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0화
돌아가는 길.
회군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비록 패잔병들의 군대라고 해도, 어지간한 마수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데다가. 악명 높은 놀 일족까지 동행하고 있으니 교전할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전투가 아예 없진 않았다.
이 모든 걸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존재가 더러 있었으니까.
"거어어얽—!"
눈이 먼 흉물에겐 두려움 따윈 없다.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박는 무모함과, 이를 뒷받침하는 재생력을 지닌 생명체.
흉물 다섯 마리가 돌진해 왔다. 그 모습을 본 놀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저놈들과 싸우는 건 싫은데···"
쟈카가 투덜거렸다. 녀석은 선봉장 역할을 맡을 만큼 용맹한 전사였지만, 흉물을 상대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마경이 낳은 골칫거리들. 흉물의 숨을 끊으려면 너저분한 싸움질을 해야 한다.
우진이 마체테의 칼날을 매만지며 말했다.
"보조만 해라.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
"그렇다면 나야 좋지."
쟈카가 씩 웃으며 꼬리를 부풀렸다. 직후 녀석이 힘껏 꼬리를 앞으로 휘두른다.
투화확!!
바람 터지는 소리와 함께, 꼬리에서 검은 가시가 여럿 쏘아졌다. 창날처럼 길쭉한 가시들이 흉물의 몸통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흉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쟈카의 가시는 몸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었다. 덕분에 멈춰 선 흉물들이 몸에 꽂힌 독가시를 하나씩 잡아 뜯어냈다.
저놈들이 가시를 다 뜯어내기 전에 처리해야 할 터였다. 우진이 마체테를 역수로 쥔 채로 흉물을 향해 돌진했다.
연습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거어얽!!"
흉물의 살찐 주먹이 휘둘렸다. 육중한 힘이 실린 주먹질. 저런 부류의 공격은 피하거나 받아 흘리는 게 최선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몸으로 때울 생각이다.
우진이 마체테를 방패 삼듯이 들었다. 흉물의 주먹이 정면에서 그 검면을 갈겼다.
콰아앙!!
강렬한 충격이 몸을 떠밀었다. 하지만 우진은 그 힘을 거스르듯 한 걸음 전진한다. 왼발에 중량화를 이용하여 무게를 끌어올린 상태.
그 발을 무게추로 써서 버텨낸 후. 우진의 시선이 적의 몸뚱어리를 한 번 훑었다.
'······옆구리.'
그곳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우진의 손가락들이 송곳처럼 흉물의 옆구리를 들쑤셨다. 오래지 않아 원했던 게 손에 잡혔다.
푸확!
옆구리 살을 한 움큼 잡아 뜯어내며, 흉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흉물. 놈이 우진의 등을 향해 손짓했다.
"그어어얽···"
힘없는 울음소리. 그리고 흉물이 햇살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이를 본 쟈카가 눈을 끔뻑인다.
'뭐지?'
방금 본 광경이 의문스러웠다. 흉물은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놈을 죽이려면 온몸을 마구 난도질해야 하는데···
저 사내는 너무 간단하게 흉물을 처리했다. 손으로 흉물을 한 번 들쑤시고 나면, 어김없이 놈의 몸뚱어리가 녹아내렸다.
순식간에 흉물 다섯을 처리한 후 돌아온 우진. 눈에 띄게 놀란 쟈카가 질문했다.
"저놈들을 어떻게 죽인 거냐?"
"내단을 뽑아냈다."
우진은 그리 말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흉물의 내단 다섯 개가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이를 본 쟈카가 재차 질문했다.
"내단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지?"
흉물은 각각 다른 위치에 내단을 품고 있다. 따라서 놈을 토막내며 내단의 위치를 가늠하는 게 유일한 사냥법이었다.
그 질문에 우진은 선뜻 대답했다.
"요령이 있다. 인간들이 쓰는 기예의 일종인데, 쉽게 터득할 순 없을 거야."
세 번째 눈, 심안.
우진은 실전에서 이 능력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심안으로 흉물이 품은 내단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것을 뽑아내어 단번에 죽인다.
'확실히 효율적이야.'
