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CSALVILL / Chapter 4 - 4

Chapter 4 - 4

카멜은 촌장을 빤히 내려다봤다. 촌장은 바짝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

순간 덜덜 떨던 촌장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 모습에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35화 편지

"난 그 누구보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 군상을 많이 봐왔지. 그런데, 잡혀 온 이들의 벌벌 떠는 모습이 왜 같잖아 보일까?"

"...."

"연기 그만해. 역겨우니까."

엎드린 촌장의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 촌장의 시선이 카멜을 향한 순간, 리옹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촤악―

핏방울이 허공에 흩어지며 양팔이 떨어져 나갔다.

잘린 상처 부위가 새하얗게 얼어붙으며 괴사하기 시작했다. 리옹의 특성, 칼바람의 냉기(冷氣)에 노출된 흔적.

생포를 위해 특성을 사용했는데, 촌장은 비명도 없이 그대로 카멜에게 몸을 튕겼다.

"죽어!!!"

촌장의 가슴이 불룩불룩 송곳처럼 튀어나오더니 전신에 실핏줄이 퍼지며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카멜은 코웃음을 치며 망토로 몸을 가렸고, 리옹이 앞을 막아서며 팔을 뻗었다. 리옹의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푸른 반지.

콰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폭발에 휩쓸린 마을 사람들 일부가 처참한 몰골로 비명횡사했다.

위이이잉―!!

폭발을 막아선 리옹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패를 내려놨다.

팔뚝에 생성된 푸른빛으로 이뤄진 카이트 실드(Kite Shield).

일주일 전 주군이 하사한 '네메시스의 얼음 방패'였다.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방패를 본 리옹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방패를 다시 들었다. 사방에서 짙은 살기가 쏟아졌다.

폭발이 신호탄이 된 듯, 피로 흥건한 바닥을 밟고 마을 사람들이 돌진해왔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모두가 카멜을 먹잇감처럼 노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포위된 리옹은 자세를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렌구아, 뭐 하나!"

리옹의 타박에 1층 중심으로 거대한 핏빛 마법진이 생성됐다.

공간 전체가 붉은빛으로 채워졌다.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자, 마을 사람들, 아니 암살자들은 더욱 다급히 카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순간,

꿀렁―!

마법진 안에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수십 수백의 붉은 넝쿨. 넝쿨은 인간의 핏줄을 닮아 혐오스러웠다. 살아있는 듯 꿀렁거리며 넝쿨들은 삽시간에 암살자들을 낚아채며 공간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암살자들은 붉은 넝쿨에 매달려 벽 이곳저곳에 꼬치처럼 달라붙었다.

백여 구의 꼬치가 붉은 벽을 수놓았다.

으....

벽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꼬치가 된 이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잠시 후, 기사들 뒤쪽에서 어두운 로브를 걸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렌구아와 주술사들이었다.

렌구아는 카멜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카멜은 형체조차 사라진 촌장의 시신을 훑어보곤 짧게 혀를 찼다.

"붐(Boom)? 설마 크룩스 놈들이었나?"

회귀 전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를 안겨준 자살 폭탄.

붐(Boom)은 카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마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어찌하시겠습니까?"

리옹이 의자를 가져오자, 카멜은 의자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그러곤 렌구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인 뒤 꼬치가 된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주술사들이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기억을 뽑아낼 주술 도구가 들려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주술사들은 꼬치에 묶인 암살자들을 하나씩 붙들고 기억을 뽑아냈다. 눈, 코, 귀에서 피가 흐르고,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질러댔지만, 주술사들은 암살자가 죽든 말든 느린 몸짓으로 뇌리에 담긴 기억을 구슬 장치에 담았다.

"촌장이 죽은 게 아쉬워. 쓸만한 기억이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리옹, 그대 잘못이 아니다. 붐(Boom)은 나도 예상 못 했거든. 세뇌당한 놈을 산 채로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차나 한잔 부탁하지. 목이 마르군."

"충."

리옹이 자리를 비우자, 카멜은 의자에 편히 앉아 품을 뒤적거렸다. 편지를 꺼낸 그는 다시 편지를 읽었다.

'그'가 보낸 편지.

벌써 여러 번 읽은 편지였지만, 카멜은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거슬려, 거슬린단 말이지."

편지의 한 문구에서 멈춘 카멜은 미간을 구겼다. 감정 표현이 절제된 그가 고작 문장 한 줄에 짜증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망토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

사흘 전에 읽은 편지 내용이다. 검은 망토라…. 카멜은 자신의 망토를 바라봤다.

용아(龍牙)의 망토.

조금 전 리옹이 대상인 마르샤를 죽이고 가져온 고대 아티팩트였다. 놈은 자신이 용아(龍牙)의 망토를 얻을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리옹이 찻잔을 건넸다.

주변은 고통과 비명으로 지옥이 펼쳐졌지만, 카멜은 덤덤히 티타임을 즐겼다.

"또 읽으십니까?"

"예언을 듣는 듯한 편지라서 말이야. 아주 기분이 더러워."

"그는 이곳에 없는 것일까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 적혀 있어. 실제로 그런 느낌이 강하고. 분명 내 주변을 감시하는 듯한데, 찾아보면 없단 말이지."

결과만 보자면 '그'와의 교섭은 연기되었다.

동맹 표시는 잘 전달받았지만, 전달자로 보낸 이가 실종됐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납치를 지시한 카멜 본인도 현재 그 전달자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감시자 소식은 아직이지?"

"아무래도 당한 것 같습니다."

"케플린은 4성 기사야. 그가 당했다면 그 전달자 주변에 조력자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가 전달자 실종을 핑계로 교섭을 미루고 있어. 날 가지고 노는 것일까?"

"벤을 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큰 기대는 안 했어. 방심을 유도하려고 붙인 미끼니까. 다만, 전달자를 도운 조력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

둘은 며칠 전 홀로 돌아온 벤을 떠올렸다. 전달자를 놓쳤고 함께 움직였던 이들이 전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렌구아를 시켜 벤의 기억을 뽑아봤지만, 기절해 있었는지, 협곡에 있었을 당시의 필요한 기억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낸 사실은 전달자 놈이 동맹 표시로 불을 지른 뒤 벤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

분명 케플린이 뒤를 쫓아갔을 텐데 지금껏 소식이 없었다는 건 리옹 말대로 당한 것 같았다.

"이 편지를 전달한 놈도 비렁뱅이라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알아낸 것이라곤 이곳이 크룩스와 관련된 마을이란 것뿐이야. '그'는 무슨 의도로 이곳을 교섭 장소로 정한 거지?"

카멜의 물음에 리옹은 답하지 않았다. 주군이 원하는 건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방식.

주군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때 주로 쓰던 방식이었다.

"짜증 나는군."

"...."

그럼에도 주군의 입에서 답이 아닌 짜증이란 단어만 흘러나온다는 건 리옹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잠시 후, 작업을 끝낸 렌구아가 정보를 정리해 카멜에게 보고했다.

"역시, 크룩스의 비밀 거점이었나?"

"주요 거점 같습니다. 크룩스에 관한 굵직한 정보가 제법 많습니다."

"'그'와 관련된 정보는?"

"'그'와 관련된 기억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그 전달자 놈이 이 마을에 머물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전달자가?"

카멜이 처음으로 큰 관심을 보이자, 렌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암살 준비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처형당한 암살자 전원이 머문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은밀히 전달자에게 접근한 존재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단둘이 마을 창고에서 만났다는 정보가 있는데, 전달자와 접선한 인물이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크룩스의 간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단둘이 창고에서 만났다라."

카멜은 조용히 편지를 바라봤다.

'추신'이라고 적힌 마지막 문장.

[이곳 음식점 빵과 수프 맛이 괜찮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드셔보시길.]

"...."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것을 대놓고 알려준 셈이다.

전달자와 접선한 존재가 '그'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슨 장난질이지?'

놈의 의도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냐? 그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교섭을 연기했으니, 좋은 정보 하나를 알려드리죠. '메케릭의 비약'이라고 그대의 영지, 블라이어 하렘가에 연금 비약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비약을 얻고 싶다면....]

메케릭의 비약은 자신이 이미 마법사를 죽이고 리옹에게 복용시켰다. 그 효과로 리옹은 현재 5성에 오른 상태.

이미 써버린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이 정보는 진짜였다.

'나에 대한 정보만 아는 게 아니야.'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거지?

'그'에 관해 떠올릴수록 답은커녕 의문만 계속 늘어갔다.

한 존재에게 이토록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었을까.

'그'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단 갈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카멜은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흥분하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를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 감정이 불같이 타올랐다.

카멜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금 짜증이 올라왔다.

"리옹."

"네."

"떠날 것이다. 준비해."

"그럼, 이곳은...."

카멜은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비를 바라는 눈빛.

"전부 태워버려."

하지만 그는 구원자가 아닌, 학살자였다.

* * *

화르르륵―!

마을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어둑한 밤하늘, 불씨를 담은 재 가루들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뿌연 연기 아래, 카멜은 검게 타버린 마을을 둘러보곤 마차에 올랐다. 말을 탄 리옹이 마차 호위에 나섰고, 그 뒤로 서른 기의 말이 줄을 섰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카멜은 창문을 연 뒤 누군가를 찾았다.

"렌구아."

"예, 주군."

"그대는 주술사 전원을 데리고 라웁 숲으로 가라. 그곳에서 키메라를 사냥하고 마석을 수집해."

"도미닉이 나타나면 어찌할까요?"

"지금쯤 놈은 베네타 영지 근처에 있을 테니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혹여 만나게 되더라도 교전은 무조건 피해라. 놈과 부딪치지 마."

"알겠습니다."

"마석이 목표량에 이르면 에토르를 중심으로 마석을 풀면서 한 가지 소문을 흘려. 생체 마석이 마나 유저의 경지를 올려주는 보물이라고."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이미 주군을 통해 생체 마석에 대한 부작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룩스 본진이 에토르에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접선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마석에 관한 작업이 끝나는 대로 에토르에 남아 크룩스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언제든 처리할 수 있게."

"크룩스를 지우실 생각입니까?"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

크룩스는 저번에 이용해 먹은 암살 조직이지만, 변변치 않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다르다. '그'와 관련된 조직인지 우선 파악한 후 결정할 생각이었다.

렌구아를 따라 주술사들이 라웁 숲으로 떠나고, 마차는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홀로 앉아 카멜은 '도네콜린트'를 떠올렸다.

'소식이 전혀 없어. 너무 조용해.'

지금쯤 세이렌의 비명에 관한 '신명'이 소문으로 돌며 귀에 들어와야 하는데, 도네콜린트는 땅으로 푹 꺼진 것처럼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영입을 위해 움직였던 모든 행동이 헛수고가 된 것이다.

미래가 또 뒤틀렸다.

36화 광의의 예언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카멜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곧 첨탑 꼭대기에서 봤던 전달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하찮은 암살자 놈.

그 만남부터 미래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카멜은 미래가 뒤틀린 원인으로 '그'를 떠올렸다. 자신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도 있는 존재.

수를 읽힐 수 있으니 어려운 상대였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던 카멜은 곧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의외성밖에 없나?"

'그'의 예측을 벗어나려면 변수가 필요했다. 그조차 예측하지 못할 변수 말이다.

그는 에토르를 떠올렸다.

토바른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세력 확장을 꿈꾸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땅.

과거에는 에토르를 점령하는 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부친과 형제.

이들을 정리하고 블라이어를 정비하는데 긴 시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8개월.'

하지만 앞으로 계획한 밑그림대로 흘러간다면 에토르는 8개월 뒤에 자신의 수중에 떨어진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인 셈이다.

그럼에도 카멜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리를 좀 해야겠어."

카멜은 큰 피해를 보더라도 점령 시기를 앞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예측에서 벗어나려면 '의외성'이 필요했고, 시간으로 상황을 뒤틀면 수많은 변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얼마나 앞당겨야 할까?

'4개월 안에 에토르의 성벽에 깃발을 꽂는다.'

절반의 시간을 줄인다.

수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미묘하게 계획이 계속 삐거덕거리는 느낌이라, 강행할 필요성을 느꼈다.

카멜은 마차를 툭툭 두드렸다. 리옹이 말을 몰고 다가오자, 카멜은 창문을 열고 물었다.

"'광의의 예언자'는 어디쯤 있지?"

"정보원의 소식대로라면 엘레토르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차를 버리고 움직인다."

"네? 하지만...."

"서둘러라. 리옹."

갑작스러운 지시에 리옹은 살짝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수하에게 주군의 말을 가져오게 했다.

"이럇!"

카멜은 거칠게 말을 몰았다.

계획을 앞당기려면 기존의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중 광의의 예언자와의 만남은 앞으로 계획을 정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서둘러야 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를 뒤로한 채 카멜 일행은 쉬지 않고 엘레토르 성곽이 위치한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숲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 트며, 색 바랜 성곽을 비추었는데, 그 길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엘레토르 성곽.

토바른 지역의 북쪽 경계를 가르는 상징이었다. 그 성곽에 도착하기 전, 카멜 일행은 대규모의 행렬과 마주했다.

"멈춰라!"

리옹이 앞서가던 행렬을 가로막았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마차는 무척이나 화려했는데, 한눈에 봐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뒤늦게 리옹 곁으로 카멜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제때 맞춰서 왔군."

카멜은 마차에 달린 깃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토르 성곽 너머부턴 오르도르의 숲이 펼쳐진다. 초대받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마녀들의 숲.

다행히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예언자의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카멜은 리옹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체력적으로 무리했다. 하지만 꼭 만나야 할 인물이 앞에 있었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차를 대표하는 덩치 큰 기사가 카멜 앞에 다가왔다. 중무장한 기사였는데, 한눈에 봐도 강해 보였다.

'리옹이 감당할 수준인가?'

눈앞의 기사들은 오르도르 숲 너머에 자리한 클라크 대공의 기사들. 대공의 직계 기사들이 약할 리 없겠지만, 손꼽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의 영지는 기사보단 마법사들의 영향력이 월등히 강한 곳이었으니까.

실력이 궁금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손님' 입장에서 예언자를 찾아온 것이니까.

"답을 구하고자 왔다."

"답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기사의 말에 카멜이 손을 까닥이자, 뒤쪽에서 리옹이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황금을 확인한 순간, 팽팽했던 대치가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예언자의 손님.

대가만 확실하다면 신분은 중요치 않았다. 그것이 대공이 정한 기준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사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마차로 돌아갔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더니 천으로 눈을 가린 노인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광의의 예언자.

그의 예언 능력은 토바른을 넘어 왕국 전역까지 퍼질 정도로 유명했는데, 그 능력을 빌리려면 천문학적인 황금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언자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2년에 한 번, 예언자는 클라크 대공의 부탁으로 손님들을 찾아가 황금을 받고 예언을 봐줬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였다.

"인연이 아닌 이가 찾아왔구려."

"...."

카멜은 눈앞의 노인을 처음 본다.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만나보지 못했을 인연. 예언자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건가?

카멜은 준비해둔 의자에 앉아 예언자를 마주 봤다.

"예언자는 이름이 없나?"

"답을 구하는 것이오?"

예언자의 답에는 황금이 든다. 카멜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관두지. 내가 답을 구하는 건 사람의 생사다. 혹시 알 수 있나?"

"나와 만난 적이 없다면 불가능하오."

카멜은 짧게 혀를 찼다. 전달자 놈과 감시자 케플린의 생사를 확인해볼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 내 죽음은? 내 죽음에 관해 예언해 줄 수 있나?"

미래가 뒤틀린 탓에 확인이 필요했다.

예언자는 카멜 앞에서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떨림과 함께 주황색으로 빛나는 구슬,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의 손길은 보이지 않소. 당분간은."

"당분간은? 그게 무슨 뜻이지?"

"그대의 행동에 따라 향후 언제든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근 시일의 죽음뿐이지."

"죽음이 보인다면 피할 수 있나?"

"피할 수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소. 다만, 피한다면 그대의 가치만큼 대가를 치를 것이오."

"대가? 무슨 대가?"

"그대에게 소중한 것."

카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리옹은 그 표정에서 주군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히, 누가 나에게 소중한 것을 가져간단 말이냐."

예언자는 그저 말없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게 신이 될 수도, 하늘이 될 수도,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과 함께.

"답변이 불성실해."

"사실만 말하는 것이오."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계획에 당장은 큰 위협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묻고 싶은 게 또 있는데."

"답을 구하려면 대가를 내놓으시오."

"참으로 비싼 입이야. 당신."

카멜이 리옹을 바라보자, 리옹은 또 다른 상자를 예언자 앞에 내려놓았다.

"근래에 받은 '신명'이 있나?"

"음, 하나가 있소만...."

무슨 이유인지 예언자는 그것에 관해 말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그 주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나?"

"할 수 있소. 신명은 특별하니까. 답을 원하시오?"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언자는 구슬을 살피더니, 잠시 후 구슬에서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소."

카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살아있나?'

그는 도네콜린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생사를 확인했으니,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카멜은 확인차 물었다.

"신명의 내용을 듣고 싶다."

"신명은 신이 주신 계시, 무분별한 발설로 세상에 영향을 준다면 큰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시오?"

"그 두 눈이 실명된 것처럼 말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

"선택권은 그대에게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카멜의 지시에 리옹은 세 개의 상자를 기사에게 가져갔다. 황금이야 금광 개발만 끝나면 천문학적으로 얻을 수 있다. 굳이 아낄 필요가 없었다.

상자를 확인한 기사는 예언자 옆에 섰다.

"손님께서 답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대는 대공께 죄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미건조한 기사의 말에 예언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을 가린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모습에 카멜은 묻고 싶었다.

스스로의 죽음도 볼 수 있냐고.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신명의 내용 중 한 줄뿐이요. 나머지는 보이지 않아."

"신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니까."

"...."

카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의 감정이 스쳐 갔다. 도네콜린트의 신명은 모두가 알 만큼 널리 퍼진 신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의의 예언자조차 보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갑자기 '그'가 떠오른 건 왜일까?

"말하라!"

그가 원하는 답은 도네콜린트의 신명, '세이렌의 비명'이었다.

재촉 섞인 언성으로 답을 구하자, 예언자는 빛나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시력은 잃었지만, 그의 뇌리에는 구슬에 내려진 신명의 글자가 또렷이 박혔다. 그중 대부분이 해석이 안 되는 글자였다. 신명의 글귀 중 가장 밑단의 내용만 해석한 것이 고작이었다.

예언자는 궁금했다.

운명의 아케인이나 마녀 릴리도 이 신명을 전부 해석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절대 이 신명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죄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예언자의 입이 떨리듯 열렸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세이렌의 찬가.]

"세이렌의 찬가."

카멜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비명이 아닌 찬가?!

신명의 주인이 바뀌었다.

* * *

월급쟁이로 팍팍하게 살아가던 내게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고르라면 잠을 청하는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보드란 이불 촉감 아래,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꿀 같은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서, 퇴근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만, 새벽이 되어 스마트폰을 끄고 눈을 감을 때면 그 환상은 와장창 깨진다. 잠이 들고 깰 때는 어찌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던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만 봐도 기분이 더러웠다.

