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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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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 ☆ ☆

처음으로 세이어가, 진심으로 경악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인류의 신이, 진심으로 공포에 질려 하찮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안 되지?"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네놈들은 너무 정보를 노출했다."

은의 현자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은 진짜 세이어처럼, 세이어와 똑같이 모든 상처와 피로를 없애도 재차 부활했다.

그때 레펜하르트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은의 현자들은 그냥 인간이지. 그러니 인간의 육신으로 싸우다 신의 힘으로 그 지치고 부상당한 육신을 치료했지.'

의문이 생겼다.

'그럼, 어째서 신인 세이어도 똑같은 방식으로 부활한 거지?'

세이어는 신이다. 신성이 신의 권능이라면, 그 힘은 언제나 세이어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저 논리대로라면 모든 공격이 아예 먹히지 않아야 정상이지, 먹혔다가 없어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세이어가 지닌 신의 힘과, 인간의 육신을 입은 세이어가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은 신이 아니라 신의 힘을 제한 없이 얻어 쓰는 존재일까? 아니면 신인 건 맞지만 화신, 아바타 같은 상태라서 필요할 때마다 원래 힘과 연결해 써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건 간에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세이어는 필요할 때마다 신성과 연결해, 그 신성을 끌어다 쓰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식은 은의 현자가 부활하는 방식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가 같다면 원인도 같다는 것이 타당한 사고방식이다. 여기에서 레펜하르트는 세이어의 부활을 막을 방법을 찾아냈다.

"신성, 그건 도무지 뭔지 모르겠더군. 감도 안 잡혀."

부상 속에서도 레펜하르트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신성과 연결하는 방법은 좀 알겠더라고."

은의 현자들이 사용했던 부활 방식, 그것은 변질된 신성력에 의한 것이었다. 신과 소통하는 힘을 이용해 자신의 상태를 보고하고, 그에 걸맞은 축복을 받는 것.

"신성을 막을 수는 없어도, 신성력을 막을 수는 있거든?"

신성력.

신과 소통하는 이 힘은 비유하자면 이것과 같다.

아이들이 작은 방에 모여 놀고 있다. 그러다 한 아이가 배고픔을 느낀다.

그 아이는 엄마를 부른다. 큰 목소리로, 익숙한 자식의 음성을 내며.

그러나 그 작은 방에 엄마는 직접 들어갈 수 없다. 창문을 통해 먹을 것을 넣어 줄 수도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그래서 그 엄마는 대답하는 대신 방을 관리하는 선생님을 움직인다.

-배고파하는 내 자식에게 빵 한 덩이를 주세요.

선생은 엄마의 요구대로 아이에게 빵을 주고, 아이는 배고픔을 이겨 낸다.

이것이 바로 신관이 신에게 기도해, 신성 주문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이다.

반면 세이어나 은의 현자의 그것은 좀 달랐다.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좀 달랐다.

-엄마! 쟤가 나 때렸어! 대신 혼내 줘!

엄마가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규칙 위반이다. 엄마가 대신 다른 아이를 혼내 주는 것도 규칙 위반이다.

그런데 저쪽의 엄마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것이 바로 신성의 힘이다.

일단 어른이 나타나면, 아무리 아이가 용을 써 봐야 어른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신성과, 현세에 몸을 둔 레펜하르트 일행의 역량 차이다.

그러나....

"엄마를 못 부르게 할 수는 있지."

저쪽 엄마가 뭐가 다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아이가 불러야 나타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부르는 방식은 다른 아이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큰 소리로, 자식의 음성을 이용한.

마켈린과 실란이 한 짓은, 저 아이가 울며 엄마를 부를 때 똑같이 울부짖으며 자기 엄마를 찾는 것과 비슷했다. 여러 아이의 울음이 혼선되며 아이 하나하나의 음성은 흐려지고, 엄마 입장에선 과연 어느 집 자식이 어느 엄마를 찾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물론 어지간히 크게 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니 다른 신을 모시는 이들끼리 모여 신성 주문을 써도 이런 일은 사실 일어나지 않고."

그러나 마켈린과 실란 정도의 신성력을 지닌 이가 전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신성력으로 오직 신과 여신에게 호소하기만 할 뿐이라면?

"저 정도 전달력과 전파력이라면 충분히 네놈의 연결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다행히 예상대로군."

세이어는 눈을 깜빡였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의 고통조차도 잊고 있었다.

"...그런 문제가 있었나?"

레펜하르트의 이론은 신인 자신조차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아니, 은의 시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발상이었다.

'아, 그건 당연하겠군. 그땐 신관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하여튼, 저대로라면 자신이 신성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도 당연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이어는 웃었다.

"그렇군. 이해했다."

'웃어?'

레펜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궁지에 몰았는데도 세이어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이었다.

"그럼 그것에 대해선 네놈도 모르는 것이군. 이걸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방식을 쓰지도 않았겠지."

'무슨 소리지?'

당황스러워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혹시 이걸로 끝이 아닌 건가? 뭔가 숨겨둔 수가 또 있었나?

'그럼 이쪽은 진짜 대책 없는데?'

러스 일행도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연습한, 예상한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여기서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갑자기 세이어가 희미한 빛을 거두었다.

"축하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레펜하르트며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 전투는 그대들의 승리다."

비아냥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음성, 이변은 직후에 일어났다.

파사삭!

세이어가 박살 났다.

간신히 마력으로 버티고 있던 남은 육신, 그것이 갑자기 땅으로 뚝 꺼진다. 동시에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조각난다. 캘러미티 혼을 맞은 평범한 인간의 육신이 응당 그리되듯, 그대로 가루가 되어 녹아내린 대지 위로 흩뿌려진다.

"...."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세이어가 죽었다.

누가 봐도 확실하게 가루가 되었다.

"...뭐야, 이거?"

☆ ☆ ☆

인류의 신, 세이어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

"...이긴 걸까요?"

"인류의 신이 죽은 겁니까?"

시리스와 이니야, 러스가 서로를 보며 허망한 음성을 흘렸다. 타시드가 버럭 성을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틸카가 헛웃음을 흘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진짜로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다들 전투라면 이골이 난 이였다.

패배한 이,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의 표정과 태도 역시 익숙한 이들이다.

이니야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건 아니에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절대 아니야...."

반면 카를은 조금 반응이 달랐다.

"뭐, 신이잖습니까? 신은 원래 저렇게 죽는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레펜하르트가 핀잔을 던졌다.

"카를, 자네는 신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건가, 아니면 신이 죽었다고 믿고 싶은 건가?"

"부끄럽게도... 후자임을 부정 못하겠군요."

얼굴을 붉히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너무도 강력한 적이었다. 그렇기에 잠시라도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그런 어리석은 착각을 하기엔 너무 겪어 온 것이 많다.

"가루가 된 것부터가 이상해. 죽었으면 그냥 시체 상태로 뚝 떨어져야지, 왜 가루가 돼?"

"그렇죠?"

"하지만 어쨌거나 죽은 건 맞지 않나요? 혹시 세이어란 자는 육체가 여러 개인가요?"

확실히, 신화를 보면 신이 여러 화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현현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니야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소. 일단 저 육체는 원래 내 것이 맞는 듯하니."

그러지 않고서야 허차원에서 드림 다이브를 시전했을 때, 자신이 테스론과 조우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또 본인 입으로도 육체 구하느라 힘들었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었으니 그리 쉽게 육체를 옮겨 다닐 수 없다는 것도 맞을 거요."

"그럼 뭐죠, 이건?"

시리스의 혼잣말은 여기 모인 모두의 심정이나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뭐냐....'

또다. 그동안의 정보로 어떻게든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모르는 것이 나왔다.

모자라다.

지식이, 정보가 모자라!

"내가 모르는 뭐가 또 있는 거냐?"

4

강철의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

그 속에 수십 개의 원통형 수조가 나란히 놓여 있다. 수조마자 혼탁한 액체가 가득 차 기포를 끝없이 피워 올린다.

부글, 부글, 부글.

그 수조들 사이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너무 말라 광대뼈가 드러난 얼굴, 퀭해서 시체처럼 보이는 눈동자, 푸석푸석 윤기를 잃은 머리칼에 거친 피부.

레펜하르트의 소꿉친구이자 이 시대, 테스론의 친우이기도 한 필레나였다.

한때 귀엽고 발랄했던 인상은 모두 없어지고 맹목적인 눈빛만을 빛내며 그녀는 정신없이 수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 멀었어, 아직 모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필레나의 얼굴에 빛이 비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수조가 모인 공간 정중앙, 제단처럼 보이는 강철의 구조물 위에 한 사내가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다. 검은 머리칼에 어떤 여인도 부러워할 아름다운 미모의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필레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 벌써 눈을 뜨셨나이까, 세이어시여?"

사내, 인류의 신 세이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필레나. 소중한 실험체 1호를 망가트려 버렸다.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라 알고 있는데...."

"상관없습니다."

진정 대수롭잖다는 태도로 필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목적을 위한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니까요."

"그 말이 옳도다."

세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팔다리를 움직여 보는 그를 향해 필레나가 물었다.

"원하시던 것을 얻으셨습니까?

"원하던 것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무엇을 확인하셨습니까?"

세이어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들은 아이를 쏘는 벌 떼다. 여왕벌을 죽이면 사라지리라 여겼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더군. 새로운 여왕벌이 나타날 뿐이야."

"그럼 어찌하실 것입니까?"

무심한 필레나의 질문에 세이어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벌통을 떼 버리면 될 문제다."

세이어가 수조 가까이 다가갔다. 수조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물었다.

"성과가 있는가?"

필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게도 아직...."

"노력하여라."

온화한 목소리로 세이어가 필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하면, 그대는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육신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신이시여."

필레나가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녀의 등 뒤, 혼탁한 수조 속에 한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은 벌거벗은 사내의 육체였다.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미모의 사내, 한때 레펜하르트, 테스론의 것이었으며 지금은 세이어의 것이 된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뇌를 소유한 자의 모습이 수조 속에 있었다.

그러나 수조 속의 사내는 인간이 아니었다.

뾰족한 귀, 분명 레펜하르트와 닮았으면서도 묘하게 현세 인류와는 다른 골격 구조, 마치 엘프와 드워프를 섞은 듯한 육신이 수십 개의 수조마다 동일하게 잠겨 있었다.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이는 아카식 드라이브로도 불가능한 결과였다."

