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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 ☆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다. 흘러가던 시공의 파편이 모조리 사라지고 암흑이 그 자리를 잠식한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지?'

어둠 저 멀리, 낯익은 청년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탄탄한 체구를 지닌 잘생긴 미남자였다. 레펜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론...."

의식 속의 부유체가 된 테스론이 허공을 디디며 다가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묘하게 초췌해 보이기까지 한다.

"꼴이 말이 아니군."

말을 건네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의아해했다. 이미 육체를 잃고 남의 의식에 묶여 있는 영혼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되려나?

뭐, 어째서 테스론의 영혼이 저런 몰골인지는 짐작이 갔다. 이 정도 정보량을 긁어모으려면 세이어의 의식에 한두 번 다이브한 걸로는 어림도 없다. 수십, 어쩌면 수백 번일지도 모르지.

그때마다 기억의 주체에게 쫓기고 때론 붙잡혀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터다. 아직도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테스론이 물었다.

"모두 보았나?"

"보았다. 평생의 의문을 풀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지."

"저걸 보고 즐거웠다고? 역시 네놈은 마법사로군. 아무리 육체가 바뀌어도 그 영혼의 본질은 어디 가는 게 아니야."

"원래 마법사란 호기심에 죽고 사는 생물이지...."

쓴웃음을 짓던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고 안색을 굳혔다.

"무슨 수작이지? 어째서 적인 나에게 이런 정보를 주는 거지?"

"그래,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대는 분명 나의 적이고 인류의 적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테스론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정신 나간 인류의 신이란 작자가 내 아군이자 인류의 수호자가 되는 건 아냐!"

격한 감정이 폭풍처럼 레펜하르트의 의식에 몰아친다. 꽤나 흥분한 모양이다.

"난 무식한 무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 목적도 단순했지."

테스론이 말을 이었다.

"난 수많은 인간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권왕으로 살아가며 무수한 살인을 저지른 테스론이었다. 개중엔 무인이나 마법사뿐 아니라 평범한 민간인도 물론 있었다.

칼과 창을 휘두르지 않고도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있다. 마법과 오러의 힘이 없이도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다. 힘없는 사내라도 연약한 여인을 학대할 때는 지옥의 악마보다 더한 존재가 되며, 때론 말 한마디가 천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아픔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힘없는 민간인은 죽였을지 몰라도, 테스론은 억울한 자를 죽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은 다르다. 전화의 불길은 강자와 약자, 악인과 선인, 죽어 마땅한 자와 억울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마왕이여, 난 그대로 인해 일어난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 그대로 인해 흘러간 피의 강과 시체의 산을 보았다. 그대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억울한 이들을 보았다."

'...넌 정말, 자신은 절대 억울한 이를 죽인 적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테스론.'

기가 막혀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말꼬리 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억울함이란 단어 해석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지. 그래서?"

테스론이 증오의 눈빛으로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마왕 레펜하르트, 난 그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그거야 잘 알고 있지."

"마찬가지로 인류의 신이란 저자의 존재도 용납할 수 없다!"

진실은 참혹했다. 세이어는 조물주도, 인류의 창조주도 아니었다.

"그는 우연히 신의 힘을 넣고 그 힘으로 세상을 망친 얼간이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도 멋대로 그 힘을 휘두르고 있지!"

이를 가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여전히 인류를 비호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인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신인 것 같은데."

테스론이 실소했다.

"재미있군, 그대가 내게 그런 소릴 하다니."

"아, 적어도 그대는 그리 여길 거라 여겼다는 소리다만."

레펜하르트가 아는 테스론이라면, 세이어가 무슨 짓을 저질렀건 엘프와 드워프의 정체가 무엇이었건 받아들일 줄 알았다. 어쨌거나 세이어는 분명 인류를 위해 저런 짓을 저질렀고, 영혼이 바뀌건 육체가 바뀌건 이종족과 인류가 별개의 종족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물었다.

"알고 있나? 일만 이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에게 죽은 인류의 수가 몇인지?"

알 리가 없다. 물론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평범한 숫자는 아니겠지만.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닌지 테스론이 바로 말을 이었다.

"의외로 적다. 다 합쳐 봐야 팔백만이 채 되지 않더군."

팔백만이면 엄청난 수처럼 느껴지지만 일만 이천 년이란 세월 속에선 그리 큰 숫자가 아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1년에 육백에서 칠백 명 사이? 저 정도면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일만 이천 년 동안 세이어의 손에 죽은 인류의 수는 팔억이 넘어!"

순간 레펜하르트가 움찔했다.

인류의 뒤에서 무수한 전쟁을 일으킨 세이어였다. 직접 나서 뒤섞인 이종족과 인류를 통째로 날려 버리기도 했다. 신의 뜻을 거역한 인간의 왕국이 신벌로 인해 멸망하는 것도 보았다. 잠깐 엿본 과거만으로도 무수한 살육이 세이어로 인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팔억이라고?'

이건 일만 이천 년이라는 시간으로도 변명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게다가 저 팔억에 이종족의 숫자는 끼어 있지도 않다. 여전히 테스론은 인간 외의 이종족은 사람으로 보고 있지도 않으니까.

'맙소사, 그럼 다 합치면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야?'

기가 막힌 레펜하르트를 향해 테스론이 오열하듯 고함을 질렀다.

"인류의 신이라고? 인류의 수호자라고? 인류 역사상 저 미쳐 버린 신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자는 없어!"

감정의 폭풍이 정신 공간 전체를 휘몰아친다. 굳건한 정신력을 지닌 레펜하르트조차 일순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었다. 지금 테스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익히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다.

"마왕 레펜하르트, 그대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화가 없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수천, 수만 단위로 죽일 수 있으면 안 된다는 거다."

예전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대량 살상에 특화된 짐 언브레이커블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자신도 인간의 감정이란 걸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하나를 죽이나 열을 죽이나 살인인 건 마찬가지지만, 사람이라면 응당 하나를 죽인 자보다 열을 죽인 자에게 더 분노한다. 수십 명을 죽이나 수천 명을 죽이나 어차피 대량 학살이긴 마찬가지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후자를 더 증오한다.

'그래, 역시 인간이군.'

테스론은 인간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편협하고 자기 본위에 따른 그의 분노 역시 옳고 그름을 떠나 분명 인간다웠다. 여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레펜하르트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실을 보여 준 이유인가?"

"아쉽게도 세이어를 상대할 가능성이 있는 자는 마왕, 그대뿐이니까."

육체를 빼앗긴 뒤 테스론은 신의 진실을 엿보았다. 세이어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며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딴 건 모르겠고, 테스론이 본 것은 그저 일만 이천 년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학살의 역사일 뿐이었다. 마왕 이상으로 인류의 신은 용납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경악하고 절망했다. 테스론 자신이 원래의 힘을 되찾아도, 마왕과 대적하던 동료들의 힘을 모아도, 심지어 사부인 제라드나 검성 바나텔이라도 저 거대한 존재 앞에선 조족지혈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자신은 두 번째 육체조차도 잃은 허깨비 신세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좌절해 있던 테스론에게 희망이 보인 건 얼마 전, 아주 잠깐 일어났던 레펜하르트와의 정신적 연결 이후였다.

"뭔 수를 썼는지 그대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오더군. 그래서 바로 움직였다. 어떻게든 내가 얻은 세이어의 정보를 전달하려 했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다. 마왕 정도라면 세이어의 정보만으로도 그의 약점이나 상대법 등을 충분히 찾아내리라 기대했다. 저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승산이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비록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제대로 된 건 하나도 못 전달했지만."

그날 이후론 미리미리 대비를 해 두었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드림 다이브하길 기대하며 온갖 정보와 역사를 전달하기 쉽게 준비해 놓았다.

"네놈이라면 분명 다시 한 번 드림 다이브를 시도할 테니까."

"내가 그리할 줄은 어찌 알고?"

"흥, 마법사가 진실을 앞에 두고 간만 보고 끝내는 경우가 있긴 하던가?"

"...제법 마법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테스론이 왜 이리 협조적으로 구는지는 알았다.

"힘을 키워서 싸우다, 같이 죽어라 이건가?"

"그게 제일 기대하는 결과긴 하지."

테스론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쯧, 안 됐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전히 오만하군! 인류의 신을 상대하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건가?"

"거꾸로다! 내 목숨을 던져도 저 인류의 신을 해치울 자신이 없단 소리야!"

확실히 테스론의 정보는 귀중한 것이었다.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승산이 올라가진 않았어. 여전히 방법은 없다. 오히려 자신감만 더 하락했군."

투덜대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있다."

"응?"

"사부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사부 본인은 자신이 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질문하려는데 갑자기 테스론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이 없군."

어느새 어둠 저편이 흔들리며 기이한 아지랑이가 공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기억의 주체가 테스론을 인식하고 추출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황급히 테스론이 손을 뻗었다.

"이것이 마지막 환영, 내가 주는 마지막 정보다."

아득히 멀어지는 테스론의 목소리와 함께....

"이후는 사부에게 물어라!"

또다시 레펜하르트의 눈앞에 과거가 펼쳐졌다.

제73장 The First Unbreakable

1

"허억!"

놀라며 레펜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다시 떠보니 그가 잠들었던 바로 그 침상이었다.

"...끝난 건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돌아온 현실, 돌아온 그의 침실에 그 혼자만 있지 않았다.

"폐하!"

"레펜 씨!"

"레펜하르트 님!"

카를, 실란, 시리스며 이니야, 러스에 타시드, 마켈린 등등. 많은 이들이 그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특히나 이니야와 시리스 같은 경우엔 반쯤 울상이기까지 했다.

"깨어나셨어!"

"아아, 엘디아시여, 감사합니다."

"아니, 그 엘디아... 별로 믿을 거 못 되던데...."

드림 다이브에서 본 것이 떠올라 멍하니 중얼거리다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했다.

'아니, 이건 함부로 할 소리가 아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신과 여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마켈린에게, 실란에게 알 포트와 필라넨스의 실체에 대해 말해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 태생이야 어쨌건 지금 그들은 이 세상의 신과 여신으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인공지능이기에 그들은 사심이 없다. 아카식 파편이 깃들었기에 신의 권능도 가지고 있다. 은의 시대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체계화된 지식과 지혜도 지녔다. 네트워크에 입력된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기에 차별도 편애도 없다.

신의 권능을 사심 없이 다루며 올바른 삶을 가르치고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아끼는 존재.

충분히 훌륭한 신이 아닌가?

'이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가야겠군.'

상념을 정리하며 레펜하르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잔뜩 모인 동료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뭐야? 왜들 이렇게 모여 있어?"

실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긴 뭐예요! 사흘이나 안 깨어나는 작자가 걱정돼서 모인 거지!"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엥? 사흘?"

☆ ☆ ☆

커다란 테이블에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통째로 구운 뇌조, 통째로 구운 염소, 양배추를 통째로 뽑아 소스에 버무린 샐러드에 통짜로 나온 빵 덩어리를 쌓아 올린 그릇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참으로 통은 큰 만찬이었다.

그 앞에서 레펜하르트가 정신없이 염소 뒷다리를 뜯고 있었다. 사흘이나 잠들었단 소린 곧 사흘을 굶었단 소리다. 일단 눈뜨고 보니 허기부터 채우는 게 급선무였다.

"아우, 좀 천천히 드세요."

옆에선 시녀들이 인상을 쓰며 잔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니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참으로 사내답다며 헤롱댔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왕비의 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터였다. 지난 사흘, 만사 팽개치고 레페하르트에게 붙어 있었던 탓에 일이 많이 밀려 있었다.

일이고 뭐고 레펜하르트 곁에 있겠다고 우겼지만 카를의 구박에 결국 미련을 덕지덕지 남기며 집무실로 돌아간 이니야였다.

