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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2

* * *

타티아나 벨로프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타고 왔던 무소음 호버 바이크를 비롯한 모든 이동 수단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믿을 건 오직 두 다리뿐.

"하아, 하아······."

임무는 실패였다.

함께한 대원 다섯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네이비 라인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예 요원들이었건만, 오직 타티아나 자신만이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인 듯햇다.

[커헝, 컹컹!]

[캬르르릉!]

[캬오오오오!!!]

자신의 뒤를 쫓는 수백 마리의 마수들.

타티아나의 상태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썩 좋지 못했다.

왼쪽 팔과 오른쪽 옆구리에서 이미 마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출혈이 상당했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 지 미지수였다.

뿌드득─

타티아나 벨로프는 이가 갈릴 정도로 악물었다.

자신을 위해서 희생한 다른 대원들을 생각해서라도 고작 이따위 놈들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가 좀······.'

도와줘.

애석하게도 타티아나 벨로프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아크가 머지않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크의 전선까지는 적지 않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

[크르릉!]

9급 야수종, 검은갈기털 랩터가 흉악한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딱! 딱!

타티아나의 손이 움직이며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이내 깔끔하게 잘린 검은갈기털 랩터의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 본다면 깔끔한 솜씨라며 박수를 쳤겠지만, 그 사실은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타티아나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일대일에 강하지, 이처럼 다수를 상대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타티아나 벨로프는 점점 집중력이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껏 도망치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마수가 타티아나를 향해서 달려들고,

'···여기까진가?'

타티아나 벨로프의 눈에 체념의 빛이 깃든 순간.

쐑!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타티아나를 덮치려던 마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 타티아나 벨로프 > 끝

"어······?"

후두둑─

사방에 떨어져 내리는 고기 파편 속에서 타티아나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찰나 여유도 잠시, 또다시 마수들이 타티아나를 향해서 덮쳐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윽!"

타티아나의 왼손이 번뜩이며 뻗어 나간 섬광이 다시금 마수의 목을 베었다.

스릉─

깔끔한 솜씨가 빛을 발하는 것도 잠시, 그로 인해서 생긴 빈틈을 노리고서 다른 마수가 달려들었다.

타티아나의 참격은 강철조차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자랑하지만, 그 참격과 참격 사이에 어쩔 수 없는 빈틈이 존재했다.

그녀가 다수의 마수와 마물을 상대해야 하는 수비대가 아니라 정찰대 소속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캬오오!]

뿌득, 뿌드득─

에테르가 소용돌이 친다.

타티아나가 몸의 부하를 감내하면서까지 제 2격을 준비하려던 순간.

쐑!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든 총알에 의해서 그녀의 지척에 다다른 마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저격.'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타티아나의 예리한 감각은 그게 총알이라는 걸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크인가?

아니, 아니다.

마수가 쓰러지는 방향을 보건대, 이는 아크가 있는 방향에서 쏘아진 총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아크까지의 거리는 한참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크에서 지원이 오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도 멀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아크에서의 지원이 아니다.

하지만 이 근처에서 아크가 아니라면 그녀를 도울 존재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체 어디서? 전혀 읽을 수가 없어.'

만약 이 저격이 대충 2km 정도 내에서 행한 저격이었다면 예리하게 발달한 타티아나의 감각이 총알이 날아온 장소를 특정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지금 이 총알이 어디서 날아든 건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대략적인 방향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타티아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더 추가되는 걸 느꼈다.

'대체 어떻게 알고?'

타티아나는 묘한 소름을 느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무려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인 자신이 대강의 위치조차도 알 수 없는 장소에서의 저격이다.

그렇다면 이 어둠 속의 저격수는 대체 어떻게 타티아나의 존재를 알고서 이런 저격을 행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설마··· 나보다 더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는 건가?'

좋지 않다.

너무나도 좋지 않다.

만약 이 저격이 노리는 게 마수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과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음이 뻔했다.

'···아직 아군이라는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야.'

타티아나가 저격수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가 연신 터져나갔다.

이런 저격을 최소 2km 바깥에서 쏘고 있다는 건데··· 한두 발도 아니고 연속해서 이런 저격을 성공시키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저격이었다.

'아크 내에도 이 정도 저격수는 드물어.'

타티아나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다리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의 저격수가 만들어준 틈 덕분에 어느덧 그녀에게 달려들던 마수들과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진 덕분이었다.

쐐액!

[컹!]

[깨갱!]

[캬오오오!]

그러는 와중에도 마치 소리 없는 암살자처럼 날아든 저격은 멈추지 않았다.

마수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쓰러져 나갔다.

'······저격 사이에 존재해야 할 대기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본래였다면 재장전 등으로 저격과 저격 사이에는 자연적인 텀이라는 게 존재해야만 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쏟아지는 총알에 타티아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즉, 저격수는 한 명이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의 저격수가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라고?

그야말로 아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를 도운 것도 그렇고, 팀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아크의 부대가 분명해. 그렇다면 어느 부대지? 레드 라인의 정찰대인가?'

어쩌면, 소문으로만 듣던 화이트 라인의 직속 수비대인지도 모른다.

아크 바깥의 전선이 아닌 노아와의 경계를 지킨다는 그들이라면, 이 정도 저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것이다.

'아니···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의문의 저격수에 대한 타티아나의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살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더불어서 이에 대한 은혜 역시도 꼭 갚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어느덧 타티아나는 자신이 아크의 방어선 내로 들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쐐애액!

쐑!

[꾸엑!]

[깨갱!]

[컹, 커허헝···!]

따로 아크의 방어선에 줄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실제로 줄이 그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수들이 일정 선을 넘기 무섭게 무수한 총탄과 폭격이 마수들에게로 쏟아졌다.

아크에서의 공세였다.

오랜 도주 끝에 마침내 아크의 방어 전선 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 하하······."

타티아나는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에 일순 다리가 풀릴 뻔한 걸 느꼈으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서 전해야만 할 말이 있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정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진 무감각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자신이 게이트 앞에 도착했음을 느꼈다.

["소속을 밝히십시오."]

타티아나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고르고는 말했다.

"···네이비 라인 본부 정찰대 소속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와 함께 스캐너가 그녀의 몸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언제 느껴도 불쾌한 감각이었지만, 불평을 토해낼 수는 없었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레드 라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벨로프 소령."]

그와 함께 레드 라인의 게이트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붉은 머리의 여성을 본 순간, 내내 굳어 있던 타티아나의 표정이 확 풀렸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몰라도 게이트 관리자가 타티아나와 구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샤?"

"오랜만입니다, 타티아나. 아, 이제는 소령님이셨던 가요?"

레드 라인 Red-17 게이트의 책임자, 이모샤 중위가 오랜 임무 끝에 돌아온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을 맞이했다.

"이모샤!"

타티아나가 이모샤를 향해 달려가서는 와락 안겼다.

한때, 전선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던 오랜 전우와의 만남이었다.

* * *

쉬이익──

나는 붉게 과열된 Ark-15 대물 저격총의 총신을 바라보았다.

'발열에 강한 Ark-15 총신이 이 지경이 될 정도라니··· 진짜 어지간히도 쏴댔네.'

무한의 총알이 가진 단점 아닌 단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도 정신을 집중해서 저격을 하다 보니, 총신이 이 지경이 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지만.'

만약 인영의 발걸음이 조금만 더 느렸다면 상당히 위험할 뻔했다.

만약 내가 발열 관리를 한답시고 저격을 어설프게 했다면 이렇게 쉽게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영이 방어선에 도착하기 무섭게 점을 쫓던 마수 떼는 아크의 막강한 화력에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웨이브는커녕 고작 수백 마리 정도의 마수 떼가 아크의 화력을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지만··· 이게 잘한 일인지는 영 모르겠단 말이지.'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도망치고 있던 인영은 분명히 마수 떼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영이 살았다는 사실이 꼭 나나 아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일단 확률적으로 봤을 때, 그 인영은 정찰대 혹은 그와 비슷한 부대였을 가능성이 커.'

즉, 모종의 임무를 받고서 아크 바깥에 나갔다가 아크로 복귀하는 와중에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다.

대충 그렇게 보는 게 옳겠지.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부정적인 가능성보다는 긍정적인 가능성 쪽에 더 힘이 쏠리는 게 사실이었다.

'어떤 임무인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외부 임무 중에서 아크에 해가 될만한 임무보다는 그렇지 않은 임무가 훨씬 더 많아.'

애초에 내가 긴 고민을 하지 않고서 그 인영을 구하는 걸 선택한 이유 역시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이번 저격으로 인한 소득 역시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10km 초장거리 저격에 성공하였습니다.]

[5km 이상의 초장거리 저격 시, 5%의 추가 피해 효과가 적용됩니다.]

[재주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1 -> 12]

[영혼의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7 -> 8]

노아에서 머무르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놈의 에테르 감응력은 뭐만 하면 올라댄다.

보통 에테르 감응력을 올리는 게 다른 능력치들보다도 더 어렵다는 걸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성장세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자는 건 완전히 공쳤네."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어둠이 물러가는 걸 보니, 어느덧 새벽이 밝았다.

정말로 긴 밤이었다.

'결국 이렇게 새버렸나.'

아까 전에 온천욕을 하며 피로를 조금 푼 탓인지 잠을 자지 않은 것치고는 그렇게까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가 제대로 잠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곧, 나는 어설픈 휴식보다는 움직이는 걸 선택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웨이브(Wave)가 멀지 않았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슬슬······.'

나는 발치에 있는 통조림을 바라보았다.

통! 통!

통조림 안에 있는 녀석은 힘이 넘쳐나는지 아까부터 열심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슬슬 꺼내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내 마음대로 쓰겠지만.'

뼈 기생체.

저걸 써먹으러 갈 때가 됐다.

< 타티아나 벨로프 (2) > 끝

더 디펜스에서 뼈 기생체를 활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특수한 수술과 약물을 이용해서 뼈 기생체를 직접 신체에 이식해서, 뼈 기생체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비록 위험 부담이 크기는 해도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효율성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뼈 기생체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지. 신체 어느 곳에서나 뼈를 분출해내는 그 파괴력은······.'

공격은 물론이고 방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게 바로 뼈 기생체 이식이었다.

실제로 아크의 전방인 바이올렛 라인부터는 이렇게 탄생한 뼈 기생체 군인들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스컬 나이트(Skull knight)라는 특수 부대가 존재한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마수의 심장을 핵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략적인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마수의 심장에 특수한 약물을 주사한 뒤에 그 심장에 뼈 기생체가 기생하도록 유도한다.

마물로서의 본능을 억제하고, 인간이 통제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뼈 기생체가 결합된 마수의 심장을 2레벨 이상의 보호복의 에너지 핵과 연결하게 되면, 비로소 뼈 기생체의 힘을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비인 뼈 갑옷(Bone armor)이 탄생하게 된다.

'첫 번째 방법보다는 못해도, 충분히 쓸만한 방법이지.'

그럼에도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첫 번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효율성 역시도 첫 번째 방법이 두 번째 방법보다 압도적인 데다가 어차피 실패하더라도 아직 게임의 초반부니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뼈 기생체 리세마라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뼈 기생체를 신체에 이식하는 건 완벽한 준비가 갖춰진 아크 내에서도 위험 부담이 큰 수술 중 하나다.

물론 몇 가지 약물과 나 자신의 의지력과 힘을 믿고서 그냥 뼈 기생체를 신체에 쌩으로 이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끌리는 방법은 아니었다.

경험상, 아크의 도움없이 뼈 기생체를 신체에 이식해서 통제하는 데 성공할 확률은 대충 열 번 중 한 번 정도.

게임처럼 무수한 기회가 있다면 몰라도, 고작 한 번뿐인 목숨을 걸고서 도박을 할만한 확률이 아니었다.

'기회는 한 번뿐.'

만약 이 세계에서 죽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원래 내가 살고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말도 안 되는 확률의 도박에 내 운명을 통째로 배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었다.

아니,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우선, 마수의 심장부터인가.'

마수의 심장을 구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산 중턱을 조금 내려가다 보면 내가 지난밤에 사냥했던 헬하운드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그중에는 내가 고의적으로 심장을 파괴하지 않고서 내버려 둔 시체 역시도 다수 있었다.

'정 못 구할 것 같으면 그냥 그걸 써도 되겠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강력한 마수의 심장을 사용하고자 했다.

뼈 기생체의 힘은 뼈 기생체가 기생하는 마수의 심장이 어떤 마수의 심장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당연히 할 수만 있다면 강력한 마수의 심장을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그만큼 통제가 어려워지긴 하지만··· 신체에 직접 이식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 정도 리스크 정도는 리스크 축에도 못 낀다는 이야기.

물론 뼈 기생체의 특성상 언제든지 마수의 핵을 갈아탈 수 있기에 당장은 헬하운드의 심장을 사용하다가 추후에 다른 마수의 심장으로 바꿔도 되는 건 맞다.

다만, 문제는 그때마다 처음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재 내가 지닌 55형 진통제의 숫자는 총 3개.'

55형 진통제의 성분은 유사시에 뼈 기생체를 통제하기 위한 약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애초에 내가 이모샤 중위에게 55형 진통제를 요구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정작 나에게 55형 진통제를 건넨 이모샤 중위는 이러한 용도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따로 구할 수야 있겠지만······.'

그럼에도 상황에 따라서 진통제 본연의 역할에 맞게 사용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가능하다면 신중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모름지기 사람 앞일은 모르는 법이었으니까.

'사냥을 할 때인가.'

자연스럽게 내 목적은 강한 마수의 심장을 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일단 선택지를 만들어 둔 상태에서 선택하는 것과 없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거처를 떠나기 전, 나는 온천과 동굴에 위장막을 펼쳤다.

워낙 지형 자체가 험준한 노아의 중턱에 위치한 터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장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해둘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더 디펜스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방심이라도 훗날 크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방심할 생각은 없다는 소리였다.

'슬슬 가볼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야 나는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 노아를 올라올 때와는 달리 무거운 군장을 내려놓은 상태라서 그런지 한껏 발걸음이 가벼웠다.

현재 내 소지품은 기본적인 단독 군장을 비롯한 Ark-15 소총과 HE2050 권총. 그리고 스멜 마체테와 식수로 수통에 떠온 온천수와 멀티 칼로리 바와 속이 빈 군장 정도가 전부였다.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본격적인 웨이브가 오기 전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산을 타는 과정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노아에는 마수나 마물이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 명제가 참으로 마음에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산을 타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오는 게 느껴졌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태양의 기상은 내게 이 세계에서 마침내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제 하루인가.'