현세에 전해지는 신神이라는 고대어는 그 발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문맥으로 그 의미를 유추할 뿐.

그러나 실제 은의 시대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따로 있었고, 그 단어는 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단어가 신의 의미로 전해지고 있았다.

지금 현세에 전해지는 '신'이라는 고대어, 그것은 은의 시대에선 아카식 드라이브Akashic drive라 불렸다.

"지식과 지혜보단 감각과 감정의 기술, 그래서 은의 시대 지식으로도 재현할 수 없었거늘...."

수조 안을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네 존재는 실로 기쁨이로구나, 필레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네크로맨서여."

☆ ☆ ☆

세이어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레펜하르트 일행은 일단 제라드와 바나텔의 전장으로 달려갔다. 어쨌거나 바나텔이라도 확실히 처리하면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바나텔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세이어를 위해 제라드의 발을 묶는 것.'

평소와 달리 바나텔은 상당히 힘을 아낀 채 전투를 벌였다. 일단 세이어가 승리하면 그 후에나 화끈하게 제라드와 맞붙을 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몰려오자 바나텔은 바로 도주했다. 충분히 힘을 남긴 상태였기에 쫒기가 쉽지 않았다. 아쉽지만 일단은 추적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안타레스는 당분간 평온했다. 전쟁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대륙의 여론도 점점 안타레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날의 미심쩍은 승리만 없었다면, 레펜하르트도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터였다.

"음...."

레펜하르트는 침대 위에 앉아 갈등하고 있었다.

"으음...."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세이어, 그놈 아무리 봐도 정말 죽은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뭐, 이건 사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천지 어떤 놈이 그렇게 우아하게 죽어 간단 말이냐? 뭐, 인생 올바르게 성자처럼 살아온 양반이면 혹시 그렇게 태연하게 죽을 수도 있겠다만....

'그놈은 아무리 봐도 그런 성격은 아니지.'

확인하고 싶었다. 세이어의 생사에 대해.

그리고 사실, 레펜하르트에게는 확인할 방법도 있었다.

'드림 다이브라면....'

그는 테스론과의 영적 연결을 통해 원거리에서 드림 다이브를 하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이미 10서클을 응용한 술식도 상당히 짜 놓았다.

그동안은 세이어가 언제 기습할지 몰라 마력 소모를 막기 위해 시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날 이후엔 그것까지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술식을 완성하는 것이 급했다.

며칠 동안 전력을 다해 술식을 완성하고, 또 시험했다. 그래서 새롭게 창조한 마법이 바로 이 장거리 정신 탐색이 가능한 10서클 대이적 마법, '다이브 오브 어비스'였다.

그래, 마법은 분명히 완성이 되었다.

"그런데 이걸 발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이유는, 이 마법이 오로지 테스론의 영혼이라는 단일 타겟 하나에만 통용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세이어가 죽은 것이라면? 그래서 그 속에 깃던 테스론의 영혼도 다시 세상의 흐름 속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라면?

"그랬다간 재수 없으면, 내 의식까지 세상의 흐름에 휘말려 버릴 수가 있단 말이지."

아무리 레펜하르트라도 거기까지 가 버리면 제정신 가지고 귀환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세이어 놈은 죽은 것 같지 않고...."

끙끙대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시대에도 이미 수없이 많은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다. 만일 세이어가 살아 있다면, 그 무수한 소중한 이들에게 위험이 닥친다. 전생의 악몽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만은 기필코 피하고 싶다.

반면 세이어가 정말 죽은 것이라면?

'그땐 나 하나 죽고 끝이야. 내가 없어도 다들 별문제 없이 안타레스를 유지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겠지.'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죽음도 나쁘지 않지! 저질러 버리자!'

침대에 누워 사방에 결계를 펼친다. 그리고 차분히 영창을 시작한다.

기나긴 영창이 끝나고, 레펜하르트가 각오에 찬 시동어를 외쳤다.

"다이브 오브 어비스!"

<19권에서 계속>

19권

제71장 History

1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새하얀 곡선의 벽이었다. 천장까지 둥글게 이어진 돔 형태의 공간이다.

다이브 오브 어비스, 특정 대상을 노리는 원거리 드림 다이브 마법이 훌륭히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눈을 껌뻑이다가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기분이 묘했다. 마법 실패로 차원의 미아가 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이게 성공했다는 소리는 세이어가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뭐, 이럴 줄 알았지."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실망할 것도 없다. 레펜하르트는 냉정을 되찾고 돔 안을 살펴보았다.

'대체 여기는 뭐지?'

그때 돔 허공에서 입체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은 한 문장의 글귀를 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도 읽을 수 없는 방식의 은의 시대 언어, 그러나 보자마자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전 드림 다이브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이 기억의 주체가 받아들인 이미지가 레펜하르트에게 전해져 뜻 자체가 직접 전달되는 것이다.

그 문장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주력 1390년, 9월 17일. 엘디아 함교 및 의회실 기록 영상을 재생합니다.

동시에 돔 안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3차원의 가상현실 화상이 순식간에 레펜하르트의 의식 주위를 모조리 둘러싸 버렸다.

☆ ☆ ☆

복잡한 기계 장치가 잔뜩 들어선 커다란 함교부, 그 안에 제복을 입은 서른 명 정도의 승무원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은발에 은빛 눈동자를 지닌 젊은이들이었다. 함교부 사방으로 크고 작은 화면들이 각종 영상이며 복잡한 수치와 그래프 등을 띄우고 쉴 새 없이 숫자를 바꾸고 또 바꾸는 중이었다.

평소 같으면 각자 자신의 화면에 집중하며 임무에 열중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함교부의 모든 이들은 중앙의 거대한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 행성이 비친다.

검고 깊은, 끝없이 넓기만 한 이 우주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별이 화면에 비쳐 승무원들의 눈빛을 사로잡는다.

젊은 여인이 감격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다른 사내도 울상을 짓는다.

"새로운 세상이로군요."

감동의 물결이 함교를 잔잔히 흐른다. 애써 냉정한 어투를 유지하며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중력도 기압도 대기 비율도, 심지어 토양과 바다의 구성 성분도 모성母星과 거의 흡사합니다. 신기한데요, 함장님?"

함교부 중앙엔 아름다운 미모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이 자리의 최고위권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젊고 연륜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똑같이 젊은 나이의 승무원들은 충분히 경의를 가지고 그를 대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이제 갓 사회에 나선 듯한 저 젊은 함장은 사실 올해로 백 살이 넘은 노인이었다. 다른 승무원들처럼 불로화 시술을 받아 저런 외모일 뿐이지.

젊은 노인이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따지고 보면 신기할 것까지는 없지."

아무리 외모가 젊다 해도 그간 쌓아 온 경험과 경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흥분한 다른 크루들과 달리 함장은 여전히 차분했다.

"이 넓은 우주에 모성과 같은 조건을 지닌 행성이 하나뿐일 리 없지 않은가?"

자신들의 본성은 거대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넓은 사막에 오아시스가 유일할 리는 없다. 자신들은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기에 충분할 만큼 아득한 시간 동안 이 검고 공허한 사막을 떠돌아다녔다.

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도 있는 자세로 코트를 걸치고 품에서 파이프를 꺼낸다.

"의회에 보고해야겠군."

평소 함교부에선 담배를 자제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온 세월을 보답 받는 이 순간이라면 담배 한 대 피울 자격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함장이 손가락을 튀겼다.

"불."

마력이 응집되며 허공에서 절로 불길이 일어나 손끝에 맺힌다. 함장은 그대로 손가락을 파이프에 가져갔다.

그런데 어째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응? 왜 이러지?"

그때 작은 입체 영상이 나타나며 까르르 웃었다.

"함장님."

녹색 머리칼에 뾰족한 귀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지닌 그 존재가 파이프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파이프에 담배, 채우지도 않으셨어요."

젊은 외모의 늙은 함장은 실소를 흘렸다. 역시 아무리 침착함을 가장하려 해도 자신 역시 꽤 흥분해 있었던 모양이다.

"허허...."

머쓱하게 함장은 파이프를 도로 외투 안으로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는 요정을 바라보았다.

"엘디아, 조사를 계속해 주게."

"네, 함장님."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지만 저 입체 영상은 생명체가 아니다.

그녀의 정체는 이 함선의 자율적 중앙 관리 시스템의 마더 프레임, 저 모습 역시 제작 당시 시스템 엔지니어가 모성에서 인기 있던 영화 캐릭터, 엘프 여인 엘디아의 이미지를 땄을 뿐이었다. 뭐, 1400년이나 지나고 보니 주객이 전도되어 이쪽이 원본 행세를 하고 있지만.

"1억의 생명이 달린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어떤 변수를 낳을지 몰라."

"걱정 마시라니까요?"

엘디아가 허공에 떠 경례를 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는 이 전통적인 경례는 모성을 떠난 지 1400여 년이 다 되도록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과거와 단절된 이들이기에 더더욱 남은 관습은 소중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럼 의회에 다녀오겠다."

승무원 전원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경례를 했다.

"예, 함장님!"

우주력 1390년. 모성이 적색거성이 된 태양에 삼켜지고 이들이 우주의 방랑자가 된 지 1400여 년 가까이 된 해.

다차원 항행용 초장거리 이민 선단, 엘디아는 드디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 ☆ ☆

이들의 선조 인류는 원래 거대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인류는 그 행성에서 흥하고 쇠하며, 끝없는 진화와 퇴화의 과정을 지내 오며 끝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인류를 낳은 행성이 인류보다 먼저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끝없이 발달한 문명은 행성을 개조하고 우주로 진출하고 원소를 변환하고 시공을 초월하는 수준까지 다다랐지만, 우주적 규모의 재앙을 막을 수는 없었다.

행성 전체를 개조할 정도로 강력한 문명의 힘도 팽창하는 태양 앞에선 무력했다. 시공을 다루는 권능조차도 그 한계가 명확했다.

어떤 수를 써도 외부의 멸망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류의 힘은 멸망을 막을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멸망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있었다는 것이다.

생명은 환경에 따라 진화한다. 그리고 우주는 생명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이다.

