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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OYLAESP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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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나는 검이었다

#Prologue.

나는 검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른다.

다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자아를 갖기 시작했다.

인간의 언어도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나를 쥔 주인과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나를 에고 소드라고 불렀다.

세상에 다시 없을 가장 강력한 검이라고 했다.

어떨 땐 참 즐거웠다.

나를 휘두르는 자의 검술엔 명확한 목적과 원칙이 있었다.

인간 기준의 선과 악은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목적과 원칙만 명확하면 되었다.

어떨 땐 참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명확한 목적도, 원칙도 없이 휘두르는 검술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런 자의 손에서는 으레 지독한 악취가 났다.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주인'을 갖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 자신의 의지로 '동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나를 휘두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갈수록 나의 가치는 높아졌다.

때로는 마땅한 동료가 나타나지 않아 백 년 넘게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동료가 없을 땐 세상이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아는 있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검이니까.

그래도.

냄새나는 놈에게 내 고귀한 검날을 맡기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동료를 만나면 또 그 만족감이 배로 커졌다.

자아를 갖게 된 이후 천년이 흘렀다.

나는 점점 더 강해졌다.

마음에 드는 동료를 만나면 그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4번째 동료는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했다.

결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뒤처져서는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해도 너무 강한 친구가 항상 붙어있었다.

4번째 동료는 나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이든이야."

-이든?

단단한, 혹은 영원한 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나의 12번째 동료.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인간.

아니, 애초에 인간은 맞았던가.

그의 검술은 누구보다도 명확한 목적과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동료가 된 기념으로 애써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미 최강이었다.

세상은 그를 '렉스'라고 불렀다.

렉스와 함께 600번의 전투를 마쳤을 때.

그가 물었다.

"이든. 너는 소원이 있나?"

나는 대답했다.

-소원?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지금이라도 생각해 보아라."

-글쎄… 소원이라. 더 이상 남의 뼈와 살을 가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거?

"어디 아무도 찾지 못할 지하 깊은 곳에 처박아 주랴?"

잠시 고민해 보았다.

-아니. 그건 너무 외롭고 지루할 것 같다. 나는 영원한 삶을 사는 존재니까.

"어떤가? 그 영원한 삶이라는 건."

-당장 끝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계속하고 싶지도 않지.

"그렇군."

잠시의 적막이 흘렀다.

소원이라....

-렉스.

"왜? 소원이 생각났냐?"

-그래.

"뭐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주지."

-나도… 인간이 되어 보고 싶다.

"인간?"

-그래.

렉스의 시선이 언덕을 가득 메운 시신들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이라고 불리고 있으면서, 고작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이냐? 쇠붙이에 베이면 저렇게 살이 잘리고 뼈가 쪼개져 결국 고깃덩어리가 되는 인간?"

-노을 잘 보고 있었는데. 고개 좀 다시 돌려줘라.

렉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도 다시 노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봐라. 나는 나를 쥔 자의 감각을 공유할 뿐. 나 혼자서는 저 노을 하나 바라볼 수가 없다. 두 발로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인간이 부럽나?"

-부럽다기보다는, 그런 삶이 궁금하군.

"진심이냐?"

-그래.

"저기 저 널브러진 시체가 네가 될 수도 있는데도?"

-응.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걷고 자유롭게 느껴보고 싶다.

렉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에 싸운 그놈 기억하나? 우리를 제일 힘들게 했던 놈."

-광룡 아우룸 드라고?

"그래. 내가 그놈한테 뺏은 게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너한테 쓰는 게 맞을 거 같구나. 나는 새로운 삶 같은 건 원하지 않으니."

-그게 뭔데?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보석. 어떠냐.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랴?"

-새로운 삶이라....

"그래. 대신 그땐 날 찾아오지 마라. 내 기억 속에 너는 최강의 존재로 남아야 하니까."

* * *

1화.

나는 검이었다.

"마님! 건강한 왕자님이세요!"

10달.

검이었던 나는 10달 동안 여자의 배속에 갇혀 있었다.

날 배에 담고 있던 여자의 이름은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

처음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었지만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자아는 그대로였다.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발차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뱃속에서 발차기를 할 때마다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달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드디어.

인간이 되었다.

'뭐지.'

숨이 막혀온다.

검이었던 시절 만난 세 번째 동료, 베넷이 나를 쥔 채 물에 빠졌을 때 느껴봤던 감각이다.

잊고 있었다.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

짝!

내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든 유모가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제 울음이 터지면서 숨을 쉴 거예요, 마님."

"얼굴… 얼굴을 보여줘."

짝!

유모가 다시 엉덩이를 내리쳤다.

"곧 품에 안겨 드릴게요. 일단 숨부터 쉬게 하고요!"

짝!

유모의 말투가 점점 다급해졌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짝!

그사이.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를 쥔 자들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숨 쉬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아는 것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에는 조금의 간극이 있었다.

잠시 후.

흐읍.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는 데 성공했다.

상쾌한 공기가 코를 통해 폐까지 전해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푸우.

코로 다시 숨을 내쉬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면서 입으로 숨을 내뱉었다.

상관없다.

일단은 숨을 쉬는 게 중요하니까.

유모 옆에 있던 사용인 한 명이 소리쳤다.

"입술을 움직였어요! 이제 곧 울 거예요!"

짝!

그러는 중에도 유모는 연신 엉덩이를 내리쳤다.

"어, 어떡하지?"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이 물었다.

"왜 그래? 유모."

"아기가… 아기가 안 울어요! 빨리 울어야 숨을 쉴 텐데!"

....

이봐 유모.

나 숨 이미 쉬고 있다.

짝!

"어떡해! 어떡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중저음.

"유모."

수시로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배에 대고 나에게 말을 걸던 사내.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목소리였다.

짝!

유모는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목소리를 못 들은 건지 발을 동동 구르며 엉덩이 때리기에 열중했다.

"유모."

"네? 네…! 남작님! 이를 어째!"

"진정하게. 엉덩이도 그만 때리고. 이미 숨을 쉬고 있는 거 같은데?"

"네?"

깜짝 놀란 유모가 커다란 얼굴을 내 코에 가져다 댔다.

"…진짜네? 휴우. 숨 쉬어요! 도련님이 숨을 쉬어요!"

태어났으면 숨을 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저렇게 호들갑인지.

곧이어 유모의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도련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유모. 자, 이제 우리 아가를 내 품에 안겨주지 않겠어?"

"아! 네!"

유모가 나를 바로 눕혀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에게 건넸다.

유모에게 발목을 잡혀 거꾸로 들려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포근했다.

따뜻하고.

이것이 나를 낳아 준 여인의 품.

천년 만에 어머니가 생긴 건가.

눈을 떠 나를 낳아 준 여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시야가 너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우리 아가가 나 쳐다보는 것 좀 봐요."

"그러네. 눈동자가 총명하기도 하지."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이 피식 웃었다.

"풋, 총명하다고요? 지금 막 태어난 아가한테?"

"훌륭한 공학자가 될 상이야."

"당신도. 성격도 급해 정말."

* * *

에반.

에반 브룩스.

내 이름이다.

오스틴 브룩스 남작과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늦둥이 아들.

일반적인 숨쉬기에 완전히 익숙해진 나는 자연을 호흡하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 * *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배 속에 있는 열 달 동안.

참 많은 걸 들을 수 있었다.

플로리는 참 궁금한 게 많은 여인이었다.

느지막이 나를 임신해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 처음 엄마라고 말했다고?"

"그럼 아빠라고는 언제 했는데?"

"3달 정도 지나면 뒤집기를 한다는 말이지? 그럼 언제 기어다니기 시작해?"

"반년이 지나면 벽을 짚고 일어난다고? 그러면 언제부터 걸어?"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주변 사람 모두에게 이런 걸 묻고 다녔다.

덕분에 적당히 평범한 인간 아기들의 성장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이곳에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보는 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나의 첫 번째 목적이다.

왠지 그래야만 진짜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은 천년 넘게 날카로운 쇠붙이로 살아온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진짜 인간의 삶을 학습하고 나면.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 것이다.

두 다리로 세상을 걷고.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두 귀로 세상을 들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은 평범하게 보여야 한다.

첫 번째 목적을 위한 첫 번째 원칙.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뒤집기에 성공했을 때쯤.

드디어 자연을 호흡하는 법을 터득했다.

* * *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포도를 먹기 위해 무심코 식탁 위로 점프했는데.

"어머나!"

하필 부엌에 들어오던 유모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그게 뭐라고.

성이 발칵 뒤집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엄빠빠빠', '아빠빠빠'밖에 말하지 못하는 설정인지라 딱히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은 어찌어찌 의자를 밟고 식탁 위에 올라간 나를 본 유모가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식탁 위로 점프했다고 착각한 걸로 마무리되었다.

* * *

9살이 되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사투스 왕국 남동쪽 평화로운 숲에 자리 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이었다.

수도에서 일하는 오스틴 브룩스 남작은 성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성에 돌아오는 날이면 어떻게든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은 나를 극진히도 애지중지 아끼며 키웠다.

부모의 사랑은 차고 넘쳤고.

주변 이들도 모두 나를 예뻐하고 좋아해 주었다.

지난 천년 넘는 세월 동안 나와 함께 했던 인간들도 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걸까.

그중엔 완전히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있었는데.

이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행복인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뭐, 어쨌든.

눈을 뜨면 세상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두 다리를 움직여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손으로는 무엇이든 잡을 수 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밤이 되면 졸음이 쏟아지는 건 조금 불편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이었을 때보다 겨우 9살 어린아이인 지금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다.

"에반!"

마일로였다.

마일로는 우리 성 집사장의 손자로, 나와는 동갑이다.

부모님이 귀족의 권위 따위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터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마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온 마일로가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뭐 흥미로운 일을 찾았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다.

"에반…. 글쎄 말이야. 내가 남쪽 숲에 올라가는 길을 찾았어!"

"진짜?"

"그래! 무시무시한 게 있으니까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하던 그 남쪽 숲으로 가는 길 말이야!"

2화. 삼총사

"대단한데? 마일로."

그러자 마일로가 검지를 펼쳐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마일로의 말에 귀 기울였다.

"성 밖에서 해 지는 쪽을 따라서 쭉 가다 보면 우물 있지?"

"응. 밀밭 쪽 말이지."

"응! 거기서 울타리 있는 쪽으로 곧장 갔다가, 다시 해 지는 쪽을 따라서 100걸음 정도 가면."

"가면?"

"개구멍이 있어! 울타리가 뚫려 있다고! 어때? 엄청나지!"

마일로가 말하는 울타리는 산짐승이 밀밭을 엉망으로 만들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쳐 놓은 거다.

당연하게도 어른들은 우리 어린이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위험한 산짐승이 많고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유다.

사실 내가 남쪽 숲에 가려고 마음먹는다면 개구멍 같은 건 필요 없다.

산짐승이 넘어오지 못하게 쳐 놓은 어른 키 높이의 울타리는 이미 9년째 자연을 호흡하고 있는 나에게 아무런 방해물이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아이인 척해야 하고.

무엇보다 마일로와 어울려 모험을 떠나는 게 싫지 않았다.

이 녀석에겐 명확한 목적과 원칙이 있다.

목적은 노는 것이고 원칙은 이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때? 에반? 우리 모험을 떠나는 거야! 남쪽 숲으로!"

"오. 재밌겠다."

그때.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네사는 동갑내기 여자애인데 마일로나 나만큼이나 모험을 좋아한다.

"너희 둘, 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신나게 하는 거야?"

마일로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어디부터 들은 거야!"

"왜? 뭔데?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어디부터 들었냐니까?"

바네사의 볼이 부풀었다.

곧이어 짧은 팔을 쭉 뻗어 마일로에게 헤드락을 건다.

"빨리 말 안 해? 나만 빼놓고 비밀 얘기하기 있어 없어!"

"으악! 아파! 이거 놔!"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고! 무슨 비밀 얘기했어!"

"놓으면 말할게!"

"봐줬다."

바네사가 헤드락을 풀자 마일로는 곧장 일어나 달아나려고 했지만.

퍽!

바네사의 발길질이 마일로의 등에 꽂혀 들어갔다.

바네사.

어지간한 또래 남자애들보다 운동신경도 힘도 모두 뛰어나다.

철푸덕!

마일로는 그대로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씨이. 너. 엄마랑 아빠한테 이를 거야!"

"너만 엄마랑 아빠 있냐?"

"씨이."

바네사가 주저앉아 울기 직전인 마일로에게 다가가 얼굴의 흙을 털어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봐. 우리 착한 마일로, 무슨 비밀 얘기했냐니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마일로는 남자답게 울음을 꾹 참아냈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바네사가 힘도 더 세고 키도 더 큰데.

왜 마일로는 남자애라 울면 안 되고, 바네사는 여자애라 수시로 엉엉 울어도 되는지.

오스틴 브룩스 남작에게 물어봤더니 남자는 원래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라고 했고.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에게 물어봤더니 남자도 슬플 땐 얼마든지 울어도 된다고 했다.

사실 남자 여자를 떠나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우는지이다.

아플 때나.

억울할 때나.