그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지내는 모든 날이 그럴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이동을 하며 아침 식사 겸으로 멀티 칼로리 바를 씹었다.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건지 처음에 느꼈던 벽돌맛은 어느새 초코바맛으로 변해 있었다.

'뼈 기생체 일을 마치고 나면 식량부터 구해야겠어.'

여전히 내게는 두 달 치가 조금 안 되는 멀티 칼로리 바가 남아 있다.

하지만 두 달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믿음직한 숫자가 아니었다.

당장은 일의 우선순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식량 조달을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한다면 멀티 칼로리 바는 최대한 아껴두는 게 좋아.'

멀티 칼로리 바는 부피도 작고, 섭취 시간에 비해서 영양분이나 칼로리도 충분하다.

비상식량으로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는만큼 가능하다면 아껴두고 싶었다.

더 디펜스의 세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방법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아크, 외부 상인, 직접 조달.

아크나 외부 상인으로부터 식량을 구매하는 방법은 당연히 기각이었다.

아직 여분의 총알이 있긴 해도 이건 나중에 훨씬 더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한다.

내가 택할 방법은 당연히 직접 조달이었다.

'노아 내에서는 식량을 구하는 게 어렵지만··· 그 근처까지 그런 건 아니지.'

화산재는 식물이 자라기에 좋은 비료가 되어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아 내에서는 식물이 거의 없지만, 아크를 바라보는 쪽이 아닌 노아의 반대쪽에는 일명 대산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숲 지대가 있다.

노아 자체가 워낙 광활한 터라 그곳까지 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해도 일단은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 식량 조달에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디까지나 주식은 마수의 시체겠지만.'

마수의 시체는 기본적으로 독성을 띠고 있지만, 대산림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식물을 이용한다면 독성을 중화해서 먹을 수 있다.

게임 내 수치로는 포만도도 꽤 잘 차는 괜찮은 식량이지만, 마수 고기의 설명마다 빠지지 않고 있던 문구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

더럽게 맛이 없다.

──────────

뭐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노아의 중턱을 가로지르던 나는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함께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조심해야 해.'

노아는 광활하다.

당연히 아크의 방어선과 걸친 면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이곳은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이곳의 주인은 마수와 마물이다.

안일함은 곧 죽음과 직결된다.

'그러면······.'

나는 36배율 스코프를 최대 비율로 조절한 채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마수나 마물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강해진다.

애초에 분류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급이 높은 마수가 꼭 사냥하기 까다로운 마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등급이 높고 강한 마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사냥하기에는 생각보다 쉬운 녀석일 수도 있다.

조건은 간단했다.

거대한 몸집.

그에 어울리는 두꺼운 가죽.

그러나, 상대적으로 둔한 움직임.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총알과 급소를 노릴 수 있는 솜씨만 있다면 얼마든지 손쉽게 잡아낼 수 있는 녀석.

다행히 이 모든 조건이 어울리는 마수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특유의 외견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거대한 몸집이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찾았다.'

6급 괴수종, 이끼의 쿠프.

내가 가져갈 심장의 주인이었다.

< 뼈 갑옷 > 끝

네임드.

자기 자신만의 고유의 이름이 있는 마수와 마물을 가리키는 말로, 동급의 마수 혹은 마물에 비해서 더 강한 힘이나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끼의 쿠프 역시도 그러한 네임드 마수 중 하나였다.

마치 등딱지 대신에 바위를 멘 거대한 거북이를 떠올리게 하는 외형.

길이만 15m에 달하는 거체.

급소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등 뒤를 덮은 단단한 암석들.

이끼의 쿠프라는 이름답게 암석 위로 잔뜩 낀 온갖 이끼들.

이미 6급 괴수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네임드 마수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경합니다.]

Ark-15 자동 변환 소총을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경한 나는 스코프를 들여다보았다.

'거리는··· 살짝 애매한가.'

스코프를 통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끼의 쿠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약 8km.

Ark-15 대물 저격총이라면 얼마든지 저격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아무래도 사냥에 적합한 거리는 아니었기에 조금 더 접근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끼의 쿠프는 한번 자리 잡은 장소에서는 웬만해서는 거의 이동하지 않으니 사냥감이 도망갈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또 등산인가.'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산이라면 질리도록 타야 할 테니까.

그렇게 이끼의 쿠피와의 거리를 약 3km까지 정도까지 좁힌 나는 다시금 Ark-15 대물 저격총을 잡았다.

스코프를 통해서 보니, 이끼의 쿠프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부터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로.

'다행히, 방향은 이쪽이 정면에 맞닿는다.'

즉, 이끼의 쿠프의 양쪽 눈이 이쪽을 향해 있다는 소리다.

나는 반쯤 감겨 있는 이끼의 쿠프의 두 눈을 차례로 조준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탄창을 작렬탄 탄창으로 교체했다.

작렬탄은 본래도 대물 저격총 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탄으로, 지금 상황에 더없이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철컥-

탁.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실행 뿐.

다른 평범한 6급 괴수종이어도 사냥을 장담할 수 없는데, 무려 네임드를 상대하는 일이다.

방심은 있을 수 없었다.

'한 번에 두 눈을 모두 앗아간다.'

시각을 빼앗는 것.

그게 첫 번째로 할 일이었다.

딸깍─

첫 번째는 왼쪽 눈.

두 번째는 오른쪽 눈.

나는 천천히 때를 기다렸다.

반쯤 끔뻑이고 있는 이끼의 쿠프의 두 눈이 완전히 떠질 타이밍을.

좋은 저격수는 기다림의 미학을 안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

철컥, 철컥─

나는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쐐애액!!

평소보다 조금은 더 큰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그와 함께 올곧은 직선을 그린 총알 두 발이 차례로 이끼의 쿠프의 양 눈에 박혔다.

'성공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이끼의 쿠프의 양 눈에서 피 분수가 치솟았다.

[크오오오오오!!!]

이끼의 쿠프가 비명을 내지르자 쿠프의 근처가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길이만 해도 15m가 넘는 대형 마수가 날뛴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엄청나긴 하네.'

물론, 현재 나와 이끼의 쿠프 사이의 거리는 3km가 넘었으므로 그 여파가 여기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눈앞에서 저 덩치가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기가 질렸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이끼의 쿠프에게 있어서 두 눈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 약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약점이 사라졌다.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기 위해서 반드시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대물 저격총 모드의 화력으로는 설사 철갑탄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끼의 쿠프가 지닌 단단한 껍질을 뚫고서 급소를 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나는 대물 저격총을 다잡고는 이끼의 쿠프 근처에 있는 마수들을 하나씩 겨누었다.

이끼의 쿠프에 접근할 때를 생각한다면 주변에 방해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대충 8급에서 9급 사이의 괴수종과 야수종들인가.'

나는 탄창을 철갑탄으로 갈아꼈다.

15형 철갑탄 수준으로 이끼의 쿠프의 급소를 노릴 수는 없지만, 8급이나 9급 마수들 정도야 충분했기 때문이다.

'단번에 두개골을 박살낸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저격은 일방적인 사냥에 불과할 테니까.

쐐애액!

9급 괴수종 하나의 머리가 터지는 걸 신호로 본격적으로 사냥이 시작을 알렸다.

아무리 가까이 접근했다고 해도 여전히 마수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3km나 된다.

당연히 마수들이 내 위치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마수들 사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끄겍!]

[꺄락, 꺄라라락!]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며, 나는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물론 저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적당한 수준의 열 관리 역시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Ark-15 소총의 총신이 아크제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정도 이상으로 과열이 되면 자가 복구가 될 때까지 당분간은 총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뛰어들 보라고.'

한 발, 한 발.

철갑탄이 공기를 찢고서 나아갈 때마다 마수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키득······.]

그리고 그때 들려온,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목소리.

[나, 여기, 있어······.]

그와 동시에 마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가 있는 장소를 향했다.

마치 내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캭! 캭!]

[크리릭!]

그리고, 이내 마수들이 내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잠잠하다 했다.'

에테르 감응력이 어설프게 높으면 이게 문제다.

아마 완숙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이런 일은 숱하게 일어날 터.

'지금 생각할 건 아니지.'

각 개체수 마다 다르지만, 마수들 중 빠른 개체는 시속 150km가 넘는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아무리 마수들과 나 사이에 3km의 거리가 있다고는 해도, 위치가 노출되었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열 관리 할 때가 아닌가.'

얼핏 봐도 백 마리는 거뜬히 넘는 마수들이 일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중 발이 빠른 개체는 금세 다른 마수들을 앞질러서 저대로 내버려 두면 2분이 채 되지 않아서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할 기세였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나름대로 험준한 산 위라는 걸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그래봤자지만.'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들고서 발이 빠른 개체들의 머리에 친히 철갑탄 두 발을 선사해주었다.

겁도 없이 선두에 선 용맹한 마수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빠른 마수에게는 빠른 죽음을.

현재 내 대물 저격총이 내리고 있는 판결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수 떼와 나 사이의 거리는 분명히 좁혀졌다.

아무리 방아쇠를 열심히 당겨도 달려드는 마수 떼를 모조리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숫자가 너무 많아.'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기 위해서 거리를 좁힌 게 이렇게 될 줄이야······.

'아무튼, 쉬운 게 없다니까.'

마수 무리와 나와의 거리가 1km 미만으로 좁혀지자,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의 레버를 돌렸다.

아무래도 일방적인 사냥은 이쯤에서 끝내야할 듯했다.

지금부터는, 전투다.

[자동 소총 모드로 변환합니다.]

나는 탄창을 일반탄으로 갈아꼈다.

철갑탄은 돌파력은 매우 강력하지만, 이런 식의 전투에서 마수의 접근을 제지하는 저지력이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와라.'

내가 준비를 마치는 동안 어느덧 마수들과 나와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

거리로 치면 500m 정도 될까?

이제는 정말로 코앞이었다.

[크르르르!]

[캬오오오오!]

제 동료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 떼에게서 흉포함이 물씬 풍겨왔다.

물론, 그에 대한 내 화답은 미간의 총알 세 발이었다.

[캥!]

이런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총신의 열 관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마수 다섯 마리의 머리에 구멍을 낼 때마다 뒤로 돌아서 도망쳤다.

일종의 히트 앤 런 작전이었다.

[켕, 켕켕!]

그렇게 달리기와 사격을 연신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나를 쫓는 마수들의 숫자가 두 자리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다.

'슬슬······.'

마침내 때가 왔음을 느낀 나는 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지척까지 다다른 마수들을 마주했다.

이 이상 달리기로 체력을 낭비하는 건 효율상 좋지 않았다.

"들어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뭐, 사실은 처음부터 달려들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갸가가각!]

[키기기긱!!!]

초음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시끄러워 인마."

나는 빼액 울어대는 마수의 성대에 총알 한 발. 그리고 미간에도 한 발을 먹여주고는 달려드는 마수들을 마주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마수들이 계속해서 달려들었으나 내 앞 15m 앞에 어떤 벽이라도 쳐진 듯이 그 앞에서 픽픽 쓰러졌다.

일종의 탄막(彈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열 발, 스무 발, 서른 발, 마흔 발······.

Ark-15 자동 소총의 총구에서 연신 불꽃이 뿜어지며 마수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늘어가는 시체의 산.

하지만 탄막을 뚫고서 내게 닿은 마수는 몇 마리가 채 되지 않았다.

쐑!

마지막으로 달려든 마수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한때 9급 야수종이었던 마수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후······."

때 아닌 마수들과의 전투를 끝낸 후, 잠시 한숨을 돌리던 순간.

[구우우우우우우───!!!]

천지를 떨게 만드는 울음이 울려 퍼지며 주변이 들썩였다.

이 울음소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야 뻔했다.

이끼의 쿠프.

놈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 뼈 갑옷 (2) > 끝

[놀라운 솜씨로 마수 무리의 습격에서 생존하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생성됩니다.]

[0 -> 1]

──────────────

[투지] [Lv.1]

불가능.

그 이름을 물리칠 힘이여.

──────────────

오호.

'생각보다 빨리 생겼어.'

투지 능력치는 설명만 보면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지만, 사실 전투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되는 능력치 중 하나였다.

'몸에 상처를 입어도 몸이 굳지 않고 곧장 전투에 속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사람의 몸은 큰 상처를 입으면 전신의 근육이 굳게 되어 있다.

투지 능력치는 그러한 굳음 현상을 방지해줄 뿐만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한 마수를 만났을 때 생기는 공포 효과에도 어느 정도 면역을 생기게 해준다.

앞으로 나타날 마수와 마물들이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필수적인 능력치 중 하나였다.

'보통 블루 라인은 가서야 얻을까 말까 한 능력치인데··· 마침 잘 됐다고 봐야겠지.'

그 말마따나 지금 내가 상대해야 할 이끼의 쿠프 역시도 그러한 마수 중 하나였다.

인간이 항거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거대해 보이는 마수.

[구오오오오오오──!]

내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이 팔린 사이에도 이끼의 쿠프는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쿵! 쿵!

괴로움의 몸짓은 마치 작은 재해처럼 주변을 휘몰아쳤으나, 이미 그에 휩쓸릴 마수들은 없었다.

비록 내가 그 마수들을 모조리 사냥한 당사자이긴 했어도,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진작 날뛰었으면 조금은 덜 귀찮아졌을 텐데.'

그러는 와중에도 이끼의 쿠프와 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에테르의 부름 덕분인지, 이끼의 쿠프는 시각을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조금씩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시각을 잃은 데다가 원래부터가 워낙 느린 녀석인 터라 이동한 거리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이쪽에서 가야 한단 소리지.'

나는 다시금 탄창을 철갑탄으로 갈아꼈다.

이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끼의 쿠프가 두른 강력한 암석 방패를 뚫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뭐, 애초에 이끼의 쿠프를 상대로는 웬만한 화력이 아니고서야 저지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의미가 없기도 했었고 말이다.

대강의 준비를 마친 나는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기에 앞서 정수용 스트로우를 통해서 수통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후아······."

원래가 온천수인 탓에 열기가 조금 식은 지금도 꽤 뜨거웠다.

사계절 내내 시원한 물을 마셔왔던 나로서는 상당히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얼음이라도 넣어서 먹으면 되겠지.'

어디까지나 여유가 된다면 말이다.

'가볼까.'

나는 내가 사냥한 마수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길을 따라서 달렸다.

적당히 수분도 보충했고, 어느 정도 체력 분배도 해둔 터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미터나 달렸을까.

