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KTHE / Chapter 2 - 2

Chapter 2 - 2

***

몇 시간 뒤, 야음이 깔리고 달빛도 흐린 어두운 밤.

제럴 경은 갈슨 경 , 엔시아 경과 함께 완전 무장을 하고서 천천히 영지에 잠입해 들어갔다.

근래에 도적들이 잡혀서 전보다 경계가 느슨해져 있었고, 하급 기사 3인방이 민첩하게 목책을 넘어가서 조용하게 구멍을 내 준 덕분에 도적들과 병사들은 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시골 길과 집들을 돌파해서 곧장 자작의 저택에 도달한 제럴 경은 엔시아 경과 갈슨 경에게 말했다.

"후환을 없애야 하니 저 저택 내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십시오. 그리고 지하도 철저히 살피고, 너희는 오늘 내가 건네준 금화부터 해서 값이 나갈 만한 것들을 모조리 털어라. 알았나?"

"예!"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은 2층을… 저는 1층을 맡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제럴 경을 비롯한 이들은 저택으로 뛰어 들어가 각자 흩어져서 조심스럽게 침입 루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그들은 어두운 달빛이 비추는 지붕 위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베오날드가 있다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11화]

'드디어 왔군. 기다리느라 졸려 죽는 줄 알았네. 어디 볼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바빴던 베오날드는 저택에 유유히 잠입하는 제럴 경과 도적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기사로 보이는 2명은 따로 움직여서 먼저 2층으로 가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흩어져서 잠입하는군. 정석이고, 또 전투력이 남아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혹시나 있을 도망로 차단과 도둑질도 겸하는 건가?'

그들이 흩어진 것은 베오날드의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낮에 사전 준비를 좀 한 덕분에 대응은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곧바로 검을 뽑아 든 베오날드는 건물 바깥쪽으로 뛰어내리면서 몰래 저택 안에 들어오려던 도적 하나를 그대로 베어 냈다.

"이거 뭐...."

'시간 없다.'

그리고 아닌 밤중에 기습을 받은 병사와 도적들이 놀라는 사이, 오러를 끌어 올린 그는 단숨에 몸을 돌려 병사와 도적 다섯을 베어 냈다.

피를 털어 내고 숫자를 확인한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일단 여기 5명. 다음!'

그다음은 저택 바깥을 빠르게 돌았고, 이번엔 다른 방향의 창문을 열고서 들어가려는 4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직 베오날드를 발견하지 못한 듯 작은 촛불 하나에 의존하여 문을 열려고 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무슨 놈의 창문이 이렇게.... 잘 안 보여서 미치겠네. 좀 더 가까이 대 봐."

"우리도 그냥 문으로 갈 걸 그랬나?"

"둘 다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따기나… 어? 저거?"

"뭔데?"

병사와 도적과는 다르게 베오날드는 마나를 깨우쳤기에 이 야밤에도 시야에 제약이 크지 않았다.

보랏빛 잔상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걸 발견한 순간, 이미 베오날드의 검은 그들의 목을 베어 낸 지 오래였다.

'이걸로 아홉. 다음!'

숫자만 확인하고 베오날드는 빠르게 또 달렸다.

이제 더 이상 저택 외곽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남은 인원은 모두 저택 내부에 침입한 듯했다. 그는 빠르게 내부로 들어간 흔적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보인 것은 제럴 경과 그의 병사 5명으로,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뭐지? 왜 아무도 순찰을 안 돌지?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자작의 영지인데… 불침번 하나도 안 세우나?"

"뭐, 인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심지어 저택 외부 경비도 없었어. 제아무리 그 자작이 생각 없는 놈이라곤 해도...! 조심해!"

'잡았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달려왔지만, 역시 마나를 느끼는 제럴 경은 베오날드의 오러를 느끼고 곧바로 병사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베오날드가 더 빨랐다.

그는 보랏빛 섬광처럼 날아가 제럴 경의 말에 따라 움직이려던 병사들 4명의 머리를 동시에 베어 버려 비명도 못 지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를 베려는 순간, 푸른빛 오러를 두른 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히이익!"

"제길! 네놈! 정체가 뭐냐?"

'시답지 않은 걸 묻고 있네.'

채앵! 푹!

베오날드는 제럴 경의 말을 무시하고 막아 낸 검을 쳐 낸 다음 곧바로 병사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가장 먼저 제럴 경을 기습으로 죽일까 고민했지만 그러면 다른 병사들이 멘탈 터져서 모두 도망칠 테고,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에 굳이 병사들부터 노린 것이었다.

'또 내가… 대(對) 기사전이 처음이거든.'

전생엔 군림하는 대귀족으로서 직접 기사와 싸울 일이 아예 없었고, 이번이 기사와 싸우는 첫 경험이니 만큼 다른 변수를 모조리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다.

결국 병사들을 다 처리한 베오날드는 드디어 제럴 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두운 밤이지만 그의 몸을 감싼 보랏빛 오러가 잔상을 남기는 게 보일 정도로 우아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동작으로 베오날드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 늦은 밤에 다시금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럴 경. 제 이름은 베오날드 더스티클록, 이 영지의 주인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입니다. 낮에는 추태를 보여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뭐, 뭐라고?"

제럴 경은 자기소개를 하는 베오날드를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가 믿을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게 베오날드라 하면 오늘 낮에 자신의 앞에서 추하게 넘어져 버린 그 허우대만 큰 10살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한데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도저히 10살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차가웠으며, 전신에 진하게 흐르는 보랏빛 오러는 못해도 중급, 아니 상급 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비슷했다.

고작 10살짜리 상급 기사라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이성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몇 번이고 자신의 감각으로 전해져 오는 저 존재감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대체 뭐냐고? 레이온 자작의 아들이! 고작 10살짜리가 상급 기사라고?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것인지? 이게…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육체와 뇌의 판단은 매우 정직했다.

상급 기사급 오러가 흘러나오는 것에 몸은 떨렸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그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지만 놈은 현실이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튼 남의 영지는 물론 저택에 무단으로 들어오신 대가는 무엇인지 아시죠?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거죠."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게.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된… 으으윽!"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보랏빛 궤적이 초승달을 그리면서 제럴 경에게 날아갔다.

그는 자신의 검에 오러를 실어서 그것을 튕겨 내려고 했지만 검이 닿기 직전, 갑자기 휘둘러지던 궤적에서 벗어나 직선을 그리며 독사처럼 날아간 검이 제럴 경의 목을 꿰뚫었다.

"무, 무슨 이런...."

'음, 나름 실전에도 쓸 만하군.'

"컥! 어어억!"

목에서 분수처럼 흐르는 피를 본능적으로 막기 위해 검을 놓친 제럴 경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신성력이나 포션이 아닌 이상 이 상처는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 같은 상황도 아니고, 상급 기사급 적을 만날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컥! 콜록! 콜록!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운이 없던 거라고 생각해라. 인간이 태풍이나 산사태, 홍수를 만났다고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이지."

"안 돼. 나는… 컥! 컥! 이런 곳에서… 어억… 죽을 순...."

철퍽!

하나 이미 저택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길 만큼 출혈이 심각했던 제럴 경은 더 이상 의식을 붙들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피 웅덩이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베오날드는 제럴 경의 죽음을 확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서 2층으로 향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2층으로 잠입한 기사들은 자신의 부모가 잠든 침실에 도달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의 부모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부모님은 여기 없거든.'

씨익.

도저히 혼자서 이 저택에서 부모님을 지키면서 싸우기는 무리라고 여긴 베오날드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캘러메인 영지로 향하게 만든 것이었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는 핑계로 지금 당장 아버지를 모시고 잠시 이곳을 떠나 주실 수 없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니? 어머?'

'시간이 매우 촉박해요. 자칫하면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마나를 끌어 올려 보랏빛 오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재능을 가진 이가 마나 호흡법을 단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기사의 상징. 모친은 그것을 보고 순간 놀랐지만, 곧바로 베오날드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제럴 경을 만날 때 10살 아이 같지 않은 현명함을 보여 주었기에 그녀는 베오날드의 말대로 했고, 그 덕분에 저택의 병사들도 싹 치울 수 있었다. 

'망할 하인 놈들, 사람이 가라고 하면 잔말 말고 나갈 것이지, 왜 그리 질문이 많은 건지.'

그리고 하인들에게는 오늘 밤 잠시만 나가 있어 달라고 한 덕분에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한 것 때문에 다소 강압적으로 말해야 했지만 말이다.

"젠장! 대체 영주가 어디에 있는 거야? 엔시아 경, 그대는 발견했나?"

"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건… 여기 이중 잠금으로 된 방 하나뿐입니다."

"거참, 시골뜨기 주제에 조심성이 되게 많군. 일단은 열어 보게나."

2층으로 가자, 아무도 없는 방들을 열심히 뒤지면서 부모님을 찾는 기사 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아직도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이중 잠금이 된 두꺼운 철문으로 입구를 막고 있는 베오날드의 수련실 덕분이었다.

누가 봐도 아주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두꺼운 철문으로 막아 놓았으니 오해하기 딱 좋았다.

'…내 수련실의 잠금장치가 저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아무튼 그럼....'

베오날드는 검을 들고, 심호흡을 한 다음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 올려 자신의 수련실 문을 열려고 낑낑대는 둘을 향해 노이멀 가문의 검술을 펼쳤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육식(六式)-아나콘다'.

검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오러가 뱀처럼 굽이치면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참 철문에서 낑낑대던 둘은 마나를 느끼고 즉각 반응했지만 피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엔시아 경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갈슨 경은 오른팔이 베였다. 둘은 자신들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오러가 날아온 쪽을 바라보았다.

"으윽!"

"누구냐? 감히 이런 비겁한 기습을?"

"…아니, 이 어두운 야밤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도둑놈 같은 행보는 명예로운 행동이고? 어라?"

베오날드는 지극히 당연한 답변을 해 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일단 갈슨 경은 오른팔이 베인 상태에서 지금 지혈하기도 바빠 사실상 적수가 아닌 상황. 엔시아 경만이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엔시아 경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여기사라고? 이거 상당히 놀랍군."

"그게 어쨌다는 거냐?"

"…희귀한 걸 봤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안 그런가?"

5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다지 문명과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한 상황이기에 여성의 사회 참여는 제약된 이 세상. 당연히 기사, 군인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여기사를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나 호흡법을 익혀서 마나를 깨우치고, 전투력을 가지면 기사라고 인정해 주기에 성별은 상관없었지만, 대부분의 기사나 귀족 가문에서는 여자는 남의 집으로 시집보내기에 전수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혹시 천연 기사인가?"

'천연 기사'. 마나 호흡법 없이 자연적으로 마나를 모으는 체질이어서 각성한 타입.

보통 집안에 이종족의 피가 섞인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엔시아 경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마나 호흡법은 부친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흔치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 집안에 사내아이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자랑스러운 부친이 알려 주신 기술로 기사가 되었으면서 불명예스러운 짓이라니. 부친의 얼굴에 먹칠하고 있군."

"닥쳐라!"

베오날드의 술수에 완전히 넘어간 엔시아는 검을 뽑아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기사 놈들은 단세포라는 생각을 하며, 베오날드도 마찬가지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다음 그녀를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12화]

베오날드가 잠깐 생각하느라 대치하는 동안, 엔시아 경은 지혈을 하며 고통을 참고 있는 갈슨 경에게 조용히 말했다.

"갈슨 경, 도망치십시오. 저자는 제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끄으으음! 하지만 어디로 도망치란 말인가?"

"다리는 멀쩡하시죠? 제가 정면으로 달려들 테니, 그사이에 옆으로 빠져나가시지요."

"그게… 될까? 오히려 그러다 죽을 것 같은데.... 대체 저런 괴물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지? 저런 위압감, 상급 기사 수준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곳에 있을 인재가 아닌데.... 아무튼 남작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갈슨 경과 엔시아 경 둘 다 눈앞에 나타난 미지의 기사를 보며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상급 기사 정도라면 이미 대귀족들과 황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그냥 하급 기사들만 해도 차원이 다른 전투 병기들인데, 중급, 상급 기사는 전장의 판도를 바꿀 레벨이었기 때문이다.

'음, 옆의 노친네는 둘째 치고, 저 여기사는 죽이기엔 아까운데~ 으으음~'

생전 수많은 처와 첩, 노예들을 거느렸던 호색가이면서도 또다시 희귀한 것을 보면 수집하고 싶어 하는 성향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베오날드인지라 엔시아 경을 보며 갈등 중이었다.

원래 계획은 그냥 싹 죽이고 입 닫아 버리는 것이었는데, 희귀한 걸 보니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외모도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저건 저것대로 수수한 맛이 있어서 갖고 싶은데… 흐음~ 일단 제안이라도 해 볼까?'

"옵니다! 갈슨 경! 부디 무운을!"

"알았네!"

엔시아 경이 먼저 앞으로 몸을 날렸고, 베오날드는 그에 맞서기 위해 똑같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달려갔다.

그녀의 뒤로 갈슨 경이 거의 동시에 따라오는 것을 발견한 베오날드는 딱 봐도 어떤 속셈인지 눈치챘다.

'뻔한 수를.... 수준 차이가 좀 덜 나야 그런 걸 당해 주지. 애초에 생각이 둘로 나뉘어 있으니 공격이 뻔해지잖아.'

물론 수준 차이 때문에 엔시아 경의 공격이 보이기도 했지만, 뒤에 따라오는 갈슨 경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공격이 너무 크고 뻔한 게 문제였다.

방침은 나누더라도 전투에 나선 이상은 그것에 집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그들의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컥...!"

"잡았다."

투웅!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단 한 동작이면 충분했다.

검 손잡이를 엔시아 경의 가슴에 찔러 넣어서 밀쳐 내고, 그런 다음 몸을 돌려서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갈슨 경의 목을 내려쳤다.

물 흐르는 듯한 깔끔한 검술. 도망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갈슨 경은 그대로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로 땅을 굴렀으며, 뒤로 밀쳐진 엔시아 경은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일대일이네? 아무튼… 계속할 텐가? 일단은 투항하는 게 어때?"

"거절합니다. 기사 된 자, 최소한 주군의 명예는 지켜야 하는 법이니...."

"그럼 주군의 명예도 지킬 수 있게 해 주면 투항하겠나? 애초에 기사가 야간에 침입해서 암살을 하는 자체가 명예를 깎아 먹는 일이지만, 그건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무슨 생각이십니까?"

"널 갖고 싶다."

베오날드는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망설임 없는 표정으로 엔시아 경에게 대놓고 말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놀라 물러섰지만 베오날드는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제정신인지요?"

"제정신이지.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이기도 하고, 아직 젊은데… 이런 곳에서 암살로 명예를 더럽힌 채 죽고 싶지도 않잖아. 기사라면 모름지기 정의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신념을 걸고 싸우다 명예롭게 죽어야 하는 법. 아니면 저것처럼 시체로 구를 텐가?"

"...."

엔시아 경은 목과 오른팔이 잘린 채로 길바닥에 널브러진 갈슨 경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생명이 끊어진 시신. 분명 눈앞의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기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델마인 남작의 보복이 머릿속을 흔드는지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이 된다면 차후에 승인해도 되는데… 다만 며칠 정도는 감금 생활을 해야겠지만, 그러고도 거부한다면 몰래 조용히 떠나게 해 주지. 어떤가? 아니면 지금 명예라곤 없이 시체가 되든가?"

"…거부합니다."

"그래. 그럼 아쉽군."

그 말을 끝으로 보랏빛 섬광이 엔시아 경의 목을 갈랐고, 그녀의 육체는 선 채로 목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사까지 꺾거나 인성을 짓밟아서 굴복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남아야 아름다운 법. 게다가 전생의 부친인 벨릭스가 여성 문제에 관해서 워낙 추잡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절제하는 법을 배운 덕분이었다.

"…이제부터가 문제군."

싸움은 손쉽게 끝났지만 본격적인 일은 이제부터였다.

죽은 시체들은 모아서 정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역시 핏자국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저택 밖의 것들은 그나마 흙만 갈아엎으면 해결되었지만, 정문과 자신의 수련실 앞에서 죽은 시체들로 인해 바닥에 핏자국이 진하게 남은 게 문제였다.

"젠장! 연금술 설비만 있었으면 약품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제길! 망할 깡촌!"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없는 상황에 분개하며 베오날드는 번거로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무구, 돈은 모두 회수해서 자신의 수련실에 만들어 둔 비밀 공간 안에 숨겨 두었고, 결국 완벽하게 핏자국을 지우지 못하기에 같이 온 병사가 아닌 도적들이 무단으로 저택에 침입한 것으로 연출하고, 나머지 시신은 멀리 가지고 가서 묻어 버렸다.

'혼자 하려니 손이 너무 많이 가는군. 제길!'

자그마치 17명, 아니 도적 4명분을 뺀다고 치면 13명분의 시신을 치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도적들 같은 경우 한 번 잡혀 왔던 놈들이라서 신원을 바꾸기 위해 영지에 오지 않은 병사와 옷까지 갈아입혀 놔야 했기에 2배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부모님을 속일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짜증을 참으며 계속 움직였다.

'마나 호흡법 수련해 놓길… 정말 잘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아침 해가 뜨고도 모두 다 처리 못해서 아등바등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처리를 완료했다.

연출된 도적들의 시체를 놔두고 베오날드는 얼굴을 가린 채 제럴 경, 갈슨 경, 엔시아 경의 머리와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서 제럴 경의 영지로 향했다.

'일단 줄 건 줘야지. 행방불명이 되면 막 찾느니 뭐니 하면서 괜히 이 영지를 들쑤시고 다닐 테니 말이야.'

"누구냐? 당장 멈추고 신원을 밝혀라!"

"돌려줄 물건이 있어서 왔다. 받아라. 너희 주인이다."

"이, 이건...? 제, 제럴 경의? 그리고 이건? 델마인 남작 측의 기사인… 에, 엔시아 경과 갈슨 경? 자, 잠깐! 거기 서! 멈춰라!"

그리고 제럴 경의 저택에서 야간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수급과 소지품을 건네준 베오날드는 바람처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걸로 시끄러운 일은 모두 이 영지로 몰릴 것이다.

도적이 잠깐 왔다 간 일보단 역시 가주를 잃고, 기사 가문으로서 후계자를 잃은 이 제럴 경의 '영지'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가지고 또 영지 없는 기사들의 신경전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이제 돌아가서 저택 쪽 정리만 하면 되겠군.'

베오날드는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잠시 저택 밖으로 보냈던 하인들에게 일부러 남겨 둔 도적들의 시신을 보여 주면서 자신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낸 이유를 납득시켜 주었다.

"과, 과연 도련님. 저희가 그것도 몰라뵈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이야기해 주셨어도...."

"괜한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나 얼마 전에 도적들에게 시달린 이후이니 말이야. 아무튼 빨리 현장을 정리해라."

"예! 도련님. 그런데 이것들을 모두 도련님이 처리하셨습니까?"

"5년 내내 검을 휘둘렀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아무튼 빨리 정리하도록."

결국 하인들은 베오날드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현장을 제대로 치우기 시작했고, 베오날드는 부모님들이 돌아올 때까지 어제 얻은 전리품을 정리했다.

소지품을 건네주었지만 제럴 경의 경우 그저 가문의 인장과 두 사람은 갑옷의 일부만 주었기에 17명분의 무장과 소지품의 양이 꽤 많았던 것이다.

'이것들은 나중에 몰래 다른 영지로 가서 팔아야겠군.'

철제 무기와 병사들이 입던 사슬 갑옷과 기사 둘이 입던 판금 갑옷 모두를 팔면 꽤 가격이 나올 법했다.

직접 철괴로 만들면 마음 편하게 팔 수 있겠지만, 이곳엔 대장간조차도 없어서 결국 통째로 가져가야 하는 만큼 갑옷의 출처에 대해 들키지 않기 위해선 적어도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다른 영지로 가야만 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한숨 자고, 부모님부터 맞이할까?'

