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데스위시 (3)
메인 시나리오에 얽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범상한 인간이 없기 마련이고, 그중에서 좋은 특성만 가지고 있기는 힘든 일이다.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인간들이 꽤 있기 마련이고, 그중 순위권을 다투는 인간 중 하나가 바로 이 녀석이다.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시나리오 안에서 노엘과 버금가는 비중을 가진 '주요 인물'.
기억나는 특성이라면.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자기 파괴적에, 제멋대로인 인간.
그런 주제에, 타고난 힘은 끔찍할 정도로 강력하지.
상황이 '어긋났을 때'의 부정적인 파급력이 안 좋을 쪽으로 심각해질 요소들밖에 없다 해야 할 것이다.
"...."
게임 안의 스토리가 흘러가는 방향을 생각한다면 결국 모든 주연들은 손에 피를 묻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루트를 타더라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의 수가 많았던 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겠지.
딱히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성격은 아니고, 무고한 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걸 즐기는 개차반도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부분의 '스위치'를 누른다고 해야 하나. 본인의 역린을 건드린다면, 이 소녀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대량 학살을 저지를 그런 인간이다.
겉모습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한가하게 거리를 거니는 부잣집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얌전해 보이는 시한폭탄이라고 해야 할까.
!! Sub Quest !!
▶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과 접촉합니다.
▶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세요.
▶ 현재 상황을 순조롭게 대처 시, 당신에 대한 대상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과 얽힌 상태에서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란다.
마치 평화롭지 않은 일이 반드시 터질 거라는 것처럼.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이미 이런 게 떠오른 이상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일 수도.'
잘만 활용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호감도를 대폭 올릴 수 있다는 건, 곧 스킬 복사권이 많이 떨어진다는 소리와 같지 않은가.
"나, 심심한데."
아무 말 안 하고 서로 얌전히 걷기를 한참.
문득, 소녀한테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뭐라도 할 거 없어?"
"...말동무가 되어달라곤 들었던 것 같은데. 할 말이 있던 것 아니었나."
"그런 거 없는데?"
"...."
"진짜로 심심해서 부른 게 전부야. 재밌는 게 코앞이었는데 방해받았잖아?"
싱글싱글 웃으면서 돌아오는 대답에, 에이든이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물어볼 거야 많지 않나.
방금 어째서 끼어들었는지, 자신의 정체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런 거만 해도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화제 아니던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 줄래?"
"...."
"당신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 몇 개가 있는데, 들어볼-"
"-아무거나 상관없어?"
말을 툭 자르고 들어오는 에이든의 모습에 카티야가 낄낄거렸다.
어딜 어떻게 봐도 왕족에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 인간에 대한 배경 지식을 그러모아 보면 딱히 그런 걸 신경 쓰는 인간도 아니다.
뭐든 전부 다 직설적인 인간이다. 굳이 한번 꼬아 생각해 볼 필요는 없지.
"뭐라도 괜찮은데."
"할 일이 있으니까, 따라올 거면 따라오든가."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앞서 걸음을 옮기자, 그 목적지를 확인한 카티야가 코웃음을 흘렸다.
"총포상?"
제도 뒷골목이라면 당연히 뭐든 구할 수 있는 곳이고, 까다로운 소지 자격증이 필요한 총도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이런 게 의미가 있는 거야?"
"필요하거든."
"왜?"
"반대로, 이유가 왜 궁금한데?"
"당신 이능 쓸 수 있잖아."
"...."
그거 니가 어떻게 아는데?
그런 의미를 담아 카티야를 바라보자, 그쪽이 고개를 쓱 비틀며 답했다.
멋쩍은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런 건 딱 보면 아는 거라서."
...딱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게 참 많기도 하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그에게 총이 왜 필요하냐고 설명하면, 좀 복잡하긴 하다.
카티야의 말대로 이능을 다룰 수 있는 인간들은 굳이 총기를 다룰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에이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특성'을 생각하면, 총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도구는 또 없다.
-이능은 이런 식으로 형태를 갖추면 훨씬 더 정교해지죠. 이렇게 신체에 담으셔도 되지만, 무기에 담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이전에 노엘에게서 그런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능은 그 자체만으로 다뤄도 괜찮지만, 무기에 담아서 사용하면 그 효율이 배가 된다. 아주 간단한 개념이지.
그럼, 이능 '여러 개'를 다루는 에이든의 경우에는 선택이 조금 까다로워진다.
여러 개의 부품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아무런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그가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전적인 창검 같은 냉병기는 선택지에 못 들어간다. 에이든은 그런 물건과는 통 연이 없는 인간이니까.
자연스럽게, 가장 적합한 선택지도 이거고.
총기. 부품 여러 개로 이루어진 간편한 무기.
"어서옵쇼-"
총포상 주인은 들어온 손님에게 싹싹한 인사를 건네는 붙임성 좋은 노인이었다.
에이든이 뒤집어쓰고 있는 변장이 어느 정도로 험악한지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접객 태도는 만점 수준이다.
"...초심자도 다룰 수 있는 권총 있습니까."
"예이. 이쪽으로 찾아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목소리와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구 사항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싹싹하게 대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건 사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그에 반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던 카티야는 뭐가 불만인지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무기는 사람 죽이라고 있는 거잖아. 여기 있는 것들은 호신용인데?"
...부끄럽게도, 에이든이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제대로 전달할 새도 없이, 카티야는 그런 불만을 행동으로 관철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인장- 카트리지는?"
"아, 서랍에 보시면 있습니다."
그 말에 휘파람을 불며 서랍장을 뒤적거린 카티야가 이내 진열대에 놓여있는 권총에 알맞은 탄환들을 꺼내 들었다.
여기까지는 별로 이상한 풍경도 아니다.
주인도, 에이든도 별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 만큼 정상적인 상황.
"무기를 사용해 보시려면 뒷마당으로-"
문제는.
그런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카티야가 장전된 총을 겨누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기 머리에.
"잠깐, 손님-!"
당황한 가게 주인이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귀를 찢어놓는 것 같은 총성이 가게 안으로 울려퍼졌다.
"...."
탄피가 바닥에 구르는 소리와 함께 에이든이 입을 쩍 벌렸다.
카티야의 몸 근처로는, 총을 발사하자마자 어느 순간 확 피어오른 신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일전에 다룬 신성과 똑같은 모습이다. 사용자의 위험을 감지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는 화염.
초고온의 신성에 닿은 탄환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게 분명했다.
"-최대까지 억눌러도 이런 식으로 튀어나온다니까. 짜증 나게."
그렇게 말한 카티야가 피식 웃으면서 초연이 피어오르는 총을 다시 진열대에 툭 올려놓았다.
이어서.
진열대를 쭉 가로지르며, 그쪽에 있는 총을 하나씩 들어 비슷한 짓을 행한다.
집어들고, 장전하고, 자신에 머리에 대고 쏜다.
마치, 비교라도 해보는 것처럼.
에이든과 가게 주인이 동시에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그 짓거리를 바라보는 사이에도, 발사된 탄환이 그녀의 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신성에 막혀 녹아버리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 그렇지."
물론, 진열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더 대구경의 화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자연스레 카티야도 슬슬 권총이 아니라 핸드 캐논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물건을 집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고.
"이건 좀 느낌이 좋네."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리 권총탄 정도는 쉽게 막아내던 신성도, 이런 대구경의 탄자를 막아내는 건 무리였는지 곧바로 관통당한다.
하지만.
"...."
에이든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얼굴로 눈앞에서 이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사람 머리가 날아간 상태로도.
카티야는, 태연스럽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탄환에 관통되어 짓뭉개진 얼굴은 마치 진흙을 뭉쳐서 만든 인형처럼 뭉그러져 저들끼리 들러붙는다.
또한 그 틈새 사이사이에 깃드는 것은, 방금 전에 그가 위험에 처하자 자동으로 흘러나오던 것과 동일한 '신성'이다.
마치 이걸 다루는 자에겐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피 한 방울 흘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런 외상을,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재생'시킨다.
"이 정도는 되어야 쓸만한 화력. 여기서부터 사는 게 나을걸?"
거기에, 당사자는.
자기 머리가 총알에 터져나갔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표정이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마치.
정말로.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것처럼.
"내가 최대한으로 억누른 신성이 얇은 철판 몇 개 덧댄 정도니까. 그 정도는 뚫을 수 있어야 전투에서 쓸만하지 않겠어?"
에이든이 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권총을 자신에게 내미는 카티야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무통(無痛).
그리고 그 단계를 한참이나 벗어난, 무감(無感).
카티야 하인켈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성을 부릴 수 있는 대가로 그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자동으로' 지워버리는 신성 덕분에, 외부 자극이 모조리 차단되어 버리니까.
'-직접 보니까, 이거 완전히-'
괴물 아닌가.
본인 입으로 최대까지 이능을 억눌렀다고 했음에도, 사실상 불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엘과 비견될 정도로 메인 스토리에서 비중을 먹는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그런 감상에 격렬하게 동의하는 인간이 한 명 더 있는 것도 분명했다.
카운터에서 들어오는 철컥- 하는 소리에 에이든과 카티야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주인장이 장전된 총을 카티야에게 겨누고 있었다.
"내 가게에서 나가."
"...보기에 좀 흉하긴 하지? 쏜 탄환 값은 다 쳐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카티야의 눈앞으로 빛이 번쩍였다.
상점 주인이 발사한 탄환을 신성이 지워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가고 했잖아, 이 괴물 새끼가...!"
긴장감이 잔뜩 깃든 목소리가 애써 흘러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본인 또한 이런 위협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겠지. 미친 짓거리를 태연하게 하는 카티야의 모습에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저지르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본 카티야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확실히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는데."