이끼의 쿠프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가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의 솜털이 주뼛주뼛 서는 게 느껴졌다.

본능이 경각심을 울리는 것이었다.

6급 네임드 괴수종.

그 이름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새로이 얻은 투지 능력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약간의 긴장 외에 다리가 풀린다거나 하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끼의 쿠프와 나 사이의 거리가 1km 안까지 줄어들었다.

이끼의 쿠프의 덩치와 파괴력을 생각한다면 내 입장에서는 거의 코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리였다.

'이끼의 쿠프의 급소는 배 아래 쪽에 있는 심장 혹은 미간.'

나로서는 배 아래 쪽의 급소를 노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 내가 노릴 급소는 당연히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 미간이었다.

물론 급소라고는 해도, 이끼의 쿠프가 지닌 단단한 암석 외벽과 두개골을 뚫고서 뇌까지 총알을 박아 넣으려면 철갑탄 한두 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철갑탄으로 균열을 만들고, 이후에 작렬탄으로 그 균열을 넓힌다.'

대략적인 전술 계산을 마친 나는 그대로 Ark-15 자동 소총을 어깨에 견착했다.

초탄은 철갑탄.

노릴 곳은 미간의 정중앙.

'이쪽을 보라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난동을 부리던 이끼의 쿠프와 내가 순간적으로 정면이 된 순간.

쐐애애액!!!

총구에서 토해진 불꽃이 이번 전투의 신호탄처럼 울려 퍼졌다.

[그우우우우우!!]

순식간에 쏘아진 열 발의 총알.

미간에 박힌 철갑탄과 함께 이끼의 쿠프가 난동을 부리자, 미간에서 부서진 암석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지금껏 이끼의 쿠프의 급소를 지켜주던 보호막이 천천히 벗겨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껍질을 완전히 벗겨주지.'

대물 저격총의 화력으로는 끌어내지 못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화력이 연신 뿜어지기 시작했다.

열 발이 안 되면 스무 발.

스무 발이 안 되면 마흔 발.

사정없이 쏘아진 철갑탄이 이끼의 쿠프를 감추고 있던 암석지대를 산산이 부숴놓기 시작했다.

쏘아낸 총알의 숫자가 어느덧 세 자리 수를 거뜬히 넘어섰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끼의 쿠프의 급소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이끼의 쿠프가 두르고 있는 방호벽이 철저하다는 소리였다.

'과연······.'

나는 여전히 미친듯이 날뛰는 이끼의 쿠프를 바라보며 총열의 열기를 잠시 식혔다.

만약 무한의 총알이 없었더라면 이끼의 쿠프를 사냥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이끼의 쿠프에 다다르기는커녕 직전에 있었던 마수 무리의 습격에서 진작에 도망쳐야 했으리라.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알아봐야겠지.'

총알이 무한이 되는 원리.

그걸 알게 되면 앞으로 이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약 일 분 동안 총열을 식힌 나는 다시금 Ark-15 자동 소총을 다잡았다.

'다시 해볼까.'

나는 이끼의 쿠프에게 조금 더 접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래도 한발 한발 신중하게 쏘는 저격과는 달리, 지금은 연사로 화력을 퍼부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거리에 따라서 탄 밀집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동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먼 거리가 아니었던 탓에 1km의 거리가 500m로 좁혀지는 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쿵! 쿠웅─!!

이끼의 쿠프를 향해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바닥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우우우우우───!]

비록 시력을 잃은 탓에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똑바로 오고 있지는 못했으나, 그 거체가 난동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앙이었다.

본래 이끼의 쿠프는 너무나도 단단한 외부 방어층 때문에 고작 Ark-15 소총 한 자루로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더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무기와 아크에서의 지원이 있어야 간신히 때려잡을 수 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능하다.'

이끼의 쿠프의 정면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쐐새색!!!

섬광이 뻗어나간다.

한 곳에서 시작된 섬광은 어느덧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져서 다시금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목적지는 이끼의 쿠프의 미간에 있는 암석층이었다.

[크우우우우!]

마침내, 이끼의 쿠프를 지키고 있던 암석층이 벗겨지며 이끼의 쿠프의 본래 가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있던 케케묵은 때를 벗겨낸 기분이었다.

'시원할 거다.'

물론 그 이후에 찾아올 건 매우 뜨거울 테지만 말이다.

[구오! 구오오오─────!!!!]

이끼의 쿠프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이끼의 쿠프는 내 존재를 확실히 알았다는 듯이 조금씩이지만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단지, 그 과정이 매우 느릴 뿐이지.

쿵! 쿵! 쿠우웅──!!!

갈곳을 잃은 발길질이 애꿎은 주변의 바위들만 부쉈다.

괜히 내가 이끼의 쿠프에게서 시각을 제일 먼저 빼앗은 게 아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이끼의 쿠프는 내 존재를 알면서도 내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서 그저 주변에 난동을 부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위협적인 게 사실이지만.'

위협이 있으면, 제거하면 될 뿐.

나는 이끼의 쿠프의 미간을 향해서 다시금 철갑탄을 쐈다.

쐑!

공기를 찢고 나아간 철갑탄이 이끼의 쿠프의 미간에 작은 상처 하나를 남겼다.

그리고 곧이어서 퍼부어진 총알 세례에 자그만 했던 상처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곧장 작렬탄으로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와 동시에 이끼의 쿠프의 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쯤 되니 내가 있는 위치를 완전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쿵! 쿵! 쿵쿵!

이끼의 쿠프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이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이끼의 쿠프의 급소를 향해서 총구를 조준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저 거체에 눈먼 발길질이라도 한번 당하게 되면 아무리 3레벨의 방호복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에누리 없이 즉사였다.

[킥킥······.]

[넌, 죽을 거야······.]

[이리 와······.]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점차 강해진다.

돌발성 난청 때문인지 그와 함께 이명이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이───────

손이 떨린다.

하지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서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철컥-

곧이어서 Ark-15 자동 소총의 총구가 불꽃을 토해냈다.

< 뼈 갑옷 (3) > 끝

총알이 올곧은 직선을 그린다.

현재 이끼의 쿠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이제 200m가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거리에서 바람의 방향이나 이끼의 쿠프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작은 변수조차도 되지 못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총구에서 뿜어진 불꽃의 숫자만큼의 총알이 이끼의 쿠프의 미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곧이어서 미간 사이에 있는 상처에 박힌 작렬탄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쾅! 콰쾅!

연달아 터지는 작렬탄들.

아무리 네임드 마수라도 두개골 바로 앞에서 터지는 폭발을 견딜 수는 없었기에 이끼의 쿠프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구오오오오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뼈가 드러났다.'

이제 마무리 단계다.

다시금 철갑탄으로 탄창을 교체한 나는 이끼의 쿠프의 미간을 향해서 다시금 조준을 했다.

이끼의 쿠프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향해 강렬한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50미터. 그 전까지는 끝낸다.'

그 이상 이끼의 쿠프와 거리가 가까워지게 되면 나도 위험하다.

아무리 지금은 약해져 있다고 해도, 본질은 무려 6급의 네임드 괴수종이었으니 말이다.

철갑탄으로 암석층을 거두고,

작렬탄으로 피부를 찢어발기고,

다시 철갑탄으로 뼈를 꿰뚫는다.

이 일련의 과정이 물흐르듯이 이어지며 쏘아진 철갑탄이 이끼의 쿠프의 두개골을 두드렸다.

과연 6급 네임드 괴수종이라는 건지 두개골 역시도 단단하기 그지없었으나, 한두 발로 안 되면 그 이상의 화력을 퍼부으면 될 뿐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와중, 이끼의 쿠프의 거체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150m.

130m.

100m.

쿵! 쿠우웅!

이끼의 쿠프의 숨결이 느껴진다.

녀석이 내뱉는 숨결과 적의가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80m.

60m.

55m.

그 순간.

쩌적, 쩍─!

'부서졌다.'

두개골 사이에 일어난 작은 균열.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끝낸다.'

50m.

45m.

이끼의 쿠프가 달려들었으나 나는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방아쇠를 당길 뿐.

쐐액!

날아든 총알이 지금껏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끼의 쿠프의 두개골을 깨부수고서 그대로 뇌까지 파고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구으으으으······.]

맹렬하게 쏘아지던 적의도,

재앙처럼 들썩이던 거체도,

그 모든 게 멈췄다.

쿠우우우웅─!!!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이어 이끼의 쿠프의 거체가 완전히 쓰러졌다.

쓰러진 이끼의 쿠프의 거체가 미끄러지며 내 앞으로 날아들었으나,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40m.

35m.

쓰러진 이끼의 쿠프와 나 사이의 마지막 거리였다.

50m 안쪽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녀석이 튼튼했던 모양이었다.

[6급 괴수종, '이끼의 쿠프'를 처치하였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특성, '괴수 사냥꾼'을 획득하였습니다.]

──────────────

[괴수 사냥꾼]

괴수종과 야수종을 사냥할 때마다 동종의 마수에 대한 피해량이 0.05%씩 증가합니다.

──────────────

'성장형 특성!'

이건 대박이었다.

아무리 증가 수치가 낮다 하더라도, 등장하는 마수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결코 낮은 게 아니었다.

'10마리만 잡아도 0.5%, 100마리를 잡으면 5%다.'

이런 성장형 특성은 당연히 일찍 얻으면 얻을수록 좋다.

그런데 아직 본격적인 스테이지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이걸 얻었다는 건, 앞으로 괴수종과 야수종에 대해서 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상성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488번 중에서도 몇 번밖에 못 얻었던 특성인데······.'

그나마 단점 아닌 단점이 있다면, 여기에 명시된 '동종의 마수'라는 게 생각보다 범위가 좁다는 점 정도일까.

요컨대,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10마리 사냥하면 10급 야수종 전체에 대한 피해량이 0.5%가 오르는 게 아니라, 헬하운드에게 입히는 피해량만 0.5% 늘어난다는 소리다.

'그래도 엄청나게 좋은 특성이야.'

더 디펜스에는 특성에 별도의 등급을 매기지는 않지만, 유저 커뮤니티에서 티어를 분류할 때 괴수 사냥꾼 특성은 최소 6성(★★★★★★)급 특성으로 분류된다.

그것도 50번째 스테이지 이후에 얻을 때 그런 취급이고, 이런 초반부에 괴수 사냥꾼의 값어치는 7성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더군다나,

내가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고서 얻은 건 비단 특성뿐만이 아니었다.

[끈질긴 영혼의 속삭임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영혼들이 당신을 주목할 것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8 -> 10]

[항거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 -> 2]

달달하게 오르는 능력치들.

거기다가, 드디어 에테르 수치가 10을 넘어섰다.

여기에서 1만 더 에테르 감응력을 올리게 되면 비로소 아크에서 분류하는 레벨 2 에테르 적합자의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

'2레벨 에테르 적합자와 1레벨 에테르 적합자의 가장 큰 차이는, 에테르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이라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즉, 비록 완전한 2레벨 에테르 적합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나도 아주 약간이나마 에테르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리였다.

'당장은 조금 그렇고··· 나중에 기회가 될 때 확인해봐야겠어.'

대강의 생각을 마친 나는 이끼의 쿠프의 시체 앞에 섰다.

눈앞에서 직접 보니, 다시 봐도 거대한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을 내가 잡았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접근을 허용했다면··· 그대로 끝이었겠군.'

무게와 속도는 곧 파괴력이다.

이런 거체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데 스치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온 몸의 뼈가 박살나고 전신이 말 그대로 터져 나갔으리라.

이끼의 쿠프 시체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이 안 나온다.

'아깝기는 하지만······.'

분명히 이끼의 쿠프의 시체는 일전에 잡았던 스컬 하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값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런 거체를 운반할 만한 수단이 지금의 내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크까지 가서 이곳에 시체가 있으니 판다고 한다면··· 거래 성사는커녕 괜히 괴상한 오해를 살 가능성이 컸다.

고작 스컬 하운드 하나를 잡고도 그런 오해를 샀는데,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모래바람 상단 같은 곳에 팔아넘기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접선지로 가는 것도 여의치 않아.'

아쉽다.

너무너무 아쉽다.

하지만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최대한 쓸모 있는 것만 챙겨갈 수밖에.'

쓸모 있는, 이라고 쓰고 가장 비싼이라고 읽는다.

가장 우선시할 건 역시나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다.

애초에 내 목적이기도 한 물건인 만큼 이걸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어디 보자··· 심장의 위치가······ 대충 이쯤이었던가?'

쓰러진 이끼의 쿠프의 배 밑으로 들어가서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어떻게 배 밑까지 파고들어도 배를 가르는 순간 내장에 파묻혀 죽으리라.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끼의 쿠프의 옆구리를 베서 파고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심장까지의 거리가 좀 되긴 할 테지만··· 그나마 이 방법이 제일 나아.'

나는 스멜 공방제 7번 마체테를 들었다.

물론 단순한 칼질만으로는 이 두꺼운 가죽을 뚫고 지나가기에 애로사항이 꽤 많았기에, 철갑탄을 장전한 Ark-15 소총 역시도 톡톡히 제 몫을 해야 하리라.

쐑! 쐑!

서걱, 서걱─

총질, 칼질 그야말로 가죽을 찢기 위한 무던한 노력이 시작됐다.

죽어 있는 시체의 가죽을 자르는 것도 이런데, 만약 살아 있는 이끼의 쿠프를 자르려고 했다면 진작 깔려 죽었으리라.

"후아······."

어느덧 내 전신이 이끼의 쿠프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분비물로 뒤덮였다.

이끼의 쿠프는 자체적인 독성을 지닌 마수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수이기 때문에 그 피와 분비물을 인간이 뒤집어 쓰고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으······."

더럽게 찝찝하네.

이끼의 쿠프를 사냥할 때만 해도 참 멋있는 장면을 연출한 거 같은데, 막상 그 뒤처리 꼴은 이렇다.

누가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서걱, 서걱─

끔찍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마수 떼와 이끼의 쿠프를 다시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 정도로.

"후······."

마침내 이끼의 쿠프의 옆구리를 가르는 데 성공한 나는 천천히 그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안에 있는 내장의 부피 역시도 보통이 아니었다.

'심장까지 닿으려면··· 이것저것 많이 꺼내야겠네.'

너무나도 끔찍한 소식이었고,

또다시 끔찍한 시간이 흘렀다.

