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로운 시작 (1)
불타는 대지에서 바라본 하늘은 너무나도 청명했다.
곧 멸망할 세계의 하늘이 저렇게 맑고 아름다울 건 또 뭐란 말인가.
가슴이 메어 눈을 감았다.
'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스스로를 검이라고 생각했다.
갈고 연마하다 보면 언젠가 예리해질 검.
'개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강해질 수 없었다.
나는 백 번째 삶을 진행 중인 회귀자.
그 억겁과 같은 시간을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알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강해질 수 없다는 것.
재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무능력자였다는 것.
결국 나는 나의 재능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
선혈이 울컥 치밀었다.
그 고통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뜨자 여전히 붉은 세상이 보였다.
공들여 키워 낸 영웅들이 장작더미처럼 타들어 간다.
대륙을 통합하여 구성한 십만의 정병은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너머로 가멜롬의 사도, 광룡 이그니타가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날아올라 하늘을 틀어막은 광룡은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고요.
광룡의 주둥이 앞에 점처럼 작은 빛의 구체가 나타나자 그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지금 광룡이 쏘아 보내는 것은 나의 실패였다.
구원하지 못한 것들의 회한과 아우성이 모여 내게 쏘아지는 것이다.
피투성이 팔을 내뻗었다.
막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음이 다시 사무친다.
그리고 광룡의 브레스는 결국 대지를 향해 폭사한다.
하늘이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에너지가 다시 한번 대지를 덮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절망이 나를 덮쳤다.
나 따위는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열아홉의 세이비어 실버하츠는 자기 분수에 맞게 마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살았어야 했다.
기사의 영웅담이나 용병의 활약 소식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청춘은 본디 희망과 꿈을 연료로 타오르는 법.
나의 청춘도 그러했다.
용병이 되고 싶었고, 나아가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싸울 줄 알아야 했고.
싸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선 골드가 필요했다.
'그때 용병 관리소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내뻗었던 손부터 광룡의 브레스에 소멸한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상념을 이어 간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후회'라는 것을.
용병 관리소에 짐꾼으로 지원하고 며칠 뒤, 어떤 고고학 탐사대를 따라나섰다.
탐험은 순조로웠다.
몬스터와 몇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무사히 유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전리품 회수의 시간.
무심코 제단 위 하얀 조약돌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을까.
그것이 시간과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의 신물이었다는 것을.
[파괴의 신, 가멜롬의 차원 침탈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라.]
신물에 손을 대자마자 머릿속에 울려 퍼진 계시.
영웅담을 동경해 용병이 되려고 하는 청년에겐 뿌리칠 수 없는 유혹.
그래서 너무 쉽게 대답해 버렸다.
'네, 기꺼이.'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소멸이 팔을 타고 몸통으로 향한다.
- 모두를 구원할 방법이 보이느냐.
모이라이 여신의 목소리 또한 회한과 함께 떠오른다.
죽음에서 돌아오면 줄곧 물어 오던 목소리.
그러면 나는 매 회차의 경과를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번엔 어떤 수련을 했고, 어떻게 강해질 계획인지.
여신은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2회차, 3회차를 지나 5회차, 10회차에 이르렀다.
뭔가 이상했다.
"여신님. 저는 왜 강해지지 않죠?"
여신도 내가 이렇게 전투에 재능이 없을지 몰랐는지 당황해했다.
- 너에겐 무한한 시간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우리 조금만 더 진득하게 노력해 보자.
인정한다.
나도 여신님도 미련했다.
안 되는 놈은 죽어다 깨어나도 안 되는 거였다.
그래도 여신님보단 내가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서른한 번째 삶을 시작할 때 여신님께 말했다.
"꼭 제가 강해질 필요는 없겠죠? 멸망을 막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때부터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영웅이라 불리던 이들을 찾아가 그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들에게 각종 기연을 선물했고 다가올 광룡과의 대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내 삶도 변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갈고 닦기 시작했다.
약초학, 연금술, 병법, 연금술, 대장장이 기술, 심지어 요리나 재봉술 등등.
익힐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은 차근차근 수립되었다.
매 삶이 진행될수록 인류의 힘은 하나로 통합되어 갔고.
영웅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여신님이 보기에 진행이 더딘 것처럼 느껴졌을까.
쉰 번째 삶을 마쳤을 때 여신님은 대뜸 내게 이런 말을 했다.
- 내 지금 백방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다. 너무 힘들면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여신님은 나를 위해서 한 말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그리고 그 반복이 여든한 번째에 이르렀을 때 여신님은 다시 한번 만류했다.
- 이제 그만하자. 이만큼 했음에도 해낼 수 없다면 이것은 그냥 불가능한 것이다.
여신님이 흐느꼈다.
덜컥 겁이 났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더 하고 싶었다. 포기하기 싫었다.
"할 수 있습니다. 여신님. 이제야 간신히 방법을 알 것 같아요."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그 후로도 이어진 나의 회귀.
인류 구원은 여전히 요원했다.
구원자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구원받았을까.
그때 내가 그 하얀 돌을 집어 들지 않았다면 세상은 평안했을까.
어느새 시야가 희미해진다.
육체가 완전한 소멸을 앞뒀다.
그러니까 후회는 여기까지.
언제나 그랬듯 모든 후회와 회한은 죽음과 함께 두고 떠나자.
절망조차 내게 주어진 과업 앞에선 사치일 뿐이니까.
'다음 생에는 기필코....'
내 온몸이 완전히 재로 변하기 직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나의 과업을 다시 떠올렸다.
- 파괴의 신, 가멜롬의 차원 침탈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라.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멸망을 막을 수 없을 테니.
다시 방법을 찾아보자.
어느덧 백 번째 회귀.
그러니까 백한 번째 삶이 거대한 고통과 함께 시작됐다.
* * *
하얗게 변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그 흐릿한 시야 너머에 그린 듯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보인다.
시간과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
저 입에서 나올 포기라는 단어가 두려웠다.
그래서 재빨리 이번 삶의 성과를 여신님에게 말했다.
"드디어 광룡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 드디어!
광룡을 직접 전투에 끌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
그것만으로도 여신님은 크게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 대단하구나! 어찌 그리 약한 몸으로 그런 위업을 달성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여신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맑은 미소를 마주하니 다시 심장 한편이 아렸다.
광룡을 마주하고 알았다.
그것은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
만약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모를까.
'제기랄, 그 가능성을 가진 내가 전투에 조금도 재능이 없다니....'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신님은 내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 잘되었어. 성과를 내다니. 나도 내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도록 하자. 시간이 30분밖에 없지 않으냐.
30분.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대기 시간.
중간계의 시간이 되감기 동안, 내가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30분이 부족하다며 여신님께서 급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들뜬 기분이 잡은 손을 통해 느껴졌다.
광룡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데....
여신님의 좋은 기분을 망칠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망설이기보다 사실을 전달하고 다음 대책을 논의해야 했다.
"그보다, 할 말이...."
그러나 여신의 말에 가로막혔다.
- 이 어미가 네 절망을 부술 만한 선물을 들고 왔단다. 마침 광룡과 마주했다니 더 이상 회귀는 필요 없을 것 같구나. 다음 생도 그렇게만 하면 되니까.
"무슨 말씀이에요? 회귀가 필요 없다니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이제 네게 부족한 것은 힘뿐이라는 말이다. 계획과 계략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그렇게 말한 여신이 제단의 한가운데에 섰다.
- 나의 구원이자, 인류의 구원. 나의 사도이자 사랑하는 아들인 세이비어에게 그 주인 된 신으로서 명한다. 이 어미가 구해온 선물에 감사하거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여신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신이 답답했다.
- 내 신물을 이리로 가져와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선물이 무엇인지는 말씀 안 해 주시고요?"
- 후후후. 봄을 가져왔지.
"봄이요?"
-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거라.
의아해하면서도 여신의 말대로 신물을 받쳐 들고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우주의 법칙에 의거하여 필멸자 세이비어의 카르마와 제 신성을 바쳐 힘을 원하나이다.
신물이 세이비어의 손에서 떠올라 빛을 내뿜었다.
제단에서 뻗어져 나온 밝은 빛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
['우주를 운영하는 대 법칙'과 여신 모이라이와의 계약이 진행됩니다.]
- 나의 아들, 세이비어야. 네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 이제 응답받을 것이다.
신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빛이 한순간에 모이라이의 신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뿜어져 나왔다.
빛이 허공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모이라이의 돌에 충분한 '카르마'가 깃들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에서 얻은 '카르마'를 계산합니다.]
[계산 중...12%]
[너무나 많은 카르마에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예상됩니다.]
"이게... 무슨?"
- 너를 위해 찾아낸 방법이니 놀라지 말거라.
눈앞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계산 중...42%]
[TIP. '시스템'은 다른 차원 인류의 유희(game)에서 따왔습니다.]
신물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글자를 만들어 냈다.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계산 중...68%]
[TIP. 악신 가멜롬이 광룡 이그니타를 사도로 삼았습니다. 광룡 이그니타가 중간계를 악신의 영역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막아야 합니다.]
팟!
빛이 한줄기 빠져나왔다.
그 빛의 단면에는 광룡 이그니타가 중간계의 생명체들을 학살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언데드.
야수성과 폭력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몬스터들.
그리고 인류를 배신한 인간들과 그들 위에 군림하는 마족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지난 삶에서 내가 마주했던 광룡의 추종자들이었다.
[계산 중...89%]
[여신 모이라이는 악신에 대항하기 온갖 문헌을 뒤져 우주를 관장하는 대법칙에 의거한 치환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사도가 쌓아 온 카르마를 <특성>으로 치환하기로 합니다.]
빛의 단면이 다른 그림을 보여 주었다.
나를 보며 슬퍼하는 모이라이가 모래알보다 더 많아 보이는 책들에 둘러싸여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계산 중...99%]
[여신 모이라이가 계약에 대가로 모든 힘을 잃어버립니다. 세이비어에게 부여했던 회귀의 권능이 힘을 잃습니다. 잠시 후 깊은 잠에 빠집니다.]
[계산 완료...100%]
[세이비어가 모아 온 '카르마'의 계산이 끝났습니다.]
[보유한 카르마에 합당한 특성을 검색합니다.]
['초월'등급의 특성, <노력과 재능의 등가교환>이 부여됩니다.]
"세상에...."
나는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였다.
30분이 지났는지 내 몸이 갑자기 빛에 휩싸였다.
중간계로의 송환이었다.
- 이제 봄이 왔으니, 새로운 잎을 틔우거라. 나의 아들아.
저 말을 마지막으로 여신님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동시에 시야가 완전히 빛에 물들었다.
2화. 새로운 시작 (2)
'여신님께서 모든 힘을 잃고 깊은 잠에 빠지셨다.'
백한 번째 삶이 시작됐으나 그것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어머니처럼 언제나 나를 독려하던 모이라이 여신.
그런 그녀가 스스로의 신성을 바쳐 만들어 낸 마지막 가능성, 특성.
- 봄이 왔을 때 꽃을 피우는 것은 겨울을 무사히 보낸 나무뿐이란다. 지금을 겨울이라고 생각하려무나. 이 세찬 겨울바람 같은 고난이 지나면 봄이 올 거야. 그때 너의 싹을 틔우고 잎을 틔워 마침내 꽃과 열매를 맺거라.
그런 대화였다.
스치듯 지나간 위로.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는 격려.
- 이제 봄이 왔음이니, 새로운 잎을 틔우거라. 나의 아들아.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런 의미였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불똥을 내뱉었다.
매번 삶을 다시 시작할 때마다 마주하는 풍경.
첫 탐험, 그러니까 열아홉 살의 내가 신물을 얻은 날의 밤.
'여신님을 깨우기 위해선 하루빨리 광룡의 목을 치는 수밖에 없어.'
그녀가 내게 보여 준 소중한 마음에 보답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모든 절망과 후회는 지난 삶에 두고 왔으니.
결국 지금 내가 할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을 확인했다.
곧바로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노력과 재능의 등가교환(초월)]
- 소유자의 전투 관련 행동이 <스킬>화 됩니다.
- <스킬>은 반복되는 행동, 스킬북 또는 특정한 이벤트로 얻을 수 있습니다.
- 모든 <스킬>은 습득 시 최하등급인 F 등급으로 고정됩니다. 숙련도가 생성됩니다.
- <스킬>의 각 등급 숙련도가 100%가 되면 다음 등급으로 올라갑니다.
- 모든 <스킬>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초월 등급 특성이 가진 가능성이 너무나 거대합니다.]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이제부터 삶의 변곡점에 '운명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찬찬히 곱씹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그리고 계획했다.
이것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큰 골조는 바로 이전 삶인 100회차와 같다.
광룡의 추종자들을 상대할 병력이 필요하니까.
그들이 광룡의 추종자를 상대하는 사이, 이번 삶에선 내가 직접 광룡의 목을 친다.
'이렇게 계획을 짜도 지난 삶과 완전히 동일한 진행은... 불가능하겠지.'
회귀를 거듭하며 충분히 느꼈다.
완벽히 똑같은 계획, 완벽히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언제나 천차만별로 달라졌으니까.
그러니 특성을 가지고 시작하는 이번 삶은 아예 처음 사는 것과 다름없을 터.
'괜찮아. 내 강점은 수많은 아수라장을 경험했다는 것이니까. 어떤 일이 있던 헤쳐 나간다.'
계획은 세우되, 그것이 틀어진다면 그저 헤쳐 나가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쌓은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나는 모든 종류의 실수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니까.
