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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BRUJASSONMUYBUENASCAZ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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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1화

001. EP1 ― 남자 마녀 (1)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 복장 차림새인, 누가 봐도 마녀 사냥꾼임을 알아볼 법한 두 사람이 이끼 낀 돌다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앞장서서 걷던 중년의 남자, 비고가 말했다.

"그거 들었나, 로웬."

"뭘 말입니까. 스승님."

"우리가 가려는 시나인 마을 말이야."

"네. 클리프만 영지 외곽의 산 아랫마을이죠."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저 먼 산봉우리를 응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 마을 뒷산에 마녀가 산다더군."

"...예?"

다리가 불편한 로웬이 절뚝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 다시 별거 아니란 듯 피식 웃으며 걸었다.

"또 이상한 괴담이 부풀려진 거겠죠. 헛것을 봤다거나. 그런 거야 많잖아요. 임무 의뢰서엔 특별히 의심할 만한 사안이 없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똑 부러지는 로웬의 대답에 비고가 클클 웃었다.

"자네가 놓칠 리 없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무리 그래도 마녀가 평범하게 마을 뒷산에 살 리가 있나. 바보도 아니고."

로웬은 스승의 시시콜콜한 농담에 대강 맞장구쳤다.

"애초에... 뒷산에 사는 게 진짜 마녀였다면. 그 마을 사람들은 살아서 저희에게 의뢰하지도 못했겠죠."

비고는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녀 사냥꾼으로 살아온 세월만 30년이다. 그동안 숱한 거짓 제보를 받고 속았다.

마녀란 족속은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음산하며, 음흉하고, 영악하다.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쉬이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사람의 생명을 거둬간다.

로웬의 말대로 진짜 마녀가 뒷산에 살고 있다면, 이들이 시나인 마을에 도착했을 때쯤이면 그곳에 살아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쿠릉―!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습해진 공기는 먹구름이 비를 몰고 올 것이란 걸 예고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비고가 입을 열었다.

"비가 올 모양이군. 오늘은 이 근처에서 자고 가지. 자네 다리도 슬슬 아플 테니까."

"전 괜찮지만... 알겠습니다."

* * *

"그윈! 이 말썽꾸러기 녀석. 또 어딜 가는 거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에이. 촌장님. 사고라뇨. 아무 짓도 안 해요. 그냥 나무하러 가지."

"나무? 요새 장작 패러 다닌다더니, 진짜였냐."

"헤헤. 저도 슬슬 철들 때 됐죠."

촌장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악동 그윈이 하루아침에 정신 차릴 위인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산으로 가나?"

"예. 다들 뒷산으로 나무하러 가잖아요."

촌장의 주름진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지만 산에 나무하러 갈 땐 항상 그것을 조심해라."

"그것?"

"산속 마녀의 새끼. 위험한 놈이라고 어른들이 자주 얘기했을 텐데."

"아― 알죠."

그윈이 속으로 촌장을 비웃었다.

'겁쟁이 영감님.'

자기가 근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게 되면 이 늙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근데 요즘 시대에 마녀가 어딨어요. 촌장님도 참."

"있다. 조심하라면 조심해. 어른 말 들어."

"예~ 예.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빈정대며 뒷산을 오르는 그윈을 보며 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어린 것들은 항상 저 모양이라니까...."

그는 수심 깊은 얼굴로 뒷산을 응시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작은 산이지만, 산어귀에 깔린 응달을 보고 있으면 몸서리가 절로 처진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산속에 사는 그 짐승을 마주하는 건 여전히 공포였다.

* * *

그윈이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사람의 발길이 끊겨 길이 없는 험준한 산이었다.

그래도 근래 몇 번 올랐다고 목적지까지 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땀이 상의를 적실 무렵 도착한 깊은 산속의 허름한 오두막. 그윈은 오두막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

"니케! 니케! 나야, 그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지기 직전의 나무문이 스산한 소릴 내며 열렸다.

이내 썩은 곰팡내와 함께 회색 늑대의 갈기 같은 머리의 소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온갖 신비와 미지가 공존하는 세상에서도 특별하게 보일 잿빛 머리와 잿빛 동공, 남자마저 놀랄 정도로 수려한 외관을 가진 어린 남자애였다.

햇빛을 받은 소년이 하품을 쩍하더니, 맹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침."

"이미 한참 지난 점심이거든? 이 자식아, 이거나 받아."

그윈이 도끼를 내밀었다.

"빨리 나와. 일할 시간이야."

"금은."

"그래. 부지런히 일해야 금이랑 은도 모으지. 너도 부자 되고 싶냐?"

무표정으로 있던 니케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형님 말만 잘 들으면 돼. 사슴이나 토끼를 생으로 안 먹어도 되고. 빨리 가자."

니케가 기지개를 시원하게 켜며 그윈을 따라나섰다. 맨발에 다 찢어진 천 옷을 입은 그 모습은 흡사 짐승이었다.

아이가 산속에서 홀로 버려진 채 지냈지만, 마을의 그 누구도 니케를 돌보지 않았다. 니케가 마녀의 새끼라는 소문이 자자한 탓이었다.

둘은 작은 공터로 갔다. 이미 니케가 잘라버린 나무 밑동이 여럿 보이는 공터였다.

쿵, 쿵쿵!

콰직!

니케가 도끼로 열심히 나무를 팼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마른 체형임에도 근력과 기술이 대단했다. 작업물이 금방 쌓여갔다.

한편, 그윈은 그 옆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산딸기를 씹어대고 있었다.

'캬, 일 잘하네. 사람들은 왜 저런 바보 놈을 무서워하나 몰라. 저렇게 멍청한데.'

비가 억수처럼 내리던 날, 산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친 그윈은 우연히 니케를 만났다.

흉흉한 소문과 달리 니케는 그윈을 잡아먹지 않고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이 일로 그윈은 니케가 소문만큼 위험한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실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바... 니케는 악마니, 마녀의 새끼니 같은 말보단 바보가 더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조금만 머릴 굴려 구슬리니, 일도 잘하고 말도 고분고분 잘 듣게 만들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우지끈!

고작 몇 번의 도끼질 만에 또다시 커다란 나무가 넘어갔다. 니케는 저 별거 아닌 몸으로 장정 몇이 덤벼야 겨우 해낼 일을 순식간에 해냈다.

'일은 저놈이 다 하고 돈은 내가 벌고. 진짜 이러다 금방 떼돈 벌겠어.'

그윈이 니케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니케! 힘내라! 이 형님이 마을 가면 과자 사줄게!"

"고기!"

* * *

순식간에 할당량을 끝낸 니케는 큰 나무를 거뜬하게 짊어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신체 능력은 아니었지만 그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힘만 센 무식한 녀석이라 여길 뿐.

니케는 잠시 기다리라는 그윈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니케는 쪼그려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윈이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뭘 그렇게 재밌게 봐? 개미 구경?"

니케가 보는 것을 확인한 그윈이 눈을 찌푸렸다. 오래된 다람쥐 사체에 개미가 가득 꼬여 있었다.

"...."

2주 정도 알고 지냈음에도 여전히 니케의 생각과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끔은 정말 섬뜩하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이 마녀의 새끼라고 부르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면모가 언뜻언뜻 보였다.

물론, 지금처럼 자기 말 잘 듣고 일만 잘해 준다면 살인을 저질러도 상관없는 일이다.

"니케. 우리가 2주 동안 번 거 나눌 시간이야."

니케가 벌떡 일어났다. 세상일에 무심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좋냐?"

"부자!"

"그래. 너도 돈이 좋긴 한가 보네. 자 받아."

그윈이 니케의 손에 돈을 떨어뜨렸다.

니케가 제 손바닥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기대했던 액수가 아니었다.

"동. 하나."

"어. 동화 한 닢. 2주 동안 네가 번 몫이야."

실제로 번 돈은 훨씬 많았지만, 나머지는 그윈이 꿀꺽한 뒤였다. 그는 처음부터 니케와 공정하게 몫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

"장작. 오십. 은화. 많이."

니케가 그윈을 노려봤다.

날카롭게 변한 눈매와 일변한 분위기가 섬찟했다.

"...그걸 다 세고 있었냐?"

"부자."

"이 자식아. 응?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양심 없는 짓이지. 너는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다녀서 백날 나무를 패 봤자 내다 팔 수 없다고. 근데 이 형님이 좋은 마음으로 해 주는 거잖아. 그럼 당연히 내가 버는 돈이 많아야지."

"금은."

니케는 여전히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동작이었다.

'멍청한 새낀 줄 알았는데.... 마냥 부려 먹긴 힘들단 건가? 어이가 없네.'

"하아. 이 새끼 봐라. 알았다. 알았어."

그윈이 인심 쓰듯 니케의 손 위에 동화 두 닢을 더 얹어 주었다.

"됐지?"

그윈이 히죽 웃으며 니케를 보았다. 니케는 여전히 만족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화만 더 돋우었다.

"부자."

"야이 씹. 이 새끼야. 장작 좀 팔았다고 금을 어디서 구하냐? 뒷산을 싹 다 밀어도 구경도 못 하겠구만."

"약속."

니케는 물러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윈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는 게 참 거슬렸다.

"...좋게좋게 말하니까 못 알아먹냐? 응? 등신 새끼면 적당히 내 말에 따르라고. 생고기나 처먹는 짐승 새끼를 좋은 마음으로 구제해주려는데 어디서 눈을 부라려?!"

"약속. 불응. 죽음."

"하, 은혜도 모르는 짐승 새끼가...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그윈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뭔진 몰라도, 니케가 자신을 협박한다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느껴졌다.

"죽음? 지금 나 죽인다고 협박하냐? 어?"

"금은. 약속. 불응. 죽음."

"야. 돌았냐?"

정색하며 화를 냈지만.

분노는 곧 공포로 바뀌었다.

"금은. 약속. 불응. 죽음."

"금은. 약속. 불응. 죽음."

"금은. 약속. 불응. 죽음."

"금은. 약속. 불응. 죽음."

"금은. 약속. 불응. 죽음."

"금은. 약속. 불응. 죽음."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2화

002. EP1 ― 남자 마녀 (2)

* * *

니케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무감정한 표정.

고저 없는 음성.

그윈은 이 은발의 소년이 진심으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내심에 한계도 왔다.

"...이, 이 씹새가 진짜!"

그윈이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웠다.

서슬 퍼런 도끼날이 번뜩였다.

"야. 네가 무슨 마녀의 자식이야. 응? 지랄 말라 그래! 너 같은 바보 병신이 뭐가 두려워!"

머리끝까지 도끼를 들어 올린 그윈이 니케를 비웃었다.

"마녀? 지이랄하고 있네. 마녀의 새끼면 뭐 어쩔 건데! 마법이라도 쓰게? 해 봐. 해 보라고! 힘만 센 새끼 주제에. 니 새끼도 도끼질 한 번이면―"

그윈이 니케의 정수리에 도끼를 내려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죽음."

회색이었던 니케의 눈동자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동그랗던 동공은 십자 형태로 찢어져 기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드드드득!

진홍의 시선이 닿자, 그윈의 검지와 중지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부러졌다.

"끄, 끄아아악!"

삽시간에 벌어진 상황. 그윈이 발작하더니, 도끼를 왼손으로 쥐고 다시 내려찍었다.

"꺼헉...."

하지만 도끼보다 빠르게 니케가 그의 뺨을 후려쳐 버렸다.

그윈은 바닥에 엎어져 기절했다. 숨은 붙어 있었다. 다만 니케가 사람을 죽인 것처럼 보일 뿐.

"꺄아아아악!"

그 모습을 지나가던 마을 아낙이 우연히 목격했고, 여인은 빨랫감을 집어던지고선 마을로 달려갔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여간 쉽지 않은 탓이다.

그간 겁을 주어 쫓아낸 적은 많았는데, 이렇게 들러붙고 사기를 치고도 덤비는 놈은 처음이어서 니케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비."

니케가 눈살을 찌푸렸다.

멀리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사냥이 성가시다. 감상은 그뿐. 더 늦기 전에 오늘 사냥을 마쳐야겠지.

잿빛 머리 소년은 쓰러진 사기꾼 녀석을 내버려 두고 펄쩍 뛰어 산속으로 사라졌다.

* * *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방울.

우중충한 낮 하늘.

제국 어딜 가나 이즈음이면 우기였기에 비가 내린다.

거센 비를 뚫고 들어온 검은 옷차림의 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자라도 되는 양 허릴 굽신대며 마을 회관으로 안내했다.

촌장이 벌벌 떨며 말했다.

"주, 주신의 발아래 입을 맞춥니다.... 마녀 사냥꾼 나리... 제발 산속 마녀를 쳐 죽이고 저희를 지옥에서 건져주십시오."

떨리는 손과 음성.

두 마녀 사냥꾼은 회관을 둘러본다.

다른 주민도 촌장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을?

"사, 산속에 마녀의 새끼가 삽니다.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가축의 간을 빼먹고 피를 마시고, 사람의 피로 강을 물들여 목욕하는 놈입니다...."

회관에 사람들이 더 모이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진다.

몇 없는 촛불에 의지한 채, 촌장의 얘기는 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그놈... 아니, 그것은 사람을 먹습니다."

그때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은 지저분하며, 얼굴엔 흉터가 맨살보다 많은 중년의 사냥꾼이 촌장의 말을 끊었다.

"잠시. 방금 뭐라고 하였소?"

"예...?"

"그놈이라니."

촌장은 '그놈'이란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던 중년 사냥꾼의 조수가 대신 물었다.