아, 출근 시간이다.

'아오, 시발 꿈!'

의식이 돌아오고, 햇살 사이로 비추는 풍경이 커튼이 아니라 숲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를 안 나가도 된다는 이 안도감.

이딴 사실 하나로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신세가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이 순간만큼은 즐기고 싶었다.

소설 속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긴 꿈을 꾸었다. 평범한 회사원의 삶이 그려졌고,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아왔다.

되새겨 보니, 현실의 삶은 확실히 재미는 없지만, 소소한 행복과 안정감이 있었다.

세렝게티 정글에 뚝 떨어져 보니, 그때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출근 시간이 싫은 것을 보면 어떻게 월급쟁이로 살았는지 몰라. 끙!"

몸을 일으키려는데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없었다.

칼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왼쪽 손목에 턱― 거슬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올려보니, 손목에 두꺼운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검은색 바탕의 투박한 팔찌.

팔찌를 보니 시술이 성공리에 끝난 것 같았다.

37화 백(百) 개의 심장

발걸음을 떼는데 힘이 쭉 빠진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쉬어서 근육이 말라버린 건가?

꼬르르륵―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상당 시간 오래 누워 있던 게 분명했다.

'아, 치킨 뜯고 싶다.'

꿈 때문인지, 배달 어플로 자주 시켜 먹던 치킨 콤보 세트가 떠올랐다.

기름에 바사삭 튀긴 현대의 맛.

오늘 같은 날 육즙이 흐르는 고기 맛 좀 봐야 하는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나무숲 사이를 거닐고 있는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정신이 언제 돌아올까 싶었는데, 오늘이었나?"

익숙한 기척과 목소리.

칼이었다.

난 칼이 떨어진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높다. 아파트 5층 정도 높이?

그런데, 떨어질 때 충격은커녕 소리도 잘 안 들렸다.

그만큼 몸이 가벼워졌다는 뜻.

"컨디션은 전부 회복하신 겁니까?"

"충분히 쉬었으니까."

"제가 꽤 오래 누워있었나 보네요."

"벌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더뎠어.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어째 뼈마디 전신이 쑤신다고 했더니, 무려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일주일을 굶어도 이리 멀쩡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의식도 없는 환자만 놔두고 전부 어딜 간 겁니까?"

"반경을 늘려서 경계를 세운 것뿐이야. 아지트는 안전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약간 귀찮아지긴 했지."

"네?"

칼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앞장서서 걸었다.

방향을 보니 아지트로 다시 가려는 것 같았다.

난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시술은 잘됐습니까?"

"성공했어. 팔찌 보이지?"

"네."

"벌레는 팔목에 안착했어. 팔찌가 벌레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할 거야. 말라 죽을 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양으로."

"무슨 마법이길래."

"라이프 드레인(Life Drain), 대상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흑마법이야. 무시무시한 흑마법이지만, 팔찌에 걸린 수준은 벌레조차 간지럼을 탈 정도지."

"용케 이런 걸 만들어줬네요."

"흑마법사지만 나름 선을 지키는 녀석과 알고 지내고 있거든."

한 달 동안 벌레 한 마리를 죽일 수 있는 미니멈 라이프 드레인이라니, 신박하긴 했다.

벌레에게 자극을 주지 않고 제거하는 방식인데, 칼이 말한 대로 딱 붐(Boom) 제거용 아티팩트 같았다.

이걸 생각하고 제작하다니.

그 흑마법사가 누굴까.

"배고프지?"

그 의문은 곧 칼의 물음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고기 없습니까?"

"그 비슷한 건 있지."

아지트로 복귀한 칼은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에는 마른 육포가 잔뜩 담겨 있었다.

육즙은 없지만, 이게 어디냐.

난 자리를 잡고 허겁지겁 육포를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 배고프면 뭐든 맛있는 것 같았다.

칼은 말없이 내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 시선에 먹던 육포를 꿀떡 삼키곤 입을 열었다.

"뭡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눈치는 귀신이라니까. 엘튼의 눈치가 네놈의 반만 닮았으면 바랄 게 없을 텐데."

"눈치보단 믿음이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쓰다 버릴 패라면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평생 곁에 둘 녀석이라면 믿음 가지곤 부족해. 높은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눈치가 왜 중요합니까?"

"그 어떤 조건보다 생존과 직결되는 덕목이니까. 우린 암살자야. 표적 중에 암살자보다 약한 자는 없어. 늘 강한 상대를 두고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지."

"기다리느냐, 사냥하느냐, 도주하느냐. 타이밍을 잘 재라는 말이군요."

"맞아. 그 찰나가 생사를 가르지."

내 답에 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클레이튼.'

칼은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물주머니를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배가 고픈지 움켜쥔 육포 덩어리만 노려보는 녀석.

짧은 시간이지만, 녀석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달라붙어서 꼬치꼬치 따지고, 이것저것 물어보길 반복해서 짜증이 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대화에 재미를 느꼈다.

'대화가 통한다.'

40년 경험의 노련한 자신과 사고 능력이 비슷한 눈높이에 있다는 뜻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것 같지 않았는데 판단에 대한 계산이 빨랐고, 사회 경험이 풍부했다.

거기에 눈치와 빠른 이해력까지.

오랜만에 욕심이 나는 인재를 만났다.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을 정도.

"2성에 올랐던데."

"아, 시술 당일에 각성했습니다. 깜빡하고 얘기를 못 했는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덕에 시술이 오래 걸렸으니까."

"네? 그게 문제가 됐습니까?"

"1성에 맞춰서 양 조절을 했거든. 마나가 돌면 베텔의 독이 해독되는 거 알고 있지? 독이 중화되는 바람에 벌레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어."

"아."

이 문제를 생각지 못했다.

설마, 2성 각성이 시술에 방해가 될 줄이야.

급히 더 많은 독을 투여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았다.

위험할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

아니, 칼이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겠지.

난 다시 한번 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목숨을 빚졌네요. 감사합니다."

"뭐, 나도 네 덕에 살아남았으니까. 슬라임 배 속 경험은 정말이지 끔찍했거든."

"끔찍하긴 했죠."

육포 주머니가 비워지는 동안, 우린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칼은 망설이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벗어나면 갈 곳이 있나?"

영입 제안.

난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칼이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조직으로 들어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으니 협력 관계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칼과 깊은 인연을 맺는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조직에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 일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니 피하는 게 맞았다.

암살자의 몸으로 빙의했지만, 난 암살자로 끝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소설의 끝자락까지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으니까.

내 뜻에 칼이 아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네가 각성한 신비 능력, 언제쯤 알려줄 거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칼이 내 진짜 이름을 물었을 때 신비 능력에 관해서도 언급했었다. 하지만 당시엔 고대 문양의 정확한 능력을 알지 못해서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고대 문양의 능력.

생체 마석을 흡수하고, 저번에 흑주술사인 여인을 상대하면서 고대 문양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칼은 여전히 고대 문양을 신비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착각을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내 신비 능력인 인챈트는 히든카드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힘 일부를 숨기라고 가르친 것이 칼이니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정화(淨化)?"

"네, 불안정하거나, 불순한 기운을 억누르거나,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그런 특성은 성직자나 사제 계열의 능력인데 혹시 신을 모시나?"

"전 무신론자인데요?"

"…무신론자? 실존하는 신을 부정하다니. 웃기는 놈이네. 악마가 씌었다고 사제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어."

무신론자인 게 여기선 문제가 되려나?

사제나 성직자가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키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마녀사냥은 사양인데.

신이라도 하나 골라서 모셔야 하나?

소설 속 신들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데, 칼이 대뜸 물었다.

"그럼, 치료는?"

"치료요?"

"능력으로 자신 말고 타인도 치료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아군에게 능력을 사용한다라.

일단 내 능력은 사제의 능력과 그 성질이 달랐다. 치료에 집중된 사제의 능력과 달리, 내 능력은 그보다 더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을 넘어, 정신 쪽에도 효과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저번에 여인이 내게 건 저주도 제거했으니, 타인에게 걸린 저주도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능력 사용 횟수는?"

"유지 시간은 얼마나 되지?"

"능력의 범위는?"

칼은 내 능력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난 숨김없이 알려줬다.

칼이 엘튼의 불 특성을 말해줬듯이 내 능력도 함께 생활하는 한, 숨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숨기면 의심만 살 뿐이니, 착실하게 답하는 게 맞았다.

마지막에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빛무리의 범위.

원의 면적을 살피며 칼은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지트 바깥이 소란스럽다고 했다. 이 타이밍에 내 능력을 물어본 게 바깥 일과 관련이 있나?

잠시 후, 칼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능력을 빌려도, 다 같이 탈출하는 건 힘들겠어."

"탈출이요?"

"일단 바깥 상황을 알려줄게.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 도적 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적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그럼 도미닉이 아예 대놓고 영지 주변 마을을 털고 있다는 말이잖아.

의식이 없는 일주일 사이에 벌써 그 시기가 된 건가?

"괴물들의 정확한 정체는 키메라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체 병기지."

"도미닉의 정보가 거기까지 퍼졌습니까?"

"더 있지. 클라크 대공의 직속 마탑 출신으로 몬스터의 생체 조직을 연구하던 뛰어난 생체 공학자였던 모양이야. 지금은 인간까지 재료로 쓰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됐지만."

내 예상이 맞았다.

도미닉의 신상과 그가 부리는 키메라들의 자세한 정보가 토바른 전 지역에 퍼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학살자가 움직였다.'

하나는 학살자가 생체 마석에 관한 소문을 퍼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네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혹시 잡혀 온 이들 중에 이종이 있었습니까?"

"이종?"

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흘 전부터 이종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지금은 그 수가 제법 돼."

"혹시 이종 중에 엘프를 보셨습니까?"

"엘프는 없었어."

여성 엘프가 나오길 바랐는데,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엘프 자체가 없다라.

그럼,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실험체 감옥에 그 엘프가 갇혀 있다는 건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이곳에 앞으로 이종들의 비율이 빠르게 올라갈 것 같거든요."

"이종들이?... 설마?"

칼은 내 말에서 숨은 뜻을 파악한 눈치였다.

"베네타인가? 도미닉이 그곳을 습격하고 있어?"

토바른 지역에서 이종들이 뭉쳐 사는 곳은 베네타뿐이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이끌고 베네타 주변 마을을 휘젓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미닉이 이종을 노리는 이유는 인간을 재료로 한 연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 사냥.

그 결과, 한 사건이 터졌다.

'엘프 샤르바딘 실종사건.'

샤르바딘은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의 여인이다.

푸른 장미 5층에서 도르네프의 질기고 긴 구애를 받고 혼인한 미모의 엘프 말이다.

이 실종 사건으로 샤르바딘과 접점이 있는 베네타와 검은 장미가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의 끝은 두 세력의 공멸(共滅).

'이미 한 차례 부딪쳤을지도.'

훗날, 학살자는 토바른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데, 그 기회를 만들어준 인물이 바로 도미닉 후아튼이었다.

토바른의 3강으로 불리는 블라이어, 에토르 그리고 베네타의 힘의 균형을 무너트린 미치광이 마법사의 등장.

한숨 자고 일어난 사이, 학살자의 버프 이벤트인 '백(百) 개의 심장'이 시작된 것 같았다.

38화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도미닉이 베네타 주변을 휘젓고 있다면 지금 흘러들어 오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종들보다 인간들의 유입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숲 전역을 키메라들이 휘젓고 있다고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라웁 숲 전역에 키메라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라웁 숲은 토바른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숲이다. 토바른 3강 외에 수많은 영지가 라웁 숲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도미닉이 하는 짓은 한마디로,

"놈이 토바른 전체와 싸우겠다는 말과 같아. 이해돼?"

"키메라의 수를 정확히 아십니까?"

"수백 마리는 되겠지. 그래도 숲 전역을 누비기엔 터무니없이 적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한 마법사가 그 많은 키메라를 제작하는 동안, 어째서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

"이곳은 들어올 순 있어도 나갈 순 없습니다. 잡혀 온 후에야 키메라의 존재를 눈치챈다는 뜻이죠."

"그게 키메라의 수와 무슨 상관이지?"

"만약 이런 곳이 한 군데가 아니라면?"

"…뭐?"

칼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내가 말한 의도를 드디어 알아챈 것 같았다.

"이 같은 곳이 한 곳이 아니라고?"

"숲 전체, 도적들의 씨가 말랐다고 했죠? 근데 저번에 잡혀 온 도적들은 천도 안 되는 수였습니다."

"...."

"전역의 어중이떠중이 도적들을 다 합친다면 만 단위는 넘을 겁니다. 숲 전역의 도적 떼가 사라졌는데, 잡혀 온 숫자가 천 명도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곳 말고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는 건가?"

"최소 다섯 군데 이상,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라웁 숲에는 실험체 감옥이 다섯 군데 이상 존재했다.

수거를 위해 들이닥친 키메라의 수보다 바깥에 다섯 배 이상의 키메라 군단이 더 있다는 뜻이고, 그 수라면 충분히 라웁 숲 전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칼은 내 말에 망치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같은 장소가 또 존재한다고?

생각지 못했다.

'작은 소문이라도 들렸을 법한데?'

다섯 군데 이상이라면 실종된 이들이 상당했을 텐데,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

칼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도적이야. 도적 떼를 눈가림으로 이용했어. 숲에 깔린 도적 소굴만 해도 엄청날 테니까. 소문이 나더라도 도적들의 짓으로 감춰진 거야."

"그 도적 떼조차 현재는 모두 몰살당한 상태죠."

"빌어먹을, 더는 숨지 않겠다는 뜻인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라고, 웬만한 전력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네 말이 맞아. 그럼 지금 잡혀 온 이들의 수가 이해가 돼. 키메라가 그렇게 많았다고?"

"더 많을지도 모르죠."

"…제길, 근데 왜 도미닉은 베네타로 간 거지? 이종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야 소설 내용을 본 것이니, 도미닉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칼은 아니었다.

내가 준 힌트만으로 칼은 도미닉에 관한 퍼즐을 사실에 가까이 맞히고 있었다.

힌트를 주면 바로 알아채는 통찰력.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학살자가 칼을 끝까지 곁에 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군이면 누구보다 든든하고, 적이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상대.'

이 아저씨와 더 친해져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으니까.

"탈출 후에 기쁨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할 궁리부터 해야겠어. 네 말대로라면 숲 전체에 키메라들이 잔뜩 깔렸다는 뜻이니까."

"아까 말했던 탈출은 뭡니까? 고민을 많이 하던 눈치였는데."

"네 능력을 이용해 볼까 했지."

"능력이요?"

"키메라에게 붙잡힌 후 탈출할 계획을 세워봤어. 네 능력 범위 안에선 키메라들을 떼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키메라를 매개체로 마법진을 빠져나간 후 능력을 사용해 숲을 벗어나는 방법.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잡힌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었고, 정신 계열의 키메라나, 저번 슬라임처럼 특수한 놈에게 잡힌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도미닉에게 내 능력이 노출되면 곤란해.'

키메라에게 천적이 될 수 있는 능력.

잘못 노출되면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짜 뭐 빠지게 도망만 다니다가 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능력은 가장 결정적인 상황에서 써야 한다.

한 번에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말이다.

단순히 도주용으로 노출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칼이 말해준 방법이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안 걸리면 그만이었다.

그 조건은 간단했다.

"혼자 탈출하는 건 가능하겠네요."

"...."

내 말에 칼은 잠시 침묵했다. 그도 느낀 것이다. 내가 탈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배신?'이라는 물음표가 머리 위로 그려졌는데,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뒤통수 안 치는 놈이 없었지."

"험하게 사셨네요."

"이 바닥이 아주 개똥 같아서 말이지. 괜히 말했어."

하긴, 이 세상이 좀 팍팍해야지.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곳을 탈출한다면 믿어보지."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칼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 강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감해졌다고 판단했겠지.

'탈출에 도움이 될 사건이 발생할 텐데. 그게 뭐지?'

저리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탈출을 고민하고 있지만, 칼은 결국 이곳을 벗어나 에토르로 향한다. 지금 칼의 반응을 보니, 탈출에 대한 뚜렷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스스로는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했으니, 내 능력을 이용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겠지.

설마 탈출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건?

의문을 품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

"일주일 내내 누워 있었잖아요. 몸이 굳어서 풀어줄 겸, 갈대밭으로 갑니다."

"오래 머물지는 마. 아무래도 곧 터질 것 같으니까."

"이제 열흘 됐는데, 벌써요?"

"말했잖아. 흘러들어 오는 수가 심상치 않다고. 당장 키메라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어. 몰려오기 전에 대비해놔야 해."

"알겠습니다."

엘프가 나타나면 곧장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난 아지트를 벗어났다.

해야 할 일과 생각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정리가 좀 필요했다.

* * *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갈대들이 바람과 부딪히며 바스락거렸다. 듣기 좋은 소리라 땀이 식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누워있었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몇 차례 더 움직이며 몸을 적응시켜놔야 할 것 같았다.

'회사 다닐 땐 숨쉬기 운동이면 충분했는데.'

이런 철저한 몸 관리는 살기 위한 발악이라고 보면 된다.

생존 본능이 위대하긴 위대했다.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움켜잡았다.

지이잉―!

마나에 반응하는 단검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붉은 보석은 이제 소용없을 것 같고.'

이곳에 오자마자 마석부터 흡수해보았다. 2성에 올랐으니, 더 많은 마석을 흡수할 수 있겠단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기대한 대로 마석을 여럿 흡수했는데도 탈력감이 찾아오지 않았다. 해서 남은 붉은 보석을 모조리 부숴서 복용했는데, 황당하게도 내 기대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 많은 보석을 흡수했는데도 아무런 자극이 없었기 때문이다.

붉은 보석이 마나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분명 소설에선 2성까지 통했는데, 뭐가 문제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석에 문제가 없다면 결국 내 몸이 문제란 뜻이니까.

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

이젠 이 정도 촉매제론 턱도 없다는 거냐?

그때부터 난 붉은 보석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했다.

'보랏빛 보석은 통하려나?'

샘플로 하나가 있으니, 복용해 보면 효과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몸을 풀어서 몸 컨디션을 최고로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저번에 제거한 도적들의 시신 때문인지, 접근하는 존재가 없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난 마나를 개방하고 갈대숲 공터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땀이 온몸을 적시고 몸이 만족스럽게 풀렸을 때, 난 품에서 보랏빛 보석을 꺼냈다.

붉은 것보다 순도 높은 기운을 지닌 생체 마석.

난 이것에 기대를 걸었다.

푸읍!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을 애써 삼켰다.

보랏빛 보석을 빻아 소량을 입에 털어 넣고 벌어진 일이었다. 손으로 양어깨를 꽉 움켜잡고 있었는데, 손톱이 파고들면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커커커컥!"

결국, 난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쌍코피도 주르륵 흘러나왔다.

어깨에 파인 상처를 의식도 못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신경독에 당한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았다.

'…시발!'

욕이 절로 새어 나왔다.

붉은 보석은 보랏빛 보석에 비하면 순한 양이었다.

이놈은 흡사 본능에 미친 짐승 같았다.

