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영체 (2)
"신기하네."
옆에서 카티야가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이리저리 나부끼듯 내동댕이쳐지는 에이든을 보고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꺼내놓는 말이었다.
"너, 지금 유령한테 두들겨 맞고 있는 거야?"
"그렇게 가만히 서서 보고 있자만 말고, 좀 와서 도와주-!"
뭐라고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에이든의 몸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사이에.
현실 세계 위에 '덧씌워진' 공간인 이면계에 존재하는 유령들은 물질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법칙조차 뒤틀어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지금 에이든을 여기저기에 처박고 있는 유령이 생전에 어느 정도로 강력한 인간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배짱도 좋네, 이 새끼가-!"
카티야에겐 들리지 않겠지만, 여명의 기사가 씩씩거리며 내지르는 소리는 참으로 흉폭하다.
그런 기색에 비해, 생김새는 곱상하기 그지없지만.
금발, 푸른색 눈동자, 미남, 기사를 상징하는 전신 갑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귀티 난다고 포장해 줘도 될 만한 외모다.
"뭐, 과장되었어? 쫌생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죽고 싶어서 아주-!"
씩씩거리며 이런 말을 계속 뱉어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포장이 가능할 텐데.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공중을 비행했다.
"...선배님, 잠깐 진정하시고-"
"선배는 무슨 얼어 죽을. 난 너랑 그런 말로 엮일 일이 없어-!"
이윽고, 여명의 기사가 씩씩거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한 대 후려 패려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위험해 보인다.
"그만, 좀, 하시라니까!"
그런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신성이 확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냉큼 달려드려던 여명의 기사도 동작을 멈춘다.
눈동자에 섞인 건 의혹과, 경악이다.
"...신성?"
여명의 기사가 멍하니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너, 분명히 몸에서 기를 다루는 놈의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신성까지 다루는 거지?"
"...."
에이든이 쓴웃음을 지으며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툭툭 털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선배님'."
그래, 이런 식으로 이능 여러 개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면 흥미를 가질 줄 알았다.
"후배가 인사 올립니다. '다중 이능 보유자'로 국한하면 선후배 맞지 않습니까."
이능 여러 개를 다루는 사람은 역사를 뒤져도 그 개체수가 대단히 희소한 재능이고, 그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 여명의 기사다.
대륙 여러 곳에서 사랑받은 이유도 간단하지. 각 나라의 고유 특질인 이능 여러 개를 능숙하게 다루는 인간이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도움이 필요해요."
에이든이 이 사람을 '데리고 가려는'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그의 '성장 루트'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고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 전체를 뒤져도 이 사람밖에 없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선배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나거든요."
주로 세상의 운명이 위험하다.
지금 '메인 시나리오'라는 세계구급 위험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건 에이든밖에 없고, 그렇다는 말은 그가 실패하는 순간 다같이 죽는단 소리나 진배없다.
"...대체 뭔 헛소리냐. 방금 전까지 나더러 과대포장 되었느니 뭐라고 하는 놈이 이제와서 무슨-"
"그거야 다 선배님 뵈려고 한 거짓말이었구요. 그런 거 아니면 영체를 이렇게 불러들이지도 못했을 테니까."
"...."
"세상에 최초의 기사이자 대륙구급 영웅을 내려치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어요. "
"...."
옆에서 카티야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비록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설마 그런 말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겠냐는 눈빛이지만.
-System Message
▶ '여명의 기사', 마이어 벨포드와 접촉합니다.
▶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아니지만, 품고 있는 능력이 대단히 비범합니다. '중요 인물' 수준의 가치를 가집니다.
▶ 대상과의 유대 단계가 1단계로 향상됩니다!
▶ 스킬 '운명의 길쌈꾼'과 연동됩니다!
...있다.
그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
에이든이 속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그런 창을 노려보았다.
이 사람 특성상 이런 점을 살짝만 건드려줘도 넘어올 거란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너무 예상대로라 오히려 어이가 없다.
"...그딴 성의없는 아첨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겠냐?"
심지어 말로는 이런 말을 하고 있으면서 그렇다는 점이 더 소름이 돋는다....
여명의 기사, 마이어가 팔짱을 끼며 겉으로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지금 시대에는 나 같은 건 뒷전으로 밀어버릴 놈이 있다며. 사자심...이라던가?"
유령 주제에 왜 그런 정보를 다 알고 있냐 싶긴 하지만, 애초에 에이든의 도발에 단번에 넘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끔찍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다. 자신을 밀어내고 최강의 기사 타이틀을 따낸 인간을 신경 안 쓰는 게 이상하겠지.
하지만.
"마침 제가 그 사자심의 남편 되는 사람인데요."
그 말에 마이어의 눈이 팍 찌푸려졌지만, 곧바로 이어진 에이든의 말에 그 표정이 역으로 해괴하게 변했다.
"제가 보증해요. 그쪽도 선배님 쫒아가긴 힘들 겁니다."
옆에서 카티야의 입가가 비틀리는 것도 시야 끄트머리로 보인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기색이지만, 에이든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단순히 어느 쪽이 더 강력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단서 한 가지만 붙이면 참이 아닐 수가 없는 명제니까.
이 남자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분명히 노엘 경조차 이 남자의 아성을 결코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죽은 이의 영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계속 남아있는 경우라면,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역사 전체에 이름을 남길 만한 수준의 위인이어야 하고.
도저히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만큼 뼛속 깊이 맺어져 있는 '한'이 있어야 한다.
여명의 기사 같은 경우에는.
"못 하신 것들, 아직 그렇게나 남아있잖아요."
여명의 기사의 표정이 급변했다.
방금 전까지 분노와 격노 일변도였다면, 처음으로 에이든의 말에 의표를 찔린 기색이다.
"...."
여명의 기사는 게임 안에서 설정으로만 다뤄지던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다.
이 남자가 자신의 재능을 너무 늦게 깨닫는 바람에 '아깝게' 닿지 못했던 경지는, 짧게 한 문장만으로 서술되어 있다.
'인간이 도전할 영역이 아니다'라고.
이 사람이 대륙 곳곳에 남긴 본인의 전설적인 무용담도, 그 영역에 닿기 위한 수련이었다고 하던가.
"...너."
에이든을 한참 노려보던 마이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소릴 하네. 그런 것까지 기록이 다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선배님을 존경하는 후배의 열성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개뿔이. 너, 그냥 나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한 거잖아. 내가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사실 맞습니다."
"...."
파멸적인 솔직함에 마이어의 말문이 틀어막힌 사이,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선배님도 역으로 이용해 먹기엔 저만한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뭐?"
"저 말고 다른 다중 이능 보유자가 또 나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
"그런 사람이 선배님에게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말을 걸 가능성은 얼마나 되고?"
"...."
"그 모든 가능성을 다 뚫고, 선배님의 염원을 '대신 이루어드리겠다'고 맹세할 사람을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마이어의 표정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하네, 너."
사실이니까 기분이 나쁜 것이렸다.
이어지는 말만 봐도 분명하다.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야. 유령인 이상 딱히 대단한 일은 못 해."
-걸렸다.
에이든이 속으로 씩 웃으며 근처에 있는 유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안에 들어올 때부터 봐두었던 물건이다. 몸에 자연스럽게 착용하고 다녀도 별 불편함이 없을 팔찌.
"-바꿔 말해서, 유령이니까 가능한 일도 있기 마련이죠."
"뭐?"
"일단 이 안에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마이어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어쩌자고 이딴 놈한테 걸렸지."
상대방한테서 그런 탄식이 흘러나올 내용이긴 했지만.
▣
잠시 후.
"흠."
에이든이 오묘한 빛을 띠고 있는 팔찌를 바라보며 콧숨을 내쉬었다.
마이어의 영혼이 잘 담긴 게 분명한 기색이다.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전부 이뤘다.
라니아의 영매, 그걸 이용하여 접촉한 마이어의 영혼. 그리고, 아직 가져오진 않았지만 그 영혼을 다루기에 최적화된 제1 황자의 스킬까지.
제1막, '유령 기사 소동'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준비 재료는 다 모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다 한 거야?"
"예. 이제 나가기만 하면 돼요."
그러니, 이런 질문에는 바로 시원스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카티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이든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우리,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예?"
"저거, 아까까진 없었거든."
그런 말에 시선을 돌려보니.
벽에 박혀 있는 크리스탈이 척 보아도 붉은색을 내뿜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경보'를 울리려는 모습이고, 거기에 영향을 받은 듯 방 전체가 같은 색으로 물든다.
사방이 붉어지는 모습에, 에이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안에 사람이 너무 오래 있으면 자동으로 켜지는 시스템 같은데?"
"-그런 거 분석할 시간에 저걸 멈춰야...!"
에이든이 식겁하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일순.
파삭, 하고 붉은 빛을 내뿜으려던 경보기가 부서졌다.
누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지른 검격에 일도양단 당한 모습이다.
에이든이 그런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 어느 순간에 튀어나온 건지, 노엘이 한숨과 함께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삼가주시겠습니까. 잘못하면 한바탕 곤욕을 치르니까요."
"...노엘 경?"
분명히 아까 스텔라 경한테서 몸이 안 좋다며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디에서 나오신...? 돌아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돌아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에이든 씨가 저하와 함께 황궁 보안을 열심히 침투하고 계시길래, 혹시라도 해서 뒤를 밟았습니다."
"...."
"위험해 보이시길래 도왔습니다만."
그걸 또 다 들키고 있었나.
이 사람은 그 와중에 그걸 말릴 생각은 안 하고 가만히 뒤만 밟았고.
'그래도, 뭐.'
덕분에 귀찮은 일 없이 상황을 수월하게 해결했다.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덕분에 잘 넘어갔습니다. 고마워요, 노엘 경."
"...예."
"...."
이 반응은 뭐람.
목각 인형도 이것보다는 더 생동감 있겠다 싶을 정도로 딱딱한 목소리만이 퉁명스럽게 돌아왔다.
노엘이 고개를 휙 돌리며 모자를 푹 눌렀다. 에이든과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따라오시겠습니까.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곧바로 청사에 돌아가시죠. 이 이상 밤이 길어지는 건 사양입니다."
묘하게 퉁명스러운 기색에,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붙는 사이.
"...음."
뒤에선, 카티야가 뭔가 석연찮다는 시선으로 노엘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살짝, 태도가 달라진 것 같은...?"
그런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안에서 멤돌았다.
▣
군부 청사 안에는 때아닌 소란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이유라고 하면, 예비 남편과 함께 만찬회에 함께 다녀온 노엘 경 때문이렷다.
에이든과 헤어져 자신의 개인실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대단히 많은... '소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 노엘 경? 오늘 만찬회는 괜찮으셨-"
그렇게 입을 열려던 인물이 입을 턱 다물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오는 노엘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말을 거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떠올릴 테니까.
"겨, 경.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편찮으시면 당장 의무대에 연락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힉."
주변에서 걱정해 주던 인원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아마 노엘의 답변이 워낙에 서슬 퍼렇기 때문이겠지.
평소에도 무표정이나 꾸며낸 미소 외에는 별다른 얼굴도 안 보이는 사람이지만, 지금 그녀의 무표정은 어딘가 뭔가를 꾹꾹 눌러서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기분이 안 좋으신가 보다....'
모르긴 몰라도 만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전원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노엘이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의 개인실로 향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집어 던지듯이 검을 내려놓고, 코트와 모자를 벗어 옷걸이 걸어놓는다.
그리고.
"...."
그녀가 무너지듯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그러자마자 귀는 물론이고 아예 정수리까지 시뻘개지는 것 같은 열기가 조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꾹꾹 참고, 다른 사람에게 티 내지 않고 있느라 정말로 힘들었다.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으로 가득했다.
호흡이 가쁘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참으면서 개인실까지 걸어오긴 했는데, 몸 전체로 열기가 치달리는 느낌이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혈관에 불덩이라도 부어 넣은 것 같은 감각이다.
-저, 그 사람 좋아하거든요.
"-!"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풀이되는 문장에, 그녀가 다시 한번 이마를 책상에 쾅 소리 나게 들이박았다.
'...뭐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책상에 이마를 박은 상태로,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벅벅 문지르면서도, 그런 의문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적어도, 노엘이 알기로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이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
원 직업이 사기꾼인 남자다. 그냥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그런 말을 꺼내 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해보겠습니다. 가치 증명. 그래야지 혼약을 올릴 수 있다면요.
그저, 그런 거짓말로 치부하기엔.
-그런데 에이든 씨는 굳이 왜 법력을 배우고 싶어 하셨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데.
-말했잖나. 남편 한번 잘 골랐다고. 그 정도의 재주를 타고난 녀석이 그 정도로 헌신적으로 바라봐주는 인생은 살 만한 것 아닌가?
그녀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들이 있었다.
"...."
애초에, 생각해 보면 굳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녀를 편까지 드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에이든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황자가 들이민 조건들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온 태도에 아주 잘 부합하는 것들이다.
험한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고, 가족은 끔찍하게 생각하고, 조용히 눈에 안 띄고 지내는 것을 선호하고.
그런데.
그런 걸 완벽하게 충족시킬 제안을, 굳이 거짓말을 해서까지 거절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런 터무니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그러니까.
에이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
그녀가 이마를 책상에 박은 상태로 주먹을 쾅쾅 내리쳤다.
체통이고 품위고 나발이고 전부 어딘가로 팔아먹은 짓이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 그런 말을, 에이든 씨, 대체 왜-'
헝클어지고,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 섞인 사고 속으로는 그런 문장만이 뚜렷하게 둥둥 떠다녔다.
"…하아아-"
영혼이 뽑혀나오는 것 같은 한숨만이, 노엘의 입에서 길게 뿜어져 나왔다.
21화. 훈련
"...이건 또 신기한 감각이네요."
에이든이 배경 하나 없는 살풍경한 광경을 둘러보며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건너편에 마주 앉아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는 마이어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처음 겪어보면 다 그렇지, 뭐."
누군가의 '머릿속'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을 심상 세계라고 하며, 지금 마이어와 에이든이 들어와 있는 장소도 그런 곳이었다.
에이든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자신의 팔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 Item Info >
[ 소울 커넥터 ] [ 희귀 ]
[ 최상위 혼 '여명의 기사'를 품고 있는 팔찌입니다. 경지에 이른 자들이 열 수 있는 고유 공간 < 심상 세계 >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해당 공간에서는 혼령과 직접 접촉할 수 있습니다. ]
...이런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일도 가능한 것이리라.
이 팔찌 자체는 그냥 아무런 효과도 없는 오래된 유물이지만, 거기에 마이어의 혼을 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온갖 효과가 덕지덕지 붙은 모습이다.
'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야?'
에이든이 그런 뜻이 담긴 시선을 상대방에게 보내자, 마이어가 여전히 목을 쭉 빼든 상태로 에이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탐색하는 것 같은 눈빛에 에이든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영체로 마주할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직접 얼굴을 마주하니,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란 확신이 든다.
에이든은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인간을 잘 묘사할 수 있는 단어를 한 가지 알고 있기도 했다.
'...포식자.'
종(種)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른 '영역'에 있는 인간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인간이라면 노엘이나 카티야 정도겠지.
하지만, 그런 인간들과 비교해도 이쪽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무섭네.'
그를 배려해서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기운을 감춰놓고 다니는 노엘과 카티야와 달리, 이쪽은 애초에 숨길 생각이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쪼그라드는 느낌. 특히나 앞의 둘에 비해서도 특히나 압박감이 강한 느낌.
'이런 사람한테서 싸움을 배울 거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전에 에이든이 내건 조건은, 이 사람이 이루지 못한 '경지'를 자신이 대신 밟아주겠다는 것.
그것을 위한 단계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매일 밤, 에이든의 '꿈'에서 펼쳐지는 심상 세계에서 1:1로 지도 편달을 받는 것이다.
그 사람의 머릿속에 구축된 세계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으니까.
"그래서, 네가 내건 그 조건 말인데.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만 묻자."
마이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에이든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솔직하게 말하자. 너 뭣도 없잖아."
"...."
"다중 이능 다룰 수 있는 건 알겠는데, 그딴 건 일단 다 떼놓고. 너 직접 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식칼 하나만 있어도 3초 안에 10번은 죽일 수 있겠는데."
이 사람, 빈말을 하는 재주가 없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점인데. 너, 별로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 보이거든."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싸우는 거 자체를 별로 반기지 않는다고. 너 험한 일 생길 것 같으면 일단 튀고 보는 사람이지?"
세상에.
"유령이 되면 독심술이라도 생깁니까?"
"대륙에 있는 이능 운용법의 절반 이상을 내가 정립했다, 이 코찔찔아. 제자로 받아본 놈이 한두 명인 줄 알아? 척하면 착이지."
그렇다고 알고 있기는 하다.
지금도 대륙구급 영웅인 여명의 기사지만, 심지어 그런 무용담의 대부분은 '축소'된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내 에이든을 구석구석 진단한 마이어가 내린 평가는 에이든으로서는 꽤 의외인 내용이었다.
"...그런 놈이 대체 이런 이능은 어떻게 들고 있는 건데?"
"예?"
