 달리 실로 군인다운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 지휘관이 귀인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참모장인 아라드 하이데펠드, 지휘관의 무례를 막지 못한 점을 가슴 깊이 사죄드립니다. 아직 노여움이 가시지 않으셨다면 그에 대한 처벌은 지휘관을 대신해 제가 대신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르도 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참모장은 하르도와 다르게 존대를 하며 예를 갖췄다.
이자가 실권자인가.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참모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다.
떼거리로 고개를 숙일 필요까지야.
죽을 때까지 때려도 시원치 않을 인물이지만, 기절한 인간을 두들겨 패는 악취미는 없다.
이미 맹인의 수호천사가 퀘스트 클리어를 알려 온 차이기도 했고.
병사들의 얼굴에도 어느 정도 만족감이 깃들었겠다,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할 테지.
유준상은 쥐고 있던 놈의 멱살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응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벌을 내리는 거야 그렇다 쳐도 제가 맞은 건 어디까지나 따귀 한 대였으니까요."
병사들에겐 고작 따귀 한 대가 아닐 테지만.
그거야 참모장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관용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라드는 곧장 병사들을 시켜 사제와 의무관을 불렀다.
그의 명령에 다급히 달려온 사제와 의무관이 서둘러 병사들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장교 하나가 정말 이래도 괜찮냐고 묻지만, 아라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르도 님께서 한순간 감정이 격해져 엄한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내일이면 명령을 번복하고 병사들을 치료하라 말씀하시겠지. 나는 하르도 님이 내리실 명령을 미리 수행하는 것뿐이다. 문제 있나."
하르도가 절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사람이 죽는 것보단 나았다.
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아라드는 기절한 하르도를 발로 툭 차고는 명령했다.
"지휘관님을 침실로. 정신을 차리시면 바로 보고하도록."
"예."
그제야 아라드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급선무였던 부상병의 치료도 해결했고, 문제인 하르도는 못해도 며칠은 누워 있어야 했다.
전투를 뒷수습하기 한결 편해지겠지.
아라드는 고개를 돌려 이방인을 보았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인물.
유준상.
단신으로 병력을 규합해 병사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만신전의 신들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라시아 제국 역사에 만신전의 신들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한 적이 얼마나 있던가.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호의를 사서 절대 나쁠 것 없었다.
아라드는 그에게 다가가 최대한 격식을 차렸다.
"겨를이 없어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했군요. 팔롱드가 소속, 하르도 님의 집사이자 작전 참모 겸 참모 단장을 맡고 있는 아라드 하이데펠드라고 합니다. 이렇게 귀인을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유준상이라고 합니다. 별거 없는 유목민족 출신으로 떠돌이 여행객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 왔군요."
"단순한 떠돌이 여행객에게 만신전의 신들이 관심을 보일 리 없지요. 지금의 만남에 신들의 인도가 있음이 느껴집니다."
신들의 인도까지야.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수호천사의 도움 덕에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던 것이었으니.
아라드는 유준상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어 감사하다며 다시 한번 고개 숙였다.
과분한 감사에 부담스러워지려던 차, 그가 본론을 꺼냈다.
"저희 또한 만신전의 신을 섬기는 병사들. 부대 차원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귀인을 대접해 드리는 것이 당연한 순리겠습니다만,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습니다."
확실히 해야 할 거라면 하나밖에 없다.
"스파이 건 말이군요."
"예. 만신전의 신들께서 유준상 님을 주시한다는 증거를 보였지만, 아무리 신들이 저희를 굽어살핀다 한들 제국의 법이란 신의 뜻이 아닌 증거주의의 원칙 아래 시행되는 것. 유준상 님께서 어째서 그라시아 제국 영토에 계시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조사는 필수적입니다."
신의 뜻이 법이고 진리인 신권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해했습니다. 제 신원을 파악하길 원하시는군요."
