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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17화 부업개시 (2)

* * *

세실리아가 카이루스에게 건네준 이 색유리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면 사라를 죽여도 의미가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죽이면 대표님은 그 값도 나에게 빚으로 달아놓을 거다."

인재를 잃은 셈이잖아. 카이루스가 봤을 때, 세실리아는 그러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다.

"좋아요. 충분하네요. 이쯤 할까요?"

목소리와 함께, 카이루스는 자신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감각을 느꼈다.

정말 죽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카이루스의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

카이루스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은 세실리아의 손에 쥐어진 포크 사이에 끼워져 있다.

뭐 이딴 괴물이 다 있지. 카이루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카이루스의 머릿속에서, 저 괴물 같은 여자는 쥐고 있는 포크를 이용해 적어도 30가지 방식으로 카이루스를 아작낼 수 있다.

사실은 방법이 더 많을 텐데, 아직 카이루스의 경지가 미숙해 30가지 정도밖에 찾아내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이 상태로는 검을 집어넣을 수가 없는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순순히 포크를 치우며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 많았어, 사라."

세실리아의 말에 사라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간만에 책더미 밖으로 나와 운동도 하고 좋았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가끔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는 편이 좋지. 준비하고 있는 논문 제목이 뭐였더라?"

세실리아의 질문에 사라가 곧바로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미시자료를 통한 항상소득가설의 분석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이루스는 약간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박사학위가 있다고 하더니 아직도 학문과 연구에 대한 열의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저러다가 나중에 진짜 교수라도 되어버리면 그것도 충격적이겠는데.

공성추만 한 워해머를 옆에 세워둔 채 강단에서 강의하고 학회에서 발표하는 강철근육의 교수라니.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모두가 전율할 것이다. 그야말로 학계의 강철 독재자 아닐까.

세실리아는 사라와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카이루스를 향해 말했다.

"단순히 싸움실력만이 평가기준이었다면 조금 더 지켜봤을 거예요."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방금 전 싸움에서 카이루스가 검 쓰는 실력만을 평가한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것도 확인했다는 뜻이다.

"싸움 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나쁜 분들도 많거든요. 외골수라고 하나?"

세실리아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벽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어간다.

"싸움에 인생을 바치고 모든 시간과 여력을 더 잘 싸우는 데에만 투자하는 바람에, 눈치고 예의고 다 염가에 팔아치워버린 사람들."

카이루스는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세실리아의 대답을 들은 카이루스가 조용한 어투로 대답했다.

"저를 상대하고 있는 사라를 죽이면 그게 그대로 제 빚이 된다는 발언 때문입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표에 써붙일 금액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어요."

세실리아는 가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운해하실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요새 한 채 가격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편이다. 제풍만 가까스로 완성한 카이루스는 아직 페더윙의 검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으니까.

"정확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평가 시간이 짧을수록, 정확도는 떨어지는 법이니까요."

"요새와 비교는 그렇다고 쳐도, 이 배틀기어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습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아무 일도 안 당했잖아요? 그 검보다는 당신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으니 가능한 일이에요. 아마 옆에 있는 봄달래 씨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그렇죠?"

세실리아의 말에 곧바로 봄달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운용 위원회 소속도 아닌데 이 정도 실력이라니. 3급 수훈기사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용하겠다는 이야기로 들어먹어도 괜찮겠지?"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 일은 물론이고, 혹시 나중에 또 함께 일할 생각이 있으면 따로 연락할 수단을 알려주지."

"그거 좋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식당 주인에게 식당일을 더 중요시 하기로 합의했거든."

봄달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단한 종이 재질로 된 카드 한 장을 카이루스에게 건네주었다.

하얀색 카드에는 말린 꽃 한 송이가 장식되어 있다.

"이 일이 끝난 다음에도 가끔 연락하라고. 이 바닥에서 무소속의 실력자는 좀처럼 보기 힘들어."

"베넷 시에는 실력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나 정도는 제법 있지 않아?"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고 말을 덧붙였다.

"대화의 형태를 띤 최소한의 교류가 설립하는 실력자가 굉장히 드물다는 뜻이야."

그게 가능한 실력자들은 이미 유명하고 규모 있는 조직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잠깐 고민하던 봄달래가 예시를 몇 가지 든다.

"반드시 상대의 팬티를 확인하고, 팬티가 빨간색이라는 걸 확인하면 항복해버리는 녀석. 비가 오면 반드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 한 명을 죽이는 식의 요상한 미친놈."

이런 것들이 무소속 실력자들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카이루스도 감을 잡았다.

"개중에 선을 심하게 넘은 녀석들은 대운하 운용 위원회에서 레드티켓이 발행되기도 하지."

"레드티켓?"

카이루스의 되물음에 봄달래 대신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레드티켓이 발행된 사람은 죽어요."

처형선고다. 대운하 운영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처분이다.

"이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짓을 했건 우리는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어차피 여기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베넷 시는 심지어 교회에서 신을 섬기는 사제들조차 범죄를 저지른 다음 유폐나 파문 대신 여기를 선택해 발령된 쓰레기들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행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베넷 시에 들어온 다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면 그땐 저희도 신경을 쓰죠."

세실리아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레드티켓이 발행되면 대운하 운용 위원회에 소속된 조직들이 전부 눈에 불을 켜고 그 사람을 추격해요."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며칠이나 버텼습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 재밌는 분이시네. 아침 해 떴을 때 레드티켓을 받고, 점심식사 때 즈음 죽은 게 최장기록이에요."

일단 받으면 한나절도 버티지 못한다.

"레드티켓의 가치는 권위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권위는 받았을 때 무조건 죽는다는 공포를 통해 보존되죠."

그렇기에 운용 위원회에 소속된 모든 조직의 장들은 레드티켓이 발행되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레드티켓을 받은 녀석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반대되는 제도로는 블루티켓이지."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가 그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세실리아가 설명해주었다.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특정인의 안전을 위원회에서 보장해주는 거예요. 대표적으로는 실력이 검증된 명의 정도가 있네요."

안전을 보장해줘야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발행된다. 당연히, 안전이 보장되는 건 먼저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에 한정된다.

베넷 시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만, 발급을 위해 요구하는 조건이 굉장히 까다롭다.

"거참 탐나네요."

"탐난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봄달래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블루티켓 또한 레드티켓처럼 좀처럼 발급되지 않는 데다가, 그 권위는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나온다.

"블루티켓을 받은 사람 중 이반 셀바비치라는 의사가 있어. 인체실험 및 시체해부 혐의로 도망치다가 베넷 시로 흘러들어왔지."

외과수술의 대가로 유명하다. 120살 먹은 노파의 고관절 골절을 수술로 치료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냥 의사라고 다 블루티켓을 받는 게 아니라, 저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블루티켓이 나온다.

"레드티켓을 받으면 죽는다. 블루티켓은 안전을 보장한다."

봄달래가 티켓 제도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원칙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도다.

"이제 내 볼일은 끝났는데. 이후 해야 할 일 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이 저택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혹시 있을까요? 아, 식사는 마저 하고 가셔도 괜찮긴 해요."

세실리아가 봄달래와 카이루스를 보며 말했다.

말씨는 부드럽고 하는 말도 예의 바르지만, 쉽게 요약하면 꺼지라는 뜻이다. 물론 세실리아가 진짜로 그런 뜻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곱게 하고 말씨를 부드럽게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듣는 사람들이 알아서 협박으로 듣게 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아,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나가서 천천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봄달래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급하게 인사를 했다. 카이루스도 사실 세실리아가 나가라고 하는데 '싫은데?' 라고 말하는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다.

"그래요? 아쉬워라. 그럼 살펴가세요."

입으로는 예의상 아쉽다고 말하지만, 이미 세실리아의 시선은 문으로 향해있다.

장미정원을 통째로 이끄는 사람이 사실 여기까지 시간을 오래 할당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아마 카이루스가 세실리아의 흥미를 약간이나마 끌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세실리아의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카이루스와 봄달래는 곧바로 그 지시에 따라 저택을 나왔다.

"후우."

저택 밖으로 나오자마자 봄달래가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더니 불을 당겼다.

"뒈지는 줄 알았네. 이봐, 이름이 카이루스라고 했나?"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 알고 있어도 안다고 떠들고 다니지는 마라. 애초에 장미정원의 대표님이 너를 불러 내 얼굴을 보여줬다는 건…."

봄달래의 신변을 세실리아가 어느 정도 보장해주겠다는 뜻이다.

"걱정도 팔자군 그래. 걱정 할 필요 없다. 약속하지."

카이루스의 입에서 약속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확실하다. 하지만 봄달래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어쨌든, 너도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녀석이구만. 장미정원에서 이번에 알선한 건의 대금이 얼마인지 아냐?"

카이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모른다. 그리고 그런 건 함부로 세실리아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곤란한 종류의 질문이다.

"다 가지면 된다."

"다 가진다고? 댁만 아는 이야기를 혼자만 아는 단어로 설명하면 내가 알아먹을 길이 없는데."

카이루스의 표정을 보던 봄달래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보니 너, 이번에 알선받은 일이 뭔지도 모르지?"

"그러게."

카이루스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봄달래는 약간 퉁퉁한 자기 배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우리는 발로른 제국의 세금 수송단을 턴다."

"이런. 수훈기사나 성기사 이야기가 왜 나오나 했더니."

카이루스는 그렇게 짤막한 감탄사를 한 번 낸 다음 잠깐의 침묵 뒤에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백성들의 혈세를 거둬서 딱히 유용하게 쓰는 것도 아니긴 하지. 우리가 가져가도 낭비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겠네."

이번 일에 약속된 보수는 털어내는 데 성공한 기차에 적재된 세금 전부다.

"그럼 도대체 이 일을 의뢰한 사람에게는 뭐가 남는 거야?"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훅, 하고 입으로 연기를 뿜어낸 다음 트름과 함께 대답했다.

"의뢰한 사람이라. 시행업자 말하는 거지?"

범죄를 공사라고 표현하고, 범죄 계획을 구상하는 사람을 건축사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 도시에서는 의뢰인을 시행업자라고 부른다.

"보통, 시행업자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야."

"그래? 그럼 뭐하러."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대답했다.

"다들 돈은 많아. 그러니 그 돈을 써서 '자신들이 하면 곤란해지는 일'을 우리 같은 시공업자들에게 시키는 거지."

시공업자들이 공사(계획범죄)를 진행하고, 시행업자는 그에 대한 보수로 대금을 지급한다. 해야 하는 공사가 어려울수록, 더 많은 대금이 약속된다.

"도덕과 양심의 영역을 벗어나면 베넷 시는 돈을 벌 기회가 차고 넘쳐. 누군가에게는 지옥인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천국이 된다고."

18화 부업개시 (3)

* * *

누군가의 지옥은 누군가의 천국이다.

카이루스가 있던 노동교화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었지만, 그 노동교화소 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데 성공한 죄수들에게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남들이 다 설설 기는 천국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라더니."

누군가의 지옥은 누군가의 천국.

모두를 위해 마련된 천국도 없고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는 지옥도 없다.

베넷 시도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것 없다. 단지, 일반적인 사람들이 맛보기에는 조금 매울 뿐이다.

이미 얼굴을 들켜버린 상황에서 봄달래가 카이루스에게 정체를 감출 이유는 더 이상 없다.

그저 카이루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봄달래의 정체에 대해 떠들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어차피 네 녀석에게는 얼굴이 들켰으니, 이렇게 된 거 아지트까지 까발려져도 크게 다를 거 없겠지."

"댁 집주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는데."

손에 반지 같은 걸 끼고 있지도 않으니 아마 결혼도 하지 않았을 거다.

나이 마흔이 넘은 남자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집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굳이 상상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뻔하다.

"내가 집 자랑을 하고 싶어서 네 녀석에게 내 아지트를 안내해주는 거 같냐?"

카이루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중요한 인물이다. 실력이 출중한 것은 물론이고, 거리에 굴러다니는 실력자들 답지 않게 대화가 가능하다.

'어차피 장미정원의 사장도 이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 시간은 별로 없어.'

카이루스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장미정원이 조직원으로 회유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때가 되면 당연히 봄달래도 카이루스와 협업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장미정원의 조직원이 아니니까, 얼마든지 협업이 가능하다. 어디 그뿐이랴.

카이루스가 장미정원의 조직원이 된다고 해도 그전까지 봄달래가 쌓아놓은 친분은 유지될 것이다.

"봄달래라고 했었지. 장미정원에서 직접 오라고 할 정도면 실력이 굉장한 것 같은데."

싸움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봄달래의 전투능력은 일반인 수준이다. 카이루스가 재채기하며 휘두른 검으로도 순식간에 죽을 정도로 형편없다.

"나? 굉장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유명해지고 있는 신흥 건축사라고 할 수 있지."

봄달래는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괜히 우리가 건축사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직접 현장에서 일을 하는 대신, 계획을 짠다. 그리고 계획한 범죄가 성공하면 그 대가로서 자신의 몫을 나눠받는다.

"실력 있는 건축사들의 노하우는 극한으로 추구한 효율성이야. 인력이나 장비를 너무 많이 동원하면 각자 나눠받을 몫, 그러니까 공수가 줄어들거든."

그렇다고 너무 적게 동원하면 성공 가능성이 터무니없이 낮아진다. 아슬아슬하게 한계까지 쥐어짜내는 범죄계획이야말로 모든 건축사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건축사들 사이에서도 최고가 따로 있나?"

카이루스의 질문에 봄달래가 대답했다.

"이 분야는 너희들처럼 서로 검 맞대고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유명한 놈들은 다들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하고 있지."

초콜릿이 특산품인 도시에 가면 모든 가게들이 여기가 이 도시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봄달래 너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거고?"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거리를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이름을 알린 정도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해. 하지만 실력과 명성이 항상 비례하는 법은 아니잖냐."

봄달래는 자신의 실력이 다른 건축사들에 비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장미정원의 부름 덕분에 어느 정도 확신으로 변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는 건 좋은 일이지. 다 좋은데, 내가 직장을 좀 오래 비워뒀어."

카이루스의 최초 목표는 음식 배달이었다. 근데 어떻게 상황이 굴러가다보니 시간을 너무 써버렸다.

이전까지는 장미정원에서 카이루스를 붙잡아 놓고 있었던 거니 조나단에게 핑계를 댈 수 있다.

하지만 봄달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까지 조나단이 이해해 주지는 않을 거다.

"그래? 어쩔 수 없겠구만 그래."

한 손에 궐련을 쥔 채 고민을 이어가던 봄달래가 카이루스의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듀럼 2가 37번지에 있는 건물로 와서 문 아래로 아까 줬던 카드를 넣어.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때 나누도록 하지."

세금을 옮기는 수송단을 털어먹는다. 약속된 보수는 수송단이 옮기고 있는 세금 전부다. 물론 그걸 한 명이 싹 독식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만져보지도 못할 큰돈을 만지게 된다.

"듀럼가 2가 37번지. 좋아. 그럼 있다가 다시 보자고. 그땐 조금 더 견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카이루스는 인사를 한 다음 봄달래와 헤어졌다.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다. 카이루스가 롱웨이브 비스트로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부엌에서 조나단이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어휴 이 씹새. 가서 뒈져버린 줄 알았잖냐!"

조나단이 한 말은 농담 같은 게 아니었다. 장미정원으로 음식배달을 가서는 몇 시간이나 돌아오지 않고 있으면 베넷 시의 사람들이 으레히 할 법한 생각은 뻔하다.

