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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020-030

020. 헤르메 스트리트 (4)

"도대체 이런 물건은 어디서 찾은 거야?"

검으로 된 스켈레톤, 아니, 각인사는 벌써 20분이 넘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빈 구멍에 외눈 돋보기를 가져다 대고는 들여다보고 있다.

'뱀 단검'을.

"그래서 이게 뭔데요?"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올리나의 찌푸린 표정.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뱀 단검을 보여 준 이유는 단순했다. 대장장이가 분석을 거절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뱀 단검은 아무리 봐도 '각인'이 새겨진 물건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기적이 새겨진 것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물건의 전문가.'

그게 각인사 말고 또 있을까?

"'마법'이야, 이건."

'마법'. 인간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신비한 것들에게만 허락된 기적.

"그래서 그게 뭐가 좋은 건데요?"

올리나는 단도직입적이다. 굽이진 곳 하나 없는 직진하는 말투다.

"딱히."

"딱히요?"

"마법으로 만든 불이나, 마술로 만든 불이나. 뜨거운 건 매한가지잖아?"

"그럼 별거 없네요?"

'딱히.'

딱히라는 말은 올리나를 실망시킨다.

마법을 쓰는 존재들이라 해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각인사는 말을 이어 간다.

"마술사는 곧 죽어도, 마법사들을 이길 수 없지."

'아주 고위계는 별개지만....'

순간, 불쑥 뱉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애써 참는다. 오래전 들었던 말 하나. 나의 친우 장 피엘이 던졌던 한마디....

* * *

"이미 극한에 다다른 마술은 마법이나 다를 바가 없지."

보름 만에 만난 장 피엘은 '이번에'는 자신이 꽁꽁 숨긴 비장의 술이 있다며 연거푸 잔을 건네 왔다.

짙은 밤의 숲에만 난다는 '포도'의 아종. 그것을 발효시켜 만든 '수제 포도주'.

'분명 다를 것'이란 장의 말대로 그가 준 술은 독했고, 감칠맛도 강렬했다.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여운이 남아 있다.

"신들에게 마법을 훔쳐 왔을 때, 그 정도의 대비도 안 했을 것 같아?"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장이 외쳐 댔다.

"드래곤조차 죽일 수 있어. 마술은!"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마법을 사용한다. 신이나 진배없는 짐승들.

언제나 마술 회의론자였던 장은 그날만큼은 잔뜩 흥분해서 '마술' 예찬론을 펼쳐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단계까지 못 가. 그게 문제...."

안타까움이 잔뜩 배어 있는 말투.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아니 십만의 하나만이 간신히 닿는다는 10위계의 고위계 마술.

한 나라의 서너 명의 마술사만이 그 단계에 도달한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다르단 건데?"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이미 그 즈음 장은 곯아떨어져 있었으니까. 그의 포도주는 정말 독한 술이었다.

* * *

'삼 일 후에 찾아와.'

우리가 떠나기 전 각인사가 던진 마지막 문장. 우리에게는 유예 기간이 생겼다.

'3일.'

꼼짝없이 헤르메노스를 떠날 수 없는 시간.

각인사는 그때까지 나에게 필요한 각인을 준비해 놓겠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나는 대장장이는 아니니까... 무기는 알아서 준비해 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잡기雜技가 많으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말처럼, 차라리 솔직한 그 말이 나는 더욱 신뢰가 갔다.

다양한 것들을 다 잘한다며 전문가를 자처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인간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이 3일 동안, 이 도시에서 '대장장이'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제대로 사용할 줄 알면, 꽤 재밌는 놈일 거야. 이놈.'

순간, 각인사가 던졌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뱀 단검을 나에게 되돌려 주며 건넨 말. 각인사는 내가 이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능력 있는데.... 이놈 욕심이 많아. 그건 조심해.'

그와 함께 던졌던 의미심장한 경고.

나는 뱀 단검의 콧등이에 새겨진 뱀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 얼굴이 마치 히죽 웃고 있는 것 같다.

'소름 끼치는 놈. 얼마나 더 괴롭히려고.'

나는 마음속에 떠오른 말을 애써 주워 담는다. 어차피 들을 사람 없는 메아리기에....

* * *

어찌 됐든 우리에겐 3일이란 유예 기간이 생겼다. 하루 이틀 정도 대장장이를 찾아 헤매인다 해도, 꽤 넉넉한 시간이다. 간만에 생긴 여유다.

"어떻게 할까요, 황자님? 우리 어디 놀러라도 다닐까요?"

올리나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온다. 비록 힘들기야 했지만, 헤르메 스트리트를 돌아다니고 이 도시에 대한 기대가 생긴 것 같았다.

동서든, 남북이든 그 어디로 가든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야말로 마술 같은 도시.

"미안, 올리나. 갈 곳이 있어."

올리나의 팔八자로 변한 눈썹을 나는 애써 무시한다. 정말 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한 가지 유흥. 나는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 * *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법 도구는 국보로 여겨진다.

각인으로도 해낼 수 없는 수준의 일을 마법 도구는 해내기 때문이다. 크게는 전쟁의 승패를, 작게는 위정자의 치세에 힘을 보태는 것이 이 마법 도구들이다.

그래서 마법 도구들은 대부분 국고國庫 깊숙한 곳에 보관된 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그런 점에서 헤르메노스에는 다른 마법 도구들과는 다른 '특별한 도구' 하나가 있다.

헤르메노스의 체스말.

이 도구의 성능은 단순하다. 바로 '대신해 주는 것'이다. 이 체스말들은 계약된 상대가 받는 데미지를, 심지어 평소의 경우라면 즉사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이를 대신해 준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는 가능하다. 목숨을 걸지 않는 결투가.

그것이 이 도시의 명물 '스타디움'이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다.

* * *

사과 설탕 절임. 신 열매를 갈아 만든 쥬스. 그리고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 후에 우리는 곧장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인산인해였다.

이번 해에 들어 5번째 마술 대회 예선이 접수 중이었기 때문이다.

'헤르메노스의 체스말'들 역시 일반적인 체스말들처럼 흑색 16개, 그리고 백색 16개. 총 32개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체스 말로 한 번의 '죽음'을 면제받을 수 있기에. 16강전일 경우, 총 30개의 말이 필요하다.

여분으로 2개의 말 정도를 쓰지 않고 쟁여 둔다고 했을 경우, 딱 맞는 숫자다.

하나의 말이 다시 '죽음'을 대체하기 위해선 총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타디움이 아무리 헤르메 스트리트의 명물이라고 해도, 한 달에 할 수 있는 이벤트의 수는 최대 2번.

운과 때가 맞지 않으면, 참가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 돌아갈 수 있는 게 바로 이 '스타디움' 경기다.

"자, 자. 모두 질서를 지켜 주세요. 빨리 접수한다고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결투'

얼마나 많은 모험자들이 꿈꾸는 일일까? 그래서 스타디움 주위는 언제나 모험자 무리로 들끓고 있다.

"그런데 황자님?"

"뭔데, 올리나?"

"왜 참가하시는 거예요?"

올리나는 살짝 기분이 나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또, 내가 사서 사선死線으로 뛰어드는 것이니까.

"왜 마음에 안 들어?"

"네.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결투잖아요."

"맞아. 그렇긴 하지."

"죽을 만치 위험한 일도 일어나는 거잖아요?"

"맞아. 그렇긴 하지."

"근데 왜 참가해요?"

"그게 중요한 거야. 올리나."

올리나는 언뜻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갖 실험을 다 해 볼 수 있잖아. 내가 어디까지 마술이 주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또 내가...."

"황자님... 솔직히... 황자님은 어딘가 살짝 이상한 사람 같을 때가 있어요."

올리나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 덕에 둘의 대화는 끝이 나긴 했지만, 내가 말한 저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지, 내가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살면서 사선死線에 스스로 뛰어든 적 없는 28살 미하엘이 아닌, 12살의 전투광 꼬마 미하엘은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는지....

그런 데이터가 필요했다. 나에게는.

"도대체 언제 시작해요?"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아직 추첨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결투' 한 번을 해 보겠다고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일 년 가까이 이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모험가들일 것이다.

"네. 곧 시작합니다. 그러니...."

접수 담당자인 듯 보이는 남자는 언제나 그래 왔다는 듯 능수능란하게 그들을 대처한다.

이런 일들은 늘상 있는 일이란 듯이....

그 사이, 멀리서 다른 접수원 하나가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온다.

그 안에는 이번 경기의 제한 사항이 쓰여 있을 것이다.

스타디움의 경기는 매번 규칙이 바뀐다.

그래서 이 규칙 때문에 참가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태반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나 강한 자들만이 스타디움의 경기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디움에 이토록 많은 모험가들이 모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술사 한정.]

첫 번째 규칙이 발표되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며, 야유 소리가 들린다.

대부분이 전사들이다. 허나 누굴 탓할까? 마술사의 도시에서 '마술사'들이 싸우는 걸 보겠다는데?

그렇게 야유 소리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두 번째 두루마리가 펼쳐진다.

[4위계 이상의 마술 사용 금지.]

또 다른 야유 소리들이 들려온다. 4위계 이전까지의 마술들은 '초급 마술'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마술 학교를 입학한 어린 신입생들도 보통의 경우 3위계까지의 마술들을 선행 학습으로 배운 후, 학교에 들어올 정도니까.

그렇기에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신출내기들을 위한 경기'

베테랑을 자처하던 이들에게는 사실 참가할 가치도 없는 그런 경기인 것이다.

코찔찔이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이겨 봤자, 무슨 명예가 있을까? 그런 마음들인 것이다.

거의 2/3 이상의 모험자들이 돌아갔다. 아까 전보다 한적해진 스타디움 앞 광장에는, 로브를 걸친 마술사들만이 잔뜩이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번쩍일 듯 맨들맨들한 지팡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경험 없는 친구들인지를 알려 주는 것 같다.

"자, 그럼 추첨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기 전에...?'

추첨식이 시작될 줄 알았건만, 접수관들은 의외의 말을 던져 왔다.

"확인식이 있겠습니다. 스크롤이나 마술 반지 없이 1위계 이상, 3위계의 이하의 마술을 사용해 주세요."

조금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1위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라니....

나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술이 '스타랜턴'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접수관들이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마술 사용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불꽃을 일으키는 사람, 물보라를 만들어 내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스타랜턴을 어떻게 1위계 이상의 마술로 보이도록 만들지 고민해 보았다.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빛 마술 목록들이 지나갔다.

* * *

10분이나 채 지났을까? 나의 차례는 빠르게 돌아왔다.

내 앞에 선 접수관이 운을 띄웠다.

"음... 좀 볼까요? 어떤 마술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

나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계란을 쥔 것처럼 손가락 사이 사이에 조금의 공간을 남긴 채 난 어설픈 주먹을 쥐었다.

곧이어 난 마술 진언 하나를 외쳤다.

"손 안에 깃들어라. '샤이닝 소드'."

순간, 나의 주먹에서부터 강렬한 빛 하나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빛은 마치 물속에 검은 잉크가 퍼지듯 퍼지며, 형태를 잡아 간다.

'영락없는 검의 모양.'

나는 이 '검'이 공격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곧장 나의 왼팔을 향해 오른팔을 내리뻗는다.

서걱.

아주 예리한 검에 베인 듯, 왼 팔에는 작은 자상刺傷이 생겨난다.

푸슉

생겨난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누가 보아도 내 손 안에 들린 것은 '빛의 검'이다.

"워워워. 그만. 시험 중에 자해는 금지입니다."

다친 나의 팔을 보며, 시험 감독관은 난색을 표한다.

'아차' 싶다.

만약 이 때문에 탈락하게 된다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3위계 빛 마술 샤이닝 소드 사용자시군요. 통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사이, 내 앞에 서 있던 접수관은 손에 든 서류철 속 종이에 체크하곤, 곧장 옆 마술사에게로 이동한다.

"치료는 저쪽 막사에 있는 치료사를 찾아가세요."

시험관인 그는 친절한 말 또한 잊지 않는다.

나는 그가 나를 더 이상 시야에 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빛 마술을 해제한다.

어느 누구도 지금 내가 사용한 마술이 '스타랜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속여 넘긴 것이다.

021. 스타디움 (1)

'존재'의 각인은 대부분의 경우 잘 사용하지 않는다.

'각인'들은 대부분 무기 사용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각인이 '사용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른 채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래서 '투명'한 무기들은 흔하지 않다.

그게 바로 이 가짜 샤이닝 소드의 첫 번째 트릭. 내가 다행히 '투명'해지는 사복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버튼을 눌러, 접합부를 해제하지 않은 사복검은 일반적인 검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그저 투명한 검일 뿐이다.

스타랜턴은 앞으로 직진하거나, 허공에 떠 있는 '빛'을 만드는 재능일 뿐이지만, 이 스타랜턴의 빛은 한 가지 재밌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체에 닿으면 그 물체의 윤곽을 타고 흐른다.

그게 바로 이 가짜 샤이닝 소드의 두 번째 트릭.

투명한 검. 그리고 그 검의 윤곽을 따라 흐르고 있는 빛무리들. 그 빛 안쪽에는 실제 '검'이 들어 있으니, 충분히 공격력도 가지고 있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빛의 검'. 아니, 샤이닝 소드로 보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접수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수관들 중 하나가 커다란 수정구 하나를 들고 와 광장 중앙에 내려놓는다.

