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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 * *

사방이 불타오른다. 폭발한 컨테이너들이 타오르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댔다.

대지는 끈적하고 검붉게 물들었다. 용병들이 흘린 피와 살점. 그리고 안드로이드들이 흘린 기름들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속에서 비교적 멀쩡한 안드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일부러 깔끔하게 손발을 날리고, 목을 꿰뚫어 작동 불능으로 만든 놈이다.

품속에서 두툼한 단말기를 꺼냈다. 90년대 휴대전화처럼도 보이는 이 물건은 데이지에게서 받아온 물건이었다.

안테나처럼 삐쭉 튀어나온 선을 뽑아 안드로이드 머리에 있는 연결 단자에 꽂았다.

삐이이.

삐이이이―――

삐빅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말기 빛이 점멸하며 깜빡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데이지의 무덤덤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어.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한밤의 인형극 (3)

94화. 한밤의 인형극

칠흑의 어둠이 집어삼킨 대지.

저 멀리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단 한줄기조차 닿지 않는 곳.

49구역이자 일명 아우터로 불리는 이곳에서 인형술사의 마지막 신호가 잡혔다.

전쟁의 참상이 할퀸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무너진 폐허 속. 그곳에서 아슬아슬하게 형체만 간직한 작은 건물.

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왜 그동안 로제가 놈의 흔적을 찾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결국, 정보라는 건 어딘가로 오가야 흔적이 남는데, 이런 곳에 처박혀 있었으니.

그때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부 생체반응 전무. 바깥에 안드로이드 몇 기만 보입니다.

왼쪽 시야 위에 겹쳐진 렌즈 화면으로 건물 주변의 스캔 정보가 떠오른다.

이번에 가져온 드론으로 얻어낸 정보다. 물론 이글아이는 아직 업그레이드중이라 그전에 사용했던 정찰드론을 사용했다.

"주변에 다른 위험상황은?"

-현재로썬 보이지 않습니다. 범위를 더 넓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쩌면 생각보다 방비가 허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태껏 들키지 않았던 은신처였던데다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놈이 가지고 있던 안드로이드 전부를 박살 내지 않았던가?

놈이 아무리 인형술사라는 이명을 갖고 있어도 안드로이드를 흙으로 빚어내지 않는 한 그만한 안드로이드를 몇 시간 만에 구할 순 없을 거다.

나는 목을 꺾어 간단히 근육을 풀었다.

"돌입한다. 주변 경계 부탁해."

-걱정하지 마세요, 마스터!

이브의 대답과 함께 나는 지체없이 폐허를 향해 질주했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황량한 대지가 하얀 달빛에 물들어 차갑게 빛난다.

다다다다!

발끝이 대지를 밀어내는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나는 단숨에 대지를 주파했다.

서걱!

소리 없이 접근해 단번에 안드로이드의 목을 가른다.

푸지지직!

툭!

갈라진 목 위로 전깃불이 튀어오르고 작동을 멈춘 안드로이드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경계를 서던 안드로이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놈들은 일제히 목이 떨어진 안드로이드와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투타타탕!

적막이 내린 어둠을 뚫고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진다.

쇄도하는 탄환들. 그리고 그 안에 섞인 굵직한 유탄들.

콰콰쾅!

유탄이 터지며 불꽃이 치솟는다.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던 공간에, 유탄의 불꽃이 번쩍거리며 주변을 밝혔다.

나는 치솟는 불길을 뚫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서거거걱!

이미 전투 안드로이드들은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내게 놈들은 조금 단단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투두둑.

지지지직!

거침없이 갈라지는 안드로이드들. 목이 날아가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이 통째로 갈라지며 폭발한다.

외부를 지키던 안드로이드들이 전부 고철덩이로 전락하기까진 그리 오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불타오르는 놈들을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답게 갈라진 벽과 무너진 천장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온다.

일견 아우터에 흔하디흔한 폐허 중 하나같지만, 정말 그랬다면 안드로이드가 경계를 서지도 않았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발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과 기계음들.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둠 속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숨겨져 있다.

저벅저벅.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지하층의 깊이가 꽤 깊은지 몇 번을 돌아서야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눈앞을 가로막고선 거대한 철문.

오래전, 감자농장에서 노동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그 거대한 철문이다.

나는 떠오르는 기억에 피식 웃고는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카카카칵!

철문이 불꽃이 튀며 갈라졌다. 뒤틀린 상처 위로 철문 뒤의 어둠이 고스란히 보인다.

쾅!

그대로 발로 걷어차자 철문이 떨어져 나갔다.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어둠으로 처박힌다.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전깃불을 튀기며 기계가 망가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시원하게 뚫린 입구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조명이 켜지다 만 건지 어두웠다.

그 어둑한 공간 속에서 온갖 기계장비들이 희미한 전원 불빛을 토해내고 있었고, 안드로이드 부품들과 조립하다 멈춰진 안드로이드들은 흉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스미스의 작업실과 비슷한 모습.

하지만 생각보다 넓은 공간인데 어딜 봐도 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하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공간이 공방이라는 것까진 좋다. 그런데 놈이 사람이라면 분명 인간이 지낼 최소한의 공간은 필요했다.

즉, 이곳 말고도 다른 공간 어딘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고.

하지만 사방이 막힌 지하공간 어디에도 다른 곳과 연결된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철저하게 폐쇄된,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공간이다.

'설마 다른 곳이 또 있나?'

그럼 귀찮아진다. 43구역 거점을 털고, 여기까지 바로 들이닥치고도 놈을 못 찾았다면 다음엔 그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할 거다.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철저히 대비할 테니까.

잠시 흔들리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곱씹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도시 내부도 아니라 49구역에 이런 은신처를 마련했는데, 과연 또 다른 공간을 만들었을까?'

심지어 놈은 본인이 외부로 드나들지도 않는 히키코모리 같은 놈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놈은 아직 여기에 있다.'

그때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스쳤다. 흉포한 무언가가 덮쳐오는 느낌.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굴렀다.

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쩌렁쩌렁한 충격파가 옷깃을 휘날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 위로 육중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소드마스터."

놈이었다.

* * *

입구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거대한 안드로이드 형태의 로봇.

3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로봇 안에 놈이 타 있었다.

꼭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생김새라 작동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그냥 작동도 아니라 거기에 타고 있을 줄이야.

"새 장난감이 좋아 보이는군."

"네 건방진 주둥이와 몸을 분리하기엔 충분할 정도지."

놈이 푸른색 안광을 번뜩였다. 밀폐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위잉거리는 전기모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놈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쉽게 가는 게 어때? 어차피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런 덩치만 키운 로봇 하나론 나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원격으로 안드로이드만 조종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놈이 직접 로봇을 타고 있었다.

부착형 로봇인 워 머신보다 진일보한 탑승형 로봇 형태인 것 같은데, 분명 안드로이드보단 전투력이 뛰어나긴 할 거다.

일단 덩치가 커서 출력도 클 테고, 직접 조종하는 거라 상황대처도 빠를 테니까.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로봇의 출력은 명백히 한계가 존재했고, 제아무리 파일럿이 뛰어나도 지금의 나를 막을 순 없다.

만약 저런 탑승형 로봇이 1개 중대쯤 되고, 그 파일럿들이 전부 베테랑 군인이라면 나도 위험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겠지.

"크흐흐! 과연 오만하구나, 소드마스터! 네 말은 틀렸다. 이 로봇은 덩치만 키운 녀석이 아니다."

불쾌한 웃음을 터트린 놈이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슴팍에서 시리도록 눈이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푸른색 전류가 흘러가며 몸을 휘감는다.

거무튀튀했던 전신이 새까만 광택으로 번들거렸고, 치익!하며 유압펌프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퍼져있던 갑주가 조각 맞추듯 맞물려 들어갔다.

마치 변신 로봇이 변신하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런 것보다 시린 빛을 토해내는 가슴팍에 집중됐다.

가슴팍의 구체 속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빛무리들. 그리고 그 빛무리들이 뿜어내는 강대한 에너지 파장.

"······사이버네틱스 코어?"

저 가슴팍의 구체는 분명 사이버네틱스 코어다.

이 정도로 강대한 에너지파장을 내뿜는 장비는 몇 개 되지 않았고, 저렇게 광입자를 가속시켜 에너지를 얻는 소형장비는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유일했다.

"동태눈은 아니로구나? 맞다. 열화판이긴 하지만, 분명 사이버네틱스 코어지."

"그걸 네놈이 어떻게 구했지?"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세계적 전략물품 중 하나로 용병 따위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대단한 하울에서도 사이보그였던 경비대장 윌리엄만이 착용했던 물건이다.

"블랙마켓에선 기업전쟁 당시 파괴된 사이보그가 종종 나오는 편이지."

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붙였다고? 죽고 싶어 미쳤군."

멀쩡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도 인간이 다루기 어렵다. 조금만 과부하가 걸려도 뇌가 녹아버리니까.

사이보그의 심장으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는 거다.

"크큭! 이제 알겠나? 네놈이 오늘 죽는 이유를?"

놈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글쎄. 네가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두세 개쯤 달고 있어도 혼자서는 무리라니까?"

하지만 나는 놈의 자신감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

안 질 자신이.

실제로 멀쩡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달고 있던 윌리엄과도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자가 수리해서 만든 열화판에, 전략 병기로 불리는 사이보그도 아니라 파일럿이 조종하는 로봇?

놈이 로봇을 조종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이 있는 건 인정하겠으나,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능력이 나를 몰아세운 적은 없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큭! 누가 혼자라고 했지?"

놈이 비틀어진 웃음을 내뱉었다.

-마스터! 주변 폐허에서 안드로이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귓가로 이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렌즈 시야 한쪽으로 자그맣게 빠르게 접근하는 안드로이드들이 띄워진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끌었군."

"크하하! 내가 왜 네놈이랑 말을 섞었겠나?"

놈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매복을 시킨 건가? 굳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너를 이곳에 끌어 들어야 하니까."

"······이곳?"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놈의 작업실이었던 지하 공간.

하지만 별다를 게 없는 공간이다. 대체 뭘 노린 거지?

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네놈의 기록을 살펴봤다. 잘 싸우긴 하지만 패턴이 비슷하더군. 압도적인 속도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대부분이 네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니 말이야."

"······."

"하지만 이곳은 다르지. 이 제한된 공간에······."

두두두두.

그때 천장이 시끄러워지더니, 계단으로 안드로이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놈이 양팔을 쫙 펼치며 안드로이드를 가리켰다.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하고도 네가 바깥처럼 날뛸 수 있을까?"

차차착!

쏟아져 들어온 안드로이드들이 전열을 갖춰 늘어선다.

저마다 총을 꺼내기도 했고, 칼날을 뽑기도 했으며, 분리된 손목에서 전류가 흐르는 와이어를 뽑아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고조되는 공기.

"어때? 이제 네놈 처지가 이해가 되나?"

놈의 비릿한 목소리가 그 공기 위를 떠다니듯 울렸다.

"······."

나는 말없이 지하공간을 둘러봤다. 가뜩이나 사방이 막힌 공간에 수십 기의 안드로이드가 쏟아져 들어오니 더욱 비좁아진 느낌이다.

그리고 놈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 심지어 외부로 아예 탈출하지도 못하게 지하로 제한된 공간에선 속도의 우위를 잡기 어렵다.

가속도가 채 붙기도 전에 이 비좁은 공간의 끝을 마주하게 될 테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선 숫자의 우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좁아진 만큼 피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고, 그만큼 더 위험에 노출된다.

분명 놈의 말대로, 외통수를 맞은 건 맞다.

'하지만 놈이 생각하지 못한 게 있지.'

"너야말로 나를 너무 쉽게 보는군. 정말 내가 속도가 전부라고 생각하나?"

"뭐?"

"애초에 내가 속도에 집중한 이유는 알고?"

"······이유?"

내가 속도에 집중한 이유.

그건 내 거리보다 적의 거리가 훨씬 길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이고, 적들은 총이니까.

즉, 거리를 좁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속도 위주로 싸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거리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가깝다면 어떨까?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보여주마. 내가 왜 소드마스터로 불리게 됐는지."

스릉.

은빛 칼날이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러냈다.

한밤의 인형극 (4)

95화. 한밤의 인형극

"어때? 이제 네 처지가 이해가 되나?"

마리오는 강현재를 둘러싸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포위된 상황을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큭큭! 이 건방진 놈! 이 도시에서 너처럼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자들이 없었는지 아느냐?'

마리오는 조소를 지었다.

백 년이 넘어가는 이 도시의 역사에서 이처럼 강했던 자들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

모조리 땅바닥에 파묻혔다. 그것도 아니면 갈가리 찢겨져 하늘강에 버려졌던가, 하수구에 처박혔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튀는 먹잇감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눈앞의 칼잡이도 마찬가지였다.

알량한 재주를 믿고 홀로 적진으로 들어오다니.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놈에겐 재수 없게도, 그게 오늘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보여주마. 내가 왜 소드마스터로 불리게 됐는지."

그 재수 없는 입매를 비틀며 놈이 칼을 뽑았다.

'······!'

마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온 듯 살갗이 서늘해진다.

얼굴을 와락 구긴 그가 버럭 소리쳤다.

"그 몸이 갈가리 찢어져도 주둥이를 놀리는지 보마!"

그와 동시에 안드로이드들의 총구에서 불을 뿜는다.

투타타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탄환들이 쏟아졌다. 번쩍이는 불꽃들이 혀를 내밀며 지하공간의 어둠을 한순간에 밝혔다.

그 순간, 노랗게 물든 공간을 가르며 강현재가 좌측으로 달려들었다.

콰직!

단번에 안드로이드 하나가 두 동강이 났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칼 한 자루로 안드로이드를 통째로 갈라버리다니.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의 실력이다.

"하지만 달라질 것 없다!"

마리오가 탄환을 피하며 재차 달려드는 강현재에게 쇄도했다.

강현재가 아무리 빨라도 이 제약된 공간에선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한계쯤은 마리오도 따라붙을 수 있었다.

콰쾅!

내뻗는 주먹을 강현재가 막아낸다. 하지만 애초에 서로의 출력이 다르다.

"큿!"

강현재가 배트에 맞은 야구공마냥 튕겨져 날아간다. 불꽃으로 밝혀진 희미한 어둠을 뚫고 순식간에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쿵!

쩌적!

부딪힌 벽에서 폭음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벽에 금이 가며 시멘트가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크하하하! 뭐하는 거냐 소드마스터! 너야말로 나를 쉽게 봤던 거 아니냐?"

마리오가 회심에 찬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전투로봇은 평범한 전투로봇이 아니다.

전쟁병기 바실리스크.

로봇공학과 사이버웨어, 그리고 바이오웨어까지 섞인 최첨단 전투로봇으로 워 머신과는 태초부터 다른 놈이다.

이놈을 사용하기 위해선 신체를 이곳에 임플란트해야 했으니까.

즉, 마리오와 바실리스크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강현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길군."

"뭐? 항복이냐?"

"네놈 혓바닥이 너무 길다고!"

그 순간 벽 끝에 박혀 있던 강현재가 공간을 질주해 들어왔다.

마리오가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벌집으로 만들어주마!"

투타타탕!

안드로이드들의 총구에서 다시금 불꽃이 뿜어졌다.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강현재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탄환을 피해낸다.

번쩍거리는 불꽃이 어둠을 밝힐 때마다 강현재의 신형 역시 도깨비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신출귀몰한 움직임. 하지만 마리오의 눈엔 전부 읽혔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다.

바실리스크가 전투병기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출력만 높기 때문이 아니다. 그 출력을 보조하는 센서와 기능들 때문이다.

"거기냐!"

쾅!

강현재가 착지하는 그 순간을 노려 바실리스크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바닥이 쩌적!하고 갈라졌다.

그런데.

"······뭣!"

분명 착지했어야 할 강현재가 그의 머리 위로 날 듯이 날아갔다.

마리오는 똑똑히 목격했다. 착지하는 그 순간, 허공에서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 미끄러지는 광경을.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체 저게 무슨 능력이란 말인가? 중력을 거스른다고?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러는 사이 강현재의 칼은 거침없이 안드로이드를 갈라버렸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날려버렸고, 코앞에서 쇄도하는 탄환을 칼날로 튕겨내며 근처에 있던 안드로이드들을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투두둑. 툭.

베어지고 갈라져 망가진 안드로이드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놈!"

마리오는 재빨리 몸을 돌려 강현재에게 쇄도했다. 육중한 몸과 어울리지 않은 빠른 속도.

탄환을 피하던 강현재가 달려드는 마리오의 공격을 받아냈다. 달려드는 운동에너지와 거기서 재차 내뻗은 주먹의 운동에너지가 공기를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엔 결과가 달랐다.

카캉!

공격을 받아낸 강현재의 몸이 밀려난 것까진 똑같았다.

다만, 이전처럼 튕겨 나간 게 아니라 이번엔 부드럽게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밀려난 궤적에 위치한 안드로이드들은 강현재의 검격에 모조리 목이 떨어졌다.

"······미친!"

공격을 역이용해서 저런 짓을 하다니?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이건 단순히 칼을 다루는 솜씨의 문제를 넘어섰다. 압도적인 전투센스와 노련함. 그리고 전장을 내려다보는 능력까지 있어야 가능했다.

'그냥 속도만 빠른 놈이 아니었다는 건가?'

마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위이이잉!

바실리스크의 가슴팍에 달린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빛무리가 더욱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대해진 에너지가 바실리스크의 출력을 강제로 높였다.

마리오는 전신에 충만한 고양감과 활력. 그리고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직 인정할 수 없다!"

단숨에 날아든 마리오가 강현재의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찍듯 떨어진다.

쿠쿵! 쾅!

쩌저저적!

바실리스크의 거체가 내려찍은 자리는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터져나갔다.

바스러진 콘크리트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터져나간 주위로 갈라진 균열은 거미줄처럼 퍼져 벽과 천장까지 뒤흔들었다.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강현재가 자욱한 먼지 속에서 중얼거렸다.

"흥! 이깟 건물 무너진다고 내가 죽을 것 같으냐?"

"그게 아니라 네놈 상태를 말한 거다. 불안정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착용한 것도 모자라서, 그걸 과출력 시키다니."

"큭큭! 그걸 왜 네가 걱정하지? 지금은 네놈 목숨이나 걱정하시지!"

"당연히 내 목숨을 걱정해서지. 그게 터지면 네놈 혼자 뒈지는 게 아니니까."

강현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과출력이면 스스로 불타는 수준에서 그친다.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다르다. 광입자를 가속시켜 에너지를 얻어내는 저 물건은, 원리는 다르지만 사실상 소형원자로나 다름없다.

만약 과출력으로 어마어마하게 모인 저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주변 수백 미터는 단숨에 날아갈 거다.

"그럴 일은 없다. 그전에 네놈이 죽을 테니까!"

마리오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신형이 강현재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안드로이드의 총구에서도 다시 불이 뿜어졌다.

투타타탕!

빗발치는 탄환 속에서 둘은 맞붙었다. 육중한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은빛 칼날은 공간을 갈랐다.

카카캉! 카캉!

주먹과 칼날이 거세게 맞부딪친다.

강철끼리 서로를 밀어내는 소음, 그럴 때마다 튕겨나가는 불똥들. 그리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총알비까지.

둘은 엄청난 속도로 공방을 주고 받으며 빠르게 전장을 이동했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탄환들이 콘크리트 공간을 헤집었다.

쾅!

또 한 번 서로의 공격이 정면으로 맞부딪침과 동시에 강현재의 신형이 스르륵 밀려나며 안드로이드에게 쇄도했다.

서걱!

그대로 안드로이드의 몸이 갈라진다. 안드로이드들의 총구가 이동하며 탄환의 궤적이 기다랗게 늘어졌다.

"비겁한! 도망치지 마라!"

마리오가 버럭 소리치며 밀려나는 강현재의 뒤를 쫓았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강현재를 찢어발길 듯 양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안드로이드랑 협공하는 놈이 비겁하다라······ 별소릴 다 듣겠군."

