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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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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법 없이 사는 놈들 ⓐ아낙필

나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나를 용서 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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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ㅂㅇㄹㄴㄷㅈㅇ

-------------------

1화 사면

* * *

칼슨 노동교화소의 아침은 확성기를 통해 퍼져나가는 나팔 소리로 시작된다.

사형선고처럼 낮게 깔린 음울한 음색이 카이루스를 깨운다.

"전원, 현 시간부로! 기상! 일어나라, 이 새끼들아! 각 죄수동의 동장은 인원보고 준비!"

살얼음이 엉겨붙은 감옥 복도에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저 쌍놈의 교도관은 애비가 분명히 수탉일 거다."

카이루스와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죄수 중 하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꿍시렁거린다.

그 사이, 카이루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적아, 몇 도냐?"

방장이 카이루스를 향해 외쳤다.

역적.

이 쓰레기통 안의 범법자들이 카이루스를 부르는 별명이다.

카이루스는 자신의 눈썹에 허옇게 엉겨붙은 서리를 털어내며 철창 밖에 걸려있는 온도계를 체크했다.

"영하 27도, 오늘도 상쾌한 하루입니다. 잠이 확 깨는데요."

"씨이펄. 27도? 눈깔의 먹물까지 땡땡 얼어붙겠구만!"

죄수들이 한탄 소리가 합창처럼 울려퍼진다. 한숨과 함께 죄수들은 연신 하얗게 얼어붙은 입김을 토해낸다.

숨 쉬다가 폐 속에 서리가 껴도 신기할 게 없는 지독한 날씨다. 죄수 중 하나가 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근처에 누워 있는 녀석을 본다.

"뭐야. 이 새끼 왜 안 일어나. 야!"

다들 연신 몸을 덥혀보기 위해 코와 입으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손을 싹싹 비비고 있는데, 쓰러져 있는 녀석의 코와 입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뻑,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쎄게 뒤통수를 맞았지만 누워있는 녀석은 일어날 기미가 없다.

"뒈졌구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칼슨 노동교화소가 위치한 지역은 여름에도 0도 이상 올라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극한의 오지다. 그리고 지금은 한겨울이다.

극한의 기후에 대충 지은 수감실을 추가하고 빈약한 식사를 곁들이면, 어제까지 살아있던 죄수가 오늘 아침 동태로 둔갑하는 신기한 마술이 벌어진다.

"3번방, 보고."

"한 명 얼어죽었습니다. 나머지는 아직입니다."

방장의 말에 죄수동을 관리하는 동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시체를 확인하고 혀를 찬다.

"니미럴."

다른 교화소와 달리, 칼슨 노동교화소의 죄수동을 관리하는 건 교도관이 아니라 같은 죄수들 중 하나다.

칼슨 노동교화소 교도관들이 임무는 죄수들의 탈옥을 막고 주기적으로 순찰하는 것뿐이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다.

"아침 먹으러 가면서 치워둬라."

"알겠습니다."

방 안을 확인하고 나가려던 동장이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아, 그리고 역적아. 오늘 내가 편지 한 장 쓸까 하는데."

"알겠습니다."

카이루스가 동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 노동교화소의 죄수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예외였다.

그는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다.

"집으로 보내시는 겁니까? 일과 끝나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래. 거 얼마였더라?"

"200자에 담배 3대인데, 형님이 부탁하신 일이니 2대로 족합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카이루스가 6년 동안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뭐야. 새끼, 너 글도 쓸 줄 아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중 하나가 놀랍다는 듯이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이틀 전에 새로 들어온 죄수다.

술 먹고 싸우다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인 놈이다.

사실, 그 정도 범죄로는 칼슨 노동교화소에 오지 않는다. 이후 그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던 노파까지 죽여서 온 거다.

"어디서 배운 거냐, 귀족이라도 한 명 후린 건가?"

카이루스는 다소 불쾌할 수 있는 상대의 태도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족 도련님이었지. 지금은 역적죄인이지만."

대답을 듣고 나자, 말을 건 상대가 더욱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별명이 아니라 진짜 역적이었냐?"

가문의 반역모의가 들통 나면서, 카이루스를 제외한 가문의 직계는 모조리 사형이 집행되었다.

"반역죄라면 즉각 사형이잖아. 넌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재수가 좋았지."

당시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기에 반란 모의에 동참할 수 없었다는 점.

17살의 미성년이라는 점.

이 두 가지가 참작되어 카이루스는 사형 대신 칼슨 노동교화소에서의 종신형을 선고받는 데에 그쳤다.

계속 말을 걸던 녀석이 슬금슬금 카이루스에게 다가가며 히죽거린다.

"그렇다 이거지. 어쨌든, 그럼 나도 편지 한 통만 써주라."

카이루스가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은 이미 들었지?"

200자에 담배 3대. 혹은 거기에 준하는 물건. 카이루스의 말에 녀석이 히죽거리던 얼굴을 구겼다.

"가격? 이런 씹새를 봤나. 좋게 말로 하니까 내가 좆으로 보이냐?"

녀석이 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은 다음 카이루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아침부터 기분 잡치네. 뒈지고 싶냐? 칼 맞고 돼지처럼 꽥꽥거리고 싶…."

불쌍하게도 녀석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이루스가 집어 든 벽돌조각이 그대로 녀석의 입에 쑤셔박혔다.

순식간에 그의 입 안이 피투성이가 되고, 강제로 욱여넣은 돌덩이로 인해 이빨 몇 개가 부러져 바닥을 때린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카이루스는 그저 묵묵히, 입 안에 돌이 쑤셔넣어진 녀석의 머리를 사정없이 주먹으로 두들겨 팰 뿐이다.

죄수들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면 안 되고, 다른 죄수들에게 얕보이면 안 된다.

카이루스는 그 두 가지 원칙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6년을 보냈다.

"꺼… 으…."

강판에 갈린 감자 꼴이 된 상대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카이루스가 녀석과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난 너처럼 죽고 싶냐고 안 물어봐. 뒈질 놈 대답을 들어서 뭐해. 그렇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가 손에 쥔 상대의 머리통이 단단하고 차가운 돌바닥을 강타한다.

그 모습을 보던 죄수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고.'

저 머저리는 하필이면 건드려도 왜 카이루스를 건드린 걸까.

"저 미친 새끼."

카이루스는 3번 죄수동을 넘어, 이 칼슨 노동교화소 전체를 통틀어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별종이다.

건드리지 않으면 굉장히 얌전하다. 다만, 누가 건드려서 눈이 돌아버리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카이루스는 그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독방을 세 번이나 갔다.

세 번이나.

한 번만 가도 반병신이 되어서 돌아오기 십상인 그 지옥 같은 독방을 카이루스는 무려 세 번이나 버텼다.

칼슨 노동교화소의 독방은 한 번 다녀오면 불침 맞은 야생마처럼 날뛰던 녀석도 거세당한 수탉처럼 얌전해지는데, 저 미친놈은 여전히 성격이 저따위다.

"야야, 역적아. 고만해라. 밥 먹기 전에 시체를 두 개나 치우면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가 털려."

결국, 그 꼴을 보던 방장이 카이루스를 말렸다. 카이루스가 손으로 붙잡고 있던 상대의 머리채를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밥도 그 망할 놈의 이끼잖아요."

겨울이 찾아오면 칼슨 노동교화소에서는 식용 이끼를 가지고 죽을 쑤어서 죄수들에게 식사로 제공한다. 카이루스가 쓰러진 녀석의 얼굴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야, 너 빵 온 지 얼마 안 지났지. 밖에서 처먹고 찌워놓은 비계가 제법 있을 텐데. 좆 같은 이끼 대신 니 뱃살이나 구워먹을까?"

바닥에 엎드린 채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녀석이 카이루스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떤다.

"졸도할까봐 농담도 못 치겠네."

카이루스는 녀석의 정수리에 가래침을 뱉었다.

"같은 방 쓰는 사람끼리 얼굴 붉히지 말자고. 예의와 존중 속에 친절이 싹트는 거야."

그렇게, 평상시와 같은 아침이 약간의 소란 끝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쓰레기 같은 밥을 먹고, 하루 종일 할당된 일과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얼어죽지 않고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하루하루.

죄지은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처벌의 나날.

가문의 반역죄는 카이루스 자신의 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카이루스는 이 가혹한 생활이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었다.

"전부 대가리 박아 이 새끼들아!"

하지만 갑작스러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6년 동안 계속되어왔던 매일의 일과에 변화가 생겼다.

"뭐, 뭐야 갑자기!?"

곧바로 방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런 썅할, 교도관 새끼들이잖아."

"죄수동 수색은 일주일 전에 했을 텐데. 그 지랄염병을 또 하는 거야?"

"븅신아. 그럴 리가 있냐."

정기적인 방문이 아니다. 교도관은 노동교화소 안에 들어오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죄수동에 교도관들이 진입한다. 죄수들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고 기도를 시작했다.

