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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개패기

사람을 잡아 먹은 개가 요괴가 되어 탄생한 개여시.

그런 개여시와 마주한 박수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었다.

그날, 그슨새에게 얻어맞은 옆구리가 괜스레 따끔거렸다.

박수는 괴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안다.

괴이란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그때 박수는 뼈저리게 느꼈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

천수화가 그슨새를 쓰러트리기 위해 강제로 각성시킨 이능.

이능이란 각성자가 각성할 때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박수는 자신의 이능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박수가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일반인보다 좀 더 강한 육체 1레벨.

하지만 박수가 상대할 개여시는 E등급이다.

E등급은 평균 2레벨에서 3레벨 사이의 개인 헌터가 사냥하는 등급이다.

당연히 1레벨 박수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하지만 박수에게는 천수화라는 히든 카드가 있다.

할 수 있는 한 해봐야 했다.

"박수, 내가."

뒤에 있던 이라나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이능이라면 개여시를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이라나의 목을 옥죄는 저주는 실시간으로 그녀의 이능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이라나의 이능이 강한 만큼, 이라나의 저주도 강해지고 있어.'

이라나의 검은 손은 얼마 안 가 그녀를 죽인다.

그것은 박수가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힘은 마지막까지 아껴둬야 한다.

'밖에는 전미현 소대장님과 싸우고 있는 범이 있다.'

만약, 전미현이 당한다면 믿을 건 그녀의 이능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개여시에게 그녀의 전력을 소비하는 건 큰 손해다.

'머리 잘 굴려라. 박수야.'

이건 훈련 상황이 아니다.

박수는 지금 무당이 아닌 헌터로서 싸워야 한다.

그때 박수의 눈에 남궁준호가 들어왔다.

박수의 눈에 언뜻 의문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박철웅은?

분명 그 또한 개여시에게 홀려 끌려갔다고 들었는데.

[ 뭘 한눈을 파는 게냐. ]

그 순간 박수는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천수화의 목소리를 들었다.

박수의 반응은 다행히 늦지 않았다.

채엥!

가슴으로 끌어 올린 박수의 검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박수는 순간 몸에 가해진 힘에 뒤로 물러설 뻔했다.

박수의 눈에 개여시가 비췄다.

개여시의 머리는 어느새 인간이 아닌 개로 바뀌었다.

더불어 자라난 손톱은 닿는 것만으로 살점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조금 전 박수를 공격한 건 녀석의 손톱이다.

'빠르다.'

개여시는 오토바이만큼이나 빠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마주하니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 머리. ]

천수화의 말과 함께 박수가 머리를 젖혔다.

콰직!

그러자 순식간에 개여시의 이빨이 머리 앞을 스쳐 갔다.

몸은 인간이었던 주제에 목을 쭈욱 빼 박수의 머리를 집어삼키려 했다.

정말로 괴이가 따로 없다.

놈의 입 안에서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귀신에게 흘러나오는 귀취 덕분에 박수에게는 그나마 익숙했지만.

그런데도 코가 아플 지경이다.

박수가 개여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헌터 훈련에서 기초는 배웠다.

그렇기에 나름대로 힘을 담아 휘두른 검이 대기를 가르고 뻗어졌다.

휙!

그러나 벤 것은 허공이다.

개여시가 몸을 뒤로 빼었기 때문이다.

장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더불어 동작이 크다.

초심자의 검을 피하는 건 개여시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 형편없구나. ]

천수화의 말대로다.

형편없는 검이다.

평생 무당으로 살아온 박수가 헌터로 각성하고.

훈련 좀 거쳤다고 해서.

검수처럼 검을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박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발을 내딛고, 개여시를 쫓아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개여시는 박수의 검을 손쉽게 피했다.

이에 득이 없지는 않았다.

개여시에게도 검은 위협적이다.

그러니 개여시도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까 전과 같은 기습은 함부로 하지 못한다.

박수는 숨을 가볍게 당겼다.

헌터로 각성한 육체는 검을 몇 번이고 휘두른 정도로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활기를 얻는 느낌이다.

헌터의 육체란 것이 새삼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왜인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서서히 무언가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뭘까.

분명 훈련할 때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무언가 읽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탁!

그 순간 개여시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대로라면 공격의 주도권을 박수에게 뺏긴다.

그것을 알기에 개여시가 박수를 향해 손톱을 뻗어왔다.

이번에도 빠르다.

박수는 눈앞에 새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휘날리는 기분을 받았다.

머리를 노린 개여시의 오른쪽 손톱.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채엥!

박수는 검을 상단으로 치켜 올려 막아냈다.

옆구리, 외복사근을 노린 개여시의 왼쪽 손톱.

콰직!

박수는 이를 검을 놓은 왼쪽 팔꿈치로 찍어 차단했다.

이 과정에서 개여시의 왼쪽 손목이 팔꿈치에 찍혀 꺾였다.

내려친 팔꿈치의 팔뚝을 역으로 노려온 개여시의 오른쪽 손톱.

쿵!

박수는 칼자루 끝으로 개여시의 오른쪽 손등을 내려찍었다.

마지막으로 개여시가 박수의 목을 또 한 번 이빨로 노린 순간.

터엉!

개여시의 몸이 크게 뒤로 물러섰다.

"크헥!"

개여시의 입에서 왈칵하고 침이 쏟아나왔다.

박수의 발이 어느새 개여시의 복부를 정확하게 걷어찬 탓이다.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든 개여시의 힘을 역이용해 걷어찼으니.

괴이인 개여시도 타격이 있다.

박수는 틈을 멈추지 않았다.

박수의 왼손이 다시금 검의 그립을 잡았다.

그러고는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깔끔한 궤적이 개여시의 가슴팍을 갈랐다.

핏물이 치솟아 올랐다.

개여시가 부릅뜬 눈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키헤에에에에에에엑!"

박수는 자기 귀에 울리는 비명을 들으며 검을 다시 끌어 올렸다.

생물이 죽어가는 비명을 질렀음에도 박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명은 귀신의 곡소리로 지겹도록 들었다.

게다가 생물을 베는 감촉은 어째선가 익숙했다.

마치, 몸이 이미 오래전에 이런 걸 겪어본 감각이다.

이상하다.

이상하지만 박수의 정신은 고조 됐다.

박수의 검이 또 한 번 개여시를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여시에게 닿지 못했다.

개여시의 몸이 작게 수축함과 함께 공중제비를 돌았기 때문이다.

개여시의 몸이 여우의 것으로 바뀌었다.

머리는 개고, 몸은 여우인 개여시의 본모습이다.

개여시는 바닥에 착지함과 함께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려고 했다.

빠르다.

녀석이 향한 방향은 동굴의 안쪽이다.

하지만 박수는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동굴 바닥을 짓밟은 박수가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동시에 오른팔에 박수의 힘이 서렸다.

박수의 몸이 회전력을 담아 틀어졌다.

휘리릭!

손에서 놓은 검이 회전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개여시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늦었다.

퍼걱!

개여시의 머리에 검의 날이 박혀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회전한 힘이 개여시의 머리를 자르고 빠져나갔다.

개여시의 머리에서 뇌수와 핏물이 흘렀다.

박수는 그 광경을 숨을 몰아쉬며 보았다.

팔이 미약하게 떨렸다.

격렬한 행동을 한 반증이다.

박수의 눈은 조금 멍하게 풀렸다.

지금 이걸 자신이 한 건가?

그의 정신은 놀랍도록 침착했고, 육체는 재빨랐다.

거기에 평소에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본능적으로 해냈다.

이는 명백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박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뒤늦게 천수화를 보았다.

천수화가 어째선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았다.

이렇게 박수가 잘 싸울 줄 몰라서였을까?

[ 그 움직임은.... ]

그건 아니다.

천수화가 놀란 이유는 다른 이유였다.

박수는 개여시가 공격을 감행할 때 보았던 백색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 머리색은 천수화를 똑 닮아 있었다.

더불어 박수의 움직임도 그랬다.

조금 전 박수는 분명.

천수화의 움직임을 똑같이 이행했다.

박수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표정을 했다.

그건 천수화도 마찬가지였다.

"무당, 잘 싸우네."

그 순간 이라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나서지 말라 한 이유가 있었어."

이라나는 나름대로 이해하며 남궁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인은?"

그리고 그녀가 질문했다.

박수가 아까 전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박철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도 보이지 않아서 의문이었어."

조금 전 일은 제쳐 두고, 박수는 이라나에게 다가갔다.

그러던 박수의 눈에 머리가 잘린 개여시가 들어왔다.

개여시는 마지막에 도망치듯 동굴 안으로 향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박수는 자기 어깨를 툭 두드리는 손을 느꼈다.

그 손은 박수가 모시는 마고할미의 손이다.

마치, 구태여 가지 마라.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손이다.

평소라면 들었을 뜻이었지만.

박수는 오늘은 마고할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박수의 발걸음이 앞으로 뻗어졌다.

그 발에는 조급함과 다급함이 담겼다.

동굴 안쪽.

개여시가 있던 안쪽보다 조금 더 안쪽.

박수가 그곳에 발을 들였다.

진한 피향이 코끝을 찔렀다.

굿을 위해 돼지 피도 직접 삼켜본 박수다.

피 냄새는 박수가 가장 잘 알았다.

무언가 서늘한 감각이 들었다.

몸이 뼛속까지 시리도록 추웠다.

「반갑습니다! 저는 박철웅입니다! 원래 7군단에서 하사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휴가 도중 헌터로 각성하게 되어 헌터 예비생이 되었습니다!」

박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기억에서 발췌된 목소리였다.

박수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간과 내장이 이리저리 파헤쳐 바깥에 쏟아진 성인 남자 한 명이 말이다.

성인 남자의 눈은 빛바랬다.

그의 숨통은 과다 출혈과 복부 손상으로 진작 끊어졌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는 헌터 예비생 지급 복장에 새겨진 이름표가 보였다.

박철웅.

전직, 군인 하사.

박수는 힘차게 자신을 소개하던 그를 떠올렸다.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이던 박철웅.

그가 그곳에 싸늘하게 누워 있다.

박수는 침묵했다.

귀신들의 한을 달래다 보면 종종 시체를 볼 때가 있다.

하지만 대개 그 시체들은 이미 오래전에 썩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이 정도로 적나라한 시체를 볼 일은 없다.

박수는 개여시의 입에서 나던 시체 썩은 내를 떠올렸다.

개여시는 사람을 잡아 먹는 개가 요괴화한 괴이다.

그런 녀석이 사람을 데려 가면 할 짓은 하나밖에 없다.

박수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박철웅의 목을 누군가가 터지라 조르고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그건 박수가 본 박철웅에게 붙은 객귀였다.

객귀의 다리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

괴현상의 힘을 받아 박철웅에게 원한을 가진 객귀가 실체화한 것이다.

놈은 이미 죽은 박철웅을 또 죽이고 있었다.

박수가 왔음에도 녀석은 자신의 원한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씨발."

박수의 호흡이 조금씩 흩뜨려졌다.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11화. 하사 박철웅

박철웅의 시체,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객귀.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박수와 뒤에선 천수화.

박수는 손과 발끝이 저릿해졌다.

기분 나쁜 끔찍한 기분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타닥!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수가 동굴 안쪽에 가놓고 오지 않자 따라온 이라나의 발소리였다.

"이라나, 오지 마!"

박수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이라나의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다행히 그녀는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소리 덕에 박수는 정신을 차렸다.

박수는 조용히 박철웅의 앞에 다가와 섰다.

객귀는 아직도 박철웅의 목을 졸랐다.

녀석은 박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원한을 푸는 것 말고는 관심 없었다.

박수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주 잠시, 박수의 눈앞에 무언가 보였다.

하사로 입대한 20대 초반의 청년, 박철웅.

「어휴, 이 병신 새끼, 어디서 이런 게 들어와서는. 퉷. 넌 나 때였으면 진짜 뒤졌어.」

자주 듣던 욕지거리가 박철웅의 귀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는 같은 부사관 선배인 김한수 상사였다.

박철웅은 그에게 군기라는 명목으로 지독히 괴롭힘 받았다.

그는 오늘도 짓밟힌 꼴로 베레모와 옷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박철웅은 이것도 군대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입대를 선택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군대에서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며 병사들까지 이끌고 출동했다.

병사들은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갑자기 실탄까지 무장하고 투입됐으니.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박철웅 하사님, 이거 진짜 무슨 일이랍니까? 저 곧 전역인데.」

「괜찮아. 별일 없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건 간부들이 할 일이니까. 너희들은 자기 안전부터 생각해라.」

박철웅은 병사들을 최대한 안심 시켰다.

그도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건 간부인 자신이 할 일이다.

그렇게 출동한 박철웅과 병사들이 마주한 것은 괴현상과 괴이였다.

실탄을 퍼부어도 죽지 않는 괴물들.

그들은 실탄의 세례 속에서도 전선을 깨부수며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김한수 상사님! 당장 여기서 후퇴해야 합니다! 이러다 저희 다 죽습니다!」

「박철웅 이 개새끼가 뭔 헛소리야! 여기서 빼면 너나 나나 모가지야! 군법 지켜, 새끼야!」

소대장인 김한수 상사는 군법을 들먹이며 빼지 않았다.

그 결과, 결국 괴이들은 병사들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아아아아악!」

「어, 엄마, 엄마아!」

「사, 살려....」

병사들은 괴이에게 맞서다 전부 죽임당했다.

곧 전역할 거라며 웃던 병장이 있었다.

군 생활 지겹다며 자주 투덜거리는 상병이 있었다.

매일 일과를 하고, 밤에 야간 공부까지 하던 일병이 있었다.

이제 막 입대하여 아직은 어벙한 이등병이 있었다.

그들은 전부 괴이 때문에 시체 조각이 됐다.

「이, 이런, 씨발!」

그제야 상황이 잘못됐음을 깨달은 상사 김한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박철웅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다.

김한수가 자신을 향해 붓던 라면 국물이 떠올랐다.

자기 발을 콱콱 밟던 모습이 떠올랐다.

군기 똑바로 하라며 복부를 가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하사들을 모아놓고, 너희가 혼나는 이유는 자신 탓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타앙!

박철웅은 어느새 총구를 당겼다.

장전되었던 실탄이 발사되며 김한수의 등에 박혀 들어갔다.

실탄은 그대로 김한수의 등을 넘어 가슴을 갈가리 찢고 지나갔다.

「억, 어억.」

순식간에 총에 맞은 김한수가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박철웅의 총구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보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박, 박철웅, 너, 이 새끼....」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몸이 고꾸라지며 금세 식어갔다.

박철웅은 뒤를 돌아봤다.

괴이들은 어느새 코앞에 도달했다.

그 또한 같은 죽음을 맞이하겠지.

어째선가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후련함이 채 가시기 전.

콰앙!

그의 앞에 헌터들이 나타났다.

박수가 눈을 번쩍 떴다.

방금 그가 엿본 기억은 박철웅의 기억이다.

곧이어 박수의 눈에 다시금 객귀가 비쳤다.

객귀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는 김한수라는 글자가 보였다.

박철웅이 죽였던 김한수 상사.

그가 바로 박철웅의 옆에 붙어 있던 객귀였다.

죽어서까지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다.

이미 죽은 박철웅의 목을 졸라 무엇을 얻겠다고.

무슨 원한을 풀겠다고.

"...진짜 원한을 가질 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잡귀 놈 같으니."

박수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제야 김한수 상사가 이쪽을 보았다.

새까맣게 물든 그의 눈동자는 박수를 보더니 입을 쩌억 벌렸다.

새까만 입 안에서 구더기가 끓었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몰골이다.

"내 너를 신들께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반드시 지옥에 떨어트려야겠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서걱!

영체의 본질이 갈리는 촉감과 함께 객귀의 머리가 잘렸다.

객귀는 머리가 잘림과 함께 그대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괴현상의 힘을 받았다 한들.

고작해야 이제 막 객귀가 된 녀석이 가지는 힘은 별거 없었다.

그렇기에 개여시가 박철웅을 죽이고 나서야 박철웅의 목을 조를 수 있었겠지.

박수는 죽은 박철웅을 내려다보았다.

"박철웅 씨...."

그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인가.

상황 대처가 느렸던 전미현 소대장?

객귀가 보였음에도 방치한 박수?

괴현상이 일어났는데 모르고 훈련을 시킨 헌터?

모르겠다.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박철웅은 귀신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무당조차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괴이에게 먹힌 자는 영혼이 남지 않는다. ]

천수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 괴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먹고 지운다. ]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 위해.

괴이는 영혼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다. ]

박철웅은 몸이 먹히고, 영혼마저 괴이에게 먹혔다.

고작 이십대.

끔찍한 참상을 겪었음에도 어떻게든 살아가던 박철웅.