강현재가 갈라버린 안드로이드 머리를 마리오에게 걷어찼다. 바실리스크의 손으로 튕겨 나간 머리가 그대로 바스러졌다.

그걸 조롱으로 받아들인 마리오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노옴!"

위이이이이잉!

바실리스크의 가슴에서 빛기둥이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지하공간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충격파가 몸을 쓸었다. 무언가 강한 충격이 공간을 밀어내는 느낌.

그 순간, 강현재의 시야로 충격파에 휩쓸린 안드로이드들이 전부 허물어지는 게 보였다.

'뭐지?'

강현재가 빠르게 몸을 균형을 되찾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빛으로 물든 바실리스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맹렬히 쫓아오던 움직임을 멈춰선 채.

강현재가 다시 쓰러진 안드로이드를 돌아보고 눈앞의 바실리스크를 바라봤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극단을 선택했군."

맹렬히 회전하는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광경을.

범위는 충격파가 휩쓸었던 지하공간 전체.

안드로이드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모조리 쓰러진 것도, 희미하게나마 공간을 비춰주던 전등의 불이 꺼진 것도, 전부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에너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강현재가 멀쩡한 건, 임플란트가 없는 순수한 육체이기 때문이고.

"찢어 죽여주마―――!"

흥분한 듯 두세 톤 정도 올라간 목소리의 마리오가 바닥을 박찼다.

쿵!

쩌적!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제자리에서 단 한걸음만에 강현재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죽어――!"

바실리스크의 주먹이 공간을 찢었다. 육중한 파쇄음이 섬뜩하게 들렸다.

흠칫한 강현재가 막아낼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을 교차하며 피했다.

콰아아앙!

바닥이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콘크리트 잔해들. 충격으로 으스러진 균열이 지하공간을 뒤흔들었다.

푸스스스!

갈라진 천장에서 돌조각과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마리오의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콰콰콰쾅!

쩌적!

쿠쿵! 쿵!

카아앙!

온갖 다채로운 소음이 폐쇄된 공간에 울려 퍼졌다.

터져나가고, 갈라지며, 부딪치고, 깎이는 소음이 허공에 비산한다.

어둠 속에서 그저 한 줄기 빛만이 도깨비불처럼 번쩍이며 여기저기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사방이 터지고 갈라지며 휩쓸려 나갔다.

쾅!

한 차례 격돌 후 잠시 멀어진 공간 속에서, 강현재는 나 홀로 빛을 뿜어대는 마리오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진짜 자폭이라도 할 생각인가?'

지금 마리오의 움직임은 정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저 육중한 몸이 한 번도 아니라 연속적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인위적으로 사고능력과 중추신경을 부스팅 시킨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그런 능력을 내는 물건은······.

'또 발할라인가?'

사용자 전원을 지옥에 데려갔다는 저주받은 바이오웨어. 발할라가 유일했다.

한밤의 인형극 (5)

96화. 한밤의 인형극

'과출력 상태에서 발할라까지 계속 쓰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거나, 부작용으로 반쯤 돌아버렸거나, 아니면 둘 다겠군.'

인간의 육체가 초월적인 능력을 보인다고 해서, 그게 절대 영원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은 항상 희생을 전제로 했다.

그게 타인의 희생이든, 아니면 본인 스스로든.

발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중팔구는 뇌가 녹아서 죽었고, 나머지는 미친놈이 되어 날뛰다가 죽었다.

인위적으로 한계를 초월한 대가는 항상 죽음뿐이었다.

번쩍!

또다시 점멸하듯 공간을 넘어온다.

강현재는 코앞으로 쇄도하는 마리오의 공격을 간신히 받아냈다.

카캉!

하지만 지탱하던 바닥이 뒤집어지며 그대로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연이은 충격으로 콘크리트 바닥의 내구도가 많이 떨어진 탓이었다.

'이런!'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마리오가 밀려나는 강현재에게 쇄도했다. 바실리스크의 양팔이 쩍하고 벌어지며 동시에 바닥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콰쾅!

푸스스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충격파와 균열.

강현재는 순간적으로 「제로의 영역」을 사용해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쏟아지는 흙먼지 속에서 비명에 가까운 광기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크하하하!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그건 진짜 광기였다. 나사가 하나 빠진듯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연신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가슴팍을 휘도는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빛무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슬슬 한계에 다다르나 보군.'

강현재가 치밀어오르는 두통을 삼키며 정신을 다잡았다.

발할라를 상대하기 위해서 강현재 역시 때때로 「제로의 영역」을 넘나들어야만 했다. 조금 전처럼 말이다.

다만, 강현재는 인위적으로 능력을 부스팅시킨 게 아니라, 그 과정을 깨달은 거다. 발할라와는 매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과하게 반복한 탓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내가 이 정도라면 놈은 이미 임계점을 지난 지 오래겠지.'

그리고 그 임계점을 무시하게 되면······ 인간의 허약한 육체는 그 대가를 결코 감당하지 못했다.

"크흐흐흐! 크흐! 크흐흐! 크아아아! 이놈! 어딨냐! 어딨는 거냐! 모습을 드러내! 불을 켜! 누가 불을 끈 거야!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크아악! 가만두지 않겠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이겠어! 어서 불을 켜!"

흙먼지로 자욱한 어둠 속에서 놈이 허공을 향해 양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목소리엔 서서히 기계음이 섞여 들리기 시작했고, 이성은 이미 가출한 지 오랜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후우······ 다행히 이 정도에서 끝나겠······ 음?"

짧게 숨을 내뱉은 강현재가 잔뜩 끌어올렸던 감각을 다시 정상으로 내려놓으려는 찰나, 그의 눈에 보이지 말았어야 할 장면이 보여지고 말았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지이이이이이이잉!

불안하게 흔들리던 빛무리가 불규칙하게 휘돌며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광입자끼리 부딪칠 때마다 번쩍거리며 빛줄기가 솟구쳤고, 불규칙한 떨림은 점점 심해졌다.

그 순간.

지이익! 지직!

사이버네틱스 코어 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코어에서 뿜어진 에너지가 공간으로 몰려든다.

순간 시퍼런 전류가 일렁이며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그와 함께 미증유의 인력이 일그러진 공간에 작동하며 주변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쿠쿠쿠쿠!

이 모든 건, 한숨을 내뱉은 그 한 호흡 만에 벌어졌다.

순식간에 지하공간은 미증유의 인력으로 인해 거센 돌풍이 몰아쳤고, 물건과 기계들이 날아다니는 난장판이 됐다.

강현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폭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응집된 이놈이 터지면 모르긴 몰라도 소형핵폭탄이 터진 것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물론 작용기전은 다르겠지만, 결과는 비슷할 거다.

주변 수백 미터의 초토화.

즉, 이게 터지면 강현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강현재가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잦아들던 포스가 다시 수문이 열린 댐처럼 폭발적으로 흘렀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거세게 펌프질하는 심장박동이 혈류를 이동시키고,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가던 포스는 이내 회오리치는 격류가 되어 다시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지끈!

"큭!"

순간 아찔한 두통에 강현재가 침음을 흘렸다.

한계를 넘어 몸을 휘도는 포스의 격랑은 그조차도 섣불리 감당하기 힘든 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해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죽으려고 여태껏 살아온 줄 알아!'

으드득!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일 년 남짓한 시간,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이 도시의 전설로 군림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 꼭 알아내야만 했다.

'그게 시궁창 같은 이 세계보다 더 더럽고 비참한 현실이라도······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

내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이대로 내가 죽을 것 같으냐!"

눈을 번쩍 뜬 강현재의 눈동자 위로 은백색 광망이 터져 나왔다. 그 시리도록 차갑고 고고한 빛은 마치 밤하늘 달빛과도 같았다.

그 순간.

번쩍!

강현재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공간이 얽힌 공간과 공간 사이. 강현재는 그 사이를 질주했다.

사방으로 지나가는 빛무리들이 길게 늘어졌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혜성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한껏 확장된 감각이 주변의 빛무리를 빨아들이듯 흡수했다.

하나하나의 빛무리들은 모두 정보의 잔재였다.

지하공간의 크기, 달아오른 실내의 온도, 떠다니는 먼지 입자의 크기······ 폭주하는 마리오의 움직임,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리는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에너지······.

감각이 확장된다.

쓰러진 안드로이드들이 발사한 탄환의 개수, 이 자리에서 안드로이드를 조립하던 마리오의 과거, 처음 이 공간을 만들었던 오염체 전쟁의 잔상들.

지금 강현재는 시공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정보량에 정신이 바스러질 것 같았지만, 강현재의 목표는 명확했다.

이 시공의 역류 속에서, 단 하나의 점을 돌파하는 것.

"으라아아―――!"

기다랗게 늘어진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강현재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제로의 영역. 3단계 레벨.

시공 돌파. 「공허의 역류(逆流)」.

번쩍――――――!

쐐애애액―――!

점멸하듯 나타난 강현재의 검이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관통했다.

콰직!

휘돌던 빛무리들이 그대로 깨진 코어의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분출.

간신히 유지했던 불안정이 깨지며 폭발하듯 빛무리가 터져나간다.

그 순간.

우드득―――!

마치 시간을 거스르듯 터져나가던 빛무리가 다시 코어로 몰려들었다. 깨져나간 코어의 유리와 부품이 멀쩡하게 조립되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역순으로 휘돌았다.

칼날은 여전히 코어를 꿰뚫은 상태였지만, 코어는 정상으로 작동됐다.

폭주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과출력으로 불안한 빛을 내뿜던 코어가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거슬렀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일은.

콰직!

다시금 들려온 파열음에 끝이 났다.

파스스스!

시간이 다시 흘러간다.

검에 꿰뚫린 코어가 박살나며 빛무리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반딧불처럼 그저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다급했던 그 모든 시간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우웨엑!"

강현재가 입가로 피를 쏟아냈다. 시커멓게 죽은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얼굴 또한 피투성이었다. 눈코입귀 할 것 없이 모조리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강현재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뒷춤에 맨 플라스크를 꺼냈다. 몇 번을 미끄러지고서야 뚜껑을 열었다.

독한 술냄새가 확하고 퍼졌다. 강현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독한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푸하······."

정신없이 술을 들이켜던 강현재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숨 한번 들이켤 시간에 그 독한 술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조금 전 받아들였던 어마어마한 정보량 때문에 지끈거리는 두통이 멎지 않았다.

자신이 받아들인 건, 수만 개의 빛무리 중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그것도 이 지하공간에 한정된 거로만.

그런데도 이런 후유증이라니.

초재생이 아니었다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 아아······"

그때 찢겨나간 바실리스크의 갑주 아래로 마리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잎새처럼 잔뜩 공기 섞인 말소리가 이어졌다.

"이토록······ 이토록 생이란 허무하던가······."

마리오의 텅 빈 눈동자가 짙은 어둠으로 물든 허공을 바라봤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무얼 바라보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살기 위해 도시로 돌아왔건만······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 도시는 내 남은 삶의 불꽃마저 잔인하게 태워버리는구나······."

마리오의 흐릿한 눈빛이 강현재를 향했다.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그는 강현재에게 경고 섞인 조언을 했다.

"도시를 떠나라······ 소드마스터······ 이 도시는 결국······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거다······."

툭.

마리오의 고개가 툭하고 떨어졌다.

길게 내뱉은 마지막 숨이 그렇게 끊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강현재는 물끄러미 마리오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무얼 생각하는지,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바실리스크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았다.

그리곤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옥에서 만나겠군."

* * *

콰콰쾅!

폐허 속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며 불길에 휩싸였다.

거의 사용하진 않지만 그래도 바이크에 넣어 다녔던 폭약과 지하시설에 남아있던 화약과 폭탄들을 한꺼번에 터트린 탓이다.

그냥 놔뒀다간 쓸데없는 흔적이 남을 수도 있으니까.

저 멀리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이 아스라이 반짝거리지만, 이곳은 한치의 빛도 없는 어둠의 한복판이다.

그리고 그 어둠 위를 춤추는 거대한 불길들.

나는 하늘 위로 솟구치는 불길을 올려다봤다.

밤하늘 아래 시커먼 연기를 줄줄 내뿜으며 일렁이는 불길은 마치 춤추는 인형들 같았다.

"한밤의 인형극이라······. 놈에게 딱 알맞은 무덤이로군."

인형술사 마리오. 과거 도시를 주름잡았던 해결사.

하지만 다시 돌아온 도시에선 더러운 일을 주로하는 블랙스컬의 일원이 되었다.

"대체 놈이 도시로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뭘까?"

그리고 폭주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실리스크를 임플란트한 이유는 또 무엇이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사이버네틱스 코어.

놈에게 힘을 선물했지만, 결국 죽음마저 함께 선물한 물건.

"······모르겠군."

어쩌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이 도시의 광기는 내가 감히 섣부르게 예단할 수 없으니.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 광기에 휩싸인 놈들은 마리오가 말했듯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밤하늘을 물들인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마치 불나방을 유혹하는 불꽃처럼 마지막 춤을 췄다. 이 지옥으로 너도 함께 가자면서. 어서 빨리 오라며 몸짓한다.

나는 조금 더 불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흔적이 지워졌을 거다.

바이크에 다가가 손에든 코어를 조심스레 실었다.

불안정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녀석의 가치는 조기경보드론 못지않다.

멀쩡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라면 당연히 그보다 비쌀 테지만, 아무래도 열화판인데다가 검이 뚫고 지나가 망가진 상태니까.

"스미스라면 어떻게든 사용할 방법을 찾아내겠지."

재료만 있다면 새로운 코어도 만들 수 있는 양반이니, 망가진 걸 가져다줘도 제법 쓸만하게 고쳐놓을 거다.

나는 서서히 사그라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곤, 쓰로틀을 당겼다.

"지옥에서 만나자."

바이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발아래 펼쳐졌던 불길이 잦아들며 한밤의 인형극이 끝났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그 위를 한 바퀴 돌고는 그대로 도시로 날아갔다.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을 향해서.

네 번째 기프트 (1)

97화. 네 번째 기프트

황량한 대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숨 쉴 때마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드나들고, 텁텁한 입안으론 모래가 씹히는 것 같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거대한 바위산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갈라진 바위산의 매마른 협곡.

흙먼지로 뒤덮인 공터엔 수많은 컨테이너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해가 드리우자 사람들이 하나, 둘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잔뜩 지치고 피곤한. 그리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표정들.

무엇을 체념했는지, 그들은 어두운 얼굴 그대로 어디론가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협곡 안, 마치 동굴처럼 깊숙이 이어진 곳으로.

그들은 마치 절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다.

멈칫.

그때 누군가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봤다. 황톳빛 하늘이 길게 떨어지는 깎아지른듯한 협곡 사이로 나 있는 유일한 출구.

그곳엔 총을 든 무장인력들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 경계를 서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얼굴이 험악해지며 말없이 턱짓을 했다. 뒤돌아서 다시 걸으라고.

그가 다시 비척거리면서 협곡 안으로 사라졌다. 늘어진 어깨엔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협곡의 모든 곳이 내려다보이는 감시탑의 가장 높은 곳.

"본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바실리스크의 연결이 끊겼답니다."

"······결국, 그렇게 됐나."

창밖으로 노동자들이 광산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윌포드가 혀를 짧게 찼다.

거점이 털렸을 때부터 왠지 찜찜하더라니.

"뭐, 어쩔 수 없지."

추모도 없고, 분노도 없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생각의 끝이었다.

"알았다. 열차를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단원이 사라지고, 윌포드는 단말기를 들었다. 어디론가 연락을 하던 그가 짧게 말했다.

"윌포드요. 물건 싣고 돌아가도록 하겠소."

* * *

며칠을 앓았다.

정확히 며칠인 줄도 모르겠다.

그저 눈을 떴다, 감았을 때마다 밤낮이 계속 바뀌고 있었으니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제로의 영역」을 3단계까지 끌어올린 후유증이다.

솔직히 죽다가 살아났다.

「초재생」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는 게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지. 저게 터졌으면 무조건 죽었을 테니."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테이블 위에 던져지듯 올려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바라봤다.

코어의 크기는 멜론만 했는데, 가운데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칼날이 꿰뚫었던 흔적이다.

"······사실 반쯤 터진 거나 다름없었지만."

만약 「공허의 역류」로 시공간을 비틀지 않았더라면, 코어를 꿰뚫었더라도 오히려 그 충격에 터졌을지도 몰랐다.

이를 악물고 「제로의 영역」을 3단계까지 끌어올렸던 이유였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그 과정 덕분에 제로의 영역을 강화할 실마리를 찾아냈으니.

"한창 찾을 땐 감도 안 오더니······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지푸라기가 잡히는군."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가 아니었던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로의 영역」은 극한의 속도 이상의 영역에 진입해 모든 신경 상태를 그 속도에 맞춰서 극가속시킨다.

단순히 움직임만 빨라지는 게 아니라, 신경 또한 가속되어 사고능력과 인지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필름이 늘어진 것처럼 시간이 느려지고, 주변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과 변화까지 인지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빗발치는 탄환 속에서 움직이는 속도만 빨라진다면, 그 속도로 탄환에 뛰어들어 자살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몸 전체에 부담이 큰 거다.

그동안 나름 강해져서 2단계까진 어찌어찌 사용할 수 있었지만, 3단계는 꿈도 꾸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지난번 일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죽다 살아났지만, 억지로 3단계를 겪고 나니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잠시······ 도시를 떠나야겠군."

* * *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구멍 뚫린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들고 <세븐 프롱드>를 찾았다.

"오! 마침 잘 왔소!"

나를 발견한 스미스가 작업대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하! 나 같은 기술자가 기분 좋을 일이야 뻔하지. 물건이 잘 나왔소."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작업대 아래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새까만 오픈 핑거형 장갑으로 손등은 불룩했고, 그 부분이 손목까지 이어져 얼핏 팔토시처럼도 보였다.

"······이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성큼 내게 다가와 물건을 건네며 말했다.

"개량한 데스핸드요. 한번 착용해보시오."

이게 데스핸드라고?

나는 홀린 듯이 장갑을 착용했다. 손을 감싸며 손목까지 부드럽게 들어간다.

주먹을 움켜쥐어본다. 약간의 이질감은 있었으나, 전혀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것 같소?"

스미스가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편합니다. 잘 움직이고요. 신기하군요."

움켜쥔 주먹을 뻗어도 보고 펼쳐도 봤다. 처음의 이질적인 감각은 금세 손에 익었다.

무엇보다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의 느낌이 좋았다. 오히려 손잡이가 손에 더 달라붙는 신기한 느낌이었다.

"껄껄! 무라마사에서 나올 때 챙겼던 탄소섬유를 섞어봤소. 최대한 연결부위의 이질감을 줄이는데 집중했지."

"무라마사 공작소의 탄소섬유 말입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무라마사 공작소가 개발한 재료 중 가장 유명한 재료가 바로 특수탄소섬유였다.

말 그대로 탄소원자로 이뤄진 섬유인데, 이걸 실로 꼬아서 원단으로 만들면 불에 타지도, 찢어지거나 해지지도 않는다.

무라마사 공작소가 세계 최고의 공방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원재료를 갖고 물건을 만들어대니.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아니, 솔직히 가격은 문제도 아니다. 무라마사 공작소가 아니면 절대 구할 수 없는 재료니까.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내가 진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한껏 기분 좋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상태로도 웬만한 총탄은 막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제대로 된 진가는 전개 이후지!"

"이게 끝이 아닙니까?"

"나를 뭘로 보고! 최소한 내 손을 거쳤으면 평범한 데스핸드보다 뛰어나야지!"

"······?"

이미 데스핸드부터가 평범한 물건이 아닙니다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콧김을 내뿜으며 작업대와 연결된 태블릿 패널을 거칠게 두들겼다. 그의 크롬 손가락이 패널을 두드릴 때마다 마치 화면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갑자기 데스핸드를 착용한 손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손등을 타고 흐른 전류는 팔목을 지나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내가 흠칫 놀람과 동시에 불룩한 손등과 손목으로 연결된 토시가 펼쳐졌다.