어젯밤 내내 싸우고 달리고 한 만큼 베오날드는 조금 지친 상태였기에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이후 해가 정오를 지나서 오후가 되었을 무렵, 어제 캘러메인 영지로 급히 떠났던 베오날드의 부모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저택에 도적들이 들어왔다는 소식과 그들을 베오날드가 처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네가 이 도적들을 처치했다고? 망할 놈들! 우리가 캘러메인 영지에 간 사이에...!"

"예. 하지만 다행히 하인들을 대피시키고, 들어온 것을 제가 각개 격파했습니다."

"맙소사! 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아버님이 안 계시면 이 영지의 주인은 접니다. 제가 안 지키면 백성들이 고통받으니까요. 이때를 위해서 5년간 검을 연마한 게 아니겠습니까? 귀족의 의무이지요."

사람 좋고 순박한 레이온 자작은 당차게 말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100퍼센트 신뢰하며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역시 어머니 쪽, 레이온 자작을 대피시키기 위해 거짓말로 캘러메인 영지로 가게 했던 그녀에겐 집무실에서 다시금 진실 되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제럴 경은 물론이고 델마인 남작 아래에 있던 갈슨 경과 엔시아 경까지 왔었다고?"

"예. 그리고 우리 영지를 약탈하던 그 도적들도 제럴 경의 수하들이었던 것 같아요."

"맙소사...!"

도적에 이어서 3명의 하급 기사가 자신들을 죽이러 왔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베오날드의 모친은 아연실색했다.

자신들은 그저 조용히 이 영지에서 살고 있고 탐낼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외부에서 공격이 올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리라.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구나. 후우우~ 내일 당장이라도 조치를 취해야겠다."

'그렇지. 이래야 정상이지.'

'그보다… 살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건 역시 할아버님을 닮은 탓일까?'

보통 사람이라면 10살짜리가 살육을 한 것에 대해 비정상적이라고 느끼겠지만, 베오날드의 모친은 자신의 아버지인 캘러메인 백작이 어린 시절부터 잔혹하고 자비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그의 피를 받았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베오날드가 이를 알면 자신이 500년은 더 먼저라고 반박했을 테지만,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모친은 다른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

"후우~ 그런데 베오날드, 그 '마나'는 언제… 깨우친 거니?"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니, 이미 깨우치고 있었지만 자각한 것은 어머님이 알려 주시고 난 이후예요."

"그렇구나. 설마 베오날드… 네가 천연 기사일 줄이야."

'전생에 배웠다고 해 봐야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저걸로 넘어가야지. 게다가 그걸 아는 순간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라 남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자신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었지만 지금은 베오날드 더스티클록이기도 했다.

상냥함과 다정함으로 자신을 길러 준 부모에 대해선 귀족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지만, 인간이자 자식으로서는 좋은 부모라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밤새도록 뛰어다니면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여신께서 너에게 엄청난 선물을 내려 주신 것 같구나."

"어쩌면 부모님에게 내려 주신 걸지도 모르죠."

베오날드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여신에 대해 생각하며 넉살 좋게 모친의 말에 대답했고, 그녀와 이 일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앞으로는 일이 있을 때 상의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아직 10살이지만 가족의 일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이라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13화]

이틀 뒤.

델마인 남작은 제럴 경의 영지에서 올라온 보고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잘것없는 일을 처리하라고 보낸 자신의 하급 기사 둘의 목과 소지품이 일부만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하급이어도 기사는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인재들로 이렇게 잃어버린 것은 엄청난 손해였다.

"이게…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대체 어떻게 했기에?"

"저희도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제 아침 영지의 저택에 수상한 남자가 와서 저의 주군이신 제럴 경을 포함한 세 사람의 머리와 소지품을 주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놈을 잡았어야지!"

"저도 머리를 받은 경비병을 문책했지만 워낙 바람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고 해서...."

제럴 경의 가신인 안델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델마인 남작에게 아는 한도 내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걸로 만족할 델마인 남작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이런 짓을 한 상대에 대한 정보나 아니면 이유라도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모르니 머리에 피가 쏠려 확 돌아 버린 것이었다.

"이 쓸모없는 놈 같으니!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송구하옵니다만 델마인 남작님, 지금 저희도… 원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군이신 제럴 경이 사망했는데, 제럴 경의 자식들 중엔 후계자가 될 만한 기사가 없어서 비상사태입니다. 거기에 만약 젤커드 자작의 기사가 차지하게 되면 곤란해집니다."

"끄으으응!"

젤커드 자작. 델마인 남작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비록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엄연히 중급 기사였고, 캘러메인 백작 아래 파벌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제 곧 작은 시골 영지 하나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기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영지라지만 엄연히 영민과 세수가 있고, 소수의 군사를 육성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제럴 경의 가문은 오랫동안 그 지역을 통치하면서 수입을 쌓아 왔기 때문에 아무리 작아도 축적한 재산도 있을 것이다.

"끄으으으으으으응! 질레온 경에게 병사를 이끌고 제럴 경의 영지로 가라고 전해라."

"예!"

우선적으로 조치를 취한 다음, 델마인 남작은 곧장 안델 경과 함께 사건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미 입은 손해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하급 기사 3명이 죽은 사건은 꽤 심각한 사안이었기에 반드시 원인을 알아내야만 했다.

"일단 제럴 경, 갈슨 경, 엔시아 경, 이 셋은 분명 그 근본도 없는 더스티클록 자작의 영지로 가서 그를 암살할 계획이었을 걸세. 분명 그렇지?"

"예. 제럴 경은 영지의 병사와 손잡은 도적,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을 데리고 더스티클록 자작의 영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계획은 공훈을 얻고 싶다는 핑계로 더스티클록 자작이 잡아 둔 도적에게 걸려 있는 현상금을 주고 도적을 돌려받으면서 정찰, 그리고 그날 밤 곧바로 더스티클록 자작을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사고는 거기서 터졌겠군. 더스티클록 자작이… 뭔가를 한 걸까? 하지만 자작은 그냥 힘 좀 쓰는 놈일 뿐이고, 병사나 가신 중에 기사가 될 자도 없을 텐데? 애초에… 마나 호흡법도 없는 곳 아닌가?"

"아마 젤커드 자작이나 캘러메인 백작님이 손을 쓴 게 아닐는지요?"

"으으음… 하급 기사 셋을 처리하려면 못해도 똑같은 하급 기사 셋, 아니면 중급 기사가 나타나야 하네. 근데 캘러메인 백작님 아래 세력권에서 중급 기사가 총 몇 명이지?"

"아마… 15명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 기사는 캘러메인 백작님의 곁에 있는 한 명뿐이지요. 하지만 중급이든 상급이든 대체… 그 영지에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파견한 걸까요? 결국 메리트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돈도 없을 텐데...."

안델의 말대로 더스티클록 자작가를 돕는다고 해도 크게 이득 볼 것이 없다.

더구나 하급 기사 셋이든 중급 기사든 어디 쉽게 보낼 인재도 아니다.

제럴 경만 해도 자신에게 하급 기사 둘을 빌리기 위해 거액을 지불했을 정도였다. 한데 고작 2대까지밖에 이어지지 않았고 수입도 변변찮은 더스티클록 자작가에 그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흐음… 잠깐만, 확실히 더스티클록 자작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지?"

"아~ 예. 올해로 10살 된 아들이 하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남작님… 설마?"

"지금 변수라고는 오직 그거뿐일세."

실제로 보진 않았으나, 추리해 나가면 변수는 오직 더스티클록 가문의 10살짜리 꼬맹이(?)뿐이었다.

안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델마인 남작의 주장을 부정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됩니다. 올해 10살입니다, 10살! 완전 애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기사일 리가? 심지어 더스티클록 자작가의 근본은 용병 집안! 마나 호흡법 하나 없을 텐데요?"

"천연 기사의 케이스도 있지 않은가? 잡것의 피가 섞이긴 했지만 그래도 캘러메인 백작의 혈통이기도 하지. 가능성이 0은 아니야."

"너무 과한 생각 아니십니까? 차라리 젤커드 자작이나 캘러메인 백작이 손을 써 준 게...."

"맞아. 과하게 생각하긴 했지. 가능성이 0은 아니라지만 너무나 희박한 확률이지.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을 만큼의 확률. 마치 병아리가 뱀과 싸워서 이길 확률 정도? 하지만 확인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사람을 하나 보내서 확인하지. 제럴 경의 영지 문제와 죽은 다른 기사들에 대한 일이 지금은 더 우선이니 말이야."

당장 제럴 경의 장례부터 시작해서 정치 싸움할 거리가 많았기에 델마인 남작은 신뢰할 수 있는 가신 하나를 그쪽에 보내어 더스티클록 자작의 아들에 대해 조사를 맡기기로 했다.

***

더스티클록 자작가.

암살 습격을 견뎌 낸 더스티클록 자작가였지만 이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져서 베오날드의 부모는 바쁜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단 적이었지만 그래도 바로 이웃 영지의 주인인 제럴 경이 갑자기 죽은 사건은 이 작은 촌 동네에선 큰일이었다.

레이온 자작은 장례식장에 조의를 표하러 가는 것은 물론이고 캘러메인 영지를 오가면서 계속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집 지킨다는 핑계로 나는 이곳에 남게 돼서 천만다행이군. 물론 아버지는 데려가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적극 변호해 주셨지.'

부친인 레이온 자작은 슬슬 베오날드를 여기저기 소개시켜야 한다며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모친은 베오날드가 이 작은 영지에 비해 너무 과분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정통 귀족 혈통인 부인의 시야와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영지에 남을 수 있었다.

'후우~ 자유로워진 건 아주 좋군.'

기마술에 능숙하다는 점과 혼자서 도적을 격퇴한 점, 10살 아이의 기량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베오날드는 홀로 영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보이는 풍경은 농작물을 기르는 이들과 사냥을 갔다 와서 사냥감을 다듬는 영지민들의 일상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놀러 온 게 아니니 정신 차리자.'

이맛살을 찌푸린 베오날드는 자유롭게 영지를 돌며 곳곳에 자라는 식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직접 맛을 보면서 성질이 변한 건가 확인을 했는데,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연금술의 재료도 재료였지만, 이 작은 영지는 예상대로 '비상약' 같은 것의 준비가 아주 형편없었다.

'상비약으로 쓸 약초 정도는 모으라고! 말려서 가루로 만든 다음 밀봉하면 오래가잖아! 그리고 상처를 싸맬 깨끗한 천도 보관하고! 그것도 기본! 도대체 칼밥으로 먹고사는 것들이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몰라! 포션까진 아니어도 준비하라고! 보자… 약초꾼 집이 여기군.'

"누구십니… 헉! 도, 도련님?"

"그래, 나다.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시간을 살 테니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내게 알려 주도록."

"소, 송구스럽사옵니다만, 일개 약초꾼의 지식이 도움이 될지...."

"그건 내가 정한다. 자, 선입금이다. 들어 보고 만족스러우면 한 장 더 주지."

은화를 던져 주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고, 하나를 더 준다고 하자 벌떡 일어나서 말리던 약초들을 베오날드의 앞에 놓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체펔이라고 부르는 약초입니다. 말려서 달여 먹으면 두통에 좋지요. 그리고 이건...."

약초꾼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지식과 대조하는 베오날드.

하나 생각보다 500년의 시간은 금방인 건지 약초들의 효능과 모양새는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크게 차이 나는 건 호칭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부르는 호칭이 다른 음식도 있으니 말이다.

'음, 아주 유익한 지식이군. 하아~ 물론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말이야.' 

전생에 천하를 호령했고, 연금술 학회에서도 인정받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지금은 일개 약초꾼에게 지식을 청하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그쯤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위해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1만 년 지옥행 생활이 예정되어 있으니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으음… 돌아가는 길에 약초나 좀 캐서 갈까?"

"그… 너무 깊이 들어가시면 야생동물도 동물이지만, 고블린이 있을 수 있습니다요."

'그거야 일상이지. 음, 사냥 기술이랑 숲에 대한 정보도 배워 볼까? 하급 귀족이면… 이리저리 뛰어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냥꾼의 집.

마찬가지로 보수를 지불한 베오날드는 그에게 이런저런 기술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덫의 설치, 제거, 야생동물 및 몬스터의 흔적과 추적 방법 등등.... 생전의 베오날드라면 전혀 배울 필요가 없을 기술들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할 것 같았다.

"도련님, 손재주가 정말 좋으시군요. 게다가… 10살이라곤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말로는 할아버지를 닮았다던데?"

"아아~ 선대 영주님은 확실히 엄청 크셨지요. 허허허. 아, 덫은 그렇게 치시면 위험합니다. 끈을 뒤로 좀 더 빼서 확실히 고정하셔야 안전합니다."

'…할아버지 핑계가 엄청 잘 먹히네.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지?'

10살 아이라곤 믿을 수 없는 성장인데도 할아버지 핑계 하나만 대면 의심이 끝날 정도였기에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 할아버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사냥꾼과 약초꾼에게 기술을 배우고 그것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정리한 베오날드는 다시 검술 수련과 마나 호흡법 훈련에 몰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더스티클록 자작 부부가 돌아왔다.

제럴 경의 영지를 맡을 자는 기사들 중에서 한 명으로 정해지는데, 그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영지에 있던 하인들과 사람들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모친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교환하는 베오날드였다.

"으음, 그렇군요. 혹시 또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어머님?"

"딱히 없더구나. 다만 델마인 남작의 눈빛이 좀 심상치 않았단다."

"하급이라지만 기사가 둘이나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죠. 거기다 그 둘… 아니, 제럴 경까지 죽인 자의 정체를 모르니 더 답답할 테구요. 저인지, 젤커드 자작의 기사인지 아니면 캘러메인 백작의 기사인지~ 상상의 여지가 넓으니까요."

"고작 10살인 너에게까지 생각이 닿는다고? 그건 좀 지나친 억측 아니니?"

"하지만 제 외양이… 정상적인 10살은 아니잖습니까? 어머님. 분명 델마인 남작은 사람을 보내 저에 대해 확인하려고 하겠지요."

다소 앳되어 보이는 얼굴만 빼면 키, 체격, 근육의 양까지 절대 10살로 보이지 않는 베오날드. 보통 10살짜리 아이라면 검을 다루는 것조차 무리일 테지만, 베오날드는 마나 호흡법 수련 덕에 신체 성장도 빨라서 전혀 문제없이 다룰 수 있을 정도이니 충분히 의심이 가능했다.

"거기에 제가 기사인 걸 확인하려고 보내는 걸 테니…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자를 잠입시킬 겁니다. 그게 문제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감출 수 있는 방안이 있니?"

"일단 저도 감추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건 불확실한 수(手)죠. 오히려 여기선 의심을 풀어 줄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거니?"

"젤커드 자작에게 적당히 비싼 선물이라도 보내 주세요. 이유는 적당히 핑계를 대시거나~ 아! 아니면 제게 검술 사범을 한 명 정도 보내 달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마치 진짜로 젤커드 자작에게 신세를 진 것처럼 감사를 표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시늉을 보이는 것으로 델마인 남작을 속일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사람은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의 증거보다는 가능성 높은 사건의 증거가 나오면 바로 그것에 판단이 매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남작을 직접 만나 봐야 좀 더 확실한 판단이 서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딱이지.'

델마인 남작을 직접 만나 보진 않았지만, 베오날드는 일단 일반적인 수 싸움에 한해서는 이 방법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모친 역시 아들의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캘러메인 백작가에 보낼 선물용으로 아껴 두었던 가장 좋은 사냥감의 모피와 뼈로 만든 장신구 등의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4화]

베오날드의 모친은 그로부터 정확하게 일주일 뒤, 젤커드 자작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한동안 검술 수련의 비중을 줄이고 밖으로 나가서 약초꾼과 사냥꾼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일에 열중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러 올 것이기 때문에 이때야말로 산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그들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야생동물도 조심하셔야 하지만, 무엇보다 조심하셔야 할 것은 몬스터입니다. 암흑신의 자손인 놈들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지 근처엔 이렇다 할 몬스터 부락이 없지 않나? 고작해야 고블린 정도지."

"그래도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요. 저희야 흔적이 보이면 바로 도망치지만요. 아무튼 덫은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근데 정말 아쉽네. 대장간 같은 것만 있어도 좀 더 좋은 덫이나 도구를 만들 텐데."

사냥꾼들이 쓰는 사냥 도구는 죄다 자연물에서 나온 것이거나 사냥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화살촉까지도 뼈이다 보니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럴 경 같은 기사들은 이미 철기와 판금 갑옷까지 입고 있는 시대인데, 이 영지가 얼마나 낙후된 건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하하하, 저희 영지 같은 시골에 올 대장장이가 있겠습니까요? 정 그러시다면 도련님, 영주님에게 부탁해서 다음에 캘러메인 백작님의 영지에 가면 좀 사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요. 물론 좀 싸게 말이죠."

"말은 해 볼게. 아, 잠깐만 이거… 약초인데 좀 캐 가야겠다."

그렇게 오늘도 약초꾼과 사냥꾼에게 수업을 들은 베오날드는 내려오는 길에 약초를 잔뜩 캐서 가져왔다.

잘 말리는 게 중요했기에 저택 한구석에 판을 깔아서 직접 말려 놓고, 이미 마른 약초들은 분말로 만든 다음 석회석 가루와 섞어서 분말 형태의 상처에 뿌리는 약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달여서 진액을 굳혀 다시 가루를 내서 먹는 약으로, 혹은 진액에 깨끗한 기름, 술 등등… 많은 재료를 섞어서 연고 형태로도 만드는 식으로 다양한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아, 이제야 본업 하는 느낌이 나네. 물론… 이건 아주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약제이지만 말이지. 하하....'

500년 전 베오날드 폰 노이멀은 연금술사로도 이름을 떨친 몸이다.

심지어 최고의 경지라는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도 성공했을 정도였다. 

물론 비용은 천문학적이라서 가끔 황제를 위한 쇼의 용도로밖에 쓸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연금술 학회에도 이름을 남길 만큼 굉장한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체펔이었나? 내 시대엔 달라스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이 약초는 워낙 쓸 곳이 많은데 대량 재배 안 되려나? 좀 많이 있어야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더 좋은 약으로 개선하기도 하고, 다른 약을 만드는 데 많이 쓸 텐데 말이지.'

연금술사로서 지식과 경지는 높아서 약초의 효능과 사용법은 잘 알지만, 재배법은 농업의 영역이었기에 전혀 모르던 베오날드는 금방 양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자신이 캐 와서 말리는 것도 좋았지만 그러자니 시간이 너무 아깝고 생산량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농민에게 물어봐야 하나? 젠장! 뭐 하나 편하게 되는 게 없군.'

하지만 그래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이런 작은 의약품 하나를 비축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그것이 영지의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많은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차후에 더 생각해 보고자 했다.

***

며칠 뒤.

더스티클록 자작가는 워낙 깡촌이라서 이곳에서 나가서 캘러메인 영지로 갔다가 오는 이는 있어도 먼저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 델마인 남작에게 명령을 받고 이곳 자작의 아들인 베오날드를 조사하러 온 기사, 월터 경은 침입을 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캘러메인 영지에서 떠돌이 상인 하나를 매수하여 잠깐 더스티클록 영지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저희야 돈 받고 가는 거지만… 기사님은 대체 뭐 하러 가시는 건지요?"

"묻지 말게. 나도 지금 많이 심란하네. 명령이라지만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떠돌이 상인의 작은 마차에 타고 있는 월터 경은 상인의 말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올해 29세인 그는 간신히 25세에 마나를 깨우쳐서 하급 기사가 된 몸. 자신의 가문에 내려오는 마나 호흡법은 물론 영약이라 불리는 포션까지 마셔 가면서 깨우치려고 애써서 25세에 겨우 기사가 되었다.

'10살짜리 애가 기사인지 조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참 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도 기사님이 있으니 몬스터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군요. 하하핫."