"성별을 지칭하는 얘기예요. 마녀의 새끼, 즉, 어린 마녀라고 얘기를 하셨는데, 그놈이란 말은 남성을 뜻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촌장은 대답이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식은땀 그리고 불안한 호흡.

금발을 단정하게 땋은 또 다른 사냥꾼이 촌장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인지하곤 친절히 풀어 설명했다.

"교단에서 정의하는 『마녀』란, 악신의 사악한 힘을 잉태하여, 그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제물로 바쳐 영생을 추구하는 '여성'을 뜻합니다."

즉, 마녀는 여자다.

그놈이란 지칭은 틀린 얘기다.

"아, 아아. 그렇군요."

촌장이 턱살에 고인 땀을 닦더니 눈썹을 구겼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명 남자아이입니다. 마녀의 자식이라구요!"

"흐음."

촛불이 흔들린다. 중년 사냥꾼의 얼굴이 그림자가 더욱 드리웠다.

'역시 개소리군.'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분별력 없는 무지한 인간들이 하는 헛소리만 듣게 생긴 것이다.

중년의 사냥꾼은 담배를 물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더는 이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 그의 조수이자 제자인 여인이 그 의지를 깨닫고 대신 조사하기 시작했다.

딱 보기에도 '마녀' 같은 건 없고 사람들이 부풀린 헛소문이겠지만, 의뢰를 받았으니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수첩을 펼치고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모았다.

"우선 어제 있었던 일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곧, 나이 마흔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아들을 붙잡고 나와 소리쳤다.

"이... 이것 좀 보십시오. 그 괴물이 제 아이의 손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윈! 어서 말씀드려!"

그윈이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푹 숙인 채, 어머니에게 이끌려 손을 내밀었다.

기괴하게 돌아간 검지와 중지.

어떻게 치료할 엄두도 안 나는 흔적에 로웬이 인상을 구겼다.

"넘어지거나 어디 찧은 게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아, 아니에요.... 분명, 니케 그 새끼가...."

그윈은 벌벌 떨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니케의 그 모습은 악몽과도 같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조여 왔다.

"마녀의 새끼라 주장하는 것의 이름이 니케인가요?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말씀하세요."

"그 새끼가... 제 손가락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막, 이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손가락이 부러졌다니. 그런 건 마녀나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니케라는 아이는 남자였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도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윈은 뜸을 들이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곤 사실대로 고하기 시작했다.

니케와의 첫 만남,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다가 일어난 다툼까지.

"저, 저런 겁도 없는 망아지 녀석!"

"미쳤지! 미쳤어!"

"마녀를 이용해 먹으려다 저주를 받았군...."

마을 사람들이 그윈을 손가락질했다.

니케의 잔혹성과 별개로 이번 일은 그윈의 자업자득이었다. 어른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로웬은 수첩에 들은 내용을 요약하곤 말했다.

"대충 사건은 알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얘기부터 하죠."

촌장을 필두로 사람들은 15년간 겪었던 기기묘묘한 일들을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15년 전, 임신한 아가씨가 이 마을에 찾아왔소. 살 곳을 내어 달라더군."

"당장 마을엔 빈집이 없었고, 산속에 버려진 폐가가 있어서 거길 대충 청소하고 지내게 했소."

모든 일의 시작은 15년 전, 시나인 마을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성.

이 위험한 세상에 혼자 다니는 여성이라면 충분히 마녀라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로웬은 수첩에 뭔갈 적어가며 경청했다.

마을에 나타난 여인은 산속에서 조용히 지냈다. 가끔은 약초를 캐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의학적 지식도 제공했다.

"귀족 집 혈통이었는지 참으로 고왔어."

아리따운 외모 덕분인지 마을 총각들이 여인에게 잘해 주었다고도.

다만, 촌장의 엄격한 관리 덕에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촌장은 그때부터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어딘가 불길한 기색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여인은 만삭이 되었고 출산 날이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번개가 치고, 비바람은 심하게 불었지. 꼭 말세 같았네."

"마을 아낙들이 여인의 출산을 돕기 위해 곁을 지키고 있었지."

새벽. 아이의 울음소리가 천둥소리를 뚫고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다고 한다.

"어찌나 컸던지... 나는 소릴 듣자마자 청년들을 데리고 산을 올랐소."

촌장이 이때부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기 시작했다. 뭔가 두려운 기억을 애써 꺼내는 사람처럼.

"그리고 거기서 보았던 것...."

쿠르르릉!

밖에서 천둥소리가 났고. 촌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건 인간이 아니었소. 갓난아기가 인간의 내장을 파먹는데 그게 어찌 인간의 아이겠는가!"

너무나도 생생한 증언에 수첩에 받아적던 로웬도 잠시 펜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 악마의 어미는 시체도 없이 사라졌고, 출산을 도왔던 아낙들은 죄다 죽어 있었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야."

촌장이 이야기를 마쳤다.

거친 빗소리가 회관을 두드리는 소리만 흘렀다.

로웬이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뒤론 어떻게 됐죠?"

"혼비백산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지. 겁을 먹곤 1년 가까이 그 근처로 가지도 않았네."

촌장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곤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본 거지. 산에서 돌아다니는 그 악마 새끼의 그림자를."

마을 사람들이 다들 몸서리를 쳤다.

"그 뒤로 우리는 그 악마 새끼와 불편한 공존을 했네. 쫓아내려고 몇 번 무기를 들고 갔었다만... 그때마다 무서운 일만 벌어졌어."

냇가나 우물이 피로 물든다거나, 가축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죽어 있다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니 마을 사람들도 저항하길 포기했다고.

"마을을 떠날 생각은 안 하셨나요?"

촌장이 탁자를 쿵! 내리쳤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이네! 60년간 이 마을을 지켜왔어! 그런데, 저... 악마 따위에게 겁먹고 터전을 버리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야."

"그런 거군요...."

심정은 이해한다.

힘겹게 일군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 한들, 이 마을 사람들이 정착할 만한 곳이 있을 리가. 어디가 되었든 이방인이 취급일 것이다.

"내 죽기 전에 그 악마 놈을 쫓아내고 말 것이오."

로웬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스승을 한 번 쳐다봤지만, 비고는 특별한 말 없이 눈만 감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이런 이야기야 흔해. 어딜 가나 있을 법한 마녀 괴담이라고.'

사소한 일에 이것저것 양념해가며 공포스러운 이야기로 꾸민다.

사람들은 어느덧 그것들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지어낸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녀 사냥꾼이 보기엔 그저 어리석은 일이다.

흔해 빠진 얼간이들의 응석.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어미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데.'

로웬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뒤로도 어미는 보지 못한 건가요?"

"맞네. 아마 악마의 새끼가 제 어미마저 먹어 치운 거겠지. 마녀가 낳은 악마라니... 끔찍하군."

로웬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지방이든 이런 류의 이야기는 존재한다.

신비로운 여인, 어느 날 자취가 묘연해지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까지 똑같았다.

'더 들을 것도 없겠어.'

허구다.

기껏해야 산속에 숨어든 마물의 소행을 부풀린 것.

저들이 주장하는 마녀의 새끼라면 적어도 '여아'여야 그나마 신빙성이 있다.

마법을 부린다고 말하면서 그 주체가 남자아이라면 들을 가치조차 없다.

대강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로웬이 수첩을 덮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마녀 사냥꾼 나리. 내 아직도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시오?"

"...뭐죠?"

촌장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때 그 여인의 자세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오."

* * *

조사가 끝났다.

비고와 로웬은 따로 나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어쩌죠?"

"음. 무시하기엔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군."

"다친 아이의 비틀린 손가락 형태가 이질적인 것과 모두가 어미의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게 걸립니다."

비고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갤 끄덕였다.

"정말로... 마녀일까요? 마녀의 새끼?"

"흐흐. 로웬 순진한 구석이 있군."

"예?"

"구린 구석이 있어도 마녀는 여자다. 아무리 기괴해도 저들이 말하는 주체는 결국 남자애지."

비고는 담배를 꺼뜨리며 말했다.

"세상에 남자 마녀는 없다."

"하긴.... 그럼 이제?"

"돈을 받았으니 확인은 해야겠지. 고작해야 환각 계열 마물이거나 산적일 테지만. 가서 사람들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3화

003. EP1 ― 남자 마녀 (3)

* * *

사람들이 안내한 곳은 시나인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거센 빗줄기도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우진 못했다.

15년간 참아 왔던 울분과 두려움이 마침내 폭발했다.

비록 그것이 마녀 사냥꾼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리 높진 않았지만, 막상 찾아오려면 제법 깊은 산속을 헤매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온 산속 남자아이의 집.

'정말 여기에 사람이 산다고?'

다 무너져 가는 오두막은 폐허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지붕엔 비를 막을 만한 구비가 갖춰지지 않았고, 잡초는 무성했으며, 나무 기둥엔 곰팡이와 버섯이 잔뜩 번식한 상태였다.

거기다 집 근처에 너저분하게 뿌려진 동물의 뼈.

'이게 다 무슨....'

그것이야말로 이것은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마물이나 짐승의 둥지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든 게 많았다.

로웬은 인상을 구긴 채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썩 나오너라 이 악마야―! 오늘 너의 죄를 묻겠노라!"

"나와! 죽여 주마! 내 아들의 원수야!"

"당장 나와라! 나오지 않으면 집에 불을 붙이겠다!"

"그냥 죽여! 불을 붙이라고!"

성난 시나인 주민들이 외쳤다.

횃불이 모여 분노를 형상화했다.

겁에 질린 개일수록 더 크게, 사납게 짖기 마련.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두 사냥꾼은 침착하게 문이 열리길 기다렸고.

끼익―

마침내 다 무너져 가는 소릴 내며,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그 어둠 속에서.

잿빛의 짐승이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여인, 로웬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나타난 것을 응시했다.

당연히, 흉측하고 무섭게 생긴 인간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영락없는 귀공자의 모습.

다 헤진 천 옷이나, 씻지 않아 꾀죄죄한 몰골을 제외한다면 누가 보아도 칭찬할 미남이었다.

소년은, 방금 잠이라도 깬 듯 눈을 비빈 채 하품했다.

"후암― 누구?"

"재밌군."

중년 사냥꾼, 비고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로웬에게 상황을 맡기고선 관망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마녀 놈아! 네 죄를 똑똑히 고하거라!"

촌장이 한 손엔 도끼를, 한 손엔 횃불을 들고서 말했다. 거리는 상당히 멀었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죄?"

번쩍! 번개가 쳤다.

소년의 비현실적인 외모가 온전히 드러난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콰르르릉.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잠깐의 정적 속엔 빗소리가 흐르고, 또 한 번 뇌운이 명멸했을 때.

로웬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저 얌전해 보이는 아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했을 거란 생각은 과한 추측. 갓난아기가 성인 여성을 죽일 가능성은 없어. 지어낸 얘기거나 악의적인 기억의 왜곡. 두려움에서 발로한 과민 반응. 하지만 가축의 간을 빼먹은 흔적이나 사람의 턱을 날린 것, 이 근처에 뿌려진 짐승의 뼈를 봤을 때 아이가 위험해 보이는 건 사실. 무엇보다... 저 아이, 풍기는 기척이 인간 같지가 않아. 대체 무슨 기운이지? 마녀? 아니야.... 애초에 마녀는 남자일 수가 없어. 불가능해. 남자애가 범인이라는 가정하에 추측해 본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산적 혹은 마물에 오염된 인간.

마녀는 아니어도 위험한 인물인 건 분명하다.

빠른 사고와 논리적 추납 끝에 로웬이 결론을 지었다.

"여러분 물러나세요."

그리곤 지팡이를 짚고서 절뚝이며 앞으로 나선다.

"정체는 모르지만, '저것'은 여기서 제압합니다."

"어서 빨리 죽여 주시오!"

키잉.

로웬이 지팡이의 손잡이를 비틀자, 날카로운 칼이 빠져나왔다. 선명한 검명이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소드 스틱이었다.

로웬은 망설임 없이 니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어?"

끼이익― 소드 스틱이 활처럼 휘었다.

정확히 니케의 목을 노린 검은 역으로 구부러져 검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기습. 공격."

두 마녀 사냥꾼이 니케를 보았다.

"어라...?"

"눈이?"

아까까지만 해도 순수해 보이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동자는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곳엔,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알려진 적도 없으며.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존재가 있었다.

콰쾅! 쿠르르르르릉!

아이의 탈을 쓴 미지의 존재가 재앙을 노래했다.

"기습. 공격. 적대. 죽음."

모두가 숨을 쉬지 못했다.

"죽음. 공격. 파괴. 저주."

불길한 말을 쉬지 않고 뱉는 소년의 머리칼이 너울거린다.

알 수 없는 불길한 힘이 그를 감싸고 있다.

"어, 어어...."

"마녀다. 진짜 마녀...!"

타닷!

다들 멍하니 충격받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에 누군가 번개처럼 질주했다.

비고였다.

'저놈은 위험하다...!'

뒤에서 방관하던 그는 상황이 순식간에 극도로 위험해졌음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휘익!

비고가 제자를 지키기 위해 달려와 소년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허?"

그러나 이번에도 소년을 향한 적의는 닿지 않았다.

비고는 강력한 결계 같은 것이 자신의 주먹을 막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움직임 자체가 막혔다.

보이지 않은 결계와 힘겨루기로 떨리는 비고의 팔.

소년은 살짝 고갤 기울이곤 싸늘하게 식은 붉은 눈동자로 비고를 응시했다.