예전 같았으면, 흉물과 지저분한 싸움질을 하며 내단의 위치를 찾아가거나. 혹은 불벼락으로 지져 죽여야 했을 텐데. 심안이 생긴 이후로 흉물은 대수롭지 않은 적이 되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곁에 있던 로가르가 존경을 표했다. 이에 우진은 뭔가 무마하려는 듯 손사래 쳤다.
"로가르, 그냥 편히 대해라. 자꾸 나에게 예를 갖추는 것도 부담스러우니."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게 더 편하다."
한때 수호자니 뭐니, 거창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그때의 일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브락나크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 예를 표해도 그러려니 했으나···
우진은 이미 놀 일족을 떠났기에, 수호자라 부르며 예의를 표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 말하자 납득했다는 듯 로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그렇다면··· 편하게 부르겠다."
로가르가 말귀를 잘 알아먹어서 같은 말을 두 번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적이 있나? "
"없다. 냄새가 나질 않아."
그리 단언하는 로가르. 놀의 후각이 주변 지역의 안전함을 확인했다. 우진은 이에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휴식을 취할 때가 되었다.
"슬슬 돌아가자."
"좋지."
놀 두 마리와 함께 숙영지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우진은 방금 얻은 내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흉물의 내단.'
암흑 신관들은 흉물을 실패작이라 불렀다.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 찾아오는 비참한 파멸. 암흑 신관들은 흉물의 내단을 먹는 걸 가슴 깊이 꺼렸다.
지난날의 우진은 찝찝하더라도 흉물의 내단을 씹어 삼켰고. 덕분에 여러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이 내단을 늑대에게 먹이는 건 왠지 꺼려지는 일이었다.
"이거, 너희들이 먹을래?"
내단을 놀들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로가르와 자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쟈카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아까 그놈을 내 입에 집어넣고 싶지는 않다."
"나도 마찬가지야."
놀들조차 흉물의 내단은 먹지 않고 걸렀다. 우진은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 문득 손 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섯 개의 내단이 서로 들러붙으며 하나의 내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기이하군.'
잃어버린 몸뚱어리를 복원하기 위해, 다섯 내단이 힘을 합치는 듯한 모양새. 불쾌한 현상이라 우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뿌득!
손아귀의 내단이 으스러지며 검붉은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우진은 마법으로 불꽃을 불러내어, 손을 씻듯이 그 잔해를 태워 없앴다.
'흉물의 내단은 그냥 버려야겠어.'
너무 이질적인 점이 많은 생명체. 이놈의 내단을 취하는 건 삼가해야 할 듯하다.
그렇게 걷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숙영지로 돌아왔다. 우진은 곧 모닥불 옆에 앉은 롤랑과 놀 주술사 브로툴을 발견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이 친구에게서 수화를 배우는 중이라네."
우진이 없을 때도 놀 일족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 생각한 롤랑은 시간이 빌 때마다 놀을 붙잡고 수화를 익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롤랑과 함께 수업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녹색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사제.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였다.
'······저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좀 궁금했지만, 친분이 없다시피 한 사람이라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저녁이나 먹자.'
작대기로 모닥불의 장작을 밀어 치웠다. 그 밑의 흙과 잿가루를 파헤쳐서 둥그런 흙덩이 예닐곱 개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그 흙덩이의 겉을 툭툭 때려서 깨부수자, 속에 든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과 나뭇잎으로 싸서 구운 사슴 고기. 그것들을 먹기 좋게 썰어서 주변에 하나씩 배분했다.
"자, 롤랑 님도 받으십시오."
"마수 고기를 먹는 것도 슬슬 지겹군."
"어쩔 수 없죠. 줄곧 보급을 못 받아서 식량이 빠듯한 상황입니다."
우진은 그리 대꾸하며, 고기가 담긴 그릇 하나를 성녀 쪽으로 내밀었다. 세실리아가 엉겁결에 그릇을 넘겨받았다.
"······."
가만히 이쪽을 보는 세실리아. 이에 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좀 뜨겁습니다."
"······."
세실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릇의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포크에 찍힌 고기가 면사포 밑으로 한 점씩 사라졌다.
'아주 과묵한 사람이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여사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데다, 목소리를 들은 적조차 없었다.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운 모습.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걸까?
