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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032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만

* * *

"아마 알렌과 이토, 두 사람이 행동에 나서자마자 빠르게 진압하는 게 본래 계획이었을 거야. 안 그래?"

"그것도 눈치챘나?"

저택에서 빠져나왔을 때, 필요 이상으로 인원이 많다는 건 파악이 끝난 뒤였다.

그때야 사방에서 달라붙어서 모두 노먼의 동료인 줄 알았지만 말이다.

"누가 뛰쳐나가지만 않았다면 조용히 끝났을 텐데 말이야."

"거, 미안하게 됐네."

"그래도 안심이 되는군. 도비 그 아이가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귄 것 같아서. 원안과 달라졌지만,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하지."

거기까지 말한 콜른이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멎지 않는 숨소리.

콜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하자, 세라는 얼른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지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나 보네."

"관리만 잘하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네."

"설마 도비도 영향을 받은 거야?"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게 슬프군."

유전병이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가족력이 있는.

하지만 콜른은 비교적 양호한 것에 비해, 도비는 바깥에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신세였다.

"왜 도비의 유전자를 조작하지 않은 거지?"

이는, 도비와 만난 후로 줄곧 품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제4세대 유전자 가위 '프라임 에디터'의 뒤를 이어 발견된 제5세대 유전자 가위, '가이우스'는 이종 접합까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현대 사회에 보급된 유전자 조작 기술은 연금술에 비견된다 할 수 있었다.

물론 난도와 비용이 비례하지만 콜른은 대기업의 총수였다. 그가 바라서 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 않은 게 아니네. 했기에 그런 거지."

"해서 그런 거라고?"

"인간이 가진 유전자 풀에는 한계가 있다는 건 자네도 알 테지?"

"대략은."

가령, 하늘을 날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유전자 조작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면 자연스레 조류와 비슷한 구조를 갖추게 되어 있었다.

비상하기 쉽게 골밀도가 줄어들고, 상반신의 근밀도만 비대해지는 진화 과정을 거치는 거다.

인간의 특징을 간직한 채로 변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날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가 아니었으니.

이러한 폐해는 가장 흔하게 치러지는 근골 강화에서도 나타났다.

높아진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인의 배에 달하는 열량을 섭취해야만 했으니까.

기술 수준이 농경 사회에서 멈췄다면, 하루 종일 식사만 해야겠으나 식품공학이 승리한 현대 사회에서는 칼로리 바를 섭취하는 것으로 끝.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은 거지, 생물로서의 한계를 탈피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도비도 비슷한 경우네."

"대체 뭘 노렸던 거지? 강화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이라도 만들고 싶었던 거야?"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저 도비가 평범하게 태어나길 바랐을 뿐이네."

"마치 천재적인 능력 하나를 거세한 것처럼 들리는데."

"틀리지 않은 말이군. 그래, 앞으로도 그 아이와 함께할 테니 들을 권리 정도는 있겠지."

호흡을 정돈한 콜른은 결심했다는 듯 가온과 눈을 마주쳤다.

"자네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한 종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갑자기 터무니없는 질문이네."

태연하게 답하면서도 가온은 턱을 긁적였다. 당장 그부터가 불로불사이지 않던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인류의 진화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되었네."

어쩐지 괄시할 수 없는 말이 콜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건 가온이 수없이 추구했던 해답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온 드라이브를 발명했던 린데르만 박사, 인공지능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사벨라 박사. 모두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아니, 그 정도 되는 인물이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선천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그런 능력 말이네."

"이능이라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래. 이능 발현 개체, 혹은 메타 휴먼. 우리들은 그렇게 칭해지고 있네."

설명으로 추측하건대, 메타 휴먼의 메타(Meta)는 초월했다는 뜻의 메타일 터.

"대단히 재미있는 소리네.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지."

흥미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가온의 가슴은 내심 두근거렸다.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던 동류가, 어쩌면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거짓이 아니라 엄연한 진실이네. 한때 나 또한 그러한 부류였으니까."

"그래, 있다고 치자고. 가문 대대로 유전되는 어떠한 이능이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부작용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없애야 할 이유는 없잖아?"

정말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다면 없앨 게 아니라 보존하고 유지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런 가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콜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라고 무리하게 유전자를 조작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성 두통을 동반한 해리성 정체 장애. 그리고 원인 불명의 신경쇠약에 시달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확실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면 도전해 볼 법도 해. 그런데 왜 도비는 실패한 거야?"

콜른이라는 성공 사례가 있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메타 휴먼의 도움을 빌린 걸로 알고 있네."

"그러면...."

다시 구하면 되지 않냐고 물으려던 가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바로 전에 들었던 참이었다.

"해리성 정체 장애."

"그래, 내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지, 유명을 달리하실 때까지도."

안타깝게도 도비는 불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달리 그를 아끼는 것도 어쩌면 죄책감에서 기인한 방어 기제일지도 몰랐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걸 보면 원하는 게 있겠지?"

"말이 통해서 좋군. 그래, 내가 자네에게 허심탄회하게 사정을 늘어놓은 건 한 가지 의뢰를 하기 위함이네."

백가온.

세라의 보고 속의 그는 말하는 맹수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보고 들은 게 맞다면 유명한 해결사들과 견주어도 될 정도.

그리고 도비의 친구이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한 적임자는 없을 터.

"도비를 치료할 수 있게 메타 휴먼을 찾아 주게."

"기한은?"

"제한을 두지 않겠네."

"장담은 못 해."

메타 휴먼.

삼백 년 넘게 살아온 가온도 처음 들어 본 단어였다. 보나 마나 시정부 혹은 그 이상의 집단에서 몸소 정보를 통제하고 있을 터.

"당장 어떻게 해 주라는 게 아니네. 그저 자네만 한 해결사라면 언젠가 그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을 테니, 기억해 두라는 것뿐."

"아무렇지도 않게 중책을 맡기네. 일단 접수했어."

도비가 누워만 있는 건 가온으로서도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늦든 빠르든 접촉해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 기회인 거다.

"그리고 알렌은 미스 시리에게서 받아 가라고. 조용히 정리하려면 녀석이 필요할 테니까."

"시리?"

콜른이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으나, 가온은 손을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 난 이만 가 볼게. 뒤처리는 알아서 하라고."

* * *

맥시멈 노이즈의 기술개발 총책임자, 알렌 하워드가 모든 직책을 잃고 지엄한 사법 체계의 처벌을 받은 건 얼마 뒤.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미야타 이토의 죽음은 가십지에서나마 한 줄 찾아볼 수 있었다.

대기업의 대들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으나, 이에 대해 심층 보도하는 곳은 없었다.

시드 콜로니에는 이 외에도 다뤄야 할 사건 사고가 너무나 많았던 거다.

당사자인 도비에게는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바깥에서 보자면 하잘것없는 해프닝 정도.

집안 단속의 연장선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콜른이 직접 나선 거다. 일부는 일련의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세상의 진실 또한 이런 식으로 묻히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여태 메타 휴먼에 대한 사실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걱정할 건 아닌가.'

애당초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곪으면 곪은 대로, 터지면 터진 대로 돌아가는 게 세상사였으니.

집중해야 할 건 앞으로의 일.

그래, 불로불사라는 걸 감추기 위해 기술적인 근거를 모으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그건 도비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정말 고마워, 신신. 덕분에 세라도 나도 무사할 수 있었어."

"감사는 됐어. 그만한 돈을 받고 한 거니까."

"이번 일로 깨달은 게 많아. 아니, 잊고 있었다는 표현이 올바르겠지. 내 아버지가 대기업의 회장이라고 해도 결국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로스트 사가로 복귀한 도비는 어딘가 모르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각오는 대견하다만 별수 없잖아."

"이런 몸이라도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잖아?"

"설마...."

"다이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슬롯도 삽입했어. 다행히 거부 반응은 적더라고."

제 두뇌를 연산 장치로 활용해, 휘몰아치는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는 무리, 다이버.

타인이 숨기고 싶은 비밀을 엿본다는 건 위기와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행동이었다. 재벌 3세가 함부로 뛰어들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콜른 회장이 용케도 허락했네."

"한 번도 바깥에 나가 본 적 없어서 그런지 차라리 이쪽이 편하더라고. 로스트 사가에 접속해 있을 때랑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쉽지만 다이버는 재능이 중요한 직종이었다.

프로텍트를 해제하고, 우회 루트를 설계하고, 데이터를 해독하는 건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통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비의 감상이 한순간의 망상으로 그칠지, 향후 지속될 진실로 변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무리하지 마."

콜른의 말이 맞다면 도비는 벼랑 끝에 걸려 있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육체적인 질환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까지 생겨나면 걷잡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나는 언제나 로스트 사가가 우선이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만."

위기를 겪었다고 해도 도비는 도비라는 걸까.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지금을 즐기자고.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 * *

로스트 사가에서 로그아웃한 가온은 커넥터를 벗었다. 도비가 잘 지내는 것도 확인했겠다, 이제 개인적인 용무를 볼 차례였다.

이번 의뢰는 복잡하게 얽힌 탓에 빙글빙글 돌아서 가야 했지만, 그래도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비와 세라, 그리고 콜른까지, 맞물린 의뢰인이 다양했던 거다.

덕분에 효율 또한 상당했다. 예정된 계획을 몇 단계나 건너뛸 수 있게 된 건 당연지사.

그때, 디바이스에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보낸 곳은 캡슐 호텔.

내용을 보니 입구에서 세라라는 안드로이드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호출에 밖으로 나가니 청녹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오셨군요."

"미스 시리."

033 실수하지 않아

* * *

"조금 더 번듯한 곳에서 머무르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박봉에 프리랜서라 말이야. 그나저나 여기에는 어쩐 일이야?"

그 물음에 답하듯이 두 팔을 벌린 세라는 치마 밑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부로 가온 님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날?"

"그리고 이건 그날(Sol) 가온 님께서 놓고 간 잔금입니다."

디바이스를 통해 다시금 적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

"의뢰금이나 착수금은 아니지?"

"스프린터를 비롯해 가온 님께서 처리하신 이들의 슬롯과 유닛을 처분하고 남은 금액입니다. 물론 수수료는 제했지만요."

"그런 서비스까지 해 준다고? 중개업자 못지않잖아."

"모든 건 회장님의 호의입니다, 감사하시길."

"날 감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가온 님을요?"

"한마디를 지지 않는군."

이러한 조치는 메타 휴먼에 대해 잊지 말라는 콜른의 배려이자 경고일 터.

뭐, 개인적인 감상은 차치하더라도 대기업의 비호가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제 개인 연락처입니다. 필요할 때 부르면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도와드리죠."

동시에, 디바이스로 세라의 정보가 들어왔다.

[미스 시리]로 그녀의 번호를 저장하기 무섭게, 가온의 귓가에 야박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지정 업무 시간 외에는 연락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현재로서는 도비 도련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뿐이니까요."

"도끼병이라고 알아?"

"유감스럽게도 안드로이드에게 그러한 기능은 없습니다. 모든 건 가온 님의 착각이라는 거죠."

"어련하시겠어."

거기까지 말한 가온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럼 여기까지 온 김에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뭡니까?"

"집 좀 볼 줄 알아?"

* * *

시드 콜로니의 2구역은 주요 인프라가 집중된 요충지였다. 모든 하이퍼루프 노선이 교차하는 건 물론이고, 각종 메가콥의 본사가 위치해 있었다.

화성에서 가장 융성한 거리.

그 한구석에 비밀 거점을 마련한 진건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청백색 석양이 지는 중이었다.

주황빛인 지구와 다르게.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후에 태어난지라 진건에게는 어느 게 진정한 석양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른 행성에 왔다는 걸 알려주는 지표로써 인지할 뿐.

옆에 서 있던 팀원 이라이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팀장님은 이곳에 양후가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녀가 줄곧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구상이었다. 본디 진건의 결정에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진건이 나지막이 물었다.

"항명하는 겁니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돔과 다르게 콜로니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제한적이니까요."

화성방위군이 대표적인 예였다.

화성을 개척할 당시, 조직된 유일무이한 군사 조직.

인류는 과거의 과오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그들만을 정규군으로 인정하고, 화성의 명운이 걸린 사건을 처리할 때만 무력을 투사하도록 그 활동 영역을 제한했다.

어떠한 콜로니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이지만 군비는 시정부와 메가콥 양쪽에서 출자해, 서로 분담하는 형태였다.

군권은 시정부에 있지만, 인사는 메가콥에 있는 공동 운영 체제.

콜로니 또한 그러했다.

돔은 인류 최후의 방주였기에, 구세력의 후손인 시정부가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으나 화성은 아니었다.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던 거다.

더구나 개척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시정부가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바 메가콥과의 공조는 필수 불가결했다.

그 때문에 시정부에서 전권을 위임한 대리인과 메가콥의 수장들로 이루어진 '이사회'가 콜로니의 대소사를 주관했다.

당장 지구에 있는 시정부보다 화성에 뿌리내린 메가콥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자아낸 문화와 관습.

No.1 돔에서 나고 자란 이라이에게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설령 양후의 뒤를 밟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저희들만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비상 재해 대책반에게 양후는 살아 있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본디 그들에게 포착된 감염자는 근시일 내로 처리되었다.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던 거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일거수일투족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후는 보란 듯이 감시망을 빠져나갔다.

그 기량은 시정부에서 배출하는 특수 요원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할 정도.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팀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진건.

비상 재해 대책반에서도 특히나 두각을 드러낸 요원. 수완도 수완이지만, 그의 진가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철저한 준비가 없다면 이번에도 또 놓칠 겁니다."

반드시 양후를 추살해야 하는 3팀과 다르게 양후는 구태여 이런 사정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 건에 관해서는 이미 약속을 받았습니다. 확실한 단서만 잡는다면 반장님께서 직접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로."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겠군요."

기립한 채로 고개를 끄덕인 이라이가 주위를 둘러본 건 그때.

"그러고 보니 휘랑이 보이지 않는군요."

3팀에서 유일한 다이버.

언제나 건들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오히려 어색했다.

"그라면 얼음을 가득 채운 욕조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슬롯도 기계 장치인 만큼 무리한 운용은 과열을 동반했다. 특히나 두뇌에 칩을 박아넣는 일이 많은 다이버에게는 일상다반사.

그래서인지 휘랑은 네트워크 속을 유영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명령만 없다면.

"무언가 조사하신 거군요."

진건이 고갯짓한 것과 이라이의 디바이스에 정보가 쏟아진 건 거의 동시.

"양후가 No.3 돔에서 사라진 뒤로 시드 콜로니에 일어난 소란과 소동을 한 줄도 빠짐없이 정리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이 중에 양후가 개입한 사건이 있을 거라 예상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지만, 꼬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테죠."

No.3 돔에서도 '신'이라는 해결사로 활동한 양후였다.

디바이스를 얻었다고 해도 어차피 그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그러면 다음 신분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기초적인 추론일뿐더러,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은거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진건으로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구미가 당겼다. 탑승객 명단에서 패러사이트가 될 만한 재목이 있다면 바로 갱신될 테니까.

"팀장님께서 따로 눈여겨보신 케이스라도 있습니까?"

"없을 리가 없죠."

진건이 탁상을 두드리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스프린터, 노먼 샌더스가 의뢰를 수행하는 중에 사망한 사건.

상대가 무명으로 밝혀져, 업계에서도 진실을 가리느라 갑론을박이 오가는 중이었다.

"시작은 이걸로 할 겁니다."

* * *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가온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여유가 될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방랑벽에서 기인한 취미였다. 해결사가 된 것도 그러한 천성이 일부분 영향을 미친 결과이리라.

새로운 경험을 갈망했다고 해야 하나.

전역한 뒤, 포탈라궁을 방문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 건물.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이자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장소는 가온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보여 주기 위해 통제한 공간은 무료할 뿐이었으니.

다른 관광객은 가지 않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

돌아가는 길도 잃어버릴 즈음,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에 도착한 가온은 그곳에서 운명을 만날 수 있었다.

정신 수양에 열중하는 다른 라마승들과 다르게 붉은 승복을 걸친 노인은 그 외견과 어울리지 않게 육체 수련에 힘쓰고 있었던 거다.

서걱.

노인의 목검이 가속한 순간, 떨어지는 나뭇잎이 둘로 갈라졌다.

그것도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언뜻 두 개로 분열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만 성공해도 기인이라 자칭할 수 있건만, 노인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바람에 흩날리는 잎새를 모조리 양단했다.

문외한인 가온이 보기엔 감히 형언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노인이 펼친 검술에는 역사가 느껴졌다.

배우고 싶다.

그 본능적인 가슴 속 울림에 가온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과 대화가 성사되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었다.

티베트어도, 중국어도 모르는 가온으로서는 스마트폰의 번역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런데도 노인은 기껍게 외지인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가온에게는 그 호의에 부응할 수 있는 열의가 있었다.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건 한순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은 사부가 되어, 한 사람은 제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만났을 때부터 노쇠한 기색이 역력한 노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나빠지는 걸 가온이 모를 리 없었다.

수명 그리고 죽음.

그건 아무리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고 해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어느 날, 노인은 포탈라궁에서도 거리가 먼 산속으로 가온을 초대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공터에 놓인 건 집채만 한 바위 하나.

