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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시작부터 위기

프롤로그.

메르디아 엠버그린.

제국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 가문의 유일한 직계혈통을 타고난 공녀. 

그러나 특유의 잔혹한 성정과 주위에서 도는 수많은 괴소문 덕분에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인물. 

그런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의 독에 당해 실려 나갔어야 했던 약혼 예정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를 악물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차 안에 독이 들어있었던 모양이네요?"

"⋯⋯."

"다행히 제가 다시 살아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흑발과 흑안, 그리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제에 자신을 백마법사라고 소개한 수상쩍은 녀석.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 건지 구분조차 잘 안 가는,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배신할 상이라든지 숨겨둔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소리가 나올만한 외모를 가진 인물.

그리고, 공작가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떨거지들과 메르디아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황실이 오직 그녀의 견제를 위해 작정하고 약혼자로 밀고 있는 성가신 존재.

그런 그가 태연하게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조금 전 자신에게 독을 먹인 자신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공녀님이 절 독살이라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아다닐 뻔했잖아요?"

그 누구라도 문득 온몸에 소름이 끼칠 만큼 섬찟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그 시점에서 메르디아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년은, 아마 자신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자애로우신 공녀님께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죠, 공녀님?"

그리고 아마 자신은, 그러한 인물이 쳐놓은 덫에 이제 막 걸려든 듯싶었다.

"그러니까 슬슬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시는 건 이제 그만둬 주시겠나요?"

그것을 아주 잘 아는지, 그 역시 실눈을 더 가늘게 뜨며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무섭다고요, 그런 표정은."

지금쯤 자신이 짓고 있었어야 할 그 표정에, 처음으로 사냥꾼에서 사냥감의 입장이 된 메르디아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

휘트니 린가드.

제국 수도 인근에 위치한 평범한 백작가 린가드 가문의 맏아들.

사실 살면서 나쁜 짓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지만, 순전히 그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외모와 말투 덕분에 수많은 음해를 당해온 불쌍한 녀석.

그런 그는, 한때 자신의 최애 캐릭터였지만 이제는 눈앞에서 살아 숨 쉬며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백금발의 공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짜 무서워 죽겠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자신의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역시 저 무시무시한 악역 공녀를 파멸의 운명에서 구해내는 것밖에 없다고.

조금 전에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자각해 낸 이유도, 아마 신이 그것을 돕고 있는 것이라 말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아까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그렇기에 없던 용기까지 전부 끌어내어, 오늘도 순수함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였다.

"우리 아직 할 이야기가 많잖아요?"

*****

아무래도 나는 지금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듯싶다.

무려 하루 전에 통보받은 내 약혼 예정자와의 첫 만남에서 찻잔을 입에 댔다가 다시 눈을 뜬 직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보다도, 먼저 당신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요."

"흐음."

"왜 차 안에 독이 들어갔는지 조사를 하는 것도 시급하고요. 그러니, 대화는 아무래도 나중으로 미루어야겠군요."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영 어색하기만 하던 약혼 예정자의 얼굴이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사색이 되어 눈치를 보고 있는 시녀들의 가운데에서 홀로 평정을 유지한 채 보석 같은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제국 유일 공작가의 공녀 메르디아 엠버그린.

방금 막 떠올려 낸 나의 전생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블랙테일 판타지 3의 메인 빌런이자, 거의 대부분의 루트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그런데, 그 표정은 뭐죠?"

결국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고야 마는, 그렇기에 내가 흐릿한 전생의 마지막까지 밤을 새워 살려보려고 노력했던 나의 최애 캐릭터였다.

"혹시 제 제안에 불만이라도 있으신지?"

그러한 캐릭터가 지금 내 앞에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약혼 예정자였던 나의 찻잔에 독을 탄 것은 덤이었지만 말이다.

"피, 피까지 토하면서 쓰러지셨으니 분명 속이 상하셨을 겁니다."

"주치의를 준비시켜두었으니 저희를 따라오시면 당장 진료를…."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앞쪽에서 시녀들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갑자기 죽다 살아나고 전생의 기억까지 떠올린 나도 나지만 그러한 상황을 마주한 저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의 현생인 '휘트니 린가드'는 메르디아의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저들은 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수면 독으로 잠시 정신만 잃게 하고 날 협박하려 했겠지.

그러니 어쨌든 내가 다시 깨어난 지금은, 치료를 핑계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협박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메르디아가 내 최애였다고 해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전력을 다해서 배드엔딩으로부터 살아남아 볼 생각이다.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악역 공녀 '메르디아'와 함께.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히 그녀가 최애라서라는 단순한 이유는 아니고, 메르디아와의 약혼이 깨지는 순간 내 팔자도 망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장남으로 있는 린가드 가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사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메르디아와의 약혼마저 깨지게 된다면, 아마 몇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몰락 귀족 신세가 되거나 거리에 나앉게 되겠지.

그렇기에 가문의 위세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번 약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제아무리 주변의 평판이 좋지 않아도, 제국에 하나뿐인 공작가의 공녀와 약혼을 한 사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이점이니.

사실 기억이 방금 막 깨어난 참이라 아직은 모든 게 어색하기에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 자신의 성격이나 인격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이 없기에 자아는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뭐 그거라도 위안으로 삼고, 이왕 목표를 정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첫 만남부터 날 죽일 생각까진 없었던 공녀의 계획에 누군가가 개입해 날 진짜로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

사방에 눈과 귀가 있기에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메르디아는 똑똑하니 아마 약간의 언질만 줘도 잘 알아듣겠지.

"이번 일은 공작가에서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약속드리죠. 그럼, 오늘은 이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부디 이번 퍼포먼스로 내가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제가 지금부터 재미있는 것을 보여 드릴 테니."

그런데 만약 관심 없으니 그냥 집에나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면 조금 곤란한데.

"재미있는 것⋯?"

"공녀님께서도 분명히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자신의 앞에서 쓰러졌던 휘트니가 다시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메르디아는 자신의 계획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손아귀 안에 넣고 움직이며 사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던 그녀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렇기에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은 메르디아에게 있어서 참으로 불쾌하고도 답답한 형국이었다. 

"보기 싫다면?"

"저런, 그러면 곤란해질 텐데요."

지금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인력에 의해 기절한 채로 실려 나갔어야 할 린가드 백작가의 장남은 어째서인지 멀쩡히 자신의 앞에서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다.

마치 오늘 이곳에서 일어날 일쯤은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하며, 웬만하면 평정을 유지하는 공녀마저 계속 움찔하게 하는 저 찝찝한 눈웃음까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공작가를 얕잡아 본 거야."

"네? 공녀님이 아니라 저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명백히 도발하는 듯한 발언에 순간 발끈한 메르디아가 싸늘하게 반박했지만, 돌아온 것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말투와 은근한 말 돌리기였다.

"말씀대로 공녀님이 곤란해지실 이유가 무엇이 있나요?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접니다."

"하."

차분히 그렇게 덧붙이는 휘트니가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은 메르디아의 찻잔일까, 아니면 그녀 그 자체일까. 

어느 쪽이든 메르디아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저 또한 흥미가 가네요."

하지만 메르디아 역시 고작 그런 이유로 빈틈을 보이거나 무너질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휘트니는 모르겠지만 그가 들고 있는 찻잔은 증거품으로서의 효력을 상실한 상태.

쌓이고 쌓인 경험으로 독의 제조에는 일가견이 생긴 메르디아가 개발한 그 무시무시한 역작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검출해 낼 수 없었다.

때문에 그가 보여준다는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오늘 행해졌던 그녀의 범죄가 밝혀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만약 밝혀진다면, 덮으면 그만이지.'

물론 상대가 상대인 만큼 상당한 공을 들여야겠지만, 만에 하나 눈앞의 저 남자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한번 보여줘 보시겠나요?"

그러한 확신을 가진 채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미소를 고스란히 따라 해 보이는 그녀였다.

"하하.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후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보여주신다던 재미있는 광경이 설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말씀하시던 것이었을까요?"

한참이나 턱을 괸 채 눈앞의 남자를 응시하던 메르디아가, 마침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렇다면 실망이네요."

"⋯⋯."

휘트니가 호언장담을 한 이후로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찻잔을 손에 쥔 채 명상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마 찻잔에 쓰인 독을 검출해 내는 마법이라도 시도해 보다 보기 좋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만 휘트니 경을 의무실로 모셔 드리도록. 그리고⋯."

속으로 그리 비웃으며 어느새 양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에게 가차 없이 신호를 보내는 메르디아였으나.

-화르륵⋯!!!

"⋯읏!?"

수하들이 휘트니를 끌어내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그가 쥐고 있던 찻잔에서 검은색 불길이 솟아올랐고.

"물러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떨리기 시작한 오른손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손안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검은색 불길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흑마법의 징후. 

신분과 지휘를 막론하고, 심지어 황실의 핏줄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대죄의 흔적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이번에 일으킬 '작은 소란'에 사용될 재료로는 단 한 번도 고려된 적이 없었지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거든요."

"…허."

아마 눈앞의 남자는, 이번 사건을 '작은 소란'으로 끝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제가 말입니다."

'⋯당했군.'

메르디아에게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덫이, 완전히 입을 다무는 순간이었다.

'아니 뭐야, 이거 왜 이래.'

물론, 그녀의 생각 속에서만.

2화 임시 동맹

"잘하셨습니다. 위험하니 그렇게 계속 열 걸음 정도 떨어져 계시길."

'뭐야 이거 왜 이래.'

약 5분간의 필사적인 시도 끝에 손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검은색 불길을 목격한 나의 소감은 이러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고요?"

'사람 살려 시발.'

원래 나의 계획은 찻잔에 남은 흑마법의 흔적을 미세하게 드러내어 메르디아에게 은근히 언질을 주는 것. 사실 웬만한 사람이면 흑마법의 위험성 때문에 엄두도 못 낼 작전이었지만,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안팎으로 문제가 많은 린가드 가문이 지금까지 구색은 유지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백마법'의 적성이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지금은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주기에 이런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수련은 해두었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성과를 믿고 찻잔에 백마법의 기운을 극소량만 흘려보내 메르디아에게만 그 흔적을 드러낼 셈이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러다간 메르디아가 나를 흑마법사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그대로 끝장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메르디아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족속들이 의외로 흑마법사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메르디아의 악명이 자자할 때 접근했던 흑마법사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부 그녀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건 흑마법사뿐만 아니라 흑마법과 연관된 인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현 제국의 태양인 황제마저 메르디아의 그 광기 어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거당하니 말 다 했다.

'황제 그 양반도 참 대단한 인물인데 말이지.'

게임 내 종합 스탯 1위, 그리고 메르디아 다음으로 가장 최종 보스가 될 확률이 높은 황제마저도 흑마법과 연관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루트에서 그녀에게 제거당한다면 믿어지는가?

나는 그러한 인물의 앞에서 대담하게도 흑마법 불꽃쇼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네가 말한 '재미있는 일'인 건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흑마법사 슬레이어 메르디아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그걸 보고 무슨 반응을 해줘야 하는 건데?"

존대도 그만두고 오른손을 살짝 떨며 살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숨이 다 막혀온다.

'분명히 자그마한 찻잔에 담길 정도의 작고 단순한 저주였을 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거래?'

그러니 당장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면 어째서인지 내 백마법과 반응하자마자 맹렬히 폭주하고 있는 이 저주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의 일반적인 해결책이라면 당연히 백마법을 대량 주입하여 흑마법을 상쇄시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쉽게도 고려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인데, 내 백마법이 어째 영 신통치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백마법은 밝고 따듯한 기운을 발산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백마법의 기운은 어째서인지 어둡고 차가운 파장을 발산한다.

가문의 어른들이 말하길 어떤 의미로 보면 흑마법보다 더 꺼림칙한 기운이라 하는데, 솔직히 그것까지는 과장이라도 해도 내 백마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까지는 백마법 그 본질의 효력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열심히 수행해 왔었는데, 설마 인생 첫 실전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이라도 실제 흑마법에 실험을 해볼걸 그랬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금기구나.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남은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백마법을 예외로 한다면, 흑마법으로 인한 저주를 제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흑마법을 시전한 자 장본인을 제거하는 것.

그러나 원작 게임에서도 메르디아를 배신하고 나의 독살을 도운 끄나풀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는 매개체인 찻잔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내 손이 잘못되기 전에 찻잔을 바닥으로 냅다 던져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 흑마법이 사방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백마법을 둘러 보호해 둔 내 손안에서 깨트리는 게 최선이겠지.

이론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다. 물론 내 백마법이 이론을 살짝 벗어나긴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녀님."

그래,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도록 하자. 사실 누군가가 이 사건에 개입해 찻잔에 저주를 걸었고, 당신은 의도치 않게 나를 죽일뻔했다고.

"쥐새끼는 눈에 보이는 대로 치우는 게 좋답니다?"

그러한 설명을 위한 의미심장한 도입부를 막 입에 담으며 손에 힘을 주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실 이 찻잔에…."

"커헉!!"

내 말대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용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 털썩….

그리고 미처 내가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온몸이 창백하게 변한 젊은 시종 한 명이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고.

"사, 살려…."

고통에 몸부림치듯 온몸을 벌벌 떨던 그는, 어째서인지 사력을 다해 내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으며 기어 오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이건 대체 또 무슨 상황이야?

"살려줘…."

"네?"

약혼 한번 하기 참 힘드네, 진짜.

*****

"쥐새끼는 눈에 보이는 대로 치우는 게 좋답니다?"

휘트니가 그러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입에 막 담았을 때쯤, 메르디아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냥 죽일까.'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본 그녀는, 그 생각을 잠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약속이랑 다르잖아…."

