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PIRGG / Chapter 1 - 1

PIRGG

Maxi_Rojas_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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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괴물이 끝없이 밀려온다.

그에 맞춰 방아쇠를 당긴다.

-철컥, 철컥!

그러나, 한없이 역부족이다.

-끼에에에에!!!

사정없이 전신을 찢는 낫 형태의 긴 갈고리.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발톱.

조금의 자비도 없이 생살을 물어뜯는 무수한 송곳니.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분명히 모니터 바깥에서 보는 광경에 불과할 텐데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깨라는 거야?"

더 디펜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자자한 FPS 형식의 디펜스 게임.

그러나 아직까지 그 누구도 더 디펜스의 엔딩을 본 적이 없다.

마의 100번째 스테이지.

그 누구도 깬 적이 없다는 백 번째 스테이 앞에서 나는 487번째 트라이 역시도 실패로 마무리했다.

"하······."

임무 중 사고로 인해서 군에서 전역한 후, 폐인처럼 살던 내 삶에 더 디펜스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487번이나 되는 트라이 동안 나는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걸 전부 다 했다.

그러나 결과는 늘 같았다.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실패, 실패, 또 실패.

'대체 뭐가 문제지?'

온갖 연구를 통해서 최적화된 특성과 매 스테이지마다 얻어야 할 특성 및 아이템은 물론이고, 숨겨진 요소들까지도 싸그리 섭렵했다.

더군다나 이미 고일대로 고인 에임은 총알 한 발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고, 쏘아낸 총알은 모두 몬스터들의 급소에 적중했다.

그럼에도 클리어하지 못한 원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철컥, 철컥─

[현재 탄환 수 : 0]

"아 씨─"

또 총알이야!

키에에엑!!!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빌어먹을 총알.

바로 그게 부족했다.

"하······."

488번의 실패.

몇 년 동안 이어진 여정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해."

더 디펜스는 깰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실제로 전 세계에 날고기는 게이머들이 몇 년간 더 디펜스를 깨기 위해서 달려들었으나, 그 누구도 100번 째 스테이지의 벽을 넘지 못했다.

물론 상황이 이쯤 되면 누군가가 핵을 사용해서라도 클리어를 볼 법도 했지만, 게임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FPS 게임이라면 빠질 수 없는 핵 역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젠, 못하겠다."

할만큼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클리어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재밌었으니까."

폐인처럼 살던 내게 새로운 삶의 이유가 되어 주었던 게 더 디펜스다.

그것도 이젠 끝낼 때가 된 듯했다.

'이젠 추억으로 묻어두자.'

그렇게 내가 오랜 미련을 끊어내고서 더 디펜스를 삭제하려던 순간.

-띠링!

평소 잠잠하던 메시지 앱이 울렸다.

최근 몇 달 동안 울리지 않던 메시지 앱이었다.

'뭐지?'

처음에는 스팸 광고 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나타난 문장에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더 디펜스 트레이너.exe]

더 디펜스 트레이너라고?

'뭐지?'

그 어떤 말도 없이, 달랑 저 파일 하나만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낸 이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이렇게도 낚네."

처음에는 그냥 낚시겠거니 하고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뭐야? 왜 안 닫혀?"

메시지 창이 안 닫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그대로 컴퓨터를 강제 종료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종료가 되지 않았다.

'해킹인가?'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 현상에 그는 컴퓨터 본체 버튼에 손을 올렸다.

이것도 저것도 먹히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종료할 생각이었다.

'······아니, 잠깐만.'

무언가 이상하다.

어떤 기묘함을 느낀 나는 컴퓨터 본체 버튼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고 하던가?

왠지 모르게 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에 관심이 생겼다.

'어차피 바이러스라고 쳐도 컴퓨터에 무슨 특별한 자료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한때, 더 디펜스에 인생을 걸었다.

컴퓨터에 중요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깔려 있는 거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더 디펜스 하나뿐.

여차하면 싹 밀어버리고 포맷하면 그만이다.

반면, 만약 저 트레이너가 진짜라면?

그토록 염원했던 더 디펜스의 엔딩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달콤한 유혹은 어느덧 나에게 어떠한 결심을 굳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 하자.'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딸깍-

마침내 트레이너가 실행되고,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건지는 몰라도 허무할 정도로 심플한 실행창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트레이너의 기능은 심플했다.

「총알 무제한 ON/OFF」

「현재 상태 : OFF」

그냥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왠지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하긴.'

지금까지 그 어떤 프로그래머나 해커도 더 디펜스의 보안을 뚫어내지 못했다.

비록 하나뿐인 기능이기는 해도, 저것만 있어도 어마어마한 거긴 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서는 저 정도 치트만 있어도 얼마든지 마의 백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자신이 있었다.

'만약 이게 진짜라면······.'

가슴이 뛴다.

몇 년 동안이나 도전해왔던 게임이지만, 이젠 진심으로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이 트레이너가 진짜라는 가정이지만··· 실험해보면 되겠지.'

나는 곧장 더 디펜스를 실행했다.

「총알 무제한 ON/OFF」

「현재 상태 : ON」

트레이너를 실행하는 것 역시도 잊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나는 기존의 세이브 데이터를 제쳐두고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정말로 총알이 무한이라면, 초반 특성을 손보면 더욱더 완벽하게 클리어 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누르자, 기본 설정 창에서 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외모를 비롯한 가타부타한 부분은 이미 저장해놓았던 세이브 데이터를 사용했다.

하도 이 짓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외모와 관련된 커스텀 부분은 아예 파일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곧장 특성으로 시선을 옮겼다.

행정 보급관, 사격의 명수, 손재주, 그 외 등등 여러 특성이 기본 특성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바꿔야 할 부분이었다.

[행정 보급관]

기본적인 탄약을 비롯한 특수 무기의 최대 소지 수량을 늘려주고, 물자 보급에도 보너스가 있는 특성.

본래 행정 보급관 특성은 쉴새 없이 몰려드는 마물과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더 디펜스의 필수 특성 중 하나인 행정 보급관 특성을 뺐다.

만일 이 트레이너가 진짜라면 이 특성은 더는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필수적인 특성인 만큼 소모 특성 포인트 값 역시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성 포인트 : 30]

그렇게 확보된 특성 포인트는 30.

일반적인 특성 세 개는 찍을 수 있는 포인트다.

그렇게 확보된 특성 포인트를 그는 새로운 특성에 투자했다.

[강인한 체력]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특성 포인트 : 0]

그렇게 모든 특성 포인트를 사용했음에도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특성 포인트를 모두 사용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짜낼 곳이 있었다.

패널티 특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패널티 특성은 일반 특성과는 달리 말 그대로 캐릭터에 패널티를 가하는 특성으로, 일반 특성과는 달리 패널티를 추가할 때마다 특성 포인트를 반환받는다.

캐릭터에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하고, 보다 더 다양한 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한 '특성 시스템'의 일부였다.

[불면증]

불면증 특성은 얼핏 보이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디버프를 동반한 특성이다.

불면 상태 이상이 발생하고, 휴식으로 인한 회복 기능에 패널티를 입는다.

거기에 더해서 적중 보정 효과 역시도 사라져서 순수한 컨트롤로 상대를 맞춰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기능이 있었는데, 바로 불면증 특성에 있는 에테르 감응력이다.

'잠을 못 자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설정이었지.'

에테르가 무엇인가?

이는 이계와 관련된 미지의 힘으로서, 에테르를 습득한 인간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게 된다.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일정 구간이 지나면 인위적으로 에테르 주입 수술을 받은 에테르 병사로 전직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불면증 특성을 잘 활용하면 그러한 수술을 받지 않고도 에테르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거기다가 에테르 병사는 패널티가 너무 커.'

정확히 말하자면 기회비용 대비 성능이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에테르는 불면증 특성으로 습득하고, 전직은 다른 걸 고르는 게 나아.'

[특성 포인트 : 10]

이러니저러니 해도 불면증의 본질은 패널티 특성이었기에 10의 특성 포인트를 반환받았다.

나는 곧이어서 몇 가지 패널티 특성을 더 선택했다.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이 패널티 특성들은 불면증 특성과는 달리 숨겨진 요소는 없는 평범한 특성이었지만, 충분히 컨트롤로 극복할 수 있는 특성들이었기에 평소에도 자주 사용했던 패널티 특성들이었다.

더 디펜스의 썩은물인 나에게 있어서 조금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과 총구가 제멋대로 흔들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패널티 특성 : 30]

'그러면······.'

나는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특성을 선택했다.

이미 무수한 시도 끝에 최적화된 빌드는 존재했고, 거기에서 행정 보급관 특성만큼 여유분이 생겼으니 다른 특성을 찍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모두 화력과 관련된 특성.

평소에도 좋다고 생각했던 특성들이지만 애석하게도 활용할 각이 안 나와서 못 찍은 특성들이었다.

[특성 포인트 : 0]

'음, 뭔가 아쉬운데······.'

물론 이 정도만 해도 평소에 내가 만들던 캐릭터보다 월등한 성능이다.

거기에 더해서 트레이너가 진짜라면, 정말로 마의 백 번째 스테이지를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시도는 해봐도 나쁠 거 없겠지.'

실패하면 그때 가서 특성을 바꿔서 다시 도전하면 된다.

어차피 이미 새로운 트라이가 낯선 건 아니었으니까.

[접신]

무려 특성 포인트 30을 반환 받는 패널티 특성.

이 특성을 습득하게 되면, 플레이어는 게임 내내 지독한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그럼에도 특성 포인트 30 반환이라는 압도적인 이점으로 인해서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이 특성에 도전했으나, 결론은 늘 같았다.

-쓰레기 특성.

아무리 특성 포인트 30짜리 패널티 특성이라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환각과 환청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특성을 작성했다.

감당할 자신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접신 특성에 숨겨진 요소가 무엇인지 슬슬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해보면 알겠지.'

거기에 더해서 '접신'으로 얻어낸 30포인트짜리 특성을 추가로 작성한 나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그대로 게임 시작을 눌렀다.

[해당 특성에 맞는 캐릭터 탐색 중······.]

[탐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칼 마커스는 토테미즘 신앙을 지닌 부족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칼 마커스는 그러한 부족 신앙에 반발하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에 잠을 설칩니다.

-이질적인 출신 탓에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많은 난항이 있을 것입니다.

-매우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지닌 전사입니다. 사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단련된 육체와 굳은 심지는 영혼들의 속삭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칼 마커스? 이 캐릭터는 처음 보는데. 거기다가 계급이랑 보직도 없다고? 병사가 아닌 건가?'

488번이나 더 디펜스에 트라이했던 나다.

설령 직접 해보지는 않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캐릭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칼 마커스의 이름은 나에게 있어서도 더없이 낯설었다.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달라.'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더 디펜스의 엔딩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묘한 열기를 느끼며 그대로 게임 시작을 누른 순간.

[게임을 시작합니다.]

"······어?"

삐이이이이이───────

갑작스레 찾아온 이명과 함께 환한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 프롤로그 > 끝

덜컹거리는 트럭 적재함 위.

온갖 화기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

"조금만 더 버텨! 거의 다 도착했어!"