겉보기에는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실없는 웃음이다.
하지만, 사람 눈치 살피는 일에 능한 에이든은 그 차이를 바로 감별해 낼 수 있었다.
그 표정 아래에 깃든 것은,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살의다.
이 소녀는, 타인의 '적의'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짜고짜 총알부터 처박는 건, 좀 기분 나쁘네?"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는 카티야를 보자마자.
-찰칵, 하고.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스위치가 움직였다. 극한 상황에 올 때마다 울리는 그만의 경보기가.
이전에 노엘이 그에게 검을 휘두르기 직전일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 사람은, 대단히 험한 꼴을 당한다.
!! Sub Quest !!
▶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과 접촉합니다.
▶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세요.
▶ 현재 상황을 순조롭게 대처 시, 당신에 대한 대상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그에게 있어 그리 달가운 전개는 절대 아니다.
에이든이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벌써 두 번째다. 이 빌어먹을 왕녀를 만난 뒤에 그가 나서지 않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그리고.
적어도.
그는 그런 걸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특히나, 자신에게 그런 걸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는.
◈ 운명의 길쌈꾼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
- 유대: 2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
◆ 최초의 서원
늘 스킬을 복사해 올 때면 보던 창을 급히 조작한다. 대충 어떤 것들이 있는 진 이전에 한 번 살펴본 적이 있어서 고르기도 쉬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카티야가 미친 짓을 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본인의 정신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밖에 없다. 물리적으로는 저지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변덕스럽고,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의 화를 푸는 방법이라면.
대상의 '흥미'를 끄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져올 스킬도 정해져 있고.
- System Message
▶ '성체(聖體)' 스킬을 복사해옵니다!
에이든이 창을 조작하는 사이,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티야의 몸 주변으로 무채색의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글거리는 신성이 이내 형태를 갖춰 칼날의 형태로 벼려지고,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를 정확하게 조준한다.
지체 없이, 발사.
상점 주인이 새파랗다 못해 이제 보라색으로 변했다.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것 같은 모습이다.
"...?"
그리고.
카티야의 눈썹이 주욱 휘었다.
두 사람의 사이로 몸을 날리듯이 던진 에이든이 끼어드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눈동자가 이내 곧바로 휘둥그레졌다.
아마.
그렇게 끼어든 에이든이 내민 팔이 그 화염의 칼날에 관통당하고.
"아프잖아-!"
그렇게 비명을 흘리는 그의 팔이, 밝게 타오르는 신성에 의해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그 광경은, 방금 전.
터진 머리를 재생시키는 카티야 '본인'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
아파.
아프다...!
◆ 성체(聖體)
최초의 서원을 기반으로 육체를 수복합니다. 서원 의식을 통해 위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 선행 스킬로 '최초의 서원'을 보유해야 합니다!
◎ '최초의 서원' 스킬에 고유 특질이 부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감각 차단' 특성이 삭제됩니다.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 가벼운 상처만 회복이 가능합니다!
이것 덕분에 팔은 멀쩡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에이든이 팔을 잡고 몸을 정신없이 뒤틀었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증 중 제일 심한 건 작열통이다. 팔 한쪽을 타오르는 칼날에 통째로 관통당하는 격통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단 소리지.
하지만.
"...."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카티야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대, 있을 리가 없는 걸 보는 것처럼.
"아저씨...!
카티야가 멍하니 굳어있는 사이, 에이든이 카운터를 향해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빨리 도망가...! 씨, 개아프네, 진짜...!"
에이든의 말을 알아들은 주인장이 곧바로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다행히, 이런 짓을 한 보람 정도는 확실하게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빠져나가는 주인장의 모습에 카티야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으니까.
"-나랑 똑같잖아."
그 볼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늘 싱글거리는 얼굴이 지금만큼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이봐. 에이든 씨. 대답해 봐. 그거 '내' 신성이었는데?"
아직 격통에 눈물을 찔끔 빼던 에이든이, 멍하니 카티야를 돌아보았다.
"에이든 씨라고?"
"그럼 그깟 변장에 속을 줄 알았어? 그보다, 대답해. 방금 그거 대체 뭐야?"
...그럼 애초에 처음부터 그인 걸 다 알면서 접근했다는 것 아닌가.
어쩐지 그에 대해 이것저것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했고, 우연히 마주치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인물이란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쪽에 대해 뭐라고 더 묻는 대신에 속으로 다시 한숨만 내쉬었다.
어차피,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맞지."
거짓말을 해 봐야 의미가 없다.
상대방도 바보가 아니고, 이런 걸 속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속여야 할 건 '다른 부분'이다.
"나랑 똑같다고."
"보면 알 것 아니야."
"...."
그런 말을 들은 카티야의 얼굴이 더욱 괴상해졌다.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의 '흥분'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고통을 느끼냐'고?"
"...."
카티야의 동작이 딱 멈췄다. 정곡을 찔린 것처럼 그 눈망울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에이든은 이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머리를 쏘고 다니는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무통을 넘어서 무감이라는 것은, 타고난 자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수준의 저주다.
아무런 자극 없이, 텅 빈 것처럼,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을 계속, 계속 지속하는 짓이니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뭔가를 '느껴보고' 싶어서 그 기행을 반복하는 것이렷다.
그런 점에서.
이 소녀가 방금 전에 경악한 진짜 이유는, 에이든이 자신의 능력을 똑같이 써서도 있겠지만.
그런 능력을 들고도,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고 있단 점에 좀 더 역점이 쏠려있을 것이다.
그러니.
"알려줄까?"
"...."
카티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약점을 깊숙하게 찔린 게 틀림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에이든의 머릿속으로는 아직도 스위치가 찰칵거리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터졌고, 해결도 임기응변에 가깝게 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한 가지를 더 붙여도 괜찮을 시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득 볼 수 있는 건 다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알고 싶으면."
그런 면에서, 본업에 충실할 시간이다.
사기.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리고, 그걸 본인의 이득으로 돌리는 것.
- System Message
▶ 서브 퀘스트를 슬기롭게 대처합니다.
▶ 대상 '카티야 하인켈'의 관심도가 증가합니다.
▶ 유대 단계가 2단계에서 3단계로 격상합니다.
▶ 스킬 복사 횟수가 1회 추가됩니다!
▶ 메인 퀘스트에 관련 내용이 추가됩니다!
"...."
에이든이 그렇게 떠오르는 창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이득에 대한 피드백이 직관적인 것 또한 확실했다.
11화. 법력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제1막, < 제도 균열 >
- 시나리오의 중요 인물들과 접촉 빈도가 충분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 곧 시나리오에 당신의 존재가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당신의 거취에 따라 시나리오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2)
-
여전히, 볼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는 창이다.
에이든이 우울한 표정으로 그런 문장을 쭉 훑어보았다.
가장 마지막에 붙어있는 창에서 특히 그런 느낌이 더욱 극대화되고 있었다.
◈ 인생은 아름다워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이 당신에게서 애타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2)
...아니, 뭐.
따지고 보면 애초에 그쪽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한 짓이긴 한데, 이렇게 아예 퀘스트 창에 등재까지 되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 묘하다.
'서브 퀘스트라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건 따로 서브 퀘스트라고 뜨고, 메인 시나리오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만 따로 퀘스트 창에 등재되는 방식인 것 같은데.
시작은 서브로 끊은 주제에 왜 또 여기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음에 만날 약속 정도는 있지만.'
당장 이틀 뒤에 그 녀석을 불러낸 게 에이든 본인이다. 아픔을 느끼는 법을 알게 해주겠다면서.
평소라면 절대로 안 할 짓이다. 카티야가 통각을 느끼는 데 필요한 짓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론상 그쪽이 방출하는 모든 신성을 전부 뛰어넘는 위력의 일격을 때려 넣을 수 있으면 그게 가능하긴 하다.
말이야 쉽지.
'힘을 최대로 억눌러도 불사인 녀석인데?'
그가 속으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정도의 신성을 타고난 녀석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당장 그게 가능할 것 같은 녀석은 근처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 노엘을 포함해서.
둘이 전투를 한다면 용호상박이겠지만, 출력에 한해서라면 아마 둘 다 엇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녀를 '압도'하긴 힘들겠지.
모든 신성을 다 뚫고 뭔가를 '느끼게' 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단 소리다.
그리고 그녀가 불가능하다면, 아무도 못 한다는 소리고.
그러니까.
한 놈만 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결국, 모든 건 그 녀석으로 귀결된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구원자' 나으리.
무슨 으리으리한 말로 수식어를 붙여도 전부 어울릴 인간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명칭은 그거다.
대륙 전체를 뒤덮을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결국 세계를 구하고 말 이 세계 전체의 중심.
인류의 구원자. 세계의 수호자. 악의 대칭점.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카티야가 바라는 짓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카티야를 만나자고 부른 이유도 녀석이 등장할 이틀 뒤의 이벤트에 같이 덤터기 시키기 위함이다. 그런 녀석을 본다면 자신에 대한 흥미도 금방 없어질 테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지.'
그 녀석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보증은 아직 없지만.
그럼에도 그 주인공이란 녀석이 없다면 이 세계는 파멸이 예정된 세계다. 애초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
주인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건 그거지만.'
그리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는.
그도 아무튼 메인 시나리오가 굴러갈 자리에 있어야 하긴 한다는 거다. 분명히 누군가의 피가 흐르고 폭력이 날아다닐 현장에.
결국 노엘이든 카티야든 그쪽에 털기 위해서는 그가 행동에 나서야 하니까.
그렇다면, 호신 수단은 필수적이다.
"음...."