우진은 이에 호기심을 품었지만, 곧 관심을 끊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함부로 들춰내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까.
"이봐 진, 포도주가 좀 남아있지 않았나?"
롤랑이 고기를 씹으며 물어봤다. 이에 우진은 짐가방을 뒤적여 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에드윈 공작이 한때 즐겨 마시던 술.
브락나크는 원정군에게 노획한 사치품 중 일부를 우진에게 나눠줬다. 이 포도주는 그때 넘겨받은 물건 중 하나였다.
'비싼 술이라서 그런지 꽤 먹을만해.'
고기와 함께 먹으면 입맛을 돋우기 좋다. 우진은 롤랑에게 포도주를 따라준 후. 세실리아에게도 한 번 물어봤다.
"좀 마시겠습니까?"
여사제가 슬쩍 나무잔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포도주를 좋아하는 모양.
우진은 잔에 포도주를 잔뜩 부어준 후, 병을 한 번 흔들어서 남은 양을 가늠해 봤다. 얼추 3할 정도가 남아있는 듯했다.
'남은 두 병은 아껴 마셔야겠군.'
개척 도시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남은 식량을 아낄 필요가 있다.
그리 생각하던 중···
샤아아아—
성녀의 손에서 녹색 신성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의아해하던 찰나, 흙바닥에서 식물 하나가 순식간에 자라났다.
순식간에 자라나서 꽃과 열매를 맺는 덤불. 그것은 다름 아닌 라즈베리였다.
툭.
세실리아가 라즈베리를 하나 뜯어서 내밀었다. 우진은 홀린 듯 그것을 넘겨받았다.
"먹어도 되는 겁니까?"
그리 묻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라즈베리를 한 번 씹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이거··· 좋은데?'
우진은 크게 감탄했다. 단순히 맛만 좋은 게 아니라, 신성으로 축성된 과일이라 그런지 몸에 활력이 돌았다.
하나만 먹고 끝내기가 아쉽다.
"······조금 더 먹어도 됩니까?"
끄덕끄덕.
세실리아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는 듯, 덤불을 향해 연신 손짓하는 여사제. 덕분에 우진과 주변 일행들이 그 열매를 잔뜩 얻어먹을 수 있었다.
주술사 브로툴이 감명받은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대단한 주술은 처음 보는군요."
"브로툴, 이건 주술이 아니라 성법이다.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능력이지."
우진이 그리 설명해줬다. 하지만 브로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호자님. 제 식견이 다소 부족하긴 하나··· 이건 아주 오래된 주술이란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
지난번 돌다리를 만들 때도 그렇고, 성녀가 행한 능력은 신성을 이용한 성법이라 보기엔 좀 이질적이었다. 세실리아의 기술은 식물 그 자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마법이라 보기도 애매하다. 머릿속에 든 에녹의 지식을 들춰봐도, 이런 희한한 마법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법도, 마법도 아닌 기이한 재주. 우진은 이런 걸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다.
'마녀의 둔갑술.'
흑표범으로 둔갑하던 마녀. 그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암흑 신관인 건가?'
어쩌면 세실리아가 암흑 신관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곱씹어 보니 아예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암흑 신관이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할 리가 없는 데다, 세실리아가 암흑 신관이라면 보우의 심안이 그 정체를 간파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개척 도시에서 마주했던 적이 있으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나 보군.'
대충 그렇게 넘겨짚으며 라즈베리를 마저 먹었다. 굳이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후로도 세실리아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쪽 숙영지를 방문했다. 우진은 세실리아가 올 때마다 음식을 나눠줬고, 성녀는 이에 보답하여 신선한 과일을 선물했다.
그렇게 우진의 짐가방에 든 물자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즈음···
'······보인다.'
저 멀리, 지평선에 걸친 장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대로 된 장벽은 아니었고, 막 건설이 시작되어 담벼락처럼 높이가 낮은 돌벽이었다.
'제2 장벽.'
1차 원정군이 균열핵을 정화하여, 인류가 마경으로부터 되찾아낸 땅. 그 영토를 지키기 위해 건설 중인 새로운 장벽이었다.