카이루스가 쓰는 방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방 안의 모든 죄수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뭔진 몰라도, 자기들이 머무르는 방 안에 교도관들이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카이루스가 누구지?"

그 목소리에, 카이루스는 여전히 바닥에 납작 붙은 채 대답했다.

"접니다."

"일어나 예를 갖춰라. 전능하고 영명하신 제국의 영도자이자, 하나뿐인 태양께서 내리시는 교서다."

황제의 교서?

6년 동안이나 쓸 일이 없었던 예의범절이 갑작스레 쓰일 곳이 생겼다.

카이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카이루스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교도관이 아니라 정복을 갖춰 입은 기사였다.

'황제폐하께서 마음을 바꿔먹어, 종신형이 아니라 그냥 나를 죽여버리기로 결정하셨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역죄인에게 걸맞은 최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카이루스는 엄숙한 목소리로 필요한 예의를 갖췄다.

"말씀을 모시기에 부족하고 죄 많은 몸이오나, 감히 태양의 목소리를 영접합니다."

"추가적인 조사 과정에서 네 가문의 반역죄는 무혐의로 밝혀졌다."

그 말을 들은 카이루스가 순간 예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운 채 머리를 들어올릴 뻔했다.

잠깐만.

'무혐의? 무혐의? 지금, 무혐의라고 한 거야?!'

누가 머리통에 용암이라도 쏟아넣은 것처럼 카이루스의 뇌 속이 분노로 바글바글 끓는다.

'그럼 내가 여기에서 보낸 6년의 세월은 뭐고, 가문의 사람들은 왜 다 죽어야 했는데.'

카이루스는 정말로 자신의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감수하고 교화소에서 썩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카이루스에게는 가족은커녕 친척조차 없다. 다 죽었다. 그리고 이 거지 같은 곳에서 6년의 세월을 날려먹었다.

"너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할 말? 카이루스의 입에서 불덩이와 같은 쌍욕들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다른 선택을 했다.

"전능하고 영명하신 제국의 영도자이자, 하나뿐인 태양께서 지금이라도 가문의 충심을 이해해주셨다는 점에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느낍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를 나가야 한다. 당장 중요한 건 그거다. 나가야 한다. 무조건 나갈 거다.

카이루스는 수도 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현 시간부로 너의 종신형을 취하한다. 허나 반역 모의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가 황제 폐하의 신임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카이루스는 저 말을 들으면서 참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황제가 페더윙 가문을 믿지 못한 이유가, 우리가 충분한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가?

'개똥지빠귀 옆구리 터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카이루스는 일단 침묵한 채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더 씨부려봐라.

"너는 비록 이전까지 누려왔던 것들을 돌려받지는 못하지만 자유라는 은혜를 받았다. 이에 감사, 또 감사함이 마땅하리."

카이루스의 종신형은 취하되고,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까지 그의 가문이 누려왔던 것들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다.

하다못해 신분조차도.

지금 이 시점부터 카이루스는 평민이다.

"다시 한번 자랑스러운 발로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바로 나갈 채비를 해라."

그의 말에 카이루스가 대답했다.

"하루의 말미를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는?"

카이루스가 고개를 들어 갑옷 입은 기사를 보며 말했다.

"일과가 끝난 다음, 이 죄수동의 동장에게 해주기로 약속한 일이 있습니다."

편지를 대신 써주기로 했다. 카이루스의 말에 기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갈 수 있는데, 고작 그딴 약속 때문에 하루 늦게 나가겠다는 거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2화 사면 (2)

* * *

잠깐 고민하던 기사가 이내 말했다.

"네놈의 약속 따위에 하루를 지체할 수는 없다. 그 동장이라는 놈을 불러서 지금 편지를 써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허락을 받은 다음, 카이루스와 방장은 단둘이 죄수실에 남게 되었다. 카이루스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방장이 말을 하면, 카이루스가 똥색의 재활용 종이에 타고 남은 재를 물에 개서 만든 잉크 비슷한 걸로 받아적는다.

"다 말씀하셨습니까?"

카이루스의 질문에 방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 4개피를 내밀었다.

당장 출소가 코 앞이긴 하지만, 카이루스는 자신이 한 노동의 대가를 거절하지 않고 챙겼다.

편지를 쓰는 일을 마치고 나자, 약간 시간이 남았다.

"나가면, 갈 곳은 있냐?"

"그럼요. 칼슨 노동교화소 밖이죠."

갈 곳이 있을 리가 없다. 가족도 다 죽었고 가문의 재산은 이미 다 걸신들린 다른 가문 놈들이 갈라먹었을 테니까.

황제가 자신의 교서로 말한 것처럼, 카이루스에게 약속된 것은 자유뿐이다.

그것도 오해로 인해 앗아갔던 것을 단지 돌려주는 거다. 약간의 여비는 제공되겠지만, 말 그대로 여비일 뿐이다.

카이루스의 말에 방장이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으며 말했다.

"베넷 시로 가보는 건 어떠냐."

카이루스가 방장을 바라보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다 마침내 대답했다.

"세상에, 제 얼굴이 벌써 그리우신 겁니까? 아직 감방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다시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지랄한다. 니 면상 다시 봐서 어디에 쓰겠다고. 똥 닦는 휴지로도 못 써."

베넷 시. 발로른 제국 서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유명한 곳이다. 카이루스가 그곳으로 대필해준 편지만 수십 통이 넘는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식당도 안전을 위해 경비를 고용하는 무법도시라고 들었다.

심지어 이 노동교화소에서 출신을 따질 때도 베넷 시에서 왔다고 말하면 그놈을 건드리는 녀석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악명 높다.

"돈 되는 일은 다 하고, 돈이 안 되는 일은 돈이 되게 만드는 곳이라고 하던데."

"예전에 친하던 놈 하나가 식당을 열었다고 하더라. 그게 3년 전이었나? 네 덕분에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되었지."

방장이 툭, 하고 손에 든 담배를 털어 재를 바닥에 떨군 다음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내 이름 대면 종업원 자리 하나는 내줄 거다. 그 자식, 요리 하나는 잘했으니 가게가 망하지는 않았을 거야."

"이 구질구질한 곳에서 일자리 소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일단,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방장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시끄러 임마. 나도 한 10년 살면 빵에서 나갈 거야. 그때 가서 나보고 쌩까지나 마라."

"베넷 시에서 10년이라. 저같이 순한 사람이 거기서 10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랄. 마호가니 공원 47번지에 위치한 롱웨이브 비스트로다. 생각 있으면 가서 토미가 보냈다고 말해. 주인놈이 뭐라고 염병하면 구름등대, 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방장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꺼져. 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한다, 역적새끼. 아, 이제 아니구나. 역적인 줄 알았던 새끼."

축하라. 카이루스는 방장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죄수실을 나갔다.

죄수실을 나가자마자 카이루스의 표정은 얼음처럼 변했다.

몰살당한 가문과 날려먹은 6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가문의 모든 재산과 권리.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건?

고작 일신의 자유.

"황제가 생각보다 멍청한 건가."

카이루스가 황제의 입장이었다면, 자신을 절대로 풀어주지 않았을 거다. 아니면 고작 한 명 풀어준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라는 안일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나.'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 그가 자유라는 점이다. 카이루스는 얼어붙은 공기가 가득한 죄수실 복도를 걸어 밖으로 나갔다.

"여비다."

새로운 신분증이 주어졌다. 가문의 이름이나 인장, 장식 따위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카이루스라는 이름만 남아있는 초라한 신분증이다.

신분증과 함께 지폐 몇 장이 카이루스에게 쥐여졌다. 다 합쳐서 150파인트다.

50파인트로 밀 한 포대를 살 수 있다. 이 교환비율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발로른 제국의 화폐인 파인트는 밀과 그 가치가 연동되어 있으니까.

즉, 6년 동안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감방살이를 한 대가는 밀 세 포대라는 뜻이다.

그 사실이 카이루스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들었다.

"차량 짐칸에 타라. 너는 칼슨 노동 교화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이송된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카이루스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차를 타고 3일 정도 걸리는 거리다."

"혹시 마을에 기차역도 있습니까?"

"없다."

기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휙 하고 가버렸다. 카이루스는 기사의 말을 곱씹고는 혀를 찼다.

"이러니 탈옥을 시도해도 의미가 없지."

차를 타고 3일을 가야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 할 수 있다면, 도보로 이동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도망치다 지쳐 죽을 거리고, 심지어 방향을 약간만 틀어도 마을에는 도착할 수 없다.

카이루스는 얌전히 짐칸에 탔다. 탑승자를 위한 배려 같은 건 쥐뿔도 없는 공간이었다.