그는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사실을 들은 박수는 양 주먹을 터지라 쥐었다.

다음 생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무당이 되어 자주 내뱉던 염을 비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박수는.

굉장히 석연치 못했다.

박수가 박철웅의 이름표를 떼어 손에 쥐었다.

밖에는 여전히 범 괴이가 있다.

이 동굴 또한 본디 범 괴이의 것일 터.

이 상황에서 시체를 수습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 당장 남궁준호를 깨워 이라나와 함께 서은설과 합류한 뒤.

범 괴이와 맞서고 있는 전미현 소대장과 합류하든, 헌터 본대와 합류하든.

뭐든 해야만 했다.

'움직여. 움직이자. 박수야.'

박수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괴현상, 괴이.

죽은 자의 영혼까지 집어삼키는 존재들.

무당이기에 박수는 알았다.

염조차 빌지 못하게 만드는 놈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앞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또한.

'어째서 마고할미께서 이리 오려는 걸 말렸는지 알겠다.'

이걸 보는 순간 앞으로 괴현상과 완전히 엮이고 말 것을 알았겠지.

하지만 엮이었기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박수는 불합리한 세상이 싫다.

천수를 누리지는 못할지언정.

하다못해 제 삶을 제대로 살아갈 기회는 주어야지.

"신님들, 제가 타고난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말입니다."

그러니 박수는 자신을 봐주는 신들께 고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더러워지는 꼴은 못 보고 살겠습니다."

멸문으로 세상은 어지럽혀졌다.

그런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처했다.

박수가 천수화를 보았다.

천수화는 말없이 박수의 옆을 따랐다.

박수는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저 무당 잠시 그만두고, 헌터 되렵니다."

괴이에게 잡아 먹히면 영혼조차 남지 않는데.

이런 세상에 무당이 할 일이 어디 있겠나.

앞으로 무당 일하기 위해서라도 멸문은 닫아야만 한다.

"그러니 허락해 주세요."

박수는 그 말을 마치고, 동굴 안을 나왔다.

그러자 거기에는 마침 정신을 차린 남궁준호와 이라나가 보였다.

그녀는 박수를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검은 손들 또한 그녀를 따라 흘러내렸다.

"군인은?"

군인, 박철웅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수는 침묵했다.

이라나가 입을 떼려는 순간 남궁준호가 먼저 알아차렸다.

"아가씨, 우선, 밖으로 나갑시다. 이 안은 위험합니다."

이라나가 남궁준호를 돌아봤다.

그녀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 이라나는 몸을 돌렸다.

박수의 곁에 다가온 남궁준호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수 씨,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무뚝뚝하던 남궁준호에게 감사 인사를 들었다.

그리고 박철웅에게는 들을 수 없는 인사였다.

둘과 함께 박수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박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졌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귀신들이 좋아할 시간대였다.

"박수 씨!"

몸을 숨기며 조마조마하고 있던 서은설이 나타났다.

그녀는 이쪽을 뛰어오다가 곧 넷이 아닌 셋임을 눈치챘다.

그녀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서은설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쿵!

그러나 그 당혹감을 풀기도 전에 산이 거세게 울렸다.

'온다.'

박수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지금 박수는 천수화가 보는 방향과 같았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밤바람을 따라 사시나무가 떨었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거센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먼지가 주변을 메웠다.

먼지 사이로 샛노란 눈동자 하나가 보였다.

주홍빛 몸에 얼기설기 있는 검은 줄무늬.

흰색의 털 아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

인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체구.

범이라는 이름의 짐승이 그곳에 있었다.

전미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박수는 범의 몸에서 일렁거리는 혼의 기척을 느꼈다.

창귀(倀鬼).

범에게 죽은 뒤 악령 된 이들이다.

그들이 범의 곁에 붙어 있었다.

"허, 힉."

범과 마주한 서은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두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벌벌 떨렸다.

그 정도로 범 괴이는 압도적인 위용을 풍겼다.

만약 녀석의 앞발이 휘둘러진다면 사람의 머리는 그대로 날아간다.

이는 생물이 지닌 본연의 압도였다.

사냥감과 사냥꾼의 차이.

그것을 범이 직접 눈앞에서 실감하게 해줬다.

남궁준호가 숨을 몰아쉬며 이라나를 지키고자 감쌌다.

이라나는 조용히 자신의 이능을 피우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그 중.

유일하게 박수만이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에 눈이 박수에게 닿았다.

이 상황에 범을 향해 가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저지르면 안 되는 일이다.

서은설이 경악했다.

남궁준호가 당황했다.

이라나가 눈을 크게 떴다.

범조차 박수를 의아한 듯 보았다.

하지만 박수의 정신은 정상이었다.

"천수화!"

박수는 한 이름을 울부짖었다.

박수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껴두던 최고의 수.

박수는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희생자가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 죽으면 넌 더 이상 이 세상에 아무것도 영향을 못 끼쳐."

[ 노부를 협박할 속셈이냐? ]

협박이라니.

말이 심하다.

"동맹이지."

귀신이란 그 누구보다 이승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가장 갈망하는 법이니까.

그건 귀신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 번 빙의를 맛봐버린 천수화가 박수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있을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나중에 혼쭐을 내주마. ]

어련하시겠어.

"맡긴다."

박수가 자기 몸에 내준 공간에 천수화가 스며들었다.

박수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그려졌다.

범에게 진짜 사냥꾼이 누군지 알려줄 시간이다.

12화. 달빛 아래 범

어두운 밤하늘 아래 숲.

뚝―.

박수의 고개가 떨어졌다.

무언가.

무언가 달라졌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그리 느꼈다.

어째선가 여기 있는 모든 이가 한마디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느새인가 자신들이 숨소리를 내뱉는 것도 망각한 걸 자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해도 숨소리를 내뱉을 수 없었다.

이 고요한 공간.

누구도 감히 숨소리를 내뱉어서는 안 됐다.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순간 모두가 자기 귀가 이상해진 기분이 들었다.

숲은 생각 이상으로 시끄럽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나무가 스치는 소리, 들짐승의 소리.

수많은 소리가 혼합된 곳이 숲이다.

그러나 지금.

이중 누구도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 일대의 공기가 바뀌었다.

바람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떨던 사시나무가 멈췄다.

짝짓기를 위해 울던 풀벌레마저 입을 다물었다.

오직 박수의 손에 들려진 헌터 용 검이 우웅거리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박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싹!

그 순간 거기에 있던 전원의 팔에 모두 소름이 돋아났다.

거기에는 있으면 안 될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자기 목을 두둑 꺾으며 풀더니 이내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굳은 자세 그대로 있는 범이 있다.

"노부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스산하기 짝이 없는 여자 목소리가 박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짐승인 네가 내 기분을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

그 말을 마치자 범이 천수화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숲속으로 도망친 범을 보고, 천수화는 눈썹을 모았다.

"그래봤자 짐승이라는 게냐."

그 순간 천수화의 귀에 나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초고속으로 움직인 범이 천수화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단 1초.

범이 천수화의 등 뒤에 도달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먼저.

천수화의 고개가 범을 향해 기이하게 꺾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가득 살의를 담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괴이지."

천수화의 검이 범의 앞발을 맞받아쳤다.

카앙!

둘의 공방에 어찌나 강한 힘이 담겨 있었는지.

일어난 바람에 숲속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맞부딪쳐 벌어진 앞발에 의해 범의 상체가 드러났다.

수북한 털을 향해 뻗어나간 천수화의 검이 깊숙이 박혔다.

"크헤이에엑!"

그러자 천수화의 검에 박힌 것은 한 귀신이었다.

범에게 잡아 먹힌 첫 번째 창귀.

굴각(屈閣)이다.

혀가 없던 굴각은 달빛으로 빛나는 천수화의 검에 산산조각이 났다.

범의 목숨을 대신한 것이다.

범이 즉시, 몸을 틀어 천수화를 후려쳤다.

그러나 천수화는 범의 앞발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쿠웅!

범의 앞발질에도 천수화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달빛을 받아 오히려 더 영롱하게 빛났다.

그 빛은 범의 눈을 어지럽혔다.

"가진 목숨이 많구나."

천수화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고양이의 목숨은 아홉 개라던데. 너도 그러냐?"

범의 눈을 어지럽힌 달빛이 내려그었다.

어느새인가 범의 어깻죽지와 가슴팍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달빛이 휘날리는 것만으로 범에게 무수히 상처가 늘어났다.

"커헝!"

그 순간 범의 입에서 저음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귀를 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막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한 울음소리였다.

천수화도 아주 잠시 주춤했다.

그것을 본 범은 바로 이빨을 들이밀었다.

범의 교합력은 사람의 뼈를 간단히 으스러뜨린다.

천수화의 머리 정도는 가볍게 으스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수화의 검은 이를 놓치지 않고, 치솟았다.

덜컥―.

그 순간 천수화의 검에 있던 날이 갑자기 사라졌다.

범의 광대뼈에 붙은 창귀, 이올(彛兀).

놈이 헌터 전용 검을 고장 낸 것이다.

천수화는 기막힌 웃음과 함께 목까지 날아든 범의 이빨을 보았다.

콰앙!

그리고 천수화가 맨손으로 범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커헝?!"

왼손 장타로 범을 바닥에 내려찍은 천수화는 고장 난 검을 머리 위로 던졌다.

그러고는 주먹으로 범의 머리를 반복해서 내려찍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범의 머리가 순식간에 산 바닥을 부수고 안으로 박혀 들었다.

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맞기를 반복했다.

"기이이이이이익!"

이윽고, 귀신의 곡소리와 함께 창귀, 이올이 소멸했다.

범의 목숨이 또 하나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도 천수화가 멈추지 않고, 계속 주먹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천수화의 다리가 무언가에 잡히며 끌어 올려졌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튕겨 올려진 천수화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범의 턱에서 귀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창귀, 육혼(鬻渾)이다.

천수화가 허공에 던졌던 검을 받았다.

검의 날은 여전히 이올 탓에 텅 비었다.

"검이 주인 말을 안 들어서 쓰나."

파직!

쏟아진 푸른빛과 함께 고장 났던 헌터 전용 검이 검날을 뽑아냈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진한 달빛을 띠는 검날이 흉흉함을 한껏 드러냈다.

"커헝!"

그사이, 범이 입을 쩌억 벌렸다.

범의 턱에 붙어 있던 창귀, 육혼이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두둑!

그 순간 범의 외형이 바뀌었다.

머리는 범 그대로지만 몸체가 근육질의 인간 남성으로 바뀌었다.

줄무늬가 새겨진 주홍빛의 수북한 털.

우람한 상체와 솥뚜껑만 한 손은 무척이나 위협적이다.

범은 그대로 자기 몸을 크게 웅크리더니.

이내 바닥을 거세게 박차며 도약했다.

후웅!

천수화가 공중에서 고개를 틀자 범의 손톱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보다 빠르군."

동시에 몸을 회전한 그녀가 범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러나 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수화를 잡으려 들었다.

천수화는 범에게 잡히기 전에 자세를 낮춰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단단하고."

범이 득달같이 천수화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전투 태세를 마치기 전에 몰아칠 작정이다.

범의 주먹과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천수화의 검 또한 그에 맞춰 범과 맞부딪쳤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범은 어떻게든 천수화를 죽이고자 힘을 쏟았다.

채엥! 채엥! 채엥!

범의 거센 맹공이 폭풍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는 나무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나갔다.

땅과 산이 여기저기 파헤쳐 나갔다.

매봉재산 전체가 두려움에 떨어 진동했다.

그러나 왜일까.

범은 천수화의 검이 점차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공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천수화의 검이 점점 더 공간을 장악해 나갔다.

점차 범이 내지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갔다.

팔을 내지를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천수화의 모든 검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어느새 범은 몸을 옴짝달싹 못했다.

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웠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괴이로 태어나 사람을 잡아 먹는 짐승이.

사람에게 죽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범의 눈앞이 어느새 달빛으로 가득 찼다.

광활한 밤하늘 아래.

범은 자기 눈을 가득 채우는 달을 멍하니 보았다.

"짐승아, 달빛에 취했느냐?"

서걱!

범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범의 목은 멍하니 달빛만을 보았다.

쿵!

범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히이이이이익!"

육혼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천수화가 검을 내리그었다.

파각!

마지막 발악으로 목을 물어뜯으려던 범의 머리를 검이 꿰뚫었다.

머리가 꿰뚫린 범이 몇 차례 움찔거리더니.

이내 파스스 소리와 함께 잿가루가 됐다.

천수화의 검에 서린 달빛이 영롱했다.

월광천하(月光天下).

천수화가 다루는 검술의 빛이 사라져갔다.

"나중에 협박한 값은 톡톡히 받아내마."

천수화의 고개가 갑자기 팍하니 꺾였다.

"흐으, 흐."

그리고 흘러나온 것은 남성의 숨소리였다.

빙의가 풀린 것이다.

박수의 코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몸 여기저기가 부서질 듯이 아팠다.

코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육체가 행할 수 없는 과도한 움직임을 행한 대가였다.

박수가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는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남궁준호, 이라나, 서은설이 보였다.

셋 다 놀라긴 했지만, 무사한 모습이다.

박수는 짧게 안도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걸 끝으로 그의 의식은 날아갔다.

* * *

이번 훈련에서 일어난 범 괴이 사건.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 여기저기가 엄청나게 깨져 나갔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매봉재산에 나타난 괴이, 범.

괴현상·괴이 B등급.

B등급은 평균 5레벨에서 6레벨의 헌터들이 중대 단위로 사냥하는 괴이다.

범에게 붙은 창귀, 굴각은 당시 매봉재산을 검토하던 감지계 이능 헌터를 홀렸다.

그로 인해 감지계 이능 헌터는 매봉재산이 안전하다 보고를 올렸다.

헌터 예비생 중 사망자 하나, 부상자 하나.

더불어 헌터 예비생 소대를 이끌던 소대장도 크게 부상당했다.

이들은 첫 헌터 예비생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이런 사건이 터지면 어떡하냐.

현역 헌터들을 재검토 해야 한다.

감지계 헌터들은 대체 일을 똑바로 안 하고 무얼 하나 등등.

당시 훈련을 추진한 헌터에게 맹렬히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TV나 인터넷 어디에도 이 사건은 다뤄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대규모로 인명 피해가 난 마당.

지금 와서 헌터 예비생 한 명 죽는다 해서 세상은 딱히 신경 쓸 틈이 없다.

아니, 예전부터 그랬다.

사람이 죽어도 누군가 징계받거나 쉬쉬할 뿐.

결국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은 묻혔다.

그렇게 부상자 중 한 명.

박수가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나서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다.

박수는 미약한 두통을 느꼈다.

천수화가 빙의했을 당시의 기억은 박수에게도 있다.

천수화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박수로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적.

그러한 범을 천수화는 가지고 놀 듯했기 때문이다.

"진짜 더럽게 강하네."

[ 도사 놈아, 말 이쁘게 안 하느냐? ]

박수가 혼잣말을 내뱉자마자 천수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팔짱 낀 모습의 천수화가 보였다.

[ 몸이 그렇게 허해서 어떡하느냐? 고작 그거 움직인 걸로 앓아눕다니. ]

"고작 그거라고?"

박수는 하늘을 펄펄 날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 정도 움직이면 운동선수도 이 꼴 난다.

[ 쯧, 네 몸이 그 꼴이니 내 힘의 절반조차도 못 쓰지 않더냐. ]

그게 절반도 안 되는 건가.

박수는 천수화의 강함을 새삼 자각했다.

[ 그보다 개짐승을 잡을 때 이야기나 해봐라. ]

그러는 순간 천수화가 박수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부분을 짚고 왔다.

[ 그 움직임은 분명 월광천하의 기본 묘리였다. ]

역시 박수의 생각대로 그건 천수화의 움직임이다.

[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

박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양팔을 스윽 하니 들었다.

"몰루?"

오히려 박수가 묻고 싶다.

대체 그건 뭐냐고 말이다.

천수화가 주먹을 들었다.

범의 머리를 박살 내놓던 주먹이다.

저 주먹에 맞는 순간 박수의 머리는 두 쪽이 날 것이다.

박수는 서둘러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아마 내 이능 아닐까."

지금까지 박수가 깨우치지 못했던 이능.

박수는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 역시, 그런가. ]

천수화도 그 부분을 염려한 것 같았다.

[ 빙의하면 빙의한 대상의 경험과 능력을 얻는다. 그런 종류의 이능일 가능성이 크겠군. ]

박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머리를 지켰다!

'그보다 내 이능 말만 놓고 보면 사기 같지만, 천수화가 없었다면 못 써먹을 정도네.'

그리고 박수는 왜 자신의 이능이 1레벨인지 알았다.