들려온 괴성과 고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사뭇 낯선 풍경이 나를 반겼다.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하늘.

마치 찬란했던 문명의 속살을 드러내듯이 드러난 철골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폐허들.

"이게 무슨······."

놀랍게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내가 알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그 언어를 직접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 얼 타지 말고 이거나 받아!"

뭐지?

뭐야 이거?

영문을 알 수 없는 와중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가 건넨 권총을 받았다.

서늘하고 묵직한 촉감.

장난감 따위가 아니었다. 비록 내가 총 대신 마우스를 잡고서 지낸 세월이 꽤 길긴 했어도 이걸 착각할 리는 없었다.

이건 진짜 권총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망할! 노친네한테 몇 마디 들은 걸 아직도 꽁해 있는 거야? 장난칠 상황 아니니까 준비나 해!"

"···준비? 무슨 준비?"

"젠장! 네 마음대로 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 속에서 전신에 문신이 그려진 사내는 버럭 화를 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칼이라니?'

잘못들은 게 아니다.

저 문신 남자는 분명히 나를 칼이라 불렀다.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문신 사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제기랄! 벌써 다 따라붙었어!"

그와 함께 사방에서 흉포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캬오오오오!]

···짐승의 울음소리?

아니, 아니다.

이 울음소리는 마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빌어먹을 개새끼들이 달라붙었지!"

그제야 보이는 트럭 바깥의 풍경.

[크르릉, 컹! 컹!]

[캬오오오!!]

내가 탄 트럭을 포함해서 3대의 트럭과 그 뒤를 쫓는 수십 마리의 괴물들의 모습.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괴수들의 모습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내가 아는 마수들과 닮아 있었다.

"저것들이 왜······."

10급 야수종, 헬하운드.

더 디펜스에 등장하는 몬스터.

그것들이 지금 우리를 쫓고 있었다.

"망할! 온다!"

문신 사내의 거친 외침과 함께 헬하운드들이 흉포함을 토해내며 트럭을 향해 달려들었다.

[컹, 컹컹!]

[캬우, 캬우우!]

"갈겨!"

신호와 함께 트럭을 향해 달려들던 헬하운드를 향해 총알이 쏟아졌다.

탕, 타탕!

타타타탕!!

[깨갱!]

그렇게 몇 마리의 헬하운드가 쓰러졌으나, 달려드는 헬하운드의 숫자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조금만 더 버텨! 곧 아크다!"

···아크라고?

"이봐."

"망할! 아까부터 왜!"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아크라고?"

"이런 씨발! 대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아크지!"

말도 안 되는······.

내가 아는 아크는 더 디펜스에 있는 인류 최후의 요새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서 칼이라는 이름과 익숙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의 모습.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아크로 향하고 있다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잖아.'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역시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비상식과 비상식.

그것들이 모두 뭉쳐서 지금의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내 생각이 정말로 맞는다면.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한다.

그리하여 내려진 결론.

'더 디펜스.'

아무래도 그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그것도 내가 만든 칼 마커스라는 이름을 지닌 캐릭터로.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모든 상황이 그것을 가리켰다.

'거기다가 지금의 상황을 보면··· 칼 마커스는 아크 출신이 아닌 외부 출신이다.'

내가 작성한 특성 탓에 생긴 패널티.

『이질적인 출신 탓에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많은 난항이 있을 것입니다.』

더 디펜스는 플레이어가 작성한 특성에 따라서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정해진다.

그중에서도 아크 바깥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나도 아예 처음 본다.

'그렇다면······.'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왼쪽 귀를 만졌다.

더 디펜스에서 캐릭터 정보를 볼 때 사용하는 동작이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1

체력 : 12

재주 : 10

행운 : 7

에테르 감응력 : 5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불면증],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

'······진짜였군.'

거기다가 이제 막 생성됐을 터인 캐릭터의 근력, 체력, 재주의 평균이 10을 넘다니······.

아크 신병의 평균적인 능력치가 보통 2에서 3 사이를 감돈다는 걸 감안한다면 엄청난 수치였다.

'보통 이런 수치는 오렌지 라인 이후에서나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에테르 수술을 받아야 얻을 수 있는 에테르 감응력 능력치가 무려 5나 된다.

아크 바깥 출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패널티가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처한 상황을 대강이나마 파악했으니,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아야 한다.

다행히도 그건 꽤 간단했다.

"조금만 더 버텨! 아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크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

나는 우리를 쫓는 마수를 살폈다.

'···몰려드는 마수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10급 야수종이 대부분.'

충분한 보급과 높은 성벽이 세워진 아크 외벽에서야 간단히 막아낼 놈들이지만, 문제는 이곳이 아크 바깥이라는 점이다.

어설프게 상대했다가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지닌 장비를 점검했다.

──────────────

[낡은 마카로프 권총] [★(1성)]

낡고 오래된 마카로프 권총.

9mm 탄을 사용한다.

고장 위험성이 있다.

"상세 보기"

──────────────

──────────────

[9mm 일반탄] [★(1성)]

[현재 수량 : 15]

9mm 일반탄.

"상세 보기"

──────────────

'···형편 없어.'

도대체 어느 시대에 썼던 건지도 모를 낡은 권총 한 자루와 고작 15발의 탄.

이 정도로는 아무리 10급 야수종이라 할지라도 한두 마리 정도 잡는 게 고작이다.

'모든 총알을 급소에 맞춘다고 해도··· 기껏해야 3마리 정도.'

하지만 고작 세 마리의 헬하운드를 사냥한다고 해서 이 전황이 바뀔까?

나는 상황을 살폈다.

달리는 트럭 위.

비루한 장비.

목적지는 아크.

'주어진 조건으로 보건대, 이 상황에서는 마수들을 섬멸하는 건 불가능해.'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트럭의 뒷부분으로 향했다.

"오, 위대한 영혼의 후예, 칼 마커스! 여긴 웬일이신가?"

"도우러 왔다."

"이제야 한 손 거들겠다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드디어 헛소리는 그만두기로 한 건가?"

"그런 셈 치지."

나는 문신 사내의 빈정거림을 뒤로한 채로 권총을 다잡았다.

서늘하고 묵직한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군에서 전역한 뒤로 처음으로 잡아보는 권총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런 권총으로 저것들을 상대할 수는 없어.'

자연히 내 시선이 문신 사내가 들고 있는 소총으로 향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권총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나아 보였다.

"그거."

"응?"

"바꾸지."

내가 권총을 내밀며 문신 사내가 쥐고 있는 소총을 가리키자, 문신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장난하나?"

"장난 아니야."

"하······."

문신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깨에 멘 멜빵끈을 풀어서 나에게 소총을 건넸다.

"네 실력 아니까 넘기는 거야."

"알아."

그렇게 나는 문신 사내의 소총과 권총을 맞바꿨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순순히 바꿔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이들 사이에서 칼 마커스의 명망이 생각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어디 볼까.'

──────────────

[오래된 M1 카빈 소총] [★(1성)]

오래된 M1 카빈 소총.

7.62 x 33mm 탄을 사용한다.

손질이 필요해 보인다.

"상세 보기"

──────────────

[7.62 x 33mm 일반탄] [★(1성)]

[현재 수량 : 30]

7.62 x 33mm 일반탄.

"상세 보기"

──────────────

'쯧.'

아크 내에서 보급받는 장비에 비하면 그야말로 형편없다.

이런 장비들로 헬하운드를 몇 마리씩이나 잡아낸 게 용할 정도.

'무엇보다도··· 총알 수가 너무 적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총알은 기껏해야 30발.

고작 이걸로는 몰려드는 헬하운드를 모조리 사냥하기는커녕 아크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흐아악!"

그러한 염려를 증명하듯이 뒤쪽 트럭에 있던 이들 중 몇 명이 헬하운드에게 붙들려서 굴러떨어졌다.

"쿠드!"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들을 구할 여유는 없었다.

"이 개새끼들아아!!"

또다른 트럭에 있는 피난민들이 마구잡이 사격을 가했으나, 영악하기 짝이 없는 헬하운드가 그런 눈먼 총알을 맞아 줄 리가 만무했다.

철컥, 철컥─

"이런 젠자─"

트럭 위로 날아든 헬하운드들에 의해서 순식간에 트럭 위 적재함에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한때 사람의 것이었던 피와 살점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흐아아악!"

몇몇 피난민들이 이를 견디다 못해서 트럭에서 뛰어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트럭을 쫓고 있던 헬하운드들에게 사정없이 물어 뜯겼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제기라알!"

헬하운드가 바로 뒤에 있는 트럭을 덮친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깨갱!]

헬하운드의 급소는 두개골이 보호하지 못하는 두 눈과 마찬가지로 갈비뼈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슴 정중앙.

'조준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못할 수준은 아니야.'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내가 작성한 수전증 특성 탓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많은 나라도 이런 악조건 속에서는 총알이 빗나갈 법도 했건만, 칼 마커스가 지닌 능력 보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친 듯이 날뛰던 헬하운드의 급소를 맞추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할만해.'

생각을 마친 내가 카빈 소총을 다잡았다.

첫 번째 목표는 주제도 모르고서 우리가 있는 트럭을 향해서 달려드는 헬하운드였다.

한 발.

[깨갱, 깽!]

[키에에에에!!!]

두 발.

[끼게게게겍······!]

세 발, 네 발, 다섯 발······.

단 한 발의 낭비도 없이 토해진 총알이 모조리 헬하운드의 급소에 박혔다.

"이런 젠장! 역시 하면 되잖아!"

문신 사내가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말을 건네며 밀려드는 헬하운드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썩 어울리는데."

"누구 덕분에 말이지!"

"이름이 뭐지?"

"···뭐? 설마 지금 내 이름도 까먹은 거냐?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식이 있나······."

문신 사내가 도끼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쿠릴타다! 강철 도끼 쿠릴드의 아들, 쿠릴타! 다음에 또 잊는다면 이 도끼가 내 이름을 못 잊게 만들어 주지!"

"알았다, 쿠릴타."

대체 몇 번의 방아쇠를 당겼을까.

슬슬 총알이 떨어질 때도 됐건만, 어째서인지 총구에서는 불꽃이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느덧 우리를 쫓던 헬하운드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저기 봐! 아크야!"

그리고서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높디높은 성벽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린 살았어!"

모두가 생존을 환호하던 순간.

"잠깐!"

콰카카캉─!!!

거칠게 울려 퍼진 굉음과 함께 이제 2대밖에 남지 않은 트럭 중 한 대가 통째로 전복됐다.

"이게 무슨─"

문신 사내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전복된 트럭에서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릉······.]

형태 자체는 헬하운드와 큰 차이가 없으나, 2.5톤 트럭 한 대를 통째로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와 마치 가시처럼 돋아난 뼈들.

'저건······.'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

헬하운드들의 우두머리다.

"저, 저게 대체 뭐야?"

"맙소사······."

"우린··· 다 죽을 거야."

모두가 절망에 빠진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냉정했다.

분명히 상황은 절망적이다.

나는 이미 30번 이상의 방아쇠를 당겼다.