뭔지도 모를 마수의 내장을 억지로 끄집어내서 여기저기에 늘여놓으니, 이곳이야말로 인세의 지옥이 아닌가 싶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바람 방향이 안 좋아. 피 냄새가 퍼지겠어. 빨리 끝내야겠어.'

더 디펜스의 세계에서는 꼭 바다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상어 떼를 볼 수 있다.

아니, 상어 같은 물고기는 귀엽게 보일 정도로 흉악한 놈들이 피 냄새만 맡았다 하면 달려들곤 한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이끼의 쿠프 안에서 심장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심장이 마치 용암처럼 뜨거웠다.

"하······."

더럽게 힘드네.

오죽하면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는 것보다 이 과정이 더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다시는··· 이딴 짓 하나 봐라.'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 바람은 부질없는 희망 사항 정도로 끝날 거라는 걸.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상, 이보다 더한 꼴은 더 보면 더 봤지 결코 덜 보지는 않을 거라는 걸.

뭐어······.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점이었다.

'바로 해볼까.'

그렇게 내가 군장 속에서 뼈 기생체가 담긴 통조림을 찾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라?'

아니나 다를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언제 힘을 회복한 건지 뼈 기생체의 다리가 통조림을 뚫고 나온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소라게 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쓰고 있는 게 소라 껍질이 아닌 녹슨 통조림이라는 게 조금 다른 점이랄까.

"어이가 없네."

통조림에 갇힌 채로 이리저리 헤매는 꼴을 보아하니, 조금 더 늦게 발견했더라도 별일은 없었을 듯했다.

"어딜 가려고?"

그대로 쫓아가서 뼈 기생체의 안식처가 된 통조림을 발로 가볍게 즈려 밟으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마침 '그걸' 실험하기에는 딱 적합한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해볼까.'

나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명령했다.

"잡아."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조금은 긴 침묵이었다.

'······역시 안 되나?'

내가 실망한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에테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초현상이었음에도 이제 에테르 감응력이 10이 넘은 내게는 그것들이 똑똑히 느껴졌다.

[······잡아?]

처음에는, 미약한 목소리였다.

환청조차 아닌 것처럼 작게 울려 퍼진 목소리는 이내 메아리처럼 울리며 점차 커졌다.

[잡아······.]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가 제 영역을 주장하듯이 귓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잡자······!]

흐릿하기 짝이 없었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린 바로 그 순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무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뼈갑옷 (4) > 끝

순식간에 뼈 기생체가 담긴 통조림을 향해 나아간 에테르가 뼈 기생체를 감쌌다.

[기익, 기기긱······!]

뼈 기생체가 발을 동동 굴리며 발버둥 쳤으나, 숙주조차 없는 뼈 기생체에겐 더 이상 힘이 없었다.

[기익!]

뼈 기생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물론 죽은 건 아니었다.

단지, 힘이 빠졌을 뿐이지.

'오호······.'

설마 했더니, 정말로 될 줄이야······.

조금 전에 있었던 현상은 내 의지에 따른 에테르들이 드디어 조금이나마 내 명령을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많은 통제력을 발휘할 수는 없어도, 약해진 뼈 기생체 정도라면 어떻게 되는 수준 같았다.

'당장 전투에 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물론 에테르는 대가 없는 힘이 아니다.

이렇게 한번 부려먹었으니, 아마 오늘 밤은 더욱더 진득하게 나를 괴롭힐 가능성이 컸다.

'뭐, 그 정도야.'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서 안 괴롭힐 놈들도 아니었기에, 나는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공짜로 괴롭힘당하는 것과 뭐라도 시키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아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많은 소득을 얻은 나는 지체없이 곧장 의료 키트에서 55형 진통제를 꺼냈다.

슬슬 오늘의 성과 중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을 차례였다.

이끼의 쿠프의 심장에 55형 진통제를 주사하자, 쿠프의 심장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뛰었다가 다시 멎었다.

마치 공포 영화에라도 나올 법한 장면이었으나,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기에 놀랄 필요는 없었다.

'슬슬 세팅해볼까.'

나는 55형 진통제를 머금은 이끼의 쿠프의 심장을 내려놓고는 그 앞에 뼈 기생체가 담긴 통조림 입구를 대고는 그대로 뚜껑을 열었다.

[기긱······.]

내가 순순히 놓아주자 뼈 기생체는 의심을 저버리지 못한 듯했으나, 이내 스스로 내가 파놓은 함정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겍, 그게게겍······!]

55형 진통제를 듬뿍 먹은 마수의 심장에 기생을 시작하자, 뼈 기생체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숙주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이끼의 쿠프의 심장은 애초에 주인부터가 네임드 출신인 만큼 그렇게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끄게게겍!]

늑대와 개의 유전적 차이는 사람으로 치면 인종별 차이보다도 더 적다고 한다.

그렇다면 늑대와 개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개 염색체 6 지역에서의 변이다. 그곳에서 발생한 GIF21이라는 단백질이 늑대와 개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

좋은 말로는 인간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쏟게 만드는 초사회적인 유전자고, 나쁜 말로는 윌리엄스-보이렌 증후군을 유발하는 유전자인 셈이다.

55형 진통제를 주사한 마수의 심장 역시도 그러한 효과를 유발한다.

뼈 기생체라는 마물에게, 마물로서의 본능을 제거하고 강제적으로 초사회적 유전자를 각인시킨다.

바로 지금처럼.

뼈 기생체의 발버둥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윽고 뼈 기생체의 발버둥이 잠잠해지자, 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

[뼈 기생체(이끼의 쿠프의 심장)] [★★★★(4성)]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을 숙주로 삼은 뼈 기생체.

현재 55형 진통제로 인해서 마물로서의 본능을 잃고서 가축화되었다.

특정 에너지원에 연결 시, 뼈 기생체와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됐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아직 완전한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직 이 녀석의 진짜 용도로 활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미룰 필요 없겠지.'

나는 곧장 뼈 기생체와 입고 있는 보호복의 에너지원을 연결했다.

츠츳, 츳─!

몇 번의 스파크가 튀고, 이윽고 연결이 안정되었는지 잠잠해졌다.

──────────────

[뼈 갑옷(Lv.3)] [★★★★★(5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드디어······.'

비록 6급 네임드 괴수종의 심장을 숙주로 사용한 것치고는 장비 등급이 낮긴 했으나, 그건 원래 장비 등급이 3성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아직 뼈 기생체의 성장이 별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먹여서 키우면, 뼈 기생체 역시도 성장한다.'

마침, 뼈 기생체에게 줄 먹이 역시도 눈앞에 있었고 말이다.

무려 이끼의 쿠프씩이나 되는 마수의 시체를 고작 먹이로 주기는 조금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발톱이나 송곳니 같은 부위는 쓸모가 많으니까 따로 챙겨두고······.'

뼈 갑옷도 얻었으니, 이전처럼 지루한 칼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원한다면 이 녀석이 알아서 이끼의 쿠프의 뼈를 싹싹 발라 놓을 테니까.

"해체해."

[기긱!]

명령이 떨어지자, 보호복에 연결된 뼈 기생체가 알겠다는 듯이 보호복에서 갈비뼈 같은 뼈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마치 뼈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이끼의 쿠프의 시체에 박히더니, 이내 그것을 빨대처럼 이용해서 양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쪼옥, 쪼옥─

뼈가 마수의 시체를 빨아들이는 장면.

누가 봐도 혐오스럽고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일상과도 같은 장면에 불과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리 뼈 기생체의 식욕이 왕성하다고는 해도 이끼의 쿠프처럼 거대 마수의 시체를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었기에, 식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

[뼈 갑옷(Lv.3)] [★★★★★★(6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상세 보기"

──────────────

조금 배불리 먹였다고 금세 등급이 1성 올랐다.

무려 6성 등급의 방어구.

거기다가 보통 방어구도 아니고 성장이 가능한 성장형 방어구였다.

거기에 더해서 추가 옵션까지도 있었으니, 공방일체의 완벽한 방어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끼의 쿠프의 힘이라··· 나중에 이것도 한 번 사용해 봐야겠는걸.'

다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이처럼 완벽한 방어구에도 단점은 있었다.

성능상의 문제는 아니었고, 외적인 부분으로 인한 사항이었다.

'그래도 생긴 게 조금 그러니까··· 평소에는 웬만하면 감추고 다녀야겠지.'

안 그래도 아크에서 출입이 금지당한 몸인데, 생긴 것까지 이래서야 에누리 없이 총살이다.

실제로 아크 내에서도 뼈 기생체 장비를 착용한 군인들은 웬만하면 그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서, 비주얼적으로 상당히 혐오감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외모지상주의가 문제라니까."

세상이 망해도 생긴 거로 차별하는 풍토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기긱!]

혼잣말로 내뱉은 건데, 뼈 기생체가 동의하듯이 주억거렸다.

과연 마물답게 인간의 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모양.

뭔가 그 모습이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보다 보니 강아지 같아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거기다가, 유지하는 데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뼈 기생체는 비록 방호복에 귀속되기는 했어도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다.

당연히 일정 주기별로 양분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말라 죽어버린다.

'아니면 굶주림에 다시 마물로서의 본능이 깨어나서 제 주인을 공격하거나.'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유지 보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뭐, 그 부분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아무리 뼈 기생체의 식욕이 왕성하더라도, 먹이로 줄 마수야 넘쳐날 테니 말이다.

'슬슬 돌아가 볼까.'

이끼의 쿠프의 시체에서 발톱, 송곳니, 가죽 같은 쓸만한 것들은 군장이 꽉 찰 정도로 모조리 챙겼다.

더는 이곳에 있어봤자 피 냄새를 맡고 온 하이에나들만 꼬일 테니, 슬슬 떠나는 게 여러모로 이로워 보였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

거처를 나설 때가 이른 새벽이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거의 오늘 하루 내내 이 짓거리를 했다는 뜻이었다.

'돌아가면 다시 밤이겠어.'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아의 밤은 무척이나 추웠으니까.

* * *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은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혼자만의 작은 티타임을 가졌다.

고된 임무를 마친 뒤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식이었다.

'대체 누구였을까?'

요즘 그녀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아크로 돌아올 때 자신을 도왔던 의문의 저격수에 대한 것이었다.

일단 레드 라인 소속의 부대는 아니다.

얼마 전에 레드 라인 게이트에서 만났던 게이트 관리자 이모샤 중위가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네. 레드 라인 내의 부대는 아닙니다. 애초에 최근에 레드 라인 게이트를 드나든 부대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 그런데 말은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야? 나 사석에서 계급장 앞세우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이게 편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이모샤의 씁쓸한 미소에 타티아나는 더는 그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블랙 라인에서 있었던 일은 언제부터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래."」

그런 씁쓸한 기억들을 애써 떨쳐내고, 타티아나는 다른 곳에 집중했다.

지난밤에 자신을 도왔던 의문의 저격수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었다.

'레드 라인이 아니라면······.'

남은 건 화이트 라인뿐.

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화이트 라인의 부대는 웬만해서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다던데······.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화이트 라인은 주둔 부대를 포함한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다.

어디 가서 권력이나 배경으로 밀려본 적이 없는 타티아나였건만, 정작 화이트 라인에 대해서 아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으음.'

기억 속 이모샤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 주제는 일 이야기였다.

「"그리고 크로노스가 멸망했다는 보고를 한 게 이모샤 너라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게이트 관리자가 그건 어떻게 알았어?"」

타티아나가 부대에 복귀한 뒤에 크로노스가 멸망했다는 보고를 올렸을 때, 직속 상관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가관이었다.

다름 아닌, 이미 알고 있다는 소식.

자신이 아크에 크로노스의 멸망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겪었던 고초를 생각한다면 다리에 힘이 풀리는 소식이었다.

동시에, 의문도 있었다.

제아무리 각 라인이 독립적인 자치 구역에 가깝다고는 해도, 명목상으로는 화이트 라인의 통치를 받는다.

하물며 네이비 라인에서 꾸린 크로노스 정찰대 파병은 이미 화이트 라인에도 보고가 올라간 사안이다.

만약 다른 라인에서 한발 빠르게 정찰대를 꾸렸다면, 자연스레 타티아나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소리.

그런데 소식을 알아보니, 다름 아닌 이모샤 중위가 크로노스 멸망 소식을 보고했다는 게 아닌가?

레드 라인의 게이트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가 그 사실 어떻게?

타티아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이 찾아왔었습니다."」

「"피난민?"」

「"크로노스에서 찾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조금··· 아니 많이 특이했죠."」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이모샤 중위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왜 그래?"」

「"그들 중 한 명은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야 크로노스에서 여기까지 왔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요. 제가 죽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어진 이모샤 중위의 말은 간단했다.

에테르 반응이 있는 이방인이 있었고, 방침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출입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엄밀히 따지면 이모샤 중위가 죽였다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아직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구제 장비로 스컬 하운드를 잡았다는 게 진짜야?"」

「"예. 깔끔하게 눈과 심장만을 노렸더군요.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이모샤 중위가 칭찬할 정도의 솜씨라······.

그 부분이 어째 타티아나의 마음에 조금 걸렸다.

「"······그으래?"」

타티아나의 의식이 기억 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이방인이라······."

어째서일까.

타티아나는 어쩌면 그 이방인과 의문의 저격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레벨3의 에테르 적합자인 타티아나가 하는 망상이라면 그건 곧 직감이 된다.

"이름이······ 칼 마커스라고 했던가?"

이모샤 중위는 그녀가 출입을 금지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미련한 짓을 타티아나는 몇 번이나 비난했지만, 아무래도 이모샤는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휴."

미련하기는······.

'곰탱이, 둔탱이, 모질이.'

속으로 실컷 이모샤 중위에 대한 욕을 한 타티아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그자와 함께 왔던 피난민들이 현재 레드 라인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던가?

타티아나는 조만간 다시 레드 라인에 한 번쯤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 뼈 갑옷 (5) > 끝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등 뒤에 짐이 한 아름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번에 얻은 뼈 갑옷의 운동 보조 효과가 아니었더라면 도착하는 데 말 그대로 온종일 걸렸을 것이다.

"후아······."

다사다난했던 하루였던 만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영산 노아의 밤은 길다.

특히나 나에겐 더욱더 그러했다.

[키득, 키득······.]

[우리랑 놀자······.]

[일어나······.]

간신히 피곤에 절은 몸을 뉘이고 수마에 빠져들려고 했다.

하지만 저놈의 목소리들은 나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오! 잠 좀 자자! 잠 좀!"

에테르 감응력이 10에 다다랐지만, 밤에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났다.