괴이는 영혼을 이 세상에서 소멸시킨다.

당연히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헌터들이라도 괴이와 맞서다 소멸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박수가 아무리 이런 이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이능을 써먹을 찬스도 거의 없다는 소리다.

'순전히 운이 좋았다.'

천수화가 있어 다행이라고 박수는 안도했다.

[ 안도할 때가 아니다. ]

그러는 순간 천수화가 박수를 다그쳤다.

박수가 천수화를 의아하게 보았다.

[ 노부가 다루는 월광천하는 마기를 바탕으로 하는 검술이다. ]

"마기?"

[ 몸을 강제로 폭주시켜 다루는 기의 일종이다. 그리고 노부의 검술을 다뤘던 네 몸에도 마기가 돌고 있다. ]

천수화는 아직도 이해 못한 박수의 표정을 보고, 혀를 찼다.

[ 노부가 빙의할 때는 상관없다. 의도적으로 마기가 몸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절했으니까. 하지만 노부가 빙의를 안 한 상태일 때 월광천하를 쓴 게 문제다. ]

천수화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 자칫하면 마기가 폭주할 수 있다. ]

"...저, 폭주하게 된다면 전 어떻게 되나요?"

천수화는 손을 팡하니 펴 보였다.

[ 산산조각이 나겠지. ]

아주 명료한 답변이다.

박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 앞으로 한 달이다. ]

천수화는 박수를 언짢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딱한 것 하며 그녀가 혀를 쯧쯧 찼다.

[ 한 달 안에 마기를 다루는 법을 터득 못하면 네 몸은 산산조각이나 폭발할 거다. ]

스물셋, 박수.

눈 뜨고 일어나니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13화. 시한부 헌터

한 달 뒤, 사형선고.

갑작스러운 사형선고에 박수는 눈물을 삼켰다.

빙의 하나 잘못했다고 시한부라니!

헌터가 되기를 결심했더니 갑자기 죽을 팔자가 됐다.

[ 살고 싶으면 당분간 노부의 말을 따라 마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거라. ]

절망한 박수의 귀에 천수화가 조언했다.

"...대체 마기가 뭔데?"

[ 직접 다룬 녀석이 그것도 모르느냐? ]

"나야 몸 가는 대로 움직였다는 느낌이 더 강하니까."

천수화의 경험을 파편으로 움직였을 뿐.

그건 의도해서 움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검을 출력시키는 걸 보면 도사, 너도 이능 자체는 느끼고 있겠지. ]

"그런 셈이지?"

그간에 훈련 과정을 통해 박수는 자기 몸에 흐르는 이능의 힘을 느꼈다.

주먹에 힘을 주어 꽉 쥔다.

그러면 이능이 흘러나온다.

이 정도 인식으로도 헌터는 이능을 쓸 수 있다.

[ 마기의 기원 자체 또한 기다. 노부의 세계와 달리 너희 세계에서는 기조차 이능이라 퉁쳐 말하고 있더군. ]

천수화는 그리 말하며 박수의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천수화의 왼쪽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올라왔다.

오른쪽 손에서는 푸른 달빛의 기운이 올라왔다.

[ 왼쪽이 일반적인 기, 그리고 오른쪽이 마기다. 둘의 차이는 딱 하나. ]

파직!

그 순간 왼쪽 기에서 새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 기는 평소에는 원활하게 흐르지만, 종종 충돌하며 생기는 현상이 존재한다. 육체로 치면 일종에 근육 경련과 유사하다. ]

기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못해도 두 배 이상은 출력이 부풀어진 느낌이다.

[ 마기는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형태다. 출력에서 기존 기보다 압도적이지. ]

박수는 천수화의 말을 긍정했다.

동시에 박수가 1레벨 헌터임에도 개여시를 압도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 박수는 천수화의 경험을 통해 마기를 운용했다.

그러니 박수의 힘은 당시에 1레벨 출력을 훨씬 웃돌았다.

[ 단, 마기가 마기(魔氣)라고 불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

"...마기를 사용하면 할수록 기의 충돌 현상이 많아진다?"

[ 정답이다. ]

정답을 맞혀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 어찌 되었든 도사 놈, 네 말대로 기는 마기를 사용할수록 충돌 현상이 많아진다. ]

천수화의 왼쪽 손의 기가 반복적으로 푸른색, 하얀색을 오갔다.

[ 기는 적응력과 흡수력이 빠르다. 그러니 마기라는 현상조차 적응하고 흡수하지. ]

그리고 얼마 안 가 결국 완전한 푸른색을 띠었다.

[ 이는 마기를 적절히 운용치 못하는 자에게는 재앙이지. 말 그대로 기가 폭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

푸른색을 띤 기가 미친 듯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그건 박수가 보아도 명백히 폭주였다.

천수화가 주먹을 콱 쥐었다.

그러자 푸른색 마기는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박수는 왜 그제야 천수화가 자신의 몸이 폭발할 거라 말했는지 알겠다.

저런 게 몸속에서 폭주하여 날뛰면 육체가 못 견딘다.

출력의 두 배를 대가로 몸의 위험 부담이 커진다.

그렇기에 이는 마기라 불린다.

육체를 대가 삼아 끌어내는 힘이니까.

[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노부는 마기에 관해서는 정점에 선 자니까. 노부의 가르침을 받으면 마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게다. ]

천수화는 차분히 말하였다.

과연, 이게 운이 좋은 걸까.

천수화가 빙의한 일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일도 없지 않나?

[ 표정이 묘하게 거슬리는구나. ]

박수는 표정을 고쳤다.

정말 귀신같이 알아본다.

[ 네 몸은 이미 노부의 경험을 일부 흡수한 모양이니 마기를 다루는 것도 금방일 게다. 육체에 새겨진 기억을 일깨우기만 하면 되겠지. ]

말은 시한부라 했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천수화는 그렇게 말했다.

"언제는 내 몸을 빼앗느니 뭐니 하더니만."

[ 시끄럽다. ]

천수화가 흥하고 고개를 틀었다.

은근히 새침데기인 천수화다.

드륵―.

그 순간 병실의 문이 열렸다.

박수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아는 얼굴이 보였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예쁘장한 외모.

사이비 서은설이다.

"아, 박수 씨, 일어나셨어요?"

서은설은 박수를 보자 밝은 얼굴을 했다.

그녀의 손목과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다.

보아하니 그녀도 그때 알게 모르게 다친 것 같았다.

"다행히 무사하셨네요."

그래도 무사한 그녀를 보자 박수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때 한 것이 헛된 노력이 아니란 것이 기뻤다.

"박수 씨가 힘내주신 덕분이죠."

서은설은 그리 말하며 바깥에 있던 간호사를 불렀다.

박수가 일어나면 부르기로 한 모양이다.

잠시 후, 간호사와 함께 의사가 와서 박수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고는 오늘만 경과를 보고, 내일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박수 씨도 크게 다친 곳 없어서 다행이네요."

"몸 하나는 튼튼하거든요. 살면서 신병 말고는 병 걸려 본 적도 없습니다."

박수는 자신의 튼튼함을 과시하며 육체미를 돋보였다.

그걸 본 서은설이 웃었다.

미인의 웃음은 그림이 된다.

보람이 넘친다!

'하지만 이건 이쯤 하도록 하고.'

박수는 근육을 과시하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서은설 씨,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차분해진 박수를 본 서은설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내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해 줬다.

"전미현 소대장님부터 이야기할게요."

전미현 소대장은 범과의 교전으로 인해 크게 다쳤다.

다행히 목숨은 무사했으나 수술 후 당분간 재활 훈련이 필요했다.

남궁준호 쪽도 무사했다.

그는 경미한 타박상 정도만 있을 뿐, 다친 곳이 없었다.

박철웅과 같이 개여시에게 끌려갔는데 다행인 이야기다.

더불어 이라나 쪽 이야기는 박수도 놀랐다.

이라나는 남궁준호와 마찬가지로 경미한 타박상만 입었다.

박수가 놀란 부분은 다른 부분이다.

박수와 다른 이들이 입원한 병원이 무려 이라나 회사의 병원이다.

"이라나 씨의 UC그룹 회장 손녀딸이었을 줄이야. 부잣집 따님인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인 줄 몰랐어요."

UC그룹.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세 개의 그룹 중 하나다.

해외에서도 UC그룹의 제품은 자주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그룹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그런 UC그룹 회장의 손녀딸.

거기에 8레벨 이능을 갖춘 헌터.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군.'

하지만 이라나의 몸에 둘린 저주를 생각해 본다면.

또 마냥 불공평하다고 보기에도 그랬다.

어찌 되었든 원래는 모두 국군 수도 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었지만.

이라나가 땡깡을 부려 일부러 모두를 UC그룹 병원으로 이송했다 한다.

'감사합니다. 이라나 님, 다음에 보면 부식 나눠줘야지.'

국군 수도 병원의 악명을 익히 들은 박수로서는 다행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은설은 잠깐 말하기를 주저했다.

박수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하사, 박철웅.

서은설은 겨우겨우 그 입을 열었다.

박철웅의 시체는 괴현상인 동굴이 사라지며 함께 산속에 파묻혔다.

그 결과, 그의 죽음은 박수의 주머니에 있던 이름표로 알려졌다.

나름대로 발굴 작업 노력했으나.

산이 무너질 판이라 결국 포기하고, 거기에 비석을 세우기로 했다.

"...박수 씨가 가져와 준 이름표, 그거 보고 박철웅 씨 어머니와 아버지가 많이 우셨어요."

서은설은 착잡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름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박수 씨께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했어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다.

박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박철웅의 영혼은 괴이에게 잡아 먹혀 존재치 않는다.

그렇기에 박수는 그의 염조차 빌어줄 수 없다.

"서은설 씨, 오늘이 며칠이죠."

"아, 4월 27일이에요."

"...논안장명폐대길일(論安葬鳴吠大吉日)."

"네?"

박수의 중얼거림에 서은설이 의아함을 보였다.

"천상의 닭이나 개가 울지 않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날은 이장하기에 길한 날이다.

박수는 무척이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가시는 날은 좋은 날이네요."

부디 그의 삶이 아픔만 있지는 않았기를.

박수는 그렇게 조용히 빌어줄 뿐이다.

* * *

다음날, 박수는 무사히 퇴원했다.

의사에게도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니.

큰 문제 없으리라.

'그러면 이대로 이제 다시 훈련소로 돌아 가게 되려나.'

괴이 사건으로 인해 잠시 훈련소를 나왔을 뿐.

박수는 본디 헌터 예비생 신분이다.

국가에서 소집한 것이니 절대 쉽게 놔주지는 않을 터.

실제로 서은설은 먼저 부대로 복귀하기로 했다.

이라나나 남궁준호도 마찬가지겠지.

박수가 그리 생각하며 만약을 대비한 진통제를 받았을 때였다.

"박수 씨, 맞으시죠."

박수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선글라스의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 헌터다. ]

그는 박수를 보자 주머니를 뒤져 명함과 증을 꺼냈다.

천수화의 말대로 그는 헌터였다.

5레벨 헌터, 권승호.

게다가 이 사람 현직 경찰이다.

'얼굴에 음기가 가득하시구만.'

타고 나기를 썩 편안한 삶을 살 것 같은 기운이 아니다.

"현재 경찰 쪽에서 신설된 헌터 관리과에서 일하고 있는 권승호입니다."

그것을 본 박수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나라, 군 소집은 철저하네요."

퇴원하자마자 탈영 못하게 잡으러 온 거지. 이거.

"아하하, 비슷하긴 합니다만 오늘은 다른 이유입니다."

"사건 진상을 듣기 위해서죠?"

"예상하고 계셨군요. 역시 용한 무당이십니다."

이쪽의 뒷조사도 했군.

박수는 그가 사건 조사 전문임을 눈치챘다.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병원에서는 눈에 띈다.

박수 또한 기꺼이 그의 제안에 응했다.

박수는 권승호의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창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곧 고개를 기울였다.

트럭에 웬 여자 귀신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일본 귀신이네.'

창백한 얼굴의 텅 빈 눈.

그리고 일본 전통 의상까지.

꽤 오래전에 죽은 귀신인 것 같다.

'일본 귀신은 안 엮이는 게 상책이긴 한데.'

한국에 있는 일본 귀신은 일제시대에 넘어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귀신이 한을 가지면 무당을 찾던, 사람을 괴롭히는 선에서 그치지만.

일본 귀신은 자기와 마주하거나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을 무작정 죽이려 한다.

그렇기에 무당들도 웬만하면 일본 귀신은 피하는 편이다.

그런 일본 귀신이 하나가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트럭에 옮기는 물건 중에 뭔가 붙을 만한 게 있나?'

박수가 트럭을 힐끗 살피자 화물칸에 영어로 적힌 부산이 보였다.

'부산 쪽에서 올라온 화물차인가.'

박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트럭이 좌회전하며 사라졌다.

누가 받게 될 물건인지는 몰라도, 꽤 고생하겠다.

그 뒤, 권승호가 데려간 곳은 한적한 도시 카페였다.

아르바이트생이 타준 커피를 받아온 그는 박수의 앞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박수는 건네준 공짜 커피를 냉큼 받았다.

훈련생 신분일 때는 누리지 못했던 카페인의 참맛.

오랜만에 혈기가 도는 기분이다.

'난 역시 군 체질이 아니야.'

문명의 이기는 이토록 행복했다.

"그럼 바로 본론을 꺼내 볼까요?"

권승호는 선글라스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박수에게 화면을 돌렸다.

"다른 분들의 공통된 진술을 통해 이번 B등급의 범 괴이는 박수 씨, 단독으로 처치했다고 들었습니다."

박수는 서은설과 이라나, 남궁준호 등이 남긴 진술을 보았다.

그들은 권승호의 말대로 공통으로 범 괴이는 박수가 처치하였다 진술했다.

"박수 씨는 B등급의 괴이를 처치할 때 헌터가 얼마나 필요한지 아십니까?"

"5레벨에서 6레벨의 헌터들이 중대 단위로 사냥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론 수업을 성실히 들으셨군요."

괴이를 상대하는 만큼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말이다.

중대 단위는 곧 100에서 250명 정도다.

B등급 괴이는 그만한 인원이 출동되어야 잡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중대 단위란 약 10명 정도의 5레벨, 6레벨 헌터를 필두로 모인 헌터 중대입니다."

헌터 중대 평균 레벨이 5에서 6레벨은 아니란 소리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5레벨에서 6레벨 정식 헌터는 61명."

나라 전체를 감당하기에는 생각 이상으로 적은 수다.

"단련에 따라 헌터의 레벨은 성장 가능하니 물론 계속 보충은 될 테고, 예비생분들이 꾸준히 생기니 이 수는 차차 늘어날 겁니다."

너무 적은 수에 놀랄 필요는 없다며 권승호가 손짓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인원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하물며 7레벨 이상의 헌터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죠."

박수는 새삼 8레벨 이능인 이라나가 엄청난 전력임을 깨달았다.

고위 레벨 헌터의 수가일 정도로 적었을 줄이야.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던 대로 박수 씨께서 단독으로 B등급 괴이를 처치해서입니다."

B등급 괴이를 처치하기 위해 5~6레벨 헌터 10명과 중대가 필요하다.

박수는 그걸 단독으로 처치했다.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박수는 금방 깨달았다.

"B등급 괴이를 단독으로 잡으려면 최소 7레벨 이상의 헌터만 가능합니다."

"이능 측정기를 사용했을 당시 저는 1레벨로 나왔습니다만."

"예, 하지만 박수 씨는 1레벨로 B등급 괴이를 처치하셨죠."

이건 권승호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멸문이 열리고,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못한 게 많습니다. 그러니 이능 레벨 측정기가 낮게 나왔다 해서 모든 걸 판단해서는 안 되죠."

박수는 결과를 냈다.

그렇다면 앞선 과정은 아무래도 좋은 게 권승호의 판단이다.

"멸문으로 인해 수많은 곳에서 괴현상과 괴이가 터지고 있습니다."

권승호는 노트북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괴현상과 괴이와 관련된 기사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헌터가 밀집된 서울은 그나마 괜찮지만, 지방은 이미 마을 인원이 전부 대피하여 출입 금지 구역이 된 곳도 있습니다."

기사를 보자 박수는 이제야 한국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자각했다.

더불어 서울이 얼마나 괴현상 대처를 잘했는지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 B등급 괴이를 바로 처치할 수 있는 전력을 저희는 방치할 수 없습니다."

권승호는 그리 말하며 박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박수 씨께서 정식 헌터로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원은 국가가 하겠습니다."

권승호는 필사적이다.

박수는 그의 눈에 생긴 눈 그늘을 엿보았다.

일반 시민들을 안전을 위해 그는 밤낮으로 분투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직 일반 시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니 그는 쉴 틈이 없다.

