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압박감을 견디면서 베오날드의 인사를 받은 메이라 부인이었지만, 가슴속엔 이미 크나큰 굴욕감이 새겨진 지 오래였다.
[25화]
그렇게 양자로서의 인사를 마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베오날드는 대귀족 출신의 역량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무력은 감추더라도 이런 기품과 예절은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때 이곳 생활을 했던 어머니라는 핑계가 있어서였고, 주변에 있는 가신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새겨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흠, 식사 예절에 대해서는 캘런에게 배운 것이냐?"
"예. 이곳에 온다고 하니 급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연습했지요."
현재 베오날드의 뒤에는 혹시나 시골 출신인 그가 식사 예절에서 실수하면 지적하고 수정해 주기 위해서 메이드장과 집사장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기품 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이 도련님에게서 마치 대귀족 같은 품격이 느껴지다니...!'
'이게 말이 되나? 심지어 스테이크는 일부러 가장 육질이 질긴 부위로 드렸는데… 저걸 접시 긁는 소리 하나 없이 잘라서 먹어?'
베오날드에게 굴욕을 선사해 주기 위해 메이라 부인의 입김을 받은 메이드장은 일부러 조리사에게 지시를 해서 베오날드의 식사에 수작을 부려 놓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감히 내게 수작질을 부릴 줄이야. 마나 호흡법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
나이프를 대자마자 느껴지는 고기의 질감에서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수작을 부린 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에 그는 비밀로 해 둔 '기사'의 저력을 이용해서 소리 없이 스테이크를 베어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드디어 고향에 온 게 실감 나는 기분이야. 바로 이거지.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군. 후후후.'
"고기가 마음에 드나 보구나, 베오날드."
"예. 역시 본래 있던 집과는 식사 레벨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심취해 버렸군요. 메이드장, 주방장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고 전해 주게."
메이드장은 베오날드의 날카로운 단어 선택에 찔끔하며 진심 어린 경의를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집사장 텔런에게 저택에 대한 안내를 받기 시작했다.
자신이 머물 방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영역, 거기에 각종 교육실과 출입 금지인 영역 등등… 주요한 곳부터 알려 주는 노집사였다.
"일단 중요한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도련님. 그리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랄트 도련님과 함께 여러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그 일정에 대해서는 따로 전속 메이드를 붙여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하나 물을 게 있는데, 알테리오는 내 방에서 머물게 해도 되나? 어차피 말들이 겁먹는지라 마구간에는 머물지 못할 테고, 아직 별도의 영역을 준비 안 한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 구속을 해 두긴 하겠네. 이미 말데로브 경의 허락도 얻어 놨네."
자신에게 주요한 협력자인 만큼 이름 정도는 팔아먹어도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말데로브 경의 허락이 있었다면… 저로선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좋네. 그럼 난 내 방으로 가서 짐을 풀지. 알테리오, 따라오너라."
삐이익!
그렇게 텔런 집사장과 헤어져 알테리오와 함께 배정받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베오날드. 그래도 양자라서 그런지 침실치곤 방이 상당히 크고 화려했다.
고급스러운 세공과 장식이 된 가구, 침대는 혼자서 자는 용도가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대했다.
"조촐하네."
시골 촌놈이라면 본래 이 커다랗고 화려한 방의 모습에 감탄해야겠지만, 베오날드의 기준에선 심심한 방이었기에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채 태연하게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는 동안 매어 놓았던 알테리오의 목줄과 입마개를 풀어 주고 자유롭게 방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었다.
"많이 답답했지? 미안하다."
삐이이잇!
"괜찮다고? 그러면 다행이네. 자, 알테리오, 밥 먹자."
똑똑.
미리 가공해서 만들어 놓은 알테리오 전용 식사를 짐 속에서 꺼내 던져 주면서 먹는 걸 감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베오날드가 문을 열자 거기엔 아주 오랜만에 그의 눈을 호강시킬 만한 아름다운 미녀 메이드가 서 있었다.
전생의 대륙 전체에서 고르고 고른 미녀들을 모두 섭렵한 베오날드 폰 노이멀. 그렇기에 그의 기준점은 상당히 높은 축이었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정도였다.
"베오날드 도련님이신지요? 저는 오늘부터 도련님의 전속 시중을 맡은 메이드, 세인이라고 합니다."
"…오오!"
베오날드는 감탄하면서 자신을 세인이라 소개한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이 건강한 색을 띤 피부, 길게 늘어뜨린 색이 옅은 적발은 화려함을 좋아하는 베오날드의 취향 그 자체였으며, 그 속에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또렷한 이목구비의 청초한 인상, 그 인상에 반역하듯 약 17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풍만한 몸매가 엄격한 미녀 판독기인 베오날드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무언가 문제가 있사옵니까? 도련님?"
"너무나 아름다워서 말을 순간 잊어버렸네. 알다시피 내가 시골뜨기라서… 깜짝 놀랐어."
"그렇습니까? 그러면 곧바로 내일 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음, 농담에 태클도 안 거는 사무적인 타입인가? 하지만 그래도 아주 좋아.'
무심하게 자신의 말을 무시했지만, 미녀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며 너그러워지는 베오날드였다.
귀족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자. 당연히 거기에 아름다운 꽃은 필수다.
그 꽃은 때론 재능, 능력이기도 했지만 역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것은 '미모'일 것이다.
'이거 하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군. 퀴퀴한 집사보단 역시 메이드지. 누구 수완인지 감사할 따름이군.'
"우선 내일 아침 오전 6시에 기상. 이후 30분까지 연병장에서 말데로브 경과 함께 체력 및 검술 단련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8시에 백작님을 비롯한 일가와 아침 식사."
그리고 베오날드가 생각하는 사이 내일 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세인이었다.
"9시부터 12시까지 예법과 각종 학문의 교육 시간을 가지며 12시부터 13시까지는 간단히 점심 식사, 그리고 오후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면 되며 이후 7시에 다시 일가와 저녁 식사를 하고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 뒤에 취침 시간은 10시입니다."
"자유 시간엔 어디까지 자유지?"
"금지 구역을 제외한 저택 내에서의 행동 혹은 영지 및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됩니다. 혹은 무언가 하실 때 보고만 해 주시면 대체로 허락이 되실 겁니다. 도련님, 그럼 내일 아침 뵙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게."
베오날드는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고, 뒤에서 앉아 있던 알테리오를 불렀다.
삐익 소리를 내면서 나귀 크기의 알테리오가 다가오자 긴장한 세인이 몸을 움츠리는데, 베오날드는 그녀의 손에 알테리오의 먹이를 주면서 말했다.
"내일 나를 깨울 때 이 녀석이 분명 경계할 거니까… 지금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 아, 그리폰과 같이 주무시는 건지요?"
"마구간에 이 녀석을 넣으면 밤새도록 말들이 불안 증세에 시달리며 잠도 못 잘걸? 차라리 내 곁에 두는 게 낫지. 아무튼 세인,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줘 봐. 너무 무서워 말고~"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베오날드에게 먹이를 받은 세인은 조심스럽게 알테리오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먹이를 본 알테리오는 천천히 다가가서 그것을 부리로 잘라 내면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인은 곧장 알테리오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리려 했지만, 아직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알테리오는 금방 그녀를 위협했다.
꾸와아아아악!
"꺄!"
'오~ 귀여운 소리.'
베오날드는 놀라서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달려드는 알테리오를 제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감격에 빠졌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느끼는 여성의 육체. 태어나서 곧장 마나 호흡법, 검술, 약학, 사냥 등등…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오래 참았던 그였다.
물론 더스티클록 영지에서도 하녀라든가 마을 처녀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시골 레벨. 눈에 차는 여성이 없어서 자연히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알테리오, 진정해. 그녀는 너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어. 친해지고 싶은 거야."
꾸우우… 삐이이이!
놀란 그녀를 꼬옥 안으면서 알테리오에게 말하는 베오날드. 사실 이것도 베오날드가 꾸민 계획이었다.
알테리오를 길들이는 것을 이용해서 그녀와의 접촉을 만들고 호감을 쌓는 것으로, 제대로 길들이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급히 손을 내밀었을 때 말렸을 것이다.
"이런, 조금 성급했군. 시범이라도 보여 줘야 했는데. 세인, 괜찮나? 정 안 되면 사슬과 입마개를 해 놓을까?"
"아, 아닙니다, 도련님."
갑작스러운 사고에 무뚝뚝한 모습이 조금은 풀리고, 얼굴이 살짝 빨개진 그녀를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침대로 데려가서 오늘 밤, 현생의 정열적인 첫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일단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로 질 수 없지요."
'오~ 근성 있는 타입이네. 메이드답지 않은걸?'
의지를 굳힌 건지 세인은 다시 일어나서 알테리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느낌이라서 그런지 알테리오는 날개를 세우면서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베오날드는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며 조언을 해 주었다.
"일단 어깨랑 표정의 힘을 푸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부터 경계심을 풀어야 상대도 경계심을 풀지. 자, 여기 간식."
"그렇군요. 해, 해 보겠습니다. 후우우~"
심호흡을 한 세인은 베오날드의 조언에 따라 긴장을 풀고 편한 표정으로 다시금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알테리오는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조금씩 먹이를 잘라 먹었고, 세인은 다 먹은 알테리오가 아쉬운 듯 손을 핥는 것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삐이이~
"이건 뭐죠?"
"양이 부족한가 보네. 원래 이 녀석의 식사 시간이었거든. 자, 여기 몇 개 더 줄게. 그리고 천천히 경계심을 풀면서 접촉을 늘려 봐."
베오날드가 보는 아래 직접 먹이를 주던 세인은 조금씩 알테리오와의 거리를 좁혔고, 그렇게 약 30분간 먹이 공급을 하자 알테리오는 그녀에게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됐어요! 도련님! 아… 이게 그리폰의 깃털이구나."
'으음~ 아주 좋군!'
알테리오의 머리도 쓰다듬고, 깃털을 만지작거리면서 세인은 행복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드는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알테리오와의 접촉을 빌미로 그녀와의 거리감을 줄인 베오날드는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알테리오용 간식을 몇 개 주고 돌려보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잘 부탁하지."
"예, 도련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알테리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일 아침에 깨워 드리러 오겠습니다."
삐이익!
그렇게 세인은 베오날드에게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무뚝뚝한 얼굴을 풀고 인사하는 모습에 베오날드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여독을 풀기 위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앞으로의 생활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26화]
다음 날, 오전 6시.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수면 중인 베오날드의 귀에 들려와 아침이라는 것을 알렸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와 알테리오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삐이잇!
"일어났니? 알테리오. 자, 이거 먹으렴."
삐이이잇!
어제 먹이까지 주며 친근감을 쌓은 덕분인지 베오날드를 지키던 알테리오는 얌전했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지척까지 온 인기척은 그대로 그의 귀에 대고 옥음으로 아침을 알렸다.
"일어날 시간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도련님?"
'이거 정말 좋군. 좀 더 버텨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만… 슬슬 일어나야겠지.'
양자가 된 첫날부터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순 없기에 베오날드는 이쯤에서 세인의 목소리를 즐기는 것을 그만두고 벌떡 일어났다.
"으음~ 좋은 아침이야."
"일어나 계셨습니까?"
"아니, 깊은 수면의 심연 속에 잠겨 있었는데~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더군. 그래서 딱 일어날 수 있었지."
태연하게 세인을 여신으로 포장하면서 립서비스를 하는데, 그녀는 이런 유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 당황해서 뒤로 살짝 물러났다.
물론 느끼할 법한 소리이긴 했지만 외모가 개연성이라고, 이번 생의 육체는 단련을 통해서 탄탄하면서도 모친의 유전자 덕분에 잘생긴 외모에다 터무니없이 당당한 기품까지 얹어지니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무튼 그건 수련복인가?"
"예, 예."
"얼른 입고 나가야겠군. 아~ 혹시 세인이 입혀 주는 건가? 대귀족의 저택에선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런 일을 하려면 저 말고도 전속이 여럿 붙어야 합니다."
"그건 정말 아쉽군. 알았네. 이리 주게."
베오날드는 세인에게서 수련복을 받아서 곧바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세인의 안내를 받아서 저택을 내려가 연병장에 도착, 거기엔 이미 아침 단련을 위해 모여 있는 다른 기사와 병사들, 모두 합쳐서 약 1,000명이 모여 있었다.
베오날드는 눈치껏 그중 가장 맨 뒤의 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굴러들어온 돌은 눈치를 잘 봐야 하는 법이지. 그나저나 백작가치곤 정규 병력이 너무 적군. 기사야 원래 찾기 힘드니 그렇다 쳐도....'
전생에 자신도 백작가의 가주여서 그런지 자신의 집안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500년 전 자신이 막 백작가의 가주가 되었을 때에도 영지 직속군으로 95명의 기사와 1천의 기병, 3천의 보병을 이끌고 있었다.
'…뭐, 난세라서 사람이 많이 죽었거나, 아니면 이 정도가 딱이라는 거겠지. 숫자는 용병이나 민병대로 채울 수 있으니 말이야.'
거기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향 내에 있는 모든 가문에서 병력을 모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그들 모두 캘러메인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요점은 역시 주변 가문보다 강하기만 하면 되니 남는 역량은 다른 곳으로 돌린 거겠지.'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작가의 이 병력 숫자에 대해 납득했다.
군비란 결국 생산성 없이 그저 소모만 되는 비용이니 너무 많아도 영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저 사람이 베오날드 도련님인가?"
"랄트 도련님과 동갑이라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난 처음엔 어디서 파견 온 기사인 줄 알았어."
"하지만 확실히 캘런 님과 닮긴 닮았군. 저 흑발에 청안… 캘런 님 아들이 맞아."
새로운 인물인 자신에 대해서 떠드는 병사와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베오날드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척 표정 관리를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의를 탈의한 말로데브 경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노령에 가까웠지만 아직도 탄력 있고 육중한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불끈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군. 물론 상급 기사가 보통 괴물은 아니지.'
그렇게 연병장 단상 위에 선 그는 병사와 기사들을 주욱 살펴보더니 랄트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랄트 도련님은 아직인가? 베오날드 도련님은 이미 자리해 계신데."
"죄, 죄송합니다. 금방 오실 겁니다."
"됐다. 언제는 오신 적이 있더냐? 바로 시작을...."
"자, 잠깐! 기다려! 나 왔어! 나 왔다고!"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메웠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거기엔 수련복을 입고서 체면도 잊고 허겁지겁 뛰어나오고 있는 랄트 도련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지각한 주제에 아주 당당히 맨 앞에 선 기사들의 대열 앞에 마치 대장인 듯 자리를 잡았다.
"…휴우~ 겨우겨우 왔네. 그 망할 반푼이 따위에게 질 수 없지. 한데 그놈은 어디에 있지? 아직도 산골인 줄 알고 잠들어 있나? 하하하핫!"
"베오날드 도련님은 저 뒤에 계십니다, 랄트 도련님."
"뭐? 나보다 먼저 왔어?"
"예. 그것도 한참 전에 말이죠. 그리고 랄트 도련님, 거긴 기사들 훈련 대열이라서 따라가기 힘드실 겁니다. 그러니 저기 베오날드 님처럼 병사들 맨 뒷열로 가시지요."