"내가 다중 이능 쓰는 놈은 여러 명 봤지만, 이능과 이능을 '섞은' 놈은 처음 본다. 어떻게 한 거야. 신들한테 사기라도 쳤어?"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나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이런 개 씨-"
쌍욕을 성대 아래로 걷어차 내린 게 분명한 마이어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능은 신들의 고유 영역인데, 그게 섞이는 게 말이 되냐. 지금까지 네 주변에서 난리가 안 난 게 더 어이가 없다. 아니, 하-"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제 정보를 열심히 은폐 중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그냥 이 시대의 이능 이해도가 그것밖에 안 된다는 반증이니까. 나 때였으면 너 지금쯤 산 채로 잡혀서 해부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뭐가 대단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이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에이든이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느닷없이 이런 고평가가 떨어지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뭐, 그래. 당장 이거면 어딜 가도 위력이 모자라진 않겠지. 이능 운용법은 한참 나중에 배워도 돼."
"나중에 배워도 된다구요?"
"정확히는 나도 네놈 연구 좀 해봐야 한다고. 이런 건 나도 처음 봐서. 당장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건 또 상상도 못 한 상황이다.
하지만.
"...뭐라도 다른 건 없습니까?"
당장 스펙을 하나라도 더 올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마이어를 그렇게 닦달할 수밖에 없다.
♠ Main Quest
◈ 제1막, < 제도 균열 >
▶ 곧 1장이 진행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진행됩니다. (D-4)
...또 메인 퀘스트의 진행이 성큼 다가와 있는 게 문제다.
물불 안 가리고 빠르게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시시각각 그를 옥죄는 상황이지.
"음...."
그런 요구에, 마이어가 턱을 긁적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기는 해."
"정말요?"
에이든이 반색하며 웃자, 마이어도 마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볍게 몇 번 죽어볼까."
이어, 그가 손을 수평으로 그었다. 힘도 들이지 않은, 휘적이는 것에 가까운 동작.
그리고.
...그 경로에 걸려 있던 에이든의 목이 통째로 날아갔다.
"...?"
잘려 나간 머리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야가 검어진다. 죽는다-
"-?!"
이어.
눈을 감았다 뜨자, 그런 감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에이든이 헐떡거리며 몸을 살폈다. 목은 여전히 멀쩡히 몸에 붙어있다.
하지만.
'...방금.'
그는, 확실하게 한 번 죽었다.
방금 목이 잘려 나가 바닥을 구르던 감각이 생생하다.
"거짓 감각이야. 심상 세계에서 죽는다고 현실의 육체에서는 아무런 이상 없어. 그렇게 '돌아올' 수도 있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에이든에게, 그런 말이 툭 떨어졌다.
"뭐, 방금 그게, 대체 무슨-"
"솔직히 말해서, 너 지금 시작점에도 못 서 있는 상태라. 피하고 살이 튀는 과격한 상황 자체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거든."
마이어가 몸을 풀며 그런 말을 서글서글하게 꺼내 들었다.
목소리에 담긴 건 초보자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는 다정한 기색에 가까웠지만, 이어지는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계속 죽으면서 싸워봐야지."
"...."
"일단 싸움 '자체'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야. 평화에 찌든 정신부터 빠르게 무장시켜야겠지?"
"...잠깐만요, 선배님. 그거 맞습-"
"이론이고, 기술 교육이고, 당장은 이게 가장 효율이 좋아 보이니까...."
마이어가 여전히 큼지막한 미소를 건 상태로 그런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 정다운 미소가 에이든에게는 숫제 악마의 미소로 보이는 형국이었지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살아남아 봐, 후배."
그런 문장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 죽음이 에이든을 덮쳤다.
▣
"...에이든 씨."
느닷없이 툭 떨어지는 문장에, 에이든이 퍼뜩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노엘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이 핼쑥하다. 안색도 새파랗고, 하루 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어젯밤 종일 마이어에게 시달리느라 이 꼴이 되었다는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편찮으시면 침실에 드시지요. 굳이 집무실에 나와 계실 필요는...."
"...괜찮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몸에는 이상이 없다.
그냥, 어젯밤 하루 종일 마이어한테 난도질당한 기억이 워낙 끔찍할 뿐이지.
'...젠장맞을 양반이야.'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떠올라 있는 창을 노려보았다.
-System Log
▶ 과격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전투의 경험이 새로 쌓입니다.
▶ 전투 경험을 쌓아 각종 유파의 기술을 익히세요!
▶ 2개의 유파의 기술을 더 익힐 시, '투로'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어제 하룻밤에만 못 해도 열댓 번은 넘게 죽었지만, 그 덕분인지 새로운 능력이 개방된 상태였다.
'이거 분명히....'
스킬과는 따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스킬은 보통 직접 '사용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라면, 투로는 캐릭터가 직접 쌓아 올린 경험의 총체로 나타나는 능력이다.
따지자면 직접 사용하는 액티브 스킬과 상시 유지되는 패시브 스킬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복사'할 수 있는 스킬의 종류가 한 가지 더 늘어나는 셈이니,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원래대로는, 그렇게 해야 할 일이지만.
'죽을 것 같아....'
오죽하면 노엘이 먼저 걱정하는 말을 꺼내 들지 않았는가.
이전에 만찬회에 다녀온 뒤로는 어쩐지 서로 서먹서먹해서 뭐라고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
에이든이 입가를 슬쩍 비틀며 입을 다무는 노엘 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괜찮다고 말을 자르자마자, 뭐라고 말을 더 붙이는 대신 곧바로 시선을 휙 돌려버린다.
이 이상 뭐라고 더 말을 섞고 싶진 않다는 듯이.
뭐라고 해야 하나.
아예 최근 들어서 그와의 접촉을 일정 이상으로 이어가지 않으려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Quest Info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
그런 급변한 태도에 맞물려서 여기 적혀 있는 내용을 보니, 뭔가 확실히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 확실한데.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제복 모자를 벗어 들었다.
'이크.'
너무 사양 없이 뚫어져라 쳐다봤나. 화라도 내려나 싶어서 몸을 움찔하자니, 노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든 씨."
"예?"
"달리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오전부터 내내 상태가 안 좋지 않으셨습니까."
"...."
"말하기 어려우신 내용이라면 저도 기다리겠습니다만...."
...아니.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평소엔 아예 접촉을 피하는 주제에, 또 이럴 땐 세상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도와주겠단 소리를 꺼내 든다.
'그럼, 뭐.'
당장 부탁할 거라면 있지.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습니까?"
그의 부탁을 들은 노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되물었다.
"검술...을 가르쳐드리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은데. 무슨 바람이 부셨답니까? 그런 기술은 별로 신경 안 쓰시는 분 아니었습니까."
"...살고 싶어서요."
"...."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표정이 노엘에게서 돌아왔지만, 에이든도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짜낸 변명이기는 했다.
당장 이제부터 매일 밤 마이어에게 죽어라 쥐어 터지는 게 일상이 될 예정이다. 뭐라도 반항할 거리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딴 것보다....'
노엘이 게임 안에서 수식되는 단어 몇 가지를 떠올려보자면, 사자심, 제국 최고의 기사, 그리고 '검의 명인'이다.
어젯밤 수십 번 그의 목을 날려버리던 마이어처럼 검술만으로 세계관을 찜쪄먹던 괴물까진 아니더라도, 그녀의 검술 실력은 초인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란 소리지.
투로 카테고리를 열 조건도 충족시켰겠다, 그걸 배울 수만 있다면 굳이 사양할 이유도 없다.
"...."
그런 사실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노엘이 이마를 쓱쓱 쓸어 넘기는 게 눈에 들어온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의 제안에 깊게 고민하는 기색이다.
"...그, 에이든 씨."
"예?"
"검술 지도라는 건, 1:1로 지도 편달을 받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러니까, 단둘이서만 진행하냐는 뜻입니다."
"...."
글쎄.
에이든으로서도 그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거 중요합니까?"
"중요합니다."
"...."
"중요한 요소입니다."
진짜 중요하다는 것처럼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는 노엘의 모습에, 에이든이 볼을 긁적거렸다.
"...그렇게까지 중요하면 1:1로 진행할까요?"
"...."
이 말에 이번엔 노엘이 입을 꾹 다물며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대체 뭘까.
"...적극적이시네요."
"...."
"저야, 일단은 괜찮습니다만."
"...네,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의문에 에이든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뭐야. 뭐야뭐야뭐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노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이든과 그녀는 집무실에서 거의 단둘만이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하고, 타인도 그런 상황을 존중해서 함부로 이 안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
노엘 경의 부관 역을 하고 있는 스텔라 경도 그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선을 지키는 편이지.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노크 한번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올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단 소리다.
"...저하. 지금은 에이든 씨와 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에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부관 역으로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어떻게 그래?"
카티야가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답하자, 노엘의 눈썹이 확 휘는 게 눈에 들어온다.
아까 전이 그냥 표정이 굳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험악하다고 불러도 될 만한 수준이다.
'...앙금이 다 풀린 건 아닌 모양이구나.'
해묵은 감정이 아직 다 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에이든이 단번에 그렇게 확신할 정도로 미묘한 기류가 서로 흐르는 모습이다.
"...에이든 씨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저하가 아니라. 그쪽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어, 그래도 난 신성 다루는 쪽에선 따라올 사람이 별로 없는데? 저 녀석도 검술 같은 구닥다리보다는 고귀한 힘을 다루는 쪽에 관심이 있지 않겠어?"
노엘이 표정이 아까보다 한층 더 험악해졌다.
이어, 그녀가 책상 위로 두 팔을 올려놓으며 턱을 받쳤다.
그 표정에 걸려 있는 것은, 흡사 전투에 임할 때나 보여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다.
"왕녀 저하. 이전에 사고 치신 것을 법정에 데리고 가지 않으신 것만 하더라도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할 입장이신 것 같은데요."
"...으음?"
"저희들의 일에 웬만하면 끼어들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단 소립니다. 에이든 씨를 괜히 피곤한 일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
그 말을 들은 카티야가 씩 웃었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는 에이든의 등골이 괜히 싸해질 만치 의도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자기 태도도 똑바로 못 정한 주제에. 독점은 하고 싶나 봐?"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비트는 카티야의 모습에, 노엘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뭐, 좋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그렇게까지 오만하게 구시니, 분명히 에이든 씨에게 도움이 될 자신이 있으시단 소리겠죠."
"음-?"
"한번 해볼까요. 저희 둘 중 누가 더 '지도 교사'로서 적합한지."
선언하는 것 같은 문장이 이어 떨어졌다.
"지는 쪽은 다른 쪽이 에이든 씨랑 뭘 하건 끼어들지 않는 겁니다."
"...."
카티야의 표정이 비틀렸다.
노엘이 이렇게 대놓고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단 기색이다....
"...재밌는 소릴 하네."
카티야가 하- 하는 날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꼴사납게 패배할 준비나 하라고, 사자심."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왕녀 저하. 왕족이라고 그동안 너무 쉽게쉽게 살아오신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너야말로 이번에는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볼 준비를-"
"...."
뭔가.
또 일이 커지고 있다.
에이든이 식은땀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22화. 다툼
사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다.
노엘이든 카티야든 둘 다 자신만의 영역에서는 고아한 경지에 닿아있다고 봐도 좋을 인간들이고, 고유한 이능을 대놓고 다루는 덕분에 에이든의 스킬 복사의 '효율'을 담당하고 있는 양대 산맥이니까.
이 두 명에게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만 해도, 그의 전투 능력은 대단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마이어 벨포드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걸 받아온 상태에서.
[ '스킬: 분석'을 복사합니다. ]
이런 스킬을 가져올 수 있다면 더더욱.
◆ 분석
[ 수없는 전장을 관류해 오며 쌓아 올린 자의 시선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유파의 분석과 습득이 대단히 빨라집니다. ]
스킬 설명만 읽어봐도, 이건 오히려 절호의 기회다. 이것저것 왕창 얻어갈 일만 남아있다.
그러니까, 에이든도 이번에 뼈저리게 곱씹고 있는 교훈도 그런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렷다.
...품고 있는 재주와, 남을 가르치는 재주는 완전히 다르단 걸.
"그러니까 거기서 방어 술식을 왜 짜올리는 거야? 연합 전쟁에서는 그렇게 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어? 전쟁이 아니라 소꿉장난이라도 하다 온 것 아니야?"
"당신이야말로 대체 어디서 전투 규범을 배워오신 건지 모르겠네요. 머리 나쁘다고 자랑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 진짜 잘하는 줄 아셨나요?"
"...."
살벌한 기색으로 그렇게 치고받는 둘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정확히는, 둘 다 에이든의 '커리큘럼'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거다.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훈련장에 있는 전원이 대체 뭔가 싶어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지.
시작할 때는 그래도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갖추고 시작된 토론이, 지금에 와서는 서로에 대한 인신 공격 수준으로까지 내려온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시나리오에서도 항상 이런 식이었던가.
이 둘은,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안 맞는다.
최근 대판 싸운 것도 있지만, 그래도 서로의 입장과 환경을 고려해서 눈에 띄는 마찰은 피해가는 분위기더만.
성격적 차이라는 건 역시 극복하기 힘든 모양이다.
'뒤로 가면 갈수록 이 두 명 다 필요하긴 할 텐데.'
비틀릴 대로 비틀려서 온갖 위험이 다 튀어나오는 시나리오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에이든이 당장 신뢰할 만한 아군이 바로 이 두 명이라 그거지.
곧 있을 시나리오의 1장의 진행에 있어서도 이 둘의 도움이 필수다. 계속 이렇게 싸움이 붙으면 곤란하지.
그리고.
그런 사실을 곱씹는 에이든의 눈앞으로 문득 창이 하나 툭 튀어나왔다.
!! Sub Quest !!
▶ 중요 인물 두 명이 얽힌 거센 충돌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세요.
▶ 현재 상황을 순조롭게 대처 시, 이어지는 메인 퀘스트에 이점이 주어집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퀘스트로 만들어서 떨궈줄 필요까진 없을 텐데.
"아, 진짜! 이럴 게 아니라 그냥 각자 해보든가! 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서 그런 목소리가 날아왔다.
"...예?"
성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카티야가, 문득 주변으로 신성을 곧바로 자아내었다.
사방으로 무채색의 불꽃이 후끈하게 흘러나왔다. 연병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뒷걸음질 쳤다.
"한번 따라 해 봐!"
그러더니, 왕녀 저하께서 곧바로 그 불덩이들을 주변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이능의 운용을 통해 공격과 수비의 조화를 이루며 가상의 존재를 두고 '전투'하는 것이렷다.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이며, 가볍고 경쾌하다. 하지만 그 중간중간 실질적으로 흘러나오는 공격들은 모두 감각적이고 매섭기 짝이 없다.
얼핏 보면 그냥 얼기설기 이어붙인 동작의 모둠이지만, 주변에서 자기 단련에 매진하던 기사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정도로 번뜩이는 순발력이 그런 동작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새삼.'
이 사람, 노엘 경이랑 싸울 때는 대충 한 게 맞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영역에 닿아있는 시연이다.
"봤지?"
곧, 시연을 마친 카티야가 땀을 닦아내며 에이든을 향해 씩 웃었다.
"이제 해봐!"
"...."
장난하냐.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가르쳐 주신다면서요."
에이든이 멍하게 반문하자, 카티야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여줬잖아?"
"...."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농담인가 싶어서 그쪽을 쳐다보니, 세상 진지한 기색이다. 진짜로 한 번 보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모습이다.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신 게 어이가 없을 정도군요."
실제로 그걸 보고 있던 노엘도 한숨과 함께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더니, 에이든의 앞에서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는다.
"가장 중요한 기본자세부터 시작해서 가르쳐 드릴게요. 천천히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노엘이 에이든 앞에서 몇 차례 간단한 동작을 시연해 주었다.
디딤발, 무게중심 이동, 디테일한 시선 처리와 상체의 구도까지. 자세한 설명까지 함께 곁들여서 가르쳐 준다.
'...오.'
확실히, 아까 전의 카티야보다는 낫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한 개념은 있어 보인다.
그런 설명을 쭉 따라가고 있으니, 끝까지 천천히 조리 있게 말을 마친 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리고 설명하신 걸 그대로 이행하시면-"
그렇게 말한 노엘이 눈앞의 타격용 목각 인형을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
폭탄이 터지는 수준의 굉음.
목각 인형이 거의 가루가 나는 수준으로 산산 조각나고, 바닥에 운석이라도 박힌 것처럼 크레이터가 파이며, 그 여파로 벽까지 쩌적쩌적 실금이 갔다.
"-이렇게 됩니다."
그런 광경을 만들어 놓은 노엘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
"...."
침묵이 감도는 주변을 본 노엘이 눈치를 쓱쓱 살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
"에이든 씨도 저처럼 순백의 기를 다룰 수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요...."
주변 인물들의 표정이 점점 해괴하게 변하는 걸 본 노엘이 점점 문장을 흐렸다.
꼴을 보아하니 진짜로 이 정도 설명했으면 '당연히' 이쯤 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한 기색이다.
"...있잖아."
카티야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도 나랑 별다를 게 없는데?"
"...그런 끔찍한 모욕은 거둬주시지요."