"황자님! 시작하나 봐요."

마술 구경에 잔뜩 신이 난 올리나가 내 손을 이끈다. 나는 추첨을 위해 수정구로 향해 간다.

여기서부턴 이제 순전히 운이다. 나는 가만히....

제발 16명 안에 들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 * *

철혈 제국 주노스의 북쪽 구역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곳이 귀족들의 거주 구역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귀족 저택들은 커튼을 잘 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들어진지를 '자랑'하길 좋아하기에, 그들의 창은 대부분 '안쪽'을 볼 수 있게 활짝 열려 있다.

그래서 커튼이 쳐져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들을 의미한다.

'켕기는 일'을 했거나, 혹은 '켕기는 일'을 하고 있거나....

그리고 지금. 북쪽 구역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한 귀족의 저택에는... 무거운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마치 '안'을 절대 보지 말라는 듯, 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어떤 쑥덕거림들을 듣지 말라는 듯....

지금 이 어두운 암막 커튼 안에서는 어떤 회동會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무서울 정도예요."

그 말을 꺼내는 남자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지금 그들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한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하엘 주노스.'

마나통 하나만큼은 드래곤에게도 필적할 황자.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답니까? 어미가 일개 하녀인데...! 그 미천한 여자가 낳은 자식이 무슨 재능을 타고났겠어요?"

사실 그래야 맞는 말이었다. 평민의 피는 그래선 안 되어야 한다. 재능은 최소 귀족은 되어야 허락되는 것이었다.

"치고 올라올 겁니다. 그놈은 계속해서.... 그래서 아마...."

모두가 우려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 '황제에까지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

그 누가 보기에도 미하엘은 귀족 친화적인 황자가 아니었다.

피바람은 불지 않을지언정, 그들이 사는 세상이 '고생스러워질 것'이란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더 커지기 전에 그놈을...!"

역시 모두가 우려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서열 7위가 뒤에 붙어 있는데 누가 해코지를 할 수 있겠냐'는 말.

이미 아이시스와 미하엘이 '형'과 '동생'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그 말인즉슨, 이제 미하엘은 건드리는 순간, '피'를 보게 되는 시한폭탄이 되어 버렸다는 소리였다.

"'헤르메노스'라더군요."

가장 안쪽의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던 사내가 말을 꺼냈다.

그 순간, 그토록 시끄럽던 홀(Hall)이 일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참 혈기왕성한 친구예요. 결투를 하러 갔답니다."

사내의 말에 모여 있던 귀족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 왔다.

"혹시 모르죠. 사고는 언제나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렇죠. 자진해서 결투를 한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동조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마치 그들이 말하는 '사고'라는 놈이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처럼....

"우선 지켜봅시다."

"예. 그러시죠."

"좋습니다."

아까까지 죽상이던 사내들의 표정은 이제 그렇게 화사할 수 없을 정도로 만개해 있다.

마치 이미 그 '사고'란 놈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회의는 끝났으나 한동안 모두가 '미하엘'의 이야기를 운운하고 있었다.

커튼을 쳐,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홀 안에서....

* * *

"황자님! 황자님! 됐어요!"

수정구에 떠오른 것은 97이란 숫자였다. 나의 손안에 들려 있는 종이 쪽지에도 9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나의 두 손을 잡고 방방 뛰며 방금까지 좋아하던 올리나가 순간 풀이 죽은 얼굴로 변했다.

"하지만... 저건 결투인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올리나는 내가 결투에서 죽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운을 띄웠다.

"괜찮아. 올리나. 기껏해야 3위계 이하의 마술로는 체스 말 생채기도 못 내."

실제로 야유를 하며 스타디움을 벗어나던 전사가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죽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체스 말을 낭비하냐'는 말.

그래서 사실 나도 마음이 편했다. 그 말인즉, 내 원 없이 놀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니까.

"참가자 선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모두 대진표를 확인하시고 16강전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우렁찬 접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내 대진표를 확인하기 위해, 게시판 쪽으로 걸어갔다.

게시판에 붙여진 대진표 속 나의 시합은 약 3번째. 하나의 시합의 최대 소요 시간은 1시간. 가능하면 오늘 해 지기 전에 시합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 * *

'신출내기'들의 결투이기에, 관객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경기장은 자리가 없을 정도의 관람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사 준 빵들을 연신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올리나가 물었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대요?"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이거든."

'싸움 구경 중엔 급 떨어지는 놈들 싸움이 제일 재밌다.'라는 얘기도 해 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나는 12살짜리니까.

"우오오오!"

"우우우우!"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동시에 야유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함성은 '이기고 있는 쪽'을 응원하는 관람객들일 것이고, 야유는 '지고 있는 쪽'을 응원하는 관람객들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스타디움' 내의 경기들은 '도박'과는 거리가 멀지만, 암암리에 사람들은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들에 돈을 건다. 경마나 다름없는 일들이 이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스타디움'은 모험가들과 더불어 '도박사'들에게도 사랑받는 곳이다.

"윈드 커터, 윈드 커터! 윈드 커터!"

첫 번째 경기. 그중 백색 체스 말을 선택한 '마술사'는 바람 마술에 특화된 '풍술사'인 것 같다.

그는 오로지 두 가지 바람 마술을 조합한 것만으로 꽤 재미있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첫 번째는 3위계 바람 마술인 '점핑 잭'

이 마술은 인간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게 점프하고, 또 길게 허공에서 낙하하게 해 준다.

그는 계속해서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점핑 잭과 다른 점은, 체공 시간이 매우 짧게 조절했다는 것.

빠르게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보다 더 빠르게 낙하하는 그는 조준하기 힘든 과녁 같은 상태였다.

그는 그렇게 빠르게 위아래로 오고 가며, '윈드 커터'를 난사했다.

바람을 날려 작은 상처를 내는 정도의 기술이지만, 난사 수준이 되면 나름 위협적인 공격이다.

이 두 가지 마술의 연계는 검은 체스 말에 꾸준히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풍술사와 대적하고 있는 마술사. 그는 지금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이제 그를 응원하던 관람객들은 야유를 넘어서 화를 내고 있었다. 패색이 짙어졌다는 신호다.

그는 윈드커터 난사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제대로 된 마술 하나를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윈드...."

그 순간이었다. 풍술사가 조금 가까운 곳에 착지했다 싶은 그 순간. 그가 풍술사를 꽉 끌어안았다.

"아...."

풍술사가 난색을 표하는 그 찰나,

"맞불!"

화륵!

두 사람 사이에 빨갛다 못해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의 강렬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맞불.'

그건 불 마술 중 3위계에 속하는 마술이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작은 불씨 하나 일으킬 수 없는 마술이지만, 조건이 맞으면 그 불꽃은 무한정으로 커진다.

'데미지를 축적할 것.'

그것이 바로 '맞불'의 조건. 맞불은 딱 누적된 데미지만큼의 불꽃을 방출한다.

그가 계속해서 윈드커터 난사에 대응하지 않은 것도, 검은 체스 말에 조각조각 금이 갈 만큼의 데미지를 받아 낸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파직.

파쇄음이 들렸다. 그 말인즉, 두 체스 말 중 하나가 부서졌다는 소리였다.

두 체스 말 중 어떤 것이 부서졌을지는 자명한 것이었다.

'흰 체스 말.'

흰 체스 말이 있던 자리에는 까맣게 그을려 재가 된 체스 말과 영롱한 빛의 코어 구슬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 '코어'는 보름 후에 완전히 성장해 또 다른 체스 말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결투는 검은 체스 말을 가진 마술사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자님... 이제 알겠어요.... 이거 진짜 재밌네요?"

12번째 빵을 입 안에 쑤셔 넣으며 올리나는 거의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올리나'가 이 도시에 잠시간 혼자 남겨졌던 그날. 펍(Pub)의 손님들이 도대체 무슨 모습을 보았던 것인지 얼추 짐작이 되었다.

'도대체 이 13살짜리 꼬마 아이의 배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 * *

"아주 유능한 친구를 보냈습니다."

주노스의 북쪽 구역에 위치한 저택. 커튼을 드리운 그 어두침침한 홀 안에서는 아직 귀족들이 회의가 한창이었다.

"9위계까지 도달한 화술사죠."

그 말에 귀족들 몇 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가 병기'급의 대마술사들을 제외하면 9위계는 마술사들의 정점이라고 부를 만한 위치였다.

"미하엘과 맞붙는다면, 시합을 포기하고 가장 강한 마술을 난사하라고 지시를 해놨습니다."

식탁 가장 깊숙한 위치에 앉은 사내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빛 마술 장난이나 치는 12살짜리가 그걸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몇몇 사람들의 박수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들이 섞여 들려왔다.

12살짜리 아이를 태워 죽이겠다는 잔인한 소리는, 적어도 이 홀 안에서만큼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 음악보다도 감미로운 명곡이었다.

"우리는 그 꼬마가 '죽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건 모두가 바라는 말이었다. 미하엘은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그들에게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022. 스타디움 (2)

2번째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채 3위계도 안 되는 마술들을 난무하다, 두 선수 다 마나가 떨어져 실신해 버렸다. 무승부였다.

전형적인 초보자들의 싸움이었다. 자기 한계를 모르고 밀어붙이는 것. 그것들은 대부분 초보자들의 특권이니까.

다음 차례는 나였다. 상대는 화술사라고 했다.

출전하기 30분 전. 대기실에서 잠시간 고민에 빠졌었다. 그 투명한 사복검을 가져가야, 말아야 하나 하는 그런 고민이었다.

결론은 가지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사복검은 눈에 띄게 '존재'가 지워져 있었다. 이제는 마나를 공급하지 않아도 검은 반쯤은 투명한 상태를 유지했다.

'아마 2~3번...?'

그 정도 검에게 마나를 부여하면, 아마 세상에서 완전히 존재가 지워져 버릴 것이다.

이런 애들 장난 같은 대회에서 쓰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올리나 잠시 가지고 있어."

뱀 단검도 올리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저 경기에 들고 가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다. 게다가 탄로날 경우에는,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철혈 제국의 황제가 초급 마술 대회에서, '마법 검'을 사용했다.

간신히 좋아진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릴 순 없었다.

결국 내가 준비한 것은, 아무 장치도 되어있지 않은 숏소드 하나.

"자, 드디어 3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가능하면 강한 마술을 사용하는 마술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약자를 유린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건, 실험이었다.

내가 상정할 수 있는 온갖 전투 상황에 대한 실험.

* * *

"우워워워!"

뭐, 그 생각은 경기장에 오르자마자 후회로 바뀌었다. 나에게 흥분한 수소처럼 뛰어오는 사내는 마술사보다 전사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것도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중갑옷 전사.

남자는 실제로, 검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단단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거의 '모닝스타' 정도로 알이 굵은 마술 지팡이뿐이었다.

남자는 그 지팡이를 도끼 휘두르듯 휘두르고 있었다.

퍽, 퍽.

남자의 지팡이가 닿는 바닥 타일들이 움푹 꺼지고, 깨져 댔다.

1~2년 수련으론 다다를 수 없는 정도의 괴력이었다.

"우워워워! 어서 이리 오지 못해?!"

남자는 또다시 괴성을 지르며, 나에게 돌진해 왔다.

그렇다면 남자가 쓴 마술은 아주 간단했다.

3위계 불 마술.

'파이어 블러드.'

전신에 흐르는 피에 열을 부여해서, 인위적으로 신체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마술.

근력의 증가, 사고 회로의 고속화 등 다양한 버프 효과를 주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2가지나 있는 양날의 검 같은 마술이다.

첫째로 방어력이 극도로 약해진다는 것.

온몸을 빠르게 도는 피는, 핏줄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마치 빵빵하게 물이 가득 찬 고무호스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작은 상처에도

픽.

피가 솟구쳐 오른다. 강력한 공격력을 얻는 대신 갓난아기보다 연약한 유리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급속도로 체력이 감소한다는 것.

지금 저 마술사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달리기를 하는 것만큼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힘 하나를 얻겠다고, 죽음으로 향하는 직행 열차를 타는 격이다.

뭐....

하지만 그런 약점들을 대처하기 위해 남자가 선택한 방법들은 칭찬해 줄 만하다.

그 어떤 상처도 허락하지 않는 풀 플레이트 아머.

그리고 계속해서 내게 돌진하며, 빠르게 승부를 보려는 저 저돌맹진.

"우워워워워!"

또 한 번 괴성을 지르는 남자의 눈은 이제 거의 빨간 핏줄들이 열 발자국 밖에서도 보일 만큼 진해져 있다.

아마, 저 갑옷 안의 피부는 더 볼썽사나울 것이다.

'이러면, 이거 너무 쉬워지는데...?'

다른 마술을 더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는 힘들 것 같다.

이미 내가 자신의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전술을 바꿔야 마땅할 텐데. 남자는 오로지 돌진만 해 오고 있다.

아마 실전에 사용할 만큼 수련한 마술이 전무하다는 소리일 것이다.

남자가 결국 자기 마술에 잡아 먹혀 죽기 전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차례다.

나는 가만히 나의 주먹을 응시한다.

'음. 아무래도 마술 대회니 뭐라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나는 곧장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퍽!

풀 프레이트의 유일한 구멍인 '눈 구멍'으로 나의 주먹이 비집고 들어갔다.

아직 덜 여문 아이의 주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억.