-할 수 없죠, 그래도 저녁은 꼭 같이 먹어요!

-아, 예. 그럼 수고하세요....

카를이며 실란, 러스 등도 사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부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현재 이 식탁에 있는 이는 레펜하르트와 왕실 시녀뿐이었다.

"음식 많아요, 폐하."

"누가 안 뺏어 먹는다니까요?"

투덜대는 두 시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이거 내가 시녀를 거느린 건지 시누이를 모시는 건지 모르겠군."

원래 안타레스의 왕실 시녀는 선발 기준이 검술, 창술, 비도술 등 괴상한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정작 본업인 '시중'엔 약한 면모가 있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일러 둔 건 어찌 되었나?"

새침한 표정으로 시녀 하나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시종 하나가 전하러 갔어요. 곧 오실 때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제라드가 들어왔다.

"제자야, 나 찾았다며? 어? 맛있는 거 먹네?"

"식사는 하셨습니까, 사부?"

"슬슬 해야지. 그런데 용건이 뭐냐?"

식탁과 제라드를 번갈아 보며 레페하르트가 물었다.

"먼저 드실래요, 아니면 듣고 드실래요?"

예나 지금이나 권황 제라드는 호방한 남자였다.

"먹으면서 듣겠다."

대뜸 레펜하르트 옆의 의자에 앉아 제라드가 고깃덩이 하나를 집었다. 입가에 가져가 으적으적 씹는다. 염소 허벅지 구이를 통째로 으드득 깨무는데, 저 굵은 염소 뼈가 그대로 박살 나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실로 사자도 울고 갈 가공할 교합력이었다. 보고 있던 시녀들이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어우, 무식해라."

"말조심해. 폐하의 사부님이셔."

"어우, 무식하셔라."

"...얘, 존댓말 쓴다고 다가 아니거든?"

물론 대범한 짐 언브레이커블은 저런 세간의 인식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배를 채우며 제라드가 물었다.

"날 왜 찾았느냐?"

빵을 찢어 입에 가져가며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세이어를 해치울 생각입니다."

"나도 불러라."

더더욱 태연하게 대꾸하는 제라드였다. 둘 다 하도 태연한 어조라 듣고 있던 시녀들이 '무슨 세이어라는 신종 몬스터라도 출몰하나? 그런데 이름이 인류의 신이랑 똑같네?'라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당연히 모실 건데, 그 전에 상대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이 필요합니다."

"주먹 쥐고 팔 뻗으면 한 방 먹이는 거지, 뭔 방법씩이나?"

이젠 슬슬 레페하르트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화법에 익숙해졌다.

"한 방 먹여서 상대가 아파하게 만들 방법이 필요합니다. 죽으면 더 좋고요."

제라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고기를 씹으며 그가 말했다.

"글쎄다, 그런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무리 자신만만한 제라드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진 않는다. 그가 본 세이어는 진정 신의 힘을 지닌 자였다.

"있다더군요."

제자의 대꾸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예, 그래서 초대 조사님의 심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찾은 이유였다.

테스론을 통해 신을 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짐 언브레이커블에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 최후의 가르침.

신조차도 멸할 수 있는, 궁극을 넘어서 극의 자체를 초월한 무극無極의 권!

"캘러미티 혼 9중첩의 경지가 필요합니다. 그 길로 가는 방법은 사부만이 알고 있으니, 제자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일국의 왕도, 10서클의 마법사도 아닌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로서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청했다.

제라드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전해 줬잖아? 그걸 왜 이제 와서 나한테 물어봐?"

"엥? 언제요?"

☆ ☆ ☆

짐 언브레이커블의 시작이자 끝,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경지를 추구하는 최종 비기 캘러미티혼은 종 아홉 단계로 나뉜다.

4중첩까진 스승의 도움 없이는 경지에 오르기 힘들다. 그래서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은 모두 4중첩의 경지에 든 후에야 하산을 허락했다.

5중첩부터 8중첩까진 스스로의 깨달음이 중요했다. 5중첩을 돌파하는 이치는 깨달음 없이는 가르쳐 줘도 무용이기에,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은 옛 무문의 폐허에 그 비법을 적어 놓고 제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 방법을 터득하게 했다.

9중첩의 경지는 8중첩까지와도 전혀 궤가 달랐다. 그래서 9중첩의 심득은 특별히 비처秘處에 감춰 두고 초대 조사의 엄명하에 경지에 오른 이만 접할 수 있었다.

-여덟 파괴의 고리가 빛을 발할 때, 이곳에 도달할 자격이 생기리라!

8중첩의 경지에 든 후 제라드도 저 비처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9중첩의 무리武理는 난해해도 너무 난해했다. 결국 자신이 아직 모자라다 여겨 다시 하산한 뒤 계속 수행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비처의 위치요. 전 그런 거 들은 적 없습니다만?"

레펜하르트가 따지듯 물었다.

"혹시 8중첩의 경지에 들면 다시 사부 찾아가 가르침을 청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라드가 8중첩의 경지에 든 때에 이미 그의 사부 라스탈은 죽은 후다. 죽은 사부가 가르침을 주었을 리 없고,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은 하산하면 남남 되는 게 전통이니 미리 가르쳐 줬다는 소린데?

"뭔 소리야? 너 5중첩 돌파했지?"

"예, 사부."

"그럼 남겨 놓은 비석도 봤지?"

"뭐, 보긴 봤죠."

레펜하르트가 애매하게 대꾸했다. 분명 보긴 봤지. 박살이 나서 머릿속에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해서 그렇지.

"그럼 왜 몰라? 비석 앞면에 5중첩 돌파 심득 적혀 있고, 뒷면엔 비처 장소도 새겨 놨잖아? 알아서 나중에 경지 되면 찾아가라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

"...아, 뒷면에 그런 것도 적혀 있었습니까?"

그제야 레펜하르트는 상황을 이해했다. 테스론이 박살을 낸 걸 기억으로 짜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뒷면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앞면만 보고 뒷면 안 봤냐?"

"그게, 사정이 있어서...."

레펜하르트는 짧게 테스론과의 얽힌 일에 대해 사부에게 말했다. 제라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구나."

자칫했으면 레펜하르트 대에서 소중한 가르침이 끊길 뻔했다.

"질 좋은 돌 골라 다시 만들어야겠군. 그나저나 그 비처를 찾아가 보겠다고?"

"예."

제라드는 잠시 고민했다.

"네 녀석이 자격이 되던가?"

현재 레펜하르트의 순수한 무술적 기량은 캘러미티 혼 6중첩을 완벽히 소화하고 7중첩의 경지를 넘보는 중이었다. 아직 20대란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라 할 것이었다. 역시 권마합신의 영향으로 진도가 빨랐다.

그렇다 해도 6중첩은 6중첩, 원래대로라면 아직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네놈, 요상한 마법으로 7중첩 쓰지?"

권마합신을 통해 레펜하르트는 7중첩, 정확히는 6.5중첩의 캘러미티 혼을 구사할 수 있다.

"게다가 요새 보니까 거기다 괴상한 수법을 덧붙이기도 한 거 같고."

캘러미티 혼의 경지는 쉬이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답답해진 레펜하르트는 결국 자신의 전공을 더더욱 살렸다. 권마합신의 술식을 더욱 보강해, 모자란 오러의 경지를 메운 것이다.

현재 그는 순수 오러로 6중첩, 권마합신으로 7중첩에 '천신의 권'이라는 새 마법 술식을 통해 8중첩 비스무레한 짓까지 가능했다.

굳이 말하자면 6.5중첩 버전 2.0 정도?

뭔가 슬슬 무술도 뭣도 아닌 괴상한 경지가 되어 버렸다만....

'어쨌거나 분명 고리 숫자는 여덟 개잖아?'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대 권왕이 정해 둔 자격은 '여덟 파괴의 고리가 빛을 발할 때'였다. 캘러미티 혼 8중첩이 아니었다.

이래서 기록은 명확하게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멋 부린다고 시적인 표현 써 봐야 의미 전달만 흐릿해지지.

"음, 그럭저럭 자격은 된 거 같구나."

이걸로 제라드의 허락도 얻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그럼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 ☆ ☆

보름 뒤, 레펜하르트는 눈 덮인 설산을 걷고 있었다.

사방이 새하얗다. 영혼조차 얼릴 듯한 추위로 뒤덮인 이곳을 보며 이니야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두꺼운 털외투를 바리바리 껴입은 붉은 머리의 미소년이 치를 떨며 물었다.

"이, 이게, 나, 날씨가 좋은 거라고요?"

"눈보라도 안 불고, 우박도 안 내리고, 엄청 화창한데?"

기분이 좋은지 이니야는 연신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복장은 간단한 털토시와 조끼뿐, 그런데도 추워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다.

이곳은 최북단의 프로즌 랜드, 그중에서도 크로방스 왕국과 인접한 대륙 북동쪽이었다. 이니야가 살던 지역과 인접한 곳이기도 했다. 고향 근처나 다름없으니 그녀 입장에선 신이 날 법도 하다.

뒤를 따르던 러스와 타시드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여긴 좀 살 만하네."

"밀림보단 훨씬 낫다."

플루탄 수해를 헤매며 더위로 고생했던 그들이다. 그러나 둘 다 지금은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이니야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가벼운 복장인데도 추위에 시달리질 않는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그러게, 얼마나 편해?"

러스와 타시드가 서로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플루탄 때와 달리 둘 다 오러 유저로서 경지가 많이 올랐다. 특히 이니야의 가르침 덕에 육체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기술이 크게 늘었다. 이젠 어지간한 추위나 더위쯤은 무시할 수준인 것이다.

뭐, 레펜하르트나 제라드야 애초에 더위나 추위에 신경 쓰는 몸이 아니고.

"오랜만에 다시 와 보는구나. 여긴 정말 변함이 없군."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웃통을 까고 있는 제라드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사부와 달라! 사람답게 옷 입고 살 거야!'라며 간단한 조끼 하나만 걸친- 정작 팔다리며 흉부, 복근의 맨살은 그대로 드러내 남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인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사부? 실란이 좀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거의 다 왔다. 곧 보일 게다."

사부의 허락을 받은 레펜하르트는 바로 제라드의 인도하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로 향했다. 그리고 이니야며 러스, 타시드와 실란도 그를 따라왔다.

굳이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대동한 이유가 있었다. 세이어 때문이었다.

세이어가 다시 습격하기라도 하면, 레펜하르트 개인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현재 그나마 세이어에게 통했던 전법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동료들의 힘을 조합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어딜 가도 최소, 대세이어 전용 전술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은 필요한 것이다.

덕분에 실란만 죽어나고 있었다.

"아으, 추워, 추워, 추워, 추워...."

레펜하르트의 전술에는 강력한 신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강력한 신관은 현재 안타레스에 마켈린과 실란뿐이었다. 바쁜 마켈린은 도저히 업무에서 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실란이 선택되었다. 둘 다 바쁜 몸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상대적으로 실란이 일이 적었다.

"어우, 저 괴수들. 그저 나 같은 평범한 인간만 괴롭지."

모두가 느긋한 가운데 홀로 벌벌 떨며 실란이 구시렁댔다. 보다 못해 제라드가 실란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에그, 이 녀석. 이러면 좀 나을 거다."

그렇게 실란을 든 채 오러를 발한다. 황금빛 오러가 전신을 감싸며 실란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아, 살 것 같다."

새끼 고양이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들려 간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도 워낙 짐짝 취급 많이 당하던 처지였다.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살살 좀 옮겨요. 이 짐짝(?) 연약하답니다."

아니, 익숙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뻔뻔해진 것 같기도 하다.

실란을 든 채 제라드는 계속 설산을 올랐다. 다른 이들도 계속 그를 뒤따랐다.