"예. 부디 저희가 유준상 님의 스파이 혐의를 풀고 귀인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굳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라드의 태도를 보자면 대우해 주면 대우해 주었지 자신을 구속하거나 적대할 것 같진 않다.
혹시 거짓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초보자의 직감이 별일 없을 거라 이야기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테지.
오히려 스파이를 핑계로 우호를 다지고 싶어 하는 듯 보이는 아라드였다.
하나 그렇다고 마냥 협조적으로 나가서야 마찬가지로 호구 취급당할 뿐이다.
세상엔 호의와 친절을 베풀면 둘리인 줄 아는 인간들이 태반이니.
최소한 얌전히 협조하는 값은 받아 내야 한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시급한 유준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식주.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식(食)과 주(住)였다.
"삼시 세끼 최고급 식사와 최고급 주거 환경을 원합니다."
아라드가 미소 지었다.
승낙의 미소였다.
* * *
스파이 혐의를 풀기 위한 조사에 앞서, 유준상은 배정받은 숙소로 향했다.
본래라면 곧장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아라드가 재량을 발휘해 편의를 봐준 덕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계 진입에 놀란 심신을 달래고자 도착한 곳은 숲속에 위치한 어느 저택.
그러나 저택 앞에 선 유준상의 심신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저택이 그의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거 맞아…?"
그가 알고 있는 램페이지 스톰 시리즈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부분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건축물과 생활양식 또한 유럽 중세 시대의 투박한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 이상이었다.
배정받은 숙소는 팔롱드가의 별장으로 균형미와 통일성이 잡힌 저택이었다.
장식이 많지는 않지만 석재와 벽돌의 재치있는 배치로 단조로움을 피했고, 특수 마감을 통해 멀리서 바라봄에도 재질감이 느껴진다.
저택을 감싸고 있는 정원은 또 어떠한가.
산책을 위해 설계된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잘 정돈된 수풀. 그리고 저택 앞에 있는 분수 위로 비친 수경은 가히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수학과 공학, 예술과 미학이 어지간히 발전하지 않으면 쉬이 볼 수 없는 그러한 저택이었다.
"하긴…."
총이 존재하는 세계다.
그만큼 과학 문명도 어느 정도 발전한 세상일 테지.
다시 한번 여기가 게임 속 세상임을 깨닫게 되는 유준상이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중세 귀족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종들이 따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적인 공간과 개인적인 시간은 자유로운 삶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
10명이 넘는 시종들이 달라붙어서야 그저 스트레스일 뿐이다.
물론, 아예 시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
얼이 빠져 주택을 구경하고 있자니 유준상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가 말했다.
이름은 '하리'로 성인도 안된 소년이었는데, 말이 병사지 사실상 시종이었다. 유준상을 안내하고 보좌하는 것이 아라드에게서 받은 주된 임무라고.
"이런 저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유준상의 반응에 흡족한 것일까.
하리가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실용성에 집중한 터라 다른 귀족들의 저택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불과한데, 이렇게나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르도 님과 아라드 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좋아하시겠군요."
여기까지 오며 팔롱드가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들은 참이었다.
팔롱드가는 그라시아 제국의 동부를 관리하는 가문.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관리를 다수 배출한 문무겸비의 권세가였다.
어느 세상이나 돈과 권력은 무적인 법.
그 점을 떠올리니 지금의 저택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이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여기가 앞으로 유준상 님께서 사용하실 방입니다."
하리는 고풍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는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어찌나 고풍스러운지 문이 아닌 문손잡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문을 열었다.
맑은 햇빛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넓고 세련된 공간.
척 봐도 수면 진입 3초 컷이 가능할 것 같은 침대, 수십여 벌을 집어넣어도 다 차지 않을 것 같은 옷장 그리고 비록 현대의 것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지만 나름 필요한 것들은 갖춰져 있는 샤워 시설.
휘황찬란한 외견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내부였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준상 님. 일거수일투족, 저희가 보좌하겠습니다."