에이든이 총포상에서 가져온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클래식한 리볼버.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가 탄환을 쳐서 발사시키는.
그가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이내 이능을 꺼내 든다.
아무튼, 황제와 두나단이 그에게 당부한 보안을 지키라는 말은 그도 대단히 유념하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다루는 게 익숙하진 않았지만, 이제 이능을 꺼내는 것 정도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기, 두 번째로 신성.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색 연무와 무채색의 불꽃이 곧바로 그의 몸 근처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첫 놈은 얌전하게 주변을 떠다니지만, 신성의 경우는 자신을 불러줘서 고맙다는 듯 불꽃의 혀를 날름거리며 공중에서 똬리를 틀었다.
마치 주인을 오랜만에 만난 강아지 같다....
'...자의식이라도 있는 것 같네.'
그가 실소를 흘렸다.
아무튼, 당장은 그의 말에 잘 따라줄 것 같아 다행이다.
두 개의 이능을 각각, 총에 있는 부품에 하나씩 부여하려고 시도해 본다. 이전에 노엘이 하는 걸 본 적이 있는 덕분에 흉내는 낼 수 있었다.
-System Message
▶ '리볼버'에 이능을 부여합니다.
▶ '순백의 심장'과 '최초의 서원'이 결합되지 않고 각 부품에 부여됩니다.
방아쇠에 담기는 첫 번째 기.
공이에 담기는 두 번째 신성.
'담기긴... 담기네.'
이능으로 코팅하듯 부품들을 감싸자, 그 부분의 겉면에 은은하게 담긴 기와 신성이 보인다.
이렇게만 보면 어려울 게 전혀 없지만, 곧바로 이상한 창이 에이든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System Message
▶ 고유 스킬 '전능'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 '이능 부여' 과정에 사용자만의 고유 특성이 부여됩니다.
▶ 위력은 늘어나지만 조건이 부여됩니다!
-System Message
▶ 대상 무기를 '전능' 스킬의 매개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이능의 숫자는 총 3개입니다.
▶ 현재 2개가 부여되었습니다.
▶ 제 위력을 온전히 내지 못합니다!
에이든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마지막에 적혀 있는 내용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으니까.
'...이런 거 원래 있었나?'
게임 안에서 전능이란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 확인할 길도 없다.
에이든이 지끈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무기에 이능을 부여하는 건 전투에 있어 거의 기초나 다름없는 짓이다. 괜히 노엘이 그에게 세세하게 가르쳐 준 게 아니지.
근데 왜 또 에이든 본인만 다른 사람과 다르게 이런저런 조건이 붙는단 말인가.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제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전에 봤던 전능 스킬의 위력을 생각하면 결코 모자랄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의 만약까지 가정한다면,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맞겠지.
'총 말고 다른 걸 쓸 수는 없고....'
이제 겨우 이틀 남은 사건을 위해 병기술을 연마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해결법은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게 좋겠지.
에이든이 턱을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이능은 기에, 신성에....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
.
『 두나단 우`잘 』
- 유대: 1단계
< 복사된 스킬 >
◆ 범용 이능: 법력
상승의 신 우르간이 내린 이능입니다. 금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운용이 가능합니다.
...이것까지 있다.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숫자로 세 개가 딱 맞긴 한다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애초에 다루는 법조차 모르는 게 문제다.
'그럼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봐야겠지.'
다행히, 물어볼 수 있는 인간이 근처에 한 명은 있었다.
▣
용 사냥꾼, 두나단 우`잘을 만나려거든 그냥 연무장으로 가면 된다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상승의 신을 섬기고, 무(武)와 관련된 가치를 숭상하는 나라의 중역이라면 단련에 중독된 인간이라는 건 누구나 알 테니까.
그건 교류 행사 때문에 잠깐 체류 중인 제국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게 분명했고, 실제로 에이든이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한 눈에 두나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드넓은 실내를 독점한 상태에서 집채만 한 쇳덩이를 맨몸으로 밀면서 운동하고 있다면, 글쎄. 누구나 눈에 띄겠지.
"...."
에이든이 가늘어진 눈으로 톤 단위의 쇳덩어리가 바닥에서 죽죽 미끄러지는 걸 바라보았다.
'...사람 아니지 않아?'
일전에도 한 번 떠올린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는다.
더 무서운 건, 이 정도의 용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도 메인 시나리오의 '주연'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그가 얽히고 있는 노엘이나 카티야 같은 인간들은 이보다 더 한 괴물들이란 뜻이다....
"익숙한 얼굴인데. 수련하러 왔나?"
그사이에 그를 발견한 모양인지, 두나단이 운동을 멈추며 그를 돌아보았다.
창칼도 튕겨낼 것 같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대단히 위압적이다.
"...가르침을 좀 청하러 왔습니다."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몸을 진정시키며 그런 말을 떨어트렸다.
아무튼 상대방이 아무리 무서워 보이건,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가르침? 나한테서?"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나단에게, 에이든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법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두나단의 얼굴로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너, 이미 순백의 기와 왕족의 신성을 다루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새로운 이능을 다루고 싶다고? 욕심도 많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두나단의 눈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에이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예?"
"그렇게까지 단련에 매진할 이유가 있냔 말이지. 이미 네가 가진 재능만 하더라도 보통 축복받은 게 아닌 수준인데?"
"...."
일반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메인 시나리오 관련이면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가 없으니까....'
...죽기 싫어서.
메인 시나리오라는, 세계 단위로 굴러가는 목숨의 위협은 무슨 안전장치를 갖춰도 모자라서.
무엇보다, 가족 곁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적당한 핑계나 둘러대는 게 좋을 거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봐도 신혼인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노엘 경을 떠올리겠지. 혹시라도 그쪽 귀에 들어갈 수도.
그럴 경우, 잘하면 호감도가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도도 어느 정도는 담겨 있다.
'...개뿔이.'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하다. 에이든이 속으로 낄낄거렸다.
듣더라도 별다른 무게를 두지 않고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을 테다.
애초에 관계의 전제가 계약 결혼인데,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다.
무엇보다, 양자 간의 '격차'를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이런저런 접점은 생겼다지만, 결국 자신은 그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고, 노엘은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호의가 진지하게 비춰질 리가.
"그럼, 입문하는 거야 간단하게 도와주지.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야 틀린 게 없으니, 그걸 들은 두나단도 씩 웃으며 납득한 모양이다.
"법력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대충은요."
법력은 꽤 이질적인 특성을 지닌다.
상승의 신 우르간은 자신의 신민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법력에 대한 제한을 해제해 놓았으니까.
이능 여러 개를 다루는 게 물론 평범한 재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개념이 아주 희소하지 않은 건 모두 법력 덕분이다.
단순히 이능을 '발현'시킨다는 측면에서, 법력은 가장 그 조건이 쉬우니까. 심지어 부족 연합에 속하지 않은 이들조차 금제의 맹세를 올바르게 한다면 곧바로 발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면 나만큼은 당연히 못 해. 보통 사람은 10년은 꼬박 노력해야 견습 전사급으로 겨우 올라가고."
"...10년으로 견습이요?"
"10년으로 견습."
발현과 별개로, 그 '숙달'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하니까 문제다.
아예 재능이 없으면 수련의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기나 발현 가능성이 제한된 인원들에게만 부여되는 신성보다는 낫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다루는' 난이도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해서 쓸 수 있는 이가 적기는 매한가지다.
기회는 공평하게.
하지만,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발전을 추구하는 우르간의 신명다운 특성이겠지.
"뭐, 그럼 바로 해볼까."
그런 말과 함께, 두나단이 경건하게 묵주를 손에 감았다.
우르간의 신물. 그에게 기도를 올릴 때 쓰이는 물건이다.
"보주여. 연화여. 광명을 발하소서."
우르간에게 바치는 진언(眞言)에 응하여, 묵주에 환한 빛이 깃들었다. 일전에도 한 번 본 광경이기도 했다
이어서, 두나단의 몸 근처로 법력이 확 치솟아 올랐다.
기가 연무, 신성이 화염의 형태로 드러났다면, 법력은 광명을 내뿜으며 사방을 휘감는 빛무리였다.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찬란한 반딧불이가 사방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모습에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그것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법력을 다루는 법 자체는 간단해. 이렇게 움직이는 기운의 흐름에서...."
그런 말과 함께, 두나단이 근처를 날아다니는 빛무리 중 몇 개가 저들끼리 뭉쳐서 명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두나단이 정신없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빛무리가 서로 부딪히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집어 뭉치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란 원. 빛무리가 뭉쳐서 나타난 광구.
"이렇게 사용할 수 있게 코어(Core)로 뭉치는 작업부터 시작이야. 이게 법력 사용자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척도지. 법력을 총 몇 개의 코어로 뭉칠 수 있느냐."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에이든의 표정은 급격하게 우중충해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이걸 '다루는' 난이도가 눈에 보일 정도니까.
에이든이 멍하니 답하며 두나단 몸 근처를 돌아다니는 빛무리들을 바라보았다.
한두 개의 경로만 쫓아도 눈이 아프고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것이 수백, 수천 개다.
이런 것들이 뭉치는 순간을 정확하게 노려서 코어를 만들어 내려면, 순발력과 직감이 보통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 척 봐도 알겠다.
"기가 몸 안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이고, 신성이 말 안 듣는 말을 조련하는 느낌이라면, 법력은 흔히 '교감하는' 거라고들 하지. 의미를 알겠나?"
"...대충은요."
이런 것들의 움직임에 맞춰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으려면 이 모든 경로와 경우의 수, 모든 변수와 벡터 그리고 경우의 분기를 도출해 내어 움직임을 살펴야 하는데....
