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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20화 흑주술사 도네콜린트

지이이잉―

"...!"

대기가 사납게 진동했다. 흐려진 시야 앞으로 단검에 막힌 검 끝이 보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하체가 꿰뚫릴 뻔했다.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쌍 단검을 교차해 감시자의 검을 막은 존재가 있었다.

복면을 쓴 호리호리한 체구.

펜리 체이서가 직접...?

아니, 그녀는 아닌 것 같았다. 비슷한 체형의 또 다른 복면인들이 감시자의 뒤를 치고 나타났으니까.

펜리의 실력이라면 굳이 일행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셋.

나를 보호하기 위해 펜리가 보낸 검은 장미들이었다.

"…뭐냐!?"

갑작스레 나타난 기습에 감시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실력 있는 기사.

그는 주변을 둘러보곤 표정을 굳히더니 온몸에서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4성의 힘을 개방하려는 모습. 이에 나를 막아선 검은 장미의 몸에도 붉은빛이 번뜩였다.

카카카카캉―!

고막을 후려치는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중심으로 빗방울과 돌조각이 사납게 튀자, 난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 빛무리가 번뜩이며 충돌하는 광경. 싸우는 모습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4성이 이 정도라고?

그럼 5성 이상은 어떤 세상 속에서 사는 놈들인 거야?

"퉤!"

난 입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뱉어내곤 도망칠 궁리를 했다.

주변을 살피는 사이, 곁에 있던 검은 장미까지 전투에 합류하자, 감시자는 수세에 몰리며 먼 거리까지 물러났다.

내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모습.

하지만 여유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분이다.]

분명히 들었다.

그때부터 타임 어택은 시작이 된 셈이다. 10분, 아니 이제 9분이면 약이 바짝 오른 감시자를 내버려 둔 채 저들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 후 뒷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4성급의 전투를 직접 구경할 기회였지만, 그게 내 목숨값이라면 사양이었다.

'어디지? 어디야!?'

쓰러진 용병들과 벤에게 잠시 머물던 시선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향했다.

마법 불꽃은 폭우 사이에서도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불꽃이 토해내는 짙은 연기.

난 어디론가 흘러가는 연기를 쫓아 움직였다.

잠시 후, 연기가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본 내 두 눈이 반짝였다. 난 그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찾았다!'

돌산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바위.

그 바위에 뚫린 수백 수천 개의 구멍 중 일부 구멍들이 검은 연기를 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현상.

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눈앞의 현상을 만들어낼 기적은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고대 문양!'

칼바람을 토해내는 고대의 힘.

조금 전 일행을 휩쓸었던 칼바람이 멈춘 이유는 다음 소리를 토해내기 위한 바람 흡수 과정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 진행 과정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저 연기였다. 저 검은 연기 끝에 넬리토리의 고대 문양이 있다.

난 주저 없이 연기를 삼키는 구멍 중 가장 커 보이는 구멍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아뜨뜨뜨...!"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암석 표면이 제주도 돌하르방처럼 잔구멍이 많고 거칠어서 미끄러질수록 잔상처가 늘었다.

하지만 지금 이딴 상처에 주저할 때가 아니다.

7분.

구멍 깊이는 깊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한 후 젖은 헝겊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화생방처럼 제법 매웠다.

난 물기로 가득 찬 공간을 둘러봤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린 개미굴 형태.

일부 구멍에서 빛이 흘러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다. 지형을 살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미로 형태에, 폭우로 인해 흔적마저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칼바람의 저주까지.

바깥과 달리, 안쪽 공간은 응축된 공간이라 칼바람의 위력이 수배는 강력할 것 같았다.

일반인은 휩쓸린 순간 머리가 터져 죽을지 몰랐다.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자라도 이런 환경에선 날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놈이 안으로 들어올까?'

곧 있으면 밤이다.

빛까지 사라진다면 감시자는 여러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나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

하지만 카멜의 명을 목숨처럼 여기는 놈이라면 끝까지 날 추적해 움직일 것이다.

'6분.'

내 계획은 간단하다.

깊숙이 숨어서 버티는 것이다. 감시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이 안에선 칼바람이 쉴 새 없이 퍼부어진다.

놈이라도 온종일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지도 힘들면 물러나겠지.

"후…."

난 수많은 구멍을 둘러보며 숨을 내쉬었다.

안쪽부턴 미지와 같아서 뭐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술래에게 잡히면 죽는다.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멀어진 후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우선 매캐한 연기를 길잡이 삼아 한 곳을 정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여유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고대 문양의 위치를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고작 1성이지만, 육체 능력은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5분.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눈앞에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다음에는 세 개의 큰 구멍이 위아래로, 다음에는 다섯 개의 큰 구멍이 사방으로 나타났다.

연기의 흔적만 쫓으면 됐기에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연기의 흔적이 끊어질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렸다.

3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더는 갈림길이 나오지 않고, 쭉 뻗은 공간만 나타났다. 구멍이 줄어들더니, 빛이 사라졌고, 잠시 후엔 폭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에 난 살짝 당황했다.

"곤란한데…."

웅크려 걷길 잠시, 이젠 기어서 가야 할 수준까지 왔다.

이대로 쭉 가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폭이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이젠 시야가 암흑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꽉 낀 공간, 어두운 시야.

현실의 나였다면 공포에 먹혔겠지만, 이곳의 나는 신기할 정도로 침착했다.

'여기서 더 좁아지면 돌아가야 해.'

고립은 안 된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데, 슬슬 10분이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돌아가다 놈과 마주치면 그대로 게임 끝이었다.

이것 또한 좋지 않다.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을 기어갔다.

결국, 10분이 지났다.

제한 시간 끝.

검은 장미들은 물러날 테고, 감시자가 움직일 시간이다. 놈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지만, 난 이제 돌아갈 수 없다.

이 길의 끝이 무엇인지에 따라 내 운명이 갈릴 것 같았다.

잠시 후,

"어?"

좁은 틈 너머에 빛이 번뜩였다. 새하얀 빛이다.

설마 바깥으로 통하는 길인가?

아니면 고대 문양이 위치한 곳?

희망이 보이자,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난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크핫!"

눈 부신 빛을 헤치고 좁은 구멍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밑으로 우당탕 굴러떨어진 나는 재빨리 자세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터였다.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는데, 반대편 쪽으로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흘렀다.

공터 한가운데 세워진 높은 제단.

제단 위에 둥둥 떠 있는 문양이 보인다. 그 문양은 포식자처럼 흘러 들어오는 바람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설마, 저게…?'

황금빛으로 이뤄진 신비한 문양.

고대 문양이 확실했다.

주인의 몸에 각인되어 문양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는 고대의 힘. 각인 아티팩트라고도 불리며, 고대 물건 중 무척 희귀한 힘 중 하나였다.

'저 문양의 주인은 흑주술사 도네콜린트였지.'

주술사들의 둥지 원로 중 한 명.

전장에서 '세이렌의 비명'으로 병사들의 공포 대상이 됐던 흑주술사 도네콜린트.

세이렌의 비명은 저 문양의 힘을 바탕으로 펼치는 강력한 정신 주술이었다.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제단의 결계를 뚫고 각인 문양에 접촉하는 것.

다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결계 속은 진정한 문양의 힘이 발휘되는 공간이었으니까.

머리가 터지는 수준이 아니라 온몸이 갈가리 찢길 수 있다.

저 결계를 뚫고 문양에 접근하는 데, 도네콜린트도 보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과연 저 결계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

'확인해보면 되겠지.'

무리다 싶으면 피하면 그만이다. 눈앞의 문양도 중요했지만, 술래가 어디쯤인지 파악이 안 되는 지금 사방이 뚫린 이런 공터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았다.

위치가 노출되면 끝이었다. 서둘러 숨어야 했다.

난 눈앞의 제단을 응시했다.

결계의 시작을 알리듯, 제단 주변에는 뜻 모를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결계 주변을 둥글게 둘러친 검은 밧줄이 보였는데, 줄에는 작은 종들이 빼곡히 달려있었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데도 종들은 전혀 울리지 않았다. 무척 기묘한 광경으로, 이 제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마치….

'주술사의 물품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때쯤 도네콜린트가 학살자의 진영에 영입됐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였지?'

카멜이 블라이어 성주에 오른 후 외부에서 영입한 첫 인사가 도네콜린트라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때, 도네콜린트는….

난 불길한 눈으로 결계를 에워싼 검은 밧줄을 응시했다.

'고대 문양의 주인이었어.'

그럼 이 시기 근처로 문양의 주인이 됐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 밧줄과 종들이 제단 결계를 뚫기 위한 도네콜린트의 결계 해주법이라면?

"아니지? 말도 안 되잖아."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내뱉은 말과 행동과 달리, 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친 듯이 구멍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콰앙―!

"이런 씨팔!!!!!!!!"

바닥이 튀어 오르더니, 거대한 바위 손이 내 뒤를 덮쳐왔다.

난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장난도 정도가 있지.

내가 넬리토리 협곡에 방문한 시기와 도네콜린트의 결계 해주 기간이 겹칠 줄이야.

뉴비 암살자에 빙의시킨 것도 그렇고, 지금 상황도 그렇고, 이 개 같은 소설은 날 괴롭히기 위해 부른 게 분명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헝겊때기를 걸친 왜소한 노인 하나가 나를 향해 지팡이를 흔들고 있었다.

시발, 도네콜린트다.

쾅! 콰앙! 쾅!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것처럼 거대한 바위 손은 바닥을 매섭게 짓누르며 나를 공격해왔다. 바닥을 구르며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자,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이 벌레 같은 놈이!"

"...."

벌레라니, 내 심장에 벌레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니라고.

반대편 벽 쪽에 다다르자, 난 근처에 있는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도네콜린트란 변수가 발생했으니, 우선 이곳을 벗어난 후 상황을 살펴야 했다. 이 상황에 감시자까지 나타난다면 예측할 수 없는 개판이 펼쳐지겠지만, 결과는 같다.

'끌려가거나, 뒈지거나.'

그렇게 구멍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막혔다.

구멍이 막혔다.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어억!… 아악!!!"

바위 손이 내 한쪽 다리를 움켜잡고 허공으로 휙 낚아챘다.

21화 터진다!

콰앙―!

"우웩!"

파리채에 잡힌 파리마냥 벽에 짓눌린 나는 피를 한 사발 토했다. 짓누르는 압력이 무시무시했다. 바위니까 당연한 건가?

등뼈가 전부 바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천천히 다가오는 깡마른 노인네와 마주했다.

학살자의 악당 중 하나라서 그런가. 인상이 딱 봐도 나 괴팍하다고 적혀 있었다.

"...."

노인, 도네콜린트는 혹시 몰라 주변을 잠시 살폈다.

결계를 해체하는 도중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근처에 누군가 접근했다는 것이고, 이곳은 칼바람의 저주로 평범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위협적인 불청객의 등장.

그가 잠시 몸을 숨긴 채 불청객을 살핀 이유였다. 그런데 보이는 건 같잖아 보이는 젊은 녀석 하나였다.

'작업이 막바지인데, 불청객이라니.'

고대 문양에 관해 잘 아는 도네콜린트에겐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보름 동안의 개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네콜린트는 빛나는 문양을 올려다보며 진한 미소를 그렸다. 탐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

'저 문양은 나와 상성이 무척 잘 맞아. 내 것이란 말이다.'

정신 공격 계열로 보이는 저 고대 문양은 각인의 주인이 정해지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그 효과는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될 정도.

'그 전에 불청객을 치워야지.'

도네콜린트는 불청객을 훑어봤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1성 정도다.

'고작 이 능력으로 제단까지 접근했다고?'

도네콜린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고대 문양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접근 불가능.

1성의 마나로 버틸 수 있는 저주가 아니었다. 잠시 불청객을 노려보던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으악!"

불청객이 허공에 거꾸로 뒤집혔다. 대롱대롱 매달려 허우적대는 불청객 주변을 느릿느릿 돌며 도네콜린트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불청객의 몸을 살펴봤지만, 감각에 잡히는 마법 물품은 없었다.

그렇다면 축복 계열일 확률이 높은데, 아무리 봐도 축복을 걸 능력자로는 안 보였다.

'동료가 있다?'

그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불청객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구멍에선 연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바깥에 누가 더 있지?"

"일단 놔주시고...."

"이대로 피떡이 되고 싶나?"

"자, 잠깐만요! 아악!"

바위 손이 나를 움켜잡고는 찌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옥죄는 압박감에 소리를 질렀지만, 노인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이놈의 악당들은 인내심이 없어!

두둑! 맞물리는 섬뜩한 뼈 소리에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위기다!'

설마, 도네콜린트를 만나 붙잡히게 될 줄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매캐한 연기가 여전히 흘러 들어왔다.

'시발, 누가 만든 건지 스크롤 효과 한번 죽이네.'

폭우 속에서 10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단으로 통하는 구멍이 제법 많았는데, 그 일부 구멍에서 연기가 계속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감시자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감시자가 나를 쫓아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면 무엇을 쫓아 움직일까.

폭우로 내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구멍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상황에 한 곳으로만 흘러가는 검은 연기를 발견한다면?

일단 그 흔적을 쫓아 움직이지 않을까?

'내 움직임으로 10분이면….'

감시자의 능력을 봤을 때, 그 절반인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곧 들이닥칠 4성 기사.

지금 도망쳐도 아슬아슬한데, 난 지금 도네콜린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감시자에게 구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거야? 정말 그런 거야?'

저 늙은 악당 새끼와 달리, 감시자는 블라이어 영지까진 날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이대로 피떡처럼 죽을 바엔 일단 잡히는 게 나을지도.

'어? 잠깐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적대하며 싸우게 한다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고민도 잠시, 지독한 압박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의 상황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저 늙은이는 정말로 날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그때였다.

거꾸로 된 내 시야에 도네콜린트의 목걸이가 눈에 띈 건.

머리카락을 재료로 만든 것인데, 뽑힌 이빨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로테스크한 목걸이였다.

'저건....'

목걸이를 본 순간,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난 다급히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하, 한 명이 더 있습니다!"

"한 명?"

"…그가 진짜입니다!"

"진짜? 무슨 소리지?"

"시, 심부름꾼!"

심부름꾼.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 온몸을 비틀 듯 압박하던 힘이 뚝 멈췄다. 도네콜린트의 가라앉은 시선에 난 얼른 품을 뒤지며 대답을 이어갔다.

"저, 전 '심부름꾼'에게 고용된 C급 용병 알입니다!"

내가 용병패를 던졌지만, 그는 내 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내가 흘린 단어다.

심부름꾼.

그 단어는 도네콜린트에게 매우 민감한 단어였으니까. 역시나 도네콜린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르도르의 숲에서 보낸 놈들이냐?"

"풀어주시면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

"흐, 흔적을 쫓아서 곧 심부름꾼이 찾아올 겁니다!"

내가 검은 연기를 가리키자, 주술사는 미간을 구겼다.

심부름꾼은 오르도르 숲의 의뢰를 받은 존재를 뜻한다. 자신을 향한 원한으로 똘똘 뭉친 일부 마녀들이 목숨을 노리고 심부름꾼을 보냈다면 부담스러운 실력자를 고용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나직이 내게 몇 가지를 물었다. 일종의 확인 작업이 분명했다.

"날 알고 있나?"

"주, 주술사 도네콜린트."

"심부름꾼이 날 쫓는 이유는?"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보, 복수라는 것밖에는…."

내 시선이 목걸이를 향했다.

도네콜린트의 목걸이.

저 목걸이는 마녀를 사냥하고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이빨도 마찬가지.

일종의 전리품이자, 주술 도구였다.

마녀의 신체는 주술에 큰 효력을 발휘했으니까.

"복수라… 날 어떻게 찾았지?"

"베네타 주변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얻고 수색 중이었습니다."

"정보? 그 정보 누구에게 들었지?"

"정보 길드 술집에서…."

"흠…."

"저,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잠깐?'

도네콜린트의 뇌리에 한 가지 기억이 지나갔다.

며칠 전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베네타에 갔을 때, 자신을 은밀히 수소문하고 다니는 세력이 있었다. 고대 문양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 일단 무시했는데, 설마 그들이 심부름꾼의 하수인이었나?

그들은 카멜이 보낸 주술사들이었지만, 도네콜린트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목적도, 정보 출처도 딱딱 들어맞자, 도네콜린트는 지팡이를 내려놨다. 거대한 손이 부스스 먼지처럼 흩어졌다. 굴러떨어진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 많은 늙은이처럼 보였는데, 생각보다 무난하게 넘어간 것 같았다.

"마녀가 직접 온 것이냐?"

"4, 4성 용병입니다."

"4성?"

도네콜린트는 짧게 혀를 찼다.

차라리 마녀라면 상대하기가 편했을 텐데, 4성 용병이면 닳고 닳은 베테랑이라 혼자선 꽤 버거웠다.

다행이라면 전투 장소가 이곳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표정에 여유가 생겼다.

'위협적이지만, 할만해.'

칼바람의 저주가 존재하는 이곳이라면 4성이라도 해볼 만했다.

자신은 이미 이곳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으니까.

그때,

딸랑― 딸랑― 딸랑― 딸랑―!!!

"...."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조용했던 종들이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난 신음을 흘리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종소리가 귀를 때리듯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무슨 주술이지?

그 모습에 도네콜린트는 히죽 웃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 눈앞의 벌레는 이제 필요 없다.

"약속대로 살려주도록 하지."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네? 그게 무슨…!"

저 종들은 신호탄이었다.

칼바람의 저주가 곧 터진다. 바깥에선 어찌어찌 저주를 버텼겠지만, 이곳은 제단 코앞이었다. 저주의 파괴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퍽―

"커억!"

지팡이에 빛이 터진 순간, 난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제단 바로 앞 벽 쪽으로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콰앙―!!!!

구멍 한 곳이 부서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그 앞에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치열한 전투로 몰골이 엉망이 된 사내였는데, 그 덩치가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 실루엣을 본 순간 난 직감했다.

날 발견한 놈의 눈동자가 살기로 가득했다.

저 살벌한 눈빛.

감시자였다.

으득―!

케플린은 암살자를 발견한 순간, 이를 으드득 깨물었다.

놈에게 제대로 농락당했다.

[최악의 경우 목을 잘라 와라.]

어떤 최악이 벌어지길래, 목을 잘라 오라고 한 것인지 처음에는 지시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해가 된다.

'꼬리가 붙었을 줄이야.'

놈을 보호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4성 한 명과 3성 둘.

셋의 합격기가 워낙 날카로워서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위태롭게 밀렸다.

위협을 무릅쓰고 구멍 안으로 피해 일대일 상황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다행히 1명이 상처를 입자, 그들은 빠르게 물러났다.

벤에게 회복 물약을 쥐여주고 추적을 위해 암살자가 사라진 장소 근처에 도착했을 땐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때 구멍들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고, 그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암살자의 찢긴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추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친위대로 부여받은 첫 임무.

주군 앞에 실패를 보고하는 굴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운이 따랐는지 암살자가 눈앞에 잡혔다.

'목을 잘라 간다.'

변수가 발생했으니, 주군의 지시에 따른다.

문제는 눈앞에 나타난 또 다른 변수였다.

케플린은 딱딱한 표정으로 출수할 수 있게 검을 늘어트렸다.

로브를 걸친 왜소한 노인.

지팡이를 겨눈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다.

마법사?

주술사?

우선 표적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조금 전 자신을 방해한 이들과 한편일까.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살자의 외침이다.

"노, 놈입니다!!!!!!!!!"

내가 바라본 시선은 도네콜린트도, 감시자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중간 사이.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외침 소리에 도네콜린트와 케플린은 동시에 생각했다.

'놈? 역시 표적의 지원 세력인가?'

'저놈이 심부름꾼이군.'

마주한 둘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대화 따윈 없었다.

아니, 정확히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세차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뚝 멈췄다. 대신 대기가 진동하며 제단 위의 황금빛 문양이 터질 듯이 부풀기 시작했다.