이를 본 병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돌아왔다—!"
긴 악몽이 끝났다. 모진 고생 끝에, 2차 원정군이 교단 연맹의 울타리로 돌아왔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1화
원탁 회담. (1)
원정군과 함께 제2 장벽으로 다가갔다.
장벽의 주둔군이 패잔병들의 접근을 확인했는지, 곧 정문이 열리며 성기사들이 걸어 나왔다. 주홍색 망토를 두른 걸 보아 투쟁의 교단 소속의 성기사였다.
패잔병을 대표하여 콘라드가 나섰다. 꽤 오래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아무래도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분위기가 썩 좋진 않네.'
기사가 성난 눈으로 콘라드를 노려봤다. 대주교의 권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시선. 그럴 만했다.
이번 2차 원정은 콘라드 대주교가 나선 덕분에 성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일을 밀어붙인 후. 원정이 실패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질책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콘라드는 면목이 없단 듯 시선을 피했다. 그와 더 마주 서 있기도 싫은지, 성기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장벽을 향해 손짓했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린다. 패잔병들이 제2 장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슬슬 우리 차례로군.'
일행과 함께 장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연히 주둔군의 시선이 쏠렸다. 늑대와 덩치 큰 놀들이 성가대와 함께 걷고 있으므로.
출입을 저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콘라드가 앞서 대화할 때 따로 언질을 해둔 듯했다.
이후의 일은 걷는 것뿐이었다.
제2 장벽의 안쪽은 토벌을 마친 안전 구역이다. 따라서 야습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원정군과 함께 남쪽을 향하여 팔자 좋게 걸었다.
그렇게 며칠 후···
정겨운 도시에 도착했다. 제3 개척 도시. 우진은 일행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놀들이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녀석들은 생전 처음으로 개척 도시에 발을 들였다. 나름대로 기념비적인 순간.
"······신기한 게 잔뜩이로군."
로가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매번 낯설었다. 마경의 원주민들에게 있어, 인간의 문명은 온통 새롭고 신비한 것들로 가득했다.
우진은 녀석들을 재촉했다.
"빨리 가자. 이러다가 해 떨어지겠다."
"알았다."
그제야 놀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갑자기 속도가 올라가자 롤랑이 한마디 했다.
"나는 빼두고 가면 안 되나?"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 롤랑. 그는 몰래 지휘관 직위를 내려놓은 후 2차 원정군에 합류했다. 이제 지난날의 업보를 청산할 때가 되었다.
집무실 내부로 들어섰다. 창가에 서 있던 보우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진.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군. 2차 원정은 어떻게 되었지?"
"주머니 속 비스킷처럼 박살났죠. 전령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못 들으신 겁니까?"
"이야기를 좀 듣긴 했다네."
제2 장벽을 통과할 때 주둔군이 전서구를 날렸다. 그 덕분에 보우도 현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를 믿기 어렵더군. 마경의 생명체와 협상한다고 했던가···"
보우가 그리 대꾸하며, 심안으로 우진의 일행을 한 번 훑어봤다. 늑대들, 놀 세 마리, 롤랑, 그리고 성녀 세실리아.
"······이제는 눈도 믿기 어렵군."
보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진은 뭐라 설명하려 했지만,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었으니까.
"좀 두서없게 들리더라도··· 일단 원정 때 겪은 일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듣고 있네."
줄곧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보우. 이 상황이 지루한지 놀과 늑대들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적잖은 시간이 지난 후, 우진의 설명이 끝났다. 보우는 팔짱을 낀 채로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어 생각했다.
"······자네는 참, 밖에 나갈 때마다 희한한 일을 저지르는 재주가 있구먼."
"어쩌다 보니··· 저도 의도한 건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성녀님은 왜 자네와 움직이는 겐가? 그 설명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특별한 사연은 없습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일행이 되셨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성녀 세실리아는 놀의 수화를 익히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계속 오고 가며 수화를 익히는 게 번거로웠는지, 어느 날부터 세실리아는 성가대와 함께 천막을 쓰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쪽 인원들도 딸려 와서 동행하는 중이다.
그리 얘기하자,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지 보우가 성녀에게 질문했다.
