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파르샤
"휴우…."
메르디아 공녀가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간 그날 저녁. 집무실에서 어김없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하던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의 약혼식에는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했는데…."
물론 앞으로 더한 일들도 이겨내야 하기에 벌써 한숨이나 내쉬고 있으면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블랙 테일 판타지 3의 프롤로그는 고인물들도 잠깐 방심하면 어김없이 재시작을 하게 될 정도로 어려운 편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게임에 익숙해진 이후로는 딱히 재시작을 한 적은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의 이야기지 현실과는 다르다.
"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황자의 약혼식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솔직히 한번 질러본 것이었지만 운 좋게도 메르디아에게 소원권 하나를 보장받은 것도 작은 위안거리다.
비록 그녀는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소원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그러니 머리도 식힐 겸, 서류 정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약혼식 시나리오를 무사히 넘겨낼 방도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일단, 내 능력이 저주에 강한 백마법이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아무튼, 약혼식 시나리오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무기부터 정리해 보자면. 우선적으로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백마법의 재능을 꼽을 수 있다.
사실 일반적인 백마법은 흑마법의 대응 수단으로서나 효과적이지 전투적으로는 딱히 잘 쓰이지 않지만, 활용만 잘한다면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특히 흑마법으로 인한 저주가 주된 원인인 프롤로그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백마법이 활약할 여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프롤로그의 난이도를 생각한다면 내 백마법 하나로는 턱도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실, 일주일 전 메르디아의 다과회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혹시나 내 백마법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닐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마법진을 만드는 틈틈이 내 백마법 역시 연구한 결과는, 내 백마법이 '쓸데없이 기분 나쁜 파장 내뿜기' 하나는 참 잘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특수한 능력 따위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아직 완전히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생물 실험군과 야근에 지친 알프레드에게 몇 번이고 백마법을 사용해 보고 내린 결과니 아마 극적으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흑마법에는 무언가 반응을 할 줄 알았는데.'
심지어 다과회에서의 상황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해 나중에 혼날 것을 각오하고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몇몇 흑마법 압수품에도 내 백마법을 사용해 봤지만, 이변은 없었다.
내 쓸데없이 기분만 나쁜 회색빛 백마법은, 그저 여타 백마법과 다를 것 없이 깔끔하게 압수품들에 걸려 있던 저주를 소멸시켰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눈 깜짝할 새에 게임 오버가 되기 십상인 약혼식 시나리오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야겠지.
다행히도 나에게는 지금 믿을 만한 호위인 루니엘이 있긴 하지만, 그녀 하나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약혼식 시나리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력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보력과 작전 구상력 등등 필요한 능력들이 많으니까.
물론 나 혼자서 그 모든 걸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그것을 나를 대신해 수행해 줄 전문적인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역사상 최강의 드림팀으로 불리게 될 그 조직의 초기 구성원들은, 이미 내가 정해 둔 뒤다.
첫째로는 게임 내 최강의 무력을 지닌 황제의 수호 기사 루니엘. 둘째로는 게임 내 최강의 통찰력을 가진 메르디아의 집사 파르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임 내 최강의 정보력을 가진 플레이어의 비밀 정보원 베르건.
수식어와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하나가 전부 사기 캐릭터지만, 게임 시스템상으로 그들은 절대 같은 편이 될 수 없다.
세 명 전부가 게임 내 주역들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이기에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의 제약을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현실이라면 어떨까?
이미 루니엘을 나의 편으로 만들며 이상한 억제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확인했으니, 다른 두 명 역시 당연하게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에 성공한다면, 완벽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꿈의 조합이 나의 가장 큰 아군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만 한다.
다행히도 베르건의 소재는 이미 파악되어 있으니, 아직 메르디아의 집사가 되기 전인 파르샤의 소재만 파악하면 되는데….
여기서 한가지 사소하면서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파르샤의 소재는 메르디아의 집사가 되기 전까진 게임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설정이 정리되어 있는 설정집에서도 불명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토리에서도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듯 메르디아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는 그녀는, 정말이지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전략을 펼쳐 나락에 빠져 있던 메르디아의 입지를 복구해 낸다.
그 능력이 너무나 유능했던 나머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담은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메르디아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대체 왜 메르디아에게 맹목적일 정도의 충성을 보인 건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메르디아가 마왕 같은 인물이 되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하며 끝까지 그녀만의 충신으로 남는다.
물론 나는 메르디아가 그런 논외의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그냥 적당히 무서운 공작 영애로 남아줬으면 하기에, 파르샤가 그녀의 집사가 되기 전에 설득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덤으로 우리 가문 재정도 그 신들린 통찰력으로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사실 지금 백작가의 재정 상태가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접어들고 있는 것도 어떻게든 파르샤를 섭외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것도 전부 행방이 묘연한 그녀를 찾아야만 해결되는 일이다.
"아이고 도련님,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덕분에 제국 수도에 포스터라도 붙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던 무렵, 별안간 집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알프레드의 앓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저택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지를 않나, 하녀들이 단체로 병가를 내질 않나…."
저택에 괴소문이 도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고, 메르디아 덕분에 마음고생을 했을 하녀들이야 넉넉히 병가를 챙겨주면 되는 일이 아닌가. 내가 맞닥트린 문제에 비하면 걱정거리도 아닌 일을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
"알프레드, 혹시 사람 찾는 거 잘해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알프레드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세를 바로 하며 질문을 던졌다.
저번에 알프레드가 나에게 건넸던 후임 추천서를 보았을 때, 그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용인들이 많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사람… 말입니까? 인상착의만 안다면 못 찾을 것도 없지요."
"제가 사실 긴히 쓰일 사용인을 한 명 찾고 있거든요."
"아, 그런 거라면 이야기가 더 쉽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멀뚱멀뚱하게 나를 쳐다보던 알프레드는 잠시 헛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찾으시는 사람이 사용인이고 제국 사람이라면 며칠 내로 신원을 정리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요?"
"이래 봬도 제가 이 바닥에서 구른 것만 40년입니다. 한창때는 전국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었고, 지금도 제국 사용인 집회에 원로로서 발을 걸치고 있죠."
알프레드의 능력을 평소에도 고평가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였을 줄이야. 하긴 지금이야 알프레드가 별 볼 일 없는 우리 가문에 종사하고 있지만, 왕년에는 상당히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아버지가 언뜻 말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파르샤의 소재를 의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메르디아에게 집사로서 스카우트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지금쯤 여러 저택에 이력서를 돌리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물론 평범한 귀족 가문에서는 그런 어린아이를 집사로 고용할 리가 없을 테니 빈번히 퇴짜를 맞고 있을 테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메르디아처럼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충성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럼, 혹시 이분을 좀 수소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뭐, 맡겨만 주십…."
그렇기에 나는 속으로 희망을 품은 채, 포스터라도 붙일 생각으로 그렸던 파르샤의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알프레드에게 넘겼다.
"...!"
그런데, 어째 그림을 넘겨받은 알프레드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설마 바로 누군지 알아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너무 못 그려서 그러는 건가?
"도련님."
괜히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알프레드가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제 손녀딸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그 말을 들은 나는, 실로 오랜만에 활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법이었구나?
"하하…."
"흡."
왠지 내 표정을 살피던 알프레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다급히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찾았다."
내 평온한 안위를 위한 두 번째 조각을 막 발견해 낸 참이었으니까.
*****
"하아…."
그로부터 며칠 뒤. 제국 서부 지역의 주인 없는 언덕에 자리를 잡은, 평범하디 평범한 오두막.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단 말이지."
그 안에서 낡아빠진 의자에 기댄 채 다 닳아가는 노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던 한 소녀가, 문득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 좋은데, 결정적인 게 빠져 있잖아."
마치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비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의 초상화였다.
"탈락."
무척이나 불경스럽게도 그 초상화가 그려진 페이지를 찢어서 구겨버린 소녀는, 그것을 뒤편에 있던 휴지통에 대충 던지며 노트를 넘겼다.
"이 사람은 카리스마가 없네, 탈락. 얜 너무 느끼하게 생겼어, 탈락. 이 녀석은 딱 봐도 고집을 부리다 전부 말아먹을 상이야. 탈락."
그 뒤로도 한동안 노트에 가득하던 인물의 초상화를 무참하게 찢어버리던 그녀는.
"역시, 이분이 그나마 제격인가?"
결국,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서야. 그러한 기행을 멈추고는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완성형 마왕도 좋지만, 성장형 마왕도 나쁘지는 않지."
그녀가 그러한 평을 내린 것은, 바로 메르디아의 초상화가 그려진 페이지.
그 페이지를 마치 보물이라도 다루듯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소녀가, 이내 소중히 그것을 뜯어내어 품에 안는다.
"어쨌든 마왕의 2인자가 되는 건 별반 다름없으니까…."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희열로 물든 채 떨리던 참이었다.
-똑똑똑….
"음?"
별안간 오두막의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한차례 울려 퍼진 것은.
"아이고, 도련님…. 제발 부탁입니다. 제 손녀는 아직 앞길이 창창…."
"그러니까, 더 창창해지게 제가 취직시켜 드린다니까요?"
"할아버진가?"
덕분에 잠시 자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녀는, 문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입구로 옮겼고.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그다음 순간, 그녀의 말이 잠시 툭 하고 끊어졌다.
"안녕하세요?"
어째서인지 사색이 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의 할아버지 옆에서, 생전 처음 보는 소년이 반가움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그리고 눈앞의 그 소년을 한참이나 멍하니 올려다보던 소녀의 눈동자는, 그제야 그녀 또래의 아이들처럼 마구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쳤네."
그 이유가 꿈에서나 그리던 사악한 존재가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딱히 또래의 아이들답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괜찮으시다면 사용인 시험에 지원해 보시지 않을래요?"
"저기, 혹시 집에 사용인 한 명 필요하지 않으세요?"
이윽고 둘의 말이 한데 겹친 채 오두막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소녀의 품에 안겨 있던 메르디아의 초상화가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늙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그 옆에서 시시각각으로 몸이 늙어 가는 것을 체감하던 알프레드가 또다시 앓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둘이었다.
11화 파르샤 (2)
휘트니에게 곧 은퇴가 예정된 알프레드를 대신할 집사 자리를 제안받은 다음 날, 파르샤는 사용인 시험에서 역대 최고점을 갱신하며 당당하게 린가드 저택에 입성하였다.
물론 딱히 시험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휘트니는 그녀를 무조건 합격시켰을 테지만, 그런 편의를 봐주기에는 파르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재정 상태가 정말이지 말이 아니군요?"
"하하…."
그렇게 집사로서의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저택의 장부와 서류들 대부분을 확인하는 기염을 토해 낸 그녀는,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휘트니의 마음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평가하자면 이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요. 인제 와서 뭔가를 새로 시도해 본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고요."
물론 아무리 집사장의 손녀라고 한들, 들어온 지 하루밖에 안 된 파르샤에게 가문의 치부가 될지도 모르는 장부를 보여주는 것에는 상당히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이대로 가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아마 3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그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주변의 반대에도 기어이 장부 대부분을 넘긴 휘트니였지만, 막상 파르샤의 입에서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이 튀어나오자 괜히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문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그런데, 뒤에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던 그녀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말했듯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하셔도 된답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휘트니가 자신 대신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하자, 잠시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파르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1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짙게 떨리고 있었다.
"메르디아 공녀와의 약혼, 성사됐죠?"
그 말에 휘트니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자, 완전히 신이 난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메르디아 공녀의 약혼이 물론 귀족들의 이야깃거리긴 하지만, 저도 꽤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할아버지한테 받는 용돈을 가십지에 전부 투자할 정도로요."
"…그럼, 가십지에서 저와 그녀의 혼담이 오고 간다는 정보를 보신 건가요?"
"네. 물론 멍청한 기자들은 하나같이 메르디아 공녀가 백작가에 기웃거릴 정도로 급해진 모양이라고 씹어댈 뿐이었지만, 전 확신할 수 있어요. 두 분 사이에 이미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을 거라는 걸."
그 모습이 영락없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하는 모범생 같았다.
"며칠 전 저택 관리 서류를 확인해 보니까 의심되는 정향이 있더라고요. 하녀들은 갑자기 병가를 내고, 접대용 차와 과자가 반출된 기록은 있는데 정작 저택 입출 기록은 깔끔하고."
"흠…."
"그걸 보면 그날 누가 저택에 방문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죠."
말을 마친 파르샤가 눈을 반짝이며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이 휘트니를 바라보며 은근히 물었다.
"저 집사로 삼으시길 잘했죠?"
하지만 어째 휘트니가 여전히 말이 없자, 그녀가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쯤.
"가십지는 저도 즐겨 보는 편인데."
파르샤의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갸웃거리던 휘트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이름이 거기에 나왔던가?"
"…!"
그 말에 파르샤가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그것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혼자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이내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파르샤 양의 말이 다 맞겠죠."
비록 그의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방의 분위기는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저는 당신의 통찰력을 상당히 높게 치고 있으니까요."
물론 정말로 방 온도가 내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흉흉한 미소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던 파르샤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파르샤 양의 말대로 1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나요?"
"아, 네?"
덕분에 잠시 굳어 있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저희 가문의 재정이 안정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휘트니의 질문에, 이번에는 지체 없이 즉답하는 그녀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제야 휘트니의 미소가 만족스럽게 바뀌자, 얼어붙어 있던 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저는 잠깐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죠."
덕분에 파르샤가 잠시 숨을 돌리던 와중에, 휘트니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등을 돌렸다.
"아. 재정에 대한 권한은 전부 위임할 테니, 저한테 보고할 필요 없이 한번 마음껏 재능을 발휘해 보세요."
그렇게 방을 나서기 직전에, 살짝 고개를 돌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석 집사 파르샤 양."
이내 방의 문이 닫히자, 집무실에는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그 적막 속에서 잠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파르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셨어.'
물론 그녀의 지능 자체도 제국에 견줄 자가 적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사실 파르샤의 진짜 재능은 '통찰력' 자체에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나를 대량으로 소모해 대상의 본질이나 사건의 대략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그녀의 진짜 능력이었다.
'할아버지가 미리 언질을 준걸까? 아니야, 내 능력에 대해서는 할아버지도 자세히 모를걸?'
물론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르샤가 신체에 선천적인 축복을 가지고 태어난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선천적인 축복을 타고난 사람들을 황제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소문은 꽤 유명하다.