풍선이 터지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도네콜린트의 비릿한 미소.

그 표정에서 한 가지를 읽었다.

'터진다!'

나는 이를 악물곤 몸을 웅크렸다. 두 귀를 틀어막고 신께 빌었다.

제발 버텨줘!

삐이이이이―!!!!!!!!!!!!!!

"끄아아악!"

칼바람의 저주가 터지자, 내 목구멍에서 절규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위에서 경험했던 칼바람의 저주는 자장가 수준에 불과했다. 이번 건 귀때기 바로 앞에서 대형 스피커로 때려 맞은 느낌이었다. 뇌가 소리에 붙잡혀 찌그러지는 고통.

그 고통 속에서도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버, 버틸 만해.'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럼, 괜찮다.

입술을 콰득 깨물자 핏물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겨우 실눈을 뜬 채 난 두 사람을 살폈다.

칼바람의 저주가 터진 순간, 두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22화 진통제가 그립다

기습적으로 터진 칼바람의 저주.

"커, 커억!"

더 큰 충격의 저주에 케플린은 가슴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청각이 삐― 하고 울리며 시야가 샛노래지는 감각. 정신이란 필름이 뒤엉킨 것 같았다.

반대로 도네콜린트는 저주의 여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대신, 마녀의 목걸이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충격을 대신 받아주고 있는 모습.

"속박!"

"큭! 이 늙은이가!"

도네콜린트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케플린 주변으로 수십 줄기의 돌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온몸을 날카롭게 옥죄였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인데, 케플린은 정신 충격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푹! 푹! 푹! 푹!

"큭!"

돌가시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케플린은 피투성이가 되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온몸에 터져 나온 검붉은 피. 케플린은 피를 한 움큼 뱉어내곤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케플린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오라가 몸을 감싼 순간, 돌가시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속박을 벗어난 그는 앞으로 돌진했다.

흐릿해지는 잔상.

도네콜린트는 다급히 지팡이를 들었다.

콰작―!

지팡이가 땅에 박히자 검은 장막이 생겼다.

쩌엉―

장막 위로 번뜩이는 불꽃의 향연. 벼락처럼 움직이는 붉은 칼날이 장막을 찢을 듯 베기 시작했다.

장막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충격을 흡수했다.

묵묵히 충격을 막아내던 도네콜린트.

잠시 후, 방울 소리가 들리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삐이이이이이이―!

두 번째 칼바람의 여파!

"크아악!"

이번에도 케플린은 대응하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그가 휘청이며 물러나자, 도네콜린트가 기다렸다는 듯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앙―!

바닥에서 바위 손들이 튀어나와 케플린의 몸을 움켜잡았다.

"마녀의 개새끼! 죽어라!"

기회를 잡은 도네콜린트가 노성을 터트리며 기운을 폭발시켰다.

부르르 떨리는 지팡이.

케플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바위 손들 표면에 돌가시들이 튀어나와 케플린의 온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동시에 걸레를 짜듯 손들이 압박을 시작했다.

"끄아악! 아악!"

결국 케플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모든 오라를 쥐어짜듯 터트렸다.

평소라면 금세 찢을 수 있는 주술이지만, 복면인들과 전투에서 힘을 소진하고, 저주까지 받은 상황이라, 모든 게 힘에 부쳤다.

케플린은 지독한 위기감에 죽을힘을 다해 버티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

바위 손들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쿨럭!"

거센 반발력에 도네콜린트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그는 검은 장막의 힘을 해제하고 심부름꾼을 죽이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죽이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잠시 대치하던 그 승부는,

삐이이이이이―!

"...크륵!"

세 번째 저주 여파로 결정이 났다. 케플린의 눈, 코, 입, 귀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저항하는 기운이 빠르게 옅어진다. 그 모습에 도네콜린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겼다!'

마녀의 목걸이가 있는 한, 칼바람의 저주는 자신의 편이었다. 처음부터 질 수 없는 싸움.

'쓸만한 전리품을 얻었어.'

4성 육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저 육체를 가지고 해볼 수 있는 주술 실험이 얼마나 많겠는가.

서서히 쪼그라드는 케플린을 응시하며 도네콜린트가 흥분하고 있는 사이,

'11, 12, 13....'

난 도네콜린트의 뒤를 잡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암살자의 걸음'이란 게 있다.

잠들어 있는 상대에게 은밀히 접근하기 위해 크룩스에서 가르친 것인데,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은밀함에선 제법 뛰어났다.

도네콜린트와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 정도.

내 존재는 잊은 것처럼 도네콜린트는 케플린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내가 저주를 버틸 수 없을 거라 판단했겠지.

사실 그게 맞긴 하다.

4성인 케플린도 버티지 못한 충격을 고작 1성 따위가 버틸 수 있을까.

'근데 버텨진단 말이지.'

전에도 느꼈지만, 정신 방벽과 관련된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열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않았나.

난 단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감시자는 칼바람의 저주에 무지했기에 도네콜린트의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감시자가 죽었을 경우.'

나와 도네콜린트의 승부에선 나의 승리를 점쳤다. 그는 내 능력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물론, 기습 공격이 성공했을 때의 일이었다.

난 천천히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네 번째 칼바람의 노래가 터지는 타이밍을 재기 위해서다.

이미 위에서 카운팅을 여럿 해봤고, 방금 세 번째 여파에서 다시 확인했다.

으득―! 으드득!

주술 압력에 바스러지는 감시자가 보였다. 허무한 죽음. 그도 여기서 자신이 죽을 줄 몰랐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었다.

툭.

잠시 후, 감시자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심부름꾼을 제거했다는 희열감에 도네콜린트는 클클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지금!'

내가 쥔 단검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인챈터의 능력.

"이 개새끼야!"

새하얀 빛으로 번뜩이는 단검.

다섯 걸음을 앞두고 질주한 내 기습적인 공격이 도네콜린트의 뒷덜미를 갈랐다. 아니, 가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늙은이 주제에 반응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다고 실패한 건 아니었다.

"커, 커억! 이, 이 버러지 같…!"

"제발 죽어 새끼야!"

뼈를 파고든 묵직한 감각.

목뼈를 분명 베고 지나갔다.

도네콜린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핏방울이 내 얼굴을 흠뻑 적셨지만, 이를 무시한 채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주술사에게 여유를 주면 죽는다.

붙자마자 박치기를 시도했다.

빡―!

"크억!"

워낙 변칙적인 공격이라, 도네콜린트도 피하지 못했다.

코뼈가 부러지며 휘청거렸다. 악을 지르며 나는 놈의 가슴에 단검을 찔렀다.

푹―

우측 어깨를 파고든 단검. 그리고 벼락처럼 마주한 놈의 지팡이.

지팡이가 섬뜩한 빛을 번뜩였다.

"...시ㅂ!"

번쩍―

퍽―!!!!

터져 나오는 빛에 몸은 멀찍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끄으으으…!"

신물이 입에서 질질 흘러나왔다. 헤비급 챔피언에게 복부를 전력으로 처맞은 느낌이다. 속이 뒤집힌 것 같은 고통. 시야가 샛노랗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이 벌레 같은 새끼가…!"

도네콜린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같잖은 것에게 죽을 뻔했다.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는 매섭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흠칫하곤 목을 더듬거렸다.

무척 당황한 눈빛.

난 비틀비틀 일어나며 손에 잡힌 물건을 들어 올렸다.

히죽 미소를 지었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난 목걸이를 흔들었다.

이 새끼야. 내가 다 봤어.

어디 뒤져봐라.

"시팔 새끼야. 딱 18이다."

숫자 18을 중얼거린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이―!

다섯 번째 여파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난 석궁을 벼락처럼 꺼내든 뒤 놈을 겨눴다.

"끄아아악!"

놈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비틀거리며 방어 주술을 외치려는 찰나, 난 볼트에 기운을 담아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기운이 담긴 볼트가 도네콜린트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놈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상대는 흑주술사.

방심하면 안 된다.

퉁―! 퉁―! 퉁―!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여러 발의 볼트가 도네콜린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난 거친 숨을 토하며 벌러덩 자빠졌다.

이 정도면 됐겠지?

"헉… 헉…."

삐이이이이이이―!

쉬고 있는데, 여섯 번째 저주 여파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뇌를 쥐어짜는 고통.

난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진통제가 그립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大)자로 누운 채 손에 들린 목걸이를 잠시 바라봤다.

칼바람의 저주를 막았던 주술 도구.

확실히 이번 전투는 운이 따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끊어졌던 목걸이를 이어서 목에 걸어봤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휘몰아치는 칼바람의 저주.

"큭!… 안 되네."

영력으로 주술을 걸어야 효력을 발휘하는 물건 같았다. 주술을 모르는 내게는 쓸데없는 물건이었지만, 난 목걸이를 챙겼다.

이 목걸이는 오르도르의 마녀들과 적대 중인 도네콜린트를 죽인 전리품 같은 것이었다. 언제고 쓸데가 있을 것이다.

천천히 일어나려고 하는데,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쪽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난 절뚝거리며 감시자의 시신에게 다가간 뒤 품을 뒤적거렸다. 붉은 병을 발견하자, 짧게 숨을 내쉬곤 내용물의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발목에 발랐다.

시원한 느낌과 함께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게 느꼈다.

회복 물약을 볼 때마다 이 물건을 현대에 가져가면 떼부자가 될 텐데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효과가 좋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술사가 가져온 작은 가방이 보였다.

난 감시자와 주술사의 품을 뒤져 쓸만한 물건들을 가방 안에 욱여넣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단을 바라보니, 문양은 다시금 황금빛을 반짝이며 주변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십 년은 늙은 거 같아."

서로 상잔시켜 상황을 정리하는 계획.

아슬아슬한 도박이 성공했다.

심호흡으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고대 문양의 본래 주인인 도네콜린트가 죽었다.

주인 없는 물건은 먼저 줍는 자가 임자다.

제단 결계를 둘러친 검은 밧줄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성큼 밧줄을 넘어 결계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보자.'

도네콜린트조차 보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결계에 진입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보름이든 반년이든 시간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 땐 그저 몸을 부딪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결계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반응을 기다렸다.

너무 무모했나?

두려움이 살짝 올라올 찰나,

번쩍―!

"...!"

제단에 새겨진 수많은 문자가 빛을 토해내더니,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따스한 느낌의 감촉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다.

최고조로 유지됐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안정감이 찾아왔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드는 심적 평온함. 이대로 곤히 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간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큭!"

짙은 눈 부심에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사그라드는 빛의 물결.

흐릿해진 시야를 끔벅이며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화려한 광경이 펼쳐졌다.

황금빛을 토해내는 신비로운 문양.

그 문양이 내 앞 허공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소설 속 도네콜린트는 결계 안에서 엄청난 환각에 빠져 며칠을 허우적댔다고 했다.

그 환각을 극복하고 고대 문양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면서 각성한 힘이 바로 그 유명한 '세이렌의 비명'이었다.

정신 환각을 펼쳐 아군끼리 창검을 휘두르게 하는 힘. 혼돈의 비명이라 불리는 각인 문양의 능력 말이다.

그런데,

'눈앞의 문양도 환각인 건가?'

설마, 문양을 건들면 시련이 시작되는 건가?

겁이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문양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23화 추락한다!

"어, 어라!?"

황금빛 문양에 접촉한 순간, 문양이 손가락 끝으로 쭉 빨려 들어왔다. 문양의 빛이 몸 주변에 흘러넘쳤다. 황금빛 기류가 몸 전체에서 넘실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끝?"

난 두 눈을 끔뻑였다.

겁을 집어먹은 것도 잠시였다.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자, 몸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다,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오른쪽 소매를 살짝 걷으니, 손등에 마법진을 닮은 신비로운 문신이 생겼다.

각인의 상징.

고대 문양의 주인이 된 건가?

"진짜로…?"

도네콜린트의 소설 내용과 비교하면 허무하리만큼 쉬워서 얼떨떨했다.

[하루하루 지옥 같았던 환각을 극복한 후에야 문양의 주인으로 인정받았고, 환각의 힘을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이렌의 비명'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도네콜린트가 주군인 학살자에게 설명하는 대사가 떠올랐다.

지독한 환각을 극복했다고?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닥을 확인했다.

결계 안.

난 이곳에서 따스한 포근함과 영원히 머물고 싶은 안락함을 느꼈다.

칼바람의 저주로 오염됐던 정신이 정화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내 정신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고 맑았다.

난 손등에 그려진 고대 문양을 쓰다듬었다.

문양의 주인이 된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소설 속 내용과 전혀 달랐다.

'세이렌의 비명은 개뿔.'

환각 각성은커녕 환각 비슷한 능력도 펼칠 수 없었다.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주인에 따라 문양의 능력이 달라지는 건가?'

가능성이 있다.

고대 문양은 주인을 매개체로 힘을 소환했으니까.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다르듯, 고대 문양도 그 주인에 따라 능력이 다를지 모른다.

도네콜린트의 문양이 환각, 세이렌의 비명을 불러일으켰다면,

'내 능력은 뭐지?'

문양으로 각인된 지식은 능력에 대한 설명 대신 사용 방법만 담겨 있었다.

일단 나가서 뭐든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바닥이 출렁거렸다.

쿠웅―!

"...!"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린 순간, 밧줄이 허공에 떠서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도네콜린트의 주술 밧줄.

검은 밧줄은 살아있는 뱀처럼 사납게 움직였는데,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다.

으으으으으으으으―!

"무, 무섭잖아. 인마!"

오싹한 울음소리.

마치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단 전체를 둘러친 밧줄은 두껍고 길었다. 밧줄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왔다.

불길한 기운.

기운이 바닥을 자극한 순간, 주변 지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설마!?"

주인인 도네콜린트가 죽자, 밧줄에 담겨 있던 영력이 통제를 잃고 폭주를 시작한 것 같았다.

밧줄에는 도네콜린트가 보름 동안 쏟아부은 어마어마한 영력이 담겨 있었다.

'설마 무너지겠어?'

그런데 무너지면 생매장이다.

드디어 카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타이밍인데, 변수가 발생했다.

탈출 후 '프리덤(Freedom)!'을 외치려고 했던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난 처음 들어왔던 구멍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콰자작―! 콰자자자자작!

"으아악!!!"

발을 딛자마자 운동장 크기의 바닥이 쩌적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판타지 게임에서 신나게 써대던 어스퀘이크 지진 마법이 딱 이랬다. 내가 쓸 땐 신났는데, 당해보니 아주 좆같았다.

"비, 빌어먹을!!!"

갈라진 바닥 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틈새는 암흑 세상이었다. 끝도 없는 나락행을 꿈꾸게 하는 섬뜩한 비주얼.

떨어지면 무조건 뒈진다.

다급히 기어 올라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제단 쪽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처음 왔던 구멍 쪽 바닥이 모조리 무너져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반대편뿐인데.

뒤쪽을 돌아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구멍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어느 구멍이 바깥으로 통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문양이 사라지면서 흘러 들어오던 검은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

"로또보다 확률이 높긴 하네."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았다.

일단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 구멍 쪽으로 내달렸다.

콰콰쾅―!

"...!"

제단이 땅속으로 삼켜졌고, 감시자와 도네콜린트의 시신도 바닥의 시커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긴장감에 몸이 굳자, 난 두 뺨을 거칠게 때렸다.

다행이라면 몸과 달리 머리는 차갑게 돌아간다는 것.

바깥으로 통하는 구멍을 어떻게 찾지?

일단 새로 얻은 능력은 지금 상황에서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아직 어떤 능력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든.

수많은 구멍을 암담하게 바라보던 그때, 좋은 방법이 벼락같이 떠올랐다.

난 다급히 구멍들 주변을 뛰어다니며 손가락을 문질렀다.

"제, 제발!"

간절한 외침에 답을 한 것일까.

검지에 때처럼 묻은 재 가루를 발견한 순간, 난 고민도 없이 그 구멍 안으로 몸을 던진 후 내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더는 들어오진 않지만, 흘러 들어온 흔적을 역으로 추적해서 길을 찾은 것이다.

쿠웅―!

잠시 후, 공간이 크게 흔들리더니, 시야가 어둠으로 푹 꺼졌다. 중심부가 무너지면서 흘러 들어오던 빛마저 차단된 것 같았다.

암흑이 펼쳐졌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공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대로 오른손 팔을 앞으로 뻗었다.

파아앗―!

황금빛 물결.

손등의 문양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빛으로 물들였다.

우웅. 우웅. 우웅.

일정한 심장 박동처럼 문양은 빛을 깜빡이며 빛을 토해냈다. 이 빛에 어떤 능력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야 확보용으로 쓸만했다.

후각에 집중하며 매캐한 냄새를 쫓아 움직였다.

어둠 속 공포, 공간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였다.

이것도 정신 방벽 때문인가?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시했다.

그것조차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 판단했으니까.

"어디야! 어디냐고!?"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중심부가 무너지면서 주변 지반도 무너지려는 것 같았다.

난 이를 악물고 달렸다.

"비, 빛!"

잠시 후, 개미굴처럼 뚫린 구멍 중에 빛의 흔적을 발견했다. 옅은 빛이 흘러 들어오는 곳.

밑바닥과 연결된 구멍이었다.

문양의 빛을 해제하자, 구멍 밑에 더욱 뚜렷한 빛이 반짝였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

구원의 빛이 분명했다.

난 그대로 구멍 아래로 몸을 날렸다. 미끄럼틀을 타듯 난 쭉쭉 미끄러졌다.

쩌저저저저저적―

근처 외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돌산 전체가 무너지려는 건가?

더 빨리!

바깥 구멍에 다다르자, 차가운 물기가 얼굴 전체를 때렸다.

바깥의 폭우, 빗방울이다!

순간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감옥을 탈출한 주인공이 비를 맞으며 하늘을 향해 자유를 표현하던 그 모습.

기쁜 나머지 절로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프리덤!

환희에 찬 표정으로 바깥 구멍을 향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구멍.

돌산 전체가 무너지는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난 프리덤을 외치지 못했다.

그저,

"아아아아아악―!!!"

새된 비명만 질러댔다.

아래쪽이 공허하다.

바닥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난 그대로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밑으로 처박혔다.

추락한다!

내 표정은 전보다 더욱 핼쑥해졌다. 밑을 보니 협곡 사이로 넘치는 거센 강물이 보였다. 폭우로 물이 엄청나게 불었는지, 물살에 회오리가 보일 만큼 섬뜩했다. 휩쓸린 순간 하늘도 못 보고 저세상 갈 것 같았다.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것.

그리고,

"시이바아알!!!!!!!!!"

욕설을 내뱉으며 빠지는 것.

풍덩―!

난 그대로 폭우가 퍼붓는 물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 * *

초등학교 시절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부모님이 다른 건 몰라도 수영은 꼭 배워야 한다고 강제로 보냈기 때문이다.

물놀이를 할 때 익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나?

어쨌든 물질에 재능이 있었는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돌고래 반에서 난 일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별명이 압구정 돌고래!

그런 내가,

"어푸! 아악! 살려줘!"

비명과 함께 물살을 따라 허우적허우적 떠내려갔다.

수영?

그딴 건 잔잔히 흐르는 물가에서나 먹히는 거고, 여긴 눈조차 뜨기 힘든 미친 물살이 흐르는 지역이었다.

진짜 돌고래가 와도 물살의 압력에 졸도할 수 있는 사지란 뜻이다.

꼬르르르륵―

그 흔한 개헤엄도 하지 못한 채, 난 다시 물살 아래로 쭉 빨려 들어갔다. 마치 소용돌이에 휩쓸린 지푸라기 같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퍽―!

"끄룩!"

물살에 휩쓸려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처박자, 붉은 핏물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이마가 찢어진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다져진 고기가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이 또렷하다는 것.

난 숨을 꾹 참았다.

여기서 물을 삼키는 순간, 멘탈이 나갈 것이다.

