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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10

* * *

카가각!

팔을 교차하며 칼날을 막아내는 워 머신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붉게 타오르는 칼날은 워 머신의 장갑을 크림처럼 녹여버렸다.

저 멀리 선 시시때때로 낙뢰가 떨어져 내렸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전장의 공기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흉흉하기만 했던 워 머신들의 기세도, 서로의 눈치를 봐가며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건 놈들의 사기가 꺾인 탓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아큐마 제약의 지원군을 기다리나?'

그리고 그런 내 의문을 대답해주기라도 하는 것 마냥.

"소드마스터! 네놈이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하늘에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검은색 형체가 떨어져 내린다.

다급히 몸을 비틀어 피하려는 찰나.

"큭!"

미증유의 힘이 온몸을 짓눌렀다. 마치 땅바닥이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은 끈적한 질척임. 우루사가 백 마리쯤 어깨 위로 올라탄 느낌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죽어라!"

검은색 형체의 정체.

다이크의 거대한 몸이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5)

117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콰쾅!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미증유의 힘.

아니, 감각세포 하나하나를 짓밟아 땅으로 처박으려는 악의.

반중력 사이버 암이다.

'이런 느낌이로군.'

나는 간신히 피했던 자리를 힐끗 살폈다.

마치 거대한 압력 프레스가 찍어낸 듯 대지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아마 피하지 못했더라면 내 몸도 저 속에 파묻혀있겠지. 놈의 발에 짓밟혀서 말이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다이크가 움푹 들어간 대지에서 걸어 나왔다.

기형적으로 거대한 어깨와 팔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양어깨에 뽕처럼 달린 반중력 엔진에서 흘러드는 빛무리다.

"그게 반중력 암인가 보군."

"그래. 너 같은 길바닥 놈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무기지."

다이크가 나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놈의 눈빛에서 불쾌한 우월감이 엿보였다. 내뱉은 말대로 길바닥 칼잡이인 나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는 성능이 별론데."

"큭! 네놈의 여유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놈 역시 마주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여긴 놔두고 모두 저 쓰레기들을 처리하러 가라. 각성자는 되도록 생포한다."

"알겠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워 머신들은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모조리 해방전선에게로 향했다.

그만큼 다이크를 믿던가, 아니면 몰살의 다이크에게 죽기 싫어서 자리를 피하는 걸지도 몰랐다.

"너야말로 여유가 넘치는군. 나를 혼자 상대하려고? 아니면 이제 와서 부하들을 안 죽여보려고 노력해보겠다는 건가?"

나는 물러서는 워 머신들을 힐끗 바라보며 놈을 도발했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크크큭!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이 네 이성을 전부 갉아먹기라도 한 모양이로군. 아주······"

웃음을 터트리던 놈의 안색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변한다.

"······건방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으로 좇아갈 수 없는 속도.

나는 그대로 몸을 튕겨 좌측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무너지더니 놈이 나타났다.

쾅!

내가 피할 걸 알았음일까? 붉은빛을 토하는 놈의 사이버아이가 정확히 나를 노려본다.

놈이 재차 사라진다. 움직이려는 준비동작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동작마저도 너무나 빨라서 보이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캉!

길게 뻗은 놈의 주먹과 칼날이 부딪쳤다.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감각은 놈의 움직임을 모조리 좇고 있었다.

"제법이군."

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나 역시 놈을 마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고철덩이 달고 다니는 것 치곤 제법이군."

"크하핫!"

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겨서 웃는 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오싹한 살기가 담겨있었으니까.

"네놈의 여유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하군."

"네 머리가 바닥에 구를 때까지는 멀쩡할 것 같은데."

"······놈!"

콰드드득!

순간적으로 출력이 늘어난 다이크의 반중력 암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쏟아졌다.

미증유의 거력이 내 몸을 내려찍는다. 어깨 위로 느껴지기 시작한 끈적한 무게는 순식간에 온몸을 짓눌렀다.

내가 멈칫하며 영향을 받는다는 걸 놈이 확인한 순간, 놈의 커다란 양팔이 나를 내려찍었다.

"짓뭉개진 주둥이로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주먹. 섬뜩한 악의가 담긴 거력이 코앞으로 쇄도했다.

중력으로 나를 직접 공격하는 게 어렵다고 느끼자, 한점으로 집중하는 걸 흩어서 나를 옭아매는데 사용하고 공격은 직접한다.

과연 몰살의 다이크. 그 이름이 허명이 아니었던지 아주 적절한 사용법이었다.

'그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말이지.'

휘돌던 포스가 이미 정수리에 모인 상태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면 어떤 힘으로든 변할 준비가 된 상태.

나는 지체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중력조작」 2단계 레벨.

비상하는 만유척력(萬有斥力).

지이이잉―――!

한순간에 세상이 뒤집힌다. 강하게 딛고 있던 발이 미끄러지고, 내려치던 주먹이 반대로 떠오른다.

내가 아니라 다이크가 말이다.

"뭐, 뭣! 이게 무슨!"

난데없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 다이크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끄러졌던 발은 다시 땅을 딛지 못하고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놈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며 말했다.

"왜? 너만 중력을 다룰 수 있을 줄 알았어?"

카카캉!

붉게 타오르는 칼날이 다이크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놈은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얕다.'

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한순간 균형이 깨지며 무방비에 가까운 상태였는데.

'그 찰나를 막아내다니.'

칼날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간 순간, 다이크의 양어깨에서 푸른빛이 폭사 되듯 뿜어졌다. 그러자 놈의 몸은 누가 끌어당긴 것처럼 뒤로 쭉 빨려 들어갔다.

덕분에 칼날은 한 끗 차이로 놈의 장갑만 갈라내는 정도에 그쳤다.

"······네놈, 대체 뭐냐? 어떻게 능력을 한 개 이상 가진 거지?"

어느새 튕겨 나간 곳에서 몸을 가눈 놈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놈의 가슴엔 칼날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선명히 남았다.

"그건 기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겠는데."

"기업 비밀?"

순간 놈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네놈 뒤엔 기업이 있었구나! 빌어먹을! 아큐마 제약과 손을 잡을 때부터 기분이 더럽더라니, 결국 기업 놈들 싸움에 또······!"

"······어?"

아니. 그거 그냥 농담인데······?

* * *

이치로는 다이크와 접전을 벌이는 강현재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다이크가 누구던가? 지금은 한낱 마약상의 집 지키는 개에 불과하지만, 한때 소울 시티 전체에 이름을 떨쳤던 전설 중 한 명이 아니던가?

심지어 그 콧대 높은 메가 코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도 끊임없이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실제로 아큐마 제약의 윗선에서도 다이크와 부딪치지 말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원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와 길바닥 칼잡이에 불과한 놈이 호각으로 싸우고 있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십 년 전에 일어난 마지막 기업전쟁 이후, 도시는 변하지 않았다.

군림한 자는 계속 군림해있고, 바닥에 처박힌 자들은 계속 바닥을 기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구도는 그렇게 정형화가 되었다.

그게 바뀌기 시작한 게 불과 1년 전이다. 정확히는 하늘을 백광으로 물들인 기현상 이후.

각성자들이 등장하면서 이 세계에 새로운 힘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알렸다. 쉬쉬하던 소문은 어느새 도시 전체에 퍼졌고, 각성자의 존재는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메가코프는 이 새로운 변화에 가장 빠르게 뛰어들었다.

각성자의 존재가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지, 그 힘은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그 힘이 메가 코프가 쥐고 있는 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치로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분명 성공적이었다.

여태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저놈들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불안해졌어.'

강현재를 살피던 시선이 다른 전장을 향한다.

새로 나타난 적들과 워 머신들의 전투. 그토록 늠름했던 워 머신들이건만, 새로 나타난 놈들의 공격에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전장엔 번개가 내리치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정체불명의 촉수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난데없이 땅이 꿀렁거리기도 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눈을 의심하게 하는 기현상이 전장 곳곳에서 벌어졌다.

'······돌연변이 새끼들.'

이치로의 눈이 험악해졌다. 그토록 찾아 헤맬 땐 보이지도 않더니, 이렇게 한꺼번에 튀어나와서 귀찮게 할 줄이야.

게다가 이놈들은 돌연변이 중에서도 돌연변이인지, 자신들이 실험했던 각성자들보다 강하고 유연했다.

개개인이 선보이는 능력뿐만 아니라, 서로 연계해서 워 머신의 틈을 노리는 공격들.

이런 게 가능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각성자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 할 정도다.

그때 이치로의 귓가에 전뇌 통신으로 연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소 상공 진입 1분 전.

그제야 험악해졌던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 이제 와서 저런 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디 마음껏 날뛰어봐라. 결국, 네놈들 모두 뒈질 테니.'

그는 오늘 연구소의 녹화영상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다. 그래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

* * *

해방전선과 나르시스 친위대 간의 전투가 격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격돌했으나, 또 서로를 피하기 바빴다. 그 말인즉, 서로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방전선의 능력자 중 하나인 안나 테일러의 손끝이 하늘로 향했다.

손끝에서 피어난 미증유의 힘이 실타래처럼 허공으로 늘어지더니 이내 번쩍!하는 낙뢰를 불러왔다.

콰르릉!

또 한 번 공간을 가르는 빛줄기가 지상에 강림했다.

워 머신 한 대가 그대로 빛으로 물든다. 이미 몇 번의 전투로 학습된 그들은 어떻게든 쇠막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지렛대가 없으니 명중률이 떨어졌고, 이번에도 세 번째 만에 가까스로 맞췄다.

그래도 맞췄으니 다행이었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이번엔 단번에 폭발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작동을 멈췄을 뿐이다.

피잉―――.

그녀의 시야가 흔들렸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마무리를 지어야 했지만, 손은 덜덜 떨리고 시야는 흐릿하다. 한계 이상으로 사용한 능력의 부작용이 전신을 덮쳐왔다. 온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무리야.'

잠시 쉬어야 했다. 1분. 아니 최소 30초 만이라도.

하지만 그 시간은 워 머신에게도 공평하게 흐른다. 이대로 놔두면 다시 복구해서 움직일 거다. 애써 능력을 일으킨 보람이 없는 상황.

그런데 그 순간, 워 머신이 기우뚱하더니 땅바닥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느새 늪으로 변한 바닥. 다급히 워 머신 등갑이 열리며 친위대가 탈출하려 하지만······.

타앙!

그걸 노렸다는 듯 한발의 저격탄이 친위대의 머리를 관통한다.

안나가 흐릿한 시야를 돌리자 늪지대 능력자 제프가 씨익 웃었다. 마치 영화 주인공처럼 엄지손가락마저 치켜든다. 웃는 제프의 코에서는 코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놈은 제 얼굴이 어떤지 알면서 저렇게 멋진 척을 하는 걸까?

'좋지 않아.'

단단히 준비하고 왔지만, 역시 나르시스의 벽은 높다. 대부분의 능력자와 전투병력을 투입한 작전이건만······ 이대로라면 전멸이다. 나르시스의 총력도 아니고 겨우 중요시설 중 한 곳에 불과한데.

'처음부터 꼬였어. 친위대가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이야.'

몇 달 전부터 이 작전을 위해 이곳을 감시했다. 그렇게 밝혀낸 놈들의 상주병력은 친위대 열 명 남짓이 전부였고, 주기별로 로테이션 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친위대 열 명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열 명은 개뿔이. 워 머신만 50기는 되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진 걸까?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소드마스터.'

그녀의 시선이 강현재를 향했다.

강현재는 친위대장과 엄청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역시 강해.'

각성을 하며 전체적으로 부스팅된 신체 능력으로도 둘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점멸하듯 가끔씩 보이는 둘의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주변이 터져나가는 모습에 접전을 벌이고 있구나, 라고만 생각이 들었다.

'소드마스터 역시 각성자. 그래서 이곳을 노린 걸까?'

알 수 없다.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많지는 않았으니까.

실제로 그를 본 건 딱 한 번. 소울 프리즌에서다. 무슨 이유로 그 일에 합류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거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돌이킬 수 없다. 그나마 소드마스터가 친위대장을 상대해줬기에 이렇게나마 싸울 수가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소드마스터가 없었고, 친위대장이 자신들에게 향했더라면······.

'······모조리 죽었겠지.'

흐릿한 잔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게다가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한번 움직일 때마다 찍어누르듯 대지가 터져나간다.

몰살의 다이크에 대해선 소문으로만 들었지 설마 저 정도일 줄 몰랐다. 잊고 있었던 이 괴물 같은 도시의 악몽이 떠오를 정도다.

그래서 다시 한번 놀랐다.

소드마스터는 그런 친위대장과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소드마스터가 이기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어.'

저 둘의 무력을 봤을 때, 결국 이 전쟁의 승리는 저 둘의 승패에 따라 결정될 거다. 자신들은 워 머신을 상대로 버티기만 하는 수준이니.

그런데 그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하늘인데도 어두워졌다는 건 달빛이 가려졌다는 뜻.

안나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

그리고 발견했다.

달빛을 가린 거대한 비행선을.

비행선 바깥엔 성난 악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큐마 제약의 심볼이었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6)

118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빌어먹을 기업 새끼들! 대체 너희들 싸움에 왜 우리들을 끼워 넣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를 끼고 싸우면 너희끼리 전쟁은 아닌 거냐? 그게 기업전쟁 이후 정해진 룰이라서?"

"아니······ 나는 기업이 아니라······"

"미친놈들! 결국, 너희들 싸움에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 넣어 죽이겠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지?"

"······."

이 세계 놈들은 한번 입이 터지면 남의 말을 안 듣는데 최적화가 되어 있나?

"소드마스터. 오만하고 미련한 자여. 네 뒤에 기업에서 뭘 약속했는진 몰라도, 그 끝이 결코 좋진 않을 거다."

"······아큐마 제약이랑 손잡고 나란히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너희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흥! 부정은 안 하는군! 이 결정은 내가 한 게 아니다. 하지만 네가 기업과 붙어먹은 건 네 결정이겠지."

"아니······"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그렇게 다이크와 입씨름 중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나와 다이크의 고개가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저놈들이 왜······?"

다이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늘엔 홀로 어둠을 밝히던 달빛을 가리는 거대한 비행선이 떠올라있었다.

어느새 워 머신들과 해방전선의 전투도 멎었다. 다들 적당히 거리를 벌리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데없이 등장한 비행선에 잔뜩 경계를 한다.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멀리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핫! 뭐하는 겁니까 소드마스터? 다시 날뛰어보시지요?"

이치로였다.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던 놈은 적당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채 삐딱한 고개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너희들인가?"

나르시스가 아니라 너희. 즉, 아큐마 제약이라는 물음.

"맞습니다. 대(大) 아큐마 제약의 보안팀이죠."

"꽤나 많이 대비하셨군. 어지간히 보여주기 싫었나 봐?"

"보안 유지 차원이라고 생각하세요. 명색이 메가코프의 연구소인데······"

이치로의 입매가 비틀린다.

"당신네들 같은 길바닥 쓰레기들을 안으로 들일 순 없잖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놈의 입가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쓰레기라······.

"글쎄. 쓰레기는 너희가 아닐까? 명색이 메가 코프라는 놈들이 마약상과 손잡고 더러운 연구를 하는데."

"뭐라고요?"

"아닌가? 너희가 무슨 숭고한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체실험으로 구한 인간의 장기로 개 같은 연구를 하는데, 누가 더 쓰레기지?"

나는 놈의 시선을 마주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짐승만도 못한 실험을 하는 너희? 아니면 그걸 막으려는 나?"

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입을 조심하세요, 소드마스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다간······."

놈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증폭하는 에너지의 파동.

나는 등골이 오싹한 그 파동에 저절로 그 에너지의 출처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번쩍!하며 비행선에서 에너지 덩어리가 쏘아진다.

어둠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찬란한 빛무리.

그건 정확히 워 머신과 해방전선 사이에 떨어지며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워 머신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해방전선 인원들은 충격파에 떠밀려간다. 직격한 것도 아니라 맨땅에 떨어져 내린 건데도 그 충격파가 어마어마했다.

이윽고 드러난 폭발점.

시커멓게 뚫린 구멍으로 매캐한 연기와 수증기가 올라온다. 부글부글 끓는 대지는 녹아서 용암이 됐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초열광자포.'

이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군용 전략무기로 취급되며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못 한다는 초열광자포가 튀어나올 줄이야. 역시 메가 코프라고 해야 할까?

내 굳은 얼굴을 노려보던 이치로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흔적도 남지 않고 뒈질 수가 있어요."

그때 다이크가 성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치로 팀장! 이게 무슨 짓이냐?"

"저는 그저 매뉴얼대로 했을 뿐입니다."

"개소리!"

버럭 소리치는 다이크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마치 맹수의 울음과도 같았다.

"······개소리. 개소리라. 뭐가 개소리라는 거죠?"

다이크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던 이치로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놈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다이크에게 향했다.

"내가 매뉴얼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이곳 보안은 우리가 책임진다! 아큐마가 개입하는 건 그 이후야!"

"그래서 개입하는 겁니다만?"

이치로가 피식 웃었다. 놈의 번들거리는 눈빛엔 서서히 광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뭐?"

"적들의 공격에 연구소가 무방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르시스가 자랑하던 친위대도 모조리 죽었고요."

"······? 그게 무슨······?"

난데없는 사망선고에 다이크의 얼굴엔 의문이 떠올랐다가, 이내 와락 구겨졌다.

이치로가 뭘 말한 건지 깨달은 거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놈은 이 전장에 있는 모두를 죽일 생각이다.

"이 개새끼가!"

여태껏 나를 경계하던 다이크가 이치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내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이치로는 이미 하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슈트에 장착된 부스터가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친 놈이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길바닥 쓰레기들! 나란히 죽어버리세요! 하하하핫!"

번쩍!

백광의 빛무리가 다이크와 내게 내리꽂혔다.

콰콰쾅!

그리고 그게 폭격의 시작이었다.

* * *

빛을 피할 수 있을까?

대답은 '없다'다.

빛은 1초 동안 지구 7바퀴 반을 돌 정도로 빠르다. 1초다. 1초에 1바퀴도 아니라 7바퀴를 도는 거다. 그런 빛을 피할 방법이 있을 턱이 없다.

초열광자포 역시 마찬가지다. 발사된 광자포의 에너지를 피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콰콰쾅!

후끈한 열기와 함께 충격파가 몸을 스쳐 간다.

그럼에도 나는 빛무리를 피하고 있다. 그건 내게 떨어지기 직전, 발사될 타이밍에 맞춰서 미리 피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파괴력을 내기 위해선 에너지를 축적하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내겐 그 약간의 시간동안 공격범위를 피할 능력이 됐으니까.

이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도 결국 에너지의 응집. 나처럼 포스를 컨트롤할 수 있다면, 다른 에너지 역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크아악!"

"사, 살려줘······!"

"끄어어······ 내 몸이······"

워 머신들은 광자포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방전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저 달아나기 바빴다.

사방이 불타오르고 녹아내리며 터져나간다.

나는 이 혼돈 속에서 순간을 기다렸다. 이 혼란을 잠재울 단 한 번의 순간.

-마스터. 잠시 후 완드가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콰드득!

나는 그대로 하늘로 뛰어올랐다.

* * *

콰콰쾅!

주변이 초토화된다.

"크아악!"

"도, 도망쳐!"

"살려, 살려줘어어어!"

동료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내달린다. 번쩍이는 빛무리는 그런 동료들을 거리낌 없이 불태웠다.

타오르는 대지, 녹아든 땅은 용암이 되어 끓어올랐고, 직격으로 광자포를 맞은 동료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증발했다.

그 가운데서, 안나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봤다.

'대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급격한 스트레스로 핑하고 시야가 돌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시야를 잡으며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는?'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변수였던 존재. 소드마스터 강현재.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친위대가 이렇게 많이 기다리고 있던 것도, 메가 코프의 비행선이 머리 위에 드리운 것도.