엔진이 덜덜거리는 소리가 잠시 울리더니, 이내 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짐칸 안에서 카이루스는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나으리, 아뢰옵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식사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참을 이동하다 저녁이 되자, 자동차를 몰던 운전사가 조심스럽게 기사에게 말했다.

"너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기사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이 시기에는 늑대 녀석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난폭해집니다. 놈들이 음식 냄새를 맡으면…."

마부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를 위해 준비 중인 식사를 바라본다. 고기를 구울 생각인 모양이다.

"이런 망할 놈이. 내가 고작 늑대 따위가 두려워 식사도 제대로 못 해야 한다, 뭐 그런 말이냐?"

고작 늑대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사의 실력이 뛰어난지 카이루스는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고작 죄수 후송 따위를 위해 폐 속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를 자랑하는 산간벽지에 올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 '고작' 늑대라는 것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카이루스도 알고 있다. 이 계절 즈음에는 칼슨 노동교화소 근처에도 기웃거리곤 한다.

이 지역의 늑대들은 다른 지역의 늑대들보다 훨씬 크고 사납다. 다른 지역의 늑대들이 이 지역의 늑대들을 마주치면 순식간에 개껌처럼 씹힐 거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운전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짧은 생각 따위로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기사는 카이루스의 제안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보통 저러면 단명하던데 말이야. 카이루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괜히 성질 긁어봤자 두들겨 맞거나 욕만 들을 게 뻔하다.

"나으리께서는 이 일대의 늑대들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하지만 먼저 말을 꺼냈던 운전사는 제법 고집이 쎈 모양이다. 당연히, 우리의 자존심 강한 기사께서는 운전사에게 그 고집에 대응하는 포상을 내렸다.

사랑의 매, 계도의 손길이라고도 불리는 포상이었다. 혹자는 죽빵이라고도 한다.

그의 얼굴에는 용감한 조언에 대한 훈장으로 멍이 하나 생겼다. 운전사는 자신이 받은 포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냄새는 진짜 기깔나네."

카이루스는 자기 몫으로 놓인 귀리죽과 기사가 뜯고 있는 스테이크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식탁까지 써가면서 쇠고기를 뜯고 있는 기사와, 눈이 쌓인 땅바닥을 피해 대충 쪼그려 앉아 귀리죽과 감자를 먹는 카이루스.

참으로 명확한 신분의 차이를 알려준다. 6년 전이라면 입장이 전혀 반대였겠지.

그런 생각을 한 건 카이루스뿐이 아니었다. 구워진 스테이크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기사는 카이루스를 슥 보며 굉장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사이, 카이루스에 대한 서류를 살펴보던 기사는 카이루스가 원래 어느 가문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페더윙이라고?"

카이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이 기사는 카이루스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었을 거다.

페더윙 가문. 약 300년간 황실 기사단장 2명에 제국군 사령관 7명, 제국검 8명과 제국 아카데미 군사학부장 3명을 배출한 가문.

제국 최강자 10명이 누릴 수 있는 칭호인 제국검이라는 호칭을 페더윙 가문의 가주가 놓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참 세상일은 모른다니까."

그 귀하신 가문 도련님께서 지금은 동물 사료를 끓인 죽 같은 걸 좋다고 퍼먹고 있다니.

페더윙 가문의 직계이자 마지막 생존자가 자신에게 존대를 하며 아랫것들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이 이 기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예 가문의 상징조차 잃어버렸다지?"

기사의 말에 카이루스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소리인지 혹시 자세히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카이루스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한 시선 아래에는 뭔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들끓고 있다.

순간 그 시선에 움찔한 기사가 이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누가 훔쳐갔겠지."

카이루스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카이루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식사를 하며 방금 전 저 기사가 한 말을 곱씹었다.

'없어졌다고? 가문의 상징이?'

사실 카이루스는 방장이 소개해줬다고 해도 굳이 베넷 시로 갈 생각은 없었다. 감방에서 나오자마자, 감방 가기 딱 좋은 도시로 향하는 바보는 아니니까.

하지만, 가문의 상징이 사라졌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저 자식의 말대로 누군가 훔친 거라면, 정상적인 경로로는 못 팔아.'

밀수밀매를 하는 장물아비들을 통해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어지간한 규모로 장사를 하는 범죄자들은 페더윙 가문의 상징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베넷 시라면. 페더윙 가문의 상징조차 취급할 수 있는 거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하다못해 유용한 정보라도 확보할 수 있을 거다.

카이루스가 베넷 시로 가기로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보소. 좀 비켜주게."

그때, 멍이 생긴 운전사는 대충 주변의 눈을 한 움큼 쥐어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카이루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옆에 앉아서 먹어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카이루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칼슨 노동교화소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니니까.

흉악범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은 거다. 카이루스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준 다음, 구석진 곳에서 식사를 대충 이어갔다.

갑작스럽게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거리가 꽤나 가깝다.

"겸상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하기사, 고기 굽는 냄새를 그렇게 사방팔방에 질질 뿌렸는데, 밥상머리에 대가리를 들이밀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카이루스는 재빨리 귀리죽과 감자를 삼킨 다음, 물 한 모금으로 입을 가글했다.

"젠장, 뭐야!"

기사가 재빠르게 검을 뽑아들고 주변을 살핀다. 사실 어둠 속이어서 제대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개짓거리다.

카이루스는 오히려 기사가 검을 쥐고 있는 자세를 보고 경탄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에, 저게 기사? 그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도대체 뭐였지.'

검을 쥔 손은 물론이고 무게중심이나 다리의 위치, 호흡과 시선… 하나하나 다 지적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정육점에서 고기 각 뜨는 사람들이 저 기사보다 검을 더 능숙하게 다룰 거다.

저런 실력으로 늑대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두루미 앞에서 깝치는 조개와 다를 게 없다.

"이런 망할, 무슨 놈의 숫자가!"

기사가 등유램프에 불을 붙이자, 마침내 굶주림에 번뜩이는 맹수의 모습이 드러난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의 크기는 엄청났다. 기사가 양손으로 꽉 거머쥐고 있는 검이 마치 이쑤시개로 보일 지경이다.

3화 사면 (3)

* * *

카이루스는 별다른 말 없이 기사와 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가 구운 고기로 인해 초청된 손님들이다. 당연히 손님맞이는 초대장을 돌린 사람이 하는 게 예의인 법이다. 하지만….

"운전사 양반."

카이루스가 근처에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운전사에게 말을 걸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말을 걸고 지랄이야?"

"내가 저것들을 다 썰어버리면 기차역이 있는 마을까지 데려가 줄 수 있나?"

카이루스의 질문에 운전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뭔 개똥같은 소리야! 기사님이 저기 저렇게 당당하게 서 계신데!"

당당이라. 카이루스가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교화소에 있던 사이 당당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바뀐 모양이지."

저 기사에게는 기저귀가 필요해 보이는데. 운전사가 말한 용기가 바지에 지려버릴 용기였던 걸까.

물론 기사 입장에서도 억울한 점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기껏 돈을 때려박아 수습기사 자리를 샀더니 이딴 일에 동원되었고, 결국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늑대들의 간식거리가 될 운명이었으니까.

사실 이 모든 사태는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기를 구운 자신의 잘못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회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자라면 돈 주고 견습기사 자리를 사지도 않았을 거다.

"으… 으으…!"

마침내, 공포가 기사의 체면을 넘어서게 되었다. 곧바로 기사는 손에 쥔 무거운 검을 버리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멍청이."

카이루스가 그 꼴을 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고픈 맹수 앞에서 뒤돌아서 도망친다고?

'오늘 밤 네 야식!' 이라는 팻말을 등짝에 걸고 흔드는 행위다.

기사가 뒤를 돌자마자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구슬픈 비명소리와 함께 늑대들의 이빨과 손톱이 기사의 정복을 찢어발긴다.

늑대들 입장에서는 근사하게 포장된 선물을 뜯는 기분일 거다.

"자, 당당하게 서 계시던 기사 나으리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는데."

카이루스가 운전사를 보며 말했다.

"늑대 친구들의 만찬에 나올 다음 코스 메뉴가 될 생각인가? 그냥 나를 가장 가까운 기차역까지 데려다주는 게 어떨까 싶은데. 목숨값치고는 싸잖아."

카이루스의 말에 운전사가 그를 바라봤다. 이제 막 교화소에서 나온 죄수 따위가 저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것 같은 늑대들을 상대한다고?

더 이상 의문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젠장, 젠장맞을. 뭐라도 해봐! 이 상황만 벗어날 수 있으면 기차역이 아니라 씨팔놈의 국경 너머까지도 가줄 테니!"

"아니, 기차역에나 데려다줘."

카이루스는 기사가 바닥에 버린 검을 주워들었다.

"꼴에 기사라고, 배틀기어는 있네."

검 형태의 배틀기어, 카이루스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다.

검을 이리저리 살피던 카이루스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전형적인 군용 보급품이잖아."

검을 쥐자, 달군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카이루스의 팔을 타고 퍼진다.