행성이 수명을 다하기 시작하자 인류도 다시금 새로운 진화의 길로 들어섰다. 수많은 도태와 돌연변이를 겪으며 인류는 그들의 정신적 능력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렸다.

정신 활동을 통해 도구를 창조해 세상을 바꾸는 것에서, 정신 활동 자체로 세상을 바꾸는 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능력이 인류의 인자 속에서 하나 둘 발현되었다.

역사 속에서 도술, 마법, 초상 능력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불규칙적으로 발현되던 능력이 점점 더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과학, 기술과 마찬가지로 문명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그저 감각과 감정으로 다루던 옛날과 달리 이론과 술식을 통해 체계화된 이 능력은 전통을 따라 마법이라 불렸다.

농담의 소재로나 쓰이던 마법사란 호칭은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되었고, 마법은 면허증이나 자격증처럼 누구나 노력해서 얻는 기술이 되었다.

물론 법을 좀 안다 해서 변호사라 불릴 수 없듯이, 마법을 좀 쓴다 해서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다. 마법 자체야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보편화된 기술이지만 마법사란 칭호를 가진 자는 그에 걸맞은 강력한 힘을 지녀야 했다. 마법사나 마학자가 의사나 변호사 같은 특수한 고위직종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마학과 과학, 기술력의 만남으로 인류는 자신의 행성을 탈출할 힘을 얻었다. 수많은 크고 작은 탈출 선단이 행성 내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하게 제조되었다.

그중 하나가 모성 서반구에서 번성하던 '서부인'의 이민 선단 엘디아였다.

☆ ☆ ☆

함장이 강철의 통로를 걷는다. 아니, 걷는다는 표현은 사실 틀렸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고 그가 밟은 원반이 빠른 속도로 통로를 날아갈 뿐이다.

엄청난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함장 주위엔 바람조차 일지 않았다. 관성 제어 시스템와 마력 배리어가 조합된 이 원반은 새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도 정작 서 있는 본인에겐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탑승자 입장에선 원반이 날아간다는 느낌조차도 없다. 그저 주위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가는 것처럼 보일 뿐.

원반이 멈추고 함장이 한 거대한 문 앞에 섰다. 화려한 무늬가 아로새겨진 강철의 대문, 그것이 열리며 도원경桃源境이 펼쳐졌다.

분명 커다란 방일 뿐인데 나무가 우거지고 개울이 흐르고 실제 생명체인 새와 벌레들이 울어 댄다. 그 가운데 좌식 의자가 둥글게 놓여 있고 은발의 남녀가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함장처럼 젊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들 앞으로 걸어가며 함장이 경례를 올렸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감격을 숨기지 않은 채 보고한다.

"전 이제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의원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들은 엘디아의 회선을 통해 저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사실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면 함장은 굳이 이 자리까지 행차할 필요도 없다.

대신 의원들은 크게 기뻐해 주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엘븐하임 함장."

"역사에 이름을 남기시겠군요."

단순한 정보 전달에는 감정이 없다. 이렇게 직접 보고할 때만이 감동이 있는 법이다. 요식행위로도 보이겠지만 이 역시 소중한 전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의원들은 전부 은발에 은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의원들뿐 아니라 엘디아에서 살아가는 '서부인' 모두가 비슷한 모습이었다.

모성을 탈출할 때만해도 다양한 머리 색과 유전 형질을 지니고 있던 이들이다. 하지만 수백 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은 모두가 같은 머리색에 같은 타입의 인자를 지니고 있다.

엘디아의 의료 체계는 통합되어 있고, 동일한 불로화 시술에 가장 건강하고 우수한 형질로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 역시 널리 퍼진 상태다. 모두가 최고를 원한다면 결과는 비슷비슷해질 수밖에 없지.

뭐, 젊은이들 사이에선 여러 색깔로 머리를 염색한다든가 형질은 그대로 둔 채 눈동자 색만 바꾼다거나 하는 문화도 유행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 격식을 차린 자리에서는 여전히 본연의 모습을 하는 것이 엘디아 내의 국가 시스템, 엘드라스의 예의였다.

이곳은 의회, 모두가 격식을 차리는 자리다.

은발의 의원 한 명이 함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사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엘디아가 처리 중입니다. 아마도 사흘을 넘기진 않을 겁니다."

엘븐하임 함장의 대답에 이번엔 다른 여의원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문제가 생길 경우도 있을까요?"

함장은 웃었다. 그녀의 의도를 읽은 탓이다.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엘드라스의 시민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요소는 모두 조사가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미생물과 바이러스, 바다와 토양의 미세 성분에 대한 상세 조사 정도입니다."

아무리 기후와 중력이 적합하다 해도 사소한 곳에서 치명적인 질병이나 유독 성분이 발견될 수 있으니 조사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함장은 자신만만했다.

"이 단계라면 만약 유해 요소가 나오더라도 충분히 사후 대처가 가능한 수준. 공표를 미룰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의원들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들 웃으며 서로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야말로 점잖게 환호하는 자리랄까?

함장이 그들 중 하나, 잘생긴 중년 은발인에게 말을 건넸다. 특이하게도 그는 모두가 젊은이인 자리에서 유일하게 중년의 외모를 지닌 이였다.

"제 일은 이제 끝이지만 그쪽은 앞으로 바빠지시겠군요, 메테우스 박사님."

그는 엘디아 최고의원 중 한 명이며 동시에 최고의 생태계 공학자였다. 엘디아 내의 바이오 플랜트 시스템을 제작한 자이기도 했다.

단순한 생물학자 수준을 넘어서 생태계 자체를 총괄하는 그의 업무는 실로 방대하다. 생물학, 분자학, 유전학 등은 물론이고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정신적 영향까지 감안해야 하니 언어학, 인류학, 경제학, 사회학 등 각종 인문학까지 통달해야 한다.

거대한 배일뿐이었던 엘디아는 메테우스 박사의 손을 거쳐서야 비로소 '세상'이 되었다. 그 공로가 실로 적지 않으니,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불로불사화 시술'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벌써 천사백 살이 넘은 나이였다.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보니, 늙지 않는 육체조차도 영혼의 영향을 받아 나이 든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메테우스 박사가 껄껄 웃었다.

"은퇴를 축하드립니다, 엘븐하임 함장. 부럽군요."

"홀가분하긴 합니다. 이제 연금 타 먹고 살면서 새로운 세계를 즐겨야겠지요. 남은 일은 박사께 미루렵니다."

"그러셔야죠. 그동안 하는 일 없이 세월만 축내며 귀중한 아카식을 차지하고 있어 은근 스트레스였는데, 슬슬 밥값을 할 때가 왔군요."

"1400년간 엘디아의 균형을 유지하셨습니다. 세월만 축냈다고 하기엔 치른 밥값이 너무 크십니다?"

"하하하!"

박사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검게 물들며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 ☆ ☆

어둠 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우주력 1390년, 9월 20일. 공식 착륙 영상을 재생합니다.

☆ ☆ ☆

거대한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들판도 호수도, 심지어 산맥마저도 가릴 지경이었다. 구름이 갈라지고 아득한 그림자가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드리워진다.

그 거대한 무엇인가가 하늘을 가르며 조각조각 분리되어 대지로 내려선다. 총 열일곱 개로 분리된 그것은 그 하나하나의 조각만으로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다차원 항행용 초장거리 이민 선단 엘디아는 정해진 착륙 시퀀스대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다.

이미 엘디아 곳곳에 설치된 수백만 개의 입체 영상이 일제히 그 광경을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영상이 바뀌고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이 화면에 얼굴을 보였다. 엘디아 열일곱 개 이민 선단의 총함장, 엘븐하임이었다.

"존경하는 엘드라스의 시민 여러분."

수많은 은발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대부분 젊고 아름다우며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들이었다. 마치 그들의 이민 선단을 총괄하는 마더 프레임, 엘디아의 가상 육체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1400년이란 세월 동안 가장 흔하게 봐 왔던 것이 그녀의 모습이니 문화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미적 감각이 그쪽을 따라가는 것이다.

함장이 선언했다.

"우리의 오랜 여행이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칠흑의 공허가 아닌 굳건한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축포와 환호가 엘디아의 열일곱 개 함선 전역에서 터졌다.

"엘디아에게 축복을!"

"엘드라스의 미래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1억에 가까운 환호가 이민 선단 전체를 뒤흔든다. 눈물과 환희가 끝없이 흐른다.

축제의 도가니인 그 모습을 의원들은 감동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방송을 마친 뒤 함장이 고개를 돌렸다.

"이걸로 제 업무는 모두 끝이군요."

그때였다. 갑자기 함장의 눈앞에 작은 요정이 포로롱 나타났다. 마더 프레임, 엘디아의 화신이었다.

"이상 현상 출현, 보고드립니다. 엘븐하임 함장님."

엘디아가 허공에 손짓을 하니 빛의 화면이 좌르륵 펼쳐져 온갖 문자를 토한다. 보고를 읽던 함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의원 중 하나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함장?"

엘븐하임 함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서 보고서를 돌렸다. 빛의 화면이 빙그르 돌아가 의원들을 향한다.

"아무래도 우리만 이곳을 발견한 게 아닌 듯합니다."

그곳은 막 엘디아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온갖 복잡한 수치와 상세한 상황 보고를 뒤로한 채 의원들이 말머리를 읽었다.

"다시공 항행용 초장거리 이민 선단 알 포트, 30광년 거리에서 접근 중?"

☆ ☆ ☆

다시 주위가 하얀 돔으로 돌아왔다. 레펜하르트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방금 본 영상을 생각 중이었다.

'이건 대체....'

지나치게 상식에서, 상궤에서 벗어난 광경이었다. 누군가의 망상인가? 하지만 망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하다. 아니면 정말로....

'은의 시대에 있었던 일인가?'

혼란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뭔가 다른 정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어째 주위가 다시 변하지 않는다. 왜 이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돔 일부가 열리고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니, 세이어?"

"네, 메테우스 박사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레펜하르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예의 그 '엘픈지 드워픈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외모의' 소년이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브 심도가 깊어지며 기억 주체와 더욱 연결이 된 건가?'

그런데 왜 테스론은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니, 세이어에게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는 와중이었다. 메테우스 박사, 영상 속에서도 보았던 그 잘생긴 중년인이 세이어를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재미있니?"

