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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021 꺼진 불도 다시 보지 못한 죄라고 생각해

* * *

소녀와 함께 화물칸 내부에 진입한 가온의 눈에 압도적인 양의 수하물이 들어왔다.

첨탑처럼 치솟은 수납대는 구역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 언뜻 질서정연해 보이지만 해당 정보가 없는 가온에게는 망망대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하물며 승객들의 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우주여객선은 성간 배송을 겸하는 경우가 태반. 포장된 택배도 적지 않았다.

사실, 가온이 기대한 건 그 부분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거다. 운 좋게 세관을 통과한 물품이 하나나 둘 정도는 있을 터.

밀폐된 수준이 높은 물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자니, 소녀가 다가와 물었다.

"뭘 찾는 거예요?"

"무기가 될 만한 거."

"저도 한번 찾아볼게요."

두 사람은 즉각 조사에 나섰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밀매되는 무기가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철저하네요."

"쓸데없는 곳에서 막히네."

하긴 시정부가 운영하는 우주여객선이었다. 어중간하게 관여한다는 건 죽고 싶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있긴 있을 거야. 우리 둘이 찾기에는 시간이 걸릴 뿐이겠지만."

관자놀이가 간질간질한 건 그때.

누군가 오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마주칠 터.

소녀를 둘러멘 가온은 그림자가 짙게 깔린 사각지대로 몸을 던졌다.

"왜...."

"쉿."

소녀의 입을 막기가 무섭게 화물칸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인원은 총 넷.

'임산부와 청춘 남녀, 그리고 노인.'

모두 객실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소년을 도와 우주여객선을 탈취한 무리였던 거다.

놈들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한 수납대로 가더니, 일렬로 놓인 케이스 중 하나를 개봉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고가의 장비.

MUG―1에 해당하는 전투 코트는 물론이고, 화기류 또한 완비된 상태였다.

뛰쳐나가서 육탄전을 강요한다면 쓰러트릴 수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확률도 고려해야 했다.

소년도 제 몸 안에 장착한 슬롯으로 살인을 저질렀지 않던가.

가온에게는 폭주하는 무리를 잠재우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것도 중요했다.

안타깝지만 특정 염기서열을 분해하는 약물, '뉴클레이즈'는 트렁크 가방 안에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목적을 이룬다면 놈들도 퇴장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한 가온의 기대와 다르게 네 사람은 오히려 일사불란하게 수납대를 쏘다니면서 다른 케이스를 꺼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내용물에 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닛?'

슬롯이 체내 이식 기기를 총칭하는 단어라면, '유닛'은 체외 장착 기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넓게 보면 의수나 검도 유닛의 종류 중 하나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리 구분하는 이는 없었다.

첨단 장비의 연장선이라는 인상이 강했던 거다.

네 사람이 조립 중인 유닛도 그러했다.

이윽고, 요철 부분이 퍼즐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면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인체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 구현한 듯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구체 관절 인형. 언뜻 보기에는 오브제인 것 같지만 그 안에 내장된 건 틀림없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결실이었다.

'전신 의체?'

기계로 구성된 신체에는 흉흉한 장비가 탑재된 상태.

하지만 정작 중요한 머리가 없었다.

네 사람 중 하나가 몸소 제물이 되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섯 번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산부가 부풀어 오른 배를 개방하자 그 안에서 사내의 머리가 나타난 거다.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한 채 때가 되기만을 기다렸던 모양새.

달칵.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장내에 열풍이 불었다.

승선 명단에 없는 승객의 등장.

어떠한 면에서는 영리하다 할 수 있었다.

아예 전신 의체를 분해한 상태로 화물칸에 반입하면 부품으로 기재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소녀가 경악하는 게 느껴졌다.

가온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이보그인가.'

사이버네틱스 수술로 신체의 90퍼센트 이상을 기계로 대체한 존재.

초기에는 장애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려되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보기 드문 방법이었다.

생체가 아닌 기계에 정신을 맡겨야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던 거다.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에 온갖 정신 질환에 시달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윤리적인 문제 또한 대두되었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이라는 대체 기술이 있지 않던가.

사이보그가 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명맥을 유지하는 건 그러한 단점을 뛰어넘는 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

인간다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발전한 기술이 결국 인간다운 삶을 버리게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게 얄궂지만 말이다.

사이보그의 입에서 고저 없는 음성이 흘러나온 건 그때.

"의복은?"

"여기 있습니다."

배가 푹 꺼진 임산부가 전투 코트를 내밀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 호의를 받아들인 사이보그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장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상하 관계가 명확하게 보이는 듯한 광경.

"계획은?"

이어지는 사이보그의 말에 남자가 답했다.

"순조롭습니다. 예상대로 쥐새끼들은 전부 함교에 모여 농성 중이니까요."

"괜찮군."

한숨을 내쉰 여자가 덧붙인 건 그때.

"다만, 승객 중 하나가 도망친 것 같습니다. 현재 수색 중입니다."

"숨바꼭질할 시간은 없다. 어차피 통신은 두절되었으니 지원도 부르지 못할 텐데?"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사이보그가 복귀를 명했다.

"시간을 낭비하면 변수만 생길 뿐이다. 어차피 목적만 달성하면 이 우주여객선은 폭발시킬 거니까."

제아무리 날고 기는 화성방위군이라고 해도 증인도, 증거도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을 터.

"빈텔로, 너는 남아서 화물칸에 폭탄을 설치해라."

"알았네."

노인, 빈텔로만 남겨 두고 네 사람이 사라진 건 한순간. 방금 전까지 북적였던 화물칸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풀린 건지 소녀가 어깨를 잘게 떨렸다. 막연하기만 했던 죽음의 기운이 지척까지 느껴진 탓일 터.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가온도 공포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주여객선이 폭발하면 우주 미아가 되는 거다.

죽지 않는 그에게는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말.

아마 끝없는 우주를 누비면서 영원에 가까운 삶을 보내야 할 테지. 그것도 신경계가 허용하는 고통을 극한까지 맛보면서.

여태껏 경험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래서 무자비하게 죽였던 건가.'

애초에 살려 둘 생각이 없었던 거다. 끝이 정해져 있는데 하나나 둘 추가된다고 무엇이 문제겠는가.

헛웃음을 터트린 가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제지해야 했다. 그게 유일한 활로.

마침 노인 한 명이 홀로 남아 작업 중이었다. 반격을 알리는 신호탄으로는 적당할 터.

상체를 앞으로 수그린 가온은 돌연 질주했다.

타닥!

때아닌 기척에 반응한 노인, 빈텔로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가온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뒤였던 거다.

돌발 상황이 발생했지만 빈텔로는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그는 백전노장.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육신이 먼저 반응했다.

하나, 가온은 기다렸다는 듯 방아쇠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격발하려는 총기를 억눌렀다.

그리고 뒤이어 남은 손으로 총열을 잡았다.

기기긱.

"뭣...."

찰흙처럼 뒤틀리는 소총을 사정없이 던진 빈텔로가 허벅지에 걸린 컴뱃 나이프를 꺼내려고 했지만―

"노획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걸."

가온에게 탈취된 뒤였다.

하지만 빈텔로는 움츠리지 않았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피복은 MUG―1에 해당하는 물품. 일반적인 날붙이가 침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달려드는 빈텔로였지만, 가온은 그런 그를 우악스럽게 잡아 짓눌렀다.

"컥."

노장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건 순식간.

빈텔로의 팔을 꺾어 등에 붙인 가온은 두 신체 부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컴뱃 나이프로 찔러넣었다.

승패가 명확하게 갈리고 나서야 나타난 소녀가 조잘거렸다.

"위험할 뻔했어요. 저 사람, 디바이스로 다른 동료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으니까요. 제가 사전에 차단하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걸요."

피식 웃은 가온은 손에 움켜쥔 물건을 소녀에게 던졌다.

데구루루.

그것은 근접한 직후 뜯어낸 디바이스.

"...그냥 그렇다고요."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은 소녀는 멋쩍은 듯 콧등을 긁적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빈텔로는 사태를 파악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꺼진 불도 다시 보지 못한 죄라고 생각해."

"하, 시정부에서 파견한 병력인가. 하지만 늦었네. 그분이 깨어났으니까."

무언가 단단히 착각한 듯한 어투였지만, 가온은 반박하지 않았다.

답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빈텔로였으니까.

컴뱃 나이프를 지르밟은 가온이 방긋 웃었다.

"그러면 늦은 김에 수다 좀 떨자고. 이 안에 얼마나 들어왔고, 무엇을 노리는지."

* * *

E―401호 우주여객선의 선장, 아이온 로웰은 침음을 흘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선내가 점령된 지도 벌써 1시간째.

바깥 상황을 살피고 싶지만, 튜너의 방해로 여의치 않았다.

"화성방위군은? 아직도 연락되지 않나?"

"네, 비상 통신망으로 우회하려고 해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나가서 원인이 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해결될 듯싶었다. 하지만 그건 하책이었다.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개방하는 순간, 불온한 무리가 함교로 달려들 테니까.

다행히 함교는 우주여객선이 폭발해도 무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산소나 식량, 중력 같은 부차적인 건 차치하더라도.

열지만 않으면 안전하다는 뜻.

"아직도 버티고 있어?"

돌연 소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걸로 7명째야, 대체 얼마나 많은 승객이 죽어야 만족할 거야?"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자네들이 통신만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면 시정부에 건의 정도는 할 수 있을지."

"아, 그래."

흥이 식었다는 듯한 어조 뒤로 비명 소리가 따라온다.

직접 보지도 않았건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것 같아, 두 눈이 질끈 감긴다.

"후세에서도 나를 용서하지 말게."

또 누군가 덧없이 사라졌지만, 아이온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메시지를 보낸 우주보안관의 조언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노리는 건―

"식별되지 않은 물체가 접근합니다."

오퍼레이터의 보고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전방위 인지 패널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전장 60미터, 배수량 8만 톤, 항해 속도 34만 노트.

"등급 외 판정,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지 않은 함선입니다."

화성 바깥을 유영하는 우주선인데 식별 번호가 없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뿐인지라, 승무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가오고 있는 건 화성방위군이 아니었다.

'우주 해적인가.'

022 요즘 영양제는 구두 밑창에서 나오나요

* * *

때맞춰 나타난 걸 보면 사전에 협의된 행동이라는 소리. 통신도 끊긴 마당이었다. 구원 요청을 듣고 접근한 건 아닐 터.

보나 마나 정체불명의 무리가 끌어들인 게 틀림없었다.

"선장님! 문이...!"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태껏 제 기능을 다했던 출입문이 점점 갈라지기 시작한 거다.

지지직.

틈 사이로 흘러나온 건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푸른빛.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사방으로 튀는 불티 때문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때나마 아이온도 다뤄 본 적 있는 도구였으니까.

플라스마 커터.

무기보다 공구에 가까운 물건이지만, 결코 얕보아서는 안 되었다.

우주여객선을 건조하기 위해 사용된 수많은 특수 장비 중 하나였던 거다.

상대도 그걸 노리고 채용한 게 틀림없었다. 더구나 별도로 개조한 건지 출력이 비정상적이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함교를 지탱하는 벽면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녹아내렸다.

쿠쾅.

두꺼운 강판을 징검다리 삼아 밟고 들어온 건 전신을 기계로 교환한 사이보그―

"지네스."

"나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마지막 일선을 넘어 버린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바야흐로 24세기.

발달된 과학 기술은 이미 인류의 인지 범위를 넘어간 후였다. 제도적인 장치가 항상 뒤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 그렇기에 인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설령 메가콥이라고 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족쇄.

'4대 기본법.'

그중 하나인 인공지능 제한법은 0과 1로 구성된 지성을 억누르기 위해 마련된 방안이었다. 오직 정해진 방법과 정해진 용도로만 인공지능을 활용하도록 지정한 거다.

안드로이드가 직접적인 전투에 나설 수 없는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편리한 도구에 책임을 전가한다면 그 뒤에 있는 건 방점 없는 소모전일 테니까.

3차 세계 대전을 통해 무의미한 분란이 어떠한 폐단을 낳는지 경험한 인류였다. 적어도 인공지능만큼은 올바른 곳에 쓰기 위해 협의한 후였다.

하지만, 맹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공지능의 영역을 제한한다 해도 인간은 아니었던 거다.

본디 인공지능이 사용할법한 전신 의체에 의식을 맡기는 일이 벌어지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

제 몸마저 불사르는 맹목적인 목표 의식은 광기와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르길―

"광신도 지네스라고 하던가."

"내 이명까지 알고 있다면 서론은 넘어가도 되겠군. 엔진룸을 개방해라."

"역시 그게 목적이었나. 아쉽지만, 자네 요구는 들어주지 못할 것 같군. 설령 승객들을 모두 처리한다고 해도 내 결정은 변하지 않을 거네."

아이온이 바늘을 삼키는 심정으로 거부했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돌연 지네스의 등 뒤에서 나타난 임산부, 아니, 네리아가 손바닥 안에 내장된 케이블을 잡아당겼다.

그 끄트머리에 연결된 어댑터가 아이온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건 한순간.

달칵.

아이온이 떼어 내려고 했지만, 지네스가 먼저 나서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인간의 틀을 탈피한 자이기 때문일까.

하중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었다.

"큭."

"얌전히 있어라."

"접속 중입니다. 우회 루트를 정립, 정신 방벽 돌파합니다."

