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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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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프롤로그

성 박 이름 수.

하필 이런 이름을 지어서일까.

유년기 시절.

박수는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박수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수야, 그게 무슨 소리야?"

동년배 아이들의 의문 섞인 대답.

"어제 가위에 너무 눌려서 목이 아프대도."

"가위? 종이 자르는 거?"

"응? 그거 말고 가위!"

박수와 달리 아이들은 가위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 취급했다.

살면서 가위를 눌려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표정을 말이다.

그때 박수는 알았다.

다른 애들은 매일 같이 가위를 눌리지 않는구나.

그리고.

늘 같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다른 친구도 보이지 않는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수의 인생이 마냥 불행하지는 않았다.

종종 잡귀들이 그를 괴롭히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죽은 이들이 산 자를 괴롭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엄마, 어제 밑에 집에 할아버지가 찾아오셨어."

"괜찮아. 어련히 알아서 가실 거야."

더불어 박수의 어머니 역할이 컸다.

박수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평온한 성격을 지닌 분이셨다.

박수가 신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불평등 없이 그를 대했다.

그 결과 박수는 무척이나 성실하게 자랐다.

13살이 접어들 무렵 신병이 오기 전에는 말이다.

처음에는 밥을 먹지 못하고, 생수만을 먹었다.

몸은 점차 말라갔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꺼림칙해졌으며 망아경(忘我境)에 빠져 달밤에 별안간 밖으로 뛰쳐나가 춤을 추었다.

결국 박수는 고명한 무당을 찾아갔다.

복숭아나무가 하나 커다랗게 피어 있는 마당.

그러한 나무 아래에는 뒷짐을 진 소복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신기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즈넉한 복숭아나무 아래.

딸랑―.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방울이 울려 퍼졌다.

"아가야, 단단히 병이 들었구나.

자리가 귀신들이 판치기 좋은 자리야.

누가 보면 세타니가 살아 있는 줄 알겠어."

그녀는 안타까움을 담아 박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가 들어 주름진 그녀의 손길은 무척이나 까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박수는 혼란스럽던 머리가 평온해 짐을 느꼈다.

"아가야, 꿈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꿈이요?"

"그래, 아가가 가장 신기하게 꾼 꿈이 무엇이었느냐."

"아, 산만 한 할머니가 나오셨어요.

순하게 생기시긴 하는데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잠에서 깼어요."

그러자 무당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허어, 마고 할미시구나. 아가가 무척이나 어여뻤나 보다."

마고 할미.

한국 설화에 창조신으로 나오는 이였다.

"이런 자리에도 지금까지 악귀들이 감히 못 꼬인 것도 그분께서 보살핀 것이겠지."

"그리고요. 큰할머니가 커다란 검을 저한테 줬어요."

"그것이 네 무구로구나. 금방 내림을 받겠어."

무당 할머니는 그리 말하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박수의 어머니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박수는 무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옘병,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것도 입이 꽤 거칠어진 무당이 말이다.

신내림을 받은 뒤.

입이 열린 박수의 삶은 무당 그 자체였다.

어느 날은 돼지 피를 꿀꺽꿀꺽 삼키며 소리를 내질렀고.

어느 날은 박수의 위에서 칼을 든 채 춤을 추었다.

청소년기 시절을 죄다 그렇게 보내서인지.

종종 교복을 입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

세상이 한순간에 개판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web발신]

긴급재난문자

[중앙괴현상안전대책본부]

[종로구]오늘 18:23경 A등급 괴현상 발생.

인근 주민은 가까운 안전 구역으로 신속히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근처 안전 구역 링크.

http://...

휴대폰을 연신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 박수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올해 나이 스물셋.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 지도 언 10년 차.

나름대로 입소문이 나 꽤 괜찮은 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었으나.

'멸문'이라는 것이 세상에 발생하고, 세상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엉망이 된 것은 세상만이 아니었다.

[ 벌써 1,000년 전 일이었지.

그때 이 몸이 만들어 둔 새로운 마법에 관해 특별히 강의해 주겠다.

들어 봐라. 이 몸이.... ]

매일 같이 자신이 한 업적을 말하는 1,000년 전 대마법사가 혼잣말을 시작했다.

[ 아이, 도사 놈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이것 봐라 노부처럼 하라니까. ]

백발의 여검수가 박수에게 자꾸만 훈수를 뒀다.

[ 아벨리아 님을 위해 잠시 몸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벨리아 님께서 부탁하신 집무를 마저 행해야 합니다. ]

여황제의 비서였던 이가 일에 미친 강박증 환자처럼 손을 떨었다.

[ 가여운 자야. 전부 신의 뜻이란다. ]

박수의 앞에 있는 눈을 감은 성녀가 말하였다.

신을 믿는 이가 귀신이 되었음에도.

성녀는 아직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 빨리 나를 빙의 시켜! 결국 언데드 놈들이잖아? 이놈들 전부 내가 다뤄줄게! ]

몸은 뼈밖에 없는 네크로맨서가 격하게 웃었다.

그렇다.

박수의 인생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다른 차원에서 세상의 끝을 보고, 죽어버린 귀신들이 들러붙었으니까.

'마고 할멈, 나 아낀다며 좀 도와줘.'

박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즐비한 다른 차원의 귀신들.

그들을 보던 박수는 결국 손을 들어 올렸다.

"A등급, 괴현상 닫을 놈, 선착순."

그리고 귀신들의 눈빛이 일제히 번뜩였다.

박수.

그는 무당이다.

귀신 잡는 무당.

그리고 멸문에서 나온 괴이를 잡는 헌터 무당이다.

* * *

그날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거리는 우중충하고, 아스팔트 바닥은 물에 젖었다.

쏴아아아아―.

때마침, 지나가는 자동차 하나가 물을 흩뿌리며 거칠게 지나갔다.

고급 세단이었다.

"미친, 차 아니야 저거!"

"아씨, 물 다 튀었네."

고급 세단이 속도를 준수하지 않고, 달려서인지.

때마침 길거리를 가던 이들이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썼다.

가뜩이나 비가 오니 모두가 짜증을 부리던 순간.

그중 유일하게 우산을 내려 물을 막은 이가 우산을 돌려썼다.

"이야, 비싼 차는 빗속을 달려도 뭐가 다르네. 기똥차다. 기똥차."

발이 조금 젖었을 뿐.

물을 조금도 맞지 않은 사내가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의 이름은 박수.

올해 스물셋이 된 그의 직업은 무당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처녀 귀신들 피셜.

얼굴 하나는 난놈이라고 한다.

그가 등에 걸친 가방을 당겨 제대로 매었다.

절그럭―.

그러자 안에서 무게감 있는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굿을 위한 도구들이었다.

몽달귀신 하나가 한 처녀를 집요하게 괴롭히길래.

허 혼례, 귀신들의 결혼을 치러주어 한을 달래고 오는 길이었다.

"귀신도 장가보내 주는데. 난 스물셋 넘도록 뭐냐. 이게?"

모태솔로 경력 어언 23년.

박수는 허망한 기분을 느끼며 씁쓸히 웃었다.

그 웃음은 앞으로도 자기 삶에 이성은 없을 거란 확신이었다.

괜히, 무당 옆에 있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고.

대부분 질겁하고 도망가기 바쁘다.

"역시 끝까지 신내림 안 받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신님들 궁둥이 닦아 주느라 제가 이 고생이다. 그쵸?"

박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놈처럼 혼잣말했다.

하지만 신님은 이럴 때만 냉큼 등을 돌리셨다.

하여튼, 고약한 양반들이다.

"나는 무당, 꿈을 꾸는 무당~."

하지만 불굴의 박수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호기롭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였다.

우뚝―.

박수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박수의 건너편 신호등 앞.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백발의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

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눈.

백이면 백 아름답다고 할 만한 얼굴의 여성이었다.

'예쁘네.'

박수는 한순간 시선이 빼앗겨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박수는 이것이 그녀의 외모에 홀렸기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녀는 새하얀 얼굴과는 별개로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장이 아닌 오랜 옛날의 때 묻은 복장이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낡아 보이는 검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현대 사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

누군가 본다면 코스프레라고 놀렸을 복장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박수는 그녀에게 조금의 이질감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억수 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그녀가 전혀 젖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오싹―.

박수는 오랜만에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매 체질로 살아온 박수다.

그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귀신을 봐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반적인 귀신과는 다른 신들 또한 있다.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고자 속세를 떠도는 신들.

저 여자는 지금 그러한 신의 한 종류가 분명했다.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면 장군신인가.'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며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박수는 굳었던 시선을 서둘러 떼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신호등을 지나기 시작했다.

'어우 씨, 웬만한 거는 다 익숙해졌는데. 신이랑 마주치는 건 익숙해질 수가 없네.'

자칫 눈 마주쳤다간 괜히 흥미를 보여 따라올지도 모른다.

이미 모시고 있는 신이 있는 마당.

박수는 괜히 신하나 더 들일 생각 없었다.

박수가 시선을 돌릴 겸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아무 곳에나 접속해서 게시글을 읽는 척했다.

[탈모 신약 개발 성공, 이제 대머리 없다.][2]

[후방주의.jpg][22]

[성형 중독이 되는 이유][45]

[싱글벙글 요즘 넷카마 근황][9]

오늘도 쓸모없는 글들이 꾸준하게 양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정신을 돌리기 딱 좋았다.

적당한 글을 찾아 스크롤을 쭉 내렸을까.

[최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댓글에 적어줘.][1]

박수는 댓글 하나 없는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귀신 보는 것도 초능력으로 쳐주나?'

박수는 살짝 동한 흥미와 함께 게시글을 눌렀다.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시글은 삭제됐다는 말과 함께 열리지 않았다.

뭐야, 무당 놀리는 것도 아니고.

박수가 짜게 식은 표정을 지은 순간.

[ 열린다. ]

박수의 귀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따라 올라간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아까 장군신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하늘 높이 든 채 물끄러미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왜일까.

박수는 지금 당장 하늘을 봐야 할 거 같았다.

분명 신이 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서 좋은 거 없단 걸 아는데.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맹렬히 들었다.

박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자욱한 하늘 위.

굉장히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문이 하나 있다.

꺼림칙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문.

이런 기운이 익숙한 박수조차 두려움을 느꼈다.

인세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쌓아 올린 듯한 문.

하늘에 존재하면 안 될 터인 문이 그곳에 있었다.

쿠궁―.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세상에 망조가 들었나. 귀문이 열린 거 같은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박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순간 박수의 눈앞이 아주 짧게 새하얗게 변했다.

박수는 낙뢰라도 맞은 듯 저릿한 몸을 느꼈다.

글자 하나가 눈을 꿰뚫어 버릴 듯이 박혀 들어왔다.

"...마고 할미?"

모시던 신의 외침을 들은 박수가 뒷걸음질 쳤다.

곧이어 박수는 코끝을 찌르는 탄내를 느꼈다.

고기가 너무 오랫동안 익어 타버린 냄새.

동시에 눈앞에서 흩날리는 잿가루가 보였다.

'소사귀?'

가장 한 많은 귀신이라며 손꼽히는 귀신 중 하나.

불타 죽은 귀신, 소사귀.

박수는 소사귀에서 나는 귀신의 냄새, 귀취를 느꼈다.

그러고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새까맣게 탄 현상과 마주했다.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린 사람.

그자는 새빨간 눈동자로 몸을 비튼 채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하다.

소사귀(燒死鬼)다.

귀신은 자신이 죽었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꺄악?!"

"저, 저게 뭐야?!"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다.

소사귀를 본 것이 박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박수가 놀란 시선으로 주위를 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 말고도 정말로 소사귀를 보고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우연히 다 영안(靈眼)이 트인 이들일까?

'그럴 리가 있나.'

박수의 눈이 서둘러 소사귀의 발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곧 그는 소사귀의 발아래에 그림자를 발견했다.

잿가루가 남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이 소사귀는 지금 실체화를 한 것이다.

"미친, 아무리 비가 오고 있다고 해도 벌건 대낮에 귀신이 실체화를 해?"

살면서 실체화가 가능한 귀신을 본 건 딱 한 번이다.

그마저도 몇천 년을 살아온 끔찍한 요사귀(妖巳鬼)였다.

박수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저벅저벅―.

그 사이에도 소사귀는 걸음을 옮기고 있다.

놈은 이윽고, 어느 빌라의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으, 으그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소사귀가 집의 문을 잡은 순간.

화륵―.

불이 붙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르륵, 콰아아아아앙!

이윽고, 순식간에 번진 불길이 빌라를 거세게 태웠다.

"불이다. 불이야!"

"119, 119 불러!"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박수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하늘 위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귀를 막으며 바닥을 굴렀다.

"사람은지나가는이를붙잡고묻기도하지만누군가는아기의눈물을보고피눈물을, 어라, 나 여기 왜 있지. 돌아가야 해...."

119를 부르려던 남자가 휴대폰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리더니.

이내 하수구의 뚜껑을 열어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콰광!

높은 건물 위에 낙뢰가 떨어졌다.

거기에는 번개로 만들어진 짐승 하나가 포효했다.

거리는 쑥대밭이 되었다.

열린 하늘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힘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휴대폰이 재난 상황을 알리는 소리를 거세게 냈다.

긴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

오늘 16:23 국가 비상사태 선포.

훈련 메시지가 아닙니다.

현재 발생한 괴현상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시민분들은 안전을 최우선시해 가까운 군 시설 혹은 안전 장소로 대피 바랍.

2024년 4월 4일.

악몽이 드리운 날이었다.

2화. 세계관 최강의 검사

쏟아져 내리는 빗물 속.

건물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꺼질 생각 없이 타올랐다.

타닥―.

타오르는 불길의 소리가 귓가를 맴돈 그 순간.

박수는 자기 어깨를 탁 두드리는 감각을 느꼈다.

넋 놓았던 그를 신이 일깨워준 것이다.

흠칫한 박수가 정신을 차렸다.

여기저기서 사이렌과 비명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

박수 또한 안전한 상황이 아니다.

"무당 살려!"

정신 차린 박수는 서둘러 휴대폰에서 재난 문자를 확인했다.