그 때문에 파르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황제의 눈에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휘트니는 그 비밀을 만난 지 하루 만에 간파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내 사소한 버릇으로부터 거기까지 추론해 내실 줄은, 정말이지 몰랐는데.'
항상 결론부터 내고 추리 과정을 거기에 끼워서 맞추는 편이었기에, 파르샤에게는 과정을 대충 설명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두가 딱 맞아떨어지는 결론에 집중하며 대충 설명된 과정은 그냥 넘어가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휘트니만큼은 그 허점을 눈치챈 듯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은 채, 아예 '통찰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언급하기까지.
"하핫…."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에, 파르샤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진짜 굉장하잖아…."
물론 휘트니를 마주하는 여타 사람들처럼 두려움이나 오싹함에서 비롯된 떨림이 아니라, 순전히 환희에서 비롯된 떨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 엉망진창인 재정 상태도 전부….'
그쯤 되자 처음에는 그녀의 통찰안으로도 이해가 어렵던 린가드 백작가의 재정 상태에 대해서도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정말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일관성 없이 전개된 가문의 사업들과 투자는, 사실 전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던 거지?'
그것을 깨닫자, 희열로 가득 차 있던 파르샤의 표정에 문득 조그마한 근심이 서린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휘트니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단순히 린가드 가문의 부흥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에는 적어도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어쩌면 몇백 년 만에 제국의 구조가 뒤집힐지도 모르는 대사건이 일어날 테니까.
"아니, 해낼 수 없더라도 해내야지."
덕분에 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을 흘리던 것도 잠시, 파르샤의 눈동자가 다시금 선명해졌다.
"아직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신 것도 있고…."
귀족이 아닌 신분이라면 아무리 유능한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떨치기 힘든 세상이다.
할아버지가 보인 선례로서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파르샤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신분과 나이, 경력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그 누구보다 통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꿈에서나 그리던 순간이잖아, 파르샤."
하지만 사실 그러한 사실들은 파르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왕의 2인자라니,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 어딨겠어.'
조금 전까지도 그녀의 통찰안에 비치던 휘트니의 그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모습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뒤틀린 꿈을 가진 파르샤에게는 무한한 원동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러면 우선 레버테인 광산 지분부터 추가 매수를 해볼까."
그렇게 그날 이후로 린가드 백작가의 얼마 남지 않은 예산은, 전부 휘트니의 '큰 그림'을 돕기 위한 거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날 믿으시고 재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해 주셨으니, 딱히 이런 사소한 일을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그런 그림 따위는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던 휘트니가 알았다면 거품을 물며 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
"휴우…."
있지도 않은 일을 핑계로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벌써 가십지에 내 이름이 돌아다니고 있을 줄이야.'
솔직히 너무 부끄러운 기분이라 파르샤 앞에서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 했다.
옛날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것에는 영 면역이 없는 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된 기분은 참으로 싱숭생숭했다.
그래도 이미 메르디아와 한배를 타기로 결정했으니 더는 돌이킬 수 없겠지.
아무래도 이것도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 모양이다.
'그래도 파르샤에게 재정을 맡겼으니, 이제 근심이 조금 덜해지는 느낌이네.'
혹시라도 파르샤마저 고개를 젓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도 메르디아와의 약혼으로 번 시간 정도면 어떻게든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파르샤에게 모든 걸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재정관리는커녕 투자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옆에서 뭐라 해 봤자 밑천이 다 드러나 실망이나 살 테니, 차라리 그녀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알았더라면 경을 칠 만한 일이었겠지만, 바로 그분이 벌여놓고 가신 일을 내가 가주 대리로서 대신 수습하고 있는 참이니 나중에도 할 말은 없으시겠지.
"지금이라도 장부를 들고 도주해서 가문에 마지막 충성을 바쳐야…."
그러한 생각으로 서류들을 몽땅 꺼내올 때 옆에서 알프레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보나 마나 파르샤 때문에 꿍얼거리는 것일 테니 신경은 따로 쓰지 않기로 했다.
'굳이 신경 안 써도 잘 해내겠지?'
사실 알프레드의 말대로 파르샤가 워낙 어린 나이인 것이 살짝 걱정되긴 하지만, 원래라면 후계자 자리에서 배제되어 가파르게 추락해 가던 메르디아의 재산을 몇 배를 넘어서 수십 배로까지 불려 내는 그녀니 아마 잘 해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파르샤는 대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던 걸까?'
그런데 문득 생각이 그러한 쪽으로 흐르니, 전생에서 봤던 설정집에 쓰여 있던 파르샤의 설명이 뇌리에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메르디아의 집사가 된 불굴의 천재. 특히 그 통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지만, 어째 그녀는 그 사실을 자랑하고 다니진 않는다.'였나.
거의 대부분의 설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설정집에도, 가끔 파르샤의 정보처럼 애매모호하게 서술되어 있거나 아예 두루뭉술 넘어가는 부분이 몇 개 있곤 하다.
'이를테면 메르디아와 보석안이나 황제가 가진 정체불명의 능력에 대한 설명도, 파르샤처럼 상당히 애매모호했지.'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아마 곧 발매될 DLC에서 풀리게 될 떡밥들이라 스포 방지를 위해 그렇게 적어둔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쉽게도 나는 전생에서 DLC가 발표되기 전에 죽었기에 확신은 하지 못하는 상황.
덕분에 살짝 찝찝하긴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문제부터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황자의 약혼식이…. 한 한 달 정도 남았나?'
다행히도 아직 내 운명이 결정될 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은 편이니, 우선 조금 쉬면서 전력을 보충하고 마지막 퍼즐인 베르건을 찾아 나서면 되겠지.
그가 합류하기만 한다면 약혼식 시나리오에서 무력만큼이나 중요한 정보력마저 확보할 수 있을 테니, 의외로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 왠지 모르게 갑자기 자신감이 치솟는 느낌인걸.
"도, 도련님!"
"응?"
그렇게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며 복도를 거니는데, 별안간 뒤에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펴, 편지가 왔어요."
뭔가 했더니, 샤샤가 다리를 덜덜 떨면서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같은 또래에다가 샤자 돌림인 파르샤가 들어왔다고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던 그녀였는데,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걸까?
"샤샤, 편지는 굳이 바로 저에게 줄 필요가 없고 집무실에 가져다 두시면…."
"그, 그건 저도 아는데…. 엄청나게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의문도 잠시, 편지에 시선을 돌린 나는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약혼식 청첩장이 왔나 보네.'
그녀가 들고 있던 건, 다름 아닌 황자의 인장이 박혀 있는 초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수고하셨…."
물론 메르디아와의 거래로 이미 약혼식에 참여하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서 든 나는.
"...."
초대장에 적혀 있던 내용을 보고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휘트니 린가드. 대체 자네는 누구길래 메르디아 공녀가 초대장을 보내라 안달인 건가?」
단순히 초대장 안에 도사리고 있던, 예상조차 하지 못한 황자의 메시지 때문은 아니었다.
「어쨌든 3일 뒤에 열릴 약혼식에서 보세나!」
'지금부터 3일 뒤라고?'
어째서인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르게, 약혼식의 날짜가 너무나도 앞당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편 그 시각, 제국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화려하면서도 은밀한 곳.
"정보는 이게 다인가?"
"예, 폐하."
그곳의 옥좌에 앉아 있던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지루한 눈빛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이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꼴이 말이 아닌 가문의 재정 상태를 제외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기록밖에 없던지라…."
"역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지는군."
"그, 그 말씀은…?"
그러던 그녀가 문득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옥좌 앞에 고개를 조아린 채 필사적으로 변명을 내뱉던 이의 얼굴에 순간 충격이 서렸다.
"황자에게 전하도록."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 맨 위의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실눈을 뜬 소년을 응시하며 다시금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이번 약혼식에는 내가 친히 참석하겠다고."
12화 약혼식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약혼식 당일의 아침.
"하아…."
지난날들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며칠간 집무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나는 우중충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조졌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약혼식이 다가오는 바람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물론 원작 게임의 전개를 알고 있으면서 뭘 그리 걱정하느냐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블랙 테일 판타지 3의 프롤로그는 어떤 시나리오와 플레이어 캐릭터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전개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최소한 정보원인 베르건을 확보하고, 그가 알아내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파르샤와 세부적인 계획을 짜야만 했는데.
알프레드 때문인지 높은 봉급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째 내가 꽤 마음에 든 듯한 파르샤와는 다르게, 그는 단순히 소재를 알고 있다고 해서 바로 영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문제였다.
그 양반이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남은 시간으로 무언가를 해보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아무래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온갖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프롤로그에 뛰어들어야만 할 것 같다.
'지금이라도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할까.'
사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게, 잠을 못 자서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뻐근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약혼은 물 건너갈 테고, 가문은 파르샤의 말대로 풍비박산이 날 테지.
-쾅, 쾅!
"도련님. 마차가 준비…. 힉!"
그런 딜레마에 빠져 머리를 감싼 채 책상에 박고 있는데,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샤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문을 닫았다.
"…들어오세요."
졸지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용히 상황을 무마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저, 저 아무것도 못 봤는데…."
마침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샤, 파르샤와는 조금 친해졌나요?"
"아, 네!"
그 말을 들은 샤샤의 표정이 오랜만에 밝아진다.
"처음에는 너무 똑똑해 보여서 친해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헤헤…."
하긴, 샤샤도 상당히 어린 편이었으니 오랜만에 또래 친구를 만나서 기분이 좋은가보다.
"그런 의미에서 샤샤 양에게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헉."
그렇다면, 역시 이번 임무를 맡기에는 안성맞춤이겠군.
"앞으로도 파르샤의 옆에 바짝 붙어서 친하게 지내주세요."
"아, 그런 거라면…!"
"그리다가 만약 특이 사항이 생기면 제게 살짝 귀띔해 주시고요."
"네?"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자, 처음에는 살짝 안심하는 표정을 짓던 샤샤의 얼굴이 다시 빠르게 굳어졌다.
"그런 인재가 행여나 다른 마음을 먹으면 큰 손실이잖아요?"
"아…."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저도 저대로 손을 써야 하니까요."
안 그래도 심약한 그녀가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파르샤를 최대한 내 편으로 잡아두기 위해서는 샤샤의 도움이 절실하다.
다행히 지금 파르샤는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완전히 나의 편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앞으로 그녀가 활약을 하게 된다면, 꼭 메르디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러브콜이 올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그러니 이직을 하려는 낌새나 일을 그만두려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연봉협상을 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내 부하로 남겨 둬야지.'
전생이나 지금이나 돈은 항상 옳은 법이다.
"치, 친구…."
"…?"
그런데 어째 샤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살면서 처음 사귄 친구인데…."
혼자서 그리 중얼거리며 눈을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못된 짓을 시키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무슨 내가 적국에 첩자로 침투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또래 친구를 잘 좀 챙겨주면서 연봉협상 타이밍이나 알려주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하기 싫나요?"
덕분에 괜히 기분이 찝찝해졌지만, 어쨌든 나는 부하의 의사를 존중하는 좋은 상사였기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눈을 질끈 감은 샤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행히도 승낙이었다.
"역시 제 최측근다워요, 샤샤."
"히익…."
자기 입으로 그리 말해 놓고서는, 그녀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나에게 칭찬을 들으며 방에서 나갈 때까지도 눈을 감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하여간 샤샤 저 녀석, 간이 작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럼, 이제 나도 슬슬 나가봐야 하는데….'
그렇게 잠시 자리에 앉아 쓴웃음을 짓다가, 이제는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황자의 약혼식 때문에 긴장감에 휩싸여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응?"
어째서인지 방금 나갔던 샤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말이다.
"이, 이상징후…. 발견했는데요."
"네?"
얼굴이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내뱉은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휴…. 다행이다…."
"파르샤 양?"
그런 샤샤의 옆을 비집고 휘청이며 들어온 파르샤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안 늦었나 보네요."
"그 몰골은 대체?"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그녀가, 피골이 다 상접한 채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료가 부족해서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했거든요…."
"그게 무슨…."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알프레드가 보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그 모습에 나는 당황하여 자리를 박차고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던 파르샤는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거, 가져가세요."
"이건…."
그녀의 손안에서 반짝거리는 그것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필요할…. 겁니다."
"아이고."
그 말을 남기고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넘어가던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붙들고는, 조용히 옆에 있던 샤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샤샤, 이건 말이죠."
"파, 파르샤가 감기에 걸렸나 보네요! 그, 그쵸?"
"하하…."
어째 저택에 괴소문이 하나 더 늘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약혼식이 코앞이었기에 아무래도 뒷수습은 못 할 것 같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
엠버그린 공작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에서 내린 메르디아 공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황자의 약혼식이 진행될 무도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메르디아 공녀 아니야?"
"이런 날에도 에스코트는 없으신가 보네. 여러모로 대단하셔."
그런 그녀의 옆에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고 있는 영애들이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허례허식 따위는 지키지 않은 지 오래된 그녀였지만, 사실 오늘만큼은 그것을 철저하게 지켜줄 생각이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건지, 예의가 없는 건지."
미리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휘트니가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지만 말이다.
"공녀님…."
"주제넘게 굴지 말고, 그자나 찾아와."
"…알겠습니다."
형식상 데려왔던 노집사가 그 모습에 다급히 그녀의 에스코트를 맡으려 했지만, 메르디아의 싸늘한 발언에 즉시 고개를 숙이고 인파 속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 보니, 슬슬 집사를 바꿀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그 뒷모습을 영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무도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던 메르디아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이거, 놀랍군! 검의 신동이 다시 부활하다니!"
"과찬이십니다."
"하?"
그녀의 눈에,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휘트니의 옆에서 하녀로서 있던 루니엘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과찬은 무슨, 자네의 검술은 내가 이미 상대해 봐서 잘 아는데. 지나친 겸손도 좋지 않다네."
"…감사합니다."
귀족 직위를 박탈당한 그녀가 이곳에 올 방법은, 오직 초대장을 받은 귀족의 에스코트를 받는 방법밖에 없다.
일개 하녀의 신분으로는 귀족들이 가득한 공간에 발을 내딛는 것조차 실례니까.
물론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수행원의 신분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렇다면 언뜻 보기에도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있을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설마 휘트니는 자신이 아니라 루니엘과 함께 이곳에 입성한 걸까?