'마지막 단 한 번의 기회. 기필코 성공한다.'
빡!
갑자기 뒤통수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 이놈이 짐꾼 주제에 불침번 서다가 멍을 때리네."
같이 불침번인 주제에 방금까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F급 용병 아돌.
그가 내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존 사람도 있는데 생각 좀 하면 안 됩니까?"
"나는 혹시 있을지 모를 내일 전투를 위해 체력을 비축한 거고. 짐꾼인 네놈이 생각은 무슨 생각."
고작 F급 용병 주제에 전투력을 운운한다.
그래 봤자 자기도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면서.
"인류 평화와 신의 모성애에 대한 고찰이요."
삐빅 삐빅.
그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근무 교대용 모래시계가 계속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눌러 끄니 아돌의 딴지가 날아온다.
"얼씨구. 야 그거 나름 알람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다. 망가지면 네가 짐꾼 일백 번 뛰어도 못 물어내."
아무 말도 없이 아돌을 바라봤다.
"...뭐지? 왜 갑자기 꼬라봐? 기분 나빠?"
"네, 기분 나쁩니다."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어.... 그래, 미안하다."
강한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만 강한 전형적인 쓰레기.
회귀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과거의 나는 왜 이런 녀석에게 절절맸을까.
아돌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과의 의미로...."
"괜찮습니다. 사탕 안 좋아하거든요."
"뭐?"
어딘가 당황한 듯한 표정의 아돌을 뒤로하고 재빨리 다음 불침번을 깨웠다.
"도른 씨, 일어나세요. 다음번 불침번 근무예요."
"아하하, 벌써 제 차례인가요."
도른이 특유의 나사 빠진 듯한 말투로 말하며 일어났다.
모든 능력이 고고학 탐사에 몰렸는지 평소엔 좀 어벙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
골드와 아티팩트에 관해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자 내 첫 번째 동료(예정)다.
이번 탐험대를 꾸린 인물이자, 장차 고고학자로서 막대한 골드와 명예를 얻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아유, 도른 씨. 피곤하시면 좀 더 주무실래요?"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도른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그럴 수야 없죠. 세이비어 님은 내일 아침에 또 아침 식사 준비하셔야 하잖아요."
고고학자인 도른과 짐꾼인 나 그리고 E급 용병인 캐빈, F급 용병인 밥과 아돌로 구성된 탐험대의 인원은 총 다섯.
짐꾼으로 이번 탐험에 참가한 나는 식사를 비롯한 잡일도 담당하고 있기에 첫 번째로 불침번을 섰다.
내일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탐험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했으니까.
"내일 아침은 진짜 맛있게 해 드릴게요. 그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맛있을 거다.
회귀했던 수많은 삶 중 왕실 조리장을 했던 적도 있으니까.
웃어 보이며 도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실은 제가 어제부터 계속 악몽을 꾸거든요. 제 옆에서 불침번 서시다가 제가 신음을 흘리면 깨워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네! 그럼요! 그런데 악몽이라니요? 어떤 악몽이요?"
"미친 거대 도마뱀이 인류를 멸망시키는 꿈이요."
"어이구 끔찍하네요. 제가 바로 깨워 드릴게요."
도른이 바보처럼 웃으며 내 침낭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대로 침낭에 들어갔다.
"아돌 님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아...아뇨. 괜찮습니다."
도른이 강아지처럼 발랄하게 아돌을 걱정했다.
나는 침낭 속에서 단검을 꼭 쥔 채로 특성과 운명의 역풍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갔다.
* * *
"아돌 님, 도시에 가면 꼭 돼지 아카데미라는 식당에 가 보세요. 거기 돼지고기는 다른 곳과 뭔가 달라요. 커다란 철판에 소금으로 간해서 구워 먹는 것뿐인데 말이죠.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도시 유일의 동대륙 음식을 파는 곳이기도 하고 맛도 있고 정말 환상적인 곳이라고요."
"아... 네."
'정말 못 들어 주겠네.'
아돌은 속으로 불평을 내뱉었다.
이 도른이라는 꼬맹이는 불침번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무려 삼십 분을 혼자 떠들고 있다.
그것도 죄다 먹는 이야기뿐.
'전생에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들렸나.'
아돌은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하긴, 자기 식재료를 들게 하겠다고 짐꾼을 따로 고용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4인 탐사대에 짐꾼이 웬 말이냐.
짐꾼이라 하면 15인 이상의 클랜부터 고용해 데리고 다니는 것이 보통.
'그래도 지금쯤이면 그 성질 더러운 짐꾼 놈도 잠들었겠지?'
아돌은 방금 전 침낭으로 들어간 세이비어의 얼굴을 살폈다.
금세 곯아떨어진 것인지 조용했다.
갑자기 세게 나와서 쫄았지만, 그래 봤자 열아홉 풋내기 짐꾼.
'곧 골로 보내 주마. 건방진 놈. 그나저나 모두 잠든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고작 4인 탐사대가 얻은 수확치곤 과한 전리품이었다.
유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대 유적에서 발굴해 낸 보석들만 팔아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을 수준.
눈앞에 허약한 고고학자를 단숨에 죽이고, 남은 용병과 짐꾼을 자는 사이에 기습하면 보물은 모두 내 몫이 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고작 용병 일당만 받을 순 없지.
크흐흐흐흐.
이제 나는 부자다.
아돌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도른에게 말을 걸었다.
"도른 씨, 이거 친구가 동대륙에서 구해 온 사탕인데 한번 드셔 보실래요?"
사탕처럼 포장하긴 했지만 실은 최하급 마비약.
짐꾼에게 먼저 사용하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사탕이요? 오! 감사합니다."
역시 걸신들린 놈. 단숨에 마비약을 받아 입속에 집어넣었다.
"쓴데요? 이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몸이 곧바로 뻣뻣하게 굳은 채로 쓰러지며 괴상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런 최하급이라 효과가 좀 덜한가. 소리를 내다니.'
아돌은 손으로 도른의 입을 막고 몸을 짓눌렀다.
도른은 계속해서 읍읍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비명을 내지르려 발악했다.
아돌은 자고 있던 이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서둘러 단검을 도른의 목으로 가져갔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도른. 딱히 원한은 없어. 내가 도박 빚만 갚고 예쁘게 무덤 만들어 줄 테니까, 잘 가고."
아돌이 단검을 찔러넣었다.
아니, 찔러넣으려던 찰나였다.
누군가 아돌의 목덜미에 먼저 단검을 박아 넣었다.
끄륵, 끄륵.
아돌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아돌은 공격한 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다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건방진 짐꾼 놈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
아직도 따듯한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는 아돌의 시체를 발로 툭 밀었다.
"어디 남의 이부자리 앞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이 짓도 백 번 가까이 하니까 도가 텄다.
아돌의 배신은 회귀 때마다 일어났으니까.
"도른 씨. 괜찮아요?"
그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비약 효과가 풀리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할 터.
도른을 일으켜 세웠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눈에는 나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생도 잘 부탁한다. 도른.'
마비되어 몸을 움찔거리는 도른을 한쪽에 눕혀 놓고 아돌의 시체를 야영지에서 먼 공터에 묻었다.
그리고 사람 몸통만 한 거대한 솥을 꺼내 들었다.
놀란 도른을 달래는 데에는 맛있는 음식만 한 게 없지.
도른은 많이 먹으니까, 한 솥은 끓여야겠다.
식자재가 한가득 들어 있는 가방에서 감자를 골라 다듬었다.
솥에 재료를 때려 넣고 끓이길 잠시, 맛 좋은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한 때였다.
훌쩍.
드디어 마비가 풀렸는지 도른이 코를 훌쩍거렸다.
이래서 수상한 아저씨가 사탕을 주면 절대 받아먹으면 안 된다.
눈물 콧물 쏙 빼놓는 경험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마비가 좀 풀렸어요?"
"으악! 오지 말아요!"
도른도 지금 자기가 엄청 지저분한 상태라는 걸 안다.
안면이 마비된 상태라 콧물이 얼굴에서 늘어져 있고, 침도 질질... 아무튼 엄청 더럽고 흉했다.
"이걸로 얼굴 좀 닦아요."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도른을 향해 던졌다.
아직 완전히 마비가 풀린 것은 아니었는지 도른이 부들거리는 팔로 얼굴을 열심히 닦았다.
"괜찮아요?"
"덕분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른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것이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어...어째서. 아돌 씨가."
흑흑흑.
타닥거리며 불똥을 뱉어내는 모닥불 앞에서 도른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또 우네. 많이 놀랐죠?"
특별히 솜씨를 발휘해 끓인 감자 스튜를 도른에게 내밀었다.
도른이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스튜의 첫술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우와!"
도른의 퉁퉁 부어오른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이게 왜 이렇게 맛있는 거죠?"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요."
도른은 결국 앉은 자리에서 스튜 한 냄비를 통째로 비워 냈다.
그 작은 배에 5인용 냄비를 가득 채운 스튜가 다 들어간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래도 어느새 도른의 눈물은 멈춰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세이비어 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당연히 구해야죠. 놀라셨을 텐데 오늘 불침번은 제가 대신 설게요. 좀 주무세요"
"아니에요. 오히려 세이비어 씨가 엄청 피곤하시겠어요. 저는 괜찮으니 얼른 주무세요."
그렇게 몇 번 겸양 섞인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곧 침묵이 내려앉았다.
원래 높은 텐션으로 대화를 이끌던 도른이 입을 다물자, 대화가 뚝뚝 끊겼다.
내가 도른에게 억지로 말을 걸지는 않았기에 점차 대화가 잦아들었다.
이 순둥이는 원수도 은혜로 갚고, 은혜는 몇 배로 갚는 성격.
지금 이 침묵은 도른이 어떤 것을 보상으로 줄지 맹렬히 생각하는 중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세이비어 씨는 용병이 되고 싶다고 했죠?"
마침내 긴 고민을 끝마친 도른이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러면 이걸 보답으로 드릴게요. 정말 감사해요. 제발 받아 주세요."
간절한 도른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 그 낡은 서책을 받아 들었다.
[클로시류 검방술.]
검의 명가 클로시 백작가의 검술이 내 손에 들어왔다.
3화. 운명의 역풍 (1)
도른과 나는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라도 진정시켜야지.'
도른이 좋아할 만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슬며시 운을 띄웠고.
도른은 신이 나서 어느 식당 음식이 맛있는지로 시작해 지역에 특산물로 만든 요리에 대한 감상평을 지나,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떠들었다.
머릿속이 정말 먹는 것으로만 가득 찼는지, 자기가 지난밤에 죽을 뻔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음식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어느새 히히거리며 웃는 도른을 보며 나도 같이 웃었다.
첫날 이렇게 웃고 있는 도른을 보고 있자니 조금 씁쓸해졌다.
백 번을 회귀하는 동안 내 모든 여정을 함께한 친구.
그 이야기는 매번 이렇게 새롭게 인연을 맺었어야 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때 도른을 죽음의 위기에 빠트리는 일이 상대를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에 그쳤을 뿐, 나는 결국 매 회차의 삶에서 아돌의 습격을 이용해 도른과 인연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인연을 맺지 않으면 관계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대신 맹세했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진심으로 대할 것.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
언제가 회귀가 끝났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와 한 약속.
오랜 친구와 다시 관계를 쌓아가고 있자니 아침이 밝았다.
다른 용병들을 깨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60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부지고 커다란 몸을 가진 E급 용병 캐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게 센 머리가 아니었다면 4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동안이었다
그가 그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께선 밤을 새우신 거 같으니 오늘 하루 더 여기서 머무르죠."
빼빼 마르고 까불거리는 F급 용병 밥은 내가 아돌을 죽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와, 내가 그놈 그럴 줄 알았다. 말하는 싸가지 하며 눈에 욕심이 드글드글했다니까. 그런데 네가 죽였다고? 아돌을? 너 보기와는 다르게 꽤 하는구나?"
그 역시 20대 후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아마도 그의 경박한 말투와 태도가 그를 더욱 어려 보이게 하는 듯했다.
도른이 밥의 시끄러운 음성을 피해 침낭에 들어가 곧바로 잠들었다.
나는 캐빈에게 유적을 구경하겠다고 말했다.
"첫 탐사죠? 그러면 모든 것이 신기할 만하죠. 유적에 몬스터의 흔적이 없어서 괜찮을 것 같긴 하군요. 그래도 깊이 들어가진 마세요."
캐빈은 흔쾌히 허락해 줬다.
나는 서둘러 유적으로 뛰어 들어가 어제 도른이 건네준 기술서를 꺼내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클로시류 검방술.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인 클로시 가문의 기초 무예다.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왼손에는 작은 버클러를 착용하여 공격과 방어의 유기적인 연계가 특징인 검술.
'이제 진짜 새로운 삶의 시작이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책의 첫 장을 넘겼다.
[클로시류 검방술을 익히시겠습니까?]
떠오르는 글자.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중 하나.
모든 기술서의 스킬북화.
책을 이해할 오성이 없다고?
재능이 없어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이제 상관없다.
세상의 모든 무예를 기술서만 있다면 익힐 수 있다.
<특성> 만세다.
"네. 무조건 네."
그 즉시 기술서의 내용이 빨려들 듯 뇌 속을 채웠다.
클로시 검방술의 역사부터 다섯 개의 기초 검식과 열두 개에 달하는 심화식. 그리고 네 개의 최종 오의까지.