얇은 철판이 서로 맞물리며 연결됐고, 순식간에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뒤덮는 장갑이 완성됐다.

'······이래서 전개라고 말한 거로군.'

외국인이라 단어를 착각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진짜 데스핸드가 전개(展開)됐다.

완전히 펼쳐진 데스핸드의 모습은 처음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마치 기갑 슈트의 팔이 이식된 것 같았다.

"그대의 AI와 연결시키면 이렇게 전개시킬 수 있소. 이게 진정한 데스핸드의 모습이지."

놀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이 된 그가 말을 이었다.

"이론상 대전차미사일의 운동에너지도 막아낼 수 있소. 물론 폭발은 또 다른 얘기오만."

그 말에 간신히 다물었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대전차미사일의 운동에너지를 막아낸다는 건······ 사실상 웬만한 충격은 모조리 막아낸다는 말이나 다름없잖아?

나는 스미스를 바라보며 데스핸드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끝내주는군요."

* * *

데스핸드 구경이 끝나고, 나는 이곳에 온 원래 용건을 이야기했다.

"스미스 씨. 사실 제가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만."

"아, 그렇지! 내가 불렀던 게 아니로군. 무슨 일로 왔던 거요?"

데스핸드를 구경하는 동안 연신 감탄하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미스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뭔 줄 아시겠습니까?"

작은 가방에서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꺼냈다. 얼핏 보기에 고장난 전기모터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 출신.

"이, 이건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아니오? 이걸 대체 어디서 구했소?"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한 번에 알아본 스미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게 사실······."

나는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얻게 된 경위에 대해서 천천히 이야기했다. 딱히 비밀 같은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미스가 어디에 떠들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뭐, 사실 떠들어도 상관없다. 이미 데스핸드와 이글아이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새롭게 하나 더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대신, 그날 소울 시티는 명인급 대장장이 한 명을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허허······ 어찌 그런 자들만 기가 막히게 만나는구려. 일평생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자들이거늘······."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스미스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데스핸드와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군용으로 쓰이는 전설급 무기였고, 이걸 갖고 있다는 건 이 도시 먹이사슬 꼭대기에 위치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도 이건 몰랐을 거다.

'이게 주인공 버프지.'

이 빌어먹을 세계가 사실 게임 속 세상이었고, 나는 엔딩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수도 없을 겪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걸 사용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고치는 거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소. 손상된 부위도 크게 없고······ 으음? 그렇지! 마침 잘됐소이다."

"······?"

"인벤토리 말이오. 마침 에너지 공급을 뭐로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인벤토리에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쓰시겠단 말입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스미스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치는 것에 초점을 뒀지, 그걸 인벤토리에 사용하겠다는 발상을 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그게 가능했던가? 코어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텐데?

"안될 건 뭐요? 오히려 그대의 인벤토리엔 AI도 들어가지 않소? 이브라고 했던가? 코어의 연산능력까지 활용하면 이글아이의 자원을 훨씬 다양하게 쓸 수 있을 거요."

"그래서 문제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 코어는 독립개체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치명적인 단점. 바로 호환성이다.

굳이 신체부위로 따지자면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심장과 뇌가 하나로 이어진 초정밀공학의 끝판왕 격이다.

즉,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슈퍼컴퓨터란 소리다.

하지만 스스로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다른 것들과 호환성이 떨어졌다.

특히, 코어와 AI는 상극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코어에서 뿜어지는 에너지를 AI가 전부 감당하지 못했다.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AI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안드로이드에 사용되지 않고, 사람의 뇌가 주체인 사이보그나 바실리스크와 같은 임플란트에만 사용되는 이유다.

그런데······.

"그거야 평범한 AI 얘기고. 이브는 다르지 않소?"

네 번째 기프트 (2)

98화. 네 번째 기프트

스미스는 뭘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이브는 다르다고?

맞다. 이브는 일반 AI와 다르다. 조금 더 특별하다.

하지만 그게 코어의 힘을 이겨낸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이브가 특별하긴 해도 그게 되겠습니까? 사람으로 따지면 바다 한가운데 던져놓은 격인데······."

"······? 아직 모르시오?"

"뭘 말입니까?"

"이브는 이미 한번 경험을 한 적 있소. 그리고 AI에게 그건 어마어마한 자산이지."

"그게 무슨······?"

이브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그리고 나도 모르는데 스미스는 그걸 대체 어떻게 알고?

내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자, 스미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허! 정말 몰랐나 보군. 공학지식이 꽤 있는 것 같아서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더니······"

"주워들은 게 많은 것뿐, 저는 칼밖에 모릅니다. 설명해주시죠."

"이글아이 말이오. 워치 AI가 조기경보드론의 시스템을 장악한 게 쉬울 거라 생각했소? 심지어 조기경보드론의 AI를 이브가 흡수했더군. 이게 무슨 의미일 것 같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뜻이오."

"······."

솔직히 전혀 생각 못 했다. 그냥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브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가능하다고 했었으니까.

게다가 이브가 이글아이를 통제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업로드하고 인스톨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더니······.

"······그 정도였습니까?"

"AI끼리의 싸움을 뭐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아마 치열하게 싸웠을 거요. 사실 기적에 가깝지. 하드웨어라는 절대변수를 극복했으니. 내가 괜히 다윗과 골리앗으로 비교한 게 아니오."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손목에 채워진 자그마한 워치를 바라봤다.

이 녀석, 말도 안 하고 그런 위험한 싸움을 하고 있었나?

어깨를 으쓱한 스미스가 말했다.

"아마 이브 입장에선 이글아이의 AI를 상대했던 것과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장악하는 건 비슷한 난이도일 거요. 어쩌면 이미 경험이 있기에 조금 더 쉬울 수도 있겠지."

"그래도 아직 케이스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위험하지는······."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도중, 여태껏 잠잠히 있던 이브가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스터.

"이브?"

-이글아이와 비슷한 난이도라면 해볼 만합니다. 자신 있습니다. 가능성도 충분하고요.

녀석은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자신감을 어필했다.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하지만 나는 바로 직전에 이글아이를 장악했던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열했는지를 들었다. 그때도 녀석은 가능하다고 했었다.

"그건 자신감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글아이는 운 좋게 성공했다지만, 만약 잘못되면? 너도 폭주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봤잖아?"

나는 구멍 난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쳐다봤다. 녀석도 내 시선을 통해 함께 코어를 바라보고 있을 터다.

아직도 그날 밤의 기억이 생생했다. 폭주한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내뿜던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폭풍. 모든 것을 소멸시킬 파괴의 빛무리를.

그걸 떠올리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인간이 아니라면 절대 다룰 수 없는 힘이라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이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 마스터.

"기회의 문제가 아니야, 이브야. 네가 잘못되면? 코어의 힘에 휩쓸리면 AI가 소멸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이게 내가 이브를 만류하는 이유였다. 녀석의 자신감에도 내가 쉽게 허락할 수 없는 이유였다.

소멸의 위험.

그건 다시 말해서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글아이를 지배하는 게 어려웠다지만, 그래도 물러설 곳은 있었다. 손상이 있더라도 다시 워치로 돌아오면 되니까.

하지만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다르다. 코어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라도 벌어진다면, 녀석은 그대로 코어의 힘에 휩쓸려 소멸한다.

이브는 똑똑한 녀석이다.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지?

-······마스터. 기억하십니까? 제게 처음 이름을 불러주셨던 그 날을.

그때 머뭇거리듯 잠시 말이 없던 이브가,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기억하지. 그건 왜?"

-저는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스터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너! 아직도 내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충분히 교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마스터. 저는 마스터가 원하면 저는 0%의 확률에도 뛰어들 자신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 줄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저는 마스터를 믿습니다.

"······."

나를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를 '믿는다'고? 0과 1. 그리고 확률로 세상을 판단하는 AI가······ 믿는다?

-저는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적극적으로요. 그리고 지금 그 방법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도움 돼. 내가 할 수 없는 걸 네가 하잖아."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어를 얻게 되면 더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소멸한다는 건 버려지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야."

나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이 똑똑한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소멸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이리 떼를 쓰듯 매달리는 걸까?

그런데 이어지는 이브의 말에 나는 사고의 끈이 잠시 멎는 걸 느꼈다.

-마스터는 제 주인이시니까요. 제가 소멸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주인이시니까요.

"······!"

-저는 마스터의 전투 데이터를 전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스터가 성장하는 만큼, 상대하는 적들도 점점 강해진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지난번처럼 무력하게 지켜만 보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마스터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 쓸모가 있길 바랍니다. 그게 저의 존재가 소멸로 이르는 길이라도요.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존재의 소멸에 이르더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니······ 이게 과연 AI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인가?

[그거야 평범한 AI 얘기고. 이브는 다르지 않소?]

스미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돈다.

그는 이걸 알고 제안을 했던 걸까? 이브에겐 특별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더 있다고?

말없이 스미스를 쳐다봤다.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이브가 대화하는 걸 관찰하던 그가 물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소?"

그는 마치 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알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지독한 사이버펑크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격랑에 휩쓸려 결국 가라앉고야 마는 이 빌어먹을 세계의 본질을.

나는 그의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브가 하겠다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이브가 내린 결정이라고. 나는 그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이제 더 이상 이브를 AI로만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브는 특별한 AI가 아니다.

이브는 특별하다.

나는 녀석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 * *

바이크가 도로를 질주한다.

오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뻥 뚫린 도로 위로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쬔다. 지평선 너머 이글대는 아지랑이 사이로 황량한 모래바람만이 불어온다.

소울 시티로 오면서 달렸던 그 도로다.

'오랜만이로군.'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 도로 위를 달렸던 그때로부터 대략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게 달라졌다.

그때는 기필코 이 세계에서 살아남겠다는 목적뿐이었다. 그리고 빛으로 물든 도시를 바라보며, 기대감이 섞인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1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려움은 사라지고 목적 또한 달라졌다.

단순히 살아남는 걸 넘어서, 이 도시 위로 군림하겠다는 것. 그래서 반드시 이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

이게 새로운 목표이자, 목적지였다. 어쩌면 이 여정의 종착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지금에 안주해선 안 된다. 끊임없이 달려나가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지금 이 도로 위를 질주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제로의 영역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았으니까.'

제로의 영역은 기프트가 아니다. 내 신체 상황이 특정 조건에 도달하여 깨달은 특수스킬에 가까웠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도 다른 기프트처럼 자연스레 강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내 깨달음과 운용능력에 달려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프트가 아니기 때문에 강해질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제로의 영역을 강화시킬 기프트를 얻으면 되니까.'

바로 기프트를 얻어 제로의 영역을 강화시키면 된다.

기프트란 결국 능력에 대한 깨달음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제로의 영역과 관련된 기프트를 얻게 된다면, 자연스레 제로의 영역에 대한 깨달음 역시 함께 얻게 될 거다.

다만, 어떤 기프트를 얻어야 제로의 영역과 시너지가 날지가 문제였다. 여태껏 실행하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정확히 깨달았지. 제로의 영역은 시공간을 다루는 것과 맞닿아있다는 걸.'

그전까지는 속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제로의 영역에 진입해 극가속상태가 된 나를 막은 존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메인 시나리오로 접어들고 전설급 장비들이 튀어나오면서 단순 가속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특히, '발할라'의 존재는 그런 내 생각에 강한 확신을 줬다.

발할라를 사용했던 소울 프리즌의 누커만. 그리고 인형술사 마리오.

이 둘 모두 나를 위협할 수준의 속도와 움직임을 보였다. 나조차도 제로의 영역을 2단계까지 끌어쓰고 나서야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세계가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사이버펑크 세계라는 거고, 발할라 역시 그 과학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즉, 발할라와 같은 무기를 가진 적이 언제까지고 혼자일 리 없다는 뜻이다. 적합자를 찾아 이식하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의 나라도, 누커만 수준의 발할라 유저가 셋만 된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속도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브가 말했듯, 내가 도시 위로 올라갈수록 상대하는 적 역시 강해질 테니까.'

부아앙!

쓰로틀을 당겼다. 쭉 뻗은 도로 위를 바이크가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나는 세찬 바람을 마주하며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도로를 바라봤다.

그 해답이 이 길 끝에 있다.

* * *

그레이트 필드.

소울시티 남쪽 수십 킬로미터부터 반도의 남단 경계선인 호강(湖江)에 이르기까지를 일컫는, 이름처럼 거대한 지역으로 이 세계로 떨어졌던 감자농장이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저쪽으로 가면 감자농장이 나오겠군.'

나는 떨어지는 태양의 방향을 가늠하며 저 멀리 황량하게 펼쳐진 대지를 바라봤다.

그레이트 필드 자체가 워낙 넓은 지역이라 꽤나 남쪽으로 내려왔음에도 1시간은 족히 달려야 했다.

대단한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악몽과 같은 기억이 서린 곳이지만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돌아갈 때 들러봐야겠군.'

그 난리를 치고 나왔는데 아직도 갱단이 있을까? 조금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가지려면, 먼저 이곳까지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저곳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도로의 끝을 바라봤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도로의 끝은 거대한 호수로 이어져 있었다. 원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는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오래전 과거 대청호라는 이름이 붙었던, 호강의 지류가 모여 거대한 호수를 이룬 곳.

저 호수에 답이 있다.

'정확히는 저 호수의 주인에게.'

네 번째 기프트 (3)

99화. 네 번째 기프트

온갖 장르가 섞여 있는 이 게임의 원형은 RPG다.

주인공이 레벨업을 하고, 스킬을 얻고, 아이템을 파밍하는 아주 기초적인 형태.

나 역시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거기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게 하나 있다.

RPG의 꽃이자, 정수로 불리는 것.

바로 몬스터 레이드다.

'귀신거북이었나?'

「레이드 각성종」 귀신거북.

이 거대한 호수를 점령한 지배자다.

호강의 지류들이 모이며 만들어진 호수라, 강을 따라 수많은 각성종이 몰려들었을 터다.

그 피 튀기는 각성종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바로 귀신거북이었다.

귀신거북이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곳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놈의 기프트는 주변의 시공간을 다룬다.'

유니크 기프트 「시간역행」.

오로지 귀신거북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이 기프트는 자신 주위의 시공간을 조작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다.

전투 중에 어떤 치명상을 입어도, 어떤 회심의 공격도, 놈이 원하면 시간은 되돌려진다.

문제는 놈의 범위에 있을 경우, 그 대상이 몇이 됐든 함께 시간이 되돌려진다는 거다. 그리고 되돌려지는 것엔 '기억' 또한 포함된다.

기억의 역행.

즉, 상대는 시간이 되돌려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돌려진 시간 속에서 상대는 회심의 일격을 날리게 되고, 이미 그걸 알고 있는 귀신거북은 기다렸다는 듯 허를 찔러 적을 잡아먹는다.

이게 귀신거북이 거대한 그레이트 필드 전체에서도 가장 풍족한 지역인 대청호의 주인인 이유였다.

플레이어나 할 법한 세이브&로드 신공을 사용하니까.

* * *

나는 놈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상대 못 할 몬스터를 철저한 준비로 공략하는 게 바로 레이드다.

특히나 놈의 경우 공략법을 모른다면 절대 상대할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리는 저 능력은 매우 까다로워서, 자칫 놈이 불리함을 느끼는 순간 호수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럼 기회는 날아간다. 저 거대한 호수의 물을 모조리 퍼내지 않는 한.

똑똑한 놈이라 다시 상대하려면 적어도 수개월은 지나야 할 터. 나에겐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없다.

물론 나는 공략법을 알고 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공략에 필요한 준비물을 충분히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겠지.'

귀신거북을 상대하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놈에게 먹일 특수먹이, 특수먹이에 섞을 각성제, 놈을 유혹할 페로몬이 묻은 거북로봇, 그리고 반경 수백 미터를 커버하는 전자기장을 뿜어내는 특수설비까지.

레이드 자체가 엔드콘텐츠 중 하나기 때문에 설정된 참사였다.

'하지만 결국 준비물의 용도는 하나다. 놈이 「시간역행」을 써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해결책이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

* * *

호수 위로 시린 달이 떠오른다. 고요한 수면 위로 번지는 달빛은 은은한 파도에 밀려 여울졌다.

가을로 계절이 접어들면서 밤낮 일교차가 극심해졌다. 급격하게 떨어진 온도로 호수 주위엔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나는 물안개 낀 호수를 바라보며 포스를 내뿜었다. 몸 안에 갈무리됐던 포스가 거침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건 일종의 신호였다. 새로운 각성종이 나타났으니 이곳의 주인에게 한판 붙자는 신호.

부스스스!

떨어지는 달빛을 고고히 머금었던 수면이 꿀렁였다. 이내 서서히 갈라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건물 한 채가 호수 위로 떠오른 것만 같다.

드러난 크기만 10미터에 육박할 것 같은 거대한 괴물. 이 호수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귀신거북이다.

무채색을 띤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네가 나를 불렀냐라는 눈빛.

나는 그대로 하늘로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펑!

호수 위로 터진 조명탄이 빛을 내뿜으며 사방을 환히 비췄다.

나는 걸쳐 매고 있던 소총을 조준해 그대로 놈에게 갈겼다.

투타타탕!

허공을 가른 탄환이 놈의 얼굴을 두드렸다. 멀리서도 탄환이 힘없이 튕겨나가는 게 보였다. 수면 위로 탄환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놈이 콧김을 내뿜었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다.

철컥철컥!

순식간에 탄창이 비워졌다.

내가 바닥에 총을 던지자, 놈이 기다렸다는 듯 호수를 가르며 내게 다가왔다.

거대한 산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분명 거리가 꽤 된다고 생각했는데, 물살을 가르는 놈의 속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호수 바깥으로 몸을 빼올린 귀신거북이 그대로 거대한 등갑과 함께 나를 덮쳤다.

콰아아앙――!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찍어 내린 땅바닥이 그대로 허물어지며 수몰된다. 호수의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사방으로 물보라가 튀었다.

하지만 이미 범위 밖으로 물러선 나는 파도처럼 들이닥친 물보라를 가르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눈앞에 떠오른 귀신거북의 얼굴.

스릉!

일체의 준비 동작 없이 뽑힌 칼날이 은빛으로 물든다. 은빛궤적은 그대로 긴 호선을 그리며 놈에게 쇄도했다.

그때 놈의 무채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눈앞으로 칼날이 날아드는데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고요한 눈동자.

그 순간 놈의 입이 슬며시 벌어지더니······.

-크롸아아―――!

천지를 진동하는 울음을 터트렸다. 눈앞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흉포한 울음소리.

놈의 울음은 충격파가 되어 주변을 강타했고, 그건 코앞으로 날아들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큭!"

나는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굴러 호수 경계의 숲까지 튕겨 나갔다.

온몸의 뼈마디가 저릿한 충격에 삐걱거렸다. 마치 트럭에 치인 것 같았다.

'「음파충격」인가?'

문자 그대로 소리를 매개체로 공격하는 기프트. 아마 놈이 흡수한 기프트 중 하나일 거다. 수많은 각성종을 먹어치웠을 테니.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귀신거북이 천천히 호수 밖으로 완전히 몸을 드러냈다.

놈의 무채색 눈동자가 뒤룩뒤룩 움직이더니 이내 흙투성이가 된 나를 발견했다.

콧김을 흥하고 내뿜은 녀석이 어슬렁거리면서 걸어왔다. 그럼에도 워낙 몸집이 큰 터라 놈과의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어차피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는 힐끗 하늘 위를 백색으로 물들인 조명탄을 바라봤다. 여전히 높게 떠오른 조명탄의 빛은 강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강하게 이를 악물며 놈에게 쇄도했다.

카카캉!

칼날과 맞부딪친 놈의 다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역시 평범한 가죽이 아니었나.'

사실 다리 한쪽이 덤프트럭만 한 크기였을 때부터 평범한 수준은 넘어섰다. 그럼에도 거북이라는 종의 특성을 알기에 등갑을 제외한 부분은 가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라면 기프트의 영향이겠군.'

단순히 몸집이 커지면서 가죽이 단단해진 것을 넘어서는 강도다.