즉, 본래 가지고 있던 총알을 모두 소모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본래였다면 탄창에 남은 총알 역시도 진작 바닥났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총구에서는 계속해서 총알이 나가고 있었다.

탕, 탕탕탕!!!

마치, 내 총알이 무한이 되기라도 한듯이 말이다.

'기분 탓이 아니야.'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그 망할 트레이너 탓에 이 세계에 들어왔다면.'

그 효과 역시도 진짜여야만 한다.

"······칼?"

쿠릴타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한 채로 나는 카빈 소총을 다잡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크르릉······.]

스컬 하운드가 이빨을 드러낸 채로 내가 있는 트럭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쿵! 쿵!

집 한 채만한 덩치를 자랑하는 스컬 하운드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철컥.

천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지금.'

뿜어질 리가 없는 M1 카빈 소총의 총구에서 화염이 뿜어지며,

[키에에에에에!!!]

스컬 하운드의 눈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 피난민 > 끝

[키에에에엑!]

스컬 하운드의 급소는 기본적으로 헬하운드와 같다.

다만, 헬하운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과 두꺼운 가죽 탓에 같은 약점이라도 훨씬 더 정교한 사격을 해야한다.

스컬 하운드의 크기는 헬하운드와 비교조차 되지 않게 거대한데 반해, 약점의 크기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화력이 너무 약해.'

본래였다면 왼쪽 눈에 총알이 박힌 순간, 총알이 스컬 하운드의 뇌까지 파고들어서 즉사했어야 한다.

하지만 화력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뭐, 문제될 건 없지.'

한 발이 안 되면, 두 발 세 발, 아니 그 이상을 쏘면 될 뿐.

본디 탄약의 제약이 매우 심한 더 디펜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식한 일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능했다.

[캬오, 캬오오!]

총구에서 불이 뿜어질 때마다 우리를 쫓는 스컬 하운드의 거체가 들썩였다.

딱! 딱!

아슬아슬하게 스컬 하운드의 이빨이 딱딱 부딪치며 트럭을 물어 뜯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급소에 총알이 박혔다.

"흐아아악!"

"더, 더 쏴!"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M1 카빈 소총의 대(對) 마수 저지력은 형편없다.

본래부터 마수용으로 설계된 총기가 아니라, 그냥 어디서 굴러먹던 오래된 총을 사용하는 거라서 그렇다.

즉, 단 한 발이라도 빗나간다면 당장 흉포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는 스컬 하운드에게 산 채로 물어 뜯긴다는 소리다.

'후.'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빌어먹을 수전증 때문이었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

단 한 번의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도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했다.

'지금.'

호흡을 멈추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속에서 다시금 방아쇠를 당긴다.

탕─!

공기 저항마저도 계산한 총알의 궤적이 스컬 하운드의 심장 가죽을 두들겼다.

[끼에에에에!!!]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고 여긴 건지 스컬 하운드가 추격을 멈추고서 몸을 돌렸다.

도주를 택한 것이다.

"도, 도망 간다!"

"살았어! 살았다고!"

스컬 하운드와 함께 쫓아오던 헬하운드들이 추격을 포기하자, 이제 몇 남지 않은 피난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칼!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 역시 위대한 영혼의 후예로군!"

"위대한 칼 마커스!"

쿠릴타를 포함한 트럭 위에 있는 피난민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대로 칼 마커스는 이들 사이에서 꽤 명망이 높은 듯했다.

"칼! 덕분에 살았어!"

"봐봐! 곧 아크야! 우린 살았다고!"

물론, 내 생각은 저들과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차 돌려."

"······뭐?"

그 말에 옆에 있던 쿠릴타가 비명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저걸 잡을 거다."

"···뭐?"

스컬 하운드의 사체는 여러모로 꽤 쓸모가 많다.

그렇기에 이미 반 시체나 다름없는 녀석을 여기서 그냥 놓아주기에는 아까웠다.

특히, 당장 내 처지가 아크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라면 더욱더.

'거기다가, 이대로 놓아주면 훗날 큰 화근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커.'

스컬 하운드는 아예 잡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잡으려 시도했다면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그 사실까지 저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에 나는 강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기랄!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쿠릴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이상 더 거리를 벌렸다가는 도망가는 스컬 하운드를 잡는 게 요원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봐! 차 돌려! 위대하신 칼 마커스께서 저놈과 끝을 봐야겠다고 하는군!"

"뭐?"

"잔말 말고 차나 돌려!"

쿠릴타의 윽박지름 때문인지, 아니면 칼 마커스의 명망 덕분인지는 몰라도 머지않아 트럭이 몸체를 돌렸다.

당장 이 트럭이 조금 전까지 죽어라 도망치고 있던 걸 생각한다면 내가 시켜놓고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제기랄··· 내가 미쳤지."

쿠릴타와 마찬가지로 피난민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잿빛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생과 사의 경계를 건넜는데, 거길 다시 들어가자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제안인 만큼 만약 칼 마커스의 평판이 조금만 더 좋지 않았더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지.'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아크 바깥의 인물로 빙의한 걸 운이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저기 있다!"

스컬 하운드의 행방은 곧 찾을 수 있었다.

이미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스컬 하운드는 그다지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이미 눈과 심장에 큰 상처를 입은 탓에 예전과 같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컹, 커헝······.]

상처 입은 야수.

본래였다면 섣부르게 건드려서는 안 될 대상이지만, 나는 스컬 하운드의 습성을 알고 있었다.

'스컬 하운드의 체력이 일정 수치 이하로 내려가면, 변태(變態)를 시도한다.'

쩌적, 쩍─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벌써 스컬 하운드의 갈비뼈가 피부를 꿰뚫고 나오며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게 보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곧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는 7급 괴수종인 스컬 센티피드가 된다.

스컬 하운드의 몸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뼈 기생체가 스컬 하운드가 약해진 틈을 타서 육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말이 변태지, 스컬 하운드들에게 있어서 이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헬하운드들도 목숨이 위험해지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컬 하운드를 따르고 있던 헬하운드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대로 둘 생각은 없지만.'

나는 곧장 변태 중인 스컬 하운드의 앞에 총구를 겨눴다.

움직이는 트럭의 속도, 바람의 방향, 스컬 하운드와의 거리. 그 모든 것의 계산을 본능적으로 마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궤적을 그린 총알이 스컬 하운드의 눈에 또다시 박혔다.

[끼에에에에!!!]

스컬 하운드가 몸부림쳤다.

하지만 나는 총질을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탕, 탕탕!!

[키에에에엑!]

스컬 하운드가 비명을 내지르며 내가 탄 트럭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흐아악!"

"오, 온다!"

전신에 돋아난 뼈와 더불어서 피를 줄줄 흘리는 채로 달려드는 스컬 하운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사자(使者)나 다름없었다.

'심장의 상처.'

약점을 포착한 내가 재차 방아쇠를 당긴 순간.

[키득······.]

어디선가 들려온 웃음소리와 함께 손에 걸리는 촉감이 이상했다.

철컥, 철컥─

'이게 무슨······.'

탄이 걸렸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캬오오오!!]

'시발.'

좆됐네.

"이런 제기랄! 칼!"

쿠릴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스컬 하운드가 지척에 다다랐다.

내가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

[킥킥······.]

귓속에서 또다시 울려 퍼진 환청과 함께 스컬 하운드의 발톱이 멈칫했다.

'···멈췄다?'

찰나의 순간.

나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쿠릴타!"

"망할! 받아!"

쿠릴타가 던진 권총을 낚아챈 나는 그대로 잠시 멈춘 스컬 하운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움직이는 트럭 위에서 움직이는 스컬 하운드의 급소도 어렵지 않게 맞췄던 나다.

이 거리에서 가만히 있는 스컬 하운드의 심장을 노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탕─!

몇 번의 총성이 울린 뒤,

심장에서 피 분수를 뿜어낸 스컬 하운드가 그대로 쓰러졌다.

쿠웅!

아무리 8급 괴수종의 가죽이 질기다고 해도, 같은 자리에 총알을 수십 발을 먹으니 버티려야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정예)를 처치하였습니다.]

[헬하운드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9급 이하의 야수종에게 1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억울하게 떠나간 원혼들의 넋이 조금은 달래졌을 것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5 -> 6]

"저걸··· 진짜로 잡았어?"

"···아직 살아있는 거 아니야?"

"이런 젠장할! 칼! 기어이 이 괴물 딱지를 잡고야 말았군."

마침내 스컬 하운드가 쓰러지고, 쿠릴타를 비롯한 피난민들이 환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멍하니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에 그건······.'

난데없이 들려온 웃음소리.

그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환청.'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환청을 비롯한 불면증과 접신 특성으로 인해서 생긴 패널티.

그게 분명했다.

『칼 마커스는 토테미즘 신앙을 지닌 부족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칼 마커스는 그러한 부족 신앙에 반발하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에 잠을 설칩니다.』

그러나 의문도 있었다.

'분명히 두 번째 환청이 들렸을 때, 스컬 하운드가 멈췄어.'

···우연인가?

'짐작이 가는 건 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

확신하지 못하는 걸 이용하려 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스컬 하운드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거."

"응?"

"나이프."

쿠릴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허리춤에 있는 나이프를 뽑아서 나에게 건넸다.

"아주 다 털어가는군."

"잠깐 빌리는 거야."

나이프를 건네받은 나는 그대로 피를 꿀렁이고 있는 스컬 하운드의 심장 앞으로 다가섰다.

"······칼?"

나이프의 주인인 쿠릴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심장 가죽을 자르기 시작했다.

스걱, 스걱─

"지금 무슨······!"

주변의 시선을 뒤로한 채로 어느새 전신을 피로 물들인 내가 스컬 하운드의 가슴 안쪽을 헤집었다.

'대충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주변의 반응은 그야말로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이었다.

"맙소사······."

"우웩!"

"칼, 대체 무슨 짓을······!"

그렇게 스컬 하운드의 가슴 속을 한참 헤집던 나는 이내 손끝에 걸리는 어떤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찾았다.'

나는 그걸 그대로 주욱, 하고 잡아 당겼다.

[끽, 끼기긱······!]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마물.

내가 찾고 있던 뼈 기생체였다.

"저, 저건!"

"칼! 당장 놔! 죽여야 해!"

"그럴 필요 없어."

뼈 기생체.

지금 당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물이지만, 초반 스테이지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그걸 왜······."

쿠릴타가 질린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나는 그것을 주변에 굴러다니는 녹슨 통조림 안에 아무렇게나 넣고는 그대로 뚜껑을 닫았다.

앞서 봤듯이 뼈 기생체는 매우 위험한 마물이지만, 조금 전에 숙주가 죽으며 힘을 거의 잃은 탓에 나에게 기생하기는커녕 이 통조림 하나 뚫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힘을 회복할 테지만, 그때가 되면 뼈 기생체를 가둘 마땅한 장비 역시도 마련될 테니 상관없었다.

"쓸데가 있어서."

"허······."

당장은 사용하지 못할 테지만, 약간의 준비만 되어도 뼈 기생체는 매우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다.

괜히 더 디펜스 클리어에 있어서 필수로 얻어야 할 것 중 하나가 아니다.

'운이 좋았어.'