"...."
하지만, 메르디아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낼 겨를조차 없었다.
"허허, 그리 말씀하시는 황자님의 검술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하!"
"지난 대회에서 아쉽게 2위를 차지하시긴 하셨어도, 루니엘 경과 맞서 검기를 뿜어내던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뭐, 그건 그냥 기본이지. 흠흠."
하필이면 루니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 약혼식의 주인공인 황자와 그녀의 친오빠인 마이어 엠버그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둘 전부가 메르디아가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들이었기에 그녀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걸음을 돌렸다.
"아니, 그런데 이게 누구야."
하지만 바로 그때, 웃음기가 가득 섞인 황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잡아 세운다.
"설마 했는데, 메르디아 공녀 아닌가?"
덕분에, 루니엘에게 쏠려 있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내 얼굴은커녕 털끝조차 보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거지?"
"...."
"하하, 제 동생이 표현이 많이 서투른 편이긴 하죠."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던 둘이 메르디아의 신경을 서서히 자극하기 시작한다.
"진작에 자존심을 버리고 황자님에게 청혼을 했으면, 이미 후계자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을 텐데."
"마이어 경, 어째 내 의사는 묻지 않는군?"
"아, 이거 죄송합니다. 하긴 아무리 제 동생이라 할지라도 황자님에게 어울릴 리가 없죠."
덕분에 안 그래도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더욱 싸해지고 있었지만,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한 듯 둘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뭐, 이 제국에 제 동생과 어울릴 남자가 있는지나 모르겠지만요."
결혼 첫날에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라고 자신의 발언에 나지막이 덧붙이며 슬쩍 메르디아를 흘겨본 마이어의 입가에는 어느새 비웃음이 만연해 있었다.
"공녀,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만 날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덕분에 메르디아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기 시작하던 와중에, 황자의 눈치 없는 발언이 그녀를 꿰뚫고 지나갔다.
"나는 이제 엄연히 임자가 있는 몸이니까."
"뚫린 입이라도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텐데요."
"하하! 이런 농담에 과민반응을 하면 더 수상해지는데 말이야."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메르디아가 오싹한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황자는 그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리 넘길 뿐이었다.
"하여간, 말버릇하고는."
"...."
"집안 망신은 다 시키는구나, 동생아."
그런 황자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마이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이자, 손에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던 메르디아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답한다.
"곧 내가 손에 넣을 집안인데, 뭐 어때?"
"그래, 그러시겠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네 몸도 권력도 함께 나누어야겠지만."
하지만, 마이어 역시 그녀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되레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황자님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보는 건 어떠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수에 맞지 않는 가주 자리보다는 황비 자리가 네겐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 입 닥…!"
그렇게 분위기가 서서히 극악으로 치닫던, 바로 그때였다.
-사아아…
별안간, 무도회장의 입구에서부터 몰아닥친 오싹한 기운이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를 덮친 것은.
"읏."
"무슨…?"
메르디아가 내뿜는 살기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그 싸한 기세에, 황자와 마이어가 검이 꽂혀 있지도 않은 허리춤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져다 대며 주춤한다.
"고귀하신 분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풍기는 기운과는 다르게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고.
"오늘 제가 에스코트를 해드려야 할 분이 그쪽에 계신지라."
"넌 누군데 감히…."
그 모습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마이어가,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번뜩이며 그를 막아 세우려던 참이었다.
"휘, 휘트니 경!"
마이어와 함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자가, 별안간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말이다.
"무도회장에서 기다리고 있지, 여기는 어쩐 일인가?"
웬만한 고위 귀족들의 이름도 외우지 못해 자주 실례를 범하던 황자의 아는 체에, 잠시 말을 멈춘 마이어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에 충격이 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하. 제가 방금 말했잖습니까, 저하."
하지만 그것조차,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은 발언이 만들어 낸 충격에 비하면 덜했다.
"메르디아 공녀님을 모시러 왔다고."
"휘트니, 너…."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그녀답지 않게 멍하니 서 있던 메르디아가 그제야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의 파트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많이 늦었죠, 공녀님?"
오직 그 자리에서 휘트니만이 특유의 수상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메르디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메르디아 공녀가 여기서 폭주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는데…!'
사실 그 장소에서 가장 긴장에 가득 차 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휘트니 본인이었지만 말이다.
13화 약혼식 (2)
정보수집을 위해 약혼식에 일찍이 도착한 보람도 없이, 나는 무도회장 안에서 갑자기 친한 척을 해오며 나를 반긴 황자에게 잡혀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그가 바람을 쐬러 나간 틈에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 줄이야.
왠지 알프레드를 닮은 메르디아의 노집사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메르디아를 프롤로그 보스로 상대할 뻔했다.
"휘, 휘트니 경.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아무튼 눈앞에서 시한폭탄이 터질 뻔한 상황을 일단은 막아낸 김에 잠시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는데, 황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자네의 파트너는 루니엘이 아니었던가?"
어쩐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분의 드레스를 루니엘에게 선물이랍시고 시녀들을 시켜 갈아입혀 주더라.
상황을 보니 메르디아와 나의 비밀스러운 거래에 대해 눈치챈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황자나 되는 사람이 대체 며칠 전부터 나에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을 주는 걸까?
"황자 저하께서 무언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오해라고?"
"루니엘 양은 제 파트너가 아니라,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온 거거든요."
의문도 의문이었지만, 우선 옆에서 또다시 표정이 어두워진 메르디아를 위해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급했기에 나는 다급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네와 루니엘의 마나가 공명하고 있는 것이지?"
"아하하…. 루니엘 양은 제게 기사 서약을 했거든요."
"그, 그런 거였나?"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황자가, 이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난 또 둘이 정을 나눈 줄 알았지. 하하!"
이 양반은 내가 자기처럼 난봉꾼이라도 되는 줄 아나?
헷갈릴 게 따로 있지, 하여간 눈치 하나는 파멸적으로 없는 인간이다.
"뭐, 황자님처럼 인기가 많으신 분은 당연히 오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잠깐, 뭐라고?"
속으로 그리 황자를 씹으며 적당히 그를 추켜세우는 말을 뱉어내던 나는, 그의 미소가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보며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약혼식을 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황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한 말치고는 상당히 예의 없는 발언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황 자체도 꽤 위험해.'
메르디아 공녀가 시한폭탄이 되는 건 다행히 막았지만, 지금 나는 겁도 없이 황자와 공작가의 장남이라는 높으신 분 두 명의 앞에 끼어든 참이다.
메르디아 공녀 정도의 체급은커녕, 다 기울어져 가는 백작가의 장남이 나설 자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옆에서 방금까지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메르디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둘 역시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나 하나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하는 싹수가 영 별로군."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영 못마땅한 낌새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마이어가 싸늘한 목소리로 힐난을 해 오기 시작했다.
"하여간,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내 동생은 보는 눈도 참 없어."
당연하게도 그 타이밍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손발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싹싹 비는 것이 상황을 모면할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저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녀석에게까지 몸을 허락할 정도로 그렇게 가주가 되고 싶나?"
하지만 마이어가 질색이라는 눈빛으로 메르디아 공녀를 바라보며 그런 망발을 내뱉었을 때, 어느새 내 입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공녀님은 이혼 경력은 없으시니까요."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마이어 말고는 없었기에 내 입으로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후련한 느낌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흠."
이제는 살기를 뿜어내는 방향을 메르디아에서 나로 완전히 옮긴 마이어와 아까부터 쭉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자로부터 어떻게 목숨을 부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자, 이런 좋은 자리에서 다들 왜들 이러나!"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인 황자가 되레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휘트니 경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한 모양이야?"
그리 말하고는 나에게 살짝 윙크까지 해 보이는 것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절친한 사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이해하겠네. 하지만 다음부터는 발언에 주의해 주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정말 자작가 영애를 창부 대하듯 침소로 끌고 가려다 신문에 기사까지 실릴 정도로 아랫것들을 무시하는 황자가 맞나?
이쯤 되면 그저 메르디아와 함께 이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만 가득하던 나도 그의 본의가 무엇인지 슬슬 궁금해진다.
"자 그럼, 마이어 경. 우린 슬슬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나? 기가 막힌 와인이 준비되어 있다네."
"…쯧."
하지만 그럴 의문을 해소할 겨를도 없이 황자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마이어의 등을 떠밀며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이 안 닿아서 그러는데, 혹시 이것 좀 푸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슬슬 눈치를 보며 흩어지기 시작한 인파의 중앙에서 그때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루니엘이 나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검을 휘두를 때 방해되는지라 드레스는 싫어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바로 벗는다고요?"
"등 뒤의 끈만 풀어주시면 제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 물론 명령이라면 계속 입고 있겠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굳어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싫은 기색인지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루니엘의 등 뒤로 향했다.
-찌이익…!
"앗."
별안간 천이 쭉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런, 실수."
"공녀님?"
"걱정하지 말도록. 이건 내가 변상하도록 하지."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갑자기 루니엘의 드레스에 달려 있던 끈을 쭉 잡아 찢어버린 공녀가, 조용히 손을 털며 그렇게 말한 것은 말이다.
*****
"아이고, 망측해라."
천문학적인 값어치의 드레스가 순식간에 망가진 것을 보고 잠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휘트니가, 훤히 드러난 루니엘의 등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등을 가려준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련을 할 때는 옷이 아예 찢어지는 경우도 빈번히…."
"그건 같은 여기사들 이야기고, 여긴 보는 눈이 많잖아요?"
"그런가요?"
"…쯧."
그 모습을 옆에서 흘겨보듯 지켜보고 있던 메르디아가, 별안간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분하지도 않은가?"
"네?"
"너 말고 네 서약자에게 한 말이야. 기사 주제에 이런 같잖은 옷으로 모욕을 당해 놓고, 어찌 그리 멀쩡히 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 참 신기해서."
그 말에, 주위의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하던 휘트니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루니엘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기 시작했다.
"고작 이런 옷 한 장으로 휘트니 경의 기사라는 제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허."
"그리고, 저는 저보다 약한 사람이 저지르는 무례에 연연하지는 않는 편인지라."
황자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불경죄를 피하지 못했을 그 발언에, 루니엘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메르디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래, 내가 속이 많이 좁긴 한가 보군."
"...."
"아니, 고작 그런 녀석들의 말에 휘둘릴 정도니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그 상태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기운 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살짝 고개를 들어 휘트니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너도 그렇게 생각…."
어느새 그와 루니엘은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덕분에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역시 이런 곳에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저런,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들이민 휘트니가 특유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온 것은 말이다.
"네 기사를 도와주러 간 게 아니었나?"
"여자 탈의실에 따라가 봤자 금방 쫓겨날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공녀님을 여기에 남겨두고 갈 리가 없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뻔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그를 가만히 흘겨보던 메르디아가, 고개를 확 돌리고는 무도회장의 입구로 걸어가며 중얼거린다.
"그런 센스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날 에스코트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글쎄, 황자님이 제게 친한 척을 해대며 계속 잡아두지 뭡니까?"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저도 믿기지가 않는데, 조금 전까지 두 눈으로 보셨잖아요?"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춘 그녀가 다시 의심 어린 눈초리로 휘트니를 쏘아보며 물었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롭게 답할 뿐이었다.
"황자와 무슨 관계지?"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여자를, 특히 공녀님을 좋아하니까."
"…말을 말지."
하지만 평소라면 지지 않고 그를 질타했을 메르디아가 또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르던 휘트니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혹시, 제가 루니엘의 등에 손을 대는 게 싫었나요. 공녀님?"
그러던 그가, 이내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 환기용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지만.
"...."
천천히 고개를 돌린 메르디아는, 어째 평소처럼 살기를 날리는 대신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어, 저기…. 농담인 거 아시죠?"
덕분에 지레 겁을 먹은 휘트니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그리 물었지만, 메르디아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유지하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질투라.'
물론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오해할 법도 했지만, 메르디아는 딱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조금 전에 자신이 그리 행동한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런 것도 느낄 줄 알던가.'
단순히 황자와 마이어의 폭언에 화가 나 심술을 부린 것도 맞았지만, 그보다는 갑자기 치밀어오른 짜증이 더 컸다.
당연하게도 휘트니가 루니엘의 등을 만지려 했다는 1차원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치밀어오른 짜증의 방향이 그에게 향했던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공녀님이 제 진의를 알아주신 모양이군요?"
"...."
"이거, 위험을 무릅쓰고 끼어든 보람이 있…."
"경은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덕분에 잠시 상황을 곱씹어 보던 그녀는 뒤에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던 휘트니가 괜히 제 발이 저려 헛소리를 재잘거리자, 눈살을 팍 찌푸리며 생각을 접었다.
"…농담입니다. 그냥 황자님이 그만큼 싫으셨던 거겠죠?"
"알았으면 에스코트나 제대로 해."
애초에 자신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단순히 사람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비즈니스 파트너의 행동 때문에 나온 해프닝이라 속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그러죠. 그럼, 저희도 슬슬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갈까요?"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잠시 눈치를 보던 휘트니가 별안간 메르디아의 손을 슬쩍 붙잡으며 눈웃음을 쳐 보였다.
"손을 잡으란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야야. 그러면 에스코트를 어떻게 하라고요?"
순간 눈썹을 꿈틀한 메르디아가 즉시 그의 손을 꼬집으며 질타하자, 작게 신음을 내뱉은 휘트니의 억울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래도 약혼할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착각하지 마. 나는 아직 널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건 조금 서운한데요."
"그렇다면 왜 그 머저리가 자네에게 생전 보이지도 않던 친절을 베풀고 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그건 저도 의문입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하지만 메르디아의 날이 선 질문에, 조용히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내리는 그였다.
"...웠어."
"네?"
그런데, 그 모습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메르디아가 별안간 허공에 맴돌고 있던 그의 손을 살짝 잡아 올리며 걸음을 앞으로 옮긴다.
"아까 일은 고마웠다고."
그런 그녀가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리 말하자, 휘트니의 얼굴에 늘상 짓던 수상쩍은 미소가 다시 피어올랐다.
"입을 비틀어 버리기 전에 그 미소, 고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그 뻔뻔한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지라 또다시 살기를 살짝 내뿜으며 그리 중얼거리는 메르디아였지만, 이번만큼은 완전한 진심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까 그가 황자와 마이어의 앞을 가로막은 채 짓던 웃음만큼은 딱히 싫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아참. 그건 그렇고,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
"…?"
