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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GOUNMONOPO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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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시작

우리는 참 무모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려준 너와 결혼했다.

양측 부모님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결혼에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할 나이는 아니었다.

돈이 없으니 결혼식도 없었다. 혼인신고를 제출한 것이 우리의 결혼식이었다.

신혼여행 같은 것도 없었고, 급하게 구한 월셋방이 신혼방이었다.

결혼은 현실이라느니, 군대 전역하자마자 뭐 하는 짓이냐느니,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느니, 직장도 없으면서 미쳤다느니. 제대로 결혼식도 못 치른 네가 불쌍하다느니.

사람들은 우리의 결혼을 평가하고, 흠잡고, 깎아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화려하고 근사한 결혼식을 들먹였다. 근사한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장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의 귀에 불어넣었다.

이렇게 무턱대고 결혼한 너희는 불행해야 한다는 것처럼. 우리의 불행을 원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주변을 둘러보기에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너무 좋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에는 서로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의 가난이 그렇게 심각한가 알 수도 없었다.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우리보다 더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도.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를 바라보기에 너무 바빠서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다녀왔어."

밤.

내가 퇴근해서 문을 열면 집 안에 네가 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반대로 내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퇴근한 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너무 제 취향이어서 그런데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저 결혼했.... 야! 너 죽을래?!"

때로는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이런 장난을 칠 때도 있었다.

"이제 콩나물은 보이지도 않네."

"그러게."

물을 추가로 넣고 간을 다시하기를 반복해 맹탕이 된 국. 난방비를 아껴서 차가운 방.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와 관리비. 식비를 줄이기 위한 노력. 겨울에 하는 냉수 샤워. 도보로 한 시간 십 분이 걸리는 출퇴근. 재활용센터에서 가져온 물건들.

가난이 우리를 비껴간 건 아니었다.

남들을 비참하고 비루하고 괴롭게 만드는 그 많은 것들이 왜 우리에게는 서로 키들거릴 농담거리에 불과했을 뿐이다.

"@#$@!%@#$@!#!!!"

"AS@#1245%^@!%"

싸움도 자주 했다. 오가는 말도 꽤나 살벌했다. 우리의 성깔은 서로에게 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옆집에서 신고도 할 정도였지.

아직도 기억나는 건 서로에게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면서도, 너는 우리가 함께 먹은 그릇의 설거지를 하고 나는 우리가 함께 더럽힌 방을 청소하던 모습이다.

애초에 우리의 싸움은 하루를 가지 못했다. 함께 쓰는 낡은 침대가 워낙 작았어야지.

다음 날 아침 그 좁은 침대에서 알람에 눈을 뜨면 서로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출근 준비를 했고, 밤에 퇴근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후회할 거다. 대책 없이 결혼하면 어쩌냐. 오래 가지 못할 거다. 너희가 걱정된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더러는 가족이었고, 누군가는 친구였는데. 결혼 생활이 3년 정도 지나니 그런 조언인지 저주였는지 모를 말도 잦아들었다.

"...."

우리는 대책이 없었고, 서로에게 미쳐있었으며, 함께 붙기만 하면 미친 듯이 타오르는 사람들이었다. 강렬한 감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지만, 우리는 그게 되는 인간들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불행했다면, 가난에 지쳐 서로를 혐오하게 되었다면. 타인들의 바램, 또는 걱정처럼 진짜로 이혼했다면.

그럼 너는 아직도 살아있었을까?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문틈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피 박살 난 문 너머 배가 열린 너와 뜯어먹힌 내장과 부러진 손톱과 손에 쥐어진 채 휘어진 식칼 말라붙은 피 위에 쏟아진 된장찌개 하얗게 뒤집힌 눈과 사라진 아래턱과 바닥에 뿌려진 부러진 이빨.

항상 너를 바라보던 내 눈이 바라볼 곳을 잃었고, 항상 귀 기울이던 네 목소리가 사라지자 듣고 싶지 않던 것들이 들린다.

사랑하던 내 아내는 그날 죽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모든 것을 행복하고 즐겁고 괜찮고 버틸만하게 만들어주던 내 인생의 마법사가 사라졌다.

다시 호박으로 돌아온 마차와 누더기로 변한 드레스를 바라보는 신데렐라의 기분이 이랬을까.

방은 추워지고, 식사는 초라해지고, 거지 같은 직장에서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이 개같아졌다.

술을 마셨다. 낡은 노트북으로 영화 틀어놓고 함께 소주 한 병을 홀짝거리다 절반을 남기던 그때와는 달리 아주 많이 마셨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초라한 이 원룸은 어디를 봐도 전부.

너를 떠오르게 해서.

몇 개월 뒤 실려간 응급실에서 내 간수치는 5,700을 달성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나는 실신해 있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그리고 깨어났다.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 아니었지만 나는 침대에서 수액을 맞고 있었고, 옆에서 작게 삐빅이는 기계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 사람도 간호사가 아니라 시커먼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김상선 씨."

나는 지친 눈으로 양복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국정원 같은 건가.

"저는 환경부 소속...."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침대가 덜컥거린다. 나는 사지가 묶여있었다.

"이 개새끼들! 너희들이, 너희들 때문에! 아아아아아아아! 이거 풀어, 풀라고 이 씨발새끼들아!"

뭔가가 주사되었고,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또다시 그 환경부의 씹새끼가 있었고.

주사로 기절하고, 깨어나고의 반복이 이어졌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힘조차 없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도 반항했고... 결국은 의미 없는 몸부림을 멈추게 되자.

"아내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1,500만 원만큼?"

내 되물음에 남자가 잠깐 침묵했다.

"오염지대로 인한 피해자 재해보상 기준에 따른 위로금이었습니다."

"그래, 너도 뒈지면 꼭 그만큼 받아라."

이 남자에게 이러는 게 의미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잠깐 서류를 훑어보던 남자는 잠깐 인이어에 귀를 기울이더니 짧게 알았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국가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기쁘네. 그 필요에 응하지 않을 수 있어서."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내 가슴을 가리켰다. 드러난 가슴팍에는 새빨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김상선 씨의 성흔발현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은 외부에서 오염지대로 진입할 수 있는 극소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의미하는 바는 아시겠지요."

오염지대, 성흔발현.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다.

"환경미화원. 내가 필요로 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새끼들."

오염도가 한계를 초과했다느니. 환경미화원들은 최선을 다했다느니. 그런 소리를 떠들며 자신들의 무능이 대단한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던 치들.

초인이니, 초능력이니 자랑스럽게 씨부렸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놈들.

"김상선 씨가 환경미화원이 되면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왜 달라야 하는데? 내가 왜 그 짓을 해야 하는데?"

선글라스가 내 눈을 향한다. 탁, 하고 서류철 덮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 때문이지?"

"그 죽통에 올리지 마."

"복수의 가능성은 어때. 청소에 실패한 오염지대는 언젠가, 어딘가에 다시 나타난다."

날카로운 반말.

그 말에 나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곧이어, 다소 부드러운 어투로 다시금 양복쟁이가 말했다.

"확률이 높지는 않습니다. 그 오염지대는 소실형이고, 오염치는 극도로 높았으니까."

다시 등장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한다.

"내가 하지 않겠다면?"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성흔발현자는 그 위험성으로 인해 처분됩니다."

"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참 선진국이야. 인권을 아주 씨발라먹었지."

잠깐의 침묵. 양복쟁이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오염지대를 마주할 확률이 높다고 장담은 못 드립니다. 어쩌면, 환경미화원으로 활동하시다 그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기서 바로 처분당하느냐, 아니면 그 낮은 확률 하나 때문에 그토록 증오하던 개새끼들 중 하나가 되느냐.

머릿속에 다시 네가 죽었던 광경이 떠오른다.

내 소원은 네 부활이었다. 이뤄질 수 없는 허상이다.

하지만 다른 소원은, 사실은 내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소원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습니다."

차분한 어조로 나는 눈앞의 양복쟁이에게 대답했다.

"아직도 당신네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 오염지대만 찾아낼 수 있다면 하죠."

나로 하여금 너를 잃게 했던 그 오염지대를 언젠가 찾아내서 완전히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면....

양복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합니다, 김상선 씨."

한국 정부와 미화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 내 복수의 천칭에 올려 판단할 것이다.

너를 구할 도리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구하지 않은 건지 알아낼 것이다. 구할 도리가 없었다면 용서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용서할 자신이 없다.

"김상선 씨도 아시겠지만, 과거와 달리 문명의 기반은 마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 덕분에 인류는 재래적인 환경오염에서는 완전히 해방되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환경오염이 발생했죠. 오염지대는 사용된 마력의 찌꺼기들이...."

설명이 이어진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준다.

나는 모든 증오와 분노와 혐오를 찌그러뜨리고 억누르고 구겨넣어 숨겼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언젠가 가슴 밑바닥에 파묻었다.

언젠가 이 감정을 퍼올릴 수 있기를 기다리며.

2화. 인벤토리

그 뒤로 나는 며칠에 걸쳐 이런저런 테스트를 받았다.

나는 내가 받은 테스트의 결과지를 확인했다.

[100m 달리기: 4.32초

제자리 멀리뛰기: 22.3m

서전트 점프: 3.9m

.

.

.]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기록의 향연이 잘 차려진 뷔페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가슴에 새겨진 요상한 문양보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록들이 내가 성흔발현자라는 사실을 더 명백하고 강렬하게 인식시켜준다.

하지만, 내가 성흔발현자라는 사실이 확정된 것은 이런 육체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테스트 결과지를 허공 속으로 밀어넣었다. 허공이 출렁거리며 내 손과 테스트 결과지를 삼켰다.

테스트 결과지를 허공 너머에 남겨두고 손을 뽑아냈다.

"이게...."

이게 내 능력이다. 모든 성흔발현자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당연하다는 듯 사용법을 알게 된다.

여러 명이 공유하는 능력도 있고, 단 한 명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있다.

"인벤토리라고 했었나."

내 능력을 확인한 연구원 중 하나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보관하는 공간을 닮았다는 설명과 함께.

내 능력은 지금까지 보고된 적이 없었다. 이후 내 능력의 이해를 위한 실험이 몇 가지 진행되었다.

1. 인벤토리는 허공에 손을 집어넣고 꺼내는 행위를 통해 사용한다.

2. 따라서, 내가 들어올릴 수 없는 무게의 물건은 넣거나 꺼낼 수 없다.

3. 나는 인벤토리 안에 있는 물건의 종류와 수량을 까먹지 않는다.

내가 성흔발현자라는 것이 확정되고 나자, 연구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나에게 오염지대와 미화원의 역할에 대한 온갖 정보를 며칠에 걸쳐 퍼먹였다.

"이해하셨습니까?"

그들의 말투는 공손했고,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미화원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굉장하다고 들었는데, 이들의 태도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화원은 오염지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내부에 있는 오염원을 제거하면 청소가 끝난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선 씨는 이제부터 견습 미화원으로서 활동하시게 됩니다. 앞으로의 노고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나는 말라붙은 연구원을 응시했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증오와 분노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천칭이 이자를 저울접시에 올린다.

이 연구원이 치러야 할 죗값이 있을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분노와 증오에 미쳐 아무나 때려죽이고 병신으로 만드는 건.

오히려 너의 죽음에 대한 모욕이기에.

그렇게 아무나에게, 아무런 방식으로 대충 해소해도 되는 싸구려 감정이 아니다.

이 연구원은 이곳에서 성흔발현자에게 교육을 진행하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할 뿐이다.

따라서 죄를 물을 수 없다.

"알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나는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견습 미화원은 선배 미화원의 지도 아래에서 활동하며 견습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충분한 경험을 쌓으면, 그때 정식으로 미화원이 되어 등급을 부여받는다.

공무원처럼 9급부터 시작해 1급까지 올라간다.

"김상선 견습 미화원께서는 유상철 7급 미화원 휘하에 소속됩니다."

나 이외에도 세 명의 견습 미화원이 유상철 미화원 아래에서 견습기간을 가지게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해했습니다."

"첫 만남은 3일 뒤 점심식사와 함께 있을 예정입니다. 그동안은 시설 내에서 휴식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을 요청해주시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나의 테스트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저기."