여느 때처럼 목검을 들어 올린 노인은 일격에 그 지물을 분쇄했다.

그 앞에서 가온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도 옮기지 못할 것 같은 돌덩어리가 한낱 노인의 기예에 굴복한 거다.

"기껏 데려왔는데 이런 것밖에 보여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그때 당시의 가온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유언을 남긴 노인이 편안한 얼굴로 내세를 떠난 건 그로부터 이틀 뒤.

포탈라궁에서 파견된 라마승들은 기다렸다는 듯 노인을 짊어지고 장례를 준비했다.

티베트에서 치러지는 장례는 대부분 조장이었다. 독수리나 까마귀 같은 조류에게 시신의 처리를 맡기는 장례 방식.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지극히 야만적이지만, 가온은 떠나지 않고 노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노인에게 친척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와 함께한 건 보름 남짓이지만 남 같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유골을 수습한 라마승이 다가와 호두알만큼이나 자그마한 구체를 건넸을 때 반사적으로 받아 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가온은 그게 노인의 육신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온기가 그걸 증명했다.

본디 인간에게는 없는 신체 기관.

그것은 내단.

노인이 한평생 갈고 닦은 결실이었다.

가온은 그걸 보고 어떠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과학 기술에 심취해 인류가 잊고 있을 수도 있는 진화의 한 갈래를. 본디 생명으로서 온당하게 지녀야 했던 강함을.

인류는 저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기 전에, 위대한 발견을 해 버렸다.

고뇌를 버리고 편리를 선택하게 된 거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 나는―

"실수하지 않아."

034 쓰레기

* * *

* * *

"후우."

가검을 내려놓은 가온은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빛바랜 추억.

이 시대에 무술이란 효율적인 몸동작에 불과했다.

습득하는 것도 간편. 디바이스로 해당 무술을 다운로드하면 끝이었다. 반복 숙달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그래도 과정이 축약된 건 입 아프게 거론할 것도 없었다.

이토록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무예이지만, 그 끝을 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거기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다고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그걸 이룰 수명이 부족했던 거다.

재능도 아니고, 환경도 아닌 수명이.

하지만 가온에게는 차고 넘치는 게 수명이었다.

본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

남들은 허황한 목표라 할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노인을 통해 그 편린을 맛보았다.

가온이 익힌 고류 무술은 중국 최초의 삼장법사라 일컬어지는 쿠마라지바가 소수의 라마승에게 전파한 무예 중 하나였다.

태고의 흔적이지만 내륙에서 완성된 기술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를 타고 우연히 티베트까지 들어왔을 뿐.

그 본원은 인도에 있었다.

창시자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래, 가온이 전수받은 건 석가모니가 열반 전 개량한 무예였다.

하지만 아무리 지닌 이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구전되면서 본래의 형태와 이름을 잃어버린 탓에 남은 건 그 찌꺼기뿐이었다.

애석하게도 가온이 구사하는 검술 또한 아류라 할 수 있었다.

노인에게서 배운 건 기본 동작과 응용 동작 몇 개.

회전이라는 개념을 접목한 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맞는지도 의문스러웠다.

바위를 양단했을 당시, 노인은 회전하지 않았던 거다. 물론 그때 당시의 자신은 어렸을뿐더러 미숙했으니 보고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 과정을 밝혀내는 게 앞으로의 과제일 터.

그리고―

'메타 휴먼.'

지난날, 콜른에게 들었던 비밀은 가온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확실히 그를 뒤쫓는 밀레니엄 코드나 시정부의 정열은 비합리적인 데가 있었다.

그들의 권위에 도전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백, 수천억을 들여 추격할 정도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후가 아닌 '메타 휴먼'을 쫓기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불로불사라는 사실까지 밝혀진 건 아니겠지만, 비정상적인 재생 능력을 가졌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 중일 터.

아니―

'검술에 대한 것도 분석했으려나.'

어찌 보면 이번에 검을 구하지 못했던 건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양후와의 공통분모가 발견된다면 기껏 얻은 신분이 불쏘시개가 될 수 있으니까.

진정한 불로불사가 되기 위해서는 장대한 서사가 필요했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의심하지 않을 만큼 장대한 서사가.

그 인과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건 당연지사.

향후 활동도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인 가온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 * *

장비를 넣을 수 있는 비밀 수납공간과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는 지하. 그리고 수련할 마당이 있어야 한다는 악조건 속에서도 세라는 기어코 그에 해당하는 매물을 찾아냈다.

32구역 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집 하나가 그 증거였다.

물론 그 노력에 대한 대가로 가온 또한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나쁘지 않아."

"뭐가 나쁘지 않다는 겁니까."

"집이."

"이 몰골을 보고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군요."

세라가 보란 듯이 검지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지적대로 탁자 위에는 일회용 용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 가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도시락을 개봉했다.

내용물은 무색무취한 젤라틴 덩어리. 그 안에 존재하는 건 균형 잡힌 영양소뿐이었다.

도시락에 동봉된 패치를 꺼낸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혓바닥에 붙였다. 패치가 사르르 녹은 것과 디바이스에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된 건 거의 동시.

아무런 맛도 없어야 할 젤라틴 덩어리가 일품 불고기 덮밥으로 일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이렇게나 기름진 식단이 단돈 800피아.

그야말로 식품공학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듣고 계십니까?"

"어, 듣고 있다고."

수련에 박차를 가하느라 청소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취하는 남자의 삶이란 대부분이 이런 게 아니겠는가.

야생을 거니는 짐승처럼 자유로운 생활.

어떠한 면에서는 로망이라 할 수 있었다.

전담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돌연 들이닥친 세라가 가사도우미를 자청하면서부터는 멀어졌지만 말이다.

적어도 주 3회, 출장 방문하는 세라 덕분에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가온 님에게 청소라는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군요."

가온이 아무렇게나 던진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은 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괜찮아서 안 한 건데?"

"쓰레기."

"어이, 간과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가온이 나지막이 항의했지만, 세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나타난 건 얼마 뒤.

이번에 세라가 들고 온 건 빨래 바구니가 아니라 골판지 박스였다.

"택배 왔습니다."

"빨리 왔네."

구입한 건 별거 아니었다. 옷가지 몇 벌과 약품 몇 가지 정도.

도검류 통합 관리 보관함, '블랙스미스'도 함께 구매하고 싶었으나 예산이 부족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잡동사니는 많아도 보호 장비는 없군요. 해결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일 텐데요."

세라가 의문을 표하고 나서야 가온은 제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실,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불로불사인 그에게 보호 장비는 있으나 마나 했다. 심대한 타격을 받아도 육신은 곧바로 재생했으니까.

부서지는 건 보호 장비뿐.

딱 잘라 말해 돈 낭비였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가온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필요하네."

"다른 것도 아니고 목숨과 직결된 문제를 잊는다고요? 벌써부터 건망증입니까. 서브 브레인이라도 삽입하는 게?"

"그러잖아도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을까 해."

"남은 돈이 없으실 텐데요?"

타인의 잔고까지 알고 싶지 않은 세라였으나, 가온이 대출 상품에 서명한 걸 본 후였다.

"너는 있잖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가온 님에게 의뢰하느라 전 재산을 날려 버렸다는 걸."

"아니, 직장인이잖아. 월급 안 받아?"

뻔뻔스러운 물음에 세라는 고개를 돌렸다.

"쓰레기."

* * *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39구역에 도착한 가온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빛바랜 네온사인이었다.

바로 앞에 증강 현실로 구현된 안내판도 있었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연신 지직거리기만 했다.

척 보기에도 낙후된 지역.

근방에 하이퍼루프 정차역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걸어서만 올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어떠한 목적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골목길로 들어가자 코끝으로 익숙한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서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메아리친 건 그때.

누군가의 비명처럼도, 기계 장치의 소음처럼도 들렸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으스스하기 짝이 없지만, 가온에게는 아늑하기만 했다. 법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만 비로소 갖게 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전신을 감쌌던 거다.

이러나저러나 일평생 음지만 돌아다닌 그였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무대가 달라졌다고 하나 축적된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메타 휴먼.'

새삼스레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겠다고 결심한 원인이기도 했다.

거창한 슬롯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필요한 건 호르몬 조절기 정도.

본래 뇌하수체의 결함을 보조하기 위해 개발된 기기를 개조해, 항시 마약을 섭취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를 응용하면 일일이 뉴클레이즈를 찾아서 섭취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질 터.

외부에 유전자 정보를 남기지만 않아도 추적의 대부분은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합법적으로 청할 수 없는 영역. 불법 슬롯만이 답이었다.

세라, 아니 맥시멈 노이즈의 연줄을 이용하면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될 테지만, 대기업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 들 생각은 없었다.

그게 다 약점이었던 거다.

언젠가 목줄이 되어 돌아올.

"어디 보자."

이른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특이한 게 있다면 혼자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

안타깝지만 39구역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인터넷을 뒤적거려도 나오는 건 불분명한 지명뿐.

이렇다 할 간판도 없을뿐더러, 표지판도 없었다.

온라인에서 공공연하게 떠들 내용은 없을 테니, 알게 모르게 오프라인에서 공유하는 게 전부일 터.

일단 관계자가 되어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지에 스며드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온이 경험한 바로는 몸소 부딪치는 게 제일이었다.

그래서 티가 나게 기웃거리며, 일부러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담아.

그러한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순찰 드론도 사라지고 인적도 드물어질 때 즈음, 등 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거기 코트, 멈춰."

앞길을 가로막은 건 세 사람이었다.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여러 번 받은 건지 몸 곳곳에 이질적인 금속이 탁한 빛을 토해냈다.

얼굴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대표로 나와 입을 연 건 그때.

"못 보던 얼굴이네?"

"그래? 나는 익숙한데."

스스럼없는 가온의 반응에 멈칫한 남자였지만, 행색을 보고는 긴장을 풀었다. 깨끗한 사지와 멀끔한 얼굴. 때 묻지 않은 인상이 강했던 거다.

종종 마주치는 인간 군상이기도 했다.

"해결사 지망생?"

"무명이니까 일단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 이 새끼 꼴통이네."

남자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호응에 힘을 얻기라도 한 듯 남자는 조금 더 거리를 좁히며 금속 치아를 드러냈다.

"그래서 체험 학습이라도 왔냐? 아, 나는 앞으로 이런 곳에서 의뢰를 처리해야 하는구나, 하고?"

"아니, 익숙하다고 했잖아."

"내가 보기에는 길을 잃고 헤맨 것처럼 보였는데? 크크, 이 바닥도 신기하단 말이야. 너 같은 녀석이 분기마다 쏟아지는 걸 보면."

"그건 나도 똑같은 심정이야. 전에 있던 곳에서도 분리수거에 신경 쓰는 편이었는데 쓰레기가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더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진 건 한순간.

"그게 우리라는 거냐?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내가 자신이 없었다면 구태여 이런 골목까지 들어올 리 없잖아."

"몸에 납탄이 박히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품속에서 권총을 꺼낸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뒤지기 싫으면 있는 거 다 내놔."

* * *

"자, 잘못해씀다."

가온이 살려둔 건 남자뿐이었다. 굳이 입이 셋이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아까 으름장을 놓는 걸 보니까 이곳 토박이 같던데, 맞아?"

"네, 네."

쓰러진 동료를 힐끗 쳐다본 남자는 가온의 말 한마디에도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대답했다.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끝난 건지 보지도 못했다.

그저 허망하게 부러진 손목만이 일전의 싸움을 예상케 했을 뿐.

"근처에 무허가 시술소가 있어? 실력이 좋았으면 하는데."

"그, 그거라면 한 고옷 알고 이씀다."

035 자네는 운이 좋군

* * *

"믿음이 가지 않는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날 곤란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아뉨다, 아님다."

금속 치아가 빠져, 발음이 샜지만 그런데도 남자는 처절하게 제 의사를 표현했다. 전의를 상실한 기색이 역력한지라 가온은 말아쥐었던 주먹을 풀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내해."

* * *

무허가 시술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상보다 살짝 낮은 지대. 오래된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상가의 뒤편. 평범한 주택 단지가 들어섰나 싶지만,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사각지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후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이 구별할 수 없어서 외지인이라면 무심결에 지나갈 장소 선정.

가온의 손에 끌려온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여김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면 아직 영업 중인 것일 터. 남자가 걷다 말고 멈춰 서자, 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 하므꼐 들어가는 검까?"

"그러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걸어."

내부로 들어가자 텔레비전이 연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내용은 오늘의 뉴스. 관심 없는 주제인지라 가온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건 한 노인.

인도계일까, 아니면 남미계일까.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유달리 또렷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외견을 부각시켜 주는 건 이지적인 분위기.

기름때 묻은 아저씨를 예상했는데, 소싯적에 인기 꽤나 있었을 것 같은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이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뗀 건 그때였다.

"누구지?"

"여기에 오면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곳이 아닐세."

"어이, 아니라는데? 거짓말한 거야?"

"아님다, 아님다."

황급히 가온의 뒤편에서 나타난 남자가 어색하게 노인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임다."

"아아, 자네였나. 또 사고를 쳤나 보군."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노인은 짧게 혀를 찼다.

"저런 녀석이라도 추천을 받아 왔다는 건 손님이라는 거겠지. 들어오게."

"그러면 잠시 실례하지."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반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설비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관리하는 건지 빛깔만 바랬을 뿐 녹이 슬거나, 훼손된 부분은 없다시피 했다.

"저기에 앉게."

노인이 고갯짓한 곳에 의료 기기와 결합된 유니트 체어가 있었다. 천장에는 수많은 수술 기기가 설치된 채로 대기 중이었다.

"디바이스에 허가되지 않은 접속이 감지되었다고 뜰걸세. 수락하게."

노인의 말대로 착석하자마자 떠오른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자, 망막 위로 새로운 정보가 투사되었다.

그것은 현재 신체 정보.

본디 엄중하게 관리해야 할 데이터였다.

"호오, 내추럴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는 드문 편이지. 그래서, 첫 시술은 뭘로 할 거지?"

"대단한 자신감인걸. 리퍼닥이라고 해도 다 특기 분야가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사이버네틱스 관련 전문 수술만 하는 의사, '리퍼닥'.

일반적인 의사와 다르게 그들은 기계공학과 생체공학에 정통해야 했다. 인간에게는 존재할 리 없는 이물을 거부 반응 없이 삽입하는 거다.

쌓아야 하는 지식과 연륜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바, 관장하는 분야도 제각각인지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뒷세계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더욱 부각되었다. 수술에 실패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 있었으니까.

미심쩍다는 듯한 가온의 반응에 노인이 답했다.

"아까 그 녀석에게 듣지 않은 건가? 아무거나 잡다하게 다 할 수 있는 게 내 특기라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구태여 알아볼 것도 없었다.

노인이 여태껏 몸 성히 장사하고 있다는 게 그 실력을 방증하는 걸테니.

"이제 보니 내가 귀인을 몰라봤네. 뭐, 길게 말할 것도 없겠네. 호르몬 조절기로 부탁할게."

"희한한 선택이군. 보통 에밀사의 브레인 시리즈를 먼저 삽입하는 편인데 말이야."

"그보다는 호르몬 조절기가 꼭 필요하거든."

"설마 약쟁이는 아니겠지?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하고 싶네만."

"아니라는 건 내 얼굴을 보면 알잖아."

확실히 중독자 특유의 삶에 찌든 인상은 없는지라, 노인은 가타부타 묻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일단 내가 취급하는 건 프로텔 B타입과 륭천 07번이네."

"차이점은?"

"저장 용량이 많은 건 전자고, 흡수가 빠른 게 후자네."

"둘 다 약물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자네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있나?"

"그러면 전자로."

"알았네. 긴장을 풀고 의자에 기대게."

노인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천장에서 수술 로봇이 내려왔다. 실처럼 가느다란 튜브가 혈관과 신경을 타고 누비는 건 한순간.

외과적인 절제 과정 없이 점처럼 자그마한 구멍을 통해 시술과 이식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몸속 깊숙이 파고드는 이질적인 감각을 감상할 틈도 없이―

"끝났네."

노인의 선언이 들려왔다.

"벌써?"

"고작 호르몬 조절기를 이식하는 데 뭘 더 바라는 거지?"

믿기지 않지만, 상완부 안쪽에 약물을 주입하는 장치가 보였다.

동전 크기만 할까.

실제 모양도 그러했다.

디바이스의 내부 인터페이스에 새로운 슬롯을 관리하는 항목이 떠오른 건 한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의문일 지경.

"비용은 전부 현금으로 지급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

디바이스를 통해 거래하는 건 전산상에 기록이 남았다. 노인에게나 가온에게나 그리 달가운 방식은 아니었다.

온갖 것이 가상 세계로 박제되는 세상에 종이 화폐라는 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일탈하고 싶은 고위 계층의 욕망이 그걸 가능케 했다.

제 소임을 다했는데도 아직까지 건재했던 거다.

두 사람이 낙수 효과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

카운터로 나와 계산하고 있자니, 갑작스럽게 정전이 일어났다. 빛 한줄기 통하지 않는 반지하에 먹물이 번지듯 어둠이 퍼져나간 건 그야말로 한순간.

내부에 감도는 건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뿐이었다.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 불빛이 들어왔을 때, 방금 전까지 없었던 덩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한 옷차림.