"너도. 적?"

비고가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 경악했다.

'저 눈... 설마!?'

퍼엉!

그 순간, 비고가 뒤로 날아갔다. 로웬도 마찬가지.

그들이 쓰러지자,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선 불길한 단어들을 주워섬기며 다가갔다.

마녀를 화나게 했다.

기다리는 건 죽음뿐.

"어, 어어, 살려 줘...."

"제길! 당장 도망치시오!"

다시 일어선 비고가 주민들을 향해 외쳤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로웬!"

"여깄습니다!"

로웬이 검은 옷 안에서 파란 유리병을 꺼내 비고에게 던졌다. 두 사람 다 뚜껑을 열어 물약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우드득.

순식간에 근육이 부풀고, 감각은 예리해졌으며, 눈가엔 핏대가 바짝 올라온다.

마녀를 상대하기 위한 각성제.

제아무리 단련한 인간의 몸이라도, 마녀와 싸울 순 없다. 그렇기에 각성제는 마녀사냥에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마, 말도 안 돼...."

각성제를 마시면 평범한 눈으론 보지 못했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악신이 이 땅에 하사한 삿된 힘의 흐름.

마력(魔力).

마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리고, 마력의 움직임을 목격한 비고가 현실을 부정했다.

악신에게서 받는다는 부정한 에너지.

오직 마녀나 마물만이 품을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그 삿된 힘이....

소년의 몸속과 그의 주위에 돌아다닌다.

남자가.

마법을 쓴다.

남자에게.

마안(魔眼)이 있다.

'가능하다고?'

동공이 커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사고가 삐걱거린다.

믿을 수 없지만, 부정도 할 수 없다.

저 남자(男子)는 마녀(魔女)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비고가 소리쳤다.

"로웬―! 일단 저놈을 제압하는 데만 집중해라! 다른 생각은 접어둔다!"

"아, 알겠습니다!"

비고가 손을 허공에 뻗어 어둠을 그러잡았다.

그러자 어둠이 그의 손아귀에 뭉치더니 형태를 잡았다. 그림자로 이뤄진 대낫이었다.

"사내놈이 마녀라니.... 뭐 이런 기막힌 일이."

거의 모든 마녀사냥 의뢰는 사람들의 무지에서 벌어진 오해.

마녀가 있다고 해도 마녀 사냥꾼들은 믿지 않는다.

비고나 로웬도 같은 생각이었다.

애당초 퇴치 의뢰 대상은 남자였으니까.

남자는 마력을 잉태할 수 없다.

그 상식이 부서지는 순간, 충격은 곱절이 되어 다가왔다.

미지의 공포를 넘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상황.

고오오오오오오.

소년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압박감이 뿜어진다. 마녀에게서 느꼈던 살기보다 더 위험한.

로웬은 공포에 사로잡혀 싸울 의지가 흔들렸다.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흐흐흐...."

미쳐 버린 걸까? 비고는 이 상황에 어째서인지 웃고 있었다.

참방, 참방.

잿빛의 소년이 무섭게 거릴 좁힌다.

앞을 막는 모든 걸 죽일 기세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두 사냥꾼이 눈빛을 교환하고 거릴 벌리며 소년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뒤를 잡아 사각까지 들어온 로웬이 비수를 던졌다. 날아간 비수가 허공에서 뚝, 하고 멈췄다.

하지만 날아간 건 비수가 아니었다.

펑!

허공에서 멈춘 비수가 두 쪽으로 갈라지더니 녹색 연기를 뿜으며 터졌다. 마력을 갉아먹는 특제 연기.

"켁, 켁!"

연기를 마신 소년이 켁켁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 틈을 노련한 사냥꾼이 놓칠 리가 없다.

부리가 길쭉한 가면을 쓴 비고가 연기를 가르며 대낫을 휘둘렀다.

터엉!

대낫을 타고 느껴지는 강렬한 저항감.

"으그...."

소년은 침을 흘리고, 콧물을 쏟는 와중에도 붉은 눈만큼은 부릅뜬 채 비고의 대낫에 마법을 가했다.

"뭐 이런 독한 놈이!"

비고가 대낫을 버리고 왼팔을 뻗었다.

소년의 마안이 왼팔을 쫓았다.

우드드득!

왼팔이 기괴하게 뒤틀린다. 살가죽에 주름이 가득 생겨 찢어졌다.

"크윽!"

보통 사람이면 격통에 정신을 잃었겠지만, 비고는 베테랑 사냥꾼.

신체 일부가 날아가는 것쯤이야 익숙한 그는 왼팔을 내어준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고.

남은 오른팔은 찰나의 격차를 두고 소년의 복부를 가격했다.

"으걱!"

순간적으로 소년을 둘러싼 모든 마력이 흩어졌다.

찰나의 틈.

콱!

로웬이 그대로 달려와 니케의 어깨에 은검을 박아 넣었다.

"아, 으갸...."

증오 섞인 붉은 눈으로 두 사냥꾼을 노려보던 소년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잠시 후 마안이 사라지고, 잿빛 눈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 *

"흐억!"

비고가 땀을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로웬도 팔이 절로 떨리는 건 마찬가지.

"스, 스승님! 괜찮습니까!?"

간신히 날뛰는 소년을 제압한 두 사냥꾼.

비고는 왼팔의 뼛조각이 박살 난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비고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으으.... 술 좀 다오. 로웬."

"이 상처에 무슨 술입니까!"

하는 수 없이, 비고는 낑낑대며 멀쩡한 오른팔로 품 안에 든 독주를 꺼내 입에 털었다. 독한 술이 아니면 이겨내기 벅찬 통증이었다.

말 그대로 왼팔이 으스러졌다. 어디 한 곳이 똑 부러진 게 아니었다.

"젠장...! 이래서야 응급처치도 어렵고, 당장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됐다. 뭔 놈의 의사냐.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뼈가 붙겠다."

"그, 그럼...."

비고는 혀를 차며 바닥에 누웠다.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상처도 아니야. 단장에게 보여 주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로웬은 분하단 얼굴로 스승의 말에 수긍했고, 기절시킨 소년을 돌아봤다.

두 사람 다 아직 싸움의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손가락은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오싹한 기운은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마녀를 만났을 때보다 더한 후유증.

특히나 비고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어지간한 마녀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그다.

그런 남자조차도 소년을 보자 잠시나마 얼어붙은 것이다.

"미칠 노릇이군... 이놈은 대체...."

로웬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은검이.... 정말로 효과가 있네요. 마녀가 아니고서야."

"마녀... 남잔데 마녀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비고.

오히려 30년간 다양한 마녀를 보고 싸워왔던 그였기에, 남자 마녀가 주는 충격은 더 컸다.

"분명 몸에서 마력이 흘렀고, 마력 산화 연기를 마시니 괴로워했고, 은검을 꽂으니 무력해졌습니다."

"전부, 마녀의 특징이지...."

부정하고 싶지만, 모든 정황 증거가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켰다.

이 소년은 마녀다.

비고가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꾹 감긴 눈은 많은 것을 고민하는 듯했다.

"이제 어떡하죠. 이 녀석...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이대로 죽이는 게 가장 안전―"

"아니."

비고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죽이기엔 너무 아깝지."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4화

004. EP1 ― 남자 마녀 (4)

* * *

로웬이 눈을 크게 떴다. 태연하게 눈을 감은 스승을 노려보며.

"예...?"

"놈은 마녀야. 남자 마녀. 역사상 단 한 번도 보고된 적 없는 특이 체질이라고. 당연히 연구해야지."

"하지만 스승님의 말대로 마녀입니다!"

로웬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휙휙 빠르게 넘기더니 수첩에 적힌 한 구절을 따라 읽었다.

"투쟁의 원탁. 은검 교단 교칙 제8장 2조. 마녀로 확정된 존재는 이유 불문 그 자리에서 사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거 보란 듯, 수첩을 소리 내어 덮는 로웬.

그녀는 스승에게 교단의 원칙을 들먹이고 있었다.

"크흐흐. 로웬, 그놈의 교칙 운운은 질리지도 않느냐."

"규칙 없이 사는 건 마물이나 마녀, 들짐승밖에 없습니다."

단호한 로웬의 말.

비고가 클클대며 입을 열었다.

"교칙 제8장 9조. 읽어라."

"에?"

"어서."

"...교칙 제8장 9조. 마녀의 정체가 확정되지 않은 경우, 혹은 마녀의 이용 가치나 그 효용에 관한 검토가 필요할 시 포획 후에 본 교단으로 이송하거나, 보고 후 답변을 기다릴 것."

로웬이 얼굴을 붉혔다.

"다 외워 놓고 일부러 모른 척한 거 다 안다. 로웬."

"어― 어디까지나 최우선은 발견 즉시 사살입니다. 마녀의 위험성은 너무 크잖습니까. 거의 모든 상황에선 보고 후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로웬이 쓰러진 잿빛 소년을 툭툭 치며 말했다.

"특히나 이런 보고된 적 없는 사례는 더 조심하는 게 맞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비고가 앓는 와중에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역시. 그럼...."

"하지만 안 돼."

"그럼 바로 목을 베겠... 예?"

그는 죽겠다는 소릴 반복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부목도 대지 않은 팔이라 끔찍한 고통이 연이어 느껴졌다.

"윽, 아파 뒤지겠군.... 로웬. 교칙 제8장 9조를 누가 만들었지?"

곧 로웬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이젠 거의 포기한 듯 힘없이 대답했다.

"...스승님입니다."

"그래. 그 교칙, 내가 꼴리는 대로 쓰려고 끼워 넣은 법이다."

"하아."

"불만이면 너도 30년 동안 마녀 사냥꾼 해. 그렇게 좋아하는 교칙도 막 바꾸고 말이지."

"...그렇게까지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쓰읍― 그래, 넌 이런 거 하지 마라."

냉랭해진 제자의 눈초리를 가볍게 받아넘기며 그가 일어났다.

"일단 이놈을 안으로 들이고 얘기하자. 비가 영 그치질 않는군."

"...예, 부목도 가져오겠습니다."

로웬은 소년을 안으로 들이고, 스승의 팔에 부목을 대어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마쳤다.

그런 뒤 로웬은 주변에 다른 마물이나 마녀의 흔적은 없는지 수색하겠다고 허름한 집을 나갔다.

남은 사람은 은검에 찔린 채 구속당한 소년과 격통에 시달리는 비고였다.

비가 여전히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집 안은 짐승의 우리보다 더 더러웠고, 곳곳엔 썩은 내장 냄새와 뼈들이 가득했다.

문명인이 지낸 흔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비고가 눈을 질끈 감고 불평했다.

"제기랄... 진통제도 별 효과는 없군. 뼛조각이 신경을 찌르는 건가."

조금은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비고가 미지의 소년을 흘겨볼 때였다.

"으극...."

니케가 신음하며 눈을 떴다.

"뭐지. 어떻게 일어난 거냐."

니케가 극심한 두통에 머릴 흔들었다. 팔을 움직이려 드니 밧줄이 집 기둥에 묶여 있었다.

곧 눈앞에 있는 중년의 사냥꾼을 확인했고, 니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금방 사나워진 모습에 비고가 감탄했다.

'은검에 찔리고도 저렇게 빨리...? 뭐 이런 경우가.'

은(銀)은 그야말로 마력의 극상성.

이것이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 마녀나 마물은 고통스러워한다.

그것에 깊게 찔리는 날에는 며칠 동안 기절하고 회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지금 저 소년처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깨어나는 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죽인다! 살해!"

"워후~ 무서운 얘길 하는군. 지금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비고가 비웃자마자 꼭지가 돌아버린 니케가 몸에 힘을 줬으나, 생각만큼 힘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려고 하니 역으로 힘이 빠지고 고통만 더 강해졌다.

니케는 어깨에 꽂힌 은검이 원흉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발버둥 쳤다.

"으윽! 이거. 풀어라!"

"넌 정체가 뭐냐."

"죽인다!"

"어째서 사내놈이 마법을 쓰는 거지?"

"죽인다! 죽인다!"

"어미는 누구며, 뭘 하는 녀석이냐."

"나도 모른다! 나도 궁금하다!"

"...말이 안 통하는군."

대화의 여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니케 또한 말이 안 통하다 느끼는 건 마찬가지.

그는 당장이라도 이 짜증 나는 늙은이를 죽여버리기 위해 안구에 힘을 주었다.

"윽! 아앗! 이얍!"

"설마.... 마법을 쓰려는 게냐."

"죽어! 죽어라!"

"그렇다면 소용없다. 네 몸은 지금 마력을 쓸 수 없을 테니."

"크르르르."

니케는 입술을 뒤집을 기세로 비고를 노려봤다. 자기 몸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다.

"죽음! 살육! 토막!"

"흠...."

슬슬 상대해 주기 귀찮아진 비고는 날뛰는 니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놈이 진짜 마녀라면... 어미도 정말로 마녀였나?'

비고는 고갤 저었다.

'아니. 마녀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마력을 얻은 대가.'

그러나 막상 상식을 정면으로 부수는 눈앞의 존재 때문에 머리만 아파져 왔다.

설명할 수 없는 미지(未知)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며. 마녀가 강한 이유였다.

마녀나 악신에 관해 아는 것이 없기에 인간들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 앞에 무력하다.

미지야말로 마녀 사냥꾼의 가장 큰 적.

'알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

그런데 마녀보다 더 설명하기 힘든 아이가 있다. 그는 마녀보다 더한 미지의 영역에 속한 존재.

"죽인다! 물어뜯는다! 심장! 간!"