그리고 서로가 별다를 게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자마자, 곧바로 투닥거리는 둘을 본 에이든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 도대체-'
아무리 여명의 기사의 스킬을 긁어왔다지만, 가르침이 이 정도로 엉망이어서야 뭔가를 배울 수 있을 리가-
-System Message
▶ '스킬: 분석'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유파: 일검일도(一劍一到)'의 숙련도가 쌓입니다.
▶ '유파: 성화술(盛火術)'의 숙련도가 쌓입니다.
▶ 두 가지 이상 유파의 숙련도를 쌓았습니다.
▶ '투로'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이제부터 관련 스킬을 익힐 수 있습니다!
"...."
눈앞으로 떠오르는 창을 보자마자 에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방금 그걸 보고 유파의 지식을 쌓았다고...?'
대단하다, 여명의 기사.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대단하다...!
어젯밤 그를 수십 번 죽여놓은 것도 덮어놓고 감탄할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재주다...!
그가 그런 사실에 순순히 감탄하고 있자니, 눈앞에서 한참을 투닥거리던 노엘이 속으로 뭔가를 꾹꾹 눌러 담는 기색으로 입을 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럼 여기까지 하시죠."
"뭐?"
"어차피 그쪽이나 저나 똑바로 된 스승 노릇 못할 건 뻔한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까 둘 다 에이든 씨한테서 손을 떼는 건 어떻습니까."
"...."
"저도 에이든 씨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을 테니, 왕녀님도 참견하지 않는 걸로 마무리하죠."
"...뭐?"
"평화롭게, 끝내자는 말입니다. 괜히 이 이상 싸우지 말고."
...어라.
에이든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노엘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벌하게 치고받았으면서, 이렇게 쉽게 물러설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카티야의 표정을 보자마자, 에이든은 상황이 평화롭게 끝날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은 싹 접기로 했다.
"...그러니까."
카티야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껏 나하고 싸움까지 붙어놓고, 적당한 구실이 생겼으니까 너도 발 빼고. 그런 김에 나도 발 빼라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왕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이 사람을 옆에서 지켜본 기간이 있어서 슬슬 알 수 있다.
이 사람, 지금 화난 상태다.
"-겁쟁이."
이어지는 행동 역시 그런 감상과 궤를 같이하는 폭거였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화염이 카티야의 몸에 깃든다. 그 팔을 타고 똬리를 트는 뱀처럼 휘감긴 화염이, 이내 노엘을 향해 폭발하듯 발사되었다.
물론 노엘이 그런 거에 호락호락 당할 위인도 아니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어 그걸 튕겨낸 노엘이 잔뜩 노한 표정으로 카티야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
그런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노엘의 지척에 도달한 카티야가 그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말이야."
주변으로 피어오른 화염이 똑바로 걷히기도 전에, 카티야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그 푸른 눈동자를 타고 번들거리는 적의가 노엘에게 찌르듯이 쏟아졌다.
"자꾸 저 남자 보호자처럼 구는 거, 적당히 좀 하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에이든 씨와 저는 부부가 될 사이-"
"-라고 듣긴 했는데. 옆에서 쭉 지켜보니까 미묘하거든. 특히 네 태도가."
으르렁거리는 카티야의 목소리가 노엘의 문장을 끊고 들어왔다.
"너, 저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스로도 몰라서 갈팡질팡하잖아?"
"...."
"더 이상 가까워지는 건 무섭고,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트려 놓지도 못하겠고. 애처로운 수준이야. 옆에서 보고 있으면."
"...."
"그런 주제에 전부터 자-꾸 나하고 저 남자하고 붙어 있는 건 언짢은 티나 내고 말이야. 차지할 생각 없으면 괜히 끼어들지 말고 꺼지라고. 짜증 나니까."
침묵하는 노엘을 두고, 카티야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애초에, 뭘 그렇게 저 남자를 보호하겠다고 그렇게 애를 쓰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응?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
"연합 전쟁 참가한 녀석은 다 알 텐데. '사자심' 같은 제국에서 포장해 주는 번지르르한 별명 말고, 적군이고 아군이고 다 쳐 죽인 '도살자'라는 아주 적당한 별명이-"
-다음 순간.
노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걷혀나갔다.
가만히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에이든조차 일순 위기감을 느낄 만치 급격한 변화였다.
원래 언제나 짓고 있는 그 조금 느슨한 미소 아래로 깃든 것은, 피부가 찢어지는 수준의 살의다.
"잠깐, 노엘 경-!"
에이든이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노엘의 몸에서 폭발하듯 기가 터져 나왔다.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비명과 함께 나부끼고, 바닥이 진동하고, 건물 전체가 요동치듯 진동한다.
폭풍이 치듯, 주변이 통째로 뒤집힌다.
단순히 이능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경이다.
에이든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 사람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해하기' 위할 때 취하는 태도.
"당신이야말로."
분노를 넘어 거의 귀기 어렸다고 표현해도 될 만한 목소리가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카티야의 목덜미를 움켜쥔 노엘이, 그대로 그걸 붙잡아 바닥에 내려찍었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바닥이 뭉개진다. 작은 크레이터가 생성될 정도로 과격하게 카티야를 바닥에 쑤셔 박은 노엘의 동공에는 흉포함이 가득하다.
"제멋대로 세상 사는 이기주의자시면. 다른 사람 휘말리게 하지 말고 혼자 계속 그렇게 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주제를 아셔야죠."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노엘을 보고, 바닥에 내려꽂힌 카티야가 낄낄거리며 받아쳤다.
"그래, 이제야 원래 성격 좀 나오는-"
"에이든 씨 '본인이'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주제에."
"...뭐?"
"애처로운 건 당신도 똑같다는 말입니다. 남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할지 똑바로 파악도 못 하는 모습이."
"...."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에, 마음대로 주변을 휘두르고 다니며, 배려 하나 없는 인간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
"에이든 씨한테 민폐라구요, 당신. 아시겠습니까?"
카티야의 입이 뚝 다물렸다. 얼굴이 멍하다.
노엘의 말대로, 그런 관점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기색이다.
"그러니."
그런 카티야에게 노엘이 다시금 으르렁거렸다.
"당신이야말로, 에이든 씨한테 괜히 접근하지 마세요."
거기까지 말한 노엘이 카티야의 머리를 바닥에 꽂아버리기 전에.
"-그만!"
어떻게든 노엘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을 뚫고 달려온 에이든이 노엘의 몸을 잡아끌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
그 손이 몸에 닿자마자, 노엘이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 바깥으로 빠져나온 기가 순식간에 몸 안으로 회수된다.
"...."
그녀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된 훈련장 내부, 놀란 눈으로 본인을 쳐다보는 사람들, 그리고 헐떡거리며 자신을 끌어낸 에이든을 차례로 확인한 노엘이 피가 나오도록 이를 악물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급하게 주변으로 나뒹굴던 제복 모자를 주워 들었다.
이어서 도망치듯 훈련장 바깥을 나서는 노엘을, 에이든이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로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 시선이 바닥에 처박힌 상태로 여전히 멍해 있는 카티야에게 가서 꽂힌다.
어지간히 충격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계속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마치 상기하듯 다시금 한 번, 창이 떠오른다.
!! Sub Quest !!
▶ 중요 인물 두 명이 얽힌 거센 충돌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세요.
▶ 현재 상황을 순조롭게 대처 시, 이어지는 메인 퀘스트에 이점이 주어집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이거.
괜히 떠오른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만이, 에이든의 머릿속을 두들겼다.
23화. 수습
제국 군부 안에서 노엘 경이 차지하는 위친 그야말로 절대적이라 봐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예 없냐고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수는 적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그녀의 적으로 돌아선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시기, 질투, 내지는 군부 내부에서 반대 파벌에 속해있다가 경쟁에서 밀려난 인간들....
아마, 이 방 안에 있는 인간들은 전원이 공감할 이야기일 것이다.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레반트 경, 일명 '대장 늑대'라고 불리는 기사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감만 듣는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별명이겠지만, 레반트 경의 앞에서 그런 별명을 말했다가는 코뼈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대놓고 조롱하는 의미니까. 명백히 사자심 '밑에 있는' 인간들의 우두머리라는.
그리고 그런 사실만으로도 레반트 경이 사자심을 싫어하는 이유는 대단히 함축적으로 설명이 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들이 '의뢰'받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지금 저희한테 대놓고 사자심의 주변 인물을 해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주변 인물은 아니죠."
품위 있다, 귀티 난다, 뭐라고 표현해도 될 그런 비단결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선선히 답했다.
귀공자, 라고 불러도 될 외모일 것이다.
꺼내는 얘기는 그런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험악한 것이었지만.
"그 부군의 호위를 치는 걸 얘기하는 건데요. 그 정도는 뒤를 밟힌다고 해도 그리 커다란 문제가 생길 일도 없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다.
이런 곱상하고 빛나는 외모 자체가 마치 독사와 같은 본성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는 생각이 물씬 드니까.
하지만, 상대가 그런 걸 티 낼 수도 없는 인간이라 괴롭다.
라드 일자 바르폰. 제국 행정장관. 황궁 서열 네다섯 번째 어딘가에 위치한 대귀족.
그런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지만, 그런 것도 묻어버리는 다른 사실 한 가지가 더 문제다.
'제2 황자의 최측근....'
그런 정보를 떠올린 레반트 경이 입가를 매만졌다.
아마, 이런 간이 대놓고 부은 사주를 하는 것부터가 그쪽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고만하실 이유가 없지 않으십니까. 제가 누구의 명을 받고 와 있을진 당신들고 알고 있을 텐데요."
"...."
"당신들이 이번 일만 잘 처리한다면, 앞으로 누구의 비호를 받을지 생각해 보시지요. 적통 황위 계승자가 지금 누구인지도 생각해 보시고."
"...매력적인 제안이긴 합니다만."
레반트 경이 찌푸린 얼굴 그대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차라리 그들에게 와서 사자심 본인에게 타격을 입힐 어떤 걸 주문했으면 모르겠는데, 이건.
'사자심보다는....'
명백히 사자심의 '부군'에게 악의를 가진 것 같은 의뢰 아닌가.
"그쪽을 타격해서 발생하는 이득이 대체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갑니다."
"어제, 훈련장에서 사자심과 그 부관이 싸움이 붙었다더군요. 들은 적 있으십니까?"
"...?"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레반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꽤 격하게 싸워서 양쪽 다 상해를 입히는 수준까지 갔는데. 그 부관 쪽은 입은 상처를 깔끔하게 '재생'했다네요. 아픈 티 하나 없이."
"...그게 무슨 뜻이신지...?"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성황국 안에 그것과 정확하게 똑같은 능력을 가진 '왕족'이 있거든요."
"...."
말이 거기까지 떨어지자 레반트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왕족을 부관으로 데리고 있다면... 글쎄요. 그것 자체가 성황국에게는 신성 모독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그쪽이 상해를 입는다면 두 배로 더 큰 일이 되겠죠."
요컨대.
성공하건 실패하건, 그 왕녀가 험한 일에 얽히는 것만으로도 꽤 커다란 사고가 된다는 소리다.
사자심의 부군은 외통수를 얻어맞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면 왕족을 시해한 저희 쪽이 더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
"무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
"성황국이 그쪽에 관심 있는 건 그 왕녀가 타고난 '왕족'이라는 지위지, 개인의 복수까지 크게 신경 쓰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적당히 무마시킬 수 있어요."
"...왕족 시해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까?"
"그 왕녀라면,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라드가 실소와 함께 말을 받았다.
애초에 시해를 받는다고 죽을 인간도 아니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 여자는 '자기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아주 특수한 인간이니까.
다른 말로.
"그 여자, 외톨이거든요."
라드의 문장이 매끄럽게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슬퍼할 사람 하나 없는."
매끄러운 것과 별개로.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날이 선 문장이었지만.
▣
-System Message
[ 서브 퀘스트의 진행 시간이 하루 남았습니다. ]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알아도 잘 안다.
훈련장 안에서 그 사달이 난 이후로 뭐라 말을 걸어도 가만히 있던 카티야가, 말도 안 하고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 버린 지 이제 딱 하루째다.
노엘 경도 자기 개인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고, 이래저래 청사 안으로는 흉흉한 분위기만 가득한 느낌이다.
'분명히....'
서브 퀘스트는 이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라고 했는데.
아마 그쪽 둘 사이를 원만하게 중재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애초에 어디 갔는지부터 찾아야 하는데.'
평화롭게 해결하고 자시고 아예 어디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은 어떻게 붙여야 한단 말인가.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이겠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저하께서는 옥상에 계십니다."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스텔라 경이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그런 문장을 꺼내 들었다.
"어제 일어난 소란은, 제 선에서 어떻게든 더 크게 되지 않게 수습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까지 제가 달래는 건 힘들어 보여서요."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잘못 접근했다가는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상태셔서, 아무도 그쪽에는 가지 말라고 한 상태입니다. 위험하겠지만, 혹시 에이든 씨가 저하를 좀 어떻게 달래주실 수-"
"제가 달래볼게요."
"...."
스텔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예."
그런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냐는 시선이 날아왔지만, 에이든이 담담하게 그걸 마주 보았다.
"...에이든 씨."
한참 그와 눈을 마주치던 스텔라 경이 한숨을 폭 내쉬며 입을 열었다.
"노엘 경이 저 정도로 감정적으로 행동하시는 건 오랜만에 봅니다. 연합 전쟁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
"당신도 참, 난 인물은 난 인물이다 싶긴 하네요. 저만한 분들이 당신 때문에 이 정도로 오락가락하니까요."
"칭찬...감사합니다?"
감사하는 문장이 이상해진 건, 그렇게 말하는 스텔라 경의 문장이 도저히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문장만 봐도 명확한 사실이겠지.
"부탁이니, 바람둥이가 안 되도록 조심해 주세요."
"...."
"나중에 노엘 경이 슬퍼할 일이 생기면, 글쎄요."
-알아서 처신하셔야 할 겁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경고와 함께 사라지는 스텔라 경을 바라보며, 에이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하지만.'
솔직히,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세계를 구한다는 업까지 뒤집어썼으면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야 한다.
애초에, 카티야를 그가 적극적으로 수습하려고 하는 이유부터가 그런 맥락이기도 하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오직 당신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유대를 쌓음으로써 새로운 보상을 얻으세요!
사람 관계라는 게, 원래 감정적으로 크게 높낮이가 있을 때 발전이든 퇴화든 있기 마련이다.
카티야와 '유대'를 쌓는다는 면에서만 보면 지금만큼 적절한 순간도 없을 거고.
"...."
...양심에 찔리긴 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 자체가 그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명확하게 함축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일부러 남의 마음을 가지고 놀 생각까진 없지만, 그럼에도 운명의 길쌈꾼이란 능력을 입수한 입장에서. 호감을 산다는 면에선 앞으로도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게 에이든의 처지다.
아직도 시스템에서 말하는 호감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찰할 거리가 많지만, 그게 남녀 간 '애정'의 형태로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건 에이든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사람은 안전할 것 같은데.'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카티야를 바라보며, 에이든이 그런 생각을 뇌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티야는 아직 남녀 간의 애정이고 뭐고 하는 이야기를 논할 그런 상대조차 아니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사람은 애초에 그런 감정이 뭔지 이해라도 할까 싶은 사람이니까.
"저하."
그쪽을 한 번 호출하자, 카티야가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이 순식간에 꾸깃꾸깃해졌다가, 이내 다시 앞쪽으로 휙 돌아간다.
뭐라고 할까.
심통 난 어린아이 같다.
"...."
에이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저런 상태라도 딱히 그를 보고 도망가거나 하진 않으니, 말을 붙이기에는 적합한 기회일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옆에 다가가 난간에 걸터앉을 때까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하고.
"왜 그렇게 기분 나빠 계세요."
"...저리 가."
"노엘 경이 그렇게 말한 거 신경 쓰고 계세요?"
카티야가 딱 소리 나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렷다.
에이든이 고소를 더욱 진하게 머금으며 말없이 카티야 옆에 죽 걸터앉았다.
이 왕녀를 알고 지낸 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여태 행동 양식을 보고 있으면 확실하게 떠오르는 감상은 있다.
'애 같단 말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기 멋대로 휘두르려는 주제에 그게 마음대로 안 되면 화부터 내는 점에서 그렇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것은 가끔 송곳처럼 날카로운 주제에, 자신의 감정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지.
"...."
그런 성격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제국에 들어올 때부터 혼자 멋대로 수행원 하나 없이 입국했고, 제멋대로 여기에 체류하고 있는데도 성황국에서는 그녀를 돌려달라거나 더 챙겨달라거나 하는 정상적인 요구조차 하나 없다.
마치,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기색으로.
성황국 내부에서 카티야의 취급은 그런 것이다.
배경 설정만 좀 생각해 봐도, 카티야는 원래 메인 시나리오 편입 전까지 제대로 된 친구는커녕 지인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도 없었다는 부연이 붙어있었던가.
괴짜. 괴물. 이물. 혐오스러운 것. 공포의 대상.
다른 말로, 외톨이.
똑똑한 것과 별개로, '인간관계'는 살면서 한 번도 똑바로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될 계기조차 없었단 소리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처음으로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 바로 에이든 자신이다.
상태창에 표기된 그녀의 호감 형태가 집착인 것도 이해가 간다.