휘트니와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시선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문득 진지해진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혹시 유망주들 보셨습니까?"
"누구?"
"제국 유망주 선발전 상위권자들이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된다고 들었는데요.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아까부터 영 보이질 않아서."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이윽고 그녀가 시큰둥하게 답하자, 어쩐 일인지 휘트니의 미소가 점차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왜요?"
"제국 유망주 선발전은 일주일 뒤에 재경기를 치르도록 내정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메르디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던 주변의 시선을 자신의 눈빛으로 되받아치며 그리 말했고.
"듣자 하니 심사 단계에서 부정행위가 발견되었다는데, 기밀 사항이라 아직 발표는 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어라."
그러자 되돌아온 휘트니의 뭔가 싸한 태도에, 그제야 옆을 돌아본 그녀는 잠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무도회장의 어두운 조명을 받으며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 휘트니의 표정이,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웃음기가 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메르디아와 함께 손을 잡고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선 지도 슬슬 몇 시간이 지나, 어느새 황자의 약혼녀가 등장하기 직전.
"하아…."
당연하게도 약혼식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고, 사람들 역시 들뜬 태도로 춤을 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나만큼은 그러한 분위기에 어울릴 수 없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없다고?'
원래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날 비극을 막아야 할 존재, 그러니까 플레이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유망주들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전개가 죄다 틀어지고 있어.'
그래, 생각해 보면 메르디아가 본격적인 악녀가 되는 원인 중 하나인 나의 죽음 자체가 사라졌을 때부터 이미 시나리오는 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약혼식이 앞당겨지거나 유망주 선발전이 부정행위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 한 명이 살아남은 나비 효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설마.'
그렇다면 의심이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건 바로, 내가 전생에서 하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DLC와 지금 상황이 연관되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던 원작의 지식이 앞으로도 계속 틀어질 예정이라면, 과연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기분 나쁜 미소로 일관하더니, 이제는 한숨 소리로 사람 신경을 긁는군."
"...."
그런 걱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옆에서 메르디아의 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공녀님."
비록 여전히 경계로 가득 찬 차가운 말투였지만, 어째 전보다는 살짝 유해진 듯한 그 분위기에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저번에 제가 얻었던 소원권, 지금 써도 되나요?"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마 며칠 전이었다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제안을 그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 뭐, 별건 아니고…."
사실 나라고 해서 이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르디아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도저히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조금 있다가, 무도회장에 소요 사태를 살짝 일으켜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미쳤나?"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내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14화 약혼식 (3)
"공녀님,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작자가 정말로 정신이 나갔나?'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약혼식을 앞두고 무도회장에 소요 사태를 일으켜 달라는 휘트니의 부탁을 막 들은 공녀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속으로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없고, 믿지도 못하실 테니 자세히 설명은 못 드리겠지만, 공녀님이 무도회장을 마비 시켜주시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질 겁니다."
"허."
하지만 메르디아의 확고한 거부감으로 가득한 표정에도 휘트니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니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절 도와주시죠. 장담컨대, 공녀님이 잘잘못을 추궁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려 자신이 독살당할 뻔했던 다과회나 일주일 뒤 백작가의 정원에서 그녀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던 때보다도 더 진지한 기세에,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던 메르디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분명히 사소한 소원을 들어준다는 조건이었을 텐데."
"저도 지금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공녀님에게 원하는 게 따로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소원의 조건을 짚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휘트니는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리 답했다.
"하지만,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달리, 입꼬리만 간신히 올라간 그 미소가 진지한 표정과 맞물려 상당히 오싹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무엇을 믿고 그런 위험을…."
하지만 휘트니의 그런 모습에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하던 공녀가, 코웃음을 치던 바로 그때였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빠르게 보여드릴 수밖에요."
"앗."
어째 자신의 옆을 슬쩍 피해 가려던 하녀가 들고 있던 접시에 올려진 와인이 담긴 유리잔을, 휘트니가 재빠르게 낚아챈 것은.
"저, 저기."
"왜 그러시나요? 서빙을 하시고 계신 게 아니었나요?"
"…시, 실례했습니다."
그 바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물쭈물하던 하녀가, 휘트니의 섬뜩한 미소에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여 보이곤 다급히 걸음을 옮긴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뭘 하는…."
그 모습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메르디아의 눈동자가, 이내 흔들리기 시작한다.
-고오오….
비록 아주 미세한 양이었지만, 휘트니가 손에 든 유리잔이 분명히 그의 백마법과 반응해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절 믿으시겠습니까?"
"...읏."
"공녀님?"
그 모습을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휘트니는 이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메르디아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알겠으니까…. 그것 좀 치워."
"아."
어째 자신의 바로 앞에 붙어 있던 메르디아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창백해져 있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유리잔을 뒤로 치웠다.
"윽…."
하지만, 이미 흑마력에 노출되어 버린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심각한 화상자국이 드러나 있었다.
'설마 이 정도로 흑마력에 취약한 상태일 줄은 몰랐는데….'
그 흉측한 자국이, 메르디아가 흑마법을 그리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이자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인 것을 알고 있던 휘트니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
덕분에 잠시 이어지던 어색한 침묵 속.
- 스윽….
별안간 자신의 주머니에서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손수건을 꺼낸 휘트니가, 말없이 메르디아에게 다가서서는 그녀의 손에 그것을 묶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연인의 손수건을 손이나 팔에 묶고 다니는 게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하던데요."
"...."
"저희가 비록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약혼을 한 김에 분위기 정도는 한번 내 볼…. 아얏."
그럼에도 의외로 가만히 서서 손을 내밀고 있던 메르디아였지만, 이어진 휘트니의 장난기 가득한 발언에 결국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휘트니를 앞으로 밀쳐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그래서, 방금 그 흑마력은 뭐지? 이번에도 네가 사전에 준비해 둔 거라면, 용서치 않겠어."
그러나 손에 묶인 손수건을 다시 벗어 던지지는 않은 메르디아가, 다시 평상시의 차가운 태도로 돌아가 질문을 던졌다.
"우선 저는 백마법사라 흑마력을 준비할 수가 없고요,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 저건 내용물을 마신 사람을 제물로 지정하는 의식용 흑마법일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그러자 돌아온 휘트니의 답변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아무 근거 없이 미친 건 아니었나 보군."
제국 전역의 유력자들이 참석해 있을 이 무도회장에, 어째서인지 백마법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공녀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나요?"
"…네가 그럴 만한 인물도 아닐뿐더러, 내가 억지로 꽂아 넣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딱히 알려지지는 않았겠지."
"그렇죠?"
물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휘트니를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사용될 술과 음식이 검사도 마치지 않고 들어왔을 리가…."
"바로 그겁니다, 공녀님."
그럼에도 쉽사리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트집을 잡던 그녀였지만, 그의 말을 도중에 끊은 휘트니가 한 말에 메르디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약혼식이 열리는 바로 이곳, 그러니까 내부에 적이 있다고요."
그렇게, 잠시 둘의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정적.
"모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정적 속에서, 갑작스럽게 대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선, 나의 약혼식에 이리 열렬한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네."
그 말에 휘트니와 메르디아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무도회장의 상석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던 황자가 언성을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들도 이쯤 되면 슬슬 내 약혼녀가 누군지 궁금해졌겠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 아닌가. 하하!"
그의 말대로, 황자와 함께 이 약혼식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약혼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 역시 아까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진이나 빼놓던 황자보다는, 대체 누가 그의 약혼녀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참이고 했고 말이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지금 바로 소개하겠네!"
그렇게 모두의 기대 속에서, 어깨를 잔뜩 으쓱거리고 있던 황자가 자신의 뒤에 있던 대기실의 문을 흘겨보며 한껏 소리를 높였지만.
"내 약혼녀이자 미래의 황비가 될, 헤스티아 자작 영애라네!"
"...."
"음?"
어째서인지, 타이밍에 맞게 열렸어야 할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황자님…."
"아, 으음. 그런가."
그 덕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자가, 대기실에서 다급히 나온 시녀 한 명이 귓가에 속삭인 말을 듣고는 살짝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계속 상태를 봐주게. 몸이 좋아지면 바로 알리고."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하객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보인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두의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이거 미안하군. 아직 내 약혼녀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네."
하지만, 무도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런 황자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일제히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술렁이고 있었다.
"자작 영애라고…? 미래의 황비가?"
"아니, 그걸 떠나서. 헤스티아 영애라면…."
왜냐하면, 물론 황자의 약혼녀가 고작 자작가의 영애라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지만.
황자가 자신의 약혼녀라고 밝힌 헤스티아 영애는, 얼마 전에 그가 침실로 끌고 가려다 제국신문의 1면에 그 추태를 박제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대충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겠는데, 이번만큼은 오해라네."
덕분에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싸해지기 시작하자, 아무리 눈치가 없는 황자라도 그 기류를 읽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헤스티아 영애에게 다소 열렬히 구애해 온 것은, 전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말이야."
물론, 이런 상황에서 황자가 무슨 변명을 하든지 간에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앉아 버린 약혼식의 분위기는 돌아올 길이 요원해 보였지만.
"사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신성교단에서 비밀리에 소식을 전해왔었다네."
황자의 입에서 '신성교단'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무도회장에 만연하던 술렁임이 일순간 멎었고.
"헤스티아 영애가, 신의 신탁을 받았다고."
그렇게 조용해진 무도회장에 황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객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수백 년 만에 이 세상에 성녀가 나타난 걸세!"
역사적으로 신의 신탁이 의미하는 것은, 성녀의 탄생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축복받은 존재가 마침내 내 구혼을 받아들였으니, 이거야말로 제국의 큰 복이지 않겠나!"
그렇기에 황자가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치자, 기적적으로 축복이 만연한 분위기가 된 무도회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네요."
하지만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휘트니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옆에 있던 메르디아에게 진지한 말투로 말을 남기기 시작했다.
"공녀님,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정말로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처럼 조용히 황자의 쪽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메르디아가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지만, 휘트니는 그저 살짝 눈웃음을 쳐 보이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뭐, 들어주지 않으면 전 여기서 죽겠죠."
"그런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내가…."
"물론 선택은, 어디까지나 공녀님의 몫입니다."
"이봐, 잠깐."
이윽고 정말로 메르디아를 남겨두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말에,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손을 뻗어 휘트니를 멈추어 세우려 했지만.
"무슨 선택을 하셔도 원망은 하지 않을 테니,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시길."
살짝 고개를 돌린 휘트니의 단호한 말투에, 그녀의 손이 그에게 닿는 대신 허공을 저었다.
"아, 그래도 그 손수건은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휘트니는, 이내 그녀의 손에 묶여 있던 손수건을 힐끔 바라보며 그리 속삭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제가 죽으면, 유품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남기고선, 조용히 인파들의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또다시 메르디아를 홀로 남긴 채로 말이다.
*****
"끝까지 제멋대로 구는군."
휘트니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가만히 응시하며 자리에 서 있던 메르디아는, 문득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트니의 말대로, 약혼식의 상황은 확실히 수상쩍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객들 중에 백마법사가 없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무도회장을 돌아다니는 경비 병력에 마법사의 비율이 적어도 너무 적다는 사실이 그녀의 눈에 막 발견된 참이었으니까.
또한, 서빙을 맡은 하녀와 시종들이 교대 시간도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와인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도 수상한 부분이었다.
그 모든 걸 고려 했을 때, 정녕 휘트니의 말대로 이곳에서 음모가 펼쳐지고 있다면 아마 약혼식의 당사자들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하객들 전부가 위험해지겠지.
"사람들이 위험하니, 내가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건 메르디아에게 있어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조금 전 휘트니와 손을 잡고 들어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낸 싸늘한 시선이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선했으니까.
메르디아에게는 그런 작자들을 도울 명분도, 인의도 없었다.
"하."
물론 휘트니의 제안은 그리 단순하게 생각해 판단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와 메르디아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일종의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역시, 고려할 가치도 없어.'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안을 수락했을 때의 이익이 확실할 때의 이야기다.
단순히 휘트니의 호언장담만을 믿기에는, 황자의 약혼식이라는 경사를 망쳤을 때 그녀가 져야 할 부담이 너무 컸다.
아무리 그가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최적의 패라 하더라도, 이것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메르디아가, 가차 없이 뒤로 돌아서서 출구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때였다.
"…윽."
별안간, 그녀의 오른손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한 것은.
'하필 지금….'
덕분에 이를 악물며 자리에 멈추어선 그녀는, 흉터가 생긴 이래로 늘 그녀를 괴롭혀 왔던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격통을 예상하고는 몸을 살짝 떨기까지 하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
어째 시간이 지나도, 차라리 살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의 통증이 그녀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설마…."
덕분에 잠시 멀뚱멀뚱하게 자리에 서 있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손에 휘트니의 손수건이 감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설마 싶은 표정을 지으며 반대쪽 손으로 그것을 살짝 들추어봤다.
"큭!"
그러자 그 즉시 끔찍한 통증이 엄습하는 바람에, 메르디아는 다급히 휘트니의 손수건을 다시 자신의 손등에 덮을 수밖에 없었다.
"...."
그 이후로, 한참이나 자리에 서서 그의 손수건이 묶여 있는 손등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그녀는.
"자, 모두들 제국과 헤스티아 영애를 위해 건배하세!"
"휘트니, 아무래도 넌 나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무도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황자를 따라 손에 탁한 적색이 맴도는 와인이 담긴 잔을 치켜들기 시작하자,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이 저주를 네가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런 그녀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보석안을 검게 빛낸 바로 그 순간.
"결국, 나는 너의 계획에 놀아날 수밖에 없잖아."
- 쨍그랑…!
메르디아의 눈에 담긴 무도회장의 샹들리에와 조명들이 일제히 산산조각 나며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꺅!?"
덕분에,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한 무도회장에서.
"뭐, 흑마법사를 엿 먹이는 일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홀로 여유롭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메르디아가, 문득 따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신의 손을 간지럽히고 있던 손수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괘씸하게도, 참으로 단단히도 매였군."
어째 하는 말과 다르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은,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한편 그 시작, 무도회장의 대기실.
"아윽…!"
그곳에서 시녀들에게 간호를 받던 황자의 약혼녀, 헤스티아 체스터는 자리에 앉아 식은땀까지 흘리며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의사를 불러드릴까요?"