나는 자리를 떠나려는 연구원을 불러세웠다.

"네."

"노트북 같은 것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 유심칩과 공기계입니다. 앞으로는 이 핸드폰을 사용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받아 유심칩을 집어넣었다.

"빠르군."

다시금 숙소로 돌아갔을 때, 이미 노트북이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전원을 켜며 생각한다. 무조건, 이 노트북은 정부가 감시할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이 설치되어 있을 거다.

그렇기에 요청했다. 내가 뭘 검색하고, 어떤 것들을 확인하는지 이들이 알아줬으면 해서.

너의 죽음 이후로, 이 시설 안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결론 자체는 간단했다.

나에게는 대체 할 수 없는 입지와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 입지를 손에 넣느냐.

"미화원은 오염지대 내부로 진입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 올 수는 없지."

오염원을 제거하면 오염지대가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지구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오염지대의 소실 과정에서 함께 사라진다.

오염지대 내부의 표본 채취.

내가 노트북으로 검색한 것이다. 내가 이런 자료들을 찾아봤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개고생을 했구만."

휴대가 가능한 크기의 간단한 설비를 미화원이 챙겨들어가 테스트를 진행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샘플 자체가 오염지대 밖으로 꺼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쯤 하면 되었겠지."

몇 시간 정도 자료를 찾아다니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표본이 없으면 연구나 가설의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지껏 보고된 적이 없는 내 능력 인벤토리는, 물건을 허공에 집어넣어 보관할 수 있다.]

[인류는 오염지대 내부의 표본 채취를 단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머리 굴리는 걸로는 손가락에 꼽히는 똑똑이들이 내 검색기록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자식이라면 오염지대 안에서 뭔가를 챙겨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나도 생각하는 걸 석박사 나으리들이 못할 수는 없으니까.

못 꺼내오면? 별수 없지. 다른 방법 생각하면 될 일이니까.

"찜닭이라."

네가 엄청 좋아했던 음식이 오늘의 저녁식사 메뉴로 제공되었다.

입맛이 확 사라졌지만 식사를 했다. 가시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 터빈 시대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식당의 TV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어차피 입맛이 없었기에, 나는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TV를 봤다.

터빈 시대. 인류가 마력이 아니라 물 끓여서 터빈 돌리는 것으로 전력을 충당하던 시절이다.

― 아차 하면 터질지도 모르는 거대한 시설을 짓고, 방사능이 줄줄 새는 위험한 물질을 이용해... 물을 끓였죠. 이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했습니다.

마력을 즉각 전력으로 변환하는 지금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 그뿐이 아니죠. 3,000원이면 찍을 수 있는 MRI를 당시에는 수십만 원을 줘가며 찍어야 했습니다. 당시 40대 이후 사망원인 1위가 폐암이었습니다. 믿어지시나요?

폐암은 15―20만 원 정도를 지불하면 며칠 안에 치료되는 질병이다.

대기오염, 수질오염, 미세먼지와 지구온난화....

TV는 계속해서 터빈 시대의 생활상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마력의 시대로 넘어온 인류가 얼마나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이어간다.

현 인류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오염지대와 오염원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나는 식사를 마쳤다.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아직 따뜻한 찜닭 한 조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 뒤에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났다.

"... 아직 따뜻하네."

다시 꺼내든 찜닭조각은 집어넣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인벤토리에 들어가면 시간이 멈춰버리는 걸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자, 무장한 남자 네 명이 서 있었다.

"김상선 견습 미화원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내 말에 곧바로 그들이 경례를 했다. 현대 한국에서 군경이 민간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두들겨 패는 일은 흔하고, 사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

내가 미화원이라 저렇게 예의를 차리는 걸까.

약간 당황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나는 어제 내가 노트북을 통해 던져놓았던 미끼에 누군가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다섯 평 남짓 되어보이는 방이었다.

"반갑네, 김상선 견습 미화원."

문 안에 들어가자마자, 더러운 연구가운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쓴 중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오염재난연구센터장 우길영이라네."

우길영이 히죽 웃자, 누런 이빨이 주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위생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건가. 만화에서 튀어나올 법한 미친 과학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상선입니다."

"자자, 앉게나. 식사는 했고?"

나는 대답 대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30분이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우길영은 자신의 이마를 탁! 하고 친 다음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말했다.

"식사는 뭘로 하겠나. 한식? 일식? 아니면 중식이나 양식도 가능하고 중동식도 있어."

중동식은 또 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한식으로 하겠습니다."

"으아! 애국자로구만."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식사가 들어왔다. 두부와 콩나물을 넣은 북어국과 쌀밥, 김치와 메추리알 장조림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십니까?"

"응? 항상 먹는 아침식사라네. 건강식이지."

내 앞에 놓인 식사와 달리, 우길영 앞에는 아침식사라고 불러주기 힘든 것들이 놓여있었다.

위스키 세 잔과 담배 한 대. 저딴 걸 아침식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기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기세에 주눅 든 척을 할까.

나는 조금 다른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거래하시겠습니까?"

내가 우길영을 이곳으로 불렀고, 상대가 이에 응했다. 우길영의 지위에 쫄아서 주눅들 이유도 없고, 이제 와서 간을 볼 필요도 없겠지.

우길영의 입꼬리가 쭉 찢어지며, 누런 이빨들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다.

쭉 들이켜지는 위스키 한 잔. 곧이어 탁! 하고 잔이 테이블을 때리는 소리. 우길영이 입가를 가운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김상선이. 김상선 맞지? 아주 좋은데."

"오염지대 내부의 표본, 채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채취할 수 있다! 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이 지구상의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행위니까.

표본의 가치 또한 미지수다.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의외로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만으로도 지금 내가 가진 가치는 꽤 희귀하다. 만약 내가 표본을 채취하는 데 성공하고, 이 표본에 가치가 있다면?

그때는 말 그대로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인재가 된다.

두꺼운 안경 너머에서 우길영의 삼백안이 나를 이리저리 훑는다.

"거래라고 했으면 원하는 게 있을 텐데."

"군용장비. 터빈 시대에 사용하던 구닥다리 말고, 현 한국군이 사용하는 것들."

인벤토리는 그 자체만으로 강한 게 아니다. 창고는 물건을 채워야 제값을 한다.

"한국에서 민간인이 소지 할 수 있는 화기는 터빈 시대 규격에 따라 제작된 구세대 물건들 뿐이죠?"

"그래, 혹시나 오염지대에 휘말리게 되면 최소한의 호신수단으로 쓰라는 의미지."

폭발탄, 전격탄 같이 마력처리를 한 탄환이나 그에 못지않게 다양하고 우수한 현대 군용 장비는 민간인의 소지가 금지되어 있다. 이는 미화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초인적인 육체와 미지의 능력을 가진 미화원들에게 정부가 날개를 달아주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위협적인 장비들이다.

3화. 나만 가능한 거래

오염지대 내부에 들어가서 표본을 채취해 챙겨오겠다. 그러니 군용 장비를 제공해 달라.

직관적인 거래내용이었지만, 내용이 직관적이라고 쉬운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이봐... 한낱 연구기관 센터장이 그런 요구를 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

들어 줄 수 있어야 할 거다. 나는 곧은 눈으로 우길영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도 센터장님께서는 군인들과 함께 움직이셨잖습니까."

이 자리에서 바로 허락할 수는 없겠지만, 권한이 있는 기관에 연락해서 요청할 수는 있을 거다.

"성공해서 표본을 채취한다면 이후로도 제가 필요로 하는 장비들을 공급해주시지요."

"채취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긴 뭘 어째.

"받은 장비들을 다 뱉어내고, 평범한 미화원으로서 활동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준 장비들은 어차피 다 기록해 둘 텐데.

"고작 그걸로 입 닦고 끝낼 생각인가?"

"네. 뭐가 더 필요합니까? 목이라도 내놓을까요?"

우길영은 내 되물음에 침묵했다. 어쨌든 미화원은 중요한 인재다. 목을 날려버릴 수는 없을 거다.

남아있던 두 잔의 위스키 중 한 잔이 그의 위장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잠깐의 침묵.

"이건 다른 기관과 상의가 필요할 것 같군."

"식사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우길영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천천히 식사를 하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나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확신이 들 때까지, 나는 가면을 쓰고 내가 품고 있는 들끓는 복수심과 분노를 마음속 깊은 곳에 밀어넣고 구겨넣어 잠글 것이다.

적절한 순간, 합당한 대상 앞에서만 꺼낼 것이다.

"...."

적절한 순간, 합당한 대상에게...라.

이 마음가짐은 어딘지 모르게 인벤토리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내가 식사를 다 마칠 무렵, 우길영이 돌아왔다.

"현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개인화기 정도까지는 지원이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네."

KM―77 소총과 거기에 사용되는 마력탄 세 종류를 각각 열 탄창, 권총과 그에 대응하는 탄창 둘을 지급한다. 이게 현재 나에게 지원해 줄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한다.

"표본 채취 가능 여부를 확인하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표본채취는 아직까지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

지금 나의 가치는 긁지 않은 복권이다.

"신중하게 판단하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제가 정말 표본 채취에 성공하면 어쩌시려고."

내 말에 우길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불가능하네. 군 장비를 지원받아 오염지대에 들어간 다음, 자네의 능력으로 숨겨두면 알아낼 도리가 없어."

총알을 쏘지 않은 다음 '다 써버렸는데요?' 라고 말할 수 있다.

1인 휴대 가능한 무반동총 같은 걸 제공했는데 '쓰다가 망가져서 버렸어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하지만 제 가치가 증명된 이후로도 그런 제한이 있지는 않겠죠?"

우길영이 마지막 위스키 잔을 비운 다음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젊은이, 내가 충고 하나 하지. 누군가 자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말하잖나?"

후우, 하고 우길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순간 시야를 가린다.

"대체로 사기꾼이야. 그래도 뭐... 지원의 폭은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

"이해했습니다."

우길영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약속받은 장비로도 오염지대에서 몸 건사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군용 장비의 성능은 우수하다네."

그런 뛰어난 장비를 가진 군대가 오염지대를 싹 쓸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성흔발현자가 아니면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해했습니다. 가치의 증명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죠."

첫 단추는 그럭저럭 잘 끼워진 것 같다. 이제, 표본 채취에 성공하면 된다.

"어떤 것들이 좋을까요."

"일단은 오염지대 내부의 토양과 괴물들의 신체 일부 정도로 하지."

당장은 어디까지나 가능 여부의 확인이다.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이해했습니다. 표본은 어디에 보관합니까?"

"오늘 오후 중으로 자네에게 미화원 신분증이 지급될 예정인데, 그때 보관용기와 군용 장비를 동봉하지."

손에 들고 있던 담배 개비를 물컵에 던져넣으며 우길영이 말했다.

"그래서, 식사는 다 마쳤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소 열심히 하시게. 첫 현장에서 꽥 하고 죽어버리지 말고. 꽤 많은 미화원들이 그렇게 가버리거든."

저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오후가 되자, 커다란 상자 안에 내가 미화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과 내가 요청했던 군용 장비, 그리고 우길영 박사가 보낸 표본채취병이 도착했다.

"화기 사용법은 아십니까?"

안에 들어있는 장비가 군용 장비이기에, 이 물건들을 전달해 준 사람 또한 군 간부였다.

"네, 저도 전역해서."

내 말에 군 간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대를 위한 신검이 굉장히 빡빡한데. 원래 건강하셨던 모양입니다."

시력, 체력, 키와 몸무게 등등....

약 20% 정도의 남성만이 조건을 충족하고 현역으로 입대할 수 있다. 예전부터 몸 하나는 튼튼했었지.

"이 시설 인근 군부대에 사격장이 있습니다. 오후 2시부터 2시간 정도 사격장이 비는데, 이용하시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군에서 사격을 배웠다고 하지만, 꽤나 옛날 일이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연습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사실 면회실에서 너와 함께 보냈던 시간 정도니까.

나는 군 간부와 함께 군 차량에 탑승해 이동했다.

"본래,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저는 민간인이 아닐 텐데요."