자신 말고는, 그녀가 세상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대상 자체가 아예 없을 테니까.
"...왜 왔어."
그리고 이 음울한 목소리는, 그런 대상에게 자신이 미움을 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반응이리라.
에이든이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상태 보러 왔죠. 하도 안 좋아 보이시길래."
"멀쩡해."
"확실해요?"
"...."
"그럼, 저 갑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카티야가 그를 샐쭉하니 노려보았다.
"...나."
그런 말만 꺼내놓고 한참을 침묵하던 카티야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방해만 되는 인간이었어?"
"아뇨."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건 너무할 것이다.
당장 에이든이 요구하는 건 그녀도 지금까지 군말 없이 다 들어줬으니까.
"...그럼 그 여자가 헛소리한 거야?"
"아뇨. 민폐는 맞는데요?"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수긍하는 에이든의 모습에 카티야의 표정이 그대로 벙쪘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에이든이 다시 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역으로 여쭙는 건데. 상식적으로 그게 민폐가 아닙니까?"
벙찐 카티야에게, 에이든이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문장을 툭툭툭 떨어트렸다.
그녀가 그의 부관을 맡겠다고 한 뒤로 생활에서 그가 겪은 온갖 불편함이 후두둑 떨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뭔가를 느껴보고 싶으니까 한 번 죽여달라 그러고."
"...."
"사생활 보장 하나도 못 받을 기색으로 졸졸졸 따라다니고."
"...."
"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수준이었는데요?"
"...."
카티야의 표정이 점점 더 해괴해지는 동안, 에이든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품을 하면서 추가적인 걸 줄줄이 덧붙였다.
악의가 없는 거면 모르겠는데 다 알고 생각할 수 있으면서 민폐 끼치고 다니는 게 더 악질이다, 제발 주변 사람 신경 좀 써라, 청사 안에서도 당신 때문에 사용인들 민원이 자자하다....
"...그러면."
한참 동안, 평소의 그 제멋대로인 기색이 전신에서 주욱- 빠지고.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계속 말로 얻어맞던 카티야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평소의 모습이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이지만, 눈가에 물기가 조금 올라와 있다. 에이든이 줄줄이 꺼내놓은 사실에 진짜로 마음의 상처라도 입은 기색이다....
"나, 너한테 필요 없다는-"
"그러니까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카티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상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기색에, 에이든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용서받는다'라는 행위 자체를 상상도 못 했다는 기색을 보면.
이 인간이 성황국에서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대충 알 만하다.
"...."
생각해 보면.
메인 시나리오 제2장, '신성 모독'은 그런 카티야의 외톨이라는 특성에서 촉발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사건을 통째로 비틀어버리는 복선을 꽂아버린다.
"친구끼리 민폐 좀 끼칠 수도 있죠. 앞으로 안 그러기만 하면 됐지."
사실, 왕족한테 에이든 같은 인간이 친구 먹겠다는 말 자체가 불경죄지만.
그럼에도, 에이든이 확고한 어조로 문장을 끝맺었다.
호감도를 올려서 스킬을 복사해 오자는 의도도 있지만, 여러 의미에서.
오히려 이 사람한테는 그런 관계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윽고, 그런 말을 들은 카티야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더욱 해괴해졌다.
"...친구?"
'친구'라는 말을 무슨 구두 뒷굽을 구워 먹는단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발음한다.
일생 이런 단어는 처음 들어보고 말한다는 기색으로.
"친구."
"...너랑, 나랑? 친구?"
"친구."
쐐기를 박듯 그런 말을 반복해서 주지시킨 에이든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조그마한 힙 플라스크다. 에이든이 가끔 쓰는 물건.
선물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맨입으로 또 이런 말 하기엔 뭐하니까 그냥 넘기는 거다.
"이건 증표."
"...."
카티야가 여전히 해괴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그걸 받았다.
"카티야."
"응."
"친구니까, 저랑 약속 하나만 해줘요."
"...."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싸움 걸고 다니지 마세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 상처 입힐 짓도 하지 마시고."
"...."
"노엘 경한테도 그렇게 싸움 건 것, 나중에 사과하시고."
"...."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알았어."
카티야가 몸을 웅크리며 힙 플라스크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알을 품는 어미 새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지킬게."
...뭐.
일단, 말은 제대로 들어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믿을게요."
에이든이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말하자, 카티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지 않게도, 얌전하기 짝이 없는 기색이었다.
▣
-System Message
▶ 당신에 대한 대상 '카티야'의 '집착' 단계가 2단계로 격상합니다.
▶ 스킬 '운명의 길쌈꾼'이 발동합니다. 스킬을 추가로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대상 '카티야'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대상 '카티야'의 심경에 당신으로 인한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미래 개변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 대상의 '개별 퀘스트'가 곧 추가로 열립니다.
▶ 고유 특성 '근원'의 정보가 개방됩니다.
"...."
하나만 해라, 하나만.
친구 약속 하나 먹고 왔다고 대체 몇 개가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거라면 따로 있다.
'...고유 특성?'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킬 창을 열었다.
분명, 기억에 따르면 다른 스킬과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능력이었으니까.
-Skill Info
■ 전능 [ 1단계 ]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조합하여 기존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 현재 발견한 조합
〓 수호자의 불꽃 (순백의 심장 ↔ 최초의 서원)
.
.
.
■ 근원 [ Locked ]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 능력을 개방하세요.
▶ 개별 퀘스트 [ 1/2 ]
...개별 퀘스트라.
시스템 메시지를 보면 그가 타인의 심경에 큰 변화를 일으켜서 '미래 개변' 가능성이 생기면 열리는 것 같은데.
그걸 한 개 더 열면 스킬이 개방된다는 뜻이렷다.
이능을 여러 개 섞여서 열린 전능이 그런 행동을 할 때 추가적인 보정을 주는 형태의 특성이니까, 이건 열리는 조건으로 추론했을 때....
'...다른 사람한테 뭔가 영향을 팍팍 주는 그런 종류의 능력인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확실한 건 나중에 가봐야 알겠지만.
'그보다....'
그래서.
한쪽은 어떻게 어떻게 해결된 것 같은데.
-System Message
[ 서브 퀘스트의 진행 시간이 하루 남았습니다. ]
[ 진행도: 50% ]
"...."
에이든이 살짝 찌푸린 눈으로 그런 창을 노려보았다.
왜 절반밖에 진행이 안 되어 있을까.
'...노엘 경도 위로하라고?'
카티야야 원래도 좀 정신 연령이 어린 느낌이었으니까 달래줄 필요성이 있다곤 생각했는데.
노엘까지 이런 게 필요하다는 건 또 의외다. 대체 상태가 어떻길래.
"...내 팔자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카티야와 달리, 노엘이 어디 있는진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개인실 앞에 도달한 에이든이 문을 똑똑 두들겼다.
"노엘 경, 에이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고개를 갸웃거린 에이든이 슬쩍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마자, 알코올 특유의 날카로운 향취가 비강을 쑤시고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안면을 뒤덮는 느낌이 들 만큼 짙은 농도의 냄새가 풍기자, 에이든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본인도 퇴근 후 맥주 한두 캔 정도야 자주 즐기는 편이지만, 이렇게 방 안에 냄새가 자욱할 정도로 마시는 건 좋다 싫다를 넘어서 천박하다고 느끼는 행위이기 때문에 지양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틀림없이 엄청나게 이질적이다.
하물며, 방 주인이 누군지 생각한다면.
"...노엘 경...?"
그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자, 이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비어있는 캔. 깔끔하게 바닥을 보이는 술병. 아마 전부 다 모은다면 모르긴 몰라도 소형 피라미드 하나를 지을 수 있을 만한 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빈 용기들이 오와 열을 맞춰 척척 정리되어 있는 모습은 노엘의 성미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기가 막혀서 잠깐 동안 멀뚱히 서 있던 에이든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 하나를 집어보았다. 들어 올린 보틀은 라벨에 당당하게 도수 50짜리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술 더 떠서 똑같은 라벨이 붙은 빈 병이 적어도 5개 이상은 눈에 들어왔다.
"...."
그가 할 말을 잃고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침대에서 누군가 꼬물꼬물 몸을 일으켰다.
"어."
불콰해진 얼굴로, 노엘이.
"헤-"
혀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에, 에이든 씨네요-"
얼굴에는 헤실헤실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
...이게 대체 뭐람.
24화. 습격
노엘 경이 술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건 예전부터 얼추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다. 당장 집무실만 해도 온갖 주류로 장식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만취할 정도로 즐긴다는 소리는 못 들어보긴 했지만.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신기한 건,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대화를 할 이성 정도는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 찰랑거리는 글래스를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생긋생긋 웃고 있는 게,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부드러운 태도다.
'취하면 사람이 좀 귀여워지네.'
평소에는 사실 경직되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하나하나 전부 빡빡해지는 느낌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니 대비 효과로 새삼 밝아 보인다.
"저...."
에이든이 뭐라고 말을 붙이려고 입을 열자마자, 그걸 자르듯이 그의 앞으로 글래스가 탕- 놓였다.
그리고 그 위로 냄새만 맡아도 독한 술이 콸콸콸 부어진다.
"에이든 씨도, 한잔?"
"...사양하겠습니다."
"아, 왜요-!"
"...."
정정하자.
귀여워지는 게 아니라, 그냥 술버릇이 끔찍할 정도로 안 좋은 부류인가 보다.
교과서에 박은 것 같은 모범 군인처럼 인생을 사는 것의 반작용인가.
그래도 그 이상으로 뭐라고 강권하지는 않고, 대신 에이든 몫으로 내려둔 잔을 통째로 자기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은 또 이 사람답다 싶다.
절대로 선은 안 넘는, 심성 자체가 유하고 선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호인.
"어제와 오늘은 별일 없으셨습니까-?"
"...예?"
"에이든 씨는, 제가 데려온 사람이니까- 책임도 제가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일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끔찍할 정도로 만취한 주제에, 꺼내는 말이 이런 종류인 것까지 그런 감상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노엘 경."
"예에-?"
"도살자라는 말을 대체 왜 듣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솔직하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도저히 안 어울리는 그런 멸칭은 어쩌다 얻었는지.
...노엘 경의 동작이 그대로 뚝 굳었다.
'실례긴 하지.'
생각해 보면.
만찬회장에서 황자도 그녀를 압박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고, 카티야도 노엘의 신경을 대차게 긁기 위해 꺼내든 수단이 그거다. 듣기만 해도 본인에게 불편한 말인 건 틀림없다.
그리고 어떻게 물어봐도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면, 에이든은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편이었다.
"...."
몸을 굳힌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던 노엘 경이 이윽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장에서, 제가 가장 많이 죽였거든요."
"군인으로서는 명예로운 일 아닙니까."
"누구든 죽였으니까요."
"...."
"무기를 들고, 전투를 이어가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노엘이 뒷말을 흐리며 다시 글래스에 술을 부었다.
...행간에 생략된 문장이 뭔지는 알만 했다.
상상이 간다.
연합 전쟁은 대륙의 모든 국가가 존망을 걸고 달려든 역대급 총력전이었고, 패전 위기에 내몰린 절박한 국가가 가장 먼저 잊어버리는 것은 인륜과 도덕이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그런 국가가 무슨 짓을 저질렀을진 안 봐도 뻔하다.
훈련도 똑바로 받지 못하고 내몰린 징집병.
원래 무기가 아니라 책과 연장을 들던 이들.
심지어 소년병까지 징집했다는 나라도 있었던가.
"...."
전장에 선 기사로서, 노엘은 그들 모두를 베어 넘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자심.
언제나 전장의 최선두에 서서 적진을 깨부수는 기사에게 수여된 존칭.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인간 백정 노릇을 누구보다도 잘 수행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들을 때마다 태도가 바뀌는 '도살자'라는 멸칭은, 그런 상처를 후벼서 소금을 뿌리는 느낌일 테고.
이렇게 진탕 퍼마시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잊고 싶었던 것들이, 기억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악몽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테니까.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노엘이 다시 술을 콸콸 부었다.
에이든의 눈이 노엘의 손끝에 가서 매달렸다.
"죽는 사람만, 늘어나니까...."
부들부들 떨린다. 간신히 힘을 주는 기색이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다. 눈가도 계속해서 경련한다.
그렇게 술을 퍼부어도 여태 버티더니, 이 화제를 꺼낼 때는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어하듯이.
"...차라리, 모두가 절 두려워하면, 항복하는 이들이라도 늘어나니까-"
사자심. 용맹한 인간 백정. 덤비는 자는 모두 죽이는 도살자.
"가장 먼저 달려가서, 가장 많이 죽여서,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를 끝내서, 죽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어서-"
스스로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한 기색으로, 노엘이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수전증이 온듯 덜덜 떨리는 손은 멈출 바를 모른다. 글래스에 콸콸 부어지는 알코올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저, 그, 그러니까-"
"예."
술이 넘치기 직전에, 에이든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
노엘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고생하셨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신도 똑바로 못 차리신 상태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마무리하겠습니다."
황자가 이전에 말했듯.
전쟁이라는 환경 안에서 노엘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황자와 그녀의 스승 되는 존재인 호국경과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의도와 행동에서 에이든이 내릴 결론은 한 개밖에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
"저는 다른 말씀은 드릴 수가 없네요."
노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한참이나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한참.
한참이나.
머릿속이 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감사합니다."
잔뜩 겸연쩍은 목소리로 그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아니, 잠깐-"
에이든이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노엘이 독주로 가득 찬 잔을 그대로 목 안으로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지금이 미묘한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치 스스로 의식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한 의지로 가득 찬 짓이렷다....
"...."
실제로 그게 결정타였는지, 의식을 잃듯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는 노엘을 본 에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든 씨-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런 잠꼬대를 웅얼거리는 노엘에게, 에이든이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하이고."
카티야가 대놓고 정신 연령이 어리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한테 너무 엄격해서 탈이다.
에이든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청소나 좀 해드려야겠다.'
아마, 평소 이미지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일 것이다.
▣
-System Message
▶ 서브 퀘스트를 슬기롭게 대처합니다.
▶ 대상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 유대 단계가 5단계에서 6단계로 증가합니다.
▶ 스킬 복사 횟수가 1회 추가됩니다!
▶ 쌓인 유대 관계가 충분히 높습니다.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곧 변화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취중 나눈 대화라도 노엘의 기분을 풀어주는 덴 꽤 도움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란 거다.
'...노엘 경만 3장이네.'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복사권을 쌓아두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쌓인 게 벌써 3개다.
카티야도 2개, 아직 사용하지 않은 황자의 스킬 복사권 1개, 그리고 아직 개방되지 않은 '스킬 상점'까지 합한다면 아직 성장할 여지야 많이 남았다고 봐도 좋겠지.
'이 정도면....'
곧 있을 제1막, 유령 기사 소동을 대처할 '재료'는 얼추 다 모았다고 보는 편이 좋다.
그 재료들을 요리할 '솜씨'- 즉, 전투 기술은 아직 한참이나 미숙한 상태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점은, 그것도 그럭저럭 성장하는 낌새가 보인다는 점이다.
"-좀 덜 죽네?"
마이어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거뒀다.
방금 에이든을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치고는 상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오늘은 80번 근처로만 죽은 거 아니야?"
"...."
"며칠 만에 이렇게 빨리 느는 건 나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에이든이 말없이 바닥에 뻗어 마이어를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대처할 수가 없다.
순백의 기를 사용해 어떻게든 신체 능력을 올리고, 신성을 이용해 위협하고, 법력까지 동원해 도망가려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기는 마분지처럼 찢기고, 신성은 모닥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흩어버리며, 법력은 집중해서 다룰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접근당해서, 양단당한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진심으로 싸우고 있지 않다는 걸 전신으로 티내고 있는 주제에 그딴 짓을 하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수준이다.
"...."
웃긴 건, 이 사람이 말하는 실력이 늘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란 점이다.
첫날에는 진짜 100번도 넘게 죽었으니까.
그리고, 어째서 그런지는 에이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System Message
▶ '스킬: 분석'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대상 '마이어 벨포드'의 전투 기술이 해당 스킬 레벨과 대등합니다. 유파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 대체로 상대방의 '약점'을 분석하는 기능이 스킬에 추가됩니다.
▶ 효율적인 대응 방법이 자동으로 학습됩니다.
분석 자체가 마이어한테서 긁어온 스킬이라, 이쪽의 유파를 그대로 학습하진 못하더라도 상대법 정도는 어떻게든 계속 긁어오고 있다. 덕분에 그때그때 대처할 방법 정도는 몸에 자동으로 각인이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대로 죽으니까 학습 효율도 기가 막히게 좋은 느낌이고.
그런 모든 메리트를 취하더라도, 상대방과의 격차가 너무 압도적이라 늘 목이 날아가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양쪽으로 갈라진 몸이 쩌저적 붙었다.
심상 세계 안에서는 어떻게 죽더라도 이렇게 금방 몸이 복구된다.
처음 겪었을 땐 진저리 쳐지게 싫었지만, 며칠 동안 수십에서 수백 번은 죽다 보니 이제 이것도 그럭저럭 익숙해진 느낌이다.
"...근데, 아무리 훈련이라도 굳이 이렇게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다 느낄 필요가 있나요?"