그럼 죽는다.

'잡을 것! 잡을 것!!'

빙글빙글 도는 시야에서 난 양손을 뻗은 채 걸리는 모든 것을 붙잡으려고 했다.

일단 중심부터 잡아야 했다.

꽈악―

무언가 잡혔다. 갈대를 닮은 잡풀이었는데, 바위틈에 박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대로 팔을 당겼다. 다행히 잡풀이 버텨줬다.

"푸아!"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숨 쉬는 게 이렇게 감사했던 적이 없다.

숨 막혀 뒈질 뻔했다.

가죽 가방과 단검 두 개.

다행히 소지품은 떠내려가지 않았다. 주변을 살핀 순간 욕설이 흘러나왔다.

가파른 절벽을 사이에 낀 협곡 형태였다.

올라갈 수 있을까?

폭우로 바위 표면이 너무 미끄럽다. 게다가 붙잡고 올라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

물살을 타고 내 쪽으로 짓쳐오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거대한 통나무.

통나무는 돌진하는 멧돼지마냥 순식간에 쇄도해왔다.

못 피한다.

"이런 시…!"

퍼억―!

"커억!"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왼손을 방패 삼아 통나무와 충돌했는데, 어깨가 부러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통나무와 함께 물살에 다시 휩쓸렸다.

고민은 짧았다.

난 통나무 위로 단검을 박아 넣었다. 기운이 실린 단검은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들어갔다.

벌레처럼 통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뒤 매미처럼 착 달라붙었다.

"끄아아악!"

부러진 어깨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난 걸레짝이 된 윗옷을 찢어낸 뒤 단검 손잡이와 손목을 한 몸처럼 칭칭 감았다. 그리고 남은 단검은 바지춤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때부터 버티기에 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

"이익!"

폭우와 비바람으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이 찾아오며 시야조차 어두워지는 상황.

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구명줄처럼 통나무만 붙잡고 늘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폭우가 점차 약해지더니 뚝 멈췄다.

물살의 세기도 약해졌다.

온몸의 힘을 모조리 썼는지,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두 눈을 가까스로 뜬 후 주변을 살피니, 바위가 사라지고 초록 숲이 펼쳐졌다.

퉁―

그중 얕은 물가에 도달하며 통나무가 부드럽게 유영하며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 개 같은 소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붙잡고 있던 의식이 날아갔다.

24화 흘러 흘러 라웁 숲

흠칫!

움찔하며 의식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거나 깨운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접근으로 깨어났다.

정확히 누구'들'이었다.

내 기감 안에 잡힌 존재들.

암살자의 기감은 기절한 나를 깨울 만큼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아니, 이 몸뚱이의 기감이 특별한 건가?

그들은 정확히 나를 태운 통나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거진 숲속이라 아직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크...."

몸을 움직인 순간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 어깨가 부러졌지?

게다가 추위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폭우와 강물에 오랜 시간 노출됐더니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신음을 삼키며 검 자루에 묶었던 헝겊을 풀었는데 손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온통 멍투성이에,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었다.

'어떡하지?'

몬스터였다면 무리해서라도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발소리는 인간의 것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위험한 놈들?

생각해보니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악당들의 세상. 인간들이 더 무서운 곳이었으니까.

최소한의 대비는 필요했다.

'포션이….'

주술사의 가방은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멀쩡했다. 게다가 방수 기능까지.

가방에 여러 가지 주술이 걸린 건가? 의외의 득템이었다.

다행히 포션 한 병이 있었다.

아낄 상황이 아니라서 포션을 쭉 들이켰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퍼지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몸의 떨림도 멈췄다.

다만, 상태가 심각해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았다.

물속에 가방을 숨긴 후 기절한 척 통나무 위에 엎어졌다.

양손에 단검을 쥔 후 물가 밑으로 안 보이게 숨겼다.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마치고 난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근처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두목!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몇 놈인데."

"한 명입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략 열 명 정도?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그나저나 두목? 어째 호칭이 싸한데.

"통나무랑 같이 흘러들어 온 모양입니다. 어떡할까요?"

"뭘 어떡해? 살펴야지. 들어가."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렸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을 헤집고 다가오는 인기척은 두 명.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일단 기절한 척했다. 내가 또 기절한 척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어때?"

"대가리에 구멍이 났는데요? 피를 제법 많이 흘렸습니다."

"죽었어?"

"숨은 붙어 있습니다. 죽일까요?"

"바깥소식을 물어보고 죽여도 늦지 않으니 일단 데려와."

이 빌어먹을 세상은 툭하면 죽이고 시작하는 모양이다.

협곡에서 어디까지 흘러들어 온 거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버틴 거라, 어디로 얼마나 흘러갔는지 가늠이 안 됐다.

아, 나도 물어보면 되는구나.

덥석―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물에 얼굴을 처박았는데, 내가 물을 먹든 말든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난 고민 없이 움직였다.

단검으로 둘의 허벅지를 벼락같이 찔렀다.

"끄아악!"

비명을 지르는 두 놈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허우적거리며 물을 처먹고 있었는데, 물맛 좀 보고 있어라.

난 소란스러운 바깥을 응시했다.

내 쪽을 향해 무기를 꺼내든 사내들.

머릿수는 많았지만, 두목이라 불리는 놈 빼곤 별 볼 일 없었다. 마나를 익힌 놈은 저 두목 말곤 없다는 뜻이고, 두목의 수준도 1성에 불과했다.

참고로 난 같은 등급한테 안 진다. 내가 가진 능력이 꽤 많거든.

"딱 봐도 어떤 놈들인지 알겠네."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을 난 질리도록 만나본 적이 있었다.

라웁 숲을 우회하며 마주쳤던 도적놈 새끼들.

아직도 그 웃음소리들이 환청으로 들렸는데,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놈들이었지.

"무, 뭐야!?"

"저, 저, 저...!"

내가 두 명을 단숨에 제압하며 일어나자, 두목은 표정을 구기곤 나를 가리켰다. 그가 사납게 '죽여!'를 외치려는 순간 내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헉!"

두목의 목으로 단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피부가 쭉 베이며 주르륵 흘러나오는 핏물.

하지만 두목은 베인 상처를 만질 생각도,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방금 스쳐 갔던 칼날에서 유형화된 빛을 봤기 때문이다.

'오, 오라!?'

도적질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상대가 있다.

바로 무기에 오라를 싣는 괴물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오라를 실어 집어 던졌다. 저 원거리 기술은 천재지변이라 불리는 괴물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5성.

피하는 게 아니라 눈조차 마주치면 안 되는 재앙 같은 존재들.

두목은 마른침을 삼키곤 가리켰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 모습에 수하들이 울분에 찬 표정을 지었다.

"두목! 고작 한 명입니다!"

"형제들이 당했습니다! 복수해야 합니다!"

"복수를!"

"우어!"

'닥쳐, 이 미친 새끼들아!'

두목은 핼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부두목이 수하들의 기세를 받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안 그래도 괴상한 장소에 갇혀서 짜증 났는데 이참에 살풀이 좀 합시다! 놈을 잡아다 사지를 뜯어서… 커억!"

두목은 막 외치던 부두목의 성대를 손날로 후려쳤다. 컥컥대며 쓰러지는 녀석을 짓밟으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경고가 우스웠나?"

"…그게!"

"다 죽이기 귀찮은데."

단검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두목이 움츠리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난 미소를 지으며 칼날에 기운을 넣었다.

신력, 인챈터의 능력.

고작 1성 기운이라 지금은 속성 없이 관통력만 증가시키는 수준이지만, 외관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무지한 자들을 속이기 충분했다.

우웅―!

"...!"

단검이 시퍼렇게 빛나자, 남은 이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눈앞의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목을 시작으로 그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망가려고?"

"...!"

"도망가는 게 빠를까? 아니면 몰살당하는 게 빠를까?"

"아, 아닙니다!"

"내가 한번 맞혀볼까? 난 이미 답을 알고 있거든."

답이 뭐냐고?

당연히 도망가는 게 훨씬 빠르지.

숲 사이로 뿔뿔이 흩어지면 내가 어떻게 잡아.

그런데도 내가 이리 여유를 부리는 건, 줄곧 살아남으면서 간땡이가 부은 것도 있지만, 우선 저들이 내 능력조차 못 알아보는 약자였기 때문이다.

수준을 파악하고 뻥카를 쳤는데,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사, 살려주십쇼!"

눈치 빠른 두목이 넙죽 엎드리며 빌자, 남은 도적들도 넙죽 따라 엎드렸다.

그래, 이렇게 쉽게 가는 날도 있어야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회복 포션을 마시고 쉬었더니 상태가 살짝 호전됐다. 그래도 전투는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았다.

그 사이, 허벅지를 찔렸던 두 놈이 버둥대며 물가로 올라왔다.

덜덜 떨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

안타깝게 보이기도 했는데, 일단 저들은 도적이었다.

난 도적이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이라.

잠시 후, 난 두목을 향해 단검을 까딱이며 말했다.

"살려면 성의를 보여야지."

"…네?"

"몸에 걸친 것들 모조리 벗어. 팬티까지."

두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발, 저 실력에 나 같은 도적을 턴다고?'

지독한 새끼한테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물쩍거리는 수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를 지른 뒤 옷을 휙휙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옷을 벗어 던지는 쇼를 구경하며 난 물가 바깥으로 나왔다.

"아우 추워."

바위에 걸터앉아 물기를 털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손끝이 떨렸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행동했다.

약한 모습을 보인 순간, 돌변하는 놈들이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옷가지들은 어디에다 놓을까요?"

"내 앞에 놓고, 너희들은 저쪽에서 무릎 꿇고 있어."

두목을 시작으로 도적들이 물건들을 좌판처럼 깔아놓고 한쪽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실수했나?'

사내새끼들의 알몸을 보고 있자니, 눈이 썩을 것 같았다.

놈들을 물가로 쫓아버린 뒤 머리만 내놓게 했다.

머리만 내민 놈들을 잠시 바라본 뒤 소지품을 하나하나 뒤적거렸다. 그러다 딱 필요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득템!'

포션으로 보이는 병을 낚아챘다.

색이 탁한 것이 품질은 낮아 보였지만, 어깨가 부러진 상황에선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그 외 물건은 낡고 닳아서 쓸모없어 보였다. 그러다, 눈에 띄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보랏빛을 띤 물병.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난 그 옆에 세트로 놓인 나무 대롱을 집어 들곤 잠시 살폈다. 손가락 길이의 쇠침이 안에 들어있었는데, 침 끝부분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에 든 보랏빛 액체는 아무래도 독인 것 같았다. 이를 알아볼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난 병뚜껑을 딴 뒤 도적들이 묻혀있는 물가에 집어 던졌다.

처음에 뭔지 모르고 멀뚱히 날아오는 병을 바라보고 있던 도적들은 곧 병을 확인하곤 시퍼렇게 질렸다.

"베텔의 독!"

"비, 비켜! 이 새끼들아!"

"나가! 얼른 나가라고!"

메뚜기 떼가 따로 없었다.

병이 떨어진 곳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무섭게 도적들이 펄쩍펄쩍 뛰며 물가에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마치 접촉하면 죽을 것처럼 말이다.

예상대로 독이 맞았다.

근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수하들은 모조리 튀어나왔는데, 두목 홀로 물가에서 머리를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 잘했죠?' 이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죽여버릴까?

난 물가 근처에서 헥헥대는 도적 하나를 붙잡았다. 부두목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린 채 넙죽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뻥카가 먹힌 건 좋은데, 너무 강력하게 먹힌 것 같았다. 하긴 5성급 존재는 도적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앞선 반응이 이해가 갔다.

다만, 난 5성이 아니라는 거.

"이건 무슨 독이지?"

"베, 베텔의 독입니다. 숲 중심부에 서식하는 독초에서 추출한 독인데, 중독되는 순간 심장 박동이 서서히 느려집니다. 중독 정도에 따라 심하면 심장이 마비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침에 독을 발라 대롱으로 쏘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뭐냐, 이 고블린 새끼들은.

독침은 고블린의 전유물 아니었어?

이 무기, 숲에서 쓰면 상당히 위협적일 것 같은데.

"해독제는?"

"없습니다."

"없어?"

내가 미간을 좁히자, 도적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시 말했다.

"마, 마나를 사용하는 존재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회복 물약만 마셔도 해독이 되는 터라 해독제가 굳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 두목 놈은 저 자리에 계속 머문 거였군. 마나를 익혔으니, 베텔의 독에 당할 리 없을 테니까.

저 새끼, 은근히 이기적이네.

나오려면 같이 나와야지.

아, 그러고 보니 이 장소가 어딘지 묻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정보인데 도적들의 출몰로 잠깐 정신이 없었다.

숲이라고 했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어디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기에 도적들이 머무는 곳까지 온 것일까.

내 물음에,

"라웁 숲입니다!"

"...뭐?"

"라, 라웁 숲...."

"시발, 뭐라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다.

라웁 숲?

내가 아는 그 미치광이 마법사, 도미닉 후아튼이 머문다는 그 공포의 숲?

그동안의 고생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룩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멜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고생을 하며 협곡 꼭대기에서 줄 없는 번지 점프까지 했는데, 그 도착지가 라웁 숲이라고?

"이런 시발…."

오늘도 욕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지독한 불안감이 몰려왔으니까.

25화 도미닉의 실험체 감옥

"...."

물가 앞에서 때아닌 캠프파이어가 펼쳐졌다. 물론, 나 홀로 캠프파이어였다.

타오르는 불꽃에 기대어 추운 몸을 녹였다.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바닥에 쌓여 있는 옷가지들을 불꽃에 던졌다.

시원하게 잘 탄다.

오랜만에 불멍이다.

회사 다닐 때는 캠핑에서 불멍을 때리는 게 유행이라 주말마다 캠핑장을 방문하긴 했는데, 평온했던 그때의 불멍과 달리 이곳 불멍은 심란함이 가득했다.

도적들을 돌아가며 심문했는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이래서 라웁 숲을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가장 피하고 싶었던 장소에 던져졌다.

폭우에 휩쓸려 물길을 따라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눈치껏 미치광이 도미닉을 피해 라웁 숲을 벗어난다면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벗어날 수가 없다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도적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도 숲 중심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어느 순간 시야가 변하더니 풍경이 도돌이표처럼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라웁 숲에서 도적질하는 놈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이라.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난 이미 라웁 숲의 이런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라웁 숲과 떨어져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고.

"아무래도 '거기'에 빠진 것 같은데…."

정보를 취합할수록 한 가지 가정으로 좁혀지는데, 난 정말 이 가정을 인정하기 싫었다.

도미닉의 임시 실험체 감옥.

도미닉이 사로잡은 실험체를 가두는 마법 공간으로, 라웁 숲 일부 지역 몇 곳에 설치됐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이 그곳 중 한 곳 같았다.

실험체 감옥에는 '환상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환상 마법진은 일종의 어부 통발과 같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건 가능하지만, 나가는 건 불가능한 구조.

만약 이곳이 환상 마법진 속이라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입구는 오직 도미닉만 열 수 있었으니까.

'돌아버리겠네.'

악어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 온 것이다. 물론, 자의가 아니라 저 통나무 새끼가 날 데려왔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미치광이 마법사 앞에서 길을 잘못 든 것 같으니 풀어달라고 따질 순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껏 살아남은 것을 보면 천운이 따르는 것 같은데, 난 왜 재수가 더럽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이거 마녀라도 찾아서 살풀이해야 하는 거 아냐?

'이미 배때기 속으로 들어왔다.'

환상 마법진에 갇혔다는 건 내 목숨 줄이 도미닉의 손아귀에 붙잡혔다는 뜻이었다.

곧 마법진 안으로 키메라들이 쏟아져 들어올 텐데.

그 이유는 하나다.

실험체 수거.

도미닉이 번거롭게 잡아 온 실험체를 임시 감옥에 가두고 연구실로 수거해가는 이유는 실험체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는 뜻이고, 반대로 이야기하면 키메라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말이었다.

갇힌 공간에서 키메라들을 피할 수 있을까.

'도미닉의 생체 연구실로 끌려가서 빠져나온 인간이 있었던가?'

시발,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난 젖은 육포를 불 위에 올려놨다. 이 상황에서도 배가 고픈 걸 보니, 역시 본능은 위대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육포를 씹고 맛보고 뜯고 있는데, 물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

도적들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너무 춥습니다!"

"제, 제발!!"

두 시간 정도 물가에 담가놨나?

물 온도가 차다 보니 저들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알몸으로 웅크린 채 내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

겉으로 보면 내가 악당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흰 빌면 살려줬냐?"

"...."

"조롱으로 답했겠지. 닥치고 턱까지 물속에 묻어라. 피부까지 벗겨주랴?"

한 명씩 돌아가며 심문을 하다 보니 저들이 한 짓까지 알게 됐는데, 주로 했던 일이 여인 납치였다. 소굴로 끌고 간 뒤 농락하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악질들.

키메라에게 습격을 받으면서 여인들도 사라졌다고 들었다. 저놈들처럼 실험체 감옥 중 한 곳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저놈들이야 뒈지든 말든 상관없는데, 잡혀 온 여인들은 무슨 죄일까.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도 열이 뻗쳐서 저리 놔두고 있었다. 심히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 말이지.

'이곳에 갇힌 도적들이 더 있다고 했지?'

라웁 숲을 우회하던 중 도적을 붙잡아 전해 들은 정보가 있었다.

대규모 도적단의 실종 사건.

그 사라졌던 도적들이 이곳 실험체 감옥에 모조리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난 재수 없게 그 공간 속으로 제 발로 흘러들어 온 것이고.

'어떡한다.'

협곡을 탈출한 뒤에 구상해 놓은 몇 가지 계획이 있었다.

나름의 고민을 거쳐 여러 가지 플랜을 짜놨는데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했다.

살기 위해서라도 도미닉을 먼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감옥에 갇힌 이상 놈과 부딪치는 건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미치광이 도미닉과 관련된 이벤트가 제법 많기는 한데….'

문제는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학살자조차 초반에는 라웁 숲을 기피할 정도니, 이곳 난이도가 얼마나 빌어먹을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헬 난이도 이벤트에 1레벨 캐릭터가 강제로 참가하게 된 꼴이랄까.

도적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내가 5성 이상의 괴물이면 모를까. 지금 실력으로 도미닉과 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금 도미닉은 솔직히 학살자보다 위협적이었다.

도미닉 자체의 능력보단 그가 제작한 키메라 군단의 존재 때문이었다.

'놈이 존재를 노출하기 시작했어. 키메라 수가 안정권에 들었다는 거야.'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

소설 속에서 '군단'이라 불릴 정도로 그 수가 많고 강력했다. 하지만 도미닉의 진정한 힘은 훗날 제작될 단 하나의 키메라다.

[백 개의 심장, 아레나 후아튼]

도미닉의 광기와 지식이 총집약된 인간 생체 병기. 무력은 5성을 능가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미완성 단계일 것이다. 동력 원천인 '심장'을 얻기 전일 테니까.

"…동력 원천."

동력 원천을 중얼거리며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불멍처럼 불꽃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말도 안 되는 계획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존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도미닉을 피할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생각.

'그녀의 동력 원천을 내가 훔칠 수 있다면?'

아니 가능은 하려나?

실패 시 죽음이고, 성공 확률이 극악이라 애초에 계획에 넣지도 않았던 메인급 스토리의 숨겨진 '힘' 중 하나였다.

계승자의 신기이자, 아레나 후아튼의 동력 원천.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심장."

현재 도미닉이 광적으로 키메라의 수를 늘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도미닉은 현재 불사자의 심장을 얻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었으니까.

"그 밑그림이 뭔지 알고 있기는 한데…."

도미닉도 보지 못한 그 완성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 * *

날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깊게 고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태양이 저무는 모양인데, 슬슬 이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간을 보면서 움직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스펙으로 동력 원천을 훔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도미닉 후아튼은 학살자 파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인 만큼 그 정보가 학살자만큼이나 방대하고 자세했다.

