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Chereads APP
Chereads App StoreGoogle Play
Chereads

PRINCIPE108

Kakao_Cuenta_7611
--
chs / week
--
NOT RATINGS
704
Views
VIEW MORE

Chapter 1 - 001-010

001. 그저 유희일 뿐 + 마지막 황자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지금 여기 내 앞에 현현顯現하라! '스타랜턴'!"

철혈의 제국 '주노스'의 황자 '미하엘'의 손안에 작은 빛 덩어리가 피어올랐다.

반딧불이의 뒤꽁무니보다 여린 불빛. 하지만 어딘가 저 하늘의 별과도 닮은 빛.

"어머, 황자님! 너무 예뻐요!"

잔뜩 꾸민 듯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액세서리와 드레스. 그리고 낡은 천....

오늘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손수 제작한 소녀의 옷은 귀족들이 본다면 비웃음을 살 만큼 형편없다.

하지만 미하엘은 이런 옷을 입은 여성들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은 삶에 스스럼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것을 좋다 말하고, 싫은 것들을 싫다 말하는 솔직함을 미하엘은 사랑했다.

"그래, 하나 줄게. 원한다면...."

미하엘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자, 그 위로 빛 덩어리가 올라왔다. 미하엘은 곧장 그 손가락을 소녀의 쇄골 위로 가져다 댔다.

빛 덩어리는 손가락을 따라 그대로 뻗어 나가 그녀의 몸에 닿았다가, 이내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며 사라졌다.

"황자님...!"

다급한 소녀의 목소리. 그녀의 얼굴이 잔뜩 울상이 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네들이 들어 봤을 법한 마술은 '전쟁에서 쓰이는 것'들뿐이니까.

혹여라도 그 빛 덩어리가 자신 안에서 번개가 되어 요동칠까 소녀는 두려움에 떤다.

"걱정 마. 뒤돌아 봐. 뭐가 있나"

미하엘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뒤돌아보길 권유했다.

그녀의 몸을 통과해 나온 빛 덩어리. 그것은 그대로 직진해 밤의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멀어지던 빛은 몇 번 깜빡이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저 장난일 뿐이야.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다고, 이건."

미하엘은 미소를 띄워 보인다. 그제야 소녀 역시 안심한 듯 웃음을 보인다.

미하엘은 그런 표정이 나타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도 좋았잖아? 네 안에 빛 하나가 반짝였던 거라고?"

그녀의 표정이 바뀐다. 이제 소녀의 표정은 거의 '선망의 대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미하엘이 좋아하는 표정.

'의심 하나 없는 무지한 백성의 표정.'

평생을 배움이란 것을 모르기에 그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감동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그 기뻐하는 순간에....

미하엘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 미하엘은 슬쩍 눈을 떠 본다.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소녀. 미하엘은 이런 것들이 재밌기 이를 데 없다.

"또, 그런 희롱 놀이를 하십니까?"

여자치고는 낮은.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저음의 목소리. 아주 익숙한 목소리.

미하엘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 약혼녀인 공녀 '지나 브리엘'이 서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이나 볼까 싶은 사이건만, 오늘 이 파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모르겠다.

휙.

급히 자리를 벗어난다, 소녀는. 분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마치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표정. 소녀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의 붉은빛이 가득하다.

"...그냥 유희 같은 것일 뿐이야. 진심은 없다고."

애써 태연한 척을 해 본다. 미하엘은 공녀 지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어라. 삶의 대부분은 웃으면 해결되는 법.'

그게 미하엘의 삶의 지론.

민망하고 난처한 상황도, 힘든 일도 대부분 웃음을 보인다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진다. 미하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랬다. 일부다처제인 이 나라에서, 이런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지나'뿐이었다.

"제가 말했죠. 저는 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 두는 꼴을 보지 않을 거라고요."

지나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다. 온통 다혈질투성이라는 힘의 나라 '브리엘 공국' 출신이면서도, 지나는 냉철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인 사람. 지나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나?"

미하엘의 말에 지나는 답이 없다. 미하엘은 지나가 어떤 말을 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미하엘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황제가 되세요."

"불가능해."

지나는 언제나 욕망이 많은 여성이었다. 브리엘의 공왕 구노스 브리엘의 수많은 딸들 중 하나면서도 그녀는 왕을, 아니 황제를 꿈꾸었다.

13살의 1월. 서로가 약혼 상대가 되어 처음 만나는 그 자리에서도 그녀는 미하엘에게 말했다.

"황제가 되세요."

물론, 미하엘은 그 말에 대해 똑같은 대답을 했었다.

"불가능해."

미하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주노스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주노스의 황자는 길거리에 차이는 돌멩이보다도 많다.]

그리고 미하엘은 그 수많은 황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것도 서열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황제가 될 가능성 제로의 황자.

지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오른 것이다.

"가 볼게요. 파티는 끝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런 유희가 달갑지 않습니다."

지나가 발코니를 나와 사라진다. 그녀는 절대 미하엘 앞에서 울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 미하엘은 가만히 발코니 너머를 응시했다. 저 멀리 지평선 끝에 작게 걸쳐져 있는 빛나는 도시.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주노스의 수도 '주노스 시티'가 보인다.

황자임에도 미하엘에겐 그 주노스 시티에 궁궐 방 한 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이 먼 변방의 황자궁에 갇혀, 저 빛을 시샘하고 부러워하는 것만이 그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스타랜턴."

다시 미하엘의 손안에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미하엘은 눈과 지평선 사이로 그 빛 덩어리를 이동시켰다.

밝은 빛 탓에, 눈의 홍채가 줄어든다. 이제 더 이상 지평선 끝자락에 있는 도시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주노스 시티가 미하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노시스는 잘하고 있으려나?'

어린 시절부터 형제보다 친구처럼 지낸 유일한 황자. 하지만 1년 전 주노시스가 무수한 업적을 쌓으며, 서열을 순식간에 높여 가면서, 이제는 연락이 소원해진 사이....

미하엘은 오랜만에 자신의 친우親友에게 편지를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각, 주노스 시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 * *

'서늘하다.'

분명 건장한 사내 하나만큼 위쪽에 있건만, 칼날은 지금이라도 당장 목을 날릴 것만 같다.

서늘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단한 나무 잠금장치.'

그 안에 감금된 목. 그곳의 계절만은 꼭 겨울 같다.

서늘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행이다.'

단단한 잠금장치 탓에 목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음에 감사한다.

만약 지금 고개를 들어 위를 볼 수 있다면, 그 거대한 칼날의 위용威容에 벌써 졸도를 해 버렸을 테니까.

위.

아래.

그리고 옆.

그 어디로도 고개를 돌릴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우, 우, 우.'

광장에 빼곡히 들어찬 국민들.

몇몇은 지금이라도 당장 칼날을 떨어뜨리라며 언성을 높인다. 환호의 함성을 지른다.

또 몇몇은 아무래도 사람 죽는 꼴이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반쯤 눈을 감고 있다.

절반은 공포, 절반은 즐기는 얼굴이다.

그래. 처형處刑이란 건, 쉽게 볼 수 없는 연례행사 같은 것이니까....

나는 이왕 죽을 것이라면, 광대로 죽고 싶다 생각한다.

'그래. 어차피 죽을 것. 웃자. 웃으면서 가자.'

나는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마지막으로 사람들 눈에 웃는 얼굴이 보이도록. 나는 웃기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희망한다.

"꼭 형님 이명 같습니다. 웃는 얼굴의 미하엘 주노스."

'경멸과 조소. 그리고 약간의 동정이 섞인 말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16위였던 황자. '주노시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116위. 주노시스는 분명 108위인 나보다도 더 낮은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었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온갖 업적을 쌓아 순식간에 3위의 자리를 차지한 번개 같은 행보는 그를 저돌맹진豬突猛進의 황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모두가 '벼락 같은 자'라고 부르는 황자. 아니, 새로운.

'황제.'

"형님, 저도 안타깝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가당치도 않은 입에 발린 말. 그것이 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사실 주노시스 주노스가 아직 116위였던 시절. 친한 황자를 꼽으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름에 오르는 것은 바로 나 '미하엘 주노스'였다.

'밑바닥 처지.'

같은 신세를 타고났기에 우리는 누구보다 쉽게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밤을 새우며 대화를 했고, 같은 일에 울고 웃었다.

'형제보다 친구 같은 사이.'

나는 진심으로 주노시스를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형님.... 제 결심이 그렇습니다."

안타깝다는 눈빛. 저게 연기일까, 아니면 진심인 걸까? 알 수 없다.

"...저는 어떤 후사後事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아버지. 아니 전前 황제의 급사急死.

대신들이 모여, 내리 일주일을 회의하고 난 후 결정된 것은 '가장 영향력 있는 황자에게 왕관을 이관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그 '가장 영향력 있는 황자'는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당연히....

'주노시스 주노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왕관은 '주노시스'에게 이관되었다.

주노시스의 등극 첫날. 그간 그의 행보를 생각하며 모두가 이 젊은 황제가 '성군'이 될 것이라 점쳤다.

그만큼이나 그의 행보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국민들만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그랬다.

친구 같은 '주노시스'가 황제가 된다면.... 조금 더 맘 편히 유유자적할 수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반갑습니다. 주노시스 력歷의 첫해. 첫날이 시작됐군요."

모두의 환호성. 그리고 박수 소리.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나 '주노시스'의 백성들이여."

모두의 기대에 찬 눈. 나 역시 그랬다.

'이 젊은 황제는 또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의심 하나 없는 무지의 눈빛.

모두가 그의 다음 말을 이렇게 예상했다.

"태평성대를 약속하겠다."

하지만....

"피의 숙청을 시작하죠!"

모두가 말을 잃었다.

이 젊은 황제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을 했을까?

"지금부터 나 외에 모든 황자들은,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인즉슨... 다른 136명의 황자들 모두의 목이 날아간다는 소리.

100명이 넘는 황자. 100번이 넘을 처형....

이 나라 '주노스'는 길거리에 차이는 돌보다 황자가 많은 나라였으니까....

* * *

'그건 자비였을까? 우리가 친구 같은 사이였기에?'

기요틴과 인사할 마지막 136번째 손님.

그건 바로 나. 웃는 얼굴의 '미하엘 주노스'였다.

물론 늦게 죽는다는 안도감보다, 형제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공포감이 더 두려웠다.

사실....

도망쳐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첫 번째 처형이 있던 날. 나는 짐을 꾸렸다. 방랑을 위한 짐이었다.

'국경을 넘어, 나를 모르는 어딘가로....'

그 끝 모를 방랑을 위한 여행 짐.

물론, 황자궁을 나와 마차에 몸을 실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마부가 아닌, 병사들의 횃불이었다.

주노스가 거느린 사병私兵들이 이미 나의 집을 에워싼 것이다.

내 앞에 135명의 머리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거의 족히 반년을 갇혀 지내야 했다.

간수 외에는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 변방의 탑.

검은 밤과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친구가 되어 주는 시간.

그때, 정신을 놓아 버렸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자, 형님. 이제 끝내기로 하죠."

황제 주노시스. 그가 다시 말을 이어 온다.

"형님의 희생으로, 이 나라는 더 나은 곳이 될 겁니다."

'죽어 달라'는 말을 참 멋들어지게도 한다. 달변가다운 말투다.

'그래, 더 나은 곳이 되겠지. 오로지 주노시스 너만을 위한 천국.'

"형님."

"...."

"앞을 보세요. 모두가 보고 있잖습니까?"

잔인한 놈.

"혹... 하고 싶으신 말은 없으십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 나는 눈을 감아 본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반란을 일으켜 이 '폭군'을 죽여 달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제발 살려 달라고 마지막 '구걸'을 해야 하나?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남은 것은 앙금처럼 쌓인 소회所懷뿐이다.

'차라리... 이럴 거면. 꿈이라도 품어 볼걸.'

밑바닥 중의 밑바닥. 절대 왕이 될 수 없는 평민보다 못한 황족.

생각해 보면 나는 계속해서 나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나보다 눈에 띄지 않던. 이름보다 '별 볼 일 없는 놈'이란 말을 더 많이 듣던 주노시스.

그가 순식간에 서열을 올려 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게'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 말 없으십니까, 형님?"

사형 집행관이 기요틴으로 다가온다. 칼날을 고정해 놓은 밧줄을 고정쇠로부터 풀기 시작한다.

이제 오로지 저 집행관의 팔 힘만이 '나'와 '칼날'을 갈라놓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줄 것이다.

"할 말이라...."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만약 내게 다음이 있다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군."

진심이다.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그때는....

'황제를 노려 보고 싶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더 이상 인생을 탕진하다 죽는 일은 사양이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순간, 주노시스의 눈에 안광眼光이 빛난다.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가 실룩댄다.

"진심입니까, 형님?"

"그래. 너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었어."

툭. 무언가가 건드려진 것 같다. 하지 않아도 될 말. 해선 안 될 말. 온갖 것들이 터져 나온다. 울음. 차마 참지 못한 눈물은 덤이다.

"너무 웃어넘겼어. 다음 생이 있다면... 그러고 싶진 않구나."

"그래요.... 하지만 삶은 찰나 같아서. 오로지 한 번만 그 빛을 뿜죠."

"그게 아쉽구나, 동생아. 아니, 한때 나의 친구였던 황제시여."