뼈 기생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크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단순히 회수 여부를 떠나서, 아크의 무식한 화력에 스컬 하운드가 죽을 정도면 심장 옆에서 기생하는 뼈 기생체가 살아남을 가능성 역시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뼈 기생체를 얻기 위해서는 스컬 하운드의 급소만 노릴 수 있는 적당한 화력과 더불어 기술이 필요했다.

"그럼 가지."

"어, 어? 그래야지."

"저것도 챙기고."

내가 스컬 하운드의 시체를 가리키며 턱짓하자, 쿠릴타가 뜨악했다.

"······진심이야?"

"그래."

쿠릴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내 말이 진심인 걸 알았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빌어먹을 놈들아! 어서 움직여!"

그렇게 스컬 하운드의 사체를 트럭 적재함에 싣자, 자연스레 우리는 그 옆에 낑기는 형태로 적재함에 타게 되었다.

"으······."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는 거 아니겠지?"

"쫄기는."

쿠릴타가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권총을 꼭 쥔 손에서 그가 긴장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어진 여정은 앞선 전투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탄했다.

스컬 하운드의 시체 탓인지는 몰라도 감히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크의 성벽이 다시금 지평선에 드러났다.

"···진짜로 살았군."

"아크다!"

아크의 뒤를 지키고 있는 활화산 노아와 수백km가 넘는 광활한 영토를 감싼 채로 높게 솟은 성벽.

그야말로 인류 최후의 요새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인류 최후의 요새, 아크(Ark).

마침내 그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 피난민 (2) > 끝

"와······."

쿠릴타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이렇게 보는 아크의 풍경에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에서 보는 아크와 이렇게 실제로 보는 아크 사이에는 그 정도로 큰 괴리가 있었다.

"저기 성벽 높이 보여? 크로노스와는 비교도 안 되겠어."

"크로노스도 충분히 거대한 도시였는데··· 여긴 아예 궤를 달리하는군."

"괜히 아크겠나?"

"그 크로노스도 이제는 없지만······."

피난민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해자로 둘러싸인 아크의 외벽을 따라서 마침내 다리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건너지?"

쿠릴타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기다려."

그 말마따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위압적이었다.

["모든 무장을 해제해라."]

온갖 마수와 마물이 들끓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는 소리는 곧 자살하라는 말과도 다름없다.

이곳이 아무리 아크라고 하더라도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힌 사고방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피난민들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이윽고 그 고민을 해결해주겠다는 듯이 스피커에서 뒷말이 들려왔다.

["불응시, 사살하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와 쿠릴타를 포함한 모든 피난민이 무장을 해제하자, 다시금 스피커가 울렸다.

["뒤로 열 보 물러나라."]

쿠릴타와 피난민들이 나를 바라 보았다.

"칼?"

"순순히 따라."

어차피 이런 건 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애초에 아크 측에서 우리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우리가 열 보 뒤로 물러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문을 겸한 다리가 깊게 파인 해자 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치익, 치이익─

그 광경이 어찌나 압도적인지 잠시 넋을 잃고 보고 있다 보니, 어느덧 그곳에서 무장한 아크의 군인들이 나와서 우리를 마주했다.

'응?'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군인의 모습에 나는 잠시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단발.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

수려하게 놓여진 이목구비.

레드 라인의 게이트 관리 장교 중 한 명인 이모샤(Imocia) 중위였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그녀가 나온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이 그녀의 책임 구역인 Red-17 게이트인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우리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어디서 왔지?"

이모샤 중위의 말에 살며시 미간을 좁힌 쿠릴타가 앞장섰다.

"크로노스에서 왔소. 정확히는 그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왔지."

"크로노스? 그곳에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정기 교류 일자는 아직 한참 남은 거로 아는데."

"크로노스가 멸망했소. 그 근방도 마찬가지고. 아주 쑥대밭이 됐지."

"······뭐?"

더 디펜스의 배경 설정이야 질리도록 읽었던 나야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기에 썩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이모샤 중위의 표정은 대단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더 디펜스의 목적은 인류 최후의 요새인 아크를 수호하는 것이지만, 아크가 처음부터 인류의 마지막 도시가 된 건 아니다.

아크 바깥에도 도시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다.

크로노스 역시도 아크 바깥에 있는 무수한 도시 중 하나였다.

더 디펜스의 시작은 그러한 도시들이 멸망하며 시작된다.

"······크로노스의 생존자는 너희가 전부라는 건가?"

"그렇지는 않겠지. 다른 곳으로 도망간 피난민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크로 향한 차량은 백 대가 넘었소."

"그런가."

이모샤 중위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타고 온 트럭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쿠릴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전리품이지."

"···전리품? 저게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이모샤 중위의 눈이 경계와 의심으로 깃들자, 하는 수 없이 내가 끼어들었다.

이대로 쿠릴타에게만 맡겼다가는 의도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꽤 값이 나간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끼어들기 무섭게 이모샤 중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떻게 잡았지? 보통 녀석이 아닐 텐데."

"눈과 심장에 몇 발 박아주니까 잠잠해지더군요."

"···그게 전부였나?"

이모샤 중위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스컬 하운드의 사후(死後)에 걱정할만한 일이라면 오직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이놈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

내가 품에 있던 통조림을 꺼내들자 이모샤 중위가 한 발자국 물러나며 경계의 기색을 띠었다.

퉁, 퉁!

통조림 안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자 이모샤 중위가 본능적인 몸놀림으로 권총을 꺼내서 겨누었다.

쿠릴타가 지니고 있던 권총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고급 장비였다.

"···그 안에 뭐가 있지?"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철컥-

이모샤 중위가 겨눈 권총의 안전 잠금이 풀렸다.

"내려놔라. 그건 위험하다. 당장 제거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제 사유재산입니다."

"사유재산?"

만약 고개가 뻣뻣한 다른 게이트 관리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샤 중위는 실전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낙하산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재미있는 소리로군."

어찌 보면 자신감이라고 봐도 좋았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모샤 중위에게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책임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름이 뭐지?"

"칼 마커스입니다."

"기억해두지."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대기해라."

이모샤 중위는 그 말만을 남긴 채로 아크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크로노스가 멸망한 것부터 시작해서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상부에 보고를 하러 가는 듯했다.

"괜찮을까?"

어느새 다가온 쿠릴타가 슬쩍 물었다.

야만인처럼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아크는 늘 심각할 정도의 병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외부인이라고는 해도 함부로 내치기는 애매할 것이다.

심지어 그게 스컬 하운드를 사냥할 정도로 유능한 이들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있긴 하지만······.'

현재 내가 지닌 에테르 감응력은 과할 정도로 뛰어나다.

아크의 최후방인 레드 라인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정도로.

에테르에 대한 생각은 아크 내에서도 생각이 갈린다.

최후방인 레드 라인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반면, 최전방으로 갈수록 오히려 무기로서 에테르를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염려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지잉, 지잉─

아까부터 거슬릴 정도로 우리를 스캔하고 있는 스캐너.

저것은 우리가 아크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내 우리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쯧.'

나는 이모샤 중위가 사라진 아크 입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레드 라인 17번 게이트의 출입 통제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는 갑작스레 찾아온 피난민들의 소지품을 살피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이런 장비들로 스컬 하운드를 잡았단 말이야?'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

헬하운드들의 우두머리로서, 아크의 방어선 중 최후방인 이곳 레드 라인에 출몰하는 마수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난적이다.

8급 괴수종답게 단단한 외피는 물론이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로서의 영악함. 거기다가 뼈 기생체와 공존하는 마수라는 특이성으로 인해서, 어설프게 상대했다가는 7급 괴수종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에 더욱더 까다로운 마수였다.

그러한 특성 탓에 스컬 하운드는 본래 최후방인 레드 라인이 아니라, 오렌지 라인에서 주로 보이는 마수였건만······.

그런데 아크가 자랑하는 최고급 장비들로도 잡기 어려운 녀석을, 외지인이, 그것도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물건들로 그것을 잡았다.

직접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스컬 하운드를 상대하다가 장비를 잃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니고 있는 평균적인 장비 수준이 모두 고철이나 다름없어.'

즉, 이 장비들로 스컬 하운드를 잡았다고 보는 게 더 가능성이 컸다.

'칼 마커스라고 했나?'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중위님, 스캔 결과 나왔습니다."]

"보고해."

["총원 11명 모두 인간입니다. 다만, 1명에게서 상당한 수준의 에테르 반응이 있었습니다."]

"···에테르 반응이라고?"

이모샤 중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영산(靈山) 노아(Noah)와 인접한 아크에서도 보기 드문 게 에테르 반응을 띠는 인간이다.

그런데 신분조차 알 수 없는 외부인이 에테르 반응을 보였다는 건 여러모로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 인원이 누구지?"

["중위님과 대화를 했던, 칼 마커스라고 신원을 밝힌 이입니다."]

"···칼 마커스?"

결국, 자신의 선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느낀 이모샤 중위가 자신의 직속 상관인 바놀 중령에게 연락을 취했다.

["보고하라."]

이미 게이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이러한 바놀의 반응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이모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총원 11명의 피난민이 Red-17 게이트에 찾아왔고, 출발지는 동쪽의 크로노스라고 주장했습니다."

["계속하라."]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멸망했으며 아크를 향한 피난민 중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생존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들의 상태는?"]

이제 몇 남지 않은 인류의 도시가 멸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바놀 중령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적이었다.

"피난민의 총원은 11명이며, 대체로 평범한 인간인 것 같습니다만, 스캔 결과 한 명에게서 상당한 수준의 에테르 반응이 있었습니다. Red-17 게이트 관리자로서 이들의 출입 허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출입을 허용해도 좋다."]

바놀 중령이 덧붙였다.

["단, 에테르 반응이 있었던 인원은 제거하라. 아크에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언제나처럼 기계 같은 어조였다.

"···구제 장비로 스컬 하운드를 잡은 실력자들입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구제(舊製) 장비.

말 그대로 대격변 이전 시대의 장비를 말함이다.

물론 저들이 지니고 있던 장비는 단순히 구제 장비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장비였으나, 이모샤는 굳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모샤 본인조차도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컬 하운드를? 그렇다면 더욱더 위험하다는 판단이 드는군."]

"피난민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워 보였습니다. 섣부르게 제거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은 판단 같습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아크의 병사가 될 자질이 있습니다."

["좋아. 그자의 처분에 대한 건 자네의 재량에 맡기지. 하지만 아크 내로는 절대로 들일 수 없어. 알겠나?"]

이는 바놀 중령으로서도 굉장히 양보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모샤 중위가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도 이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바놀 중령이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전 아크의 최전방이었던 블랙 라인이 그렇게 멸망했다.

아크의 영토 중 무려 15%가 소실된 그 날의 끔찍한 기억.

「"살아."」

이모샤는 그날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쿠릴타가 하품을 늘어지게 할 때쯤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낸 이모샤 중위의 표정이 상당히 어두웠다.

"어떻게 됐습니까?"

내 물음에 이모샤 중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이 허가됐다. 들어가도 좋아."

그와 함께 쿠릴타를 비롯한 피난민들이 환호했다.