'난 그런 거 못 해...!'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법력을 교감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그쪽에서 파생되는 것일 테다. 계산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움직임에 맞춰 다뤄야 하니.
"일단 한번 해보겠나?"
"해보다니요?"
"금제를 걸어본 적 없는 몸 같은데. 내 법력을 한 번 양도해줄 테니, 코어 뭉치는 작업을 한번 해보라고."
"...그거 양도가 되는 거였습니까?"
"보통은 안 되지. 하지만 법력 자체의 출력과 운용 능력만 따지면 난 대평원 전체에서도 한 손에 들어가."
어쩐지, 이전에 본 전사들의 빛무리와 비교해도 확연하게 그 양이 압도적이다 했더니.
본인에게 건 금제가 보통 강력한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럼, 시작해 보라고."
그런 말과 함께, 에이든의 몸 안에 이질적인 기운이 훅 흘러들어왔다.
이내, 두나단의 것과 비교하면 한참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이 환하게 부신 빛무리가 그의 몸 근처로 확 치솟아 올랐다.
"...."
에이든이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배울 수는 있는 거야, 이거...?'
첫 허들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다.
서로 모이는 순간에 맞춰 코어로 뭉치라고는 하는데, 맨손으로 실체없는 허깨비를 잡는 느낌이다. 도저히 쫒아갈 수가 없다....
▶ '법력'의 운용을 확인합니다.
▶ 추가 이능이 개방된 것을 확인합니다.
▶ [ 스킬: 전능]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스킬에 추가적인 효과가 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그의 눈앞으로.
문득, 그런 창이 붙어 나왔다.
< Skill Info >
전능 [ 2단계 ]
-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조합하여 기존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 이능의 근원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숙달과 탐색이 용이해집니다.
▶ 현재 발견한 조합
〓 수호자의 불꽃 (순백의 심장 ↔ 최초의 서원)
※ 스킬 단계가 높아질수록 조합할 수 있는 이능의 숫자가 늘어나고, 추가적인 효과가 생깁니다.
※ 다룰 수 있는 이능의 숫자를 늘려서 스킬 레벨을 올리세요!
"...?"
에이든이 눈앞에 느닷없이 떠오른 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룰 수 있는 이능의 개수가 늘어나면 스킬의 단계가 오른다고는 들었는데.
남이 넣어준 이능으로도 가능한 거였나, 그게?
"...."
이어서.
에이든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창이 떠오르자마자, 아까 전과 비교해서 명확하게 뭔가 달라졌다는 것이 곧바로 체감되었으니까.
'...어라?'
뭔가가.
보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산발적으로 움직이는 이 빛무리들 사이로, 일종의 '법칙'이.
뚜렷하게.
손에 잡힐 것처럼.
"너무 욕심부리지 마."
말없이 주변을 슥슥 둘러보기만 하는 에이든이 빛무리의 운동에 당황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두나단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부족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렸던 나도 첫 코어를 만들고 견습 전사로 승급한 데 걸린 시간이 1년이야. 지금은 어떻게든 움직임에만 익숙해지는 게-"
그의 문장이 뚝 끊겼다.
에이든의 몸 근처에서 주먹만 한 광구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빛무리가 나타난 지 5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두나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12화. 법력 (2)
"사자심."
"예, 족장님."
"남편 한번 잘 골랐네."
"...."
"...."
노엘이 말없이 두나단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을 수집하는 취미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술잔을 기울이기엔 이른 시간이 분명했지만, 상대방의 상태를 보니 도저히 부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엔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방금 있었던 일을 들으니 그럴만하다 싶긴 하다.
"...에이든 씨가 법력의 코어를 몇 시간 만에 3개까지 모으셨다구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말이지."
노엘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고하자, 두나단이 노엘이 채워준 술잔을 한 번에 식도로 때려 박았다.
동작에 묻어있는 허탈감이 보통이 아니다....
"첫 번째 코어를 만드는 게 부족 연합에서 성인식 대용으로 쓰이는 걸 알고 있나, 사자심."
"같이 전투에 나섰던 이들에게서 듣긴 했습니다."
"연합의 모든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법력을 다루는 법을 의무적으로 배우는 것도 알겠지, 그럼."
그렇게 어릴 때부터 숙달시켜도 성인 될 즈음에 1개 만드는 게 '평균'이란 소리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 연합은 인구 대비 개개인의 전투력은 대륙 단위로 따져도 최고인 나라고.
'분명히....'
노엘이 이전 기억을 머릿속에서 뒤적거렸다.
코어 두세 개만 있었어도, 그 지옥 같았던 연합 전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던 대평원의 전사들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에이든 켈러메인이란 사람은.
그 수준까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도달했단 소리다.
"이능을 단순히 타고나는 것과 잘 다루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야."
가끔 축복을 받은 녀석들이 있다. 여러 개의 이능을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는 놈들.
에이든 켈러메인도, 틀림없이 그런 부류인 건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솔직히, 위로할 준비까지 하고 있었거든. 힘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자신 있는 녀석들도 법력만큼은 숙달하기 힘들어하니까."
나는 분명 천재인데, 축복을 받은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좌절하는 녀석들은 꽤 봤다.
하물며, 대체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사자심의 순백의 기와 성황국 왕족의 신성을 동시에 타고난 녀석이다. 자부심이 대단할 거라는 예상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나단 본인이 처음 법력을 다룰 때 느꼈던 그런 감상이나, 다른 이들에게서 보았던 그런 '벽'을 느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가 '초심자'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낄 거라곤, 분명히 예상하지 못했고.
"놈은 천재야."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노엘의 모습에, 두나단이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
방금 꺼낸 문장을 반추하는 것 같은 기색이다.
"아니. 천재...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어폐가 있지."
두나단이 글래스에 담긴 술을 흔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놈은 괴물이야."
"...."
에이든이 보인 재능이 대단한 수준인 건 확실하지만,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폭력적이라 수식해도 될 재능을 가진 이들은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인류의 구원자, 패퇴한 흉신(凶神), 잊혀진 마왕....
그런 대륙 역사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천외천의 이름들이 있는 이상, 아주 특별한 재능까지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그가 벌인 짓을 직접 보기 전까진.
"나도 천재라는 소리 들으면서 자랐지만, 그런 꼴은 머리털 나고 난생처음 봤네. 대평원에 돌아가서 동료 족장들한테 말해도 미친 녀석 취급받을 거고."
적나라한 평가에, 노엘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내 들었다.
"보통 그 수준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죠?"
"범재 기준으로 10년."
"...."
"나도 2년은 걸렸어."
"...."
"내 말 믿으라고, 사자심. 남편 정말 잘 골랐어. 그 녀석, 나중에 어디까지 커 있을지 나도 궁금하니까."
천재라고 불리는 이가 2년 만에 이룬 걸 하룻밤, 그중에서도 몇 시간이라.
노엘이 볼을 쓰다듬으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릿속으로 골랐다.
두나단은 일평생 남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재능을 타고나 본인이 천재의 기준이 된 이다.
그런데 세상 처음 보는 '벽이 느껴질 재능'을 보는 바람에 정신이 나가기 직전인 상태인 게 분명하다. 이걸 위로해야 하나.
아니면....
"역시 에이든 씨네요."
"...금슬이 훌륭한 건 좋은 일이지만, 굳이 지금 내 앞에서 남편 자랑을 해야겠나?"
노엘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사실, 자랑보다는 그녀로서도 얼떨떨한 일이라 굳이 입 밖으로 내본 것에 가깝다.
능력도 능력인데, 그 사람이 벌인 일 자체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왜 갑자기 수련을?'
바보가 아닌 이상, 에이든이 '큰일'이나 '귀찮은 일', 내지는 '힘든 일'에 얽히는 걸 극단적으로 기피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그녀 곁에 있으면 그런 풍파를 겪을 수밖에 없으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데려온 거지만, 본인의 태도가 그런 걸 반기지 않는 건 명백했다.
애초에 노엘이 그를 거의 감시하다시피 끼고 있는 것 역시 되도록 그런 일에 갑작스레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려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 의문을 곱씹는 사이, 두나단이 다시금 혼이 나간 목소리로 문장을 툭 떨어트렸다.
"괜찮은 술이군."
"한 병 더 있으니 선물해드리죠."
"대작할 생각은 없나."
"공무가 남아있습니다."
노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혹시라도 누군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저지를 불상사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아마, 굳이 품고 있는 궁금증을 꺼내 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란 소리다.
"그런데 에이든 씨는 굳이 왜 법력을 배우고 싶어 하셨답니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데.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
"말했잖나. 남편 한번 잘 골랐다고. 그 정도의 재주를 타고난 녀석이 그 정도로 헌신적으로 바라봐주는 인생은 살 만한 것 아닌가?"
노엘이 무표정으로 침묵하며 두나단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말을 꺼내놓은 당사자가 당황할 만큼 길게.
어찌 보면 당황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를 보고 한 말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그런 말을 읊조리는 노엘의 모습에 두나단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신혼인 아내가 아니면 그런 말을 들을 대상이 누가 있다고?"
"...."
노엘의 무표정이 조금 더 깊어졌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다.
그건 그런데.
애초에 에이든 씨는 납치당해서 강제로 계약 결혼으로 묶인 대상이다.
노엘 본인한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아무래도 예전 기억은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어렸을 때라던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마 진짜로 잊으셨을 줄은 몰랐는데.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머릿속을 두들기는 문장의 연속에 노엘이 마른세수를 한 차례 시도했다.
또.
또, 또, 또.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이것들이 마치 홀리듯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 남자, 진짜로 과거에 자신이랑 뭐가 있나?
그것 때문에 그런 말을 부끄럽지도 않게 하고 다니나?