이제 밤에 잠 대신에 온천욕으로 피로를 푸는 건 나에게 있어서 더는 선택이 아니었다.

"으허······."

언제나처럼 아저씨 같은 목소리를 내며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근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물론 말이 생각이지, 사실상 수면에 가까운 멍 때리기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나는 온천에 몸을 담근 채로 왼쪽 귀를 슬며시 만졌다.

오랜만에 내 상태를 점검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2

체력 : 13

재주 : 12

행운 : 8

투지 : 2

에테르 감응력 : 10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불면증],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저격수의 시간], [괴수 사냥꾼]······.

──────────────

며칠 동안 오른 능력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정도로 많은 능력치가 올랐다.

특히, 에테르 감응력 같은 경우는 원래 이렇게 잘 오르는 능력치가 아닌 걸 생각한다면 파격적인 성장이었다.

뭐어, 그건 그렇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가장 급한 건 역시나 식량 조달에 관련된 사안들이다.

멀티 칼로리 바는 한 개만 먹어도 하루에 필요한 열량과 영양분을 모두 공급하지만, 그것도 어느덧 4개나 먹었다.

남은 멀티 칼로리 바는 고작 56개.

아껴 먹는 건 본질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당장 내일부터라도 식량 조달에 나서야만 한다.

뭐, 이 부분은 당장 내일부터 하면 되니까 일단 접어두고······.

'두 번째는, 무한의 총알에 대한 원리를 알아내는 것.'

이미 이동 중에 몇 가지 간단한 실험을 해보긴 했다.

우선, 총에서 탄창을 빼면 아무런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혹시 탄창을 빼면 일반탄으로 나가나 싶어서 실험해 봤지만, 의외로 탄창을 뺀 상태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무한의 총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복제하는 개념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종의 복사 붙여넣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총알이 발사되기 전에 중간에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총알이 화폐나 다름없는 이 세상에서 무한에 가까운 자금을 손에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총알 자체는 아직 무한으로 얻을 방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한으로 배출되는 게 전혀 없진 않지.'

바로 탄피였다.

'이것도 값어치가 전혀 없지는 않을 테지만······.'

탄피의 원료는 황동을 비롯한 여러 합금을 주로 소재로 사용한다.

일단은 모으기에 따라서 상당한 값어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

하지만 과연 그게 총기의 내구성을 소모하면서까지 얻을만한 값어치인가? 하면 그건 또 잘 모르겠다.

'뭐, 급할 때 팔아먹을 게 있다는 건 좋은 거지.'

어차피 총 쏠 일이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떨어지는 탄피도 틈틈이 모아놨다가 팔아먹으면 없는 살림살이에 제법 도움이 되리라.

특히, 탄피 같은 물건은 총알의 자체 생산이 가능한 아크 내부보다는 모래바람 상단 같은 외부의 인원에게 팔아먹으면 그 가치가 더욱더 상승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비상금 정도라고 봐도 좋으리라.

'그리고··· 아크 내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 해.'

현재의 나는 이방인 신분이다.

더 디펜스의 기본 목적은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들을 막아내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는 필시 아크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개입을 해야 한다.

라인 정쟁(Line 政爭).

이는 아크 수호와 더불어서 더 디펜스에서 가장 거대한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현재 아크 내에서 나와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쿠릴타를 비롯한 피난민 몇 명정도.'

비록 내가 쿠릴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지만, 지켜본 바에 따르면 쿠릴타는 지휘관보다는 병사에 더 걸맞은 인재였다.

훌륭한 부하나 믿음직한 동료는 될 수 있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쿠릴타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방인 신분이야.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아크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그렇다면 아크 내 인원들과 접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으음······.'

이 부분은 나로서도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아크의 이방인으로 사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실행하기 어려워.'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너무 쌓였다.

나는 온천수에 몸을 맡긴 채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점차 귓가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무시하고는 노곤해진 정신을 놓았다.

밤이 깊었다.

*

아침이 밝았다.

오늘 할 일은 식량 조달이었다.

'일단, 거기부터 가볼까.'

일전에 내가 사냥한 마수 무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록 하루가 지나긴 했어도 마수 시체의 특성상 벌써 부패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게 대강의 채비를 마친 뒤에 얼마 전에 내가 마수들을 사냥했던 장소로 가니, 헬하운드들의 시체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기긱, 긱······.]

헬하운드들의 시체를 보자 뼈 기생체가 울었다.

아무래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몇 마리 먹으려면 먹어."

어차피 다 가져가지도 못할 테니, 딱히 아까울 것도 없었다.

[기긱!]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뼈 갑옷에서 뻗어 나온 뼈들이 헬하운드의 시체에 꽂혔다.

쪼옥, 쪽─

나에게야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만약 다른 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비명을 내지르리라.

실제로 뼈 기생체를 직접 신체에 이식한 스컬 나이트들도 이러한 방식의 영양 섭취가 가능하긴 하지만, 웬만큼 비상시가 아니고서야 거의 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로 마수의 시체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하기엔 상당히 혐오스러운 행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뼈 기생체를 직접 신체에 이식한 스컬 나이트들도 이러한 방식의 영양 섭취가 가능하긴 하지만, 웬만큼 비상시가 아니고서야 거의 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로 마수의 시체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하기엔 상당히 혐오스러운 행위였기 때문이다.

'뭐··· 아무렇지도 않게 마수들한테 빨대를 꼽고 다니던 놈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거야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으니 굳이 예시로 들 필요는 없었다.

뼈 기생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마체테를 들고서 헬하운드의 시체를 손질했다.

원래는 흐르는 물가 같은 곳에서 해야 하는 게 맞았으나, 이 시체들을 온천이 있는 곳까지 짊어지고 가기는 조금 부담됐기에 일단은 여기에서 대충 하고 갈 셈이었다.

'대충 됐나.'

손질을 마친 나는 그것을 거처까지 옮겨놓은 뒤, 다시금 원정을 떠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수 고기의 독성을 중화하려면 대산림에 있는 몇 가지 식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의료 키트에 있는 몇 가지 약물들로도 비슷하게 할 수야 있지만··· 효율이 영 안 좋아. 그리고 이왕 가는 김에 땔감도 가져오고.'

바로 근처에 온천수가 있으니 모닥불의 존재가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일단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좋았다.

만약 이 산이 다른 산이었다면 마수가 들끓는 이 세계에서 불을 피우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겠지만, 이곳은 현재도 화산 활동이 끊이지 않고 있는 영산 노아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 활화산에 있어서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당장 고개만 위로 올려도 자욱한 화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가볼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레드 라인을 찾은 타티아나 벨로프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오랜 친우인 이모샤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레드 라인의 훈련소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이비 라인 본부 소속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이다. 이곳에 얼마 전에 입소한 이방인 출신의 훈련병들이 있나?"

"저희 중대 소속 훈련병들 같습니다만···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훈련대장의 물음에 타티아나가 살며시 웃었다.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미소였다.

"내가 귀관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야 하는 건가?"

"···실례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니, 내가 직접 가지."

타티아나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본능이 외쳤다.

이곳에, 그녀가 그토록 찾던 답에 대한 단서가 있을 거라고.

타티아나는 훈련장으로 이동하며 훈련대장에게 몇 가지 사실들을 들었다.

피난민들의 간단한 이름 같은 신상과, 그들의 출신.

그리고······.

"네가 쿠릴타인가?"

크로노스의 피난민 신분으로 이번에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은 딱 봐도 단련이 잘 되어 있는 전사들이었다.

쿠릴타 역시도 그러했다.

다만, 태도는 전사라기보다는 아직 문명화가 되지 않은 야만인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래, 내가 쿠릴타다."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옆에 서 있던 훈련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훈련병! 상급자에 대한 예를 갖춰라! 내가 저번에도 경고했을 텐데!"

훈련대장은 매우 큰 곤란함을 느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훈련병들은 다 좋은데,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군인이라기보다는 야만인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정훈 교육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던 차인데, 하필 이런 시기에 네이비 라인의 소령이 방문하다니······.

'흐음.'

타티아나 역시도 쿠릴타의 태도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크로노스 근방에 있는 출신.

전신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문신.

누가 봐도 야만인이었다.

'저 문양이라면, 크로노스 인근에 있는 야만 부족 출신이라는 게 사실인 것 같군.'

그 근방이라면 타티아나 역시도 임무 도중에 몇 번인가 들렀던 적이 있다.

그 근처에서 저것과 비슷한 문신을 한 야만인들을 꽤 많이 보았었다.

"아니, 됐다. 저자와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깐 자리를 피해주시겠나?"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쿠릴타와 단둘이 된 타티아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칼 마커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봐라."

쿠릴타가 타티아나를 한번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

"안 됐군."

"뭐를 말이지?"

"얼굴은 제법 반반하긴 하지만··· 너는 칼의 취향이 아니다. 칼은 가슴과 엉덩이가 큰 여자를 좋아하지. 너는 그렇지는 않군."

설마하니 훈련병으로부터 이런 모욕을 당할 줄은 몰랐기에 타티아나는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그저, 당황했을 뿐.

"······뭐, 뭐?"

상대가 야만인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뭐가 그리 놀랍지? 칼은 전사 중의 전사다. 위대한 전사는 자식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여인과 혼인하는 게 당연하다."

쿠릴타의 폭언 속에서도 타티아나는 계급이나 권위를 내세우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상대는 야만인이다. 군인의 계율 따위를 내밀어봤자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훈련대장이 고생이 많겠어.'

그렇기에 타티아나는 최대한 캐낼 수 있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했다.

"···내가 듣기로는 칼 마커스는 아크의 출입이 금지되었다던데, 그가 아크 바깥에서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 자식도 살아 있어야 만들 수 있지 않나?"

"칼이라면 아크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위대한 영혼의 후예니까."

크로노스 인근에서 살아온 야만인이라면 아크 바깥이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쿠릴타는 칼 마커스의 생존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가."

"그렇다."

또다시 들려온 당당한 대답.

이제 타티아나는 쿠릴타의 당당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꼬집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칼 마커스가 정말로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타티아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자도 분명히 저자처럼 교양 따위는 없는 야만인이겠지. 분명해.'

칼 마커스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확신이 채 들기도 전, 그녀의 머릿속에 편견이 먼저 쌓였다.

< 불청객 > 끝

쿠릴타와의 만남 이후,

타티아나 벨로프는 생각했다.

'만약 칼 마커스라는 자가 정말로 살아 있고, 그자가 나를 도운 이라면······.'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기로 했다.

만약 자신이 칼 마커스라면, 아크의 출입이 금지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우선, 거처를 정해야 해.'

'아크 바깥에는 마수와 마물이 들끓어. 사실상 안전한 장소는 거의 없어.'

'레드 라인 입구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어.'

'물 또한 필요해. 범람하는 강이 있기는 해도, 그 근처에는 마수들의 서식지 역시도 있어. 그곳은 안 돼.'

'대산림 주변도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마수와 마물의 터전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지닌 곳은 대개 이미 마수와 마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모든 장소가 그런 건 아니었다.

비록 여러 가지 제약 사항이 있긴 해도, 마수와 마물들이 절대로 가지 않을 장소가 한 곳 있었다.

'영산 노아.'

그녀의 시선이 노아를 담았다.

* * *

대산림.

아크를 노아의 남쪽에 있다고 했을 때, 대산림은 노아의 동쪽에 있는 범람하는 강 위쪽의 동북쪽에 있는 거대한 숲 지대를 말한다.

정말로 화산재가 비옥한 비료가 되어준 건지, 아니면 다른 지리적 조건이 마침 맞아 떨어졌던 건지는 몰라도 대격변 이후에 생겨났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산림은 광활하다.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영토는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는 장소였지만, 아크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이곳의 정벌에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빈번히 실패했다.

이곳에는 숲의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나는 그렇게까지 깊게 들어갈 생각도 없지만.'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마수의 독성 중화용 식물 몇 종류와 땔감으로 쓸만한 나무 정도다.

마수를 사냥하는 게 목적이 아닌 만큼 가급적이면 전투는 피할 생각이었다.

'거기다가, 가능하다면 수면에 도움이 될 만한 식물들도 찾아보고.'

지금도 내 귓가에서는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다.

[키득······.]

[나랑, 놀자······.]

[죽이자, 다······.]

평상시에는 그러려니 하고서 넘어가는 목소리들이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온천욕으로 억지로 피로를 달랜 게 벌써 며칠째다.

이대로는 아무리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에테르 감응력 수치를 일정 수치 이상으로 올리는 거지만··· 쉽게 될 일은 아니야.'

이미 지금의 성장세도 충분히 엄청나다.

이 이상으로 억지로 에테르 감응력을 끌어올리려 했다가는 그대로 미쳐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가볼까.'

생각의 정리를 마친 나는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노아에서 대산림의 광활한 숲지대를 내려다본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대산림은 더 디펜스를 플레이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오게 되는 장소 중 하나다.

이곳에서만 자라는 특수한 식물들을 채취하거나, 혹은 몇 가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들를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도 대산림의 지리라면 꽤 밝은 편이었다.

'이쪽이었지, 아마.'

오늘 내 목표물은 마수 중화용 약초인 담쟁이 겨우살이 잎과 줄기, 검은 아가위 꽃잎, 장명초. 그리고 수면제로 사용할 약초들과 땔감이다.

땔감과 수면제로 사용할 약초들이야 종류가 종류인 만큼 금세 구할 수 있을 테니 우선순위는 당연히 독성 중화용 약초들부터였다.

마침내 내가 대산림의 초입이라 부를 수 있는 노아와 대산림의 경계에 도착하자, 이름 없는 숲에서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우우우우우우──

숲은 불청객을 원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숲에서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음산함이 느껴졌다.

[히에엑······!]

[도망, 가자······.]

[여기 있기 싫어······.]

에테르가 요동쳤다.

숲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주인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

어차피 나도 숲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숲의 초입 부분에 있는 약초들만 슬쩍 훑고서 빠르게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가볼까.'

숲의 초입을 조금 들어간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숲의 초입 부분에서 마수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7급 거충종의 흔적.'

아직 점액질이 마르지 않을 걸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식지가 있거나 이 근방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돌아가야겠어.'

싸우려면 싸울 수야 있는 상대지만, 아무리 소음 모드를 적용한다 해도 이곳에서 총성을 내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무려 7급 거충종이 숲의 외곽으로 밀려나서 간신히 살아갈 정도로 대산림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위험한 마수와 마물들이 나타난다.