'마녀조차 놀라 자빠질 정도로....'

그 강하고 빈틈없는 마녀도 이 소년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연히 놀랄 것이며, 관심을 보이겠지.

남성이 마력을 품고, 다룬다는 것 자체는 절대로 깨지지 않았던 우주의 법칙이니까.

'악신과 마녀가 관장하는 법칙을 깨는 놈이다. 그런 놈을 다룰 수만 있다면....'

어쩌면....

제법 위험하고 발칙한 상상을 하며, 비고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비바람에 삐걱대던 문이 열렸다. 주변 수색을 마친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비에 흠뻑 젖은 후드와 머리칼을 털며 로웬이 비고에게 다가왔다.

"몸은 좀 어떤가요?"

"뒤질 것 같다."

망설임 없는 대답.

"살 만하군요. 다행입니다."

로웬은 안도했고, 이 순간에도 니케는 으르렁대며 속박을 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니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웬이 수첩을 꺼내 펜으로 뭔갈 적었다.

[저 애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어떡하고 싶나? 자네 생각이 궁금하군."

로웬이 니케를 보았다.

"아줌마! 죽인다!"

다시 수첩에 끄적이는 로웬.

[그냥 죽이죠.]

끌끌 대는 비고. 그는 길게 숨을 내쉬더니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놈을 사냥개로 기른다."

"...예?"

수첩에 적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로웬은 제 귀를 의심하고 이를 바득 깨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들었잖나. 저놈 저거... 마녀 사냥꾼의 재목이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로웬이 발끈했다.

"스승님! 말이 되는 소린 그만 좀! 농담이 지나칩니다!"

"말이 왜 안 되지?"

비고도 정색하며 제자를 쏘아봤다. 그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실없는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잘 생각해 봐라, 로웬."

남잔데 마법을 쓴다.

위험해 보여도 15년간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것은 딱 한 번.

그마저도 사정을 파헤치니 다친 청년이 먼저 사기를 쳤고, 공격해서 당한 정황 증거가 확실했다.

사람들을 끌고 쳐들어갔을 때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이 아니다.

"어떠냐."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 봤자, 마녀란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마녀지. 목줄을 채울 수 있는 마녀."

"스승님...!"

정말로 위험천만한 이야기.

스승이 매번 위험한 짓을 하거나, 과감한 전법을 쓰는 건 알고 있다.

그는 마물이나 마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얼마든지 갈아버리는 인간.

그렇다고 해도 선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녀를 사냥꾼으로 키우겠다니.

"이놈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어떨지 상상이 가나? 마법을 쓰는 마녀 사냥꾼이다."

이즈음 비고는 희열에 가득 차서 웃고 있었다.

그가 남은 팔을 들어 올렸다.

"저놈이라면 세상 모든 마녀를 죽일 수 있어."

스승의 눈에 깃든 광기에 압도된 로웬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로웬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비고는 듣지 않을 테니까. 그는 하고자 한다면, 황제가 막아도 할 인간이다.

"너와 나, 모든 죽어 간 사냥꾼들의 비원을 이룰 존재란 말이다. 로웬."

"그래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로웬은 강경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로 아니었다.

소년은 마법을 쓰는 마녀.

이런 놈을 동료로 삼고, 등 뒤를 맡기는 일 따위 그녀는 납득하지 못했다. 설령 스승과 척을 지는 일이 있더라도 막을 각오했다.

그런 그녀의 각오를 읽어낸 비고가 신음하며 등을 기댔다. 자연스럽게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 비고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후― 로웬. 나는 지쳤다."

노병이 고백한다.

"30년이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난 그 긴 세월을 마녀와 싸워 왔지."

목소리는 힘이 없고, 자조적이었다.

"정말 많이도 죽였다. 닥치는 대로 죽였어.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봐라."

얼굴엔 흉터가 가득하고, 관절은 삐걱거리며,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내 인생을 바쳤지만,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병 들고 늙었지만, 마녀는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다니지."

"...."

"30년 동안 싸우며 느낀 건― 인간은 절대로. 절대로 마녀를 이길 수 없다."

그토록 강해 보였던 스승의 고백.

로웬은 참담한 심정으로 위대한 사냥꾼의 나약한 모습을 마주했다.

"나 같은 놈을 100명을 데려와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아. 마녀는 강하고, 인간은 약하다. 개미가 발버둥 쳐도 코끼리는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잔인한 진실.

"나는 마녀를 세상에서 모조리 없애고 싶다. 로웬,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복수하고 싶을 텐데."

"...맞습니다."

"그걸 자네 힘으로 할 수 있겠나? 솔직하게 대답해 봐라."

로웬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 또한 외면하던 현실이며, 세상 모든 마녀 사냥꾼들이 느끼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괴물을 죽이기 위해선 괴물이 필요하다."

"...."

"지금 난, 그 괴물을 찾았다."

비고가 말한다.

"로웬. 고개를 들어라. 저 녀석을 봐."

크르르!

여전히 짐승처럼 울부짖는 잿빛의 소년.

"넌 저 녀석이 뭐로 보이지? 그저 힘이 조금 센 괴물? 인간? 아니.... 내 눈엔 세상 모든 마녀를 죽일 『구원자』다."

퍼엉!

그때였다.

비 내리는 바깥에서 폭음이 울렸다.

로웬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고, 곧 그녀는 호흡이 무너진 채 돌아와 소리쳤다.

"스, 스승님!"

"무슨 일이냐. 마녀라도 본 얼굴이군."

"큰일 났습니다! 마을이 불타고 있습니다!"

비고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그야....

아직도 지붕 틈새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중이었으니까.

* * *

비고가 아픈 것도 잊은 채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다 무너져 가는 집을 뒤로한 채, 언덕 끝에 서니 보이는 풍경.

"무슨...."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중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화마에 삼켜지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저렇게 큰불은 날 수 없잖아요."

비고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보통의 경우엔― 그렇겠지."

"보통의 경우...."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달려오느라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은 로웬이 점차 심각해졌다.

저 불은 보통 불이 아니란 소리다.

비가 이처럼 쏟아지는 날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물체를 태우는 불이라면 역시나.

"마녀...."

"혹은 마물의 짓이지. 뭐가 됐든 저건, 마력을 연료로 삼아 타오르는 불이다."

비고는 확신을 담아 얘기했다.

"누군가 불을 질렀군."

"대체 누가...."

로웬은 소름이 돋아 팔뚝을 매만졌다.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남자인데, 마법을 쓰는 남자 마녀를 만났고.

그 소년을 만나자마자 마을에 큰불이 났다.

그것도 빗속에서도 타오르는 불꽃.

마녀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로웬. 자네는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잠시 생각하던 로웬이 고갤 저었다.

"정황상 누군가 개입한 게 맞겠죠. 확률적으로도 말도 안 되고요."

그렇다.

누군가 이 모든 걸 지켜보다가 저질렀다.

그 말인즉슨.

니케라는 소년은 단순한 산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조금 더 거대한, 감히 예측하기도 두려운 비밀을 품은 존재가 틀림없었다.

비고는 수백 년간 돌아가지 않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로웬. 안에 있는 놈을 데리고 와라. 마을로 내려간다."

"...예. 알겠습니다."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5화

005. EP1 ― 남자 마녀 (5)

* * *

니케가 잉걸불 사이를 걸었다.

잿빛 머리와 잿빛 동공. 그 기묘한 외형은 그가 마치 이 잿더미 속에서 탄생한 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을에 남은 것은 없었다.

촌장의 집도 그윈의 집도....

재가 된 채로 빗물에 젖어 들어갈 뿐.

"모조리 불에 타 버렸군."

흑색 후드를 벗으며 비고가 말했다. 눈가에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물기가 남았는데 탈 수 있는 건지...."

"어지간한 마녀도 부리기 힘든 수준의 마법이지."

직접 와서 확인해 보니, 마을을 집어삼킨 불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컸고 치명적이었다.

잔불에 깃든 마력의 농도를 확인했을 때, 이 불을 낸 마녀는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

모르긴 몰라도 아주 위험한 마녀가 니케라는 소년과 연관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로웬이 어딘가 불편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스승님. 짐작 가는 거라도...."

"30년 간 마녀를 족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지금처럼 기기묘묘한 적은 나도 처음이군."

마법을 쓰는 남자아이가 발견되자 갑자기 불에 타 버린 마을.

범상치 않은 일임은 자명했다.

베테랑 마녀 사냥꾼의 직감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

두 사냥꾼이 니케를 보았다.

밧줄에 묶인 소년은 툴툴대며 잔불 위를 걷고 있었다. 맨발이지만 조금도 뜨거워하는 기색이 없다.

'화상 입은 발바닥이 곧바로 재생해.'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마녀조차 저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는 경우는 잘 없다.

"저 아이.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합니다. 지금이라도 후환을 없애야...."

"기회이기도 해."

비고는 검지를 세우고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는 오히려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스승님의 심정은 알지만! 알지만... 저 아이를 살려서 데려갔다간 무슨 참사가 벌어질지 모릅니다!"

하나, 마을이 불에 탔을 때부터 비고는 결정을 내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비고는 성질부리는 니케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놈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500년간 이어진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녀석이다."

"...."

로웬이 입을 다물었다.

안다.

그녀 또한 마녀 사냥꾼들이 걷는 미래에 희망 따위 없다는 것을.

해가 갈수록 마녀 사냥꾼의 수는 줄고, 교단의 규모는 축소된다.

그러나 마녀는 건재하고, 마물의 군락지는 줄어들긴커녕 늘어만 가는 추세.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마녀에게 동생이 죽임당할 때부터 좌절했고, 마녀 사냥꾼이 되어서도 이길 수 없음은 각오한 바였다.

따라서 비고의 의견 자체는 동의하는 중이다.

니케가 철저하게 비고에게 충성하고, 다룰 수만 있다면 교단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비밀 병기가 탄생하겠지.

마녀 사냥꾼에겐 너무나도 거대하고 위험한 적인 마녀를 상대로 유일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존재.

그들의 심장에 칼을 꽂을 변수.

'...어디까지나 말을 듣게 할 수 있을 때의 문제지만.'

"놔라! 죽인다!"

로웬은 여전히 날뛰는 니케를 보며 고갤 저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갓난아이 때부터 산짐승으로 자란 녀석을 대체 무슨 수로 인간 사회에 적응시키고, 마녀 사냥꾼으로 훈련 시킬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힘든 싸움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로웬, 안 그런가?"

"...잘 모르겠습니다."

제자의 솔직한 대답에 스승이 웃었다. 지금은 말해 봤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비고 본인조차 자기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뱉는 건 아니었으니까.

단지 직감에 의존한 추측일 뿐이다.

그 직감으로 비고는 30년을 버텨왔다.

"저 아이로 마녀의 씨를 말릴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키울 거야."

"그게 될까요? 만약 저게 정체를 숨긴 마녀라면 역으로 저희가 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되게 만들어야지. 그런 위험은 감수하는 거다. 애초에...."

비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저 아이는 어차피 언젠가 마녀의 손에 넘어간다. 마법을 쓰는 남자애가 마녀의 손에 들어갔다간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

"그럴 바엔 우리가 데리고 감시하는 게 낫다. 역으로 사냥개로 키우는 거야."

로웬은 말이 없다.

스승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지만, 그녀의 눈에 니케는 여전히 흉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스승의 결정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혼자서라도 지켜볼 생각이다.

"근데. 어떻게 저 애를 설득하죠? 얌전히 따라오고, 사냥꾼이 되겠다고 하진 않을 텐데."

비고가 동의하며 턱을 긁었다. 그를 데려가겠다는 의지와 별개로 니케를 설득하는 건 큰 난관이다.

"설득은 필요 없다."

"예?"

"사냥개는 그저 목줄을 채우고 몽둥이로 패면 그만."

"설마...."

로웬은 스승의 광기 어린 눈을 읽었다. 섬뜩할 정도로 날이 서 있는 눈이었다.

"마녀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한다. 설령 저놈에게 원수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 * *

비고와 로웬이 니케를 보며 돌아섰다.

니케는 여전히 적개심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자― 건방진 꼬마야. 협상의 시간이다."

"닥쳐라! 죽여 버린다!"

꾸욱.

"으갹! 아아아악!"

비고는 사정없이 니케의 어깨에 꽂힌 은검을 깊게 찔러넣었다.

니케가 발작하며 몸을 떨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길한 감각, 무기력함이었다.

"난 평화주의자거든. 하지만 네놈이 계속 짐승처럼 짖어대기만 하면 폭력을 쓸 생각이다."

"크으으!"

여전히 으르렁대지만 덤비진 않는 니케.

"좋군. 대화를 시작하지."

니케가 말이 없자, 그것을 대화 동의로 받아들인 비고가 급격히 정색하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잘 들어라. 네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그는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하나. 네놈의 정체가 뭐건 간에 명백히 마법을 쓰는 삿된 존재. 교단의 법에 따라 이 자리에서 즉시 처형할 권리가 내게 있다. 이게 너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선택지."

실로 불합리한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는 비고. 니케는 증오 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둘.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교단의 사냥개가 되어라. 마녀 사냥꾼이 되는 거지. 이게 두 번째 선택지다."

"닥쳐라!"

당연히 니케는 어느 것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비고의 목을 물어뜯어 죽여버릴 생각만 가득했다.

빠악!

비고는 그대로 니케의 복부를 무릎으로 찍었다. 고꾸라진 니케를 발로 걷어차고 머릴 짓밟았다.

"크윽...! 죽인다! 죽인다!"