그 구멍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온다. 아마 주먹에 얻어맞은 남자의 코가 문제를 일으킨 것일 것이다. 터진 실핏줄들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잔인한 광경에 눈살이 찌부려진다. 하지만....

망설여서는 안 된다.

"샤이닝 피스트."

나는 일부로 또박또박 단어를 발음해 본다.

'샤이닝 피스트.'

치료사들이 교단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아주 기초적인 기적.

그저 손이 조금 빛나고, 아주 소량의 파괴력을 증대시켜 주는 기적.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한 그런 기적.

"샤이닝 피스트, 샤이닝 피스트!"

실제로 관객들은 나를 응원하며 내가 진짜 '샤이닝 피스트'를 사용했다고 믿는지, 그 기적의 이름을 연신 소리치고 있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그 사이, 나는 고개를 돌려, 체스 말들을 바라본다. 이미 남자의 체스 말은 금이 갈 대로 가 있다.

픽.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자신이 쏟은 많은 양의 피를 보고 놀란 것이다.

아무리 체스 말이라도 심리적인 데미지까지는 대신해 줄 수 없다.

"승자는... 앙헬!"

앙헬은 내가 대회 참가를 위해 임의로 만든 가명이다. 뭐, 결국은 내가 이겼다는 소리다. 잔뜩 기대했던 경기였는데 어쩐지 아주 싱겁게 끝이 나 버렸다. 그리고... 내가 실험해 보고 싶었던 일은 안타깝지만 손도 대지 못했다.

* * *

사실 이번 경기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저 시간 때우기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디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번 대회의 참가 목적이었다.

자상, 화상, 열상, 타박상....

마술을 통해 온갖 종류의 데미지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이번 대회는 말 그대로 고통의 전람회 같은 곳이었다.

수렵 국가인 '웅가'의 반란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역사대로 흘러만 간다면, 그건 불과 얼마 남지 않아 일어날 기정 사실이다.

거기다 난 그 격동의 현장에서 한 사람을 지켜 내야 한다.

서열 7위 '얼음 공작'

아이시스 주노스.

도대체 웅가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 이 물 마술의 천재에게 씻을 수 없는 데미지를 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내가 그 현장에서 그를 지켜 낼 수만 있다면, 그는 진심으로 나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이다.

게다가 후에 주노시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때도, 그를 견제할 훌륭한 장애물이 되어 줄 것이다.

"블러드 파이어...! 블러드 파이어...! 음... 안 되는데...."

아까부터 올리나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아까 전 그 중갑옷 전사, 아니 마술사의 마술이 못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런다고 마술이 나가진 않아. 그리고 올리나. 블러드 파이어가 아니라, 파이어 블러드야."

올리나는 마치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선 급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흠, 흠, 흠."

무슨 노래인지도 모를 이상한 콧노래. 올리나가 무안할 때면 언제나 하는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향해 주먹을 펴 보았다.

"파이어 블러드."

물론,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토치 파이어."

손안에 작은 불을 만드는 불 마술 중 가장 기초적인 생활 마술. 3살짜리 어린아이도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마술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티끌만 한 불꽃도 나타나지 않는다.

"스타랜턴"

"으악! 눈부셔요, 황자님!"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빛에 올리나가 자신의 눈을 감싼다.

이제는 거의 생각만 해도 시동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 버린 마술이다.

"클린 워터, 아이 재우기...."

나는 연이어서, 0위계 마술들의 이름을 외쳐 본다.

반응이 없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스타랜턴' 외에 그 어떤 마술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뭐 하시는 거예요, 황자님?"

계속해서 이상한 주문들을 중얼대는 나를 보며 올리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인다.

"아니야, 올리나. 아무것도...."

나는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마디를 애써 지우려 노력한다. 나의 친우가 '스타랜턴'의 마나줄을 나의 영혼에 각인시켜 주며 했던 그 한마디.

'너는 앞으로 그 어떤 마술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

나는 공인된 마술 재능 최하위다.

내 속에 드래곤이 들어 있다고 한들, 브레스 하나 쓸 줄 모르는 드래곤은 그저 날개 달린 공룡이나 진배없다.

'장이라면 어쩌면....'

작은 희망 하나로 출발한 여행이었다. 나는 제발 내 희망이 확신이 되길 기도해 본다.

* * *

"아니, 9위계니 뭐니 하더니, 지지 않았습니까?"

3회전 경기 결과를 빛 전보를 통해 전해 들은 귀족 사내 하나가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놈 하나 고용하자고 얼마를 썼는지 모릅니까?"

실제로 그들은 '그 괴물 같은 마나통'을 가진 황자 하나를 죽이겠다고 지금까지 막대한 양의 돈을 써댄 동지들이었다.

그놈만 죽는다면, 그래서 존 형제가 다시 황제의 눈에만 든다면 그 정도 돈이야 언제고 다시 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에 모인 결사 같은 이들이었다.

"아니, 그때 그것도 실패했지 않습니까! 그 바보 같은 여관 주인년 때문에!"

귀족 중 하나가 소리를 쳐 댔다. 방을 급습했던 그 남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분명 그 남자일 것이다.

"그놈은 어린애의 가면을 쓴 악마 같은 놈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언제, 진 그놈이 우리가 고용한 선수일 거라 했습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일순 입을 닫았다. 그만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출전한 마술사 중에 불 마술사는 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맞불을 쓴 그놈. 그리고...."

"불 마술사라고 꼭 불 마술만 쓴답니까?"

일순, 남자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1~2위계 애들 장난 같은 마술들이야, 그 남자에겐 숨 쉬는 것보다도 쉬운 일입니다."

"...."

"미안하지만 맞불이니 블러드 파이어니 하는 애들 장난으로 평가를 하진 말아 주십쇼. 여러분이 마술을 쓰지 못한다고, 그런 장난들이 위대한 건 아닙니다."

"흠, 흠."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많은 귀족들이 마술을 사용하지 못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그들은 구태여 노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자, 다음이나 다다음 경기에서 만나게 되겠죠. 어차피 16강전이잖습니까 헤르메노스의 경기들은?"

"그... 그렇지요."

"기다리시죠. 자고로 고기란 건 오래 익히고 먹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말이 없었다. 뭐 사태를 안들, 대처할 수도, 대처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오후쯤 되자, 마지막 경기까지 끝이 났다. 승리한 선수들은 다시 출전권을 얻었고, 패배한 선수들은 쓴 울음을 삼키며 대기실을 비워 주어야 했다.

물론, 난생처음으로, 죽지 않은 결투에 참가해 보았다는 생각에 표정이 잔뜩 고양된 친구도 몇 보였다.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는 내일 이어집니다."

소리 확성 마술로 커다랗게 증폭된 해설자의 목소리가 건물 전체에 퍼졌다.

"내일 오전 9시. 다시 이 경기장에서 뵙겠습니다."

'라라라라라~'

경기장 영업 종료를 알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관객 무리들은 이제 개미 떼처럼 줄을 지어 경기장을 나가고 있었다.

"황자님. 어떻게 할까요?"

올리나가 내게 물어왔다.

사실 경기에 승리한 선수들은 이 경기장 내부에 있는 숙박 시설에서 묵는 것이 허락됐다.

웬만한 황자보다 호화로울 만큼 화려한 방들에서, 먹고 싶은 것과 마시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 시켜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모든 것이 무료였다. 그래서 그 하룻밤의 사치를 위해 이 스타디움을 찾는 모험자들도 존재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나?"

나는 대기실 가만히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해는 아직 지평선으로부터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2~3시간 정도는 아마 해가 지지 않을 것이다.

"원하시면 숙소 체크인을 해도 되고요."

아까부터 올리나는 대기실에 비치되어 있는 숙소 설명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족히 20가지는 넘어 보이는 룸서비스 명단을 보며 그녀는 무얼 먼저 시켜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가자."

물론, 그 말에 딴지를 건 것은 나였다.

"예? 체크인 안 하세요?"

그 어떤 때보다 실망한 얼굴의 올리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따 밤에 해도 되잖아."

"하지만 황자님.... 그러다 늦으면... 룸서비스가 끝나는데요."

"제시간에 돌아오면 되지."

나는 대기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향했다. 올리나가 못내 아쉬웠는지 그녀의 발소리는 내가 나간 후,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들려왔다.

023. 스타디움 (3)

룸서비스의 마감 시간은 10시. 그 이후가 되면, 스타디움에서 운영하는 숙소는 그 어떤 식사류도 제공하지 않는다.

"황자님... 음... 황자님...."

계속해서 초조한 듯 낑낑거리는 올리나 때문이라도 쇼핑은 빨리 끝내야 했다.

사실 봐둔 가게가 있었기에,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우리가 헤르메 스트리트를 계속 돌던 중 보았던 무기점인 '검은 쇠'.

헤르메 스트리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상점이었다.

* * *

다행히 사고자 했던 무기의 구입은 쉽게 이루어졌다.

아마 검은 쇠의 주인은 '진도'의 대장장이와 동문인 듯한데, 이 주인 여자 역시 자신의 스승을 거의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그 점이 재미있었다.

댕, 댕, 댕....

대장간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헤르메 스트리트의 종료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려왔다.

9번의 타종.

1시간 남았다. 10시까지는.

"황자니... 임...! 흐응...."

올리나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더욱 애처로워져 있었다. 흡사 비 맞은 강아지처럼.

* * *

"황자님! 오! 이거 드셔 보세요!"

다행히 제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불과 10시 10분 전. 다행히, 라스트 오더가 가능한 시간이 10시였기에, 우리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래서 먹고 싶은 요리가 뭔데? 여긴 다 공짜니까, 다 먹어도 돼."

그 말이 실수였다. 그녀는....

"우선은 여기 스테이크를 2접시 시키고요. 그리고, 여기 이거 맛있어 보인다. 이 국수도 2그릇.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그녀가 시킨 음식은 20가지에 달하는 음식 전 종류를 모두 각각 2개씩.

나는 퇴근을 앞두고, 이런 대규모 만찬을 주문받아야 했던 요리사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했다. 헤르메노스를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팁이라도 조금 전해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걱, 우걱.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나는 '밥 먹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그 조그만 입은 쉬지 않고, 벌어졌다 닫혔다는 반복하며 착실하게 음식을 소모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 작은 몸에 저게 다 들어가는 거지?'

이미 절반 이상을 해치워 버린 그녀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날 왜 사람들이 올리나의 식사를 열광하며 바라보았는지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먹을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던, 그녀의 말이 왠지 더 와닿았다.

그녀에게 그건 거의 약쟁이들이 약을 끊는 것만큼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 * *

"자, 드디어 8강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와와!"

어마어마한 관람객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예선전에 가까운 16강전보다는 이 8강전부터가 진정한 볼거리라고 할 수 있다.

족히 어제의 2배는 될 듯한 사람들이 이 스타디움의 경기를 보겠다고 몰려들어 와 있었다. 나는 대진표를 바라보며, 나의 순서를 체크했다. 두 번째. 상대는 16강전에서, 나와 같은 빛 마술을 사용한 '준'이라는 남자였다.

그 말은... 빛 마술에 대한 대책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었다.

* * *

"우와와와!"

"우우우우!"

16강전의 첫 번째 경기가 끝난 듯했다. 관람객들의 함성 소리와 야유 소리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다음 경기, 즉 나의 경기가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결심을 굳혀야 했다. 나는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솨아아악.

마나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검은 그 실루엣조차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해졌다.

스타랜턴이 먹히지 않을 경우에는 '샤이닝 소드'라도 사용해야 했으니까.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스탭 하나가 나의 대기실로 들어와, 말을 건네 왔다.

그의 말대로 나갈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 * *

"자, 그럼 8강전의 2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고함이 관람객들 전체에 퍼졌다.

"우와와와아!"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무대 위에 올라갔다.

"아주 귀여운 꼬마 친구구만."

다 낡은 로브를 걸친 마술사는 꽤나 나이가 많은 연로한 사람 같았다. 그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이가 찬 마술사라.... 보통은 둘 중 하나다. 아예 한 분야에 일각을 이룬 고위계 마술사이거나 그게 아니면....

"말하자면, 소일거리지."

이미 오래전, 벽을 느끼고 마술을 그만두고 취미로 마술을 즐기는 사람이거나.

물론, 둘 다 이런 대회에 나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인간을 넘어선 수준의 마술을 펑펑 써내는 고위계 마술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마술에 큰 뜻을 두지 않는 취미 마술사가 이곳에 올 리는 없었다.

"자, 그럼 우리 시작해 볼까?"

남자는 이내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내보였....

아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깊고 검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왜? 자네에게는 지금 내 얼굴이 이상하게 보이나 보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남자의 얼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아...."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나를 덮쳐왔다. 촉이라고 하던가? 어떤 일들이 들이닥치기 전 찾아오는 경고.

타닥.

나는 곧장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이든 곧장 승부를 내야 한다고 내 직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스타...."

"파이어 블러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주문도 영창하지 않은 채 곧바로 마술의 이름을 외쳤다.

피를 데워, 순간적으로 신체 능력을 올리는 3위계 마법.

그 순간, 그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탁.

나의 팔목을 잡아 오는 그의 손.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그는 내가 채 1걸음도 떼기 전 이미 나의 뒤를 잡아버린 것이다.

"적옥赤獄. 대상은 스타랜턴."

치이익.

순간, 팔 전체에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분명 체스말에 대부분의 고통이 전이되었을 텐데도, 느껴지는 고통.