필사적으로 휘트니를 향해 기어가며 중얼거리고 있는 시종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러한 지식에 능통한 메르디아가 알기로는 전형적인 마나 회로 역류의 징조로, 입막음을 위해 걸어두는 저주의 패널티로는 꽤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었다.

"살려줘…."

그것을 시종도 잘 알고 있었는지 이제는 굳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는 팔과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며 꺼져가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내가? 당신을?"

그 모습을 메르디아만큼이나 침착하게 관조하고 있던 휘트니는, 문득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리 물을 뿐이었다.

"왜?"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끄윽..."

휘트니의 그 무심한 말이 끝나자마자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낸 시종은 그대로 바닥에 축 늘어졌고, 다시 고개를 드는 일은 없었다.

"주, 죽었어…."

"흡…."

자신들의 주인을 모시다가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한 수하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애초에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

덕분에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손아귀 안에서 바스러진 찻잔을 털어내던 휘트니의 억울하다는 듯한 중얼거림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

메르디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이나 했는데, 그래도 생각은 있었군.'

사실 조금 전까지 전개되던 상황은 메르디아에게 있어서는 외통수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휘트니가 이번 사건의 전모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휘트니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역으로 메르디아에게 덫을 놓은 것이다.

약혼 예정자가 다과회 중 수면 독을 섭취해 쓰러지는 사소한 해프닝을, 흑마법을 이용한 독살이라는 대사건으로 바꾸는 대담한 덫을 말이다.

전자의 경우였다면 만일 탄로가 났더라도 공작가의 권력을 사용해 덮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흑마법이 엮이는 순간부터는 일이 복잡해진다.

흑마법과 관련된 인물은 황실의 핏줄이라도 예외 없이 처분이니까. 심지어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황제라 하더라도 경중에 따라 폐위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물론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휘트니가 이미 사전에 모든 판을 짜두었다는 것이다.

설사 여기에서 그를 죽여 입을 막는다 하더라도, 아마 그가 준비시켜 둔 세작들이 하루가 채 안 되어 편지를 황실이나 성국으로 전달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제아무리 위세가 높은 엠버그린 공작가의 공녀라고 해도 그날로 성국의 이단 재판에 목숨줄이 달리게 되는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되었을 게 분명한 휘트니의 조작을 재판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장, 만에 하나 입증해 내더라도 닥쳐올 후폭풍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이미 성황에게 밉보인 전적이 있는 엠버그린 공작가의 편의를 과연 성국이 봐줄지까지 생각해 본다면, 제아무리 메르디아라 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옅지.'

그러나 휘트니가 선택한 행동은 공작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협력한 게 분명한 흑마법사와 유일한 증거품을 본인의 손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 시종의 반응을 보면, 조금 전 휘트니가 보인 그 매정하고도 오싹한 행동은 분명히 합의되지 않은 사안일 것이다. 즉, 휘트니는 처음부터 공작가를 고발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일을 벌인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빠르게 생각을 거듭하던 메르디아는 이내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상황이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해야 할 말은 해야겠군요."

어쩌면 휘트니가 지금까지 벌인 이 모든 일은, 그저 그가 공녀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꽤 무서운 가설을 말이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저는 백마법사입니다. 덕분에 찻잔에 걸려있는 흑마법을 눈치챌 수 있었고, 그것을 보여드리고자 이런 일을 벌인 겁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가설은, 인상을 찌푸린 채 절명한 시종을 바라보던 휘트니가 이내 메르디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태연하게 발언을 이어 나가기 시작하자 빠르게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시종이 갑자기 왜 발작하다가 쓰러졌는지는 저도 아는 것이 없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추론을 내놓을 수는 있을 것 같군요."

아직도 그가 대체 어떻게 공작가에서 직접 선별하는 수족들 사이에 끄나풀을, 그것도 흑마법사를 끼워 넣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은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한 제삼자가 있었던 겁니다."

"제삼자라."

"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으니, 빠르게 끄나풀을 제거한 것이겠죠."

하지만 메르디아에게 그것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건으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 보인 휘트니가 지금 메르디아 본인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나 공녀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겁니다."

"....."

"아시겠습니까?"

그제야 메르디아는 휘트니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섬뜩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갑자기 제삼자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휘트니의 진의는, 서로 간에 오늘 있었던 일을 조용히 묻자는 노골적인 신호임과 동시에 명백한 우호의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이런 짓까지 해가며 원한 '우호'의 조건은, 분명히 공녀 자신만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

만약 휘트니 본인이 흑마법사였거나 조금 전의 흑마법사에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었다면 메르디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녀가 보기에, 비록 약간 수상한 면이 있긴 했어도 휘트니는 확실히 백마법을 다루긴 했다. 

또한 아무리 능력 증명을 위한 수단이라고는 해도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게 살짝 걸리지만,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잔인하게 녀석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시는 그와 상종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메르디아에게는 바로 그 점이 가산점으로 적용되었다.

"오늘 일은, 그랬던 걸로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슬슬…."

"그럼, 이제 슬슬 원하는 걸 말해주겠나?"

그렇기에 먼저 가식을 내려놓은 그녀는 휘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것…. 말입니까?"

"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했어. 그러니 이젠 진짜 목적을 들을 차례겠지. 설마 정말로 나와 약혼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테니까."

"그게 맞는데요?"

그 말에 휘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었지만, 이미 파악을 마친 메르디아의 눈에는 그저 가식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말해도 하나도 신빙성이 없으니, 그냥 원하는 걸 말하지?"

"뭐, 그렇다면…."

그렇기에 그녀가 살짝 불쾌하다는 듯이 말투에 짜증을 섞자, 잠시 물끄러미 메르디아를 바라보던 휘트니가 이내 품에 손을 넣었다.

"그저 여기에 도장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이윽고 그렇게 말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든 그는, 메르디아가 서류 봉투를 향해 뻗던 손을 잠시 멈칫하게 할 정도로 오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그거 하나거든요."

그런 그녀의 손에 차분히 서류 봉투를 쥐여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 휘트니는, 이제 더 이상 가식을 챙길 생각은 없는 건지 대놓고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네?"

"괘씸하지만 이번만 봐주도록 하겠어."

그리고 그건 휘트니의 미소에 잠시 움찔했던 메르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과 똑같은 부류를,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 존재를 마주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인생에 몇 안 되는 새롭고 강렬한 자극이나 다름없었기에, 지금까지 그가 능력 증명을 위해 범한 무례 정도는 자비롭게 눈감아주기로 하였다.

"뭐…. 아무튼 간에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답해주셔도 됩니다."

"좋아. 면밀히 읽어보고 빠른 시일 내에 답변을 주도록 하지. 이만 휘트니 경을 배웅해 드리도록."

"지금 여기서 보셔도 되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야…."

그렇게 한번 손발이 맞자, 그들의 대화는 청산유수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아, 다음에 마주 앉을 때는 제대로 된 차를 대접해 줄게."

"네?"

"이제는 한배를 탄 몸이니. 독은 아마도 없을 거야.""아하하."

"후후후."

몇 분 전에 사람 한 명이 죽은 정원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두 배로 겹쳐 울려 퍼지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시종을 힘겹게 옮기고 있던 사용인들의 안색이 한층 더 울상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제국 최악의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휘트니 린가드, 꽤 쓸모 있는 패가 될지도 모르겠어.'

'뭐지, 수틀리면 또 독을 타겠다는 건가?'

어째 서로의 생각은 완벽하게 다른 듯싶었지만.

*****

아무튼 그녀답지 않게 농담까지 하며 기분 좋게 휘트니를 내보낸 메르디아였으나.

"…도대체."

그로부터 수십 분이 지난 시점. 온갖 흉계의 원천지인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채 봉투의 내용물을 막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 휘트니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청혼서]

"뭘 원하는 거지…?"

휘트니가 그녀에게 남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청혼서였기 때문이었다.

3화 계획 수립

- 덜컹, 덜컹….

우여곡절이 많았던 살벌한 다과회에서 방금 막 탈출한 마차 한 대가 공작가를 벗어난다.

최대한 빠르게 공작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휘트니의 주문이 있었기에 마차의 속도는 평소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빨랐다.

'설마 공녀를 독살하고 도주 중이신 건 아니겠지?'

하지만 마차 안에서 잔뜩 주눅이 든 채 휘트니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녀의 전속 하녀 샤샤는 그러한 연유를 알 턱이 없었기에 속으로 오싹한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공작가에서 들려오던 시끌벅적한 소리나, 빠르게 밖으로 실려 나가던 천이 덮인 무언가는 대체 뭐였을까.

공작가의 경호 인력에 막혀 먼발치에서밖에 구경할 수 없었던 그녀가 보기에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저, 저기…. 도련님."

"네?"

그렇기에 샤샤는 실례를 무릅쓰고 오늘따라 더 음산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자신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졌고.

"혹시, 아까 다과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저런…."

이내 자신의 그 맹랑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걸 보셨군요?"

"힉!"

어느새 창가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 휘트니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세로 중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살짝 곤란한데..."

"저, 저는 그저…."

"그러다가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휘트니의 서른 일곱번째 전담 하녀인 샤샤의 선배들이 저택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했던 주의사항이었다.

"자자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네?"

"오,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제 눈과 혀를 뽑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것을 자신이 어겼다는 것을 방금 막 깨달은 샤샤가 다급하게 애원하기 시작했지만, 휘트니의 반응은 냉정했다.

"아니 뭐, 그 정도로 과하게 반응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샤샤의 빠른 참회에도 그저 실눈을 한층 더 가늘게 뜬 채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는.

"당신 한 명 정도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잊힐 테니."

마치 하녀 한 명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태연한 말투로, 오금이 저리는 발언을 뱉어냈다.

"저저, 저는 아직 부양해야 할 어머니와 동생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그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에 샤샤는 결국 울먹거리며 최후의 변론을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휘트니는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모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못 본 척 잊으시고요."

"아…."

"그러는 편이 당신에게 좋을 거랍니다."

덕분에 한순간에 긴장이 풀린 샤샤는, 이내 안도할 겨를도 없이 마치 기사처럼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며 소리를 높였다.

"…네!"

"아하하.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요?"

평균보다 몇 배나 높은 봉급만을 보고 이런 지옥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그리 후회하는 샤샤였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나 혼자 가야겠네….'

하마터면 죄 없는 불쌍한 하녀 한 명을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게 할 뻔했다.

샤샤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다행이지, 만일 조금이라도 특색이 있었다면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만으로 메르디아에게 찍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와 한배를 타기로 작정한 이상 앞으로 이런 일이 수두룩하게 생길 텐데, 죄 없는 사람들이 연루되지 않게 대책이라도 세워놓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긴 했는데.'

오늘 다과회에서 갑자기 끄나풀로 추정되는 녀석이 죽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은 안 했을 텐데. 

내가 원작과는 다르게 살아나며 전개가 뒤틀렸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흑마법사가 죽기 전에 보인 태도가 여전히 의문이다.

목숨을 구걸할 거라면 자신에게 저주를 건 녀석에게 빌어야지, 대체 왜 나한테 살려달라고 한 걸까? 설마 어차피 죽는 김에 물귀신이라도 씌우려고 했나?

'아니면, 혹시 내 신통치 않은 백마법에 숨겨진 능력이라도?'

원작 게임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게 없는 나지만, 딱 하나 내 현생인 '휘트니 린가드'에 대한 정보만은 부족하다.

특히 내가 다루는 이 요상한 백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을 정도다.

기존의 특징과 정반대인 것도 그렇고, 잠깐의 상호작용만으로도 극소량의 흑마법이 갑작스레 폭주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한번 날을 잡아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끼이익….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아무튼 한동안 그러한 생각에 잠겨있으니, 어느새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제, 제가 열겠습니다!"

"이것 참,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쪽으로 내리세요!"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마차에서 내리려 하는데, 어째서인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샤샤가 다급히 문을 열고는 허리를 숙인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 나름의 충성 표현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사정을 들어보니 저 어린 나이에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아무래도 봉급이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이번 직장에서 잘 보이고 싶겠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줄 생각이지만, 열심히 하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니 너무 무리만 하지 않으면 구태여 말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엇…."

그런데 씩씩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앞으로 든 샤샤의 표정이 갑작스레 변한다.

왜 그러나 싶어서 덩달아 시선을 앞으로 향한 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

"아, 우리 세실이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동생, 세실이 오랜만에 나를 마중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아카데미 수석. 최연소 은급 기사 수련생. 그리고 비록 백마법의 재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불량품인 나와는 다르게 대다수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마법사. 

워낙 유능한 탓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아 옛날부터 나와의 교류는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정말이지 자랑스럽고 소중한 동생이다.

"아, 아버님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응?"

그런데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와중에, 갑작스레 나의 말을 끊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온다.

갑자기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왜 묻는 거지?

"무슨 소리니, 세실. 아버지는 나들이에 가셨잖아?"

"…나들이라고? 일 년 넘게 나들이를 가는 사람도 있어?"

아하.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오랜 시간 저택을 비운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구나. 역시 우리 동생은 마음씨도 착하다. 

"소문은 나도 들었어. 그러니 그 입으로 직접 말해.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음, 이걸 어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아버지의 행방은 극비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금쯤 황제의 명령대로 극비 임무를 수행 중이실 테니까. 게임에서 짤막하게 언급되었기에 망정이지,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나조차도 아버지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기에 내가 주제넘게 아버지의 행방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불안해하는 동생을 안심시킬 의무는 있겠지.

"하하, 세실…."