또한 평생을 꿈꿔 왔던 마나 연공술 또한 머릿속에 들어왔다.
클로시류 검방술에 대한 모든 지식이 온전히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스킬을 실행하기 위해선 마나하트를 먼저 연성해야 합니다. 클로시류 마나 하트 연공을 실행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마나 하트 연성.
백 번의 삶 동안 염원하던 것.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세계는 마나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변화는 마나의 이합집산 과정이다.]
첫 번째 문장.
지난 삶에선 난해하게 느껴졌던 문장이 단숨에 이해됐다.
글자들이 품고 있는 의미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상의 구성요소이며 현상의 원인인 마나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두 번째 문장.
마나를 충분히 인정하고 인식한다?
말이 쉽지. 그걸 내가 할 수 있었으면 백 번의 삶 동안 마나하트를 못 얻었겠냐고.
분명 그랬었는데....
"이게 되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쉽게 습득하다니.
자신감이 생겼다.
여신님의 선물이 드디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성공한 건 아니지.
차분하게 눈을 감고 세상 만물 속의 자신을 느꼈다.
느껴지는 것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유적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미묘하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벌레 소리.
이 모든 게 마나의 작용임을 인식한다.
"어렵네."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단숨에 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직하게 노력하는 것에는 도가 튼 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독 신경을 거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간질간질.
팔뚝의 솜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그것은 마치 변덕스러운 어린아이처럼 몸을 들락거렸다.
'이게 마나?'
이건 분명히 마나였다.
그냥 바람이 아니다.
문득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세상이 찬란하게 빛났다.
작은 소립자들이 빛을 뿜어내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이게 마나!'
경이로웠다.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황홀경 속에서 나는 정신을 붙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마나를 내 몸으로 불러들였다.
'더럽게 말 안 듣네.'
세상에 퍼져 있는 것에 비해 티끌만 한 양.
하지만 나는 그 조금의 마나마저도 기껍게 느껴졌다.
그들을 소중히 내 오른쪽 가슴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빠악.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나의 몸 안에 마나를 통제할 이질적인 장기가 새로 생겨났다.
좁쌀만큼 작았지만,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
마나하트였다.
'이제 회로를 뚫어야 해.'
마나하트에 자리 잡은 마나를 진짜 심장으로 인도했다.
토독토독.
괴상한 소리가 몸 안에서 들려왔다.
두근두근.
그 괴상한 소리가 힘차게 달음박질하는 심장과 만났다.
그리고 혈관을 따라 마나 회로를 몸에 새기기 시작했다.
"으윽"
처음이라 그런지 고통이 뒤따랐다.
그렇게 한 바퀴.
심장의 동맥을 따라 온몸에 굵은 마나회로를 아로새긴 마나가 다시 마나하트로 복귀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안내음.
[클로시류 마나하트 (F)]
"아... 똥 싸다 자빠졌다고 해야 하나."
전신의 노폐물들이 빠져나와 옷이 구정물로 젖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덤이었다.
그런데 자꾸 얼굴에 미소를 피어올랐다.
마나하트를 오른쪽 가슴에 새긴 자, 마나비기너.
마침내 '마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자'가 됐다.
벌러덩.
그대로 드러누웠다.
유적의 높은 천장이 보였다.
"마나하트."
오른쪽 가슴에 생긴 것의 이름을 곱씹었다.
"하... 안 울려고 했는데."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날까.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른다.
[첫 무기술 습득을 축하드립니다.]
[신체 등급과 마나하트의 숙련도가 개방됩니다.]
[신체 등급]
- 지구력 (F): 숙련도 0.00
- 근력 (F): 숙련도 0.00
- 민첩 (F): 숙련도 0.00
[마나 하트]
- 클로시류 마나하트(F): 숙련도 0.00
[전투 기술]
- 클로시류 검방술(F): 숙련도 0.00
마치 책의 목차처럼 펼쳐지는 글자들.
백 번의 회귀 동안에도 본 적이 없었던 생소한 광경이었지만, 그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있었다. 백지나 다름없는 나의 현재 수준을 알려 주는 목록이었다. 절망스럽진 않았다. 어떻게 해도 발전할 수 없었던 이전의 나와는 다를 테니까.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쟁이 가시화되기까지 5년.
5년이란 세월 안에 광룡의 목을 썰어 버릴 만큼 강해져야 한다.
이 특성, <노력과 재능의 등가교환>으로.
시간이 촉박했다.
* * *
다시 캠프로 돌아가니, 캐빈은 어렵지 않게 내 상태를 눈치챘다.
"마나하트를 연성하셨군요? 마나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축하합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 악취는 처음 마나하트를 연성하면서 배출된 노폐물 냄새거든요. 마나하트를 연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걸요? 그리고...."
캐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이비어 씨도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주변의 마나를 느껴 보세요. 제 오른쪽 가슴에서 마나하트가 느껴지지 않나요?"
캐빈의 말에 그의 오른쪽 가슴에 감각을 집중했다.
"어? 진짜네요. 제 것보다 커요."
분명, 내 가슴에 있는 것보다 큰 마나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당연하죠. 저는 마나 유저, 즉 싱글코어에 도달했으니까요. 마나하트를 감지해서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하는 게 용병들의 기본이거든요."
싱글 코어.
'마나하트가 건물을 세우기 위한 토대라면 코어는 건물의 뼈대지.'
지난 삶, 성장을 도왔던 영웅들에게 들은 코어에 대한 설명이 떠올랐다.
캐빈의 경지는 싱글코어, 마나비기너의 다음 경지.
마나비기너가 체내의 마나로 조금 더 힘이 세지는 경지라면 마나유저는 마나를 직접 사용하여 특정 신체를 강화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래도 정말 대단합니다. 알려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코어의 근간이 되는 마나하트를 생성해 내다니."
캐빈이 무뚝뚝한 말투로 칭찬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정말 엄청난 재능이군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 캐빈이란 남자는 매번 그랬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세심하게 파티원들을 챙겼다.
거대하고 우락부락한 아저씨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섬세함이 있었다.
특히 첫 탐사에 나서는 나와 도른을 많은 부분에서 도와줬다.
"그보다 식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배가 고프군요."
"네!"
근처 개울에서 얼른 몸을 씻고 온 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오, 이게 무슨 냄새야. 기적이 일어났나? 돼지죽밖에 못 만들던 놈이 요리를 하고 있잖아."
F급 용병 밥이 옆에 와서 깐족거렸다.
"진짜 기적을 보여 드릴까요? 짐꾼이 국자로 F급 용병을 때려잡는?"
스튜를 젓던 거대 국자를 들어 올리자 밥이 설설 기며 도망쳤다.
"아, 미안합니다. F급 용병 따위는 단칼에 멱을 따 버리는 짐꾼님이셨죠."
"네, 그 짐꾼님이 천상의 요리를 해 드릴 테니 잠자코 계시죠."
밥은 나름 유쾌한 사내였다.
용병 특유의 천박함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탐사대 전체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지금도 아돌의 죽음으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띄우고자 장난을 친 것이리라.
"아? 맛있는 냄새."
내가 만든 요리의 냄새를 맡고 도른이 일어났다.
밥은 도른이 어젯밤 일어난 일에 우울해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계속해서 떠들었다.
덕분인지 도른은 쉴 틈 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무뚝뚝한 캐빈조차 작게 웃을 정도로 떠들썩한 하루였다.
* * *
다음 날이 되어 도시로의 귀환할 때도 틈틈이 훈련을 이어 갔다.
틈틈이 마나하트를 수련하고 행군을 하며 신체 능력의 숙련도를 올렸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지구력을 늘리는데 탁월했고 등에 멘 도른의 식재료는 근력을 올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3일 후.
여전히 도시로의 귀환 중인 내 눈앞에 황당한 글자가 떠올랐다.
[운명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이벤트 - 아돌의 배신'이 심화합니다.]
[아돌의 시체가 지난 사흘간 충분히 부패했습니다. <특성>을 부여한 우주의 법칙은 이 시체를 이용하여 세이비어에게 고난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부패한 시체에 아돌의 재화에 대한 탐욕이 깃듭니다. 그 탐욕은 죽음마저 초월하여 죽은 육신을 일으켜 세웁니다. F급 용병 아돌이 '죽음에서 돌아온 자' 시체먹는 언데드, 구울이 되어 탐사대를 추격합니다.]
[우주의 법칙으로 점지된 운명, 구울의 습격까지 남은 시간 71:59:59]
[운명의 역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날, 정해진 때에 일어납니다.]
실시간으로 남은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건 또 뭐야.'
<특성>을 얻은 대가로 불어온다던 운명의 역풍.
지금껏 간과하고 있던 그것이 내 운명을 습격해 왔다.
4화. 운명의 역풍 (2)
세이비어가 대충 묻어 놓은 아돌의 무덤에서 짙은 피냄새가 피어났다.
피 냄새는 언제나 몬스터를 불러오는 법.
킁킁.
피 냄새를 맡고 무덤을 찾아온 다이어 울프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코끝에서부터 꼬리까지 2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늑대.
녀석이 아돌의 무덤을 파헤쳤다.
팟.
그때 땅속에서 검은 손이 튀어나와 다이어 울프의 머리를 잡아챘다.
놀란 다이어 울프가 강아지 소리를 내며 뒤로 빠졌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의 주인, 아돌도 자연스럽게 흙 속에서 끌려 나왔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아돌이 아니었다.
구울.
시체 먹는 시체.
몬스터화가 진행된 아돌의 신체는 인간일 때와 사뭇 달랐다.
온갖 원한과 원망, 그리고 욕망이 뭉쳐져 그의 신체를 재구성했다.
피부가 흉측하게 쪼그라들었고, 신체는 전체적으로 거대해졌다.
특히, 검게 변한 그의 오른팔은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커다래져 있었다.
"세…이…비…어...."
구울이 자신을 죽인 저주스러운 그 이름을 찬찬히 읊조렸다.
그의 거대한 오른손에는 머리를 잡힌 다이어 울프가 고통스럽게 낑낑거렸다.
"탈…것…이…필…요…해...."
팍.
그 말과 동시에 다이어 울프의 머리가 짓뭉개졌다.
놀랍게도 다이어 울프는 구울의 하위 개체인 좀비가 되어 일어났다.
아돌이 머리가 짓뭉개진 다이어 울프 좀비의 등에 올라탔다.
"죽…인…다...."
지옥에서 새어 나온 듯한 거친 음성.
좀비가 된 다이어 울프가 달려나갔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세이비어가 있는 곳.
아돌은 본능적으로 세이비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서 세이비어를 죽여야 했다.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 * *
도시로의 행군 중 갑작스럽게 떠오른 파란 창.
눈앞에 떠오른 글씨를 심각하게 바라봤다.
이게 뭐야 갑자기?
놀랐으나 곧 수긍했다.
여기에 떠오른 글자를 믿지 않는다는 건 이제야 시작된 나의 성장 또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기껏 특성 좀 얻어서 뭐 좀 해 보려 하니까 [운명의 역풍]인지 뭔지가 불어온단다.
'구울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구울?
구울은 전투력이 E급 용병 중 상급은 되어야지 간신히 처치할 수 있다고 알려진 언데드 계열 몬스터.
성가시게도 물어 죽인 생명체를 최하급 언데드인 좀비로 재탄생시킨다.
그냥 구울 한 마리만 온다면, 파티에 있는 E급 용병 캐빈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캐빈은 E급 용병 중에서도 실력으로는 수위를 다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구울이 데려올 좀비의 수에 달려 있다.
'구울은 좀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좀비 떼가 탐사대를 덮치면, 이건 답도 없다.
캐빈 혼자 도른을 보호하며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검방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아직 제대로 된 수련은 하지 못했다.
특성이 사기적인 이유는 무한으로 강해질 가능성을 준다는 데 있지 그 자체로 강한 건 아니다. 충분한 수련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전력은 지금 어떻지?
캐빈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전력이지만....
F급 용병인 밥은 좀비 몇 마리 상대하는 게 고작이겠지.
도른은 옆에서 응원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수준이고.
'당분간은 순탄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분명 앞으로도 이 운명의 역풍이란 것이 내 앞길을 막을 것 같다.
파란만장은 이제 끝일 줄 알았는데 이놈의 인생 고난이 끊이질 않네.
짝!
두 손으로 내 뺨을 휘갈겼다.
자! 푸념은 여기까지 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첫째, 행군 속도를 높여 빠르게 도시로 들어간다.'
그러면 제깟 놈들이 어쩔 거야.
[남은 시간 69:43:29]
....
아무리 날고 기어도 3일 안에 도시에 도착할 수 없으니 기각.
'둘째, 여기서 진을 치고 습격에 대비하며 수련한다.'
그래, 방법은 이거밖에 없다.
구울이던 좀비던 지능은 처참한 수준이니까 그 점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물론 쉽지 않겠지.'
내가 백 번의 삶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대가 없는 혜택은 없다는 것이었다.
좋은 일 뒤엔 언제나 나쁜 일이 따라오고 그 뒤엔 다시 좋은 일이 온다.
특성이라는 커다란 능력에 딸려온 [운명의 역풍]은 내가 지금껏 경험해 온 삶보다도 가혹할 가능성이 높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면 되지, 뭐.'
언제는 할 만해서 했던가.
해야 하니까 했지.
'그러려면 일단 이 행군을 멈춰야 하는데....'
그때 눈에 쑥색 민들레가 들어왔다.
신발 끈을 다시 묶는 척하며 그 쑥색 민들레 몇 송이를 꺾어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의 식사에만 민들레즙을 슬쩍 넣었다.