미화원은 민간인이 아니다. 직업의 선택권이 박탈된 시점부터 확정된 사안이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

군용 차량이 달리기 시작하자, 모세의 기적처럼 자동차들이 양옆으로 갈라선다.

사이렌을 울렸냐?

아니다. 괜히 군인 나으리 앞에서 알짱거리다가 불똥 맞기 싫은 사람들이 알아서 기는 거다.

운전을 하던 간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터빈 시대 시절에는 병사 교육에 사용된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민간인이 시비 걸면 대응하지 말고 도망치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반대가 아니라? 군인이 도망친다는 겁니까?"

민간인은 군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건 징집된 기간병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훈련이 극도로 고되고 선임들의 부조리는 가혹해서 군생활 중에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휴가나 외박을 나왔을 때만큼은 이등병도 신이 된다. 휴가 나온 병사를 통제할 수 있는 건 헌병 정도가 전부다.

"그럼 방빼기 같은 것도 없었겠네요."

외박 나온 군인들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는 집주인에게 방을 빼라고 한다.

그러면 집주인은 곧바로 집에서 나가고, 군인들은 외박하는 동안 그 집을 제멋대로 쓴다.

가끔 휴가 나온 군인들이 공무원이나 경찰의 집을 건드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집주인이 '여기 말고 다른 곳 찾아보세요.' 정도의 말만 하고 좋게 보내준다.

예의상 경찰이 출동할 때도 있는데 찾아온 경찰들이 하는 말이라고는 '심각한 파손이나 절도 같은 건 적당히 해주세요.' 같은 부탁이다.

심지어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해달라는 거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공권력이 지금같지 않았다고 하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보니, 우리는 금방 인근 야산에 위치한 사격장에 도착했다.

실탄과 제식무기,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병사가 우리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입구를 열어주었다.

"연습을 위한 실탄은 제공이 협의되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내 옆에 놓인 탄통과 군용 소총. 사격 통제는 따로 없었다.

"...."

소총은 가벼웠다. 그리고, 저 멀리 250m에서 불규칙적으로 일어났다 눕는 표적 또한 선명하다.

표적에 튄 흙자국이 보일 정도다. 성흔발현자들은 더 이상 인간의 육체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빠르게 장전을 했다. 몸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하다.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표적을 강타하며 화염과 함께 폭발한다.

5.56mm 폭발탄. 흔하게 사용되는 탄종 중 하나다. 마력처리한 탄두는 충돌하는 순간 화염과 폭발을 만들어낸다.

탄환의 폭발이 지니고 있는 살상반경은 3m 정도. 위력이 약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수십 발 날아들어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표적 맞추는 건 핵심이 아니지."

휴가증 딸 것도 아니니까. 나는 사격장에 보이는 잡초나 흙더미 같은 걸 조준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격을 이어갔다.

탄창을 깔끔하게 비우고, 새 탄창을 꺼내 끼워넣는다. 2시간에 걸친 연습이 종료되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좋은 구경했습니다. 미화원들이 초인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명불허전입니다."

이후 찾아온 간부에게 인사를 한 다음, 나는 다시금 원래 있던 시설로 복귀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마침내 7급 미화원 유상철을 만나게 되었다.

"뭐해? 앉아."

이미 나를 제외하고도 두 명이 더 앉아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한 명씩.

"...드실래요?"

멍하니 앉아있던 여자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나 또한 그녀와 비슷하게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토끼 캐릭터가 프린팅되어 있는 분홍색 음료병이었다. 커다랗게 '솜사탕 맛'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 멀리, 아이들이 볼풀에서 놀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여기는 키즈카페다.

7급 미화원 유상철은 앞으로 자신과 함께 할 견습 미화원들을 키즈카페에 불렀다.

뭐 하는 사람이지, 미친 사람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김상선입니다."

"그래."

앞으로 선배가 될 사람에게 미쳤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냥 인사를 선택했다.

우리는 그렇게, 키즈카페에 부모님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에 앉게 되었다.

"자, 서로 인사들 나눠."

우리는 그렇게 아이들이 놀면서 즐거워하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깐 채 통성명을 시작했다.

"김상선입니다."

고등학생 정도의 남자가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에 붉은 화염으로 글자가 써진다.

[오민혁]

나는 그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대화를 할 생각은 없나?"

"연습 중이라서요. 게다가 능력 소개까지 할 수 있잖아요."

능력과 자신의 이름을 동시에 알려줄 수 있다는 건가.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오민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젊은 친구가 싸가지가 없네, 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어차피 나와 오민혁 둘 다 견습 미화원일 뿐이니까. 원래 조직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짬이 중요한 법이지.

동기한테 나이로 텃세 부리는 것만큼 추한 일도 드물다.

"한세희예요. 잘 부탁해요."

눈 아래에 박힌 점이 인상 깊은 여자였다.

"저는... 집중력을 먹어요."

"응?"

한세희가 자신의 능력을 말했을 때,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숨을 약간 들이켰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내 입에서 연기가 난다.

아, 마시멜로를 불에 구워먹으면 맛있는데. 불멍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어 낸 걸까? 개가 짖는 소리를 왜 멍멍이라고 하지. 고양이도 귀여워.

그리고, 손등의 따끔한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세희가 포크로 내 손등을 살짝 찌른 상태였다.

"이해했죠?"

"...네."

집중력을 먹는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방금 전 그 행위로 확실하게 이해했다. 순간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들이 떠오르고, 그 잡생각들이 다른 잡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김상선입니다. 능력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물잔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들었다.

"앞으로 함께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나와 같은 견습 미화원이다. 너의 죽음에 책임을 물을 일이 없기에, 굳이 뾰족한 태도로 대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7급 미화원 유상철.

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과연 이 녀석은 어떨까.

4화. 견습기간 (1)

나는 가만히 유상철을 관찰했다.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유상철이 응?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입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망할 놈의 출장에서 방금 돌아온 차다."

"출장?"

"그래, EU의 NGO와 협업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몇 개월 날려먹었지."

오염지대에 대응하는 조직은 국가별로 차이가 조금씩 있다.

한국의 성흔발현자들은 미화원이라는 이름하에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유럽의 성흔발현자들은 NGO에 소속되어 활동한다. 어느 정도 국가의 보조를 받는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훨씬 더 활동에 자유가 있고, 각 NGO 별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

"출장 말입니까."

"그래, 복귀하자마자 너희 병아리 새끼들 관리해야 하니... 아주 죽을 맛이다."

유상철은 그렇게 말하며 분홍색 액체가 들어있는 어린이용 음료수를 쭉쭉 빨았다.

너의 비극이 일어날 동안 이 자는 한국에 없었다.

그걸로 충분한 걸까.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한국에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유럽의 오염지대 관련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한국의 미화원이 파견될 이유가...."

내 말을 듣고 있던 유상철이 코웃음을 쳤다.

"애송이, 오염지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없어."

오염지대 중 일부는 범국가적인 피해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여러 국가의 성흔발현자들이 협업한다.

그때, 나를 포함한 네 명의 핸드폰이 일제히 진동했다. 곧바로 유상철이 얼굴을 구겼다.

[수원시 고동동 고동로 59번길 72 수원여고 오염지대 발생. 현 위치 구조물의 옥상으로 이동.]

"첫 만남부터 이 지랄이네. 참 거지 같은 직장이야."

"이건... 뭡니까? 7급 미화원 유상철 님."

오민혁의 질문에 유상철이 대답했다.

"선배라고 불러. 그리고 뭐긴 뭐겠냐, 일하라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유상철이 빠르게 코트를 걸쳤다.

"뭐해. 움직여 이 새끼들아! 달려!"

유상철의 외침에 가만히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옥상으로 달렸다.

건물의 옥상은 잠겨있었지만, 유상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문짝을 발로 찼다.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뜯어졌다.

― 미화원들이 출동 중입니다. 시민 여러분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하늘에서, 헬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녹음된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동시에 주르르륵, 헬기에서 간이사다리가 내려왔다.

"사다리 잡고 올라!"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다리를 붙잡고 잽싸게 기어올랐다.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

헬기에 탑승하자마자, 무장한 군인이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다. 우리가 신분증을 내밀자, 군인이 이를 장비로 스캔했다.

"유상철 미화원 외 3인 확인했습니다. 현장으로 이동합니다."

헬기가 곧바로 비행을 시작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빠른 일처리였다.

"어이, 군인 양반. 상황 보고해."

"수원여고에 오염지대가 발생했습니다. 발생시각은 오후 2시 12분입니다."

나는 곧바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평일이다. 그렇다면....

"수업 중이었을 텐데."

"좋은 지적이군. 대가리 굴러가는 게 빨라."

내 말에 유상철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군인에게 질문했다.

"오염치는?"

"낮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유상철이 다시금 우리를 바라본다.

"오염지대에 진입하면 나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후 대기할 예정이다. 청소 중, 오염지대 내부에 생존자가 확인되면 내 쪽으로 보내도록."

그 말에, 오민혁이 움찔했다.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머저리 새끼. 왜, 아예 김밥이랑 돗자리 챙겨서 자리도 깔지? 놀러가냐 지금?"

유상철이 차갑게 쏴붙였다. 청소는 우리가 한다. 유상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어떠한 훈련도...."

"가르쳐서 투입할 정도로 한국에 미화원이 썩어넘치는 것 같냐. 청소작업은 좆망겜과 같다. 튜토리얼이 없고 더럽게 불친절해. 게다가 목숨은 하나뿐이지."

현장에서 배워라. 유상철의 선언에 모두가 순간 침묵했다. 조심스럽게, 이번에는 한세희가 입을 열었다.

"많지 않은 미화원이니 더더욱 철저하게 교육한 다음 투입을...."

"너희 교육하는 동안 시민들은 다 뒈져나가고, 오염지대는 그냥 방치하라고?"

다시금 침묵. 하지만, 나는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유상철 선배님."

"아, 씨. 넌 또 왜?"

나는 차분하게 인벤토리에서 탄창을 하나 꺼내보였다. 곧바로 유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관련 내용 전파받았다. 청소에나 집중해."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 나와 유상철의 대화를 듣던 한세희와 오민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용? 무슨 내용이요?"

"신경 꺼. 넌 아직 알 짬 아니야."

한세희의 질문에 돌아온 것은 유상철의 차가운 한마디였다.

곧이어, 그는 우리에게 인이어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우리가 착용을 마치자, 인이어에서 유상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아, 들리나?

우리는 모두 유상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뭘 등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 버튼 누르고 한마디씩 해봐. 통신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우리는 곧바로 입을 열어 말했다. 통신에 이상이 없다는 게 확인된 다음, 유상철이 입을 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첫 봉급도 못 받고 견습으로 뒈지면 억울해서 이승을 못 떠날 테니."

활동비를 제외한 월급이 800만 원에 거주지와 차량 등등이 지급되는 걸로 안다.

"오염지대 내부에서는 밖으로의 교신이 불가능하다. 이 인이어는 우리끼리 통신을 위한 거야."

유상철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했다.

"꽤 많은 견습이 첫 청소에서 뒈진다. 오염지대에는 불합리하고 황당한 죽음이 가득하지. 항상 긴장하고, 주변을 살피고, 논리와 직감을 모두 동원해 상황을 파악해."

정말,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전화번호 정도 교환하고 해산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청소라니.

"오염지대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헬기에서 다시금 사다리가 내려가 땅을 때렸다. 우리는 그 사다리를 통해 땅에 발을 내딛었다.

이미 오염지대 인근은 한국군에 의해 통행이 차단된 상황이었다.

"미화원 맞으십니까?"

우리가 헬기에서 내렸기에, 군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다가와 빠르게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래, 보고 후 바로 진입할 예정이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군인이 무전기에 뭐라고 떠들자, 길을 막고 있던 군인들이 장애물을 치웠다.

"...돔?"

시커먼 벽 같은 것이, 거대한 돔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수원여고가 있어야 하는 곳이겠지.

저게 오염지대군. 성흔발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고, 나갈 수도 없는 곳.

산업기반을 마력에 의존하게 된 인류에게 내려진 원죄.

그리고 너가 죽게 된 원인. 거기에 생각이 닿자, 혈관 속으로 용암이 흐르는 것 같다.