전부 소드마스터가 이 자리에 나타났던 것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정작 그는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다이크와 싸우고 있던 걸 봤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강현재도, 다이크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일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전력이다. 사람이 어찌 비행선을 상대하겠는가? 그것도 메가 코프의 전투비행선을.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달빛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비행선.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쏟아내는 그 빛무리엔 어떤 감정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철저히 사람을 죽이는 빛이다.

'아, 아아······ 정녕 이대로······'

비행선에 붙은 성난 악마의 얼굴이 그녀를 노려보는 듯했다. 마치 너도 지옥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이는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찰나.

"멍청아! 뭐 하는 거야!"

누군가 그녀의 팔을 확하고 낚아챘다.

"······라이나?"

촉수 능력자 라이나였다.

"그래, 나야! 여기서 아직도 뭘 하고 있어? 도망쳐야지!"

"도망?"

"그럼? 여기서 죽기라도 하려고? 저 비행선에 죽는 건 개죽음이야! 안 보여?"

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이 시간에도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위에서 내려보며 한 마리씩 벌레를 죽이는 것처럼 바깥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부터 죽이고 있었다.

이게 역설적으로 안나가 멀쩡한 이유였다. 전장을 빠져나간 이들부터 먼저 죽어 나갔으니까. 그녀는 전장 한가운데 있었고 말이다.

"······그래. 이래선 안 돼. 다들 도망치려면 비행선의 시선을 끌어야 해."

"뭐? 미쳤어!?"

안나의 말에 라이나가 기겁을 했다.

시선을 끌겠다니? 저 빛무리를 보고도 저런 말을 하는 건가? 그건 곧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저걸 봐, 라이나. 우리가 제아무리 뛰어도 비행선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어. 이대로라면 모두 도망치다가 죽을 거야."

라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왜 네가 하려고 해!"

"그럼 누가 해? 나 말고 저 비행선까지 능력이 닿는 사람 있어?"

"그, 그래도······! 그래! 저걸 봐! 저놈들끼리도 싸우고 있잖아!"

그때 라이나의 시선에 공평히 공격을 받아 터져나가는 워 머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분이 일어난 거야! 나르시스가 뭐라도 하겠지! 저놈들도 그냥 당하고 있진 않을 거라고!"

"맞아. 나르시스도 뭐라도 하겠지. 그러니 우리도 해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니까."

"안나!"

"미안해, 라이나. 너라도 꼭 살아줘."

안나는 자신의 팔을 꽉 끌어안고 있는 라이나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녀 주위로 미증유의 힘이 모여들었다. 허공에 모여든 힘은 이내 미세한 전류를 퍼트리며 작은 뇌운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의지에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작은 빛을 반짝이던 뇌운이 녹아들 듯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번쩍!

눈이 멀 것 같은 엄청난 광량을 뿜어내며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비행선 바로 위에서 내리친 번개는 그대로 비행선을 빛으로 물들였다.

콰르르릉!

쾅쾅!

하늘이 울부짖었다. 그 옛날, 어째서 인간이 하늘을 두려워하며, 신으로 여겼는지 알 것 같은 뇌전의 폭풍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행선은 끄떡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하늘을 날며 항상 번개에 노출된 비행선인데 대비가 되지 않았을 턱이 없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이 일의 원흉을 찾기 위해서 폭격이 잠시 멎었으니까. 애초에 노렸던 시선을 끄는 일은 성공적이었다.

안나가 희미한 웃음을 띠며 다시 힘을 끌어올렸다.

핑――!

어질어질한 시야와 제멋대로 비틀거리는 몸이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눈코입 귀할 것 없이 모든 구멍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안나!"

"라이나! 도망가!"

안나가 외치며 다시 손을 내뻗었다.

솟구치는 미증유의 힘. 뇌운으로 변한 그 힘이 한순간 빛으로 물들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백광이 강림한다.

번쩍!

그런데 그 순간.

'······어?'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점이 강림하는 백광을 관통했다.

찰나의 순간. 그 점은 그대로 백광을 흡수하더니, 빛나는 하얀 점으로 화했다.

그리고 뇌전을 머금은 하얀 점은, 그대로 비행선에 내리꽂혔다.

쾅!

콰콰콰쾅!

'아······.'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행선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터져나간 비행선이 연달아 폭발하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타오르는 비행선의 파편들이 거짓말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안나는 물론이고, 라이나까지 입을 떡하고 벌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안나!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능력이 더 강해진 거야?"

라이나가 안나의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능력은 쓸수록 강해진다. 그건 해방전선의 능력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는지는 몰랐다.

"아,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안나 역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대체 갑자기 나타났던 그 검은 점은 뭐였지?'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 검은 점은 절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그녀의 번개가 없었더라도, 그 검은점은 비행선을 관통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산산이 조각난 비행선의 파편들 사이로, 누군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안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소드마스터!"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강현재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7)

119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중력을 거스른 내 몸은 그대로 위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중력조작은 사물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즉, 내게도 적용된다.

나를 끌어내리는 중력을 뒤집는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는 것처럼 내 속도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빨라졌다.

발밑으로 나를 노렸던 광자포가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나는 비행선을 넘어 더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더 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은 점 하나가.

이브가 말했던 '완드'라고 말했던 쇠막대기다. 특수강과 텅스텐을 섞어 만든 막대로 초고열에도 버틸 수 있도록 제작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부터 벌어질 불꽃놀이에서 견뎌야 하니까.

「중력조작」 2단계 레벨.

광범위 타격 스킬. 추락하는 혜성(彗星).

실타래의 실이 풀리듯 뻗어 나간 스킬이 완드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발아래, 지상으로.

화르륵!

급가속을 시작한 완드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혜성처럼 긴꼬리를 그리며 지상으로 쇄도한다.

불과 눈 깜빡할 사이에 '점'은 '선'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비행선의 머리 위로 혜성이 드리웠다. 공간을 찢으며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완드가 당장에라도 비행선을 산산조각낼 것처럼 성난 빛을 토했다.

그때, 난데없이 비행선 위로 백광이 내리쳤다.

'······이건?'

낙뢰다.

지상에서 목격했던 해방전선의 능력자임이 틀림없었다.

'용감하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아직 도망치지 않은 것도 놀라운데, 오히려 능력을 일으켜 공격까지 할 줄이야.

하지만 비행선에 번개가 먹힐 리 없었다. 나도 아는 사실인데, 번개를 다루는 능력자가 몰랐을 리 없다.

알고도 공격한 거다.

'아마 시선을 끌기 위함이겠지.'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놈이었다. 매번 정상이 아닌 놈들만 만나다 보니, 이런 선택을 본 게 반가울 정도였다.

'누군지 궁금하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번개는 내가 잘 쓰도록 하지.'

완드가 공간을 가르며 떨어지는 번개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불타오르던 완드 주위로 번갯불이 튀어 오르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빛으로 화한 완드는 그대로 비행선에 떨어져 내렸다.

번쩍!

완드가 비행선을 관통하며 최초의 폭발음이 먼저 터졌고.

쾅!

뒤이어 관통한 에너지가 비행선 내부를 휩쓸었다.

콰콰콰쾅!

모조리 폭발한다.

운동에너지와 전격(電擊)이 섞인 공격은 비행선을 한순간에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 거대했던 비행선이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분쇄되며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불꽃놀이처럼 흩날리는 비행선의 파편을 피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소드마스터!"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얼굴에 온통 피칠을 한 금발 머리 여자와 옷을 입다가 만 것처럼 천 쪼가리로 중요부위만 가리고 있는 오렌지색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 둘이 능력자임을 알아봤다.

은근히 풍겨오는 포스의 잔향도 그렇고, 당장에 피를 쏟은 금발 머리 여자의 상태는 기프트를 임계치 이상으로 끌어다 쓴 후유증이었으니까.

그녀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해방 전선?"

"마, 맞아요! 대체 당신이 이곳에 왜 있는 거죠?"

금발 머리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해서 그런지 유난히 눈동자가 커 보였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전장을 수습하는 게 먼저 같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장은 말이 아니었다.

사방이 불타오르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워 머신들은 모조리 죽었거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해방 전선 단원들의 시체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여기에 조금 전 떨어져 내린 비행선 파편들까지 섞이자,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었었다. 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게 먼저였다.

"······그건 그렇죠."

"알겠어요."

그녀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흐음. 그새 멀리도 갔군.'

마침내 발견한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움직이려는 순간, 그녀들이 물어왔다.

"어, 어디 가세요?"

"대화를 좀 해야 할 놈이 있어서."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이치로는 눈앞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분명 계획은 순조로웠다.

가장 성가셨던 다이크가 시작과 동시에 폭격을 맞았고, 소드마스터 역시 꼬리에 불붙은 개마냥 폭격을 피하기 바빴다.

나르시스의 워 머신들도, 정체불명의 능력자놈들도, 모조리 비행선의 폭격에 녹아내렸다.

계획대로라면, 전장에 살아있는 존재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어야 했다.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내리꽂힌 미지의 공격에 비행선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 파편들 사이로 천천히 내려앉는 소드마스터를.

'미, 미친! 인간이 어찌 이런 일을······?'

이성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됐지만, 본능이 소리쳤다.

빨리 도망치라고.

그리고 이치로는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아니, 솔직히 본능이 남으라고 소리쳤어도 도망쳤을 거다. 전투비행선이 파괴된 순간,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이치로가 다급히 몸을 돌려 날아갔다.

부스터는 무한하지 않다. 부스터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이곳과 멀어져야 했다.

'그놈 눈에 띄면 죽는다!'

자신을 노려보던 소드마스터의 싸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비행선마저 파괴한 소드마스터의 능력이라면, 자신쯤은 단칼에 둘로 쪼개버릴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서서히 전장과 멀어졌다. 이제 눈으론 전장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검게 솟구치는 연기만이 보일 뿐이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엇?"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었다.

"이, 이게 왜 이래?"

알 수 없는 힘이 바닥으로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다급히 부스터를 더 강하게 내뿜었지만, 연소되는 소리만 크게 들릴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으, 으어억!"

이치로는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쿵!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날개 없이 떨어져 내린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이 사이버웨어였으나, 하늘에서 추락한 충격은 그의 전신을 부숴놨다.

"끄으윽!"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을 잡아챈 그 힘이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이치로는 자신이 떨어져 만든 구덩이에서 필사적으로 기어 나왔다.

부서졌어도 사이버웨어는 기계. 약간의 고통만 감수한다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 막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새 멀리도 갔군, 이치로 팀장."

그의 눈앞에 소드마스터가 떨어져 내렸다.

* * *

나는 놈을 내려다봤다.

놈은 볼썽사납게 꺾인 팔과 다리로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소, 소드마스터!"

깜짝 놀란 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놈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곳이 네가 선택한 무덤인가? 메가 코프의 보안팀장이 생각보다 소소하군. 아무도 찾지 않을 곳에 묻히겠다니 말이야."

물론 내용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놈이 기겁을 하며 빌었으니까.

"사, 살려줘! 다! 다 말할게! 제발 살려만 줘!"

가면이 벗겨진 놈의 얼굴은 볼만했다. 시종일관 여유 있는 척 웃던 얼굴엔 이제 공포와 비굴함만이 가득했다.

"다 말하겠다? 무엇이든 말인가?"

"물론! 물론이다! 살려만 준다면 전부 다 말하겠어!"

놈이 과격하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나는 입매를 살짝 비틀곤 물었다.

"뭐, 좋아. 그럼 연구소부터 물어보지. 네놈들, 거기서 대체 뭘 연구했던 거지?"

"시, 신약 개발을 위한 실험을 했다. 실험 내용은 나도 정확히 몰라."

"신약 개발? 무슨 신약이지?"

"초인······ 초인을 만드는 약이라 들었다."

"초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초인이라면······ 이거 설마?

"너 같은 초인 말이다! 능력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약으로 능력자를 만들겠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으로 능력자를 만들겠다니. 사이버펑크 세계의 제약회사다운 상상력이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래. 능력자 DNA를 변형시키는 약을 먼저 연구했다. 그건 성공적이었지. 남은 건 일반인들도 능력자의 DNA 구조와 유사하게 변할 수 있는 약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실험실에선 그걸 연구했고."

이놈들. 어느 정도 성과까지 있었다.

'뭐야? 진짜 이런 게 가능하다고?'

이건 이 세계의 설정을, 그러니까 정확히는 이 게임을 뒤흔드는 변수였다.

내가 플레이할 땐 이런 게 존재하지 않았다. 능력자의 숫자는 「기적의 서광」 이후 꾸준히 줄어들기만 했다. 계속 죽어 나갔으니까.

그런데 능력자를 양산하는 약이 있다는 건, 게임의 설정을 단숨에 엎어버리는 일이었다.

만약 이 약이 정말 개발된다면, 내가 알고 있는 기존 시나리오도 완전히 뒤틀릴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이미 뒤틀렸을지도 모르지. 이런 변수가 튀어나온 걸 보니.'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놈의 말에서 무언가를 캐치했다.

"잠깐. 능력자의 DNA를 변형시키는 약이 성공적이었다는 말은······ 설마 그 재료가 인체실험으로 얻은 신체조직인가?"

"······그렇다."

이제야 놈들이 골든에그에서 했던 짓이 뭔 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약쟁이들에게 치사량의 약을 먹인 뒤 적응증을 보인 자들의 뇌와 장기만 수거해갔던 게, 저 능력자의 DNA 구조를 변형시키는 약의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마······?

"그게 혹시 블루필인가?"

"헉! 그 이름을 어떻게?"

"대답해라. 그게 블루필이냐?"

"그, 그건 아니다. 블루필은 초인을 만드는 신약에 붙은 가칭이야."

이치로의 대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울의 주인. 소피아는 분명 내게 그리 말했다.

내가 이 세계에서 홀로 우뚝 서는 날, 세계의 진실을 엿볼 준비가 됐을 때 선택하게 될 거라고.

빨간약과 파란약.

둘 중의 하나를.

만약 각성자를 만드는 약이 진짜 블루필을 뜻한다면, 그 반대에 있는 레드필은 다시 일반인으로 만들어주는 약을 뜻한다는 건데······

'그건 이상하지.'

세계의 진실과 각성자를 만드는 약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막말로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이 능력자가 된다 한들, 그건 내가 이 세계로 빙의한 이유와 하등 관련이 없다.

나는 이 세계 '밖'의 사람이니까.

'단순히 이름이 겹친 우연이었던 건가?'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정확한 건, 연구소를 직접 확인해보면 알 수 있겠지. 이놈들이 뭘, 어떻게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건지 말이다.

그때 내 눈치를 살피던 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구, 궁금한 건 다 풀렸나?"

"아직. 하지만 네가 알 것 같진 않군."

"그럼 이제 살려주는 건가?"

놈의 얼굴엔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이 가득했다. 나는 그 열망 어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왜 살려줘야 하지? 조금 전까지 날 죽이려던 놈을?"

"무, 무, 무슨! 살려준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러는 네놈은 살려달라는 적을 단 한 번이라도 살려준 적이 있었나?"

"그, 그건······."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놈을 바라보며 그대로 칼을 뽑았다.

스르릉.

눈을 돌리던 놈이 칼날을 확인하자 다급히 대답했다.

"있어! 있다고! 생각났어! 씨발! 하하하하! 숨겨놓은 비자금을 준다고 해서 내가 살······ 커, 커억!"

칼날이 환호에 찬 놈을 갈랐다. 짧은 단말마를 토한 놈의 눈빛엔 억울함과 의문이 가득했다.

나는 꺼져가는 놈의 눈을 바라보며 싸늘히 대답했다.

"나는 없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8)

120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콰드득!

처음에 봤던 녹슨 철문을 뜯어냈다. 따로 보안장치를 설치한 건 아니었던지 손쉽게 뜯어졌다.

뭐, 애초에 철문을 우그러뜨리는 괴력으로 뜯어내는 거라 손쉽다는 것에 어폐가 조금 있었지만, 폭탄이 터지거나 총알이 날아오진 않았으니까.

하긴, 워 머신을 탑승한 무장병력이 지키고 있었으니, 보안장치가 필요 없을 만했다.

철문 뒤로는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나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 뒤론 그나마 멀쩡한 무장전선 단원들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나야 이곳에서 블루필의 흔적만 찾으면 되니까 그들의 동행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나르시스와 함께 싸웠던 건 맞으니까.

꽤나 긴 계단을 내려가자 뻥 뚫린 거대한 지하공간이 나왔다. 자연적으로 생긴 일종의 천연동굴 같았다.

하지만 내부는 인공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공동엔 투명한 유리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언젠가 SF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기계장치와 연결된 유리관 속은 푸른빛 액체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천천히 유리관 쪽으로 다가가자 보였다.

"이게 무슨······."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이.

호흡을 위해 입속으로 연결된 관을 제외하고서도 온몸엔 덕지덕지 전자장비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쪽에 띄워진 모니터엔 알 수 없는 그래프와 숫자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젠슨!"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치더니 한쪽 유리관으로 뛰어갔다. 헐벗은 옷을 걸치고 있던 오렌지색 머리의 여자. 자신을 라이나라고 소개한 여자였다.

"이익!"

유리관과 그곳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살펴보던 그녀는 열 방법을 찾지 못하겠는지 유리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 촉수가 유리관을 두드렸다. 가린 부위가 많지 않은데······ 어디서 나온 거지?

퉁퉁!

촉수가 유리관을 두드렸다. 강화유리인지 몇 번을 두드리던 유리관이 이윽고 와장창 깨졌다.

액체가 터져 나오며 젠슨이라 불린 사내도 떠밀려 나왔다.

"젠슨! 정신 차려!"

라니아가 젠슨의 뺨을 후려쳤다. 몇 번을 때려도 의식이 없자, 혼자서 호흡도 확인해보고 어설프지만 CPR도 해본다.

"젠슨! 젠슨, 이 개새끼야! 눈 좀 떠!"

그때 누군가 다가와서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밀어냈다. 깨진 안경을 쓴 사내였는데, 그가 젠슨의 눈과 맥박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있어."

그리곤 다른 해방 전선 단원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두 다 흩어져 유리관에 달라붙었다. 젠슨이라 불린 자는 이들의 동료 같았지만, 다른 유리관에 갇힌 자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들도 딱히 동료를 찾는다거나 하지 않았고. 그냥 본 김에 구해준다는 걸까?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저들이 유리관 속 사람들을 구하든 말든 나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내 목적만 이루면 된다.

* * *

"소드마스터. 당신은 사람을 찾으러 온 게 아니군요?"

유리관으로 흩어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를 졸졸 따라오던 금발 머리 여자가 물었다.

피칠을 말끔히 지워낸 그녀는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이제 막 스물이나 됐을까?

아직 젖살이 전부 빠지지 않은 동글동글한 인상이었지만, 그 옛날 유명한 영화에 나왔던 영화배우가 떠오를 정도로 닮아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말이다.

"그래. 너와 달리 난 이 연구소에 알아볼 게 있어서 왔다."

"안나."

"······? 뭐?"

"너가 아니고 안나에요. 제 이름."

자신의 이름을 안나라고 밝힌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당당하다 못해 당돌한 자기소개였다.

"······그래, 안나."

나는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묻지. 너희는 이곳에 왜 온 거지? 납치당한 사람들을 구하러 온 건가?"

"맞아요.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동료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요."

"저들이 전부 동료라고?"

"물론 아니에요. 저희도 설마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납치당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라······ 문득, 비행선 위로 떨어졌던 낙뢰가 떠올랐다.

"아까 비행선에 번개를 떨어뜨렸던 거, 네가 한 일이지?"

"그, 그런데요?"

갑자기 전투 중 있었던 일을 물으니,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다람쥐처럼 커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왜 그랬는지."

"어······ 그때는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했어요. 동료들을 살려야 하니까요."

"비행선이 너를 찾았더라면 죽었을 거야."