복용한 순간부터 이성이 흐릿해지고, 마나가 온몸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정신 방벽과 정화 능력이 아니었다면 미치거나, 온몸이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복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진짜 오늘만큼은 내 능력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통이 사라졌다.

난 질질 흘린 침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바닥에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탈력감은 무슨, 전기 고문을 한 시간 정도 받는 것 같았다.

피카츄의 백만 볼트 공격이 이런 맛일까.

"효, 효과는 죽이는데...."

전보다 진득해진 기운.

몸 안에 휘도는 마나가 제법 거세다.

3성으로 가는 희망을 보긴 했는데, 이 끔찍한 고통을 또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남은 양을 보니, 서너 번은 더 가능할 것 같은데.

이것으론 부족하겠지?

쉽게 얻는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건가.

또 복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가루 주머니를 챙겼다.

"...하."

아지트로 돌아온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철퍼덕 누웠다.

탈력감보다 더 지독한 무력감이 나를 찾아왔다.

보라색 보석을 복용한 후유증.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냥 쉬고 싶었다.

두 눈을 감은 순간, 내 의식은 저편으로 날아갔다.

* * *

"이봐."

"...."

"어서 일어나라."

머리를 세차게 두드리는 감각에 겨우 잠에서 깼다. 부스스 눈을 뜨니, 시퍼런 단검이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설마 그걸로 때린 거야?

난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복면을 썼지만, 호리호리한 체구.

한눈에 단검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불꽃검 엘튼이었다.

"깨우는 방법 좀 바꾸지? 머리에 구멍 나겠어."

"몸에 문제 있나? 못 일어나던데."

"내가?"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

이 녀석이라면 진짜 그렇게 했을 거 같은데.

난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을 살피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약간 피로감이 느껴지는 정도?

마석의 효과는 확실한데, 생각보다 피로감이 심한 모양이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반나절 정도."

"머리에 구멍을 낼 정도로 급한 일이 뭔데?"

엘튼은 대답 대신 단검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는데, 흠칫하곤 청각에 집중했다.

으어― 으어― 으어―

아지트 숲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괴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저번에 천여 명의 도적들을 한순간에 쓸어간 재앙의 소리였으니 당연했다.

"...설마."

내가 엘튼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39화 베네타의 재앙, 아레나 후아튼

짝―!

두 뺨을 매섭게 때렸다.

얼얼함과 함께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상황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코앞에서 키메라 소리가 들리는데?"

사방에서 괴성이 흘러나오고,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튼은 고개를 흔들었다.

"산채 쪽이 첫 번째다. 우린 그다음이야."

산채는 가장 피해야 하는 장소라고 칼이 말했었다. 새로 유입된 이들을 미끼로 시간을 버는 장소라 했지?

엘튼의 말처럼 들려오던 괴성은 점점 멀어졌고, 숲의 움직임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후,

끄아아아악―!

산채 방향 멀찍이서 비명이 하나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메라 군단의 수거 작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자, 받아."

엘튼은 내게 보랏빛 병을 건넸다.

베텔의 독이다. 이 독을 복용하고 쥐 죽은 듯 숨어 있으면 키메라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칼 일행에겐 목숨 줄 같은 물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사용할 일이 있을까?'

내겐 고대 문양의 힘이 있다.

키메라에게 잡혀갈 걱정은 없을 거란 뜻이며, 오히려 난 이 힘을 통해 키메라를 어떤 식으로 사냥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보랏빛 마석이 더 필요했고, 그 마석을 지닌 키메라는 보통 키메라보다 훨씬 강력했다.

간을 보다가 사냥할만하다 느끼면 시도해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혼자 움직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두었는데, 엘튼이 갑자기 함께하자며 곁에 머물렀다.

"난 숨을 생각이 없어."

"상관없다."

"혹시 칼의 명령이냐?"

"널 보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역시, 엘튼 스스로 이런 판단을 내렸을 리 없지.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칼을 찾았다. 칼은 일행을 빠르게 모으고 있었다.

칼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은 이유는 이곳에 숨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칼은 현재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이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불안했나 보네.'

나 홀로 탈출해버릴까 봐, 엘튼을 붙인 것이다. 아마 엘튼도 그에 대해서 언질을 받았을 거다.

"감시하라냐?"

"...."

"너한테 말해봤자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칼에게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칼은 입맛을 다시곤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왜 왔는지 아는 눈치.

알면서도 붙인 게 분명했다.

신뢰를 보이려면 말보단 행동이지.

"이 팔찌를 벗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벌레가 죽지 않겠지."

"다시 심장으로 이동한다거나, 터진다거나 그런 거 없습니까?"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팔찌를 풀어 칼에게 툭 던졌다. 얼떨결에 팔찌를 건네받은 칼은 살짝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팔찌는 이따가 다시 받아 가겠습니다. 저번처럼 잊어먹지나 마세요."

"...."

힘겹게 칼과 신뢰를 쌓아놨는데, 그 인연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 탈출은 진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나 고려할 일이었다.

칼은 말없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내 행동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한 번쯤 믿어보라니까요. 가보겠습니다. 머리털 안 보이게 잘 숨어 계세요."

"엘튼을 데려가."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면서 도둑질이나 하겠지."

"암살자 말고 돗자리나 까시죠. 돈 많이 버실 것 같은데."

"딴소리 말고 데리고 다녀. 나한테 한번 믿어보라고 했지? 엘튼은 내게 그런 녀석이다."

숨긴 능력을 엘튼에게 보여도 문제가 없을 거란 믿음이었다. 칼이 저렇게 믿을 정도면 입이 무거운 인물이란 소리겠지?

'하긴 고지식한 성격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긴 하지.'

불꽃검 엘튼은 학살자도 탐을 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학살자가 내민 그 어떤 유혹도 마다하고 끝까지 칼을 모시며 그 곁을 지켰다.

암살자보단 기사에 어울리는 인물.

데려갈까?

엘튼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면 혼자보단 두 명이 키메라를 사냥하기 수월했다. 게다가 엘튼은 자신보다 더 강한 실력자.

안전도 보장받고, 힘도 빌릴 수 있는 믿음직한 조력자를 구하는 게 어디 쉬울까.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칼은 미소를 짓곤 팔찌를 내게 다시 던졌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칼은 등을 돌리고 성큼 걸어갔다. 나름 멋져 보이는 퇴장이긴 한데 말이지.

난 그런 칼의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왜?"

"제 가방이요."

"...."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강탈한 가방은 뛰어난 충격 흡수와 방수, 내열 기능이 탑재된 마법 물품이었다.

칼이 유독 탐을 냈는데 살펴본다고 하더니,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가방이 나한테 있었나?"

"등에 메고 있으면서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하죠."

"큼!"

달라고 안 하면 끝까지 안 줄 생각이었나 보다.

보라색 마석은 주먹 크기라 보관하려면 가방이 필수였다. 난 가방을 뺏다시피 가져와서 안을 살폈다. 그러곤 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 시선에 칼은 헛기침하곤 품에서 마녀의 목걸이와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도둑으로 전직하실 생각입니까?"

"신기한 물건들이라 잠깐 살펴본 것뿐이야."

"...."

"그 스크롤은 뭐에 쓰는 거지?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던데."

난 진회색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찢는 순간, 나비 떼가 허공을 수놓는 축제용 환상 스크롤.

공격용으로는 1도 상관없는 관상용 마법이 담긴 것인데,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하고 잠시 잊고 있었다.

"생존 물품이요."

"뭐? 생존?"

"그런 게 있습니다."

난 스크롤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건데, 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궁을 등에 메고, 볼트 꾸러미를 허리춤에 찼다. 칼은 미련이 남은 듯 가방에 시선을 한 번 주고 등을 돌렸는데, 난 그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

칼이 말없이 노려보자 난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이건 단순한 감이었다.

"붉은색 마석은 괜찮은데, 그 외의 것은 모두 제 겁니다."

칼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엘튼을 바라봤다. 엘튼이 억울한 듯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는데? 내가 그 소문에 관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엘튼을 자꾸 붙여준다고 할 때부터요."

"그 소문 말이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저도 귀가 있거든요? 여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난 칼의 부름을 무시하고 반대편 숲으로 빠르게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엘튼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시기상 소문이 퍼질 타이밍이기도 했고, 칼이 집요하게 엘튼을 붙이려고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나 칼이 생체 마석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학살자가 퍼트린 소문이 칼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건, 마석에 관한 소문이 에토르에 퍼질 대로 퍼졌다는 뜻인데.'

―마나 각성에 엄청난 효능을 보이는 마나 촉매제.

악마의 보석.

이 소문으로 에토르는 지금 생체 마석 수집에 눈이 돌아간 상태일 것이다.

다만, 10명 중 7명 정도가 광인(狂人)으로 전락해 미쳐 날뛴다는 치명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

학살자가 심은 탐욕과 무지의 씨앗이 에토르 영지 내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에토르에겐 몰락의 징조였다.

왼쪽 손목에 팔찌를 도로 차며 생각에 잠겼다.

'에토르까지 숲에 진입하면 도미닉은 도주각을 잡을 거야.'

토바른의 3강.

블라이어, 에토르, 베네타의 3방위 압박은 아무리 도미닉이라도 버티기 어렵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한곳에 집결시키고, 계승자의 신전으로 시선을 돌리는 타이밍.'

그때가 내가 끼어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난 비명이 터져 나오는 방향으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직 그 타이밍이 도래하려면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3성에 올라야 해.'

어둠이 찾아온 밤.

드넓은 숲 그림자 사이로 나와 엘튼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 * *

에토르에서 하루 남짓 거리에 있는 라웁 숲의 동남쪽 숲.

차르륵―

중년인은 책장을 부드럽게 넘겼다. 안경이 살짝 흘러내리자, 안경을 바로 세운 그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숲 사이, 작은 바위에 편히 걸터앉아 독서하는 모습만 본다면, 산책 도중 여유를 즐기는 취미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 괴...! 끄아아악―!"

"사, 살려줘!"

비명이 가득한 숲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눈앞의 참극과 큰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콰작―! 콰자작―!

살점 뜯기는 소리.

핏방울이 안경에 튀자, 중년인은 두 눈을 깜빡이곤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로브 자락에 쓱쓱 닦으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이 온통 붉다.

찢긴 살점과 흘러내린 핏물은 이 주변 숲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뚫리면 다 죽어! 다 죽는다고!"

"마, 막아!!!"

발악 섞인 처절한 외침.

도미닉의 시선은 소리가 난 곳에 닿았다.

키메라 군단에 빽빽이 포위된 대규모 용병단이 보였다. 키메라를 노리고 들어왔다가 역으로 포위된 자들. 쉴 새 없이 죽였는데도 대략 2백 정도가 살아남아 악착같이 저항했다.

"인간들의 생존 욕구인가?"

도미닉의 눈에 그들은 덫에 걸린 쥐새끼들처럼 보였다. 아니, 곧 실험체로 쓰일 실험쥐들인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책에 다시금 집중했다. 정리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콰아아앙―!!

갑자기 용병단 사이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용병들의 정신과 체력을 야금야금 빼앗던 키메라 일부가 바깥으로 튕겨 나와 도미닉 근처에 처박혔다.

"...."

즉사한 키메라들의 상처를 확인한 도미닉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 폭음이 터진 곳에 닿아있었다. 포위망 일부가 누군가의 공격에 틈을 보였다.

그 틈 사이로 키메라 체액을 뒤집어쓴 용병 하나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포위망이 뚫렸다.

"타앗―!"

용병이 휘두른 검에 키메라들은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검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아지랑이, 유형화된 오라.

"쥐새끼들 사이에 늑대가 있었나?"

4성 용병이 무리 안에 있었다.

"다, 단장님이 빠져나가셨다! 조금만 버텨!"

"저 미치광이만 죽이면 희망이 있다고!"

희망에 찬 용병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용병 단장은 온몸에 아지랑이를 퍼트리며 도미닉을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도미닉을 노려보던 단장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검 자루를 까득 움켜잡았다.

"이 개자식! 다 말하면 살려준다고 했잖아!"

"살려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포위된 이들 중에 죽은 이가 있습니까?"

"우릴 지치게 한 뒤 어쩌려고!?"

"영생을 누리게 해드리겠습니다."

"뭐, 영생?"

"키메라와 한 몸이 된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히."

"미, 미친 새끼가!!!!"

의뢰주와 의뢰 목적을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거짓말이었다.

용병은 마나를 터트리며 도미닉의 심장을 향해 검 끝을 내밀었다.

도미닉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나직이 달싹였다.

"아레나."

그 부름에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인영이 도미닉 앞을 막아섰다.

늘어트린 양 로브 자락은 맨손이었고, 도미닉보다 작고 왜소했다.

살벌한 용병의 기세 앞에서 로브가 들춰지는 순간, 소녀가 얼굴을 비쳤다.

무표정의 소녀.

아레나 후아튼이었다.

40화 어디 실력 좀 보자

소녀를 본 용병 단장은 이를 악물었다.

저 여린 외모를 우습게 봤다가 찢겨 죽은 부단장들을 여럿 봤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갑옷째 생살을 찢어버리는 악력, 저 소녀는 인간의 탈은 쓴 괴물이 분명했다.

"괴물 같은 년!!"

전력을 다한 묵직한 검격!

소녀는 몸을 옆으로 살짝 비틀며 팔뚝을 들어 올렸다.

푸욱―!

왼쪽 팔뚝에 검이 박힌 순간, 소녀는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용병의 심장을 향해 남은 손을 뻗었다.

잔상이 보일 정도의 속도.

손은 그대로 용병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 커억!"

피를 울컥 토하는 용병을 잠시 바라본 소녀는 천천히 용병의 심장을 뽑아냈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소녀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그녀가 손에서 펄떡이는 심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때, 용병의 목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용병들의 외침은 비명이 되고, 곧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단장이 죽자, 용병단은 패닉에 빠졌다. 그들은 더는 뭉치지 않고, 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포위망에 갇힌 용병들은 결국 키메라들에게 모조리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아아악―!"

"사, 살려…!"

처절한 풍경을 자아내는 지옥도.

잠시 후, 공터가 된 숲은 끌려간 핏자국들의 흔적만 가득했다.

"아레나, 조심해야지."

도미닉은 피로 얼룩진 아레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소녀의 꿰뚫린 팔뚝을 살펴보더니 치료하기 시작했다.

팔뚝의 찢긴 살점을 뜯어내고, 파열된 근육을 끄집어냈다.

인간이라면 버틸 수 없는 지독한 고통.

하지만 소녀는 멍하니 멈춰있는 심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치료를 끝낸 도미닉은 소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지닌 갈색의 머리카락은 묘한 위화감을 불러왔다.

"금방 괜찮아질 거다. 사랑하는 내 딸아."

훗날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고 '백(百) 개의 심장'으로 불릴 베네타의 재앙.

그의 역작으로, 도미닉은 자신의 친딸마저 키메라로 제작하면서 미치광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뼈마저 드러났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재생력이 뛰어난 몬스터, 트롤의 유전자를 신체에 섞어놨기에 보일 수 있는 효과였다.

그것도 잠시, 상처에도 끄떡없던 아레나가 불현듯 축 늘어졌다.

도미닉은 주머니에서 보랏빛 보석을 꺼내 아레나의 입 속에 넣었다.

그녀의 입 안에서 보랏빛이 반짝였다. 빛이 사그라들며 마석이 입 안에서 녹았을 때, 그녀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멀쩡히 도미닉 곁에 자리를 잡았다.

도미닉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마석 유지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육체가 보랏빛 마석으로 더는 유지하기 힘들 만큼 발전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도미닉이 가진 지식으로는 육체가 완전체에 다다랐다는 뜻인데, 문제는 이 육체를 지탱할 신(新)동력 원천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수량을 늘려 시간을 벌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군.'

도미닉은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는 오백에 달하는 대규모 용병들이 매복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네타에 이어 에토르까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에토르의 군주, 톰자엘 자작의 의뢰라.'

구석까지 내몰린 용병들을 구슬려 정보를 얻었는데,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만한 내용을 접했다.

'마나 촉매제 악마의 보석이라, 생체 마석의 비밀이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토바른 전 지역에 마석의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톰자엘 자작이 어떻게 마석의 존재를 알고 키메라 사냥을 지시한 것일까.

'부작용은 언급도 안 됐단 말이지.'

누군가 노리고 퍼트린 소문이 분명했다.

대체 누굴까? 이 비밀을 파악할만한 녀석들이.

'그들인가?'

며칠 전 라웁 숲 서쪽에서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난 키메라들을 떠올렸다. 키메라들이 반수 이상 돌아오지 못했는데, 에토르에 풀린 붉은 마석을 설명하려면 그곳밖에 없었다.

의문의 주술사 집단.

자신이 움직이려고 하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려는 모습인데, 그 주술사들이라면 생체 마석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응이 너무 빨라.'

마석의 비밀이 퍼지면서 라웁 숲을 낀 영주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특히 베네타가 가장 문제였다.

용병단 규모를 보내는 다른 곳과 달리 베네타는 군주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한 달 정도 생각했던 실험체 수거 계획이 보름도 안 돼서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도미닉의 머리에 후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실험체들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굳이 위험하게 충돌할 필요가 있을까.

일정 수의 키메라를 미끼로 던지고 시간을 버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마석의 부작용을 경험한다면 주춤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크리스탈 미믹(Mimic)의 탐욕치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어. 곧 손을 볼 때이긴 한데….'

십 년 전, 클라크 대공의 추격을 피해 라웁 숲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숨어들어 왔을 때, 무너진 절벽 틈새에서 흉물스러운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낡은 상자는 자신을 고대 시절 미믹이라 소개했고, 높은 지능을 가진 상자는 도미닉과 말이 통했다.

생체 마석은 미믹이 실험체를 먹고 토해내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이종 사냥을 한 이유이기도 했다.

보랏빛 마석을 보상으로 받으려면 이종의 혈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받게 되는 고대의 지식까지.

크리스탈 미믹이 없었다면 지금의 키메라도, 도미닉도 없었다.

그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

그리고 사냥할 존재이기도 했다.

'신(新)동력 원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크리스탈 미믹이 지닌 '그것'이라면 자신과 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클라크 대공에게 복수를 시작할 수 있다.

도미닉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고서(古書)를 떠올릴 정도로 두껍고 무거웠지만, 그는 한 손으로 편히 지탱했다.

"아레나, 실험체 감옥들을 폐쇄해야겠다. 마무리 작업을 시작해라."

그 지시에 처음으로 아레나가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녀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동시에,

쿠오오오오오오오―!!!!!

숲 전역이 키메라들의 괴성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설치된 실험체 감옥으로 수거책들이 방문을 시작했다.

도미닉은 아레나와 함께 바위에 걸터앉았다.

키메라 군단은 크게 둘로 나뉜다.

수거책과 사냥책.

조금 전 사냥을 끝낸 키메라들이 감옥에서 돌아오면 미끼로 일부를 남겨두고 연구실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후퇴를 염두에 둔 작업.

아레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도미닉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곧 막바지다."

도미닉은 책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키아아아아아―!

코앞까지 들려오는 괴성.

엘튼을 향해 정지 신호를 보냈다.