"뭐, 뭐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 동생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채 최대한 따듯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금 좋은 곳에 가 계신단다."

"…뭐?"

"그러니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어. 어차피 네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에는 모든 일이 정리되어 있을 거란다."

어차피 내가 공작가에 사위로 팔려 갈 때쯤이면, 아버지도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오실 것이다. 자연스럽게 후대의 가주는 유능한 동생이 맡게 될 테고 말이다. 

"앞으로 복잡한 가문의 일은 아버지 대신 이 오라버니가 알아서 처리할게."

"읏…."

"그러니 너는 그저 학업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야. 알겠니?"

그리고 안 그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쁜 동생에게 가문의 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오빠로서 못 할 노릇이기도 하니, 동생이 온전하게 가문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밑바닥을 깔아놓을 생각이다.

"…착하지?"

그러한 진심을 듬뿍 담아, 동생을 향해 한층 더 고개를 숙인 나는 싱긋 눈웃음을 쳐 보았고.

"...."

한동안 멍하니 나를 응시하던 그녀는, 결국 그 마음을 이해 해준 건지 양 입술을 앙다문 채 두 손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것도…. 잊을까요?"

"응?"

그런 기특한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샤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리 물어온 것은 왜였을까?

"아이고, 도련님…."

그 이유를 혼자서 세 번쯤 곱씹어 고민하고 있을 때쯤, 저 멀리에서 동생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발 그런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말 좀 하시지 마시라고."

저택의 총괄, 그리고 나의 유일한 말 상대를 담당하고 있는 집사장 알프레드가 걸어오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해한단 말입니다."

"뭐를요?"

"…말을 맙시다."

*****

"음."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알프레드의 손에 이끌려 저택의 집무실에 들어온 나는 한동안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달빛이 참 밝네…."

"크흠."

그렇게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오늘치 분량을 끝마치고 달밤의 경치를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옆에서 일을 보조 해주고 있던 알프레드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 의미 없이 그런 표정으로 중얼거리시는 건 제발 좀 삼가시길."

"왜요?"

"그…. 아닙니다. 이유를 설명하면 불경죄인지라."

알프레드는 다 좋은데 가끔 의미를 모를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어릴 때부터 종종 그러곤 했으니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도련님. 일이 끝났으니 말인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러고 보니 알프레드도 참 저택에서 오래 일하긴 했다. 전생의 기준으로 치면 이미 한참 전에 은퇴하고도 남았어야 할 나이니까 말이다. 

"저 올해에 은퇴합니다."

"앗."

"말이 올해지, 아마 몇 달 내로 정리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하고 있었는데, 잠시 내 눈치를 보던 알프레드가 내뱉은 말은 빠르게 그것을 현실화시켰다.

안 그래도 가문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알프레드마저 떠나면 이제 어떻게 하지?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백작님과 사전에 합의가 된 사항이니까요."

"그래요?"

"제가 사용인으로 활동해 온 게 벌써 40년입니다. 그만 쉴 때도 되었죠."

마음 같아서는 울고 불고 매달려서라도 잡고 싶었지만, 새하얗게 센 알프레드의 머리를 보니 차마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언덕 높고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농사나 지으며 살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래,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알프레드."

그렇기에 아쉬운 마음을 접어둔 나는, 쿨하게 그의 은퇴를 축복해 주기로 했다.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헉."

그런 의미에서 건낸 덕담이었는데, 왜 갑자기 몸을 움찔거리시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건가?"

"네?"

"크흠…. 아닙니다. 아무것도…."

저런. 그렇게 유능했던 알프레드라도 결국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건가? 항상 빈틈없는 모습만 보여주던 집사장의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빈말이라도 그를 잡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무튼 곧 은퇴한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죠. 우선 백작님이 저에게 은밀히 명령했던 사안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잠깐, 아버지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아무튼 슬픈 마음을 숨긴 채 이제는 그리워질 알프레드의 보고를 듣던 나는, 처음 듣는 소식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기에."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바로 도련님의 약혼에 대해서입니다."

약혼이라면 아버지가 가문의 사활을 걸고 대놓고 추진하시던 일이 아닌가? 새삼스레 은밀하게 알프레드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동안 모인 정보에 의하면, 도련님의 백마법을 정상화할 실마리가 아무래도 엠버그린 공작가에 있는 모양입니다."

"정말로요?"

"그렇습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백작님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기 전에 공녀와 도련님의 약혼을 급하게 추진하신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알프레드가 살짝 오락가락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실제로 제국의 몇 안 남은 백마법사인 아버지가 위험천만한 황제의 제안을 군말 없이 수락한 것은, 나와 공작가의 약혼을 추진하기 위해 황제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설마 그 이유에 가문의 부흥만이 아닌 나를 위한 부분도 있었을 줄이야. 이건 살짝 감동인데.

"솔직히 도련님에 대한 수많은 착각 중 반절 정도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 음침한 파장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러니 그것만 해결된다면 도련님도 어쩌면 평범한 삶을…."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는데, 그럼 나머지 반절의 이유가 뭔지는 좀 듣고 싶네요?"

"…으음,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부자간의 정을 느끼고 마음이 따듯해져 있었지만, 알프레드의 헛소리 때문에 신통이 깨져버렸다.

덕분에 한숨을 내쉬며 지금이라도 의원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닐지 진심으로 고민하던 찰나, 가만히 눈치를 보던 알프레드가 진지한 표정이 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순수하게 이 늙은이의 개인적인 노파심으로 도련님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도련님 곁을 떠나면, 아마 도련님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지겠죠."

아무리 편하게 말하라고는 했지만, 시작부터 악담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저야 도련님이 태어난 이후로 쭉 곁에 붙어 다니며 지켜봐 왔기에, 사실 도련님의 심성이 극히 선하다는 걸 압니다."

"그런가요?"

"뭐, 그렇죠. 저 같은 사용인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주시는 분은 제국에 도련님밖에 없을 겁니다."

살짝 서운할 뻔했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눈물이 다 나오네요?"

"음, 사실 아직도 그 수상쩍으신 표정을 볼 때마다 살짝 의심 중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이 도련님의 진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거라는 부분입니다."

뭔가 도중에 이상한 말이 섞여 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알프레드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다. 당장 저택의 사용인들만 하더라도 어째서인지 나를 상당히 어려워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웃는 연습도 혼자 꽤 많이 하고 있으니, 그런 밝은 모습을 보여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러니 이젠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도련님이 먼저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셔야 할 겁니다."

"으음."

하지만 그런 나의 안일한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알프레드의 엄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아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도련님에게 충성할 심복을, 더 나아가 도련님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본인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직접 나서서 나의 편을 만들라는 거구나. 사실 나도 전생을 자각한 이후에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블랙테일 판타지 3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동료들의 구성도 상당히 중요하니까. 내가 주인공의 입장은 아니지만 메르디아와 한배를 탔으니 난이도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호위다.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위험한 사건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하고 유능한 호위 기사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후보군은 제가 추려놨습니다. 역할에 맞게 분류해 두었으니 이 명단 중에서 쓸만한 사람을 골라서…."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한 이유로 잠시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호위 후보를 물색하던 나는,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알프레드의 말을 끊었다.

"마침 딱 알맞은 인재를 알고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제 명단에 없을 리가…."

물론 알프레드의 안목도 믿을만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최초로 발견되었을 때 게임 커뮤니티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던, 초반 시점에서 영입할 수 있는 최고의 사기 캐릭터를 말이다.

"내일은 노예 시장에 한번 가봐야겠어요."

"아, 이 늙은이가 결국 도련님의 유희에 당했구나."

그리고 그 캐릭터의 최초 발견자는 바로 나였다.

4화 노예 시장

하마터면 엠버그린 공작가에서 차갑게 식은 변사체가 될 뻔한 다음 날 아침, 나는 제국 수도 최악의 암흑가를 로브 한 장 걸친 채 호위 한 명 없이 거닐고 있었다.

'무서워 죽겠네.'

사실 나라고 이런 흉흉한 곳에 혼자만 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장소는 나 같은 선량한 귀족이 공식적으로 가기에는 영 떳떳하지 못한 곳이기에, 정의감 넘치는 백작가의 기사들을 데려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위험한 곳에 전속 하녀 샤샤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알프레드를 데려올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러다가 건달들에게 시비라도 붙으면 골치가 아파질 텐데. 

'아니, 고작 그런 걸로 겁먹고 있을 수는 없지.'

이래 봬도 나는 백마법사다.

물론 저번 사건 이후로 살짝 자신감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찌 됐든 간에 간단한 전투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별 볼 일 없는 소년인 줄 알고 접근하는 녀석들 정도면, 백마법을 다루는 모습을 살짝 보여주기만 해도 그대로 꽁무니를 빼겠지.

나 역시 실전 경험은 적고, 전생을 자각한 이후로 사람과 싸우는 건 조금 껄끄럽기도 하니 제발 일이 그렇게만 흘러가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터벅, 터벅….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갑작스럽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내 착각이 아닐지 싶어서 가던 길을 틀어봤지만, 그대로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아무래도 의도가 불순한 녀석들인 것 같았다.

'결국 한번 시비가 붙는 건가?'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실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한번 전투를 해야 할 것 같다.

"으음."

"쯧."

그런 생각으로 온몸에 백마법을 순환시키며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는데, 나를 본 녀석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텄군."

"같은 편이면 표식을 좀 제대로 보이고 다니라고."

"하여간 요즘 것들은…."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조금 전에 나에게 말을 건 녀석들뿐만이 아니라, 길가에서 나를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뭐라 투덜거리며 으슥한 골목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단순한 불량배들이 아니었던 건가…?'

그저 한량 같은 불량배들이나 모여있을 곳이라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설마 대부분이 내 미약하기 짝이 없는 백마법의 기척마저 감지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을 줄이야. 경계심이 높은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되려 내가 당할뻔했다.

'역시 다음부터는 꼭 믿을만한 호위를 데려와야겠어.'

물론 그러기 위해서 오늘 이런 위험한 지역에 찾아온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초반 사기 캐릭터는. 이곳의 중심부에 위치한 노예시장에 있기 때문이다.

'부디 황제가 선수를 친 뒤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렇다. 지금 내가 손에 넣으러 가는 캐릭터는 사실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황제의 오른팔이자 충성스러운 호위 기사로서 등장하는 녀석이다.

게임 내에서는 '황제의 사냥개', 유저들 사이에서는 '유입 절단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만큼 무지막지한 전투 스탯을 보유한 채로 말이다.

물론 단순히 전투력만 높은 게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는 판단력 역시 상당히 뛰어나기에, 메르디아가 황제를 끌어내릴 때까지 가장 많이 부딪히며 경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곧 내 든든한 호위가 되겠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인게임 상에서 그녀를 포섭할 방법은 꽤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과거사 자체가 배신과 기만으로 얼룩져 있는 캐릭터이기에, 몰락 귀족으로서 부자들의 노리개 신세가 될 뻔한 자신에게 유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황제 한 명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드런을 하기 위해 다양한 빌드를 연구하던 고인물들은 결국 그녀를 영입할 방법을 찾아내고 말았다.

'물론 최초 발견자는 바로 나였고.'

아무튼 그 방법은 바로, 초반부에는 거의 마굴이나 다름없는 암흑가에 무턱대고 침입해 노예시장에서 황제보다 먼저 그 캐릭터를 입찰해 오는 것.

물론 그 노예를 놓치게 된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될 확률이 극악으로 치솟기에 안 하느니 못한 행위지만, 그럼에도 중간보스나 다름없는 캐릭터를 포섭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커뮤니티에서 예능 빌드로 상당히 각광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그러나 지금은 게임의 프롤로그보다도 한참 이전의 시간대. 그렇기에 타이밍만 잘 맞는다면, 꽤 높은 확률로 황제의 진노를 사지 않고도 사기급 캐릭터를 데려올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들키더라도 황제는 지금 나를 메르디아의 견제용 카드로 사용하고 있으니, 특유의 성격상 그냥 묵인해 줄 가능성이 높고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들키지 않는 것이 좋기에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더라도 리스크보다 이득이 더 큰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다.

'그러니, 슬슬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이제 곧 내가 기억하는 노예시장의 입구가 나온다. 그곳은 조금 전까지 내가 지나온 곳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이니,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게임에서 하던 대로만 하자. 하던 대로만.'

*****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는 제국의 수도가 가진 또 다른 이면. 루테인 암흑가.

"계시나요?"

'…손님?'

그곳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구역의 입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관리인, 리암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암호를 뱉어내었다.

"달 그림자?"

"은화 3닢."

'음, 손님이 맞군.'

그러자 돌아온 나지막한 답변에, 눈을 비비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바로 했고.

'잠깐, 뭐라고?'

이내 대경하며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일반 손님을 받을 때가 아닐 텐데?'

사실 그가 관리인으로 있는 노예시장이 문을 연 것은 불과 하루 전. 그것도 사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귀빈 중의 귀빈만을 받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관리인이 아는 얼굴만 있는지라, 암호 자체가 필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암호를 본부에 전달했던가?'

또한 방금 손님이 답한 암구호는, 리암 나름대로 최대한 머리를 쥐어 짜내어 의미 있고 멋진 단어를 만들어 내느라 본부에 전달이 늦은 상태. 그러니까 아직은 그 밖에 모르는 상황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물론 장본인인 휘트니가 들었다면 아차 싶었을 일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독심술 따위는 없던 그는 매우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문제라도?"