산중턱에 이르러 커다란 얼음 동굴을 지나니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이 나왔다. 제라드가 감동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다 왔구나, 제자야. 이곳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니라!"

동굴 끝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며 모두가 놀랐다.

"이곳이...!"

사방이 빙벽으로 막힌 분지 형태의 공터,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곳에 달랑 작은 오두막 하나가 서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일 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돌 오두막이었다. 방 한 칸에 굴뚝 하나, 사냥꾼용 임시 오두막도 저것보단 클 것 같았다.

"...꽤 소박하네요?"

"작네...."

어째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이다. 허름한 오두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거,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 다들 부자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문의 궁극 비기가 숨겨진 비처인데 좀 근사하게 지으시지들...."

제라드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뭐하러? 어차피 여기 올라올 인간은 우리 무문밖에 없는데?"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 그것도 8중첩의 경지에 들어서나 여길 찾을 일이 생긴다. 오두막 좀 허름하다고 감기를 걸리겠냐, 얼어 죽길 하겠냐? 대충 지붕 있고 몸 누일 바닥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평범할 줄은 몰랐지요. 그래도 명색이 지상 최강의 무문, 그 궁극의 경지가 숨겨진 비처인데...."

레펜하르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공감의 빛을 띠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은근 기대를 했다. 한겨울에도 꽃이 피고 기화요초가 만발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신비스러운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제라드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괴상한 걸 주워 본 모양인데, 그딴 게 세상에 어디 있겠냐?"

그렇다. 보통 흔한 영웅담을 보면 전설의 비기가 숨겨진 전설의 금역 같은 곳은 인세에서 벗어난, 뭔가 신비스러운 장소로 묘사되기 마련인데 사실 이게 현실적으론 참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한겨울에도 꽃이 피는 근사한 지역이라면 숙박업소 세우고 장사를 해야지. 떼돈 벌 텐데. 왜 그런 입지 좋은 곳에 무문의 금지 같은 걸 세워?"

"그것도 그러네요?"

"우리 말고는 방문객 하나 없는 곳에 굳이 돈 들여 근사한 저택 세울 이유가 뭐가 있는데? 쓸데없이 근사한 저택 지을 돈 있으면 제자 키우는 데 쓰고 말겠다."

지출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알뜰한 자산 관리만이 알찬 제자 육성으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가르침이다.

'하긴 예전에 수행하던 곳도 오두막 자체는 허름했었지?'

하여튼, 제라드가 마저 손짓을 했다.

"헛소리 작작 하고 일단 들어가자. 짐 대충 풀고 초대 조사님의 가르침을 접하러 가야지. 그런데 저 안에 이 인원이 다 들어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성큼성큼, 제라드가 앞장서 오두막으로 향했다. 뒤를 따르지 않고 레펜하르트는 잠시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첫인상 탓에 감동이 많이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니 역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곳이 신을 멸했던 권이 숨겨진 곳이란 말이지?"

과거형으로 말하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의 기억 속에, 테스론이 마지막으로 펼쳤던 과거의 환영이 재차 떠올랐다.

2

테스론의 모습은 사라졌다. 어느새 레펜하르트는 순백의 거대한 홀 안에 서 있었다.

홀 중앙에 은색의 로브를 걸친 한 무리가 보인다. 그 가운데 웬 피투성이의 중년 사내가 꽁꽁 묶여 무릎 꿇고 있다. 복장을 보아하니 마법사인 것 같다.

그리고 그를, 홀 상단의 왕좌에서 세이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인가?"

"예, 세이어시여."

인류의 신을 향해 은의 현자들이 정중히 고개를 조아린다. 세이어를 바라본 레펜하르트는 순간 흠칫 놀랐다.

'저 자식, 꼴이 왜 저래?'

인류의 신은 늙고 병들어 있었다.

윤기 흐르던 푸른 머리칼은 탈색되어 푸석푸석하고 매끈한 피부는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만신창이다. 눈빛은 흐릿하고 사지는 말라비틀어졌다. 그토록 건강하고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세이어가 묶여 있는 중년인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는다. 찬란한 빛이 마법사를 뒤덮는다.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신음을 터트렸다.

"으윽!"

그러나 딱히 고통 따위는 없다. 잠깐 당황했던 마법사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황당해한다.

늙고 병든 인류의 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자라다."

은의 현자 중 하나가 당황하며 말했다.

"하지만 세이어시여, 이자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을 익힌 이들 중 9서클의 영역에 든 이는 이자뿐입니다. 오래 사는 엘프나 드워프조차도 이 경지에 든 자는 없습니다."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자신이 바슈탈론의 이름으로 모든 이종족을 청소한 지 벌써 800년째다. 노예 신세가 된 엘프나 드워프에게 마법사가 남아 있을 리 없다.

"9서클이라... 그 정도 경지의 마법사는 고대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이 정도로는 나를 담을 수가 없다."

한탄하며 세이어가 손가락을 튀겼다. 불길이 치솟아 중년인의 전신을 감쌌다.

"으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마법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가 되었다.

늙은 세이어가 왕좌 깊숙이 몸을 숙인다. 그대로 손을 내젓는다.

"물러가라."

송구스러워하며 은의 현자들이 빠르게 홀을 떠난다. 어느새 홀 안에 세이어 혼자 남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힐끔 보았다. 방금 손가락을 튀긴 그 손이다. 손등이며 손가락 여기저기가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다.

"고작 그 정도 힘을 쓴 것만으로도 이 모양인가? 이 육체도 슬슬 한계로군."

아카식을 사용해 세이어는 바로 상처를 수복했다. 하지만 손등의 주름은 여전했다. 노화를 역순시킬 정도로 강력한 신성을 그의 육체가 더 이상 감당치 못하는 탓이다.

턱을 괸 채 세이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신체神體는 하나뿐. 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순백의 홀이 사라지고 레펜하르트의 주위가 돌로 된 거대한 투기장으로 변했다. 요란한 소음과 외침 소리가 귀를 찔러 댔다.

"크아아아!"

"죽어라!"

"어림없다!"

무수한 사내들이 그 속에서 혼잡하게 뒤얽혀 혈투를 벌이고 있다. 하나같이 건장하고 단단한 육체의 소유자들이었다. 겉보기엔 전형적인 투기장 투사 같은 이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이 범상치 않았다.

"오러 웨이브!"

사내들이 전신에 각양각색의 오러를 끌어 올린 채 서로를 향해 가공할 파괴의 힘을 내던진다. 투기장 곳곳에서 강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놀랍게도 이들은 전원 오러 유저였던 것이다.

'맙소사!'

놀라 레펜하르트는 입을 쩍 벌렸다. 세상 어딜 가도 귀족처럼 대접받을 오러 유저가 천한 검투사처럼 뒤엉켜 싸우고 있다니?

게다가 놀랄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밀리던 사내들 중 일부가 재빠르게 수인을 맺더니, 시동어를 외쳐 댄다.

"라이트닝 볼트!"

"아케인 블래스터!"

찬란한 마법의 섬광이 투기장 곳곳을 가로질렀다. 이들은 오러 유저인 동시에 고위 마법사이기도 한 것이다.

'저 정도 강자들이 어째서 저런 꼴이?'

혼란해하면서 레펜하르트는 계속 투기장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자니, 저 사내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근육질의 사내들 중에서도 한층 탄탄해 보이는 거구의 청년이었다. 신장이 족히 2.2미터는 넘어 보이는데 전신이 그야말로 알차게 단련되어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타아아앗!"

사내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 낸 뒤 바로 손바닥을 반전시켜 마법을 구사한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다른 투사 두 명이 피 떡과 한 줌의 재로 화했다. 그 압도적인 위력에 투사 몇몇이 서로 눈짓을 보낸다. 우선 저 거인부터 처리하자는 의미다.

"에잇!"

"죽어 버려!"

다섯 명의 투사가 오러와 마법을 동원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가공할 기세, 그러나 거구의 사내는 전혀 피할 기색이 없었다.

단지 싸늘하게 웃으며 근육질 가슴을 활짝 펼 뿐.

"스파이럴 가드!"

찬란한 황금빛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다섯의 투사를 모조리 갈아 버렸다!

"엉? 뭐, 뭐야, 지금?"

기겁해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낯익은 오러 스킬이었다. 사부 밑에서 죽도록 맞아 가며 익힌 바로 그,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 방어 기술이 아닌가!

'진짜 스파이럴 가드다. 운용법도, 효과도 오러의 특성도 완전히 똑같아.'

멍한 레펜하르트의 곁을 하나의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다시 젊은 모습으로 돌아온 푸른 머리의 세이어였다.

관람석에서 투기장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류의 신이 눈을 빛냈다.

"저자의 이름은?"

곁에 있던 은의 현자 하나가 공손히 대답했다.

"실험체 458번, 발켄슈트입니다."

☆ ☆ ☆

일만 이천 년이란 긴 시간을 살아가며 세이어는 계속 영혼 전이술로 육체를 바꿨다. 이미 신의 힘을 지닌 그가 여전히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영혼 일부는 아카식 드라이브와 연결되어 있다. 한낱 개인의 영혼이 초월적 힘을 지닌 우주의 근원과 접속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한 인간의 영혼이 우주의 근원과 접해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주의 알,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시스템과 세이어 자신의 굳건한 의지가 그의 인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비유하자면 거대한 댐의 구멍을 작은 조약돌로 막은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일단 막혀 있는 동안은 안정적이다. 하지만 만약 돌이 빠진다면? 혹은 마모되어 부스러진다면?

한번 분출된 물줄기는 순식간에 거세져 댐 자체를 허물어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세이어는 반드시 육신이 필요했다. 심, 기, 체가 합일되어 굳건한 존재로 자리 잡을 때만이 그는 튼튼한 돌멩이가 되어 댐의 구멍을 막을 수 있었다. 아니면 예전처럼 아카식의 제어 라인을 차단하고 자신의 시간을 동결시키는 수법뿐인데,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별로 고려할 선택지가 아니었다.

메테우스 박사가 했던 것처럼 세이어는 자신의 클론을 무수히 만들고 그 클론에 불로화 시술을 행했다. 그리고 육체가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계속 갈아타며 불로불사의 삶을 살았다.

그렇게 일만 년이 넘게 되자, 슬슬 문제가 생겼다.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세이어의 클론 육체 인자가 열화되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냥 원래 육체 인자를 계속 보존하고 필요할 때마다 원본에서 클로닝을 시도하면 열화할 일도 없겠지만, 아쉽게도 영혼 전이술은 그런 식으로 가동되는 게 아니다.

원육체에서 500년을 산다. 이후 원육체에서 클로닝한 새 육체에서 또 500년을 산다. 그럼 천 년 뒤, 과연 원육체는 원래 상태대로 저 영혼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다.

육체가 영혼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영혼 역시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이미 클론 육체에 적응한 영혼 입장에선 저 원육체 역시 '새로운 육체'일 뿐이다. 그렇기에 변질을 막으려면 2차 클론에서 3차 클론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일만 년 넘게 수십 번을 계속 복제하고 또 복제하다 보니 슬슬 육신의 변질을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른 것이다.

"곤란하군."

아카식의 전지 영역을 검색하며 세이어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은의 시대 고대인들은 1, 2년씩 최적화 작업을 거치며 세밀하게 육체를 조정해 영혼 전이술을 시전했었다.

"하지만 내겐 그럴 재주가 없고."

현 시대에 사령술, 네크로맨시로 전해지는 계열의 마법은 원래 생명마학, 영자학으로 고대에 존재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마학은 단순히 지식과 지혜만으로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근사한 명화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명화를 똑같이 복사한다고 치자.

지식과 지혜만으로도 명화를 똑같이 옮길 수는 있다. 그냥 사진을 찍으면 된다.