모르겠다.
당장은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 머리 저쪽으로 밀어놓고 싶어도, 연속으로 이런 걸 의식하게 하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
그리고 이런 잡생각이 들 때 해결 방법은 꽤 명확하다.
노엘이 한숨을 내쉬며 벽장에서 글라스를 한 잔 더 꺼내 왔다.
의도가 명확한 행동에 두나단이 실소를 지었다.
"공무가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 보니 술 몇 잔이야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아무렴."
짠, 하고 두 명이 잔 끄트머리를 부딪혔다.
'...설마, 진짜로 나 좋아하나?'
술을 글라스에 콸콸 부으며, 노엘이 문득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
에이.
아니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잔을 반쯤 채운 알코올이 한 번에 들이켜며 그런 생각을 이어 떠올린다.
...술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
-Skill Info
『 두나단 우`잘 』
- 유대: 2단계
- 1개의 스킬을 추가로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복사된 스킬 >
◆ 범용 이능: 법력
상승의 신 우르간이 내린 이능입니다. 금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운용이 가능합니다.
▶ 코어 개수: 5개
※ 전능(全能) 스킬 보정으로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이질적 특성이 부여됩니다.
※ '고유' 계열의 금제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이외의 방법으로는 사용이 불가합니다. 대신 해당 조건을 만족 시, 스킬이 변화됩니다.
그런 시스템 창에서, 에이든이 코어 개수 옆에 있는 5개란 숫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족장님 때문에 3개까지만 만들었는데....'
코어 개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거의 정신이 나가기 직전인 표정이 되어서, 점점 눈치가 보였지 뭔가.
그래서, 원래는 추가로 얹었어야 하는 질문도 오리무중이다.
스킬창 맨 아래에 추가로 붙어있는 문장 두 개가 문제였으니까.
'난 특수한 것밖에 안 된단 말이지?'
게임 안에서는 '식사를 한 끼 굶는다'라거나, '잠을 7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라거나, 뭐 그런 간단한 금제도 얼마든지 가능했는데.
시도해 보니 에이든은 그런 종류의 금제는 모조리 무효화 되었다. 스킬창에 적힌 것처럼 특수한 것만 가능하다는 것처럼.
'고유 계열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지금까지 시스템에서 사용한 용어로 유추해 보면,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징을 띄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금제?'
...일단 대평원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만 생각해 봐도 어질어질하다.
대륙 전체에서 법력 쓰는 사람이 몇일지 생각하면 더더욱 어지럽고.
이러면 기껏 법력을 배워놓고도 못 쓰는 것 아닌가....
'고민을 좀 해봐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닫으려고 하자, 문득 새로운 문장이 눈앞으로 휙 떠올랐다.
-System Message
▶ 대상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 유대 단계가 2단계에서 3단계로 격상합니다.
▶ 스킬 복사 횟수가 1회 추가됩니다!
▶ 메인 퀘스트에 관련 내용이 곧 추가됩니다!
에이든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느닷없이 눈앞에 떠오른 창을 노려보았다.
'...그게 먹혔나?'
이전에 둘러대듯이 두나단에게 흘린 말이 노엘에게 전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반 장난삼아 던진 건데, 진짜로 올라버리니까 떨떠름하긴 하다.
"...."
이쯤 되면, 조금 마음을 달리 먹어야 하겠다는 경각심은 든다.
이 정도로 빠르게 호감도가 쑥쑥 오른다면 나중에 정말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설마 그런 일까지 가겠어.'
지금이야 이런저런 우연이 겹쳐서 그쪽도 자신에게 관심이 점점 더 깊어질 뿐이다.
어차피 지금 그에게 쏟아질 관심도 결국 나중에 '주인공'이 등장한다면 그쪽으로 옮겨갈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당장 자신은 곧 마주칠 주인공에게 전부 다 떠넘기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그전까지만 잘 쓰면 되겠지.
에이든이 턱을 톡톡 두들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남아있는 게....'
현재 남아있는 스킬 복사권은 총 세 개다.
카티야한테서 한 개, 노엘한테서 한 개,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서 가져올 수 있는 것 한 개.
'당장 익힐 필요는 없겠지.'
메인 시나리오 관련 사건에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미리 스킬을 배워놓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무슨 무슨 스킬이 있는지는 한번 쓱 훑어보았으니, 상황이 다급해졌을 때 그중 가장 상황에 적합할 것 같은 능력을 가변적으로 배우는 게 이상적이지.
애초에 그가 애써 법력을 배워온 것도 '혹시 모를' 응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가져온 수단 아닌가.
'...아예 아무것도 안 배우고 평화롭게 넘어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걸 위해서 지금 열심히 움직이는 것 아닌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일전에도 한 번 온 기억이 있는 장소.
빌리 헤이건의 도구상. 일전에 부탁했던 정보를 수령하기 위함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얼굴을 알아본 빌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 그 위험한 일에 머리를 들이밀던 놈이지?"
...기억하는 방식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만.
"정보는요?"
그 말을 꺼내자마자, 카운터 위로 둘둘 말린 서류뭉치가 툭 떨어졌다.
"거래량, 유통 경로,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래 장소'까지 전부 다 정리해 뒀어."
거래 장소를 굳이 강조한 건 그곳이 아마 사건이 터지는 배경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서 특별히 찾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쓱쓱 훑어보았다.
확실히, 웃돈을 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일처리다.
에이든은 카운터 위에 챙겨온 금화 자루를 턱 올려놓았다.
"50골드 더 넣었어요. 친분의 의미로."
"너 돈 많냐?"
...노엘이 많이 챙겨주기는 했다. 에이든이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루를 쏟아 액수를 확인 후 그 말이 사실임을 파악한 빌리가 허- 하고 웃으며 추가 몫을 덜어냈다.
"필요 없으니까 이건 가져가. 제대로 다 일해준 것도 아니니까."
"네?"
"그 무기들 말이다. 누가 그걸 풀고 있는진 못 찾았어. 보통 꽁꽁 감춰진 게 아니던데."
"550골드인데 힘 좀 써 보시지 그랬어요."
빌리가 소탈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지랄하네."
"...."
"내가 못 찾을 정도면 최소 고위 귀족이야. 그쪽 정보를 파라고? 누구 목 날아가게 만들 일 있어?"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이든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거 원래 못 찾았던가?'
고위 귀족이라.
게임 안에서는 유통을 담당하는 집단 자체를 추적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잡범들이니까. 그쪽에 '사주한' 인물을 찾기 어려운 게 문제였지.
이렇게 첫 단계부터 막히는 건, 에이든이 기억하는 원작의 형태로만으론 꽤 힘든 일이다.
'...뭔가 다르긴 하네.'
제1막의 선역인 황자와 황제의 사이가 안 좋은 것도 그렇고.
메인 시나리오의 가장 첫 번째 사건부터 뭔가 어긋나 있는 것도 그렇고.
소소한 부분에서 뭔가 자꾸 위화감이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가 아는 '원작'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은, 한 가지 사실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었는데.
"저기, 빌리 씨."
"그냥 빌리로 괜찮아. 뭔데."
"제가 부탁했던 사람의 인적 사항은 여기 없는데요."
"없으니까 안 넣었겠지?"
"...그런가요?"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이번에도 빠져 있었다.
이만큼이나 유능한 정보상도 못 찾아냈다면서.
"...."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메인 시나리오가 조금씩 비틀려 있다 해도, 애초에 녀석이 없다면 이 게임 속 세계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는 거니까.
하지만.
"-"
만약.
만약에.
내일 현장에 그 녀석이 없다면.
이 세계가 '주인공 없는 세계'임이 확실시된다면.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제1막, < 제도 균열 >
- 시나리오의 중요 인물들과 접촉 빈도가 충분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 곧 시나리오에 당신의 존재가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당신의 거취에 따라 시나리오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2)
◈ 인생은 아름다워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이 당신에게서 애타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2)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오롯이 그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면.
생각해 둔 것은 있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고, 할 확률이 높지도 않을 테지만.
만약, 절체절명의 때가 기어코 오고 만다면.
'해야겠지.'
그럴 때는, 그도.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13화. 결국
에이든은 새벽녘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제도 끄트머리에 있는 선착장.
푸르스름한 새벽녘을 가르고 들어오는 거대한 선박이 보인다.
제도 안으로 밀반입되는 무기는 대부분 운하를 타고 다니는 선박으로 유입된다. 오늘 사건이 터지는 곳도 바로 이곳이고.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이 당신에게서 애타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Day!)
★ 사건에 슬기롭게 대처 시, 대상에 대한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달라집니다.
◈ 제1막, < 제도 균열 >
- 시나리오의 중요 인물들과 접촉 빈도가 충분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 곧 시나리오에 당신의 존재가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당신의 거취에 따라 시나리오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Day!)
♠ Main Quest
◈ 제1막, < 제도 균열 >
- 제도 안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일당이 있습니다. 모두 검거하세요.
- 클리어 조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키지 마세요.
- 퀘스트를 실패하면, 사망합니다!
우와.
오늘 동시에 터질 사건들이라고 적혀 얼굴에 들이밀어지는 걸 보니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특히 메인 퀘스트에 아주 똑똑하게 박혀 있는 '실패하면 사망'이라는 문구를 보니 더더욱.
일전에 한 번 받은 서브 퀘스트랑 다르게 이건 꼭 성공해야 한다는 걸 아주 특별하게 강조하는 느낌이랄까.
'게임 안에서 보던 거랑 똑같네.'
새삼 다짜고짜 '이거 안 하면 죽이겠다'라고 협박하는 살벌한 문구를 보니, 그가 디디고 있는 곳이 게임 세상이구나 싶긴 하다.