우리는 그 거대한 검은 돔 바로 앞에 도달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니, 돔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벽 같다.

"내 신호에 맞춰 진입해라. 하나... 둘...."

유상철의 입에서 셋. 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곧바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하?"

그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시커멓고 거대한 벽을 향해 몸을 던지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까.

물론, 나는 용기가 아니라 증오가 원동력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두 명을 바라보며, 검은 벽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오겠지."

몸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끝났다.

다시 눈을 뜨자. 마력을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들이 모여 만들어낸 끔찍한 별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런 고름 같은 점액이 흘러내리는 피막. 그 위에 돋아난 울룩불룩한 종양. 그 모든 것들을 뒤덮은 채 맥동하는 검붉은 핏줄들.

그 모든 것들이 학교 건물을 뒤덮은 상태였다.

"...."

그 거대하고 폭력적인 위협의 징조 앞에서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용암처럼 질주하던 증오가 순간 움찔할 정도로.

"너도."

이런 광경을 본 걸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총과 탄창을 꺼내 빠르게 결합했다. 몸의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끔찍한 풍경이다.

너는 대항할 수 있는 힘이나 장비도 없이 이 지옥도에 떨어졌었구나.

다시금 몸속에서 열기가 들끓는다. 순간 몸을 덮쳤던 차가운 두려움이 날숨을 타고 토해진다.

"으... 아어...."

등 뒤에서 오민혁과 한세희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새끼들, 정신 차려!"

뒤이어 유상철이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어거지로 밀어넣은 모양이다.

"오셨습니까?"

"제 발로 걸어들어간 새끼는 간만에 보네."

유상철이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때, 한세희가 온갖 것들로 뒤덮인 학교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거...!"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수상한 덩어리들이 철벅거리며 땅에 떨어졌다.

한 반년 정도 청소 안 한 화장실 배수구 거름망을 본 적 있는가? 머리털과 때, 출처를 알 수 없는 끈적이는 점액질이 서로 뒤엉킨 혼합물 말이다.

거기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물컹이는 덩어리들이 질퍽이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청소 시작이다. 잊지 말도록. 생존자는 확보해서 나에게 데려온다."

유상철의 지시와 함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역겨운 새끼들."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불꽃과 함께 총성이 탄환을 쏟아낸다. 움직이는 점액질 덩어리에 박혀든 총알이 폭발하며 녀석들을 산산조각 냈다.

군 제식장비는 강력했다. 저 질척거리는 덩어리들이 물풍선처럼 터져나간다.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다.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회백색 점액질들이 터져나가는 간단한 작업. 분노와 고양감과 자신감이 서로 뒤엉켜 몸을 뜨겁게 만든다.

"...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아쇠를 당겨도 아무것도 발사되지 않게 되었다.

벌써 한 탄창을 다 써버렸다.

"에라이."

나는 스스로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총알을 아끼자. 이렇게 난사하면 챙겨온 탄환이 삽시간에 동나겠다.

나는 새로운 탄창을 다시 소총과 결합했다. 총알을 아끼고, 몇 발 사용했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오염원."

오염지대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오염원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오염지대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머릿속이 뜨거워진다. 이 역겹고 끔찍한 풍경을 한시 빨리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머리카락과 점액질이 뒤섞인 역겨운 덩어리들을 총탄으로 박살 내며 나아간다.

점액질 덩어리는 총알 서너 발로 한 덩어리를 정리할 수 있다. 탄창 하나로 최대 10마리를 처리할 수 있다.

계산. 계산.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간다. 학교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염원은 안에 있겠지.

어차피 생존자들이 있다 해도 학교 안에 있을 거다.

그러니 진입해야 한다. 진입해서 이 역겨운 덩어리들을 싹 쓸어버리고, 오염원을 찾아내 파괴한다.

"두 사람 빨리 합류하세요!"

뒤늦게 한세희와 오민혁에게 생각이 닿은 나는 그 둘을 호출했다.

"아, 아... 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한세희와 오민혁이 내 쪽으로 합류했다.

"진정하고, 의외로 별거 아닙니다. 쉽게 처리할 수 있어요."

일단, 이 두 명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줘야 한다. 나 혼자서 들어가는 것보다, 함께하는 편이 오염원 제거에 더 도움이 될 거다.

"멋대로 움직인 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냥... 우리와는 달리 겁을 먹지 않았던 것뿐이잖아요?"

"우리보다 훨씬 나아요."

두 명은 나름대로 정신을 가다듬는 데 성공했다.

"오염원은 학교 건물 안에 있을 겁니다."

"그렇죠, 건물 외부에는 별달리 수상한 게 없으니."

학교 내부로 진입하는 입구는 살덩이와 핏줄들이 서로 엉겨붙은 채 단단히 틀어막혀 있었다.

폭발탄을 쏟아넣으면 충분히 파괴할 수 있겠지만... 탄환이 너무 낭비될 텐데.

5화. 견습기간 (2)

꽉 틀어막힌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오민혁이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입구, 뚫을게요."

화악, 거대한 화염이 눈앞에 나타났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맹렬한 화염이었다.

그리고, 화염이 한 점으로 뭉쳐든다. 어거지로 구겨넣은 화염은 그 크기가 작아졌지만 타오르는 움직임은 훨씬 더 맹렬했다.

"뒤로."

나와 한세희가 물러나자, 폭발하는 화마가 문을 가로막은 살덩이를 모조리 불살랐다.

시원스럽게 뻥 뚫린 입구. 그리고 그 입구 언저리에 남아있는 살점들은 새까맣게 탄화되었다.

"이야, 시원하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어둡네."

외부가 그 역겨운 것들로 뒤덮인 상태였으니까. 내부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손전등 같은 거라도 인벤토리에 챙겼다면 좋을 텐데. 유상철과 만나자마자 바로 청소에 투입되어서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불, 밝힐게요."

오민혁이 자그마한 불꽃 여러 개를 만들어내 주변을 밝혔다.

"오염치가 낮아서 그런 걸까요? 의외로 할 만한 것 같은데."

한세희가 약간 부드러워진 어투로 말했다. 그녀뿐이 아니라, 나와 오민혁 또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생각보다 이 오염지대의 점액질들은 강하지 않았고 오민혁 또한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한세희 씨 능력이 통할지 의문입니다."

"해봐야 알겠... 말하기가 무섭네 정말."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점액질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덩어리를 다 셀 수는 없었지만, 수십 마리는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천천히 한세희가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하얀 연기 같은 것들이 점액질에게서 흘러나와 한세희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아, 된다!"

그리고, 점액질들은 목적을 잃은 것처럼 멈춰서 뭉클거린다. 완전 맛이 가버렸군.

이러면 처리가 쉽지. 나와 오민혁은 따로 신호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화염의 파도가 점액질들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들에게는 내가 발사한 총알이 박혀들었다.

"아, 잠시만."

나는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표본병을 꺼낸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점액질의 잔해를 챙겨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제 다시 이동하자."

표본까지 챙겼으니 거칠 게 없었다. 우리는 빠르게 괴물들을 지워나가며, 뭔가 이상한 장소가 없는지 수색을 이어나갔다.

♩♪♬♩♬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잘 들린다. 노랫소리다. 사람이 부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곡조와 박자가 선명하다. 그리고, 듣는 것만으로 사람의 정신을 서서히 깎아내리는 것 같은 섬뜩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정신 박힌 일반인이라면 저런 음산한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지는 않을 거다. 위험하다고 광고를 때리고 있는 꼴이니.

하지만,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다.

"지하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학교 지하에는 보통 커다란 공용주차장이 있다. 시민들에게 주차공간을 제공하자는 의미로 아주 옛날부터 시행하던 정책인데, 요즘에는 보편화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지하로 진입했다.

지하 주차장은 기둥처럼 솟은 새하얗고 거대한 뼈들이 숭배하듯 세워진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낮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지고 있다.

꿈틀거리는 핏줄들이 왕의 알현실 앞에 깔린 카펫처럼 쭉 늘어서 있고.

그 카펫의 끝에는 얇은 피막에 감싸진 채 액체 속에 잠겨있는 태아를 닮은 끔찍한 형체가 한 마리 보인다.

― 아, 으....

그리고 그 피막 옆에 서 있는, 여성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보인다.

양 눈은 핏줄을 실처럼 사용해 꿰매져 있었고, 무수한 팔이 공작새의 깃처럼 등 뒤에 솟아나 있었다.

가로가 아닌 세로로 찢어진 입이 벌어졌다 다물어지기를 반복하고, 세 갈래로 찢어진 보라색 혀가 꿈틀거린다.

배에서 툭 튀어나온 창자 같은 것이 태아 비슷한 것을 감싼 피막과 연결되어 있었다. 뭔데, 저 태아의 어미 같은 건가?

― 누, 구. 없... 어 요?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했다. 사람의 말을 하는 건가? 모두가 섬뜩함에 굳어있는 사이.

그녀의 등 뒤에 펼쳐져 있던 팔 중 하나가 그것의 목을 움켜잡았다.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뜯어져 그 손에 움켜쥐어진다. 그리고 다른 손이 다시금 그 뜯겨져 나간 목에 처박힌다.

― 은... 희야. 살려 줘.

"이런 씨발, 저거 사람의 성대에요!"

한세희가 뒤늦게 뭔가를 알아차리고 외쳤다.

저 괴물의 등 뒤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팔들은 손에 사람의 성대를 쥐고 있었다.

뭔데, 사람 성대를 녹음기 같은 걸로 쓰는 건가? 뿌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등 뒤에 펼쳐진 무수한 팔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걸 구경해 줄 이유가 있나? 없지. 나는 조정간을 연발로 돌린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연달아 터져나오는 총성과 함께 폭발탄이 흩뿌려지며 녀석의 팔을 박살 낸다.

군용 장비가 좋다니까. 강한친구 대한육군 만만세.

― 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가가가각!

그 순간, 피막에 쌓여있던 태아 형태의 괴물이 울음을 터뜨렸다. 삽시간에 눈앞이 하얗게 물들고 육신을 움직이던 정신이 마비된다.

"커... 헉."

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후려친다. 온몸의 힘이 쭉 풀린다.

그리고, 덤벼드는 무수한 팔들.

"흐... 읍...."

그때, 미친 듯이 울부짖던 태아로부터 흘러나온 하얀 연기가 한세희의 입으로 빨려든다.

집중력이 쪽 빨려나간 태아가 울음을 멈추고, 나는 다시금 내 육신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잘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덤벼드는 팔을 향해 다시금 사격을 개시했다.

쉬지 않고 팔이 터져나간다. 한세희는 계속 호흡을 반복하며 태아 괴물의 집중력을 빨아낸다.

밀려드는 팔은 내가 연발사격을 갈기며 막아내고, 태아의 울음소리는 한세희가 막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한 명이 더 있다.

"아저씨, 뒤로 도망쳐!"

오민혁이 나를 향해 외쳤다. 나는 그 외침을 듣자마자 뒤로 몸을 던졌다. 중형차 크기의 화염 덩어리가 팔로 뒤덮인 괴물의 몸을 덮쳤다.

거대한 화염의 폭발이 팔이 잔뜩 달린 괴물과, 태아 괴물을 삼켰다.

"우... 아악."

"잡았다."

폭발의 충격파가 내 몸을 덮쳤다. 붕 떠서 날아가는 나를 한세희가 받아냈다.

"괜찮아요? 이거 몇 개?"

곧바로 나를 내려놓은 한세희가 내 앞에 손가락으로 브이를 펼쳐보인다.

"스무 개?"

내 말에 한세희가 피식 웃은 다음 폭발의 현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크게 한 방 날리는 건 저 애한테 맡기면 딱이네요."

"어마어마하네."

새카맣게 변한 숯덩이가 두 개 놓여있다. 하나는 엄청 크고, 하나는 작다.

방금 전까지 우리가 상대하던 괴물이었던 것들이다.

"헤엑... 크에엑...."

"어이, 이봐! 괜찮아?"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오민혁의 상태는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녀석이 입을 열고 숨을 토해낼 때마다 격렬한 아지랑이가 쏟아져나온다.