"윽... 배가...."
얼굴이 노래진 밥이 배를 움켜쥐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뱃속의 악마와 전쟁을 이제 막 시작한 밥에게 심심한 사과를....
'미안합니다, 밥. 이거 말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꾸르륵, 꾸륵.
그날 밤새도록 밥의 배에선 흡사 뱃고동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밥은 숲속으로 달려갔다.
새벽에 이르러선 밥이 벌써 아돌에게 당해 좀비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쑥색 민들레는 변비에 사용되는 아주 유명한 약재다.
효과로도 유명하고 가성비로도 유명하다.
길가에 널려 있으면서도 한 송이만으로 한 달 치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약재.
그런 쑥색 민들레로 즙을 내서 식사에 섞었으니, 밥은 지금 '수문 개방!'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정말 미안합니다. 밥의 희생 잊지 않을게요.'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하며 밥의 명복을 빌어 주고 있는데 캐빈이 입을 열었다.
"밥의 상태가 저러니 괜찮아질 때까지 이곳에 머물도록 할까요? 다행히 주변에 몬스터의 흔적은 없어 보이니까요."
"네! 좋아요! 뭔가 캠핑 나온 기분이네요! 이럴 땐 바비큐인데, 우리 고기 남은 거 있나요?"
도른이 해맑게 대답했고, 나도 웃으며 도른의 물음에 답했다.
"아뇨, 챙겨 온 고기는 도시에서 나온 첫날 끝났어요."
무려 5키로에 달하는 돼지고기를 끝장내던 도른.
그 모습은 꽤 충격적이어서 백 번의 회귀를 한 지금도 기억난다.
"헤헤, 아쉽다."
"끄아아악!"
도른의 해맑은 웃음 소리와 밥의 절규가 절묘하게 맞물렸다.
어쨌든 식사를 했고, 그 후 나는 바로 삽을 집어 들었다,
'함정이 필요해.'
형편없는 지능과 신체 능력을 가진 좀비들이 한 번 빠지면 나오지 못할 깊은 함정.
어느 방향에서 올까.
북부의 야만족에게 전수받은 함정 제조술이 빛을 발했다.
캠프의 위치와 주변 지형을 고려하여 아돌이 어느 방향으로 올지 후보군을 정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캐빈이 정말 유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쩜 내가 한 것만큼이나 완벽한 캠프 위치잖아?'
전략적으로 완벽한 위치선정.
캠프는 낮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고, 그곳으로 오기 위한 길은 나무로 가려져 결국 한 곳으로 이어졌다.
'그럼 여기 한 곳에 커다란 함정만 파면 되겠군.'
"절묘한 함정이군요."
내가 함정을 파고 있자, 캐빈이 나타나 감탄했다.
"며칠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안전할수록 좋죠. 저도 돕도록 하죠."
"와! 저 함정 처음 파 봐요!"
캐빈과 도른이 함정을 파는 데 합류해 반나절 만에 깊은 함정을 팔 수 있었다.
마나비기너인 나도 꽤 많이 땅을 파긴 했지만 마나 유저인 캐빈의 활약이 컸다.
도른은 뭐... 흙 장난하는 수준이었고.
'그래도 덕분에 근력과 지구력이 많이 올랐단 말이지.'
[신체등급 (F)]
- 지구력 (F): 숙련도 32.14
- 근력 (F): 숙련도 22.10
- 민첩 (F): 숙련도 8.13
지난 삼 일간의 행군과 오늘 함정 파기로 신체 등급 숙련도가 꽤 많이 올랐다.
확실히 수치가 올라가니 덜 피곤하고 더 힘이 강해진 게 체감됐다.
틈틈이 진행한 마나연공 덕에 마나량도 15로 늘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탐색해 좀비와 구울의 습격에 대비할 아이템들을 몇 개 만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만드시는 거죠?"
캐빈이 물어 왔고.
"혹시 몰라서요."
대충 얼버무렸다.
갸웃거리는 캐빈의 얼굴을 뒤로하고 음폭탄이나 발화 가루 같은 것들을 끝끝내 다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하는 건, 기초 검식 수련이지.'
[남은 시간 32:18:44]
하루하고도 반나절 조금 안 되게 남은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선 검식 수련이 답이었다.
앞으로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선 나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전투 기술]
- 클로시류 검방술(F): 숙련도 0.00)
아직 단 한 번도 수련하지 않았던 클로시류 검방술.
한 번도 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검과 버클러가 없는데 어떻게 검방술을 수련하냔 말이야.'
검방술이란 말 그대로 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기술인데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라곤 30센티미터짜리 단검이 고작이었다.
"저기, 밥 씨. 고생 중에 죄송한데 소드 스토퍼랑 숏 소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바짝 건조된 오징어 같은 몰골의 밥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참 운명의 장난인지, 안배인지.
때마침 밥이 사용하는 무기가 검과 방패지 않은가.
물론 머릿속 검방술에 관한 지식에선 사람 머리만 한 소드스토퍼보다 조금 더 큰 버클러를 추천하고 있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 실행해 보는 클로시류 검방술의 기초 5식.
막고 찌르는 1식.
후려치고 베는 2식.
피하고 후려치는 3식.
베고 막는 4식.
막으며 돌진하는 5식.
말 그대로 검과 방패를 사용할 때 기초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동작들.
그러나 그냥 기초 동작만 나열된다면 대륙 최강 명가의 무예가 아닐 터.
클로시류 검방술의 진가는 각 5식의 연계에 있다.
지난 삶에서 이 기초 5식의 연계만으로 몬스터를 분쇄하던 클로시 백작의 위용을 보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던가.
끝없이 휘두르는 검과 방패의 틈에서 적은 정신을 못 차리고 갈려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생전 처음 1식에서 5식까지 순서대로 휘둘러 본 검과 방패.
생각보다 더 묵직했고 부자연스러웠다.
- 클로시류 검방술(F): 숙련도 0.05
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연하자 숙련도가 0.05 올랐다.
단순 계산으로 백 번 반복하면 5.00의 숙련도가 오르는 샘.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반복할 수 있을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자세를 잡은 순간이었다.
"모든 무기술은 스텝이 중요합니다. 하체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검과 방패를 휘둘러 보세요."
한참 수련 중인데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빈이었다.
[특별한 이벤트 - 캐빈의 가르침이 활성화됩니다.]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클로시류 검방술의 숙련도가 두 배 빠르게 오릅니다.]
세상에 맙소사.
캐빈이 툭하고 던진 한마디 말에 이런 효과가 있다니.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곤 바로 캐빈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자,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캐빈은 옆에서 보기에 답답해 아저씨 특유의 오지랖을 부린 거 같지만....
뭔 상관이야.
무려 숙련도가 두 배다.
5화. 운명의 역풍 (3)
캐빈 아저씨와 함께하는 숙련도 두 배 파티는 순조롭게 끝났다.
거대 방패와 둔기를 사용하는 캐빈은 검에 대한 조언보다 방패를 사용하는 법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결국 검방술의 숙련도를 12까지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중간중간 말해 준 전투 팁이 아주 도움이 많이 되겠어.'
시야를 가리지 않게 방패를 드는 법이라던가, 반대로 방패로 상대 시야를 가리는 방법 같은 것들은 실전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좋은 팁이었다.
수련을 끝낸 나는 더 무리하지 않고 장비를 점검하며 때를 기다렸다. 여전히 해쓱한 얼굴의 밥은 자신의 무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캠프 안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00:00:00]
[지금부터 아돌의 습격이 시작됩니다.]
캠프 주위로 음산한 기운이 닥쳐왔다.
캐빈이 급하게 말했다.
"모두 전투 준비."
동시에 캐빈이 자신의 메이스와 거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전투 준비요?"
도른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고.
나는 소드스토퍼와 검을 집어들고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노려봤다.
고오오오.
여전히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저 멀리서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른 씨, 뒤에서 밥 씨와 함께 계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주변에서 채취한 재료로 만든 음폭탄을 챙겼다.
그때였다.
공기가 질척거리는 질감으로 바뀌었다.
꺼져가는 저녁노을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신형을 비췄다.
입구 너머로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났다.
흐느적 흐느적.
기괴한 움직임.
역겨운 시체 썩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쾅.
캐빈이 함정의 바로 뒤편에서 거대 방패의 아랫부분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곤 나를 바라봤다.
"대기."
실제로 본 좀비 무리는 내 예상보다 좀 더 많았다.
어림잡아 서른 정도.
"좀비다. 음폭탄, 음폭탄 만들지 않았나?"
다급한 상황이 되니 캐빈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얼른 손에 든 음폭탄을 캐빈에게 들어 보였다.
"좋아. 신호하면 함정 위로 음폭탄을 던져라."
역시 숙련된 용병.
캐빈은 좀비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만든 음폭탄을 떠올렸다.
좀비는 모든 감각이 퇴화하고 오로지 소리에 반응하니까.
커다란 소리를 발생시키는 음폭탄이라면 좀비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을 터였다.
'됐어. 저 정도면 파 놓은 함정에 다 들어갈 거야.'
그리곤 불을 붙이면 끝이다.
다행히도 도른의 식사를 위해 챙겨 온 기름과 발화 가루들이 많았다.
그걸 함정에 미리 뿌려 뒀다.
꿀꺽.
솔직히 말해 조금 긴장이 됐다.
백 번의 삶을 살아오며 이것보다 더한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다음 삶이 보장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기에 얼마든지 목숨을 도외시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지금 던져라."
어느덧 좀비 무리가 함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즉시 캐빈이 소리쳤다.
손에 들고 있던 음폭탄을 함정 위로 던졌다.
툭.
음폭탄이 함정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리고.
끼에에에에에엥!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 지르는 꽃, 프레이코.
이곳 대륙 동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시사철 피는 꽃.
그 붉은 잎이 소리를 지르자, 좀비 떼의 고개가 동시에 갸우뚱 꺾였다.
그오. 그악. 크륵.
괴상한 소리를 내는 좀비 떼가 음폭탄을 향해 돌진했다.
흐느적거리며 느릿하게 움직였던 것과 대비되는 폭력적인 움직임.
콰과과광!
좀비 떼가 걸신들린 아귀처럼 함정 위로 달려 들어오자, 나뭇가지와 흙으로 숨겨져 있던 함정이 폭삭 내려앉았다.
즉시 달려나가 그 위에 불붙인 파이어 스틱을 던져 넣었다.
화르륵!
함정에서 거대한 불꽃이 타올랐다.
살 타는 냄새가 퍼졌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나?"
불타면서도 함정에서 기어 올라오는 좀비를 발로 차며 캐빈이 말했다.
그때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타오르는 화염을 뚫고 날아와 캐빈을 덮쳤다.
쾅!
캐빈은 들고 있던 사각 방패로 간신히 막아 냈지만, 뒤로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크르르르릉.
머리가 짓뭉개진 다이어 울프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아무리 작게 봐도 2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
'세상에 이건 커도 너무 큰데.'
다이어 울프가 일반 늑대보다 크다지만 이건 정도를 넘었다.
불을 붙이고 잠시 뒤로 빠져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세이비어, 더 뒤로 빠져라!"
내 실력을 파악하고 있던 캐빈이 다급히 외쳤다.
그는 연신 다이어 울프를 방패로 밀어 내면서도 전황 전체를 신경 썼다.
캐빈과 다이어 울프의 힘은 백중세.
"엎드려!"
돌연 캐빈이 내게 외쳤다.
나는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방금 내 머리가 있던 자리로 검은 팔이 튀어나왔다.
그 징그러운 팔은 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이…비…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황급히 거리를 벌린 나는 나를 공격한 팔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돌이었다.
생전보다 훨씬 커지고, 피부도 검게 변했지만, 그리고 온몸이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무너져 흘러내리는 얼굴에서 희미하게 아돌이 보였다.
"아돌?"
다이어 울프 좀비를 힘겹게 막아서고 있던 캐빈이 놀라 소리쳤다.
"죽…인…다...."
그러나 캐빈의 목소리에도 아돌은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두껍고 검은 팔이 땅에 질질 끌렸다.
쥐고 있던 숏소드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왼 손등에 차고 있는 소드스토퍼를 가슴께 부근으로 가져왔다.
발꿈치를 몸에 꽉 붙여 가드를 단단히 했다.
클로시류 검방술의 기본자세였다.
"피해! 도망쳐! 네 상대가 아니라니까! 뛰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라고!"
다시 한번 캐빈이 외쳤다.
알았어요. 아저씨. 그만 진정해요.
할 수 있었다면 진작 뛰어서 도망쳤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못 도망친다.
등을 보이는 순간 죽는다.
백 번이나 죽어 봤다.
그 죽음의 경험이 내게 경고했다.
'싸우는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잠자코 나를 노려보고 있던 아돌이 내게 긴 팔을 뻗었다.
창!
채찍처럼 휘어져 정확히 소드스토퍼 위를 때린 녀석의 팔.
분명 살과 쇠가 부딪쳤건만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으윽, 팔이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아.'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라고. 도망쳐!"
캐빈이 저 멀리서 계속 고래고래 소리쳤다.
힐끗 본 캐빈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간신히 다이어 울프 좀비의 공격을 막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일반 다이어 울프도 E급 용병과 동급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저건 좀비로 변한 다이어 울프다.
힘과 민첩성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적의만큼은 살아생전과 비교도 할 수 없다.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은 그것만으로 상대를 질리게 한다.