집행관의 팔이 떨려 오기 시작한다. 족히 30브리엘은 넘을 저 무거운 쇳덩이. 힘이 부치는 것이다.

집행관은 지금 당장이라도, 사형을 집행해 달라는 듯 주노시스를 바라본다.

하지만, 주노시스는 집행관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나의 대답이 조금 더 듣고 싶은 것이다.

"계속해 봐요. 뭘 하고 싶나요?"

"네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야."

바보 같다. 하지만 나도 내 입을 막을 수 없다.

"한 번 황자로 태어났는데...."

그를 응시해 본다. 반은 장난기. 또 반은 어떤 기다림....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이 비친다.

"어느 누가 황제가 되고 싶지 않겠어?"

자칫 곡해曲解하면, 반란을 꿈꾼다는 것으로 들을 법한 이야기. 물론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

한참을 심사숙고하던 주노시스가 운을 뗀다.

"형님. 저도 형님을 죽이게 된 이 운명이 안타깝습니다."

의외의 말. 나는 살짝 놀란다.

'주노시스에게도 약간의 우정이 남아 있었구나.'

애처롭다는 듯. 눈썹 양 끝자락이 팔八자로 내려간 주노시스. 나를 바라본다.

"그러시지 그랬어요. 형님. 그랬다면 저 기요틴에 목을 내거는 역役은 저였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도저히 진심을 가늠할 수가 없다. 저의底意가 무얼까?

"혹여라도... 다음이 있다면 형님. 그때는 황자 게임에 참가하시길...."

'황자 게임?'

순간 주노시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말. 하나....

"황제 폐하! 도저히 버틸 수가 없습니다!"

팔 힘이 부칠 대로 부친 집행관이 결국 밧줄을 놓고 만다.

슉.

30브리엘이 넘는 쇳덩이가 나의 목 위로 곧장 수직 낙하한다.

써컹.

도로로록.

주위 풍경이 빙글빙글 돈다. 세상이 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다.

저 멀찍이, 머리통을 잃은 나의 몸이 보인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뻘건 단면만이 위치해 있다.

'끊어진 목뼈. 그리고 핏줄과 근육.'

신체 부위들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눈 안에 맺힌다.

순간, 자신의 몸뚱이 안을 직접 구경할 수 있다니, 꽤 재밌는 경험이란 생각이 들지만, 이내 엄습해 오는 고통 때문에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그저 '아프다'는 감정만이 머릿속을 덮쳐 온다. 폭탄이 터진 것 같다.

머리 안 가득.

'섬광처럼, 폭죽처럼.'

빛 덩어리들이 터진다.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머릿속이 점멸한다.

그 순간....

콱.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무언가. 사람의 손이다. 아니 주노시스의 손이다.

잘린 나의 머리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제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 가는 나의 눈에, 국민들의 얼굴이 비친다.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 표정들을 보며, 나는 '내가 정녕 죽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제 이 나라에 어떤 서열 싸움도 없게 될 것이다!"

주노시스의 고함. 박수 소리도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적과 고요만이 광장 안을 감돈다.

주노시스는 재차 소리친다.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다! 국민들이여!"

아주 작은 박수 소리. 그리고 잇따라 들려오는 수많은 박수 소리.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려 본다.

'그래, 이왕 죽는 거라면 광대처럼 죽으리라.'

나는 나의 이명異名인 '웃는 얼굴'처럼 죽어 간다.

검은 천이 머릿속을 드리우는 듯한 감각. 천천히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이내 소리가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하엘 주노스'라는 사람의 의식마저 지워져 간다.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차가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마저 완전히 지워져 간다.

나는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002. 새로운 황자 (1)

방. 작은 요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반짝, 반딧불이보다 작은 빛 덩어리가 허공에 생겨나, 일렁이듯 흔들린다.

처음에는 단 하나. 하지만 그 빛 덩어리는 수 분마다 하나씩 늘어나, 어느새 수십 개는 족히 생겨나 있다.

다시 반짝, 가장 작은 빛 덩어리 하나가 깜빡이기 시작한다. 이내 그 반짝임이 주위로 옮겨 간다.

또다시 반짝, 가장 커다란 빛 덩어리마저 껌뻑대기 시작하자,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모든 빛 덩어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직후...

"응애애! 응애애애! 응애애!"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그 소리는 어딘가 고통에 차 있다.

흔들, 요람이 그 아픔을 대변하듯, 좌우로 요란히 흔들려 댄다.

다다닥.

복도 밖에서 들려오는 달음박질 소리.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서너 명의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선다.

얼굴에 팔八자 주름이 선명한, 가장 노련해 보이는 하녀가 요람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녀의 품 안에 아이가 안긴다.

자신의 팔이 요람인 양 흔들며, 하녀는 아이를 달래 본다.

"응애애! 응애애애!"

하지만 아이는 도통 울음을 그칠 줄을 모른다.

하녀들은 서로 '배가 고픈 것이다', '아니다. 심통이 나신 것이다.' 따위의 의견을 나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이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마나통을 키우기 위해, 마나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 * *

나. 그러니까 황자 '미하엘 주노스'가 스스로를 깨달은 것은 태어나고 첫울음을 운 직후였다.

찰싹!

궁중 어의御醫의 매서운 손바닥이 나의 볼기짝에 닿는 순간.

"응애!"

그 아픔이 저도 모르게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온 그 순간.

나는 내가 기요틴의 136번째 이슬이 되었던 그 '웃는 얼굴'의 미하엘 주노스임을 자각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 과거 회귀를 깨달은 그 순간, 첫 번째로 든 감정은 '절망감'이었다.

이미 세상을 살 만큼 산 28살짜리 청년의 정신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쟁이의 신체 안에 갇혀 버리다니...!

오래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었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성인식 직후나, 13살 아카데미 입학식 같은 시기에 '과거의 기억'을 깨닫던데 비록 2번째 기회를 얻은 건 감사하지만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 적어도 첫걸음마를 뗄 정도로 몸이 단단히 여물려면 못해도 1년.

그 긴 시간을 무얼 하며 지내야 하나 고민이 찾아왔다.

물론 그런 고민들 속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황제가 되겠다.'

는 각오였다.

* * *

[말은 어릴 때 배워야 한다.]

그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갓난아이의 뇌는 정말이지 활주를 위해 절벽을 낙하하는 암벽수리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성인의 머리였다면, 족히 새벽녘이 되어도 끝나지 않을 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해'는 아직 중천中天에 반도 못 올 만큼 뭉그적거린다.

덕분에 나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의 상황을 심사숙고하고도 남을 만큼 많이.

몇 개월 사이 내가 파악한 것들은 대충 이렇다.

첫째. 나는 '미하엘 주노스'로 다시 태어났다.

그 말인 즉, 발버둥치지 않으면 또다시 밑바닥 신세라는 뜻이었다.

적자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천한 궁중 하녀의 아들. 후궁조차 되지 못하고, 궁궐에서 쫓겨나야 했던 나의 어머니.

그게 불과 내 나이 2살 때였다.

나는 언제나 논외論外였다.

이번 생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귀족들 앞에서 황자들이 소개 되는 황자연. 모든 황자들은 12살에 이 행사를 거친다. 그때까지 무엇이든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108위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이 갓난아이가...?

"언니. 언니는 이번에 어떤 황자님이 가장 주목받을 것 같아요?"

황실에서 '갓난아이 방'은 보통 어린 하녀들의 수다의 장이 되곤 한다.

'아이를 본다'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진을 치고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귀청 떨어지게 울어 대고, 수틀리면 떼를 써대는 '아이'들은 보통에 경우 고참 하녀들이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소문이 아직 재밌어 죽겠는 젊은 하녀들은 이 '갓난아이 방'에 모여 미주알고주알 온갖 담화를 떠들어 댄다.

"음... 아무래도 존도우 도련님이 아닐까?"

"언니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애들이 뭐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어? 근데 존도우 도련님은... 재능이 다르시잖아, 재능이."

존도우라...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동맹국이었던 마술 제국 '헤르메노스'의 공주가 낳은 황자.

비록 정실이 아닌 후궁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정략결혼한 동맹국의 공주는 다른 후궁들과는 다른 특별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존도우 역시 그래서 나 같은 놈과는 애초에 태생부터 달랐다.

12살의 황자 소개연에서부터, 내 아버지 '앙그로'는 '존도우'를 모든 황자들 중 32번째로 사랑한다고 공표했다.

서열 32위면, 성인이 된 후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땅만으로 일개 소국小國의 왕 못지않은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 인생을 살 수만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핏줄이 다르잖아. 핏줄이."

"그쵸. 아무래도 정략결혼이니...."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헤르메노스의 공주인데! 그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이요?"

"벌써 3위계 마술을 연달아서 쓰신대."

3위계 마술. 보통은 마술을 처음 수련하는 마술사들 중 재능 있는 자들이 5년 이상을 수련해야 그 입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영역이 바로 3위계 마술이다. 그런데 존도우는....

순간, 나는 그 시절 들었던 소문 하나가 생각났다.

존도우가 '마도를 깨우친 자'라는 이명異名을 얻게 된 건, 그가 12살 황자 소개연宴에서 보여 준 모습 때문이라고....

"아마 이번 황자 소개연에서 존도우 도련님 수정구가 제일 빛날걸?"

그래, '수정구'! 황자 소개연 때, 그저 황자를 소개하는 것이 메인이 아니다.

황자 소개연은 세상에 태어난 황자들이 겪는 첫 번째 전쟁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어떻게든 귀족들에게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혈통도, 재능도 없는 황자들은 그 소개연을 끝으로 모두의 관심에서 지워진다.

'황자'라는 이유로 삶을 제한받은 채, 꿈도 없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건 108위였던 나 역시 그랬다. 어차피 황제는 꿈꿀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인생도 살 수 없던 나는 혹여라도 누가 황제가 되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웃으며' 지냈다.

서열 50위 안의 '가능성' 있는 형제들이 비웃음을 보낼 때도 나는 웃었다.

모욕적인 언사를 하며, 침을 뱉을 때도 나는 웃었다.

양보만이 미덕美德이었고, 웃음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12살 황자연. 아버지 앙그로 주노스께 그 어떤 관심도 받지 못 했던 그 날 이후 내 삶의 모든 순간이 그랬었다.

"3위계 마술을 연달아 쓸 정도면... 도대체 마나통이 얼마나 크신 거야?"

존도우가 3위계 마술을 쓴다는 소식을 처음 접해 들은 하녀가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감탄을 뱉어 내고 있다. 그만큼이나 그 소식은 놀라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마나통'이라는 말만이 맴돌았다.

마나통.

한 인간이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마나의 총량.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태어날 때 주어진 마나통 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마나통이 크다는 건 많은 스킬과 마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에, 대부분 마나통이 큰 인물들은 영웅이 되거나,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래서 마나통은 그 사람의 그릇을 재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그 마나통을 재는 의식이 바로 12살 황자 소개연에 이루어지는 '수정구의 의식'이다.

특수 제작된 수정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진언眞言을 외우면, 수정구는 사용자가 가진 마나를 흡수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빛은 흡수된 마나량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밝기가 달라진다.

"거기 둘! 애 본다는 핑계 그만 대고 나와서 복도 물걸레질이나 좀 해!"

복도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모든 하녀들을 총괄하는 하녀장의 목소리다.

"네, 금방 갈게요!"

아까까지 존도우를 놓고 수다를 떨던 하녀 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두 사람이 사라진 방에 고요한 적막이 감돈다.

아마,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상은 한동안 아무도 이 방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걸 실행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눈을 감고 나는 마음속에 문장 하나를 떠올린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지금 여기 내 앞에 현현顯現하라. 스타랜턴.'

문장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눈을 뜬다. 허공에 '빛 덩어리' 하나가 떠 있다.

'스타랜턴'. 어른 미하엘이 알던 유일한 마술.

황궁에서 술 파티를 열 때, 평민 계집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배웠던 마술.

체온보다 살짝 높은 온도에 물리적 공격력도 없는 오로지 '여자를 꼬시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는 그저 유희용 마술.

하지만 지금은 생전에 이 마술을 배워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은둔 현자'라고 불리던 마술사. 나의 친우親友 장 피엘은 이렇게 말했다.

'말은 아기 때 배워야 한다고 하지? 그게 왜 그런지 알아? 이제 세상에 막 태어난 아기의 뇌에는 어른에게 없는 성분이 흐르고 있거든. 그 시절에 마술 수련을 할 수만 있다면, 아마 드래곤도 부럽지 않을 마나통을 가질 수 있을걸?'

아니, 어느 누가 말도 못 뗀 아이들에게 '마술'을 가르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 당시에 나는 장 피엘의 말을 농담처럼 흘려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황제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진 이상. 그 작은 희망조차 잡지 않을 수 없다.

'좋아. 마술 수련?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줄창 그거나 하지 뭐.'

나는 연이어서 진언眞言을 외운다.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세 구球의 빛 덩어리가 허공중에 나타난다.

핑.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나를 덮친다. 하지만 참는다.

'중요한 건 그냥 마술을 쓰는 게 아니야. 쓸 거라면 끝까지! 마나통이 텅 비는 그 순간까지 계속! 그러면 찾아오거든. 마나통이 텅 비는 순간이. 그때 마지막 힘을 짜내 한 번 더 마술을 쓰는 거야. 바로 그 한 번이 마나통을 한 뼘 늘려 놓는 거지.'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 내기 위해 이빨을 깨문다. 졸음을 참아 내는 이 순간이 거의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참아 낸다.