그의 진실된 감정을 느낀 박수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 권승호 씨."

권승호가 박수를 바라보자 박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그거 쓰러트린 건 제가 아닌데요."

"예? 하지만 진술에서는 박수 씨라고...."

"맞죠. 맞긴 하는데. 다른 사람이라서요."

권승호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 말입니까? 혹시 헌터 예비생 이라나 씨 말씀이십니까?"

"같은 여자긴 하네요."

"서은설 씨 말입니까?"

아쉽게도 다 틀렸다.

"지금 권승호 씨, 옆에 있거든요."

권승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을 보았다.

당연히 그의 눈에 비친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인사하세요. B등급 괴이를 쓰러트린 천수화입니다. 자자, 천수화 너도 인사드려."

권승호는 천천히 박수를 돌아봤다.

아, 저 눈 익숙해.

미친놈 보는 표정이야!

박수는 오랜만에 자신이 무당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14화. 8레벨 헌터에게 찍힌 썰 푼다.

헌터 관리과 5레벨 헌터 권승호.

그는 헌터 관리과라는 신설과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헌터를 꽤나 많이 봐왔다.

'이상하게 고위 헌터일수록 괴짜가 많다.'

이능이 정신에 무언가 영향을 주기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괴짜들만 고위 헌터가 되기라도 하는 건지.

고위 헌터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괴짜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또 다른 괴짜 한 명을 마주했다.

레벨 1로 등록됐지만, 무려 B등급 괴이를 처치한 이.

바로 박수다.

찾아보니 굉장히 어린 시절 신내림을 받아 무당으로서 살아왔다 한다.

무당이라는 정보를 확인했을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

설마하니 괴이를 처치한 게 귀신이라 할 줄 몰랐다.

권승호가 다시금 박수를 돌아봤다.

박수의 눈은 맑았다.

그리고 그 눈이 너무 과하게 맑아 광인처럼 빛났다.

분명 인물은 나쁘지 않은데.

저 광인 같은 맑은 눈동자가 왜인지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는 무당이라고 무시할 시대가 아니다.

'귀신의 존재성은 지금도 헌터 사이에서 내부적으로 오고 가고 있다.'

괴이와 괴현상, 이는 국가에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아직은 윗사람들끼리 아는 이야기라 권승호도 깊게는 모르지만.

국가는 오래전부터 이미 멸문의 출현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해왔다.

거기에는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도 없지 않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박수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권승호는 평생을 귀신과 담쌓은 사람이다.

'이성이 자꾸만 나를 묶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옆에 누가 있다고 하니.

바로 그렇구나 하고 믿기도 그랬다.

"천수화도 인사하네요!"

[ 시답잖은 짐승 하나 죽였다고 뭐 이리 난리이더냐. ]

"자기가 괴이를 잡은 걸 자랑스러워해요!"

[ 도사 놈아, 한 번만 더 멋대로 말하면 노부가 직접 손봐주겠다. ]

그사이, 박수는 천수화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말은 달랐을지언정 뜻은 같을 거다.

물론 여전히 권승호의 눈빛은 미묘했다.

박수도 저런 눈빛이 익숙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무당은 미치광이로 보일 뿐이니까.

"안 믿기죠?"

박수의 질문에 권승호가 멈칫하였다.

그러고는 그는 자기 얼굴을 쓸었다.

"죄송합니다. 제안하러 온 입장에서 표정 하나 관리 못 한다니."

"아니요. 저도 익숙하거든요."

박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제 말은 사실입니다. 저 혼자서는 그런 거 못 해요."

그렇다고 해서 천수화의 빙의를 매일같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천수화의 빙의는 박수에게도 꾸준히 부담이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그릇이란 게 있다.

그러한 그릇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자신의 영혼이 이미 그릇을 채우고 있는데.

그러한 그릇에 자꾸만 새로운 영혼이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당연하지만 그릇이 깨지거나 혹은 본래 영혼이 넘쳐 버릴 거다.

박수가 천수화의 빙의를 마친 후 코피를 쏟거나 통증을 느끼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내가 천수화를 마지막 카드로 썼던 것도 그런거고.'

빙의는 만능이 아니다.

특히, 천수화 정도 되는 귀신이라면 더더욱 큰 부담이다.

'가능하면 괴이와 맞서는 건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

천만다행으로 빙의한 대상의 경험과 능력을 흡수하는 이능을 갖췄으니.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제안하신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제 수준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강해져서 돌아오겠다.

아디오스!

박수가 그리 전하자 권승호는 쓴웃음을 삼켰다.

쿵!

그때.

박수가 앉아 있던 탁자가 내려쳐졌다.

흠칫한 박수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인가 권승호의 옆에 한 여성이 보였다.

박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언제 나타난 거지?'

분명 방금까지 권승호의 옆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샌가 권승호의 옆에 서 있었다.

'귀신도 이렇게는 못 나타나겠는데.'

금발로 화려하게 머리를 염색한 그녀는 새까만 라이더 재킷과 배가 드러나는 크롭티 차림이었다.

딱 달라붙는 스키니와 주렁주렁 달린 사슬까지.

어딘가 폭력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그녀가 동그란 선글라스를 눈 위로 치켜올렸다.

"하이 안녕, 그럼 네가 말한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 좀 해보고 싶은데."

다짜고짜 그녀가 말을 전했다.

박수가 눈을 깜빡이자 옆에 있던 권승호가 당황했다.

"오, 오시아 씨, 언제부터 따라오신 겁니까?"

"새로운 인원을 영입하겠다고 할 때부터!"

"처음부터지 않습니까!"

오시아라 불린 여자는 당차게 웃음 지었다.

'이 여자, 기 장난 아니게 쌔네.'

귀신이 얼씬도 못 할 정도로 기센 사람이다.

'사주를 아직 안 봐서 몰라도 양인살(羊刃煞) 느낌이 드는데.'

양인살을 가진 사람은 성질이 흉포하고, 독불장군 기질이 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성격을 타고났기에 때로는 불세출의 영웅이 되기도 한다.

[ 흐음. ]

그러는 사이, 천수화가 턱을 쓸며 오시아를 바라보았다.

[ 강하군. ]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돌아왔다.

은근히 남에게 칭찬이 야박한 천수화다.

그런 그녀가 강하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강자일 거다.

"우리 월급 노예 권승호는 비키고!"

오시아는 권승호의 머리를 밀어내며 몸을 쭉 내밀었다.

그녀는 박수와 눈이 마주친 채 방긋 웃었다.

"그래서 친구는 수준 확인, 불가능해?"

이 여자 막무가내인 타입이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박수다.

박수는 그녀가 상당히 위험한 인물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양인살이 낀 사람은 밀어붙이려는 성향이 강하니까.

"수준 확인이...."

박수는 말을 이어 가려다가 멈칫하였다.

왜냐하면 아주 잠깐 눈앞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기, 부산 해역.

거대한 선박, 그리고 거기에 끝도 없이 붙어 늘어진 일본 귀신.

오시아와 마주하자 신령이 보여준 단편적인 정보였다.

박수는 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악의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박수는 아까 전 부산 화물차를 타고 가던 일본 귀신을 떠올렸다.

박수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예감이 안 좋다.

그는 굳은 얼굴로 오시아를 돌아봤다.

"지금 일본에 무슨 일이 난 겁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오시아도 멈칫하였다.

그녀는 묘한 눈으로 박수를 바라보다가 권승호를 돌아봤다.

"일본 이야기 내가 오기 전에 했었어?"

"...아뇨. 아직입니다."

권승호도 놀란 눈으로 박수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박수가 한 이야기가 꽤나 큰 비밀이라는 소리였다.

"과연, 무당이라더니! 용하네."

그러자 오시아는 씩하니 미소를 머금었다.

"간단히 알려줄게. 일본은 지금 괴현상으로 인해 사실상 사회가 무너지고, 망할 위기야."

그리고 다음 말은 박수가 멍한 표정을 짓게 했다.

"일본이 망할 위기라고요?"

박수는 가게에 있는 TV를 바라보았다.

뉴스가 나오는 TV에서는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없다.

"당연히 대중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어. 근접한 국가 하나가 망한 걸 알려 봤자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

오시아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올려 꼬았다.

박수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났길래."

"짐작은 대충 가지 않아?"

오시아는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일본은 옛날부터 요괴와 관련된 괴담이나 신화가 집요할 정도로 많았던 국가지."

박수도 이는 알고 있던 이야기다.

"문제는 잦은 지진과 해일로 인해 재해와 관련된 요괴가 너무 많았어."

"설마."

"그 설마야. 재해와 관련된 요괴들까지 괴이로 탄생했어. 지금 일본은 그야말로 괴이의 소굴이야."

박수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괴이 때문에 귀신들조차 발붙일 틈이 없어지니.

녀석들이 한국으로 떠나는 배에 잔뜩 붙어 도망쳐 온 거다.

부산 화물차를 타고 가던 일본 귀신도 같은 경우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근접한 국가인 일본의 몰락으로 생길 외교 문제는 제쳐 두고.

오시아는 당장 생길 문제를 입에 거론했다.

"일본에서 탄생한 괴이들이 괴현상 백귀야행이 되어 현재 바다를 타고, 이동 중이라는 거야."

"설마."

"그래, 일본과 인접한 부산, 제주도."

그녀는 천천히 지역을 입에 읊었다.

그때마다 박수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 갔다.

"동해 지역, 중국 황해, 북한, 러시아까지."

전 세계를 향해 일본의 괴현상, 백귀야행(百鬼夜行) 괴이들이 쏟아지고 있다.

"놈들은 일본에서 흘러 나와 점차 각국으로 이동 중이야."

한국은 당장 자국에서 생기는 괴이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 상황에 일본의 괴이까지 합류한다면.

당연히 한반도는 쑥대밭이 될 거다.

"문제는 우리는 당장 일본만 걱정할 게 아니란 거지."

오시아는 짜증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긴 하지만 북한 쪽도 위험해. 차이나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섰으니까."

북한이 무너지는 순간 북한 쪽 괴이도 한국으로 내려올 것이다.

자국 내 괴이.

일본 괴이.

북한 괴이.

이 세 가지가 전부 한국을 강타할 예정이다.

박수는 그제야 어째서 천수화가 멸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는지 깨달았다.

다른 나라 상황은 몰라도 한국은 정말 멸망을 코앞에 뒀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단군 할아범, 우리 땅 투기 사기당했어.

"그래서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지금 고위 헌터들을 부산 쪽으로 소집 중인 셈이지. 물론 나도 오늘 있을 회의 후 바로 갈 예정이야."

부산을 시작으로 동해 쪽까지.

헌터들은 방어선을 구축해 일본 괴이를 막아낼 계획을 짜고 있다.

"각 지방 쪽에는 국가에서도 내륙으로 피난 권고를 내리고 있어. 일단은 괴이 탓으로 둘러대면서."

"...일반 시민의 불안이 가중될수록 사회의 붕괴가 초래할 테니까요."

오시아는 신이 난 듯 양 손가락 검지를 척 올렸다.

"이해력이 좋아서 좋네! 덤으로 인간의 불안감은 괴이의 탄생을 가중하거든!"

박수는 그 말의 뜻 또한 알아차렸다.

"괴담을 바탕으로 괴현상과 괴이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까?"

"100점이야. 상은 나중에 줄게."

오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우리가 왜 이리 인재에 목말라 하고, 국가가 어떻게든 헌터 인원을 동원하려는 이유가 느껴지지?"

"느껴지다 못해 무서워 죽겠는데요."

"아직 못 죽어. 할 일이 많거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다니 블랙 기업 헬조선이다.

그러나 이런 블랙 기업 체제로 운영 안 하면 한국은 망한다.

"자, 여기서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오자!"

오시아는 팔짱 낀 팔을 풀었다.

"나는 오시아, 대한민국에 있는 5명뿐인 8레벨 헌터야."

5명뿐인 8레벨 헌터.

그녀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박수는 벌써 그중 하나를 알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이라나기 때문이다.

이 인원수를 들으니 고위 헌터가 얼마나 적은지 확실히 체감된다.

"박수, 나랑 한판 붙자!"

8레벨 헌터가 1레벨 헌터한테 결투 신청을 해왔다.

"아뇨. 안 할건데요."

"미안하지만 선택권은 없어!"

세상 억울하다.

[ 도사 놈아. ]

그러는 순간 천수화가 박수를 불러왔다.

[ 일본이랬나. 다른 지역에서 열린 멸문은 노부 세계와는 또 다르게 이어진 멸문일 것이다. ]

박수가 천수화를 돌아봤다.

그 말은 즉.

"...멸문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온 귀신이 또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멸문을 타고 올 수 있는 귀신이라면 노부만큼의 실력을 갖췄겠지. ]

박수의 이능은 빙의한 귀신의 생전에 경험과 능력을 얻는 것.

이는 뛰어난 귀신을 더 많이 빙의시킬수록 박수가 강해진다는 뜻과 같았다.

천수화 한 명으로 이 정도까지 강해진 박수다.

인원이 더 늘어난다면 당연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 물론 노부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 지키는 것쯤이야 충분하긴 하겠지만. ]

천수화는 다른 귀신이 여기에 끼인다는 게 썩 달갑지는 않은 듯했다.

[ 하지만 노부 또한 네 이능에 흥미가 있다. ]

순수한 흥미.

박수가 수많은 귀신을 삼키고,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천수화는 이러한 순수한 흥미를 오랜만에 느꼈다.

[ 도사, 네 이능이라면 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박수 또한 천수화의 이야기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무당까지 때려치우고, 헌터가 되기로 했다.

박수는 더 이상 박철웅 같은 이가 괴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된다.

"그래, 귀신 찾는 게 무당 일 아니겠어?"

허공과 대화하는 박수를 보며 오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시아를 박력 넘치게 돌아봤다.

"오시아 씨."

"어, 응?"

"제가 당장은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언젠가 전력으로 참가한다면 혹시 일본에 데려가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터무니없는 제안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권승호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에 간다니 그게 무슨."

권승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박수를 말렸다.

"일본은 지금 괴이로 쑥대밭입니다. 일본 자국 헌터들의 생존도 가늠할 수 없는데...."

그 순간 권승호의 말을 오시아가 손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박수를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좋아. 내가 책임지고 데려가 줄게."

"오시아 씨!"

"어차피 동해 전선을 유지 시킨 뒤에는 각 국가와 연합을 짠 뒤 일본으로 한 번은 가야 하잖아? 그때 데려갈 거야."

일본 괴이가 한국으로 다 넘어올 때까지 언제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가까운 국가들끼리 연합을 형성해 일본 내 괴현상과 괴이를 공략할 작정이다.

"방사능 유출은 못 막아도 괴이는 막아봐야지."

권승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런 발언을 나중에 기자들 앞에서는 하지 말아 주세요. 국가 간 대립을 초래할 겁니다."

"괜찮아! 어쨌든 지금의 일본은 망했잖아!"

권승호는 배가 아픈 기분을 느꼈다.

괴짜 헌터들을 관리한 결과 생긴 스트레스성 장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시아는 이야기를 진행했다.

"자, 헌터 예비생 박수, 거래는 성립됐어."

"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박수는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 그럼 한판 붙으러 가자!"

옘병, 이야기가 원점에서 벗어나지를 않네.

15화. 미친개

8레벨 헌터 오시아.

헌터 내 별명.

광견(狂犬)

직역하자면 미친개.

헌터들이 오시아를 평가하자면 이렇다.

「한 번 물면 끝까지 안 놓는 미친개.」

「오시아가 온다고? 다들 튀어! 물리면 끝장이다!」

헌터들은 오시아가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친다.

그녀가 얼마나 미치광이인지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이·괴현상에 관해서.

대한민국 헌터 중 가장 많은 업적을 보유한 것 또한 그녀라 할 수 있다.

멸문이 열린 악몽의 날.

그녀는 최전방에서 괴이와 괴현상을 맞섰다.

그리고 멸문에서 나온 괴이와 괴현상이 안정될 때까지.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그들과 맞섰다.

그 결과, 뉴스와 각종 SNS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 또한 그녀였다.

괴이와 괴현상을 가장 많이 막은 인물 중 하나인 만큼.

시민들 앞에서도 모습을 가장 많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일반 시민을 구하는 그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헌터 선전 간판으로 쓰이고 있다.

성격은 몰라도 타고난 화려한 외모가 눈에 띈다.

그러니 정부에서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헌터 포교용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사회가 이러니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는 속도가 느리지만.

얼마 안 가 대한민국을 크게 알리는 간판 스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지금.

정부가 한국 대표 헌터로 광고하고!

시민들에게는 우상인 그녀가!

뭘 하고 있을까?

'1레벨 헌터를 패려고 하고 있지.'