'아, 이 녀석이 무슨 실수를 하는 바람에 장미정원의 심기를 건드렸구나.'

카이루스는 곧바로 조나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봄달래에 관한 이야기는 살짝 제외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봄달래가 아니었고, 사실 조나단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도 봄달래에 대한 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나단이 입을 헤 벌리고 있다. 벌어진 조나단이 씹던 담배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두령님, 씹던 담뱃잎이 바닥에 떨어졌는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나단이 말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을 대면했다고? 그럼 넌 유령이라는 건데. 망할 사제들이라도 불러서 지폐 다발을 쥐여주고 구마의식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산 사람을 죽이다니."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베넷 시에서 만나지 않는 게 좋은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위험한 사람 중 하나가 네가 방금 전에 만났다고 '주장'하는 장미정원의 대표님이다!"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만났는데요."

하지만 카이루스도 저 말에는 동의한다. 장미정원의 대표 세실리아 롱호른은 지극히 위험한 사람이다.

조나단은 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임마 차라리 사람을 하나 죽여. 장미정원에 관한 걸로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하면 상상하기도 힘든 방식으로 처참하게 죽어."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제가 뭐하러 장미정원의 대표님을 만났다는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여기, 가서 받아 온 선물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물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대가로 받은 물건이지만… 어쨌든 받아온 건 사실이다.

카이루스가 뽑아든 색유리를 보자 조나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아무 곳에나 굴러다닐 정도로 흔한 배틀기어가 아니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진짜 만나고 살아남은 거냐. 장미정원 소속도 아닌데 장미정원의 대표님을 만난데다가, 살아서 선물까지 챙겨 돌아오다니. 천운을 타고난 놈이군."

"아, 그리고 아무래도 일을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미정원에서 소개받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될 것 같은데."

거기까지 듣자마자, 곧바로 조나단이 대답했다.

"몇 년이 지나도 상관없으니 하게 된 일은 꼭 끝내라. 그리고 혹시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 차라리 그 편이 덜 고통스러울 테니.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어서 해주는 충고다."

"… 장미정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들을 때마다 놀랍군요."

"장미정원뿐이 아니야 이놈아."

대운하 운영 위원회에 소속된 조직들에 대한 인식이 전부 이런 거다. 베넷 시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운영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들은 천재지변과도 같다.

압도적으로 강대하고, 거역할 수 없고, 당하는 사람들의 사정도 신경 쓰지 않고 불어닥쳐 휩쓰는 천재지변.

잠깐 생각하던 카이루스가 조나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령님도 장미정원이나 그 뭐였지… 루카스의 아이들? 하여튼 그 조직들과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거 아닙니까?"

"친분? 무슨 망할 놈의 친분."

루카스의 아이들에 소속된 조직원들은 가끔 식당에 와서 밥을 먹는다. 물론 그들이 오면 그 순간 식당에 있던 다른 손님들은 모조리 도망치듯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간다.

그리고 장미정원에서는 세실리아가 주기적으로 조나단이 만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다.

"둘 다 단골손님이잖아요. 그 정도면 친분이 있다고 봐야죠."

"아서라.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

진짜 친분이 있었다면 요전에 그 양손에 클로 낀 병신과 그 일행들이 조나단의 목을 따겠답시고 기웃거릴 수도 없었을 거다.

"조직원이나 블루티켓이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위원회를 구성하는 조직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아. 그게 불문율이다."

외부인들에게 신경 쓰다가 잘못하면 조직 간의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장미정원이나 루카스의 아이들 같은 규모의 조직들이 서로 충돌하면 베넷 시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균형이 통째로 아작나게 된다.

"그런 일이 생기면 베넷 시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편을 택해야 할 거야. 심지어 제국 치안대나 공화국 경찰청까지도. 예외는 없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마찰을 피한다. 심지어 그 악독하고 정신나간 걸로 유명한 루카스의 아이들조차도 이것만큼은 지킨다.

"루카스의 아이들, 의외로 진짜 미친놈들은 아니었군요."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에서 날뛰다 독방으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진또배기 또라이들을 떠올리며 한마디 했다.

"미쳤으면 그렇게 큰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겠냐?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들은 루카스의 아이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단지 그들 앞에서 그걸 지적할 용기도 없고, 이유도 없을 뿐이다.

"어쨌든, 두령님께서 제 출장을 허락해주시니 참 다행입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에잉, 하는 소리를 냈다.

"가게가 불타는 가운데 장미정원 조직원들 앞에서 내 손으로 염산을 먹고 뒈지는 것보다야 낫지."

"…장미정원의 일처리는 깔끔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산 사람에게 염산을 먹이는 게 언제부터 깔끔한 일처리가 된 걸까. 카이루스의 의문 섞인 질문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루카스의 아이들이라면 내 사지를 잘라내 머리통에 꿰메놓았을 거다. 물론 그 꼴로 내 숨통은 붙여둘 테니, 서커스단에 볼거리로 팔려갔겠지."

"이야, 장미정원이 확실히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편이네요."

그리고 루카스의 아이들은 아무래도 미친 연기에 너무 심취해서 진짜 미쳐버린 것 같다.

"그럼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면 될까요?"

"지금 당장. 그 장미정원에서 알선해준 공사의 공사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내 가게에서 손끝에 물 한 방울도 닿을 생각 하지 마라. 유급 휴가라고 생각해."

카이루스는 조나단의 선언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현시점을 기준으로 당분간 가게를 비우겠습니다."

말을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곧바로 가게를 나와 봄달래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기대를 해서 손해를 본 느낌인데."

세실리아의 저택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그런지, 이번에 봄달래의 아지트도 약간 기대했었다.

하지만 모두가 세실리아처럼 근사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확실히, 봄달래의 아지트가 자리잡고 있다는 건물 주변은 딱 봐도 근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게 분명해보이는 길바닥과 건물 벽에 오줌이 말라붙은 자국 따위를 보고 있으려니 밥맛도 싹 가실 지경이다.

"이보오 청년, 술 한 병 살 텐가? 지금이라면 2병에 1파인트 또는 50드램이라네. 기깔나게 독해서 한 병 먹으면 이틀 뒤 대낮에 깨어날 거야."

드램은 아이란 공화국의 화폐 단위다.

길거리에 매대를 늘어놓은 노파가 술병 하나를 따더니 카이루스에게 내민다.

고약하고 시큼한 냄새에 카이루스는 순간 몸을 떨며 얼굴을 구겼다. 이 냄새는?

"세상에, 프루노랑 냄새가 똑같네."

19화 혼자서는 은행을 털 수 없다

* * *

프루노. 노동교화소에 갇힌 죄수들이 만들어 먹는 밀주다.

물에 식사로 나온 온갖 야채나 과일 찌꺼기에 곰팡이 핀 빵을 섞어 만들어내는 물건이다.

"뭐여, 빵 갔다 온 녀석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 개똥같은 술이랑 비교하면 쓰나. 제대로 된 이스트를 써서 만든 건데."

확실히, 냄새는 비슷해도 분명히 약간이지만 차이가 있다. 카이루스는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 대답했다.

"이스트 빼고 나머지 재료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그러니 2병에 1파인트 또는 5드램이라는 기적같은 가격이 가능한 거다.

카이루스의 말에 술을 팔려고 하던 노파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거 더럽게 쫑알거리네. 살 거야 말 거야?"

"한 병 사겠습니다."

오래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토 쏠리는 냄새를 맡으려니 칼슨 노동교화소에서의 구질구질한 기억이 다시금 카이루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 병만 사도 가격은 두 병 사는 것과 똑같아."

카이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1파인트를 내밀었다.

"열 때 조심하고. 잘못해서 병 터뜨려도 환불 없어."

"이 쓰레기는 여러 번 먹어봤습니다."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요령 좋게 병을 딴 다음,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프루노를 마실 때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 건강이다.

맛탱이가 확 가버린 과일, 먹고 남은 야채 찌꺼기, 마지막으로 곰팡이 핀 빵까지….

내가 이걸 마신 다음 멀쩡할 수 있을까? 라는 원초적인 공포에서 비롯된 질문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게 된다.

지금 카이루스가 구매한 밀주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짜 '프루노'는 아니지만, 곰팡이 핀 빵이 이스트로 대체된 것 빼고는 모조리 다 프루노의 재료와 똑같다.

"그래도 뭐."

카이루스는 배탈을 걱정할 필요 없다.

프루노뿐 아니라,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먹었던 온갖 미식들 중 카이루스의 건강을 해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더윙 가문에서 태어나자마자 받은 시술 덕분에 카이루스에게는 특수한 소화기관이 하나 더 있으니까.

사낭(沙囊), 모래주머니. 조류가 가지고 있는 소화기관에서 이름을 따왔다.

카이루스가 섭취한 음식물은 위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사낭에 도착한다.

사낭에 도착한 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온갖 독과 유해균, 기생충 따위가 제거된다.

걸러진 유해성분은 사낭에서 분비하는 성분으로 감싸진 채 보관되다가 여유가 있을 때 게워내면 된다.

사낭 덕분에 페더윙 가문의 구성원들은 음독으로 죽는 경우가 없고, 굶어죽는 경우가 드물다.

'급할 때는 옷감이나 종이, 가죽벨트 같은 걸 뜯어먹어도 괜찮으니까.'

사낭은 솜이나 비단, 아마포나 종이 같은 것들을 사람이 흡수할 수 있는 영양소로 분해한 다음 위장으로 보내는 역할도 겸한다.

구두나 가죽옷도 추가적인 조리과정 없이 바로 씹어먹을 수 있다. 가죽을 가공하는 데 사용된 온갖 약품은 사낭이 걸러내고, 가죽의 영양소만 뽑아낸다.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독실에 가둬졌을 때 변기의 오물 속에서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주워먹거나, 죽은 쥐의 시체를 생으로 뜯어먹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 다 이 기관 덕분이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병 안에 담긴 역하고 점성이 있는 액체를 홀짝이며 주변의 다 무너져가는 건물을 살피던 카이루스는 삐걱거리는 곰팡이 슨 문 앞에 섰다.

"거 취미 한번 고약하네."

머리카락 대신 뱀이 자라나 있는 기괴한 얼굴의 청동장식이 문고리를 대신하고 있다. 크게 벌린 입을 통해 혀가 축 늘어져 있고, 그 끝에는 문고리가 달려있는 형상이다.

카이루스는 아래로 카드를 밀어넣었다.

"…."

한 10초 정도 기다리던 중에,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왔냐? 잠시만 있어봐."

그리고 문 너머에서 뭘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모양이다. 카이루스는 양팔을 꼰 채 인내심을 가지고 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망할. 이게 여간 뻑뻑해야 말이지. 녹을 아무리 털어내도 며칠 지나면 다시 생긴단 말이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너머에서 녹슬고 뒤틀린 격철과 나사가 삐걱거리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또한 카이루스의 인내심이 삐걱거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좀 들어갑시다."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의 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카이루스는 결국 손을 뻗어 문짝을 꽉 쥐었다. 으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통째로 들썩인다.

계속해서 힘을 주자 이내 굉음과 함께 문짝의 경첩이 뜯어져 나갔다.

"야, 내가 이 보안을 갖추느라 얼마를 들였는지 알아?"

봄달래는 어울리지 않게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노력이다. 카이루스는 그런 봄달래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를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하나 못 막는 걸 보니 돈 낭비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긴 하니까. 물론 카이루스가 보통 인물이 아니긴 하지만, 베넷 시의 어둠은 깊고 음습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이루스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암약하고 있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베넷 시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카이루스조차 막지 못하는 보안은 돈 낭비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내 말 맞지? 이제 들어가자고.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은 걸로 아는데."

카이루스는 지금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베넷 시로 굴러들어온 다음 처음으로 목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몇 년 만에 자신의 의지로 세운 목표를 뒤쫓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자유인으로서 세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출발점이다.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래, 일단 들어와."

카이루스는 봄달래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순간적으로 방금 전까지의 흥분이 삽시간에 당황감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게, 다 뭐냐."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대답했다.

"뭐가, 내 방이잖아. 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분홍색 파스텔 톤으로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거대 캐노피 침대였다. 사람들이 소위 공주님 침대라고 부르는 바로 그 물건이다.

거기에 더해 카이루스의 코를 간지럽히는 건 솜사탕과 같은 달짝지근한 향기였다. 천장에는 알록달록한 모빌이 수놓아져 있다.

아찔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여기가 정녕 배가 통통하게 나온 중년 아저씨의 생활공간이라는 건가.

"딸이 있는 줄은 몰랐지. 이런 도시에서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딸 같은 소리하네. 난 독신이다."

"음, 그렇군. 그 이유도 바로 알 것 같네."

딸이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독신이라는 봄달래의 대답이 돌아오자 카이루스는 그 설명 또한 곧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자기 방을 이렇게 꾸며놓은 중년 남자와 결혼하려면 그 상대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

"여기에서 발로른 제국의 국세 수송단을 털어먹을 계획을 세우는 거냐."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척 하고 엄지를 세우며 대답했다.

"그래. 이곳이 바로 그 역사적인 계획이 수립되는 장소이자 나의 자랑스러운 아지트다."

봄달래는 자랑스럽다, 라는 단어를 수치스럽다, 라는 단어와 혼동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즐기는 미적 취향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확실했다.

베이지와 하늘색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깜찍한 책상 위에 커다란 지도가 놓였다. 카이루스는 이제 주변의 소품들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계속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머리만 아플 것이 분명하니까.

"자, 앉아. 이야기가 제법 길어."

카이루스는 봄달래의 권유로 곰돌이 모양의 방석이 인상적인 의자에 앉았다.

크흠, 하고 잠깐 헛기침을 한 다음, 봄달래가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카이루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도대체 젖병을 왜 물잔으로 쓰고 있냐?"

"사레 들리는 걸 막을 수 있잖아. 게다가 디자인도 근사하고."

"사레는 무슨, 지랄옘병하고 자빠졌네."

"뭐 임마?"

카이루스의 말에 곧바로 봄달래가 얼굴을 굳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나?"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잠깐 카이루스를 슥 훑더니 대답했다.

"…건축사들이 자기 작업실에 사람 데리고 오는 경우는 없어. 너는 이미 내 얼굴을 아니까 상관이 없어진 거고. 보통 건축사들은 얼굴 들키면 오래 살지 못해."

"그런가. 그렇겠지."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뒤에서 설계도면만 짠 주제에 대금을 갈라먹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녀석들도 있고… 계획을 짜다 보면 시행업자를 골라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연락하지 않은 녀석들도 원한을 품거든."

공사 현장으로 치면 사무직과 현장직 사이의 갈등 비슷한 거다.

그리고 베넷 시에서 싸움 실력이 일천한데 남들과 갈등이 빚어진다면 그 최후는 일반적으로 끔찍하다.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다지만, 더 나쁜 죽음은 분명히 존재해."

그리고 정체가 발각된 건축사들은 사람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들 중 안 좋다고 평가될 만한 죽음을 주로 맞이하는 편이다.

"그럼 내가 당신 목숨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은건가?"

카이루스의 말에 즉시 봄달래가 반응한다.

"맞아. 하지만 내 정체를 네가 밝히게 된다면…."

"장미정원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도 정체를 까발릴 생각은 없으니 걱정 놓아둬."

카이루스가 손뼉을 한 번 치고 봄달래에게 말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보다, 계획."