그리고 이미 그 시점에서 리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 녀석, 우리와 동류군.'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갖가지 경험을 다 해봤기에 웬만한 사람은 눈으로 쓱 보기만 하더라도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그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눈앞에서 오싹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청년은, 단순히 '귀빈'이라는 선에서 정의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풍기는 기운이나 조금 전의 독심술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자신이 속한 쪽에 가까운, 한없이 어두운 그림자에 속해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소속이라면 구태여 이런 식으로 노예시장에 찾아올 이유는 없고, 그저 개인이라면 더더욱 찾아올 이유가 없다. 그림자에 종속된 자들에게는 굳이 살아 움직이는 일손이나 유희거리가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 당연하게도 다른 곳에 소속되어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런 존재를 은밀히 움직여 이곳에 보낼 수 있을 만한, 동시에 관리인인 자신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일방적으로 노예시장의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은 누굴까.

'설마…. 요새 들리는 그 허무맹랑한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건가?'

리암이 생각하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한 존재는 무엄하게도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황제. 대륙 유일의 통일 제국을 지배하는 자이자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 

그런 거대한 존재의 그늘에 가려진 채 움직이는 통칭 황제의 그림자가 요즘 들어 암흑가를 들쑤시고 있다는 소문이 최근 알게 모르게 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가…?'

물론 리암조차 뜬소문이라 여길 정도로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지만, 눈앞에서 소름이 끼치는 분위기를 풍기며 태연하게 웃고 있는 자를 본 이상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몸담은 조직이 비록 여러 유력 귀족과 연이 있고, 또한 제국 전역에 뻗쳐있을 정도로 거대하긴 했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대놓고 이러한 어두운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일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의 손아귀 아래에서 벌어진 것이라면?

'아니, 더 이상 파고들지 말자.'

특유의 빠른 머리 회전으로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암이었으나, 이내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조금 전까지의 추론을 머리에서 지웠다.

이런 복잡하고 거대한 사안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체를 했다가 쥐도 모르게 사라지던 사람들을 꽤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렇기에 그는 그저 중간관리직의 본분을 다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뒤에 있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진짜 하던 대로만 했더니 되네?'

물론 휘트니 본인은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 단순히 자신의 침착함을 고평가하며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지만.

"네, 확실합니다."

놀랍게도 이번만큼은 완전한 착각이 아니었다.

"…휘트니 린가드. 그자입니다, 폐하."

저 너머 어두운 골목에서, 휘트니에게 선수를 빼앗긴 채 짙은 그림자에 섞여 있던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방금까지 본 광경을 어딘가로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편 그 시각. 노예시장 지하에 위치한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감옥.

"어이, 167번."

이미 귀빈들이 한번 쓸고 텅 비어있던 그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소녀가, 문득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배식이다, 애송이."

그런 그녀의 앞에 내동댕이치듯이 던져진 것은, 개밥보다도 못한 무언가가 담긴 그릇. 그것에 잠시 눈길을 주던 소녀가 조용히 시선을 거두자,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진다.

"그렇게 고상하게 굴지 마."

"...."

"자기가 아직도 귀족인 줄 아나 보지?"

그 말에 텅 비어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불타올랐으나, 교도관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회초리로 움직이자 얼마 못 가 꺼져버렸다.

"기껏 상등품으로 분류했더니 불량재고나 되어서 밥이나 축내고 말이야."

그 모습에 더욱 기세를 얻은 교도관이,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맙게 여겨. 하품으로 분류되었으면 진작에 더럽혀졌을 테니까."

"...."

"뭐, 혹시 모르지. 곧 들어올 일반 손님 중에서도 돈이 썩어나는 배불뚝이들은 넘쳐나니까. 만약 그 반반한 얼굴로 꾀어내어 정부라도 될 수 있으면 제2의 삶을 살 수 있을지 누가 알아?"

하지만 소녀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괘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회초리를 높게 들어 올렸으나.

"근데 이게 아까부터 사람 말을…. 음?"

자신의 손에 새겨진 검은 문양이 작게 불타오르자, 입맛을 다시며 회초리를 다시 집어넣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여간, 재수 없는 년."

그리고 시작된 정적.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 정적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저 검을 다시 잡고 싶었을 뿐인데.'

평생을 검 하나에 바친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검은 고사하고, 조금 전 교도관의 말대로 부자들의 노리개가 되어 팔려나갈 처지다.

'대체 왜….'

희망은 진작에 놓아버린 뒤였다.

한때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던 자들이 조소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품평하고 간 것이 불과 하루 전이다.

물론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녀를 입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저 동정이 섞인 말들을 내뱉으며 앞을 지나쳤을 뿐이었다.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 그리고 검에 대한 자존심이 전부였던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흐극…. 으으…."

이제는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두 손을 모아 쥔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차가운 돌바닥을 적신다.

차라리 당장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노예의 인장은 그 최후의 존엄성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오랫동안 밥에 입도 대지 않은 몸에는 슬슬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녀석들이 입 안에 억지로 사료를 쑤셔 넣을 테니, 어차피 그것 또한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검을 다시 잡아 볼 수 있을까?'

그 때문에 끝없는 절망의 늪에 빠진 채, 희미해져 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지도 않은 그녀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루니엘 미스틸레인."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진 것은 말이다.

"이분으로 하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자각한 소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고.

"제 마음에 쏙 드네요."

그녀는 이내 몸이 멀쩡했다면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 또래의 청년을 보게 되었다.

'그나마 배불뚝이는 아닌 게 다행인 건가?'

순간 속으로 그리 생각한 자신에게 짙은 혐오감을 느끼며,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루니엘 양."

'아니,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을지도.'

그리고 휘트니가 들었다면 퍽 서운해했을 듯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툭 하고 끊겼다.

5화 루니엘 미스틸레인

"도, 도련님?"

"히익."

"세, 세상에."

새벽부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호위도 없이 저택을 나섰던 휘트니가 마차를 타고 복귀하자, 동료 하녀들과 함께 마당을 쓸고 있던 샤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좋은 아침이네요, 샤샤?"

"...."

여느 때처럼 수상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옆에, 처음 보는 소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 옆에 계신 분은…."

그렇기에 눈치를 보며 소심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려던 샤샤의 말문이 이내 막힌다.

단순히 호기심을 죽이라는 휘트니의 오싹한 조언이 떠올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소녀의 꼴이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며칠은 굶은 것 같은 핼쑥한 얼굴, 몸 이곳저곳에 남겨져 있는 멍과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까지.

가끔 악몽에 나오던, 무언가 중대한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저택의 지하실에 갇히게 된 자신과 상당히 흡사한 그 모습에 샤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네. 확실히 이분 꼴이 말이 아니긴 하죠."

"그그그, 그렇네요."

"그러니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대체 무엇을 도와달라는 거지? 고문용 도구들이라도 구해오라는 걸까?

순간적으로 든 온갖 흉측한 생각들에 잠시 눈을 질끈 감은 샤샤였지만, 다행히도 휘트니의 부탁은 그러한 종류는 아니었다.

"우선 몸을 조금 씻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도록 하세요. 방은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곳이 많이 비어있으니, 그곳을 사용하면 될 것 같고."

"아…."

"그리고 밥도 좀 먹이도록 하세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신 분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는 확실히 양호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샤샤는 불길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대체 어디에서 이런 다 죽어가는 사람을 주워 온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대체 무엇을 시키려 하는 걸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마차에서 개인 면담을 빙자한 정신교육을 받은 뒤였기에, 그러한 의문점들을 그저 목구멍으로 삼킨 채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하는 샤샤였으나.

"아참, 그리고…."

이어진 휘트니의 말에, 그 미소는 살짝 바라졌다.

"씻길 때 어깨 부분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네?"

"어깨가 살짝 예민하신 분이거든요."

그 말을 들은 소녀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샤샤의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하녀들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시…. 하루 이틀 된 관계는 아닌 것 같지?"

"쉿! 너 죽고 싶니?"

그러나 그녀들 역시도. 벌써 수년 전에 금지된 노예의 인장이 보통 어깨에 새겨지곤 했다는 지식을 불우한 가정사 덕택에 알고 있던 샤샤만큼은 덜 움찔하지 않았을까?

'잊어야 해, 잊어야 해, 잊어야 해….'

덕분에 한껏 사색이 된 채 속으로 그리 되뇌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니엘을 인계받는 샤샤였다.

*****

'이제 슬슬 좀 회복했으려나?'

루니엘이 저택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꺼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걱정이 많았지만, 지난 일주일간 샤샤와 하녀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몸의 건강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이다.

어째서인지 백작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징징거리던 알프레드를 진정시키고 받아본 보고에 의하면, 그녀의 표정은 감옥에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듯싶으니까 말이다.

하긴, 그녀의 과거사와 지금까지 당한 수모를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지. 애초에 나도 몰락 귀족이 되지 않으려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이미 몰락 귀족이라는 딱지가 붙은 데다가 어깨에는 노예의 인장까지 새겨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호화로운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건강을 회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아쉽게도 당장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노예의 인장을 제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순히 노예의 인장도 제거하려면 꽤 고등위의 마법사가 필요한데, 지금 그녀의 어깨에 새겨져 있는 인장에는 놀랍게도 흑마법까지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에 제거하려면 최소 성국의 추기경이나, 아버지에 버금가는 유능한 백마법사가 필요하다.

물론 전자는 잘못하다간 이단 재판을 받기에 딱 좋고, 후자에 속하는 백마법사들 역시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우리 가문에 협조적으로 굴 것 같지는 않기에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요원하다.

사실 내가 해결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메르디아 공녀의 다과회장에서 일어난 그 식은땀 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연구가 끝나기 전까지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인해 남은 방법은 한가지.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면 되는 거야.'

어깨에 새겨진 노예 인장 정도는 따위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녀의 삶 그 자체나 다름없었던 것을 되찾게 해주면 되는 일이다.

물론 그게 쉽다면 그녀가 이런 꼴이 되지도 않았을 테고, 황제의 개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일은 없었을 테지.

하지만 나는 안다.

한때 검의 천재라 칭송받던 그녀가 검을 잡지 못하게 된 이유를, 그리고 황제가 그것을 해결해 준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슬슬 그 방법을 알려줄 때가 온 것 같다.

"샤샤, 계시나요?"

"넵!"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루니엘을 불러야 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샤샤를 부르니, 복도에서 그녀의 즉답이 울려 퍼진다.

요즘 들어 너무 과하게 일하는 것 같은데, 저러다가 몸살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혹시 루니엘 양을 불러와 주실 수 있으실까요?"

"루루, 루니엘 씨라면 바로 제 옆에 있는데요?"

그러한 생각으로 한마디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샤샤가 당황한 표정으로 답한다.

설마 말하기도 전에 명령을 수행한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샤샤가 일에 열정적이라고 해도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도, 도련님이 몸이 좋아지면 하녀 일에 투입하라고 하셨었기에…."

"아하."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겠지만 루니엘이 나의 검이 되었다는 것을 당분간은 숨기는 것이 좋다.

아직은 힘도, 영향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그녀가 나에 의해서 다시 검을 들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괜히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갈 곳 없는 그녀를 친절하게 저택의 하녀로 고용했다는 식으로 당분간 주변의 눈을 속일 생각이었는데, 그것을 위해 해둔 명령이 벌써 착실하게 수행되고 있나 보다.

아무튼 몸은 확실하게 회복된 모양이고, 그렇다면 더 눈치 볼 필요 없이 그대로 계획을 진행하면 될 것 같다.

"일은 좀 적응할 만한가요?"

"…네."

그리 생각을 정리하고 샤샤의 말대로 메이드 복을 입은 채 복도를 쓸고 있던 루니엘에게 말을 걸자, 생기 없는 답변이 돌아온다.

"더, 더 활기차게 말하시는 게 좋아요…!"

옆에서 지켜보던 샤샤가 초조한 듯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뭐라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영혼 없는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샤샤가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힘든 일이 있으시면 말하시고요."

그 모습이 측은해 보여 살짝 앞으로 다가선 나는, 혹시라도 노예의 인장을 살짝 약화할 수는 없을지 확인할 겸 괜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읏."

하지만 내 손에 남아있던 백마법과 노에의 인장이 반응이라도 한 건지 루니엘이 괴로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그 바람에 나는 다급히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왠지 모르게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그냥 본론이나 말해야….

"으으…."

"앗? 왜 그러세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루니엘의 몸이 갑작스럽게 휘청인다.

"괜찮나요?"

"…죄송합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샤샤가 잡아주었기에 별일은 없었지만, 딱 보기에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노예시장에서 얻은 후유증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역시 '그 문제'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일단 지금은 푹 쉬시고."

"감사…."

"괜찮아지면, 밤이라도 상관없으니 혼자서 조용히 제 집무실로 오세요."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 말에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루니엘이,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침묵에 잠겼다.

"...알겠습니다."

그 모습이 심히 안타까워 너무 아프면 그냥 내일 이야기 해도 좋다고 하려던 참이었지만, 그 전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지만, 루니엘을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샤샤, 부축을…."

"힉! 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예? 알겠으니, 이분을 어서 부축해 주세요."

"네네, 넵!"

그렇게 샤샤의 어깨에 기댄 채 멀어져가는 루니엘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지."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자꾸 이상한 중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

그날 밤. 어둠이 내려앉은 린가드 백작가. 

식솔의 대부분이 잠이 든 새벽에, 혼자 조용히 복도를 걷고 있는 이가 있었다.

"...."

그녀는 바로 루니엘 미스틸레인. 지난 일주일간 이어진 휘트니의 배려로 그녀의 몸 상태는 상당히 나아진 상태였지만, 꼭대기 층에 있는 집무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윽."

그럼에도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였지만, 살면서 처음 입어본 메이드 복장이 문득 그녀를 답답하게 조여온다.