"네."

"그럼 더 놀고 있으렴. 그래도 너무 늦게 자는 건 곤란하다?"

"네, 박사님."

돔의 문이 다시 닫힌다. 세이어라 불린 이형의 소년만이 다시 홀로 돔 안에 남았다.

소년이 허공에 손을 뻗자 버튼이 달린 입체 화면이 허공에 생성된다. 소년이 그 영상에 대고 몇 번 손가락질을 했다.

다시 돔 내부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예의, 그 고대 문자로 이루어진 문장이 다시 나타났다.

-우주력 1390년, 9월 20일. 알 포트 내부 기록 출력을 시행합니다.

2

그곳은 엘디아와 마찬가지로 온갖 금속과 기계가 들어선 거대한 함교였다. 그러나 엘디아와 달리 상세한 부분은 차이가 났다.

같은 검이라도 롱 소드와 환도는 확연하게 다르듯, 전체 디자인이 꽤 다르다. 엘디아와는 별개의 문화권에서 출발했다는 증거다.

함교부 내에서는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마다 콘솔을 조작하고 데스크를 만지며 각자의 임무에 열중이다.

이들 역시 엘디아의 승무원처럼 사멸해 가는 모성을 탈출해 우주를 떠돌던 이들, 하지만 엘디아의 함교를 감싸던 감격과 흥분의 분위기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함교 뒤쪽에 도열해 있는 '높으신 분'들의 눈치만을 살필 뿐이다.

"엘디아, 행성 북반구에 현재 착륙 상태입니다."

"엘디아의 모선을 비롯, 모두 열일곱 개체로 분리되어 전 함이 테라포밍 시퀀스로 변환 중입니다."

"앞으로 열여섯 시간 후면 현 함 역시 실시간 통신이 가능한 구역까지 접근 가능합니다."

함교부 중앙 화면에 비친 아름다운 푸른 별을 보며 검은 머리의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이거 상황이 우습게 되었구려."

금속질의 제복을 걸친 다른 승무원들에 비해 그 중년인은 꽤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붉은색이 도는 비단으로 만든 코트를 걸치고 허리에 요대를 찼는데 코트 겉면에 금박으로 용의 무늬가 수놓여 있다. 이들의 전통 속에서 용포龍袍라 불리는 의복이었다.

알하트란의 17대 국왕, 드칼란 2세는 난처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어 함장."

함장석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새치머리의 중년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폐하."

엘디아와 달리 이곳의 승무원들은 저마나 나이대가 달랐다. 젊은이도, 중년인도, 심지어 백발이 성성한 나이 든 이도 있다.

이곳, 알 포트에도 불로화 시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실제로 이들도 모두 불로화 시술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엘디아의 그것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엘디아의 불로화 시술은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유지하게 해 주는 시술이다. 그러나 알 포트의 시술은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은 신체 능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시술이었다.

이들의 문화적 기반이 모성의 대륙 동반구에서 비롯된 탓이었다.

'동부인'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고향은 전통적으로 서부에 비해 나이와 서열을 중시했다. 문화나 풍습은 물론, 언어조차도 서부인에 비해 연배를 훨씬 중시하는 문법 체계를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그 전통을 이은 알하트란인들에겐 나이든 모습 역시 젊음 못지않은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엘드라스가 한발 빨랐구려."

"그렇습니다, 폐하."

고뇌에 찬 표정으로 드칼란 2세는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이 못지않게 알하트란은 사내다움을 강조하는 문화도 지니고 있었으니, 수염을 기르는 것 또한 남성들 사이에선 꽤나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현장의 의견을 듣고 싶소."

"그에 대해선 저보다 창화 수석 법무관이 더욱 상세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창화?"

"아, 트라벤 수석 법무관 말씀입니다."

흠칫 놀라며 기어 함장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드칼란 2세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알하트란의 신민들은 모두 태어날 때 두 종류의 이름을 받는다. 기어, 드칼란처럼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시스템 I.D와 전통 스타일의 진명眞名이 그것이다.

드칼란 2세 역시 청풍월淸風月이라는 진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진명을 부르는 경우는 부모와 자식, 혹은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만 있는 일이다.

말인즉슨....

"정녕 사내로고! 알하트란의 천년 대업을 코앞에 두고도 할 짓은 다 하셨구먼?"

"소, 송구스럽습니다."

기어 함장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 뒤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 걸어왔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폐, 폐하. 소인 트라벤이옵니다."

겉보기엔 기어 함장과 부녀지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기어 함장과 동년배였다.

분명 알하트란은 나이와 서열을 중시하며, 늙음을 존중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남성에 한한 것이고 여성들은 좀 달랐다. 동부인 여성들은 오히려 서부인보다도 더 심하게 젊음을 탐닉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립적이고 성숙한 여인을 높이 치는 서부인에 비해 동부인 여성들의 취향은 닥치고 동안童顔이었다. 무조건 어려 보이면 좋아한달까?

물론 그 와중에도 여성스러운 면은 또 강조되길 원하니, 베이비 글래머라는 괴상한 표현이야말로 동부인 여성들의 이상형을 정확히 칭한다 할 수 있겠다. 뭐, 전통적으로 남성 우위 성향이 강한 만큼 그에 대한 영향력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이유로 중년의 나이이면서도 여전히 탱탱한 피부의 트라벤 법무관이었다. 그녀가 애써 냉정을 되찾으며 보고했다.

"현재 엘디아는 본함보다 이틀 먼저 신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관례적으로 볼 때 그들이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현재 엘디아는 전 우주를 향해 초공간 통신으로 신세계 발견 소식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이 머나먼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인류 중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웃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알 포트는 저들의 인도로 저 행성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초공간 통신이 쏘아지기 이전에 이미 저희 관제 시스템이 포착했으니까요. 이는 증거 기록으로 제출될 수 있으며 국제법상 충분히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하? 모성이 박살 난 지 1400년인데 이제 와서 국제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게 문제지요."

동감이라며 트라벤 수석 법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칼란 2세가 혀를 찼다.

"하필 이런 재수 없는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기어 함장이 조심스레 첨언했다.

"우연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 사료됩니다만."

사멸해가는 모성을 탈출한 것은 자신들뿐이 아니다. 저들, 서부인의 엘디아 뿐 아니라 많은 이민 선단이 제조되어 새로운 미래를 찾아 모성을 떠났다. 엘디아와 알 포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선단이었을 뿐이다.

목마른 두 사람이 말라 버린 오아시스 대신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았다.

비슷한 체력의 두 사람이 같은 종류의 낙타를 타고 동일한 시간을 사막 속에서 헤맸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오아시스에 도달하는 것은 필연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나친 우연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그래,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소. 하지만 14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는데, 이 드넓은 우주에서 고작 이틀 간격으로 만나는 건 분명 천문학적인 우연이 아니겠는가?"

골치가 아파 드칼란 2세는 미간을 짚었다.

저 행성에 엘디아가 먼저 도착했다 해서 자신들이 운전대 꺾고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다. 엘드라스의 인구는 고작 1억, 알하트란과 합쳐도 2억 정도다. 그들의 모성은 이보다 몇십, 몇백 배나 되는 인구도 포용했었다. 뭐, 300억을 넘어가며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저 행성은 두 이민 선단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크다.

실제로 지금 엘디아의 초공간 통신이 담은 내용은 '새 땅을 찾았으니 아직 새 땅 못 찾은 분들 계시면 이리로 오세요!' 쪽이었다. 결코 '우리가 먼저 찾았으니 여긴 우리 땅! 쳐들어오면 죽인다!'가 아니다. 저런 치졸한 짓을 할 만큼 엘드라스의 시민들은 미개하지 않다.

문제는 행성 점유에 따른 권리였다.

신세계를 발견했다고 모든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걸맞게 온갖 문제가 널려 있다. 영토 배치며 천연 자원의 우선 점유권, 해양 자원의 분배 등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수두룩하다.

"속 편하게 행성을 딱 반으로 나눠 엘드라스와 갈라 먹을 수도 없고 말이지."

평범한 사과조차도 완전히 똑같이 반으로 가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한쪽이 보다 달고 즙이 많으며 맛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물며 이건 사과도 아니고 거대한 행성이다. 어떻게 나눠도 결국 한쪽이 유리하게 된다. 그것을 정하는 것이 바로 우선권.

트라벤 법무관이 고개를 저었다.

"엘드라스에선 발견 우선권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기나긴 외교가 필요해지겠구나."

"저들은 알하트란과 달리 의견 수립이 한층 까다로우니까요."

법무관의 말에 드란칼 2세는 한숨을 쉬었다. 엘드라스는 의회제, 중론을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결론을 내는 데는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쪽도 그리 다를 건 없지만.'

비록 알하트란이 중앙 집권형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독재국가는 아니다. 엄연한 입헌군주제로 신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차라리 알 포트가 한참 늦어, 엘디아의 인도에 따라 저 행성을 찾은 쪽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엘디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 따른 몇몇 행성 점유권을 양보한 뒤 함께 살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의 결과를 내는 것이 왕의 임무다. 그가 한발 나서고 물러날 때마다 1억 신민의 미래가 좌지우지되니까.

각오를 굳히며 드란칼 2세가 손짓했다.

"실시간 통신 가능 공역까지 계속 전진하라. 결과야 어찌 되건 일단 엘디아와 접촉해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 테니."

"예, 폐하."

문득 드란칼 2세가 미소를 지었다.

"사멸해 가는 고향을 함께 탈출한, 같은 품에서 함께 자라난 두 인류가 이 끝없는 우주에서 다시 만났다."

왕다운 음성, 왕다운 미소로 그가 말을 맺었다.

"지금은 일단 새로운 만남에 순수하게 기뻐하자꾸나."

☆ ☆ ☆

알 포트는 엘디아가 착륙한 행성 북반구를 피해 적도 근처에 착륙했다. 그리고 바로 외교 서신을 보냈다. 그들의 업적을 축하하며, 또한 자신들 역시 이 행성 발견에 권리가 있음을 명확히 하는 서신이었다.

물론 엘드라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 재수 없는 우연에 당황하기로는 그들이 더 했다. 큰 기쁨에 젖어 있다 뒤통수를 맞은 격인 것이다.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저들의 주장이 합당하니 동등한 조건에서 행성 점유권을 나눠야 한다는 온건파.