'이 짓을 반복하라고? 이 고통스러운 걸?'

'장은 미친놈이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그러는 사이에도 수마睡魔의 유혹이 계속된다. 당장이라도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다.

'스타랜턴.'

하나 나는 기어코 한 번 더 마술을 시전하고 만다.

허공에 또 한 구球의 빛 덩어리가 생성된다. 그리고....

"응애, 응애, 응애애애애!"

너무도 큰 고통이 엄습한다.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온다. 허공에 떠 있던 '빛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기어코 마나통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아, 맞다! 편두통은 좀 조심해야 돼. 마나통이 바닥나면 겁나게 쎈 두통이 찾아오거든.'

이제야 그의 표정이 이해가 된다. 마나통이 바닥나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할 때 짓던 표정이.

정말이지 이 두통은....

'진절머리가 쳐질 만큼 아프다.'

꼭 넘어서는 안 될 선이니 여기서 멈춰라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멈출 거냐고?'

물론 절대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각오를 되새긴다.

'황제가 된다.'

그리고....

'주노시스를 기요틴의 이슬로 만든다.'

나는 다시 한번 진언眞言을 외운다. 울고 있는 나를 안아 주러 달려온 젊은 하녀. 그녀의 등 뒤에 빛 덩어리 하나가 생긴다.

더 거대한 편두통의 파도가 엄습해 온다.

"응애, 응애애!"

나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이 울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003. 새로운 황자 (2)

서쪽 대륙의 맹주盟主라 불리는 3국國 중 하나 '주노스'.

이 나라에는 다른 국가의 사람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2개의 국가 행사가 있다.

하나는 1월 1일부터 시작해 1월의 마지막 날까지 장장 30일간 지속되는 '새해맞이'다.

웬만한 소국小國의 국가 예산을 사용한다고 할 만큼 길고 성대한 행사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황자연宴'. 합법적인 '일부다처제'와, 모든 전쟁에 선봉'에 설 만큼 체력이 넘쳐 나는 전사 출신의 황제 '앙그로 주노스'의 정력精力이 맞물려, 주노스에 있는 황자들의 수만 해도 무려 137명.

'주노스'에서 신성시되는 숫자인 6이 2번 겹쳐지는 나이. 즉 12살이 되는 해에 이루어지는 이 행사는, 그 수많은 황자들 중에서 싹수가 괜찮은 황자들을 골라내는 '솎아내기'의 과정이기도 했다.

미래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혹은 또 새롭게 공표되는 황자들에게 얼굴이라도 비칠 겸 해서, 주노스국國의 귀족들이란 귀족들은 모두 이날 황궁으로 모여든다.

이 행렬이 워낙 길고 빼곡해서, 타국의 사람들은 '뇌물賂物의 파도'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물론, 비하를 한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 황자 소개연은 그래서 세상 모두가 아는 주노스국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다.

그리고 올해 12살이 되는 건 5명의 황자들. 그 안에는 '미하엘 주노스'도 속해 있었다.

* * *

나는 다시 한번 황자들의 리스트를 확인한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존로우 주노스.

6년 전, 황자 소개연에서 연회장을 가득 채울 만큼 밝은 빛을 내뿜으며, 모두를 놀라게 했던 '존도우'의 직계 혈족이다.

당연히 존로우에게도 마술 제국 헤르메노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분명히 수정구의 의식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그 외에 또 참고할 만한 건, '아모우 웅가웅가'. 최근에 동맹을 맺은 수렵 국가 '웅가'에서 온, 말하자면 양자養子다.

웅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이상, 아버지가 아모우의 서열을 높게 쳐줄 가능성이 있다.

리스트 확인을 끝낸 나는 마지막 확인에 들어간다. 앞으로 황자 소개연까지 남은 시간은 16시간. 마나가 바닥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원 상태로 회복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어차피 정치적인 상황들은 12살짜리 꼬마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오로지.

'수정구의 의식.'

나는 눈을 감는다.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온 의식을 시작한다.

'스타랜턴.'

작은 빛 덩어리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다. 이전에 반딧불이 같던 조그만 덩어리가 아닌 거의 10살짜리 꼬마 아이의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덩어리다.

마술은 쓰면 쓸수록 그 성능이 향상된다. 그건, 그 마술에 대한 마술 회로가 점점 더 상세히 온몸에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빛 마술사라 불리는 '멀린'의 스타랜턴도 기껏해야 우박 알갱이만 했었다.

적어도 이 마술에 한해서만큼은 세상에 어느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눈앞에 떠 있는 빛 덩어리를 보며, 나는 본격적으로 '마나통'을 태워 보기로 작정한다.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탄랜턴....'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스타랜턴을 외쳐 댄다.

거의 2~3초에 한 번씩 허공중에 또 다른 빛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이미 인간이 감당할 만한 광원光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시신경이 타 버릴 정도로 밝은 빛.

나는 혹여라도 밖에 있는 이들이 훔쳐볼까 두려워 암막 커튼을 드리운다. 하녀들에게 부탁해 주문 제작한 특수제작품이다.

모든 빛을 흡수한다는 '동굴어둠박쥐'의 날개 가죽을 수십 겹을 쌓아 만든 커튼. 그걸 1장이 아닌 5중으로 겹겹이 겹쳐지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방의 암막 커튼이다.

가장 강한 12시의 태양이 뜨는 낮에도 커튼을 치면 태양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해야 할 정도다.

하나, 그런 암막 커튼조차도 이 방의 빛을 완벽히 지우진 못한다.

그만큼이나 방안을 가득 채운 스타랜턴의 불빛은 밝디밝다.

* * *

댕, 댕, 댕, 댕, 댕, 댕.

약속의 여섯 번의 타종 소리가 들린다. 황자 소개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정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미리 준비된 화포에 포탄을 장전한다.

심지에 불이 붙고, 이내 타들어 간다. 심지가 완전히 사라지자, 포구에 불꽃이 번쩍인다.

하늘 높이 포탄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곧바로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맞더라도, 무해한 종이 조각들이다. 안에 있던, 화약들이 터지며 빛을 흩뿌린다.

큰 행사 때만 터트리는 귀한 폭죽이다.

사방으로 퍼진 포탄의 종잇조각들이 꽃가루처럼 날리며 모두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모두가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연이어,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고, 웅장한 음악과 함께 아버지가 연회장에 들어선다.

모두가 일어서 아버지를 향해 박수 세례를 보낸다.

지금의 '주노스'를 서쪽 대륙의 맹주盟主로까지 올려놓은 전쟁 군주.

위대한 발걸음의 '앙그로 주노스'.

이미 오래전 잊고 지냈던 황자 소개연을 다시 체험해 보니, 다시금 아버지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그래, 나는 이 위대한 남자의 아들이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떠나서, 가능하다면 이 남자의 눈에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이제부터 황자들의 미래를 점칠 의식을 시작하겠다!"

아버지가 귀족들에게 '수정구의 의식'을 시작하겠단 공표를 한다.

시중들이 다섯 명의 황자들 앞에, 수정구들을 가져다 놓는다.

"그럼 첫 번째는 도시국가 '곤라스'에서 온 미아벨라와의 결실 '아노스'부터 해 볼까?"

아노스 주노스. 아버지와 속국인 도시 국가 곤라스의 삼녀 사이에서 나온 아들. 나보다야 낫지만, 서열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

그렇다고 이렇다 할 마술적 재능도 흐르지 않는 혈족.

안타깝지만... 경쟁자가 되긴 힘든 인물이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아노스의 수정구는, 평범한 수준의 빛을 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약간 밝은 정도인 수준.

아마, 아노스는 평생을 자신의 황자궁에 갇혀 인생을 낭비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나'다.

* * *

"세상에, 분명 영웅이 되실 분!"

"저토록 환한 빛이라니, 이 홀 전체에 불을 꺼도 낮처럼 밝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게 이곳에 온 귀족들이 해야 할 책무責務니까.

마법 제국 헤르메노스와 깊은 교우 관계를 가진 몇몇 귀족들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환희의 표정이 드러난다.

'존로우' 역시 높은 서열을 받을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12년 전의 황자 소개연 이후, 존 형제는 거의 상금을 타는 게 확실시된 경마 마권馬券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만의 무역망을 가진 귀족들은 너도나도 헤르메노스와의 유통망을 뚫고 싶어 했고, 그런 것들에 취미가 없는 귀족들은 어떻게든 존도우와 존로우의 후견인이 되고 싶어 루트를 물색했다.

아마 오늘 이후로 그런 귀족들이 갑절은 늘어날 것이다.

그만큼 '존로우'의 수정구는 비범할 만치 빛나고 있으니까....

광원의 밝기는 빛의 여신 '라이트나'의 이름을 따서 센다.

한밤중에 켜 놓은 촛불 하나의 밝기를 1라이트나로 규정하고 그걸 기준으로 다른 광원들의 밝기를 셈한다.

일반적으로 마술 학교에 처음 들어간, 마술 초급생들의 1위계 빛 마법 '랜턴'의 밝기가 5라이트나다.

그 '랜턴' 하나면, 광원 하나 없는 동굴 안 전부를 채울 수 있다.

주노스 서쪽. 앙구르마 산맥을 넘어 위치한 '태양나무 숲'. 그곳에서 자생하는 태양나무들이 내뿜는 빛이 46라이트나.

그리고 태양나무 숲 전체에서 내뿜는 빛이 121라이트나다.

그 정도라면, 사방 1,000걸음 이내에 있는 이들은 낮과 밤이 바뀌는 것조차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존로우의 수정구가 내뿜는 빛은....

"황제 폐하! 배... 백구십삼 라이트나입니다!"

마술청에서 파견되어 온 심사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93라이트나라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벼운 시각 손상을 불러올 정도의 빛이다.

"허허, 미안들하구만. 혹여라도 황궁을 나가서, 제대로 안 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치료관을 찾아가게. 치료비는 내가 모두 지불할 테니까."

기분이 좋으신지 아버지께서 농弄을 던지신다. 여기저기서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터진다.

이제 이 연회장의 기류氣流는 존로우에게로 흐르고 있다.

"좋아, 다음은... 잠시만."

아버지가 자신의 앞에 있는 리스트를 확인한다. 이제야 기억난다. 그때도 그랬다.

저 바쁘신 분께서 하녀의 아들 따위 기억할 리가 없지.

그때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리스트를 확인하고 나서야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어...."

표정이 굳는다. 가장 상처였던 순간. 아버지는 내 어머니의 이름을 도무지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보통은 '누구'와의 결실이다 말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미하엘. 네 차례다."

차가운 말투. 기대라곤 하나 없는 마치, 도시의 걸인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내가 삶의 욕망을 포기해야 했던 그 순간. 그 눈빛 탓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어 버렸었지.

조심스레 수정구가 있는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 개밖에 되지 않는 계단이, 그 어떤 산보다 가파른 산등성이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걷는다.

내 망설임을 털어 낸다. 아버지의 그 눈을 다시 보았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살지 않은 것이다.

두 걸음... 걷는다.

내 아픔을 털어 낸다. 어른인 미하엘은 죽었다. 여기 있는 건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도화지 같은 소년 미하엘뿐이다.

세 걸음... 걷는다.

각오를 다진다. 그래. 나는 황제가 된다.

드디어 제단 위에 올라섰다. 앞에 수정구가 보인다. 나는 서서히 그 수정구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댄다.

준비된 진언을 외친다.

"마법을 선물한 신 '헤르메노스'시여. 나 당신에게 나를 비추어 봅니다."

손바닥 끝 마디마디가 수정구에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이제 시작이다. 나의 마나가 수정구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 * *

'앙그로'력 24년 6월 6일에 있었던, 황자 소개연. 그날 마술계는 새로운 마술 재해 하나를 새로 규정한다. 그것은.

[수정구 의식에서 과도한 마나 공급으로 인한 빛 폭발 재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귀족들 절반 이상이 시력 장애를 호소했고, 3명의 사람들은 치료 마술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영구적인 '시력 장애'를 얻었다.

그리고 그날, 모두의 기대를 얻었던 신예 황자 존로우는 평생을 따라다닐 이명異名을 얻게 된다.

'아쉬운 별빛.'

분명 다른 황자 소개연이었다면 최고의 기대를 받으며, 박수 받았어야 할 그가, 그 한 인물 때문에 2인자로 낙인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미하엘 주노스.'

아니 단순 마나 공급만으로 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괴물급 마나통을 가진 황자.

그날 '미하엘'은 영웅의 길을 걷는 자라는 가장 영광스런 이명異名을 얻게 된다.

위대한 발걸음 '앙그로 주노스'는 그날 미하엘을 자신이 83번째로 사랑하는 아들이라 칭했다.

어미의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그의 천한 신분과, 단 한 번도 귀족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 속에서 자란 것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물론 그 선언을 가장 기뻐한 것은 '미하엘' 본인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세상에는 그가 서열 108위의 꿈도 포기한 채 살던 탕아蕩兒였단 걸 아는 이가 없었으니까.

물론, 이 일로 많은 이들이 '미하엘'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137명의 다른 황자들과 황제 본인조차 '미하엘'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었다.