나무를 타고 숲 위를 빠르게 이동 중이었는데, 스쳐 가는 나뭇가지 아래로 어지러운 기척들이 느껴졌다.

키메라 떼 사이로 사람들은 혼이 나간 듯 도망치고 있었다.

"고, 괴물…!"

"이것들 뭐야! 갑자기 어디... 아악!!!!"

거칠게 날뛰며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낚아채 가는 키메라들.

인간보다 키메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잡히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이제 어쩔 거지?"

"뭐가?"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목적이라, 있긴 있지. 따라와."

일단 산채로 가볼 생각이다.

산채 주변에 도착한 우리는 나무 위에 숨어 주변을 둘러봤다.

숲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인파가 보였다.

2천? 3천?

저번의 도적 떼보다 훨씬 더 많은 수 같았다. 칼의 말처럼 도미닉이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잡아 온 모양.

도망치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주변인들을 미끼로 삼았다.

함께 달리는 일행을 넘어트렸고, 무기로 동료들의 다리를 찔렀으며, 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돌을 던져 멈추게 했다.

역시나, 정의는 없다.

가장 먼저 잡혀서 끌려간 이들은 약한 자들이었다.

이전이라면 씁쓸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을 거다.

필요했다면 도움을 줬을지도.

하지만 이젠 상황을 맞춰가며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겼다.

난 잡혀서 끌려가는 인간들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에 엘튼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설마 구하려고?"

"아니."

전부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저들의 구출은 내 생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럼 왜?"

"키메라들이 벗어나는 장면을 보려고."

"마법진 밖으로 말인가?"

"그래. 본 적 있어?"

엘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가 한 곳을 가리켰다.

결계 끝에 다다른 키메라들이 보였다. 키메라들은 잠시 멈춰서 붙잡은 사냥감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러곤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사라지는 키메라들.

방향 없이 경계 어디서든 똑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미간을 좁힌 채 엘튼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저곳으로 몸을 날려봤지만, 공간만 바뀔 뿐 나갈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슬라임에게 잡아먹혀서 죽을 뻔했지.

하지만 키메라는 마법진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특징이 있다."

"특징?"

"하나같이 잡은 이들을 삼킨 후 사라진다는 거다."

"결국, 입구가 아닌 키메라가 마법진 바깥으로 나가는 매개체라는 거네."

키메라와 우리 사이의 차이가 뭘까.

며칠 전에 마석을 들고 경계를 넘어본 적이 있는데, 실패했다.

마석과는 상관없다는 뜻.

고민도 잠시, 나무 바로 아래쪽에서 이족 보행으로 어슬렁거리는 놀 세 마리를 발견했다. 아니, 놀을 닮은 키메라였다. 양쪽 팔에 각기 다른 몬스터 팔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소형 키메라는 대부분 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라웁 숲 전역에 놀의 개체 수가 가장 많기에 그런 것 같았다.

'슬슬 간을 봐볼까.'

내 목적은 거대 키메라를 잡아 보랏빛 마석을 수집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어디 실력 좀 보자.'

불꽃검 엘튼.

그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난 엘튼을 바라보며 수신호를 보냈다. 놀들을 공격하라는 신호.

그 신호에 엘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칼이 마석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야?"

"...."

내 미소에 엘튼은 인상을 구기곤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날렵하게 나무 밑으로 몸을 던졌다.

엘튼이 움직인 순간, 난 석궁을 꺼내 볼트를 장전했다.

그러곤 엘튼이 막 교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퉁―!

끼에에에에에엑!

볼트에 맞은 놀 키메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에 숲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이 몰려온다.

엘튼은 기습으로 한 마리를 태워 죽인 후 나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미친 짓이냐는 시선이었다.

난 그런 그를 향해 수신호를 날려줬다.

'버텨.'

"이 미친 새끼가!!!"

그냥 테스트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지.

엘튼 같은 강력한 미끼가 있으면 사냥은 배로 쉬워진다.

'화내려면 칼에게 화내라고. 그한테 배운 거니까.'

나뭇잎 사이에서 기척을 죽인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곳을 응시했다.

멀찍이서 유독 크게 흔들리는 숲 방향.

거대한 놈이 오고 있었다.

41화 포위당했다

순식간에 키메라들이 몰려왔다.

키메라들에게 포위되자, 엘튼은 특성의 힘을 개방했다. 작은 개체뿐이지만 수가 많아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화르륵―!

입술을 깨문 채 그는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노출된 암살자는 더는 암살자가 아니다. 엘튼은 마치 전사처럼 키메라 무리와 싸웠다.

검날을 타고 뻗치는 이글거리는 불꽃.

불꽃은 모든 것을 태울 듯 사납게 일렁였다. 불꽃에 베인 키메라들은 불에 삼켜지며 발버둥을 쳤다.

매캐한 냄새가 숲을 가득 채웠다.

"헉. 헉. 헉…."

그을린 재로 화한 키메라들.

엘튼은 단검을 내리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특성 발현에는 많은 체력을 소비한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망할 새끼!'

엘튼은 나무 위를 노려봤다. 버티라는 신호만 남기고 사라진 녀석. 이 주변에 있는 것 같은데, 도움은커녕 구경만 하고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엘튼은 칼의 눈을 믿었다.

이리 자신을 미끼로 던져놓고 무책임하게 움직일 녀석이 아니었다. 계획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식의 계획은 사절이었다.

퉁―!

"...!"

녀석이 나무 위에서 석궁을 쐈다.

엘튼은 볼트가 떨어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거진 숲 바로 앞에 박힌 볼트.

마치 조심하라는 듯 경고를 날린 느낌이었다.

쿵. 쿵. 쿵. 쿵.

"...뭐?"

볼트가 부르르 떨리며 지축이 거칠게 울렸다.

박힌 볼트 쪽 숲이 양 갈래로 쩍 갈라지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앞으로 돌진해왔다.

빠르다!

엘튼은 몸을 옆으로 날렸다.

크아아아앙―!

가슴을 쿵쿵 치며 괴성을 터트리는 압도적인 거체.

5미터에 이르는 대형 몬스터, 오우거의 형체를 띠었지만, 그보다 배는 비대한 몸통에 팔이 여섯 개나 달린 괴생명체였다.

크고 흉측하다.

엘튼은 짓쳐 오는 팔들을 회피하며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피부에 그슬린 자국만 남을 뿐,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화력 부족.

특성이 안 통한다.

"…큭!"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칼을 단숨에 삼켰던 거대 슬라임과 같은 등급의 키메라. 위의 녀석이 합류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

엘튼이 다급히 외치며 몸을 빼려는 찰나, 사방에서 팔들이 쏟아졌다.

결국, 팔 하나가 엘튼을 벼락같이 낚아챘다. 잡힌 순간 지독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완력으로 풀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빌어먹을!"

욕설과 동시에 허공에 뜬 엘튼은 쩍 벌어진 입 속을 구경했다.

먹힌다!

엘튼의 표정이 급박함으로 물들었을 때, 그를 삼키려던 키메라가 멈칫했다. 올려다본 시선으로 눈부신 물체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웅―!

빛을 머금은 두 발의 볼트.

관통의 힘이 실린 볼트는 엘튼을 지나쳐 부릅뜬 키메라의 눈동자를 무참히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악―!

키메라가 고통을 지르며 엘튼을 집어 던졌다. 나무에 처박히려는 엘튼을 누군가 부드럽게 받아냈다.

녀석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워, 진정하라고. 저런 무식한 괴물이 나올 줄 누가 알았나?"

"이따 다시 얘기하지."

엘튼은 거칠게 나를 밀어내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키메라를 빠르게 살폈는데, 키메라는 두 눈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쓰러트린 건가?"

"글쎄, 아직 확신하긴 일러."

"뇌까지 타격이 간 것 같은데."

두 발의 볼트가 정확히 두 눈동자를 관통했다. 엘튼의 말처럼 뇌까지 휘젓고 들어갔을 거다.

애초에 노린 것이긴 한데.

뇌가 곤죽이 됐다면 보통은 즉사하겠지만, 눈앞의 괴물은 시체들을 이어 붙인 키메라였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이고, 그 말은 곧 사실로 다가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놈이 보인다. 눈동자가 파괴됐음에도 놈은 정확히 우리 쪽으로 몸을 튼 채 그르렁거렸다.

쿵쿵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

엘튼은 질린 듯 신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물러나자는 뜻.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이 아니면 거대 키메라를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조금 전 전투를 지켜보며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아.'

수거 명령이 내려진 키메라는 실험체를 죽이지 않는다.

삼키는 행위는 실험체를 마법진 바깥으로 꺼내기 위함이지 잡아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숲 바깥에선 저 주먹에 곤죽이 될 테지만, 이곳에서 저놈의 패턴은 삼키는 행위로 정해져 있었다.

지금이 사냥 기회.

첫 번째 기습에서 처리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계획했던 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저놈이 쓰러지면 날 찾아서 꺼내줘."

"뭐? 그게 무슨…!"

엘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단검을 움켜쥔 채 거대 키메라를 향해 돌진했다.

설명은 사치다.

듣는 순간, 날 미친 또라이 새끼라고 할 테니까.

후―

짧게 숨을 내뱉곤 오른쪽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오른손 문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떨렸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고대 문양의 능력을 믿는다.

나는 이를 악물곤 키메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못생긴 괴물 새끼야! 식사 시간이다!"

뒤쪽에서 엘튼의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저 녀석 눈에는 내가 자살특공대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합리적인 움직임이라고.

'이미 한 번 증명된 방법이기도 하고.'

허공에서 날 덥석 움켜잡은 녀석은 본능적으로 날 집어삼켰다.

씨발, 괴물 아가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라니.

알고 있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다.

예상대로 놈은 씹지 않고 날 그대로 꿀꺽 삼켰다.

좁은 통로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끈적이는 체액이 내 몸을 뒤덮었다.

불쾌한 감촉과 역겨운 냄새, 그리고 서서히 무뎌지는 감각.

슬라임 때처럼 몸이 마비됨을 느꼈다. 키메라의 체액은 이렇듯 실험체를 마비시키는 건가?

꿀렁이는 목구멍을 지났을 때, 팔다리가 저릿했다. 몸이 굳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꿀렁―

공간이 있는 피부 벽에 철퍼덕 쓰러진 순간 단검이 번뜩이며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인챈터의 능력.

관통의 기운이 실린 단검으로 피부 벽을 힘껏 찌른 나는 단검을 움켜잡곤 두 눈을 부릅떴다.

"크아아아아!"

번쩍!

손목에 새겨진 문양에서 황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아."

엘튼은 입을 벌린 채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된 것 같았다.

키메라의 입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미친 새끼.

이 상황을 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란도 잠시, 괴성을 듣고 빠르게 몰려드는 키메라 무리에 엘튼은 흠칫하곤 다급히 주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거대 키메라도 벅찬데 사방이 키메라로 빠르게 채워지는 상황.

동료의 구조는커녕 자신의 안위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어떡하지?'

엘튼이 이도 저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번쩍―

"...!"

갑작스러운 빛무리.

엘튼은 황급히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그 틈 사이에서 엘튼은 빛의 진원지를 찾았다.

쩍 벌어진 거대 키메라의 입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무슨!?"

쿵―!!!!!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었다.

키메라의 입에서 황금빛이 터진 순간, 키메라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몰려오던 키메라들도 무슨 이유인지 괴성을 지르며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동체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

순간,

[저놈이 쓰러지면 날 찾아서 꺼내줘.]

녀석이 떠나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튼은 다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쓰러진 키메라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동체 위에 오른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삼켜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빛이 터졌다. 키메라의 목과 가슴 부위에 귀를 대고 있던 엘튼은 멈칫했다.

무언가가 안에서 두드리는 감각.

녀석이다!

그는 단검을 꺼내 갈비뼈 아래 가죽을 힘껏 찔렀다.

"이익!"

5m가 넘어가는 동체.

가죽이 질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은 키메라 가죽을 가르는 건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피부를 갈라 손바닥 크기의 틈을 만들고, 틈 사이로 양손을 넣어 젖 먹던 힘으로 틈을 벌렸다.

흉물스러운 키메라의 내장이 드러났다. 안쪽을 살펴보니, 내장은 갈가리 찢겨 엉망이 되어 있었다. 녀석이 안에서 몸부림친 흔적.

"이, 이봐!"

그 살덩이들에 파묻혀 있던 녀석을 발견하곤, 엘튼은 그를 힘껏 끄집어냈다.

녀석은 정신을 잃은 채 의식이 없었다.

눈에 띄는 건 한 손에 움켜쥔 보랏빛 보석이랄까.

엘튼은 그를 업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끈적이는 체액을 뒤집어쓴 모습. 고약한 냄새에 엘튼은 얼굴을 구기곤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미약한 숨결이 느껴지자, 그는 가슴을 여러 차례 압박하며 힘껏 후려쳤다.

"…커억!"

반응이 나타났다.

녀석이 정신없이 기침을 토하며 내장 조각을 뱉어냈다.

"정신이 좀 드나?"

"헉, 헉, 헉… 시발, 뒤질 뻔했네."

난 목구멍에 걸린 살점 덩어리를 뱉어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키메라를 쓰러트리고 마석을 취하는 것까지 계획대로 흘러갔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놈이 죽자, 호흡이 턱 막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키메라의 숨구멍이 막히면서 호흡 곤란이 온 것인데, 엘튼이 조금만 늦었다면 처음으로 괴물 배 속에서 질식사하는 인간이 될 뻔했다.

"덕분에 살았다."

"대화는 잠시 미루고 일단 움직여야 해. 또 몰려온다."

엘튼은 나를 부축한 채 단검을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르―

빛이 사그라들고 잠시 후, 주변을 서성이던 키메라들이 피 냄새를 맡고 다시금 몰려들었다.

녀석을 끄집어내기 위해 시간을 너무 소비한 것 같았다. 사방이 키메라들로 가득했다.

포위당했다.

"산 넘어 산이로군."

"날 업고 그대로 달려."

"저것들 사이로?"

"날 믿어."

조금 전 황금빛을 떠올린 엘튼은 군말 없이 날 업고 키메라 무리 사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칼이 언급했던 내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 기대에 보답했다.

파아아아앗―!

빛이 터진 순간, 키메라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쭉 갈라졌다. 빛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지독히 꺼리는 몸짓이다.

그 반응에 난 확신할 수 있었다.

'키메라들에게 능력이 완벽히 먹힌다.'

거대 키메라를 잡으면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능력이 완벽히 증명됐다.

도미닉이 제작한 키메라들을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면 계승자의 신기를 노려볼 만한데.'

아레나 후아튼의 동력 원천, 레토니칼스의 심장.

실험체 감옥에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심장을 훔칠 계획을 떠올리긴 했지만, 시도는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미닉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키메라를 무력화할 카운터가 생겼다.

불가능한 도박에서 목숨을 걸어볼 만한 도박으로 바뀐 것이다.

'불사자의 심장이라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지.'

강력한 독 저항력, 지치지 않는 체력,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초재생력.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백(百) 개의 심장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심장의 능력을 얻게 되면 앞으로 살아남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다.

'눈덩이는 굴릴수록 커지듯,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속도에서 차이가 벌어질 거야.'

학살자는 물론, 앞으로 등장할 재앙 같은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계승자의 신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획득만 한다면 생존 난이도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남았다.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없어.'

아레나 후아튼.

그녀가 문제였다.

거대 키메라의 경우엔 몸속에서 빛을 터트렸기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레나 후아튼은 인간형 생체 병기였다. 덩치가 나보다 작은 키메라였기에 빛은 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치고 빠지다가 주먹 한 번 휘두르면 그대로 즉사.

그녀의 괴력은 기사조차 갑옷째 찢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도미닉을 제거하려면 그녀를 뚫어야 하는데, 그녀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 퍼즐만 풀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 가장 큰 산이네.'

"이봐!"

"아…!"

신경이 딴 데로 쏠린 사이 빛이 옅어지자, 키메라들이 바로 이빨을 들이밀며 개미 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빛을 바로잡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딴 생각 할 때가 아니었다.

피 냄새를 맡고 온 키메라들이 엄청나게 몰리면서 사방이 키메라 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방심한 순간, 잡혀갈 게 분명했다.

주변에 도망치던 인간들은 모조리 잡혀간 듯 키메라들의 시선은 나와 엘튼에게 몽땅 쏠려 있었다.

지옥에서 온 아귀가 따로 없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엘튼, 이 정도면 키메라들이 슬슬 물러날 시간 아니야?"

"이미 물러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난 엘튼의 등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키메라가 더 몰리는 느낌이지?"

뭔가 이상했다.

42화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껏 일정 수의 인간들이 잡혀가면 키메라들은 만족한 듯 감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 키메라들은 완전히 끝장을 볼 것처럼 덤벼들었다.

딱! 딱! 딱!!

빛을 피해 아가리를 들이미는 키메라들. 섬뜩한 이빨이 허공을 한가득 채웠다.

"빌어먹을! 이것들 왜 이래!"

나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포위망을 뚫고 달린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키메라들이 눈에 밟혔다.

바위 뒤에도, 숲 사이에도, 냇가 주변에도, 뒤에서 맹렬하게 뒤쫓는 키메라 무리뿐 아니라 사방에서 키메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망치던 인간들은 씨가 말랐고, 이 공간에는 나와 엘튼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쫓아오는 키메라의 수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 엘튼의 자세도 흐트러졌다.

"괜찮아?"

"아직은...."

엘튼은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은 무척 지쳐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난 이를 악물고 빛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유지에도 마나와 체력이 필요했다. 체력이야 엘튼에게 업혀 가는 상황이니 아낀다 쳐도 마나는 고작 2성일 뿐이었다.

빛 유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둘러 쉴 곳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딱히 숨을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키메라들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베텔의 독이 효과를 보이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10분."

"빌어먹을, 더럽게 오래 걸리네."

"지금 상황에서 숨는 건 무리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결국, 엘튼이 결단을 내렸다.

"내가 시선을 끌겠다. 넌 그 사이에 도망쳐."

"지랄하네. 주변을 봐봐. 이게 지금 한 명이 시선을 끈다고 되는 상황으로 보여?"

"...."

"닥치고 경계 쪽으로 가."

"경계?"

"방법이 없다면 운에 맡겨야지."

내 의도를 눈치챈 엘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를 파고든 순간,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 무작위로 이동되는 현상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내 운빨은 최악이었기에 난 엘튼의 운빨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서둘러!"

서서히 흐릿해지는 빛무리.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내 마나가 어느새 바닥에 다다르고 있었다.

빛이 껌뻑껌뻑하자, 키메라들의 접근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큭!"

어깨와 등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

할퀴고 간 횟수가 점차 많아졌다.

엘튼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마법진 경계는 다행히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칼이 표시해둔 경계선이 보였고,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뛰어!"

엘튼이 나를 업은 채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허공에 뜬 우리는 그대로 마법진 경계를 넘었다.

공간이 비틀리는 감각.

감옥 내 어딘가로 이동됐다.

허공에 뜬 순간, 우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주변을 서둘러 살펴야 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없어! 어서 서둘러!"