이후, 몸속에서 짧게 철컥, 하는 격철음이 울려퍼졌다. 손에 쥔 배틀기어가 카이루스의 몸에 맞게 최적화를 끝냈다는 신호다.

"간만이다."

카이루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뼈마디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난다.

쥐고 있는 검을 움직이자, 바닥에 쌓여있던 함박눈이 칼날의 움직임에 딸려 올라가며 허공에서 나풀거린다.

죽은 기사의 시체를 찢어발기고, 살점으로 배를 채우고 흐르는 더운 피로 목을 축이던 늑대들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늑대들도 카이루스가 쥐고 있는 날붙이가 위험하다는 건 반복된 학습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어째야 하나."

검을 쥔 카이루스는 막막함을 느꼈다. 코앞에서 누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늑대들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서 막막한 거다.

"스승이 되어 줄 가문의 어르신도 없고… 비전서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상징은 사라졌고."

카이루스는 지나치게 젊다. 가문의 검술을 완성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데, 길잡이는 다 죽었고 지도는 소실된 상황이다.

"이봐, 뭐 하고 있어?!"

카이루스가 한탄 속에 가만히 서 있자, 뒤에 숨어있던 운전사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하지만 운전사의 외침이 자극한 것은 카이루스가 아니라 그를 마주하고 있던 늑대들이었다.

늑대들 중 한 마리가 카이루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용감한 늑대로 말하자면, 방금 전에도 기사에게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늑대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 속에 시도한 습격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기분 싱숭생숭한데."

하지만 용감한 늑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반대의 결과였다.

칼의 흐름에 따라 바람이 춤추고, 춤추는 바람에 이끌린 눈송이가 덩달아 춤춘다.

칼날과 바람, 눈송이가 늑대를 휘감아 올렸다. 카이루스를 덮치기 위해 뛰어오른 늑대는 휘도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채 허공에서 난자당한다.

늑대의 몸을 난자한 수십 개의 상처에서 터져나온 피가 쌓인 눈 위로 스며든다.

"이 개새끼들은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말이야."

혼자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카이루스는 계속 칼을 휘둘렀다.

무혐의. 그 세 글자에는 곱씹을수록 카이루스를 미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제 와서 뭐?"

허공에 뜬 늑대를 휘감은 공세가 더욱 거칠어지며 늑대를 산채로 저며낸다. 이미 죽어버린 늑대의 사체는 너덜너덜해져서 제대로 된 형체도 유지하지 못한 채 바닥에 쳐박혔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운전사는 공포에 몸을 떨고 있었다.

"사람, 사람도 아니야. 세상에 맙소사."

저 모습에 경악하는 건 운전사뿐이 아니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늑대들도 같은 감정이었다.

카이루스가 산 채로 갈아버린 늑대는 이 무리의 리더다. 가장 크고, 가장 똑똑한 개체. 짐승의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대장이 저항조차 못하고 죽었다.'

절로 가랑이 사이에 꼬리가 들어가게 만드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도륙의 현장이다.

자신들의 대장이 실시간으로 허공에서 분쇄육으로 탈바꿈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다.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는 늑대는 없었다.

"어딜 가려고. 내가 국도 휴게소 화장실로 보이냐?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게."

녀석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카이루스는 나머지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위치는 이미 반전되었다.

달려드는 카이루스의 모습은 늑대들에게 있어 사신과 다름없었다.

한 마리, 한 마리. 그렇게 삽시간에 네 마리의 늑대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아."

그 순간, 도망치던 늑대 중 한 마리가 배를 까뒤집어버렸다. 도망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칼이 녀석의 목을 찌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검끝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늑대의 털 위로 똑, 하고 떨어졌다.

"…."

항복과 도망은 다른 행동이다. 최소한 카이루스에게는 그랬다.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도주를 시도한다면 상대의 도주능력과 카이루스의 추격능력을 겨루는 또 다른 싸움일 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상대의 처분에 맡겨버린다면 그건 더 이상 싸움이 아니다.

"두 번은 없다."

카이루스가 검을 움직여 녀석의 배에 작게 X 표시를 냈다. 다음에 이놈을 또 만나면 저 X 표시로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도 이번처럼 덤벼들면 그때는 죽인다.

"날도 추운데 배 그만 까고, 꺼져."

항복한 녀석에게 볼일은 없다.

카이루스는 늑대의 배를 발끝으로 툭 하고 친 다음 운전사에게 돌아가며 손에 쥔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출력이 딱 1마력이네. 이렇게 맞추는 것도 재주야."

1마력. 이 배틀기어의 출력을 전부 근력강화로 돌리면 8시간 동안 말 한 마리에 해당하는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무리해서 출력을 끌어올리면 그 두 배까지도 가능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망가지겠지.

검을 이리저리 살피던 카이루스는 검신에 새겨진 글자들을 발견하고 코웃음 쳤다.

"살천성이라. 지랄이 짜다."

기껏해야 군에서 보급해주는 양산형 배틀기어에는 과분할 정도로 화려한 이름이다.

'농조연운이라면 모를까.'

페더윙 가문의 가주가 사용하는 배틀기어이자, 가문의 상징.

이미 죽어버린 기사의 말에 따르면 페더윙의 상징인 농조연운은 행방불명이다.

"그 훌륭한 배틀기어가 사라지다니."

카이루스는 페더윙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고, 후계자도 아니었기에 만져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직계로서 구경할 기회는 있었다.

눈부시도록 훌륭한 암녹색 칼날이 인상적인 검이었다.

배틀기어의 대량생산 기술이 확립되기 이전 시대의 배틀기어다.

생산성이나 효율 같은 건 따지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갈고닦은 장인들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펼쳐가며 예산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해 빚어낸 물건들.

에인젤린의 해답, 달모래, 농조연운….

강력하고 유명한 배틀기어들은 따로 구분해 걸작이라 불린다.

"저기."

운전사가 카이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의 기차역까지. 약속은 지켜라."

카이루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당연히 지켜야지요! 최대한, 그…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운전사도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생각은 없다. 코앞에서 거대한 늑대들이 그토록 처참하게 썰리는 꼴을 봤으니까.

다시금 자동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카이루스는 아까와는 달리, 짐칸이 아니라 운전사 뒤편의 상석에 앉아있었다.

"베넷 시에 대해서 뭐 좀 알고 있는 거 없나?"

카이루스는 운전사에게 말을 걸었다.

"베넷 시 말입니까? 글쎄요… 저 같은 것들이 아는 거라고 해봤자 별게 없을 텐데요."

이젠 존댓말까지 써주네. 카이루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그래도 뭐 들은 소문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기사를 수행하던 운전사인데."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던 운전사가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범죄 말고 다른 유명한 걸 생각해보라고 하면 안타리아 대운하가 있죠."

"안타리아 대운하. 그렇지. 그게 있었지."

카이루스도 알고 있는 건축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불가사의들 중 유명한 것을 꼽으라고 하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

데르소스가 남긴 유산이다. 데르소스는 이미 350년 전에 멸망한 고대국가지만, 안타리아 대운하는 지금까지도 개보수를 해가며 계속 활용되고 있다.

"그게 그 정도로 대단한가?"

카이루스의 질문에 말에 운전사가 바로 대답했다.

"소문대로라면 고래급 군함 열 척이 나란히 진입해도 공간이 좀 남을 정도로 폭이 넓다고 합니다."

고래급 군함 열 척이 나란히 진입할 정도라는 말에 카이루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최소 폭이 200m 이상이라는 소리다.

"엄청나네."

안타리아 대운하는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감히 따라 지을 엄두를 못 내고 있다더니. 괜히 불가사의가 아니다.

"게다가 엄청 길어서 상선이 대운하를 다 빠져나가려면 한 13일 정도는 걸린다고 합니다."

말을 이어가던 운전사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내 이잉, 하는 소리를 냈다.

"근데 유명하면 뭐 합니까? 아이란 공화국 머저리들이 그 일대가 자기들 소유라고 개지랄을 떨고 있으니."

운전사는 다소 적대감이 느껴지는 어투로 계속해서 불평을 이어갔다.

"베넷 시에 멋대로 경찰청인지 뭔지 하는 건물까지 불법으로 차려놓고 땡깡을 피우고 있다고 합니다. 쌍놈의 새끼들. 남의 땅에서 뭐 하는 짓거린지."

아이란 공화국과 발로른 제국.

서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좋지 않다.

땅덩이는 발로른이 더 크다고 하지만, 국력이나 군사력은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그 와중에 둘 다 자신들이야말로 데르소스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영토 분쟁도 끊이지 않는다.

"뭐, 투표로 기간제 국왕을 뽑는 또라이들이 그 짓거리 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잖아."

카이루스는 대충 운전사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두 국가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카이루스의 관심은 페더윙 가문의 상징인 농조연운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베넷 시에서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였으니까.