덕분에 행여나 자신들에 불똥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시녀들이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어 가는 그녀를 위해 의사를 불러오려 했지만.
"전 괜찮으니…. 잠시 나가 주세요."
얼굴이 창백해져 있던 헤스티아가 손을 들어 그 행동을 제지하자, 그녀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부탁이니까, 제발…."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상태를 계속 면밀히 살피라는 황자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이윽고 이어진 그녀들의 단호한 말투에, 입술을 꽉 깨문 헤스티아가 눈을 질끈 감는다.
"당신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끔찍한 일에 휘말릴…. 끅!"
그런 그녀의 입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 즉시 끔찍한 통증이 그녀를 덮치자 헤스티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건데….'
그렇게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벽에 걸려 있던 거울로 향한다.
'엉터리 같은 신탁을 받고…. 원하지도 않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잠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전부, 시키는 대로 했잖….'
바로 그다음 순간,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더니 서서히 공포에 잠식되어 가기 시작했다.
"…뭐?"
물론 그 자리에는 헤스티아와 시녀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누군가에게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듯 벌벌 떨던 그녀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아니야, 그렇게는 못 해. 절대로!"
"헤스티아 양?"
그 이상행동에 시녀들의 눈이 커졌지만, 헤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울을 노려보며 소리를 높였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건…!"
- 지지직….
"…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그녀를 다시금 덮쳐 오는 바람에 그녀는 결국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윽, 힉…. 으으…."
"...."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그녀가 고통을 잊으려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리자,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라 명을 받은 시녀들조차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직접 나설 용기도 없어서,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겁쟁이 주제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내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헤스티아는, 무언가 각오한 표정을 지으며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 말이 틀렸어…? 틀렸다면,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 보던가…."
그런 그녀가, 다시금 거울을 노려보며 흐릿한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거참, 일이 복잡해지니 저항하지 말래도."
굳게 닫혀 있던 대기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입구 주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경호 인력을 뒤로하고 한 소년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온 것은.
"여기 있었네."
"아….
그런 그가 대기실에 멍하니 서 있던 헤스티아를 발견하고는 밝게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자, 각오로 가득했던 그녀가 설마 싶은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시작한다.
"다, 당신. 설마…."
"처음 뵙겠습니다만, 헤스티아 영애."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산뜻한 말투로 그리 말하며 헤스티아를 향해 손을 내미는 휘트니였다.
"잠시 저한테 납치당해 주시겠나요?"
15화 – 약혼식 (4)
"악! 내 발!"
"젠장,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추, 출구는 어느 쪽이야!"
메르디아가 소요 사태를 일으킨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무도회장의 혼란은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모두 진정하고, 일단 불부터 다시 켜!"
"초, 촛불을 포함한 모든 불이 켜지질 않습니다!"
"…뭐라고?"
혼란 속에서 홀로 가만히 서 있던 메르디아의 검게 빛나고 있는 보석안 때문일까,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광원이 빛을 잃고 무용지물이 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쯧."
덕분에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다급히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혀를 차며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군."
무도회장의 경비 인력으로 변장하고 있던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오늘 이 약혼식장에 잠입한 흑마법사 단체의 간부 페드로 고메즈.
신성 교단에서 발견 즉시 사살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발표할 정도로 흑마법계에서 악명을 떨친 거물 중 한 명이었다.
"미리 정보가 새어 나간 건가? 아니, 그렇다면 이런 방식을 쓰진 않았겠지."
그런 그의 철저한 지도하에 은밀히 준비되어 왔던 거사가 이제 시작만을 앞두고 있었건만, 바로 직전에 일이 터지는 바람에 페드로의 심정은 상당히 어그러져 있었다.
"마스터!"
"일이 틀어졌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계획은 그대로 진행…."
그러나 아직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기에, 어둠을 뚫고 달려온 두 흑마법사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그리 말을 걸어왔을 때,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명령을 내리려던 그는.
"잠깐,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지?"
"아, 그건…."
"너희들은 성녀를 감시하고 있어야 하잖아!"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두 흑마법사가, 시녀로 변장해 대기실에 있던 성녀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인력들인 것을 알고는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번 거사에는 너희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그, 그것이!"
"내가 이까짓 변수에도 대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당장 돌아가!"
그런 그가 윽박을 지르며 대기실이 있는 곳을 가리키자, 잠시 그의 눈치를 보던 두 흑마법사는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녀가 납치당했습니다!"
"…지금 농담하자는 건가?"
"저, 저희가 아니라 웬 어린 청년한테요!"
처음에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던 페드로의 표정이, 이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작 한 명에게 성녀를 빼앗겼다고?"
"뒤, 뒤에 한 명이 더 나타나긴 했었는데…. 저희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 검을 쓰던 녀석의 부하도 상당히 강했지만, 어쩐지 그 소년의 앞에서 흑마법이 이상하리만치 잘 써지지가 않아서…. 컥!"
그런 그가 순간 눈을 번뜩이자, 겁이 질려 변명을 늘어놓던 그녀들이 가슴을 움켜쥐고는 자리에 주저앉는다.
-고오오오….
"용서를…. 아악!"
"아, 아아…."
두 흑마법사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낙인이, 검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성녀를 빼앗겼다면, 계획은 실패다. 그녀 없이는 의식을 완성할 수가 없어.'
그렇게 두 흑마법사가 순식간에 검은 화염에 휩싸여 사그라지는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페드로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우리 측의 피해 없이 이곳에서 철수해야 해.'
이윽고 빠르게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 낸 그는, 무도회장 각지에 퍼져있던 흑마법사들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흠?"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잠시 멈칫했다.
'동지들의 수가 줄어들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각지에 퍼져 있던 수하들의 기감이, 어째 현저히 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덕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페드로의 눈이, 이내 가늘어진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흑마법사들만 골라 없애고 있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날렵하게 움직이며 흑마법사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기감을 보니 검사인가?'
그러나 조용히 흑마력을 끌어올리며 반격을 준비하던 그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검사가 어떻게 우리들을 구분해 낼 수 있지?'
분명히 감지되는 기척은 검사의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어둠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자신조차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흑마법사만 골라내 처리하고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저주나 대규모 의식들이 주로 세간에 보도되기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원래 흑마법은 은밀하게 대상을 처리하는 것이 이점이다.
그렇기에 미세한 섬뜩함을 느끼는 것이면 모를까, 저 정도로 정밀하게 흑마력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존재는 흑마법사의 천적인 백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허."
그렇기에 잠시 역으로 감지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기감의 감지 범위를 무도회장 전역으로 뻗쳐나가던 페드로는,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흑마력을 거두었다.
'저 녀석이 이번 계획을 망친 주범이군.'
무도회장의 구석에서, 자신처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청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백마법사 새끼들….'
그 주변에서 자신의 흑마력이 상쇄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인물의 정체는 어떻게든 이번 약혼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백마법사가 확실했다.
'저 녀석만큼은 확실하게 죽이고 가야겠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계획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백마법사 한 명 때문에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드로는, 이를 갈며 이름 모를 백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만.'
문득 싸한 위화감이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백마법사는 어둠에 약할 텐데. 어떻게…?'
흑마법사들이 태양이 쨍쨍한 곳을 피하듯이, 백마법사들 또한 어두운 곳에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저자는, 어떻게 이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여유롭게 자신들을 감지해 내고 있는 걸까?
- 스윽….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페드로가 잠시 주춤하고 있던 그때, 오랜 경험으로 인해 남들보다 빠르게 어둠에 적응한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장면이 목격된다.
'지금, 저자가 날 보고 있는 건가?'
방금까지 명령에만 집중하고 있던 인물의 시선이, 어느새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말이다.
'…말도 안 돼.'
끈질긴 신성 교단의 추격에 대비해 기감을 숨기는 것에는 이제 도가 튼 그였다.
물론 자세한 상황 파악을 위해 흑마력을 무도회장 전역에 펼치긴 했었지만, 이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백마법사라 하더라도 무려 간부 중 하나인 자신을 정확히 감지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하…."
"...!"
그렇기에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던 청년이 뒤이어 오싹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페드로는 그것을 우연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벗어나야겠어.'
자신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지자, 페드로는 살기를 담아 끌어모으던 흑마력을 전부 그 자리에서 도주하는 마법진을 소환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뜻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러한 빠른 판단력은 페드로를 뒷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흑마법사 중 한 명으로 만든 기반이었다.
'지금은 후퇴하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그리하여, 원래라면 이번 일로 세간에 자신의 악명을 한층 더 널리 떨쳤을 페드로는 미련을 품은 채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새어 나온 그림자에 섞여 들어가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고.
'이 제국의 수도에, 악마를 현현시켜 주마.'
성녀와 하객들 대다수가 제물이 되어 벌어질 뻔했던, 프롤로그의 악마 소환 사건은 그렇게 일찍 그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메르디아 공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아직 할 일이 남아서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휘트니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흑마법사들의 행동 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저 멀리 있는 메르디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파르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마도구를 미리 준비해 둔 걸까?'
그런 그가 저택에서 떠나기 직전 파르샤에게 아슬아슬하게 받았던 야간 투시 마도구를 착용한 채, 어둠 속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거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들만을 지목해 루니엘에게 제압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 바람에, 원래부터 신중한 성격이던 사람들 몇 명도 루니엘의 칼등에 기절할 정도로 그의 계획이 단순 무식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뭐, 일이 잘 풀렸으면 그만이긴 하지.'
아마 페드로는 뒷목을 잡고 기함을 하며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
"모두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주십시오!"
"이번 사건은 흑마법사들이 개입한 걸로 추측됩니다! 혹시라도 상태가 이상하신 분들은 모두 이쪽으로 서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질 무렵.
"거참, 난리도 아니군."
혼란에 가득 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제국 기사단 병력의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메르디아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입만 살았지 실속이 없는 놈들이라니까."
그런 메르디아의 비웃음으로 가득한 혼잣말과는 달리, 사실 기사단은 범인 색출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저 그녀의 보석안이 기존 마법 체계를 가볍게 유린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초동 수사에서 흑마법과 관련된 사안들이 잔뜩 발견되었기에, 따지고 보면 소요 사태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그녀는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손쉽게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나저나 휘트니 그 자식은, 또 어디에 간 건지.'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참이었음에도 그녀의 안중은 오직 휘트니에게 쏠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바삐 돌아다니다가 모습을 감추더니, 이젠 다시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군.'
자신이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것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물어봐야만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손에 묶여 있던 손수건에 대한, 사소한 답례도 할 필요도 있었고 말이다,
"흠?"
그렇게 휘트니를 찾아 바삐 움직이던 그녀의 시선이, 별안간 한군데로 쏠린다.
"공녀님~!"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마차 옆에 기댄 채, 음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라는 에스코트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선, 내 마차라도 빌려 탈 생각인가?"
"하하…."
"네가 타고 온 마차는 어디에 있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야기하죠?"
눈살을 찌푸리며 휘트니가 있는 곳까지 다가선 메르디아가 질문을 던져댔지만, 어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의 안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허, 참."
그 어지간히도 자연스러운 태도에 잠시 혀를 차던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휘트니의 뒤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섰고.
"뻔뻔한 것도 도가 있…."
그다음 순간, 메르디아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읍, 읍…!"
약혼식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사단에게 비상이 걸리게 만든 황자의 약혼녀, 헤스티아 영애가 온몸에 밧줄이 꽁꽁 묶인 채 자신의 마차 안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그런 그녀를, 휘트니만큼이나 땀으로 절여져 있던 루니엘이 옆에서 입을 막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협박하고 있었다.
"제 마차는 아무래도 검문에서 들킬 것 같아서 그러는데 말이죠…."
"...."
"한 번만 더 도와주시겠나요, 공녀님?"
오늘만 벌써 몇 번인지 모를 벙찐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메르디아는, 휘트니가 옆에서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산뜻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미쳤어?"
이번만큼은 짜증이 아니라, 순수하게 기겁을 한 채로 말이다.
16화 후폭풍
휘트니를 따라 마차에 탄 메르디아가 밧줄에 묶인 채 납치되어 있던 황자의 약혼녀를 보고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을 무렵.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에도, 현장에는 상당히 뒤숭숭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사는 이쯤 해도 될 것 같군요. 오늘은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이봐, 헤스티아 영애의 행방은 조금 잡히는 바가 있나?"
"…자세한 것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암울하다고밖에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장에 도착한 기사단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붙잡혀 있던 하객들의 불안과 불평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가? 수고하게."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메르디아와 거의 동일한 이유로 수사선상에서 배제되다시피 한 마이어 엠버그린은, 수사관에게 격려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른 이들보다 일찍이 등을 돌려 약혼식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젠장."
그러나 무도회장을 등진 채 자신이 타고 왔던 마차로 향하던 그의 얼굴은, 어째 수사관을 대하던 상냥한 표정과는 달리 초조함과 짜증으로 뒤섞인 채 일그러진 상태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사실 오늘 원래 약혼식장에서 벌어졌어야 할 참사의 배후 중 한 명이 바로 마이어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준비는 완벽했을 텐데.'
황자의 둘도 없는 친우라는 점을 이용해 백마법사들이 약혼식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은근하게 설득한 것도 그였으며, 하녀들과 시종들의 인선을 도맡아 흑마법사들을 비밀리에 끼워 넣은 것도 그였다.
'이러면, 연합회에서 내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
비록 본인이 흑마법사는 아니더라도, 세계 전역의 흑마법사들이 모여 결성한 비밀 조직인 '그림자 연합회'와 꽤 오래전부터 연을 맺고 있던 마이어로서는 이번 일 만큼 자신의 입지를 상승시킬 기회가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했던 일이었다.
물론, 보다시피 성대하게 계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도리어 책임을 물을 가능성까지 생긴 참이었지만 말이다.
'설마, 메르디아 그 미친년이 꾸민 일인가?'
그 덕에 초조하게 이를 갈며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유추하던 마이어의 뇌리에, 문득 몇 시간 전에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던 동생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메르디아를 쳐다보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혐오하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이어가 그녀의 실력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에게 보석안을 비롯한 눈부실 정도의 재능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공작가의 후계자 구도는 정리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웬 수상쩍게 생긴 백작가 자제를 파트너랍시고 데려왔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마이어의 뇌리에, 문득 메르디아만큼이나 자신을 거슬리게 했던 인물의 정보가 스쳐 지나간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뼈아픈 치부를 언급하며 메르디아를 감싸고 돌았던, 그런 주제에 자기 수족들의 이름조차 잘 외우지 못하는 멍청한 황자의 은근한 비호를 받았던 인물.