도미닉 당사자조차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으니, 정보 우위에선 압도적으로 유리했는데, 문제는 그 정보를 가진 내 무력의 부재다.

어설프게 강해선 어림도 없다.

'도미닉은 몰라도, 키메라를 상대할 방법이 없어.'

키메라를 상대할 다른 무언가가 생기지 않는 한,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훔치는 건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화톳불에 모래를 부어 불을 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러진 팔을 가볍게 돌렸는데, 약간의 고통을 제외하곤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적에게 강탈한 포션을 사용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따뜻한 온기에서 긴 시간을 휴식했더니 컨디션도 회복됐다.

이제 움직일 시간.

그 전에 난 도적들의 처우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일단 죽이는 건 하(下)책이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주술사 도네콜린트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상황이라 살수를 펼친 것이고, 살인은 여전히 나에게 거북한 행위였다.

목숨을 구걸하는 도적들의 간절한 눈빛.

물가에 밤새 놔두면 저체온증으로 모조리 뒈질 것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가방을 둘러멨다.

전과 달리 가방은 제법 묵직했다. 도적들의 소지품에서 먹거리와 베텔의 독이 담긴 병들을 모조리 챙겼기 때문이다.

도적들을 잠시 바라본 나는 숲 안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도적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그들에게 그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무시한 채 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정도면 안 보이겠지?"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도적들의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졌을 때, 나는 주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나뭇가지 사이에 은신을 한 채 멀찍이서 도적들을 살폈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만 볼 뿐 도적들은 물가에 덜덜 떨며 머물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도적 중 일부가 눈치를 보며 물가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이래저래 죽을 바엔 내가 사라진 틈에 도망치는 도박을 시도한 이들이었다.

애초에 내가 노렸던 바이기도 했다.

한두 명이 바깥으로 나와 도망가기 시작하자, 분위기에 휩쓸린 듯 남은 도적들도 허겁지겁 물 밖으로 나와 반대쪽 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빠른 이는 역시나 두목이었다.

난 그들 뒤를 은밀히 쫓기 시작했다.

저들을 도망치도록 방치한 이유는 마법진에 갇힌 도적들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알몸이 된 데다 물품마저 모조리 빼앗긴 상황, 게다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저들이 향할 곳은 한 곳뿐이다. 형제라 부르는 도적단들의 집합 장소.

대략적인 정보는 도적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저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 실력으로 감당할 수 없거든.'

처음에는 5성인 척 연기를 하며 이곳 도적들을 이용할 계획을 떠올렸는데, 도적들의 수준을 모르는 상황에선 위험해 보였다.

영악하고 눈치가 빠른 이가 있을 수 있고, 혹여 3성 이상의 실력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인챈트 기운을 눈치챌 테니, 거리를 두고 전력을 살피는 게 먼저였다.

'꽤 많다고 했는데, 얼마나 잡혀 온 거지?'

잠시 후, 숲 한가운데에 큰 공터가 펼쳐지더니 커다란 산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목재로 지어진 산채 주변을 살펴보니,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비어있던 산채를 점령하고 머문 흔적이 아니었다.

기존에 자리 잡고 활동하던 도적 떼의 거점인가?

그렇다면 저 산채의 주인은 나만큼이나 재수가 더럽게 없는 놈이었다.

환상 마법진 범위 안으로 산채가 통째로 먹힌 셈이었으니까.

나는 한눈에 산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숨어 도망친 이들을 살폈다.

"살려... 살려줘!!!"

"여, 여기!"

소리를 빽빽 지르며 알몸으로 나타난 도적들의 모습에 산채가 시끄러워졌다.

안에서 도적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는데, 그 광경에 나는 짧게 혀를 찼다.

'뭐 이리 많아?'

눈에 띄는 숫자만 백 명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전부 모인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정도 숫자라고?

게다가 제법 강해 보이는 놈들도 보였다.

난 잠자코 숲 사이에서 저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도망친 이들을 통해 5성급 실력자가 근처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면 도적들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

도망치는 것?

아니, 그건 도망칠 장소가 있을 때 하는 행동이고, 이곳은 환상 마법진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장소다.

그럼 저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뿐이다.

'모조리 뭉치는 것.'

마법진에 갇힌 도적들이 모조리 한곳에 뭉칠 것이다.

압도적인 강자가 출현하면 약자들은 뭉치기 마련이니까.

26화 키메라 군단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서 그런가? 금세 밤이 찾아왔다.

횃불이 사방에 타오르며 산채 주변을 밝혔다.

일단 계획은 성공했다. 내 의도대로 산채에 도적들이 우르르 몰리고 있었으니까.

근데,

"와, 도미닉 이 미친 새끼."

그 수가 터무니없이 많았다.

발가벗겨 쫓겨난 도적들이 소식을 전달하면서 흩어졌던 도적들이 한곳에 모였는데, 그 수가 이미 5백을 넘어갔다.

지금도 빠르게 늘어나는 중.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도미닉의 광기 때문이다.

'도대체 몇이나 실험체로 쓴 거야?'

이곳은 임시 실험체 감옥 중 하나일 뿐이다. 나머지 감옥들까지 합친다면 2천? 3천?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 몰랐다.

그들 전부가 연구실로 끌려가 키메라의 연구 재료로 소비되는 것이다.

마치 실험쥐처럼.

소설 내용에선 수년 전부터 행해진 연구라고 했으니, 희생된 자들이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안 됐다.

'개인플레이로는 학살자보다 더 악질적인 녀석이네.'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인가.

학살자와 만찬을 즐길 때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학살자는 말이라도 통했지, 이 미친 사이코패스는 예측이 안 됐다.

수틀리면 그 자리에서 뜯어먹힐지도.

해일 위에서 서핑을 도전하는 마음이 이럴까.

마법진을 파훼할 수 없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수거 시기인데, 언제쯤 움직일까?'

키메라들의 실험체 수거 작업.

심문한 도적들이 이곳의 정체를 모르는 것을 봐선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저기 모인 도적 중에 이곳의 정체를 아는 이가 있을까.

없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다면 저따위로 모이는 짓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 테니까.

정보를 저들과 공유한다면?

고민은 짧았다.

키메라 군단을 떠올린 순간 답은 나왔으니까.

'달라지는 건 없어.'

도적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희생을 자처할 생각도 없었다.

괜히 나서다 뒈지는 게 아니라, 내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저들을 이용하면 이용했지. 불구덩이로 스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무 많은데, 괜찮으려나?'

수가 7백을 넘어 8백에 가까워지자, 슬슬 불안감이 생겼다.

많아도 너무 많다.

도미닉이 본다면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만찬과 같다.

일정 수가 한데 모이면 반응을 한다거나, 이런 건 없겠지?

애써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껏 안 좋은 가정은 신들린 듯이 맞아떨어졌으니까.

"…아."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각.

난 본능적으로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나뭇잎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는데, 그 감각은 곧 섬뜩함으로 바뀌었다.

'살기다.'

사나운 포식자의 살기.

갑자기 무언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더니, 사방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살기의 주체가 하나가 아닌 다수가 뿜어내는 기운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시발, 왜 하필 지금인데?"

난 신음을 삼키며 산채를 응시했다.

살기의 방향이 내 시선과 일치했다.

한데 뭉친 수백의 도적들.

저들을 먹잇감으로 보는 존재들이야 뻔했다.

키메라 군단.

안 좋은 가정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이거 알려야 하나?

아니, 이미 늦었다.

쿵. 쿵. 쿵. 쿵. 쿵!

판단할 새도 없이 숲 바깥에서 큰 울림이 터졌다.

숲 전체가 미약하게 흔들린다.

동시에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박에 나는 이를 악물곤 몸을 바짝 웅크렸다.

들키면 끝장이다!

크아아아아아아―!!!!

"...!"

거대한 숲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꿀렁이더니, 안쪽에서 괴성을 토해냈다.

도적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했다.

민첩하게 즉시 도주하는 도적들도 보였다. 소수에 불과했는데, 움직임을 보니 실력자들이었다. 마치 이곳에 지옥이 곧 펼쳐질 거란 사실을 아는 눈치 같았다.

"무, 뭐야? 무슨 일이야!?"

"숲이 움직이고 있어!"

"이거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도망치는 게 더 병신 같은 짓이야. 우리 머릿수를 보라고."

"하지만 저들은...."

"딱 봐도 겁쟁이들이잖아. 신경 끄고 뭉쳐."

대다수가 도망치는 도적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들은 곧 무기를 꺼내 들고 똘똘 뭉쳤다.

그 광경에 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8백이라면 뭐가 됐든 할만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상대가 나빠.'

오늘 터질 사건이었는지, 나로 인해 벌어진 사건인지는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

감옥 내 세력과 주변 지형을 살필 새도 없이, 사건이 터졌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난 빠르게 분위기를 살피며 머리를 굴렸다.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실험체의 앞날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시작은 '그들'과 조우했을 때였다.]

뚝―

"...!"

출렁이던 숲이 일순간 멈췄다.

지독한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도적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어둠 속의 숲을 응시했다.

난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나무를 골라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작아진 도적들을 내려다보는 그때, 음울한 소리가 가슴을 옥좼다.

으어― 으어― 으어―

숲 사이사이가 쩍 벌어지며 검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횃불에 비친 그들의 모습에 도적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혐오스러운 괴생명체.

수백의 흉측한 그림자들이 산채를 에워싼 채 쏟아져 들어왔다.

키아아아아아아―!!

"무, 뭐야!! 저것들은…!"

"아악! 도망쳐!!"

실험체 수거를 위해 나타난 '그들'.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이 등장했다.

검은 해일처럼 산채를 뒤덮은 악귀들을 보며 난 입술을 꽉 악물었다.

라웁 숲에 떨어진 첫날부터 아주 스펙터클한 이벤트가 내 앞에 펼쳐졌다.

확실히 난 운이 더럽게 없었다.

* * *

전투 가능한 도적 수백 명이면 작은 중소 귀족 군대도 상대할 전력이었다.

똘똘 뭉친다면 상급 몬스터들도 위협할 수 있는 전력.

하지만 그런 전력도 눈앞의 키메라 군단과 마주치는 순간, 오합지졸처럼 뿔뿔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마주 본 순간 전투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비주얼.

"오, 오우거?!"

"…아니야. 파, 팔이 여섯 개라고!"

"미, 미친! 따라오지 마! 아아악!"

"끄아아악! 살려줘!"

산채 주변을 부수며 짓쳐 오던 흉측한 거대 괴물.

오우거가 돌진해오더니, 도적들의 진형에 뛰어들었다.

여섯 개의 팔이 휘둘러지자, 진형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팔에 잡힌 도적들은 허공에 뜬 채 살려달라 울부짖고, 남은 이들은 혼비백산 도망쳤다.

쿠어어어어―!!!!!!!

오우거의 괴성에 근처 도적들은 풀썩 쓰러졌다. 공포에 짓눌려 머리를 박고 벌벌 떨었는데, 이성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들 위로,

스스스스슥―

"어억! 크룩!"

"사, 살려...!"

산채 크기의 거대한 슬라임이 미끄러지듯 다가오더니 도적들을 낚아챘다.

슬라임 표면에 붙어 있는 수십 수백의 팔.

그 팔들은 인간의 것을 닮았고, 팔에 잡혀 삼켜진 도적들은 슬라임 몸체에서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힌 듯 목을 움켜잡고 발버둥을 쳤는데, 곧 의식을 잃고 안에서 부유하며 둥둥 떠다녔다.

공포스런 광경.

도적들은 패닉에 빠져 비명과 함께 숲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냥이 시작됐고, 사냥꾼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황소 얼굴에 악어 육체를 한 괴물,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달린 뱀도 있었다.

덩치는 하나같이 거대해서, 인간들이 작은 벌레처럼 보일 정도였다.

후미로 다양한 형체의 작은 키메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도적들을 덮쳤다.

붙잡힌 도적들은 바닥을 긁으며 절규했고, 곧 키메라에게 질질 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방적인 사냥이다.

다만,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비명과 절규가 숲 곳곳에서 처절하게 울렸다.

숲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어째서 이곳이 공포의 라웁 숲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화아아악―!

"아아아아악!"

난 나무 위에 숨어 밑을 살폈다.

몸통 크기의 큰 눈동자가 허공에 떠다녔는데, 도망치던 도적들이 눈동자 괴물 앞에 선 순간, 눈동자가 붉은빛을 토해냈다.

빛에 노출된 도적들은 머리를 움켜잡고 비명을 질러댔고, 잠시 후에는 멍한 표정으로 눈동자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최면에 걸린 듯 보였다.

'지금!'

나무 밑으로 눈동자 괴물이 지나가는 순간, 나는 단검에 신력을 담고 뛰어내렸다.

눈동자가 퍼뜩 하늘을 올려다봤다. 순간, 확장되는 눈동자의 동공, 그 동공에 내 모습이 비친 것도 잠시, 동공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빛에 노출된 순간, 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두통과 함께 매스꺼움이 올라왔는데 신물을 삼키며 버텨냈다.

푸욱―

단검은 눈동자에 그대로 박혔고, 난 그대로 단검을 내리그으며 착지했다. 갈라진 눈동자가 피를 쏟아냈다. 난 눈동자 뒤를 잡은 채 두 번째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푹― 푹― 푹― 푹―

눈동자 몸에 단검을 미친 듯이 찔러 넣었다. 새하얀 진액이 튀며 온몸을 적셨다. 잠시 후, 부르르 떨던 눈동자가 축 늘어졌다.

"...어?"

괴물이 죽자, 곁에 멍하니 서 있던 도적들이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그들은 꿈에서 깬 듯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아악!"

"살려줘!"

미친 사람처럼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숲 사이로 도망쳤다.

구해준 사람은 보이지도 않은 모양인데, 이해했다.

지금 이곳은 지옥 그 자체거든.

나 또한 홀로 살아남은 게 고작이라, 저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난 눈동자 괴물의 시체를 도축하듯 해체했다. 잠시 후, 엉망이 된 시체 안에서 붉은 보석을 끄집어냈다.

'정말 있네.'

키메라의 동력 원천인 '생체 마석'.

마석의 가치를 잠시 떠올린 나는 마석을 품에 넣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기 위해 나무를 타고 움직였다.

한동안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봤는데, 키메라의 목적은 학살이 아닌 생포에 맞춰져 있었다.

'기습을 해도 대응이 소극적이란 말이지.'

키메라 군단에 대한 도미닉의 명령 체계가 단편적이란 뜻이고, 지금 상황을 잘 이용하면 키메라 사냥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다만, 잡히면 나도 끝장이라서 사냥 가능한 키메라만 노려야 했다.

처음에 등장한 거대 키메라들은 꿈도 꾸면 안 되고, 조금 전처럼 정신 계열의 키메라는 손쉽게 사냥 가능했다.

특별한 정신 방벽.

여기서도 내게 큰 힘이 됐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자.'

일단 목표는 실험체 수거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도미닉은 필요한 수의 실험체만 채워지면 마법진을 다시 닫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사이 숨거나 도망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생체 마석을 수집하는 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난 독한 향을 풍기는 풀들을 모아 짓이긴 후 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풀독에 피부가 부어오르고 따끔했지만, 후각에 민감한 키메라를 따돌리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크아악!

키에에엑!

숲 전체를 휘젓는 키메라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안전하게 정신 계열의 키메라들을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미끼를 쫓는 것.

난 비명을 쫓아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27화 고대 문양의 능력

푸욱―

신력이 깃든 단검은 키메라의 얇은 껍질을 가볍게 꿰뚫었다.

정신 계열 쪽 키메라는 물리 방어력이 약했는데, 난 이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히익!"

키메라가 죽자, 잠들어 있던 도적들이 발작하며 일어났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난 무시한 채 생체 마석을 채취하고 자리를 떴다.

'열 마리.'

미끼를 문 키메라만 기습했기에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붉은 보석을 가방 안에 넣고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는데,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비명이 멎었고, 사방을 메우던 괴성도 사라졌다.

아니, 멀어지고 있다.

'키메라들이 물러나고 있다.'

수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복귀 명령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주변에 보이는 키메라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붙잡힌 도적들을 끌고 마법진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인데.

'어떻게 나가는 거지?'

의문이 들자, 곧장 거대 키메라들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흔적이 커서 추적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키메라들의 흔적이 대부분 숲 바깥으로 이어져 있자, 더는 눈치 보지 않고 숲을 전력으로 가로질렀다.

잠시 후, 숲을 지나 흐르는 물가를 건넜을 때, 나는 잠시 멈춰선 채 인상을 구겼다.

'흔적이 끊겼어.'

칼로 베인 것처럼 흔적이 잘린 듯 사라졌다.

'마법이라는 건가?'

남은 흔적을 자세히 훑어봤지만, 이어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허공 속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내가 마법진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우선 이 근처에 숨어 지켜볼 요량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

옆쪽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풍경이 비틀리면서 다른 공간으로 떨어졌다.

마법진의 경계를 밟으면 생기는 현상. 주변 다른 곳으로 이동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발...!"

시야가 바뀐 순간, 수많은 팔이 내게 쏟아졌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인간들의 팔이다.

뭐야, 이것들은?

다급히 단검을 휘둘렀지만, 베는 것보다 짓쳐 오는 게 더 많았다.

팔들은 내 팔다리를 붙잡고 확 당기더니, 목과 허리를 매섭게 끌어안았다. 난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크아아악!"

전력을 다했지만, 뿌리치는 건 불가능. 동시에 흐물거리는 젤리 벽이 나를 반겼다.

위를 봐도 온통 젤리 벽이다.

인간 팔들을 달고 다니는 거대 슬라임.

망했다.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슬라임이 나를 집어삼켰다.

퐁―!

삼켜진 순간 수영장에 풍덩 빠진 부유감이 몰려왔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인데, 문제는 숨을 쉬는 것도 수영장이랑 똑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크, 크룩!"

걸쭉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그 맛이 역했다.

문제는 맛이 아니라 액체를 삼킬수록 몸이 마비된다는 것이었다.

악을 쓰며 허우적거렸지만, 잡히는 건 함께 떠다니는 도적들뿐이었다.

순간,

"...!"

뒤룩뒤룩 움직이는 도적들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의식은 있지만, 몸이 굳어 있는 상태.

그때 깨달았다.

'최악이다!'

이대로 도미닉과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마비된 채 실험용 쥐처럼 뒈지겠지.

지독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난 살기 위해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그때였다.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본 것이.

고대 문양.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문양의 빛을 소환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힘이자,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

목적을 가지고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존 본능에 가까운 행동.

우우우우우웅―!!!

손등이 황금빛으로 물든 순간, 내 몸을 중심으로 끈적이는 액체가 소용돌이쳤다.

황금빛 파동.

빛의 물결은 곧 슬라임 몸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곧 거대 슬라임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꿀렁―!

슬라임의 몸체가 빛과 함께 크게 꿀렁거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거대 슬라임.

빛에 노출된 순간 움찔움찔하더니 이내 거대한 몸체를 고통스레 비꼬기 시작했다.

팔 전체가 바들바들 떨며 경련을 일으켰는데, 지독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크에에에엑!!!!

괴성과 함께 슬라임의 몸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젤리 벽이 허물어지며 삼켰던 모든 것들을 게워냈다.

걸쭉한 액체와 쏟아져 나오는 인간들.

"우엑!!!!"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의식은 있지만, 마비가 풀리지 않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마비가 풀릴 것이다.

제발, 이대로만 가자.

키아아아악!

"...."

어림도 없다는 듯, 검은 그림자가 강한 돌풍과 함께 내 위를 덮쳤다.

허공 위의 검은 그림자.

날개 달린 거대 뱀이었는데, 놈은 바닥에 너부러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몸의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슬라임 체액 덕에 삼킬지 말지를 고민하는 모습인데, 간담이 서늘했다.