"그랬겠죠.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많이 살릴 수 있었을 거예요."

"후회하지 않아?"

"전혀요."

안나가 꽤나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 표정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돌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런 모습도 있었나?

그런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살짝 볼을 붉히더니 말했다.

"그, 그래도 고마웠어요."

"······?"

"비행선 말이에요. 당신이 파괴해준 덕분에 제가 살 수 있던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아."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거였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너와 달리, 너를 구하겠다고 비행선을 공격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 그래도요!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편한 대로 해."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쩌다 이 어린 아가씨가 목숨까지 걸 정도의 동료애에 눈을 떴을까? 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듯 듯, 타인을 위해 본인 목숨을 던지는 결정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눈앞의 이 어린 아가씨도 그렇고, 동료를 구하러 왔다는 다른 해방전선 단원들도 그렇고······ 다들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왔다.

'대체 왜? 해방 전선이라는 조직이 그렇게 끈끈한 동료애를 자랑하는 조직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불현듯 남궁민수가 떠올랐다.

해방전선의 창시자이자 리더.

내가 아는 남궁민수의 모습과 현재의 해방전선 모습은 꽤나 거리가 멀었다.

"남궁민수도 이 일을 아나?"

"단장요? 물론이에요. 그분이 계획한 일이니까요."

"남궁민수가 계획했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그럼 절대 이들의 목적은 동료를 구하는 것만은 아닐 거다.

남궁민수가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해방전선의 전력을 쏟는다?

그는 그렇게 상냥한 자가 아니다. 냉정하면 냉정했지, 동료라거나, 전우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자다.

그의 과거부터, 시나리오가 진행되며 펼쳐질 미래까지.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로 귀결되어 있다.

소울 시티를 붕괴시키는 것.

그는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치를 거다. 타인의 목숨, 동료의 목숨, 종국에는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이번 일도 분명 그것과 맞닿아있을 거다.

"또 다른 말은 없었나?"

"네. 왜 그러시죠?"

"흐음. 아니다."

고개를 젓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나 역시 뒤에서 다시 쫓아왔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다. 남궁민수가 무리해서 이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그게 뭘까? 이 연구소에 납치된 자들을 구출해서 얻을 이득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겨우 사람이나 구하자고 남궁민수가 이런 무모한 계획을 짰을 리 없는데······.

'······아? 사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맞다. 이곳에 납치된 자들을 구출해서 얻을 이득은 이곳에 납치된 자들. 즉, 사람 그 자체다.

나는 뒤를 돌아 나를 올려다보는 안나를 바라봤다.

"하나 더 묻지. 혹시 납치됐다는 너희 동료들······ 전부 능력잔가?"

"······? 맞아요."

"그럼 저 유리관에 든 사람들 전부 다······?"

"네. 전부 능력자들이에요. 아큐마 제약이 초창기 능력자들에게 접근해서 납치한 거라고 하더군요. 나중엔 닥치는 대로 납치했지만요."

"······."

이제야 이해가 됐다.

시나리오 중간부터 해방전선의 힘이 급격히 강해졌는데, 그 바탕이 이곳에서 얻은 능력자들이었던 셈이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남궁민수, 그자가 그렇게 순수했을 리 없다. 결국, 이번 일은 구출이 아니라 징병이었다.

"······?"

내가 말없이 피식 웃자 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다시 작은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따라오는 게 들렸다.

* * *

연구소장실에 들어섰다. 오는 길에도 느꼈지만, 이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따로 대피소라도 있는 건가?'

친위대 말고도 이곳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모조리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뭐, 굳이 상관없나?'

내가 필요한 건 데이터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연구소장의 컴퓨터에 다가가 워치를 연결했다.

-방화벽 확인. 무효화.

-2차 보안시스템 확인. 무효화.

-시스템 장악을 시장합니다.

이브의 믿음직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네트워크가 해킹됐다.

"데이터 카피까지 바로 이어서 해줘, 이브."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저쪽 일은 이브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때 이곳까지 나를 따라온 안나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사이버러너인가 보죠?"

"음? 뭐?"

"이브라는 사람요. 그분과 대화하신 거 아니에요? 듣기론 해결사들에겐 다들 함께 일하는 사이버러너가 있다고 하던데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브가 내 전용 사이버러너이자,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료지."

"······우와. 부럽네요. 소드마스터에게 그런 평가를 듣다니."

안나가 진심으로 감탄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당돌한 태도로 본인 생각을 말할 때와 다르게, 이럴 땐 확실히 그녀의 나이가 얼굴 위로 드러났다. 아직 소녀다운 모습 말이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브야. 들었어? 네가 부럽다는데?"

-······. 시스템 장악 완료. 데이터 카피까지 3분 21초 남았습니다.

부끄러운 듯,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내놓는 이브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데이터 카피를 끝내고 소장실을 빠져나왔다.

그 사이, 유리관 속 각성자들은 전부 구출해서 연구소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나머지 해방전선 인원들은 연구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우린 이제 빠져나갈 겁니다."

라이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가슴 위에 걸쳐져 있던 상의가 마침내 끊어졌는지, 흰색의 연구원 가운을 위에 걸친 채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운이라 그 아래로 훤히 몸의 굴곡이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벌써? 꽤나 서두르는군."

진짜 목적이 납치된 각성자들을 구하는 것밖에 없었나?

"단장이 아큐마 제약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조금 전, 보안팀 비행선 하나와 수송선 3대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흐음. 수송선이라······."

남궁민수의 정보라면 확실했다. 음흉한 것과 별개로, 사이버러너로서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보안팀과 더불어 수송선이 함께 출발했다는 건, 무장병력. 그러니까 전투 안드로이드들일 가능성이 컸다.

수송선 한 대에 못해도 수백 기는 탑승해있을 테니, 그 수송선이 3대라면 천 기에 달할 거다.

나는 괜찮아도, 구출된 각성자라는 짐덩이까지 얻은 해방전선은 서둘러야 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이 근처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야 할 테니까.

"뭐, 나도 볼일은 다 봤으니······"

그 순간.

투타타탕!

복도 너머에서 총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갑자기 웬 총소리지? 설마 살아남은 친위대가 있었나?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해소하려는 듯, 리아나가 말했다.

"아큐마 제약의 연구원들이에요."

"연구원? 이 연구소 말인가?"

"맞아요. 이 실험을 자행한 악마같은 놈들이죠."

"······그래서 모두 죽인 건가?"

연달아 들린 총소리와 그걸 해명하듯 대답한 리아나의 태도를 봤을 때, 그 연구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리아나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살려둘 수 없는 놈들이에요. 살아있다면 다른 곳에서 똑같이 이 일을 반복할 테니까요."

어쩌면 냉정하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한 이야기다.

그저 연구했다는 죄로 모두 죽은 거니까.

하지만 이해는 된다.

직접 실험을 진행했던 연구원들이라면 이곳에서 어떤 실험을 자행했는지 뻔히 알고 있을 거다. 아마 이 실험의 주재료였던 뇌와 장기가 어디에서 조달되는지도 알았을 테지.

그걸 알면서도 묵인한 것도 모자라, 그걸 사용해 또 다른 인체실험을 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 죄는 가볍다고만 볼 수 없다.

본인 의지가 아니라서 억울하다고?

그건 생체실험을 당한 약쟁이들도, 이 연구소에 납치된 각성자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개인이란 거대 기업의 장난에 놀아나는 장기말에 불과할 뿐.

그곳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건 의미 없다. 그게 싫으면 스스로 강해지든가, 도시 밖으로 탈출해야지.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 끝냈으면 가지."

배를 가르려는 자들 (9)

121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콰콰쾅!

하늘이 무너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대지는 이내 모았던 불길을 내뿜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불길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연구소.

전투의 흔적으로 이미 위장건물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였지만, 지금은 통째로 땅 밑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골든구스라······.'

가라앉는 골든구스 연구소를 바라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름대로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어쩜 이리 동화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는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도 결국 주인은 거위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그 결말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멀쩡한 거위와 앞으로 낳을 황금알까지 모조리 잃었다.

아큐마 제약도 마찬가지다. 각성자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으면서, 그걸 포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실험하는데 사용했다.

만약, 이곳에 실험용으로 끌려온 각성자들을 고용했더라면, 지금쯤 메가코프의 자본력에 걸맞은 강력한 각성자 부대가 탄생했을 거다.

'하긴. 그랬다면 사이버펑크의 메가 코프가 아니겠지만.'

극도로 치달은 자본주의 세계를 대변하는 메가 코프. 그들의 사고방식은 포용보다 지배이며, 동반보다는 군림이다. 그게 그들이 살아온 길이며,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다.

나는 잠시 더 불길을 내뿜는 연구소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시선 끝으로 녹아들었던 대지가 흘러나간 흔적이 보였다. 다이크가 초열광자포에 맞았던 자리다.

그때는 나도 신경 쓰지 못했지만, 다시 확인해보니 저렇게 빠져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마 멀쩡히 도망가진 못했을 거다. 초열광자포에 직격으로 맞았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겠지.

'뭐, 이 세계에선 숨만 붙어있으면 되니까 상관없겠지만.'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자랑하던 반중력 사이버 암도 완전히 박살 났을 테니,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겠지.

어쩌면 이번 타격으로 육체를 버리고 아예 사이보그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르시스의 자본력이라면 사이보그화도 가능할 테니까.

'조만간 또 만나게 되겠군.'

내가 블루필을 쫓는 한 나르시스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이제 나와 나르시스의 악연은 돌이킬 수 없다. 별로 돌이키고 싶지도 않고.

그럼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누가 먼저 죽느냐의 싸움이다.

'그때는 확실히 끝장내주마.'

한번 붙어본 결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이크는 확실히 나보다 아래라는 걸.

굳이 따지자면 폭주하기 직전의 인형술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인형술사보단 훨씬 까다롭긴 했다. 반중력 사이버 암이라는 변수가 존재했기에.

아마 내가 인형술사를 만났던 시기에 다이크를 먼저 만났더라면 꽤나 고전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귀신거북을 사냥하고 「시간역행」을 얻은 지금의 나는 그때와 비교해서 몇 단계나 강해졌다.

단순히 기프트 하나를 얻은 것이 아니라, 「시간역행」을 얻음으로써 파생되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한꺼번에 강해졌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인벤토리까지 완성된 상황이다. 「추락하는 혜성」과 같은 키네틱 스트라이크 스킬이 비행선이 아니라 개인에게 떨어진다면, 그걸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기대되는군.'

놈과 다시 만날 그 날이 말이다.

그때 누군가 도도도 뛰어오더니 내 뒤에서 멈춰섰다.

발끝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체중과 몰고 온 바람결에 은은히 섞여 있는 피 냄새와······ 체리향.

"소, 소드마스터!"

"······? 무슨 일이지?"

몸을 돌리자 역시나 부스스한 금발 머리가 시선을 가득 채운다.

안나였다.

"여,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잔뜩 얼굴을 붉힌 그녀가 양손으로 개인단말기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 연락처?"

나는 잠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녀에게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내 번호를 따가려고 하는 게 맞는 거지, 지금?

"네! 나, 나중에 꼭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여기서 물어봐도 되는데."

"여, 여기서 말고 나중에요!"

그녀가 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서 나를 간절히 올려다보는데 거의 울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나는 잔뜩 부끄러워하는 이 작은 아가씨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네 생각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재미가 없을 텐데. 네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르고."

"괘, 괜찮아요! 어차피 질문은 핑계······ 아앗! 그게 아니고!"

"뭐, 좋아."

나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붉어진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찌감치서 그녀를 구경하듯 서 있는 해방전선 단원들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아하니, 거절했다간 이 어린 아가씨가 꽤나 상처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번호를 입력하고 단말기를 건네주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소드마스터!"

"강현재."

"네?"

"강현재라고. 내 이름."

나는 그녀가 나에게 소개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건네주며 웃었다.

밝아졌던 그녀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지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연구소가 있던 곳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안나를 비롯한 해방전선 단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서둘러야 하는 건 나보다 그들이다.

"자! 우리도 빨리 빠져나가자고!"

"제길! 돌아가면 맥주로 목구멍부터 씻어야겠어."

"너는 목구멍이 아니라 다른 걸 먼저 씻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이 새끼야? 지금 한번 해보······"

"뭐 어쩌라······"

해방전선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진다.

대신 울창한 숲속의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내가 내딛는 힘찬 발걸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바이크를 세워놓은 곳까지 대략 3키로 남짓.

나는 잠깐의 여유 아닌 여유를 즐기며 그렇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듣겠습니까?

나는 귀를 의심했다.

"······? 너 이런 화법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사람 같다, 사람 같다 했더니, 이젠 진짜 의심이 갈 지경이다.

-사이버 세상엔 없는 게 없습니다.

"평소에 뭘 딥러닝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이브야. 이상한 거 보는 건 아니지?"

-주로 마스터의 검색기록을 참고하고 있습니다만.

"······할 말 없게 만드네."

이런 요오망한 AI 같으니라고.

나는 혀를 쯧하고 찼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데이터 분석이 끝났습니다. 사전에 마스터가 설정하신 키워드와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언급된 내용 위주로 데이터를 간추렸습니다.

렌즈 화면 위로 온갖 사진들과 문서들이 홱홱 나열됐다가 사라진다. 빠르게 지나가는 정보의 파도에 미간을 찌푸릴 무렵, 이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마스터가 궁금해하실만한 정보입니다. 데이터상에 직접적인 위치는 표시되어 있진 않지만, 방문했던 연구소와 유사한 연구를 도시 전역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슈퍼컴퓨터에 필적하는 이브가 내린 결론이다. 그건 곧 사실에 매우 근접한다는 뜻.

"유사한 연구라면······ 인체실험 말인가?"

-인체실험인지까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블루필 연구를 위해 거점 곳곳에서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블루필 연구를 위한 데이터? 그렇다는 건······?"

-네. 연구소에서 생산된 약을 각 거점에서 실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미친놈들!"

그러니까 골든구스 연구소에서 만든 약을 현장에서 임상실험한다는 거다.

아마 임상 대상은 나르시스의 말단 조직원들이 되겠지. 그들은 본인이 실험대상인지도 모르고 약을 복용하고 있을 테고.

다이크와 이치로가 서로 아웅다웅했어도, 결국 그보다 윗선에선 이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말인즉.

"······그 거점을 뒤지러 가야 된다는 소리겠군."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 도시 전역을 다 뒤지나."

뭐, 그래도 이제는 괜찮다. 하늘을 나는 호버바이크 덕분에 도시 반대쪽을 가로지르는 게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마침 바이크를 세워둔 곳에 거의 도착했다.

그때 이브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나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나쁜 소식도 있었지. 뭔데 그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해?"

지금 시점에서 나쁜 소식이라고 해봤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바이크가 부서졌습니다, 마스터.

"······어?"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뭐가 부서졌다고?' 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걸음을 내디뎌 나무가 가리고 있던 시야가 사라지자······.

-덩치가 큰 야생동물로 추정됩니다.

이브의 말대로 바이크가 박살이 나 있었다.

"······."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들었다. 시커멓게 내려앉았던 어둠이 서서히 물러서며 하늘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걸어가야겠군."

* * *

다음날 로세툼을 방문했다.

딸랑딸랑.

오늘도 애처로운 종소리가 로세툼의 방문을 알렸다.

일주일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꽤나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번 일에 심력을 많이 쏟았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그건 로제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꽤 오래 걸렸네요?"

다리를 꼰 채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말투엔 가시가 돋쳐있었다. 뾰로통한 얼굴 위로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일주일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그전엔 이렇게 오래 걸린 일이 없었잖아요?"

그건 그렇다. 의뢰를 받아도 길어야 사흘이면 끝냈으니.

가장 오래 걸린 일이 귀신거북을 잡으러 나갔던 것 정도일까? 그거야 도시 밖으로 나갔으니 어쩔 수 없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복잡해져서."

"중간에 연락은 해줄 수 있잖아요. 저, 당신의 유일한 중개인이에요. 바로바로 연락은 안 되더라도, 끊기진 말아야 한다고요."

"그건······ 미안하군."

사실 이건 배려의 문제이긴 했지만, 나는 깔끔히 사과했다. 말 그대로 배려의 문제인데, 나와 그녀의 관계는 단순히 중개인과 해결사 그 이상의 관계가 되어버렸으니.

그리고 내 깔끔한 사과에 로제 역시 사르르 표정이 녹아내렸다. 불만으로 가득 차 삐쭉거리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쏙하고 들어갔다.

"그래서······ 갔던 일은 잘 끝났고요?"

로제가 장식품처럼 세워놨던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찻잔 하나를 끌어와 쪼르륵하고 찻물을 붓는다. 찻잔 위로 모락모락 뜨거운 연기가 올라왔다. 다 준비를 해놓고도 심통이 나서 차를 안 줬던 거다.

"······아니."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블루필이 초인을 만드는 약이라는 건 알아냈지만, 그게 내가 찾던 블루필과 같은 약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호버바이크가 박살났다. 없을 땐 몰랐는데, 있다가 없으니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진짜요? 이런 적은 처음이네요."

찻잔을 슥 밀어서 내 앞에 가져다 놓은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차피 단번에 해결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그것보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요?"

"호버바이크를 구해줬으면 좋겠군."

"······? 또요? 바이크 수집 취미라도 생긴 거예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고······ 후우. 바이크가 박살 났거든."

"네? 뭐하다가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야생동물이 박살 냈더군."

"······? 뭐요? 야생동물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죠?"

"그래.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예요?"

"말하자면 복잡해. 아무튼, 구해줄 수 있지?"

"그거야 가능은 한데······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호버바이크를 수입이라도 해오는 건가?"

"아니요. 요즘 전장부품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수급난이에요. 호버바이크뿐만 아니라 자동차, 로봇, 안드로이드 전부 생산 차질이거든요."

"반도체 수급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게 왜 부족한데?"

"딱히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들리는 말로는 어딘가에서 전장 반도체를 쓸어가고 있다는데, 이것도 그냥 소문이고요."

B와 D 사이의 어디쯤 (1)

122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전장 반도체(電裝 Semiconductor).

원래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뜻하는 말이지만, 로봇과 안드로이드가 활보하는 이 세계에선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에 들어가는 모든 반도체를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보다도 훨씬 중요한 반도체가 바로 이 전장 반도체다.

이 세계의 기계장치는 사이버웨어라는 이름으로 사람 몸까지 들어가니 말이다.

"흐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게 됐다. 하필 이 타이밍에 반도체 수급난이라니. 기업 단위에서 반도체가 모자라다는데, 개인이 어쩌겠는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데 게임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최소한 내 기억엔 없다. 관련된 퀘스트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고.

그렇다면 설정에만 존재했거나······.

'아니면 이 세계에서만 일어난 일이라는 거겠지.'

해방전선이 소울 프리즌을 습격했던 거나, 아큐마 제약과 나르시스가 손잡고 각성자 연구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 * *

"왜요?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나도 모르게 표정이 진지해졌나 보다. 로제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긴, 반도체 수급난을 듣고 갑자기 표정이 변했으니 이상할 만하지. 반도체 같은 첨단장비와 가장 거리가 먼 칼잡이인데 말이다.

"아니. 별거 아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반도체 수급난이든, 반도체가 남아돌아서 폭락하든 아무렴 어떤가?

내가 기업가 테크를 탔다면 몰라도, 길거리 해결사로 살아가는 나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예전에 타던 바이크를 다시 꺼내야 하려나······."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로제가 불쑥 물어왔다.

"혹시 자동차도 괜찮아요?"

"음? 자동차?"

"자율주행 자동차라면 바로 구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도체 수급난이라며?"

"제가 자동차 수집광을 한 명 알고 있거든요. 그 사람한테 받아오면 돼요."

자동차 수집광이라?

"누군데?"

"알리오요."

"알리오?"

설마 제 오빠 자동차를 뺏어서 갖다 주겠다는 건가? 이게 말로만 듣던 불속성 남매의 우애?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당신이 오면 방문해달라고 연락이 왔거든요."