오시아가 허벅지용 소켓에서 꺼낸 비수를 빙그르르 돌렸다.

현재 박수가 온 곳은 국가 헌터 전용 훈련장이다.

언제 이런 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낡은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훈련장으로 쓰인 모양이다.

"간단히 테스트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는 마!"

아까까지 한판 붙자고 한 사람이 무슨.

박수는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킨 채 헌터용 검을 쥐었다.

박수가 본래 받았던 헌터용 검은 범 괴이와의 전투 중 망가졌다.

덕분에 그가 지금 들고 있는 건 권승호의 것이다.

박수는 천수화를 힐끗 보았다.

[ 직접 해라. 경험 쌓기 딱 좋은 상대니까. ]

빙의 찬스는 없는 모양이다.

박수는 하는 수 없이 자세를 엉거주춤하게 잡았다.

실전 경험이라고는 개여시밖에 없는 박수다.

'아직 내 이능의 사용법을 난 아직 잘 몰라.'

그때 발휘했던 천수화의 몸놀림은 원한다고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전투에 들어가 봐야 감을 잡을 듯싶다.

"시작할게!"

오시아가 비수를 머리 위로 던졌다.

비수는 빙글빙글 돌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오시아가 몸을 회전시켰다.

카앙!

뒤돌려 차기를 그린 오시아의 발이 비수의 그립을 걷어찼다.

그 순간 비수가 탄환 같이 박수를 향해 쏘아졌다.

놀란 박수가 급히 고개를 젖히려는 순간.

훅!

박수는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코앞에 도달한 오시아를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이 던졌던 비수를 손에 쥔 채 박수에게 내려찍었다.

박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건, 빠르다는 수준을 넘었다.

그녀는 개여시보다도 훨씬 빨랐다.

딱!

비수를 빙글 돌린 오시아가 대신 박수의 이마를 그립 뒷부분으로 내려쳤다.

박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대로 해! 방금 거 비수였으면 끝이었어."

박수는 손을 들어 자기 이마를 감쌌다.

오시아의 말대로 그립이 아니라 날이었다면 박수는 머리가 꿰뚫려 죽었다.

오시아의 8레벨 이능.

가속(Acceleration).

모든 운동 방향에 가속을 부여한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한 이능도 많이 없다.

오시아는 조금 전 가속을 이용해 직선거리로 던진 비수보다도 빨리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녀의 육체 또한 무려 8레벨.

무려, 자신의 이능과 동급의 육체 레벨을 지녔다.

육체 8레벨과 이능 8레벨이 만난 결과.

그녀는 살아 있는 육탄 전차가 됐다.

초인(超人).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오시아였다.

'이건 눈으로는 쫓아갈 수가 없는데.'

박수가 숨을 삼켰다.

애초에 반응을 못 하니 상대가 안 된다.

[ 도사 놈아, 눈을 감아라. ]

그러자 대뜸 천수화가 눈을 감으라고 했다.

박수는 의아함을 보였지만, 전투에서는 천수화가 더 숙련자다.

박수는 천수화를 따라 눈을 감았다.

저 멀리 오시아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소리로 알아채라는 건가.

박수는 눈을 감은 채 다른 오감에 집중했다.

퍼억!

그리고 배를 얻어맞고 바닥을 거칠게 뒹굴었다.

"크엑!"

"아, 미안, 뭔가 하려는 줄 알고."

바닥을 구르는 박수를 보며 오시아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박수는 한바탕 바닥을 구른 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프다.

배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그러자 천수화가 물었다.

[ 눈 감으니 뭐가 보이더냐? ]

"...시커멓던데."

[ 그럼 그게 네 미래다. 다시 눈이나 감아라. ]

우리 천수화 동백꽃이 매몰차다.

박수감자는 살짝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결국 천수화의 말을 따라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박수가 눈을 감자 주위가 서서히 고요해졌다.

[ 내면에 깊숙한 곳, 그 안을 향해 집중해라. 지금부터 바깥은 모두 잊어라. ]

고요한 주위.

박수는 왜인지 바깥보다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여러 소리가 난다.

심장이 뛰는 소리부터 시작해 소화, 장기, 뼈, 근육까지.

그들은 잘 안 들릴 뿐 여러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중.

박수는 자기 몸에 피와는 다른 흐름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능.'

천수화는 기라고 일컫는 힘.

그 힘이 박수의 몸을 타고 여기저기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

파직!

이능이 가끔 충돌하듯 부딪치며 스파크가 일렁였다.

이는 천수화가 말한 마기라는 증상이다.

천수화의 빙의를 통해 월광천하라는 검술을 사용한 결과.

박수의 몸에 흐르는 이능은 마기의 증상을 반복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 지금부터 마기만 골라 바깥으로 배출해라. ]

집중하는 박수의 정신 사이로 천수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는 그녀의 말대로 마기가 생겨나는 부분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는 이능을 내보내는 감각과 다르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 그리고 마기를 육체의 넓이보다 더 넓고 고르게 퍼뜨려라. ]

본래라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박수의 몸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이행했다.

천수화의 경험과 능력이 빙의를 통해 육체에 스며들었기에.

박수는 천수화의 말을 따라 금방 육체 전체에 마기를 둘렀다.

다른 이의 눈에는 그의 몸 주위에 푸른색의 달빛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지금부터 마기에 닿는 외부의 충격에만 집중할 거다. ]

박수는 천수화가 자신의 검을 쥐어 들어 올리는 기분을 느꼈다.

[ 이제 눈 떠라. ]

떠오른 눈동자 앞에 백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흩날렸다.

박수의 눈동자 색 또한 천수화와 같이 새파랗게 빛났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를 제일 처음 느낀 건 오시아였다.

"흐음."

그녀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비수를 쥔 손을 쥐었다 폈다.

박수가 무언가 했다.

그의 몸 주위로 흐르는 푸른 달빛의 기운도 그렇지만.

그라는 사람 자체가 바뀐 느낌이다.

오시아가 비수를 공중으로 던졌다.

캉!

그러고는 아까와 똑같이 비수를 회축으로 참과 동시에 사라졌다.

비수가 탄환같이 박수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박수의 코앞까지 비수가 도착한 순간.

오시아는 박수의 등 뒤에 도착했다.

어느새 오시아의 왼손에는 비수가 한 자루 더 쥐어져 있었다.

오시아가 손에 쥔 비수가 박수의 뒷목을 향해 나아갔다.

앞은 날아온 비수.

뒤는 오시아가 휘두른 비수.

앞과 뒤가 전부 막혔다.

파직!

오차 없이 두 개의 비수가 박수의 달빛 기운을 뚫은 순간.

박수가 움직였다.

제일 먼저 박수의 왼쪽 손이 전방으로 날아든 비수를 내려찍었다.

콱!

검 면을 정확히 내려친 결과 비수가 뒤틀리며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카앙!

그와 동시에 박수의 목 뒤에서 검명이 울려 퍼졌다.

박수가 역수로 쥔 채 뒤로 뻗은 검이 오시아가 휘두른 비수를 차단한 것이다.

오시아의 눈이 뜨여졌다.

박수를 향해 내지른 두 개의 수가 동시에 막혔다.

이는 타고난 전투 센스를 지닌 이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호오?'

그 순간 박수의 오른발이 바닥을 지르밟았다.

동시에 오른발을 주축으로 박수의 몸이 회전했다.

착!

어느새 박수의 왼손에는 허공에서 회전하던 오시아의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박수의 비수가 노린 곳은 오시아의 목덜미.

오시아는 왼손잡이다.

그렇기에 왼손으로 휘둘렀던 비수가 박수의 검에 막힌 지금.

오시아의 오른쪽 몸은 텅 비어 있었다.

그 틈을 박수는 절묘하게 노렸다.

하지만 오시아도 괜히 8레벨 육체가 아니었다.

그녀는 왼손을 뻗고 있는 자세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크게 굴렸다.

그러고는 박수가 내지른 비수를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카앙!

단단한 헌터용 부츠가 박수가 휘두른 비수를 튕겨냈다.

그녀는 기울어진 몸 그대로 바닥을 양손으로 짚었다.

그러고는 자기 다리에 가속을 부여함과 함께 박수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캉!

박수가 아슬하게 검으로 부츠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주 짧은 공방.

박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삼켰다.

빙의하지 않았지만, 빙의를 한 것 같은 상태.

가빙의·역천 세계 천수화.

이능을 발동시킨 박수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 내가 다루는 검술, 월광천하(月光天下).

그 이름 그대로 달빛 하늘 아래 온 세상을 손안에 쥐는 검술이다. ]

천수화가 박수의 곁을 뒷짐 진 자세로 뚜벅뚜벅 걸었다.

[ 지금 네가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월광천하의 기본 묘리, 반경(反境). ]

박수의 몸 주위에 푸른색 달빛이 흘러 지나갔다.

[ 그리고 이는 도사, 네게 주어진 너만의 절대적인 공간이다. ]

박수의 마기는 현재 박수의 반사 신경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그 결과, 상대의 공격이 박수의 반경에 닿을 경우.

박수의 육체는 척수반사로 이를 막고자 반응한다.

[ 지금은 네 육체로 낼 수 있는 반경은 그게 한계선이겠지. ]

천수화의 경험과 능력을 이능을 통해 흡수했다 한들.

박수의 몸이 긴 시간 단련된 천수화의 몸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박수의 몸은 자신이 겪은 경험과 능력에서 발췌해 현재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월광천하를 발휘했다.

[ 노부가 보기에 네 이능은 노부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흡수하는 것은 아니다. ]

천수화가 보기에 박수는 자기 햇병아리 시절과 같다.

[ 아마 한 번에 네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이 있는 거겠지.

도사 네가 다루는 월광천하는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

그렇기에 박수의 이능은 1레벨이라 표해졌다.

[ 그러니 앞으로 키워주마. ]

천수화의 푸른색 두 눈이 하늘을 연상케 할 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 언젠가 이 세상을 달빛 전체로 물들어 네 것으로 만들 만큼. ]

그것은 천수화가 생전에 결국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 노부가 너를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일컫도록 만들어 주겠다. ]

그녀의 호령과 함께 천수화가 고했다.

[ 그러니 보여줘라. 앞으로 천하제일인이 될 이의 위용을. ]

박수가 앞발을 내밀고, 오른손에 쥔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대신, 등 뒤로 자연스럽게 왼손을 숨겼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비수가 쥐어져 있다.

집중력이 올라갔다.

개여시 때와 같은 느낌이다.

느낌이 좋다.

박수는 천수화의 말한 월광천하의 묘리를 이해했다.

반경.

자기 몸을 두른 달빛 안.

이 안에서만큼은 박수는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평소 천수화가 보는 세상이 두 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녀의 패도적인 기색이 조금은 옮은 느낌이다.

"흐흣, 하하하."

오시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웃음 지었다.

"재밌어!"

그러고는 대뜸 오시아가 라이더 자켓을 확하니 펼쳤다.

박수는 라이더 재킷 안을 가득 메운 비수를 보았다.

대체 몇 자루나 되는 건지.

순간적으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수가 그녀의 옷 안에 있었다.

박수가 경악했다.

저걸 입고 그렇게 빠르게 움직였던 건가.

터무니없는 몸놀림이다.

촤라라락!

그 순간 오시아가 자켓을 벗어 던짐과 함께 모든 비수를 일제히 던졌다.

수십 개의 비수가 빙글빙글 도는 순간.

오시아의 두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빛났다.

훅!

그리고 오시아가 사라졌다.

박수가 눈동자를 굴리며 서둘러 그녀를 쫓은 순간.

타앙!

탄환과 같은 소리와 함께 비수 한 자루가 박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반경 안으로 급습한 비수에 의해 박수의 몸이 척수반사로 움직였다.

채엥!

끌어올려진 검이 순식간에 비수를 받아쳤다.

그러나 날아든 비수는 끝이 아니다.

비수는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박수를 향해 모조리 쏘아졌다.

반경안.

수십 자루의 비수가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그것은 마치, 비수의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박수의 검이 달빛을 흩뿌리며 끊임없이 휘둘러졌다.

페이크로 쓰려했던 비수 또한 휘두르며 박수가 악착같이 모두 막았다.

하지만 수십 자루의 비수라 해도 끝이 있는 법.

박수는 모든 비수를 받아쳤다고 생각했지만.

왜인지 비수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건.'

박수는 뒤늦게 오시아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오시아는 지금 가속하여 고속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박수가 튕겨낸 비수가 있는 곳이다.

'내가 비수를 튕겨낼 때마다 다시 받거나 쥐어 나를 향해 던지고 있다.'

가속을 이용한 비수의 감옥.

박수는 주변을 가득 메운 비수의 감옥에 갇혀 버렸다.

오시아는 박수의 반경을 동물적인 감으로 눈치챘다.

이는 오시아의 타고난 전투 센스였다.

[ 쯧. ]

천수화마저도 혀를 찰 만큼 오시아는 전투에 관해서는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 결과, 그녀는 박수의 반경을 꿰뚫을 방법을 고안했다.

반경은 분명 반경 안에 행해지는 모든 공격을 척수 반사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반경을 행하는 것도 사람의 육체.

"윽!"

박수의 팔에 비수 한 자루가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남겼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이는 반경이 뚫렸음을 의미했다.

반경에 들어온 비수를 박수의 몸은 분명 눈치챘다.

하지만 수많은 비수를 계속해서 쳐낸 결과.

육체 자체의 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반응을 해도 몸이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피잇, 핏, 피잇!

비수가 얕은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핏물이 흘렀다.

보통은 이미 여기서 겁에 질려 움츠러들 테지만.

천수화의 경험이 새겨진 육체는 이보다 더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박수는 통증을 견뎌냈다.

박수가 숨을 최대한 당겨 삼켰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그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박수의 몸에 상처는 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전부 얕은 상처일 뿐.

거동을 불편하게 하는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박수는 의도적으로 위험한 비수만을 오롯이 쳐내고 있었다.

채엥, 채엥, 채엥, 채엥, 채엥, 채엥, 채엥!

폐부가 터질 것 같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박수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무당 시절이 떠올랐다.

망아경에 취해 춤을 추던 그때.

박수는 이보다 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도 춤을 추었다.

굿판에 올라 춤을 추던 때, 이보다 더하게 숨이 찰 때도 많았다.

작두 위에서도 춤을 췄다.

비수 속이라고 해서 춤을 못 출까.

"하."

박수가 짧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비수의 공간 속.

박수의 검이 머리 위로 올랐다.

신이 들린 듯 박수의 검과 비수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광경은 영락없는 춤사위였다.

비수를 쳐내는 소리가 묘하게 장구와 꽹과리 소리처럼 느껴졌다.

입이 쭈욱 찢어진 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괴이함을 느끼게 했다.

"얼쑤!"

박수무당.

그 말이 무엇인지 보여주듯.

박수의 검과 비수가 끊임없이 춤췄다.

그 광경을 멀리서 멍하니 보던 권승호가 오싹함을 느낀 그때.

쩌적!

오시아의 예민한 귀에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시아가 손에 쥔 비수와 함께 고개를 든 순간.

쨍그랑!

오시아가 쥔 비수의 날이 갑자기 깨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박수를 가뒀던 비수 전체가 일제히 깨졌다.

파스스스―.

천장의 조명을 받은 비수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며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시아의 눈이 서서히 크게 떠졌다.

대련인 만큼 비수에 이능의 힘을 담지 않았다고는 하나.

오시아의 비수는 단단하기 짝이 없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졌다.

그런 비수를 하나씩 깨부수는 것도 아니고.

일제히 타이밍에 맞춰 한 번에 깨부수다니.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박수의 몸 주위에서 비수의 조각들이 빛났다.

그 광경은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고고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박수는 검을 치켜 올린 자세 그대로 오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땀으로 범벅이 된 박수가 웃었다.

"쓰레기를 버리면 쓰나."

박수의 검이 영롱한 달빛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다시 가져가야지."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달빛과 함께 휘몰아친 바람이 날카로운 비수 조각들을 일제히 날려 보냈다.

비수 조각이 향한 방향은 오시아였다.

본디 수십 개의 비수였던 조각들이다.

박살이 난 날카로운 비수 조각들은 수천 개 가까이 됐다.

비수 조각으로 만들어진 폭풍에 닿는 순간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은 당연지사.

비수 조각을 피해 오시아가 가속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시아는 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코앞을 향해.

비수 한 자루가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발이 제동을 걸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늦게 그 비수가 박수가 쥐고 있던 비수임을 눈치챈 순간.

그녀의 얼굴 앞.

달빛을 머금은 박수의 검이 뻗어 나왔다.

오시아의 눈이 치켜 떠졌다.

조금 전 날아든 비수 조각의 폭풍은 반대편에 조각이 더 많았다.