캐빈의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그걸 말해 줬다.
'그리고 상대를 질리게 하는 살의는 이쪽도 마찬가지고.'
챙! 챙! 챙!
구울로 변한 아돌이 연속해서 내 소드스토퍼를 두드린다.
소드스토퍼를 찬 왼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그러나 더욱 팔꿈치에 힘을 줘 가드를 굳혔다.
'내가 혼자 녀석을 상대해야 한다. 싸워 이겨야 해. 그런데 어떻게?'
이미 생명이 없는 녀석이니 인간일 때의 약점을 노리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있는 부위가 있다면 녀석들은 끝까지 움직여 공격하니까.
그래서 좀비나 구울을 잡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 목뼈를 쳐부수는 거다.
녀석들은 머리가 부서지면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다는 건 이 채찍같이 휘둘러지는 팔을 뚫고 녀석의 목을 끊어야 한다는 건데.'
제기랄, 그게 말이 쉽지.
밥의 작디작은 소드스토퍼는 녀석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벌써 울룩불룩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사거리 차이가 너무 난다.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때였다.
퍽!
잔뜩 우그러진 소드스토퍼를 든 팔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너머로 썩어 문드러져 진물이 흐르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표정.
'일부러 소드스토퍼 위만 때린 건가?'
쉭.
구울의 검은 팔이 완전히 무방비가 된 내 몸통으로 날아온다.
촤라라락.
그리고 상체에 기다란 상처를 남긴다.
마치 검에 베인 것처럼 내 상의가 찢어졌다.
타격당한 살갗에 피가 배어 나왔다.
크르르륵.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구울이 이렇게 감정표현이 풍부했나.
단 한 방, 일격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제기랄.
그리고 연이은 후속타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퍽.
내 몸이 날아갔다.
퍽.
무릎과 고개가 꺾여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기우는 몸을 녀석이 쳐올려 쓰러지지도 못하게 했다.
퍽. 퍽. 퍽.
그렇게 수련용 허수아비처럼 계속 맞았다.
눈이 퉁퉁 부어 시야가 좁아졌다.
그러나 분명히 보였다. 녀석이 웃음이.
귓가에 들리던 녀석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정신 차려라!"
멀리서 캐빈의 절규가 아련하게 들렸다.
이대로 끝나나.
문득 죽음이 눈앞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삶이 스쳐 지나간다.
다시 주마등이 시작될 전조가 보였다.
느릿느릿 아돌의 검은 팔이 내게로 닥쳐온다.
'젠장, 안 돼. 방법을 찾아야 해.'
운명은 언제나 감당해 낼 수 있는 고난만을 준다.
무려 운명의 여신님이 내게 직접 말한 신언이니 확실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역풍도 내가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클로시류 검방술의 모든 식은 균형과 순환을 담고 있다.]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불현듯 클로시류 검방술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균형과 순환이란 무엇인가.
흔들리지 않은 것이 균형 잡힌 것인가? 아니다.
절대 변치 않는 것이 순환인가? 결코 아니다.
튕겨져 나간 왼팔을 힘겹게 앞으로 가져왔다.
팔꿈치를 조이고 소드스토퍼를 들어 올려 다시 가드했다.
어느 한쪽으로 쏠렸다가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균형이다.
크게 흔들거려 휘청거리다가도 다시 본래로 중심을 잡는 것이 곧 균형이다.
머릿속에 오뚜기가 떠올랐다.
비틀비틀 크게 흔들리는 오뚜기.
나는 그 오뚜기처럼 한쪽으로 크게 쓰러지듯 몸을 기울였다.
퍽.
전보다 작은 소리가 내 왼팔에서 들려왔다.
'흘려 내는 데 성공했다. 팔이 안 아파.'
아돌이 다시 내 소드스토퍼 위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방패는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존재하는 무구다.
그러나 막기만 해서는 언젠가 부서지고 말 거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오는 충격을 흘려 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버클러다.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방패.
검술서에서 버클러를 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들고 있는 소드스토퍼보다는 크지만, 캐빈이 들고 있는 중갑 보병용 거대 사각 방패보다는 작다.
이는 막기보다는 흘려 내는 것에 집중하는 말이다.
또한 클로시류 검방술에선 그 흘려 냄이 방어라는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흘려 냄이 선행되어야만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다.
왜냐.
그것이 힘을 '순환'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니까.
기우뚱.
오뚜기처럼 몸이 오른쪽으로 기운다.
오른 다리를 벌려 땅을 지지했다.
얼마 안 되는 마나가 오른쪽 다리로 몰려가 근육에 힘을 실었다.
그 힘으로 땅을 박찼다.
동시에 왼손의 소드스토퍼를 힘껏 휘둘러 녀석의 팔을 쳐 냈다.
그 힘에 내 허리가 회전한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숏소드를 그 회전력에 실어 휘두른다.
이것이 기초 5검식 중 제 2식.
후려치고 베기.
지금껏 공격만을 일삼던 아돌의 무자비한 공격이 멈췄다.
정확히는 내가 멈춰 세웠다.
내가 그은 숏소드의 칼날이 아돌의 단단한 가죽을 베고 들어가 긴 생채기를 남겼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식을 전개했다.
녀석의 공격을 막고 찔렀다.
흘리고 베어 냈다.
피하고 소드스토퍼로 후려쳤다.
그렇게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기우뚱 기우뚱, 오뚜기처럼 이리저리 쓰러질 듯 몸이 좌우로 크게 기울었다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식부터 5식의 연계가 끝났을 때.
어느새 아돌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죽…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돌은 다시 한번 말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쇠를 긁는 소리.
"야. 다시 아까처럼 웃어 봐."
녀석은 웃지 못했다. 대신 끄륵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래. 썩어 가는 고깃덩이가.
그대로 아돌의 목을 베어 냈다.
쇠처럼 단단하던 팔과는 다르게 칼날이 부드럽게 피부를 가르고 들어갔다.
뎅겅.
잘린 아돌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녀석의 악취 나는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하지만 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허물어져 썩은 진물을 흘릴 뿐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이 폐를 타고 흘러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다이어 울프 좀비를 끝내고 돌아온 캐빈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잘했다."
담백한 한마디.
그 한마디에 기분이 이상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
[강적과의 전투로 검식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12.24 → 22.24]
그래, 숙련도도 올랐구나.
그러나 상관없었다.
"해냈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말했다.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았으나, 무엇인가를 싸워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걸어 잠갔다.
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가지고 있고 싶었다.
6화. 도른 (1)
그날 밤.
원기를 회복한 밥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모닥불에 비친 밥의 얼굴이 붉게 번들거렸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우오오오!"
그 앞에 있던 도른이 주먹을 불끈쥐며 괴상한 추임새를 넣었다.
"무려 구울이라고요 구울. E급 용병도 한 수 접어 준다는 구울! 그걸 우리 짐꾼이 잡았다니까요!"
"봤어요! 저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도른씨! 그중 압권은 단연 그 장면이었죠? 소드 스토퍼로 녀석의 검은 팔을 팟! 하고 튕겨 내더니 번개처럼 촤악하고 놈의 품으로 파고든 후에 한 말이요! 우리의 짐꾼 세이비어가 깊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 그것도 들었나요?"
도른이 귀엽고 동그란 얼굴을 찌푸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나를 따라 했다.
"야! 다시 처 웃어 봐!"
도른이 자기 미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이비어 씨의 미간이 이렇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어요."
그 모습을 보고 밥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맞아요! 도른! '처 웃어 봐'라니. 우리의 구원자 세이비어도 아돌의 괴상망측한 웃음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밥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눈엔 장난기가 그득했다.
"구울로 변한 아돌 놈의 주무기가 검게 변한 팔이지 않습니까? 저는 저 대사를 아돌의 손발을 오그라트려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신 공격의 일종이라 확신하고 있어요. 도른 씨."
"우와! 정말인가요? 노림수였던 거예요? 세이비어 씨?"
도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순수한 눈빛을 무시하고 계속 나를 조리 돌림하는 밥을 향해 말했다.
"밥 씨, 머리가 뭉개지면 정신도 같이 붕괴한다고 합니다. 붕괴한 정신 속에서 헤매게 만들어 드릴까요?"
"어이쿠, 무서워라. 도른 씨, 구울 슬레이어가 밥 슬레이어가 되기 전에 도망가야겠습니다. 도른 씨도 언제 당할지 몰라요. 어서 이리 오세요."
"와아아아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밥이 도른을 데리고 도망쳤다.
캐빈이 내 옆에서 큭큭거리며 웃었다.
"귀엽지 않습니까?"
전투가 끝나자 다시 존댓말을 해 오는 캐빈이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한참이나 어린데요."
"전투 때야 빠른 의사 전달이 생명이니 반말한다고 해도, 일상생활에선 그럴 수 없지요. 저는 어렸을 때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는 어른들이 무척 싫었거든요. "
"아... 그렇군요."
지금 캐빈과 나는 나란히 누워 있다.
구울에게 곤죽이 될 때까지 구타당한 나는 온몸이 멍에 상처투성이였고, 홀로 좀비로 변한 다이어 울프를 상대한 캐빈 또한 가슴에 긴 자상이 생겼다.
둘 다 거동이 힘들 만큼의 중상.
"이번 탐험에 밥을 데려와서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캐빈의 시선이 모닥불 앞에서 신나게 웃고 떠드는 밥에게 향했다.
"밥처럼 떠드는 녀석이 없었다면 분위기가 참 삭막했겠지요."
"네, 그런 의미라면...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캐빈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에 마주 웃었다.
그리고 까닭을 알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뒤를 이었다.
"도시로 돌아가면 말했던 대로 용병이 될 생각입니까?"
침묵을 깬 것은 캐빈이었다.
"글쎄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캐빈의 말처럼 원래는 도시로 돌아가 바로 용병 등록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역풍이란 것을 경험하며 생각이 많아졌다.
내 삶의 변곡점마다 이런 운명의 역풍이 불어온다면 세워 놓은 계획들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이번 구울의 습격도 그래.'
만약, 내가 검과 방패가 없다는 이유로 수련하지 않았다면?
만약,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검방술의 기술서를 받고 마나하트를 만들지 않았다면?
만약....
수많은 '만약'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정확히 운명의 역풍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운명의 역풍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쥐어 짜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 지난 100회차의 삶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테지.
'이미 지난 삶과 조금이지만 달라졌어.'
원래라면 내일모레에는 도시에 도착해야 했을 일정.
그러나 아돌의 습격으로 인해 3일이나 여정이 미뤄졌고, 중상을 입은 나와 캐빈으로 인해 며칠 더 도시로의 귀환 일정이 미뤄질 예정이다.
'저 먼 동대륙의 나비가 무심코 한 날갯짓이 서 대륙에서는 태풍이 된다던가.'
지금으로선 단순히 도시로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일 뿐이지만, 이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언제는 뭐 쉬웠나.'
입술을 꽉 깨물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내 진정한 강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백 번의 삶을 '경험'했다는 것에 있다.
어떻게 세상사 일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그 사건과 사고들을 넘어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섰고.
'재능이 없었기에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실패를 경험했고, 그랬기에 앞으로 어떤 고난이 나를 찾아오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어.'
그래 봤자 내가 경험한 실패이지 않겠는가.
"왜? 용병은 너무 위험해 보이던가요? 그런 것 치고는 정말 대단한 재능과 실력이었습니다."
생각 많은 표정으로 대답이 늦어지자 캐빈이 재차 물었다.
"아뇨, 용병은 될 생각입니다. 도시로 귀환하는 즉시 용병 시험을 보고, 자격요건을 맞춰서 팀을 만들고 클랜을 결성하려 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길드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벌써 그렇게까지. 세이비어 씨라면 분명 잘 해낼 겁니다."
캐빈이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뭔가 말씀하실 게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캐빈이 정곡을 찔렸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렇다면... 밥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밥 씨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탁.
"탐사대에 부담을 줄 것 같아 말하지 않았지만... 밥은 제 아들입니다."
"아들이요?"
백 번을 다시 살았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왜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털어놓는 거지?
원래라면 밥과 캐빈은 이 첫 탐사가 끝난 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소설로 치면 이름 없는 엑스트라랄까.
그런데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자 그저 스쳐 지나가던 인연이 내게 더 깊은 인연이 되어 보자고 말을 걸어 온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야 했던 도른과, 내가 보여 준 모습에 새로운 인연이 되길 자처하는 캐빈.
어쩌면 이것이 특성과 운명의 역풍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저는 곧 은퇴할 예정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앞으로 길어야 1년.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제 한계입니다. 그 이상 탐험을 지속하다가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겁니다."
그가 자신의 주름지고 거친 손을 내게 내민다.
손이 허공에서 덜덜 떨렸다.
눈앞의 용병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녹슬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캐빈이 쓰게 웃었다.
"세이비어 씨는 배신한 아돌을 죽이고, 도른 씨가 준 검술서로 하루 만에 마나하트를 만들어 왔습니다. 또 탐험대가 체류한 야영지에 함정을 파고 음폭탄을 준비했죠. 그리고 결국에는 구울까지 홀로 잡았습니다. 신중함에 침착함, 그리고 근성까지 겸비했죠. 제 경험상 그런 사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3년 차 미만 용병들의 사망률은 60퍼센트.
이제 1년 차인 밥이 경험을 쌓고 한 사람 몫을 할 때까지 데리고 다녀 달라는 말이었다.
