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 예상외의 선택지 (2)

응접실에 도착하니 홀로 적적하게 술병째로 나발을 불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젊어 보이는 외모의 비쩍 마른 사내는 몸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풀린 눈으로 가만히 유준상을 응시하는 그.

그러다가도 포도주병으로 나팔을 부는 것이 어째서 하르도가 한량이라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다.

"설마 내 만남 요청에 응할 줄 몰랐는데. 만나서 반갑군.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예의상 내 소개를 하자면, 칼트슈베르트가의 장남인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라네."

그가 유준상의 손을 잡았다.

붙잡은 손의 힘이 생각한 것 이상이다.

술에 취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악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칼트슈베르트가는 유명한 군사 가문이라고 그랬지.

비쩍 마른 것치고는 생각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

"일개 유목민족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대접을 잘 받는군. 그 고지식한 팔롱드가에서 자네에게 이러한 저택을 하사하고 말이야."

"하사한 게 아니라 잠시 얹혀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도 하르도 공자님이 많은 편의를 봐주어서 그런 것이고요."

"하르도가 아니라 아라드겠지. 그리고 이렇게 뒤를 봐줄 정도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역시, 이쪽도 하르도는 안중에도 없다.

율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지 상황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로리엔 영지의 실권자가 아라드라는 사실은 하르도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막시밀리안 공자님."

"편하게 막스라고 불러. 굳이 길게 막시밀리안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을까. 대단한 인물도 아닌데."

"그래도 권세가의 장남이신데 어떻게 그 이름을 짧게 줄여 부를 수 있겠습니까."

"농담 아니야. 짧게 불러, 그게 더 편해. 그리고 유명한 가문의 장남이라고 해도 내겐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어. 난 그저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개 장기 말에 불과할 뿐이니까."

이상하긴 하다.

그 권세가의 장남이 그 흔한 호위 하나 없이 방문했으니.

꽤 강해 보이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을 찾았던 율리아와는 정반대. 지금도 율리아를 대신해 감찰을 수행하고 있는 그였다.

속된 말로 여동생에게 짬 처리 당한 것이었다.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네. 난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거든. 술을 빨든 도박에 미치든 가문에 해만 되지 않는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호위가 없는 건 쓸데없이 병력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내가 거절한 거야."

"그렇군요."

"편하게 말하라니까. '그렇군요'가 아니라 '그래'. 말을 편하게 하지 않으면 이 이상의 대화는 힘들 것 같은데."

그가 반쯤 감긴 눈으로 유준상을 바라본다.

원래 이런 성격인 건가, 아니면 시험하는 건가.

이전 세상에서 만났다면 저 막역함에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라시아 제국은 엄격한 신분제도를 운영하는 국가.

신분의 경계가 명확하며 어지간해선 그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라시아 제국의 귀족 입장에서 보자면 유목민족은 그저 오랑캐.

오랑캐가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불편할 수밖에.

여기선 세간의 상식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호칭은 관계를 규정하는 첫 단추. 올바른 관계 성립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말을 놓거나 애칭으로 부르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흠….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막시밀리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준상을 바라본다.

딱히 초보자의 직감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자면 위해를 가할 만한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재미있군.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리는 그.

"뭐, 좋아. 사실 별생각이 있어서 여기 온 건 아니네. 그냥 저 고리타분한 업무에서 빠져나와 술이나 얻어 마실 겸 친구나 새로 사귈 겸 온 거지."

"역시, 술친구가 필요하셨군요."

"그런 셈이지. 알지 않은가. 원래 근무 중에 마시는 술보다 더 달콤한 건 없는 거. 그래서 말인데, 내가 좋은 술집을 아는데 같이 가지 않겠나?"

"술집 말이십니까?"

로리엔 평야는 기본적으로 시골이다.

목축업과 산림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으로, 이전에는 귀족들의 휴양지 겸 관광지로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마수들의 출현으로 인해 상당수의 사람이 빠진 상태였다.

주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팔롱드가의 주류 창고보다 뛰어나진 않았다.

"아, 물론 이곳에 있는 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그렇다면…."

"내가 게네호픈에 있는 유명한 술집의 단골이지. 그곳을 자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어떠한가."

"그 말씀은 저를 게네호픈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십니까?"

"그래."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었다.

팔롱드가의 비호를 받는 자신에게 게네호픈에 함께 가자니.

저 당당함에 잠시 당황하던 차, 알림창이 떠올랐다.

[막시밀리안의 제안으로 다음 퀘스트에 선택지 '게네호픈'이 추가되었습니다.]

[게네호픈을 선택할 시 추가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게네호픈에 무언가가 있는지 알림창은 그곳에 추가 퀘스트가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아직 세 번째 튜토리얼 퀘스트 '믿음의 부응'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 3: 믿음의 부응]

[설명: 율리아 칼트슈베르트는 아라드 하이데펠드와 그의 세력을 흡수하고 싶어 합니다. 율리아 칼트슈베르트의 음모에서 그를 구하고 무사히 감찰을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는 결코 당신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 2,500 GP]

추측건대 막시밀리안이 감찰을 끝내는 순간 퀘스트는 클리어될 테고 그와 동시에 다음 퀘스트가 열리겠지.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다.

"저는 팔롱드가에 은을 입었습니다. 여기서 막시밀리언 공자님을 따라가서야,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크게 상관없지 않겠는가. 자네는 여행자고 나는 여행자에게 다음 목적지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니. 그리고 그들도 자네를 그냥 보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거야. 사람을 붙이겠지. 자네가 정말로 탐이 난다면 말이야."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여행자의 신분을 고수하고 있는 이상,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알림창이 게네호픈으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면 여러 가지로 고민해 볼 만한 사항이었다.

"조금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

유준상의 대답을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그의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아마도 당연히 거절당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상관없네만, 내가 무작정 답변을 기다릴 만한 성격이 아니야. 그래서 언제까지 답변을 줄 수 있지?"

"감찰이 끝난 다음 날까지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일까지 답변을 들을 수 있겠군. 내가 선언하지. 지금 이 시점에서 감찰은 끝났네."

나름 황실을 대신해 감찰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었을 텐데,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이었나.

그 의문을 해소하려는 듯, 알림창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퀘스트 3 '믿음의 부응'을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2,500 GP를 획득합니다.]

[일반 업적 '어제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500 GP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업적 보상으로 '협상가' 클래스의 획득 조건(1/3) 만족하셨습니다.]

뜬금없이 망막 위로 떠오른 알림창.

고작 귀족의 말 한마디에 감찰이 끝나다니. 조금 어이가 없어지려 한다.

현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과연 관료제와 귀족제에서 신분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된다.

알림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막시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긍정적인 대답 기다리고 있겠네. 술은 잘 마셨다만, 솔직히 그다지 맛있는 술은 아니더군. 다 마시고 이런 말 하긴 염치없는가. 뭐 아무쪼록 좋게 생각해 주게."

막시밀리안은 그 말을 남기고 유유히 응접실을 빠져나간다.

하르도와 비교하기엔 여러 가지로 의문이 많은 인물이었다.

* * *

"희한하군."

유준상.

여러 가지로 특이한 인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사도' 같았지만, 정작 자신은 신의 사도라는 사실을 모른다.

지금까지 보았던 대부분의 신의 사도들이 자신은 특별하며 특수한 목적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것과 정반대였다.

심지어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태도까지.

여러모로 흥미가 동하는 인물이었다.

"진짜로 술친구가 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어야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는 법이라 굳게 믿는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는 유준상에게 긍정적인 답변이 오길 기대했다.

어쩌면 술친구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지금 답답한 이 상황을 벗어나게 도와줄지도 모르니.

"그나저나 술은 잘 마시려나. 유목민족은 술을 잘 못 마시긴 하는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막시밀리안은 말고삐를 쥐었다.

* * *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 4: 여정의 시작]

[설명: 당신의 활약으로 로리엔 평야와 팔롱드가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로리엔 일대에 위험이 도사리는 일은 없을 테지요. 이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때가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파티 멤버를 편성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 보세요.]

[보상: 2,500 GP]

[선택 가능 목적지]

[1. 그라쿠스 대평원]

[2. 피오나 산맥]

[3. 슈트랄 동굴]

[4. 게네호픈]

[파티 맴버]

[0/1]

[현재 대상 없음]

예상대로 세 번째 튜토리얼이 끝나기 무섭게 네 번째 퀘스트가 떠올랐다.

'여정의 시작'이란 퀘스트로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 모험을 시작하라는 퀘스트였다.

튜토리얼 퀘스트도 어느덧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라쿠스 대평원 말인가요?"

유준상은 병영에서 라엘, 던컨과 함께 식사하며 퀘스트에 떠오른 목적지에 관해 물었다.

"그라쿠스 대평원은 로리엔 평야 북쪽에 있는 평원이에요. 한차례 마수들을 토벌했지만, 그곳에 있던 여러 마을이 무너졌던 탓에 아직까지도 도적 떼가 많은 곳이죠."

"피오나 산맥은 그라시아 제국 서남부에 있는 지형이 험한 산맥이다. 두비에라 신성 국가와 경계가 되는 산맥이지. 슈트랄 동굴은 잘 모르겠군."

"아, 저 슈트랄 동굴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무수한 보물들이 묻혀 있어서 많은 탐험가들이 찾는 장소라고 그러네요. 하지만 그만큼 마수도 함정도 많은 곳이라고."

역시 두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답이었나.

하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지 곤란해하는 눈치였는데.

원하는 정보만을 쏙쏙 말해 주는 라엘과 던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보시나요? 설마 이제 움직이시려는 건가요?"

라엘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본다.

호기심 가득한 토끼와 같은 눈동자였다.

"네. 한곳에 너무 머물러 있어서야 여행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그,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준상 씨는 여행자셨죠! 그래서… 목적지를 찾고 있는 거였군요."

"네. 그 때문에 다음 목적지가 어디가 좋을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던컨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설마 조금 전에 말했던 곳을 목적지로 삼을 건 아니겠지?"

"문제가 있나."

"목적지를 선택하는 거야 네 자유지만, 하나같이 위험도가 높아. 마수에 도적 떼에 험난한 지형까지. 누가 보면 죽을 곳을 찾아가는 줄 알겠어."

확실히 유준상이 생각하기에도 썩 좋아 보이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게임을 진행하는 데 있어 전투는 필수였기에 그러한 선택지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 무턱대고 위험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지금까지 잘도 무모한 짓을 했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합니다.]

우리의 수호천사님께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발렌토로나 검은 갈기늑대는 어디까지 철저히 계산하고 싸움에 임했던 것이었다.

무모하긴 했지만 딱히 근거가 없진 않았다.

물론 도망치는 것이 좀 더 편한 선택지라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야 히든 피스를 얻지 못했지 않는가. 의도한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게네호픈은 어떻지? 알고 있는 게 있나?"

"게네호픈? 그 유흥 도시를 말하는 건가?"

"앞선 지역과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라엘과 던컨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게네호픈은 우리와 같은 일반 백성들은 쉽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철저히 귀족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계획도시고 그곳에 시민들도 적어도 우리와 같은 삼류 시민은 아니지."

"그쵸…. 저희는 열심히 생활을 영위하다가도 필요하면 이렇게 징집되니까요…."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군."

"아쉽게도. 아라드 참모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보를 얻기 쉬울 거다."

역시 아라드와 상담해 보아야 하나.

내일까지 답변을 주기로 한 만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기…. 그래서 언제 떠나시나요?"

라엘이 눈동자를 굴리며 이야기한다.

묘하게 긴장한 눈치였는데, 식사에 문제라도 있었나 싶다.

식사는 괜찮았던 거 같은데.

"글쎄요. 목적지가 정해지고 준비하고 그러면 일주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그, 그렇군요! 그럼 호, 혹시…. 그… 호위나 그런 사람은 필요 없으신가요…? 길잡이라도…. 저 이래 봬도 길 엄청 잘 찾는데…. 때마침 이번 주로 징집 기간이 끝나기도 하고…."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나는 던컨.

라엘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유준상과 테이블을 번갈아 바라보기 바쁘다.

어째서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그거야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던컨한테 호위 겸 길잡이를 부탁―"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갈(喝)!!]

콰가가강―!

느닷없는 벼락에 깜짝 놀라는 사람들.

라엘도 놀라서 잔뜩 어깨를 들어 올린다.

어째서 이런 일이.

유준상 또한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당황하고 있자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지금 제정신이냐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라엘을 놔두고 저런 땀내 나는 남자를 길잡이와 호위로 대동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던컨도 훌륭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라엘보단 아니지 않냐며 크게 노합니다!!]

느낌표를 두 개나 쓰다니.

그저 좀 더 여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하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니. 되게 신기한 일도 벌어지네요. 그래서… 던컨 씨랑 같이 가신다고요…?"

"아, 예. 그러려고요. 아무래도 던컨이 이런저런 경험이 많다 보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띠링―

그 순간 또 한 번 귓가에 소리가 울렸다.

다행히도 이번엔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서브 퀘스트를 알리는 알림음이었지.

[서브 퀘스트: 파티 결성]

[설명: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의 판단에 어처구니없어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자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며 현재 상황을 한탄합니다. 지금 당장 라엘과 파티를 맺고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세요. 맹인의 수호천사가 노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보상: 1,000 GP]

[거절 시: 맹인의 수호천사의 분노]

 21. 예상외의 선택지 (3)

[서브 퀘스트: 파티 결성]

[설명: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의 판단에 어처구니없어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자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며 현재 상황을 한탄합니다. 지금 당장 라엘과 파티를 맺고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세요. 맹인의 수호천사가 노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보상: 1,000 GP]

[거절 시: 맹인의 수호천사의 분노]

유준상은 멍하니 눈앞에 떠오른 서브 퀘스트창을 바라보았다.

굳이 라엘과 파티를 맺지 않더라도 함께 여행을 떠나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런데 라엘과 파티를 맺으라고 이렇게 서브 퀘스트까지 보내오다니.

심지어 보상으로 1,000 GP나 준다.

그저 파티를 맺는 것에.

하지만 문제는 파티 자리가 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파티 맴버]

[0/1]

[현재 대상 없음]

[GP를 사용하여 최대 파티 인원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파티를 설정하시면 파티원으로부터 획득하는 GP가 공유됩니다.]

[파티원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파티 멤버 전원에게 특별한 효과를 전해 줍니다.]

GP가 공유되기에 전투 능력이 뛰어난 던컨을 파티원으로 맞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GP를 사용하여 파티 인원수를 늘리자니 너무나 소모값이 크다.

[GP를 사용하여 최대 파티 인원수를 늘리겠습니까?]

[1 → 2 = 10,000 GP]

[소지 GP: 7,070 GP]

10,000 GP면 능력치와 스킬을 몇 단계는 더 상승시킬 수 있는 값이다.

라엘과 던컨을 모두 파티원으로 들이는 것보다 능력치와 스킬을 올리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한 자리에 라엘을 파티원으로 들여야 한다는 말인데….

"준상 씨? 무슨 생각 하시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할지 조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건 그렇고 저랑 함께 가도 괜찮으신가요?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르는데."

이 세상에서 여행이란 말을 타고 두 발로 대지를 걸으며 며칠이고 밖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중노동.

본인이야 퀘스트 때문에 움직여야 했지만, 라엘은 그 어디에도 따라올 이유가 없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저 엄청 튼튼하거든요! 길가의 풀만 뜯어 먹어도 잘 먹고 살아요!"

길가의 풀만 뜯어 먹어도 잘 먹고 산다니.

라엘은 초식동물이었나.

라엘과 함께 있으면 보급은 문제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단순히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마수나 도적 떼와도 마주칠 수 있습니다. 전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저랑 함께 가셔야 해요! 저 나름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거든요. 저랑 함께 길을 나서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일종의 행운 토템인 셈이죠!"

열심히 자기 PR을 해 보이는 라엘.

생각해 보면 라엘은 처음 만났을 때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어쩌면 초심자의 행운과 같은 행운 관련 스킬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라엘을 파티원으로 들여서 나쁠 건 없었다.

운만 좋은 게 아니라 체력도 뛰어나고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으니 여러 방면에서 활약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어디 한번 선택해 보라 합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지켜보고 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수호천사와 같은 부류는 퍼 줄 때 신나게 퍼 주는 만큼 화를 낼 때도 그에 못지않게 화를 낸다.