카이루스의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봄달래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세금을 옮기는 건 증기 기관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금을 적재한 화물칸은 알란스 시그니쳐 3번을 이용한 반 뼘 두께의 금고를 자랑한다."

화물칸 자체는 일반적인 규격의 잠금장치를 사용하지만, 세금을 담은 금고는 특별 제작품인 모양이다.

카이루스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알란스 시그니쳐가 벌써 3번까지 나왔다고? 세월 빠르다."

카이루스가 노동교화소에 들어갈 당시에는 알란스 시그니쳐 2번의 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6년의 세월 흐름을 이런 곳에서 느끼게 된 카이루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봄달래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아는 게 많잖아. 원래 출신이 궁금해지는데."

"알 필요 없잖아. 금고를 딸 방법이나 말해줘. 궁금하다."

카이루스의 말에 곧바로 봄달래가 대답했다.

"다연 대왕국에서 괜찮은 물건을 받아올 예정이지."

"그, 안타리아 대운하 반대편에 자리 잡은 국가 말이지?"

안타리아 대운하의 북쪽 입구는 발로른 제국과 아이란 공화국이 국경을 맞댄 베넷 시에 위치해 있다. 그 반대편 입구는 다연 대왕국이라는 국가가 자리잡은 남서쪽에 있다.

"그래, 그 쌀 쪄먹는 자식들에게 이번에 괜찮은 물건을 소개받았지. 맛보기로 조금 전달받았는데, 이게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봄달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으로 푸쉬시시시시시 하는 소리를 내며 엄지를 세웠다.

"불을 붙이면 막 이런 소리를 내면서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데, 아래 받쳐놓은 금속판이 순식간에 녹아내려서 구멍이 뻥 뚫릴 정도야."

아무래도 그걸 이용해서 세금을 보관하고 있는 금고의 입구를 봄바람이 닿은 눈사람처럼 녹여버릴 계획인 모양이다.

"그러다 잘못하면 금고 내부의 내용물도 손상되지 않을까?"

카이루스의 질문에 봄달래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니 분량을 세밀하게 조절해야지. 약간만 실수가 있어도 난리가 날 테니까."

"설마하니 분량을 우리더러 알아서 잘 조절하라는 뜻은 아닐 테고."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기겁하며 대답했다.

"내가 미쳤냐. 실제 사용분과 예비분을 따로 포장해서 너희들에게 줄 거다.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도 하나 따라붙을 거고."

그렇다면 카이루스도 불만 없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봄달래가 벽에 걸린 연노랑색에 하트로 장식된 뻐꾸기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자, 이제 한동안 함께 할 다른 시공업자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야."

"뭐야, 혹시 같이 가는 건가?"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는 고개를 저었다. 건축사들은 정체를 감추고 활동해야 한다.

실수로 정체를 들키게 되면 보통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아니, 그럼 우리끼리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계획을 준비한 건 봄달래다. 봄달래가 오지 않는다면 결혼식에 하객만 오고 신랑 신부가 없는 상황과 같다.

"전화기로 할 거다."

카이루스가 봄달래의 대답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청 같은 공공시설도 아닌데 전화회선을 어떻게 사용하냐. 금지되어 있을 텐데."

전화회선은 귀하다. 아무나 멋대로 설치해서 사용할 수 있는 설비가 아니다.

카이루스의 말을 들은 봄달래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냐? 돈이 있으면 회선은 깔 수 있어. 한 2년 정도 순번을 대기해야 하지만."

카이루스가 노동교화소에 가 있는 사이 전화회선 관련 규정이 변경된 모양이다.

20화 혼자서는 은행을 털 수 없다 (2)

* * *

새삼스럽게 교화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카이루스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나 말해줘."

"둥근 마름모라는 이름의 카페로 가서 3번 방으로 안내해달라고 하면 된다. 카페 위치는…."

봄달래가 둥근 마름모라는 이름의 카페 위치를 알려주었다.

"업사이드에 위치한 곳이군요."

업사이드에 아름드리 전당포의 지부 중 하나가 위치해 있다고 조나단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큰일을 할 예정인데 길바닥에서 모임을 가질 수는 없잖아?"

"업사이드라."

베넷 시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번화가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장소가 아니라, 가진 돈을 소모하는 블랙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사용해 큰돈을 만지는 데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업사이드에 위치한 호화 윤락시설 및 도박장 같은 곳에서 탕진하게 된다.

다른 장소의 고급 시설과는 달리 업사이드는 명성이나 자격, 계급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업사이드에서 필요한 건 오직 하나다.

돈.

업사이드에서는 돈만 있으면 왕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알겠어. 다녀올테니 있다가 보자고."

카이루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봄달래에게 인사한 다음 업사이드로 향했다.

"번화가라고 하더니."

업사이드의 거리는 사람의 오감을 뒤흔들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정신없었다. 번쩍이는 불꽃과 웃음소리,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미남 미녀들의 호객행위까지.

"여기저기 먼 곳 돌아다니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싸고 즐겁게 한잔하시는 건 어떤가요! 술값과 테이블비를 제외한 추가금은 절대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로데오 삼거리에서 고추제왕을 찾아주세요! 서비스는 높게, 가격은 낮게!"

"오늘 하루 운이 좋으셨나요? '운수 좋은 날'에서 즐거운 하루의 유쾌한 마무리를!"

누구를 향해 외치는지 모를 호객행위가 취객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뒤엉킨다.

철제 구조물 위에 세워진 거대 배너에는 카드와 룰렛, 반짝이는 파인트화와 드램화가 그려져 있다.

쿵짝거리는 음악 소리, 번쩍이는 즐거운 거리.

업사이드를 걷다보면 베넷 시는 사실 소문과는 달리 천국이었던 건 아닐까? 라는 착각조차 들게 하는 깊은 매력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리의 화려한 베일 속에는 더러운 음모와 협잡질, 사기와 날강도질을 엿볼 수 있다.

마치, 겉보기에 근사한 산해진미에 파고들어 숨어든 이질균 같다.

군침도는 모습에 속아 입맛을 다시며 손을 뻗으면, 잠깐의 즐거움 뒤 길고 끔찍한 괴로움이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위협과 리스크를 견디며 벌어들인 거금은 업사이드에 들어서는 순간 온갖 호객행위로 인해 따뜻한 물에 던져진 각설탕처럼 녹아내린다.

두둑한 주머니로 들어온 사람이 아차 하는 순간 속옷만 남기고 모조리 탕진하게 만드는 장소.

그게 이 거리의 진면목이다. 다행인 점은, 오늘 카이루스가 여기에 돈을 쓰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둥근 마름모. 찾았다."

번쩍이는 거리를 한동안 돌아다닌 끝에 카이루스는 목적한 가게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어서 오세요. 둥근 마름모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차와 커피를 취급하는 고급 카페인 모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찻잎과 커피콩 볶은 향기가 카이루스의 코를 간지럽힌다.

"3번 방으로 예약했습니다."

가져온 예약자 명단을 살피던 여성 종업원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특별히 찾으시는 음료가 있을까요?"

"가능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카이루스의 말에 종업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지간한 찻잎과 원두라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재료의 가치를 알고, 거기에 알맞은 금액을 지불하실 용의만 있으시면 됩니다."

사실 가치를 알 필요는 없고, 돈을 낼 용의만 있으면 된다. 카이루스는 종업원의 말을 들은 다음 말했다.

"그럼 람다로얄 핸드픽, 애프터 블랜드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 들어가기 전에는 좋은 것만 골라먹고 살던 페더윙 가문의 직계였다.

카이루스의 말에 방금 전까지 당당하게 말하던 종업원이 순간 움찔하고는 한동안 카탈로그를 살펴보다 대답을 돌려주었다.

"네, 있습니다."

"그럼 프레스로 한 잔."

주문을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안내를 받아 3번 방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그럼, 둥근 마름모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안내를 마친 종업원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카이루스는 3번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카이루스의 이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카이루스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허리춤에 걸어둔 칼을 뽑아들고 자신을 공격한 자의 목을 쑤셨다.

"어… 커…ㅋ"

칼끝이 상대의 목을 꿰뚫고 파고든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카이루스는 곧장 상대의 머리채를 꽉 붙잡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으지직.

칼에 꿰뚫린 상대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잠깐 버둥거리던 상대의 몸이 축 늘어진다. 칼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깜짝이야. 왜 덤벼들고 지랄이야."

카이루스는 뒤늦게 죽은 상대를 확인했다. 여자였다.

시체의 목줄기에 박혀있던 칼날이 빠져나왔다. 퍽, 하고 시체가 바닥에 쓰러진다.

"…."

원래는 이 방 안에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한 명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네 명이다.

"너,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냐?!"

얼탱이가 나간 표정을 하고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카이루스에게 외쳤다.

젊은 청년이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카이루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이미 죽은 시체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도 뒤늦게 발견했다.

연인 사이였던 모양이다.

"공격하길래 반격했지. 미친건 내가 아니라 저기 뒈진 년이고."

사람 이마를 노리고 대뜸 날붙이를 휘두르는데 통성명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이 새끼야.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 거잖아!"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면 반대로 뒈질 각오도 했어야지."

방금 전 급습에 카이루스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는 이미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결국 카이루스가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다.

힘으로 찍어 누른다.

"그리고 아까부터 입에서 나오는 말뽄새가 가관인데, 아가리를 양갈래로 찢어서 관자놀이에 걸어주면 예쁘고 고운 말이 나오려나."

카이루스는 칼날에 엉겨붙어 있는 피를 털어내고는 아까부터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상대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저 여자도 진짜 죽일 의도는 없었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 와중에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이 카이루스에게 말했다.

"사람 이마빡 노리고 칼을 휘두르는데 죽일 의도는 없었을 거라고? 좋아. 영감, 나도 다치게 할 의도는 없어."

카이루스는 자신에게 말을 건 중년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한 다음, 중년의 몸을 벽에 가져다 붙이고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숨통을 조여오는 감각에 중년이 몸을 버둥거리고,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카이루스의 손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카이루스가 그의 멱살을 놓아주며 말했다.

"다치게 할 의도는 없다고 말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믿냐? 기분 좆같게 하네."

바닥에 엎드린 중년이 쿨럭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카이루스는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중년을 향해 말했다.

"불과 30초 전에 자신이 한 말도 못 지키는 한심한 새끼로군."

한심하다는 듯이 카이루스가 중년을 바라보며 혀를 찬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카이루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있다.

정확히는 못 하고 있다. 잘못하면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다. 멋대로 실력을 확인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가 죽어버린 저 여자처럼.

"어쨌든, 자기소개는 해야겠지. 카이루스다."

자기소개를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가 방 안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을 꿰찬 채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본다.

"다들 앉아. 서서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래도 좋고."

카이루스도 그냥 망나니처럼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아니다.

어차피 큰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들이라면 봄달래가 고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카이루스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면, 봄달래가 굳이 카이루스를 고용할 이유가 없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이루스보다 실력이 떨어지고, 뒤를 봐주는 무시무시한 조직이나 뒷배도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카이루스는 이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그 동안은 웃는 얼굴로 지내는게 좋다.

하지만, 문 열자마자 대뜸 사람 얼굴을 향해 칼부터 휘두르는 새끼들을 상대로 혼자 교양을 갖춘 지성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 애인 죽은 것 때문에 빡돌아서 같이 일할 생각이 사라졌으면 안 말려."

카이루스의 말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이루스를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바닥에 침을 뱉고는 근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원한이야 있겠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구성원 중 한 명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문제의 싹을 뽑아버리겠답시고 저 남자까지 죽일 수는 없다.

병사를 대뜸 죽인 다음, '저놈은 겁쟁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쳐서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거다. 그러니 그냥 지금 미리 죽여서 불안의 싹을 자르는 편이 좋다!' 같은 소리를 떠드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공격을 당한 다음 반격한 것과, 공격 할 것 같으니 먼저 칼로 찔러버리는 건 명확히 다른 상황이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잠깐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나 싶더니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이미 죽어버린 여자뿐이다.

카이루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다란 수화기를 들어올리고, 교환원을 통해 봄달래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 아아, 들리나?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제법 컸다.

봄달래가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사이, 카이루스가 주문했던 커피가 도착했다.

종업원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확인하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시신을 치울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뜻이지.'

겉보기에는 다른 대도시의 중심지나 번화가와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베넷 시의 번화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카이루스가 커피를 마시고, 그사이 봄달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시공업자 여러분,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함께하게 될 거사의 설계도를 담당한 봄달래라고 합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마침내 봄달래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이번에 우리가 습격할 예정인 수송단이 옮기는 세금은 약 280만 파인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어음이나 지폐가 아니라, 전부 금괴입니다.

"뭐?! 엄청나잖아!"

계획이 성공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이 구체적인 수치의 형태로 드러나자, 갑작스러운 유혈사태에 바짝 굳어있던 분위기가 대번에 뒤집혔다.

심지어 애인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를 삭이고 있던 에릭슨조차 애인의 죽음을 까먹을 정도였다.

일단 성공하면 280만 파인트에 해당하는 금괴를 손에 넣게 된다. 금괴. 저 거금이 남김없이 실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재수가 좋아봤자 노동교화소로 직행하는 팔자가 된다.

"선택지 균형 한번 작살나네."

다른 사람들이라면 '까짓거 실패하면 노동교화소 한 번 가고 말지!'라는 허세를 부릴지도 모르지만, 카이루스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유경험자니까.

노동교화소는 끔찍하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닌 행위를 살기 위해서 반복해야 하는 지옥이다.

구체적인 목표 없이 그저 돈 많이 땡겨서 펑펑 낭비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로 다시 돌아갈 위험이 있는 일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 잃어버린 가문의 유산들을 되찾고, 그를 통해 페더윙의 무예를 완성한 다음 그 맥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런 신세로 전락하게 만든 황제 새끼 멱을 따버릴 거다.

"아, 자기소개는 나 말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카이루스가 대뜸 살아있는 사람을 살아있던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다들 넋이 나가서 자기소개를 할 틈이 없긴 했다.

눈앞에서 산 사람이 살았던 사람으로 변한 직후 서로 명함을 교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21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

"여기 내 명함이다."

아직 김이 오르는 카이루스의 커피잔 옆에 명함이 한 장 놓였다.

"다니엘이라고 불러주면 된다."

가장 먼저 자기소개를 한 것은 방금 전 시시비비를 따졌던 중년이었다.

그가 카이루스에게 건넨 명함에는 [다따막따] 라는 글자와 자물쇠 그림이 그려져 있다. 평상시에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문따기 담당인 모양이지?"

딱 봐도 열쇠공 같아 보인다. 카이루스의 말에 중년이 짧게 대답했다.

"아이란 공화국에 있던 젊을 적에는 법원 집행관과 전속계약을 했었지."

아이란 공화국의 집행관.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한 다음 팔아치워 현금을 마련하고, 그 돈을 채권자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다.

하는 일의 성격상, 툭 하면 남의 집 문이나 금고를 강제로 따야 한다. 재산을 다 압류하겠다며 덤벼드는데 곱게 문을 열어 주는 등신은 없으니까.

"다른 열쇠공 나부랭이들과는 열어제낀 잠금장치의 양과 질이 틀려."

공무원이 뽑은 사람이니 인맥 같은 게 작용하지 않았냐고?

집행관들은 압류품을 돈으로 바꿀 때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자기 몫으로 챙기게 되어있고, 5년의 임기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 집행관 임기를 끝낸 법원 공무원은 명예퇴직하는 게 관습이다. 그 관습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은퇴하기 전에 집행관 노릇 하면서 한탕 크게 빨아먹어.]