타인의 정보를 탈취하는 건 수준 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슬롯을 필요로 하는 건 물론이고 그만한 재능도 있어야 했다.

흔하지 않은 고급 인력.

선내에 둘이나 있을 리 없었다.

한 박자 늦게 네리아가 선내의 장비를 정지시켰던 튜너라는 걸 눈치챈 아이온은 두 눈을 감았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도 결국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걸 직감한 거다.

"엑세스 코드 획득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지네스의 전완부에서 푸른 불빛이 피어올랐다.

* * *

"이온 드라이브를 노린다고?"

가온이 읊조렸지만 빈텔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의 동공은 텅 빈 지 오래였으니까.

가온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은 뒤였던 거다.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온 드라이브는 대개 세 개의 장치로 이루어졌다.

수소 포집 장갑.

핵융합로.

그리고 이온 추진 기관.

하나도 빠짐없이 갖춰지면 우주를 광속으로 횡단할 수 있는 만큼 시정부는 엄중하게 관리해왔다.

메가콥조차 소유하지 못한 전략 물자.

불온한 무리가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성공만 한다면 누구보다 튼튼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시정부가 평생토록 그 뒤를 쫓을 테니까.

자신의 발로인 건지, 오만의 발로인 건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놈들의 폭주는 말로 한다고 해서 멈출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래서, 선뜻 나서겠다는 소녀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에도 늦은 것 같은데요."

"미스 피톤치드."

어딘가 모르게 책망하는 듯한 어투에 소녀는 멈칫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본디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던 거다.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MUG―2 수준의 슬롯이나 유닛도 제어할 수 있고, 또 아저씨는 모르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필사적인 항변.

거기에, 마지막 말은 가온으로서도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있는 거야?"

"저 할아버지의 디바이스가 있잖아요, 아마 비상 신호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송신 범위를 제안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만 호출하는 것도 가능할 테죠."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 보자는 거네."

심사숙고한 가온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대신, 나보다 앞서지 말 것. 그리고 만약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지킬 수 있겠어?"

"...네, 알았어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가온은 빈텔로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내장된 탄약은 17발.

물론 오토 락이 걸려 있어,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보안이 해제되었다.

튜너로서의 소양이 없는 가온이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어때요? 이만하면 쓸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가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제 트렁크 가방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뉴클레이즈를 찾아, 입에 털어 넣었다.

"뭔가요?"

"영양제."

"요즘 영양제는 구두 밑창에서 나오나요."

무언가 수상쩍다는 듯 바라보는 소녀였으나, 가온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면 나가자고."

* * *

소녀가 제안한 작전은 퍽 효과적이었다. 무리 내에서 빈텔로가 차지하는 지위는 낮지 않았는지 비상 신호를 보내는 족족 달려왔던 거다.

이름 모를 사내의 미간에 꽂힌 컴뱃 나이프를 회수한 가온이 숫자를 헤아렸다.

"이걸로 넷, 순찰을 도는 인원은 거의 다 정리한 것 같은데."

상대의 전력이 줄어드는 건 고무적이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앞으로 몇 분만 지나면 덜미를 잡힐 공산이 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함교로 가야지."

이온 드라이브를 함부로 분해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엔진룸은 침입자가 들어올 시, 자폭하도록 설계되었으니까.

해제 명령은 선장만 내릴 수 있는 만큼 놈들의 경로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온은 얼마 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이 나타난 거다.

그것도 둘이나.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정말로 수색을 중단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보다 놓친 건 하나라고 하지 않았어? 왜 내 눈에는 둘로 보이는 거지?"

화물칸에서 보았던 청춘 남녀였다.

남자가 매트, 여자가 시트라고 했던가.

"알 게 뭐야, 처리만 잘하면 되지."

"그도 그런가."

"우리에게 벗어날 수 있는 녀석은 없으니까."

마치 다 잡은 것처럼 태연하게 잡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양쪽 다 공평하게 번갈아 가면서.

하지만 쏘아진 탄환은 미간을 뚫지 못하고 휘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부만 긁고 튕겨 나갔다.

'슬롯?'

이마에 추가적인 강화 시술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꼭 사격에 자신 있는 녀석은 머리부터 노리더라고."

매트가 팔을 뻗은 순간, 전완부가 네 방향으로 개방되었다.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파라볼라 안테나처럼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기계 장치.

어떠한 징후도 없었건만, 마주하기가 무섭게 작열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특정 전자기파를 발사해, 표피 아래에 분포된 통각점만 자극하는 고통 광선.

일명, '페인 메이커'.

공찰이나 군에서나 사용하는 진압용 무기를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매트가 발목을 묶었다고 판단한 건지, 시트가 소총을 들어 올렸던 거다.

둘의 전술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매트가 제지하고, 시트가 처리하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연계가 핵심일 터.

하지만 빈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둘이서 1인분이라는 소리였던 거다. 조금 더 풀어 보자면 각자는 반푼이.

더군다나 상성까지 좋지 않았다.

셀 수도 없이 죽은 가온에게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안 하느니만 못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멈칫한 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몸짓에 불과했다.

폭발하듯이 뛰어오른 가온은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가는 탄환을 무시한 채, 곧장 시트에게 달려들었다.

"뭣."

두개골이 단단하다는 건 방금 전 깨달은 참이었다. 하지만―

"턱 밑은 어떨까."

보드라운 살 사이로 총구를 들이민 가온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시트!"

절규한 매트가 반격하려고 자세를 바로잡은 것과 가온이 팽이처럼 회전한 건 거의 동시.

쓰러지는 시트를 발판 삼아 도약한 가온은 그대로 매트의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창처럼 내질러지는 일격에 매트가 외마디 탄성을 터트린 건 당연지사.

널브러진 매트가 일어날세라 가온은 마지막 원심력을 끌어모아 컴뱃 나이프를 던졌다.

쿵!

목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날붙이.

접전이 벌어진 지 불과 2초. 그 끝에 일어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걸로 다섯 중 셋을 처리한 건가."

그동안 벌어졌던 전투를 복기하는 가온의 곁으로 소녀가 다가왔다.

"역시, 제 도움이 컸죠?"

"무슨 도움?"

"남자가 가진 슬롯을 멈췄잖아요."

그러고 보니 충돌한 당시, 격통이 사그라든 것 같기도 했다. 근데 그게 승패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냐고 한다면―

"글쎄, 없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네, 네. 알겠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거죠?"

아니, 아닌데.

뭔가 구차해지는 것 같아 가온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계속 이어 나갈 수도 없었다. 방금 전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보지만 말고 나오지 그래?"

"아, 눈치챘어?"

모퉁이에서 나타난 소년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잊으려고 잊을 수 없는 미소.

그래, 저 녀석이었다.

객실에서 난데없이 학살을 벌인 주범.

빈텔로에게 듣기로―

"론이라고 했던가."

023 나이스 어시스트

* * *

"너는...."

론 또한 가온을 알아보았다. 그에게 당했던 세 번째 희생자였던 거다. 다른 승객들은 혼비백산하면서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을 테지만, 론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살아났냐는 건데―

"그래, 슬롯.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

매트와 시트가 삽입한 것도 그러한 종류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기가 불리하다는 걸 알고 바로 죽은 척하다니, 약지 않았는가.

키득키득 웃은 론이 덧붙였다.

"설레는걸, 같은 녀석을 두 번 죽이는 건 처음인데 말이야."

"이번에는 네가 한 번 죽을 차례야."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론이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구부렸다.

제 미간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검지를 노려본 가온은 자세를 낮췄다.

온다.

살인을 결심한 론에게서 수많은 정보가 흘러나온다. 어떠한 수단을 이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긴장된 몸짓만큼은 진실되었다.

더구나 일찍이 한 번 당한 수였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허리를 비튼 것과 옆머리가 사정없이 휘날리는 건 거의 동시. 섬뜩할 정도로 정제된 바람이 훑고 지나간 결과였다.

그래, 그 여파야말로 론이 사용하는 슬롯의 정체였다.

원류는 도살용 공기총, 캐틀건.

극한까지 압축한 공기를 극소 분사구로 사출하는 무기였다.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지당했다. 실낱같은 틈 사이로 기체가 새어 나오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피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검지를 총구라 가정하면 어디를 겨누는지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거다.

그렇게,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방아쇠를 당긴 가온이었으나―

"그런 장난감으로는 죽지 않아."

론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복에 구멍이 뚫렸지만, 피부만큼은 건재했던 거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 부를 수 없는 내구도.

결론은 하나였다.

'우블렉 탄성 피부.'

충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단단해지는 성질을 가진 유닛이었다.

전투 코트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타고난 살가죽을 전부 들어내야 한다는 단점만 뺀다면.

"어쩐지 어린애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노회한 기색이 느껴진다 했더니, 아예 갈아엎은 거였냐. 설마 빈텔로보다 늙은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져? 여기에서 너희가 죽는 건 바뀌지 않는데."

확실히 일반적인 권총만으로는 화력이 부족할지도 몰랐다. 앞서 상대했던 녀석들이 내다 버린 소총은 저 멀리 있고.

하나, 상대하는 동안에 어떠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격 시에는 뻗은 팔을 결코 구부리지 않았던 거다.

마치―

'총신처럼.'

검지와 팔, 총구와 총신.

슬슬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론도 마찬가지였다. 가온을 구석으로 몰아붙인 그는 다섯 손가락을 쭉 펼쳤다.

싱글 배럴이 펜타 배럴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일렬로 쏘아지는 만큼 피해야 하는 범위도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직감만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뿌리친 가온이 소리쳤다.

"미스 피톤치드!"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요!"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소녀가 침음을 흘렸다. 론은 노련한 상대였다. 슬롯을 애용하는 사람답게 튜너에 대한 대책도 세워 두었던 거다.

일부는 아예 유압만으로 작동하는 기계 장치로 대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주여객선의 보안도 뚫었던 소녀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가 전자전에서 무릎 꿇는 일 따윈 없었다.

달칵.

메마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론이 멈칫했다. 예상하지 못한 이변. 몇 번이고 조작했지만 잠긴 장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관련 프로그램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나이스 어시스트."

그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가온이 아니었다.

탕, 탕, 탕!

론의 눈꺼풀을 향해 연달아 사격한다.

후벼 파듯이 계속해서.

우블렉 탄성 피부에서 가장 얇은 부위이지만, 관통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건 거리를 좁히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찰나의 순간, 론의 품속에 파고든 가온은 그의 팔오금을 후려쳤다.

손과 팔이 직선을 이루어야만 캐틀건이 작동한다는 건 파악했다. 다시 말해 팔뚝을 꺾어놓기만 한다면―

"이 잘난 슬롯도 사용하지 못할 테지."

"멍청할 정도로 단순하네. 덫인지도 모르고 뛰어들고 말이야."

비릿하게 웃은 론은 제압되지 않은 팔을 들이밀었다. 캐틀건이 장착된 건 오른손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도 사용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한 가온은 대항하기보다 손바닥으로 론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큽?"

"트릭이 들통난 마법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고."

다른 총기에 비해서 화력이 특출난 건 아니지만, 그런데도 캐틀건이 유용한 건 반영구적으로 탄알을 생성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체내에서 공기를 압축하면 그만인 거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호흡기가 막힌다면 그다음 단계를 수행할 수 없었다.

우악스럽게 잡힌 론이 활어처럼 펄떡거렸지만, 놓아줄 가온이 아니었다.

그대로 등 뒤를 점한 뒤, 목 전반을 압박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깔끔한 넥 크랭크.

우드득.

우블렉 탄성 피부는 어디까지나 충격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유닛이었다. 반대로 그와 무관한 공격에는 취약한 편.

즉, 서브 미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소리였다.

시야가 붉어지자 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상상하던 전개가 아니었던 거다.

"어째서...?"

"네 말대로 나는 너에 대해 몰라, 하지만 너도 나에 대해 모르잖아?"

만약 알았다면 절대 가까이 두지 않았을 테니까.

낮게 조소한 가온이 첨언했다.

"너만큼은 죽인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 생각뿐이었어."

콰득.

순간, 론의 목이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였다.

* * *

엔진룸 앞에 선 네리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론에게서 연락이 오는가 싶더니, 바로 두절되었던 거다. 디바이스를 조작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론이 맡은 객실에서 무언가 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혹시 몰라 다른 동료들의 동태를 살피려고 했지만, 묵묵부답.

알 수 없는 예감에 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수백 명이나 있는 공간이다. 오히려 개입하지 않길 바라는 건 오만이겠지."

한결같이 여유로운 지네스의 태도에 네리아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중요한 건 목적을 달성하는 거지 변수와 다투는 게 아니었던 거다.

"그러면 잡히지 않도록 페이스를 올리겠습니다."

"지극히 옳은 판단이다."

컨트롤 패드에 액세스 코드를 입력하자, 삼중으로 얽히고설킨 보안 장치가 해제되면서 엔진룸이 개방되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온 건 정돈된 파이프와 전선을 휘감은 토카막(Tokamak).

핵융합을 일으키는 도넛 모양의 설비는 조용히 공명하는 중이었다.

"예상 소요 시간은?"

"56분 정도로 사료됩니다."

이것조차 필수 불가결한 요소만 취합한 결과.

핵융합로는 원자력공학의 정수였다. 온전히 분해하려면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온 추진 기관과 연결된 부위까지 모조리 가져간다고 가정한다면?"

우주여객선을 가로지르는 대공사.