주변에 키메라가 보이지 않는다. 난 베텔의 독을 꺼내 들며 빠르게 엘튼을 바라봤다. 독을 사용해 몸을 숨길 절호의 기회.

하지만 자빠져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본 엘튼은 헛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있다. 빌어먹게도."

펄럭―!

"...!"

거친 날갯짓 소리에 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한 존재를 발견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이런 시발…."

성인 아나콘다도 새끼 뱀으로 보일 법한 거대한 뱀 형태의 괴물이 여러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전에 봤던 그 거대 키메라였다.

늑대 무리를 피해왔더니, 호랑이와 마주친 격이다.

서둘러 손등을 뻗었지만, 마나가 바닥났는지, 문양은 반응이 없었다.

난 바닥에서 돌을 줍곤 엘튼에게 외쳤다.

"뱀 대가리가 사라지면 넌 베텔의 독을 사용해!"

"자, 잠깐!"

"미끼 역할은 이럴 때 하는 거라고!"

뱀 괴물을 향해 돌을 냅다 던진 나는 숲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놈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는데, 놈의 비행 속도는 생각지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짓쳐 오는 괴물이 보인다.

더럽게 빨랐다.

퍼억―!

삼켜지는 건 피했는데, 놈의 비늘에 부딪히며 허공을 붕 날았다. 바닥을 수십 바퀴는 구른 것 같았다.

"…커억!"

잠시 끊겼던 의식이 돌아왔다. 입 속에 들어온 흙을 뱉어내며 힘없이 바닥을 기었다. 시발, 이젠 진짜 티끌만큼의 힘도 없었다. 발악도 이게 마지막인가?

쉬쉭―

"이, 미친 꼼장어 새끼가…."

괴물의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먹힌다.

먹혀도 죽지는 않을 거다. 연구실로 끌려가겠지. 그 후를 도모해야 하나? 아니, 마비된 상태면 답이 없다. 결론은 뒈진다는 건데, 여기서 콱 죽어버려?

별의별 생각을 떠올리며 힘겹게 몸을 뒤집었다.

근데,

"…응?"

나를 가로막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설마 엘튼?

병신 같은 놈이 도망치지 왜 이곳에....

아니, 그가 아니었다.

엘튼이라고 하기에는 외형이 작았다.

여성스러운 굴곡이 강조된 호리호리한 몸매.

허공에 흩날리는 금발.

그 사이로 드러난 뾰족한 귀.

'뾰족한 귀라고?'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인영의 양팔이 활짝 펼쳐지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번뜩이는 빛과 함께 뻗어 나온 짐승의 발톱. 아니, 무기다. 두 개의 크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으로 물든 두 자루의 크로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무기다.

인영이 몸을 튼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웃고 있는 검은 피부의 다크 엘프를.

"다, 당신...!"

내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

시선을 허공 위로 돌리니, 수십 조각으로 잘린 뱀 키메라가 붉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으악!"

난 살덩이들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다시 두 눈을 깜빡이니, 바로 옆에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녀가 그제야 내 얼굴을 알아보곤 미간을 구겼다.

"1만 골드? 뭐야, 마력 파장을 쫓아왔더니, 네가 왜 이곳에 있어?"

검은 장미 수장, 펜리 체이서.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우리 인연이 제법 깊나 봐? 안 그래?"

곰방대를 뻐끔뻐끔 내뱉으며 만사가 귀찮은 듯 내리깐 눈빛.

저 재수 없는 눈빛을 보니, 확실히 펜리, 그녀가 맞았다.

5성급 실력자의 등장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실험체 감옥에 그녀가 갑자기 왜?

"무, 뭡니까?"

"그러니까. 너 뭐냐? 도망친 거 아니었어?"

"도망쳤습니다."

"1만 골드를 써서 도망친 곳이 여기라고?"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웃긴 물건이네."

펜리는 별 괴상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낄낄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현 상황이 인생 코미디 그 자체인데, 얼마나 웃기겠냐.

이 꼴이 된 데에는 10분짜리 타임 어택을 준 저년의 지분도 상당했는데, 저리 비웃고 있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속으로는 욕을 해댔지만, 그녀 앞에선 최대한 눈치를 봤다. 그녀 곁에 머물면 안전이 보장된 셈이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방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니 더욱 긴장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이곳에 우연히 나타난 것일까?'

답은 '아니오'다.

그녀는 목적 없이 움직일 위인이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사람 하나를 찾고 있어."

펜리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답에서 난 바로 힌트를 찾았다.

'엘프 샤르바딘 실종 사건!'

드워프 도르네프가 펜리에게 의뢰한 샤르바딘 실종 의뢰는 무척 유명한 내용이었다.

펜리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은 유일한 사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의뢰에 실패한다. 그녀가 발견한 건 녹아 문드러진 샤르바딘의 뼛조각뿐이었으니까.

'잠깐만, 이거….'

펜리가 뼛조각을 발견한 장소를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5성급 실력자, 펜리 체이서.

그녀를 본 순간 뭔가 길이 보였다.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풀리지 않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질 것만 같은 느낌.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

"정확히 여자 엘프다. 혹시 엘프를 본 적 있나?"

"엘프라…."

내가 정신없는 틈을 타 그녀는 바로 본론을 물었지만, 난 그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답만 듣고 떠나 버릴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답을 듣기 전에 우리의 안전부터 확보해 주시죠."

"우리?"

난 엘튼을 가리켰다.

거대 키메라는 죽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키메라들의 천국이었다. 안전을 확보하는 게 먼저였다.

"돈도 안 되는 일을 내가 왜?"

"답을 듣기 싫으십니까?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요."

"뭔가 아는 눈치인데?"

"후회는 안 할 겁니다."

"그럼,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면 되겠네?"

"없을 겁니다. 이미 알고 절 구한 거 아닙니까?"

펜리는 가치 없는 일에 절대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전혀 상관도 없는 거대 키메라를 죽이고 날 구했다. 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구한 것이다.

그녀의 기세에 주눅 들지 않고 내가 자신감 있게 받아치자, 그녀는 잠시 곰방대를 피우곤 내 눈을 바라봤다.

무심한 눈빛, 솔직히 쫄린다.

하지만 난 당당하게 마주 봤다.

엘프이니, 내 눈에서 거짓이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거다.

"흐응, 저번 거래에선 웬 호구 하나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너 꽤나 까다롭구나?"

잠시 후, 펜리가 뿌연 연기를 후― 뱉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엘튼!"

난 다급히 엘튼을 손짓으로 불렀다.

엘튼은 다가오지도, 도망치지도, 베텔의 독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곳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펜리의 등장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 모양이었다.

내 부름에 엘튼은 어물쩍 다가와 펜리의 눈치를 보았다.

거대 키메라를 한순간에 조각낸 실력자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펜리는 곰방대를 내 주변에 탁탁 털고 있었다. 재 가루가 반짝이며 머리와 몸 주변에 한가득 묻었는데 난 잠자코 있었다.

얼핏 보면 담배빵보다 더 심한 짓거리를 하는 건데, 난 이 재 가루의 정체가 엘프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프석을 하루에 담배 두 갑씩 피워대듯 소비하고 있으니, 돈에 환장할 수밖에.'

느리지만 확실하게 강해지는 방법.

다만, 돈이 있어도 수급이 어려운 보석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프 종족을 책임지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성장 방법.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마법어가 흘러나왔다.

나와 엘튼은 몸 주변을 신기한 듯 살폈다.

옷 주변에 묻은 가루가 푸르게 물들며 몸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마법이 걸린 겁니까?"

"위장(Camouflage)."

거짓 꾸밈을 통해 잠시 동안 키메라들에게 동족으로 보이게끔 하는 위장 마법이었다.

"머리통이 빈 녀석들이라 속이기 쉽지."

펜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쪽으로 몰려오던 키메라들이 제자리에 멈추더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먹잇감을 찾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효과는 얼마나 지속됩니까?"

"반나절 정도? 이제 네 차례야. 내 물음에 답해야지?"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바위에 걸터앉았다.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목적을 이루려면 그녀의 도움은 필수다.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그녀의 성격을 한번 떠올린 나는 입을 열었다.

"이종들은 봤지만, 엘프는 못 봤습니다."

"...."

내 답에 펜리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예상과 달리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뭔가를 파악하려는 시도 같은데, 소용없다. 단지 진실을 파악하는 것으로 내 속마음을 알 수 없을 테니까.

"거짓은 아닌데, 어째 꼼수를 부리네. 후회는 안 할 거라고? 벌써 후회되는데?"

"대신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움? 네놈이 뭘 알고?"

"엘프를 찾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도와드리겠습니다."

"빌어먹을, 시간만 낭비했어."

펜리는 곰방대를 내려놓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빛이 가라앉은 것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이대로 흘러가면 곤란했다.

그녀는 악당은 아니지만, 철저한 중립 인물, 상황에 따라 악당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와 한 차례 손님으로 인연을 맺었던 건 나에겐 천운이었다.

"검은 장미의 손님만 아니었다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적어도 한 번, 그녀를 설득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니까.

43화 생명의 징표

그녀의 사나운 기세에 엘튼은 무기를 움켜잡고 물러났다. 하지만 난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장미는 웬만해선 손님들과 척을 지지 않아.'

마스터인 그녀가 정한 규칙이었기에 길드의 존속이 달린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내게 살수를 펼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거래를 위해선 대화 포지션이 중요했으니까.

일단 도발부터.

"혼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날 우습게 보는 건가? 네깟 놈이?"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귀가 먹은 놈인가? 네놈이랑 더는 할 말 없어."

"생명의 징표를 원합니다."

"푸하하하!"

그녀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무시로 일관하는 내 태도가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나를 응시했는데, 살기를 억누르는 행위처럼 보였다.

이건 좀 무서운데.

"별 볼 일 없는 놈 주제에 생명의 징표를 다 알고 있어? 듣는 귀가 밝은 모양이네."

"홀로 움직이는 사람 중에는 누구보다 밝은 편이라 자부합니다. 특히 라웁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선 더더욱 말이죠."

귀가 밝다.

정보 획득에 능하다는 말이었다.

[진실]

내 눈을 살핀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입을 열 때마다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데, 담긴 의지에는 거짓이 없다.

전부 진심이라는 뜻인데,

자신을 이리 헷갈리게 만드는 놈이라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놈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구출 대상에 관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도 미련을 남게 했다. 결국, 그녀는 미간을 구기곤 내게 물었다.

"혀가 길면 잘리는 법이야. 핵심만 말해."

"엘프 샤르바딘."

"...."

"그녀를 찾고 있는 거 아닙니까?"

손을 쥐었다 펴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속으로 상당히 놀랐을 거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종들을 봤다고. 추측한 겁니다."

"이종들이 샤르바딘에 대해 말했나?"

"직접 들은 건 아니고, '간접적'으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소설에서 읽은 내용이니, 직접 들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잠시 내 눈을 바라본 펜리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일단 대화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정보 출처에 대해 집요히 파고든다면 곤란했기에 난 서둘러 그녀의 관심을 끌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실종에 관한 소문이더군요. 바깥 외출 후 사라진 그녀를 도르네프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엘프 샤르바딘은 푸른 장미 5층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의 수장이 당신이니 혹시나 해서 짚어본 겁니다."

"정확히 짚었어. 그녀를 찾고 있다."

펜리는 실속을 중요시하는 인물.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의뢰를 밝혔다.

그녀가 직접 움직인 이유는 샤르바딘, 그녀의 가치가 실로 크기 때문이다.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가 질긴 구애 끝에 얻은 하나뿐인 반려.

샤르바딘은 베네타와 검은 장미를 잇는 가교이자, 베네타를 뒷배로 둘 수 있는 정치적인 도구로서 절대 잃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생명의 징표를 원합니다."

"...."

생명의 징표는 그녀가 징표를 준 자에 한해 목숨을 한 번 살려주는 일종의 구원 증표였다.

증표의 주인을 죽이려는 자와 계산 없이 싸워야 했기에 리스크가 무척 큰 대가였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대가다.

그런데도 펜리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나는 샤르바딘의 가치가 예상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나는 서둘러 엘튼을 잡아끌곤 속삭였다.

"넌 이곳을 당장 떠나."

"뭐? 너는?"

"같이 움직일 상황이 아니잖아? 가서 숨을 장소를 찾고 버텨."

"차라리 저자와 같이...."

"위험해."

펜리라면 교섭 우위를 위해 칼 일행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내가 칼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아낀 이유다. 그녀의 청각이라면 지금 대화쯤은 엿듣고도 남았을 테니까.

역시나,

"누가 떠나도 된다고 했지?"

펜리가 바로 제지를 해왔다. 엘튼이란 카드를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다.

난 바로 말을 받아쳤다.

"샤르바딘이 어딨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방법을 듣고 싶다면 그를 보내겠습니다."

"...."

엘튼이라면 위장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 안에 칼 일행과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엘튼은 앞으로 칼과 인연을 이어갈 중요한 인물. 다음 만남을 위해서라도 꼭 보내야 했다.

"날 믿지?"

"...."

"숲에서 이틀 정도 죽은 듯이 버텨."

"이틀?"

"버티면 길이 열릴 거야.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어 있어."

처음에는 키메라의 움직임에 당황했는데, 지금까지도 어슬렁거리는 키메라들을 보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감옥 폐쇄 현상.

도미닉이 연구실로 후퇴를 결정했을 때 나타나는 전조 증상인데, 그 시기가 다가온 것 같았다.

지금 모습을 보면 폐쇄 전에 모든 실험체를 싹 다 수거하는 과정 같았다. 그 후 키메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마법진은 폐쇄되며 사라진다.

처음 펜리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칼 일행을 탈출시킨 계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소설 속에서 칼과 펜리는 인연이 없었다.

즉, 칼 일행은 베텔의 독으로 감옥 폐쇄까지 버티다가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틀을 강조한 건 내가 끼어들면서 칼 일행의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조언을 한 것이었다.

"붉은 보석에 관한 소문은 함정이니까, 믿지 마. 욕심내다간 대가리 제대로 깨질 거다."

내 말은 모두 칼에게 전달될 거다.

꼭 필요한 핵심 사안을 더 전한 뒤 엘튼을 거칠게 밀어냈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서둘러!"

"...."

잠시 서서 나를 응시하던 엘튼은 입을 꾹 다물더니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고지식한 녀석이라 버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자, 이제 말해봐."

"뭘 말입니까?"

"방법."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내가 저 녀석을 그냥 보내줬다고 생각해? 마법이 걸린 이상, 내 눈을 피하긴 힘들어."

"그래서 증표를 줄 겁니까? 안 줄 겁니까?"

"하, 빌어먹을 새끼."

뻗대는 내 모습에서 펜리는 교섭의 불리함을 인정했다.

그녀가 아무리 말을 돌려봤자 소용없다. 샤르바딘의 가치를 난 너무 잘 알고 있거든.

"대가 없이 말하라니 양아치 아닙니까? 나 때는 아주 껍질째 벗겨 먹었으면서."

"그럼 증표 말고 돈을 주지."

"100만 골드."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100만 골드 이상의 가치가 있을 텐데요. 선택을 서둘러야 할 겁니다."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그녀가 도미닉에게 납치됐다면 당장 움직여도 아슬아슬합니다. 연구실 앞에선 인질의 가치 따윈 상관없습니다. 인간과 이종의 구분만 있을 뿐이죠."

펜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녀석의 말대로 샤르바딘은 100만 골드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귀가 누구보다 밝은 녀석이라더니, 귀찮은 상대를 만났다.

겁박도 어렵고, 시간도 없는 상황.

그런데 저놈의 입에 샤르바딘의 유일한 단서가 있다면? 이번 교섭에선 아무래도 손해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하지."

펜리는 곰방대를 물었다. 잠시 연기를 내뱉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날 그녀 앞으로 데려다 놔. 그럼 증표를 내주지."

"조건부라는 겁니까?"

"그래. 대신…."

펜리는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뿜으며 말했다.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책임을 물을 거다. 검은 장미의 이름으로 네놈과 지금 떠난 저놈 그리고 너희들과 엮인 인연까지 찾아서 모조리 척살할 거야. 이건 길드의 존속과 관련된 사안이거든. 동의하나?"

길드의 존속.

확실히 샤르바딘을 잃으면 검은 장미는 베네타라는 뒷배를 잃는다. 그 책임을 묻겠다는 뜻.

"찾았는데, 샤르바딘이 죽었다면? 제 책임입니까?"

"기간은 일주일, 그 안에 그녀가 죽었다면 네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일종의 면죄부도 주어졌다.

생존과 상관없이 일주일 안으로 그녀를 샤르바딘 앞으로 데리고 가는 조건이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목숨이 걸린 살벌한 거래였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볼 만한 도박이기도 했다.

일단 샤르바딘이 죽은 장소가 도미닉의 연구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내볼까.

증표 외에 다른 것을 더 요구한다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조건부 대가이지만, 방법조차 듣지 않고 그녀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 있었다.

"거래 성립이군요."

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펜리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난 아직 아무런 내용도 듣지 못했어."

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그동안 구상해둔 계획을 들려줬다.

처음 라웁 숲에 떨어졌을 때부터 생각해둔 계획, 다만, 실행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서 줄곧 망설였던 계획이기도 했다.

하지만 펜리가 이 계획에 합류하면서 그 가능성이 열렸다.

'아레나 후아튼을 막아줄 존재.'

내게 부족했던 무력을 대신해줄 카드.

마지막 퍼즐이 풀린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학살자조차 포기한 도미닉의 연구실 습격 계획.

이건 펜리에게도 나에게도 도박인 계획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펜리는 곰방대를 들고 있을 뿐 입에 물지 않았다. 곰방대를 피우는 것도 잊은 채 내 말에 집중했다는 게 정확했다.

잠시 후,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곰방대를 물었다.

"미친 또라이 새끼."

내 계획은 들은 첫 소감으로 그녀는 날 또라이로 지목했다. 그럼에도 표정은 웃고 있었다.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허를 찌르려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게 확실하니까요."

"내키는 방법은 아닌데… 괜찮단 말이지. 빌어먹을."

펜리는 샤르바딘에게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의 방법이 무엇인지 들었다.

'스스로 키메라에게 잡아먹히라니.'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키메라가 알아서 샤르바딘이 잡힌 장소로 데려다준다나.

설명대로 잡힌 실험체들이 도미닉의 연구실로 모조리 모이는 전개라면 확실히 가능성 있는 작전이었다. 샤르바딘이 키메라에게 잡혔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키메라의 움직임을 어떻게 파악한 거지?"

"두 번이나 키메라에게 먹혀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키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네 녀석이 먹히고, 내가 그 키메라를 쫓아가는 방식은 어때?"

"이곳에 펼쳐진 결계를 아십니까?"

"이미 확인했어."

"뚫을 수 있겠습니까?"

"단시간에는 어려워."

"연구실 주변에는 이보다 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을 겁니다.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음."

도발처럼 들렸지만, 펜리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곳 결계는 일반적인 마법과 달랐다.

고대의 지식이 결합한 마법진이라 단시간에 파훼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실패할지도 모른다. 결국, 녀석의 말대로 키메라를 매개체로 이용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란 결론이 나왔다.