죽으면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게임과 다르게 그는 한 번 죽으면 끝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이런 것들에 신경을 쏟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것 정도일까.
'분명히....'
에이든이 머릿속으로 사건의 '진행'을 반추했다.
아무리 몰래 들여온다고 해도 쿠데타와 연관될 만큼 많은 양을 들여온다고 하면 꼬리를 밟힐 수밖에 없다. 제도의 시경이 냄새를 맡고 단속을 위해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세계 전체가 휩쓸리는 '시나리오'의 시작이다.
'거기에 있지.'
그리고, 그 단속 나오는 시경 무리에 에이든의 목표물도 섞여 있다.
오늘 겪을 '위기'에서 본인의 재능을 각성할 우리의 구원자 나으리.
이 세계의 주인공.
이 시점에서는, 제도 시경의 신참에 불과한 신분이던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건 확실하다.
아니, 등장해야만 한다.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나한테 떨어진 것들도 좀 가져가라.'
본심은 그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그리고, 아무튼 그 첫걸음을 밟기 위해선 만나기로 한 사람부터 합류시켜야 할 것이다.
분명 이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느닷없이 위쪽에서 얼굴이 휙 내려왔다.
박쥐 마냥, 근처 가로등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카티야였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안-녕."
공중에서 뒤집힌 상태로, 방긋 웃으면서 그렇게 손을 흔드는 카티야를 보고 있으니 곧바로 가슴이 텁텁해진다.
보이는 모습이야 그냥 소녀지만, 흡사 거대 맹수를 마주하고 있는 압박감이 전신을 옥죈다.
노엘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쪽은 위해를 가할 거란 확신이 없기라도 하다. 시한폭탄 같은 이쪽과는 다르게.
"이상하단 말이야."
그런 인간 모양의 맹수께서, 에이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뭐가?"
"이렇게 근처에 올 때까지 하나도 몰랐다는 게."
"...."
"나랑 똑같은 신성을 써먹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 왜 그런 간단한 것도 못 하실까."
"...."
"힘은 마구마구 들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쓰는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 당장 성황국에 데려가서 안이라도 뜯어보고 싶다니까?"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도 그런 압박감을 느끼는 데 큰 몫을 하고 있겠지.
더없이 맞는 말이다.
에이든이 들고 있는 이능은 하나하나 전부 강력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지만, 그는 그것을 전투에 '적합하게' 활용하는 방법이라곤 손톱만큼도 모른다.
진짜배기 전투원으로 길러진 카티야가 보기엔 아마 한심한 수준이겠지.
"뭐, 괜찮아."
가로등 아래로 툭 떨어지며 카티야가 말을 이었다.
"약속만 지키면, 그런 자잘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뭐부터 하면 되는데, 그래서?"
"소개해 줄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부터 만나자."
우리의 주인공 나으리라면. 당장 카티야한테 뭔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애초에 원작에서 카티야가 '동료'로 편입되는 과정이 다 첫 만남에서 주인공한테 뭔가를 느껴서 아니던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법이야 어쨌든 그의 선천적인 무감증을 전부 다 뚫고 어떤 종류로든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게 카티야와 관련된 개별 퀘스트의 시작이다.
그런 진행 이후로 카티야가 주인공에게 졸졸 따라붙는 장면들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카티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거 기대되네."
...말이야 쾌활하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약속 못 지키면 그때는 알아서 하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
단속 현장은 대단한 열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있어서 진짜로 온도가 높았다.
확성기를 동원한 시경 측의 지속적인 투항 권고와 범죄 집단의 욕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발포음과 폭음으로 대단히 시끄럽기도 했다.
무기 밀수 단속 주제에 뭐가 이렇게 어마어마하냐 싶을 정도로.
'그래도 사상자는 안 나오는 게 다행인가.'
아무리 정규군은 아니라고 해도, 제도 시경 정도면 치안 유지 조직 중에선 엘리트가 분명한 인간들이다. 이런 범죄 조직 소탕 정도에 애먹을 사람들은 아니란 거지.
클리어 조건인 '사상자 발생'에는 그다지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격렬한 전투 외곽에서.
"굳이 이렇게 조용히 있어야 해?"
에이든은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수치가 급상승하고 있는 반면에, 그와 그늘 속에 숨어 그 모습을 쭉 구경하던 카티야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뭘 할지는 몰라도, 그냥 여기서 '지루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게 굉장히 불만인 모양새다.
'하여간 진짜....'
몸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감각이랄 게 없으니까, 카티야는 정신적으로나마 뭐라도 느끼기 위해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걸 즐긴다.
"조금만 참아. 어차피 저기 끼어들어 봤자 득 볼 것도 없는데."
"이 정도로 지루하게 만들었는데, 별것도 아닌 결론으로 끝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
눈앞에서 총탄과 폭약이 날아다니는데 이렇게 가벼운 말투로 지루하다고 하는 이 미치광이는 뭔가 싶지만.
이 녀석이 화를 낸다고 하면, 그건 최소 인명 피해가 두 자릿수에서 심하면 세 자릿수가 넘어갈 대재앙의 전조다. 가볍게 들을 말은 아니지.
'곧 올 때가 됐는데....'
다행히, 카티야가 뭐라고 더 툴툴거리기 전에, 에이든이 기억하는 사건이 곧 눈앞에서 발생하는 중이었다.
"전부 물러서!"
그렇지.
궁지에 몰린 범죄 조직원 중 하나가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상자를 들고나오는 걸 본 에이든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불 폭탄?"
오죽하면, 여태까지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티야가 휘파람을 올릴 정도였으니까.
"연합 전쟁 때도 비싸서 잘 안 쓰던 것 아니야? 저런 게 왜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건데?
그가 그런 망을 중얼거리는 사이, 새파랗게 질린 제도 시경 측 인원들의 얼굴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저게 터지기라도 했다간 일대가 전부 다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잠깐, 진정하고-"
"무기 내려! 전부 다 바닥에 안 내려놓으면 그대로 기폭시킨다!"
아, 향수마저 느껴진다. 튜토리얼 끝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컷 신 아니던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그 대단하신 주인공 나으리가 등장해서 저 일대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잡범을 일거에 제압하는 게 장대한 스토리의 시작이다.
그래, 이제 곧.
하나.
둘.
셋.
"...팀장님, 어떻게 합니까?"
"당장은 자극하지 마. 저 새끼 눈 뒤집힌 거 보이지?"
"어이, 뭘 속닥거리고 있어! 무기 바닥에 내려놓으라니까!"
"잠깐, 진정하라고. 응? 말하잖아. 내려놓을게. 내려놓을 테니까."
"...."
나와야 하는데.
아니.
나와야, 했는데...?
에이든이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과 함께 '아무런 변화도 없는'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손발 끝이 차가워진다.
당연히.
당연히 있어야 할 녀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까.
'없어?'
지금 타이밍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난장판이 되는 상황 속에서, 먼저 나서서 '용기'를 보이는 인간이, 반드시 단 한 명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없다.
모두가 혹시라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치만 볼 뿐.
여기에는, 평범한 사람뿐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의 운명을 짊어질 그런 인간은.
에이든이 자신에게 부과된 짐을 내던지려고 했던 '주인공'은.
지금, 여기 그 어디에도 없다.
"...."
에이든이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그렇게,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상황'이 눈앞으로 구체화되고 있었으니까.
"이봐."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전부 정리하기도 전에.
옆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래서, 만나게 해준단 사람은?"
"...."
"설마 저기 있는 저 한심한 작자들 중에 있다는 건 아니겠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분위기는 아니다.
분명히, 그랬다가는 이 자리에서 에이든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카티야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정상이다.
"-"
다시.
머릿속으로 스위치가 찰칵- 하고 들어간다.
극한 상황일 때마다 돌아가는 그만의 생존 본능이.
"에이든 씨, 대답은?"
이제 평소에 가면처럼 걸고 다니는 웃음조차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카티야가 다시금 그런 문장을 떨어트렸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다. 정말 이딴 걸로 자기 시간을 낭비시켰냐-고 말하는 것 같이.
그리고 그사이,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견적서가 뽑혀 나오고 있었다.
'당장 시급한 건....'
이 자리에서 그가 해결해야 하는 건 지금 옆에 있는 이 괴물 왕녀님을 어떻게든 '아프게' 하는 거다.
카티야가 들고 있는 모든 '신성'을 뚫어내어 어떤 종류로든 '감각'을 쑤셔 넣지 못한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거 전제가.'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할 방법은 이전에도 한 번 정리해 본 적이 있다.
이쪽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신성을 뚫어버리는 수준으로 강력한 '일격'을 때려 박으면 된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건, '호신용'으로 챙겨둔 리볼버 한 개와 카티야가 지적했듯이 쓰는 법도 모르고 '들고만 있는' 반쪽짜리 이능 여러 가지.
초라한 무기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나 다름없는 능력들.
이런 걸 가지고.
노엘과 버금가는 괴물의 출력을 뛰어넘는 '일격'을 먹여야 한다.
"-"
그렇다면, 과연.
할 수 있는가?
방법은 있는가?
계산은 빨랐고, 결론은 더욱 빨랐다.
"귀라도 먹었어? 지금 내가 묻고 있-"
"다물어 봐, 좀."
있다.
딱 한 가지.
예전에도 결론을 내린 바 있지만.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
정말,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
"내가."
그걸 하려면, 우선.
불러야 할 사람이 하나 있다.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품으로 손을 넣어 뭔가를 꾹- 눌렀다.
"기다리라고 했지."
1초. 2초. 3초.
쭉 세어서, 10초.
그런 짧은 침묵이 흐른 후에.