물론 마음씨 착한 샤샤가 행여나 불편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신경 써 입혀준 메이드복이 실제로 그녀의 몸을 조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니엘에게는 자신의 현재 처지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복장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불편 따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그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오싹한 기운을 풍기는 그 소년이, 고작 허드렛일이나 시키려고 굳이 거금을 들여가며 자신을 구매했을 리가 없으니까. 

물론 몰락한 귀족 가문의 여식을 하인으로 부리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부류들도 있었지만, 루니엘은 자신이 구매된 이유가 고작 그런 소꿉놀이에 그칠 거라는 희망 따위는 품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그녀의 인생은 이미 나락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어떤 나락에 처박힐지 결정되는 순간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루니엘은, 그저 자신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기사였던 점을 높게 평가받아 어딘가 위험한 곳에 버리는 패 따위로 보내지기를 소원할 뿐이었다.

그것만이 지금의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희망찬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렇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고 옮겨 그녀가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온다.

-끼이익….

감옥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느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채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방문을 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루니엘은 이를 악문 채 문을 당겼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러자 턱을 괸 채 책상 앞에 앉아있던 휘트니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혹시 무리해서 온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그녀와 눈을 마주친 휘트니가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매를 한층 더 가늘게 휘며 조용히 눈웃음을 짓자, 루니엘의 몸이 조용히 떨린다.

창가에서 들어온 달빛과 어우러진 휘트니의 미소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고 넘어봤던 그녀조차도 움찔하게 할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뭐, 그럼….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저 가만히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던 그녀는, 기어이 휘트니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기 시작하자 질끈 눈을 감았다.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짓을 당하더라도, 눈앞의 남자가 만족할 만한 반응 따위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조용히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지만.

"다시 검을 들어주세요."

이어진 휘트니의 무척 태연한 발언에, 그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저를…."

"불가능합니다."

이제는 그럴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텅 비어있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검을 다시 들 수만 있었다면, 이런 꼴로 당신의 앞에 서 있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제아무리 뿔이 꺾이고 비늘이 뽑혔다고 하더라도, 용에게는 역린이 남아있는 법이었다. 그 역린이 루니엘에게는 검이었고 말이다.

"날 앞으로 어떻게 해도 좋아. 알아서 즐겨. 하지만…."

그렇기에, 루니엘은 이를 바득바득 걸며 그동안 쌓여있던 분노를 눈앞의 남자에게 토해내기 시작했지만.

"다시 한번 검으로 날 모욕한다면, 내 남은 인생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널…."

"검을 다시 들 방법을 내가 알고 있다면?"

그때까지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던 휘트니가 다시 입을 열자, 벙찐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당신의 완전히 불타버린 마나 회로를 다시 재생시킬 방법을, 내가 알고 있다면?"

어느새 루니엘의 몸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방금 말한 것처럼, 모든 걸 바칠 수 있나요?"

하지만 그것은 그동안 여실하게 느꼈던 무력감이나 절망감 때문도, 여전히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휘트니의 사악한 기세 때문도 아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저 검을 다시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미약한 가능성이 끝없는 나락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던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 영혼도 바칠 수 있어."

"아니 그것까지는 필요 없는데, 뭐 아무튼…."

그리고 그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계약 성립이네요."

그것이 설사, 눈앞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우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6화 루니엘 미스틸레인 (2)

"뭐, 그러면 입장 정리는 끝난 것 같으니…."

실로 오랜만에 눈에 생기를 되찾은 루니엘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던 휘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슬슬 자리를 옮겨볼까요?"

"…?"

오랫동안 절망에 빠져 있다가 본 작은 희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루니엘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문득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자리를 옮겨야 한다면 왜 새벽에 비밀스럽게 혼자서 이곳으로 오라고 했던 걸까?

행여나 방에 숨겨진 비밀통로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꼭대기 층에 그런 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읏차."

"…!"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의문은, 이내 휘트니가 자신의 뒤에 있던 책장을 가볍게 밀자 빠르게 해소되었다.

-쿠구궁…!

살짝 밀린 책장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래로 이어진 어두운 통로가 가려져 있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건…."

"별건 아니고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지하실로 가는 통로입니다. 예전에 저택을 리모델링 하면서 쓸모가 없어졌었는데 마침 쓸 일이 생겼네요."

그 명백히 수상쩍기 그지없는 비밀통로에 대한 휘트니의 변명은 어찌 보면 그럴싸했다.

안전에 민감하다 못해 광적으로 집착하는 바람에 저택에 비밀통로나 함정을 몇 개씩 만들어 두는 괴짜 귀족들이라면 사실 꽤 있었으니까.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귀족들의 저택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숨겨진 탈출구가 한두 개는 있는 법이다.

하지만 마치 범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저 통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한 일반적인 탈출 용도는 아닌 듯싶었다.

'…피비린내인가.'

그게 아니라면, 통로의 깊은 곳에서부터 비릿한 쇳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향기였으나, 그동안 사선을 몇 번이고 넘어왔던 루니엘은 그것이 피 냄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뭐 하시나요? 들어오시지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라도 도망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휘트니가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루니엘의 심장은 더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물론 아래에 있는 것이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이미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에게 몇 번이고 배신당하며 마음이 꺾일 대로 꺾여버린 그녀였기에, 한 번 더 배신당해 봤자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즉, 밑져야 본전이었다.

"좋아요, 이제 도착입니다만…. 들어가기 전에 미리 한마디 해두겠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한동안 말없이 휘트니의 뒤를 따라, 점점 피비린내가 짙어져만 가는 비밀통로를 내려가던 그녀였으나.

"놀라지 마세요?"

그런 그녀도. 지하실의 입구에 도착한 휘트니가 별거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문을 열었을 때만큼은 헛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이건 흑마법사의 나쁜 의식 같은 게 아니니까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지하실의 내부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육망성이 바닥 전체를 가득 채운 채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음, 이래서 미리 주의를 부탁드렸던 건데…. 역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진 루니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나에게도 조금 억울한 측면은 있다. 나 역시도 며칠 전까지는 이곳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만한 은밀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한참을 고민하던 알프레드가 잿빛이 된 낯빛으로 이곳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가 은퇴한 뒤에도 몰랐겠지.

아무튼 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곳인 데다, 지난 며칠간 이곳에서 한 실험이 있기에 내가 보기에도 지하실의 분위기는 상당히 으스스했다.

하지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원리를 알기만 한다면 그다지 무서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보기에는 조금 그래도, 의식에 피를 이용하는 건 신성 교단에서도 쓰이는 전통적인 방식이랍니다?"

실제로 흑마법과 백마법은 의식의 과정과 결과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혼을 다룬다는 점에서 뿌리를 함께 한다.

이렇게 말하면 백마법이나 흑마법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 착각할 수도 있는데, 오해는 금물이다.

그 '약간의 차이'로 의식의 과정 중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지 아닌지, 혹은 결과가 저주인지 축복인지 등등이 나누어지니까 말이다. 나쁘고 못된 흑마법과 정의의 백마법은 그러한 면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참고로 마법진의 재료로 쓰인 피는 암소의 피입니다. 그러니 그런 눈빛으로 저를 보지 말아주시겠어요?"

며칠 전에 오랫동안 키우던 암소가 병으로 죽어 꺼이꺼이 울던 마구간지기 한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스의 애착 가축 브라운도 루니엘이 다시 검을 잡는 모습을 보면 저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기뻐할 게 분명하다.

"뭐, 그래도 영 아닌 것 같으시다면…."

"저는 딱히 당신을 탓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루니엘이 나의 해명을 영 못 믿는 눈치였기에 말을 조금 덧붙이려는데,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다시 검을 둘 수 있게만 해준다면, 이런 것쯤이야 수백, 아니 수천 개는 더 그릴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기, 그러다간 제국의 소가 남아나지 않을…."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살짝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바로잡으려 했지만, 루니엘은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 이제 설명해 주시죠."

비록 말투는 침착했지만, 어둠 속에서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선명해져 있었다.

"제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다시 검을 들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각오였기에, 그것을 확인한 이상 무어라 왈가왈부하는 것은 사족이겠지.

"뭐, 별거 없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으니."

그렇기에 나는 지난 며칠간 밤을 새워 가며 만든 마법진의 정중앙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당신은 그저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가 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죠."

비록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오늘의 의식은 마냥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여러 미 등장 술식과 의식들이 등장하는 게임 설정집을 통째로 외우고 다니는 광팬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가문과 백마법의 증진을 위해 영혼을 익숙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고안한 이 의식을 재현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 황제마저 성공하기까지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거쳤던 이 의식은, 사실 설계 난이도에 비하면 매우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그 방법이란, 바로 루니엘의 영혼에 가공된 각인을 새겨 이미 불타버린 신체 내부의 마나 회로를 대체하는 것. 쉽게 말하자면 몸 구석구석에 혈관을 내기 위해 생살을 헤집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언데드, 그중에서도 리치가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아는가?

아무리 녀석들의 본체인 성물함이 막대한 양의 마나를 품고 있더라도, 생명이 깃들지 않은 육체에는 마나가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려면 체내의 마나를 필요할 때 외부로 투사할 수 있는 순환 체계가 있어야만 하는데, 뼈밖에 남지 않았기에 마나 회로를 사용할 수 없는 리치의 경우에는 그것을 영혼에 술식을 새기는 것으로 해결한다.

즉 마나 자체를 혼백에 새기면, 몸에 마나가 흐르지 않더라도 문제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는 영혼에 막대한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말 그대로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고통을 수반한다.

당연히 신체의 고통이 아닌 영혼의 고통이기에 리치 역시 고스란히 고통을 느끼지만, 흑마법에 절여지다시피 하는 그들은 영혼의 내성이 높고 어차피 죽은 몸이기에 쇼크사할 걱정도 없다.

하지만 그런 리치들도 몇몇은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지곤 하는데, 만약 일반인이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다면 술식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정신이 나가버리거나 영혼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인간의 범주에 속해 있는 루니엘을 대상으로 한 이 의식은, 영혼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단계를 나누어 천천히 술식을 새기도록 고안되었다.

비록 고통 자체를 줄일 수는 없더라도, 여러 단계를 걸쳐 순차적으로 술식을 새겨나간다면 안정성을 비약적으로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의식을 고안해 낸 황제조차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리치의 마나 사용법을 결국 규명해 낸 그녀조차도, 그것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루니엘이 해내지.'

게임의 부록으로 발매된 설정집에서 워낙 인기 캐릭터였던 루니엘의 과거를 흥미 있게 읽어봤기에 똑똑히 알고 있다.

조금 전까지 내가 머릿속으로 정리한 내용을 고스란히 루니엘에게 말했던 황제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고, 루니엘은 그저 검을 다시 들 수 있다는 말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술식을 새기는 것을 택한다.

그리고, 비록 단계를 나누었다고는 하지만 리치들조차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지기 십상인 처절한 고통을 수차례나 버텨낸 끝에 결국 성공해 내고야 만다.

하지만 그 고통이 워낙 심했던 탓일까, 안 그래도 희미했던 감정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바람에 황제의 살인 기계로 전락해 버리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약간 상황이 다를 것이다.

지난 며칠간 의식을 개량하며 내가 생각해 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 영혼을 대가로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면 다시 검을 들 수 있다는 겁니까?"

"음, 살짝 다르긴 한데…. 그냥 그렇다고 합시다."

아무튼 이제 슬슬 의식을 진행해야 할 때였기에 루니엘에게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역시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평생을 검만 보고 살았던 그녀니, 복잡한 마법 체계를 이해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핵심은 잘 파악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 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루니엘의 본인의 의지력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준비가 되면 말씀해 주시죠.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테니 충분히 마음의 정리를 하시고…."

"준비는 아까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의식을 시작할 때가 다가오니, 오히려 마음을 굳힌 루니엘보다 내가 더 긴장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황제가 고안한 의식을 제대로 구현해 낸 게 맞을까? 미리 준비해 둔 '대비책'은 잘 먹힐까?

"그럼, 시작하죠."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걱정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잠시 심호흡을 한 나는 조용히 바닥의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했다.

-지이잉….

그렇게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눈이 부실 정도로 새빨간 빛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어두컴컴하던 지하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윽!?"

바로 다음 순간, 루니엘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크흑…. 으으…."

"흠."

지금쯤 그녀는 아마 온몸의 신경과 내장이 날카로운 칼로 찢어발겨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진통 마법이라도 걸어주고 싶지만, 신체가 아닌 영혼이 찢겨나가고 있는 것이기에 소용없는 짓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루니엘의 검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그것에서 비롯된 초월적인 정신력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 이 정도는…. 거뜬…."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도 무색하게, 잠시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되찾는 듯싶던 그녀는 결국 다리의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낭패로군."

그것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기대 이하라고밖에 할 수 없네."

"읏."

내 딴에는 의식을 재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무한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황제가 만든 것보다는 마법진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 같다.

다행히도 의식 자체는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안 그래도 마법진의 질이 낮아져 가해지는 고통도 극심한데, 소모되는 시간마저 원래보다 늘어난 듯싶으니 이대로 가면 아무리 루니엘이라도 의식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물론, 그러한 심각한 상황을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볼 생각은 없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뻔히 알았으면서 대비책도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실격이지 않은가.

좋아. 그럼, 이쯤에서 슬슬 준비해 둔 대비책을 꺼내야겠다.

"아직…. 아직이야…!"

"깜짝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마법진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작스럽게 루니엘의 새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뚫고 들어온다.

"아직, 아직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고통을 참다못해 바닥에 엎어진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던 루니엘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낸 건지 힘겹게 고개를 올리고선 다급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반, 반드시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보일 테니까…."