분명 없는 줄 알았던 10명의 시종이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대놓고 그의 자유를 방해하겠다고 선언하는 그들이었다.
8. 누군가에게 있어 그의 모습은 (1)
발코니에 앉아 올려다본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어찌나 맑은지 보고 있자면 이게 하늘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였는데, 하늘색 페인트 통에 롤러대를 흠뻑 담그고 그대로 밀면 저렇지 않을까 싶다.
혹시라도 하늘에서 파란색 물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하리가 다가와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했다.
대부분 병영에서 일어나는 가십거리나 상관 뒷담화.
그중에서도 가장 단골이 되는 소재는 단연코 지휘관인 하르도 이야기였다.
―하르도 돼지… 가 아니라 공자님께서 어찌나 화를 내던지, 진정시키는 게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장 준상 님을 사형시키겠다며 소리를 지르는데, 본인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다짜고짜 본가에서 기사단을 끌고 오겠다느니 반역죄로 황궁에 보고를 올려야 한다느니 그딴 헛소리를 하지 뭡니까? 그딴 헛소리를 하다 아라드 참모장님께서 잠시 근처의 유흥 도시로 요양을 가 있으라 하니, 옳다구나 하면서 시종들을 대동해 떠났습니다. 보나 마나 도시에서 도박과 여색을 탐할 생각이겠죠. 제가 모셔야 하는 분이긴 하지만 참으로 구제 불능입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하로드에 대해 좋은 소리밖에 하지 않던 하리였는데.
유준상이 막역하게 대하니 보고와 함께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는다.
영지 내의 규율이 깐깐한지 아무래도 말동무가 없는 듯하다.
기사 지망생으로 매번 이런저런 곳에 불려 가 허드렛일하기 바빴으니, 하리에게 있어 유준상의 시종으로 있는 지금이 숨을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유준상이 시종보단 동생 느낌으로 대한 것이 한몫했겠지.
하리는 하르도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준상 님의 이야기는 가히 영웅담과 같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등장해 사람들을 구하고 신의 가호를 두루 받아 악덕 공자를 응징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 속 한 장면과 다름없었죠. 제가 그 자리에 있던 게 얼마나 큰 영광이었는지. 대대손손 자랑할 거리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로 유준상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하리.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둘째 치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과 벼락은 임팩트가 상당했다.
신한테 부탁 좀 했기로서니 갑자기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려오고 벼락이 떨어지다니.
신은 죽었다며 책까지 써 갈겨 홍보하던 니체가 오답 노트까지 만들어 인생을 복습할 만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우리의 악덕 공자 하르도 또한 신화나 전설에서나 나오던 것이라고 그랬고.
뭐 어쨌건 간에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래저래 도움을 주었던 맹인의 수호천사는 만신전에 모셔진 신중에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님께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고 빵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합니다.]
[빵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얻는 것이라며 한때의 영화에 취해 근면함을 잊어선 안 된다 경고합니다.]
평소 보내오는 메시지를 보면 푼수 같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보면 꽤 고지식한 신 같기도 하다.
기회가 되면 만신전에 들려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으니 만신전에서 예를 갖춰 감사를 표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고 보니 근 며칠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지식을 머리에 욱여넣는 데 집중한 탓에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GP에 관해 확인하지 못했다.
때마침 오후의 스파이 관련 조사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 차.
유준상은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유준상
클래스: 없음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내구: 10
마력: 10
<스킬>
무기연마 lv. 3
손재주 lv. 3
<숙련도>
검술 lv. 1
사격술 lv. 30(max)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
초심자의 행운
초보자의 직감
???
<소지 GP>
4,140 GP
다시 봐도 신기한 상태창이다.
대충 훑어보니 능력치나 스킬 그리고 고유능력은 이전에 확인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
변화가 있는 난은 <숙련도>란과 <소지 GP>란.
검술이 1레벨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마수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해 낼 당시 알림창이 떴었으니까.