끔찍하다 시발.

삼켜지기 전에 붐(Boom)을 터트리고 같이 죽어?

하지만 내 생존 본능은 무척이나 강력해서, 그딴 짓은 절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발악하려고 두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불과 세 걸음 거리, 인상 더러운 중년 도적 하나가 마네킹처럼 굳은 채 날 보며 입을 놀리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뭐라는 거야?

비... 빛?

동시에 눈동자로 내 손등을 다급히 가리킨다.

아, 멍청하게 이걸 잊고 있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설마, 이 빛이 지금 상황을 만든 건가?

번쩍―!

손등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이것도 마나를 소비했기에 전보다 그 빛이 옅었지만,

끼아아아악―!

키메라 뱀을 날려 보내기는 충분했다. 빛에 노출된 순간, 몸을 배배 꼬던 뱀이 황급히 몸을 날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곤 숲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난 손등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마법진을 응시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이거.

고대 문양의 능력을 찾은 것 같았다.

부스슥― 부스슥―

'…설마, 또냐?'

넝쿨 흔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또 다른 키메라들이 입에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시발, 여기가 무슨 동네 맛집인 줄 아나.

도적과 나는 시선을 마주쳤고, 도적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용히 손등을 들어 올렸다.

* * *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밤이 지나갔다.

주변은 이제 조용했다. 키메라들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선 수거 작업이 마무리된 모양.

"으윽!"

마비가 풀렸다.

너부러진 사람 중에 내가 가장 먼저 풀렸는데, 아무래도 문양의 빛과 관련되어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도적이 그다음으로 몸을 배배 꼬며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우웩―!"

나와 도적은 사이좋게 낮에 먹었던 음식물을 토해냈다.

신물을 뱉어내며 구역질 나던 것들을 모조리 게워내자,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시부랄, 까나리 액젓을 통으로 퍼마신 것 같네."

마법진 경계를 밟는 바람에 저세상 갈 뻔했다. 그것도 슬라임 배 속에 잡혀서 말이다.

고개를 탈탈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속은 아직도 더부룩했는데, 그것 말곤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거대 슬라임이 눈에 들어왔다.

날 붙잡았던 팔들은 기능을 멈춘 채 무덤처럼 박혀 있었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그로테스크했다.

슬라임의 사체를 살폈는데, 죽은 이유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분명 고대 문양의 능력과 관련이 있을 텐데.

문양이 키메라와 상극인 기운을 담고 있는 건가?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또 다른 키메라와 마주한다면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아, 챙길 건 챙겨야지."

단검을 빼 들고 슬라임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잠시 후 젤리 조각에서 생체 마석을 뽑아냈다.

붉은 보석 형태로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거대 슬라임의 것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기운을 보니, 붉은 마석보다 상등품 느낌이 났다.

마석을 가방에 챙기고 옆에서 토하고 있는 도적을 살폈다.

체액에 중독되어 마비된 도적들은 스무 명 정도 됐는데, 마비가 풀린 이는 이 도적뿐이었다.

근데 이자의 외형이 눈에 띄었다.

'한쪽 팔이 없네?'

상체가 드러나 있었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흉터가 많았다.

잘린 왼팔은 가슴 근처까지 아물어 있어서, 당시에 이 상처를 입고 어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상처만 봐도 인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둑치곤 빡세게 살았네.

'그나저나 어떡한다.'

주변에 너부러진 도적들을 둘러보며 고민에 빠졌다.

문양의 능력으로 위기는 탈출했는데, 저들은 내 능력을 모두 보았다. 저 도적만 해도 내 능력을 상기시켜주지 않았던가.

문양에서 터진 빛무리가 키메라를 쫓는 걸 봤으니, 내 능력이 키메라와 상극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죽여야 하나?'

안전을 위해선 전부 죽이는 게 맞다.

방금 보여준 능력이 좀 특별해야지.

정보가 알려진다면 분명 내게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이 생길 거다.

근데,

'시발, 그게 어디 쉽게 되냐고.'

무력화된 인간의 심장을 찌르는 일.

그것도 무려 스무 명이나 된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사이코패스나 다름없다.

알아도 쉽사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란 뜻이다.

저들의 마비가 풀리기 전에 결정해야 하는데,

"이, 이봐."

그때 외팔이 도적이 입가를 닦으며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40대 정도로 보였는데, 눈빛을 보니 평범한 놈 같지 않았다.

이 새끼부터 조져야 하는데.

근데 마주 본 순간 느낌이 싸했다.

이 사내, 나보다 강하다.

위기감에 본능적으로 단검을 꺼내 들었는데, 그 모습에 외팔이도 다급히 단검을 꺼냈다.

그런데,

"…너 뭐냐?"

도적의 시선이 내가 꺼낸 단검에 닿아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검 자루 끝에 벗겨진 흔적이 있었는데, 흐릿했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포효하는 늑대 문양.'

지워진 흔적은 내가 쥐고 있던 단검과 닮아있었다.

내 단검은 크룩스의 단장이 쓰던 무기였다. 크룩스 출신만 사용하는 단검이란 뜻이다.

설마, 이딴 곳에서 크룩스 출신의 암살자와 마주할지 몰랐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너 누구 휘하에 있는 놈이냐?"

질문이 들린 순간, 난 움직였다.

마비가 덜 풀린 지금이 기회.

일단 제압한다.

그런데 사내가 더 빨랐다.

삐이이이이―!

사내는 품에서 호각을 꺼내더니, 길게 불었다. 그 소리에 난 욕설을 내뱉었다.

혼자가 아니다.

방금 소리는 크룩스 내에서 사용하던 긴급 호출 신호.

사내는 방금 동료들을 불렀다. 근처에 크룩스의 암살자들이 더 있다는 의미.

게다가 호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단장급!'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28화 협상하자

창―!

단검끼리 부딪친 순간, 상대는 단검을 놓쳤다. 마비가 덜 풀린 부작용이었다.

난 상대를 발로 찬 뒤 목에 단검을 겨누었다.

일단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숲 주변을 살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인기척들이 느껴진다.

수가 제법 많다.

도망가야 하나?

하지만 주변을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여덟? 아홉?'

고요히 가라앉은 숲 사이로 그들은 어둠을 은폐 삼아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전방위로 순식간에 포위됐다.

키메라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정도면 실력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운 숫자.

아니, 전투는커녕 도망치는 것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키메라 폭풍 다음에는 크룩스냐?

언제쯤 안식이 찾아올는지.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졌다.

일촉즉발의 순간처럼 느껴졌는데, 의외로 그들은 코앞에서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포위한 채 지켜보는 모습.

어째서?

의문도 잠시, 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제압한 사내를 바라봤다.

설마, 이자 때문에?

의문이 들면 알아보면 된다.

난 검 끝으로 인질의 목을 살짝 찔렀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 순간,

"그분을 죽이면 너도 죽는다."

숲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벌한 기운을 담고 있었는데, 마치 내 행동에 분노하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협박처럼 기세가 사나웠는데, 난 오히려 피식 웃었다.

죽음의 문턱을 서너 번 넘다 보면 간땡이가 이렇게 커지나? 이런 협박은 이제 우스웠다.

"그러니까. 죽이기 전에 앞으로 모두 튀어나와."

"...."

"아홉 정도인가? 부끄럽게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 숨어있다 발각당하면 이자의 목숨을 책임질 수 없으니 머리 굴리지 말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을 두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이다.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고, 난 붙잡은 사내가 저들의 우두머리가 아닐까 의심했다.

역시 예상대로 단장인가?

사내를 바라봤는데, 무슨 생각인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의문도 잠시, 난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주변으로 검은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무 위, 숲 사이, 바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정확한 숫자는 열 명이었다.

난 바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호리호리한 복면인에게 집중했다.

'한 명 더 있었네.'

유일하게 기척을 잡아내지 못한 인물이었다. 은신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강하다는 뜻인데,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잠시 후, 난 주변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염병할, 이건 너무 심하잖아!'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를 돌아봐도 마나 기운이 감지됐다.

전원이 최소 1성 이상이란 뜻.

'전투 즉시 뒈질 각이고, 도주도 힘들 것 같은데… 이 새끼들 뭐지?'

최악을 가정해 조직에서 보낸 추적조도 염두에 두었는데, 전력을 보니 내 착각이었다.

학살자 카멜을 암살하는 데 일곱이 동원됐다. 그런데 눈앞의 전력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고작 뉴비 암살자인 나를 죽이러 보내기엔 터무니없는 전력이란 뜻이다.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봐."

외팔이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무시하기 힘들어서 녀석을 바라봤는데,

"협상하자."

"협상?"

"그래. 그 전에...."

사내는 주위를 잠시 둘러본 뒤 동료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짓했다.

수신호.

나도 알고 있는 크룩스의 수신호였다. 그래서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암살 지시?

"죽여."

사내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단검을 쳐들었는데, 그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암살자들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놈들.

동시에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암살자들이 주변에 너부러진 도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난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사내를 내려다봤다.

"…뭐 하는 짓이지?"

"대신 도와준 것뿐이야. 병신같이 가만히 있길래. 뭐, 그 덕에 난 살아남았지만."

"...."

"뭐야, 설마 그거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어?"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래 살기 그른 놈이네. 그 능력을 누가 알면 어쩌려고."

"이젠 너만 알고 있지."

"날 죽이는 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난 누구한테도 네 비밀을 주절거릴 생각이 전혀 없거든. 누구 좋으라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암살자들이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눈앞의 사내. 이제 이 녀석만이 내 능력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도망치는 것도, 부딪치는 것도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마법진에 갇힌 이상 저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유리한 포지션은 지금뿐이다. 우두머리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원하는 게 뭐지?"

"말했잖아. 협상하자고. 그런데 그 전에 무척 찝찝한 점이 있어서 말이지. 그것부터 털어내자고."

"뭘 말이지?"

"네놈 정체. 확인이 필요해."

처음으로 사내의 표정에 긴장이 스쳐 갔다. 기대 반 불안 반이 섞인 눈빛인데,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너, 마스터 사람이냐?"

"뭐?"

"우리를 어떻게 찾았지? 크룩스 내의 정보력으로는 찾기 불가능했을 텐데."

"뭔 개소리야?"

"날 몰라?"

사내는 질문을 던지면서 내 반응을 살폈다.

크룩스 출신의 외팔이 사내.

내가 너 따위를 알 리가….

순간, 벼락같이 한 존재가 떠올랐다.

어? 잠깐만?

내 멍한 반응에 사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녀석의 시선은 목을 겨눈 내 단검에 닿아 있었다.

"이건 단장만 쓸 수 있는 표식 단검이다. 너처럼 새파랗게 어린놈이 가질 수 있는 단검이 아니란 소리지. 몇 가지만 물어볼 건데,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지금껏 물어본 건 뭐지?"

"간단한 확인 정도? 지금이 진짜야."

"웃기는 놈이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협상 결렬이지. 날 죽이든 마음대로 해."

"...."

같이 죽자고 뻗대는 모습이 꽤나 강경했다.

놈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건 곤란한데.

왠지 질문의 답에 따라 놈의 반응이 갈릴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살필수록 느껴지는 게 있었거든.

"그 단검 누구 거야?"

"내가 속해 있던 단장의 것이다."

"단장의 단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대가 단장을 죽였다고 판단해도 되지?"

예리하네.

지금껏 그걸 고민하고 있던 건가.

그나저나 대화를 해보니, 크룩스와 이미 척을 진 느낌인데.

"단장 외 다른 동료들도 이곳에 있나?"

"라웁 숲에 들어온 건 나 혼자야.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누구에게 죽었지?"

여기가 포인트인데, 난 고민 없이 답했다.

"나한테."

"...."

내 답에 사내는 침묵했다. 잠시 후, 사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유."

"내게 벌레를 먹였거든."

"…벌레?"

"붐(Boom)이 이곳에 기생 중이다."

내가 덤덤한 표정으로 심장을 쿡쿡 찌르자, 사내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긴장이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벌레를 삼켰다는 건, 조직에서 버려졌다는 뜻. 그건 사내가 가장 잘 알았다. 더는 크룩스와 관련해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손목을 잡아봐도 되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사내는 내 손목을 덥석 움켜잡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칼이라고 한다."

"…칼."

"내 이름이다. 넌 이름이 뭐지?"

사내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단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난 침묵했다. 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놀라서 못 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칼'이라고?

칼이 왜 여기서 나와?

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흉터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미소를 짓는데, 어째 무섭다.

난 소설 속에서 칼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나이는 40대, 한쪽 팔에 강철 의수를 착용한 전(前) 크룩스의 암살자 출신. 온몸에 자상이 있고, 얼굴은 무식한 산적을 닮… 응? 정말 그러네?

그런데 슬라임 배 속에서 첫 만남이라니, 내용상 말이 안 된다.

"내 말 듣고 있나?"

"아, 알이다."

"알이라, 가명이군."

"...."

이 아저씨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하긴, 칼이라면 쉽게 속이기 힘들겠지.

난 말없이 칼을 내려다봤다.

정말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다.

'칼 바스타인.'

난 칼의 풀네임을 기억할 정도로 눈앞의 사내를 잘 알고 있다.

칼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기는 반년 후 학살자가 에토르 가문을 짓밟고 그 영지에 깃발을 꽂을 때다.

학살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크룩스의 몰락을 바랐던 인물.

내가 벌레 폭탄, 붐(Boom)을 삼켰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벌레를 삼킨 후 마스터의 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아, 이젠 나까지 두 명인 건가?

그 전의 행보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카멜과 만나기 전에 실험체 감옥에 갇혀 지냈던 건가?

'그럼, 마법진을 살아서 빠져나왔다는 건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아니 그것보다 조금 전 칼은 나와 함께 슬라임에 잡혀 죽을 뻔했다. 내 발악이 아니었다면 사이좋게 도미닉의 실험체로 사라졌겠지.

칼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미래가 벌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내 존재가 칼의 운명을 비틀어버린 것 같았다.

'오히려 잘된 건가?'

칼의 운명이 바뀌는 게 나에겐 훨씬 이득이었다. 아니, 무조건 바꿔야 했다.

칼 바스타인이 학살자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 그래도 팍팍한 이 세상이 더 괴로워질 테니까.

"그 단검으로 날 찌를 게 아니라면 치우지? 팔 안 아파?"

고민은 짧았다.

난 단검을 치우고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위험한 판단 같지만, 무척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우선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고, 눈앞의 사내가 그 칼이라면 안심해도 괜찮았다.

'학살자의 숨겨진 비수.'

소설 속 칼 바스타인의 별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학살자를 도왔던 악당 조력자.

그는 주군인 학살자와 이득을 두고 저울질할 만큼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즉, 내가 그에게 줄 게 있으면 내 목숨은 보장된다는 뜻.

[협상하자.]

조금 전 칼이 내게 한 말이다. 그는 내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 * *

"나를 구해준 사람이다."

흙먼지를 털고 일어난 칼은 내 앞에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조금 전까지 인질 놀이를 했던 사이라 이게 뭔가 싶었지만, 칼의 행동은 나와 암살자들의 갈등을 삽시간에 풀어냈다.

호리호리한 녀석이 다급히 다가오더니, 비틀거리던 칼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엘튼."

"아닙니다. 칼 님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먹힐 땐 끝인 줄 알았지. 운이 좋았어."

"다신 무모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전 남은 이들을 책임질 그릇이 못 됩니다."

"내 판단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트렸으니, 책임을 진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녀석들이 전부인 거냐?"

엘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목숨 걸고 마물들의 시선을 끌었는데도 절반에 가까운 전력을 잃은 것이다.

여태껏 가장 큰 피해였다.

'하필 그 타이밍에 마물들이 들이닥치다니.'

무방비 상태로 산채에서 마물들에게 포위당했다.

최악의 판단이었지만 5성의 등장 소식은 이 빌어먹을 곳을 벗어날 유일한 동아줄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5성의 존재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큰 피해만 입고 자신은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다행이라면 최선 대신 차악이라도 찾았다는 건데.'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었다.

적어도 절망 대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으니까.

칼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자신을 알이라 소개한 남자.

"그 눈빛은 뭐야? 할 말이라도 있나?"

"아주 많지."

내 물음에 칼은 씨익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더는 5성의 존재는 없었다.

새로운 동아줄을 찾았다.

29화 칼 바스타인

"폭우에 휩쓸려 왔다고?"

"정신 차려보니 여기였습니다."

"넬리토리에서 이곳까지? 운빨 죽이는 녀석인데? 그 거리를 살아서 오다니."

"운빨이라…."

확실히 운빨 좆망이긴 하지.

소설 속에서 눈을 뜬 순간 학살자의 멱을 따러 가는 자살 특공대의 신입 암살자에 빙의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학살자 앞에서 굽신굽신하며 온갖 개고생을 하고 벗어났더니, 폭우에 휩쓸려 도착한 곳이 미치광이 새끼의 실험체 감옥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안 돼서 키메라 군단의 습격을 받았고, 눈앞의 칼을 만났다.

"시발."

"...?"

길게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냥 최악인 건 아니었다.

바락바락 살아남으면서 쓸만한 보상들을 얻기도 했으니까. 실험체 감옥도 최악이긴 했지만,

'학살자보다 먼저 칼 바스타인과 인연을 맺었지.'

눈앞의 인연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칼과의 인연은 장기적으로 판단하면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학살자의 숨겨진 카드 하나를 제거하는 셈이니까.

앞서 학살자의 정복 전쟁을 책임지던 주술사 도네콜린트마저 제거한 상태라, 학살자의 인재 테크트리에 균열을 준 상태였다. 여기에 칼까지 빼버리면?

타격이 엄청날 것이다.

물론, 학살자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칼을 바라보자, 그는 이상한 놈을 보는 것처럼 물었다.

"근데 왜 말을 높이는 거지?"

"이제부터 협력 관계니까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제 마음입니다."

"웃긴 놈이네."

인상 더러운 마흔 살 아저씨한테 반말을 찍찍 뱉는 게 좀 어색해서 말이지.

'임시적인 동료 관계라.'

칼은 내게 탈출 때까지 협력 관계를 제안했는데, 큰 고민 없이 수락했다.

스토리에 변화가 없다면 칼 일행은 훗날 이곳을 벗어나 학살자와 만나게 되어 있다.

머무는 동안 안전도 보장받는 셈이니, 버스 탄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빌붙어 있다가 상황을 보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난 칼 일행과 숲을 거닐고 있었다.

준비된 아지트가 있다고 했는데, 들어보니 꽤 오래 머문 티가 났다.

"어제 왔다면 이곳에 대해 전혀 모르겠는데?"

"뭐 좀 아는 게 있습니까?"

"아주 빌어먹을 곳이지. 마법진 결계 같은데, 들어올 순 있어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잡혀 오신 겁니까?"

"아니,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흘러들어 왔어. 두 달 하고 보름 정도 갇혀 있었지."

"…네?"

난 멈칫하곤 칼을 바라봤다. 그 시간이면 키메라 군단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닐 텐데, 그때마다 살아남았다고?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그럼, 그 괴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봤지."

"그때마다 버티신 겁니까? 괴물 수를 보니,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방법이 있어."

"방법?"

"그건 조금 있다 알려주지."

역시, 키메라를 피할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피하는 것만으로 이곳을 벗어나진 못할 테니,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저들과 처음부터 같이한 겁니까?"

"같이했지. 스물다섯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열 명 남짓이야."

"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이젠 좀 지쳐."

칼은 쓰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난 마른침을 삼켰다.

칼 일행이 변고를 당한 데에는 5성 소식을 퍼트린 내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서 어떻게 단장과 암살자들을 제거한 거지?"

"파양초를 알아보고 취한 척 연기했습니다. 방심을 유도한 뒤 암습했죠."

"임무가 뭐였지?"

"음, 그게…."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스토리는 약간의 각색이 필요했다. 하나하나가 워낙 믿기 힘들어서 말이지. 나 같아도 내 스토리를 못 믿겠는데, 칼이라고 믿을까.