"아니, 됐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녀의 정신력은 정말이지 존경할 만하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계속 그 정도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보다 확연히 우수했던 황제의 의식도 결국 그녀의 감정을 지워버렸는데, 내 질 낮은 의식을 버티다가는 감정이 아니라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가 고안했던 대비책을 시급히 실행해야만 한다.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마, 만약 제 영혼만으로는 부족한 거라면…."

"예?"

"그렇다면, 이 세상이라도 당신에게 가져다 바칠 테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마법진 안으로 발을 내디디니, 이제는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한층 더 다급하게 들려온다.

"부,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아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무슨 마왕도 아니고, 세상을 손에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언가를 주었다 뺏는 잔인한 행위도 할 생각이 없고 말이다.

"저는 지금 당신의 의식을 도우려고 하는 겁니다만…."

"아…."

이것만큼은 왠지 제대로 해명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해 주려 했지만.

-주륵….

"저런."

눈의 실핏줄이 전부 터져가면서도 이를 악물며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버텨내던 그녀는, 결국 코에서 한줄기 피를 터트리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녀의 옷은 이미 차가운 식은땀으로 완전히 절여진데다가, 온몸의 근육은 아직도 고통을 잊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경련 중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루니엘의 입에서는 포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실로 독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녀라고 해도, 더 이상 영혼에 타격을 받으면 위험하다. 정신을 잃은 지금도 루니엘의 영혼은 끝없이 고통을 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대비책'을 실행할 순간이다.

"후우."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대비책은 눈앞의 의식만큼이나 단순 무식하면서도 위험한 것이니까.

"이걸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방법이란, 바로 미리 마법진에 슬쩍 끼워둔 술식을 사용해 루니엘에게 가해지는 영혼의 고통을 나에게로 돌리는 것.

동료들에게 향하는 저주와 대미지는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몸에 깃드는 이로운 축복은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는 전술을 주로 사용하는 성기사단의 기둥, 팔라딘들의 술식을 모방해서 만든 내 비장의 한 수다.

이거라면 확실히 루니엘의 의식을 안정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 온전히 나에게로 향한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야 하지만.

'그 정도야 전생에서도 몇 번 겪었으니까.'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아픈 것이야 이전의 생에서 숱하게 겪었기에 익숙하기도 하고, 애초에 나는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감수하게 할 성격이 되지 못한다.

그랬다간 죽기 전까지 꿈에 나올 것 같으니, 찝찝해서라도 이게 맞다.

그래도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이게 다 무슨 고생인가 싶지만.

'루니엘만 같은 편이 되면 앞으로의 행보가 탄탄대로인데,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애초에 루니엘이 시간을 꽤 오래 끌어주었으니, 나는 남은 시간만 버티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검을 다시 들고 싶어 했는데 감정이 죽어 버리면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방법이 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기쁘다는 느낌 정도는 잃지 말았으면 한다.

-지이잉…!

거기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의외로 많이들 까먹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원래 윗사람으로서의 지위에는 그만한 책임이 동반되는 법이다.

"으윽…!"

아니,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책임이 조금 과한 것 같기도 하고?

7화 서약

그저 검을 다시 들고 싶을 뿐이었다.

"마, 마나가! 내 마나가…."

"젠장! 어서 의식을 멈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어야 했을 기사 임관식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식이 실패해 마나 회로가 전부 불타버린 이후로, 루니엘은 항상 그것만을 생각하며 발버둥 쳐 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역대 최고의 신동이 나타났다며 그녀를 소리 높여 칭송하던 이들은 너무나 쉽게 등을 돌렸고, 하루가 멀다 하지 않고 물밀듯이 들어오던 후원은 거짓말처럼 끊어졌으니까.

제국 최고의 명의라 불리는 이들도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으며, 사랑을 아끼지 않던 가족들은 의미 없이 소모되는 천문학적인 치료비에 결국 그녀를 버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루니엘은 아직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심지어 이젠 그 검마저 들 수 없게 되어 버린 순진한 소녀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나 회로를 고쳐주겠다며 접근한 엉터리 전문가들, 동정심을 가장하며 사채라 불려야 할 후원을 일삼은 사기꾼들에 의해 빚과 업보가 쌓여 나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결국, 어느 날 허름한 여관에 간신히 묵고 있던 루니엘의 앞으로 귀족 지위의 제명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을 때. 그녀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로서의, 귀족으로서의, 하다못해 평범한 소녀로서의 인생조차 그녀는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한낱 평민보다도, 심지어 여느 천민보다도 못한 절망적이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한 채 끝없이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노예 시장에서 악성 재고를 처리하듯이 반값에 팔려나갔을 때, 한때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자들의 옷을 입은 채로 처음 보는 복도의 먼지를 쓸 때, 그러다가 새벽에 당연하다는 듯 주인의 방으로 호출되었을 때마다 점점 더 확실해져만 갔다.

이제 그녀는 긍지 높은 기사 루니엘 미스틸레인이 아닌, 노예 시장의 상품번호 167번이자 몰락 귀족이라는 상품성을 가진 관상용 메이드에 불과했으니까.

앞으로 그녀에게는 검 대신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기사의 맹세 대신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 비루한 인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

"허억…!"

헛숨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뜬 루니엘이,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일으켜 앉는다.

"하아, 하아…."

한동안 기절해 있다가 막 눈을 뜬 참이었기에, 그녀의 정신은 아직 몽롱했다.

비록 아까 전까지 가해지던 끔찍한 고통은 사라졌어도 온몸의 근육은 여전히 고통을 잊지 못한 건지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땀으로 축축해진 옷은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덕분에 완전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지하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덕분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니엘의 뇌리에, 자신을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기대 이하라 중얼거리던 휘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걸로 끝인가."

그것을 고려하면, 아마 의식은 이미 실패로 돌아갔고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녀는 이곳에 버려진 모양이었다.

"…?"

그런데 그러한 사실에 절망해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눈에,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던 쪽지 한 장이 들어왔다.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집어 든 루니엘의 시선이 쪽지에 적혀 있던 정갈한 필체를 훑었고.

「의식 도중에 기절하시는 바람에 직접 전해드리진 못했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내 시간이 잠시 멈추듯이,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휘트니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한 쪽지에 쓰여 있던 그 문장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물론 당신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닙니다. 아마 이번과 같은 고통을 몇 번이고 더 견뎌내셔야 할 테죠.」

보통 이때쯤이면 마나가 역류한 몸이 다시 떨려왔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니엘의 몸은, 통증의 후유증을 제외하면 놀랍도록 멀쩡했다.

「하지만, 일단 오늘부터 당신은 다시 마나를 다룰 수 있을 겁니다.」

오직 멍하니 쪽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루니엘의 손만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쉬시다가 기운이 나시면 제 집무실로 오도록 하세요. 이야기는 그때 다시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녀의 시선이 쪽지의 마지막 문구로 향했고.

「다시 검을 들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루니엘 미스틸레인 양.」

이내 그녀의 손에 잡혀 있던 쪽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ps. 지하실 앞문은 지금 쓰이지 않으니, 되도록 제 집무실과 연결된 뒷문을 사용해 주세요.」

이미 눈이 돌아가 버린 루니엘이 미처 보지 못한, 끝에 작게 쓰인 추신을 담은 채로 말이다.

-터벅, 터벅….

하지만 그 쪽지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루니엘은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검을 들 수 있다, 라는 말 따위는 사기꾼들에게 몇 번이고 들었었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분명히 무언가가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찬란했던 과거의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느낌'만으로는 부족했다.

지난 몇 년간 미친 듯이 바랬던, 매일 밤 꿈에서나 그리던 그 순간을 두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그녀는 안심할 수 없었다.

"확인…. 지금 당장 확인을…."

그렇기에 얼마 남지도 않은 힘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던 지하실의 정문을 연 루니엘은, 무작정 걸음을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통로는 먼지가 가득한 데다가 어두컴컴하고 습했지만, 다행히도 출구로 추정되는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작고 가느다란, 한줄기에 불과한 빛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어둠에 잠겨 있었던 루니엘에게는, 그 작은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 보였다.

-끼이익….

그렇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빛을 따라가 통로의 끝에 도달한 그녀는, 손에 닿은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는 힘껏 위로 밀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한 햇살이 그녀를 감쌌다.

"아…."

덕분에 살짝 눈을 찌푸리며 몸을 밖으로 빼낸 루니엘은, 이내 자신이 린가드 저택의 정원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꺄, 꺄악!"

"누, 누구…?"

저택의 정원을 관리하던 정원사와 마침 옆에서 물을 긷고 있던 하녀들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며 아연실색했지만, 루니엘은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잔뜩 헐거워진 채 흐트러져 있는 데다가 흙먼지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기까지 한 옷을 입고선, 온몸에서는 피비린내를 잔뜩 풍기면서 말이다.

"쟤, 걔 아니야? 도련님이 일주일 전쯤에 구매…. 아니, 데려왔던 애?"

"어, 어제 새벽에 혼자 방에서 나가던데."

딱 봐도 무언가 끔찍한 일을 당한 것 같은 그 처참한 몰골에 하녀들은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루니엘의 안중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검…. 검이 어디에 있지?"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당장 검을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교육 담당이었던 샤샤가 말하길, 기사들이 임무 수행을 위해 자리를 비워 연무장은 잠겨 있다. 그리고 저택의 창고는 허락받은 사람과 관리인만이 드나들 수 있다.

그렇다면 저택에 남아 있는, 그나마 검과 비슷한 것을 잡아 볼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뿐.

"어, 어디 가요?"

"따,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저택으로 향하자, 불안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하녀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뒤를 따른다.

"저기, 잠깐만…."

"비켜."

그중 몇 명은 루니엘을 막아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그녀가 섬뜩한 표정으로 살기를 흘리자 즉시 움츠러든 채 길을 터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여기라면…."

그렇게 저택에 무사히 무혈입성한 루니엘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주방.

뒤에 사람들을 줄줄이 단 채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잠시 풀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찾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미처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루니엘의 손이 앞에 있던 조리 기구 보관대로 향했고.

- 스릉….

이내 그녀의 손아귀에 날카로운 식칼이 움켜쥐어지자, 그녀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온 하녀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굳었다.

"…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핫, 하하…!"

한참 동안 주방에 내려앉아 있던 싸늘한 적막을 깬 것은, 도무지 루니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오싹한 웃음소리였다.

"아하하하하하!!!"

그 웃음소리에 압도된 사람들이 여전히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무렵, 두 손으로 식칼을 꽉 붙잡고 있던 루니엘이 별안간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하! 핫, 하하하…."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며,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그러한 상태로 마치 광인처럼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루니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휘트니 린가드."

그런 그녀의 입에서 탁하게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그때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떨고 있는 루니엘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 영혼을 당신에게 판 대가가 이것이라면…."

그리고 그 덕분에 루니엘의 등에 가려진, 그녀의 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검기가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작은 식칼에 감싸진 그 검기는, 지하실의 통로에서 들어오던 빛처럼 당장에라도 꺼질 듯이 희미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난 몇 년간 루니엘이 그렇게 바라고도 또 바랬던 작은 희망이었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검이 되어 주도록 하겠어."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말 그대로 영혼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어젯밤에 잠깐 화장실에 갈 때 비명소리 같은 게 들리던데."

"그, 그럼…. 그게 들고양이 소리가 아니라…."

"쉿,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물론 그러한 전후 사정을 모르던 하녀들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루니엘이 조용히 칼을 바닥에 내려놓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훗날 '주방 자살소동'이라 불리게 될 괴담의 뼈대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안들린다…. 아무것도안보인다…. 아무것도안…."

덕분에 주방에서 혼자 열심히 샌드위치를 만들다가 다급히 바구니 안으로 몸을 숨긴 샤샤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비롯한 모두의 오해를 풀 길은 요원해 보였다.

*****

'어휴, 아파서 쇼크사할 뻔했네.'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가려워진 귀를 괜히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몇 시간 전에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픈 건 이미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이었어.'

루니엘과 고통을 분담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게임 오버를 맞이할 뻔했다.

하긴 영혼에 마나가 흐르는 통로를 강제로 뚫는데 그 정도 고통은 느껴져야 정상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몇 번이고 더 고통을 분담할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온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남아야 할 사건들을 생각하면 상당히 남는 장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누구도 성공시킨 적 없는 루트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고인물로서 상당한 성취감도 느껴지고 말이다.

상당히 게임중독자 같은 발언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것이 현실이니 거리낄 것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누적 플레이타임 8500시간 정도면 중독자도 아니잖아?

-똑똑똑….

"들어오세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로 다시 시선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알프레드, 제가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요즘 서류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 루니엘 양?"

당연히 알프레드일 것으로 생각하고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서류의 양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려는데,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가 아니라 루니엘이었다.

보아하니 눈빛이 지난 일주일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지긴 했다. 그래도 의식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을 텐데?

참고로 나는 지금도 온몸의 근육이 뻐근해서 죽을 지경이다.

"벌써 기운을 차리신 건가요? 조금 더 쉬다 오셔도 됐을 텐데…."

"묻겠습니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리를 하는 건 아닐지 싶어 걱정을 담은 질문을 던지려는데, 루니엘의 담담한 목소리가 내 말을 덮는다.

"당신이 제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묻기에 뭔가 싶었는데, 그녀의 질문은 김이 빠질 정도로 쉬운 것이었다.

그야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게임 내에서는 영입하기 힘들었던 사기 캐릭터들만 모아 둔, 나의 목숨과 평안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드림팀이니까.