하지만 사격술이란 숙련도가 새로 생긴 것도 모자라 30레벨, 만렙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였다.
'사격술이라니.'
사격술에 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 생각하니 설명창이 떠올랐다.
<숙련도>
[사격술 lv. 30(max)]
[총기의 숙련 정도를 나타냅니다. 해당 레벨이 높을수록 총기류의 이해도가 높으며 조작 능력이 뛰어납니다. 이는 총기의 명중률과 재장전 속도 등 전투 능력에 큰 영향을 줍니다.]
[숙련도가 최고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이상 숙련도를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활과 관련된 숙련도는 '궁술'로 따로 분류됩니다. 주의해 주세요.]
실로 상식적인 설명과 함께 숙련도가 최대 레벨에 도달했다는 알림.
그가 기억하기로 유준상과 동기화한 캐릭터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캐릭터가 사용했던 무기는 대검. 애초에 총기류가 나오는 게임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한데 검술은 고작 1레벨인 반면 사격술은 30레벨, 그것도 최고 레벨이다.
아무래도 유준상의 현대의 세상에서 살았을 적의 특성을 반영한 듯했다.
게임을 하면 핵쟁이라 의심받기 일쑤였고, 사격장에 놀러 갈 때면 사람들이 사격 선수냐 물어올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최고 레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이상 숙련도를 상승시킬 수 없다니.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는 상승시킬 수 있는 건가?'
스킬 '무기 연마'나 '손재주'로 추가 상승은 안 되는 것 같던데.
나중에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숙련도도 확인했겠다, 이제는 본론인 GP를 확인할 차례.
유준상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소지 GP>
[4,140 GP]
퀘스트 보상에 마수를 처리해 획득한 GP.
해당 수치가 많은지 적은지는 둘째 치고 어디에 사용되는지가 의문이다.
이전에 보았던 알림창을 떠올리자면 GP는 일종의 재화로 이것을 통해 능력치와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문을 품자니 그런 의문을 해소라도 해주려는 듯 설명창이 떠올랐다.
[GP(Gift Point)를 사용하시겠습니까?]
[1. 능력치 상승]
[2. 스킬 레벨 상승]
[3. 아이템 구매]
역시나, GP는 예상대로 능력치나 스킬을 강화하는 데 쓰이는 포인트였다.
그는 유심히 창을 바라보았다.
'역시, 고유능력 관련된 건 없나.'
램페이지 스톰의 최고 적폐는 단연코 고유능력이다.
고유능력을 진화시키거나 강화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텐데, 고유능력과 관련된 선택란은 없었다.
'애초에 고유능력은 특수 조건을 만족해야만 진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초심자의 행운과 초보자의 직감이 너무나도 유용해 혹시나 했건만.
...욕심부려 좋을 것 없지.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
초심자의 행운
초보자의 직감
???
비록 하나가 아직 활성화되어 있진 않지만, 고유능력이 무려 4개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잠재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천리길도 한 걸음이라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특수 조건을 알아 가면 된다.
지금은 GP의 사용처에 대해 파악하는 게 우선. 그는 첫 번째 선택란인 '능력치 상승'을 확인했다.
[GP를 이용하여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1. 근력: lv. 10 → 11 = 100 GP]
[2. 민첩: lv. 10 → 11 = 100 GP]
[3. 체력: lv. 10 → 11 = 100 GP]
[4. 내구: lv. 10 → 11 = 100 GP]
[5. 마력: lv. 10 → 11 = 100 GP]
생각보다 능력치 상승에 많은 GP가 소모되지 않았다.
어쩌면 4,000 GP는 많은 게 아닐까?
그는 시범 삼아 체력 수치를 증가시켜 보았다.
[체력이 10에서 11로 상승했습니다.]
[100 GP가 사용되었습니다.]
[체력이 11에서 12로 상승했습니다.]
[200 GP가 사용되었습니다.]
[체력이 12에서 13으로 상승했습니다.]