저렇게 약이 잔뜩 오를 때 사람들은 우는 것 같던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바네사. 마일로. 그만 싸워. 다 같이 가면 되잖아."

바네사의 입이 귀에 걸릴 듯 벌어졌다.

"그래! 에반 말이 맞아! 나도 같이 가!"

마일로가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쳇.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럼 우리 셋이 떠나자. 남쪽 숲 모험."

환하게 웃고 있던 바네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남쪽 숲? 거길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

조금 전 발에 차여 울먹이던 사람은 어디 갔냐는 듯.

가슴을 당당하게 편 마일로가 말했다.

"나 마일로가 알아냈다 이거야. 무려무려무려. 남쪽 숲으로 가는 개구멍!"

"오! 완전! 대박! 개구멍!"

우리가 개도 아니고.

개구멍이….

그렇게 흥미로운 발견인가?

* * *

다음 날.

각자 집에서 아침을 먹은 우리 셋은 밀밭 우물 앞에서 모였다.

"가자!"

"좋아!"

마일로가 신나서 앞장서고.

그에 질세라 신이 난 바네사도 뒤를 바싹 따랐다.

저만큼 신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얘들하고 어울려 모험을 떠나는 게 싫지는 않았다.

우정?

아니지.

우정을 논하기엔 9살은 아직 너무 어리다.

아무튼 확실한 건.

나는 저 두 사람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지내고 있다.

우물에서 울타리까지 곧장 달렸다가 다시 서쪽으로 100걸음 정도 달리자.

진짜 개구멍이 있었다.

"이거 봐! 진짜 있지?"

"대박!"

자연스럽게 수로 하나가 생겼다가 점점 커진 건지.

울타리 아래로 어린이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한 홈이 파여 있었다.

'…혹시.'

누가 일부러 파 놓은 구멍이 아닌가 하고 주변을 잘 살펴보았다.

다행히 인위적인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이 먼 시골 남작의 영지에 누가 뭐 하러 잠입을 시도하겠는가.

이곳의 영주 오스틴 브룩스 남작은 수도에서 공학자로 일하고 있다.

젊었을 때 무슨 기계인가를 발명했다는데 그 공로를 왕에게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암투나 전쟁 같은 건 그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곳은.

검으로 살아온 세상과 정말 같은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들어가자!"

마일로가 앞장서 개구멍을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음."

"왜? 에반."

"아니야."

수로가 커져 생긴 개구멍이라 그런지 바닥이 진흙에 가까웠다.

저길 기어들어 갔다간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가면 유모와 사용인들이 질색한다.

뒤이어 바네사까지 개구멍으로 들어가고.

폴짝.

나는 가볍게 점프해 울타리 기둥 위로 올랐다.

진흙투성이가 된 마일로의 등이 보이고 뒤이어 바네사의 등이 나올 때.

가볍게 뛰어내려 바네사의 옆 마른 땅에 엎드렸다.

마일로가 등을 펴고 일어났다.

"드디어 우리가!"

뒤이어 바네사도 일어났다.

"남쪽 숲에!"

이번엔 내 차례.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고.

"들어왔다."

마일로와 바네사가 깔깔 웃었다.

"역시 우리 삼총사는 호흡이 잘 맞는단 말이야!"

비밀을 알려주네 마네 싸운 건 언제고.

오늘은 다시 호흡이 잘 맞는 삼총사가 되었다.

다행히.

남쪽 숲에 최연소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흥분한 두 친구는 자기들 옷과 내 옷의 차이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일로가 소리쳤다.

"올라가자!"

바네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래! 저기 꼭대기까지 간다!"

바네사가 나를 돌아본다.

호흡이 잘 맞는 삼총사가 되려면 뭐라고 한마디 거들어야 할 타이밍이다.

"…오늘 우리가 남쪽 숲을 정복한다."

"우와아!"

"우와!"

* * *

삼총사는 힘차게 숲을 올랐다.

절반쯤 올랐을까.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우리가 무서워서 짐승들도 다 도망간 거 아니야? 남쪽 숲도 별거 없네!"

이런.

별거 있다.

"마일로, 바네사. 잠깐 멈춰."

"왜?"

"왜? 에반."

포식자의 냄새다.

나는 천천히 마일로와 바네사의 앞에 섰다.

잠시 후.

크르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낮고 묵직하다.

덩치가 제법 있는 놈이다.

"무, 무슨 소리야?"

"어떡해! 얼른 다시 내려갈까?"

9살 꼬맹이들이 서둘러 숲을 내려간다고 피할 수 있는 포식자가 아니다.

크르르.

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온다.

한발 한 발 내딛는 앞발은 마일로의 머리통만 하다.

날카로워 보이는 발톱이 땅을 단단히 파고든다.

철퍽!

바네사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엄마…."

닥닥닥닥.

마일로의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려왔다.

"바네사, 마일로."

"...."

둘은 대답도 못 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이럴 거면 숲을 뭐 하러 올라온 건가 싶다가.

이게 인간의 본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이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니.

지금 뒤에 얼어있는 9살 꼬맹이들보다 더 무모한 짓을 하는 어른들을 수백 수천 명도 더 봐 왔다.

예를 들면 나를 들고 있는 내 동료에게 우르르 달려드는 그런 짓 말이다.

인간은.

당해보기 전엔 얼마나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딘 건지 알지 못한다.

"대답해. 바네사, 마일로."

마일로가 먼저 용기를 냈다.

"…응."

"너희 둘. 오늘 볼 거 절대로 비밀이야."

급기야 바네사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저 늑대한테 잡아먹히고 말 거야…."

"너희 둘이 비밀만 지킨다고 약속하면. 우리 삼총사는 아무도 안 죽어."

"알았어…."

"어쩌려고… 에반?"

어쩌기는.

포식자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내가 포식자가 되면 된다.

* * *

타앗.

가볍게 땅을 박찼다.

성장이 반도 끝나지 않은 9살 어린애의 몸.

검이었던 시절 봐왔던 강자들에 비하면 비루하기 그지없지만.

산짐승 하나를 처리하기엔 충분하다.

예상대로 놈은 바네사와 마일로를 제쳐두고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크허엉!"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향해 최단 거리로 달려든다.

나 역시 달아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미리 눈여겨본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 뒤.

뒤를 바짝 쫓는 늑대와의 거리를 계산하고.

놈의 아가리가 내 뒷목에 닿기 직전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콰앙!

놈의 대가리와 아름드리나무가 그대로 부딪혔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허리춤에 미리 챙겨두었던 쇠붙이를 꺼내 들었다.

어젯밤 사병대 무기고에서 슬쩍 해 놓은 단검.

들어가는 각도가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이 단검과 9살 어린이의 조합으로는 놈의 가죽을 뚫어낼 수 없다.

나무에 대가리를 처박고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저 늑대에겐 안 된 일이다.

그 정도 검로를 그리는 건 나에겐 일도 아니거든.

어른에겐 두 뼘 정도 되는 단검.

내가 들고 있으니 제법 큰 검의 모양새다.

손잡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놈의 목덜미에 단검을 수직으로 내리꽂는다.

날카로운 검로를 그린 단검은 그대로 늑대의 목덜미를 뚫고 들어갔다.

아찔한 통증에 오히려 정신을 차린 늑대가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

한 번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놈이 커다란 앞발을 휘둘러왔다.

몸을 데굴 굴러 앞발 공격을 피해낸 뒤.

이번엔 놈의 목 아래를 크게 그었다.

'역시.'

단검은 놈의 가죽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순간 힘을 빼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 손목이 꺾였을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체중을 실은 찌르기는 가능했지만.

누운 자세로 두꺼운 늑대 가죽을 베어내기엔 아직 힘이 부족했다.

그사이 놈이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내 머리통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땅에 누워 있으니 체중을 실은 찌르기는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이렇게 달려들어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몸을 옆으로 틀어 놈의 이빨을 피해냄과 동시에.

다시 단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놈의 턱 아래쪽에 그대로 가져다 댔다.

내 체중은 실을 수 없지만, 대신 놈이 달려들던 힘을 이용해 단검을 쉽게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케헹!"

깜짝 놀란 늑대가 그대로 턱을 들어 올렸다.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내 몸까지 같이 딸려 올라가다가, 늑대의 턱을 조금 더 찢어 놓은 후 단검이 빠졌다.

툭.

나는 그대로 땅에 떨어졌고 늑대는 피를 줄줄 흘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으로 살던 시절.

12명의 동료 중 12번째.

렉스의 말이 떠올랐다.

"저기 저 널브러진 시체가 네가 될 수도 있는데도?"

"하…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불렸던 내가.

고작 늑대 한 마리를 상대로 이런 난전이라니.

저절로 터져 나온 웃음처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어쩌지 렉스? 그래도 지금이 더 재밌어."

3화. 두 번째 목적

검으로 살던 시절.

12명의 동료 중 3번째.

무사 베넷이 말했다.

"비밀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비밀이 퍼지지 않게 만들어야지."

-베넷 너는 어떤 방식을 선호하나. 뇌물을 먹이는 거? 협박을 하는 거?

"둘 다 아니다."

베넷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자기 목에 대고 슥 그었다.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더 이상 세상에 없게 만들면 된다."

이 작은 영지에서 동갑내기 꼬맹이 둘이 죽어 없어지면 큰 소란이 날 거야, 베넷.

그리고.

난 이 애들을 없애고 싶지 않아.

아직은 꽤 재밌거든.

뭐, 발설할 것 같으면 조치를 취하겠지만.

아직도 넋 놓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일로와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마일로, 바네사. 오늘 일 비밀로 한다고 약속할 수 있지?"

"어? 응…."

"그, 그럼. 에반."

다행히 마일로와 바네사는 비밀을 잘 지켜주었다.

대신 종종 그들과 함께 남쪽 숲에 들어가 줘야 했고.

높이 뛰기라던가 산짐승 잡기 같은 묘기를 보여줘야만 했다.

비밀 유지의 대가였다.

이 정도면 가성비 좋은 거 아닌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12살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나를 걱정하던 남작과 남작 부인도 요즘은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내 연기가 훌륭해졌단 것이겠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이제 인간인데, 왜 인간 흉내를 내야 하는가.

저들과 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연을 호흡하면서 또래 아이들과 전혀 다른 운동 능력을 가진 걸 감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일로와 바네사도 비밀을 잘 지켜주었고.

무엇보다, 이런 건 저들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냥 또래보다 조금 더 강한 것뿐이니까.

문제는 감정이다.

쇠붙이로서 살아온 천년의 시간은 머릿속에서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12년을 살아오면서 인간의 감정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내가 그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직 들지 않는다.

이해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건 다른 문제.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은 때론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손해가 훤히 보이는데 자기 자신까지 속이며 모른 척 넘어가기도 하고.

어떨 땐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길을 택하기도 한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게 뻔한 행동을 밥 먹듯이 하고.

특히, 별것도 아닌 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중간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지금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이 하는 이런 행동처럼 말이다.

"어쩌지, 모처럼의 마을 축제니까… 우리 아들 예쁘게 입히고 싶은데. 누가 봐도 제일 멋져 보이게 말이야."

그럼 예쁘고 멋진 옷을 입히면 되는 거 아닌가.

자기 아들이 가장 돋보이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당연한 감정이니까.

그런데.

"하지만 이 옷은 안돼. 너무 비싼 옷감이야. 영지민들도 다 함께하는데 굳이 그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 필요는 없어."

우리는 영주 일가이고 저들은 가난한 영지민이다.

적당한 크기의 이 영주성뿐 아니라, 밖의 영지 전체가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땅이다.

우리 가족이 저들과 다른 옷을 입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엄마, 그럼 저 옷을 입으면 되잖아요."

나는 평소 영지에 놀러 나갈 때 입는 투박한 옷을 가리켰다.

영지민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그들과 같은 옷을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간단한 문제다.

"그래도 오늘은 축제니까. 조금은 더 좋은 옷으로 입자. 아빠도 오랜만에 오셨고."

그렇게 한참을 더 고른 결과.

고급스럽지도 허름하지도 않은.

옷장 안에서 가장 어중간한 옷을 입게 되었다.

이 얼마나 어중간하고 비효율적인 결정인가.

하지만 나는 두말하지 않고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의견을 따랐다.

"이걸로 입을게요."

"우리 아들. 에반. 너는 어쩜 이렇게 착하니? 한 번 엄마 말을 안 듣거나 토를 달지도 않고.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나왔을까?"

당신 배에서.

내 눈 봐봐.

아직 12살밖에 안 됐는데도 당신 눈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잖아.

"자, 가자. 아빠 기다리신다."

방을 나서자 널찍한 복도에 나와 똑같은 모양의 코를 가진 사내가 서 있다.

"여보, 에반."

"여보, 오래 기다렸죠?"

"아빠!"

나는 오스틴 브룩스 남작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면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나를 끌어안는다.

오스틴 브룩스 남작은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뒤에서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아빠가 좋니? 아빠만 보면 항상 저렇게 달려간다니까."

이걸 이 양반이 제일 좋아한다니까.

"아빠만 오면 엄마는 항상 뒷전이고 말이야."

당신이랑은 평소에 시간을 많이 보내잖아.