004. 대담 (1)

이레 전 아버지의 부름이 있었다.

[황자 '미하엘 주노스'는 이틀 후, 오전 중에 황제 폐하를 알현할 것.]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혹여라도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들켜 책을 잡힌다면 지금껏 있었던 약소한 행운조차 강탈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나 기쁜 건 사실이었다. 전에는, 그러니까 어른 '미하엘 주노스'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입고 갈 옷과 액세서리 등, 차림새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골랐다.

12살의 어린아이가 가진 발랄한 순수함을 연기하면서도,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꽤 많은 옷들을 고르고 입어 봐야 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무난한 흰 와이셔츠에 그레이 톤의 베스트(Vest). 그리고 베스트와 톤을 맞춘 반바지.

어린아이다운 복장이지만 단정해 보이기도 하여, 퍽 마음에 들었다. 옷을 고르는 건 하녀들 중 그나마 나이가 비슷해 사이에 허물이 없던 올리나가 골라 주었다.

약속 당일 아침. 아버지가 계신 본궁에서 '마차'가 도착했다.

하녀장을 비롯한 몇몇 하녀들이 나와 대동하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일말의 가능성일지언정, '하녀들 치마폭에 싸인 도련님'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짧은 다리 탓에, 마차에 올라가는 일에 '보조 계단'이 필요했던 것 외에는 큰 특이 사항은 없었다.

나는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고민을 가진 채 본궁으로 향했다.

* * *

"지난번의 업적은 아주 잘 보았습니다. 황자님."

황자궁에서 본궁까지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온 것은, 봉시청 소속의 비서관 앙드리오였다.

어른이었던 시절에는 그의 본명보다 '일 잘하는 앙디'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본궁 비서장 후보에도 올랐었지, 저 사람?'

나는 되도록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 겸손한 말투를 연기했다.

"고맙습니다. 비서관님. 업적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하는 의식이었을 뿐인데요."

앙드리오는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28살? 그 정도려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앙드리오의 입에서 나온 숫자는 나의 나이였다. 어른 '미하엘 주노스'의 나이.

"무, 무슨 소리십니까?"

"그 정도로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입니다. 지난번 황자 소개연 때도 그랬지만, 황자님은 12살 같지가 않아요."

적막이 찾아온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잠시 대답을 보류한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돈다. 별로 나에게 이득 될 게 없는 침묵이.

나는 간신히 말 하나를 골라낸다.

"긍정적인 이야기시죠?"

앙드리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비웃는 투? 그건 아닌 듯하다. 살짝 재밌다는 듯한 웃음이다.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황자 저하. 애들은 싫어해서요."

"그렇군요.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하군요."

"하지만 이왕이면, 아이는 아이다운 게 더 좋죠. 이 나라에선 '다른 건' 책을 잡히는 법이니까."

앙드리오가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꼭 속을 들여다보는 눈빛. 나는 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가며, 똑같이 그를 응시한다.

이내, 앙드리오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한다.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띄운다.

"그게 좋은 쪽으로 작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황자님께 1표 던지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앙드리오는 이내 품에서 손바닥 세 마디 정도로 재단된 종이를 꺼낸다. 이어 앞주머니에서 펜을 꺼낸 그는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펜이 몇 차례 종이 위를 움직이다 멈춘다. 그가 이내 그것을 내게 넘긴다.

"우정국의 빛 통신은 아시죠? 간단한 전보 정도는 보낼 수 있는 것. 그게 제 번호입니다. 혹여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나는 그가 내게 준 종이를 응시하다 품에 집어넣는다. 그는 연이어 말을 이어 간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실 겁니다. 더 많은 번호를 받으실 거구요. 부디, 좋은 분들과 더 나은 갈림길로 향하시길."

그는 '주노스국'의 오랜 격언 하나를 인용해 내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두 개의 갈림길이 네 앞을 막아서면, 먼저 좋은 사람들을 찾아가라. 그들은 너에게 더 나은 길을 언질言質해 줄 테니.]

그가 인용한 이 격언이 왠지 싸늘하게 내게 다가온다.

선택의 갈림길....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 위엔 또 얼마나 많은 기로岐路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 우리 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사이, 벌써 본궁에 도착했군요. 가실까요, 황자님?"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선다. 결과적으로 앙드리오와의 대화는 나에게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게 만들어 주었다.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조금 수상한 사람인지 아리송한 사람.'

나는 우선은 내 마음속 인명 사전에 '앙드리오'를 이렇게 정의 내려 보기로 한다.

* * *

"반갑구나. 아들."

황제 폐하와의 알현이라기에 나는 홀(Hall)에서의 조금 거리를 둔 만남을 상상했건만, 아버지께서 나를 부른 곳은 아주 사적인 공간. 그의 침소였다.

"술 한잔할 텐가? 브리엘에서 보내온 봉밀주蜂蜜酒야. 만든 지 열흘도 안 된 거라, 아직 달달할 텐데."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선 그것을 거부로 받아들이셨는지 이내 나를 향해 내밀었던 술병을 다시 거둔다.

"아쉽구만. 자고로 술은 대화의 윤활제 같은 건데 말이야."

아버지는 못해도 성인의 주먹만 한 크기의 잔에 술병에 담겨 있던 봉밀주를 모두 따라서는 이내 들이켠다.

반병이 넘던 술이 그의 입 안으로 모두 털어 넣어진다.

아버지는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혓바닥을 앞으로 내민다. 꼭 아이들이 서로를 놀릴 때 하는 그 표정 같다.

"으, 아직 너무 달구만. 그냥 꿀물이 따로 없어."

쿡, 쿡.

순간,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난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애들은 웃어야지. 좋구나. 아들."

나를 아들이라 부르는 아버지. 내가 죽기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그 말을 마치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그를 보니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감사함? 아니다.

애정? 그것도 아니다.

이건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다.

"앙드리오."

"예. 황제 폐하."

"이제부터는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 비서관 앙드리오가 이내 밖으로 나간다.

이 사저私邸 안에는 오로지 나와 아버지. 둘만이 있다.

"어떠냐, 좋은 연기였지?"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차갑게 바뀐다. 아까까지 사람 좋은 모습들이 마치 연기라는 듯.

"미안하지만 말이야, 우린 사실 부자父子보다 타인에 가까운 사이 아니냐?"

그제야 나는 이 두려움의 정체를 깨닫는다.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연기하는 살가움. 그것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공포.

"국가가 무엇인지 아니?"

"수수께끼를 하시자는 건가요?"

"아니,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야. 이건 긍지를 가질 만한 일이다. 이 질문은 내가 마음에 든 자식 놈들에게만 했던 거거든."

그제야 아버지의 본의本意를 깨닫는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싹수를 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을 고른다.

"1분만 제게 시간을 주시겠어요?"

"원한다면."

아버지께서는 밀랍으로 봉인된 봉밀주 하나를 더 딴다. 잔을 채우는 술. 그는 이번엔 음미하듯 술잔을 기울인다.

그 모든 동작 사이에 단 한 번도 그는 내게 눈을 떼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학술적인 대답? 아니면 나의 철학? 기껏 12살짜리에게?'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뇌리에 하나의 고함이 스쳐 지나간다.

"피의 숙청을 시작하죠!"

주노시스가 취임식 때 했던 그 말. 나는 어쩌면 이게 아버지께서 원하는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입을 연다.

"피로 쌓은 성벽이 아닐까요?"

크하하하!

순간, 귀청을 찢을 듯,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의 웃음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나는 생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다.

"그래. 반은 맞는 말이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다시 내려간다. 그의 눈이 다시 차가운 맹수의 눈으로 바뀐다.

"국가는 사람으로 쌓은 산이야."

아버지의 안광眼光이 번뜩인다. 그의 눈이 잡아먹을 듯 나를 주시한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지금 피한다면, 그는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

"피가 아니다. 죽은 게 아니라는 소리야. 지금도 이 발밑에 쌓인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지."

아버지의 자신의 발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왠지 지옥의 비명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산 사람은 언제나 배신을 해. 하지만 국가는 사람을 쌓지 않으면 만들 수 없지. 그 사이에 있는 딜레마. 그게 바로 '왕'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숨이 막힌다. 주노스의 영토를 지금의 크기로 넓힌 전쟁 군주다운 면모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에게 더 이상 기대를 안 할 거야."

"...."

"혈통도 없고, 조력자도 없다. 후견인은커녕, 자본도, 실력도 없지."

'12살짜리에게 하기엔 너무 가혹한 말 아닌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왜? 12살짜리에게 하기엔 너무 가혹한 말 같다는 표정이구나."

"...아닙니다."

"양자니, 정략결혼이니, 후궁이니.... 내가 왜 그토록 많은 자식들을 낳고 모았는지 아니?"

"...."

"저 먼 동쪽 대륙에 전해지는 주술이 있어. 고독蠱毒이라는 술법이지. 독이 있는 동물들을 항아리 안에 넣고, 한 마리만 남을 때까지 가둬 두는 거야."

적막이 돈다. 한참을 말을 이어 가던 아버지가 순간 입을 닫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다.

휙.

찰나의 순간,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아버지의 검지와 중지가 내 눈앞에 와 있다.

지금이라도 앞으로 뻗으면 눈알을 찌를 수 있는 위치에.

못해도 10발자국은 떨어져 있었을 아버지와 나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어 있다.

툭.

식은땀이 이마에 배어 나온다. 분명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꿈이 있다면 거두도록. 마나통 하나만 믿고 걷기엔 그 길은 너무 가혹하다."

아버지가 이내, 뒤를 돌아 다시 의자로 돌아간다. 병 안에 남은 술을 그대로 들이켜고는 크게 숨을 몰아쉰다.

"가 봐. 할 말은 끝이니까."

아버지가 손을 들어 앞뒤로 흔든다. 아무리 보아도 시종 따위에게 하는 손짓이다.

아버지는 내가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건가?'

또다시 108위. 꿈이라곤 없이 삶을 탕진하던 '미하엘 주노스'로?

"왜 제가 그것들을 못 얻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순간, 다시 아버지의 눈빛이 예리해진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간다.

005. 대담 (2)

"6월 6일. 귀족들을 눈멀게 한 그 광휘光輝가 그냥 생겼을까요? 제가 그저 큰 마나통을 타고난 놈으로 보이십니까, 아버지는?"

"...."

"이 나라가 가진 신의 이름 '주노스'. 주노스는 금속과 욕망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나는 한 발짝, 걸음을 떼어 본다. 힘겹다.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실제로 중력重力이라도 가진 양, 나를 짓누른다.

하지만 걸어야 한다. 걸어서 저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 간다.

"저는 그 이름을 짊어졌습니다, 아버지. 미하엘 주노스. 그게 제 이름입니다."

열 발자국은 이제 한 발자국 이내로 줄어든다. 아버지와 나의 얼굴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깝다.

나는 팔을 들어 올린다. 손을 그대로 아버지의 얼굴을 향해 뻗는다.

뻗은 손에는 오로지 검지와 중지만이 펴져 있다.

나는 그 두 손가락을 아버지의 눈앞에 가져간다.

방금 전 '아버지'께서 그랬듯이.

"저 역시 욕망을 신봉합니다. 제 가장 큰 재능은 욕망입니다. 황제 폐하."

"파하하...."

마치 가죽 공에 구멍이 나,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

아버지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다. 그의 어깨가 내 손 위에 올라온다.

아버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 기대하마. 미하엘 주노스. 내 아들아."

눈물이 나는 것을 애써 참는다. 어른으로서의 28년. 그리고 아이로서 12년. 도합 40년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 들어 본 적 없는 단어를 들은 것 같다.

'아들.'

왜 지금의 '아들'만이 이토록 내 가슴을 찌르는 걸까?

공적인 자리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아들'이란 말이 아닌... 오로지 나를 지칭해서 해오는 '아들'이란 말.

비록 진심이 아니라 해도 지금만큼은 '진심'이라 믿고 싶은 말이었다.

'아들'이란 그 말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애써 눈에 힘을 주는 사이, 아버지는 또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

"사실, 너를 위해 선물을 두 개 준비했다."

'선물?'

"하나는 이 집 문을 나가면, 비서관 앙드리오가 알려 줄 거야. 그를 따라가라."

"...."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말을 고른다. 꼭 내키지 않은 말을 하려는 것처럼.

"...그래. ...별궁에 가 봐라."

'별궁? 그곳을 왜 가라는 거지? 그곳은 후궁들만이 모여 있는 곳일 텐데...?'

"다시 들였다. 자고로 아이가 클 땐 어미가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지."

'어미.'

난 그제야 그 말뜻을 이해한다.

내 어머니. 내가 2살이 되던 해 쫓겨났던 나의 어머니가 다시... 궁궐에 들어오셨다는 말.

"어서 가 봐. 모자母子 상봉이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니, 황제 폐하!"

나는 고개를 숙여 아버지께 인사를 올린다. 예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

고개를 들자마자 나는 곧장 문을 향해 뛰어간다.

'어머니를 본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속에 가득 찬다.

'이건 12살 '미하엘'의 감정일까? 아니면 28살 '미하엘'의 감정일까?'

아주 사소한 고민 하나가 떠오르지만 이내 지워진다.

나는 더욱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 * *

궁궐 입궐을 하고 난 후 열흘이 지났다. 오랜만에 나의 어머니를 뵈었다.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안기에 울컥 나도 눈물이 흘러 서로 얼싸안고 같이 울었다.