"세이비어 님이 제 아들을 맡아 주신다면 저도 맘 편히 은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밥은 제 아들이지만 참 명랑하고 밝은 녀석입니다. 아직 부족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겠지만 저를 닮아 곧 쓸 만해질 겁니다. 저도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세이비어 님을 도울 거고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캐빈의 실력은 E급 용병 중에 상위.
특히 근방의 지리를 꿰고 있어, 뛰어난 길잡이로 정평이 나 있다.
돈 많은 도련님인 도른이 고르고 골라 데려온 용병 아니던가.
'미래에 밥이 어떻게 됐더라?'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중에 길드가 만들어졌을 때는 꼭 전투 인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니까.
정 안 되면 물자관리라도 시키면 되겠지.
용병 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 시기에 캐빈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큰 이득이다.
경험 많은 용병과 함께하면 내가 할 일이 크게 줄어들 테니까.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캐빈이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슬쩍 숙여 왔다.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기에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지만....
"캐빈 씨도 말해 봐요!"
그때 도른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캐빈에게 달려왔다. 그 뒤로 밥이 능글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시로 돌아가서 돼지 아카데미에서 뒤풀이하는 거 싫어요?"
"도른 씨, 누가 동대륙 음식을 먹는다고 그래요. 탐험대의 뒤풀이는 무조건 '푸른 마녀의 집'이라니까요. 거기 마담 가슴이 얼마나 큰 줄 알아요? 살살 녹는 눈웃음은 어떻고요. 진정으로 용병을 위하는 고용주라면 무조건 푸른 마녀의 집으로 가야죠. 음식은 고만고만하지만, 마담과 눈이 마주치면 아주 맛 좋게 느껴질 테니까요."
맙소사.
어느새 탐사 후 뒤풀이 장소 이야기로 화제가 변경됐나 보다.
그때 캐빈이 담담히 자기 의견을 말했다.
"흠... 역시 용병들의 전통에 따라 푸른 마녀의 집이 더 괜찮지 않을까요?"
얼씨구, 이 아저씨 봐라. 얼굴은 왜 또 빨개져.
"그...그렇군요."
캐빈의 대답을 들은 도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잔뜩 실망했다.
"저는 그 동대륙 음식 먹어 보고 싶은데요?"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도른의 편을 들어줬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풀이 죽으면 안 되지.
"그쵸!"
도른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어? 그러면 2대 2네요. 어떻게... 구울이 된 아돌 머리라도 주워다가 다시 물어볼까요?"
밥이 시답잖은 말을 했고.
"이럴 땐 돈 주는 사람 말을 듣는 게 맞죠."
내가 그 말을 무시하고 판결을 내렸다.
"마...맞아요! 제가 고용주라고요! 뒤풀이는 돼지 아카데미로 확정이에요!"
도른이 나름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캐빈도 나도, 도른을 놀리던 밥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하루가 끝났다.
다음날,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캐빈의 상처와 내 타박상에 쓸 약초들을 주워 왔다.
채집한 약초를 잘 짓이겨 캐빈의 자상에 발랐다.
그냥 놔두면 몇 주는 갈 상처였지만 4일 만에 딱지가 앉았다.
내 멍과 타박상도 많이 좋아졌다.
"자! 이제 다시 출발해 봅시다!"
드디어 도시로의 귀환이었다.
* * *
대륙 동부의 다섯 왕국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다이너스 왕국.
우리의 목적지는 그 다이너스 왕국의 최동단에 있는 도시 슈펠이었다.
'입구는 의외로 평범하단 말이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줄이 짧아지는 것을 보며 서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된다.
'환락과 탐욕의 도시 슈펠, 그 옆에 붙어 있는 숲의 이름이 허영인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우리 탐사대가 방금까지 탐사하던 허영의 숲은 고대 유적과 몬스터가 드글거리는 곳.
자연히 유적을 발굴하고 유물을 얻기 위한 탐험가들과 그들을 몬스터로부터 지키기 위한 용병들이 모여들었다.
탐험가와 용병, 이 두 직업군은 모두 탐욕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직종.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등이 속한 탐험가 쪽은 유식하게 탐욕스러운 놈들이고, 전투가 주업인 용병들은 무식하게 탐욕스럽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놈들이 모여드는 도시가 정상적일 리가 있나.'
몬스터의 피를 보며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괴팍하고 괴상했다.
"들어가면 저희 부자는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치유소를 들를 예정입니다. 보수는 저녁에 돼지 아카데미에서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 그러면 저도 보석을 골드로 환전해서 뒤풀이 장소로 갈게요. 짐은...."
캐빈의 말에 도른이 대답했다.
"당연히 짐꾼이니까 제가 들어야죠."
혼자 환전을 하러 보내면 어떤 눈탱이를 맞을지 모르는 도른에겐 내가 따라붙기로 했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자니 어느덧 우리가 성에 들어갈 차례가 됐고, 각자 용병패와 신분패를 내밀었다.
"그럼, 저녁에 뵙지요."
캐빈과 밥이 고개를 숙이곤 멀어져 갔다.
우리는 우선 도른이 묵고 있는 여관에 들러 연구할 유물과 보물을 종류별로 정리했다.
그리곤 발굴해 낸 보석 꾸러미를 들고 여관 근처 보석상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 에잉, 구경은 안 돼. 나가라 꼬맹이들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콧수염을 얌생이처럼 기른 보석상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놈은 나이가 어리고 돈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항상 이렇게 무시하기 일쑤였다.
"보...보석을 팔러 왔는데요?"
기가 죽은 도른의 작은 손이 당황해 꼼지락거렸다.
"뭐? 뭐라는 거야? 아직도 안 나갔냐?"
탁!
나는 다짜고짜 탁자에 보석들을 펼쳐 놨다.
"이게...?"
얌생이 수염 보석상의 얼굴이 홱 돌아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왜 무시해.
우리 순둥이 기죽게.
우리 보석 있어.
"얼마까지 쳐줄 거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싹수없는 말투로 녀석에게 말했다.
7화. 도른 (2)
순둥이의 삶엔 언제나 그들을 이용하려는 놈들이 끼어든다.
그리고 도른은 그 순둥이 중에서도 제일가는 순둥이.
"아이고, 손님. 이 정도는 보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돌덩이죠."
"아... 보석이 아니에요?"
순둥이의 왕, 도른.
그가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도 파시겠다면 전부 합쳐서 4실버 정도는 쳐 드리겠습니다."
보석상은 테이블 위에 흩뿌려진 보석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기도 잠시, 빠르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래, 여전히 우리를 호구 취급한다 이거지.
"그, 그거밖에 안 되나요?"
도른이 울상인 표정으로 얌생이 수염을 쳐다봤다.
지금 도른의 머릿속이야 뻔하다.
생애 첫 탐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져온 첫 수확인데 한 끼 식사값도 나오질 않는다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이 사파이어가 커팅된 것 보이시죠? 표면이 너무 거칠고 마모가 심하게 돼 있어서 제 빛을 내지 못해요. 이 가넷은 사각형으로 세공됐네요. 가넷은 동그랗게 세공된 걸 최고로 치죠."
보석상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자세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디서 운 좋게 유적이라도 발견하신 모양인데, 흔한 일이죠. 유적이라면 최소 몇백 년에서 최대 몇천 년은 흘렀을 건데 세공 기술이 지금의 것보다 낙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기대하셨다면 아쉽게 됐네요."
나는 얌생이 수염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석들을 다시 꾸러미에 챙겼다.
"아쉽네요. 도른 씨, 가요. 여기가 현금 보유가 가장 많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내일이면 문 닫게 생겼네요."
보석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고, 손님. 보석을 팔지 못해 아쉬운 건 이해하지만 내일이면 문을 닫게 되다뇨? 아무리 화가 나도 보석이 가치가 없는 건 제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보석이 가치 없는 건 당신 탓이 아냐.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보석들이 엄청난 보물로 보이거든. 그래서 난 이 길로 나가 이 보석을 그대로 슈펠 성의 영주님께 바칠 거야. 이 보석들이 진짜라면 영주님이 내 소원 하나는 들어주지 않을까?"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 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예를 들면, 내게 사기를 치려고 했던 비양심적인 보석상의 삼대를 멸해 달라거나. 뭐 그런 거."
"손님. 뭔가 오해가...."
"오해인지 아닌지는 영주님이 판가름해 주시겠지. 가요, 도른 씨."
그대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도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다가 쪼르르 따라왔다.
"삼천 골드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붙잡는 다급한 상인의 목소리.
"사천오백 골드. 그 밑으로는 꿈도 꾸지 말라고."
경험상 여기까진 받아 낼 수 있더라고.
원래의 값은 삼천 골드가 맞지만, 괘씸죄까지 추가된 가격이었다.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똥 씹은 표정의 얌생이 수염을 쳐다봤다.
* * *
"우아아아. 세이비어 씨는 정말 대단해요."
약속한 뒤풀이까지 시간이 남아 도른과 근처 카페테리아에 들어왔다.
도른이 오렌지 쥬스를 홀짝이며 말했다.
"저...저랑 같은 나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실 수 있을까요?"
이 정도는 별일 아니라고, 백 번쯤 삶을 반복하다 보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쓴웃음이 났다.
도른의 이 해맑음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사실은 회귀자고, 우리는 내 과거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말해도 다 믿어 줄 것만 같다.
반복하는 삶에 대한 괴리감이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다.
"그냥 경험의 차이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밑바닥을 구르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도른 씨는 귀하게 자라셨잖아요."
도른의 눈이 커졌다.
"훔... 저는 그게 싫은걸요."
도른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과거긴 한데요.... 아하하하, 저는 사실 저를 과보호하는 환경이 싫어서 집을 나와 탐험가가 되기로 한 거예요."
애써 밝은 척하려는 게 느껴져 더욱 침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는요. 예전부터 뭘 하던 실수투성이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실수를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헤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정말 잘하는 거 하나 없고 언제나 사고만 쳤었네요. 그런 저를 아버지는 언제나 아이 취급하셨고요."
"과한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거군요."
"아... 네, 맞아요.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모두에게 받았죠."
받은 사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듯, 도른은 제 가슴으로 양손을 가져와 꼭 쥐었다.
"헤헤헤... 그런데 그게 너무 과하다고 느껴졌어요. 세이비어 씨, 저는 사람이 실수와 실패를 하며 발전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받은 사랑은 제 실수와 실패를 제 삶에서 지워 버렸어요. 그 어떤 것도 배울수 없게 제 실수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죠."
툭. 툭.
도른의 발이 괜스레 땅을 발로 찼다.
"저는 이제 홀로 서고 싶어요. 세이비어 씨처럼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나도 할 수 있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나도 멋진 사람이다."
나는 가만히 도른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얗고 뽀얀 피부의 도른이 굳은 다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른 씨, 나 믿어요?"
"...네?"
갑자기 장난스럽게 변한 내 목소리에 도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저는 예전부터 감이 좋은 편이었거든요. 어? 이렇게 될 것 같은데,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더라고요."
여전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도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 함정이나 음폭탄을 미리 만든 것도 그런 감 때문이었어요?"
"네? 네, 맞죠."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그냥 운명의 역풍에 대비한 것뿐이었으니까.
이런 점은 서글프다.
진심을 전달하려는 순간에 온전히 진실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그래도 나는 우울해하는 내 오랜 새 친구를 위해 말을 이었다.
"최근에 저를 엄청 찌릿찌릿하게 하는 느낌이 하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던, 백 퍼센트짜리 감각이 계속 제게 말해요."
"오오오오! 뭐라고요?"
"도른 씨가 아주 엄청난 사람이 될 테니, 옆에 꼭 붙어 있다가 콩고물을 주워 먹으라고요."
"에이, 뭐예요. 장난치지 마세요. 그래도 감사하네요."
"진짜예요, 도른 씨. 저는 장난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내 말을 인사치레로 생각한 표정이다.
그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도른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집안에서 그런 대우를 받을 정도면 엄청 좋은 집안일 텐데 그걸 뿌리치고 탐사라는 고생길을 선택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떠난 첫 번째 탐사에서 엄청난 수확을 얻은 것도 그렇고. 보통 사람은 절대 그렇게 못 해요. 그냥 자기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지."
"아...."
도른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이룬 일에 대해 생각이 미쳤으리라.
"도른 씨가 해낸 일은 분명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에요. 어디 가서 자랑해도 모두 박수를 쳐 줄 일이죠."
그런 도른의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바라봤다.
도른의 두 손을 꼭 잡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도른 씨, 도른 씨는 반드시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될 거예요. 제가 보증할게요. 제 말 한번 믿어 봐요. 무려 확률 백 퍼센트짜리 감이라고요."
마주한 도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이 순둥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한 건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도른은 알아서 엄청난 탐험가가 되고 고고학자가 될 것이란 것.
그래도 응원해 주고 싶다.
내 백 번의 삶에서 도른은 언제나 내 옆을 지켜 주었고,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것이 기만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친구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다.
어차피 대단한 탐험가가 될 것이라도 그 가는 길에 가시덤불을 조금이나마 치워 주고 싶다.
아니,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감사해요. 정말요.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 생겼어요!"
도른이 언제나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 때문인지 도른의 얼굴도 조금 붉게 보였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그 동대륙 음식 먹으러 갈까요?"
"오오! 좋아요!"
도른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자리를 옮겨 도착한 돼지 아카데미에는 캐빈과 밥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돼지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여기서 돈 내고 고기를 굽고 있는 거지? 동대륙은 요리사가 없답니까?"
밥이 볼멘소리를 했고.