"아무튼 가서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 고용된 용병이라는 거 잊지 말고. 알았나?"

"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떠돌이 상인과 함께 월터 경은 조심스럽게 더스티클록 영지 내부로 들어갔다.

용병으로 위장한 월터 경은 아예 진짜 용병이 쓰는 장비를 사서 챙겼기에 수상하게 여길 게 없었다.

"정말 시골이군요. 여기… 돈은 굴러갑니까? 끽해야 물물 교환이 전부일 것 같은데 말이죠."

"…나도 그래서 오고 싶지 않았네."

"일단 영주님 저택에 가 봐야겠군요. 물론 기사님의 부탁도 거길 가는 것이었지만 말이죠."

"그러세."

떠돌이 상인의 마차는 그대로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고, 레이온 자작은 보통은 오지 않는 행상인의 방문에 반가워하며 즉시 영지 백성들에게 상인이 왔다는 통보를 넣음과 동시에 그 자신도 이곳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을 사기 위해 움직였다.

"자자, 천천히, 천천히 오십시오. 물건은 여럿 있습니다. 물물 교환도 받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 자작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혹시 장신구나 보석은 없나? 가능하면 선물용으로 보관하고 싶은데 말이지."

"하하, 물론 있습니다요. 하하하핫."

웅성웅성....

간만에 행상인이 온 탓에 영지민들까지 몰려와서 북적북적해진 상인의 마차였다.

그 안에서 월터는 경비를 봐 주면서 레이온 자작의 아들을 찾기 위해 둘러보는 중이었다.

분명 이런 시골 촌구석의 10살 아이라면 외지에서 온 상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어디 보자… 어린 꼬맹이가 어디 있을까?'

"상인 아저씨, 이 유리병은 어디서 만든 겁니까?"

월터 경이 어린애를 찾는 사이, 한 청년이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던 유리병을 꺼내어 상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곱상한 외모의 청년이긴 했지만 일단 입고 있는 옷은 흔한 작업복이었고, 키나 체구로 보아 절대로 10살로 보이지 않아서 그냥 저택의 하인 정도로 생각하고는 신경을 끄는 월터 경이었다.

"예? 그러니까… 캘러메인 영지에 있는 유리 장인이 만든 것이지요. 제가 직접 사서 가져온 겁니다."

"으음, 가격이 얼마나 돼요?"

"개당 은화 3장입니다."

"너무 비싼데. 캘러메인 영지에 직접 가서 사야 하나?"

"아이고, 보통은 캘러메인 백작님에게 진상되고 남은 것을 파는데, 이건 진상되는 놈을 산 겁니다."

상인답게 교섭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살짝' 진실 같은 거짓을 섞어서 집어넣는다.

어차피 이런 시골 영지의 청년 따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간파할 수 없으며, 차후 캘러메인 영지에 간다고 한들 이미 거래가 끝나고 난 뒤일 것이다.

또 애초에 영주 허락 없이 영지를 벗어나는 일도 불가능할 테고 말이다.

"음? 엄마아! 이거 확인 좀 해 주세요!"

"으음? 잉?"

하나 가격 교섭을 하던 중 청년이 뒤를 보며 갑자기 누군가를 불렀고, 더스티클록 자작 부인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캘러메인 백작의 딸 중 한 명인 그녀는 비록 이런 근본도 없는 용병 출신 귀족에게 시집왔지만, 그래도 분명 한때 캘러메인 백작의 딸로 저택에서 생활을 하였다.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흉측해진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도 없고 말이다.

"엄마, 이거 캘러메인 백작님 저택에 진상되는 거랑 같은 게 맞나요?"

"으음…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베오날드, 이걸 만드는 그 유리 장인의 집엔 나도 자주 가는 편이라 아는데...."

"그럼 저 상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요?"

그러자 청년은 무서운 눈으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종류의 가벼운 사기를 들키는 경우야 종종 있는 일이기에 그는 넉살을 떨면서 다른 상품을 꺼내는 척하려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이, 일단은 자작 부인보고 엄마라고 하는 걸 보면 아들이라는 건데. 그럼 설마 이 청년이 그… 더스티클록 자작가의 후계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느낌은?'

고작해야 갓 성인(15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청년의 시선이 무서울 리 없을 텐데, 상인은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살이 떨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이성적으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 청년을 화나게 해선 안 된다고 상인의 감각과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과연...."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물건도 물건이고!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도, 도련님! 사죄의 뜻으로 그 유리병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아니, 하나 가지곤 소용없어."

"그, 그러면 여, 여기! 세트로! 세트로 드리겠습니다. 이만큼 다 가져가십시오."

유리병이 든 상자를 통째로 내밀면서 상인은 베오날드에게 계속 굽실거렸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는 큰 손해를 보더라도 지금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한 것이다.

"정말 그래도 되나?"

"예, 물론이죠. 제가… 제가 잘못한 일이니까요. 하하하."

사실은 속이 쓰릴 만큼 엄청난 손해였지만, 천만다행으로 베오날드의 눈빛이 많이 누그러지면서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에 상인은 안도했다.

드디어 연금술에 쓸 수 있는 도구가 확보된 것을 기뻐하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뛰던 베오날드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뭐지? 음? 아… 용병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시선을 보낼 일이 없는데.... 아, 아니면 저 떠돌이 상인의 친우 혹은 동료인가 보군.'

"음? 베오날드, 아무리 그가 잘못했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만? 그냥 돌려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래도 이런 곳까지 찾아와 주신 분인데...."

"아이고! 아닙니다, 나리! 제가! 제가 무조건 잘못했고,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꼭 도련님에게 주십시오. 괜찮습니다요!"

레이온 자작은 베오날드가 마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인의 것을 갈취한 것으로 보여 돌려주라고 말했지만, 상인은 기겁하면서 그런 레이온 자작을 말렸다.

베오날드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아무튼 연금술 도구가 될 유리병을 얻은 것에 만족하며 병이 든 상자를 가지고 자신의 수련실로 향했다.

하나 그렇게 투닥거리는 바람에 자신을 바라보던 용병의 존재, 월터 경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저게 10살이라고? 믿기지가 않는… 아! 아니지. 선대 더스티클록 자작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뭐니 뭐니 해도 2미터가 넘는 키에 근육질이었고, 용병 업계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어릴 때 성장이 빨랐다고 했으니.... 아무튼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르니 조사를 해 봐야겠군.'

기사의 가능성에 대해선 몰랐지만 10살짜리라 볼 수 없는 체구와 아까 전 상인을 압박하던 눈빛이 묘했던지라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월터 경은 저택과 그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15화]

월터 경은 용병인 척하면서 베오날드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그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단 유리병을 산 시점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저택에 올라갔던 베오날드는 갑자기 또 내려오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어딘가로 향했다.

'저건 뭐야? 말린 풀? 그래도 근본 없다고 욕먹을지언정 자작가의 도련님인데… 저게 무슨 짓인지, 원~ 아무리 기사가 안 되어도 영지를 잃지 않는 귀족이라지만.... 쯧쯔쯔.'

'아주 좋아! 유리병이 이만큼이나 되니까 진액을 만들기도 좋고, 합성하기에도 아주 좋고, 다양한 케이스로 실험할 수 있어! 아싸아아!'

월터 경이 바라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베오날드는 연금술 도구가 생긴 것에 즐거워하며 이 유리병들을 즉시 수련실에 갖다 놓고, 아예 실험실로 만들 생각까지 하며 연장을 챙기는 등 난리를 치고 있었다.

거기에 모자란 연장은 상인에게서 이번엔 제 가격을 주고 구입하는 등등, 귀족 후계자답지 않게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무슨… 일꾼인가? 저러는 걸 말리지도 않는 걸 보면 일상적인 건가 보군. 한창 지식과 무예를 단련해야 할 영지의 후계자를 무슨 하찮은 일손처럼 부리다니. 쯧쯔쯔… 역시 근본 없는 집안은 어쩔 수 없나?'

월터 경은 더 이상 베오날드에 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오늘 영업이 끝나는 즉시 상인과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혹시 모르니 좀 더 지켜볼까? 수련실이라는 건 있어 보이는데… 이건 뭐야?'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몰래 짐을 옮기는 척 베오날드를 따라가 그의 수련실을 정탐하는데, 안에는 무기와 갑옷 및 단련에 필요한 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월터 경을 경악시킨 건 그 수련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실험 도구와 각종 약초들이었다.

'아니, 육체를 단련하고 검을 배우는… 이 신성한 장소에서 이런 짓을?'

월터 경은 정통 기사 가문 출신.

수련실이라는 곳은 성기사에게 있어서는 신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수련실에 비치되어 있는 약병과 말리는 중인 약초의 존재는 마치 신전 한가운데에 시장판이나 화장실을 만든 것 같은 불쾌감을 선사하는 거였다.

'이건 더 볼 것도 없다. 이런 장소에서 기사가 나올 리 없어!'

월터 경은 큰 실망과 불쾌감을 품은 채로 상인도 버리고 곧바로 영지를 떠나 자신의 주군이 있는 델마인 남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델마인 남작에게 전하면서 기사는커녕 더스티클록 자작가는 근본이 없다는 악평을 늘어놓았다.

"저기에서는 10살짜리는 물론 백 년, 천 년이 지나도 기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음… 그런가? 그대가 말하면 그렇겠지. 알았네."

월터 경에 대해서는 젊고 실력 있는 기사라며 신뢰하고 있던 델마인 남작은 그의 보고를 전적으로 믿고, 역시 자신의 생각이 기우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젤커드 자작이나 캘러메인 백작이 수를 쓴 거라 생각하고 제럴 경의 영지 문제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베오날드의 행동에 대해서 월터 경은 좀 더 신중하게 조사를 했어야만 했다.

적어도 그의 행동에 대해 부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봤다면 앞에서의 생각을 모두 바꿨을 테니 말이다.

"…베오날드가 왜 저러는 거요? 수련실에서 또 이상한 짓을 하던데...."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행동이니 말이죠."

"그래도 그걸 수련실에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아이가 성장을 하고자 하는데, 장소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부인이 그렇다면 뭐...."

사실은 부친인 레이온 자작도 베오날드의 행동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부인이 그의 의구심을 적절히 풀어 주면서 방해하지 못하게 차단해 준 것이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아주 능숙하게 연장을 쓰면서 수련실 일부를 실험실로 만드는 것에 흥겨워하는 중이었다.

'날 속이려는 건 괘씸했지만 떠돌이 상인이 오다니 정말 운이 좋다니까! 이것도 여신의 인도인가?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실험을 잔뜩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약품 만드는 것에 대한 실험체도 가득하고 말이지!'

물론 기존에 알고 있는 제조법과 약들로도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뒤였다.

자신이 모르는 질환이나 병이 있을지 모르며, 또 사람들의 체질이 다르고 구할 수 있는 재료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알맞은 약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베노피스에선 그냥 최고급 재료를 모아서 만들 수 있었는데… 여긴 다르니 말이지. 제길!'

이 망할 깡촌에서 모을 수 있는 재료는 한정적이었기에 거기에 맞춰서 싸고 좋은 약품을 만들려면 시행착오와 개선 작업이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농업과 사냥 및 산에서 채집을 병행해서 생산 활동을 하는 이 영지의 특성상 분명 각종 찰과상 및 상처 입을 일이 많을 터였다.

그들에게 무상으로 약을 나눠 주는 척하면서 약의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실험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인 것이다.

'이런 간단한 약 하나로 엄청난 인구 손실을 줄일 수 있으니 말이지. 또 장차 쓸 일도 많을 거고~ 보자… 다른 약초를 구해 와야지. 일단 두통약, 상처 치료제, 감기약. 이거 3개는 기본적으로 만들어 두면 언제든 쓸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독약도 만들어야겠군. 몬스터 사냥에 쓸 수도 있으니....'

그렇게 베오날드의 일과엔 약 제조가 추가되었고, 후엔 아예 수련실 옆방을 실험실로 만들어서 약의 제조에 힘썼는데, 이렇게까지 진보된 것은 그가 무료로 나누어 준 약의 효능을 본 자들의 지지 덕이었다.

"도련님 덕분에 큰일 날 뻔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아, 정말이지 멧돼지에게 죽는 줄 알았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도련님!"

"도련니임! 저희 애가 아파서 그런데 혹시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요?"

물론 단점은 사람들이 의료원을 찾듯이 저택을 찾게 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차피 인구가 적은 영지이다 보니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베오날드에겐 실험체들이 알아서 찾아와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4년 뒤, 14세가 된 베오날드는 이제 누가 봐도 성인이라고 보일 정도로 성장한 모습이 되었다.

검술은 여전히 '노이멀–10식'을 뚫지 못한 상태여서 상당히 초조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이 작은 영지에서 자신의 연금술을 펼치고, 또 새로이 사냥 기술을 숙달하며 당차게 자란 것이었다.

"오오오! 저, 저거 뭐야? 아! 도련님이시다!"

"이번엔 곰인가? 굉장해! 오오오! 엄청 커! 게다가 새끼까지 산 채로 잡으셨어!"

"세상에, 14살에 곰을 잡으시다니! 선대 자작님의 손자답구먼!"

앳된 외모에 맹수처럼 단련된 날렵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베오날드는 거대한 곰을 목에다 이고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냥 기술과 검술, 그리고 산에서 실전적인 움직임을 단련하는 겸해서 이것저것 잡아 오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돈이 되는 게 많았고, 그것들을 팔아서 더 좋은 연금술 도구나 약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애초에 이 작은 영지의 주 수입원이 사냥이었기에 사냥꾼들과 교제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고 말이다.

"왈트, 이놈 해체 좀 부탁하네. 특히 장기와 쓸개는 분해하자마자 가장 먼저 가져다주게나. 가죽은 잘 말린 다음에 가져오고, 보수로는 고기는 자네가 다 가지게. 지방은 빼고 말이지."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나저나 새끼 곰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백작님께 진상할 걸세. 맹수의 새끼야말로 가장 잡기 어려운 귀중한 것 아닌가? 그나저나 우리가 필요하겠군. 가서 만들어야겠어."

베오날드는 그렇게 늙은 사냥꾼에게 곰의 해체를 맡기고서 먼저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길을 가는 도중에 사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기 봐. 도련님이셔. 오늘도 너무 멋지시다. 게다가 곰까지 혼자 사냥하셨다며?"

"약도 나누어 주시고, 자상하고 어질기까지 하시니… 정말 이 작은 영지에 두긴 너무나 아까운 분이야."

"이 사람아! 그럼 다른 영지에 가길 바라나? 있어 주면 우리야 좋은 거 아니겠어?"

모두의 존경과 선망, 사랑이 담긴 눈빛. 지난 4년간 자신이 세운 입지의 결과가 느껴지자 베오날드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난 4년, 본격적으로 연금술과 약제를 짓기 시작한 덕분에 영지민들의 신임을 얻기가 아주 수월했다.

'이 몸을 우러러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의술에 아주 밝은 건 아니지만 연금술을 하면서 부가적으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전염병이 아닌 이상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병환 같은 것을 치료하기엔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검술과 마나 호흡법의 영향으로 강해진 육체로 '사냥'과 '농사'가 주업인 이 영지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사냥꾼'으로서의 기량을 보였으니, 모두가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곤 해도 나의 정원이니~ 손을 쓰긴 해야지.'

제국의 영역으로 보면 간신이자 권력을 사유화한 권신이긴 해도 자신의 영지만큼은 가장 아름답고 거대하게 가꾸어 나간 베오날드였다.

자신의 영지는 굳건하고 아름다워야 자신의 가문, 자신의 안전과 명성 모든 것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게 베오날드의 가치관. 그 영지엔 당연히 영지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보자… 돌아가면 말려 놓은 약초를 또 정제하고 그다음엔 다시 검술 연마, 그리고 부모님과 식사 후에 저녁엔 과제 같지도 않은 어머님의 과제로 공부하는 척을 하면서 검술 수련을 하면 되겠군. 이 맛에 제2의 인생을 사는 건가? 후후.'

지독하리만큼 치열했던 전생의 14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완전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발버둥 치는 새끼 곰을 단단히 잡고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어오자 그를 맞이하러 나온 모친이 보였는데, 품에 작은 아이들을 둘이나 안고 있었다.

바로 베오날드의 동생들로 남녀 쌍둥이였다.

"돌아왔구나, 베오날드. 무사해서 다행이다."

"하하, 저보단 애들이 더 문제죠. 괜찮나요?"

"괜찮기는~ 밤에도 울고, 낮에도 울고, 잠을 깨우고 난리였단다. 널 키울 땐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거야 나는 태어나자마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쌍둥이는 베오날드가 12세 때 태어난 아이들로, 본래 귀족가라면 좀 더 일찍 많은 아이들을 낳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지만 초기엔 베오날드를 키우느라, 그리고 어느 정도 커서는 영지 주변에 사건이 많아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제럴 경 문제가 해결된 이후엔 안심할 수 있었고,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한 끝에 남녀 쌍둥이를 출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손에 든 새끼 곰 2마리는 뭐니?"

"얼마 뒤에 캘러메인 백작님의 생신이니 그때 선물로 바칠 겁니다. 거기에 지금 어미 곰의 가죽도 조심스럽게 떼어 내는 중이에요. 가능하면 몬스터로 잡고 싶었는데… 영 없네요. 이 근방엔~"

"곰만 해도 대단한 거란다. 그보다 베오날드?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씻고 내 집무실로 오려무나."

"예, 어머님."

중요한 이야기가 뭔지 모르지만, 베오날드는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바로 어머니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어린 동생들은 하녀와 유모에게 맡겨 둔 모친은 베오날드에게 한 서찰을 내밀었다.

그것은 예전에도 보았던 캘러메인 백작의 생일잔치 초대장이었는데, 베오날드는 의아한 눈초리로 모친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걸 왜 저에게?"

"아무래도 이번엔 네가 그이를 보좌해 줘야 할 것 같다. 나는 역시 네 동생들을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생일잔치라는 게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게 아니지 않니?"

"그렇죠. 그럼 제가 하도록 하죠."

말이 생일잔치이지, 사실은 캘러메인 백작이 자신의 아래에 있는 가신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는 자리로서 조공을 받거나 혹은 이런저런 정치 싸움을 하는 판이었다.

생일날 이전에 미리 도착해서 귀족끼리 서로 안면도 트고, 여러 파벌이나 서열 관계도 확인하는 등등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어지간한 자보단 네가 더 믿음직스러우니, 잘 부탁한다."

'음, 귀족판 데뷔는 성인이 되고 나서 할 줄 알았는데… 1년 이르군. 하지만 성인이 아닌 이상에야 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분위기 파악 정도이려나? 아주 딱 좋아. 캘러메인 영지도 처음으로 가 보겠군.'

본래 성인이 아닌 남성은 참여하지 못하는 행사였지만 이미 모친이 보기엔 베오날드는 성인 한 사람의 몫은 하고도 남을 정도로 잘 장성했으니 자신보다 더 잘하리라 믿어서 그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드디어 제대로 된 도심이라 할 수 있는 캘러메인 영지에 가는 것과 이 시대의 귀족 정치판을 구경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16화]

이틀 뒤.

어머니에게서 캘러메인 백작의 생일잔치에 참여하는 걸 일임받은 베오날드는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과 함께 그곳에 참여할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선물은 베오날드가 직접 준비한 것으로 최상급 곰 가죽과 생포한 새끼 곰 2마리, 거기에 뼈로 만든 장신구와 곰 머리 박제, 그리고 약초와 사냥한 짐승, 몬스터의 뼈, 뿔로 만들어진 각종 의약품들과 저축한 돈으로 틈틈이 구한 보석과 짐승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장신구였다.

"네 덕분에 올해도 무사히 넘기겠구나."

"제 덕분이라니요. 다 아버지의 덕이죠."

"아무튼 부인의 말대로 네가 정말… 보물 같은 아이였구나. 할아버지를 뛰어넘을지도 모르겠어. 하하핫."