그중에는 이끼의 쿠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험한 녀석들도 다수 있다.

괜히 쓸데없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았다.

'찾았다.'

기억 속에 있는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초들의 서식지가 나왔다.

파밍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었다.

[장명초를 분류하였습니다.]

[재주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2 -> 13]

그렇게 나름대로 마수들의 영역을 피해서 약초를 캤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숲에 살아가는 모든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마수와의 마주침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온··· 다······.]

목소리의 경고와 함께 이내 나무 위에서 8급 거충종, 빨간융기털지네가 나를 향해 덮쳤다.

지네에 깔리기 직전.

나는 재빨리 몸을 굴러서 지네를 피하고는 마체테를 뽑아 들었다.

길이만 해도 최소 3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 지네였다.

[쉭, 쉬이익─!]

실제로 거충종을 보니 벌레에 대한 혐오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으나, 그렇다고 해서 겁을 집어먹고 움츠릴 생각은 없었다.

'총성을 내선 안 돼.'

특히나 대산림의 숲은 총성이 메아리치기에 아주 좋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소음 모드라고 하더라도 저 정도의 상대에게 총을 쓰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할 수 없지.'

나는 조용히 마체테를 다잡았다.

물론 8급 거충종을 상대로 단순히 칼 한 자루만 들고서 덤빌 정도로 무모한 도전을 할 생각은 없었다.

[끼긱, 끼기긱······!]

보호복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뼈들이 순식간에 내 전신을 감쌌다.

완벽한 전투태세였다.

'선수 필승.'

거충종은 기본적으로 마수로 분류되는 만큼, 각기 다른 신체구조를 지닌 마물과는 달리 급소 역시도 여타 마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와 심장.

내가 지금부터 노릴 곳이기도 했다.

"잡아!"

그와 함께 움직인 에테르 파동.

[잡······ 아.]

비록 현재 내 에테르 감응력 정도로 무언가 거창한 공격을 바랄 수는 없었으나, 8급 거충종의 움직임을 아주 잠깐 멈추는 것은 가능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네 차례야."

[끼깃!]

뼈 갑옷에서 분출된 뼈 촉수들이 단번에 빨간융기털지네의 몸을 꿰뚫었다.

뼈 갑옷에서 뿜어진 뼈 촉수들이 빨간융기털지네의 급소를 단번에 꿰뚫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지네의 움직임을 막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쌔새색!]

단번에 뼈 촉수들에 의해서 전신이 구속당한 빨간융기털지네가 괴성을 토했다.

뼈 갑옷이 빨간융기털지네의 움직임을 막는 동안, 나는 마테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깡!

마치 쇠를 내리친 듯한 감각이 손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무려 10이 넘는 근력 능력치로도 단번에 부수지 못할 정도로 8급 거충종의 머리는 단단했다.

물론,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한 번, 두 번, 세 번······.

깡! 까앙! 콰득! 콰드득!

처음에는 둔탁한 쇳소리 같았던 굉음이 어느새 묵직하게 변했다.

마치 벌레의 껍질을 부수듯이.

손아귀에서 피가 배어 나올 때쯤, 마체테를 쥔 손에 전해진 감각이 달라졌다.

콰지직─!

수십 번의 내리침 끝에 마테체의 날이 지네의 머리를 깨부쉈다.

지네의 머리를 깨부순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점액이 나를 덮쳤다.

"흡!"

간신히 몸을 날려서 피한 탓에 지네의 체액에 중독되는 우스운 꼴은 피할 수 있겠지만, 바닥을 구르는 우스운 꼬락서니는 피할 수 없었다.

"에휴······."

총만 쏠 수 있었더라면 몇 발이면 정리될 녀석에게 이렇게 시간을 빼앗기니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래도 다른 마수들이 몰려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내가 마체테에 묻은 체액을 나뭇잎에 닦고 있을 때, 무언가 익숙한 나무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코카나무.

비록 수면제로 쓰이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쓰기에 따라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부작용이 적지 않은 물건이라 게임 내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지만··· 그래도 챙겨두면 쓸모가 있겠지.

'일단 챙겨볼까.'

나는 코카나무의 잎을 있는 대로 다 뜯어서 가방용으로 군장 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덩굴들도 챙기고······.'

이따가 땔감을 가져갈 때 쓰기 위해서였다.

'빨간융기털지네가 나타났다는 건, 이곳이 녀석의 활동 영역이라는 소리다.'

즉, 영역의 주인을 없앴으니 당분간은 안심하고 이 근처에서 약초를 채집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주인이 빈 곳에 다른 녀석이 자리를 잡겠지만··· 적어도 그게 오늘은 아니지.'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즐거운 파밍, 아니 채집 시간이었다.

*

정신없이 약초 채취를 마치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걸로 대충 한 달 정도는 식량 때문에 고생할 일 없겠어.'

마수 고기를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니, 이미 채집한 약초만으로 당분간은 대산림에 오지 않아도 되리라.

돌아가는 발걸음은 빈말로라도 가볍지는 않았다.

약초나 잎사귀들이야 군장 가득 채워도 들만했으나, 덩굴로 엮은 땔감들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불은 있어야 요리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걸 정녕 요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석양이 지고, 다시금 어둠이 내리깔릴 때가 되어서야 나는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면에 도움이 될 만한 약초들과 몇 가지 진정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가져 왔으니··· 아마 오늘은 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내가 거처에 발을 디디려던 순간.

'뭐지?'

거처 근처에 올 때부터 나는 묘한 낯섦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거처를 나서기 전에 슬쩍 땅에 설치해둔 탄피들이 쓰러져 있었다.

침입자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마수인가?'

하지만 이곳은 영산 노아에서도 중턱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물며 지형 자체도 숨겨져 있는 형태라, 웬만한 마수나 마물들은 감히 이곳에 접근하지 않을 텐데······.

'······아니, 마수가 아니다.'

나는 이내 드러난 흔적을 보고서 자동 소총을 다잡았다.

남겨진 발자국은 분명히 인간의 것이었다.

'이곳에 인간이? 왜?'

영산 노아에 올 법한 사람들을 굳이 꼽아 보자면,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의 군인들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굳이 꼽았을 때지, 그들은 평소 아크의 전선을 유지하느라 이런 곳에 여력을 쏟을 틈이 없다.

'그렇다면······.'

나를 찾아온 건가?

대체 누가?

[뒤······.]

그때 들려온 속삭임.

대개 나를 향한 속삭임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지껄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철컥!

나는 재빨리 Ark-15 자동 소총을 꺼내서 어둠 속에 있는 그림자를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 있는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인기척이었다.

"···누구냐."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상대는 나를 보고 있고, 반면 나는 상대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이라면, 차라리 먼저 공격하는 게 낫다.'

그렇게 계산을 마친 내가 방아쇠에 천천히 힘을 주려던 순간.

"자, 잠깐!"

분명히 평범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일어난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최소 레벨 3이상의 에테르 적합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파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히에에에에······!]

[괴로워······.]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에테르 파동!'

내 본능이 외쳤다.

이건, 위험하다고.

'피해야 한다.'

날아들 공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뒤로 몸을 굴렸으나, 예상했던 공격은 날아들지 않았다.

'······뭐지?'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나?

의아함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치 별을 수놓은 것처럼 길게 내려선 금빛 장발.

신비함을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누구라도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을 유려한 이목구비.

"당신이 저를 구했습니까?"

한밤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 불청객 (2) > 끝

영산 노아에 도착한 타티아나는 평소보다 더욱더 강렬해진 에테르 농도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에테르 적합자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을 리가 없어.'

그 정도로 영산 노아는 에테르 감응력이 있는 이에게 끔찍한 환경이었다.

오죽하면 에테르에 민감한 마수나 마물들조차도 접근하지 않겠는가.

'설마······.'

속으로는 부정하면서도 타티아나는 영산 노아에서 몇 가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수의 시체들과 몇 가지 흔적.

명백히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흔적들이었다.

'···정말로? 이곳에서?'

반신반의하면서 타티아나는 직감에 따라서 노아를 올랐다.

물론 말이 직감이지, 레벨 3 에테르 적합자인 타티아나의 직감은 이미 직감의 영역을 뛰어넘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어?"

[있어! 있어! 이쪽, 으로······.]

그녀가 물으면, 에테르가 호응했다.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란 그런 존재였다.

"어디?"

[이쪽, 이쪽······.]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에테르의 안내에 따라서 영산 노아를 정처 없이 거닐던 타티아나는 마침내 아크제 위장막으로 보이는 은신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서 만약 에테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찾지 못했을 정도였다.

'정말로··· 살아 있었잖아.'

이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크제 물건을 들고서 외부에서 살고 있을 만한 인원이라면, 최근에 이모샤 중위와 거래를 했다던 그 사내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자가 나를?'

그 야만인이 나를 구했다고?

정말로?

그토록 찾았던 그 날의 진실을 앞에 두고서 타티아나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칼 마커스를 처음으로 본 타티아나의 감상은 놀람이었다.

'···나무?'

영산 노아에는 나무가 없다.

이 근방에서 나무가 자랄만한 장소라면 아크 안쪽과 대산림인데, 당연히 아크 내일 리는 없었으니 남은 건 오직 한 곳뿐이었다.

'설마 대산림까지 갔다 온 거야?'

영산 노아에 이어서 대산림이라니?

고작 나무 따위를 하러 그곳까지 갔단 말인가?

놀람도 잠시, 타티아나 벨로프는 여전히 칼 마커스를 야만인이자 호색한으로 보고 있었기에 첫 만남은 빈말로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누구냐."

총구를 겨눈 칼 마커스의 경계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그녀를 비호 하고 있던 에테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미워? 그러면 나도 미워.]

"자, 잠깐!"

뒤늦게 말리려 했으나, 이미 날뛰기 시작한 에테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의지를 거스른 에테르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히에에에에······!]

[괴로워······.]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에테르 파동이 칼 마커스를 덮쳤다.

'···버텨?'

칼 마커스는 무려 레벨3 에테르 적합자의 에테르 파동을 그저 표정을 살짝 찌푸리는 정도로 견뎠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칼 마커스가 아닌 다른 평범한 사람이 저런 에테르 파동에 노출되었다면 그대로 강신 현상으로 미쳐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녀의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번졌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타티아나 벨로프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당신이 저를 구했습니까?"

* * *

'···누구지?'

상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목적은 여전히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그게 무슨 말이지? 구하다니?"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다시금 에테르가 요동쳤다.

나름대로 절제한 건지 처음보다는 덜했으나, 중요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최소 레벨 3의 에테르.'

레벨 2 직전의 에테르 감응력을 지닌 내가 에테르 장악력에서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강력한 에테르 파동이었다.

따로 에테르 시술을 받은 에테르 병사인지, 아니면 태초부터 타고난 적합자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최소 전방 라인 소속의 군인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단번에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력과 추리력. 거기에 더해서 실행력까지.'

한마디로, 눈앞에 있는 상대는 지금의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거슬리는 건, 내가 처음 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는 만약 내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에 마수 떼에게 쫓겨서 죽었을 것이다.

원래였다면 죽었어야 할 인물인 만큼, 더 디펜스에서도 등장하지 않았을 터.

내가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괜히 구했나?'

슬그머니 후회가 자라났다.

만약 아크 내의 다른 인물이었다면 그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으니 대응법 역시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는 달랐다.

나는 이 자의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까 구했다는 표현도 옳지 않지."

그래서 물어봤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모른다고요?"

"그래."

그녀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무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것 같다고 느낀 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터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은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여기에서 밀리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라도 총구를 치켜들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

내 말이 통한 걸까.

그녀는 또다시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뿜어내고 있는 에테르 파동을 거둬들였다.

"그······ 죄송합니다."

뭔가··· 예상보다 순순한 사과였다.

최악이라면 최악의 첫인상이었으나, 이렇게 보니 사람을 대하는 게 어설플 뿐, 악인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상대는 에테르 적합자다.

에테르 적합자들은 아크 내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알게 모르게 차별 아닌 차별을 받는 존재들이다.

사회성 부분에서 어느 정도 결함이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이야기였다.

'반응을 보건대, 처음의 에테르 파동도 의도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다.'

레벨 3정도 되는 에테르 적합자라면 에테르를 어느 정도 이용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에테르 적합자의 사소한 감정 변화 등의 온갖 요소가 에테르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제 이름은 타티아나. 네이비 라인 소속의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입니다."

···벨로프라고?

네이비 라인이라는 소속과 소령이라는 계급보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그녀의 성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라는 이름···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이제 제 질문에도 답해주시죠. 칼 마커스, 당신이 저를 구한 겁니까?"

···역시 나를 알고 있었나.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상대의 정체는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알아낼 건 굳이 나를 찾아온 이유였다.

설마하니 구해준 은혜라도 갚겠다고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장난이죠?"

"분명히 나는 얼마 전에 아크 전선 밖에서 마수 떼에 쫓기는 누군가를 구하기는 했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게 누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흐름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묻지."

내가 타티아나 벨로프를 향해 물었다.

"내가 구한 게 너인가? 타티아나 벨로프."

"아······."

타티아나의 얼굴이 잠시 벙쪘다.

설마하니 내가 역으로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흠, 흠! 따, 딱히 구했다기보다는, 그 뭐야··· 아! 꼭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움은 됐다? 그 정도겠네요."

"맞다는 말이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답이 들려온 건 잠시 후였다.

"···그,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네, 맞아요."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곧장 다음 질문을 던졌다.

"왜 나를 찾아왔지? 설마하니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노아까지 찾아왔다는 건 아닐 테고."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타티아나 벨로프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나를 찾았는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타티아나 벨로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거, 맞는데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

무엇보다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뭐가 맞다는 거지?"

"······그게, 맞다고요. 감사 인사."

덧붙여진 뒷말에 잠시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영산 노아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정말로 그런 이유라고?"

타티아나 벨로프가 되려 성을 냈다.

"왜요, 뭐. 그러면 안 돼요? 생명의 은인인데 감사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 말도 맞긴 한데······.

문제는 이곳이 안전 따위와는 천만 년 정도 거리가 있는 아크 바깥이라는 점이었다.

'···진짜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유였으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믿음이 갔다.

만약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듯한 이유를 댔을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곳은 어떻게 찾았지?"

"쿠릴타라는 사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라면 아크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거라고. 그래서 아크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 몇 곳을 추렸죠."

고작 그것만으로 내가 노아에 있을 거라는 것까지 유추해 냈다라······.

'···확실히, 보통은 아니야.'