"아직도 성역 탐색을 하고 계신지요?"
슥, 스윽.
세실리아가 질문에 응하여 손짓했다. 뜬금없는 행동을 본 보우가 살짝 당황했다. 곁에 선 우진이 그 뜻을 해석해 줬다.
"맞답니다. 하지만 쉽진 않다고 하시네요."
세실리아는 놀의 수화로 대화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그로 인해 번영의 교단 소속의 사제들도 덩달아 수화를 익혀야만 했다.
그리 설명하자 보우는 난처하게 되었다는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과묵한 분이신데··· 이러면 상황이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모르겠군."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런데 아까 언급하신 성역이란 건 뭐죠?"
성역.
그 단어가 신경 쓰여서 물어봤다. 보우는 고민 없이 질문에 답했다.
"말 그대로 신성한 땅이지. 교단마다 성지로 여기는 땅이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이제는 성지라 부를 만한 곳이 몇 없다네."
"왜죠?"
"그야 대부분 소실되었으니까."
북부 유적의 균열이 열리고, 이계의 괴물들이 문틈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인류는 대략 8할의 땅을 마경에게 내줘야 했다. 그로 인해 각 교단은 귀중한 성유물과 대성당, 성지를 여럿 잃어버렸다.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는 마경 어딘가에 있는 성역을 찾길 원했다.
"수화를 익힌 것도 그 일환입니까?"
끄덕.
그리 질문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리아. 그녀가 수화를 배운 건, 놀을 비롯한 마경의 원주민과 소통하기 위함이었다.
2차 원정군은 힘으로 놀 일족을 정복하려 했으나 끔찍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를 본 세실리아는 그 방법이 틀렸다 판단했고, 성역을 찾기 위해선 마경의 원주민과 친분을 맺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놀을 비롯한 여러 일족과 대화한다면 언젠가 단서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음 원정도 참여하시겠군요?"
세실리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앞으로도 종종 뵐 일이 있을 듯하다.
그리 대화하던 중···
"······그건 그렇고."
보우가 문득 중얼거리며, 새삼스레 우진의 일행을 훑어봤다. 줄곧 잊어버리고 있던 걸 찾아내려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충 뭘 찾는지 짐작이 갔다. 우진은 고개를 돌려 롤랑을 보았다. 그 성기사는 뒤쪽에 홀로 선 채로 딴청을 피우는 중이었다.
툭.
롤랑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엉겁결에 앞으로 걸어 나온 롤랑. 이를 본 보우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롤랑, 자네는 따로 남게나. 간만에 정신 교육을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
롤랑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성기사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이는 그가 감내해야 할 업보다.
우진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어디 갈 곳이라도 있나?"
"신디를 만나고 올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신디와 밀린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건 어려울 듯했다.
"아, 이 말을 하는 걸 잊었군. 신디는 개척 도시를 떠나 장벽 안으로 돌아갔다네."
보우는 그리 말하며, 서랍을 뒤적여서 편지를 하나 꺼냈다. 신디가 남긴 편지. 우진은 곧바로 밀랍을 뜯어서 그 내용을 읽어봤다.
'······일 때문에 마경을 떠났구나.'
신디의 아버지, 황금충 볼프는 마경에서의 사업을 진즉 정리해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신디는 이곳에 머물러도 달리 할 일이 없었고, 돈벌이를 위해 장벽 안쪽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디는 너무 오랫동안 휴가를 보냈다. 마녀사냥도 마쳤으니 슬슬 본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중에 만나러 가봐야겠어.'
우진은 그리 생각하며 편지를 품속에 접어 넣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신디를 만나는 건 훗날로 미뤄둬야 할 듯하다.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보우 님. 조만간 교단 연맹의 본부로 가서, 놀과의 평화 협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인데···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2차 원정이 실패했다.
교단 연맹은 콘라드를 불러내어 상황 조사를 할 것이고, 우진은 그 자리에 참석하여 놀과의 평화 협정 이야기를 꺼낼 예정이었다.
이를 실현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 부탁에 보우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자네 부탁이라면 도와야겠지. 함께 가도록 하세."
"감사합니다."
든든한 아군을 하나 얻었다.