"죽이고 싶나? 날 죽이고 싶어?"

"으아아아아아!"

분노로 이성이 날아가려는 니케의 귀에 대고, 비고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그럼 나와 계약해라. 내게 충성하여, 마녀사냥을 끝마치는 날, 내 목숨을 네게 주마."

"크으...."

뺨이 눌린 니케가 잿물을 마시며 비고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늙은 사냥꾼은 자길 따르지 않으면 정말로 니케를 죽일 생각이다.

그럴 힘도 있다.

남자는 강하다.

빌어먹을 은검 때문에 싸울 수단도 없다. 완벽한 진퇴양난이었다.

"계약해라. 어차피 네놈은 여기 남아 봤자, 마녀에게 발각당해 평생 인체 실험이나 당하다가 죽을 운명. 그럴 바엔 내 밑에서 구르는 게 훨씬 나은 형편일 거다."

"스승님...."

어린 남자애를 심하게 몰아붙이는 모습에, 니케를 마녀라고 생각하며 경계하던 로웬마저 괴로워했다.

"방해하지 마라."

그러나 이미 광기에 물든 스승은 말릴 재간이 없었다.

"자, 대답."

비고가 니케의 머릴 아예 진흙에 처박으며 물었고.

"으걱! 끄으!"

기포가 한참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니케가 바닥을 때렸다.

"푸하―!"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니케.

잿물로 뒤덮인 니케의 얼굴 위로 흰자위만이 서슬 퍼렇게 드러났다.

니케는 세상 모든 증오를 담은 눈으로 비고를 노려봤다.

"죽인, 다."

"하겠나?"

이가 부러지도록 턱을 꽉 무는 니케.

"...싫다."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설령 여기서 이 남자에게 죽는다 해도 누군가의 개로 살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고가 니케를 잡아 일으켰다.

"강단이 있군. 마음에 든다."

그는 아까보단 약간 풀어진 말투로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네놈의 정체, 사라진 어미. 그것이 궁금하진 않나?"

순간 니케는 그의 말에 반응했다. 비고는 그의 잿빛 눈동자를 뚫어지게 보았다.

"네놈은 분명 지능이 있다. 생각보다 훨씬 높지. 그렇다면, 너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있을 거다. 너도 모른다고, 너도 궁금하다고 했었지."

스쳐 지나는 니케의 발광 속에서 비고는 힌트를 얻었다.

"나와 함께 다니면, 너에 관한 걸 알아봐 주마. 애초에 네 어미도 평범해 보이진 않으니... 마녀를 찾아다니다 보면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고. 아니, 나는 확신하고 있다."

모든 사건 정황이 니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가리킨다.

바보가 아니라면, 니케도 알 것이다.

"...."

니케가 어느새 진정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짐승처럼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에겐 나름의 고민이 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란 무엇이며.

어째서 이곳에서 혼자 떨어져서 살고 있고 왜 남들과 다른가.

지난 15년을 산속에서 홀로 지내며 끝없이 고민하고 고민했던 것들이다.

너무나도 막연해서. 무기력하게 지냈던 날들이 막 변하려는 참이다.

이 기회를 잡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나'가 누구인가를 찾을 것이냐.

아니면 또 산속에서 홀로 지내며 고독하게 살 것인가.

선택의 기로.

혼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니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찾는다고. 약속. 해라."

"네놈과 관련된 걸 모조리 찾는 게 내 목적과 일치할 거다. 약속하지 않아도 할 생각이었다."

어느새 누그러진 긴장감.

놀랍게도 니케가 호의적으로 변했다. 로웬은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상황을 지켜봤다.

"나를 따르겠나?"

조금 더 고민하는 니케.

그는 비고가 자신의 밧줄을 풀어주는 걸 보았다.

"나와 함께 마녀를 사냥하며 네 존재를 알아보자꾸나."

비고는 이내 니케에게 꽂아둔 은검마저 뽑았고. 니케는 마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로웬은 마지막까지 긴장했으나.

"...한다."

니케는 우려와 달리 덤비지 않았다.

"좋군. 이제부터 네놈은 은검 교단의 마녀 사냥꾼이다."

"마녀... 사냥꾼."

니케는 멍하니, 자신에게 부여된 생애 첫 '소속'과 '정체성'을 곱씹었다.

얼떨떨한 얼굴.

얌전해진 강아지 같은 그를 보며 비고가 코웃음을 친다.

"자, 이제 너는 마녀 사냥꾼이 되는 거다. 앞으로 내 말에 복종하고, 마녀 사냥꾼으로서 훈련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거지. 이해했나? 네 생각만큼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고기. 황금."

"고기나 돈은 활약하는 만큼 준다고 약속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안다."

망설임 없는 시원한 대답.

눈빛은 이미 결의를 다진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복수한다. 방금. 모욕."

"하하하하! 좋지. 언제든지 환영이다. 훈련을 시켜 줄 예정이니, 그때 마음껏 갚아 봐라."

"죽인다. 비고!"

비고는 흡족하게 웃으며 니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뭐, 어쨌든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EP1 ― 남자 마녀

END.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6화

006. EP2 ― 악마를 보았다 (1)

* * *

빗속에도 활활 타오르는 마을.

그 위로 피어나는 자욱한 연기를 보며 한 여인이 고아한 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다 처리하셨나요?"

"예. 주민은 모두 죽였습니다. 목격자도 처리했습니다."

"...다행이군요.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달려오느라 체면을 많이 구겼습니다. 귀족적이지 못하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기품이 넘치십니다."

남자의 맹신적인 칭송에 여자는 감정 없이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칭찬엔 조금도 감흥이 없지만, 아리따운 미소는 남의 환심을 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기에.

그녀는 마을을 계속 응시하며 얘기했다.

"한데.... 하필이면 그 유명한 사냥꾼이 붙었다니, 참 곤란하네요. 저희끼리 죽이기도 불가능하니."

남자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비고라는 사내라면, 은검 교단의 실질적인 리더. 그들도 냄새를 맡은 걸까요?"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죠."

"그럼."

"조금 더 지켜보죠. 저들이 「제물」을 데리고 뭘 하려는지. 지금 바로 움직이면 오히려 의심만 살 테니까요."

남자가 고갤 끄덕였다.

두 사람이 다시 불타는 마을을 응시했다.

비에 젖은 매캐한 냄새가 이곳까지 흘러왔다.

"드디어 제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군요."

"예상보다 빠르지만,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 저희는 오더(Order)를 따를 뿐입니다."

* * *

불타 버린 시나인 마을을 뒤로하고, 세 사람은 여정에 나섰다.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산에서 야영하기로 한 저녁.

니케는 사냥에 성공했다.

니케가 토끼의 목을 비틀었다. 손톱으로 피부를 뜯어 이빨로 가죽을 벗기는 과정이 몹시 능숙했다.

평소 마물과 마녀를 사냥하며 온갖 못 볼 것을 다 봐 온 사냥꾼들이지만.

조금의 자비도 없이, 적나라하게 토끼를 사냥해서 손질하는 15세 소년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그다지 징그러운 광경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그 탓에 로웬은 비위가 상하고 말았다. 보고 있는 게 불편했다.

잔혹함으로 따지면 스승인 비고가 더 할 텐데.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라 그렇다."

제자의 안색을 살핀 비고가 한마디 던졌다. 그 또한 로웬과 비슷한 감상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형용하기 힘든 이질감을 똑바로 설명해주었다.

"날 것 그대로...."

"조금도 문명화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인 거지. 그것도 저렇게 어린애가 저러니 묘하게 불쾌할 수밖에."

"그, 렇군요."

과연 이런 아이를 마녀 사냥꾼으로 키울 수 있을까.

로웬은 니케를 반기지 않는다. 저런 모습을 보니 더욱 거부감만 생길 뿐이었다.

"아침 식사!"

"저녁이겠지, 이놈아."

비고는 니케가 직접 사냥해 온 토끼를 받으며 대답했다.

여러모로 행동이나 대화 방식이 평범한 인간과 달랐다.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한숨부터 나오는 대목이다.

비고는 감자를 깎고, 로웬은 불을 지펴 물을 끓였다.

별거 없지만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토끼 고기 스튜.

사냥꾼들은 질려 버린 음식이었으나 니케에겐 생애 처음 먹는 '조리된' 음식이었다.

"오오."

니케가 눈을 반짝이며 군침을 흘렸다. 두 사람은 뒤늦게 니케가 생고기만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고가 낡은 그릇에 스튜를 담으며 말했다.

"아아― 이것은 토끼 스튜라는 것이다."

"토끼. 스튜?"

"그래. 토끼 고기와 야채를 넣고 졸인 음식이지."

"츄릅."

침이 홍수를 이루기 직전이다. 비고는 안달이 난 니케에게 스튜를 주었다.

니케는 그릇을 받자마자 스튜에 손을 담갔다.

"아윽! 뜨뜨!"

니케는 바로 그릇을 놓치곤 방방 뛰었다. 손가락이 몹시 뜨거웠다.

"사기꾼! 살인자! 뜨겁다!"

"...무슨?"

"그걸 왜 손으로...."

비고와 로웬이 이마를 짚었다.

"아, 그렇군."

니케는 음식을 손으로만 먹고산 인간. 당연히 '수저'라는 것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조차 없는 아이였다.

"자, 이거랑 수저도 받아. 이걸로 이렇게. 떠서 먹는 거야."

"푸우― 푸우―"

막상 니케는 다시 받자마자 입으로 후후 불며 스튜를 게걸스럽게 마시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스튜에 익어 버려도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는 듯이.

"...."

"...."

생전 처음 보는 자연인의 광기에 두 지성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쿨쿨―"

"세상 모르고 자네요."

"음. 납치해도 전혀 모르겠군."

저녁을 먹은 후 니케는 빠르게 잠이 들었다.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예민해질 만도 한데 그런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어디든 흙을 베개 삼고, 구름을 이불로 삼아 잠들 수 있는 천하태평한 모습에 비고와 로웬이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나 경계심이 없을 줄이야.

"이렇게 순수해 보이는 아이가... 마녀라니."

로웬은 피곤해진 눈두덩이를 꾹꾹 문질렀다.

아직도 오늘 겪은 일이 믿기지 않았다.

마녀를 만난다는 사실 자체도 굉장히 드물고 극도로 위험한 일.

그런데,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남자 마녀를 만났다.

그것도 동료로 합류한 상태.

차라리 꿈이라는 게 더 현실성 있었다.

이런 감정은 베테랑인 스승도 마찬가지였는지, 냇가에서 대강 씻고 온 비고는 줄곧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돌아온 비고가 니케의 잠 든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로웬. 얘기나 하지."

"예? 아, 예...."

"할 얘기가 많겠지."

니케에게서 살짝 떨어진 두 사람이 살짝 목소리를 키웠다.

"많습니다. 아주아주 많이요."

"해봐라. 니케가 의심되니 죽인다, 버리고 가자, 제정신이냐 그런 소리는 빼고."

"네? 그게 단데요?"

로웬이 빳빳하게 고갤 세운 채 말했다. 비고는 피식 웃더니 고갤 저었다.

"의심되는 것도 사실. 위험한 것도 사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어쩌라는 거지.

로웬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하지만 말했듯이 니케는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해. 적어도 이 녀석의 정체를 알아낼 때까진."

"...그 말씀도 맞습니다. 마녀의 손에 넘어가면 너무 위험하니까요."

고개를 천천히 주억인 비고가 팔짱을 꼈다.

"일단 우리가 고려할 건 세 가지."

하나는 니케의 정체.

둘은 니케의 목적.

셋은 마을에 불을 지른 존재.

"정체는 당장 우리가 추측해도 알아낼 게 없다. 단장에게 맡겨야겠지."

"예. 감도 안 오네요."

"두 번째는 놈의 목적인데... 솔직히 나도 놈이 우리에게 일부러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곤 계셨군요."

"넌 날 뭐로 생각하나?"

아무 대책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미친 늙은이.

술주정뱅이에 아닌 척하는 호색한.

로웬은 이번에도 말을 삼키며 싱긋 웃었다.

"우리가 모르는 마법으로 외형을 숨긴 마녀라든가, 마녀의 사역마일 수도 있지. 이대로 교단에 무작정 데려가는 건 분명 위험하다."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

로웬이 비고의 얼굴을 보곤 그의 생각을 읽었다.

"...다음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겠군요."

"그래. 놈이 마녀나 마물이라면, 동족을 공격하진 않겠지. 죽인다고 해도 우리 손에 맡길 테니까."

"확실히 그 점을 살펴보면 적인지 아군인지 알겠네요."

비고가 고갤 끄덕였다.

"다음 마을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놈의 진의를 확인한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남자 마녀가 발견된 날.

하필이면 그의 존재와 과거를 아는 모든 이들이 살해당했다.

우연일 리가 없는 불가사의한 일.

"저 녀석을 지켜보는 무리 혹은 존재가 있다."

"가장... 걸리는 부분이죠."

"나도 그렇다. 마법으로 일으킨 불이라는 것도 그렇고, 왜 여태 가만히 두었는지도 의심스럽지."

로웬이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여러 단서들이 퍼즐처럼 흩어졌지만, 아직은 조립을 시작조차 못 할 만큼 혼돈 상태였다.

"만약 저놈이 마녀거나, 그쪽 편이면 다음 마을에서 우릴 습격할 수도 있다."

"대비해야겠군요."

"저놈 자는 얼굴을 보면 아닐 것 같지만, 준비는 해둬야겠지."

자는 모습이 천사 같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다.