날붙이와 부딪쳤는데 불꽃이 튀었다는 건, 금속과 비견될만한 경도를 지녔다는 뜻이다.

'예상은 했지만 귀찮게 됐어.'

나는 그대로 몸을 뽑아 올렸다.

콰앙!

놈이 치켜든 발로 그대로 내가 서 있던 곳을 짓밟았다. 바닥이 터져나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사이 나는 놈의 몸을 타고 등갑 위로 올라왔다. 족히 수십 미터는 될법한 너른 공간에 울퉁불퉁한 육각형 등갑이 펼쳐져 있다.

나는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곤 놈의 등갑에 칼날을 휘둘렀다.

타타탕!

불똥과 함께 칼날이 튕겨나온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역시 다리 가죽을 두드렸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등갑은 절대 못 뚫겠군.'

그때 등갑 사이로 뜨거운 난데없이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미간을 꿈틀하는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칫!'

그대로 등갑을 밟고 뛰어올랐다.

후끈한 열기가 뒤통수를 덮쳐왔다. 힐끔 돌아보자 하늘로 솟구치는 불기둥이 보였다.

'이젠 불꽃을 다루는 능력인가.'

과연 레이드 몬스터다. 아직 놈의 본래 능력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온갖 기프트의 향연이 끊이질 않는다. 앞으로도 몇 개의 기프트가 더 남았을지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서 아직 할만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놈의 기프트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

놈이 가진 기프트는 수십 개가 넘어갈 테고, 그 정도 숫자는 주인공 버프를 받은 나라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하물며 놈이 동물에서 지성을 깨달은 각성종이 된 건 고작 1년 남짓.

아무리 기프트가 본능에 각인되는 힘이라 해도 일정 수준 이상 끌어올리기엔 짧은 시간이다.

기프트의 역설.

능력이 너무 많기에 오히려 약해 져버린 케이스다.

물론 이대로도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까다로웠다.

'역시 약점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나?'

놈의 약점은 등갑과 연결된 목의 안쪽이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곳과 달리 연약한 피부라 검기를 두른 칼날이라면 단숨에 갈라버릴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놈도 자신의 약점을 안다는 거고, 그래서 항상 목을 움츠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불기둥이 사라진 등갑 위로 뜨거운 열기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기회는 이제부터 만들면 된다.'

인간도 실수를 하는데 저 괴물이라고 다르겠나. 그리고 그 실수를 하는 순간이 바로······.

'네놈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다.'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쥔 나는 그대로 놈에게 쇄도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지이잉!

은빛 칼날이 찬란한 빛을 뿜어냈으니까.

그리고 그 칼날이 만든 결과 역시도.

카가가각!

놈의 다리를 두드린 칼날은 이전처럼 튕겨나지 않았다. 이제 진짜로 다리 가죽을 갈랐다.

칼날이 헤집고 들어간 겉가죽이 두부처럼 썰렸고, 그 자리는 불로 지지기라도 한 듯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타올랐다.

-쿠오오오!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놈이 펄쩍 뛰어오르며 뒤로 물러섰다.

콰콰쾅!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중량이 대지를 짓누르자 형편없이 터져나갔다.

한차례 충격파가 일며 흙먼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나는 흙먼지를 뚫고 다시 놈에게 쇄도했다.

그때부터 거센 공방이 시작했다.

나는 계속 놈에게 다가가 칼을 휘둘렀고, 놈은 때론 피하고 때론 몸을 던져 덮쳤으며, 때론 기프트를 사용해 공격했다.

그러던 한순간, 짓밟는 발을 피해 잠시 뒤로 물러서던 그때.

귀신거북 역시 기회를 노렸던지, 놈의 얼굴이 그대로 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크롸아아―――!

또다시 터진 「음파충격」.

허공에서 공기를 터트리며 주변을 집어삼킨 충격파는 그대로 나를 덮쳤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내가 유도한 바였다.

몇 번 비슷한 패턴을 보여주며 놈의 눈에 익도록. 그래서 이 기회를 잡도록 말이다.

'이걸 기다렸다!'

나는 어느새 붉게 타오르는 칼날을 내밀었다. 그 순간 온몸을 거세게 휘도는 포스가 칼날로 뭉텅 빠져나갔다.

화르륵!

붉은 불길이 공간을 격하며 뿜어졌다. 「음파충격」의 충격파를 그대로 찢어버리곤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놈의 얼굴로.

그렇게 타오르는 검기가 귀신거북의 목줄기에 틀어박히는 그 순간.

"······!"

놈의 목이 수축하듯 줄어들며 등갑 안으로 들어갔다.

콰지직!

스쳐 간 검기가 놈의 이마를 찢고 등갑을 박살 낸다.

'저걸 피하다니!'

놈의 원형이 거북이라는 걸 깜빡했다. 저 거대한 몸이 등갑 안으로 숨어드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때 놈의 머리가 들어간 등갑의 구멍에서 두 줄기 푸른빛이 섬광처럼 뿜어졌다. 놈의 무채색 눈동자에서 뿜어진 빛줄기였다.

* * *

'이걸 기다렸다!'

나는 어느새 붉게 타오르는 칼날을 내밀었다. 그 순간 온몸을 거세게 휘도는 포스가 칼날로 뭉텅 빠져나갔다.

화르륵!

붉은 불길이 공간을 격하며 뿜어졌다. 「음파충격」의 충격파를 그대로 찢어버리곤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놈의 얼굴······로 향했어야 했는데?

콰지직!

순간적으로 몸을 낮춘 놈의 등갑 위로 검기가 틀어박힌다. 검기는 등갑을 갈랐지만, 그 속까진 파고들지 못했다.

'······! 이걸 알아채다니?'

그때 주변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흩뿌려진 물안개가 얼어붙더니, 이내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되어 휘몰아쳤다. 놈이 가진 또 다른 기프트의 힘이다.

쩌저저정!

수천 개의 얼음 칼날이 태풍이 되어 쇄도했다.

피부 위로 서리가 맺히고, 붉게 타오르는 검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도 대비하고 있었다.

'네놈만 기프트가 여러 개가 아니다.'

놈에게 숨겨왔던 또 다른 기프트.

「중력조작」 2단계 레벨.

광범위 조작스킬. 「춤추는 만유인력」.

퍼버버벙!

쇄도하던 얼음칼날이 모조리 땅으로 머리를 처박으며 추락했다. 얼음알갱이로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퍼석!

나는 얼음 결정으로 뒤덮인 대지를 질주했다. 공간이 늘어지는 감각 속에서 터져나가는 얼음알갱이가 느릿하게 재생된다.

얼음 먼지를 가르며 솟구친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

붉게 타오르는 칼날이 놈의 머리를 꿰뚫으려는 그 순간.

번쩍!

무채색이던 놈의 눈동자에서 푸른빛 섬광이 요동쳤다.

* * *

'이걸 기다렸다!'

기회였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검기를 뿜어내려고 했다.

'이대로 「음파충격」을 돌파해서 놈의 목줄기를 가른다!'

하지만 그때, 대낮처럼 하늘을 밝히던 조명탄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당했었나?'

네 번째 기프트 (4)

100화. 네 번째 기프트

'······당했었나?'

조명탄이 하늘을 밝히는 시간은 대략 5분.

쏘아 올린 지 얼마 안 된 조명탄이 벌써 사그라들었다는 건,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놈의 기프트에 휘말렸다는 뜻이다.

과연 레이드 각성종.

하지만 놈은 알까?

내가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끝내주마!'

나는 움켜쥔 검을 놓고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을 꺼냈다. 거무튀튀한 검신이 달빛 아래 드러난다.

그리고.

촤르륵!

갈라진 검신이 그대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놈에게 쇄도했다.

* * *

본능처럼 수많은 각성종을 먹어치우던 귀신거북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이 누구고, 어떤 힘을 갖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할지.

자신은 왕이었다. 비틀어진 세계의 절망이었으며, 멸망 이후 세계의 공포였다.

그때부터 귀신거북은 호수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종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각성종을 먹어 치웠다.

싸움은 쉬웠다.

막강한 방어력으로 적의 능력을 몇 번 상대해주고, 시간을 되돌려서 역으로 공격하면 속절없이 쓰러졌다.

눈앞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강해서 시간을 몇 번이나 되돌렸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촤르륵!

그때 인간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됐다.

손에서 길쭉하게 늘어나는 미지의 공격. 자신의 등갑마저 깨부쉈던 무식한 공격이.

지나간 과거요, 이미 되돌려진 시간이지만, 그때만큼 간담이 서늘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카카캉!

몸을 낮춰 등갑으로 받아낸 인간의 공격이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몇 번이나 등갑을 쪼개고, 갈라냈던 공격이었는데 이번엔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

귀신거북은 생각했다.

드디어 인간의 힘이 다했다고.

「시간역행」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게 바로 포스였다.

죽음에 이른 상처도, 터져나간 대지도 되돌릴 수 있지만, 소모된 포스만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건 「시간역행」도 포스의 영향을 받는 기프트기에 그랬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귀신거북이 낮췄던 몸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쿠쿠쿠쿵!

육중한 몸과 다르게 쇄도하는 속도는 전광석화 같았다. 보폭이 어마어마한 터라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미터를 주파했다.

힘이 빠진 인간 따위, 이 몸에 짓눌려 벌레처럼 죽으리라!

-크롸라라라!

승리에 찬 포효와 함께 인간을 찍어누르려는 그 순간.

쿵!

갑자기 인간의 손이 검게 물들며 커지더니, 쇄도하는 자신의 돌격을 막아냈다.

'······!'

마치 바위산에 몸을 들이박은 것 같았다. 아니, 거대한 호수에 몸을 던진 것 같았다.

인간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돌격을 막아냈고, 심지어 막아낸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발치에도 겨우 올법한 작은 인간이······ 대체 어떻게?

귀신거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껏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곧, 본능 아래에 잠들어있었던 공포를 깨웠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먹이사슬 아래 거북이로 살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던 포식자들의 위협을 말이다.

그때 인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서 목을 내줘서 고맙군."

귀신거북은 공포에 질렸다. 인간이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인 줄은 몰랐으나, 그 뉘앙스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귀신거북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 위험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시간역행」뿐이었다.

* * *

-크롸라라라!

나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돌진하는 놈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귀신거북의 피니쉬 패턴 중에 하나. 승기를 잡으면 목을 길게 빼고 적을 유린하며 짓밟는 육탄돌격.

그리고 그때가 바로 놈의 약점이 드러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다.

나는 빠르게 손목 안쪽을 쓸었다. 데스핸드의 물리적 전개를 위해 장착된 비상용 버튼.

철컥!

그 순간 데스핸드의 철갑 부위가 비틀리더니, 서로 맞물리며 손 전체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전개된 데스핸드의 진짜 모습.

나는 검게 물든 팔을 그대로 앞으로 내뻗었다. 마치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서.

쿵!

그러자 산이 멈췄다. 귀신거북의 거대한 육체가 거짓말처럼 멈춰섰다.

옷깃을 휘날리는 세찬 바람이 몰아쳤으나 그건 한 줄기 바람에 불과했다.

치익! 치이익!

충격을 받아낸 데스핸드가 붉게 물들며 열기를 토했다. 손등에 난 토출구로 뜨거운 증기가 뿜어졌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귀신거북의 회심의 일격이었던 육탄돌격을 막아낸 대가가 말이다.

"······!"

귀신거북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당황한 놈의 콧바람이 길게 뿜어졌다.

나는 놈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알아서 목을 내줘서 고맙군."

그때 귀신거북의 무채색 눈동자에 푸른빛이 휘돈다. 나는 그게 놈이 「시간역행」을 사용하려는 전조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놈에겐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거다.

나는 끌어올렸던 포스를 전개했다. 놈의 육탄돌격을 방어하는데 들어간 포스는 아주 미세한 수준. 그 나머지가 공간을 격하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빛과 같은 속도로 놈의 약점을 꿰뚫을 한줄기 칼날.

그 어떤 방해도, 그 어떤 과정도 없이, 오롯이 세계 위로 강림해 심판을 내릴 한줄기 벼락.

그 모든 걸 포스에 담아서 심상에 그려낸다.

포스는 의지요, 생명이니.

심상은 곧, 현상이 되어 빛으로 화한다.

「중력조작」 2단계 레벨.

원격제어 스킬. 「심판의 낙뢰」.

쿠르릉―――!

하늘에서 한줄기 은빛 섬광이 내리꽂힌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정확히 귀신거북의 목을 꿰뚫고 지상에 떨어졌다.

그건 내가 체인소드를 대신 뽑으며 하늘 위로 띄워놓았던 검이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크르르륵!

놈이 바람 빠진 비명을 내질렀다. 한껏 치켜든 목줄기가 파르르 떨렸다.

꿰뚫린 상처 위로 매캐한 연기와 시커멓게 탄 자국, 그리고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이 솟구쳤다.

놈이 발작하듯 몸을 꿈틀거린다. 눈동자의 푸른빛이 궤적을 그리며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그 빛은 절정에 달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푸른빛은 무채색으로, 다시 공허한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쿵!

놈의 거대한 육체가 쓰러졌다. 사후경직으로 꿈틀거리던 놈의 움직임은 금세 뻣뻣하게 굳어갔다.

나는 혀를 길게 빼물고 죽은 귀신거북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끝났군."

귀신거북이 「시간역행」을 못쓰게 만드는 방법. 단순한 해결책이었으나, 그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방법.

그건 쓰기 전에 단숨에 죽이는 방법이었다.

* * *

잠시 숨을 돌린 나는 여전히 뜨거운 증기를 토해내는 데스핸드를 바라봤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이 가득했던 이유가 바로 이 데스핸드 덕분이었다.

"······스미스 영감이 엄청난 걸 만들었군."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 능력을 기계장비로 만들어내다니. 과연 소울 시티의 전설명인으로 불릴법한 능력이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역시 배터리가 전부 방전됐나?"

증기 토출구 아래 달린 미세한 불빛이 빨간색으로 점등됐다. 배터리가 모두 소진됐다는 신호였다.

정확히 무슨 원리인진 모르겠지만, 스미스는 이 탄소나노튜브가 섞인 강화합금에 전자설비를 추가함으로써 충격흡수 능력을 극대화했다.

대신 충격량에 따라 배터리가 소모되는데, 배터리가 전부 방전되면 그 능력 또한 극도로 떨어진다.

이 때문에 스미스가 계속 팔 한쪽만 떼어내고 임플란트를 하자고 꼬셔대기도 했다. 임플란트로 전기공급만 된다면 단점이 사라진다며.

미친 소리 같았지만, 이 세계에선 흔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거절했고.

"어차피 데스핸드가 기회를 만들어주는 건 한두 번뿐이니까."

데스핸드가 전설급 장비에 속하긴 하지만, 원래 임플란트로 만들어진 장비다. 애초에 이 정도 능력까진 바라지도 않았기에 지금도 충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칼잡이다.

결국, 나를 도시 위로 올려놓을 무기는 칼 한 자루면 족했다.

······뭐, 몇 자루 더 있어도 좋고.

아무튼,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다.

"이제 이놈을 어쩐다······."

나는 쓰러진 귀신거북의 사체를 올려다봤다.

이종포식을 위해선 놈의 심장을 찾아야 했다. 직접 칼날을 꽂아 넣어 기프트를 흡수해야 했으니.

문제는 이 거대한 사체를 뒤져 심장을 찾는 일이고, 하필 이 사체의 주인이 거북이라는 사실이다.

"······심장을 찾는 것도 일이로군."

일단은······ 저 딱딱한 등갑을 해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 *

하늘이 서서히 파랗게 물들었다.

한밤에 시작했던 해체작업은 날이 밝아 오고서야 끝이 보였다.

"후욱. 후욱."

나는 피로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향했다.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진한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았다.

수면 위로 빛살이 굽이쳤다. 떠오르는 태양을 머금은 호수는 그 자체로 웅장했다.

나는 물을 보자마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풍광이고, 웅장이고 지금은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을 물에 담그자 한껏 달아올랐던 열기가 서서히 식었다. 그렇게 조금 더 물속에 있다가 몸을 일으켜서 호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두 동강 나다시피 갈라진 귀신거북 사체와 흘러나온 핏물들로 흥건했고, 쏟아진 온갖 장기와 잘린 살점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 짓도 두 번 할 짓은 못 되는군."

다음번엔 꼭 안드로이드를 데려오거나,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예를 들면······

"숀을 데리고 올 걸 그랬군. 소매치기 하는 걸 보니 손재주가 있는 것 같던데."

음. 그래. 다음엔 꼭 숀을 데려와야겠다.

아무튼, 그건 다음 일이고······ 지금은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하며 얻은 소득을 정리해볼 때다.

콰직!

나는 바닥에서 자갈 하나를 주워 바스러뜨렸다. 산산이 조각난 자갈이 가루가 되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단 「시간역행」은······."

그 순간, 땅바닥으로 떨어지던 조각들이 위로 솟구쳤다. 정확히는 내 손바닥 안으로.

그리고 저마다 조각을 맞추더니 처음 모습이던 자갈로 돌아왔다. 완벽한 복원이었다.

"······아직 이 정도가 한계인가?"

귀신거북의 심장을 꿰뚫고 문제없이 기프트를 흡수했다.

레이드 각성종의 특성상 다른 기프트가 흡수될 위험은 없었다. 레이드 각성종이 가진 유니크 기프트는 모든 기프트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신거북이 사용하던 「시간역행」과 비교하면 초라했지만, 그건 종의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기프트는 여타 각성종과 작용기전이 조금 달랐다. 단계별로 강해지는 힘이 다른 각성종보다 유난히 약했다.

즉, 기프트 본연의 힘은 인간보다 다른 각성종이 훨씬 더 잘 다룬다는 뜻이었다.

대신 인간은 가지고 있는 다른 능력과 호환되는 '스킬'이라는 능력을 만들었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게, 내가 「시간역행」을 얻으려고 했던 본래 이유였다.

"······이제 알겠어. 제로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시공간을 질주해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를."

* * *

지상으로부터 수천 미터 상공.

비행체에 달린 25개의 카메라가 어느 한 지점을 비추고 있다.

순간, 구름이 갈라지며 한 줄기 빛이 지상에 드리운다. 황금빛으로 물든 호수의 수면이 부서지듯 일렁인다.

그리고 그 호수를 등지고 한 대의 바이크가 떠나고 있었다.

나르시스 (1)

101화. 나르시스

돌아오는 길.

그레이트 필드의 황량한 개활지를 조금 돌아 감자농장에 방문했다.

추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명했던 기억들은 있었기에.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기엔 최고의 장소였다.

하지만 입구부터 내 기억과는 많이 달라졌다.

허리까지 자라난 잡풀들과 건물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넝쿨들. 사람들의 발길이 떠난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나조차도 안으로 들어서기 망설여질 정도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폐허가 되어 있군. 하긴, 그렇게 초토화가 됐는데 다시 쓸 리가 없겠지.'

혼란스러웠던 각성의 그 날.

나뿐만이 아니라 블랙스컬도 농장을 공격했었다.

쏟아지는 폭격이 농장에 떨어졌다. 건물 대부분이 폭격에 터져나가거나, 불탔다.

내가 이 농장의 주인이었더라도, 그 정도 일이 터졌다면 이곳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 거다.

단순히 건물 몇 채 올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곳은 마약공장이었으니까. 노출된 마약공장을 다시 쓰는 결정은 머저리가 아닌 한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허물어져 가는 감자농장을 살피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내가 떠날 때와 달라졌는데?'

첫 느낌대로 폐허인 건 맞다.

낡고 오래된, 관리되지 않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그 흔적들이 내 기억들과 어긋나있다.

일단 허물어져 가지 않았다. 분명 터지고 쪼개지며 지붕이 통째로 무너진 건물도 많았는데······ 지금은 어딜봐도 낡긴 했지만, 건물 자체는 멀쩡했다.

나는 기억을 되짚어 가장 정확한 흔적이 남은 곳으로 향했다.