"윽! …아, 알았어."
말데로브 경은 이 백작가의 숙장이며 유일한 상급 기사. 심지어 작위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후계자의 아들인 랄트라고 한들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건지 그는 투덜거리면서 베오날드의 옆에 가서 섰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의 지시 아래 본격적으로 아침 훈련을 시작했는데, 우선은 몸을 풀기 위한 체조를 한 이후에 곧바로 구보가 시작됐다.
병사들과 베오날드는 그대로 뛰어가는 한편, 기사들은 말데로브 경의 신호에 모두들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갈 것 같은 갑주와 무구를 그대로 착용한 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훈련 메뉴는 역시 다르군.'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너희는 기사! 즉! 이 백작가의 검이자 방패이다! 나약한 검과 방패는 쓸모없다. 알았나? 더 날카롭고! 더 단단해지는 것이 우리 임무이자! 기사도다! 움직여! 란스터! 자네는 중급 기사로 승급한 주제에 지금 하급 기사들과 똑같이 가는 게 이상하다고 안 느끼나? 벌써 힘을 아끼려는 건가?"
말데로브 경의 호령과 함께 기사들은 자신들의 중무장을 다 걸친 채로 뛰기 시작했다.
다들 오러를 사용하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데로브 경은 아주 가혹하게 몰아치면서 그들을 저택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기사님들 쳐다볼 시간에 자신들이나 신경 써라! 저분들은 저래도 우리보다 강하기에 강한 훈련을 받는 것이니 말이다!"
"예!"
"도련님들도 이 훈련에 참여하신 이상 봐 드리지 않습니다. 이 꽉 깨물고 따라오십시오. 구보가 끝났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낙오하시면 두고 갈 겁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인솔하는 지휘관은 베오날드와 랄트에게 다가와서 각오하라는 듯 엄포를 놓았다.
랄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베오날드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의 구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음~ 이건 너무 가벼운데?'
"하악… 하악… 하아악… 잠깐… 잠깐! 이거 어디까지 하는 거야? 하악...."
'…아, 이 친구, 딱 봐도 운동 부족이군.'
"하악… 하악...."
영지의 치안을 상시 유지하고 전쟁을 대비하는 병사들인 만큼 기사들보단 못하지만 구보라고 해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운동량을 가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태어나면서부터 단련한 마나 호흡법과 검술 수련, 사냥 덕분에 그 운동량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그동안 배우는 것을 등한시하고 놀고먹기만 하던 도련님인 랄트는 금방 땀범벅이 되고 숨을 헐떡이면서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기다… 기다려! 젠장! 기다리라고… 그학… 하악… 내가… 내가 왜 이런 걸… 하악… 쿠악!"
'결국 한계에 달했나? 하긴 본래 운동 안 하던 놈이라면 수위를 바꿔야 하는데… 여기에 참여시킨 자체가 이상한 거긴 한데....'
"젠장… 내가 왜 이런 걸… 젠장!"
'음,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어설픈 우정 연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버려두고 가야 하나? 으으음~ 일단은 멈춰야겠군.'
베오날드는 일단 지쳐서 엎어진 랄트의 곁으로 갔다.
무시하기엔 자신은 경쟁마 교육의 포지션이자, 양자로서 이제 형제가 되는 몸이었다.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신중히 해야 하는 그로선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이익… 씨이이익...."
"일으켜 드리지요. 시작이 힘들 순 있습니다."
"이거 놔! 너 따위 도움 필요 없어!"
'오, 좋은 반응이고~ 그렇지. 귀족은 자존심이 꺾이면 시체지. 암, 이래야지. 이래야 말고~'
속으로는 대견하게 여기면서 베오날드는 일단 그의 손짓에 물러났다.
하지만 역시 전신의 힘이 빠져서 그런지 랄트는 일어나기 힘들어했는데, 베오날드가 내려다보는 형국인지라 더더욱 굴욕감은 커져만 갔다.
가쁜 호흡 때문에 괴로운 것도, 온몸이 무거운 것도, 땀으로 끈적이면서 짜증 나는 것도 모두 베오날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젠장! 젠장! 다 이놈 때문에! 이놈 때문에에!'
'하지만 능력이 없으면 그저 찌질한 놈일 뿐이지. 물론 고작 14살짜리고, 이제 막 뭔가 시작한 만큼 재능에 대해 판단하긴 이르지만 말이야.'
"이익… 이이이익! 고개 돌려!"
'아, 내려다보는 게 불쾌했나 보군.'
랄트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굴욕감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일어날 수도 없고, 당장 저놈을 처리할 수 없어서 더더욱 큰 무력감까지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정에 랄트는 어떻게 해서든 저놈을 이길 거라고 이 악물며 맹세했지만, 전생의 경험에 14년간 철저히 단련해 온 베오날드와 다르게 그동안 놀고먹고 다니기만 한 그가 무엇 하나 베오날드를 능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이후 여러 훈련들을 더 진행했지만 랄트는 구보로 진작 뻗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앉아서 쉬면서 훈련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사들의 거친 훈련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했다.
"그럼 해산! 각자 씻고 정비 후 각자 업무에 들어가도록!"
"수고하셨습니다!"
아침부터 땀을 잔뜩 흘리고 난 뒤, 병사들과 기사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아침 훈련이 끝났다.
그렇게 돌아가려는데, 이제 좀 살 만한 건지 랄트가 베오날드에게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젠장… 젠장, 두고 봐! 오늘은 이렇게 되었지만 나중에...."
"그렇군요. 힘내십시오, 형님! 진정한 후계자가 되실 분이니 분발하셔야죠! 그럼 식사 때 뵙겠습니다."
"젠자아아아앙!"
미소로 대답해 준 베오날드는 랄트를 두고서 세인과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전신의 근육들이 난리인 랄트는 아침밥이고 뭐고 그냥 씻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아침 식사 자리를 빼먹으면 마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고서 씻으러 향했다.
그리고 저택에선 현재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와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이 함께 그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음, 벌써부터 효과가 나오는 것 같군. 부인? 내 말이 맞지 않소?"
"애초에 이제 막 시작한 아이에게 너무 과한 게 아니옵니까? 저 천한 피가 섞인 것은 시골에서 뛰어놀던 들개 같은 것인데!"
"맞소. 일부러 랄트의 자존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지. 저 아이도 귀족가의 아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것이 그냥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오. 부인도 알다시피 지금 난세잖소? 땅 한 쪼가리도 힘이 있으면 빼앗고, 힘이 없으면 뺏기는 그런 시대 말이오. 아무튼 오늘 저 아이가 깨달았으면 좋겠군."
렌겔 가주 대리는 랄트가 자신의 뜻을 깨닫길 원하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뒤에 있는 메이라 부인은 달랐다.
남편의 말이 일단은 옳아서 지금은 참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이 당한 굴욕을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생각한 그녀는 반드시 이 굴욕을 저 베오날드에게 돌려주겠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불태웠다.
[27화]
백작 일가와 아침 식사를 마친 베오날드는 다음 일정을 위해서 곧바로 움직였다.
다음 일정은 백작가의 가정교사에게서 받는 각종 수업으로, 매일매일 진행되며 요일마다 각각 다른 것을 배운다.
주로 배우는 것은 예법, 수학, 역사, 문학, 춤 등등… 귀족에게 필요한 소양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배울 것은 역사와 예법 과목이었다.
"저는 역사 교사인 벨이라고 합니다. 그럼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도련님들, 저는 교육을 맡은 자로서 엄격하게 진행할 터이니 불평 마십시오. 그러면...."
'…왜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들은 저런 마녀 같은 스타일인 걸까? 우리 가문도 저랬는데 말이지. 우리 아버지 대에도 그랬고, 내가 가주가 되었을 때도 저런 스타일인 것 같았는데… 어디서 만들어 내나?'
가정교사는 삐쩍 마른 중년 여성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깐깐하고 표독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베오날드는 '500년이 지났음에도 이건 변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가르치는 내용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나 그의 옆에 있는 랄트는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식사 후 이 교실에 오자마자 곧바로 책상에 엎드리더니 그대로 뻗어 버린 것이었다.
"랄트 도련님, 랄트 도련님, 일어나세요. 수업 시작할 겁니다."
"…드르러어엉...."
"도련님!"
"으아아아!"
콰당!
찌를 것 같은 하이 톤의 일갈이 떨어지자 랄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베오날드는 그 상황에 웃고 싶었지만 겨우겨우 참아 내면서 무표정하게 랄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상당히 볼만한 것으로 부끄러움, 민망함, 졸린데 깨운 것에 대한 분노 등등…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익… 이이익!"
"얼른 착석하십시오! 캘러메인 백작가의 뒤를 이으셔야 할 분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침에 갑자기 뛰어다녀서 힘들었다고! 젠장! 안 해!"
"어디 가십니까? 도련님! 도련님! 후우~ 결국 또 이렇게 되었군요."
랄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업에서 도망쳐 버렸다.
남은 건 베오날드와 가정교사 벨뿐. 서로 어색하게 시선을 주고받던 중 가정교사 벨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했다.
"크흠! 어쩔 수 없군요. 저도 일단 고용이 된 몸. 제 몫을 해야 하니 베오날드 님에게라도 교육을 진행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골 출신으로 입양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한들 캘러메인 백작가의 명예를 짊어진 몸이 되셨으니 가차 없이 진행할 것입니다."
"예! 선생님."
기합을 잔뜩 넣은 베오날드의 반응에 만족한 듯 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역사라곤 하지만 막 수천 년, 수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대륙이 어째서 6개의 나라로 갈라졌으며, 그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과 전쟁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주였다.
"현재 대륙은 우리 칼레움 제국부터 시작해서 한 제국, 다이나 왕국, 볼레아 왕국, 가르칸 공화국, 신성국. 이렇게 여섯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라 이름… 여기서 처음 듣는 거지? 하긴, 시골에서 나라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어. 기껏해야 캘러메인 백작가가 전부였지. 그나저나 익숙한 이름도 몇 있네. 다이나, 볼레아 가문 녀석들, 성공했나 보군.'
500년 뒤였지만 역사의 흔적은 이어지고 있는 것에 베오날드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있을 당시엔 다이나 후작가, 볼레아 변경백으로 불렸고, 다이나 후작가는 마법 명문가, 볼레아 변경백은 무가(武家)로서 명성을 떨치는 곳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일개 가문에 불과할 뿐. 통일 제국 시기의 국력은 막강했으며 황실을 등에 업은 '노이멀 가문'에 충성을 바친 놈들이었다.
'그놈들이 황제니 왕이니 자칭하며 거들먹거린다라? 정말 웃기지도 않네. 자기네들 가보를 나한테 바치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놈들이 말이야. 푸훕훕.'
"베오날드 도련님, 왜 웃으십니까? 제 수업의 어디에 웃음 포인트가 있는 거지요?"
"태양빛 아래 살면서도 보질 못하여 감겨 있던 눈이 뜨여, 그 광휘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작해야 더스티클록 영지와 이 캘러메인 영지가 세계의 전부였던 전 지금 막 세계의 광대함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요. 하긴 사람은 높은 산에 올라서서 세계를 바라보면 그 광대함에 감동하기도 하니, 도련님의 심경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중요한 수업 시간입니다. 이번은 넘어가 드리도록 하지요."
"예, 감사합니다!"
적절한 말재주로 위기를 넘긴 베오날드. 그리고 가정교사 벨의 교육은 계속됐다.
전반적으로 모두가 유용한 정보였기에 베오날드는 단 하나의 내용도 까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갱신해 나갔다.
'현 대륙의 판도, 그리고 국가의 과거사, 진행 상황을 모두 알 수 있다니! 최고로군!'
'어쩜… 저런 열정적인 눈빛을!'
가정교사 벨은 이곳뿐만 아니라 도시의 상인과 유력자, 장인, 기사, 귀족 자제들의 교육도 맡고 있었는데, 여러 도련님들 대부분은 '역사'나 대륙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면 시시해하거나 지루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개중엔 심하면 아까 전의 랄트 도련님처럼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14살처럼 보이지 않는 이 시골 출신 소년은 자신의 수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정적으로 응해 주고 있지 않은가?
'무골(武骨)처럼 보이는 자인데… 학구열도 이리 뛰어나다니! 캘러메인 백작가에 보배가 들어왔군요.'
"선생님? 갑자기 수업을 멈추셨는데...."
"음, 시간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그리고 오늘 배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머릿속에 확실히 집어넣어서 도련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보람이 있으니 좋군요.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예!"
그렇게 베오날드의 첫 역사 수업이 끝났다.
전반적으로 선생은 만족한 수업이었지만 베오날드에겐 약간 미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지도의 문제였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륙 모양이 바뀌는 건데? 역사 선생이면 대륙 전체 지도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아?'
아무리 개발새발이라도 자신의 위치와 대륙 전체 지도만 있으면 자신의 영지였던 '베노피스'를 찾는 건 정말로 식은 죽 먹기인데!
'…저 저급하게 그린 지도만 봐도 화가 날 지경인데, 그나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뭔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젠장!'
통일 제국 시절 질리게 본 지도를 기억하고 있는 베오날드가 자신의 기억과 저 저급한 지도를 최대한 맞춰 보려고 했지만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지명도 다 다르고… 해안선도 다르고...! 대체 전쟁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땅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닐 텐데.... 하아~ 일단 나중에 하자.'
결국 베노피스의 위치를 가늠하는 건 차후로 미루자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음 예법 수업이 이어졌는데, 대귀족으로 수십 년을 산 베오날드에게 예법이란 숨 쉬는 것과 같기에 이제 최신 트렌드만 알면 될 정도였다.
40분 만에 예법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베오날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도련님께 제가 가르칠 것은 없습니다! 도련님의 수업료는 받을 수 없습니다. 신이 내린 천부적인 창조의 기적 앞에! 저는 그저 길 안내밖에 할 게 없습니다."
'이건 뭔가 사기 치는 기분이라 찝찝하군.'
다른 이들에게 있어 예법은 그저 귀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혹은 평민들과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한 격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예법 선생에게는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을 시골 출신인 14살짜리 청년이 약간의 지적만으로 관록과 기품을 몸으로 구현해 내자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베오날드로선 사기 친 기분이라서 좀 찜찜했기에 그를 위로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예법 수업까지 끝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점심때.
점심 식사는 낮에 공무가 있거나 다른 볼일이 있을 수 있기에 가족이 모두 모이지 않았고, 각자 혹은 시간이 나는 이들끼리 모여서 먹었기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후우~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있겠네. 알테리오, 아빠 없어서 외로웠지?"
삐이이잇!
이제부터 저녁때까지는 자유 시간. 성인식을 하지 않았기에 딱히 임무나 할 일이 있는 게 아닌지라, 저택 내 혹은 영지 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다.
물론 이미 무엇을 할지는 정해 놓은 그였다.
'도서관! 도서관을 간다. 지식의 방주이자 요람! 한 시간짜리 감질나는 교육으로 못 얻은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서!'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점심 식사 후 도서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운동 부족인 주제에 격렬한 아침 운동을 한 것 때문에 근육통에 시달리는 랄트 도련님은 현재 끙끙대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이 와서 그를 돌보고 있었다.