마녀란 그런 식으로 인간을 홀려서 죽이는 족속. 베테랑 사냥꾼도 안전하다는 착각은 금물이었다.

"단장에게 까마귀로 연락해 둬라. 다음 마을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교단으로 돌아간다고."

"...정말로. 입교시킬 생각이신가요."

비고가 나무에 기댔던 등을 떼었다.

"당연하지. 놈이 설령 진짜 악한 마녀여도 목줄을 채워서 사냥개로 기를 생각이다."

로웬은 자러 가는 스승의 등을 말없이 쳐다봤다.

* * *

니케는 의외로 두 사람을 잘 따랐다.

오히려 평생 살아온 마을을 떠남에도 미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며칠 걸으니 니케는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했다.

원래 살던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발달한 곳이었다.

비고와 로웬이 보기엔 평범한 소도시였지만, 평생 시골 마을만 봐왔던 니케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도시를 도는 내내 니케의 고개는 잠시도 쉬질 못했다. 사방이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다리가 불편해 지친 기색인 로웬을 힐끗 본 비고가 그녀에게 말했다.

"로웬. 자네는 먼저 가서 숙소부터 잡고 쉬고 있게. 나는 요 녀석 옷부터 좀 사 입힐 테니."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녀는 니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살짝 허릴 구부리고 떠났다.

"자, 우리도 가지. 훌륭한 마녀 사냥꾼이 되려면 필요한 게 뭔질 아나?"

비고가 묻자 니케가 미간을 구기며 고민했다.

"허어어어. 으으으음. 고기?"

"든든한 식량도 좋지만, 좋은 장비가 필요한 법이다."

"오오!"

비고는 니케에게 낡아 빠진 천 옷 대신 후드가 달린 검은 망토를 사 주었다. 정식 사냥꾼 복장은 아니어도 최대한 비슷한 옷이었다.

니케는 영양이 부족했는지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아 보였다.

그 탓에 망토 밑단을 크게 잘라야 했고, 사람들은 니케를 나이보다 더 어린애로 보았다.

"어머. 귀여워라! 잘 어울리네."

드디어 사람 같아진 니케는 저잣거리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 그림 같은 외모를 칭찬하고 엉뚱한 모습에 호감을 품었다.

'남자이긴 해도 마녀는 마녀란 건가.'

비고는 조용히 니케를 관찰했다.

가릴 것 없이 사람을 홀리는 건 마녀의 특징이다.

물론, 유려한 화술이나 육체미 혹은 마법으로 유혹하는 게 아닌 생긴 것 하나만으로 저러는 것이니 의도한 것은 아닐 테다.

"고기!"

도시 구경을 적당히 시킨 뒤, 니케에게 양꼬치를 하나 물린 비고는 어딘가로 그를 데려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도시 외곽의 버려진 저택에 도착했다.

오래된 저택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이곳으로 오는 길조차 잡초로 뒤덮였으니 수년은 되었을 것이다.

비고는 그 낡고 으스스한 저택을 보며 담배를 물었다. 니케 또한 녹슨 철문 틈 사이로 저택을 구경했다.

"니케. 저 집, 어때 보이나?"

"음습!"

비고가 쿡쿡 웃었다.

그것보다 명확한 표현을 없을 거라며.

"정확하군. 감이 좋아."

비고가 니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니케는 그것이 귀찮은지 머릴 피하느라 애썼다. 그래도 비고가 계속 건들자 니케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죽음."

"...알았다. 예민한 녀석."

쩝, 손을 떼며 비고가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잘 들어라. 오늘 밤 마녀를 사냥한다."

"오!"

"애초에 우리 둘은 저 집에 사는 마녀를 잡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지. 겸사겸사 너희 마을의 이상한 의뢰까지 해결하려다 널 만난 거고."

니케는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낡은 저택만 응시하며 코를 킁킁댔다.

"뭐, 관심 없나. 어쨌든 오늘 네가 저 마녀를 잡아야 한다."

"싫다."

"뭐?"

비고가 귀를 의심했다. 싫다고?

"어째서냐."

니케는 귀를 파며 대답했다.

"귀찮다."

"...아니. 약속은 지켜야지."

"계약. 대가."

"아."

비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녀석.... 날 갖고 노는군. 뭐 좋다. 속아 주지.'

"대가를 받아야만 움직인다는 거냐."

끄덕.

"좋다. 상을 주마."

"상?"

니케가 갑자기 숨을 죽이고 눈동자를 빛냈다.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걸 잔뜩 먹여 주지. 잘 조리된 고기 요리, 과일과 디저트까지. 어떠냐. 맛보고 싶지?"

"맛있는... 음식...."

니케가 군침을 흘리며 다시 저택을 노려봤다. 눈빛이 제법 진지해졌다.

그는 한 덩이 남은 양꼬치를 왕, 베어 물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고기. 그리고?"

비고가 담배를 물고 파안대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식... 어리숙한 척 연기하는 것 같다고. 자기 몫은 절대로 잊지 않으며, 원대한 꿈마저 꾸고 있질 않나.

"당연히 돈도 준다. 네놈이 그렇게 좋아하는 금."

"학살!"

"흐흐, 정말 약아빠진 사냥꾼이로군."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7화

007. EP2 ― 악마를 보았다 (2)

* * *

니케는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체험했다.

잘 조리된 음식.

뽀송뽀송한 이불과 푹신한 침대.

무엇보다 뜨거운 물로 씻는 건 기가 막힌 경험이었다.

"거품!"

"가만히 좀 있어라!"

행동은 어린애 같아도 막상 몸뚱이는 어느 정도 큰 청소년인지라, 그를 깨끗이 씻기는 건 로웬이 아닌 비고의 몫이었다.

'이 나이 먹고 내 새끼도 아닌 놈 목욕이나 시키다니!'

비고는 문득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했다. 모든 게 부질없었다.

"이 자식! 다음부턴 꼭 혼자서 씻어라. 알겠냐!"

"생애. 처음. 목욕. 흥분!"

촤압! 물장구를 처맞은 비고가 이를 갈았다.

'나도 모르게 당하고 있는 걸지도....'

흔한 마녀의 수법이다. 당하는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마녀에게 이용당한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다 주다가 목숨마저 바치게 된다.

마녀에게 홀려 심장까지 내어 준 마녀 사냥꾼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

목욕을 마친 니케는 주인장이 올려보낸 따뜻한 음식까지 먹고 나서야 얌전해졌다.

식기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느라 로웬이 애를 좀 먹었는데, 좀 시도하다가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15년을 자연에서 지낸 짐승을 하루아침에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게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씻고, 식사까지 마치고 침대에서 잠이 든 니케.

두 사람은 니케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지친 몸을 소파에 묻었다.

"...내가 사냥꾼인지 보모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냥 버릴까요?"

로웬은 제법 진지했다.

연애도 못 해 본 꽃다운 나이에 덜컥 챙겨야 할 아이가 생긴 기분은....

단언컨대 최악이었다.

하늘이 붉은색으로 뒤덮일 무렵, 정신없이 잠들어 있던 니케를 로웬이 깨웠다.

"...점심."

"이제 저녁이야. 일어나. 사냥 준비다. 와서 보고 익혀 둬."

니케는 하품하며 로웬을 따라 나갔다.

거실로 나가니 거실 중앙 탁자엔 눈이 휘둥그레질 물건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보물?"

잠이 확 달아난 니케가 로웬 곁에 다가왔다. 지팡이 검을 장미 기름으로 닦던 로웬이 대강 대답해 주었다.

"사냥 도구야. 이걸 잘 정비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어."

"도구...."

니케는 멍하니 사냥 도구들을 관찰했다. 로웬은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다가 제안했다.

"해 볼래?"

"노력. 보상."

그렇게 말하며, 니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웬은 어이가 없어 살짝 웃었다.

스승의 말대로 이 아이는 묘하게 똑똑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연하게 '보상'을 언급하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기막혀.'

로웬이 도구 손질법을 알려 주자 니케는 묵묵히 로웬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천으로 닦는 일이라 사실 어려울 게 없었다.

니케는 도구들을 닦으면서 신기한 물건들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지팡이 검이나 투척용 나이프, 형형색색의 이상한 약병 등이 무척 많았다.

니케는 처음 보는 물건들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사냥 도구 정비가 끝났다.

비고와 로웬은 능숙하게 망토 안에 장비들을 장착했다.

"자. 니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일단 네겐 선택권이 없다."

"사기?"

"그건 아니고.... 마녀가 위험하다고 이 집에 남겨 두고 가진 않을 거란 얘기다. 왜냐면 너는 마녀 사냥꾼으로 키우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거니까. 공적을 쌓아야 하루라도 빨리 승진하고 부자가 되지 않겠나?"

"승진. 부자...."

니케는 곧장 수긍했는지 팔짱을 끼고 고갤 끄덕였다. 두 단어를 반복해서 입에 담았다.

"적어도 우리 둘 중 한 사람에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웬만하면 내 옆에 있고."

"비고. 안전."

로웬보단 비고가 훨씬 더 강한 사람이었다. 니케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니케가 고갤 끄덕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진 로웬이 니케를 째려봤다.

"좋군. 우리가 사냥하는 건 성격 좀 나쁜 짐승 따위가 아니란 것쯤은 알겠지?"

"마녀! 학살!"

"뭐... 보면 알 거다."

비고는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녀는 보통 사역마를 만들어 파수꾼 노릇을 시키지. 아까 그 저택에서 네가 느꼈던 음습한 기운 기억하나?"

"음습!"

"아마, 그 느낌이 그 낡은 저택을 지키는 파수꾼의 기척이다. 사역마를 죽이면 마녀도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거고."

굉장히 기분 나쁜 기운이 넘실대는 저택이었다. 니케는 거기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며 외쳤다.

"멍멍!"

"...?"

"뭐?"

로웬과 비고가 눈을 부릅떴다.

"멍멍!"

"갑자기 왜 개 짖는 소릴 내는 거냐?"

"3층에 머리 없는 멍멍이!"

"...뭐? 설마."

비고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는 흥미로움을 감추지 않았다.

"3층에 개가 있다는 거냐? 그 음습한 기운이 개였다고?"

니케가 고갤 빠르게 끄덕였다. 본 걸 그대로 답하는 거니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진짜 보였다고?"

"있다!"

"허어."

두 사람은 이제 니케가 거짓말할 녀석도 아니고, 지능이 낮은 것도 아니며, 오히려 영악할 정도라는 걸 안다.

고로, 니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로웬은 손톱을 깨물며 소파에 도로 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진 듯했다.

"...어이가 없네."

"굉장하군. 놀라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비고는 또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는 것도 잊고 그가 니케를 쳐다봤다.

"...마녀 사냥꾼도 사역마를 맨눈으로 보진 못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지. 하지만 넌... 그걸 볼 수 있구나."

"노력. 금은. 부자!"

비고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일어났다.

이 말도 안 되는 재능으로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줄지 상상만 해도 흥분됐다.

"흐흐, 흐흐흐.... 물건이군."

"물건. 아니다. 사람!"

보이는 걸 있는 그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다들 놀라워하고 칭찬한다.

늙은 사냥꾼의 형용할 수 없는 그 기쁨을 니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이들의 기대를 즐길 뿐이었다.

* * *

반쯤 몸을 숨긴 달이 밤하늘에 걸렸다.

살짝 가려진 구름의 그림자가 저택을 덮었고.

끼이이―

녹슨 철문은 곡소릴 내며 밤손님을 반겼다.

비고가 조심스럽게 우거진 덤불을 헤집으며 나아갔다.

니케는 후미에서 따라가는 중이었는데, 다리를 저는 로웬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다리. 불편."

"...응? 불편하냐고?"

로웬은 니케가 다시 고쳐 준 지팡이를 보여 주었다.

"어릴 때 마녀한테 당해서 이렇게 됐어. 불편하지만, 내 복수심을 매일 상기시켜 줘."

"다리. 불편."

니케는 로웬의 개인사엔 관심이 없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다리 병신이라 놀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든 로웬은 울컥하기까지 했다.

곧 니케의 의도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

"다리. 불편."

니케는 로웬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말에만 집중했던 나머지 로웬은 니케의 행동을 주목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웬이 실수를 깨닫고 뺨을 긁었다.

니케는 호의를 베풀었는데, 자신은 그걸 놀린다고 부정적으로 여긴 것이 부끄러워졌다.

'주위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잘해 주고 호감을 사는 건 마녀의 습성. 조심하자.'

그러다가도 아직 이 아이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존재란 걸 상기하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해도 꼬맹이에게 부축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했으면 마녀 사냥꾼이 되지도 못했어."

"상처!"

"...말은 고맙다만. 정말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로웬은 니케를 보더니 다시 그를 앞질렀다.

자기도 왜 '고맙다'고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아직 믿을 수 없는 놈인데.

'나 홀린 건가?'

로웬은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인지하지 못한 채 마녀에게 홀려 죽은 사냥꾼이 산더미일 것이다.

정체와 속내를 알 수 없는 꼬마.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니케를 보지 않고 말했다.

"멀어지지 마. 몰래 도망쳐 봤자 금방 잡을 수 있어."

언제 저 무채색의 동공에 현혹될지 모르니까.

"억울!"

어느새 저택 입구까지 도착했다.

비고는 시가를 태우며 문을 응시했다. 그리곤 무어라 욕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성가시게 됐군...."

고개를 들어 로웬을 봤다.

로웬 또한 아까 전의 여유는 사라졌다. 그녀는 긴장할 때마다 손톱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로웬. 일지를."