너무 과한 능력을 쓰면 체온이 올라가는 건가. 오민혁은 몸을 숙인 채 한쪽 손을 들어올리고 계속 숨을 몰아쉰다.

"끝난 거... 맞죠?"

숨을 몰아쉬던 오민혁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나와 한세희를 향해 질문했다.

"그래, 방금 상대한 게 오염원이었어."

나는 허공에 등장한, 소용돌이치는 시커먼 구멍을 가리켰다.

"진짜 배수구가 나타나네."

한세희가 중얼거렸다.

배수구. 오염원을 박살 내는 데 성공하면 나타나는 검은 소용돌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괴물의 잔해와 시커멓게 타버린 숯 같은 것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저 배수구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저게 오염지대의 표본을 채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오염원을 제거하면, 오염지대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거리 제한을 무시하고 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버리니까.

"정말... 끝났네요."

나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첫 청소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나름대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분담했다.

내가 없었다면 무수한 팔들을 막아내지 못했을 거다.

한세희가 없었다면 태아의 울음소리에 당한 다음, 그대로 성대가 뜯겨나갔겠지.

그리고 오민혁이 결정타를 날렸다.

"미화원들 중에 술고래가 많은 이유를 알겠어...."

한세희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확실히, 이런 일 끝내고 나면 술 한 잔이 간절할 것 같긴 하다.

"이제, 돌아가자."

청소는 끝났다. 몸은 피로하지만, 한층 가뿐한 걸음걸이로 유상철에게 향했다.

이 정도면 칭찬 같은 것도 기대할 만하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은....

"아주 잘했다. 정말 훌륭해."

유상철의 등 뒤에 스무 명이 넘어가는 고등학생들이 창백하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광경이었다.

짝짝짝. 건성으로 치는 박수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때렸다.

"사람 목숨 따위,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세상에 넘치는 게 사람이잖아? 아주 냉철한 판단이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하도록."

그리고 우리는 저 말이 칭찬으로 들릴 정도의 병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존자가 있는지...."

한세희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곧바로 유상철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총성이 들리자, 4층에서 구조해달라고 연기를 피웠더군. 뒤덮인 살점들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어. 뭐, 몰래 담배 피는 불량학생이라도 있었나보지."

그리고 우리는 그걸 보지도 못한 채 학교로 진입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걸 못 봤어요."

오민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생존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었다는 거냐?"

다시 한번 돌아온 유상철의 저 질문에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생존자의 구출.

아예, 머릿속에서 잊어버렸었다.

"내가 연기를 보고 4층으로 갔을 때는, 점액질들이 뚫고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유상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염원 제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저 아이들은 다 죽었을 거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침묵한 와중에도 박살 난 점액질과 건물을 뒤덮었던 살덩이들이 지하에 생성된 배수구를 향해 고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오염지대를 감싸고 있던 시커먼 벽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빨려들어가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잠깐 하늘을 바라보던 유상철이 입을 열었다.

"내가 따라붙은 이유는 너희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를 방지하고 수습하는 거다."

생존자 구출을 도외시한 지금 이 상황처럼.

"상황의 여의치 않다면 별수 없겠지만, 구할 수 있으면 구해야지."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히 생존자의 구조를 우선할 수 있었다. 구조 신호도 있었고, 오염지대의 괴물들이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생존자 구조라는 목표를 머릿속에서 지우지만 않았어도, 저들을 구한 다음 오염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

"처음이니, 더 갈구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희도 결국 견습 딱지를 뗄 거다. 오늘의 사건이 교훈이 되었길 바란다."

그 말대로, 유상철은 더 이상 우리를 갈구지 않았다.

"각자 핸드폰의 메시지를 통해 전달된 거처를 확인하고 돌아가서 휴식하도록. 거처로 1시간 이내에 복귀할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라."

오염원 처리는 성공했다.

하지만 여기에 유상철이 없었다면 살 수 있었던 고등학생들도 전부 죽었을 거다.

나는 오염지대로 인해 너를 잃었기에 오염지대를 원망하고, 너를 구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원한을 불태우고 있다.

근데, 오늘 나 또한 너와 같은 죽음을 내 손으로 저지를 뻔했다.

"...씨발."

오늘의 사건은 나에게 확실한 교훈이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멍해져 있던 나는, 뭔가를 퍼뜩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렸다. 표본병.

이미 저지른 실수에 대한 후회도 좋지만... 해야 할 일을 하자.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표본병 안에는 내가 집어넣은 점액질 덩어리가 담겨있었다.

최소한, 우길영에게 할 말은 생긴 셈이다.

6화. 작은 협상

표본병을 다시 집어넣은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제공된 거처로 향했다.

50평짜리 아파트였다.

혼자 살기에는 쓸데없이 크다.

그리고 내 흥미를 딱히 끌 만한 건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살자고 미화원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

"...."

나는 느긋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간절한 건 내가 아니라 우길영이다.

굳이 먼저 몸이 달아있을 이유는 없지.

"일용품이나 음식은 아무것도 없네."

침대나 TV 같은 가전제품은 충실하게 채워져 있지만, 일용품은 하나도 없었다.

잠깐 밖에 나가서 필요할 것 같은 일용품들을 구매한 다음 돌아오니.

"안녕하세요."

새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우길영 박사가 보냈습니다."

"그런가요?"

순순히 그걸 믿기는 어려운데. 그냥 검은 양복 입었다고 말에 신뢰도가 생기는 건 아니다.

"증거가 필요한데."

내 말에, 곧바로 남자 중 한 명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었다.

― 아아, 들리나?

"잘 들리는데, 누구십니까."

내 말에 곧바로 핸드폰에서 하하하, 하는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 우길영이네.

"핸드폰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런 것 같습니다. 목소리 변조가 가능한 세상 아닙니까."

대답을 들은 우길영이 잠깐 침묵했다.

― 성공한 건가?

전화를 받는 내 태도만으로도 성공 여부를 짐작한 모양이다. 하긴, 실패한 놈이 이렇게 꺼드럭거리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본인이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는 더 이상 나눌 말 없습니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문으로 향했다.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김상선 견습 미화원님."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런 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럼 함께 안에서 기다리죠."

내 말에 양복쟁이 두 명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 것도 눈치를 봐야 합니까? 참 거지 같은 직장이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어차피 내가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저들이 나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잠시 뒤, 나와 양복쟁이 두 명은 계란과자 한 봉지와 믹스커피를 앞에 두고 앉았다.

"드세요."

하지만 아무도 과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싫으면 말고."

"보통, 견습 미화원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너희는 아무래도 나에게 관심이 쏠리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고.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관심을 보이겠죠."

더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우길영의 도착을 기다릴 뿐이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 오래도 걸리네.

"김상선이."

"우길영 센터장님."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뭐라고 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인벤토리에서 표본병을 꺼내보였다.

"여기, 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인벤토리에 표본병을 집어넣었다.

"이제 보수에 대해 논해보시죠."

내 말에, 우길영이 대답했다.

"방금 전 자네가 꺼내보인 거, 우리 집 고양이가 토해놓은 털뭉치처럼 생겼던데."

아, 그러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토사물로 연구를 하시면 되겠군요. 결과도 같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 말에 우길영이 피식 웃었다.

"그냥 해본 말에 뭘 그렇게 정색하나. 어차피 거짓말이라면, 연구소에 가자마자 바로 밝혀질 텐데."

"그렇겠죠? 아, 계란과자 좋아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과자를 가리켰다. 우길영은 고개를 젓고, 손을 내밀었다.

"성격 참 급하시네요."

나는 표본병을 다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우길영은 표본병을 챙긴 다음 양복쟁이 한 명에게 건네주었다. 표본병을 받은 양복쟁이가 곧바로 집을 나섰다.

"바로 확인하시는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상호신용이 부족하네요."

"근거 없는 신용은 사기당하는 지름길 아니겠나. 이해해주게."

그리고 바삭, 우길영이 계란과자를 씹으며 뒤에 있는 또 다른 양복남에게 손짓했다.

"제대로 된 물건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검은 케이스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 대가로 제공될 장비네."

은색으로 반짝이는, 시계를 닮은 장신구였다.

"역장생성기군요."

보호막 역할을 하는 역장을 만들어 피부를 감싸는 장비다.

"군용 사양 중에서도, 출력을 높인 특제품이야. 동전형 마력전지 하나로 세 시간의 작동이 보장되지."

개인화기로 발사하는 관통탄까지도 방어할 수 있다. 민간에 풀리지 않은 건 물론이고, 군에서도 특수부대가 사용하는 물건이다.

"그리고 이건 고속회복제."

고속회복제. 사실, 이게 역장생성기 이상으로 대단한 물건이다.

팔다리가 잘려도 즉시 주사 한 방 놓고 절단면을 붙이면 다시 붙고, 두 방이면 아예 잘려나간 부분이 다시 자라난다.

"명확한 의도가 느껴지는 지원이군요."

"조국이 이렇게나 자네의 몸을 걱정하고 있다는 거지. 항상 감사하게나."

지랄한다. 육체가 사람의 영역을 넘어선 미화원에게 무기를 주는 건 부담되니까 이러는 거겠지. 어쨌든, 죽지 않고 표본을 챙겨 돌아오라는 뜻인가.

"제가 오늘 견습으로 첫 청소를 했습니다."

"아, 이야기 들었어. 멋지게 성공했다더군. 축하하네."

우길영의 말에 나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 다음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주 소중한 교훈을 하나 배웠죠."

"그런가? 어떤 교훈인지 궁금해지는데."

"생존자의 구조가 중요하다. 오염지대에 갇힌 생존자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저희 말고 없으니까요."

내 말에 우길영이 동조하려다가 입을 잠깐 다물었다.

"제 몸의 안전을 위한 장비보다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힘이 필요합니다."

"...알고 있겠지만, 미화원이 소지하는 장비는 본래 통제되고 있다네."

국제협약으로 정해진 사안이다.

안 그래도 초인적인 힘을 자랑하는 성흔발현자들이 화기까지 소지하는 순간 정부로서는 이들을 제압하는 게 무진장 어려워지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의 최첨단 기술과 온갖 신소재를 이용해....

성흔발현자들이 사용할 검, 활, 창이나 방패 같은 장비를 생산하고 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외로 해달라고 했었죠."

지금의 나라면 견인대공포도 손에 들고 기관총처럼 사용할 수 있다.

이 몸에 걸맞은 더 많은, 강력한 화력이 필요하다.

"...해당 요청에 대해서는 관련 기관과 신중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네."

돌아온 대답은 꽤나 싱거웠다. 신중한 논의라.

"빠르고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겠습니다."

약간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세상에 거래 상대가 한국 말고 없는 것도 아니거든.

경쟁상대가 나타난 이후에도 그 '신중한' 논의를 계속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일단은, 지금 제공한 장비들 선에서 만족하게나."

"알겠습니다."

어쨌든,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까.

"연구결과가 긍정적이었으면 좋겠네요."

결국, 모든 것은 가치로 결정된다. 나는 오염지대 안에서 표본을 채취할 수 있다.

하지만, 채취한 표본이 의외로 별거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내 능력은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계속해서 화기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내가 채취한 표본이 큰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 또한 바라는 바야. 아, 그리고 여기 내 휴대폰 번호라네. 앞으로는 나를 직접 부르지 말고, 수상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게."

그 말을 끝으로 우길영은 양복을 입은 자들과 함께 돌아갔다.

"나도 이제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머리를 긁었다.

"옘병. 먹을거리를 안 사왔네."

구매한 생필품은 세제나 수세미, 샴푸나 비누 같은 것들이었다. 음식은 사오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라도 사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두 사람, 외식 생각 있어요? 냉장고가 완전 텅텅 비었는데.

한세희가 나와 오민혁을 메신저에 초대한 모양이다.

외식이라. 솔직히 말해서 몸과 정신이 둘 다 지친 상황에 다시 식재료를 사와서 요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견습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각자에게 제공된 거처도 멀지 않다.

― 저는 좋아요.

곧이어 오민혁 또한 답장을 날렸고, 나 또한 동의했다.

결정이 나자마자, 곧바로 한세희가 주도해서 식당과 시간을 잡았다.

"여기예요!"