라엘을 파티원으로 안 들이면 자신을 악착같이 괴롭힐 게 분명했다.

좋게 생각하자.

지금까지 수호천사의 말을 들어서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유준상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다름 아닌 성좌의 후원이다.

그는 라엘에게 물었다.

"저와 함께해도 괜찮으시겠나요?"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착을 되찾는가 했더니만, 라엘의 눈 사위가 역동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줄 알겠네.

"다, 당연히 되죠!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하, 하지만… 던컨 씨랑 같이 가신다고…."

"한 명만 같이 가라는 법 없잖아요. 그리고 던컨이 제 제안을 수락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고요."

"그, 그렇죠! 역시 이동하려면 사람이 많은 것이 좋죠…!"

너무 많으면 오히려 속도만 느려질 뿐이다.

또 다른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많아야 서너 명의 인원을 꾸려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많은 것이라면 뭐 많은 걸지도 모르지.

라엘은 당근 한 바구니를 선물 받은 토끼와 같이 말했다.

"그럼 준비할 게 많겠네요! 물자도 챙겨야 하고 장비도 챙겨야 하고 지도도 필수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목적지가 정해진 건 아니죠?"

"예. 하지만 곧 정해질 겁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목적지가 정해지는 즉시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 짐 싸는 건 자신 있거든요! 누구보다도 알뜰살뜰하게 잘 준비할 수 있어요!"

든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게네호픈에 가게 되면 막시밀리안의 호위대와 함께 가는 만큼 특별히 준비할 게 없을 텐데.

지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손가락을 접으며 무엇을 챙겨야 할지 하나하나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즐거워 보였으니까.

라엘이 함께하는 것이 정해지자 시스템은 곧이어 메시지를 띄웠다.

['라엘'이 당신의 파티에 합류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의 파티 합류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고민할 필요도 없이 YES를 눌렀다.

['라엘'이 파티에 합류합니다.]

[파티원: 1/1]

['라엘'이 획득한 GP가 파티장인 당신에게 공유됩니다.]

이것으로 파티원은 충족시켰다.

이제 남은 건 목적지.

아라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차.

그의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알림창이 뒤이어 나타났다.

['라엘'을 파티원으로 맞이했습니다.]

['라엘'의 파티원 효과 '재생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자연 재생력이 20% 상승합니다.]

[모든 회복 효과가 20% 상승합니다.]

[마력 회복이 20% 상승합니다.]

[모든 독성 저항이 10% 상승합니다.]

[정신 간섭 저항이 10% 상승합니다.]

[해당 수치는 파티원의 성장에 비례하여 상승합니다.]

[파티원을 육성하고 더 많은 효과를 얻어 보세요.]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알림창.

그와 동시에 머리가 한층 맑아지고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파티를 하면 특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보통 이런 효과는 끽해 봐야 한두 개가 아닌가?

아니면 렘패이지 스톰에선 파티 효과가 원래 이렇게 많은 건가.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멍하니 눈앞의 알림창을 확인하고 있자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세상에 떨어졌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냐고 묻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최고의 인재만을 추천해 준다 이야기합니다.]

수호천사는 의기양양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콧김을 뿜으며 히죽이고 있을 것 같다.

고작 파티 효과로 이렇게나 많은 부수 효과들을 얻게 되다니.

심지어 라엘이 성장하면 할수록 파티 효과도 더 강해진다.

[열심히 라엘과 여행하길 추천합니다.]

[인품, 외모, 능력 어디 하나 할 거 없이 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장하면 최고의 서포터가 될 거라 장담합니다!]

그 점이야 굳이 수호천사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능력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인품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외모야 사람의 취향을 타니 최고라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하여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득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램페이지 스톰에 목을 매달았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자신의 클라스라며 우러러볼 것을 권합니다.]

이미 우러러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최고가 되려면 마무리까지 잘해야겠지.

유준상은 싱긋 웃으며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그건 그렇고 정산해 주셔야죠?"

잠시간의 침묵.

메시지가 떠오른 건 그 침묵이 불편해질 때쯤이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지독한 남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 줬으면 좋게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니냐 외칩니다.]

약속은 약속이지 않은가.

평소보다 말이 많은 데는 항상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곧이어 알림창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서브 퀘스트 '파티 결성'을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1,000 GP를 획득합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두고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소지 GP: 8,070 GP]

원플러스원 대할인 행사.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호천사님.

* * *

하르도는 진즉에 퇴근하고 아라드만이 홀로 남아 업무를 하고 있는 지휘관실.

아라드는 친절히 유준상의 물음에 대답했다.

"게네호픈은 유흥 도시인 만큼 많은 귀족이 몰립니다. 그라시아 제국법이 워낙 엄격하고 까다로우니 그 탈출구의 역할을 하는 셈이죠. 실제로 그곳에서만큼은 많은 것들이 용인되기도 하고요."

그라시아 제국법이 얼마나 깐깐한지는 이미 알고 있다.

총탄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반제국활동가로 낙인 찍혔을뿐더러 신분의 구분과 예법, 각종 규제가 셀 수없이 많아 아무리 귀족이라 할지라도 피로감을 호소한다.

하르도가 괜히 게네호픈으로 냅다 달려갔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귀족이 많고 법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말은 각종 암투나 암거래가 이루어지기 쉽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게 주신 총탄도 게네호픈에서 구한 것이겠군요."

"예. 일직이 알고 있던 암상인을 통해 구했던 것이었습니다. 나름 믿고 있었는데, 율리아에게 붙잡혔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정보를 불어 버렸지만요."

아라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게네호픈으로 가실 생각이신지요?"

"막시밀리안 공자가 제안하더군요. 자신과 함께 게네호픈으로 가자고. 좋은 술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다음 목적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라시아 전역에서 귀족들이 몰려드는 만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 지리상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이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 문제라면 귀족들 간의 암투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준상 님이 가지고 계신 팔롱드가의 증패를 보고서도 덤빌 얼간이는 없을 테죠. 막시밀리안 공자님도 옆에 계시니 더욱 그러할 테고요."

반대할 줄 알았는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아라드였다.

"제가 칼트슈베르트가의 자제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칼트슈베르트가는 군사 가문답게 신의가 두텁고 충심이 강한 가문입니다. 율리아 칼트슈베르트가 적대적으로 나와서 그렇지, 본래 팔롱드 가문과 나쁘지 않은 관계입니다. 막시밀리안 공자님도 저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시고요."

말을 편하게 하라는 말은 시험해 보려는 뜻이 아닌 진심이었던 건가.

괜히 거리를 둔 게 아닌가 싶다.

"어느 시점부터 술독에 빠져 살기 시작했지만 막시밀리안 공자님은 본래 촉망받는 기대주였습니다. 이번에 만나서 잠시 이야기해 본 바로는 아직 그 총명함이 사라지진 않은 듯 보이더군요. 무슨 연유로 술을 달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아 때처럼 준상 님을 해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대접해 주겠죠."

"그런가요. 괜히 따라갔다가 습격당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괜찮은 선택지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안전하다는 이유 말고도 여러가지로 게네호픈은 준상 님에게 좋은 선택지일 겁니다."

아라드는 유준상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옮겼다.

"준상 씨의 주력 무기가 총화기인 만큼 게네호픈의 암상인을 통해 다양한 무기들을 구입할 수 있겠죠. 강화를 맡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 게네호픈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위기를 맞이할지 모르는 만큼 무기의 개량과 추가 확보는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니까.

"혹시 필요하시다면 저희 쪽 호위를 조금 붙여 드릴까요? 아무리 막시밀리안 공자님의 병사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개인 병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클 겁니다."

"아,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라엘과 던컨이 함께 해 주기로 했습니다."

"라엘과 던컨이군요. 시민들 사이에서 징집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지요. 실전에서도 여러 차례 가능성을 증명했고요. 하지만 그 둘 가지고는 부족할 겁니다. 저희 쪽에서 뛰어난 인재를 붙여 드리죠."

"감시를 붙이겠다는 말이군요."

"하하. 감시라뇨. 언제든지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연락책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회사 다닐 적에 이러한 상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름 보람차게 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라드.

여러모로 인상 깊은 사내다.

유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그를 아라드가 배웅한다.

"언제 출발하시는 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이르면 내일 늦어도 일주일 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자님의 일정에 맞춰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내일 출발하겠군요. 그럼 저희 쪽 인재는 내일 오전 중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시길."

"준상 님이야말로. 내일 뵙겠습니다."

유준상은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시종을 통해 막시밀리안 공자에게 게네호픈에 함께 가겠다 소식을 전하니, 아라드의 말대로 내일 아침에 떠나자는 답장이 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건가.

행동력이 상당한 막시밀리안이었다.

시종을 통해 라엘과 던컨에게도 이야기를 전한 유준상은 침대에 누웠다.

팔롱드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밤이었다.

 22. 예상외의 선택지 (4)

"이렇게 준상 님과 함께하게 되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

병영의 성문 앞, 막시밀리안의 호위대에 합류하자니 익숙한 얼굴이 유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14살의 성실한 소년.

우리의 불초 하리.

어째서 이 녀석이 이곳에 있는가 싶어 이유를 물었더니, 가슴께를 펴며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아라드 참모장님께서 저 불초 하리의 잠재력을 높이 사고 기사로서의 자질을 높이 여기어 준상 님과 함께 세상을 두루 여행하며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셨습니다! 더불어 준상 님 옆에서 열심히 보고 배울 것을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뛰어난 인재를 붙여 준다길래 기사급 되는 사람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하리를 붙여 준 아라드였다.

하긴 고작 연락책으로 기사급 인재를 붙이는 건 과해도 한참 과하지.

그런 의미에서 하리는 아라드와 유준상 모두 만족할 만한 훌륭한 인선이라 볼 수 있었다.

이래 보여도 하리는 기사 지망생인 터라 전투에서 1인분 몫은 가능했고 여러모로 박학다식해 생소한 사항들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소보다 들떠 있는 하리.

생각해 보니 하리는 한 번도 로리엔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했었다.

처음으로 다른 곳으로 나서는 만큼 여러 가지로 신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인가?"

"아라드 참모장님이라면 저기서 막시밀리안 공자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다. 일행이신 라엘 님과 던컨 님은 마차에 짐을 싣고 계시고요. 다들 일찍 오셨습니다! 물론 제가 제일 먼저 와 있었지만요."

예정 시간보다 일찍 왔건만 벌써 도착해 짐을 옮기고 있는 라엘과 던컨이었다.

슬쩍 보아하니 꽤 짐이 많은가 보다, 특히 라엘 쪽이.

던컨이 열심히 짐을 싣는 걸 도와주는 중이었다.

어제 하루밖에 짐을 꾸릴 시간이 없었는데 그사이에 여러 가질 준비한 모양이다.

유준상은 라엘과 던컨에서 막시밀리안과 아라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지 나름 진지한 표정의 두 사람.

본래라면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은 하르도인데.

하르도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르도 공자님을 찾으시는지요?"

"어? 어. 아무리 막시밀리안과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황실을 대신해 감찰을 수행했는데, 배웅하지 않는 건가 싶어서."

하리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애석하게도 우리 돼ㅈ… 가 아니라 하르도 공자님께선 해가 중천에는 떠야 일어나십니다. 지금 시간은 주무실 시간이라는 거지요."

늦잠 자느라 못 나온다는 말이었군.

실로 하루도다운 이유였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럴 줄 알고 어제, 밤늦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가 하르도 공자님께 여러 가지를 받아 왔으니!"

그렇게 말하면서 하리는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보이는데 그곳에는 금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밤늦게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찾아간 것도 모자라 금화를 뜯어내다니.

기사를 아끼는 하르도의 성향과 기사 지망생인 하리의 훌륭한 입담이 더해진 결과였다.

어쩌면 하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요령 좋은 인물이 아닐까.

그간 해 왔던 불평불만은 사실 엄살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가시는군요."

막시밀리안과 대화가 끝났는지, 아라드가 다가왔다. 하리가 눈치껏 자리를 비운다.

"예. 한곳에 오래 머물러서야 여행자라 부르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슬슬 떠나야 할 때였습니다."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조금 더 오래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이래저래 일이 많았던 터라 제대로 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하기는 무슨.

분에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사치도 이런 사치가 따로 없을 테지.

이전 세상에선 꿈도 못 꿨을 사치였다.

"그리고 이걸."

아라드가 허리춤에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팔뚝만 한 길이의 단검이었다.

"본래는 팔롱드가에서 수료식을 끝마친 기사들에게 내주는 호신용 단검입니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만큼, 내구도와 마력 감응도가 뛰어나지요. 증패는 이미 가지고 계시니 그 대신으로 준비했습니다."

지금까지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이런 것까지.

어지간히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듯한 아라드였다.

유준상은 검을 확인해 보았다.

얼핏 보면 양산형처럼 보이는 심플한 그립과 크로스 가드.

그러나 핵심이 되는 검신은 달랐다.

검집에서 단검을 뽑으니 척 봐도 탄탄해 보이는 검신의 예기가 눈을 아리게 만든다.

검신 위로 특수문자가 쓰여 있기까지.

검의 주인이 팔롱드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뜻을 지닌 문자였다.

곧이어 아티팩트 설명창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충성을 증명하는 단도]

종류: 도검

등급: 고급

공격력: 20

내구도: 20/20

[특성]

마력 감응(B)

칼날 보존(B)

사용자 한정

[마력 감응: 해당 아티펙트는 마력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칼날 보존: 내구도에 상관없이 항상 높은 수준의 공격력을 유지합니다.]

[사용자 한정: 해당 아티펙트에 등록된 인물 이외에는 소지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사용자는 '유준상'입니다.]

리볼버와 마찬가지로 '고급' 등급의 아티팩트.

효과 또한 전투에 매우 유용한 효과들이었다.

아직 마력 사용법을 몰라서 그렇지, 마력 사용법만 어찌 익힌다면 마력 감응을 통해 한층 더 강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칼날 보존은 검날의 상태를 신경 쓸 필요 없이 공격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사용자 한정 특성으로 도난당할 가능성까지 줄여준다.

"아무리 사격 솜씨가 뛰어나다 한들, 혹시 모를 접근전에 쓸 만한 무기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게네호픈에 가자마자 호신용 무기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 차에 이런 아티팩트를 주다니.

"이거면 한동안 접근전에 다른 무기는 필요가 없겠군요. 이런 훌륭한 무기를 주시다니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준상 님께선 제 목숨도 구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정도야 제 목숨값으로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지요."

"제 목숨도 걸려 있었는데요 뭘."

"저희를 배신할 수도 있지 않으셨습니까."

율리아가 했던 제안을 알고 있었나.

"믿음에 부응해 준 보답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증패의 역할도 대신하니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굳이 율리아의 제안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생색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아라드였다.

유준상은 허리춤에 검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때마침 이동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드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디 앞으로의 여정에 만신전의 신들의 가호가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저야말로 팔롱드가에 만신전의 신이 함께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말에 오르는 유준상.

고삐를 쥐니 말이 마차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라드를 필두로 떠나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들.

유준상은 그들의 배웅을 눈에 담았다.

* * *

"인망이 있었나 보군."

유준상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만.

마차 창문으로 막시밀리안이 유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부터 술을 마셨는지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 온다.

"인망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떠날 때 말이야. 시종들과 병사들이 거하게 배웅했던 거."

거하다니.

그냥 나름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 예의상 나왔을 뿐인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배웅 아니겠습니까. 인망을 얻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 적 없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느꼈을지라도 저들은 아닐 거야. 원래 그렇지 않나. 필요 없어서 버리는 물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간절히 필요한 물건이라면, 받은 입장에선 큰 은혜처럼 다가오는 거. 인망을 얻는다는 게 별게 아니야. 물건이든 마음이든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주면 그것으로부터 인망이 생기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래. 싸구려든 아니든 일단 인망을 만들면 이래저래 쓰임이 있어. 아라드같이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에게서 인망을 얻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고. 그리고 그는 어지간히도 자네를 고평가하고 있지."

아라드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고평가한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확실히 이런 부분에선 눈이 어둡군."

"무엇이 말씀이시죠."