아버지는 베오날드의 성장과 완력은 완벽히 할아버지의 유전이라 생각했고, 의술이나 지식 쪽은 부인의 교육 덕분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모친과 협약해서 하게 된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모친도 속이고 있으니 딱히 죄의식 같은 건 없는 베오날드였다.

'어차피 세계를 위한 건데… 어쩌겠어.'

"아무튼 캘러메인 영지에 가면 조심해야 한단다. 거긴 우리 영지와 달리 귀족과 기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 봤자 베노피스만 하겠어? 하아~ 그립구나. 나의 정원~'

과거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영지를 떠올린다.

'베노피스'. 사치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저택은 물론 그 주변 영지도 아주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제국 수도보다 더 아름다웠던 도시. 평생을 들여서 영지민들도 살기 좋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완성한 자신의 정원이었다.

물론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을 지옥으로 만들었기에 낼 수 있던 성과였지만, 베오날드는 자신의 작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걸 가꾸는 데 평생을 들였는데… 망할 놈들은 순식간에 부숴 버리다니....'

"아,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버지만 잘 따라오면 되니까 말이야."

"아, 예. 알겠습니다."

상념에 빠진 것을 긴장한 것으로 오해한 아버지의 위로에 다시 정신이 든 베오날드는 아버지와 함께 준비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사흘 뒤,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과 함께 베오날드는 캘러메인 백작의 영지로 향했다.

사실 제럴 경의 영지에 들어간 적이 있기에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영지 밖으로 외출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베오날드는 살짝 설레고 있었다.

'영~ 나답지 않군. 음, 몸이 젊어진 탓인가? 역시 시골 생활이 너무 길어서 그랬던 걸까? 후우~ 원래 난 도시 출신이라고!'

"괜찮다. 그리 긴장할 거 없어요. 결국 다 사람 사는 곳이니...."

'아니, 긴장 안 했다고!'

뜻은 좋았지만 베오날드에겐 꽤나 지겨운 소리의 반복이었기에 들어 주는 척을 하면서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길 빌 뿐이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캘러메인 영지는 그래도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었기에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도달했다는 거였다.

베오날드는 드디어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차의 창을 통해 그곳을 바라보았다.

캘러메인 백작이 사는 성.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이 주변 지역의 맹주로 군림하는 귀족의 성. 어느 정도인지 대귀족이었던 자신이 봐주겠다고 생각하며 봤는데, 금방 실망하고 말았다.

'고작 이거? 작네? 이게… 이 근방을 주름잡는 귀족의 영지라고? 대체 500년간 무슨 일이 있던 거지?'

"하하, 많이 놀랐나 보구나, 베오날드. 저곳이 캘러메인 백작님 영지이자 도시란다. 아무튼 들어가면...."

'…놀란 게 아니라 쥐똥만 해서 어이가 없는 건데! 기껏해야 중소 도시겠구만!'

물론 중소 도시도 엄연히 '도시'이니 만큼 작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주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귀족이라고 해서 꽤나 큰 도시일 거라고 생각한 베오날드로서는 아주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환경은 좋아서 더 열 받네! 강도 있고! 산도 끼고 있고! 평야도 넓어! 저 땅들을 안 굴리고 뭐 하는 거야? 주변 영지와 거래 및 상업 교류도 하고 있으니까! 개발해서 넓히라고!'

"베오날드, 진정하렴. 아무튼 안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많을 거니까...."

"…예."

아버지의 말에 간신히 진정한 베오날드.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어쨌든 시골 깡촌보다는 나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 마차는 경비병들이 지키는 관문을 지나서 도심으로 들어갔고, 내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풍경은 자신이 죽고 500년이 지났지만 역시 대전쟁과 교단의 존재 때문에 문명이 후퇴한 탓인지 500년 전에 비해서 그리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베오날드의 기준에선 정말로 지방 소도시나, 다스리는 영주나 귀족이 형편없는 곳을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길은 잘 닦여 있었지만 돌아다니는 평민들과 집, 거리는 여지없이 지저분했고, 이상한 냄새들이 가득한 평범한 곳이라서 금방 흥미가 식어 버렸다.

'…별 볼 일 없군. 오히려 그 시골이 나을 정도야.'

"역시 어색한가 보구나. 하하하. 그래도 우리는 백작님의 저택에 머물 거니까 그리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일단은 우리도 백작님의 가족이니 말이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군. 하지만 '일단은'이라는 전제가 붙은 걸로 봐선 그리… 좋은 취급은 받질 못한다는 걸 내포하고 있군.'

하긴 아무리 버림패라고 해도 오랫동안 가문의 자존심을 세운 백작가에서 근본도 없는 용병 집안에다 딸을 내준 거니 별로 좋은 취급은 못 받으리라.

정통 대귀족인 베오날드의 시선에서 생각해 봐도 근본도 없는 용병이 갑자기 귀족이랍시고 자리를 잡는 꼴을 보면 충분히 배알이 뒤틀릴 터였다.

'그나마 능력이 좋으면 좀 타협을 할 수 있겠는데… 이 양반 같으면… 하아~ 이해를 못하지.'

약간의 무력이 있고, 사람은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용병이라는 디메리트를 상쇄할 수 있는 건 아니니 결론은 그냥 어떤 굴욕이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저 모양인 이상 베오날드에게도 똑같이 내려질 숙명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가로지른 마차는 잠시 후 캘러메인 백작의 저택에 도달했다.

도시는 형편없었지만 저택은 나름 백작가의 위용과 자존심이었는지 깔끔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택 입구와 밖은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안에는 잘 정돈된 정원과 건물들, 그리고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 깔끔한 옷차림을 한 메이드와 집사들이 오가면서 계속해서 정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500년이 지나도 이 풍경은 안 변했군.'

그리고 먼저 온 손님들이 많은 건지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었고, 그 위에 각 가문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각 가문의 하인들과 병사들은 각자의 말과 마차를 정비하거나 짐을 옮기는 등등 번잡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런 마차들이 수십 개가 넘으니 사람들은 개미처럼 끊임없이 일을 다니는 모습이었다.

"더스티클록 자작이시군요. 안내하겠습니다. 마차를 끌고 절 따라오십시오."

말끔히 차려입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서 다른 건물에 있는 마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친족이자 혈족이니 그쪽 방면으로 대게 해 준 것이리라.

엄격한 가신과 혈족의 구분. 그만큼 혈족에 대한 서열 구분도 심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한데 이분은 누구입니까? 더스티클록 자작님. 자작 부인은 안 보이시는군요."

안내를 마친 집사는 무언가를 적으면서 베오날드와 레이온 자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마 인명부 같은 것이리라.

그리고 자작 부인이 캘러메인 백작의 딸인데, 그녀가 오지 않은 것이라면 가족의 연이 끊어진 거나 다름없기에 집사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있었는데, 레이온 자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정을 설명했다.

"예. 그… 아주 근래에 둘째랑 셋째가 생겨서 현재 애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여기 우리 첫째 베오날드와 함께 왔습니다. 캘러메인 백작님의 외손자이지요."

"오… 그렇군요. 베오날드 도련님이십니까? 한데 혈족들의 성인식 때 뵌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 그게 이 녀석, 아직 14살입니다. 내년에 성인이 되지요."

"14살이라고요? 아무리 봐도...."

'이미 성인으로 보이는데.'라는 말을 뱉지 않고 삼키는 집사였다.

누가 봐도 베오날드는 갓 성인이 된 15세는커녕 이미 성장을 끝낸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를 바라보았다. 딱히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레이온 자작의 성정에 대해선 이미 잘 알고 있는 집사였기에 그가 수작 부리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레이온 자작은 거짓말 같은 걸 할 인간이 아니지.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니까. 뭐, 이쪽 도련님은… 확실히 아가씨의 분위기나 느낌을 물려받은 것 같군. 아버지는 개인데, 아들은 늑대인가?'

"얘가 좀 빨리 큰 게 아무래도… 제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 것 같아서 말이죠. 하하하."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럼 성년이 아니니 다른 행사엔 참여 안 하시겠군요."

"예. 선물을 올릴 때나 가볍게 소개하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용무가 있으면 불러 주시고, 숙소에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결국 집사는 레이온 자작과 이야기를 마친 후 바로 물러났다.

그러자 레이온 자작은 한숨을 크게 쉬면서 베오날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우~ 정말이지 여긴 올 때마다 긴장된다니까.... 보통은 절차를 밟는 건 네 어머니가 해 주는데, 오늘은 내가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좀 답답하겠지만, 며칠만 여기서 하인이랑 우리 짐을 지키면서 지내면 된단다."

"밖엔 못 나가나요? 사고 싶은 것도 있는데."

"그게… 일단 잔치가 끝날 때까지는 이 저택… 아니, 숙소에서 너무 멀리 가진 말렴. 그럼 나는 여기저기 인사드리고 올 테니 짐이랑 하인들을 부탁한다. 시내 구경이나 물건 사는 건… 돌아가는 길에 하자꾸나."

"예. 그러도록 하죠."

그러곤 머물게 된 저택의 방에 짐을 옮겨 두고 베오날드는 방에, 하인은 마차를 돌보러 갔고,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은 다른 귀족과 캘러메인 백작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홀로 떠났다.

'…그나저나 소개라면 나도 같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음~ 아까 전에 한 말로 보아선 '성인식' 때 본래 소개하게 되어 있던 건가? 뭐, 그런 관습인가 보지.'

가문마다 관습이 조금씩 다른 건 500년 전에도 아주 흔하게 있던 일인 만큼 베오날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부친의 말을 듣기로 한다.

아까 전 일개 집사에게도 말을 높이던 꼴을 보니 어차피 밖에 나가 봐야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거나 광대가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추가로 지금 들어와 있는 숙소의 질만 봐도 더스티클록 자작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아주 나쁜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혈족인데 저택 내 구석진 곳에 거의 짱박아 두다시피 한 건 어지간히 바깥에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하긴 사실상 가문의 수치이지. 차라리 내 경우처럼 그래도 피라도 받거나 늘 말하던 선대처럼 유능하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아버지 레이온 자작은 그 어느 쪽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람 좋은 게 전부인 양반. 그렇기에 결국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했다.

베오날드가 검술이라도 연습할까? 생각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숙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음?'

"어? 뭐야? 여기 사람이 있었네?"

노크도 없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온 것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밝은 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무례하게 들어왔지만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전혀 없는 눈빛으로 베오날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거기에 입고 있는 옷은 순백 베이스에 청색 무늬가 들어가고 소매 부분이 금실로 장식되었으며 가슴엔 산맥 모양의 엠블럼이 달린 화려한 옷으로, 소재도 고급스러웠으며 그 산맥 모양의 엠블럼과 보석으로 치장된 것으로 보아 이 저택의 주인 캘러메인 백작가의 사람인 게 확실했다.

"넌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고 대놓고 베오날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무례한 말을 내뱉는 소년이었다.

[17화]

'…어이가 없군.'

"아, 더스티클록 자작가에서 온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속으로 짜증 내는 것과 별개로 겉으로는 허리를 숙이고 손까지 비벼 가면서 비굴하게 소년을 대하는 베오날드였다.

처음부터 공작이 아니었고 백작가에서부터 시작한 그는 딱 봐도 지금의 자신보다 상위 귀족의 자제로 보이는 자를 대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 그 시골뜨기네? 매년 쥐뿔도 없는데 용케도 오네?"

"쥐뿔도 없으니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백작가의 빛을 받아야 살 수 있으니 말이죠."

"푸하핫! 너 말 되게 잘한다? 보기엔 딱딱하게 생겼는데!"

베오날드의 재치 있는 대답과 자기보다 크면서 알아서 굽실거리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년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와서 미리 가져다 놓은 백작의 생일 선물들을 뒤적거렸다.

천으로 잘 가려 놓았는데 뒤적거리자, 작은 나무 우리 안에서 자고 있던 새끼 곰 2마리가 깨어나더니 울어 댔다.

"오, 뭐야, 이거? 새끼 곰? 살아 있는 거네? 우와아~ 제법 신기한 걸 가져왔구나?"

"도련님, 그건 엄연히 백작님의 생신 선물입니다."

"어? 그래? 하지만 괜찮아. 내가 가져도 할아버지는 뭐라고 안 해. 그러니 가져간다?"

'…백작의 손자인가 보군. 아, 그러면 내 친척이 되는 건가?'

베오날드는 캘러메인 백작의 외손자, 이 안하무인의 소년과는 친척이 되겠지만 굳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성인식 때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조용히 있는 편이 좋았고, 거기에 이 예의 없고 오만방자한 꼬맹이의 태도를 보니 가까워져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맨날 가죽뿐이야. 으음~ 이건 뭐야?"

"상처에 바르는 약입니다. 약초로 만들었지요."

"시시해."

소년은 베오날드가 선물용으로 정성 들여 만든 약을 보더니 시시하다는 듯 집어 던졌다.

고작해야 작은 케이스에 담긴 약일 뿐이지만 저거 하나를 만드는 데 많은 정성을 쏟았던 베오날드는 순간 움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망할 자식이....'

너무 오랜만에 자신을 무시하는 자를 만나서 그렇지, 전생에서도 이런 굴욕이 아예 없지는 않았었다.

그렇다곤 해도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약을 집어 던지니 가슴이 꽤 아팠지만, 일단 지금은 꾹 참고 이 망할 도련님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우와아아! 이 곰 가죽! 엄청나다! 이거 나 할래! 내 방에 카펫으로 깔아야지!"

"도련님, 그것도 백작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입니다만?"

"뭐 어쩌라고? 아까 말했잖아. 할아버지 건 내 거나 다름없다고! 그럼 간다!"

베오날드의 말을 무시한 소년은 그렇게 백작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제멋대로 털어서 나갔다.

이름도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 안하무인에 무개념인 소년이 백작의 손자라는 걸 알았기에 나중에 볼 것이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조용히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 주도록 하지. 그보다 이 망할 백작가는 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참 나~'

아주 어린아이도 아니고, 10대 중반 정도… 즉, 베오날드 또래이면서 이런 무개념 짓을 저지르는 것도 문제였지만, 공물로 가져온 것을 멋대로 털어 가는 저 버르장머리, 거기에 자신이 정성 들여서 만든 약을 무시하는 행위까지. 선이란 선은 이미 죄다 넘어 버린 꼬맹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차례 인사를 돌리고 온 레이온 자작에게 대충 친족이고 저택의 도련님인데 알 수 없는 꼬맹이가 멋대로 들어와서 깽판 치고 갔다는 것을 그대로 전했다.

"금발에 하얀 옷? 랄트 도련님이시구나!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딱 봐도 지체 높으신 도련님 같아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습니다."

"휴우~ 그래, 잘했다. 지체 높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유력한 차기 후계자 후보이니 말이다."

'…망했네.'

이어서 아버지는 베오날드가 만났던 소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랄트 캘러메인. 나이는 공교롭게도 베오날드와 동갑인 14세. 캘러메인 백작의 장남이자 현재 거의 차기 가주로 유력한 렌겔 캘러메인의 둘째 부인에게서 나온 독자(獨子)로, 독자이다 보니 가문에서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으며 누구도 그 횡포를 말리거나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폭군이군요."

"그렇지. 백작님이나 렌겔 님은 그래도 성인이 되면 나아질 거라고 하던데...."

"사람은 천성보다는 환경과 교육이 만들죠."

"너도 그리 생각하나 보구나. 후우우~ 정말 곤란하군. 백작님의 선물이 이렇게 털려 버렸으니 어쩐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않나요?"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창피만 당하겠지. 어쩐다~ 그래도 보석은 털리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도련님이라지만 역설적으로 어린애 하나 못 막아서 백작의 선물을 뺏겼다고 한다면 가뜩이나 꼬투리 잡을 구석을 노리고 있는데 잘 걸렸다며 이 벼락출세한 자작가 집안을 다들 비난할 것이다.

자신들보다 강한 자에겐 아무 말도 못하지만 약한 자가 약점을 드러내면 철저히 밟아 뭉개는 게 이 바닥 습성… 아니,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본성일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끙끙대는 판국이었는데, 베오날드는 그동안 열심히 머릿속에서 주판을 굴리고 있었다. 

'으으음… 어떻게 할까? 이대로 그냥 무시받고 돌아가는 엔딩도 썩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면 좀 이르지만 데뷔할까?'

"음, 어쩐다. 급히 조달할 방법이 없을까? 끄으응~ 물건 사야 할 돈으로 선물을 따로 구해야 하나? 역시 부인과 같이 왔어야...."

끙끙대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던 베오날드는 주판을 튕기다가 결국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보자, 백작님 생신이 3일 뒤였죠?"

"그렇다만? 뭔가 생각이 있느냐?"

"이렇게 된 이상 현장 조달하는 수밖에요. 모험가 길드 있는 방향이랑 무기류 파는 곳 좀 알려 주세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니까요. 그 정도는 아시죠?"

"아, 알았다."

베오날드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 눈치챈 레이온 자작은 곧바로 이 도시의 구조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곧장 자신의 돈과 선물로 준비한 의약품을 챙겨 들고 저택을 떠나 도심으로 향했다.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시골 촌구석과는 다른 제대로 된 도시였기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는 아버지가 알려 준 무구점부터 방문했다.

"어서 오십쇼~"

"가죽 갑옷 하나와 철 투구, 도끼 한 자루, 장검 하나, 그리고 단검 3개, 튼튼한 밧줄 두 묶음, 물통 하나와 부싯돌까지 빠르게 부탁하지. 가죽 갑옷은 징이 박혀 있으면 더 좋고, 투구는 완전히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걸로 부탁하네. 급한 용무일세."

"예? 아, 예. 아, 알겠습니다."

느긋하게 있던 무구점 주인은 베오날드의 속사포 같은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신속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처음 보는 손님에게 뭔가 벗겨 먹을 생각을 하겠지만, 현재 캘러메인 백작의 생일잔치로 캘러메인 백작 휘하는 물론 축하하러 온 여러 귀족들이 모두 이 도시에 모여 있었고, 딱 봐도 외양부터가 귀티와 위압감이 서린 베오날드였기에 귀족이라는 걸 감지한 상인은 별 수작 안 부리고 그가 원하는 것들을 내주었다.

"음, 다행히 물건은 나쁘지 않군. 가격은?"

"으, 은화 8장입니다."

"적절하군. 은화 10장. 2장은 팁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필요한 장비류를 구한 베오날드는 그다음 이 도시에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 길드. 몬스터 퇴치를 맡거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을 탐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베오날드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주로 의뢰를 하는 쪽이었지, 자신이 해결하는 쪽은 아니었기에 오자마자 일단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보자, 어디 좀 쓸 만한 몬스터가 없으려나?'

"저기, 손님, 의뢰를 하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위로 올라가서 이야기하심은...."

"아니, 그냥 잠깐 구경 좀 하고 있네.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하지."

"예, 그러십시오."

길드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말을 걸었지만 베오날드는 그것을 무시한 채 의뢰 게시판의 의뢰들과 주변에 표시해 놓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백작의 영지 주변의 주요 산과 숲, 강에 어떤 몬스터가 있고 없는지 서식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딱 봐도 주의 사항으로 적힌 강력한 몬스터도 있었다.

'예상대로 오길 잘했군. 주요 위험 몬스터로는 아울베어, 그레이트 울프, 오크 로드 부락, 그리폰 둥지까지.... 음~ 조금은 무서운걸?'

500년 전에도 들어 본 중대형 몬스터들이 한가득이었는데, 각 영역은 기존 모험가들의 희생과 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들의 영역으로는 가지 말라는 주의 사항도 붙어 있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위치를 확인하고 기억 속에 넣어 둔 다음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사냥감을 선택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폰 잡아야지.'

그리폰. 독수리의 날개, 앞발과 사자와 같은 맹수의 몸을 가진 생물.

주로 높은 산에 살며 기습적으로 강하해서 소나 말 같은 생물을 잡아먹는 걸로 유명했다.