화상이었다.

나의 오른팔에는 여러 갈래로 퍼진 불꽃 갈래 같은 화상 자국이 퍼져 있었다.

"알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 마술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적옥'이란─

마술을 당한 피해자에게, 임의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제한을 거는 저주에 가까운 마술.

이 적옥에 당한 상대방은 마술사가 제한 한 행동을 할 경우, 뜨거운 열기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알겠지만, 이건 규칙 위반 아니야. 알지?"

사실이었다. 적옥은 3위계 화염 마술이었으니까.

적옥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접촉하고, 마술어와 함께 제한 사항을 말해야 하는 마술이었다.

기본적으로 원거리 전을 기본으로 하는 마술사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거의 사용할 일 없는 마술이었다.

허나 저 마술사. 준이라는 마술사는 달랐다. 파이어 블러드로 강화했다곤 해도, 내가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 그는 아마 불 마술을 극한까지 연마한 마술사일 것이다.

"왜... 아저씨 같은 분이 이 대회에 나온 거예요?"

방금 전 화상의 고통도 슬슬 체스 말에게로 넘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오른팔을 지끈거리게 하던 고통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말했잖나. 유희라고. 자네도 그런 것 아닌가, 황자 미하엘?"

직감했다. 그는 내가 말한 적도 없던 나의 본명을 말하고 있었다.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참가 신청서에도 이름을 가명으로 기재했다.

그렇기에 내가 황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올리나 하나뿐이었다.

"황자님!"

물론... 저렇게 외쳐대는 탓에, 모를 수는 없지만.... 미하엘이란 이름은 정말이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이 도시 안에서는, 적어도.

'스타....'

화륵.

"크아아아악!'

정말 지독한 마술이었다.

마음속으로 하는 영창에까지 반응하며, 적옥의 열기는 나의 팔을 태워 대고 있었다.

이미 나의 체스 말은 거의 부서지기 일보 직전까지 금이 가 있었다.

"참, 운이 좋군요. 여기선 그래도 목숨을 보장받은 채 싸울 수 있으니."

마술사가 운을 띄웠다. 남자는 아까부터 재밌다는 듯 체스 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 하나 가지 않는 그의 체스 말이 나와 그가 얼마나 실력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황자님. 황자님께서는 세상의 악의에 조금 익숙해지실 필요가 있어요."

알 수 없는 소리를 그는 내뱉어 댔다.

"염옥炎獄, 대상은 '스테이지'."

순간, 거대한 불기둥들이 치솟았다. 이내 불기둥들이 구부러지며 천장을 가렸다. 반구 형태로 변한 불꽃들은 이제 나와 '준' 두 사람만을 가리는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마지막 틈새까지 가려지며, 밖에서 들리던 사회자의 다급한 목소리마저 가려졌다.

3위계 이하에 마술들이 이런 대규모의 기적을 행사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못해도 7위계 이상의 마술을 남자는 부린 것이다.

"파이어볼"

내가 이 경악스런 상황에 한눈을 판 사이,

훅.

나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만 한 불덩어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퍽.

거의 물리적 충격이 느낄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를 가진 불덩어리.

"켁, 켁."

나는 돌덩어리에 가슴을 맞은 것처럼 이내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샤륵.

물론 이내 그 아픔은 씻은 듯 사라졌다.

빠직.

그 순간, 마나의 줄 하나가 끊어진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체스 말이 부서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저 체스 말이 없었다면 이미 진즉에 난 죽은 목숨이었을 거란 점이다.

그리고 이제....

나의 목숨을 지켜 줄 것도 이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표정을 보니,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나 보군요."

약간의 킥킥대는 웃음이 들려왔다. 사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마치 지금 상황이 재밌어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사내의 목소리는 어딘가 나이 든 남성 특유의 노기老氣가 서려 있었다.

'3위계 마술'이나 쓸 수 있는 초급 마술 대전에 늙은 마술사가 나온다?

두 번째 위화감이 나를 덮쳤다. 마치 어떤 짐승의 아가리에 스스로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두려움.

"그럼... 우리, 통성명을 제대로 할까요?"

솨아아악!

사내의 얼굴을 가리던 검은 어둠들이 사라져 있었다.

흉측한 얼굴이었다. 얼굴 여기저기 화상 자국들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눈알 한쪽조차, 의안인지 움직이지 않은 채 이상하게 한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미래의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내가 환생하기 전, 한때 주노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마술사가 하나 있었다.

흉측한 얼굴에 여기저기 일그러진 얼굴이 그의 악명을 더욱 부추겼고, 급기야 그의 이름은 주노스의 어린아이들이 떼를 쓸 때 부모들이 외치는 이름이 되어 버렸다.

"너 자꾸 그러면 번데로사가 찾아온다~!"

그 소리 하나면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들도 모두 울음을 그쳤다.

'번데로사.'

주노스를 떠들썩하게 하던 살인 청부 마술사.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명백히 그였다.

형태를 가진 지옥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024. 스타디움 (4)

주노시스가 황자들의 숙청을 결정하고 나서, 모든 황자들이 그의 말에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확고한 황제의 권력을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에 선뜻 '죽어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바보가 몇이나 있을까?

별다른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낮은 순위의 황자들이야, 그저 황제가 불어 대는 피의 폭풍 속에서 목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름 재능을 타고났으며, 그 이명만큼이나 명성도 드높았던 황자들은 주노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때 이름을 알린 것이 '번데로사'다.

극소수의 인간들, 그러니까 한 나라의 보물 취급을 받는 궁중 대마술사 몇만이 도달한 영역인 10위계. 그 직전의 단계인 9위계의 마술에 도달한 마술사 번데로사.

그는 주노시스에게 반항하는 황자들 중에 마술에 재능이 있는 황자들도 많았다. 그런 그들을 숙청하고 죽이는 일을 담당한 것이 바로 번데로사였다.

마도를 깨우친 자 '존도우 주노스', 그리고 아쉬운 별빛 '존로우 주노스'....

이 존 형제 두 사람을 죽인 것도 바로 이 남자.

그는 그래서 '주노시스 황가의 푸줏간 주인'이라고 불렸었다.

그를 만난 황자들은 모두 고깃덩어리로 변모했기에....

* * *

스타랜턴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영창하는 마술어에까지 번데로사의 마술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제, 체스말조차 부서진 이상... 스타랜턴을 외치는 일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진배없었다.

투쾅!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돔 형태의 감옥. 불꽃 벽이 거대한 충격을 받았는지 흔들리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은 듯하군요."

번데로사가 흔들리는 불꽃 장벽을 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투쾅, 투쾅, 투쾅!

연이어서 들려오는 굉음. 그의 말대로 불꽃 벽에는 간간이 틈이 생겼다가 다시 재생되며 막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7위계 화염 마술 염옥.

마술 시연자가 공간을 지정하여, 거대한 벽을 만들어 대상을 가둘 수 있는 이 마술은 명백히 3위계를 넘어간 고위계에 속하는 마술이었다.

이번 경기의 룰 위반이었다. 거기다 체스말의 효과가 끝난 시점에서 이미 번데로사는 나에 대한 공격 행위를 멈추어야 했다.

"이 도시에 있는 마술사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려는 건가?"

내가 물었다. 진심이었다. 번데로사가 아무리 위대한 암살자라 해도, 이 도시에는 너무도 많은 마술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10위계를 넘어간 대마술사들도 존재할 것이다.

"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갓난쟁이들을 말하는 겁니까? 평생을 마술에 인생을 바쳐 봐야 7위계나 간신히 도달할 정박아들?"

"...."

"대마술사들은 바쁜 분들이죠? 이 멍청이들만 있는 도시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기거하고 있을까요?"

사실인 말이다. 10위계는 일반적인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그 영역까지 도달한 인간들은 어딘가 특별한 괴짜들이다.

자기 할 일 바쁜 그들이 이 도시에 수비대를 자처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자, 우리 저 벽들이 없어지기 전에 그만... 우리 일을 끝내기로 하죠."

번데로사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마술을 쓸 생각인 듯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두 번째 수를 쓰기로 했다.

나는 팔을 휘둘렀다.

쉭.

'존재'를 거부하는 각인이 새겨진 나의 투명한 사복검이 놈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슝.

사복검은 놈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놈의 반대편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휘청.

예상 못 한 검의 궤적에 나의 몸이 요동쳤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으며 검의 궤적을 재조정했다.

스팟.

실수였다. 궤도를 놓친 검은 그대로 나의 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팔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얼굴을 찡그리는 날 보며, 놈은 그 어떤 감정의 미동 없는 얼굴로 내게 말을 이어 갔다.

"재미있는 검을 들고 다니는군요."

"어떻게...?"

"하지만 황자님. 각인은 만능이 아닙니다."

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건 미래의 내가 아닌 12살짜리인 내가 들어도 알 만한 말이었다.

"투명한 검은 보통 존재를 부정하는 각인을 사용하죠. 그 검도 그렇고. 맞습니까?"

"...."

"그런데, 그 존재의 각인이 문제죠. 투명해진 검에 마나를 더 부여하면 어떤 작용이 일어날까요?"

그 순간이었다. 나의 손에 느껴지던, 검 손잡이의 이물감이 사라진 것은.

방금 전까지 내 손 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검의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완전히 존재를 부정당한 물건은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평생을 화염 마술에 인생을 걸어 온 남자.... 그에게 마나를 조작하는 일은 거의 숨을 쉬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마 몸에 검이 닿는 그 순간, 마나를 과부화시켜, 몸에 닿는 검날의 '존재'를 부정해 버린 것일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아까워 쓰지 못하던 소중한 검 하나를 영영 잃어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놈에게 공격이 닿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죽을 순 없기에.

딸칵.

버튼을 눌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들고 온 호신용 무기에 장치를 작동하는 것이었다.

숏소드로 가장한 나의 또 하나의 사복검.

뱀처럼 길게 늘어진 검날이 곧장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륵.

놈의 몸을 지나쳐 온 나의 사복검은 어느새 절반이 줄어들어 있었다.

놈에게 닿았던 검날 부분이 녹아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열에너지를 가진 화염 마술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검이 날아든 궤적을 따라 놈의 몸에서는 붉은 불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검을 피할 방법은 무수히 많죠."

이내, 놈의 몸 전체가 붉게 타오르며, 그 실체가 드러났다.

마치 하나의 불의 정령과 같은 모양으로 변해 버린 놈의 몸.

'파이어 바디'였다.

일반적인 화술사들이 도달하고자 발버둥 치는 꿈의 경지.

자신의 몸을 불꽃의 화신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인 9위계의 마술이었다.

그저 로브 하나 걸친 노인이 아무런 방어 태세 없이 서 있을 수 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자신에게 '파이어 바디'를 시연하고 있던 것이다.

두 자루의 검이 모두 부서져 버렸다. 뱀 단검은 올리나의 손에 들려 있다. 스타랜턴은 놈의 마술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어 버렸다.

더 이상 놈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12살의 '미하엘'의 삶이 여기에서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절망에 빠져들었다.

* * *

"우오오오!"

"거봐요. 죽을 것이라 했잖습니까?"

주노스의 북쪽 구역, 커튼이 드리워진 저택 안에서는 어제까지의 침울한 분위기와 다른 환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홀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거울 앞에 모여 있었다.

그 거울은 번데로사의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그대로 거울 안에 옮겨 놓고 있었다.

연이어 실패한 어린 황자의 공격. 그리고 부서지고 사라진 두 자루의 검이 그들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미하엘'이 이 상황을 타개하고 도망칠 거라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나통이 아무리 크든, 보유한 마나가 아무리 많든. 그걸 사용할 루트가 모두 막힌 이상. 미하엘은 그저 12살짜리 어린아이일 뿐이기에.

"자, 계속 봅시다. 이제 우리는 저 어린 황자가 목숨을 구걸하는 꼴만 보면 됩니다."

오늘 미하엘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다시 '존 형제'의 마술 재능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후원자들인 귀족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 * *

투쾅, 투쾅, 투쾅!

이제 화염 벽의 흔들림은 거의 춤에 가까울 정도로 격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과 세상 사이의 단절이 곧 끝날 거란 것을 이야기하는 듯이....

번데로사는 다시 한번 화염 벽을 바라보았다.

"자, 끝냅시다. 더 이상 우리 할 이야기도 없으니."

번데로사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불꽃으로 변해 버린 그의 몸과는 달리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 거리낌도 없는 사람의 눈동자.

나는 그사이 수많은 방법들을 구상해 보았다.

도망을 치는 것도, 외부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전부 불가능한 이 시점에서 그 모든 생각들은 모두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번 크리쳐."

놈이 다시 마술어를 외쳤다. 그러자, 마치 놈의 불꽃 몸속에서 여러 가지 작은 불꽃 멍울 6개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불꽃 멍울들은....

거대한 곰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쿠오오오!"

6마리의 불꽃 곰. 그리고 최악의 화술사 번데로사까지.

"그럼 이만."

번데로사가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그 순간, 곰들 6마리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마술 스크롤이라도 하나 들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물론, 경기장에 오르기 전, 검사대에서 빼앗겼을 것이다.

우스운 상상이다.

단검이라도 하나 더 챙겨 왔어야 했나? 아니면 올리나에게 뱀 단검을 맡기지 말고 여기에 들고 왔어야 했나?