그리 생각하던 중, 시선이 느껴졌다. 세실리아가 우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인지한 순간 성녀가 수화하여 뜻을 전한다.
—저도 도와줄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성녀 또한 이번 일에 거들 생각인 모양.
'기대 이상의 상황이로군.'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 * *
다른 이들과 함께 제3 개척 도시를 떠나, 장벽 도시 유르기스에 왔다. 여기까지는 딱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원탁 회담.'
직위가 높은 사제들이 둘러앉아서 토론을 진행하고, 참관인들이 주변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대화를 경청한다. 이 자리에서 놀 일족과의 평화 협정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우진은 이 회담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교단에 소속된 성직자가 아니었으니까.
'논의 도중에 날 부를 거라고 했지.'
우진은 자문관으로서 이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러니 놀에 대한 안건이 나올 때까지 대기한 후. 몇 가지 질의응답을 할 예정이었다.
'······말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런 자리에 나서서 발언하는 건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 주기나 할까?
우진이 그런 잡념에 휩싸여 있는 와중, 놀들은 마냥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개목걸이를 차는 취미는 없는데··· 인간들은 참 어지간히 겁이 많은 듯하군."
로가르가 그리 말하며, 목에 걸린 쇠사슬을 툭툭 건드렸다. 안전을 위해 놀들은 수갑과 쇠사슬로 몸을 속박해둔 상태였다.
쟈카가 호승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한 번 부숴볼까?"
"좀 참아.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니. 여긴 인간들의 도시 한복판이라고."
"그냥 해본 소리야. 따분해 죽겠어."
대화 소리를 들으니 시간이 잘 갔다. 그렇게 제법 기다리고 있자, 성기사들이 다가와서 우진을 불렀다.
"회담 자리에 호출되셨습니다."
우진은 괜히 뜸 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후 놀들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드디어 뭐든 하겠네."
우진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놀 세 마리. 녀석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쇠사슬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하게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일까?
마치 검투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문 너머로 나가는 순간, 굶주린 사자 한 마리를 맞닥뜨리게 될 듯한 느낌.
'······차라리 사자가 더 낫겠군.'
사자는 그냥 때려죽이면 되지만, 성직자는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우진의 입장에서는 더 골치 아픈 적이었다.
심호흡하여 숨을 고른 후···
문 너머로 걸어 나갔다. 직후 우진은 회담을 진행 중인 고위 성직자들과, 관객처럼 앉아 있는 수많은 신도들을 맞닥뜨린다.
"중앙으로 오시오."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우진은 그 명에 응하여 앞으로 계속 걸음을 옮겨갔다.
원탁 회담이라 하길래 그냥 둥근 책상에 둘러앉아 있을 줄 알았건만, 한 입 베어먹은 도넛처럼 생긴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치 알파벳 C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
놀들과 함께 그 가운데에 서자, 고위 성직자들에게 포위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수 사냥꾼 진. 그대는 놀이라 불리는 하이에나 마수와의 평화 협정을 주장한다 들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까?"
원탁에 앉은 사제가 질문했다. 높으신 분 같긴 한데, 회담 도중에 참여하여 저 사제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
우진은 그 질문에 선뜻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그리 생각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전술적인 면에서, 놀과의 평화는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고 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보고서를 미리 제출했습니다."
우진은 회군할 때 틈틈이 보고서를 여럿 작성했다. 이에 대해 언급하자, 다른 여사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아까 전 그대가 올린 보고서를 읽어봤습니다. 이 내용은 솔직히··· 환상적이더군요."
······비현실적이라는 얘기인가.
아무래도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내심 조급해진 우진이 말을 이었다.
"비현실적이라 여겨질 만한 내용이 적잖게 있긴 합니다. 이에 대해 첨언하자면···"
"잠시만요. 제 말을 오해하신 듯한데."
여사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근사하다는 뜻입니다. 이 보고서는 교단 연맹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우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다고?'
보고서의 내용이 나름 알짜배기긴 했다. 지금껏 마경에서 겪은 경험과 생각, 노하우를 잔뜩 눌러 담아서 쓴 글이니까.
그런데 이걸 선뜻 인정받자 좀 낯설었다. 일종의 몰래카메라 아닌가 하는 느낌.