매일 같이 밥 먹고 같이 잠들고.

나는 나름대로 형평성에 맞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두 사람의 날 향한 마음의 크기는 비슷할 테니까.

언제나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오스틴 브룩스 남작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이 순간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음, 나도 싫지는 않다.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품이 포근하고 따뜻하다면.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품은 넓고 안정적이다.

"자, 가자."

나는 왼손은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 오른손은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영지 축제가 있는 날이다.

매년 추수가 끝난 다음 주 월요일.

우리 영지는 축제를 연다.

"아빠가 에반 개인 교습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공학을 특히 잘한다던데?"

공부는 관심이 없다.

그나마 공학은 정답이 명확히 정해져 있어서 덜 지루했을 뿐이다.

검이었던 시절부터.

나는 명확한 걸 좋아했으니까.

뚜렷한 목적과 원칙이 있는 자들만 동료로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아들도 아빠처럼 공학자가 될 거지?"

공학자가 될 생각은 없다.

아직 부모님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나는 성인이 되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 것이다.

"아직 모르겠어요. 커서 뭘 할지는."

"에이, 참. 이이도. 우리 아들 이제 12살이에요. 벌써 공학자 되라고 압력을 넣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교습 선생님이 특별히 공학을 잘한다니까 하는 말이지. 에반, 아빠가 절대로 강요하는 거 아니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감사해요, 아빠."

분명히 나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다, 오스틴 브룩스 남작.

나는 세상을 떠돌 것이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두 번째 목적이다.

1층으로 내려오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펑! 퍼엉!

"벌써 불꽃놀이 시작했나 보다! 어서 가자, 에반."

플로리 브룩스 남작 부인의 말대로 마을 광장 쪽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불꽃놀이 소리가 작년과 다르다.

저렇게 연기도 많이 났었나?

* * *

그날 밤.

나의 부모와 일가친척은 모두 살해당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성 또한 완전히 불탔다.

사용인은 물론이고 영지민 대부분이 죽었다.

친구처럼 지내던 마일로도, 바네사도 모두 죽었다.

오스틴 브룩스 남작의 빠른 판단으로 나 혼자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반! 아빠 말 잘 들어. 이 문으로 들어가면 지하통로가 나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보이거든, 나가서 또 뛰어. 알았지? 그러면 나중에 아빠가 데리러...."

다른 인간이었으면 분명히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을 택했을 텐데.

오스틴 브룩스 남작은 사실을 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명확한 사실과 근거를 추구하는 공학자였다.

"…아빠는 널 데리러 갈 수 없어. 엄마도, 삼촌도, 집사님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네."

"이곳에서 나가면 한동안 절대 모습을 드러내면 안 돼. 이 말… 명심해야 해."

"네."

"살아야 한다. 에반. 에반 브룩스. 사랑하는 내 아들."

"네."

텅.

오스틴 브룩스 남작은 그대로 비밀 통로의 문을 닫아버렸다.

성인이 되면 가족과 헤어져 두 다리로 세상을 떠도는 게 두 번째 목적이었는데.

갑자기 목적을 이뤄버렸다.

그런데.

목적이 하나 더 생겼다.

마지막 동료 렉스가 준 선물이자, 천년을 기다려 만난 내 첫 번째 가족을 저렇게 만든 놈들을.

인간으로서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만든 놈들을.

지옥에 처박아 줄 것이다.

놈들이 내 첫 번째 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관련된 모든 자들을.

한 놈도 빼지 않고.

불지옥에 처박아 줄 것이다.

이제 다시.

나는 검이다.

* * *

"에반!"

"네?"

"이 새끼야! 내가 이불 정리 제대로 해 놓으랬지!"

퍽!

딜란의 발길질이 또 시작되었다.

신입인 내가 이불 정리를 해 놓지 않았다는 핑계다.

대충 기워 만든 가죽 더미를 덮고 자는 주제에 정리는 무슨.

사실 이불 정리를 잘해놨어도 달라질 건 없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매일 밤 드잡이질을 하는 게 저 녀석의 일과다.

놈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적단에 숨어 들어온 지 어느새 일주일.

퍼억!

딜란의 발길질에 맞아 다시 바닥을 데굴 굴렀다.

"에반 이 새끼는 어떻게 신음 한 번을 안 내는 거야? 독종 새끼!"

퍼억!

나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광룡 아우룸 드라고의 보석이 일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완전한 인간이 아닌 걸까.

"넌 왜 또 눈을 그렇게 뜨고 서 있어?"

퍽!

이번 타겟은 바스티안이었다.

나와 동갑인 이 녀석은 산적단에 들어온 지 벌써 4년도 넘었다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매일 이렇게 얻어맞을 서열은 지났다.

그런데 이상한 곤조가 있는 녀석이라 꼭 저렇게 선배들을 노려보다가 얻어맞곤 한다.

지금도 이유 없이 나를 구타하는 딜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노려보고 서 있었겠지.

일주일 전.

숲속 깊은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이 녀석이다.

바스티안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날 숲에서 놈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야! 다 와서 밟아! 내가 오늘 이 두 새끼 다 완전히 버릇을 고쳐 놓는다!"

딜란의 명령에 십여 명의 패거리가 바스티안과 나를 둘러싸고 밟아대기 시작했다.

발길질 사이로 딜란이 씩씩거리며 벽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몽둥이로 쓸만한 걸 가지러 가는 것이겠지.

콰직! 콱!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아프지도 않고.

이 정도 발길질에 뼈가 부러질 일도 없다.

멍은 좀 들 수도 있겠군.

그런 건 관심 없다.

나는 웅크린 채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일주일.

이 근처 수색은 끝났겠지.

놈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이 산적단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여기 산적 두목이 너무 강해서인가?

뭐, 이유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제 슬슬 여길 나갈 때가 되었다는 거다.

옆에서 밟히고 있는 바스티안에게 물었다.

"바스티안."

"윽! 으윽! 왜, 에반."

"내가 너한테 도움을 받은 게 있어서 물어보는 건데. 네 삶의 목적은 뭐야?"

"갑자기! 윽! 무슨! 으윽! 개소리야!"

"네가 정한 삶의 원칙 같은 건 있어?"

계속 밟히느라 끅끅거리면서도 바스티안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시선을 마주친 채 다시 물었다.

"네 삶의 목적이랑 원칙을 말해봐."

"뭔, 윽! 개소리냐니까!"

"내 동료가 될 기회를 주는 거야."

"동료?"

"그래."

발길질하던 산적 놈 하나가 소리쳤다.

"딜란 형님! 이 새끼들 둘이 떠들고 있는데요?"

"그 새끼들이 좀 독한 새끼들이냐? 아직 덜 맞아서 그래! 더 밟아!"

"네!"

퍽! 퍽!

발길질이 더욱 거세졌다.

"대답해 봐."

"네, 윽! 동료가… 큽! 되면, 윽! 뭐가, 으윽! 좋은데?"

"일단 이놈들의 발길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크윽! 어떻게?"

간단하다.

"다 죽이면 되지."

"시팔! 윽! 진지하게, 으윽! 물어본, 크윽! 내가 병신이지."

"마지막 기회야. 바스티안, 네 삶의 목적이 뭐야?"

"미친, 윽! 놈, 으윽! 하하하! 윽! 역시 넌, 윽! 또라이야."

무언가 결심했는지 바스티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 목표는 군 장교가 되는 거다! …윽!"

역시 강단이 있는 녀석이다.

적어도 저 말 만큼은 앓는 소리 없이 내뱉고 싶었던 거겠지.

여기까진 합격.

"그럼 네가 정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원칙? 윽!"

"그래, 원칙. 목숨이 부러져도 어기지 않을 그런 너만의 원칙."

"그런, 윽! 건 생각… 억! 안 해봤는데. 으윽!"

"지금이라도 생각해 봐."

잠깐 고민하던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부하들을… 으윽! 패지, 윽! 않는 거."

음….

목적은 그럴듯했는데 원칙이 조금 부실하다.

고작 부하들을 패지 않는 거라니.

하지만 뭐.

없는 것보단 낫지.

먼저 나를 도와준 것에 가산점을 주어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바스티안."

"아오! 왜 자꾸, 윽! 말 걸어."

"내 동료가 된 걸 축하한다."

"미친, 윽! 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록 12살 꼬맹이의 비루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이었다.

4화. 여행의 시작

나를 거쳐 간 12인의 동료는 모두 당대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검술을 모두 알고 있다.

자아를 갖게 된 이후, 날 쥐고 있는 인간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오감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나를 휘두를 때마다 각각 도달한 검술의 경지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쾌검을 쓰는 자, 패검을 쓰는 자.

계산대로 움직이는 자, 본능에 의한 자.

형식을 중요시하는 자, 변화를 즐기는 자.

상대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자, 자기 흐름을 만드는 자.

모두의 검술이 달랐다.

그렇게 그들은 나를 휘두르며 용맹을 과시했고.

나는 그들의 검술을 흡수하며 점점 더 강해졌다.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텁.

머리를 향해 날아든 발을 맨손으로 잡았다.

"뭐, 뭐야! 이 새끼! 안 놔?"

발을 잡힌 녀석은 급히 발을 뒤로 뺐다.

아까 나와 바스티안이 떠든다고 딜란에게 일러바친 놈이다.

발을 뒤로 빼내기 위해 일어난 자연스러운 체중 이동.

그 뒤는 너무나 간단하다.

잡았던 손을 놓음과 동시에 손바닥 아래쪽으로 녀석의 발을 툭 쳤다.

체중이 뒤로 이동하던 차에 내 타격이 가해지자 그대로 넘어갔다.

쿵!

"이 새끼가!"

또 다른 녀석이 발을 뒤로 멀리 뺐다가 크게 휘둘러왔다.

제 딴에는 큰 힘을 실어 나를 걷어차려고 한 모양인데, 자세가 커진 덕분에 빈틈이 수백 개도 넘게 보였다.

도대체 어느 빈틈을 공략해야 하나 고민이 생길 정도였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른 다리를 길게 뻗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녀석의 발길질은 나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내 오른 다리는 녀석의 디딤발을 걸고 지나갔다.

쿠웅!

공중에서 크게 회전한 녀석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혔다.

콰득.

나는 녀석의 얼굴을 밟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발밑에서 놈의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찌감치 자연을 호흡하는 법을 깨우쳤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고작 12살 꼬맹이의 몸.

도약은 생각보다 빠르거나 높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10대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이곳 막사 안 산적 지망생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저쪽에 어디선가 구해온 기다란 나무막대를 들고 달려오는 딜란이 보였다.

1 대 다수의 싸움에선.

당연히 대장을 먼저 죽이는 게 순서다.

툭, 툭.

당황해서 허우적대는 놈들의 어깨를, 머리통을 밟으며 딜란에게 내달렸다.

멍청한 딜란은 달려오던 속도를 늦추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멍청한 눈빛에 멍청한 표정.

멍청한 자세.

어차피 결과는 똑같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높이려면 그대로 달려와 저 몽둥이를 휘둘렀어야 했다.

멍청한 놈.

분명 저 몽둥이를 쥔 손에서는 악취가 날 것이다.

부웅.

뒤늦게 휘둘러진 몽둥이.

뭉툭하고, 느리고, 힘조차 실리지 않았다.

딜란 이 멍청한 놈은 몽둥이를 쥔 팔과 손에 잔뜩 힘을 줬겠지.

그래서는 무기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몽둥이가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간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퍼억!

딜란의 턱주가리를 날렸다.

휘청.

고작 12살 꼬맹이 주먹 한 방에 검은자위가 위로 올라가고 흰자위가 보인다.

검으로 살던 시절.

12인의 동료 중 6번째.

아이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멈춘 거냐?

"상대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왜지?

"왜냐니? 나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군인이다. 오로지 싸울 수 있는 상대만을 상대한다."

아이커.

좋은 녀석이었고, 그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미는 좀 없었다.

게다가 저 이상한 원칙 때문에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나랑은 안 맞아.

뒤로 넘어가는 딜란의 오른쪽 볼때기를 부여잡았다.

이미 턱을 맞고 기절한 상태.

상관없다.

그대로.

콰앙!

"눈빛, 표정, 자세, 선택 모두 멍청함의 극치였어. 딜란."

바닥에 찍어버렸다.

딜란의 얼굴이 뭉개지며 사방에 피가 튀었다.

"뭐, 뭐야!"

"죽은 거야?"

"에반 저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천천히 일어나 숙소 안 산적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 안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나랑 같이 밟히던 놈들.

매일 밤 나를 밟던 놈들.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들인 건 똑같지만.

오늘 밤 이들은 둘로 나뉜다.

산 자와.

죽은 자.

* * *

콰직!

마지막 한 놈 남았다.

오줌을 지린 건지 바지가 온통 젖어있다.

벌벌 떨리던 다리가 결국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꺾인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내 눈을 보고 사정한다.

"사, 살려…."

콰득!

더러운 구걸을 하는 주둥이에 무릎을 꽂아 박았다.

앞니가 몽땅 부러졌다.

"으어어!"

두 손으로 놈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러고는.

콰득!