"괜찮니? 랄트? 정말이지! 그이도 너무하지. 저런 짐승 같은 잡종과 경쟁을 시키다니!"
"엄마아아아~"
"걱정 말렴. 저건 널 자극하기 위해서 데려온 잡종일 뿐이란다. 네 후계자 자리가 위협받을 일은 절대로 없어! 이 엄마만 믿으렴."
"하지만 엄마아아, 여기서도 다 들리는걸요? 시종들이랑 집사들이 '드디어 캘러메인 백작가에 어울리는 후계자다.'라느니, '베오날드 도련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라느니, '그 깐깐한 벨 선생님이 만족하다니!', '말리드 예법 선생님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대요!'라면서 그 커다란 녀석 이야기만 한단 말이에요."
겉으로는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랄트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다.
그래, 아무리 오만방자하다고 해 봐야 14살.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이야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섬세한 나이대였다.
그동안엔 하인들이 아무리 중얼거려도 자신이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이젠 압도적인 비교 대상이 생기다 보니 열등감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얘야! 저놈이 이상한 거다! 그리고 귀족이란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는 자가 아니란다. 그러니 모자라도 돼! 전통과 혈통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그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질 수 없는 걸 네가 가지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엄마아… 걔 진짜 엄청 무서워. 아침에… 날 내려다보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더한…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무서웠단 말이야."
랄트 또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더 어릴 적에 자신을 축하하러 온 다른 귀족들이나 또 제국 수도에 가서 더 높은 귀족들은 물론 이 나라의 황제까지도 본 적이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경험 덕분에 오늘 쓰러진 자신을 걱정하듯 연기를 하는 베오날드의 눈빛 속에 너무나 차갑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존재하는 걸 눈치챈 것이었다.
"그 눈! 안에 차갑고 공포스럽고! 무언가 거대한 게...! 제국 수도에서… 수도에서 아빠랑 할아버지를 적대하던 아저씨들이 보던 그 눈빛처럼… 무섭단 말이야!"
"진정하렴. 그리고 정신 차리렴! 괜찮아! 엄마도 있고! 엄마의 가족도 있단다. 그리고 그 반푼이가 그토록 강하다면 순혈인 너도 강해질 수 있단다! 그저 조금 늦은 것뿐이야!"
"…나도… 그놈처럼?"
"그래! 아니! 오히려 그놈보다 더! 네게도 가능성이 있어! 너에겐 캘러메인 백작가의 피도 있지만, 이 어머니의 고귀한 피도 흐르고 있단다! 그럼 그 천한 용병의 피를 절반 가진 놈보다 더 가능성이 있어! 시간이!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뿐이란다! 그럼!"
그렇게 필사적으로 랄트를 위로하는 메이라 부인. 그녀의 말에 조금은 위안과 용기를 얻은 듯 덜덜 떨던 랄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14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애송이였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오늘 베오날드에게 얻은 굴욕과 그에게 압도당한 것을 떠올리면서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진짜?"
"그럼! 이 엄마도 도와주마! 그러니 힘내렴! 너라면 14년쯤의 차이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다. 그 잡종보다 2배는 뛰어나니까!"
"어, 나! 해 볼게!"
그렇게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랄트의 눈빛은 오늘 오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메이라 부인은 남편의 의도대로 경쟁마 교육을 통해 아들이 한 걸음 성장한 것에 기뻐하면서도 베오날드라는 애송이의 역량이 자신의 생각을 자꾸 넘어서고 있는지라, 좀 더 신경을 써서 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8화]
같은 시각, 캘러메인 백작가의 서재.
"이게… 무슨...!"
베오날드는 아주 실망하고 있었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이자 저장 수단. 그렇기에 그 어떤 것보다 귀족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확보해야 하고 보관을 철저히 해야 하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사람인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며 지식을 전수하는 데 있어 구전으로는 정보가 조금씩 손실되거나 수정되기도 하기 때문에 '책'의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높게 여겨졌다.
'고작 이것밖에 없다고오오? 백작가인데?'
하나 베오날드는 서재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베오날드의 키보다 살짝 큰 책장이 고작 5개. 한 책장당 앞뒤 다 포함해서 약 2~300권 사이의 책이 있는 것 같으니 최대로 많이 쳐줘도 1,500권. 하지만 책장에 가득 꽂혀 있지 않았으니 그보다 더 적을 것이다.
'아니, 대체 왜 이 꼴이지?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어머나~ 소문으로 듣던 뉴페이스 도련님이 이 서재엔 어쩐 일이신가요?"
"어… 음, 그러니까 책을 보러 왔죠? 그보다 당신은?"
"마탑에서 이 백작가에 파견된 4급 마법사 셀리나라고 합니다. 지금은 여기 서재를 관리하면서 개인 연구 중이지요!"
자신을 소개하는 셀리나. 마법사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로브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키가 175센티미터가 넘는 게 특징인 여성이었다.
미모 또한 나쁘지 않아서 충분히 베오날드의 미인 컷에 들어갈 정도였지만, '마법사'라는 카테고리에서 그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마탑 새끼들, 입만 열면 돈 이야기만 꺼낸단 말이야. 진리니 근원이니 찾는다면서 맨날 후원금, 연구 자금...! 그러면서 마법사들을 독과점으로 운영하는 양아치 새끼들!'
대귀족이자 통일 제국을 지배한 베오날드도 도저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들로 전략, 전술, 지혜적 가치를 비롯해서 고대부터 내려오던 '마탑'의 독점 구도 때문에 어떻게 해 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했고, 결국 거액의 후원금과 '연금술사' 자격으로 자신도 마탑에 소속되는 걸로 그들의 압력을 간신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거 되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젠장! 마스터를 따는 것도 힘들었지.'
마탑의 계급 체계는 최하위인 1급에서 9급, 그 위로 마스터로 베오날드는 정치적, 권력의 힘이 있었음에도 마스터를 딴 것이었다.
이렇듯 마탑에 관해선 좋은 인연이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마법사를 혹시 처음 보는 건가요? 괜찮아요. 잡아먹지 않는답니다, 도련님."
"그, 그런가요? 역시 그렇겠죠? 하하하. 아무튼 일단 구경이나 좀 해 볼게요. 그럼~"
다행히 셀리나가 시골 출신인 자신이 생전 처음 마법사라는 존재를 보고 놀란 것으로 오해한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둘러댈 수 있었다.
베오날드는 어울리기 싫어서 슬쩍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녀는 관심이 있는 건지 베오날드의 뒤를 종종 따라왔다.
"...."
"...."
"저기, 무슨 용무라도?"
"그리폰을 길들이셨다면서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멀리서 봤는데 상당히 크던데! 언제부터 길들이셨죠? 그리고 먹이 공급은 어떻게 하시나요? 배변 처리는? 서열 정리는? 날개 한쪽이 안 보이는 이유는?"
속사포처럼 재잘거리면서 베오날드를 압박하는 셀리나.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그녀의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은 제 방에 있습니다. 밖에 마음대로 풀어 둘 수 없어서 거기에 놔두었지요. 길들인 건 새끼 때고, 한 반년 다 되어 갑니다. 날개가 없는 건 아마 기형으로 태어나서일 겁니다. 그리고 먹이 공급은 밖에서 사냥으로 하고, 배변 처리도 마찬가지죠. 이 정도면 되었나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피라든가 깃털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시약 소재라든가 매개물 같은 걸 만들고 싶어서! 아! 물론 공짜는 아니구요. 또 기왕이면 데려와 주셔서 얼굴도 좀 보고 싶네요. 그리폰!"
"피는 무리지만, 깃털 정도라면 모아 놓은 게 있으니 그걸 드리죠."
"정말요? 그럼 언제 찾아가면 될까요?"
"아뇨. 내일 다시 여기로 올 테니 그때 가져다 드리죠. 아무튼 전 독서나...."
베오날드는 그렇게 셀리나를 멀리하고 책장으로 시선을 옮겨 하나씩 책을 뽑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에 고서(古書) 같은 것이 있어서 자신의 영지 베노피스에 대한 단서라든가, 아니면 그 즈음의 다른 정보 같은 것이 있을지 몰라서 계속해서 뒤져 보았다.
'…영 영양가 있는 내용이 없군. 근데… 음? 설마?'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베오날드. 그는 책을 넘기지도 않고 갑자기 책 중간에 문장들이 나오는 부분만 보고는 홱 하고 넘겼다.
뒤에서 셀리나가 따라오는 것도 무시한 채 그렇게 빠른 속도로 책들을 넘겨 보던 베오날드는 책장의 절반 정도를 다 훑어보자 이 책들에 있는 내용이 전부 '필사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필사본밖에 없는 거야? 인쇄본은 없는 거냐고!'
"왜 그러시는지요?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신 겁니까? 도련님? 관심 가는 분야가 있으면 저에게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 드릴 수도 있는데 말이죠~"
'대체 5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이게 말이 되나?'
500년 전 베오날드가 있던 시대엔 엄연히 '활자 인쇄술'이 존재했다.
글자별로 파츠를 만들어서 문장을 조합한 다음 책을 비롯한 글로 담긴 '지식'을 찍어내어 대량 생산하는 기술. 그래서 평민들도 나름 책을 보유할 수 있었고, 베오날드 같은 대귀족의 경우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는 게 가능했었다.
"음? 도련님?"
"저기, 그… 활자로 인쇄된 책은 없나요? 도시라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활자… 요?"
'마탑은 분명 500년 전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그렇다면 필시 이 이유에 대해서 알겠지?'
"음? 그게 뭔가요? 무슨 글씨체 같은 건가요? 글씨체 책 같은 건 여기에 없는데요."
'뭐라고?'
'활자'라는 것을 모른다는 대답에 베오날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대체 500년간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통일 제국이 분열한 것이야 뭐 그냥 역사적 흐름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멀쩡히 올려놓은 문명의 발달이 이렇게 후퇴한 것은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기 위해서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마탑에서 오셨다면 엄청 멀리서 오셨겠네요. 마탑… 딱 산맥 속에 고고히 서 있는 거대한 탑이라는 이미지인데… 저도 산 쪽으로 사냥을 다녀 봐서 아는데, 그럼 꽤 위험하지 않나요?"
"아~ 한 500년 전쯤엔 그런 곳에서 지냈다고 하던데… 지금 거기는 파괴되었어요. 그래서 이름은 '마탑'이지만 그냥 제국 수도에 있는 '마법 대학교' 같은 곳이 되었어요. 물론 상징성을 생각해서 '마탑'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이지만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후우~ '베노피스의 유산'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지식의 성소이자 본토였던 마탑은 무너지고, 대륙 전체에다가 엄청난 짓거리를...."
'설마 또… 난가?'
이게 말이 되냐면서 경악하고 싶었지만 베오날드는 일단 꾹 참았다.
대체 500년 전에 자신의 유산을 두고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탐욕에 미쳤어도 그렇지, 대체 어떻게 해야 인쇄술까지 까먹을 정도로 문명이 퇴화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에 암흑신의 음모가 끼어 있는 건가? 아니지,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인쇄술은 결국 우리 같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배를 위한 기술로만 사용하려고 외부 유출을 극히 꺼리고 통제했어.'
평민들도 책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족들에게 필요 없는 장서를 판 것일 뿐, 인쇄술은 아주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관련자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소수만이 독점하고 있던 게 갑자기 공격을 받거나 해서 사라지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 라기엔 너무 무리수가 많군.'
"아무튼 이제 '탑' 형태의 마탑은 없으니까요. 또 다른 질문은 없으세요?"
"아, 일단은 없습니다. 그럼 얌전히 독서나 하겠습니다."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이 500년 뒤의 세상은 같아 보이면서도 자신의 생각보다 엄청 변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는 장서들을 보면서 베노피스에 대한 단서라든가 역사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을 열심히 탐구했지만 역시 제대로 활자로 생산된 책이 아니라 사람이 옮겨 적거나 직접 쓴 사본들이라서 내용도 중구난방이거나 갑자기 뜬금없는 문장이 들어가는 등등 정보 오염이 심각했다.
"도련님, 슬슬 저녁 시간입니다."
"어, 알았어, 세인. 갈게."
정신없이 책들을 훑어보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베오날드는 결국 도서관에서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다.
여전히 의문인 지난 500년의 일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캘러메인 백작 일가와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나가서 사냥과 훈련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첫날이라 하루가 아주 길군. 후우~ 낯선 곳이라 그런가?'
삐이이잇!
"알테리오. 손~ 옳지~"
똑똑.
준비하면서 세인과 알테리오가 노는 것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베오날드가 들어오라고 하자, 문이 열리고 낯선 사내가 들어와 베오날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베오날드 도련님! 전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자 '제럴드 경'의 종자로 일하고 있던 에라솔 말데로브라고 합니다. 부친이자 이 영지의 사령관인 말데로브 경의 명을 받고 이 시간부로 도련님의 호위와 수련의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흐음...."
자신을 소개하며 들어온 에라솔이라는 남자는 밝은 금발에 깔끔하게 태운 갈색 피부를 가진 훤칠한 청년이었다.
기사를 모시는 종자이긴 하지만 역시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갑옷과 무장을 탄탄하게 갖춘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종자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원시원한 미소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쾌남의 모습. 누구라도 호감이 갈 만한 인상이었지만 왠지 성실할 것 같지는 않은, 뭔가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뭐, 인상만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그래, 잘 부탁하지. 근데 오늘 나는 이 녀석 밥 먹이러 사냥을 갈 거라 저녁엔 수련실을 쓰지 않을 거네. 그러니 내일부터 부탁하지."
"아!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도련님은 아직 오신 지 얼마 안 된 만큼 영지를 다니시다가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에라솔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베오날드는 곤혹스러워했다.
아무리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곤 하나 아직 그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하는 게 아니며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같이 가도록 하지."
"예! 그럼 곧장 말을 데려와서 대기시키겠습니다."
"그, 그래. 아, 맞다. 세인은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상냥하게 깨우러 와 줘."
베오날드는 그렇게 세인을 돌려보낸 뒤 에라솔이라는 청년과 알테리오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세인은 베오날드의 지시에 따라 그의 방의 문단속을 한 다음 저택 복도를 지나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의 방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세인. 그래, 그 망할 베오날드라는 놈에 대해서 어서 이야기해 주렴."
"예, 마님."
[29화]
세인. 그녀는 메이라 부인의 가문에서 데려온 메이드로 메이드장에게 압력을 넣어서 베오날드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었다.
백작과 가주 대리가 모르게 메이라 부인은 저택 내에 자신의 힘이 닿는 영역을 철저히 만들어 놓았고, 그 덕분에 자신의 아들 랄트에게 방해가 될 사내아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베오날드 도련님은 도저히 14살로 생각되지 않는 분입니다. 신체의 성장부터가 두드러지는 것도 있지만, 행동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관록이 도저히 시골 출신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캘런 그년이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켰나 보군. 제길! 시골 촌닭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을! 계속 말해라."