농조연운은 강력한 유물 이상의 가치가 있다. 괜히 페더윙 가문의 상징이 아니다.

페더윙 가문에서 검을 배운 사람은 가주를 이기지 못한다.

'농조연운이 없으면, 페더윙의 검술은 완성되지 않는다.'

카이루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농조연운을 찾는다고 끝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으니까.

'이런 씨발. 누구한테 검을 배우지?'

스승이 없다.

4화 죄 많은 도시

* * *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카이루스의 머리를 강타한 질문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머리를 떠돌고 있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한테 배우지.

페더윙은 멸문했다. 카이루스에게 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다.

설사, 정말 재수가 좋아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어도 방계일 것이다.

그 이외에 페더윙의 검술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가문에 찾아와서 가르침을 사사받은 외부인 정도다.

'방계랑 외부인에게는 배울 게 없어.'

직계로서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슬프게도 진짜로 배울 게 없다.

방계와 외부인에게도 배움이 허락되는 페더윙의 검술인 제풍(製風)은 카이루스도 완성했다.

'빵에 들어가도 하필이면 그때 들어가서!'

카이루스가 노동교화소에 잡혀들어간 시점도 참 그지같기 짝이 없다.

말이 유학이지, 외국의 전쟁터에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끌려가서는 3년 동안 지옥을 구르며 제풍을 완성했다.

이후 카이루스는 가문으로 돌아와 섭운(攝雲)의 가르침을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섭운을 배우기도 전에 가문은 반역이라는 누명을 쓰고 씨가 말랐고,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에 쳐박혔다.

"하다못해."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서책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독학이라도 시도 할 수 있을 텐데.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더 어렵고 험한 길이겠지만 상관없다.

'아버지도 제풍은 20살에 완성했었지.'

심지어, 카이루스는 가문의 후계자인 맏형보다도 제풍을 빨리 완성했다.

스승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는 카이루스가 가지고 태어난 재능으로 비벼보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다.

"근데 씨, 아무것도 없으면 비빌 수도 없잖아. 애초에 방계나 외부인은 안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못 가르쳐주는 거고."

카이루스는 얼굴을 구긴 채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서가는 자동차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사는 백미러를 통해 그런 카이루스를 보며 경악하고 있다.

'사람도 아니야. 괴물이잖아! 무슨 놈의 사람이 5시간 동안 자동차 뒤를 따라 달려?!'

저게 사람일 할 수 있는 짓거리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달리는 자동차를 달려서 따라잡고 있는데, 몇 시간이고 뒤쳐지지 않는다. 그 꼴을 보던 운전사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저게 가능하면 자동차랑 운전사는 왜 필요한 거야?"

지금 카이루스가 저지르고 있는 폭력적인 기행을 가능케 하는 요소가, 바로 방계나 외부인이 섭운을 배우지 못하는 이유다.

페더윙 가문의 직계는 태어나자마자 시술을 통해 고유한 다섯 개의 기관을 이식한다.

[사낭, 기낭, 후조, 겹슬, 조감]

이 다섯 개의 기관들은 아이의 성장과 함께 성숙되고 완성된다.

섭운을 익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시술을 받지 못한 외부인과 방계는 섭운을 가르쳐주고 싶어도 못 가르쳐준다.

다 이식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시술 재료는 땅 파서 나오는 게 아니다. 고로 직계가 최우선이다.

어쨌든, 카이루스가 이렇게 달리는 차를 몇 시간이나 뒤쫓아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 시술을 통해 얻은 것들 중 기낭과 겹슬 덕분이다.

기낭은 조류의 호흡 방식을 적용하고 발전시킨 기관이다.

폐 및 기도와 이어진 두 개의 기낭이 생긴다. 이를 활용해 폐 속의 공기를 100% 교환하는 방식의 호흡으로 압도적인 지구력과 효율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러한 호흡계의 변화 과정에서 혈관과 심장 등 순환계 또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도록 강화된다.

거기에 더해 겹슬.

이를 통해 페더윙 가문 사람들의 무릎에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여분의 슬개골이 하나 더 만들어진다.

타조가 빠른 속도로, 오랫동안 달릴 수 있는 원리와 유사하다.

거기에 더해 새로 생긴 슬개골에 맞춰 온 몸의 인대와 연골이 강화되고, 관절액이 더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신체가 변한다.

"후우…."

땀을 한 바탕 쏟아낸 다음, 카이루스가 휙 하고 자동차로 다시 들어왔다.

"역까지는 아직 멀었나?"

카이루스의 말에 운전사가 한 번 크게 흠칫 한 다음 대답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곧 도착 할 겁니다."

운전사 입장에서도 늑대 무리를 순식간에 분쇄육으로 만들고, 달려서 자동차를 따라잡는 괴물같은 인간과 동행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조수석에 괴물이 타있으면 누구나 서두르게 된다. 고로, 운전사도 최대한 서두르는 중이었다.

얼마나 자동차가 달렸을까. 마침내 도로 너머로 도시 외곽이 보였다.

"여기가 작센입니다."

"앞으로 서로 볼일 없었으면 좋겠어. 형씨도 그렇겠지."

운전사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카이루스는 군말 없이 내렸다. 카이루스가 내리자마자 운전사는 자동차와 함께 멀어졌다.

"…."

도시 안에 공장이 얼마나 있는 건지, 공장 굴뚝에서 푹푹 솟아오르는 매연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어질어질하네."

카이루스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짝 아찔해졌다.

매캐한 공기,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포함한 온갖 도시의 소음에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다. 지난 6년 동안 본 사람의 수십 배는 되는 사람을, 이 짧은 시간 동안 보게 된 거다.

어지럽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카이루스는 어찌저찌 기차역에 도착해, 표를 파는 창구로 향했다.

"베넷 시로 가는 표 한 장."

카이루스의 말에 창구 너머에 있던 사람이 카이루스를 위아래로 훑는다.

"베넷 시로 가시는 분이면,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베넷 시로 가는 사람만 신분을 확인하는 모양이다. 카이루스는 그 말에 순순히 신분증을 내밀었다.

창구의 직원은 신분증의 사진과 카이루스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85파인트이고, 3시간 뒤에 옵니다."

"좌석이랑 기차칸은 안 말해주십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창구의 직원이 귀찮다는 듯한 어투로 대답했다.

"3등석이 무슨 좌석이랑 기차칸을 따져요? 그냥 요령껏 타세요."

그 요령껏 타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카이루스는 기차가 오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망할."

타는 데 성공하면 기차를 타고 베넷 시로 갈 수 있고, 실패하면 못 가는 거다. 그게 창구 직원이 말한 '요령껏'의 진의였다.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들어 기차 안으로 자신의 몸을 구겨넣기 위해 기를 쓴다.

민첩하고 힘 좋은 카이루스는 이 급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 기차 속에 몸을 구겨넣는 데 성공했다.

기차가 마치 커다란 통조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카이루스는 깡통 속에 쑤셔박힌 고기통조림의 기분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굴러가는 기차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를 빌었다.

불행히도 카이루스의 기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람 살려. 아니, 그냥 죽여라."

약 80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카이루스는 비로소 기차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잠도 못 자고, 먹거나 마시지도 못했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체취에 볼일이 급한 사람들이 구겨넣어진 채로 지린 대소변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잡아 뽑고 싶은 악취까지 견뎌야 했다.

"교화소 독방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이잖아."

다른 것들은 거의 다 비슷했다. 하지만 칼슨 노동교화소의 독방은 여기에 동상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추위를 첨가해야 한다.

"덕분에 이나 빈대는 없었지."

교화소의 독방은 너무 추워서 그 벌레들도 버티지 못하고 죄다 얼어 뒈진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까스로 기차에서 내린 카이루스는 강렬한 가려움을 참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차에서 벗어나 역을 벗어나려는 순간 카이루스는 새로운 방해물을 맞이하게 되었다.

보안 검색대.

"아니 무슨 놈의 줄이."

베넷 시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잔뜩 몰려있는데, 검문하는 자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들여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통과해야 한다.

하나는 발로른 제국 치안대가 운영하는 검색대고, 다른 하나는 아이란 공화국 경찰청이 운영하는 검색대다.

지독하고도 끔찍한 변비로 한 달 정도 고통받는 사람의 대장 내부가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

카이루스에게 있어 기다림은 익숙하다. 칼슨 노동교화소에서는 손톱깎이 같은 하찮은 물건조차 사용하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그건 감방 안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여유다.

아침에 일어나면 감방이고, 저녁에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뜨면 감옥이다. 오늘 손톱을 못 깎으면 내일 깎으면 된다. 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게 종신형을 받은 죄수의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농조연운도 찾아야 하고, 실전된 가문의 서책들도 수소문해야 한다. 서책을 찾는 데 성공하면, 하루라도 빨리 익혀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베넷 시로 들어가야 한다. 빠를수록 좋다.