단순히 레벨 3 이상의 에테르 적합자라는 사실이나, 네이비 라인 소속의 소령이라는 걸 빼놓고 봐도 타티아나 벨로프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거기다가, 네이비 라인 출신이라는 것과 벨로프라는 성.'

네이비 라인의 지도자는 명목상 의회를 통해서 선출된 판달림 시장이라고 볼 수 있으나, 사실 진짜 지배자는 따로 있었다.

안톤 벨로프.

네이비 라인의 진정한 주인이자,

벨로프 패밀리의 보스.

'네이비 라인과 블루 라인의 갈등이 벨로프 패밀리 보스의 딸의 죽음으로 촉발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즉,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타티아나 벨로프는 벨로프 패밀리의 보스인 안톤 벨로프의 딸일 가능성이 컸다.

설사 아니더라도 패밀리의 일원인 것만큼은 거의 확실했으니, 소령이라는 직책을 떠올린다면 뭐가 됐든 벨로프 패밀리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닌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보다 거물과 엮이게 됐어.'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가?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벨로프 패밀리가 거물이긴 해도···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이는 네이비 라인의 수비대장인 이반 벨로프와 관련이 있었다.

안톤 벨로프의 아들, 이반 벨로프.

'언젠가, 나는 이반 벨로프를 죽여야만 한다.'

이반 벨로프는 네이비 라인의 수비대장이라는 막강한 직책을 가진 인물임과 동시에, 네이비 라인 전선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다.

즉,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반 벨로프 암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벨로프 패밀리에게 내 존재를 노출하지 않는 거다.'

그렇기에 타티아나 벨로프와의 인연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옳았다.

괜히 타티아나 벨로프의 존재가 훗날 있을 일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런가."

"혹시 무언가 제 도움이나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이래 보여도 제가─"

내가 타티아나의 말을 잘랐다.

"그건 필요 없고, 볼일이 끝났다면 이만 돌아가라."

< 불청객 (3) > 끝

타티아나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절망적인 감정을.

임무는 실패였다.

정찰대원들은 모두 마수와 마물의 먹잇감이 되었고, 오직 타티아나만이 그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서 폐허가 된 크로노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마수들은 집요했다.

하나하나만이라면 단 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놈들이, 떼로 몰려드니 타티아나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누가, 누가 좀······!"」

구원의 손길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총성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쫓던 마수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걸 보았을 뿐.

'대체 누가?'

그래서 궁금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구했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몇 차례나 해가면서, 결국 이곳에 닿았다.

마침내 마주한 생명의 은인은 분명히 타티아나의 추측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칼 마커스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화이트 라인의 비밀스러운 수비대도, 임무 중이던 레드 라인의 정찰대도 아니었다.

그냥, 얼마 전에 아크로 피난을 왔다가 출입이 금지당해서 노아를 터전으로 삼은, 단지 그뿐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 이상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생명의 은인은 타티아나를 반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배척하고 있었다.

"······."

축객령이 떨어진 후,

타티아나 벨로프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칼 마커스의 눈에서 더없이 차가운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그래. 그리고 가급적이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한다. 외부인이 내 영역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거든."

생명의 은인은, 칼 마커스는 마지막까지 단호했다.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주의하죠."

타티아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끝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뻔뻔함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

무엇보다도, 지금 타티아나의 귓가에서 에테르가 속삭였다.

지금 칼 마커스가 한 말들은 모두 거짓 따위는 없는 진심이라고.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이곳에 오는 걸 원하지 않고 있다고.

"······."

돌아가는 발걸음은 허탈했다.

나름대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것저것 챙겨왔건만, 건네주기는커녕 꺼지라는 소리나 들었다.

'···내가 그렇게 수상했나?'

물론, 엄밀히 따지면 타티아나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영산 노아에서 에테르 파동을 뿜어내며 상대를 위협했다.

이건 입술이 백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게 다 그 야만인이 그렇게 말을 해서······.'

순간적으로 쿠릴타의 얼굴을 떠올린 타티아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또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야만인은 그냥 평소처럼 말했을 뿐이고, 엄밀히 말하면 타티아나 본인이 그걸 근거로 칼 마커스라는 사내를 멋대로 판단했을 뿐이었다.

"······."

무언가··· 첫 단추부터 아주 단단히 잘못 꿴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왜, 나는 항상······.'

타티아나 벨로프의 시선이 머나먼 곳을 향했다.

레드 라인 저 너머, 한때 아크의 최전방 전선이었던 장소로.

* * *

나는 멀찍이서 타티아나 벨로프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고는 총구를 거두었다.

혹시라도 타티아나가 돌발 행동을 보인다면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한밤중의 불청객은 분명히 어떤 의미로는 나에게 있어서 아크 내에 있는 인물과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네이비 라인의 소령.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

그중 무엇 하나도 버리기 아까운 인맥이었건만, 문제는 그녀가 벨로프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아크 내에 개입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물론 그건 내가 하려고 한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천천히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곧,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애초에 이 세계에 온 그 순간부터 모든 날이 그러했다.

이제 나도 거의 한계였다.

아마 타티아나 벨로프에게 필요 이상으로 까칠하게 군 데는 그로 인한 영향 역시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천욕으로 풀 수 있는 피로도 이제는 한계야.'

지금 나는 자고 싶다.

자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드러눕고 잠든다고 한들, 빌어먹을 목소리들이 나를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나는 군장을 뒤적거렸다.

온갖 잎사귀, 줄기, 뿌리, 꽃들이 섞인 가운데 내가 꺼낸 건 수면에 도움이 되는 몇몇 식물들과 코카나무잎이었다.

'아예 다 써보자.'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불면증에는 어지간한 수면제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수면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포함한, 아주 강한 녀석이 필요했다.

나는 주변에서 반질반질한 돌 하나를 가져와서, 그 위를 온천수로 닦은 후에 약초들을 늘여놓았다.

빻아서 한꺼번에 섭취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아프리카에서는 코카인에 무연화약을 섞어서 만드는 브라운 브라운(Brown-Brown)이라는 녀석이 있다.

비록 코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원료라고 볼 수 있는 코카나무잎이 있으니 대충 으깨서 섞은 뒤에 씹어 삼키면 그보단 못해도 얼추 비슷한 효과를 낼 터.

당연히 화약을 섞어 만드는 만큼 건강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가리고 싶지는 않았다.

'총알이 아깝긴 하지만······.'

한 발 정도라면 쾌적한 수면을 위해서 기꺼이 쓸 용의가 있었다.

수면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한꺼번에 빻아서 즙을 만든 나는, 곧 그것들을 치우고는 그 옆자리에 코카나무잎을 빻은 즙에 총알 안의 화약들을 넣어서 섞었다.

거뭇거뭇한 즙.

딱 봐도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팍팍 풍겼으나, 나는 앞선 다른 약초들을 섞은 것과 그것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으······ 웁."

처음에 풍긴 건 온갖 풀 내음.

두 번째는 화약의 향.

세 번째는 뭔 맛인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많이 섞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효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

나는 동굴 안의 거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환각과 환청에도 굴하지 않았던 강건한 육체는 약물의 힘에 무너져 내렸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내 다리에 닿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키득······.]

[나랑, 놀자아······.]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예전처럼 내 정신을 완전히 침범하지 못했다.

"······아."

무척이나 오랜만에,

수마가 나를 반겼다.

*

아침이 밝았다.

간만에 푹 잔 덕분인지 무겁게만 느껴졌던 몸과 마음이 한껏 가볍게 느껴졌다.

그 사실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니었는지, 간밤 사이에 능력치가 올랐다.

[오랜만에 깊은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찢어진 근육이 회복되며 근력과 체력이 증가하였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2 -> 13]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3 -> 14]

"후아······."

어제 제법 격렬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벼웠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방법을 써도 잠들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먹혀들었다.

'그래도 이 방법은 자주 써선 안 돼.'

약물에 의존하는 방법은 다 좋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존재했다.

바로 이곳이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미 바로 어제 불청객이 있었던 만큼, 아무리 영산 노아라고 해도 침입자가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최소한 잠을 잘 거라면 동굴 안에 있는 텐트 안에서 자야 해.'

나는 지난밤을 온천 옆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만약 그때 나에게 악의를 지닌 누군가나 마수가 이곳을 찾았다면, 나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이 방법은 피로가 극에 당했을 때 가끔 사용하는 게 맞겠어.'

물론, 그 전에 충분한 방비 역시도 해두고 말이다.

아무런 대비 없이 목숨을 길바닥에 내놓고 운에 모든 걸 맡기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러면 오늘은 할 일은··· 역시 그건가.'

나는 군장 안에서 마수 독성 중화용으로 가져온 풀들을 꺼냈다.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식당 현지 조달을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마수 시체는 대충 어느 정도 있으니··· 바로 하면 되겠어.'

가장 먼저 할 일은 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땔감과 건초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남은 건 부싯돌로 적당히 불씨를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칙, 칙!

몇 번의 시도 끝에 불씨가 타오르자, 나는 건초를 조심스럽게 불면서 땔감에 잘 얹었다.

화륵, 화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서 땔감에 건초에 있던 불씨가 서서히 번지며 이내 모닥불이 완성되었다.

'불은 됐고.'

나는 반합에 온천수를 한껏 푼 뒤, 그곳에 중화초들을 넣었다.

'원래 온천수 온도가 제법 되는 편이니··· 한 십 분 뒤에 손질한 마수를 넣으면 되겠지.'

애초에 거창한 요리를 하는 게 아니었으니, 과정 자체는 그다지 복잡할 것도 없었다.

첫 번째 요리는 독성을 중화한 마수 고기를 있는 그대로 먹는 일종의 고깃국이었다.

마침 온천수와 모닥불도 있겠다, 그나마 제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헬하운드 고깃국] [★(1성)]

헬하운드 고기로 만든 고깃국.

더럽게 맛이 없다.

"상세 보기"

──────────────

'음······.'

누가 마수 요리 아니라고 할까 봐 늘 붙어 있는 문구 역시도 빠지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있는 식량으로는 얼마 못 버텨. 독도 제거했으니, 먹는 게 나아.'

그렇게 반합에 담긴 헬하운드 고깃국을 한술 뜬 순간, 나는 왜 더 디펜스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 요리에 '더럽게 맛이 없다'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욱······."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한다.

마치 최면처럼 그렇게 되뇌며 나는 꾸역꾸역 고깃국을 씹어 삼켰다.

맛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저,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되뇌면서.

"우웁······."

식사인지 고문인지 모를 시간이 흘러간 후, 내가 남은 고기들을 훈제하기 위해서 땔감 중에서 나무 꼬치로 쓸만한 것들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이 유독 어두웠다.

처음에는 비가 오려나 했는데, 멀찍이서 검게 몰려드는 먹구름 떼를 본 순간 나는 그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먹구름이 아니야.'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 하늘 위에서 굉음 같은 괴성이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키엑, 키에에엑!]

[까아아악! 깍!]

나는 이내 그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4급 괴암종, 가고일.

5급 비행종, 암흑 가오리.

3급 괴수종, 케찰코아틀.

이끼의 쿠프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마수와 마물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었다.

쿵!

쿠웅─!!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대하게 울리는 땅.

지평선 너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무수한 점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도 주었다.

4급 괴수종, 검은털 티라노.

3급 괴암종, 기암괴석 골렘.

[그오오오오오─]

[크르르릉!]

하늘을 올려다봐도,

땅을 내려다봐도.

온 세상에 마수와 마물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한 마수와 마물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아크(Ark).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수의 마수와 마물 군단이 인류 최후의 요새를 향해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웨이브.'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더 디펜스의 첫 번째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 웨이브 > 끝

웨이브.

첫 번째 스테이지의 시작.

그 사실을 증명하는 마수 군단을 바라보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빨라.'

내가 알고 있기에 웨이브가 찾아오려면 적어도 아직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나도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적당히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던 건데, 난데없이 웨이브라니?

'변수가 생겼어.'

그리고 그 변수는 필시 내가 일으킨 어떤 나비효과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문제는, 무언가의 변화라고 해봐야 내가 아직 이곳에서 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짐작이 가는 게 있다면··· 한 가지 정도뿐인가.'

타티아나 벨로프.

예상보다 빨라진 웨이브에는 아무래도 그녀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내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아크 바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로 뛴 것 외에는 본래 죽었어야 할 타티아나 벨로프를 구한 것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타티아나 벨로프가 생환함으로써, 누가 의도적으로 웨이브 시기를 앞당겼다는 건데···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한 집단은 몇 없어.'

아크 바깥에도 세력은 존재한다.

그 세력에는 비단 모래바람 상단 같은 중립적인 세력뿐만이 아니라, 아크에 적대감을 지닌 세력 역시도 존재한다.

그들이 아크를 적대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아크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아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 외 여러 가지 이유로.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큰 세 집단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기존 크로노스의 난민들을 비롯한 군소 도시들의 난민들이 모여서 만든 크로노스 연합.

마수와 마물을 추종하는 종교 단체인 모트교.

마지막으로 모든 게 베일에 감춰져 있는 단체인 그림자단.

'이 세 가지 세력 중, 웨이브를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집단은 둘.'

모트교와 그림자단.

'그중에서 굳이 타티아나 벨로프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집단을 추론해보자면······.'

주어진 단서를 조합한다.

타티아나 벨로프의 생환.

예정보다 빠른 웨이브.

모트교.

그림자단.

'네이비 라인과 블루 라인의 갈등은 안톤 벨로프의 딸의 죽음으로 초래되었다.'

아직 타티아나 벨로프가 안톤 벨로프의 딸이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이번 웨이브의 배후 역시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웨이브를 일으킬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이토록 아크 내 정치에 관심이 많은 세력은 오직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단.'

앞선 두 세력과는 달리, 아니 아크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군소 세력과 비교해도 그림자단의 구성인원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열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니, 인원수만 따지면 세력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것도 사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힘이 앞선 거대 세력들 못지않다는 점이었다.

그림자단의 목적은 간단하다.

아크를 지배하는 것.

실제로 더 디펜스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그림자단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숨겨진 루트가 있다.

실제로 한때 이 루트의 존재가 알려진 후, 유저 커뮤니티에서 그림자단 루트는 더 디펜스를 클리어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루트 중 하나로 꼽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플레이어가 그림자단에 가입한 뒤에 플레이하기에 따라서 정말로 그림자단이 아크를 장악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크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며 아크 내에 있는 전력이 절반 가까이 소실되지만, 그 대신 본래였다면 절대로 합쳐지지 않았을 아크 내의 힘이 하나로 결집하게 된다.