다만 사는 곳이 워낙 높은 산인 데다 거리도 꽤 먼 곳이었는데, 베오날드가 이 생물을 선택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잡으면 가장 멋있겠지. 으으음~'

다른 모든 몬스터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멋'의 기준에서 따져 보면 역시 거대한 독수리의 머리와 늘씬하면서 근육질인 고양잇과 맹수의 몸통을 가진 그리폰만큼 멋이 흘러넘치는 것도 또 없으리라.

'상상만 해도 끝내주는군.'

물론 잡는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기왕 데뷔하는 무대라면 역시 최고로 멋진 것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그의 머릿속에는 나름 귀족의 품격과 멋,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구로 가득해서 자신이 14세이며 너무 능력을 드러내지 말고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 맞다. 나 14살이었지."

한껏 야망에 취해 있던 베오날드가 자신이 지금 14살에 가진 카드를 그동안 잘 숨겨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산속 깊은 곳까지 와서 야영을 하려던 타이밍이었다.

"나 정도 되는 자가 이런 실수를!"

그래, 그 랄트라는 꼬맹이가 심기를 건드린 것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귀족으로서의 욕구까지 폭발하면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리라.

"그럼 그리폰은… 무리잖아! 젠장! 잡아도 무리라고! 그러면 하향 조정해야 하나? 끄으으응~ 그럼 14세에 기량이 적절한 몬스터가 뭘까? 젠장! 그보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너무 의욕에 찼던 머리가 식어서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산 깊은 곳까지 와 있었다.

그것도 그리폰의 서식지에 가까운 곳까지, 험한 산행로를 도끼와 검으로 뚫어 내고 와서 도착하니 이제야 떠오른 것이었다.

"으으음… 어쩐다? 후우우~"

한숨을 푸욱 쉰 베오날드는 오다가 잡아서 딱 알맞게 구워 낸 토끼 고기를 뜯으면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일단 자신의 외양과 기량이 14세를 벗어나긴 했지만 너무 화려한 건 잡으면 곤란할 거란 생각에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그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어라?"

[18화]

삐이이익! 휘이이이익!

작은 휘파람 같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베오날드의 귀에 들려왔다.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나 몬스터의 소리라기엔 너무나 가늘고 미약한 소리여서 오히려 더 귀에 잘 들어온 베오날드는 그 소리를 쫓아서 움직였다.

몇 개의 수풀과 나무를 지나서 소리가 난 곳에 가까워지자, 거기엔 아주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삐이이이… 삐이....

"이건 그리폰… 새끼?"

삐이… 삐이이익.

자세히 보자 아주 작은 그리폰이 누워서 계속 울어 대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일단 근처에 그리폰의 수컷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는데, 자세히 보니 새끼 그리폰은 오른쪽 날개가 아예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그 흔적만 남고 퇴화되어 있었다.

'…과연, 딱 봐도 날개 한쪽에 장애가 있어서 버려진 것 같은데.... 비행 연습을 하다가 낙오한 걸까? 아니면 낙오한 걸 부모가 더 이상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마나를 끌어 올려 주변의 기척을 감지해 보았지만 성체 그리폰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 주변이 그리폰의 서식지이긴 했는데, 아무튼 새끼 그리폰은 베오날드의 품에서도 계속해서 울 뿐이었다.

삐익… 삐이익....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인지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울음소리를 내고 발버둥 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마 이 아이는 나름대로 부모를 부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것이리라.

하지만 자연의 섭리상, 장애를 가진 새끼는 도태될 것이 뻔했기에 이 새끼 그리폰의 부모 또한 눈물을 머금고 다른 새끼들에게 투자하고자 이쪽을 버린 것일 터였다.

'그리폰 잡으러 왔다가, 신기한 인연이군. 아무튼 살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데려가 보자.'

이대로 놔둬 봐야 야생 몬스터나 짐승의 먹이밖에 되지 않는다.

부모 그리폰도 버린 것 같으니 베오날드는 여지없이 자신이 거두기로 하고 모닥불을 피워 둔 곳으로 데려가려는데, 이번엔 묶어 둔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자신의 말을 야생동물이 노린다는 것을 안 베오날드는 즉시 검을 뽑으며 달려갔다.

"망할 새끼들이!"

크르르르르! 으르르르릉!

"늑대인가? 아니, 좀 더 큰데? 아무튼 상관없지! 속전속결이다!"

도착하자 보통 늑대보다 좀 큰 검은 늑대 5마리가 말을 둘러싼 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구워 놓은 토끼 고기는 이미 건드렸는지 잇자국이 나 있었고 고기는 절반 정도만이 남았다.

자신의 식사를 건드린 것에 참을 수 없다는 듯 베오날드는 즉시 마나를 끌어 올려 검술을 시전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오식(五式)-사이드와인더'.

보랏빛 검기가 파도처럼 굽이치면서 날아갔고, 늑대는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끼고 잽싸게 피하려고 했지만 도망치는 루트가 마침 파도처럼 굽이치는 궤도에 걸려 그대로 한 마리가 목이 베여 쓰러졌다.

그리고 다른 4마리는 각자 흩어져서 으르렁거리면서 베오날드를 노려보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히 말의 곁에서 물통을 꺼내어 새끼 그리폰에게 물을 먹였다.

"조금씩… 조금씩… 그래, 천천히 마셔라."

크르르르릉! 컹!

다른 늑대 하나가 베오날드가 한눈을 팔고 있다고 생각해서 달려들었지만, 순식간에 보랏빛 궤적이 늑대의 머리를 베어 냈다.

조용하게 움직임과 소리도 내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단숨에 뱀처럼 베어 내는 검법,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칠식(七式)-붐슬랭'이었다.

삐이이이… 꾸우우....

"그래, 배가 고프겠지. 보자, 식사는...."

그르르르… 컹컹!

컹!

동족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된 것을 본 이 늑대 무리의 리더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인간은 자신들이 사냥할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물러나는 것이리라.

베오날드는 도망가는 늑대들을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품에 있는 새끼 그리핀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죽은 늑대의 시신을 끌어왔다.

"음, 그러니까… 그리폰이 조류 쪽에 가깝든가? 고양이 계열 맹수 쪽에 가깝든가? 아, 이거 분명 공부한 적이 있는데...."

꾸우....

"알았어, 알았어. 기다리렴~ 일단 물을 끓여서 푸욱 익혀야 하는데… 아니, 일단은 익힌 것부터 내가 씹어서… 줘야 하나? 이러다 아사하겠네."

베오날드는 일단 임시방편으로 늑대들이 먹다 남은 익힌 토끼 고기를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먹이로 줘 보았다.

전생에 연금술을 공부하다가 들은 지식으로 새들은 반쯤 소화된 걸 뱉어서 먹인다고 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냥 우유 같은 거나 생고기를 먹여야 하는 건지 갈등되는 상황에서 천만다행으로 그리폰에도 적용되는 건지 베오날드가 준 것을 잘 받아먹고 있었다.

"후우~ 내가 어쩌다가.... 아무튼 생일 선물은 저걸로 때워야겠군."

삐이이! 삐이이이!

"참 나, 기가 막힌 녀석. 방금 전까진 죽을 기세더니, 그거 먹고 다시 난리냐. 조금만 기다려. 이번엔 푸욱 익혀서 먹기 쉽게 해 주마."

그렇게 베오날드는 새끼 그리폰에게 조심해서 밥을 먹였고, 약 2시간가량 고생해서 조금씩 먹이고 나자 드디어 배가 부른 건지 잠드는 새끼 그리폰이었다.

베오날드는 자신도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후우~ 이 정도면 적절한 선물이겠군. 일부러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고."

바로 늑대의 해체. 시체 상태로 가져가 봐야 냄새만 나고 더러울 테니 미리미리 가죽과 뼈, 이빨, 고기를 얻고, 내장은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이 어두운 산간에 더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재빨리 채비를 마치고는 새끼 그리폰을 품에 조심스럽게 싸서 하산했다.

'정말이지 너는 운이 좋군.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날 만났으니 말이야!'

본래 야간 산행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더 많은 야생동물과 몬스터를 만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지만, 5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별'들을 통해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는 베오날드에겐 문제도 아니었다.

'또 그리폰의 영역만 나가면 이제 남은 건 끽해야 자잘한 몬스터들뿐이지.'

타고 있는 말에겐 너무나 가혹한 밤이 되겠지만, 그래도 방금 늑대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만큼 빨리 이 산을 내려가는 것엔 말 또한 찬성하리라.

물론 너무나 지쳐 있었기에 간혹 속도를 줄이거나 말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으면서 스태미나 조절을 한 탓에 날이 밝아도 아직 산중이었다.

"완전히 날 샜군. 하루라도 오래 살아야 하는 내 건강엔 별로 안 좋은데… 휴우~ 음?"

삐이이이!

"먹고 자니까 힘이 좀 나는가 보구나. 아니면… 배가 더 고픈 건가? 속 편한 녀석~"

새끼 그리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베오날드를 보면서 계속 울어 댔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 먹이까지 준 것을 아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배고프니까 졸라 대는 건지는 몰라도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엔 육포를 씹어서 이유식으로 만들어서 먹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애들 키울 때가 생각나는군.'

그 초롱초롱한 눈과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것을 보니, 베오날드는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최고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아이를 얻고, 돌본 적이 있지만 역시 가장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건 첫 자식이었다.

'쳇, 이렇든 저렇든 알테리오 녀석이 생각날 수밖에 없군.'

서투른 초보 아빠였을 때의 기억도 기억이고, 가장 재능 있고 총명하던 아이여서 후계자로 삼았기에 기억이 강했고.... 그 무엇보다도 차기 가주 자리에 앉는 게 확실한데 자신을 배신한 그 강렬한 기억 때문에 알테리오의 얼굴만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망할… 자식… 씁. 이럴 땐 기억이라는 게 참 괴로운 거군. 그래, 안 좋은 기억은 다시 덧칠하는 수밖에 없지. 그런 의미에서… 네 이름은 이제! 알테리오다!"

삐이?

"알. 테. 리. 오. 이게 네 이름이다."

삐이이잇! 삐이잇!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밥을 더 달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전 아들의 이름을 물려받은 한쪽 날개가 망가진 새끼 그리폰, 알테리오는 신나게 울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아무튼 베오날드는 그래도 수확은 수확이라 생각하며 기쁘게 산을 마저 내려갔다.

백작의 생일은 앞으로 이틀 뒤.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일단 하루는 도시의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무리 날개 하나가 망가졌다지만 그래도 몬스터인 알테리오를 보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몰랐기에 잘 숨기기 위해서 작은 철제 새장을 산 다음 거기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온 덕에 이제 좀 더 제대로 된 이유식을 조합해서 먹일 수 있게 되었고, 알테리오가 잘 먹는 것을 본 베오날드는 안도하고는 드디어 잠을 청했다.

삐이이! 삐이이?

"좀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좀만 참으렴. 널 보면 노리려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거라서 말이다."

직접 만든 작은 우리에 알테리오를 집어넣고 천으로 덮은 베오날드는 그제야 좀 편하게 잠들 수 있… 진 않았다.

삐이이익!

"으으음… 아, 맞다. 이제야 기억났어. 대부분 메이드들에게 맡겨서 몰랐지만 원래 어린애들은… 막 먹고… 자고… 막 먹었지. 젠장...."

검술과 마나 호흡법 때문에 감각이 민감해져서인지 베오날드는 알테리오가 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미리 만들어 둔 이유식을 먹였다.

정말로 홀몸으로 자식(?)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새삼 깨닫게 된 그는 적어도 돌볼 사람을 고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이(?)를 갖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알테리오… 이렇게 정성 들였는데, 너… 나중에 야생성 살아나서 말 안 듣고 날뛰면 절대 가만 안 둘 거다. 응? 알았니?"

삐우우우~ 삐우우우~

"…나는 못 자는데 너는 맘껏 자냐. 하아아아아암~"

자신의 푸념을 못 들은 척하려는 건지 푹 드러누운 알테리오를 보면서 베오날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자다가 깨다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 그래서 결국 제대로 수면 부족을 해소 못한 탓인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베오날드였다.

"어디 보자… 늑대 가죽이랑 뼈, 좋아. 머리, 좋아. 알테리오도 딱 밥 먹이고 재웠으니 좋아. 휴우~ 내일이 백작의 생일이니 아슬아슬하게 맞췄군."

알테리오를 조심히 숨겨서 캘러메인 백작의 저택으로 돌아온 베오날드는 겨우겨우 자신들이 배정받은 저택의 방으로 올 수 있었다.

도착하자 거기엔 자신을 기다리느라 지친 건지 아니면 선물을 제대로 준비 못해서인지 얼굴이 반쪽이 돼서 폭삭 늙어 버린 레이온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저 왔어요."

"베, 베오날드 왔느냐? 그래서 물건은?"

"여기요. 좀 큼직한 늑대들을 잡았어요. 다른 몬스터를 노려 보고 싶었는데… 거리라든가 시간의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오오...! 이 정도면 최상품이구나. 근데 잠깐, 이… 검은 털은? 이 늑대들은 이 근방에서 살지 않는 늑대일 텐데?"

썩어도 준치라고,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대부분의 진상품을 바치는 영지의 귀족답게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검은 늑대의 가죽을 보면서 감탄하는 레이온 자작이었는데, 역으로 그런 점 때문에 이 근방에서 살지 않는 것을 눈치채 버렸다.

'아차아… 그랬었나? 제길! 캘러메인 영지 주변의 동물 분포도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낭패라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급히 변명을 짜내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그 순간 알테리오를 숨겨 놓은 철장에서 또다시 밥 달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잇!

"…음?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새?"

"아… 예, 대충 그 비슷한 것이긴 한데...."

낭패는 거기서 끊이질 않았고, 결국 베오날드는 한숨을 푸욱 쉬면서 알테리오가 들어 있는 작은 철장의 천을 열어서 보여 주었다.

날개 한쪽이 없지만 그래도 그리폰은 그리폰. 알테리오를 본 레이온 자작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19화]

"이, 이건? 그, 그리폰? 맞느냐? 위험종 몬스터 중 하나! 하늘을 날아서 내려와 소나 말, 양을 잡아먹고 도망치며 때론 인간도 습격하는 건데… 검은 늑대도 그렇고, 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그러니까 뭐랄까? 젊음의 혈기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원래는 그리폰을 노리려고 했는데 말이죠."

14세면 젊다고 말하기엔 어린 수준이었고, 전생과 합쳐서 베오날드의 나이는 또 이미 노년을 넘어선 수준이라서 어디에도 말이 맞지 않았지만 그의 변명을 들은 레이온 자작은 뭔가 말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폰을 노리려 했다고? 맙소사! 여신이시여!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곤 해도 아직 어린데! 그리폰이라면 숙련된 모험가들도 함부로 못 잡는 것이다!"

"하하하… 뭐, 호기롭게 시도만 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건 못 잡았고 요놈만 주워서 도망쳐 왔어요. 이 검은 늑대들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한 겸에 잡은 거고 말이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느냐! 네가 죽으면 네 어미는...."

"그래서 시도는 안 하고 진작 도망쳤다니까요. 아무튼 이 녀석에 대해선 비밀로 해 주세요. 제가 기를 테니까요."

"기, 기르겠다고? 그리폰을? 아니, 오히려 백작님에게 바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위험할지도 모르고… 게다가 이 정도면 최고의 선물일 텐데...."

날개 한쪽이 없어도 위험종인 그리폰. 그것도 살아 있는 새끼이니 가치는 웬만한 사냥감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 분명 백작에게 바치면 빼앗긴 곰 가죽 따위는 이미 상관없을 레벨이었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부친의 의견을 부정했다.

"아니죠. 너무 귀한 걸 바치면 오히려 시샘받을 수 있고, 눈에 띕니다. 딱 이 정도가 좋아요. 시골 촌놈 출신인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한도이지요."

"그… 그런가?"

"이렇든 저렇든 우리 가문은 어차피 미운 오리 새끼예요. 딱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선물이 좋아요. 아무튼 이놈은 제가 맡아서 키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야생성을 안 잃어버리면 그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네가 그런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베오날드의 의견이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부친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순응했다.

가끔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 순순함 하나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괜히 부친의 권위니 뭐니 하면서 옳은 의견인데도 귀를 꽉 막은 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인간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혹시 그 망할 도련님이라는 인간이 오거나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 녀석에 대해선 비밀로… 아니, 그냥 눈속임을 할 겸 밖에서 다른 새라도 사 오는 게 좋겠네요. 제가 이 녀석을 감시할 테니 아버지,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늑대 가죽을 좀 더 깔끔하게 다듬을게요."

"그래, 알았다! 금방 다녀오마."

'휴우~ 진짜 말 하나는 통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 잘 듣는 아버지를 보내고, 베오날드는 다시 울어 대던 알테리오에게 밥을 주었다.

그리고 늑대 가죽을 손질하다가 잠시 후 아버지가 가져온 새를 알테리오가 자는 상자 위에 놓아서 위장으로 삼는 와중에 아버지는 또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드린다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데, 또 어디선가 갑자기 경박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 소리는? 아, 또 그놈인가?'

쿵! 쿵! 쿵!

주변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저 경박한 발소리. 딱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던 베오날드는 한숨을 푹 쉬고 곧바로 알테리오를 숨겼다.

늑대 가죽이야 까짓것 그냥 또 줘 버려도 되지만, 알테리오는 자신이 기르기로 한 만큼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 절대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군.'

쾅!

빠르게 손을 써서 감추고 대신 사 온 새를 돌보는 척하면서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귀족가의 자식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태도로 문을 쾅! 박차고 들어온 랄트 캘러메인은 카나리아를 돌보고 있는 베오날드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음? 어라? 없나? 왜 없지?"

오만방자한 태도로 인사나 통성명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기만 할 뿐, 눈앞의 베오날드를 완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랄트였다.

속으론 짜증이 올라왔지만 베오날드는 여유 있게 참아 내면서 랄트에게 물었다.

"뭘 찾으시는지요?"

"새끼 그리폰이 있다고 하던데? 어디 있어?"

'....'

아주 자기 것인 양 대놓고 찾는 태도도 어처구니없었지만, 대체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필시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보이지 않게 철창 우리에 잘 감췄고, 주변의 기척까지 철저하게 신경 써 가며 알테리오가 밥 달라는 소리도 크게 나지 않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먹이를 주었고, 이 저택에 올 때도 늑대 가죽만 보였지 잘 숨겨서 가져왔는데,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단 말인가?

'아… 망할 아버지겠군. 새어 나갈 곳이 딱 거기뿐이야. 어쩔 수 없군.'

대체 어디서 입을 연 건지 모르겠지만 베오날드는 대강 예상이 갔다.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닐 테지만, 혼자서 끙끙대다가 혼잣말을 한 것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야 있긴 합니다. 지금은 금방 먹이를 먹여서 재워 두었죠."

존재 자체가 긴가민가하다면 배 째고 모른 척하겠지만, 저 태도를 보면 분명 알테리오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숨겨 두었다는 걸 능숙하게 포장해서 변명하는 베오날드였다.

어차피 저 안하무인의 애송이는 제멋대로 막 헤집으면서 찾아내려고 할 게 뻔했으니 존재 자체는 밝힌 것이다.

"내놔. 할아버지 선물은 내 거잖아."

얼마 전에 봤던 그 패턴으로 또다시 강탈하려고 억지를 부렸지만 베오날드는 이번만큼은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백작님께 드릴 선물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영지에서 나온 거면 내 거잖아."

"애초에 그리폰은 백작님의 영지에 서식하는 종이 아닙니다. 말을 타고 하루 넘게 달려서 건너간 곳에서 우연히 구해 온 것이지요."

"이이익!"

차분하게 말하는 베오날드의 논리에 막히자 랄트 캘러메인은 무섭게 베오날드를 노려보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어떤 자도 자신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 이상한 놈이 자신을 거역하고 있는 것부터 화가 날 만했다.