그 결과, 오시아는 더 적은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이는 박수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가속할 방향을 박수가 강제로 정한 것이다.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뛸 방향을 알고 있다면 행할 것은 같다.

박수는 오시아가 달릴 방향을 눈치채고, 비수를 던져 멈춰 세운 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몰아넣어졌다.

그 생각을 한순간.

오시아의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귀 끝까지 올라갔다.

레벨 차이를 고려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거니.

박수를 무시하지 않고, 전투에 제대로 임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이토록 몰아넣다니.

오시아로서는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리고 그 놀라움이 즐거움이라는 광기로 바뀌는 것도 금방이다.

그녀의 눈이 휘어졌다.

동시에 나쁜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몸속 깊은 곳.

레벨 차이를 고려해 잠재워 두었던 이능의 힘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더, 조금 더.

그에게 힘을 부딪쳐 보고 싶다.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어디까지 자신을 받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즐겁다.

가슴이 뛸 정도로 즐겁다.

헌터가 되고 나서 발생한 전투를 향한 야망이 그녀의 본성을 끌어냈다.

광견.

그녀가 왜 그리 불리는가.

그것은 마음에 드는 상대가 망가질 때까지.

그녀의 이가 끊임없이 물어뜯기 때문이다.

후욱!

한순간 박수의 몸이 시간이 멈춘 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는 박수가 느려진 게 아니다.

오시아가 터무니없이 빨라진 것이었다.

가속, 그것이 최대치에 달했을 때.

오시아의 눈에 세계는 멈춘 것처럼 비춘다.

시간 지평선(Time horizon).

정지한 이 세계 속.

오시아는 속도의 정점에 도달한다.

현재의 박수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미친개가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듯.

그의 몸을 오시아의 손이 타고 오른 순간.

탁!

대뜸 그녀의 팔이 박수에게 잡혔다.

오싹!

일순간 오시아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시간 지평선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가 본능적으로 최대의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녀는 박수와 눈이 마주쳤다.

박수의 푸른색 눈동자에 아까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

"탐내지 마라."

조용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진한 경고를 담았다.

산 위, 거인이 고개를 내밀어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압박감이 오시아를 짓눌렀다.

"이놈은 노부가 먼저 찜했다."

그 말과 함께 박수가 그녀의 팔을 놓았다.

오시아가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곤두선 채였다.

그러자 박수의 코에서 대뜸 주르륵하니 핏물이 흘렀다.

"천, 수화, 빙의, 안, 한다면서."

그리고 박수는 끊어지는 정신과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털썩!

바닥에 누운 박수를 오시아가 천천히 내려보았다.

아까 전 마주친 눈빛의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알았다.

"이거, 물건이네."

광견의 눈동자 속.

박수가 가득 차오른 순간이다.

16화 소대장님 맞아보셨습니까?

박수는 꿈을 안 좋아한다.

어릴 때 신병을 앓던 시절.

신내림을 받으라고 꿈에 시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당이 되고 나서도 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신령들은 꿈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박수는 새빨갛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기라도 한 듯.

태양에 의해 거칠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

해수면을 가득 채운 이매망량의 괴이가 보였다.

괴이들은 무너지고 있는 도심에서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이는 끝이 없어 보였다.

저 멀리 무너지는 붉은색의 탑이 하나 보였다.

박수는 그것이 사진으로 봤던 도쿄 타워임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러한 괴이의 도시 위.

새까만 로브를 휘날리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사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내 박수가 마주한 것은 새하얀 백골의 시체였다.

시체의 새까만 안광이 번뜩였다.

눈동자는 마치 심연과 같았다.

심연 속,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

그 감각을 받은 순간.

"허억!"

박수가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박수는 천천히 땀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에 본 장면.

그건 일본이 분명했다.

신령이 꿈을 통해 보여준 장면인 것이다.

'지금 그게 일본 상황이라는 건가?'

박수는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새삼 깨달았다.

동시에 조금 전에 눈을 마주친 백골 귀신.

박수는 놈에게서 천수화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멸문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온 게 분명했다.

박수는 자기 팔을 비볐다.

귀신을 마주하자 꺼림칙한 느낌이 용솟음쳤기 때문이다.

악귀? 도깨비? 요괴?

그건 대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귀신이었다.

"이런 거나 보여주고, 신령님들도 제가 헌터 되기를 찬성하는 겁니까?"

자기들 엉덩이 안 닦아 준다고 화부터 낼 줄 알았더니.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쩌면 그들도 괴이와 괴현상에 의해 사라지는 영혼이 탐탁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들 또한 같은 영혼이니 말이다.

[ 무슨 꿈을 꿨기에 그러느냐? ]

그 순간 천수화가 대뜸 벽을 뚫고 나오며 물었다.

귀신 아니랄까 봐 아주 자유롭다.

"천수화,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박수는 천수화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일본에 멸문을 타고 온 다른 세계의 귀신이 있어."

일본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이로써 확실해졌다.

"일어나셨습니까?"

그 순간 박수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안경을 쓴 군인이 보였다.

"훈련병, 일어나셨으면 소대장분 불러 드릴 테니 부대 복귀하시면 됩니다."

박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후, 훈련병?

"저, 저, 전역했는데요?"

박수는 혀를 몇 번이고 절며 물었다.

이게 무슨 전역 했더니 다시 훈련병 됐단 소리지?

한국 신종 공포 영화인가?

그러자 군의관은 눈을 깜빡이더니 아하고 소리 냈다.

"아, 죄송합니다. 입버릇이 들어서 여긴 일반 병사들도 같이 쓰는 곳이거든요."

군의관은 미안한 표정을 했다.

십년감수했던 박수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보다 부대 복귀라니.

기절한 뒤, 부대 시설 내 의무실에 던져 놓고 간 건가.

오시아와 권승호, 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악마가 따로 없다.

"여기 권승호 헌터 분이 전해 달라고 하신 겁니다."

박수가 두 사람에게 실망하는 사이, 군의관이 쪽지를 전해줬다.

내용은 단순했다.

부대 복귀 시간이 다 되어 돌려보내니, 예비생 신분이 끝나면 다시 찾아오겠다 한다.

일본 상황을 생각하면 이쪽도 바쁘겠지.

박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줬다.

쪽지를 전부 다 읽자 맨 밑에 추신을 발견했다.

[ 추신, 오시아 씨가 박수 씨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 거 같습니다. 조심하세요. ]

박수가 눈을 깜빡였다.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좋게 봐주고 있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쪽 업계 사람이 조언했다면 이유가 있을 터.

박수는 조언을 겸허히 수용했다.

'오시아는 위험인물.'

박수는 쪽지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어 뒀다.

"이건, 오시아 헌터님께서 다 읽으면 주라던 쪽지입니다."

그러자 박수에게 군의관이 또 추가로 쪽지를 전해줬다.

이번 쪽지를 줄 때는 군의관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군대와 거의 동일하게 운영되는 헌터다.

'8레벨 헌터면 우리나라 헌터 중에서 최상위 위치니까.'

못해도 군대나 헌터 내에서 장관급 취급받지 않을까?

'그럼 나는 훈련병이 장관이랑 한판 붙은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

박수는 군의관이 건네준 쪽지를 받았다.

[ 하이 안녕, 박수, 내 전화번호야. 훈련 끝나면 연락해. 010-XXXX-XXXX. ]

이성에게서 연락하라는 쪽지를 받다니.

난생처음이다.

문제는 '연락해.'라는 세 단어에서 박수의 선택권은 없다는 거다.

이건 오시아의 성격을 보건대 명령이 확실했다.

무조건 연락하라는 명령.

[ 침 묻히지 말랬더니. ]

천수화가 언짢음을 담은 채 쪽지를 노려봤다.

박수는 조용히 군의관을 돌아봤다.

"혹시 이 쪽지 제가 안 받은 걸로 해도 됩니까?"

"안 됩니다."

군의관이 정색했다.

박수는 쪽지를 주머니에 잘 넣어뒀다.

이것도 어딘가에 쓸데가 있겠지.

"박수 예비생, 박수 예비생 어디 있나!"

그러는 순간 박수는 자신을 부르는 남자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대장이 온 것 같다.

그보다 왜인지 목소리가 매우 익숙하다.

'갑자기 굉장히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데.'

박수의 인생사,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저번에 천수화가 이걸 기감이라고 말하던데.

어쩌면 기감이 또 발동한 걸지도 몰랐다.

"박수 예비생, 나가보세요."

오한이 든 박수가 팔을 비비고 있으니 군의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박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 덩치가 꽤 큰 남성이 한 명 보였다.

박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선 굵은 외모.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깎은 머리.

그는 박수 쪽을 보더니 이내 오하고 커다랗게 소리 냈다.

"거기 있었군! 박수 예비생!"

그리고 그의 커다란 목청을 들은 순간.

박수는 깨달았다.

「그런 건 군인 정신으로 이겨내라!」

박수가 군대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말.

그리고 이건 박수가 군대에서 가장 증오하던 이가 자주 내뱉던 말이기도 했다.

'미친, 포대장이 왜 여기 있어?!'

자대 시절, 박수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인간 군상.

포대장, 대위 호강한.

그 인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수가 갑자기 두통을 느꼈다.

그는 본디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박수도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귀신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본인의 군인 정신도 나한테 강요할 생각 말았어야지.'

쌍팔년도 군대 정신을 소유한 자.

그리고 그걸 병사에게 집요하게 강요하는 군인.

그게 바로 호강한이다.

그는 박수를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박수의 어깨를 쾅하니 두드렸다.

"반갑군. 나는 앞으로 3소대를 부임할 3소대장, 호강한이다!"

이 인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안면 인식 장애가 조금 있어서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는 박수를 볼 때마다 '신병이냐?' 하면서 툭하면 물었다.

처음에는 군기라도 잡는 건가 싶었지만.

들어보니 자신 말고도 다른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했다.

'나는 포대장이 있는 포대 소속은 아니니까.'

자기 포대원은 아니니 박수가 전역하자마자 까먹은 거겠지.

박수의 존재 자체를 잊은 게 분명했다.

"...박수입니다."

박수가 허탈하게 자기소개했다.

역시나 호강한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전역한 사이에 헌터가 됐던 건가.'

이미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걸 보면.

그는 멸문이 열리기 전에 각성한 헌터일 것이다.

"3소대장은 말이지. 원래도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서 무려, 14년을 군 복무한 베테랑이다!

내가 맡은 3소대도 베테랑 인원으로 키워낼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호강한은 군의관에게 박수를 인계받은 뒤.

혼자서 신이 난 듯이 떠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군생활 이야기하는 건 변함 없었다.

박수는 그제야 왜 그가 헌터 쪽으로 냉큼 옮겼는지 눈치챘다.

'대위 이하로 15년 이상 근무하면 근속정년으로 전역이라던가 그랬지.'

호강한을 아주 싫어하던 후임이 말해준 이야기였다.

호강한, 저 인간 소령 진급에 계속 실패해서 곧 전역당할 거라고 말이다.

37살이면 아직 한창 사회의 구성원인 나이다.

전역당하는 것보다야 헌터가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군인의 의무를 그만둔 것은 아쉬우나 헌터로서의 활동 또한 군대와 같이 나라를 위한 일이니 괜찮다!"

전역당할까 봐 헌터로 냉큼 옮긴 거면서 왜 저러나 모르겠다.

[ 뭐냐. 이 쓰레기는? ]

옆에서 가만히 듣던 천수화조차 귀가 아프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그를 봤다.

'그립읍니다. 전미현 소대장님....'

박수는 속으로 전미현을 향한 깊은 그리움을 느꼈다.

그녀는 훈련 도중에도 소대원의 말을 헤아리고, 힘을 복 돋아 줬는데.

그는 벌써부터 기운을 빠지게 하고 있다.

"전미현 헌터는 그에 비해 너무나 군인 정신이 모자랐지!"

그 순간 다음 말을 듣고, 박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박수가 언짢은 기색을 담아 호강한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흠하고 콧김을 내쉬었다.

"군인 정신이 있는 자라면 자고로 적과 우연히 만났을 때 죽기 살기로 적과 맞서 싸웠어야지.

소대원에게 괴이가 가도록 내버려 두다니. 소대장으로서 턱없이 부족한 자질이야."

그는 전미현을 힐난하게 비판했다.

범 괴이는 B등급 괴이다.

레벨 5에서 레벨 6 사이에 헌터가 중대를 이뤄 사냥하는 괴이.

전미현은 5레벨 헌터로서 단신으로 범 괴이와 맞섰다.

그것도 소대원들이 최대한 살아남도록 시간을 끌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크게 다치어 지금은 치료 중이다.

그런 전미현에게 죽기 살기로 괴이와 맞서 싸웠어야 했다고?

호강한, 이 인간 제정신인가?

"거기다가 소대원 중에는 전직 군인도 있었다지."

박수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쯧쯧,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불상사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사랬나. 이래서 부사관들은."

그가 박철웅까지 모욕한 순간.

쿠당탕!

호강한은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건 박수가 그의 엉덩이를 거세게 걷어찼기 때문이다.

"끄, 으윽!"

자기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는 그를 보며 박수의 몸에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병신이 뭐라는 거야."

박수가 제대로 열받았다.

17화 인맥이 중요한 이유

14년 차 군인.

대위, 호강한.

그는 굉장히 군인 정신이 투철한 사내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신만으로 안 되는 게 무수히 많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의 군대 생활 또한 포함된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했던가.

이것은 호강한을 대표하는 말이다.

호강한은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

군대 내에서 그의 무식한 신념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만 해도 다수.

그로 인해 그는 만년 대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군인으로서 자긍심이 넘쳤다.

그는 군대를 좋아했다.

대위면 어떠한가!

자신의 밑에는 이토록 많은 병사와 부하 간부들이 있다.

그들을 이끄는 건 바로 나다!

그의 명령은 적어도 자기가 이끄는 부대 내에서는 절대적이니까.

그런 지금.

그가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든 채 바닥에 처박혀 있다.

하물며 자신을 찬 게 누군가.

바로 조금 전에 데려온 박수라는 소대원이다.

소대원.

무려 소대원에게.

소대장이 엉덩이를 걷어차여 넘어졌다.

그 모습은 참으로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는 호강한의 군인 정신과 위계질서에 지극히 위반되는 상황이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졌다.

호강한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 상체를 들어 올렸다.

"상관 폭행, 상관 모욕죄!"

그의 입에서 커다란 목청이 쏟아져 나왔다.

목청 하나만큼은 부대 제일인 그였다.

"전시 상황이라면 즉시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극죄!"

호강한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 채 거친 콧김을 내쉬었다.

"박수 예비생! 지금 자네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겠나악!"

호강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박수는 뭘 하고 있을까.

박수는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벼파고 있었다.

순간 호강한은 지금 자신이 뭘 본거지라는 표정을 했다.

상관을 때린 이치고는 너무나 태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수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내 새끼손가락을 뺀 박수는 그 손가락으로 호강한의 옷에 찍찍 닦았다.

"넌 휴지 역할은 할 수 있냐?"

호강한의 눈이 돌아갔다.

그의 손이 번쩍 들려졌다.

박수의 뺨을 후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의 손이 후려쳐지기도 전.

박수가 먼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커흐억?!"

한순간에 뺨을 맞은 호강한의 고개가 꺾여 돌아갔다.

박수가 후려치는 뺨을 그는 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그가 지금 자신을 맞았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 못한 순간.

박수는 그의 뺨을 때린 손을 탁탁 털었다.

"호강한, 넌 아직도 손부터 올라가는 그 버릇 못 고쳤구나. 그걸로 징계도 받은 놈이."

박수는 자기 턱을 천천히 쓸었다.

'나도 분명 몇 대 맞을 뻔했지. 아마.'

그때마다 타고난 회피술로 피하긴 했지만.

이놈은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죄책감이 없다.

"뭐, 뭐, 네, 네놈 누구길래. 그런걸."

호강한이 자기 뺨을 감싼 표정으로 당황했다.

박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이놈은 정말로 자신의 기억을 싹 다 잊었다.

이 녀석 때문에 얼마나 많은 병사와 간부들이 고생하고 욕을 얻어먹었더라.

물론 거기에는 박수도 똑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대는 연대책임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니까.

그런데 이놈은.

헌터가 되고서도 여전히 그때 군대놀이에 빠져 있었다.

"본인이 맞아보니 좀 정신이 드냐?"

박수가 웃음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야 자신이 또 맞은 사실을 인식했다.

"감히 상관을 모욕해!"

소리 지른 호강한이 또 덤벼들자 박수는 아까와 같이 뺨을 후렸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는 듯 호강한이 고개를 젖혀 피했다.

대단한 반사 신경이다.

헌터가 되면서 육체 능력이 올라간 거겠지.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박수는 반대 손을 뻗어 호강한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호강한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짝!