"동대륙에서는 다 이렇게 먹는대요. 구워서 나오면 고기가 식잖아요. 식은 고기는 질겨지고 냄새가 난다고요. 이건 고기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동대륙만의 특급 비법이라고요!"
도른이 신나서 설명해 줬다.
치지지직.
돼지고기가 먹음직한 소리를 내며 불판에서 익어 갔다.
그날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먹고 마셨다.
도른이 기분이 좋다고 보수를 올려서 줬다.
그것도 무려 열 배나.
평범한 4인 가정의 한 달 생활비인 10골드!
도른의 주머니에는 사천오백 골드나 있고 그건 내가 받아 준 거나 다름없기에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캐빈이 밥의 용병 생활을 내게 맡겼다는 사실을 도른에게 말해 줬다.
나는 앞으로 용병 자격을 획득할 것이며 팀을 만들고 클랜으로 발전시켜, 나아가 길드를 만들 것이라 모두에게 말했다.
"오오오오! 저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제가 먼저 부탁하려고 했어요. 도른 씨 옆에 꼭 붙어 있겠다 했잖아요."
도른이 자신도 내 클랜에 들어오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당연히 승낙했고 밥과 캐빈도 올려 받은 보수에 흥이 나는지 술을 연신 들이켰다.
나도 앞으로의 여정에서 제대로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지금뿐이란 것을 알기에 있는 힘껏 술을 퍼마셨다.
백 번의 삶 중 최초였다.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은 것도, 내 포부를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것도.
'이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게 아쉽네.'
더 이상 회귀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면....
더 열심히 놀아야지.
취기를 핑계로 골드주머니를 손에 쥐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췄다.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밥이 따라 올라와 노래를 불렀다.
도른이 그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웃고, 웃고 또 웃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 * *
끄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내가 다시 술을 이렇게 마시면 개다.
도대체 어제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분명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다 돼지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건까진 기억이 나는데.
기억을 더듬고 있자니 점점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다음에 2차를 갔구나.
거기서 또 테이블 위에 올라갔었구나.
올라가 힘차게 외쳤다.
'나는 세상을 구하겠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으련만.
도른을 가리키며 '너는 내 전용 유물 탐색기가 되어랏!'이라고 외쳤던 것도 기억난다.
도른이 마공학 유물 탐색기를 든 시늉을 하고 입으로 삐삐빅 소리를 내며 2차로 간 푸른마녀의 주점을 탐색하고 돌아다녔다.
밥은 주점 마담에게 껄떡거리다 뺨을 맞았고, 캐빈 아저씨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다 기절했다.
'아... 제길, 다신 그 술집 못 가겠네.'
그러곤 기억이 잘 안 난다.
집엔 어떻게 들어왔지?
아니지, 일어난 곳은 내가 묵던 싸구려 여관이 아니었다.
아? 도른이 잡은 숙소로 같이 들어온 건가?
눈곱이 잔뜩 껴 까슬거리는 눈을 슬쩍 떴다.
그러자 옆에 누워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도른?"
그런데 긴 머리네?
뭐? 긴 머리?
눈이 번쩍 떠졌다.
벌떡 일어나 옆을 바라봤다.
내 옆에는 도른이 긴 머리를 미역처럼 늘어뜨리고 뻗어 있었다.
그래, 사실 도른은 여자다.
그것도 검술 명가로 이름 높은 클로시 백작가의 금지옥엽 막내딸.
본명은 제이라 디 클로시.
내게 클로시류 검방술을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클로시 가문의 직계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직계가 아닌 자가 가문의 무예를 외부로 유출한다면 준 놈, 받은 놈 할 것 없이 쌍으로 골로 가겠지.
어쨌든 그녀는 집을 나왔고, 귀족가 여식임을 숨기고 선망하던 탐험가로 활동하기 위해 남장을 선택했다.
'세상에 맙소사. 얼마나 마신 거야. 지난 삶엔 한 번도 폴리모프 아티팩트로 실수한 적 없었잖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여관방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도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렇고 여전히 예쁘긴 엄청 예쁘네.'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도른의 작고 예쁜 얼굴을 따사롭게 비췄다.
잠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8화. 도른 (3)
뭐 하는 거야. 나는.
정신 차리자.
'역시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좋겠지?'
다 큰 남녀가 여관방 안에서 만취된 상태로 한 침대에서 잤다.
나는 상관없다만 아직 순수한 도른이 알게 된다면 불편해할 게 뻔했다.
지난 삶처럼 충분히 친해진 후 도른이 스스로 고백할 때까지 모른 척하자.
'가만, 옷? 옷은?'
정말 다행히도 도른과 나 둘 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뻗어 있었다.
'잘했다, 내 본능. 잘 참았구나. 그래. 도른은 친구다. 친구. 얼른 내려가서 모른 척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혹시 도른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짐을 챙겨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아함, 일어나셨어요?"
도른이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어... 어! 아하, 이것 참. 술을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아프네. 나 밑에 내려가서 해장용 스튜 좀 시켜 놓고 있을게. 천천히 준비하고 내려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도망쳤다.
제기랄, 왜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거야.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이제 여자인 걸 들킨 걸 알 텐데, 어쩌지.
그런데 나 방금 너무 당황해서 반말하지 않았나?
아직 반말하는 사이 아닌데.
아픈 머리를 싸매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해장할 수 있는 아무거나 좀 내주세요."
테이블을 닦고 있던 푸근한 느낌의 여주인에게 식사값과 함께 1실버를 팁으로 내밀었다.
여주인은 방긋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골이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머리가 아파 왔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어갈까.
워낙 백지처럼 순수한 아이니 그냥 모른 척하면 넘어가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 짓도 안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고.
정체를 숨긴 건 도른이고, 술 취해서 들킨 것도 도른이다.
"맛있게 드세요."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여주인이 해장에 도움을 줄 해산물 스튜와 바게트빵을 몇 조각 내왔다.
빵을 스튜에 찍어 입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애초에 도른이 여자인 건 아무 상관이 없잖아?'
도른이 여자라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른은 여전히 내 친구고, 앞으로의 여정엔 그녀가 필요하다.
도른이 여자인 걸 감추고 싶다면 모른 척하면 된다.
"그래. 그럼 되지, 뭐. 모른 척 얼렁뚱땅 넘어가자. 도른은 둔감하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그때 도른이 1층으로 내려와 나와 똑같은 음식을 여주인에게 주문했다.
어느새 다시 머리가 짧아졌다.
폴리모프 아티팩트를 다시 가동한 모양.
그러곤.
"저... 세이비어 씨."
우리 순둥이가 얼굴을 붉히며 불길하게 나를 불렀다.
"제...제가 여자인 건 비밀로 해 주세요. 그리고... 다음부턴 허락 없이 같이 자는 건 안 돼요."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음식을 내오던 여관 아주머니가 미묘한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본다.
그러곤 입을 가린다.
아뇨. 아닙니다. 뭘 상상하든 아닐 겁니다.
저는 여자가 좋거든요.
"아...."
순간 너무 당황해 할 말을 잃고 입에 욱여넣고 있던 빵을 떨어뜨렸다.
놀란 눈으로 도른을 바라보니, 도른이 입을 꾹 다물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주머니의 오해도 오해지만, 도른의 오해도 문제다.
얘는 날 여자랑 동침하고 태연하게 아침밥을 먹는 파렴치한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다음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완전히 안 볼 생각은 없다는 뜻.
그런 생각에 용기를 가지고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허락 없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그것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세이비어.'
인생 최대의 위기다.
이런 하찮은 이유로 친구인 도른을 잃을 수 없다.
방법을 찾자.
내 말하지 않았던가.
내 최대의 무기는 미래나 기연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아수라장을 헤쳐온 내 경험이라는 것을.
백 번을 살아온 내 경험이 말한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가 답이라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렵게 열었다.
"미안합니다, 도른 씨. 여자인 건 이 목이 떨어져 나가도 반드시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아.... 네."
도른이 냉랭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빌어먹을. 해명을 하려다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도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스튜를 퍼먹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이젠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아... 네."
도른이 선을 그었다.
달그락 달그락.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다음 탐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도른이었다.
"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도른을 바라봤다.
"어제 그러셨잖아요. 동료가 되어 달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제가 꼭 필요하다고. 이 세상에서 세이비어 씨만이 온전히 제 가치를 알고 있으니, 자신을 믿어 보라고요."
'제...제가요? 그렇게 구체적이고 희망적이게 말했던가요?'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지금 그런 소리를 한다면 분위기만 더 악화될 것 같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비록 술을 먹고 한 말이긴 했지만 도른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지금 증명해야 한다.
내가 그냥 말만 많은 허풍선이가 아님을.
어떤 계획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도른은 꿈이 많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가문을 뛰쳐나왔고 남장을 해 가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지난 회차들에 비춰 보건대 그것은 도른의 정체성이다.
고대 문명에 대한 열정.
평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순둥이인 도른이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 유일한 분야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런 도른이 맘껏 꿈을 펼칠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른은 나를 마주 봤다.
크고 동그란 눈에 내 진지한 얼굴이 비쳤다.
"이번 탐사에서 얻어온 유물에 대한 분석. 언제까지 끝낼 수 있습니까?"
"최...최소 2주에서 늦어진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무, 물론 더 걸릴 수도 있구요."
도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음 탐사는 한 달 뒤입니다.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 새로운 정보가 생길지도 모르니 도른 씨의 연구를 끝내 주세요. 혹시 더 오래 걸린다면 다음 탐사는 그 이후입니다."
"네?"
"도른 씨는 첫 탐사로 도른 씨의 고고학 실력이 진짜라는 것을 제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제가 증명해 보여야지요. 제 실력과 능력을. 한 달 뒤까지 저는 D급 용병패를 가져오겠습니다."
D급 용병패.
D급 용병부터 팀을 만들 수 있으니, 사실상 도른에게 어제 했던 이야기가 술 먹고 한 헛소리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물론 D급 용병패를 딴다고 해서 바로 팀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팀을 만든다는 건 우리가 어제까지 다녀온 소규모 탐사와는 전혀 다른 일이다.
팀의 최소 인원은 5인.
팀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수입을 내야 한다.
우리가 첫 탐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대 유적을 발굴하거나, 몬스터를 잡아 그 부산물을 팔아서.
"저는 지금 고작 짐꾼입니다. 이런 제가 도른 씨에게 약속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뿐입니다. 충분한 연구 시간과 탐사지에 대한 결정권. 그 둘 모두를 도른 씨에게 드리죠."
팀을 결성하고 탐사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보통 탐사지에 대한 권한은 모두 팀장이 가진다.
팀장이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에게 행선지의 전권을 위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통은 팀에 소속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혹은 유적에 대한 정보를 가진 그 누군가가 팀장에게 보고하면, 팀장은 그 신빙성 여부를 파악하고 탐사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비록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팀이라 할지라도 팀의 스케줄을 한 명의 고고학자에게 맞추고, 탐사지에 대한 결정권을 넘긴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니, 파격을 넘어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아니, 왜...?"
도른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물어 왔다.
"어제 말씀드렸죠? 저는 도른 씨를 믿습니다. 도른 씨도 저를 믿기 때문에 어제 제가 한 말을 술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음 일정을 물어본 것 아닙니까?"
말에 확신을 담았다.
"한 달 뒤. 그때 다음 탐사를 떠날 겁니다. 그때까지 클랜을 만드는 건 힘들겠지만, 제가 D급 용병이 되어 팀을 이끄는 것 정도는 보여 드려야 도른씨가 제게 인생을 걸어 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인...인생을 걸어요?"
"네. 그럼 밥과 캐빈 씨에게도 말씀해 주십쇼. 한 달 안에 D급 용병이 되려면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해서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른은 의외로 나를 잡거나 하지 궁금한 것을 더 묻지 않았다.
왜인지 도른의 얼굴이 또 붉어졌을 뿐.
그런 도른을 뒤로하고 여관을 나섰다.
* * *
도른과 헤어지고 내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연금술 도구 상점이었다.
그리고 어제 보수로 받은 10골드 중, 무려 4골드를 투자하여 최하급 연금술 도구를 샀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골드다.'
골드는 많은 것을 간편하게 만들어 준다.
D급 용병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D급 용병으로 승급하기 위한 조건 자체가 D급 용병과 일대일 승부에서 이기는 것.
대련 상대로 예정된 D급 용병에게 돈을 찔러주면 세상 모든 일이 부드럽게 풀릴 것이다.
실제로 지난 삶에서 그런 식으로 용병 등급을 높여 활동한 적도 있었고.
그러나 지금은 진짜로 강해져야 했다.
과거엔 팀을 만들기 위해 D급 용병이란 명함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정말로 내가 D급 용병급 무력을 갖추는 게 먼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
아니, 나중엔 결국 광룡의 멱을 따야 하는데 D급 용병 패도 한 달 만에 못 따면 어느 세월에 대업을 이루겠는가.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많은 골드를 벌어 내 몸에 바르는 것.
지금 내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은 마나하트를 싱글코어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선 영약이 필요하고, 영약을 만들거나 사기 위해선 많은 골드가 필요했다.
물론, 이미 부자가 된 도른에게 돈을 빌리면 일은 쉬워지겠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증명해 보이겠다고.
도른의 금력을 빌리는 것은 좀 더 신뢰가 쌓인 다음으로 미뤘다.
'마나하트가 없던 지난 회차에는 상상만 하던 일을 실제로 하려니 두근거리네.'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허름한 건초상이었다.