그 팀을 꾸릴 수 있는 최소 조건인 루니엘을 손에 넣었으니 그것 자체로 이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원하는 것이라면, 이미 손에 넣었는걸요?"

그렇기에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루니엘을 바라보며 그리 답했지만, 그녀는 그저 말없이 자리에 선 채 나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사실 제가 좀 위험한 상태라, 든든한 호위가 필요…."

"알아들었습니다."

그 모습에 혹시나 잘 이해를 못 한 건가 싶어 자세히 설명을 덧붙이려던 바로 그때, 갑자기 확신에 찬 듯한 루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럼, 서약하겠습니다."

"네?"

어느새 그녀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인 채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고 있었다.

"적에게는 단죄와 징벌을, 포로에게는 자비와 선의를. 명예와 신의를 중요시하고, 시험에 맞서 긍지를 지키기를."

아니 잠깐, 그거 기사의 서약이잖아?

"저, 루니엘 미스틸레인. 오직 주군에게 승리와 영광만을 안겨드리기 위하여."

어째 악인과 약자가 적과 포로로 바뀐 건 그렇다 치더라도, 생애 단 한 명의 주군에게만 할 수 있는 의식을 그렇게 고민도 없이 바로 한다고?

"지금 이 순간부터, 휘트니 린가드."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루니엘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나를 곧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직 당신만의 충실한 검이자 도구가 되리라 맹세하겠습니다."

물론 루니엘이 나에게 그 정도의 충성을 바치는 것은 희소식이다.

기사의 서약은 강요나 협박이 아닌 오직 서약자의 본의로만 진행할 수 있으며 서약자 본인이 다시 깨트릴 수 없기에, 상대방에게 평생토록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또한 기사의 서약을 한 당사자는 제국 법상으로 대상자의 소유물이 되어버리며, 마나 역시 대상자에게 종속된다.

괜히 기사의 서약이 우스갯소리로 합법적인 기사용 노예의 인장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마나 종속' 덕분에 그녀가 나의 소유인 것을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아직 루니엘의 회복이 전부 끝난 것이 아닐뿐더러,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들과 변수를 고려한다면 아직은 그녀의 부활을 숨기는 것이 좋은데 말이다.

애초에 몸이 다 나으면 다시 찾아오라고 한 것도 나중에 의식이 다 끝났을 때 혹시 괜찮다면 나에게 서약을 해 달라 제안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러면 일이 완전히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저기, 그건 조금 나중에…. 앗."

그 때문에 다급히 그녀를 말리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서약은 이미 끝난 뒤였다.

설마 내가 조금 전에 그녀의 질문에 한 답변이 서약의 승낙으로 여겨지는 바람에, 그녀와 나의 마나가 일사천리로 감응해 버린 건가?

아뿔싸, 이래서 계약이나 의식을 할 때는 입을 조심해야 하는 건데.

"부디 유용하게 사용해 주시길."

그런 나의 속도 모르고 조용히 고개를 든 루니엘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미소에 미약한 배덕감이 섞여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는 내 머릿속이 지금 너무 복잡했다.

"우선…. 당분간은 밖에 나서지 마시고 회복에 집중해 주세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제가 차차 생각해 볼 테니…."

"도, 도련님!"

아무튼 벌어진 일에 대한 수습은 해야 했기에, 우선 루니엘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기려던 그때였다.

"메메메, 메르디아 공녀께서 도련님을 만나고 싶으시다고…."

"으음."

불난 데 부채질하듯이, 잔뜩 겁에 질린 샤샤에 의해 메르디아의 접견 요청이 전해진 것은 말이다.

"잘됐네요. 그럼, 한번 시간을 잡아보도록 하죠."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사, 사실 이미 저택의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돌겠군."

얼굴이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샤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결국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당연히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갈 것이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 하나 정도는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세상에서 없앨 수 있는 최종 보스가 나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것 정도….

"그, 그리고….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뭐죠?"

"저번에 건넨 서류에 대한 그럴싸한 해명을 내놓을 수 없다면 여, 여러모로 각오해야 할 거라고…."

"루니엘 양, 저랑 잠시 정원 산책이나 좀 할까요?"

에라, 나도 이제 모르겠다.

8화 데릴사위

여러모로 의외였던 휘트니와의 다과회가 끝난 이후로 근 일주일간, 메르디아는 짜증과 불쾌감으로 가득한 신경이 곤두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휘트니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청혼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속을 긁는 모종의 사건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몇 분 전에 백작가에 친히 왕림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메르디아는 그녀를 맞이한 하녀들이 차도 제대로 따르지 못할 정도로 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일주일 만이네요, 공녀님."

하지만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따라진 차를 막 입에 가져다 댈 무렵,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정원에 들어온 휘트니가 특유의 저의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메르디아의 앞에 앉았고.

"미리 방문을 알려 주셨다면 조금 더 융숭한 대접을 해드렸을 텐데 말이죠."

"하."

바로 그 옆에, 한 소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잡고 서자 그녀는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재주도 참 좋군."

꽤 그럴싸한 메이드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저택에서부터 휘트니의 옆에 바짝 따라붙어 나온 소녀의 얼굴은 메르디아에게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루니엘 미스틸레인. 최연소 금급 기사 수련생이자, 황자와 엠버그린 공작가의 장남을 비롯한 여러 쟁쟁한 후보들이 난립했던 제83회 제국 유소년 검술 대회의 우승자.

그러나 기사 서임식에서의 그 불행한 사건 덕분에 하루아침에 제국의 가십거리로 전락하고만,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

하지만 지금 휘트니의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는, 제국 신문에 실린 사진에서 보였던 그 절망적인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몰락 귀족을 구매해서 노예로 부리는 음침한 취미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더한 걸 하고 있었을 줄이야."

저 멀리에서는 긴가민가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진 지금은 둘의 마나가 공명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어째 다른 의식이라도 몇 개 더 한 건지 그 공명의 강도가 너무 강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검의 신동이라 불렸던 루니엘의 마나가 되살아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그녀가 진심으로 휘트니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서약'에는 꼼수나 협박이 통할 수가 없으니, 아마 그녀의 마나를 되찾아 준 것은 바로 휘트니 본인일 것이다.

"인정하지. 휘트니 린가드, 역시 너는 꽤 유능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난 일주일간의 고민 때문에 쌓여 있던 메르디아의 짜증은 어느새 호기심으로 덧칠되기 시작했다.

청혼 같은 선을 넘는 일만 아니었다면, 원래부터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일에 짜증보다는 흥미를 느끼던 그녀였으니까.

"저번에 말했듯이, 이야기만 잘 통한다면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야."

또한 그런 예상을 벗어난 사건이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이 서기만 한다면 메르디아는 상당히 자비로워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걸."

"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에 대한 메르디아의 판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경과 독대를 요청했을 텐데."

"아, 그건…."

"그런데 감히 호위를, 그것도 서약까지 한 여자 호위를 데려와?"

애초에 그녀가 예고도 없이 백작가에 찾아온 것부터가, 바로 그것을 확실히 판가름하기 위해서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내게 청혼 신청을 해놓고서 말이지?"

일순간, 숨이 막힐 듯한 탈력감이 휘트니와 루니엘을 덮친다.

- 쿠구구구….

메르디아로서는 단순히 억누르고 있던 마나를 살짝 해방한 것이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정원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음, 이거 뭔가 오해가 있는 듯싶은데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로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휘트니만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내가 모욕감을 느꼈다는 사실이잖아?"

"아하하…."

그 역시 메르디아가 눈을 부릅뜨며 싸늘하게 속삭이자, 멋쩍은 듯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는 휘트니에 대한 평가를 속으로 살짝 올리면서도, 그가 끝까지 숨기고 있는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메르디아가 한층 더 기세를 높일 때였다.

-까드득….

휘트니의 옆에서 휘청이고 있던 루니엘이, 별안간 이를 악물더니 귀기 어린 표정으로 메르디아를 노려보기 시작한 것은.

"기세를, 거두십시오."

바로 그다음 순간, 다과용 테이블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집어 든 그녀가 눈 깜짝할 새에 메르디아의 목에 그것을 겨누었고.

이내 정원에는 쥐 죽은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호오."

당연하게도 상황을 최악으로 악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행동에, 메르디아의 시중을 들다가 봉변을 당한 불쌍한 하녀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메르디아는 그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자신에게 무기를 겨눈 루니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건가?"

"큭…."

"몸이 다 회복된 것 같지도 않은데, 역시 제법이야."

이윽고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여전히 메르디아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루니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네가 대회에서 내 오라비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을 때는, 꽤 볼만했었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는 모습에, 메르디아가 한층 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고.

"내 수하가 될 생각은 없나?"

"거절합니다."

"하!"

그 즉시 루니엘의 즉답이 날아오자, 그녀의 입꼬리가 아예 귀 위로 치솟았다.

"후회할 텐데?"

"그건 제가 정하는 겁니다."

그렇게, 정원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루니엘 양, 그리고 메르디아 공녀님."

그때까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휘트니가, 별안간 루니엘의 팔을 잡으며 입을 연 것은 말이다.

"슬슬 그쯤들 하시죠."

그 말에 메르디아와 루니엘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내 정원에는 쥐 죽은 듯한 침묵만이 맴돌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오직 휘트니만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말투로 그 자리에서 둘을 타이르듯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

*****

'이게 무슨 난리야, 시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서 겨우 입을 여는 데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깐 기절한 사이에 일이 이렇게 돌아갔을 줄이야.'

그야 메르디아의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잠시 기절했다가 눈을 뜨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손이 안 떨리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정신력을 증폭하는 백마법의 주문을 속으로 전력을 다해 외우고 있었는데도, 결국 기절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만약 내가 자리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하녀들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이더라도 일이 더 틀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루니엘 양은 이만 저택에 들어가 쉬고 계세요. 저는 공녀님과 마저 이야기를 나누다 갈 테니."

때아닌 살육전이 정원에서 벌어진다면 죄 없는 하녀들의 일거리가 늘어날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숨이 막히는 살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메르디아의 목에 나이프를 겨누고 있던 루니엘은, 내 말에 비교적 순순히 기세를 거둔 채 물러서 주었다.

이윽고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쩐지 상당히 축 처져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주인을 실망케 만들어 주눅이 든 사냥개 같아 불쌍해 보였지만, 딱히 목에 무딘 다과용 나이프를 겨누고 있다고 해서 메르디아를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선 루니엘을 이 자리에 데려온 목적 자체는 달성하였으니, 메르디아의 신경을 더 이상 긁을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공녀님도 슬슬 살기를 거두어 주시겠어요?"

"그건 명령인가?"

자, 그러면 이제 열심히 입을 놀릴 차례다. 쥐뿔도 가진 게 없는 나에게는 이 주둥이만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수단이니까.

"제가 어찌 감히. 그저 쓸데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랍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메르디아가 조용히 고개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정원에 가득하던 살기가 살짝 덜해진다.

"그럼, 한번 설명해 봐."

덕분에 잠시 숨을 돌리며 이마의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고 있으니, 그녀가 나의 눈을 응시하며 속삭이듯 명령했다.

비록 그 표정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보석안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한때 게이머로서 축적한 지식에 의하면, 그것은 메르디아가 짜증이나 살의보다는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식은땀 나는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우선 저는 공녀님을 위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하더라도, 위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흠."

"그리고 루니엘이 공녀님에게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만, 만약 제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공녀님에게 보여드리지도 않았겠지요."

메르디아의 그 잔혹한 성정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가 돌발상황이나 타인의 도전에 관대하고, 그것을 되레 즐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날 때부터 원하는 것은 전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오히려 뻔하거나 쉽게 수가 읽히는 족속들, 혹은 자신에게 겁을 먹는 자들을 싫어한다.

"저는 그저 제가 공녀님에게 얼마나 유능한 패가 될 수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

"루니엘은 이미 저와 서약을 한 뒤라 공녀님의 검이 될 수는 없지만, 제가 공녀님과 손을 잡으면 그녀 역시 든든한 아군이 될 테죠."

내가 이 자리에 굳이 루니엘을 데려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숨기고 싶었지만, 어차피 메르디아와 한배를 타게 된다면 루니엘은 얼마 못 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리고 어차피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면, 어째 불만이 가득해져서 온 그녀의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자극제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 자극이 너무 컸는지 정원이 피비린내로 범벅이 될 뻔했지만, 원래 도박수에는 그 정도의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낸 적이 없는 마나 회로 복구에 대한 업적은 어째 쏙 빼놓고 말하는군?"

그런데 어째 메르디아의 핀트는 루니엘이 아닌 나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하하, 그 정도는 공녀님도 조금만 연구하시면 해내실 수 있잖아요?"

"농담이 지나쳐. 그 사실이 알려지면 마법 학계가 당장이라도 뒤집힐 텐데."

나는 그저 게임 설정집에 있던 황제의 의식을 그대로 베꼈을 뿐이다. 

따라서 5살부터 마나학의 기초를 뗀 메르디아가 의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실력이 들통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나는 경과 손을 잡고 싶고, 그에 대한 요구 조건을 웬만하면 들어줄 의향도 있어."

"서로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나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먼저 이야기를 돌린 것은 메르디아였다. 

"하지만 말이야, 그 빌어먹을 청혼서는 대체 뭐지?"

지금까지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온건해진 말투로 말하던 그녀가 문득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진 순간,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경은 설마 정말로 나와 결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건가?"

그녀가 친히 이곳까지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당연히 저는 공녀님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한 나머지 청혼을…."

-고오오….