호강한의 고개가 휙 하니 꺾였다.

그는 볼과 턱에서 뻗어지는 충격에 뇌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넌 그럼 헌터라는 놈이."

짝!

"괴이를 단독으로 맞선 사람과."

짝!

"괴이에게 피해를 본 사람을."

짝!

"모욕해?"

짝!

같은 자세로 순식간에 네 대를 얻어맞아 호강한의 눈이 풀렸다.

어느새 입술을 부르터지고, 볼은 시퍼런 멍이 생겼다.

"힉, 히익!"

박수가 한 대 더 칠 듯 손을 들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커다란 덩치와는 걸맞지 않은 볼품 없는 행동이다.

"네가 최소한 군인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면."

박수는 그리 물으며 그의 머리를 놨다.

그러자 다리가 풀린 호강한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최소한 같은 군대 일원으로서 함께했던 전우가 사망했을 때 예부터 갖췄어야지."

박수는 그리 말하며 호강한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호강한의 앞에 휴대폰을 내밀었다.

잠금 화면을 풀라는 지시였다.

호강한은 벌벌 떨며 서둘러 잠금 화면을 풀었다.

타고난 덩치와 빠른 나이에 임관했다 보니.

그는 이때까지 이토록 노골적인 폭력에 노출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본인이 휘두르던 폭력이 자신에게 향할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두려워 박수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박수는 그가 휴대폰을 풀자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몇 번의 수신음이 갔을까.

―음햐아, 누구야.

자고 있었던지 하품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박수는 잘 기억한다.

아까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니까.

"박수입니다."

―으음? 생각보다 더 빨리 전화했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오시아.

박수가 한판 붙었던 8레벨 헌터였다.

"제가 사고를 좀 쳤습니다. 저희 소대장을 팼거든요."

박수는 호강한을 힐끗 내려다봤다.

그러자 호강한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낮췄다.

꼴은 저렇지만 소대장은 소대장.

헌터는 군법과 동일시되고 있는 게 꽤 많다.

상관 폭행죄가 어떤 식으로 처벌이 내려질지 박수도 몰랐다.

그러니 냉큼 오시아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 무대포군. ]

오죽하면 천수화마저도 박수를 보며 질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어쩌리.

타고난 성격이 이런걸.

사람들도 참다 병나서 죽은 뒤 귀신 되어 지랄하는데.

무당 된 사람이 그거 뻔히 다 아는 마당에 참을 순 없잖아.

"이런 거 가장 잘 해결할 수 있을 분이 오시아 씨인 거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뭣하면 권승호 씨랑 연결해 주셔도 되고요."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자 전화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시아가 듣기에도 기막힌 거 같았다.

―귀엽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칭찬이었다.

"어, 감사합니다?"

그러니 넙죽 감사 인사했다.

―그건 내가 처리해줄게. 그 소대장이라는 녀석 살아 있지?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무당이 살생하면 큰일 납니다."

―좋아. 그럼 바꿔봐.

박수는 오시아의 전화를 호강한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호강한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전화를 받았다.

"예, 예, 예?"

전화를 받은 호강한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는 차렷 자세 그대로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반복해서 외쳤다.

그가 세상이 무너지기 직전인 표정을 했다.

전화를 마친 그는 박수에게 냉큼 전화를 내밀었다.

박수는 다시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했길래 저래요?"

―아, 마침, 국방부 장관이랑 헌터부 장관이 회의하고 있거든.

이번에는 박수가 황당해하는 얼굴이 됐다.

지금 그 상황에 졸다가 전화를 받은 건가?

오시아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박수는 그제야 왜 호강한이 사색이 됐는지 눈치챘다.

자신의 구 소속 최고위와 현 소속 최고위가 함께 있는 자리에 통화를 받았으니.

그의 머릿속 사고는 이미 망가졌을 거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박수는 감사 인사는 해두기로 했다.

오시아 덕분에 문제없이 일이 해결됐으니 말이다.

―참고로 이거 빚이야.

빚.

박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불어 권승호에게는 속으로 사죄해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오시아와는 단단히 엮일 것 같다.

그걸로 전화는 마쳤다.

박수는 호강한의 앞주머니에 그의 휴대폰을 밀어 넣어줬다.

"호강한 소대장님,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겁니다. 그쵸?"

"예, 예, 그, 그렇죠."

박수의 웃음에 호강한도 억지로 따라 웃었다.

그래, 네가 웃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겠어.

"존댓말 좋네요. 앞으로 서로서로 존댓말 씁시다. 다른 소대원들한테도 마찬가지고요."

"예!"

호강한은 이제 박수의 말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

평생 군인으로서 살아왔기에 상관과 연결된 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박수는 그걸로 만족하고, 이만 넘어가기로 했다.

최소한 앞으로 그가 전미현과 박철웅에 관해 함부로 논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박수는 드디어 부대 복귀를 마쳤다.

호강한은 박수를 데려주곤 냉큼 떠났다.

'여가 시간이라 다들 엄청나게 떠들고 있네.'

박수 때 사건이 있었음에도 훈련소는 왁자지껄했다.

'하긴, 사고가 났다 한들 결국 남 일처럼 느껴지는 법이니.'

이들이 슬퍼하거나 침울해할 이유는 없다.

"박수 씨."

그러는 순간 박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박수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라나의 보디가드, 남궁준호.

그를 본 박수는 미소 짓곤 손을 들어 보였다.

"이야, 준호 씨, 오랜만입니다."

"그래봤자 이틀 정도입니다."

"훈련소에서 한식구처럼 지냈으니 이틀이면 크죠."

남궁준호와는 이번 일로 말을 조금 튼 기분이다.

함께 생사를 지나왔으니 전우애 같은 거라도 생긴 거겠지.

"그러고 보니 박수 씨, 돌아오시면 이라나 님이 저번 일로 대화할 게 있다고 전해 달라하였습니다."

박수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덤덤히 끄덕였다.

분명 이라나의 몸에 둘린 검은손 이야기겠지.

얼마 전 박철웅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박수는 이라나의 일도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해결하려면 우선 이놈의 훈련소 좀 나가야 한다는 건데.'

앞으로 훈련은 이주나 남았다.

바깥에서는 순식간에 가는 이주인데 어째 여기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 느리다.

'골치다. 골치야.'

앞으로 이라나가 이능을 쓰지 않도록 조언해야겠지.

'무엇보다.'

박수는 오늘 꿈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과연, 지금의 우리나라 헌터들 만으로 일본의 이매망량 괴이 집단을 막을 수 있을까.

여러모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도사 놈아, 네 상태나 신경 써라. 노부가 말했던 걸 잊었느냐? ]

그러고 보니 마기로 인해 시한부 인생이었지.

박수는 인생 한 번 단단히 꼬였다고 생각했다.

"오, 형님 복귀하셨습니까!"

그 순간 또 하나 더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박수가 큐피드로 이어준 커플 남은구다.

"그래, 잘 지냈어?"

"저야 멀쩡하죠. 미희랑도 잘되고 있고요."

그는 꿀이 떨어지는 얼굴로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아차 하며 표정을 바꾸더니 박수의 곁에 슥 붙었다.

"아, 형님 그러고 보니 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그 형님이랑 같은 소대인 서은설 있지 않습니까."

사이비, 서은설.

그녀의 이름이 대뜸 남은구의 입에서 나오자 박수가 의아함을 보였다.

"서은설 씨가 왜?"

"미희 말로는 돌아오고 나서 어째 원래 지내던 무리와 다투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지내던 무리라면."

서은설이 원래 지내는 무리라고 해봤자 하나다.

'천지주신교.'

분명 그녀와 함께 들어왔던 사이비 일원들일 거다.

"그냥 서은설이 형님 소대이니 좀 알려두면 어떨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덕분에 고맙다. 다음에 부식 나오는 거 내 것도 받아 가."

"하하, 뭐 그러실 거까지야. 잘 먹겠습니다!"

남은구는 싱글벙글 웃으며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수는 생각에 잠겼다.

서은설의 일.

뭔지 몰라도 이번에도 예감이 썩 좋지 않다.

이놈의 훈련소.

아주 바람 잘 날이 없다.

18화 치킨 모의전

훈련소 다음날.

"흐아암."

박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기다랗게 하품했다.

오늘은 모의 전투 훈련이라는데.

피곤하기 그지없다.

'대인 전인가.'

세계는 지금 전국적으로 각성자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괴현상과 괴이로 불안전한 틈을 타.

이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각성자 범죄자를 마주쳤을 때도 겁먹지 않게 하려고.

이번 모의 전투를 통해 대인 전에 익숙하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범죄자랑도 싸우게 생겼네.'

박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에 고개를 거꾸로 젖히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눈이 한쪽 없는 소년은 입꼬리가 반대로 올라가 있었다.

덕분에 거꾸로 보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놈아, 너지. 최근에 화장실에서 사람들 나자빠지게 한 게."

박수는 소년을 콱하니 노려봤다.

"괜히 혼나기 싫으면 얌전히 지내."

그러자 소년은 스르륵 천장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군대 아니랄까 봐 귀신 한번 많다.

이래서 군대는 질색이다.

화장실을 나온 박수는 곧장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흙바닥이 쭈욱 깔린 연병장에는 사람들이 제각기 소대별로 모여 있다.

박수는 냉큼 3소대에 합류했다.

"오셨습니까."

예전보다 살가워진 남궁준호가 박수를 반겼다.

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소대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은설과 눈이 마주쳤다.

어제 남은구에게 들은 게 있는 박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사이비 일원과 싸웠다는데 그걸 어떻게 언급할지 고민됐기 때문이다.

'그냥 신령님이 보여줬다고 할까.'

만능 무당 변명이다.

휙!

그 순간 서은설이 고개를 갑자기 홱하니 돌렸다.

그걸 본 박수가 눈을 깜빡였다.

평소 서은설과 나름 살갑게 지냈던 박수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다니.

아가 무당은 마음에 크게 상처 입었다.

또 나만 진심 친구였구나....

"무당."

서은설이 고개를 돌린 사이, 박수의 앞을 채운 건 검은 손들이었다.

박수는 이 검은 손의 출저를 잘 알고 있다.

예비생 중 유일한 8레벨 헌터, 이라나.

그녀가 박수의 앞에 섰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분에 박수는 검은손에 놀라지 않았다.

박수는 이라나에게 손을 슥 들어 보였다.

"이라나, 오랜만."

박수가 손을 들자 이라나가 손 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박수는 모든 검은 손들이 일제히 치솟는 광경을 보았다.

뭐야, 이거, 무서워.

박수는 모두 손바닥을 보여주는 검은 손들을 보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박수는 검은 손 사이로 삐져나온 이라나의 자그마한 손을 발견했다.

이라나가 손을 들어서 일제히 같이 손을 들어준 건가.

겸연쩍어진 박수는 그대로 손을 내려 이라나와 하이파이브 해줬다.

"예이."

그리고 검은 손들이 일제히 쭈뼛 서며 미친 듯이 흔들거렸다.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박수가 검은 손들을 두려워하는 사이, 이라나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는 이내 내렸다.

"무당, 저번에 이야기 한 거."

이라나가 화제를 돌리자 검은 손들이 겨우 진정했다.

박수는 거기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세한 건 당장 말하긴 그렇지만, 그건 내가 밖에 나가면 해결해 줄 수 있어."

꽤나 고생을 하게 되긴 하겠지만.

이라나에게 걸린 저주를 박수는 나름대로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이래 보여도 만신 할멈에게도 무당으로서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받았으니까.

성격 더러운 게 무당을 하기 좋은 체질이라고 칭찬도 자주 받았다.

"...정말?"

이라나는 살짝 주저하듯 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도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해본 모양이다.

'쉽지 않았겠지.'

이라나에게 쌓인 업의 저주는 무당인 박수가 보기에도 소름 돋기 그지없다.

당사자는 매일 같이 고통을 받고 있을 터.

함부로 건드렸다간 역살(逆殺)을 맞을 거 같아 섣불리 손대지 못했지만.

그녀를 옭아맨 저주가 그녀의 이능을 흡수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박철웅 씨 꼴 나게 절대 두지 않아.'

박수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박철웅의 목을 조르던 객귀, 김한수 상사가 떠올랐다.

박수는 그런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 한 말 유의해. 너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네 이능의 힘을 잡아먹고 있어."

"이능을 쓰지 말라는 거?"

"응, 자칫하면 나도 손댈 수 없게 되는 순간까지 갈 거야. 무엇보다."

박수는 말을 멈추고, 진지하게 이라나를 보았다.

"이라나, 네가 위험해."

이라나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것이 가장 크고 중대한 문제다.

박수가 조언하자 침묵하던 이라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라나는 말을 잘 듣는 똑똑한 아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아, 지금부터 소대별 헌터 모의전을 시작하겠다."

그러는 순간 헌터 중대장을 맡는 이가 확성기를 들고, 말을 전했다.

이번 모의전은 단체다.

범죄 집단과 마주쳤을 때의 대응을 위해 다수 전투에 익숙해지는 게 목적이라 한다.

"이번 전투의 목적은 아군을 확실히 구별하고 적과 싸우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중대장 헌터가 추가로 말을 이었다.

[ 제대로 된 말을 하는군. ]

천수화도 이에는 동감하는 반응이다.

그 말대로 전투에서 아군을 구별하고 싸우는 것은 중요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사상자 21%는 오사 사고였다지.'

아군이 아군을 쏜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지만 전쟁 같은 난장판에는 흔히 일어난다.

포탄 세례가 쏟아지는 곳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는 힘드니까.

그리고 그건 헌터 사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모의 전투에서 1등을 하는 소대에는 무려, 오늘 밤 치킨 부상이 주어질 예정이니, 다들 최선을 다하도록."

"와아!"

예비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쁨을 내비쳤다.

치킨이라는 말에 다들 걸신들린 듯 눈빛이 변했다.

이래서 훈련소가 무섭다.

사람을 가둬 두니까 평소 먹던 음식을 푸는 것만으로 저렇게 눈빛이 변하지 않나.

"저희 이깁시다."

그리고 거기에는 박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치킨은 못 참지.

"1소대, 2소대 모의 전투 시작!"

중대장의 시작과 함께 1소대와 2소대의 전투가 시작됐다.

예비생들이 각자의 이능을 펼쳤다.

그중에는 화력을 쏟아내는 이능도 존재했다.

"아악! 조준 좀 잘해! 나도 맞을 뻔했잖아!"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쏟아지는 화력에 휘말릴 뻔한 아군이 소리를 내질렀다.

헌터의 이능은 분명 강력하다.

그러나 이능은 괴이와 괴현상만을 노리지 않는다.

아군이라 할지언정 언제든 이능에 휘말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거리 화력 이능을 지닌 헌터들은 제일 먼저 아군이 휩쓸리지 않고.

이능을 발동하는 것부터 배우게 된다.

그리고 실전은 그게 생각 이상으로 더 어렵다.

1소대와 2소대의 전투는 엉망진창이었다.

이번 훈련이 있기 전에 개인전으로 사람과 싸우는 법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각성자라 한들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사람들.

당연히 사람을 공격하는데 꺼림칙함을 가지고 있다.

빠악!

하지만 주저하는 사람들과 다른 이들도 있다.

2소대원 한 명을 발차기로 기절시킨 저 남자가 그러했다.

듣기로는 아마추어 격투기 대회에서 성적을 낸 선수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타격 방식부터가 상당히 정교했다.

저걸 보면 확실히 헌터도 결국 타고난 자질이 중요한 것 같았다.

[ 아주 그냥, 오합지졸이군. ]

천수화의 눈에는 단 한 명도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희는 인원 한 명 적은데 어쩐답니까?"

그러던 중 박수는 문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박수의 말대로 3소대는 박철웅이 빠져 인원이 한 명 적다.

다들 나름 트라우마인지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오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그 순간 박수의 말에 대답한 건 3소대장 호강한이였다.

그는 박수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였다.

"애초에 3소대는 밸런스에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밸런스를 언급하자 박수는 살짝 우쭐거렸다.

이거, 참, 5레벨 괴이를 해치운 이 몸 때문인가?

물론 그건 천수화가 하긴 했지만 말이다.

"8레벨 소대원, 이라나가 있으니 말입니다."

8레벨, 헌터.

박수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 전에 오시아를 통해 겪었다.

이라나 또한 같은 8레벨 헌터인 만큼 후에는 그렇게 될 터.

당연히 호강한의 말대로 3소대는 이미 오버 균형이었다.

이리나가 이능만 한 번 발동 시켜도 끝이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호강한이 한가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이라나는 저주로 인해 이능을 쓰면 안 된다.

이는 조금 전에 박수가 직접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라나를 제외한 3명으로 싸우란 거지.