하녀에서 벗어나, 후궁이란 신분을 얻으셨다고 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어머니는 '그만큼 아버지의 기대가 크다'는 말을 남겼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약 한 시간 정도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

시답지 않은 신변잡기들을 풀어냈다.

내 시중을 드는 하녀장이 얼마나 깐깐한지, 지난번 황자 소개연 때 수정구를 얼마나 빛나게 만들었는지.

맞장구를 치고, 잘했다고 말해 주는 것이 좋아 나는 있는 허풍 없는 허풍 다 긁어모아 이야기를 해 댔다.

하나 12살짜리의 인생에 특별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결국 말할 거리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떠나는 나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다만 한 가지 당부의 말을 남겨 주셨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의 대답을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짧았던 재회가 끝났다.

사흘 전에는, 앙드리오로부터 빛 전보가 도착했다.

내 눈앞에 생긴 빛들이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글자를 만들었다.

[찾아뵙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뭐가 그리 급하길래, 가능한 빨리라는 말을 썼나 궁금했으나, 재차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는 법이므로.

결국 앙드리오가 나의 거처에 찾아온 건 오늘 오전의 일이다.

"전하께서 그때 말씀하신 걸 아직 주지 못하셨다 하더군요."

그제야 나는 왜 앙드리오가 왔는지를 이해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선물.'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시 본궁으로 가는 겁니까?"

"아니오. 저하. 우리는 창고로 갈 겁니다."

'창고?'

생각을 하는 그사이, 앙드리오가 품에서 꺼낸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공이었다.

여러 고대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는 그 공은, 그저 생김새만으로도 꽤나 값져 보였다.

"이게 선물인가요, 앙드리오?"

"그럴 리가요. 이건 열쇠입니다. 저하."

알 수 없는 말에 아리송한 사이, 앙드리오가 다시 그 황금 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의 옆에 나 있는 금에 손톱을 집어넣더니 작은 핀셋 크기 정도의 막대기를 꺼내었다.

"사실은 제가 들고 다녀선 안 될 물건인데.... 폐하가 허락을 해 주셔서요."

그 작은 막대기를 앙드리오는 음각에 꽂아 넣었다. 이내 앙드리오는 그 음각된 글자들을 길 삼아, 막대기를 요리조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막대기가 처음 꽂았던 위치로 돌아왔을 때....

그 음각된 글씨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공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여러 조각으로 나뉜 황금 공의 조각들이 허공중에 퍼져 나갔다.

어느새 그 조각들 사이에 성인 남성 하나만 한 에너지 장이 생겨났다.

"자, 가시죠. 이게 황제의 보물 창고로 가는 길입니다."

앙드리오가 먼저 그 에너지 장 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이내 완전히 형체를 감추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혹여라도 전기처럼 따끔거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달리, 에너지 장은 내 생각보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 * *

에너지 장을 넘고 나자 보인 광경은 무수히도 많은 물건이었다.

그곳에는 종류를 불문한 온갖 것들이 다 모여 있었다.

검이며 방패, 책과 도자기 항아리, 그리고 금화는 물론 석상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쓰레기 같은 것들까지....

어느 정도 감탄이 사그라들자, 앙드리오는 말을 시작했다.

"폐하께서,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하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이든요."

도대체 이 수많은 물건 중에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선택지가 많으니 오히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검사를 꿈꾸신다면, 가장 예리한 칼을. 마술에 더 정진하고 싶다면 고위 마술사들도 부러워할 마도서를 챙겨 주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지난번의 보답이라더군요."

"보답?"

"그 눈이 다친 3명의 귀족 중에 폐하가 꼴 보기 싫어하는 분이 계셨거든요."

그 말에 순간 웃음이 났다.

"참 아버지께선 자기 감정에 솔직하신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순 없죠. 폐하는 생각보다 재밌는 분입니다."

새삼 내가 아버지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지난 40년보다 요 근래 한두 달 동안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에 대해.

"자, 그래서 뭘 선택하실 건가요?"

앙드리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들은 전부 명검처럼 보이고, 갑옷들은 전부 세상 영웅들이 입었을 듯 멋들어져 보인다.

모든 물건들이 다 제 나름의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무얼까?'

검은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해, 당장은 목검으로 충분했다.

마술은 그저 마나통만 클 뿐, 아직 제대로 된 기초도 알질 못하니 고위 마도서는 있어야 장식품이 될 것이다.

그럼 대체....

순간, 또다시 뇌리에 주노시스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아직 친했던 시절. 그가 그런 파격적인 행보를 걷기 이전의 기억.

"형님! 정말 어마어마한 곳이었어요!"

그는 변방에서 일어난 민란을 제압한 후, 왕의 창고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았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가 가지고 온 건 검도, 갑옷도 마도서도 아닌 낡고 작은 금화 한 닢이었다.

"형님, 이게 행운을 불러다 준다고 하더라고요."

손안에 든 동전을 계속 어루만지며, 기대에 차 말하던 주노시스.

그가 그런 저돌맹진猪突猛進을 시작한 건, 그 후로 딱 반년이 지난 후였다.

"혹시 동전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앙드리오에게 물었다.

"동전이요?"

"네, 동전. 왕의 창고 안에 행운을 불러오는 동전이 있다고 하던데...."

그 순간, 앙드리오는 금화와 금괴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의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게... 어디에 있더라~."

그 안에서 한참을 뒤적이던 앙드리오가 오른손에 작은 금화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주노시스가 선택했던 바로 그 동전이었다.

"원하시는 게 이걸까요?"

"네. 찾던 건 맞는데.... 이건 뭐가 특별한 건가요?"

진심으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게 없는 그저 동전일 뿐이어서.

"행운... 아니다. 행운이라 말하긴 좀 그렇고. 운명이라고 하죠."

"운명이요?"

"이 동전은요. 딱 한 번 특별한 만남을 가지고 옵니다. 그게 좋은 인연이 될지, 아니면 나쁜 인연이 될지. 큰 기회가 될지, 아니면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요."

나는 앙드리오가 내민 금화를 손에 쥐었다.

'특별한 만남이라....'

왠지 나는 이 동전이 꽤 마음에 들 것만 같았다. 어찌 됐든 반드시 한 번은 효과를 낸다는 거니까.

'또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까?'

기대감에 살짝 가슴이 뛰었다.

* * *

앙드리오가 다시 본궁으로 돌아간 이후, 나는 지금까지의 상황과 계획을 고민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마나통뿐이었다.

할 줄 아는 마술이라곤, 살상 능력은 하나 없는 파티용 마술 하나뿐이고,

이제 막 검술을 배우고 있으나, 과연 적성에 맞는 것인지 확신이 없다.

지금 여러 귀족들에게, 관심을 받고는 있다곤 하나. 제대로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분명 금세 모두에게서 잊힐 것이다.

결론은 자명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재능과 특기. 그리고 앞으로 무얼 육성해야 할지까지....

그러기 위해선....

'스탯 카드'가 필요했다

스탯 카드.

주노스를 포함한 이 서쪽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15살을 기점으로 성인과 아이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성인이 되는 해에 새롭게 어른이 된 소년 소녀들은 자신이 믿는 신의 신전에 가서 경배를 드리고, 스탯 카드를 나눠 받는다.

마나수 잎으로 만들어진 스탯 카드는 소유자의 마나를 흡수해, 온갖 능력치를 상세히 기록해 낸다.

누군가는 그래서 이것을 신의 이름을 빌린 악마들의 농간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누군가는 이것이 신들이 인간이 스스로를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도록 내린 기적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에겐....

살짝은 불쾌한. 그리고 지옥 같은 단어였다.

재능을 가진 자에겐 한없이 축복 같은 단어. 하나 재능이 없는 자에겐 한없는 저주와 같은 단어. 그것이 스탯 카드였다.

그때의 내 스탯이 기억난다. 볼품없는 스탯. 마술의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렇다고 전사나 력사가 되기엔 약한 근력. 그나마 있는 재능이라곤 전쟁 중에 줄행랑치기 좋은 민첩성뿐.... 어느 곳에선가 객사하기 좋은 그런 범인凡人의 재능.

하지만 나는 운명을 바꾸었다. 노력으로 만들어 낸 엄청난 마나통. 어쩌면 스탯 또한 바뀌지 않았을까?

하지만 15살까지는 앞으로 3년. 스탯 카드를 받는 날까지 시간이 너무도 많이 남았다.

그렇다면...?

스탯 카드는 마나수의 잎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그 마나수의 잎을 직접 따 오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던전 공략을 해야겠다 마음먹는다.

마나수는 대부분 마나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던전코어' 근처에서 자라나는 법이니까.

006. 고도스 던전 (1)

불과 약 400년 전까지만 해도 서쪽 대륙의 인간들은 마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불이 없는 곳에 불을 피우고, 허공중에 얼음을 만들어 내는 그런 기적들은 오로지 신들과 용, 그리고 악마와 몇몇 특이한 존재들의 영역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기적들을 일컬어 '마법魔法'이라고 불렀다.

간혹 오래도록 무구武具를 연마한 검사들이 '오러(aura)'라고 부르는 기적을 행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신자信者들이 신의 힘을 빌려 약간의 기적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신적인 존재들에게 대기에는 미약한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400년 전 그런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은 사라진 현자 '장 쟈크몬드'다.

"용과 악마들이 쓸 수 있다면, 그건 인간도 써야 한다."

그런 신념 하나로 그는 이 이형異形의 존재들의 기술을 훔쳐 오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그는 자신의 세월 대부분을 그 '방법'을 찾는데 사용했다.

그 시절, 가장 위대한 전사이기도 했던 그가 찾아낸 방법이 바로.

'마나수'다.

던전의 최심부에 있는 '던전코어' 주위에는 반드시 자생하고 있는 이 나무는 그 잎사귀며 줄기와 뿌리, 심지어 열매에조차 마나를 보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심부深部를 허락한 적 없는 가장 강력한 던전들을 골라 공략했고, 마나수의 열매들을 따 왔다.

방대하고 진한 마나를 흡수하며 자란 열매들. 그건 그 기괴한 것들의 마법을 담기에 충분했다.

드래곤의 불의 숨결이.

악마들의 독의 바람이.

열매 안에 담겨 인간들의 도시로 옮겨졌다.

십수 년 후, 인간들 역시 그들의 기적을 모방해 세상에 없던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마술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다시 마나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나수는 마나를 흡수해서 보관하는 효과가 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대부분의 일들은 '마나'를 기반으로 일어난다.

검을 휘두르는 일부터,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하는 일. 발을 굴러 달음박질을 하고, 세상을 보고 냄새 맡고 들으며 소통하는 그 모든 일이 마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 말인즉, 내 몸 안에 흐르는 마나의 농도와 흐름을 알 수 있다면, 그건 곧 자신이 가진 '재능' 역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탯 카드'의 본질이다.

* * *

축축한 습기가 가득 찬 공간 이곳저곳에서 곰팡이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내추럴 던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주노스의 서쪽. 앙구르마 산맥에 있는 수많은 자생 동굴들 중에는 이런 내추럴 던전들이 많다.

그리고 지금 탐사하고 있는 '고도스 던전' 역시 이런 것들 중 하나다.

마나수를 얻기 위해 이 고도스 던전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2가지다.

하나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낮을 것이란 것.

내추럴 던전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일반적으로 던전의 은혜라고 불리는 '몬스터'들은 던전코어의 시스템이 마나를 이용해 만들어 내는 기적들이다.

하지만 내추럴 던전은 다르다. 지형地形 안에 자생하고 있던 다양한 동식물들이 자연스레 던전의 주민들이 된다.

던전의 은혜를 받아, 다소간의 변화를 가지지만, 태생적 한계로 그들은 다른 던전들에 있는 몬스터들에 비해 현저히 약할 수밖에 없다.

토끼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토끼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몇몇 등급 높은 던전에서 출몰하는 만렙 토끼들은 예외다.)

그리고 이 고도스 던전은 앙구르마 산맥의 던전 중에도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곳이다.

두 번째로 이 고도스는 심층부가 매우 얕다. 불과 약 5층 정도의 깊이 안에 던전코어가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고도스는 '학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잡기 쉬운 몬스터들을 잡다 보면 어느새 던전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유독 운이 안 좋은 날들이 있기는 하다.

던전의 난이도 역시 계절처럼, 날씨처럼 그때그때 바뀌기 마련이니까.

던전의 난이도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어제는 단검 하나를 든 초보 모험가도 공략 가능하던 던전이, 오늘은 베테랑도 쉽게 죽어 나가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마치 태풍처럼, 혹은 지진처럼 이 지옥 같은 난이도는 자연재해처럼 찾아온다.

그래서 이 변화를 던전의 '날씨'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좀 날씨가 안 좋은 날인 듯하다.

* * *

자신의 털을 잔뜩 곧추세우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놈들은 '키네마우스'라는 몬스터들이다.

가장 흔한 동물 중 하나인 '쥐'가 마나로 인해 변화된 이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쥐들의 2배 정도의 크기. 그러니까 새끼 고양이 정도의 몸집을 가지고 있다.

열 마리 정도까지야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놈들이지만, 문제는 백 마리 이상 모였을 때부터다.

그때부터 놈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개미나 벌 같은 군집 동물들 같아지는 것이다.