자신들의 우선권은 확실하나 저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으니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중도파.

심지어 의회제 특성상 과격한 의견도 서슴없이 나왔다.

"이 행성은 분명 우리의 것,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함이 옳지 않겠소?"

"그럼 전쟁이라도 벌이잔 말입니까?"

"필요하다면 뭔들 못하겠소?"

알하트란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러 의견이 난립하니 명확한 결론 따윈 전혀 나지 않았다. 개중엔 엘드라스보다 더 심한 과격파도 있었다.

"시공융합포로 저 행성 날려 버리고 다른 세상 찾아 각자 떠나 버립시다! 차라리 그쪽이 속은 편하겠어요!"

물론 저 헛소리는 가뿐히 무시되었다.

"1400년 만에 겨우 찾은 소중한 행성을 어쩌고 어째?"

그러나 저런 의견조차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가열된 것은 사실이었다.

드란칼 2세의 한숨 섞인 혼잣말이야말로 현 분위기를 명확히 보여 준다 하겠다.

"새로운 만남이 기쁘긴 개뿔!"

어전御殿의 과열된 분위기를 피해 뒤뜰을 산책하며 드란칼 2세가 허공에 뇌까렸다.

"알 포트."

허공에서 빛이 응집하며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수북한 검은 수염에 짧고 탄탄한 체구, 모성의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 나오는 환상의 종족 드워프의 모습이다. 엘디아와 마찬가지로 알하트란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자율성 중앙 관리 시스템의 메인 프레임, 알 포트였다.

입체 영상, 알 포트가 진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엘디아처럼 알 포트 역시 원래는 모성의 유명한 영화 캐릭터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같은 영화의 두 캐릭터가 두 이민 선단의 마스코트가 된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이민 선단을 제작하던 당시 인류는 모두가 힘을 합쳐 마학과 기술, 과학의 힘을 총동원했고 그 와중에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그 와중에 남성 비율이 높던 서부의 시스템 엔지니어 측이 엘디아를 중앙 시스템의 마스코트로 삼자, 여성 비율이 높던 동부 쪽이 경쟁 심리로 영화 속 라이벌 캐릭터인 알 포트를 마스코트로 삼은 것이다.

비록 드워프긴 했지만 영화 속 알 포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난쟁이'라는 유쾌한 별명마저 있었을 정도다.

전형적인 이상형 타입인 엘디아에 비해 알 포트는 마니악한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고,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은 원래 취향이 마니아에 가깝다. 별 고민도 없이 알 포트를 중앙 관리 시스템의 인격 형상체로 입력해 버렸다.

인류의 미래가 걸린 국책 사업의 마스코트를 제작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결정해 버리다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는 멸망을 코앞에 둔 시대, 그까짓 마스코트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괜히 트집 잡아서 개발 늦어지기라도 하면 수억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데? 드워프가 아니라 삼두육비의 괴물을 마스코트로 삼았어도 가동만 잘되면 문제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무사히 모성을 탈출한 후에도 중앙 시스템의 디자인은 변동이 없었다. 탈출 초기에는 개발자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감히 손을 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선 다들 너무 당연히 여겨 손댈 필요를 못 느꼈다. 그렇게 알 포트는 아득한 세월 동안 알하트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알하트란의 모든 것이 집약된 눈앞의 입체 영상을 향해 드란칼 2세가 명령을 내렸다.

"이 사태에 대한 대처법을 분석하라."

알 포트는 모성의 모든 것을 담은, 거기에 1400년 동안 알하트란의 신민들이 쌓아 온 정보까지 총 집약된 거대한 지식의 우물이다. 단지 그 지식 속에 지혜는 없다. 인공 지능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렇기에 어전에서 지금도 저리 토론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알 포트가 대답했다.

"다섯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알하트란의 신민들이 원하는 것, 가장 이로운 것, 가장 현실적인 것, 가장 현명한 것, 가장 어리석은 것."

"신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화,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 양쪽 모두에게 공평한 해결책입니다."

"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굳이 알 포트의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아도, 이미 저게 불가능하다는 건 드란칼 2세도 예상했다. 똑같은 빵 두 개가 있고, 그걸 두 사람에게 나눠주면 양쪽 모두 공평하다고 느낄까? 천만의 말씀이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고 체형이 다르니 양쪽 모두 불공평하다고 느낄 뿐이다.

그럴 줄 알았다며 드란칼 2세가 말을 이었다.

"가장 이로운 대처법은 무엇인가?"

"전쟁입니다. 한쪽의 뚜렷한 우위가 결정되고 나서야 이 사태는 깔끔히 해결될 것이며, 전통적으로 가장 확실한 우위 결정 방식은 폭력, 곧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엘디아와 알 포트가 명확한 우선권을 설정한다면, 전쟁에 승리하건 패하건 그 결과는 알하트란의 안정적인 미래로 이어집니다."

눈살을 찌푸리며 알하트란의 국왕이 재차 묻는다.

"가장 현실적인 대처법은 무엇인가?"

"전쟁입니다. 엘디아와 알 포트의 전력은 비등, 국지전에서의 승패는 갈려도 총괄적인 측면에서 양측은 비슷한 전황을 유지할 것입니다. 소모전이 계속되며 서로의 피해가 커지면 외교적 이득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보다 적어지게 됩니다. 그리하면 양쪽 모두 합리적인 양보가 가능합니다."

"가장 현명한 대처법은 무엇인가?"

"전쟁입니다. 외교적 불균형은 당장의 사태는 진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대로 문제점을 내재하게 됩니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외교적 불균형에 따른 불만으로 야기되는 소규모 접전 및 냉전이 40년 이상 이어질 경우 실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능가할 것입니다. 한 번의 전쟁으로 확실한 결과를 낳는 쪽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더욱 현명합니다."

드란칼 2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도 전쟁, 저래도 전쟁인가?"

이것이 알 포트의 판단을 그들이 따르지 않는 이유다.

분명 알 포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완벽히 분석하고 가장 확률 높은 미래를 예지한다. 이민 선단 알 포트는 시공을 넘나들며 항행하던 선단, 시공을 항행하며 얻은 수많은 정보는 거의 근사치에 가까운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아마도 이 역시 높은 확률로 실현되겠지.

하지만 그 결과를 누리는 것은 자신들이다.

눈앞의 희생과 미래의 행복 중 어느 쪽이 더 가치가 높은가? 알 포트는 통계를 통해 후자를 택한다. 그러나 인류에겐 때론 눈앞의 희생이 미래의 행복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 희생을 용납지 않음으로써 보다 힘겨운, 그러나 보다 떳떳한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분명 인류에게 그 미래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시스템의 메인 프레임일 뿐인 알 포트에겐 '보다' 불행한 미래일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오직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국 큰 이변은 없겠지.'

드란칼 2세는 어전 쪽을 힐끔 보았다. 분명 제도적으로 알하트란은 알 포트의 판단을 참조는 할지언정 결코 따르진 않는다. 하지만 인류는 그리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고, 언제나 미래는 과거의 답습인 법.

어전 쪽에서 한 중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선전포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의의 박수 소리.

이번에도 알 포트의 판단과 관계없이, 결국은 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직 알 포트는 다섯 가지 중 네 방안밖에 말하지 않았다.

"...그럼 가장 어리석은 대처법은 무엇인가?"

감정이 없는 인공 지능, 가상 인격체 알 포트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전쟁입니다."

☆ ☆ ☆

신세계를 발견한지 반년 뒤, 결국 엘디아와 알 포트는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새로운 희망은 서로의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다.

☆ ☆ ☆

전쟁은 4년에 걸쳐 진행됐다.

이미 엘드라스나 알하트란이나 물량에 의한 총력전을 벌이는 문명 수준은 벗어났다. 개인으로 군대를 상대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기실 군대는 크게 필요 없다. 그저 초인과, 그 초인을 지원할 군사적 시스템만이 필요할 뿐.

차원과 시공조차 초월하는 이들 문명에서 전쟁은 선택받은 특수층의 전유물이다. 모성의 역사 속에선 삼류 사기꾼에게나 붙던 것이지만 현재는 사회를 지탱하는 최고위층에게만 붙는 칭호, 마법사가 그들을 지칭한다.

양측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세계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온갖 다양한 전함과 전투선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초월적인 성능을 지닌 강력한 병기가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강력한 마법사들 손에 들려 끔찍한 파괴의 향연을 펼쳤다.

새로운 세계의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물론 모든 전쟁이 마법사들만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일반 군인의 존재가 필요한 소소한 전투도 제법 많았다.

그런 군인들을 위해 대륙 곳곳에, 훗날 던전이라 불리게 되는 다양한 전진기지가 세워졌다. 마법사들이 하늘을 부수는 동안 군인들은 마탄창을 쏘아 화력전을 벌이고 마검을 휘둘러 백병전을 펼치며 대지를 서로의 피로 물들였다.

엘디아의 이민 선단 중 넷이 폭파되고 셋이 시스템 파손으로 인해 차원 저편으로 유실되었다.

알 포트의 이민 선단 중 셋이 붕괴되고 넷이 시스템 파손으로 인해 시공 저편으로 유실되었다.

같은 고향에서 출발한 같은 인류의 후손,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의 전쟁은 수천만의 사상자를 낸 후에야 겨우 끝났다. 알 포트의 예언대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행성 우선권으로 얻는 이득을 넘어서자 양쪽 모두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몇 달에 걸친 외교 끝에 정전 협정이 맺어졌다.

겨우 평화가 왔다.

방공호에 갇혀 있던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가 펼쳐졌다.

새로운 대지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전쟁으로 소모되었던 국력이 모두 외부로 옮겨진다. 과학자와 탐험가, 마법사들을 앞세워 이 젊고 싱그러운 행성 곳곳을 조사한다.

그 와중에 이들은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 조금씩 소문은 돌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은 되지 않았던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 도시 괴담처럼 오가던 이야기가 드디어 학자들에 의해 명확히 밝혀졌다.

이 행성은 빈집이 아니었다.

이곳엔 이미,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원시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다.

3

어둠 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우주력 1395년, 1월 20일. 메테우스 마학 연구소, 제9연구실 기록 영상을 재생합니다.