아닌 게 아니라, 매번 모든 죽음이 생생하기 짝이 없다.
검으로 두 쪽 나는 것도, 신성에 타는 것도, 기에 몸이 터지는 것도, 법력에 의해 몸이 벌집이 되는 것도, 하나하나 전부 진짜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생생하기 짝이 없는 고통들이다.
"필요하지."
하지만, 마이어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햇병아리야. 하나 알려줄게. 내가 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기사가 되었는지 아냐?"
"예?"
"훈련이 실전보다 더 좆같을 정도로 힘들게 굴러서야."
"...."
"그렇게 지옥 같은 훈련을 하며 모든 최적화를 마친 내가 친히 1:1로 지도해 주고 있는데, 불평하지 마라. 다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아니, 뭐.
말이야 타당하긴 한데.
그는 그냥 지금 힘들기만 한 것 아닌가. 여전히 마이어에게 일도양단 당하는 걸 반복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많이 늘었다고 하는 거, 빈말 아니야."
"예?"
"내 말 믿어. 너 이제 당장 싸움 나더라도 1인분은 할 수 있을걸."
"...무슨 근거로요?"
뭐 제대로 배우는 것 하나 없이 계속 이쪽에 쪼개지기만 하는 게 대체 무슨 훈련이란 말인가.
"그래, 그게 핵심인데."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 툭 떨어졌다.
"너, 며칠 사이에 별의별 방법으로 다 죽어봤잖아. 그렇지?"
"그렇죠?"
"그만큼 여벌 목숨을 번 셈이라고 보면 돼."
"...."
"못 믿겠다는 눈으로 봐도 할 말 없어. 사실이니까."
"그냥 고문당하는 느낌인데요...?"
"아니."
마이어가 핏 웃으며 답했다.
"그냥 고문이 아니야. 가치 있는 고문이지."
...고문이라는 건 이 인간도 인정하는구나.
▣
그리고 매일 밤 그런 경험을 하며 보낸다면, 자연스레 이런 말이 날아들기 마련이다.
"에이든 씨. 밤에 잠은 제대로 주무십니까?"
집무실에서, 노엘 경이 걱정스레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에이든을 보면 누구나 걱정이 될 테니까.
"...예, 어떻게든."
"불편한 점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든 개선해 드릴 테니까요."
"...괜찮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못 도와주는 일이니까.
아무리 죽지 않는 걸 알고 있고, 가상의 감각이라는 걸 알더라도, 그런 경험을 계속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매일 한계까지 가는 느낌이다. 말라비틀어진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에이든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노엘이 입가를 오므리며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 그쪽에 전달하니, 노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을 마주하기를 잠시.
대화가 시작된 김에 뭔가를 말하려는 모양인지, 노엘이 잠시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에이든 씨."
"예."
그녀가 에이든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입술을 질겅였다.
"제가 만취했을 때, 제 방에 오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있죠?"
"제가 그때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
"...주사가 고약하다는 소리는 예전부터 들었던지라."
말하는 걸 보니 그때 있었던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글쎄....'
실례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절대 안 보여줄 모습을 여러 개 보여주긴 했다.
"...아뇨."
에이든이 볼을 긁적거리며, 떠오른 감상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뭔가 걱정이 너무 많은 것 같으니, 최대한 좋게 말해주자는 심산으로.
"따지자면 귀여웠던 것 같은데요."
"...."
"노엘 경?"
"...."
"노엘 경...?"
"...."
대답이 없다.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노엘 경이 모자를 푹 눌러쓰며 자신의 책상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하지만 귀 끝까지 열이 확 올라온 모습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모습이다.
"에이든 씨."
한참 그런 모습으로 침묵하던 노엘이 뭔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거 금지입니다."
"...."
"그런 말은 되도록 삼가주시죠."
"...기분 나쁘셨나요?"
"나쁘진 않았는데 금지입니다."
"...."
"따지고 보면 좋긴 한데, 아무튼 하지 마십쇼."
왜 금지일까.
...와중에 솔직하게 좋았다고 말해주는 게 참 이 사람답다 싶긴 하다.
'생각보다 칭찬에 약하시네.'
이 사람 같은 위치에 있는데 칭찬에 약한 건 또 희귀한 케이스겠지. 하여튼 까면 깔수록 이상한 점 투성이인 사람이다....
"에이든 씨, 노엘 경!"
그런 감상에 대해 깊게 파볼 틈도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의 모습과 달리 잔뜩 급한 기색의 스텔라다.
"스텔라 경? 무슨 일-"
"카티야 저하가 실종되셨습니다!"
에이든이 식겁하며 자리를 박찼다.
25화. 습격 (2)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의 악명은 군부 청사 안에서도 꽤 자자한 편이다.
독불장군, 천상천하 유아독존, 끔찍한 수준의 행동력과 저돌성.
원하는 게 있다면 이뤄질 때까지 주변 사람들을 아예 배제한다. 방해한다면 용서치 않는다.
무엇보다 사자심의 부군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머리를 들이밀고 다닌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런 감상이 아주 절절하게 와닿는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본 이들은 가히 우주적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방긋방긋, 생글생글, 화창하게 웃으며 복도를 도도도 가로지르는 카티야의 모습은, 그렇게 수식해도 될 만큼 이질적이었으니.
"아, 좋은 아침!"
심지어 그녀에게 그런 인사를 받은 사용인 중 하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까지 쳤다던가.
원래대로는 눈만 마주쳐도 에이든과 관련된 정보를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이건 이래야 한다, 저건 저래야 하지 않느냐' 하며 들이받고 다니던 인간이 저러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
"-이히히."
심지어 이런 실없는 소리까지 흘리고 다닌다면 두려움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평소에 항상 걸고 다니던 어쩐지 보고 있으면 불안한 느낌이 드는 웃음보다는, 진짜로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표정으로.
그리고 군부 청사 안에 그런 혼란을 몰고 다니는 카티야의 품에는 얼마 전에 에이든에게서 받은 힙 플라스크가 꼭 안겨 있었다.
'친구!'
사실, 카티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스레 그런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히히히-"
다시금 누군가에게 형이상학적 공포를 선사해 주는 소리를 흘리며, 카티야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뭘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진 그녀 본인도 잘 몰랐다. 그냥 몸 안에서 활기가 넘쳐나서 잠시도 가만있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뿐.
아마.
느닷없이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뭔가'에 평소보다 조금 반응이 늦은 것도, 그렇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평화로운 풍경을 순식간에 찢어버리며 날아든, 테러 행위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과격한 행위.
썩어도 준치라고,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고개를 젖혀 그걸 피하긴 했지만 부수적인 피해까지 막기는 힘들었다.
제도 청사의 창문을 산산조각 내며 날아온 거대한 철근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총 4개. 긴 철근. 감싸듯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온갖 부적이 특징적이다.
그런 것들이 차례대로 건물을 부수듯이 날아와 카티야를 감싸듯이 사각형을 이루며 틀어박혔다.
'결계?'
제압주(制壓柱).
극동에서 제작되는 물건이다. 흉폭한 산신(山神)을 제어하기 위해 주술사들의 주력을 아낌없이 때려 박은 영물.
포효만으로 산의 표면을 뒤집어버린단 맹수를 상대로 만들어진 물건이니만큼, 대상을 '제압'하는 데엔 이것만큼 효율적인 선택지도 드물 것이다.
'-이런 걸, 나한테?'
대륙 하나를 통째로 가로질러야 겨우 그 국경을 접할 수 있는 곳에서도 귀한 물건을 제국에서 구경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걸 구할 수 있는 인간은 아주, 아주, 아주 강력한 권력이나 수완을 가진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걸 써서 카티야 하나를 정확하게 특정 지어 공격하려는 것도 이상하고.
누구한테서, 무엇 때문에?
그런 의문을 카티야가 마저 정리할 새도 없이.
-!!
-!!!!!!
그녀의 근처로 틀어박힌 네 개의 제압주가 서로 공명한다. 이윽고 그 철근을 감싸고 있던 부적들이 그녀에게 날아들어 마치 전신을 감싸듯이 그녀의 몸에 달라붙는다.
신성이 깎여나간다. 상대의 힘을 빼놓는데 최적화된 물건답게 실시간으로 이능이 약해지는 게 체감이 될 정도다.
이어, 부적과 기둥이 공명을 일으키며 근처의 공간을 통째로 '뜯어내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결계 안쪽의 카티야를 통째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게 분명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바뀐 풍경이 하나하나 인식되었다.
넓은 공터. 제도 청사에서 얼마나 멀리 날아왔는진 모르겠지만, 인적 하나 없이 드문 곳을 골랐다는 건 알겠다.
지금부터 여기서 벌어질 일은 남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렷다.
과연, 주변에는 무장한 남자들 수 명이 그녀를 에워싸고 대기한 상태였다.
"-너희들, 누구야?"
카티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대낮에 다짜고짜 납치해서, 집단 린치라도 하려고?"
"...."
"감당할 자신 있어?"
대답 대신, 그녀를 에워싼 전원의 몸에서 형형색색의 기가 확 피어올랐다.
카티야의 눈가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기사?'
분화되는 기의 색깔이 많아야 서너 개로 압축된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밀도로 기를 다룬다고 봐도 좋겠지.
연공술을 이 정도로 쌓아 올린 인간들은 기사가 아닐 수 없다. 개중에서도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진 이들이겠지.
아예 한 가지 색으로 순백의 기를 뽑아버리는 노엘에 비하면 명백한 격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또 이만한 숫자가 모인다면 그것 자체로 어마어마한 위협이다.
이윽고, 그만한 숫자의 기사가 그녀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알면서 싸움을 거는 건가?'
카티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꼬았다.
정화의 신 시어를 상징하는 수인(手印). 이어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다.
제압주에 영향을 받고, 그쪽에서 날아온 제압부가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음에도 아직 운용 가능한 이능은 한참이나 남아있다.
이런 인간에게 싸움을 거는 건,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너무 많은 양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람에, 스스로 '덜어내기도' 힘들어하는 그런 불꽃이 파괴적인 기색으로 터져 나왔다.
정확히는.
그렇게 되기 직전이었다.
"...."
그대로 신성을 휘두르려던 카티야가 멈칫하며 동작을 거뒀다.
마치, 뭔가를 그때 되어서야 간신히 '떠올렸다'는 듯이.
그사이, 그녀 쪽으로 날아들던 참격이 몸을 가르고 지나간다.
"...저항하지 않는데요?"
"...."
근처에서 날아온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레반트 경도 바이저 안쪽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건 당혹스러운 일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중으로 약화시켰고, 그걸로도 모자라 추가적인 '대책'을 몇 개나 더 들고 왔는데.
오히려 상대방이 저항할 의사가 미미해 보인다.
'...그놈 말로는 절대 쉽게 가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재수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행정 장관을 떠올리며, 레반트 경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된 일이지."
하지만 그 원인을 추측하는 대신, 레반트 경은 검을 다시금 곧추세우는 걸로 의지를 굳혔다.
아무튼.
"정보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너희들."
조금 더러운 일을 함으로써, 황자의 비호를 받고 그 짜증 나기 짝이 없는 사자심의 주변인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기회다.
"잘 죽는 인간도 아니니까, 괜히 힘 아끼지 마. 주술을 이용해 데려왔으니, 추적대는 늦게 올 거다."
상대의 상태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그들이 할 일을 할 뿐이다.
▣
당연한 얘기지만, 군부 청사 안은 유례없는 대혼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테러나 다름없는 행위가 대낮부터 이루어졌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런 혼란을 가중시키는 건 대관절 카티야가 어디로 '전송'되었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주술을 사용해 누군가를 전송하는 건 그 거취를 추적할 수 있는 인간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힘을 다뤄본 인간이 없으니까.
딱 한 명.
'어떻게든 찾아보겠다'라는 말과 함께 바로 청사를 뛰쳐나간 인간을 제외하면.
[에이든 씨, 찾았습니까?]
"어떻게든요!"
[-어떻게 하셨답니까?!]
노엘 경이 경악한 목소리로 답했다.
엘리트들이 잔뜩 모인 제도 청사에서도 엄두를 못 내던 짓을 혼자서 휙 해버렸으니까 당연한 반응이겠지.
에이든으로서도 확실히 될 거란 생각을 못 한 짓이긴 했다.
'-생각해 보면!'
카티야가 맨 처음 자신을 만날 때, 마치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걸 '알고서' 찾아온 느낌을 풍기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당시 변장하고 있던 에이든의 모습을 꿰뚫어 보기까지 했고.
관련해서 무슨 능력이 있지 않을까 해서 스킬창을 뒤져봤는데, 결과는 월척이었다.
-System Message
▶ '신성 운용: 감응'을 복사합니다.
-Skill Info
◆ 신성 운용: 감응(聖體)
신성 능력자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대상의 거취를 쉽게 추적 가능합니다!
다행히 카티야의 스킬 복사권을 두 장이나 들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급할 때 바로 써먹어도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위치 알려드릴 테니까 곧바로 지원 보내주세요! 먼저 갑니다!"
[잠깐, 에이든 씨! 혼자서는 위험-]
그런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에이든이 곧바로 신성이 느껴지는 쪽으로 뛰어갔다.
찾던 건 오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폭음. 쓸려나가는 공기. 사방에 가득한 기의 잔상들.
여러 명의 기사들이, 그 중앙에 놓인 한 명에게 쉴 틈도 없이 공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추적대? 이렇게 빨리-"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에이든 쪽으로 겨누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끝에 기가 응축된다.
이에, 누군가 급하게 그쪽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하는 것도 이어 눈에 들어왔다.
"-사자심의 부군이야. 저쪽을 직접 때리면 수습도 못 한다!"
"...큭!"
그런 말에 모두가 주춤하는 사이, 곧바로 에이든이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제치고 카티야에게 달려갔다.
"...."
아무리 공격을 중간에 거뒀다지만, 이만한 숫자의 기사가 적대적인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기색이다.
"카티야, 괜찮-"
그렇게 말하려던 에이든의 문장이 뚝 끊겼다.
카티야의 모습은, 만신창이였다.
무릎 사이로 뭔가를 끌어안은 것처럼 웅크린 자세로. 엉망이 된 옷. 온몸에 끔찍한 수준으로 새겨져 있는 자상. 가득한 피멍.
대체 여기 서서 얼마나 맞고 있었는지. 재생도 똑바로 하지 못하고 그런 상처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왜."
에이든이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며 이를 악물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맞고만 계셨어요. 자기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키실 수 있으시잖아요."
"별것도 아닌데. 나 알잖아. 아프지도 않아."
그런 말이 속삭이듯, 바닥에 깔리듯 조용하게 돌아왔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싸우지 말라고 해서."
...에이든의 동작이 우뚝 굳었다.
확실히, 카티야는 이 꼴이 될 때까지 그냥 멍하니 맞고 있을 사람이 절대 아니다.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싸움 걸고 다니지 마세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 상처 입힐 짓도 하지 마시고.
...누군가에게 얼마 전에 그런 부탁을 받았다는 걸 떠올리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기사라면.'
기사단의 가사라면, 다들 저마다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 제국 군부의 얼굴마담들이다.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최고급 인력 취급을 받는 이들.
이만한 숫자가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한다면.
그건 에이든에게, 곤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충분히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서서 맞고만 있었다.
"...."
뭐라고 꺼낼 말을 찾지도 못하는 사이, 그 몸에 코트를 둘러주던 그의 손이 카티야에 몸에 맞닿자 그녀가 몸에 전류라도 통한 듯 움찔했다.
이윽고 몸을 더욱 움츠린다. 웅크린 상태의 몸통 부분은 절대 보여주기 싫다는 것처럼.
"다쳤어요? 보여주세요."
"자, 잠깐만, 이, 이거-"
답지 않게 카티야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에이든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품을 젖혔다.
그러자, 그 안으로.
그녀가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꼭꼭 품고 있었던 물건이 그의 눈에 걸렸다.
힙 플라스크.
그가 얼마 전에 '친구의 증표'라면서 넘겨준 물건이다.
그렇게 꼭꼭 감추고 있었음에도 결국 지키는 덴 실패했는지, 너덜너덜해지고 두 쪽이 나 있었다.
"...."
에이든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카티야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카티야의 얼굴을 처음으로 살핀 것도 그때쯤이다.
어떻게든 평소와 똑같은 웃음을 지으려 애쓰고 있는.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것은 에이든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떨림이다.
그조차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불안함이 응축된.
"아직, 친구야?"
"-"
"나, 이, 이것보다는 더, 잘 지킬 수가 없어서-"
그것 때문에.
이 꼴이 될 때까지, 도망가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가만히 얻어맞고 있었단 소리인가.
이게 더 엉망이 될까 봐.
'증표'가 깨지면, 더 친구가 아니게 될까 봐 무서워서.
"-"
에이든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말을 꺼낸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예. 당연하죠."
"...정말?"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가 아직도 검을 곧추세우고 있는 주변의 기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친구로서, 나쁜 놈들한테 깽값은 좀 받아와야겠어요."
이윽고, 그의 몸 주변으로 이능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26화. 대적
무전기와 전화기도 보급이 된 시기에 수정구라고 하면 대체 뭔가 싶지만, '추적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직 이런 마도구들은 그 쓰임새가 있다.