장소는 모두가 군말 없이 먹을 수 있는 고깃집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도착했고, 나는 약간 늦었다.

"제가 좀 늦었네요."

"괜찮아요. 밥 한 끼 같이 먹는 건데요 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우리는 불판을 앞에 두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원래 다들 뭐 하던 분들이세요? 저는 간호사였거든요."

"아, 그럼 주사 같은 것도 잘 놓으시겠네요?"

내 질문에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문제없죠. 다만, 제가 수술실에 들어가서 2년 정도 고생한 상황이라 살짝 감이 죽었을지도 몰라요. 수술실에 들어가면 주사 놓을 일이 워낙 없어서."

수술실 간호사라, 어쩐지. 그 팔 잔뜩 달린 괴물이 쥐고 있는 게 사람의 성대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다 싶었다.

"저는 그냥 고등학생이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열심히 하지 말걸. 아, 그리고 두 분 모두 말 놓아주세요. 불편해요."

오민혁은 고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순위권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졸지에 성흔발현으로 미화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같은 고졸이라고 할 수 있겠네."

내 말에 오민혁이 오, 하는 소리를 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셨나봐요?"

"그냥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삶이었지."

너랑 함께 먹고살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 맞아. 근데 우리는 총 같은 거 못 쓰지 않아요? 오슬로 협약인가 뭔가 때문에."

식사를 하던 와중, 오민혁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름의 사정이 있지.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야."

"혹시, 우리도?"

글쎄다... 탄약은 넉넉하게 제공해주겠지만, 그걸 발사할 수 있는 총기를 많이 제공해주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말이지.

"사격 해본 사람?"

내 말에 곧바로 두 명이 불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우민혁은 고등학생이고, 한세희는 여자다.

사격을 해봤을 리가 없지. 자고로 뒤통수에서 날아오는 총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슬프게도, 이 둘에게 총을 쥐여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아, 민혁이는 생각해둔 장비 있어? 카탈로그에 꽤 많던데."

"야구배트처럼 생긴 게 있던데요. 그나마 익숙한 형태가 제일 무난할 것 같아서 그걸 생각 중이에요."

나는 두 사람의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카탈로그는 또 뭡니까?"

"침실에 놓여 있었는데... 혹시 못 보셨어요?"

도착하자마자 우길영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고, 곧바로 여기에 오느라 침실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아직은 견습이라 허락되는 장비가 제한적이지만, 정규가 되고 급수가 올라가면 점점 더 다양해져요."

고위공무원단 대우를 받는 3급 이상의 미화원이 되면 아예 커스텀 제작까지 지원해준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오슬로 협약을 어길 수는 없지만."

다시 한번 오민혁이 나를 슬쩍 바라봤다. 그래 뭐, 한창 궁금한 게 많을 나이니까.

저 호기심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만 바라보고, 밥이나 먹어."

"네...."

우리의 식사는 삼겹살 5인분과 목살 3인분, 된장찌개와 냉면 등등을 해치우며 승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많이 먹는 편이 좋아요. 성흔발현자들은 칼로리 요구량이 많거든요. 오천 칼로리 정도는 거뜬하다고 들었어요."

"너, 그런 거 되게 잘 안다? 어려서 배우는 게 빠른 건가? 자, 여기 많이 먹어."

한세희가 오민혁의 앞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꽤나 자상하네.

오민혁이 접시에 고기를 받으며 대답했다.

"애들이 관심이 얼마나 많은데요. 유명한 미화원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채널 구독자 규모만 봐도 알 수 있죠."

"다이어트 걱정은 없어서 좋...."

말을 이어가며 불판에 고기를 올리려던 한민희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거... 누가 장난친 거 아니지?"

고기가 담겨있는 접시 위에, 사람의 손가락으로 보이는 것이 한 토막 올려져 있었다.

이딴 씨발같은 장난을 어떤 또라이가 할까.

7화. 갑순이네 (1)

고기가 담긴 접시에 사람의 손가락이 올려져 있다.

우리 세 명 모두 굳은 표정으로 접시를 바라봤다.

"바, 방금 전까지는 없었는데."

오민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고기를 받을 때는 저런 게 없었다. 있었다면 고기를 삼켰을 리가 없으니까.

"꺄아아아아아아악!??"

"이, 이거 뭐야! 사장 나와!"

그리고 이 소름 끼치는 현상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음식에서 사람의 일부를 발견했다. 구토를 하는 사람들, 사장 나오라고 외치는 사람들, 패닉에 빠져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고깃집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장 불쌍한 건 물론, 즐거운 식사 중에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 손님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불쌍한 건 이 가게 주인이겠지. 분노한 손님 몇 명이 사장을 향해 덤벼들었다.

항거하기 어려운 공포와 혼란 속에서 약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전원 조용!"

경찰 두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그리고는 대뜸 권총을 꺼내 허공에 대고 한 발 쏜다.

날카롭고 커다란 총성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경찰에게 향했다.

"바닥에 엎드려서 대가리 숙여, 이 새끼들아! 빨리 움직여라!"

경찰의 외침에,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도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숙였다.

지시를 거역하면 그 순간 팔이나 다리에 금속이 첨가될 테니까.

"현 시간부로 이 식당에서 아무도 못 나간다."

그렇게 말하며, 경찰이 가게 문에 사슬을 걸어버렸다.

"움직이면 경고 없이 발포한다."

이게 필요한 조치인지, 아니면 과도한 조치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경찰들의 폭압적인 상황정리가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움직이지 말라고!"

조금이라도 지시를 어기면 고압전류가 흐르는 경찰봉이 내려찍히니까. 통제에 따르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하나.

"너희들은 뭐야 이 새끼들아!"

그들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우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미화원 신분증을 내밀었다.

멀리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건지, 곧바로 경찰들의 안색이 변했다.

"...죄송합니다. 미화원분들이신 줄 몰랐습니다."

냉혹하고 엄격하게 현장을 제압하던 경찰들이 오민혁의 신분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안도감이었다.

이제 살았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

경찰들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숙인 사람들도 조금씩 웅성거린다. 곧바로, 경찰들이 경찰봉의 버튼을 올려 타탁! 하는 전깃불 소리를 내자 금방 조용해졌지만.

"가게에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내 말에 경찰들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가 보고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사람 몸의 일부가 음식에서 튀어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이 뜬금없이 팍 하고 튀어나온 셈이다.

"오염지대의 여파로 보입니다만... 미화원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마찬가지 생각이다. 불특정한 대상을 상대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은 거의 대부분 오염지대의 여파다.

FPS 게임을 하던 와중, 상대 캐릭터가 쏜 총알이 모니터를 뚫고 나와 총상을 입힌다.

자다가 죽은 사람의 입 안에서 머리카락 80kg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유를 알 수 없이 실종되고 변사체로 발견되는 무수한 사람들과 기괴한 현상들.

"미화원분들께서 시민 통제권한을 이양 받으시겠습니까?"

우리는 경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견습이라서 경험이 부족합니다. 상황 정리까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곳에서 대기만 하겠습니다."

내 말에 경찰들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경찰들은 빠르게 폴리스 라인을 치고,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거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매섭게 경찰봉을 휘두르거나 제압용 권총탄을 발사한다.

"미화원 신분증이 좋네요. 살다 보니 경찰들이 존대하는 모습을 다 보네."

한세희가 작게 나와 오민혁을 향해 속삭였다. 확실히 희귀한 경험이지.

"상황은 대충 정리되어가는 것 같은데."

경찰이 충원되고, 빠르게 식당 안을 정리한다. 그리고, 경장 계급장을 단 사람이 피곤한 눈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미화원분들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순경이 진급하면 경장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경장은 제법 보기 드문 계급이다.

오염지대 관련 사건이라면 제일 먼저 튀어나가야 하는 경찰들 중 약 절반은 순경일 적에 죽고, 1계급 특진해서 경장이 되니까.

살아있는 경장보다 죽은 경장의 수가 더 많다는 농담은 제법 유명하다.

그렇게 위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찰을 지원하는 이유?

대우도 좋고, 봉급도 높으니까.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점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염지대의 여파인가요?"

내 말에 경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갑순이네' 라고 불리는 오염지대로 추정됩니다."

"이름하고는."

옆에서 한세희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나도 동감이다. 갑순이네가 뭐냐, 갑순이네가.

우리의 말을 듣고 있던 경장이, 뭔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명함 사이즈의 종이였다.

"이래서 갑순이네라고 불립니다."

"... 하."

갑순이네

신선하고 확실한 고기!

쫀득한 식감과 깊은 맛!

053 ― 안알려줌 ― 약오르지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언제나 이 정체불명의 명함이 그 장소 어딘가에서 반드시 발견된다고 한다.

"측정된 오염도는 계속 낮음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그 낮은 오염도의 오염지대가 한 달을 넘게 청소 실패 중이라고 한다.

"견습 미화원분들이 세 번 도전했는데 생환자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뜻이다. 이해는 한다. 오염도가 낮다고 측정되면, 견습 미화원들의 숙련을 위해 다른 미화원들이 청소하지 않는다.

앞서가는 선배들이 뒤따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남겨두는 거다.

"이쯤 되면 견습 미화원 대신 정규직을 투입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해진 절차가 있다보니...."

오염수치가 낮게 측정된 오염지대의 경우, 정규 미화원이 투입되는 건 한 달이 경과한 시점이다.

그래서 저 갑순이네인지 갑분이네인지 하는 오염지대 청소에는 아직까지 정규 미화원을 투입하지 않는 중이다.

견습 미화원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규칙이다.

사실, 정규 미화원들은 더 위험한 오염지대 청소 때문에 바쁘기도 하고.

"게다가, 갑순이네는 낮은 오염도의 상주형 오염지대로 추측되기에 우선순위도 낮을 겁니다."

상주형.

한 번 나타나면 청소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 자리에 유지되는 종류의 오염지대.

너를 죽인 오염지대는 소실형이다.

소실형 오염지대는 청소되기 전까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점점 더 위험도가 높아진다.

"이거... 혹시 우리가 담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오민혁의 말에 우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견습 미화원들이 파견되는 낮은 오염도의 오염지대.

이미 우리는 이 사건에 얽힌 셈이다. 청소를 시킬 명분이 생긴 셈이지.

"너희들은 무슨 일 긁어모으는 자석이냐?"

상황 정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유상철이 들어왔다.

"하루도 안 지났는데 말이지."

유상철이 여기에 왔다는 건, 그리고 일을 긁어모았다는 건.

갑순이네로 향하게 될 견습 미화원들이 우리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밥 먹다가 얽힌 걸 어떡해요."

오민혁의 말에 잠깐 그를 바라보던 유상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지.

우리의 잘못이라고는 고기 먹다가 접시에서 사람 손가락 발견한 것 말고는 없다.

"그냥 화풀이야 자식아. 청소 하나 끝내자마자 또 청소하게 생겼잖냐."

갑순이네의 다음 타자는 우리가 되었다.

"...괜찮겠습니까?"

견습 미화원들이 세 번 들어가서 세 번 전부 죽어나간 오염지대다. 견습들이 들어갔다는 건 당연히 유상철과 비슷한 수준의 미화원도 동행했다는 건데.

그 숙련된 미화원들까지 전부 죽은 거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어."

우리가 오염지대를 선택해서 청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알겠습니다."

나 또한 있는 오염지대 피해가면서 청소할 생각은 없다.

"준비할 시간은 좀 있었으면 합니다."

다양한 상황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식량이나 침낭, 버너 같은 것만 챙겨도 도움이 될 테니까.

"알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식당의 상황도 정리가 끝났다.

"내일 오전 10시에 서울역에 모인다. 식사는 든든하게 한 모양이니, 일찍 씻고 자도록."

유상철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해산했다. 나는 곧장 우길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내일 청소를 위해 추가 탄약과 총기손질도구가 필요합니다. 내일 오전 8시 전까지 표본보관용기와 함께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내가 청소하게 된다면 표본보관용기는 무조건 전달 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필요한 것들도 보충받아야지.

문자를 보낸 다음, 나는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하기 시작했다.

"밧줄과 공구. 천막과 침낭...."