그 말은 뒷부분을 절단하자고 제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과감한 선택인 만큼―

"31분까지 단축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지네스가 무엇을 노리고 그러한 말을 꺼낸 건지 모를 네리아가 아니었다.

바깥에는 이미 그들이 준비한 개인 우주선이 도킹 대기 중이었던 거다. 일단 분리만 한다면 운송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바로 작업을 시작하지."

지네스가 팔을 치켜든 순간, 플라스마 커터가 푸른 불빛을 토해냈다.

* * *

"이건...."

소녀의 눈에 반쯤 박살 난 함교가 들어왔다. 맹수가 찢어발긴 듯 긁힌 자국이 가득한 벽면. 훤히 드러난 전선 다발에서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 뒤에 피어오른 건 짙은 피 냄새.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체를 쳐다본 소녀가 뒷걸음질 치자, 가온은 조용히 그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미스 피톤치드,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거 안 했거든요."

"그래, 그러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어른의 마음이라고 치자고."

소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린 가온은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진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승무원들과 다른 복장을 한 중년인.

가슴에 걸린 휘장이 그 직위를 짐작게 했다.

"선장?"

아이온 로웰.

그의 디바이스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다. 누군가 억지로 접근을 시도한 탓인지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튜너가 저지른 짓인가, 쯧."

필요한 정보는 모두 가져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엔진룸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출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

가온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려는 순간,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시죠, 적이 아니니까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이목구비. 피부도 하얗고, 손도 깨끗한 게 꼭 학자를 보는 듯했다.

다가온 남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배지(Badge)를 내밀었다. 동시에, 디바이스를 통해 한 가지 정보가 갱신되었다.

이름, 레이먼드 호너.

직책은―

"우주보안관?"

"그렇습니다."

짧게 답한 남자, 레이먼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통로마다 테러리스트들이 쓰러져 있던데 여러분이 처리한 겁니까?"

"그래."

"승객들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하죠.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상황이 더 심각해졌을 테니까요."

"공치사하기에는 아직 일러. 아무래도 녀석들이 노리는 건 이온 드라이브 같으니까."

가온의 말에 침음을 흘린 레이먼드가 턱을 긁적였다.

"과연, 그거라면 이 난리를 피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난처하게 됐군요."

"뭐가 난처하게 됐는데요?"

소녀가 불쑥 묻자 레이먼드는 품속에서 폭발물 하나를 꺼냈다. 가온도 본 적 있었다. 화물칸에서 빈텔로가 설치하던 물건이었으니까.

"IED잖아."

일명, 사제 폭탄. 그것도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재료로 제작한 게 아닌 군용 물품을 베이스로 화력을 높인 특제였다.

"선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더군요."

"지금까지 뭉그적거린 것도?"

"오면서 감지 센서에 걸린 폭탄을 해체하면서 왔기 때문이죠."

"야단났네."

아쉽게도 가온이나 소녀나 레이먼드처럼 숨겨진 IED를 감지할 수 있는 슬롯은 없었다.

오롯이 레이먼드의 역량에 맡겨야 한다는 건데―

"둘로 나누는 수밖에 없겠어."

폭발물 제거와 테러리스트 처리.

한 사람이 동시에 처리할 수 없는 안건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가 폭탄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게 효율적이니까."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우주여객선이 폭발해서야 의미가 없었다.

가온과 시선을 교환한 레이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승객분들에게 이러한 부담을 지우는 게 당치도 않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요. 폭탄을 전부 해체하는 대로 곧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오라고."

024 다섯 발걸음이네

* * *

* * *

레이먼드를 뒤로한 가온은 소녀와 함께 선내를 내달렸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이온 드라이브가 탈취당하는 순간,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증발할 테니까.

"아저씨."

소녀가 검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뭇별, 그 사이로 불청객이 육중한 체구를 드러냈다.

"...우주선?"

화성방위군이 도착한 건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일련의 소동이 단번에 진압되었을 테니.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

"녀석들이 호출한 함선인 것 같은데."

하긴, 이온 드라이브의 크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편성이었다. 설마하니 등에 짊어지고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까.

방금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우주선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신호.

도킹이라도 하는 날에는 되돌릴 수 없을 터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 * *

예상했던 대로 엔진룸은 활짝 개방된 뒤였다. 우주여객선과 연결된 모든 고리가 해제된 건 덤. 이미 별개의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설 아닌 화물에 가까운 상태였던 거다.

사주를 경계하고 있자니, 그림자 저편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입니까?"

임산부―였던 여자, 네리아였다.

"...."

서로 간의 목표가 대립하는 마당이었다.

대화는 무용.

상대를 인지한 순간 총구를 들이미는 가온이었지만,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 오토 락 기능이 활성화된 거다.

즉시, 어깨에 둘러멘 소총으로 교체했으나 결과는 대동소이. 소녀가 풀어 주었던 잠금장치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사용했던 물건이 우리에게 통할 리 없지 않습니까."

"해제할게요. 어?"

소녀가 뒤늦게 개입했지만, 넘어간 주도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도의 개조가 가해진 게 틀림없었다.

튜너로서의 기량 이전의 문제.

이제 와서 다른 화기를 찾을 수도 없는바, 가온은 컴뱃 나이프를 빼 들고 지면을 박찼다.

금방에라도 고꾸라질 듯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긴 극단적인 질주.

창졸간에 네리아의 코앞까지 당도한 가온은 컴뱃 나이프를 휘둘렀다.

사이버네틱스 수술로 강화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속도인지라 네리아는 그 근간을 파헤치고자 했다. 그러나, 디바이스를 통해 들어오는 건 도화지처럼 깨끗한 이력뿐.

"뭣...."

한 박자 늦게 가온이 내추럴인 걸 파악한 네리아였으나, 이미 늦었다. 들이밀어진 칼날이 목덜미를 긁고 지나가기 직전이었던 거다.

일촉즉발의 상황.

생사가 갈리는 분기점에서 승리한 건―

팅.

놀랍게도 네리아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제삼자가 끼어들어 날붙이를 걷어 낸 거다.

갑작스럽게 드리운 거체에 뒤로 물러난 가온은 헛웃음을 흘렸다. 한 번밖에 부딪치지 않았건만, 컴뱃 나이프에 균열이 생겼다.

이렇게나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화물칸에서 태어난 마지막 승객―

"지네스."

"여태껏 우리 뒤를 따라왔던 녀석이 너인가."

"그렇다면?"

"안타깝군. 가만히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내가 죽는다고? 그거야말로 난센스네."

가온이 조소했다.

제 처지를 비관한 반응이었지만 지네스에게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비칠 뿐이었다.

"못 믿겠다면 확인해 봐라. 제 분수를 알지 못하고 날뛰는 자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전신 의체의 전완부가 개방된 순간, 뿜어져 나온 청색광이 어두컴컴한 엔진룸을 밝게 비추었다.

팔뚝에서 시작된 빛줄기는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을 무자비하게 베어 가르며 전진했다.

공중제비를 돌아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가온은 식은땀이 흐르는 뺨을 닦았다.

고온 고압 방전 현상에 의한 절단.

지네스가 사용하는 무기는 간단명쾌했다.

'플라스마 커터?'

군사 효용 등급조차 받지 않는 물건이었다. 애당초 용접과 가공에 활용하는 공구였던 거다. 설령 무기화가 된다고 해도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화기에 밀릴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비정상적인 출력이 모든 단점을 뒤덮었다.

전신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예. 아무래도 체내에 소형 제너레이터까지 이식한 듯했다.

"광신도답네, 이미 인간도 뭣도 아니잖아.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제 몸을 불사르는 거지?"

"말한다고 해도 너희 같은 인간은 평생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

마치 본인은 인간이 아닌 듯한 어투.

무언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물어볼 것도 없었다.

"순교자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 같은데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얼마나 깊은 사정이 있든,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서는 성립될 수 없었으니까.

컴뱃 나이프를 거꾸로 쥔 가온이 도약을 준비한 순간, 등 뒤에서 소녀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자. 거기까지 하시죠."

"너는?"

소녀를 제압하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민 건 우주보안관인 레이먼드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변절에 가온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로써 한 가지 분명해진 건 있었다.

"포섭된 거였냐."

"적어도 여러분 편은 아니죠."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이만한 무리가 잡음 없이 들어온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론이 가온을 우주보안관으로 착각한 것부터가 모순적이었다. 지닌 장비의 수준을 고려하면 나오려야 나올 수 없는 실수였던 거다.

하지만, 그게 처음부터 정해진 거였다면?

승객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치러진 요식 행위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객실을 지키던 론과 일전을 치른 가온이었다. 승객들을 감시해야 하는 그가 어떻게 나와 선내를 배회할 수 있었을까.

'녀석 말고도 다른 동료가 있었다는 거겠지.'

정황 증거는 차고 넘쳤다.

왜 이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졌는지 의문스러울 정도.

더구나 함교에서 만난 레이먼드는 자기가 먼저 폭탄을 해체하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우주보안관이라면 승객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는 건―

"선내에 설치된 폭탄을 제거하러 간다는 것도 거짓말이겠네."

"덕분에 다른 동료들이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역시나.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건네준 거나 다름없었다.

"영민한 분이니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계실 테죠. 이제 그만 항복하시죠.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소녀는 모든 걸 받아들인 건지 체념한 듯한 기색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유능한 튜너라고 해도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탄환은 막지 못할 테니까.

진퇴양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다섯 발걸음이네."

나지막한 소리에 소녀의 눈빛이 밝게 빛난 건 한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오로지 파트너의 실력을 믿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

당연하게도, 가온은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소녀가 행동에 나선 것과 동시에 컴뱃 나이프를 던진 거다.

푹.

미처 반응하지 못한 레이먼드는 손목을 꿰뚫고 들어온 날붙이에 고함을 지르면서도, 소녀를 향한 살의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쏜살처럼 도약한 가온이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는 것과 동시에 피거품을 토해내며 절명했다.

사지가 힘없이 축 늘어지는 건 당연지사.

레이먼드가 떨어트린 권총을 발끝으로 걷어차 회수한 가온은 곧장 네리아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오토 락이 걸려 있었지만,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기대에 부응했듯이 소녀 또한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탕!

결과는 들리는 대로.

하지만, 네리안의 미간을 향해 쏘아진 탄환은 튕겨져 나갔다.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낀 건지 지네스가 몸소 방패막이 된 거다.

플라스마로 구성된 칼날이 머리 위에 드리운 건 그때.

소녀를 걷어차, 저 멀리 밀어낸 가온은 반대편으로 구르며 대응 사격했다.

플라스마를 채찍처럼 휘둘러 탄환을 쳐 낸 지네스가 재촉했다.

"네리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우주보안관에게 지급된 총기는 그들이 가져온 것과 다른 종류였다. 미리 준비된 게 없으니 쉽사리 우위를 잡을 수 없었다.

주춤거리는 네리아의 태도에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것까지 조종하는 건 무리였나 보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김에, 사격에 박차를 가한다.

우주보안관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레이먼드가 소지했던 권총은 신형이었다. 화약 추진과 더불어 내장된 배터리팩의 힘을 빌려 자기 가속까지 하는.

하나, 지네스에게는 무의미한 발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건 매한가지였던 거다.

참다못한 그가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사건이 일어났다.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네리아가 쓰러진 거다.

"아, 이게 되네."

가온이 노린 건 도탄.

아예 지네스가 맞는다는 걸 전제로 각도를 계산한 거다. 비록 그것 때문에 탄창이 텅 비었지만 남는 장사였다.

"하."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네리아를 망연하게 내려다본 지네스가 출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따라 점점 더 선명해진 플라스마가 엄폐물을 사정없이 양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사라진 건 한순간.

"평범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무엇을 상상하든 이 이상으로 추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많이 아꼈나 봐? 혹시 특별한 사이?"

어렵지 않은 추론이었다. 네리아의 품에 안겨 우주여객선에 탑승했던 거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

무릎을 굽혀, 자세를 한껏 낮춘 가온은 숨지 않고 오히려 내달렸다.

푸른 빛줄기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전신이 저릿했지만 상정 내.

"도와드릴게요!"

뒤편에서 나타난 소녀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이보그가 상대인 만큼 튜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긴 거다.

하지만 이게 웬걸, 지네스는 그녀의 상상보다 전자전에 능했다. 전신 의체를 사용해서 그런지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투입할 경로를 원천 차단한 거다.

'아니.'

이건 소녀가 알고 있는 양상과 달랐다. 인간의 정신이 기계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본래의 몸인 것처럼.

아무래도 지네스가 가진 특이 체질인 듯싶었다.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개입할 수 있는 방도가 사라져 발을 동동 굴리는 소녀였으나, 가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손으로 끝맺음을 짓기로 결정한 거다.

쿵.

플라스마 커터가 내장된 지네스의 전완부를 팔꿈치로 쳐낸 가온은 두 주먹을 차륜처럼 돌려가며 밀어붙였다.

하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맨손으로 두꺼운 금속 장갑을 깨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허무하리만치 둔탁한 소음만 일어날 뿐.

"분투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동료가 그렇게 죽었는데도 배운 게 없네."

당연하게도 가온이 노린 건 언젠가 일어날 우연이 아니었다. 애당초 공격한 게 아니었다. 5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체를 밀어낸 것뿐이었으니.

그제야 제 발자취를 더듬은 지네스는 등 뒤에서 감지되는 기척에 전율했다.

그것은 토카막.

모든 사건의 근간이 되는 장치였다.