황자와 행정 장관이 들여다보고 있는 '천리안'이라 불리는 수정구 역시 그런 용도렷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하?"
라드가 어디선가 가져온 견과류를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데스위시가 기사 여러 명에게 린치당하는 모습을 이런 꼴로 보고 있단 것 자체가 이 남자의 성격에 대해 많은 걸 시사하고 있겠지.
수정구 안으로는 카티야를 뒤에 두고 앞에 나서는 에이든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사자심의 부군까지 끼어들지는 몰랐는데요. 상황이 곤란하게 됐습니다."
상황이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치곤 여유가 아주 한껏 묻어나오는 말투였다.
옆에서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황자가 삐뚜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말투네."
"아뇨. 상황 자체는 예상 바깥입니다."
그가 의자를 여유롭게 뒤로 젖히며 말을 받았다.
"못해도 파견한 놈들 중 절반 정도는 데스위시한테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예상보다 저항이 훨씬 유합니다."
"...."
"명분이라도 생겨야 정치적 공격이 가능한데, 이래서야 말짱 꽝이죠. 이건 저도 예상하지 못했네요."
황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기서 말하는 '죽는다'는 인원은, 지금 카티야에게 집단으로 달려든 기사 무리를 말하는 거다.
본인이 파견한 주제에, 사상자가 안 생겨서 대단히 유감이란 말투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걸 상정하고 보냈다는 것처럼.
"책사보다는 독사에 가깝구나, 라드."
"칭찬은 감사한데, 아무리 우수한 책사라도 결국 결정권은 못 가진단 말이죠."
그렇게 말한 라드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정은 당신이 하시는 겁니다, 황자님. 저는 방법만 전해드리는 거고."
"...."
"그러니 말씀하시죠. 사자심의 부군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추천부터 듣지."
"치는 거죠."
황자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자심의 부군 본인이라면, 일이 잘못됐을 때 정말 뒷감당이 안 될 텐데."
"그런가요?"
"네가 직접 분석했잖아. 저 남자가 이능을 다루는 솜씨야 기괴할 정도로 뛰어나지만, 전투 기술은 초보자 수준도 안 돼. 끔찍하다고."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기사 여러 명이라고 한다면, 장난으로라도 해하면 안 되는 상대방에게 투입 시키기엔 너무 과한 전력이다.
"너무 심하게 다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지도 않고."
"무슨 근거로?"
"제압주같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까지 써서 세운 계획이었는데, 그게 저 남자 때문에 통째로 어그러졌단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데스위시가 저 정도로 온건하게 변한 것도, 분위기를 보면 저 남자 때문이다.
심지어는 절대 추격대를 안 붙이려고 일부러 주술이라는 희귀한 이능까지 사용했는데 또 혼자서 쫓아온 것 아닌가.
라드 본인이 세운 계획이 근본부터 비틀린 이유 두 가지가, 모두 저 남자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분명히.
보이는 것 이상으로 뭔가를 감추고 있는 인간이다.
"...방해될 수도 있으니 경계하자는 소리야? 대업에 지장이 될 만큼?"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죠."
딱 잘라서 결론 짓는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제 사견으로는, 저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라드가 분석한 에이든 켈러메인이란 사람은 딱 그 정도였다.
평범한. 평범하려고 노력하는. 험한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싸움에도 휘말려 본 적이 드문.
저 자리에도 어쩌다가 앉아있는, 운이 좋은 범부.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그냥 사기꾼한테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지?"
"앞으로는 신경 쓰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푸른색으로 번들거리는 라드의 시선은, 수정구 속의 에이든에게 쭉 고정되어 있었다.
"...평생 평범하게 살아온 인간치고는, 좀 '과분한' 힘을 다루는 느낌이라 말입니다."
그 홍채 안으로는, 이채를 담은 푸른 빛이 에이든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기사 여러 명이라면... 절대 이길 수는 없겠지만. 재미있는 모습 정도는 보여줄 수 있겠죠?"
▣
'-싸우라고?'
통신 너머에서 날아온 명령을 레반트 경이 당혹스럽게 확인했다.
그 주변 사람을 치는 건 몰라도, 사자심과 그 부군을 직접 치는 것의 리스크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정보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상대방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분명히-'
이능 여러 개를 사용하는 다중 능력자. 위협적이고, 강력한 특징이다.
실제로 지금 그 몸 주변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이능은 강력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전투 경험은 일천한 수준.'
일전에 부족 연합과 교류식에서 이 남자가 행한 전투 행위는 이미 유출된 정보로 들은 바 있다.
불가사의한 힘을 다루지만, 그걸 다루는 재주는 조악하기 짝이 없다. 전투 기술을 한 번이라도 갈고닦은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모습이었다.
그런 면에서.
"-죽일 생각은 없다. 그러니 쓸데없이 저항하진 말도록."
품에서 구슬 형태의 법구 하나를 꺼내 든 레반트 경이 그렇게 말하며 그걸 그대로 깨트렸다.
사방으로 반투명한 파장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 있던 모든 이능이 눈에 띄게 그 세가 꺾여나갔다.
기사들의 기도, 카티야의 몸에 깃든 신성도, 에이든이 뿜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이능도, 전부.
"-"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본적으로 그의 전투는 고출력의 이능에 의존하는 타입이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지만, 그런 것의 위력이 깎여나간 것만으로도 대단한 페널티를 안고 가는 셈이다.
반면에, 기사들의 기는 조금 깎여나가도 그들이 평생을 걸쳐 수행해 온 전투 기술은 그대로다.
원래는 카티야를 저격하여 들고 온 물건이겠지만, 그 효과는 에이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피차 싸워봤자 서로 좋은 꼴은 못 볼 테지. 얌전히 있게."
"그래요?"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죽일 생각은 없어."
적당히 다치게 하고, 흠씬 두들기고 쫒아내면 그만이다.
상대방도 두뇌가 있으면 가장 큰 강점이 꺾인 상황에서 이만한 숫자의 기사에게 덤벼들진 않겠지.
"사자심의 부군이라는 지위가 안전을 보장해 줄 거라는 생각은 접어두지 그러나. 우린 지금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들'이네. 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없는 일'이고."
"저항도 없는 사람한테 집단으로 칼 휘두르는 사람들치고는 혓바닥이 기네요."
"...불가결한 일이다."
"아무렴 그러시겠죠."
그 말을 듣자마자 에이든이, 검을 뽑아 들며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그럼 불가결하게, 저한테도 똑같이 하시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여태 뒤에서 얌전히 앉아있던 카티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만, 너 그러다가-!"
"괜찮아요."
그 문장 아래 깃들어 있는 건, 평소의 유들유들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단호함이다.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이놈들만큼은 머리통을 으깨놔야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분노.
"제가 훈련하고, 단련하고, 개고생하면서 힘을 모으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뭐 메인 퀘스트를 위해서 힘을 모으고, 성장하고, 스킬을 복사하고, 다 좋은데.
근본적으로 그가 힘을 축적하는 이유가 뭔가.
"이런 놈들 패려고 단련하는 거지."
상대가 누구건, 그 배후가 뭐건, 목적이 뭐건.
가족, 친구, 친지....
에이든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친구 뒀다 어디에 쓰게요."
"뭐...?"
"가끔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봐요."
카티야의 눈이 다시금 크게 떠지는 사이.
레반트 경이 기가 찬 기색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상대가 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모습이다.
그가 가장 근처에 있는 기사에게 턱짓했다.
"-알고 있지. 죽이진 마."
이능이 없으면 시체인 인간이다. 긴장할 필요도 없지. 적당히 제압해 버리면 끝날 일이다.
"예."
근처에 있는 인간들도 심드렁한 기색으로 검을 들었다.
이만한 인간에게 이 정도 전력을 쏟아붓는 건 명백한 과투자라는 인식을 공유 중인 게 분명했다.
이윽고, 기사들의 몸이 한꺼번에 튕겨 나왔다. 산벼락이 노호하는 것 같은 기세의 합격이 사방에서 쇄도한다.
그리고.
"...?"
그들이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다.
누구나 그런 걸 느낄 것이다. 지금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에이든의 모습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서 있다.
마치, 그래도 괜찮다는 것처럼.
아무리 이능을 억눌렀다고 해도, 평생을 전투 기술을 갈고닦는 데 투신한 기사의 움직임은 가뿐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일반인의 동체 시력으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공격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것이다.
그런데.
에이든의 시선이.
전투 경험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알려진 인간의 눈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검의 궤적을 모조리 따라잡고 있었다.
"...!"
레반트 경의 몸에 소름이 죽 돋아났다.
이윽고.
"당신들이, 여기서 있는 모든 일은 '없는 일'이라고 했으니까. 역으로-"
그런 말과 함께.
"-당신들이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의 몸이, 한순간에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에게 달려들던 인간들이 마치 마분지 흩날리듯이 사방으로 모조리 흩날리며 쓰러졌다.
"...."
"...."
침묵만이 가득한 주변으로, 레반트 경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 그대로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몸에 타격이 들어온 것도 들어온 것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방금, 무슨?'
이만한 숫자의 기사가.
한 명에게, 한순간에 제압당했다.
아득한 수준의 '역량 차이'가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현상.
'웃기지 말라고...!'
그가 이를 부득 갈면서 몸을 일으켰다.
견습 기사 때도 이런 수치는 당해본 적이 없다.
이건 틀림없이 방심해서 일어난 일이다. 다시 한번 잘 연계하면 절대로 상대방이 대비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까 그랬지? 죽이진 않는다고."
저 자리에 서서,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런 확신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다.
"마음 써줬으니까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죽이진 않을게요."
"...건방도 정도껏 떨어야-"
"그런데, 내가 겪어봐서 아는 건데요."
에이든이 풀린 눈동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끔찍한 기억을 머릿속으로 반추하니 저도 모르게 희미해지는 이성 때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얼굴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아프게 다치는 경우의 수가, 니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거든?"
주로 마이어에게. 주로 꿈속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얻어맞다 보면 차라리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만한 부상도 한 번씩은 겪게 마련이니까.
적어도 그 분야에서 에이든은 일타강사라고 할만했다....
"그러니까, 인당 하나씩은 알려드릴게. 아니면 내가 좀 억울해서 그래요."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순식간에 흐르는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할 정도니까.
그 모습을 보자마자, 레반트 경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들었고, 실제로 보았고, 여기 있는 전원이 저 남자에게 품었던 평가는 실시간으로 폐기처분 해야 할 것이라고.
뭐, 전투 경험이 일천해? 기술이 조악하다고?
'지랄도 정도껏...!'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사선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어온 베테랑만 뿜어낼 수 있는 지독함이다.
마치 죽음을 '직접' 수도 없이 경험해 봤다고 해도 믿을 만큼 지독한 압력이다...!
"큭...!"
그 압력에 견디다 못해, 누군가 앞으로 튀어나가는 걸 기점으로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제국 기사단의 집단전은 기본적으로 여러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빈틈없는 연계를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단순히 동시에 공격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대방을 확실하게 사냥하기 위해 모든 각을 빈틈없이 에워싸는 포위망.
하지만, 이번에도.
-!
-!!
검로가 한 차례 공중을 휘감자, 포위망을 형성했던 기사들의 몸이 일제히 무너져내렸다.
"뭐, 뭐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전투 중이라는 것도 잊고 그런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신묘한 기술이었지만, 정작 그런 묘기를 부린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동작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진짜로, 활약 못 하면 내가 억울하다니까...."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풀린 눈동자로 그런 말을 뇌까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지금 이런 '전투 기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가 아주 간절하게 품고 있는 감정이 뭔지는 아주 명확했다.
이럴 때 활약하기 위해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마이어에게 얼마나 끔찍한 꼴을 당해왔던가.
무력감, 고통, 절망감, 무슨 짓을 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
그러니까...!
"너희들도 좀 겪어봐...!"
"...."
"나만 당하는 건 억울하잖아...!"
"...."
뭔가 핀트가 어긋난 원망이었다.
▣
방향성 없는 분노에 휘말린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박살이 나는 사이.
황자와 라드가 동시에 할 말을 잃은 상태로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볼까요."
드물게,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 라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수정구를 톡톡 두들겼다.
초점 풀린 눈동자로 에이든이 검을 휘두르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쩐지 김 새는 겉모습과 다르게.
펼쳐지는 결과는, 그들의 얼을 빼놓기 충분했다.
"이거, 최소 10년은 넘게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이나 할 짓이죠? 기사들 상대로 일대 다를 압도한다고?"
"...재능과 경험이 아주, 아주, 아주 충만한 베테랑."
황자가 부연 설명을 붙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사실, 그의 말대로 재능과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라고 해도 이런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그도 제도 안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재능을 가진 검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광경을 잘 분석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그대로 긁어오고 있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에이든 씨가 저기 있는 전원의 움직임을 그대로 긁어오는 중이라고."
라드가 잠시 침묵했다.
방금 황자가 꺼내놓은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요?"
"사용하는 기술들이 수시로 계속 바뀌고 있어서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황자가 어지럽다는 말투로 문장을 이었다.
또 한 차례 연계해서 에이든을 쓰러트리려던 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참이었다.
"보법은 폭풍의 기사가 만든 검식인 윈드 토커(Wind Talker)...."
봄의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자유자재로 비틀리는 신체의 방향이 그에게 달려드는 모든 공격의 궤도를 교란시킨다.
"하체에는 봄의 방랑자가 자주 쓰던 부초(浮草)...."
흔들리는 풀처럼 부드러운 무게 중심의 전환이 봄의 산들바람과 결합되어 현란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검격에 담긴 궤도는 어스름의 자객이 만든 현월(弦月)...."
간결하고 정직하지만 그만큼 회수가 빠르고 묵직한 직선 궤도의 검격.
"...그런 것들을 전부 한꺼번에 써먹고 있다고."
"그런 기술들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긁어왔다는 게 무슨 소리-"
"저기 있는 기사들이 쓰는 기술이야."
"...예?"
"제국 기사쯤 됐으면 서로 익힌 검술 체계가 다른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거든. 각자 이론을 정립하고, 실전으로 갈고닦고, 저마다의 경험을 녹여서 만들어지는 게 유파니까."
그래서, 결국에.
같은 기술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쓰는진 누구나 천차만별로 갈라진다. 그래서 같은 검술을 배우더라도 저마다의 지문 같은 흔적들은 남기 마련이다.
그들의 검술 인생, 전투 경험, 이론과 노하우가 녹아들어 있는, '비기'라고 불러도 될 만한 움직임들.
"-그게 전부 다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한순간에."
그런데.
지금 에이든이 사용하는 기술들은.
전부 에이든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이 쓰던 움직임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이 일생을 걸쳐 쌓아 올린 업적을 그대로 '분석'해서, '복사'해 버리고 있다.
...설명이 안 된다. 어떤 기술을 쓰더라도,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거기에.
가장 어이가 없는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 신묘한 전투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저 남자가 기사들을 상대로 이런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걸 완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에이든의 신체 능력이 저들보다 월등히 강하냐? 빠르냐? 대단하냐?
아니다. 이능이 신체 능력을 보조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신체 조건만이라면, 저기 있는 기사 한 명만 하더라도 에이든 같은 이가 한 트럭이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기사들은 에이든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박살 나고 있는가.
'...어떻게.'
황자가 혼이 나갈 것 같은 눈으로 에이든의 움직임을 훑었다.
'전부 다 정답이지?'
전투의 순간에서, 찰나와 콤마 초 이하 단위에서의 판단만으로 생사가 결정되는 그 갈림길에서, 저 남자가 내리는 판단은 전부 다 '정답'이다.
검이 뻗아나갈 궤로를 선점해서 피한다. 합격으로 날아올 공격은 튕겨낸다. 비틀어 버리고, 움직여서, 반격하고, 제압하고-
그때마다, 그 순간순간마다, 가장 효율적으로 취해야 할 움직임을 망설이지 않고 골라서 선택한다. '승리'로 향해서 가는 지름길만을 매 순간마다 쟁취한다.
'-아니.'
에이든의 움직임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황자가, 곧바로 그 감상을 수정했다.
승리를 향하는 진취적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훨씬 처절한.
'승리가 아니라, 생존.'
에이든 켈러메인은.
승리를 향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모든 선택지를 피해 가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
마치, 이미 경험해 보았다는 듯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온몸으로 이미 학습했다는 듯이.
신경이 기억하는, 근육에 새겨진, 영혼에 각인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그런 움직임들을 선택하게 만드는 거다.
"-"
저 남자는.
대체 과거에 무슨 경험을 했길래, 저런 방식으로 전투에 접근한단 말인가.
황자가 잠시 할 말을 잃고 눈을 감았다.
"...."
이윽고, 그가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라드."
"예."
"저 남자, 조사했을 때 아무것도 안 나왔었지."
"...그랬죠."
"다시 조사해."
"...."
"평범한 사기꾼일 리가 없어. 절대로. 어렸을 때부터 뼈를 깎고 살을 찢는 수준으로 훈련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제가 한 정보 수집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처음으로 틀린 게 이번이네. 명령이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와."
이번엔, 라드가 침묵할 차례였다.
그가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골몰하는 사이, 황자가 가라앉은 눈으로 수정구 안쪽을 살폈다.