"드디어······!"

"살았어, 살았다고!"

"칼! 다 네 덕분이야!"

그러나 나는 그들의 환호성에 동참할 수 없었다.

나를 향한 이모샤 중위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짤막한 한마디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담긴 목소리.

무엇보다도 이전까지와는 다른 정중한 말투에 심각함을 느낀 좌중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칼 마커스."

이모샤 중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신은 아크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 아크(Ark) > 끝

"뭐어어어어?!"

우렁찬 기함을 토해낸 쿠릴타의 목소리와 함께 피난민들의 시선이 이모샤 중위를 향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당신의 존재가 아크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당신은 아크의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된 게 불길한 예감은 한 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방법이 없습니까?"

"미안합니다."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이모샤 중위의 표정에 그늘이 그리웠다.

즉, 이번 출입 불가 판정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바놀 중령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괜한 실랑이를 벌여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윗선에서 내려진 결정에 실무자를 붙잡고 드잡이질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테르 반응을 띠는 인간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금의 나처럼 선천적인 재능으로 에테르 감응력을 높게 타고난 인간.

두 번째는 특별한 수술을 통해서 에테르 병사가 된 인간.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바로 인간으로 의태한 마물(魔物)이다.

실제로 이전 아크의 최전선이었던 블랙 라인이 멸망할 때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게 바로 2급 환상종인 도플갱어(Doppelgänger)였다.

뼈저린 교훈을 얻은 아크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아크 태생의 인물이 아닌 외부인이 에테르 반응을 띠고 있을 때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알겠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설마하니 내가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지 이모샤 중위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크에 비견될 정도로 대도시였던 크로노스까지 멸망한 마당에 아크에 들어갈 수 없는 건, 곧 죽으라는 소리와 같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어차피 방법은 없어.'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그나마 이모샤 중위가 있는 Red-17 게이트로 온 게 나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어떤 조건을 말씀하시는 거죠?"

"거래를 원합니다."

"······거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표정했던 이모샤 중위의 얼굴에 점차 다양한 표정이 드러났다.

지금 드러난 표정은 의문이었다.

"아크의 군용품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아크의 군용품은 외부로 반출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죄송하게 됐군요."

물자의 외부 반출 금지는 모든 군대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게 실제로 잘 지켜지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많은 물자를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딱 제가 나가서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물자면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군용품 외의 물자라면 어느 정도 지원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저것도 제가 다시 가져갈 수밖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가져온 게 달리 있나요?"

그제야 이모샤 중위는 내가 어떤 걸 가리키는지 알아차렸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스컬 하운드의 시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아크 내에서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의 시체는 연구, 가공 등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는 만큼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물며 그게 저렇게 깔끔하게 잡아낸 시체라면 더욱더 말이다.

"스컬 하운드는 제가 잡았습니다. 따라서 소유권 역시도 제가 지니고 있죠. 다들 안 그래?"

내가 동의를 구하듯이 쿠릴타를 비롯한 피난민들을 둘러보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괴물은 칼의 것이다!"

"맞다!"

"칼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었어!"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호응한 건 역시나 쿠릴타였다.

'믿음직한 녀석.'

물론 이모샤 중위가 하고자 한다면 나를 비롯한 피난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냥 스컬 하운드의 시체를 빼앗으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스컬 하운드의 시체가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훗날 아크의 병사가 될 건장한 장정 10명의 값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처음부터 이 거래에 '불공정'이나 '강제성' 같은 개념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한 게 뭐죠?"

그 말만을 기다렸다.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36배율 변환 스코프, HE2050 권총 및 그에 맞는 공통 규격의 일반탄, 예광탄, 철갑탄, 플레셰트, 작렬탄, B타입 산탄, 특수 그물탄, 2레벨 이상의 마취탄 각 10발씩. 스멜 공방제(製) 7번 타입 마체테와 표준 규격 야전삽. 2레벨 이상의 방호복. 55형 진통제가 포함된 긴급 의료 키트 및 침낭과 CC형 텐트가 포함된 AC형 완전 군장, 두 달 치의 멀티 칼로리 바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맛은 초코맛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모샤 중위의 표정이 벙쪘다.

마음 같아서는 아크 기본 보급 장비인 Ark-15 자동변환 소총이 아니라 Zero-999 전술핵 발사기나 Noah-01 물질분해기 같은 흉악한 물건들을 받아오고 싶지만, 그것들이야말로 정말로 아크 바깥으로의 반출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물품이었다.

'그것들은 애초에 이모샤 중위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최대한 타협하고 타협해서, 내가 생각하는 스컬 하운드 시체의 값어치를 꽉꽉 채워서 요구했다.

저 정도라면 이모샤 중위가 충분히 내어줄 수 있는 수준임과 동시에 나로서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그제야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이모샤 중위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혹시 아크 출신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아크의 군용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아크 출신이라고 말해봐야, 아크 내에 칼 마커스의 신분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었기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아크제 군용품에 대한 명성은 저 멀리 크로노스에서도 자자하죠."

방산 비리는 아크에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세상이기에 더욱더 제 잇속을 챙기는 놈들이 득세하는 법이다.

"하······."

나로서는 적당히 댄 핑계였지만,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이모샤 중위는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거래 성사의 의미로 내가 악수를 건네자, 이모샤 중위는 잠시 멀뚱멀뚱 그것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말씀하신 물품들은 삼십 분 안에 준비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잘 됐네요."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뭘요?"

"당신은 이제부터 아크 바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글쎄요. 어차피 별 수 있나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괜히 여기서 징징거려봐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긴 하네.'

칼 마커스의 특성 중 하나인 '초인적인 정신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현재 상황에 대해서 냉정했다.

아크 바깥이 어떤 곳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칼 마커스, 당신은··· 강인하군요."

"그런 편이긴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이모샤 중위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했다.

그게 나를 아크의 병사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아쉽다는 건지, 아니면 곧 죽을 내 운명이 불쌍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모샤 중위가 약속한 삼십 분이 채 되기 전에 모든 물자의 준비가 끝났다.

"맞네요."

이모샤 중위는 착실할 정도로 내가 요구한 사항을 이루어 주었다.

더군다나 방호복 같은 경우에는 2레벨 이상의 방호복을 요구했는데, 이모샤 중위가 건넨 것은 요구 사항보다 한 단계 더 높은 3레벨의 방호복이었다.

'이 정도면 꽤 부담이 됐을 텐데.'

이모샤 중위 나름의 배려이리라.

'응?'

거기다가 탄약들 역시도 각각 10발씩을 요구했는데, 정작 탄창에 들어 있는 건 20발씩이었다.

'착각한 건 아닐테고··· 이것도 배려겠지?'

주는 건 얌전히 받아야지.

무엇보다도 마수와 마물이 들끓는 더 디펜스의 세상에서 탄약이란 곧 화폐로서의 가치도 꽤 훌륭히 발휘하는 물건이었으므로,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비록 당장은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게 되더라도, 아크와 교류할 방법은 꽤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교류하는 대상이 꼭 아크일 필요도 없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아크 외의 도시는 모두 멸망했지만, 몇몇 인간들은 도시 바깥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 중 하나가 바로 모래바람 상단으로서, 그들은 아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꽤 괜찮은 거래 상대 중 하나다.

'프리미엄이 조금 많이 붙는 게 흠이지만.'

그 대신에 아크에서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품목들도 취급을 하니, 나쁠 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방호복과 군장을 착용하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피난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나도 함께 가겠다!"

쿠릴타였다.

"칼! 너만 두고 갈 수는 없다. 나도 너와 함께 가겠다!"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고맙기는 한데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부담될 정도였다.

"쿠릴타, 그냥 여기에 있어. 그게 나한테 더 도움이 돼."

"칼! 나는 너를 따르겠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야. 나도 아크에 아는 사람 정도는 있어야지."

어차피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거라면 하나나 둘이나 그게 그거다.

아니, 오히려 인원이 늘어나면 소모하는 자원이 비례해서 늘어나니 더 불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외부에서 살아가기로 작정을 했다면, 아크 내에 인맥이 있다는 건 큰 자산이 된다.

'지금까지 쿠릴타의 언행이나 나에 대한 신뢰를 보건대, 훗날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게 분명해.'

그걸 위해서라도 쿠릴타는 반드시 아크 내에 남아주어야만 한다.

"칼······."

내가 대놓고 이유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릴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했는지 그 무식한 근육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럼에도 숨이 막히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내 몸뚱어리 역시도 보통은 아니었다.

"반드시··· 반드시 방법을 찾을 것이다. 형제."

"그래주면 고맙고."

물론 쿠릴타가 바놀 중령의 결정을 뒤집을 정도의 위치가 되려면, 아마 공을 아주 많이 세워야 할 거다.

"나, 강철 도끼 쿠릴드의 아들 쿠릴타는 맹세한다! 반드시 너를 아크 안으로 들일 방법을 찾을 것이다!"

쿠릴타의 맹세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이 세계에서 소음(騷音)이란 곧 웨이브(Wave)의 기폭제 중 하나였기에 금기시되는 행위였지만,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쿠릴타를 제지하지 않았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님도요."

"···제가 이름을 말했던가요?"

아차.

"저쪽에서 군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저는 이만."

이모샤 중위와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길을 나섰다.

곧 밤이 된다.

앞으로 아크 바깥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가볼까.'

내가 발걸음을 돌린 순간,

[키득······.]

귓가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냥, 다, 죽이자······.]

그와 함께 내 주변에서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현상이 일어나며 바닥의 모래와 자갈이 들썩였다.

'쯧.'

아무래도 나를 아크의 위험요소로 여긴 바놀 중령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시끄러워.'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하고는 아크의 입구를 나섰다.

이제부터 나는 디펜스 게임의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 *

떠나가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모샤 중위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

'······.'

저 자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이모샤 중위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아크에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출입을 거절한 이들을 무척이나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모샤 중위는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해츠, 드레이클, 톤라카, 시보퍼, 타이나 폰, 엔드라, 라즈틴, 칼 마커스······.

사선을 넘어서 아크까지 도달한 이들인 만큼, 하나 같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이모샤 중위는 그들의 시체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가끔 정찰을 나갈 때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찢어진 옷가지나 물건들을 발견하곤 한다.

인육은 물론이고 씹을 수 있는 거라면 모든 지 씹어 삼키는 마수들에 의해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이모샤 중위는 이번 역시도 그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랐다.

요구 사항 이상의 물자를 칼 마커스의 군장에 넣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모샤 중위가 고개를 내저었다.

석양이 유독 붉게 느껴졌다.

< 거래 > 끝

이동 수단은 도보(徒步)였다.

피난길에야 어차피 도망치는 길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애초에 타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차량에 탑승했다지만, 혼자 이동하는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량처럼 무식한 소음을 자랑하는 물건으로 이동하는 건 아크 밖에 즐비한 마수들에게 나 여기 있으니 어서 잡아드시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마수들에게 쫓기기도 했고.'

크로노스에서 아크로 출발한 차량이 백 대가 넘었다고 하니, 그 짓거리가 얼마나 무모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사시에 은폐나 위장도 어려웠으니, 여러모로 아크 바깥에서 이동할 때는 튼튼한 두 다리만한 게 없었다.