얼마나 급하게 보냈는지 재난 문자를 채 완성되기 전에 보냈다.

'가까운 군 시설 혹은 안전 장소.'

박수는 군 시설을 본 순간 눈을 와락 찌푸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귀신들이 실체화했다.

그런 마당에 군 시설이라니.

'군 시설은 무당들도 꺼리는 곳이라고.'

원한과 음기가 가득 차다 못해 일반인도 귀신을 보는 게 군 시설이다.

그런데 군 시설로 오라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다면 안전 구역으로 가라는 건데.'

대체 이럴 때 안전 구역이 어디 있을까.

콰광!

박수는 저 멀리서 내려친 낙뢰를 보고는 흠칫했다.

거기에는 번개로 만들어진 짐승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저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쪽에서 멀어져야 함은 확실했다.

'신당.'

그 순간 박수는 신당을 떠올렸다.

신을 모시는 신당은 잡귀신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장소다.

정말 귀신들이 전부 실체화한 거라면 그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최소한 내 기준으로는 확실해.'

박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지나쳤다.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어떻게든 살겠다고 일단 어딘가로 달리는 사람.

제자리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 사람.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 등.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당연한 일이다.

박수는 그나마 귀신이 실체화했다 해도 평소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는 게 빨랐다.

반면에 일반 사람들로는 현실 감각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이게 대체 뭔 일인지."

물론 박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문이 열렸다 싶더니 귀신이나 요괴 같은 것들이 실체화했다.

당연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신님들은 뭔가 아시는 거 없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박수가 하늘을 보고 외쳤다.

물론 돌아오는 말은 없다.

신이라고 만능이 아니라는 건 무당인 박수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시내를 조금 벗어나니 사람의 수가 줄기 시작했다.

신당이라는 건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몰린 곳에서 멀리 있으니.

사람이 없는 곳으로 쭉쭉 향해 나아가는 박수였다.

의외로 시내 바깥으로 나오니 소동은 많지 않아 보였다.

'사람이 밀집된 장소에서 주로 괴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가.'

박수는 그 부분에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귀신이라는 건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을 좋아한다.

'사람이 몰리는 시내는 기본적으로 양기 성향이 강한데.'

그런 곳에서 귀신이 실체화를 했다라.

박수는 지금 사태가 마냥 귀신과 관련된 게 아님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래. 아까 소사귀를 처음 봐서 귀신이 막연히 실체화했다 생각했는데.'

박수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던 뇌기의 짐승을 떠올렸다.

지금껏 무당으로 살아온 박수다.

심지어, 박수는 무당 중에서도 난놈이다.

오죽하면 박수가 한창 신병을 앓던 시절.

무당들을 찾아갔을 때 자기 신이 자꾸만 등을 돌린다며 내쫓았을까.

신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곧 박수의 앞길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

그만큼 박수는 무당 중에서도 '기 센 거'로 유명한 이다.

그러니 박수의 영안은 다른 무당도 못 보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그런 박수마저 거의 본 적 없는 것이 바로 요괴들이다.

놈들이 지금껏 어디 꼭꼭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마냥 실체화로 치부할 게 아니다.

'실제로 지금도 거리는 깨끗해.'

거리에는 평소 자주 보이던 귀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두려워 전부 숨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으, 그으으, 으으."

그때 박수는 사람 앓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골목길이 보였다.

그러한 골목길 안쪽.

사람 하나가 공중에 들어 올려진 채 축 늘어졌다.

그는 자기 목을 계속해서 긁으며 괴로운 눈을 했다.

박수는 시선을 올렸다.

거기에는 볏짚으로 만들어진 옷을 두르고, 머리카락 또한 볏짚 같은 이가 보였다.

볏짚으로 짜낸 가면을 쓴 녀석은 기다란 두 다리로 골목길 중앙에 선 채.

남자의 목을 검은색 줄로 대롱대롱 묶어 놓았다.

그슨새.

살인한 죄인이 죽어 탄생한 제주도 쪽 귀신.

사실상 요괴로 분류해야 하는 녀석이다.

그슨새는 혼자 있는 사람을 찾아 홀려 끝내 넋이 나가 죽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이런 사람 없는 곳에 나타난 것 같았다.

하나, 귀신 또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그 힘을 기른다.

그슨새는 옛날 설화다.

그러니 요즘은 그슨새를 믿는 이들이 줄어 별다른 힘을 못 쓰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일반 악귀인 소사귀마저 실체화할 힘을 얻은 지금.

그슨새라고 해서 힘을 얻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놈은 설화대로 혼자 다니는 사람을 발견하고, 생전과 같이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박수와 그슨새에게 잡힌 남자의 눈이 딱 마주쳤다.

"사, 살려, 주세, 요."

그가 목이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박수에게 애원했다.

눈물에 찬 남자의 눈이 서서히 뒤집혔다.

탁!

바닥에 고인 빗물이 튀어 올랐다.

어느샌가 박수는 가방을 던지듯 하며 달렸다.

절그럭―.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는 귀신을 쫓는 군웅칼이 들렸다.

「잘 듣거라. 박수야. 무당이라는 것은 신들의 업을 닦는 일이다.」

박수는 모든 무당이 박수를 돕기를 포기했음에도.

유일하게 자신을 살갑게 맞아 주었던 만신 할미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 깃든 악의와 부정을 닦아 내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무당 천직이지.」

만신 할미는 어린 박수의 머리를 무척이나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을 구하거라. 네 힘은 죽은 자의 넋두리를 달래 산자를 지키는 힘이니까.」

죽은 자의 넋두리가 요괴에게까지 통용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박수는 이 순간 전력을 다해 남자의 목에 이어진 검은 줄에 군웅칼을 휘둘렀다.

꾸으으으윽! 서걱!

군웅칼에 닿은 검은 줄이 길게 늘어지더니 이내 끊겼다.

쿠당탕!

그러자 목이 졸렸던 남자가 바닥을 구르며 떨어졌다.

그는 끅끅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박수가 외쳤다.

"일어나서 달려!"

무당 일하면서 호통치는 것 하나는 일가견 있는 박수다.

박수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흠칫한 남자는 억지로 일어나 어떻게든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박수는 조금 안도했다.

다행이다.

설마 군웅칼이 효과가 있을 줄이야.

신도 믿고 볼 일이다.

박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향했다.

가면 너머로 그슨새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알겠다.

이놈, 단단히 빡쳤다.

"...한 번만 봐줄래?"

그 순간 그슨새의 기다란 팔이 들어 올려졌다.

화해의 악수라도 하자는 걸까?

박수는 기꺼이 화해에 응해줄 마음이 있다!

쇄엑!

그러나 그슨새의 팔이 세차게 내려쳐지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박수는 그의 악수에 응하지 않고 바닥을 냅다 굴렀다.

콰아아아앙!

아스팔트 바닥이 파헤쳐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조금 전까지 박수가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난 것이다.

"으아씨."

박수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화났으면 말로 할 것이지 주먹부터 나가다니.

가정 교육을 영 못 배운 녀석이다.

문제는 그 가정 교육 못 받은 놈에게 죽게 생겼다는 거다.

"아주 저주다 저주야! 만신 할미 말은 왜 생각나서는!"

박수가 소리를 내지르며 군웅칼을 앞세운 채 벌떡 섰다.

그 순간 그슨새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그슨새의 반응을 읽은 박수가 군웅칼을 보았다.

군웅칼은 부정과 액을 제거할 때 행위를 위한 칼이다.

그슨새 또한 귀신에서 비롯된 요괴.

어쩌면 군웅칼의 효력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박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동시에 박수의 눈이 자기 가방 쪽에 닿았다.

가방 안에는 만약을 대비해 챙겨놓은 사마제압부(邪魔制壓符)와 악귀부(惡鬼符)가 있다.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지만.'

군웅칼을 꺼리는 걸 보면 통할 확률이 높다.

'이놈을 그냥 두면 분명히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거다.'

그슨새는 혼자 있는 이를 노리는 악질적인 요괴다.

박수는 그슨새를 마냥 방치할 수 없다.

쿠웅!

그 순간 그슨새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수 또한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바닥을 박차고 오른 박수가 가방을 향해 뛰었다.

그러자 그슨새도 볏짚 속에 있던 팔을 휘둘러왔다.

박수가 구르다시피 그슨새의 팔을 피했다.

콰앙!

이번에도 박수를 못 맞춘 그슨새의 팔이 애꿎은 벽에 부딪혔다.

쿠웅, 쿵!

골목 벽에 팔이 깊숙이 들어가서일까.

그슨새가 팔을 빠르게 빼지 못하고 쿵쿵거리며 당기고 있었다.

그 틈에 가방을 회수한 박수는 급히 가방을 열었다.

박수가 꺼내 든 것은 사마제압부였다.

사귀, 요마를 제압하는 효능이 담긴 부적.

박수의 눈이 벽에서 팔을 빼고 있는 그슨새에게 향했다.

원래라면 이 틈에 당장 뒤돌아서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지만.

무당 팔자가 뭔지, 귀신 두고는 그냥 못 가겠다.

그러니 박수는 이를 꽉 깨물며 그대로 달렸다.

그러고는 기어코 팔을 뽑은 그슨새의 앞에 도달해 부적을 붙였다.

착!

빗물에 젖었던 부적이 그슨새의 몸에 붙었다.

그 순간 박수는 우뚝하고 멈춘 그슨새를 발견했다.

박수의 눈에 확신이 떠올랐다.

이 틈에 악귀부까지 사용하고자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빠각!

박수의 시야가 어느새 돌아갔다.

"어."

소리를 낸 박수는 자신이 어느새 바닥을 뒹굴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입에서 기침과 함께 핏물이 흘러나왔다.

배가 아프다.

정신이 혼미했다.

박수가 곧이어 자신이 벽에 부딪힘을 깨달았다.

빗물이 빠르게 박수의 몸을 두드렸다.

몸에 가한 충격이 어찌나 강했는지 갈비뼈가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숨이 자꾸만 턱턱 막혔다.

저벅저벅―.

긴 팔을 덜렁거리며 걸어오는 그슨새가 보였다.

먹구름 아래에 선 놈은 요괴라는 말이 걸맞게 기괴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안 통했구나.'

박수는 그슨새가 일부러 자신을 농락했음을 눈치챘다.

처음에 군웅칼을 두려워했던 것도 연기였겠지.

요괴란 사람을 놀리는 것으로 희열을 느끼는 고약한 존재들이다.

특히, 요괴는 무당들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오래전 영한 무당들은 요괴도 잡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 복수인가.'

무당도 자기 팔자는 모른다더니.

설마 여기에서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쿵―. 쿠웅―.

그슨새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느새 박수의 앞에 도착했다.

팔 척 귀신 정도 되는 키를 가진 그슨새가 또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박수는 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무당이 죽어서 되는 무당귀만큼 지독한 건 없다던데.

자신은 참 지독한 귀신이 되겠거니 하고, 박수가 생각했다.

[ 도사 놈, 힘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매가리가 없구나. ]

그 순간 박수의 귀에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듣기에 무척이나 좋은 그 목소리를 박수는 기억했다.

희미하게 떠진 박수의 눈에 그슨새의 뒤에 선 여성이 비췄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투명한 눈동자.

거기에 아름다운 얼굴.

분명 하늘에서 문이 열리기 직전에 봤던 장군신이다.

[ 이곳 도사 놈들은 어떨까 했더니. 이 꼴이라. ]

그녀는 박수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 이런 것도 하나 어찌 못한다면 거기서 끝인 거겠지. 노부였다면 한 손가락으로 처리했겠거늘. ]

그녀는 그것을 끝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번쩍!

그때였다.

박수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듯 무언가 정신이 든 것이 말이다.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신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저 한낮 무당의 감.

그러나 그 감으로 먹고살았던 박수이기에 외칠 수 있었다.

"거기, 신, 님!"

박수가 쥐어 짜내듯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 돌아서려던 장군신이 멈칫했다.

그녀는 곧이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박수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을 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쪽은 똑똑히 보인다.

귀신도 신도 보이는 아주 독한 영매 체질이었으니까.

박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슨새는 어느새 박수의 코앞에 도착했다.

"그, 렇게 자신 있, 으면 하, 다 못해 직접 해보십쇼!"

살다 살다 신내림을 강제로 받으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그러나 살려면 해야 했다.

귀신을 받아들일 때와 같이 박수의 몸이 툭하니 꺼졌다.

무당 일하며 여러 귀신을 들리게 해본 박수다.

신이 들어설 자리 만드는 건 눈감고도 할 수 있다.

장군신도 이걸 못 알아보지 않았을 터.

박수는 자신의 인생을 건 마지막 도박 수를 던졌다.

그슨새의 손이 박수를 향해 내려쳐 왔다.

콰직―.

그리고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자기 죽음이라 생각한 박수가 쓴물을 삼킨 순간.

곧이어 박수의 눈에 세상이 비쳤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빗물 아래.

거대하기 짝이 없던 그슨새가 반토막이 났다.

"그익, 그에게게엑...."

그슨새의 뒤편 깔끔하게 잘려 나간 벽이 보였다.

곧이어 박수는 자신이 휘두르고 있는 군웅칼이 보였다.

군웅칼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기운은 놀랄 만큼 청아했다.

박수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 그 순간.

박수는 자기 몸을 휘두르고 있는 신의 기척을 느꼈다.

"내가 잘못 봤군."

박수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에게 깃든 신이 박수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다.

박수의 입가에 한가득 웃음이 걸렸다.

그 경쾌한 웃음은 누군가에게는 악귀로 보일 만큼 광기에 차올랐다.

"도사 놈아. 넌 이 세계에서 최고의 이능을 지닌 녀석이다."

모두가 악몽의 날이라 부르며 도망치던 그 날.

어쩌면 요괴보다 더한 걸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3화. 몸 내놔

쏟아지는 빗물 아래.

소멸한 그슨새의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자리 잡은 꽤나 괜찮은 얼굴.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만약, 어느 이성이 그 웃음을 봤다면 순간 홀려 버릴 만큼.

그의 웃음은 눈길을 빼앗는 마력을 지녔다.