의심만 살까 싶어 대충 둘러댔는데,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홀로 해결하다니, 실력이 상당한데."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

칼은 굳이 그 능력이 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거진 숲을 벗어나 확 트인 들판을 걷는데,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이 아니야."

목조 건물이 눈에 띄어서 그곳을 바라봤더니, 칼은 고개를 흔들며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저 건물은 나도 아는 곳이다.

도적 산채.

어젯밤 지옥 파티가 열렸던 장소였다.

"왜 저곳을 쓰지 않는 겁니까? 아지트로 사용하기에 좋은 환경 같은데."

"저곳에 있으면 죽기 딱 좋아. 가장 피해야 하는 곳이지."

"저곳이요?"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가장 먼저 던질까?"

"...."

"한곳에 우글우글 몰려 있으면 괴물들의 최우선 표적이 되지. 저 산채는 미끼를 모으는 장소야."

"…미끼? 산채 사람들은 괴물의 존재를 모르는 겁니까?"

"대부분 모르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왜죠?"

"간단해. 그물이 꽉 차면 어부는 집에 가거든."

"...."

"이곳에 살아남은 이들이 우리뿐일까? 제법 많아. 하지만 오래 버틴 녀석 중에 괴물의 존재를 알리는 멍청한 놈은 없어. 왜? 알려주면 생존 확률이 떨어지니까."

"그럼 저 산채는…."

"암묵적으로 가장 안락하게 만들어놓지.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머물 테니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새로 유입된 이들을 미끼로 삼는 곳.

확실히 냉혹한 세상이었다.

"비인간적 같아?"

"도덕적이지는 않죠."

"또 머저리 납시었군. 이런 방식에선 나랑 잘 안 맞나 보네."

목적을 위해 타인을 미끼로 쓰는 심계는 학살자와 닮았다. 이래서 오랫동안 쿵짝이 맞았던 건가? 그렇다고 칼과 카멜이 같은 결의 인간이란 뜻은 아니었다.

칼과 카멜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으니까.

"방법이 틀리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를 비판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타인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라도 그 상황이라면 묵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칼이 운이 더럽게 없었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산채를 잠시 방문한 그때 키메라 군단의 습격을 받았으니까.

습격 초반에 도주를 감행한 이들이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뭉쳤던 도적들과 달리 도주를 택했던 사람들.

칼 일행을 포함해서 감옥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인 것 같았다.

그들을 언급하자, 칼은 짧게 혀를 찼다.

"이번만큼은 대부분 잡혀갔을 거야. 우리조차 버티지 못했으니까."

"강한 이도 있었습니까?"

"있긴 했지만, 우리가 가장 강했어."

그런 칼 일행도 절반이나 잡혀간 상황이니, 이번 습격이 얼마나 갑작스레 이뤄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모였던 이들 중에 얼마나 살아남았을까? 난 그저 조용히 칼을 따랐다.

"…아지트가 여깁니까?"

"왜? 뭐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나?"

"뭐, 기대한 건 아닌데…."

아지트라고 해서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냥 숲 사이에 공터만 덩그러니 있는 장소였다. 습격에 바로 반응할 수 있게 시야가 확보되고 뒤쪽에 개울이 흘러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정도?

'뭐, 충분한 건가?'

난 씻기 위해 개울가로 다가갔다. 슬라임 체액 냄새가 워낙 지독해서 말이지.

그건 칼도 마찬가지였는지 내가 웃옷을 벗고 체액을 씻고 있자, 곁에 걸터앉아 머리를 헹구고 있었다.

어째 자세가 힘들어 보였다.

한 팔이니 당연한 건가?

"도와줄까요? 불편해 보이는데."

"팔이 없다고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신경 쓰지 마."

몸을 씻으며 칼을 힐끗 바라봤다. 그가 웃옷을 벗자, 잘린 흉터가 훤히 드러났다.

난 말없이 그 흉터를 살폈다.

그의 정체가 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잘린 어깨의 흉터가 달리 보였다.

'저게 붐(Boom)을 터트린 흔적인가.'

그는 붐(Boom)을 터트리고도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심장이 아닌 팔을 잃었다는 게 중요했다.

'벌레 제거법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

벌레 제거법은 크룩스에게 무척 치명적인 약점이었기에 마스터는 전 조직을 동원해서 칼을 제거하려고 했다.

칼이 추적을 피해 라웁 숲까지 흘러들어 온 이유였다.

'내겐 벌레를 제거할 기회가 온 셈이지.'

시선을 돌린 나는 머리를 빡빡 감기 시작했다. 동작과 달리 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칼 바스타인을 만나면서 계획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 * *

칼 일행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고, 엘튼만 칼 근처에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칼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나를 부르더니 개울 너머 큰 나무들이 즐비한 장소를 가리켰다.

"다른 장소로 던져지고 싶지 않으면 저 나무들 뒤쪽으로 넘어가지 마."

"마법진 경계입니까?"

"경계를 알고 있어?"

"경계를 밟는 바람에 슬라임에게 먹혔거든요. 재수 더럽게 없었죠."

"나에겐 천운인데?"

칼은 피식 웃으며 나무들 주변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바닥 부분에 굵직한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주변 경계선을 모조리 표시해 둔 것 같았다.

"경계선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면 쓸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어."

"쓸만한 것?"

"우리처럼 재수 없게 흘러들어 온 인간이나, 들짐승들이 개울로 오는 경우가 제법 있거든."

"인간이라면 어찌합니까?"

"바깥소식을 듣고 보내지."

"그냥 보냅니까?"

"그게 우리에게 이득이니까. 대부분 산채로 흘러들어 가거든."

"...."

"어제 잡은 멧돼지가 있어. 먹을 복은 있네."

"사냥도 합니까?"

"우릴 가둔 새끼는 우리가 먹고 자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지. 그런 면에서 이곳은 나름 명당이야."

잠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바깥소식이라….'

그러고 보니, 미치광이를 피할 생각만 했지. 그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똥은 피하면 된다지만, 이번 똥은 피하는 게 불가능하니,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그 바깥소식이란 것 좀 알 수 있겠습니까?"

"바깥소식? 어떤 소식을 말하는 거지?"

"혹시 이 마법진을 만들고 괴물들을 보내는 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난 그 주인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이 모든 정보를 타인에게 오픈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칼과는 협력 관계 중이지만, 모든 것을 공유할 만큼의 동료는 아니었다. 그래서 칼이 알고 있는 정보에 맞춰서 행동할 적정선이 필요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놈이 있어."

"누굽니까?"

"도미닉 후아튼. 마법사야."

칼은 도미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바깥에 도미닉의 정보가 완벽히 풀렸다는 뜻인데,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도미닉이 토바른 지역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건, 더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고, 키메라 군단이 만족할 만큼 완성됐다는 의미였으니까.

"바깥 사람에게 들은 정보입니까?"

"그래."

"언제 들었습니까?"

"이틀 전쯤? 괴물들과 함께 돌연 모습을 드러낸 녀석인데, 숲에서 활동하던 모든 도적의 씨를 말려버린 모양이야."

아직 알려진 희생자가 도적 떼뿐이라, 큰 경계를 하지 않는 모습인데, 곧 토바른 전 지역이 도미닉, 한 마법사를 두고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여유가 없는데?'

도미닉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판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상황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곧 토바른 전 지역을 아우르는 대전쟁이 펼쳐질 것 같았으니까.

30화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나도, 칼도,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아지트에 온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시원한 들판, 밤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지옥을 경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는데, 엘튼이 주변 경계를 위해 암살자들을 호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을 믿고 자도 괜찮은 걸까. 뒤통수치면 답이 없는데, 사실 알아도 답이 없는 건 똑같았다.

드르렁―!

"...."

멀찍이서 대차게 코를 골며 자는 칼이 보인다.

괜한 걱정을 한 건가?

난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하암!"

라웁 숲에서 악몽 같았던 첫날이 지나갔다.

걱정했던 것이 무안할 만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개울가 소리.

새 지저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따스한 햇볕이 나를 반겼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질 정도.

이곳은 키메라만 없으면 평범한 숲과 같았다.

'간만에 여유네.'

푹신한 풀에서 뒹굴거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는 엘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찰조가 복귀했습니다."

"상황은?"

"제법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숨은 이들이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이 힘든데. 오십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오십? 꽤 살아남았네."

"전처럼 움직일까요?"

칼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그동안은 방관을 유지한 채 새로 유입된 이들에게 정보만 얻어내며 조용히 지내왔다. 갇힌 이들과 다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렇게 하자."

"일단은… 입니까?"

"알다시피 상황이 변했거든."

"저자 때문입니까?"

칼은 미소로 답했다.

무언의 긍정.

언제든 포지션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엘튼은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들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알이란 인간이 보였다.

'저자에게서 뭘 보신 거지?'

괜찮은 실력이지만, 칼 님의 행동에 변화를 줄 만큼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녀석의 소지품은?"

"아무래도 확인이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

엘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칼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어젯밤에 녀석이 자는 동안, 가방을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는데, 전혀 건들지 못한 것이다.

"접근조차 못 했다고? 네가?"

"기척 감지가 무척 뛰어납니다. 일정 거리 안쪽으로 접근하면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더 접근하면 깰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럼, 일행에게 물어본 것은?"

"다들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일행 대부분은 과거 크룩스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저 알이란 녀석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일행 중 아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최근 1년 사이에 들어온 신입이란 뜻이잖아. 저 실력이 신입이라고?"

"정 의심스러우면 확인해볼까요?"

엘튼의 성격상 그 확인 과정이 부드러울 리 없다. 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건들지 마. 일단 지켜만 보자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말했잖아. 목숨을 빚졌다고. 좋게 좋게 가자고."

"…사실이었습니까?"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잖아. 기다려봐."

엘튼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눈앞의 사내를 따를 자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손을 흔들었다. 엘튼은 뒤를 돌아봤다. 알이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코를 골며 잘도 자던데."

"누가 말입니까? 제가요?"

"몰랐나? 조심해야 할 거야. 코골이 하는 암살자치고 오래 사는 걸 못 봤으니까."

"혹시 나이가 몇입니까?"

"이제 마흔 중반 정도 됐지? 왜 묻나?"

"오래 사셨네요."

"…?"

칼이 의문을 표하며 엘튼을 바라보자, 엘튼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 아저씨, 진짜 모르는 걸까? 아무도 코골이를 얘기 안 해줬다고?

잡생각을 털어내며 배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에게 먼저 접근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다.

"먹을 거 없습니까?"

"그럴 줄 알고 준비해놨지."

"정말입니까?"

"따라와."

칼의 안내를 받은 곳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 중이었다.

한쪽에 큰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칼은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불 속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 뒷다리가 보이자 절로 군침이 흘러나왔다.

엘튼은 다른 일행이 있는 바로 옆자리로 옮겨갔고, 나와 칼, 단둘이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칼이 구워진 부위를 단검으로 잘라 건넸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난 아기새처럼 칼이 주는 고기를 받아먹었다. 잠시 후, 잘 구워진 고기를 후후 불며 칼에게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이곳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이곳? 이 빌어먹을 곳은 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신 칼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시죠."

"질문을 주고받자는 건가?"

"네."

"제법 땡기는 제안이네. 좋아."

칼은 쿡 찍어 올린 고기를 내려놨다.

두 달 하고 보름의 기억.

떠올릴수록 밥맛 떨어지는 기억이라, 오늘 식사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칼은 덤덤히 실험체 감옥의 경험을 풀어냈다.

난 조용히 식사하며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재밌었다.

소설 주요 등장인물의 외전을 듣는 느낌이랄까.

칼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기분이었다.

그 효과로 인해 소설 스토리와 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다.

'크룩스 시절 때 입지가 꽤나 높았나 보네.'

추적을 피해 라웁 숲까지 오는 동안 그를 따랐던 암살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정도면 크룩스 내 파벌이 있는 간부급은 되어야 한다. 하긴 붐(Boom)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단장급 정도로는 안 된다.

예전에 내게 벌레를 먹인 사내만 봐도 단장보다 훨씬 강했다.

칼도 그 이상의 무력을 지녔을 것이다. 한쪽 팔을 잃기 전까진.

'복수심을 품을 만하네.'

함께한 동료들이 다수 죽고, 한쪽 팔도 잃었다.

마스터를 죽이고 싶었겠지.

칼은 그 복수의 대안으로 학살자를 선택했던 것 같다.

칼은 마스터의 죽음을 원했고, 학살자는 에토르 점령 후 다음 욕망을 채워 줄 뛰어난 말을 원했으니까.

크룩스의 본진이 에토르에 자리했기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맹약이란 긴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예로 이뤄진 소수 암살자 집단을 대동하고 학살자 앞에 나타났다고 했지.'

난 주변에서 식사하는 암살자들을 둘러봤다.

실험체 감옥에서 살아남은 저들은 지옥에서 벼려진 실력자들이었다. 엘튼을 보니 저들이 칼의 정예 전력인 것 같았다.

엘튼은 칼의 호위 암살자로 끝까지 함께했던 등장인물이었으니까.

긴 상념도 잠시,

칼이 괴물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입을 열고 있을 때, 그가 내뱉은 한 단어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베텔의 독?"

"표정을 보니 베텔의 독을 아는 눈치인데, 알고 있나?"

"이거 아닙니까?"

난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이곳으로 처음 흘러왔을 때, 도적들에게 강탈한 보랏빛을 띤 병이었다.

병을 살핀 칼은 두 눈을 반짝였다.

"베텔의 독이 맞아. 어디서 구했지?"

"괴물 습격 때 주변에 제법 굴러다니더군요. 일부 도적들의 품에도 있길래 혹시나 하고 족족 챙겨놨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벌거벗은 도적들을 말해야 하는데, 숨기는 게 좋았다. 그들 때문에 칼 일행이 좋은 꼴을 못 봤으니까.

"얼마나 더 있지?"

가방에서 십여 개의 병들을 쏟아내자, 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응을 보니, 꼭 필요했던 물건처럼 보였다.

"그 난리에 용케 구했어."

"필요한 겁니까?"

"생존 물품이니 많을수록 좋지."

"생존 물품? 이게 말입니까?"

"이 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심장에 부담을 주는 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독을 알고 있다니 설명하기가 쉽겠어. 베텔의 독을 일정량 복용한 뒤 숨어 있으면 괴물들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심장 활동이 비약적으로 줄어들면 죽은 것으로 판단하는 모양이야. 괴물들의 시선을 받지 않더군."

"도적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까?"

"알아도 마나 유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심장이 멈추면 죽을 테니까."

"아…."

설마 그런 효과가 있을 줄 몰랐다. 그저 심장에 타격을 주는 단순한 독인 줄 알았는데.

소설 속에서도 얻지 못했던 정보.

하지만 이 독의 진짜 정보는 지금부터였다.

"이 독 때문에 내 인생이 단단히 꼬였지."

"독 때문에 말입니까?"

"붐(Boom)의 해제법과 관련 있는 독이거든."

"...!"

붐의 해제법.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였다.

난 다급히 물었다.

"호, 혹시 치료제입니까?"

"치료제는 아니야. 하지만 치료에 꼭 필요한 독이지."

난 심장을 꽉 움켜잡았다. 베텔의 독은 심장의 박동을 급격히 줄여준다. 그 효과가 벌레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 모양이었다.

칼이 이 정보를 내게 알려준 의도가 뭘까.

그냥 알려줬을 리 없다.

"...."

난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칼은 조용히 고기를 썰어 내 앞에 놔줬고, 난 말없이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잠시 후, 난 칼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이야기를 제게 한 이유가 뭡니까?"

"그 전에 내 질문에 답해야지. 나만 이야기하면 억울하잖아."

"물어보시죠."

"크룩스에서 누구 밑에 있었지?"

"...."

"신입이란 결론에 이르렀는데, 1년 신입치고 터무니없이 강해. 이유가 뭘까 고민해봤지."

"답이 나왔습니까?"

칼은 대답 대신 단검을 들고 고기를 잘랐다.

불꽃에 붉게 물든 험상궂은 얼굴, 그 얼굴에 묻은 재 가루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코를 훔치며 고깃덩어리를 자르는데, 얼핏 보면 우둔한 곰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칼이란 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아니, 칼 자신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칼의 심리 상태나 행동 이유를 소설을 통해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칼은 곰 가죽을 둘러쓴 여우다.

그것도 아주 노련한.

이럴 땐 돌려 말하는 것보다 정면 돌파가 답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붐(Boom)."

크룩스의 악질적인 벌레 폭탄. 붐(Boom).

붐을 언급하며 칼의 빈 소맷자락을 가리키자, 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러곤 코웃음 치곤 나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연기가 타고났는데? 역시나 나에 대해 알고 있었어."

"크룩스 1급 암살 대상, 칼 바스타인."

"하!"

"수년 전 붐(Boom)의 해제 방법을 알아낸 죄로 척살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지? 붐과 관련된 정보는 기밀일 텐데."

"크룩스 내에서 금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금줄? 누구 밑에 있었지?"

"마스터(Master)."

"…뭐?"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난 흘러가는 듯 답했지만,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엘튼을 시작으로 그 주변에서 식사하던 암살자들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스터의 직계라는 게 이들에겐 주적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귀도 밝네. 먹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잖아.

오직 칼만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잠시 후, 칼이 가볍게 손을 들자, 암살자들은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지켜봤다. 칼에 대한 믿음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 같았다.

"간부도 아니고, 마스터라… 대답 잘해야 할 거다."

"제자가 됐고, 버려졌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유는?"

"반푼이 신비 각성자."

"?"

"전 실패작입니다."

31화 특성 개화자

최악의 마나 감응력.

마스터의 시선에선 실패작이 맞았다. 신비를 각성했어도 등급 잠재력이 꽝이면 무특성 3성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역시, 그 황금빛이...."

슬라임을 죽이고 자신을 구한 신비한 빛무리.

칼은 그 황금빛이 내가 가진 신비 능력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칼의 착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들킨 능력을 신비 능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맞았다. 인챈트 능력을 굳이 오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신체에 각인된 고대 문양이기에 가능한 속임수였다.

"신비 능력을 각성하고, 마스터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게 1년 전이다?"

칼처럼 나도 내 스토리를 풀어냈다. 물론, 진짜 나의 스토리가 아닌 이 몸의 스토리였다.

마스터의 선택을 받고 수련했던 기억.

버려진 이유까지.

마나 과실 세 개를 복용하고도 아직 1성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에선 칼도 혀를 내둘렀다.

최악의 가성비.

"그 돈이면 3성 암살자도 키울 돈인데, 나라도 버리겠어."

"당사자 앞에서 할 말입니까?"

"그럼 여전히 1성이란 소리인데."

칼은 내 몸을 쭉 훑어봤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1성인데, 1성 같지 않단 말이지."

칼의 눈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나는 1성에 불과하지만, 난 특별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 방벽과 인챈트, 그리고 고대 문양까지.

모두 내 목숨을 한 번 이상 살려준 능력들이고, 고작 1성이 지니기엔 터무니없이 큰 힘이었다.

그렇다고 내 등급보다 높은 이들을 이길 수 있느냐?

도네콜린트는 상황이 특수했던 것이고, 대부분은 힘들 것이라 봤다.

주어진 능력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등급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인챈트도, 고대 문양도, 전부 반쪽짜리처럼 느껴졌다.

칼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멀찍이 서서 지시를 기다리는 암살자들이 보인다.

살기가 느껴졌는데, 칼이 신호를 보내면 당장 죽이러 올 것 같아서 살 떨리긴 했다.

하지만 확신했다.

칼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일단 내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그 완벽한 증거가 바로,

"붐(Boom)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버려진 패의 증거니까요."

붐(Boom)의 희생자라는 것.

칼을 설득하는 데 이만큼 확실한 카드가 또 있을까?