맞다. 소나 말의 여물을 사고파는 그 건초상.
"푸른 호접초 있는 거 다 주세요. 이미 건초가 된 상태도 좋고 말리기 전 살아 있는 상태도 좋습니다."
소나 말의 여물로 사용되는 호접초를 주문했다.
잡풀이지만 농가에서 자주 매입하는 탓에 아주 싼값에 살 수는 없었다.
"있는 거 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소 농장이라도 크게 하나?"
건초상 노인은 간만에 들어온 큰 거래라며 반겼다.
"다 합쳐서 2골드 80실버네. 허허 간만에 건수 하나 잡았구먼."
기분 좋게 웃는 건초상 할아버지에게 제안을 하나 더 했다.
"선생님, 혹시 빈 건초 창고를 2주일만 대여해 주실 수 있을까요? 2주일 대여하는 데 제가 산 건초값이랑 합해서 총 4골드 드리겠습니다."
"안 될 게 뭔가. 다음 물건이 들어올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한 달 정도는 써도 될걸세."
남은 2골드로 작은 통을 있는 대로 다 사들여 건초상의 빈 창고로 배달시켰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연금술이 왜 연금술인가.
금을 만들어 내는 법칙이기에 연금술 아니겠는가.
실제로 연금술로 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실패했지만, 금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실패 속에서 금에 비견될 만한 물건들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면 10년 후에 용병들의 필수물품이 되는 이 '지혈제' 같은 것들 말이지."
크흐흐흐흐.
나는 최하급 연금술 키트를 펼치며 나지막이 웃었다.
9화. 발돋움 (1)
특성 <노력과 재능의 등가교환>을 얻기 전까지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많은 말로 나를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인간관계에서의 치졸함이든,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착이든.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해 왔다.
그리고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지혈제 역시 내 집착의 산물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후.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광룡과 그 추종자와의 전쟁이 본격화된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피 튀기는 전투의 연속.
그런 세상에서 인류는 무수히도 죽어 나갔다.
나는 전쟁터에 나서는 병사들의 생환율을 높이기 위해, 혹은 상처를 입더라도 전투를 지속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치료제를 만들었다.
아니, 치료제뿐이었을까. 인류의 승리를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연구를 시작했다.
전투에 직접 나설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으니까.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흔한 풀인 '푸른 호접초' 또한 내 연구 재료 중 하나였다.
나는 이 풀의 질긴 성질에 주목했다.
'이걸 어떻게 잘 가공하면 병사의 갑옷 내구도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푸른 호접초를 사용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엉뚱한 결과를 발견했다.
푸른 호접초의 추출물을 굳히면 반 젤리 상태의 연고가 되고, 그 말랑거리면서도 적당히 끈적거리는 연고는 인간의 출혈을 막고, 2차 감염을 막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을.
또 미미하지만 자연치유 효과도 있어 미래에는 전투에 나서는 이에게 필수품이 됐다.
사용하자마자 상처가 즉각 회복되는 힐링 포션은 만들기도 까다로웠고 필요한 재료도 너무 많았다. 자연히 값도 엄청 비쌌고.
그에 반하여 이 푸른 호접초로 만든 연고는 만들기도 간단했으며 재료 수급도 대륙 어디에서나 가능했다.
즉각 전 병력의 기본 보급에 이 푸른 호접초 연고를 추가했다.
병사들은 이 연고를 '푸른 연고'라고 부르며 그 효과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그리고 병사들의 생환률이 10퍼센트나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지난 탐험 때 캐빈 아저씨의 자상에 발랐던 것도 이 푸른 호접초였지.'
그때는 연금술 도구가 없었기에 그냥 즙을 내서 상처에 발랐을 뿐인데도 4일 만에 딱지가 앉지 않았던가.
이 푸른 호접초로 만든 연고의 성능은 놀라웠다.
가성비는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고.
질기디질겨 소여물로나 간신히 사용할 수 있었던 풀들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일단은 400개인가."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400개의 푸른 연고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면 대량 생산을 해 대형 상회에 납품하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내 클랜이 길드로 발전했을 때 길드 사업으로 추진해 보도록 하자.
지금은 당장 시간도 없을뿐더러, 일손도 부족하다.
"자, 어떤 상단을 찾아가 볼까."
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으면서, 가격을 후려치지 않을 만한 상인.
이 시기에 누가 있었더라.
피식.
반가운 얼굴이 떠올라 미소가 피어올랐다.
만들어 놓은 푸른 연고 중 하나를 들고 창고를 나섰다.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 * *
"에릭 로드웬, 일어나라."
중앙 광장의 뒷골목은 노숙자들이 모이는 장소다.
그래서인지 깔끔한 행색의 젊은 청년의 방문은 이곳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뒷골목에서 낮잠을 청하던 노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녀석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고, 나으리.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저는 그저 이름 없는 거지일 뿐이옵니다."
젊은 청년에게 지목을 당한 노숙자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가?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네 녀석이 에릭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머리의 청년, 세이비어가 말했다.
"에릭 로드웬, 로드웬 상단의 삼남. 뛰어난 상재로 상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지. 그러나 사교계 파티에서 알게 된 도로시 남작가의 여식에게 껄떡거리다가 귀족 모독죄로 수배령이 내려 쫒기는 신세가 되었고, 노숙자로 위장하여 이곳 극동의 슈펠까지 흘러들어 왔다. 아직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온 것 같나?"
노숙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잠시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놈은 누구지? 도로시 남작가에서 보냈나? 나를 죽이려고?"
"벌써 말하지 않았나? 널 죽이러 온 게 아니라고."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세이비어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 로드웬. 나는 결코 네게 해를 입히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거래를 하러 왔지."
그러나 에릭이라고 불린 노숙자는 여전히 경계 어린 눈으로 세이비어를 바라봤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수배령이 내려진 범죄자를 앞에 두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믿을 만하지."
세이비어는 주저앉아 있는 에릭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이거로는 부족한가? 그렇다면 그것도 주지. 내 말을 들어 준다면, 네 짝이 될 만한 여성을 소개해 주지. 아주 아름다운 분으로."
다시 한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세이비어가 말을 마치자마자, 에릭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만날 아름다운 레이디의 신상을 먼저 말씀해 보시오. 내 비록 이 도시에 온 지 3일 정도밖에 안 됐으나, 이 도시의 모든 레이디를 알고 있어 말만 한다면 내 알 수 있을 테니."
훗날 전 대륙으로 퍼져나갈 로드웬 상단의 막내아들, 에릭 로드웬.
이 남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여자에 미친 놈'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누구보다 손익 계산에 민감한 뼛속까지 상인.
세이비어가 여자 얘기를 꺼낸 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상인이란 우습게 보여야 이득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던가.
도로시 남작가의 영애에게 집적거리다 낭패를 본 것은 경쟁 상단의 농간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백날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빠르겠지."
세이비어는 그대로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단검으로 그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오!"
에릭이 놀라 소리쳤다.
"심약한 척하지 말고 잘 봐라."
세이비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상에 푸른 연고를 발랐다.
곧바로 피가 멎었다.
"지혈 연고?"
에릭이 놀라운 눈으로 세이비어의 팔을 바라봤다.
"그래, 이 정도 효과라면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에릭은 신중하게 자상을 만져 봤다.
"놀랍구려. 피가 멎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미약하지만 치료되고 있어."
"거기에 진통 효과까지 있지."
"이 정도면 개당 90실버는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아니지, 아니야. 이곳은 환락과 탐욕의 도시 슈펠이지. 탐험을 떠나는 용병들에게 판매한다면 개당 1골드는 능히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최하급 상처약이 80실버 정도니 이 정도가 적정선이겠지."
세이비어의 한쪽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잔머리 굴리지 마라. 1골드 20실버는 받을 수 있잖나?"
"그건, 내가 아버지의 상단의 도움을 받을 경우지. 지금은 불가능하지 않소?"
"네 수배령은 진작에 풀렸다. 그러니 노숙자 생활을 끝내고 일을 시작해라. 아버지에게 드릴 귀가 선물로는 이 푸른 연고가 제격이지 않겠나?"
"내 수배가 풀렸다니, 그걸 어떻게 믿소?"
"지금 당장 로드웬 상단의 슈펠 지부로 달려가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내가 거짓말을 할까?"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에릭에게 수배령을 내린 도로시 남작이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추후에 밝혀진 조사 내용에 따르면 사인은 독살이라던가.
아들 사랑이 끔찍한 에릭의 아버지가 수배령을 내린 남작이 단승 귀족인 것을 알고 에릭을 위해 몰래 손을 썼다지.
아마 지금쯤 남작은 이미 죽어 있을 거다.
극동에 위치한 슈펠까지는 그 소식이 닿지 않은 것일 뿐.
"이 푸른 연고를 400개 가지고 있다. 개당 90실버에 네게 넘기지. 어때 살 생각이 있나?"
에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상단을 떠나 세계를 유랑하는 몸. 이미 현장을 떠난 내게 이런 제안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소. 그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나는 지금 그대의 말을 끝까지 들었소. 그러면 이제 그 아름답다던 여인을 소개해 줄 차례가 아닌가 싶소만."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개당 80실버. 더는 안 된다."
틱.
세이비어는 푸른 연고를 주저앉아 있는 에릭에게 던졌다.
얼결에 푸른 연고를 받아 든 에릭이 세이비어를 올려다봤다.
"그 푸른 연고는 시험품으로 주지. 북쪽 건초장의 창고로 찾아와라. 대금은 달맞이꽃으로 받겠다. 기억해라. 320골드만큼의 달맞이꽃이다. 아! 질 좋은 버클러와 숏소드도 준비해 주면 좋겠군."
세이비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뒷골목에 남겨진 에릭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래서 여자 소개는 해 준다는 것이오? 만다는 것이오?"
에릭의 두 눈에 허망함이 깃들었다.
* * *
정확히 반나절 후에 에릭은 수레에 가득 달맞이꽃을 싣고 창고로 찾아왔다.
"내 수완을 부려 350골드 만큼의 달맞이꽃을 사 왔소. 버클러와 숏소드도 준비해 왔고."
무려 수레로 다섯 대 분량의 달맞이꽃이었다.
"당신 말대로 내 수배령이 풀렸더구려. 덕분에 슈펠에 있는 우리 상단의 지부를 이용해서 빠르게 올 수 있었지."
녀석은 마치 칭찬을 해 달라는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삐뚜름하게 바라봤다.
에릭은 영리한 녀석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눈이나 상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도 뛰어나다.
즉, 머리가 좋다.
그 말은 곧 다루기 까다롭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에릭을 다루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나의 상품 가치를 내보이는 것'
녀석은 아마도 지난 반나절 동안 주판을 튕겼을 거다.
이 푸른 연고로 자신이 어디까지 이득을 남길 수 있을지.
푸른연고의 도매가는 80실버.
에릭은 그것을 이렇게 이해했을 거다.
'아! 재료값이 한 50실버쯤 되겠군.'
의약품의 원재료값이 50실버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의약품은 비싸니까.
지금 당장 약초상에 가서 상처에 바르는 약초를 산다 해도 한뿌리에 50실버의 값을 치러야 한다.
정제도 되지 않았고 즙을 내서 상처에 발라도 효과가 미미한 약초 한뿌리가 50실버인데, 원가 50실버짜리 효과 좋은 지혈제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실제 원자재는 1실버도 안 하는 잡풀이지만 에릭은 그걸 모르지. 아마 안다면 놀라 까무러치겠지.'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아직 통성명도 못 했네."
말끔하게 씻고 나타난 에릭은 이전 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이 굵고 느끼하게 생긴 놈.
에릭이 생긴 대로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소매가 걷혀 있어 건장하고 두꺼운 팔 위로 털이 북슬북슬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큰 코와 툭 튀어나온 눈썹이 무척이나 남성적이었다.
"세이비어 실버하츠다."
녀석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나야말로."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오? 왜 자꾸 반말을 하시는지...."
"열아홉 살, 너보다 한 살 많다. 삭은 외모를 가지고 사기 칠 생각은 하지 마."
나이가 어리면 우습게 보인다나 뭐라나.
입에 달고 살았던 그 말이 참 무색하게도 에릭은 사십대 중반 같은 외모를 가졌다.
꽃다운 열여덟이라는 원래 나이를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혼자 다른 사람이 먹을 나이까지 다 처먹은 건가.
녀석이 자꾸 형님하면서 부르는데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
"크흠.... 그럼 형님이구먼! 세이비어 형님이라고 부르겠소."
이것 봐. 또 사기 치려고 했지?
"그래라."
내친김에 로드웬 상단과 푸른연고에 대한 정기 제공 계약을 맺었다.
"첫 거래이니만큼 원래 제시했던 90실버로 매입해 드리지. 한 달에 400개 잘 부탁드리오."
판매가는 1골드 20실버로 고정.
에릭은 조금 더 많은 물량을 받길 원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탐험도 나가야 하고 수련도 해야 한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때 한 달에 하루를 빼는 것도 솔직히 아깝다.
그렇게 에릭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계약서를 들고 돌아갔다.
이제 창고에 남은 것은 가득 쌓인 달맞이꽃뿐.
10골드가 단 이틀 만에 350골드 어치의 달맞이꽃으로 변했다.
'이걸 그냥 가져다 팔아도 이득일 테지만....'
나를 위해 써야지.
이제 이걸로 영약을 만들어야지.
먹으면 마나 코어가 한 개 정도는 뚝딱 생기는 걸로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