하지만 그 찍힌 사진이 과연 명화 원본과 동일한 것인가? 분명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그림이지만 과연 그 사진에 명화가 지닌 감동이 있는가?

그러나 가끔 위작 중엔 원본 이상의 감동을 주는 경우도 있다. 화가의 예술혼, 화가의 감정과 영혼이 담겨 있는 경우다.

이렇듯 생명마학은 학문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영역이었다. 도저히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예술혼이라는 분명 존재하면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제3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비로소 완벽한 클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는 세이어가 가장 취약한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 몸이나 차지할 수도 없는 신세니...."

영혼 전이술에 저렇게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완벽하게' 변화 없는 삶을 이어 가려 해서다. 육체가 전혀 다르다고 영혼 전이가 안 일어나진 않는다. 그랬다면 애초에 세상이 이 모양이 되지도 않았게?

10서클의 경지에 든 강력한 영혼이라도 무지렁이의 육신에 들어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두 번 영혼 전이한 걸로 심각한 인격 오염이 일어나거나 마법의 지식을 모두 잃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뭐, 좀 손해는 보겠지만.

그러나 세이어는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의 영혼과 연결된 아카식 드라이브는 철저하게 세이어의 심기체에 적응해 있었다. 여기서 아무 몸하고 바꿨다 기량이 저하되기라도 하면 바로 댐은 붕괴한다. 적어도 세이어 자신과 동급의, 혹은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육체여야 겨우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한 종족의 궁극 진화체인 그와 비견될 만한 재능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200년을 찾았지만 그런 자는 보지 못했으니...."

아카식 드라이브의 검색을 끝내며 세이어는 인상을 썼다. 도박 같은 확률에 목숨을 거느니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나았다.

"나와 비등한 재능의 소유자가 없다면,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수밖에."

☆ ☆ ☆

강철의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

공간 가득 나란히 놓인 수십 개의 원통형 수조가 혼탁한 액체 속으로 기포를 끝없이 피워 올린다. 많은 '사람'의 육체가 그 수조에 떠 있었다.

수조 사이를 걸으며 세이어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측 수조에 떠 있는, 알몸의 잘생긴 금발 청년이 보인다.

"결국 R.X 시리즈는 실패로군."

고대의 초인병 프로젝트를 토대로 재현한 마력, 신성력, 오러를 모두 구사하는 R.X 시리즈는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는 삼위일체 형태로 만들겠다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과는 그냥 세 분야 다 모자란 수준이 되어 버렸다.

"역시 하나라도 확실하게 극의에 다다르는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공간 우측 수조에는 푸른 머리의 젊은 선주종 육체들이 들어 있었다. 바로 세이어 자신의 클론, 마법의 극에 다다른 육체다.

이는 분명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아쉽게도 수명이 다 되었다. 은의 시대 생명마학자에 버금가는 천재적인 감각의 소유자가 있어 최적화 조정을 해 준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성배 프로젝트는 너무 지지부진하고."

다른 편 수조에는 수십의 어린 소녀의 육체가 들어 있었다. 마력, 정신력처럼 심心에 속하는 신성력, 아카식과의 소통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걸 목표로 한 실험체다.

성배 프로젝트는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목표치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세이어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현재의 그는 또다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열화된 육신을 버리고 영혼전이술을 시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클론 인자의 열화가 진행되어도 너무 진행되었다. 이 육체의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클로닝할 인자가 남지 않는다.

"게다가 역시 여자가 되는 건 좀...."

아름다운 소녀의 나신을 보며 세이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성력이란 게 남성보단 여성 쪽이 월등히 재능이 높게 발현되는 분야라 어쩔 수 없이 여성체로 만들긴 했지만...."

그도 남자였다. 저 아름다운 나신을 품는 거야 얼마든지 환영이겠다만 저 몸이 되는 건 영 탐탁찮다. 소멸하는 것보다야 나으니 일단 시도는 했다만 역시 이 방식은 최후까지 미뤄 두고 싶다.

"역시 제일 가능성이 있는 건 이쪽인가?"

세이어는 공간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수조 무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근육질 소년들이 떠 있는 수조였다. 심, 기, 체 중 체體의 극한을 추구하는 육신을 제조하는 곳이다.

붕괴하는 육체를 보며 세이어는 계속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육체에 가해지는 신성의 압박을 줄일 수 있을까? 어찌해야 육체와 신성의 부조화를 최대한 지울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문득 발상의 전환이 생긴 것이다.

'압박을 줄일 게 아니라, 그 압박도 견딜 수 있는 육체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바로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 봤고, 결과는 꽤 긍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이 수조 무리가 탄생했다. 처음부터 육체 인자를 조작해 인공 자궁에서 탄생시키는 게 아니라,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육체적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를 납치해 강제로 그 자질을 일깨운다. 불굴의 신체를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이 계획은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라 명명되었다.

수조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세이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지나간 뒷자리, 남겨진 수조에서 문득 갇힌 소년 하나가 꿈틀거렸다.

부글....

의식도 움직임도 있을 수 없는 그 수조 속에서, 소년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부그르르르....

실험체 458번이었다.

☆ ☆ ☆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가 개시된 지 15년 뒤.

프로젝트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육당하던 맹수들이 은의 현자가 방심한 탐을 타 우리를 부수고 대규모로 탈주했던 것이다.

은의 현자는 대혼란에 빠졌다.

탈주한 수십 명의 '신의 육체'들. 그들은 하나같이 세이어의 육신이 되기 위해 고도의 마법과 무술을 익힌 이들이었다. 하나같이 대륙 어느 곳을 가건 명성을 떨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강자들이었다. 수많은 은의 현자가 죽음을 당하고 시설 곳곳이 파괴되었다.

그래도 역시 은의 현자는 강했다. 고대의 비의를 독점한 은의 현자는 많은 피해를 입고서도 결국 탈주한 실험체들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거의 전원이 결국 세상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아 탈출한 이는 단 한 명.

가장 강하고 가장 튼튼하며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던 실험체 458번, 발켄슈트뿐이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세이어는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실험체의 행방을 찾았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전지 영역이 있으니 행방을 찾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금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발켄슈트를 거두려던 세이어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굳이 지금 거둘 필요는 없겠는데?"

우물 안 개구리보단 세상 밖 개구리가 더욱 멀리 뛰는 법.

세상을 나선 발켄슈트는 여러 사건 속에서, 여러 강자와 겨루며 더더욱 강해졌다. 기량뿐 아니라 그의 육체 역시 더더욱 단단해졌다.

그 결과는 세이어의 기대를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시설 내에서 저희들끼리 싸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졌다. 심기체 중 체體의 극한만을 기대했을 뿐인데 심心에 속하는 마력과 정신력, 기氣에 속하는 오러의 경지도 무시무시하게 올라갔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성능 좋은 육체가 낫겠지?"

결국 세이어는 일단 발켄슈트를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 ☆ ☆

20년 뒤, 발켄슈트는 세이어의 기대대로 놀라운 경지의 무인이 되었다.

40대 중반의 그는 검성과 함께 세계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하며 권왕拳王이라는, 그 전에는 존재치 않던 새로운 칭호로 불리고 있었다. 마법 수준 역시 더더욱 깊어져 8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다다랐다.

육체도 정신도 충분히 무르익었다. 만족한 세이어가 명했다.

"신의 육체를 수확할 날이 왔도다."

신탁이 내려지자 은의 현자들이 움직였다. 상대의 힘을 고려, 은의 암살자 중에서도 최강자들만을 골라 금기시된 아티팩트를 들려 줘 발켄슈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전원 돌아오지 않았다.

당황하며 은의 현자들은 이번엔 군대를 움직였다. 세이어 교단의 사주 아래 제국의 군세가 출동했다.

그들 역시 전원 돌아오지 않았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은의 현자들이 온갖 금단의 아티팩트로 중무장하고 직접 나섰다. 은의 협력자 중에서도 최강급 오러 유저와 대마법사들이 총동원되었다.

이번엔 다들 돌아왔다.

머리통만.

수십 개의 잘린 머리통이 담긴 상자, 그 뚜껑에는 발켄슈트가 남긴 고상한 전언도 한 구절 적혀 있었다.

-직접 와라, 새꺄.

벌벌 떨며 은의 현자들은 저 소식을 세이어에게 전했다. 그리고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세이어는 분노하지 않았다.

"훌륭하도다."

자신의 육체가 될 이였다. 그 육체가 저리도 강해졌다는데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

흔쾌히 세이어가 직접 나섰다.

야심한 밤, 바슈탈론 동쪽의 한 인적 드문 야산.

인류의 신과 초대 권왕이 서로 조우했다.

"오랜만이구나, 실험체 458번."

뾰족한 귀를 지닌, 엘프도 드워프도 아닌 기이한 외모의 이형異形 신이 허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본다. 주먹을 말아 쥐며 권왕 발켄슈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세이어."

비록 은의 현자는 설명해 준 적 없지만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한 곳에서 십몇 년을 갇혀 보냈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을 꿈꾼 것이 아닌가? 어차피 그대로 있어 봐야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분명 그대가 다시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

탈주 이후 한 번도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 그의 적은 무려 인류의 신이었다. 감히 나태할 수가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족도 만들지 않은 채 평생 동안 육체를, 정신을, 마법을 단련하며 보냈다.

서서히 다가오며 세이어가 빙그레 웃었다.

"신의 것은 신에게. 그 육체를 이제 거두겠노라."

세이어의 어깨 너머로 자욱한 영기가 피어났다. 영기가 정해진 술식을 따라 마력으로 치환된다.

"무릎 꿇고 그 육체를 건넬지어다."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 그 모든 실험체에 내재된 조작 코드 발동어였다. 이게 세이어가 그토록 태연했던 이유였다. 발켄슈트가 아무리 날고뛰어 봐야 어차피 자신의 손아귀 안이었으니까.

"복종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강력한 정신적 압박이 발켄슈트의 뇌리를 강타한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며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를 불처럼 뿜어냈다.

"웃기지 마라!"

조작 코드가 거부되었다. 무시무시한 정신력이었다. 세이어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까지 성능이 올라갔는가? 실로 기쁘구나, 나의 육체여."

"누가 네놈의 육체라는 거냐!"

분노하며 발켄슈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가공할 마법과 오러의 힘이 합일하여 인류의 신을 노렸다.

"대단한 정신에 대단한 힘이로다. 정말 감탄스럽구나."

세이어는 태연하게 그 모든 걸 받아쳤다.

"아무래도 기운을 좀 빼 놓아야겠군. 일단 쓰러지거라!"

8서클 섬광 주문이 발켄슈트를 강타했다. 황금빛 회오리가 일어나 마법을 튕겨 냈다.

"스파이럴 가드!"

"제법이군?"

세이어는 살짝 놀랐다. 설마 8서클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금 더 힘을 썼다.

"쓰러져라!"

9서클 폭염 주문이 발켄슈트를 강타했다. 두 줄기 황금빛 회오리가 일어나 마법을 튕겨 냈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이것도 버티나?"

세이어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발켄슈트의 방어력이 높았다. 세이어가 진지하게 10서클 궁극 제압 주문을 날렸다.

"태고의 혼돈이 그대를 묶을 지어다, 혼천악쇄!"

이번엔, 무려 세 줄기 황금빛 회오리가 일어나 10서클의 마력과 충돌해 사방을 뒤흔들었다.

"트리플 스파이럴 가드!"

잠시 후, 폭연이 사라진 자리에 피투성이가 된 발켄슈트가 두 눈을 불태우며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세이어는 당황했다.

"...어? 잠깐?"

10서클 제압 마법마저 버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쨌거나 자신의 육체가 될 놈이었다. 부수면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런데 조작 코드도 제압 마법도 안 통하면....

'저걸 어떻게 안 망가뜨리고 제압하지?'