"아무튼! 아무튼 내놔!"

'…그렇지. 이게 14살이지. 그건 그렇다 쳐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잘 먹고 잘 자라서 잘 꾸며 놓았기에 멀쩡한 외모에 맞지 않게 징징대면서 억지를 쓰는 랄트였다.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면서 징징거림이라곤 허락하지 않던 무자비한 자신의 생전 부친 벨릭스를 떠올리며 이 짜증 나는 소리를 어떻게 막을지 고민하는데, 그 와중에도 랄트는 자신의 징징거림을 무시하는 베오날드에게 한 번 더 엄포를 놓았다.

"안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말해서 가만 안 두겠어! 시골 촌놈 주제에!"

"네. 확실히 시골 촌놈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엄연히 백작님의 혈족입니다?"

"그게 뭐 어쨌는데?"

"음, 교육을 못 받으셨나요? 장차 이 캘러메인 가문을 이끄셔야 하는 도련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백작가의 주변엔 백작가의 힘에 굴복한 자들도 있지만, 혈연(血緣)을 이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가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 캘러메인 백작의 영향권 내에 있는 영지가 많은 것이지, 순수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지가 광대한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신뢰를 쌓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혈족은 그 신뢰를 일단 '피'로서 보장하며 같은 배를 탔을 확률이 높기에 반드시 마음을 잡아 놔야 하는 아군이었다.

'물론 전생의 아들놈처럼, 가장 믿었는데 배신을 때린 놈도 있지만.... 가문의 운영은 결국 사람을 보는 눈과 혈족의 관리가 기본.'

"그래서 어쨌는데?"

"어쨌긴요. 아무리 시골 촌놈에 근본이 없고 쥐뿔도 없지만 엄연히 저도 백작님의 피를 나눠 받은 혈족입니다. 게다가 그리폰의 새끼라면 꽤 화제가 될 보물이죠. 자, 그럼 종합해 보죠. 가문의 위세를 이용해서 혈족의 물건을 합당한 이유 없이 빼앗는 차차기 후계자의 모습을 보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작은 새 한 마리 때문에 무엇을 잃을지 아십니까?"

"…뭐야, 그게?"

베오날드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그의 분위기와 위압감에 눌린 건지 랄트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멈추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원래부터가 키와 덩치의 차이도 있었지만, 품격은 행동과 언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법이다.

"뭐냐고? 그게!"

대귀족으로서 차분히 압박하는 베오날드의 언변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랄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계속 저항하려고 언성을 높이고 안하무인으로 굴었지만, 그래 봐야 베오날드에겐 병아리가 발버둥 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날 같은 미소를 띤 채 풍선을 터뜨리듯 랄트의 앞에서 입을 열었다.

"자, 이다음은 백작님 혹은 도련님의 아버님께 여쭙고 오십시오. 시골 촌놈인 제가 가아암히~ 캘러메인 백작의 차차기 후계자이신 랄트 도련님을 교육할 입장은 아니니 말이죠."

"씨이! 뭐어?"

"대신 답을 들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이 그리폰 새끼를 드리지요. 제게 흐르는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걸고서 말이죠."

"…좋아! 너 가만 안 둘 거야! 여기서 딱 기다려!"

"예예~ 도련님. 전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습니다."

랄트는 그렇게 씩씩대면서 방을 나갔고, 베오날드는 느긋하게 침대에 앉아서 또다시 잠에서 깬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먹였다.

아무리 자식 사랑이 대단한 아비나 조부라고 할지라도 제정신 박힌 가문을 지키는 가주라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번에도 또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면… 이 가문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혈족의 가치와 가솔의 중요성을 모를 정도로 눈이 흐려진 가주나 후계자가 있는 가문이라면 버려도 아쉬울 게 없었다.

이 백작가를 배의 선장이라고 볼 때, 그 혈족이 있는 분가나 혈연으로 연결된 다른 가문들은 선원 같은 존재였다.

선장이 제아무리 유능하다고 한들 혼자서 거대한 배를 몰 순 없듯이 선원들과의 협력 관계를 잘 이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선장이라는 자가 자신의 권위와 힘을 생각해서 선원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권위와 인망에 상처를 입고, 혈족 간에 신뢰가 깨져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저 유일한 독자(獨子)가 자신이 차차기 후계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벌이는 패악질은 자신에게만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을 것이기에 더더욱 혈족 간의 신뢰의 사슬을 녹슬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결국… 언젠가 작은 위기가 일어났을 때, 산산이 부서지겠지.'

그렇게 되면 백 년, 천 년 갈 것 같은 가문도 단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자 이번엔 정숙하고 가벼운 발소리로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는 것이 들려왔고, 잠시 후 매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안에 있는가?"

"예, 있습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갈색 머리와 깔끔하게 기른 수염을 가진 중년 남성.

화려하지 않은 흑갈색의 옷을 입었으나 장신구는 꽤 화려한 것이 붙어 있어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엔 아까 전에 안하무인으로 날뛰었던 랄트 도련님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같이 온 중년 남성은 굳은 표정으로 베오날드에게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나는 렌겔 캘러메인. 캘러메인 백작님의 둘째 아들이자 그분의 후계자이며 현재 연로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영지의 모든 업무를 보고 있는 대리인이다."

"예. 반갑습니다, 가주 대리님. 저는 레이온 자작의 첫째 아들 베오날드 더스티클록이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자기소개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눈빛을 보며 상대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렌겔 캘러메인이 베오날드의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는 것이었다.

[20화]

"자식 놈이 억지를 부려서 정말 미안하네. 다 내가 교육을 잘못시킨 탓일세."

"아닙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가주 대리님. 저같이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에게 너무나 과한 대처이십니다."

"아닐세. 캘런의 아이면 우리 가족이지. 가족이기에 오히려 더욱더 철저히 해야 하네."

'그렇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베오날드는 속으로 렌겔 캘러메인의 행동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이게 실제 가주 대리를 맡는 자의 대처인 것이다. 가문 내의 권력을 가지고 피를 나눈 가족끼리 싸울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일단 가주는 모든 혈족들의 결속과 지배를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아무리 강력한 가문이라도 내부에서 무너지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도… 후우~ 내부에서 무너졌지. 아무튼 좋은 대처야. 저놈 표정을 봐. 가주 대리인 아버지가 지금 근본도 없는 시골 귀족에게 사과도 모자라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걸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

"너도 어서 무례를 사과하도록 해라, 랄트."

"그… 그게… 죄송합니다."

백작가의 가주 대리인 아버지가 허리를 숙인 마당에 랄트라고 더 이상 위세와 권위를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옆에서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고, 베오날드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손을 저으면서 자신도 예의를 갖춰서 대응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가주 대리님.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 아닙니까? 하하."

"어린아이라.... 내 기억에 의하면 자네도 내 아들과 같은 나이로 알고 있네만? 후우~ 정말 부끄러울 따름일세. 한심한 놈 같으니...!"

렌겔 가주 대리는 자신의 아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눈앞의 베오날드를 보자 부러움이 용솟음 쳤다.

같은 나이임에도 깍듯이 지키는 예의, 상식과 품격 있는 태도, 거기에 아직 어린 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자신의 배다른 여동생을 닮은 칠흑 같은 흑발에 깨끗한 청안을 가진 조각 같은 외모. 또한 큰 키와 다부진 체격까지. 자신의 아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딱 봐도 이 아이는 보물이다. 그것도 엄청난 보물. 다른 자들이 보기 전에 내가 발견해서 다행이군.'

가문을 운영하기 위해선 혈족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건 그래도 신뢰를 보증 수표로 깔고 있는 것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능력 있는 인재였다.

귀족 가문의 가주라면 무와 문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모아서 활용해야 하는 법. 뛰어난 병사, 뛰어난 문관 하나하나가 쌓여서 영지의 강함이 된다.

심지어 이 아이는 엄연히 가문의 피를 나눠 받은 혈족! 프리미엄까지 붙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너무 과한 경우 후계 구도를 해칠 가능성이 있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지만, 현재 가뜩이나 부계에서 남성 혈족은 저기 뒤에 있는 랄트 하나뿐이었기에 더욱 귀중한 자원이었다.

"아무튼 이전에 란트가 뺏어 온 백작님께 드려야 할 선물도 모두 돌려주겠네. 본래 자네 집안의 것 아닌가? 아, 맞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느냐?"

"가주 대리님의 명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래, 따라오거라. 그리고 랄트, 넌 방에 돌아가서 오늘은 나오지 말고 있어라. 메이아 경에게 지키라고 할 것이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는 자신의 아들은 처벌로 방에 가두어 놓고, 베오날드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집사로 하여금 차를 내오게 하고 단둘이 독대했다.

당장 내일이 백작의 생일날인데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렌겔 캘러메인, 그가 베오날드를 얼마나 고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차는 어떤가?"

"시골 촌뜨기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으음~ 우선 첫 향은 진하네요. 그리고 가슴이 고양되는 느낌과 살짝 상쾌함으로 마무리… 좋군요."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군."

'음, 이 맛과 향… 기억에 남은 것과 유사하군. 아마~ 대륙 남부에 있는 피얼릿이라는 잎인 것 같군. 약간의 각성 효과가 있는 것을 잔뜩 모아서 농축시켜서 각성제의 재료로 쓰곤 했는데… 지금 시대엔 이걸 차로 마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캘런은 아들을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지? 찻잔을 들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품위가 느껴지는군. 랄트 녀석은 예의니 뭐니 하는 걸 배우기 싫다고 난리였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베오날드는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렌겔 캘러메인은 차를 마시는 품격마저 멋있는 베오날드를 보며 연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생각을 마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시 캘러메인 백작이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14살이라는 게 말이야. 어딜 봐도 이미 성인, 아니 완숙된 품위를 갖추고 있어. 부러울 정도로 말이지."

"전 그저 조금 빨랐을 뿐입니다. 분명 랄트 도련님도 저처럼… 아니, 더 능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겸손히 자신을 포장하면서도 베오날드는 당연히 비뚤어진 그 랄트라는 애송이에겐 무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교육 방침을 바꾸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이미 저렇게 오만하고 독선적이 되었으니 고치려면 엄청나게 고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이 가주 대리 양반은 상당히 멀쩡한 인간인데… 교육에 대해서 관여를 안 한 건가?'

호부 아래 견자 없다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데, 눈앞의 렌겔 가주 대리는 이성적이고 상황에 따라 과감히 머리 숙일 줄 아는 면도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한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서 그런 아들이 나온 건지는 살짝 의문이었다.

'둘째 부인의 자식이더라도 보통 사내놈들은 다 관리해야 할 텐데....'

"그 랄트 녀석을 자네처럼이라. 후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관리했으면 모를까, 아쉽지만 저 아이가 태어난 뒤 난 곧바로 황제 폐하의 명으로 나온 소집령에 우리 영지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네." 

'아… 전쟁이었나?'

"애초에 본래 저 랄트는 독자(獨子)가 아니라 셋째 아들로, 첫째 부인에게 아들 둘이 더 있었고, 성년이 된 아이들이라 기사의 종자로 같이 참여했지."

"그랬었군요."

"그리고 운도 없이 전쟁에서 하필.... 적 기사단의 랜스 차징에 모조리 휩쓸렸고, 나는 우리 기사들의 희생으로 살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적의 창에 꿰뚫려 죽어 버렸네. 그 뒤로 첫째 부인은 그 쇼크로 사망했지. 그래서 저 랄트 하나만이 유일한 독자가 된 거지. 물론 사정은 이게 전부가 아닐세. 후우~"

렌겔 가주 대리는 그동안 토로하지 못했던 가정사에 대해서 베오날드에게 전부 쏟아 내고 있었다.

"영지에 남으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제국 수도나 다른 곳으로 불려 가는 일도 많았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나는 가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네."

"어떤...?"

"뻔하지 않나? 혈족을 늘리는 일이지."

"아아~"

결국 둘째 부인이 정실이 되었고, 자손이 사내아이 하나뿐인 건 또 불안한 일이었기에 그 뒤로도 셋째, 넷째 부인들을 계속 들여서 자손의 생산을 위해 노력했는데, 거기서 또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랄트를 제외하고 그 뒤로는 이상하게 태어나는 사내아이들이 자꾸 죽어 나가더군. 질병, 사고 등등… 갖가지 일로 말이지. 후우우~"

"맙소사, 그걸 그럼 그냥 넘어가셨습니까?"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나도 나름 철저히 조사했고, 여러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꼬리를 잡진 못했네. 하지만...."

"배후로 짐작 가는 곳은 있으신 거죠? 가주 대리님께 더 이상 아들이 없으면 가장 이익을 보는 곳은 느낌이 올 테니까요."

"오… 역시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군."

'이 정도는 쉬운 건데… 딱 봐도 둘째 부인이잖아.'

유일한 독자를 가지고 있는 둘째 부인.

필시 첫째 부인에게 장성한 두 아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땐 그 야망을 꽁꽁 감추고 있었겠지만, 이후 전쟁이라는 변수로 두 아들과 첫째 부인까지 죽고 자신의 아이가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가 되고 나자 가슴속에 있던 야망이 피어오른 것이리라.

'흔히 있는 이야기이지.'

"그럼 보통은 외부에 꺼내지 않는 이 이야기를 내가 자네에게 한 이유도 알겠나?"

"으음… 모자란 식견으로 짐작만 해 보겠습니다만, 가주 대리님은 저를 양자로 들이실 생각이 아니신지요?"

"바로 그거일세!"

짝!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읽은 베오날드의 대답에 렌겔은 박수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보면 볼수록 최적의 인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왜 하필 저런 재능을 가진 아이가 본가가 아닌 외가, 그것도 근본 없는 용병에게 시집보낸 집에서 나왔냐는 점이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랄트의 상황은 자네도 알다시피 심각하네. 지금은 내가 가주 대리이자 차기 가주나 마찬가지이기에 어떻게든 손을 쓰고 있지만, 혹시라도 아버님과 내가 잘못되거나 사고가 터진다면 저대로 우리 가문의 가주가 되네."

"그렇죠."

"지금 저 상태론 끝장이지. 그래서 저 녀석에게 자극도 줄 겸 자네가 필요하네."

"으음… 하지만 가신분들의 반대가 클 텐데요?"

"걱정 말게. 일단 명분으로는 랄트 녀석의 교육을 위한 경쟁마로 속일 생각일세."

'흔한 방법이네.'

너무 안정된 자리에 있어서 나태해진 후계자를 자극시키고 채찍질하기 위해 혈족 중 똑똑한 아이를 데려와서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 후보로 삼는 행위. 귀족 가문의 여러 노하우 중 하나였다.

확실히 지금 랄트의 상태는 베오날드가 봐도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가신들도 '경쟁마 교육'을 위한 대상으로 쓴다는 데엔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내년이면 성년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랄트의 상태를 고치지 않으면 가문의 위기인지라 아무리 근본 없는 용병의 피가 섞였다고 한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 보일 뿐이었다.

"물론 충분한 대가와 지원을 약속하지. 더불어서 정 랄트에게 자격이 없다면 자네가 우리 가문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하겠네."

"파격적이군요."

"가주로서 가문을 더 중요시 여기는 건 당연하다. 대안이 없다면 나도 다른 대처를 준비하고 랄트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었겠지만, 둘째 부인의 미움을 받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더 뛰어난 혈족을 찾았다면 의미는 다르지. 아무튼 어떤가?"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베오날드는 바로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이 양자 제안, 어떻게 보면 기회이지만 어떻게 보면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길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은 독자적인 세력이 없는 가운데 무조건 여기 렌겔 가주 대리의 지원만을 믿고 모든 것을 조치해야 하는데, 결국 직접 대응해야 할 일이 많으며 특히 랄트의 모친인 둘째 마님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기회야.'

하나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 영지에서 나갈 기회다.

그리고 가주 대리가 직접 제안한 만큼 일정 이상의 자금과 시설, 설비, 인원을 받거나 혹은 다른 기회를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어떤 선택을 하든 메리트와 디메리트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 베오날드는 열심히 주판을 굴리며 계산을 했고, 최종 선택을 하게 되었다.

[21화]

"받아들이겠습니다."

"오… 그런가?"

"다만 그 시기를 성인식 이후로 하지요. 지금 바로 아무 대비 없이 일을 시작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마님 측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움직여야 하고, 가신들과 다른 가문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하셔야 합니다."

"오오오… 허허, 오히려 내가 한 수 배우는 느낌이군. 알았네. 그리하도록 하지."

렌겔 가주 대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베오날드는 그와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백작의 생일잔치는 무사히 거행되었다.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예정대로 곰 가죽과 새끼 곰, 거기에 늑대 가죽을 비롯한 적절한 선물을 바쳐서 살짝 눈에 띄긴 했지만 금방 다른 귀족들의 화려한 선물에 가려져서 곱게 넘어갔고, 적당한 시점에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우리가 오래 있어서 좋을 입장도 아니니 말이지. 휴우~ 이래서 근본도 없는 집안은 피곤해.'

"휴우~ 드디어 한숨 돌렸구나. 베오날드, 그나저나 너 혹시 가주 대리님과 무슨 말을 했었느냐? 랄트 도련님에게 빼앗긴 물건도 되찾아 오고...."

"가주 대리님이 제대로 된 분이셨어요. 혈족에게 물건을 왜 뺏으면 안 되는지도 잘 아시니까요."

"...?"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레이온 자작을 보면서 베오날드는 그가 자작이라는 작위를 달고 있지만 제대로 된 귀족으로서의 교육과 '가문'의 문화를 모르는 초보 2대째 귀족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보를 흘린 것도 흘린 거고, 왜 이렇게 여러 부분이 허당인 건지. 할아버지는 나름 걸물이었다고 했는데....'

물론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해서 반드시 아들도 대단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베오날드는 자신의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에 대해서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아무튼 이제 잔치도 끝났고, 당장 내일 돌아가도 상관없게 된 상황에서 부친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베오날드에게 제안을 했다.

"아무튼 네 덕분에 정말 큰일 날 뻔한 고비를 넘겼구나. 어쨌든 내일 돌아가긴 하는데, 오기 힘든 곳이니 원한다면 도시에서 하루쯤 더 놀다가 와도 되는데 어떻게 할 테냐?"

"아뇨. 괜찮아요. 이 녀석을 돌봐야 하는데, 놀러 갈 새가 어디 있겠어요? 하하."

삐이이익!

우리에서 베오날드에게 또다시 밥을 달라고 조르는 알테리오였다.

그렇게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백작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돌아가게 된 베오날드였다.

더불어 새로운 가족과 성과도 있어서 좋아했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 백작의 저택 창문에서 누군가가 그를 무섭게 지켜보고 있었다.

"제스 경, 저… 아이가 베오날드라고 하는 아이인가요? 우리 랄트에게 모욕을 주고, 그이가 데려가서 독대를 했다던?"

거추장스러울 만큼 수많은 장식이 달린 화려한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 올려 묶은 화려한 금발 머리와 고고해 보이는 모습에서 보통 신분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베오날드에 대해 자신의 뒤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기사 제스 경에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메이라 마님."

마님. 지체 높으신 분의 부인을 뜻하는 말이다.

백작은 이미 노령이고, 백작의 부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지라 자연스럽게 이 '마님'이라는 호칭을 이어받을 자는 바로 현 가주 대리를 맡고 있는 렌겔 캘러메인의 부인인 그녀였다.

"그이와 무슨 이야기를 한지는 아무도 모르고?"

"예. 들으려고 했지만 아시다시피 가주 대리님이 쓰시는 집무실은 보안성이 워낙 뛰어나서...."

"그나저나 우리 랄트랑 동갑이라고 했는데, 믿기지 않는 체구와 키군. 정말 14살이 맞나?"

"혹시나 싶어서 급히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맞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캘런 아가씨의 아들이 맞습니다."

"후우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메이라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베오날드와 남편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에 대해 상상했다.