그의 이름은 박수.

무당이었다.

군웅칼을 늘어트린 그가 자기 목뒤를 손으로 감쌌다.

두둑, 둑!

그러고는 뼈를 맞추기라도 하듯 그에게서 기괴한 소리가 나왔다.

곧이어 박수는 자기 몸도 이리저리 더듬었다.

두두둑! 두두둑!

그때마다 기괴한 소리가 울렸지만, 박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리하던 그는 곧 만족한 듯 바닥을 툭툭 쳤다.

"이 정도면 싸우는 데 문제없지."

그리고 흘러나온 말에는 절절한 전투 의지가 담겼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섬찟할 법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육신을 다시 얻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그는 군웅칼을 비틀어 쥐며 스산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사 놈아, 네 희생을 봐서라도 노부가 기꺼이 몸을 잘 써주마. 네 세계는 노부가 지켜주겠다."

그가 시내 방향으로 몸을 틀던 때였다.

우뚝―.

갑자기 박수의 몸이 멈추어 섰다.

동시에 박수의 코에서 주르륵하니 핏물이 흘러내렸다.

"커헉, 헉!"

박수가 기침을 토해내며 벽을 짚었다.

그는 혼미한 정신과 함께 눈을 잔뜩 찌푸렸다.

"희, 생은 무슨!"

겨우 몸의 주도권을 되찾은 박수가 코에 묻은 핏물을 슥슥 닦았다.

[ 뭐, 노, 노부를 밀어내? ]

박수가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아까 본 장군신이 보였다.

한참 어린 얼굴임에도 자신을 노부라 칭하는 이상한 신이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박수를 바라봤다.

"무당이 자기 몸에 들어온 신도 못 밀어내면 그게 무당입니까?"

박수는 숨을 돌린 채 자기 몸을 점검했다.

몸에 있는 기란 기는 싹 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범상치 않은 신이란 거야 보자마자 알긴 했는데.'

설마하니 빙의 하나로 몸이 이렇게나 거덜 날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그슨새에게 당한 부분을 고쳐줬다.

무당이 보기에도 신묘한 의료술이었다.

[ 못난 도사 놈이! 당장 다시 나를 그 안에 들여라! ]

그 순간 눈이 돌아간 장군신이 박수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박수의 옷깃을 틀어잡으려 했지만, 당연히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장군신이라 한들 결국 영체다.

원래 영체는 인세에 관여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거지.'

박수는 그슨새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힐끗 보았다.

"그보다 당신이야말로 정체가 뭡니까."

박수는 조금 저릿한 머리를 감싸며 장군신을 돌아보았다.

박수의 머릿속에는 어떤 세계가 하나 그려졌다.

동양풍의 건물들이 줄지어진 곳.

그곳은 불바다가 되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중심.

박수가 장군신이라 부른 그녀가 그곳에서 구슬프게 서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사이.

무언가 거대한 것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사람의 인식을 한참 벗어난 존재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발작하게 하는 존재.

그 존재는 세상을 통째로 등에 업고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일어난 새까만 하늘 위.

박수는 오늘 자신이 보았던 문과 똑같은 문을 보았다.

「...이건, 노부의 죄다.」

장군신은 검을 들었고, 바닥을 박차며 그 존재에게 달렸다.

그리고 거기서 박수가 본 기억의 파편은 끊어졌다.

언뜻 본 기억의 파편.

그 기억의 파편을 통해 박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대체 어디서 오신 겁니까?"

순간 신들이 사는 신계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더불어 이제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업이 느껴졌다.

업보(業報).

인과를 뜻한다.

박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내림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보이는 그녀에게 쌓인 업은 감히 입밖에 내뱉기 두려울 지경이다.

[ ...노부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보통 도사 놈은 아니었군. ]

차츰차츰 장군신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박수의 옷깃을 잡으려던 손을 거뒀다.

[ 노부는 역천의 세계에서 온 이다. ]

다음 말을 듣고, 박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기가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그녀가 밝혔기 때문이다.

[ 저 하늘 위에 생겨난 멸문. ]

박수는 하늘 위에 생겨난 문을 떠올렸다.

[ 멸문으로 인해 노부의 세계는 멸망했다. ]

그리고 박수가 그래도 얼어붙었다.

박수의 반응을 본 장군신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멸문은 그녀의 세계를 멸망시켰다.

이번에 멸문이 열린 곳은 다름 아닌 지구.

멸문이 다음 멸망으로 택한 곳이 어디인지 박수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노부는 죽음을 맞이한 주제에 멸문에 붙어. 이 세계에 온 거다. ]

그녀의 다른 복장과 말투.

그리고 그슨새를 한 번에 죽인 검술과 그녀의 기억까지.

이 모든 게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가리켰다.

"...멸문이라는 게 뭡니까."

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박수가 긴장했다.

[ 노부도 모른다. ]

그러자 장군신은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다.

[ 노부는 세계를 지키려는 이들을 외면했던 도망자니까. ]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깊디깊은 후회가 쌓였다.

'신이 아니었어.'

그녀는 장군신이 아니다.

그저, 너무 많은 한과 업을 지녀 강대한 기를 지니게 된 귀신이다.

무당인 박수조차 신으로 착각할 만큼 말이다.

귀신이 되는 이들은 대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생전 하지 못한 것에서 깊은 한을 지닌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수는 그녀의 깊은 곳에 자리한 만년설보다 차가운 한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그 한을 어찌 풀 수 있을까.

자신의 한을 풀어야 할 세계는 이미 멸망하고 없는데 말이다.

죽은 자의 넋두리를 달래는 무당인 박수조차 그녀의 한을 달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 단지, 노부가 아는 건 멸문이 세계에 강림하는 순간 멸문은 그 세계에 맞추어 괴현상과 괴이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

박수는 그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했다.

'세계에 맞추었다는 소리는 기록된 설화나 요괴, 그리고 귀신까지 멸문이 실체화했다는 소리인가.'

그리 생각한 박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멸문을 보았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요괴와 같은 설화가 적은 축에 속한다.

나라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요괴와 귀신을 친숙히 여겼지.

마냥 두려운 존재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이 꼴이 났다.

'그렇다면 외국은.'

박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유럽 쪽만 해도 생각나는 괴물이 한둘이 아니다.

올림포스 신화, 북유럽 신화, 인도 신화까지.

그것들이 전부 괴현상으로서 실체화했다면?

외국은 정말로 끝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아직 너희 세계는 구할 수 있다. ]

박수는 자신의 앞에 다시금 우뚝 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 다시금 몸을 주거라. 도사 놈아, 세상은 노부가 구해주겠다. ]

이거,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

세계가 멸망할 만큼의 업을 쌓은 그녀다.

그녀가 악귀로 돌변하는 순간.

박수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그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을 직감한 박수가 냉큼 몸을 뺐다.

그러자 그녀의 손아귀에 박수의 옷깃이 스쳤다.

'만졌어?!'

박수는 옷에 남은 촉감에 흠칫한 얼굴을 하였다.

저 귀신, 지금 분명히 이쪽을 잡았다!

[ 그렇군. 그래, 이런 느낌이면 잡을 수 있는 모양이야. ]

박수를 지나친 그녀가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그녀의 입이 쭈욱 찢어지며 웃음이 그려졌다.

예쁜 얼굴과는 별개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귀신이었다.

박수는 오싹한 기분에 빠졌다.

[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거다. ]

두둑하니 몸을 푼 그녀가 손을 들었다.

섬섬옥수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새하얬다.

손 한번 이쁘네.

"저희 대화로 해결합시다. 이런 걸로 해결되는 건 없어요."

[ 괜찮다. 도사 놈아, 너도 즐겼잖나. ]

"즐기긴 뭘 즐깁니까!"

[ 너도 괴이 놈을 물리칠 때 즐긴 거 다 알고 있다! ]

사람을 살육에 미친 놈으로 아나.

하지만 눈이 광기에 찬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았어요! 그럼 잠시만요!"

박수는 손을 번쩍 들어 외쳤다.

그녀가 순간 멈칫하며 박수를 기다린 순간.

타다닥!

박수는 말을 잇지 않고, 냅다 몸을 돌려 뛰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박수를 본 그녀가 순간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을 와락 찌푸리더니 자세를 낮췄다.

탁!

그리고 단 한 걸음이었다.

박수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 것을 그녀가 따라잡은 것이.

"헉!"

박수는 코앞에 날아든 손을 보고는 고개를 훅하니 숙였다.

아슬하게 박수의 머리 위에 그녀의 손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박수를 잡지 못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을 휘두른 자세로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박수의 앞길을 막았다.

"미친!"

무슨 곡예사도 아니고.

귀신이어도 저건 너무한 거 아닌가?

박수는 비명을 지르며 방향을 틀어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가 없는 귀신에게 도망갈 수 있을 리 없다.

"흐으, 흐, 죽, 죽겠네."

박수는 순식간에 막다른 길에 몰렸다.

그녀는 빗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며 버릇처럼 손을 두둑하니 풀었다.

[ 나원, 살다 살다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

"...저도 살다 살다 이렇게 예쁜 사람에게 쫓기는 건 처음입니다."

[ 입이 아주 발랑 까졌구나. 여자애들을 많이 홀렸겠어. ]

아쉽게도 모태솔로 인생 23년 차다.

[ 그렇지만 도망도 여기까지다. 얌전히 노부의 것이 되어라. ]

"제가 이미 임자 있는 신이라서."

더 이상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박수는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분명 달려온다는 것은 인식했다.

그런데 너무 빨라서 몸이 반응하지를 못했다.

이건 못 피한다.

박수가 마지막 발악으로 몸을 방어하려는 순간.

그때.

박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듯 내려온 손의 형태를 보았다.

[ 읏?! ]

귀신이 몸을 흠칫 떨며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눈을 와락 찌푸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렇군. 이곳도 신 노릇을 하는 놈들이 있다 이 소리인가. ]

박수는 마고 할미가 그녀를 막아내 줬음을 깨달았다.

콰앙!

그 순간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놀란 박수와 그녀가 서둘러 그 방향을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건물 사이로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곧이어, 박수의 문자가 대뜸 울렸다.

박수는 문자 내용을 보고는 이번에도 의문을 보였다.

[web발신]

긴급재난문자

[중앙괴현상안전대책본부]

현재 국가에서 파견한 괴현상 전문 헌터가 괴이와 교전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교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박수가 눈을 깜빡였다.

"헌터?"

괴이와 교전을 하고 있다니.

박수는 뇌기로 만들어진 괴이와 맞서는 이를 보았다.

그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공통된 복장을 한 이들이 나타나 정말 괴이와 맞섰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헌터라니.'

동시에 박수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게시글이 떠올랐다.

[최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댓글에 적어줘.]

올라오자마자 삭제되었던 게시글.

그 게시글을 떠올린 박수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이미 정부는 대비하고 있었던 거다.'

정부는 멸문이 나타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은연중에 이능력자들을 모아 괴현상을 대비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박수는 서둘러 휴대폰을 살폈다.

그러자 세계 여기저기에서 실시간 소식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모두 공통으로 헌터라는 말이 거론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세상이야...."

괴현상과 괴이가 나타나고, 그들과 맞서는 헌터까지.

정말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세계였다.

4화. 군대 재입대라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다음 날.

그런 세상에서 박수는 빅튜브 인터넷 기사를 봤다.

거기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나와 일장 연설했다.

[ 정부는 예전부터 이와 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으며 시민의 안전을 위해 신속히 대처.... ]

박수의 예상대로 정부는 멸문과 괴현상에 관해 알았다.

이 사실을 알려 봤자 일반 시민들에게 혼란만 초래할 뿐이니.

비밀리에 헌터라는 이능력자들을 육성시키고, 대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첫 멸문 당시 많은 수의 인명 피해를 내긴 했으나.

정부가 꺼낸 헌터라는 카드는 성공적으로 괴현상을 잠재웠다.

[ 앞으로 발생하는 괴현상에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은 정부를 믿고.... ]

박수는 빅튜브의 댓글을 스윽 살폈다.

빅튜브 댓글의 상황은 반반이었다.

유가족들의 피해 보상.

괴현상을 정말 계속 막아낼 수 있는가.

일 터지고 나서 무책임한 정부.

세상이 멸망할 거다.

같은 부정적인 여론부터.

대처가 가장 빨랐던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

그래도 대비를 해둔 것이 어디냐.

고생한 헌터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

등등 긍정적인 여론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서로 대립하고 있다.

"엉망이네."

박수는 씻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박수는 일단 신당으로 왔다.

그러고는 거기서 하루를 지새우며 기다린 결과.

정부에서는 도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괴현상을 해결했음을 공포했다.

그 뒤 집으로 돌아온 박수는 결국 그대로 앓아누웠다.

비를 그렇게나 맞고, 그슨새에게 얻어맞은 뒤 빙의까지 했으니.

앓아눕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박수는 자기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옆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창문에 서있는 귀신이 하나 보였다.

그녀는 말없이 창문 밖을 물끄러미 봤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러한 세계를 그녀는 착잡하게 보았다.

'어제 빙의를 한 번 실패하고 나서 헌터까지 나타난 뒤로 조용해졌었지.'

박수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한 모금 하며 그녀를 보았다.

귀신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봐도 그녀의 미모는 대단했다.

기다란 백색의 머리카락과 우수에 찬 눈은 마치 그림 같았다.

하지만 박수는 저 미모를 마냥 신용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저 아름다운 외모조차 전부 잡아먹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름도 모르네.'

박수는 그녀의 이름조차 들은 적 없음을 떠올렸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옆에 두는 건 나쁘지는 않지.'

무당이라고 해서 제 팔자는 모르는 법이다.

박수도 어디 가서 쉽게 죽을 생각은 없었던 만큼.

이미 멸문에 관해 알고 있는 그녀는 옆에 두는 게 좋았다.

"거기, 귀신 씨."

박수의 부름을 들은 그녀가 이쪽을 보았다.

생각보다 더 강렬한 외모 탓에 박수는 순간 멈칫했다.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쁘고 난리야.

"일단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박수입니다."

[ ...통성명. ]

귀신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나.