그래, 승패와 관계없이 토카막이 망가진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터.

"인간적으로 둘 중 하나는 부서지자고."

025 이걸로 끝낸다

* * *

지네스를 구석에 몰아넣은 가온이 어금니를 깨문 순간, 선내가 강하게 흔들렸다.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진동이 아니었다. IED가 폭발하기에는 아직 일렀던 거다.

그 말인즉슨, 외부적인 요인이라는 것.

오는 길에 보았지 않던가.

고려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도킹.

'늦어 버렸나.'

아니나 다를까, 엔진룸 자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미 분리된 공간이었다. 외부 장갑과 합금 강판, 그리고 케이블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건 당연지사.

유례없는 탈피가 일어나자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틈을 이용해 전진한 지네스가 플라스마 커터를 휘둘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네가 아무리 지껄여도 결국 변한 건 없었다는 거다!"

허공에 아로새겨지는 빛줄기를 피한 가온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기자재를 발판 삼아 지네스의 턱밑까지 도약했다.

그리고 무릎을 높게 차올렸다.

발밑에 스프링이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

'아니....'

이는, 중력 발생 장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스 피톤치드, 어서 엔진룸에서 나가. 아마 출입문만 닫으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아저씨는요."

"나는 됐으니까 어서!"

"내 앞에서 한눈을 파는 건가."

섬뜩한 발언과 함께 플라스마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소녀가 엔진룸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가온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제 거칠 것 없었다.

맹렬하게 질주한 그는 맨손으로 지네스의 팔뚝을, 플라스마 커터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매캐한 냄새가 나면서 가온의 팔이 증발했다.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지네스는 내심 조소했지만―

우지끈.

이어지는 소리에 두 눈을 부릅떴다.

내장된 기기인지라, 의체를 두른 금속 장갑보다 내구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둘을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인간이 함부로 우그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

"왜? 너만 인간 탈출한 줄 알았냐?"

영영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가온의 손은 어느새 재생된 뒤.

지네스가 납득할 시간도 주지 않고 사각지대로 숨어든 가온은 옆구리를 난타했다. 두 주먹이 깨부숴져도 개의치 않고.

쿵, 쿵, 쿵!

족쇄를 끊고 폭주하는 폭력에 지네스의 팔이 반대로 꺾였다. 형언할 수 없는 괴력에 굴한 게 아니었다. 애당초 의체에는 고정된 방향이랄 게 없었다.

구체 관절을 채용한 만큼 앞과 뒤를 구분하는 건 무용.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벗어난 지네스는 집요하게 가온을 추적했다.

360도로 돌아가는 목과 허리.

서 있는 자리에서 전, 후면을 교대할 수 있는 지네스와 다르게 가온은 그런 그를 피해 위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비되는 동선이 늘어나니, 자연스레 격차가 벌어졌다.

백미는 지네스의 팔꿈치가 강렬하게 돌아가면서부터.

덩달아 플라스마 커터 또한 프로펠러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형 분쇄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에 가온이 멈칫한 순간, 우주여객선의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

쿠구궁.

이내, 빈틈 사이로 광활한 우주가 그 편린을 드러냈다. 어떠한 왜곡이나 보정 없이 마주한 광경. 가온은 감탄하기보다 서둘러 근처에 있는 기둥을 잡았다.

그 직후, 선내에 재앙이 들이닥쳤다. 온갖 물품이 바깥으로 빠져나간 거다.

기압 차로 인해서 생긴 자연 현상은 전율적인 흡인력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 금세 잦아들었지만, 낙관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극한의 환경에 노출된 거다.

태양에서 시작된 복사열과 우주를 지배하는 극저온.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비롯된 온도 차.

생물에게 무자비한 우주 자외선도, 진공 상태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지만 가장 위협적인 건 지극히 낮은 기압이었다.

지구에서 끓는점은 100도지만 우주는 20도였던 거다.

인간의 체온은 36.5도.

부글부글 끓기에는 적당한 온도였다.

안타깝지만 인간이 우주에서 맨몸으로 버틸 수 있는 건 1분 내외.

모성의 은혜를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바로 지네스.

사이보그인 그는 우주 공간에서도 보호 장비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엔진룸 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게 그 증거.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제한 시간이 초 단위로 다가왔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승리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다.

활로를 개척하는 건 오롯이 개인의 의지.

'이걸로 끝낸다.'

생각을 정리한 가온은 방금 전까지 토카막을 지지하던 철골을 잡아 뜯었다.

추정 길이 6미터.

유사시, 핵융합로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견뎌야 하는 만큼 내열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재.

플라스마를 베는 검으로 쓰기에 적합했다.

* * *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홀로 도망친 소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녀의 능력 밖이었다. 미안하다고 괜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게 민폐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적어도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했다.

마침, 쓰러진 레이먼드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우주보안관이라고 소개했던 사내.

후에 배신하면서 혹시 신분을 속인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지만, 그가 보여 준 배지는 진품이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화성방위군 직통 라인이 있다는 소리였다. 비상 연락망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황급히 레이먼드의 몸을 뒤집은 소녀는 그의 디바이스를 해킹했다.

"아아!"

다행히 회선은 살아 있었다.

여태까지 선내의 장비를 조작했던 네리아도 죽었겠다, 호조가 아닐 수 없었다.

곧바로 화성방위군에 구조 신호를 보낸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순간―

쿠쾅!

뼈가 시큰거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선내를 훑고 지나갔다.

"아저씨!"

반사적으로 출입문에 얼굴을 들이민다.

외시경 너머로 펼쳐진 건 놀라울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었다.

동작이 끊겨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남자와 푸른 빛무리를 이끄는 사이보그.

둘의 대치에 미처 해소되지 못한 열량은 불티가 되어 사방에 흩날렸다.

평생 무예와 담을 쌓고 살아온 문외한이지만 공방의 수준이 높다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치가 얼마 가지 못할 거란 것도.

지금 엔진룸은 우주 공간과 다를 게 없었다.

사이보그인 지네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건 당연지사.

'아니.'

철골을 치켜든 남자가 자세를 잡은 순간, 일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움찔거린 소녀는 저도 모르게 곤두선 솜털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본능이었다.

저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없다는 본능.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그리 고민한 것과 남자가 철골을 내리그은 건 거의 동시.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후폭풍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뭐...."

고작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찰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순간.

그 사이에 지네스는 양단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치부했을 광경.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그렇게 지네스를 관통한 검격이 토카막까지 닿아 기어코 반으로 갈라버린 거였다.

쿠궁.

예상치 못한 폭발에 놀란 개인 우주선이 뒤로 물러난 건 그때. 그들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토카막이 부서진 것처럼 보였으리라.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도망친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저 멀리서 다른 함선이 접근하는 중이었던 거다.

인류가 보유한 최고 최대 전력.

바로 화성방위군이었다.

* * *

화성방위군이 등장하면서 개인 우주선은 단번에 제압되었다. 그로 인해 우주여객선에 평화가 돌아온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선내에 들어온 군인들은 즉시 사후 조치에 들어갔다. 승객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묻는 한편, 인과 관계를 되짚었던 거다.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건 소녀였다.

화성방위군에 연락한 만큼 그녀는 성심성의껏 답했다.

그래, 레이먼드가 자신을 희생해 토카막을 자폭시켰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대놓고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인지라 다그칠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화성방위군은 그럴듯하다 여긴 건지 곧바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소녀로서는 뒷맛이 씁쓸한 게 사실이었다.

내부 조력자를 영웅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한 사람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거다.

때문에, 화성방위군의 인도 아래 무사히 우주 공항에 도착했음에도 소녀는 부루퉁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저씨 부탁이 아니었다면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 거예요."

"미안하게 됐어."

가온은 소녀의 투정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신분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면 밝혔을 거다. 하지만 이제 막 지구를 떠난 시점. 밀레니엄 코드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을 테니, 이 소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귀에 닿을 게 뻔했다.

자그마한 명성 좀 얻자고 괜히 도박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괜찮아요?"

"뭐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력에 도움이 될 텐데요. 잘하면 화성방위군에 입대할 수도 있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소리를 하네."

애당초 가온은 군인 출신이었다. 그것도 시대의 흐름에 등 떠밀리듯이 된.

눈물 나는 시기에 눈물 나는 직군이 되었는데 좋은 추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제때 화성방위군을 불러준 건 고마워. 그 녀석들이 부른 우주선까지 들어가야 하나, 하고 고민했거든."

"아저씨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네요."

차게 식은 눈으로 가온을 응시한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허세가 심하다 여겼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어 보니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기인이 여태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

소녀와 시선을 맞춘 가온이 입을 열었다.

"이 이후에도 못 본 척해 주는 게 예의인 건 알고 있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신사의 비밀을 지켜주는 숙녀거든요."

만족스럽게 웃은 가온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그러면 잘 지내라고, 미스 피톤치드."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예요. 제 이름은...."

반발한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가온은 인파에 휩쓸려 사라진 뒤였다.

매정한 상대를 향해 힘껏 소리치려던 그녀의 구상은 목구멍 안쪽을 맴돌 뿐이었다.

워낙 많은 일이 휙휙 지나가서 그런지 한 가지 깜빡하고 있었던 거다.

"아."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린 소녀는 이마를 짚었다.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네요."

연락처와 주소 또한.

적어도 사례는 하고 싶었건만, 그건 물 건너간 듯싶었다.

미스 피톤치드.

어쩐지 얄미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런 건 공평하지 않았다. 그래서 멋대로 정했다.

"나중에 봐요, 미스터 페티시."

026 세상에 도둑놈이 너무 많아

* * *

* * *

화성방위군.

그것도 우주작전사령부 예하 제11경계대대는 화성의 안전을 책임지는 부대 중 하나로, 현재는 순환배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4우주정거장에 주둔 중이었다.

주기적으로 행하는 순찰만 제외하면 한직이라 할 수 있지만, 근래에는 아니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걸 갈음이라도 하겠다는 듯, 대형 사건이 터진 거다.

한 하사를 따라 격납고 안으로 들어간 진건은 반쯤 망가진 선박을 볼 수 있었다.

No.3 돔 우주 공항에서 출항한 E―401호 우주여객선.

"그러면 저는 이 앞에서 대기할 테니 용무가 끝나면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관할이 다른 만큼 시정부 소속인 진건이 중간에 개입하는 건 무리한 부탁이겠으나, 이미 대대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요원들과 함께 내부로 들어간 진건은 곧장 엔진룸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건 현장은 온전히 보존 중이었다.

부서진 토카막도, 그리고 이 참상을 벌인 용의자도.

"광신도, 지네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는 사이보그였다. 폭발 때문인지 원형을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조사하시죠."

"네."

요원 중 한 명이 지네스의 머리에 어댑터를 꽂았다.

벽에 등을 기댄 진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상 재해 대책반에는 여러 인재가 있었다. 모두가 맡은 영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 주는 전문가들.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외부 요인이 없는데도 뇌세포의 일부가 변질되었군요. 반도체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걸로 사료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기계의 마음을 이해한 존재. 이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이능의 흔적이었다.

"감염자입니까."

예상했던 바였다. 전신을 의체로 바꿨는데도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활동했던 거다.

맹목적이고도 왕성하게.

그 행동 양식은 한 가지 명령밖에 입력되지 않은 안드로이드와 다를 게 없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군요."

감염자가 무리를 이루고 우주여객선을 습격한 거다. 그것도 이온 드라이브를 탈취하기 위해서. 우연의 일치일 리 없었다.

그런데도 화성방위군은 태만하게 대처했다.

이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아무 말 없이 덮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진급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모두 배제하겠다는 뜻일 터.

따지고 보면 우주보안관이 자신을 희생해 막았다는 말도 의심스러웠다. 도저히 그럴만한 규모가 아니었으니까.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진건은 고갯짓했다.

"네, 말씀하시죠."

"필요한 정보는 전부 모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추가로 지시할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대로 조사 결과를 전달한 뒤 화성으로 내려갑니다. 어차피 우리 소관도 아니니까요. 나머지는 후발대가 맡을 겁니다."

그 말대로.

진건이 지휘하는 3팀의 주요 임무는 이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한 남자를 추격하다 들른 것에 불과했던 거다.

그래, 중요한 건―

'양후.'

그를 처리하는 거였다.

양후가 No.3 돔에서 신이라는 인물로 20년 동안 생활했다는 건 이미 파악한 뒤였다. 그리고 뉴델바이어의 후버 부자를 죽이고 잠적했다는 것도.

돔 내부를 톺아보았지만 얻은 건 없었다.

외부로 시선을 돌린 건 당연한 수순.

화성으로 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예상과 다르게 No.3 돔에 숨어 있을 수도, 다른 돔으로 도피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양후였다.

쫓긴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수법에 명운을 걸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줄곧 양후의 뒤를 밟은 진건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 망막 위로 명단이 떠오른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No.3 돔을 떠난 우주여객기는 총 586기. 추정 인원 24,667명. 누구든 양후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될 수 없는 상황.

조사해야 할 양은 방대하지만, 그렇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방점을 찍을 수 있다고.

진건이 발자국을 떼며 사라진 자리에, 그을음처럼 생긴 스키드 마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테라포밍.

인간이라는 종이 살 수 있도록 행성을 조율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설령 그만한 기술과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던 거다.

세컨드 또한 그러했다.