[300 GP가 사용되었습니다.]
[체력: 10 → 13]
[소지 GP: 3,540]
능력치 3을 올리는 데 소비된 GP는 총 600.
능력치를 하나 올릴 때마다 100 GP가 추가로 소모되는 식이었다.
그제야 커뮤니티에 능력치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했던 램페러들의 말이 이해된다.
이런 식으로 능력치를 올리는 데 필요 GP가 상승한다면 나중에 가선 능력치 하나를 올리는데도 엄청난 양의 GP가 필요해질 것이다.
능력치 하나하나의 차이가 더 두드러지겠지.
다음으로 확인한 '스킬 레벨 상승란'도 GP 잡아먹는 건 능력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1. 무기 연마: lv. 3 → 4 = 2,000 GP]
[2. 손재주: lv. 3 → 4 = 1,600 GP]
요구하는 GP값이 상당하다.
무기 연마와 손재주의 필요 GP량이 다른 것을 보면 스킬 마다 요구 GP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범용성과 효과가 뛰어난 스킬일수록 필요한 GP량이 많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을 생각하자면 마냥 효과가 뛰어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좋은 건 아니었다.
정작 레벨업을 하지 못해 그 효과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수 있으니.
필요에 따라선 GP 소모값이 낮은 스킬을 육성해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르겠다.
고인물이었다면 해당 사항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럴 땐 게임 지식이 없는 게 조금 아쉽다.
그래도 렘페이지 스톰과 관련된 지식이 없을 뿐이지 그간 해 온 게임 짬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적응하다 보면 이것저것 보이는 게 있겠지. 효율 좋은 스킬이라든지, 효율적인 육성 방식이라든지.
유준상은 스킬 레벨 상승 창을 닫았다.
이제 남은 건 '아이템 구매'란.
확인하고자 하니 상점이 열릴 거란 예상과 다르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튜토리얼 진행 기간에는 상점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튜토리얼 중이었지.
그렇다고 상점 열람 자체가 불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원래 능력치나 스펙이 부족하면 포션을 마셔 가며 미션을 클리어하는 법 아니겠는가.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이 마력 회복 능력을 1,000%나 상승시켜 줘 마력엔 걱정이 없지만 생명력은 아니다.
큰 부상을 입었을 경우를 대비해 보험으로 다량의 포션을 구비하려 했는데.
이래서야 몸으로 때워 가며 하는 플레이는 불가능해진다. 게임이 현실이 되어 버린 이상 그런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퀘스트 공략법 하나 사라진 건 확실히 아쉽다.
그래도 튜토리얼을 끝내면 가능할 테니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럼 이 남은 GP를 어디에다가 사용해야 한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금 상황에서 GP를 아끼는 게 썩 좋은 판단처럼 보이진 않았다.
능력치는 일종의 기초 체력이다.
특히 RPG 게임이 그러했는데, RPG 게임의 대표 주자인 램페이즈 스톰도 다르지 않다.
사격술도 최고 레벨이겠다. 무기 연마나 손재주를 레벨업하는 것보단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게 더 유용해 보인다.
유준상은 남아 있는 GP를 사용해 모든 능력치를 조금 전 올려놨던 체력 스텟과 동일한 13까지 상승시켰다.
근력: 10 → 13
민첩: 10 → 13
체력: 13
내구: 10 → 13
마력: 10 → 13
[소지 GP: 3,540 → 1,140]
모든 능력치가 13에 달하니 유준상의 몸에 지금까지보다 더한 활력이 느껴진다.
힘껏 주먹을 쥐어 보니 평소보다 좀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
두 번째 튜토리얼 퀘스트가 온다고 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렇게 성장이 전해 주는 희열감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준상 님, 아라드 참모장님과의 약속 시간입니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알리는 하리.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스파이 혐의에 관한 조사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조사.
아라드를 비롯한 그 누구도 유준상을 스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악덕 공자 하르도가 사라진 지금 굳이 서면으로 조사할 필요까진 없었다.