놈의 면상에 무릎을 더 세게 꽂아 넣었다.

한 번 더.

콰득!

한 번 더.

콰득!

풀썩.

끝났다.

불과 10여 분.

일주일 동안 매일 밤 나를 때리고 밟던 놈들을 모두 시체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다.

죄책감.

감정의 동요.

그런 건 없다.

12년 동안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검으로 살아온 세월은 천년이 넘는다.

잠시 후.

바스티안이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다가왔다.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을 피해 겨우겨우 땅을 밟았다.

역시.

강단이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나머지 산 자들은 모두 한쪽 벽에 따닥따닥 붙어 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다.

"이게 도대체… 너, 내가 알던 그 에반 맞지?"

"맞아."

"도대체 너 정체가 뭐야?"

"네가 알던 그 에반이야."

"아니. 어떻게 이 많은 선배를 다…."

죽일 수 있어?

라고 물으면 넌 다시 동료 탈락이다.

"…이긴 거야?"

일단 합격.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기는 건 당연한 거지."

"강한 사람이라…. 그러면 하나 더 묻자. 넌 왜 일주일 동안 맞고만 있었던 거야?"

"때리니까 맞았지."

바스티안이 손을 들어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무슨 소리야 도대체. 너는 강해. 네 말대로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이기는 거고. 그런데 왜 때리는 데 가만히 있었어? 아프지 않았어? 기분 나쁘지 않았냐고?"

아프지 않았다.

별로 기분 나쁜 것도 없었고.

세상엔 12살 꼬맹이 몸으로는 아직 상대할 수 없는 실력자가 차고 넘치겠지만, 여기 이놈들은 아니다.

이곳에서의 목적은 일주일 동안 조용히 머무르는 거였고.

이놈들의 구타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을 뿐이다.

"너무 하찮아서. 아프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어."

"그럼 관리자한테 네 실력을 보였으면 되잖아? 기회는 많았어. 이 정도 실력이면 행동대장이나 뭐 다른 높은 자리도 꿰찰 수 있었을 텐데?"

생각보다 의문이 많은 녀석이었네.

"내 목적은 일주일 동안 산채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뿐이었어. 그에 따른 원칙은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는 거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젠장. 에반, 일단 다음을 생각해 보자. 이젠 어떡할 거야? 당장 내일 해가 뜨면 점호에 나가야 하는데 어떡할 거냐고."

"달아나야지. 여기 산적 두목은 아직 이길 수 없거든."

"달아나? 어떻게? 경비나 보초들은 어쩌고."

그런 잡일이나 하는 놈들은 수십 명이 한 번에 몰려와도 자신 있다.

"뚫을 수 있어. 같이 갈 거지? 바스티안."

"어?"

"군 장교가 되겠다며. 여기 이대로 있으면 넌 장교는커녕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몰라."

긴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부모를 죽이고 가문을 멸문시킨 자들.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세력의 크기도 모른다.

지금 알 수 있는 건.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성인이 되면 시작하려던 여행을 일찍 시작하는 것뿐이다.

그만큼 더 빨리 강해질 수 있겠지.

그러다 놈들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내가 놈들을 이길 만큼 강해지면.

전부 지옥에 처넣으러 가는 거다.

* * *

바스티안을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내일 해가 뜨면 선배들을 모조리 죽인 데 대한 문책이 따를 게 뻔한데도.

어쩌면 그 책임을 물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데도.

숙소에 남는 걸 택했다.

이래서야.

숙소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놈들과 다를 게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시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진짜 시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벌벌 떠는 시체라는 것 정도겠지.

"바스티안. 허리 숙여."

"어?"

바스티안의 뒤통수를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쐐액!

화살이 바스티안의 등 위를 지나 땅에 푹 꽂혔다.

이미 산채 이곳저곳에 횃불이 켜지고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그대로 몸을 날려 감시탑 기둥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스티안. 신호할 때까지 그늘 속에서 웅크리고 기다려."

아, 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

검이던 시절 날 쥐었던 인간들이 워낙 강했다 보니 인간의 몸이 이렇게 약한 줄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점차 나아지겠지만 지금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이 정도 높이는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올라야 하는데.

그렇게 기둥을 기어오르고 올라 감시탑 위에 올라섰다.

감시탑을 지키던 산적 두 놈이 날 발견하고 도끼와 검을 휘둘렀다.

녹이 슨 도끼와 이가 다 나간 검.

어이가 없다.

감히 내 앞에서.

지금 저딴 걸 무기랍시고.

후웅.

도끼가 수직으로 찍혀 내려왔다.

몸을 옆으로 살짝 틀자 도끼는 그대로 감시탑 바닥에 찍혀 들어갔다.

그대로 도끼를 잡은 손목을 강하게 올려 쳤다.

"아악!"

너무도 쉽게 놓아버리는 무기.

어이가 없다 못해 코웃음이 다 날 지경이다.

숙소에 있던 놈들은 아직 어린 지망생이었다 치고.

이놈은 다 큰 성인이 전투 도중에 무기에서 손을 놓다니.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런 놈을 보초로 감시탑에 올려놓은 산적단 수준도 알만하다.

아.

산적 두목은 빼고.

아, 가끔 드나드는 지부장인가 하는 놈도.

나는 그대로 놈의 도끼를 두 손으로 쥐고 바닥에서 뽑아냈다.

그사이 다른 놈이 검을 휘둘러왔다.

이가 다 빠진 검.

아직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녹이 슨 도끼를 사선으로 들어 이가 빠진 검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중심을 놓친 놈이 휘청하는 사이.

몸을 반대쪽으로 빠르게 회전시켰다.

덕분에 원심력을 얻은 녹슨 도끼는.

콰직!

두꺼운 가죽 갑옷을 입은 놈의 옆구리에 깊이 박혀 들어갔다.

"크헉!"

그대로 놈의 검을 빼앗아 아까 도끼를 놓친 놈의 명치를 찔러 들어갔다.

"크윽!"

이가 다 나간 검 손잡이에서 얼른 손을 뗐다.

이딴 검은 오래 쥐고 있기도 싫다.

'차라리 도끼가 낫겠군.'

나는 산적의 몸에서 도끼를 뽑아 허리끈에 대충 꽂아 넣었다.

"바스티안. 올라와도 돼."

"읏쌰!"

바스티안은 이미 감시탑을 오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르기가 무섭게 바로 감시탑 위로 올라섰다.

"신호하기 전까지 밑에서 기다리라니까."

바스티안이 쓰러진 산적 둘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 혼자 위험할까 봐 도와주려고…."

그래.

그래야 동료지.

"그런데 에반 너 진짜 도대체…. 숙소에서 상대한 놈들은 아직 지망생이었다 치고. 무기를 들고 있는 진짜 산적을 이겼어? 맨손으로 기어 올라와서? 2 대 1인데도?"

"어때, 내 동료가 되길 잘했지?"

잠시 고민하던 바스티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그래야지.

"좋아. 이제 담 너머 저 풀숲으로 뛰는 거야."

"뭐, 뭐? 좀 멀지 않아?"

"저게 멀면, 군 장교가 되기까지의 네 길은 얼마나 멀다는 거냐?"

"응? 에반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5화.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

12인의 동료 중 3번째.

명언 제조기 베넷.

"저게 멀면. 천하제일인이 되기까지의 내 길은 얼마나 멀다는 것이냐."

-내가 도와준다니까.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

"아니다. 너를 휘두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름길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나머지는 반드시 내 힘으로 이룰 것이다."

-그래. 알아서 해.

"저게 멀면, 군 장교가 되기까지의 네 길은 얼마나 멀다는 거냐?"

그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떠올라 따라 해보았다.

"뛰어. 할 수 있지? 저 담 못 넘으면 너는 여기서 죽는 거야."

바스티안이 당황한 눈으로 감시탑과 담 끝을 여러 번 번갈아 확인했다.

"음… 잘하면 넘을 수 있을 거 같기도."

"그럼 뛰어."

* * *

콰직!

커다란 돌이 얼어있는 개울을 뚫고 들어갔다.

얼어있던 개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아래는 아직 얼지 않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지금 한겨울인데!"

저 아래 평원은 아직 늦가을이지만, 깊은 산중의 겨울은 훨씬 더 길고 혹독하다.

"붙잡혀서 뒤지고 싶으면 그냥 거기 그러고 서 있든가."

풍덩.

나는 망설임 없이 개울물에 몸을 던졌다.

그대로 잠수해 온몸을 개울물에 담근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네 차례야."

"그러니까,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지?"

"응. 뒤지기 싫으면."

바스티안이 차가운 개울물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갔다.

망설이는 바스티안.

발로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첨벙!

"으악!"

순식간에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바스티안이 소리쳤다.

"너무 차갑잖아! 이거!"

"머리끝까지 모두 들어가."

"으으… 기왕 이렇게 된 거."

바스티안도 개울물에 온몸을 담갔다가 빠져나왔다.

퍽!

조금 전 잡은 사슴 다리를 도끼로 잘라 바스티안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사슴피가 쏟아져 내렸다.

"으윽."

바스티안은 구역질이 나오는 걸 참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은 내 차례.

사슴 다리 하나를 더 잘라 사슴피를 뒤집어썼다.

"자, 다시 들어가."

"어?"

망설이는 바스티안의 엉덩이를 또 한 번 걷어찼다.

풍덩!

"으악!"

피를 뒤집어쓰고.

얼음물에 들어가고.

이러기를 세 차례.

12인의 동료 중 7번째.

암살자 플로이드.

그는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사냥개도 당분간 냄새를 쫓지 못한다."

-그건 너 알아서 하고. 그 더러운 피 내 몸에 묻게 하지 마라. …아, 짐승 피 튀기지 말라고!

"이, 이제 된 거야?"

"그래. 얼어 죽지 않으려면 몸부터 좀 녹여야겠지. 여기서 불 잠깐 쐬고 바로 북쪽으로 올라간다. 오래는 못 있어. 기껏 체취를 지웠는데 여기 새로운 냄새를 남길 순 없으니까."

"북쪽? 산에서 내려가는 방향은 남쪽이야."

"여기서 우리 흔적을 잃은 추적대가 향할 방향이기도 하지."

"아…."

잠깐 몸을 녹인 후.

"넌 여기 있어."

"어디 가게?"

"잠깐 내려갔다 올게."

우리가 쉬던 모닥불을 기점으로 개울을 따라 남쪽으로 내달렸다.

내리막길이라 속도가 제법 붙었다.

한참을 내달리다가 폭이 좁은 곳에서 개울을 건너뛰었다.

그러고는 크게 빙 돌아 다시 바스티안에게 돌아갔다.

그러길 두 번.

"뭐 하고 온 거야?"

"남쪽으로 가는 발자국을 남겼어. 네 거랑 내 거 두 개."

"대단해, 에반!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사상 최강의 암살자에게 배웠다.

"이제 가자."

나는 폴짝 뛰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개울을 건넜다.

"이리 건너와. 개울 전에 발자국 안 남게 조심하고."

"발자국 안 남게?"

"그래. 거기서 한 번에 개울까지 뛰어."

"좀 먼데?"

"그게 멀면. 군 장교가 되기까지의 네 길은…."

"알았어, 알았어."

바스티안이 폴짝 뛰어 개울 위 얼음에 착지했다.

당연히.

휘청.

"어! 어!"

쾅.

미끄러졌다.

"잘했어. 천천히 건너와."

바스티안이 개울을 완전히 건너온 후.

"충분히 쉬었지? 이제 북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린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저 능선을 넘어야 해."

"가능할까? 꽤 멀어 보이는데."

"그게 멀면. 군 장교가…."

"알았어! 가자!"

바스티안은 가성비가 좋았다.

* * *

"헉, 헉! 에반! 나 더는… 더는 못 뛰어."

조금 전부터 다리를 휘청거리더니, 결국 바스티안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나는 뒤로 돌아 그동안 우리가 뛰어 올라온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이 자식.

제법이다.

말로는 능선이 목표라고 했지만, 12살 꼬맹이의 몸을 고려해 그 중간쯤을 실제 목표로 잡았다.

그런데 이미 중간은 훌쩍 넘었다.

"여기서 쉬자. 마른 나뭇잎을 좀 구해올게. 밤새 덮을 게 필요하니까."

"불을 피우면 되지 않아?"

"여기선 못 피워. 오늘 안에 아까 거기까지 추적대가 들이닥칠 거야. 여기 불을 피웠다간 단번에 이리로 치고 올라오겠지."

바스티안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그럼 더 가야지. 능선까지 가서 쉬자."

제법이다.

한 걸음 뗄 힘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역시 강단은 있는 놈이다.

"네 몸으론 무리야. 그리고 산 아래로 발자국을 남겨놓고 왔으니까 그쪽으로 추격을 할 거야."

"…에반 넌 도대체 무슨 체력이 그렇게 좋아? 나도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 안 밀렸는데. 선배들한테도."

"매일 운동했어."

"운동은 나도 꽤 열심히 했는데?"

동료가 된 녀석이니 조금 알려줘 볼까.

"숨 쉬는 게 중요해."

"숨?"

"그래, 숨. 숨만 제대로 쉬어도 최고의 무사가 될 수 있어."