일단 문제는 백작에게 줄 선물을 자기 것처럼 멋대로 강탈하러 다닌 자신의 아들 랄트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그 행위에 대해선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둘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이제 와서 뭘 생각하는 거람! 그 사람은!"

"가신 쪽에 붙여 둔 자의 말로는 아마 '경쟁마 교육'을 생각해 보고 있다고...."

"경쟁마 교육… 즉, 저 아이를 랄트와 경쟁시킨다는 거야?"

"예. 그렇게 되려면 일단 '격'을 높여야 하니 아마 양자로 들이시거나 아니면 주요 휘하 귀족들 중 한 명과 혼인을 시키겠지요."

"대체 그이는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아니, 우리 랄트가 어디가 부족하다고!"

렌겔 가주 대리와 다르게 메이라 부인은 자식을 감싸면서 그가 허튼짓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부유한 남작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문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곳 캘러메인 백작가에 정략결혼으로 시집와서 둘째 부인이 되었지만, 이미 첫째 부인의 아래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는 상황이라서 사실상 그냥 장식용 꽃, 혹은 가문 간의 계약서 취급이었다.

남의 집안이긴 했지만 그래도 귀중한 '계약서'인 만큼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한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결국 이곳은 타인의 집일 뿐이었다.

홀로 섬에 갇힌 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랠 존재라고는 자신의 본가에서 데려온 몇 명의 기사와 몇몇 시종들뿐. 하나 거기엔 가족이 없었다.

유일한 가족이라곤 오직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 랄트뿐. 그러니 그녀가 아들을 감싸고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망할 년이 죽고, 드디어 내 시대가! 드디어 우리 랄트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또 무슨 짓거리를!"

"하지만 랄트 도련님의 평판이 날이 갈수록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젤커드 자작의 파벌은 물론 저희 파벌인 델마인 남작 파벌 귀족들도 우려를 표할 정도입니다. 예법도 지키지 않고, 문무… 그 어느 쪽에도 집중하는 느낌이 없고, 그저 권위에 기대서 남을 핍박하기만...."

"닥치세요.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차차 알아서 철이 들 겁니다!"

"하지만 내년이면 성년이 되십니다. 또 경우에 따라선 수도 아카데미로 보내질 수 있는 상황인데, 저래선...."

"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 당신은 저 망할 베오날드이니 뭐니 하는 잡종이나 조사해!"

문제점은 그녀의 가신인 제스 경에 의해서 이미 지적이 되고 있었지만 메이라 부인은 그 점을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혈육이자 가족을 아끼는 점도 있었지만, 이 저택에 오고서 단 한 번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아집을 꺾지 않는 면이 컸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바로 아들을 후계자의 자리에 앉히고 이 감옥 같은 캘러메인 백작가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기껏 기회가 와서 그것을 잡았고, 이후로 나온 모든 사내아이들을 처리했는데!"

"마님, 목소리가 크십니다. 아무리 이 방 주변에 마님의 가신과 시종들만 있다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시지요. 그 사안은 들키면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끄으응! 좋아. 아무튼… 후계자는 우리 랄트야. 근본도 없는 용병이랑 붙어먹은 년의 아들이 그 자리를 노리게 할 순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태 하시던 것처럼 암살을...?"

"아니, 이미 '경쟁마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지금 처리해 봐야 다른 상대를 구할 수도 있어요. 잘못하다간 더 상대하기 골치 아픈 적이 들어올 수도 있겠죠. 일단은 내버려 둬요. 우선 그이랑 대화하고, 또 델마인 남작과 다른 귀족들과 상담해 봐야겠으니. 내일 당장 전령을 보내도록 해요."

"예!"

아들 사랑에 미쳐 있고, 독선적이고 고집은 세지만 그래도 머리까지 아주 멍청한 건 아니었다.

랄트의 후계자 자리를 지킨다는 대전제 안에서는 그녀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고, '후계자 교육 방식' 면으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곧바로 전령을 보내서 다른 귀족들과 의견을 취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연 교육 방식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제스 경은 속으로 그런 우려를 표하면서도 자신이 명령을 받고 조사해 본 베오날드에 대해 떠올렸다.

14세라곤 보이지 않는 외양, 그것도 나쁜 면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 성인을 넘어서 한 사람 몫을 할 정도의 모습은 물론이고 행동에선 이상하게 알 수 없는 품위와 기품까지 흐르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든 랄트 도련님에겐 자극이 되겠군.'

그 일이 있은 뒤로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도련님을 생각하며 제스 경은 이 일을 계기로 그가 좀 더 후계자다워지기를 바랐다.

절반은 저 메이라 부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다른 절반은 렌겔 가주 대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자질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

몇 달 뒤, 더스티클록 영지.

백작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영지로 돌아온 베오날드의 일상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마나 호흡법, 검술 단련, 약초 재배 및 약 제조, 그리고 영지민들의 병환을 봐주고, 시찰, 알테리오의 먹이 사냥, 추수와 사냥감 거두기를 비롯한 영지 일까지 어느새 베오날드의 손을 거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테리오! 쫓아!"

삐이이이익!

작고 조그맣던 알테리오는 쑥쑥 자라더니 대형견 사이즈가 되어서 베오날드의 지시에 따라 토끼를 쫓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본래 인간보다 거대한 사이즈가 되는 그리폰인 만큼 빨리 자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하나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날개 한쪽 때문에 여전히 하늘은 날지 못했고, 다른 한쪽 날개를 접은 채 고양잇과 맹수처럼 달리면서 쫓아다녔다.

삐이이약!

"아이고, 실패했구나. 하지만!"

쐐애애애액!

알테리오는 사냥에 실패했지만, 그사이 베오날드는 지친 토끼를 향해 활을 쏴 맞혀서 토끼 사냥에 성공했다.

그러곤 다시 알테리오에게 지시를 내려서 그 토끼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화살을 회수한 뒤 알테리오에게 건네주었지만, 자신이 잡은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건지 아니면 사냥에 실패한 게 미안한 건지 알테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삐이이이이....

"괜찮다. 실패할 수 있는 거야. 처음부터 능숙할 순 없지. 자자, 먹으렴."

결국은 몬스터라는 걸 아는 베오날드는 때로는 상냥하게 가르치면서도 알테리오가 사람을 덮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교육시키는 데 열중했다.

영지민들이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인육이나 사람의 피에 대해선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삐이?

"아니다. 생각을 좀 하느라 말이지. 아무튼 계속 사냥하자꾸나."

삐이이!

"그래,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거다. 알테리오."

잠깐 생각하느라 멈췄던 베오날드는 다시 알테리오와 함께 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산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준비와 단련을 더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렌겔 가주 대리의 양자가 되면 또다시 피도 눈물도 없는 치열한 귀족의 정치판에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이다.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해야지. 후우~'

[22화]

캘러메인 백작가, 응접실.

그리고 베오날드가 마지막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무렵,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는 예정대로 렌겔 가주 대리의 주최하에 주요 귀족들과 함께 후계자인 랄트에게 '경쟁마 교육'을 하는 일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

참여자는 역시 캘러메인 백작 아래의 파벌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 그리고 이 영지 유일의 상급 기사이자 군 지휘관인 말데로브 경, 마탑에서 파견 나온 4급 마법사인 셀리나를 비롯해서 텔런 집사장, 에트랑 메이드장, 그리고 자신의 둘째 부인이자 지금은 정실인 메이라 부인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저번에 제안한 경쟁마 교육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랄트는 내년이면 성년이 되는 몸인데, 들리는 소문과 근래에 일으킨 사건 등등으로 봤을 때, 그 아이가 후계자로서 적합한 수준의 지식 혹은 무예, 기품, 예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 말씀엔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님?"

"크흠… 예."

본래 메이라 부인은 경쟁마 교육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했지만, 후계자인 랄트의 상태는 그들의 파벌인 델마인 남작이 보기에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보통은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지배하는 자가 재능 없는 범재이거나 무능하면 파벌들에겐 좋은 상황이었지만, 랄트는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최소한 귀족끼리의 체면과 룰은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백작을 위해서 혈족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빼앗는다거나, 내년이면 성인인데 아직도 놀이터인 양 저택을 쏘다니며 사람들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건 정말로 선을 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래서 델마인 남작은 일단 교육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메이라 부인을 설득한 것이었다.

"의외로군. 필시 반대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닙니다. 저희 또한 랄트 도련님의 교육을 좀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허허허, 아무튼 그 대상으로는 마침 내 여동생인 캘런의 자식이 적합해 보이더군. 나이도 랄트와 같은데, 기량이 보통이 아니야. 홀로 산속의 곰이나 늑대를 사냥하거나 그리폰 새끼를 데려올 정도의 무위를 지니고 있고, 품위와 예의 모두 캘런이 잘 가르쳤는지 나도 놀랄 정도더군."

"14살에 곰이랑 늑대를요? 말이 됩니까?"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증거가 있는 데다, 직접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도저히 14살이라곤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뛰어난 혈족이니 랄트 곁에 두면 분명 큰 자극을 받을 걸세."

렌겔 가주 대리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미심쩍다는 표현을 했지만, 사실 이미 각자 조사를 통해서 베오날드의 프로필에 대해선 파악하고 있었다.

'경쟁마 교육'을 하더라도 보통은 다른 인재를 추천하거나 혹은 자신들 파벌에 있는 사람을 밀어 넣고 싶었지만, 이번엔 도저히 무리였다.

'세상에 저딴 14살짜리가 어디 있어? 괴물이 따로 없네.'

'역시 썩어도 캘러메인의 피를 받은 자라는 건가? 젠장!'

"뭐, 다들 반대 의견은 없을 거라 생각하네. 랄트가 자극을 받으려면 이 정도로 압도적이어야 하니까. 근데 하나 더 문제는 그 아이의 '격'을 어느 정도 올려 줘야 랄트가 밑으로 보지 않을 터인지라....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인 열등감만 커질 테니 말이야. 어차피 혈족이니 내 양자를 들이고 싶네만?"

"그건 절대 반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렌겔 가주 대리가 예상한 대로 '양자'로 들이는 것은 델마인 남작 측이 철저히 반대했다.

물론 교육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딱 봐도 보통 이상의 인재가 캘러메인 백작가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메이라 부인은 당연히 자칫 잘못해서 저 베오날드라는 소년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적어도 '급'이 맞아야 랄트도 자극을 받을 텐데?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아니오?"

"다른 귀족 가문과 혼인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도 있지. 하지만 우리 혈족이긴 해도 절반은 천한 용병의 피. 그에게 누가 딸을 내어 주겠나? 캘런 같은 경우 말고는 말이지. 우리 혈족이니 우리가 양자로 들이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보네만?"

"윽...."

렌겔 가주 대리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천한 용병의 피가 섞여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 델마인 남작 파벌은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젤커드 자작 쪽으로 눈빛을 보내 봤지만,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무시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사람이 손을 들었는데, 바로 이 영지의 유일한 상급 기사이자 군을 지휘하는 말데로브 경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가주 대리님."

"말데로브 경이? 말씀해 보시오."

"아이의 무재에 관심이 가는군요. 그리고 제게 딸 하나가 있기도 하고, 또 저는 일단 남작의 작위도 가지고 있으니 '격'으로 봤을 때도 어울릴 것 같기도 합니다."

말데로브 경은 이 영지에 하나뿐인 상급 기사. 인간을 초월한 무위를 지닌 기사인 만큼 여러 곳에서 작위와 부귀영화를 미끼로 그를 모셔 가려는 시도도 많았다.

하나 그는 오직 캘러메인 백작가만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고,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받았지만 영지는 모두 캘러메인 백작에게 바친 것이었다.

그래서 기사이자 귀족, 두 카테고리를 만족하는 자이며 상급 기사의 가치가 높은 만큼 혼처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14살에 그 정도 용맹을 가진 자라면 관심이 안 갈 수 없죠. 허허허, 게다가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가진 자 아닙니까? 그러니 어쩌면 '천연 기사'일지도 모르고 말이죠."

"과한 칭찬은 고맙네만, 그 아이가 '천연 기사'인지는 보장할 수 없네. 나도 그 아이를 오래 본 게 아니니 말이야. 아무튼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 말데로브 경의 집안과 혼사라니. 이거 내가 더 기뻐해야 할 일인...."

"자, 잠시만! 잠시만요! 당신! 그런 혼사 자리라면 그런 천한 것보다는 우리 랄트와 맺어 주는 게 먼저 아닌가요?"

뜬금없이 좋은 제안이 들어와서 가주 대리가 좋아하던 찰나, 메이라 부인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

상급 기사와의 혼약으로 이어지는 건 이 백작 가문에 큰 이익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좋은 자리를 근본 없는 집안 아이에게 주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기에 반발한 것이었다.

"아니지, 랄트는 후계자니까 더 좋은 혼처를 찾아 줘야지. 안 그렇소, 부인?"

"맞습니다, 마님. 랄트 도련님은 차기 백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 아닙니까? 그러면 적어도 백작가 이상의 혼처를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 또한 영광이지만 말입니다."

"아… 그...."

메이라 부인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남편과 말데로브 경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순간 발끈해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의 말대로 '경쟁마 교육'의 격을 위해 맺는 혼사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이의 혼사는 레벨이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워낙 지금 후계자 라이벌이 될지 모르는 문제로 인해 민감해진 바람에 괜히 잘못 끼어든 것이었다.

'저 멍청한 년, 얌전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것을.... 그나저나 이거 좋지 않군. 양자로 들이는 게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 되었잖아?'

아무리 같은 편이지만 저런 우행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델마인 남작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랄트 도련님이 왜 그 모양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상급 기사와의 혈연을 막아야 했다.

지금 14살에 곰과 늑대를 사냥할 정도의 무골인 그놈이 혹시라도 저 '말데로브 경'의 마음에 들어서 마나 호흡법과 검술이라도 배웠다가는 백작가의 힘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흠! 하지만 그 아이는 아직 성년이 아닙니다, 가주 대리님. 그리고 아이의 행복도 생각하셔야죠, 말데로브 경. 본인들의 의사도 모르는 판국인데, 너무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남작이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겠소?"

"제 선에 그런 자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없군요. 그러니 양자 건이 가장 합당하다고 뵈옵니다."

'…반대할 땐 언제고, 간교한 자 같으니!'

'체면을 구겼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렌겔 가주 대리와 델마인 남작은 속으로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껄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델마인 남작은 상당한 파벌을 이끄는 귀족이며 힘이 있었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경쟁마 교육 건은 결국 베오날드를 양자로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

물론 이런 과정이 결정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베오날드의 부모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뒤로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을 백작가에서 양자로 삼으려 한다는 것에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백작의 생일잔치에 갔을 때 눈에 띄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니? 오라버니… 그러니까 가주 대리님이 너를 양자로 삼으려고 한다는데?"

"음… 뭐, 귀족가에선 흔히 있는 일 아닌가요?"

"그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너무 태연한 거 아니니?"

"양자든 뭐든 제 부모님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이 제안… 거부할 수 없잖아요?"

"베오날드...."

가주 대리의 명령은 사실상 백작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골 약소 영지의 힘으로는 저항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일인 만큼 얌전히 베오날드를 양자로 보내야만 했다.

"나는 네가 너무 걱정되는구나. 이 시골에서만 살던 네가… 그 잔혹하고 무서운 귀족 집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거긴 무력만 강하다고 해서 되는 곳이 아닌… 뱀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제가 전생에 그 뱀의 소굴의 지배자였습니다.'

히드라 문양을 사용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 '뱀'을 상징으로 삼은 노이멀 가문의 지배자.

백작가였던 노이멀 가문의 작위를 공작까지 끌어올린 베오날드에겐 그 뱀의 소굴이 원래 살던 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도망칠 테니까요. 모험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알테리오도 있고."

"아, 네 그리폰 말이지? 그나저나 위험하지 않니?"

"그래서 일단 제가 관리 안 할 때는 입마개도 하고 잘 묶어 놓고 있어요. 가끔 저 한쪽만 남은 날개로 발버둥 치는 게 문제이지만요. 아무튼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래. 그래도 네 동생들이 있으니… 나는 어떻게든 지낼 수 있겠구나. 다만 영지 사람들이 서운해할 것 같구나."

의술을 무상으로 베풀어 주고, 약도 만들어 주고, 약초 재배 방법도 개발하고, 곰 같은 대형 사냥감도 너끈히 잡아 주던 이 작은 시골 영지의 영웅이 떠난다면 슬퍼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

하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두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 시골 영지를 떠나는 건가!'

새로이 태어난 곳이자 썩 나쁘지 않은 휴가처였지만, 베오날드는 그래도 천성부터가 귀족인지라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갈 수 없었기에 모친에게 아는 한도 내에서 캘러메인 백작가의 주요 인물과 정치 판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이게 내가 아는 현 상태란다. 아마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렴."

"아뇨. 근래에도 캘러메인 영지에 다니셨으니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어머님. 그럼 전 알테리오 밥 주러 갈게요. 남은 시간 동안 할 일이 많네요."

"그러렴."

이야기가 끝나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의 밥을 주기 위해 어머니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하나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머릿속에선 백작가에 대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열심히 주판이 굴러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백작가에서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리라.

[23화]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놀 순 없지. 흐으으음~"

삐이이익....

"오, 알테리오냐? 음? 밥은 이미 먹지 않았느냐?"

삐이익… 삐익!

"입에 그거 빼 달라고? 안 돼. 세상엔 엄연히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단다."

아주 작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엄연히 대형견 사이즈보다 컸기에 베오날드는 자신이 직접 돌보지 않는 동안엔 알테리오에게 목줄과 입마개를 채워 놓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다쳐선 안 되었기에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에게 사람과 가축을 덮쳐선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시키는 중이었다.

삐이잇! 삐잇!

"…아니, 안 된다니까...."

한쪽만 남은 날개를 퍼덕이면서 불만을 표시하는 알테리오. 떨어지는 깃털들을 베오날드는 잽싸게 열심히 주웠다.

그래도 그리폰의 깃털이다. 좋은 연금술 소재가 될 것이기에 모조리 회수해서 깔끔하게 정리해서 넣었다.

물론 그러면서 엄연히 대귀족인 자신이 이런 깃털이 아까워서 줍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이것도 약재 아니면 장식용으로 쓸 수 있으니까~ 돈도 엄청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삐이잇!

'그보다 저 한쪽 날개만 남은 게 영 마음에 걸리네. 작을 땐 그냥 장식 같았는데… 점점 크니까 엄청 커지고 있어. 심지어… 날개 힘도 장난이 아니야.'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알테리오의 날개를 만지면서 이 하나만 남은 날개를 그냥 놔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다.

거의 고양잇과 맹수만큼이나 무거운 몸을 날게 하기 위해선 날개에도 엄청난 힘이 필요해서인지 크기도 크고 힘도 엄청 강했다.

'무게도 가벼워. 그리고 몸에서 마나도 느껴져. 역시 마물(魔物)은 마물인가? 아마 심장 근처에 마석이 있다고 하지? 천연으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생명체라니, 정말 대단하군.'

삐이익?

그리폰의 비행 방법과 원리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베오날드는 이 편익을 쓸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날개가 없는 반대쪽에 가짜 날개를 한번 달아 줘 볼까? 고민했지만 흔적 자체만 살짝 남은 정도라서 도저히 날개를 달아 주거나 혹은 재생을 시도할 수 없었다.

'으음… 잘린 거라면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나질 않았으니.... 그럼 이 한쪽 날개만 가지고 뭘 해야 한다는 건데....'

삐이… 삐유우~

"그래그래, 잘 참는다. 잘 참고 있어. 저녁에 또 사냥 나가자꾸나."

삐이이!

펄럭!

기분이 좋은 건지 날개를 또다시 쫘악 펼치는 알테리오. 베오날드는 그 날개를 뭔가 다르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무언가 머릿속에 번뜩였다.