"으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발켄슈트가 맹수처럼 돌진했다. 무수한 펀치와 킥이 마력과 오러를 실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으랏차차차차차차!"

무지막지한 공격이 세이어의 방어막을 두들겼다. 무지막지한 타격음이 연거푸 울렸다. 세이어가 조금씩 뒤로 밀렸다.

"윽! 이거...."

상상 이상으로 발켄슈트의 공격이 강했다. 게다가 모든 공격에 오러뿐 아니라 마력도 깃들어 있어, 세이어의 마력장을 교묘히 파고들어 온다!

"강하다는 마법사란 마법사는 다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사투를 벌였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쯤은 지긋지긋하게 익혔다! 그 모든 건 지금을 위해서!"

단순 무식하면서도 철저하게 마법사의 약점만을 노리고 공세가 퍼부어진다. 세이어의 표정이 점점 더 굳었다. 두 눈에 분노가 떠올랐다.

"실험체 주제에 감히 신에게 대항하느냐!"

사정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마법을 날렸다. 9서클 궁극 폭발 주문이 발켄슈트의 사방을 감쌌다.

"임페리얼 퍼니시먼트!"

장대한 폭발이 일어나 폭연이 산기슭까지 닿았다. 폭풍이 몰아치고 산악 전체가 흔들린다. 그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마법을 날린 후에야 세이어가 아차 하며 혀를 찼다.

'아차! 완전히 부숴 버리면 안 되는데....'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바뀌었다. 폭연 속에서 여전히 두 발로 굳건히 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탓이다.

"약해! 약하다고! 이 정도로 나의 육체를 부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류의 신이여!"

"...뭐야? 이것도 버텼다고?"

질린 나머지 세이어가 입을 쩍 벌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발켄슈트가 광소를 터트렸다.

"이 육체는 불굴이다! 으하하하하하!"

공방이 이어졌다. 하늘이 뒤흔들리고 대지가 뒤엎어졌다. 무자비한 신의 공세 속에서도 발켄슈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밀리고 나뒹굴지언정, 무수히 상처 입고 피를 흘릴지언정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어떤 마법을 날리고, 어떤 공세를 펼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덤벼 온다.

"이놈이 감히...."

짜증을 내며 세이어가 소리쳤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느냐? 이 정도 힘으로 신에게 대항할 수 있으리라 믿었느냐? 마음만 먹으면 네놈 따위 흔적조차 남지 않게 증발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느냐?"

세이어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예상 밖으로 발켄슈트가 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와 세이어 사이엔 여전히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

그러나 발켄슈트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아, 그럼 그렇게 하시든가?"

그렇게 못 하니까 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잇고 있는 거 아닌가? 일만 이천 년 만에 세이어는 사람이었을 때의 기분을 느꼈다. 울화통이 터졌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진짜 신의 힘을 보여 주마!"

아카식과 연동하며 세이어가 신성을 발동시켰다. 마법이 아닌, 아카식 그 자체로 발켄슈트의 영혼을 공격한다. 가공할 영압이 발켄슈트의 정신을 해일처럼 밀어붙인다.

"신의 위엄을 맛보아라!"

망망대해에 휘말리는 감각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핏발이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으아아아아!"

저항하는 발켄슈트를 향해 세이어가 신의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위대한 신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영광된 운명을 받아들여라!"

절대적 복종을 느끼게 하는 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발켄슈트는 따르지 않았다.

"아, 모르겠고."

헛소리로 포장하면 강간이 연애가 되냐? 불륜이 로맨스가 돼? 주절주절 핑계 대 봐야 남의 것 훔치려는 놈이 도둑놈이지 뭐긴 뭐야? 남의 몸 날름 집어삼키려는 도둑놈이 더럽게 말도 많다!

"신이고 나발이고 어디서 남의 귀한 육체를 날로 먹으려고?"

조작 코드? 그딴 건 근성으로 극복한다!

신의 위엄? 그딴 건 열혈로 태워 버린다!

"꺼져 버려! 이 날강도 놈아!"

몰려오는 아카식, 진정한 신의 권능을 향해 일권을 날린다. 거대한 신성의 바다를 향해 평생의 수행을 담아 주먹을 내지른다.

8중첩 캘러미티 혼이 신성과 충돌했다. 현재 발켄슈트가 가진 최강의 일격이었다.

"타아아아앗!"

...그러나 그 최강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세이어가 광소를 터트렸다.

"가소롭구나! 하하하핫!"

오러의 빛이 사라진다. 순식간에 신성의 해일에 휩쓸려 흔적 없이 소멸한다. 역시 한낱 인간의 주먹에서 나온 힘이라 위력도 하찮기 그지없다.

발켄슈트가 허무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정말 하찮구나....'

자신도 하찮고 그의 주먹도 하찮고, 세상도 하찮고, 저 거대한 신의 힘조차도 하찮다. 모든 것이 유有였으며 무無였다.

"마법은 곧 공空이요, 무武는 곧 무無로구나."

무심히 중얼거리며 발켄슈트가 재차 주먹을 허리로 가져갔다. 세이어가 의아해했다.

'저게 뜬금없이 뭐래는 거야?'

발켄슈트의 전신에서 빛의 고리가 광채를 발했다. 오직 세이어 하나만을 위해 갈고닦았던 권격, 여덟 파괴의 고리로 만물을 파괴하는 필멸의 권, 캘러미티 혼 8중첩.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고리가 그 위에 중첩되고 있었다.

웅웅웅웅!

굉음과 함께 아홉 빛의 고리가 파괴의 일점으로 수렴한다. 만물을 파괴하는 필멸을 넘어서, 존재를 지우는 소멸의 권이 허공을 갈랐다.

"캘러미티 혼!"

해일을 가르며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이 순식간에 아카식 곳곳을 꿰뚫고 퍼져 나간다. 세이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으윽!"

신성이 깨진다. 유상무상의 힘, 아카식. 그 법칙을 지우는 광채가 사방에 가득하다.

'말도 안 돼!'

빛이 세이어를 뒤덮었다. 그의 육체를 뒤덮고, 그의 영혼을 뒤덮고, 그 영혼과 연결된 신의 권능마저 뒤덮으며 찬란히 빛난다.

인류의 신이 비명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악!"

☆ ☆ ☆

드림 다이브의 마지막 환영을 상기하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한 방에 세이어 놈이 골로 갔다 이거지.'

그날 이후의 정보는 테스론도 그다지 얻지 못했다. 신성 자체에 타격을 입은 탓에 당시의 정보가 상당수 유실된 것이다. 세이어 본인조차도 제라드를 만나기 전까지 당시 일을 잊고 있었을 정도다. 거의 건질 게 없었다.

덕분에 세이어의 소멸 원인은 은의 현자 쪽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신살神殺의 위업을 달성한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해서도 소리 소문 없이 감춰졌다. 뭐, 발켄슈트도 저런 거 자랑스레 떠들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고.

육체를 잃고 세이어는 허깨비 상태가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육체가 소멸하기 직전 아카식과 연결된 제어 라인을 차단해 간신히 흡수되는 것만은 막았지만, 덕분에 물질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

이후 세이어는 망령이 되어 세계의 틈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존재를 잃어 갔다.

그가 다시 현세에 발을 디딘 건 그로부터 근 50년이 지나서였다.

원인은 몰라도, 세이어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한 은의 현자다. 당황 속에서 어떻게든 세이어를 재림시키려 노력했다.

방치된 성배 프로젝트가 재가동되었다. 수많은 어린 실험체 소녀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아쉽게도 그 상태론 도저히 신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실로 비인도적인, 참혹한 실험이 이어졌다.

전 세계에서 힘 있는 성직자를 데려다 세뇌시켜 저 어린 소녀들과 강제 교배시켰다. 이후 낳은 아이들끼리 또 강제 교배시켰다. 수많은 근친 교배 속에서 겨우 프로토 타입이 나왔다.

세렐라인이라 이름 붙은 이 검은 머리 소녀로 인해 세이어는 간신히 물질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의식까지 깨어나진 않았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은의 현자는 세렐라인에게 불로화 시술을 시행했다. 흑발이던 그녀의 머리칼은 은발이 되었고 성장하던 육체는 소녀 상태에서 멈췄다.

이후 세이어는 세렐라인의 속에서 머물렀다. 한낱 실험체였던 세렐라인은 신을 품은 고귀한 존재로 숭앙받아 은의 현자, 최고위층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레펜하르트의 육체가 나타나고 나서야 인류의 신은 오랜 잠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육체가 없었던 전생의 역사에선 성녀 엘린의 몸으로 갈아탄 거였다 이거지."

이제야 성녀 엘린의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마켈린도 못하는 기이한 힘을 펑펑 쓴다 했지. 덕분에 엄청 고생했었는데."

여하튼, 분명 세이어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대 권왕 발켄슈트로 인해 잠시 세상에서 퇴출되었다. 틀림없이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신성, 아카식에게도 통하는 초월적인 뭔가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과연 그걸 얻을 수 있느냐는 거군.'

기대와 불안을 함께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작은 오두막, 짐 언브레이커블의 마지막 비처로 걸음을 옮겼다.

3

오두막에 들어가 제라드는 일단 불부터 피웠다. 산 밑에서 들고 온 땔감이 활활 타오르며 금방 내부가 훈훈해졌다. 안쪽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다들 짐 풀어라. 워낙 좁아서 풀고 말고 할 것도 없겠지만."

확실히 오두막 내부엔 뭐가 없었다. 심지어 침상이나 테이블조차 보이지 않고, 그냥 굴뚝 옆에 나무 식기 몇 개가 들어 있는 찬장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뭐, 호사를 바란 것도 아니니 다들 적당히 들고 온 배낭을 집 한쪽 구석에 쌓았다. 오두막 내부를 살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딱히 뭐가 남아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사부?"

무술 이론이 적힌 글귀라든가 책자, 뭐 이런 건 전혀 없다. 그냥 텅 빈 집이다. 제라드가 대꾸했다.

"그야 여긴 2대 권왕께서 세운 거처일 뿐이니까."

'2대 권왕이라면... 칼브레인인가?'

예전에 제라드에게 들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사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왕으로 군림하던 발켄슈트는 나이 쉰에 짐 언브레이커블을 창시하고 널리 제자를 모았다. 대륙 최강자가 가르침을 내리겠다고 하니 당연히 수많은 무인들이 풍운의 꿈을 품고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발켄슈트는 그중 육체가 강건하고 몸이 날랜 젊은이들만을 뽑아 수행을 시켰다.

그리고 다 죽어 나갔다.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발켄슈트는 자신이 강해진 방식 그대로, 그 무식한 '서로 패고 패고 또 패다 보면 엑기스만 남겠지.' 방식을 고수했던 것이다. 참으로 상식 있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다들 도망가려고 난리였고, 그때마다 발켄슈트는 도망친 놈들 잡아다 다시 수행을 시켰다. 130년에 걸친 장대한 '제자 도주 시도 시 사전 차단법 노하우'의 시작이었다.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그는 아무래도 인간성에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뭐, 그렇다고 발켄슈트가 천하의 악인이었단 소리는 아니다. 맞아 죽은 제자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본인도 나름 자기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수행 방법을 바꿨다.

그래도 다 죽어 나갔다.

서로 패는 대신 사부가 직접 패 주겠다는 그 방식은 쌍무식이 무식이 되었다 뿐 딱히 나아진 게 없었다. 덕분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명만 대륙 전역에 자자하게 울려 퍼졌다.

10년 뒤, 남은 건 칼브레인 한 명뿐이었다. 서른 살이란 늦은 나이에 짐 언브레이커블에 입문한 그는 용케 살아남아 나이 마흔에 2대 권왕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하나 건졌구나. 네 때엔 좀 덜 피 보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제자야."