바스티안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게 무슨. 일류 무사 소리라도 들어보려면 무슨 마나인가 하는 걸 심장에 담아내야 한다던데? 마법사들처럼 말이야."

헛소리다.

"요즘 유행하는 방법일 뿐이야. 지금도 다른 방법으로 수련하는 무사들도 제법 있고."

"요즘 유행?"

"그래. 한 2백 년 됐나? 3백 년?"

"그런 건 책에나 쓰여 있는 거잖아. 혹시 너?"

이 녀석.

내가 살아 온 시간과 깊이를 알아챈 건가.

"글도 읽을 줄 알아?"

그럼 그렇지.

"그래. 책에서 봤다고 치자."

"오, 책에서 보다니. 뭔가 멋져."

무사들의 수련법은 계속 변화를 거쳐 왔다.

누군가 효율적인 수련법을 만들어 내 전파하면 한동안 모두가 그걸 따라 한다.

어떨 땐 신체 단련을 최고로 치던 시절도 있었고.

어떨 땐 하복부에 기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은 마법사들이 쓰는 마나를 심장에 모으는 방법을 쓴다.

하지만 어떤 수련법이 몇백 년의 유행을 타든.

결국은 바뀌고 또한 돌고 돌기까지 한다.

12인의 동료.

시기에 따라, 스승에 따라, 또 가진 재능에 따라.

모두 다른 수련법을 썼다.

나는 그들의 수련법을 모두 알고 있다.

중요한 건 본질이다.

본질은 모두 같다.

어떻게든 더 쉽고 빠르게 강해지려고만 하는 게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에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요령만을 연구한다.

어떤 길로 시작했든.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즈음엔 모두 같은 곳에 도착한다.

"자, 편안하게 누워 봐."

"어디에?"

"그건 너 알아서 하고."

"이렇게?"

바스티안이 땅에 등을 대고 대자로 누웠다.

"숨을 들이마셔."

후웁!

"아니. 그렇게 말고.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바스티안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몸 안에 공기가 차며 어깨와 가슴께가 부풀어 올랐다.

잠시 후.

"푸하!"

"어림없어. 다시. 더 깊게 들이마셔. 천천히. 깊게."

바스티안이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엔 눈까지 감았다.

말은 참 잘 듣는 녀석이다.

첫 번째 동료로 나쁘지 않아.

"더."

스읍.

"더."

습.

"더."

끄으으.

"더."

"푸학! 뭐 언제까지 들이마시라는 거야."

"네 몸이 숨 쉬듯 자연과 호흡할 때까지. 그게 본질이야."

"응? 본질? 자연과 호흡?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세상 모든 만물은 자연과 호흡할 수 있다.

인간은 물론 동식물까지.

검이었던 나조차도.

검이었던 시절.

자연을 호흡하는 법을 익히게 되면서 에고 소드가 되었고.

시간이 흘러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이 되었다.

"나중에 천천히 알려줄 테니까. 어쨌든 연습해. 숨쉬기."

"너도 이런 걸 연습해 온 거야? 그래서 그렇게 체력이 좋아진 거야?"

"그래."

"오오, 좋아. 나도 해보겠어. 그런데 에반. 넌 이 숨쉬기를 얼마나 연습했어?"

"12년."

바스티안이 푸학, 하며 웃었다.

"12년? 에반 너 나랑 동갑 아니냐? 뭐 태어나자마자 이것부터 연습하기라도 했어?

"맞아."

어떻게 알았지.

* * *

며칠 후.

능선을 몇 개나 더 넘어 산 반대쪽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그… 남은 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 있을까?"

아무 용기도 희망도 없는 산 송장들.

"내 기준에서는 떠나올 때 죽어 있었어."

"뭐? 아니, 다들 살아 있었는데!"

"실제로 죽었을 거란 말이 아니야."

"그럼?"

"그렇게 살아 있어 봐야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뭐, 실제로 이미 죽었을 수도 있고."

오솔길을 따라 근처 마을을 찾아가는 길.

바스티안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계획은 있어?"

"군대로 가야지."

걸음을 멈춘 바스티안이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너도 군인이 꿈이었어?"

아니.

가장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원래는 아니었어. 여유롭게 세상 구경이나 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왜?"

"실전은 최고의 훈련이니까. 거기만큼 빠르게 실력을 키우기 좋은 곳은 없어. 너도 마침 군 장교가 되는 게 삶의 목적이라며."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는 몰락 귀족의 도망자.

바스티안은 고아에 산적단 출신.

지방 어느 귀족 사병대라면 몰라도 정식 군대에서는 우리를 받아 줄 리가 없다.

"우선 조력자를 찾아야 해."

"조력자?"

"산적질이나 하던 너를 군대에서 받아 줄 것 같아?"

바스티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그래…."

"그러니까 신분을 세탁해야지."

"신분 세탁?"

"그래."

"어떻게?"

* * *

용병 길드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

사투스 왕국 전역에는 용병 길드가 수백 개도 넘게 있다.

레드 아이즈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약 300년 전 용병왕 켄드릭이 직접 만든 길드로, 그의 붉은 눈동자를 기려 길드 이름이 레드 아이즈가 되었다.

"에반, 우리가 여기서 임무를 얻을 수 있을까? 용병 길드에 가입되어 있어야 의뢰를 수락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 엿듣기만 하는 거야."

"뭐? 용병 길드에 들어온 의뢰를 허락 없이 따로 수행하다 걸리면 길드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던데?"

"그러니까. 그냥 엿듣기만 하는 거라고."

"그런데 뭐가 들리긴 들려?"

"조용히 해봐."

나와 바스티안은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 지붕에 몰래 올라와 납작 엎드려 있다.

나는 귀를 가져다 대고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12인의 동료 중 10번째.

붉은 눈의 용병왕 켄드릭.

용병 길드 레드 아이즈의 설립자.

"야, 이든. 너 내가 첫 의뢰를 어떻게 따낸 줄 아느냐?"

-모르지.

"야 인마. 무려 용병왕의 첫 의뢰라고. 그런데 그 시시한 대꾸는 뭐야. 궁금하지 않아? 이 용병왕 켄드릭의 시작이 말이야."

'워낙 대단한 놈들을 많이 봐와서'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궁금하네. 어떻게 했는데?

"하하. 그렇지. 전설의 시작인데 궁금해해야지. …열다섯 살 때였나. 몇 날 며칠을 용병 길드 지붕에 납작 엎드려 안에서 들리는 말을 엿들었다. 놈들은 길드원이 아니면 의뢰를 안 줬거든. 아니 시펄, 돈을 벌려고 용병이 되는 건데 길드원이 되려면 돈을 내라는 게 말이 되냐?"

그래서.

전설의 시작을 따라 해보는 중이다.

무려 용병왕이 처음 일거리를 구했던 방법.

6화. 구출 작전 (1)

태어나자마자 호흡법부터 연습해 자연과 호흡해 온 결과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갖출 수 있었다.

바스티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겠지만, 나는 지붕 아래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딱 맞는 의뢰를 하나 엿들었다.

"됐다. 가자."

"응? 뭐가?"

용병왕 켄드릭은 몇 날 며칠을 엎드려 있었다고 했는데.

나는 반나절 만에 괜찮은 건수 하나를 물었다.

지기 싫어하는 켄드릭이 들으면 관짝에서 벌떡 일어나겠군.

* * *

"웬 꼬맹이들이 나타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썩 꺼져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주님을 만나러 왔어요. 공개 의뢰를 하셨잖아요. 따님을 찾아달라고."

문지기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만 도대체 몇 명이 찾아오는 건지 원. 하다 하다 이제는 애새끼들까지."

옆의 문지기가 혀를 끌 찼다.

"제대로 된 용병단이 올 리가 없잖나. 상대가 블랙 울프이니. 영주님도 참. 괜히 공개 의뢰인가 뭔가를 해서 우리만 귀찮게 됐지 뭔가. 어중이떠중이들만 잔뜩 꼬이고. 어이! 꼬맹이들! 얼른 꺼져라."

"영주님을 만나러 왔다니까요."

"이 자식들이 진짜! 자꾸 귀찮게 할래?"

문지기가 주먹을 들어 위협하는 흉내를 냈다.

"그럼 높은 관리인이라도 좀 불러 주세요."

"아, 거 참! 고집 센 놈들이네. 저리 꺼지래도!"

온종일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시달렸는지 문지기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이다.

스릉.

급기야 문지기는 검을 뽑아 위협했다.

그것도 내 앞에서.

12인의 동료 중 3번째.

명언 제조기 베넷.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고로 검을 진심으로 익힌 자 앞에서 검을 뽑아 들려면. 사지 중 하나는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산채에 있을 때 일주일 동안 맞고 지낸 건 당시 명확한 목적과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 보는 놈한테 위협을 당하는 걸 참을 이유가 전혀 없다.

감히 검까지 뽑아 들다니.

"어디를 잘라 줄까."

"뭐?"

"네가 먼저 검을 뽑아 들었잖아. 왼팔. 오른팔. 왼 다리. 오른 다리. 하나 골라라."

"쪼끄만 게 곱게 보내주려고 했더니!"

스윽.

허리춤에 대충 차고 있던 도끼를 뽑아 들었다.

"안 고르면."

그대로 미끄러지듯 문지기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를 상대할 때.

다리 밑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어…?"

게다가 상대는 무거운 중갑옷을 입고 있는 상태.

방어력이 조금 상승하는 대신 움직임은 몇 배로 둔해진다.

철제 중갑옷.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의 선택이다.

"내가 고른다."

콰직!

녹이 슨 도끼가 문지기의 오금을 가격했다.

무릎을 굽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철을 덧댈 수 없는 곳.

도끼는 정확히 그 틈을 파고들었다.

"끄아악!"

문지기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앞쪽엔 두꺼운 철이 덧대어져 있어 다리를 완전히 베고 지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도끼가 박혀 들어간 깊이는 충분했다.

아직은 덜렁덜렁 달려있긴 하지만, 놈은 평생 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얼른 유명한 사제를 찾아가면 원래대로 고쳐 놓을 수도 있겠지만.

사제들은 문지기같이 가난하고 미천한 자들은 잘 치료해 주지 않는다.

"이놈이…!"

스릉.

또 다른 문지기가 커다란 검을 빼 들었다.

그것도 내 앞에서.

그때.

"무슨 일이냐!"

마찬가지로 철제 중갑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문지기들보다는 훨씬 반짝이는 갑옷.

검술을 제대로 익힌 듯한 걸음걸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

저놈은 말이 좀 통할지도 모르겠다.

"영주님의 공개 의뢰를 수행하러 왔습니다."

사내는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훑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린 나이인데도 제법 단련된 몸이군."

"저 문지기보다는요."

사내는 그제야 쓰러져 있는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오금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 있다.

바닥에는 이미 피가 흥건하다.

"뭐 하느냐! 어서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해라!"

"네!"

사내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영주님의 문지기를 이렇게 만들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은 각오하고 있겠지?"

젠장.

이놈도 말이 안 통하는 놈이었나.

놈이 서 있는 자세에서 약점을 찾아보는 사이.

"…그런데 방금 해 놓은 짓을 보니. 어쩌면 네놈이 적임자일 수도 있겠구나."

말이 통하는 놈이었다.

* * *

영주 접견실.

"인사 올려라. 프린 데이건 남작님이시다."

나는 귀족의 예를 갖췄고.

바스티안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중년의 인자한 얼굴을 한 프린 데이건 남작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한방에 문지기를 불구로 만들어버렸다는 말이냐?"

나를 데리고 온 사내가 대답했다.

"네, 영주님. 의뢰를 수행하려고 찾아왔는데 문지기가 들여보내 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작 에스핀의 또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저 아이들이 어떻게 에스핀을 구해온다는 말이냐."

"상대가 블랙 울프인 이상 제대로 된 용병은 구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병대조차 출동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끄응.

영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요구하는 몸값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병대로 도적단 주둔지를 칠 수도 없으니 이거야 원…."

사람을 불러다 놓고 왜 둘이서만 얘기를 하는 걸까.

둘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가서 에스핀 아가씨를 구해오겠습니다."

영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우릴 데려온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케일. 정말 이 아이들이 에스핀을 구해올 수 있겠는가?"

"일단 어린아이들이지 않습니까. 노예로 잡힌 걸로 둔갑해 블랙 울프 주둔지로 들여보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세팅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다음엔?"

인간들은 참 어리석다.

나이, 외모, 차림새 같은 걸로 상대를 판단한다.

어린 외모와 초라한 행색 탓인지 또 자기들끼리 떠든다.

나랑 얘기하자고, 나랑.

내가 의뢰 수행하러 온 사람이라고.

내가 네 딸 구해올 사람이라니까.

다시 둘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지키고 있는 놈들 몇 죽이고 아가씨를 데리고 주둔지를 빠져나오면 되겠죠. 영주님은 근처에 말이나 두 마리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대신 의뢰에 성공하면…."

"10 골드를 주겠다고 했다."

"금화는 필요 없습니다."

금화 1개는 은화 100개의 가치를 가진다.

평범한 도시 노동자의 한 달 급여는 은화 3개 정도다.