생각은 행동을 늦출 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에 나의 마나통을 상상하면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 대전에서 나는 제대로 된 마술을 써 본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사용할 수 있었다. 내게 가장 익숙한 나의 마술을.

'스타랜턴.'

화아아악.

거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거대한 고통이 나를 엄습해 왔다. 적옥, 번데로사가 나에게 걸어 놓은 마술. 그 효과였다.

적옥은 지정한 기적의 사용을 금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온몸이 불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온다.

허나 괜찮다. 고통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아니니까.

"재미있는 일을 하는군요. 황자님."

빛 속에서 번데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엔 어떤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 더. 많은 빛이 필요해'

그랬다. 내가 가진 유일한 수. 나는 더 많은 마나를 나의 마술에 부여했다.

"크윽, 크윽, 크으으윽!"

동시에 몸을 태우는 듯한 그 고통도 더욱 커져 갔다.

그 보답인 양 빛이 더욱 눈부셔지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이 불빛이 저 살인광의 눈을 멀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고통도 참을 만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퍽.

컥!

엄청난 충격이 나의 배를 강타했다. 너무도 큰 충격에 정신줄이 순간 끊겨 버렸는지, 순식간에 내 스타랜턴의 빛이 사라졌다.

번데로사.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이글대고 있는 불꽃 눈동자.

너무도 쉬운 파훼법이었다.

놈은 파이어바디로 자신의 눈동자마저 불꽃으로 바꾼 것이다.

물리력이 없는 그저 빛일 뿐인 스타랜턴은 불꽃에게 어떤 작용도 할 수 없다.

컥, 컥.

주룩

입 안에서 걸쭉한 침이 길게 늘어져 내려왔다. 노란 침이었다. 아무래도 위액이 함께 섞여 나오는 것 같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놈이 만들어 낸 6마리의 곰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곰의 앞발이 내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앞발이, 그 거대한 주먹이 나를 강타한 것이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내장의 부위 중 어딘가를 잘못 맞은 것 같았다.

허나 정신을 잃을 순 없었다.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스타랜턴이 통하지 않는다.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잡념이 피어올랐다. 그 중 8할 이상이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탈출구는 막혀 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였다.

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이 조막만 한 주먹뿐이었으니까. 죽더라도 한 방. 한 방이라도 때리고 죽어야 한다.

'이번 생에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누구와? 나 자신과.

"우오오오!"

6마리의 불꽃 곰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와라!"

나도 그들처럼 아우성쳤다.

주먹을 가슴팍께로 올렸다. 더 꽉 주먹을 그러쥐며. 나는 곧장 그들에게 달려들었....

* * *

"그렇게는 안 되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불꽃들의 불길한 '지글거리는 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뭐, 뭐야?"

번데로사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황자님! 황자님!"

"이봐, 괜찮나, 자네?"

나의 몸을 흔드는 느낌에 나는 눈을 떴다.

아마, 그 번 크리쳐와 닿는 순간, 기절을 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바닥에 풀썩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상황을 파악했다.

스타디움 소속인 듯 스타디움의 공식 마크가 새겨진 로브를 입은 마술사가 나를 흔들고 있었다.

여사제 하나가 지혈의 마술어를 중얼대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의 살점이 떨어진 어깨를 치료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빨리 달려온 올리나도 있었다. 그녀는 곧장 나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화염 벽도, 그리고 그 6마리의 곰들도, 그리고 번데로사의 불꽃 몸조차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이번에는 실패한 거 같군요."

물 마술을 사용하는 수술사들이 물 마술을 사용해, 번데로사를 포박하고 있었다.

물론, 9위계의 마술사인 번데로사에게, 그런 마술들은 별거 아닌 것이겠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는 순순히 그들의 포박에 당해 주고 있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황자님. 아쉽게 되었네요."

나를 향해 지어 보이는 번데로사의 웃음은 너무도 인자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죽이려던 사람에게 보내는 미소가 저럴 수 있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남자다.

하여간, 모든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왜 죽을 짓을 사서 하는 거야?"

그건 나 말고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또다시 들려오는 그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지난번 고도스 던전에서 만났던 그 존재. 마신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미간을 찌뿌리고 있었다.

"젠장. 아무래도 배팅을 잘못한 건가?"

마신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마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올리나조차도.

025. 각인사 (1)

여사제의 도움으로 어깨의 상처를 치료한 후,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올리나와, 마신. 그리고 대회의 집행 위원장 역시 나를 따라왔다.

"마술의 무효화는 고등의 마술인 것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집행위원장은 말했다.

"7위계의 염옥은 물론, 8위계의 번 크리쳐, 그리고 9위계 마술 번 바디까지 일순간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인정하시죠?"

"...."

"그렇기에, 이번 경기에서는 번데로사와 황자님 두 분 모두 탈락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건, 안 했건 마술들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구하신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 집행위원장은 노인들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손이 나의 어깨에 와 닿았다. 따스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니까요, 암요."

큰 방심이었다. 체스말이 있기에,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착각한 것은.

이번 생을 얻고 나서, 사실 모든 것이 하나의 게임 같았다. 체스 말을 옮기듯 나의 몸을 사용해 왔다.

경각심도 현실감도 사실 없었다.

던전에서 죽을 뻔한 그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대항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싸울 여력도 없이 죽음의 순간에 덩그러니 놓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시 몸이 떨려 왔다.

아직도 그 공포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여사제가 정신 안정을 위한 기적을 걸어 주었음에도, 불쑥불쑥 마음의 심연 위로 떠오르는 공포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어른들도 죽음은 무서운 법이니까요."

집행 위원장이 말을 이어 갔다.

"황자님. 목숨을 소중히 여기세요."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 그 말이 집행 위원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엇이 그렇게 급하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급하시게 움직이면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

"그럼. 가 보겠습니다."

작별 인사를 끝으로 집행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황자님."

순간, 멈춰 선 집행 위원장.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혹, 더 실력에 자신이 붙으시면... 그때 또 한 번 저희 스타디움을 찾아 주시길."

"...?!"

"저희는 언제나 황자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희소식.

대기실로 이동하며, 번데로사의 '참가 자격 영구 정지 소식'을 들었다.

스타디움에서 '규칙'은 절대적이다.

규칙 위반자에 대해서, 스타디움은 재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법이었다.

그런 그들이 내게 한 가지 호의를 베푼 것이다.

"사실 말이죠. 그건...."

잠시 생각하던 집행 위원장이 말했다.

"마술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말한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마신이 떠 있는 곳이었다.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곤 이내, 그는 발걸음을 돌려 대기실을 나갔다.

그 다음은... 올리나의 차례였다.

"으아아아앙!"

또다. 또 올리나가 울고 있다.

또 올리나를 울리고 말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올리나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기에 빠져 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사뭇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암살자 '번데로사'. 그는 절대로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주노스에는 '내'가 죽길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건 앞으로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으흑, 으흑... 흑...."

한참을 울던 올리나가 울음을 참으려고 끅끅대고 있었다.

"저는요. 황자님.... 으흑"

계속해서 딸꾹질처럼 올라오는 울음을 참아 가며 올리나는 말을 걸어왔다.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황자로는... 으흑. 안 태어날 거예요."

의외의 대답.

"이제 그만하라고 안 하네?"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 없으실 테니까요."

"...."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말로, 독으로, 음회로, 정치로....

세상에 나를 죽일 방법은 많다.

내가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움직이는 이상, 그런 그들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제2, 제3의 번데로사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 언젠가는.

"그러니까... 황자님은 강해지셔야 해요."

올리나가 말했다. 그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저도... 강해질 거예요."

13살짜리 꼬마 아이의 입에서 '강해지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이의 결심은 진지하기보다, 귀여웠으나 그 말이 주는 고마움은 비견 작지 않았다.

"그래. 강해져. 기대할게."

그런 올리나의 말에 나는 그저 긍정의 다독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마신과의 대화는 올리나가 잠든 후에 진행되었다.

비록 탈락한 탈락자이긴 했지만, 스타디움에서 헤르메노스에 체류하는 동안의 모든 숙박을 책임져 주었다.

이례적인 대우였다.

덕분에 하루 이틀 더 그 고급 숙소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봤던 대로야."

오늘도 20가지의 룸서비스를 2가지씩 시켜 모두 먹은 올리나는 완전히 골아떨어져 버렸다.

오후에 마음을 썼던 것들이 그녀의 심신을 피곤하게 한 것일 것이다.

"그건 네가 한 일이 맞아."

마신은 이야기했다.

"그걸 내가 했다고?"

나는 되물었다. 마술에 재능이 없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너의 마나를 빌려서 내가 한 일이지."

'마나를 빌리다'. 사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죽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 나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긴 했다.

순간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양의 마나였다. 일반 인간이라면, 감히 견디지 못할 만큼의 소모량이었다.

"마술은 마법을 이길 수 없어."

마신이 말을 이어 갔다.

"왜냐하면, 마술은 마법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든."

"고개를 숙여?"

"그래. 인간이 드래곤을, 그리고 신을 쉽게 이길 수 없는 이유가 그거야. 마술은 그저 마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니까."

그 말을 하는 마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조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순간 나의 친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 * *

"신들이 우리를 비웃는 이유가 그거야. 윈드커터!"

불쑥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장은 허공을 향해 벌써 121번째 원드커터를 날려 대고 있었다.

오늘 그는 '신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아기들 장난감을 들고 흔들어 대는 갓난쟁이니까. 윈드커터!"

122번째 윈드커터가 허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바람의 칼날은 구름에도 채 닿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다. 그저 마나 낭비일 뿐인 행동.

"그럼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거야?"

그의 말이 워낙 부정적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윈드커터를 날리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오랜만에 의지에 찬 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눈은.

"극도로 발달한 마술은 마법과 진배없지."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극도로 발달한 마술.' 그가 그날 말한 것은 아마....

* * *

"그게 황자 게임의 본질이야."

마신은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입에서 다시 '황자 게임'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반적인 마술사들은 그 누구도, 황자들을 죽일 수 없어."

"...."

"황자들은 오로지, '황자'들만 죽일 수 있지. 물론, 인간이라는 전제하에."

그 순간, 나는 담아 두었던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렇다면 10위계가 넘어간 마술사들은?"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마신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마신은 말을 이어 갔다.

"10위계를 넘어간 시점에서 그건 마술이라고 보기 힘드니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애초에 인간이 신들에게 훔쳐 온 마술은 9위계까지가 끝이었다고 한다. 그 단계를 넘어간 마술들은 인간이 스스로 일궈 낸 기적.

결국에는 신들도 상상 못 한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했다.

"그 마술들은 위아래도 모르는 거만한 놈들이야. 어디, 인간의 마술 따위가 신들의 마법 앞에서 고개를 치켜세워!"

고위계의 마술 이야기에 살짝 성이 난 마신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 점이 꽤 재밌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 안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는 질문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적옥. 그러니까 그 3위계 마술에 내가 당한 이유는?"

정말이지 궁금한 것이었다.

마술이 마법 앞에 고개를 숙인다면, 왜 그런 위계도 낮은 저급 마술에 내가 고통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마신이 내놓은 답은 아주 단순했다. 그리고 명쾌했다.

실소가 터질 만큼 간단한 답.

"너는 애들 장난에 어른이 끼어드는 꼴 봤어?"

그랬다. 신들 입장에서 저급 마술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애들 장난이었던 것이다.

"그럼, 또 보자고. 아직 너와 나는 계약을 맺은 게 아니니까...."

마신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는 나에게 위협을 하려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모습조차 내 눈엔 재밌는 장난으로 보였지만.

"다음에는 안 도와줄 거야."

파란 불꽃이 일렁이며 마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남았는지, 그 텅 빈 허공에 마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힘을 원하면, 계약을 하라고, 계약을!"

그 말을 끝으로 마신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복기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길고도 피곤한 하루였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가 찾아간 곳은 무기점이었다.

엊그제 밤에 찾아간 바로 그곳이었다.

주문을 해 놓았던 무기를 찾으러 와야 했기 때문이다.

각인사에게 각인을 부탁할 바로 그 무기였다.

"또 왔네, 꼬마?"

무기점의 주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잔뜩 흥분한 그녀는 다시 자신의 스승 '데보라'에 대한 무용담을 들려주려 했다.

물론,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음... 정말 대단한 분이신데."

나는 언제나 만나면, 꼭 그분께 무기 제작을 의뢰하겠다는 이야기를 연거푸 4번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말을 끊을 수 있었다.

'대장장이들의 신'이라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즉시, 어떤 말들이 터져 나올지 뻔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바삐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무기점을 나왔을 때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쿠루루루룽!

우선은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올리나의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충분히 천둥소리 같은 그 뱃고동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헤르메 스트리트의 푸드 구역으로 향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우린 곧장, 각인사를 찾아갈 것이다.

"황자님 어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이끌고 푸드 구역으로 향하는 올리나의 발걸음은 하늘을 날 듯 가벼웠다.

다행인 일이었다.

026. 각인사 (2)

각인사에게 향하는 길은 역시나 미로 같았다.

위로 갔다 생각하면 아래로 가 있었다. 아래로 가 있다 생각하면 천장에 붙어 있었다. 천장에 붙었다 하면, 바닥에 가 있고, 바닥에 가 있다 생각하면 벽에 붙어 있었다.

도대체 저 밖의 물리 법칙이 통하지 않는 신비한 공간을 계속 헤매면서 우리는 각인사의 집으로 향했다.