즉, 집행관 입장에서는 자신의 퇴직금 액수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이라는 거다.

못 미더운 사람을 이토록 중요한 일에 데려갈 리가 없다.

집행관과 계약했던 열쇠공인 이상, 다니엘의 잠금장치 따는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넷 시로 온 다음에도 굵직한 것들로만 20개 정도는 열었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잠금장치를 열어주는 열쇠공이라니. 감동적이네."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을 가져다주고 돈을 내라고 하는 식당과 다를 바 없고, 그런 범죄 행위를 일컫는 단어가 바로 강매다.

"난 에릭슨이다. 네가 죽인 여자의 연인이지."

뼈가 느껴지는 한마디가 카이루스의 귀를 간지럽힌다.

"연인이 아니라, 연인이었지. 이젠 뒈졌잖아,"

카이루스는 에릭슨의 자기소개에 대답하며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에릭슨의 입 안에서 작게 뿌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루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가 에릭슨의 코앞에 나타났다.

"죽은 전 애인과 어깨동무하고 지옥에서 불타고 싶으면 덤벼."

에릭슨의 목젖을 칼끝으로 겨눈 채 카이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뒈졌는지도 모르게 죽여줄게."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지금 죽기에는 실력이 조금 아깝네. 조금 더 오래 살아보는 게 어때? 인생이라는 게 살다 보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거든."

다른 사람들이 카이루스의 움직임에 경악하고 있는 사이, 카이루스의 시선은 에릭슨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에릭슨은 소매에 숨겨놓은 한 쌍의 송곳을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단지, 그의 실력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을 뿐이다.

"닥쳐."

에릭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이루스가 그의 싸대기를 한 대 후려쳤다.

"나보다 약하면 명령하지 마. 들어 줄 생각 없으니."

이 사회에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주먹질로 대답하는 미풍양속이 있다.

에릭슨은 수훈기사를 상대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세금 수송단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기사들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실력자다.

카이루스가 색유리 대신 계속 그 살천성인지 뭔지 하는 구질구질한 성능의 배틀기어를 계속 사용했다면 되려 패배할 가능성도 꽤 높았다.

'세실리아가 괜히 그 가격을 부른 건 아니라니까.'

좋은 배틀기어를 하나 확보한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뀐다.

이러니까 좋은 배틀기어 매물이 풀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눈이 뒤집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거다.

다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건 검은 원피스 위에 쥐색 코트를 입은 밤색 단발의 여자였다.

"타냐 라이샌드에요. 오늘 이 만남을 강복하며."

대뜸 타냐가 양손을 내밀었고, 카이루스는 순간 뒤로 물러났다.

"안수기도를 해드리려고 했는데요. 이런 기회 좀처럼 없답니다."

카이루스의 반응을 확인한 타냐가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쏘아붙인다.

나름대로 온갖 상황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는 카이루스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수기도? 교회의 사제들이 가끔 하는 그걸 말하는 건가.

― 그녀는 자기가 사람의 육신을 통해 태어난 이테라의 외동딸이라고 믿고 있어.

이테라.

발로른 제국의 국교이자 아이란 공화국에서 신도 수 1위를 자랑하는 승천교에서 믿는 신이다.

수화기를 통해 타냐 라이샌드에 대한 설명을 들은 카이루스가 잠깐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자기 자신을 이테라의 딸이라고 믿는 사람이라.

"발로른 제국 세금 수송단 터는 게 언제부터 애들 장난이 된 건지 모르겠는데."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황급히 대답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데… 그래도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다음, 백금자비단에서 팀장으로 활동했어. 분쟁지역 사리예프가 주 무대였지.

백금자비단은 의료봉사단체다. 주로 전쟁터 및 분쟁지역에서 국적이나 신분, 과거 행적 따위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치료한다.

그냥 봉사자도 아니고 팀장이라면 의료인, 그것도 응급의학에 관련된 능력과 경험은 최상위권이라는 뜻이다.

카이루스가 새삼스럽게 타냐를 바라보자, 그녀가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아버지, 간절히 바라오니 제가 한 명만 더 구하도록 허락해주세요."

짤막한 기도를 마치자마자 타냐 라이샌드가 봄달래의 방금 전 발언에 이의를 제기한다.

"봄달래 씨는 말을 조심하세요. 나는 아버지의 딸이 맞아요. 믿음이 부족한 자에게 구원은 오지 않는답니다."

그 주장을 듣고 있던 카이루스가 질문했다.

"그러니까, 이테라의 딸이자 전직 군의관 겸 백금자비단 팀장이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건가?"

카이루스의 말에 타냐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아요. 아니, 저지를 수 없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곧바로 타냐가 허리를 숙여 왼쪽 손으로 살짝 땅을 짚은 다음 대답했다.

"제가 제 의지로 행하는 모든 일은 전부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따라서, 죄가 되지 않지요."

자기가 하는 강도질은 신이 허락한 강도질이라 괜찮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자기가 사람을 죽이면 주신이 허락한 살인이기에 괜찮다고 하겠지.

결국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카이루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주 단단히 미쳤구만."

카이루스의 말에 타냐가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양 눈썹을 한 번씩 건드린 다음, 엄지로 자신의 입을 만졌다.

"저분의 발언은 제가 용서했어요. 아버지 또한 죄를 묻지 마세요."

"이거, 벌써부터 이 모임이 너무 즐거워서 돌아버릴 것 같은데."

카이루스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마지막 남은 사람을 바라봤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잔다라."

여성의 목소리였다. 카이루스는 잠깐 생각하나 싶더니 이내 대답했다.

"두텔 부족 억양?"

이 일대에 아주 옛날부터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들이다.

제국과 공화국의 영토분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부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동되었다.

역사 공부는 제국 귀족의 교양 중 하나기에, 카이루스가 두텔 부족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혼혈인가?"

카이루스가 잔다라에게 질문했다. 보호구역을 벗어나 활동하는 소수의 대부분은 제국이나 공화국의 피가 섞인 혼혈이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잔다라가 슬쩍 이마를 가리고 있는 후드를 살짝 들어올리고 카이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보라색 눈동자와 갈색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두텔 부족의 특징이다.

"아는 게 많지만, 현명하진 않군."

"그런가? 너는 짧게 보고 참 많은 걸 판단하려 드니 또한 현명하지 않겠군."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 잔다라를 보던 카이루스가 입을 열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피로 대신할까."

두텔 부족의 호전적인 문화를 대표하는 격언이다. 더 할 말 있으면 무기를 들라는 뜻이다.

그런 풍토 때문에 최대한 말을 짧게 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잔다라는 시선을 옆으로 치웠다.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게 전부인 건가? 꼴랑 다섯 명인데 말이야."

명색이 제국의 세금 수송단을 털어먹자고 모인 건데, 규모가 너무 작은 것 같다.

― 여섯 명이지. 나는 왜 빼는 거야.

봄달래가 곧바로 카이루스의 발언을 정정한다. 카이루스는 다른 범죄자들이 건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직접 뛰지 않는 사람이 자기 몫을 챙겨놓으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발로 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영 별로일 수밖에 없다.

"한 분 하고도 여섯 명이에요. 아버지께서 항상 저와 함께하며 우리의 거사를 굽어살피고 계시답니다. 저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은 참으로 복됩니다."

타냐의 말에 또다시 카이루스의 표정이 우울해진다.

"너… 설마 자기에게 두 사람 몫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카이루스의 질문에 즉시 잔다라가 타냐를 향해 다소 살벌한 어투로 말했다.

"그딴 소리를 한다면 즉시 반으로 쪼개 두 명으로 만들어주마."

잔다라의 살벌한 말에도 불구하고 타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외동딸인 저 이외에 이 세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그러니 제 몫만 챙겨주시면 족해요."

"신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내가 교회의 사제 나으리들에게 들은 강론과는 다른데."

에릭슨의 딴지에 타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저예요. 제가 여러분을 걱정하고 있으니, 아버지도 여러분에게 가끔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타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그 말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타냐 라이샌드가 베넷 시로 오게 된 이유는 분명 승천교 교황청의 이단심문관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점이다.

"어쨌든 현장에서 공사하는 사람은 다섯이 전부라는 거잖아."

다행히, 카이루스가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겪은 무수한 일들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핵심을 정확히 짚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사람이 많으면 나눠받는 몫이 준다고. 그리고 다섯 명이면 충분하니까 다섯 명만 모은 거다.

봄달래가 제대로 된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건 아니다. 봄달래가 계속 수화기를 통해 말을 이어간다.

― 애초에 열차강도라는 건 숫자로 밀어붙여서 성공하는 일이 아니야.

발로른 제국의 국세 수송단을 습격하는 일이지만, 어차피 일행의 목표인 세금의 수송은 기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 열차를 털어먹는 절차는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는 편이지.

열차 시간을 확인한다 ― 노선을 확인한다 ― 해당 노선의 철로 중 인적이 드문 곳을 체크한다 ―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철로를 박살 낸다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녀석들을 죽이고, 값나가는 것들을 챙긴 다음 도망친다.

― 일반적인 열차강도와 차이점이 있다면 굳이 기차칸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승객들로부터 돈을 뜯어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봄달래의 말에 곧바로 다니엘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기찻길이 박살 난 걸 보는 순간 기차 안에 대기 중이던 발로른 제국군이 모조리 경계 태세에 들어갈 테니까."

승객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죄다 무기를 들고 우리를 찾아올 테니까.

그게 좋은 일인지는 솔직히 여기에 모인 다섯 명 모두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제국군은 '적이 일당백이라면 100명의 병사를 때려박고, 일기당천이라면 1,000명의 병사를 때려박으면 된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열차를 터는 카이루스와 그 협업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병사들의 실력은 형편없어도, 숫자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들이 열차를 털면서 맞이하게 될 진짜 위협은 제국병 따위가 아니다.

"발로른 제국 기사들은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야."

제국병을 고기방패로 던져주고, 그사이 배틀기어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전장을 휘저어 승리를 가져온다. 이게 발로른 제국 전략의 기초적인 골자다.

고로, 제국의 기사들은 그 직책에 어울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의 전투력과 사기는 아이란 공화국의 병사들이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기사단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제국 기사들의 실력이 공화국 기사들보다 더 뛰어난 편이니까."

22화 가짜와 진짜

* * *

제국 기사가 공화국 기사보다 실력이 우수하다. 카이루스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사 양성의 역사가 발로른 제국이 더 오래되었으니까. 그동안 쌓아놓은 경험과 노하우의 양과 질에 차이가 있다.

거기에 더해….

"아이란 공화국이 1,000명의 병사에게 할당한 예산을 발로른 제국은 기사 한 명에게 때려박으니 당연한 거지."

다니엘의 말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밥을 먹인다고 쳐도 공화국 병사 1,000명이 먹을 밥을 제국 기사 혼자 다 퍼먹는다는 뜻이다.

약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기사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고견을 좀 들어보고 싶은데."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대답했다.

― 기차에 탑승하는 기사들 중 하나가 여자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거든? 고로 거기에 있는 소피아라면 그 녀석을 꼬셔서 그 기차에 한 자리 얻어 탈 수 있을 거야. 그럼….

카이루스는 봄달래의 계획에 대한 설명을 계속 듣는 동시에, 작은 의문을 하나 가졌다.

소피아? 소피아가 누구지. 여자 이름 같은데. 하지만 여기에서 자기소개를 한 사람 중에는 소피아가 없다.

카이루스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가는 여자의 시체에게 향한 다음, 곧이어 에릭슨에게 향했다.

"혹시 내가 죽인 네 애인 이름이 뭔지 물어본다면 실례가 될까?"

카이루스의 말에 에릭슨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대답했다.

"소피아다."

― …이봐, 지금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소피아가 뭐?

봄달래는 지금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사람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가 입맛을 다시고는 대답했다.

"그 여자를 밝히는 기사라는 작자가 죽은 여자도 밝히는 게 아니라면, 다른 계획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어지는 카이루스의 설명을 들은 봄달래가 끄으, 하는 소리를 냈다.

― 야, 거기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필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냐?

"당연히 그런 생각 정도는 했지. 하지만 그게 대뜸 날 찌르려는 녀석을 살려둘 이유는 아니야."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었는데 상대보다 약하다? 그럼 역으로 죽어야지. 카이루스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하지만 계획이 망가진 건 내 책임이 크니까… 보자, 내가 좀 더 어려운 역할을 맡지."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대답했다.

― 그렇다면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어디 보자… 기관차에는 보일러의 검댕이나 재를 청소할 청소부가 필요하거든.

카이루스가 작게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위장해서 들어가라는 소리 같은데."

기관차를 움직일 석탄을 넣는 것과는 달리 보일러와 연소실 내부를 청소하는 건 단순 노동이라서 전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끊을 예정인 선로에 도착하기 전에 해당 기차는 정비를 한 번 받을 예정이다."

거기에서 원래 고용된 노동자 대신 카이루스가 슬쩍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된다.

"나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 녀석들의 식사에 특별한 향신료 정도는 첨가해 줄 수 있겠지?

카이루스는 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의학은 오랜 시간 공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야 하는 분야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이 사람들 중에는 관련 지식에 제법 해박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환자라는 점이 문제지만."

카이루스가 타냐를 보자, 타냐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아버지의 보살핌을 갈구하는 환자들이랍니다. 스스로의 처지를 아는 것은 병세 호전의 첫걸음이지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면서도 저러는 거 아닐까? 카이루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자신의 양 눈썹을 오른검지로 한 번씩 두들긴 다음 질문했다.

"타냐 라이샌드,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처방되는 진통제 중에 제일 강한 게 뭐야?"

카이루스의 질문에 타냐가 마찬가지로 성호를 그으며 대답했다.

"디오제릴이죠. 산제 및 구강정 형태가 있어요."

타냐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어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또는 바이알 한 병을 생리식염수 2번 규격에 혼합해, 12초에 한 방울 떨어지도록 조절해 투여할 수도 있어요. 천식환자 및 만성 폐질환 환자의 경우…."

"잠깐만, 그런 것보다 치사량은?"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저런 지식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타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10mg."

"맛이나 향은?"

"맛은 쓰고, 향은 없는 무색의 결정이에요. 베넷 시 밖에서 구하려면 의사 자격증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건 베넷 시 밖의 일이다. 베넷 시에서 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빈민가에 있는 주사옥에서 한 방 맞을 수 있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니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카이루스는 이제 놀라는 것도 지쳤다.

"왜 아니겠어."

개판으로 굴러가는 이 도시에서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거다. 의사의 처방 같은 거 없이 치사량 이상을 구하는 건 돈만 주면 가능하지.

어쨌든, 구강정 형태가 있다는 건 입으로 먹어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쓴맛이 있다고는 하지만 매우 소량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과다 복용 시 부작용이 궁금한데."

구토와 설사를 하며 동서남북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비명 지르는 게 부작용이라면 사용할 수 없다. 먹은 사람 상태가 이상해지는 게 너무 티가 나게 되니까.

"호흡억제 및 실신이 가장 큰 부작용이죠. 의존성도 굉장히 심한 편이지만 그런 게 궁금한 건 아니신 것 같고."

호흡억제와 실신이라면, 자는 것처럼 죽어버린다는 뜻이다.

추후 부검을 하면 독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지만 별로 신경 쓸 만한 사항은 아니다.