'못해도 2~300마리는 되겠는데....'

벽과 바닥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수많은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올리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요즘은 초보 모험자들은 고도스로 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날씨가 뒤죽박죽이라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도련님.'

올리나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 단위의 키네마우스는 숙련자 파티들도 고전을 면치 못할 때가 있다. 그만큼이나 까다로운 놈들이란 거다.

키약!

선봉인 듯 보이는 한 마리가 허공중으로 점프해, 나에게 몸을 날린다. 나는 곧장 들고 있는 숏소드로 놈의 배를 베어 버린다.

내장 조각과 피를 쏟으며, 놈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키네마우스들이 놈에게 몰려든다.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냐고?

아니다. 잡아먹는 것이다. 수십 마리의 키네마우스들이 죽은 놈의 몸을 뜯어 발긴다.

이 후미진 동굴 안에서 굶주린 놈들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먹는다.

'하나하나 상대하다가는 내가 당하겠는데?'

한 마리당 한 번 숏소드를 휘둘러도 수백 번이다. 놈들을 잡아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내가 배운 마술은 오로지 공격력이라곤 1도 없는 파티용 마법 스타랜턴뿐이다.

츠, 츠, 츠.

작은 소음들이 들려온다. 놈들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다. 어느새 놈들의 군집이 나와 스무 걸음 이내로 가까워진다. 단체로 달려들 속셈인 것이다.

그 말인즉슨, 내게도 결정이 필요하단 얘기다.

* * *

나의 친우 은둔 현자賢者 '장 피엘'이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는 바로, '마술 전략'이었다.

"강한 칼로, 약한 놈을 때려잡는 건, 푸줏간 주인이 고기를 써는 일이랑 다를 게 없거든."

장은 마나를 엄청나게 소모하는 고위계 마법들을 사용하는 일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생쥐가 고양이를 물 때, 소년이 자기보다 서너 배는 커다란 장정을 쓰러뜨릴 때. 그럴 때가 짜릿한 법 아니겠어?"

이 주에 한 번 정도는 만나 술을 기울이던 내 친구 장은 철저한 약자 옹호론자였다.

가장 약한 1위계 불 마술 '토치 파이어'로 4마리의 코볼트를 잡는 방법이나, 0위계 물 마술 '클린 워터'로 언데드 마술사 리치와 상대하는 방법 같은 것들....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우리는 술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렇게 술에 취한 몽롱한 정신으로 다양한 마술 전략을 이야기하곤 했다.

허풍에 가까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건 말도 안 된다'며 웃어댔고, 장은 '진짜 해 봤다'며 말도 안 되는 배짱을 부려 댔다.

"그러니까 말이야. 친구. 뒤집어 보라고. 가장 약한 놈이 가장 위에 서야... 그게 재밌는 거라니까~!"

그러다 완전히 만취하고 나면 했던 그 말. 장은 언제나 나에게 황제가 되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참 싫었고, 그 말이 나올 때쯤 되면 술자리를 끝내고 나의 거처로 돌아오곤 했다.

또 2주 후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 * *

가방을 뒤져 본다. 준비해 온 것들을 훑어본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마나통뿐인 황자.

아는 것이라곤 0위계 마법 스타랜턴 하나뿐이기에 준비를 안 하곤 도저히 올 수 없었으니까.

'찾았다.'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가 손에 잡힌다. 마나 스크롤이다.

마나수의 잎을 짓이겨 만든 이 서류에는 '시동키'가 되는 약간의 마나와, 글씨로 적더라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간단한 수준의 마술 언령言令이 적혀 있다.

물론, 어느 수준을 넘어간 마술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신들의 언어'를 필요로 하기에 스크롤로 만들 수 있는 마술은 기껏해야 3위계가 한계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온 마나 스크롤은....

'파도'다. 검은 어둠의 파도.

마치 갉아먹듯 벽과 천장 바닥을 기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그것. 바로 0위계 빛 마술 '밤의 안대眼帶'가 만들어 낸 어둠의 장막이다.

밤의 안대는 실은 기껏해야 눈을 가릴 정도의 영역에서 빛을 빼앗는 마술이다. 하지만 이 마술에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마나를 공급해서 그 넓이를 늘릴 수 있다는 것.

밤의 안대는 얼마나 많은 마나를 공급했느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물론, 크기가 2배 늘어날 때마다 필요한 마나의 양도 곱절로 늘어나기에 그 효율은 극악에 가깝다.

4위계 빛 마술 중에 한 사람의 시각을 완전히 차단하는 '시선 강탈'이 있기에 거의 대부분이 사용하지 않는 마술이다.

물론 3위계 이상의 마술이기에 마나 스크롤로 구할 수 없는. 내겐 그림의 떡 같은 마술이다.

* * *

어둠이 공간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진 '키네마우스'들은 이제 서로의 등 위에, 타고 또 올라타 마치 털로 만들어진 슬라임처럼 뭉쳐 꿈틀대고 있다.

"캬악, 캬아아악!"

위기를 느낀 놈들이 더욱 독이 올라 소리치고 있다. 마술이 풀리는 순간, 당장이라도 덮쳐 올 기세다.

마나 스크롤도 이제 거의 찢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면적만으로 놓고 봤을 때도, 지금 공급된 마나의 양은 이미 한계를 넘고도 또 넘었다.

'아, 이건 궁중 마술사들도 못 찢을 거라니까요!'

스크롤을 팔며 하던 상점 주인의 너스레가 떠오른다. 황자님께서 쓰시기엔 '일반 스크롤'은 어울리지 않다던 그의 말.

그가 추천한 '마스터피스'급 스크롤을 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랬으면 벌써 찢어졌을 테니까.

이제는 거의 사람 하나 누울 정도의 공간만이 남아 있다. 2/3 이상의 키네마우스들이 어둠의 영역 안에 빠져들어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고 있다.

"찍, 찍, 찍, 찍."

공포스럽다는 듯 울어 대는 놈들의 울음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스크롤에 마나를 쏟아붓는다. 지금껏 쏟아부은 양 전부를 합친 것만큼 많은 양이 한꺼번에 몸에서 빠져나간다.

스크롤을 잡은 팔이 순간 푸르스름하게 빛날 만큼의 마나 이동.

공간이 전부 검게 물들어 버린다. 단 한 마리도 도망칠 구석 없이.

이제 완전한 어둠만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007. 고도스 던전 (2)

"찍! 찍! 찍! 찍!"

어둠 속에서, 더욱 빨라진 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0위계 마법이 모두 그렇듯, 이 밤의 안대 역시 이렇다 할 공격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놈들의 움직임을 막고 있을 뿐이다.

오감이 발달한 놈들은 내가 한 발짝이라도 발을 떼는 순간, 그 소리를 듣고 달려들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번 생 가장 익숙했던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지금 여기 내 앞에 현현하라.'

이제 마술의 이름을 말할 차례다.

'스타랜턴.'

그리고 나는 또다시.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수천 번. 같은 이름을 마음속으로 수천 번 영창한다.

마음의 시간은 몸의 시간과 달리 빠르게 지나가기에....

수천 개의 10살짜리 아이 주먹만 한 빛 덩어리가 허공중에 만들어진다. 그것도 시간 차 없이....

키야야야약!

키네마우스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영창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감은 눈 안으로 스타랜턴의 빛이 스밀 때까지.

창조신 '올 파더'께서 처음 세상에 선물했다는 빛이 이만큼이나 밝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은 지금 바로 이곳에 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이 곳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곳이다.

이 곳에 있는 빛은 수백 마리의 키네마우스들의 시신경을 태우고, 장님을 만들기엔 충분한 양의 빛이다.

* * *

6할 이상의 키네마우스들은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다. 너무도 과도한 양의 빛에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몇몇 놈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긴 하지만, 꿈틀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직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온몸이 마비된 불구의 상태.

나는 숏소드를 꽉 그러쥔다.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한 마리, 한 마리. 가서 숨을 끊어 놓는 것.

나는 아직 숨이 붙은 놈들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아무래도 수백 마리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니까....

나는 내 몸 안에 들어찬 마나의 양을 가늠해 본다.

졸리지도, 그렇다고 마음이 술렁거리지도 않는 걸 보니 아직 마나는 동이 나려면 먼 것 같다.

다시금, 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 마술 수련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용도 부럽지 않을 마나통을 가질 수 있을걸?'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나의 친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 * *

피범벅이 된 숏소드를 마른 헝겊으로 닦아 낸다.

하나 이미 숏소드의 예리함은 이전만 못하다.

날이 뭉개지기도 했고, 미처 닦이지 않은 피들이 칼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나는 황가의 창고에 갔던 그날. 차라리 날이 상하지 않는 검을 달라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한다.

좋은 칼은 부르는 게 값이라 쉽게 구할 수 없는 법이니까.

댕그랑.

나는 결국 숏소드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장비는 죽음을 부른다.

허리춤에 있던 숏소드의 검집도 풀어 바닥에 던진다.

남은 것은 허리에 찬 검집 속 작은 단도 하나.

'아, 이건 저의 작은 선물입니다.'

창고에 갔던 그 날. 비서관 앙드리오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황자의 덕목 중 하나는 무력武力이죠. 황자님께서도 자기 몸 지킬 정도의 무술은 겸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작은 조언과 함께 건네준 단도.

코등이를 똬리를 튼 뱀의 모양으로 조각해 놓아,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나는 검이라 사용하기가 께름직해 쓰지 않으려 했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전투는 피하자.'

휙.

오른손에 단검을 빼 들었다.

사그락.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며, 나는 서서히 몸을 옮겼다. 동굴 더 깊은 곳으로....

* * *

두 번째 구간은 다행히 아무것도 없는 엠티 홀(Empty hall)이었다. 하녀 올리나가 싸 준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먹으며 휴식을 가졌다.

염장한 고기와 치즈, 넓은잎을 가진 야채 두어 가지를 빵으로 감싼 간편식이었다.

들어 있는 소스가 어우러져 식었음에도 꽤 괜찮은 맛이 났다.

'올리나가 보면, 솜씨가 괜찮단 말이야.'

돌아가면 꼭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싸 온 요리를 모두 먹었다.

세 번째 층에선 몬스터와 조우했다. 첫 번째 층에 있던 것과 동일한 키네마우스들이었다.

4마리로 이루어진 적은 마릿수의 그룹이었다. 이미 수백 마리를 상대한 탓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스타랜턴을 사용해 눈을 멀게 한 후, 곧장 달려들어 종유석 꼬챙이를 찔러 넣었다.

아무래도 단도를 쓰는 것이 께름직해 두 번째 층에서 몇 개 끊어 온 것이다.

그렇게 세 번째 층 역시 쉽게 클리어하고 나는 곧장 네 번째 층으로 향했다.

네 번째 층을 클리어하면 남은 것은 던전코어가 있는 다섯 번째 층.

모든 것이 순조롭게 느껴졌다.

* * *

쿠오오!

후두둑.

거대한 울음소리. 천장에 붙어 있던 종유석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큼이나 큰 울음이었다.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놈과의 간격을 벌렸다.

놈의 꼬리 끝이 마치 뱀의 머리처럼 나를 계속 향하고 있었다.

놈의 꼬리에 있을 리 없는 눈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만티코어.'

맹수를 닮은 머리. 흡사 멧돼지를 닮은 몸뚱어리. 그리고 전갈의 꼬리를 가진 몬스터.

'아니, 대체 왜 이곳에...?'

어느 정도 농도 짙은 마나가 내포된 고등급 던전이 아니면 쉽사리 마주칠 수 없는 놈이 이 고도스 던전에 있다.

생쥐나 도룡뇽, 박쥐 따위를 기반으로 한 몬스터들이나 모습을 드러내는 이곳에선, 지형적으로도 있을 리 없는 몬스터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아버지? 아니면....

쿠오오오!

만티코어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놈이 앞발을 굽히고 뒤꽁무니를 바짝 세운다.

고양잇과의 맹수들이 달려들기 전에 흔히 하는 동작이다.

놈이 이빨을 드러낸다. 빛이 부족한 동굴인 탓에 놈의 확장된 동공은 거의 빛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 * *

"으아아아악!"

왼쪽 어깨를 바라본다. 뜯긴 어깨 살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나는 곧장 마나 스크롤 하나를 꺼낸다.

1위계 치료 마술인 '지혈'이다.

상처 부위에 얇은 빛의 막이 형성된다. 상처 부위에서 피들이 배어 나오지만 막을 뚫지 못하고 다시 안으로 스며든다.

하나 아픔은 줄이지 못한다. 뜨거울 정도로 상처 부위가 쓰라려 온다.

방심한 탓이다. 그 거대한 몸에서 그토록 빠른 움직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놈의 앞발이 바닥을 박찼다, 라고 생각한 순간, 놈은 벌써 나의 뒤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이었다.

'정말 잘못하면... 또 죽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다시 한번 죽음을 직감한다.

기껏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는데, 또 뺏길 수는 없다.

놈이 살짝 먼발치에 떨어져, 또다시 돌격해 올 순간을 재는 사이. 나는 내가 가진 방법들을 다시 한번 가늠해 본다.

아직 쓰지 않은 스크롤 하나. 그리고....

단검.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 께름직한 단도를 손에 잡는다.

하나 마땅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뚝.

그때, 마술 지혈을 쓰기 전 흘렸던 핏방울이 단검에 가 닿는다.