"그 녀석의 이름이, 뭐라 했더라…."
메르디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상정한 상황 외의 변수임은 틀림없었기에 마이어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그의 이름을 떠올려 내려던 바로 그때였다.
"휘트니 린가드."
별안간 마이어의 옆에서,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것은.
"그래,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 깜짝이야!"
그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돌리던 마이어가, 일순간 눈을 치켜뜨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 이름을 가진 청년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는가."
로브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인물이, 그런 마이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뭐, 뭐야. 넌?"
"...."
"복장을 보니 경비대 소속인가? 그럼, 저쪽에서 기사단에게 조사나 받고 있을 것이지. 왜…."
그 무심한 태도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마이어는, 눈앞의 인물이 착용하고 있던 가면을 확인하고는 이내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만 말해 주겠나."
"...!"
그럼에도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인물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살짝 벗어 보이며 다시 질문을 던지자,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화, 황제?'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몇 년간 모든 공식 석상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어째서인지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골방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쯧."
애초에 그를 비롯한 그림자 연합이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대담한 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하나가 바로 황제의 부재였기에, 마이어는 자리에 엎드려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은 채 어버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말하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만인의 어머니다운 관용을 베푼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지 황제는 그저 심드렁한 태도로 그리 중얼거릴 뿐이었다.
"음?"
그런데 그런 황제의 시선이, 별안간 저 멀리 검문을 거의 생략한 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던 마차에 꽂힌다.
"이런, 구태여 자네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군."
그 마차의 뒤편에 새겨져 있던 메르디아의 인장을 잠시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이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벗었던 가면을 다시 얼굴에 써 보였다.
"오늘 나를 여기서 봤다는 사실은, 함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고는 조용히 마이어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던 황제가, 별안간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그때까지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마이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쯤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는, 그 즉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보이며 황제의 명령에 답한 마이어는.
"아, 자네가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그 아이에겐 말해도 되네."
황제가 지나가는 말을 하듯이 내뱉은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있었던 사실과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황자 말고는 없거든."
"아…."
"뭐, 이젠 자네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런 마이어의 심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 말을 남긴 황제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하아, 하아."
그럼에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치켜들고는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한 마이어는, 속으로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정말로 살기조차 띠지 않은 사람의 위압감이 맞는 건가…?'
만약 자신이 공작가의 장남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저 단순히 황제가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라도 했다면.
아마 자신은 지금쯤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나저나, 휘트니 린가드. 그놈은 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것을 제국에서 가능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황자에게 미리 언질을 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인 휘트니에 대한 평가는, 마이어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상향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메르디아와 동급으로 취급해야겠어.'
물론, 그때쯤 마차에서 메르디아의 매서운 추궁과 어쩔 수 없이 납치해 버린 성녀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던 휘트니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상당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최소한, 다음 그림자 회합 때에 변명거리는 생겼으니 다행인 건가.'
이미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
여러모로 탈이 많았던 약혼식의 날이 지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았다.
"하아."
하지만 나는 프롤로그에서 살아남았다는 여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루니엘과 함께 내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집으로 데려오긴 했는데, 이제부터가 문제네.'
왜냐하면 지금쯤 실종 소식으로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황자의 약혼녀이자 예비 성녀, 헤스티아 자작 영애가 나 대신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젠 그리도 발버둥을 치시더니, 지금은 아주 잘 자시는군….'
원래는 그녀를 확보하고 나서 내가 이러한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하려 했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마차에 탄 이후로는, 끊임없이 나를 추궁하다가 기어이 내 집에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메르디아를 말리는 데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제 경혈 찌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깊게 잠들었을 뿐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하…."
그렇게 묻고 싶어 보이는 게 많아 보이는 메르디아를 두고 은밀하게 저택에 내린 나는, 여러모로 상황이 곤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루니엘에게 헤스티아를 잠시 잠재워 달라 부탁하고 내 집의 담을 도둑처럼 넘어 들어왔다.
그러다가 하필이면 빈소에 들렸다 돌아가던 샤샤와 마주치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녀를 제외하면 실종된 성녀가 이 저택에 있다는 사실은 나와 루니엘, 그리고 메르디아 공녀밖에 모른다.
'일단 고비는 한차례 넘겼으니, 메르디아에게는 약속을 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되는데….'
"으으…."
'헤스티아 영애가 이 일을 납득해 줄지 모르겠네.'
이미 거하게 무례를 저질러 놓은 터라 그녀가 날 믿지 않아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라고 해도 이런 비신사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빼돌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그녀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 헤스티아 영애는 스스로의 의지로 저항하는 게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저주가 걸린 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원래라면 프롤로그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만나 성녀의 힘을 각성함으로써 그 저주에서 벗어났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유망주 선발전이 취소가 되는 바람에 그녀는 약혼식에서 살아남더라도 여전히 위험에 빠진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명색이 백마법사인 내가 그녀의 저주를 중화시킬 수 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아마 며칠도 못 가서 프롤로그만큼이나 위험한 사건이 터졌을 것이다.
'결국, 이걸 해결하려면 플레이어블 캐릭터랑 헤스티아 영애를 만나게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내 저주 중화도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황실에 그녀의 신변을 넘겼다가는 황제의 마수가 그녀에게 뻗칠 것이고, 광적으로 원리원칙에 얽매인 신성 교단에 넘겼다가는 성녀의 힘을 깨우친답시고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만나지도 못한 채 끔찍한 고행과 시련을 강요받을 것이 뻔하다.
그렇기에 유망주 선발전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 내가 안전하게 그녀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물론 흑마법사들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세계의 평화와 무엇보다도 내 안락한 여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일단 헤스티아 영애가 성녀로 각성만 하면, 세계 평화는 더 이상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그녀가 알아서 지켜줄 테니 더더욱.
'일단 다시 눈을 뜨면 최대한 친절하게 상황 설명부터 해줘야지. 그리고….'
-쾅쾅쾅!
"깜짝이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미래의 성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때, 별안간 천둥을 치는 듯한 소리가 문 쪽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 오빠! 지금 거기에 있어? 있냐고!
"…세실이니?"
혹시라도 흑마법사나 제국 기사단에게 꼬리가 밟힌 것은 아닌가 싶어 당황하던 차였지만, 다행히도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여동생의 것이었다.
- 대체 언제 돌아온 거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문 열어봐!
덕분에 한숨 돌리던 나는, 다시 한번 문이 뒤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옆에서 검을 반쯤 빼내 들었다 다시 집어넣고 있던 루니엘에게 조용히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긴, 여동생분의 실력은 확실히 진검을 사용해야 할 정도긴 하니…."
"아니, 헤스티아를 보이지 않게 숨기라고요. 이왕이면 루니엘 양도 같이."
그렇게 사소한 시행착오를 걸친 끝에 헤스티아는 루니엘에게 둘러업어진 채 그녀와 함께 내 방의 옷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제야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방문을 열어 동생을 맞이하였다.
"하아, 하아.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하하…. 그야 우리 세실을 완벽한 모습으로 맞이하기 위해…."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세실이 날 자꾸 피하던데, 다시 이렇게 말을 걸어오다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한번 아카데미 이야기나 친구들 이야기나 들으면서 남매의 정을 돈독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
"됐고! 대체 이게 뭐야!?"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언성을 높이며 무언가를 들이민 그녀의 표정을 본 나는 살짝 시무룩해진 기분으로 그녀가 내밀고 있던 신문을 받아 들었고.
"지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어?"
그다음 순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약혼식에서 실종된 황자의 연인. 행방은 오리무중….」
「전례 없는 대사건, 제국 수도의 중심부가 흑마법에 휩싸이다.」
신문의 맨 위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들은, 나로서도 당연하게 예상을 하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린가드 백작가의 장남, 휘트니 경의 목숨을 건 헌신」
「젊은 영웅, 침묵하던 황제 폐하를 움직이게 만들다.」
「특집: 화제의 인물, 휘트니 경. 사실 메르디아 공녀의 약혼자?」
바로 그 아래에 있던 기사들은, 도무지 상상조차 못 하고 있던 제목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약혼식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
나 왜, 영웅이 되어 있지?
17화 – 후폭풍(2)
"왜, 왜 말이 없어."
"음."
"뭐라고 말 좀 해보라니까?"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웅 취급에 잠시 멍하니 신문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앞에서 들려온 세실의 불안한 기색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영웅이 된 건 그렇다 쳐도, 메르디아 공녀랑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
"우, 우리 같은 별 볼 일 없는 백작가가 왜 그런 엄청난 가문이랑 혼담이 오가는 건데?"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하잖아…."
"…그러니?"
"힉."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묻자, 순간 움찔한 그녀는 서서히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대대, 대체. 무슨 꿍꿍이를…."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꼬리를 흐렸다.
'우리 동생은 다 좋은데, 이런 점은 고쳐야겠어.'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세실은 유독 나와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말을 더듬고는 했다.
친구들이나 사용인들과는 잘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처럼 어색하거나 대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만 그러는 듯한데.
물론 그런 사소한 결점이 뭐든 잘하는 세실을 깎아내릴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 트집을 잡는 것이 바로 귀족들의 사회다.
당연히 그딴 걸로 내 동생을 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녀의 보호자인 내가 용서치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없는 곳에서조차 그녀를 지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세실 스스로가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
"…세실."
"...!"
"내가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잠시 기사를 보고 생긴 고민을 마음의 구석에 치워둔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군가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면, 말을 똑바로 하라고."
"아, 알겠…."
"자, 그럼 다시 말해 보겠니?"
그러자 잠시 몸을 떨던 그녀는, 이내 심호흡을 하더니 비록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확실하게 말을 끝맺었다.
"…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그래, 하려면 할 수 있잖아."
역시, 우리 동생은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주 연습시키면, 분명히 훗날에는 뛰어난 가주가 되어 가문을 부흥시키겠지?
"장하네, 우리 동생."
"읏."
"그래도 나한테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는데, 살짝 섭섭하네…."
"내, 내 말에 대답이나 해…."
그렇게 기특한 마음을 품고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나는, 주먹을 꽉 쥔 세실이 내뱉은 말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시작했다.
"이게 다 너와 가문을 위해서란다."
"…뭐?"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갑자기 내 이름이 제국 전역에 알려진 것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물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당황이 더 크긴 했지만, 어쨌든 나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니 위험 부담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메르디아 공녀와의 약혼설은 사실이야. 이미 며칠 전에 이야기를 정리한 참이지."
"그, 그 말은…."
"그래, 이제 나도 슬슬 진심을 다해 움직일 생각이거든."
하지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 이름을 알린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보다는 최대한 이용해 먹는 것이 정답이겠지.
지금은 메르디아와의 약혼으로 어찌 저찌 버티고 있는 상황이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만일을 대비한 플랜 B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자신도 있고 말이지."
그러한 다짐을 굳게 할 겸, 나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세실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혀 보였다.
"...."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마른침을 삼킨 세실의 얼굴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하여간 우리 동생은 마음씨도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속으로 그리 흐뭇한 마음을 품던 나는, 이내 세실의 어깨를 다독이며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고.
"넌 그냥, 이 오라버니의 활약을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하나만 물을게."
그런 나를 한동안 입술을 짓씹으며 바라보던 세실은,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황자의 약혼녀가 실종된 사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거 맞지?"
그 예리한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짓던 표정 그대로 잠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오빠?"
"아, 물론이지.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저지르겠…."
덕분에 세실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기에, 다급히 정신을 차린 나는 최대한 태연한 태도로 변명을 시작했다.
- 쿵!
별안간 방에 있던 옷장에서 수상쩍은 진동이 울려 퍼진 것은, 하필이면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바, 방금 뭐야?"
"응?"
"옷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울린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세실은, 이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글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오빠, 설마…."
"그건 그렇고 슬슬 아침 식사를 할 때 아니니? 우리 오랜만에 둘이서 같이…."
그런 세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나는, 또다시 겁에 질려 가던 그녀의 등을 떠밀며 방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 쿵! 쿵!
이번에는 한층 더 또렷한 진동이 무려 두 번이나 옷장 안에서 울린 순간.
"이익!"
"어이쿠."
최연소 은급 기사 수련생다운 날렵한 움직임으로 날 제친 그녀는, 순식간에 옷장 앞에 도달해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뻗기 시작했다.
- 끼이익….
하지만 미처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먼저 열/려진(린)/ 옷장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례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던 루니엘 한 명이었다.
"루, 루니엘."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때.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있던 세실이, 슬그머니 옷장의 문을 다시 닫던 루니엘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세실은 기사로서 루니엘을 상당히 존경하는 눈치였지.
알프레드에게 듣기로는 루니엘이 며칠 전에 저택에서 하녀 일을 할 때 세실이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다고 하니, 사실 나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루니엘 단장님!"
덕분에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루니엘에게 달려가 안긴 세실이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 저는 이제 휘트니 경의 소유물로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기사들은 계급이 아니라 실력으로 말한다 하신 건 단장님이잖아요! 그,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이 도움을 받았는데…."
그러고 보니, 금급 기사 수련생들은 종종 아래 등급 기사들의 단장을 맡고는 했지.
그렇다면 세실은 루니엘을 단장으로 섬기고 있던 건가? 어쩐지, 단순히 존경하는 것 치고 너무 잘해주더라.
"그런데, 왜 옷장에 들어가 계셨던 건가요?"
"그건…."
"생각해 보니 여긴 오빠 방인데, 왜…?"
덕분에 살짝 시무룩해졌던 표정을 풀고 있는데, 세실의 눈이 별안간 게슴츠레해진다.
"아."
그러고는 옷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헝클어져 있던 루니엘의 머리와 옷, 그리고 방금까지 헤스티아가 누워 있었기에 어색하게 치워져 있던 이불에 차례대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쓰레기."
이내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 보더니, 곱디고운 입에서 싸늘한 매도를 내뱉기 시작했다.
"죽어."
"세실? 뭔가 오해가…."
"죽어죽어죽어."
한순간에 그녀의 생각 속에서 귀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나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변명을 해 보려 했으나.