어차피 세금털이 자체가 사형 아니면 노동교화소행인데, 거기에 독살이 추가로 더해져봤자 형량이 크게 변할 리는 없다.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네요."

음식에 약을 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먹는 식사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기에 약을 어디에 타야 할지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땅콩이나 귀리, 감자 따위를 빼면 전부 기사들 먹일 식재료겠지요."

기사들이 먹는 식사는 최전선이라고 해도 최소한 염장 또는 훈제한 고기 1.5kg과 야채 통조림, 커피 또는 차 마지막으로 감미품이 건빵과 함께 제공된다.

최악의 경우에도 기사들에게 저 정도는 먹여야 한다고 아예 군법으로 박아놓은 거다.

"그런 거 먹으면서도 건빵이 딱딱하다고 불만을 건의한다지?"

에릭슨의 말에 카이루스가 작게 혀를 찼다.

"뭐어, 건빵이 딱딱하긴 하니까."

벽돌로 건빵을 내려치면 일반적으로 건빵은 멀쩡하고 벽돌이 박살 날 정도다. 불만을 가질 만하다.

여튼, 기사들이 먹을 음식을 찾아내 약을 섞는 건 일도 아니다.

"전시 상황이 아니니까 식단표도 짜여져 있을 테고."

그럼 그 식단에 맞춰 기사들이 먹을 음식에 약을 타면 된다.

"디오제릴은 강력한 진통효과만큼이나 진정효과도 강렬해요."

치사량을 먹고 죽지 않아도 괜찮다. 진정효과는 좋게 표현한 거고, 좀 안 좋게 표현하면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거다.

차라리 각성효과가 있다면 모를까, 강력한 진정제를 치사량까지 복용한 상태로 싸우는 건 굉장히 어렵겠지.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한번 해보자고."

필요한 약을 구하고 분량을 조절하는 건 관련 분야 종사자인 타냐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저 녀석은 따로 움직이게 되는 건가?"

에릭슨의 말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위장해 열차에 탑승해야 한다. 당연히 다른 녀석들과는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굳이 그걸 재확인하는 에릭슨의 의도가 궁금하긴 하다.

'어차피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모인 것도 아니지.'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단 하나다.

돈.

그리고 일단, 에릭슨이 최소한 이번 일을 진행하는 동안 카이루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 자, 그럼 이제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아야 하니 서둘러.

계약서를 통한 장미정원의 보증.

에릭슨이 제아무리 카이루스에게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어도 계약에 동의하게 되면 최소한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개수작을 부릴 수 없다.

물론 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카이루스에게 위해를 가하려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카이루스 또한 더 이상 에릭슨을 살려둬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

위해를 가하려는 순간, 애릭슨도 자신의 전 애인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다.

― 좋아, 그럼 다음의 내용에 모두가 동의하는 거 맞나?

시간이 좀 흐른 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이제 장미정원의 보증만 받으면 된다.

― 장미정원에서 사람이 한 명 올 거야. 미리 부탁을 해두었으니 곧 올….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호쾌하게 열렸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열린 문 쪽으로 쏠렸다.

"다들, 좋은 저녁!"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알록달록한 천을 이어붙여 만든 정신 사나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쓰고 있는 챙이 넓은 모자에 다양한 색의 막대와 구슬이 금실로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구슬과 막대가 서로 부딪칠 때마다 종소리 비슷한 게 울려퍼진다.

한마디로, 요란한 복색의 남자였다.

"자기소개를 하고 싶은 마음은 살짝 접어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갑작스럽게, 녀석이 테이블 중앙에 나이프를 하나 박아넣었다.

그는 곧이어 오른손으로 피젯 스피너를 회전시키며, 모여있는 사람들을 슥 훑었다.

"카이루스라는 녀석이 누구인지, 소개를 부탁해도 괜찮은가?"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카이루스에게 쏠렸다. 기차를 털기 위해 일시적으로 뭉쳤을 뿐인 이들에게 카이루스의 정체를 감춰 줄 의리는 없으니까.

"찾는 카이루스 여기 있습니다."

카이루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애초에 모두가 다 카이루스를 바라보고 있는 판국에 정체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표님이 귀하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누구를 의미하는 건지 카이루스가 모를 리가 없다.

카이루스의 눈은 저 웃긴 복장을 한 남자의 오른손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피젯 스피너를 응시하고 있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

굉음과 함께 테이블이 뒤집히며 까앙, 하는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카이루스의 턱 바로 아래에서 단검의 칼날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다.

"너 이 새끼. 막아?"

칼날은 닿지 않았다. 카이루스의 왼손이 단검을 쥐고 있는 상대의 손을 꽉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루스가 뽑아서 휘두른 검은 상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왜 안 피하시나 의문이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으셨네요."

카이루스의 검은 알록달록한 정장을 가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했다.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이 마치 금속 같다. 살짝 힘을 더 주자, 칼날이 닿아있는 상대의 옆구리에서 금속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카이루스의 시선은 녀석의 오른손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피젯 스피너에 고정되어 있다.

"그 장남감은 배틀기어네요. 아마 유물 같고."

"눈썰미가 상당하시군. 감탄이 나올 지경이야.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지는데."

"애들 장난감 같은 모습으로 배틀기어를 제작하는 공장은 없지 않습니까."

피젯 스피너의 형태를 한 배틀기어라니.

효율성을 위해 무기의 형태만으로 제조되고 있는 현대의 배틀기어와는 그 형태부터 다르다.

방금 전 카이루스의 일격이 저 녀석의 살갗조차 베어내지 못한 건 저 배틀기어가 가진 고유한 힘 때문이다. 하지만 걸작이라고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물건은 아니다.

갑자기 상대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딱, 하고 치더니 몸을 덩실덩실 흔들며 과장된 포즈로 인사했다.

"아,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소개는 해야겠지. 장미정원 현장관리부 2팀장 기드온이라 하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직급이 있다는 건 간부라는 뜻이다. 카이루스는 장미정원의 간부에게 검을 휘두른 거다.

"이봐, 어쩔 거야. 응? 지금 이 자리에서 엎드려서 빌어보는 건 어때. 응?"

카이루스는 대놓고 자신을 협박하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봐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너무 무서워서 혀가 안 움직이나?"

"하여튼, 머저리 새끼 지랄하는 거 들어주는 것도 참 고역이라니까."

상대의 기대와는 달리 카이루스의 입에서는 모두의 간을 눈꼽만 하게 만드는 폭탄 발언이 흘러나왔다.

23화 가짜와 진짜 (2)

* * *

멍하니 서 있던 기드온이 눈을 껌벅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금 이 새끼가 한 말 들은 사람?"

기드온이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카이루스가 대답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이 굉장히 훌륭한 인격자시더라고. 이제부터 내가 뭘 할 건지 말해줄게."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기드온의 허리에 닿아있던 검을 천천히 회수했다.

"여기서 네 녀석 이마빡을 칼로 쑤시고, 장미정원으로 가서 그 사실을 밝힐 거야. 그리고는 장미정원에서 일하겠다고 맹세할 거다."

세실리아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싼 물건이 망가진 대가로 더 비싼 물건을 공짜로 얻게 되는 거다.

그녀가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기드온의 등을 타고 살짝 식은땀이 흐른다.

"길가에서 굴러먹던 주제에 날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군."

"지금 하고 있잖아. 어떻게. 눈에 의안 박아넣으셨나?"

기드온의 공격은 막혔다. 하지만 카이루스의 공격은 적중했다. 뭐, 지독하게 튼튼해서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상대의 공격은 닿지 않았는데 카이루스의 공격은 닿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서로 간의 실력차를 증명할 수 있는 결과가 또 있을까?

"…."

기드온도 그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 맞붙었던 사라와 비교하면 이 기드온이라는 작자는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 간부라고 다 같은 간부는 아닌 법이니까.

하지만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장미정원의 간부라는 걸 밝혔는데 여기에서 꼬리를 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민하는 기드운을 바라보던 카이루스가 이내 밝게 웃으며 검을 거뒀다.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 하지 마세요. 저같이 뒷배 없는 녀석들이 그런 협박을 당하면 오금이 쪼그라든단 말입니다."

기드온에게 던지는 말도 다시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체면 때문에 여기에서 꼬리를 말지 못할 테니, 카이루스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생존할 수 있다 해도, 그게 내 목표의 전부는 아니니까.'

장미정원의 구성원이 되어버린다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페더윙 가문의 부흥과 복수라는 카이루스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나 꿈보다, 조직의 목표를 더 우선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하… 하하하! 고작 이 정도 장난으로 놀라다니, 아직 멀었군 그래!"

카이루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기드온이 곧바로 카이루스를 향한 적의를 거두고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미친 척하는 정상인은 결국 말이 통하는 법이다. 카이루스의 시선이 슬쩍 타냐 라이샌드에게 향했다.

최소한 저 정도는 되어야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제가 나름대로 다양한 경험을 해봤거든요. 미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방식으로 미친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베넷 시는 범죄자들이 많고, 치안이 불안하다. 그건 카이루스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위험한 형태로 미친 또라이들의 비율?

그 지표만큼은….

베넷 시조차 칼슨 노동교화소를 따라잡지 못한다.

카이루스는 노동교화소에서 6년을 보내며 무수한 또라이들을 봐왔다.

"그래서?"

기드온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눈앞의 상대가 진품 또라이인지, 아니면 짜가리 또라이인지 순식간에 견적서를 뽑아내는 재능이 생겼죠."

카이루스는 기드온에게 한 발 더 다가간 다음,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기드온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과 저기에서 기도하고 있는 타냐 라이샌드라는 아가씨는 진품이에요."

하지만 지금 알록달록한 정장을 입고 피젯 스피너를 돌리고 있는 이놈? 이건 가짜다. 카이루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기드온 님은 죽기 싫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마주하면 두려움을 느끼죠. 돈과 예쁜 여자를 밝히고, 맛있는 거 먹고 쾌적한 곳에서 살고 싶을 테고."

그는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평범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 너는 어떤지 궁금한데."

기드온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웃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제가 자신을 강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가 미쳤는지 자력으로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거다. 자기가 미쳤는지 모르니까.

"약간 어수선한 형태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런 작은 모임의 계약을 보증하는데 설마하니 장미정원의 간부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당연히 기드온은 카이루스를 포함해 이 방에 있는 범죄자들의 계약을 보증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냥, 존경하고 경애해 마지않는 세실리아 롱호른 대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괘씸한 새끼가 있다고 해서 손을 좀 봐줄 생각으로 찾아온 거다.

장미정원에 들어가서 몇 년이나 충실히 일한 자신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크흠, 그래.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유에 대해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카이루스가 적절한 핑곗거리를 던져줬다.

기드온으로서는 카이루스가 던져준 걸 받아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있다.

머리에 화살 박힌 등신이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다. 베넷 시에서 눈치 없는 녀석들은 장수하지 못하는 법이다.

'장미정원의 간부가 카이루스에게 쫄았다.'

'팀장이라면 고위 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미정원의 간부인데 길바닥 굴러다니는 녀석에게 기세에서 밀렸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동시에,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자신이 알아차린 사실을 상황과 때를 봐가며 떠들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기드온에게 쫄? 같은 말을 하면 순식간에 뒈진다.'

'기드온은 카이루스에게 쫀 거지, 나한테 쫀 게 아니야.'

모두가 합의한 계약서의 내용을 기드온이 확인한다. 오랜 시간 장미정원에서 일했던 기드온이 계약 보증 절차를 모를 리는 없다.

이제 그런 일을 할 짬이 아니라고 해도, 그동안 쌓은 경력이 있으니까.

"이걸로 끝이다. 너희들이 맺은 계약은 장미정원에 의해 보장된다."

최초 등장할 때 인상 깊던 경쾌한 하이톤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의 요상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알록달록한 정장뿐이다.

저게 기드온의 평상시 모습이겠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배려에 감사드리는 의미로 식사라도 한 끼 사드리고 싶지만… 장미정원 간부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수도 없겠죠."

긴말을 짧게 줄이자면, 너한테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꺼지라는 뜻이다.

의도는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기드온이 당장 뭘 할 수는 없다. 결국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돌아갔다.

"자, 그럼 오늘 우리가 모였던 목적도 모두 이룬 것 같네."

이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이 만나서 반갑다고 맥주 한잔할 정도로 정겨운 사이는 아니다.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 카이루스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카이루스의 등을 에릭슨이 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에릭슨이다. 졸지에 애인을 잃어버렸으니까.

'저 녀석은 나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못해.'

에릭슨이 잃은 애인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면, 아니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면 카이루스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에릭슨에게는 다른 소중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자신의 목숨.

또는 이 일을 끝낸 다음 자신이 거머쥐게 될 목돈.

거기에 더해 그 목돈으로 할 수 있는 무수한 향락과 사치, 안락한 생활.

'애초에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액수가 나온 순간부터 죽은 애인의 시신에는 눈길도 거의 안 줬지.'

입으로는 계속 죽은 애인을 들먹이고 있지만, 기껏해야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애인이 죽었는데 돈 이야기를 듣자마자 군침만 줄줄 흘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에릭슨을 어떻게 평가할지 빤하니까.

카이루스는 업사이드의 밤거리를 거닐며, 에릭슨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서 최소한의 경계는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경계가 실질적인 위협을 상대하게 되는 일은 없을 확률이 높다.

"바로 준비해야겠네."

이번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카이루스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결국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을 통과하는 이동수단이다.

자칫 잘못하면 달리는 기차를 따라잡아야 하는 기깔나는 상황이 펼쳐진다.

다시 봄달래의 아지트로 돌아가자, 봄달래가 분홍색 찻잔에 들어있는 핫초코를 휘휘 젓는 꼴이 카이루스의 눈에 들어온다.

"거 좀 어울리는 잔을 사용하지 그래."

"이거 비싼 잔이야. 장인이 직접 도색한 거라고."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한 법인데. 카이루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넌 바로 출발해야 할 거야. 우선적인 목적지는 세인트 드빌 역."

휙 하고 날아온 봇짐을 받아들며, 카이루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세인트 드빌이라. 피나무꿀이 아주 기가 막히지."

카이루스가 어릴 적 쓴 약을 먹기 싫어할 때, 그의 어머니는 약을 꿀에 섞어주곤 했다.

쓴 약을 그냥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 꿀이 먹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못 먹겠다고 칭얼거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꿀이 세인트 드빌의 특산품이었다.

"또 옛날이야기냐? 거기 재개발해서 제국 방직공사가 세운 산업단지가 자리 잡았어."

이전에 있던 것들을 싹 다 밀어버린 다음 방직공장과 염색공장이 들어섰다는 것이 봄달래의 설명이었다.

카이루스의 입에서 미소가 확 사라졌다.

"그거참… 슬프네."

어릴 적 추억 속에 잠깐이나마 빠질 수 있는 물건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까.

"어쩌겠냐, 발로른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잖아."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비로운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고 땅을 '빌려서' 필요한 용도로 쓰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황제가 꺼지라고 명령하면 꺼져야 한다. 보상금 같은 건 한 푼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란 공화국이 더 살만한 것 같다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코웃음 쳤다.

"6살짜리 어린애가 일당 10드램에 15시간 일하다가 잠깐 졸아서 손을 다치는 순간 즉시 해고되는 나라가?"

아이란 공화국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자유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고, 이를 책임지는 건 오롯이 그 개인의 의무다.

따라서 하루 15시간의 노동을 하고 10드램을 받기로 자신이 선택했다면, 그 모든 책임은 그 사람이 감당한다.