귀신 중에는 그런 이들도 적지 않은 만큼 박수가 고민하던 찰나.

[ 노부는 천수화다. ]

의외로 한국다운 이름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는 씁쓸히 웃었다.

[ 이 꼴이 되고도 누군가에게 이름을 다 말해보는군. ]

귀신이 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을 본 이들을 마주한 적 없다.

그저, 미련이 남아 멸문의 곁을 정처 없이 떠돌 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그녀가 박수의 몸을 빌렸다곤 하나 괴이를 처치하고, 이름까지 말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옛날 생각이 났던 그녀였다.

"좋네요. 천수화 씨, 그럼 저랑 거래 하나 하죠."

[ 거래? ]

천수화가 의아한 눈으로 박수를 보았다.

그 눈과 마주한 박수는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다.

"내가 당신이 지닌 한을 풀어 줄게."

박수는 의자를 빼 앉았다.

천수화는 여전히 자신이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난 무당이야. 당신 세계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죽은 이들 넋두리 달래 천도시키는 직업."

천수화에게는 깊디깊은 한이 있다.

그녀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이유는 그러한 한 때문이다.

박수는 무당이다.

무당이 귀신과 거래하는 건 딱 하나다.

"나는 당신을 천도시켜 줄 테니. 당신은 당분간 나를 좀 도와."

이 모양 이 꼴인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험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박수가 냉큼 거래를 제안하자 천수화는 침묵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천수화는 곧 천천히 웃음을 흘렸다.

[ 노부의 한을 풀어 준다라. ]

그녀의 눈에는 딱히 별다른 기대감이 없었다.

단지, 박수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아무 관여도 할 수 없던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조금은 개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녀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그래, 좋다. 그래서 노부가 무얼 도울 수 있겠느냐? ]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지."

띠링―.

그 순간 박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수는 울리며 오는 문자를 보고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또 무당의 감이었다.

'어째 요즘 불안함만 느끼는 것 같은데.'

박수는 쓴 한숨을 삼킨 채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 본다고 휴대폰이 폭발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web발신]

[국방부]

동원 소집 안내

― 대상 : 만 16세 이상 성별에 무관한 이능력 각성자

― 직책 : 헌터 예비생

― 집결(소집)일시 : 4월 3일 10시 이내

― 집결지 : 수도방위사령부 제1방공여단

※국가 비상사태로 인해 이능력자의 동원 소집 거부 시 제98조에 의거하여 형사처벌 대상이 되니 주의 바랍니다.

박수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분명 동원령이었다.

차라리 휴대폰이 폭발했어야 할 상황이 들이닥쳤다.

'이능력자.'

어제 말한 헌터들을 가리키는 말이겠지.

함부로 사람을 끌고 갈 수 없는 시대라 쉬쉬했지만.

괴현상이 터지고 나서는 죄다 끌고 갈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이능력자가 아니라 다행이네."

박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때였다.

[ 도사 놈아, 무슨 소리더냐. 너도 이능력자다. ]

옆에서 지켜보던 천수화가 개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 본 박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난 무당이지. 이능력자 같은 게 아닌데?"

[ 헛소리는, 네 몸에는 이능이 있다. ]

"아니, 이능력이면 초능력이잖아. 난 그런 거 없다니까? 난 그냥 무당이야. 귀신이나 보는 무당!"

세상은 귀신 좀 본다고 해서 초능력 취급해 주지 않는다.

대부분 미친놈이나 취급하지.

세상이 이렇게 됐다고 인제 와서 영매 체질이 이능력이라니.

평생 미친놈 취급받으며 살아온 박수로서는 억울할 지경이다.

[ 쯧, 눈을 감아 보거라. ]

박수는 답답했지만, 눈을 감았다.

이참에 이능력자가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겠다.

그러자 천수화가 박수의 등에 손을 툭하니 대었다.

실체화가 되어 있는 손이다.

[ 천천히 네 몸속 내부를 직접 살피는 느낌으로 쫓아 보거라. ]

박수는 천수화의 말을 따랐다.

곧이어 박수는 자기 몸속 깊은 곳에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어떤 뜨거운 덩어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는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 느껴지느냐? ]

"이, 이게 뭔데?"

박수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 멸문이 열리기 임박한 시점부터 이 세계에 사는 자들에게는 이능이 발현된다. ]

박수는 숨이 턱 하니 막혔다.

[ 당연히 우리 세계에서도 이능이 발현된 이들이 여럿 있었다. ]

박수는 왜 천수화가 빙의했을 때 이능이라 일컬었는지 눈치챘다.

천수화는 이미 그녀의 세계에서는 이능을 겪었으니까.

[ 물론 도사, 너의 경우에는 아직 이능이 잠들어 있는 상태긴 했지만. ]

박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천수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박수의 귀가 쫑긋하니 섰다.

그녀의 입에서 무언가 놓치면 안 되는 이야기가 나왔다.

[ 노부가 네 몸에 들어섰을 때 특별히 직접 깨워 주었다. ]

다음 말을 들은 순간 박수가 삐걱거리며 천수화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천수화는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은 영락없이 잘한 일을 한 표정이었다.

[ 감사는 됐다. 노부도 네 몸을 쓰기 위해 일깨워준 것뿐이었으니.... ]

"감사는 개뿔이!"

박수는 소리를 내지르며 펄쩍 뛰었다.

놀란 천수화가 땡그랗게 뜬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으니.

박수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 다시 군대 가게 생겼잖아아악!"

23살, 박수.

직업 무당.

불과, 1년 전에 제대 후 현재는 예비군 신분.

다시 군대에 가게 생겼다.

* * *

군대.

그곳이 어떤 곳인가.

박수에게 있어 군대란 다른 의미로 끔찍한 곳이다.

수많은 이들의 원망과 원한이 담긴 음기 가득한 장소.

그곳이 바로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군대 썰 들으면 자주 거론되는 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귀신썰이다.

어느 사로에서 머리가 텅 빈 귀신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산에서 근무하다가 저 멀리 누가 철장을 두드리길래 가보니.

아무도 없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등.

귀신과 관련된 여러 썰은 군대에서 끊이지를 않는다.

그런 곳에서 박수는 어떻게 지냈을까.

'어떻게 지내긴 지랄맞다 못해서 진짜 개판이었지.'

박수는 무당 중에서도 아주 난 놈의 영매 체질이다.

어린 시절부터 무당으로 자라왔던 만큼 귀신은 이골이 났지만.

박수는 살면서 군대만큼 귀신 많은 곳은 못 봤다.

낮에는 노동으로 인한 피로가 쌓이고, 밤에는 귀신 달래느라 피로가 쌓인다.

덕분에 박수는 군 생활 내내 피로에 휩싸였다.

듣기로는 박수가 전역한 뒤 귀신 소동으로 난리였다는데.

박수는 전역한 군부대 쪽으로 엿이나 날릴 뿐.

아무런 조치도 해주지 않았다.

'진짜 저놈은 가만두면 부대 박살 난다고 부적 하나만 쓰게 해달라고 부탁해도 반입을 거절하던 포대장.'

박수는 과거에 악연을 떠올리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지금.

박수는 또다시 군대에 재입대하게 생겼다.

이번에는 헌터 예비생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결국 군대인 것은 같았다.

'인터넷도 난리가 났네.'

갑작스러운 동원령.

이능력자가 아닌 이들은 나라를 위해 빨리 입대하라고 내몰고.

누군가는 인권을 운운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박수는 인터넷은 더 안 보기로 했다.

온갖 사상이 충돌하는 이곳은 지금 혼돈의 도가니였다.

[ 관에 가는 게 뭐가 그리 두렵다고 난리인지. ]

물론 천수화는 박수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박수가 왜 그토록 화냈는지도 의문인 그녀였다.

[ 네 이능을 안 깨웠으면 그때 죽는 건 너였거늘. ]

"그것만큼은 고맙게 생각하긴 하는데."

박수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켰다.

그가 지금 와있는 곳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수도 방위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근무를 서는 군인들과 안내를 위한 군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헌터들도 보였다.

검은색의 통일된 제복 복장을 갖춘 이들.

그들은 군인들과 함께 안내 절차를 맡고 있다.

'이능력자가 생각보다 많나 보네.'

수도사령부 앞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렸다.

그건 육군훈련소 입영 당시가 떠오르는 광경이다.

박수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잠시 두통을 느꼈다.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

이 나이의 재입대라니.

"거기 뒤쪽에 계신 분,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는 순간 박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거기에는 헌터 남성 한 명이 서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았다.

"이능력자 분이시네요. 이능력이 무엇인지는 깨우치셨나요?"

그는 눈으로도 박수의 이능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 그게, 아직입니다."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차차 알아가실 거예요."

그는 생각보다 더 친절했다.

육군훈련소에서도 입대 전까지는 군인들이 다 이렇게 친절했는데.

박수는 살짝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무당이 아니라 예언가였던 건가!

박수는 헛소리하면서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세상이 이 꼴이 났다.

신들 업 닦아 주기 위해 평생 좋은 일만 하고 살아야 할 팔자.

'내 팔자가 그렇지.'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하자.

게다가 다른 세계에서 온 귀신이 인정해 준 최고의 이능을 지닌 박수다.

박수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세계최고지존헌터님 입장하신다.

"그럼 입대, 아니, 들어가시기 전에 이능율을 체크하겠습니다."

그는 알코올 측정기 같은 걸 꺼냈다.

"후, 불어주세요."

그리고 정말로 알코올 테스트 같은 걸 했다.

박수는 걱정했다.

혹시 테스트기가 폭발하는 건 아닐까?

이쪽 이능 탓에 폭발해버리면 민폐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고 불어주세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건만.

박수는 헌터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테스트기에 후하고 입김을 불었다.

띠링―.

잠시 후 테스트기에 숫자가 떠올랐다.

다행히 테스트기는 폭발하지 않았다.

'몇 정도 되려나. 너무 높은 거 아닌가 몰라.'

그 순간 헌터의 눈이 박수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에 부담을 느낀 박수가 흠흠 헛기침한 순간.

"레벨 1이시군요. 괜찮습니다. 어떤 레벨이든 헌터로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예?"

박수가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1레벨은 누가 봐도 가장 낮은 레벨이다.

그러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박수가 묻자 헌터는 테스트기를 보여줬다.

"이능 레벨, 1레벨 맞습니다."

1레벨 이능 헌터 무당이었다.

5화. 조 편성 망했어

세상에는 원래 억울한 일이 많다.

박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

박수는 군대 안으로 들어온 뒤 팸플릿을 받았다.

거기에는 헌터의 이능에 관한 설명과 이능 레벨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서 적힌 이능 레벨 1에 관한 설명은 이러했다.

[이능 1레벨]

일반인과 달리 괴이와 교전을 할 수 있음.

딱 한 문장.

그러니까 일반인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바깥에서는 이름 날린 무당인 내가 안에서는 레벨1 헌터?!'

뿌슈빠슝....

박수는 넋 놓은 표정으로 팸플릿을 내렸다.

뭐랄까.

작년까지는 공익으로 빠졌는데 올해 병역법이 바뀌며 입대해야 하는 기분이랄까.

형용할 수 없는 기분과 함께 박수는 씁쓸한 눈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자기 옆에 있던 천수화를 돌아보았다.

"...내가 최고의 이능을 가졌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름 기대하고 왔건만.

이게 뭐람.

[ 무슨, 노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인 것만으로 당연히 최고의 재능이지 않더냐?

조금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

천수화가 가슴을 펴며 우쭐거렸다.

그녀는 자존감이 무척이나 높았다.

박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무당이 되어서 귀신 믿은 게 잘못이지.

'그래, 차라리 1레벨인 걸 좋게 생각하자.'

1레벨이라고 한다면 위험한 곳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잡일이나 조금 하겠지.

'잘하면 병사로서는 가치가 없으니 빠르게 제대시켜 줄 수도 있고.'

박수는 다시금 멘탈을 회복했다.

평생 귀신에게 시달려 온 만큼 정신력만큼은 자신 있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러는 순간 박수는 자기한테 말을 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검은 긴 머리의 예쁘장한 여성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녀는 박수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박수도 얼떨결에 웃었다.

지금 박수가 있는 이곳은 헌터 예비생들이 모인 장소.

그녀 또한 박수와 같은 헌터 예비생이다.

"얼굴에 근심 걱정이 무척이나 많아 보이시네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동원령으로 끌려온 만큼 다들 같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는 생글생글하는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 혹시 나한테 관심 있는 걸까.

박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힘껏 우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생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인생 사는 게 참 힘들어요. 대뜸 이런 곳에 끌려와서 다들 심란해하시거든요."

그녀는 박수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역시 관심 있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런데 그 심란한 마음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출처 말입니까?"

그녀는 박수의 손을 대뜸 꼬옥 잡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플러팅이 과하다.

"마음의 불안함은 바로 신의 뜻이랍니다.

마음속 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굿을 올려야 하죠."

박수의 표정이 죽었다.

니체의 말이 맞다.

신은 죽었다.

"저희와 함께 굿을 올린다면 꼬인 사주마저도 바꿀 수 있답니다."

"와, 사주까지 바꿉니까?"

박수는 감탄을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더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마치, 먹잇감을 낚아챈 포식자의 눈이다.

"근데 제 직업이 조금 문제 될 거 같은데요."

"네? 어떤 직업이시기에...."

"저, 무당입니다."

이번에는 박수가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직업에 그녀의 웃음이 삐걱거리며 굳었다.

"사주팔자 보는 직업이라 사주가 바뀌면 곤란해서 말이죠.

그보다 신을 쫓아내는 굿이라. 어디 무당이시랍니까?"

허주를 쫓는 것도 아니고, 신을 쫓다니.

아주 용한 무당일 게 분명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무당은 만신 할미 덕분에 다 얼굴 텄는데.

어디 어떤 놈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아, 하하, 그랬군요. 아쉽네요.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그녀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박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며 보인 게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 하나 있는 거 키우기 힘들지?"

박수의 말투가 바뀜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집에는 정말로 어린 동생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물로 안 좋은 일 생길 거야. 물 조심해."