나와 노동자들이 머물렀던 감옥. 노동자 숙소로.

'철문이 멀쩡하군.'

잔뜩 녹이 슬었지만, 특유의 거대한 철문은 여전히 견고했다.

이 철문은 분명 내가 박살냈다. 갇혀있는 노동자들을 빼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증거로 그라타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해방전선에 남아 있었다.

슬쩍 열린 문틈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앉은 내부가 보였다.

흘러나오는 바람결에 퀴퀴한 곰팡내가 느껴졌다. 나는 그 곰팡내에서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빠르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정신없이 농장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딜 봐도 내가 남긴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콘크리트 기둥을 갈랐던 칼날의 흔적도, 감독관을 피떡으로 만들며 무너졌던 벽의 흔적도, 전투를 하며 남겨졌던 흔적들 전부 다.

이건 마치······.

"······퀘스트가 끝난 이후 리셋된 것 같은 모습이로군."

나는 강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계는 분명 현실이다.

내가 원래 있던 세계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현실이라고 믿었었다.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더라도, 엄연히 눈앞에 실재(實在)하니까.

'그래. 마치 다중우주처럼.'

그런데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눈앞의 광경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과연 이 세계가 네가 믿는 대로 현실일까? 네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진짜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라는 질문을.

나는 수풀로 뒤덮인 과거의 낡은 기억 속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마주했다.

"······확인해볼 게 생겼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게 된다면······ 나는 이 빌어먹을 세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 * *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도로 위를 달렸다.

이 세계로 떨어지고 처음으로 자유를 얻었던 그 날도 지금처럼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곧 황량한 마을 하나가 보였다.

처량한 달빛 아래 쓰러져가는 건물들. 잔뜩 때가 낀 창문 사이로 희미한 전등불이 가득하다.

바이크가 미끄러지며 마을 진입로로 들어선다. 그곳엔 진입로 한쪽을 점유한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늘어선 드럼통들 위로 불길이 솟구쳤다. 뭘 넣고 태우고 있는 건지, 한밤인데도 시커먼 연기가 줄기줄기 하늘로 날아오른다.

천천히 바이크의 속도를 늦추자,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불청객을 바라보던 사내가 굵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 너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 일렁이는 불빛을 반사하는 반들반들한 민머리.

'코이라고 했던가?'

과거 이 마을에 들렀을 때도 만났던 사내. 바로 다이손 영감의 사위이자, 손마담의 남편이었다.

"나를 기억하나?"

나는 완전히 바이크를 세우며 물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 와이프가 미식가라고 아주 극찬을 했었는데!"

흐음. 나를 기억한다 이거지?

"그나저나 때깔이 엄청 좋아졌는데? 그때는 반쯤 부랑자나 다름없는 행색이었는데······ 도시에서 돈 좀 벌었나 봐?"

"뭐, 보다시피 먹고 살 정도는 되지."

"쯧! 칼잡이가 먹고살 정도가 된다는 건, 여전히 도시는 개판이라는 소리겠군. 왜 거기서 살아? 여기까지 돌아다니는 걸 보면 굳이 도시에 목매는 것 같진 않은데."

작게 혀를 찬 그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도시 자체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도시는 변하지 않거든. 언제나 더럽고, 시끄럽고, 위험하지. 나 같은 칼잡이가 살기엔 좋은 환경이야."

"그것도 한때야. 네가 아직 젊어서 모르나 본데······ 라떼는 말이야. 개처럼 바글바글한 도시에서 한탕 하고 이런 시골에서 유유자적 지내는 게 꿈인 시절도 있었다고. 이것 봐!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얼마나 평화로워?"

콧수염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하던 그가 마을을 돌아봤다.

고즈넉하게 떨어지는 달빛 아래 허름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불빛을 밝히고, 침묵이 내려앉은 거리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이곳이 도시였다면 저 어둠 아래엔 갱과 마약에 취한 범죄자들이 가득했겠지.

"평화롭긴 하군.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서. 그건 그렇고, 아직도 레스토랑을 하나?"

"아니! 이미 접었지!"

"접었다고? 왜지?"

"왜냐니! 당연히 망했으니까 접었지! 네가 다녀간 뒤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음식을 개발하겠다고 하는 통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그런가? 아쉽군."

그러니까 음식 개발에 실패해서 망했다는 건가? 조금 아쉬웠다. 오랜만에 별미를 먹을 수 있었는데.

"아, 아쉽다고?"

그런데 코이를 비롯한 주변의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일렁이는 화톳불 사이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너, 너, 너! 행여나 그런 소리 입 밖에도 꺼내지 마! 너는 한번 먹고 가면 끝이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

나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코이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리 호들갑이지? 아? 그 음식 개발비 때문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손마담을 만나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지?"

"레스토랑 자리로 가봐. 지금은 커피를 팔고 있으니까."

"커피라······ 알겠다. 알려줘서 고맙군."

"고마우면 입 조심해! 절대 음식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참고하도록 하지."

나는 쓰로틀을 천천히 당겨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백미러로 코이에게 다가간 사내들이 심각한 얼굴로 쑥덕거리는 게 보였다.

이제 보니 손마담의 레스토랑이 이 마을의 명물이었나 보군. 하긴, 그런 별미라면 맛집 투어로도 종종 찾아올만할 테니.

'그런데 왜 음식을 접고 커피를 만드는지 모르겠군. 진짜 돈 때문은 아닐 테고.'

손마담은 소울 시티 최고 부자 중 한 명인 다이손의 딸이다.

애초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마을에서 레스토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번 물어나 봐야겠군.'

그러는 사이, 바이크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예전 손마담의 레스토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역시나 그때처럼 따로 간판은 없었지만, 문밖으로 은은한 커피향이 향긋하게 흘러나왔다.

"어머! 어서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지 손마담이 바(Bar)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마침 잘됐어요. 여기 앞에 앉아요. 내가 금방 마실 거 만들어줄게요"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바 테이블로 자리를 권했다. 나도 그게 편했기에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요? 편하게 물어봐요."

그녀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대답했다. 새하얀 손가락이 연신 굵직한 무언가를 쓸어내렸다.

한 손에 전부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굵은 칵테일 쉐이커였다. 그런데 여기 커피말고 술도 파나?

살짝 고개를 갸웃한 나는 다시 본래 질문으로 돌아왔다.

"혹시 제가 떠나고 나서······ 이 마을에 특이한 일이 생겼습니까?"

"특이한 일? 글쎄요. 여긴 1년 365일 특별할 게 없는 곳이라······ 가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모른다니까요?"

"특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평소와는 다른 일이요. 예를 들면 저 같은 외부인이 찾아왔다거나······."

"으음~ 그런 일이라면······ 그래. 한 달 전쯤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시시콜콜했다.

옆집 창문이 깨져서 집안이 난장판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신 나간 올빼미의 소행이었다거나.

도시에서 도망친 범죄자가 몰래 숨어들어서 강도질을 하려다가 자경단에 걸려서 죽었다거나.

정기적으로 필요 물품을 구하기 위해 도시에 보냈던 청년 둘의 소식이 끊겨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거나.

"아? 그러고 보니, 그쪽 해결사였죠? 혹시 이 청년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볼 수 있겠어요?"

이야기를 하는 도중 난데없이 훅 들어온 의뢰였지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았고, 의뢰비용도 나와 맞지 않았다.

"저 말고 다른 해결사가 맡을 수 있도록 중개인을 소개해줄 순 있습니다."

"에이. 그럼 됐어요. 딱히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라서. 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이만하면 궁금증은 풀렸습니다, 마담. 감사합니다."

나는 손마담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이야기로 어느 정도 궁금증은 해결됐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곳도 내가 떠난 후 정상적으로 시간이 흘러간 것 같다. 저런 시시콜콜한 사건이 여럿 벌어진 걸 보면.

'그럼 리셋된 지역은 튜토리얼 지역이 유일하단 건가?'

그때 음료를 다 만들었는지, 손마담이 커다란 유리잔을 내 앞에 내려놨다.

"자! 목말랐을 텐데 쭉 들이켜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뭘 넣은 건지 유리잔은 초록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뭐지? 에너지드링크로 만든 음료인가?'

고개를 갸웃하고 벌컥 들이켠 순간.

"······!"

미각을 넘어 오감을 강타하는 맛의 파도에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안에 가득 찬 음료를 간신히 목으로 넘긴 후 물었다.

"이, 이건 대체 뭐죠?"

"마침 장사가 잘 안돼서 필살 메뉴를 개발하고 있었거든요! 민트초코고사리라떼에요! 괜찮죠?"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

필살(必殺) 메뉴.

반드시 죽이겠단 뜻이라면 성공이었다.

* * *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도로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언젠가 달렸던 그 날처럼, 나는 질주하는 바이크 위에서 생각했다.

물론 고민의 대상은 달랐다.

'일단 가설 하나는 확인했다. 주요배경인 도시 바깥이라도 나와 관련된 상호작용은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맺어놨던 인연들까지 리셋됐다면,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바로 리셋, 그 자체다.

나르시스 (2)

102화. 나르시스

'마냥 현실이 아니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 규모로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 세계가 내가 원래 살던 세계처럼 또 다른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울의 주인인 소피아.

그녀와의 대화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있었으니까.

'빨간약, 파란약.'

현재에 만족할 거냐, 진실을 마주할 거냐의 선택.

그리고 여기서 진실이 뜻하는 건 단순히 비밀이야기를 듣는 수준은 아니었다.

'진실은 현재를 파괴한 자리 위에 세워지지.'

어떤 선택을 하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거다. 3년 후 사라졌던 소피아가 그랬듯이.

'아직까지는 표본이 적다. 튜토리얼 지역이라서 리셋이 됐을 수도 있고, 다른 이벤트가 섞여 있기에 리셋이 됐을 수도 있어.'

어쩌면······ 리셋이 됐다는 것 자체가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

지금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또 다른 리셋 지역을 발견하거나, 그와 비슷한 특이점을 발견하기 전까진.

'그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군.'

나는 지평선 너머 하늘 위로 솟구치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가진 단서는 단 하나뿐.

그걸 쫓는다.

'감자농장의 진짜 주인. 그 마약갱 놈들을 찾아야겠어.'

* * *

"그건 쉽지 않겠어요."

로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양쪽으로 땋아 내린 백금발 머리칼이 조명에 어지러지듯 반짝였다.

양손으로 찻잔을 쥔 채 홍차를 홀짝이던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도시 바깥 마약공장인데다가, 문을 닫은 지 한참 됐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에요. 어쩌면 못 찾을 수도 있고요."

"흐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단호한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블랙 스컬의 주요 거점까지 알아냈던 그녀의 능력으로도 힘든 건가?

그런 내 의문을 알기라도 하듯,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 도시에선 매일 수십만 명이 마약에 취해요. 유통되는 마약의 종류도, 양도 어마어마하죠. 시 정부에서도 적색 등급 마약이 아니면 터치를 안 하고요."

어마어마한 숫자다.

매일 약에 취한 수십만 명의 잠재적 범죄자들이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바로 뒤에 언급했듯, 수요가 있다는 건 당연히 그만큼의 공급이 있다는 뜻이다.

대체 이 도시의 마약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당연히 이 노다지 시장에 웬만한 갱들은 전부 다 뛰어들었어요. 심지어 고객들이 알아서 찾아오니 팔아먹기도 쉽죠. 아마 도시 바깥이 아니라 40번대 구역의 공장단지에서도 암암리에 마약을 제조하고 있을 걸요? 일단 만들기만 하면 파는 거야 문제도 아니니까."

로제의 말에 나는 첫 의뢰를 떠올렸다.

기업에서 도난당했던 실험용 적색 등급 마약을 되찾는 의뢰.

처음엔 도둑놈이 훔쳐간 물건을 되찾는 의뢰였지만 알고 보니 그게 적색 등급 마약이었고, 그 배후엔 지역 갱이 있었다.

놈들이 어떤 용도로 적색 등급 마약을 노렸는지는 모른다. 그때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대답을 듣기 전에 모두 다 죽여버려서.

아마 그걸 밀매해서 팔았을 수도, 혹은 그들이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마약을 활용해서 다른 마약을 제조하려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갱이 있던 곳도 40번대 구역이었으니까.

"그 말은 마약공장이나 공급처가 너무 많아서 주인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뜻인가?"

"비슷해요. 게다가 놈들끼리 전쟁을 하면서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애초에 정상적인 사업체가 아니잖아요?"

"전쟁이라······."

그러고 보니 블랙 스컬이 왜 마약공장을 습격했나 했더니······ 상대 조직에서 의뢰했었나 보군?

"하지만 방법은 있어요."

그때 로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르시스>라면 알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들 공장일 수도 있고요."

나르시스.

소울 시티 최대 마약조직이다.

사실상 이 도시에 유통되는 마약의 절반가량이 그들 손을 거쳐서 퍼지는데, 직간접적인 영향까지 합치면 도시 전체의 마약 유통망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네 말대로 쉽지는 않겠군."

"맞아요. 그들도 철저히 점조직으로 움직이니까요."

마약조직답게 그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인다. 각 구역마다 지부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고, 수시로 없어지거나 바뀐다.

그건 귀찮은 단속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백색 황금을 캐는 노다지를 움켜쥔 숙명이기도 했고,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흘렸던 피의 대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놈들은 단순히 갱단으로 분류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돈이란 곧 힘이다. 권력과 무력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때려 박은 나르시스의 친위대는 웬만한 기업의 경호세력보다도 강했다.

"그래도 너라면 방법이 있겠지?"

로제가 나르시스를 언급하며 방법이 있다고 한 이유가 있을 거다.

미간을 찡그린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푸른색 눈동자 위로 한줄기 걱정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꼬리를 찾는 건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알아낼 수 있어요. 당신이라면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겠죠. 그런데 어쩌려고요? 진짜 나르시스와 부딪치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필요하다면."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눈빛.

입이 마르는지 침을 꼴깍 삼킨다. 가녀리고 새하얀 그녀의 목덜미가 작게 흔들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유가 뭔데요?"

"지금은 얘기해줄 수 없어."

"······."

순간 그녀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그런 대답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

푸른색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그 안으로 폭풍우가 몰아친다.

나는 습기가 차오르려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도 내게 많이 의지했다. 함께한 시간이 오래됐다는 건, 서로 공유한 시간이 많다는 거다.

하물며 나와 로제는 서로에게 첫 경험과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로제는 첫 중개인이었고, 로제는 내가 첫 독점 해결사였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이름이 되었으며, 대체할 수 없는 일부분이 되었다.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가랑비에 젖은 것처럼 어느새 서로에게 젖어버렸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널 못 믿어서가 아니니까. 다만······ 아직 나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걸 알아보기 위해 나르시스의 정보가 필요한 거고."

"······알겠어요. 대신 나중에 꼭 얘기해줘야 해요."

나라 잃은 표정이 됐던 그녀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그 모습이 처연하게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뒷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세계의 진실에 접근했을 때······ 그때도 여전히 이 세계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로제가 나르시스의 꼬리를 잡는 동안, 나는 로세툼 지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쐐애애액!

은빛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검 끝에서 늘어진 빛줄기가 공간을 격하고 샌드백용 표적을 강타했다.

퍼억!

강철을 덧대 만든 표적이 두부처럼 꿰뚫렸다. 주먹이 드나들 정도로 커다란 구멍.

하지만 빛줄기는 표적을 꿰뚫고도 멈추지 않았다.

순간 뻗어 나간 빛줄기가 프리즘에 맺힌 것처럼 갈라진다. 수면 위에 떨어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사방으로 쇄도했다.

서걱!

연무장 곳곳에 세워놓은 샌드백용 표적이 단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위아래가 분리된 표적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지금!'

그 순간 나는 집중했다. 휘도는 포스가 척추를 지나 정수리로 쏟아져 들어간다.

반으로 갈라진 표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텅!

묵직한 소음을 내는 그 순간.

텅! 하며 바닥에 부딪친 소음이 터어어엉! 하며 길쭉하게 일그러졌다.

점등된 전등의 불빛이 거칠게 깜빡이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떠돌던 먼지가 흐르던 공기를 따라 역순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졌던 표적이 서서히 위로 떠올랐다. 떨어졌던 궤적 그대로 시간을 거슬렀다.

그건 분명 느렸지만, 또한 찰나였다.

갈라진 표적은 다시 하나로 이어졌고, 꿰뚫렸던 표적의 구멍은 어느샌가 메워져 있었다.

내 인식은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인지했고, 이게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 순간.

번쩍―――!

내게서 뿜어진 푸른빛이 번개를 치며 공간을 물들였다.

"······."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가까이부터 멀리까지.

대부분 표적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아직 여기까진가.'

일정 범위 바깥의 표적은 되돌아오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대략 내 주위로 10미터가량.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범위다.

'시간이 지나 숙련도가 올라가면 더 늘어나겠지.'

다만, 지금은 1초 남짓한 시간을 되돌렸기에 이 정도다. 만약 시간을 더 뒤로 되돌린다면 범위는 급격하게 줄어들 거다.

범위와 시간이 반비례하지만, 그 손실률이 꽤나 크다. 인간종 특유의 한계 때문이다.

즉, 나는 절대 귀신거북과 같은 규모로 「시간역행」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종에겐 특별한 힘이 생겼지.'

바로 스킬이라는 특별한 힘이.

오로지 인간종만이 2단계 레벨부터는 기본레벨과 전혀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스킬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만히 호흡을 고르면서 뇌를 가속했다. 미세하게 연결된 길을 따라 포스가 회전하며 뇌를 휘돌았다.

그 순간 세계가 느려졌다.

점멸하는 시간 속에서 빛줄기가 뻗어 나가고, 오감을 통해 주변의 모든 정보가 쏟아지듯 들어온다.

제로의 영역.

나는 이제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제자리에서 제로의 영역을 발동할 수 있었다.

"후우······."

가속됐던 뇌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제로의 영역이 해제되며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3단계도 큰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겠군.'

물론 후유증은 있겠지만, 지난번처럼 죽다 살아나는 수준까진 아닐 거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완벽하게 제어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기프트의 완성. 초월 레벨까지도 시도할 수 있겠어.'

초월 레벨.

이 게임의 만렙을 찍고 스킬 트리를 끝까지 타게 되면 열리는 특화 스킬.

사실상 그때부터가 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메인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보스들을 제외하고선, 어떤 적도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아마 그때가 온다면 많은 게 변해있겠지.

나도. 이 빌어먹을 세계도.

띵동!

그때 단말기에서 알림 소리가 들렸다. 꺼내든 화면 위로 짤막한 메시지가 표시됐다.

[찾았어요. 꼬리.]

나르시스 (3)

103화. 나르시스

때마침 스미스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바로 인벤토리가 완성됐다는 소식이.

나는 나르시스의 꼬리를 찾기 전에 <세븐 프롱드>를 방문했다.

언제 들여다 놓은 건지, 안드로이드가 관리하는 매장을 지나 뒤쪽으로 이어진 공방으로 향했다.

소형용광로 앞에서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던 스미스가 나를 발견했다.

"오! 어서 오시오."

"또 뭘 만드시려고 하십니까?"

"아? 이거 말인가?"

그가 소형용광로를 힐끔 쳐다보더니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대가 내게 창작욕을 줘서 말이오. 인벤토리에 실험해볼 무기가 막 떠오르지 뭐요? 나 같은 사람은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소이다."

"인벤토리에 실험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완성됐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실험이라니? 무슨 실험을 하겠다는 거지?

"그 신비한 능력 있잖소. 중력을 조작하는 마법. 어떤 물건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투하하는지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결과가 일어나겠소? 게다가 무기로 쓰려면 대기를 빠르게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소하거나 불안정으로 폭발해버릴 수도 있잖소? 일단 내 눈으로 결과를 봐야 제일 정확하겠지만, 그렇다고 도시 위로 떨어뜨릴 수도 없으니! 하하하! 또 내가 무엇을 준비했냐하면······"

나는 스미스의 수다를 한참 동안 들어야 했다.