모두가 자비로운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이기에, 최소한의 노동여건이 보장되어 있는 발로른 제국과는 사뭇 다르다.

봄달래와 헤어진 다음, 간단하게 짐을 챙긴 카이루스는 베넷 시를 떠나기 전에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주인 조나단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용된 입장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니 그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카이루스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세인트 드빌의 특산품을 더 이상 못 구하는 게 아쉽긴 하네요. 어디 보자… 이제 시간도 된 것 같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러던가."

조나단의 시큰둥한 대답을 끝으로 카이루스는 식당을 나섰다.

24화 귀족놀이

* * *

우선 해야 할 일은 위장이다. 위장에 필요한 도구와 노하우는 봄달래의 도움을 받았다.

봄달래는 정체를 감춰야 하는 건축사였기에, 위장에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는 법과 노하우에 능통한 편이었다.

가발을 쓰고, 뺨에 흉터를 만들고, 가짜수염을 달고, 피부색을 바꿨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거다.

이후, 베넷 시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탑승한 카이루스는 세인트 드빌 역에 도착했다.

세인트 드빌.

장기노선을 경유하는 기차들이 베넷 시를 떠난 다음 정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역이다.

쀄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마구 뿜어내며 기차가 멀어진다.

역에 내린 카이루스는 주변을 살펴보며 혀를 찼다.

공장이 잔뜩 들어섰다고 하더니, 확실히 양봉업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세상에, 물색이 무지개색이잖아. 머리 속까지 알록달록해지네."

발로른 제국이 노동자들의 삶의 여건을 최소한으로나마 보장해준다고 하지만, 그건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을 즐길 권리까지 보장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매캐한 연기가 대낮에도 유령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다.

강물에는 요상한 색의 기름이 떠 있거나, 아니면 수상할 정도로 알록달록하다.

카이루스는 강물을 타고 퍼져나가는 구역질 나는 냄새에 살짝 인상을 구겼다.

세인트 드빌의 방직공장들이 오폐수를 그대로 물에 방류하는 중이겠지. 어쨌든, 세인트 드빌의 물과 공기는 이 지역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지 카이루스의 알 바는 아니다.

카이루스가 여기에 온 것은 내일 오전 중으로 도착할 예정인 기차 때문이니까.

"봄달래가 말한 대로군."

그리고 벌써 기차역 주변에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치안대원과 군인들로 가득했다.

내일 세금을 잔뜩 적재한 기차가 오니까, 이들이 기차역의 경계를 강화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신분증."

"고생 많으십니다. 여기 있습니다."

카이루스는 순순히 그들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어차피 위조된 신분증이다.

베넷 시라면 신분증과 함께 뇌물도 바쳐야 했겠지만….

지금 카이루스를 수색하고 있는 치안대원은 베넷 시의 치안대원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리고 베넷 시에서 제값을 주고 위조한 신분증은 그 정교함이 기가 막힌 수준이다.

"신원 확인 끝났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죠? 갑자기 이렇게 삼엄하게 경비하다니."

카이루스의 말에 치안대원이 대답했다.

"평범한 제국 신민이 알아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서 볼일을 보도록. 현재 이 역에는 2급 경비태세가 내려져 있으니,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슬렁거리지 마라."

2급 경비태세가 내려진 장소를 지키는 치안대원이나 군인들은 임의로 거수자를 체포할 권한이 부여된다.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경계태세가 내려진 곳에 얼씬거리지 않는 편이 좋다.

'슬프게도 나는 얼씬거려야 할 이유가 있지.'

그것도 가장 경비가 삼엄해지는 시점인, 세금이 적재된 기차가 도착하는 바로 그 순간 기차역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시점이 되면 기차역에 일반 제국 신민들의 통행은 엄격히 금지될 거다.

최종적으로 기차에 타는 순간에는 청소부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다른 복장을 해서 기차역 내부로 진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치안대원이나 제국군 군인으로 변장하는 게 가장 확실한 길인데."

카이루스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24시간 동안 계속 똑같은 병사들이 줄창 경계를 서는 건 아니다.

교대 근무를 서고 있을 거다. 녀석들 중 하나로 위장하는 게 가장 깔끔하게 기차에 진입하는 방법이라는 건 확실하다.

'말로만 하면 다 쉬워보이지.'

쉬운 방법이 아니다. 아니, 쉬워 보이기만 할 뿐이지 실행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징병제로 끌려온 제국병들은 같은 부대 소속일 경우, 한 병영에서 몇 년이나 같이 생활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복장 빼앗아 입고 투구로 얼굴 좀 가리는 정도로 그들을 속이겠다는 건,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겠다는 미친소리와 다를 게 없다.

"아, 이건 도무지 방법이 안 보이는데."

될 것 같지가 않다. 카이루스는 잠깐 벽에 기댄 채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잠깐만, 내가 아주 잘할 수 있는 역할이 하나 있긴 하지."

귀족.

다른 연기라면 몰라도, 귀족 연기는 평범한 제국 신민들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딱 보면 티가 나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었건, 아니면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건, 어떤 지위에 오르게 되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싶어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국 귀족들의 예법이다.

소위 말하는 아랫것들을 마주했을 때에는 지키지 않지만,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반드시 지키는 예절이다.

그래야 어정쩡하게 귀족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졸부들을 걸러내고, 갓 귀족이 된 신생 가문의 기를 죽여놓을 수 있으니까.

카이루스는 세인트 드빌 역에 비치되어 있는 공용 전화를 통해 봄달래에게 연락했다.

― 미친 자식아. 공용 전화 쓰는데 비용이 얼마나 깨지는지 알고는 있냐? 전화를 건 이유가 있어야 할 거다.

카이루스는 봄달래에게 빠르게 상황과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곧이어 요청 사항을 전달했다.

"우선 좋은 옷이 필요해."

― 그렇겠지. 귀족 행세를 할 생각이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페더윙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이루스가 귀족 행세를 하는 건 귀족 행세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어쨌든, 봄달래의 말대로 지금 카이루스의 복색으로 귀족 행세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좋은 옷,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가문의 인장으로 장식된 물건. 회중시계여도 좋고, 안경이나 단추, 또는 넥타이핀이나 손수건에 놓은 자수 같은 것도 문제없어."

― 가문의 인장이라.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써먹을 수 있는 게 있으니 이렇게 부탁하는 거지."

페더윙 가문의 인장을 쓸 수는 없지만, 카이루스가 알고 있는 귀족가문의 인장은 한두 개가 아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약간 못 미더운 어투로 대답을 돌려준다.

― 네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옛날 일들이 많던데. 그 가문의 인장이라는 것도 혹시 네가 모르는 사이 바뀐 것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발로른 제국 귀족들은 선조계승의 원칙에 목숨을 거니까."

카이루스의 말을 들은 봄달래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모르는 모양이다.

이 원칙을 모르는 걸 보면, 봄달래는 발로른 제국 출신이 아니거나, 최소한 귀족 가문의 사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가문의 조상들이 정하고 행한 가문의 전통을 보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코웃음을 쳤다.

― 아, 들은 적 있는 것 같아. 제국 귀족이라는 것들은 밥 처먹을 때 쓰는 연장도 수십 개라지?

"뭐, 그런 가문도 있긴 하지."

발로른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면, 심지어 제국의 신민이어도 귀족이 아니라면 대부분 선조계승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그런 원칙이 제정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 글쎄,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 확실하냐? 원래 사람이 큰돈이 걸리면 체면이고 예의고 다 때려치는 법이야.

카이루스는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바로 그 큰돈 때문에 귀족들이 선조계승의 원칙에 몰두하는 거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일수록, 오랜 세월에 걸쳐 선조들이 쌓아올린 유산이 어마어마해."

― 그렇겠지.

"그리고 그 유산을 탐내는 무수한 방계, 또는 자신도 그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겠지."

어떻게 한번 비벼서 후손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면 평생 먹고 놀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시도해보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선조의 유산을 소유하려면, 그 선조를 계승한 가문이 자신들이라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겠어."

― 그래서, 선조계승인지 뭔지 하는 게 바로 그 증거로 작용한다?

"그래. 잘 알아먹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소유하는 건, 그 전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가문으로 한다.

대충 말이 되는 소리 같긴 하지만… 이 원칙이 참 놀라운 상황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선조의 묘소에 개량종의 장미를 헌화하던 가문이, 재래종 장미를 헌화하던 방계에게 재산을 싸그리 털리고 깡통을 차게 된 사건도 있을 정도니까."

과거에 선조의 묘에 헌화되던 장미는 재래종이었다는 방계의 주장이 통한 거다.

관련 사례까지 듣게 되자, 봄달래는 제국 귀족들이 보수적인 꼰대라서 과거 전통을 유지하려고 드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 가문의 인장은 절대 못 바꾸겠군.

"못 바꾸는 정도가 아니지. 다른 가문의 재산을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저 원칙을 활용하는 방법일 정도니까."

고작 묘소에 바치는 장미 하나 잘못 올렸다고 전 재산이 털리는 경우도 있는데, 아예 가문의 인장을 바꾼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좀 적나라하게 말하면, 경제라는 분야에 한정해서 페더윙 가문과 같은 꼴로 굴러떨어지는 지름길이다.

"전화가 길어지긴 했는데, 어쨌든 요점은 가문의 인장이 바뀌었을 일은 절대로 없으니 내가 말하는 걸 준비해주면 된다는 거야."

카이루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빠르게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 알았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보내지.

"그래, 부탁 좀 하자."

카이루스는 곧바로 전화를 마치고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확인했다.

그가 이 통화를 한 덕분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무려 98파인트였다.

"환장하겠네. 뭐가 이렇게 비싸?"

제아무리 전화회선이 귀하다고 하지만 이건 거의 날강도 수준이다.

봄달래가 자기 집에 전화를 설치하는 데 성공한 건 엄청난 일이었다. 정작 본인은 '돈 내고 기다리면 된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지불해야 하는 금액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엄청났을 거라는 점은 카이루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전화를 몇 대씩 설치해두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베넷 시에서는 운용위원회 정도의 위치가 아니라면 힘들지 않을까.

하긴, 6년 전에는 심지어 페더윙 가문에서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물건이니까. 6년이 지난 지금 법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전화회선을 까는 건 어려운 일이다.

"뭐어, 나중에는 전화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지도 모르지만."

회중시계 비슷하게.

카이루스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는 픽 웃은 다음, 이번에 그가 위장하기로 한 귀족 가문에 대한 것을 천천히 떠올리며 속으로 정리했다.

인장과 인사말, 식사를 하는 순서와 식사 때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들….

"머리 나쁘면 귀족도 못 해먹는다니까."

이런 걸 다 기억하려면 당연히 머리도 좋아야 한다. 카이루스는 어릴 떄 이 무수한 정보들을 다 외우다가 밤새도록 울기도 했었다.

그때는 지옥같이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페더윙 가문의 경우, 가문의 후계자로 내정된다면 거기에 더해 높은 검술실력까지 요구하니까, 더욱 빡세다.

역 근처의 저렴한 여관에 방을 잡은 카이루스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한층 더 조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봄달래가 보낸 물건이 도착하면 귀족이 되어야 한다. 그 전에 이렇게 저렴한 복장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얼굴을 팔면 나중에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된다.

"맛스튜 하나."

카이루스는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여관 근처에 위치한 노점식당으로 찾아가 음식을 주문했다.

무지막지한 사이즈의 솥에 담긴 내용물을 삽으로 휘젓고 있던 남자가 카이루스를 위아래로 훑은 다음 말했다.

"1.5 파인트."

카이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1파인트 지폐 한 장과 1/2 파인트 가치를 지닌 동전 한 개를 내밀었다.

돈을 확인한 다음, 솥을 휘젓고 있던 남자는 양철 그릇에 솥 안의 내용물을 채운 다음 카이루스에게 내밀었다.

"맛스튜라. 이딴 게 진짜 존재하는 음식이었다니."

노동교화소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이야기로만 전해들었던 음식이다. 쉽게 말해 아무거나 다 처넣고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 동안 끓인 스튜다.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저렴한 가격으로 끼니를 떼우기 위한 목적으로 먹는 음식이다. 양철 그릇에 한가득 퍼주는데도 불구하고 가격은 1.5 파인트니까.

게다가 카이루스 같은 경우에는 음식의 위험한 요소를 걸러주는 사낭 덕분에 식중독을 걱정할 필요 없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청한 물건을 봄달래가 보관해두겠다고 한 장소를 확인하러 갔다.

25화 귀족놀이 (2)

* * *

"화장터라."

온 천지가 매연에 뒤덮여 있다고 해도, 시체 타는 연기까지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사람들은 없으니 도시 외곽에 위치해있고, 오가는 사람도 적다.

설사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마주한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고 있기에 카이루스 같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를 숨기기에는 딱 좋다. 아이란 공화국이라면 사람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자기 집 근처에 화장터가 들어서는 걸 막아서겠지.

하지만 나라의 모든 것이 황제의 소유인 발로른 제국에서는 국민의 불만이 나랏일을 방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여긴데."

배틀기어를 활용하는 카이루스가 병영이나 치안대도 아닌 화장터 따위를 몰래 들어가지 못할 리가 없다.

"4번 화로가 어디에 있더라."

카이루스는 화로 번호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화로를 열었다.

4번은 별로 좋은 의미가 있는 숫자가 아니기에, 보통 다른 화로가 남아있다면 이 화로를 쓰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화로 안에 몰래 물건을 보관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발견될 일이 적다.

"아, 이미 도착했잖아. 빠르네."

화로 내부를 뒤적거리던 카이루스는 상자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국 귀족의 신분증을 위조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에 신분증은 이 소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상관없다. 귀족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면, 이미 상대가 귀족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카이루스는 물건을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놋쇠 단추를 단 더블 블레이저와 드레스 셔츠, 슬렉스와 캐슬 로퍼.

"젊어서 다행이지. 진짜."

30대 이전의 젊은 귀족은 이 정도만 차려입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귀족들이 격식과 예의를 중시하기는 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시 해야만 하는 게 있지.

황제.

"그 개새끼의 삽질이 이번 일에는 도움이 되었군."

지금의 황제는 젊을 적 외출 시, 정장 입기를 굉장히 귀찮아했었다.

그러다 결국 지금의 카이루스와 비슷하게 입은 다음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입어도 격식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결정했다.

그 선언 이후 30대가 되기 전의 귀족들은 이런 간략화 된 복장을 입어도 괜찮게 되었다.

즉, 카이루스의 위장이 성공여부는 주문한 인장이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하게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이 정도면…."

카이루스는 지팡이 끝에 달린 주석 손잡이를 확인하고 작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부탁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림 같은 걸 그려서 보여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제대로 된 물건이 올 줄은 카이루스도 몰랐다.

"드미트리 가문."

인장은 울부짖는 늑대머리. 주석을 사용해야 하고 오른쪽 눈에는 사선으로 흉터가 하나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위턱에 달린 한 쌍의 어금니를 강조한다.

늑대의 눈은 녹색인데 직계는 에메랄드를, 방계는 페리도트를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이제 연기 시간이구만."

화장터를 벗어난 카이루스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동안 유지하던 위장을 바꾼 다음, 세인트 드빌 역으로 향했다.

"저기, 나으리."

입고 있는 복색과 자세만으로도 역을 지키고 있던 치안대원의 태도에 현격한 차이가 생긴다.

"음, 나 말하는 건가?"