"네, 아, 가, 감사합니다."

어딘가 오싹한 기분을 느낀 그녀가 도망치듯 달아났다.

그러고는 몇몇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고개를 숙였다.

잘 안됐다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살다 살다 사이비도 꼬이네."

사이비한테 굿 권유받는 무당이라.

참으로 신박한 일이다.

그때.

박수는 무언가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멀대 키의 남자도 있었다.

상당한 체격과 얼굴에 흉터까지 무성한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보디가드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문제는 소녀 쪽이다.

지금 박수의 눈에는 그녀의 얼굴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와씨, 뭐시여, 저게.'

박수는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흉흉하게 휘감고 있는 검은 손을 보았다.

특히 얼굴에는 검은 손들이 더더욱 끊임없이 둘러 있다.

둘린 검은 손 때문에 박수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검은 손 아래 삐져나온 스커트로 여자란 걸 인식할 뿐.

박수는 그녀의 덩치조차 어림짐작할 지경이다.

'저게 다 악귀라고?'

대체 얼마나 많은 악귀가 붙어 있는 건지.

박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혼미할 지경이다.

'오랜만에 귀신 보는 것만으로 코피 날 거 같다.'

박수는 자기 코를 손으로 꾸욱 하니 눌렀다.

저 소녀가 대체 뭔지는 몰라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냄새가 났다.

'내 10년 무당 인생에서도 저런 건 처음 보는데.'

보는 것만으로 몸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뱀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오셨습니까."

그 순간 헌터 몇 명이 부리나케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여자애를 보면서 설설 기기 시작했다.

여자애 또한 그런 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어디 높으신 분 따님인가?'

저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악귀가 붙으려면 저주 종류가 분명한데.

어느 집안인지는 몰라도 집안 대대로 저주를 받은 모양이다.

'단명하겠네.'

박수가 솔직한 평가를 내리는 동안 천수화도 소녀를 빤히 봤다.

천수화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 건가.

천수화가 박수의 시선을 느끼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 도사, 저 여자애가 여기서 가장 강하다. ]

그리고 뜻밖의 말을 해왔다.

박수는 다른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가장 강하다는 건 이능 쪽?"

[ 그래, 아마 마음먹으면 여기는 그대로 초토화할 수 있겠지. ]

뭔, 이능이 그렇담.

붙어 있는 악귀도 그렇고, 이능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쪽과 엮이는 건 피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박수는 안다.

세상은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깊게 옭아맨다는 걸.

"...이 인원으로 한 달간 여러분들은 같은 소대로서 활동하게 될 겁니다."

소대장 역할을 맡은 헌터의 말에 박수는 옆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박수의 얼굴 앞에 검은 손들이 넘실거리며 지나갔다.

박수의 옆에는 아까 보았던 소녀와 보디가드가 있었다.

거기에 다른 두 소대원들 또한 더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중 한 명은 아까 박수에게 굿하라던 사이비 종교 신도다.

'마고 할미, 나한테 억하심정 있어?'

어떻게 이렇게 절묘하게 소대를 짜주지?

박수는 살짝 울적해졌다.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앞으로 여러분을 담당하게 된 3소대장, 진미현이에요."

진미현은 무척이나 선한 인상으로 웃음 지었다.

"자, 그럼 이쪽 분부터 차례대로 자기소개 해 볼까요?"

실제로 그녀는 선한 게 맞았다.

강압 없이 최대한 유순하게 예비생들을 대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소개를 맡게 된 인물은 박수와 같이 최악의 소대에 뽑힌 피해자 남성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박철웅입니다! 원래 7군단에서 하사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휴가 도중 헌터로 각성하게 되어 헌터 예비생이 되었습니다!"

박철웅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머리카락이 짧더라니.

이능을 각성하고 나서도 군대로 오게 된 걸 보면 천직이 군인인 모양이다.

"아, 저는 서은설이에요. 밖에서는 마트 일하고 있어요."

사이비 종교원 분은 사이비 일은 일절 배제한 채 말하였다.

그러면서 박수의 눈치를 힐끗힐끗 봤다.

조금 전에 잠깐 봐준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남궁준호입니다. 경호원 일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보디가드 남자 쪽도 자기소개했다.

역시 이쪽은 보디가드였다.

뒤이어 보디가드가 지키는 소녀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박철웅은 그녀를 보고 헤하고 입을 벌린 채 보았다.

서은설 쪽도 입을 가린 채 감탄하는 느낌이다.

두 사람은 소녀의 외모를 보고 감탄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를 본 이들은 모두가 그녀의 외모에 감탄하고는 했다.

배우를 연상케 하는 아리따운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박수만이 질색하는 표정을 가리느라 급급했다.

검은 손이 자꾸 어깨를 툭툭 쳐서 소름 돋아 미치겠다.

확, 악귀부를 써버릴까 보다.

"이라나, 대학생."

그녀의 짧은 설명이 끝마쳤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마지막 인원에게 몰려들었다.

검은 손과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박수가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이쪽 소개 설명 시간인가.

박수는 힘껏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건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었다.

"박수, 무당입니다!"

박수가 자기를 소개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의 눈에 희한한 사람을 보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분명 최대한 밝게 소개했는데.

왜 이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 이상한 건 너희들이잖아!

난 선량한 무당일 뿐이라고!

박수는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애써 참았다.

"아, 하하, 그, 그렇군요. 박수 씨는 무당이시군요.

저희 앞으로 잘해 보아요."

진미현이 서둘러 싸한 상황을 정리시켰다.

그것을 본 박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당 취급이 이렇지, 뭐.'

박수는 순순히 이해했다.

그 또한 이런 취급이 새삼스러운 것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 깜빡 잊었다.

세간에는 무당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는 걸 말이다.

입대 첫날부터 삼일까지.

헌터 조교들은 앞으로의 이능 테스트와 훈련과정을 설명했다.

거기에 비어 있는 생활관에 남녀 구분해 배치하고, 생활 물품을 배포했다.

영락없이 육군훈련소에 돌아온 기분이라 박수는 조금 울적했다.

그렇게 삼일 차에 이르자 사람들은 서서히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첫 무리의 중심은 아무래도 자기 소대끼리였다.

그 뒤에는 생활관, 곧 자주 마주치는 무리로 발전하더니.

이내 완전히 무리가 나뉘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다 큰 성인들도 있지만, 이곳에는 아직 어린 이들도 여럿 있었다.

"아저씨, 무당이라면서?"

여가 시간에도 생활관에서만 지내야 하는 만큼.

몸이 쑤셨던 이들이 주변에 말을 걸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거기에 박수가 그들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세간에서 무당은 썩 좋은 인식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무당과 관련된 영적인 일을 믿기도 하지만.

대다수 사람이 사기라며 손가락질하거나.

혹은 정신병 취급하기도 한다.

눈앞에 있는 사내도 후자에 해당하는 분류였다

박수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죽거림이 가득 담겨 있다.

"어디 나도 뭐 좀 봐줘 봐봐. 나한테 뭐 붙어 있어?"

그는 최근에 생겨난 무리 중에서 자주 말썽을 부리는 일당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무리들.

그들은 군대라는 답답한 공간을 극도로 못마땅해했다.

그래서인지 종종 조교와도 다툴 만큼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박수는 그를 마주 보더니 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심심하니 시비나 걸어볼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봐줄 수 있지. 앉아 봐."

이쪽은 프로 무당이거든.

6화. 아자아자, 3소대!

점사(占辭).

점괘를 나타내는 말.

풀어 말하자면.

무당이 신령의 힘을 빌려 찾아온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점쳐주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박수 또한 점사 신령이 붙어 있다.

얼마 전, 서은설 때가 그러했다.

갑자기 입에서 신령이 전하는 말이 술술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신령이 힘을 빌려줬을 때 이야기고.

박수는 점사라는 것이 꼭 무조건 신령의 힘이 필요하지 않음을 안다.

'사실 신령님들의 힘만 제하고 보면 심리학에 가깝지.'

박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올해, 만 19세.

남은구.

화려한 머리와 일부러 낸 스크래치.

팔에 두른 이레즈미 문신, 지운 눈썹.

상체를 키워 뚱뚱한 체격.

본인 취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위압감을 형성한 남자.

나름대로 배가 나올 때까지 어떻게든 체격을 키운 듯싶지만.

그의 손목과 바짓단 아래 드러난 발목은 무척이나 가늘었다.

이는 타고나기를 마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눈썹을 지워 어떻게든 인상을 강하게 보이도록 하긴 했으나.

타고난 눈매는 유순한 편이다.

얼굴도 찌워놓은 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본디 동그란 형의 얼굴이었을 터.

'타고난 체질이 그리 못될 수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 그러한 점들이 그의 과거에서 썩 안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위압적이지 못하면 역으로 당한다.

그의 과도한 위압감은 그러한 자신을 타파하기 위해 택한 것일 확률이 높다.

'지금도 주위 시선을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방을 나눈 만큼.

이곳에는 남자들만 모인 방이다.

거기에 헌터라는 특성상 다들 육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다.

남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그는 일부러 험한 말과 사고 치는 것을 반복했다.

이는 학창 시절, 학교라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터득한 기술이다.

이것이 구태여, 신령님을 부르지 않아도 보이는 부분이었다.

삶.

사람은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본인이 지니고 있다.

외형, 행동거지, 눈빛, 눈의 방향, 입버릇, 표정까지.

이 모든 것에 삶은 묻어 나온다.

'어른들이 어릴 때부터 바르게 키우려는 건.'

옳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지 은연중에 알기 때문이다.

박수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이 좋다.

10년 무당 인생은 그에게 사람 보는 눈 만큼은 확실히 만들어 줬다.

"남은구, 이거 큰일인데."

"뭐가?"

그리고 이런 이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도가 텄다.

박수는 남은구에게 고개를 낮추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남은구가 슬쩍 귀를 기울였다.

"네 근처에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애가 하나 있어."

"뭐, 누구?!"

이런 타입의 이들은 이성에 관한 관심이 특히 높다.

이성 또한 남성적 지위를 뽐낼 수 있는 우월함 중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은구는 아니나 다를까, 이성의 관심을 주목했다.

"목소리 낮춰봐. 남들은 다 군대 안에서 고생하는데 이성이 관심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시기하지 않겠어?"

"그, 흐음, 그건 그렇지?"

남은구는 어느새인가 거칠게 콧방귀를 내쉬기 시작했다.

신이 난 것이다.

"얼마 전에 군대 내에서 한 명 도와준 애가 있지."

"어어, 맞아, 맞아!"

남은구가 고개를 거칠게 끄덕였다.

"신나서 몰아붙이지는 말고, 조금 거리 둔 채로 행동해. 호감이라는 건 한순간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잖아? 아직은 좀 이르니까."

"오, 알았어. 조금 거리를 둔 채로 말이지. 하, 이 몸의 인기란."

남은구는 어느새인가 박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참고로 남은구에게 말한 여성분이 그에게 호감이 있는 건 진짜다.

이론 훈련 도중 화장실 갔다가 나오는데 여자들의 수다가 들린 탓이다.

당사자가 직접 마음에 든다고 말했으니 그걸 그대로 전해준 것뿐이었다.

'짚신도 짝이 있는 법.'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 여성분은 애정 결핍 느낌이 있단 말이지.'

금방 이성에게 반한 뒤 집착으로 변하는 애정 결핍일 확률이 높다.

'거기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겠지!'

나머지는 알아서 할 거다.

[ 가만 보면 은근히 못되게 구는구나. ]

박수가 싱글벙글 웃고 있자 천수화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무당은 본디 세상에 환멸이 나 있거든. 그래서 본디 성격이 못돼요. 못돼."

박수는 그러면서 자기 손에 턱을 괴었다.

"물론 이러면서도 사람 못 버리는 게 무당이긴 하지."

박수는 신나 하는 남은구의 옆쪽에 보이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각이 딱 잡힌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전 하사 박철웅.

박수와 같은 소대로 활동하는 이였다.

박수는 그의 옆에 붙어 있는 귀신을 하나 보았다.

한이 듬뿍 맺은 객귀 한 명.

박철웅을 바라보는 객귀의 눈동자에는 깊디깊은 원한이 쌓여 있었다.

"참으로 사람 못 버려."

박수는 늘 그렇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며칠 뒤, 드디어 지루한 이론 훈련을 마쳤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훈련은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육체를 전투적으로 쓰는 법.

둘은 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법.

헌터로서 활동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다.

이런 몸을 쓰는 시간이 온 만큼.

헌터 예비생들 사이에서도 피로를 호소하는 이가 늘었다.

모두가 꽤나 엉망인 꼴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때.

"박수 형님! 점심 맛있게 드십쇼!"

"오냐."

박수는 자신을 향해 힘차게 외치는 남은구를 보고, 적당히 손 흔들어 줬다.

그러자 남은구의 옆을 따라오던 무리들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큰형님이 된 기분이다.

"박수 씨, 저분이랑 친하셨어요?"

그러자 옆에서 아이스 홍시를 먹던 서은설이 말을 걸어왔다.

본디 사이비 종교의 일원인 그녀지만.

사이비만 제외하고 본다면 서은설은 그리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딱 그쪽에 위치하는 게 서은설이다.

처음 사이비를 권유했다가 박수가 무당인 걸 알고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훈련하는 동안 매일 같이 얼굴을 봐서인지.

이제는 그녀도 박수를 같은 팀원으로서 대했다.

"예, 그럭저럭요?"

"신기하네요. 남은구 씨가 안 좋은 소문이 많아서요."

서은설은 꺼리는 타입인 모양이다.

"제가 친화력이 원체 좋거든요. 누구든지 친해질 수 있습니다."

박수는 콧대를 드높였다.

실상은 남은구가 박수가 알려준 여성과 사귀기 시작했는지라.

큐피드 역할을 한 박수를 형님으로 대하는 것뿐이었지만.

속사정 알 길 없는 사람들 눈에는 친해 보일 거다.

"하하, 누구든 친하면 좋죠!"

그러자 박철웅이 힘찬 목소리로 동의해 왔다.

박수는 그에게 붙은 객귀가 신경 쓰였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준호 씨?"