챙기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차고 넘친다. 말 그대로 필요할 것 같은 온갖 것들을 다 인벤토리 안에 밀어넣었다.

그중에는 식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벤토리에 들어간 물건은 들어가기 전 상태를 유지하니까.

다양한 상황을 상정하며,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쟁여두어야 한다.

"아, 그래. 아예 미친 척하고."

나는 소형발전기와 안에 채울 마력 카트리지까지 구매했다. 계산대 앞에 선 나는 미화원 신분증을 점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업무상 구매입니다."

실제로

"네? 아... 네!"

멍하니 신분증을 바라보던 점원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낸다. 처리를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절차를 모르는 모양이다.

결국, 잠깐 허둥거리던 점원이 상사를 호출해 절차를 진행했다.

"저기... 근데 이걸 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십니까? 당점에서는 배달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내가 구매한 물건이 좀 많다. 온갖 잡다한 것들을 마트에서 싹 긁어모으다시피 했으니까.

전표에 긁힌 금액이 500만 원 언저리다. 카트도 하나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네 개를 사용했다.

"오늘 중으로 가능합니까?"

"네, 문제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인벤토리에 다 집어넣고 갈 수도 있지만....

굳이 시선을 끌어 구경거리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다.

배달받은 주소를 적은 다음, 나는 밖으로 나와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봤다.

네가 쉬고 있을 납골당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견습 미화원은 거처에서 1시간 이상 걸리는 장소로는 갈 수 없다.

"에휴."

딱히 갈 곳도 없었기에, 결국 나는 정부에서 제공한 거처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구매한 물건들이 거처 앞으로 배송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밀어넣었다.

그러다가, 쌓여있는 상자들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안 터지는 걸로 유명하긴 한데...."

부탄가스 28캔이 들어있는 커다란 박스 다섯 개. 아주 낡은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가끔씩 찾는 물건이다.

마력전지로 만들어내는 불꽃은 고기 굽는 맛이 없다나 뭐라나. 아마 젊은 사람들은 이게 뭔지도 모르겠지.

나는 포장을 풀지 않고 인벤토리 안에 밀어넣었다.

"충격과 불꽃으로 폭발한다고 했었지."

커다란 화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한 박스 꺼내서 던진 다음 소총을 갈겨버릴 생각이다.

꽤나 인상 깊은 폭발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한다.

"에, 에취!"

물건을 인벤토리에 집어넣던 나는 순간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했다.

"어?"

그리고 다시 집어넣던 물건을 확인했다.

상자가 절반 정도 인벤토리 안에 들어간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8화. 갑순이네 (2)

인벤토리에 들어간 모든 것은 시간이 멈춘다.

그럼, 절반 정도 들어간 것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눈앞에 그 대답이 펼쳐져 있었다.

일렁이는 공간 너머로 절반 정도 들어간 상자가 그대로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물리법칙을 능욕하는 수준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쌍으로 무덤에서 손을 잡고 일어나 경악할 정도다.

"...."

나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상자에 닿는 순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상자가 툭, 하고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손에 닿으면 다시 움직이는 건가?

나는 다시 한번 상자를 인벤토리에 반 정도 걸쳐놓고 손을 뗐다.

"역시."

아까와 똑같이 허공에 고정된 상자. 나는 발을 가져가 힘껏 밀었다.

"하."

안 밀린다. 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깐 허공에 고정된 상자를 바라보던 나는 전력을 다해 상자를 발로 밀었다.

"크... 흑...."

안 움직인다. 인벤토리에 들어가다가만 물건은 인벤토리에 들어있을 때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다.

시간이 멈춘 물건은 파괴되지 않는 걸까.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알루미늄 호일을 꺼내 절반 정도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손을 놓았다.

허공에 멈춘 호일을 바라보던 나는, 곧바로 젓가락을 던졌다.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젓가락이 호일을 강타했다. 뚫리기는커녕, 구겨지지도 않았다. 알루미늄 호일인데.

마지막으로, 나는 허공에 떠 있는 호일을 바라보며 다른 물건 하나를 집어들고 인벤토리에 넣으려는 시도를 했다.

이 상태로 인벤토리를 계속 써먹을 수 있나?

"...안 열리는구나."

안 열린다. 동시에 인벤토리 두 개를 쓰는 건 불가능한 건가.

하지만 그게 딱히 심각한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부서지지 않는 방패잖아."

내가 전력을 다해 투척한 젓가락이 알루미늄 호일 한 장을 뚫지 못했다.

아마 젓가락을 던지는 게 아니라 총을 쏴도 결과는 같았겠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호일을 잡았다.

"아니, 이건 또 가능하네."

장갑을 낀 손은 손으로 쳐주는 건가. 그렇다면... 인벤토리로 고정시킨 호일을 향해 식칼을 힘껏 찔러넣었다.

식칼이 그대로 휘어져버렸다.

"이건 또 아니고. 도대체 기준이 뭐야."

장갑을 낀 건 손으로 쳐주지만, 손에 잡힌 식칼은 손으로 쳐주지 않는다니.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머리를 긁었다.

"고졸이 과학자 놀이를 하고 있네. 정신 차리자."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법칙 같은 걸 알아내는 건 잘 배운 똑똑이들이 하는 일이다.

나 같은 녀석들은 그냥 경험을 통해 '이게 되네?' 같은 식으로 알아내고 활용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내가 알아낸 사실.

인벤토리에 아주 약간이라도 들어간 물건의 시간은 멈춘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위해서는 내 손길이 닿아야 한다.

나는 이걸 절대 부서지지 않는 방패로 써먹을 수 있다.

"시간 빨리 가네."

벌써 밤 11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침과 분침. 오늘 하루가 바빴다는 증거겠지.

나는 시계를 바라보다가 침실로 향했다.

"아, 카탈로그."

침대 옆에 떡하니 놓여있는 단말기가 보인다. 식사 주문이나 방청소 같은 것을 부탁할 수도 있고, 카탈로그 메뉴로 들어가서 정부가 제공하는 장비들을 살펴볼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원거리는 충분하지."

당장 나에게 필요한 건 원거리에서 투사할 수 있는 추가적인 화력이 아니다.

소총과 권총이 있는데 활 따위를 살 이유가 없다. 이런저런 특수 섬유를 이용한 옷?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동전만 한 마력전지 하나 끼워넣으면 세 시간 동안 유지되는 역장생성기가 있다.

"...."

이 카탈로그에서 제공되는 물건 중, 나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주변의 위협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는 수단들이다. 카탈로그를 살피던 나는 진동감지 레이더를 선택했다.

주변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진동이 감지되면 홀로그램을 띄워 위치를 표시해주는 물건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카탈로그를 더 바라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컵라면을 먹던 나는 우길영에게 부탁했던 것들과 표본을 담을 보관용기, 그리고 어제 주문했던 진동감지 레이더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좋아."

인벤토리에 넣을 물건은 넣고, 바로 몸에 장착할 것들은 장착한다.

소총과 권총에 미리 탄창을 끼워둔 채 인벤토리에 넣고, 나머지 탄창도 모두 탄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합류하기로 정해진 서울역으로 향한다.

"여기예요!"

서울역에 도착하자, 저 멀리에서 곧바로 한세희의 외침이 들렸다.

그 옆에는 유상철도 서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오민혁도 합류했다.

"좋아, 바로 이동하자고."

유상철이 우리에게 기차표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역으로 걸어가며 이리저리 바라보던 오민혁이 질문했다.

"다른 미화원들은 기차도 전용을 쓴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그러는 녀석들도 많지."

유상철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전용 기차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기차와 달리 딱 한 칸으로 운용되는 물건이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쓸 이유가 없다."

정해진 시간에 오는 기차를 타고 이동해도 문제가 없는데 유난을 떨 필요가 없다는 건가.

"하긴, 그렇겠네요. 시설이 엄청나다고 들어서 궁금했어요."

대답을 들은 오민혁이 순순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막만 한 땅의 이동수단 주제에 온수풀과 침대가 있다. 그리고 선반에는 콘돔도 있지."

그 정도면 레일 위를 달리는 모텔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원래 목적대로 쓰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 휴식 중에 자기 돈 내고 그러면 모를까."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잠시 뒤 기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지정된 좌석으로 향했다. 네 명이 모두 좌석에 앉자, 곧바로 오민혁이 입을 열었다.

"몇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조사해봤지만, 이렇다 할 정보가 없어요."

"성실하네?"

한세희가 오민혁에게 가볍게 칭찬을 했다.

"안에 들어갔던 미화원들이 죄다 죽었으니까."

유상철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굉장히 심각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현재로서는 갑순이네 내부의 상황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잠깐 눈가를 문지르던 유상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모든 오염지대가 대놓고 오염원이 드러나 있지는 않으니까."

그저 특별한 능력과 강인한 육체만으로는 청소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정말 어이없는 과정과 황당한 원인으로 인해 죽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강해져도 오염지대에 진입한 이상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당장 지금 우리가 향하는 갑순이네만 봐도 알 수 있지."

노련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미화원도 견습 미화원과 함께 들어갔지만, 살아나오지 못했다.

"저번에 청소했던 곳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까."

"일반적인 형태는 아닐 거다."

기차 밖으로 풍경이 흘러간다. 한도 끝도 없이, 하늘을 찔러버릴 것처럼 우뚝 솟은 건물들은 한국의 번영와 풍요의 증명이다.

― 고객 여러분,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달리던 열차의 속도가 느려지나 싶더니, 안내방송이 나온다.

대구에 도착했다는 방송이었고, 우리는 내려서 곧장 갑순이네가 위치한 문제의 장소로 향했다.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장소 주변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신분 확인을 받았다. 다시금, 시커먼 벽 앞에 서게 되었다.

인이어를 끼고, 통신 상태를 확인한다.

"자, 들어가자고."

유상철의 지시와 함께,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불길한 검은 벽 너머로 우리는 발을 내딛었다.

[갑순이네. 13:15 PM]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간판이 깜박이는 낡은 정육점 건물이었다.

잠깐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던 한세희가 눈앞의 정육점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정육점에 네온간판? 가게 이름은 갑순이네인 주제에?"

그녀의 말대로, 우리의 눈앞에서 지잉, 지잉 하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껌벅이고 있는 것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네온간판이었다.

"조심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소총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도 저희끼리 시도합니까?"

유상철이 내 말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동행한다."

이미 미화원 여럿을 잡아먹는 데 성공한 오염지대다. 유상철도 저번과 같은 방침을 고수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내가 앞장선다. 뒤따라 진입하도록."

우리는 긴장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삐걱이며 정육점으로 보이는 가게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진입했다.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우리의 입장을 알린다.

"넓고... 깨끗하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귀를 찌르는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의 비명같이 날카로운 소리와, 불쾌할 정도로 큰 북소리,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 같은 피아노의 불협화음.

잠깐 정신이 아찔해졌던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새하얀 바닥과 벽. 새빨간 조명 아래에 진열된 살덩이들.

"어서오세요"

고기진열대 너머에 서 있는 것이 우리에게 인사한다. 순록탈을 쓰고 있는 3m가 넘어가는 근육질의 거구.

입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무 앞치마가 전부였다.

"찾으시는물건이있습니까"

말을 함과 동시에 커다란 중식도가 도마 위에 올려진 살덩이를 내려치며 쾅! 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순록탈에 박힌 시뻘건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본다. 광택이 없고, 초점도 없는 시선.

"구경 좀 하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유상철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순록탈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진 것을 손질한다.

"이거, 지뢰를 밟은 것 같은데."

유상철이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경험 많은 베테랑 미화원이 저런 말을 하니 절로 나까지 긴장된다.

"심각한 상황입니까?"

내 질문에 유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오염지대 안에는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어. 어기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오염지대 안에는 누르면 안 되는 폭탄 스위치가 숨겨져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 폭탄 스위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정육점 안에서 우리는 뭘 찾아내야 하는 걸까. 시간이 흘러간다.

혹시나 해서 쇼케이스 안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해봤다. 개 중에 일부는 소나 돼지, 닭 같은 일반적인 가축들의 고기였다.

하지만.