"저기 저 꼬맹이를 보게나."

그가 고개를 뒤를 돌려 라엘, 던컨과 잡담을 떠들고 있는 하리를 가리켰다.

"그 어떤 누가 감시, 연락책으로 이제 막 페이지가 된 기사 지망생을 붙이겠나. 그것도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에게."

램페이지 대륙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치안이 좋다는 그라시아 제국에도 도적 떼와 마수들이 돌아다니는 실정이다.

그의 말대로 아직 성인도 안된 하리를 유준상의 연락책으로 보내는 건 위험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아라드가 저것을 자네에게 붙인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는 자네를 믿기 때문이지."

"제가 하리를 지켜 줄 거라는 믿음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그게 핵심 이유는 아닐 거야. 두 번째 이유가 진짜겠지."

"두 번째 이유라면…."

"저 꼬맹이를 제대로 키워 볼 생각인 거지. 자네를 따라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면 여러 가지로 배우는 게 있지 않겠는가. 원래 경험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인재를 키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

"...."

"뭐 어찌 되었건, 아라드 그 작자 참으로 약아빠진 인간이야. 자네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미래의 자신의 힘이 되어 줄 인재 육성을 자네에게 맡긴 꼴이니까."

막시밀리안은 피식 웃더니 유준상에게 술을 건넨다.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게네호픈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려. 적막할 텐데?"

"괜찮습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아 술을 마시고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네요."

"유목 민족이 승마에 익숙하지 않다라…. 재미있군. 혹시나 하는데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지?"

술을 잘 마시진 못한다.

회사 다닐 적에도 회식 자리는 젬병이었으니까.

그래도 라엘의 파티 효과로 얻은 독성 저항을 생각한다면 생각보다 마실 수 있지 않을까?

"많이는 아니더라도 남들 맞춰 줄 정도는 마실 수 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좋은 술집을 소개해 주려 했는데, 술을 못 마셔서야 라플라시아강 오리알 신세가 될뻔했어."

막시밀리안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히죽히죽 웃는다.

이 사람 괜찮은 거 맞겠지.

예전에는 총명했다고 하던데, 혼자 실실거리는 것을 보자면 반쯤 미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술독에 빠져 있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막시밀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말이네."

"예."

"자네는 뭘 위해서 여행을 하는 건가."

그의 반쯤 감긴 눈이 유준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술에 푹 절어 있음에도 그 눈동자에서 묘한 총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그거야 지금이라도 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굳이 여행할 필요는 없을 텐데. 고향이 어디길래 그러는 거지."

이곳과 다른 세상.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말한다 한들 믿지 않을뿐더러 괜히 쓸데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정이 아니라 창이 심장을 관통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중세 시대는 마녀사냥의 시대이기도 했으니, 이 세상에 관해 온전히 파악하기 전까진 출신이나 정체에 대해선 최대한 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마경이 되어 버린 곳입니다."

"마수들에게 잡아먹힌 땅이 고향인가. 그것 딱하군. 딱해. 그래."

딱하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

"마수들을 처리하고 강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마경이 되어 버린 고향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향에 있는 마수들을 처리하겠다는 소리군. 굳이 어려운 길을 굳이 갈 필요가 있나. 그냥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으면 그만인데 말이야."

실로 달콤한 이야기다.

팔롱드가와 같이 대접해 주는 곳에서 적당히 직책을 얻고 산다면 그것도 나름 안락한 삶일 테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병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와 빚더미 속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는 동생이 있다.

가족들을 놔두고 나 혼자 이곳에서 안분지족하면서 살라니.

내겐 힘든 선택이다.

"막시밀리안께서는 가족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실 수 있겠습니까."

막시밀리안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사정이 있었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미안하네. 아는 척 지껄여서."

"괜찮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자님의 말도 일리 있는 말씀이셨으니까요."

"일리가 있다 해서 무례함과 오만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굳이 자네의 물음에 답을 하자면 나도 자네와 같네. 자네처럼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건 사양이지. 자네처럼 뭐라도 해 보고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지만."

않았지만?

과거형으로 대답하는 막시밀리안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가.

물어볼까 하다 유준상은 그만두었다.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으니.

이후 막시밀리안은 마시던 술도 내려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들판 너머 게네호픈의 성벽이 눈에 들어온 건 이틀이 지난 뒤였다.

 23. 유흥 도시 게네호픈 (1)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등.

고대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콘텐츠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것이 정말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대 모습인지 진지하게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수준급 공학적 지식으로 만들어진 드높고 단단한 성벽과 거대한 검투장, 수학을 통해 이끌어 낸 심미적인 디자인의 신전 등.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모두가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런 점에서 가히 최고로 볼 수 있는 콘텐츠는 단연코 게임.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함에도 오버테크놀로지가 집약된 구조물이 나온다든지, 중세 로마를 배경으로 하지만 몇 시대는 훨씬 앞서나간 전략과 군사 장비가 활용된다든지.

수많은 게임이 판타지 요소를 대거 도입하여 자칫하면 지루하고 단조로울 수 있는 게임 속 배경에 신선함과 화려함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러한 게임 중 특출나다 볼 수 있는 게임이 다름 아닌 현실이 되어 버린 램페이지 스톰이었고.

"와…."

"엄청… 크네요…."

높이만 대략 15m에 달하는 성벽이 들판 위에 펼쳐져 있다.

로리엔 평야에 있던 성벽은 기껏해야 5m에서 7m 남짓이었는데.

그보다 최소 두 배는 높은 성벽이 세워져 있으니 라엘과 하리가 눈을 끔뻑끔뻑 뜨면서 올려다볼 만했다.

성벽뿐만 아니라 관문 또한 눈이 돌아가기엔 충분했다.

어찌나 화려하게 장식해 놨는지 재액을 물리치는 조각상이 관문 근처에 늘어서 있어 눈 돌아가기 안성맞춤이었다.

라엘은 그렇다 쳐도 하리는 뭘 그리 놀라는 건지. 팔롱드가의 장식품도 이에 뒤지지 않는데 말이다.

"하리, 뭘 그리 놀라?"

"아, 준상 님. 준상 님은 놀랍지 않으십니까? 저 성벽의 높이 좀 보십시오. 어마어마합니다. 저런 성벽이 있으면 마수 따윈 엄두도 못 낼 겁니다. 그리고 저기 저 조각상들도 말이 안 됩니다. 저렇게 값비싸 보이는 걸 밖에다가 내놓다니. 저러다 금방 훼손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벽이야 기술만 갖춰진다면 높이 쌓아 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조각상은 재료와 기법에 따라 몇천 년 몇백 년이고 유지되기도 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마력과 마술이 존재하는 세상 아닌가, 분명 유지 보수 하는 마술이 걸려 있을 거다.

"고작 이런 걸로 놀라고 그래. 이것보다 높은 건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에 하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웃긴 건 옆에서 듣고 있던 라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오로지 던컨만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로, 저 성벽보다 높은 건물이 있다고요?"

못 믿겠는지 말까지 더듬는 라엘.

그러고 보니 라엘도 로리엔 평야 토박이였지.

이렇게 로리엔 지역을 벗어난 적이 처음인 그녀였다.

"네. 제가 아는 건물 중에는 고개를 올려다보아도 안 보이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네…? 혹시 마탑인가요? 마탑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높은 건물이 있을 리는…."

마탑은 무슨.

뉴욕 맨해튼에 가면 많다.

엄청나게.

보여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유준상을 대신해 던컨이 이야기했다.

"애초에 마탑은 그 위치가 숨겨져 있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 그리고 높은 건물을 찾는다면 굳이 마탑까지 갈 것도 없지. 게네호픈에도 있을 테지만, 그 어느 대도시를 가든 이보다 더 높고 거대한 건축물이야 널리고 널렸다. 당장 황성의 황궁만 해도 그 높이만 지금 이 성벽의 두세 배는 되겠지."

"그렇군요! 세상에는 산만큼이나 크고 높은 건물들이 많다는 거네요?! 역시 이렇게 따라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어찌나 눈이 반짝이는지.

라엘의 눈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다.

나중에 하늘의 별을 따야 할 일이 생기면 라엘에게 눈을 빛내 달라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판매한다면 10분 만에 매진될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그렇게 주변을 구경하며 하리와 라엘의 반응을 즐기고 있자니 어느덧 선두에서 검문이 끝났다.

"검문 끝났습니다. 이동합시다!"

다시금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고, 그들은 성벽을 지나쳐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 내부가 그들 앞에 펼쳐진다.

이번에도 역시나 새로운 광경에 감탄하기 바쁜 라엘과 하리.

이렇게나 많은 건물이 모여 있는 건 처음이라든지, 광장의 시계탑을 보고 저렇게 큰 시계는 처음 본다든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처음 소풍 나온 자식들을 쳐다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걸까.

저 둘을 보고 있자면 보모가 된 느낌이다.

띠링―

두 사람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림음이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목적지 '게네호픈'에 도착하셨습니다.]

[튜토리얼 퀘스트 4 '여정의 시작'을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2,500 GP를 획득합니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알림창.

그저 말을 타고 이동했을 뿐인데, 보상으로 2,500 GP나 획득했다.

마수나 도적 떼와 마주칠 줄 알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생각보다 거저먹는 퀘스트였다.

알림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장기간의 이동 간 단 한 차례의 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히든 업적 '내가 가는 길이 안전한 길'을 달성.]

[클래스 '길잡이' 획득 조건(1/2)을 충족시켰습니다.]

[보상으로 500 GP를 획득합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업적이 달성되었다는 알림. 클래스 획득 조건뿐만 아니라 500 GP까지 받았다.

알림창으로 보건대 원래는 오가는 와중에 마수나 도적 떼와 전투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초심자의 행운이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엮여 있으면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은데.

무슨 연유일까 고민하는 찰나, 멀뚱멀뚱 구경하는 라엘의 얼굴이 눈에 잡히는 것과 동시에 지난번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 나름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거든요. 저랑 함께 길을 나서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일종의 행운 토템인 셈이죠!

설마 라엘 때문인가.

파티 효과가 많은 것도 그렇고, 수호천사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씩 꼽아 보자니 정말로 라엘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길래.

가만 보고 있자면 그저 한없이 사람 좋은 시골 아낙네처럼 보이는데.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건만, 어디선가 수호천사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 * *

"안녕하십니까. 게네호픈에 머무르실 동안 유준상 님을 보좌하게 될 칼트슈베르트가의 시종 '메리'라고 합니다."

게네호픈의 외곽에 위치한 칼트슈베르트가의 저택에 도착하니, 하리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단발머리 소녀가 유준상을 맞이했다.

군사 가문답게 각진 제복을 입은 도도한 이미지의 소녀.

나이가 앳되어 보이는 것과 달리 몸가짐에 전문가 특유의 기량이 묻어 있다.

가볍게 인사했을 뿐임에도 느껴지는 그 전문성이 과연 그녀가 뒤에 있는 다른 시종들을 제치고 자신을 맞이했음을 알게 한다.

그건 그렇고 시종 맞지? 군인이 아니라.

"아쉽게도 준상 님의 취향을 알지 못하는바, 기존에 있던 내부 장식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메리가 저택 내부를 소개해 주며 하는 말이었다.

딱히 취향에 맞추어 바꿀 필요가 있나 싶다.

비록 팔롱드가의 저택만큼 거대하진 않았지만 나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고, 벽지나 바닥, 각종 가구들은 팔롱드가 못지않게 고급스러웠다.

지나치게 넓었던 팔롱드가의 저택과 달리 공간의 여백이 많지 않은 이곳이 조금 더 호감이 간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호감이 가는 것일 뿐, 부담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연분홍빛 머리칼을 지니신 여성분은 바로 옆 건물, 저희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건물 중 가장 좋은 방을 내어 드렸습니다. 거구의 사내분과 페이지 소년 또한 이곳과 멀지 않은 곳의 좋은 방을 내드렸고요. 전부 칼트슈베르트가의 소유지 내부이니 교류하는 데는 문제 없을 겁니다."

설마 여기서도 혼자 저택 하나를 차지할 줄이야.

아라드에게서 대접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팔롱드가에서 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러한 대접이 귀족의 기본인가.

아니면 막시밀리안 공자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나.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사항도 아니다.

일단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막시밀리안 공자님은 뭘 하고 계시지? 여기까지 호위를 붙여 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숙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막시밀리안 공자님이라면 도착하기 무섭게 침실에 드셨습니다. 여독이 많이 쌓여 있던 탓이겠지요."

여독이 아니라 술독일 것 같지만.

뭐가 되었든 막시밀리안이 취침 중이라면 술집 소개는 나중이 될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려 하니, 메리가 이야기했다.

"막시밀리안 님께서 취침에 드시기 전 유준상 님께 당부하셨습니다."

"당부를?"

"예."

그가 무슨 당부를 한단 말인가.

"자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도시의 구석구석 파악해 두라는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준상 님께서 도시에 한시라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우라 하시더군요."

"공자님께선 언제 일어나시지?"

"평소와 같다면 여행에서 돌아오시고 난 뒤로 이틀에서 사흘은 주무시니 못해도 나흘 뒤에 뵐 수 있을 겁니다. 여유가 있는 만큼 천천히 움직여도 될 테죠."

"혹시 그런 당부를 하신 이유는 알고 있나."

메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감고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와 관련해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무언가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감히 소견을 이야기해 보았겠으나, 미천한 저로서는 막시밀리안 공자님의 저의를 파악하기엔 부족하군요."

그냥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참으로 어렵게 돌려 이야기하는 메리였다.

유준상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아무리 여독이 쌓여 있다고는 하지만 누구와 달리 벌써부터 침대에 들어갈 정도로 피곤하진 않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도시를 둘러보도록 하지."

벌써 움직일 줄 몰랐는지 메리가 조금 놀란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십니까. 이틀간 장거리를 이동하신 탓에 많이 피곤하실 텐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피곤했을 거다.

하지만 나름 두 자리가 넘는 체력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데다, 라엘의 파티 효과에 있는 피로 회복 효과 덕분인지 그다지 피곤하진 않았다.

"이 정도는 별문제 없어."

"체력이 매우 뛰어나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장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메리.

무언가 분주해 보인다.

그냥 밖에 나갈 뿐인데 저렇게 분주할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잠시 후 메리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으며 돌아왔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가시죠."

"...."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두 자루의 레이피어 검.

오른손에 들려 있는 버클러 방패와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나이프에 등에 있는 건 뭐지?

클레이모어인가.

어째서 그저 밖에 나가는 것뿐인데, 이렇게 중무장한단 말인가.

혹시나 해 창밖을 확인해 보니 수려하기 그지없는 마차에 중무장한 칼트슈베르트가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묻겠는데…."

"말씀하시죠."

"혹시 게네호픈의 치안이 안 좋은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게네호픈은 귀족들을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 대낮에 거리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일은 황도를 제외한다면 그라시아 제국에서 가장 적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중무장을…?"

"본래 위험이란 가장 평화로울 때 닥쳐오는 법. 손님을 모시는 데 있어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을 더 주의하든 모자람이 없습니다."

팔롱드가에서도 시종들이 우르르 나타나 피곤했었는데, 여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째서 시종이란 것들은 이리도 정도를 모른단 말인가.

이틀간의 여행으로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머리가 갑자기 아파 오기 시작한다.

"메리, 당장 무장 해제하도록."

"예…? 하지만, 그래서야 안전에…."

"언제는 취향에 맞춰 준다 하지 않았나. 내 취향은 홀가분함이야. 그러니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그것들 전부 내려놓도록."

명령이 당황스러웠던 걸까.

우리의 도도한 도도새 메리는 왕을 향해 진언을 올리는 충신처럼 외쳤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게네호픈이라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습격이 있을 리 알 수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외출 시 무장을 하는 것은…!"

"병력도 전부 철수시켜. 도시 나들이는 너와 나만 간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얘지는 메리.

을사오적한테 나라 팔렸단 소릴 들은 고종도 이런 표정은 안 지었을 것 같은데.

이대로 더 고집을 부렸다간 혼자 나간다고 말할 것 같은지, 메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무장 해제를…."

이내 메리가 자리를 떠나 무어라 이야기하니 밖에 있던 마차와 병사들이 다급히 사라졌다.