"기르고 있는 그리폰도 제대로 통제하고 있고, 위험성에 대한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武)의 소양만 가진 게 아니라 지식도 많아서 책을 보면서 무언가 정보를 찾으려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그리폰 때문인지 마법사이신 셀리나 님과도 접촉했고,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호위로 붙었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접촉한 시간이라고 해 봐야 데리러 갔을 때뿐이었을 텐데?"
영지 내 유일한 상급 기사이자 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말데로브 경이 아들을 호위로 붙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해석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말데로브 경이 그 시골 잡종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는 된다.
더욱이 문제는 그렇게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붙음으로써 베오날드에게 수작을 걸기 어려워졌다는 거였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이지? 말데로브 경은?"
"아마 마님에게서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는지요? 너무 빨리 죽거나 다치면 경쟁마 교육이 진행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뭐?"
"주인 어르신과 가주 대리님도 어느 정도 감을 잡고 계신 거겠죠. 마님께서 다른 부인들께서 낳은 사내아이들을 몰래 죽… 꺄아!"
쨍그랑!
그 순간, 세인은 메이라 부인이 던진 꽃병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유리 조각과 물, 꽃이 땅에 흐트러졌고, 세인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네년, 설마 나 없는 데서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죄,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실수했습니다."
"안 되겠구나. 후우~ 가뜩이나 그 잡종 새끼 때문에 우리 랄트가 괴로워해서 화가 나는데, 벌을 받아야겠다. 벗으렴."
"마, 마님, 제가 정말 잘못했...."
"얼른!"
"…예."
세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메이드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사이 메이라 부인은 침대 옆에 잠겨 있는 서랍의 문을 열고 거기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온 것은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채찍. 그녀가 본가에서부터 애용하던 것으로, 아랫것들을 조교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간 모자란 것들은 맞아야 말을 듣지. 절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감히 내 앞에서 입을 열어? 세인, 이건 전적으로 네가 잘못한 게 맞지?"
"마… 맞습니다, 마님."
"그래, 이건 교육이란다. 그러니 달게 받으렴. 늦은 밤이니 비명 지르면 안 되는 거 알지?"
"예, 마님."
찌아아악!
평생을 써 온 채찍이기에 메이라 부인은 아주 능숙하게 채찍을 다루었고, 채찍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세인의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단 한 번으로 피부가 풍선 터지듯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나왔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고통이 세인을 덮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어서 이 고통이 지나가길 빌며 계속해서 메이라 부인의 채찍질을 받아 냈다.
"후우~ 알았니? 또 허튼소리를 하면 다음엔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란다."
"예… 예, 마님."
"좋아. 일단 넌 계속해서 그 잡종 놈의 곁에서 환심을 사고, 동향을 계속 나에게 보고해라. 그 일조차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네 상상에 맡기마. 그럼 어서 네 더러운 피가 묻은 카펫을 들고 꺼지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메이라 부인의 말에 세인은 옷을 대충 입고, 간신히 일어나 피가 묻은 카펫을 들고 부인의 방을 빠져나갔다.
등의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이젠 이런 일을 당해도 억울하거나 서럽다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무기력이 학습된 자신이 더 한심하게 느껴진 세인은 그대로 묵묵히 등을 치료하고, 피로 젖은 카펫과 옷을 세탁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
몇 주 뒤, 아침.
"보십시오, 아버님. 어떻습니까?"
"허허허, 네 말이 맞구나. 확실히 랄트의 눈빛이 많이 달라졌어."
렌겔 가주 대리는 현 가주인 캘러메인 백작과 함께 창밖을 내다보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메마른 노인인 캘러메인 백작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독기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는 현재 메이드장이 끄는 휠체어에 앉아서 창밖의 랄트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 손자가 정신을 차리니 아주 좋군."
그 놀고먹으면서 오만하게 횡포만 부리던 후계자 랄트가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병사들의 구보를 따라가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 길이 아직 멀긴 했지만, 그래도 첫날처럼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따라가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내심 불안하긴 했는데,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군. 네 선택이 맞았구나."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저러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베오날드에게 좀 더 관심을 주는 척할 겁니다."
"하지만 렌겔, 잊지 마라. 우리 가문의 후계자는 랄트다. 귀족에겐 혈통이 정의다. 아무리 캘런의 아이가 뛰어나다고 한들. 알았느냐?"
"물론입니다, 아버님."
캘러메인 백작. 현 가주이자,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대귀족의 표본 같은 사람으로 귀족의 혈통은 고귀한 것이라고 믿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가문과 그 격에 맞는 여성과 맺어져서 낳은 랄트야말로 진정한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캘러메인 백작은 현실주의의 시각을 약간이나마 가진 아들인 렌겔과는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니 넌 저 아이를 이용하되 절대로 그 재능과 빛에 매혹되어선 안 된다. 저건 파멸의 씨앗이다. 저 잡종이 절대 허튼 꿈을 꾸지 않게 너는 철저히 주제 파악을 시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물론입니다. 이미 경쟁마 교육을 시키고 난 이후까지 생각해 놓고 있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사위로 보내든가, 아니면 적당한 영지를 줘서 독립시켜서...."
"멍청이! 저놈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고서 내린 판단인 게냐? 늑대가 사자를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말데로브 경의 사위로 보내는 건 오히려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렌겔 가주 대리의 안일한 생각을 지적하며 캘러메인 백작이 호통을 쳤다.
아무리 혈족이어도 놈은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인 잡종.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빚 때문에 자작의 작위를 내렸지만 절대로 가문에 합류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더스티클록 영지가 그 모양이었고 말이다.
"네 말대로 지혜와 용맹을 다 갖춘 인재라고 한다면 나중에 결국 랄트가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반감을 갖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느냐? 자신의 능력이 랄트보다 뛰어나다는 걸 아는데 그 자리를 빼앗기는 걸 가만히 볼 수 있겠느냐?"
"그렇게 치면 말데로브 경도 상급 기사인데 저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가 말데로브 경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고, 그가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지 않느냐? 영지를 스스로 우리에게 반납하고, 작위를 받았지만 '기사'로서 살고 싶다고 '경'을 자칭하지. 하지만 저 아이는 아직 그런 신뢰의 증거를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러니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시간이 되었으니 저는 영지 업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겉으론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렌겔 가주 대리는 적어도 랄트가 이 영지의 후계자에 어울릴 만한 인재가 될 때까지는 베오날드를 인정해 줘야 하며, 정말 대안이 없을 경우엔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지금 시대를 너무 우습게 보고 계셔. 현장을 벗어난 지 오래되셔서 국가 정세와 상황을 모르시니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업무실로 돌아온 렌겔 가주 대리는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6개의 나라로 나뉜 전국. 자신이 속한 칼레움 제국은 대륙 서부에 자리 잡은 국가이며, 현재 3개의 다른 국가와 전선을 맞대고 있어 상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전쟁도 잦았다.
그래서 제국의 부름에 이 캘러메인 영지도 꾸준히 군을 파견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혈족인 인재를 버릴 순 없지. 위험하다고 해도 차라리 더 유능하고 강한 자가 가주가 되는 게 난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차피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과연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가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의 시샘과 질투를 견딜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랄트 이래로 가문 내의 사내아이들을 죽인 유력한 자임에도 부인이자 그녀의 본가도 나름 힘을 쓰는 귀족이었기에 손을 댈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비록 위험을 미리 알렸다곤 하지만 그녀의 술수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베오날드의 일상은 그 뒤로도 큰 변화 없이 흘러갔다.
아침 훈련과 교육, 오후와 저녁엔 자유 시간, 심지어 오전의 교육은 오히려 선생들을 감탄시키는 일이 많아서 수업을 거부하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베오날드는 사실상 아침 공동 훈련과 식사를 제외하면 저택과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될 만큼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 되었다.
'이제 곧 성년식이니 본격적인 일은 그때부터지.'
성년.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나이가 된다.
물론 바로 무거운 책임과 현실 자각이 필요한 건 아니고, 그 이후 약 20세까지는 '준성년'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때부터 자신이 할 일과 직책을 정해야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선택이 가장 중요한데 말이지. 왜냐면 이대로 가면 난 분명....'
이 영지의 군에 속해서 기사로 복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평시엔 X 빠지게 일해야 하며, 전쟁터에 나가서 공훈을 세운다고 한들 결국 백작가에서 줄 수 있는 보상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라 단물만 쪼옥 빨릴 가능성이 컸다.
또한 너무 큰 공을 세우면 역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여길 지켜본 결과 여기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도 좋을 일은 없는 것 같아.'
혈족이긴 해도 절반이 용병의 혈통인 만큼 여기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도 하위 귀족들이 이탈을 하거나 아니면 랄트를 명분으로 내전이 일어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후계자 자리를 빼앗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독이 든 성배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여기를 떠나기엔 다른 대책이나 정보가 없기에 베오날드는 이곳에서 계속해서 무예 단련과 필요한 물건들을 제작하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라면 여기서 평온히 있는 것도 나름 힘든 일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노려보는 시선이 많이 느껴지는군. 메이라 부인이 본격적으로 날 노리려 하는 건가?'
메이드와 집사들, 그리고 주변에서 일하는 자들 사이사이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이 진하게 느껴졌다.
딱 봐도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의 사주일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 되더라도 똑같은 짓을 했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일을 방해하면 가만둘 생각은 없는 베오날드였다.
[30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줘도 못 가질 집안을 가지고 쓸모없는 싸움을 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아.'
지금 베오날드에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검술로는 노이멀의 3대 오의를 마스터하고, 그다음 황실 기사단 검법, 황가 검법으로 진도를 나아가야 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연금술 지식의 재정립과 실험 및 자료 조사, 알테리오의 조련과 훈련, 사냥.... 이것만 해도 벅찬데 추가로 이 캘러메인 영지와 저택의 일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예 나는 후계자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메이라 부인과 몰래 교섭해서 하하호호 하는 결말도 나쁘지 않지만, 그러면 결국 저 망나니 같은 랄트 놈이 후계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없지.'
지금은 자신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훈련과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베오날드가 만약 항복 선언을 해서 메이라 부인이 안심하게 되면 자연히 랄트의 긴장도 풀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다시 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망나니로 남을 거고, 그런 랄트가 후계자가 되면 이 영지의 미래도 밝지가 않을 터였다.
'후우~ 그래도 부모님이 있는 영지이니… 그놈을 정신 차리게 할 수밖에 없군.'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경쟁마 교육의 효과를 위해 메이라 부인의 적대심을 계속해서 받기로 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것을 핑계로 성년이 되었을 때 '영지 군대'에 속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사전에 말데로브 경에게 이 일을 상담했다.
"아, 그 일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 이미 가주 대리님과 다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랄트 도련님이 변하기 시작한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기상조이지요. 아마 랄트 도련님과 같이 가주 대리님을 따라서 일하실 겁니다."
"음, 그게 밝혀지면 메이라 부인… 아니, 어머님이 많이 화를 내실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틈을 노리고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에라솔 군 덕분에 위협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근 몇 주간 메이라 부인은 계속해서 베오날드를 노려 왔다. 특히 그가 야간에 알테리오의 먹이 공급과 산책을 위해 나가는 타이밍에 손을 쓰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이 따라붙는 바람에 위험부담이 너무 커져서 노리는 걸 포기했던 것이다.
"틈을 노리는 걸 알아냈단 말입니까?"
"예. 산에서 괜히 지낸 게 아닙니다. 게다가 알테리오도 있구요."
산에서의 경험, 거기에 알테리오라는 그리폰의 존재로 인해서 어설프게 따라붙는 자들을 알아챈 것을 납득시키는 베오날드였고, 말데로브 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했다.
"더구나 제가 '천연 기사'라는 걸 모르니까 아마 전문적인 도적 길드 무법자 같은 게 아니라, 어디 싸구려 용병 나부랭이나 고용했겠죠. 정말로 에라솔이 없었으면 진작 피를 봤을 겁니다."
"예. 그나마 지금은 아직 성년이 아니고, 또 저택의 유명 인사이시니 건들기가 더 힘들었을 겁니다."
"제가요? 아~ 하긴 뉴페이스이니까 다들 주목하곤 있겠죠. 하하."
"아무튼 곧 있을 성년식까지도 조심하셔야 하지만 그 이후에도 조심하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예. 아, 그건 그렇고 말데로브 경, 하나 부탁할 게 있습니다만...."
슬슬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베오날드는 말데로브 경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성의 외곽에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고 싶으니 저택 하나를 달라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부탁에 말데로브 경은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알테리오의 사냥 문제와 겨우내 쓸 식사 비축, 그리고 비밀 수련과 혹시 모를 메이라 부인의 습격이나 암살 위협에서 도망칠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자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하긴 그 그리폰이 먹기도 많이 먹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알았습니다. 그럼 제 사유지에 있는 빈집 하나를 알아봐 드리지요.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도 내려놓을 테니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직접 구하려고 했으면 돈 문제부터 시작해서 매물을 구하기 힘든 것 등등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만, 적절한 후견인이 있으니 이리 쉽지 않은가?
이래서 사람은 백이 있어야 한다고 절로 생각이 드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디어 베오날드가 원하던 저택이 마련되었다.
"으음, 꽤 작지만 마음에 드는군."
"한데 이런 저택은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베오날드 도련님?"
저택은 엄연히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 안에 있었기에 그 안내를 위해서 같이 온 에라솔이 용도를 물었다.
베오날드는 이미 말데로브 경에게 말했던 대로 대답하면서 철문을 열고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서인지 여기저기 풀과 잡초가 무성했으며, 내부 또한 먼지가 가득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물이 있다는 점과 집은 2층이지만 안을 보니 생각보다 넓어서 쓸 수 있는 방도 꽤 많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지하실까지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게 다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만족해했다.
"저기, 도련님, 하인들에게 치우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직접 하지.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니까. 대신 이것들 좀 사 와 줄 수 있겠나?"
"기꺼이! 그럼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도련님!"
에라솔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베오날드가 준 쪽지를 받아 들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저택을 청소하기 시작했는데, 에라솔이 약 3시간 정도 걸려서 물건을 다 사 올 쯤엔 저택 대부분이 청소가 완료된 지 오래였다.
'마나 호흡법으로 단련된 육체라는 건 정말 사기적이라니까… 이 좋은 능력을 오직 전투에만 쓴다니. 에휴~'
"도련님! 주문하신 물건 모두 말끔하게 다 사왔습니다!"
말에 작은 수레 하나를 연결해서 도착한 에라솔을 본 베오날드는 수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며 충실히 자신의 말을 이행한 그를 속으로 칭찬했다.
'아, 왔나? 근데 저 눈빛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니까… 외양과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아버지는 군 지휘관이자 영지 내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진 말데로브 경이다.
금발 머리에 태운 피부, 거기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에라솔은 선입견으로만 보면 정말 숨 쉬듯이 여자를 후리거나 횡포를 부릴 것 같았지만, 몇 주간 같이 지내 본 결과 여자관계에선 숙맥이고 지금까지 기사로서 단련만 열심히 한 순수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전통 기사 가문 도련님이라서 그런지 내가 천연 기사라는 걸 알자 저렇게 동경과 존경심 가득한 태도라니.... 너무 부담스러워서, 원.'
"역시 대단하십니다. 도련님의 손에 걸리면 청소도 일이 아니군요!"