한 번 간 적 있는 길임에도 그 길은 낯설고 괴상했다.

"진짜, 여기는...!"

역시나 이번에도 올리나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진짜 이 거리를 디자인한 건축사는 나가 죽어야 해요!"

올리나는 계속해서 열불을 토해 냈다. 그건 각인사로 가는 길 동안 꽤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각인사에게 가는 길은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았다.

* * *

"마나 과부하구만."

우리가 가게에 들어서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진열장 안에 단정히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단검들은, 지난번 보았던 그 검으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이 그저 꿈처럼 느껴지게 했다.

"마나 과부하...요?"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에 내가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비켜서 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올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다시 검들이 들어 있는 유리 진열장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연거푸 열리는 진열장의 문들.

가장 먼저 허공으로 솟아오른 것은 척추 역할을 할 장검이었다. 이어서 단검들이 소용돌이치며, 장검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난번 보았던 그 광경이 꼭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검날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나자, 우리 앞엔 다시 검들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이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줘 봐?"

나는 그에게 아까 전 무기점에서 받은 무기 상자를 내밀었다.

"그거 말고."

답답한지 그가 손을 뻗어 나의 오른손을 잡았다.

"이거."

내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그는 그 '아무것도 없는 손 안'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네?"

"멍청하기는...."

순간, 그의 왼손을 담당하는 단검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 모양을 형성하던 단검들이 이내 다시 위치를 바꾸더니, 거대한 바늘 같은 형태로 모습이 바뀌었다.

그 바늘은 곧장 나의 오른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늘은 내 오른손에서 한 손가락 2마디 정도 위쯤에 멈추었다.

슈우우욱.

바늘 끝에서부터 파란 기운 같은 것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흡수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내....

"우와!"

나의 손 위에는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번데로사가 없애 버린 줄 알았던 바로 그 검.

'투명한 사복검'이었다.

* * *

각인을 새길 준비를 하는 각인사를 보며 나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족히 4번 넘게 같은 대답을 해야 했던 각인사는 살짝 짜증 난 어조로 대답을 이어 갔다.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해 줄래? '존재'의 각인이 마나 과부하로 필요 이상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라진 듯 보였던 사복검은 계속 나의 손안에 있었다고 한다. 허나 존재의 각인이 과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게감도, 냄새도, 질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을 뿐.

알면 알수록 신기한 각인의 세계. 나는 어서 각인을 새기고 싶어졌다.

"좋아, 다 됐다."

준비가 끝났는지 각인사는 작은 물동이 하나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꺼내 봐."

각인사가 말했다. 나는 그의 앞에 무기 상자를 들이밀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길고 두꺼운 바늘 하나가 들어 있었다.

'거의 몽둥이에 가까운 두께의 바늘.'

날 하나 세워지지 않은 그 바늘은 오로지 찌르는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물론, 인간 정도의 크기의 상대에게는 찌르는 것보다, 휘두르는 게 더 효과적일 '둔기'에 가까운 무기였다.

"흐음... 재미있는 걸 들고 왔구나."

각인사는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무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그 무기를 매만졌다.

"데보라가 만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쉽게 부러질 물건은 아니겠어."

그는 진심으로 물건을 만지며 감탄하고 있었다.

"좋아. 내가 준비한 건...."

그는 그 바늘을 물동이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슈아아악.

물동이 안에 물들이 빛나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의 표면에 유독 밝게 빛나는 부분이 보였다. 두 글자의 글자였다.

'강인强忍'이라는 글자였다.

두 글자는 마치 물고기처럼 물속을 유영하다 이내 바늘을 향해 나아갔다.

글자가 바늘의 표면에 들러붙었다.

그 순간, 물동이 안의 물이 빛나는 것만큼이나 밝게 '바늘'이 빛을 발했다.

몇 초가량 지속되던 빛이 사그라졌다.

물동이 속 물도, 그리고 바늘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다 됐구만."

각인사는 물동이 속에서 바늘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에게 받은 바늘을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봤자, 안 보일 테니 헛수고하지 말라고."

각인사는 벌써 한 3분쯤 바늘을 들여다보는 내가 한심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 무기에 본질 속에 새긴 거야. 겉으론 보이지 않아."

본질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기적이었다. 각인은....

* * *

각인사는 우리가 가게를 떠나기 전, 한 가지 선물을 더 건네주었다.

큰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단검이었다.

"내 몸을 이루는 것들 중 하나야."

"네?"

"내 몸이라고, 임마, 내 몸."

"그러면...."

"그래. 12살짜리 꼬마들이 그렇게 뻗대고 다니는데, 이 아저씨가 걱정이 안 되겠니? 가져가. 도움이 될 테니까."

그가 우리에게 준 것은 겉으로 보이는 평범한 모습과는 다른 엄청난 가치가 있는 무기였다.

생명을 가진 무기. 그렇기에 그건....

"날이 상했다 싶으면, 검집에 넣어 놔. 그럼 아마 다시 날이 서 있을 테니까."

스스로 데미지를 회복하는 무기였다. 각인사가 죽지 않는 한, 그 무기는 날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꼬맹아, 그러니까 나중에 커서 꼭 찾아와. 이번엔 거의 거저로 준 거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금화 3개.' 그가 준 선물과 그의 기술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이었다.

* * *

"그럼 이제 우리... 짙은 밤의 숲으로 출발하는 건가요?"

올리나가 물었다. 물론, 그걸 것이다. 허나 그 전에 한 군데 더 들릴 곳이 있다.

나는 잠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앞섶을 열고 가지고 온 물건들 몇 개를 다시 살펴보았다.

혹시의 상황들을 대비해 가지고 온 마술 스크롤들 몇 개. 그리고 상처 회복에 도움을 주는 포션류들이 보였다.

가방 깊숙한 곳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꽤 두꺼운 가죽에 소중하게 감싸 놓은 돌덩이 하나.

가죽끈을 풀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만티코어'의 마석이었다.

지난번 고도스 던전의 싸움에서 얻어 낸 바로 그것.

* * *

어쩔 수 없었다. 그 미로 같은 '진짜 헤르메 스트리트'를 헤매야 했던 건.

이 정도의 마석을 정제해 줄 장인은 기념품이나 파는 '겉'의 헤르메 스트리트에는 존재치 않았으니까.

초행길이었기에 한참을 헤매야 했다. 게다가 각인사의 길보다도 '마석 장인'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더 정신없었다.

미끄러지고, 쓰러졌다 휘청대기를 반복하기를 수십 번.

그제야 마석 상인의 집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님."

물론, 올리나는 화가 나 있었다.

"제가, 다시 헤르메 스트리트에 오면 전 사람이 아니예요."

그녀는 거의 각오 수준으로 '헤르메 스트리트'에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내뱉어 댔다.

족히 수십 번을.

그 말은 마석 장인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반복 되었다.

똑, 똑, 똑.

"그냥 들어와요."

각오를 하고 문을 두드렸으나, 이번에는 딱히 놀랄 만한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각인사의 상점과 달리 마석 장인의 가게는 누구나 상상할 법한 평범한 '장인'의 공방 그 자체였다.

'마석 장인'은 눈 한쪽에 외눈 돋보기를 낀 채 마석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웬만한 건 진열장에 있으니까, 알아서 사 가. 돈은 데스크에 놓고 가고."

그는 손님은 우리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우리는 그가 말한 대로 진열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종류의 마술 반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3위계 이하의 마술이 담긴, 저급 마술이 담긴 반지들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크롤이든, 반지든 담을 수 있는 마술의 한계는 3위계였으니까.

나는 그 물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 해? 안 사?"

내가 한참을 계산 없이 반지만 들여다보고 있자, 그제야 장인은 외눈 안경을 눈에서 빼곤 나를 바라보았다.

"살 게 없어요."

순간, 그의 이마 한 쪽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살 게 없다'라는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오호~. 얼마나 대단한 걸 사시려고."

그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그의 말투에서도 비꼬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원래, 고지식한 장인들에게는 이런 게 직방이다. 그들이 만든 결과물을 부정하는 순간, 그들은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거든요."

그러고 난 후,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마디를 더 던진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눈 안에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아니, '적의'가 피어올랐다.

적의는 때론 협상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 적의가 호의로 바뀌는 순간,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니까.

나는 그가 나에게 적의를 느끼도록 일부러 다소간 버르장머리 없는 소년을 연기한다.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가능한 한 마나를 많이 감당할 수 있는 반지를 원해요."

"거 있잖아? 대마술사가 사용해도 안 깨져, 그것들은."

구석에 놓은 알이 굵은 반지들을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그 반지들은 다른 반지들보다 족히 2배는 앍이 굵어 보였다.

큰 마석일수록 더 많은 마나를 감당한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부족해요."

"하!"

'부족하다'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그 말이 그의 흥미를 돋운 것 같았다. 이내 사내는 자리를 박차고 나에게 걸어왔다.

"뭐가 부족한데."

사내가 말했다.

"대체 뭐가 부족한지 말해 보라고."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곧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잠시 눈을 감아 주세요."

내가 말했다. 사내는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내 말에 따라 주었다. 사내가 눈을 감자 나는 익숙한 그 마술어를 마음속에 되뇌었다.

'스타랜턴.'

눈부신 빛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사내는 눈을 감은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이내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가게를 부술 셈이야?!"

사내가 소리쳤다.

샤아악.

나는 조심스레 빛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가게 안의 광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을 뜨셔도 되요."

사내가 눈을 뜨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판매 물건들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식!"

물건들에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곧장 나에게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미쳤어? 남의 가게 부숴 놓을 셈이야?"

"그럴 일은 없어요. 공격력은 티끌만큼도 없으니까."

"무슨...?"

"이건 스타랜턴이에요. 0위계 파티용 마술."

그 말을 듣자, 순간 사내의 입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

"너... 드래곤이라도 되냐?"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스타랜턴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 0위계 마술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는 생전 본 적 없는 괴물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들어 주세요. 내 마나를 감당할 만한 반지를."

"...."

묵묵부답. 그의 입에 떠올랐던 조소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내가 말한 '쓸 만한 물건이 없다'라는 말이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된 것이리라.

027. 짙은 밤의 숲 (1)

"이 정도라면, 원하는 만큼 마나를 흡수시킬 수 있을 거야."

투박한 은색의 링. 그리고 그 중앙에 박힌 다소 커다란 크기의 마석.

마술 반지였다.

장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티코어'의 마석을 정제해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장담은 못 해. 나도 너 같은 경우는 처음 봤으니까."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반지를 넘겨주면서도 그는 우려의 말을 덧붙였다.

"국가 재해급의 몬스터의 마석도 부족할 거다. 네 마력을 전부 다 쏟아부을 수 있는 반지는."

언제나 듣기 기분 좋은 말이었다. 적어도 한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나는 이 세계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단 것이니까.

여자를 꼬시는 일 외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의 평가는 후해도 너무 후하긴 했다.

"이번에는 진짜 가는 거죠? 황자님?"

반지 장인의 상점을 나오며 올리나가 물었다.

그 말에 나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 이제 가자."

그녀의 작은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정말 짙은 밤의 숲으로 갈 시간이었다.

* * *

짙은 밤의 숲으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상단의 마차를 찾아야 했다.

'짙은 밤의 숲'은 킹스 로드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었기에 호위들은 필수였다.

우리가 마주쳤던 그 산적 떼들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물건을 훔치고자 달려드는 도적들은 킹스로드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헤르메노스의 성문에 위치한, 마차 정류장에는 이미 많은 자유 상인들이나 모험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5명 이상의 호위를 대동한 대형 상단의 마차를 얻어 타기 위해 대기하는 이들이었다.

대형 상단의 이동은 그리 흔치 않기에, 이곳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게 숙박을 해결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나도 내심 그런 것들이 걱정이었다.

만약 출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대형 상단 마차의 행렬이 없다면, 도보 여행까지도 각오해야 했으니까.

"미하엘 님이시죠?"

우리가 두리번거리는 그사이, 한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머리에 두른 터번이 그가 여러 곳을 유랑하는 '방랑 상인'임을 알아보게 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터번을 벗어 가며 정중히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90도를 넘게 깊이 숙인 그의 허리가, 지금 우리를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했다.

의아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처음 본 낯선 사람이었다.

"오클레 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오클레?'

그의 입에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손익을 계산하지 말고, 황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라고 하더군요."

그는 자신의 왼손으로 날을 세우며,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단의 마차와는 다른 마차들 5~6대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천막을 씌워 놓은 마차들. 마차의 나무에 새겨진 무늬들과, 바퀴살에 덧씌워진 금박은 그 누가 보아도 vip를 접대하기 위해 준비된 특별한 마차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나는 지난번 받았던 빛 통신 쪽지를 다시 한번 꺼내 보았다.

[오클레 푸우푸우

: 푸우푸우 상인 연맹]

나는 생각보다 거물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 * *

숙련된 마술사에게 부탁하여, 네 개의 바퀴 전부에 충격 흡수 마술을 부여했다는 마차는 그 말대로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구름을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지난번 대형 마차 행렬에 얻어 탔을 때도, 덜그덕 거리는 느낌 때문에 허리가 아팠는데, 지금 이 마차에선 그런 느낌이 일절 없었다.

"엄청 푹신해요, 황자님."