마차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설마 저 마차도 군사 장비였나…?

메리만이 알겠지.

"나가시죠."

곧이어 메리가 진정으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왔다.

입고 있는 제복 안쪽으로 나이프를 몇 개 더 챙긴 것처럼 보이지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좋겠지.

"...."

"...."

지금도 이렇게 불만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기껏 준비한 것까지 빼앗아서야 앞으로의 생활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마시는 차마다 걸쭉한 게 들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찌 되었든 썩 좋은 첫인상을 주진 못한 듯하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는 차.

갑작스레 메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실은 전해야 할 막시밀리언 공자님의 당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당부가 하나 더 있다니.

"공자님께선 혹시라도 유준상 님과 같은 민족의 인물을 본다면 절대 접촉하지 마실 것을 권하셨습니다."

"이유는?"

"유준상 님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아무래도 당부는 이쪽이 진짜였던 모양이다.

메리의 이야기에 직감이 경고하는 것을 보자면.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주의하세요.]

 24. 유흥 도시 게네호픈 (2)

"도시 구경이라니. 엄청 기대되네요."

말을 타고 칼트슈베르트가의 저택 부지를 나오며 라엘이 입을 열었다.

"저도 엄청 기대됩니다! 도시는 처음이니만큼 눈 크게 뜨고 관찰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하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의욕 만만인 두 사람.

본래 메리와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으나 한차례 소란이 있던 탓에 라엘과 하리도 함께하게 되었다.

메리가 두 사람의 컨디션을 걱정했지만 이틀간의 여행에도 하나도 피곤한 기색이 없는 라엘이었다.

그와 반대로 하리는 이래저래 피곤해 보였는데, 혈기 왕성한 나이답게 기합으로 극복해 보인다.

―모셔야 할 분이 나들이를 나가는데 어찌 시종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저택까지 오면서 보았던 노점상의 음식들을 맛보고 싶을 뿐이겠지.

하리를 몰랐다면 분명 가슴이 뭉클해질 만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아라드는 이 녀석의 세 치 혀 놀림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사항이다.

"일행이 늘었군요. 다행입니다."

터버터벅 말을 몰던 메리는 두 사람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내해야 할 사람이 늘어나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그녀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여차하면 저 두 사람을 방패로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썩 튼튼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제노비아의 테러가 자행된다 해도 한두 번쯤은 막아 낼 테죠. 저까지 몸을 던진다면 도합 세 번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메리,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다.

아무리 군사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율리아도 그렇고 막시밀리안도 그렇고 칼트슈베르트가는 분명 뭔가 있다.

앞으로 칼트슈베르트와 관계된 것들은 모두 조심하자.

그러고 보니 던컨은 어디 있지.

주변에 몇 없는 상식인인데.

"하리, 던컨은?"

"아, 던컨 형님께선 칼트슈베르트가의 병사들을 도와 뒷정리를 하겠다 하십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친해진 터라 가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도와드리겠다고 했는데 대부분 힘쓰는 일이라 제가 도와줄 일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근력이 강했으면 도왔을 텐데. 체력만 왕창이라 조금 슬프네요."

라엘은 던컨과 병사들을 도와주지 못한 게 아쉬운지 울상을 지어 보인다.

반대로 하리는 합법적으로 일을 돕지 않아도 되어서 기뻐하는 눈치다.

"하리. 혹시라도 노점상에서 뭐라도 주워 먹을 거면 던컨 것도 꼭 챙겨. 알았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불초 하리, 전우를 챙기는 의리의 남자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모로 걱정되지만, 그래도 나름 아라드의 기대를 받는 유망주이다.

잘 챙기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억해 두자.

던컨도 나름 고생했는데, 아무 보상도 못 받으면 섭섭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도시를 구경한다는 건 알겠는데, 게네호픈은 꽤 큰 도시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박했군요. 일단 시내로 향할 생각입니다."

"오오…!"

"시내라면 이 도시의 중심을 말하는 거죠…?"

하리와 라엘이 눈을 빛내며 기대한다.

"예. 게네호픈은 총 다섯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심. 시내는 도시의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왕성하고 각종 공공기관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그럼 노점상도 있나요?"

"있습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지 침을 줄줄 흘리는 하리.

그런 하리의 질문에도 존댓말로 대답하는 메리였다.

한쪽은 기사 지망생이고 한쪽은 시종인데, 분위기가 정반대다.

"가는 길이 짧지 않다면 다른 구역들도 설명해 줄 수 있나."

"어렵지 않습니다."

메리는 실로 친절하고 일목요연하게 게네호픈의 남은 네 구역을 설명해 주었다.

칼트슈베르트가의 저택을 비롯한 그라시아 제국의 귀족들이 거주하는 북쪽 구역.

유흥, 술, 도박, 창관 등 게네호픈이 유흥도시로 불리게 된 이유이자 각종 유흥 시설이 밀집해 있는 동쪽 구역.

그리고 게네호픈의 주둔군과 용병 및 다양한 수공업 길드가 모여 있는 남쪽 구역.

"그리고 남은 서쪽입니다만…."

메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한다.

"서쪽 구역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구역입니다. 게네호픈의 많은 낙오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각종 노예와 마약과 같은 것들이 유통되기도 하지요. 그 외에도 수많은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가급적이면 발을 들이지 않길 추천드리겠습니다."

"불법적인 일이라면?"

"귀족들 간의 암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아라드도 게네호픈에 귀족 간에 더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야기했었다.

그 더러운 일 대부분을 서쪽 구역에서 처리하는 것이겠지.

효율 좋은 방식이다.

더러워질 거라면 한 곳만 더러워지는 게 여러모로 관리하기 편할 테니까.

"어째서 유흥 지구와 떨어져 있는지 이해되네."

"예. 귀족분들께서 자신들의 놀이터에 더러운 것들이 접근하길 바라지 않으시니까요. 그런 만큼 동부의 유흥 지구와 중앙의 시내는 신분의 검사가 철저합니다. 증패를 잃어버리면 곤란하지요."

구속이라도 되는 건가.

물론, 유준상에게 있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증패 뿐만 아니라 신분을 증명하는 단검 또한 소지하고 있었으니.

하나는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고 하나는 그가 아니면 만질 수 없으니, 도난당할 염려도 없었다.

하리와 라엘에겐 신분증이 없었지만 유준상의 호위와 시종역이니, 그의 신분만 확실시된다면 그가 두 사람의 신원을 보증할 수 있다.

가문이 다른 메리는 힘들겠지만.

"좋은 정보 고마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전해 드려야 하는 사항이었습니다."

그렇게 메리에게서 도시에 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자니 어느덧 흙길이 벽돌길로 바뀌며 수풀이 무성했던 주변 풍경에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부턴 구역상 시내입니다. 일단 역참에 들려 말을 맡기도록 하죠. 혹시라도 그 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초행길인데 있을 리가.

예의상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대로 역참으로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 앞으로는 사람이 붐빌지도 모르니 잘 따라와 주시길."

메리가 앞장서고 그 뒤를 유준상과 일행들이 따랐다.

가슴 벅찬 기대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라엘과 하리.

이게 뭐라고.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지만, 가슴은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콩닥대는 유준상이었다.

* * *

"여기 증명서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내의 중심가에 있는 고급스러운 역참.

말을 넘기니 역참원이 메리에게 증명서를 내준다.

메리는 증명서를 지갑으로 보이는 금화 주머니에 조심히 넣는데 그 모습에서 기존의 딱딱했던 이미지와 다른 소녀다움이 느껴진다.

라엘도 똑같이 느꼈는지 귓속말로 물어온다.

"메리는 원래 시종이 아니지 않았을까요? 조금 전에 증표를 받고 지갑에 넣는 모습이 엄청 우아했는데."

"그냥 교육을 잘 받은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거 잘 맞춰요?"

"...아뇨. 실은 친구들이 매번 헛다리 짚는다고 가르미슈 계곡의 허탕새라고 불렀네요…."

"재미있는 새네요. 왠지 체력 좋을 것 같아요."

라엘이 한쪽 입술을 삐죽인다.

귀엽네.

"그럼 시내를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준상은 메리를 따라 역참에서 나와 거리로 나섰다.

4차선 정도 되어 보이는 넓은 거리 양옆으로 다양한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가뿐만 아니라 정육점이나 약초방도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를 거닐며 값을 치르고 흥정을 하니, 그저 길 사이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삶의 활력이 느껴진다.

"게네호픈은 대도시이긴 하나 상시로 시장이 열리진 않습니다. 식료품의 경우 4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리지요. 사치품의 경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리고요."

"사치품을 따로 파는 가게가 있는 건 아닌가 보군."

"저희와 같은 서민 입장에서 사치품으로 보이는 물건을 파는 가게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귀족분들께서 찾는 건 희소성 있는 물건이다 보니 게네호픈에서 말하는 사치품이란 그라시아 외부에서 반입된 물건을 뜻합니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귀족들이군.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자면 이들 전부가 사치품을 팔기 위해 온 사람들인 모양이다.

"준상 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주시하시면…."

유준상이 아시아 계열로 보이는 인물들을 주시하니 메리가 주의를 준다.

막시밀리안의 당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주의해서 나쁠 것 없다.

막시밀리안이 괜히 경고와 같은 당부를 한 것이 아닐 테니.

유준상은 시장 상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와…. 이렇게나 비싼 약초들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라엘은 약재 냄새가 진하게 나는 약초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하나 약초를 확인해 보더니, 상점 주인에게 어디서 구했냐 든지 보관은 어떻게 했냐 든지 등을 물어본다.

본래라면 사지 않을 거면 꺼지란 말을 했을 상점 주인은 천진한 라엘의 미소에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친절하게 대답한다.

그렇다고 상점 주인 입장에서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라엘이 주변으로 밝은 기운을 흩뿌리니 텁텁하기만 하던 약초방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으니까.

상점 주인은 여러모로 계 탔네.

그러고 보니 하리는 어디 있지?

고개를 돌려 하리를 찾아보았다.

절대 멀리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조금 주변을 둘러보니 하리는 고작 몇 미터 떨어진 노점상의 꼬치구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유준상과 눈이 마주친 하리가 후다닥 달려온다.

"준상 님! 아라드 참모장님께선 제게 준상 님을 따라 많은 것을 보고 겪으며 견문을 넓히라 하셨습니다!"

이제 막 운을 뗐을 뿐인데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이어진 말은 한치도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어 보는 것도 견문을 넓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빌헬름 전기 7장 3절에 따르면 본디 새로운 경험이란 오감의 새로운 자극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합니다. 부족한 제 미각에 새로운 자극을 전해 준다면 이를 통해 예상치 못한 영감으로 준상 님을 모시는데 크나큰 성취를 이룩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기사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갈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 잘난 세 치 혀를 놀려 어떻게든 꼬치구이를 먹어 보려는 하리.

옆에서 하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리가 어이없어한다.

당연히 어이없겠지.

'꼬치구이 하나만 사 먹어도 되겠습니까?'란 질문을 저리도 길게 씨불인 것이니까.

"먹어. 던컨 것도 챙기고."

"감사합니다, 준상 님! 저 불초 하리. 이번 기회에 미식에 눈을 뜸으로써 앞으로의―"

"빨리 가서 먹어."

"알겠습니다!"

하리는 싱글벙글 해맑게 웃으며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점원이 돈을 내라 손을 벌리니, 우리의 하리는 당당히 가슴 안쪽에서 두툼한 주머니를 꺼내 보인다.

설마 여기서 저걸 활짝 여는 건 아니겠지.

저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그러나 우리의 하리는 걱정이 무색하게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금빛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점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고작 14살짜리밖에 안 된 녀석이 이렇게나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다니.

아무리 귀족의 시종이라지만 사람들 눈 돌아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자칫하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

"후…."

메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급히 하리에게 다가가 금화 주머니를 서둘러 감췄다.

하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메리.

그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달은 하리가 크게 위축된다.

"계산은 내가 대신하도록 하지."

메리가 지갑을 열어 돈을 내고 꼬치를 받아 든다.

그제야 하리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된다. 그녀의 제복이 나름대로 억제력이 돼 준 덕분이었다.

메리가 하리를 째려보았다.

"돈 자랑할 일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잠깐 고기 먹을 생각에…."

"드십시오."

하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메리에게서 꼬치구이를 받아 든다.

꼬치구이를 한 입 베어 무니 조금 전 위축되었던 게 거짓말처럼 헤실헤실한다.

"그렇게 정신이 팔려서야 모시는 이를 지킬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시길."

"예. 정진하겠습니다!"

굳이 지킬 필요까지야.

위험을 자초하긴 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물론 주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좋지 않은 시선은 느껴지지만.

아쉽지만 시내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 자리를 옮기는 게 좋아 보인다.

그러한 생각을 메리와 의논해 보려던 차, 괴상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야아아아―!"

하리 나이쯤 되었을까.

골목에서 뛰쳐나온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사람들을 무작정 밀치고 지나간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밀치고 지나간 사람 중엔 하리와 메리도 있었다.

꼬락서니가 썩 좋지 않은 것 하며, 하는 짓거리하며, 영락없는 소매치기와 다름없다.

설마, 이 녀석들, 하리의 금화를 보고….

"하리, 소지품."

"아, 네!"

하리가 주섬주섬 가슴 안쪽을 뒤진다.

다행히도 주머니는 무사했다.

주머니 안에 있던 금은보화도.

주변을 보아하니 주변에도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그냥 무리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길 좋아하는 녀석들이었나.

가끔 그런 녀석들이 있다.

어떻게든 관심받고 싶어서 허튼짓하는 애들.

그러나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 건 예상 밖의 인물로부터였다.

"없다…. 없어…!"

자신의 옷을 몇 번이고 뒤적이는 메리.

"메리?"

"준상 님,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메리의 얼굴이 당혹감과 수치심에 뻘게진다.

"지갑을 도난당한 것 같습니다. 신분을 증명하는 증패와 역참 증명서도…."

가장 중요한 신분증을 잃어버리다니.

편히 구경하나 했는데, 역시나.

"추격하자."

"예…!"

 25. 유흥 도시 게네호픈 (3)

인간의 신체는 본디 달리기 위해 구성됐다고 했던가.

오래 달리는 데 최적화된 심폐 능력과 골격 구조는 도주하는 목표를 추격, 사냥하고 맹수에게서 벗어남으로써 생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그야말로 수렵채집이라는 삶의 방식에 최적화된 결과물인 것이다. 물론, 좌식 생활이 주가 되어 버린 현대에 와서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학창 시절을 제외하면, 늦잠 때문에 출근 버스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뛸 기회가 없는 것이 작금의 현대인들이었다.

그렇기에 느긋하게 걸어 다니고 앉아 있을 뿐인 삶이 지속되리라 생각했었는데.

이세계 소환이란 신비 덕분에, 유준상은 오늘도 신체의 존재 의의를 톡톡히 증명하고 있었다.

"라엘, 하리!"

"네, 네! 불초 하리, 갑니다!"

"자, 잠시만요! 갑자기 왜 뛰시는 건가요?!"

상황을 파악 못 한 라엘이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일행이 달리니 마찬가지로 달리는 라엘.

유준상은 짧게 설명했다.

"저 앞의 놈들이 증패를 훔쳐 갔습니다."

"앞의 놈들이라면, 저기 저 아이들이요?"

메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면목 없습니다."

"일단은 달리는 데 집중을!"

"네…!"

앞선 소매치기범들과는 꽤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저기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애들이었고, 이쪽은 네 명 모두 군사 훈련을 받은 이들.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에 차이가 있다.

"뭐 저리 빨라?! 귀족들은 하나같이 느려 터진 거 아니었어?"

"귀족 아닌 거 아니야?"

"분명 내가 봤다고, 저기 저 시종이 금화 주머니 가지고 있는 거!"

금화 주머니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부 귀족일 리 없건만.

"야, 골목으로 빠져! 거기서 따돌리는 거야!"

"응!"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던 아이들은 이내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얌전히 잡힐 것이지. 귀찮은 짓을.

녀석들을 쫓아 들어간 골목은 비좁았다.

단순히 비좁은 것뿐만 아니라 쓰레기가 쌓여 있는 함이라든지, 가정집에서 널어놓은 빨랫줄이라든지, 여러모로 통로를 방해하는 지형지물이 많다.