즉, 용건이 있어서 부른 것 같으니 대가로 자동차를 뜯어와라, 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건 이거대로 이상했다.

"날 찾았다면 의뢰를 맡길 생각인가 본데······ 너는 괜찮아?"

어디까지나 내 중개인은 로제였다. 즉, 모든 의뢰는 로제를 통해서 전달되는 게 원칙이었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받았던 의뢰도 존재했지만, 그거야 내 필요에 의해서 했던 것이 대부분이고 외부로 알려지는 중개인 의뢰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중개인이 멀쩡히 있는 대도 불구하고, 다른 중개인의 의뢰를 맡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내세웠던 '소드마스터의 전용 중개인'이라는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나의 사례가 생긴 순간, 그녀를 제치고 나와 직접 거래를 트고 싶어 하는 중개인들이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물었던 거다.

너는 괜찮냐고.

차를 홀짝이던 로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는데······ 당신한테도 좋은 기회라서 어쩔 수 없이 승낙했어요."

"······? 나한테 좋은 기회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네. 알리오가 얼마 전에 다섯손가락에 오른 건 아시죠?"

"듣기야 했지."

결국, 알리오는 암투 끝에 다섯손가락 중 하나가 되는 데 성공했다.

가문의 힘이었다고 해도 본인의 역량이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거다.

"알리오가 다섯 손가락이 되고 받은 첫 번째 의뢰를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 해요."

"음······?"

나는 미간을 좁혔다.

첫 번째 의뢰를 맡긴다고?

내 표정을 읽은 로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소울 시티의 모든 사람이 이번 의뢰를 지켜볼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성공적으로 의뢰를 끝마친다면······"

로제의 푸른 눈동자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녀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단언했다.

"······당신 이름을 이 도시 전부가 알게 될 거에요."

* * *

콜레오넬 가문.

꽤나 오랜만에 방문하는 이곳은 여전히 변한 것 없이 고풍스러웠다. 아마 백 년 뒤에 찾아오더라도 지금 모습과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다.

다만, 겉모습만 그대로일 뿐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날카로운 기세도 곳곳에서 느껴졌고, 저택의 사용인들과 오가는 사람들도 훨씬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건 알리오가 분열되어 있던 콜레오넬 가문을 확실히 휘어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랜만이군. 일단 앉지. 잘 지냈나?"

접대용 테이블에 앉아있던 알리오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나야 뭐."

나는 반대편 소파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축하한다. 다섯손가락에 올랐다고?"

"흐흐흐. 네 덕분이다. 가문을 좀먹던 세력을 쓸어버리니 생각보다 방해가 없었어. 최악의 적은 내부의 적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셈이지."

알리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가문을 좀먹던 세력이라면, 그녀의 고모였던 이자벨과 사촌들을 말하는 걸 거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어도 친혈육을 쓸어버린 걸 안타까움 하나 없이 저리 기분 좋게 말하다니······.

참 이 세계는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내 덕분이라면 지금이라도 인센티브 좀 주는 게 어때?"

"······하여튼 해결사티는 팍팍 내는군."

"이거 안 보이나?"

나는 얼굴을 구긴 알리오를 바라보며 허리춤을 톡톡 두들겼다. 매달린 칼집에서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로 숨길 생각 없어. 숨길 이유도 없고."

해결사라고, 칼잡이라고, 나를 처음 본 이들은 대부분 얕잡아본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 방심이 내겐 기회였으니까.

실제로 나를 얕잡아봤던 놈들 대부분은 머리와 몸이 분리됐다. 그것도 아니면 좌우로 분리됐던가.

"돈도 꽤 번 거로 아는데, 여유 좀 부리지 그러나? 그러려고 돈 버는 거 아닌가?"

"글쎄. 너도 그런가?"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사람마다 돈 버는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나도 마찬가지고, 눈앞에 알리오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자신의 말대로 풍족한 돈으로 여유를 부리는 삶을 바랐다면, 알리오도 다섯손가락에 오르는 모험을 하진 않았을 거다.

다섯손가락은 도시 권력의 한 축이다. 온갖 의뢰가 오가는 도시의 속성상, 그 정점에 선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적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권력을 노리는 자들과도 싸워야 하고, 의뢰 중에 부딪힌 무수한 대상과도 싸워야 한다.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다섯손가락도 마찬가지다. 버티지 못하면 목이 꺾여 죽는다.

내 물음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알리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건 그렇군! 미안하다. 천하의 소드마스터에게 범인의 기준을 갖다 대다니."

"받아들이지."

나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술병을 꺼내든 알리오가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로제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네게 의뢰를 맡기고 싶다. 내 첫 번째 의뢰이자······ 선물이다."

휙.

가득 채운 술잔이 테이블 위로 미끄러지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술잔을 잡아채며 대답했다.

"거창한 선물이로군."

"네 말대로 해결사라면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지. 어때?"

알리오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물끄러미 녀석의 눈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의뢰 내용은?"

* * *

커다란 창문 뒤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붉게 드리운 빛의 물결이 실내를 황혼으로 물들였다.

"연구소 하나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적들 정체도 알아내면 좋고."

술을 홀짝이던 알리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잔 위로 붉은빛이 파도쳤다.

나는 그 붉은 물결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또 연구소라······ 이 세계는 쓸데없이 연구소가 많은 것 같군."

뭘 그리 연구할 게 많은지. 연구 못 해서 죽은 귀신들이 전부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 빙의되기라도 한 건가.

"또? 최근에 연구소 관련된 의뢰를 받았었나 보지?"

"뭐······ 반대였지."

"반대?"

알리오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술잔을 들어 올렸다. 목구멍을 타고 뜨겁지만 부드러운 무언가가 흘러내려 간다. 마치 황혼에 담긴 태양을 꾹 삼킨 것만 같았다.

"······후.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어떤 기업의 연구소지?"

단번에 들이켠 술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대답이 들려왔다. 알리오의 표정은 한껏 진지해져 있었다.

"셀리케 바이오텍."

"셀리케?"

나는 미간을 좁혔다.

셀리케 바이오텍.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다섯 개의 메가코프 중 하나.

바이오시밀러로 시작한 이 기업은 뛰어난 유전자 카피 능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약 시장을 점령했다. 오늘날 대중에게 보급되는 대부분의 약은 셀리케에서 만든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제품은 방사능 중독을 중화시키는 '언더스컬'이다. 사실상 이 약을 선점함으로써 오늘날의 셀리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방사능 제거 기술이 점점 발전함으로써 언더스컬의 매출이 떨어지고, 셀리케는 새로운 먹거리를 위해 바이오와 테크를 합친 신산업을 창조해냈다.

바로 사이버 웨어다.

기계 팔과 다리, 개조 안구, 크롬 본 등 대부분의 신체개조 기술의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사이보그 기술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가장 사이버펑크 다운 기업이었다.

'그리고 골든구스에서 이치로가 떠들어댔던 배후 중 하나였지.'

아큐마, 셀리케, 도그마.

이 셋의 공통점은 메가 코프라는 것 외에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바이오기업이라는 것.

각자 바이오 산업에서 자기 영역이 확고한 바이오테크의 괴물들이었다.

"왜 그러지?"

"아니. 아니다. 계속 듣지."

"흐음. 알겠다."

고개를 갸웃한 알리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셀리케의 연구소를 노리는 세력이 포착됐다. 이미 몇 번의 침투도 있었다고 한다.

사이버러너를 이용한 네트워크 침투부터, 내부자를 포섭해 정보를 빼돌리려고도 했고, 실제로 <밤고양이>라는 유명한 도둑들이 침입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 막아냈다.

셀리케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대 메가코프 중 하나. 웬만해선 보안이 뚫릴 일이 없다.

"그런데 왜 의뢰를 넣은 거지? 네 말대로 셀리케의 보안을 누가 뚫을 수 있다고?"

내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묻자, 알리오가 입꼬리를 씰룩하고 올렸다.

"어디겠나?"

그리곤 여유롭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여유로운 태도에 담긴 대답을 읽어내곤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메가 코프가 노린다고? 설마? 4차 기업전쟁 이후 그들 간의 전쟁은 하지 않기로 협정하지 않았나?"

4차 기업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사실상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 빌어먹을 사이버펑크 세계가 더 막장으로 치달은 것도 기업전쟁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마지막 기업전쟁이라 불리는 4차 기업전쟁 이후, 메가 코프들은 모여서 협정을 했다.

어차피 정리될 기업은 대부분 정리됐으니, 여기서 다들 멈추자고.

이러다간 인류와 함께 공멸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협정이 뭔 줄 아나?"

알리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녀석의 눈에 언뜻 광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젠가 깨질 약속이라는 뜻이야. 어느 한쪽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 순간 모조리 깨지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궤변······"

알리오의 말에 반박하려던 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아큐마 제약의 보안팀장이던 이치로의 입에서, 확신하듯 다른 메가 코프의 이름이 줄줄 흘러나오던 장면이.

[대체 해결사 나부랭이 따위가 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거죠? 듣자 하니 골든에그도 털었다던데······ 어디의 사주를 받았습니까? 셀리케? 도그마? 설마 미우라는 아닐 테지요?]

협정이 여전히 강력했다면 다른 메가 코프를 의심하는 말이 나오진 않았을 거다.

즉, 그들의 협정은 이미 깨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표정을 굳히자, 알리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깨달았나 보군. 이 세계엔 영원한 약속 따윈 존재하지 않아. 변하지 않는 건 돈과······ 그 돈을 탐하는 자들의 탐욕뿐이지."

B와 D 사이의 어디쯤 (2)

123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창밖으로 멀어지는 강현재를 바라보며, 알리오는 시가를 빼 물었다.

"후우.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소드마스터."

독한 시가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어느덧 어둑한 하늘이 내려앉은 창문으로 타들어 가는 시가의 새빨간 불꽃이 비쳤다.

이번 일은 알리오에게도 도박이었다.

강현재가 무식하게 강한 칼잡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한 것과 뛰어난 해결사인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나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강현재가 칼날이라면, 그 손잡이는 자신이다.

만약 의뢰가 실패해 칼날이 부러진다면, 손잡이 역할을 했던 자신 역시 함께 폐기될 거다.

칼날이 부러진 칼을 사용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럼 이 도시 역사상 최단시간에 다섯손가락에서 물러난 중개인으로 기록되겠지."

가문은 쇠락하고, 영향력은 줄어들 거다. 지시를 따르던 중개인들이 줄지어 떠나겠지.

아니, 떠나기만 하면 다행이다. 등 뒤에 칼을 꽂을 수도 있으니.

즉, 콜레오넬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강현재에게 의뢰를 맡겼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아는 가장 강력한 해결사이자, 부러지지 않을 신념을 지닌 사내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 방해자들이, 이 의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온갖 방해공작을 하겠지. 의뢰 자체에 대한 공작은 물론이고, 자신이 의뢰를 맡긴 해결사에게도.

돈, 마약, 여자, 권력, 모든 것을 들이밀며 속삭일 거다. 의뢰를 포기하라고. 어떤 방식이든 실패만 하면 되니 말이다.

"소드마스터는 최소한 그런 면에선 믿을 수 있는 사내지."

알리오는 강현재를 '여러모로' 믿었다.

최소한 뒤통수는 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첫 번째. 그리고 그 지랄 맞은 성격상 당한 것 이상으로 상대에게 돌려줄 거라는 믿음이 두 번째다.

"큭큭! 그 정도만 되도 이 바닥에선 최고의 신용도를 자랑하는 거지."

피 묻은 돈과 더러운 욕망이 모인 곳이 바로 의뢰시장이다.

도시의 뒷골목이 원초적이라 하지만, 이 바닥은 그보다 더 원초적이고 음습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한때 도시의 낭만을 꿈꾸며 모였던 자들은, 누구보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자들로 바뀌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이 바닥은 그런 곳이다. 믿음보다 배신이 당연시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는 이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큭큭큭!"

그래서 알리오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저열한 세계를 살아온 자들이, 그들이 살아왔던 대로 헛짓거리를 하다가 강현재의 칼날에 모조리 쓸려나갈 게 너무나 기대돼서.

당황한 얼굴로 목이 잘릴 미지의 방해자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통쾌해서 말이다.

후우.

타들어 가는 시가를 훅하고 뿜어낸 알리오가 저택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동찻값은 그걸로 대신하도록 하지."

* * *

의뢰 계약이 완료되기까지 며칠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말에, 나는 블루필을 임상실험했다는 거점들을 뒤지러 다녔다.

골든 구스에서 얻은 데이터에서도 정확한 위치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어느 구역의 특정 갱이거나, 상징물을 거점 이름으로 대신했기에 찾기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귀찮아서 그렇지.

그리고 내겐 이런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줄 이브라는 존재가 있었다.

-저곳입니다, 마스터.

시선 끝으로 어둠에 물든 폐아파트가 보였다. 달빛을 피해 드리운 밤의 장막은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의 외관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결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입에서 번개를 쏜다는 39구역의 '전기 두꺼비'가 더 현실성 있겠군."

"입이 아니라 혓바닥이라고 하더군."

"음, 어?"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각성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기 두꺼비' 그자 말이야. 정확히는 혓바닥에서 전기가 흐른다고 하더군."

"······그것도 진짜라고?"

"그래도 바퀴벌레 외피를 가진 '콕로치 맨'이나, 열 손가락 전부 촉수로 사용하는 '텐타클 핑거'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지."

"허······?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그들의 말대로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각성자가 등장한 지 1년.

도시전설처럼 여겨지던 각성자의 존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각성자를 직접 봤다는 사람은 드물었고, 스스로 각성자입네 하고 드러내고 다니는 자들도 드물었다.

아마 아큐마 제약이 각성자를 납치했던 것도 영향을 줬을 테고, 기프트를 믿고 설치다가 눈먼 총에 맞아 죽어 나간 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영향을 줬을 거다.

그럼에도 지금 저들이 말하듯, 길거리 이명까지 생긴 존재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건······ 쉬쉬하며 숨기기엔 각성자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말인즉.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각성자들의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세상이 미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이렇게 미쳐있으니 우리 같은 놈들도 먹고사는 거지."

"또 늙은이 같은 소릴 하는군!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소드마스턴지, 그지깽깽인지 하는 놈이 42구역 거래처를 쓸었다면 그다음은 우리가 될 수도 있잖아?"

'소드마스터?'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내 얘기가 나온다고?

"그래서 대장이 요즘 그 난리를 치는 거라고 처음에 말했잖나?"

"대장이 지랄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그그, 소드마스터라는 자에 대해서 더 소문난 건 없나? 예를 들면 생김새라든지!"

"글쎄······ 일단 동양인 남성이라는 것과 칼을 두 자루씩 차고 다닌 것 정도일까?"

"뭐? 그게 다야? 이 도시에 칼차고 돌아다니는 동양인이 몇인데!"

"······음! 이건 정확한 건 아닌데······ 그가 의뢰받은 현장엔 항상 피에 젖은 우의(雨衣)가 버려져 있었다고 하더군."

이렇게도 자세히 소문이 났었나?

중개인이나 해결사라면 내 소문에 관심이 생겼겠지만, 이런 말단 갱단원에게까지 퍼졌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름이 아니라 이렇게 특징적인 내용까지 전부 다.

"우의? 비옷(Raincoat) 말인가?"

"아무래도 칼로 썰고 다니니 피가 많이 튀지 않겠나? 매번 피를 뒤집어쓸 텐데 우의라면 피를 피할 수 있겠지."

"······진짜 미친놈이로군!"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오늘 그 미친놈 손에 네놈들 전부 죽는 거야.

* * *

쾅!

복도 끝 철문을 걷어찼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철문은 그대로 경첩째 떨어져 날아갔다.

내부는 가정집이 아니라 공용시설로 활용됐을 법한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백 평 남짓한 공간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투명한 비닐 커튼이 곳곳에 드리워 파티션을 구분했다.

나는 코끝에 맴도는 진한 혈향과 화약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역겨운 향기를 쫓았다.

공간의 끝. 유일하게 벽으로 구분되어 따로 방이 만들어진 곳.

그곳에서 진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저벅저벅.

나는 지체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앞서 갱들의 대화로 이곳엔 약에 취해 쓰러진 놈들의 보스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약에 취한 놈 목 따는 거야 우습지도 않다.

그렇게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쿠콰콰쾅!

나무로 된 문을 뚫고 시커먼 무언가가 나를 덮쳐왔다.

"건방진 소드마스터! 네가 찾아올 줄 알았다!"

그건 이 폐아파트 갱단의 보스였다.

놈은 반쯤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헐벗은 상체가 크롬빛으로 빛났다. 상반신 전체가 사이버 웨어였던 거다. 그러니 맨몸으로 문을 뚫고 튀어나왔겠지만.

"죽어라!"

팔을 활짝 펼친 놈이 나를 잡아챌 듯 손을 뻗었다.

제법 허를 찌르는 공격이자, 그 자신감만큼이나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서걱.

은빛 궤적이 한차례 허공을 스쳐가자.

우당탕탕!

놈은 나를 덮쳐오던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목이 떨어진 시체는 사이버웨어 할애비가 와도 움직일 수 없으니까.

데구르르.

발치로 눈이 뒤집힌 놈의 머리가 굴러왔다. 나는 물끄러미 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물어보고 죽였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이번 거점이 다섯 번째 거점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방문했던 곳엔 임상실험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딱히 실험실 같지도 않았고, 그냥 갱단 소굴이나 마약상 기지 같았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쳐진 비닐 커튼 안에는 마약을 제조하고 포장하는 장비들만 가득했지, 실험과 관련 있어 보이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브. 이 건물 전체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확인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3D 공간 탐색 시작합니다. 완료까지 4분 38초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놈이 들어가 있던 방까지 마저 살핀 후 밖으로 나왔다. 좁은 공간에서 너무 많은 피를 뒤집어쓰다 보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도 허탕이려나."

나는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 * *

나흘간 총 12곳의 임상실험 거점을 털었지만, 어딜 봐도 실험의 'ㅅ'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낸 건 갱단 놈들이 잘 씻지 않는다는 게 전부였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 알리오에게 연락이 왔다.

-계약체결 됐다. 네 단말기로 의뢰정보와 출입코드 보냈으니, 확인하고 바로 의뢰인에게 가면 된다.

단말기 너머로 들려오는 알리오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무려 메가 코프와의 계약이자 본인의 첫 번째 의뢰 아니던가? 계약 사항을 조율하며 시달렸을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뢰인이라면 셀리케의 회장 말인가?"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후우. 네가 만날 사람은 보안실장이다.

"보안실장이라······ 아쉽군. 경호대장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셀리케 바이오텍의 무력부대는 2개로 나뉜다.

보안실과 경호대.

보안실은 말 그대로 보안에 신경을 쓰기에 현실보단 넷상에서 활동하는 사이버러너가 주력이었고, 보안실장 역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사이버러너였다.

반대로 경호대는 셀리케의 임원들이나 VIP 같은 요인경호를 주로 한다. 따라서 무력이 주력이었고, 경호대장 역시 사이보그였다.

내가 경호대장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그가 사이보그이자 칼잡이였기 때문이다.

최첨단기계가 되어버린 그가 가장 원초적인 냉병기인 검을 다룬다는 아이러니가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소드마스터. 혹시나 해서 부탁하는데, 제발 그들과 부딪치지 마라. 그들은······ 메가 코프의 괴물들이야.

단말기 너머로 딱딱하게 굳은 알리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B와 D 사이의 어디쯤 (3)

124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틀렸어.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너야말로 다섯손가락이라는 자리에 올랐으면서 왜 그들을 두려워하지?"

-똑같은 사람이라······ 그건 네가 진짜 괴물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울시티의 전설들? 메가코프 앞에선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들이야.