그럼에도 아라드 참모장이 이렇게 유준상을 부른 것은 다른 용건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알림창이 떠오를 리 없었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창을 확인해 주세요.]
그는 하리를 따라 병영으로 향했다.
아라드와 대화를 나눌 차례였다.
9. 누군가에게 있어 그의 모습은 (2)
하리를 따라 도착한 지휘관실은 실로 사치스러웠다.
천장에는 세상의 천지창조를 표현한 종교화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예술품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화려한 가구들이 늘어서 있다.
금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책상에, 정교한 장식이 박혀 있는 책장 등.
이곳이 과연 미술관인지 지휘관실인지 헷갈릴 정도다.
과연 집무가 가능할까 싶은 공간.
그 가운데, 수수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유준상을 맞이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심플한 디자인의 군복을 입은 이는 다름 아닌 아라드 하이데펠드.
극서부 대마수군단전선의 참모장이자 하르도가 부재중인 이곳의 최고 실권자였다.
그가 고개를 숙여 유준상에게 예를 갖췄다.
그에 따라 유준상 또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잘 지냈습니다."
"듣기로는 시종들이 너무 많아 불편해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좋게 평해 주시니 그 배려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종 이야기를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유준상이었다.
목욕 수발을 들겠다며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질 않나, 옷을 입혀 주려 하지 않나, 먹기 힘든 음식의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주려 하지 않나.
처음 시종들을 봤을 때부터 감이 안 좋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마치 갓난아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떠올리자면 시종장을 설득해 개인 활동을 보장받은 것은 그가 이 세계에 와서 행한 최고 업적이었다.
개인 샤워 시설에 난방시설, 환기 시설, 조명 등.
문명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는데.
생활양식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과연 게임 속 세상이라면 게임 속 세상다웠다.
"일단 앉으시죠."
아라드가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차를 내온다.
마주 앉은 아라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본래라면 무엇을 마실지 여쭈었겠지만, 강력히 추천 드리고 싶은 차가 있어서 이렇게 권해 드립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차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히려 무엇을 마실 건지 물어봤으면 불편했을 겁니다."
하리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만큼 유준상이 이런 차 문화에 지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아라드였다.
굳이 묻지 않고 차를 내준 건 아라드 나름의 배려.
아라드는 점잖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실은 제가 이렇게 준상 님을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스파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닌가 보군요."
"예. 스파이 건은 하르도 공자님께서 이곳을 떠난 시점에서 처리를 끝마친 상태입니다. 애초에 혐의도 충분치 않아 큰 문제도 없었죠. 있다 하더라도 제 재량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고요."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참모였다. 보통 이런 일은 길게 끌면 끌수록 혐의만 늘어나니.
하지만 이러한 호의를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라드가 말을 이었다.
"떠돌이 여행객이라 본인을 소개하셨던 만큼 앞으로 분주히 움직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맞는지요?"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가 아는 램페이지 스톰은 계속해 모험을 떠나며 세상을 탐험하고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rpg 장르의 게임.
30년간 발매된 모든 시리즈에서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절대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테고.
분명 계속해 움직여야 하는 퀘스트나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맞습니다. 아직 다음 예정지가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만, 정해지는 것과 동시에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아라드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니 호위병이 다가와 들고 있던 무언가를 유준상에게 건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은 백금으로 만들어진 패(牌).
일종의 신분증이었다.
"팔롱드가의 귀한 손님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라시아 제국 내에선 스파이 취급을 당하는 일은 없겠죠."
확실히 그의 말대로 신분이 보장된다면 엄한 일을 당할 확률이 훨씬 줄어든다.
권세가의 손님이라는 증표는 만일의 경우 보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혈통도 아니고 일개 작전 참모에 불과한 아라드가 가문의 증표를 건네줄 줄 몰랐는데.
그의 의문을 파악한 것인지 아라드가 말했다.