샤아아악!

단검 코등이 뱀의 보석 눈이 번쩍이더니, 살아 움직이듯 머리를 움직인다. 입을 벌린 뱀이 그대로 송곳니를 나의 손등에 박아 넣는다.

"악!"

짧은 비명. 그리고 그 순간... 8자를 그리며 움직이던 만티코어의 꼬리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어?'

나는 살짝 놀라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다. 그 움직임조차 느리다.

1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야 모든 움직임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나는 단검을 바라본다. 빛나던 뱀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그거 좋은 거예요, 황자님. 아마 전투에서 생각할 시간을 좀 벌어 줄 겁니다.'

나는 그제야, 앙드리오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거 생각보다 큰 빚을 졌는데...?'

나는 다시 한번 단검이 손안에 가득 차도록 자세를 고쳐 잡는다. 혹여라도 놓칠 일이 없도록.

심호흡을 한다. 가방에 아직 남아 있는 스크롤에 들어 있는 마술은 방금 전 쓴 것과 동일한 지혈.

혹여라도 문제가 생길 경우 한 번 더 피를 막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치유 마술 지혈 해제.'

상처 부위를 막고 있던 빛의 막이 사라진다. 이내 피들이 솟구쳐 나온다. 그 피들이 팔을 타고 흘러 곧장 단검을 향해 간다.

탐욕스런 뱀파이어처럼 단검은 흐르는 피들을 모두 머금어 간다.

단검의 코등이. 즉 뱀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만티코어의 꼬리가 다시 느려진다.

'이 효과가 얼마나 유지될까?'

시간이 없다. 나는 그대로 만티코어를 향해 달려 나간다.

* * *

검을 들고 시합에서 싸워 먹고 사는 검투사들과, 마술사들은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아, 술집에 가면 때때로 이 두 집단의 싸움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말싸움으로 끝나지만, 간혹 말로 끝나지 않고 주먹 싸움으로 불거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대결은 열에 두 번 정도 마술사들의 승리로 끝난다.

평생 운동이라곤 하지 않는 골방의 공부벌레들이 대체 어떻게 검투사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게 내겐 언제나 의문이었다.

* * *

느려진 시간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 내가 발걸음을 떼자, 이내 만티코어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다시 앞발을 굽히며 돌격 자세를 취한다.

나를 향해 곧장 달려올 기세다.

놈을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살짝 느린 걸음을 걷는 시늉을 한다.

놈이 걸려든다. 놈이 앞발로 땅을 박찬다. 상체부터 앞으로 튀어 오른다. 이내 부풀어 오른 놈의 뒷다리 허벅지가 펴진다.

뒷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놈이 그대로 허공중에 떠오른다. 놈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그 모습은 마치 대포알을 방불케 한다.

나는 살짝 몸의 각도를 돌린다.

그대로 놈이 나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예상과는 다른 움직임에 놈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뒹군다.

이때다. 나는 놈을 향해 뛰어간다.

느린 팔과 다리가 마치 물속을 허우적대는 것 같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몸을 움직인다.

팔의 핏대가 불거져 나온다. 다리에 근육이 윤곽이 잡힐 만큼 뚜렷하게 부푼다.

12살짜리 어린 몸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육들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이 느린 시간 속에서, 나의 움직임만이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상황을 파악한 만티코어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대로 단검을 두 손을 모아 잡는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나를 물어뜯으려는 듯 놈이 입을 벌린다. 나는 그 주둥이를 박차고 뛰어, 놈의 목덜미에 올라탄다.

놈의 눈이 내 앞에 드러난다. 나는 단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곧장 내리꽂는다. 놈의 왼쪽 눈을 향해.

단검이 놈의 왼쪽 눈에 그대로 박힌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이내 단검의 코등이가, 내 주먹이 놈의 눈알을 향해 직행한다.

뭉개진 수정체가 마치 젤처럼 터져 나온다.

나는 그제야 손을 빼낸다.

휙.

등 뒤에서 놈의 꼬리가 날아온다. 나는 살짝 몸을 피한다. 하지만, 어깨에 꼬리 끝이 스치고 만다. 놈의 전갈 독이 내 피부로 스며든다.

모세 혈관들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다시 단검을 하늘로 높이 올린다. 그리곤 놈의 오른쪽 눈을 향해 그대로 내리꽂는다.

놈의 수정체가 짓뭉개지고 나서야, 단검을 든 팔을 난 빼낸다.

놈이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지른다. 하나 나는 멈추지 않는다. 단검을 바닥에 던지곤, 구멍 뚫린 놈의 두 눈동자를 향해 팔뚝을 집어넣는다.

이제 가장 잘하는 일을 할 때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지금 여기 내 앞에 현현顯現하라.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스타랜턴!'

수천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놈의 눈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코에서, 입에서. 귀에서, 그리고 놈의 항문에서까지....

뚫려 있는 모든 구멍에서 놈이 빛을 발한다. 이내 살갗에서조차 빛이 새어 나온다. 놈은 완전히 하나의 가로등 불빛 같은 꼴이 되어 버린다.

"쿠오오오오오오!"

이제서야 놈의 울음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나에게 주어진 그 '느린 시간'이 모두 끝난 것이다. 나는 모든 힘을 잃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비명을 지르는 놈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저래도 죽지 않는다면... 죽는 건 내가 될 거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들은 전부 했다.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만티코어의 독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서서히 눈을 감는다.

008. 만남, 그리고 또 다른 만남 (1)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느낌에 서서히 눈을 뜬다.

'죽음'에서 깨어날 때 느꼈던 그 감각. 지독히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느껴지는 불쾌감.

"야, 난 네가 이렇게 터프한 놈일 줄은 몰랐다."

누군가 내가 말을 걸어온다.

'이 던전 심층부에? 누가?'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악!"

하지만, 심한 격통에 결국 다시 눕고 만다.

"가만있어. 죽을 걸 살려 놓은 거니까."

서서히 눈을 떠 본다. 쇳덩이만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벌린다.

'푸른...색?'

눈앞에 있는 인간의 피부색. 살짝 푸른 기가 돌고 있다.

아니, 인간 중엔 저런 피부색을 가진 인종은 없다. 아마 다른 존재일 것이다.

뱀파이어? 아니, 뱀파이어의 피부는 희고 창백하며,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반투명하다.

엘프? 엘프가 이런 동굴 깊숙이까지 내려온다고? 파티를 맺고 던전 탐험을 하지 않는 이상 엘프는 이런 어둡고 습한 동굴에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다.

다크엘프? 그들이 피부는 어두운 암갈색을 띤다.

그렇다면....

"쉬라니까 그러네. 머리 굴리지 말고. 알아서 내가 설명할 테니까."

살짝 짜증이 섞인 어조. 나는 이내 생각하길 그만둔다.

"좋아. 다행인 줄 알아. 독이니까 망정이지. 다른 거였으면 넌 이미 죽었어."

놈이 이죽거리며 나를 응시한다. 내가 재밌다는 듯이.

"반가워. 악수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은 네 상태가 그러니 못 하는 게 유감이군."

순간, 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마치 곡예 비행하듯 크게 한 바퀴를 빙 돌더니 다시 땅에 착지한다.

그 짧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쉬지 않는 걸 보니 꽤 부산한 놈인 것 같다.

"좋아. 어쨌든 통과야. 너."

'통과? 그게 무슨 소리지?'

"황자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단 소리지."

'황자 게임.'

나는 순간 주노시스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길로틴에 목이 떨어져 죽기 직전, 그와 나누었던 담화가.

그는 그때, 혹여 다음 생이 있다면 꼭 '황자 게임'에 참여하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의식이 돌아온 후,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서서히 상체를 일으킨다. 고통이 엄습하지만 참는다.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놈이 불쑥 손을 내밀어 온다. 그의 손에 스크롤이 들려 있다.

내 가방에 들어 있던 지혈 스크롤이다.

"이젠 일어났으니 네가 막아."

나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를 바라본다. 마치 액체와 같이 짙고 어두운 무언가가 상처 위에 쌓여 있다. 안에는 작고 빛나는 가루들이 흐르며 소용돌이 무늬를 만들고 있다.

"우리들의 마나는 사람 몸에 닿아서 좋을 게 없거든. 자, 푼다."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그 액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시 피가 슬금슬금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손을 뻗어 스크롤을 집어 든다.

'지혈.'

이내 어깨의 상처 위에 빛의 막이 만들어진다. 피가 멎는다.

"좋아. 고생 많았어. 어린 황자."

놈이 박수를 치며 다시 공중을 한 바퀴 돈다. 뭐가 저렇게 신나는 걸까?

"그래, 그래서 넌 뭐지?"

나는 질문을 던진다.

"네가 찾아다니던 해답."

아리송한 대답.

"난 찾아다닌 게 없는데?"

내가 다시 묻는다.

"아니, 넌 계속 찾고 있어. 안 그럼 날 만날 일도 없었을걸?"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번 삶에서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딱 하나. 그럼....

"넌 날 황제로 만들어 줄 수 있나?"

"그래. 그게 네가 찾는 답이야!"

놈이 웃기 시작한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인다.

"물론, 상황이 잘 풀렸을 때 이야기지만."

순간, 놈의 표정이 바뀐다. 차가운 눈빛. 주노시스와 아버지. 두 사람에게서 보았던 그 맹수의 눈빛.

"이봐, 황자. 이 나라가 믿는 신이 누구지?"

"주노스."

"그럼 그 신이 주관하는 것들은?"

"금속. 그리고 욕망."

"욕망. 탐욕. 그건 한 장 차이잖아? 안 그래? 좋은 것만 가져야 할 신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주관한다니.... 재밌지 않아?"

"...본론이 뭐야?"

"너도 알 거야. 세상엔 선한 신들만 존재하는 게 아닌걸."

"악신을 말하는 건가?"

"그래. 악신들의 계보도 좀 알고 있나 보네?"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 정체도 모를 존재와의 대화는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질문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허나...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런 아우라가 흘러나온다.

나는 계속 대화를 이어 간다.

"어느 정도는."

"탐욕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을 아나?"

"주나펠. 탐욕과 승부를 관장하는 악신"

"그래. 그건 주노스의 이명異名이야."

"...!"

"네가 사는 이 서쪽 대륙은 주나펠이 만든 신들의 도박장이야. 특히나 주노스. 네 나라는 더 심하지!"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 놈은 이 땅. 철혈의 제국 주노스가 속해 있는 이 서쪽 대륙 전체를 도박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참 내 표정을 바라보던, 놈이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주노스에는 황자들이 발에 차일 만큼 많다."

놈이 주노스의 격언을 입에 담는다.

"왜 그럴까? 왜 그토록 많은 황자들이 필요할까?"

"...."

"너희들이 게임의 '말'들이거든."

'게임의 말'.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너무도 모욕적이다.

'철혈의 제국.'

서쪽 맹주 3국 중 가장 강한 국력을 가진 모두가 선망하는 나라. 지금 놈은 그 '주노스'가 마치....

"그래. 보드게임 같은 거지."

'보드게임.'

나는 지금 막 내 머릿속에서 정리된 말을 놈에게 꺼내어 본다.

"우리들이 신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건가?"

나의 말투 안에 살짝 분노가 느껴진다. 숨기려 했지만,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말을 이어 간다.

"꿈도 꾸지 못하고, 평생을 황자궁에서 갇혀 지내는 그 수많은 서열 하위의 황자들이 모두...."

"너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하하하!"

놈이 다시 웃기 시작한다. 꼭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모, 든, 황, 자들에게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해?"

'모든 황자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럼...."

"그래, 맞아! 우리들도 사람 보는 안목이란 게 있거든. 애초에 싹수가 없는 놈들에겐 관심 없어."

놈이 나를 쳐다본다.

"관심 없다는 소리지."

허공중에 떠오르는 놈의 몸. 놈이 다시 공중제비를 돈다.

다시 바닥에 착지한 놈이 손을 뻗는다. 그 순간....

웅.

나의 옷 안쪽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서서히... 나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동전'이다.

창고에서 선택한 바로 그 '운명'의 동전.

"대부분의 놈들은 그곳에서 다른 걸 선택하지. 검이니, 돈이니 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 말이야."

이내 허공을 날아 동전이 놈의 손 안에 들어간다. 놈이 동전을 손가락 마디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짜들은 알거든. 내 운명을 바꾸는 건 그런 게 아니란 걸."

"...."

"만남. 인간의 인생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놈이 동전을 허공중으로 던졌다 받는다. 놈의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던 동전이 이내....

확.

불꽃과 함께 타 없어진다.

"주나펠은 자신의 영혼을 나눠 72명의 마신들을 만들었지."

서서히 놈이 어떤 존재인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명백해진다. 놈의 정체가.

"그래. 네가 그 72마신들 중 하나로군?"

놈이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음을 보인다. 정답인 것 같다.

"그래! 선택받은 자들 앞에 나타나는 '운명'! 난 이번 게임에서 너를 선택하기로 했다!"

놈이, 아니 저 마신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잡지 않는 채, 나는 놈을 올려다본다.

"계약을... 하자는 건가?"

그렇게 말 많던 놈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지긋히 바라본다. 그저 가만히 손을 내민 채로....

그 손이....

'해선 안 될 계약'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손을 잡는다.'

그래. 각오를 했었다. 황제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용하겠다고. 아니,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고.