은화 1개는 다시 동화 100개의 가치를 가지며, 동화 1개로는 보통 빵 한 개 정도를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금화 10개는 평범한 도시 노동자의 30년 치 임금이다.

"…금화는 필요 없다?"

"네."

"그럼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네. 의뢰에 성공해 아가씨를 구해오면 저희를 조카로 삼아 주십시오."

"조카?"

"네. 몇 년 전 전쟁터에서 죽은 동생분이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그분의 숨겨진 자식 정도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귀족이 되고 싶은 것이구나. 그게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느냐? 그리고. 당장 내 조카가 되면 이런 성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어리다지만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이봐 영주.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살....

아니다, 됐다.

"귀족이 되어 떵떵거리고 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군대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제야 영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군대?"

"네. 그 정도 신분은 있어야 제대로 된 군대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신분 세탁이라…. 뭔가 계획이 있는 아이들이로구나. 그럼 에스핀을 어떻게 구해올지 얘기나 한번 들어볼까?"

* * *

그날 밤.

영주가 마련해 준 숙소.

숙소래 봐야 성 안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 같은 곳이다.

"에반, 금화를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신분 세탁만 해도 무리한 요구니까. 금화는 거절해야 형평성이 맞지."

"아니 그래도…. 금화 10개면 몇십 년은 돈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돈 걱정이라니.

무슨 소리지.

애초에 그런 건 할 필요가 없다.

"걱정 마라. 우리는 이 성 영주보다 훨씬 부자가 될 테니까."

"뭐? 어떻게? 도적질이라도 할 생각이야?"

"도적질 아니야. 예전에 허락받았어."

"허락?"

12인의 동료 중 10번째.

전 대륙을 돌며 용병 길드의 규모를 키워 간 용병왕 켄드릭.

나는 그의 개인 비밀 창고 위치를 대부분 알고 있다.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 붉은 수염, 붉은 눈동자.

용병왕 켄드릭의 상징.

그런 켄드릭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어느 날.

-켄드릭. 이 많은 금화랑 보물은 저승에 다 싸 갈 거냐.

"나 죽으면 너 가져라."

-내가? 나보고 저런 걸 가져서 뭐 하라고.

"그럼 그냥 두든지."

-길드원들에게 나눠주고 가는 게 낫지 않나.

"그놈들? 갑자기 이런 큰돈을 주면 싸움만 날 거다. 서로 죽고 죽이느라 용병 일은 쳐다도 보지 않겠지."

-자식들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주었다."

-그러면 다 쓰지도 못할 걸 왜 이렇게 열심히 모은 건지.

"야, 이든.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않느냐."

-아.

목적과 원칙.

"목적이었을 뿐이다.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태어난 나 용병왕 켄드릭의 삶의 목적."

켄드릭.

네 입으로 분명히 말했다.

너 죽으면 나 가지라고.

* * *

이 성에 머무른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우리를 영주에게 안내해 줬던 케일이라는 사내는 영주의 사병 대장이었는데, 일 처리가 아주 깔끔했다.

블랙 울프인가 하는 도적단에 잠입하기 위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잠입 일자는 내가 정한 날로 했다.

케일은 매일 같이 우리에게 들러 일의 진행 상황이나 주변 정황을 알려주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숙소에 찾아와 블랙 울프 도적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이다.

"…놈들은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한 도적단이다. 도적질은 물론, 아이들을 유괴해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하고. 지방 귀족의 가족을 납치해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하기도 하지. 이번 에스핀 아가씨 사건처럼 말이야."

그 정도 악질 도적단이라면 진작에 근처 귀족들이 힘을 모아 토벌했어야 맞다.

아니면 거대 용병 길드에 토벌 의뢰를 하든가.

"그런 악질 도적단을 왜 그냥 두는 거죠?"

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쪽 국경에 있는 녹스 변경백 때문이다."

"동쪽 국경이면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잘 알고 있군. 너희들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바스티안이 대답했다.

"군인이요?"

"틀렸다."

"지휘관?"

"틀렸다."

"동맹?"

"틀렸다. 돈이다. 전쟁 자금. 전쟁이 길어질수록 막대한 전쟁 자금이 필요해지지."

그렇군.

이제야 왜 용병 길드에서 이 의뢰를 수락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귀족들이 블랙 울프 도적단을 못 본 척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이유도.

"그 변경백 녹스 후작이 도적단 블랙 울프의 뒤를 봐주고 있군요."

케일이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거 유추하는 걸로 그런 대견하다는 표정 짓지 마라.

"정확하다. 블랙 울프는 녹스 후작에게 전쟁 자금을 대고 있고. 녹스 후작은 그런 블랙 울프의 뒤를 봐주고 있지."

후작을 등에 업은 도적단.

이 근방 귀족 누구도 블랙 울프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반면, 바스티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요.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도적단의 뒤를 봐주다니요?"

"바스티안.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이냐.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많은 물자가 필요하다니까."

"귀족은 다 고귀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바스티안.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귀족들이야말로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짓도 할 수 있는 자들이야."

"그래?"

케일이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 구석에 있는 임시 숙소.

주변엔 아무도 없다.

"쉿! 말조심해라 이놈들아. 여기가 남작 성 안이라는 걸 잊었느냐…!"

케일은 블랙 울프 도적단에 대한 정보 몇 개를 더 늘어놓은 후 돌아갔다.

"에반."

"왜?"

"멋있어. 케일 아저씨랑도 척척 대화하고. 너는 왜 이렇게 유식해? 아는 것도 많고. 나랑 동갑인데. 아! 책을 읽어서 그런가? 나도 글자를 배워야겠어!"

글자를 배운다고 이런 일들을 다 알게 되는 건 아니지만.

배워둬서 나쁠 건 없다.

"틈틈이 배워 놔. 말단 병사는 몰라도 장교까지 하려면 글자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

"알았어!"

말은 참 잘 듣는 녀석이다.

가성비 동료랄까.

"숨 쉬는 건 계속 연습하고 있어?"

"응. 볼래? 그래도 전보다는 좀 더 깊이 들이마실 수 있어."

"나중에. 어차피 네가 다음 경지로 넘어갈 때가 되면 내가 알게 돼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잘하란 말이야. 군 장교가 되고 싶으면."

"알았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바스티안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진지하게 연습하느냐에 달렸겠지.

그러다 바스티안이 자연을 호흡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음 단계를 알려주면 된다.

천하제일인까지는 아니어도.

군단 몇 개쯤은 네 마음대로 주무르게 만들어 주마.

새로운 인생에서의 첫 동료.

바스티안.

7화. 구출 작전 (2)

다음 날.

끼이.

숙소 문이 열렸다.

사병 대장 케일이었다.

"나와라. 작전 시간이다."

케일과 함께 성을 빠져나왔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시간.

불을 피우고 야영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열댓 명.

각기 다른 모양의 무기를 허리나 등에 차고 있다.

가운데는 커다란 마차가 놓여 있다.

나무 기둥이 빽빽하게 박혀있고 위엔 두꺼운 철제 지붕이 달려있다.

죄수 호송 마차와도 같은 모양새.

마차 안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애들 스무 명 남짓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숨어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다가왔다.

케일이 나와 바스티안을 바라보았다.

"이 자를 따라가라. 우리가 매수한 인물이다. 그러면 너희 둘을 자연스럽게 노예 수레에 태워줄 거다. 그대로 수레에 타고 끌려가다 보면 블랙 울프의 주둔지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들."

케일이 나와 바스티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꼭 살아 돌아와라."

며칠이나 봤다고 벌써 정이라도 든 건가.

아무튼 인간들은 참 희한하다.

아, 나도 인간이지.

"그럼 갔다 올게요. 약속한 위치에 차질 없이 말이나 준비해 두세요."

"알았다."

"가자, 바스티안."

"응! 에반."

짜악!

케일과 접선한 사내가 갑자기 양 손바닥을 세게 맞부딪쳤다.

짜악!

한 번 더.

사내가 소리쳤다.

"이놈들! 똥 누러 보내줬더니 여기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었던 거야! 따라와!"

뺨 때리는 소리를 흉내 낸 모양이다.

그러기엔 우리 뺨이 너무 멀쩡한데.

계획은 완벽할수록 좋다.

짜악!

나는 손바닥을 펼쳐 내 뺨을 후려쳤다.

"…너 이놈, 뭐 하는 거냐?"

"뺨을 맞았으면 볼에 맞은 자국이 있어야죠. 바스티안. 이리 와."

"어, 어?"

짜악!

나는 그대로 바스티안의 뺨도 후려갈겼다.

금세 볼이 퉁퉁 부어올랐다.

"허, 이 녀석. 대단한 놈일세. 가자."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내를 따라 걸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아까 똥 누러 보내달라던 놈들. 안 돌아오길래 가서 잡아 왔지."

커다란 칼을 등에 멘 사내가 나와 바스티안을 바라보았다.

"못 보던 놈들 같은데."

우리는 퉁퉁 부은 볼을 매만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애새끼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 뭐."

"그런가, 하긴. 어서 마차에 집어넣어."

"들어가! 이놈들!"

케일과 내통한 사내가 호송 마차의 뒷문을 열었다.

나와 바스티안은 순순히 호송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속삭였다.

"…무기는 약속된 대로 마차 아래에 있다."

나는 고개를 잘게 끄덕이고 그대로 마차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행색을 한 20여 명의 아이들.

대부분 비슷한 또래였다.

몇몇은 이미 죽은 눈을 하고 있고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다.

저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이 아이들의 인생을 바꾼다.

이미 죽은 눈동자를 한 놈들은 평생 노예로 살아갈 것이다.

음.

죽은 눈동자와 호기심 어린 눈동자 사이에.

색다른 눈빛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앉아있는 자세나 몸의 근육도 나이에 비하면 보통이 아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위.

덩치는 나와 바스티안보다 머리통 한 개는 더 있을 만큼 컸다.

이 호송 마차 안에서 가장 큰 덩치.

신기한 놈이다.

녀석과 시선이 얽힌다.

녀석도 나를 신기하다는 듯 주시했다.

밤늦은 시간.

불침번이 나무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러니 도적단 말석이나 차지하고 있지.

나는 천천히 궁둥이를 옮겨 저녁에 찜해두었던 그 특이한 녀석 옆으로 갔다.

"이름이 뭐야?"

눈을 감고 있지만 녀석의 호흡을 통해 잠이 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이름이 뭐냐니까?"

녀석이 천천히 눈을 떴다.

"…퍼랜도."

"귀족 출신이야?"

퍼랜도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곧은 자세나 눈빛, 말투. 그냥 찍어 봤어."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꺼져라. 노예로 팔려 가는 마차에 탄 주제에."

"귀족 맞네. 그런데. 너는 지금 우리랑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너도 노예로 팔려 가는 마차에 타고 있어."

"…난 다르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본인과 남들을 똑같다고 인정해 봐야 진짜 똑같아질 뿐이다.

격차라는 것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싸움은 좀 해?"

"왜. 나랑 한 판 붙게? 이 좁아터진 마차 안에서?"

"까칠하네. 뭐, 좋아. 인간이란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처음엔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 많은 놈이구나."

"너. 도적 소굴에서 탈출하는 게 목적이야? 노예로 팔려 가기 전에."

흠칫하는 모습이 아직은 어린애다.

"도적 소굴을 빠져나가고 싶으면 내일 날 잘 따라와. 임시 동료로 임명해 주지."

"임시 동료?"

"바스티안만큼의 검증을 거치진 않았으니까. 너는 임시 동료다."

"…별 특이한 놈."

* * *

다음 날 하루를 꼬박 이동해 블랙 울프 주둔지에 도착했다.

주둔지 입구와 그 주위엔 수많은 보초가 서 있다.

마차는 어렵지 않게 주둔지 입구를 통과했다.

잠시 후 주둔지 한쪽 마구간 옆에 세워졌다.

"자, 자. 고생했으니 맥주나 한잔씩 하러 가자고."

"아우. 따분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다음부턴 이런 임무는 안 맡아야지."

"우리 같은 처지에 임무를 골라 맡을 수는 있고?"

"그건 그렇지. 어쨌든 맥주나 때리러 가자고."

우리를 끌고 온 열댓 명의 도적은 그대로 주둔지 중심으로 사라졌다.

이미 주둔지 안으로 들어온 이상 어린이 노예를 실은 마차를 감시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 또한 계획에 모두 포함되어 있던 일.

주머니에서 투박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내통자에게 미리 받아두었던 열쇠.

퍼랜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너? 그거 뭐야?"

"이제야 반응하네. 말했잖아. 탈출하고 싶으면 나 잘 따라오라고."

자물쇠를 따려는데 퍼랜도가 갑자기 손목을 낚아챈다.

"그냥 이대로 나가는 게 계획이야? 여기 도적단 주둔지 복판이라는 거 몰라? 어떻게 나갈 건데?"

"그냥 나갈 건 아니고. 누구 좀 구해서 나갈 거야."

"누굴 구해서 나가? 그러려고 일부러 여기 들어온 거야?"

"그래."

퍼랜도가 이마를 짚었다.