그러면서 박철웅은 옆에 있던 보디가드, 남궁준호에게도 말 걸었다.

"예."

남궁준호는 무척이나 짧게 대답했다.

그는 예전부터 그다지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먼저 묻는 말은 없고 대답은 늘 단답형이다.

더불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이라나는 말할 것도 없다.

박수는 아직 자기소개 이후로 한 번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다.

그녀는 남들과 대화 자체를 일절 안 하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 쪽도 그녀가 지닌 분위기와 뛰어난 외모 탓에 거리감을 느끼니.

애초에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같은 팀원인 서은설조차 그럴 지경이다.

다른 이들은 말 다했지.

하지만 박수는 다른 이유로 이라나에게 말을 안 걸고 있었다.

'어우.'

그도 그럴 게 여전히 새까만 손 수십 개가 그녀를 돌돌 말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는 아직도 이라나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 줄 모른다.

정확히는 박수도 괜히 화 입을까 싶어 피하는 중이다.

'세상사 굳이 엮이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

박수가 보기에도 저렇게 뒤엉켜서 오랜 시간 자손에게 이어진 저주면 답 없다.

대대로 단단히 저주받았다는 소리니까.

'아직 어린데 안타깝긴 하네.'

하긴, 부잣집 따님인 거 같으니.

문제 생기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 버섯 튀김이라 맛나겠군. 다시 봐도 식단이 꽤 괜찮아. 노부 때는 관의 병사 식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수준이다. ]

이쪽도 옆에 있는 귀신 하나 아직 해결 못한 상황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조용하던 천수화는 은근히 말이 많았다.

죽고 나서 사람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박수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서 혼자 쫑알쫑알 자주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이제 말을 배운 아이를 보는 것 같아.

박수는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미녀는 뭘 해도 그림이 된다고.

쫑알거리는 모습도 귀엽긴 해서 들어 줄만 했다.

'나 박수, 외모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운 무당.'

박수는 외모를 우월하게 여기는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혼내면서도 엄지를 들었다.

예쁘고 귀여운 건 옳다.

설령 그게 귀신이라도.

"으이씨, 밥이 무슨 이따위야. 진짜 군대 밥 못 먹겠네."

[ 저, 저, 천벌 받을 놈. 음식 귀한 줄 모르긴! ]

단, 화내면 주위 물건이 흔들리니 참아줬으면 좋겠다.

박수는 음식물을 버리는 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천수화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고는 다시 버섯 튀김을 씹었다.

'변함없네.'

군 생활 동안 탕수육인 줄 알았던 게 버섯임을 깨달을 때마다 느낀 허무함.

그걸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오후 수업은 드디어 괴이와 직접 맞서 본다는군요!"

그러는 사이, 조용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박철웅이 말을 시작했다.

"E등급 괴이라고는 하지만 힘내서 같이 무찔러 보죠!"

박철웅은 전투의 의지를 절절하게 보였다.

'뭔가 있었네.'

하지만 박수는 박철웅의 행동이 과장 됐음을 눈치챘다.

마치, 자신이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남들을 독려하는 모습이었다.

박수의 눈에 박철웅의 옆에 붙은 객귀가 다시 보였다.

녀석은 박철웅의 어깨를 부서질 듯이 눌렀다.

'괴이와 무슨 일이 있었나.'

멸문이 열린 것은 얼마 전.

그렇다면 저 객귀는 얼마 전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철웅은 최근에 꽤 안 좋은 일을 겪은 것 같았다.

그의 격려 섞인 말에도 3소대는 조용했다.

어이구 씨, 밥이 아주 코로 넘어가겠다.

다른 데는 다 하하 호호하던데 왜 우리 소대만 이럴까.

"하하, 맞죠. 열심히 해봐야죠! 기왕 하는 거 일등으로 괴이를 무찌릅시다!"

"역시 박수 씨입니다!"

그러니 박수가 혼자서라도 박철웅의 말을 받아 줬다.

"아자아자, 3소대. 파이팅입니다!"

박철웅은 힘찼다.

그의 등 뒤에 붙은 객귀도 같이 힘차서 악의를 잔뜩 내뿜었다.

객귀가 내뱉는 악의가 언짢은지 이라나에게 붙은 검은 손들이 꿈틀거렸다.

천장에 달려 있던 조명이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했다.

[ 잡귀 놈들이 참, 시끄럽구나. ]

천수화는 귀가 따갑다는 듯이 자기 귀를 파며 눈을 부라렸다.

"천지주신님, 오늘도 맛있는 식사 감사합니다."

사이비 서은설은 사이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박수는 그냥 손뼉만 쳤다.

단합은 하나도 되지 않는 3소대.

아자아자, 출격이다!

7화. 방배근린공원 속 괴이

서울특별시 관악구, 방배근린공원.

공원이라 썼지만, 실상은 산지에 가까운 곳.

평소 열린 공원인 그곳이 오늘만큼은 정부하에 통제가 되어 있다.

물론 멸문이 열리고 나서, 사회가 한 번 뒤엎어진 터라.

겁 없이 인근이 적은 공원에 들어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벌써 몇 주 지나갔다 이건가.'

박수는 그런 방배근린공원, 매봉재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와 있다.

원래는 군부대 관측 시설이었다는데.

그 덕분인지 전망이 꽤 잘 보였다.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더 적응력이 빠른 걸까.

멸문과 괴현상, 괴이와 헌터라는 비이상적인 상황이 터졌음에도.

수많은 차들이 여전히 바쁘게 서울을 오가고 있다.

"다들 돈 버느라 바쁜 모양이네요."

그러는 순간 박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박수와 같이 보호구를 착용한 서은설이 보였다.

사이비긴 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외모의 그녀다.

덕분에 보호구를 입었음에도 죽지 않는 불굴의 외모를 보여줬다.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 괴현상이 일어나거나 괴이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다들 겁이 없는 거려나요."

박수의 말에 서은설이 착잡한 얼굴을 했다.

"내일 당장 입에 풀칠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괴현상이 무슨 문제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내일이 더 두려워요."

마음 아픈 현대 사회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북한이 미사일을 쏴도 그러려니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이미 진작부터 괴현상에 빠져 있었군요."

박수는 나름대로 이해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도 벌어야 하는 게 돈이겠죠."

그녀의 얼굴에 깊디깊은 씁쓸함이 담겼다.

박수는 그녀가 돈과 관련하여 일이 있음을 눈치챘다.

박수는 신령이 서은설에 관해 보여준 장면을 기억했다.

그녀는 부모 없이 혼자서 어린 동생을 키우고 있었다.

혼자 살기도 힘겨운 세상.

어린 나이에 동생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죠."

박수는 섣부르게 그녀를 위로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의 위로는 때론 칼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 두 분 뭔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우리의 하사 박철웅이 슥하니 끼여왔다.

보아하니 도저히 말 없는 보디가드와 아가씨 사이에는 못 끼어 있어서겠지.

"그냥 세상 사는 이야기 좀 했어요."

서은설은 까칠하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박철웅은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제가 뭔가 은설 씨에게 밉보인 게 있는 걸까요?"

확실히 서은설은 박철웅에게 묘하게 까칠하긴 했다.

"나한테도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박수는 대충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별말 안 했다.

때로는 태생이 밝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도 있는 법이니까.

박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전미현 3소대장이 보였다.

3소대가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

그건 바로 실습 훈련을 위해서다.

현역 헌터인 3소대장을 필두로 방배근린공원에 의도적으로 푼 E등급 괴이를 잡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훈련의 목표다.

"여기는 알파, 여기는 알파, 지정 위치 도착했습니다. 오버."

―여기는 브라보, 지정 위치에 스탠바이해라. 신호 주겠다. 오버.

3소대장 진미현은 무전기를 통해 아래에 배치된 헌터들과 대화를 나눴다.

'진짜 하네.'

E등급 괴이라.

박수는 지난날에 마주쳤던 그슨새를 떠올렸다.

녀석은 말 그대로 정말 괴이다.

인간은 당해낼 수 없는 그런 존재.

과연, 그슨새는 몇 등급이었을까.

"자, 3소대 여러분 집합해 주세요."

그러는 순간 진미현이 사람들을 집합시켰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천수화도 박수의 옆에 섰다.

천수화, 너 아자아자 3소대원이었니?

"지금부터 3소대 E등급 괴이 소탕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수가 천수화에게 전우애를 느끼는 사이.

진미현은 작전을 설명하였다.

"우선, 서은설 예비생이 이능을 이용해 괴이를 수색합니다."

서은설의 이능은 무려 4레벨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물건에서 감각을 읽어내는 이능이라 한다.

그녀는 육체 수준은 낮지만, 감지계 이능 레벨이 무척이나 높은 사례였다.

4레벨이라는 준수한 레벨 덕에 그녀는 물체의 주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정보를 얻는다.

단점은 아직 이능에 익숙하지 않아 눈을 감지 않으면 그 좋은 능력을 사용 못 한다.

그래도 활용 방법을 생각하면 굉장히 뛰어난 능력이었다.

"진형은 박철웅 예비생과 남궁준호 예비생이 전방, 이라나 예비생과 서은설 예비생이 중앙, 박수 예비생이 후방에 서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최후방에 선 것은 전미현이다.

참고로 박수가 후방에 선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제일 이능 레벨이 낮으니까. 히히.'

박수의 이능은 1레벨.

그나마 가장 낮은 박철웅도 2레벨이다.

만약 박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최후방에 있는 전미현이 지켜주면 된다.

그러니 박수는 후방에 배치된 것이다.

즉, 박수는 감자 취급받고 있다.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느 소대에는 이거 없지....'

박수감자는 쓸쓸히 앞장서는 소대를 따랐다.

그래도 괜찮다.

박수감자한테는 필살기 천수화 동백꽃이 있다.

박수감자는 굴하지 않았다.

"아, 발견했어요!"

그 순간 서은설이 눈을 번쩍 뜨며 말하였다.

"외형이 어떤가요?"

"머리는 개와 비슷한데 몸은 여우인 애네요."

진미현의 질문에 서은설은 침착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E등급 괴이, 개여시군요."

개여시.

인간을 맛본 개가 나이를 먹어 요괴가 된 형태.

경상남도 거제와 통영에 주로 퍼진 괴담의 주인공이다.

특징은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과 여자로 변신할 수 있다.

여자로 변신한 개여시는 남자를 꼬셔 데려간다.

이후 남자의 시신은 발견조차 못 하게 된다.

그것이 개여시다.

'요괴가 내려오는 전승과 별개로 괴이의 본래 출신은 상관없는 걸까?'

비록, 이번에 개여시는 헌터들이 직접 잡아 데려온 것이긴 하나.

박수가 저번에 마주친 그슨새라는 케이스가 있었다.

그슨새는 본디 제주도 쪽 요괴다.

그런 그슨새가 서울 한복판에서 괴이가 되어 발견됐으니.

괴이의 발생은 요괴의 시작 장소 자체는 심하게 제약을 안 받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국은 한국 요괴 설화 자체에 덧씌워져 버린 건가.'

생각해 보면 멸문이 열린 당시.

꼭 한국의 설화 요괴만이 나타난 건 아니다.

'괴담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 왔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수많은 괴담이 퍼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빨간 마스크', '홍콩 할머니'와 같이 말이다.

'멸문은 세계에 맞추어 괴현상과 괴이를 만든다고 하였지.'

그렇다면 그러한 괴담 또한 괴현상과 괴이로 발현된 걸지도 몰랐다.

'앞으로 괴담 공부라도 해야 하나.'

나름대로 서적을 통해 읽어 온 게 존재하긴 하지만.

현대 괴담까지는 박수도 알지 못한다.

어쩌다가 무당이 귀신 잡다 요괴와 괴담까지 상대하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바로 쫓도록 하죠."

"네!"

그러는 사이, 서은설이 다시금 수색을 시작했다.

목표물은 발견했으니 목표물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서은설을 필두로 한참을 나아가던 산행 도중.

서은설이 드디어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저기 동굴이네요. 개여시는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에는 서은설의 말대로 뜬금없이 웬 동굴 하나가 떡하니 있었다.

근처에는 돌탑 몇 개가 세워진 게 보였다.

'쓰읍, 느낌이 안 좋은데.'

박수가 영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수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이곳 근처에 귀신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산이든 귀신은 많다.

그것도 등산객보다 훨씬 많은 게 산귀신이다.

이는 당연히 방배근린공원이라 불리는 매봉재산도 마찬가지다.

산은 음침하고, 빛이 적으며 습기가 많다.

귀신들이 환장할 만한 환경을 전부 가지고 있다.

'동굴이라면 특히 귀신들이 살기 좋을 텐데.'

이곳에서는 그런 녀석들 또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령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면 이거 진짜 위험한 건데.'

자연령은 인간령보다 훨씬 힘이 센 이들이다.

그런 이들조차 이곳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저 동굴에 자연령을 쫓아낼 만한 무언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박수는 순수하게 이곳이 꺼림칙했다.

무당의 감이다.

[ 도사 놈, 늦게도 알아차리는군. ]

그 순간 천수화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몸에서는 어느샌가 푸른 빛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수는 그게 천수화의 전투 의지가 형상화된 것임을 눈치챘다.

[ 그 정도 감을 갖췄으면 금방 알아차렸어야 하지 않나? ]

박수는 천수화를 의아한 듯 보았다.

"...내 이능은 감지계였어?"

박수는 아직도 자신의 이능을 알지 못한다.

남들은 각성하자마자 자기 이능을 알게 됐다는데.

박수는 천수화가 강제로 이능을 일깨워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이능 말고, 타고난 능력을 말하는 게다. ]

박수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금 느낀 감?"

[ 그래, 그게 아니면 뭐겠느냐. ]

무당으로서의 감.

이는 신령의 도움이 없어도 생각보다 꽤 잘 들어맞는다.

불길한 느낌을 받으면 몸을 뺀다.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박수는 이러한 것에 예민했다.

[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노부의 세계에서는 이를 기감(氣感)이라 표했다. ]

천수화의 세계는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것도 능력이라 평가해 주니 조금은 뿌듯했다.