한껏 발달된 승모근과 그 주위에 장착된 철제 프레임은 갑각을 연상케 했다. 허리춤에는 소드 오프 샷건이 액세서리처럼 대롱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뺨을 가로지르는 갈고리 모양의 문신.

노인에게는 익숙한 얼굴인지 곧장 날이 선 음성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수술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영감이 아직까지 상납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이건 우리, 피어 갱에 대한 반항이라고 봐도 되는 거겠지?"

"골목대장이 되고 싶은 거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주위 사람까지 말려들게 하지 말게."

노인이 운영하는 건 무허가 시술소였다. 해당 지역을 점거한 범죄 조직이 자릿세나 보호비를 요구하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아니, 어떠한 면에서는 관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손님으로 온 가온에게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지라 슬그머니 빠지려고 했으나―

"형님!"

남자의 한마디에 상황이 일변했다.

노인을 노려보던 덩치가 그제야 비로소 남자의 존재를 인식한 거다.

"터그? 손목은 왜 그 모양이지?"

남자 터그의 시선이 가온에게로 향한 순간, 일련의 과정을 이해한 덩치가 으르렁거렸다.

"이 녀석을 이 꼴로 만든 게 너냐?"

"정당방위였다만."

숨결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이민 덩치가 눈알을 부라렸지만, 가온은 무미건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이곳의 룰을 모르는 녀석이 있다니. 너, 초행이군."

"글쎄, 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 같은데."

"잘됐군. 마침 새로 시술한 슬롯을 시험해보고 싶은 참이었거든."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자,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도록 가온이 전신의 근육을 수축한 순간―

"거기까지 하지."

제삼자가 난입했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해 보이는 인상. 큼지막한 두 눈망울에서는 언제라도 눈물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무해한 개구리.

그게 가온이 받은 첫인상이었다.

"너...."

하지만 그와 다르게 덩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

"듣자 하니 영감님에게 상납금을 요구한다고? 그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자네의 그 슬롯도 영감님이 달아 준 걸 텐데? 아니면 용돈이라도 급하게 필요해진 건가, 게스토?"

"우리 피어 갱의 지침이다. 그 누구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는."

"내 지인도 똑같은 의견일까 궁금한데, 불러도 되나?"

지인이라는 단어에 멈칫한 게스토가 등을 돌렸다.

"흥이 식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괜히 구차하게 너와 설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나가는 길에 가온과 눈을 마주친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음에 마주치면 그때가 네 제삿날이다.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처신해라."

"어이구, 무서워라. 지금 지려야 하는 타이밍이지?"

게스토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가운뎃손가락만 내밀며 퇴장했다.

* * *

얼마 뒤, 무허가 시술소 밖으로 나온 가온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수상쩍은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 전 게스토를 물러나게 했던 그 중년 남자였다.

"자네는 운이 좋군."

"뭐가?"

"피어 갱과 마주치고도 살아남았으니까. 처음 와서 모르겠지만 그들은 요 근방에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신흥 세력이라네. 박힌 돌을 빼고 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런지, 잔혹하기 그지없지."

귓속에서 진물이 흐를 정도로 자세한 설명.

하지만 중년인은 만족하지 못한 건지 한 차례 더 덧붙였다.

"더구나 게스토는 간부는 아니더라도 행동대장쯤은 되는 위치에 있지. 한번 물리면 골치가 아픈 유형이네. 때마침 내가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자네도 곤혹스러웠을걸? 그는 벌어들인 수입을 자신에게 전부 투자하는 타입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비장의 패를 하나나 둘쯤은 준비해두고 있었을 테지."

중년인이 가온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건 그때 즈음.

"이런, 내가 너무 주절거렸나 보군. 미안하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건 언제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거든.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가 아직이군. 나는...."

그가 제 이름을 말하려고 했으나―

"내가 스프린터를 죽였다는 걸 알았나 보네."

가온은 선수 쳐 입을 다물게 했다.

번화가에서 만났다면 특정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이곳은 뒷골목. 배신과 음모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모르는 이에게 섣불리 호감을 드러내기 어려운 장소.

그런데도 중년 남자는 친근하게 다가왔다.

말을 거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때문에,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036 그래, 허풍선은 아니라 이거지

* * *

"그래, 너 같은 녀석이 다가올 거라는 건 익히 짐작했어. 오히려 나와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중개업자 아니면 그와 관련된 직종이겠지. 알고 보니 스프린터의 지인이라는 결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정말로 내가 자네와 원한 관계라면 방금 그 말은 삼가야 할 텐데?"

"왜?"

"빈틈을 노릴 테니까."

"그래서 나쁘지 않다고 한 거야. 동전 한 닢까지 정당하게 빼앗을 수 있잖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중년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스프린터를 처리한 이가 누구일까 궁금해서 접근했건만, 이런 성격이었을 줄이야.

하긴, 젊은 나이에 이룬 성취가 있을 테니 거기에 자신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미숙할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밤거리를 헤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뒷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

"세상 혼자 사는군. 하긴, 출신 자체가 묘연하더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마 자네도 그걸 알기에 뒤가 없다는 듯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거겠지만."

애석하게도 가온도 거기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토마스가 살아 있었다면 개요라도 들었을 테지만―

"그걸 너에게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혹시 모르나? 자네에 대해 업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맥시멈 노이즈에서 준비한 인물이라는 설까지 나돌 정도라네. 스프린터와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일지도 모른다고 떠드는 중이고."

"얼굴마담이라는 거네."

드문 일도 아니었다. 제 입맛에 맞는 해결사를 구하는 것보다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니. 그것도 기업의 대외비를 처리해야 한다는 목적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면 착각할 법도 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까."

"바로 그걸세."

아무리 특출난 재능을 지녔다 해도 명성도 없는 무명이 숙련된 해결사를 없앤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사이버네틱스 수술도 처음 같던데. 유전자 조작을 받았다기에는 특유의 체취가 없군. 숨긴 건가? 하긴 요즘에는 탈취제도 잘 나오는 편이니까. 아마 자네 정도 되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일 테지."

"거기까지 하지."

가온의 경고에 중년 남자는 길어지려던 혓바닥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튼 자네가 이 업계에 있을 거라면 중개업자가 필요할 걸세. 하지만 자네 수준에 어울리는 녀석들은 모두 콧대가 높지. 또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고."

맞는 말이었다.

대외적으로 가온은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애송이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라는 소리.

때문에, 입증해야 했다.

지독히도 지루한 과정을 몇 번이고 거쳐서.

"하지만 나는 다르네. 자네만 승낙한다면 바로 기용할 테니까."

"키다리 아저씨를 자청하는 건가. 마음씨 좋은 중개업자는 진작에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는 나름 견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네만."

"일부러 접근한 시점부터 네 진의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온의 눈빛에 서늘하게 가라앉은 건 그 순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빠졌잖아."

"알려줄 수 있겠나?"

"네 능력. 이 거리에서 모르는 중개업자란 유망한 사기꾼과 동의어잖아, 안 그래?"

갑작스러운 시험이었지만, 중년 남자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피어 갱 패거리가 조용히 넘어간 걸 보면 모르겠나. 이거 아무나 못 한다고?"

"그래, 허풍선은 아니라 이거지."

스프린터가 죽었다는 사실은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를 누가 죽였는지는 퍼지지 않게 콜른이 막아 주었다.

그런데도 백가온이라는 인물을 특정했다는 건 독자적인 정보망이 있다는 것.

장담한 대로 의뢰 하나는 확실하게 물어다 줄 것 같았다.

먼저 찾아와 제안하는 능동적인 면도 가산점이었다.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라면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일 테니.

이왕이면 유능한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었다.

더구나 본래의 '목적'을 고려하면 이보다 더한 인선은 없을 터.

"해결사, 백가온이다. 네 예상대로 이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이제야 내 인사를 받아 주는군. 나는 페르난데스 페로마라고 하네. 이런저런 의뢰를 해결사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을 하고 있지."

"그러면 미스터 페페."

"페페? 소개를 하지 않았던가? 내 이름은...."

페르난데스가 항변하려고 했지만 가온은 그게 어쨌냐는 듯 제 할 말부터 꺼내 들었다.

"그것보다 가까운 총포상부터 소개해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이왕이면 네 이름으로 할인이 되는 곳으로. 수중에 돈이 별로 없거든."

"아니, 무슨...."

"그러면 앞장서라고. 우리 중개업자께서는 얼마나 좋은 인맥을 가졌는지 궁금하니까."

구두로 계약했을 뿐이건만, 완전히 제 종을 부리는 듯한 태도였다.

상대를 잘못 잡은 건 아닐까.

벌써부터 걱정되는 페르난데스였다.

* * *

화성으로 진출한 인류는 크게 성장했다. 혹한의 대지에 머물러야 했던 시기의 울분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깨끗한 물에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인구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시드 콜로니의 역사는 곧 팽창의 역사.

한 자릿수에 머물렀던 구역도 지금은 40번대까지 늘어난 상태였다. 방사형으로 퍼진 인프라가 그 성세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급격한 발전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만큼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당시에는 최적의 설계였지만 워낙 빠르게 변화한 탓에 정비할 시기를 놓친 결과.

가온이 도착한 38구역도 그러한 역풍을 맞은 곳이었다. 본디 산업 단지로 조성될 곳이었으나, 인구 폭증에 대처하기 위해 단순 거주로 용도가 변한 거다.

더구나 38구역은 뒷세계로 통하는 39구역과 인접해 있어,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지 않았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땅값이 낮아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도 공간을 넓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핫 플레이스나 다름없었다. 조금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여느 저택 못지않은 건물을 얻을 수 있었던 거다.

페르난데스가 운영하는 바, 콜롬버스도 그 연장선.

다음날, 곧장 그곳으로 출근한 가온은 페르난데스에게서 이번 의뢰의 개요를 들을 수 있었다.

"반년 전, 한 편부 가정에서 나고 자란 10대 여자아이가 사라졌네. 그때 당시만 해도 모두 단순 가출로만 알고 있었지."

"사춘기가 온 게 아니라고?"

"그래,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아버지란 인간이 알콜 중독이었거든.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거지."

흔한 인간상이었다. 과거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기본 소득제가 실시되는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다.

아예 어린 나이부터 독립하는 부류도 적지 않았던 거다.

"그런 사람이 제 딸을 찾겠다고 의뢰하는 그림이 안 그려지는데."

"그래, 그 한 사람뿐이었다면 말이지. 내가 말했지? 그녀가 나간 건 반년 전이라고. 그 사이에 그녀와 비슷한 케이스가 연달아 나왔네."

순간, 디바이스를 통해 새로운 정보가 연달아 갱신된다.

보육원에서 갓 퇴소한 10대 남자아이,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독거노인, 패러사이트가 되어 캡슐 호텔을 전전하는 50대 남성 등등―

예시가 쌓이자 어떠한 공통분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 취약 계층이네."

"이들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네."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을 가능성은?"

"그렇다면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고, 눈에 띌 만한 조짐을 보였겠지. 하지만 사라진 이들은 조용히 외출한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네. 마치 예기치 못한 사건에 조우한 것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 납치인가."

"가장 확률이 높은 건 그거겠지."

수상쩍은 건 확실했다.

실종자들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건 38구역. 범죄 우발 지역인 39구역이 바로 코앞인 곳이었다.

"그들을 살려서 데려온다면 4천만 피아, 전말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2천만 피아라네."

"금액이 상당하잖아."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거든."

납득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기본 소득제가 시행되는 사회였다. 모두 한마음에 한뜻으로 십시일반 모은다면 유명한 해결사에게 의뢰를 넣을 수 있었다.

"나가기 전에 한잔하고 가겠나?"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주문에 페르난데스가 큼지막한 눈망울을 끔뻑였다.

"그거 의미가 있는 요청인가?"

* * *

본격적으로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콜롬버스를 나온 가온은 페르난데스에게 받은 정보를 지도 앱에 연결했다. 동시에 망막 위로 실종자들의 행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온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정말 계획적인 납치라면 어떠한 패턴이든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우발적인 행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통분모가 눈에 띄었다.

프리벳로(路) 128번 길.

실종자들의 경로가 얽히는 교차점으로 발걸음을 옮긴 가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랜드마크도 없는 외지지만 가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순찰 드론부터 시작해서 차량 그리고 건물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는 오밀조밀하게 엉킨 거미줄과도 같았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어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을 터.

가온이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128번 길과 연결된 골목길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묘할 정도로 통제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그는 조사하는 것도 멈추고 제자리를 한참이나 서성여야 했다.

대체 뭘까.

제 관자놀이를 간질이는 위화감에 가온이 두 눈을 번뜩인 건 한순간. 벽면을 밟고 도약한 그는 가로등 위에 착지했다.

그래, 이것 때문이었다.

'CCTV.'

공교롭게도 이 부근에 있는 건 이거 하나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난립하던 감시 장치들의 수가 무색할 정도.

사소하지만, 명확한 괴리가 육감을 건드린 거였다. 누가 보아도 의도적으로 제한했다는 게 눈에 보였던 거다.

실종자들을 끌고 가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경로가 있을까 싶었다.

"비었나."

역시나 CCTV 내부는 껍데기뿐이었다. 딴에는 완벽하게 뒤처리했다 자찬했을 테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시작 지점이 밝혀졌으니까.

꼬리를 잡은 이상, 이 뒤로는 일사천리.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가온은 CCTV부터 확인했다. 고장 난 채로 방치 중인 녀석들만 따라가자, 루트가 하나로 이어졌다. 우연의 일치로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이는 천재(天災)가 아닌 엄연히 인재(人災)였다. CCTV 관리는 공찰의 소관이었던 거다.

없애는 건 가능해도 해당 지역이 녹화되지 않는다는 이상 현상까지 감추는 건 어려웠다. 누군가 협조하지 않는 이상에야.

어째서 해결사를 부른 건지 알 것 같았다.

이 건, 공찰도 얽혀 있었다.

037 닥치고 알았다고 해

* * *

* * *

단순한 납치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가온의 추적은 멈추지 않았다. 특수한 조건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었던 거다. 도중에 중단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 앞으로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납치범들이 제 범행을 감추기 위해 해 놓은 조치가 도리어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니까.

타닥.

더 이상 고장 난 CCTV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가온은 그간 지나쳐 온 길을 기록했다.

종착지는 39구역의 한 지점.

누군가 만들어 낸 사각지대는 정확하게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외부의 시선을 따돌리고 싶다는 듯이.

실종자들은 아마 이 안 어딘가에 있을 터.

가온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동기였다. 디바이스가 상용화된 시대에 타인을 납치하는 건 성공 확률도 낮을뿐더러 사전에 작업해야 할 것이 많았던 거다.

그런데도 납치범들은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태가 심각해져 수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취약 계층만 골라서 데려간 거다. 애당초 돈은 안중에 없었다는 뜻.

그렇다는 건 이미 납치한 시점에서 목적을 이루었다는 소리가 되었다.

특별한 능력도 없는 일반인에게 납치범들이 바란 건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하며 배회하던 가온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겍."

남자도 가온을 발견한 건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가 도망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볼 가온이 아니었다.

남자, 터그와 어깨동무한 가온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제는 고마웠어.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었거든. 단골로 삼기에는 제격이더라고. 그런데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왜냐고 말해도, 여기가 우리 세력권인데...."

"말이 짧다?"

"...요."

"아무튼 피어 갱이 관할하는 곳이라고?"

"네. 그렇슴다."

그러고 보면 어젯밤에 방문했던 무허가 시술소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터그의 말에 모순은 없다는 뜻.

무분별하게 상납금을 갈취하는 게스토. 그리고 피어 갱이 자리 잡은 구역에서 실종된 취약 계층,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페르난데스까지.

어딘가에서 냄새가 나는 듯했다.

* * *

범죄 조직에는 여러 형태가 존재했다.

규율을 중시하는 마피아, 상하 관계가 확고한 삼합회와 야쿠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신디케이트, 그리고 단순한 폭력배에 이르기까지 각자 추구하는 노선이 달랐다.

그중에서 스트리트 갱을 대표하는 건 역시나 무법 정신이었다.

내솔이 없다는 듯 오늘을 불사르는 그들의 행동 양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선천적으로 기반이 열악하기에 대성할 수 없는 유형이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최저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기본 소득제가 시행되면서 급격하게 세를 불리기 시작한 거다. 이제 그들은 삼시 세끼 걱정하지 않고, 난동을 부릴 수 있었다.

사회의 거악으로 부상한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

다른 범죄 조직과 다르게 뽑아도 뽑아도 잡초처럼 자라나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요 근래 이름을 알린 피어 갱 또한 전형적인 스트리트 갱 중 하나였다.

아무나 가입할 수 있을뿐더러, 따로 다른 크루를 결성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피어 갱이 해당 소속원들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른 조직과 세력 싸움을 할 때는 무조건 참가할 것.

자그맣게라도 39구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건 단순하지만 강력한 지침 덕분이라고―

"제가 알고 있는 건 그 정도임다."

터그에게 일련의 설명을 들은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의도적으로 숨긴 내용이 있을까 싶어 집요하게 물었지만 나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터그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애당초 가입한 지 3달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피어 갱 내에서는 말단 중의 말단일 터.