펜리는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모습. 이 녀석의 말만 믿고 움직이는 건, 그녀에게 큰 도박과 같았다.

"어쩌실 겁니까?"

손을 가볍게 흔드는 녀석이 보인다. 마치 자신의 말대로 될 것이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땅에 헤딩보단 가능성이 큰 계획.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천천히 눈앞의 손을 마주 잡았다.

"펜리 체이서, 내 이름이다."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거래가 성립됐다.

44화 난 1인분이야. 한 마리만 오라고!

거래의 시작은 이곳, 실험체 감옥을 벗어나면서부터다.

이동할 매개체인 키메라들은 굳이 찾을 필요 없었다. 눈앞에 물 반 고기 반처럼 깔린 게 키메라였으니까.

다만, 이동 전에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공짜 마석을 포기할 순 없지.'

난 조금 전 펜리가 조각낸 뱀 키메라의 시신을 뒤적거렸다. 나로서는 얻기 힘든 보랏빛 마석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기회가 생겼을 때 챙겨야 했다.

혹시 몰라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별다른 말 없이 그녀는 등을 돌린 채 키메라의 시신을 들추고 있었다.

"체액 성분이 귀찮게 구성됐네."

그녀는 시체 조각에서 체액을 맛보거나, 냄새를 맡는 기행을 보였는데, 내가 부탁한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체액을 막을 만한 마법이나 물건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두 번의 경험을 통해 키메라의 체액에 특별한 독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삼킨 실험체를 마비시키는 효과였는데, 이동의 매개체로 키메라를 이용하려면 이 독부터 해결해야 했다.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마나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금세 방법을 찾을 것 같았다. 그 사이, 난 마석을 발견하곤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으로 두 개인가?'

사냥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한 것이라, 일이 무척 잘 풀린 상황이었다.

이 정도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고통과 부작용을 버틸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마석의 위험성을 잘 아는 눈치던데, 아니었나?"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내 행동을 전부 보고 있었나?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그녀가 주머니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돌에는 산 자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이 담겼어. 널 망가트릴 거다."

기운에 민감한 엘프답게 펜리는 마석의 부작용을 단박에 파악하곤 베네타의 군주에게 경고를 한 상태였다.

소문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에토르와 달리 베네타가 소문에 크게 흔들리지 않은 이유였다.

"쓸데가 있습니다."

"뭐, 계획에 방해만 안 된다면야."

"방해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계획은 저에게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목숨 귀한 줄은 아나 봐?"

확신이 있는 베팅이라 목숨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계획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샤르바딘의 구출이 목적인 그녀와 달리, 내 목적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에 있었으니 말이다.

생명의 징표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응시하던 펜리는 다시 체액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그사이 나는 두 개의 마석을 잘게 빻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복용만 하면 되는데, 복용 시기와 장소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받아."

잠시 후, 그녀가 머리를 풀어 헤치더니 목걸이를 건넸다.

푸른 돌이 장식된 목걸이였는데, 조금 전까지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축복이 걸린 내 애장품이다. 체액으로부터 보호해 줄 거야."

"축복…?"

"눈빛이 불경한데? 탐낼 생각은 버려.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거든?"

"...."

눈치 하난 귀신같네.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순간, 포근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세계수의 축복이라서 그런가.

역시 효과가 죽인다.

펜리의 애장품인 이 목걸이는 소설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더 해줄 말은?"

"키메라들이 물러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거?"

"바로 움직이면 되겠네."

그녀라면 알아서 체액에 대비할 테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곰방대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그녀의 신호였다.

"흐응, 어떤 녀석이 좋으려나."

나도 그녀를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들판을 빽빽이 채운 키메라 무리가 보인다. 거대 키메라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은 모양.

하긴 거대 키메라를 과자처럼 찍어낼 수 있었다면 1챕터의 주인공은 카멜이 아니라 도미닉이 됐을 것이다.

그녀가 키메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 뒤를 쫓으며 숲 너머를 응시했다.

'엘튼은 잘 찾아갔겠지?'

큰 소란이 없는 것을 보면, 칼 일행과 잘 합류한 것 같았다.

난 칼의 다음 행보를 떠올렸다.

'이것으로 악당 조력자 칼 바스타인은 사라지게 되는 건가?'

소설 속 내용이라면 칼 일행은 숲을 벗어난 뒤 에토르에 비밀 거점을 두게 되는데, 이는 학살자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칼의 운명을 악당 조력자로 이끌었다.

'이번에는 그 운명과 반대로 움직이게 되겠지.'

내가 끼어들면서 운명적 만남이 비틀렸다.

악당 조력자가 아닌 칼은 이제 나의 조언자이자, 학살자를 견제할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계획까지 성공하게 된다면?'

펜리와 엮이면서 큰 흐름을 타게 됐다.

샤르바딘을 구출하고, 백(百) 개의 심장으로 각성할 아레나 후아튼까지 막는다면 베네타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다.

베네타가 건재하면 토바른을 집어삼키려는 카멜의 행보에 큰 차질이 생긴다. 놈을 상대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훼방을 놔도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겠지. 소설 속 위치가 실감 나긴 하네.'

소설 속 세상은 주인공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한 번 엎어지면 끝장인 엑스트라와 달리, 주인공은 이 위기를 극복할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

이 괴리를 바로잡으려면 앞으로가 중요했다.

"저 녀석으로 하지."

"…선택 기준이 뭡니까?"

"그나마 동물처럼 생긴 거?"

"그렇긴 하네요."

한쪽을 가리키며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먼저 먹히라는 신호.

하긴, 직접 보기 전까진 믿기 힘들겠지.

난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황소를 베이스로 한 키메라 무리가 보였다. 단단한 두 개의 뿔과 악어 입을 닮은 무시무시한 비주얼을 자랑했는데, 거대 키메라가 사라진 지금, 저 키메라가 그나마 승차감(?)이 좋아 보였다.

물론,

키에에에에엑―!

그 승차감을 느끼는 곳이 키메라의 등짝이 아닌 입 속이란 것이 끔찍했지만 말이다.

마법이 풀리자, 키메라들이 동시에 나를 노려봤다.

실로 섬뜩한 광경.

키에에에엑―!

카아악!

키메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돌진해왔다.

"시, 시발! 난 1인분이야! 한 마리만 오라고!"

난 그중 가장 순해(?) 보이는 녀석의 위로 몸을 날렸다.

쩍 벌어진 수백 수천 개의 주둥이가 보인다.

순간, 식인 물고기를 다룬 영화, 피라냐가 떠오른 건 왜일까.

감옥 바깥이라면 영화 피라냐처럼 갈가리 찢겨 사라질 운명이지만,

"으아아악!"

이곳에선 고통 대신 어둠이 찾아왔다.

악취는 덤이었다.

* * *

키메라에게 먹힌 횟수만 세 번째.

내 지독한 불운을 엿볼 수 있는 횟수였다. 그래도 이미 경험해 봤다고 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키메라의 내부는 협소해서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질척거리는 압박감이 느껴졌는데, 마치 답답한 고치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잠시 후, 뜨겁고 끈적이는 액체가 온몸을 적셨다. 익숙한 냄새와 감촉, 키메라의 체액이었다.

체액이 몸에 닿은 순간, 따스한 빛이 가슴팍에서 흘러나왔다.

펜리가 준 목걸이였다.

밝아진 시야 사이로 몸을 꿈틀대며 감각을 살펴봤다.

'효과가 있네.'

마비 증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꿀렁거리는 내부에서 난 잠시 대기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됐나?'

흔들림에 집중하던 나는 슬그머니 눈꺼풀을 올렸다.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던 흔들림이 어느 순간부터 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향으로 키메라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진을 벗어나, 그 지긋지긋했던 실험체 감옥을 드디어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그보다 더한 장소로 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도착할 장소는 도미닉의 연구실로 불리는 장소.

키메라들을 찍어내는 둥지나 다름없었다.

목걸이의 빛 덕에 시야가 확보됐는데 차라리 안 보는 편이 좋을 뻔했다.

꿀렁거리는 내장 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차라리 독으로 정신을 잃었다면 좋았겠지만, 내 정신은 목걸이의 축복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오감 자체가 민감해졌다고 해야 하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악취가 점점 짙어지는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이 망할 엘프가 설마…!'

차고 있던 애장품을 줄 때부터 뭔가 찝찝했는데, 오감이 증폭되는 효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렇다면 실로 악마 같은 년이었다.

탈출 욕구가 불쑥 올라왔지만, 다시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으니 참아야 했다.

'잘 따라오겠지?'

펜리를 잠시 떠올렸다.

얼마나 배 속에 머물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 말해주지 않았다.

길어야 하루 이틀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을 봤을 때, 제법 고역의 시간이 될 게 분명했다.

'벌써 날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을지도.'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민감해졌던 후각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은데, 내부는 일정한 흔들림만 느껴졌다.

슬슬 움직일 시간인가?

몸을 살짝살짝 뒤틀면서 가방을 천천히 뒤적거렸다.

그러다 마른 육포를 발견하곤 짧게 신음을 흘렸다.

식량을 주는 걸 깜빡했다.

'엘프는 며칠 굶어도 괜찮겠지?'

이런 곳에선 식욕이 감퇴할 것이니 괜찮을 거다.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가방에서 주머니를 꺼낸 뒤 안을 살폈다. 마석을 빻아 넣은 보랏빛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하릴없이 배 속에서 멍 때리고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주머니 안에 있는 마석 가루를 이 자리에서 모조리 흡수할 생각이었다.

'3성.'

연구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등급 각성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2성과 3성의 차이는 일반적인 등급 차이와 달랐다.

특성 개화가 이뤄지는 단계.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면 내 생존 확률은 전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시도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설마 무특성이 뜨진 않겠지.'

불운 덩어리로 살아온 터라, 애써 부정한 생각을 털어버리며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까슬까슬한 감촉.

삼키면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산 자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 이 망할 기운을 짓밟고 잡아먹어야 강해질 수 있었다.

정신 방벽과 고대 문양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미친 짓.

아니, 이보다 더 미친 짓을 해야 했다.

'키메라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게 고대 문양을 사용해야 하니까.'

문양의 능력은 2성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빛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한 번만 실수해도 끝이다.'

키메라가 날 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긴 시간, 그렇게 인내를 가지고 복용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후, 나는 아주 끈적하고 불결한 공간에서 그보다 더더욱 거칠고 불결한 가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흡!"

지독한 고통이 뇌리를 뚫고 몰려온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 외의 복잡한 감정이 혼재된 잡념을 털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키메라 배 속에서의 수련.

마석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하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득한 피맛.

이 비린 맛에 익숙해지며 훗날 이때의 과거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3성에 오를 때가 가장 ㅈ같았다고.

45화 한번 믿어보려고

키에엑―

으어! 으어!

라웁 숲, 실험체 감옥을 가득 채우던 키메라들의 괴성이 밤새 울렸다.

키메라들은 밤새 숲을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하루가 더 흘렀을 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감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숲은 적막에 휩싸였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숲은 서서히 밝아졌고 아침이 찾아왔다.

그 따스한 햇볕 아래,

새들의 지저귐과 동물들의 울음이 적막을 깨고, 숲 분위기에 변화를 불러왔다.

들썩―!

땅이 반응을 보였다.

땅이 움푹 꺼지더니 잠시 후 일단의 사람들이 땅속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퉤!"

칼은 입 속에 가득 담긴 흙을 뱉어내며 이를 갈았다.

무려, 이틀이다.

보통 반나절이면 물러나는 키메라들이 장시간 머무는 바람에 땅속에 갇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들 무사해?"

칼의 부름에 흙을 털고 나오던 수하들이 칼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표정에 힘이 없다.

장시간 베텔의 독으로 심장에 무리를 준 탓에 모두가 허약해져 있었다.

그중에는 엘튼도 있었다.

아서와 헤어진 엘튼은 곧장 칼이 표시해둔 은신처로 돌아와 땅굴로 합류했다.

휴식만 취하면 괜찮아질 현상이라, 칼은 모두에게 휴식을 명하곤 엘튼만 불렀다.

"움직일 수 있지?"

"네."

"둘러본다."

주변에 키메라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칼은 엘튼과 함께 숲을 거닐며 수색을 시작했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흔적을 살핀 칼은 키메라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키메라뿐만이 아니었다.

"모조리 잡혀간 모양이네."

잡혀 온 이들이 씨가 말랐다.

칼의 말에 엘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갇혀 있던 이들 중 남아 있는 이들은 없었다.

어제 습격으로 살아남은 존재는 칼 일행이 유일했다.

아서의 조언대로 이틀을 땅속에 더 머물렀던 게 일행을 살렸다.

칼은 엘튼과 함께 아서가 머물렀던 들판에 도착했다.

"녀석은 이곳을 벗어났겠지?"

"그럴 겁니다."

"다크 엘프와 만났다고 했지?"

"네. 서로 아는 사이 같았습니다."

엘튼에게 상황을 보고받았기에 칼은 아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엄청난 강자와 동행 아닌 동행을 하게 됐다고 했는데, 어디 가서 개죽음을 당할 녀석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슬슬 돌아가자고."

칼은 아지트로 돌아와 곧장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서의 말대로라면 숲에 큰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걸 확인해봐야 했다.

칼 일행은 마법진 경계를 앞에 둔 채 잠시 대기했다. 졸졸졸 흐르는 냇가 너머로 칼이 표시해둔 경계선이 보였다.

잠시 경계선을 내려다본 칼은 느리게 선 앞으로 발자국을 내디뎠다.

긴장감이 흐르고,

"...."

경계선을 넘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몇 발자국을 더 걸은 뒤 등을 돌리자, 일행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수하들.

모두 놀란 표정들이다.

경계선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칼이 조용히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튼을 선두로 수하들이 경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사라지는 모습 없이 그대로 경계선을 넘어왔다.

'녀석의 말대로야.'

이틀 뒤 키메라 무리가 사라지면 마법진이 사라질 것이란 말.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이 정도로 확실한 정보를 알고 있는 녀석이라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칼은 아서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서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했지만, 사실 정보 교환에 가까웠다.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반대로 많은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는 칼의 다음 행보에 큰 변화를 줄 정도였다.

칼은 고민을 시작했다.

그 사이,

"드디어...."

"공기가 다른 것 같아."

수하들은 모두 들뜬 표정으로 숲을 둘러봤다. 고작 한 걸음 차이인데, 숲 분위기가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지옥 같은 장소에서 빠져나온 것이니 감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엘튼은 그 분위기 사이에서 조용히 물러나 칼 곁으로 붙었다.

칼의 다음 행보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

칼은 엘튼을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라면 에토르 영지 주변에 거점을 두고, 크룩스에 복수할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엘튼."

"네."

"지금껏 그 녀석의 말대로 움직여서 손해를 본 적이 있던가?"

엘튼은 칼이 언급한 그 녀석이 누군지 바로 눈치챘다.

"경험상 없습니다."

"녀석이 내게 청사진 하나를 제시했어. 어떻게 생각해?"

"전 칼 님을 따를 뿐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엘튼의 표정에서 아서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단단한 성정만큼이나 쉽게 믿음을 주는 인물이 아닌데,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엘튼의 마음을 얻게 된 건지 신기했다.

"녀석에게 뭐라도 받았어?"

"목숨을 빚졌습니다."

"꽤 비싼 걸 받았네."

'뭐, 나도 마찬가지인가?'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 보는 눈은 엘튼보다 자신이 더 까다로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의 과거가 궁금했다.

고작 신입 암살자일 뿐일까.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신비한 인물.

'더 궁금해지네.'

크룩스 따위가 담을 수 있는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복수에는 힘이 필요한 법이죠. 그 힘을 빌려줄 인물을 소개해줄까요?]

크룩스의 복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녀석이 해준 말이 있다.

'처음에는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한 사내만 영입할 수 있다면 복수는 식은 죽 먹기라고 했던 녀석의 말을 이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먼저 움직이라 조언했던 녀석.

"블라이어 영지로 간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크룩스를 무너트릴 수 있는 인간이 블라이어에 있다고 했거든."

"설마, 블라이어 성주입니까?"

블라이어의 성주, 카멜 블레이저.

엘튼의 물음에 칼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카멜은 크룩스를 단숨에 짓밟을 힘을 가졌다. 하지만 칼이 생각하는 인물은 그가 아니었다.

"성주에 오른 카멜은 크룩스와 판을 짜고 혈육을 도륙한 인물이라더군. 녀석이 그 임무의 당사자이니 확실하겠지. 블라이어 성주는 크룩스와 한편일 수 있으니 오히려 적에 가까워."

"그럼 누구를 찾아가는 겁니까?"

칼은 아서의 말을 떠올렸다.

그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할 경우 복수를 넘어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훗날 블라이어 영지와 적이 될 남자라고 해야 하나?"

"네?"

현재는 금광에 갇혀 노역 중이라고 했으며, 아서는 그를 길 잃은 영웅이라 표현했다.

블라이어 가문의 전(前)대 기사 단장이자, 5성급 실력자.

'록터 펠리스.'

괜히 길을 잃은 영웅이라 표현한 게 아닌 만큼 아서는 그를 섭외할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광산을 탈출한 직후가 영입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지.'

언제까지 광산에 갇혀 지낼 인물이 아니라고 했으니, 블라이어 영지에 머물고 있으면 록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서의 정보가 확실한지 사실 확인부터 할 생각이었다.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한번 믿어보려고."

[한번 믿어보시죠.]

떠나기 전 녀석이 팔찌를 던지며 자신에게 했던 말.

그 모습에서 확신이 생겼다.

한번 믿어본다.

그리고 기다려볼 생각이다.

녀석의 귀환을.

결정을 마친 칼 일행은 록터 펠리스가 갇혀 있는 블라이어 영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카멜의 조력자로 훗날 피의 정복에 한 발을 담갔던 악당 조력자 칼 바스타인.

그런 그가 배덕의 기사이자, 카멜의 대항마였던 영웅 록터의 조력자로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라웁 숲 중심부에는 하늘 끝까지 솟구친 오래된 절벽이 존재한다. 한눈에 담기 힘든 이 거대한 절벽은 숲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지만,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아니, 정확히 절벽으로 접근하기 전에 습격으로 죽거나 사라졌다는 게 정확했다.

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리며 주변 숲 사이로 짙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숲과 먼지를 뚫고 수백의 키메라 무리가 절벽으로 접근해왔다.

누구의 발길도 허락지 않았던 절벽의 공간은 키메라들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키메라들은 절벽으로 다가가더니 곳곳이 벌어진 절벽 틈새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무리에는,

으어어―!

황소를 닮은 키메라 무리도 존재했다.

절벽 틈새 안쪽 공간은 동굴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어지럽게 이어진 미로 속에서 키메라들은 흩어지고 뭉치길 반복하며 절벽 안쪽으로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갔다.

잠시 후, 키메라들은 절벽 중심부의 드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바닥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공간이었다.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구멍이었다.

쿠웩!

키메라들은 그 구멍 앞에 한 마리씩 서더니, 속에 있던 것들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수거해온 실험체들이 구멍 아래로 하나둘 쏟아졌다.