그들이 인류의 요청에 몸소 화성으로 발걸음을 옮긴 건 2159년, 그러니까 지구에 방문한 직후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테라포밍이 완료된 건 2200년.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이었지만, 인류라고 막연하게 기다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화성에 정착하기 위한 기반 기술을 개발했던 거다.

목표가 있기 때문인지 그때 일어난 기술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리하여, 2201년.

인류는 비로소 화성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념비적인 날을 기려 '개척력'이라는 연호를 붙였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돔과 다른 형태의 자치구, 콜로니까지 마련된 상태였다.

현재 화성을 대표하는 콜로니는 총 다섯 개였다. 가온이 도착한 시드 콜로니도 그중 하나였다. 더구나, 현존 콜로니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곳.

널찍한 도로와 가로수.

거미줄처럼 퍼진 고층 빌딩.

그리고 보기만 해도 아늑해지는 아이보리 계열의 거리까지.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불모지였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전된 모습이었다.

하물며, 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르른 하늘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콜로니 바깥은 적토(赤土)라는 것. 이는, 아직까지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친근한 광경에 잊기 십상이지만 이곳은 지구와 다른 행성이었다.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엇나간 시간이 가르쳐 주었던 거다.

지구와 화성, 두 행성의 자전 주기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차가 발생했다.

때문에, 지구의 하루와 화성의 하루는 동일하지 않았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화성에서는 하루를 일이 아닌 '솔(Sol)'이라 칭했다.

당연하게도 연도 또한 아예 달랐다.

화성의 공전 주기는 대략 2년.

지구의 두 배에 달했다.

무슨 말이냐면, 사계절도 2배가량 길다는 거였다.

지구는 2321년 8월 1일. 한창 여름일 때지만, 화성은 개척력 65년 2월 12솔.

"엣취."

―겨울이었다.

* * *

무기반.

무자본.

무연고.

가온의 현황을 표현하자면 참담, 그 자체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300년 가까이 살다 보면 싫어도 요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소녀와 헤어진 그는 곧장 캡슐 호텔로 향했다.

의식주가 갖춰진 장소.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패러사이트들이 주로 거주하기에 눕는 게 고작이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가온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

사실 자그맣더라도 원룸을 구할 계획이었다. 디바이스를 얻어 매달 기본 소득을 얻게 된 거다.

1인 가구에게 주어지는 지원금은 올해 기준 215만 피아.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일하지 않고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잔고를 확인한 가온은 비속어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15만 5천 피아]

그게 그에게 주어진 전 재산이었으니까.

기본 소득제는 지구의 시간을 기준으로 통일되어, 시행 중이었다. 마침 오늘이 바로 입금되는 날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215만 피아를 넘지 못한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뭔가 싶어 이용 내역을 살펴보던 가온은 결제 목록에서 수상쩍은 사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동 이체?'

매달 215만 피아씩, 그러니까 기본 소득이 나올 때마다 어딘가로 넘어가고 있었다.

[RYS컴퍼니]

듣도 보도 못한 회사였다. 검색해도 나오는 건 없었다. 마치 누군가 차단한 것처럼.

아무래도 디바이스의 전 주인, 그러니까 진짜 백가온과 관련된 곳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도 지인이나 친척이 있을지 몰랐다. 재수가 없다면 길가에서 마주칠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그런 물건을 유통할 리 없겠지.'

이러나저러나 일단 해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갈취당한 돈을 찾고 싶다고 해도 유령 회사가 상대였던 거다.

아마도 디바이스를 판매한 세력일 터.

아쉽지만 가온으로서도 당당해질 수 없는 주제였다. 바로 그러한 점을 노리고 자동 이체를 해놓은 것일 테지만.

마지막 피까지 빨아먹겠다는 의지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세상에 도둑놈이 너무 많아."

고개를 저은 가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일상을 누린 뒤에나 해결사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란 항상 바뀌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다행히 이번에는 서둘러 중개업자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로스트 사가에서 함께 활동한 유저, 극락제조기의 의뢰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 * *

시드 콜로니의 끝자락, 43구역.

돔과 다르게 외곽 지역은 부의 상징인 듯했다. 주소가 가리키는 방향에 돈 냄새가 물씬 풍겼던 거다.

진입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순찰 드론의 외견이 바뀐 것도 모자라, 저택과 저택 간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으니까.

여유라는 가치를 구매한 듯한 모양새. 지나쳐 온 번화가가 번잡한 시골 같아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거리를 오가는 안드로이드의 비중 또한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발광하듯 선명한 원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으니.

이는, 인공지능 제한법에 따라 안드로이드에게 부여된 특징. 인간과 혼동하지 않도록 외적인 요소를 첨가한 거였다.

공교롭게도 한 안드로이드와는 가는 길이 겹치는 건지 한동안 나란히 걷게 되었다.

덩굴이 자란 담벼락을 따라.

계속해서, 쭈욱.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설마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아니."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 직장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마침 순찰 드론이 지나갈 시간이기도 하군요."

"그러니까 선량한 시민이라고."

"저는 공찰에 신고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정말로 우연의 일치였으나 안드로이드는 믿기지 않는 건지 짐짓 경고했다.

어떤 곳에서 교육을 받길래 저러나 싶지만, 그녀가 멈춘 곳을 보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문부터 다른 저택과 비교해 남다른 위용을 자랑했던 거다.

마침, 가고자 했던 목적지와 일치하기까지 했다.

그녀를 따라 자연스럽게 입장하려고 했으나, 접근하는 것과 동시에 저편에서 남자 둘이 다가와 제지했다.

그것도 무장한 채로.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용건이 없다면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도비 하워드, 안에 있지? 그 녀석을 만나러 왔는데 말이야."

얼마 전에 알게 된 극락제조기의 본명을 밝혔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소를 착각했나 싶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제대로 찾아온 듯싶었다.

"그분과 무슨 관계입니까?"

"친구."

물론 온라인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027 거기서부터 시작인 거구나

* * *

"도련님의 친구분이라고요?"

"그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네."

옆에 서 있던 남자의 동료가 웃었다. 조롱보다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쯤 되니 가온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내, 동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른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시죠."

"여기에 없는 거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난관.

서둘러 도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부러 외면하는 걸까, 아니면 그만한 사정이 있는 걸까.

가온이 고심하는 것과 저 멀리서 사내가 다가온 건 거의 동시였다.

경호를 대동한 채 등장한 사내는 가온을 쳐다보더니,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그리고 경비들을 꾸짖었다.

"뭔데, 이건. 들개는 들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쯧, 43구역도 관리가 안 되는 건가."

오만방자하게 한탄을 내뱉은 사내가 고갯짓했다.

"치워."

무미건조한 지시를 내린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사내와 교대하듯이 남자가 다가왔다.

"들으셨겠지만, 이곳에 계속 계셔서 이로울 건 없을 겁니다."

정중한 어투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는 한 가지였다.

* * *

결국, 가온은 도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캡슐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었으니까.

즉시, 커넥터를 대여해 로스트 사가에 접속한 가온은 길드 하우스로 직행했다. 장난친 게 아니라면 대기 중일 터. 하지만 그러한 예상도 빗나갔다.

처음 저택에 방문했을 때처럼.

"마스터? 접속하지 않았는데."

"접속하지 않았다고?"

한 길드원의 말에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그 주제에 이끌린 이들이 나타난 건 한순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사라져서 놀라긴 했지. 대화하는 도중에 로그아웃했거든."

"대단히 뜬금없었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프라이멀 길드가 창설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스터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타날 것 같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동의했지만 가온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보다 신신, 온 김에 같이 레이드 뛰지 않을래? 마침 한 자리가 비었거든."

"미안하지만 다음에 하자고. 나도 좀 바쁘거든."

24시간 접속해 있던 극락제조기였다. 대체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런데 하루 가까이 부재중이라고?

그것도 의뢰를 맡기겠다고 예고한 직후에?

로스트 사가에서 나온 가온은 상념에 잠겼다.

"심상치 않은데."

저택부터 압도적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프라이멀 길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도비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

해결사 하나나 둘 정도는 손짓 하나로 구할 수 있었을 텐데도, 구태여 로스트 사가에서 만난 인연을 부른 거다.

그에 어울리는 내막이 있다는 건 당연지사.

이제 그걸 알아볼 차례였다.

* * *

가온이 도비를 만난 건 5년 전, 그러니까 로스트 사가가 런칭한 직후였다.

당시에 대대적인 광고를 진행했던 터라 '호기심이 동했다.'라는 건 표면적인 이유.

게임에서 얻은 아이템을 현금 거래하면 생활에 도움이 될 거 같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게스트 계정을 마음대로 생성할 수 있어 접속이 자유로웠던 건 덤.

지극히 속물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취미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도비는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었다.

"너, 엄청나잖아."

"기본 장비로 여기까지 한다고?"

"이론상 가능하지만, 실제로 하는 녀석은 못 봤다고?"

극락제조기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던 거다.

철저한 고립을 표방하는 가온에게는 맞지 않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뿐이었다. 우연히 레이드에서 만난 인연이 이어지기까지.

"외롭지 않아? 이왕 하는 게임이잖아, 즐겁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감언이설에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저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상 현실에서까지 자신을 숨기는 건 우습다 여겼을 뿐이었으니까.

프라이멀 길드에 가입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때만 해도 도비와 절친한 친구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면을 뒤집어쓰고 만난 거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줄어든다는 건 어불성설.

"의미가 없어."

그래서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비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아니지,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거야. 사는 곳도, 나이도 모르지만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거잖아. 여기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저 한 사람의 유저일 뿐이니까."

그때 티 없이 밝게 웃은 미소가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나는 그게 게임의 묘미라고 생각해. 모두가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장소니까.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지 말이야. 너도 그렇지 않아?"

경박하지만, 이따금씩 보여 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떠나지 않은 거였다.

도비의 말대로 3차 세계 대전을 똑똑히 기억하는 가온 또한 여기에서는 평범한 유저에 불과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에 우열을 가리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라고, 친구."

"그러게."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잠에서 깨어난 가온은 성대하게 기지개를 켰다.

지난밤에는 정보 수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는 다이버를 고용하는 게 정석이지만, 자금이 부족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다행히도 단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도비 하워드.'

이름만 가지고는 모자랄지도 몰랐다. 시드 콜로니에 거주하는 시민만 해도 1억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43구역에 거주하는 이라면 범위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부촌에 입주했다는 건 그만한 금력이 있다는 거고 인덕이든, 악덕이든 쌓았을 거라는 소리니까.

어느 쪽이든 명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넷상에서 하워드라는 단어의 연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로스트 사가를 개발한 회사, '맥시멈 노이즈'의 주인이 바로 콜른 하워드였다.

개척력 1년부터 시드 콜로니와 함께한 역사가 깊은 대기업 중 하나.

원래 정착할 당시에는 통신사였다고 한다.

게임 제작사로 업종을 변경한 건 얼마 전.

그러니까, 로스트 사가가 첫 작품이라는 거였다.

아무래도 다루는 게 게임이다 보니 실질적인 권력은 없다시피 하지만 무시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화성에 뿌리를 내렸을 때부터 이어진 인맥은 여전하다는 걸까.

여론만 보아도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맥시멈 노이즈를 훑어보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

쭉 찢어진 눈매와 어울리는 얇은 입술.

저택에서 자신을 쫓아내라고 일갈했던 사내였다.

'알렌 하워드.'

이름을 보고도 도비와의 연결 고리를 연상하지 못한다면 맹인이나 다름없었다.

특이한 건 두 사람 중 하나만 이력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 분명 도비도 하워드가에 속한 일원일 텐데 그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파면 팔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배경지식은 전부 습득했으니,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43구역을 쭉 둘러본 가온은 도로의 외곽에 자리 잡았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어서 그런지 보안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별다른 장치가 없는 한, 들킬 수밖에 없는 구조.

억지로 침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정말로 도비가 부재중이라면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내부 조력자가 있다면?

때마침, 면식이 있는 상대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청록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안드로이드.

"역시 저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군요."

"진정하라고."

그녀와 만난 건 가온이 노린 바였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대기한 것도 그 때문.

"용건이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도비니까."

"...."

"아직 저택에 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휙 돌아서는 안드로이드였지만, 가온은 포기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옆을 차지했다.

'직장이라고 했지.'

곱씹어보면 묘한 표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안드로이드는 소유물에 가까웠던 거다.

물론 콜로니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개체가 아닌 만큼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지겠지만, 그게 무한한 건 아니었다.

더구나 출퇴근까지 한다?

그 말인즉슨, 어딘가에 자택이 있다는 거고 사유 재산까지 인정받았다는 거였다.

"어제 만났던 녀석은 과분한 아량을 베풀 정도로 순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알렌이 아니라면 안드로이드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은 도비밖에 없었다. 예측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안드로이드라도 평등하게 대했을 테니.

"그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데?"

인공지능 제한법에 따라 대다수의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지녔다. 다른 게 있다면 기억력과 집중력, 그리고 체력 정도.

대부분 육체적인 성능에 의지하는 만큼, 실수를 유도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이렇게.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은데,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 * *

"그러니까, 도비 도련님과 친구라는 겁니까? 의뢰를 받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고?"

자신을 세라라고 소개한 안드로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택을 지키던 경비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반응.

"왜 놀라는 거야? 평생 친구 하나 사귀지 않은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여자를 데려온 걸 본 엄마처럼."

"그건...."

슬며시 추궁했지만, 세라의 입은 떨어질 줄 몰랐다. 내키지 않아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마 내부 정보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제약이 걸린 탓일 터.