"…한 건 아니고요. 그저 그편이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는 데 편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슬슬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듯싶었기에, 일단은 분위기를 환기할 겸 아부를 떨어보려 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메르디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재빨리 말을 바꾸어 미리 준비해 둔 설명을 내뱉기 시작했다.

"최근에 결혼이니 청혼이니 뭐니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공녀님 같은 분에게는 신랑이 누구든지 과분할 테지만…."

"본론만 말하도록."

"…공녀님의 목적은, 가주가 되는 것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공녀의 진짜 목적은 게임에서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최종 보스로서의 그녀를 막는 것이 대다수 루트의 엔딩을 차지하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게임 오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일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선은 그렇다고 해 두지."

아니나 다를까 메르디아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 사실이 살짝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그녀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 또한 그것이 아니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가 공녀님의 방파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건 무슨 의미지?"

몰락 직전인 가문을 위해, 앞날이 창창한 동생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지금부터 나는 그 어떤 플레이어도 감히 시도해 보지 않은,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할 수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루트를 제안할 셈이었으니까.

"지금 이 시점부터 시작해, 원하시는 기간까지."

그리고 아마 그 제안은, 단순히 메르디아 한 명의 운명을 넘어서 세계선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제가 공녀님과 혼인해,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물론, 내가 이 말을 끝으로 메르디아에게 살해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9화 데릴사위 (2)

"…데릴사위라."

혹시나 살인 저주가 날아오지 않을까 싶어 손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내 제안을 들은 메르디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저주가 아닌 의뭉스러운 중얼거림이었다.

"원한다면 제가 먼저 '데릴사위'를 원했다는 문구가 적힌 각서도 써드릴 수 있습니다. 그편이 공녀님도 좋으시죠?"

다시 한번 파리 같은 목숨을 건진 것에 감사하며 나는 다급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지만, 답변 대신 그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메르디아는 되려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처지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워낙 유명한 이야기지 않습니까? 아마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알 테죠."

그렇다. 지금 메르디아 공녀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은, 전생의 지식조차 필요 없이 제국의 가십지들을 보는 것만으로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공작이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사실이지."

"아하하…."

그래도 정리를 해보자면, 지금 엠버그린 공작가에서는 단 하나뿐인 가주의 후계자 직위를 두고 상당히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전쟁에서 가장 유리한 고점에 올라서 있는 메르디아에게는 현재 수많은 공격과 견제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것이 다름 아닌 '청혼 공격'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는 엠버그린 공작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인 후계자 선정의 규율이 있었다.

그 규율에 따르면 엠버그린 공작가의 가주는 후계를 직접적으로 선택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자격을 가진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후계자 선별식을 열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주의 역할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닌데, 가주는 선별식이 열리는 동안 후계자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한가지 규칙을 발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가주가 감정적으로 후계를 정하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선별식의 주최자인 가주의 권위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조치로서 그런 규율이 존재한다고는 들었는데, 솔직히 효과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솔직히 엠버그린 공작가가 제국 창립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 온 그 어마어마한 위세를 생각해 보면, 괜히 케케묵은 전통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게 아니리라.

아무튼 문제는, 메르디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당대의 엠버그린 공작이 발표한 규칙이 바로 '후계자에게는 반드시 혼인한 상대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아들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 조약이지만, 일반적인 혼인을 한다면 제국법상 신랑의 직위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은 메르디아에게는 참으로 치명적인 조항이 아닐 수가 없다.

당장 엠버그린 공작이 칙령을 발표한 이후로, 혹시 모를 잭팟을 기대한 머저리들이 일제히 청혼을 보내는 바람에 메르디아에게 오던 서신의 양이 5배는 더 늘어날 정도였으니까 말 다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메르디아가 처한 골치 아픈 상황의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방법은 바로 신랑이 신부의 가문에 종속되는 데릴사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작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 중에서는 언제 장기 말처럼 쓰이고 버려질지 모르는 그런 위험천만한 자리를 맡으려는 자들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작이나 남작을 데릴사위로 삼기에는 메르디아의 위신이 너무나 떨어지는 행위였고, 그녀의 특기를 살려 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을 협박해 허수아비로 세운다고 하더라도 제국의 귀족 혼인이 가진 복잡하고도 악명 높은 권위 때문에 되레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여자는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이었다면 시원하게 반란이라도 일으켜 주었을 텐데 말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규칙이니 참으로 음흉하기가 짝이 없어."

그 말대로 가문이 휘청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메르디아가 가주가 되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그런 주제에 자신의 위상은 또 지키고 싶던 엠버그린 공작이 정말이지 잔꾀 하나는 잘 낸 것 같다.

"하지만 제 제안을 받아주신다면 그런 문제는 단숨에 해결될 테지요."

"흠."

"아, 이혼 귀책 사유는 공녀님이 원할 때쯤에 발견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러면 공녀님의 정치적 타격이 좀 덜하겠죠?"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나 같은 호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내 제안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그동안 메르디아가 고민하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적당한 명성과 적당한 지위를 가진, 심지어 원할 때 알아서 파혼에 필요한 귀책 사유까지 만들어 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의 계약 신랑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은 뭐지?"

"당연히 저와 제 가족의 안위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조건이, 그냥 잠깐 결혼해 주기 하나뿐인 호구 신랑은 단언컨대 나 하나뿐일 것이다.

뭐, 사실 나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공작가에 팔려 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가문의 서류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산더미 같은 빚과 거의 가문의 전 재산이 들어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업들을 무더기로 발견해 낸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와 메르디아의 혼약이 파투가 나는 순간 투자자들은 일제히 발을 뺄 것이고, 얼마 안 가 빚쟁이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와 동생이 있는 저택으로 달려들 테니 말이다.

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까지 벌여두고는 잠수를 타신 거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내 최애가 메르디아 공녀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거다.

"하, 그래. 일단은 믿어주도록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또다시 피식 웃음을 터트린 메르디아가 턱을 괴며 한층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경은 여러모로 수상하지만, 단순히 내 권력이나 몸에 눈이 먼 얼뜨기는 아닌 게 확실하니까."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아직은 긴가민가하지만 아무래도 희망이 보이는 듯싶다.

"그런 놈들에게는 질릴 대로 질린 참이라 말이야."

"음, 제가 개인적으로 공녀님에게 반해 있는 건 맞는데…."

"그래도 일단은 결혼이 아니라, 약혼으로 하도록 하겠어."

아니나 다를까, 괜히 서운해서 중얼거리던 나의 말을 끊고 들어온 메르디아의 발언은 상당히 반가운 소식을 담고 있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결혼이 아닌 건 아쉽지만, 일단 약혼이라면 어느 정도 가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겠지.

물론 파혼이라는 타임 리미트가 새로 생겼기에 앞으로 더욱 열심히 굴러야겠지만. 그래도 당장의 파멸은 피했으니, 당분간은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지."

"네?"

"별건 아니고, 최근에 내 신경을 긁던 일을 같이 처리해 주면 돼."

그러한 생각으로 희희낙락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별안간 메르디아가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새로운 조건은 그렇다 쳐도, 메르디아의 신경을 긁는 일이라니?

물론 억지스러운 부탁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지만, 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일까.

"그런고로, 이번에 열리는 황자의 약혼식에 나와 대동해 줘야겠어."

"뭐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며 메르디아의 눈치를 보던 나는, 그녀가 방금 막 내뱉은 조건을 듣고는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대체 뭘 잘못 먹은 건지, 옛날부터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 중인 그 머저리 새끼가 나한테 청첩장을 보냈거든."

"아…."

"그 청첩장에 쓰여 있는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들을 읽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 경이 내 약혼자라면, 당연히 내 복수를 도와주겠지?"

'큰일이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자를 메르디아와 손을 잡고 엿 먹여야 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것도 아니다.

일단 메르디아와 한배를 탄 이상, 앞으로는 그것보다 더한 짓들도 수두룩하게 해야 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반응한 이유는, 황자의 약혼식이 원작의 튜토리얼임과 동시에 게임의 주인공인 플레이어가 무조건 승리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즉,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의 적을 맡게 되는 메르디아와 나는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후폭풍을 뒤집어쓰게 될 사람은 아마 공녀인 메르디아가 아닌 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왜, 싫나?"

"아하하…."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어째 다시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다.

*****

"뭐, 딱히 강요하는 건 아니야."

처음으로 휘트니의 미소가 일그러지는 것을 본 메르디아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덧붙였다.

"싫다면 포기해도 좋아."

그 미소는,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하녀들을 가로질러 정원의 출구로 향할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 정도의 모험도 할 수 없는 남자에겐 나 역시 더 이상 흥미가 없으니."

실로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도 모르게 눈앞의 남자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설마 인제 와서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 휘트니.'

걸음을 옮기는 메르디아의 시선은, 은근히 뒤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다리시죠."

그 때문인지, 어느새 그녀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할 무렵.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이제는 사뭇 익숙해진, 활기찬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어 왔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아, 대신 저도 한 가지 조건을 붙여야겠습니다."

하지만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춘 메르디아에게, 예상치 못했던 제안 하나가 들어온다.

"만일 제가 성공적으로 공녀님의 계획을 도와드리면,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덕분에 이번에는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 일로 백지수표를 요구하다니, 원하는 것도 많군?"

"뭐, 싫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휘트니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말을 덧붙였다.

"저도 싫다는 사람은 딱히 잡지 않는 편이라."

어째 그 미소가, 메르디아의 눈에는 정색이라도 한 것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일이 틀어진다고 해서, 제가 공녀님을 해코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허."

이윽고 그의 입에서 옆에 호위가 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협박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오자, 메르디아의 입가가 순간 호선을 그렸다.

'빈말은 아니군.'

물론 그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긴장에 빠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휘트니에게서 느껴지던 꺼림직한 기운의 실체를, 이제야 막 두 눈으로 확인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허세였다면 내 살기를 그렇게 정면으로 버텨낼 수도 없었겠지만.'

지금 그녀의 보석안에만 감지되고 있는, 그의 몸 주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회색빛의 기운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그 기운을 끝까지 끌어내 보고 싶었지만, 그 시점의 메르디아는 아직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상태였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원은 거절하도록 하겠어. 어디까지나 선을 지키는 게 우리 모두에게 편할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그렇기에 그녀의 입에서 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동의가 튀어나오자, 휘트니의 입꼬리 역시 조용히 위로 솟아 올라갔다.

"어찌 됐든 저는 공녀님을 좋아하니까요."

"경은 농담에는 정말이지 소질이 없군."

그 모습이, 정말이지 서로에게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점까지도 나와 많이 닮았어."

'알겠으니까, 이제 제발 가줬으면 좋겠다.'

물론, 혹시라도 저주가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다시 속으로 전력을 다해 보호 주문을 외우고 있던 휘트니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감상이었겠지만 말이다.

*****

그로부터 몇십 분 뒤.

휘트니가 있던 정원을 벗어나 저택의 정문에 도달한 메르디아 공녀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려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역시, 보통은 아니군.'

그런 그녀의 얼굴은, 정원을 나서기 전까지와는 달리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 기세를 정면에서 버텨내다니.'

그 루니엘을 수하로 삼은 것이나,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마나 회로의 복구를 성공시킨 것, 그리고 자신의 협박에도 끝까지 말장난이나 하면서 결국 본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그녀가 진심을 담아 내뿜었던 살기는 단순한 기합이나 보호 마법으로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살기에는 사실 메르디아의 고유한 마나가 짙게 섞여 있었기에, 웬만한 실력을 갖춘 강자가 아닌 이상 너덜너덜한 꼴이 되었어야 정상이니까.

그리고 그런 꼴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메르디아가 알기로는 제국을 넘어 전 대륙으로 나아가더라도 몇 없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자신의 기세를 이를 악물고 버티던 루니엘만큼의 반응은 나왔어야만 했지만, 어째서인지 휘트니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살기를 그대로 버텨냈다.

평소처럼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도 파악할 수 없는 실눈을 뜨고선, 정말로 미약한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아까의 그 기세는.'

또한 그가 루니엘과 그녀를 본격적으로 말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정원을 나서려던 그녀를 멈춰 세웠을 때.

비록 미세한 수준이었지만 메르디아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마다, 주변에서 계속 머물고 있던 어두운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방을 향해 뻗어져 나가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딱히 유독하거나 살기를 띤 것은 아니었다.

그 기운 자체는 그저 소름 끼치고 불길한 파장을 하염없이 내뿜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음에도 그것에 노출된 주변 사람들이나 본인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만약 소유자인 휘트니가 의도적으로 기운을 억누르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만일 조금 전의 상황에서 휘트니가 자신처럼 전력을 다해 기세를 높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조사가 필요하겠는걸."

휘트니 린가드. 그자에게는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과 대등한 수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물론 여전히 경계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기던 메르디아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보석 같은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콰직…!

그러자 별안간 무언가가 우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그녀의 옆에 있던 나무 위에서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윽고 다급하게 날개를 펼친 그것이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지만, 그 모습이 메르디아의 눈에 담긴 순간 그것은 힘을 잃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 폐하께서도 친히 눈여겨보고 계시는 모양이니."

그렇게 결국 금이 간 채 메르디아의 발치에 떨어진 것은, 유리로 정교하게 조각된 비둘기 모양의 마도구였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마나는 이미 메르디아 본인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그녀가 현재 엠버그린 공작만큼이나 경계하고 있는 자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역시 당분간은 내 손에 넣고 있어야겠네."

그 마도구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던 메르디아는, 이내 그것을 무참히 짓밟아 박살 내고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사려 깊은 아내를 둬서 좋겠어? 휘트니 린가드."

물론 그때까지도 정원에 남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휘트니 본인이 들었다면, 다소 어이없어했을 발언이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