"그렇게 감탄한 일은 아닌데 말이지. 아무튼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종자이자 호위로서 당연한 일이죠! 더 도와 드릴 일 있으면 기탄없이 시켜 주십시오, 도련님!"
'…너무나 충직하고 성실한 녀석이라 껄끄럽군.'
하나 마냥 좋다고 하기엔 살짝 거북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치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은 오히려 경계하는 게 베오날드의 심경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디에 쓰실 겁니까? 도련님. 유리병들은 왜 이렇게 많이 사신 건지...."
"알테리오의 먹이 가공이랑 간단한 응급처치 약 같은 걸 만들기도 하는 거지. 내가 있던 영지엔 신전도 너무나 작고, 신관님도 치유 마법이 약하시거든. 그래서 약초를 가공해서 약을 만들곤 했지."
"아하~! 그렇군요. 하긴 가벼운 상처 같은 걸로 신관을 불러서 치료비를 내긴 아까우니까요."
'그 신의 은혜를 빌어먹고 사는 놈들은 여전한가 보군.'
기본적으로 마탑 쪽에 속하기도 하고 세계와 현실을 파헤치는 학문인 연금술을 전공하다 보니 베오날드는 신전과는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연금술을 하면서 발달시키는 의학과 약학은 신성력과 비전 치료법으로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하는 신전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정치적 라이벌 세력이었다.
게다가 아예 없앨 수 없어서 그냥 일부 파벌에게 거액의 헌금을 내는 걸로 입막음하는 게 한계였다.
"아무튼 이곳의 신전에는…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하지."
"예! 제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것들 정리는 내가 하고 있을 테니 밖의 풀들을 부탁하지."
"예! 도련님!"
에라솔을 밖으로 보내 버린 베오날드는 그가 사 온 물건들로 다시 연구실을 꾸렸다.
이번엔 기초적인 연구나 가벼운 시약 제조밖에 못했던 예전과 달리 은밀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기에 좀 더 심화적인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자급자족해야 했던 시골과 다르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영지라서 돈만 있으면 웬만한 재료를 공수할 수 있어서 좋군. 물론 마석(魔石)은 터무니없이 비싸서 내가 직접 공수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야.'
유리 장인, 대장장이, 약초상, 고기 및 야채, 모험가 길드도 있어서 필요한 소재를 지닌 몬스터의 위치도 확인해서 직접 사냥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역시 무언가를 하려면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면서 베오날드는 완성된 연금술 실험실에서 무엇부터 만들지 고민하며 저택을 나왔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할 수 있겠군.'
지금 하고 있는 검술 수련과 마나 호흡법도 새롭고 중요한 것이었지만, 역시 베오날드의 근본은 대귀족과 연금술사였기에 그는 이쪽을 할 때 더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
같은 시각, 캘러메인 백작가.
사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여도 메이라 부인은 어떻게 해서든 베오날드를 이 저택 혹은 후계자 경쟁에서 치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젠장! 젠자아아앙!"
세인도 붙이고 그의 행적에서 빈틈이나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놈은 무슨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저택 생활을 완벽하게 보내고 있어서 손을 쓰려고 해도 쓸 곳이 없었다.
용병들이나 기사를 고용해서 무력을 쓰려고 해도 말데로브 경이 아들을 호위로 붙여 놔서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그래서 스트레스가 늘어난 메이라 부인은 현재 방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거나 부수면서 분노를 쏟아 내고 있었다.
차라리 뭔가를 억지로 지적해서 어떻게든 평판을 깎아 먹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바로 자신의 아들인 랄트가 더 수준이 떨어지기에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차라리 성년식 이후 군에 속하게 만들어서 영지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는데! 그것도 그 멍청한 이가 막고 있고! 아아아아아악!"
'랄트의 행동이 바뀐 건 좋지만 역시 그건 베오날드가 있기에 일어난 일. 랄트의 가능성을 키우고 싶기에 성년식 이후 둘 다 내 곁에 두고 각종 일을 맡길 것이오. 어차피 랄트에 대해선 걱정할 게 없는 게, 부인과 그쪽 가신들이 도와줄 것 아니오?'
"그 망할 인간이!"
'그러니 베오날드 정도나 되어야 오히려 공정한 승부가 되겠지. 허허허, 물론 그 아이 하나를 상대하는 데 랄트와 부인이 협동을 해야 공정한 승부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버님을 설득해서 손을 쓰는 수밖에...."
결국 현재 병환으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캘러메인 백작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메이라 부인은 곧장 그에게로 가서 베오날드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흐음, 그 정도로 그 아이가 위협적이란 말인가?"
"예,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로 그 근본도 없는 잡종을 후계자로 삼을 것 같다니까요! 아버님!"
"허허허, 그래선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고말고.... 알았다. 내가 손을 쓰마. 우리 귀여운 랄트의 미래를 방해하게 둬선 안 되니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님!"
백작의 말에 메이라 부인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놈이 뭐가 됐든 간에 결국 백작의 마음은 랄트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그녀는 안도하면서 아버님이 무엇을 할지 기대했다.
[31화]
그 뒤, 해를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오날드와 랄트는 15세의 성년식을 맞이했다.
더 이상 아이로서 보호받는 게 아닌 가문의 구성원이 되는 중요한 시점.
베오날드와 랄트는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성인이 되는 것을 허락받았고, 영지를 위한 일을 하는 이의 상징인 검과 펜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 어떤 일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예정대로 둘 다 동시에 렌겔 가주 대리를 도와서 후계자 수업을 받기로 했고 둘은 경쟁 상대라는 것을 공표하게 되었다.
"절대… 안 질 거야."
'…뭐, 약발이 아직도 먹힌다는 거군.'
적개심을 불태우며 베오날드를 노려보는 랄트. 하지만 베오날드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태도로 개무시했다.
이 영지의 권력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자신의 일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성인식을 마친 둘은 본격적으로 일을 부여받기 위해서 렌겔 가주 대리의 집무실에 도달했다.
"성인이 되었다는 건 축하할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일을 다 해야 한다. 알았니? 베오날드. 그리고 랄트도 마찬가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임무는 작게는 이곳의 서류를 처리하는 일부터 크게는 검을 들고 직접 싸우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성인이 된 기념으로 너희의 첫 일은 백작님께서 직접 내려 주셨다."
렌겔 가주 대리는 품에서 봉인되어 있는 편지를 꺼내어 베오날드와 랄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둘은 그것을 열어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일을 확인했다.
먼저 랄트의 경우, 아주 사랑스러운 백작의 손자라서 그런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상인 회합에 참여해서 자신들의 영지를 비롯해서 주로 무역하는 주변 영지와 제국의 주요 생산물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 이게 뭐야?"
물론 일을 시키는 백작 기준에서는 당연히 후계자이자 영주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랄트로서는 진땀을 흘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걸 후계자 후보에게 하라고?'
반면 베오날드의 경우는 편지를 보고 믿을 수 없어서 재차 읽어 내려갔다.
하나 편지 내용은 변하거나 달라지진 않았고, 베오날드는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현실을 파악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은 일주일 내로 성내의 테알 슬럼가의 불법 조직들을 정리할 것. 단, 영지의 병력을 동원해선 안 된다.>
'슬럼가를 정리하래 놓고는 병력을 쓰지 말라는 건 뭐지? 뭔가 거부할 줄 아는 용기를 보는 건가? 15살짜리에게 맡길 일이 아닌데?'
슬럼가의 정리. 말은 쉽지만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시라면 어디에나 생기는 패배자들의 모임장, 도둑 길드부터 시작해서 마을의 불량배와 범죄 조직의 소굴, 부랑자, 도시에 일을 구하러 왔다가 실패한 자들 등등, 무법 지역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갓 15세가 된 소년에게 정리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것은 백작이 내린 임무, 그 또한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귀족의 관점에서 이것을 해석해 본다면 역시 사랑하는 직계 혈통의 자리를 위협하는 근본도 없는 잡종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암, 그렇지. 역시 혈통과 전통은 중요하지. 그렇고말고.'
공감이 매우 쉬운 이유였기에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내려진 이 임무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임무를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에게 버겁다면서 포기하고 거부할 순 있지만, 명색이 백작이 직접 내려 준 첫 임무. 대놓고 거부하면 백작에게 자신의 인상이 어떻게 박힐지 뻔한 상황이었다.
'거부할 수 없으니 처음에 이런 걸 준 건가 보군.'
"베오날드, 무슨 일이냐? 일이 만만치 않니? 랄트는 이미 일을 하러 떠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 좀 하느라구요. 그런데 이 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어디 보여 다오… 맙소사?"
렌겔 가주 대리는 베오날드가 보여 준 쪽지를 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5세 혼자서 군사도 없이 슬럼가를 정리하라니. 상대는 권위가 먹히지 않고 법과 질서가 사라진 무법자들이다.
아무리 사냥꾼이라 한들 베오날드 혼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건 너무 불합리한 업무 같구나. 아버님이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이건 도저히...."
"하겠습니다."
"뭐라고?"
"이건 엄연히 시험 같습니다. 백작님이 성년인 제게 내리신 기념할 만한 첫 임무죠. 아마 제 태도와 의지를 보려는 것 같습니다. 불합리,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말이죠. 다만 시간제한이 있는지가 걱정되는군요."
"으으음… 딱히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으니 네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인 것 같구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말렴. 이건 내가 봐도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진 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오날드는 백작이 내린 임무를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렌겔 가주 대리의 집무실을 나섰다.
사실 가주 대리의 말대로 이 임무를 거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다.
어차피 백작은 이미 죽을 때를 기다리는 노인. 실권을 가진 건 가주 대리였기 때문에 그가 불합리하다고 하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베오날드는 열심히 포장해서 그냥 받아들인 것이었다.
'불합리한 임무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백작이 직접 내린 첫 임무라는 핑계는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이것에 몰두할 가치가 있었으며, 또 '슬럼가'의 문제 해결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저택에서 언제든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병력 사용을 금지시켰기에 호위 없이 혼자서 움직일 핑계까지 생겨서 베오날드는 오히려 이 임무가 반가웠다.
'그리고 이 임무가 가장 좋은 건 역시~ 돈 냄새가 난다는 거지.'
슬럼가, 불법 조직 놈들이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버는지는 몰라도 결국 조직을 유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며, 불법적인 수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슬럼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베오날드의 특기인 연금술을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므로 '돈' 냄새가 나는 이 일을 거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어디 가 보자고~"
베오날드는 물 만난 고기인 양 의욕을 불태우면서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택을 나가기 전에 딱 봐도 느껴지는 이 도련님의 체취와 향기를 없애기 위해 때를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알테리오와 함께 베오날드는 먼저 산으로 들어가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세인, 나는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 때문에 며칠간 저택에 돌아오지 못할 거야. 에라솔에게도 이야기해 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래도 어디에 가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음~ 일단 산으로 갈 거야. 사냥하면서 때 좀 묻히려고 해."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몸이 안 좋으면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하루나 이틀쯤 쉬고 나와도 돼. 내가 산에서 사냥을 하다 보니 코가 좀 민감하거든~ 피 냄새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날 있잖아? 하하."
"도련님!"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함치는 세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저택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베오날드는 역시 여성의 그(?)날에 대해서 지적한 것은 안 좋았나 싶었지만, 이럴 때 미리 말해서 배려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전에도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휘청거렸었지. 표정도 좋지 않았고. 그때는 말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세인이 몸조리를 잘하길 빌며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베오날드가 떠난 뒤, 세인은 곧바로 메이라 부인에게로 가서 그가 백작님이 준 일을 하기 위해서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듣자 메이라 부인은 턱에 손을 괴며 진심으로 기쁜 듯 날카롭게 웃기 시작했다.
"오호호호홋! 그 잡종이 결국 그 임무를 하러 떠났다고?"
"예, 마님. 일단 산으로 가서 때를 묻힌다고 합니다."
"호호호홋! 제 딴엔 머리를 좀 썼구나. 하지만 그 '테알 슬럼가'가 그런다고 쉽게 정리될 곳이 아니지."
"예? 그러니까 베오날드 도련님을 지금 테알… 슬럼가로? 거긴 너무 위험합니다! 마님!"
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테알 슬럼가'는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
폭력과 무법의 영역이며, 이 도시의 악당들이 모두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선대 백작과 렌겔 가주 대리도 몇 번인가 토벌을 하려 했지만 기생충처럼 계속 살아남아 인명 손실과 손해만 커지는지라 결국엔 자리 잡은 조직의 상납금을 대가로 내버려 둔 영역이었다.
그곳엔 현재 전직 용병 및 기사, 도망친 군벌들이 여러 조직을 만들어서 서로 세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불법 거래, 매춘, 노예 사업, 마약 거래 등등… 각종 범죄들이 벌어지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거나 하는 그 무법 지대에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출신 도련님이 갔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노림수란다. 후후훗, 일단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을 맡긴 이상 실패가 보장되니 놈의 평판이 깎이는 건 당연하지. 게다가 운이 좋으면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것도 노림수지! 역시 아버님이 나서니 일이 쉽구나. 후후훗, 아무튼 놈이 이룰 수 없는 무모한 일을 하느라 바쁠 동안 우리 랄트가 착착 일을 해 가며 점수를 쌓을 수 있지."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 백작이 둔 신의 한 수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기울어졌던 후계자 구도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건 물론, 베오날드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는 동안 랄트는 능력에 맞는 일을 착착 해 나가는 것으로 점수를 따내어 역전은 물론 가신들의 평판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버님과 상담을 할걸. 오호호호홋!"
"그래도 베오날드 도련님이 죽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게 낫지! 그 망할 잡종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굴욕을 맛보지는 않았어! 그보다 세인, 너 아까부터 계속 그 잡종 놈을 두둔하는 것 같구나. 정이라도 붙은 게냐?"
"아, 아닙니다, 마님. 전 그저 마님을 생각해서...."
"하긴 너도 잡종이니 잡종에게 끌릴 수밖에 없겠지.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구나. 오호호호호호홋! 아무튼 오늘은 이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으니 썩 꺼지렴."
메이라 부인의 폭언을 참아 낸 세인은 그래도 오늘은 맞지 않고 무사한 것에 안도하며 메이라 부인의 방을 나섰다.
잡종. 그렇다. 베오날드와 마찬가지로 세인 또한 메이라 부인 본가의 혈육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노예였기에 주류가 될 수 없었고, 메이드가 되는 것이 한계였다.
부친은 가문의 혈통인 '기사'로 그저 모친에겐 무책임하게 쾌락만 쏟아 내고 자신들을 없는 존재로 여겼고, 결국 유일한 가족인 모친이 여전히 노예로서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 또한 가문의 소유물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베오날드 도련님, 부디 무사하시길....'
이런 배경을 가진 것 때문에 그의 심리를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한 메이라 부인의 술책에 따라 그녀는 베오날드의 전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녀는 자신과 유사한 배경을 지녔지만 완전히 다른 베오날드의 모습에 동경과 놀라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상하고, 당당한 그의 모습에 끌리게 된 그녀는 그가 무사하길 빌며 자신의 일을 하러 돌아갔다.
[32화]
일주일 뒤, 말데로브 경 사유지 내 은신처.