어째서 골목으로 들어왔는지 이해되네.

하지만 고작 이정도로 추격을 막기엔 모자라다.

유준상은 실로 민첩하게 지형지물을 뛰어넘고 피해 가며 녀석들을 추격했다.

늑대 무리를 상대하느라 산속을 내달렸던 경험 덕분인지 이정도 장애물이야 우습다.

[반복 숙달로 인해 '파쿠르'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파쿠르 lv. 0 → lv. 1]

심지어 파쿠르 숙련 보정이 생기기까지.

추격하는 데 속력이 붙는다.

"미친! 저 인간 원숭이인가 봐!"

"내가 뭐라 했어! 귀족 아니라고 그랬지!"

"닥쳐! 그렇다고 두목 말을 거역할 순 없잖아!"

"흩어지자! 살 사람만 살아!"

놈들은 그렇게 말하며 다음 갈림길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흩어졌다.

"준상 님,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하겠는가, 계속 쫓아야지.

돈이나 역참 증명서는 그렇다 쳐도 신분 증패는 잃어버리면 여러 가지로 위험하다.

이전 세상에서도 해외 여행 시 절대 여권만은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마약이나 테러 등.

그 신분증이 어떤 나쁜 짓에 이용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리와 메리는 좌측 골목으로, 라엘은 우측을 맡아 주세요. 저는 정면으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갈림길에 도착하기 무섭게 양옆으로 흩어지는 일행들.

유준상은 정면으로 달려갔다.

"제기랄! 우리한테 제일 까다로운 놈이 붙었다!"

"뭐라도 좀 해 봐!"

"에라잇!"

꼬맹이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주먹만 한 돌을 집어 던진다.

감히 누구한테 돌을 던지는 것인지.

심지어 아리랑 볼이다.

유준상은 날아든 돌을 손으로 낚아채고는 그대로 되던졌다.

[무기 연마 lv. 3이 활성화됩니다.]

[손재주 lv. 3이 활성화됩니다.]

[투척술 lv. 5 → 9]

실로 깔끔한 투로(投路)를 그리며 날아가는 돌덩이.

감히 평균자책점 2.0 이하라 자부할 수 있는 돌덩이는 가차 없이 한 녀석의 발목에 적중했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넘어지는 녀석.

"페트릭!"

남은 한 놈이 어떻게든 넘어진 친구를 함께 데려가 보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몸에 힘 빼, 무진장 아플 거니까!"

유준상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운동 에너지를 모두 담아 녀석의 복부에 발을 꽂았다.

놈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바닥을 구르고 굴러 벽에 기대어 있는 나무 통나무를 부수고 나서야 간신히 구르길 멈추었다.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한 녀석.

가급적 어린애들에겐 자비를 베푼다는 입장의 유준상이지만, 어디까지나 반성하고 사죄하는 녀석들 한정이다.

"제기랄, 죽어!"

지금 이렇게 품 안에 숨겨 놓은 단도를 휘두르는 녀석을 상대로는 애고 어른이고 없다.

"너희들을 보니까, 우리 하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새삼 알겠네."

유준상은 단검을 피하고 그대로 놈의 손목을 붙잡았다.

발등을 발로 누르고 비어 있는 손으로 턱, 인중, 콧등, 미간에 4연타를 꽂아 넣는다.

"커억―!"

그대로 단도를 놓치는 꼬맹이.

놈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른다.

며칠 전, 던컨에게 배운 기초적인 호신술인데 꽤 쓸 만하다.

유준상은 그대로 녀석을 엎어 메쳤다.

등에 가해진 충격에 고통으로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귀찮게 하지 말고 자라. 알았냐?"

마지막으로 녀석의 턱에 펀치.

기절하는 것으로 귀찮게 도망치던 두 명 모두 제압된다.

유준상은 근처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팔자에도 없는 뜀박질을 또 할 줄이야."

어째 이 세계에 와서는 유독 뛰는 일이 많다.

'투척술'이야 과거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숙련도지만 '파쿠르'까지 생길 줄은 몰랐다.

어지간히도 뛰었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달리기였었지 아마.

이래서 달리고 저래서 달리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민첩이나 체력 수치를 올려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알림음과 함께 알림창이 떠올랐다.

[약자를 상대로 방심하지 않고 아무런 피해 없이 제압에 성공하였습니다.]

[일반 업적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체력과 민첩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민첩: 13 → 14]

[체력: 13 → 14]

체력과 민첩 능력치를 올려야겠다 생각한 게 몇 초 전인데, 때마침 달성한 업적이 민첩과 체력을 상승시켜 주었다.

GP로 치자면 600 GP에 해당하는 가치.

비록 엄청 크지는 않지만 나름 쏠쏠한 보상이었다.

"내가 운이 좋은 건가, 원래 이런 건가."

확실히, 램페이지 스톰이 말도 안 되는 난이도와 밥 말아 먹은 운영에도 팬층이 두꺼운 이유가 있다.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업적이 달성되니 다음엔 또 무엇이 있을까 탐구심을 자극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적당히 숨도 골랐겠다, 놈들의 옷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도 메리의 지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지갑이 나오는데, 참으로 많이 해 처먹었다 싶다.

소매치기나 절도 같은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지 이 경우는 숙련도겠구나.

뭐가 되었든 이 녀석들이 도적 예비생들이란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아직 파릇파릇한 애들인데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날붙이를 휘두른 걸 생각하면 더 맞아도 싸다.

뭐가 되었든 좋은 교훈이 됐을 테지.

그렇게 메리의 것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지갑을 챙기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됐습니다.]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주의하세요.]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살기.

유준상은 그대로 옆으로 몸을 굴렀다.

그가 있던 자리에 나이프가 박혀 들었다.

"와. 이걸 피하네? 대부분은 반응도 못 하고 꼴까닥하는데 말이야."

유준상은 나이프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2층짜리 건물 옥상.

자신과 같은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한 이가 이죽거리고 있었다.

"...."

"너 뭐냐? 막 '미래 예지'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냐? 내 공격은 어떻게 알고 피했대?"

"뭐 하는 놈이냐."

"뭐 하는 놈이냐? 말하는 거 X나 웃기네. 니가 보기엔 내가 뭐 하는 놈일 것 같냐?"

유준상은 그의 복장을 훑었다.

척 봐도 움직이기 편한 복장에 갑옷 또한 격한 움직임을 보조할 수 있는 얇은 가죽 갑옷이다.

뭐 하나 걸릴 것 없이 매끄러운 실루엣은 은밀한 기동에 어울릴 법했다.

"암살자냐."

"오호. 비슷했어. 하지만 틀렸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비릿해졌다.

갑작스레 팔을 당기는 그.

"그럼 틀렸으니 벌을 줘야겠지?"

바닥에 박혀 있던 나이프가 유준상을 향해 호를 그리며 날아든다.

빌어먹을 자식 나이프에 와이어를 묶어 놨었나.

유준상은 크게 고개를 젖혀 나이프를 피했다.

다른 하나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깊이가 얕다.

유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마음 같아선 총을 들고 싶지만, 도심 한복 판에서 총을 쐈다간 어떤 후폭풍이 올지 알 수 없다.

아무리 팔롱드가와 칼트슈베르트가가 뒤를 봐주고 있다지만, 한도는 있는 법이니.

놈의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와. 이것도 피해? 암만 봐도 튜토리얼 중인 거 같은데 인벤토리까지 쓰고 말이야."

"플레이어냐? 도대체 날 왜 습격한 거지?"

"너 병신이야? 생전 처음 보는 놈이 남의 사업장에 멋대로 들어와서 깽판을 치는데 사장된 입장에서 응징에 나서는 건 당연한 거지."

여기 바닥에 쓰러져 있는 꼬맹이들이 말하던 두목이 저 녀석이었나.

그렇다면 클래스가 뭔지도 대강 감이 잡힌다.

"도적 클래스였군."

"빙고. 그래서 말인데, 적당히 물러나 주지 않을래? 솔직히 나는 여기서 네놈을 죽일 생각은 없어."

죽일 생각으로 나이프를 던져 놓고서 하는 말이라고는.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진짜라고? 여기서 괜히 소란을 피워 봤자 우리 무서우신 경비대 나으리들이 들쑤시기만 할 테니까. 그래서야 피곤하다고. 높으신 분들한테 이래저래 사정해야 하니 말이지. 아, 물론 우리 애들이 열심히 땀 흘려 벌어 놓은 지갑들은 그 자리에 놔두고."

원하는 건 돈이었군.

"딴 건 몰라도 우리 일행의 지갑은 줄 수 없어."

"예외는 없어. 말했지만 우리 애들이 열심히 땀 흘려서 훔친 지갑이야. 애들의 오늘 품삯인데 그걸 뺏어 가겠다니 불쌍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다 내려놓고 가."

"거절한다면?"

"여기서 죽겠지? 나한테."

이게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맞는 건가?

램페이지 스톰에 인성 박살 난 놈들 천지라고 하더니만, 이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준상은 단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응. 죽여 줄게."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진 놈의 신형.

직감이 위험을 외쳐 온 곳은 등 뒤였다.

"...!"

목을 베기 위해 날아든 놈의 나이프가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할 줄 알고 있었지!"

이어진 발차기.

가슴을 가한 발차기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도적의 나이프가 쇄도한다.

유준상이 다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무기 연마 lv. 3이 활성화됩니다.]

[손재주 lv. 3이 활성화됩니다.]

[검술 lv. 2 → 6]

상승한 검술 덕에 간신히 놈의 나이프를 받아 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받아 내는 데에 그칠 뿐.

야금야금 몸 위로 상처가 생겨나고, 반격은커녕 점점 체력만 소모되어 간다.

"엄청 잘 버티는데? 성기사나 방패 기사는 아닐 거고. 너 클래스 뭐냐?"

"너보다 좋은 클래스."

"하하! 웃기는 새끼네, 이거."

한순간 놈의 다리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이건…."

그대로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발차기.

체감상 기존보다 배로 빨라진 속도에 반응하지 못하고 날아간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목재 함을 부수며 바닥을 뒹구는 유준상.

그런 그를 보며 놈이 비웃었다.

"너 램페러 맞냐? 이 좆망겜에 좋은 클래스가 어디 있어? 다 하나같이 하자만 가득해서 무슨 클래스를 하든 엿 같은데. 뭔가 있는 줄 알았더니만 초짜였구만."

빌어먹을 자식.

조금 전 그 푸른빛은 마력이었나.

쓸데없이 빠르고 쓸데없이 강력한 위력이었다.

충격이 충격인 탓에 코에서 피가 흐른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괜찮냐고 묻습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좋지 않은 것 같다며 도망칠 것을 권합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지.

우리의 수호천사님의 메시지에서 당혹감이 느껴진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서브 퀘스트를 등록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도주]

[설명: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현재 자리에서 이탈, 아군과 합류해 목숨을 부지하세요. 이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보상: 1,500 GP]

도망칠 것을 권하는 서브퀘스트.

마음 같아서 도주하고 싶지만, 도주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놈은 생각보다 빨랐고, 훨씬 강력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갑이고 신분 증패고 다 포기하는 건데.

아니지, 놈이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건대 지갑을 포기했어도 공격했을 놈이다.

그러니 맞서 싸우는 게 최선의 판단일 테지.

[서브 퀘스트 '도주'를 거절했습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혹스러워합니다.]

"뭐야. 여전히 싸울 맘이 가득하네? 이쯤 되면 보통 다 줄 테니까 살려 달라 비는데."

"처음 단도를 던졌을 때도 그렇고 이런 짓 자주 하나 봐? 사람들 반응까지 다 알고 있는 걸 보면."

"당연하지. 이래 봬도 이 세상에 온 지 일 년 차라고. 내 손에 죽은 놈들만 연병장 세 바퀴다 이 말이야."

빌어먹을 자식.

어쩐지 강하더라니.

일 년 차였나.

여섯 배나 경험이 많네.

이래서 짬밥이 중요하다.

'그래도….'

놈을 상대로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 놈이 보였던 그 마력을 담은 발차기와 같이, 이쪽도 마력을 사용해 대응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반격을 가해 볼 만하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하느냐.

"아까의 발차기 어떻게 한 거지?"

"와…. 마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라? 진짜 초보자인가 보네. 모든 램페러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마력 회로 만드는 작업인데. 근데 너 말이야. 그런 걸 나한테 물으면 내가 친절히 가르쳐 줄 것 같아?"

허공에 나이프를 돌리며 다가오는 녀석.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녀석이었다.

"너 뭔가 착각한 게 있는데,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

"하늘에 물은 거지."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빛줄기에 당황하는 도적.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자신의 힘을 강제로 밀어 넣어 마력 회로를 증설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매우 매우 고통스러울 테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아무렴.

그래도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울까.

죽어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개자식!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성좌가 붙어 있었나…!"

유준상을 끝내기 위해 달려드는 녀석.

유준상은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비추고 있던 한 줄기 빛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26. 유흥 도시 게네호픈 (4)

티잉―!

한 줄기 빛이 시야를 물들이는 것과 동시에 청음이 터져 나왔다.

도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의 나이프가 유준상의 단검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유준상의 단검 위로 푸른 마력이 넘실거린다.

본래라면 나이프에 의해 깨져야 했을 단검.

마력 감응으로 강화된 단검은 도적의 나이프를 당연하다는 듯 막아 냈다.

"X밥이면 X밥답게 곱게 죽을 것이지!"

"너라면 곱게 죽어 주겠냐!"

도적이 실로 쾌속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나이프를 휘두른다.

그러나 유준상은 대부분의 공격에 반응해 보였다.

초보자의 행운까지 사용해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내는 유준상이었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더 당혹스러울 수 없었다.

도적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다 막아 낸다고? 설마, 뒤를 봐주는 성좌가 '불멸하는 불의 전달자'인가? 그 성좌로부터 예지의 힘을 받았다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자신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지 능력이 있는데 무엇 하러 위험을 자초하겠는가.

무엇보다 그의 움직임은 예지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많았다.

그는 공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공격에 대응했고, 중간중간 먼지바람이 불어온다든지 안주머니의 금화가 공격을 막아 준다든지와 같은 운도 따라 주었다.

"억까도 정도껏 해야지!"

도적은 답답한지 나이프 대신 발차기를 날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마력이 담겨 있는 공격.

유준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 그래도 능력치 차이 때문에 피하기 힘든 공격이다.

마력 회로를 강제로 개방한 탓에 전신이 비명을 지르고,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감이 덮쳐 오고 있다.

놈의 발차기를 맞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힘들 거다.

일어난다 하더라도 허울뿐일 테고.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피하거나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카운터는 칠 수 있다.

그는 다리가 날아드는 방향으로 단검을 세웠다.

투콱―!

그의 머리에 둔중한 충격이 전해지며 뇌관이 크게 흔들린다.

"커헉―!"

유준상의 몸뚱어리가 그대로 날아간다.

그러나 마냥 날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크윽…! 빌어먹을 새끼…!"

도적의 왼 다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

발차기가 유준상의 머리를 후려치기 직전, 단검의 날이 여지없이 그의 정강이를 베고 지나간 것이었다.

"선물이다. 멍청아."

"그딴 걸 말이라고…!"

상처가 깊고 출혈량이 상당하다.

고통이 상당한지 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나 고통스러운 건 유준상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흘러들어 온 수호천사의 힘 덕분에 가슴에 고여 있던 마력이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지만, 그 여파로 조금만 움직여도 송곳으로 관절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인다.

신경계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죽을 것같이 아프네…."

유준상은 단검을 들고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워낙 세게 맞은 탓인지 균형 감각이 혼란스럽다.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얕보이는 순간, 놈은 무리해서라도 끝내러 올 테니.

여차하면 리볼버를 꺼내 들 생각으로 그를 주시했다.

"내가 너 같은 새끼한테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어야겠어?"

놈은 잔뜩 인상을 쓰더니 다시 한번 나이프에 마력을 불어넣는다.

그냥 적당히 좀 물러나 주면 어디가 덧나나.

어쩔 수 없다.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리볼버를 꺼내는 수밖에.

"나 같은 새끼한테 상처를 입은 걸 보면 너도 같은 새끼가 아닐까?"