"하. 어쩐지. 중간에 마차에 탈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이봐."

"내 이름은 에반이다."

"그래, 에반. 그냥 가만히 있어. 며칠 후에 경매장으로 호송될 건데, 그때가 탈출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야. 주둔지 복판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아니라고. 그 문 따고 나가봤자 곧 잡혀서 개죽음을 당할 거야."

내 죽음을 단정하다니.

재밌는 놈이다.

"개죽음이라. 몇 명이나 당할까? 그 개죽음."

"뭐?"

"몇 명이나 내 앞을 가로막으려나 하는 말이야."

철컥.

호송 마차의 자물쇠를 풀었다.

"어?"

"뭐지?"

"어쩌지?"

마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술렁인다.

"알아서들 해라. 탈출해 보려는 놈은 시도해 보고. 무서우면 그냥 여기 가만히 있고. 그럼 잡혀서 죽지는 않을 테니까."

"저런 미친…."

퍼랜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나와 바스티안은 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바스티안이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진짜 있다!"

곧이어 아밍소드 두 자루를 안고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사병 대장 케일에게 말해 미리 준비해 둔 검.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르기 좋은 길이에, 검신은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테이퍼형이다.

음.

이 정도면 '검'이라고 불러줄 순 있다.

특별히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검신을 검게 칠해달라고 요청했다.

심플한 모양의 십자가형 크로스 가드가 손을 보호하고, 손잡이 끝에는 무게추 역할을 하는 폼멜이 달려있다.

군대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검으로, 나머지 한 손에는 방패를 드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와 바스티안은 방패 같은 건 들 수 없다.

한 손으로 들기 좋은 검이라는 건 성인 기준.

키가 작고 팔이 짧은 우리는 이걸 투핸드 롱소드나 바스타드 소드처럼 활용해야 한다.

아밍소드를 다루는 기초 방법은 성에 머무르는 사흘 동안 대충 가르쳐 놨다.

가르쳐준 걸 얼마나 활용하느냐는 바스티안의 몫이다.

바스티안도 산적단에서 4년이나 버틴 놈이다.

제 몫은 충분히 할 것이다.

"가자. 바스티안."

"응! 에반!"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퍼랜도. 어쩔 거냐. 내가 보기엔 지금 나를 따라오는 게 탈출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망설이는 퍼랜도.

"그럼 이제 알아서 해라. 우린 간다."

"젠장! 이 정도 준비를 해 왔으면 뭐 계획이 있겠지. 나도 함께 간다."

"좋아. 잘 따라오라고."

우리 셋은 어두운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 * *

사병 대장 케일이 보여 줬던 지도를 떠올리며 에스핀이 갇혀 있다는 건물을 향했다.

저 뒤쪽 우리가 떠나온 곳은 이미 시끌시끌해졌다.

호송 마차가 열린 걸 알아챈 것 같다.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

"알았어! 에반."

건물 벽에 붙어 빠르게 이동하는데.

벌컥.

바로 앞에 있는 문이 열리며 도적 셋이 걸어 나왔다.

"누구… 큭!"

우리를 보고 소리치려는 순간.

그대로 놈의 배를 꿰뚫어버렸다.

가르쳐준 대로라면 다음은.

슈욱!

뒤에서 아밍소드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스티안이었다.

챙!

도적은 두꺼운 도를 꺼내 바스티안의 아밍소드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바스티안이 만들어 낸 작은 시간.

첫 번째 놈의 배에서 아밍소드를 뽑아 두 번째 놈의 목을 그어버리기엔 충분했다.

검 끝이 가볍게 목을 툭 치고 지나갔을 뿐이지만.

기도까지는 충분히 들어갔다.

"허억!"

헛바람 삼키는 소리를 잠깐 내더니 그대로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자, 이제 남은 건 한 놈.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고 자리를 뜬다.

"어?"

촤악!

퍼랜도가 휘두른 도가 도적의 가슴팍을 대각선으로 깊게 베어냈다.

두 번째 도적이 들고 있던 두꺼운 도가 어느새 퍼랜도의 손에 쥐여 있었다.

이 자식.

좀 하네?

우리 셋은 빠르게 다른 건물과 건물 사이로 이동했다.

도적 수십 명과 한꺼번에 대치하고 싶지 않으면 전투가 끝나자마자 최대한 빨리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한다.

"…제법인데. 퍼랜도."

"내가 할 말이다. 에반."

퍼랜도.

도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놈이다.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다.

전력에 보탬이 될 줄 알았어.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에스핀이 갇혀 있는 건물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퍼랜도가 물었다.

"계획은?"

계획?

있다.

아주 완벽한 계획이.

"여기서 대기한다."

8화. 구출 작전 (3)

"그냥 대기한다고?"

"그래."

"…그게 계획이야?"

"그래."

"언제까지 대기할 건데?"

"기다려. 곧 소란스러워질 거야. 그때 에스핀을 구출해서 이 주둔지에서 탈출한다."

"소란스러워져?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대?"

"꽤 똑똑하네, 퍼랜도."

퍼랜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 도시 경비대에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먼저 잠입한 모양인데. 아무 소용 없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여기 블랙 울프 주둔지에 쳐들어올 수 있는 경비대 같은 건 없어."

이 녀석 봐라.

그런데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건 너다.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냐?"

"아직 나이도 어린데 제법 대단해서. 주변 정세도 읽을 줄 아네. 뭐 정치 수업이라도 받던 중이었나 봐."

퍼랜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표정 관리가 미숙한 게 아직 애는 애다.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척 보면 알지 이 녀석아.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주변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왔군."

바스티안이 물었다.

"와? 누가?"

"레드 아이즈."

"레드 아이즈? 우리 갔던 그 용병 길드?"

"그래."

"에스핀을 구하러 온 거야? 프린 데이건 남작의 의뢰를 받아서? 그럼 우린 어떡해!"

"아니. 그런 사소한 의뢰나 수행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도적단을 아예 박살 내러 온 거지."

"뭐? 이 도적단은 변경백이 뒤를 봐주고 있어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며! 녹스…? 닉스? 후작이 뒤를 봐준다고 안 했어?"

우리의 대화를 듣던 퍼랜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도 그런 걸 다 알아?' 하는 표정.

안다.

너보다 많이.

* * *

지난주.

용병 길드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 지붕.

"에반, 뭐가 들려?"

"쉿."

나는 지붕 아래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바스티안은 아무것도 못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지부장님, 블랙 울프 주둔지를 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괜찮으시겠습니까? 전력은 우리가 앞서지만, 놈들의 뒤에는 녹스 후작이 버티고 있는데요.

-녹스 후작과는 이미 얘기를 마쳤다.

-네?

-전쟁 물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적놈들과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변경백이나 되는 인물로서 누구나 공공연히 아는 이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지.

-그건 그렇겠습니다만....

-변경백 녹스 후작, 생각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인물이더군. 우리는 공식적으로 녹스 후작의 의뢰를 받아 블랙 울프 도적단을 토벌한다.

도적단과 손을 잡은 게 부끄러워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게 부끄러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손을 잡지도 않았겠지.

-전쟁 자금을 대주는 도적단을 토벌하라는 의뢰를 용병 길드에게 맡기다니요?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맡기려면 의뢰비를 만만치 않게 치러야 할 텐데요. 자기 돈을 들여 제 돈줄을 끊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받을 의뢰비는 없다.

-예?

블랙 울프 도적단이 뭔가 변경백 녹스 후작의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하다.

그 틈을 용병 길드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장이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알고 했든,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든.

-의뢰비가 없을 뿐 아니라, 변경백의 전쟁 자금도 이제부터 우리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에서 대기로 했다.

그럼 그렇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구나.

-네? 의뢰비도 없이 의뢰를 받으셨다고요? 게다가. 전쟁 자금을 우리가 대다니요? 그 큰돈을 어떻게 말입니까?

지부장이 이런 비밀을 나누는 걸 보면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놈일 텐데.

정황을 못 읽어도 너무 못 읽는다.

답답하군, 저 부지부장이라는 놈.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왕국 남동쪽 6개 대도시의 모든 의뢰는 우리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가 독점한다. 요즘 용병 길드가 너무 많아도 너무 많지 않느냐.

-어떻게 말입니까? 아무리 변경백 녹스 후작이라도 그런 독점권을 우리한테 줄 수는 없을 텐데요? 그리고 독점권을 얻는다고 해도 다른 길드들에서 어디 그 말을 듣기나 하겠습니까?

-블랙 울프 토벌은 대업의 시작일 뿐이다. 스스로 물러나거나 해체하지 않는 용병 길드는 바로 친다. 후작의 군대가 우리를 도울 것이다.

-…엄청난 걸 계획하셨군요, 지부장님. 그럼 블랙 울프 도적단은 언제 칩니까?

-다음 주 금요일 밤이다. 지금까지는 너와 나, 그리고 변경백 녹스 후작 이렇게 세 명만 아는 사실이다.

이제는 네 명이다.

* * *

"모두 튀어나와! 정문에 엄청난 수의 적이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감히 우리 도적단을!"

"몰라 인마! 일단 전부 깨워! 전부 정문으로 튀어 나가라고 해!"

도적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체계도 없는 움직임.

쿵. 쿠웅.

레드 아이즈는 공성 병기까지 가져온 건지 땅을 울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퍼랜도가 물었다.

"…에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말한 대로 소란스러워졌고, 이제 우리는 에스핀을 구해서 여길 빠져나가면 되는 일이지."

"아니! 누가 여길 쳐들어온 거냐고! 감히 변경백이 뒤를 봐주는 도적단을 누가?"

아, 그건 비밀이지만.

어차피 곧 다들 알게 될 테니.

"레드 아이즈 남부 지부."

"레드 아이즈? 용병 길드?"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퍼랜도 녀석은 혼자 무슨 생각을 정리하는지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저도 갈까요?"

"야! 저 계집애 몸값이 얼만 줄 알아? 너는 여기 지키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전부 네 책임이다! 알았어?"

"네, 네!"

에스핀이 갇혀 있다는 건물.

그곳도 한 명만을 남긴 채 도적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제 가자."

"응! 에반."

아까처럼 조심스레 그림자를 따라 이동할 필요도 없다.

이미 주요 전력은 모두 정문을 향해 튀어 나갔다.

쾅!

문을 발로 찼다.

나무 걸쇠로 잠겨있던 문이 가볍게 열렸다.

"누구냐!"

그대로 도적을 향해 내달렸다.

놈은 급히 벽에 세워뒀던 검 자루를 집어 들었다.

뒤늦게 검을 빼 들려고 했지만.

촤악!

내 검이 놈의 목을 따는 게 훨씬 빨랐다.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어야지.

보초를 선다는 놈이 자세가 안 되어 있다.

고개를 돌려보자 의자에 묶여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나이는 우리 또래쯤?

귀족치고는 조금 어두운 피부색을 하고 있지만, 상당히 예쁜 얼굴이다.

약간 붉은색이 도는 갈색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네가 에스핀이야?"

"너, 너흰 누구야?"

"너 구하러 온 사람."

"날 구하러 와? 너희 같은 꼬맹이들이? 프린 데이건 남작이 보낸 거야?"

프린 데이건 남작이라.

보통은 아버지나 아빠라고 부를 텐데.

이 녀석도 전생에 검이었나?

'음. 그럴 리 없지.'

광룡 아우룸 드라고의 보석.

렉스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위해 사용해 버렸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신물이니까.

어쨌든.

전생에 검이 아니었다면, 가족을 저렇게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친부가 아닌 모양이군.'

상관없다.

의뢰에 따라 남작에게 에스핀을 무사히 데려다주고 가짜 신분을 얻으면 그뿐.

"가자. 남작한테 데려다줄게."

"…가기 싫어."

여기까지 오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미리 계산해 보고,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다.

바스티안이 물었다.

"뭐? 가기 싫어? 너희 아빠가 널 구해오라고 보내서 왔다니까?"

"안 가."

에스핀이 고개를 팩 돌리고 눈을 감는다.

아주 잠깐.

'죽여서 시체를 들고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왜 안 가?"

"가기 싫으니까."

"왜 가기 싫어?"

에스핀이 입을 앙다물었다.

볼은 퉁퉁 부어있고 입 주변엔 피가 말라붙어 있다.

이곳에서의 대접이 어땠는지 훤히 보이는 얼굴인데도.

집에 가기 싫단다.

"그냥 가. 나 못 구했다고 해. …아니, 그냥 죽었다고 해."

나는 무심히 검을 들어 올렸다.

에스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 뭐야! 진짜 죽이려고? 죽여달라는 게 아니라…! 그, 그냥 죽었다고 말만 하라고!"

내려그은 검은 에스핀의 몸통을 갈랐다.

"꺅!"

정확히는, 몸통 바로 앞을 갈랐다.

투둑, 툭.

에스핀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헉, 헉."

자신의 가슴께를 부여잡은 에스핀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고.

바스티안은 아무 생각이 없고.

퍼랜도는 입을 쩍 벌리고 내 검 끝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뭐야?"

"아밍소드. 그것도 몰라?"

"그게 아니라! 그 검술 뭐냐고. 어떻게 옷자락 하나 안 건드리고 밧줄만 잘라냈어…?"