그가 기쁨에 차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냉정히 시끄럽다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뭐, 나도 대충 어떤 능력이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지 알아야 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완성은 된 겁니까?"

"아차차! 그렇지.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빠르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공방 한쪽에 놓인 작업 테이블로 다가갔다. 거기서 익숙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자. 일단 이거 받으시오."

지난번 의뢰 때 맡겼던 AI 워치였다.

새삼스레 감회어린 눈으로 워치를 착용하자, 곧바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오셨군요!

한껏 톤이 올라간 목소리.

이전에도 목소리에 감정이 섞인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지금은 진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잘 지냈어?"

-아니요. 마스터가 보고 싶었어요! 저 변태 늙은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요! 저를 볼 때마다 꼭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에요!

"······어?"

이브의 엄살에 나도 모르게 스미스를 바라봤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와 이브의 만남을 지켜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눈동자 아래로 뭔가 뜨거운 열망이 느껴졌다.

분명 지적 호기심이 맞겠지만, 저 수염 가득한 근육질 거구의 눈빛은 충분히 부담스럽긴 했다.

"크흠!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내가 몸을 돌리자 스미스가 따라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공방과 이어진 뒷문으로 나갔다. 야외작업을 위해 마련된 공터에 커다란 컨테이너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스미스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러자 컨테이너 중앙이 서서히 옆으로 갈라졌다.

"······어마어마하군요. 멋집니다, 스미스 씨."

나는 모습을 드러낸 인벤토리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가로세로 직경 5미터는 넘어갈 법한 크기에, 체고도 2미터 가까이 됐다. 이전에 이글아이도 컸지만, 이건 크다의 수준이 아니라 거대하다라는 표현이 맞았다.

내 감탄사에 입꼬리를 씰룩거린 스미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 커험! 가동시켜보시오. 이브는 이미 자리 잡았으니."

"그럼."

기분 좋은 웃음을 참고 있는 스미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손목에 채워진 워치를 바라봤다.

"이브야."

긴말은 필요 없었다. 작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이브는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네, 마스터!

씩씩하게 대답을 내뱉은 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인벤토리에 달린 18개의 프로펠러가 거센 광풍을 내뿜으며 서서히 떠올랐다.

세차게 휘날리는 바람결 사이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줄기가 보였다.

인벤토리 정중앙에 박힌 사이버네틱스 코어.

새하얀 빛무리는 코어 중심을 빙글빙글 휘돌며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 순식간에 하늘 위로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에서 멀어지며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카메라 시야 연동합니다.

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렌즈 시야 위로 카메라 시야가 겹쳐진다.

얼마나 높게 떠오른 건지, 지나가는 구름 아래로 그림 같은 도시 전경이 펼쳐졌다.

나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에 저절로 탄성을 내뱉었다.

"와······."

지도나 사진으로 많이 봤지만, 이건 또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진짜 하늘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위치 확인. 확대합니다.

이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브 역시 내 반응에 신난 건지 들뜬 목소리였다.

렌즈 화면이 쭈욱 당겨진다. 콩알처럼 작았던 건물들이 점점 확대됐고, 흔적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봤었던 위성사진 수준의 해상도.

하지만 인벤토리의 카메라는 그러고도 끝없이 확대된다.

저 멀리 보였던 건물들이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가까워졌고,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마저 구분이 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내뱉고 있는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 이렇게까지 확인이 가능하다고?'

이 정도면 뒷조사 의뢰쯤은 집에서도 할 수 있겠는데? 물론 이런 물건을 갖고 뒷조사 의뢰에 쓴다는 건 낭비긴 하지만.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카메라가 확인됐습니다. 인식저하 프로세스를 발동합니다.

그 순간 내 모습에 노이즈가 꼈다. 카메라 위로 지직거리듯 내 주위가 일그러지더니, 내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다.

"이제 이런 것도 가능해? 대단하다, 이브야."

-가, 감사합니다, 마스터! 더한 것도 됩니다!

이브가 신나서 이 기능, 저 기능을 마구잡이로 보여줬다.

나는 적당히 기능을 구경하다가 대공미사일 방어를 보여주겠다며 현란하게 회피기동을 하며 플레어를 뿜어대는 모습에 카메라 연결을 끊었다.

이건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그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스미스가 물었다.

"만족하시오?"

"대만족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거대한 크기를 띄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속도는 눈으로 쫓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그 안에 내장된 기능들은 한 번에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걸 이렇게 빠른 시간에, 그것도 전혀 다른 에너지원인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연동해서 만들어내다니.

과연 전설 명인이라 불릴 만했다.

스미스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오. 그대가 원하던 능력은 무기사출이니 말이오."

"그것도 당연히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스미스 씨가 만들었는데요."

"흐읍! 큭! 커험! 그, 그렇지. 당연히 문제가 없을 거요."

기어코 웃음을 터트린 그가 급하게 웃음을 참았다. 너무 좋아하는 게 티가 나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두꺼운 팔로 수염난 얼굴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내가 일단 공방에 있던 무기들을 종류별로 채워 넣었소. 엄청 좋은 무기들은 아니지만, 쓰기엔 크게 문제가 없을 거요."

"감사합니다."

"커험! 그리고 키네틱 스트라이크용으로 제작한 무기도 넣어놨으니, 나중에 써보고 꼭 말씀해주시오. 소재나 형태 개량을 거쳐야 하니까. 정보는 이브가 알고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이번 주 내로 바로 말씀드리죠."

"헙! 그, 그렇게 빨리 말이오? 대,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마 이렇게 빨리 사용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

나는 슬며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마침 실험하기 거리낌 없는 쓰레기들을 만나야 해서요."

* * *

40번 구역.

소울 시티의 유일한 항만답게 이곳은 40번대 구역답지 않게 화려했다.

번쩍이는 네온 불빛, 화려한 레이저기둥, 밤하늘을 떠다니는 홀로그램까지. 도시를 오가는 모든 화물이 이곳을 통해 운송되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으레 항구도시가 그렇듯, 40번 구역의 뒷골목은 썩어빠졌다. 40번대 다른 구역들보다도 더욱.

노숙자들이 음식물쓰레기를 뒤지고, 약에 취한 중독자들이 바닥을 기어 다녔으며, 그림자 속에 숨은 범죄자들은 호시탐탐 빛을 오가는 사람들을 노렸다.

그건 거대한 돈이 만들어낸 그늘이었다. 항구의 찬란한 빛에 가려진 그림자였다.

그리고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이다.

나는 한때 개발되다 중지된, 이제는 폐허에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관리가 안 된 지하는 습하고, 더럽고,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군."

꽤나 크게 짓다가 말았는지, 쭉 뻗은 지하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로처럼 사방으로 흩어져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완공되기 전에 엎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방사능 때문이라고? 웃기는 소리지."

이 공사가 중지된 표면적인 이유는 지하에 스며든 방사능 때문이었다.

이론적으론 그럴싸했지만, 사실 개소리였다. 이미 방사능 중화 장비가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으니까.

이 공사가 중단된 실질적인 이유는 도시 중앙에 사는 기득권들의 반대였다. 그들은 지하철의 라인이 빈민구역과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하철 특성상 관리되지 않는다면 슬럼화가 될 가능성이 컸고, 그곳에서 노숙자나 범죄자들이 구역을 넘어 자신들이 머무는 중앙으로 오는 걸 경계했다.

결국, 항구를 잇는 지하철은 폐지되었고, 이 도시에서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곳은 20번대 미만 구역뿐이었다.

사실 그거야말로 돈 낭비였다. 거기 사는 자들은 전부 자가용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하늘을 나는 부유자동차까지도.

나는 작게 혀를 차곤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온갖 시선들이 달라붙는다.

노숙자, 마약중독자, 범죄자, 창녀, 미치광이······ 더 나열할 것도 없을 정도의 밑바닥 인생들의 끈적한 시선이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내 허리춤에 달린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누군가가 대신 죽을 테고 그들의 목표는 쓰러진 시체로 바뀌겠지.

아무도 그 쓰러진 시체가 되고 싶진 않은 거다. 그저 지금처럼 대신 나서줄 누군가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미로처럼 엮인 지하도를 따라 내려가자, 어디서 가져온 건지 드럼통 안에 땔감을 태우는 갱들이 보였다. 시커먼 연기가 줄줄 올라오는 걸 보니, 평범한 땔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접근하자, 불을 쬐며 싸구려 술을 들이켜던 놈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가 카를로인가?"

나는 얄팍하게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누구?"

"42구역에서 왔다. 약을 구하려면 네게 가면 된다던데."

"뭐? 누가 그딴 개소리를 해? 너 씨발 뭐하는 새끼야?"

그가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허리춤에 매어진 총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녀석들도 흉흉한 눈빛으로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나는 차분히 놈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되새겨줬다.

"42구역에서 왔다고 방금 말했을 텐데? 흐음······ 설마 지역 공조도 모르는 말단 놈을 알려준 건가? 일 처리를 개같이 하는군."

내가 뒷말을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자, 순간적으로 놈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너, 진짜 조직에서 왔다고? 난 전해 들은 게 없는데?"

"떠보는 거냐, 몰라서 묻는 거냐?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일을 일일이 보고했다고?"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구겼다.

"흐음······ 그건 그렇지."

그제야 놈의 눈빛에서 의심이 옅어진다.

총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다시 술병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긴 했으나, 적의는 사라진 상태다.

"길게 얘기할 거 없고, 서로서로 편하게 가자고. 나는 약만 받으면······"

그때 지하도 끝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기다란 빛줄기가 여럿 반짝였다.

부아아앙!

그건 바이크의 전조등이었다.

어떤 미친놈들이 이곳까지 바이크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서, 지하도를 달리고 있는 거다. 비틀거리는 불빛 움직임이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이크들이 정확히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거고······

"캬하하하! 약 내놔! 약약약!"

"오오오오! 그분께서 부르신다! 약이 필요해! 더 많은 약! 더 강한 약!"

그 위에 올라탄 놈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동소총을 꺼내 들고 있다는 거였다.

부아아앙!

투타타탕!

바이크 굉음과 지하도에 울리는 총성이 폭격이라도 난 듯 메아리쳤다.

나르시스 (4)

104화. 나르시스

갑자기 벌어진 총격전에 노숙자들은 머리를 처박았고, 그나마 용기가 있는 자들은 기어서 도망쳤다.

강현재는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긴 채, 그 옆에 같이 고개를 처박은 카를로에게 물었다.

"저 새끼들 뭐야?"

"몰라 씨발! 눈깔 돈 거 보니까 약쟁이 새끼들 같은데!"

카를로가 얼굴을 한껏 구기며 대답했다.

"너를 어떻게 알고? 설마 중간상을 안 거치고 직거래라도 한 건가?"

"미쳤나! 저런 약쟁이 새끼들한테 언제 뒈질 줄 알고! 저놈들은 약을 준다면 지옥에도 뛰어들 미친놈들이라고! 씨발! 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그가 힐끔 고개를 내밀었다가 쏟아지는 총격에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작은 목소리로 계속 '씨발, 씨발' 욕설을 내뱉었다.

투타타탕!

어느새 바이크는 버리다시피 던져놓은 약쟁이들이 점점 다가왔다.

그 숫자만 서른 명에 가깝다. 카를로와 그와 함께 있던 갱들이라고 해봤자 합쳐서 여섯 명.

퇴로가 막힌 탓에 이대로 포위되면 끝이다.

"이래선 안 돼. 포위되면 끝이다."

강현재는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카를로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때마침 맞은편 엄폐물에서 대응사격을 하던 부하가 눈먼 총알에 맞고 쓰러졌다.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서긴 했으나 한쪽 팔이 박살났다. 어깨 뒤로 시커먼 오일이 섞인 핏물과 총상으로 튀어나온 전선들이 흘러나왔다.

그가 이를 악물며 되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한 번에 일제 사격해서 놈들 숫자를 줄인다. 아무리 약에 미친 놈들이라도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면 조금 움츠러들겠지. 그때를 노린다."

"그게 가능······ 씨발! 별수 없군. 이래죽나 저래죽나!"

카를로가 탄환을 장전하고 부하들을 바라본다. 대화를 들은 부하들 역시 탄환을 전부 장전하고 기다렸다.

서로 눈빛이 오간다. 결의에 찬 짙은 눈빛들. 반드시 이 사지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결심이 보였다.

강현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놈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셋에 간다."

하나.

둘.

셋!

"으라아아!"

"이 개새끼들!"

"뒈져라! 약쟁이 새끼들아!"

그들은 분기탱천한 포효를 내지르며 다 같이 일어섰다.

임플란트된 양손에 쥔 자동소총들.

여섯 명의 분노가 담긴 12개의 소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으려는 그 순간.

지이잉!

강현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딱거렸다.

"이 개새······ 어?"

"뒈져ㄹ······ 억?"

그들이 쥐고 있던 소총이 미증유의 힘에 휩쓸린 듯 땅바닥에 처박혔다.

한순간에 무기를 잃은 카를로와 갱들이 멍한 얼굴로 달려드는 약쟁이들과 땅에 떨어진 무기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그 잠깐의 당황은, 생사를 가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케헤헤헤! 약 내놔아아!"

"죽이고! 약을 뺏자!"

"그분이 오신다아아!"

투타타탕!

약쟁이들이 쏘아낸 탄환이 카를로와 갱들에게 쇄도했다.

미처 몸을 피하겠다는 판단이 서기도 전에, 그들은 전부 온몸에 구멍이 뚫렸다.

"컥!"

"끄, 끄으윽!"

그들은 짧은 단말마를 내뱉고 전부 바닥에 쓰러졌다.

이전처럼 다시 일어나진 못했다. 흐릿해진 그들의 동공은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단 눈빛이었다.

"허, 허헉!"

오로지 카를로만이 뒤로 넘어지듯 나뒹굴어서 그 죽음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현재가 뒷목을 잡고 냅다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본능적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의 시선이 쓰러진 갱들에게 향한다. 이미 처참하게 죽어버린 부하들.

그리고 엄폐물 사이로 유유자적 장난스럽게 총을 쏴대는 약쟁이들이 보였다.

카를로의 안색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이런 씨발······ 이러다가 진짜 뒈지게 생겼는데?"

그는 조금 전에 겪었던 혼란스러움보다도 당장 코앞으로 닥쳐온 죽음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 일에 뛰어든 이상 편히 죽진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약쟁이들 손에 개죽음당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 못 했다.

적어도 SCPD와의 추격전 끝에 멋있게 죽거나, 상대 조직과의 격렬한 혈투 끝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있던 강현재가 낮게 한숨을 내뱉더니 중얼거렸다.

"후우······ 어쩔 수 없군. 잠시 그대로 머리 처박고 기다려라."

"뭐, 뭐? 뭘 어쩌려고?"

카를로가 뜨악한 표정으로 강현재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 눈 깜빡할 사이에 부하들이 다진 고기가 되는 걸 못 봤나? 설마 대화를 하려고 하나? 저 약쟁이들은 말도 안 통하는 놈들인데?

그런 온갖 의문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강현재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손을 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저 약쟁이들은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니까."

"그, 그게 무슨······?"

카를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에서 강현재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딜 봐도 강현재가 보이지 않았다.

"씨, 씨발······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

그 순간.

"끄아악!"

"내, 내 파알! 컥!"

"약을 내ㄴ······ 커헉!"

"주, 죽어라! 죽어! 죽어! 뒈ㅈ······ 끄윽!"

엄폐물 너머.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던 약쟁이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총성과 비명.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분절되는 끔찍한 소리들.

카를로는 본능적으로 엄폐물을 기어올라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

그건 참상(慘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반대로 꺾이고, 목이 반대로 돌아가 죽은 시체들이 바닥을 가득 메웠다.

어떤 시체는 얼굴 전체가 함몰되어 납작하게 변했고, 가슴뼈가 모조리 으스러져서 주저앉은 시체도 보였다. 허리가 반으로 접히거나, 벽에 처박혀 피떡이 된 시체도 보였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한 흔적.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시체들의 모습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흔적의 가운데에서.

"끄, 끄윽!"

우드득!

강현재가 마지막 남은 약쟁이의 목을 꺾었다.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던 약쟁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명멸하는 전등 불빛이 그 광경을 보였다, 감췄다를 반복했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로 강현재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 카를로는 온몸을 휩쓰는 전율에 몸서리를 쳤다.

실로 압도적인 모습이다. 맨몸으로 약에 취한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다니. 그것도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놈들을 말이다.

저 정도쯤 되면 이성과 감각의 일정 부분이 마모되어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약이 가져다줄 흥분만이 삶이 목적이 된 상태다.

자신들이 굳이 약쟁이들을 피해 다니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했다. 약에 미쳐있는 놈들을 상대하려면 필연적으로 손해가 발생했으니까.

놈들은 이성 따윈 없었다. 약이 있다면 경찰서 습격도 마다치 않는 미친놈들이다.

그런데······.

'그런 놈들을 맨손으로 모조리 죽여버리다니······. 게다가 손속도 거침없고 잔혹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강해!'

'저 정도로 강한 조직원이라면 설마······?'

생각이 이어지던 카를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만 훔쳐보고 나와라. 다 처리했으니."

그때 들려온 강현재의 목소리에 카를로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그는 진짜 쓰레기를 치웠다는 듯, 가볍게 옷을 털며 카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체 더미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이다.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카를로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강현재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말투는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있었다.

"호, 혹시 친위대십니까?"

나르시스 친위대.

나르시스의 금력을 집대성하여 만들어진 극강의 전투기계들. 감히 경쟁조직들이나 어중간한 기업들이 나르시스를 넘보지 못하게 만드는 전가의 보도.

조금 전 인간 같지 않았던 강현재의 움직임과 손속을 보고 카를로가 내린 결론이었다.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 좋을 텐데? 오래 살고 싶으면 말이야."

"흐, 흡! 네, 넵!"

강현재가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하자 카를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광경을 목격하고도 처음처럼 뻗댈 수 있는 자는 아마 없을 거다.

만약 있었다면······.

꿀꺽.

'지, 지금은 없어졌겠지.'

아마 멀쩡한 모습으로 없어지진 않았을 거다. 저 시체들처럼 목이 꺾여 죽었거나, 얼굴이 함몰되어 죽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팔다리가 꺾인 채 하수구에 버려졌겠지.

카를로가 힐끔 강현재의 눈치를 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 분명 그럴 거다. 저 눈빛······ 사람 한두 명 죽인 자의 눈빛이 아니다. 최소 수백 명을 죽인 도살자의 눈빛이야!'

그렇게 카를로가 여태껏 한 추리 중에서 유일하게 정답에 근접한 결과와 함께 강현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았으면 이제 약을 받으러 갔으면 하는데. 어차피 이곳은 더 사용 못 할 것 같으니."

"보, 보급거점에 말씀이십니까?"

"왜? 설마 여기서 기다리라는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진 않을 테지?"

강현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들거리자, 화들짝 놀란 카를로가 양손을 격하게 휘저으며 대답했다.

"서, 설마요! 다, 당연히 보급거점에 가셔야죠! 제가 어찌 감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까?"

"좋군. 그럼 바로 가지. 시간이 많지 않아."

"네, 넵! 그럼 가시죠!"

카를로가 앞장서듯 지하철 입구로 걸어나갔다.

카를르와 강현재가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 같자, 그제야 머리를 처박고 있던 노숙자들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목적지는 반대였다. 출구로 나가는 그들과 스쳐 지나간 노숙자들은 이내 뜀박질을 하며 시체들에게로 달려갔다.

아마 쓸만한 모든 게 적출된 채 어딘가에 버려질 테지. 장기든, 임플란트든. 약쟁이들 시체에서 쓸만한 게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스쳐 지나가는 사내 중에서 낯이 익은 사내가 강현재를 슬그머니 바라본다.

마주친 시선.

그 사내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냉막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현재도 그때만큼은 피식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라진 강현재와 카를로. 그리고 남은 이들은 버려진 시체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화약냄새가 진했던 지하공간은 어느새 비릿한 피냄새로 뒤덮였다.