카이루스는 6년 만에 '서둘러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는 데 성공하며,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다시금 선명하게 실감했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어 밤이 되었다. 시계를 확인한 제국 치안대원이 대기 중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금일은 여기까지다! 아직 통과하지 못한 녀석들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도록!"

그 말에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나온다.

"젠장맞을,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사람들 중 한 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병사들에게 다가간다. 카이루스는 별다른 말 없이 그걸 구경했다.

뇌물이다.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고생한 상대의 팍팍하게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품어주고 어루만져주는 마법의 윤활유라고 해야 하나.

"좋아."

치안대원은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건 말건 뇌물을 받고 그 사람을 통과시켜 주었다.

제국의 녹봉을 받는 치안대원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하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나,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가 배제된 행위였다.

저렇게 당당하게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카이루스가 머무르던 교화소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양심에 난 털을 뽑아서 머리로 옮길 수만 있다면 저 휑한 정수리를 자랑하는 병사도 즉시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검색대를 통과한 그 사람은 곧이어 공화국 경찰에게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는 3분 만에 두 국가의 통행증을 모두 얻는 데 성공했다.

"도시 꼬라지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

이미 입장절차부터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하다. 내부에 어떤 인외마경이 펼쳐져 있을까.

"이런 씨바랄! 왜 저 새끼는 그냥 통과시켜 주는 건데?!"

그리고 이 상황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항의를 받은 치안대원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꼬우면 너도 내던가."

빠른 통과를 원한다면 돈을 내야 한다. 베넷 시에서 오랜 시간 일한 치안대원에게는 상식과 같은 일이고, 오히려 이런 일로 대든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짓이냐? 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치안대가 뇌물을 이렇게 당당하게 받아 처먹어도 되는 거냐고! 이 승냥이 같은…."

계속해서 항의하던 녀석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곧바로 휘둘러진 치안대원의 제압봉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커흑!"

그 일격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한 제압 행위가 절대로 아니었다. 쓰러진 남자를 향해 연달아 발길질과 매질이 이어진다.

"새끼가 누구 앞에서 악을 바락바락 질러. 내가! 너, 같은 새끼들 편의나 봐주려고! 여기에 있는 것 같냐?! 어!"

쓰러진 남자는 계속해서 몸으로 구타를 받아내고 있었다. 고통에 찬 외침이나 신음 소리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부러진 이빨이 바닥에 뒹굴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치안대원은 남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두들겨패고 있다. 아니, 죽이려고 두들겨 패는 거다.

결국 두들겨 맞던 남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재수없게시리."

구타를 마친 병사가 바닥에 침을 뱉고 대기 중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돈 없으면 내일 다시 와라. 이상."

방금 전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치안대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숨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상냥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저리 비켜 이 새끼야! 이건 내가 먼저 잡았잖아!"

본래 남자의 소유였던 물건을 자기가 먼저 잡았으니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실신해 쓰러진 남자는 이제 거의 알몸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들은 남김없이 털렸다.

5화 죄 많은 도시 (2)

* * *

카이루스가 단순히 귀하게만 자라온 도련님들이라면 저 광경을 보고 사람들의 추레함에 얼굴을 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그러지 않았다.

'칼슨 노동교화소랑 다를 것도 없네.'

물론 카이루스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었지만, 6년간의 칼슨 노동교화소 생활은 카이루스를 귀하게 자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도련님으로 놔두지 않았다.

궁핍과 절박함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이는지, 카이루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푸세식 변기통에서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먹어 본 적도 있는데 뭘.

"그래도 팬티는 남겼구만."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얼어죽거나 맞아죽은 녀석들은 죄다 '진짜' 알몸으로 버려진다.

그래도 저 남자를 털어먹은 사람들은 아직은 남이 입던 속옷을 빼앗아 입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절박하진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뇌물이라. 카이루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굳이 저 친구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방금 전에 뇌물을 바치고 통과한 사람은 따로 통행증 같은 걸 받지는 않았다.

즉, 이 검색대만 넘어가면 몰래 지나갔건, 아니면 제대로 검사를 받고 지나갔건 상관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카이루스에게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없다.

"그냥 차단벽을 내린 걸로 끝이야?"

사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문제점? 당연히 있다.

'죽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구나.'

만약 이 안에서 불이 나면 역 안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중 벗어날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전부 불타 죽는 거다.

생명경시도 이 정도로 대놓고 하니 차라리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다.

카이루스는 주변을 살폈다. 조명이라고는 역 안을 밝히고 있는 등유 램프 정도가 전부다.

"어디 보자."

혼자 빠져나가지 말고 아예 차단벽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탈주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카이루스는 베넷 시와 역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차단벽을 슬쩍 쓰다듬었다.

다행히, 이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확신을 가진 카이루스가 천천히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배틀기어가 조금 더 성능이 뛰어났다면 차단벽 내구도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없는 후추 찾으며 불평해봤자, 눈앞의 음식만 식는 법이다.

카이루스는 어디를 노려서 어떻게 베어들어가고, 검을 박아넣은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움직여 뽑아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나갔다.

틱,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휘둘러진다.

깔끔하게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차단벽이 잘려나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크으으…."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콰직거리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가 휘두른 검이 지나간 차단벽의 일부가 문자 그대로 뜯어져 나갔다.

잘 들지 않는 칼로 고기를 썰면 저런 식으로 뜯어져 나가지 않을까?

"망할, 어쩔 수 없잖아."

카이루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에 변명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어도, 배틀기어가 그 실력에 걸맞은 출력을 내주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싸움 좀 한다 하는 녀석들은 죄다 좋은 배틀기어에 목숨을 거는 거다.

"후딱 지나가야지."

카이루스가 차단벽을 아작내는 소리는 졸고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정도였다.

"어? 뭐야. 저거 왜…."

마치 거대한 맹수가 물어뜯은 것처럼 차단벽의 한쪽이 뜯겨져 있다. 카이루스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지금이면…."

하지만 혼란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뜯어져나간 차단벽으로 몰려들었다.

이미 어지간한 경범죄는 범죄라고 생각 하지도 않는 사람들 천지다.

아침이 되면 뇌물을 바치거나 아니면 또 하루종일 기다려야 할 텐데, 그 문이 이렇게 갑자기 열려버렸다.

'지금이라면 공짜다.'

머릿속에 결론이 도출되자마자 모두가 행동으로 옮겼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저 구멍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카이루스 또한 있었다.

"마호가니 공원 47번지에 있는 롱웨이브 비스트로."

무사히 기차역을 빠져나온 카이루스는 자신이 찾아가야 하는 장소를 읊조렸다.

명문가의 자제에서 노동교화소의 죄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죄 많은 자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넷 시 식당의 종업원으로 생활하며, 농조연운의 행방을 수소문해야 한다.

인생이 파란만장하다는 건 카이루스를 보고 하는 말이겠지.

"이야."

기차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역시 카이루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원래 불법이 만연한 도시는 낮보다 밤이 더 분주한 법이라고 하던가. 카이루스는 순간 넋을 잃고 멍하니 감상에 빠졌다.

도로변에 세워진 무수한 가스등의 행렬이 연한 모과색의 빛을 알알이 뿌리고 있다.

"온갖 범죄의 온상이라고 불리는 도시 치고는 지나치게 아름다운데."

그런 감상과 함께 거리로 나온 카이루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답다고 했던 자신의 평가를 약간 바꾸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 한쪽 구석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욱하고 매캐한 연기가 대로변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춥지도 않나?"

쫙 달라붙는 손바닥만 한 검은 팬티 한 장만 입고 몸을 자랑하는 남자들과, 그에 질세라 어마어마한 옷감 면적을 자랑하는 헐벗은 여자들이 하룻밤의 즐거움을 구매할 사람을 찾아 부지런히 호객행위 중이다.

취객들과 술집의 바운서가 길바닥에서 서로 뒤엉킨 채 죽자고 싸우는 와중에, 누가 이길지 돈을 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돈이 없어? 돈이 없다고 씨부린 거냐 지금?! 뭐 이런 씹새가 다 있어?!"

바운서가 휘두른 술병이 취객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병이 박살나며 유리조각이 취객의 머리통에 마구 박혀든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등신 같은 게 기어들어와서는."

바운서가 그렇게 말하며 피투성이가 된 취객을 길바닥에 집어 던진 다음, 손을 탁탁 털고 다시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골목 구석에 숨어서 싸움을 지켜보던 꾀죄죄한 아이들이 취객에게 달려든다.

아이들은 바닥에 쓰러져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는 취객들의 소지품을 싹 털어서 도망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몇몇 한량들이 붙잡더니, 몇 대 때리고 아이들이 훔친 물건을 다시 빼앗는다.

용기를 내 한량들에게 저항하던 아이는 이빨 대여섯 개가 부러졌다.