본래 예정은 3일이었지만 베오날드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느라 자그마치 일주일을 산에서 보낸 뒤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은신처로 온 그는 산에서 잡은 몬스터와 동물들을 도축하고 분해해서 쓸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곤 모조리 알테리오의 먹이로 저장을 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 올라온 베오날드는 강물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비춰 봤다.
옷도 모험가들이 입는 것으로 입고서 일주일 동안 산을 뛰어다니면서 피와 땀, 때를 많이 묻힌 덕분에 제법 일반인 티가 났다.
"좋아. 준비는 이 정도면 되겠고… 알테리오, 먹이는 충분히 모아 놨으니까 난 며칠간 외출 좀 하다가 올게."
삐이익!
배웅해 주는 알테리오를 뒤로하고,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영지의 도시에 잠입해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모험가 길드에다 몬스터의 소재를 팔아서 얼굴을 트고, 여기저기 다니는 상인과 모험가에게 돈을 주거나 '좋은' 거래를 하면서 일일이 호감을 샀다.
그러면서 떡밥을 살짝 던지자 '테알 슬럼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길을 잘못 들어서 '테알 슬럼가' 쪽에 들어갈 뻔했어요. 도시 지리에 익숙지 않다 보니… 뭔가 살벌한 모습의 사람들이 가득해서 빨리 도망쳤는데, 거긴 뭔가요?"
"그거! 정말 큰일 날 뻔했군. 역시 사냥꾼이라 낌새가 좋은 건가? 아무튼 잘 도망쳤네. 거기는 상종도 하면 안 될 곳이야."
"대체 뭐 하는 데랍니까? 일단 이름이 '슬럼가'인 걸 보면 질이 안 좋은 인간들이 모인 곳 같은데 말이죠."
"대충 전직 용병이나 병사들, 도적 길드 놈, 그 외 불량배, 암살단 같은 놈들이 매일같이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불법적인 사업을 갖고 다투는 곳이라고 보면 돼. 아무튼 상관해서 하나도 좋을 게 없는 곳이야."
"오죽하면 영주님도 포기했겠어?"
베오날드가 던진 떡밥에 모험가 길드 사람들은 외지인을 위해 친절하게 그곳이 위험하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베오날드는 좀 더 중요한 정보를 갖고 싶었는데, 역시 테알 슬럼가에 직접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그들이 어떤 불법적인 사업을 하고, 어떻게 싸우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음, 이렇게 되면 직접 저쪽 사람을 납치해서 알아봐야겠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고, 베오날드는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테알 슬럼가로 향했다.
하지만 낮에 가기엔 부담이 되었기에 간만에 알테리오도 볼 겸 잠시 은신처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렇게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있는 은신처에 도착하자 낯선 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어머나, 상태가 말이 아니네요, 도련님."
"…셀리나 마법사님?"
175센티미터쯤 되는 커다란 키를 한 미녀. '마법사입니다.'라고 써 붙여 놓은 듯한 챙이 넓은 모자와 로브에 지팡이. 틀림없는 그녀였다.
이 자리에서 만나기엔 그리 반갑지 않은 존재였는데, 말데로브 경에게 비밀로 한 이 은신처를 어떻게 그녀가 알고 왔는지부터가 문제인 상황. 베오날드는 검에 손을 올리고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엔 어떻게?"
"아! 그 살기는 거둬 주세요. 전 딱히 도련님에게 폐를 끼치러 온 게 아니거든요."
"이미 여기 온 시점부터가 민폐입니다만? 애초에 어떻게? 말데로브 경이 알릴 사람은 아닐 텐데...."
"전 그저 약속한 그리폰의 깃털이 받고 싶어서 왔을 뿐이라구요. 그 뒤로 단 한 번도 서재에 안 들르셨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직접 베오날드 도련님에게 갈 순 없고 말이죠. 저택 내부의 집안 상황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단 말이에요! 그 정도는 아시죠?"
셀리나의 말대로 마탑의 4급 마법사인 그녀는 백작가의 주요한 인사 중 한 명으로 회의에 참여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말데로브 경이 뒤를 봐주는 것만 해도 저택에 영향이 큰데, 마탑의 사람이자 '마법'이라는 특수한 힘을 다루는 그녀까지 베오날드를 지지하는 형세를 보이면 저택 내부의 정치 상황이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애초에 저는 그런 것에 관심도 없어서 그냥 다시 책을 읽으러 오시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안 오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여기를 어떻게 온 건지는 설명할 수 있으신지요?"
"당연히 저 아이를 찾아서 왔죠. 그리폰! 엄연히 마물(魔物). 살아 있는 자체가 마력을 생성하고 다루는 생물! 그 반응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이치에는 어긋나지 않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침입한 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만?"
"그건~ 역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정말정말로~ 그리폰의 깃털이 꼭 필요하기도 했고, 도련님이 그 위험한 테알 슬럼가의 일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만~"
테알 슬럼가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지자 베오날드는 조금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완전히 의심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지만, 마탑과 마법사라는 배경에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에 그녀에게 깃털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이기에 베오날드는 일단은 그녀에게 그것을 주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럼 물건을 드리도록 하죠. 안에서 챙겨 올 건데… 여기서 가만히 계세요. 쓸데없는 행동을 하면 바로 실력 행사를 하겠습니다."
"으음~ 정말이지, 경계심이 너무 강한 거 아닌가요? 물론 귀족가의 교육도 그렇고, 생각이 다른 거야 이해하겠지만 그렇게 너무 뻗대면 곧 후회할걸요?"
"후회라. 이 일로 제게 원한이라도 가진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저한테 테알 슬럼가의 정보가 있는데~ 말이죠."
중요한 정보가 베오날드의 귀에 들어왔지만 그는 일말의 동요 없이 태연하게 알테리오의 깃털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는 훌륭한 전진에 오히려 떡밥을 던진 셀리나 쪽이 당황하는 눈빛이었지만,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그 정보에 대해서 묻고 싶은 베오날드였다.
"어머~ 고맙습니다. 드디어 이걸로 새로운 시약을 만들 수 있겠어. 아, 맞다. 그렇다고 공짜로 가져갈 수는 없는데… 얼마면 될까요? 금화를 가져왔는데...."
"돈은 됐고, 대신 셀리나 님이 가진 테알 슬럼가의 정보를 듣도록 하죠.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따라오세요."
"역시 도련님이라면 택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정보는 역시 가치 있는 것이었고, 지금 가서 납치해서 신문하는 과정과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에 베오날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리하여 저택 안으로 셀리나를 들인 베오날드는 일단 손님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수 차를 끓여서 그녀에게 대접했다.
'내가 직접 차를 타 주는 처지라니. 내 영지의 가신들과 기사들이 봤다면 기겁할 일이겠지.'
"무례하게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차까지 내오시다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도련님… 어머? 이건?"
차를 마신 그녀는 눈이 커지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베오날드는 겉으론 표현 안 했지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차는 흔히 마실 수 있는 차가 아니라, 바로 마스터 연금술사인 베오날드가 직접 블렌딩한 차로서, 세 가지 잎을 우리고 동시에 배합을 한 것으로 이곳에 시설을 만들었을 때 테스트 겸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어떠신지요?"
"세상에… 이런 건 처음이에요. 어쩜! 어디서 구한 잎이죠? 세상에나~"
"비밀입니다. 아무튼 어디 정보 이야기나 들어 보죠."
자신에게 간을 본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를 한 베오날드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셀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테알 슬럼가는 현재 3개의 조직이 각자 불법적인 사업을 벌이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알라스 조직'. 테알 슬럼가를 비롯해서 영지 도시 내의 창관 운영과 불법 노예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로 창관을 이용하고, 노예 사업을 하는 것으로 용병 및 모험가들과의 인맥을 넓힌 덕분에 무력적 자원을 가장 풍부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흐음… 다음은?"
"두 번째로는 '다크티스 길드'. 도적 길드 및 암살자 길드를 아우르는 곳으로 주 임무는 불법적인 정보 수집과 암살입니다. 다만 그 규모가 작고, 극소수의 암살자 길드원을 제외하면 다른 구성원의 무위가 그리 높지 않아서 귀족들의 일엔 끼지 못하고 주로 상인들과 모험가, 다른 조직과의 싸움에서 의뢰를 받곤 합니다."
"정보에 밝고 암살을 주업으로 삼는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럼 마지막은?"
"마지막이 가장 위험한 조직입니다. 이름은 '아그라샌더 그룹'. 이들은 마약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마약상입니다. 이곳 캘러메인 영지뿐만 아니라 주변 영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죠. 그리고 알다시피 마약은 그 중독성과 쾌락으로 악명이 높은데… 조직의 자체적인 역량도 좋은지 다수의 연금술사까지 영입해서 금지된 실험으로 강화된 인간이나 몬스터를 합성한 키메라까지 운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니 백작가에서도 함부로 해결을 못했던 거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업에 방해가 되면 곤란하기에 백작가에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서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지요."
"하하, 그런 걸 지금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가? 참 나~"
기껏해야 슬럼가에서 무법자들처럼 사는 불량배 조직을 생각했는데, 스케일이 거대하자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런 놈들과 손을 잡고서 이익을 얻고 있는 쪽에 캘러메인 백작가가 끼어 있다는 점이었으며, 알고서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던져 준 것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어지간하면 적당히 돈 좀 벌고 그만하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심하군. 화가 날 포인트가 너무 많아.'
자기들도 처리할 역량도 안 되면서 일을 떠넘긴 캘러메인 백작에 대한 분노부터 시작해서 비록 권력을 잡고 사리사욕을 채웠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원인 영지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 한 귀족으로서 쓰레기 같은 범죄 조직들이 설치는 것에 대한 분노, 마지막으로 마탑의 인정을 받은 마스터 연금술사로서 연금술을 모독하는 놈들에 대한 분노였다.
'…화가 나는군.'
동시에 세 가지 분노가 솟아오른 베오날드는 어떻게 해야 이놈들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아직은 정보가 부족했다.
"혹시 더 아는 것이 있다면 더 알려 주십시오. 지금 싹 다."
"예? 아~! 그렇다면 일단 대충 테알 슬럼가의 지도랑 구조랑~ 또… 도련님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장소도...!"
셀리나는 갑자기 무서운 눈빛으로 돌변한 베오날드의 모습을 보자 피부를 찌르는 살기와 공기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캘러메인 백작에게서도 느낄 수 없던 두려움과 위압감을 느낀 그녀는 그의 눈 안에서 타오르는 자신감과 강렬한 의지를 알아차렸다.
'어머? 설마… 진짜로 할 생각인 거야?'
현재의 '캘러메인 백작가'조차 어떻게 하지 못해서 뇌물을 받고서 손을 놓고 있는 저 테알 슬럼가를 없애 버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허세나 젊음의 패기라고 치부하기엔 지금 베오날드에게서는 진지함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튼 정보는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차를 마저 즐기다가 가시지요."
"저, 저기, 혹시 제가 도와 드릴 만한 건 없을까요?"
"으음… 저희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와 제가 뭘 할 거라는 것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 주십시오.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떠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예. 아, 알겠습니다."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에 눌린 셀리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베오날드를 거스를 생각이 전혀 없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 베오날드는 한숨을 살짝 쉰 다음 연금술 실험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서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33화]
며칠 뒤, 캘러메인 백작 영지 내 테알 슬럼가 '아그라샌더 그룹 영역'.
음습하고 어두운 슬럼가의 한구석. 마약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아그라샌더 그룹'의 영역은 더더욱 어두웠고, 하천엔 더러운 물이 흐르고 지독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하나 막대한 이득이 생산되는 곳이면서 중독성으로 장사하는 마약을 제조하기에 영역을 오가는 이에 대한 인원 통제는 단순한 폭력 조직 레벨을 넘어서 거의 수도나 황실을 오가는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이봐, 여긴 아무나 함부로 올 곳이 아니야. 우리 '아그라샌더 그룹'의 영역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영역의 입구를 지키는 두 불량배들은 겁 없이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수상한 인물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 겁을 주었다.
그 인물은 로브와 후드를 써서 얼굴과 전신을 가리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자로, 키가 상당히 큰 것 외엔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겁준 그들에게 태연히 다가간 그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하하, 물론 잘 알고 있고, 나름 용건이 있으니 온 것입니다. 이것을 두목님에게 전해 드리실 수 없으신지요? 이건 개인적인 보수입니다."
작게 종이로 싸여진 무언가와 금화 2개를 내미는 것을 본 영역 지킴이들의 눈이 순간 커졌다.
각자 금화 하나씩을 받은 2명은 그가 준 작은 종이봉투를 곱게 받아 들고는 되물었다.
"이게 뭔데? 위험한 거 아니야?"
"일종의… 샘플. 예, 견본품입니다. 지나가던 연금술사인 제가 만든 것이라고 그분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거래할 생각이 있다면 내일 지금 시간에 다시 이곳에 올 테니 그때 대답을 전해 주시면 됩니다."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알았다."
일단 금화를 한 장씩 받아먹은 덕분인지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수상한 인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봉투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뇌물도 적절히 바쳤고, 심상치 않아 보이는 자였기에 그들은 곧바로 보고 체계를 거쳐서 두목에게 그 종이봉투를 전했다.
"뭐? 수상한 놈이 이걸 나에게? 대체 뭐야?"
"예, 두목."
두목이라 불린 남자는 거구에 근육질의 남성이었는데, 이 아그라샌더 그룹을 지휘하는 자로 이름은 말렉이었다.
그는 어릴 적 이 조직에 들어왔고, 타고난 용력과 비열한 지혜를 통해서 조직 내에서 승급, 이제 한 도시의 조직을 관리하는 두목까지 스스로 올라온 자였다.
그는 오늘도 두둑이 들어오는 마약 판매 실적을 보던 중 영역을 지키는 부하 놈들이 가져온 수상한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뭐야, 이거 가루잖아? 약 같은데? 우리가 파는 건… 아닌데."
"그러게 말입니다."
"야, 그 자식이 이거 주면서 뭐랬어?"
"그… 견본이라면서 써 보시고 마음에 들면 내일 대답을 해 달라고.... 로브에 후드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뭐야, 그럼 이것도 마약이라는 건가? 근데 이상하네. 보통 풀 형태 아니냐? 이건 무슨 밀가루나 소금도 아니고. 참 나~ 허!"
말렉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가루를 바라보았다.
일단 형태는 무색무취의 백색 가루. 자신들이 파는 마약은 주로 마약 성분이 있는 약초를 말리고 압축시켜서 담배나 궐련 형태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신기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이걸 맛보자니 독이나 뭔가 이상한 것을 넣었다면 위험했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아까웠다.
그는 부하에게 건네주면서 지시를 내렸다.
"야, 지금 당장 우리 농장에 가서 노예 한 놈 데려와. 가장 나이 많고 힘없는 놈으로 말이야."
"예. 두목."
'만약 독이거나 하면 그 망할 자식을 족쳐야 하니 확인해 봐야지.'
이 수상한 가루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말렉은 부하를 시켜 노예 하나를 데려왔고, 그에게 곧장 그 수상한 가루를 절반가량 흡입시켰다.