화성에서는 모든 게 첫 경험인 가온이었다. 뒷세계에 어떠한 조직이 있는지, 무슨 지역을 지배하는지 배워야 할 게 산더미였던 거다.

하지만 피어 갱의 성장이 비정상적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단합이 잘 되어서 승승장구했다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요란스럽게 몸집을 불리면 견제가 들어올 법도 하건만, 그들은 항상 공격하는 입장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러 주기라도 한 것처럼.

공찰이 개입했다는 정황을 발견한 가온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추측하기 어려운 답도 아니었다.

"그러면, 저 가도 되는 검까?"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나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소문이 퍼지면 무조건 네가 한 줄 알고, 찾아갈 테니까."

"불합리...."

"닥치고 알았다고 해."

"알았슴다."

* * *

터그와 헤어진 가온은 곧장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옥상에 바짝 엎드린 채로 잠복을 준비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실종 사건이 한 번 일어났다는 건 두 번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거고, 그게 여러 번이나 조직적으로 진행 중인 일이라면 들킬 때까지 지속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출입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남은 건 실증뿐이었다.

마침 실종 신고가 접수된 지 일주솔이 지나는 시점.

예상대로 피어 갱에서 납치를 자행하고 있다면 슬슬 입질이 올 터였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온 건 그때.

검은 코트가 새하얗게 물들었지만 가온은 꿈쩍도 하지 않고 거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어둑해진 거리에 헤드라이트 세 쌍이 나타났다.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헤엄치듯이 등장한 빛무리는 정확하게 CCTV가 고장 난 경로만 골라서 통과했다.

'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온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폭설이 내렸기 때문인지 승합차도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기묘한 대치가 끝난 건 다섯 블록을 지나고 나서.

갑작스레 방향을 돌린 승합차 세 대는 줄을 지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동태를 살피기 위해 가까운 벽면에 등을 붙인 가온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맨 앞에서 멈춰선 승합차에서 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아니, 끌려 나왔다고 해야 하나.

결박된 남자의 목뒤에는 너트처럼 생긴 육각형 모양의 장치가 결착된 상태였다.

'락 다운?'

그것은 디바이스가 가지는 기능 대부분을 제한하는 장치였다.

공공 기관이나 집행 기관에서 인신구속용으로 사용하는 기기. 일반인의 손에 들어갈 리 없는 도구이건만, 아무래도 뒷세계 거주민들은 마지막 일선까지 넘은 것 같았다.

"시러, 실타고."

근육이완제라도 맞은 건지 남자는 웅얼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슬린 건지 그에게 다가간 덩치는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시끄럽다."

액세서리처럼 흔들리는 소드 오프 샷건. 승모근 주변에 장착된 유닛. 그리고 뺨 전체를 가로지르는 갈고리 모양의 문신까지.

가온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페르난데스에게 게스토라고 불렸던 사내.

피어 갱의 행동대장이었다.

* * *

게스토가 다른 갱스터들과 함께 사라지고 난 뒤, 모습을 드러낸 가온은 방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피어 갱이 납치한 사람은 총 다섯.

적다고 하면 적을 수도, 많다고 하면 많을 수도 있는 수였다. 중요한 건 갱스터들의 움직임이 익숙해 보였다는 거였다. 아마도 이런 짓을 저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리라.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한다는 건 자명한바, 담장을 뛰어넘은 가온은 건물을 둘러보았다.

뜯어진 페인트와 부실한 외장재.

버려진 곳을 활용한 건지 아니면 노후된 건지 척 보기에도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부지만큼은 여느 저택 못지않게 넓었다.

혹시나 침입자에 대비해 경계를 서는 무리가 있을까 싶어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나, 가온은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근본 없는 갱답게 기본 따위는 엿 먹으라는 듯 기척 자체가 없었던 거다.

물론, 건물 구석구석에 부비트랩 같은 건 있었다. 직접 부품을 구매해 제작한 건지 여기저기 조잡한 부분이 도드라졌지만.

폴딩 나이프로 와이어를 끊어 낸 가온은 무덤덤하게 위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갱스터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벽지는 물론이고, 가전제품도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피어 갱 패거리가 우르르 들어간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참이었으니.

'설마.'

1층으로 내려간 가온은 서둘러 바닥을 훑어보았다. 눈길을 헤치고 들어왔을 테니 자국이 남아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에게서 떨어진 눈은 1층 창고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위에 없다면 아래에 있을 뿐이니.

벽을 더듬거리면서 겨우 발견한 버튼을 누르자, 그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면이 갈라지면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온은 언제든지 사격할 수 있도록 홀스터의 덮개를 열고, 권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저 밑바닥에 모든 사건의 원흉이 있었던 거다.

차분하게 내려가 통로에 진입한 가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하는 폭설이 내리는 바깥보다 더 추운 듯했다. 냉방이 되고 있다는 방증.

정처없이 걷던 가온의 발목을 붙잡은 건 보관실이라는 표찰이었다.

섬뜩한 감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건 한순간.

무언가 홀린 듯 문을 열어젖힌 가온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비추는 건 푸르스름한 조명. 마치 심해에 들어온 것처럼 빛이 있는데도 어둡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파밧.

한 걸음 내딛자 누군가 왔다는 걸 감지라도 한 건지 내부의 불빛이 강해졌다.

그로 인해, 저 너머까지 진열된 유리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보관실에 설치된 유리관 하나하나가 생명 유지 장치였던 거다.

대략 100여 개는 될까.

일개 갱이 소유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설비였다.

"하."

이제 보니 이것들을 가동하면서 생기는 열을 해소하기 위해서 지하의 온도까지 조절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절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환경을 조성했는지.

유리관을 슥슥 문질러 표면에 서린 물기를 닦아내자 내용물이 드러난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버튼같이 납작하고 동그란 기기. 거기에 연결된 유사 신경계는 해파리 다리처럼 연신 흐물거렸다.

"...."

세상 무거울 거 없다는 피어 갱의 작태를 보고 어쩌면 실종자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은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결말을 상상한 건 아니었다.

순간, 전기적인 자극을 받은 건지 기기, 아니 디바이스가 나지막이 발광한다.

지난 수백 년간 수없이 많은 인간 군상을 보아온 가온이지만,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악의라는 개념이 드러나는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피어 갱이 하는 사업은 디바이스 적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범죄였다.

038 특식이다, 갱스터

* * *

이는, 시정부와 이사회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다루는 분야였다. 사회 기반이 전부 무너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던 거다. 기본 소득제가 시행되는 사회에서 신분이란 곧 예산.

누수되는 금액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일찍이 인류는 방만하게 관리하다 이러한 폐해를 겪은 적 있었다.

2246년에 일어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대표적인 예.

한 박자 늦게나마 통화 긴축 정책을 이행한 덕분에, 급한 불은 꺼졌지만 위험 요인은 아직까지도 존재했다.

2300년대에 접어들었는데도 2000년대 초반에 가까운 물가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러한 여파가 한번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디바이스 적출은 메가콥조차 피해 갈 수 없는 대죄였다.

하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과 다르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정해진바, 아무리 나락까지 떨어진 범죄 조직이라도 좀처럼 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

"이게 누구야. 햇병아리 해결사가 아닌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가온은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게스토."

지하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 만남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봐서는 안 될 걸 보았군."

"이미 공찰에 신고했어."

"크크, 그 녀석들이 여기까지 올 것 같나? 이 설비가 어디에서 온 건 줄 알고?"

그건 익히 짐작했다. 떠보듯이 말한 건 확인 절차에 불과했다. 게스토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실제로는 신고도 하지 않았다.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해결사 나부랭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이야기였나."

아니, 이해했다.

공찰이 개입한 수준이 아니라 선도하는 수준이란 말이 아닌가.

피어 갱은 단순히 그들의 의지를 투사하기 위한 도구.

어떠한 거래가 오고 갔을지 훤히 보였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은 건 옳은 판단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부패한 공찰과도 싸워야 할 판이었으니.

그렇게,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는 가온이었으나 게스토에게는 다르게 비쳤다. 마치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거다.

그래, 생각하지도 못한 덫을 밟아버리고 놀란 토끼처럼.

무허가 시술소에서 했던 경고가 불현듯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전에 말했지, 나와 다시 만나면 그때가 네 제삿...."

"뭐라는 거야, 병신이."

으름장을 놓는 게스토가 같잖다는 듯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권총을 꺼내, 쏘아 갈겼다.

미간과 가슴, 그리고 복부를 노리는 트리플 탭.

격동의 연사가 이어짐에도 총구에서 나오는 건 미약한 소리가 전부였다.

어제 그가 총포상에서 구매한 건 세븐 메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가콥, '펀더멘탈 락'에서 제작한 명품.

일반적인 권총보다 다소 총신이 길지만, 화력이 높은 건 아니었다. 크기가 커진 건 소염기와 소음기 둘 모두를 수용한 총열 설계 때문.

일명,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권총.

20dB이라는 경이로운 수준까지 제어된 총성은 시계 초침 소리처럼 간지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도 클락.

"귀엽군. 고작 그런 걸 믿었나?"

하지만 불시의 총격을 받고도 게스토는 죽지 않았다. 그는 뒷세계에서도 거칠기로 소문난 스트리트 갱의 일원.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급소를 슬롯으로 보강한 건 특별할 것도 없는 조치.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핏물을 혀로 핥은 게스토가 소드 오프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쿠쾅!

순간, 폭탄이 터지기라도 하듯 부채꼴 모양으로 퍼진 쇠구슬이 비산하며 장내를 찢어발겼다.

가온이 얼른 생명 유지 장치 뒤로 엄폐한 것과 동시에 총성을 듣고 갱스터가 들어왔다.

"형님?"

"침입자다. 연습했던 대로 처리한다."

일목요연한 설명.

게스토가 내린 처형 선고에 조직원들은 각자 제 위치로 흩어졌다.

관리실에 빛이 사라진 건 그 순간.

완벽하게 통제된 실내는 칠흑과 다를 게 없었다.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

"네가 도망칠 곳은 없다."

오로지 게스토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가 사라진다.

암실을 꿰뚫어 볼 장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대처한 듯했다. 이러면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할 테니 적절한 전술이라 할 수 있을 터.

적의가 넘실거리는 밀실에 갇힌 가온은 머릿속으로 셈했다.

승합차 세 대에서 내린 인원은 총 열여덟. 납치된 다섯을 빼면 남은 건 열셋.

본디 클락에 삽입된 장탄 수는 16발이었으나, 게스토에게 세 발을 소진했으니 남은 건 13발.

둘 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니―

'탄창을 교체하지 않아도 되겠네.'

모조리 명중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그런 건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춘 건 그때.

탕!

예고도 없이 초탄이 터진 순간, 총구 화염에 의해 주위가 밝아진다.

그래봤자 밀리초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피아를 구분하기에는 충분했다.

갱스터들의 위치를 모두 외운 가온은 날아온 탄환을 피하며 대응 사격했다.

달칵.

"크헉."

비명 소리와 함께 장내는 분주해졌다. 설마하니 반격에 성공할 줄은 몰랐으리라.

서둘러 엄폐 장소를 바꾸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소용없었다. 이곳은 개활지가 아니라 생명 유지 장치가 오와 열을 맞춰 설치된 보관실.

숨을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바둑판이 아무리 넓다한들 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한정되는 법이니까.

더구나 철저하게 응징하겠답시고 무차별적으로 난사할 때마다, 주위가 환해졌다.

아무리 이동한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해서 단서를 주어서야 추론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실시간으로 갱스터들의 위치를 파악한 가온은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메타 휴먼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전처럼 죽지 않는다는 이점을 이용하는 건 지양해야 했다. 섣부르게 움직인다면 꼬리가 잡힐 테니까.

숨길 수 있는 상황이면 숨긴다.

그게 가온이 새로이 정한 방침이었다.

어차피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갱스터들은 끝까지 가온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니까.

마침, 잔탄은 한 발.

그리고 남은 사람도 단 한 명이었다.

쿵.

그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육중한 진동이 보관실 전체를 가로지른다. 구태여 쳐다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열기가 전방에서 쏘아졌다.

숨지 않고 앞으로 나온 가온은 이죽거렸다.

"나를 위해 준비한 쇼는 이게 다야? 아니지, 흥미롭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걸 보니 쇼도 아니었나."

"이 새끼가...."

다시 한 번 산탄이 쏘아지자 가온은 높이 도약했다. 발광하듯이 퍼지는 불티 바깥으로 몸을 던진 그의 총구가 게스토에게로 돌아갔다.

달칵.

목을 노린 일발이었으나, 게스토에게는 그 순간이 명확하게 보였다.

외부 자극에 인간이 반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0.3초.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그 기록을 줄일 수 있지만 그것도 0.1초까지.

그 이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게스토는 제 몸을 제물로 바쳐 한계를 돌파했다. 불법으로 개조해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기기를 억지로 삽입한 거다.

슬롯, 페이스 업.

두뇌에 꽂힌 칩은 신경 말단까지 자극해 0.1초의 벽을 허물었다.

접근하는 가온을 보고 소드 오프 샷건을 사용하기에는 늦었다 판단하고 버린 건 그 때문.

게스토가 주먹을 말아쥔 순간 그의 승모근에 갑각처럼 달라붙은 유닛, 레이지가 용틀임했다.

푸쉬익.

몸속 깊숙이 장착된 원통형 플라스크가 솟구친 것과 동시에 전신의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정신 고조와 통각 절단. 그리고 근육 자극.

레이지에 내장된 기능은 오로지 눈앞에 있는 적을 말살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뿐.

콘크리트 벽도 맨손으로 부술 수 있는 거력을 얻은 게스토는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변변찮은 보호 장비도 없으니 이걸로 끝이리라.

우드득.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다르게 상대에게서 터져 나와야 할 파열음이 제 팔뚝에서 일어나자 게스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꿈치?"

그 말대로 주먹을 짓뭉갠 건 창졸지간에 쏘아진 가온의 팔꿈치였다. 상정하지 못한 반격이었으나, 게스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편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원투와 훅, 그리고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

길거리를 전전긍긍하면서 배운 권투 기술이 아낌없이 쏟아부었지만 한 번 기울어진 저울추는 좀처럼 돌아올 줄 몰랐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반응 속도는 일반인에서 한 걸음 벗어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응한다는 건―

"컥."

게스토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단번에 턱밑까지 치달은 가온이 뛰어올라 그의 턱을 무릎으로 걷어찬 거다.

볼품없이 뒤로 넘어진 건 당연지사.

분명 고통 따윈 없어야 하건만, 뼛속까지 울리는 충격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스토라고 해결사라 불리는 족속을 만나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태반이 인간 부스러기였다. 누가 범죄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중 한 줌이나 될 법한 이들만이 업계를 지탱하는 뿌리라 할 수 있었다. 메가콥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인재들과도 감히 견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게스토가 보기에 가온 또한 그러한 부류였다.

"대체 무엇이 아쉬워 뒷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지?"

"너 같은 쓰레기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게 아쉬워."

제 가슴을 밟고 선 가온을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스토였으나 어째서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심할 것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잘만 움직이던 턱이 툭, 하고 떨어졌으니까.

"기뻐해. 약실에도 탄환을 채워 넣었다는 걸 깨달은 참이거든."

사전에 장전했던 탄환은 16발이 아닌 17발. 제원(諸員)보다 한 발 더 많은 수였다.

어디에 써야 할지는 명약관화.

"특식이다, 갱스터."

게스토의 주둥이에 총구를 억지로 밀어 넣은 가온은―

달칵.

마지막 한 발을 소진했다.

* * *

보관실을 나선 가온은 곧장 수색에 돌입했다. 디바이스를 적출한다는 걸 파악한 이상, 지체하고 있을 틈은 없었던 거다.

다행스럽게도 내부를 설계할 때부터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던 건지 수술실이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미닫이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수술대에 드러누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시작한 건지 그의 디바이스는 무사해 보였다.

"게스토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의사로 보이는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혀를 찼다.

불량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말투뿐만이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마스크도 쓰지 않았을뿐더러, 라텍스 장갑도 착용하지 않았던 거다.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반푼이.

"수술할 때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그랬을 텐데? 내 말이 그리도 우습나? 나 아니면 너 같은 녀석들과 손을 잡은 사람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런데도 오만한 태도만큼은 여느 병원장 못지않았다.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담력이 독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들어온 건 조력자가 아니라 불청객이었으니까.

"너...엇."

뒤늦게 가온을 발견한 노인이 두 눈을 부릅뜬 것과 핏물이 벽면에 흩뿌려진 건 거의 동시.

달칵.

일련의 과정에 대화 따윈 필요치 않았다.

039 거슬리는 녀석이 생겨 버렸네

* * *

쓰러진 의사를 걷어찬 가온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느리게 호흡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는 듯했다. 아마 깊이 마취되어 정신을 잃은 것뿐일 터.

나쁘지 않았다. 길게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니.

남자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바깥으로 나온 가온은 여태 가지 않은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리실이라고 적힌 섬뜩한 표찰이 눈에 밟힌 건 한순간. 피어 갱의 성향을 고려하면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부에는 남은 네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아직 적출당하기 전인지 온전한 상태였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건 아닌지라 가온은 등을 돌렸다. 일단 의뢰를 받아서 온 몸이었다. 구호 활동도 좋지만, 명단에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 * *

지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

지금까지의 악행이 기록된 장소에 도착한 가온은 품속에서 마그네틱 케이블을 꺼냈다.