그 가운데에 서 있던 사내가 아귀다툼을 하는 곳을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미련 없다는 듯 걸어왔던 곳을 되돌아 출구로 걸어나갔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됐는데······ 앞으로도 잘 되려나 모르겠네?"

건들거리며 걸어가던 사내가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지껄였다.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린 입가엔 빠진 앞니로 인한 구멍이 시커멓게 뚫려있었다.

바로 치명적인 매력의 남자.

강현재로부터 40번대 구역 뒤처리를 맡았던 숀이었다.

나르시스 (5)

105화. 나르시스

시간을 잠시 과거로 돌려서.

사실 일은 이랬다.

나르시스의 꼬리를 그대로 족치는 건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입도 열지 않고 죽기라도 한다면 간신히 찾은 꼬리도 놓치는 꼴이었다.

그때 떠오른 게 숀이었다.

40번대 구역을 오가며 소매치기를 하던 녀석은 이 밑바닥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어떤 놈들에게 돈을 먹이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 말이다.

"형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난 숀이 계획을 이야기했다.

녀석은 언젠가부터 형님 소리를 해댔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서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결사님'이라거나 '칼잡이님'이라고 부르게 할 순 없으니 그냥 놔뒀는데, 알고 보니 숀은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은 20대 초반이었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얼굴에 고스란히 녹아있던 거였다.

"나르시스의 마약상은 저도 대충 압니다. 제 친구가 중간책을 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뭐, 뒈져버렸지만. 아무튼, 거리에서 거점을 옮겨 다니는 놈들이라 항상 마약이 있진 않습니다. 수요가 더 많거든요. 그래서 놈들끼리 '지역 공조'라는 걸 합니다."

"지역 공조?"

지역끼리 함께 돕는다? 대충 이런 뜻인가?

"네. 단순히 말해서 자기네 구역에서 약이 떨어지면 옆 구역 가서 빌려오는 거죠."

"······그래?"

녀석의 말에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건 나도 전혀 몰랐던 정보였다.

그야말로 40구역의 밑바닥. 그것도 나르시스와 접점이 없었으면 알아낼 수 없었던 정보니까.

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형님이 옆 구역에서 온 나르시스 마약상으로 위장하는 겁니다. 조금 많은 양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줄 수 없을 테니 보급거점으로 가겠죠. 구역 내에 보급거점 규모가 다르겠지만, 운이 좋아서 가장 큰 보급거점으로 가면 분명 윗선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보급거점이라······"

그럴싸했다.

구역 내에 흩어져서 마약거래를 하는 나르시스의 꼬리보다, 마약을 직접 건네주는 거점이라면 분명 그보다 윗선. 즉, 간부급이 분명할 테니.

다만, 이 모든 일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믿을까? 나라면 안 믿을 것 같은데."

바로 애초에 이 모든 대전제가 '내가 옆 구역에서 온 나르시스 마약상'이라는 걸 상대가 믿었을 때의 이야기다.

상대가 믿지 않으면 이 그럴싸한 계획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히히히! 형님. 그럼 믿게 만들어야죠! 제 목숨줄을 형님이 구해주면 안 믿고 배기겠습니까?"

숀은 오히려 음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해 못 할 말을 덧붙이면서.

"목숨을 구해줘라?"

"네! 제가 약쟁이들을 꼬셔서 치겠습니다. 나르시스 마약상이 어딨는 줄 알고 있다고 하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걸요? 그때 형님이 쓱싹! 어떻습니까?"

녀석이 장난스럽게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마약상인 척 위장해서 접근하는 사이, 숀이 약쟁이들을 데리고 그 현장을 습격하고, 위험에 빠진 나르시스 꼬리를 구해주자는 계획이었다.

단순한 계획이었지만, 밑바닥 생리를 모르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는 계획이었다.

"······좋군."

"크헤헤! 감사합니다, 행님!"

나를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숀을 바라봤다.

'이 녀석, 생긴 것과는 달리 잔머리가 꽤 돌아가는 녀석이었잖아?'

하긴, 그랬으니 소매치기로 여태껏 살아남았겠지. 언제 총 맞아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40번대 구역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다른 놈들은 죄다 죽고 이 녀석만 머리 박고 빌어서 살려줬었군.'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인연이란 참 우습다. 그렇게 맺었던 인연이 이렇게도 발전이 되다니.

처음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닐 때만 해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어? 이건 무슨 돈입니까?"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묻는다. 물론 그 눈빛 아래 숨은 한줄기 기대감까진 숨기진 못했다. 속으론 이게 웬 돈이냐며 환호하고 있겠지.

"기왕 일을 벌일 거, 좀 크게 벌리자고. 약쟁이들에게 무기 좀 쥐여줘. 남은 돈은 네가 챙기고."

"아? 푸헤헤헤! 알겠습니다, 행님!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군요! 저만 믿으십쇼!"

녀석이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카를로는 뒤따라 오는 사내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자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약쟁이 놈들에게 죽었겠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마약상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렇게 약쟁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줄이야.

약에 중독된 놈들은 전부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놈뿐이라 뭉치기 어려웠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마치 누군가가 사주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위치가 노출됐다. 중개상놈들 중 하나가 흘린 걸까?'

지금으로썬 가장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 약쟁이 무리에 함께 섞여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자신이 약을 척척 내주니 갖고 있는 약이 많을 줄 알았겠지. 그래서 욕심을 내본 걸 테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 바닥 생리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내지 않을 욕심이다.

'최근에 마약 수요가 늘어서 못 보던 중간책이 몇 명 보이더니······ 분명 그놈들 소행이겠지.'

카를로는 다음부턴 조금 더 폐쇄된 곳에서 거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책도 한번 걸러서 받고 말이다.

그러다 다시 자신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는 사내에게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런데 친위대도 약 거래를 했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여태껏 그런 일은 없었다. 친위대도 소문만 들었지 본적도 없고.

의아하긴 했지만, 또 마냥 이상하진 않았다.

어쨌든 나르시스는 마약조직이다. 친위대라고 마약거래를 안 한다는 건 편견일지도 몰랐다.

친위대는 사람 아닌가? 자고로 돈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 없다. 애초에 마약조직 자체가 돈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 아니던가?

적당히 찾아오는 약쟁이들 상대로 약만 건네주면 돈이 벌리는데, 친위대라고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 같은 갱 출신도 하는데, 일신의 무력이 강한 친위대에겐 일도 아니겠지.

그때 보급거점에 도착했다.

40구역과 42구역이 맞닿은 공장지대. 이곳이 원료를 정제해 마약으로 만드는 공장이자, 자신 같은 판매조직원에게 보급하는 보급거점이기도 했다.

"카를로?"

입구를 지키던 조직원이 아는척했다. 그는 진짜 담배인지, 아니면 마약성분이 들어간 담배인지 모를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여어. 제튼. 별일 없지?"

"뭐 항상 똑같지. 그런데 너는 꼴이 말이 아닌데?"

제튼이 가늘게 뜬 눈으로 카를로의 행색을 살펴봤다.

먼지로 얼룩덜룩한 옷에, 소매와 옷깃은 찢어졌고, 피인지 오일인지 모를 검붉은 액체가 옷 전체에 묻어있었다. 한바탕 어디서 뒹굴기라도 한 행색이다.

제튼은 본능적으로 뒤따라온 사내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슬그머니 허리춤 뒤로 향하는 손끝엔 총 손잡이가 있었다.

그때 카를로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말도 마라. 어떻게 알았는지 약쟁이 새끼들한테 습격당했다. 씨발······ 부하들도 전부 잃었고."

움직이던 손끝이 멈춘 제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 약쟁이들한테? 그놈들이 거길 어떻게 알고?"

"몰라! 중간책에서 샌 거 같은데, 위에 말해서 한번 싹 조져봐야지! 반드시 찾아서 장기 하나, 임플란트 하나까지 전부 적출해버리겠어!"

"고생이 많네. 그러게 돈이 다가 아니라니까?"

분노를 토하는 카를로를 보며 제튼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리고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카를로와 제튼. 그 누구도 죽은 부하들을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제튼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카를로가 당한 건 당한 거고, 이곳에 외부인을 데려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순간, 제튼의 총구는 카를로에게 가장 먼저 향할 거다.

"아? 그렇지. 이분은 42구역에서 지역공조로 찾아오신 친위······ 아니, 높으신 분이다."

카를로가 대답을 하면서 슬쩍 강현재의 눈치를 봤다. 자신이 잘 이야기를 했나하고.

강현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시는군!

"아······ 42구역?"

그런데 대답이 떨떠름했다. 제튼은 뭔가 할 말이 있는듯한 눈빛으로 카를로와 강현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강현재는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바로 읽어냈다. 분명 42구역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강현재는 제튼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곧바로 그의 앞으로 나서며 다그치듯 말했다.

"다들 한가한가 본데, 나는 네놈들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단 말이다. 알겠나?"

"아, 네네! 우리 들어갈게?"

"어? 어어······."

화들짝 놀란 카를로가 다급하게 말하자, 제튼 역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카를로와 강현재가 보급거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튼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 모습조차도 사라지자 신경을 껐다.

'높은 사람이라더니 간부님이라도 되나 보지? 저렇게 굽신대다니.'

그게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의심이 불씨가 피어날 땐,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좋은 수였다.

* * *

보급거점의 대장인 호세는 난데없이 찾아온 카를로와 냉막한 인상의 사내를 마주했다.

원래는 카를로 정도의 판매조직원이 자신을 직접 독대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뭔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여기까지 길을 터주고 심지어 생전 처음보는 놈까지 함께 찾아오다니.

'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아무리 거점 내부여도 이리 허술하게 길을 터줘?'

호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게 다 1년 전에 있었던 전쟁 후유증이었다.

그때 대대적으로 갈려 나간 조직원들 대신 새로운 놈들이 들어왔는데, 군기가 개판이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바꿔버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호세는 카를로가 떠드는 내용을 적당히 걸러서 들었다.

'그러니까 이젠 하다못해 약쟁이 새끼들한테도 당했다, 이건가? 씨발. 대체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이거야 약만 제대로 공급됐지, 중요한 인력들이 새로 충원이 안 되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였다.

분명 매년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정작 지역 거점까지 보충되는 인원은 없다시피 했다.

'대체 그 많은 인원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겠군. 어디선가 듣기론 새로운 사업을 준비한다던데······.'

그때 카를로가 뒤를 돌아보며 강현재를 소개했다.

"여기 42구역에서 오신 분입니다."

"42구역? 거기선 뭐하러?"

"지역 공조 때문에 오셨답니다."

카를로의 말에 호세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역 공조? 42구역으로 물건이 넘어간 게 이틀밖에 안 됐는데?"

"······네?"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카를로의 시선이 강현재에게 향했다. 호세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현재를 쏘아봤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의 적막이 가슴을 답답게 만들었다.

여기서 단 하나의 불꽃만 튀어도, 그대로 폭발할 것처럼 팽배해진 분위기.

한껏 조심스러워야 할 이 순간, 강현재는 그 분위기를 정면으로 박살 내버렸다.

오히려 잔뜩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역 공조가 어렵다고?"

와락 구긴 얼굴.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빛. 위협하듯 피어오르는 기세.

정면으로 부딪친 모습에 카를로는 움찔했고, 호세 역시 조금은 의심을 가라앉혔다.

이게 바로 마약조직이었으니까.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어디로 보낼 물건일진 알아야 할 거 아니오? 정확히 42구역 어디의 누구요?"

"말하면? 책임질 순 있고?"

그 말에 서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강현재도. 호세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기세 싸움.

"······뭐 얼마나 대단한 분이랑 거래하는진 모르겠소만, 보급거점에선 물건이 나가는 곳을 전부 알아야 하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오직 보스뿐이지."

호세가 입매를 비틀며 대답했다. 강현재의 강짜에 오히려 말을 비틀어서 반박한 거다.

네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보스보다 아래라면 순순히 말하라고.

그걸 거절한다면, 보스를 아래로 보고 있다는 뜻이니 그건 또 반역의 빌미기도 했다.

그야말로 외통수에 걸려버린 셈.

강현재가 피식 웃더니 호세를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좋아. 듣고도 감당할 수 있나 두고 보지."

"여기선 시 의원실에도 납품되오. 그보다 대단한 곳이오? 뭐, 시장실이라도 되나?"

"그런 곳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곳이지."

"흥! 허세가 심하시군! 대체 어디길래!"

호세가 코웃음을 쳤다.

시장실보다도 더 위라고? 그럼 메가코프 회장실이라는 건데, 메가코프 회장이 이런 싸구려 마약 따위 하기나 하겠는가? 궁지에 몰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런데······.

"지옥."

여전히 냉막한 표정으로 호세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강현재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 그게 뭔······?"

내가 뭘 잘 못 들었나?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그 약과 관련된 놈들은 모조리 지옥에 보내줄 거다."

"······!"

호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온몸의 소름이 쫙 끼치면서 온갖 경종이 들려왔다.

"이런 씹!"

욕설을 내뱉은 호세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춤에 총을 꺼내 들었다.

물론 그건 그의 상상이었다.

번쩍!

은빛 궤적이 눈앞에서 번쩍하는 순간, 팔다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탱할 신체를 잃은 그는 그대로 바닥에 거꾸러졌다.

한편, 그와 반대에 서 있던 카를로는 호세와 달리 총을 뽑는 대신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이미 강현재의 무력을 목격했다. 혼자서 약쟁이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여버린 괴물과 무슨 수로 싸우겠나? 그건 자살행위였다.

그렇게 뒤로 달아나려는 순간.

쐐애애액!

푹!

"커억!"

투창처럼 쏘아진 검이 카를로를 꿰고 벽에 처박혔다.

"끄, 끄으윽······."

정확히 척추를 꿰뚫은 검.

신경다발이 끊긴 카를로는 그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이내 축 늘어져 숨이 끊겼다.

그때 검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강현재의 손으로 회수됐다. 강현재가 부드럽게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고 검집에 꽂았다.

어느새 바닥에 쓰러진 호세의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고, 강현재는 그대로 워치의 연결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시간부로 시스템 장악 완료했습니다. 지금부터 데이터 카피 시작합니다.

강현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바닥에 쓰러진 호세를 내려다봤다.

팔다리가 잘린 공포에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강현재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그러게.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했잖나."

나르시스 (6)

106화. 나르시스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호세를 내려다봤다.

놈은 하얗게 질린 안색이었다. 임플란트 덕분에 절단된 팔, 다리는 알아서 지혈됐으나, 그럼에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피와 오일 때문인 듯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진짜 공포에 질리기라도 했거나.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보내주지.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여라."

놈이 몸을 꿈틀거리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갈을 풀어주고 물었다.

"그레이트 필드의 감자농장. 그곳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좌표는 36.321655, 127.378953이다."

"거, 거긴 왜······? 약 때문에 온 게 아, 아닙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휘둥그레 눈을 뜨며 되묻는 놈에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 같은데,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미 보안시스템은 이브가 장악했으니까.

놈은 코앞으로 다가온 칼날에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그, 그곳은 1년 전쯤에 폐기된 곳입니다. 용병 놈들이 쳐들어와서······."

"다시 복구는 하지 않았나?"

"노출된 거점을 어떻게 다시 씁니까? 그것도 이미 털린 곳을······."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놈들은 그곳을 버렸다. 멀쩡히 다시 붙은 숙소의 철문도, 뚜껑이 날아간 건물들도, 이들이 복구시킨 게 아니었다.

'진짜 리셋이 된 건가?'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게 사실로 확인이 되니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엉켰다.

'그나저나 내가 벌인 일까진 모르나 보군. 용병들 이야기만 하는 걸 보니.'

그때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놈이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어떻게든 내게 잘 보여서 살아남고 싶은 발버둥이라고 생각했다.

"호, 혹시 당신도 블루필 때문에 온 겁니까?"

그 이름을 듣기 전까진.

"······! 뭐라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곳에서 들으면 안 될 단어를 들어버렸다.

"브, 블루필 말입니다! 그곳에서 만들던 약이요! 아, 아닙니까?"

"블루필······."

블루 필(Blue Pill).

이름 그대로 '파란약'을 뜻하는 단어.

'여기서 파란약이 나온다고? 그것도 내가 갇혀 있었던 튜토리얼 지역에서 생산이 됐어?'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내가 지금까지 정립했던 이 세계의 기준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다.

"네가 말한 블루필이라는 거, 뭐하는 약이지? 그것도 마약인가?"

"마약공장에서 만들었으니 당연히 마약이겠죠······?"

달라진 내 분위기에 놈이 움츠러든 기색으로 대답했다.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는 건지 말 맺음이 물음으로 끝난다.

"그건 어디서 구할 수 있지? 혹시 이곳에도 있나?"

"저, 저도 그 약은 소문으로만 들어서 모릅니다! 오직 그레이트 필드 공장에서만 제조됐었는데, 지금은 시설이고 기술자고 죄다 죽어버렸어요!"

"모른다라······ 좋아. 믿어주지."

나는 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아까 당신도 블루필 때문에 왔냐고 물었었지? 그 말은 나 말고도 누군가가 그 약을 찾으러 왔었단 소리인데······ 누가 찾아왔지?"

"치, 친위대였습니다! 그것 말고는 하나도 몰라요! 정말입니다!"

"그게 끝인가? 할 말이 더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바닥에 꽂아 넣은 칼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녀석의 시선이 내가 만지작거리는 칼의 손잡이와 내 눈 사이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놈은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그, 그렇지! 49구역! 그자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49구역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49구역?"

"마, 맞습니다! 분명 49구역이었어요!"

다시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적의 서광」이 비췄던 각성의 그 날. 개새끼 조쉬와 운반책이 나눴던 대화에서 49구역이 등장했었다.

분명 그때 물건들이 49구역으로 몰린다고 했었다. 49구역의 오염체를 사로잡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이걸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게 튜토리얼 각성 이벤트 중 하나였으니까. 그것 때문에 미리 각성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단순히 이벤트 변수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던 일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49구역 거점 정보는?"

"모, 모릅니다! 그건 진짜 아무도 몰라요! 그자도 49구역으로 간다고만 했지 거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점이 아닐 수도 있다?"

"49구역엔 부랑자 새끼들이랑 스케빈저 같은 쓰레기들밖에 없는데 거점을 세울 이유가 없잖습니까?"

"흐음. 뭐, 좋아. 믿어주지."

나는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점정보는 모를 거라고 예상하고 물어본 거였다. 점조직인 나르시스 특성상 반대편 거점까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그래서 점조직이다.

아무래도 그곳은 다른 방법을 써서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그, 그럼 이제 보내주시는 겁니까······?"

어느새 새하얗다 못해 슬슬 새파래지기 시작한 놈이 나를 올려다봤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한 눈빛이었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내줘야지."

"가, 감사······ 컥!"

번쩍!

은빛 칼날이 놈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심장 쪽에 보호강판을 덧댄 사이버웨어가 달려 있었으나, 칼날은 강판을 사정없이 찢고 심장을 헤집었다.

"꾸, 꾸륵······ 보, 보내준다고, 야, 약속······."

툭.

놈의 고개가 푹하고 꺾였다. 억울함과 원망이 섞여 있던 눈동자는 금세 초점을 잃고 회색빛으로 변했다.

나는 놈의 심장에서 천천히 칼날을 뽑으며 말했다.

"보내줬잖아. 지옥으로."

* * *

부릅뜬 눈으로 죽은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나가 해결됐나 싶더니, 다른 게 튀어나오는군.'

후우.

저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이 빌어먹을 세계가 어떤 구조로 이뤄진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블루필. 이게 우연일까?'

파란약. 너무나 흔한 이름이다.

다른 곳에서 이런 이름이 언급됐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거다. 파란약이니 파워에이지 맛이 나겠군 하면서.

하지만 그 이름이 언급된 장소가 하필 튜토리얼 지역이었으며, 그곳만이 유일하게 리셋된 지역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거니까.

만약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감자농장에 들리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몰랐을, 어쩌면 영원히 몰랐을 내용이었다.

'이건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우연은 겹치지 않아.'

우연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다. 세계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과율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 흔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같은 장소에서 연이어 벌어진다?