알리오는 애써 침착하려는 모습이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 없었다. 그건 진짜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알리오는 왜 메가코프를 두려워할까? 어쨌거나 그는 중개인. 그의 가장 큰 고객 중 하나가 메가 코프일 텐데.

하지만 그 의문을 물어볼 순 없었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물어도 대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그의 걱정대로 그들과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지.'

"네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걱정하진 마라. 나도 그들과 부딪칠 생각은 없으니. 어쨌든, 의뢰인 아닌가?"

-그럼 의뢰인이 아니었다면 부딪치겠다는 소리냐?

단말기 너머로 알리오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상대가 메가 코프라고 납작 엎드려야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건 도시에 막 들어왔던 1년 전. 내가 아직 제대로 된 성장을 못 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벌써 부딪친 메가 코프도 있고.'

아큐마 제약.

나는 이미 셀리케와 함께 세계를 주무르는 메가코프인 아큐마 제약과 부딪쳤다. 그리고 놈들의 수작을 철저히 깨부쉈다.

철저히 파괴된 탓에 아큐마 제약도 지금은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내지 못하겠지만, 이 바닥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특히, 메가 코프의 정보력 앞에선.

언젠가 골든 구스를 파괴한 게 나와 해방전선이라는 걸 아큐마 제약도 알아차릴 테고, 그땐 놈들도 선택해야 할 거다.

'나와 싸울 건지, 아니면 침묵할 건지 말이지.'

내 위치가 지금 이대로라면, 놈들은 높은 확률로 나를 제거하려 들겠지만······ 만약 내 위치가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면?

가령, 새로운 소울시티의 전설로 불리는 해결사이자, 셀리케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면?

놈들도 망설일 수밖에 없을 거다.

나를 자극했다가, 내가 셀리케 쪽으로 완전히 붙어버리면 골치 아플 테니까.

그래서 이번 의뢰는 내게도 중요하다. 내가 셀리케 밑으로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외부에서 바라봤을 때 그런 뉘앙스는 풍겨야 했기에.

이게 내가 '지금 당장은 셀리케와 부딪칠 생각이 없다'라고 한 이유였다.

-······제발 부탁한다. 그 일에서 나는 빼다오.

단말기 너머로 잠시 침묵하던 알리오가 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는소리 그만하고. 바로 출발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그 괴물들과 척지지 마라! 이봐! 소드마스터! 듣고 있······!

뚝.

나는 단말기 통신을 끊어버리곤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은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단 말이야.

* * *

셀리케 연구소는 유일한 싱글 넘버링 구역인 1구역에 있다.

싱글 넘버링. 유일하게 단 하나의 숫자만을 사용하는 곳. 소울 시티의 1구역이라는 말로 모든 설명이 끝나는 곳.

나는 며칠 만에 다시 방문하는 1구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자주 올 만한 곳은 아니야."

1구역엔 콜레오넬 가문의 저택이 있다. 부유촌인 노스 캐슬 스트리트. 며칠 전에 1구역을 방문한 이유였다.

하지만 저택 같은 부유층 거주지가 있는 곳과 다르게, 상업구역인 이곳은 대기업 본사와 고급아파트 같은 마천루가 즐비했다.

너무나 높은 빌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좁은 면적에 하늘까지 닿을듯한 고층빌딩들이 줄지어 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인구밀집도를 자랑했다.

그럼에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보이는 건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과 로봇. 날아다니는 드론과 부유자동차들 뿐이었다.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삭막한 콘크리트 숲 그 자체였다.

나는 차창밖에 비치는 회색빛 도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기업의 부품과도 같은 사람들이니······."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

이 시간에 감히 바깥을 돌아다니는 선택을 하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상업지구로 대부분이 대기업의 근로자다. 그들에겐 각기 정해진 업무량이 있었고, 그걸 해내지 못하면 퇴근도 없었다.

그래서 이 세계엔 '칼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칼퇴라는 것 자체가 정해진 시간만 일하면 되는 업무가 주어졌을 때 가능한데, 그런 단순한 업무는 인간이 하지 않는다. 로봇과 AI가 일상인 세계 아니던가?

따라서 인간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거나, 그 기계를 유지, 보수, 관리하는 일을 했고, 대부분이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업무량 소화가 가능했다.

과연 미래의 대한민국을 모델로 한 도시다웠다.

기업윤리? 후생? 복지?

그런 건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이 세계에선 사라진 개념이다. 감히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기업에서 퇴출당한다.

그 순간 이 안락한 상류층 삶과는 이별이다.

그들 대부분은 도시의 하층민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알고 있다. 혹은 기업에 들어오기 전까지 하층민이었던 자들도 있다.

그들은 절대 그 시궁창에 빠지기 싫었고, 그러기 위해 기꺼이 기업의 부품이 되길 망설이지 않았다.

이 도시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였다.

* * *

마침내 차량이 셀리케 연구소에 도착했다.

미리 등록시켜놓은 출입코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바리케이드가 저절로 올라가며 길을 열었다.

그때 차량 스피커에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유도지시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대로 따를까요?

"그래."

아마 정해진 곳에 주차하라고 온 메시지 같았다. 보안이 중요한 연구소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는 의미겠지.

대답을 들은 차량이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며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구불구불 이어진 사내도로와 주차장을 지나 차량이 연구소를 크게 돌았다.

하늘강을 마주 보는 곳에 지어진 연구소는 마천루가 즐비한 이곳에서도 유독 눈에 띌 정도로 낮은 50층 남짓한 빌딩이었다.

하지만 빌딩이 세워진 토지는 비슷한 건물이 몇 채는 더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땅을 쓰고 있었는데, 아마 지하 공간을 사용하기 위함일 거라 추측됐다.

우리 차량도 어느 순간 지하 공간으로 들어와 계속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지하주차장을 지나, 또 어디론가 연결된 지하통로를 지나, 차량은 계속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단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끼익.

부드럽게 멈춘 차에서 내리자 모여있던 무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소드마스터."

세 명의 사내였는데, 그들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곤 대답했다.

"보안실에서 나왔나 보군. 바로 보안 실장을 만나러 가나?"

"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들은 따라오라는 듯 안내를 하면서 앞서 걸었다. 그러면서 계속 곁눈질로 나를 살폈다.

'뭐지?'

그들이 보인 반응은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나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경계를 한다거나, 위협을 한다거나, 무시를 한다면 몰라도, 당황이라?'

대체 이들이 나를 보며 당황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라 무려 오만하기로 악명 높은 메가 코프의 보안실 직원들이 말이다.

그때 귓가로 이브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투코드 해체 완료! 침투 경로 역추적 성공! 역공격에 들어갈까요?

······뭐라고?

* * *

이브의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침투코드.

다른 말로 악성 사이버네트워크코드라고도 하는 이건, 말 그대로 특정 대상이나 시스템에 침투해 내용을 조작하거나 더 나아가 마음대로 휘두르기까지 하는 해킹공격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침투코드를 이미 해체했다는 건, 이브가 몰래 침투한 해킹공격을 완벽히 막아냈다는 뜻이다.

거기에 침투 경로를 역추적해서 역공격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피식.

나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저렇게 당황한 얼굴이었던 거로군.'

아마 해결사로 온 나를 골탕 먹여서 길들이려고 했던 짓이겠지.

네가 바깥에선 제법 이름 좀 날리지만, 이곳 메가 코프에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침투코드가 해체당해버리고 추적까지 당했으니 당황할 법하겠지.

사이버러너로 나름 목에 힘주던 그들이 해결사이자, 칼잡이에 불과한 내게 박살 나버린 셈이니까.

괘씸한 놈들이지만, 오히려 나는 놈들의 헛발질에 고마웠다.

'잘됐군. 내가 주도권을 잡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겠어.'

이런 일을 보안 실장이 시켰을 것 같진 않다.

어중이떠중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메가 코프의 보안 실장. 나를 찍어누르려고 마음먹었다면, 조금 더 과하게 손을 썼을 거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나는 적이 아니라, 그들의 의뢰를 받은 해결사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개미굴처럼 이어진 지하통로와 공간을 네 번쯤 거쳤을 때, 드디어 보안 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가워, 소드마스터. 보안실장 유혜리야. 그런데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네?"

자신을 보안실장 유혜리라고 소개한 여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풍성하게 기른 흑갈색 머리가 가슴께까지 내려왔고, 새하얀 얼굴 위로 까만 티타늄 안경테가 돋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복장이었다. 그녀의 피부색을 닮은 새하얀 블라우스와 몸에 달라붙는 빨간 업스커트를 입었으니까.

무시무시한 메가 코프의 보안 실장이 아니라, 그냥 사무직 직원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그쪽은 별로 평범하진 않군."

"아?"

"왜 직접 나오지 않은 거지?"

"······아하하하! 어떻게 바로 알아차렸어? S급 오메가라서 인간이랑 거의 차이가 없을 텐데?"

그녀가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메가. 즉, 인간형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인간과 아주 유사한 안드로이드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S급이라고 말할 정도면 그녀가 중얼거린 대로 인간이랑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칼잡이가 눈썰미가 좋다는 소문은 유명할 텐데?"

"여태 내 앞에서 눈썰미 자랑하던 놈들은 모조리 죽어서 말이야."

"그중에 칼잡이는 없었나 보군. 아! 물론 칼잡이 흉내만 내는 가짜 놈이 아니라 진짜 칼잡이 말이야."

"뭐? 아하하하! 평범하다는 말 취소취소!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잖아?"

그녀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S급 오메가라서 그런지, 웃음소리도 완전히 인간의 그것과 유사했다.

손을 맞잡았던 촉감이라든지, 얼굴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라든지, 정말 외관으론 구별할 수 없었다.

내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내 주변으로 계속 포스를 퍼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이곳이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본능적인 경계랄까?

그리고 포스로 감지되는 생명체와 기계는 느낌부터 다르다.

"좋아, 합격! 나도 길바닥 소문은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믿어도 되겠어."

"믿는다라······ 그건 그쪽 이야기고. 이제 내게도 믿음을 줘야 하지 않나?"

"이 모습 때문에 그래? 걱정하지 마. 이게 내 본체는 아니지만, 내 생각과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되니까. 그냥 나 자체라고 봐도 좋아."

그녀가 빙그르르 돌며 자신의 몸을 소개하더니, 갑자기 내게 한걸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이것 봐. 일부러 생긴 것도 똑같이 만들었다고?"

그러면서 얇은 블라우스 사이로 비치는 자신의 가슴을 와락 움켜쥐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블라우스 단추 하나가 뜯어져 나갔다.

나는 잠시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내게 보냈던 환영인사를 말하는 거다."

"환영인사?"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에게 나는 있었던 일을 말했다.

보안실 직원들이 침투코드가 담긴 메시지를 보내 나를 골탕 먹이려 했던 내용을.

"아······?"

유혜리의 시선이 천천히 보안실 직원들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았던 그녀의 얼굴이 기계처럼 굳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실장님!"

"어떻게 된 일이지?"

"그냥 해결사가 온다기에 수준 좀 알아본다는 게 그만······"

"수준? 그 알량한 실력으로 내가 데려온 해결사의 수준을 알아봐? 그것도 심지어 보기 좋게 걸렸고?"

"그, 그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유혜리가 피식 웃더니, 직원들을 향해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됐어, 가봐. 너희 셋은 내일부터 크래쉬 처리팀으로 출근해."

"시, 실장님!"

"제, 제발 그것만은!"

직원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이다.

그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물었다.

"그럼 그냥 해고될래?"

"허, 헉! 아, 아닙니다!"

"추, 출근하겠습니다!"

유혜리가 말없이 손을 휘젓자,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처박듯 숙인 그들이 물러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돌린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메라가 분명한 그녀의 눈동자는 내 전신을 마치 탐닉하듯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그 이상야릇한 시선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려는 찰나.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를 두셨네? 우리 애들 공격을 네트워크에서 다 막아냈다는 뜻이잖아?"

어느새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침투코드를 막아낸 게 내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B와 D 사이의 어디쯤 (4)

125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칼잡이라 무시하는 건가?"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찔러보는 네 추측 따위엔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하지만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유혜리의 입가엔 어느새 생글거리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거야 너에겐 사이버 웨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유혜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내 몸을 끈적하게 훑어본다.

그 눈빛 안에 담긴······ 아니, 정확히는 눈동자의 렌즈와 그 주변부 표정 근육은 장난기를 가득 내포하고 있었다.

이번엔 놀람을 참을 수 없었다.

S급 오메가의 디테일한 표현은 물론이고, 내가 사이버 웨어가 없는 육체라는 걸 한눈에 파악한 안목 때문이다.

이건 눈으로 봐선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싸구려 사이버 웨어야 겉으로도 드러나고 감지센서에도 잡히지만, 고급형으로 넘어가는 순간 겉모습으론 구분할 수 없고, 감지센서에도 잡히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지?

"······눈썰미가 좋군."

"너만큼이나 좋지?"

장난기 가득 담긴 얼굴로 키득거리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뛰어난 해결사는 전용 사이버러너와 페어로 움직인다고. 그런데 생각보다 네 친구 능력이 좋더라? 저 녀석들이 머저리 같은 짓을 해서 그렇지, 그래도 실력은 확실한 놈들인데 말이야."

그러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답을 종용하는 거다.

장난기 가득 담긴 얼굴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 대체 안드로이드로 어떻게 이 정도까지 표현이 가능한 줄 모르겠지만, 이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상대는 메가 코프의 보안실장이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인물 중 하나다.

이들의 호기심을 호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호기심은 영원할 수 없고, 그 뒤엔 그들의 본모습이 숨어있다.

게다가 이미 아니라고 발뺌하는 건 의미가 없다. 사이버 웨어도 없는 내가 침투코드를 분쇄했다고 말해도 믿을 턱이 없었으니까.

"내 친구가 능력이 좋긴 하지."

나는 깔끔하게 '거짓'을 '인정'하기로 했다.

"확실히. 어디 보자······ 역추적까지 당했었네? 스페이스 락 바로 앞까지 왔다가 돌아갔어. 이 정도면 나랑도 별 차이 없겠는걸?"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싱긋 웃더니 다시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는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친구 이름 좀 알려줄래?"

이름이라······.

"들어도 모를 텐데."

"글쎄? 네 생각보다 내가 아는 게 많거든. 그래서 이름?"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 고집이 엿보인다.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나는 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브."

"······이브?"

그녀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진다.

"그게 진짜 이름 맞아?"

"그래. 내가 모를 거라고 했잖아."

"으음······ 내가 모르는 이름인데, 이 정도로 뛰어난 사이버 러너라······."

골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그녀가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여! 이브! 듣고 있지?"

나와 한 뼘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나를 똑바로 마주 본다.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나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뭐 하는 거지?"

"너 정말 실력 좋더라. 혹시 이 친구 떠나서 일할 생각 있으면 꼭 나한테 연락해! 넌 바로 팀장급으로 고용할게!"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완전히 제멋대로다. 첫인사에서도 느꼈지만, 이 여자는 묘하게 자신의 페이스가 있었다. 쾌활하면서도 날카로운, 양면의 모습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사자 앞에서 스카웃을 하는 건가?"

"뭐 어때? 기회는 찾아왔을 때 잡는 거야! 이브!"

······정말 제멋대로군.

"내 친구는 신경 끄고 일 얘기나 하지."

나는 그녀가 다가왔던 거리만큼 뒤로 물러섰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여러 번 얘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곤 갑자기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실내 전체의 조명 채도가 낮아지더니, 사방에서 쏘아진 레이저빛이 춤을 췄다.

어느새 실내엔 거대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연구소를 비롯한 인근의 3차원 지도였다.

"그럼 원하는 대로 일 얘기를 해볼까?"

* * *

어둑한 조명이 떨어지는 실내. 다소 좁아 보이는 그곳엔 사내가 홀로 앉아 시가를 피우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환한 빛이 쏟아진다. 실내를 자욱하게 채웠던 연기가 넘실거리며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문이 다시 닫힌다. 어느새 그 문 앞엔 누군가 걸어들어와 있었다.

"앉으시오. 한잔하시겠소?"

사내가 테이블 아래에서 새 술잔을 꺼내려고 하자, 새롭게 들어온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별로 술을 마시고 싶진 않군요. 특히나, 이런 냄새를 맡으면서 말이죠."

묘하게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

어둑한 조명 아래를 지나는 그녀는 탐스러운 흑발을 머리 위로 틀어 올린 뒤 기다란 비녀를 꽂은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저런! 아쉽군! 과거엔 담배가 불로초라고도 불렸다는 걸 아시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일 얘기나 하죠. 그리고 당신이 피우는 시가는 담배도 아니잖아요?"

"내용물이 중요하겠소? 형태가 중요하지! 흐흐흐! 아무튼, 일 얘기라······ 뭘 어디부터 말해주면 되겠소?"

사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놈년과 식솔들 전부 파멸하는 내용 전부 다요."

"으음! 그럼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

* * *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위로 어떤 사진들이 덧씌워졌다.

쓸려나간 실내엔 온갖 기계장비와 컴퓨터들로 가득했고, 그 아래 총알로 벌집이 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름 유명한 해커집단이야. 소울 시티가 비좁다며 사이버 스페이스 너머 다른 도시까지 털던 놈들이지. 실제로 이놈들 잡으려고 외국에서 몇 번이나 소울 시티를 찾을 정도로 골칫덩이였지만, 그래도 실력은 있었는지 근 10년 넘게 잡히지 않고 활동하던 놈들이야."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나름 유명한 게 아니라, 저 바닥에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을 정도의 커리어다.

일단 도시 간 사이버 스페이스를 넘어서 다른 도시를 털었다는 것 자체가 웬만한 사이버러너들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도시의 네트워크를 보호하는 장벽 너머, 불가해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도둑질을 했다? 이것만으로도 저들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0년 넘게 잡히지 않고 활동했던 게 그 증거다.

하지만······.

"모두 죽었군."

그런 해커집단이 저렇게 잘 다져진 고깃덩이 신세가 됐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조직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사진까지 찍어서 남길 조직은 말이다.

내가 무심히 말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을 넘은 탓이지. 여태 놈들이 활개치고 다녔어도 기껏해야 부패한 정부조직이나, 자그마한 기업들을 상대한 게 전부거든. 그런데 감히 우릴 건드렸잖아?"

그건 자신들이 죽였다고 시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굳이 이 자리에서 밝힌 이유는 뻔했다.

"연구소를 해킹하려고 했던 놈들이 저놈들이었나?"

"그래. 죽었어도 할 말 없는 거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있었다던 몇 번의 공격. 그중 하나가 저들의 소행이었던 거다.

"나름 정당방위로군."

물론 진짜 정당방위라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 도시에선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었다.

"우리도 나름대로 법이 있어. 웬만하면 상식선에서 해결하려고 한다고? 멍청한 놈들이나 메가 코프의 초법적 지위를 욕하지, 오히려 우리가 웬만한 시민들보다는 법을 잘 지킬걸? 우린 과속딱지나 불법주차딱지도 절대 체납하지 않거든!"

그녀가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무 알량한 예 같은데."

과속딱지와 불법주정차딱지라니. 하긴, 그걸 체납하는 메가코프라면 그건 그것대로 웃길 것 같긴 하다만.

"아하핫! 들켰네. 사실 바깥 일은 나도 잘 몰라. 이렇게 몸을 나눠서 쓰고 있어도 너무 바빠서 사소한 일은 신경 쓸 수가 없거든!"

볼을 긁적인 그녀가 장난스럽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핑크빛에 가까운 혓바닥이 입술을 쓸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놀랍다. 대체 뭘로 만든 거지? 진짜 혓바닥 같은데.

"아무튼, 이때까진 그냥 정신 나간 해커집단의 일탈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지."

딱!

경쾌한 핑거스냅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화면이 전환된다.

이번엔 누군가의 프로필이다. 마치 누군가의 입사지원서를 보는 것처럼 사진과 이름, 학력, 거주지, 이력 등등이 주르륵 나열됐다.