달칵.

한쪽은 디바이스에 가져다 대어 결착하고, 나머지 한쪽은 포트에 연결한 순간, 망막 위로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상정 내의 상황.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가온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바, 잡기도 몇 개인가 익혔다. 해킹 툴을 다루는 것도 그중 하나.

다이버나 튜너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스트리트 갱의 거점 하나 터는 일이었다. 간단한 복호화 프로그램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조속히 정보를 분류한 가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래 장부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속에 파묻혀 있던 실종자들의 이름 또한 금방 드러났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모두 폐기 처분 완료했다는 무미건조한 보고뿐.

그것도, 최종 수정 일자는 일주솔 전이었다.

의뢰를 받기도 전에 일어난 참사였지만, 입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오다가 보지 않았던가. 처리실이라고 명명된 공간을.

애당초 피어 갱은 납치한 사람들을 살려 보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마지막을 모두 복사해야 할 터.

데이터를 저장하던 와중, 기묘한 목록이 눈에 띈 건 그때.

이곳에서 적출된 디바이스가, 대기 중이어야 할 그 기기가 매달 일정 금액을 누군가에게 납부하고 있었다.

내역을 검색해보니 익숙한 이름이 나타났다.

[RYS컴퍼니]

가온이 디바이스를 이식받기 전까지 이 안에 담긴 시민 ID가 열심히 송금했던 정체불명의 회사.

이제 보니 피어 갱과도 연결된 곳인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진짜 백가온 또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쳤던 건가.'

사회 취약 계층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예상은 예상일 뿐이니 함부로 속단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었다.

세라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난데없이 무슨 일이야?"

[저택에 공찰 측에서 온 손님이 왔다 갔습니다. 아무래도 일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눈치더군요]

"언제 왔는데?"

[24분 10초 전입니다. 사실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묘하게 걸리더군요. 도비 도련님께서도 알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말씀하셔서 이렇게 전해 드리는 겁니다]

"종결된 거 아니었어?"

맥시멈 노이즈의 회장, 콜른이 직접 나서서 무마한 사건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공찰이 개입할 이유는 없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조서를 꾸미고 싶다는 취지에서 온 듯했습니다]

"실수로라도 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저희가 거론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쪽에서 먼저 가온 님에 대한 걸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세라가 연락한 이유인 것 같았다.

"나에 대해 물었다고?"

공찰의 입장에서 해결사란 하루살이와 다를 게 없었다. 직접적으로 얽히지만 않는다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거다.

[추궁보다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가온 님도 아시다시피 중간에 한 사람이 붕 떴으니까요]

"스프린터 말이지."

냄새를 맡고 중개업자, 페르난데스도 접근한 터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다행히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불만을 품은 건 아닌 듯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조사하러 나온 건데."

[듣자 하니....]

세라의 입에서 대상의 이름이 나오려는 순간, 전조도 없이 통신이 뚝 끊겼다.

전자기 펄스에 당한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디바이스에 오류가 떠올랐을 테니까.

이렇게나 깔끔하게 주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기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물며 언젠가 한 번 사용한 적도 있지 않은가.

'통제기.'

공찰에서 고위급 인사만 가지고 다니는 전가의 보도. 지하에 누군가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꽤나 성가신 부류의.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마그네틱 케이블을 정리하기가 무섭게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거기까지입니다. 하던 게 있다면 멈춰 주시기 바랍니다. 섣부르게 행동하면 형량만 더해질 뿐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건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건 하책.

두 손을 올린 가온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나는 해결사야. 의뢰를 받고 여기에 왔지."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그러한 노력은 위협 사격으로 돌아왔다.

탕.

예고도 없이 뺨 끝을 스치고 지나간 탄환은 벽에 꽂혔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내린 한 줄기 핏물이 컨트롤 패드에 뚝뚝 떨어졌지만 가온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반격할 의향이 있다고 판단하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묻는 말에만 답하시면 됩니다."

하긴, 이 시대의 공찰은 이런 식이었다.

과잉과 강압 그리고 협박.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였다.

"말했잖아, 나는 갱스터가 아니야. 이 선량한 얼굴을 보라고?"

"그거야 제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낯선 체취가 훅하고 들어왔다.

연초와 가축이 뒤섞인 타바코―레더. 원초적이고도 남성적인 향기는 질식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짙었다.

남자는 강화 인간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백가온."

"시민 ID를 제출하시길."

근거리 통신으로 개인 정보를 보내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력은 깨끗하군요. 전과도 없어 보이고요. 시드 콜로니에 머무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군요."

"그렇다만?"

"그전에는 어디에서 지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지. 그런 건 신원 조회를 해 보면 알 텐데?"

이 상황과 그다지 연관이 없는 물음에 묘한 위화감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정상적인 공찰이라면 디바이스 적출이라는 사건에 더 집중할 테니까.

구질구질하게 신상을 캐묻는 이유가 과연 뭘까.

"너 정말 공찰이 맞아?"

"이런, 그런 말이 나올 정도면 제가 선량한 시민분에게 큰 무례를 저지른 것 같군요. 확인 절차가 끝났으니 돌아보셔도 됩니다."

위압적인 어조는 어디로 갔는지 태도가 돌변했다. 그래서일까. 무언가 놀리는 듯한 기분조차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름 하나 없는 정장과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 무엇보다 가늘게 뜬 실눈이 인상적이었다.

입가에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지만,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저는 2구역 광역수사대 소속, 보안관 진건이라고 합니다. 가온 씨의 적극적인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보란 듯이 공찰 수첩을 펼치자, 배지가 눈에 들어온다.

인식 태그를 촬영하니, 해당 직급이 맞다는 관공서의 승인이 날아왔다.

"보안관이나 되는 분이 일개 갱의 뒤를 파헤치고 있었나."

"누가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2구역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어지간한 걸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광역수사대의 수사에 성역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눈여겨보던 사람이 움직였거든요."

의미심장하게 웃은 진건의 시선은 마치 뱀처럼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돈되었다고 해야 할까.

제 잘못을 인정하고 예의를 지키니 막연하게 비난하는 것도 불가했다.

물론 피어 갱과 공찰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의심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증거 인멸을 하기 위해 몸소 나타났을 수도 있는 일.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무색하게 조사관들이 들이닥쳐 실종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장내가 어수선해졌지만 진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갱스터들이 모두 죽어 있더군요."

"그래? 나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누가 먼저 왔다 갔나 보네."

괜히 처리했다고 밝혔다가는 서까지 끌려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정당방위로 풀려난다고 해도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바, 얻는 것도 없는데 괜히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제 권한으로 가온 씨에 대한 탐문은 끝마친 걸로 처리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야."

진건의 호의를 받아들인 가온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한마디 말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저는 보나 마나 가온 씨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생각보다 굽힐 줄 아시는 분인가 봅니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말.

하나, 의도는 명확했다.

구태여 어울려 줄 가치가 없을 정도로.

"그럴지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인 가온은 손을 흔들며 진건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지상으로 나오니,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는 공찰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이 근방은 사건 현장으로 규정된 후인 것 같았다.

슬그머니 그들을 지나쳐 도로로 나온 가온은 방금 전 만남을 복기했다.

진건이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는 분명 회피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뺨에 남은 실선이 그걸 증명하지 않던가.

사전에 행동을 읽혔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체취로 가늠하건대, 직감이 비대하게 발달한 부류일 터.

불행 중 다행인 건 찰나의 순간 재생 능력을 억제했다는 거였다.

진건에게 빌미를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친근한 척 굴지만, 시험해 보는 듯한 언동이 기저에 깔려 있었던 거다.

하지만 모든 건 주관적인 판단일 뿐, 실질적인 증거라고 할만한 건 없었다.

그래도 세라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가온 님? 방금 전에 연락이 끊긴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별거 아니야. 갱과 한바탕하던 중이었거든. 그래서 날 찾던 공찰, 이름이 뭐라고?"

[진건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제게 흥미가 있다는 공찰과 동일 인물이었다.

지하에서는 모르는 척 시치미 뗐지만, 일부러 접근한 거였다. 아마 자신과 도비가 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터.

아마 당당하게 등장했던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일 거다.

"거슬리는 녀석이 생겨 버렸네."

스윽.

뺨을 쓸어 넘기는 검지를 따라 일직선으로 그어진 상처가 지워지듯이 회복되었다.

040 이걸로 빚은 없는 거야

* * *

* * *

가온이 떠나간 자리, 홀로 남은 진건은 공찰 수첩을 도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비상 재해 대책반에 속해 있는 그이지만 공식적으로 밝히는 건 무리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아무도 모르는 음지에서 활동해야 의미가 있는 기관이었던 거다.

그래서 세간에 정체를 드러내야 할 때면 위장 신분을 사용했다.

진건이 애용하는 건 보안관이었다.

화성방위군과 다르게 공찰은 시정부에 협조적인 조직이었으니까.

더구나 공적인 권력인 만큼 휘두르기에도 용이했다. 유사시에는 협조 병력까지 호출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력들이 그러했다.

"아쉽게 되었군요."

스프린터, 노먼의 죽음은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누군가 처리했다는 건 분명한데 그 상대가 불명확했던 거다.

물론 가온이라는 인물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나 재벌 3세 도비를 도운 해결사. 더구나 행적이 모호한 주제에 기량만큼은 비정상적이었다.

시기를 고려하면 양후가 아닐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건 쓰러진 피어 갱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명당 한 발. 게스토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이런 자가 전조도 없이 나타났다?

적어도 진건의 상식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온을 발견하자마자 탄환을 날린 것도 그 때문.

하지만 그가 흘린 피는 진짜였다.

머지않아 회복되리라 여겼건만 이게 웬걸, 상처는 그대로였다. 반쯤 확신하고 지른 경고 사격이 무안해질 정도.

이는 힐링 팩터를 보유했다면 보여 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물론 제 능력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터무니없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았다.

의심암귀에 빠져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

시야를 넓게 봐야 했다.

가온이 양후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

하지만 진건과 수많은 위기를 헤쳐온 직감이 속삭였다.

방금 놓아준 사내야말로 양후라고.

아까 전이 마지막 기회였노라고.

머릿속에서 태동한 망상은 끊임없이 진건을 충동질했다. 하나 그는 알고 있었다. 제 능력이 어디까지나 습득한 정보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다는 걸.

일단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컨트롤 패드에 묻은 핏방울을 닦은 진건은 비닐 팩 안에 넣어 밀봉했다.

오늘 만남은 모두 이걸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얼굴을 바꾸고, 이름을 버리고, 출신을 속인다고 해도 디바이스에 내장된 유전자 정보만큼은 결코 변경할 수 없었다.

화성에서 태어난 인류의 데이터는 모조리 시드 콜로니에 집결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구역에 위치한 초대형 데이터 센터가 그를 주관했다.

메가콥은 물론이고, 시정부의 대통령조차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블랙박스.

완공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성. 그곳을 뚫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손수건에 묻은 피와 디바이스에 저장된 기록을 비교한다면 진실이 드러날 거다.

과연 백가온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 * *

다음날, 가온은 콜롬버스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나타나자 페르난데스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벌써 의뢰를 달성한 건가?"

"어려울 것도 없었어."

바 카운터에 앉은 가온은 디바이스에 저장된 데이터를 페르난데스에게 전송했다.

내용을 확인한 페르난데스가 탄성을 터트리면서, 보드카 마티니를 대령했다.

"대단하군.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해결할 줄이야. 아무래도 자네에 대한 평가를 더 높여야 할 것 같군."

주절거리는 걸 멈추지 않는 페르난데스였으나 가온에게는 의미 없는 잡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이번 의뢰는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저절로 목소리가 낮아지는 건 당연지사.

"미스터 페페."

"왜 그러지?"

"할 말은 그것뿐인가? 디바이스가 적출된 것도 모자라 실종자들은 모조리 죽었는데도?"

"...."

"이 의뢰를 맡긴 녀석은 누구지?"

"말했지 않나.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애매한 답변이었다. 구체적인 인물은 한 명도 거론되지 않았던 거다.

"그 화법, 꽤 불쾌하네. 거짓은 고하지 않겠지만 진실도 말하지 않을 거다, 이거잖아?"

"그게 무슨 말인가? 솔직하게 다 말해 주었지 않나."

"그러면 답해 봐. 의뢰를 맡긴 건 실종자들의 일가친척인가? 그것도 아니면 친구? 동료?"

페르난데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가온은 코웃음 쳤다.

하나같이 사회 취약 계층이었다. 하나나 둘 사라진다고 해서 표가 나지 않는.

애당초 납치해서 탈이 날 거였다면 피어 갱의 목표도 되지 않았다.

"우리 중개업자 나으리께서 이 의뢰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모를 리 없었겠지."

"...의뢰인의 요청이었네."

궁지에 몰린 페르난데스가 꺼낸 대답은 퍽 그럴듯했으나, 물러날 가온이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사전에 고지했어야지."

자칫 잘못하면 모르는 사이에 공찰과 악연을 쌓을 수도 있었다. 피어 갱과 얽혀 평생 그들의 추적을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리스크를 전부 배제했으니, 질타를 받아 마땅했다.

"이런 식으로 써먹으려고 내 실력을 믿는다고 지껄인 건 아니지?"

자리에서 일어난 가온이 거리를 좁혀오자 페르난데스가 두 팔을 방패 삼아 내밀었다.

"자, 잠깐. 내 말을 들어 보게. 자네가 조사하다가 막히면 그때 하나둘씩 풀려고 했네. 디바이스 적출이라는 게 아무에게나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 않나. 그리고 하루아침 사이에 의뢰를 해결할 줄 누가 알았겠나."

지금에 와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미래였다. 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변명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그렇다고 해도 페르난데스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RYS컴퍼니의 흔적을 찾았을뿐더러, 무의미한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저지할 수 있었던 거다.

물론 가슴에 들끓는 분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쾅!

개구리처럼 생긴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친다.

저 멀리 날아가 진열대와 부딪친 페르난데스가 풀썩 쓰러지자, 그의 머리 위로 온갖 종류의 위스키와 와인이 떨어졌다.

바 전체가 눅진한 알코올로 가득 찬 건 한순간이었다.

"내, 내 컬렉션이...."

"이걸로 빚은 없는 거야."

중개업자라는 건 장난꾸러기와 같았다. 때로는 친절하게 다가와 쓸개라도 줄 것 같이 굴다가도, 때로는 멀어져 철천지원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비단 페르난데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뒷세계에 속한 이들 태반이 제 사익을 위해 가면을 쓰고 살았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 이상, 감내할 수밖에 없는바 차라리 약점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게 효율적이었다.

페르난데스를 끝장내지 않은 건 그 때문.

무의식중에 남겨진 부채 의식이 그의 행동을 제어할 터였다.

"하지만 이다음에도 헛짓거리한다면 퇴근길에 아무도 모르게 죽여 줄게."

정말로 그리된다면 노리는 시간대는 출근길이 될 거다. 퇴근길이라고 구태여 지정한 건 선입견을 뇌리에 새기기 위함.

보드카 마티니를 한입에 털어 넣은 가온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알았으면 대답해."

"이해했네."

페르난데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구에 습기까지 찬 게 여간 억울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가온조차도 너무한 게 아닐까 하고 다시 한 번 제 행동을 돌아보게 할 정도.

"아 참, 그리고 2구역 광역수사대 소속 보안관 진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정보상을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나?"

"아니, 네가 책임지고 알아 와. 너 때문에 귀찮은 녀석과 얽혔으니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 * *

가온이 대답을 듣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솔 뒤였다.

여느 때처럼 길을 걷던 와중, 제 발걸음을 붙잡는 경적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검은색 세단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리어 도어에서 창문이 내려온 건 그때.

"백가온, 맞나?"

"그렇다만."

"페르난데스의 소개를 받고 왔다. 어서 타라."

말을 걸어온 건 척 보기에도 공직자 냄새가 풀풀 풍기는 흑인이었다. 고압적인 말투였지만, 평안한 안색으로 보아 그건 습관 같았다.

나이대는 페르난데스와 비슷할까.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되었기에 가온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탑승했다.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차 안.

맞은편에 앉아 있는 흑인이 공찰 수첩을 내밀었다.

"일단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나는 39구역 동부공찰서 소속 보안관, 도미니크 조단이다."

"미스터 페페와 아는 사이?"

"페르난데스를 말하는 거라면 그래, 그와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한 사이다."

슬슬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무허가 시술소에서 게스토를 물러나게 했던 페르난데스의 뒷배가 바로 눈앞의 사내일 터.

페르난데스가 운용하는 정보망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너와 페르난데스 사이에 일어난 일은 들었다. 나 때문에 괜히 불필요한 마찰이 생긴 것 같더군."

단편적인 말이었지만 정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나 숨기고 싶어 했던 의뢰인이 너였냐."

"해결사 백가온. 네 실력은 잘 보았다. 아주 인상적이더군."

어쩐지 의뢰인의 정체를 끝까지 두루뭉술하게 넘기더라니. 하긴 공찰이 연관되었다면 함부로 언급하기도 힘들었으리라.