그때부턴 우연이라 부르지 않는다.

필연.

반드시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다.

'게다가 약 이름도 레드필이 아니라 블루필이지.'

빨간약(Red Pill)은 비틀린 세계의 진실을 마주한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선택한 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파란약은 아니다. 이 세계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 믿고 싶은 그대로를 믿게 만드는 망각의 약이다.

쿵!

어디선가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마스터. 데이터 복사가 끝났습니다.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상념을 깨웠다.

호세와 대화하기 전부터 이브를 통해 이곳 데이터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워치에 담겨 있었더라면 생각도 못 했겠지만, 지금은 슈퍼컴퓨터보다도 뛰어난 인벤토리가 본체였다. 지금도 수천 미터 상공 위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호세와 카를로의 시체를 바라보곤 작게 명복을 빌어줬다.

"내세엔 꼭 개돼지로 태어나라."

그래야 이놈들 때문에 죽어 나간 마약중독자와 그 가족들의 업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

"가자. 바이크 대기시켜."

-네, 마스터!

* * *

끈적한 피에 젖은 사무실.

한쪽 벽엔 구멍 뚫린 흔적과 함께 가슴이 꿰뚫린 시체가 엎어져 있고, 다른 쪽엔 팔, 다리가 잘린 채 심장이 꿰뚫린 시체가 누워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강현재가 휘젓고 나간 나르시스 거점대장인 호세의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무실 중앙에서, 시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2미터는 훌쩍 넘어가는 키에 고릴라가 생각나는 근육질의 체구. 고글을 낀 듯 임플란트된 사이버아이는 시리도록 푸른 빛을 점멸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흔하디흔한 모습이었으나,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부터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가 거대한 팔을 꿈틀거렸다. 웬만한 성인남성의 몸통만 한 팔뚝 역시 사이버웨어였다.

반중력 사이버 암.

팔이자, 무기를 뜻하는 암(Arm)이라는 단어를 중의적으로 쓴.

내로라하는 메가코프의 경호실에도 적합자를 찾지 못해 봉인되어 있다는 현존 최강의 무기.

적합자를 찾기 위해 죽어간 사람 숫자만 수만 명이며, 그 적합자가 반중력 사이버 암을 들고 죽인 사람의 숫자는 그 수십, 수백 배가 된다는 최악의 무기.

그 절망의 무기가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골격 임플란트를 단번에 갈라버린 칼잡이라······."

사내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체에 남은 흔적을 살펴봤다.

상처가 깔끔했다. 여러 번도 아니라 단 한 번이다. 상대는 단칼에 외골격 임플란트의 장갑을 뚫고 그대로 잘라버렸다는 뜻이다.

아마 단분자 커터나, 초진동 블레이드를 사용한 뛰어난 칼잡이겠지.

다만 문제는 그 흔적이 눈에 익다는 거였다.

"그곳에서 봤던 흔적과 비슷하군."

약 1년 전.

총과 폭탄으로 초토화됐던 그곳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던 흔적들이 있었다.

총상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검상의 흔적들.

그때는 신약을 노린 적들의 용병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하필 지금 이 흔적이 다시 나온다라?

'평범한 용병 놈은 아니겠군. 연구 결과가 VIP들에게 전달되는 이때에 맞춰서 나타나다니.'

어디서 사주받은 놈일까? 시 정부는 아닐 테고······ 다른 메가코프? 셀리케 놈들인가?

그때 컴퓨터에 앉아서 무언가를 조작하던 부하가 그를 불렀다.

"대장님. 영상복구 완료됐습니다."

그가 말없이 벽면에 붙은 보안 카메라 화면을 바라봤다.

거점을 비추던 수십 개의 카메라 중에서 몇 개가 확대됐다.

모든 구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찍힌 사진엔 유유히 걸어들어와, 잠시 후 유유히 걸어간 인물이 보였다.

이 사건의 범인이 분명했다.

그가 힐끗 벽면에 엎어진 카를로의 시체를 바라봤다. 들어올 땐 함께 들어왔지만, 나갈 땐 죽이고 나갔다. 그것도 위치를 보니 도망가는 걸 죽였다.

'배신은 아니고, 뭔가 속임수를 썼군.'

게다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얼굴을 비롯한 몸 전체에 노이즈가 껴서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찾을 수가 없었다. 얼굴만 확인됐으면 SCPD 데이터를 뒤져서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꽤나 실력이 있는 놈인가 본데······.'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영상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범인이 밖으로 걸어나간 외부화면이 확대됐다. 카메라 끝에서 거의 사라질 듯 말 듯 하던 범인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이크를 타고 말이다.

"찾았다."

입꼬리를 섬뜩하게 올린 사내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다려라. 나르시스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알려주마."

푸른빛으로 빛나던 사이버아이가 불길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1)

107화. 황금알은 낳는 거위

허공으로 떠오른 바이크가 이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허공을 거침없이 유영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는 발밑으로 깔린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스카이라인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에 긴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었다.

일찍부터 부지런히 허공에서 춤추는 홀로그램 광고들도, 의미 없이 꺼져있던 네온사인의 불빛이 다시 켜졌어도, 땅거미가 진 황혼 무렵의 어둠은 환하게 밝히지 못했다.

그렇게 도시는 빛이 빛이 아니고, 어둠이 어둠 아닌 시간을 잠시 동안 공유했다.

나는 그 미묘한 경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와 내 주변으로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다.'

리셋과 블루필.

이건 이 세계에 빙의한 직후 세웠던 내 계획엔 없던 내용이었다.

'내가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몰랐을 내용이지.'

즉, 원래 이 세계에서 벌어져야 할,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시나리오와는 별개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마냥 게임 속 세계가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해주는군.'

하울의 주인인 소피아.

그녀와 만나면서 나는 이 세계가 평범한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전까진 어떻게든 이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날 이후 새로운 목적이 추가됐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세계의 비밀을 찾는 것.'

과연 이 세계의 진실이 뭘까?

만약 이대로 게임 시나리오의 엔딩을 보게 된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엇도 알 수 없었지만, 딱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의 끝을 보더라도, 아름답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마무리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But I'm still there.

Life goes on.

이 세계의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난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테니 말이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파란약에 대한 단서를 찾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어.'

진실을 찾는 일이든, 엔딩을 보는 일이든,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당장은 하나씩 밟아나간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부아앙!

쓰로틀을 당겼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바이크가 하늘을 질주했다.

그렇게 나는 황혼 너머로 달려갔다.

* * *

하루 동안 데이터 분석을 끝냈다.

온갖 정보가 복잡하게 얼기설기 엮여있어 보는 것만으로 눈이 빠질 지경이었으나, 이브는 마치 퍼즐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데이터를 섹터별로 분류하고, 또 거기서 필요한 데이터만 추출하고, 그중에서도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은 정보만 쏙쏙 골라 건네줬다.

이전에도 유능했었지만, 이제는 진짜 개인비서나 다름없었다.

어떨 때는 말하기도 전에 일 처리를 해놔서 소름이 돋기도 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튼, 그 결과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일단 40구역 보급거점은 다른 거점보다 큰 건 확실했다. 출납내역을 보니 바닷길을 따라 해외에서도 약이 들어왔다.

하긴, 소울 시티에서 소비되는 약이 어마어마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긴 했다.

소울 시티에 정식 등록된 인구만 3억 명. 미등록된 인원들까지 합치면 5억 명에 달하는 인구가 이 작은 땅에 몰려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다수가 마약과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하층민들이다.

다만, 막대한 데이터양에 비해 거점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싶었더니, 40구역 내에 이와 비슷한 보급거점이 7개가 더 있었다. 내가 턴 곳은 그 7곳 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말이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야말로 마약에 미친 도시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7개의 거점이 데이터를 통합 관리한다는 점이었다.

'운이 좋군.'

이건 정말 운이 좋았다.

7개의 거점 데이터가 전부 따로 보관되어 있었더라면 40구역 내 나르시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을 거다.

게다가 카를로를 속여 위장 침투했던 것도 유효했다.

만약 대놓고 쳐들어가서 경보가 울렸다면, 바로 데이터가 소각되도록 알고리즘이 짜여있었다.

약간의 운과 숀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정작 내가 찾는 정보는 없다.'

온갖 정보들이 있었으나, 정작 블루필은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보급거점의 대장이 알만한 약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남아있어야 할 텐데, 마치 일부러 지워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7개의 보급거점 데이터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이름을 발견했다.

'골든 에그. 황금알이라······.'

40구역의 모든 보급거점은 전부 다 이곳, 골든에그에 약을 납품했다.

7개 보급거점에서 그곳으로 흘러가는 약은 어마어마했다. 전체 판매량의 절반 이상이 골든에그로 흘러갔다.

그럼 40구역 보급거점의 약만 그곳으로 들어갈까?

나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40구역 전체 거점에서 약을 쓸어가는 거면, 다른 구역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았다.

'그냥 약의 흐름 자체가 이곳으로 집중되고 있어. 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제아무리 매일 마약파티를 한다고 해도 이정도 양을 한곳에서 소모하는 건 불가능했다. 밥 대신 마약을 처먹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양이다.

이건 골든에그가 최종 종착지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곳을 거쳐서 다른 곳으로 약이 흘러간다는 거다.

'문제는 골든에그가 뭐 하는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로군.'

거점의 납품데이터엔 그저 이름과 날짜, 수량만이 달랑 존재했다. 어디에도 골든에그를 추측할만한 정보는 보이질 않았다.

'······황금알을 찾는 게 가장 큰 일이겠어.'

* * *

해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골든에그라면 30구역의 베이핑 샵인데요?"

숀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말했다.

"베이핑 샵?"

그런 게 있었나?

"그, 뭐라고 해야 하려나······ 시 정부에서 공인한 마약샵이라고 해야 하나······?"

"······? 시 정부에서 마약샵을 공인해줬다고?"

나는 내가 뭘 잘 못 들었나 싶었다.

"네. 대신에 거기서 구매한 마약은 그곳에서 전부 소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이핑 샵이에요. 뻐끔뻐끔. 아시죠?"

베이핑(Vaping).

전자담배를 흡입하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다. 그걸 마약샵에 붙였다는 뜻은, 전자담배가 아니라 전자마약이라는 소린데······.

"시 정부가 미친 건가? 마약 단속을 해도 모자란 마당에 마약을 하는 가게를 허가해줘?"

이 세계가 정신 나간 세계인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다. 정부에서 마약을 허락하다니?

여기가 '아'로 시작해서 '카'로 끝나는 깡패 국가도 아닌데, 이걸 대체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그러지?

"마약중독자들을 밝은 양지로 끌어내겠다고 만들었답니다. 허가된 구역에서 감시하에 마음껏 마약을 하라는 거죠. 겸사겸사 세금도 뜯고요. 뭐, 이 도시에선 흔한 일 아닙니까?"

"그걸 마약중독자들이 따른다고? 비용이 몇 배나 더 들 텐데?"

"당연히 아니죠. 얼마 전에 보셨잖아요. 나르시스 마약상 털려는 거."

"······그럼 대체 베이핑 샵은 뭐 하는 곳이지?"

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마약중독자가 아닌 자들이 대상입니다. 베이핑 샵 안에 스트립 클럽도 있고, 섹스돌 대여점도 있고, 없는 게 없어요. 마약을 꺼렸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제 합법적으로 마약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니 체험해봐라.' 이거죠.'

"미친······."

내 생각이 짧았다. 이 도시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이놈들은 애초에 감당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이 사는 상류층 지역을 제외하고선 길거리에서 마약중독자가 죽어 나가든, 범죄를 저지르든 전혀 개의치 않을 생각이다.

놈들 시선엔 빈민층이나, 부랑자나,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나, 다 똑같은 밑바닥 시궁창 인생들이니.

"······그래서 골든에그로 약이 죄다 흘러간 모양이로군."

정부 공인 마약 샵.

그것도 약과 섹스, 환락과 유흥이 섞인 곳이라면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몰릴 테지. 그건 부자와 빈민을 가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정상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분명 나르시스는 베이핑 샵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막대한 로비를 했을 거다. 빌딩도 몇 채 살 수 있을 정도로 뇌물을 뿌려댔겠지.

그럼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마약사업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지로 끌려오는 순간, 시 정부에서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죄다 털어갈 텐데 뭐하러? 지금도 수요보다 공급이 모자랄 정도로 약이 잘 팔리는데 말이다.

'뭔가 더러운 냄새가 나는군.'

나는 숀을 바라보며 물었다.

"베이핑 샵이라는 거. 나는 처음 들어보는데 언제쯤 생긴 거지?"

"제가 알기로 1년 조금 안 됐습니다. 6개월은 확실히 넘었고요."

"······그래?"

입매가 비틀렸다.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시기가 겹친다. 분명 그레이트 필드의 감자농장이 박살 난 직후에 베이핑 샵이라는 게 생겼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 절대 우연이 아니다. 베이핑 샵은 원래 게임 스토리에 없었던 장소. 이건 내가 튜토리얼 지역을 죄다 쓸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변수다.'

플레이어가 튜토리얼 지역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갱에 합류하거나, 습격이 벌어진 틈에 탈출하거나, 감독관 암살한 후 위장하거나, 운반책 트럭에 숨어 탈출하는 등 방법은 샐 수 없었다. 일단 튜토리얼 지역에서만 빠져나오면 튜토리얼 퀘스트는 완료됐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튜토리얼 지역의 갱과 용병들을 죄다 죽여버리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벨1짜리 캐릭터가 각성했다고 갱단과 용병단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애초에 탈출이 목적이기에 튜토리얼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했지. 즉, 원래 진행될 스토리에 변수가 생긴 거다.'

이런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바로 해방전선을 도와주며 개입했었던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말이다.

남궁민수와의 접점을 위해 정보를 던져줬다가, 뜬금없이 시나리오 지역이 소울 프리즌으로 바뀌면서 난이도가 올라가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남아있었어야 할 그레이트 필드의 감자농장이 초토화돼버리면서, 그곳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다.

'그게 베이핑 샵인 셈이지.'

그리고 그곳은 높은 확률로 블루필과 관련이 있을 거다. 감자농장에선 분명 블루필을 '만들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나는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숀을 바라봤다. 녀석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숀. 너는 가봤나?"

"베이핑 샵이요? 아니요. 거기가 얼마나 비싼데요? 거기서 약을 하느니 차라리 친구들한테 조금 빌려서 하고 말죠. 섹스돌도 단골집 가면 싸게 빌릴 수 있는데요. 형님도 한 발 빼실 일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세요. 제가 풀코스로 쏩니다!"

녀석이 주먹 쥔 손을 손바닥으로 탁탁탁 치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풀코스가 아니라 수중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렸을 텐데 아쉽군.

나는 그대로 뒤돌면서 말했다.

"따라와라."

"네? 어, 어딜요?"

"골든에그로 간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2)

108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30구역.

거주지와 뒤섞인 다른 구역들과 달리, 소울 시티의 유일한 상업지구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과 스타트업들이 작은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그만큼이나 많은 유동인구가 오가며 온갖 상업시설과 유흥이 발달한 곳이다.

골든에그가 이곳에 들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 정부 공인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마약샵 같이 생겼군."

나는 30층은 될법한 골든에그 빌딩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부 공인 마약샵이라서 뭔가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이 정신 나간 도시에서 그런 걸 기대하다니. 환락과 유흥으로 점철된 곳인데 말이 되나.

그나마 약쟁이들에게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골든에그 근처에 경찰차가 몇 대 서있긴 했는데, 어디에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차가 모형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놈들도 같이 마약 빨러 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

"에이. 국가기관처럼 딱딱하게 해놓으면 파릇파릇한 쌔삥 약쟁이들이 거부감 들지 않겠어요? 애초에 목적이 약쟁이들 양산해서 세금 뜯겠다는 건데요."

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말하는 태도나 말투에 비해서 내용은 항상 시니컬했다.

아마 이게 하층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거다.

정부가 더러운 짓을 하는 것도 알고 그게 잘못됐다는 것도 알지만, 근본적으로 고쳐지진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더럽고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점. 숱한 위정자들이 개혁을 외쳤으나,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점.

이 도시는 절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

그게 도시 사람들이 시니컬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런가?"

"그런 거죠."

우리는 그런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골든에그 내부로 들어섰다.

이곳에 처음 와봤다는 숀은 생각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웨이터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는데, 웨이터가 화들짝 놀라며 룸으로 안내했다.

골든에그는 1층이 거대한 입구이자 각종 마약제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2층부터 5층까지가 마약클럽이었다. 클럽 중앙이 뚫려서 전층에서 2층 스테이지가 보이는 구조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층이 올라갈수록 비싼 룸이었다.

우리는 가장 높은 5층 룸으로 안내됐다. 다만, 룸의 모양새가 일반적인 생김새와 달랐다.

술과 마약이 진열되어 있어야 할 테이블 대신에 안마의자처럼 생긴 기계가 몇 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뭐라고 얘기했길래 여기로 안내해?"

실내를 살펴본 나는 숀을 돌아보며 물었다.

녀석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 아니······ 형님이 군부대 출신 마약상인데, 이번에 좋은 물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물건 확인하러 왔다고 하니까 여기로 안내하던데요?"

"군부대 출신 마약상?"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사, 사실대로 소드마스터가 너네 가게 털러 왔다고 말할 순 없잖습니까?"

"······."

그건 맞지만, 그래도 군부대 출신 마약상이라니. 쓸데없이 디테일한 설정이로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사용하는 방법은 알겠어?"

"기계들 사용하는 방법이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용도는? 이게 마약과 상관이 없잖아? 전자마약이라고 기계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 텐데."

"어······ 그, 글쎄요? 마약을 한 다음에 피로를 푸는 용도?"

"······."

에라이.

한숨을 푹 내쉬는 그때, 룸의 문이 열리고 여성 둘이 걸어들어왔다.

"······?"

뭐지? 이런 마약 클럽에도 부킹이 있나?

의아한 눈으로 그녀들을 쳐다보는데.

"······!"

우리의 시선을 즐기듯 받아낸 그녀들이 천천히 기다란 코트를 벗었다.

코트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는 헐벗은 몸이었다.

"흐응. 오늘 저희랑 같이 천국가요."

그녀들이 야릇한 표정과 간드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골든에그 컨트롤 센터.

어딘가에서 들어온 무전에 센터장인 두들러가 고개를 갸웃했다.

"군부대 출신 마약상?"

단말기 너머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좋은 물건 있다고 구경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단 작업실로 보냈습니다.

"그놈 혼자야?"

-아뇨. 멸치 같은 놈이랑 같이 왔는데 딱 봐도 별거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 몸 상태는?"

-제가 왜 연락드렸겠습니까? 몸도 탄탄하고 분위기도 살벌한 게 진짜 군인이거나, 하다못해 전쟁용병이라도 뛰었던 놈이 분명합니다.

"흐음. 좋아. 그럼 작업해서 지하로 보내. 군인 출신 육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네, 알겠습니다.

단말기의 연락이 끊기고 두들러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좋은 물건 나왔다는 소문만 골라 들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놈인가 보군."

골든에그에 기깔나게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문은 약쟁이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이었다.

실제로도 특수개량한 VIP 약물은 부작용도 덜하고 각성상태의 쾌락이 오래 지속됐다.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 약이면 환장했다.

하지만 마약상들에겐 한 가지 소문이 함께 돌았다.

그렇게 VIP 약물에 중독되어 골든에그에 드나들다가,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다는 소문이.

끔찍한 소문이었지만, 마약상들에겐 아무 상관 없는 소문이기도 했다. 마약과 관련된 범죄를 한두 번 봤겠나? 그저 그들만 조심하면 됐다. 그게 마약상끼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 소문도 못들을 정도면 이제 막 마약상 일에 뛰어들었나 본데······."

킥킥.

두들러의 입가를 비집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빛도 제대로 못 보고 지옥으로 끌려가게 생겼군."

자라나는 새싹 마약상에겐 안타깝게 됐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선 모르면 당하는 게 맞으니까.

그게 설령 본인의 목숨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