"무언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만, 저와 휘트니 경은 그저 이곳에서 평범한 수련을 했을 뿐입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방에서 무슨 수련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제가 좋아서 부탁한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루니엘이 변명이랍시고 내뱉은 발언에, 그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 좋았다고요?"
"그렇습니다."
"왜, 왜요?"
하지만 그런 내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자신의 변명이 먹혔다고 생각한 루니엘은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오해에 쐐기를 박았다.
"보다 우월한 존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니까요."
"...."
"아직 세실 양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크면 저절로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리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지어 보인 루니엘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실의 눈이, 이내 빠르게 죽어가기 시작한다.
아니, 이건 정말로 오해인데.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나, 결정했어."
그 덕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상황을 수습할 방도를 고민하고 있는데, 별안간 각오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난 어떻게든 가주가 될 거야."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어 있던 세실의 눈이 어느새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보란 듯이 오빠를 꺾고 가주가 되어서, 단장님을 구할 테니까…!"
"하하, 세실…."
그 모습을 본 나는, 상황이 상황이었음에도 귀에 입이 걸릴 정도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가 되겠다고?"
동생이 가주가 되겠다고 스스로 포부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번 해 보렴."
혹시라도 그녀가 가주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봐 그동안 말을 먼저 못 꺼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입으로 듣게 될 줄이야.
그녀가 너무나도 기특한 나머지 눈물이 찔끔 흐를뻔했지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그녀를 응원했다.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세실을 위해서라면 이런 오명쯤이야 얼마든지 뒤집어쓸 수 있다. 물론 내 이미지는 살짝 안 좋아지겠지만, 나중에 사실을 밝히면 그만이니까.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겠지만, 어디 한번 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미래에 가주가 된 세실의 모습을 속으로 그리고 있는데, 입술을 꽉 깨문 채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방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제국 유망주 선발전에서 내가 우승하면, 그 여유로운 미소도 사라질 테니까!"
잠깐만, 그건 안 되는데?
메르디아의 말대로 유망주 선발전이 조만간 재경기를 펼치게 된다면, 거기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산더미처럼 참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세실이라 해도....
- 쾅!
그런 생각을 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실이 유망주 선발전에 참가하겠다 밝힌 것도 걱정할 거리는 맞았지만, 지금 신경을 써야 할 곳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흠."
그렇기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이내 걸음을 소리가 났던 옷장으로 옮긴 나는.
"돌겠네."
루니엘이 슬쩍 닫았던 옷장의 문을 다시 열고는, 이내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옷장 안에서 정신을 차리시는 바람에…."
"읍, 읍!"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반드시 협조를 구해야만 하는, 황자의 약혼녀이자 미래의 성녀.
그러한 대단한 존재가 루니엘이 옷장 안에서 급한 대로 처한 응급조치로 인해, 손과 발은 이불로 묶이고 입에는 베개 커버가 물/려진(린)/ 채로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읍…."
그런 그녀가 옷장의 문을 연 우리를 보고 신음을 멈추며 지은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동생께 들키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다행…. 맞나요?"
이걸 이제 어떻게 수습하지?
*****
한편 그 시각. 린가드 백작가의 마당.
"그거…. 꿈이겠지?"
새벽에 잠시 빈소에 들렸다가 목격한 충격적인 장면 덕분에 아침까지 잠을 설친 샤샤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저택의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하, 하긴. 아무리 도련님이라고 해도, 설마 그런 짓까지 할 리가…."
이른 아침부터 황자의 약혼녀가 실종된 대사건에 대해 떠들어 대던 사용인들의 대화를,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하면서 말이다.
- 다그닥, 다그닥….
그러던 그때, 저 멀리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빗자루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고.
"이런 이른 시각에 누가…."
"여긴가."
"히, 히익."
이내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저택의 입구에 보이기 시작하자, 그대로 빗자루를 놓치고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봐, 거기."
그 하찮은 모습이 워낙 눈에 띄어서였을까.
저택의 입구에 모인 사람들의 맨 앞에 있던 남자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는 손짓을 해 보이며 부르자, 샤샤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휘트니 경은 어디에 있지?"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살려주세요!"
"...?"
그 바람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영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자, 잠시 고개를 기우뚱하던 남자는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소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저저, 정말요?"
그 말에, 샤샤는 슬그머니 눈을 뜨며 소심한 목소리로 그리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그저 황제 폐하의 명령을 가져왔을 뿐이니까."
"히에에에엑."
"…어디가 아픈 아이인가?"
남자의 입에서 갑자기 그녀의 콩알만 한 심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튀어나오자, 다시 눈을 감으며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는 그녀였다.
18화 불청객
"저기, 입에 있는 거 빼 드릴 테니까요."
"...."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옷장 안에 구겨져 있던 헤스티아 영애를 루니엘의 도움을 받아 다시 침대로 꺼내 놓은 나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던 그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을 뻗었다.
"하아, 하아."
그렇게 헤스티아의 입에 물려 있던 베개 커버를 빼내자, 잠시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던 그녀가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어."
"저기…."
"이제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는, 절대 움직여 주지 않을 거니까."
비록 여전히 그녀의 표정에는 어느 정도 공포감이 섞여 있었지만, 띄우고 있는 눈빛만큼은 결연했다.
"이 더러운 흑마법사야."
"하하…."
그런 그녀가 짓씹듯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자, 나는 하마터면 삼류 악당마냥 손뼉을 치며 그 기개를 칭찬할 뻔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동안 쌓인 오해를 풀 시간이었다.
"저는 백마법사인데요?"
"뭐?"
"자, 보세요."
그러려면 우선 내가 흑마법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나는 각오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앞에 손을 내민 채 조용히 백마력을 끌어모아 보였다.
"내, 내가 알던 백마력과는 조금 다른데."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헤스티아의 눈에는 내 회색빛 흑마력이 상당히 수상쩍어 보인 모양이었다.
성녀의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 긴가민가하는 백마력이라니, 이러다가 나중에 백마법사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흑마력은 아니죠?"
"그, 그건 그렇긴 한 것 같은데…."
하지만 다행히도, 한참 동안이나 내 백마력을 살피던 헤스티아는 내가 흑마법사는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 듯싶었다.
"혹시, 머리를 아프게 하던 목소리가 이제 안 들리지 않나요?"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제 백마법이 영애의 저주를 중화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지만요."
그렇기에 내친김에 그녀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꺼내 놓은 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헤스티아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사실 당신을 구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날…?"
"전 흑마법사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당신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도 알고 있죠."
그 말에 눈이 크게 뜨인 헤스티아의 눈동자는, 또다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소 거친 방식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대신, 부탁 하나만 하죠."
"...."
"앞으로 몇 주 정도만 이곳에 머물러 주시겠어요?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거든요."
그런 그녀의 손과 발에 묶여 있던 이불을 손수 풀어주며, 나는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지만.
"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죠?"
역시나, 헤스티아는 여전히 상당한 불신과 미약한 공포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사실 당신이 그 저주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머릿속에 목소리가 안 들리고 있는 거고."
"그게 정말이라면, 이제 와서 굳이 이렇게 행동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나를 이렇게 속여서라도 회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하긴 지금껏 믿을 사람도 없이 계속 이용만 당해왔을 텐데, 자신을 밑도 끝도 없이 납치한 자가 갑자기 이런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그럴 만도 하겠지.
"…당신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절 신성교단 측으로 보내주세요."
"그건 힘들겠는데요. 그분들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는 영애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헤스티아의 간절함이 섞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아마 그들은 보호는커녕 당신을 끝없는 시련에 밀어 넣을 겁니다. 그러니…."
"그럼, 제국에 상황을 설명하고 신변 보호를 요청해 주세요."
"그것도 안 됩니다. 무엄한 발언이지만, 황제 폐하가 당신을 노리고 있기에."
물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헤스티아에게는 말을 계속 돌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계속 이곳에 붙잡혀 있으라는 거군요.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아무 증거도 없이."
그렇기에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이해가 갔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미래에 성녀가 될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으음. 이 선량한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선량…?"
"농담이니까 그렇게 정색하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내가 사실 이 세계를 게임으로 한번 체험해 본 전생자라는 진실을 밝혀 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당할 것이 뻔했기에,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아, 그래. 이 방법은 어떨까요?"
"...?"
별안간 뇌리에 떠오른 무척이나 간단한 해결책을,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헤스티아 영애에게 눈을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헤스티아 영애께서 제 영혼을 직접 읽는 겁니다."
"여, 영혼을 말인가요?"
"당신이 신의 신탁을 받은 성녀라면, 제 영혼이 사악한지 아닌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겠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긴 하지만, 나는 전생이나 현생이나 꽤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히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도 없고, 가진 게 있으면 항상 나누는 것을 인생의 신조로 삼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적어도 성녀에게 영혼을 읽었을 때, 그녀를 안심시킬 정도는 되겠지.
"나는…. 성녀가 아니에요."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헤스티아의 반응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그 빌어먹을 목소리 때문에 억지로 성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뭣도 아닌 자작가 차녀에 불과하다고요."
"신성 교단의 신탁은요?"
"그들이 조작한 거겠죠. 저에게는 신성력은커녕 마법의 재능조차 없으니까요. 참으로 이용해 먹기 좋은 꼭두각시죠?"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인 채 그때까지 입고 있던 치장이 가득한 약혼식용 드레스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하지만 전생의 지식을 가진 나는, 그녀가 역대 성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재능을 타고난 희대의 사기 캐릭터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프롤로그에서 생존하는지에 따라 게임 전체의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이 정해질 정도니,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플 정도다.
"자, 손을 한번 내밀어 보세요."
"힉."
"…이번에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어서."
그렇기에 머뭇거리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재빨리 낚아챈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며 내 몸에 있는 영혼을 공명시키기 시작했고.
"자, 이제 눈을 감고 집중해 보세요. 제 몸에 흐르는 영혼의 기류를 느껴보라 이 말입니다."
"그, 그렇게 말해도…."
과연 무시무시한 재능을 타고난 덕분이었을까.
"…어, 어어?"
"거봐요. 느껴지죠?"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금세 내 영혼을 인지해 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영혼인가요?"
"그렇죠. 원래 영혼을 감지하는 것만 해도 몇 개월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데, 역시 성녀는 성녀군요?"
"어라? 그런데 왜 이렇게 깨끗하지…?"
그런 그녀가 문득 의외라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리자, 나는 생각이 먹혀들었음을 직감하고는 밝게 눈웃음을 쳐 보이며 쐐기를 박으려 했지만.
"그게 바로 제가 당신을 구할 생각으로 가득 찬 선량한 백마법사라는 증거…."
"…자, 잠깐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헤스티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힉!"
"성녀님?"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이 되어 몸을 비틀더니, 비 오듯이 식은땀을 흘려대는 것이 아닌가.
"아, 아아…. 아아아…!"
"저런, 부담이 심했나 보군요. 그래도 처음치고는 굉장히 잘하신 겁니다."
덕분에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아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그녀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다급히 영혼의 연결을 끊고 그녀를 위로했다.
"하아, 하아…."
"그래서, 이제 좀 어떤가요? 제 말을 믿을 수 있겠죠?"
그럼에도 헤스티아의 얼굴이 여전히 창백해 보였기에,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질문을 던지던 나는.
"시, 시키는 대로 할게요."
"아, 그거 다행…."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속으로 내심 안심을 했지만.
"내가…. 내가 뭘 하면 되나요…."
"어…. 그냥 때가 올 때까지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시면 된다니까요?"
어째 그녀의 반응이 조금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
이 사람, 왜 갑자기 고장이 나버린 거지?
- 쾅쾅쾅!
그렇게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내가 벙쪄 있던 바로 그때였다.
- 도, 도련니이임!
별안간, 문밖에서 샤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말이다.
"샤샤, 지금은 제가…."
- 화, 황실에서 사람들이 왔어요오!
"예?"
물론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이번에는 샤샤가 무슨 소식을 들고 왔더라도 뒤로 미룰 생각이었지만, 문 뒤에서 그녀가 '황실'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순간 다급히 걸음을 문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서 여긴 왜…?"
"화화화, 황제. 황제 폐하의 명령을 가져왔다는데요오?"
그렇게 문을 살짝 열고 그녀를 맞이한 나에게 샤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한 소식은,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알프레드는 지금 어디에 있죠?"
"아, 알프레드 님은 제국 사용인 집회에 참석하러 가셨어요."
"그럼, 파르샤는?"
"파, 파르샤는 어제 이후로 계속 앓아누워 있는데요…."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아진 헤스티아를 봐줄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주인님, 우선 이곳은 제가 맡…."
"맡아서,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나마 마침, 내 옆에서 말을 걸어온 루니엘이 있긴 하지만.
"우선 옷장에 다시 집어넣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하아…."
아무래도 해결책으로 성녀를 옷장에 처박는 것을 진지하게 제시한 그녀는 섬세함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기에, 믿고 맡길 수는 없었다.
"부, 분위기를 보니까 도련님을 지금 당장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것 같던데…."
"...."
"어, 어떻게 해요. 도련님?"
그렇다면, 역시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겠지.
"샤샤 양."
"네, 네에?"
"제가 당신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는 거, 알죠?"
"그, 그건 갑자기 왜…."
그렇기에 찰나의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가득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샤샤에게 진지한 말투로 당부를 시작했다.
"잠깐이면 되니까,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안에 계신 분을 잘 돌봐주셨으면 해서."
"누, 누누 누구를…."
"그건…. 모르셔도 됩니다."
"힉."
나로서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단호한 말을 들은 샤샤의 눈동자가 불쌍하게도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미어졌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 뜨이면 여러모로 곤란하신 분인 것만 알아두세요."
"저, 저저 저는."
"정 들킬 것 같으면, 루니엘에게 집무실의 비밀 통로에 대해서 물어보시고요."
하지만 세계의 평화와 샤샤에게 꼬박꼬박 고액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우리 가문의 운명을 지키려면 그녀의 힘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잠시 생각할 시간을…."
"믿을게요, 샤샤?"
"어, 어어?"
속으로 그리 합리화를 하며 여전히 눈에 지진이 나 있던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옷차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히에에에에에에엑!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버린 샤샤의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을, 쓴웃음을 지은 채 들으며 말이다.
"하하…."