하나같이 의식이 없는지, 구멍 안으로 추락하듯 빨려 들어갔지만, 누구 하나 비명을 지르는 이가 없었다.

물론 그중에는,

"우읍!"

양손으로 신음을 틀어막고 있는 멀쩡한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나였다.

"으!"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더니 추락이 시작됐다.

키메라가 날 토해낸 것인데, 롤러코스터를 타고 미끄러지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다.

허우적거리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시야조차 어둑어둑해서 긴장감이 올라왔다. 잠시 후, 어둠이 사라지더니 흐릿한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찾아온 차가운 감촉.

풍덩―!

"...!"

호수에 빠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우적거릴 틈도 없었다. 무언가가 다가와 내 몸을 거칠게 낚아챘기 때문이다.

허공을 부유한 순간,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떴다.

온통 붉은 공간이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난 내부 풍경.

'…이런 시발!'

욕설이 절로 나왔다.

호수 주변으로 끝없이 뉘어진 인간들이 보였다. 그 수가 천 단위로 셀 수 없이 많았다. 흡사 시체 처리장에 온 느낌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네."

중얼거림도 잠시, 나도 늘어진 인간 중 하나로 분류되어 구석에 던져졌다.

잡혀 온 이들은 체액에 긴 시간 중독되어 모두 의식이 없는 상태 같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눈에 띄기 쉬워서 우선 기절한 척 연기를 하며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키엑! 키엑!

내 머리 위로 소형 키메라들이 바삐 돌아다녔다.

촉수 같은 기다란 팔을 달고 다니는 녀석들이었는데, 호수 주변에 자리를 잡고 물에 빠진 이들을 낚아채듯 건져내고 있었다.

살펴보니 이곳은 수거해온 실험체들을 한곳에 모으는 장소 같았다.

'펜리도 이곳으로 왔겠지?'

그녀의 능력이라면 이곳을 충분히 빠져나가겠지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은 이상,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엘프라면 분명 다른 공간으로 격리될 거야.'

그것을 증명하듯 인간과 달리 이종은 잡혀 온 즉시 어디론가 이송되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은 인간이잖아, 멍청한 괴물 새끼야!"

인간의 언어.

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이곳에 존재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키메라에게 자연스레 지시를 내리는 존재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신체 일부가 괴물의 팔다리로 이뤄져 있어서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다만, 그들은 이성이 존재했는데, 키메라를 부리는 것을 보니, 도미닉이 부재중일 때 이곳을 책임지는 관리인들로 보였다.

그들은 키메라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며 분류 작업에 몰두했다. 잡혀 온 이들의 성별, 나이, 신체 조건을 따지며 등급을 매기고 있었다.

잠시 후, 관리인들이 내 머리 위로 머리를 드리웠다.

내 차례인가?

"이 녀석, 혈색이 너무 좋은데? 중독된 거 맞아?"

"팔다리를 잘라볼까?"

"그럼 물건이 상하잖아! 멍청아!"

난 두 눈을 감고 꾹 주먹을 쥐었다.

내 몸을 훑어보는 끈적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들 뒤를 따르는 수십 수백의 키메라 무리.

쫄린다. 시발.

46화 도미닉 연구소

그들은 기괴한 팔을 움직여 내 얼굴을 붙잡고 살폈다. 다른 이는 구슬을 조작해 내 몸을 살폈는데, 잠시 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순도 높은 마나가 감지돼."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육체 능력과 밸런스도 최상, 먹이나 재료로는 쓸 수 없는 등급인가? 주인님의 실험실로 옮겨야겠는데?"

"한 달에 한 번 볼까 하는 최상품이 연달아 잡혀 오다니.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좋아하시겠어."

품평은 아주 후하게 끝났다.

의식이 있다는 것을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최상품이 연달아 잡혀 왔다고? 왠지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순간 어깨 부분이 시큰거렸는데, 큼지막한 도장이 찍힌 자국이 보였다.

최고 등급을 표시한 것인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고로 분류된 것치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난 키메라들에게 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몰래몰래 주변을 쉴 새 없이 살폈다.

잡혀 온 이들부터 키메라 무리까지, 엄청난 머릿수가 머무는 만큼 공간에는 크고 작은 동굴이 여럿 존재했는데, 난 그중 가장 작은 동굴로 이송되었다.

최상품이라서 그런지, 관리인도 한 명 붙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잠시 후, 철로 된 거대한 문 앞에 관리인이 멈춰 섰다.

문 앞에 관리인이 손을 대자, 철문이 흔들리며 천천히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온 관리인은 멈칫하더니 한 곳을 노려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안쪽 공간에는 또 다른 관리인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실험대 위에 누군가를 올려놓고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기 드문 실험체가 도착했잖아. 너도 맛 좀 볼래?"

"또 건들려고?"

"지금껏 봤던 것 중 최고야. 보라고."

조금 전 신경질은 어디 가고 날 데려온 관리인은 날 구석에 내팽개친 채 동료가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험체?'

아, 나 말고 또 다른 이가 있다고 했지.

내 몸을 옥죄고 있는 키메라의 눈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관리인 쪽을 바라본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시시덕거리는 관리인들 실험대 밑 쪽으로 흘러내리는 금발이 보였다.

어째 익숙한 머리 색깔이다.

젠장, 제발 건들지 마.

"주인님이 곧 오실 텐데, 위험한 거 아니야?"

"즐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야. 어차피 사라질 몸뚱이인데 건드린다고 티 나겠어? 우리 몰골을 보라고. 괴물까지 됐는데 보상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맞는 말이야."

"피부를 봐, 그 희귀하다는 다크 엘프라고. 몸매 죽이지 않아? 흐흐흐."

괴물로 변해도 밝히는 건 똑같은 건가?

욕망을 품고 있는 걸 보니, 인간의 이성을 가진 놈들로 보였다.

음심을 품은 관리인들의 대화에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자살 스위치를 누르려는 저놈들을 말리고 싶었다.

"가슴부터 볼까? 여기 단추부터 풀어... 끄아아아아악!"

역시나 이미 늦었나.

슬슬 움직일 때가 된 모양이었다.

난 기습적으로 몸을 튕기면서 소리 질렀다.

"펜리!"

처절한 비명이 터진 순간 그녀를 다급히 불렀다.

그녀가 위험에 빠져서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성이 있는 놈들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놈들을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까웠다.

"죽이면 안…!"

이어지던 외침은 키메라의 움직임에 단절됐다. 날 붙잡고 있던 키메라가 긴 팔로 내 목을 거칠게 조여왔다. 서둘러 오른팔을 뻗어 키메라 입 속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번쩍―

"크에에엑!"

황금빛이 입 속에서 터져 나온 순간, 키메라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땐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몸매를 운운하던 관리인은 형체가 갈가리 찢겨 핏덩이로 변해 있었다.

"화끈하게도 조져놨네."

다행히 한 명은 살려놨다.

날 끌고 온 관리인은 복부에 꼬챙이가 박힌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질러댔는데, 그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정보도 좋지만, 안전도 중요했다. 소란에 바깥 괴물들이 모조리 몰려올 수도 있는 상황.

난 다급히 펜리에게 다가갔다.

"키메라들이 몰려올 겁니다!"

"안 올걸?"

"네?"

"소리를 차단했거든."

펜리는 늘씬한 허리를 쭉 펴며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제야 반투명 막이 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까지 알고 있는 거야?

'배우면 진짜 개꿀일 것 같은데.'

마법의 유용함을 다시금 느꼈지만, 미련을 접었다.

'마력'은 나와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듣기만 해도 움츠러들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펜리의 손이 어느새 벽에 매달린 관리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자리한 부위였다.

진짜 살벌하네.

행동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여자였다.

"입도 안 열었는데 죽이려고요?"

"이 녀석이 인간으로 보여? 이 정도로 안 죽어. 이미 테스트도 해봤어."

"…테스트?"

설마, 관리인 하나를 핏덩어리로 뭉개놓으면서 신체 구조를 확인해본 거야?

무서운 년.

펜리와 절대 적이 되면 안 될 이유가 또 생겼다.

돈을 아주아주 많이 벌어야겠는데?

그녀는 관리인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심장을 움켜잡고 쭉 잡아당기자, 관리인이 피를 토해내며 살려달라 빌었다.

이딴 고문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엘프들은 어디에 있지?"

심장이 튀어나오려고 하자, 관리인은 자동 로봇처럼 아는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심지어 묻지 않은 것까지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에겐 마석이 아닌 심장이 존재했다.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뇌나 다른 작업을 해놓지 않은 건가?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먹이? 먹이로 줘?"

관리인의 대답에 펜리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일반 엘프들은 먹이로 던져집니다!"

"누구의 먹이로 말이지?"

"그건 저도 잘... 크, 크아아아악!"

"네 심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모,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중심부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지는 이들을 '먹이'라고 표현할 뿐, 구덩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했다. 몇 차례 심장을 주물럭(?)거려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펜리는 그 외에 쓸만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한 후 슬쩍 미소를 지었다.

관리인의 눈에는 그 미소가 악마의 미소로 비쳤다.

"사, 살려주겠다고…!"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퍼석―

심장이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관리인은 곧 축 늘어졌다.

펜리는 피 묻은 손을 털어낸 뒤 곰방대를 물었다.

그 사이, 난 실험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있었다.

도미닉의 개인 실험실이라고 했다. 분명 쓸만한 물건이 있을 것이다.

잡혀 온 이는 우리가 전부였는데, 우리 주변에는 실험체를 묶어두기 위한 실험대들과 기괴한 형태의 실험 도구들이 테이블 위에 즐비했다.

'끔찍하네.'

곳곳에 피의 흔적이 한가득해서 공포스러웠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해야 하나.

내 시선은 곧 커다란 책상에 쏠렸다. 도미닉이 쓰던 것 같은데, 서랍 이곳저곳을 열다가 작은 철제 상자를 발견했다. 살펴보니 열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여는 거지? 부숴볼까? 하지만 마법사의 보관 상자라 섣불리 건드리기가 껄끄러웠다. 상자를 흔들며 귀에 대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 잠금장치가 걸린 거야."

"풀 수 있습니까?"

"안에 든 것의 절반을 내게 준다면?"

"샤르바딘을 구하러 온 거 아닙니까?"

"돈 될만한 건 취하면서 가는 주의라."

하여튼 욕심만 그득그득한 년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나눌 수 없는 것이라면 공유하는 것으로 하죠."

"좋아."

"약속 지키십시오."

"날 뭐로 보는 거야?"

당신을 잘 아니까 그러는 거야.

난 그녀에게 상자를 넘겼다. 어차피 마법에 문외한인 내겐 제안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상자를 붙잡고 잠시 살펴보던 펜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마법 장치를 풀 퍼즐을 찾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두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굳게 닫혀 있던 상자가 덜컥 소리와 함께 열렸다.

기대감으로 입술을 혀로 핥던 그녀는 곧 안을 살피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생각했던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

그녀가 상자에서 꺼낸 물건은 한 권의 공책이었다.

곁 표지에 새겨진 문양.

불타오르는 심장을 본 순간, 난 짧게 신음을 흘렸다.

'도미닉의 키메라 연구 일지다.'

저 공책에는 일평생 도미닉이 인체 실험을 통해 알게 된 연구 지식이 집약되어 있었다.

흑주술사나 흑마녀, 흑마법사처럼 인간을 매개체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이들에겐 엄청난 보물.

물론, 공책의 가치를 알아봤을 때의 얘기였다.

"이게 뭐야?"

책을 뒤적거리던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기 때문이다. 혹여나 마법 처리가 됐는지 살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꽝인데?"

반짝이는 보석이 아니자, 흥미를 잃어버린 표정.

페이지를 파르륵 넘기던 그녀는 책을 그대로 태워버리려고 했다.

"무, 뭐 하는 짓입니까?!"

돈을 성욕보다 더 밝히는 욕심쟁이에다, 무서운 년이지만 이건 못 참는다.

나는 다급히 공책을 낚아챈 뒤 피어오른 불똥을 탁탁탁 털어냈다.

이 미친 엘프가 방금 뭔 짓을 하려고 한 건지.

이 연구 일지는 훗날 학살자의 진영인 '주술사들의 둥지'로 넘어가 주술 위력을 두 단계나 높이는 역할을 한다.

내가 카멜이었다면 당장 저년을 죽이라고 외쳤을 거다.

학살자 역시 이 연구 일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앞장이 다 탔잖아요!"

"빈 쓰레기를 태우겠다는데 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노려봐?"

"소유권은 저에게도 있는 거 아닙니까? 살펴볼 시간은 줘야죠."

"흐응."

펜리는 곰방대를 물고는 뻐금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설마 내 반응에서 뭔가를 눈치챈 건가.

눈치 빠른 년이니 그럴지도.

백지에 적힌 내용을 보려면 특수한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알려줄 것 같아?

"움직이시죠. 샤르바딘은 '제단' 쪽에 있을 것 같으니까."

"제단?"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꾼 효과가 있었다.

뭔지 모를 책보단 샤르바딘의 생사가 그녀에게 훨씬 중요할 거다.

난 소설의 정보 일부를 그녀에게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관리인이 털어놓은 정보가 있어서 말하기 쉬워졌다.

"먹이를 던져놓은 구덩이를 말하는 겁니다. 끌려오기 전에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구덩이를 '제단'이라고 말하더군요."

펜리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제단이라는 건, 누군가를 모시는 장소를 말한다.

미치광이 마법사가 어떤 존재를 추종하고 있다는 말인데.

"어떤 존재의 똥구멍을 빨고 있는 거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샤르바딘이 그 제단에 던져졌다는 겁니다."

샤르바딘은 뛰어난 미모와 달리, 무력은 평범한 엘프였다.

먹이로 간주됐을 것이고, 실제로 그녀의 유골은 제단에서 발견됐다.

샤르바딘은 지금 제단에 갇혀 있다.

'문제는 생존 여부인데.'

샤르바딘이 잡혀 온 날짜가 이틀 전이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시일이 제법 흐른 뒤라 생존을 확신하기 힘든 상황.

"먹이로 던져졌다면 그 먹이를 탐하는 존재도 있겠죠."

"그 존재가 약하거나 소화불량이길 빌어야 하나?"

이틀 전에 샤르바딘을 포함한 수백에 달하는 이종을 한꺼번에 제단의 먹이로 던졌다고 했으니, 그것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실제로 포식자는 한 마리이니까.'

서둘러야 했다.

그녀가 죽었다면 아쉬운 상황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이었으니까.

펜리는 곰방대 연기를 내 얼굴에 후― 불었다. 몇 번 당해보니, 이 행동은 불만을 표할 때 그녀가 보이는 행동 같았다.

불만?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확실한.

"아슬아슬하겠어?"

"면책 기간이 아직 하루 남았습니다. 그 안에 샤르바딘을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흥!"

일주일 안에 샤르바딘을 찾으면 그녀의 생사와 상관없이 난 면책권과 함께 징표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얘기하면 벌써 6일이나 흘렀다는 뜻이었다.

"그래, 일주일까지 단 하루 남았지. 아주 엿 같은 배 속에서 6일을 머물렀다는 뜻이야."

"...."

"내가 그 안에서 쫄쫄 굶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응? 맞혀볼래? 누군가를 씹어 먹고 싶지 않았을까?"

시발, 역시 벼르고 있었나?

속 좁은 년.

왜 말 안 꺼내나 했다.

47화 엿이나 먹어라

나도 키메라 배 속에서 6일이나 있게 될 줄 몰랐다.

라웁 숲이 좀 넓어야지.

육포 주머니도 절반 정도 비운 상태였는데, 사흘 정도 굶으니, 밥맛 떨어지는 괴물 배 속 환경에서도 육포가 잘만 넘어갔다.

하지만 펜리의 경우에는,

꼬르르륵―

순간, 배 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니다.

두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시발, 이게 왜 웃기지?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웃는 순간 저년 손에 뒈질 것 같았다. 이빨을 보였다간 앞의 키메라처럼 심장을 움켜잡을지도.

"무, 뭐 좀 드릴까요?"

"...."

위기를 넘기려고 가방에서 육포 주머니를 건넸는데, 최악의 선택이었다.

주머니에 담긴 육포를 본 순간 그녀의 표정에 헛웃음이 그려지더니 움켜쥔 곰방대가 부르르 떨렸다.

"혼자 처먹으니, 맛있니?"

퍽―

"쿠엑!"

시야가 샛노랗게 변했다.

난 복부를 움켜쥔 채 바닥에서 꿈틀댔다. 간이 뒤틀리는 통증이 뇌리를 뚫고 올라왔다. 곰방대가 아니라 무슨 해머에 처맞은 것 같았다.

"샤르바딘이 살아있길 기도해야 할 거야. 보름 동안 굶고 싶지 않다면."

"...보름?"

넌 6일 굶었는데, 난 왜 보름이야?

그러면서 육포 주머니는 또 잘만 챙겼다.

피부만큼 속도 시커먼 년.

내가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동안, 그녀는 관리인의 손목을 자른 뒤 철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철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철문에 잘린 손을 닿게 하자, 쿵쿵 흔들리며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생체 방식으로 반응하는 문 같았다.

그녀도 들어올 때 그 모습을 본 모양.

열린 문 앞에서 그녀는 잠자코 서 있었다.

날 돌아봤는데,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시부랄, 그럼 패지나 말든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딛고 그녀 곁에 서자, 그녀는 곰방대를 내 몸 주변에 탁탁 털었다.

작게 읊조리듯 흘러나오는 주문.

"...."

푸른빛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보니, 저번에 썼던 위장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위장 마법이 몸에 걸리면 키메라의 시야를 피할 수 있으니, 관리자들의 눈만 피하면 될 것이다.

"제단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

"배 속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알겠습니까?"

"또 맞겠다고?"

"…생각 중입니다."

"얼른 생각해."

"지리 파악이라면 당신 특기 아닙니까? 나보다 당신이…."

"내 능력이 뭔지 알고."

당연히 잘 알지.

그녀의 개화 특성인 그림자 능력은 일정 범위 내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통해 순간 이동이 가능했다.

주변 지리를 파악하는 데 최고의 능력. 하지만 난 이것을 두고 말한 게 아니었다.

바로 엘프의 전매특허인 정령 소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5성에 이른 그녀라면 쓸만한 정령 한두 마리와는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정령을 소환하면 제단쯤은 쉽게 찾지 않을까요?"

"이미 시도해봤지. 불가능해."

"네?"

펜리는 설명 대신 벽 쪽으로 걸어갔다.

절벽 안의 공간은 특이하게도 온통 붉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 온 공간이 붉게 보였던 것도 사방을 에워싼 이곳 벽의 색감 때문이었다.

그녀가 벽을 툭툭 두드렸는데 단단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곳 벽은 돌로 이뤄진 것 같지 않아. 살짝 물컹거리는 감촉이 느껴지거든."

그녀의 말대로 벽을 확인해보니 벽이 아니라 끈적하고 질긴 피부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엄청나게 큰 키메라 배 속에 들어온 느낌이네요."

"닥쳐."

"...."

6일 동안 배 속에 머물렀던 경험이 그렇게 끔찍했나?