놈이 나이프를 바로 잡는다.

유준상 또한 인벤토리에서 리볼버를 소환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렇게 놈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게네호픈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비대의 호루라기 소리였다.

"빌어먹을!"

녀석의 얼굴이 흉신악살과 같이 구겨진다.

자리를 뜨려는지 곧장 나이프를 집어넣고 등을 돌리는 녀석.

아무리 정신 나간 녀석이라도 경비대와 충돌하는 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놈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유준상을 노려보았다.

"운이 좋은 줄 알아.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 줄 테니까."

어떡하지 이쪽은 다시 만날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노력해 봐 행운을 빌어 줄 테니까."

"쓰레기가…!"

누가 쓰레기인데.

그 말을 남기고 놈은 자리를 떠났다.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유준상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어떻게 된 게 몸이 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놈에게 맞은 머리는 여전히 띵하고, 사지육신은 그저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전해 왔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괜찮냐고 묻습니다.]

하나도 안 괜찮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서 인벤토리에 있던 포션을 하나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어렸을 적 먹었던 해열제를 먹는 맛이라 묘하게 추억을 자극한다. 추억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포션을 먹었다고 머리를 울리던 통증이 점차 가라앉는다.

다만 날뛰는 신경계는 진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성좌의 힘이 한차례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으니 포션만으로 진정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무슨 짓을 했길래 자신이 잠시 다른 데 눈을 판 사이에 그런 무모한 싸움을 벌였냐고 이야기합니다.]

[설마 또 무리해서 상대를 도발한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도발 안 했다.

놈이 다짜고짜 무기를 날린 거지.

물론 중간에 협상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놈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협상에 응한다 해도 싸움을 걸어왔을 것이다.

....

걸어왔겠지?

어찌 되었건 정신 나간 소매치기 두목은 물러났고 목숨도 건졌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라 볼 수 있었다.

"준상 님, 괜찮으십니까!"

때마침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하리와 라엘 그리고 메리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를 보고 위치를 파악한 것이었다.

"준상 님! 설마 습격을…!"

"일단은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

"메리 씨 잠시만요. 생각보다 상처가 커요. 응급처치할게요."

다급히 다가오는 라엘.

포션 덕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피가 난다고 하는 것 하며 상처가 크다고 하는 것을 보니 여러모로 좋지 않은 듯하다.

라엘은 약초상에서 받았다고 하는 약재를 작은 천 쪼가리에 묻히고는 상처 위에 덮었다. 그리고는 비교적 깨끗한 자신의 내의를 찢어 붕대 대용으로 머리에 감아 주는 데 그 손길이 능숙하다.

"일단 아쉬운 대로 조처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제대로 치료받을 필요는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 의원을, 아니 사제를 불러서 치료를…."

그렇게 하리와 라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려던 차 말발굽 소리와 함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건장한 덩치에 콧수염이 멋진 경비대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물건들을 박살 나 있고, 애새끼 두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데다 바닥은 피로 얼룩져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 너희들이 한 거야?'일 테지.

뒤에 있는 경비대원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으니 확실하다.

유준상이 이야기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소매치기범을 잡는 과정에서 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성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고요."

"습격받았다라…. 신분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메리가 당황한다.

유준상이 그녀의 지갑을 건네주니 감사와 함께 안심한다.

유준상과 메리의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대는 놀라움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팔롱드가의 손님과 칼트슈베르트가의 사용인이셨군요. 느닷없는 소매치기와 습격에 깜짝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소홀한 치안 관리로 인한 저희의 부주의함 때문이겠죠.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태세 전환이 빠른 경비조장이었다.

"이해는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순찰한다고 한들 사각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

"그 넓은 도량에 감사를 표합니다. 여러분들의 이해와 아량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철저히 순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저기 쓰러져 있는 두 소매치기범을 챙기는 경비대.

"부디 게네호픈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인연이 된다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말고삐를 돌렸다.

"저기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닌지 떠나려는 그들을 유준상이 붙잡았다.

경비조장이 고개를 돌려 유준상을 바라본다.

"혹시 문제가 더 남아 있는 것입니까? 뒷수습은 곧 병사들이 와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는 않으셔도…."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궁금한 게 있어서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비조장.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절 습격한 이의 인상착의는 필요 없으십니까? 생김새라든가, 말투라든가, 특징이라든가. 사람의 목숨을 노린 녀석이었는데."

"...."

경비 조장이 빤히 유준상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다.

그러나 곧 면전 위로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이야기한다.

"하하.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지 기본적인 걸 잊어버리는군요. 그래서 인상착의가 어떤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흑발에 어두운 갈색 눈동자. 저와 비슷한 체고에 마른 체형."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쪽과 완전 판박이처럼 들립니다만?"

"예. 저랑 비슷했습니다. 그러니 더욱 쉽게 찾으실 수 있으시겠죠."

경비 조장이 몸을 돌렸다.

"이른 시일 내로 결과를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퍽이나.

질질 끌다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이면서.

유준상이 물었다.

"그쪽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그딴 것을 왜 묻느냐는 눈치.

그러나 대답하지 않아서야 쓸데없는 오해만 살 뿐이다.

"제 3경비대의 조장 '귄터'라고 합니다."

"귄터…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그럼…."

유유히 멀어지는 귄터와 경비대.

유준상은 떠나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다.

"라엘, 메리. 뒤를 부탁할게요."

"아, 네! 걱정하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일어나셨을 때 신경 쓰실 일이 없도록 완전무결하게 수습해 놓겠습니다."

그것참 안심되네.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지만, 이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유준상은 눈을 감았다.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그의 정신이 암전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마력 회로를 개방하였습니다.]

[히든 업적 '남들과는 다르게'를 달성.]

[클래스 '마술사'의 획득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1/3)]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 * *

게네호픈의 서부.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에 도착한 도적은 허리춤의 가방에서 회복 포션을 꺼냈다.

깊은 상처가 나 있는 정강이 위로 포션을 부었다. 극심한 열통과 함께 수증기가 인다.

"빌어먹을…!"

도적 클래스의 램페러 오승민, 이곳에선 '베르디'로 불리는 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램페이지 스톰의 세상에 떨어지고 난 후 이보다 더한 치욕을 겪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름 쏠쏠한 사업이었는데, 빌어먹을 뉴비 새끼 한 마리가 깽판을 쳐 놓은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상처까지 남겼다.

'튜토리얼도 안 끝낸 녀석에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단순히 튜토리얼만 안 끝낸 게 아니다.

마력의 사용법도 모르는 데다 눈깔부터 맹한 것이 애초에 램페이지 스톰을 해 본 적 없는 문외한이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다.

램페러가 아닌 일반인이 램페이지 스톰에 들어오는 경우가.

하지만 그 대부분이 튜토리얼을 채 끝내지 못하고 죽었고,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램페러에게 뒤통수를 맞고 죽는다.

그렇기에 문외한 중 살아남는 놈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인데.

'그러고 보니 그 새끼, 빌어먹을 정도로 운이 좋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스타팅포인트가 잘 떠서 귀족가랑 연을 맺었음이 틀림없다.

애초에 상인도 아니면서 게네호픈에 올 수 있는 방법은 귀족을 통해서 밖에 없었으니까.

자신은 조그마한 마을에서 도마뱀이나 사냥하면서 겨우겨우 성장했는데, 놈은 귀족가의 지원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 따윈 해 본 적도 없었을 테지.

그렇기에 이번에 죽였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드는 오승민이었다.

"제기랄. 겁나게 아프네."

그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 정강이 위쪽을 강하게 묶었다.

즉발성 포션이 아니기에 치료가 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지혈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상처를 확인하고 있자니, 건물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 편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세 자루.

전부 와이어에 연결되어 있어 언제든지 변칙적인 궤도를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는 긴장하며 다가오는 이를 천천히 기다렸다.

휘익―!

방문자가 모습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나이프.

그러나 그것이 방문자의 몸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익히 아는 얼굴에 나이프가 중간에서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인사가 성대하군, 베르디."

"다음에는 성대하다 못해 영광으로 여기도록 해 줄까? 눈알 하나 없어지면 딱일 것 같은데 말이야."

건장한 덩치에 잘 다듬은 콧수염.

제 3경비대의 조장이자, 오승민의 편의를 봐주고 있던 '귄터'였다.

"네가 중간에 난입하는 일만 없었어도 그 새끼의 멱을 따는 거였어."

"그게 최대한 봐준 거야. 그렇게나 시간을 끌어 줬는데 해결하지 못한 네놈 잘못이지."

일개 NPC에 불과한 새끼가.

귀족가의 서자여서 경비 조장이나 처하는 주제에 꼴에 귀족 출신이라고 뻗대는 놈이다.

툭 치면 죽을 놈이.

귄터는 자신을 노려보는 오승민을 무시하고 말했다.

"상처는 어떻지? 많이 심각한가."

"보면 몰라? 회복까지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필요하다라…. 그럼 다음 의뢰는 못 하겠군."

"다음 의뢰? 뭔데."

"지난번 일에 연장선이다. 의뢰주님께서 네 일 처리 방식이 꽤 마음에 드시는지, 널 콕 집어 지명하셨더라고."

지난번에 한 일이라면 멍청한 귀족 녀석들 몇몇을 협박, 겁탈하는 일이었다.

나름 재미도 볼 수 있으면서 꽤 액수가 많아 만족했던 일.

덕분에 그 돈으로 일주일간 유흥 지구에서 펑펑 돈을 써 가며 놀았던 오승민이었다.

"뭐야. 그 일이었어? 그거면 당연히 콜이지."

"부상이 심한 거 아니었나?"

"돈 좀 쓰면 돼. 이참에 비싼 포션 몇 개 쟁여 놓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의뢰 끝나면 금화 다발이 쏟아질 거 아니야."

귄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의뢰를 받으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수수료도 짭짤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다른 귀족들을 견제할 수도 있고, 잘만하면 가문 내 자신의 지위가 상승할지도 몰랐으니 더할 나위 없는 셈.

"그래서 타깃은?"

"뭐 여러 귀족이지. 그중 대표적인 가문이라고 한다면…."

귄터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확인했다.

그의 비열한 입꼬리가 한층 더 비열해졌다.

"칼트슈베르트 가문이군."

 27. 멋대로 죽게 놔둘까 보냐 (1)

입안이 얼얼하다.

얼마나 얼얼한지, 혀가 자신의 혀가 아닌 것을 넘어 혀만 남한테 원격조종 당하는 기분이다.

도적 플레이어에게 습격을 당한 지 사흘이 넘은 지금, 머리에 나 있던 상처도 전부 아물고 날뛰던 신경계도 어느 정도 진정했지만, 혀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것 때문이었다.

형광빛을 발하는 저 걸쭉한 액체.

유준상은 자신의 침대 옆 선반에 놓여 있는 액체를 보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집사의 발 냄새를 맡은 고양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우욱―!"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구토감이 치미는 액체다.

라엘이 약초상에게서 얻은 귀한 약재들로 만들어 준 포션이었는데, 맛도 향도 어찌나 문제가 많은지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만다.

눈을 뜨면 느껴지는 혀의 얼얼함이 저 끔찍한 포션의 파괴력을 입증했다.

괜히 던컨과 팔롱드가의 병사들이 포션을 보고 질겁했던 것이 아니다.

그에 반해 효능만큼은 뛰어나 일주일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흘이 지난 지금 큰 문제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라엘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녀의 포션이 아니었으면 며칠은 더 끙끙 앓았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괜히 라엘을 추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열심히 라엘을 PR하는 우리의 수호천사.

이 정도 되면 라엘과 수호천사 간의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라엘이 조용히 수호천사에게 뒷돈을… 찔러 줄 리는 없지. 그럴 성격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라엘은 성좌에 관해서 알지도 못하는 듯하고.

라엘과 수호천사의 관계에 대해선 나름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딱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사항은 많았으니.

지금 당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라면….

유준상은 미루어 왔던 알림창을 띄웠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마력 회로를 개방하였습니다.]

[히든 업적 '남들과는 다르게'를 달성.]

[클래스 '마술사'의 획득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1/3)]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추가 보상을 알려 오는 '남들과는 다르게'라는 명칭을 가진 히든 업적.

보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든다.

현대에선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음에도 간신히 평균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는데.

그저 살아남기 위해 열심일 뿐이었는데 이런 업적이 달성되다니.

묘하게 가슴이 설렌다.

자신이 이곳에선 특별한 인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곳에서 계속해 살아간다면 게임 속 문법대로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문득 그런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유준상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그저 몇 달도 안 되는 시간이다.

현대에서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을 똑같은 저울에 올리기엔 그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설령 같은 저울에 올려 비교할 수 있다 한들,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낸 세상을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성장하고 퀘스트를 클리어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테지.

그를 위한 보상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추가 보상을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하겠다 생각하니 이번에도 역시나 다섯 장의 카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천천히 회전하는 고동색 카드와 은색 카드들.

무엇을 골라야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이번에도 역시나 수호천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이번 보상은 전부 쓸 만하다고 합니다.]

[은색 카드 2개는 '아티팩트'고 고동색 카드 3개는 '스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시라도 특별히 원하는 게 있다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범위에서 구해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만큼 수호천사가 든든해 보이는 때가 없다.

아무리 다 쓸 만하다고는 해도 상황이나 육성 방향에 따라선 우열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특히 이렇게 운에 따른 요소가 심한 가챠에선 함정을 피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 당장 필요한 아이템이나 스킬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이나 활, 또는 검을 요구해도 되겠지만, 무기라면 칼트슈베르트가나 팔롱드가를 통해서도 조달할 수 있다.

당장 도적 플레이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단검만 해도 팔롱드가에서 받은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스킬을 요구하자니, 램페이지 스톰에서 쓰이는 스킬을 모르고.

그간 게임 짬밥을 봤을 때 대충 있을 것 같은 스킬들이 몇 개 생각나긴 했지만, 그러한 스킬들이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

"...."

이럴 땐 그냥 운에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이번에는 제가 알아서 뽑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냐고 묻습니다. 괜히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고를까 봐 걱정이라고 합니다. 마음 같아선 무슨 아이템과 스킬인지 알려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게 아쉽다고 합니다.]

괜찮을 거다.

적어도 쓸모없는 보상이 나오진 않을 테니.

애초에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은 처음 행하는 일을 할 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괏값이 조정된다.

'흠…. 뭘 고르지.'

유준상은 자신의 눈앞을 떠다니는 카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은색 카드가 아티팩트, 고동색 카드가 스킬.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티팩트보단 역시, 스킬이다.

설령 아무리 등급이 낮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활용할 여지가 있을 테고, 다른 스킬들과의 시너지 또한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고동색 카드를 집었다.

[그것을 고를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스킬 등급을 한 단계 더 상승시켜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메시지창이 떠오르기 무섭게 손에 쥔 고동색 카드가 은빛을 발하더니 빛 가루로 산화한다.

곧이어 유준상의 몸에 스며드는 빛 가루.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의 권능으로 스킬 '마력 인지'가 '마력 감응'으로 바뀝니다.]

[축하합니다!]

[스킬 '마력 감응 lv. 1'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마력 감응 lv. 1]

[효과: 활성화 시 마력 인지능력이 향상하며 마력을 다루기 한결 쉬워집니다. 마술의 사용 시 소비되는 마력을 1%(lv. 1) 줄여 줍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꽤 쓸 만해 보이는 스킬의 설명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라드에게서 받은 '충성을 증명하는 단검'의 특성과 동일한 이름의 스킬로 단검과 비슷하게 마력을 사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스킬이었다.

활성화 시에만 발휘되는 효과였지만, 스킬의 소비 마력을 줄여 주는 효과는 고유능력 '멈추지 않는 순환'과 매우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1,000%의 마력 회복력에 마력 소비량 감소까지 있다면 어지간히도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마력이 모자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단검을 제외한다면 지금 그가 마력을 활용할 데가 딱히 없다는 것.

'그 도적 녀석은 마력으로 신체 강화도 하고 그러던데….'

마력 소비가 상당한지 신체 강화를 오래 지속하진 못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마력으로 강화한 그 움직임은 쉽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보자의 직감과 초심자의 행운이 전투를 보조했음에도 마력을 담은 발차기를 두 번 모두 허용했으니, 말 다했지.