"네."

로웬은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내 비고에게 건넸다. 비고는 수첩을 빠르게 넘기더니 중간쯤 가서 멈추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로웬이 그 옆에 다가가 그가 펼친 페이지를 읽었다.

"입구에 새겨진 피의 장미. 사람들 속에 숨지 않고 오히려 찾아올 테면 찾아오라는 듯 홀로 저택에 지내는 패기로움. 은은하게 풍기는 유황 냄새. 머리 없는 개 사역마.... 전부 100년 전, 사냥꾼 힌센을 죽인 마녀의 설명과 일치하는군요...."

로웬의 머리를 넘기며 인상 썼다. 비고는 담배만 뻐끔대며 한숨을 쉬었다.

"욕심 많은 노괴지."

"...100년 전이면 3위계 마녀.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아니."

비고는 시가를 던지곤 품에서 은제 회중시계를 꺼냈다.

"모르가나 그것.... 단장이 일부러 나를 보낸 거다. 고약한 녀석."

"그래도 위험합니다. 역시 지원 요청이 낫겠습니다. 100년 넘게 산 마녀를 사냥할 땐 최소 2조가 투입되는 게 원칙이잖습니까."

로웬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트급 마녀라면 정말로 위험했다. 그런데도 생각보단 여유로워 보이는 비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비고라면 문제없겠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전혀 없다.

표정에서 비릿한 미소를 지워 낸 비고가 니케의 어깨를 짚었다.

"그래도 할 만하다. 우리에겐 비밀병기가 있으니까. 안 그러냐, 니케?"

"학살!"

니케가 용맹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니케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으엑!?"

콰당탕!

정신을 차려보니, 니케는 저택 안을 구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니케가 뒤를 도니 비고가 싱긋 웃으며 문을 닫고 있었다.

"...?"

"니케. 보수 협상 시간이다."

"하아?"

"저놈과 잘 싸우면 돈을 더 올려 주지. 황금에 보물까지."

"!"

고민은 금방 사라졌다.

아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잘 싸우면 고기와 황금을 얻는다.

그리고―

어느새 3층에서 1층 로비까지 달려온 머리 없는 개가 니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르르르르.

머리 없는 개가 낮게 울었다.

"크르! 왕!"

왜인지 니케도 짖었다.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8화

008. EP2 ― 악마를 보았다 (3)

* * *

"스, 스승님!"

비고가 니케를 저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년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제아무리 니케를 아직 의심하는 상황이라지만, 저렇게 혼자 내버려 두다니.

로웬이 보기에 너무나도 비인도적인 처사였다.

그녀가 니케를 마녀라 의심하는 마음과는 또 별개였다. 로웬은 이것이 교단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지, 인간적인 도의에 맞는 행위인지 속으로 저울질했다.

"왜 그러나."

"저, 저도 저 꼬맹이가 아직 못 미덥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웬은 아직 니케를 의심했다.

마법을 쓴다는 것은 마녀란 얘기.

마녀는 악하다.

불변의 법칙이자, 예외는 없었다.

니케가 남자인데 마법을 쓰는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이기보단 마녀의 실험체거나 속임수라 여기는 게 당장은 훨씬 합리적이었다.

여차하면 벨 생각이었다.

혹시나 배신의 낌새가 보이면 주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정작 비고는 로웬보다 훨씬 냉정했다.

얼마나 냉철한지 꼬마를 사지로 밀어 넣을 정도였다.

"무슨 소리냐. 저 애가 죽을 걸 걱정하나?"

"그럼요!?"

"난 반대다."

"네?"

비고는 담배를 물고는 사악하게 웃었다.

"걱정보단 저 애가 얼마나 날뛸지 오히려 기대되는데 말이야. 보수를 얼마나 줘야 할지 벌써 머리가 아프군."

"예? 대체.... 악!"

비고는 갑자기 로웬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그리고 잊었나. 저 녀석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하기로 했잖나. 아군이면 열심히 싸우겠지."

"그렇지만 그건 싸우는 도중 하는 행동을 관찰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 즉시 죽이기 위해서―"

비고는 담배를 꺼내면서 고갤 내저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냥 저기다 던져두면 알아서 죽이고 나올 거다."

"...?"

"놈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솔직히 나는 관심이 없어."

비고의 흉터 가득한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걸린다.

"적군이어도 목줄을 채우고 사냥개로 쓴다― 는 게 내 계획이다."

"아니."

로웬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과연, 수십 년간 살아남은 최고의 사냥꾼다운 발상이었다. 그만큼 범인(凡人)은 상상하지 못할 생각.

로웬이 떫은 얼굴로 멍하니 있으니, 비고가 턱짓했다.

"뭐, 정 걱정이라면 같이 들어가서 도와줘라."

"큿...."

로웬이 고민했고, 비고는 닫았던 문손잡이를 잡았다. 직접 열어줄 생각으로.

스릉. 로웬이 이내 문 앞에 서서 소드 스틱을 뽑았다.

로웬의 눈빛이 결연했다.

"열어 주시죠."

인간이 도덕성과 정의로움을 버린다면 마녀와 다를 게 무엇인가.

니케의 속내를 밝히는 건 사냥꾼인 내가 할 일이고, 처형도 내가 직접 한다는 로웬의 각오.

적군인데도 곁에 두는 건 그녀로선 용납할 수 없는 교칙 위반.

비고가 그녀의 올곧고 숭고한 의지를 확인하곤 문을 열어젖혔다.

―크르르르르르!

문을 열자 시체 썩은 내와 함께 소름 끼치는 괴성이 로웬의 얼굴을 엄습했다. 바람에 머리칼이 뒤로 흩날렸다.

문이 열리자 나타난 머리가 없는 하얀 개.

창백한 짐승은 몹시 컸다. 머리가 잘린 게 아니라 키가 커서 천장에 머리가 갈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헙...!"

가히 압도되는 풍경에 로웬이 헛숨을 삼켰다. 돕는 건...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히, 힘내! 니케!"

"오우!"

니케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응원하는 로웬.

니케가 고맙다는 듯, 주먹을 들어 보였다.

쿵.

이번엔 로웬이 직접 문을 닫았다.

"...휴."

비고가 옆에서 클클대며 웃었다. 담뱃재가 입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쾌하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미쳤어. 나 뭐 한 거야.'

로웬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곤 자기를 비하했다.

이렇게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꼬마를 던져 놓고 외면하는 추태라니.

방금 자기가 했던 각오는 마주한 공포 앞에 이리도 쉽게 꺼지는 촛불이었다.

사냥꾼이 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녀와 사역마는 극복하기 힘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주치는 순간 싸우겠다는 생각보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먼저 올라오는 건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 이 스승과 '오우!'하며 외치는 니케가 정상이 아닐 뿐.

"걱정하지 마라. 로웬. 저놈은 안 죽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글쎄...."

비고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직감이지."

"으, 으으으! 진짜! 난 바본가!?"

무슨 어른이 저따위냐고!

한껏 부끄러워진 로웬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용기를 내어 저택 문을 걷어찼다. 두려움마저 이겨내기 위해 물약까지 손에 쥔 채로.

낡은 문이 휘청거리며 젖혀졌다. 다시금 썩은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로웬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

그 커다랗고 무서운 사역마가 형체도 없어 터져 있었다.

* * *

크르르르!

하얀 개가 낮게 운다.

짐승 간의 싸움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

분명 위협적이다. 어지간한 인간은 보자마자 자지러져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래 봐야 니케에겐 고작해야 덩치 큰 똥강아지가 짖는 것에 불과했다.

"노력! 부자!"

니케가 생각을 지웠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다.

저택에 홀로 던져졌다는 사실에 당황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저 개를 사냥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부자가 되면 맛있는 고기와 빵을 먹을 수 있다.

고기와 빵은 맛있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크르르르릉!

하얀 개가 괴성을 흘리며 자세를 낮췄다. 니케의 목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니케도 낮게 자세를 잡곤 하얀 개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의 자세는 허술했다. 무서운 괴물을 상대할 기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개가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리했고,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크르릉! 멍멍! 왕! 왕왕!"

하얀 개에게 인간 소년의 울부짖음은 소형견의 하찮은 허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얀 개의 생각과는 반대로 니케의 모습이 점점 변화했다.

한쪽 눈동자가 붉어졌다. 쭉 찢어진 동공에 마녀의 사역마가 한순간이나마 기세가 꺾였다.

거기에 팔다리에 핏대가 바짝 서고 거짓말처럼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누가 짐승인지 인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크르르르!

쿠웅, 쿠웅!

성난 하얀 개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니케 또한 네 발로 뛰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니케의 붉은 동공이 허공 위로 뛰어오른 하얀 개를 포착했다.

하얀 개의 잘린 목에서 이상한 촉수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촉수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파앗!

니케가 빠르게 바닥을 박차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잘린 목에 연결된 촉수가 이때다 싶어 니케를 휘감으려 덤볐다.

콱!

니케가 자신의 목을 감으려는 촉수를 왼손으로 붙잡고 팔에 감았다. 그리곤 괴물이 반응하기도 전에 왼팔을 뒤로 꺾으며 잡아당겼다.

작은 체구가 반동으로 튀어 나가며 하얀 개에 순식간에 당도했다.

―크르르?

"왕!"

그 찰나의 순간, 니케의 붉은 눈은 빛났고 오른손은 비어 있었다.

퍼걱―!

하얀 개가 공중에서 터졌다.

마녀사냥에 필요한 숙련된 기술이나 함정 따위는 압도적인 힘이 없는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쏴아아!

먼저 바닥에 착지한 니케의 머리 위로 피의 비가 내렸다.

뒤늦게 떨어진 내장과 개의 사체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피의 비 한가운데서 잿빛의 소년이 포효했다.

"학살―――――!"

* * *

"어, 어어?"

로웬은 할 말을 잃었다. 충격에 어안이 벙벙했다.

니케가 사역마를 죽였다.

문을 열고 보니 사역마는 형체도 없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백여 년을 살아남은 마녀의 사역마다.

그 강함은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다.

마녀 사냥꾼 2개 조가 철저히 협공해야 안전하게 잡을 만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그런 괴물을....

니케는 손쉽게 죽여 버렸다.

고전하거나 난투를 벌인 것도 아니었다. 정말 짧은 순간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사냥을 완수했다.

사냥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소년이 부르짖는 것처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으니까.

괴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도망친 로웬의 모습에 비하면 너무나도 대조됐다.

'난... 난 대체.'

로웬이 복잡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비고가 담배를 꺼뜨리며 곁으로 왔다.

"흐흐. 이거 진짜 물건을 구했군."

"저 아이는 대체 뭐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비고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가 됐든 기대 이상이다. 안 그러냐. 로웬."

"글쎄요...."

로웬은 그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저런 괴물이 여전히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저게 마녀가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꿔 먹고 공격할 수도 있다. 한데, 스승님은 왜 저렇게 태연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니케라는 정체불명의 소년도.

능구렁이 같은 스승의 마음도.

'아직 방심할 순 없어. 나라도 경계해야 해.'

로웬은 침을 삼키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긴장을 풀다 마녀에게 속아 넘어가 죽어버린 동료들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야, 니케. 아주 대단했어! 역시 넌 마녀 사냥꾼의 재목이구나!"

"사냥. 봉급!"

"그래그래. 자기 돈은 또 기가 막히게 챙기는구나."

방금 그 실력이면 돈을 많이 받아도 되겠다고 칭찬하며, 비고는 하얀 개의 사체를 살폈다.

'마법의 흔적은 없다. 그냥 완력으로 터뜨린 건가?'

마녀의 사역마를 완력으로 터뜨리는 경우는 들은 사례가 없다. 니케에겐 무기도 없지 않았나.

'마법을 안 쓴다고...? 맞아? 대체 뭐지?'

비고가 니케를 보았다.

소년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방금 자신이 뭘 죽였는지 감흥이 조금도 없는 기색이다. 보통의 사냥꾼이라면 죽을 때까지 떠들어도 될 놀라운 공적이거늘.

'무엇보다 겁이 전혀 없다....'

괴물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물이 니케를 두려워했었다.

일렁이는 유열.

비고는 니케라는 사냥개가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환심이라도 살 겸, 비고가 니케를 더욱 칭찬해 주려던 그때였다.

비고와 니케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 또한 같은 장소였다.

―!

일순. 기감이 일어난다.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느껴지는 위험 신호였다.

"스승님."

로웬도 목소리를 낮게 깔며 비고 곁에 섰다. 굳은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사냥꾼들이 이렇게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오직 하나.

세상 모든 악의 원흉.

"...그래. 마녀다."

마녀가 온다.

마녀가 헌팅을 잘함 009화

009. EP2 ― 악마를 보았다 (4)

* * *

마녀(魔女).

그 짧은 단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정신이 붕괴하고, 손짓으로 불을 일으키며, 재앙을 초래한다.

마녀가 머무는 곳엔 잡초조차 살지 못한다.

'젠장....'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등장에 긴장감이 만연하다.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노련한 사냥꾼 둘을 긴장하게 만든 존재가 흐린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남의 집 개를 죽인 게... 당신들이야?"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놀랍게도, 유리처럼 반짝이는 긴 머리칼.

눈썹과 속눈썹, 눈알마저 유리로 박아 넣은 듯한 비현실적인 미형의 여인이 이쪽을 내려다본다.

거듭 관찰해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가 반파된 계단을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내려왔다. 걸음마다 죽음의 꽃이 피는 듯했다.