밧줄만 베면 된다.

옷까지 베면 저 이상한 여자애가 화를 낼 테고.

조금 더 깊이 베면 피가 뿜어져 나올 거니까.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자, 에스핀. 그만 칭얼거리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중인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에스핀이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시간 끄는 건 딱 질색인데.

"셋 셀 동안 안 일어나면 저 밧줄처럼 너도 베어버린다."

벌떡.

진작 그럴 것이지.

* * *

도적단을 빠져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부 침입자를 막으러 나가느라 막사와 건물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도적도 우릴 신경 쓰지 않고 급박하게 무언가를 하기에 바빴다.

종종 '너흰 누구냐!'라며 무기를 빼 든 도적은 그대로 몸이 반토막 났다.

도적단을 빠져나와 약속된 숲속에 도착하자 말 두 필이 묶여있는 게 보였다.

"에스핀 너는 내 뒤에 타고. 한 마리는 바스티안이 타고. 퍼랜도 너는 어쩔 거야?"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퍼랜도.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우릴 따라나설지, 원래 가던 길을 갈지.

이럴 땐 결정을 도와줘야지.

"잘 가라, 퍼랜도. 나중에 또 볼 날이 있겠지."

"어? 어...."

에스핀을 먼저 말 위에 태우고 그 앞에 탔다.

"에스핀, 꽉 잡아라. 가자, 바스티안."

"응! 이랴!"

퍼랜도.

실력도 제법이고 괜찮은 녀석 같지만.

우리가 가려는 길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넌 너의 길을 가라.

시간이 지나 서로의 검이 가리키는 곳이 일치한다면.

언젠간 다시 만나겠지.

* * *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영주성까지 한 번에 가자."

나와 바스티안은 간단히 야영 준비를 했다.

야영 장비는 말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에반, 불 피워도 돼?"

"응."

"도적들이 우릴 따라오면?"

"우릴 따라 올 도적은 없어."

오늘 밤.

놈들은 거의 다 죽거나 뿔뿔이 흩어질 테니까.

"아, 그래?"

바스티안이 신난 얼굴로 불 피울 준비를 했다.

"에반, 하루 종일 굶었더니 배고파. 우리 뭐 토끼라도 잡아다 먹자."

"그럴까?"

아까부터 시무룩해 있던 에스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토끼고기?"

프린 데이건 남작과 에스핀의 관계가 궁금했었는데.

잘 되었다.

"내가 사냥해 올게. 바스티안 너는 에스핀이랑 여기 있어."

"에반 너 혼자?"

"응."

나는 바스티안과 에스핀을 뒤로 하고 숲으로 몸을 날렸다.

무슨 고기를 구워주면 자기 사연을 술술 불려나.

9화. 프린 데이건

타닥, 탁.

"와, 맛있겠다."

에스핀이 당장이라도 침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모닥불 옆으로 다가왔다.

모닥불 위에는 멧돼지 통구이가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바스티안이 물었다.

"에반! 다 익어가는 거 같지 않아?"

나는 옆에 세워둔 검을 집어 들었다.

에스핀이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촤악.

한 번의 칼질에 앞다리 하나가 깔끔하게 잘렸다.

잘려 떨어지는 앞다리는 왼손으로 받아냈다.

"잘 익었네."

그러자 바스티안이 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스티안. 레이디 퍼스트. 제대로 된 군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알아둬야 해."

"…아. 그래?"

군인이란 말에 갑자기 정자세를 하고 에스핀에게 고기를 양보하는 손 모양을 펼친다.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잔뜩 깔고서는.

"레이디 퍼스트."

나는 잘 익은 앞다리 고기를 에스핀에게 내밀었다.

"자, 에스핀."

"…고마워.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바?"

"아니, 에반."

에스핀은 손으로 고기를 받아 들고는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앗. 뜨거."

절대로.

귀족 영애의 모습은 아니다.

"넌 남작하고 무슨 사이야?"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오물오물하던 에스핀이 다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냥 물어보는 거야. 우린 어차피 보수만 받고 떠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잠시 고민하던 에스핀이 입을 열었다.

"그래. 반강제였긴 했지만, 도적들에게서 구해주고 먹을 것도 줬으니까."

와구.

에스핀이 멧돼지고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절대로.

귀족 영애의 모습은 아니다.

"나는 양녀야. 프린 데이건 남작이 날 입양했어. 원래는 소작농의 딸이었어."

자기 먹을 고기를 열심히 떼어 내던 바스티안이 말했다.

"오, 좋겠다."

"뭐가 좋아?"

"귀족 집안에 입양됐으니까 귀족이 된 거잖아."

"그게 좋아?"

"그럼 안 좋아? 소작농 부모보다는 귀족 부모가 낫지 않아?"

"너 고아지."

바스티안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에스핀이 다시 고기를 크게 한 입 뜯었다.

"원래는 소작농의 딸이었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부모가 멀쩡하게 있는데 입양된 거라고. 돈에 팔려 간 거란 말이야."

"아...."

흔히 있는 일이다.

나이 든 귀족이 어린 여자아이를 돈을 주고 입양해 오는 건.

노리개가 필요해서이거나.

정략결혼을 시키기 위함이다.

"에스핀 넌 어느 쪽이야?"

"뭐가? 에반."

"노리개야, 정략결혼이야?"

에스핀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너 엄청 직설적인 애구나?"

"그런 편이지."

인간들은 왜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효율적인 그런 화법은 누가 처음 시작해 퍼뜨린 건지.

"정략결혼이야. 나 다음 달에 약혼해. 결혼은 아마 내년쯤?"

입안 가득 넣은 고기를 꿀꺽 삼킨 바스티안이 물었다.

"누구랑?"

"나이 마흔 넘게 먹은 아저씨랑."

"헉. 왜?"

에스핀이 나와 바스티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는 예리한데 직설적이고. 하나는 순진한데 멍청하네?"

"나 안 멍청하거든! 에반이 똑똑한 거야."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집에 안 간다고 했군.

그럴 만도 하다.

아직 열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래서 남작이 얻는 건?"

"뭐긴 뭐야. 정계에 줄이 잘 닿아있는 사돈집 연줄이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군."

"프린 데이건 남작? 몰라서 물어?"

"잘 몰라. 너 구하러 가겠다는데 자꾸 다른 놈이랑 말을 섞길래 잠깐 죽여버릴까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거 말고 별로 아는 건 없어."

"뭐? 누굴 죽여?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몰라도 돼."

"하긴. 어차피 너희들은 바로 떠날 거라며. 남작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 없겠지."

그건 그렇다.

에스핀과 남작의 사이가 궁금했을 뿐.

남작이 어떤 인물인지는 전혀 관심 없다.

"에반 너는? 너도 고아야?"

고아지.

그것도 아주 신선한.

이 표현이 맞나.

"응."

"안됐구나...."

너도 꽤 안됐는데, 에스핀.

그 후로 우리 셋은 별말 없이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 * *

다음날.

등 뒤에서 에스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와버렸네...."

저 앞에 프린 데이건 남작의 성이 보인다.

"에스핀."

"응?"

"정 싫으면 도망가. 아, 당장은 안되고. 우리가 너를 남작한테 인계한 다음에."

"금방 붙잡히고 말걸. 그리고 혹시 무사히 도망친다고 해도... 그럼 남작이 우리 부모님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것저것 다 고민하고 신경 쓰다가는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

"...."

"뭐, 선택은 너의 몫이니까."

좋지 않은 상황일수록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건 인간의 특성이고.

"선택은 나의 몫...."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성문 앞에 도착했다.

"아니? 너희들은?"

"에스핀 아가씨를 구해왔습니다."

"자, 잠깐 기다려라!"

문지기 하나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해냈구나!"

사병 대장 케일이 나왔다.

"네, 아저씨."

"잘했다. 잘했어. 둘 다 무사하구나. 어디 다친 덴 없느냐?"

남작의 영애가 돌아왔는데 우리 안부를 먼저 묻는다.

케일, 진짜 그 잠깐 사이에 우리한테 정이 들어버린 거야?

그게 가능하다니.

"네 없어요. 그보단 영애님의 안위를 물으시는 게."

"아! 내 정신 좀 봐라.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안으로 드시지요. 자 얘들아, 너희도 들어가자."

에스핀은 사용인들이 따로 데리고 가고.

케일은 나와 바스티안을 영주에게 안내했다.

영주 접견실로 향하는 내내 케일의 입이 쉬지를 않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것이냐?"

"아직 여기까진 소문이 안 퍼졌나 보네요."

"무슨 소문?"

"곧 아시게 될 거예요. 블랙 울프 도적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접견실에 도착하고 잠시 후.

인자한 표정의 프린 데이건 남작이 걸어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대단하구나. 고생했다."

"의뢰를 받았으니 그걸 수행했을 뿐입니다."

"보내면서도 반신반의했거늘. 정말 구해오다니. 자, 이제 보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꾸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우리를 죽은 동생분의 자식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한 명은 숨겨진 자식으로 하면 되겠고, 한 명은 입양된 걸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프린 남작이 껄껄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해 온 것이냐."

"얘랑 저랑 동갑인데 친형제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생긴 것도 많이 다르고요."

"과연 영특한 소년이구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반입니다."

"에반이라.... 우리 가문의 성을 얻으면 에반 데이건이 되겠구나."

에반데이건.

곧 내 새로운 이름이 되겠군.

"네. 에반 데이건. 마음에 듭니다."

"좋다. 내 딸아이를 구해왔는데 무슨 청이든 못 들어주겠느냐. 그렇게 해주마."

"감사합니다."

"다만 일을 완벽히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서류도 몇 개 조작해야 하고. 입을 맞춰둬야 할 사람들도 있고."

"이해합니다."

"그동안 우리 성에서 머물거라. 내 일주일 안에 너희 둘의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나가봐라. 사용인들에게 너희가 머물 숙소를 마련하라 했다. 이전에 지내던 숙소보다 훨씬 나은 숙소일 것이다."

남작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사용인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쯤 되었을 청년.

"안녕. 나는 빌리야. 날 따라와. 숙소로 안내할게. 남작님이 엄청 좋은 방을 준비해 주셨어. 나보다 한참 더 어려 보이는데 이런 일을 해내다니 대단해. 너희들 몇 살이야?"

"열두 살이요."

"열두 살?! 그래도 열다섯은 넘었을 줄 알았더니. 진짜 대단하다. 난 열두 살 때 뭐했지?"

뭐했긴.

사용인이었겠지.

빌리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내성을 빠져나와 건물 몇 개를 더 지나고 남작성 북쪽 경계 근처까지 왔다.

"거리가 머네요."

"영애님을 구해온 너희들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하신 배려가 아닐까? 방을 보면 깜짝 놀랄걸."

울창한 나무숲 바로 앞.

적당한 크기의 별장이 하나 지어져 있었다.

"여기야."

빌리가 별장 문을 열어주었다.

"우와."

바스티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데이건 가문의 전대 가주님이 독서를 하시던 별장이래. 조용하고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그런 곳이야."

"우리 진짜 여기서 머물면 되는 거예요?"

"그래. 너희가 여기 머무는 동안 나는 저 오두막에 있을 거야."

우리가 머물 별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서 말하면 돼. 식사는 따로 다 가져다줄 거야."

바스티안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우와. 감사합니다!"

"뭘, 다 남작님의 배려지. 나는 사용인일 뿐인데. 그럼 쉬어."

"네."

빌리가 돌아간 후.

"와, 에반! 임무에 성공하고 나니까 완전 대우가 달라졌다. 그치?"

대우가 달라졌다라.

이번 일은 분명 의뢰와 보상을 주고받은 비즈니스다.

길거리 고아일 게 뻔한 아이들에게 이 정도 대접은 너무 과하다.

남작이 정말 우리한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치더라도.

굳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일 필요는 없다.

내성에도 좋은 방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와! 별장 진짜 크고 조용하다. 시끌시끌하던 내성이랑은 완전 분위기가 달라."

"응. 사람 둘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바스티안. 나 좀 나갔다 올게."

"나가? 어딜? 에스핀 만나러 가? 그럼 나도 갈래. 첨엔 좀 이상해 보였는데 보다 보니 착한 애 같아. 얼굴도 예쁘고."

"에스핀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그럼?"

"아무래도 남작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 난 그걸 알아보러 갈 거야."

"진짜야?!"

바스티안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하는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이제 내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바스티안이다.

"그, 그럼 나도 같이 가야지! 우린 동료니까!"

"아니야.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어. 그리고 이 별장에 우리가 머무는 척하려면 너라도 여길 지켜야 해."

"아, 그래? 알았어!"

참 말을 잘 듣는 가성비 동료다.

"넌 원래 하려던 대로 뒹굴뒹굴 쉬고 있어. 빌리한테 가서 배고프다고 먹을 것도 달라고 하고."

"알았어."

"누가 별장에 찾아오면 나는 방에서 곯아떨어졌다고 말해."

"응!"

"그럼 갔다 올게."

"응!"

바스티안.

이 말 잘 듣고 기특한 녀석.

조만간 선물 하나 주마.

10화. 에반데 이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