카이루스는 걸음을 멈추고는 지팡이를 왼손으로 가볍게 쥔 채 치안대원을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세인트 드빌 역은 현재 출입이 불가합니다."

"여기가 세인트 드빌 역이라 그거지? 좋아. 그럼 내가 제대로 온 것 같구나. 앞장서도록."

방금 전 치안대원이 한 말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 귀족들이 아랫것들 대하는 일반적인 자세다.

오히려 카이루스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치안대원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싹퉁바가지 없는 젊은 놈이 귀족가의 자제라는 점에 서서히 확신을 가지게 되는 중이다.

"어디로… 모시라는 말씀이신지."

하지만 그 확신이 치안대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귀족이라면 치안대원이고 뭐고 간에 결국 이 젊은 자식이 시키는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어디긴 어디겠냐. 네가 소속된 부대의 임시 지휘소. 속히 안내하거라."

카이루스가 턱짓과 함께 치안대원의 엉덩이를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툭 쳤다.

산책 나온 강아지 취급 비슷한 걸 받아버린 치안대원이었지만, 카이루스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없었다.

아마 지금 중대장 및 소대장은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운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중대보좌관님은 이런 경우를 여러 번 당해봤겠지.'

중대보좌관은 10년 넘게 치안대에서 지냈다. 당연히 귀족들을 비위도 잘 맞출 거다. 빠르게 중대보좌관에게 이 귀족 나으리를 넘기고 도망쳐야 한다.

치안대원은 그렇게 속으로 결론 내린 다음, 순순히 세인트 드빌 역 내부의 임시지휘소로 카이루스를 안내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인해 대접이 소홀했던 점을 먼저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카이루스가 잠깐 밖에서 대기하는 사이 치안대원이 임시 지휘소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한 모양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지휘소의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나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살짝 말을 끌었다.

이름을 모르니 말해달라는 뜻이다.

"랄로프 드미트리."

방계이긴 하지만, 실제 드미트리 가문의 구성원 중 하나다. 오히려 방계인 점이 지금 상황에서는 더 좋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귀족 가문의 직계 이름을 전부 기억하기는 힘들다.

사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다른 가문의 후계자와 가주의 이름 정도만 기억해둔다.

다 외우려고 하면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무수한 이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교화소를 나오자마자 가명부터 만들었겠지.'

직계의 이름도 후계자가 아니라면 모를 정도인데, 심지어 방계의 영역까지 넘어간다면 '그런 사람이 있나?'라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의문이라는 건 뭐라도 좀 아는 게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의문도 생기지 않는다.

"명성 높은 드미트리 가문의 랄로프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빈을 응접하기에는 제 신분에 흠결이 많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귀족이 올 거다. 중대장이 직접 올 가능성은 낮고, 아마 그 휘하의 소대장 중 하나가 오지 않을까.

"알았네, 그럼 자네는 커피나 한잔 내오지?"

카이루스의 말에 곧바로 중대보좌관이 바로 커피를 탄다.

치안대원부터 시작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틴 끝에 중대보좌관이라는 직책을 받았지만, 귀족 앞에서는 그저 평민일 뿐이다.

카이루스는 커피를 타고 있는 중대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태도인데 말이야.'

사실, 카이루스도 평민을 아예 같은 종 취급하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는 노동교화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쭉 그렇게 살았다.

카이루스가 태어날 때부터 쭉 함께했던 상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성의 감정이 스멀거리고 있다.

'똑같이 밥 처먹고 똥 싸는 주제에 참 오질라게도 깝치며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카이루스 앞에 커피가 놓였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이제 갓 10대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나가 있어."

아마 자기보다 나이 2배는 더 먹었을 것이 분명한 중대보좌관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하는 걸 보니, 저 친구는 귀족이 확실하다.

역시, 귀족은 그 행동만 봐도 티가 나는 법이다. 중대보좌관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마자 상대가 카이루스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초면이지요? 제롬 레니게이드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귀족들이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건 오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한정된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랄로프 드미트리입니다."

카이루스는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제롬에게 건넸다. 손수건에는 랄로프 드미트리의 이름이 자수로 새겨져 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롬 레니게이드 또한 자신의 이름이 자수로 놓아진 손수건을 카이루스에게 건넨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알아보기 위해 주고받는 거다. 아이란 공화국에서 사용하는 명함과 비슷하다.

손수건은 하얀색이어야 한다. 자수는 크기 12, 굵기 3번의 검은색 제국 표준필기체를 사용해 손수건의 왼쪽 아래에 수놓는다.

"이렇게 인연이 닿게 되어서 기쁘네요."

카이루스는 받은 손수건을 접으며 말했다. 상대로부터 전달받은 손수건은 정해진 방식으로 접은 다음 안주머니에 넣는다.

귀족 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여기에서 걸려 넘어진다.

'사실상 말이 귀족이지 비밀결사라니까.'

배타적인 지위를 누리고, 그 지위에서 오는 권리를 타인과 공유하기 싫다는 욕심을 갈고 닦아 탄생한 예절이다.

예의범절의 목적 자체가 상대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너 진짜 귀족 맞아? 흉내 내는 거 아니야?' 라는 의심의 뜻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귀족이 서로 초면일 경우, 약 20분 정도는 이러한 검증절차와도 같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예전에는 이 절차가 스스로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즐거운 일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이 모든 행위를 하며 카이루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한 가지였다.

'산책 나온 개들이 초면에 서로 엉덩이 냄새 맡는 거잖아.'

어쨌든, 검증절차를 마치고 나면 그 이후에 지켜야 하는 예의는 상당히 널널해진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이 절차를 수행했었기에,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끝낼 수 있었다.

"드미트리 가문에서 이 먼 길까지 오신 이유가 뭔지 여쭤보고 싶은데요."

카이루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이마를 엄지로 한 번 누른 다음 그 엄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공식 문서가 없는 황명이라는 뜻을 가진 신호다.

교지가 있다면 황제폐하의 지시라고 당당하게 밝히면 되지만, 교지가 없을 경우에는 황제가 지시한 일이어도 황제가 지시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황제의 잘못이 아니게 되니까.

"이번에 세인트 드빌을 경유하는 국세 수송 열차 말입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제롬이 아,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작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쉰다.

"세간에서 뒷말이 나오고 있는 중이긴 하죠."

여기에서 말한 세간은 진짜 동네 사람들이 술집에서 떠도는 헛소문이나 싸구려 신문의 가십거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클럽하우스에서 오가고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제국의 녹봉을 받는 자들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카이루스는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뭐,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거기에 맞춰 계획을 살짝 틀어줘야 할 필요가 생겼다.

원래 현장에서는 계획만큼이나 임기응변도 중요한 법이니까.

"안 좋은 소문은 선량한 사람의 평판을 해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모든 일은 모름지기 확실한 게 좋지요."

"동감입니다. 소문이 생각보다 더 만연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카이루스는 황제가 사적으로 세간에 도는 소문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이곳으로 보낸 귀족으로 둔갑하는 데 성공했다.

장군의 군복을 빼앗아 입은 적군에게 속아 정체도 확인하지 않고 지휘부 문을 열어주는 꼴이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이 무례라고 생각하는 관습과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훌륭한 합작품이었다.

제국 국세청에 관해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카이루스도 알게 되었다.

귀족들 사이에 오가는 소문은 물론 신뢰도가 높다지만, 당장 카이루스가 신경 쓸 여유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그걸 빌미로 여기에 머무르며 기차가 올 때까지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설사 지금 눈앞에 있는 제롬이 카이루스를 의심해도 상관없다.

26화 귀족놀이 (3)

* * *

'제깟 것이 어떻게 확인할 건데. 황제에게 전화라도 걸 거야?'

레니게이드 가문의 상징은 사슴이다. 직계는 머리가 둘 달린 사슴이고, 방계는 머리가 하나다.

그리고 제롬은 머리가 하나인 사슴 인장을 몸에 지니고 있다. 방계라는 뜻이다.

평민들 앞에서나 콧바람을 뀔 수 있지, 직계 앞에서는 설설 기어야 한다.

게다가 레니게이드 가문은 그렇게 권세 있는 귀족가도 아니다.

페더윙 가문과는 감히 비교할 깜냥도 안 된다. 아이란 공화국을 예로 들자면 동장과 대통령 수준의 차이가 있다.

'페더윙 가문이 누명을 쓰고 멸문당하지만 않았다면….'

제롬 정도의 귀족들은 허리를 바짝 숙이고 숨도 허락받아가며 쉴 정도로 카이루스 앞에서 몸을 조심해야 했을 거다.

"그럼, 일단 치안대 지휘계통을 통해 상황을 전한 다음 관련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카이루스는 그에게 인사한 다음, 역사 내에 준비된 임시 숙소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제롬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아예 의심을 놓은 건 아니다 그거지.'

제롬도 병신은 아니라서, 혹시나 하는 의심은 계속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문제는, 사람이 의심을 하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아무리 치밀하게 의심하고 검증해도 의미가 없는 법이다.

제롬의 모든 의심은 '귀족이 아닐 수도 있어.'라는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마침 식사 시간인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초청에 감사합니다. 기꺼이."

보통이라면 제롬의 방법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

상대가 카이루스만 아니었다면, 수상한 사람을 골라내는 거름망으로써의 역할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려내는 필터로는 카이루스를 걸러 낼 수 없었다.

"맛이 좋네요. 제국의 치안을 책임지는 치안대에 대한 황제 폐하의 관심이 잘 느껴집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다음, 디저트로 나온 차와 블랙베리 타르트를 먹으며 카이루스가 말했다.

"말이나 개처럼 별거 아닌 일을 하고 있는 저희들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항상 감사한 일이지요."

제롬이 카이루스의 말에 대답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제롬은 카이루스에게서 수상한 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드미트리 가문이 이 정도로 후손 교육을 잘 시키는 가문이었나?'

오히려 제롬이 배워야 할 점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식사가 중반 즈음에 들어서자, 제롬은 오히려 자신이 뭔가 실례를 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행동을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겠군.'

결국 제롬은 카이루스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야, 카이루스는 페더윙 가문의 직계니까.

'내가 비록 가문의 후계자는 아니었지만, 받는 교육의 양과 질이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랐어.'

카이루스도 그런 제롬의 생각 변화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롬의 생각 흐름은 간단하다.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고? 귀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귀족은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자신이 황제의 명을 받았다는 말을 거짓으로 꾸밀 리 없다.'

고로, 카이루스가 귀족이 맞는지만 확인하고, 귀족이라는 판단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황명을 받았다는 카이루스의 주장까지 검증이 끝나게 되는 거다.

"그럼, 내일부터 바쁘시겠지요. 따로 머무르실 곳은?"

"아시다시피, 워낙 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카이루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차가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받고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했을 거다.

"저런,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 곳에서나 주무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리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쉴 곳을 제공하게 해주세요."

단순히 의심을 불식시킨 것을 넘어서, 카이루스는 치안대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에까지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이걸로 충분한 것 같고.'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 아무도 깝치지 못하는 게 발로른 제국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모든 권력과 주권이 황제의 손에서 나오기에, 황제가 의지를 가진다면 어마어마한 수준의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황제의 명을 받았다는 식으로 남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이후로는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한다.

이 도시를 통제하는 치안대장이고, 기사단장이고 상관없다. 결국 황제가 내린 지시라는 한마디면 모두가 꼬리를 말고 뒤로 한 걸음 빠져있게 된다.

"국세청이라."

일신의 안전을 유지하며 국세를 수송하는 기차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진 카이루스는 숙소의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제롬이 말한 세간의 소문이라는 건 카이루스가 해야 할 당장의 일과는 큰 관련이 없다.

최소한 방금 전까지 카이루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당면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편해졌다.

장미정원의 알선을 받아 봄달래에게 의뢰한 의문의 누군가는 성공 보수로 수송 중인 세금을 걸었다.

'국세를 수송 중인 기차를 털어달라는 의뢰를 했는데, 정작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득인 세금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기차를 털게 되었을 때 그 '의뢰인'이 얻게 될 이득은 뭐가 있을까.

기차를 털고 난 다음 시간이 다소 남는다면 다른 범죄자들이 금괴에 관심을 쏟는 사이 살짝 딴짓을 해봐도 될 것 같다고 카이루스는 판단했다.

'가끔은 종이쪼가리 하나가 금괴 수십 수레보다 더 귀할 때가 있는 법이니.'

금을 훔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금을 왕창 뜯어낼 수 있는 종이쪼가리는 더욱 좋은 법이다.

훨씬 가볍고, 몰래 지니고 있기도 쉽잖아. 게다가 결국, 카이루스가 노리는 건 금괴 그 자체가 아니다.

'정보가 필요한 거지.'

아름드리 전당포는 베넷 시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물아비 조직이다. 금괴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선호하는 것들이 있겠지.

카이루스의 목적은 벼락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사라진 가문의 유산을 되찾는 것이고, 그 목적 달성에는 반드시 금괴가 필요한 건 아니다.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카이루스는 시간을 확인한 다음 샤워를 했다.

국세를 수송하는 기차는 내일 도착한다. 기왕에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최대한 그 혜택을 누릴 생각이다.

샤워를 마친 카이루스는 제공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귀족이고, 내일은 기차의 기관실 청소부라. 신분 변화 한 번 격렬하네."

이러다가 나중에는 황족 흉내를 내야 할 수도 있겠네. 카이루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제공된 식사를 든든하게 퍼먹고 외출 준비를 마친 카이루스는 문을 나섰다.

"아, 랄로프 드미트리 씨. 중대장님이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드미트리 가문과 연이 있으신 분이라서."

제롬이 카이루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랄로프가 카이루스에게 한 말은 그의 머리에 벼락처럼 내려꽂혔다.

이 치안대의 중대장이 드미트리 가문과 연이 있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기 위해, 카이루스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한다.

'이런 처망할. 재수가 옴이 붙어도 이딴 식으로 그지같이 붙냐.'

만나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는 직감이 카이루스의 뇌리를 직격한다.

제아무리 카이루스가 귀족 행세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해당 가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귀족 앞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제롬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미 드미트리 가문과의 교류가 있는 다른 귀족이라면 카이루스가 연기를 통해 속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즉, 들킨다.'

"그런가요?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한 일이네요. 다만,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 우선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이루스는 고속으로 머리를 굴리며 제롬에게 말을 걸었다.

"약 1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중대장님과 잠깐 담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지…."

주변에 사람은 없다. 기차는 대충 1시간 뒤에 도착한다.

카이루스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제롬의 입을 막으며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그의 목에 박아넣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제롬 레니게이드. 미안하다."

카이루스가 죽거나, 아니면 제롬이 죽거나.

양갈래길이었다. 다행인 건 최소한 선택은 카이루스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제롬이 죽은 사실이 1시간 이내에 발각되지 않는다면 카이루스는 기차에 탑승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제롬의 시신이 발견되어도 상관없다.

이미 기차는 출발했을 테고, 카이루스는 달리는 기차에 탑승한 이후일 테니.

'지금 해야 하는 건.'

귀족 신분을 위장했던 누군가가 제롬을 죽인 이유.

그걸 그럴듯하게 꾸며야 한다.

기차에 탑승한 게 아니라, 제롬에게서 뭔가를 얻은 다음 도망쳤다고 여기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제롬의 죽음이 발각된 다음, 세인트 드빌 역에서 전보를 쳐 국세 수송 열차가 도착 예정인 다음 역에 알릴 거다.

기차가 멈추지는 않겠지만, 기차가 도착 예정이던 역과 세인트 드빌 역에서 군대가 출동할 거다.