"아는지 모르겠지만 디바이스를 불법으로 적출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례적인 확산 속도지. 그런데 공찰 내에서는 방비하지 못할지언정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려는 무리가 태동하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제삼자에게 의뢰를 맡길 정도로 절실할 줄은 몰랐는걸."

"공찰에 소속된 간부라고 해서 모두 부패한 건 아니다."

내부에서 총질하면 견제당할 게 뻔하니 해결사의 손을 빌리려고 한 것뿐일 터.

그래서 가온은 도미니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번에 내 역할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공찰의 발 닦개였나."

"그렇게 비하하지 말도록. 네 덕분에 피어 갱을 지원한 공찰 내 고위 간부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으니. 증거가 확실한 만큼 재기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런 건 공치사가 아니라 돈으로 말하는 거라고."

"그러잖아도 4천만 피아 그대로 지급하려고 했다."

"일 처리는 화끈해서 좋네. 내가 속셈을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실종자를 살려서 데려오면 4천만 피아 지급이라는 말부터가 거짓이었다. 애당초 의뢰를 넣었을 당시에 그들이 죽었을 거라는 건 도미니크도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번 의뢰는 2천만 피아로 책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금액을 부풀린다고 해서 감동받을 리 없었다.

"그나저나 왜 나를 만나고자 한 거지? 이런 말은 미스터 페페를 통해서 전달하면 될 텐데."

"진건이라는 자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페르난데스에게 부탁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공찰 내부 정보이다 보니 한 다리 건너서 전하는 건 내키지 않더군."

"호오, 그래서 직접 행차하셨다?"

그래도 페르난데스가 일 처리는 똑바로 하는 것 같았다. 물리적인 치료가 빛을 발한 걸까.

자세를 고쳐 앉은 가온이 고갯짓했다.

"말해 봐. 그 녀석이 누구인지."

041 특이하네

* * *

"2구역 광역수사대 소속, 보안관 진건. 네 말대로 일단 공찰이더군."

"일단?"

"지난주에 No.1 돔에서 시드 콜로니로 인력 보충이라는 명분하에 발령을 받았다. 관련 서류를 보아하니 직접 지원한 거 같더군."

"특이하네."

"내가 일단이라고 말한 것도 그 부분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화성에 올 정도로 이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화려하더군."

수백에 달하는 스트라이더 무리를 소탕하고 수여 받은 공로백군장. 메가콥의 비리를 적발하고 얻은 대통령 표창장. 그리고 한 마피아의 우두머리와 협상해 자백을 이끌어 내고 받은 특진에 이르기까지.

"젊어서 그런지 아직 승진 대상이 아니지만 경력만으로는 특무관으로 임명되어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그 정도라 이거지."

특무관이란 보안관의 바로 다음 직위.

현대의 공찰은 계급이 단순한 만큼 오로지 실적만으로 승부하는 세계였다. 출신이나 나이는 그 뒤에 이어지는 별첨 부록 같은 거였다.

보안관에 이어 특무관.

겨우 한 단계 차이지만, 직권 활용 범위는 말도 못 하게 넓어졌다.

한 기관의 장이 되어 진두지휘하는 입장이 되는 거다. 메가콥을 상대로도 수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

특무관 다음에는 공찰의 체제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위밖에 없으니 얼마나 높은지 입 아프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러한 인재가 어째서 화성으로 왔는가―

"아마 상부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테지."

도미니크가 제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상부에서 말 못 할 인력을 활용할 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국정원에 소속된 요원들도 다른 기업으로 위장 취업해 활동한다고 했던가.

케케묵은 기억을 꺼낸 가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찰 소속보다는 시정부 소속에 가깝겠군."

"마침 No.1 돔에 아는 지인이 있어서 물어봤지만 모르는 눈치더군. 이렇게나 활약했다면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세심하게 숨겨도 인맥까지 꾸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건가."

"아무튼 내가 접근해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다. 이 이상으로 파헤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저쪽이 눈치채겠지."

그건 가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자를 조사하고자 한 거지?"

"눈에 밟혀서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 걱정은 접어 둬. 적어도 네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할 테니까."

"그 부분은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네가 더 알 테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도미니크가 작별을 고했다.

"그러면 페르난데스를 잘 부탁하지."

한적한 길가에 내린 가온은 저 멀리 나아가는 검은색 세단을 배웅했다.

도미니크와 만난 덕분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어느 날(Sol) 갑자기 나타난 사내, 진건.

보안관이라 자칭했지만, 아마 그의 진정한 정체는 지구에서부터 자신을 쫓아온 사냥개일 터.

십중팔구 시정부 소속일 공산이 컸다.

밀레니엄 코드가 아니라는 게 의외지만 사실 그들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현재 회장직을 맡고 있는 여자부터가 서녀 출신이었으니까.

직접적인 원한 관계는 없다는 거다. 아마 시정부의 의중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같이 따라다니는 것일 터.

원인이 밝혀졌으니 해결하는 건 쉽다.

2구역까지 달려가 진건을 죽이면 될 뿐이니.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자신이 양후라고 소리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도둑이 제 발을 저려도 그 정도는 아닐 터.

물론 신분이 없던 시기였다면 서슴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백가온이라는 허물을 뒤집어쓴 상태.

진건의, 아니 시정부의 의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지 제2의 진건이 나타날 테니까.

고무적인 건 이쪽이 이미 수를 읽었다는 거다.

특정된 대상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 *

32구역.

가온의 집 지하에는 철문이 존재했다.

오로지 열쇠로만 개방할 수 있는 철문이.

디지털 장비는 일부러 배제했다. 그리고 아날로그 감성으로 대체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방식이 안전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까.

유난스럽다면 유난스러운 대처지만, 특이한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철문의 중량.

그것은 무려 7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합금 덩어리였다. 무게를 늘린 만큼 강도와 내구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어지간한 화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터.

무엇보다, 수동이었다.

말 그대로 맨손으로 700킬로그램에 달하는 철문을 옮겨야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

사실 이것만으로도 보안은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좁고 짧을뿐더러, 중장비를 들여놓기에는 애매했으니까.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완성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세라에게는 창고라고만 일러두었다.

괜히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든가, 여기에 오면 큰일이 날 거라든가 등등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경고는 하지 않았다.

행여나 열리지 않는다고 호소해도 고장이 났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만에 하나, 들어온다고 해도 특별한 건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껏 비상 발전기까지 갖췄지만, 가동 중인 장비는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던 거다.

모니터 앞에 앉은 가온은 노화에 대해 조사했다.

인간이란 대체 왜 늙어가는 걸까.

가장 대표적인 건 텔로미어의 소멸 때문이었다. 세포가 분열할 시 손상되는 DNA를 막아 주는 염기서열, 텔로미어가 점차 닳아 없어지면서 세포의 일부가 제대로 복제되지 못하고 사멸하면서 노화가 진행되는 거다.

이는 탄소 기반 생명체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구조적인 결함이기도 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발현되었으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비효율적인 모형이었다. 형태를 유지하려면 외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했던 거다.

타자의 희생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인류는 자연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순환이라는 업을 부여받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온만큼은 예외였다.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돌연변이.

과연 자신의 몸 안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지럽군.'

제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려고 마음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 터.

3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빙하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리려던 찰나 도래한 외계와의 접촉. 그리고 화성 진출에 이르기까지.

삼백 년이라는 시간은 언뜻 길어 보이지만,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지 짧게만 느껴졌다.

가온의 정신 연령 또한 그러했다.

청년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임기응변에 능하도록 발전한 것뿐.

하염없이 세월만 보낸다고 다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맞이해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고, 제 아이가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황혼기를 마무리하면서 삶에 대해 회고하는 시간도 가져본 적 없지 않던가.

인간의 정신이란 색다른 경험이 축적되면서 성장하기 마련인데 그런 쪽으로는 연이 없는 가온이었다.

더구나 인생이란 탄생과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

기간이 정해져 있기에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거다.

하지만 죽음이 결여된 가온은 영원히 정체될 뿐, 마침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해결사라는 직종을 선택한 건 그러한 결여를 채우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영원히 죽지 않는 제 삶은 변치 않지만 언젠가 죽을 사람들의 삶은 변했으니까.

도비도 그중 하나였다.

원래대로라면 얼마 전에 죽어 사라졌을 운명.

하지만 가온이 개입해 꼬인 실타래를 풀어 주었기에 도비는 제 인생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긍정적인 변화.

그 과정에서 가온은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일희일비할 수도 없는 법.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였다.

물론 그런 포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하실은 조촐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다시 봐도 황량하네.'

간단하게는 전자 현미경. 넓게는 3D 프린터나 성분 분석기, 초저온 냉동고, 생체 조직 검사기. 종국에는 유전자 조작기까지―

채워 넣어야 할 품목이 한가득이었다.

가장 시급한 건 연구를 진행할 주체였다.

불로불사라는 주제는 생명의 정수를 노리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생명공학, 분자생물학, 유전공학 등등 관장해야 할 분야는 차고 넘쳤다.

여러 슬롯이 개발되면서 지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단은 많아졌지만 그 또한 재능과 적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가들의 조언을 얻는 게 이상적이지만, 말처럼 쉬이 일이 풀릴 리 없었다. 가장 믿지 못할 게 인간이었던 거다.

다행스럽게도 대체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

명령을 강제할 수 있는 그들이라면 배신할까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었다.

세라도 자기가 근무하는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지 않던가.

아무래도 객식구를 한 명 구해야 할 것 같았다.

* * *

바 카운터의 한구석.

이제는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에 앉은 가온은 눈동자를 굴려 디바이스를 조작했다.

저 멀리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페르난데스와 어색한 기류가 흐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무서워한다고 해야 하나. 잘못한 게 있으니 움츠려 있다고 해야 하나.

딴에는 배려한다고 하는 걸 테지만 가온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그릴 수도 없는 법.

가온은 무심하게 바 카운터를 검지로 두드렸다.

"안 잡아먹으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방금 전부터 뭘 보고 있는 건가? 설마 나 대신 다른 중개업자와 접촉한 건 아니겠지? 알겠지만 저번에도 중개료를 최저로 해 줬지 않나. 내 자랑 같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거의 남는 게 없이 퍼 주었다고 봐도 무방하네."

괜히 물꼬를 터 주었으나 싶을 정도로 페르난데스는 방정맞게 입을 놀렸다.

"진정해,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카탈로그?"

"그래, 안드로이드가 꽤나 비싸네."

4차 산업 혁명의 주역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공지능이었다. 화성을 개척할 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 않았던가.

끊임없는 원가 절감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는 개인이 소유해도 될 정도로 단가가 낮아졌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분별없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옛날 감성으로 말하자면 고급 외제 차를 들이는 기분이랄까.

"그런 거라면 내가 알선해 줄 수 있지. 평소에도 알고 지내는 업자가 몇 명인가 있으니까."

"아, 내가 사고 싶은 건 시중에 나온 게 아니야."

가게에서 판매하는 안드로이드는 모두 가정용이었다. 하나같이 세라처럼 평범한 사양이라는 뜻. 그런 것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연산 속도가 느려 고차원적인 추론 같은 건 하지 못할 테니까.

때문에, 가온이 노리는 건 당연하게도―

"인공지능 제한법에서 벗어난 안드로이드, 그러니까 '언락'된 녀석들도 뒷골목에 떠돌고 있을 거야. 그렇지?"

042 괜찮아, 잔업 한 번만 뛰면 낼 수 있어

* * *

여태 카탈로그를 살펴본 건 시가를 유추하기 위해서였다.

"보아하니 성능이 낮은 녀석은 5억 피아 정도면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블랙마켓이라도 소개해 달라는 건가?"

"그래."

생각하지도 못한 부탁에 페르난데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대체 왜 그런 게 필요한 거지?"

"해결사로 활동하면서 이것저것 시킬 조수가 필요하거든. 알잖아? 시중에 나온 건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예를 들자면 무단 횡단.

인간은 급하면 신호가 바뀌지 않아도 뛰어가지만, 안드로이드에게는 그러한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철저하게 법을 준수하도록 설계되었으니까.

"차라리 사람을 고용하지 그러나."

"내 노하우만 쏙 빼 먹고 도망칠 수도 있는 녀석을 말이지."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한지라 페르난데스는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못 말리겠군."

"정말 내 편의를 위해서만 사용할 거야. 내가 선을 넘는다고 생각하면 직접 신고하라고."

"일단 한 가지 말해 주자면 알고 있는 것과 입장하는 건 별개라네. 아무리 내가 소개한다고 해도 입구 근처조차 가지 못할 테지."

"그러니까 검증받은 녀석들만 들여보내 준다는 거지?"

"주인 없는 장물이 돌아다니는 일반적인 블랙마켓이라면 바로 추천해 줄 수 있지만 자네가 원하는 품목은 그게 아니지 않나."

복제 인간 통제법, 유전자 보호법, 가상 현실 특례법, 그리고 인공지능 제한법에 이르기까지.

흔히 4대 기본법이라 불리는 규율은 특정 세력의 사익이나 공공 기관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게 아니었다.

지켜져야만 현대 사회가 유지되기에 자연스레 형성된 것에 불과했다.

한 가지라도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바, 일단 일탈이 발견되면 메가콥이라고 해도 곤혹을 면치 못했다.

뒷세계에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건 당연했다.

실질적으로 유통되는 곳도 음지 중의 음지.

단순히 접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페르난데스가 가온이라는 해결사를 인정하고 그에 준하는 대우를 해 주고 있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공유하는 동료 의식에 불과했다.

그게 업계 전반의 의견은 아니었던 거다.

세간에서 보기에 가온은 아직도 증명해야 할 게 많은 신참이었다.

피어 갱과 충돌한 뒤에도 자잘한 의뢰를 수행한 가온이지만 그걸 경력으로 삼기에는 부족했다.

"귀찮네."

"서두르지 말게나. 자네라면 머지않아 원하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테니. 그보다 피어 갱이 자네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알고 있나?"

"그 녀석들을 지원한 놈이 공찰에서 굴러떨어졌는데 어쩔 건데.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데 굳이 나서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숨어 지내는 게 최선이겠지만 녀석들이 타협이라는 걸 알았다면 갱스터라 불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받았으니 갚아 준다.

거기에 이해관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길 가다 눈먼 칼에 찔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런 거로 죽을 거였다면 이렇게 고생 안 해."

피식 웃은 가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올 때까지 새로운 의뢰나 잘 받아 봐."

* * *

[밀리터리 룸]

34구역 외곽에 위치한 총포사에 들어가니 자욱한 안개가 두 눈을 간질였다.

중심에 있는 건 담배를 씹어먹을 것처럼 호쾌하게 피우고 있는 중년 남성.

근육의 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팔뚝에는 총상이 산재해 있고, 짧게 깎은 수염에는 야성이 물씬 풍겼다.

흉악한 이목구비와 다르게 일단 돈만 주면 친절한 이웃으로 변하는 총포상, 올리버 트윈슨 앞에 선 가온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트리거 해피."

한껏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올리버의 눈썹이 들썩였다.

"너는, 페르난데스와 함께 왔던 해결사였나. 그러니까...."

"백가온이야."

"아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장사하는 사람이면서도 서브 브레인 하나 이식받지 않은 건 올리버가 기름과 화약에 매료된 인간이어서였다.

사격에 어떠한 장치의 개입도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순도가 떨어지면 손맛도 함께 떨어진다고 하던가.

수많은 사람과 만난 가온이 보기에도 특이한 부류였다.

"페르난데스에게 듣고 온 건가."

뜬금없는 이름이 거론되자 멈칫한 가온이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창고로 들어가더니 박스를 하나 들고 나왔다.

겉 표면에 찍힌 상표는 섬유와 의류 분야에서 정평이 난 메가콥 야미타의 것.

"보호 장비? 저번에 구매했을 텐데."

입고 있는 코트가 그러했다.

"그런 조잡한 걸로 버티면 지갑보다 먼저 네 몸뚱이에 구멍이 날 거다."

"강매라도 할 셈이냐."

"말했지 않나, 이건 페르난데스가 너한테 주라고 맡겨 둔 거다."

이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올리버는 포장된 제품을 건넸다. 엉겁결에 받아 든 가온은 고개를 숙였다.

[IVOD―300]

피어 갱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그렇게 하더니 따로 염두에 둔 게 있는 듯했다.

우울한 인상과 다르게 세심하다고 봐야 할까.

"방검, 방탄, 방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더 아머다. 세라믹 복합소재에 탄소 섬유를 더해 MUG―1에 해당하는 작전 수행 능력을 보장하지."

가온도 익히 알고 있는 제품이었다. 50년이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는 베스트셀러였으니.

"갓 해결사가 된 녀석에게는 필수적인 장비다. 아무래도 페르난데스는 진지하게 너를 키워 볼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코트를 벗고 안에 착용한다.

착, 하고 달라붙은 언더 아머. 언제 또 사이즈를 확인한 건지 불편한 부분은 없었다.

화해의 선물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저번에 사 갔던 클락은 어때? 쓸 만한가?"

"추천해 준 대로 쓸 만해. 다만 화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고 해야 하나."

게스토를 보면 알겠지만, 골격계를 슬롯으로 보강한 녀석들에게는 파훼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지난번 진건과의 만남을 통해 함부로 검을 사용할 수 없는 입장인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가온이었다.