돌아오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챙겨줄 겸 포상 휴가와 봉급을 넉넉히 챙겨줄 테니. 이번 한 번만 잘 부탁할게, 샤샤.
*****
한편 그 시각. 엠버그린 공작가.
"그래서, 여기에 왜 왔다고?"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비운 엠버그린 공작 대신 메르디아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그 영지에, 어째서인지 휘트니를 찾아온 것과 거의 동일한 수의 제국 기사단이 방문해 있었다.
"메르디아 공녀님을 어제 약혼식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참고인 신분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나는 이미 현장에서 모든 조사에 협조했을 텐데."
"조사 중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부득이하게 모시게 된 점은 죄송합니다."
물론 휘트니의 경우에는 의전의 성격이 강했지만, 메르디아를 찾아온 기사단의 병력에는 아무래도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꼭 조사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밝힐 수 없는 은밀한 사항 때문에 반드시 메르디아 공녀님을 모셔 오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의전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를 데리러 온 자들이 제국 무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 기사단이었던 것이 첫 번째 증거였고.
"그러니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당신과 적대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더욱이 맨 앞에 있던 기사단장과 부관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증거였다.
"그래서?"
하지만 그런 그들과는 달리,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던 메르디아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할 뿐이었다.
"황제가 오라고 하면, 내가 고개를 숙이고 가야 하나?"
만약 그 말을 한 것이 메르디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 목을 베여도 뭐라 할 수 없는 불경죄였을 것이다.
"황실과 엠버그린 공작가가 맺은 맹약을, 제국 기사단인 너희들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그리고 나는 지금, 엠버그린 공작가의 임시 가주로서 모든 권한을 대리하여 행사할 수 있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나 현재 모종의 이유로 자리를 비우고 있는 엠버그린 공작 대신 가주 대리를 맡고 있는 메르디아는, 최소한 황제의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던 마이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계속 그리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저희도 곤란…."
"계속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하지."
그리고, 애초에 가주 대리로서의 권위가 없었더라도 메르디아의 의지에 반해 그녀를 데려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지금 매우 피곤하고, 또한 불쾌한 상태야."
"...."
"그러니 날 보고 싶으면, 황제가 직접 오라고 해."
제국의 제1 기사단을 격식을 무시한 채 홀로 맞이하고 있었음에도, 긴장을 한 쪽은 그녀가 아닌 기사단 측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거, 아무래도 글렀군."
"…휘트니 경은, 지금 막 제2 기사단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고 합니다."
"하아, 그럼, 우선…."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옆에서 부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해온 보고에 한숨을 내쉬며 병력을 물리려던 바로 그때였다.
"거기 너."
"네?"
"지금 뭐라고 했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메르디아가, 별안간 눈을 번뜩이며 부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휘, 휘트니 경 또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그자가?"
"물론 휘트니 경은 가벼운 참고인 조사만 마치고, 폐하의 치하를 받을 예정이오나…."
그 사소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에 띄는 행동에, 부관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고.
"아무래도 정확한 논공행상을 위해서는, 그분과 같이 약혼식에 참석했던 공녀님의 증언이 중요하기에…."
"…그럼, 가도록 하지."
"예?"
정말 놀랍게도,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르디아에게서 지금까지의 대치가 허무해질 정도로 빠르게 답변이 돌아왔다.
"잘 못 들었나?"
"아니, 그게…."
"황실에 내 친히 행차해 준다고 말한 참이야."
덕분에 멍하니 눈을 끔뻑이기 시작한 기사단에게 다시 한번 확답을 한 메르디아는, 참으로 태연히도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내 약혼자가 거기에 있으면, 나도 가야지."
"...."
"그에게는 아직 볼 일이 있거든."
이윽고 그 말을 남기고는 기사단의 사이를 지나친 메르디아가 미리 대기 되어 있던 마차에 오르자, 벙찐 표정을 짓고 있던 부관이 문득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제국 신문 그거 다 뻥이라면서요, 단장님."
"…난들 알았냐."
그런 그녀와 마찬가지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마차에 올라탄 메르디아를 힐끔거리며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답하는 기사단장이었다.
"그 메르디아 공녀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도 모르던 백작가 장남이랑 진짜로 그렇고 그런 관계였을 줄을."
비록 그뿐만이 아니라, 기사단 전원의 시선이 메르디아에게 향해 있었지만.
"...."
장작 마차에 턱을 괴고 걸터앉아 있던 메르디아의 시선은, 그때까지도 손에 매여 있던 누군가의 손수건에 향해 있었다.
19화 오해
메르디아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1기사단의 시선을 받으며 막 마차에 올랐을 때쯤.
"으아아. 지, 진짜로 따라가잖아아…."
헤스티아가 있는 방에 밀어 넣어졌던 샤샤는, 창가에서 발꿈치를 들어 올린 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는 휘트니를 보며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 잡혀 가는 건 아니시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납치하던 순간부터 쭉 옆에 있었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발각된 기색은 없었습니다."
"대, 대체 둘이서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런 샤샤의 옆에서 홀로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니엘이 태연한 태도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덕분에 기겁을 한 샤샤는 소리를 높여 따지기 시작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황자의 약혼식을 망치고 약혼녀를 빼돌려 왔습니다."
"그러니까, 왜…?"
"주인님이 하시는 일에 왜 의문을 품어야 합니까?"
하지만 루니엘이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답하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샤샤는 이내 다시 울상이 되어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이,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살짝 든 샤샤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돌려 침대에 앉아 있던 헤스티아를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저, 저기요."
"...."
"저기이…. 들려요오?"
그러나, 휘트니의 영혼을 접한 이후로 어째 넋이 나가 있던 헤스티아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보세요…."
"힉!"
"흐엑!"
덕분에 불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밀던 샤샤는, 별안간 헤스티아가 몸을 움츠러트리자 마찬가지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데칼코마니였다.
"다다, 당신은 누구죠?"
"샤, 샤샤인데요."
"네?"
"아. 다, 당신을 맡게 된 전담 하녀예요. 원래는 도련님의 전담이긴 한데…. 그러니까…."
그렇게 한바탕 촌극을 벌인 둘이 서로 말을 더듬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왜 다들 거기에 모여 있어요?"
별안간 그녀들의 뒤에서, 파르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파, 파르샤? 여긴 어떻게…?"
"몸이 조금 나아져서 도련님을 보러 온 참인데."
"무, 문은 어떻게 열었어?"
기계처럼 고개를 삐그덕 거리며 뒤를 바라본 샤샤가 얼빠진 얼굴로 질문을 던지자, 파르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그냥 열려 있던데?"
"아."
그런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조용히 등 뒤로 감추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니던 샤샤는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떡하니 벌리며 굳어버렸다.
"그런데 뒤에 있으신 분은?"
"이, 이분은. 그러니까. 어. 그게."
"아, 알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파르샤가 별안간 손뼉을 치며,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온다던 하녀지?"
"하, 하녀?"
"요즘 하녀를 구하고 있다고 도련님이 말씀하셨는데, 아닌가?"
"아, 응. 맞아! 하녀!"
물론 샤샤에게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복장이 조금 마음에 안 드네."
"응?"
"하녀는 하녀답게 복장을 갖추어야지. 왜 그런 옷을 입혔어?"
"그, 그건…."
그러나 파르샤가 다시 한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샤샤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는다.
"시, 신고식 중이었어!"
"신고식?"
"우, 우리 저택에서는 하녀한테 드레스를 입히는 전통이 있거든! 그, 그쵸. 루니엘 씨…?"
그 상태로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있지도 않은 부조리를 창조해 낸 샤샤가 루니엘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우, 우선은 이쯤 하고 슬슬 하녀복을 가지러 가죠. 아주 복 받은 줄 아세요?"
"...."
"차, 참고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하는 신고식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가, 각오하시고요?"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샤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스티아에게 다급히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들키기 전에 빨리 변장시켜야 해애…."
"하핫, 내 친구는 오늘도 귀엽네."
그런 그녀의 잔뜩 울먹이는 중얼거림이 복도에 울려 퍼지자, 조용히 피식 미소를 짓던 파르샤는 이내 옆에 있던 루니엘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루니엘 씨도 슬슬 나가보세요."
"내가 왜 너의 명령을 들어야 하지?"
하지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니엘의 반응은 상당히 시큰둥했다.
"제가 도련님의 오른팔이니까요?"
"이상하군, 그건 나인 줄 알았는데."
"본인 입으로 그저 도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를 꼬마 보다는, 도구가 더 오른손에 쥐어질 확률이 높지."
덕분에, 잠시 둘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했지만.
"뭐, 그건 나중에 확실히 하자고요."
문득 시선을 헤스티아에게 돌린 파르샤가, 말을 끊고 걸음을 그녀에게 옮김으로써 때아닌 충성심 경쟁은 우선 일단락되었다.
"저기요."
"네, 네?"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그렇게 헤스티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파르샤가,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앞에 있었던 대화도 듣지 못한 그녀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휘트니 경의 영혼을 읽었죠?"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
"어떻던가요? 휘트니 경의 영혼에서 무엇이 보였죠?"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모르는 척을 하려던 헤스티아였지만, 어째 파르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너무나 간절해 보였다.
"…그걸 왜 묻는 건가요."
"성녀님의 답변에 따라, 제 운명도 달라지니까?"
옛날부터 어린아이에게 약했던 헤스티아로서는, 이제는 아예 대놓고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는 파르샤의 질문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신 같은 어린아이들도 이곳에 억지로 붙잡혀 있는 건가요…."
"부탁이에요, 성녀님…."
"하아."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미 샤샤와 파르샤는, 마굴에 잡혀 억지로 일을 도맡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지 말고 들으셔야 해요."
그렇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납치범치고는 그의 영혼이 너무 깨끗하길래, 저는 어떻게든 사악한 흔적을 찾아보려 했어요."
"...."
"그러자 제 눈앞에 보인, 그의 영혼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건…."
그런 헤스티아의 이마에서, 서서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끔찍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제국…. 아니, 세계였어요."
"흡."
그 말을 들은 파르샤가 일순간 헛숨을 들이키자, 가엾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파르샤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저, 저희는 그저 그의 손에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모든 운명을 강제로 결정했으며…."
"...."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자, 세계가 암전하더니…."
하지만 거기에서 잠깐 말을 멈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남은 것은, 그저 어둠과 고요였답니다."
그리고 시작된 정적.
"그, 그러니까 저를 도와주세요. 지금이라도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면 그걸 막을 수 있거든요."
"...."
"저기, 제 말 듣고 계시나요?"
그 정적 속에서 파르샤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을 도와달라는 본론을 꺼내던 헤스티아는, 어째 그녀가 반응이 없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저는, 혹시 보이던가요?"
"어? 그러고 보니까…."
이윽고 파르샤가 멍한 표정으로 그리 묻자, 잠시 기억들 되짚어 보던 그녀는.
"바로 앞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
답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뜨며 또다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역시…."
"서, 설마."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휘트니가 세계를 불태우는 것을 돕던 일등 공신이, 자신의 앞에서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설마 날 그렇게나 신뢰하고 계셨다니…"
"오, 맙소사."
"이힛, 이히히히…."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희열이 가득한 웃음을 터트린 파르샤로부터 다급히 뒤로 물러난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히 가장 중요한 건 아직 말하지 않았어.'
그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한 내용대로, 사실 헤스티아는 자신이 본 모든 걸 파르샤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가 암전된 이후에, 암흑 속에서 떠오르던 그 정체불명의 문자들. 그 마지막 장면이 분명 휘트니의 목적일 거야.'
검게 암전된 세계의 하늘에, 마치 무언가의 이름 같은 문자들이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하는 것이 그녀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이시여. 제가 정말 당신의 성녀가 맞다면….'
그러나, 아쉽게도 그 문자들은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문자였기에 헤스티아는 결국 성녀로서는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저에게 진실을 깨달을 지식을 주소서….'
그러한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헤스티아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은 없었다.
'…신이시여?'
왜냐하면,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그것이 휘트니가 전생에서 플레이했던 게임의 엔딩 크레딧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까.
물론 헤스티아의 잘못보다는,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사악한 행동이 호기심에 딱 한 번 악 성향으로 게임을 플레이해 본 것이었던 휘트니의 잘못이 컸다.
"서, 성녀…. 아니, 신입 하녀님. 메이드복을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생전 처음 타보는 말에 오른 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향하던 나는, 행여나 바닥에 나뒹굴까 봐 갑작스럽게 쑤셔오는 귀를 파지도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닙니다. 하하."
"어차피 슬슬 도착했으니,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내 옆에 있던 제2 기사단장의 말대로, 어느새 저 멀리 하늘 높이 뻗어져 있는 황궁의 첨탑이 보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동안 볼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린가드 백작가의 영지가 수도 바로 옆에 붙어 있긴 해도,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빠르게는 오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거리도 거리지만, 어째 나는 옛날부터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거동 수상자 취급을 받으며 검문을 받기 일쑤였으니까.
관문이 나타날 때마다 제2 기사단장이 들어 올린 황실의 인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내가 도착한 것은 며칠 뒤였을지도 모른다.
"우욱…."
물론, 말 한번 타본 적 없는 나에게 말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린 황가의 명마도 그 경이로운 속도에 한몫했다.
"정지. 정지하라."
"잠깐 멈추시오!"
덕분에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꾸역꾸역 참으며, 마침내 삼엄한 경비가 이어지고 있는 황궁의 입구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이거, 어째 오해가 끊이질 않는군,"
"아하하…."
어제의 일 때문인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황실 경비대가, 다급히 우리를 향해 뛰어오며 손을 흔든 것은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게. 이분은 흑마법사나 범죄자가 아니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휘트니 경으로…."
"저, 저희도 압니다!"
그 모습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제2 기사단장이, 내가 또다시 흑마법사나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황실의 인장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럼 왜 막는 거지?"
"그, 그것이…!"
어째 그럼에도 우리의 앞을 막고 있는 경비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에, 나와 기사단장이 일제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때.
"이놈들! 이거 놔라!"
저 멀리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던 경비대를 팔을 휘둘러 떼어낸 누군가가,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휘트니 경!"
그제야 나는 왜 그들이 그리 좌불안석인지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네!!"
어제 열렸던 약혼식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황자가, 마치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절친을 마주한 것마냥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좀 도와주게!!!"
'이건 또 뭐야, 시발.'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의 약혼녀를 부득이하게 납치한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