하물며 서은설은 감지계 이능을 가진 비전투 헌터다.

치킨 모의전 시작부터 3소대는 수적 열세에 처했다.

* * *

1소대와 2소대의 모의 전투는 1소대의 승리로 끝났다.

박수가 봤던 대로 1소대의 아마추어 격투가가 순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3소대, 4소대 준비."

박수와 3소대의 모의전이 시작됐다.

박수는 4소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3소대 4명과 4소대 5명.

수적은 3소대가 열세였지만, 4소대의 눈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박수는 그들의 긴장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눈치챘다.

'이쪽에는 이라나가 있으니까.'

다들 8레벨 헌터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본인의 이능 레벨을 안다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있다.

이라나는 예전부터 8레벨 이능을 갖춘 걸로 유명했다.

그러니 이라나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인원은 분명 우리가 적다.'

솔직하게 말해 전투에서 운영할 수 있는 인원은 남궁준호와 박수, 둘뿐.

그러나 상대는 이를 모른다.

'그리고 이게 바로 기회다.'

박수는 검을 꽉 쥐었다.

개여시에 이어 오시아까지 맞서본 박수다.

박수도 꽤나 실전 경험을 쌓았다.

아직 풋내나는 예비생 정도야 손쉬운 일이다.

다 해치워 주마!

[ 도사 놈아, 마기는 쓰지 마라. ]

"으익."

그 순간 기세를 끌어 올린 박수가 푹 꺾였다.

"...아, 그렇지."

시한부라는 걸 깜빡했다.

오시아 때는 경험 쌓으라고 둔 모양이지만.

고작 이런 훈련에서 마기를 썼다간 괜히 명만 앞당긴다.

그 말을 들은 박수는 훈련용 모조 검을 틀어쥐었다.

이쪽도 죽기는 싫으니 어쩔 수 없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로 할 뿐이다.

"박수 씨."

그 순간 남궁준호가 박수를 불러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작전은 이미 마쳤다.

"시작!"

남은 것은 이행하는 것뿐.

헌터 중대장이 시작을 알리자마자 박수와 남궁준호가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양쪽으로 흩어지며 달렸다.

4소대가 순간 당황했다.

5명이 오롯이 모여 있는데 둘 다 양쪽으로 흩어져서 뛰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4소대는 곧 그들의 작전을 눈치챘다.

"진짜는 전방이야!"

머리를 땋은 4소대원 한 명이 소리쳤다.

그 말에 4소대원들이 일제히 앞을 보았다.

그들의 전방.

이라나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들에게 손을 겨누고 있었다.

이라나는 무려 8레벨 이능을 갖춘 이.

하물며 그녀의 이능은 광역 화력이 가능한 전자기력 조작이다.

이라나의 이능을 원활히 쏘게 하기 위해.

두 사람은 일부러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준 것이다.

"모두 흩어져!"

4소대원은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흩어졌다.

이라나의 이능을 막을 방법은 그들에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흩어진 그 순간.

그들의 앞.

한 남자가 도착했다.

박수다.

4소대원은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도달한 박수를 보고 놀랐다.

그와는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한순간에 코앞까지 도착한 것이다.

4소대원 한 명이 급히 박수를 향해 훈련용 도끼를 거칠게 휘둘렀다.

육체 3레벨인 그의 도끼는 박수를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으랴아!"

그가 도끼를 휘두른 그 순간.

그는 어느새 자신의 시야에서 박수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어, 어?"

그가 서둘러 주변을 살피자 곧이어 그는 도끼가 무거워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뒤늦게 도끼를 보자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그의 도끼의 옆면 위.

박수가 도약 자세로 안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묘기에 가까운 짓을 벌인 박수를 보고 그가 경악한 순간.

콰앙!

박수가 그의 도끼를 박참과 동시에 탄환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가 쏘아진 방향에는 아까 전 머리를 땋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에게로 쏘아진 박수를 보고 당황했다.

그러고는 급히 자기 이능을 발동시켰다.

그녀의 이능은 4레벨 파이로키네시스(Pyrokinesis).

4소대 중 유일하게 화력전이 가능한 이였다.

그녀의 화염이 일렁이며 그녀의 앞으로 치솟아 오른 그 순간.

박수는 치솟아 오르는 화염을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그녀의 입이 쩌억 벌려졌다.

이제 막 피어오른 불꽃이라 해도 충분히 화상을 입을 수 있다.

하물며 사람은 타고나기를 불을 무서워한다.

그런데 그걸 정면 돌파로 뚫을 생각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경악하며 굳어서는 안 됐다.

이능 레벨에 비해 육체 레벨이 낮은 그녀다.

순간의 육체의 굳음은 곧바로 패착으로 이어졌다.

콱!

박수의 손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낚아챘다.

땋은 머리가 허공을 휘날린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박수는 도약한 자세 그대로 그녀를 연병장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박수가 기절한 4소대원을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수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 아래, 박수의 눈빛이 푸르게 빛났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는 나머지 4소대원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훈련용 모조 검을 빙글 돌린 채 박수가 고했다.

"다음."

박수무당이 날뛸 시간이다.

19화 모의전 여포 무당

3소대와 4소대의 모의 전투.

그 속에서 박수는 그야말로 날뛰었다.

"왜, 왜 안 맞는 건데!"

박수를 상대로 검을 내지르던 4소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박수와 교차하고 몇 분.

그는 박수를 향해 맹렬히 검을 휘둘렀지만, 박수는 모든 검을 피했다.

그것도 큰 동작 없이 가볍게 발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한 것이다.

[ 월광천하의 보법은 바닥에 원을 그리듯 움직이는 거다.

이는 공간을 선점하는 월광천하의 기본 묘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

박수는 실시간으로 천수화의 이론을 주입 당했다.

박수의 육체는 이능을 통해 천수화의 월광천하를 익혔다.

그러나 육체와는 별개로 박수의 머리에는 월광천하의 이론이 없다.

아무리 육체가 월광천하의 묘리를 깨우치고 있다고 한들.

그걸 실행시킬 머리가 지시하지 못한다면 월광천하의 본래 힘을 끌어낼 수 없다.

[ 월광천하로 그린 보법의 안, 그곳은 네 공간이다. 어떤 이의 침입도 허용치 않는 너만의 공간. ]

그러니 박수는 이 기회에 천수화의 강의를 받았다.

그리고 그 강의는 무척이나 효과적이다.

박수가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박수는 무섭도록 강해졌다.

이미 육체가 모든 기본기를 흡수한 상태이니.

머리의 이론과 맞아떨어지자 그 효과를 팍팍 내기 시작한 것이다.

천수화는 그런 박수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사멸한 세계의 비기.

세계가 멸망하고, 천수화의 명이 끊기며 월광천하는 영원히 사라진 비기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세계의 일원이.

지금 월광천하의 기본 묘리를 익혀 나가며 강해지고 있다.

이는 천수화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평생을 제자 하나 똑바로 두지 못한 나였거늘.'

천수화는 언제나 고고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혼자 다니는 것을 고수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에게 배신당한 이후 그 복수를 마쳤을 때.

그녀는 천애고독을 택했으니까.

동년배로 불리던 이들이 나이가 들어 제자를 들이고, 가문을 일으켰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천수화는 별다른 흥미를 품지 못했다.

어차피 살다가 떠나갈 세상.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

천수화가 살아간 역천 세계는 멸문으로 멸망했다.

천수화는 아직도 지난날을 후회한다.

배신한 가문은 그렇다고 하여도.

지난날, 연을 쌓아온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음에도.

천수화는 그들을 외면하고, 돕지 않았다.

세상을 등한시했던 그녀는 괴이와 괴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다.

그녀는 짐승들도 살아가기를 꺼리는 안개 숲에서 은거하고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괴이, 괴현상.

어차피 자기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괴이와 괴현상이 기어코 안개 숲까지 들이닥쳤을 때.

놈들을 박살 내고, 나온 천수화의 눈에 비친 건 무너져가는 세상이었다.

그때 돼서 자신의 무지함과 치기 어린 생각을 깨달았다.

세상이 무너져 가는데 홀로 평생토록 검을 휘둘러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이 무기를 다루는 것은 자신과 자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세상이야말로 자신을 품고 있던 가족이 아니던가.

'내가 검을 다시 들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세상은 이미 제 수명이 끝나 있었다.

결국, 그녀는 홀로 무너져가는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아야 했다.

천애고독(天涯孤獨).

자신이 택한 삶에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한이라는 게 뭔지.

그녀는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영혼이 되어 멸문에 붙었다.

그렇게 찾아온 세상.

지금 그녀의 눈앞.

고작해야 20대 초반의 사내가 월광천하를 휘두르고 있었다.

'역천 세계에서 수많은 녀석이 제자로 들어오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던 나이건만.'

어째선가 연고도 없는 세계에서 연고도 없는 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귀신인 자신을 볼 수 있는 이.

그리고 무려 빙의를 할 수 있는 이.

과연, 정말로 그것 때문에 이 남자를 돕고 있는 걸까.

아니다.

천수화는 보았다.

세계를 등한시했던 자신과 달리.

월광천하를 이용해 다른 이를 구하는 박수를 말이다.

가문의 배신을 복수하기 위해 갈고 닦아 만들었던 월광천하다.

그런 월광천하가 누군가를 지킬 수 있었다.

개여시를 박살 내던 박수를 본 그날.

천수화가 멍하니 박수를 보았던 이유도 그 이유다.

그리고 그날 이후, 천수화는 어딘가 바뀌었다.

그녀는 박수에게 월광천하를 전수하고 있었다.

박수의 월광천하는 사람을 구하는 길이다.

그건 패도의 길을 걸었던 천수화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월광천하가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

이는 어쩌면 천수화도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를 길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왜 다른 녀석들이 그토록 제자를 남기려 했는지 알겠군.'

스승은 자신이 나아가는 길과는 또 다른 길을 제자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연고도 없는 세계에 뿌리내린 월광천하라.'

이 세계에도 달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달 아래, 천하를 쥐어야 하는 것은 역시 월광천하여야 하지 않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 한을 풀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지.'

월광천하가 보여 줄 수 있는 또 다른 길.

그 길의 끝을 보게 된다면.

천수화의 안에 쌓인 깊디깊은 한도 풀릴지 모른다.

「내가 당신이 지닌 한을 풀어 줄게.」

박수가 천수화에게 했던 말이다.

천수화가 박수를 다시 보았다.

'그것을 알고 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해낸다면 그는 확실히 용한 도사라 칭할 만하다.

'아니, 이 세계 말로 무당이랬나.'

박수는 모를 거다.

이 천수화가 무려 인정해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역천 세계의 정점.

천신(天神), 천수화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천수화, 나 좀 치는데!"

[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아직 멀었다. 똑바로 해라. ]

"이 옙!"

박수가 대답하며 또 다음 상대를 향해 도약했다.

천수화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가벼워 보이는 태도는 뜯어고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 * *

3소대와 4소대의 전투는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분대장 역할을 하던 4소대원 여성이 첫 일격에 쓰러지고 난 후.

이미 그 시점에서 4소대의 전투 의지는 꺾여 있었다.

그 결과, 박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거기에 남궁준호도 경호원답게 수월하게 한 명을 제압한 결과.

4소대는 전멸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보던 현역 소대장 헌터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다.

"박수, 저 친구 잘 싸우네요."

"어, 1소대장님 몰랐어요? 저번 사건에서 B급 괴이를 혼자 잡았다잖아요."

그때 야간 근무 후 근무 취침이라 정확하게 듣지 못했던 1소대장 헌터는 깜짝 놀랐다.

"네? 저야 3소대장님이 버티다가 다른 헌터들이 합류한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B등급 괴이를 단독으로 잡다니.

예비생이 지닐만한 무력 수준이 아니다.

"대체 레벨이 몇이죠? 높은 레벨을 지닌 예비생은 이라나 예비생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게 말이죠."

이야기해주던 6소대장 헌터도 모호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5소대장 헌터가 말하였다.

"첫 측정 당시, 이능, 육체 둘 다 1레벨이요."

"네? 그게 말이 돼요? 1레벨 헌터가 어떻게 B등급 괴이를 단독으로 쓰러트려요."

"그래서 위에서 난리가 났어요. 측정 방식이 잘못됐다던가. 말이 많던데요."

둘 다 1레벨이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능 쪽은 몰라도 말이죠. 적어도 오늘을 보면 육체 쪽은 확실히 알겠네요."

1소대장 헌터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조금 전 보여 준 전투.

박수의 육체 레벨은 절대로 1레벨이 아니다.

저건 반드시 재측정이 필요했다.

"애초에 대체 원래 뭐하던 사람이래요?"

1소대장이 질문하자 6소대장 헌터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결국 5소대장이 대답했다.

"무당이랍니다."

헌터들은 얼빠진 표정을 했다.

전투와는 도무지 관련 없어 보이는 직종이었으니까.

그 시각, 무당 박수는 승리에 취했다.

5대 3이라는 숫자적 열세를 이렇게 손쉽게 타파하다니.

"나 좀 강할지도?"

[ 고작 기본 한 것 정도로 우쭐거리지 마라. ]

그러자 천수화가 바로 초를 쳤다.

박수는 살짝 침울해졌다.

그러자 천수화가 박수를 잠시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 ...햇병아리가 마기 없이 그 정도 했으니 칭찬해주마. ]

박수는 바로 가슴을 들어 올리고, 어깨를 촥하니 폈다.

"역시 사람은 칭찬 나무로 키워야지!"

[ 쯧, 이래서 칭찬을 안 하려 했거늘. ]

박수가 까불거리자 천수화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박수 씨, 고생했습니다."

"오, 준호 씨도 고생 많았어요."

한 명을 훌륭하게 쓰러트린 준호다.

박수에 묻혀서 그렇지 그라면 아마 나머지 인원들도 손쉽게 정리했으리라.

괜히 UC그룹 회장 손녀딸 경호원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최근 훈련 의지가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개여시 당시 아무것도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경험을 통해 나아간다.'

박수는 이를 상기하며 미소 지었다.

"고생."

그러는 순간 합류한 이라나도 고생했다는 말을 해왔다.

예전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그녀였는데.

그녀가 많이 큰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지는 박수였다.

"서은설 씨도 고생했어요."

그리고 박수는 서은설 쪽에도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는 박수 쪽을 힐끗 보더니 이내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계속 저 상태인가.

박수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서은설은 박수의 얼굴을 보고 움찔거리더니 이내 머뭇거리다 말았다.

아쉽게도 표정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다.

"으아아아! 아까 입은 화상 때문에 아파 죽겠네!"

박수가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4소대를 수습하던 군의관들이 놀라 이쪽을 보았다.

박수는 아까 파이로키네시스가 일으킨 불의 벽을 정면 돌파했다.

화상을 입어도 당연히 이상한 것 없었다.

정작, 박수는 뚫기 직전 이능을 둘렀기에 별로 큰 상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화상을 입기에 충분했다.

"예비생,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군의관이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약 좀 받아야 할 거 같아요. 아까 화상 입어서 아프네요."

"그렇군요. 확인하고 처치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시죠."

"아, 그리고 서은설 예비생도 아까 이능을 너무 써서 두통이 있다고 해서요. 같이 가야 할 거 같습니다."

"네?"

서은설이 놀란 얼굴로 박수를 돌아봤다.

설마하니 이렇게 막무가내로 데려가려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군의관이 서은설을 돌아봤다.

그러자 서은설이 진실을 말하려 했다.

"저는...."

"3소대장님!"

박수는 서은설의 말을 끊으며 3소대장 호강한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호강한이 냉큼 여기로 뛰어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서은설 예비생이 두통이 있다고 해서요. 잠깐 군의관님과 갔다 와도 괜찮죠?"

"물론입니다! 소대원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호강한은 사전에 있는 것처럼 적절히 대답했다.

역시, 권력의 힘이란 훌륭하다.

권력 최고.

박수가 서은설을 돌아보며 고갯짓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가요."

박수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이다.

서은설의 거절을 무너뜨린 박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누군가.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갈색 파마 머리칼에 인자한 얼굴을 하며 웃고 있는 중년 여성.

아닌 척하지만, 그녀는 명백히 서은설과 박수를 주시 중이었다.

'천지주신교 주교 중 하나.'

서은설에게 어떤 말을 불어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당을 얕봤다.

'누구든 작은 무당을 건드리면 큰일 나는 거예요.'

그것도 무려 대한민국 최고 전력 중 하나를 빽으로 둔 이 무당을 말이다.

'게다가 작은 무당이 실패해도 나에게는 큰 오시아 누님이 있다!'

박수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 자리가 사람을 망친다더니. ]

천수화는 박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거, 제자로 잘못 뒀다고 말이다.

20화 사이비도 설득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