마차의 내부 역시 특별했다. 마찬가지로 숙련된 마술사에게 부탁하여, 내부 확장 마술을 부여했다는 마차의 내부는, 외부에서 보이던 모습보다 족히 2배는 넓어 보였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 오리 깃털로 가득 채워 누워만 있어도 잠이 오는 침대. 그리고 냉기 마술이 부여된 보관 상자 안에는 간식거리로 과일들과 단 음료수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이미 올리나는 그 음료수들의 족히 2/3쯤을 비워 내곤 침대에 몸을 누인 후였다.

"황자님이 싸우는 건 싫지만요."

감격에 찬 올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따라다녀야겠어요. 모험 가실 때."

나는 그러라고 대답했다. 올리나 덕분에 이번 여행은 꽤나 재미있었다.

경험하는 모든 일에 시종일관 놀라워하고, 반응하는 올리나를 보는 일은 그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우리에게 마차를 제공한 사내는 한 시간에 족히 1번은 계속 얼굴을 비치며, 우리가 편안한지를 물어왔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친절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과분할 정도로 편하게 가고 있어요, 정말."

사실이었다. 무엇 하나 불편한 것이 없었다.

마차가 편한 것만이 아니었다.

6대의 마차 그 어디에도 무역품들이 들어 있지 않았다.

6대 중 2대의 마차는 오로지 우리들의 편의를 위한 숙소용 마차였으며, 나머지 1대는 이 마차 행렬에 참가한 직원들의 휴식용 마차였다.

1대의 마차에는 오로지 도착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우리가 먹을 식량들이 들어 있는 냉각 마차였다. 그 안에는, 족히 한 달을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의 음식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2대는 용병들을 위한 마차였다. 5위계 이상의 마술을 사용하는 마술사 2명. 날렵한 도적 2명. 그리고 사제 1명과 전위를 담당할 중갑옷 전사 1명이 이 마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지난번 마차 행렬을 호위하던 용병들보다도 많은 숫자의 용병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공짜였다. 오로지 나와 올리나만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대체 저한테 왜 그렇게 잘해 주시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수상할 정도의 친절이었기 때문이다.

"오클레 님을 구해 주셨으니까요."

'대장장이'들에게 '데보라'가 있듯, 상인들에게는 '오클레'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날의 일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많은 산적 떼들을 죽인 죄책감이 조금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 * *

'짙은 밤의 숲'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공터까지 족히 3일의 시간이 걸렸다. 얼추 역계산을 해 보았다. '반란'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그럼, 언제든 불러 주시길. 저희 푸우푸우 상단의 마차는 언제든 황자님의 것이니까요."

떠나기 전, 남자는 자신의 빛 통신 쪽지를 남겨 주었다. 그는 마차가 필요하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경우 언제든 불러 달라는 말을 남겼다.

신세를 지는 일을 좋아하지 않기에, 또다시 부를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황자님. 그런데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요."

올리나는 아까부터 계속 텅 빈 평야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짙은 밤'도 '숲'도 없는 텅 빈 평야와 킹스로드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장 피엘의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짙은 밤의 숲의 존재를 평생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괴팍한 장은, 세상 모든 손님들을 거부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길조차도 수수께끼처럼 꽁꽁 숨겨 놓았다.

"여기가 맞아, 올리나."

나는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걱정을 하는 올리나를 안심시키듯 말을 내뱉었다.

저 멀리 지평선 끝으로 마차들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게 짙은 밤의 숲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장 피엘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문'은 사람이 3명 이상 모여 있으면, 절차에 맞추어 행동하더라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자. 준비해. 올리나. 이제 짙은 밤의 숲에 들어갈 거니까."

앞으로 걸어 나가며 올리나에게 소리쳤다.

올리나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아 놓은 뱀 단검을 다시 한번 꽉 그러쥐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녀에게 들려 준 것이었다.

그사이, 나는 평야 중간에 위치한 가장 커다란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바위에는 마치 짐승의 입 같은 구멍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 구멍 위로 작게 파인 생채기들은 마치 동물의 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 바위는 점토로 대충 만들어 놓은 고양이 인형 같아 보이기도 했다.

툭 불거져 나온 부위는 웅크린 뒷발. 앞으로 조금 솟아나 있는 부위는 고양이의 얼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법한 생김새였다.

물론, 그 상상의 나래가 심하게 큰 날개여야 하겠지만.

나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몇 가지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이내 나는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18번째 밤. 33번의 울음. 72번의 쉰 소리. 그리고 농담 좋아하는 아저씨...."

이어지지도, 의미도 없는 말들을 나는 중얼대며 뱉어 냈다. 물론, 그 바위는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미친 소리 같은 단어들을 족히 3분 가까이 뱉어 내는 나를 보며 올리나는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왔다.

그 사이, 메모지의 마지막 구절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시동어만이 남아 있었다. 그건....

"도대체 이런 시간 낭비는 왜 시키는 거야, 장 피엘?" 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가 누구든 놀리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쿠구구!

시동어가 들리자, 바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두 눈 같던 구멍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짐승의 입 같던 주둥이가 서서히 아래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뒷다리 같던 부위는 곧게 펴지기 시작했다.

웅크린 고양이 같던 바위는 어느새, 몸을 곧게 편 고양이처럼 변해 갔다.

그 고양이의 입은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입 안에는 깊이를 모를 어둠과, 그 어둠 속으로 길게 뻗은 계단이 보였다.

"황자님... 이거 정말 내려가도 되는 거예요?"

살짝 겁에 질린 올리나가 물어왔다.

"응. 가자."

나는 올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잠시간 내 눈을 쳐다본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잠깐, 올리나."

다음 계단을 밟으려던 올리나를 제지했다. 그러자 올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필요 없어."

그 말에 올리나가 띄운 발을 다시 내려놓았다.

우리 첫 번째 계단에서 한 10초간 가만히 서 있었다.

쿠구궁!

흔들림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흔들림에 올리나가 휘청거렸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끼긱, 끼긱.

오랫동안 손님이 없었는지 요란한 마찰음이 들려왔고, 서서히 계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 우와, 황자님."

놀라운 일일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계단'이라니.

"그런데 황자님.... 이거 어디까지 내려가나요?"

살짝 걱정스런 말투의 올리나. 나는 그녀에게 왜 '짙은 밤의 숲'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숲'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028. 짙은 밤의 숲 (2)

"우와~!"

올리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신기한 광경일 것이다. 분명히. '짙은 밤의 숲'은 분명히 지하에 있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광원光源이 많다.

그것은 이곳에 자생하고 있는 식물들과 곤충들 때문이다.

태양나무 숲에서만 자란다는 곤충인 '별딧불이'들도 이 '밤의 숲'의 일원 중 하나다.

이 특별한 숲에만 자생하는 반딧불이의 아종은 121라이트라를 자랑하는 태양나무 숲에서도 그 빛에 지지 않을 만큼 강한 빛을 내뿜는다. 그래서 그들의 꽁무니가 이리저리 움직이면, 그 궤도를 따라 빛의 줄기가 하늘이며 땅 등 온갖 곳에 빛을 흩뿌려 댄다.

꼭 무대 조명 같기도 한 그 모습 탓에, 별딧불이는 유랑극단들이 가장 사랑하는 곤충이다.

"멋져요. 황자님...."

올리나의 끝없는 감탄을 들으며, 우리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래는 이즈음에서, 장의 거처가 보여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낯선 손님이니까.'

아마 장이 걸어 놓은 '방향 인지 저해 마술'로 인해, 우리는 지금 벌써 몇 시간 째 같은 곳을 돌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황자님. 저 나무는 지나오지 않았어요?"

이제 슬슬, 올리나도 이 숲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올리나와 이 미로 같은 숲을 벗어나기 위해 물건 하나를 찾고 있다.

"이즈음, 있을 텐데...."

"뭐가요, 황자님?"

찾았다. 두 번째 고양이. 잡초로 우거진 바닥에 작은 돌조각 하나가 드러나 있다.

나는 그 주위를 미친 듯이 더듬기 시작한다.

덜컥.

손 안에 잡힌 것은 파란색 돌조각.

"야오오옹!"

실제 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신호다.

쿠구궁!

흔들림이 느껴진다.

쩌어억.

바닥이 벌어진다. 내가 방금 만진 돌 조각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한다. 저 먼발치에도 똑같은 파란빛을 내는 돌 조각 하나가 보인다.

쿵!

흔들림이 멎는다.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 하나가 나 있다. 주위에 변형된 지형의 형태를 보아하니, 영락없는 고양이 모습이다. 입 벌리고 하품하는 고양이.

"자, 우리 이제 들어갈까?"

나는 올리나에게 손을 내민다.

"여... 여기를요?"

올리나가 살짝 겁을 먹은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입구에는 그 어떤 계단도 잡을 난간도 보이지 않는다.

"걱정 마, 안 다칠 테니까."

나는 올리나의 손을 낚아챈다. 그리곤 곧장....

휙.

"꺄아악!"

올리나와 함께 그대로 고양이의 입 속으로 몸을 날린다.

비탈진 고양이의 입 안 벽들을 따라 우리는 계속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마치 아주 어린 시절 몇 번 타보았던 미끄럼틀처럼.

우리는 어둠 속을 내달린다.

* * *

"끼야야야옹!"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딘가 고양이를 닮은, 그렇지만 명백히 몬스터의 그것임을 느끼게 하는 우렁찬 소리다.

'캣카트리스'다.

고양이의 얼굴에 뱀의 꼬리를 단 몬스터다. 코카트리스를 '장 피엘'이 직접 개조한 아종이다.

닭이 아닌, 고양이의 몸을 단 탓에 더 교활하고, 더 민첩한 생물.

"끼야야아아옹!"

벽에 붙어 나를 관찰하던 놈이 곧장 몸을 날려 왔다.

투쾅!

놈이 부딪힌 땅이 깊게 패여 있다. 부드러운 흙바닥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저 정도의 패임은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이다.

놈이 나에게 부딪히는 순간은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황자님!"

"피해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놀란 올리나가 내게 달려오려 하지만, 나는 손을 뻗으며 그런 그녀를 막는다.

이 일촉즉발의 현장에 그녀가 오게 할 순 없다.

"...네... 황자님."

그나마 그녀가 여자인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장 피엘도, 그리고 그가 만든 몬스터들도 남자보단 여자에게 친절한 신사들이니까.

물론, 내가 놈의 이목을 끌고 있던 탓도 있지만, 다행히 캣카트리스는 올리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내가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지 않는 한 놈은 그럴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이미 주노스를 떠나오면서부터 상정했던 상황이지만, 난처하단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캣카트리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날렵하다. 역시 무엇이든 한 번 보는 게 듣는 것만 못한 법이다.

"캬아아악!"

다시 놈이 몸을 날려 온다. 나는 살짝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놈을 가볍게 피한다.

아직은 괜찮다.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면, 분명히 한 번은 저놈의 발톱에 스치게 될 것이다.

나는 놈의 꼬리를 응시한다. 다행히 아직 꼬리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그렇다면 저 꼬리가 눈을 뜨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한다.

나는 준비해 온 것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왼손을 치켜올린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 세공된 반지알은 마석이다. 바로 '만티코어'의 마석.

"밤의 안대!"

검은 어둠이 반지에서부터 주위로 퍼지기 시작한다. 내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덤이다.

'만티코어'의 마석에 저장되어서 그런지, 밤의 안대가 만들어 내는 어둠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주위로 퍼져 간다.

"끼야야옹? 끼야옹! 끼야옹!"

당황했는지 캣카트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어둠은 완전히 주위를 집어삼킨다. 모든 것이 검게 물든다.

"끼야야야옹! 끼야야야옹!"

어둠 속에서 놈의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높고 새된 울음소리는 놈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유추하게 만든다.

'반쯤의 분노, 그리고 반쯤의 공포.'

'만티코어'의 마석 안에 무슨 마술을 넣어야 할지 깊은 고민을 했다.

아쉽지만 마석 마술 역시 3위계 이상의 마술을 집어넣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세상 어딘가에 7~8위계의 마술도 척척 마석 안에 새겨 넣는 천재 마석 장인이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를 만난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그저 허황된 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3위계 이하. 그것들은 리스크가 크거나, 효과가 미약하기에 홀로 공격용으로 쓰기엔 한계가 있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밤의 안개'만큼 좋은 마술은 없었다. 마나 공급에 따라 그 영역을 무한으로 확장할 수 있는 점이 내가 가진 '드래곤보다 큰 마나통'이랑도 잘 어울렸다.

거기다 이미 써 본 경험이 있기에, 유사시에도 실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물론,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마술 '스타랜턴'과의 연계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적합한 마술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

"끼야야악!"

다시 캣카트리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다다닥, 투쾅!

흥분한 놈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왼손을 다시 치켜올렸다.

"스타랜턴."

내 유일한 장기. 마술명이 외쳐지는 순간, 눈부신 광휘가 방 안을 채웠다.

"끼야야야옹!"

갑작스런 빛에 눈을 질끈 감은 캣카트리스가 바닥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눈을 감았든, 감지 않았든 놈이 지금 몇 초간 아무것도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곧장 내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몽둥이로 쓰는 게 차라리 맞을 기다란 바늘.'

각인사에게 각인을 새긴 그 물건이 손에 잡혔다.

나는 그대로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투콱!

"끼야야옹!"

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늘이 놈의 목에 박혔기 때문이다. 허나 그 박힌 정도는 너무도 미미했다.

두꺼운 놈의 목에 비해 바늘은 간신히 피부에 걸쳐져 있다시피 할 만큼 얕게 박혔다.