안 그래도 수송단의 병력을 상대하는 게 골치 아픈데, 거기에 더해 지원병력까지 상대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

카이루스는 재빠르게 제롬의 시신에서 레니게이드 가문의 인장과 지갑, 마지막으로 치안대 소속증과 그의 개인 수첩을 훔쳤다.

"어차피 시신이 발견되고 나면 내가 귀족을 사칭했다는 건 알아차릴 테니까."

제롬의 시신에서 사라진 물건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카이루스가 제롬을 죽이고 그를 사칭할 생각이라고 추측할 거다.

국세 수송단이 도착할 다음 기차역에 전보를 치는 게 아니라, 레니게이드 가문에 전보를 치겠지.

그리고 귀족사칭과 같은 사안은 군대가 담당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치안대가 담당할 사안이니, 당연히 치안대에서 군대에 이 사실을 보고할 이유도 없다.

즉, 카이루스와 그 협업자들이 기차를 터는 동안 증원군이 올 일은 없게 되는 거다.

"시체는…."

일단 안 보여야 한다. 일단 칼이 목에 박혀있어서 출혈이 크지는 않다. 이걸 뽑으면 아마 콸콸 쏟아져나오겠지.

카이루스는 제롬의 상의를 벗긴 다음, 숙소 안의 이불을 집어 들었다.

칼이 박혀있는 제롬의 머리를 이불로 칭칭 감아 상의로 묶은 다음 시신을 옷장에 처박았다.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옷장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고이는 건 막을 수 있을 거다.

조치를 마친 카이루스는 곧바로 입고 있는 옷이나 얼굴을 점검한 다음 숙소를 나왔다.

이제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시간을 보내다가 기차에 탑승하면 된다.

"말이야 쉽지."

치안대 지휘소에서 들키지 않고 2시간을 버티는 건 어린애들이 하는 숨바꼭질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상황을 쉽게 생각한다면, 그냥 2시간 동안 어디 화장실에라도 짱박혀 있자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그러지 않을 계획이다.

'너무 위험한데.'

이미 중대장이 찾고 있는 상황이다. 카이루스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치안대원들이 카이루스를 여기저기 찾아다닐 거다.

그러면 가장 먼저 찾아보게 될 장소는 뻔하다.

'내 숙소.'

그리고 카이루스가 머무르던 숙소의 장롱에서는 지금 제롬 레니게이드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긴 잠을 자는 중이다.

급하게나마 숨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막상 치안대원들이 카이루스의 숙소로 들어오게 된다면?

제롬이 죽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다. 장롱은 잠금장치가 달려 있는 금고 같은 게 아니니까.

지금 핵심은 카이루스가 모습을 감추는 게 아니라, 제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감추는 거다.

"밥 먹으러 가야겠네."

이미 카이루스는 아침식사를 했다. 하지만, 한 번 더 먹기로 했다.

치안대는 당연히 역 내부에 마련된 공간에서 단체로 식사한다.

평범한 치안대원들은 같은 소대에 소속끼리 뭉쳐 해당 소대를 관리하는 선임조무관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간다.

소대장과 같이 사관급에 해당하는 간부들은 개인적으로 식당에 방문해 식사를 하고, 중대장은 따로 식사를 한다.

당연히 그에 따라 메뉴도 차이가 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한 번 식당에 온 녀석들이 또 오는 경우는 없다는 거지.'

아침식사를 하면서 카이루스를 봤던 치안대원이나 간부들이 또다시 식당에 올 리는 없다.

즉, 식당에서 카이루스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전부 카이루스가 식당에 있는 걸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중대장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중대장이 카이루스를 찾는다고 해도 식사를 하는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오면 잠시 동안 기다려 줄 거다.

단순히 만나서 잡담이나 할 목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귀족을 대뜸 호출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니까.

27화 달리는 기차, 다급한 남자

* * *

"그다음은…."

카이루스는 두 번째 아침식사를 즐기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최대한 느긋하게 식사한다 해도, 이걸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30분에서 45분 정도다.

'게다가 여기에서 너무 오래 있으면 그것도 그거대로 위험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귀족보고 오라고 하는 건 실례지만,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건 실례가 되지 않는다.

갑자기 중대장이 식당에 오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오면 카이루스는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너무 이상해보이니까. 약간 느긋하게 식사하는 정도의 시간만 여기에서 버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카이루스는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다음 자신의 손바닥을 스테이크 나이프로 그었다.

"이봐, 응급처치를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곧이어 카이루스는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를 손수건으로 막으며 인근의 치안대원에게 말했다.

피에 젖어들어가는 상처를 확인한 치안대원이 기겁하며 바로 대답했다.

"즉시 안내하겠습니다."

"앞장서."

식당에서 다쳐서 치료받으러 갔다고 하면 또다시 시간을 한 번 벌 수 있을 거다.

스테이크 나이프는 수술할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기에 이걸로 난 상처는 굉장히 더럽다.

심지어 그 나이프를 이용해서 밥도 먹었으니 당연히 상처에는 이물질도 들어있다.

이걸 덧나거나 흉이 남지 않도록 조치하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거다.

"제대로 치료해라."

의무실에 도착한 카이루스는 이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렇게 명령했다.

즉시 상처를 살피던 의무원은 잠깐 고개를 갸웃한다.

"저기, 이 상처는 어쩌다가?"

"스테이크 나이프에 베였는데."

카이루스의 대답을 들은 의무원이 한층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테이크 나이프로 손에 이런 상처가 났다고? 물론 스테이크 나이프는 날카롭다.

하지만 이 정도 상처?

거의 접시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고 스테이크로 착각해서 썰어버리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상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큰 상처가 나시다니…."

"네놈은 치료를 하겠다는 거냐, 아니면 나를 추궁하겠다는 거냐?"

카이루스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의무원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상처가 제법 깊어서 봉합을 해야 하는데, 음식물이 붙은 나이프로 생긴 상처라서 깨끗하게 세척 및 소독을 해야 한다.

"국세 수송기차가 오기 전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이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카이루스의 말에 의무원이 곧장 시계를 확인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 바 아니고, 그전까지 마무리 지으라는 거다. 말을 못 알아먹는 놈이군. 도대체 의무원은 어떻게 합격한 건지 모르겠어."

카이루스의 재수탱이 없는 말을 들은 의무원이 마음속으로 다양한 종류의 욕을 떠올리며 조치를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사실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카이루스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의무원이 카이루스의 상처를 치료하는 사이, 카이루스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전 대답을 생각해보면 기차 도착 전까지 이걸 치료하는 건 아슬아슬한 모양이지.'

그럼 딱 좋다. 중대장이라고 해봤자 발로른 제국 황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황제가 지시한 일의 수행이 당연히 먼저다.

이미 제롬이 어제 중대장에게 카이루스가 세인트 드빌 역에 온 이유를 보고했을 거다.

'못 막는다.'

치료를 마치고 나오게 되면, 중대장과 마주쳐도 상관없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급하게 갈 길을 가면 된다.

치안대 중대장도 급하게 움직이는 카이루스를 의심하거나 멈춰세우지는 못한다. 상처를 치료하며, 카이루스는 잠깐 제롬의 생각을 했다.

'죽이거나, 죽거나.'

몇 번이고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도 카이루스는 몇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카이루스는 상대가 항복하면 무조건 한 번은 보내준다.

그래서, 상대가 항복을 시도하기 전에 재빠르게 죽여버리는 편법을 즐겨 사용한다.

"필요한 조치는 다 끝났습니다."

카이루스는 봉합을 마친 상처를 확인했다. 소위 빨간약이라고 불리는 소독약을 바르고 말린 다음, 석유젤리를 발라 마무리하고 붕대를 감아두었다.

"실밥은 2주 뒤, 정형외과 의사에게 확인받으신 다음 푸시면 됩니다."

"그래."

카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귀족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사례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이렇게 상처를 치료받은 경우, 오히려 사례하지 않으면 그게 두고두고 입소문거리가 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사합니다."

의무원 또한 이런 일이 흔히 있었는지, 놀라거나 감탄하지 않고 감사인사와 함께 카이루스가 건넨 사례를 받았다.

'차라리 안 주길 기대했는데.'

내심 의무원은 차라리 이 싹퉁바가지 없는 귀족이 사례를 까먹길 바랬다.

사례를 까먹었다는 사실을 떠들고 다니면 저 재수탱이 귀족의 면상에 똥칠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카이루스는 시간을 확인한 다음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이봐 거기."

나오자마자 카이루스는 지나가는 치안대원 하나를 불렀다. 그가 다가오자, 카이루스가 곧바로 명령했다.

"중대장님이 나를 찾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얼굴을 뵐 시간을 도무지 낼 도리가 없구나. 너는 속히 이를 중대장님께 전해라."

카이루스의 지시를 들은 치안대원이 알겠다고 대답한 다음 자리를 떴다.

원래 이런 상황이라면 무조건 서신을 통해 사과와 함께 상황을 설명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다.

근데 평민을 시켜서 이런 사실을 전하게 한다? 이런 경우는 절대로 없다.

'중대장은 내 정체를 의심하게 될 거야.'

괜찮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중대장이 카이루스의 정체를 의심해야 할 시점이다.

'기차가 잠깐 멈추고 바로 출발하는 게 아니니까.'

국세를 수송하는 열차는 여기에 잠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점검'을 하고 출발하는 거다.

카이루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향했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눈에 들키지 않은 상태로 기차에 타야 한다.

'들키면 나를 기차역에서 발견했다는 보고가 중대장에게 들어갈 테고….'

지금부터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색유리의 출력을 아낌없이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기차 오면 정차시키고, 내부 수색해!"

정거장 근처의 철골 위에 올라타 기차의 도착을 기다리던 카이루스의 귓가에 중년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아니 씨, 이건 너무 빠른데?'

카이루스는 뭔가 일이 어긋나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두 기억해둬라, 거수자는 의무원에게 손의 상처를 봉합했다!"

카이루스는 작게 감탄했다.

"제국 치안대에 아직 눈치가 빠른 양반이 남아있었네. 아직 망할 나라는 아니다, 뭐 그런 건가."

그 유능한 양반에게 한 방 먹은 카이루스는 사실, 칭찬할 기분은 아니었다. 이걸 어쩐다. 기차는 역에 거의 다 도착해서 서서히 감속하는 중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차피 지금 즈음이면 준비는 다 끝낸 상황일 테고.'

카이루스는 세인트 드빌에 도착하기 전에 봄달래로부터 향후 계획은 전부 들어두었다.

"이러면 내 손에 애꿎은 상처만 남긴 꼴이 되잖아."

카이루스는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기차를 응시했다. 하지만 뭐, 지금 손의 상처 따위를 아까워할 상황이 아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카이루스는 퉤, 하고 침을 뱉은 다음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한눈에 봐도 딱 들어오네."

은색으로 번쩍이고, 창문 하나 달려있지 않은 기차칸이 눈에 확 들어온다.

기차칸을 숨기는 것보다는 확실한 보호를 택한 결과겠지. 사실, 굳이 은닉할 필요가 없긴 하다.

정차하는 역은 치안대의 보호를 받게 되고, 달리는 중에는 기사단과 제국군의 보호를 받게 되니까.

"애초에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도착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

하지만 카이루스는 해냈다. 다만,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일이 좀 꼬였을 뿐이다.

카이루스는 유성처럼 추락하며, 기차 칸과 칸을 연결하고 있는 이음쇠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음매가 썰렸다. 이제 기관실과 연결된 기차칸은 딱 국세를 적재하고 있는 기차칸까지다.

"좋아. 이제 다음."

카이루스는 이음매가 썰려나간 걸 확인하고 다시 발에 힘을 주고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곧이어 기차를 운전하던 기관사와, 화실에 석탄을 퍼 넣던 인부들은 갑자기 천장에서 울려퍼진 둔중한 소리에 흠칫했다.

그 흠칫거림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아아아아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기관사와 인부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기관실의 천장을 썰어내는 걸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

"안녕, 친구들. 후우, 여기 엄청 덥구만."

카이루스는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 손부채질을 하며 그들을 검으로 겨누었다.

"속도 늦추지 말고 계속 달려.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뒈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수 있는 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 기관사가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하, 하지만 정비를 하고 석탄과 물을 보급하지 않으면 오래 달리지 못합니다!"

저건 중대한 사항이다.

"얼마나 달릴 수 있는데?"

"최대 5시간 정도…."

5시간이라. 카이루스는 엄지를 척 하고 세웠다.

"충분해."

어차피 5시간 동안이나 달릴 일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머리통 잃고 싶지 않으면 계속 달려. 농담하는 거 아니다."

그렇게 카이루스는 기관사와 인부들을 과격한 방식으로 독려하며 기관실 입구에 섰다.

여기는 기관실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두 개의 칸은 석탄과 물을 쟁여놓은 탄수차다.

'일 참 거지같이 돌아가네. 결국 타냐가 제공해 준 약은 쓰지도 못하게 되었고.'

기차가 멈추기로 한 역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으니, 기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이 수상함을 느끼고 움직일 거다.

이제부터 카이루스는 약속된 지점에 도착하는 2시간 동안 혼자 이 기관실 입구에서 버텨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입구가 좁다는 점. 이음쇠를 잘라놓았기에 국세를 담은 칸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는 점.'

그 정도를 제외하면 카이루스에게 유리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카이루스는 화로에 석탄을 넣는 인부들을 위해 마련된 물동이의 물을 한 바가지 퍼먹은 다음 입가를 훔쳤다.

"아 됐어. 씨발놈의 거. 이렇게 된 이상 다 때려쳐."

몸이 멍청한 녀석들이 머리를 쓰는 법이라는 말도 있다.

카이루스는 이렇게 된 이상 혈혈단신으로 배틀기어 한 자루 쥐고 기관실로 오는 자식들을 전부 상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난 지금부터 기관실을 문 앞을 지키고 있을 생각인데."

결심을 한 카이루스가 기관사와 인부들을 보며 말했다. 일하던 그들이 카이루스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순간 몸을 움찔했다.

"만약 기차가 멈추거나 속도가 느려지면, 한 새끼씩 눈깔을 파낸 다음, 파낸 구멍 안에 달군 석탄을 쑤셔넣어줄 거다."

말을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기관실 문을 발로 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에는 이미 무장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안녕, 친구들."

카이루스는 손에 쥔 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둘렀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너희들 입장도 이해한다. 의무에 따라 강제로 징집된 것도 짜증 나는데, 달리는 기차에서 뒈지게 생겼으니 말이야."

카이루스는 손을 들어올린 다음, 기차의 벽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굉음과 함께 기차벽이 박살 났다.

뜯어져 나간 기차의 벽면은 구멍이 되었고, 그 구멍으로 타고 돌풍이 밀어닥친다.

한 번의 주먹질로 만들어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호쾌한 결과였다.

"여기에서 다치거나 죽어봤자 제국에서는 보상금 한 푼 안 줄 거야. 말로 할 때 그냥 꺼져. 그럼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

병사들이 침묵한다.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는 기본적으로 높기가 힘들다.

애국심이나 충성심은 교육이나 강요를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니까.

"으아아아아! 황제 폐하와 자랑스러운 베로나 제국에 영광 있으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꽉 쥐고 카이루스에게 달려드는 병사가 있었다.

저 병사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용맹하고 충성스러웠다는 점뿐이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느린 죽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다.

28화 달리는 기차, 다급한 남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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