이변은, 곧바로 찾아왔다.
"-뭐야?"
선착장에 있던 눈치 빠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아마 주변 환경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감이 좋은 인간이라면 주변에서 뭔가 격렬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미약한 움직임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이어서 폭풍으로, 그리고 어지간히 무거운 것도 모조리 나부끼는 것 같은 태풍으로.
이윽고.
하늘에서.
순백의 연무를 전신에 휘감은 '인간'이, 흡사 운석처럼 내려꽂혔다.
-!!
-!!!!!!!!!
방금 전에 귀를 찢어놓는 것 같던 싸움의 소음이랑 비교도 안 되는 격렬한 폭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인간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눈에 반짝거림이 깃드는 카티야와 더불어.
이 당사자를 '부른' 에이든만 제외하고.
"후우-"
격렬한 착지에 살짝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쓴 노엘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이윽고, 에이든을 발견한 그녀가 살풋 웃었다.
"-부르셨습니까?"
무시무시한 등장에 걸맞지 않은, 침착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
에이든이 품에 넣어둔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며 얼떨떨하게 노엘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이 사람이 위험해지면 누르라고 전해 준 신호기다.
'...내가 위험해지면 한달음에 달려온다는 거.'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14화. 부여
"-아하."
하늘에서 느닷없이 내려꽂힌 사람의 모습에 주변이 다들 침묵하고 있는 사이, 카티야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노엘을 바라보았다.
"소개해 준다는 사람이, 이쪽?"
그렇게 말하는 카티야의 눈은 흥미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이 인간이 '데스위시'라는 별명으로 소문이 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길 죽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흥미를 보이니까 생긴 별명이다.
"...."
그리고 카티야가 그런 말을 떨어트리는 사이, 에이든은 노엘 쪽으로 슬금슬금 조금씩 붙고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상황'에 대해서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직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임 안에서, 주연급 인물들끼리는 웬만하면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건 일종의 대전제에 가까운 일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하나가 워낙 색이 강한 녀석들이 많다 보니 같이 뒀을 때 충돌할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합이 안 좋은 인간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 둘이다.
사자심과 데스위시.
이유야 간단하다. '성격적인' 부분에서 그야말로 상성이 최악이다.
모범생과 미치광이의 만남이랄까. 서로가 서로의 행동 원리를 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자심 정도면, 그래도 기대해 볼 만하지."
그 말에,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기대하다니, 뭘 말입니까?"
"당신, 나 한번 죽여볼래?"
"...."
노엘이 무표정하게 카티야를 돌아본 다음, 에이든의 자포자기한 표정을 바라보며 눈썹을 슬쩍 비틀었다.
다행히, 에이든이 위험하다고 그녀를 호출해서 온 상황에서 '위험 인자'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 안에서 저런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인간은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저하되십니까."
"그래, 그래."
"제국에 방문하신단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음."
"자세한 이야기는 제도 사령부에서 듣겠습니다. 정식 입국 절차도 그쪽에서 밟으시면-"
"입에 발린 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카티야가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손 관절을 풀었다.
항상 입고 다니던 코트까지 대충 벗어서 바닥에 툭 던지는 걸 보니.
누가 보아도 '만전'을 기하는 기색이다.
"안 싸울 거야?"
"...."
노엘의 입이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앞뒤 다 자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기색에 어질어질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 죽으려면 있는 거 다 쏟아낸 상태에서 죽어야 해서. 전투 없이는 애초에 전제부터가 성립도 안 되거든."
하지만.
카티야가 툭 내뱉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눈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근처에는 민간인도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요구는 그만두시죠."
이 둘이 싸움으로써 생겨날 외교적 문제나 기타 정치적 문제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성황국에서도 손꼽히는 괴물과, 현존 최강의 기사가 맞붙는 충돌이다.
싸움의 여파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근처에 있는 이들 전원이 휘말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카티야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놈들은 왜 신경 쓰는데?"
노엘의 표정으로 슬슬 숨길 수 없는 격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이룰 수 있으면 아무래도 다 좋은 인간과, 일생을 도덕과 정의에 투신한 인간의 대치다. 대화 흐름이 맞을 리가 없지.
카티야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꺼내든 말만 봐도 그러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안 싸워주면, 일단 이 근처를 돌면서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죽일 거야."
"...."
"그다음엔 네가 보는 앞에서 거기 있는 남편을 죽일 거고. 그만하면 나랑 싸울 이유가 될-"
노엘의 몸에서 격렬하게 순백의 기가 터져 나왔다.
에이든이 그녀를 본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살의'가 듬뿍 담긴 임전 태세였다.
"-그래."
물론, 그걸 보자마자 만족스럽게 웃는 미치광이가 한 명.
"그러셔야지."
그런 말과 동시에.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수준의 불꽃이 카티야의 몸 근처에서 치솟아 올랐다.
이윽고.
두 이능이 부딪히며, 여명의 태양처럼 환한 폭발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대략 수m를 중력이 없는 것처럼 자유 부양하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이 부딪히자마자 터져 나온 여파만으로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휩쓸려 주변으로 나부끼던 참이다.
이내 돌바닥에 그대로 처박혀서 우당탕탕 바닥을 구르며 온몸을 덮치는 격통 안에서도, 에이든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 Main Quest
◈ 제1막, < 제도 균열 >
- 제도 안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일당이 있습니다. 모두 검거하세요.
- 클리어 조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키지 마세요.
- 퀘스트를 실패하면, 사망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다.
원래는 '주인공'이 해줬어야 할 일 말이지.
'최악이잖아.'
그렇게나 피하고 싶어 했던 일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다. 그가 메인 시나리오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것.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다. 이런 것들은 전부 떨어트리고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가 뭔가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근처에 있는 인간도 모조리 다 죽을 거다.
그가 '불러서' 이 자리에 온 노엘까지도 위험에 처할 거다.
곧, 그는 죽는다.
"...."
그걸 막기 위해서는, 지금 저기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을 어떻게든 제압해야 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흡!"
몸을 벌떡 일으킨 에이든이 그와 똑같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근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전원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초인 중에서도 최고봉에 앉아있는 두 명이 부딪히는 모습에 넋이 나간 게 분명하지.
그사이에서, 찾고자 하는 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야."
후다닥 달려간 에이든이, 멍한 표정으로 상자 하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그거 줘."
남자가 마치 가보라도 되는 것 마냥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건 지옥불 폭탄이다.
카티야조차 잠시 흥미를 보였던 초고화력 무기.
"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
그래도 꼴에 험악한 기색은 유지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위협적으로 말을 꺼내려던 사내의 모습에, 에이든이 씩 웃으며 문장을 끊었다.
"저거 안 보여?"
에이든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 든 노엘한테 맨손으로 달려들고 있는 카티야를 가리켰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기와 충돌한다.
"내 말 믿어. 지금 당장 저기 있는 기사님 안 도와주면, 우린 다 죽어."
"그게 무슨-"
"기사님은 전력을 못 내고 있거든. 우리들이 휩쓸릴까 봐."
물론 전투력의 우열을 가린다고 한다면 카티야나 노엘이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족쇄가 채워진 쪽은 누가 봐도 후자다.
부수적 피해는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카티야에 비해, 민간인이나 에이든의 안위를 신경 쓰면서 싸워야 하는 건 그녀니까.
그리고 카티야는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바보가 아니다.
이어, 그런 상황에 그가 취할 짓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저기 있는 미친놈은 주변에 있는 것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것 같다면서 우리 다 죽이고도 남을 인간이거든?"
"...."
"못 믿겠으면 손가락 빨고 있다가 다 같이 죽어볼래?"
"이상할 정도로 참잖아, 사자심!"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의 카티야로부터 고막을 찌르는 것 같은 광소가 터져 나왔다.
"방해물이 주변에 있어서 그래? 치워줄까?"
"...일단."
노엘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답했다.
"법정에 세우기 전에 인성부터 배우셔야겠군요. 저하."
순백의 기가 휘감긴 장검과, 최초의 서원이 깃든 권격이 충돌했다.
다시 밤하늘을 물들이는 격렬한 폭발이 양쪽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에이든이 있는 쪽에서도, 전과 같이 다들 비명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고.
살수가 교환되는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이 종이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다.
"봤지?"
"...."
똑같이 바닥에서 나뒹군 에이든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로 그런 말을 얹자, 남자가 홀린 듯이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에이든이, 다시금 몸을 벌떡 일으키며 머릿속의 주판을 더욱 빠르게 두들겼다.
준비물은 이거면 된다. 나머지는 이걸 다룰 도구지.
당장 필요한 건 세 가지.
-System Message
▶ '기(氣) 운용: 방어 역장'을 복사합니다.
▶ '신성 강화: 서원'을 복사합니다.
▶ '법력 강화: 진언'을 복사합니다.
각각 노엘과 카티야, 그리고 두나단에게 할당된 스킬 복사권을 써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에, 에이든이 잇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지금 하려는 건,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지옥으로 가는 편도행 티켓이다.
돌아갈 수 없다. 메인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그럼에도.
안 하면 죽는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
가족들의 얼굴이 순간 눈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아빠. 시셀라.'
역시.
이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 두 명이 우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지옥에 한 번 떨어지고 만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건 조금 늦을 것 같아.'
에이든이 심호흡을 하며 품속에 있는 리볼버의 감촉을 확인했다.
손에 와 닿는 감각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차가웠다.
▣
연합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쳐 온 역전의 기사라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도를 다 구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노엘은 상대방에게 내릴 평가를 한 가지밖에 찾을 수 없었다.
터무니없다.
"하-!"
카티야가 전신에 신성을 감싼 상태로 그녀에게 쇄도했다. 어찌나 빠른지, 마치 동작의 시작과 결과만 존재하는 것 같은 정신 나간 속도다.