마력으로 강화된 단검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마력을 사용하고 못 하고의 차이는 명확했다.

"...."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마력의 사용법을 배워 놓는 것이 좋아 보인다.

문제는 누구한테 배워야 하느냐인데….

아는 것이 없다.

열심히 도시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메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일어나계셨군요, 준상 님. 저는 주무시고 계신 줄 알고…."

"괜찮아. 이제 막 일어난 참이니까."

별것도 아닌 것에 깍듯이 사죄를 표하는 메리였다.

하리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은 편하게 대해도 좋을 텐데.

"몸은 조금 어떠신지요."

"많이 좋아졌어. 저기 저 포션 덕분이지."

선반 위의 라엘의 포션을 가리키니 메리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한차례 시음했었던 메리였는데, 아주 살짝 혀만 가져다 댔을 뿐임에도 양잿물을 들이마신 것처럼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었다.

그래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 용케 유준상의 식탁에 저 흉흉한 포션을 올리는 걸 허락한 그녀였다.

"역시 입에 쓴 것이 몸에 좋은 것이군요. 옛 성인들의 말씀 중 허투루 들을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쓴 정도가 아니건만, 본인이 먹지 않는다고 아무 말이나 내뱉다니.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 왔네."

"무언가 궁금한 게 있으신지요? 혹시, 소매치기 건의 행정 처리를 궁금해하시는 건가요?"

그것 또한 궁금한 사항이긴 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사를 무마할 게 뻔했으니까.

당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혹시 마력 사용자와 만나 볼 수 있을까 싶은데."

"마력 사용자 말씀이십니까? 기사나 마술사와 같은…?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조금 마력을 다루는 데 참고하고 싶어서."

메리의 눈이 커졌다.

그라시아 제국에서 마력이란 기사와 마술사들의 전유물.

일개 여행자가 그러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니.

막시밀리안 공자가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들라고 명했던 것도 그렇고, 며칠 전 소매치기 사건 때 자신의 지갑을 찾아 준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시 문제 될 게 있나?"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메리는 표정을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게네호픈은 기본적으로 귀족들을 위한 유흥 도시. 마술사는 지극히 소수지만, 귀족의 수만큼이나 기사의 수는 상당합니다. 칼트슈베르트 가문에 우호적인 기사에게 사사를 칭하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겠지요."

하리에게 듣기론 기사에게 사사를 청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권세가이고 볼 일인가.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든다.

"우호적인 기사에게 사사를 청해야 한다니. 게네호픈에 주둔하는 칼트슈베르트 가문 소속 기사는 없는 건가?"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는다.

당장 하르도만 해도 자신의 기사들을 전부 대동하고선 게네호픈으로 떠났었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코패스 도적 플레이어 같은 녀석이 있는 곳인데, 기사 하나 없다니.

"막시밀리안 공자님께서 지난해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본영지로 보내셨습니다. 일전 율리아 님이 방문하셨던 것을 기점으로 남아 있던 모든 기사들이 본영지로 돌아갔지요."

"그러면 누가 호위를 하는 거지?"

"저희 시종들을 비롯한 칼트슈베르트가의 병사들 가운데 전투에 뛰어난 인원들을 선별하여 호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호위 치곤 부족할 것 같은데."

"예. 저희들의 부족한 실력을 눈치채고 실제로 몇 차례 암습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어쩐지.

메리가 그토록이나 쌍심지를 켜고 안전과 보안에 몰두했던 이유가 있었다.

"막시밀리안 공자님께선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지? 아무리 못해도 기사 한두 명은 남길 수 있는 것 아닌가."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없는 이라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큽니다."

"...."

술에 절어 있는 것도 그렇고, 막내인 율리아의 업무를 대신 수행해 주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사정이 많은 듯한 막시밀리안이다.

"이야기 고마워.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사항이었는데."

"아닙니다. 준상 님은 막시밀리안 공자님이 직접 모셔 온 손님. 그 말인즉 공자님께선 준상 님께 나름 기대를 하고 계신다는 말이겠죠. 공자님이 그러시다면 시종인 저 또한 준상 님께 기대를 품을 뿐인 이야기입니다."

무슨 기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가벼운 기대는 아닐 테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 칼트슈베르트 가문에 우호적인 마력 사용자를 모색해 사사를 요청해 보겠습니다. 혹시 특별히 원하는 조건이 있으신가요. 일정 경지라든지, 사사 경험이 있다든지."

"사사 경험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없어. 부탁할게."

"부탁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사용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사항이니.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최대한 빠를 필요가 있을까.

기사들이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화는 끝난 줄 알았는데.

무언가 용건이 있는지 말을 잇는 메리였다.

"준상 님께서 회복하시느라 잠드셨던 며칠 사이, 막시밀리안 공자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준상 님을 찾으시더군요."

이곳으로 초대한 건 다름 아닌 막시밀리안이었다.

기운을 회복했다면 저택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환영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환영 인사인가. 나는 언제든지 상관없어. 적당한 시간을 이야기해 줘. 맞추도록 할 테니까."

"안 그래도 막시밀리안 공자님께서 준상 님에게 당장이라도 술집을 소개해 주고 싶다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오늘 저녁은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라 하시더군요."

"오늘 저녁?"

팔롱드가를 떠날 때도 느꼈던 거였지만, 계획과 실행 사이에 틈이 없다.

뭐가 이렇게 급한 건지.

"힘드시다면 공자님께 거절을…."

"아니야. 괜찮아. 격하게 움직이는 것만 아니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 술집 정도야 문제없겠지."

괜히 술 때문에 회복이 지연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 일지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망막에 맺힌 알림창이 제안을 거절하지 말라 알려오고 있었으니.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 5―1: 유흥 지구]

[설명: 막시밀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유흥 지구로 향하세요. 유흥 지구에서 행할 당신의 선택과 판단에 새로운 퀘스트가 열릴지도 모릅니다.]

[보상: 500 GP, 클래스 선택권 (1/3)]

[해당 퀘스트 거절 시 '추모'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28. 멋대로 죽게 놔둘까 보냐 (2)

게네호픈의 동쪽에 위치한 유흥 지구는 언제나 빛무리에 휩싸여 있는 곳이다.

마정석을 담은 가로등 전구는 어둠이 드리우기 무섭게 거리를 밝히고, 고급스러운 기법으로 마감 처리된 수많은 건물 창가에선 따스한 불빛이 잠에서 깨어났다 손을 흔든다.

그라시아 제국의 모든 도시가 이렇게나 밝은 저녁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마석을 이용한 새로운 발전(發電)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다고는 하나, 현대와 같은 대량 전력 공급 시스템이 들어서기 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환한 빛이 게네호픈 유흥 지구 일대에 가득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곳이 귀족들의 향락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빛이 주는 그 당당함과 떳떳함이 그들에게 향락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알려 주고, 그 빛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에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이라 면죄부를 선사한다.

밝기에.

눈부시기에.

오히려 더욱더 거침없이 욕망을 풀어헤치고 기꺼워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 불빛 앞에선 똑같다고.

괜히 게네호픈을 귀족들의 유흥 도시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와, 대단하네요…."

"밤이 이렇게 밝을 수 있다니, 14년을 살면서 처음 깨달은 사실입니다."

"나름대로 도시 경험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건 나도 조금 놀랍군."

호위 겸 말을 타고 오던 라엘과 하리 그리고 던컨.

그들은 자신들이 호위 임무 중이란 사실도 잊은 채 눈이 휘둥그레져 주변을 돌아본다.

로리엔 지방은 해가 지면 그대로 어둠을 받아들여야 했으니, 이곳과 같이 강제로 낮을 만들어 버리는 광경은 그들에게 있어 마법과 다름없었다.

"...."

유흥 지구의 빛무리를 보며 감탄한 것은 유준상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빛이 가득했던 서울의 밤하늘과 비교하면 게네호픈의 밝음은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유흥 지구를 제외한 모든 구역이 어둠에 잠기고 오로지 이곳만이 빛을 발하니, 그 빛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특별함이 느껴진다.

"놀라운가."

마차 안, 그를 마주 보고 앉은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가 물었다.

"아, 네. 아무래도 이러한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유준상의 말에 대답한 건 막시밀리안의 옆에 앉은 여인이었다.

"호호. 이참에 실컷 구경하다가 가세요. 눈치 보지 마시고 저희 그이한테 필요한 거 다 말씀하시고요."

안나 칼트슈베르트.

막시밀리안의 아내.

유준상과 같은 흑발에 어두운 갈색 눈동자지만, 막시밀리안과 비슷한 슬라브계 특유의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이었다.

척 보기에 슬라브―아시아 혼혈이었는데, 흔치 않은 외모에 쉽게 이목이 끌린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어."

"알아서 하긴요. 매번 방문하는 사람마다 쌀쌀맞게 내치잖아요. 그런 와중에 얼마만의 손님인지. 저는 당신이 인간 혐오증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니까요?"

금실이 좋은지 막시밀리안에게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안나 칼트슈베르트.

서글서글하게 말하는 것이 성격이 참 좋아 보인다.

그런 그녀를 닮아서인지 지금 유준상의 옆에 앉아 있는 작은 꼬맹이, 드미트리 칼트슈베르트 또한 실로 살갑게 유준상을 대했다.

"아저씨는 어디서 오셨나요?"

"나…? 음… 저기 먼 곳에서."

"저희 어머니처럼 북쪽에서 오셨나요?"

"그렇지…?"

"그럼 어떤 민족 출신이신가요? 어머니께서 말씀하기로는 북쪽에는 수많은 민족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유카기르' 민족 출신이시고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질문을 하는 드미트리다.

적당히 넘어가면 안 되려나.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

안나 칼트슈베르트가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표하고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저도 궁금하네요. 이 도시에서 여러 이방인을 보았지만, 북방 민족 출신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어느 부족 출신이신가요? 아뇨, 제가 맞춰 봐도 될까요. 반듯하고 올곧은 인상을 보아하니 극북지방 쪽은 아닐 것 같고. 동방의 민족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그럼… '카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여기서 '예'라고 대답하자니 더 깊게 이것저것 물어 올까 봐 걱정되고 '아니오'라고 대답하자니 어느 민족 출신이라 이야기할지 고민이다.

여러모로 곤란해하자니, 막시밀리안이 이야기했다.

"안나,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아. 유카기르 민족과 적대적인 민족 출신이면 어찌하려고. 괜히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말게."

그 말에 안나가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렇군요. 제가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아, 자연스레 다른 분들도 별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네요. 누군가에겐 저희 부족이 가족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죄송합니다, 준상 씨. 생각이 깊지 못한 저를 나무라 주세요."

그녀가 고개를 숙여 사죄를 표하자 옆에 있던 드미트리도 마찬가지로 함께 고개를 숙인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사과할 일인가.

부담스럽다. 꽤 많이.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유준상, 따라오게."

"당신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게 얼마만의 가족 외출인데 꼭 이렇게 따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나요!"

안나가 이런저런 잔소리 하며 마차에서 내리려는 막시밀리안을 막아 보지만, 막시밀리안은 꿋꿋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미안하네. 안나가 원래 사람을 사귀는 데 거리낌이 없어. 초목을 누비며 거침없이 지냈던 탓에 사람과 거리를 재는 데 서툴지.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여러모로 신선하고 좋았는데요."

유준상은 고개를 돌려 마차 안을 확인했다.

유준상과 막시밀리안을 대신해 들어간 라엘과 하리가 안나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나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여러 가지로 라엘과 잘 맞는 듯하다.

신분의 벽이 두터운 그라시아 제국인 만큼 서민인 라엘과 벽을 세울지 몰라 걱정했는데, 북방 민족 출신인 만큼 그런 일은 없었다.

"좋았다니 다행이군. 안나도 드미트리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지 오래됐거든. 어지간히도 답답했었을 테지."

"다양한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만큼 접점은 많았을 텐데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다가오는 이들 전부 다 내치니 자연스레 안나도 드미트리도 다른 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적어진 거지."

막시밀리안은 그리 말하며 가슴 안쪽에 있던 포켓 위스키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더니 유준상에게 건넨다.

"마시겠나."

"괜찮습니다. 멋진 술집에서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거든요."

"흠…. 이것도 나름 괜찮은 술인데 말이야. 미리 몸을 달궈 놔야 즐거운 마음으로 술집을 즐길 수 있거늘."

막시밀리안은 아쉽다는 듯 입을 오므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마셨습니까?"

"15살 때부터니까. 11년 전이군."

어쩐지 젊다 했더니만.

동갑이었나.

"처음 술을 마신 날을 묻는 게 아니라 술독에 빠진 날을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의외라는 듯 유준상을 바라본다.

"그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말이야."

유준상의 시선이 마차 안에 있는 안나와 드미트리에게 향한다.

저들을 보아하니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유준상이었다.

"그냥 걱정되어서 해 본 말입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군.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즐거운 날 그런 고민을 해서야 쓰나."

즐거운 날인가.

막시밀리안에겐 그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날일 것 같은데.

그가 어째서 즐거운 날이라고 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도착했네. 여기가 내가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던 술집이네."

"...."

"...."

"...."

"...."

유준상을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며 술집을 쳐다보았다.

말의 네 다리가 멈추어선 곳은 오색 빛이 현란한 어느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이 얼마나 큰지 건물 내부에 운동장이 들어갈 것 같은 크기에 높이도 어지간한 빌라만큼 높다.

도대체 어떻게 지었나 싶은 건축물.

유준상이 의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여기가 술집 맞나요…? 아무리 봐도 카지노처럼 보이는데요…?"

"술을 팔면 다 술집 아니겠나. 술맛이 기가 막히는 곳이니 걱정하지 말게."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그렇게 따지면 도박장도 창관도 극장도 전부 다 술집이다.

여기 유흥 지구에 술을 팔지 않는 곳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원래 돈을 따고 마시는 술은 알코올 원액을 마셔도 단 법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설마 이런 곳에 아내분과 자식분을 함께하려는 건 아니시겠죠?"

"걱정이 많군. 염려 붙들어 매게, 내부엔 처자식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반대편에서 가족을 동반해 입장하는 사람들을 보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유준상이었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막시밀리안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유준상이 따랐다.

내부의 찬란한 조명이 그들을 환영했다.

* * *

그들 무리가 들어선 건물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샹들리에에 걸린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들이 일대에 빛을 흩뿌리고, 코팅된 대리석 바닥은 마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감촉이 부드럽다.

걷고 서는 데 느껴지는 발의 피로감이 기존과 차원을 달리한다.

드넓은 공간에는 카지노답게 각종 게임을 위한 테이블과 개인룸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건 귀족이거나 돈 많은 상인뿐이라 크게 신분에 우열을 두는 공간 구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보다는 모두가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구조로. 2층과 3층에 쇼핑을 할 수 있는 옷 가게나 다과점 등, 귀부인과 아이들을 위한 공간 또한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원할 때면 언제든지 난간에서 1층을 구경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카지노였다.

아니, 애초에 이쯤 되면 카지노라기보단 카지노 겸 복합 상가라 봐도 무방했다.

당연하게도 라엘과 하리 그리고 던컨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제가 지금 별천지에 있는 건 아니죠?"

"놀랍군…."

본래 너무나 놀라우면 오히려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법이라고 그랬나.

지금 유준상이 정확히 그러했다.

현대에서나 보일법한 건물이 이렇게나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니.

이쯤 되면 어떤 마술을 쓰길래 이러한 건축물을 올릴 수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막시밀리안이 메리에게 이야기했다.

"안나와 드미트리의 호위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메리가 병사들과 함께 안나와 드미트리를 호위하며 2층으로 올라간다.

막시밀리안에게 적당히 즐기고 올라오라 이야기하는 안나는 말이 잘 통했는지 라엘도 데려간다.

"어… 그러니까 저는… 준상 님을…."

"괜찮으니까 안나와 함께 가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아, 네…."

유준상이 허락하니 마지못해 안나와 함께 올라가는 라엘.

주변에 남은 건 하리와 던컨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호위는 충분했다.

애초에 이렇게나 귀족들이 많은데 습격해 오는 바보가 있을까.

막시밀리안과 구석에 위치한 펍으로 이동한 유준상은 종업원에게서 술을 받았다.