"진품 여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길 떠나시기 전 하르도 님께서 직접 서명까지 하셔서 증명 패를 내주시는 걸 허가하셨으니."
"그 악덕 공자가 말입니까? 제게 이를 갈고 있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요."
"병영을 떠나시기 전 다량의 안건 사이에 증명 패를 발급하는 문서를 끼워 넣어 결재를 요청했습니다. 워낙 바쁘신 분이시다 보니 적당히 보시고 서명하시더군요."
끼워 팔기 했다는 소리.
확실히 사람 다룰 줄 아는 아라드였다.
"이 증명 패를 대신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요?"
아라드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미소 지어 보였다.
"셈에 능하시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병사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라면 스파이 혐의를 처리해 준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것 같네요."
"과연…."
경험상 이런 부류는 조심해야 했다.
능구렁이 같아 위험은 이리저리 잘 피해 가면서도 원하는 바는 어찌어찌 손에 넣는 부류였으니.
그렇기에 무능한 악덕 공자를 보좌할 수 있던 것일 테고.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로리엔 평야에 있었던 마수들과의 격전에서 생존자는 천여 명 중 대략 200. 2할이 안 되는 숫자죠. 준상 님께서 발렌토로를 처리해 주시지 않았다면 팔롱드가의 명예에 큰 흠을 남길 만한 패배였습니다."
알고 있다.
잘못된 판단으로 8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사지로 몬 것이니 불명예도 이러한 불명예가 따로 없을 테지.
"현재 저희 측 상황은 썩 좋지 않습니다. 병력의 손실은 어마어마하고 머리가 사라졌을 뿐 마수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오가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죠."
"마수를 처리해 달라는 말인가요."
"마음 같아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저희의 일입니다. 준상 님께 부탁해서야 저희의 무능함만 보여 드리는 꼴. 이미 한차례 보여 드린 것 같기도 해서 아쉽군요."
아라드는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의 잘못이 아니라 하르도의 잘못이었지만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는 테이블 위로 지도를 폈다.
로리엔 평야와 그 근방을 나타내는 지도.
아라드가 로리엔 평야 북쪽에 위치한 마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생존자를 찾기 위해 보냈던 수색병에게서 들어온 보고입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여기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 농성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산에 걸쳐 있는 마을로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 있는 곳이었다.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은 정면의 좁은 길목뿐.
그 길목을 사수해 농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여기 이곳의 사람들을 구출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듣기론 이 부대에 기사들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들을 보내면 금방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리에게 들은바, 이 시대의 기사는 일반 병사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뛰어난 신체 능력에 마력을 이용한 검기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썰어 버리는데, 하나하나가 걸어 다니는 살육 무기이며 공성 병기.
그 수가 적지만 한 명만 있더라도 능히 백을 감당할 수 있었다.
유준상의 말에 아라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사들은 어디까지나 하르도 공자님의 직속. 제가 감히 작전을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명령권을 얻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공자님께서 기사들만큼은 악착같이 사수하시더군요. 이번 로리엔 평야 전투에서도 몇 번이고 기사들을 전투에 내보낼 것을 권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어째서죠? 그렇게나 강하다면 굳이 내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
"그야, 기사는 고급 병력. 고급 병력이 자칫 잘못해 다치거나 전사하기라도 하면 공자님께 큰 손해이니 그렇습니다."
어리석다.
싸우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육성한 기사일 텐데. 죽을 것을 염려해 싸움을 피하다니.
"마을에 농성하고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죠?"
"보고에 따르면 대략 50여 명입니다. 이 중 전투원은 절반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부상병이라는 말.
생각보다 지켜야 할 숫자가 많다.
"마수들의 숫자는요?"
"대략 300에 가깝습니다만 대부분 위험성이 높은 마수는 아닙니다."
그렇겠지.
강한 마수들이야 진즉에 병사들을 집어삼키고 배를 불렸을 테니까.