☆ ☆ ☆

-새로운 인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온갖 매체와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원시 인류의 발견을 공표했다. 확실히 이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시민들의 반응은 요약하면 '아, 역시?' 쪽에 가까웠다.

4년 동안 많은 마법사와 군인들이 행성 곳곳을 누비며 전투를 벌였다. 비록 군사 기지를 세우기 위한 목적이지만, 그 와중에 행성 탐사도 꽤나 진행되었다. 당연히 군 내부에선 이미 몇 번이나 원시 인류며 이 행성 특유의 생물체와 조우한 바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저들이 사회로 복귀하며 그 이야기를 널리 퍼트렸으니, 이미 이 행성에 선주 종족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 지금일 뿐이지.

"그래도 이제부턴 공식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었으니, 이건 좋군."

화면을 보며 중년인, 메테우스 박사는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지금 수십 개의 거대한 유리창이 설치된 커다란 연구실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유리창 안쪽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멍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한다.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 못 하는 표정이었다.

"우우...."

"아르르르...."

"커헝!"

언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이들은 메테우스 박사와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금은청록의 다양한 체모 색깔에 뾰족한 귓바퀴, 이목구비의 형태며 신체 골격 역시 꽤 차이가 난다.

바로 이 행성의 원시 인류, 선주 종족들이었다.

전쟁 중 전투에 휘말린 선주 종족은 대부분 메테우스 박사에게 인도되었다. 덕분에 정식으로 공표하기 몇 년 전부터 박사와 그의 연구원들은 이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많은 연구원들이 저마다 차트를 들고 각 우리를 관찰한다. 우리에 갇혀 있는 선주 종족은 모두 연구원이 제공한 의료용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저래 놓으니 정말 문명인과 별 차이가 없는 외모다. 심지어 꽤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야만인은 야만인이었다. 우리를 들여다보면 여성 연구원 하나가 얼굴을 붉혔다.

"아우, 또 저러네."

선주종 중 몇몇이 가운을 훌렁 젖히고 사타구니를 벅벅 긁고 있었다.

이들에겐 아직, 외부 환경으로부터 육체를 보호하는 목적 이상의 의복 개념은 없는 것이다.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냈다 해서 수치심을 느낄 만큼 사회적, 도덕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참 연구원 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지. 문화가 다르잖아?"

"문화라 부를 정도의 뭔가도 없잖아요."

여성 연구원이 인상을 썼다.

"그냥 짐승이지 저거...."

실제로 다른 유리 우리에선 선주 종족 남성 하나가 성기를 빳빳하게 발기시키고 여성체를 덮치려는 중이었다. 강제로 여자의 다리를 벌리고 짐승 같은 신음을 내며 발버둥을 친다.

"카오오오!"

놀라지도 않고 연구원 하나가 손가락을 튀겼다.

"아쿠아 샤워."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마법쯤은 누구나 쓰는 시대다. 이내 물의 공이 생겨나 남성체를 뒤덮었다. 물벼락을 맞은 남성체가 화들짝 놀라 우리 구석으로 달아나고 여성체가 안심한 표정으로 반대쪽으로 달려간다.

마법을 쓴 연구원이 피식 웃었다.

"이건 뭐, 흘레붙는 개들 떼어 놓는 것도 아니고...."

가족 개념과 사회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을 넣은 것인데, 가족이고 사회고 간에 일단 덮치려고만 한다.

"지성 따윈 보이지도 않네. 역시 짐승인가?"

메테우스 박사가 혀를 찼다.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 없지. 자네를 벌거벗겨 놓고 알몸의 미녀 앞에 던져놓으면 뭐, 다른 짓 할 것 같은가?"

"에이, 그래도 일단은 상황 파악부터 하겠죠. 어떻게 대뜸...."

"그러니까 그 상황 파악을 해야 한다는 개연성 사고가 미발달된 것은 맞지. 그렇지만 미개하다는 이유로 짐승이라 매도할 수는 없을 걸세."

"매도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깨를 으쓱거리며 연구원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메테우스 박사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연구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이들, 선주 종족을 연구한 지도 벌써 2년이 넘게 지났다. 이미 다양한 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생태는 파악이 되었다.

신체적으로 이 원시 인류는 그들과 동일한 타입의 진화 과정을 거쳐 온 것으로 보인다. 뾰족한 귓바퀴며 체모 색 등 외모적 차이는 있지만 직립 보행에 손을 사용하는 것하며 골격과 근육 형태 역시 유사점이 있다.

두뇌 발달 레벨 역시 현 이주 인류와 비슷해 보였다. 미개한 이들이 문명인인 현 인류와 두뇌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건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모성에서도 원시인이나 문명인이나 뇌 용적, 뉴런, 시냅스 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문명 수준은 모성 기준으로 대략 후기 구석기에서 신석기 초기 단계였다. 이처럼 시대적 간극이 큰 이유가 있다. 행성은 넓고 선주 종족은 다양하게 퍼져 있으며 서로 간에 교류가 극히 힘든 만큼 지역별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행성의 원시 인류는 모성의 고대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특이한 부분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개체 정보 및 인격 구축 기반 활성화 영자 구현체', 즉 영혼에 현 이주 인류와 비슷한 인자를 지니고 있었다.

"크아아!"

우리에 갇힌 선주 종족 남성체 하나가 유리창에 대고 포효를 질렀다. 충격파가 터져 유리창을 강하게 진동시켰다.

콰쾅!

연구원 하나가 인상을 썼다.

"저거 또 난리네."

간단한 전격 마법으로 감전 쇼크를 주니 이내 얌전해지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메테우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기하단 말이야."

정신과 영혼을 구축하는 요소, 즉 영자靈子를 기반으로 물리적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마법'은 모성에서도 멸망의 시대 직전에나 발현된 인자였다. 그런데 이 행성의 선주 종족 역시 저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발현 가능한 건 만에 하나 꼴이고 대부분 잠든 채 끝날 뿐이지만.

'이들이 특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도 고대엔 그런 인자가 있었는데 묻혔다가 다시 발현된 것인가?'

생각해 보면 모성의 고대 역사에서도 온갖 영웅과 마법, 주술의 전설이 있었으니 아주 근거가 없는 가설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들도 정상적으로 문명을 발달시킬 경우, 자연스럽게 저 힘을 잃고 모성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지.

'아니면 역시 수명 문제일지도?'

메테우스 박사는 또 다른 가설을 떠올렸다.

많은 부분에서 모성의 인류와 비슷한 선주 종족, 그러나 명확한 차이점도 있었다.

이들의 성장 속도는 인류의 네 배에 달했다. 기대 수명 역시 네 배라는 의미였다.

극도로 발달한 문명, 보편화된 불로화 시술 덕에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의 시민은 모두 장수한다. 그러나 늙지 않는 그들조차도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낡은 집을 거듭 리모델링해 새 집처럼 만들어도 그 토대는 시간 속에 함몰되기 마련이다. 각종 인자를 조작해 젊음과 건강을 유지해도 세포 자체의 수명은 결국 한계가 있었다.

대략 150년 정도 지나면 아무리 불로화 시술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이 뇌세포가 붕괴되며 영혼과의 결합이 끊긴다.

괜히 노화 발현 인자가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점에서 볼 땐, 노화를 멈춘 채 어느 순간 급사하는 것보다 육체적으로 가장 뛰어날 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종 자체의 수명을 늘리는 데는 훨씬 이롭다.

메테우스 박사가 받은 '불로불사화 시술'처럼 아카식 드라이브를 이용한 '영혼 전이술'로 아예 새로운 육체에 옮겨 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여전히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선주 종족의 수명은 인류의 네 배다. 자연스럽게 늙을 경우 최대 사백 살, 불로화 시술을 받는다면 육백 살까지 생존할지도 모른다. 한 세대에 영혼이 육체에 거하는 시간이 월등히 길다.

'그러니 인류와는 다른 방식의 영적 진화를 이루는 것도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

메테우스 박사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특히나 저 선주 종족의 긴 수명은 그의 연구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떤 인자가 어떤 형태로 발현하기에 저리 자연스러운 수명을 지니고 있을까? 그것을 밝혀낸다면 엘드라스 시민들의 수명 역시 대폭 늘어날 것이다.

기대에 차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구실을 벗어나 다른 장소로 향했다.

마력 원반에 올라타 통로를 한참 이동하다 또 다른 작은 방 앞에 선다. 포육실哺育室이라 적힌 그 방 안에 들어가니 다양한 색채로 벽을 장식하고 온갖 장난감이 늘어져 있는 아이용 방이 나왔다.

한 여성 연구원이 채 돌도 지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아기를 안고 달래다 메테우스 박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셨어요?"

"그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메테우스 박사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듯한 이 작은 아기는, 사실 이미 출생 후 2년이 넘었다. 듬성듬성 난 푸른 머리카락에 뾰족한 귀를 지닌 이 아기야말로 박사가 원시 인류의 최우수 인자만을 뽑아 인공 자궁에서 탄생시킨 존재였다.

코드 넘버 : Si13408.

원시 인류의 본질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오직 육체적, 영적 인자의 가능성만을 발현시켜 최대한 자연스럽게 태어난 이 아기야말로 그가 원하는 완벽한 실험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메테우스 박사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조막만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아기가 입을 열었다.

"박사님... 메테우스 박사님...."

인간으로 치면 태어난 지 반년도 안 지난 셈인데 벌써 뚜렷하게 말을 한다. 저 밖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는 다른 선주 종족과는 전혀 다르다.

메테우스 박사는 아기의 이름을 불렀다.

"잘 잤니, 세이어? 까꿍!"

☆ ☆ ☆

"큭!"

레페하르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극심한 감성의 파도가 밀려온 탓이었다.

그리움, 상실감, 분노, 증오, 애정, 사랑, 두려움....

혼탁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뇌리를 감싸며 영혼을 매몰시킨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 드림 다이브 상태에서 종종 있는 일, 꿈꾸는 자의 감정이 너무도 격해져 다이버에게까지 그 폭풍이 몰아치는 상태다.

"끙, 세이어가 궁상이라도 떠나보군."

금방 레펜하르트는 냉정을 되찾았다. 타인의 감정에 휘둘릴 정도로 그의 수양은 얕지 않은 것이다. 잠깐이라도 흔들린 것 자체가, 지금 몰아친 이 감정이 얼마나 거세고 격렬한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정도야 흔한 일이지, 뭐."