무당으로 사는 삶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박수 예비생, 지금 누구랑 대화하세요?"

그러자 때마침 박수의 대화를 들은 전미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요? 아는 귀신이랑요."

빙의도 시켜준 꽤 친한 사이다.

전미현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아, 그, 그렇군요. 그래도 괴이가 있으니 목소리를 줄이도록 합시다."

"제가 배려가 없었군요."

"괜찮습니다. 주의만 해주세요."

"옙."

소대장께서 말씀하시는데 박수는 잘 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럼 동굴 안으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두 두 분 앞서 주세요."

박수와 대화를 마친 전미현은 앞에 두 사람에게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 소녀에 의해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불길해. 난 안 가."

박수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으이씨.'

그리고 박수는 바로 고개를 홱 틀었다.

왜냐하면 이라나의 몸에 붙은 검은 손들이 미친 듯이 허공에서 휘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말을 내뱉은 이는 이라나였다.

그녀는 대뜸 동굴을 보더니 안 간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라나 예비생? 안 간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전미현 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훈련에도 묵묵히 참여하던 이라나가 반대 선언했으니.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말 그대로야. 난 여기 안 가."

이라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였다.

이라나는 헌터들이 직접 마중을 갔을 정도의 좋은 집안 아가씨다.

이는 전미현 또한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을 터.

그렇기에 전미현은 이 상황을 어찌할지 더더욱 고민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러는 사이, 남궁준호가 이라나에게 붙어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변함없다.

정말 그저 불길하니 안 가겠다는 소리였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길 안내를 했던 서은설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박철웅은 무슨 일인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떴다.

그러고 보니 박철웅에게 붙어 있던 객귀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라나 예비생, 오늘 행하는 건 훈련입니다. 안에 있는 건 E등급 괴이일 뿐이고요. 불안한 건 알지만...."

전미현은 이라나를 나름대로 설득해 보려 했다.

하지만 이라나는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미현이 쩔쩔매는 걸 본 박수는 슬쩍 발언하고자 손을 들었다.

"전미현 소대장님, 저도 발언해도 됩니까?"

"아, 네, 박수 예비생 하세요."

전미현은 조금 지친 얼굴로 박수의 말을 들어 주었다.

"저도 우선, 이라나 양과 같은 생각입니다."

"...불길하다는 건가요?"

"그것도 있긴 한데. 오는 길에 산귀신들을 잔뜩 봤거든요."

박수는 익숙하다는 듯 산의 경치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만 산귀신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뭔가 두려워 도망친 것처럼 말이죠."

박수는 전미현을 다시 돌아보았다.

세계가 멸문이 열리고, 귀신 중에서도 실체화를 한 녀석들이 존재한다.

이는 헌터들도 아는 사실일 터.

이제 더 이상 귀신을 무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무당 된 감으로서 솔직하게 말해. 여기 들어가면 다 큰일 날 거 같습니다."

박수는 소신 발언하였다.

무당 말 들어서 나쁠 건 없다.

"박수 씨가 그렇다면 저도 가고 싶지 않네요."

그 순간 서은설 쪽에서도 동의해 보였다.

처음 본 날 박수가 자신의 개인 정보를 툭 내뱉었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으음, 소대장님, 소대원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것도 소대장으로서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꺼리는 기색을 보이자 박철웅도 살짝 거들어주었다.

모두가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걸 본 전미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박철웅 예비생 말대로 그 또한 소대장의 덕목이죠. 훈련은 우선, 여기서 중지하겠습니다."

전미현은 생각보다도 더 참된 소대장이었다!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전미현 소대장님, 이 시대의 낭만."

"소대장님 믿고 있었습니다!"

박수가 슬쩍 바람을 넣자 박철웅도 때마침 전미현을 칭찬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놓고 하는 칭찬이 조금 부끄러운지 귀를 붉혔다.

"소대장 놀리지 마세요! 훈련 중지를 알리고, 산을 내려갈 테니. 다들 움직일 준비 하세요. 아아, 여기는 알파...."

전미현이 그리 말하고 무전기를 든 순간이었다.

[ 늦었다. ]

쿵―.

그리고 박수의 시야가 뒤집혔다.

8화. 추악함 속에 담긴 빛

시야가 어지럽다.

박수는 낙뢰라도 맞은 듯한 기분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상당히 어지러웠다.

무언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반응 못한 박수는 휘말려 산을 굴렀다.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린다.

어디 하나 부서지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다.

[ 도사 놈아, 언제까지 나자빠져 있을 게냐. ]

그 순간 들려온 천수화의 목소리에 박수는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박힌 나무뿌리를 잡고 박수가 몸을 일으켰다.

"으, 흐으, 후."

박수의 귀에 침음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가 고개를 돌리자 비스듬히 자란 나무에 걸린 서은설이 보였다.

아무래도 똑같이 휘말린 것 같았다.

박수는 산을 아슬하게 타며 서은설의 상태를 살폈다.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친 듯 이마에서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금방 차리지 못하는 건 뇌진탕 때문인 것 같았다.

박수는 응급 처치로 구르느라 찢어진 옷 부분을 마저 찢어 그녀의 머리를 묶었다.

지혈 정도는 될 거다.

박수는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자신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았다.

위쪽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천수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범이 나타났다. ]

천수화의 말이 이어졌다.

"범?"

[ 그래, 범이다. 집채만 한 커다란 범. 속도 또한 빨랐다. ]

한국 산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니.

'괴이다.'

박수는 자신의 불안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멸문이 열린 이 세상은 언제 어디서 괴현상과 괴이가 탄생할지 모른다.

매봉재산에서 괴현상이 발생했고, 이를 확인 못하고 훈련을 하다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 전미현이라는 여자가 범과 맞서고 있다. ]

전미현 소대장.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능 각성자로서 헌터로 훈련받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범을 괴이로 판단.

즉시, 교전에 들어간 것 같았다.

"상황은?"

[ 이기지 못하겠지. 위험할 거다. ]

박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현역 헌터인 전미현이 당한다면 그다음 사냥감은 예비생들이다.

전미현이 아직 당하지 않은 지금.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야 했다.

"천수화, 그럼 일단 그 범이라는 걸...."

[ 도사 놈아, 미리 말하마. ]

천수화는 박수의 머리 위에 우뚝 섰다.

[ 이번에 빙의한다면 노부는 절대로 네게 몸을 돌려주지 않을 게다. ]

천수화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 웃음은 마치, 악귀와 같은 얼굴이었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노부는 딱히 천도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

천수화가 양손을 하늘을 향해 펼쳤다.

그 손은 하늘마저도 자기 손에 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 노부의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다. 그런 노부가 천도한다 한들 어디로 가겠느냐. ]

천수화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듯 휘날렸다.

그 광경을 올려다보는 백도마저 오싹할 만큼.

그녀에게서 거센 악의가 흘러나왔다.

[ 차라리 도사, 네 몸에 깃들어 천하를 쥐어 보는 게 더 즐겁겠지. ]

천수화가 미래를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귀신은 산 자의 몸을 언제나 탐하려 든다.

자신에게는 이제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기회가 된다면 바로 산 자에게 깃든다.

천수화 또한 같은 귀신.

장군신으로 착각할 만큼 거센 기운을 지니고 있다곤 하나.

그녀도 귀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 그러니 노부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

천수화는 박수의 얼굴을 투명한 손으로 감쌌다.

[ 도사, 네가 노부에게 기댈 수밖에 없게 될 상황을 말이다. ]

박수는 천수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어째선가 실소를 머금었다.

"천수화, 위에 있는 괴이, 네가 이기지 못할 만큼 위험해?"

[ 노부 상대로는 별것도 아닌 존재지. ]

"그럼 됐어."

[ ...노부의 말이 말 같지 않으냐? ]

말 같지 않다고 한 적 없다.

"그냥 그 정도라면 빙의시켜도 되겠다 싶어서."

[ 그 정도라고? ]

"너 멸문 싫어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멸문 하나만큼은 반드시 부숴버리려 할 거 아니야."

박수도 멸문은 탐탁지 않다.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멸망시킨다니.

그게 무슨 천벌 받을 짓인지 모르겠다.

"천수화, 무당 우습게 보지 마. 귀신이 나쁜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

박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거세게 반짝이고 있었다.

천수화가 눈을 찡그릴 정도로 밝게 말이다.

"그리고 나도 우습게 보지 마. 빙의 몇 번 당한다고 귀신 못 쫓아낼 만큼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어."

이건 박수의 순전한 자신감이었다.

천수화가 빙의한다 해도 쫓아낼 수 있다는 무당으로서의 자신감.

그 자신감과 마주한 천수화가 침묵했다.

"바, 박수 씨?"

그러는 순간 서은설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본 박수는 바로 상황부터 전했다.

괴이인 범이 나타났고, 전미현이 그런 괴이와 맞서는 중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은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호, 호랑이라니."

범이란 맹수다.

본 적 없는 괴이보다도 더 확실하게 형성된 공포.

맹수가 날뛰고 있다는데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이가 두렵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에 반해 박수는 침착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귀신을 보고, 어울려서일까.

박수는 타고난 본성이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수화는 그런 박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생각을 하는 표정이다.

"서은설 씨는 이대로 산에서 내려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훈련 교육 중일 때는 휴대폰 사용 금지다.

그러니 개인 휴대폰은 전부 보관함에 들어 있다.

'망할 군대 시스템, 이딴 거까지 군대 그대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어찌 되었든 그 탓에 아래에 연락할 수가 없다.

한 명쯤 도움을 청해야 할 이가 필요하다.

"네, 네? 그러면 박수 씨는 어쩌시게요?"

"위의 상황을 모르잖아요.

전미현 소대장님이 맞서고 있긴 하지만 다른 예비생분들도 있어요. 이대로 두면 전부 당합니다."

박수는 그리 말하며 이미 올라갈 채비를 마쳤다.

"잠깐만요. 박수 씨, 그러다 죽어요! 같이 내려가요!"

아무리 한동안 훈련을 같이했다 한들.

그들은 생판 남이다.

목숨까지 걸 이유는 없었다.

"서은설 씨, 저는 무당입니다."

박수는 나무뿌리를 잡고, 위로 올랐다.

"제가 아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되면 가장 먼저 달려올 곳이 어디겠어요."

서은설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는 그 꼴은 못 봅니다. 무엇보다 저대로 그냥 두는 게 더 위험해요. 다음 사냥감은 우리일 테니까."

박수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산의 비탈길을 올랐다.

"그러니까 내려가서 지원군 부탁합니다."

서은설은 멍한 눈으로 박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릿속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서은설과 그녀의 동생 서은지는 부모가 없다.

그 이유는 부모가 천지주신 신교에 빚을 진 뒤.

두 사람을 빚 대신 천지주신 신교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부모의 빚은 고스란히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

서은설은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추악함을 절절히 느끼고 살아왔다.

그녀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다.

혼자라면 어찌하여 도망칠 수 있겠지만.

천지주신 신교는 서은지를 사실상 인질로 삼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알바를 하거나.

혹은 천지주신 신교의 교리에 따라 새로운 신도를 데려오는 것뿐이다.

돈은 징글징글하다.

그리고 사람은 추악하다.

그리고 서은설도 마찬가지로 사람이다.

그녀는 남들보다 좋은 외모를 이용해 신도를 끌어들였다.

그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내일을 위해 누군가를 함정에 빠트렸다.

하지만 지금.

무당 한 명이 망설임 없이 사람을 구하고자 위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도 소대 내에서 가장 이능 레벨이 낮은 그가.

그녀는 잡고 있던 나무뿌리를 뜯듯 꽈악 쥐었다.

어째선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달싹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죄책감과 자괴심, 한심함, 무력감.

스스로 추악함을 마주한 듯한 끔찍한 기분.

사람은 분명 추악하다.

그러나 때로는 기차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뛰어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 중에는 늘 가장 먼저 선두에 나서는 이가 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선의로 이끌어 가는 사람.

서은설이 산에 올라가는 박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자신도 그런 선의에 이끌린 걸지도 모른다.

"박수 씨!"

서은설이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은설 씨?"

"같이 가요."

"예? 하지만."

"벌써 해가 지고 있어요. 만약 산길을 찾아내려 가야 하거나 한다면 제가 있는 게 훨씬 빨라요."

산은 조난하기 쉽다.

특히, 지금 같이 괴이가 날뛰는 상황이라면 더욱 위험하다.

"그리고 전미현 소대장님 무전기 기억하시죠."

호랑이 괴이가 나타나기 전.

전미현은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연락이 닿았다면 이미 아래쪽은 상황을 알 거예요.

거기에 전미현 소대장님이 무전기를 놓치는 걸 본 게 기억나요."

"그럼 무전기는."

"지금 동굴 앞에 떨어져 있을 확률이 높아요.

다른 데 떨어졌어도 제 사이코메트리라면 발견이 더 쉽고요."

무턱대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타당한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귀신이 원한을 가지는 건 무서우니까요."

자기 말을 인용한 서은설을 보고, 박수는 짧게 웃었다.

"서로 귀신 안 되게 조심합시다."

"네, 이렇게는 못 죽죠."

서은설은 자신이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단 걸 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왜인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가죠."

박수가 먼저 앞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은설도 그 뒤를 따랐다.

사람은 때때로 정말 단순한 계기로 가치관이 바뀌기도 한다.

서은설은 오늘 일이 자신에게 있어 그런 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박수는 금방 동굴 앞에 도착했다.

비탈길을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헌터가 되고 확실히 육체 능력이 좋아진 모양이다.

박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전기는 바닥에 보이지 않았다.

서은설의 말대로 어딘가에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사람이 전부 굴러떨어질 정도의 충격이다.

그보다 가벼운 무전기이니 당연하겠지.

'떨어진 충격으로 고장 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부디, 이쪽 사태를 아래쪽에서 알아차렸기를 바라야겠다.

"후우!"

그사이, 서은설도 비탈길을 전부 올라왔다.

"서은설 씨, 무전기가 안 보입니다."

"제가 바로 찾을게요."

그녀가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하는 사이, 박수는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구석진 곳에 검은 손들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이라나?'