처음으로 벌레 새끼한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젠 쐐기를 박아야 할 차례.

다음 포지션이 중요했다.

"전 마스터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갈망합니다. 크룩스의 몰락까지도."

"...."

"이곳을 벗어난다면 꼭 '복수'할 겁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마스터의 죽음과 크룩스의 몰락은 현재 칼이 마음속으로 가장 갈망하는 목표였다.

복수.

목표의 일치성을 언급하는 건 신뢰를 주기 좋다.

같은 적을 둔 동료라 어필하는 것이다.

내 눈을 말없이 응시하는 칼이 보인다.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난 단단한 눈빛으로 칼을 마주 봤다.

"애써 만든 친구를 잃을 순 없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암살자들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행히 말이 먹혔다.

"부탁이 있다고 했지? 붐(Boom)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한동안 우물우물거리던 그가 음식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대신 당장 들어야 할 게 있다."

"뭡니까?"

"진짜 이름이 뭐지?"

칼의 질문에 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에 칼이 손을 흔들자, 암살자들은 거리를 벌렸다.

'그럴 의도로 둘러본 건 아니었는데.'

내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내 이름이 듣고 싶은 건가?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칼 바스타인이다."

이 통성명을 통해 칼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같은 적을 둔 동료로 인정받은 건가.

칼은 다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서 놔줬다.

이젠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그래도 애써 맛있는 척 집어 먹었다.

'두 번째인가?'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의 뒤를 이어 내 진짜 이름을 들은 두 번째 인물.

어째 주요 인물들과 하나둘 엮이는 느낌이다.

난 남은 고기를 입에 모조리 욱여넣었다.

식사 시간이 끝났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생체 마석을 시간 내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칼과 대화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암살자들의 살기가 워낙 살벌했어야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밤하늘에 뜬 별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 참...."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아주 좆같았다.

* * *

다음 날, 물고기를 잡아다가 식사를 준비했다. 자급자족이라더니, TV에서만 보던 정글 서바이벌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민첩한 몸놀림 덕에 사냥은 성공했는데,

"불은 어떻게 피우지?"

어제 일로 부탁하기가 어색해서 마른 풀때기를 붙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칼이 다가왔다.

"뭐 하나?"

"불 피우는데요?"

"난 또 춤추는 줄 알았지."

"...."

칼은 피식 웃고는 엘튼을 불렀다.

갑자기 그 녀석은 왜?

잠시 후, 엘튼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단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살벌하게 왜 이래.

엘튼은 내가 붙들고 있던 풀때기를 단검으로 가볍게 찔렀다.

순간 단검에 변화가 일어났다.

화르륵―

"...."

허무하게 타오르는 불씨.

여태껏 한 행동들이 다 뻘짓으로 취급되는 결과물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칼이 엘튼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을 해왔다.

"우리 불 담당이지. 신기하지?"

"…3성, '특성 개화자'입니까?"

"함께하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엘튼의 속성 계열만 밝히는 거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마나 유저로 각성하면 1성으로 취급되며, 2성, 3성, 숫자가 높아질수록 등급 차이를 보이게 된다.

등급 분포는 당연히 피라미드 구조.

위쪽으로 향할수록 폭은 급격히 좁아졌다.

소설에선 이 피라미드 구조를 꽃의 성장 과정으로 묘사했는데, 1성은 새싹, 2성은 꽃봉오리, 3성은 '개화'로 표현됐다.

개화(開花)!

마나 유저의 일생(一生)이 특성과 무특성으로 갈리는 단계.

이 중 선택받은 소수만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 물론, 난 엘튼의 개화 특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불꽃검 엘튼.'

암살 대상은 재 가루만 남긴다는 엘튼의 위명이었다.

그리고,

"칼 님도 3성입니까?"

"내가 그렇게 세 보이나?"

"약한 자는 머리가 될 수 없다. 암살자 세상의 격언이죠."

"부인할 수 없겠는데? 뭐, 3성 비슷하다고 해두지."

3성과 비슷하다라.

답이 애매했다.

과거에는 그 이상이었는데 한쪽 팔을 잃으면서 3성으로 떨어졌다고 해석하면 되나?

"칼 님도 특성 개화자입니까?"

"난 운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불씨를 태워 큰불을 만든 후 물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난 그의 개화 특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위기 감별사.'

그는 위험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 계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크룩스의 고된 추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능력.

특성 개화자인 두 사람을 보니, 문득 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3성이 됐을 때, 로또가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힘들겠지?'

워낙 불운 덩어리로 취급되는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마나 감응력이 최악인 나에겐 3성도 아직 요원했다.

가성비가 워낙 쓰레기라서 말이지.

'아, 그것도 확인해봐야 하는데.'

가방에 넣어둔 생체 마석을 떠올렸다.

내 쓰레기 같은 몸뚱이에 희망의 불씨를 피워줄 물건인지 확인해봐야 했다.

혼자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데.

그때 칼이 용무가 있었는지 말을 꺼냈다.

"시간이 필요해."

"...네?"

"시술하려면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바로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팔찌가 없어졌어."

"팔찌? 그게 뭡니까?"

"벌레를 제거하려면 그 팔찌가 꼭 필요해. 내 것을 없애려고 예전에 제작한 물건인데, 슬라임에게 먹히면서 어딘가 흘린 것 같아. 찾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팔찌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팔찌를 제작할 마법사를 찾아가야지."

팔찌가 없으면 이곳에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팔찌가 숲에 있길 기도해야 하나.

"팔찌만 찾으면 됩니까?"

"베텔의 독을 시술에 맞게 손봐야겠지. 기다려봐. 팔찌를 찾으면 금방이니까."

"저, 근데…."

"뭐, 할 말 있나?"

"아직 대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가?"

"시술의 대가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 운을 뗀 거 아닙니까?"

"아, 그럴 의도로 말을 꺼낸 건 맞지. 네 폭탄 발언 때문에 깜빡했지만."

"원하는 게 뭡니까?"

부담스러운 부탁이면 곤란한데.

"필요 없어."

"네?"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까."

노릇하게 익은 물고기를 보고 있던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칼을 올려다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네가 말한 복수. 왠지 너랑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이룰 것 같거든."

"감입니까?"

"내가 감이 뛰어나긴 하지."

칼은 씨익 웃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서워, 이 아저씨야.

그리고 이건 내 복수가 아니라 당신 복수잖아.

결국, 복수를 위해 대가 없이 치료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크룩스와 적대 사이니 상관없으려나.

어째 학살자가 아니라 나를 통해 복수하려는 모습인데, 부담스럽다.

난 다 구워진 물고기를 빤히 바라봤다.

식욕이 뚝 떨어졌다.

* * *

엘튼은 일행과 함께 팔찌를 찾으러 자리를 비웠고, 칼은 일부 암살자들 곁에 머물러 있었다.

함께 움직일 땐 몰랐는데, 부상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두 셋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확인은 힘들었고, 칼이 그 셋을 치료하며 돌보고 있었다.

하긴 칼도 스스로 미끼를 자청하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

난 그에게 다가갔다.

이대로 빈둥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괴물들이 언제 또 나타날까요?"

"그건 인간들이 채워지는 시간에 따라 달라. 급격히 공간이 차버리면 저번처럼 갑작스레 나타나기도 하지."

"그럼 지금은 안전하다는 소리네요."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그럼 이 주변에 동굴이나 시선을 피할 장소가 있습니까?"

"그런 곳은 왜?"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다니 섭섭한데."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칼은 어깨를 으쓱이곤 한쪽 숲을 가리켰다.

"동굴은 없어. 하지만 갈대숲이 빽빽한 장소는 있지.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이야."

"감사합니다."

"멀리는 나가지 마. 뒈지면 곤란하니까."

"괴물 말고 위험할 게 또 있습니까?"

"인간."

칼은 내게 폭죽 같은 걸 건넸다. 긴급 신호탄이었다.

"괴물보다 인간들이 더 무서워. 강하면 강력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위협적이지. 감정이란 약점을 이용하거든. 특히 너같이 기준 없는 녀석은 먹잇감으로 딱이지."

"...기준? 무슨 기준 말입니까?"

"피를 보는 기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기준을 잘 정해야 할 거야. 너무 무르면 죽기 십상이고, 너무 타이트하면 적이 많아지니까."

기준이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는데, 칼의 조언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칼의 기준은 뭡니까?"

"복수. 난 복수를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도, 죽이는 대상도 가리지 않아."

"...."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살아남는 것.'

내 기준은 초반에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32화 광렙은 무슨

발을 떼기 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붉은 보석을 아십니까?"

"붉은 보석? 그게 뭐지?"

"괴물들의 몸속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돌 같은 겁니다."

"괴물 몸속에 그런 게 있다고?"

칼의 반응에 난 미간을 좁혔다. 칼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키메라와 수차례 맞닥뜨린 인물이었다.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잡기도 했을 텐데.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물어본 건데, 칼은 생체 마석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키메… 아니 괴물들의 몸속을 확인해본 적이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 기회가 없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눈치 못 챘나?"

칼은 짧게 혀를 차곤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러곤 내게 물었다.

"어제 나와 함께 오는 동안 괴물들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아!"

칼의 말에 잊고 있었던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죽은 키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키메라들의 습성.

생체 마석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한 도미닉의 명령 체계인데, 학살자의 모략으로 마석의 존재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 깜빡하고 있었다.

"근데 붉은 보석에 대해 왜 묻는 거지?"

"아는 게 있나 해서요."

"지금 가지고 있어?"

"네."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 칼에게 던지자, 칼은 마석을 살펴보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상황에서 괴물의 시체를 가르고 있었다고? 제정신이야?"

"호기심이죠. 베텔의 독도 챙기지 않았습니까?"

"혹시 도벽이 있나? 미리 말해. 나중에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

칼은 마석을 돌려주며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 마석의 효능을 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기 힘들 텐데. 뭐, 칼에겐 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니 상관없으려나.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칼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내 키보다 큰 갈대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대들을 헤치고 칼이 알려준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근처로 접근해 온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소리라서 마음에 들었다. 이동하길 잠시, 갈대숲 중심에 제법 큰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 말한 장소였다.

"괜찮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빽빽한 갈대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마석들을 털어냈다.

붉은 보석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중에 보랏빛을 띤 보석도 있었다. 거대 슬라임에게서 얻은 것인데, 기존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보다 짙었다.

'상급 키메라에게 쓰는 건가?'

붉은 보석 열 개, 보랏빛 보석 한 개.

일단 구성은 차고 넘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개의 붉은 보석을 잡고 단검 자루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작은 알갱이가 될 때까지 난 쉴 새 없이 마석을 빻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먹 크기의 마석이 모래 알갱이처럼 변했다.

난 그중 일부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반 개 분량 정도 되려나?

후―

이래도 되나?

소설 내용을 상기하며 한 짓이긴 한데, 단순히 읽었던 내용과 지금껏 경험했던 현실은 천지 차이였다.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간 게 있어야지. 이러다 진짜 뒈지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대안은 없어.'

짧게 숨을 내쉰 뒤 난 가루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자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속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후, 불같은 기운이 가슴에서 용트림 쳤다. 동시에 활성화되는 마나 감각.

뜨거운 기운과 마나가 한데 섞이며 온몸을 누볐다.

난 제자리에 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짙어진 기운의 흐름을 느꼈다.

생체 마석은 마나 과실보다 더 큰 효능을 지닌 마나 촉매제다. 제약이 있다면 3성 이상에겐 효과가 없다는 것.

마석의 기운이 3성 이상의 마나에는 무력화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 반대로 1성이나 2성에는 엄청난 효과를 보였다.

'치명적인 부작용만 뺀다면 말이지.'

마석의 기운이 3성급보단 약하지만, 그 이하보단 강하다.

즉, 마석의 기운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팔다리, 몸통을 지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끈적한 기운.

잠시 후, 그 기운이 척추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 기세가 무척 매섭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온다!

쾅―!

"컥!"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코를 닦으니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짙은 고양감과 흥분, 쾌락이 올라왔다. 살의가 일어났다. 살점을 찢고, 먹고, 부수고 싶다.

다급히 손톱을 확인했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붉다.

부작용 현상.

반 개가 이 정도라고?

시발, 한 번에 너무 많이 복용했나?

손톱은 곧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의 갈증 현상.

낭패 어린 표정으로 갈증을 억누른 채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다행이라면 손톱이 붉어져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신 방벽이 보호해 주는 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오른쪽 손등에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한 느낌이 아닌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

'고대 문양!'

부르지도 않았는데, 은은하게 빛을 흘리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설마, 마석의 기운에 반응을 보인 건가.

번쩍―

빛을 소환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이 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동시에 찾아온 그때의 첫 느낌!

처음 문양을 얻었을 때의 포근함이 느껴지더니, 폭주하던 기운이 안정되어 갔다.

흥분이 가라앉고, 갈증이 사라졌다.

피 묻은 붉은 손톱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문양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금 빛무리. 그 빛을 보며 난 무심코 한 단어를 내뱉었다.

"...정화(淨化)?"

불순과 악에 반응하는 정화의 기운.

내가 느낀 고대 문양의 능력이었다.

"하, 시발...."

긴장이 풀리자,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축축했다. 광인이 될 수 있겠단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생체 마석의 부작용.

이 유혹적인 물건은 초반에 가파른 등급 성장을 약속하지만, 잡아먹히면 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광인 신세로 전락한다.

훗날 수백 수천의 광인을 만들어낸 악마의 보석.

다만, 한 개는 극복 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 고작 반 개에 부작용을 겪다니.

'1성이라서 그런 건가.'

2성과 달리, 1성은 복용 그 자체가 위험 수위인 것 같았다.

'이젠 두려울 게 없어졌지만.'

정신 방벽으로 이성을 붙잡고, 문양의 힘으로 부작용을 없애면 몇 개라도 마석을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3성까진 고속 프리패스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광렙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칼 일행이 팔찌를 찾는 동안, 나는 마석 흡수에 집중했다.

안전장치가 있는데, 굳이 흡수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흡수하고 나면 짙은 탈력감이 찾아왔는데, 그땐 하루를 마무리하고 아지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흡수량은 하루에 한 개가 적당했다. 벌써 세 개를 흡수했는데 마나량이 늘어난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진짜 가성비 개 쓰레기네.'

소설에선 한 개의 마석만 복용해도 부작용만 버티면 등급이 오르는 악마의 보석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난 세 개를 처먹어도 여전히 1성에 머물고 있었다.

쌍욕이 나왔지만, 며칠 내로는 2성에 오를 것 같아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석 흡입을 시작한 지 다섯째 날이 지났다.

오늘도 하루 분량을 흡수하곤 아지트로 돌아와 칼을 찾았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 그리고 질문.

"어제 했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또?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시술이 늦어지니까 그렇죠."

"뒈질 뻔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알아? 엘튼이랑 놀라고."

"저 타 죽는 거 보시려고요?"

난 남은 시간에 칼을 집요히 괴롭혔다.

칼은 십수 년간 죽음과 싸워 지냈던 인물이다. 그 몸에 새겨진 상처들만 봐도 그의 굴곡진 인생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위기 감별사'란 특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닐 거다.

그만큼 칼은 위기관리 능력과 상황 처세술이 뛰어났다.

난 그를 통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칼은 무척 귀찮은 듯 툴툴댔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태도 때문이다.

이래 봬도 열띤 교육열로는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대한민국 인재였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남다르니, 가르치는 맛이 날 거다.

확실히 칼은 좋은 스승이었다.

* * *

"광렙은 무슨, 렙업 한번 더럽게 더디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난 드디어 2성에 올랐다.

마석을 무려 여섯 개나 복용하고 이룬 쾌거였다.

마스터가 날 버린 이유를 피부로 팍팍 느낄 수 있었다.

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은 진짜 쓰레기였다.

우웅―!

난 눈부시게 빛나는 단검을 응시했다. 인챈트에 담긴 날카로움이 훨씬 뚜렷해졌다.

익힌 속성이 있다면 여기에 덧씌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속성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익힐 수 있는 속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양의 빛도 더욱 진해진 것 같고.'

빛의 범위도 기존보다 배는 늘었다.

1성에서 2성이 된 것뿐인데, 능력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졌다.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한데, 왜 한숨이 먼저 나올까.

"3성이 두렵다. 시발."

남은 마석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보랏빛 마석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어찌 될지 잘 모르겠다.

마석을 또 모아야 하나.

솔직히 얼마나 더 처먹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난 생각을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오늘은 일찍 아지트로 돌아가 칼을 더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도 은근히 괴롭힘당하는 걸 즐기는 느낌인데 말이지.

부스럭― 부스럭―

그때 멀찍이서 갈대 마찰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인상을 구기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아아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

절박하게 외치며, 반쯤 찢어진 옷을 붙잡고 도망가는 여인이 보였다.

미모가 제법 반반해서 한눈에 띌 정도였다.

난 갈대숲 사이에 숨은 채 그 모습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년은 저기서 또 저 지랄이네."

"사, 살려주세요!"

도움을 구하는 애처로운 목소리.

난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봤다.

"무, 무슨 일입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외침을 듣고 사내들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또 걸려들었다.

사내 셋으로 구성된 파티였는데, 용병으로 보였다. 그들은 여인을 발견하곤 한달음에 여인 곁으로 몰려들었다.

찢긴 여인의 옷자락에 눈을 흘기며 만지작거리는데, 좋은 의도로 다가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인에게 동정을 느끼느냐?

"또 낚였네."

내 말이 끝난 순간, 여인이 흐느끼듯 주저앉았다. 순간, 여인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용병들이 당황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화살 세례였다.

33화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끄아악!"

"무, 뭐… 큭!"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용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쓰러졌다.

둘은 죽고, 한 명은 피를 흘린 채 바닥을 기었다.

잠시 후, 갈대숲 사이에서 활을 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거리던 인기척들이 저들이었다.

새로 흘러들어 온 도적 떼였는데, 며칠 전부터 갈대숲 주변에 덫을 놓고 금품을 털거나 사람을 잡아갔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성큼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우람한 덩치를 지닌 녀석이었는데, 땅속에서 나온 여인을 보자 헤죽헤죽 웃으며 여인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서너 번 본 광경인데 저 물고 빠는 행동은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나저나, 실험체 감옥에서 도적질이라.

내 눈에는 철창에 갇힌 실험용 쥐가 재롱을 떠는 것으로 보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이곳 처지를 아직 몰라서 벌거숭이처럼 놀고 있는데, 조만간 사라질 녀석들이었다.

전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화 소리가 내 발걸음을 잠시 세웠다.

"오! 이게 뭐야. 묵직한 금덩이잖아!"

"끄윽! 다,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 금덩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마르샤 가문이라고 적혀 있는뎁쇼?"

"마르샤? 대상인이잖아?"

"혹시 대상인의 직인 같은 거 아닐까요? 딱 봐도 금패 같은데."

"직인? 그 귀한 게 왜 이 녀석 품에 있어. 가짜 아니야?"

"글쎄요. 금은 진짜 아닙니까?"

"맞아."

금패를 살짝 물어본 두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적들이 단검을 들고 용병에게 다가갔다.

주, 죽는다!

용병은 묻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토설했다.

"저, 저희는 마르샤 대상인이 고용했던 용병들입니다! 그 물건은 죽은 대상인의 품에서 훔쳐 온 겁니다!"

"대상인이 죽어? 네깟 놈들이 어떻게?"

"저, 저희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블라이어가의 기사들."

블라이어가(家)의 기사들.

학살자 가문의 기사란 소리에 내 몸은 본능처럼 움직였다. 난 갈대숲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카멜 블레이저의 소식이라.

이건 못 참지.

바스락― 바스락―!

거칠게 흔들리는 갈대의 움직임.

"누, 누구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도적들이 다급히 몸을 틀고 시위를 당겼다.

난 양손에 단검을 움켜쥐었다. 마나를 머금은 단검이 미세하게 울어댔다.

"소, 쏴!!!"