태연스레 레펜하르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린 아기와 메테우스 박사의 영상은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 돔 내부로 돌아와 있었다. 그 한 가운데서 세이어가 웃으며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 웃으며, 증오의 눈길을 보낸다.

"하하하하...."

그곳에 앉아 있는 세이어는 더 이상 귀 뾰족한 소년이 아니었다. 흑발을 길게 드리운 아름다운 청년, 젊은 레펜하르트의 육체 형상을 하고 있다.

레펜하르트의 존재 따윈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세이어가 혼잣말을 흘렸다.

"아아, 증오하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여...."

순간 돔이 통째로 사라졌다. 배경 자체가 녹아내리며 시야의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 의식 전체가 어디론가 날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꿈이 바뀌나 보군."

인간의 꿈이나 기억은 현세의 법칙이 아닌 의식의 흐름을 따른다. 시간과 공간적 제약이 없으니 드림 다이브 시 이렇게 갑자기 모든 게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느새 레펜하르트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수많은 은발인이 오가는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도서관 사방에 온갖 서적이 빽빽이 꽂혀 있다.

'허어, 이 정도로 극도로 발달된 문명에서도 여전히 종이는 정보 저장용 도구로 사용되나?'

그런데 자세히 보니 종이책만 진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둥근 수정구 역시 빽빽하게 놓여 있고,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서적이 아닌 저 둥근 수정구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잘 보니 익숙한 물건이었다. 레펜하르트도 종종 이용했던 마법기, 정보 저장구다. 뭐, 그가 쓰던 것보다 훨씬 세련된 형태긴 했지만.

눈치를 보니 정작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저걸로 독서를 대신하는 모양이다.

"뭐야? 저럴 거면 책은 왜 꽂아 놨어? 그냥 폼인가?"

책을 보는 이들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독서하는 방법이 레펜하르트의 상식 밖이었다.

그냥 책 하나를 들고 와 자리에 앉고 페이지를 펼치는 것이 아니다. 마법으로 조심스레 책을 뽑고, 커다란 유리통 같은 곳에 넣은 뒤 조심스레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상한 분사액 같은 걸 뿌린다.

어찌나 조심하는지 살얼음판을 건드려도 저것보단 난폭할 것 같았다. 책이 아니라 무슨 다 죽어 가는 중환자 다루는 듯한 모습이다.

'...저렇게까지 할 거면 대체 왜 종이책을 그냥 놔두는 거냐?'

어이없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기억의 주체를 찾는 것이다.

과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소년 하나가 도서관 내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열 살 남짓 정도로 보이는 세이어였다.

소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나가던 은발인들이 흠칫 놀란다.

"어머? 선주종이잖아?"

"저게 어떻게 여기 있지? 무슨 촬영 중인가?"

"그래도 옷 입혀 놓으니 꼭 사람 같긴 하다."

신기한 눈초리로 보다가 이내 신경을 끈다. 무심한 얼굴로 소년은 계속 걸었다. 그리고 도서관 한쪽에 서서 한 정보 저장구에 손을 얹었다.

정보가 소년을 통해 레펜하르트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 ☆ ☆

전쟁이 끝나자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은 더 이상 케케묵은 우주력을 쓰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이 행성을 발견한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역법이 만들어졌다.

신세력新世曆 54년.

두 인류가 이 행성에 이주한 지도 어느덧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행성에 대한 조사도 거의 끝이 났다.

비슷한 조건, 비슷한 크기의 행성인 만큼 환경 역시 모성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루의 길이, 1년의 길이, 자전과 공전이 거의 같았다.

심지어 달조차도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공전 주기, 비슷한 궤도로 행성 주위를 돌고 있다. 조류潮流도 흡사하단 소리다.

종교인들은 '이것이 어찌 우연일 수 있으랴, 이것이야말로 신께서 우리들을 위해 안배한 곳이다!'라고 떠들어 댔지만 과학자나 마학자 입장에선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행성의 크기, 태양과의 거리, 자전축의 각도로 인한 사계절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대기 순환, 달의 질량과 거리로 인해 행성에 미치는 영향 등 수많은 요소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곳은 사람 살 곳이 못 되게 된다.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은 사실 굉장히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걸 고려해 인류가 살아갈 장소를 찾는 것이 과학자들의 임무였다.

기술과 마법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은 의미가 없다. 그럴 거면 그냥 이민 선단에서 살아가도 된다. 후손을 위해 완벽한 미래를 남기지 않으면 성공했다 할 수 없었다.

모성에서 살던 인류가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원했고, 결국 찾았다. 당연히 모든 조건이 모성과 흡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넓은 우주에서 모성과 똑같은 행성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운운 역시 의미가 없다. 평범한 복권도 1400년 동안 긁으면 당첨되게 마련이다. 그동안 이들이 포기한 행성과 항성계가 몇인데? 단지 3천 년 정도는 각오했는데 1400년 만에 발견하게 된 것은 확실히 행운이긴 했다.

모성과 환경이 흡사한 만큼 행성의 생태계 역시 상식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식물도 동물도 이주 인류가 적응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고 모성과 큰 차이는 없었다.

심지어 호랑이며 사자, 하마, 소, 말, 개, 고양이 등이라든가 벼와 밀, 보리며 각종 유실수처럼 모성과 거의 같은 동물군이나 식물군도 존재했다.

물론 다른 점도 없지는 않았다.

일단 거대 맹수류가 그것이다. 모성에선 오래전 사멸한 거대 맹수류가 이 젊은 행성에선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모성과는 다른 형태, 다른 모습이지만 인화성 물질이나 독액을 내뱉어 자신을 방어하는 습성을 지닌 이 거대 맹수류는 이주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전통으로 전해져 오는 신화며 전설에 따라 이 거대 맹수류는 히드라나 드레이크, 드래곤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이곳엔 아직 인류의 아종亞種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모성에서도 인류의 초기엔 수많은 다종 인류가 번성했다. 진화의 과정 속에서 많은 인류의 선조들이 투쟁하고 사멸해 갔다. 그중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살아남은 것이 바로 현 인류의 선조다.

모성에서는 모든 아종이 사멸한 후에야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켰지만 이 행성에선 좀 다른 길을 걷는 듯했다. 이미 선주 종족 일부가 원시 문명의 초기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다른 인류의 아종 역시 행성 곳곳에서 생존하고 있었다.

지능이나 수명 면에선 선주 종족보다 떨어지지만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단순한 도구를 다루는 또 하나의 원시 인류, 이는 이주 인류의 전설에 나오는 한 생물체와 이미지가 흡사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레 오크라 이름 붙여졌다.

지능 자체는 선주 종족 못지않지만 사회성 개념이 없고 신체 변화 능력과 정신 제어 능력이 있는 흉포한 또 하나의 원시 인류, 이들은 트롤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실 이들이 정말로 모성의 전설 속 오크나 트롤과 흡사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비교해 보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다. 모성의 오크는 마법 한 방에 비실대는 속성 따위 전혀 없고, 전설 속 트롤도 2단 변신하는 괴물 따위는 아니다.

하지만 전설 속 기린과 실제의 기린이 뭐, 어디 비슷한 데가 있긴 하던가? 원래 대충 이미지가 맞으면 이름 붙이는 법이다.

그렇게 행성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은 번영을 이어 갔다.

대지 곳곳에 신도시가 세워지고 개발이 진행되었다. 피로 시작했던 두 인류의 관계도 극히 좋아졌다.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다. 이제 서로의 도시에서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이들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 ☆ ☆

열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TV를 본다. 한창 요새 인기 있는 영화가 화면을 통해 비친다.

3D, 4D를 넘어서 홀로그램이며 뇌신경에 직접 관여해 완벽한 가상현실을 제공하는 기술이 극도로 발달했음에도 여전히 평면 화면은 존재했다.

기술은 필요에 의해 발달하고 걸러지는 법, 실감 나는 영상과 체험도 물론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실감 나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자고로 구경은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 최고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구경'이 재미있는 거지 '체험'이 재미있는 건 아닌 것이다. 한발 떨어져서 멀리서 관조하는 구경 역시 실감 나는 체험 못지않게 사람이 필요로 하는 유희다.

평범한 화면 속의 영화를 보며 어린 소년, 세이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영화는 아름다운 엘프와 늠름한 드워프가 은발인, 흑발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과 동료를 맺고 원시 세계를 탐험하는 내용이었다. 모성의 오래된 환상 문학 중 하나를 현 시대에 맞게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영화뿐 아니라, 현재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에선 이런 식의 환상 문학 기반 문화 현상이 붐이었다. 괜히 이 행성의 생물에 환상 문학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다.

이미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에선 영화뿐 아니라 각종 관련 문화 상품이 개발되어 크게 흥행하고 있었다.

원래 이민 선단 내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일부 마이너한 취미를 지닌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이 지금 크게 유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쟁으로 시작했던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이다. 그리고 두 이민 선단의 상징은 바로 엘프 여인 엘디아와 드워프 사내 알 포트다.

평화의 시대가 온 지금, 인간과 엘프, 드워프가 힘을 합쳐 모험하는 환상 문학 계열은 새 시대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오크나 트롤 등을 해치우며 탐험하는 것 역시 행성을 개척하는 이미지와 흡사했다.

이주 인류에 있어 이 영화는 분명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 것이리라.

하지만 세이어는 그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분 나빠...."

영화 내에서 오크가 나와서 포효하고 트롤이 나와서 주인공들을 위협한다. 그 모습은 모성의 전통과 달랐다. 이 행성의 진짜 오크와 트롤의 모습이었다. 세이어,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행성의 주인인 그들이 한낱 괴물로 치부되어 덤비고, 죽어 간다.

어쩌면 자신의 종족이 저 자리에 대신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저 선주 종족의 외모가 이주 인류와 비슷하기에, 특히나 그들이 상징으로 삼는 엘프나 드워프처럼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결코 저들이 선주 종족을 존중해서, 같은 인류로 인정해서가 아니다.

신경질적으로 세이어는 TV를 껐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답답했다. 가슴속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다. 태어난 지 50년 가까이 된 지금도 그는 아직 어리디 어린 소년이었다.