인간을 옭아맬 수 있는 건 계약서뿐이지만, 안드로이드는 달랐다. 권한만 있다면 언제든지 명령을 갱신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파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는 길에 봤는데 말이야. 맥시멈 노이즈의 주가가 떨어지는 중이더라고. 신기하지? 요 며칠 전에 로스트 사가에서 대대적인 업데이트가 진행됐는데 말이야."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

뜬구름 잡는 소리에 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회장님이 두문불출하시니까요."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가온은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요 근래 콜른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건 언론에서도 다룬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내부 정보라고 할 수 없는 셈.

하나,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세라였다.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소리.

"거기서부터 시작인 거구나."

턱을 긁적이면서 대화를 이어 간다.

"알렌의 행동이 바뀐 것도 그즈음일 테고. 혹시 알렌이 도비를 억류 중이야?"

"물어본다고 해도 답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하긴 그건 내가 알아봐야겠지."

028 내가 의뢰하고 싶은 건 하나야

* * *

별거 아니라는 듯 어투.

세라에게 가온은 수상쩍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열쇠라는 건 틀림없었다.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걸 신고할 권리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으니까.

기회는 줄 수 없었다.

다만, 여지는 줄 수 있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오늘은 정문보다 후문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테죠. 거리가 가까우니까요."

순간, 가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문보다 후문의 보안이 취약하다는 소리로 들렸던 거다.

"내 말을 믿는다는 거지?"

"그걸 결정할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 * *

―원하는 대로 미행하는 수밖에.

가온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담장과 담장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세라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직접적으로 언급만 하지 않았지, 그녀는 이리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외진 곳으로 들어갈 테니 알아서 출입하라고.

초대한 것도, 그렇다고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 여지만 주었던 거다. 안드로이드에게 주어진 족쇄를 끊지 않은 선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

이제 목표를 이루는 건 오롯이 자신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문으로 들어가는 세라의 모습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 엄지를 튕겨 동전 하나를 그 틈 사이로 밀어 넣는다.

기긱.

은밀하게 접근한 가온은 세라의 기척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난 후 동전을 회수했다.

그래, 후문이 잠기기 직전 막아선 동전을.

첨단 기술로 도배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완전한 건 없었다.

세라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감시 장치를 피하며, 정원을 지나친 가온은 회랑 기둥 사이를 내달렸다. 그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건 특이하게 구성된 인원 덕분이었다.

'안드로이드뿐이네.'

그것도 극소수였다.

일전에 보았던 경비들은 바깥에만 상주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워낙 넓은 곳인지라 별채부터 뒤져야 하나 싶지만 가온은 정확하게 중심부로만 발걸음을 옮겼다. 도비의 처지나 위치를 생각하면 게스트 룸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선택은 곧 결과로 이어졌다. 기다란 복도에 문이 달린 건 오직 한 방뿐이었으니까.

명당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단 하나.

"여기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고아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부드러운 러그, 그리고 형형색색 꽃이 만개한 화분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는 편성이었다.

돌연,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실크 커튼이 살랑거렸다. 이내, 꽃잎 하나가 의료용 포드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현대 의학에 정통한 '이나토미 코퍼레이션'에서 생산하는 명품, '아니마'.

내부는 항시 무균 상태.

바깥세상과 단절되어도 생존 가능한 약물을 자가 생산할 수 있을뿐더러, 내장된 머니퓰레이터는 현존하는 외과 수술을 전부 재현할 수 있었다.

전기만 공급된다면 반영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기.

하나에 수백억을 호가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끌리듯 곁으로 다가간 가온의 눈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콜른을 닮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새하얀 도화지처럼 구김살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

처음 보지만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도비.'

곤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사 상태라는 건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면 알 수 있었다.

하루나 이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청년은 아니마에서 생활했던 거다.

이래서, 경비나 세라가 그렇게 반응한 거였다.

"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의 친구가 몸소 찾아온 거다. 차마 표현은 하지 못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터.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루 종일 로스트 사가를 붙들고 있길래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선후가 바뀌었다.

도비에게 있어, 로스트 사가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멍청한 자식."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가온은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 다가올 때까지, 그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으니까.

눈앞에 나타난 건 누워 있는 도비와 똑같이 생긴 청년.

쌍둥이인가 싶지만, 아니었다.

두 사람의 외견은 정확하게 일치했으니까.

예상대로 슬그머니 어깨를 잡자, 온기가 아닌 가벼운 반발력이 느껴졌다.

마치 수면을 헤집고 있는 듯한 기분.

원한다면 반대편까지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 질량 홀로그램?"

주위를 훑어보니 벽면과 벽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투영기가 설치된 흔적이 역력했다.

군에서 실험 중인 기술이라고 들었는데 맥시멈 노이즈나 되는 대기업 정도 되면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너는..., 설마 가온이야?"

"그래."

"와, 여기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감동해도 되는 부분이지? 이렇게 찾아와 주는 친구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태평한 목소리를 들으니, 긴장이 확 풀리는 듯했다.

오프라인에서도 도비는 도비였다. 아니마 위에 앉은 가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들여보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생 좀 했지."

"해결사라고 들었는데, 자칭할 만한 기술은 있나 봐?"

"그래. 그리고 의뢰하고 싶다는 녀석이 사라졌는데 궁금해서라도 포기 못 하지. 그나저나 왜 연락을 받지 않은 거야?"

"저택 내부의 모든 통신이 끊겼어, 보다시피 내가 저런 몸이라 구조 요청도 못 했지."

일시적인 문제라고 해도 두 발로 나갈 수 없는 도비에게는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유일한 대책은 안드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걸 보면 알렌이 권한을 탈취한 듯싶었다.

도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다르지 않았다.

"형님의 태도가 단번에 바뀌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아, 내가 말하는 형님은...."

"알렌 하워드. 맥시멈 노이즈의 주주 중 하나이자 전무. 현재는 기술개발 총책임자라지?"

"그걸 또 알아냈어? 너, 생각보다 유능하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평가였다.

"그래서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건데? 서자라도 되지 않고서야."

"서자? 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린 도비가 덧붙였다.

"오히려 형님이 입양되었지."

"사연이 있나 봐? 그래도 긴 이야기는 질색인데."

"짧게 할 테니까 듣기나 해."

* * *

현대 사회에서 고아란 무가치한 생물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세상에 나왔으니까. 사용할 수 없는 잉여 자원이나 매한가지.

더구나 아이가 없는 가정에서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할 이유가 없었다. 극의에 다다른 인공 수정 기술은 체세포를 가지고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켰으니까.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그래서 콜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가족을 가지고 싶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 알렌은 엄격한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기대에 걸맞은 성적으로 보답했다.

하지만 콜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항상 도비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가 호흡도 하지 못하고, 가사 상태에서나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반푼이.

어찌 보면 고아보다 더 쓸모없는 인생이었으나, 알렌은 제 속내를 숨기고 도비를 대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면 설령 양자라고 해도 적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전.

그러니까, 업무를 처리하던 콜른이 갑자기 쓰러지면서부터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다는 건 회사 내에서도 아는 이가 없는 극비 중 극비.

그 과정에서 콜른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진심을 드러냈다.

"도비를 도와 맥시멈 노이즈를 운영하라고?"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당시의 충고가 귓가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알렌의 삶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선고였던 거다.

"개처럼 굴렀는데도 누워서 잠밖에 자지 못하는 녀석이 우선이라 이거지?"

말이 좋아 전문 경영인이지, 실상은 잡일꾼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양자는 양자였던 거다.

그것도 제 친자식의 권한을 대행하기 위해서 들인.

돌연, 아니마 속에 조용히 잠든 콜른의 얼굴이 보인다. 그가 정신을 잃은 지도 벌써 열흘째.

평소에 콜른은 자신을 어떻게 여겼을까.

집 지키는 개?

그것도 아니면 애교 부리는 고양이?

어느 쪽이든 인간은 아니었다.

공평하지 않다.

옳지 않다.

그리고 개운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 위해서 발악한 게 아니었다.

병실을 빠져나온 알렌은 그 즉시 한 사람에게 연락했다.

"저번에 말했던 거래, 받아들이지."

좋은 자식, 아들로 지냈던 과거의 알렌은 이 자리에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항하는 양자만 있을 뿐이었다.

* * *

도비의 말을 들은 가온이 하품을 내뱉었다.

"설명은 짧게 한다면서?"

"감상은 그것뿐?!"

해결사가 된 지도 어언 100년. 이쯤 되면 듣기만 해도 사건의 개요가 보였다.

도비의 사연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둘뿐인 형제와 막대한 유산.

불이 붙지 않는 게 이상한 조합이었다.

걸리는 게 있다면 어째서 지금에서야 도비의 발목을 잡냐는 건데.

'어쩌면....'

아니, 십중팔구 행방이 묘연한 콜른과 연관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알렌의 짓일까?

고민하고 있자니, 도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의뢰하고 싶은 건 하나야."

"듣고 있어."

"이 저택에 세라라는 안드로이드가 있어. 그녀를 거두어 줬으면 해."

그건 또 의외였다. 보나 마나 신변 보호를 요청할 줄 알았던 거다.

"아마 내가 죽으면 폐기될 테니까."

"소중한 사람인가 보지?"

"내게는 누나 같은 존재야. 어렸을 때부터 줄곧 나를 보살펴 줬으니까."

세라의 자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형을 치워 달라고 의뢰하지 그래."

"뭐, 형님을 네가?"

가만히 가온을 쳐다본 도비가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네가 자금만 대 준다면 내가 알아서 용병을 구할 수도 있어."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발악하자는 말이지? 글쎄,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친구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싶지 않은걸."

이렇게 마주하는 것조차 가온에게 부담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재벌 3세의 결정에 도전하라니.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널 고용하는 것도 벅차. 그러니까 부탁할게. 나는 세라가 행복...."

거기까지 말한 도비가 사라졌다.

아니, 투영기의 전원이 꺼진 거였다.

아니마의 불빛도 흐릿했다.

상정 외의 일.

아무래도 저택 내의 전력이 끊어진 것 같았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웠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가 저지른 건 아닐 거다.

제삼자의 개입.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나가려던 찰나, 세라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우리 만나서는 안 됐지 않아?"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029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마

* * *

황급히 아니마에서 도비를 꺼낸 세라가 그의 입과 코에 생명 유지 장치를 연결했다.

달칵.

결착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치 방독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양새. 기다렸다는 듯이 대처한 세라는 도비를 안아 들었다.

"알렌이 사주한 녀석들이라도 쳐들어온 거야?"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건 여느 때처럼 단답.

설령 세라가 무언가를 눈치챘다 하더라도 발설할 수 없다는 건 가온도 익히 숙지하고 있었다.

사실,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그 과정이 세련되지 못했다. 마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습격이었던 거다.

"나중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순간, 눈먼 탄환 하나가 아니마를 향해 꽂혔다.

누구를 노렸는지는 명약관화.

저택을 습격한 무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리 판단한 건 가온뿐만이 아니었다.

세라 또한 마찬가지.

"가온 님은 해결사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도비 도련님에게 우호적인 인물일 거라 판단됩니다."

"그렇다만."

대답한 순간, 망막 위로 숫자가 떠오른다.

[2억 4378만 피아]

근거리 통신을 통해 들어온 정보. 세라의 잔고라는 걸 눈치챈 가온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였다.

"제가 도비 도련님을 모시며 모은 전 재산입니다. 의뢰를 맡기겠습니다. 부디 도련님을 구해 주세요."

* * *

방 밖으로 나온 가온의 코끝에 옅은 혈향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울리던 총성도 잦아들기 시작했으니 가리키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경비가 당했나."

더불어, 안드로이드들도 보이지 않았다.

우군은 없는 셈.

저택을 방패막이 삼아 농성하는 게 최선일 테지만, 상대는 프로. 더구나 여기는 지켜야 할 사람까지 있었다. 거동은 물론이고, 의식조차 불분명한.

무대를 바꿔야 하는 건 당연했다.

"미스 시리."

"시리? 제게는 세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지하 주차장에 승합차가 있다고 했지?"

"네, 아직 저들도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저택 내의 모든 기능이 셧다운 된 상황. 비상 발전기도 가동되지 않아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했다. 도비를 안고도 빠르게 뛰어가는 세라를 따라 아래로 향한 가온이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어?"

"저기에 있습니다."

세라가 검지로 한 방향을 가리킨 순간, 주차된 차량의 전조등이 번쩍였다. 눈에 익은 형태였다.

탈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제작하는 메가콥, R&C에서 발표한 다목적 승합차―

"레일리 프로."

제로백은 무려 1.3초. 내장된 배터리팩이 보장하는 거리만 해도 1만 킬로미터였다.

하지만 승합차라는 점을 감안해도 커다란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출고했을 당시의 체급이 아니었다.

"개조한 거냐."

"느긋하게 감상할 시간이 없을 텐데요."

도비를 뒷좌석에 단단히 결박한 세라는 당연하다는 듯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를 따라 운전석에 탑승한 가온은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액셀부터 밟았다.

끼기긱.

한시라도 빨리 저택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

앞을 가로막은 주차 차단기를 그대로 박살 낸다. 굉음에 놀란 무리가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승합차는 이미 가속한 뒤였다.

쿠쾅.

정문까지 밀어내고 도로에 진입한다.

뒤에서 탄환이 꽂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보강된 차체에 피해를 주는 건 무리였다.