밀리터리 룸에 들린 건 그러한 단점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기관단총이 대세다. 연사도 가능하고, 일부는 여차할 때 소총탄과도 호환이 되니까. 거기에 총기 액세서리도 부착할 수 있어서 여러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지."

"이왕이면 있던 걸 활용하고 싶은데."

안드로이드를 구입하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우리 해결사께서는 특별한 걸 찾는가 보군."

기다렸다는 듯 올리버는 진열장에서 큼지막한 곽을 하나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클락과 호환되는 9mm 탄.

올리버가 선택한 건 그중에서도 끝부분이 예리한 녀석이었다.

"특수 배합한 장약을 넣어 화력을 높인 탄환이다. 적어도 네가 쓰던 것에 비하면 두 배가량 강해질 테지. 자기 몸을 막 굴리는 녀석들이 나타나도 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을 거다."

자동소총에 비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아랫급은 된다는 소리.

"훌륭한걸. 왜 이런 물건을 지금까지 숨긴 거야?"

"한 발당 2천 피아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잖아."

가온이 식겁한 표정을 짓자, 그 표정을 읽은 올리버는 즉시 판매 전략을 바꿨다.

"하지만 지금 100발을 구입하면 15퍼센트 할인해 주지."

솔깃한 제안에 가온은 절충안을 냈다.

"그러면 외상으로 처리해 줘. 보아하니 어차피 안 나가는 애물단지 같은데 말이야. 나 말고는 살 사람도 없잖아."

"뭐?"

"괜찮아. 잔업 한 번만 뛰면 낼 수 있어."

아니, 내가 안 괜찮은데.

올리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탄환을 챙긴 가온은 밀리터리 룸을 나섰다.

* * *

해결사를 지망하는 햇병아리가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이는 건 현상금 사냥이었다.

지명 수배가 될 정도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놈이라는 거고, 그 말인즉슨 중간에 실수해서 죽이더라도 죄를 묻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니까.

제 능력을 시험하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적합한 무대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 게재되기까지 하니 접근성 또한 남달랐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수습 딱지를 뗀 해결사들도 종종 용돈을 벌고자 현상금 사냥에 열을 올리고는 했다.

가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타깃은 조슈아 뮈버.

한 갱단의 사주를 받아 해당 구역 공찰서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었다. 후속된 조사에서 제 혐의가 드러나자마자 잠적, 지금까지 도주 중이었다.

물론 녀석이 유능해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지타산의 문제였다. 수색하는 단계에서 소비되는 자원이 너무나 많았던 거다.

신원이 특정된 순간 녀석은 언노운을 사용해 제 행적을 감추었다.

'언노운.'

노이즈 웜이 녹화나 녹음 시 방해 전파를 뿜어내고, 락 다운이 디바이스의 기능을 정지시킨다면 언노운은 항법 장치로 가는 신호를 차단하는 기기였다.

공찰이 다른 단체보다 우위에 있는 점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개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데 그 점을 완벽하게 무위로 되돌리는 장치였다.

디바이스를 추적할 수 없으니 하염없이 잠복 수사해서 체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얻는 실적은 절망적.

공찰이 기피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치안 공백을 막기 위해서라도 담당 부서가 신설되어야 할 테지만 앞서 서술했다시피 해결사를 중심으로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공생하는 사이가 되었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은 것도 그 연장선.

가온이 보기에 조슈아는 전형적인 인생 막장이었다.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는 도박에 전 재산을 탕진한 것도 모자라 사채까지 끌어다 썼던 거다.

갱단과 얽히게 된 것도 그 때문.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말만 듣고 공찰서에 불을 질렀으니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조슈아는 몰랐겠지만 난리가 난 사이, 갱이 몇 명인가 탈출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갱단이 노리는 바였겠으나, 조슈아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을 거다.

쥐 죽은 듯이 종적을 감춘 건 그나마 최소한의 생존 본능이 발휘된 결과일 터.

하지만 가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조슈아가 어디에선가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아니나 다를까, 불법 도박장을 순회한 끝에 놈이 매주 출근하는 업장을 특정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리고 있자니, 한 남자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사처럼 아무렇게 기른 수염에 탁한 눈동자.

목표인 조슈아의 얼굴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는 건 당연지사.

도망자 신세라는 자각이 있는 건지 조슈아는 일부러 으슥한 골목만 골라 다녔다.

가온에게는 기꺼울 따름이었다.

따로 유인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시기를 가늠한다.

저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려 퍼지자 움찔한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043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떠나지 않으니까

* * *

현상금 사냥꾼에게 필요한 9할 9푼은 인내고, 나머지 1푼은 넉넉한 납탄이었다.

가온이 품속에 넣은 손을 뺀 것과―

달칵.

클락이 불을 뿜은 건 거의 동시였다.

총성이 주위의 소음에 파묻혔듯이, 뒤로 쓰러진 조슈아 또한 길가에 쌓인 눈더미에 파묻혔다.

잡으러 왔다느니, 죗값을 치르라느니 의미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죽을 녀석이 죽은 것뿐이었다.

애도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번에 가온이 목도한 건 조슈아의 죽음이 아니라 바뀐 탄환의 위력이었다.

"돈값 하네."

* * *

"지명 수배범 한 명 처리했으니까 사람 좀 불러. 그리고 언더 아머, 영리한 선택이었어. 고맙게 잘 입지."

[뭣....]

GPS에 찍힌 제 좌표를 페르난데스에게 보낸 가온은 등을 돌렸다.

콜롬버스까지 조슈아를 데려갈 것도 없이 공찰과 협조하면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기증이라는 명목하에 의사들의 수행 재료가 되든, 피해를 입은 공찰 측에 들어가 오체분시가 되든 알 바 아니었다.

사소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 또한 해결사의 덕목이었으니.

골목길을 나오니, 빌딩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둑한 밤인데도 곳곳에서 발광하는 홀로그램과 네온사인. 그리고 디바이스와 연계해서 펼쳐지는 증강 현실은 낮처럼 떠들썩하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본 가온은 자신이 여태껏 와보지 못한 장소에 발을 들였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24구역인가.'

연예 기획사나 영화 제작사가 밀집된 곳이었다. 관련 대학교도 근처에 있고 소공연장이나 라이브 클럽의 비율도 높았다.

그러한 시류를 따라 방송국이 인접한 곳에 세워진 건 말할 것도 없는 바, 상상 이상의 활기가 느껴졌다.

근간이 되는 건 8차선이 교차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광장.

대로변에 위치해서 그런지 여러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춤을 추는 댄서가 있는가 하면 초상화를 그려주는 길거리 화가가 있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저마다 노래를 부르는 버스커들이었다.

오가던 사람들도 잠시 발걸음을 멈춰서고 감상에 젖어 들었으나, 가온만큼은 예외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한 음색과 음정은 라디오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었던 거다.

자신만의 해석보다 완벽한 재생이 선호받는 시대.

가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다.

세대 차이를 이런 곳에서 느낄 줄은 몰랐던 터라 절로 쓴웃음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디바이스에 현상금이 들어온 건 그때.

깔끔한 페르난데스의 일 처리에 감탄하며 가온은 그중 일부를 올리버에게 전달했다. 타박하는 듯한 답장이 돌아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돌연, 저 멀리서 불협화음과도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던 거다.

숨이 벅차도록 한껏 끌어올린 미성과 선명하게 울리는 통기타 소리.

모든 게 통일된 광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개성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걸어간 가온은 한 소녀 앞에 섰다.

체구를 가늠할 수 없는 펑퍼짐한 항공 점퍼. 후드를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목도리를 빙빙 감아 얼굴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호소력과 감성.

가슴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소녀에게 있었다.

놀라운 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오해할 터였다.

사실, 특색을 떠나서 노래 선정부터가 부적절했다.

"'스텔비아'의 '별을 찾은 너'. 맞지?"

노래를 마무리한 소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묻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활동했던 유명 가수가 바로 스텔비아였던 거다. 숫자로 따지자면 대략 삼백 년 전.

복고 중의 복고, 레트로 중의 레트로였다.

그때 그 시절 사람인 가온에게는 명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 사회 그것도 연예계에서는 사장되다시피 한 노래였다.

"잘 아시네요?"

"나도 좋아하거든. 혹시 직접 선정한 거야?"

"네, 요즘 노래보다는 예전 노래가 마음에 들거든요."

"어린 나이인데도 음악이 뭔지 알고 있네."

"가, 감사합니다."

때아닌 극찬에 소녀는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가온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세간에 노출만 된다면 그녀가 비상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혹시 가수 지망생이야?"

"가수보다는 아이돌, 이에요."

"오, 만능 엔터테이너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질겁하며 손사래를 치지만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만큼은 감추지 않는 소녀였다. 어쩌면 그녀에게 모자랐던 건 관심일지도 몰랐다.

"열심히 해.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떠나지 않으니까."

기타 케이스에 5만 피아를 넣은 가온은 소녀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광장을 벗어났다.

그가 떠나간 자리.

홀로 남은 소녀는 멍하니 기타 케이스 안을 내려다보았다.

버스킹을 하면서 처음 받은 돈이 그곳에 있었다.

현재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서 있는 소녀에게는 어떠한 계시나 다름없었다.

지폐를 부적으로 삼아 품속에 넣은 소녀는 밝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응원도 받았겠다, 뭔가 될 것 같은 날이었다.

* * *

화성을 대표하는 종편 LOTV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틱 헌드레드.

각지에서 모인 연습생 100인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런칭할 때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철저하게 야생을 표방한 서바이벌이었던 거다.

느슨해진 방송계에 긴장감을 주는 편성.

더구나 여기에서 선발된 최종 6인은 메가콥 마스톱의 비호를 받으며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명인데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춰 인지도를 쌓는 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메가콥이 선정한 아이돌이 되는 거다.

시청자들은 제 손으로 그러한 재목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고, 연습생들은 두 번 다시 없을 특혜에 온 열정을 쏟아냈다.

세 달 간에 걸친 경합 끝에 남은 건 7인.

막바지에 다다른 만큼 이제 한 사람만 탈락하면 프로그램이 종료되었다.

그래, 한 사람만 넘으면 된다.

할 수 있다.

그리 되뇐 소녀, 사쿠야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동선 체크도 끝났고 주제곡도 모두 외웠다. 의상도 제대로 입었고, 메이크업도 부족한 구석 없이 완벽했다.

남은 건 최고의 나를 보여 주는 것.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려니, 대기실 안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상대가 들어왔다.

헨델 바이슨.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1위를 가리는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의미 없는 칭호지만, 현 시점에서 그녀의 데뷔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룹이 결성되는 즉시 핵심 멤버가 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사쿠야가 보기에도 헨델은 이상적인 아이돌 그 자체였다. 별빛을 담은 듯 살랑거리는 백금발에 육감적인 굴곡. 더구나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는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성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고 밑바닥을 나돌았다.

"구질구질하게 기어코 여기까지 올라왔네? 혹시라도 네가 통과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야. 수준 낮은 멤버랑 같이 활동하게 되는 것만큼 참기 힘든 건 없거든."

참가했을 때부터 늘상 이런 식이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제 본성을 드러내기 급급했던 거다.

하지만 대꾸하려던 사쿠야는 입을 열다 말았다.

귓가에 묘한 이질감이 맴돌았으니까.

그 주체는 헨델.

그녀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원인은 하나―

"설마 인공 성대를 또 교체한 거야?"

"신제품이 발매되어서 말이야. 저번 기종보다 1.6배는 더 깔끔하게 고음을 구현할 수 있다고 하던데 이번 경연에서 확인해 봐야겠네."

그러면, 헨델이 부르는 게 아니라 기계가 대행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부끄럽지도 않아?"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게 아이돌이야. 너 같이 어중간한 각오로 내추럴을 유지할 바에는 끝까지 가는 게 나아. 그건 득표수가 말해 주고 있어."

그 말대로 헨델은 회를 거듭할 때마다 환골탈태했다.

이목구비가 변하는가 하면 피부에 잡티가 사라지고 몸매가 완성되었다.

과학의 힘을 빌린 미(美).

"그런 건 기만이야. 기계 장치로 범벅이 된 사람을 볼 거면 차라리 안드로이드를 찾지, 공연장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부러워?"

숨결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이민 헨델이 잔망스럽게 웃었다.

"전혀."

사쿠야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들이밀었다. 가슴만큼은 그녀도 지지 않았으니까.

"기본 소득만으로 생활하는 주제에 잘난 듯이 훈계질이나 하고 말이야. 너도 예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이돌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을 거 아냐? 인정하지?"

아니.

사쿠야는 단언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음악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달려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매주 버스킹에 나서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옛날이라면 너 같은 아이는 몸 파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을 텐데, 정말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

"내가 돌려주고 싶은 말이네."

곁에서 줄곧 헨델은 지켜본 사쿠야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녀는 게으름뱅이였다. 모든 능력을 슬롯에 의지하는.

아마 몇몇 잡기만 제외한다면 오롯이 헨델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할 거다.

마음이 없는 노래는 밑천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쿠야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다.

대기실에 FD가 들어온 그때였다.

"생방송 시작 20분 전입니다. 참가자 분들은 모두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보란 듯이 미소를 꾸며 낸 헨델은 FD가 나가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흥이 식었어, 갈래."

들어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진 헨델.

폭풍이 한 번 휘몰아치고 갔지만 사쿠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 뒤, 그 기세 그대로 무대 위로 올라간 사쿠야는 마이크를 잡았다.

품속에는 5만 피아 지폐가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떠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사쿠야는 힘껏 노래했다.

그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나는―

* * *

[아깝습니다. 사쿠야 양은 이렇게 7위로 밀려나게 되었네요]

[어떻게 보면 정해진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성장하는 한편 사쿠야 양은 처음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몰라보게 늘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랙슨 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텔레비전 속 패널들은 엊그제 방영한 미스틱 헌드레드에 대한 내용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최종 선발에서 탈락한 건 유키하나 사쿠야.

보육원 출신, 소녀였다.

순간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연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지만 팔을 덜덜 떠는 게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착각인지, 망각인지 알 수 없는 노릇.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가온은 곧장 상념을 접었다. 난데없이 콜롬버스에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램이 나와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었던 거다.

044 어련하시겠어

* * *

페르난데스에게로 고개를 돌린 가온이 입을 열었다.

"뭐야, 갑자기 저런 걸 보고. 늦바람이라도 든 거냐."

가온에게는 식어서 썩은 떡밥이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고 지금 시대에는 저러한 포맷이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가 그 흐름에 올라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답한 건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등 뒤로 다가온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관심사다 보니 양해를 구하고 채널을 바꿨습니다. 혹시 실례가 됐을까요?"

"그런 거라면 괜찮아.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남자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자 가온은 손을 저었다. 페르난데스가 시의적절하게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의뢰인이라네. 자네가 적임일 것 같은데, 생각 있나?"

"그래?"

그제야 남자의 행색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요즘 세대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 정도로 세련된 스타일링. 코에 걸린 금테 안경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조차도 잘 어울렸다.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옅은 체취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보다 짙게 풍긴 건 돈 냄새였다.

뒷골목을 전전긍긍하기보다 아예 공찰에 신고할 것 같은, 모범적인 인상.

"일단 어떠한 의뢰인지 들어나 보자고."

* * *

콜롬버스 한쪽에 마련된 접견실로 들어간 남자가 플라스틱 명함을 내밀었다.

"부끄럽지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거기에 새겨진 인식 태그를 확인하자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오르페우스 소속 제3제작팀 총괄 프로듀서, 라주 세이블? 그 나이에 벌써 한 자리 차지했네.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과찬이십니다."

남자, 라주가 멋쩍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가온은 보이는 대로 믿지 않았다.

오르페우스.

메가콥 마스톱 산하 연예 기획사 중 하나로 시가 총액만 해도 11조에 달하는 대기업이었다. 그곳에서 히트한 걸그룹만 해도 여덟. 가수나 배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연혁을 살펴보면, 화성이 개척되었을 당시부터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문화를 선도하는 회사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서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건 좋든 싫든 정치에 능하다는 소리일 터.

"가온 씨께서는 아이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문답이나 다름없는 물음.

"평가할 게 있어?"

업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는 문외한인 가온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라주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평가할 게 없습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외견으로 성형하고, 인공 성대로 발성과 화음을 강화하고 세컨드 브레인으로 모자란 지식을 채우니까요."

필요하다면 골격까지 깎아서 보형물과 지지대를 삽입하는 업계였다.

한 가지 형태로 귀결되는 우상(Idol).

거기에 개성이나 자아는 필요치 않았다.

"그런 추세이긴 하지."

괜히 가온이 길거리에서 버스킹 하던 소녀에게 감탄한 게 아니었다.

"기술이 앞장서고 정작 인간은 뒤따라가는 형국입니다. 상품보다 제품에 가깝다고 할까요."

자조적으로 웃은 라주가 덧붙였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습생들이 지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죠."

"그래서 개인의 성과나 성취에 따라 회사에서 따로 지원해 준다고 들었는데."

"명목상 투자라고 하지만 본질은 빚입니다. 데뷔하고 인기를 얻으면 빠르게 청산할 수 있지만 대다수는 그러기도 전에 조용히 사라지죠."

"방금 전에 보았던 사쿠야라는 아이처럼?"

"그렇습니다."