"이자는 연구원 K야. 연구원 K. 연구원······ 잠시만."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몇 초나 지났을까?

"연구원 케이스케 이노우. 아, 이제 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 쓸데없는 곳에 보안이 걸려있었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안드로이드가 맞긴 한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케이스케 이노우. 이자는 얼마 전까지 이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던 자야. 몰래 연구데이터를 빼돌리려다가 걸렸지. 뭐, 지금은 뇌만 적출돼서 데이터감옥에 처박힌 신세지만."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꺼냈다.

데이터감옥까진 몇몇 기업이나 거대 갱단도 보유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뇌만 적출된 데이터감옥이라······.

이게 가능한 기술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실제로 실행해버리는 광기는 더 놀랍다.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고통을 주겠다는 미친 생각이었으니까.

딱!

다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연구소 복도 중 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시체들이 줄줄이 쓰러져 있다.

"그리고 이건 '밤고양이'라는 도둑년들.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어. 그리고 이 모든 게 불과 두 달 사이에 연달아서 벌어졌지. 이게 뜻하는 바가 뭐겠어?"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누군가 연구소 데이터를 노리는 거로군."

"맞아. 이 도시에 미친놈들이 많다지만, 감히 셀리케의 연구소를 노리는 자들이 이렇게 연달아 나올 리는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까진 짐작하던 바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지?"

내 질문에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 힐끗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하는 모습에 무안함과 쑥스러움이 담겨있다.

"······그게 우리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놈들에게 전달된 의뢰는 익명이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누구야? 당연히 꼬리를 잡을 줄 알았지. 그런데 웬걸? 실체가 없더라고. 어떤 방법을 써도 잡히는 게 없는 거야."

"그 정도라면 상대도 너희와 비슷한 능력을 보유했다는 뜻이겠지. 그럼 하나밖에 없지 않나?"

"상대도 메가 코프라고?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의심만으론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너도 알잖아? 기업전쟁 이후 메가 코프끼리는 전쟁이 금지됐다는 거."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냐면서 말이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나 역시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잡아 왔던 알리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메가 코프에게 협정 따위는 계기만 만들어진다면 언제든 깨질 약속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눈앞에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혜리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정말 협정이 절대적이었다면 외부로 이번 일의 의뢰를 넣지 않았겠지. 다른 누군가의 공격에 손을 벌리는 건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즉, 그녀.

아니, 셀리케 바이오텍의 생각은 이러할 거다.

'외부인인 나를 통해서 확실한 명분을 찾길 원하는군.'

전쟁을 일으킬 명분 말이다.

B와 D 사이의 어디쯤 (5)

126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소드마스터?"

유혜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나 보군.

"아아. 그래. 기업끼리 전쟁은 금지되어 있었지. 그럼 내가 뭘 해주길 바라지? 상대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은데."

굳었던 얼굴을 정상으로 되돌린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유혜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높은 확률로 그들이 다시 연구소를 노릴 거라고 보고 있어. 그것도 머지않은 시점에. 그때 네가 도와줬으면 해."

"뭘 도와달라는 거지?"

메가 코프가 내게 도움을 바랄 게 뭐가 있을까?

무력적인 도움? 국가와 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메가 코프가 겨우 칼잡이 따위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예상했던 대로 내가 '목격'해주길 바라는 건가? 다른 메가 코프의 공격이었다는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지만 유혜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예상을 뒤엎었다.

"그놈들을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

"시간을 끌어달라?"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우린 특정 날짜에 일부러 보안에 허점을 만들 거야. 보안실과 경호대 전부. 그리고 실제로 그 시간엔 공백이 생길 거고."

"······허점이라. 진짜로 움직여야 상대가 믿을 거란 말이로군."

"맞아. 설령 의심하더라도 놈들은 절대 참지 못할 거야.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과감한 계획이다.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실제로 보안에 구멍을 뚫겠다는 선택은, 웬만한 자신감이 없인 할 수 없는 작전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버텨달라? 나를 너무 높게 보는 건가? 아니면 어차피 미끼로 쓸 거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이 계획의 주축은 결국 나다. 내가 적들을 상대로 버티지 못하고 죽든가, 혹은 칼을 거꾸로 잡으면 그들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 거다.

게다가 내가 이 무모한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말이 좋아서 시간을 끄는 거지, 미끼가 되라는 뜻이었으니까.

"글쎄. 어느 쪽 같아?"

유혜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초승달처럼 휜 눈꼬리와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그린 것처럼 환한 미소를 만들었다.

한점의 악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

나는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하고 내뱉었다.

"둘 다로군."

어느 쪽이 아니라 양쪽 다였다.

셀리케도 분명 나에 대해 조사했을 테고 어느 정도의 기대감은 있는 게 분명했다. 유혜리가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했으나, 그래도 나를 존중해주는 태도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게 미끼로 쓰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메가 코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 같은 칼잡이가 아니라 시 정부 고위공무원, 심지어 시장이라도 가차 없이 쓰고 버릴 수 있었다.

"정답!"

그녀가 경쾌한 목소리로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면전에서 너무하는 거 아닌가?"

"너무 고까워하진 마. 나는 전자를 더 높게 생각하니까. 그리고 이 정도 의뢰인이면 괜찮은 거 아니야? 적어도 일부러 죽을 곳에 밀어 넣진 않잖아?"

"······퍽이나 고맙군."

웃긴 말이지만, 그녀 말대로 이 정도 의뢰면 나쁜 축에 속하진 않았다.

적어도 내용을 몰래 숨기거나, 거짓을 알려준다거나, 일부러 죽이기 위해 미끼로 집어넣는다거나, 마지막에 뒤통수를 칠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이후 계획은 뭐지? 내가 시간을 끌면 너희가 멋지게 등장해서 놈들을 때려잡겠다, 그건가?"

"에이, 설마 그렇게 쉬우려고?"

키득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우린 놈들이 데이터를 탈취해 전송하는 그 시점에 은밀히 놈들 네트워크에 침투할 거야. 놈들과 연결된 곳만 찾는다면······ 배후가 밝혀지겠지."

"그게 그렇게 쉽나?"

"당연히 어렵지. 그래서 너처럼 강한 사람이 필요해."

"······?"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트워크 추적을 하는데, 나처럼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사이버러너가 아니고?

"넌 강하지만 혼자고 상대는 아니겠지. 즉, 상대는 무리를 나눌 거야. 너를 상대할 팀. 그리고 내부로 들어가 데이터를 훔칠 팀. 우린 놈들이 데이터에 접속하는 순간, 역으로 추적해서 들어갈 거야."

음. 그러니까 내가 미끼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타임어택 보스 같은 느낌도 내달라는 거로군? 그 시간이 긴박해야 셀리케가 역추적을 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걸리는 게 있다.

"그런데 이상하군.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건데, 범인을 잡고자 데이터를 넘겨주겠다니. 주객이 전도된 거 같은데."

데이터 탈취를 막기 위해 오히려 데이터를 넘겨주겠다는 선택.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데이터에 접근하는 순간 진위여부는 판단할 수 있다.

즉, 역추적이 목적이라면 가짜 데이터로는 불가능하다.

유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스페어 데이터를 쓸 거라 상관없어."

"그건 상대가 바로 눈치챌 거 같은데."

"과거 데이터를 넣어놓으면 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절대 그 시간 안엔 옛날 자료라곤 알아채지 못할 거야."

"과거 데이터를 쓴다라······."

나는 자신 있게 나를 바라보는 유혜리의 눈빛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말대로 그들이 노렸다는 데이터지만, 그 내용이 과거라면 절대 짧은 시간 안엔 파악하지 못할 테니.

"······계획은 완벽하군."

현장의 변수는 변수니까 제쳐놓고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유혜리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 완벽한 계획의 마스터피스가 소드마스터, 바로 너야!"

그러면서 장난스러운 얼굴로 윙크를 찡긋 날린다.

"천하의 셀리케 보안실장께서 이러니 오히려 의심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닐 테고."

나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계획도 완벽하고, 준비도 천하의 셀리케 바이오텍인데 말할 것도 없을 거다.

그런데 왜 나를 이렇게 띄워주는 거지? 칼잡이 경시가 만연한 이 세계에서,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메가코프 간부가?

내 눈빛에 담긴 의문을 알아챈 것인지, 그녀가 깔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나는 침대에서도 상대가 내게 엄살 부리게 만들지, 내가 엄살 부리진 않는다고?"

"······?"

갑자기 뭔 소리야?

* * *

유혜리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길거리 해결사 중에서도 악명 높은 소드마스터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그 바닥은 죄다 쓰레기만 모인 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도 있었네?'

첫 만남에서부터 작은 호감이 일었던 그녀의 마음은, 이제 조금 더 움직여 호기심으로 변했다.

저 냉막하고 무던한 얼굴 뒤에 숨어 있을 진짜 모습에 대해서.

그녀는 강현재를 조금 더 도발해보기로 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직접 보여줘야 믿을 거야?"

한 발자국 다가선 그녀가 강현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하고 찔렀다.

"······!"

강현재가 움찔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 사람 생각보다 키가 컸네?'

유혜리 역시 강현재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친다. 저 새까만 눈동자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지.'

가슴을 찌른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마치 뱀처럼 미끄러지는 손가락은 가슴, 명치, 배꼽······ 그리고 그 아래로 서서히 움직였다.

그 순간.

탁!

강현재가 유혜리의 손을 낚아챘다. 이번엔 반대로 유혜리가 움찔거렸다.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직접 보여줄 생각 있나? 그 몸 말고, 진짜 당신 모습 말이야."

강현재의 눈빛은 강렬했다. 타오르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그 눈빛을 마주한 유혜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안드로이드의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꼭 현실처럼 느껴졌다.

마치 강현재의 시선이 카메라 너머의 자신을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혜리는 강현재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몸은 S급 오메가야. 가슴처럼 이 아래 쪽도 사람이랑 똑같다고. 충분히 널 만족시켜 줄 수 있을걸?"

그녀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S급 오메가답게, 그녀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실제로 그녀의 시야 한쪽에 떠 있는 바이오 모니터에선 온갖 호르몬 수치가 날뛰고 있었다.

그런 유혜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현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쉽군. 난 로봇이랑 하는 취미는 없어서."

"······?"

아쉽다고?

유혜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선 강현재가 말했다.

"네가 말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하지. 다만, 현장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걸 알아뒀으면 좋겠군."

"······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서 돌발행동을 했다면, 그건 참작해줄게."

"좋아.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연구소 지리도 익혀야 하고, 준비할 일도 있으니까."

"······그래."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쾌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강현재가 물러서는 도중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빙글 뒤로 돌며 말했다.

"다음엔 진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군."

"······!"

"그럼."

간단하게 목인사를 한 강현재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유혜리는 한참을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 * *

유혜리가 있던 방에서 빠져나온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멋대로 정도가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한 여자로군."

직설적인 말투와 행동은 그녀 특유의 쾌활한 듯 음침한 성격과 만나면서, 마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습으로 완성됐다.

게다가 본인의 외모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섹스어필까지 더해지니,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 나는 그녀의 공략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S급 오메가를 사용했다는 것, 그 자체였다.

"굳이 본인의 모습을 감추고 안드로이드를 대신 내보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위화감이지. 다른 곳도 아니고 본인 집인데."

이곳은 셀리케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연구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굳이 이곳에서까지 안드로이드로 스스로를 대체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 본인의 진짜 성격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르지. 사람 앞에 서는 게 익숙지 않거나 두려울 수도 있고."

즉, 그녀가 S급 오메가로 보여줬던 성격과 실제 그녀의 성격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혜리가 과감히 들이댔을 때 말했었다.

네 모습을 직접 보여줄 생각 있냐고. 그 강철껍데기가 아니라 진짜 모습을.

그때부터 그녀의 기세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마 강아지였다면 분명 쫑긋거렸던 귀가 축 늘어졌을 거다.

"이게 마스크 이론이었나? 단지 입만 가려진 것뿐인데, 마스크를 쓴 것과 안 쓴 것이 완전 다른 인격처럼 작용한다고."

세계적 전염병이 돌았던 현실에서 종종 거론되던 이론이었다.

"······그나저나 의아하군. 무려 메가 코프의 보안실장이 어떻게 저런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마치 본체와 안드로이드를 조종하는 인격이 분리된 것 같지 않던가?

보통 이런 경우는 일부러 분리시킨 것보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 경우가 많던데······.

"뭐, 나중엔 알게 되겠지."

언제까지고 안드로이드를 통해서만 만날 것 같진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원근감을 무시할 정도로 멀리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덩치다.

3미터에 육박하는 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바닥.

그리고 등 뒤에 매어진 거대한 칼.

'경호 대장?'

셀리케의 경호 대장이었다.

경호대장 역시 멀리서부터 나를 살펴보더니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길을 막아섰다.

"네가 그 걸레년이 부른 해결사냐?"

B와 D 사이의 어디쯤 (6)

127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경호 대장과 첫 만남.

놈의 말투에서부터 느껴지는 태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건 나를 향한 적대감이라기보단 유혜리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예의가 없군."

나는 놈을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나에 대한 적대감이든, 유혜리를 향한 적대감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놈이 나를 보자마자 무례한 말을 내뱉었다는 게 중요했다.

내가 비록 그들이 무시하는 길거리 해결사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의뢰를 받은 상황이다.

만약 바깥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냥 한 귀로 흘렸겠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선 나에 대한 존중을 보여야 한다.

"예의? 지금 내 앞에서 건방지게 예의라고 지껄였나?"

"누가 더 건방진 줄 모르겠군. 나는 정식으로 셀리케의 의뢰를 받은 해결사다."

"푸하핫! 그게 뭐 어쩌라고? 그 걸레 년이 좀 빨아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거냐?"

경호 대장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엔 비웃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안색을 굳히더니 나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그만 건방 떨어라. 그러다 뒈지는 수가 있다."

놈의 안구 주위로 불길한 붉은빛이 번뜩였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의 눈빛처럼 시선에 담긴 살의가 몸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였다.

나는 놈의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번 해보든가."

쐐애액!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 위로 검격이 떨어져 내렸다.

언제 검을 뽑은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연속된 사진에서 중간에 몇 장이 빠진 것처럼, 어느 순간 거대한 대검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쾅!

하지만 나 역시 눈으로 보고 움직이는 수준은 아득히 지났다.

경호 대장의 거대한 대검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나는 머리 위에서 멈춘 대검을 힐끗 바라본 뒤 붉은빛으로 물든 놈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별거 없군. 건방은 네가 떨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를 내려다보던 놈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찢어진다.

"크흐흐! 이제 죽어도 원망하지 마라."

그 순간 놈의 가슴팍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온다.

옷으로 가려놨음에도 눈부심을 가릴 수 없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주변을 일그러뜨렸다.

'사이버네틱스 코어!'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아니라 완전한 사이버네틱스 코어다.

하물며 메가 코프의 경호 대장이 사용하는 코어니,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됐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코어일 터.

위이이잉!

광입자가 가속되며 에너지를 펌프처럼 생산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온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이보그인 경호 대장은······.

"죽어라!"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검격을 날렸다.

허공을 베는 대검 주위의 대기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대검에 문신처럼 들어간 무늬에서 코어의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한 대검이 아닐 거라곤 예상했지만, 코어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대검이라니. 대체 저 에너지를 칼날이 어떻게 버티는 거지?

'흘린다.'

나는 저 에너지를 경시하지 않고 공격을 흘려서 막기로 했다. 코어의 에너지가 어떤 위력을 내는지 확인하고 맞대응해도 늦지 않다.

끼기기긱!

떨어지는 검격을 양팔과 어깨를 이용해 막아내듯 밀어냈다. 올곧게 떨어지던 대검의 궤적이 미세하게 밀려났다.

나는 그 밀려난 틈을 이용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가간 움직임만큼 놈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이 과정은 마치 한 동작처럼 이뤄져서, 남들이 봤을 땐 경호 대장이 내 칼끝으로 몸을 들이미는 것처럼 보일 거다.

마치 검도의 한 장면 같은 모습.

하지만 경호 대장은 이런 대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검면을 90도로 회전시켰다.

휘릭!

검면의 폭은 대검의 무식한 크기만큼이나 커서 50센치에 가까웠다. 웬만한 성인 남성도 통째로 가려질 정도.

타앙!

찔러가던 칼끝이 놈의 검면과 부딪쳤다.

단순히 막았나? 싶었는데, 놈은 그대로 검면을 밀어냈다. 부딪친 칼날이 밀어낸 충격으로 그대로 튕겨 나갔다.

내가 조금 전 놈의 공격을 막으며 사용했던 방법과 유사한 응용법이었다.

'과연 사이보그 칼잡이라더니, 단순히 설정 그 이상이로군.'

이 세계에서 칼잡이를 만난 적은 많지 않다. 칼잡이 자체가 드문 까닭이다. 총과 로봇이 활보하는 세계에서 칼이 얼마나 효용이 있겠는가? 사이버웨어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거지.

게다가 그나마도 마주쳤던 칼잡이들은 정말 칼을 들고 휘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사이버웨어로 늘어난 근력과 속도에만 의지한 거다. 이건 자칭 칼잡이협회의 칼잡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호 대장은 아니었다.

조금 전 기술로 놈은 똑똑히 보여준 거다.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칼잡이인지 말이다.

쐐애애액!

거대한 대검이 뱀처럼 움직이며 내게 쇄도했다. 밀어낸 내 뒤를 쫓아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카앙!

칼날이 부딪친다.

서로 얽힌 칼날은 반발력으로 튕겨 나갔지만, 재차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의 목덜미를 노렸다.

타타타탕!

어마어마하게 빠른 공방이 오갔다.

경호 대장의 대검은 묵직했지만 빨랐고, 내 칼날 역시 포스의 힘으로 그 검격을 모조리 쳐내고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경호 대장의 대검을 따라 휘몰아치던 빛무리가 점점 강해졌다. 검격의 움직임은 변함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서서히 증폭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준비하는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각성자들은 전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그 감도가 예민했고, 경호 대장의 대검에 모여드는 에너지가 커질수록 무언가 준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윽고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던 칼날들이 마치 영화처럼 칼끝끼리 부딪치며 튕겨 나간 순간.

번쩍!

대검을 휘돌던 빛무리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에너지를 쏟아냈다.

마치 태양빛을 마주하면 이럴까? 싶을 정도의 광량.

그리고 코어의 광량은 그 에너지의 밀도와 마찬가지였다.

쐐애애액!

위로 튕겨 나간 검이 공간을 밀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왕이 행차한 것처럼 공간의 간격이 벌어지며, 그 사이를 따라 대검의 무지막지한 검격이 떨어져 내렸다.

눈 부신 빛으로 휘감긴 대검.

이 검격이 놈이 노렸던 비장의 한 수임이 틀림없었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나는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빛무리를 보며 느꼈다.

이 검격에 담긴 에너지는 절대 물리적인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그럼 방법은 하나다.

지이잉!

칼날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윽고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검기.

놈을 죽일 순 없기에 내 피를 먹인 혈검기는 아니었지만, 이 푸른색 검기 역시 검기였다.

무엇이든 갈라내고 녹여버리는 절대불멸의 빛.

이윽고 마주한 두 개의 빛이 서로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박아넣었다.

콰아아앙―――!

빛이 폭발한다.

서로에게 박아넣었던 이빨이 터져나가며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쏟아냈다.

쩌저적!

퍼퍼퍼퍽!

나와 경호 대장을 중심으로 연구소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천장을 촘촘히 수놓았던 전등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어둠으로 휩싸인 실내.

쿠르릉!

뒤늦게 강타한 충격파로 연구소 전체가 흔들렸다.

웨에에엥! 웨에에엥!

순간 어둠에 젖어 들었던 공간이 빨간빛으로 물들었다.

사방에 숨어있던 경고등이 요란하게 반짝이며 적색램프를 깜빡였고, 연구소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복도에 줄지어 있던 철문들이 열리며 사방에서 연구원들이 튀어나왔다.