승합차의 내구를 확인한 가온은 보다 과격하게 운전했다.

공찰에 신고할 수도, 그렇다고 증원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 세라에 이르러서는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자율 주행 모드에 의존하는 건 불가했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 없을뿐더러, 프로그램에 난폭 운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입력되어 있지 않았던 거다.

지금 필요한 건 순수한 기량.

사이드 미러 너머로 보이는 차량들을 확인한 세라가 입을 열었다.

"36구역에 차명으로 구입한 안가가 있습니다. 그곳까지 간다면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테죠."

"과연, 시리."

"이해 못 할 말은 거기까지 하시죠."

43구역의 지형은 이미 숙지한 가온이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근방의 저택은 모두 경계가 모호했다. 어차피 경비와 공찰이 지키고 있으니 집으로는 들어오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다.

당연하게도, 아예 담이 없는 곳도 존재했다. 불청객의 존재 자체를 상정하지 않은 설계.

그리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만 아니었더라면.

"꽉 잡아."

쿠쾅!

도로에서 벗어나 이름 모를 저택의 정원을 관통한다. 네 바퀴가 닿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억지로 차체를 욱여넣는다.

오프로드를 달리는 것처럼 승합차가 위아래로 흔들리지만, 속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쳐 쌓인 경험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살아 있는 인간 중에서 가온에게 견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그렇기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채인가 통과했는데도 쫓아오는 차량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던 거다. 거기에 더해, 한구석으로 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상정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당했네."

"무슨 말씀입니까?"

이날을 기다린 알렌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패 또한 그 집념에 비례할 터.

"36구역에 있다는 안가, 들킨 것 같다고."

그제야 따라붙은 차량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세라가 침음을 흘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겠죠."

"다른 곳은 없어?"

"본가나 회사로 직행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테지만...."

"회장이라는 사람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겠지."

그리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순조롭게 저들을 따돌린다고 해도―

"알렌이 공찰에 신고한다면 도비를 납치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그때는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처벌이 가능하다. 그것도 콜로니의 인력을 빌려서.

"어쩔 수 없지."

가온은 운전대를 급격하게 꺾었다. 콜로니 내부로 진입하는 건 자살 행위. 그렇다면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시드 콜로니 너머에 있는 광활한 적토를 향해.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검문소를 지나쳐야 하는데 괜찮을까?"

"맥시멈 노이즈 소유 법인용 차량입니다. 당연히 프리패스입니다."

"메가콥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업이라 이거지."

대화하는 순간에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거머리들.

속도계의 바늘이 한계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거리는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었다.

승합차가 가질 수밖에 없는 선천적인 한계.

그런데도 미묘한 대치는 이어졌다.

딱, 시드 콜로니를 벗어나기 전까지만.

방금 전까지 주위를 에워쌌던 빌딩 숲이 사라지고, 드넓은 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눈에 들어오는 건 산화철이 녹아든 적토뿐.

완벽한 무인 지대.

문명의 흔적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섬뜩한 소리가 빗발쳤다. 탄환이 자아내는 폭우에 세라는 가온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상대의 공세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승합차가 버티지 못하는 지점이 올 거라는 건 자명한 일.

"다른 콜로니까지 갈 수는 있는 겁니까?"

"거기까지 갈 것도 없어. 내가 바라는 건 장소야, 보는 사람 하나 없는 장소."

"그게 무슨...."

세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이드 미러에 불길한 광경이 비쳐서였다.

바짝 쫓아오는 차량에서 한 남자가 상체를 내밀었을 뿐이지만, 그녀는 이례적일 정도로 커다란 위기감에 휩싸였다.

남자가 어깨에 견착한 병기, 그건 휴대용 대전차 화기였다.

본디 전장에서 쓰일 법한 물건이 척하니 모습을 드러내니 가온도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운전대 잡아."

"자, 잠깐만...."

당혹스러워하는 세라를 뒤로한 채, 창문을 열고 승합차 위로 올라간 가온은 팽이처럼 회전했다.

세 발자국 만에 형성된 원심력. 그 흉흉한 관성에 루프가 우그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두 손가락 사이에 걸린 칼날이 가온의 손을 떠난 것과 격발음이 터진 건 거의 동시.

쿠쾅!

폴딩 나이프와 부딪친 탄두는 목표에 닿지 못하고 중간 지점에서 폭발했다.

자욱하게 솟아오른 불길과 함께 발생한 충격파가 근방을 뒤흔들었다.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승합차가 한 박자 늦게 들썩였지만, 상정 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세라는 탄성을 터트렸다.

"뭣...."

날아오는 탄두를 정면에서 쏘아 맞힌다니, 듣도 보도 못한 기예였다. 하지만 그 비범함을 음미할 새도 없이 그녀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미리 대기하던 무리가 앞길을 막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루프에서 내려온 가온이 신신당부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마."

* * *

갑작스럽게 시작된 추격전은 시드 콜로니도 점처럼 보일 정도로 먼 공터에서 막을 내렸다. 불어오는 건 메마른 바람뿐.

저택에서부터 쫓아온 무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승합차를 빙 둘러쌌다.

압도적인 열세였으나, 가온은 긴장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누구야? 여기 머리는."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긴 사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다. 단정한 생김새였지만 그보다 가온의 눈길을 잡아끈 건 그의 다리였다. 바지 밑단 사이로 금속으로 구성된 의족이 보였던 거다.

더구나, 그 틀은 인간의 것이 아닌 맹수의 것.

신발을 신지 않아서 그런지 유달리 빛나는 듯했다.

"스프린터, 노먼 샌더스다. 보다시피 받은 의뢰를 처리하는 중이지."

"그래."

"놀라지 않는군."

"놀라야 하는 거야?"

시드 콜로니에서 활동하는 해결사가 전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수만 해도 수천, 수만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이명이 붙을 정도로 능력이 특출난 이는 주목받는 법이었다.

노먼도 그중 한 명이었다.

'스프린터'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더구나 최근에 두각을 드러낸 그였다. 소문에 민감하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는 건, 어디에선가 굴러들어 온 돌이라는 소리.

"햇병아리였나."

그래도 눈치는 있는 듯했다. 수세에 몰리자마자 선뜻 얼굴을 내밀었으니까. 이는, 명확한 항복의 표시.

선배로서 아량을 베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이미 맥시멈 노이즈에서 진행된 사안이다. 콜른 회장이 승인했다는 거지."

"자기 자식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됐다고?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건 아니지?"

"거기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다. 받은 금액만큼 일할 뿐이니까."

아무래도 맥시멈 노이즈는 알렌의 손에 떨어진 것 같았다. 십중팔구 콜른의 거취도 그가 알고 있을 터.

흥미로운 소재였기에 가온은 귀를 기울였지만 노먼은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화두를 돌렸다.

"이렇게 몸소 나온 걸 보면 합의할 의사가 있다는 거겠지. 얼마를 받았든 그 3배를 주지. 어때? 귀찮게 일 복잡하게 만드는 것보다 나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먼의 예상과 다르게 가온이 마주 선 건 마침표를 찍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나오는 말도 고울 리 없었다.

"왜 너희들이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지?"

030 물 근육이 뭐 어쩔 건데

* * *

그 당돌한 발언에 해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노먼만큼은 웃지 않았다. 모처럼 내보인 호의가 짓밟힌 거다.

"확실히 이 업계에서는 선심을 쓰면 얕보이는군. 주제도 모르는 녀석이 단명하는 것도 그렇고."

상대는 비무장이었으나, 노먼은 주저하지 않고 기관단총을 빼 들었다.

세븐 메탈에서 제작한 명품, 스피더 F33.

화약 추진 대신 자기 가속의 비중을 늘려, 소형화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더불어 연사 속도 또한 남다른바, 사람 하나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죽여."

철컥, 메마른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제 사격의 전조.

수많은 총구가 들이밀어진 순간, 가온은 두 전완부로 머리와 가슴을 보호한 채 질주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개활지에서 탄환을 전부 피하는 건 무리였다.

애당초 그 자신의 안위는 후 순위.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할 건 도비와 세라의 안전이었다.

비교적 멀리 있는 휴대용 대전차 화기를 먼저 노린 건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덜그럭.

품속에서 꺼낸 너클을 말아 쥔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수가 가온의 접근에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그 찰나의 빈틈이 생사를 갈랐다.

콰직.

살과 살이 부딪친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파열음.

솟아오른 콧대가 뒤통수에 닿을 정도로 짓뭉개졌으니,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대로 절명한 이를 걷어찬 가온은 무미건조하게 다음 주자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축이 되는 어깨와 팔꿈치는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그 뒤에 이어질 맹공을 연상케 했다.

그런 그를 제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납탄이 꽂혔지만 무용지물.

한 번 내디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가온이 아무도 없는 장소로 무뢰배를 초대한 건 몰살하기 위해서였다. 황무지를 지배하는 건 오직 힘의 논리뿐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무법.

시드 콜로니에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과감하고 단호한 철권 제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승합차에 다가가려는 남자를 걷어차, 반대편 차량까지 날려 보낸 가온은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동시에, 부근에 박힌 탄환이 돋아난 새살에 밀려 떨어졌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건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을 노먼이라 소개한 남자가 전부였다.

"빠르게 도망쳐서 스프린터였냐."

"너...."

조롱에 가까운 평가였으나 노먼은 격분하기보다 거리를 벌렸다. 처음 의뢰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기업과 얽힌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간의 경험을 통해 통렬하게 습득했던 거다.

하지만 도비의 사정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일어서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반푼이.

더구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콜른조차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거리낄 건 없었다.

사회적 파장이 적을 거라 확신하고 몸소 나선 거였다.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해결사가 바라는 이상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게 웬걸,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모든 기대를 어그러뜨렸다.

분명 즉사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일어났다. 오발이 났나 싶지만, 구멍이 뚫린 코트가 방금 전까지의 격전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주었다.

불가해 그 자체.

때문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콜로니에서 들어온 건가."

"이곳 출신은 아니지."

"그래, 그래서 날 몰랐던 거군."

능청스럽게 답하면서도 노먼은 기관단총의 탄창을 교체하는 걸 잊지 않았다. 개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머리와 가슴만큼은 철저하게 보호했던 상대였다.

약점이라고 부를 만한 게 어디에 있는지는 명약관화.

가슴팍에 총구를 겨냥한 노먼은 예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미간을 노리고 쏘아진 총격에 가온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돌연, 탄환이 직선 운동에서 벗어나 완만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스마트 불릿.

진보된 과학 기술은 절대적인 명제마저 뒤틀었다.

엿가락처럼 휜 궤적이 기어코 관자놀이를 뚫고 지나간 순간, 노먼은 가온이 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 뒤로 넘어지기 직전, 허릿심만으로 상체를 세운 가온이 빠르게 접근했다. 눈을 깜짝일 때마다 위치가 달라졌다.

오히려 전보다 탄력을 받은 듯한 모양새.

일전에 의뢰를 받았던 돌연변이 실험체도 이보다는 끈질기지 않으리라.

"미친 새끼가!"

머릿속에 장착된 슬롯, 세컨드 브레인이 사격통제장치를 대신해 궤도를 연산한다.

때아닌 난사에 반동을 견디지 못한 총구가 미친 듯이 흔들렸지만 탄환의 궤적은 하나로 수렴했다.

"뻔하다고."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는 살인 도구.

얼핏 막강한 무기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꺾이는 각도마저 염두에 두고 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더욱이 스마트 불릿이 제 효용을 발휘하는 건 발사되고 단 한 발뿐.

이론상, 여러 번도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실되는 운동 에너지는 막대했다.

그렇게, 관통력이 줄어든다는 건 총기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말.

명중률을 올리기 위해 화력을 희생한다니 언어도단이었다.

따라서,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필연.

코앞까지 다가온 가온이 주먹을 내지르기 직전, 노먼은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그의 두 다리는 해결사가 되기 위해 준비한 특제.

인공 근육과 압축 스프링 그리고 피스톤이 자아내는 운동 능력은 인간의 그것을 아득히 초월한 지 오래였다.

가온이 오른 다리를 쳐냈지만 노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건 페이크였으니까.

땅바닥에 발이 닿기 직전 방향을 전환한 그는 왼 다리로 가온의 턱밑을 노렸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나래 차기.

임팩트가 터지는 순간, 부스터의 보조를 받아 위력이 배가되기까지 했다.

솟구치는 로켓과 진배없는 일격.

노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른 다리를 축으로 삼아 맹공을 이어 갔다.

그가 스프린터라 불리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승기를 잡았다, 그리 확신한 순간―

팅.

불길한 소리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난데없이 두 다리가 끊어졌으니까.

볼품없이 넘어진 노먼은 제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단면이 매끄러운 게 마치 칼날로 절단한 것만 같은 형태였다.

그제야 노먼은 가온의 무장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클이 두 개?"

하나인 줄 알았건만, 여태까지 두 개를 겹쳐서 사용한 것 같았다.

그 말대로.

가온이 소지한 너클은 하나가 아니었다.

15만 피아.

수중에 있는 돈으로 그가 구할 수 있는 무기는 제한적이었다. 그런데도 너클을 두 개나 구입한 건 오롯이 하나의 장치를 위해서였다.

"견인용 와이어야. 급조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지?"

너클과 너클을 잇는 가는 실 하나가 빛을 받아 번쩍인다.

인장 강도는 600kg/㎟.