박수는 바로 그쪽으로 뛰었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옷 뒤가 걸려 버둥거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라나는 여성 중에서도 키가 작은 편이다.

그러니 나뭇가지에 걸리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깨닫고, 이쪽을 보더니 흠칫했다.

이라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손들이 제멋대로 일렁였다.

'부끄러운 건가.'

얼굴이 안 보이니 잘 모르겠다.

"잠시만, 도와줄게!"

박수는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 이라나의 허리를 잡았다.

말도 안 되게 가는 허리였다.

얘, 밥은 먹고 다니나.

사람 손길이 닿아서인지 이라나가 순간 움찔거렸지만, 다행히 얌전히 있었다.

박수는 그대로 이라나를 들어 올려 내려 주었다.

"다친 곳은?"

"...없어."

이라나는 쪽팔리는지 자기 옷깃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고마워."

바로 감사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나쁜 애는 아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전미현은 범 괴이와 싸우고 있는 마당.

박철웅과 남궁준호에 관해 묻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녀도 범 괴이가 출현할 때 휘말려 잠시 의식을 잃은 모양이다.

"박수 씨!"

그 순간 위에서 서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는 서둘러 이라나와 함께 위로 올랐다.

그러자 무전기를 찾아낸 서은설이 굳은 얼굴을 지었다.

"큰일 났어요. 박철웅 씨와 남궁준호 씨가 어떤 여자한테 넋 놓은 채 동굴 안으로 끌려갔어요."

박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 괴이를 떠올렸다.

개여시.

남자를 홀려 잡아먹는 괴이.

두 사람이 혼란을 틈타 개여시에 홀렸다.

9화. 사람 무는 개

소대장 전미현은 범과 전투 중.

남궁준호와 박철웅은 개여시에게 홀린 상황.

절체절명의 상황 속.

"무전기가 작동돼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전기가 작동된다는 것 하나.

서은설이 서둘러 무전기로 연락하는 사이.

박수의 고민은 짧게 이어졌다.

"전 두 사람부터 구해 올게요."

그리고 박수는 결단을 내렸다.

당장 두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개여시에게 잡아 먹힌다.

상대는 E등급의 괴이.

혼란을 틈타 둘을 어떻게든 꾀어내긴 한 듯하지만.

본질이 약함은 변하지 않는다.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미현 소대장님도 걱정이지만.'

박수도 자기 주제는 안다.

천수화의 도움이 없는 이상 전미현 쪽은 사실상 돕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해야만 했다.

'선택과 집중이다.'

자기 주제는 자기가 아는 법이니까.

"잠깐만요. 박수 씨,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할 건 해야죠. 최대한 몸 숨기고, 무전기로 계속 연락 부탁드립니다."

박수는 그 말을 남기고, 동굴 안으로 뛰었다.

타닥!

그러는 순간 박수는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박수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이라나가 보였다.

"이라나?"

박수가 부르자 이라나의 검은 손들이 한차례 넘실거렸다.

무섭게 왜 저래.

"같이 가."

박수가 의아한 듯 되묻자 그녀는 빠른 속도로 박수의 옆에 붙었다.

"아까는 불길하다면서."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니까."

한시가 급한 상황.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이라나는 나이가 어릴지언정 같은 헌터 예비생 신분이다.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터.

'나쁜 애는 아니네.'

박수는 마음속 이라나의 평가를 올리며 천수화를 살폈다.

아까 전 박수와 입씨름을 한 후.

천수화는 줄곧 침묵한 채 박수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얼굴 하나는 기막힌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박수는 동굴을 달리는 내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이 기분은 분명 천수화가 말한 기감이라는 거겠지.

'알겠다. 이 동굴 자체가 괴현상이었어.'

매봉재산의 산은 크지 않다.

당연히 이런 크기의 동굴이 생기기도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는 건 이 동굴은 괴이가 나타나며 발생한 괴현상이다.

산귀신들이 왜 동굴 근처에 얼씬도 안 했는지 알겠다.

괴현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겠지.

"어둡네."

안으로 들어갈수록 빛은 사라지고, 어느새 어둠만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에 어둠까지 가득하자 폐소공포증이 느껴졌다.

인간의 눈은 생각 이상으로 어둠에 약하다.

아무리 어둠에 적응된다 한들 빛 한 줌 없는 곳에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파직!

그 순간 박수의 귀에 스파크가 울려 퍼졌다.

박수가 옆을 보자 거기에는 번갯불이 튀는 손을 든 이라나가 있었다.

이라나의 이능.

전자기력 조작(Electromagnetic Force Manipulation).

그녀의 이능 추정 레벨은 8.

이마저도 추정 레벨일 뿐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헌터 중 공식으로 가장 높은 레벨이 9레벨이다.

즉, 8레벨이란 헌터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는 레벨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번 헌터 예비생 중 가장 높은 이능 레벨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아직 미숙하기에 본래 출력의 반의 반도 못 내서 그렇지.

그녀가 완숙한 헌터가 된다면 국가 제일의 전력 중 하나가 될 거다.

덕분에 헌터 예비생들은 이라나가 자신들과 같은 훈련을 받는 것에 의문을 표했다.

헌터 예비생의 평균 레벨은 3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관해 헌터 교관들의 이야기를 살짝 들어 보자면.

본래 이라나는 특별 훈련 과정을 거쳤어야 할 테지만.

국가가 '8레벨의 헌터도 동원 훈련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싶어 어떻게든 배치했단다.

'국가 비상사태니, 각성자들은 어떻게든 동원 시키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그런 지금.

이라나가 자신의 이능 전자기력 조작을 발동했다.

이라나의 이능 덕분에 동굴이 환하게 잘 보였다.

8레벨의 전자기력 조작이라더니.

쳐다보기 눈 아플 지경이다.

[ 범도 한 방이겠군. ]

그걸 본 천수화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라나가 있으면 범 괴이도 쓰러트릴 수 있는 건가.

'나는 몰라도 이라나라면 전미현 소대장님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이능의 레벨 차이가 어느 정도 격차가 나는지 박수는 모른다.

하지만 천수화의 말만큼은 사실이겠지.

'이쪽을 최대한 빨리 구하고.'

전미현과 합류한다.

"고마워. 이라나."

박수가 감사를 표하자 이라나의 검은 손들이 좌우로 일렁였다.

살짝 등이 곱게 펴진 걸 보아하니 우쭐거리고 있다.

파다닥!

그 순간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 다수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안쪽에서 들려올 날갯짓 소리.

그 주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라나, 고개 숙여!"

박수가 웃옷을 머리 위로 펼쳐 들며 이라나 쪽으로 뛰었다.

깜짝 놀란 이라나도 자세를 낮춘 순간.

박수가 그녀와 함께 옷을 덮으며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찌지지직!"

"찌지직!"

"찌지지직!"

그러자 머리 위로 굉장한 수의 박쥐 떼가 지나갔다.

박수의 예상대로 박쥐 떼가 몰려온 것이다.

갑자기 번갯불이 터졌으니.

빛에 민감한 녀석들이 반응한 거겠지.

'이 동굴은 괴현상, 그렇다면 저 박쥐들도.'

괴이의 일종일 확률이 높았다.

박수가 웃옷을 들자 박쥐 떼는 허공에서 유턴하고 있었다.

저건 명백히 공격하겠다는 의사였다.

"귀신 잡다 박쥐 잡게 생겼네!"

박수가 급히 허리춤에 둘렀던 헌터 전용 검을 들었다.

헌터의 육체 능력은 일반인과 다르다.

이는 육체 능력에 부여된 이능의 힘 덕분이다.

그렇기에 모든 헌터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각성하게 된다.

1. 신체.

이는 운동선수보다 뛰어난 육체 능력을 수월하게 발휘한다.

2. 이능

서은설의 사이코메트리나 이라나의 전자기력 조작 같은 출력이 가능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같은 카테고리로 통용되지 않는다.

헌터의 육체 레벨과 이능 레벨은 별개다.

앞서 말했듯 서은설이 가장 두드러진 케이스다.

이능 레벨이 높은 것에 비해 육체 레벨이 낮거나.

반면에 육체 레벨이 높은 것에 비해 이능 레벨이 낮거나.

둘 다 다른 강점을 가진 만큼.

헌터 예비생을 지나 정식 헌터가 된다면 이러한 레벨에 따라 집중 훈련이 시작된다.

박수는 이를 이론 수업에서 배웠다.

그리고 박수가 쥔 검은 헌터의 육체 레벨을 반영하는 검이다.

박수가 쥔 검 손잡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검날이 형성됐다.

헌터라는 집단이 국가에서 발표된 지 얼마 안 된 만큼.

훈련을 위해 제작된 검이라도 따끈따끈한 새것이다.

군대 안에 있는 오래된 구식 무기처럼 오작동을 일으킬 일은 없다!

박수는 기념비적인 헌터의 첫 출격과 함께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파직―.

박수의 등 뒤에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수가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하얀 섬광이 그를 지나갔다.

파지지지지지지직!

곧이어 날아온 박쥐 떼가 일제히 감전되며 타올랐다.

매캐한 살 탄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차올랐다.

'나는 왜 여기서 검을 들고 있는가.'

박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손가락을 겨눈 이라나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위, 검은 손들이 넘실거렸다.

"징그러."

그녀는 박쥐를 보고 질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박쥐들이 들으면 상처받을 이야기였다.

박수는 다 타버린 박쥐를 보았다.

엄청난 일격이다.

이 정도 위력이라면 그슨새도 손쉽게 쓰러트리지 않았을까.

박수는 새삼 이능의 힘을 깨달았다.

'이 정도는 되야 헌터들이 괴이에게 맞서는구나.'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였는지 깨닫게 된다.

투둑―.

그 순간 이리나의 얼굴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

"이라나?"

그것을 본 박수가 놀란 순간 이라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올렸다.

박수의 눈에는 검은 손 사이로 이라나가 손을 넣은 걸로 보였지만.

그녀는 코를 눌러 지혈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 몸은 이능이랑 잘 안 맞아서 그렇다니까."

다음 말은 박수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능이 자기 몸에 안 맞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건가?

[ 저 새까만 악귀들이 저주의 형태로 엮여서 그런 게다. ]

그러자 천수화가 그녀가 저리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리나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검은 손.

그 손들은 분명 이라나의 조상 대대로 쌓인 업이다.

조상이 무수히 많은 원한을 살 만한 짓을 저질렀고.

그 결과, 핏줄에 저주의 뿌리가 내려져 저러한 형태로 발전된 거다.

[ 이능의 힘을 각성하고 나니, 저 소녀의 몸에 둘린 저주도 소녀의 이능에 영향을 받아 저주의 효력이 강해진 게다. ]

죽은 자는 본래 산 자보다 약한 법이다.

산 자와 다르게 육체가 없는 그들이 산 자에게 개입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승과 이승은 다른 세계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그렇기에 핏줄에 뿌리내린 저주도 악운을 종종 불러들일 뿐.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리는 수준까지 가기 힘들다.

그러나 이는 세상이 원래의 형식대로 굴러갔을 때 이야기다.

멸문이 열린 지금.

귀신이 실체화했을 뿐만 아니라 괴담마저 괴현상과 괴이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본디 현실에 존재하던 저승이라는 이면 세계.

그 세계 또한 이승과 같은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소리였다.

박수는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기분을 느꼈다.

막연하게 이라나의 조상부터 내려온 저주라고 생각했다.

함부로 손을 대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그러니 그냥 방관했다.

남 조상의 업까지 닦아주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천수화의 말을 듣고 박수는 깨달았다.

무당으로서 살아오며 저승은 이승에 관여할 수 없다는 불변의 법칙.

그 법칙은 이제 멸문이 등장한 순간부터 완전히 깨졌다.

더불어 이라나를 조이고 있는 저 검은 손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순간 십중팔구.

'이라나는 죽는다.'

멍청했다.

망각했다.

무당이라는 놈이 귀신을 얕보고 말았다.

눈앞에 일을 막연히 방관할 때가 아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리고 무당인 자신도 바뀌어야 했다.

"이라나, 지금부터 이능은 최대한 쓰지 마."

천수화는 그녀를 두른 저주가 이라나의 이능을 먹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능을 쓰면 쓸수록 저주는 더 강한 힘을 지니게 될 터.

"괜찮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라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코를 훔쳤다.

본인 몸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전문가다.

"최근 자는 사이, 몸에 손자국이 남거나 목을 조르는 감각을 느낀 적 있지."

순간 이라나가 멈칫하였다.

"악몽도 자주 꿨을 테고, 때때로 거울을 보면 누군가 널 옥죄고 있는 기분도 들었을 거야."

박수가 너무 정확하게 꿰뚫어 오자 이라나가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반응이다.

그리고 박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반응이다.

"네게 생긴 불가사의한 일, 그거 내가 해결해 준다."

박수는 그리 말하며 동굴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무당 말 들어. 손해 볼 거 없으니까."

박수는 그리 말하며 이라나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동굴의 끝까지 이제 그리 남지 않았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박수가 고개를 들었다.

저쪽도 시야가 어두운 게 싫었는지.

푸른색의 도깨비불들이 동굴 안쪽을 여기저기 불 지폈다.

박수의 눈앞에 벽에 못 박히듯 걸린 한 명의 남자가 보였다.

남궁준호.

그는 얼굴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소복을 입은 여성이 있었다.

무척이나 고운 얼굴의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여성은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성은 이쪽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 내가 여자를 들인 적은 없는데."

그녀는 박수를 뒤따라온 이라나를 보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런 멋진 남자분이 올 것도 예상 못했고요."

그와는 별개로 박수에게는 고혹적인 웃음을 그렸다.

그런 그녀의 웃음에는 남자를 현혹하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개여시의 능력이다.

하지만 박수는 코웃음을 쳤다.

무당이 잡귀한테 홀리면 어디 가서 놀림거리 된다.

"어디서 개가 자꾸 짖어."

캉!

박수가 자신이 든 검을 바닥에 내려쳤다.

그 위협적인 행동에 여성의 얼굴이 날 서듯 변했다.

"흉물아, 사람 무는 개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이참에 단단히 알려주마.

10화. 개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