엉치살 350g(대한민국산, 거세수컷)

심관 75g(영국산, 어린암컷)

마음을 심란케 하는 것들도 떡하니 진열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고기에 붙어있는 가격표도 이상했다.

숨 쉬는 법 한 뼘, 삶의 소중함 2온스 같은 것들이 고기를 구매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다.

단위가 이상한데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살벌하니 감히 구매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그러고있을건데"

순록탈을 뒤집어쓴 거한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가게에 들어와서, 물건은 사지 않고 가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손님. 저 순록탈이 가게 주인이라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안들리냐"

언제.

저 순록탈이 우리 앞에 서 있게 된 거지. 전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녀석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진다. 동시에 나는 온몸의 털이 바싹 서는 느낌을 받았다.

본능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위험.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절대로 아니라는 확신.

"...젠장."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상철조차도, 먼저 저 순록탈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뭐라도, 뭐라도 없을까 살피던 내 눈에, 뒤늦게 아까 봤던 벽보가 떠올랐다.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넘겼던 벽보였다.

"투, 투어!"

내 외침에 움직이던 순록탈이 멈칫했다.

"너, 임마 지금...."

유상철이 급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당장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방금 전 기세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거랑 싸우면 무조건 뒈진다.

"코스요리 시식회...! 아직도 진행 중입니까?"

내가 가리킨 벽보에는 그런 안내문이 써져 있었다.

[갑순이네와 함께 선택으로 즐기는 다섯 가지 코스 요리! 시식회 진행 중]

살아가다보면, 때론 일을 저질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들 하지.

머릿속에 벼락같이 꽂힌 하나의 생각. 그 생각의 타당성을 검토하기도 전에 먼저 입에 담아야 하는 상황 말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식회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진열대에 있는 것들 못 봤어요?"

한세희가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러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다른 방법이 없었잖아요."

"그건... 그렇죠."

뭐라고 더 말을 하려던 한세희도 이내 수긍했다. 내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더 고민을 할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우리는 분명 신선한 육고기로 해체되어 포장된 다음 진열대에 올랐을 테니까.

"시식회참석말씀이십니까"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살벌하게 반말을 하던 순록탈이 다시 존댓말을 사용한다.

나의 선택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가 벌써 나온 셈이다.

"값을치르시겠습니까현장행사를진행하시겠습니까"

시식회는 값을 치르거나, 현장행사를 진행해야 참석할 수 있는 모양이다.

"값은 얼마입니까?"

내 말에 순록탈이 곧바로 대답했다.

"소중한기억한되입니다"

소중한 기억 한 되라니.

단위가 이상한 건 그렇다 쳐도, 소중한 기억을 지불해야 한다면 나로서는 값으로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들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현장행사는 뭔데? 어떻게 해야 끝나는 거지?"

"알려드릴수없으나알게될것입니다"

말을 마친 순록탈이 옆으로 비켜나자, 녀석이 서 있던 바닥에는 원래 없었던 다락문이 하나 생겨났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다락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현장행사진행으로알겠습니다"

우리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저기로 들어가야 한다.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눈앞의 순록탈을 상대하면 반드시 죽는다.

"저 아래에 필연적인 죽음이 있다 해도, 최소한 몇 초라도 우리의 죽음은 유예되겠지."

"그렇죠."

유상철이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판매하는 고기를 보면, 그 시식행사라는 것도."

오민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고등학생이 뭘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한다.

"잊지 마, 선택메뉴로 구성된 다섯 가지 코스야. 뭘 먹을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정육점에서 파는 고기 중에는 감히 입으로 가져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것들과, 우리가 늘상 먹던 고기가 혼재되어 있다.

피하면 된다.

사실,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떠드는 중이다.

"만약에 모든 메뉴가 다 엉망이라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상철이 휙, 하고 손을 한 번 털며 말했다.

"그런 걸 하나하나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김상선의 판단이 맞아. 우리는 내려간다."

곧바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아니고 유상철의 판단이라면 우리 모두가 존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앞장선다."

유상철의 말과 함께 우리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계단으로 발을 내딛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비정상적인 허기가 내 몸을 덮쳤다. 위장에 빵꾸라도 난 것 같은 무지막지한 허기.

"크흑...."

스스로의 뺨을 한 대 후려친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거대한 갈고리들이 무수히 걸려있다. 털이 밀린 창백한 시체들이 갈고리에 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피를 완전히 뽑아낸 모양인지, 바닥에 떨어진 피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에서 골절기 돌아가는 소리와 고기분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냉장된 고기 특유의 냄새가 이 지하를 불쾌하게 부유하고 있다.

"대충 알겠군. 이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먹을 생각하지 마라."

경험 많은 미화원답게 유상철이 곧바로 우리에게 명령했다. 배가 고프면 뭔가를 먹고 싶어진다.

이 오염지대가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여기 있는 것들을 먹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거참...."

갈고리에 걸린 시체를 바라보던 한세희와 오민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차피, 먹을 수 있는 건 저에게 많습니다."

나는 인벤토리에 많은 것들을 챙겨왔다. 전부 모두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아, 김상선 씨가 있었죠."

두 사람의 표정이 약간 나아졌다. 이 오염지대 안에 있는 것들은 절대 먹으면 안 되지만, 우리에게는 대응법이 있다.

"그래도 가능하면 참아. 뭐 주워먹다가 갑자기 싸우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유상철의 말에 일리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걸까요?"

한세희가 질문했다. 여기에서 뭘 해야 한다는 건지, 이 현장행사라는 것이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지. 당장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갈고리에 걸린 시체들을 보며 침이나 꼴딱꼴딱 삼키는 게 지금 우리의 신세였다.

"이런 것도 못 참으면 미화원 일 오래 못 해."

"알겠습니다."

우리는 갈고리에 걸린 시체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시선을 애써 돌렸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진동감지기가 삐빅거리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주변에 원인불명의 진동이 추가되었다는 뜻이다.

"뭔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내 말에 모두가 곧바로 전투 준비를 갖췄다.

갈고리에 걸린 시체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다. 묵직한 발소리는 이제 진동감지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이런 씨...."

쌍욕이 올라온다. 그건 나 뿐이 아니었다. 한세희가 순간 자신의 입을 막았고, 오민혁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푸줏칼과 예리한 뼈칼을 손에 쥐고 있는, 순록탈을 쓴 거인들. 우리가 위층에서 봤던 그 살벌한 가게 주인과 똑같이 생겼잖아.

― 머... 머리. 털을태우고눈알을제거해삶아눌러굳힌다

하지만 뭔가 다른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동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진짜 호랑이와 영상으로 보는 호랑이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 정도는 아니다. 정신 차려."

그때, 유상철이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을 빠르게 정신 차리게 하는 법은 잘 모르는 건가?

나는 인벤토리에서 소총을 꺼내들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순록탈의 대가리를 향해 한 방 날렸다.

천둥 같은 총성과 함께 5.56mm의 폭발하는 죽음이 날아가 저 추한 알몸 고무 앞치마 순록탈의 추한 머리통을 작살냈다.

머리가 사라진 순록탈은 가만히 서 있다가, 그대로 옆으로 팍 꼬꾸라졌다.

"봐, 별거 없잖아."

가게에서 우리를 협박하던 그 무시무시한 순록탈이, 과연 내가 쏜 총을 맞았을까?

절대 아니지. 설사 맞았다 해도 상처 하나 없었을 거다. 곧바로, 다른 두 명도 용기를 되찾았다.

― 오금의연골과힘줄을국거리로쓸수있다

― 혀의밑뿌리를제거하고껍질을벗기면구이감으로좋다

― 허벅지는살이부드럽고기름기가많다

― 사타구니와겨드랑이괄약근은냄새가심하니반드시제거한다

마음을 가다듬은 건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뜻 모를 소리와 함께, 녀석들은 대뜸 손에 쥐고 있던 무지막지한 사이즈의 푸줏칼을 휘두르며 돌진한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총알 한 방 머리에 맞으면 끝장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리가 쫄아있을 이유가 없지.

시작은 한세희의 호흡이었다. 들숨과 함께 녀석들로부터 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그녀에게 빨려들어간다.

녀석들의 움직임이 잠깐 멈춘 사이, 오민혁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록탈 세 마리의 머리가 삽시간에 촛불로 변해 불타오른다.

"이게 전부인가?"

열 마리 정도 되는 이 가짜 순록탈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위쪽의 진짜 순록탈이 현장행사니 뭐니 하는 소리를 떠든 것 치고는 별거 없는....

"뭐야, 시체 어디 갔어."

순록탈의 시체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 엉덩이살은씹는맛이좋고기름기가적당하니구이용으로두껍게썬다

삐빅거리는 진동감지기의 경고음, 저 멀리에서 또다시 들리는 순록탈들의 기괴한 말소리.

"지랄이 났어요, 아주."

우리는 다시 교전에 들어갔다. 덤벼드는 순록탈을 모조리 처리했다.

시체가 사라지고, 다시 가짜 순록탈 한 무리가 나타난다. 전부 죽이면 시체가 사라지고, 다시 가짜 순록탈 한 무리가 나타난다.

이 반복이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우리는 도합 다섯 번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전투 자체가 어렵다고 할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쏟아져나오지만, 강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숨돌릴 틈도 충분히 주고 있다.

문제는....

"진짜, 배고파 미칠 것 같은데."

강렬한 허기가 점점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좀먹는다.

"이거, 배고프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에요."

한세희가 단언했다. 저 말에 나도 동의한다. 이건 그냥 배고프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우리는 며칠 굶은 상태로 싸우는 중이다.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젠 진짜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싸우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오민혁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라이터를 흔들었다.

"이런 건 먹다가도 바로 싸울 수 있잖아요."

저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갈고리에 걸려있는 시체들은 먹으면 위험하다지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나에게 얼마든지 있다.

뭐 거나하게 퍼먹자는 게 아니다. 중간중간 기력을 되찾기 위해 뭐라도 씹자는 뜻이다. 인벤토리에 있는 것들 중에는 간단하게 먹어치울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다.

"그래, 그 편이 맞는 것 같다."

유상철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생각을 좀 더듬어보자.

"...."

나는 스스로를 꽤나 잘 객관화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세 팀이 먼저 들어왔었다고 했었지.

포스터를 보고 탈출법을 떠올린 다음 행동하는 것. 그게 정말로 다른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발하고 참신하고 천재적인 방법이었나?

그건 아니다.

경력 있는 정규 미화원 세 명에, 나와 같은 견습 미화원이 아홉 명이잖아.

전부 또는 일부는 나와 같은 방법으로 현장행사를 진행했을 거다. 여기 걸려있는 시체들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

지하에 진입하자마자 덮쳐드는 허기로 인해 눈치채지 못하는 게 힘들다.

근데 못 돌아왔잖아, 죽었다는 뜻이다.

왜?

"아, 드디어 뭐라도 먹겠네요."

내가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오민혁이 라이터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손을 뻗어 녀석의 손에 쥐어진 라이터를 쳐냈다.

"...? 갑자기 왜 이러세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오민혁. 배고픈 상황에서 누군가 손에 쥐어진 먹거리를 쳐낸 것 치고는 꽤나 차분한 반응이었다.

"먹지 마. 생각해봤는데, 지금 상황이 이상한 것 같다."

곧이어, 나는 빠르게 방금 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그래서 막았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침묵했다.

"그럼 네 생각대로라면 지금 우리 머릿속이 맛이 가 있다는 뜻이냐."

유상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

"현기증, 다들 느끼셨죠?"

지하로 발을 내딛는 순간 느껴진 강한 현기증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때 우리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게 아닐까.

"현장행사종료"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뒤를 돌아보니, 가게 주인으로 보이던 바로 그 순록탈이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과 닭살이 쫙 피어났다.

방금 전까지 상대하던 순록탈들과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시식회장으로안내하겠습니다"

순록탈이 다시 옆으로 물러났다. 거기에는 텅 빈 자리에 문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스스로 선택하는 다섯 개의 코스요리."

나는 다시금, 우리가 참가하겠다고 말한 시식회를 떠올렸다.

"망할."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선 안 되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다. 그리고, 이 오염지대를 나가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될 확률이 높다.

그럼....

이 상태로 어떻게 코스요리의 지뢰를 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