문밖에 나선 그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론가 뛰어가기도 했고, 전뇌 통신을 통해 누군가와 대화하며 소리를 치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저, 적들이 쳐들어온 건가?"

"대피소! 대피소로 빨리 가야 해!"

그러다가 나와 경호 대장을 발견한 그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나를 적으로 인식한 건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구원들은 우리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도, 도망쳐!"

"경호 대장이다! 근처에 있으면 죽을 거야!"

"제길! 경호 대장이 왜 여기에?"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연구원들이 사라졌다.

깜빡이는 적색램프 불빛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 일격으로 느낀 거다. 여기서 더 했다간, 연구소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걸.

"······생각보다 일이 커졌군."

나는 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잘하면 의뢰를 시작하기도 전에 짤리겠는데?

하지만 경호 대장은 전혀 개의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생각보다 쓸만하군."

"뭐라······"

놈의 시답잖은 말에 대꾸하려는 찰나,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거칠게 뛰어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리스! 이게 무슨 짓이야!"

유혜리였다. 하이힐은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맨발이었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바닥도 거침없이 밟으며 다가온 그녀가 경호 대장 바로 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분명 내가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또 끼어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서슬 퍼런 기세다. 아까 전 나에게 한껏 끼를 부리며 대화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경호 대장은 자신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 않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얼마나 도움될지 알아본 거뿐이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그 더러운 몸뚱이로 말이냐?"

"뭐, 뭐라고!? 이 뇌까지 깡통으로 변한 고철덩이 주제에!"

얼굴을 굳힌 유혜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워낙 덩치 차이가 크니, 꼭 어른과 아이의 말다툼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즈즈즈즈!

그녀 주위로 미세한 전류가 파직거리더니, 에너지가 빨려들 듯 휘몰아쳤다.

눈으로 보기엔 정전기처럼 보였지만, 몰려드는 에너지는 언제라도 전격으로 변할 준비를 마쳤다.

경호 대장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기세를 내뿜었다. 가슴팍에 회전하는 코어의 빛무리가 재차 뿜어지며 에너지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파지직! 파직!

서로의 에너지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터져나간다.

이게 눈으로 보일 정도라니. 얼마나 둘이 다루는 에너지의 밀도나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찰나.

""흥!""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자욱하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야 이 녀석들?'

그때 경호 대장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너 제법 쓸만하던데, 저년이 한번 대줬다고 그걸 호의라 믿지 마라. 저 장애인 년과 얽히면 너도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유혜리가 버럭 소리쳤다.

경호 대장은 유혜리를 힐끗 쳐다보더니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더 말을 섞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철컥.

대검을 등 뒤에 장착한 경호 대장이 마지막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분명 경고했다."

그리곤 나타났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스릉.

그제야 나도 검을 집어넣었다.

"소드마스터. 저 자식이 한 말 신경 쓰지 마."

유혜리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이보그 시술로 뇌가 점점 맛이 가는 거야. 저 깡통 로봇 상태로 50년이나 살았으면 오래 산 거지. 이참에 위에다가 안락사 요청이라도 넣어야겠어. 순 제멋대로잖아?"

혼자서 씩씩거리며 성을 내는 유혜리를 바라본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군."

B와 D 사이의 어디쯤 (7)

128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저 자식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라서 그래. 언제적 일로 아직까지 저러는 건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게······ 있어! 그런 게!"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유혜리가 대답을 회피했다.

"에이! 일하는데 흐름 깨졌네. 저 자식은 일도 안 하나? 무슨 여유가 넘쳐서 여기까지 기어 와서는!"

그녀는 괜히 툴툴거리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얇은 스타킹 위로 발가락이 튀어나왔다. 맨발로 갈라진 땅바닥을 뛰어오느라 스타킹이 찢어진 탓이다.

나는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힐끗 쳐다보곤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경호 대장이 이곳에 올 일이 없나?"

그녀의 대답과 조금 전 연구원들의 반응을 봤을 때, 평소에 경호 대장이 이곳에 잘 오지 않았던 것 같긴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연구원들은 경호 대장을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그가 모습을 보임으로써 벌어질 일에 대해 두려워했던 게 분명했다.

처음엔 날 보고 도망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경호 대장을 보고 도망치는 거였으니까.

"본사에 있어야지, 지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겠어? 연구소는 보안실 담당인데!"

하긴, 경호대는 무력부대의 성격이 짙다.

사건이 터진 이후라면 몰라도 평소에는 임원들과 VIP가 상주하는 본사에 있는 게 맞을 거다.

하물며 때로는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칼이 되기도 하는 곳이니.

'그렇다면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일부러 이곳에 왔다는 뜻인데······.'

그럼 그 목적이 뭐였을까?

'······애초에 나를 보러 왔던 거로군.'

나를 도발한 것도, 내게 칼을 휘둘렀던 것도, 우발적인 게 아니라 전부 계획된 일이었다.

'대체 왜?'

그냥 유혜리와 사이가 안 좋아서? 그녀가 고용한 해결사를 짓밟아주려고?

아니면 떠나면서 말했던 그녀를 믿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전부 아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혼잣말로 경호 대장을 욕하는 유혜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이 둘 사이의 사건이 키 포인트겠지.

'중요한 건, 둘 다 내게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유혜리는 대답을 회피하고, 그렇다고 경호 대장을 찾아갔다간 다시 칼부림 나지 말라는 법 없으니.

그때 열심히 경호 대장 뒷담화를 하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중얼거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허공의 어딘가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내게 고개를 돌리곤 빠르게 말을 와다다 쏟아냈다.

"아무튼, 저 지랄을 하고 갔으니 당분간은 마주칠 일 없을 거야. 혹시 보인다면, 미안하지만 그냥 피해버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지. 저놈은 똥보다 못한 깡똥로봇이야. 피하는 게 이긴 거라고! 알았지? 나 이만 간다? 간다고! 알았어? 간다니까?"

"······그래. 알았다."

내게 대답을 강요하던 그녀는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활짝 웃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어느새 요란스럽게 울리던 사이렌이 꺼진 복도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홀로 남은 나는 연구소를 거닐며 조금 전 격돌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경호 대장과 맞부딪쳤던 마지막 일검을.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검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베어내고 녹여내는 불가해의 불꽃.

나는 최소한 놈의 팔, 다리 중 하나쯤은 가져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사이보그이니 아무런 타격도 없을 테고.

'······그런데 실패했지.'

그건 내 예상을 뒤엎는 기술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코어의 에너지를 검격에 입히는 기술.

대검을 휘감은 백색 에너지는 검기와 대등하게 격돌했다. 그 충격파로 연구소가 통째로 뒤흔들린 것만 봐도 에너지 밀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 힘은 분명 이 세계에서 보아왔던 일반적인 힘과는 궤를 달리했다.

게다가 나중에 나타난 유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이버러너라고만 생각했던 그녀는 에너지를 퍼트려 전자기장을 조작하는 기술을 보였다.

그녀의 몸체가 안드로이드라는 걸 몰랐더라면, 각성자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다.

'과연 세계관 최강자들답다고 해야 하나.'

메가 코프의 보안 실장과 경호 대장.

이 둘은 메가코프가 지배하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도 사실상 최강자로 군림하는 자들이다.

솔직히 나르시스의 친위대장이었던 다이크와 싸운 이후, 조금 방심했던 것도 있었다. 다이크 역시 보스급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다른 보스급들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을 첫 만남에 박살 내버렸다.

'메가코프는 메가코프인가.'

다이크와는 완전히 결이 다르게 압도적이다.

다이크가 착용했던 반중력 사이버 암도 메가코프의 기술이다. 이것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최첨단기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유혜리와 경호 대장은 어떠한가?

이들 역시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을 사용했지만, 다이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기술을 사용했다.

똑같이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못하는 첨단 기술을 사용했지만, 거기서도 차이가 발생한다.

그럼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결국, 돈보다는 기술이라는 뜻이겠지.'

거액의 돈도 결국 기술을 사기 위해 지불된다.

즉, 기술을 지배해서 돈을 버는 메가코프와 돈을 벌어 기술을 사는 대다수는 영원히 그 간극을 좁힐 수 없다.

메가코프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 한, 절대로 기술적 우위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거야 그렇다 치지만······.'

나는 경호 대장이 경고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너 제법 쓸만하던데, 저년이 한번 대줬다고 그걸 호의라 믿지 마라. 저 장애인 년과 얽히면 너도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비속어가 잔뜩 섞인 말이었지만, 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혜리를 조심하라는 것.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군.'

유혜리는 경호 대장의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나? 좋은 꼴은 못 본다는데.

그리고 유혜리 역시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었고.

'일단 지금처럼 적당히 거리를 둬야겠어.'

아직 메가 코프와 깊이 얽힐 시기는 아니었다.

딱 지금 정도가 괜찮았다. 나중엔 얽히고 싶지 않아도 알아서 꼬일 대로 꼬일 테니 말이다.

'······유혜리의 육탄돌격만 막아내면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 *

소울 시티 외곽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공장.

얼기설기 대충 엮인 철조망이 보안의 전부처럼 보이는 이곳에 일단의 무리들이 숨어들었다.

"도슨, 페일. 너희는 왼쪽 건물. 피키, 도트. 너희는 오른쪽 건물. 나머지는 나랑 가장 큰 건물로 간다."

"오케이."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서둘러야 해. 괜히 사람들 마주치거나, 경호원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진다고."

"알았어. 그런데 여긴 며칠 동안 봤지만,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낮에 몇 명 왔다 갔다 하긴 하더라. 아무튼, 여기로 들어온 물건 중에 내가 직접 본 것만 로보 테크니카 부품이 수백 상자야. 그것만 찾으면 우린 떼부자 되는 거라고!"

"확실한 거지? 이런 허름한 공장에 보안도 개판인데 진짜 로보 테크니카 부품을 쓸까? 중국산 짝퉁 아니야?"

"그 정도 양이면 짝퉁이어도 돈방석이야. 아무튼, 서두르자. 소문엔 여기 노리고 있던 놈들이 꽤 되는 거 같으니까."

"그래. 혹시 우리가 터는 거 보고 뒤늦게 끼어들 수도 있으니까!"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 지명받은 건물로 주변을 살피면서 몰래 접근했다.

이 무리의 리더인 와터도 일행을 이끌고 중앙 건물로 들어섰다.

물론 확실히 의아하긴 했다. 정말 로보 테크니카의 부품을 쓰는 공장이 이렇게 보안이 허술하다고?

그들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그게 무색할 정도로 어떤 장애물도 나오지 않았다.

덜커덕!

반쯤 녹이 슨 철문이 전기충격기를 버티지 못하고 걸쇠를 열었다.

"와터! 열렸어!"

"아직 좋아하긴 일러. 안을 확인해봐야지."

꿀꺽.

일행은 모두 조심스레 침을 삼키며 철문을 서서히 밀었다.

어둠이 내린 공장엔 한치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뚫린 환풍구로 미세한 달빛이 스며들긴 했으나,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일행들 전부 사이버아이를 임플란트했다. 이런 도둑질을 하는 그들에겐 필수에 가까운 사이버웨어였다.

야간모드로 변경한 그들의 시야가 녹색으로 바뀌고, 그들은 실내를 살펴볼 수 있었다.

실내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기다란 컨베이어 벨트가 구불구불 이어졌고, 중간중간 거대한 로봇팔과 기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조립하고 생산하는 공장임이 분명했다.

"지, 진짜 공장이었네?"

"씨발! 대박! 저것들만 떼어다가 팔아도 얼마야?"

"쉿! 우리 목표는 저게 아니라, 저것들이 만들던 물건이야. 로보 테크니카 부품을 썼으니 분명 로봇이 분명할 거라고!"

"왓더······ 그거만 찾으면 진짜 떼부자가 아니라 씹부자 되겠는데?"

"떼든, 씹이든, 일단 찾아야······ 어? 저거 아니야?"

그때 와터의 시야에 공장 한편을 뒤덮고 있는 천막이 보였다. 울룩불룩한 모습을 봐선 무언가를 덮어놓은 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이곳에서 만들던 상품 말이다.

"저, 저게 맞는 것 같아!"

"확실해?"

"그럼 쓰레기를 저렇게 정성스레 덮어놨겠어?"

"가, 가보자!"

그들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물건을 찾았다는 흥분 탓인지, 조심스레 움직였던 발걸음은 어느새 거칠게 변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느끼진 못했다. 자신의 가슴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으니까.

"연다?"

"하나, 둘!"

천막 일부가 걷히고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경악에 질린 얼굴이 됐다.

"이, 이건······!"

"세상에······."

"씨발, 씨발, 씨발! 이건 대박이야! 대박이라고!"

각자 놀람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생각은 똑같았다. 대박이라고.

왜냐면 천막 안엔 조립이 완료된 안드로이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얼마야?"

"내가 뭐랬어! 그 정도 부품이면 뭐라도 만든다고 했잖아!"

작게 환호를 내지른 그들은 다른 건물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무전을 연결했다.

"도슨, 페일. 너희는 어때? 여긴 대박 났다고!"

-······.

"도슨? 페일?"

왼쪽 건물로 간 도슨과 페일에게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오른쪽 건물로 갔던 피키와 도트도 마찬가지였다.

"피키! 도트! 대답해!"

-······.

이곳에 있는 인원들 말곤 전부 연락이 끊겼다.

그제야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다들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그······ 통신 상태가 안 좋은 거 아니야?"

"마, 맞아! 안드로이드를 만들던 공장이니, 분명 전파방해 같은 것도 공장에 설치해놨을 거야!"

"그, 그렇겠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별거 아니라고 주문처럼 중얼거렸지만, 속으론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했던 단거리 무전은 도청은 될지언정, 전파방해는 피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동료들이 무전을 안 받는 이유는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물러서자거나, 그들을 구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눠야 할 몫이 4개 줄었으니까.

"자자! 시간이 많이 없어. 물건 챙길 방법이나 생각하자. 최대한 많이 챙겨서 떠나야 된다고."

"그, 그래!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까!"

"우리가 들어서 옮기는 건 힘들 것 같고. 근처에 지게차라도 있나?"

"찾아보자."

그들은 부산을 떨며 안드로이드들이 쌓여있던 곳 근처를 뒤졌다. 하지만 어딜 봐도 이 안드로이드를 옮길만한 동력원은 보이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 컨트롤 패널이 있어!"

"안드로이드랑 연결되어 있다!"

다들 모여들었다. 그곳엔 대형냉장고 크기의 거대한 컴퓨터 몇 대와 그걸 제어하는 컨트롤 패널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안드로이드 후면에 위치한 소켓과 이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아! 컨트롤 패널을 보아하니 충전도 완료된 거 같고, 이걸로 명령해서 직접 움직이라고 하면 될 거 같은데?"

"씨발! 오늘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 전부 다 가져갈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 트럭이 그 정도 크기가 안돼."

"아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화물트럭을 가져오는 건데!"

"그걸 누가 알았겠어. 그만 떠들고 빨리 움직이자. 이러다가 해 뜨겠어."

"오케이! 이제 안드로이드에 전원 켜고 움직이자."

"어······?"

그때 컨트롤 패널을 살펴보던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컨트롤 패널과 안드로이드를 연신 번갈아 쳐다봤다.

"제이슨? 뭐하는 거야? 시간 없다니까?"

와터가 얼굴을 구기며 말하자, 제이슨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거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전원이 켜져 있어!"

"······? 무슨 소리야?"

"저 안드로이드들! 처음부터 전원이 켜져 있었다고!"

"그, 그게 무슨······?"

제이슨의 외침에 다들 본능적으로 안드로이드들을 쳐다봤다.

안드로이드의 전원이 처음부터 켜져 있었다면, 자신들의 행동을 모조리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대체 안드로이드가 뭐하러 침입자를 두고만 보고 있겠나?

하지만 한편으론, 연락이 두절된 다른 건물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무엇에 당해서 연락조차 못 했을까?

"에, 에이······ 아니겠지."

"다시 살펴봐. 패널이 잘못 표시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 없······! 허억!"

현실을 부정하는 그들의 시선이 제이슨에게 향한 순간, 그들을 마주 보는 제이슨은 목격했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내뿜는 안드로이드의 눈빛을. 그리고 그 눈빛들이 그들을 향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

"제이슨 왜 그ㄹ······ 커억!"

"살려······ 씨, 씨바알······!"

"와터 개새끼야! 대체 어딜 데려온······!"

저항은 짧았다.

그들은 덮쳐온 안드로이드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모조리 제압당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분질러진 그들은 간신히 숨만 붙은 채 기절했다.

안드로이드 몇몇이 기절한 그들을 들쳐메고 어디론가 향했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흩어졌던 안드로이드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걷어졌던 천막이 펼쳐지며 안드로이드를 덮었다. 실내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벌어졌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지나간 헤프닝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진짜 기계가 있었잖아?"

"내가 뭐랬어! 버려진 공장에 부품이 들어갈 리가 없다니까!"

"씨발! 대박이다! 기계들도 거의 새거나 마찬가지라고!"

어둠 속에서 안드로이드의 눈이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공장은 또다시 잠깐동안 소란스러워질 예정이었다.

B와 D 사이의 어디쯤 (8)

129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밤새 연구소를 돌아다녔다.

지리도 익힐 겸 메가코프 연구소는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서.

물론 둘러본다고 알아낸 건 거의 없었다. 연구원들이 연구하는 연구실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격한 건 꽤 됐는데, 대부분이 사이버웨어와 연동된 로봇공학이었다.

어떤 원리인진 모르겠으나 부스터 없이 몸을 부유하는 사이버웨어도 목격했고, 빛이 번쩍거리는 곳에선 순간적으로 착용자의 홀로그램을 퍼트려 분신술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비도 목격했다.

대부분 실험단계라 그 완성도는 낮았지만, 언젠가 실용화될 게 분명한 기술들이었다.

이곳은 메가코프의 연구소니까.

'왜 이들이 세계패권을 쥐고 있는지 알겠군.'

내가 목격한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진짜 중요한 극비실험들은 나도 볼 수 없는 곳에서 하고 있을 테지.

유혜리와 경호 대장이 사용했던 그 미지의 힘처럼 말이다.

'비정상적으로 과학이 발달한 세계라, 최소한 과학만큼은 보편화돼서 큰 차별은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과학이 발달했기에 그 차이가 극명하게 갈렸다.

일반 대중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과학기술이 발전했는지 깨닫지 못할 거다.

기껏 눈에 보이는 건 화려한 크롬 사이버웨어나, 날아다니는 부유자동차, 우주정거장을 오가는 로켓정도겠지.

나 역시 이 연구소에 방문하기 전까지 비슷하게 생각했으니.

'정말 빌어먹을 세계관이로군.'

부의 차이가 기술의 차이로 이어지는 세계.

누군가는 오롯이 과학의 산물을 향유하지만, 반대편에 선 대다수의 사람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삶을 살아가는 세계.

사실 이 세계는 어쩌면, 내가 살았던 현실 세계와 지독히도 닮은 세계일지도 몰랐다.

* * *

날이 밝자 연구소를 나왔다.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연구소라 밤낮구분이 크게 의미는 없었지만, 필연적으로 낮보다는 밤의 보안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즉, 연구소를 노리는 적들도 밤을 노리지, 대낮에 연구소를 쳐들어오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게다가 유혜리가 말했던 거사일까지는 며칠의 말미가 있는 상황.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마천루들의 숲을 지나갔다. 동쪽부터 떠오르는 태양을 가린 빌딩들에 의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도로는 한적했다. 가끔씩 그림자를 가르며 고급 부유자동차들이 하늘을 오갈 뿐이었다.

그때 차량과 연결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꼬리가 붙었습니다.

"꼬리?"

차량 전면유리 한쪽이 반투명하게 바뀌더니, 뒤따라오는 차량이 떠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탑뷰. 이글아이의 시점이다.