세계는 너무도 넓었고, 그는 너무도 작았다.

☆ ☆ ☆

신세력 72년.

사방이 두꺼운 벽으로 막힌 한 실험실, 열여덟 정도로 보이는 날씬한 체구의 소년이 새하얀 가운을 걸친 채 차분하게 손을 움직인다. 춤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하고 수화手話라기엔 너무 우아한 그 손짓과 함께 소년이 입을 연다.

"뎀 피르 아스타르나, 내 손에 임한 빛이 징벌의 철퇴가 되노라, 루미너스 퍼니시먼트!"

굵은 섬광이 손끝에서 쏟아져 실험실을 갈랐다. 실험실 중앙의 더미에 정확히 섬광이 명중하며 허공에 빛의 숫자가 떠오른다. 방금 날린 마법의 파괴력 수치 데이터였다.

실험실 안에서 검은 머리의 중년인이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세이어. 이걸로 칠륜八輪의 경지에 다다랐구나."

모두가 길고 늘씬한 체형인 이 엘디아에서 중년인은 짧고 단단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알 포트에서 온 동부인인 것이다.

"이걸로 오늘 훈련은 끝내자꾸나."

세이어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마그림 선생님."

알하트란의 동력로 엔지니어이자 유명한 마법사이기도 한 마그림은 현재 기술 교류를 위해 이곳, 메테우스 연구소에 와 있었다. 그의 임무는 선주 종족의 마법 적응력과 습득력에 대한 데이터 수집 및 작성, 그 일환으로 세이어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도 하고 있었는데....

"정말 무시무시한 습득력이구나, 세이어. 이 정도면 인간이랑 비교해도 오히려 빠른 편인데?"

마그림이 혀를 내둘렀다.

엘디아에선 7서클, 알하트란에선 칠륜의 경지라 불리는 수준까지 마법을 익혀야 비로소 정식으로 마법사란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

마법이 보편화된 이 시대에도 마법사는 극히 소수다. 구륜의 경지쯤 가면 사회를 지탱하는 최고위층으로 대접받으며 마그림처럼 십륜의 경지까지 마법을 익힌 이들은 이 마학 문명의 극에 달한 시대에서도 채 백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세이어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 마법사 칭호를 얻을 수준까지 기량이 오른 것이다.

마그림의 감탄에 세이어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마그림 선생님은 언제 칠륜의 경지에 오르셨나요?"

"나? 난 서른셋이었던가? 마법을 익힌 지 20년이 되어서야 겨우 도달한 경지지."

"전 벌써 30년째 마법을 익히고 있는데요? 솔직히 별로 칭찬 같진 않네요."

"아, 사실은 네가 나보다 연상이지...."

중년 나이인 마그림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한다. 세이어의 수명은 이주 인류의 네 배, 10대 소년으로 보이는 그의 실제 나이는 올해로 일흔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건 기뻐할 만한 성과다.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저 모양이잖니?"

마그림이 창밖을 손짓했다. 세이어가 힐끔 그곳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도 여러 실험실이 있었고, 같은 또래의 귀 뾰족한 소년, 소녀들이 방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코드 네임 Si 시리즈, 세이어와 마찬가지로 원시 인류의 우수 인자를 발현해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그의 형제자매들.

그들이 각자의 실험실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자, 이번엔 이 문제를 풀어 보렴."

칠판에 간단한 사칙 연산 몇 개가 적혀 있다. 인간이라면 열 살 정도면 풀 수 있는 간단한 산수 문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그걸 보며 한참을 낑낑거린다.

반대편에선 역시 또래의 소녀가 여선생의 지도 아래 입을 뻐금대고 있다.

"자, 따라해 보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안녕하세요."

"아녀하요...."

구관조도 곧잘 따라 하는 단순한 단어조차 힘겹게 내뱉는 그 모습에 세이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 저런 애들보다 잘났으니 좋아하라는 건가?'

저쯤 되면 토끼와 거북이 경주 수준이 아니다. 치타와 달팽이가 달리기를 해도 이보단 격차가 덜 날 것이다. 마그림도 속내를 짐작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 아이들과 널 비교할 수야 없겠다만...."

세이어와 함께 태어나 똑같은 환경 아래 자라난 선주 종족 아이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여전히 기존 선주종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고대에 대한 명확한 연구를 하며 밝혀진 사실이 있다.

-미개인이 문명인이 될 순 있어도, 원시인이 문명인이 될 수는 없다.

만약 미개인의 어린 아기를 데려다 문명 세계에서 키운다면 그 아기는 자연스럽게 문명인으로 자랄 것이다. 그러나 원시인의 어린 아기는, 아무리 똑같은 환경에서 키워도 문명인이 될 수가 없다.

본능뿐 아니라 지능을 가진 지성종, 인류에겐 육체적 진화만큼이나 영적 진화 또한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영적 진화는 종 전체가 고르게 일어난다. 미개인은 그저 문명 발달 수준이 뒤떨어졌을 뿐이지 영적으론 문명인과 동일하다. 문명 레벨이 다르다 해도 이들은 같은 행성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 온 동일종이니까.

반면 이 행성의 원시 인류는 영적 진화의 초기 단계다. 지성을 처리할 수 있는 두뇌는 완성되었으되 그 지성을 창조하는 영혼이 아직 미발달되어 있다.

종족 전체의 집합적 무의식 자체가 영적으로 미숙하니 아무리 일부 개체를 교육시키려 해도 의미가 없다. 이들은 아직 종족적으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듯 구석기에 머물러 있는 선주 종족의 영적 진화 단계를 최소 청동기 수준까지 진행시키는 것이 메테우스 박사의 연구 목표였다.

그래야 현 이주 인류와 엇비슷한 수준까지 이를 것이고, 그래야 비로소 원시 인류의 장수 인자를 현 인류에 맞춰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을 테니까.

이는 엘드라스 최고의 생명마학자이자 1400년을 살아온 10서클의 마스터, 메테우스 박사에게도 실로 난해한 도전이었다.

인위적인 육체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의 기술은 그 정도로 발달해 있다. 하지만 인위적인 영혼 조작은 여전히 갈 길이 먼 영역이었다.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 온갖 영자 구성 요소를 조작해도 결과는 늘 도박이었다.

다섯 자리 숫자의 수정란이 인공 자궁에 잉태되었고, 백 중 하나만이 남아 생명이 되었다. 절반 이상이 태어나자마자 부작용으로 죽고 서른 정도만이 생존해 무사히 성장했다. 그중 기대치 이상의 능력을 보인 건 오직 세이어 하나뿐이었다.

반면, 유일하게 성공한 실험체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잠재 마력, 연산력, 정신력, 영력 측면에서 세이어는 모두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선주 종족 기준이 아니라 이주 인류 기준으로 측정한 수치가 그렇단 소리다. 이주 인류 중에서도 저 정도 수치는 최고위 마법사들이나 지닌 재능이다.

선주 종족의 평범한 영적 진화체를 목표로 했는데, 선주 종족의 궁극적인 영적 진화체가 나와 버렸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이어를 보며 마그림이 중얼거렸다.

'메테우스 박사가 대단하다기보단, 이 경우는 운이 엄청나게 좋았다고 봐야겠지?'

세이어 정도의 능력은 사실, 현 선주 종족의 자연스러운 진화 단계라면 향후 수만 년은 족히 지나야 겨우 발현될 수준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으려나?'

마그림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화는 환경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법, 그리고 이 행성엔 이제 월등히 앞선 영적 진화를 이룬 이주 인류라는 새로운 지성종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론상 선주 종족 역시 그 영향을 받아 영적 진화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수천 년 정도까지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여튼, 현재 세이어의 존재가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건 마찬가지다. 메테우스 박사도 아마 두 번은 성공시키지 못하겠지. 마학자로서의 상념을 접으며 마그림이 세이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록 살아온 시간은 많지만 넌 아직 청소년기다. 인간으로 치면 10대 소년이 마법사 시험을 통과한 셈인데, 굉장한 거잖냐? 게다가 인간들도 보통 마법사 자격을 얻는 이는 대부분 40대니까 단순 비교로 해도 충분히 기뻐할 만해."

"네."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도 세이어는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말과 달리, 그가 우울해하는 진짜 이유는 저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 난 이제 마법사 자격증을 딸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어.'

세이어가 이주 인류였다면 이 능력으로 많은 인생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화려한 삶을 즐기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밀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런 걸 익혀 봤자 어디다 쓰라는 거야?'

☆ ☆ ☆

인류는 완전하게 행성에 자리 잡았다.

전쟁으로 시작했던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은 이제 제도적, 외교적으로 훌륭한 이웃이 되었다. 인류의 앞날은 밝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인류의 범주 속에 이 행성의 원시 인류들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과학자며 마학자는 선주 종족이 분명한 사람이며, 인류의 초기 형태임을 명확히 발표했다. 그러나 그 발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경제적,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다.

만약 저 선주 종족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그럼 이 행성의 주인이 저들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자연 개발과 도시 확장 단계에서 저들과 외교를 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선주 종족의 문명 수준은 미개한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원시적이다. 외교나 협상은 고사하고 물물교환의 개념조차도 극히 일부만 간신히 지녔을 뿐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학자들은 선주 종족의 자연스러운 발전을 기다리거나, 최소한 사회적 개념이 생길 정도까지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모르는 이의 헛소리일 뿐이었다.

이미 1400년간 이민 선단의 좁은 세상을 살아온 시민들에게 다시 기약 없는 미래를 기다리라고? 선거에서 표 다 잃을 소리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동물로 대하고 따로 특별 동물 보호법을 제정하는 게 경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물론 반대도 많았다. 이미 이주 인류는 모성의 역사에서, 미개한 원주민을 힘으로 누르고 수탈한 전적이 있었다. 그 비극을 되풀이할 셈이냐며 데모가 몇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은 그것을 외면했다. 저 데모대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건,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놔두고 여전히 좁은 이민 선단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이 도리는 언제나 실리 앞에 무릎 꿇는 법.

신세력 24년에 정식으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선주종과 오크, 트롤은 유인원으로 도감에 등록되었다. 그로써 그들은 법적, 제도적으로 침팬지나 고릴라와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앞에 두고 인류는 또다시 자신들의 과오를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