늙고 병든 노예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발버둥 쳤지만 말렉의 부하들이 몸을 단단히 구속하고 그의 코와 입을 벌려서 흡입하는 걸 수월하게 했다.
"왜 다 안 넣으시고 절반만?"
"약효가 어느 정도인지 보려는 거다. 전부 다 쓰면 샘플이 안 남지 않냐?"
"으어억… 으으… 으허어어~ 으허허허허헝~ 헤헤헤."
짝! 짝! 짝!
그리고 잠시 후, 약 기운이 몸에 도는지 노예는 몽롱한 표정을 짓더니 마치 꿈을 꾸는 양 갑자기 실실 웃으면서 박수까지 치면서 막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떨기도 하고, 쭉 펴면서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꿈틀거리는데, 말렉과 부하들은 마약상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반응이 나오는 건 생전 처음인 듯 기겁하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끄으으… 으헤헤… 끄으으으! 우오오오!"
"두, 두목, 뭡니까? 저거? 저것도 마약입니까? 아니, 우리가 파는 풀도 마약이지만 저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할 게 어디 있어? 저거 누가 봐도 '약' 한 새끼 반응이잖아. 이거 효과 죽이는데? 이거 대체 뭐야? 너 해 볼래?"
"아뇨. 아뇨! 절대 싫습니다. 제정신입니까?"
"좋아. 아주 훌륭한 자세야."
마약상이 마약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그것을 아주 잘 지키는 부하를 보면서 흐뭇해하는 말렉이었다.
그리고 약 5분 뒤, 마약의 효과 끝난 건지 노예가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말렉은 그에게 다가가서 남은 절반의 가루를 보여 주면서 어땠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이거 빨아 보니까 어땠냐? 아주 세세하게 말해라. 그럼 남은 걸 다 주도록 하지."
"그… 그게! 아, 아주아주 엄청났습니다.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면서 막 흥분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뇌를 찌른다고 해야 하나? 막 하늘을 난다고 해야 하나? 신을 본 것 같은… 막 그런 기분이! 짜릿하고 기분 좋은 기분이! 계속 오래가는데!"
'뭔가 미친 약물이라는 건 사실이구먼. 이야~ 이거 대박이네.'
"아무튼 주인님, 약속하신 약을… 주십시오."
"뭐? 하! 미쳤냐? 내가 진짜로 이걸 줄 거라고 생각해? 미친 새끼. 당장 다시 일터로 돌아가서...."
"내 약 내놔아아!"
말렉의 비아냥거림을 듣던 늙고 병든 노예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힘과 기세로 말렉에게 달려들어 약을 빼앗으려고 했다.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짐승처럼 달려든 그는 말렉의 손을 물고 할퀴면서 그의 손에 있는 약을 빼앗으려고 발버둥 쳤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호위하는 조직원 둘이 달라붙어 때리는데도 떼어 내지 못할 정도였다.
"젠장! 뭐야? 이 자식!"
"두목! 칼을 써도 됩니까? 이 자식, 맞아도 끄떡도 안 하는데요?"
"약! 내 야아아아악! 내 야아아아아악! 컥!"
결국 답이 없다고 생각한 것과 동시에 두목으로서 체면을 중시한 말렉은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노예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동맥을 찌른 것인지 피가 분수처럼 나오면서 바닥을 적실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이 노예는 말렉이 가진 마약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죽을 때까지 발버둥 쳤다.
"내… 야… 아… 악...."
"젠장! 무슨 놈의 약을...!"
"내일 당장 그놈을 족칠깝쇼?"
"후우~ 족치긴, 자식아. 지금 우린 대박 인연을 만난 거야. 내일 '그분', 아주 제대로 모셔라. 알았냐? 절대 놓쳐선 안 될 분이니 말이야."
말렉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신의 손에 들린 남은 마약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그저 허용량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해서 일어난 작은 액시던트. 이걸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은 양에 이 정도 효과라면 더 적은 양으로 소분하거나 아니면 와인이나 다른 액체에 타서 써도 좋고, 아니면 독약 대신 다량을 써서 사람을 '광증'으로 만드는 극약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거 어쩌면 내 인생이 엄청난 기회가 온 건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렉은 어서 내일이 되길 기대하며, 남은 약을 품에 집어넣은 채 죽은 시체를 치우라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예정대로 로브 차림에 후드를 꾸욱 눌러쓴 그 수상한 자는 다시 예정된 시간에 '아그라샌더 그룹'의 영역에 나타났다.
아침부터 미리 대비하고 있던 말렉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아그라샌더 그룹의 말렉이다. 어제 보내 준 선물은 잘 받았다. 아주~ 놀라운 물건이더군."
"놀라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하고 그만 '1회 권장 투여량'을 쓰지 않았지 뭡니까?"
"그래서 어제 준 이거, 몇 인분이지?"
"20세 이상 남성 기준으로 하면 20인분입니다. 여성, 노인, 아이로만 대상을 지정하면 30인분까지 나오죠. 훗."
"그래서 어제 그 꼴이 났던 거군. 큭!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한 방 제대로 먹었다는 표정을 한 말렉은 수수께끼의 남자를 데리고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대화를 계속했다.
"좋은 신상품을 소개해 준 건 좋은데… 이걸로 뭘 얻고 싶은 거지? 수상한 양반?"
"돈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 보다시피 저는 연금술사입니다. 세계의 진리와 원소, 구조를 파악하는 학문. 물론 사람들은 그 부산물을 더 좋아하지만요. 거기 그 마약 같은 것처럼 말이죠."
"심플한 이유로군. 하! 마약 판 돈을 얻어서 진리 탐구를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사실… 저도 예전엔 그런 고상한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한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말이죠."
말과 함께 수수께끼의 남자는 머리에 쓴 후드와 로브 소매를 슬쩍 걷어서 말렉에게 보여 주었다.
말렉은 깜짝 놀랄 뻔한 걸 간신히 참고서 그것을 바라보는데, 보면 볼수록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보랏빛과 연녹색, 노란색 고름으로 가득 차고 뒤틀어진 피부. 일부엔 구더기까지 기어 다니고 있어서 누가 봐도 끔찍한 상태였다.
"너, 너! 그, 그거!"
"아, 놀라지 마세요. 병은 아닙니다. 그저~ 돈 없는 연금술사들이 간혹 하는 짓입니다. 하하하, 자기 몸에다가 시약을 붓고 반응을 보는 것이지요. 이 정도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두목님이라면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으실 텐데요?"
"아, 아아아! 그렇지. 그렇고말고! 다만 그, 그런 형태는 처음 봐서 놀랐을 뿐이야. 아무튼 상태가 안 좋아서 돈이 필요하다는 거지? 이해했어. 이해했다고! 더 보기 싫으니까 어서 가려!"
"예, 그러지요. 아무튼 사업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일단 절 만난 것부터가 저와 일하실 생각이 있다는 걸로 보이니 필요한 설비, 재료, 인력, 그리고 생산량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지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비용도 중요하지."
"아마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실 겁니다."
로브 속에 얼굴을 감춘 수수께끼의 사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말렉을 바라보았다.
'…멍청하군. 나라면 이런 흉측한 외양도 진짜인지까지 확인했을 텐데 말이지. 이 피부는 그저 돼지 피부를 물약으로 가공해서 만든 건데.'
수수께끼의 남자는 바로 베오날드. 저 마약 또한 그가 만들어 낸 것으로 500년 전, 대륙을 한 번 흔들어 놨던 마약 '환영의 꽃'이었다.
자신의 집권 시기에 일어난 일로 아무리 간신이지만 자신의 정원을 더럽힌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황실 근위대와 자신의 영지 최고의 엘리트 기사들이 모두 나서서 마약 조직을 박멸했으며, 베오날드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사재를 털어 환영의 꽃의 중독 효과를 치료할 약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데 설마 내가 그 환영의 꽃을 직접 만들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참~ 아무리 놈들을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라곤 해도… 묘하군.'
과거와 자신의 현 상황을 잠시 생각한 베오날드는 곧 환영의 꽃을 만들기 위한 시설과 설비에 대해 말렉과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갔다.
[34화]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몇 개의 약초, 증류와 압착, 식힘 등등을 할 수 있는 가벼운 설비. 대용량을 만들려면 그 스케일을 키우면 그만이죠. 그리고 마정석 조금."
"마정석? 그거 꽤 비쌀 텐데?"
"아, 그것이 있어야 핵심 공정을 할 수 있어서 말이죠. 다만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이미 생산성은 고려했으니 충분한 설비를 갖춰서 한 번에 만들 수만 있으면, 이 주먹 크기 정도의 마정석이면 이 가루를 저 밀 포대의 절반 정도는 채울 겁니다."
"포대 절반이면… 아까 이 양이 20인분이랬지?"
"예. 족히 100만 명은 투약할 수 있는 양이죠. 그걸 중독성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건 두목님에게 맡기죠. 저는 수입의 1할만 받겠습니다. 제작을 하고 남은 시간 동안 이 피부를 고칠 연구만 하면 되거든요."
"1할? 그거만 받고 되겠어?"
고작 1할.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치곤 너무나 적게 먹는 느낌이라서 말렉은 당황하여 되물었지만, 베오날드는 능숙하게 손을 저으면서 적게 먹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했다.
"저는 연금술사입니다. 마약을 만들 순 있지만 판매하는 세계에 대해선 무지하죠. 그런 놈이 욕심을 과하게 부리면 다치기도 하고, 또 저는 연구와 제조에만 집중하고 싶으니… 대신 그~ 마지막 공정은 제 목숨줄이니까 비밀로 하는 걸로~ 부탁합니다. 하하하."
'으으음… 하긴 먼저 목숨 값을 내고 굽힌다고 생각하면 틀리진 않지. 게다가 딱히 계약금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베오날드의 태도와 더불어 큰돈을 먼저 내는 게 아니라 설비 투자만 하면 이 마약이 생기는 거라서 말렉에게도 큰 위험부담이 없었다.
저쪽은 대신 주도권 식으로 기술 보호만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몰래 다른 연금술사를 고용해서 노려도 되는 일인 만큼 말렉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래서 필요한 게 뭐지?"
"일단 생산 설비를 놓을 장소랑 제가 머물 장소, 사람 한 10명 정도, 그리고...."
말렉은 정체를 속인 베오날드의 말에 따라서 자금을 투자해서 사람과 설비를 갖춰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 뒤, 아그라샌더 그룹 영역의 가장 중심에 새로운 작업장이 생기게 되었다.
베오날드는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일단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환영의 꽃을 제조하는 모습을 순순히 보여 주었다.
"짜잔, 완성했습니다. 아직 설비 최적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생산량이 조금 떨어지지만 약 반 포대를 완성했습니다."
"음, 그렇군. 어디 시험해 보세."
극히 중요했기에 3겹으로 싼 포대에 든 마약을 베오날드에게서 건네받은 말렉은 안을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실험용 노예에게 그것을 투여, 예전보다 양은 적었지만 일전에 보았던 그 노예의 반응과 똑같이 쾌락과 환상에 푹 젖어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자 말렉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거 진짜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잖아? 이 약효! 제작에 쓰는 돈이라고 해 봐야....'
재료비는 각종 약초와 몇 가지 포션 다량과 주먹 크기의 마정석 하나. 이제 설비는 보강만 하면 되니 투자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만큼의 마약이 생산되고, 이것을 유통시킨다면?
처음엔 미량을 샘플로 주고 중독시키고 난 뒤에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말렉은 머릿속으로 벌써 자신이 금화로 된 산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떠신지요? 제조 시간은 약 48시간. 좀 더 연구해서 최적화만 시키면 더 많은 양을 생산 가능합니다. 그러니 1할, 꼭 부탁드립니다. 제 생명과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은근슬쩍 '생명'을 강조해서 그에게 약속을 지켜 달라고 절박하게 말하는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이제 실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했고, 그것을 생산해서 팔면 엄청난 돈이 된다는 생각에 말렉은 함박웃음을 띠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흐흐흐, 흐하하하하하! 아주 좋아! 선생! 결과를 보여 줬으니 나도 더 이상 뭐라 할 게 없지! 알았네! 자네는 열심히 이것을 만들고 최적화하게. 나는 열심히 팔아 치울 테니!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좋아. 이걸로 첫 조건은 완료.'
"아무튼 오늘을 기념해서 한잔 어떤가? 내가 사지. 설마 그 상태라곤 해도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 우린 이제 부자야! 크하하하핫!"
"적당히만… 먹는다면야. 하하하."
그렇게 베오날드는 좀 더 친근감을 갖기 위해서 그들의 연회에 참석, 밤새도록 술 마시고 떠들면서 놀았다.
술에는 나름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약한 샌님 연금술사 연기를 해야 했기에 조금씩 먹으면서 말렉과 대화를 나누었다.
"크으! 이거 우리 선생님, 나중에 병만 나으면 내가 여기 테알 슬럼가 창관의 에이스를 대접할게! 어찌나 지명 비용이 비싼지 귀족분이나 거상들이나 상대할 수 있는 년이지만! 이거면 우리도 거상들만큼 벌 수 있어! 흐하하!"
'그래, 나도 놀랐다. 마약 조직이라기에 나처럼 연금술 연구실 같은 걸 만들어 놨을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마약 성분 있는 풀을 압착해서 담배 형태로 파는 정도라니. 좀 더 알아보고 할걸. 쳇!'
또 한 번 500년 뒤의 세상이 얼마나 후퇴했는지 깨닫게 되는 베오날드였다.
이 조직의 규모와 인력은 확실히 도시의 범죄 집단이라고 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거래하는 마약의 제조 방식은 너무나 원시적이었던 것이다.
이걸 미리 알았다면 굳이 환상의 꽃 같은, 한 시대를 휩쓴 거물급 마약이 아니라 성분이 약한 마약을 적당히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다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운 거니까… 이제 와서 다른 방안은 없지.'
일단 한번 만들어야 저 말렉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여기까지의 과정은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연회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계획대로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일어나서 다음 일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그라샌더 그룹 영역 연회장.
흥겨움에 밤새도록 먹고 마신 말렉은 갈증과 두통에 시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물을 찾았다.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그는 잠들어 있는 부하들과 노예들을 둘러보았다.
"으으으… 목말라. 음? 선생, 어디 갔어? 벌써 일하러 갔나?"
그런데 자신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연금술사 선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마시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이긴 했는데, 일하러 갔나 싶어서 말렉은 그를 위해 마련해 준 마약 공장 시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가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다들 기상! 기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이 생산 설비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 연금술사 선생의 주문에 따라서 가져온 유리병과 각종 시설들이 모두 부서지고 파괴된 상태였고, 재료들도 모조리 불타거나 이상하게 엉켜 있어서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보통 사태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말렉은 곧장 부하들을 깨워서 사태 파악부터 시작했다.
"젠장! 감히! 어떻게 되었어?"
"다행히 창고와 금고는 무사합니다. 어제 그 선생이 처음 만들어 준 '약'도 무사합니다."
"'약'이 무사하다고? 그러면 역시… 그 선생이 도망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만약 그 선생이 만든 '물건'이 사라졌다면 자신을 이용해서 만들기만 하고 도망친 걸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물건이 무사한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게 확실했다.