'그래, 깃털을 경화시켜서 방패로 쓰게 할까? 어차피 날지 못하는 기관인데, 방어용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니면 미스릴 같은 금속을 달아서 칼날로 쓰든가. 으음~ 성체가 되기 전엔 날개 쓰는 법을 교육시키고, 그다음에 날개 위에 뭔가 장비 같은 걸 만들어 주자. 그리고 나중엔....'

알테리오가 더 커서 완전히 중무장을 한 편익의 그리폰을 타고 전장에 나갈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냥 기마로 이루어진 기병과 중기병만 해도 지금 이 시대에선 전장의 꽃인데, 말보다 더 크게 자라는 그리폰을 중무장시켜서 전장에서 선봉으로 돌진하면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리라.

심지어 그리폰의 주식엔 말도 들어가기에 적들의 말들이 공포까지 느낄 걸 생각하면 이 알테리오는 어마어마한 보물이었다.

'적 기병대를 와해시키거나 돌진력을 떨어뜨릴 수 있기만 해도 엄청난 전술적 가치가 있는 거지. 아무튼 날개 쓰는 법을 같이 훈련하면서 연습해야겠다.'

그렇게 베오날드에게 새로운 일과가 추가되었는데, 바로 알테리오의 조교 역할이었다.

먹이를 사용해 가며 알테리오에게 다른 방식의 날개 사용법을 가르치는 건 꽤 순조로웠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검술'이었다.

아류작인 '노이멀 10식'이 아직도 진도가 안 나갔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본가에 올라가기 전에 10식을 뚫고 싶은데. 후우~ 다른 일을 모두 접고서 해야 하나?'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냥, 약초 채집과 가공, 재배 연구, 제약, 개인 훈련, 알테리오의 조교 역할, 영지 순찰, 부모님과의 교류 시간 등등. 몇 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싶었지만 단순 노동이나 사냥, 약초 채집 외엔 전부 다 교육 수준이 높거나 자기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답이 없었다.

'인재 영입의 중요성을 또다시 깨닫게 되는군. 젠장! 하다못해 3명… 아니! 2명 정도만 일을 맡길 수 있는 놈이 있었더라면! 이래서 기본 되는 집안이 커야 한다니까! 인구 차이가 진짜!'

전생엔 딱히 인재 풀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베오날드가 갓 가주가 되었을 때도 말석이긴 해도 수도의 대귀족 회의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귀족이었고, 영향력을 끼치는 귀족들의 영지에 있는 인구까지 합치면 수십만의 영지민을 지배하고 있는지라 돌아다니면서 적당히 똘똘해 보이는 애들을 주워서 교육시켜서 부려 먹으면 그만이었다.

'이 코딱지만 한 영지는 인구도 적고, 애들도 결국 그게 그거라서 답이 없어. 애당초 기초 교육도 안 되어 있으니까 시간도 시간대로 걸려! 답이 없어! 답이!'

삐이이?

'그러니 검술 하나에만 집중해야겠어. 가기 전에 10식을 반드시 뚫는다. 캘러메인 백작가로 가면 수련도 이제 눈치껏 해야 할 테니 말이지.'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자신을 부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지 모르지만, 베오날드는 의지를 굳힌 채 모든 일정을 폐하고 검술과 마나 호흡법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노이멀 10식을 뚫겠다는 의지를 굳힌 채 베오날드는 수련실에서 계속 피땀 흘리며 검만 휘두를 뿐이었다.

"젠장할! 왜 안 되는 거야! 왜! 후우… 후우… 후우...! 고작 아류인데! 황실 기사단 짝퉁 검술인데!"

하나 생각대로 진도가 안 나가자 베오날드는 자신도 모르게 성질을 내 버렸다.

전신에서 땀을 비 오듯 쏟아 내면서 숨을 헐떡이는 그는 정말로 자고 먹는 것 외에 모든 시간을 검술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노이멀 10식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젠장! 아니야. 내 재능이 고작 이 정도일 리 없어!'

마치 '네 검(劍)의 재능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현실에 베오날드는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났다.

"후우… 후우… 우리 집안의 기사들도 다 하는 건데! 젠장! 하아… 하아… 하아...!"

특히나 그를 열 받게 하는 건 자신에게 있어 한 손으로 움직이는 체스 말에 지나지 않는 가문의 기사들은 이 10식까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마나 호흡법도 황실 기사단의 아류작인 더 안 좋은 걸 쓰는데도! 여지없이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든 재능을 통해서든 뭐든! 엄연히 가주이자 정점에 오른 자신이 자신의 가문의 검술을 못 익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하지 말까? 이 정도 무력이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한… 아니!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이 했던 말이 맞는 게 되잖아.'

'베오날드, 네겐 무의 재능은 없다. 무(武)란 결국 자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내면을 단련하는 것. 하나 네 내면은… 비유를 하자면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있을 때, 기사들은 그 바위를 부수기 위해 검을 휘두르지만 너는 굳이 부수지 않고 피한다는 거지.'

"웃기지 마라! 벨릭스 폰 노이멀! 멋대로 날 규정하지 마라! 후우… 후우… 반드시! 반드시 이깟 노이멀식 마스터 해 주겠어! 후우… 후우...."

"도련님,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오기가 솟는 것과 함께 의지를 불태우던 베오날드였지만, 식사 시간을 알리는 하인의 말에 일단은 수련을 멈췄다.

본래는 이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간이식만 가지고 들어오고 싶었지만, 이별도 얼마 안 남은 만큼 남은 일정을 모두 수련에 매진하는 대신 식사만큼은 부모님과 함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씻고 가마."

"예, 도련님."

"후우우~"

결국 어쩔 수 없이 베오날드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 참여했다.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한숨도 돌릴 겸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서…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렴. 분명 힘들 거란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잘 컸는데… 거기에 보내야 한다니 안쓰럽구나. 그저 우리 가족끼리 여기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아쉽지만 어머니, 전 그럴 운명이 아닙니다. 후우~'

자신의 탄생조차 여신에 의해서 고용된 것이기에 베오날드는 결국 이곳에서 평온히 살 수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베오날드가 다시 수련실로 향하려는데, 누군가가 급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거기엔 저택 밖에서 일하는 하인이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그게 제 아들놈이 갑자기 아파서! 막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제발… 잠시만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후우~ 가도록 하지."

이래서 기술자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

처음엔 한시라도 더 수련에 매진하고 싶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곧 떠나는 마당에 부모님에게도 그렇고 이 망할 영지에 찝찝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일단 챙길 수 있는 약품과 도구를 챙겨서 하인의 집으로 향했다.

"여, 여깁니다."

"어머! 여보! 다행히 우리 튠이...!"

'젠장! 시간 낭비만 했잖아!'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이미 호흡 곤란은 진정된 상태였고, 아이는 금방 기력을 찾아서 쌩쌩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고 보니 구운 고깃덩어리를 작게 자르지 않고 욕심을 내서 큰 덩어리째로 입에 넣고 삼켜서 그리된 거였다.

그리고 부친이 베오날드를 부르러 간 사이에 어머니가 아이를 토하게 해서 겨우겨우 살려 냈다는 것이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요! 도련님."

"아닐세. 무사하면 됐네. 다만 혹시 모르니 오늘은 푹 쉬게 하게."

"예, 도련님!"

'젠장! 시간 아깝게! 하찮은 것들이!'

겉으론 인자하게 웃으며 나왔지만 속으론 자신의 시간을 빼앗은 것에 대해 심히 불쾌했다.

가뜩이나 수련도 막히는데 짜증 나는 일까지 겹치니 화가 잔뜩 난 베오날드는 화를 삭이면서 길을 걷는데, 문득 마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포착됐다.

'애들인가? 뭐, 부모들이 일하면 자기들끼리 노는 법이지. 뭘 가지고 노는 것 같은데… 아, 나무 팽이인가? 회전력을 이용해서 도는.... 부모들이 만들어 줬나 보군.'

평민 아이들이 나무를 깎아서 만든 팽이를 돌리며 노는 모습을 지나쳐 가는데, 다들 잘 돌리는데 유독 한 아이의 팽이만 정체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가서 팽이 돌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렇게! 손으로 잡고! 던지면서 당기는 거야."

"끄으응… 나는 잘 안 돼."

"딱 하면 되는데 왜 안 돼? 던지면서 당기라고!"

"알겠는데… 잘 안 된다니까!"

'아는데… 안 된다라. 마치 내 처지 같군.'

분명 방법은 알지만 못한다는 동질감이 느껴져서인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팽이를 못 돌리는 아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해도 해도 실패했고, 결국은 팽이를 집어 던지면서 성질을 내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수련 직후의 자신의 꼴이나 다름없었다.

"씨이이잉! 안 되잖아! 팽이가 안 좋아!"

"아니야. 자, 봐. 조금 어렵지만 되잖아? 그러면 이걸로 해 봐."

"네 걸로 한다고 뭐가 달라져? 게다가 무거운데?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어?"

"...!"

친구에게서 받은 팽이를 던지자, 이때까지 서지 못했던 팽이가 조금 위태롭지만 돌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첫 성공. 본래 자신의 것으로 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다른 아이의 것으로 바꾸니 성공한 것이다.

그 장면을 본 베오날드도 눈이 커지면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와! 된다! 된다아아아아아!"

"봐! 다르다니까! 원래 초보는 방법을 알아도 감을 못 잡아서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인 거야. 그러니 네 힘에 맞는 팽이를 줘서 맞춘 거지. 몇 번 더 해 보고, 하는 법을 감 잡으면 다시 네 걸로도 할 수 있을 거야."

'...!'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며 감탄했다.

그래, 자신이 계속해서 10식을 실패한 이유는 눈을 가린 채로 한 가지 길만 뱅뱅 돌았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곧 길을 찾는 것이며, 무(武) 또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베오날드는 그것을 무시한 채 그저 반복하고 단련하면 언젠가 되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모두가 다 같은 검술을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검사가 아닌 거야. '배운 자만의 검술'. 나 자신의 검술이 되는 거지. '노이멀 10식'을 배우는 게 아니야! 나의 '노이멀 10식'을 만들어 내는 거야!'

깨달음을 얻은 베오날드는 얼른 저택에 돌아가려다가 잠시 멈춰서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부모에 대해 물은 다음에야 돌아갔다.

그리고 그 두 아이의 집엔 올해의 공물을 면제해 주고, 보상으로 곡식까지 내려 주었다.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것에 비하면 선물은 아주 하찮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노이멀 십식(十式)-쌍두사'! 됐다! 됐다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얼마 후, 베오날드는 검과 자세를 바꿔 가면서 변수를 만들어서 시도했고 드디어 '노이멀 10식-쌍두사'를 성공하게 되었다.

한동안 막혔던 고난을 뚫어 낸 베오날드는 눈물과 함께 기쁨 가득한 환호성을 지르면서 저승에 있을 전생의 아버지 벨릭스 폰 노이멀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냈다.

[24화]

그렇게 '노이멀 10식'을 뚫어 낸 이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자 캘러메인 영지에서 사람들이 베오날드를 맞이하러 왔다.

심지어 맞이하러 온 사람들 속엔 충격적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지 유일의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이었다.

캘러메인 영지의 인물 관계도에 대해 사전에 교육받았던 베오날드도 영지의 최중요 인물이 자신을 맞이하러 오자 내심 당황했다.

'와우… 왜 이렇게 높으신 분이 왔어?'

"모시러 왔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말데로브 경이셨죠? 아니, 남작님으로 칭해야 하나?"

"하하핫, 저는 평생 기사로 살아온 몸입니다. 경이면 좋습니다."

평온히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하지만, 서로 간에 긴장감이 강하게 맴돌았다.

숨겨 둔 카드는 가능한 한 많을수록 좋았기에 베오날드는 아직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급 기사나 되는 양반이 오면 빼도 박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악수를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마나를 탐색하려는 듯 말데로브 경의 마나가 흘러들어 왔고,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마나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호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예? 그게 무슨...."

"베오날드 님은 '천연 기사'이십니다. 허허허!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가 더 크게 빛나겠군요."

"천연… 기사?"

"예. 보통은 마나 호흡법으로 마나를 모아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게 기사이지만, 때론 선천적으로 그게 가능한 자들이 나오곤 합니다. 조상 중 마나를 자유자재로 쓰는 자의 피가 섞이거나 혹은 타고난 재능일 수 있죠.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나오는 자들을 '천연 기사'라고 합니다."

"아하~"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 처음 안 것처럼 반응하는 베오날드. 어차피 까발려진 셈이니 그냥 이대로 밀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시작부터 뭔가 꼬였다는 생각에 심란해하는데, 알테리오가 베오날드를 날개로 툭툭 건드렸다.

주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챈 것이리라. 특이한 점은 마물의 성장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빠른 건지, 이젠 대형견 크기를 넘어서 나귀 정도까지 자라 있다는 거였다.

삐이익?

"어, 알테리오. 왔냐? 보아하니 짐은 다 실은 것 같네."

삐이익!

알테리오의 몸엔 베오날드의 각종 짐 가방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동안 알테리오를 가르친 성과 중 하나로 무언가 몸에 실어 나르거나 탈 때를 대비한 훈련이었다.

나귀 정도 크기로 큰 지금, 탑승 훈련은 이미 조금씩 하고 있었다.

베오날드의 키와 체중이 동년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커서 제대로 뛰어다니기 힘든 점이 문제였지만, 그 점은 좀 더 성장하면 해결될 것이다.

"오… 이 그리폰은 그때 백작님의 생일잔치 때 소동의 원인이었던 그건가 보군요. 이 정도로 늠름해졌을 줄이야."

"키우는 데 꽤 고생했죠. 아무튼… 알테리오! 이 마차를 따라오면 돼. 알았지?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버님! 어머님!"

삐이이이!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탑승하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알테리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마차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날진 못하지만 그리폰인 만큼 체력과 지구력이 남달라서인지 아주 여유롭게 따라오고 있었다.

오히려 마차의 말이 그리폰인 알테리오를 보고 놀라서 속도를 더 올리는 게 문제였기에 살짝 거리를 더 벌리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말이 겁을 먹어서 폭주할 줄이야. 후우~ 가면 알테리오 녀석에게 맛있는 걸 더 줘야겠네요."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폰을 결국 길들이는 데 성공한 셈인가요? 그것만으로도 도련님의 가치는 올라갈 겁니다. 게다가 '천연 기사'이기까지 하니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도 놀라겠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말데로브 경, 죄송하지만 제가 '천연 기사'인 것을 비밀로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흠? 어째서요? 도련님의 가치가 오를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저는 지금 '경쟁마 교육'을 위해서 입양이 되는 겁니다. 그 목적이 중요하지요.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는 한도 내에 있으면 사람은 도전과 투지의 의욕을 세우지만, 절대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판단하게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천연 기사'는 아마 그런 종류의 문제겠지요."

베오날드의 논리는 지금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신의 한 수였다.

일단 상급 기사에게 자신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라는 걸 들켰지만 지금 이 핑계라면 비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불어 랄트 도련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이중으로 말데로브 경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호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나 도련님도 엄연히 이제 양자이기에 후계자의 자격이 생깁니다만?"

"하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천한 용병의 피가 절반이 섞인 제가 어떻게 유서 깊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맡겠습니까? 설사 맡더라도 큰 피바람이 불 것이고, 지금 같은 난세에 그것은 영지민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허어! 가주 대리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구나!'

14세에 맞지 않은 무(武)의 역량을 가지고 있고 '천연 기사'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사려 깊고, 귀족계의 성질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한 진심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저런 말을 생각한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였기에 말데로브 경은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날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하하, 물론 지금은 아니며, 캘러메인 백작가 안에서 그런 다툼은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전에 랄트 도련님의 교육이 먼저겠지만요."

"허허허, 알겠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제 기사도에 걸고, 도련님이 '천연 기사'라는 사실은 도련님이 스스로 밝히시기 전까지 침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영지를 반납해 가면서 계속해서 기사로서 한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자의 맹세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베오날드는 그의 맹세를 믿고 안심하기로 한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은 베오날드가 상상 이상으로 걸물이라는 것을 판별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창밖을 달리는 기사들 중 자신의 가신을 불러서 몰래 지시를 내렸다.

'음, 뭐지? 잘 안 들리는걸? 뭔가 꿍꿍이가 있나? 지금까지 한 질문과 답변에서 저 충심 가득한 기사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발언은 전혀 없었을 텐데?'

말데로브 같은 기사 타입은 500년 전에도 흔한 것으로, 비위를 맞춰 주기도 아주 쉬운 편에 속했다.

능력이 있지만 혈통의 중요성을 아는 태도, 영지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자신도 그것에 기여하겠다는 비밀 맹세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젊은이의 혈기를 보이는 모습까지. 사전에 답안지를 작성해 왔다고 할 만큼 완벽한 대답이었는데, 그의 태도가 묘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 하하하. 아무튼 영지에 도착하시면 다른 일 같은 건 없고, 곧바로 가주 대리님의 인도 아래 양자로 입양하게 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이제는 '더스티클록'이 아니라 '베오날드 캘러메인'이 되시는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처는 본 건물로 해 드릴 것이고, 수련장 문제인데.... '천연 기사'이신 걸 감추실 수 있게 도와 드리려면 역시 '개인 수련장'을 쓰는 게 좋겠지요?"

"그래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 수련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또… 저를 납득 못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아까 전에 전한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말데로브 경의 환심을 산 건 확실한 듯, 이런저런 상담을 해 주면서 빠르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그의 모습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이제부터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가는데 이런 협력자의 존재는 매우 소중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캘러메인 백작가에 척을 지지 않는 한 아군이 될 테니 아주 좋군.'

'도저히 내가 지금 14살 도련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군. 마치 과거 백작님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야.' 

말데로브 경은 생각에 잠긴 베오날드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와 기품에 감탄하면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저 정도의 재능과 능력을 가진 아이가 만약 절반의 혈통만 좋았더라면?

만약 저 아이가 지금 랄트 도련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더라면?

캘러메인 백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100년은 빛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나 현실은 현실. 말데로브 경은 속으로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베오날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캘러메인 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거리를 지나서 캘러메인 백작가의 저택에 도착한 베오날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와 기사들을 보았다.

"어서 오렴. 오느라 수고 많았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 대리님."

"가문의 일을 위해 부른 것인데 인사는 무슨. 아무튼 이 저택에 온 순간부턴 너는 캘러메인의 일원이며, 더 이상 더스티클록이 아닌 캘러메인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가문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전에 미리 맞춰 놓은 듯한 예의와 겸양이 가득한 대화에 가주 대리의 뒤에 모여 있던 백작가의 가신들과 저택을 관리하는 자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14세로 보이지 않는 성숙한 외양에 늠름한 체구, 거기에 예의에 기품이 서려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경악했다.

다들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그저 시골 출신의 힘 좀 쓰는 무뢰배의 이미지에 가까웠던 데다, 총명하다는 말은 립서비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백작과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와 태도를 보니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저게 14살이라고?'

'랄트 도련님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사전에 미리 연습한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건 말이 안 돼. 아니, 옷자락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저건 보통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닐 텐데?'

'왜 갑자기 그의 뒤에서 황도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같은 일도 수년을 하면 숙달이 되며 수십 년을 하면 달인이 된다.

그리고 대귀족으로서 60년을 보낸 베오날드라면 행동만으로 대귀족의 기품과 카리스마를 재현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그는 항상 황제를 모시면서 그를 압도하고 휘둘러야 했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귀족들을 짓눌러야 했기에 더더욱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기품을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 왔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천것의 피가 흐르는 저놈에게! 내가… 내가!'

그리고 그 기품은 귀족으로서 지체가 높고 오만한 자일수록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의 기품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에 큰 굴욕을 느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바라보려고 하는데, 가족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베오날드가 보였다.

마치 거대한 포식자가 자신을 잡아먹으러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작 14살짜리에게 겁먹어선 안 된다는 오기로 버티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이제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후계자이신 랄트 도련님을 형님으로 모시며 잘 보좌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요.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