어쩐지 프로그램을 주의 깊게 감상하더라니, 아무래도 해당 업계 종사자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몰입한 듯싶었다.

한 차례 숨을 몰아쉰 라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연습생들은 그러한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 한시라도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일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막연한 서론이었지만 배경 설명이 길어서 그런지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폰 제의라도 받는다는 거냐."

"네, 제가 담당하던 아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방금 전까지 잘만 말하던 라주가 입을 다문 건 그때.

찻잔에 비친 제 얼굴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설명을 이어 갔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바뀌더군요, 노래며 춤이며.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쏟아부은 열의가 이제야 빛을 발한 거라고 믿어서 오히려 격려했죠."

그녀가 어떠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지막 부분은 흘리듯이 말한 라주였지만 후원을 받는 과정에서 소녀가 불순한 대가를 주었다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온의 대답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애석하지만 그런 건 공찰의 소관이잖아. 그리고 어리다고 해도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생기는 문제는 본인 책임이라고."

"맞습니다. 그러잖아도 그 아이가 그러더군요. 모든 걸 폭로할 테니 도와달라고."

그러면 그 건과 관련된 의뢰인가 싶어 호응하려던 가온이었으나―

"하지만 그다음 날에 바로 실종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대답을 바꾸었다.

"놀라울 정도로 공교롭네."

"네, 아마도 그녀와 접촉한 사람 중 누군가 눈치챈 게 틀림없습니다."

"실종 신고는?"

"했지만 근거가 빈약해서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어쩌겠습니까, 저라도 나서는 수밖에."

기실, 현대 사회에서 실종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신경계 전반과 연결된 기기, 디바이스를 이식하고 다니는 만큼 그것만 추적하면 손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영장이 발부되어야 했다. 그것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무고한 시민을 위한 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위정자를 비롯해 세력가를 위한 방비책이었다. 만약 편이하게 디바이스를 추적할 수 있다면 부정적인 혐의가 밝혀지는 즉시 행적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거다.

옛날처럼 스마트폰을 버리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포착되는 순간 사회적으로 말살되는 건 당연한 수순.

때문에, 조슈아처럼 공찰에 불을 지르지 않고서야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게 디바이스 추적이었다.

세간에는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강화 조치라고 떠벌렸지만 그게 마음에도 없는 주장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프로듀서라고 해도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과하지 않아? 그 아이의 가족은 어쩌고."

"제가 가족입니다."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를 쓰다듬은 라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이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은퇴해 평범한 주부가 되고, 저는 독립해 기획사를 차리는, 그런 꿈을 꿨습니다. 이제 와서는 모두 부질없지만요."

은원을 정산하고 새롭게 출발하려고 했던 두 사람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검은 얼룩을 지우고 행복해지는 걸 용서하지 않았던 거다.

라주에게 남은 건 없었다.

아니, 하나 남긴 했다.

모든 업보의 청산.

삶의 목표가 정해졌기에 지금 이 자리에 앉은 거였다.

"그녀의 실종에 연관된 이가 고통받길 바랍니다. 어중간한 처벌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알선한 브로커, 제안한 스폰서, 동조한 관계자까지 전부."

"보수는?"

"제가 기획사를 차리기 위해 마련한 자금 10억 피아 모두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긴 대화에 방점을 찍은 라주는 울지 못하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 * *

라주가 떠나고, 어딘가 모르게 휑해진 접견실.

페르난데스가 턱을 긁적였다.

"받지 않을 줄 알았네만."

"그렇게 내 속내를 떠보는 듯한 말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안하군,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하지만 의외라는 건 진심이네. 터무니없이 어려운 의뢰가 될 거라는 건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건데? 어쩌면 단가가 맞지 않을 수도 있네."

"확실히 10억 피아로는 모자랄 수도 있겠어. 그래도 일부러 이런 것만 가지고 오는 녀석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라주의 사정을 듣고 모든 걸 이해했을 때, 가온은 페르난데스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정의 구현에 관심이 많나 봐?"

"양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네. 그게 설령 누구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도 말일세. 자네도 체감했을 거 아닌가. 이 세상에 법이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아니, 점점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대중이 참여해서 시류를 바꾸는 시대는 끝났다. 자정해야 할 제도(制度)가 제 기능을 멈춘 거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법전에 수많은 규율이 명시되었다고 해도 결국 그걸 지시하고, 행하는 주체는 인간이었다.

약속은 약속일 뿐, 절대적인 명제는 되지 못했다.

구성원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단체가 지키지 않겠다면? 무시하겠다면? 마음대로 갱신하겠다면?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분개한 민중이 괭이를 들고, 낫을 들고 숫자로 몰아붙이겠지만 지금은 허황한 상상일 뿐이었다. 주류가 된 기득권이 모든 권리를 한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반란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그 즉시 버튼 하나로 쓸어버리겠지.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거다.

업계의 진실을 폭로하려고 했던 소녀가 실종된 것처럼.

어찌 보면 해결사라는 직종이 생겨난 것도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중개업자라 자칭할 거면 중개업자만 처리할 수 있는 의뢰를 맡는 게 온당한 처사 아니겠는가."

"누가 보면 네가 뛰어다니는지 알겠네."

"뛰어다니지 않기 위해서 자네 같은 인재도 몸소 포섭하지 않았나."

"어련하시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가온은 콜롬버스를 나섰다. 그리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해 인파에 스며들었다.

프로듀서, 라주가 미래를 약속했던 소녀의 이름은 애비게일 코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얼굴은 익숙했다. 지난번 피어 갱의 거점에서 얻었던 목록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그래, 디바이스를 적출당한 사람들의 목록에서 말이다.

애비게일이 어찌 되었을지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페르난데스도 이를 눈치채고 은연중에 라주가 콜롬버스에 방문하도록 유도했을 터.

뒷세계는 절제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위험한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소였다. 여기에서는 명분이나 잔정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하고 싶으니까 한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폭로하려고 한 당사자를 납치해 깔끔하게 없앤 것도 모자라 디바이스를 적출한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물어볼 것도 없지.'

그 바탕이 되는 건 극한까지 인간을 활용하고자 하는 악의였다. 더 이상 동족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자원으로 취급하는 것만 보아도 자명한 일.

페르난데스가 염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비게일의 뒤를 쫓는다는 건 결국 그러한 녀석들과 대적하게 된다는 거니까.

그래도 가온은 보고 싶었다.

과연 누가 주관했는지.

045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핵심만 말해

* * *

* * *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입주할 수 있는 하이 클래스 주상복합 단지, 스카이 빌리지.

언제나처럼 소파에 앉은 청년은 13구역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직접 어깨를 부딪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개미처럼 작게만 느껴졌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눈앞의 광경을 되새기는 게 청년의 별거 아닌 취미 중 하나였다. 자신이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게 여실하게 다가와서였다.

녹아내린 얼음이 글라스 안에서 청명한 소리를 낸 건 그때.

"헨델 바이슨이라고 했나?"

"네, 일전에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1위를 차지한 소녀입니다."

뜬금없는 물음이었으나, 청년의 뒤에 기립한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사용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 사업에 투자한 보람이 있군. 그런데 말이야."

"말씀하시죠, 도련님."

힐끗 방문을 쳐다본 청년이 덧붙였다.

"저런 제품 말고 신선한 건 없나? 손때가 타지 않는 게 내 취향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마침 하나 매물로 나온 게 하나 있습니다."

노인이 보낸 정보를 디바이스로 확인한 청년은 손가락을 튕겼다.

"내추럴이면 나쁘지 않지. 잘 포장해서 데려와."

"마침 헨델과 아는 사이니 유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청년이 가볍게 수긍하는 것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다, 당신들은 뭐죠? 저는 왜 이 꼴이고요?!"

치렁거리는 백금발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녀, 헨델이 쏘아붙였다.

"아, 깨어났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청년이 무덤덤하게 반응하자 헨델은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시, 신고하겠어요."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큭."

노인이 팔을 뻗자마자 헨델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디바이스가 작동 오류를 일으킨 거다. 누가 정신 방벽을 뚫고 들어오려는지는 명약관화.

하지만 이내 두통이 잦아들었다.

노인의 디바이스 간섭이 실패했다고 안심하려던 찰나―

"우리 둘은 상호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어요. 저도 성인인걸요. 이런 걸로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어른의 교제란 그런 거잖아요?"

입술이 움직였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나중에 심정이 변해서 헛소리할 수도 있지만, 알잖아요? 여자는 다 변덕쟁이라는 거.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을게요."

어떻게든 목구멍을 닫으려고 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막 쏟아져 나왔다.

'튜너?'

헨델이 추측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녹화했나?"

"빠짐없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절조 없이 다니는 그녀라고 해도 이제 막 데뷔가 결정되었는데 스캔들을 일으킬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는 건 아니었던 거다.

디바이스로 스팸 메일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분명?'

그제야 제 기억이 누락되었다는 걸 깨달은 헨델은 소름이 돋는 듯했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의도된 상황이라는 건 명확했으니까.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술병을 집어든 그녀였으나 회심의 반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또다시 노인이 개입했던 거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헨델은 제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몇 번이고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 있던 건 청년이 아니었다. 이름 모를 중년이었다. 그전에는 여자, 또 그보다 전에는 노인.

혼탁한 상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헨델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반복이었으니.

"당신...."

헨델이 남긴 건 외마디 탄식뿐.

기절한 그녀를 무심하게 지켜본 청년은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반복적인 전기 신호로 자극하다 보니 거기에 따라 새로운 신경 세포가 형성되는 건가. 이건 차차 수정해야겠군. 기억은 지울 수 있겠지?"

"무의식중에 남아 있겠지만 문제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뛰쳐나오는 것까지 허용해 주면 그 뒤에 생겨날 변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이번 일만 맡기고 처리해야지. 저번에 맡겼던 곳이 있을 텐데? 이름이 뭐더라, 되게 직설적인 단어였는데."

"피어 갱이라면 저번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잔당도 떠도는 처지입니다."

"아, 그래? 그러면 그 녀석을 불러야겠군."

청년이 칭하는 이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노인으로서는 꺼림칙할 뿐이었다.

"도련님, 그들과 얽히는 건 지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됐으니까 연락이나 넣어라. 어차피 녀석이 책임질 일이지 않나."

말 그대로.

청년은 이렇게나 복잡하고 귀찮은 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독보적인 지위를 가졌으니까.

그런데도 구태여 비호하는 건 워낙 판이 잘 짜여서였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상상 이상의 부산물을 얻을 수 있었던 거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저마다 쓰임새가 있는 법. 내 권위에 빌붙어 장사하고 있다면 마지막까지 그 소임을 다하는 게 옳지 않겠나."

* * *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 가온은 상황을 정리했다. 라주에게 듣기로 애비게일이 죽기 전에 만난 사람은 총 셋.

매니저.

친구.

그리고 기자.

저마다 연관이 있고, 부자연스럽지 않은 접선이었다. 누구나 조력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거다.

애비게일도 그리 판단하고 제 속내를 털어놓았을 터.

그게 누구인지 밝혀내는 게 관건이었다.

가온에게 있어 가장 의심스러운 상대는 애비게일의 매니저였던 홀덤 브루스였다. 이는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었다.

하루 종일 붙어서 애비게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도 의심받지 않을뿐더러, 외부 세력에 영향을 받기 쉬운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 다르게 애비게일이 실종된 뒤로 홀덤의 생활에는 바뀐 게 없었다. 거주지도 전과 다르지 않았고 소유 차량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오르페우스 소속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솔 동안 미행했지만 평이했다.

느닷없이 브로커나 배신자로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관상이나 인상에 의거한 판단이 아니었다. 밑거름에 있는 건 철저하게 조사한 정보뿐.

본래 홀덤은 홈마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돌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팬이었다는 소리.

업계에 투신한 것도 걸그룹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함이라고 하니, 스스로 제 우상을 떨어트리려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홀덤이 현재 담당하는 아이돌은 헨델이었다.

그래,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1위를 차지한 이번 분기 최고의 유망주 말이다.

'별다른 건 없나.'

애비게일이 실종되었을 당시,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고 하니 그에 대한 의심은 잠시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만약 모든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면 홀덤은 매니저가 아니라 배우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다른 매니저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홀덤의 뒷모습을 바라본 가온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직접 보니 어떻습니까?"

"평범하던걸. 적어도 혐의점은 보이지 않아."

"하긴 업계에서도 조용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더군요."

"기껏 번 돈은 굿즈로 소비하고 말이야. 너무나 투명해서 반대편이 보일 정도였어."

가온은 상대방의 말에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먼저 온 남자의 정체는 대형 언론사 '모럴 하인즈' 연예부 소속 기자, 샴 베리였다.

일찍이 애비게일이 실종 직전, 면담을 요청했던 남자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적과의 동침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면이었지만, 샴이 이번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건 라주에게 신상을 들었을 때부터 익히 짐작한 가온이었다.

근거는 몇 개인가 있었다.

하나는 애비게일과의 접점이 없다시피 했던 것. 또 다른 하나는 그녀가 무엇을 폭로하려고 했던 건지 그도 아직 모른다는 거였다.

그 주장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이 만남이 증명했다.

정말 샴이 배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면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납치되거나, 살해당했을 테니까.

경솔한 접근일 수도 있지만, 자그마한 위험을 무릅쓸 정도는 되었다.

공동 전선을 펼친 덕분에 홀덤에 대한 조사도 예상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었던 거다.

다이버도 아닌 가온이 어떻게 그가 홈마 출신이라는 걸 단시간에 알아냈겠는가.

모두 연예부에서 구르고 구른 마당발이 옆에서 조언해 주어서였다.

물론 이렇게나 물심양면으로 샴이 도와주는 건 그의 저널리즘이 특출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면 이 기사는 단독으로 제게 주시는 겁니다?"

샴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특종을 터트리면 따라오는 성과급과 명성이었다. 가온을 만났을 때부터 그의 목표는 단순명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보신을 위해 행동했다.

기술의 발전이 마냥 선순환을 낳는 건 아니었다. 새로이 창출되는 사업이 있는가 하면 사장되는 직업도 존재했으니까.

기자도 그중 하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사는 인공지능이 작성했다. 키워드만 알맞게 제시한다면 초 단위로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바, 기자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시피 했다.

능률로 우위를 점한다는 건 언어도단.

다행히,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모든 걸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보란 현실 세계에서 태어나 가상 현실로 흘러 들어가기 마련이었으니.

입력되지 않은 자료라면?

기록되기 전의 사건이라면?

데이터를 선별하고 취합하는 데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없는 데이터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영역은 오로지 발로 뛰어야만 얻을 수 있었다.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한 샴은 진실을 캐내는 것보다 인맥을 쌓는 것에 열중했다. 취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구성한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정교해졌고, 그의 하나뿐인 자산이 되었다.

가온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고 친히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해결사와 기자는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한 직종이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샴이 재촉하지 않아도 넘겨줄 생각이었다.

나팔수와 알고 지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다만―

"실을 수 있다면 말이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회사의 모체가 어디인지 알고 계실 텐데요? 증거만 확실하다면 1면에 실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럴 하인즈의 뒷배가 오르페우스의 모회사라 할 수 있는 메가콥 마스톱과도 일전을 벌일 수 있는 메머드 기업이라는 건 가온도 알고 있었다.

업종이 비슷해서 그런지 재계에서는 영원한 라이벌로도 유명했으니까.

어째서 애비게일이 샴과 접촉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러고 보니 가온 씨가 애비게일 양의 매니저를 조사하는 사이 저도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접했습니다."

"뭔데."

"이번 사건을 접수한 건 조사관이라고 합니다."

공찰에서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

발령이 났을 뿐이지 잡일꾼과 다를 게 없는 직급이었다.

수사관도 아니고, 조사관인 거다.

두 단어에서 다른 건 한 글자뿐이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판이하게 달랐다.

'수사'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판단이 가능한 활동이지만 '조사'는 정적이고 단순한 반복 작업일 뿐이었으니.

당연히 따라오는 권한 또한 제한적이었다.

그러니―

"특별할 게 있어?"

"이제 막 출근해 앞도 뒤도 모르는 상태라면 조금 특별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구워삶았다는 소리이리라.

"서론이 긴 걸 보니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나 본데,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핵심만 말해."

주위를 둘러본 샴이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신고가 두 번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046 보기보다 친절하잖아

* * *

"두 번?"

한 번은 프로듀서, 라주일 거다. 애비게일과 함께 업계의 진상을 폭로하려고 했던 당사자이니.

그렇다면 남은 한 번은 누가 한 것인가.

"약혼자라는 분보다 먼저 신고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하루 전에."

"누구지?"

"카탈리나 로웬이라고 합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애비게일의 친구였던 거다. 실종되기 전에도 만났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한.

오래전에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 순위로 미뤄두었지만―

"열쇠를 쥔 건 그녀였나."

"흥미로운 건 실종 신고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납치 신고를 한 거죠."

"납치? 설마 직접 목격한 건가?"

"그건 가온 씨께서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샴도 뒷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카탈리아가 전화한 내용이 공찰 내부 데이터베이스에서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난 후에는 관심이 뚝 떨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직감한 거다.

여기서부터는―

"해결사의 차례지 않겠습니까."

샴이 정리한 내용을 디바이스로 건네받은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종, 기다리고 있어. 갓 잡은 걸로 올려줄 테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