악마가 아닌 마신이라면. 차라리 그건 오히려 내겐 행운이다.

영혼을 팔 거라면 차라리 신에게 파는 것이 낫다.

* * *

고도스 던전에서 돌아온 지 약 일주일이 지났다.

던전 공략을 끝내고 돌아온 그 날. 옷이 전부 피에 젖은 채 돌아온 나를 보고 하녀들은 거의 졸도하다시피 했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나의 던전 공략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치료청에서 가장 유능한 치료사들을 나의 황자궁까지 파견해 주셨다.

거의 반나절에 걸친 치료 덕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이 다 잘려 나간 어깨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의 흉터만 남긴 채 완전히 나아 버렸다.

가장 걱정된 것은 만티코어의 독이었으나, 다행히 체내에 어디에도 독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악마, 악신, 마신 같은 마魔에 속한 존재들은 독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하녀 올리나는 내가 치료받는 내내 내 방 앞을 서성였다고 한다.

그 반나절 내내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다음 날 오전 일정을 내리 쉬었다고 한다.

'시내에 가면 단 디저트라도 하나 사다 주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애정해 주는 마음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다.

비록 상처는 나았으나, 이틀은 내리 잠을 잤다. 생사를 오고 가는 경험 속에서 심리적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던전에서 돌아온 후, 나흘째 되는 날.

나는 던전에서 얻은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선 그 이름 모를 마신.

'때가 되면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만남을 기약하며 그는 다시 내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떠나기 전 그는 '반드시 자신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추가로 남겼다.

정체도 모르는 그를 필요로 할 때? 아직은 감이 안 잡혔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와야 하는 운명은 대체로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므로.

두 번째로 '운명의 동전'.

불꽃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동전은 다시 나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대화 도중 그가 했던 '이건 운명이 아닌 걸로 치지.'라는 말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또 다른 운명이 나를 찾아온다는 걸까?

기대 반, 두려움 반.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세 번째로는 마나수 잎.

아무래도 등급이 낮은 던전에서 얻은 것이어서 그 마나 흡수량과 순도는 현격히 낮은 저급이지만, 재능을 간파하기엔 무리가 없는 것들이었다.

몸이 나아지고 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마나의 잎들을 이용해 앞으로의 나의 성장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것이다.

네 번째로 마석. 스스로 마나를 발하는 이 돌들은, 다양한 곳에 코어(Core)로 쓰인다.

쉽게 찢어지고, 부서지는 스크롤과 달리 영구적 혹은 다회용으로 쓰이는 '마술 반지'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만티코어의 마석은 순도가 높기에 분명 괜찮은 장비를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던전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 째 되는 오늘.

나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서열 7위의 황자.

얼음 대공 '아이시스 주노스'

바로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009. 만남, 그리고 또 다른 만남 (2)

"인사는 됐다. 누워 있도록."

서열이 10위 안짝에 들면 누구든 황제가 될 권리를 가진다.

혹여 황제가 급사하여 권력을 양위讓位해야 할 경우, 몇 가지 과정과 중신들의 회의를 거쳐 이 10위권 안의 황자들 사이에서 다음 황제를 선출한다.

한마디로 '아이시스'는 이 나라에서 가장 황제에 가까운 10명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여간 궁금해서 말이지, 네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거든."

아이시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는 나 '미하엘 주노스'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한다.

물론 그게 꼭 좋은 소식인 것만은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을 더 많이 입에 담기 마련이니까.

"헛된 꿈을 꾸는 미치광이라고 하더군."

'헛된 꿈을 꾸는 미치광이.'

그게 바로 지금 나에 대한 평가.

사람이 살면서 개화開花할 수 있는 재능은, 모두 마나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는 바로 마나의 양.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마나의 흐름.

인간의 몸에는 피가 흐르는 핏줄과 더불어, 마나가 흐르는 마나의 줄이 함께 존재한다.

이 줄이 어떤 식으로 나 있는지가 그 사람의 역량을, 아니 '인생'을 결정한다.

근육 전체로 뻗은 굵은 마나줄은 그 소유자를 역사力士로 만들어 준다.

손발 끝, 마디마디까지 세세하고 촘촘히 짜인 마나줄은 민첩함을 선사한다. 이런 마나줄을 타고난 자들의 발재간은 여간해선 따라갈 수 없기 마련이다.

마술사들이 부리는 마술과 신도들이 보여 주는 기적조차도 이 마나줄에 의해 발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네 어머니는 아무리 잘 쳐주어 봐야 범인凡人이다. 그 아직도 노화를 모르는 생생한 '미모' 말고는 무엇 하나 '재주 없는 여자'지."

'재능 없는 사람' 혹은 '평민'.

타고난 마나줄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이들.

열에 아홉이 이런 혈통을 타고 태어난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신분은,

일개 하녀.

선조에 선조까지 평민일 것이 분명한 나의 어머니의 마나줄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너도 별 볼 일 없는 마나줄을 가졌을 거라고."

"...."

아이시스의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짐작된다.'

지금 귀족들이 내게 가지는 마음이 응원이 아닌 '비방'일 것임이.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 '세상 가장 작은 수도꼭지를 가진 세상 가장 큰 물통.'"

명명백백한 비하의 의도가 담긴 멸칭蔑稱. 예상했던 반응들이지만, 직접 들으니 충격이 온다.

"하지만 난 널 다르게 본다."

아이시스가 말을 이었다.

"난 널 몰라. 하지만 이건 확신한다. 그 마나통은... 인간인 가질 만한 수준이 아니야."

"...."

"분명 무슨 짓을 한 게지. 그게 아니라면...."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한다. 재밌다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정답을 찾아보려는 수색의 눈빛인 걸까?

"인간을 넘어선 재능? 아니면... 노력인 걸까? 하지만 어떤 노력?"

말하는 내내 그의 시선은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노력. 할 수 있다면 나도 하고 싶군. 물론, 자네는 알려 주지 않을 테지?"

"...."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아니, 말한다 해도 믿으시기나 할까?

'젖도 떼지 않는 갓난쟁이 시절부터 두통을 참아가며 마법을 썼던 그 일을...?'

"아신다 해도 못 하실 겁니다."

나는 결국 조금 은유적인 대답을 꺼내 본다.

"그래, 특수한 뭔가가 있다는 거군. 너만 아는 방법이거나, 아니면 너의 신체에만 있는 특수성이거나...."

"...."

"그도 아니라면... 내게 말하기 싫은 것이거나."

계속해서 나를 떠보는 그의 말투. 아마 앞으로 나는 이런 말투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려는 길은 그런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거짓은 고하지 않았습니다. 황자님."

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가 이내 다시 풀린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하튼 난 내가 둘 중 하나는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인간을 넘어선 재능. 혹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노력. 둘 중 하나."

"...."

'히죽'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그런 인간을 좋아하지."

계속 문가에 기댄 채 서서 말을 건네던 아이시스가 이내 나에게로 걸어온다.

완전히 침대 앞에 다다른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지금 나는 너에게 '형제의 관계'를 제안하는 것이다."

'형제의 관계.'

모든 황자들은 '앙그로 주노스'의 피를 물려받은 형제들이긴 하지만, 그 관계는 사실 타인보다 못 하다.

100명이 넘는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어찌 됐든 우리들은 모두 경쟁자들이니까.

'협력할 수도 있지만 방향이 다르다면 언제고 적이 될 수 있는 사이.'

결국 황제는 하나만이 될 수 있다. 황자들은 그래서 결국 형제이기 이전에 모두가 라이벌이고 적이였다.

그래서 황자들은 쉽게 서로를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적에게 살가운 호칭을 하지 않듯이....

그래서 '형제'라는 말은 그 어떤 계약보다도 특별한 작용을 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저 서로를 형, 동생으로 부르는 일일 뿐이지만, 이 호칭이 정치적으로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형'들은 '동생' 황자의 위기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형제의 관계라는 것이 보통은 '형'이 제안을 해 오는 것이기도 하고, 황자들에게 있어서 '말'이란 주워 담을 수 없는 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서열의 황자를 '형'이라 부를 수 있게 된 '동생'들은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게 비록 서열 하위권의 황자들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자님께서 얻으시는 건 무엇입니까?"

조심스레 물어본다. 가볍게 생각해 보면 '아이시스'에게 이득이 될 게 없는 협정이다.

"하하. 12살짜리치고는 참 당돌하구나. 미하엘."

그가 웃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안심이 된다.

"난 너의 가능성에 걸려는 거다."

입꼬리가 다시 수평을 찾는다. 웃음을 거둔 것이다. 아이시스는 다시 날 바라본다.

"네가 뭐라도 '하나'는 될 것 같거든. 그때가 되면 네가 나를 돕는 거지."

이해가 된다. 아이시스의 속내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빛나고 있다. 아니, 이글거리고 있다.

'욕망이 그득한 사람들의 눈'.

아니, '도전하는 자들의 눈'.

"나는 될 거거든, 황제."

살짝 놀라움이 인다. 그가 얼음 대공이라고 불리는 탓에 나는 그를 '차가운 사람'일 것이라 예상했었다.

허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의지 넘치는 뜨거운 사람이다.

'오해였구나.'

나의 머릿속 수첩에서 '아이시스 주노스'에 대한 항목을 다시 써 내려간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 안에 누구보다 큰 욕망을 가진 황자.'

"그때가 되면, 너는 내 우편右便에 서는 거야. 어떠냐?"

"...."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살짝 흥분한 말투로 그는 계속 말을 이어 간다.

"너의 그 마나가 머리 굴리는 데 쓰는 용도라면, 난 널 재무부 장관으로 쓸 것이다. 힘을 쓰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럼 나는 널 내 기사단 단장을 시키겠다."

그는 지금 미래를 그리고 있다. 황제 아이시스의 미래. 확신에 찬 그의 말투가 내심 싫지 않다.

"네가 가진 재능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나는 널 사용하겠다!"

'사용한다'라....

자신의 행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의 말투....

그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니 미하엘. 너는 내 동생이 되어라."

그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해 온다.

나는 잠시 내 손의 행방을 고민해 본다.

'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뭐... 답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지만.

* * *

"형님."

자신이 타고 온 마차 앞에 서 있는 아이시스에게 나는 말을 던진다.

"그럼 또 가까운 시일 안에 뵙겠습니다."

본궁으로 돌아가는 그를 배웅하며 나는 '형'이란 말을 꺼내 보았다.

앞으로 더 자주 부르게 될 호칭이기에, 조금이라도 입에 익혀 볼 생각이었다.

"아직 어색하구나, 미하엘. 다음에 볼 때는 조금 더 편해져 있었으면 좋겠어."

만약 누군가가 본다면 절대 믿지 않을 만치 환한 미소가 그에 얼굴을 가득 채운다. 누가 지금 이 미소를 보고 그를 '얼음 대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가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악수로 화답한다.

덜거덕, 덜거덕.

마차 바퀴가 움직이며, 아이시스가 나의 황자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간다.

작아지는 그의 마차를 보며, 나는 몇 가지 생각에 잠긴다.

사실 그와의 '형제 관계'를 주저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 연도 7월 안에 일어날 수렵 국가 '웅가'의 대규모 반란.

그 진압을 위해 웅가로 향했던, 아이시스는 그곳에서 한쪽 팔을 잃고, 얼굴에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비록 한쪽 팔이야,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해 '얼음 의수'를 만들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얼굴.

얼굴 상단 전체를 뒤엎은 상흔傷痕은, 이후 그가 대외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도록 만든다.

가장 강력한 차기 황제 후보 '얼음 대공'이 일선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음... 가능하면 이건 원래 역사대로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웅가'의 반란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일. 나는 그사이에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집사 '올란도'를 나의 방으로 부른다.

* * *

"이건... 신기하군요."

올란도는 내가 적어 준 쪽지와 몇 가지 그림들을 받은 즉시 유심히 보고 있다. 벌써 3번 넘게 내용을 정독한 그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 안에 적은 것들은 아직 이 시절에는 없는 방책들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요...? 사실 황자님께서는...."

순간, 올란도가 아차 싶은지 자신의 입을 막는다. 대충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짐작이 간다.

'사실 황자님께서는... 12살 꼬마일 뿐이시잖아요.'

16년. 내가 죽은 28살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 십수년이란 시간은 쉽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수많은 상단이 무너지고, 강과 산이 형태를 바꾸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전쟁 역시 양상을 바꿨다.

구태여 마술사나 전사가 아닌 일개 평민들도 전쟁에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는 변화가 온 것이다.

지금 이 12살 미하엘 주노스의 머릿속에는 그 방법이 담겨 있다.

"제가 따로 부탁드린 것만 해 주시면 나머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집사님."

조금 목소리를 강하게 내어 본다. 그러자 올란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황자님. 제가 선을 넘었군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분명 쓰임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황자님을 보필하기 위해 있는 몸. 분명 이유가 있으시기에 이런 것들을 모으라고 하신 것이겠죠."

다행히 올란도는 나의 말에 수긍해 준다. '언젠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좋은 어른'이다.

"그럼. 황자님.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올란도가 방을 나간다.

이제 드디어 나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던전에 들고 갔던 그 가방이다. 앞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서 나는 '마나수의 잎'을 꺼낸다.

이제 드디어 '나' 자신을 확인할 시간이다.

010. 가장 작은 수도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