밝은 도박장과 다르게 구석이라 그런지 펍의 분위기가 조금 어둡다.

사람도 많지 않은 데다 어두운 분위기가 오히려 적당한 분위기를 조성해 술 마시는데 운치가 있다.

그는 술을 한 잔 마시더니 저 멀리 도박에 한창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여기가 내가 좋아하는 술집이야."

"술집인 것 치고는 상당히 복잡하고 크지만요."

"아니, 내 말은 여기 이 펍(pub) 말이네."

여기 이곳은 썩 좋은 펍은 아니다.

구석진 데다 자리가 좁고 파는 술도 고급 증류주가 아닌 일반 서민들이나 마시는 맥주다.

종업원이 돌아다니며 귀족들에게 술을 제공해 주는 덕에, 조금 특이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굳이 이 펍까지 직접 발걸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곳이 좋다고 하다니.

"취향이 특이하시군요."

"여기서 저기 저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안도감이 들거든."

그가 손가락으로 돈을 잃어 허탈해하는 표정의 인물을 가리켰다.

나름 부유한 귀족인지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고급스러운 인물이었다.

"승부에서 졌다는 분함인지, 돈을 잃었다는 상실감인지는 몰라.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인간들을 보자면 적어도 나는 저렇게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군."

"돈을 따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반대로 불안하신가요."

막시밀리안은 히죽 웃으며 추가로 맥주를 주문했다.

유준상은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는데 벌써 한 잔을 통째로 비운 그였다.

"오히려 기대돼. 여기에 오는 인간들은 돈을 따고 집에 가는 법이 없거든. 번 돈 그대로 도박에 꼬라박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저기 저 인물과 같은 표정을 짓거나 더더욱 절망적인 표정을 짓거나. 그러하니 이보다 더할 만한 안주가 따로 있겠나."

"악취미시군요."

"자네도 내 처지가 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이렇게라도 감정을 달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거든."

확실히 막시밀리안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정 때문에 이렇게 술집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이라 확신하는 유준상이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자네 도박 잘하나."

"언제는 술 잘 마시냐 묻지 않았습니까?"

"지금 보면 술 못 마시는 건 금방 알 수 있지."

그의 시선이 유준상에 손에 들려 있는 맥주잔로 향했다.

그의 맥주잔엔 여전히 맥주가 남아 있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술 잘 마시는 인간 치고 못미더운 인간이 없었거든. 정확히는 많이 들이부었음에도 맨정신인 인간이라 해야겠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술을 잘 받건 잘 못 받건 간에 술을 마시고 맨정신을 유지하는 건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하다 볼 수 있었으니까.

엄격할수록 책임감이 강한 것이 보통이었고.

"근데 술 자체를 못 마시니 별수 있나. 다른 것을 확인해 보는 수밖에."

"그것이 도박입니까?"

"그래. 자네의 운이라도 확인해 봐야겠거든."

"제가 공자님의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요?"

그가 유준상을 보더니 싱긋 웃는다.

"죽음이 가까워 오면 마지막 칩을 걸고 도박하고 싶은 법이거든."

 29. 멋대로 죽게 놔둘까 보냐 (3)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유준상은 막시밀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은 두 잔째 맥주를 들이켜고 있음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냥 말이 그런 거 아니겠나. 하루하루 이런 식으로 무료하게 살아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는 말이네."

"...."

"뭐, 너무 괘념친 말게. 그냥 자네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야. 술과 도박은 본디 세트 아니겠나."

막시밀리안이 비릿하게 웃어 보인다.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괘념치 말라니.

유준상은 오후에 보았던 퀘스트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퀘스트 거절 시 '추모'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추모.

그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경우 발생하는 또 다른 퀘스트.

누굴 추모하는지는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분명 눈앞의 이 남자,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겠지.

"썩 반가운 이유는 아니군요."

"미안하군. 괜한 소리를 해서. 그래서 할 건가?"

그가 도박이 펼쳐지고 있는 1층 강당을 가리킨다.

기다렸다는 듯 맑은 알림음이 달팽이관을 자극한다.

띠링―!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튜토리얼 서브퀘스트: 도박으로 인하여]

[설명: 막시밀리안이 도박을 통해 당신의 운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도박에서 일정 이상의 금액을 획득하여 막시밀리안에게 당신의 행운을 증명하세요.]

[보상: 2,000 GP]

[실패 시: 막시밀리안의 실망]

[해당 퀘스트는 언제든지 중간에 그만둘 수 있습니다.]

[결과는 앞으로의 퀘스트 내용과 난이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박에서 운이 따름을 증명하고 그의 신뢰를 얻으라는 내용의 퀘스트.

어려운 퀘스트는 아니다.

초심자의 행운이 있는 유준상이니, 부정행위가 이루어지거나 어지간히 운이 좋은 상대만 아니라면 쉽게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저 도박해서 돈을 얻는 것만으로 GP까지 획득할 수 있으니, 사실상 거저먹는 퀘스트였다.

이 퀘스트에, 그리고 막시밀리안의 태도에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유준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리, 10게일만 칩으로 교환해 올래?"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유준상이 도박에 나선다는 사실에 흥미가 동하는지 하리가 들뜬 발걸음으로 달려간다.

반대로 던컨은 썩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카지노에 왔다고 굳이 도박을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나는 괜히 돈만 잃을까 봐 걱정이군."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저기 뒤에 있는 공자님께서 내가 주사위를 던지는 꼴을 보고 싶다 하더라고."

던컨이 막시밀리안을 슬쩍 곁눈질한다.

막시밀리안 또한 하리와 마찬가지로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넬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닐 테지."

"그래. 그러니까 적당히 어울려 주려고."

벌써 교환을 끝마쳤는지 하리가 칩이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가지고 온다.

1게일은 램페이지 대륙 서민들의 평균 한 달 생활비.

10게일을 칩으로 교환했으니, 사실상 10개월 치의 생활비가 이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귀족들 입장에선 그저 하루 이틀 노는 데 쓰이는 비용밖에 안 되지만, 이것으로 못해도 100배까지 돈을 불릴 생각인 유준상이었다.

"계속해서 막시밀리안 공자의 호위를 부탁할게."

"지루한 역할은 내 몫이군."

"지루한 역할이 아니라 중요한 역할이야. 저렇게 삐쩍 마른 공자를 하리보고 지키게 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혹시라도 소란이 일면 막시밀리안 공자가 아니라 라엘 쪽에 합류 부탁할게."

그 이야기가 의외였는지 던컨이 의아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는 그였다.

"하리, 가자."

"예."

유준상은 하리와 함께 카지노 내부를 훑어보았다.

룰렛, 바카라, 블랙잭, 홀덤 등등.

슬롯머신만 없다 할 뿐, 현대에서 보았던 도박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도박에 그다지 소질도, 접할 기회조차 없던 유준상이었지만 규칙을 모를 정도로 까막눈은 아니었다.

설령 모른다고 할지라도 순수하게 운만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종목만을 고르면 상관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도박은 다름 아닌 룰렛이었다.

"오…! 재미있어 보입니다!"

하리가 테이블 위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룰렛을 보며 눈을 빛낸다.

휠 위에서 회전하는 공 소리와 다분히 베팅 판에 올라가는 칩들의 마찰음.

0부터 36까지 총 37개의 숫자가 적힌 룰렛이 빠르게 회전하며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힌다.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초보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도박.

회전력을 잃은 공이 중력에 이끌려 천천히 룰렛의 중심으로 내려오고 마침내 숫자 중 하나에서 멈추었다.

"안 돼! 조금만 더 옆으로 갔었으면 따는 거였는데!"

"하하! 그래서 안전하게 배팅해야지!"

"제기랄! 이번엔 홀수에다 배팅한다!"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들.

그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이 언제나 기품 넘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귀족들인지 의심이 든다.

유준상은 주머니에서 칩을 다섯 개 꺼냈다.

"하리, 좋아하는 숫자가 있나?"

"좋아하는 숫자 말입니까? 음…."

하리가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

"18이 좋겠습니다."

18?

묘한 숫자를 고르는 하리였다.

현대였다면 18을 고른 시점에서 욕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여기는 현대가 아니지 않은가.

램페이지 스톰에서 18을 쓰는 욕지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괜히 18을 고른 이유가 궁금해져 물었다.

"최연소 기사가 될 수 있는 나이가 18살입니다. 저 불초 하리! 정진하여 18살에 기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4년밖에 안 남았는데.

과연 그 기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듣자 하니 기사는 전투면 전투, 예법이면 예법.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그러니.

힘든 길을 가겠구만.

유준상은 하리의 앞날을 응원하며 18에 칩 10개를 전부 걸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휘파람을 분다.

"와우. 젊은 친구가 담이 크구먼. 숫자 하나에 칩을 10개나 걸다니 말이야."

"객기지 객기. 이런 호구들이 있어야 딜러들도 돈을 벌 거 아닌가?"

사람들이 유준상의 선택을 비웃지만, 유준상은 그저 편안한 미소를 띠며 쇠구슬이 룰렛 위를 회전하는 걸 지켜보았다.

"준상 님, 될까요…?"

하리가 회전하는 쇠구슬을 보며 숨을 삼킨다.

"너무 기대하지 마.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래도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되면 얼마나 받는 겁니까…? 10배…?"

고작 10배라니.

"36배. 따면 칩을 한 번에 360개를 얻는 거야."

그 말에 입을 떡하니 벌리는 하리.

이 녀석 오늘 저녁에만 턱을 몇 번 벌리는 건지. 이러다가 턱관절 빠지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진짜 됐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됐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엄청 기대하는 하리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습게 쳐다본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구먼."

"바랄 걸 바라야지. 시종 수준을 보아하니 웃대가리도 수준을 알 만하군."

하리가 기분 나빠하는 티를 풀풀 내지만, 일개 페이지이자 시종인 그가 귀족을 상대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쇠구슬이 18번에서 멈춰 주길 기도하는 것밖에.

드르륵―

마침내 맹렬히 룰렛 휠을 돌던 쇠구슬의 속력이 감속하기 시작하고 천천히 중심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쇠구슬은 룰렛에 튀어나온 부분을 맞고는 그대로 숫자 칸으로 빨려 들어갔다.

"...?!"

"뭐!?"

"말도 안…."

유준상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쇠구슬이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숫자 18.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하리는 진짜로 턱이 빠진 것 같이 입을 벌렸다.

어이가 없는지 유준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딜러.

뭘 그리 어이없어할까.

지금부터 시작인데.

"하리, 뭐해. 딜러한테 칩 안 받아 오고."

"앗, 네! 지금 바로 받겠습니다!"

하리가 싱글벙글하며 딜러에게 칩을 받아 온다.

눈높이만큼 솟아오른 칩의 탑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저기…. 준상 님."

"왜."

"저도 조금만 해 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추천드린 번호로 돈을 땄으니, 그래도 제 지분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본인이 숫자를 골랐던 만큼 자신에게도 운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됐다.

이대로 돈을 따기만 했으면 교육 차원에서 좋지 않다.

룰렛이란 본래 돈을 잃게 되어 있는 구조.

도박의 쓴맛도 봐야겠지.

"10개 줄게. 알아서 배팅해."

"감사합니다! 제가 꼭 몇 배로 불려서 준상 님께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리는 얼굴 위로 웃음기를 가득 머금으며 배팅 판을 기웃거렸다.

어디에다가 배팅할지 즐거운 고민을 하는 눈치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짜증 내며 툭툭 쳐 댔음에도 마냥 좋아하는 하리였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어디에다가 걸어 볼까.'

유준상은 적당히 아무 숫자나 떠올렸다.

26.

유준상의 나이이자 막시밀리안의 나이인 26에 칩 350개를 전부 올렸다.

"저 미친놈! 또 번호 하나에 몰방한다고?!"

"초심자의 행운이 또 적용될 줄 아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없는 건 이쪽이다.

저들이 알고 있는 초심자의 행운과 유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은 질적으로 달랐다.

처음 한 행동에 유리한 판정을 주는 건 똑같지만, 이후의 선택과 결괏값에도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지금처럼 다 잃거나 다 얻거나 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미친!"

"이게 말이 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당연하게도 쇠구슬이 멈춘 숫자는 26.

350개의 칩이 그대로 36배가 되어 12,600개가 되었다.

딜러가 기존의 칩이 아닌 다른 모양의 칩을 전해 준다.

"돈으로 이 칩을 교환하는 경우는 봤어도, 이런 식으로 교환하는 것은 난생처음입니다."

기존의 칩과 달리 황금색으로 테두리가 칠해져 있는 칩.

126개를 주는 것을 보니 기존의 것보다 100배의 가치를 지닌 칩이었다.

손때가 묻지 않은 게 몇 번 사용된 적 없는 듯하다.

"저도 이렇게 딴 것은 처음이네요."

"부디 우연이길 빌겠습니다. 혹여라도 부정행위를 했다면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처벌을 피하실 순 없으실 테니까요."

협박인가.

아니었다. 그저 유준상에게 주의를 준 것뿐.

유준상은 주변으로부터 경계 가득한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들이 대부분 이곳의 종업원이나 경호원들이었는데, 옅은 마력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것이 그가 마술을 사용하나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하나 그들의 시선보다 유준상의 시선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3회 이하의 도박으로 원금의 100배 이상을 획득하셨습니다.]

[히든 업적 '노름은 도깨비 살림'을 달성.]

[클래스 '도박사'의 획득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1/2)]

[성좌 '공정함의 설계자'가 당신을 인지합니다.]

이번에도 달성되는 히든 업적.

클래스 획득 조건을 충족한 것과 더불어 성좌에게 인식됐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갈지는 알 수 없겠으나 결코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키진 않을 거다.

지난번, '밟고 올라서는 피의 여제' 때처럼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식할 뿐인 중립적인 표현이었으니.

어쩌면 '공정함의 설계자'는 주사위의 신이 아닐까?

주사위 앞에서야말로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운을 평등하게 시험받으니 말이다.

이후 유준상은 몇 차례 더 룰렛에 배팅하려 했지만, 그가 베팅하는 숫자마다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결국 제대로 된 게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딜러는 쇠구슬을 던지지 않았다.

블랙잭, 바카라로 종목을 바꾸었지만, 그 종목 또한 마찬가지.

특히 룰 자체가 홀짝에 가까운 게임인 바카라는 12연속으로 게임을 이겨 버리니, 딜러가 진지하게 이 이상 게임하지 않을 것을 권했다.

주변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며 이야기하지만 아직이다.

아직, 튜토리얼 서브퀘스트 '도박으로 인하여'가 클리어되었다는 알림창이 뜨지 않았다.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막시밀리언에게 행운을 증명하는 것.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뜻이겠지.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가 유준상에게 다가온 것은 카지노의 직원이 제공한 개인실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실로 대단하군. 고작 10게일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의 몇백 배에 가깝게 돈을 불리다니 말이야."

홀덤 테이블에 유준상을 마주 보고 앉은 막시밀리안.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막시밀리안은 카드 뭉치를 꺼냈다.

"플레이가 아주 화끈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중간중간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끝에 가선 결국 이기는 모습이 실로 감탄스러웠어."

오직 운으로만 행하는 게임은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건 실력이 가미된 게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포커 치는 모습을 보셨군요."

"그래. 나름 좋아하는 게임이거든. 안나가 막 시집왔을 때 시누이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서 내게 알려 달라 한 게임이 포커였어. 그래서 조금 구경했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묘하게 표정이 어둡다.

"어떤가. 마지막으로 나랑 한 게임 하지 않겠는가?"

그가 손에 잡힌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판돈은 뭐가 좋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따로 게임을 하자는 것을 보면 칩을 원하는 것을 절대 아닐 것 같은데요."

그는 실실 웃는 표정을 거두고는 나름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게네호픈에 있는 내 명의로 된 모든 것들을 판돈으로 걸지. 대신 자네는 내 부탁을 반드시 이행할 것을 판돈으로 걸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행하겠다고."

"...."

무엇을 부탁할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유준상은 물었다.

"무슨 부탁을 하실 생각이시죠."

"내가 죽으면 책임지고 안나와 드미트리를 북방 민족에게 데려다주게."

 30. 멋대로 죽게 놔둘까 보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