'...어디서 튀어나온 인간이야, 이건.'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27화. 전조
"-으으윽-"
"-거어어어억-"
"허어어어억-"
"...."
좀 심했던 것 같긴 하다.
에이든이 멋쩍은 표정으로 주변에서 인간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여있거나,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찌르고 있거나, 척추가 비틀려 있거나.
어느 쪽이든 초인 기준으로도 감당할 수가 없는 부상을 입은 이들뿐이다.
'우와.'
사실, 확신이야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륙구 영웅인 여명의 기사 본인이 '1인분은 할 거다'라고 인정해 준 상태 아닌가.
이능이 약해졌다고 해도 그 사람이 보증할 정도면 전투를 이어갈 수 있을 거란 확신 정도는 있었는데. 이 정도로 압도할 거라곤, 에이든 본인도 상상을 못 했다.
'...학습되어 있긴 하네.'
그 사람이 말했던, 죽었던 만큼 '여벌 목숨'을 벌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주 절절히 체감된다.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이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몸이, 본능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찾아간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기술을 그대로 분석하는 마이어의 스킬과 겹쳐지니, 그야말로 농락하는 수준으로 상대방을 으깨놓지 않았는가.
-System Message
▶ 전투 행위가 끝났습니다. '스킬: 분석'의 발동이 종료됩니다. 상대방의 약점 분석에 대한 보정이 종료됩니다.
▶ '투로: 일검일도'의 보정이 종료됩니다.
▶ 중요도가 낮은 유파들의 숙련도가 쌓였습니다.
▶ 스킬로 복사되지 않습니다. 포인트가 축적됩니다.
▶ 곧 '포인트 상점'이 개방됩니다. 조금만 더 모으세요!
'복사된 건... 없네.'
분석 스킬의 효과로 기사들이 쓰는 기술들 역시 관련된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는 건 가능했지만, 그게 또 다른 투로의 형태로 구체화되진 않았다.
늘 그렇듯, 메인 시나리오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인물들 것이니까 그럴 테다.
물론 그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훨씬 효율이 월등한 노엘의 투로는 이미 들고 있는 데다가, 포인트 상점의 개방도 코앞까지 떨어졌으니까.
'대체 뭘 얼마나 좋은 걸 감춰놨길래 여태 개방 안 되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에이든이 볼을 긁적거리고 있자니, 누군가 근처에서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든 씨!"
노엘의 목소리다. 에이든이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 사이에 또 달려온 모양이다.
"아, 노엘 ㄱ-"
그리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려던 에이든의 문장이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노엘의 표정을 마주하자마자, 에이든은 직감적으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화났다.
진짜 무지하게 많이.
아니나 다를까, 이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노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에이든의 양어깨를 콱 틀어쥐는 것이었다.
공업용 바이스에라도 끼인 것처럼 무시무시한 압력이 양어깨로 들어온다.
노엘의 눈동자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보이는 착각마저 생길 정도다....
"어쩌자고 지원도 없이 혼자서 뛰어가셨습니까-!"
"...."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에이든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다치는 걸 넘어서, 정말 큰일이라도 나셨다면!"
"...가만히 뒀다간 카티야 쪽이 위험해서."
"저하보다 당신이 죽을 확률이 훨씬, 훨씬 더 높습니다-!"
"...."
"아시겠습니까, 다시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저나 저하를 던져두시고 본인이 도망갈 생각을 하셔야 할 분이-!"
...아니.
기색은 마치 먹이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 같은데, 말하는 거 하나하나 들어보면 그냥 전부 다 걱정해 주는 것들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이니까.
"아뇨."
아무리 상대방이 화가 났다 해도, 할 말은 해야지.
에이든이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수는 없는데요."
"그게 대체 무슨-!"
"만약에 노엘 경이 저런 환경에 처해도 전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
"카티야나 당신이 위험할 때 도와주는 게 대체 뭐가 잘못인데요?"
둥글둥글하고 원만하게 사는 것과 겁쟁이처럼 사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에이든은 원만하게 살고 싶을지언정 겁쟁이는 아니었다.
카티야는 그와 친구고, 노엘 경은 비록 시작은 안 좋았다지만 시종일관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있다.
그의 '친지'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는 마땅히 그 위협에 앞장서서 머리를 들이받아 왔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미래에 닥쳐올 위협을 아는 게 자신밖에 없다지만, 세계를 구한다는- 한 명의 인간이 끌어안기엔 말도 안 되는 업을 뒤집어쓴 것도 결국엔 그런 맥락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지는 에이든도 모른다. 어쩌면 중간에 처절하게 실패해서 그가 사망하고,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지.
그럼에도 그걸 떠맡은 이유는.
그에겐 늘 그렇듯, 아주 작지만 뚜렷한 것이다.
"친한 사람 다 버리고 혼자 잘 살 거면, 열심히 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세상살이 혼자 살아봐야 그게 대체 무슨 가치가 있나. 그게 대체 무슨 재미고 무슨 의미인가.
에이든 자신이 좀 위험해도 괜찮다. 좀 손해 봐도 괜찮다.
친한 사람들끼리, 다 같이 뭉쳐서, 둥글둥글하게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런 목가적인 풍경을 방해하는 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분쇄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과 얽혀 대단한 능력을 얻고, 어쩌다 보니 세계까지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지만.
여태까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한 번도 그런 경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가족. 친구. 그들과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소시민.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는.
"...."
그런 말을 쭉 들으면서, 노엘의 손아귀에서 점점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손을 내린 상태로 노엘이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가 침묵하는 기간에 비례하여 에이든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빠져 나가고 있었다.
'말대꾸하지 말걸...!'
이거 폭발하기 직전 상태 아닌가.
화난 사람한테 괜히 주름 잡았다가 역으로 더 털리는 것 아닌가...!
할 말은 하더라도 좀 더 부드럽게 말해 볼걸...!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에이든 씨."
마치.
울 것 같은 눈동자였다.
"왜 이럴 때만 단호하신 겁니까. 평소에는 투명 인간처럼 살고 싶어 하시면서."
...어.
에이든이 어색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이 사람 분위기가 왜 이럴까.
말대꾸하지 말라고 혼날 줄 알았는데, 뭔가....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분위기가 이전에 어쩌다 도살자라고 불리는지 물었을 때와 비슷하다.
그의 말을 쭉 들으며,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그에게 겹쳐 보는 느낌이다.
이윽고 노엘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본인의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그녀가 자주 취하던 행동이다.
"저하와 함께 청사로 복귀하시죠. 현장 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이것만큼은 설명을 듣는 것조차 요원해 보였다.
▣
"진국이네, 저놈."
손을 뒤로 포박당하며, 레반트 경이 실소와 함께 말했다.
"남편으로 괜찮은 놈을 꿰찼네, 노엘.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야."
"...."
"그러니까 더 알 것 같네. 네가 왜 저 녀석이랑 거리를 두는지."
"...."
"성별은 다르지만 꽤 닮았지, 테레사랑. 안 그러냐?"
"...레반트 경."
노엘이 잠깐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서로 걱정해 줄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연합 전쟁에서는 동료였습니다."
"너 때문에 테레사가 죽기 전까지는 그랬지."
"...."
동작을 멈추는 노엘을 향해, 레반트 경이 느릿하게 문장을 떨어트렸다.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잘 들어."
단순한 비난이라기엔, 회한과 비애마저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건 테레사가 아니라 너였어야지. 구국의 영웅으로 금의환향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호국경이었어."
"...."
노엘이 답하지 않고 묵묵하게 그들을 포박하는 손만 움직였다. 그런 것들은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짐이라는 듯이.
얌전히 포박당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반트 경이 다시금 실소를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해졌네, 사자심."
"뭐가 말입니까."
"예전에는 테레사 얘기 들으면 눈부터 뒤집혔잖아. 지금은 여유가 좀 생긴 것 같은데?"
"...."
레반트의 말에 노엘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
확실히, 얼마 전까지는 그랬을 텐데.
왜 그럴까.
"결혼 생활이 좋긴 좋나 봐?"
"...."
"신혼이라 아주 깨가 쏟아질 때인데, 확 바람이라도 났으면 좋겠-"
대답 대신, 노엘이 그의 뒷덜미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인정사정없는 일격이었다.
▣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청사로 돌아온 카티야는 뭔가 생각에 골똘히 잠긴 듯 곧바로 자기 방에 가서 틀어박혔고, 에이든도 그대로 침대에 머리부터 처박을 정도로 일이 많은 하루였다.
'그 기사들은-'
곧바로 재판에 넘어간다나. 구속시켜서 검찰에 넘긴 노엘 경이 남긴 말이었다.
꽤 엄중한 처벌을 받겠지.
"...."
누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 증거야 어디에도 없지만.
심증이라면 있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아르덴 브림스톤 라이오넬
- 악의: 1단계
- 스킬 1개를 모방할 수 있습니다.
※ '유대 관계'를 쌓는 게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스킬의 효과가 원본과 변경됩니다!
대놓고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사람밖에 없으니까.
습격 자체가 에이든을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로밖에 결론이 안 모인다.
'...그러면 말이야.'
에이든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창을 노려보았다.
슬슬 이쪽이 대놓고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생각은 없다.
대비책은 수립해 둬야겠지.
물론, 당장 그것보다 급한 건 있었지만.
-Quest Info
♠ Main Quest
◈ 제1막, < 제도 균열 >
▶ 곧 1장이 진행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진행됩니다. (D-1)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1)
"-음."
눈앞에 떠오른 창을 살피는 에이든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가늘게 뜨다 못해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힐 지경이다.
이제 겨우 하루라.
메인 퀘스트야 원래도 적혀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노엘 관련된 일까지 겹쳐서 일어나는 건 대체 뭔가 싶다.
'대비는 열심히 해뒀지.'
무슨 일이 터질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에 부끄러움은 전혀 없다.
포인트 상점을 못 연 건 아쉽지만, 스킬 복사는 이미 충분히 넘치도록 해뒀다. 그가 기억하는 원작 기준의 난이도라면 이 정도면 그리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랬던 법칙 하나 때문에 안심을 할 수가 없다.
'원작대로 흘러간 적이 없는데.'
애초에 주인공이 없는 세계다. 모든 게 원래의 흐름대로 굴러갈 거라는 속단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틀림없이, 뭔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겠지.
그러면, '보험' 정도는 한 개 깔아둬야 할 것이다.
힘을 비축하는 것과 별개로, 사건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행동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으니까.
"흠."
콧숨을 내뱉은 에이든이 곧바로 복도로 걸어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 심지어 그 일벌레인 노엘마저 퇴근한 시간이지만 그보다도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에이든이 사무실의 문을 똑똑 두들겼다.
"들어오시죠."
피곤에 쩐 목소리를 들은 에이든이 슬쩍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나 격무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계 같은 기색으로 타자기를 두들기고 있는 스텔라 경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든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개인적으로 접촉한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스텔라 경이 눈썹을 둥그스름하게 뜨며 질문했다.
확실히, 그림이 좀 이상하긴 하다. 그가 지금부터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의 내용도 더욱 그렇고.
"스텔라 경."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저랑 같이 나가실래요?"
"...."
스텔라 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진 지 한참 지난 시각이다. 시꺼먼 새벽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외간 여자에게 찾아와서 말하기엔 이상한 부탁이긴 하다.
"...외출하기에 많이 늦은 시각인 것 같긴 합니다만...?"
"그렇긴 하죠?"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급한 일이라면 노엘 경한테 보고를 올려서 적절한 인원을 할당받으시는 게-"
"아뇨, 경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
"저희 둘이서만 나갔으면 좋겠는데요."
스텔라 경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성대하게 뿜어냈다.
28화. 전조 (2)
...생각 외로 스텔라 경은 금방 수락해줬다.
아무튼 계약상으로나마 노엘 경의 부군이니, 그를 보좌하는 것 역시 그녀의 임무라나.
물론 해야 할 일의 내용을 자세히 들은 뒤의 일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아무리 괴악한 취향을 가진 이라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바란다면 물건을 바리바리 싸든 상태로 건물 옥상을 뛰어넘어 다니진 않을 테니까.
"...사람 놀라게 하지 좀 마십시오."
스텔라 경이 아찔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오해하지 않게 말씀하시는 법을 좀 배우셔야겠습니다. 식겁하지 않았습니까."
"...."
이쪽에 멱살을 잡힌 상태로 옥상을 날아다니는 에이든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식겁한 상태긴 하다.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짐짝 들 듯이 걸치고 다니면서 도약 한 번 한 번마다 건물 몇 개를 뛰어넘는 모습은 그야말로 초인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신체 능력은 진짜...!'
바로 요전번에 기사들과 직접 부대끼고 왔지만, 그래서 더욱 기사 안에서도 그 '급'이 명확하게 나뉜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체감 중이다.
물론 순백의 기를 모조리 끌어다 쓰는 노엘보다는 약하겠지만, 이쪽은 별다른 이능도 쓰지 않고 이런 짓을 하는 중이다. 괜히 사자심의 부관이라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절절히 알겠다.
덕분에, 에이든 혼자라면 며칠을 꼬박 새워도 못할 일을 지금 수월하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예, 거기에다가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이든이 지시한 곳에, 스텔라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뚝을 깊게 때려 박았다.
그가 지정한 건물을 맨몸으로 뛰어다니며 이 정체불명의 '말뚝'을 박고 다닌 게 여태 한 일이다.
"에이든 씨."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이런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금방 끝내긴 했습니다만."
"의미라면 있습니다."
당장 저게 그냥 말뚝이 아니니까.
-System Log
▶ 대상 '나무 말뚝'에 '신성'을 부여합니다.
마이어에게 매일 밤 난도질을 당하면서 싸움법을 배우면서도, 어떻게든 낮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만들고 있던 것들이다.
총기처럼 구조가 복잡한 물건도 아니라서 한 가지 이능만 담는 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지만, 그 숫자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노엘이 보고 흡혈귀 군단이라도 사냥하러 가냐며 식겁하지 않았던가.
-System Log
▶ '운명의 길쌈꾼'을 대상 '카티야'에게 사용합니다.
▶ '신성 운용: 지연 방출' 스킬을 복사합니다.
그리고, 저걸 운용하는 데 핵심이 되어줄 스킬도 있고.
안쪽에 담긴 이능이 그가 '원할 때' 기능하게 만들어 줄 능력.
이걸 미리 저기에 이능 부여로 넣어둔 신성과 조합한다면, 꽤... '흥미로운' 사용법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것만으로 1장을 다 틀어막을 순 없지만.
핵심이 되어줄 건, 아직 노엘에게 남아 있는 세 장의 복사권과 원본보다는 떨어지는 성능이겠지만 '모방'해올 수 있는 황자의 복사권 한 개.
이걸 어떻게 써먹느냐가, 이번 사건에서 에이든의 생사 여부를 가를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니, 팔짱을 낀 스텔라 경이 다시금 불만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뭘 노리시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라면 카티야 저하나 다른 분들도 있었을 텐데요. 왜 굳이 저한테?"
"그 사람들한텐 못 물어보니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노엘 경과 호국경 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스텔라 경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다른 사람의 개인사입니다. 저한테 여쭤보시는 게 올바른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요."
"황자가 그걸로 노엘 경을 압박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보통이 아닌 느낌이던데."
"...."
완고하게 입을 꾹 다무는 스텔라에게, 에이든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믿어주세요, 스텔라 경. 저도 노엘 경을 돕고 싶어서 여쭙는 겁니다."
"...단순히 계약 결혼에 낚인 사람치고는 꽤 열성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까."
"열심히 일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의도와 동기를 알 수 없는 호의만큼 의심스러운 게 없죠."
다행히, 그거라면 확실하게 있다.
"저, 황자가 싫어요."
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이유만으로 카티야에게 수작을 부린 뒤부터 그렇다.
에이든은 그런 종류의 행동에 대해선 뒤끝을 꽤 길게 가져가는 편이니까, 더욱.
"그쪽이 하고 다니는 일은 전부 다 훼방 놓아야 직성이 풀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쪽이 뭘로 협박하는지부터 알아야겠어요."
"...."
"싫은 놈이 노엘 경한테 수작 부리는 건 더더욱 싫거든요."
"...."
"얼굴은 번지르르하게 생긴 놈이 음침하게 협잡질이나 하고 다니는 게 눈꼴 시렵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한 스텔라 경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걸리면 교수형입니다, 에이든 씨."
"어, 신고하실 건가요?"
"아뇨. 노엘 경한테 그딴 식으로 구는 인간은 저도 싫습니다."
비밀스러운 뜻이 통하는 사람들 특유의 악동 같은 미소를 잠시 공유한 뒤, 스텔라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서 떨어졌다.
"연합 전쟁 막바지에... 제국 쪽에 궤멸적으로 불리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어렴풋이요?"
풍문으로나마 들은 적이 있다.
전쟁 당시 제국과 가장 오랫동안 격렬하게 치고받은 국가는 마도 왕국 그리버스고, 그건 제국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도 마찬가지였다나.
밀리는 전황을 뒤집기 위해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걸 목적으로 파견된 특공대라고 들었다. 완벽한 외통수라 제국 쪽 수비 병력도 미약했다 들었고.
만약 그게 제대로 성공했다면, 지금 그들이 여기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국 전역이 전란의 불꽃에 휩싸였을 테니.