'캣카트리스'는 그래서 무서운 놈이었다.

고양이 같은 외형과 다르게, 놈의 피부는 웬만한 골렘의 피부보다 두껍고 단단했다.

우연히라도 이곳을 찾아온 전사들이며, 마법사들이 줄행랑을 치며 도망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장은 캣카트리스가 무수히 많은 전사들의 검날을 부셔 놓았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 이 바늘에게 한 번 더 마나를 먹일 시간이란 뜻이었다.

슈아아악.

나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바늘이 빛에 휘감겼다. 이 뾰족한 놈에게 박아 놓은 각인이 발동한다는 신호였다.

투곽!

"끼야야야옹!"

울컥, 울컥.

놈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새겨 놓은 각인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각인사가 새겨 준 각인은 '강인强忍'. 강하고 단단하다는 뜻의 동쪽 대륙의 글자다. 각인은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부정한다. 한마디로 이 무기 '바늘'은 강하고 단단한 것을 부정한다.

물론, 새길 때 각인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덧붙이긴 했다.

'무기 외부'에만 작용하게 해 달라고.

글자에 상응하는 특징일수록 각인의 효과는 더욱 잘 작용한다.

수많은 전사들의 검을 부셔 놓은 캣카트리스의 피부는 그래서 방금 전, 케이크보다 더 부드러운 상태였을 것이다.

휙, 탁.

놈이 고개를 흔든 탓에, 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놈은 이제 성대가 뚫린 탓에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었다.

"샤아아악."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캣카트리스의 꼬리가 빠르게 몸을 흔들대고 있었다. 꼬리가 깨어났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눈 감아, 올리나!"

나는 올리나에게 소리쳤다. 올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놈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캣카트리스'가 가진 특성 때문이었다.

석화의 눈빛을 가진 코카트리스의 특성을 이어받은 놈은 눈빛으로 사람을 돌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놈의 꼬리, 그러니까 저 뱀 머리의 특성이었다.

"샤아아악."

뱀 머리는 나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서 계속해서 머리를 흔들대고 있었다.

"끼야야야옹!"

고양이 부분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하나의 몬스터지만, 캣카트리스는 이 탓에 두 마리를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우선은 머리 중 하나라도 먼저 해치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슈아아악.

다시 마나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바늘'에 새겨 넣은 두 번째 각인을 발동할 시간이었다.

* * *

"음. 하나 더 새겨 넣어 줄 순 없어요?"

각인사의 집을 떠나기 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뭐? 뭘 또? 뭐가 더 필요해?"

물동이니, 붓이니 하는 각인 장비를 정리하던 각인사가 짜증 섞인 대답을 해왔었다.

"꼭 요즘 애들은 다 끝나고 말을 한다니까. 한 번에 말해, 좀 한 번에."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부탁 하나를 했다.

"이 바늘에... 각인 하나만 더 새겨 넣어 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각인사가 말을 잃었다.

순간, 숨을 쉬지 않을 터인 그의 단검들이 웬일인지 한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지?"

"...."

"이미 그 물건의 존재 자체에 기적을 불어넣었어. 근데 또 다른 기적을 넣으라니."

"하실 수 있잖아요."

"...."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각인사잖아요."

띄워 주는 말. 아마 그게 성공이었던 것 같다. 각인사가 그 말이 끝난 직후에 곧장 다시 붓을 들었으니까.

029. 짙은 밤의 숲 (3)

슈우욱.

얇고 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일 때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두껍고 육중한 물체에게선 날 수 없는 소리. 그렇다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놈의 '뱀 꼬리'거나, 혹은....

콰직!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늘은 정확히 캣카트리스의 머리통을 부수어 놓았다.

캣카트리스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12걸음.

내가 캣카트리스에게 달려들지도, 그놈이 내게 달려오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두 번째 각인의 힘이었다.

나는 각인사에게 두 번째로 '정확'의 각인을 걸어 줄 것을 부탁했다.

순전히 실험이었다.

이렇게 여러 뜻을 가진 단어는, 대부분 각인을 새기는 데 실패하거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확한 각인들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감지'와 같은 각인이 그러하다. 암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 각인은 사용자에 대한 인식을 저해시킨다. 이 각인이 잘 각인된 무구의 경우, 사용자가 5발자국 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도대체 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인가?'

아리송한 개념이지만 나는 그렇기에 이 개념을 실험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늘은 나의 손에서 길게 뻗어, 캣카트리스의 고양이 머리에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수 미터는 넘을 만큼 길어진 바늘은 마치 하나의 긴 줄처럼 보였다.

각인 '정확'을 부정한 효과였다. 아마 이 바늘의 외형적인 정확한 수치들이 부정된 것이리라.

각인사의 집에서도 실험해 보긴 했지만, 꽤나 이 각인은 난폭한 놈이었다.

마나를 부여할 때마다 다른 수치가 변화했다. 한 번은 두께가 두꺼워지기도 했고, 또 한 번은 손톱만큼 작은 크기로 변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길이의 정확함이 부정된 듯했다.

퉁.

캣카트리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조작하던 캣카트리스의 고양이 머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황자님!"

놀란 듯 나를 부르는 올리나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와락.

올리나는 안심했는지 나에게 다가와 품에 안겼다.

나는 올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다 끝났잖아. 끝...."

올리나의 눈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몬스터와의 전투가 처음이었다. 몇 번 내가 던전에서 싸운 경험들을 말해 주긴 했지만,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두근, 두근.

많이도 놀랐는지, 그녀의 작은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더 꽉 안아 주었다.

꿈틀, 꿈틀.

그 순간이었다.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스윽.

힘을 잃은 생물체가 바닥을 기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계속해서 태동하는 소리. 마치 근육들이, 핏줄들이 일렁이듯 태동하는 소리.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콰직, 콰직!

캣카트리스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 체액이 빠르게 빨려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양이 부분의 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슈욱, 슈욱.

그에 뱀 부분의 몸뚱이가 고양이 부분의 체액들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부풀고 있었다. 파충류 형태의 이족 보행 괴수.

놈이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놈의 눈은....

"밤의 안대!"

나는 놈이 미쳐 눈을 돌리기 전에 급히 사방으로 어둠을 뿌렸다.

넓이가 늘어날 때마다 마나를 곱절의 곱절로 먹는 '밤의 안대'는 빠르게 내 마나를 흡수하며 커져 갔다.

휘청.

빨려 나간 마나 탓에 현기증이 났지만, 애써 참아 냈다.

"샤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파충류 특유의 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절그럭, 절그럭.

바닥을 끌며 걷는 소리. 놈이 나를 찾아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급히 '바늘'에 마나를 부여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슈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 바늘이 빠르게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고 있었다.

샤아아악.

쾅!

어둠 속에서, 육중한 물체 하나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직!

"아악!"

실수였다. 어둠 속에서도 놈은 나를 정확히 노리고 달려들어 온 것이다.

거기다, 옆에 있던 올리나까지 챙겨야 했던 탓에 반응이 늦어졌다.

허벅지에서 불쾌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인 것은 뱀 형태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저놈에게 독은 없다는 것이었다.

들은 기억이 있다. 장 피엘은 그게 아쉽다고 했었다. '모든 걸 돌로 만드는 눈.', '독을 머금은 독니.'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장은 말했었다.

"황자님!"

"괜찮아, 올리나, 나는 괜찮으니까...."

"샤아악...."

다시 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 보면 놈은 시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밤의 어둠 속도 유유히 돌아다니는 것이 뱀이다.

그리고 비록 키메라이긴 하나 캣카트리스의 꼬리. 아니, 이제는 몸통이 된 저놈도 분명히 뱀의 피를 이은 놈이다.

어둠은 이제 나에게도, 올리나에게도 전혀 이점을 주지 못한다.

그럼 차라리 이 어둠을 틈타 놈에게 깜짝 서비스를 하는 게 차라리 더 이득일 것이다.

나는 왼손을 치켜올렸다.

"스타랜턴!"

밝은 빛이 다시 왼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하얀빛이 공간 전체를 채웠다.

놈이 눈이 부신 탓에, 찡그리는 그 찰나. 나는....

번쩍.

아니었다. 놈의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그 누구보다 또렷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석화시키는 눈. 놈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던 내가 그 눈과 마주친 것은....

명백히 당연한 일이었다.

* * *

잔인한 일이었다. 석화는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놈과 눈이 마주친 나의 몸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손가락, 발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나는 바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석화는 아주 천천히 찾아오고 있었다. 나의 발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간신히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내 발끝을 쳐다보았다. 벌써 내 무릎 부분까지의 신체 부위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언젠가 내 머리 위에 단두대의 칼날이 떠 있던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언제나 죽음이란 것은 찾아오기 직전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안 돼...."

올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안 된다고, 어서 돌려내!"

철컥.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맡겨 두었던 뱀 단검을 품에서 꺼내 들고 있었다.

"돌려놓으라고! 이 나쁜 놈아!"

올리나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가 마치 넘쳐서 흩뿌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주위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게 가능했던가? 마술도 할 줄 모르는 일개 7살 꼬마 아이의 몸에서?'

나는 내가 아는 정보들을 가늠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야야!"

그녀가 몸을 날렸다. 어찌나 강한 발돋움이었는지, 그녀가 있던 땅의 바닥이 깊게 파일 정도였다. 그녀는 천장에 부딪힐 만큼 높이 솟아올랐다.

그녀 주위의 공기는 아직도 빨갛게 일렁이고 있었고....

이내, 나의 의식은 완전히 끊겼다. 아마, 돌이 되어 버린 탓일 것이다.

* * *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찾아온 거야?"

의식을 되찾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때, 나는 내가 아주 익숙한 곳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12년 만에 다시 온 장소. 아니, 이번 생에는 처음 찾아온 장소.

'장 피엘'의 오두막이었다.

장은 여러 가지 플라스크들이 모여 있는 작업대에서 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내가 의식을 찾았다는 걸 알았는지, 내게 걸어와 약병 하나를 입에 물렸다.

양파와 호두, 그리고 생고기가 뒤섞인 괴상한 맛이 느껴졌다.

"음. 가만히 있어. 아직 반쯤은 돌이니까."

그 말에 나는 내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나의 하반신은 아직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올리나는?"

장이 반갑긴 했지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올리나의 이름이었다.

"걱정 봐. 잘 있으니까."

다시 작업대에서 약품을 제조하며 장이 말했다.

"하지만, 안 보이잖아. 어디에 있어?"

나는 조금 신경질적인 말투로 장에게 말을 걸었다.

장은 고갯짓을 하며, 거실 한켠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분홍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다만 그 고양이는 웬만한 대형견보다도 더 몸집이 커 보였다.

"캣카트리스?"

고양이 모습을 한 몬스터.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캣카트리스뿐이었다.

"야오오옹!"

캣카트리스라는 말에 실망이라도 했는지, 고양이가 울부짖었다. 처음 보는 고양이였지만, 그 소리가 '실망'을 나타내는 것이란 건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하네. 자기 생명의 은인도 못 알아보고."

"생명의 은인...?"

나는 그 말에 고양이를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분홍색 털의 고양이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풍겨 왔다. 어딘가 아직 덜 자란 듯 아기자기한 이목구비들은 그 느낌을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나는 내가 짐작하는 것을 아주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오... 올리나...?"

"끼야아아앙!"

그 순간, 고양이가 몸을 공중으로 높이 치솟아 올렸다. 고양이는 사뿐히 나의 옆에 와 착지했다.

고양이의 발들은 어찌 그렇게 정확한지, 침대에 얼마 있지도 않은 빈 공간을 찾아 디뎠다. 마치 나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낼름.

고양이의 혀가 나의 뺨을 핥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 그 애가 걔 맞아."

'이 고양이가 올리나가 맞다고?'

나는 놀라서 다시 고양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뺨을 핥아 대는 고양이는 분명히 올리나를 닮아 있었다.

"같이 여행을 하고도 몰랐다니. 그 애 수인이잖아. 멍청아."

'수인'이라니.... 그건 정말 보기 드문 종족이었다.

과거에 아직 다양한 종족들이 인간들과 섞여 살 때에는 간간이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종족.

하지만 인간이 다른 종족과의 화합을 거부하자, 가장 먼저 인간의 곁을 떠나갔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종족.

"이 친구는 그중에서도 더 희귀한 친구야."

작업대에 약물 제조를 끝냈는지, 장은 또 한 병의 약물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약은 내 것이 아니었다. 장은 그 약을 고양이. 아니, 올리나의 입에 물려주었다.

꼴깍, 꼴깍.

자기를 위해 만든 약이란 걸 알기라도 한 듯이 고양이의 주둥이에 물려진 약병 속 약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땡그랑.

바닥에 약병이 널브러졌다. 고양이의 표정이 어딘가 경직되어 보였다.

"키야아아악!"

표정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고양이는 이내 몸의 털들을 곤두세웠다. 분홍색 털들이 모두 천장을 향해 세워졌다.

촥, 촥, 촥!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양이는 몸을 뻣뻣이 세운 채 깡총깡총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전 그렇게 높이 뛰어오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낮은 점프였다.

"키야아아악!"

몇 번 더, 날카로운 고양이의 괴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올리나였다. 그것도 알몸의.

옷 한 올 걸치지 않은 올리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영락없는 사람의 형상. 내가 아는 올리나 본인이었다.

030. 장 피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