비고는 여인에게서 죽음의 향기를, 니케는 죽음의 향취를 맡았다.

머리가 쭈뼛 선다. 로웬 또한 송곳처럼 찔러 들어오는 살기를 경계했다.

비고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지시했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로웬. 뒤에서 보조해라. 그리고 니케? 이번엔 내 지시를 따라 싸우―"

쌔애액!

날카로운 소리.

허공이 번뜩였다.

"켁?"

예고도 없이, 뾰족한 유리 결정체가 날아와 니케의 이마를 꿰뚫었다.

니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크게 뜬 두 눈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다. 곧 그의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곧 움직임이 멎었다.

"흐음. 이거 곤란한데."

"아... 안 돼!"

니케가 선 채로 죽었다.

평소 감정 변화가 적은 비고도 이번만큼은 조금 당황했다.

"유리의 마녀...."

100년 동안 살아온 마녀의 마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위험했다. 준비 동작이나, 손짓마저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사람을 죽였다.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었다.

"시끄러운 개는 죽었고.... 남은 건 늙은 사냥개랑 햇병아리인가요?"

마녀의 스산한 눈이 두 마녀 사냥꾼을 훑었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집을 지키던 개가 죽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조금 놀란 마음에 나와본 것인데, 재밌는 것들이 마당을 어질러 놓은 것이다.

'저 늙은 남자는 위험해 보이고....'

멋대로 마당에 침입한 들개의 우두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을 찾아온 그 사냥꾼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힘이 약했던 터라, 조심히 접근하고 천천히 유혹하여 죽였었다.

하지만 과거와 지금은 엄연히 달랐다.

마녀 사냥꾼 둘을 해치우는 건 지금의 자신에겐 일도 아니었다.

유리의 마녀가 손짓하자, 니케를 꿰뚫었던 날카로운 유리 결정체가 소름 끼치는 소릴 내며 허공에서 생겼다.

"귀찮게 굴지 말고 죽어요."

"로웬. 훈련한 대로."

"네!"

로웬이 품에서 투척용 단검을 꺼낼 때였다.

유리 공에처럼 반짝이던 마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허, 이것 봐라?"

"...무슨."

비고도, 로웬도 마찬가지였다.

우드드득.

차가운 어둠 속.

목이 뒤로 꺾인 채 굳었던 잿빛의 형상이 좀비처럼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니케...?"

마녀의 마법 결정에 머리가 꿰뚫린 니케가 되살아났다.

비고와 로웬. 심지어 마녀마저도 당황한 순간.

콰아아아아앙!

팽팽했던 긴장감이 터져 나가며 광풍이 불었다.

시린 검명과 함께 빛이 번뜩였다.

급격히 일어난 먼지를 손으로 날리며, 비고와 로웬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상황 파악에 애를 먹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로웬이 제 눈을 의심했다.

막 품에서 꺼냈던 단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눈을 재빠르게 굴려 사라진 단검을 찾았다. 다시 단검을 확인한 곳은 다름 아닌 저 높은 계단 위.

"...으, 윽?"

마녀가 제 목에 박힌 단검을 매만지며 신음을 흘렸다.

눈 깜짝할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가녀린 목울대를 침범했다.

마녀는 제 목에 꽂힌 검을 손으로 만지며 이게 진짜 검인지 확인했다.

검날에 손끝이 베인다. 진짜 검이었다.

"무슨...?"

마녀가 동공을 돌려 앞을 보았다.

히죽, 웃는 앳된 얼굴이 보였다.

분명 머릴 뚫어 죽였던 소년이 번개처럼 날아와 제 목에 칼을 박은 것이다.

"마녀... 학살!"

그 의기양양한 모습을, 마녀도 비고도 로웬도 멍하니 지켜보았다.

먼지가 가라앉은 저택 안은 니케의 포효와 마녀의 신음만이 존재했다.

"어― 아, 컥컥."

마녀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될 일이 아닌데.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마녀가 흐려지는 유리안(琉璃眼)으로 잿빛의 소년을 응시했다.

"너...."

이윽고 눈이 커진다. 아이의 한쪽 눈동자가 이상했다.

진홍의 색.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별의 존재가 세상에 하사한 축복이자 마녀의 전유물.

그녀가 눈에 박아 넣은 유리안과 같은 마안(魔眼)이었다.

"마녀...? 아니―"

콰득!

마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니케가 마녀의 머릴 잡고 목을 돌려 버렸다.

승리를 만끽한 니케는 뒤를 돌아 비고를 보았다.

그리곤 피를 뒤집어쓴 얼굴로 해맑게 묻는다.

"지시?"

그 해맑은 물음에 비고가 뒤통수를 긁으며 말을 더듬었다.

"어, 그... 아, 아무것도 아니다. 잘했다. 응, 잘했어."

* * *

...마녀가 죽었다.

베테랑 사냥꾼 비고나 로웬이 활약할 틈이 없었다. 정신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니케가 마녀의 목에 칼을 박은 것이다. 마녀는 입과 목에서 피를 흘리며 스르르 무너졌다.

"마녀. 학살―!"

양팔로 만세를 하며 외치는 니케. 등진 모습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니케의 표정은 분명 의기양양했으리라고 로웬이 생각했다.

놀라운 상황이지만, 비고는 아직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숨을 죽이며 품 안에서 은색 회중시계를 꺼내고 있었다.

"스, 승님?"

"로웬. 내 뒤로 서라. 아직 마녀는 죽지 않았다."

노련한 마녀 사냥꾼의 말이 사실이었다.

목에 칼이 꽂혀 피를 한 웅덩이 쏟아낸 마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동자에 생기를 되찾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마녀의 몸이 기괴하게 삐걱거린다.

니케가 놀라 걸음을 뒤로 물렸다.

살다 살다 죽었다 살아나는 존재는 또 처음 보았다.

니케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괴물!"

니케가 놀란 가운데 새하얀 마녀의 주위로 마력 파동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챙, 챙―

되살아난 마녀가 목에서 칼을 뽑아 던지니 금속음이 계단을 따라 떨어졌다.

뒤이어 스산한 여성의 음성이 공기를 타고 선율처럼 흘렀다.

"꼬마야. 너... 뭐니?"

마녀가 고개를 들었다.

칼이 박힌 상처는 남김없이 치유된 뒤였다.

마녀 특유의 불사(不死)에 가까운 재생력. 마력이 존재하는 한 어지간한 상처론 마녀를 죽일 수 없다. 목을 돌려 버려도 뇌나 심장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마녀는 살아난다.

마녀는 쉽게 죽지 않고, 강력하며, 잔혹하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앞에서 맨정신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다.

저택 1층에 마력이 가득 찼다.

공기는 죽었고, 시체 썩은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정말로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마녀가 실력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악의가 강할수록 악취는 심해지는 법이다.

"니케! 도망쳐라! 위험해!"

비고가 황급히 외쳤다. 양손에는 그림자로 뭉친 칠흑의 대낫을 쥐고서.

그는 로웬은 밖에서 대기하란 명령을 남긴 채, 니케를 구하기 위해 저택 로비로 뛰어들고 있었다.

아무리 니케가 강해도 100년을 살아온 마녀를 상대로는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녀. 방금은 마녀가 방심했기에 성공한 일격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순식간에 저택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마력량이 엄청난 마녀다.

비고가 나서야만 했다.

키잉!

비고의 그림자 대낫이 날카롭게 울었다.

대응이 조금 늦었다.

그가 뛴 직후 마녀의 유리안 주위로 오색 빛이 튀었고, 저택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졌으며, 그대로....

콰, 콰아아아아아아앙――――!

무지갯빛 화마가 저택을 덮쳤다.

그것은 별의 힘이고.

재앙을 부르는 노래이며.

악신(惡神)에게 제물을 바쳐 얻는 죽음의 씨앗.

마법이었다.

* * *

"크윽!"

막강한 폭발에 저택이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

건물 잔해가 폭발에 비산하고, 기둥이 부러져 지붕마저 폭삭 내려앉았다. 무너진 저택 위로 반짝이는 유리 불꽃이 치솟았다.

그야말로 재앙.

인간은 저런 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반짝이고 날카로운, 물리적 실체를 가진 불꽃이라니.

이는 악신의 힘을 빌린 마녀만이 가능한 이능이다.

다행인 건 비고가 늦기 전에 빠져나왔다는 사실. 그는 검은 그림자를 몸에 둘러 마녀의 화염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스승님!"

"로웬, 괜찮으냐!"

"네, 전 괜찮습니다!"

비고가 로웬을 몸을 살폈다. 다행히 비고가 위기를 직감하고 밖으로 내보낸 탓에 로웬은 다친 곳이 없었다.

"젠장. 로웬, 바로 전투를 준비해라!"

"네? 니케는 그럼...."

"죽었겠지! 아무리 그 녀석이라고 해도 저런 폭발 속에선 죽었을 거다. 그보단 마녀가 먼저다!"

마력이 담긴 불꽃이다. 니케의 재생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나, 마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아직도 반짝이며 불타는 저택 안에서 마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칠게 일렁이는 마력의 흐름을 보건대 마녀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웬 침입자들이 기르던 사역마를 죽이고, 목에 칼을 꽂고, 집마저 불태우게 했으니....

이제 피를 보지 않고는 살아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비고의 매의 눈이 불길 속을 훑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들지 모른다.

"빨리 물약을 마셔라!"

그리 말하며, 비고는 녹색 유리병을 꺼내 벌컥 들이켰다. 로웬도 그를 따라 녹색 물약을 마셨다.

"크읍."

"하아, 하아."

두 사람의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가엔 핏줄기가 선명하게 돋아났다. 신체 능력이 극도로 상승하고, 안력이 강화돼 마력의 흐름마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저기!"

"...그래, 불길 속에 있군."

두 사람이 마녀를 목격한 순간, 마녀는 태연하게 불구덩이 속에서 걸어 나왔다.

처음 입었던 새하얀 드레스는 조금도 불타지 않은 그대로였다.

"유리 결정으로 불꽃마저 만들어서 부리는 마녀.... 로웬 긴장해라. 생각보다 더 위험한 년이다."

"예!"

"겁도 없이 또 덤비는 걸 보면, 멍청한 건지 자신이 있는 건지.... 내가 만만한가요?"

"만만한 게 아니라, 사냥꾼이니 덤비는 거다. 멍청한 년."

마녀의 날 선 말을 받아치며 비고가 자세를 잡았다. 기세가 훨씬 사나워졌다.

말하지 않아도 로웬 또한 그에 맞춰 전투 태세를 갖췄다. 손에는 소드 스틱이 들려 있었다.

"교단의 사냥개야. 오늘 밤은 너희들의 피로 포도주를 만들고, 그 혀와 눈알을 뽑아 입가심을 해 주마."

딱!

마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택을 태우는 유리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손가락 위에 모여들었다.

엄청난 크기의 무지갯빛 화염구가 사방을 밝혔다. 얼어붙은 별의 시체 같은 모양새였다.

실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치명적이다.

바닥에 깨진 저택의 유리 조각들도 함께 빨려 올라가 유리 폭풍을 만들었다.

긴 영창이나, 준비도 없이 불과 유리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100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싸움이 길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한없이 진지해진 비고가 달궈진 밤공기를 베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검은 잔상이 마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콰악!

다음 순간, 마녀의 가슴을 뚫고 반짝이는 불꽃을 두른 주먹이 튀어나왔다. 마녀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이윽고 피부가 불에 타고 찢겨 걸레짝인 된 탓에 튀어나온 동그란 눈알이 마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

"키히히히히히.... 사냥!"

로웬이 입을 틀어막았다.

니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온몸에 불이 붙어 살가죽이 녹아내렸다.

피부가 녹아 근육과 뼈, 안구의 형태가 선명했다.

눈알마저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니케는 기어이 마녀의 심장에 구멍을 내버렸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나?

아니었다.

그는 하얀 치아를 빛내며 웃고 있었다.

"너.... 어떻게...? 심장을 태웠는데?"

마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니케를 확인했다.

떨리는 눈동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 방황했다.

불길로 살가죽을 녹이고, 유리 파편으로 심장을 갈아 버렸다.

제아무리 강력한 마녀라도 마력을 보관한 심장이 파괴되면 살 수 없다.

규격 외의 존재에 유리의 마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야말로 미지에서 오는 공포였다.

"어, 째서...."

말을 끝맺진 못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서 마녀는 숨을 거두었다.

마녀는 어지간한 상처도 회복하나,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 니케는 정확히 마녀의 심장을 터뜨렸다.

니케의 불 주먹은 백여 년을 이어온 긴 생의 종말을 고했다.

니케가 팔을 뽑고 발로 밀었다. 마녀가 앞으로 고꾸라져 떨어졌다.

그녀가 바닥에 부딪히자 머리칼의 유리가 산산이 조각나며 바닥에 뿌려졌다.

콰쾅!

저택을 삼키는 불길이 더욱 몸집을 키웠다.

어두운 밤하늘을 저택의 아름다운 불빛이 밝혔다. 그 예술적인 화마 아래, 소년이 있다.

소년을 삼킨 총천연색의 불길은 차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온몸이 불탄 소년의 몸이 서서히 돌아왔다.

녹아내린 살점 위로 새살이 돋고, 튀어나온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다 타버린 머리칼은 금방 자라났고, 원래 그 모습대로 미형을 갖추었다.

비현실적이다.

기괴하나 아름다웠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비고와 로웬은 오늘.

EP2 ― 악마를 보았다

END

마녀가 헌팅을 잘함 010화

010. EP3 ― 은검 교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