유언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말을 남기며 발켄슈트는 예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 정도의 강자치곤 너무 일찍 죽은 셈이다. 이야기 들을 당시엔 레펜하르트도 몰랐지만, 세이어와의 전투로 수명이 많이 깎인 탓이었다.

어쨌거나 저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곧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걸 얻었다는 의미다. 하산하자마자 칼브레인은 바로 권왕의 칭호를 얻고 세계 최강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워낙 늦은 나이다 보니 느긋하게 명성이나 떨칠 팔자는 아니었다. 어서 후계자를 찾아 무문의 맥을 이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칼브레인은 발켄슈트와 제자 육성 방법이 달랐기에 더욱 시간이 없었다.

대마법사이기도 했던 발켄슈트와 달리 칼브레인은 순수한 무인이었다. 오직 자신의 천재성에만 기댔던 발켄슈트와 달리 그는 무학자武學者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애매모호하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무리武理가 칼브레인 대에 정립되고 체계화되었다. 제대로 된 제자 육성 방식 역시 이때 갖추어졌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칼브레인은 피 흘리지 않고 후계자를 키우려면 최고의 자질을 가진 이를 어린아이일 때부터 수행시켜야 가능하다는 걸 알아냈다. 발켄슈트처럼 이미 다 자란 몸 좋은 젊은이를 모아 봐야 별 성과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최고의 자질이란 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륙 곳곳을 20년 넘게 샅샅이 뒤지고 나서야, 나이 예순에 겨우 제자를 찾을 수 있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칼브레인은 소중한 후계자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건네주었다.

시간과 돈,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제자 육성 방식의 결과는 훌륭했다. 칼브레인의 후계자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걸 완벽히 소화해 냈다.

이후 짐 언브레이커블은 계속 최강의 자리를 고수했다. 3대 권왕 라스탈, 4대 권왕 제라드에 이르며 그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발켄슈트가 가르침을 펼친 지 130년 후, 이제 대륙 전역에 짐 언브레이커블을 모르는 무인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니 테스론이 5대째랬지.'

여하튼, 이곳은 그냥 오두막일 뿐이고 초대 권왕의 심득이 새겨진 동굴까진 한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제라드의 설명이었다.

"5분 정도 걸릴 게다. 그나저나...."

말하다 말고 제라드가 다른 일행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따라올 테냐?"

짐 풀고 쉴 준비를 하던 이니야가 놀라 되물었다.

"어머? 저희도 올라가도 되는 건가요?"

러스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술계에서 서로의 기술을 탐하는 것은 상당히 꺼려지는 금기다. 그래서 전생의 러스가 그토록 친구 하나 없었던 것 아닌가?

그냥 기술도 아니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 비기가 담긴 곳이니 당연히 자신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줄 알았다.

레펜하르트도 당황해 물었다.

"어? 그래도 되는 겁니까, 사부?"

제라드가 호탕하게 대꾸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가르침을 숨기지 않느니라!"

하긴, 평소에도 이 좋은 가르침을 세상 널리 퍼뜨리고 싶단 소릴 해대긴 했다. 그래도 납득이 안 가 레펜하르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자격 운운하는 건 뭐였습니까?"

분명 초대 권왕은 자격 없는 이는 발 들이지 말라며 엄명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야 자격 없는 후계자가 주제 파악 못 하고 극의를 보면 몸을 망칠 수도 있잖냐? 그걸 경계하신 거지."

"그럼 쟤들은요?"

"쟤들은 짐 언브레이커블이 아니잖아? 뭔가 얻는 것이 있다면 제 팔자요, 엉뚱한 길로 들어서 몸 망치는 것도 제 팔자다."

"그러니까... 후계자 아닌 놈들이야 망가지건 말건 알 바 아니니 마음껏 보여 줘도 된다는 겁니까?"

"그렇지!"

기가 차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이걸 야박하다고 해야 하나,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제라드도 아주 생각 없이 한 소리만은 아닌 듯했다.

"저 녀석들 수준이면 몸 망치기도 쉽지 않아. 뭔가 건지면 좋고, 아니어도 딱히 손해 볼 일은 없을 게다. 명색이 가르침 한 줄씩은 준 아이들인데 몸 망칠 거 뻔히 알면서 데리고 가겠느냐?"

재차 이니야와 러스, 타시드를 보며 제라드가 묻는다.

"어쩔 테냐? 따라와 볼 테냐?"

다들 기대하는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설적인 무인이 최후의 심득을 남겼다는데,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무인은 없었다.

"가 볼래요."

"가겠습니다."

"당연히 가야죠!"

물론 무인이 아닌 실란은 이불 폭 뒤집어쓰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었지만.

"전 절대 안 가요!"

"아무도 네 녀석보고 따라오라고는 안 한다. 짐이나 지키고 있어라."

실란에게 핀잔을 던진 뒤 제라드가 뒷문으로 향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 일행도 오두막을 나섰다.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실란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세요~!"

☆ ☆ ☆

얼음 동굴 속을 걸어가며 제라드가 중얼거렸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극의, 캘러미티 혼 9중첩은 단순히 무술의 깨달음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뒤따르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경청한다.

"무술이나 오러를 넘어선 경지, 지고한 깨달음만이 9중첩의 길에 들 수 있느니라. 초대 조사의 가르침은 너무도 깊고 심오하여 부끄럽지만 이 사부도 아직 그 경지엔 이르지 못했다. 레펜하르트, 네 녀석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동굴이 끝나고 거대한 얼음 공동이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이 아닌 듯 천장도 벽도 동그랗고 매끄럽다. 뭐, 멀쩡한 절벽에 주먹질해서 동굴 만드는 거야 짐 언브레이커블이 심심하면 해 대는 짓이긴 하다.

그 인위적인 공간 한쪽에 마치 칼로 자른 듯 매끈하게 다듬어진 벽이 보였다.

"보거라, 제자야. 이것이 캘러미티 혼의 극의니라."

벽 위에는 온갖 글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다들 정신없이 그 벽면을 바라보았다. 제라드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전반부는 정신적 깨달음에 대해서, 그리고 후반부는 오러의 극의에 대해 적어 놓으셨지. 난 전반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전대 권왕께서도 마찬가지였지. 오직 초대 조사께서만 도달한 무신의 경지다."

벽에 적힌 글귀를 보던 이니야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

어째서 제라드가 1년 동안 매달렸음에도 전혀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난해하네요...."

평생 검을 수행해 온 이니야조차,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달인 중의 달인인 그녀조차도 빙벽에 새겨진 글귀를 단 한 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추상적이었고 비유와 은유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무술 비의란 게 은유와 비유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 어려웠다.

타시드와 러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정말 어렵네."

"러스, 너도 어려워? 너 어지간한 건 척 보면 이해하는 놈 아니었냐?"

"이건 아냐. 너무 심오해서 가닥조차 잡기 힘들어."

이니야의 경지, 러스의 천재성조차도 저 심오한 무론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름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던 이들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라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충격받을 것 없다. 그저 부족함이 남아 있을 뿐이니."

그러던 중이었다.

모두의 귓가에 시큰둥한 레펜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작 이거였어?"

러스와 타시드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와 이니야도 눈을 크게 떴다.

레펜하르트는 진짜 별것 아니란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역대 권왕들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하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저 글귀를 보자마자 이해했다. 심지어 이해하는 데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여기 적혀 있는 글귀는 무술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거 권마합신이잖아?'

☆ ☆ ☆

초대 권왕의 심득, 그 전반부는 제라드의 설명과 달리 정신적인 깨달음에 대한 게 아니었다. 그냥 순수한 마법 이론이었다. 오러와 마법을 융합하는 제어 술식을 룬어와 공용어를 섞어 빼곡하게 남겨 놓은 것이다.

'저걸 무술적 관점으로만 보면 당연히 못 알아먹지, 쯧쯧.'

게다가 오러와의 융합을 목표로 만든 술식이라 기존 마학 술식과도 표현이나 비유가 전혀 다르다. 어지간한 마법사가 와도 이걸 마학 이론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했을 테니, 역대 권왕들이 다들 이해 못 한 것이 납득이 간다. 알아보기 쉬웠다면 대마법사라도 하나쯤 초빙했겠지.

'그러고 보면 초대 권왕은 오러 유저이면서 동시에 대마법사였지?'

레펜하르트처럼 발켄슈트 역시 오러와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던 자다. 그러니 사용 술식도 비슷할 수밖에.

'그런데 권마합신에 비해 한참 조잡하군.'

한 방에 이해 끝내고, 심지어 레펜하르트는 그 짧은 시간에 저 술식에서 수정점을 수백 개도 더 찾아냈다. 10서클의 고금 제일 마법사인 그에 비해 발켄슈트는 고작(?) 8서클의 대마법사다. 마법사의 레벨이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다.

'...아, 김샌다, 쩝.'

엄청난 걸 기대하고 왔는데, 정작 보니 자신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뭐,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긴장하고 각오를 다졌는데 결과가 이러니 맥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제자의 반응에 제라드가 눈을 빛냈다.

"혹시 이걸 이해했느냐, 제자야?"

"예, 사부."

레펜하르트는 간략하게 발켄슈트가 남긴 마학 이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제라드의 표정도 기묘하게 변했다.

"허, 허허허허!"

제라드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천상의 맛을 내는 수프를 맛보고 그 맛을 재현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돼지고기를 다 시험해 봤는데 알고 보니 재료가 소고기더란 소릴 들은 요리사의 기분이 이럴까?

"그렇군, 그런 것이었나."

마법, 마법이었다니? 그럼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어쩐다? 이 나이에 마법도 다시 익혀야 하나?"

심각한 얼굴로 제라드가 고뇌에 빠졌다. 슬쩍 눈치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제자가 마법에 대해선 좀 아는데, 가르쳐 드릴까요?"

제라드가 자신에게 퍼부은 애정과 사랑의 깊이를 절실히 실감한 레펜하르트다. 그런 사부를 위해서라면 평생 갈고닦은 마법을 아낌없이 풀 용의가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 방식으로 말이지, 후후후후.'

제자의 흉악한 속셈을 알아챈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됐다."

제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길이 다름을 알았으니, 이걸로 족하니라."

잠시 좌절한 듯 보였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길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으니, 다른 길을 걸어 도달하면 된다. 선인이 남겨 준 길만을 걸어서야 어찌 진정한 무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마법이 아닌, 오러만으로 9중첩의 경지에 도달할 길을 스스로 찾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말뿐이 아니다. 진심과 각오가 확실히 느껴진다.

새삼 레펜하르트는 감탄했다.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

불굴을 추구하는 이 무문은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마왕이었던 자신을 상대로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던 전생의 권왕, 테스론처럼.

"그나저나 잘되었구나."

이내 표정을 풀고 제라드가 기대 어린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건 네 녀석은 저거 이해했단 소리지?"

"그렇죠, 사부."

자신만만한 제자를 보며 제라드의 노안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초대 권왕 이후, 역대 권왕들은 모두 8중첩의 경지를 넘지 못했다. 최강자로 군림하면서도 그들은 초대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에 항상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책감은 사라졌다. 비록 제라드 자신은 저 경지에 들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는 드디어 초대 조사님의 가르침을 완벽히 받아들였다!

"드디어 짐 언브레이커블에 아홉 개의 고리가 다시 빛을 발하겠구나!"

역시 잘 키운 제자 하나, 열 자식 안 부러운 법이다. 제라드가 빙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 마저 보거라, 제자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오러의 운용과 무의 깨달음 쪽에 치중되어 있다. 이 역시 난해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후반부는 대체로 쉽다. 충분히 이해가 갈 거다."

캘러미티 혼 8중첩에 든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에겐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었다.