그 속도도 속도지만, 그 전신에 깃들어 있는 신성의 압력은 그녀조차 현기증이 날 정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신경 아래에 들러붙어 밝기마저 혼동을 주는 밀도의 화염이 주변으로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율律. 맹세합니다."
입술 아래로 조용히 축성을 바친다.
그녀가 보유한, 압도적인 출력의 기로도 단순 운용만으론 버티기도 버거운 상대다. 강화가 반드시 필요하지.
"죄 없는 자들의 안위를."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강력해진 기가 제식 장검에 깃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허공에 몇 번 공격을 휘둘렀다.
맞을 거리가 아님에도 그런 짓을 하는 건 일견 아무 쓸모도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한참 멀리서 돌진해 오던 카티야의 몸이 순식간에 조각났다.
공간을 '뛰어넘어' 보내는 참격. 검에 깃든 기를 초월적인 집중력으로 정밀하게 조작할 수 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다른 이능에서는 보기 힘든, 출력에서 장점을 가지는 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기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
노엘이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었던 곳으로 불꽃덩어리의 형상을 한 카티야가 쑥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휘말려서 얻어맞았을 것이다.
"잘하잖아! 그런 건 처음 봐!"
그렇게 말하는 카티야의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참혹했다.
끊어진 갈빗대, 잘린 단면으로 보이는 너덜너덜해진 근육들.
이 여자는, 방금 '또' 한번 죽었다.
그럼에도 왕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은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터무니없다고 평가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모든 공격을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모조리 얻어맞으며 밀고 들어오는 주제에. 치명상을 수도 없이 입는 주제에.
지치는 기색조차 없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있잖아."
아니, 그런 것조차 뛰어넘어.
"아직도, 아무것도-"
흐느끼듯, 그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찢어지는 것 같은 광소에 섞여 터져 나오는 바람에, 웃으면서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안 느껴진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돌진하는 카티야의 모습에, 노엘이 한숨과 함께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다.
'이대로는-'
제압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당할 수도.
"...."
노엘이 시선을 흘끔 돌렸다.
꺼내지 않은 수라면 얼마든지 남아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위가 문제다.
그녀가 진심으로 부딪히기 시작한다면 사상자가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노엘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에이든 씨?'
품에 든 상자를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에이든 씨가 보인다.
그런 짓을 하다 그녀와 잠깐 시선이 마주치자, 에이든 씨가 급하게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끌어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노엘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그쪽으로 던졌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본인의 넘쳐나는 힘을 전투를 통해 어떻게든 '소진'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듯 단순한 돌진만 반복하고 있는 상대다. 어떤 곳에 끌어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지.
투우하듯이, 다시금 달려드는 카티야를 슬쩍 비끼며 에이든이 요구한 곳으로 그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이든이 그쪽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폭탄이 천축을 울리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기폭했다.
지옥불 폭탄은 원래 고층 건물을 무너트릴 때나 쓰이는 병기다. 원래대로는 일대가 날아가야 정상이겠지만.
폭심지로부터, 순식간에 작은 형태의 '돔'이 생성되었다.
일전에, 노엘이 순백의 기를 사용해서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형태다. 지금은 지옥불 폭탄이 만들어 내는 폭발과 카티야만 따로 그 안에 격리하는 용도로 쓰인 게 차이점이지만.
'대단한걸.'
노엘이 땀을 닦아내며 속으로 그리 감탄했다.
방어 역장을 이런 식으로 써먹는 건 그녀로선 생각도 못 해본 방법이다.
그리고 그 활용법도 활용법이지만, 더 신기한 건 그 폭발을 견뎌낸 돔의 내구성이다.
아무리 가장 정순한 기라고 해도, 저렇게 좁은 범위 안에 저만한 폭발을 붙들어 두는 것은 그녀로서도 조건이 몇 개 붙어야 가능할 일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축성조차 곁들이지 않고 하는 건 힘들지.
아마, 돔을 구성하고 있는 이능이 그녀로서도 생소한 종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전에도 한 번 본 적 있긴 하다. 기와 섞인 신성.
'-출력은 기와 비슷하고, 화력은 신성과 비슷-'
양 이능에서 장점만 따온 그런 특성이다.
덕분에, 기의 운용은 그녀와 똑같이 하는 주제에 그 성능은 거의 상위 호환 아닌가.
"-시도는 좋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에 깊게 고찰할 상황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초음속의 파편들에 전신이 찢기고, 폭염에 전신이 불타오르고, 방금 그것만으로도 수도 없이 그 안에서 수십 번은 '죽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카티야는 여전히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방어 역장을 손으로 잡아 뜯어내고 있었다.
"이런 걸로 끝내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
"바라지도 않았어."
그런 문장을 에이든의 담담한 목소리가 툭 자르고 들어왔다.
"그건 그냥 '걷어내는' 용도야. 최소한 쏘려면 좀 약하게는 만들어 놔야지."
어느 순간 리볼버를 들고 카티야의 지척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카티야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성은 그 자체로서 검이자 방패로 기능한다.
생성되는 곳은 모든 이능의 근원지인 '심장'.
에이든이 노리는 것도 그쪽이었다.
지옥불 폭탄은, 그쪽을 철통같이 지키는 신성을 잠깐 약화시키기 위함이고.
실제로 몇 번 죽는 것도 아니고 수십 번 신체를 재생시키는 것은 그녀로서도 꽤 고역이었는지, 그를 휘감고 있는 화염은 명백하게 세가 약해져 있었다.
"-있잖아."
카티야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목소리와 함께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준비 과정 전부 다 잘 쌓아두고, 마지막에 꺼내 온 게 그런 장난감이면 어떻게 해?"
물론, 그럼에도.
지옥불 폭탄을 정통으로 맞아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신체다. 조그마한 탄환으로 카티야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는 건, 그 어떤 이가 해도 불가능한 일이리라.
방금 전에 어마무시한 폭발에 비하면, 지금 소형 화기를 들고 그 앞에 서 있는 에이든의 모습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글쎄."
에이든이 한숨과 함께 리볼버의 해머를 당겼다.
"이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 모습에, 노엘이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눈썹을 비틀었다.
두 번 정도 본 모습이지만, 워낙 뇌에 강렬하게 박힌 덕분에 그게 뭔지 정의하기는 쉬웠다.
이건, 그녀가 에이든 씨와 관련해서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터지기 직전일 때의 느낌이다.
"율律, 맹세합니다."
방아쇠에 담기는 첫 번째 축성(祝聖).
순백의 기가 그의 의지에 따라 손가락을 타고 부품에 깃든다.
"이 미천한 자가 기도하나이다."
총신에 담기는 두 번째 서원(誓願).
카티야에게서 복사한 스킬이다. 그로서는 배운 적이 없는 '올바른' 서원의 기도문.
몸에서 치솟은 화염이 총신에 똬리를 틀 듯이 깃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주여, 연화여, 광명을 발하소서."
총탄에 담기는 세 번째 진언(眞言).
얼마 전에 배워온 법력이다.
그가 무기에 '이능 부여'를 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
물론, 아직은 금제를 부여하지 못해서 반쪽짜리다.
'거지 같기도 해라.'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참으로 곤란한 짓을 해야 하는 참이다.
금제는 대상이 도달하기 힘든 '목적'을 정의할수록 더욱 법력의 힘을 강화시킨다.
기의 색깔, 신성의 온도, 그리고 금제의 '어려움'은 각각의 이능의 최소 출력을 결정하는 척도니까.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순백의 기는 강력하다. 최초의 서원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선 저기서 노엘을 몰아붙이며 활개 치는 괴물이 타고난 끝도 없는 이능의 원천을 뚫어버리기엔 한참 모자라다.
적어도, 앞서 먹은 두 능력에 '버금가는' 능력이라도 하나 더 떨어지는 게 아닌 이상.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메인 시나리오의 주연으로 긁어온 '고유' 스킬들과 비교했을 때, 그가 가진 법력은 아무 특성도 없는 이능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특별하게 만들 방법을 한 가지 알고 있다.
※ 전능(全能) 스킬 보정으로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이질적 특성이 부여됩니다.
※ '고유' 계열의 금제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이외의 방법으로는 사용이 불가합니다. 대신 해당 조건을 만족 시, 스킬이 변화됩니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고유한' 금제라면,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까.
"하여, 나는-"
그런 면에서.
지금 상황에서 그가 상승의 신에게 바칠 '맹세'는.
한 가지밖에 없다.
세계에서 단 한 가지밖에 없는.
'원작 기준'으로, 오직 한 명만이 우르간에게 바치는 맹세를.
"-세계를 구한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주인공의 업'을.
!! System Message !!
[ '범용 이능: 법력'이 '구원자의 맹세'로 변경됩니다! ]
[ '이능 부여'에 성공합니다. 무기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
그런 메시지에 이어.
탄환에 '힘'이 깃든다.
그렇게 리볼버 전체를 타고 쭉 올라온 힘이 합쳐져 하나의 '기운'으로 승화해 깃들자마자, 에이든이 방아쇠를 당겼다.
-…
-…
-----!!!!!!!!!!!!!!!!!!!!!!!!!!!!
"-이런, 미친!"
노엘조차 순간적인 욕지기를 내뱉을 정도로 끔찍한 수준의 여파와 함께, 리볼버에서 뻗어 나왔다곤 믿을 수 없는 맹렬한 힘이 유성처럼 궤적을 남기며 내달려서.
카티야의 몸을 그대로 산산조각 내었다.
지금까지 한 방울도 흐른 적이 없었던 그녀의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15화. 왜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