화면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은색 세단이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파악 가능해?"

-도난 신고된 차량으로 확인됩니다.

"······그래?"

치안이 열악한 40번대 구역도 아니라 1번 구역에서 도난차량이라? 그리고 하필 그 도난차량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

"그럼 확인을 해봐야지."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브. 외곽으로 방향 틀어."

-경로를 재설정합니다.

직진하던 차량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며 방향을 틀었다.

1번 구역을 빠져나온 차량은 북쪽을 향했고, 28번 구역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노스 마운틴. 풀네임은 빅 마운틴 오브 노스로 소울 시티 북쪽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산자락이다.

웬만한 구역 두어 개는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곳이지만, 딱히 도시 구역에 속해있진 않았다. 소울 시티 안쪽에 있긴 했지만, 암벽과 바위뿐인 불모지라 사람이 거주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도시의 치안 범위 바깥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뒤따라오던 고급차량이 본모습을 드러내듯 굉음과 함께 질주하며 내 차로 달려들었다.

-다이나믹 모드로 주행을 시작합니다.

이브 역시 차량의 주행모드를 변경하더니, 달려드는 차를 피해 곡예 운전을 하며 도로를 질주했다.

웨에에엥!

끼이이익! 끼익!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도로를 달렸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차량과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달려들던 차가 속도를 줄였다. 마치 다른 차와 사고가 나는 건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모습이었다.

"저기로 가자."

나는 전방에 설치된 표지판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절벽이 있다는 경고 표지판, 그리고 도로가 끊겼다는 경고 표지판이었다.

"여기가 좋겠군."

굉음을 내며 나란히 절벽을 향해 달리던 와중, 우리가 먼저 멈춰섰다.

우릴 스쳐 간 고급차량이 급히 방향을 회전했다.

끼이이익!

나는 그사이 차에서 내려 회전하는 차량을 바라봤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돌린 차량이 잠시 멈춰 서더니, 이내 나를 발견했는지 다시 맹렬히 바퀴를 회전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드는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차량의 전조등이 깜빡거리며 나를 조롱했다. 네가 차에서 내려서 뭘 어쩌겠냐는 거겠지. 상대는 고급 세단. 기본적으로 총알이 통하지 않는 방탄차량이다.

-마스터?

귓가로 이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차량에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고 있었어."

그리고 결정했다.

총알이 안 통한다고?

'내 칼도 안 통하는지 확인해볼까?'

나는 그대로 칼을 뽑아 달려드는 차량을 향해 휘둘렀다.

번쩍!

공간이 갈라진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은빛 궤적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진짜 갈라졌다.

공간이 아니라 달려들던 차량이.

서거거걱!

그대로 양쪽으로 갈라진 차량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콰콰쾅!

어떤 반전도 없이 각기 나무와 바위를 들이받고 시원하게 폭발하는 차량.

나는 폭발하기 직전에 차에서 탈출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뭐하는 새끼냐?"

그대로 들어 올려진 놈이 목을 부여잡곤 소리쳤다.

"커, 컥! 그, 그만! 난 해결사요!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했을 뿐이오!"

"······해결사?"

"그렇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해결사가 왜 튀어나온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이놈이 해결사라면 분명 의뢰를 맡긴 의뢰인도 있다는 뜻이다.

"해결사라니 긴말 안 하겠다. 누가? 어떤 걸 시켰지?"

"다, 당신을 미행하다가 기회를 봐서 접촉사고를 내라고 했을 뿐이오."

"접촉사고?"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놈을 쳐다봤다. 접촉사고를 낸다는 놈이 저렇게 차를 꼴아박아?

"그, 그게······ 확실한 게 좋으니 말이오."

놈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유는······ 어차피 네놈도 모를 테니 필요 없고. 누구지 의뢰인이?"

"의뢰인의 신뢰를······"

"의뢰인의 신뢰를 어길 수 없다,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면 당장 목을 베서 저 불 속에 던져주지."

"······스모커요."

"스모커?"

나는 머릿속을 뒤적였다. 스모커가 사람 이름일 리는 없으니, 스모커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자겠지.

그러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30구역 중개인 스모커 말인가?"

"그, 그렇소."

"······그자가 왜 이런 짓을?"

30구역 중개인 스모커.

이름은 알려진 바 없이 그저 스모커라고만 불린다.

30구역에서. 아니, 어쩌면 소울 시티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가진 중개인이 이 스모커였다.

중개인 중 유일하게 스스로 해결사일까지 겸하는 괴짜였으니까.

하지만 의아했다. 놈이 괴짜인 걸 떠나서 나와 스모커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즉, 놈이 이런 짓을 꾸밀 이유가 없는 거다.

그때 내 눈치를 살피던 해결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 스모커가 당신에게 남긴 말이 있소."

내게 말을 남겼다?

"뭐지?"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었소."

"······거 참 신박한 개소리로군."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요즘 내 이름값이 높아지다 보니, 어떻게든 나와 직접 얘기하고 싶어서 이런 개수작을 벌인 것 같은데······.

"스모커에게 전해라. 이런 개수작 부려봤자 중개인 옮길 생각 없다고."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 스모커를 찾아가시오."

"······? 뭐하는 거지?"

나는 다시 앵무새처럼 말을 꺼낸 놈을 노려봤다. 그러자 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스, 스모커가 그랬소. 당신이 들은 체도 안 하면 꼭 다시 한번 말해주라고."

놈의 대답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니까 내가 들은 체도 안 할 거라는 걸 짐작했다 이거지?

나는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럼 나도 다시 한번 말해주지. 다음에 또 귀찮게 하면 네놈이 좋아하는 담배를 입 대신 다른 구멍으로 피우게 만들어줄 거라고."

"커, 커컥!"

"똑똑히 전해."

"아, 알겠소! 컥컥! 이, 이거 좀!"

나는 파랗게 질려가는 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노려보고는 놈을 던져버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던 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너. 다음에 또 만나면 죽는다."

"······아, 알겠소."

* * *

차를 몰아 집에 돌아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로비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가는데, 어떤 목소리가 내 귀를 잡아끌었다.

정확히는 대화 내용이 말이다.

"SCPD가 여긴 무슨 일이래? 살인사건이라도 났나?"

"몰라. 57층에 누가 사냐고 물어보던데?"

"57층? 57층이면 예전에 데이지 씨가 살던 곳 아닌가?"

"에이, 설마 경찰이 순진한 데이지 씨를 찾았으려고."

"하긴 57층이면 집이 총 4개니까 다른 곳이겠지? 아니면 새로 이사 온 사람이던가."

"그런데 거기에 누가 사는지 아는 사람 있나? 그 층에 사는 사람들은 얼굴 보기가 힘든 것 같아?"

"여기서도 급을 나누는 거지. 거기가 좀 비싼 집이야? 펜트하우스 바로 아래잖아."

"아, 데이지 씨가 그립다. 어리고 예쁘고 순진한 데다가 부자이기까지 하잖아."

"소문에 어떤 못생긴 놈팽이가 들이대는 게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게 혹시 너냐?"

"뭐야? 내가 놈팽이는 맞아도 못생기진 않았지!"

나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한 뒤 56층을 눌렀다.

띵동.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움직여 56층에 멈춰섰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나와 비상계단을 조심스레 열었다.

비상계단은 조용했다. 한쪽 면이 전부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비상계단 전체가 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57층의 비상구를 열었다. 미세하게 열린 틈으로 복도의 전경이 보였다.

'흐음······.'

경찰들이 내 집 문 앞을 어슬렁거렸다. 힐끗 시선을 돌리니 엘리베이터 앞에도 두 명이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비상구를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다시 56층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눌렀다.

스르륵.

엘리베이터가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제야 미간을 찡그렸다.

'뭐지? 경찰이 왜 나를?'

무법자들의 천국인 이 도시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경우는 딱 2가지다.

은행털이같이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든가, 아니면 누군가 신고를 했을 때다.

'······나를 신고했다고? 누가? 무슨 이유로?'

경찰들이 바보도 아니고 직접 출동을 했다는 건, 나를 특정하는 무언가를 확인했기에 찾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스쳐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 스모커를 찾아가시오.]

으드득!

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스모커. 네가 정녕 아랫구멍으로 담배를 태우고 싶나 보구나."

B와 D 사이의 어디쯤 (9)

130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장막처럼 어둠이 드리운 실내.

희미한 빛줄기가 커튼처럼 떨어져 내리고, 그 빛의 커튼 위로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떠다녔다.

"아으으!"

담배를 피우던 스모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지······."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창문이 없으니 외풍이 들어 올 리는 없고, 때마침 불어온 온풍기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스모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늙어 가나······ 요즘 따라 몸이 허한 것 같네. 인공장기로 슬슬 바꿀 때가 된 건가?"

그러면서 컨트롤 패널을 두드리며 인공장기 임플란트를 검색했다.

감정에 따라 혈류량을 자동으로 조절해줘서 흥분까지 조금 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준다는 인공심장 광고를 구경하던 스모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소문대로 소드마스터 그자의 성격이 썩 좋아 보이진 않던데······ 만약을 대비해놔야 하려나?"

그냥 간단한 접촉사고만 내려고 했는데, 차를 통째로 갈라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덕분에 수리비에서 끝날 거 새 차로 한 대 뽑아주게 생겼다.

게다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해결사가 말했다. 앞으로 그자와 관련된 어떤 의뢰도 하지 않겠다고.

같은 해결사가 꼬리를 먼저 내린 거라면 말 다한 거다.

막 나간다는 뜻이다.

"······아무리 막 나가도 중개인인 나를 어떻게 하겠어?"

작게 중얼거린 스모커가 의자 뒤로 몸을 기울였다. 흐읍!하고 길게 숨을 들이켜본다. 허공에 떠다니는 자욱한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며 온갖 냄새가 느껴졌다.

"놈이 사이보그가 아닌 이상, 이곳에서 자유로울 리도 없고 말이지."

스모커의 입꼬리가 씨익하고 올라갔다.

* * *

스모커가 있는 30구역으로 가는 도중, 로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게 지명수배가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알리오에게 무슨 의뢰를 받은 거예요? 시의원 관용차를 박살 내고 그 아들을 납치했다면서요?

"그게 지명수배 이유던가?"

나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접촉사고를 가장한 폭주를 뛰었나 했더니 이 일을 뒤집어씌우려고 그랬나 본데······.

쪼개버린 자동차가 시의원 관용차였다는 건 둘째 치고, 그 아들을 납치했다는 건 무슨 개소리지?

-맞아요. 나한테도 당신을 내놓으라고 난리라고요!

"그래서 내놓기로 했나?"

-미쳤어요!

장난스럽게 물은 질문에 로제가 버럭 소리쳤다.

-이럴 때 보호해주는 게 중개인 역할이에요!

"알아. 농담이었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재미없게 해요? 그것보다 빨리 얘기해봐요. 대체 시의원 아들은 왜 납치한 거예요?

"서운하군. 내가 애나 납치하고 다닐 사람 같나?"

나는 잔뜩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제의 분위기를 풀어주고자 다시 농담을 섞어 물었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애라뇨? 이 시의원 아들이 개망나니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음? 어린 애가 아니고?"

"열네 살이라던데 그 나이면 알 거 다 아는 놈이죠. 그놈 손에 병신이 된 사람만 몇인데요? 좀 알아보니 인신매매에도 손을 댔더라고요.

"······그렇군."

이 도시를 또 너무 얕잡아봤다. 납치된 아들이라고 해서 순진한 어린아이를 생각했더니, 납치될만한 이유가 있는 놈이었다.

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이 도시에선 정상적인 놈을 찾는 게 더 어려우니까.

"다시 정정해서 말하지. 내가 그런 쓰레기를 굳이 납치할 것 같나?"

-······하긴, 당신이라면 애초에 그런 의뢰는 받지 않았겠군요. 죽이라는 거면 몰라도.

단말기 너머로 잠시 머뭇거린 로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스모커가 꾸민 일 같아.

-스모커? 30구역 중개인 스모커 말인가요?

로제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본능적으로 다른 중개인을 경계하는 거다.

"그래. 내 얼굴을 꼭 보고 싶은지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였더군. 웬 자동차가 달려들길래 쪼개버렸더니, 해결사가 기어 나와서 스모커를 찾아가라더군.

-자, 잠시만요. 자동차가 달려들길래 쪼개버렸다고요? 그럼 시의원 관용차를 박살낸 건 사실이라는 뜻이네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그게 시의원 관용차인 건 몰랐지. 도난신고가 되어 있길래 부셔도 될 줄 알았어. 이렇게 귀찮은 일 일줄 알았으면 그냥 피했을 텐데."

-어쩐지 지명수배가 이렇게 쉽게 떨어질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더니. 하아······ 일이 복잡해졌네요.

단말기 너머로 로제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납치한 증거는 없을 테니 어떻게든 무마되지 않을까?"

-평소였다면 그랬을 테지만······ 스모커가 꾸민 일이잖아요. 그자는 이런 쪽으로 프로라고요. 간계와 술수로만 해결사 일을 하던 자니까요.

스모커는 소울 시티 유일의 중개인이자 해결사 일도 겸하는 자다.

본인 사무소에만 앉아있는 그가 어떻게 해결사 노릇까지 하느냐? 하면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애초에 의뢰 목적이 상대를 엿먹이거나 함정에 빠뜨려야 하는 거라면, 본인이 나설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즉, 굳이 꼽자면 지능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단순한 지능의 높낮이는 큰 의미가 없다.

대신 저런 쪽으로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언제나 수요가 있었다. 음모와 귀계, 암투, 모략은 수천 년 인간 역사에서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리 굴려 일을 꾸미는 자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 괜찮아. 안 그래도 그놈 얼굴 보고 얘기할 생각이니까."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거다.

물론 몸의 대화를 말이다.

-당신······ 조심해요.

"왜? 설마 내가 스모커 손에 당하기라도 할까 봐?

-설마요? 당신 성질 조심하라고요.

단말기 너머로 로제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요. 실수로 스모커를 죽이지 말라는 소리죠. 그랬다간 지금 귀찮음의 백만 배쯤 더 귀찮아질 테니.

"나를 성격파탄자로 생각하는군. 그쯤은 나도 알아."

-네. 제발요. 수배 중에 사고 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요. 수배는 제가 최대한 해결할 방법을 찾아볼게요.

"고맙군."

-그게 중개인이 할 일이니까요. 아무튼, 사고만 치지 마세요.

그렇게 로제와 통신을 종료했다.

"······흐음."

나는 끝까지 그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스모커와는 얼굴보고 얘기하는 시간보다, 아랫구멍에 대고 얘기하는 시간이 더 많을 거라는 사실을. 그걸 그대로 얘기했다간 또 잔소리할 게 분명했으니.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번엔 유혜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밑도 끝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물어오는 말.

하지만 나는 어떤 걸 물어보는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메가코프의 정보력이라면 내가 지명수배됐다는 걸 알아내고도 남았을 시간이니.

"귀찮은 놈이 끼어들었다."

유혜리에 사건의 전말을 얘기했다. 나를 직접 만나기 위해서 중개인 하나가 수작을 부렸다는 내용.

그러면서 혹시 메가코프의 힘으로 이 일을 무마시켜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내 일이기도 했지만,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그들의 일이기도 했기에.

그런데 유혜리가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개입하긴 어려워. 평소였으면 처리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시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

소울 시티의 시장 선거.

일견 이번 일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을 거론한 이유는, 시장 선거가 다가올수록 심해지는 정치공격 때문이다.

메가 코프가 시 정부를 막후에서 조종하고는 있지만, 그거야 권력 구도가 정립됐을 때의 이야기.

언제, 어느 쪽으로 정권이 뒤바뀔지 모르는 현재에, 한쪽 정치 세력의 시의원이 개입된 사건을 메가 코프의 힘으로 끼어들기 어렵다는 소리였다.

자칫 셀리케가 후원하는 시장 후보에게 역풍이 불어올 수도 있으니까.

-······네가 원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도와줄 수는 있는데. 어때?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유혜리가 은근히 물어왔다.

메가 코프가 아니라 유혜리의 개인적인 도움. 아마 메가 코프의 권력이 아니라 그녀 본인의 사이버러너 능력, 혹은 개인적인 연줄을 이용한 도움이겠지.

"아니. 그렇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어. 나도 일단 해결하려고 방해꾼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나는 유혜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녀가 보인 호의는 고마웠으나, 그게 진심인지도 알 수 없었고 괜히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으니.

무엇보다 도움을 받게 되면, 이것 또한 빚으로 남게 된다.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하는 것. 아직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있을 때 처리하는 게 맞다.

-거사일 전에는 꼭 해결돼야 해! 일정 틀어지면 회사 차원에서 네게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너 잘못하다간 알거지 된다?

"걱정하지 마라. 정 안될 것 같으면 말할 테니."

-좋아! 꼭 연락 줘!

그녀와의 통신도 끝났다.

그렇게 두 여자와 이야기하는 사이, 차량은 30구역에 진입했다.

* * *

30구역.

구역 전체가 상업지역인 이곳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소울 시티 전체 인구가 비공식적으로 5억명 가량. 그리고 이 중 1억명 이상이 30구역에 몰려 있었다.

온갖 산업시설과 유흥시설. 자그마한 중소기업과 사무소들이 난잡하게 들어선 탓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소울 시티의 심장이라고도 말한다. 가장 역동적이고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니까.

그리고 나 역시, 그 사건·사고 중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그마한 건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어두컴컴한 실내엔 자욱한 담배 연기로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1년만 이곳에 있었다간 폐암에 걸릴 게 분명했다.

나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구름처럼 떠다니는 담배연기를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시오, 소드마스터!"

내가 오는 걸 알았는지, 나를 보고도 놀람 대신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사내.

"네가 스모커인가?"

"하하하! 맞소! 내가 스모커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스모커가 입에 문 시가를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입가에 진 미소를 따라 치아가 환하게 드러났는데,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모 흑인 래퍼처럼 치아 전체를 금으로 임플란트한 모양이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손을 쓱 내밀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시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힐끔 그 손을 바라보곤 다시 스모커의 눈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놈에게 내 말을 못 들었나?"

"무슨······ 아?"

민망한 듯 내민 손을 다시 입가로 옮기며 시가를 한 모금 빤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구멍으로 담배를 피우게 해주겠다는 말 말이오? 하하하하! 미안하지만, 이미 해봤는데 입이 제일 낫더란 말이오."

그러면서 시가를 길게 빨더니 후우 하고 내뱉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소."

뿌연 담배연기가 내 얼굴로 쏟아진다. 나를 어떻게든 자극하려는 모양새다. 어차피 내가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나는 피식 웃으며 놈을 바라봤다.

"'배려'라······ 그래. 내가 너를 '베려'하고 있지."

스르릉.

허리춤에 달린 칼을 꺼냈다. 은빛 칼날이 드러나며 서늘한 예기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희미한 조명 아래임에도, 그 빛을 받아 환하게 반짝이는 칼날.

스모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드, 듣던 것보다도 과격하시군! 다짜고짜 칼을 꺼내다니!"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지. 때론 축소되기도 하고. 직접 겪게 해줄 테니 참고하도록."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놈이 그대로 물러섰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놈에게 걸어갔고, 놈은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쿵.

스모커의 등이 벽에 닿았다.

내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자.

"자, 잠시만! 우리 대화부터······! 어억!"

은빛 궤적이 공간을 갈랐다. 어둠을 가르고 눈앞을 스쳐 간 칼날의 예기.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찢어질 듯 커진 스모커의 눈이 풍랑을 만난 파도처럼 흔들리며 바닥을 향했다.

그곳엔 그가 입가에 물고 있던 시가의 반쪽이 떨어져 있었다.

치이익.

나는 떨어진 담뱃불을 발로 짓밟으며 말했다.

"어디 지껄여봐. 들어는 주지."

B와 D 사이의 어디쯤 (10)

131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