제대로 된 도시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풍경이다. 카이루스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방금 전 아이를 두들겨 패고 물건을 빼앗은 한량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말씀 좀 물읍시다."

"꺼져. 병신아. 대가리 터져서 묻히고…?"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한량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카이루스가 휘두른 손이 녀석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법칙을 항상 지켜야 한다.

무시당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 것.

어떤 일을 해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챙길 것.

카이루스는 방금 무시당했고, 이미 6년 동안 익숙해진 법칙에 따라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씀 좀 물읍시다."

불시에 싸대기를 날려버린 카이루스는 다시금 아까와 다르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결국 이 새끼들도 범죄자들이라는 건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칼슨 노동교화소의 범죄자들은 다행히도 치안대가 붙잡는 데 성공한 덕분에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다는 점뿐이다.

"이런 쌍놈의…."

다시 한번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의 손바닥이 방금 전 후려쳤던 한량의 뺨을 정확히 강타했다.

"말씀 좀 묻겠다고. 귓구멍 용접했냐?"

예의범절이나 화법, 설득 같은 건 필요 없다.

힘으로 찍어 눌러 내가 위에 있다는 걸 증명하거나, 하다못해 내가 비록 너보다 약할지라도 결코 쉬운 놈은 아니라는 걸 필사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카이루스는 뺨을 얻어맞은 녀석의 팔을 붙잡고 관절을 비틀며 말했다.

"마호가니 공원 47번지의 롱웨이브 비스트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데."

고작 1마력짜리 싸구려 보급품이라 해도 배틀기어는 배틀기어다. 말 한 마리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일반인은 없다.

"끄… 아아아아아아아!"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붙잡힌 한량의 어깨 관절이 아작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뼛속을 타고 퍼져나가는 격통을 참지 못한 남자는, 거세당하는 수탉이나 낼 법한 구슬픈 비명을 지른다.

"시간이 있다면 길 안내를 좀 부탁해도 괜찮을까? 신사 양반들."

약간의 물리력을 섞은 정중한 요청은, 정중한 요청만 할 때보다 언제나 설득력이 더욱 있는 법이다.

사람 팔 관절을 작살낸 것이 약간의 물리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도시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 정도 물리력은 그냥 안부인사 물어보는 수준일 거라고 카이루스는 판단했다.

"안내할 테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봐!"

카이루스는 그제서야 여전히 붙잡고 있던 녀석의 팔을 놓아주었다.

"서로 상냥해지니까 훨씬 좋잖아. 앞장서."

카이루스가 툭 하고 허리춤에 찬 칼을 친 다음 턱짓을 했다. 무의미한 저항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간단한 경고였다.

방금 전 눈앞에서 친구의 팔뚝이 수수깡처럼 똑 부러지는 꼴을 본 한량들은 저 간단한 제스쳐에 바로 저항의 의지를 곱게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도착했습니다. 마호가니 공원입니다."

마호가니 공원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마호가니라고는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몇 그루와 더럽혀진 벤치, 그리고 그 벤치에서 싸구려 약이나 밀주에 취해 헛소리와 신음 소리를 흘리는 거지 무리 정도가 보인다.

"여기에서 뭔가 조심해야 할 게 있을까?"

카이루스의 말에 녀석들 중 하나가 재빨리 대답했다.

"딱히 없습니다. 어차피 무주공산이라서 멋대로 날뛰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카이루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방금 전 자기 팔을 아작 낸 녀석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할 리가 없다.

카이루스는 마음대로 날뛰어도 된다고 하는 녀석들의 조언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먹었다. 분명히 여기, 모종의 범죄자들이 꽉 잡고 있을 거다.

"고생 많았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도록."

인사를 한 다음 카이루스는 녀석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마호가니 공원 주변을 살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카이루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썩 고와보이지 않는다.

먼저 시비를 털고 싶은 생각은 없는 카이루스였기에, 그런 시선들은 그냥 무시하며 계속 목적지를 찾아다녔다.

"찾았다."

목적지였던 롱웨이브 비스트로를 찾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 중에도 안에서 제법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뜬금없이 가게가 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카이루스에게 식당 내부의 풍경이 펼쳐진다.

먼지가 내려앉은 축음기가 오래된 재즈를 힘겹게 뱉어내고 있다. 그 힘겨운 연주에 곁들여진 판 튀는 노이즈가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가래 끓는 소리 같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갓 달린 등유 램프가 희미하게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주사위 던지는 소리와 함께 쌍욕이 오간다.

얇은 옷을 여자들이 연기가 자욱한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다 먹고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놀러오라고 남자들을 꼬신다.

식당이 아니라 무슨 도적놈들 소굴 같다.

"대충 아무 자리에나 앉아. 30분 뒤에 문 닫으니 빨리 먹고 나갈 수 있는 메뉴를 고르고."

이 가게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근육덩어리 중년이 씹던 입담배를 퉤 하고 허리춤의 통에 뱉으며 말했다.

"토미의 소개를 받아서 왔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주인장이 순간 흠? 하는 소리를 내고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뭔 개소리야. 그 새끼 빵에서 나오려면 아직 한 세월일 텐데."

"같은 동에서 생활했습니다. 출소하는 길에 갈 곳이 없으면 여기로 가라고 하던데요. 종업원 자리 하나 정도는 내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주인장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쿵, 하고 바 테이블을 주먹으로 한 번 내려친 다음, 커다란 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그대로 쭉 들이켰다.

그의 허리춤에서 절그럭 소리를 내는 한 쌍의 너클은 배틀기어다. 식당 주인이 배틀기어를 쓴다니. 해군 출신 어부를 보는 느낌이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주인장에게 시비를 거는 취객들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력도 제법 있는 게 분명하다.

6화 취직

* * *

카이루스를 바라보던 조나단이 질문했다.

"그래, 그 머저리는 잘 사냐?"

"바깥 생활 기준입니까? 아니면 노동교화소 내부 기준입니까?"

조건에 따라 대답이 변한다. 카이루스의 말에 주인장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발로른 제국 치안대 세 놈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일곱 마리를 병신 만든 것치고는 잘 사냐고."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정도 죄를 저질렀는데 칼슨 노동교화소 내부의 방장이라면 잘 살고 있다는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가게 주인장의 주먹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근데, 뭐 어디에서 그 병신놈 이름 주워듣고는 뭐라도 주워먹어보자, 같은 생각으로 아가리 터는 건 아니겠지?"

가게 주인은 카이루스를 다소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구름등대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던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곧바로 가게 주인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대충 봐도 키가 2m가 넘는 거구라서, 카이루스가 올려다봐야 할 지경이다.

"내 이름은 조나단이다.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종업원으로 취직하게 된 걸 환영한다, 땅딸보."

카이루스가 땅딸보가 아니라, 눈앞에 서 있는 조나단이 너무 큰 거다.

"주급은 350파인트. 식사는 해결해주지. 잘 곳 없으면 가게에 다락방 있으니 거기서 자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숙식제공에 주급 350파인트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호칭은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새끼, 네 맘대로 불러라."

조나단의 말에 카이루스가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럼 두령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친새끼. 내가 무슨 산적이냐?"

맘대로 부르라고 한 건 조나단이다. 그리고 사실 조나단도 호칭이 딱히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카이루스도 그 점을 눈치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령님."

"오늘은 가게 문 닫는 게 얼마 안 남았으니. 잘 곳부터 알려주마."

잠시 뒤, 회중시계를 확인한 조나단은 가게 문을 닫은 다음 카이루스에게 다락방을 보여주었다.

"초라하네요."

다락방이라는 게 애초에 그렇게 상쾌한 환경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다.

거미줄도 보이고, 먼지도 좀 있는 데다가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하지만 제법 건조해서 곰팡이 같은 걸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때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자그마한 램프 하나가 이 방을 밝히는 유일한 조명이다.

"그럼 공짜로 재워주는데 뭘 기대했냐?"

"룸서비스 메뉴판 같은 게 있으면 좋겠네요."

조나단이 카이루스의 등짝을 때렸다.

"여기 모포다."

휙 하고 낡은 담요가 던져졌다. 그래도 세탁은 한 모양인지, 퀴퀴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식사는 어차피 내일 오전 중으로 버릴 예정이었던 스튜가 있으니 그걸로 대충 해결해."

내일 버릴 예정인 스튜라. 카이루스는 가만히 접시에 담긴 스튜를 바라봤다.

"메뉴에 불만 있냐?"

"그럴 리가요. 저는 아무거나 잘 주워먹습니다."

"좋아."

조나단이 제법 커다란 양철 그릇에 스튜를 퍼담았다. 토마토와 샐러리, 양송이 따위가 들어간 스튜였다.

그리고 시큼한 맛이 나는 단단한 흑빵도 한 덩이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노동교화소의 죄수들은 눈깔을 뒤집고 달려들어 석 달 열흘을 굶은 개처럼 퍼먹겠지.