여건만 된다면 비행기도 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걸 휘감아서 쥐어짰으니, 아무리 금속제 의족이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견인용 와이어를 팽팽하게 당긴 가온이 미소 지었다.

"그래서 우리 스프린터 씨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너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다."

* * *

발이 빠른 노먼은 발설하는 것 또한 남달랐다. 1분을 넘기지 않고 알고 있는 걸 모두 실토했던 거다.

덕분에 사전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원흉이 거주하는 곳은 20구역에 세워진 팔머 타워팰리스.

선택받은 이만이 입주할 수 있는 만큼 모든 출입구는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였다.

디바이스의 시민 ID를 확인하는 건 물론이고, 위험물 감지 센서와 금속 탐지기가 동시에 운용 중이었다. 더불어, 계약된 시큐리티 또한 주기마다 순찰을 돌았다.

민간 레벨에서는 최고 수준.

외부인은 다가갈 수조차 없는 철옹성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부지에 잠입한 가온은 정문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위를 배회했다.

거주민인 척 당당하게 산책해서 그런지 수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구태여 정면 돌파를 택할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3, 4층 사이에 올라가기만 해도 되었던 거다. 고층까지 검문하는 이는 없을 테니.

마침 창문이 열린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보안을 위해서 닫는 게 이상적이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한 조언에 귀를 기울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염탐하는 사이에도 창문이 열렸다 닫히는 중이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가온은 누가 올세라 견인용 와이어를 재빠르게 던졌다.

털컥, 하고 끄트머리에 달린 너클이 창틀에 걸린 건 한순간.

몇 번 잡아당겨 안전한지 확인한 가온은 두 팔의 힘만으로 외줄을 타고 올라갔다.

검색을 완전히 무시하고, 내부에 진입한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물 흐르듯이 뛰어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면 되었으니까.

가온이 목표로 하는 곳은 42층이었다.

한 플로어를 통째로 사용한다고 하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하는 인원도 몇 명인가 있을 터.

견인용 와이어를 쌍절곤 삼아 빙빙 돌리자, 그 끝에 걸린 너클이 흉흉한 바람을 내뱉었다.

올라가는 층수에 따라 돌아가는 너클의 위력도 점차 강해졌다.

띵.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좌우로 열린 순간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여태껏 끌어모은 힘을 해방했다.

서걱.

가장 가까이 있는 경호원이 견인용 와이어에 의해 양단된다. 반격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필살의 기예.

"컥."

전문 인력답게 밀리초 이내로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총기를 들이밀었지만,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돌아가기 시작한 견인용 와이어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으니.

기기긱.

다만, 마지막 한 명만큼은 달랐다. 한껏 돌아가던 견인용 와이어가 사내의 팔뚝에 휘감긴 채로 회전을 멈췄던 거다.

장갑이 두꺼운 의수라는 건 명약관화.

가온은 그대로 잡아당겼다.

"뭣."

"물 근육이 뭐 어쩔 건데."

속절없이 끌려오는 사내를 걷어찬 가온은 반대 손에 쥐고 있던 너클로 그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축 늘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견인용 와이어가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끈이 되었던 거다.

털썩.

곤죽이 되어 주저앉은 사내를 밀어낸 가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들어온 건 고집스러운 입매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오랜 시간 동안 관리한 건지 중년인으로도 노인으로도 보이는 얼굴.

연륜이 이목구비에 스며들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미야타 이토."

맥시멈 노이즈의 부회장이자 알렌에게 동조한 내부 조력자. 오기 전에 미리 조사했기에 헷갈리는 일 따윈 없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이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누구인가?"

"어떻게 날 잊을 수가 있어?"

가온이 팔을 휘두른 순간, 날아간 너클이 이토의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가 벽에 꽂혔다.

"쳐 죽이라고 했으면서."

031 물은 답을 알고 있으니까

* * *

* * *

미야타 이토가 맥시멈 노이즈에 근무한 지도 어언 30년. 젊은 시절을 모두 갈아 넣은 덕분인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알렌과 만나게 된 건 필연.

어느 날(Sol) 갑자기 나타난 서자는 열성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정말로 자신이 제 동생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듯.

애석하게도 콜른이 제 친자식인 도비에게 지극정성이라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

그렇기에, 이토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이라는 걸 단번에 간파했다. 그리고 그게 어떠한 파국으로 이어질지도.

그래서 먼저 거래를 제안했다.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노먼에게 진상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온 가온으로서는 흥이 식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콜른이 지병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틈을 타 유일한 적자인 도비를 죽이고 맥시멈 노이즈를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세운 거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잡음은 이토가 잠재우고,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회장이 된 알렌은 그에게 다시 부회장 자리를 약속하고―

"정말이지 시답잖네."

두 사람의 야망은 인정하는 바이나, 한 가지 결함이 있었다.

"콜른 회장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하려고?"

"...."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이토였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을 모를 가온이 아니었다. 아마 도비처럼 처리할 생각이었을 터.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요란스럽게 진행한 이유는 뭐야?"

"맥시멈 노이즈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이 저지른 것처럼 보여야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조용히 없애면 들킨다는 건가."

그럴듯했다.

회장인 콜른이 시의적절하게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새삼스럽지만 그의 신변에 변화가 생기면서 많은 화학 작용이 일어났다. 묘한 위화감에 휩싸이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상념은 길어지지 못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찌그러진 경호원들을 힐끗 쳐다본 이토가 나지막이 물어서였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지?"

"정해져 있잖아."

디바이스를 검지로 가리킨 가온이 고갯짓했다.

"불러."

* * *

이토에게서 도비를 척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알렌은 곧장 그가 거주하는 타워팰리스로 향했다. 누군가 도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상황이 역전될 것 같아 걱정스러웠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우는 기우에서 그쳤다.

앓던 이가 빠진 듯한 기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긴 알렌은 멈칫했다. 안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너는?"

낯설지만, 분명 저택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늦었잖아. 시간 약속은 꼭 지키라고 부모님이 가르쳐 주지 않든? 아, 너는 없지."

태연하게 타박하는 사내의 발밑에 주검이 된 이토의 모습이 보였다. 뒷걸음질 친 알렌의 눈이 허공을 헤엄쳤다.

디바이스를 조작하려는 게 뻔히 보여, 가온은 넌지시 경고했다.

"공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집 안은 이미 전자기 펄스 축제가 벌어진 뒤였다. 노먼에게서 빌린 물건 중 하나가 열일한 결과.

"그렇다고 뛰쳐나가도 죽어."

보란 듯이 폴딩 나이프를 다루는 가온의 모습에 알렌은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이 개자식이...."

"마지막까지 기개는 있다 이거지? 나쁘지 않아."

가온은 근처에 있는 의자를 하나 걷어찼다. 주르륵 밀려난 의자는 알렌의 발치에 가서 섰다.

"뭐 해, 앉아."

묫자리로의 초대.

하지만 알렌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지못해 앉은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도비에게 고용된 녀석이지?"

"그렇다면?"

"원하는 걸 말해, 무엇이든지 들어줄 테니까. 어차피 사회생활도 못 하는 녀석에게 받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잖아."

"지금 회유하는 거야?"

"너도 그걸 바라서 뜸을 들이는 걸 텐데."

탄성을 터트린 가온이 다가오자 알렌은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그래, 결국 해결사 나부랭이는 돈으로 조종할 수 있는 노예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알렌의 편견과 다르게, 그의 손에 폴딩 나이프를 쥐여 준 가온은 무심하게 선고를 내렸다.

"자살해, 그러면 네 패륜적인 행각은 영원히 묻어 줄게. 어때? 나쁘지 않지?"

"이 버러지 새끼가."

"왜, 나는 네가 말한 대로 원하는 걸 말했을 뿐이라고?"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격노한 알렌이 그대로 폴딩 나이프를 빼앗아 휘둘렀으나, 가온은 그의 팔을 꺾는 것으로 그 뜻을 제지했다.

속절없이 무릎을 꿇은 알렌은 토해 내듯이 외쳤다.

"너도 아버지처럼 무능한 그 녀석이 좋은 거냐. 대체 내가 그 녀석보다 못한 게 뭔데?"

"적어도 심성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

"하, 지랄. 입장이 바뀌면 녀석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을 텐데?"

"뭐, 개인의 착각은 자유니까."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으면 형제끼리 피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터. 협의를 거치기도 전에 처리해야겠다는 발상을 먼저 떠올린 건 알렌이었다.

갱생의 여지가 없었다.

"여태껏 내키는 대로 살아왔을 테지만, 이제는 죗값을 치러야지."

"그래서 죽이겠다고?"

그것도 방법이겠으나, 알렌에게는 이토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콜른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러면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 주지."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행방을 모르는구나?"

키득키득, 낮게 웃은 알렌이 건들거렸다.

"말하지 못하겠다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맥시멈 노이즈를 가지지 못한다면 부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대로 콜른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회사는 붕 뜨게 될 테니까.

나머지는 승냥이들이 알아서 물어뜯을 터.

그리고―

"내가 지정한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공찰에 신고하도록 지시했어. 그러면 네까짓 놈이 잡히는 건 순식간이겠지.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말이야."

돌연, 소녀가 그리워지는 가온이었다.

그녀가 있다면 입씨름할 것도 없이 디바이스의 정보를 훑어볼 수 있었을 테니까.

"꼬라지를 보니까 그럴듯한 튜너도 못 구했나 보네. 그게 네 한계라는 거야."

한계는 아니다. 다만―

"내가 고민한 건 네가 혹시라도 말하기 전에 망가질까 봐 그런 거였어."

"뭐...?"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재벌 3세가 대상이었던가.

"긴장한 것 같은데 일단 목부터 축이고 시작할까?"

물 한 컵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백 컵은 독이 된다. 수분 중독이란 그만큼 무서웠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거다.

"물은 답을 알고 있으니까."

* * *

밖으로 나오니, 주차장에 대기 중인 세라가 보였다. 노먼에게 정보를 얻은 직후, 말도 없이 달려와서 그런지 궁금한 게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를테면 저 위에 벌어진 참상이라든지, 아니면 시드 콜로니 바깥에서 벌어진 전투라든지.

물론 물어본다고 해도 가온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미스 시리."

"용건은 모두 마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알렌 도련님은 왜 데려오신 겁니까?"

기절한 알렌을 힐끗 쳐다본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부가 다른 때와 다르게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포박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세라였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가온도 비슷한 처지였다면 척살했을 테니.

"없애버리는 게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법적인 처벌이라도 받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거야 콜른 회장에게 달렸겠지."

"하지만 회장님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그 회장을 만나러 갈 예정이니까."

* * *

31구역 끄트머리에 위치한 콜리 클리닉.

그곳은 알렌이 사적인 자금을 운용해 세운 개인 병원이었다. 개원한 지 몇 년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진료한 경우는 전무.

허울뿐인 간판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고용된 인원도 안드로이드 둘이 전부.

"이래서 찾지 못했던 거였군요."

"글쎄, 노력하지 않아도 너는 알게 되었을걸."

"그게 무슨...."

반문하는 세라를 뒤로한 채, 내부로 들어간 가온은 무덤덤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규모는 컸으나, 병실 자체는 몇 개 없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테라리엄이었으니.

콜른이 머물고 있는 곳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니마가 비치된 병실은 한 곳이 유일했던 거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내밀어 그 안을 확인하니 여태껏 행방이 묘연했던 이의 얼굴이 보였다.

도비가 조금 더 성숙해진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맥시멈 노이즈의 회장, 콜른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지 곤히 자고 있었다.

디스플레이를 통해 콜른의 상태를 확인한 세라가 입을 열었다.

"의사를 수배해야 할까요?"

"왜?"

"그야 회장님이 일어나지 못하시니까요.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부르지 않아도 돼. 금방 깨울 수 있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알 것 같았다.

죽어 본 사람에게 죽은 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마의 덮개를 짚은 가온은 그대로 잡아 뜯었다.

콰지직.

경고음이 울리면서 아니마가 작동을 중지한 건 한순간.

"회장님에게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화들짝 놀란 세라가 소리쳤지만, 그 염려가 무색하게 콜른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눈치챘나 보군."

"연기를 오죽 못 해야지. 모르는 척해 주기도 곤란해."

"그렇게까지 형편없었나?"

가온의 말을 맞받아친 콜른이 기침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세라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기는. 지병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 그저 쉬고 있었을 뿐이라는 거지. 아마 다른 라인을 통해 보고를 받고 있었을걸?"

"눈썰미가 대단하군."

"간단한 추론이야."

알렌과 이토가 작당한 순간, 쓰러진다?

너무나 극적이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형제의 난처럼 보기 흔한 게 바로 후계자의 본심을 보기 위한 우두머리의 연극이 아니던가.

"기껏 구한 아들이 못마땅했나 봐?"

"그렇다기보다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을 품게 된 게 원인이라고 해야겠지."

콜른은 자신의 사후에도 도비가 평화롭게 살길 바랐을 터. 알렌을 입양한 것도 그러한 연유일 공산이 컸다. 말하자면 제2의 보호자.

하지만 당초의 계획과 달라졌으니―

"언젠가 터질 문제라면 그걸 기반으로 삼아 서열 정리를 하는 게 낫다는 건가."

"나는 기회를 주었네."

"쓰러진 척 뒤로 퇴장하면서 말이지."

냉정하지만 제삼자가 뭐라 두둔할 수 없는 주제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세라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심하셨습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해놓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여기 계신 가온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도비 도련님은...."

세라를 막아선 가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콜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032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