'거기다가 재미까지 있었지.'

그림자단이라는 비밀 단체에 속한 채로 스파이로서 아크 내에서 여기저기 암약하는 과정은 많은 유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나도 그림자단 루트만 거의 50번 정도 트라이했던 게 사실이었고.

그러나······.

이 루트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91번째 스테이지, 즉 블랙 라인을 마주한 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의 스테이지에서는 절반이 소실된 아크의 힘으로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으나, 91번째 스테이지부터는 도저히 아크의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에서는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림자단 루트는 결론적으로 틀린 루트였던 셈이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어디까지나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

웨이브를 앞당긴 원인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들이 있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철컥-

웨이브를 막는 것.

그게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마수 군단과 아크 사이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그우우우우─!!!]

[아오오오오!!!]

수백만이 넘는 마수들의 울음소리는 이미 그 자체로 어떤 재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아크에서도 사뭇 긴장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잠잠하던 성벽 위의 군인들에게서 분주하다 못해 혼란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많은 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그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이기도 했다.

'가볼까.'

나는 Ark-15 소총의 레버를 돌렸다.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환합니다.]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한 Ark-15을 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저격 포인트로 이동한다.'

나는 이미 영산 노아 내에서 레드 라인의 전선을 저격할 수 있는 저격 포인트 몇 곳을 봐두었다.

만약 거처에서 직접 저격을 했다가 마수와 마물들이 내 거처를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은신처는 은신처로 남겨두는 게 좋아.'

무엇보다도 노아에 있는 내 은신처는 아크의 전선과의 거리가 상당했다.

그 정도 거리에서 저격할 수 있는 전선도 있겠지만, 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렌지 라인까지 사정권이 닿지 않아.'

더 디펜스에서 스테이지를 가르는 건 기본적으로 각 라인의 수비 영역을 뜻한다.

최후방인 레드 라인을 시작으로, 플레이어가 성장하며 점차 전방으로 옮겨가는 방식.

즉, 첫 번째 스테이지에 해당하는 레드 라인 소속 병사는 레드 라인의 전선에서밖에 활약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크 바깥에 있다.

레드 라인의 병사로서 짊어져야 할 라인 수비의 의무 따위는 없는 셈.

그렇다면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레드 라인부터 오렌지 라인까지의 전선을 커버한다.'

그 이상의 전선을 커버하려면 아크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다른 저격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노아 내에서는 그런 위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Ark-15 대물 저격총의 유효 사거리를 최대한 땡기고 땡겨도, 레드 라인과 오렌지 라인 전선의 초입까지가 고작이었다.

그 정도로 아크의 전선은 광활했다.

'애초에 지금 내 장비 수준으로는 그 이상의 마수들을 상대하기 어려워.'

어차피 업그레이드나 커스터 마이징이 되어 있지 않은 순정 상태의 Ark-15 대물 저격총으로는 5급 이상의 마수에게 거의 타격을 주지 못한다.

아직 첫 번째 스테이지라는 걸 감안한다면 억지로 무리하는 것보다는 몰려드는 마수 군단을 최대한 적은 피해로 막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

마치 선전포고처럼 울려 퍼진 굉음과 함께 저 멀리 전방의 라인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도 마수와 마물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캬오오오오오!]

[캬악, 캬아아아악!!!!]

쾅! 콰아아앙!!!

쿠콰카카카!!

괴성과 굉음.

땅을 울리는 지진.

치솟는 화염.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전쟁이, 시작됐다.

아크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막대한 화력에도 마수 군단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마수가 죽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려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마수 떼의 행렬 속에서 몇몇 기민한 비행 마수와 마물들이 아크의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의 몸을 낚아챘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건 마수가 아닌, 아군에게서 날아든 총탄이었다.

어설픈 인질극 따위는 없었다.

그게, 전쟁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저격 포인트로의 이동을 마친 나 역시도 바위 위에 엎드린 채로 위장용 판초를 쓴 채로 대물 저격총을 겨누었다.

'우선, 레드 라인의 네임드부터.'

웨이브에서 네임드 마수들은 마수 군단 내에서 일종의 지휘관 역할을 한다.

당연히 최우선 저격 대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곧이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코프에 내 사냥감 하나가 포착되었다.

8급 괴수종, 뼈 들개 카락카.

일전에 사냥했던 스컬 하운드의 네임드 마수였다.

'거들먹거리기는.'

뼈 들개 카락카는 스컬 하운드를 이끄는 네임드 마수답게, 근처에 스컬 하운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스컬 하운드 자체가 정예 마수로 분류될 정도로 동급의 마수 내에서 강력한 마수였음에도 순순히 따를 정도로 뼈 들개 카락카는 강력한 네임드 마수였다.

'우선, 너부터.'

탄창을 작렬탄 탄창으로 교체한 나는 조준경으로 뼈 들개 카락카의 머리를 겨누었다.

'거리는 약 9km.'

비록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도,

나에게는 충분한 거리였다.

['저격수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보인다.

뼈 들개의 모습과 녀석이 이끌고 있는 스컬 하운드 무리의 모습.

그리고 훤히 드러난 눈동자까지도.

끼긱-

천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쐐애애액─!

바람을 찢고서 날아간 작렬탄이 뼈 들개 카락카의 머리를 터트렸다.

< 웨이브 (2) > 끝

[8급 괴수종, '뼈 들개 카락카'를 처치하였습니다!]

[일격에 스컬 하운드 무리의 대장을 침묵시켰습니다.]

[선제공격 시, 네임드 마수 및 마물에 대한 피해량이 10% 증가합니다.]

모든 등급의 네임드 마수 및 마물에 대한 피해량 증가 효과.

비록 선제공격이라는 제한적인 조건이 있기는 해도, 총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초탄에 한해서 무려 10%의 피해량 증가 효과나 다름없었다.

괴수 사냥꾼 특성으로 인한 효과도 빠질 수 없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시작이 좋아.'

나는 방아쇠를 멈추지 않았다.

뼈 들개 카락카를 시작으로, 녀석이 이끌고 있던 스컬 하운드 무리 역시도 마무리할 필요성이 느껴져서였다.

'예전과는 다르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은 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던 고철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흉악한 녀석이지.

철컥-

적을 조준한다.

방아쇠를 당긴다.

일련의 간단해 보이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에 더없이 최적화된 과정이었다.

'너희들 대장 곁으로 보내주지.'

한놈,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한놈,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한놈.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스컬 하운드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는 한 발의 총알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녀석들이 아무리 천방지축 날뛰어 봤자, 스컬 하운드의 움직임은 이미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장을 잃은 스컬 하운드의 행동 패턴은 총 두 가지. 그렇다면······.'

뻔하고, 익숙하다.

뒤늦게 혼자가 된 스컬 하운드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을 보였으나, 이미 그 역시도 내게는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에 불과했다.

쐐애액─!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내가 뼈 들개 카락카가 이끌던 스컬 하운드 무리를 모조리 학살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마무리 역시도 잊지 않았다.

내가 죽인 스컬 하운드는 모두 머리가 터져서 즉사했으니, 아직 스컬 하운드의 체내에 살아있는 뼈 기생체가 스컬 하운드의 시체를 숙주로 삼아서 변이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8급 괴수종을 7급 괴수종으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이전처럼 움직이고 있던 마수를 맞추는 게 아니라, 이미 시체가 된 녀석들의 심장을 맞추는 것인 만큼 어려울 건 없었다.

총구가 작은 불꽃을 토했다.

바람을 찢고서 날아간 총알이 9km의 거리를 날아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뼈 기생체의 변이를 연달아 저지하였습니다!]

[뼈 기생체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뼈 기생체를 이식한 신체 혹은 장비에 대한 효율이 20% 증가합니다.]

내 시선이 다시 전장을 향했다.

고작 열 마리 남짓한 스컬 하운드 무리를 해치운다고 해서 변하는 건 거의 없었으나,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아크의 막대한 화력이 불을 토해내며 온갖 곳에 작은 버섯 구름을 피워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수들은 전진했다.

압도적인 수는 마수 군단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이쯤이면 됐나.'

나는 총열의 열관리를 위해서 몇 초 정도 뜸을 들였다가 다시금 총구를 들었다.

스컬 하운드 무리의 네임드는 처치했으니, 이제 다른 마수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다시금 방아쇠를 당긴다.

목표는 8급 네임드 비행종, 하늘 포식자 메르돈.

비행종의 특성상, 특유의 기동력 탓에 이 거리에서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급소를 제대로 맞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행종에게는 꼭 단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급소만이 약점이 아니다.

'비행종에게는 맞추기 쉬운 약점이 한 가지 더 있지.'

바로 날개였다.

철컥-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고서 날아든 작렬탄들이 단번에 8급 네임드 비행종의 날개에 맞으며 폭발했다.

아무리 마수라 할지라도 불타는 날개로 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하늘 포식자 메르돈은 그대로 추락했다.

[끼에에에에!]

그리고, 추락하고 있는 비행종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도 맞추기 쉬운 과녁판에 불과했다.

쐑!

총알이 바람을 가른다.

작렬탄이 하늘 포식자의 심장을 꿰뚫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8급 비행종, '하늘 포식자 메르돈'을 처치하였습니다!]

[비행종의 약점을 꿰뚫었습니다.]

[모든 등급의 비행종에 대한 피해량이 1% 증가합니다.]

'오호······.'

비록 피해량 증가가 1%밖에 되지 않지만, 모든 등급의 비행종에 대한 피해량 증가는 엄청난 효과였다.

이것으로써 이미 나는 비행종이라는 마수종 자체에 대해서 1%만큼 상성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네임드 마수를 처치함으로써 얻어낸 괴수 사냥꾼 효과도 쏠쏠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사냥이 계속됐다.

온갖 굉음이 울려 퍼지는 아크의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마수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움직이는 과녁판과 사냥감들에 불과했다.

그 순간.

[여기야······.]

[이쪽으로······.]

사냥이 너무 길어진 탓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테르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곳은 이제 전장이다.

그렇기에 아크의 전선은 이제 얼마전과는 달리 에테르가 쏟아내는 비탄과 비명이 마치 바다처럼 흘러넘치는 곳이 되었다.

이런 곳에서 저런 미약한 속삭임은 누군가에게 닿기는커녕 중간에 흩어져 버린다.

바로 지금처럼.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이리 와······ 다들 이쪽으로 와.]

[끼기기긱! 끼기기기긱!]

넘실대는 에테르의 바다 한복판에서 내 위치를 알리는 에테르는 그야말로 한 줌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 이상, 웬만큼 감각이 예민한 마수가 아니고서야 이곳으로 방향을 틀 리가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다시금 총구를 겨누었다.

아크를 찾아온 무뢰배들에게 진정한 죽음과 절망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부지런히 방아쇠를 당긴 덕분일까.

어느덧 레드 라인에 있는 네임드 마수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 게 눈에 보였다.

'레드 라인에 있는 8급 이하의 네임드 마수는 거의 다 정리가 됐어.'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아크의 전선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제부터 노릴 마수들은, 본래였다면 절대로 내가 노릴 수 없는 오렌지 라인의 네임드 마수들이었다.

단지, 아크의 막강한 화력에 의해서 단단한 외피가 벗겨지고 급소가 드러났을 뿐이지.

일종의 막타였다.

[6급 거충종, '충혈된 눈의 크룩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6급 거충종, 붉은 눈 거대 잠자리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비록 마무리 타격만 가한 탓에 별도의 소득은 없었으나, 일단 괴수 사냥꾼 효과를 채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성과였다.

나는 저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 마리, 한 마리.

네임드 마수들이 쓰러져간다.

아크의 레드 라인과 오렌지 라인의 전선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수 군단의 숫자도 어느덧 조금씩 줄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순간적으로 열세에 몰리는 듯했던 아크에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며 마수 군단의 진군이 주춤했다.

'그러면······.'

레드 라인에 있는 네임드 마수들은 거의 다 정리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오합지졸들 뿐.

[소음 모드를 해제합니다.]

[일반 모드로 변환합니다.]

지금껏 나는 이끼의 쿠프를 사냥할 때를 포함해서 모든 상황에서 소음기를 사용해왔다.

이 세계에서 소음이란 곧 웨이브를 유발하는 아주 치명적인 행위인 데다가, 멀리 있는 마수와 마물들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웨이브는 이미 일어났다.

이제 레드 라인 전선에 오합지졸들만이 남은 작금의 상황에서 내가 굳이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 소음기로 인한 탄속 저하를 감내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총 한 자루로 소리를 좀 낸다고 해서 온갖 굉음이 울려 퍼지는 전장에는 작은 티조차 나지 않는다.

굳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슬슬 마무리 해볼까.'

[자동 소총 모드로 변환합니다.]

지금껏 얼마나 참았던가.

무한의 총알을 절제 없이 마음껏 쏟아낼 때가 됐다.

철컥-

'눈이 조금··· 침침하네.'

난시로 인한 시력 저하와 환각으로 인한 시각 피로로 그런 듯했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이젠 네임드 마수를 저격할 때처럼 거창한 조준 사격까지도 필요없었다.

지금 라인 전선에 있는 건 물 반 고기 반 수준의 마수 떼다.

곧, 어차피 대충 쏴도 다 맞는다.

쿠구구구구─!!!

총구에서 불이 뿜어진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바람을 찢는 소리보다도 먼저 총구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단지, 내 총구에서 나간 총성이 퍼져나가기에는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온갖 굉음이 너무나도 거대했을 뿐.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0.05%, 0.1%, 0.15%······.

괴수 사냥꾼의 피해량 증가 수치가 마치 연달아 호재를 맞이한 주식 차트처럼 치솟았다.

나도 그에 맞춰서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총열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때,

내 총구의 불꽃이라도 본 걸까.

멀찍이 있는 열 마리 정도의 8급에서 9급 사이의 비행종과 거충종 몇 마리가 곧장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어딜.'

어차피 저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걸 보기 전까지는.

'음?'

내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멈칫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열 마리의 비행종의 발굽에 매달려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건······.'

아크의 병사들.

아쉽게도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닌 듯했다.

곳곳에서 보이는 총상으로 보건대, 마수에게 붙잡히자 아군의 사격으로 인해서 죽은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현재 장착한 것들이었다.

비록 그들의 생명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크제 군용품으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라는 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호······.'

이 사실이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크리스마스도 아닐 텐데.'

아무래도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를 잔뜩 든 산타클로스가 나타난 듯했다.

< 웨이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