하여튼 이 벽에는 정령과 상극인 기운이 흐르고 있어서 정령을 소환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녀가 전에 말했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 말이다.

그럼 직접 움직이며 알아봐야 한다는 건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펜리를 바라봤다.

"이건 어떨까요?"

"말해봐."

"으앗! 모, 목에 바람은 왜 불어요!"

이어지는 설명에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툴툴대는 태도와 달리 내 의견에 반응하는 것이 나에 대한 믿음이 눈곱만큼은 쌓인 모양이었다.

결과가 좋게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믿고 움직이는 거겠지.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조금 전 끌려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샤르바딘의 생사는 빨리 확인할수록 좋으니 서둘러야 했다.

그것 외에 급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또 있었다.

'도미닉이 조만간 도착할 거야.'

펜리를 겁탈하려던 관리인 중 한 명이 하는 말을 들었다.

도미닉은 전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귀환 중이었다.

도착 시기도 얼마 안 남은 상황.

서둘러 제단을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난 제단에서 서식하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메인이벤트, 백 개의 심장을 일으킨 진짜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도미닉을 탄생시킨 악당 생성자 말이다.

'크리스탈 미믹(Crystal Mimic).'

관리인들조차 모르는 제단의 정보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 세부적이지 않아 그 정보가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소의 '진짜 주인'은 크리스탈 미믹일지도.'

제단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만큼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몰고 오기 전에 무조건 크리스탈 미믹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

도미닉이 도착하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포위당한 채 잡혀 죽을지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제거할 수 있겠지? 혼자가 아니니까.'

난 펜리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내 무력을 대신할 카드.

아직까진 큰 문제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드륵 드륵 드르륵―

일련의 수레들이 덜컹거리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는 스무 대 정도로 줄이 길었는데, 그 안에는 축 늘어진 인간과 이종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마치 시체 더미를 담아 옮기는 장면 같았다.

"네놈의 방법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또 어딨다고요. 그리고 배 속보단 낫잖아요."

"시끄러워."

나와 펜리는 덜컹거리는 수레 밑바닥에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종 대부분이 제단의 먹이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이종들을 한가득 실은 수레에 무임승차를 시도했다.

수레가 움직이는 동안, 펜리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댔고, 난 밑바닥에서 주변을 계속 살폈다.

보이는 건 앞서 걸어가는 관리인 셋과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따라오는 키메라 무리의 하체뿐이었다.

실린 실험체의 수만큼 붙은 키메라들도 엄청났다.

싸우면 이길 수 있냐는 물음에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귀찮게 도망치지 왜 싸우냐고 했다.

내가 증표를 얻으려는 이유였다.

이 엘프는 효율을 너무 따져서, 전투에 쉽사리 끼지 않거든.

통로는 무척이나 길었다.

수레 전부가 제단으로 향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통로 군데군데 철문이 여럿 존재했는데, 그곳에 잠시 들러 수레 일부를 남겨두고 오길 반복했다.

각 철문 안쪽을 둘러볼 때마다 나는 치를 떨었다.

'이런 개새끼들!'

관리인들이 '재료방'이라 언급했던 공간은 잡아 온 이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참혹한 도축장의 풍경이었고, '보관실'은 인간, 이종 그리고 몬스터들의 신체가 크고 작은 병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형 키메라를 제작하는 공간도 존재했는데, 제작 과정은 관리인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대화를 엿들어보니, 주인으로 통하는 도미닉은 중요한 키메라 제작에만 참여하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껏 만난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모두 저놈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건데.

이 정보는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라, 또 한 번 소설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의문도 들었다.

관리인이라 불리는 저들은 누굴까.

어떤 이유로 이 끔찍한 곳에 흘러들어 와 도미닉을 돕고 있는 거지?

저들은 과연 희생자일까. 가해자일까.

의문에 대한 답은 최종 도착지, 제단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밝혀졌다.

"쳇, 오늘 재료방은 내가 맡았어야 했는데."

"뭐가 또 불만인데?"

"어린 것들이 이번에 많이 잡혀 왔잖아. 작은 것들은 자르는 맛이 기가 막히다고."

"물량이 많아서 기회는 충분히 있어. 내일은 너와 나 차례잖아."

"클클클, 그렇긴 하지. 역시 이곳은 천국이란 말이야. 주인님 말만 잘 들으면 살인이든 뭐든 다 할 수 있잖아."

"도적 시절보다 이곳이 훨씬 재밌긴 하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니까. 생명 연장까지도."

서로의 신체를 가리키며 낄낄대는데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과거 라웁 숲을 주름잡던 도적들인 것 같았다.

하나같이 살인을 통해 욕구를 푸는 사이코패스 같은 놈들.

철저한 가해자로 답이 나온 순간, 난 고개를 돌려 펜리를 바라봤다.

"슬슬 움직이시죠?"

"...."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허공에 섬뜩한 크로우를 소환했다.

훼손된 엘프들의 신체들이 병에 담긴 것을 본 후부터 그녀는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계획은?"

"다 죽이시면 됩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방법을 말했네."

수레 밑에서 나온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도착한 제단 입구.

철문이 열리는 것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누, 누구냐!?"

관리인 하나가 나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나를 손가락질한 저들의 괴물 같은 손을 넌지시 바라봤다.

문을 여는 데 저 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너희들을 손질할 사람."

펜리가 수레 뒤쪽으로 튀어 나간 순간, 난 선두에 선 관리자들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상대는 모두 셋.

셋 사이에 기습적으로 자리를 잡고 전방위로 단검을 벼락처럼 찔러 넣었다.

푹. 푹. 푹.

목, 심장, 명치.

셋의 급소를 정확히 파고든 공격.

"…컥!"

"건방진…!"

한 방에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치명상이 분명한데, 관리인들은 즉시 반격해왔다.

역시, 괴물이라는 건가.

부웅―! 붕!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귀 끝에 스쳤다.

저 괴물 같은 팔에 맞는다면 어디든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신체 능력이 인간의 것보다 월등하고, 지능이 있어서 일반 키메라 여럿을 합친 것보다 월등히 강력했다.

거대와 소형의 중간 정도 무력이라고 해야 하나.

전이라면 다소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살짝 물러난 뒤 문양의 빛을 터트렸다.

번쩍―

"...큭! 눈이!"

갑작스러운 눈 부심에 셋 다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는데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문양의 빛이 통하지 않았다.

마석이 깃든 키메라에게만 통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놈들을 향해 단검을 추켜올렸다.

'어디 보자.'

몸 안에 깃든 충만한 마나가 휘돌기 시작했다.

지옥 같았던 6일을 통해 키메라 배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키메라가 죽을까 봐 섣불리 확인하지 못했던 힘이 있다.

난 그 힘을 그대로 개방했다.

우우웅―!

단검이 찬란한 빛으로 번뜩였다.

무기 속성을 강화해주는 인챈트.

단검에 실린 마나 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짙고 무거웠다.

고통을 견디고 견디며 보랏빛 마석을 모조리 복용했고 결국 다 먹어 치웠다.

그 보상이 바로 이 빛무리다.

3성 마력이 깃든 인챈트.

번뜩이는 검날이 공간을 가르며 송곳처럼 뻗어 나갔다.

퍼억!

"끄아아악!"

"…컥!"

일격에 두 놈의 몸통을 무참히 꿰뚫었다. 움찔하는 두 놈의 반응이 끝나기도 전에 난 그대로 놈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피를 뒤집어썼다.

턱 밑으로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내고 시선을 돌렸을 때, 남은 놈이 기겁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총알처럼 튀어 나간 내 손이 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단검을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커, 커억! 살려…!"

"지랄하네."

으득―

잡은 머리를 우악스럽게 꺾으며 단검을 비틀자, 머리가 뎅겅 분리됐다.

목 없는 인형처럼 쓰러지는 놈.

관리인들을 모두 정리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수레를 따라오던 키메라들이 고깃덩어리처럼 너부러져 있었다.

수레 주변에서 펜리가 크로우를 휘두르며 키메라들을 썰고 있었다.

키에에엑!

크아악!

그녀의 크로우에 닿은 순간 키메라들은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고양이처럼 가볍고 날카로운 공격.

압도적인 무력이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여러 장소를 방문하면서 키메라가 줄었다지만, 그래도 수백 마리에 달했다.

짧게 호흡을 내쉰 나는 단검을 움켜잡고 앞으로 쇄도했다.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키메라 무리 속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발톱, 이빨이 사방에서 거칠게 짓쳐 왔다.

순간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눈썹을 찌푸리는 게 미쳤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험이 있어서 말이지.'

수백의 키메라 안에 파고든 순간, 키메라 무리가 날 포위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압박감.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다.

그 압박감에 답을 하듯,

난 씨익 웃으며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가운뎃손가락을 편 순간,

번쩍――――――!

황금빛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48화 환상 마법진

스아아아―!

3성의 마나를 빨아들인 문양은 눈부신 물결로 사방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고립된 공간, 그 안에서 황금빛에 잡아먹힌 키메라들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

빛이 사그라들고, 휑해진 공간.

천천히 내가 등을 돌려 펜리를 바라보며 손을 내린 순간,

쿠쿠쿠쿠쿠쿵―!

수백의 키메라들이 약속한 것처럼 쓰러졌다. 손짓 한 번에 모든 것을 무너트린 압도적인 광경.

"너 이 새끼…."

펜리의 표정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드러났다.

두 눈을 살짝 치켜뜬 채 나를 한참 응시하던 그녀는 무구를 해제하곤 곰방대를 물며 생각에 잠겼다.

아서 클레이튼.

첫 만남에선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기준이 계속 달라지는 녀석이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이 나타난달까.

"양파 같은 놈이네. 힘을 숨기고 있었어?"

"전 숨긴 적이 없습니다만."

"엉덩이 만질 때 분명 1성이었는데, 이상해. 내 감각이 틀릴 리가 없는데."

"...."

첫 만남에서 엉덩이를 만진 게 그런 의미였냐?

검은 장미에서 펜리를 처음 만났을 때 1성이었으니,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3성에 올랐기에 그녀의 혼란은 당연했다.

내 각성 속도는 확실히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모두 생체 마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게다가 꼴에 특성 개화자? 무기에 능력을 부여하는 지원 계열인가? 그 빛은 또 뭐지? 설마 신력?"

수백의 키메라를 단숨에 제압했던 빛.

그 힘은 일반적인 특성과 달랐다.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펜리는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난 짧게 호흡을 내쉬며 이마를 슬쩍 훔쳤다.

과도한 마나 소비로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일단 목적은 달성한 것 같은데.'

내가 오버페이스로 그녀 앞에서 능력을 드러낸 건, 샤르바딘을 찾은 직후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때부턴 계약이 아닌, 필요에 의한 동행이 될 텐데, 펜리의 무력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선 절대 그녀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됐다.

'주도권이 필요한 상황이지.'

적어도 이 장소에서만큼은 그녀보다 강력한 능력을 보유했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추후 내 의견이 먹힐 테니 말이다.

문양의 빛은 키메라에 한해선 그녀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줬다.

"키메라에게 천적인 능력이라, 그 미치광이가 알면 널 씹어 먹으려고 들겠네."

"비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는 거 봐서. 또 숨기는 거 없어? 다른 능력이라든가. 다 털어놔봐."

이 망할 엘프가 춥다고 옷 빌려줬더니, 팬티까지 벗기려고 하네.

물론, 내 패를 전부 깐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새로운 패'가 생겼거든.

바로 3성에서 각성한 개화 특성.

무특성이면 어쩌나 했는데, 적어도 불운 덩어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정 궁금하시면 정보 교환할까요? 저도 펜리 님의 능력이 궁금하거든요."

"내가 왜?"

"싫으면 관두고요. 이럴 시간 없습니다."

그녀가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내뱉었다.

콜록! 매워. 맵다고. 이 빌어먹을 년아.

"흐응, 어디 나가서 보자고."

그녀는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곤 철문에 집중했다.

제단과 통하는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져와."

"네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죽은 관리인의 손을 자른 뒤 그녀 뒤에 섰다.

그녀가 비켜서자, 난 관리인의 손을 철문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쿠쿵―! 소리를 내며 거대한 철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뒤쪽에 잡혀 온 이들이 신경 쓰였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백 단위가 넘어가는 이들을 전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만."

그때 펜리가 수레 쪽을 잠시 둘러보더니, 품에서 수정을 꺼냈다.

손톱 크기의 붉은 수정.

저 수정의 용도는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넬리토리 협곡을 향할 때 그녀가 내게 건네줬던 물건으로, 저 수정을 으깨면 현재 위치 신호가 검은 장미들에게 전달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즉, 그녀가 제단의 위치를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 된다.

"누구에게 보내는 겁니까?"

"저들의 주인."

수레 안에는 납치당한 이종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이종들의 주인?

토바른 지역에서 이종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

"어째서 도르네프에게."

"이번 의뢰는 그 난쟁이의 반려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성격 급한 난쟁이 녀석이 가만히 날 기다릴 것 같아?"

"도르네프가 설마 이곳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오는 내내 신호를 보냈으니 따라붙었겠지."

"혼자 움직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정확히 각자 움직이고 있었지. 내가 샤르바딘의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녀석이 움직인 거야."

의뢰 초기에는 도르네프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움직였던 모양인데, 도르네프를 이곳까지 끌어들인 건 내 정보가 한몫한 것 같았다.

이건 희소식이다.

"도르네프의 합류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겁니까?"

"다리 짧은 난쟁이들만 움직이는 상황이라 살짝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반나절 안에는 도착할 거야."

드워프들로 이뤄진 병력이라면 템빨 죽이는 정예 중 정예일 것이다. 문제는 합류 타이밍인데, 시기가 공교로웠다.

"도미닉의 병력과 부딪칠 수도 있겠는데요?"

"부딪칠 일은 없어. 난쟁이가 피할 테니까. 그 미치광이 곁에 진짜 괴물 새끼가 붙어 있거든. 저번에 부딪혔다가 도르네프가 호되게 당했지."

예상대로 베네타의 영토에서 도미닉의 군단과 베네타의 군대가 한 차례 붙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미치광이 곁을 지키는 진짜 괴물이라.

'아레나 후아튼.'

난 그 괴물의 정체를 바로 눈치채곤 빠르게 물었다. 그 전투에 펜리도 있었을까?

"혹시 그 괴물과 싸워보셨습니까?"

"아직. 하지만 도르네프가 절대 혼자 싸우지 말라고 경고하던데."

"그래서요?"

"닥치라고 했지. 그딴 괴물은 내 한주먹거리도 안 돼."

아, 어째 불안한데.

미완성체인 아레나 후아튼이라면 펜리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는데 도르네프의 경고대로라면 판단 미스일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샤르바딘의 생사가 더 중요해지는데….'

한 지역의 군주인 만큼 도르네프도 펜리만큼 강한 드워프였다.

샤르바딘을 곁에 둘 수 있다면 도르네프까지 내 계획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후속 병력까지 도착하면 내 계획이 훨씬 순조로워진다.

'제발 살아있어라.'

샤르바딘을 떠올리며 활짝 열린 문 너머를 응시했다.

둘러싼 붉은 벽을 제외하곤 내부는 휑했다.

보이는 거라곤 중심부에 자리한 작은 구덩이뿐.

근처로 다가가 구덩이 밑을 살펴보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멍 너비는 마을 우물보다 약간 큰 정도였는데, 잡아 온 이들을 이 구멍 안으로 던져 넣은 것 같았다.

"이게 제단이라고? 그냥 구덩이인데?"

"밑은 다르지 않을까요?"

"밑?"

이 밑에 먹이를 사냥하며 돌아다니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 존재를 펜리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싶지만, 이곳 관리인조차 알지 못하는 정보를 내가 알려준다면 의심부터 할 게 뻔했다.

'걱정할 필요도 없는 실력이고.'

그녀보단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기다려봐."

펜리가 구덩이 쪽으로 손바닥을 펴더니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허공에 작은 빛 구체가 소환되더니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빛이 퍼지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닥 시야.

밑바닥은 그리 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황할 정도로 얕았다.

5미터 정도?

순간 의문이 들었다.

"깊이가 얕은데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 정도 깊이면 누구든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단 한 명도 구덩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걸까요?"

구덩이 주변에 감시자나 경비를 따로 세운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구덩이를 빠져나와 탈출했다는 정보는 들은 바가 없었다.

"전부 기절한 상태로 끌려갔다면?"

"그럼 흔적이 남았을 텐데, 바닥에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샤르바딘을 포함해서 수백 명이 먹이로 던져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밑바닥에 뭔가 남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적어도 핏자국이라든가."

내 말에 펜리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드러난 바닥은 너무나도 깔끔했다.

전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문은 많은데, 뚜렷하게 풀리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소설의 시간보다 빠르게 움직이니까, 곤란한 점도 있네.'

구덩이 밑의 제단은 도미닉이 죽고 한참 뒤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때 이곳은 완전히 무너져서 제단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때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면 곤란했다.

'아직 도미닉이 작업하기 전 단계이니까.'

내가 아는 건 이 제단의 정체뿐, 현재 이 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모르겠으면 부딪쳐 봐야지."

"그래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수고해."

"…예?"

내 몸이 순간 휘청이더니 구덩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펜리가 내 목덜미를 붙잡고 던진 것이다.

추락하는 순간 웃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펜리가 보였다.

"안전하면 곧 따라갈게."

이런 망할 년이!

욕설을 한 바가지를 날리려는데,

"...!?"

나를 바라보던 펜리의 모습이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의문도 잠시,

콰자자작―!

"크윽!"

곧 나는 무언가에 부딪치며 바닥에 처박혔다. 나와 부딪친 것들은 잘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것들은 뭐지?

분명 바닥을 확인했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끄응!"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허리를 두드리며 찡그리고 있던 두 눈을 뜬 순간이었다.

"...."

난 돌처럼 굳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벽에서 흘러나오는 광택 덕분에 시야는 흐릿하게 확보가 되었다. 물론, 썩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내부는 핏빛으로 물든 오싹한 세상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더 오싹한 건.

"시발, 이게 다 뭐냐."

두 발에 치이도록 쌓여 있는 뼛조각들이 보였다. 엄청난 양의 뼛조각이 바닥에 너부러진 광경.

잡혀 온 이들의 유해 같았다.

대체 얼마나 많이 잡아먹힌 거야?

게다가 위에서 바라볼 땐 분명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 뼛조각들은 도대체 어디서.

'설마…!'

다급히 위쪽을 확인했고, 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구덩이가 사라졌다.

구덩이 대신 천장은 붉은 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더듬거리며 천장 벽을 살펴봤는데 허상이 아니었다.

모두 진짜였다.

"펜리! 이 개 같은 년아!"

맞을 각오를 하고 그녀를 크게 불러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펜리의 존재감마저 사라져 버린 상황.

순간 라웁 숲의 실험체 감옥이 떠올랐다.

'환상 마법진!'

설마 이곳에도 환상 마법진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럼 관리인들이 구덩이 밑으로 접근하지 못한 이유와 던져진 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모두 설명된다.

들어올 순 있어도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는 장소.

'이것까진 생각지 못했는데?'

아주 큰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49화 크리스탈 미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