'자, 그러면 어디로 간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옷, 음식, 집.

이를 가리켜 보통 의식주(衣食住)라 통틀어 말하곤 한다.

다행히도 입는 것이나 먹을 것 같은 경우에는 이미 어느 정도 확보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장 급한 게 아니다.

곧, 자연스럽게 내 목표는 거주지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더 디펜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주지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안전이다.

그런 쪽으로 보면 아크 역시도 안전한 장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더 디펜스의 세계에서 생존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흐음.'

또한, 거주지에 필요한 조건은 비단 안전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물인데, 애석하게도 이 물이라는 놈은 멀티 칼로리 바처럼 몇십 개를 편하게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1리터의 물의 무게는 1kg.

사람이 하루에 마셔야 하는 물의 권장량은 약 1.5리터에서 2리터 사이.

아껴 마신다고 쳐도 1리터는 마셔야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즉, 당장 일주일 치 마실 물만 짊어지고 다닌다고 쳐도 무려 10kg 가까이 된다는 소리다.

'무게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부피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안 그래도 군장 안에 꽉꽉 차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물까지 짊어지고 다닐 여유는 없다.

거주지를 정할 때 수원지(水源池)와의 거리 역시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수원지 바로 근처에 거주지를 정하는 게 맞겠지.'

안전.

물.

현재 위치와의 거리.

이 모든 조건이 부합하는 장소는 내가 알기에 오직 한 곳뿐이었다.

'역시, 그곳밖에 없나······.'

영산(靈山) 노아(Noah).

대격변 이후 지각 변동으로 생겨난 활화산이자, 아크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인 장소.

내가 거주지로 삼으려는 장소는 바로 그 장소였다.

괜히 영산이라 불리는 게 아니듯이 노아는 활화산 특유의 화산 가스와 열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독할 정도의 에테르 농도를 지닌 탓에 어지간한 마수나 마물도 감히 접근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수맥을 잘 찾으면 온천수까지도 나오니,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잘하면 온천욕 같은 사치까지도 부릴 수 있다.

일단 안전과 식수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하는 셈이었다.

'에테르 농도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만한 장소는 찾을 수 없어.'

애초에 아크가 활화산인 노아를 등 뒤에 끼고서 만들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어떤 마수나 마물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수자원 역시도 확보할 수 있고, 더불어서 화산 발전을 통한 에너지 수급 역시도 수월하다.

비록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바로 등 뒤에 끼고 있는 정도는 리스크가 있긴 해도, 인류가 직면한 암울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리스크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아크 내에서 라인이 나뉜 이유도 영산 노아 때문이지.'

영산 노아에는 마수와 마물이 접근하지 않는다.

이 명제를 참으로 놓고 말해 보면, 당연히 노아와 가까울수록 마수와 마물의 출현이 적어지니 자연스럽게 그곳은 아크의 후방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노아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안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라인(Line)은 그렇게 탄생했다.

노아와 직접적으로 면적을 맞댄 아크의 정중앙에 위치한 화이트 라인을 중심으로, 상대적 노아와 가장 가까운 최후방 전선은 레드 라인이 되었고, 반대로 가장 멀리 떨어진 최전방은 블랙 라인이 되었다.

자연스레 화이트 라인을 제외하고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 레드 라인은 아크 내에서 기득권이 몰려드는 부촌(富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가장 위험한 최전방전선인 로즈 라인과 블랙 라인은 아크 내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더 디펜스에서 플레이어는 아크의 병사로서 최후방인 레드 라인을 시작으로, 스테이지가 진행되며 점차 성장해 나가며 전방으로 자리를 옮겨나간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중앙]

화이트 라인 (??)

[최후방 전선]

레드 라인 (1~10 스테이지)

[후방 전선]

오렌지 라인 (11~20 스테이지)

옐로우 라인 (21~30 스테이지)

그린 라인 (31~40 스테이지)

블루 라인 (41~50 스테이지)

[전방 전선]

네이비 라인 (51~60 스테이지)

바이올렛 라인 (61~70 스테이지)

퍼플 라인 (71~80 스테이지)

[현(現) 최전방 전선]

로즈 라인 (81~90 스테이지)

[구(舊) 최전방 전선]

블랙 라인 (91~100 스테이지)

최후방에서, 최전방으로.

비록 플레이어의 결정에 따라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게 플레이어의 기본적인 진행 방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

아크의 병사로서의 굴레.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아크의 병사로서 플레이했을 때 나는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지 못했다.

이런 시작이 옳은지 틀린 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손해 볼 건 없다는 소리였다.

'뭐, 나중에 생각할 일이지.'

나는 멀티 칼로리 바의 포장을 뜯어서 베어 물었다.

아직 이동 중인 상황이니만큼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을 때 미리 열량을 보충해 두는 게 나았다.

'···음.'

초코맛이라더니, 말 그대로 초코향만 살짝 입힌 벽돌 맛이다.

앞으로 내가 먹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겠지.

멀티 칼로리 바를 반 정도 먹자 슬슬 포만감이 차는 게 느껴졌다.

수통에 든 물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 남은 멀티 칼로리 바를 건빵 주머니에 고이 챙긴 나는 이번에 얻은 장비를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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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15 자동변환 소총] [★★★(3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자동변환 소총.

자동소총, 대물 저격총, 샷건 세 가지 모드로 변경할 수 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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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세 가지 변신 모드가 포함된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비록 기본 보급품이긴 해도 아크의 군인들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데는 괜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듯이 상당히 괜찮은 성능을 자랑한다.

업그레이드와 커스터마이징을 하기에 따라서 최대 6성(★★★★★★) 등급까지 랭크업이 가능할 정도로 여러모로 범용성이 높은 총기였다.

'무엇보다도 발열에 꽤 강하지.'

무한의 총알을 쏟아낼 수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현재 내가 구할 수 있는 총기 중에서 이보다 더 좋은 총기가 없었다.

'어디 보자, 다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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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2050 권총] [★★★(3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권총.

강한 파괴력과 반동을 지녔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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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멜 마체테-7] [★★(2성)]

스멜 공방제(製) 7번 타입 마체테.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녹이 슬지 않고, 날이 잘 상하지 않는다.

과연 명장의 작품은 다르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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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방호복(Lv.3)] [★★★(3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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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아주 좋군.'

그렇게 이번에 이모샤 중위에게서 얻은 장비를 살피던 순간.

[캬오오오오오!!!]

[컹! 컹!]

멀찍이서 느껴진 소음과 함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일단 최대한 안전한 길로 온다고 온 거지만, 늘 강조하듯이 이 세계에서 안전한 길이나 장소 따위는 없었다.

'마수 떼.'

대부분 10급 야수종과 괴수종들로 이루어진 행렬이지만, 간간이 9급 이상의 마수들도 섞여 있었다.

얼핏 봐도 수백 마리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행렬인 데다가 현재 내 위치를 고려했을 때, 전투는 그다지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주변에 엄폐로 삼을 만한 장소는 없어. 돌아가야겠어.'

마수 떼의 진행 방향을 보아 하니, 아크로 향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렇게 마수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가파르게 변하는 오르막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레드 라인의 평원에서 노아의 경계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거의 다 왔나.'

애초에 출발지가 노아와 가장 가까이에 인접한 레드 라인이었기에 도보로 이동했는데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시간일 때고 주관적으로 보면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말이다.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욕심이었나.'

어느덧 지천에 어둠이 깔렸다.

영산 노아는 활화산답게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풍경을 자랑한다.

다만, 워낙 산지 자체가 험하고 광활한 탓에 산 전체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노아에 있는 수맥 중 몇몇 장소를 알고 있었다.

남은 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것뿐인데, 문제는 지금 내 앞에 불청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크르릉······.]

[컹! 컹!]

영산 노아에는 웬만하면 마수나 마물이 발을 디디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늘 예외라는 게 존재하듯이 이곳을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더 디펜스 내에서 안전한 장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헬하운드인가.'

아크의 최후방인 레드 라인에서 가장 많이 출몰하는 마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들이 나를 에워싸며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전에 보았던 마수 떼에 비해서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기껏 해야 30, 아니 31정도?

'아, 그렇게 된 건가.'

나는 이내 헬하운드의 가죽 곳곳에 난 총알 자국을 보고는 저것들이 어째서 노아까지 기어들어 오게 되었는지 알았다.

'아까 스컬 하운드와 함께 우리를 쫓던 녀석들이군.'

즉, 스컬 하운드가 변태(變態)를 시작하자 겁을 먹고는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노아라는 소리다.

'이걸 이렇게 만나네.'

그렇다고 겁 먹었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아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아주아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다, 죽이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거 우연인데."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이었거든.

철컥-

나는 Ark-15 소총을 다잡으며 모드 설정 레버를 손가락으로 슬쩍 밀었다.

"아까와는 다를 거다."

지이이잉─

철컥, 철컥, 철컥-

[샷건 모드로 변환합니다.]

< 거처 탐색 > 끝

아무리 이곳이 영산 노아의 초입이라고는 해도 한밤중에 소음을 일으키는 건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더 디펜스에서 소음이란 웨이브의 기폭제로서 언제 어디서든지 조심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총구를 잡고 살짝 돌렸다.

Ark-15 소총은 자동변환 기능과 더불어서 총구 압력 조절을 통해서 소음 모드를 적용할 수 있었다.

[소음 모드가 적용됩니다.]

비록 파괴력이 다소 감소하는 단점이 있긴 했어도 헬하운드를 상대하는 데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탄입대에서 탄창 하나를 꺼내서 그대로 장전했다.

B타입 산탄이었다.

B타입 산탄은 내가 가장 애용하는 타입의 산탄 중 하나다.

산탄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 파괴력과 탄의 응집도가 가장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어서, 대(對) 마수 저지력에 있어서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쒹!

[깽!]

바람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선두에 서서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헬하운드의 심장이 그대로 폭발하며 저 멀리 날아갔다.

누가 봐도 즉사였다.

'오호.'

아무리 급소를 노렸다고는 해도, 단 한 방에 죽다니······.

스컬 하운드를 사냥하고서 얻은 9급 이하 야수종에 대한 10% 추가 피해 효과를 감안해도, 현재 소음 모드가 적용되어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특성 덕분인가.'

내가 작성한 총기 관련 특성들.

아마 그것들이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내게 만든 원인일 것이다.

'괜히 아크 출입이 금지된 게 아니라는 건가.'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나를 향해서 흉포한 기세로 헬하운드들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캬릉, 캬르릉!]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총구의 방향이 헬하운드의 벌어진 주딩이 안쪽을 겨누었다.

쐭!

다시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헬하운드의 전신이 폭발하듯이 터져나갔다.

후두둑─

한때 헬하운드였던 고기 파편이 마치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르릉······!]

[컹! 컹!]

헬하운드들은 곧 하나씩 덤벼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나머지 스물아홉 마리의 헬하운드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포위되면 귀찮아진다.'

다행히도, 두 다리는 아주 튼튼했다.

'앞에 둘. 뒤에 다섯.'

그렇다면 앞으로 뚫고 나간다.

쐭!