"장사가 잘되는 이유가 있군요."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다음 카이루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카이루스가 어릴 적 먹었던 근사한 요리들과 비교해도 그렇게 뒤떨어지는 맛이 아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조나단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이다.

그럴 만하다.

롱웨이브 비스트로는 매음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법 약물을 파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밤이 되면 문을 닫으니 애초에 술 판매가 주요 수익원도 아니다.

이 식당이 장사가 잘되는 이유는 순수하게 맛있고 양이 많은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팔기 때문이다.

베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짜 '식당' 중 하나가 바로 롱웨이브 비스트로다.

"이 썩어문드러진 동네에 이제 막 들어왔으니 뭐 개뿔도 아는게 없겠지. 먹으면서 들어라."

조나단은 이 새로 굴러들어온 초짜에게 베넷 시에서 조심해야 하는 녀석들이나, 세력들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다.

고용하기로 결정한 이상, 카이루스가 실수해서 그 불똥이 튀는 일은 조나단도 최대한 막아야 하니까.

"일단 대운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겠지."

조나단의 말에 카이루스가 식사를 잠깐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안타리아 대운하? 그게 이후 이어질 이야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안타리아 대운하와 베넷 시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위험들 사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껌딱지 엉겨붙은 머리채처럼 꼬여 있다.

"일단, 아이란 공화국 경찰청과 발로른 제국 치안대가 있겠지."

둘 다 카이루스가 이미 기차역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하나의 지역에 두 국가의 치안유지 조직이 자리 잡고 있다. 영토분쟁 중이라는 상황을 이것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예시가 있을까?

아이란 공화국과 발로른 제국 모두 베넷 시를 탐내고 있다. 양 국가가 절대로 베넷 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안타리아 대운하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두 국가 사이의 힘의 균형은 실로 절묘할 정도로 맞아떨어져서, 양국 모두 전면전을 벌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경찰청과 치안대라. 두 조직 모두 치안에는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던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씹는 담배 한 줌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일부러 외면하는 거야. 범죄자를 잡았다고 치자, 어느 나라로 그 죄수를 이송하냐?"

"음, 아하. 그게 그렇게 되네요."

카이루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발로른 제국과 아이란 공화국은 베넷 시 일대에서 치열한 영토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범죄자를 잡았다고 대뜸 자국으로 이송하기는 힘들다.

"아예 분쟁거리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

"그런 거지."

"정신 나간 해법이네요."

카이루스는 혀를 내둘렀다. 범죄자를 잡으면 어느 국가로 이송해야 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으니, 경찰청과 치안대 모두 아예 도시의 치안유지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아니, 치안유지를 할 생각이 없으면 도대체 경찰청과 치안대는 왜 이 도시에 눌러앉아 있는 건데?

"게다가, 범죄자를 함부로 잡아들였다가는 베넷 시의 조직들로부터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어."

치안 유지를 위한 국가조직이 범죄조직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냐고 물어본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베넷 시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범죄조직들의 협조를 구하지 못한다? 자칫 잘못하면 베넷 시에서 물러나야 할 수도 있다.

경찰청이건 치안대건 안타리아 대운하의 입구가 위치한 베넷 시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그 지휘관의 처벌은 경고장 따위로 끝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범죄조직도 그런 무리수를 두지는 않겠죠."

카이루스가 말했다.

이 동네에서 주름잡고 다니는 번데기 친구들도 이 교묘한 균형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가능성이야. 그럴 수도 있다! 라는 거."

그 가능성만으로도 함부로 행동하는데 막대한 부담감이 생기게 된다.

씹던 담배를 통에 퉤 뱉은 다음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진짜 주의해야 할 녀석들이다. 운용 위원회를 구성하는 조직의 장들."

여기부터가 진짜다. 사실, 제국 치안대와 공화국 경찰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어느 도시에서나 당연히 따라야 하는 상식이다.

베넷 시에서는 그들의 위험도가 다소 증가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조나단이 말하는 것들은 베넷 시를 실제로 통제하는 범죄조직과, 그들이 만들어낸 베넷 시만의 규칙들이다.

"운용 위원회라니."

"정식 명칭은 안타리아 대운하 운용 위원회다."

베넷 시를 통제하는 거물급 범죄조직의 대장과 치안대장, 경찰청장이 구성원으로 포함하는 위원회이다.

정기 회의에서는 대운하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의 배분과 운용 방침 등을 정한다.

비정기 회의에서는 베넷 시와 그 일대에 큰 영향을 끼칠 중요 사안을 협상하고 결정한다.

"사실상 작은 독립정부군요."

"그런 셈이지. 다 말하려면 길어지니,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후딱 말해주마."

조나단은 운영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조직들에 대해 말했다.

루카스의 아이들

초롱불

루미스 & 웨슨 운송회사

아름드리 전당포

장미정원

위의 다섯 범죄 조직의 수장과, 제국 치안대장 및 공화국 경찰청장까지.

총 일곱으로 구성된 위원회다.

"그중 장미정원의 지부에는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향한다."

"네?"

카이루스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 하는 조직이길래 당장 내일 아침 찾아가야 한다는 걸까?

"혹시 이 일대가 그 장미정원이라는 조직의 영역입니까?"

빵에 신입이 오면 형님들에게 인사를 가야 하는 것과 비슷한 절차일지도 모른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코웃음을 친 다음, 씹던 담배를 통에 뱉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장미정원이 이딴 밥집에 관심이 얼마나 있겠냐?"

그럼 왜? 라고 카이루스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조나단이 말했다.

"장미정원의 핵심 사업은 보증이다."

"…보증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조나단이 퉁, 하고 테이블을 친 다음 말했다.

"이 바닥에서 사람이 씨부리는 말만 믿고 뭘 하고 싶어 하는 놈들은 없거든."

사기꾼, 범죄자, 강도 같은 범죄자들이 굴러다니는 이 도시에서 단순히 사람이 입으로 나불거리는 말은 신뢰도가 너무나도 낮다.

"장미정원은 두 사람의 계약 이행을 보증해주고 대가로 돈을 받지."

"보증이라는 게…."

카이루스의 질문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서로 합의한 계약서의 복사본을 장미정원의 보증소에 맡기고, 상대가 계약을 어겼을 시 어떤 대가를 받을지 말하면 된다."

그다음, 장미정원이 부르는 값을 지불하면 절차는 끝난다. 조나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이 도시에서 장미정원이 보장하지 않은 계약은 종이쪼가리야."

"신뢰도가 굉장히 높은 모양이군요."

제아무리 계약 보증을 전문으로 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신용받기는 힘들 텐데.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약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델슨 시라고 아냐?"

"네,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 아닙니까."

발로른 제국이 소유한 도시다.

"최근 거기 시장이 장미정원이 보증한 계약을 어겼다가 뒈졌어."

"저런, 암살당한 겁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냥 백주대낮에 시청으로 조직원들이 쳐들어가서 목을 쳐버렸어."

"아니…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규모가 있는 범죄조직이라고 해도 해가 훤히 떠 있는 대낮에 황제가 직접 임명한 시장의 멱을 따버렸다고?

"그 정도 행동력이 있으니 베넷 시의 사람들이 장미정원이 보증한 계약만큼은 믿는 거지."

보증된 계약을 어겼다고 제국 황제가 임명한 관리의 목을 칠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니, 장미정원의 보증이라면 무조건 믿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다.

"내일 오전 중으로 대필소에서 고용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 장미정원의 보증소로 가서 보증받을 거다."

조나단도 글을 읽거나 쓸 줄은 모른다. 카이루스가 그 말을 듣고 한마디 했다.

"글이라면 제가 써드릴 수도 있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코웃음 쳤다.

"네 녀석의 어딜 믿고 계약서를 맡기라는 거냐?"

신뢰받지 못한다는 점은 카이루스 입장에서 아쉽지만, 사실 오늘 처음 만난 조나단이 카이루스를 믿는 게 더 웃기는 상황이긴 하다.

"그것도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 보자고."

조나단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밖에서 무기가 부딪치고, 쌍욕이 오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비명이 울려퍼진다. 잠깐 카이루스가 움찔하자, 조나단이 한마디 했다.

"그냥 자장가라고 생각해. 이 동네에 밤이 찾아오면 저런 소리는 해가 뜨기 전까지 다섯 번은 넘게 듣는다. 밥 다 먹었으면 가서 잠이나 자."

참 더럽게 살벌하고 불길한 자장가다.

카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다락방으로 향했다.

불안정한 치안과 만연한 범죄를 상징하는 것 같이 이어지는 온갖 소음을 들으며 카이루스는 다락방에서 담요를 덮었다.

"하."

카이루스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베넷 시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최소한 베넷 시에 머무르며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확보했다.

빠르게 이 동네 굴러가는 꼴에 익숙해지고, 행방이 묘연해진 가문의 유산들을 되찾을 실마리를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