흥분하며 레펜하르트를 끌고 빙벽 후반부로 데리고 간다. 평생의 숙원 중 하나가 풀리는 상황이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글귀를 가리키며 늙은 제라드가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어때? 쉽지?"

레펜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후반부를 정신없이 읽을 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보았다. 이제 곧 제자가 깨달음을 얻어 황금빛 폭풍 속에 무극의 권을 각성하리라!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토록 똑똑한, 솔직히 제라드 자신보다 몇천 배는 더 똑똑한 제자가 영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진작 뭔가를 얻어 각성을 하건 경지를 뚫건 해야 할 텐데, 어째 마냥 제자리에 서서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다?

"뭐 하니, 제자야?"

사부의 질문에도 레펜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혼란에 빠진 눈으로 빙벽을 보고 또 볼 뿐이었다.

한참 후, 레펜하르트가 멍청한 음성을 흘렸다.

"...저게 뭔 소리입니까, 도대체?"

☆ ☆ ☆

빙벽 후반부는 지고한 오러의 경지에 오르는 길이 적혀 있었다. 그 궁극의 경지가 전반부와 융합해 마법의 힘으로 극의를 넘어서면 비로소 캘러미티 혼 9중첩, 신조차 멸하는 필살의 일격이 된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저 후반부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싸릿나무로 바다를 쓸고 산악을 갈라 노른자를 꺼내라고? 무슨 개소리야?'

비유도 뭐, 비교 대상이 있어야 비유지 저건 도저히 앞뒤 안 맞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5중첩을 돌파하는 무학 이론도 비슷한 타입이긴 했어.'

그때도 저게 뭔 헛소리냐 싶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이해가 되며 5중첩으로 각성했었다. 그래서 계속 저 기나긴 무학 이론을 읽고 또 읽었다. 안 그래도 대륙 제일의 속독법을 지닌 레펜하르트다. 글 자체는 벌써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같았다.

전혀, 하나도, 눈곱만큼도 모르겠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제라드가 미심쩍은 듯 묻는다.

"...어째 표정이 그러느냐?"

사부의 눈치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토록 기대하고 있는데, 저토록 기뻐하고 있는데 저기다 대고 '전혀 모르겠는데요?'라고 해야 하는 건가, 지금?

"설마... 모르겠냐?"

황당해하며 제라드가 다시 물었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라드가 한탄을 터트렸다.

"보통 이런 경우면 깨달음이 척 와서 떡하니 각성하고 척척 새로운 경지를 나가는 법인데?"

역대 권왕 모두가 감도 못 잡았던 전반부를 그리도 쉽게 이해해 버린 제자였다. 전생에는 무려 마왕씩으로 불리던 제자였다.

"당연히 후반부쯤은 보자마자 바로 깨닫고 무아지경 속에서 새 경지를 열 줄 알았거늘."

"무아지경이라니... 세상에 그런 경지가 흔할 리가 없잖습니까, 사부...."

주절거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막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던 참이었다.

"...엥?"

이니야가 무아지경에 들어 전신에 한기를 흘리고 있었다. 한기가 오러에 뒤섞여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운으로 화한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아아아아...."

러스도 마찬가지였다. 주위 공간이 일렁이며 오러와 공간이 합일하여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옆에 선 타시드 역시 넋 나간 얼굴로 오러를 흘리고 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오러 유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여는 광경, 곧 각성이었다.

"허허, 엉뚱하게 저 녀석들이 하나씩 건졌구나."

제라드가 기가 막혀 뇌까렸다. 밥상 차리고 떠먹여 준 레펜하르트는 정작 하나도 못 건졌는데, 덤으로 데려온 저것들이 뭔가 하나씩 한계를 돌파해 버렸다.

잠시 후 이니야의 오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돌아왔다. 예전보다 훨씬 차분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무武의 길은 끝이 없군요...."

새로운 경지를 각성했음에도 기쁘긴커녕 한없이 아쉬워하기만 한다. 제라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원래 그게 정상이다. 그래, 뭔가 건졌느냐?"

"모르겠어요. 건진 건지 아닌지...."

갑자기 이니야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래도 이런 건 할 수 있게 됐네요."

손을 휘저으니 냉기가 응집되며 허공에 얼음 결정이 맺힌다. 예전에도 가능했던 그녀만의 오러 능력이다. 그러나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휘이이잉!

눈보라가 불며 그녀의 오러가 세상에 '구현'되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의자, 온갖 아름다운 장식장이며 얼음상이 순식간에 주위에 나타났다.

레펜하르트가 경악해 입을 쩍 벌렸다.

'맙소사!'

단순히 안개 정도였던 북해의 숨결 수준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오러를 얼음이란 형태로 '완벽하게' 세상의 물질로 바꿀 수 있다. 비非 물질 에너지인 오러를 물질화시키는 무시무시한 기적이다!

이니야가 배시시 웃었다.

"정말 오러란 끝이 없군요."

제라드도 마주 웃었다.

"추구하는 길의 극의를 보았구나, 훌륭하다."

뒤이어 러스와 타시드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아...."

둘 다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오며 들끓던 오러가 착 가라앉는다. 멍하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굉장하네."

"그러게, 뭔가 굉장한데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이번에도 제라드가 그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얻었느냐?"

러스가 허리의 일루미네이터를 뽑았다. 그리고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잠시 칼날을 바라보았다.

"전 이제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간 러스가 허공에 참격을 날렸다. 공동을 버티던 석순 하나가 뎅겅 잘려나갔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참격,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느낄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허공검, 실검으로 공간을 넘나드는 진정한 허공검을 얻었구나."

전생의 검성 사이러스가 구사하던 비기가 드디어 현생의 러스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형님의 조언 덕입니다."

겸손하게 러스가 감사를 표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가 던져 준 화두가 아니었다면, 저런 경지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러스라도 벌써 이 경지에 닿을 수는 없었으리라.

"축하한다, 러스."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며 레펜하르트는 타시드를 돌아보았다. 과연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했다.

"은인이여,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참마도를 든 채 타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계속 말을 뱉으려다, 이게 아니다 싶어 도로 목구멍으로 삼킨다. 그러더니 러스를 보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우, 모르겠다. 러스! 방금 그걸로 나 한 대만 후려갈겨 봐."

"위험할 텐데? 이거 아직 나도 제어가 제대로 안 돼."

"누가 내 목 노리래? 적당히 어깨 정도 노리라고. 어차피 실란 대주교 있으니까 좀 베여도 문제없잖아?"

"하긴...."

호기심에 러스가 자세를 잡았다.

'뭐지? 타시드 녀석 능력이 전투 예지긴 한데....'

실체의 허공검도 타시드를 상대하긴 여전히 까다롭다. 실검이든 블레이드 오러든 어차피 맞혀야 의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어깨라고 과녁을 정해 준 걸 보면 예지 쪽은 아닌 듯한데?

"타앗!"

아직 명칭을 정하지 못한 실체의 공간 절단검이 타시드의 어깨를 노리고 정확히 날아들었다. 타시드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참마도를 들고 저 '무엇이건 베어 버리는 검'을 막을 뿐!

타아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빛의 검 일루미네이터와 참마도 다카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검을 거두며 러스가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그거 뭐야? 이걸 어떻게 막아?"

타시드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된다. 이런 거 맞구나."

그리고 히죽 웃었다.

"난 이제 무엇이든 막을 수 있게 됐다, 야."

제라드와 이니야가 눈을 껌뻑였다. 러스의 공간 절단은 따라 하진 못할지언정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방금 타시드가 한 짓은 그들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뭘 한 건가요, 타시드 경?"

"그러게? 네 녀석 뭐 했냐?"

타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어째서 이런 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잘 막을 수 있게 됐다니까요?"

레펜하르트만이 타시드가 한 짓을 이해했다.

'하, 하하하....'

전생 때 오크 대전사 타시드만이 검성 사이러스의 공격을 예측하고 막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오러 스킬, 전투 예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레펜하르트는 타시드가 그 특유의 감각으로 사이러스의 허공검, 그 공간 절단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을 노려 막은 거라 여겼다. 마왕 레펜하르트조차도 저 공간 절단의 힘을 피할 수는 있을지언정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능력의 본질이 시간 고정이었어?'

방어하는 찰나의 순간, 타시드는 자신의 애도 다카르의 시간을 동결시켰다. 고정된 시간이 공간의 침범을 거부하며 러스의 일루미네이터를 가로막은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고도의 능력이다. 마왕이라 불리던 전생 때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러의 힘까지 얻은 지금에서야 겨우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

'세상에, 시간 고정은 전생의 나도 못했던 건데....'

시간과 공간과 물질, 이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부분이 시간이다. 공간과 물질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던 레펜하르트도 시간만큼은 감히 손대지 못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바로 시공 회귀 주문이었다.

'그걸 그냥 칼 한 자루로 해 버린다고?'

심지어 타시드 본인은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진짜 신기하네, 한 번 더 막아 봐, 타시드."

"어우, 너무 오러 소모가 심한데? 지금 수준으로 두 번은 무리다."

"일회용이야? 그건 좀 문제 있네."

"러스, 넌 그거 펑펑 날릴 수 있냐?"

"펑펑은 아니고... 그래도 대여섯 번은 가능하지 싶은데...."

검을 쥔 채 러스와 타시드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니야와 제라드도 타시드의 신기술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러스 경의 기술은 같은 공간 관련이라 알아보겠지만, 저건 대체 전투 예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진짜 모르겠구먼. 제자 녀석 어디서 저런 신기한 놈들이 건진 건지."

어찌 보면 저것도 다른 의미에서 언브레이커블이다. 제라드가 뭔가 감이 온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에휴."

러스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니야와 제라드조차도 인정하는 자신의 친우를 보며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아무리 봐도 진짜 천재는 네 녀석인 것 같거든? 대체 왜 널 놔두고 만날 나만 천재, 천재 하는 거야?"

"네가 더 알아보기 쉬운 천재인가 보지."

멍청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진실을 꿰뚫는 답변이었다.

"아, 이번엔 진짜 확실한 거 하나 건졌다고 생각했는데."

일루미네이터를 내려다보며 러스는 인상을 썼다. 타시드의 성장은 물론 기쁘지만, 그와 별개로 역시 불만이 있었다.

'도대체 뭔 기술이 개발만 하면 바로 막히는 거야, 난?'

오만에 들지 않음은 검사로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한다. 도대체 하늘이 작정하고 자신이 오만해지지 않게 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아아, 아무리 나라도 하루쯤은 오만에 젖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대체 오만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라도 좀 느껴 보고 싶다. 묘하게 궁상맞아진 러스가 연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 생각 없이 타시드가 다가와 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기술 재밌더라. 딴 거 또 개발해 봐. 나도 딴 거 개발해서 막아 보게."

"...됐어."

하여튼, 다들 놀라운 힘을 손에 넣었다. 역시 초대 권왕이 남긴 심득은 보통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제라드가 기뻐하며 웃었다.

"하나씩 건졌으니 발품 판 보람이 있구나! 좋은 일이다!"

자기 무문도 아닌 이들이 어부지리를 얻었다 해 불쾌해하는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그렇게 치졸한 무문이 아닌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이 치졸해지는 경우는 오직 돈 문제가 걸렸을 때뿐이다.

"하지만 네 녀석은 여전히 문제구나, 제자야."

다른 이들의 성장을 보니 더더욱 제자의 상태가 아쉽다.

"뭐, 느낌 안 오냐? 뭔가 둔탁한 게 뒤통수를 탁 치는 뭐 그런 거."

"전혀 안 오는데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죄인 된 기분이다. 레펜하르트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왜 하필 쟤들은 이 타이밍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씩 건진 거야?'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제라드가 주먹을 쥐었다.

"뒤통수를 한 대 쳐 볼까?"

"참아 주시죠...."