돈이 목적인 양반이 빈손으로 사라질 이유는 없으니 그럼 결국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바로 납치였다.
"그러면 남은 건… 결국 납치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떤 놈들이?"
"그야 다크티스나 바알라스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딱 봐도 이 테알 슬럼가에서 이런 대박 건수를 우리에게서 빼앗을 만한 배짱, 그리고 단시간 내에 소식을 들을 곳이면 거기 둘뿐이죠."
"제길!"
부하의 말대로 짐작이 가는 곳이라고 해 봐야 자신들과 같은 이곳 테알 슬럼가 3대 조직뿐. 경비대, 기사단, 백작가에 소식이 들어간다면 이렇게 납치로 끝날 게 아니라 아예 병사들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족쳤을 것이다.
물론 자신들 아래에 있는 군소 조직이나 다른 자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역시 유력한 용의자는 다크티스와 바알라스 두 조직이었다.
"제엔장! 한창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두목."
"일단 하부 조직들 싹 다 뒤져 봐. 우리와 연계하고 있는 주변 영지의 다른 조직들 소식통까지 전부 동원해서 그 선생을 찾아야 해!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놓칠 순 없어!"
"예!"
"이런 젠장! 어떤 자식인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말렉은 남아 있는 분량의 환상의 꽃 포대를 보면서 이를 박박 갈았다.
기껏 활짝 피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황금빛 미래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나타난 셈이니 침착해지려 해도 침착할 수 없는 상황.
거기에 만약 범인이 다른 3대 조직에 있다고 한다면 이건 단순한 범죄로 국한될 일이 아니었다.
'우리 밥벌이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만약 다른 조직이 이 환상의 꽃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턴 자신들 아그라샌더 그룹은 멸망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은 조직의 존립이 걸린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에 말렉은 여차할 경우 정말로 다른 조직들과 전쟁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젠장! 기왕 이렇게 된 거, 확 그냥 여길 통일해 버려?'
그동안 마약 판매로 축적한 부가 있고, 지금 손에 신품 마약까지 있는 상황이었기에 적절히 다른 영지에 있는 무법자들과 용병들까지 끌어모아서 한바탕 하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연금술사 선생을 되찾지 못하면 어차피 조직의 존립이 위험한 만큼 지금 명분이 확실할 때 화끈하게 투자해야만 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이게 있으니 어찌어찌 믿을 구석은 있겠고. 아무튼! 어떤 망할 자식인지 걸리기만 해 봐라!'
말렉은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면서 조직 전체에 비상을 걸고, 진심으로 전쟁을 한판 하기 위해서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는 광경을 베오날드는 신전 건물 지붕 위에서 아주 즐겁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쪽에도 부채질할 타이밍을 재기 위해 말렉 측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며 자신도 이 전화(戰火)를 키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3일 뒤.
하부 조직들을 수색하고 주변 영지의 노예 시장과 뒷골목까지 전부 싹 다 뒤졌지만, 말렉의 부하들은 베오날드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말렉은 아그라샌더 그룹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며 조직원들을 소집했고, 모아 놓은 재산을 군자금으로 돌려 용병들과 특수한 능력을 갖춘 모험가들까지 모아서 다른 3대 길드를 통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근데 두목, 만약 그 두 조직들에서도 연금술사 선생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짜샤, 그럼 더더욱 3대 조직 다 조져서 통일하는 수밖에 없지. 판돈 올인했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 가요? 하지만...."
"이 약을 보라고! 이게 있는 이상 우리 조직의 미래는 없어. 마약상이 판매하는 마약의 질에서 밀리면 결국 끝장이란 말이야. 그러니 그 선생이 없더라도 우리가 다크티스랑 바알라스를 먹어야 한다."
말렉의 말에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각오한 표정으로 3대 조직 간의 전쟁을 확실히 준비해 나갔고, 그들의 움직임은 바알라스와 다크티스에게도 전해졌다.
[35화]
"바알 사장님, 아그라샌더 그룹에 있는 우리 내통자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 그 약팔이 놈들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갑자기 용병들을 모으고, 평소 마약 판매하던 꼬랑지들과 부하들이 모두 들어가서 무장하고서 무언가 찾아다니는 등등… 사태가 평소와 달라서 심각해 보입니다."
"또 한판 하자는 건가? 말렉 자식, 약이라도 한 건가?"
수염이 길고, 깐깐해 보이는 안경 쓴 중년 남성인 바알.
그가 바로 이 테알 슬럼가의 조직 중 하나인 바알라스의 수장으로, 여러 사업체들을 운영하다 보니 그의 호칭은 '사장'이었다.
아무튼 이 테알 슬럼가에 함께 사는 다른 조직이 갑자기 무장을 한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곧바로 대비를 해야만 했다.
하나 그 전에 놈들이 무장하는 이유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대체 왜 그런대? 내통자 놈에게서 다른 보고 없었나?"
"보고는 있었습니다. 무슨 알 수 없는 연금술사가 '신종 마약 제조법'을 가져왔는데… 첫 생산품이 나온 날 연회를 했고, 그날 밤에 연금술사가 납치당한 것 같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저 약팔이가 빡친 거군. 연금술사를 빼돌렸다라.... 이건 누가 봐도 다크티스 짓 아닌가? 솔직히 우린 아니잖아."
"아뇨, 사장님. 엄연히 우리 영역에서 우리보다 돈 더 버는 놈들이 엿 같아서 몇 번이나 놈들의 사업을 빼앗으려고 했잖습니까?"
바알라스는 술집과 창관을 사업장으로 가지고 있었고, 마약 판매상인 그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물론 자기들이 키워 손님을 끌어모은 영업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꼬워서 서로의 자리를 노리는 경우가 있던 만큼 의심을 살 여지는 충분했다.
"후우~ 망할, 우리는 절대 아니지 않냐?"
"완전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죠. 밑의 놈들이나 하위 조직에서 저지른 거면...."
"씁! 일단 모든 영업장에 비상 걸어. 그런 다음에 말렉 그 새끼랑 대화해 봐야지. 서로 피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젠장!"
"만약 놈이 대화를 안 듣는다면?"
"그것도 대비해야겠지. 일단 우리도 끈이 닿는 용병 놈들과 교섭을 한다. 머릿수도 채워야 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다크티스에 사람을 보내서 놈들과도 대책을 논의한다. 그 미친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말이야."
난데없이 일어난 '아그라샌더 그룹 사태'에 바알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현상은 동시에 다크티스 쪽에도 이야기가 들어간다.
같은 시각, 도적 길드와 암살단이 있는 다크티스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간부들이 모여서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표가 없고 5명의 간부가 다수결로 의사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간부들 모두 가면과 검은 로브를 입고 있어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의뢰와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서 뭉친 형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설명 좀 해 주실까? 4번?"
그래도 구별은 해야 했기에 가면에 쓰여 있는 번호로 서로를 지칭하는 다크티스의 간부들이었다.
"이미 다 준비해 왔네, 3번. 아그라샌더의 말렉 놈이 떠돌이 연금술사를 고용했는데 놈이 신형 마약을 만들어 냈다. 한데 오늘 아침 그놈이 없어졌고, 새로운 돈벌이와 신형 마약 제조법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말렉은 화가 나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쏟아부어서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다."
"아침부터 용병 길드가 왜 그렇게 난리였는지 알 것 같군. 그래서?"
"아마 놈은 그 연금술사가 사라진 원인으로 우리 혹은 바알라스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나 아직 우리 정보망에도 그 연금술사의 자취가 걸리지 않았으며, 다른 하위 조직들이 바깥으로 나갔는지 흔적을 살펴보고 있지만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 그러면 뻔히 우릴 의심하겠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행방불명의 상황이니 다른 조직들은 100퍼센트 '다크티스'를 의심할 것이다.
사실 세상 모든 행방불명이 그들의 짓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도적, 암살자 길드로서의 명성과 두려움을 주기 위해 그냥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블러핑을 하기도 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그야 나는 모르지, 2번. 하지만 방법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군. 가장 좋은 건 우리가 그 연금술사를 찾아서 말렉에게 돌려주는 건데… 그걸 찾는 게 쉬울 것 같나? 4번."
"이 도시에서 우리 정보망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네. 그런데 지금 행방불명이라는 건… 쉽지 않을 거란 이야기겠지."
"그러면 결국 저 약팔이 말렉 놈을 말릴 방법은 없다는 건가? 그럼 우리도 전쟁 준비를 해야 할 판이군. 아니면 혹시 바알라스가 한 짓은 아닌가? 늘 자기들 영업장에서 마약 파는 저 아그라샌더 놈들을 아니꼽게 여겼지 않은가?"
"그놈들이 했다면 오히려 발견하기나 쉬웠겠죠. 하아~ 대체 그 연금술사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놈을 되찾지 않으면 말렉 놈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막대한 이익을 낳아 줄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잃어버린 격이니 눈이 돌아가고 혈압이 상승하는 건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결국 그 연금술사가 있어야 하지만 찾을 수 없기에 사태 해결의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말렉을 막을 방도가 없다면 바알라스와 손을 잡고 아그라샌더를 없애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가능한 방법이지만, 문제는 그다음 아닌가? 아그라샌더가 사라지면 그 시장을 노리려고 할 텐데?"
"그냥 바알라스에게 줘야죠. 그게 이 테알 슬럼가의 질서를 지키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백작가에서 나서면?"
"으음… 일단 그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은 바알라스와 이야기하고 힘을 모아서 아그라샌더를 막아 봅시다. 반대하는 의견이 없다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시다."
끄덕.
다크티스의 간부들은 이 의견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맡은바 임무를 하기 위해 흩어졌다.
테알 슬럼가에 여러 분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한 조직이 작정하고 모든 역량을 다 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더더욱 신속한 조치가 필요했다.
***
그리고 이 무렵, 베오날드는 다른 도시에서 온 용병으로 위장해서 용병 길드에 들어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그라샌더 그룹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계속해서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일거리가 있다는 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용병들이 오고 있는 바람에 그가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 되었다.
"자자! 줄들 똑바로 서세요. 우리 모두 신뢰를 주고받아야 하니 계약서를 제대로 써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순서대로 합시다."
"자! 바알라스 쪽에 고용되고 싶은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이것도 기묘한 광경이군. 하나의 용병 길드에서 서로가 싸워야 할 진영을 고르게 되는 꼴이라니.'
사실 용병 길드에 들어올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 이곳엔 아그라샌더에서 나온 의뢰인과 바알라스에서 온 의뢰인이 나란히 용병들을 모으고 있어서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진영에 속함과 동시에 상대 쪽 진영에 가입하는 용병들에 대해서 보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싸우기도 전부터 용병들의 싸움 태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있긴 하지만 결국 이 주변에서는 캘러메인 백작의 영지가 가장 큰 만큼 소문이 모이고 또 강자에 대한 명성은 퍼지기 마련이었다.
"저것 봐. '트롤 슬레이어' 자이넬이야. 제길! 아그라샌더에 고용되었나? 큰일 났네. 난 바알라스에 고용되었는데… 전장에서 보면 조심해야겠군."
"음, 그럴까? 바알라스에는 그 유명한 번개 형제가 고용되었다던데? 바알 사장 인맥이라던가?"
"번개 형제? 그 3급 마법사와 파문당한 성기사 페어 말하는 거지? 그럼 만만치 않겠는데?"
용병들의 떠드는 소리는 언뜻 들으면 아이들이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보고서 비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그들에겐 목숨이 달린 대화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베오날드는 그들의 그런 심경을 모르기에 유치함이 폭발할 것 같은 대화 내용을 듣고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 곤혹을 치렀다.
'유치해서 미치겠군. 그래도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선 들을 수밖에… 나도 이 혼란 속에 참전할 거니 말이야.'
그렇게 유치찬란한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테알 슬럼가의 작은 분쟁에 참여하는 용병들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수집한 후, 그는 곧바로 바알라스 조직의 의뢰인에게 가서 자신도 고용을 등록하고자 했다.
"보자… 신입이고, 꽤 어려 보이는걸? 그럼 이 일은 맡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너 사람 죽여 본 적 있냐?"
"예, 있습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어차피 여기서 돈 벌고 바로 뜰 거니까요."
"으음, 하긴 용병이 일하고 돈만 벌 수 있으면 장땡이긴 하지. 좋아, 여기 계약서에 사인하고, 신입이니까 최저 랭크지? 그럼 고용비 은화 20개고, 선금은 은화 10개. 이후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공헌에 따라서...."
"최저 랭크이긴 한데… 이러면 얼마죠?"
"뭐가? 이러면이 뭔… 으… 읍!"
바알라스에서 나온 의뢰인은 베오날드가 내민 단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랏빛 마나가 둘러진 그 단검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뢰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베오날드가 사전에 차단해서 용병 길드에 그의 비명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쉬이잇~ 남에게 들켜서 좋을 거 하나 없잖아요? 자~ 릴렉스하시고~ 방랑하는 몸으로서 돈 좀 벌고 싶어서 온 거니 말이죠. 이제 파악되셨죠?"
"으읍! 으읍!"
의뢰인은 베오날드의 살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할 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번 전쟁에서 핵심이 될 히든카드가 하나 탄생한 것을 확신하며 곧바로 특별한 배지를 꺼내 줬다.
"이건?"
"특별 의뢰 대상이라는 표시입니다. 제 역량으로는 도저히 거래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났을 때 드리는 거죠. 번화가로 가셔서 악마의 뿔 2개가 그려진 간판이 있는 건물을 지키는 자들에게 이걸 내밀면 알 겁니다."
"좋아. 그러도록 하지."
베오날드는 배지를 품에 집어넣고 바알라스의 의뢰 담당이 이야기한 곳으로 곧장 향했다.
그곳에는 이 시궁창스러운 슬럼가치고는 꽤나 제대로 된 5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입구엔 험상궂게 생긴 떡대 둘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바알'이라는 이름의 모티브에 맞게 악마의 뿔 2개가 그려진 간판이 보였다.
"넌 뭐야? 예정된 손님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 때문에 온 거라고 해 두지."
"…특별 의뢰군. 좋아, 들어가라. 1층에서 그걸 보여 주고 사장님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면 안내해 줄 거다."
베오날드가 다가가자 일순 경계를 했지만 배지를 보자마자 그들은 태도를 바꾸더니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안내인까지 따라붙어서 5층까지 올라간 다음 사장실이라고 표시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수염을 잔뜩 기른 중년 남성이 담배를 문 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양피지 서류와 판재들을 정신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젠장! 말렉 그 약팔이 자식! 아주 작정을 했군.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도가 지나치네! …어? 뭐야, 넌?"
"이걸 주곤 여기로 가라고 하던데요?"
"그, 그건? 오오오!"
베오날드가 배지를 내밀자 사장인 바알은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뛰어갔다.
특별 의뢰 대상. 용병의 궤를 넘어선 괴물급을 만나면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해 준 것이었고, 드디어 만나게 되자 반가움에 달려 나간 것이다.
이미 주요 용병들은 모조리 말렉이 쓸어 간 시점에서 괴물급의 등장은 구원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는 곧바로 베오날드와 협상하기 시작했다.
[3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