나는 가장 선두에서 달려드는 헬하운드에게 한 발을 먹여주고는 물 흐르듯이 몸을 돌려서 배후의 헬하운드를 향해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헬하운드들이 스러졌음에도 쉴 시간은 없었다.

위치를 계속해서 바꾸지 않으면 헬하운드에게 포위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지형 자체가 험해. 잘못 발을 디디면 순식간에 포위될 수도 있어.'

사선(死線).

엄밀히 따지면 지금 상황은 처음에 스컬 하운드를 비롯한 헬하운드 떼에서 쫓겼을 때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는 게 옳다.

단순히 혼자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목적 역시도 아크로의 도주가 아닌 헬하운드의 섬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어진 상황만 보면 그렇지.'

샷건 모드로 변경된 Ark-15의 총구가 다시금 돌아갔다.

쒹!

공기를 찢는 소리.

[깨갱!]

살을 꿰뚫는 소리.

후두둑─

육편이 떨어지는 소리.

어둠 속에서 퍼지는 총성과 헬하운드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물론 총구에도 사각(死角)은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의 손은 두 개인 이유가 있듯이 나는 왼손으로 마체테를 뽑아서 달려드는 헬하운드를 베었다.

[깨갱!]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고작 칼질 한 번에 헬하운드를 도륙 내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틈을 만들어내는 데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쐑!

공기가 다시금 폭발하며, 헬하운드의 머리가 마치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곧,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이건 학살이었다.

'절반 정도 남았나.'

그 순간.

[키득······.]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

총구를 겨눈 나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장소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

아니, 아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가 입가가 찢어질 정도로 웃고 있었다.

[킥킥······.]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

'환각!'

짧은 망설임.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그 미세한 망설임은 곧 너무나도 큰 빈틈을 만들어냈다.

[캬릉!]

[크릉, 크르릉!]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헬하운드들이 순식간에 내 팔과 다리를 물었다.

"씨발!"

다행히 고작 10급 야수종에 불과한 헬하운드들에게 단번에 뚫릴 정도로 3레벨의 방호복의 방어력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프잖아!"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모조리 제압당했다.

본래였다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치는 그걸 가능케했다.

『매우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지닌 전사입니다. 사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단련된 육체와 굳은 심지는 영혼들의 속삭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알아.

안다고.

"으라아!"

오른팔에 있는 헬하운드를 떨쳐내는 나는 다시금 총구를 들이댔다.

"뒤져."

쐑!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헬하운드의 머리가 다시금 터져나갔다.

"꽉들 물고들 있어라."

내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헬하운드들은 여전히 내 팔과 다리를 물고서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여전히 내 팔과 다리를 물고 있는 헬하운드들에게 B타입 산탄을 친히 한발씩 먹여주었다.

[케헹!]

[깽!]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멈추지 않고 당겨진 방아쇠가 마지막으로 남은 헬하운드의 머리를 겨누었다.

우수수─

고기 파편이 떨어져내렸다.

"후아······."

간신히 한숨을 돌린 나는 땀인지 피인지 모를 것을 손으로 훔쳐낸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둑시니가 내려앉은 풍경 속에서 보이는 건 피와 헬하운드들의 시체. 그리고 풍겨오는 자욱한 혈향 뿐이었다.

[끈덕진 근성으로 한밤의 습격을 이겨냈습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12 -> 13]

[지옥의 번견들에게 절대적인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해서 3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영혼의 속삭임에 부응했습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6 -> 7]

'부응은 무슨······.'

솔직히 말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능력치가 오르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었다.

"하······."

장난 아니네.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운 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물린 곳은 멀쩡한가.'

헬하운드들의 송곳니는 레벨 3의 방호복을 꿰뚫지 못했다.

만약 헬하운드들의 송곳니가 방호복을 뚫고서 살까지 파고들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모샤 중위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벼운 멍 정도야 들 것 같지만······.'

그 정도야 이 튼튼한 몸뚱어리의 내구력을 생각한다면 부상 축에도 끼지 못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분명히 환각이었지.'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이라고 해서 쉽게 봤더니, 전투 중에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은 몰랐다.

괜히 더 디펜스에서 손에 꼽히는 쓰레기 특성이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오 분 정도 누워서 휴식을 취한 나는 그대로 일어났다.

일단 소음 모드를 켜긴 했어도 헬하운드들의 울음소리는 가려지지 않았다.

영산 노아의 특성상 다른 마수나 마물이 찾아올 확률은 거의 없긴 했으나, 생명을 담보로 도박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 슬슬 이동하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저것들은 어쩐다······.'

나는 헬하운드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총 31마리의 시체.

극한의 상황에서 마수의 시체는 몇 가지 처리를 할 줄만 안다면 꽤 괜찮은 식량원 중 하나다.

물론 내가 알기에 맛은 절대로 보장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아깝기는 하지만··· 당장 들고서 이동할 수는 없어.'

생각을 마친 나는 헬하운드들의 시체를 적당히 모았다.

당장은 가져갈 수 없더라도 일단 거처를 정하고 나면 그때 챙기겠다는 계산이었다.

'지금 위치라면··· 수원지 중 하나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아.'

이미 노아를 향할 때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파악을 해두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목적지를 정한 나는 곧장 노아를 오르기 시작했다.

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울창한 숲은커녕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함이 이곳이 활화산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조금 전에 제법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는 게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산이라면 훈련을 비롯한 임무 때 질리도록 타왔던 나였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옛날 생각나네.'

산을 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수원지 포인트 중 한 곳에 도착했다.

'아마 이쯤이었지.'

나는 그대로 야전삽을 들고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파고, 파고, 또 팠다.

그렇게 약 1미터 정도 땅을 파고 들어갔을 때쯤이었을까.

콸콸콸!

뿌연 연기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용출수(湧出水).

내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활화산의 열기로 후끈하게 데워진 온천수였다.

< 거처 탐색 (2) > 끝

드디어 찾았다.

"하······."

뿌연 연기와 함께 뿜어지는 용출수를 앞두고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리 초인적인 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영산 노아의 수맥 중 한 곳을 발견하였습니다!]

[놀라운 행운으로 행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7 -> 8]

아직 초반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크 바깥이라는 극한의 상황이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능력치 상승이 나쁘지 않았다.

행운 능력치는 수치가 낮을 때는 별로 체감이 안 되지만, 일정 수치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말도 안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능력치였다.

당연히 높을수록 좋다는 소리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제 막 거처를 만들기 위한 위치를 찾은 것에 불과하다.

이곳에 거처다운 거처를 만들려면 아마 보통의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 전에.'

이제 수원지도 찾았겠다, 나는 수통에 있는 물을 아낌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컥, 벌컥─

"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이어서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아까 먹다 남긴 멀티 칼로리 바를 꺼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움직였더니 갈증과 허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과로사로 진작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으적, 으적.

허기가 최고의 반찬이라고 하던가.

초코향 벽돌로 느껴지던 멀티 칼로리 바가 마치 진짜 초코바처럼 느껴졌다.

오 분이 채 되지 않는 짤막한 식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면서 했던 그 어떤 식사 자리보다도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휴식은 사치였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잘 수 있는 공간도 없었기에 나는 다시 야전삽을 짚고 일어났다.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볼까.'

나는 이제 내가 판 구덩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용출수를 바라보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용출수가 끊임없이 흘러넘쳐서 머지 않아서 수원이 바닥이 날 것이다.

아니면 이 근방이 물바다가 되거나.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내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뿜어져 나오는 용출수의 압력이 적당히 평행을 이루는 수준이 될 때까지 수원지 근처를 더 파거나 넓히면 된다.

온천을 만드는 것이다.

'해볼까.'

다행히도 3레벨의 방호복에는 상당한 수준의 방수 기능도 있었기에 방호복을 벗는 위험한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됐다.

혹시 있을 모종의 기습에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하거나, 무거운 방호복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건 피한 셈이다.

푹! 푹!

과연 아크의 야전삽은 달라도 뭐가 다른지 지금껏 내가 써왔던 그 어떤 야전삽과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온천수의 영향으로 땅이 질어졌다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땅이 마치 푸딩처럼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삽질을 했을까.

'흠.'

깊이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너무 깊게 만들면 여러모로 불편할 게 뻔했기에 나는 온천을 최대한 넓게 만드는 게 주력했다.

깊이는 약 150cm 정도에 맞추고, 넓이는 대충 정사각형 모양으로 5✕5m 정도였다.

'이쯤이면 됐나?'

그렇게 땅을 다진 후에 온천의 틀을 만드니, 뿜어지던 용출수가 어느덧 1미터 높이쯤에서 멈췄다.

압력이 균형을 이루었다는 증거였다.

[간이 온천을 만들었습니다.]

[재주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0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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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온천] [★(1성)]

활화산 노아에 임시로 만든 온천.

피로 회복과 상처 회복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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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대충 만들긴 했으나, 일단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둬야겠지.

'보수 공사는 나중에 얼마든지 해도 되니까.'

현재의 온천은 제작 과정이 워낙 대충대충이었던 터라 물 안에 흙 같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온천수 자체의 순도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터라 그로 인한 효과나 효능 역시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이건 나중에 손을 보기로 하고······.'

나는 그대로 온천 안에 슬쩍 손을 담갔다.

'온도는··· 적당하네.'

내가 알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온천수의 수온은 지하로 100m를 내려갈 때마다 평균 2.5도씩 오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현재 뿜어지는 온천수의 온도는 당장 들어가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바로 식수로 활용할 수 있느냐인데······.'

온천수는 각 지형과 위치에 따라서 먹을 수 있는 온천수와 그렇지 않은 온천수가 나뉘어져 있다.

일단 내가 알고 있기에 영산 노아에서 나오는 온천수는 대개 음용수로 활용해도 별다른 상태 이상 같은 걸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지는 알 수 없었다.

'사소한 배탈 같은 건 상태 이상으로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가장 좋은 실험 방법은 역시나 몇 가지 단계를 거쳐서 이 물을 당장 식수로 활용해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마셨을 때 어떤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으나, 일단 당장 치명적인 것만 아니면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정수할 방법도 찾아봐야겠지.'

물론 당장 내 수통에도 결합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수용 스트로우가 몇 개 있긴 하지만, 혹시나 잃어버리거나 파손될 경우 그대로 식수 조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빨대 쪼가리 몇 개에 내 운명을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당장 오늘 할 일이 아니지만.'

아직 수통의 물도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내가 머물 만한 거처를 만들지 못했다.

거처는 내가 만든 간이 온천과 가까운 게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바로 옆에 거처를 만들기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어디 보자······.'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 작은 동굴 비스름한 것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위치 역시도 아크를 비롯한 노아 바깥에서 보기 힘든 위치인 데다가, 혹시 마수나 마물이 들이 닥치더라도 수비하기에 꽤 괜찮은 지형이었다.

'저기가 좋겠어.'

가파른 절벽을 오르니, 이내 내가 보았던 작은 동굴 하나가 드러났다.

우연히 찾기는 했어도 여러모로 조건이 꽤 잘 들어맞았다.

'좁은 게 단점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될게 없지.'

평수야 넓히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야전삽을 들었다.