여전히 기운 없이 대답하는 레펜하르트였다.

4

레펜하르트 일행은 계속 설산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제일 중요한 레펜하르트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으니, 그가 뭔가 얻을 때까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실란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우, 대체 잘난 척은 다 하고 세상만사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양반이 왜 그건 모른대요? 심지어 타시드 경도 이해했다던데?"

사방에 오직 눈 밖에 없는 설산 한복판, 그리고 이 오두막은 처음부터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를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쉽게 말해 방한防寒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건물이란 소리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전신에 이불을 바리바리 둘러싸도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세상에 오크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마왕이 어디 있냐? 쳇! 흥! 핏!"

더 열받는 건, 실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혀 추위 따위 느끼지 않는다는 거다! 다들 새로 얻은 경지 시험하겠다고 눈보라 속에서 칼질하고 날뛰고 신 났는데, 일반인인 실란 입장에서 보기만 해도 등골이 시리는 광경이었다.

"...미안하다, 에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레펜하르트는 오늘도 동굴로 향했다. 평소처럼 빙벽의 글귀를 보고 뭔가 얻기 위해서였다.

아예 도시락까지 싸 들고 빙벽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그리고 몇 번이나 보았던 걸 보고 또 본다.

그래도 모르겠다.

"후우... 역시 난 무인의 재능은 없는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현재 레펜하르트의 경지는 6중첩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6중첩조차도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는 권마합신을 통해 미래의 경지를 간접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높여 왔다. 이게 진도 빨라서 좋긴 한데 부작용이 있었다.

'오러마저도 마법처럼 수치화, 계량화해서 받아들이다 보니 정작 무인의 감 쪽이 약하단 말이지, 내가.'

물론 예전과 달리 무술 쪽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현재의 레펜하르트는 분명 오러 유저다운 무인의 감각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수준이었다. 평범한 오러 유저보다야 낫지만 정점에 선 이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그리고 저 빙벽 후반부는 오직 무인의 감각을 토대로 새겨졌다. 그야말로 현재의 레펜하르트와는 상극인 것이다.

"아, 대체 이슬로 태양을 식히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답답한 나머지 버럭 소릴 지른다. 그때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슬이 진짜 이슬이 아니고 태양이 진짜 태양이 아니에요."

걱정이 되어 이곳까지 올라온 이니야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곁에 앉았다. 레펜하르트가 투덜거렸다.

"저도 비유라는 것쯤은 압니다. 대체 뭘 비유하는 건질 몰라서 그렇지."

"그러니까...."

뭔가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던 이니야가 포기하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죄송해요. 이 이상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네요."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니야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소릴 하는군요."

사부뿐 아니라 러스며 타시드에게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 그냥 이슬 같은 오러를 태양 같은 오러에 던져서 불 끄라고! 그게 왜 이해가 안 돼?"

"이슬은 이슬이잖아요. 태양은 태양이고. 그러니까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은 저게 가능하단 소린데...."

"난 은인이 뭘 모르겠다는 건지조차 모르겠소. 그냥 시키는 대로 했더니 된 거유."

애당초 초대 권왕도 후계자 괴롭히려고 저리 두루뭉술하게 적은 게 아니다. 무학 이론이란 게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억지로 옮긴 것이다 보니, 태생적으로 명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발켄슈트 딴에는 최대한 직설적으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표현을 고른다고 고른 게 저거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말로 설명하려니 비슷한 소리밖에 안 나온다. 이니야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냥 태양을 이슬로 식히는 느낌으로 오러를 운용하란 소린데...."

대체 이 쉬운 걸 왜 이해 못 하는지 모르겠다. 이니야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휴, 하여튼 이놈의 무술이란 건 왜 이렇게 명확하지 않나 몰라? 마법처럼 착착 이론화, 수치화되면 좀 좋아?"

투덜거리는 그를 보며 문득 이니야가 물었다.

"마법은 감각적인 부분이 없나요?"

"네?"

"마법은 확실하게 모든 게 수치화, 계량화 되어 있나 보네요?"

이니야 딴에는 순수한, 마법에 대해 잘 모르기에 묻는 순수한 질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변했다.

'아, 그런가?'

마법은 무술과 다르게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명확히 설명이 되는가?

"확실히 그건 아니지...."

마법 역시 감각적인 측면이 크게 중시된다. 경지에 오를수록 수치와 술식 못지않게 마력 흐름 등에서 느낌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고도의 마학 이론은 사실 무술 이론과 그리 다를 게 없다. 무학 못지않게 고도의 비유와 은유가 총 동원되는 것이 마법이다.

레펜하르트도 그 비유와 은유를 이해하고 느끼며 마법적 기량을 키워 왔다.

'그래, 생각해 보면 마법도 그리 다를 건 없었어.'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곁에 이니야가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정신없이 빙벽의 글귀를 노려본다.

'아... 뭔가 얻으셨나?'

뭔가 가닥을 잡은 눈치라 이니야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 없이 동굴 밖으로 향했다. 중요한 순간이니 방해할 수 없었다.

대신 말없이 응원을 날렸다.

'그럼 힘내세요, 레펜하르트 님!'

☆ ☆ ☆

하루가 더 지났다.

여전히 레펜하르트는 빙벽 앞에 앉아 있었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네.'

이니야가 던진 한 마디로 느낌은 분명 왔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질 만큼 절실히 오진 않았다. 잡힐 듯 말 듯하면서도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뛰어논다. 이래서야 지난 사흘 내내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그래도 전혀 건진 게 없진 않아 다행이군.'

빙벽엔 캘러미티 혼 9중첩 말고도, 1중첩에서 8중첩까지의 무리 또한 총괄적으로 적혀 있었다. 대부분 룬어로 적어 놔 역대 권왕들은 무리였겠지만 그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초대 권왕의 캘러미티 혼은 그가 배운 것과 달랐다. 스파이럴 가드나 기격탄, 스트레이트 캐논 등과 달리 오리지널 캘러미티 혼은 처음부터 마법과 오러가 융합해 발동되는 기술이었다.

오히려 레펜하르트의 아케인 캘러미티 혼 쪽이 오리지널에 가까웠던 것이다.

"확실히 오러 고리 중첩이나 파괴력 증가 방식이 마력 집적술이나 마법 융합술과 비슷하긴 했지?"

이것이 순수한 오러 스킬로 변한 건 2대 권왕 때의 일이었다.

2대 권왕 칼브레인은 마법적 재능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초대 권왕의 기술 중 오러에 해당하는 부분은 완전히 터득했으되, 마법은 1서클도 익히지 못했다. 발켄슈트도 안타까워했던 일이었다.

'캘러미티 혼만은 마력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이니 칼브레인, 네겐 무리겠구나.'

그러나 칼브레인은 굴복하지 않았다.

'길이 다르다 해도 목적지가 같다면 도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작정하고 자신의 전공만 파고들었다. 근성과 독기로 수행에 매진, 또 매진하며 마법과 융합해야 가능하던 캘러미티 혼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마침내 순수 오러만으로 이루어진 무자비한 재앙의 뿔이 세상에 재구현되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심지어 오리지널보다도 더 뛰어났다. 9중첩의 경지엔 들지 못하되, 8중첩까지는 칼브레인의 캘러미티 혼이 초대 권왕을 능가해 버렸다!

'역시 짐 언브레이커블은 독한 인간들이야.'

감탄하면서 레펜하르트는 오리지널 캘러미티 혼의 운용을 유심히 살폈다.

발켄슈트가 남긴 마법 쪽은 솔직히 별 볼 일 없었다.

발켄슈트의 술식은 오직 캘러미티 혼을 발동할 때만 마력과 오러를 융합시킬 수 있다. 그에 비해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은 훨씬 보편적이고 범용적이라 어떤 오러 스킬, 어떤 마법이건 전부 융합이 가능하다. 권마합신에 비하면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오러 운용 쪽은 달랐다.

순수한 오러 스킬인 현재의 캘러미티 혼에 비해, 발켄슈트의 캘러미티 혼은 마법과의 융합을 염두에 둔 오러 운용법에 바탕을 둔다. 융합 효율 면에서 몇 배나 더 뛰어나고 심오한 수법이다.

당연히 이 역시 결코 쉽진 않았지만, 몇 번이나 보고 보다 보니 레펜하르트도 제법 이해할 수 있었다.

'캘러미티 혼의 위력이 상당히 올라가겠어.'

분명 위력 자체는 현 캘러미티 혼이 오리지널보다 강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발켄슈트는 세이어를 상대하기 위해 캘러미티 혼을 만들었다. 순수하게 마력을 부수는데 특화되어 있었달까? 적어도 세이어 상대론 이쪽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도 역시 9중첩을 얻지 못하면 세이어를 상대하긴 힘든데.'

그렇게 한참 동안 빙벽을 보던 중이었다. 제라드가 동굴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제자야?"

"죄송합니다, 사부.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해석이 되질 않는군요."

송구스러워하는 제자를 보며 제라드는 인상을 썼다.

'너무 똑똑해도 문제로구나.'

고민? 해석? 저런 소릴 하는 것부터 이미 텄다. 무의 오의는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 머리로 해독하는 게 아니다.

"쯧쯧, 네 녀석은 너무 생각이 많아."

오랜만에 사부의 자세가 되어 제라드가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자야."

"예, 사부."

미몽에 헤매는 제자를 위해 위대한 가르침을 내린다.

"사람이 사람 패는 데 생각은 필요가 없느니라."

"...."

레펜하르트는 침묵했다. 가끔,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위대해서 듣기만 해도 말문이 턱 막힌다.

"대체 싸움에 임해서 생각이 왜 필요하냐? 머리는 박치기 하라고 있는 거지 잡생각 떠올리라고 있는 게 아니다!"

기가 막혀 레펜하르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뭐로 받아들인 건지 제라드가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사부 노릇 제대로 했다고 흐뭇해하며 발길을 돌린다.

"그럼 난 이만 나가 보마, 제자야."

이후 레펜하르트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갑자기 그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순간 이니야가 동굴 안으로 뛰어들며 놀라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

걱정도 되고 방해하기도 싫던 그녀는 계속 레펜하르트가 머무는 얼음 동굴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지극 정성이었다.

"...괜찮으신가요?"

안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레펜하르트가 이니야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아!"

기뻐하며 그녀가 물었다.

"9중첩에 도달하신 건가요?"

"아니요!"

대답 한번 당당하기도 하다. 이니야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네?"

계속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저는 때려죽여도 짐 언브레이커블을 이해 못 한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의 두 주먹에서 황금빛 오러가 서서히 흘러나온다. 그걸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래, 확실히 알았다.

자신은 저걸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머리는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박치기용이라는 소릴 자랑스레 해 대는 인간들이 남긴 걸 뭔 수로 이해하라고?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폈다. 황금빛 오러가 흩어지며 사그라진다. 펼친 손바닥 위로 보랏빛 영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방법을 바꿀 겁니다."

2대 권왕, 칼브레인은 말했다.

길이 다르다고 도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사부도 말했다.

선인이 남겨 준 길만을 걸어서야 어찌 진정한 무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빙벽에 새겨진 무학 이론 따위 뇌리에서 싹 지웠다. 가슴 한구석을 맴돌고 있던 흐릿한 느낌도 싹 버렸다.

"사람은 모름지기...."

흐흐 웃는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이 시대 사람들은 미처 모르겠지만....

"자기가 잘하는 걸 해야 하는 법이지."

전생에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던 전설적인 마법사가 마법을 연구할 때 보이던 눈빛이었다.

"무학 따위 때려치운다! 이슬이고 태양이고 알 바 아냐! 부족한 건 죄다 마법으로 때워 버리겠어!"

고금 제일, 사상 최강.

신조차도 경악한 인류 최고의 지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74장 Silence &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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