사자심- 노엘이 유명해진 것도 그 사건 전후다.
한 번의 외통수로 부서질 뻔한 제국을 틀어막은 영웅으로서.
한 줌도 안 되는 수비 병력을 그러모아, 마도 왕국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러모은 특공대를 정면으로 분쇄했다던가.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닙니다만. 그때 노엘 경과 함께 출동한 인원 중에는 꽤 인상적인 분들이 두 분 있었습니다. 한 분은 황자님이고, 나머지 한 분은-"
테레사 아델라이트 경.
통칭, 호국경. 기사단의 원로.
노엘을 맨 처음 제국군에 입대시킨 장본인.
당시 전투에 선두에 섰던 이들이 그들이고, 그들 중 둘은 돌아왔지만 한 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
"그날 당시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진 노엘 경과 황자만이 알겠죠. 다만, 알려진 건...."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스텔라 경이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로 문장을 이었다.
"...전투 중 실수를 저지른 노엘 경을 '살리기 위해' 테레사 경이 희생하셨다는 소문은 있습니다."
"...."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 중 일부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건 들었습니다만, 진위는 아무도 모르구요."
"...그렇습니까."
에이든이 살짝 찡그린 얼굴로 말을 받았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윤곽만 들어도 꽤 많은 의문점이 해결된다.
호국경은 황자와 노엘 둘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원작 배경에도 거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고 서술되어 있을 정도니까. 소문이 사실이라면 노엘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라면.
'...왜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한테 청혼을 하지?'
증오하는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하는 건 뭔가 앞뒤가 안 맞아도 단단히 안 맞는다.
심지어는 그 자리를 꿰차기 위해 에이든에게 파혼까지 요청하지 않았던가.
앞뒤가 다르다.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마치 영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그쪽은 조금 더 파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든이 스텔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럼 슬슬 들어갈까요."
내일은 중요한 날이다.
푹 자고 체력을 비축해서 상황이 터지는 걸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자리도 좀 좋은 곳으로 잡고. 조금이라도 빨리 대처할 수 있게.
'어차피 어디에 있건 터질 건 터지지만.'
1막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균열은 이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규모로 일어난다.
비록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다지만, 어디에 있건 사건이 터졌을 때 모를 가능성은 없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문득 눈앞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System Message
▶ 퀘스트 정보가 갱신됩니다!
-Quest Info
◈ 제1막, < 제도 균열 >
▶ 곧 1장이 진행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진행됩니다. (D-Day!)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Day!)
...갱신?
느닷없이 이런 게 왜 떠오르나 해서 생각해 보니, 슬슬 날짜가 넘어갈 시각이긴 하다.
그럼 뭐 갱신될 만하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자니.
-...
-...!
-...!!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끔찍하게 음산한 기운이 주변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에이든만 그런 걸 느낀 건 아닌 모양인지, 그를 짐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옆구리에 끼고 뛸 준비를 하던 스텔라 경도 흠칫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무슨...?"
검은색으로 가시화된 음산한 사기(死氣)가 주변으로 요동친다. 이윽고 그게 소용돌이쳐 뭉치듯이 하늘로 비상한다.
그쪽으로 보이는 건, 여기서도 훤히 보이는 '틈새'다.
도화지를 찢은 것처럼, 풍경이 구겨지듯 나타난 실금이 주변 공간을 어그러트렸다.
이어.
처음에는 실금처럼 그어진 공간의 어그러짐이, 마침내 쩌적쩌적 갈라지는 거대한 균열로 확산한다.
'아.'
에이든이 속으로 탄식했다.
그로서는 꽤 기억에 남아있는 광경이다.
이거.
1막, '유령 기사 소동'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다.
'인정머리 없는 새끼들아...!'
이윽고, 그의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적어도 쉴 시간은 좀 주지 그러냐...!
"...저한테 꽉 안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에이든 씨."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얼굴을 굳힌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양팔로 에이든을 꼭 끌어안았다.
에이든으로선 옆구리에 끼워둔 짐에서 소중한 귀중품으로 신분이 격상된 기분이었다.
"일단 안전한 곳까지 전속력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그 뒤에 지원을 불러야-"
하지만, 그 문장이 이어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에이든 씨-!"
이런 이상 상황이면 스텔라 이상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해 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저런 소용돌이가 튀어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를 노엘 경의 목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언제나처럼 하늘에서 유성처럼 날아온 노엘 경이 그들의 앞에 착지했다.
"무사하십니까! 갑자기 괴상한 것이 나타난-"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노엘이 입이 딱 다물렸다.
새끼새가 어미새에게 안긴 것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에이든과 스텔라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
"...."
"...."
세 명이서 참으로 어색한 침묵을 공유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에이든 씨."
노엘이 간신히 목소리를 내며 그 침묵을 깨트렸다.
얼굴에는 늘상 걸고 다니는 미소도 함께 딸려온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분의 꼴이 이상하긴 합니다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러니 간단하게만 물어보겠습니다."
...나중에 물어본단 선택지는 없구나.
상황이 아무리 급해도 그건 짚고 넘어가야 하는구나....
자세히 보니, 그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와중에도 어쩐지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
"스텔라와 뭘 하고 계셨습니까?"
"...산책을 좀."
"이 시간에요?"
"...."
"단둘이?"
"...."
"묘하네요."
"...노엘 경에게 떳떳하지 못할 짓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여느 때와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에이든은 어쩐지 그 행간에 있는 문장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아하, 그러셔?
-같은.
"그런 짓을 하셨다 해도, 제가 뭐라고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합니다. 저희는... 아무튼 '계약'으로 결혼한 사이 아니겠습니까."
"...노엘 경?"
"예, 아무튼 그렇죠. 서로 간 정말 깊은 감정을 교류할 사이는 아니긴 합니다. 그렇죠...."
에이든의 눈이, 말을 이어가며 검집을 쓰다듬는 노엘 쪽으로 가서 쏠렸다.
손버릇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어쩐지 피가 마른다....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고 웅얼거리길래 반문했더니, 노엘이 칼같이 그의 반문을 짓뭉개 버렸다.
이윽고 눈썹을 일자로 굳히며 정면으로 시선을 휙 돌려버린다.
입가에는 어쩐지 그 냉기가 깃든 미소가 여전히 걸려 있다....
"...일단, 저것부터 해결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노엘의 시선 끄트머리에는, 이제 제도에 있는 인간들이라면 모두 발견할 만큼 커다래진 균열에 가서 걸려 있었다.
"...."
어쩐지.
저기에 가서 화풀이를 하고 오겠다는 기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29화. 유령 기사
유령 기사 소동의 진행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갈라진 균열로 영체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도 안에 물리적으로 피해를 일으킨다.
일전에 마이어의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영체는 물질계에 그렇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여명의 기사 같은 대륙구 영웅도 그를 한 번에 제압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영체들이 쏟아진다고 해도 그렇게 큰 일까진 아니다. 원래대로는.
다만.
"-보통 일은 아니군요."
그렇게 간단하다고 해서,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노엘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균열이 이만한 규모로 생겨났다면 제도 전체가 영향권 안에 놓일 겁니다."
"...어째 익숙해 보이시는데요?"
원작 지식으로 이게 어떻게 굴러갈지 알고 있는 에이든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엘 역시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눈치다.
"연합 전쟁 당시에 쓰던 전법 중 하나입니다."
그런 말을 꺼낸 노엘이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눈매가 날카롭다. 그녀로서는 흔치 않게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적의가 깃들어 있다.
"...마도 왕국에서 자주 쓰던 방식이죠."
...그런 말만으로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진 단박에 이해되는 느낌이다.
호국경이 사망하던 당시의 전투도 마도 왕국과 벌어지던 전투였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리고, 그런 적개심이 그런 이유만으로 나오는 게 아닌 것도 분명해 보였다.
"에이든 씨. 스텔라와 함께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 주시겠습니까."
노엘이 진지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순백의 기가 검날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일전에도 한 번 보았던 임전 태세다. 카티야와 마주칠 때나 한 번 보았던 모습이지.
바꿔 말하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때와 비슷한 수준의 중대 상황이란 뜻이다.
"꽤 험한 작업이 될 겁니다. 이만한 크기의 균열을 메우려면... 저도 이것저것 걸어야 해서요."
뭔가를 아주 단단히 각오한 목소리다. 에이든을 들쳐메고 있던 스텔라의 눈빛도 일순 변할 만큼.
"경. 혼자서 해치우실 생각이십니까."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뿌리'를 전부 찾아서 뽑아야 해."
뿌리라고 함은 마술사가 마력의 근원을 담아 설치해둔 구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일일이 찾아서 부수는 게 아니면 저 균열을 닫을 방법은 없고, 그만큼 민첩하고 기민한 능력을 가진 이는 여기에 노엘밖에 없다.
"위험합니다. 아무리 경이라 해도 잘못하면 크게 다치실 겁니다!"
"저기, 잠깐만-"
"하는 것 자체는 별로 안 어려워. 찾아서 부수면 되니까."
"하지만 곧 균열이 대놓고 열립니다.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저쪽에 들어갔다간, 열릴 때의 여파를 대놓고-"
"잠깐 제 말 좀-"
"스텔라."
노엘이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스텔라의 말을 받았다.
"기사라는 직함은 이럴 때 도망가라고 받은 게 아니지?"
"부탁이니까 잠깐 말 좀-"
"시민이 저기에 있어. 그럼 가서 지켜야지."
"...."
"하지만, 경...!"
스텔라가 애타게 노엘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서 그런 희생을 혼자 하냐는 듯이. 왜 그렇게 혼자서 뭐든 떠안으려고 묻는 것 같은 안타까운 감정이 그 눈동자에서 소용돌이친다.
애절하다고 불러도 될 만한 장면이다. 이에 노엘 역시 숭고한 사명을 띈 기사의 표정으로 받아쳤다.
"알았으면 여기를 벗어나, 스텔라. 에이든 씨를 지키는 게 최우선-"
"사람 말 좀 들으라고-!"
"...."
"...."
그리고 그런 문장을 가열차게 자르고 들어온 에이든의 말에 두 명의 기사가 동시에 침묵했다.
아마 에이든이 이마에 혈관까지 뽑아내며 고함을 치는 건 둘 다 처음 보기 때문일 것이다....
"심각한 이야기 나누시는 도중에 죄송한데, 일단-"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아까 전까지 스텔라가 열심히 박고 다니던 말뚝이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확실하게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이렷다.
다른 말뚝과 다르게 확실한 '기능'이 있다는 것처럼.
"-균열 닫는 것보단 다른 걸 더 걱정해야 하거든요?"
"에이든 씨? 그게 무슨-"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질문을 꺼내 들려고 했지만, 그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에이든의 몸에서 신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에이든이 잡은 말뚝은 일종의 기폭 스위치 비슷한 것이다.
다른 것들에 담아둔 이능이 '원하는 타이밍'에 방출되도록 지시할 수 있는.
그 이능이 자연스레 그가 쥔 말뚝에 깃드는 것과 동시에, 눈앞으로 창이 하나 떠오른다.
-System Message
▶ 대상 '나무 말뚝'에 '신성'을 부여합니다.
▶ '신성 운용: 지연 방출'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대상과 이어둔 모든 물체에 같은 종류의 이능이 부여됩니다!
그런 문장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무채색의 화염이 피어올랐다.
에이든이 스텔라와 함께 하룻밤 꼬박 날아다니면서 박아둔 말뚝들이 위치한 곳에서 일제히 피어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빛이 퍼져나온 곳에서, 거뭇거뭇하게 생긴 구조물들이 파사삭 부서져서 재로 화하는 것들이 일제히 눈에 들어온다.
노엘이 말한 균열의 '뿌리'의 모습이다.
...정확하게 에이든이 스텔라를 시켜 말뚝을 박아둔 장소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균열의 뿌리야 어차피 원작에서는 항상 고정된 위치에서 튀어나오던 것들이다. 괜히 이 야밤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설치한 게 아니지.
"...."
"...."
노엘과 스텔라가 동시에 입을 콱 다물고 밤하늘을 꿰매듯이 닫히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는 에이든이 씩씩거리며 방금 쓴 말뚝을 바닥에 휙 던지고 있었지만.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무슨...!"
"...에이든 씨."
"예?"
"저는 한창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만."
"...."
묘하게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노엘의 시선에 에이든이 볼을 긁적거렸다.
"그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좋은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요."
그렇기는 하지.
그렇기는 하지만....
"...."
"...."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노엘의 쪽팔림과는 별개로 애초에 이런 것 하려고 그도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한 편 아니던가.
다만, 그럼에도 그는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균열을 노려보았다.
이렇게만 본다면 손쉽게 넘어갈 수 있는데.
그런 걸로 끝나는 거였으면 에이든이 지금까지 그렇게 주도면밀히 준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아까도 말했지만 진짜 긴장해야 할 건 이제부턴데요."
"예?"
"이게 본 경기가 아니라서."
생각해 보면 간단한 원리다.
지금 그가 숨 쉬고 있는 세계는 원작 '게임'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세계고, 그렇다는 말은 1막과 1장 같이 '에피소드'로 나눠지는 스토리 구성에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가 있단 소리니까.
'보스전.'
빠질 수가 없지.
에이든이 속으로 그런 단어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균열이 닫히기 직전에 그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기색으로 엑토플라즘이 뭉치기 시작했다.
'유령 기사- 였던가?'
애초에 이벤트 이름 자체가 '유령 기사 소동'이다. 어떤 종류로든 기사 관련된 적이 등장하는 건 분명하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엑토플라즘이 뭉쳐서 갖춘 형태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주를 갖춘 기사의 형태.
"-"
에이든이 심호흡을 하며 의식을 가다듬었다.
물론 1막의 1장- 가장 첫 번째 이벤트이니만큼 그렇게까지 어려울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다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아직도 그에게 익숙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수단은-'
노엘의 스킬 복사권 3장, 그리고 황자의 스킬 모방권 1장.
무슨 스킬들이 있는진 이미 달달 외워놨다. 상황에 맞춰서 잘 복사해서 쓰면 되겠지.
이걸 어떻게든 잘 써서 상황을 헤쳐나가면-
[나는, 강철-]
-된다고 생각했었다.
엑토플라즘으로 형태를 갖춘 기사가, 느닷없이 그렇게 '말'을 꺼내들기 전까진.
"-?"
에이든의 등골을 타고 불길함이 쭉 미끄러졌다.
여명의 기사처럼 어지간히 강력한 존재가 아닌 이상, 영체가 '의식'을 유지하고 사람처럼 구는 건 불가능하다.
즉, 저기 있는 건.
1막 1장 따위에 등장할 존재가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
[나는, 칼날-]
이윽고, 그런 말과 함께.
영체 주변으로 이능이 치솟아올랐다.
기.
새하얀 색의.
...노엘이 다루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나는, 천칭.]
뭉친 이능이 이윽고 하나의 참격으로서 그 형태를 갖춘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자세다. 마찬가지로, '노엘'이 카티야에게 '참격 보내기'를 할 때 취했던 자세였으니까.
-System Message
[ '스킬: 분석'이 대상을 인식합니다. ]
[ 대상이 사용 중인 유파와 보유하고 있는 투로인 '일검일도'의 특성이 일치합니다. ]
[ 전투 시 보정을 받습니다. ]
...아니나 다를까.
저 유령 기사가 사용하는 유파는, 에이든이 노엘에게서 복사해 온 투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종류다.
그리고 그런 참격을 공중에 맺은 유령 기사가, 눈앞에 있는 에이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제일 먼저 위기를 감지하고, 그의 몸 근처로 수호하듯 신성이 바로 뛰쳐나왔다.
사실 이거만 있어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다음 순간 이뤄진 모든 행동은, 이성이 아닌 본능 영역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System Message
[ '기 운용: 방어 역장'을 복사합니다. ]
[ '기 운용: 경도 강화'를 복사합니다. ]
[ '기 운용: 신속 생성'을 복사합니다. ]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스킬 조합이다. 노엘의 스킬 중에는 이런 것보다 훨씬 값진 것들이 많으니까.
이건 당장 공격을 한 번 방어하는 데 쓸 '방어막'을 강화시키기 위해 복사권을 탈탈 털어 넣는 형태다.
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게 아니면, 지금 당장 죽는다는 확신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제국의 신민들이여, 두려워 말라-]
그리고, 그건 틀림없는 정답이었다.
[-내가 왔으니.]
다음 순간, 에이든의 눈앞으로 새하얀 장막이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눈치채는 순간, 이미 몸 바로 앞까지 날아와서 그를 후려갈긴 참격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무슨...!'
공격이 날아온 걸 아예 확인도 못 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3중으로 강화시켜 둔 방어 역장은 방금 그 한 방으로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방금 복사권을 다 털어 넣은 게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죽었다...!
'대체 뭐야...!'
이건, 마치.
노엘 '본인'을 상대하는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저쪽이 다루는 건 노엘이 다루는 순백의 기고, 사용하는 건 노엘이 사용하는 유파고, 그 위력조차 거의 동일하다.
아마, 세상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노엘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딱 한 명만 빼면.
"...테레사?"
갈라진 목소리로.
노엘이 호국경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30화. 유령 기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