'암석 지대인가? 파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힘든 것과 불가능한 건 다른 이야기다.

나는 다시금 삽질을 시작했다.

깡! 깡!

과연 아크 보급 야전삽답게 웬만한 암석도 깨부수며 한밤의 굴착 공사가 시작됐다.

암석 지대를 삽으로 내려칠 때마다 손이 저릿저릿 울렸다.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흠, 이대로는 오늘 못 끝낼 것 같은데······.'

그러다 나는 이내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는 Ark-15 소총을 꺼내들었다.

[소음 모드가 적용됩니다.]

나는 탄입대에서 그대로 철갑탄 탄창을 꺼내들어서 Ark-15 소총에 결합했다.

굴착 공사에는 이만한 탄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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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형 철갑탄] [★★★(3성)]

[현재 수량 : 20]

아크제(製) 15형 철갑탄.

강철도 꿰뚫을 수 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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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볼까.'

어차피, 총알이라면 남아 돈다.

해봐서 손해볼 건 없다는 소리였다.

쐑!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Ark-15 자동소총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드득─!

그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암석.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쾅!

콰카캉!

과연 굴착 공사에는 아크제 철갑탄만한 게 없는지 몇 가지 포인트들에 철갑탄을 박아주자, 공사의 난이도가 매우 내려갔다.

남은 건, 무너져 내린 암석 파편들을 삽으로 파내는 것뿐.

그렇게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서 동굴 안의 넓히는 순식간에 5인용 군용 텐트 하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콜록! 콜록!"

자욱하게 일어난 돌가루와 흙먼지를 피해서 잠시 동굴 바깥으로 피신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폐병으로 죽는 건 사양이었다.

"후······."

그렇게 십 분 정도를 한숨 돌릴 겸 밖에서 기다리고서야 동굴 안에 일어났던 먼지가 착 가라앉았다.

나는 공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CC형 텐트를 설치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확보가 되고서야 이 지루했던 굴착 공사 역시도 끝을 고했다.

한 차례의 환기를 더 한 후에 나는 동굴 안에 미리 챙겨왔던 CC형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설치라고 해봐야 CC형 텐트의 최장점 중 하나가 간단한 설치였으니 크게 뭘 할 필요도 없었다.

피웅!

간단한 터치와 고정핀 몇 개만 박았을 뿐인데 훌륭한 보금자리가 완성됐다.

[CC형 텐트를 설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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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형 군용 텐트] [★★(2성)]

아크제(製) CC형 군용 텐트.

최대 10인까지 사용할 수 있는 넓이를 지니고 있다.

2레벨의 방호 능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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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형 텐트는 2레벨의 방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웬만한 마수나 마물이 간밤에 들이닥쳐도 내가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다는 소리다.

'거기다가 이 동굴 안이라면 CC형 텐트를 단번에 찢어버릴 만한 대형 마수나 마물도 쉽게 들어오지 못해.'

일단 안전성 자체는 아크 바깥이라는 극악의 환경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마침내, 오늘 해야 할 일이 끝난 것이다.

'드디어······.'

나는 텐트 안에 침낭을 깔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과연 10인용답게 한 사람이 세로로 누웠는데도 널찍함이 느껴졌다.

"으······."

몸이 노곤노곤하다.

당장 기절할 것 같다.

뭔가 해야 할 게 남은 것 같긴 한데, 더 이상은 내 몸이 버티는 게 무리였다.

그만큼 오늘 하루는 인상적이었고, 또한 고됐다.

'······아, 몰라.'

수마가 나를 덮쳤다.

*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킥킥······.]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더없이 낯선 그런 목소리들이.

[나를, 나를 봐······.]

아무래도 쉽지 않은 밤이 될 것 같았다.

< 거처 탐색 (3) > 끝

영산(靈山) 노아(Noah)에는 마수나 마물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다.

활화산이라는 험준한 환경을 제외하고도, 노아의 짙은 에테르 농도가 마수나 마물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아의 특이성은 인류 최후의 요새 아크를 탄생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강신(降神) 현상.

말 그대로 에테르가 인간에게 깃드는 현상으로, 몇몇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견뎌내고 에테르를 다룰 수 있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테르가 깃들게 되면 그대로 미쳐 버리게 된다.

상대적으로 노아와 가까운 레드 라인의 사람들이 에테르에 대해서 타 라인보다 더 큰 거부감을 지닌 것 역시도 이 때문이었다.

레드 라인은 물리적으로는 아크 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가장 위험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영산 노아는 바로 그러한 에테르가 가장 짙게 풍겨오는 장소다.

곧, 뛰어나다 못해 과할 정도의 에테르 감응력을 지닌 내게 있어서 노아는 결코 머물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소리다.

[나랑 놀자······ 어서······.]

[키득, 키득······.]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짙어졌다.

불면증 특성에 접신. 거기다가 노아라는 지리적 환경까지 겹치니 나에게 있어서 온전한 수면이란 사치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결국, 반강제적으로 잠을 포기한 나는 텐트를 나섰다.

이대로 억지로 누워 있어봤자 내내 환청에 시달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동굴을 나선 나는 그대로 조금 전에 만들어 놓은 온천으로 향했다.

'차라리······.'

온천을 앞에 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방호복을 벗어 던졌다.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이런 좋은 걸 눈앞에 두고서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인내심은 깊지 못했다.

일종의 수양 부족이라 할 수 있겠다.

'물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

일단 온천수 특성상 물을 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한번 더럽혀지면 언제 다시 깨끗해질지 알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온천수는 앞으로 내가 식수로도 활용해야 할 물이었으니 웬만하면 항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거의 다 마신 수통을 완전히 마셔서 비우고는 그곳에 온천수를 담았다.

뽀글, 뽀글─

그렇게 수통으로 온천수를 담아서 임시 샤워를 몇 차례 하고서야 나는 온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발끝부터 천천히 온천에 몸을 담그자, 후끈한 열기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으어······."

입에서 절로 아저씨 같은 소리가 났다.

환청 탓에 미처 풀지 못했던 피로가 그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그 속에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이 세상에 온 거지?'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처음으로 생긴 여유 덕분일까.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는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가?

'일단 내가 이곳으로 온 원인은 그 트레이너 때문인 것 같긴 한데······.'

트레이너는 진짜였다.

내 총알은 정말로 무한이 되었고, 나는 이 세계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더 디펜스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아크를 지키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걸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아크를 지키고, 더 나아가서 내가 미처 클리어하지 못했던 더 디펜스의 100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그 뒤에 있을 더 디펜스의 진정한 엔딩을 맞이하는 것일 뿐이지.

그렇다면 그걸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해져야 해.'

지금까지 내가 플레이했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현재 칼 마커스의 초반 능력치는 내가 플레이했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강해진다는 목적에 있어서 일단 초반 시작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서 연신 의문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강해지는 방법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역시나 능력치와 업적을 쌓아서 강해지는 것이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면서 확실한 방법.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이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능력치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비롯한 온갖 업적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좋은 장비를 손에 넣는 것.

본래였다면 이 방법 역시도 앞선 조건처럼 시간이 해결해주어야 했지만,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른 방법보다도 더 험난했다.

이방인이라는 신분.

출입이 금지된 아크.

물론 하고자 한다면 모래바람 상단 같은 자들과 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총기류 같은 물건은 아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아크와 교류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귀찮고 험난할 뿐이지.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에테르에 관련된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영산 노아는 내가 지닌 에테르 감응력을 늘리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과정이 조금, 아니 매우 험난하기는 할 테지만 결과적으로 에테르 감응력이 일정 수치를 넘어가게 된다면 웬만한 문제는 사라질 터였다.

'대충 이 정도인가.'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통! 통!

뼈 기생체.

지금도 통조림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저것을 써먹는 것이다.

비록 여전히 힘을 회복하지 못했는지 통조림을 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 터.

당장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일 바로 하면 되겠지.'

그 정도라면 뼈 기생체가 힘을 회복하기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대강의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앞으로의 일정과 당장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온천에 몸을 녹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물론 환청들은 그런 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꼭 깊은 잠만이 휴식은 아니다.

[도와줘.]

그때였다.

이제껏 없었던 선명한 환청이 들려온 게.

'응?'

이런 환청이 들려온 적이 있던가?

동시에 무언가 스산한 바람이 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는 온천을 나섰다.

온천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서늘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으나, 오들오들 떨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미리 꺼내놓은 수건으로 빠르게 몸을 닦고는 곧장 옷과 방호복을 입었다.

무장을 마친 나는 최대한 내가 지닌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이 근처가 아니야.'

밤의 산은 고요하다.

당연히 이런 고요함 속에서는 조금의 움직임도 큰 소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주변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좀, 도와줘.]

다시금 들려온 선명한 환청.

그제야 나는 이 환청이 지금까지 들려온 환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아에서 들려온 게 아니야.'

그렇다면 어디서?

나는 36배율 스코프를 최대 배율로 맞추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노아를 중심으로, 라인과 평원이 맞닿은 전선까지.

야간 모드를 적용한 터라 어둠은 크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저쪽인가?'

그렇게 몇 분 동안 주변을 탐색하고서야 나는 전선과도 한참은 떨어진 평원 한복판에서 마수 떼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행렬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거리가 너무 멀어.'

내 시력과 36배율 스코프로도 마수 떼가 이동한다는 사실 정도만 간신히 알 수 있는 걸 보니, 얼핏 봐도 이곳과의 거리는 10km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라면··· 레드 라인 전선을 진작 벗어났다.'

그렇다면 저 마수 떼는 대체 왜 저런 괴상한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으음.'

한참을 정신을 집중해서 스코프를 들여다 보던 나는 이내 마수 떼가 어떤 점 하나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사람이 대체 왜 아크 바깥의 평원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거지?

'어쩔까······.'

나는 지금 나에게 들려온 환청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저곳에서 쫓기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신원을 확인하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도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스코프를 통해서 드러난 점과 마수 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대로면 잡힐 상황.

논리가 아닌 직감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할 수 없나.'

나는 Ark-15 소총의 레버를 돌렸다.

지잉.

칙, 칙, 칙.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환합니다.]

Ark-15 대물 저격총 모드의 유효 사거리는 약 13km.

맞힐 수만 있다면 지금 자리에서도 평원을 달리는 마수 떼를 저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아무리 총기의 성능이 받쳐준다고 하더라도 저격에 성공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

물론,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일 경우에는 말이다.

['저격수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저격수의 시간.

이는 내가 접신 특성을 작성하고 반환받은 페널티 특성 포인트로 작성한 조건부 특성 중 하나였다.

조건부 특성.

말 그대로 여타 다른 특성과는 달리 특정한 조건이 채워졌을 때 발동하는 특성으로서, 제한된 조건하에 발동하는 특성인 만큼 상시 적용되는 타 특성보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바로 지금처럼.

'보인다.'

저격수의 시간과 함께 이내 최대 배율로 조정된 스코프에 목표물의 모습이 점차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게 누구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격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공기의 방향, 세기.

목표물과의 거리.

Ark-15 대물 저격총의 탄속.

그 모든 걸 계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지금.'

파앙─!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바람을 찢으며 나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