아직 허기를 채우지 못한 잔챙이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병사들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굳이 거절할 이유도, 거절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퀘스트창이 그의 요청을 들어주라 하니.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 2: 도움]
[설명: 로리엔 평야에서의 전투는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희생자는 많고 가용 병력은 한정된 상황, 아라드 하이델펠드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의 요청을 승낙하고 신뢰를 얻으세요.]
[보상: 2,000 GP]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못 본 척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도울 만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퀘스트창이 없다 한들 받아들였을 거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대접받은 값은 하고 싶네요."
그 말에 아라드의 표정이 밝아진다.
거절할지도 모르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유준상 님께서 도와주신다니. 이렇게나 든든할 수가 없군요."
"든든할 것까지야. 제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닌데요."
"만신전의 신께 관심을 받는 준상 님이 함께합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오를 테죠. 신들은 절대 자신이 지켜보는 이를 죽게 놔두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 은총이 병사들과 함께할 겁니다."
사기 진작을 위해서였나.
그렇다면 그가 도움을 청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병풍처럼 서 있을 생각은 없었다.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서입니다만, 혹시 이걸 구해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유준상은 주머니에서 총알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지난번 전투에서 50발 중 40발을 사용해 남은 건 고작 10발뿐.
한 발을 지금 막 아라드에게 주었으니, 이제 남은 건 9발이었다.
총이 그의 핵심 무기인 만큼 총알의 비축은 필수적.
아라드는 총알을 빤히 보고는 말했다.
"당장 구해 드리긴 힘듭니다. 그라시아 제국은 개인의 화기 소유와 유통을 엄격히 금지하는 국가. 총알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밀수를 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제게 부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가능한가요?"
아라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가슴 안주머니에 총알을 집어넣었다.
"불가능이라뇨.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 걸릴지도 모릅니다. 이번 작전 내로는 조금 힘들겠군요."
당장 충당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괜찮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제가 해야 하는 거지요. 작전 계획은 하리를 통해 따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볼일은 다 봤다.
유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명 패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럼 좋은 오후 보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 *
부하들과 시종들을 전부 내보내고, 아라드만이 홀로 남은 지휘관실.
'확실히, 지금까지 만나온 이들과는 다르군….'
그는 떠나가는 유준상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존재.
뛰어난 전투 능력에 상식도 가치관도 램페이지 대륙민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최근 들어 대륙 곳곳에 그와 비슷한 인물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간에선 '신의 사도'라 칭하는 이들.
하늘에서 뚝 떨어져 저마다 특별한 힘을 사용했으니 그리 칭할 만했다.
아라드가 보기엔 유준상 또한 신의 사도였다.
마력과 마수, 귀족과 평민의 간극 등.
6살 어린아이도 아는 기초적인 세상의 상식조차 모르는 것을 '신의 사도'가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 의외인 것은 지금까지 만났었던 신의 사도와는 태도도 자세도 다르다는 것이다.
신의 사도 대부분은 지극히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들은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허나 아라드가 본 유준상은 정반대다.
바라는 것도 소박하기 그지없었고 도울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는다.
신의 사도가 아닌 언젠가 보았던 옛 기사의 모습과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만신전의 신께서 괜히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닌 건가.'
이러나저러나 여러 가지로 많은 관심이 가는 남자다.
본래 영웅이란 혼란한 시기에 등장하는 법.
지금과 같이 마수들이 창궐하고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시기에 그와 같은 인물의 등장은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잠시 생각하던 아라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영웅이라니. 나도 나이가 들었나."
자신답지 않게 감상에 빠져 버렸다.
뭐가 되었든 유준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 사실.
만신전의 신이 주시하고 있다면 여차할 때 어떤 식으로든 도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팔롱드가에게, 하다못해 내게만이라도 우호적이었으면 좋겠군.'
아라드는 어떻게 하면 유준상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시작이 다름 아닌 이 총알이었다.
10. 늑대와 함께 춤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