갈대숲을 뚫고 나온 순간, 도적들이 시위를 놓았다. 매서운 기세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입을 꽉 다문 나는 단검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카카카캉―!

"...!"

부서지고 튀어 오르는 화살 파편들.

화살을 튕겨낸 나는 파편 사이로 매섭게 돌진했다.

"고, 괴물!"

"…한 놈뿐이다! 공격해!"

칼 일행 앞에선 고작 2성뿐인 실력이다.

하지만,

'도적들 앞에선 괴물이지.'

큰 도끼를 쳐들며 바락바락 외치는 두목이 보였다.

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아지트로 가기 전에 잠깐 볼일이 생겼다.

* * *

"끄아아악!"

"...으흑!"

스무 명의 도적 떼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도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의외인 건 도망치는 도적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싸웠다. 저번에 벌거벗겼던 도적 떼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뭐지, 이것들?

단순한 도적과 느낌이 달랐다.

겁을 줘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손에 피를 많이 묻혔다.

습격자인 내가 잠시 당황했을 정도.

결국, 난 두목을 죽여야 했다.

푹―!

"크, 크룩!"

두목의 목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뽑아내며 물러났다.

피로 질척이는 바닥.

주변은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했고, 도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살려놨는데, 두목의 경우는 마나를 쓰는 노련한 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난 두목의 품을 뒤졌다.

붉은 포션.

전리품으로 회복 물약을 챙긴 뒤 베인 상처에 천천히 부었다.

워낙 매섭게 달라붙어서 팔과 다리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다.

시체 앞에서 상처 치료라니, 나도 이 세상 사람이 다 됐다.

죽은 두목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저, 전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정말이에요!"

"...."

"사… 살려주세요!"

줄곧 도적 떼에게 잡혀 끌려다녔다는 기구한 이야기.

울고 불며 목숨을 구걸하는데, 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잠시 후, 난 주변을 둘러보곤 한 곳을 조용히 가리켰다.

"쭉 가면 큰 산채가 보일 거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더는 이곳으로 오지 마."

고개를 수차례 끄덕인 여인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런 여인을 보며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털고 용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목적은 이 용병이 가진 정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자, 용병은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을 박박 기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러면 살려준다."

"네, 네!"

용병을 통해 블라이어 기사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마르샤 대상인의 저택을 습격하고 불태운 뒤 사라진 기사들.

인상착의를 들어보니, 리옹이 이끄는 카멜의 친위대들 같았다.

'마르샤가 수집하던 아티팩트를 노린 거야.'

학살자가 잠들어 있는 고대 아티팩트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불탄 저택 위치를 들어보니, 내가 알려준 '그'의 교섭 장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손에 닿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담고 있겠지.'

학살자의 성격상 대부분 강탈로 이뤄질 것이고, 마르샤의 경우처럼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난 그 횡액에서 살아남은 용병을 바라봤다.

"용케 살아남았네."

"저, 전 숲으로 도망친 것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라웁 숲 쪽으로 도망치다니 운이 좋은 놈이었다.

'카멜이 라웁 숲 접근 금지령을 내렸을 테지.'

도미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다.

도미닉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슬슬 학살자도 이에 맞춰서 일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허억!"

용병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더니,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녀석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크웩!"

가슴을 움켜잡더니 검은 피를 쏟아냈다. 스스로 목을 움켜잡고 몸을 꼬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난 쓰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 쉽게 가긴 글렀나?

잠시 후, 몸을 뒤틀던 용병이 축 늘어졌다.

갑작스럽게 용병이 죽어버린 상황이지만, 난 침묵했다.

어째 싸한 느낌이 들더라니.

"깔깔깔깔!"

뒤쪽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박한 웃음이었는데, 조금 전 겁먹고 도망친 여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찢어진 옷 대신 검정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왜 돌아왔지?"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죽은 용병처럼 내게도 무슨 꼼수를 부린 모양인데, 맞나?"

"눈치가 빠르네. 곧 내게 살려달라고 빌게 될 거야."

"그건 뭐지? 나랑 인형 놀이 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인형이 두 개 들려 있었는데, 하나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여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잔혹하게 죽은 용병과 찢긴 인형을 가리켰다.

"어때? 다음은 네 차례인데."

"흑주술사였나?"

"흥! 알아도 이미 늦었어."

내가 단검을 들어 올리자, 여인은 남은 인형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순간, 내 몸을 옥죄는 감각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 이질적인 기운이 흑주술과 관련되어 있던 거였나?

주술을 걸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도적들의 무기에 저주를 걸어놨구나."

"알아도 이미 늦었어. 주술이 완성됐거든."

"저 도적들도 세뇌한 건가? 어쩐지 너무 겁대가리가 없더라."

"멍청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지?"

"...."

"기회를 줄게. 넌 저 쓰레기들보다 쓸만할 것 같거든."

"기회?"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에서 작은 벌레를 꺼냈다.

꿈틀거리는 벌레.

시발,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먹어.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내가 벌레 먹인 놈들에겐 악감정이 아주 많거든."

"죽고 싶나 봐?"

"아줌마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인형을 움켜잡은 여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 순간 내 몸속에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저주의 기운.

그 기운이 내 몸을 지배하기 위해 꿈틀대자, 난 고대 문양을 개방했다.

처음 도적들의 무기에 상처를 입었을 때, 이질적인 기운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끈적하고 더러운 마석의 기운을 흡수하다 보니, 문양의 사용 방법에 감이 오기 시작했거든.

난 문양의 힘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정화(淨化).

손등에서 황금빛이 쏟아진 순간, 날뛰던 기운이 짓눌리더니 삽시간에 사라졌다.

"끼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인형을 떨어트렸다. 피를 울컥 토해내며 비틀대는데, 주술이 깨진 반발력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는 두려운 듯 물러났다.

"바, 방금 그거 뭐지? 대체 뭘 한 거냐!?"

처음 떨면서 그녀가 살려달라 빌었을 때, 겁먹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년 뭔가 있구나.

"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어."

"벌레 주제에!"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도적들처럼 날 세뇌하려는 주술이 펼쳐졌다.

눈빛을 마주한 순간, 진득한 두통이 느껴졌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당해봤던 건데.

카멜의 감옥에서 흑주술사들에게 둘러싸였던 악몽이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서서 대치한 것도 잠시, 여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며 일그러졌다.

반대로 내 표정은 여유롭게 풀렸다.

정신 압박이 렌구아보다 훨씬 약했다. 계속 내 정신을 압박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해서 그녀를 제지하려고 빠르게 움직였다.

내 행동에 조급함을 느낀 걸까.

그녀가 결국 모든 힘을 개방했다.

"주, 죽어!!!!!!"

퍼억―!

그녀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몸체만 남은 시신은 곧 축 늘어졌다.

난 죽은 여인을 잠시 응시했다.

정신 방벽.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롱하려는 흑주술사들에겐 천적 같은 능력이었다.

빌어먹을, 물어볼 게 있었는데.

"하...."

난 짙게 한숨을 내쉬곤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두려움에 흠칫 떠는 도적들이 보인다.

그녀가 죽자, 세뇌가 풀리면서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개 같은 년. 그냥 가지 왜 돌아와서.'

머리 없는 그녀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나는 단검을 움켜잡고 도적들에게 걸어갔다.

칼 바스타인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특히, 피의 기준.

이곳에서 내 힘을 본 자들을 살려둘 순 없다.

내 생존과 직결된 일이었으니까.

* * *

"늦었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많이도 죽였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피 냄새가 짙어서."

"피 냄새?"

칼의 말에 몸 냄새를 킁킁 맡아봤다. 물가에서 씻고 온 상태인데도, 칼은 정확하게 피 냄새를 맡았다.

개코인 건가?

아니면 위기 감별사의 능력?

난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칼에게 간략히 전했다.

"실력 있는 흑주술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딴 곳에 흘러들어 와서 인간 사냥이나 할 정도면. 이름도 몰라?"

"아, 그게...."

뭘 물어볼 틈을 줬어야지. 그렇다고 정신 방벽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으니 어색하게 머리만 긁적였다.

칼은 내가 건넨 황금패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르샤가의 직인이 맞아. 욕심 많은 돼지였는데, 이렇게 골로 가버렸네."

"마르샤 대상인을 아십니까?"

"암살 의뢰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골동품 수집에 광적인 늙은이였지."

불행하게도 그 골동품 중에 카멜이 눈독 들인 물건이 있었다.

카멜 블레이저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

'용아(龍牙)의 망토.'

카리스마형 군주인 녀석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아티팩트였다.

우선순위로 강탈할 아티팩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범인이 블라이어의 성주라고? 네가 말했던 암살 대상?"

"네."

"주변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마르샤가 보호비로 뿌린 돈이 제법 많거든."

귀족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렸을 때를 노렸을 것이다.

지금쯤 도미닉이 풀어놓은 키메라 군단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

직인을 내게 건네며 칼은 입맛을 다셨다.

"바깥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인데?"

"키메라들의 습격을 기회로 보는 이들이 나타난 거죠."

정확히 이들이 아니고 학살자의 독식이라고 봐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챙기는 인물이니까.

"엮일 일 없는 블라이어 성주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자고."

"뭐, 그러죠."

"저리 가. 피 냄새 때문에 어지러우니까."

"수십 년 경력의 암살자가 할 말은 아니네요."

난 자리로 돌아왔다.

들판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살자와 엮일 일이 없다고?

'아주 제대로 엮여있지.'

칼은 자신의 미래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만간 학살자가 움직일 거야.'

이건 챕터1 주인공인 학살자의 세력 성장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이었으니까.

34화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토바른의 영지들은 라웁 숲을 중심으로 퍼져 있고, 라웁 숲 사이에서 키메라 군단이 난리를 피울수록 카멜에게 유리했다.

회귀자인 그는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시기가 나 때문에 다소 늦춰지긴 했는데.'

내가 더미로 만든 존재, '그'.

갈대숲에서 만난 용병을 통해 카멜이 현재 '그'를 만나기 위해 교섭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와 교섭을 위해 카멜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학살자는 '그'란 존재를 매우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난 카멜에게 건넸던 지도를 떠올렸다.

카멜이 그곳에 도착해도 '그'는 없다. 대신 내가 보낸 '편지'를 받겠지.

'편지는 잘 전달했겠지?'

검은 장미에 1만 골드짜리 의뢰를 신청하면서, 남은 잔돈으로 편지 의뢰를 부탁했는데, 펜리는 푼돈 의뢰 따윈 듣고 싶지 않다며 쫓아냈다.

다행히 푸른 장미의 마담인 넬라가 그 제안을 수락했는데, 그 조건으로 잔돈과 5층에서 환불한 금액까지 몽땅 빼앗겼다.

'엘프가 돈독 오르니까. 더 무서워.'

천 골드 이상을 건넨 배달 의뢰다 보니 학살자의 눈을 피해 잘 전달했을 것이다.

편지는 카멜이 위화감을 느낄 만한 내용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 읽어보는 순간 꽤나 놀랄 거다.

'다만, 편지를 읽고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카멜 블레이저는 등장하는 악당 중에 지능이 가장 뛰어난 놈이었다.

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놈이라, 섣불리 예측했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었다.

그저 나와 관련된 상황만 빼고 스토리의 큰 틀만 생각해야 했다. 카멜의 목적은 토바른의 전역을 손에 넣는 것이었으니까.

'놈은 나만큼이나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야.'

분명 키메라 군단을 이용해 에토르 가문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아쉽게도 지금 처지에선 이를 방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건너 숲에서 엘튼이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 모습에 벌떡 일어났다.

엘튼이 칼에게 건네는 장신구가 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팔찌.

칼이 말한 팔찌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게 그 팔찌입니까?"

"그래,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 들 찰나였는데 다행이야."

확실히 다행이었다.

팔찌를 찾지 못했으면 칼이 아는 마법사에게 제작을 다시 맡겨야 했는데, 그 시기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예상한 것과 달리, 별다른 특징이 없는 팔찌였다. 도시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투박한 디자인. 다른 점이라면 팔찌 안쪽 면에 마법 룬어가 깨알만 한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마법 아티팩트다."

"이 팔찌가 벌레를 죽일 수 있다고요?"

"그래. 벌레 제거용으로 제작된 거야. 다만, 시간이 걸려. 벌레를 단칼에 죽이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이는 거니까."

"어떻게요?"

"일단 선택해. 오른손이야? 왼손이야?"

오른손은 고대 문양이 각인되어 있어서 난 왼손을 선택했다.

"벌레를 네 왼쪽 손목으로 옮길 거야."

"그게 가능합니까?"

"충분히."

"굳이 옮기는 이유가 뭡니까?"

"팔찌를 채워야 하니까."

팔찌에 벌레를 죽이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기간을 물어보니 한 달 정도는 차고 있어야 한다나.

"근데, 정말 안전한 겁니까?"

벌레도 죽기 전에는 꿈틀댄다고 하지 않던가.

칼의 휑한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묻자, 칼은 피식 웃으며 헐렁한 소매를 흔들었다.

"이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야. 팔찌랑 상관없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크룩스의 추적대를 따돌리기 위해 스스로 팔찌를 풀고 붐(Boom)을 터트린 일을.

엘튼과 그 휘하 암살자들이 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저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희생이었으니까.

'학살자와 칼이 다른 점이지.'

학살자에게 수하란 욕망을 채워줄 도구에 불과하지만, 칼은 자신의 사람이라 확신이 들면 책임을 진다.

내가 칼과 친해지려는 이유였다.

칼의 생존 버스에 좀 타보고 싶었다.

"왜, 불안해?"

"뭐, 그 정도는 아닌데."

"정 불안하면 옮긴 후 벌레를 터트려버려.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제 팔은요?"

"시원하게 날아가겠지. 더럽게 아프긴 한데, 날 봐. 어쨌든 살아있잖아."

취소다.

생존 버스는 무슨.

내 안위는 내가 직접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용케 살아남았네요."

"운이 좋긴 했지. 함께한 이들이 많았으니까."

"전부 크룩스 출신입니까?"

내가 엘튼과 그 주변의 암살자들을 둘러보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붐(Boom)의 희생자 리스트에 올라온 녀석들이야. 도망칠 때 전부 데리고 나왔지. 그 덕에 개고생 좀 했지만."

칼은 엘튼에게 베텔의 독을 가져오게 했다.

엘튼이 가져다준 병은 기존 베텔의 독과 달랐다. 보랏빛이 아닌 분홍빛을 띤 병이었다.

시술에 맞게 제작한 독이라고 했다. 칼은 병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시술, 바로 할 거지?"

"네. 찜찜한 건 얼른 털어버리는 성격이라."

"자리 깔고 누워."

이 벌레 새끼가 생존의 위협을 느낀 건가?

심장이 간질거렸다.

자리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었다. 난 칼이 쉬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편히 누웠다.

칼이 병뚜껑을 땄는데, 병에서 시큼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저 예쁜 분홍빛 비주얼에 걸레 빤 썩은 냄새라니 어째 불안한데.

칼이 냄새를 맡고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더 불안해졌다.

"벌레가 심장에 자리하는 이유는 심장 박동 때문이야. 진폭이 일정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둥지를 틀도록 훈련되어 있거든. 그런데 만약 심장 박동이 죽은 듯이 느려지면 어떻게 될까?"

"다른 곳을 찾아 움직인다는 겁니까?"

"정확히 둥지 이전이지."

"원하는 부위로 어떻게 이동시키는 겁니까?"

"압박과 자극."

칼은 길고 두꺼운 천을 꺼내더니, 내 왼쪽 손목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강하게 옥죄는 압박감과 함께 짙은 맥동이 느껴졌다. 칼은 약초를 꺼내더니 잘게 빻아 천 위에 꾹꾹 눌러 붙였다.

뜨거운 감각과 함께 맥박의 세기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손목 맥박이 북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칼은 내 입술 위로 병을 가져왔다.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대사 한번 살벌하네요."

"맛도 살벌하지."

험악한 인상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째 분위기가 장기를 떼서 파는 인간 백정 놈의 대사 같은데.

괜찮겠지?

난 그대로 병을 받아 마셨다.

시큼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맛도 참으로 역겹다.

꾸역꾸역 삼키는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시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거지?

근데 묻지 못했다.

의식이 날아갔으니까.

* * *

"주군, 리옹입니다."

"들어와."

끼익― 귀에 걸리는 낡은 소리가 울렸다. 리옹은 너덜너덜한 문짝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주군이 이런 누추한 장소에 오래도록 머문다는 사실이 무척 불쾌한 표정이었다.

나른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검은 머리의 사내.

작은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잔이 전혀 줄지 않았다.

그 모습에 리옹은 주군이 고민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됐지?"

"구했습니다."

그제야 사내, 카멜이 리옹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리옹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자신이 가져온 상자를 올려놨다.

카멜이 상자를 열자, 검은빛의 매끈한 망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아(龍牙)의 망토.

마법 방어력과 함께 착용자의 존재감을 올려주는 고대 아티팩트였다.

"마르샤 대상인은?"

"정리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겠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욕심 많은 돼지가 탐낼 만한 물건은 아니지. 뒤처리는?"

"접촉했던 증인들은 모두 제거했고, 흔적이 남을 만한 저택과 창고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용병 일부가 도망쳤는데, 증인으로 세우기엔 비루한 놈들이라 무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깔끔하네. 역시 리옹이야."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 순간 방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리옹은 주군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걸친 망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좋은 물건은 넘쳤고, 자신은 여전히 배가 고팠으니까.

"이 마을 아무래도 미심쩍어."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렌구아는 도착했나?"

"바깥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몇이나 데려왔지?"

"다섯입니다."

"슬슬 시작해볼까."

고개를 끄덕인 카멜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창가를 향해 다가서더니,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창가로 비치는 풍경은 작은 시골 마을을 연상케 했다.

전달자가 건네준 지도대로 '그'를 보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카멜은 사흘 정도 이곳에 조용히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편지 한 장을 전달받았다.

편지 내용은 그의 심기를 무척 거슬리게 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자니.

감히 자신을 바람맞힌 인간은 회귀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카멜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며칠을 더 묵었다.

며칠 동안 창밖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그 이질감이 뭔지 오늘 확인해보고 싶었다. 주술사들이 도착했으니 움직인다.

"마을 전체를 봉쇄하고, 단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붙잡아라."

"충."

"렌구아에게 작업을 지시해."

"무슨 작업을 원하십니까?"

카멜은 식은 찻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뽑아야겠다."

* * *

"아악!"

"도, 도망쳐!"

조용했던 마을에 때아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쑥 나타난 검을 든 사내들이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카멜이 데려온 정예 친위대로 전원 마나 유저로 이뤄져 있었다.

그 기세를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낸 채, 여관으로 모조리 끌려왔다.

그들은 여관 1층 구석에 몰린 채 벌벌 떨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

쿵!

"...!"

그 정적 사이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 계단에서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한 사내가 조용히 내려왔는데, 짙은 위압감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움츠러들었다.

그가 1층으로 내려오자, 둘러싼 이들이 고개 숙여 그를 맞이했다. 카멜은 리옹을 바라봤다.

"전부인가?"

"128명. 그 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촌장은?"

리옹이 손짓하자, 기사들은 한 사내를 질질 끌고 왔다.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촌장치곤 젊어 보이는 나이였다.

카멜 앞에 엎드린 채 촌장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할 말은 있는지, 용기 내어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십니까?"

"이곳에 볼일이 있는 사람."

"이곳은 에토르 가문에 보호세를 내는 정식 마을입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톰자엘 자작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아아, 그 늙은 너구리에게 보호세를 내고 있었나? 그 늙은이가 이곳까지 발을 담그고 있을 줄 몰랐는데."

"그 무슨 불경한…."

"이 마을 뒤에 누가 있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여긴 에토르의 주인이신 톰자엘…."

"걸음걸이가 달라."

"...."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범한데 이상하게 거슬려. 내가 자주 보던 그 느낌이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