'교토 화법인가?'
비꼬는 건가 싶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는데, 어째 이쪽을 보는 시선이 마냥 호의적이었다.
그제야 우진은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말이 통하는구나.'
2차 원정군의 수뇌부에게 한 번 데여서 그런지, 이 상황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2화
원탁 회담. (2)
2차 원정군의 몰락 이후. 교단 연맹은 북벌이 쉽지 않다는 걸 다시금 체감했다.
발목을 잡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마경이라는 환경 자체가 인류에게 너무 가혹한 곳인 데다, 북진하는 내내 마수들의 야습을 버텨야 하니 병력 손실이 컸다. 보급이 끊기는 건 예삿일이었다.
'무작정 북쪽을 향해 진군하는 건 사실상 자살 행위와 다를 것 없는 짓거리다.'
교단 연맹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기에, 자연히 고민이 깊어졌다.
어떤 방식으로 북벌을 진행해야 할까.
1차 원정 때처럼, 개척 도시를 여럿 만들어서 지역을 안정화한 후. 원정군을 보내어 마수들을 토벌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남부 지역은 마수들의 수준이 낮고, 그 머릿수가 적기 때문에 개척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그 위험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따라서 도시를 지키려면 많은 병력들을 그곳에 주둔시켜야 하는데, 이럴 경우 지켜야 할 지역이 끝도 없이 넓어진다.
'더 위험한 땅에서, 더 넓은 전선을 구축하는 건 너무 부담스러운 짓이다.'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기에 교단 연맹은 북부 정벌이라는 대업을 일단 훗날로 미뤄두고, 새롭게 얻어낸 땅을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제2 장벽.
개척 도시 전체를 교단 연맹의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는다. 이후 북벌을 어떻게 진행할지 다시 논의할 예정이었다.
즉, 별다른 해결책은 없고, 진전 없이 상황이 계속 늘어지고 있었는데···
"······그대가 올린 이 보고서는 아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더군요."
마경의 원주민들과 동맹한다.
이 전제 하나만으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된다. 놀 일족의 영토는 마수로부터 안전하기에, 그 땅에 전초 기지를 세워두면 보급로와 주둔지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놀 일족의 영토가 개척 도시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다. 인류는 간단히 마경의 중부 지역을 관통하여, 병력 손실 없이 마경의 깊은 곳까지 진군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이 동맹은 반드시 체결하는 게 옳은 선택이겠죠. 놀 일족에게 지형 정찰만 맡기더라도 교단 연맹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원탁에 앉은 성기사가 그리 말했다.
교단 연맹의 고민들을 단번에 해결하는 지름길. 이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확실히 옳은 말이지만, 이 동맹에 대한 우려를 떨쳐내긴 어려워."
나이 든 사제가 반론을 시작했다. 마수와 동맹을 맺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때문이었다.
설령 마수와의 동맹이 성립되더라도 불안감을 떨쳐내긴 어렵다. 만약 놀 일족이 배신하여 뒤를 친다면, 교단 연맹은 전방에 배치한 중요 병력을 모조리 잃게 될 테니까.
"쉽고 좋아 보이는 선택에 함정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 자체는 매혹적이지만, 저 하이에나들에게 등을 맡겨도 괜찮을지 걱정되는군."
늙은 사제가 그리 말하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반론하기 위해 우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궁금하다."
곁에 서 있던 쟈카가 질문했다. 돌연 놀이 말하자 사제 또한 호기심을 품었다.
"저 존재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사제님이 하신 말씀이 뭔지 물어봤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뒤숭숭해지니, 그 내용이 궁금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까 한 말을 저 놀에게 전해줄 수 있나? 대답이 듣고 싶은데."
늙은 사제는 우진의 주장을 듣는 것보단, 놀과 직접 대화해보고 싶은 듯했다.
서로의 말을 궁금해하는 상황. 요구에 응하여 우진은 목을 한 차례 가다듬은 후. 수화와 놀의 언어로 사제의 말을 번역해줬다.
이에 쟈카가 간단히 대답했다.
"배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거래를 지킬 테니까. 그리 전해주길 바란다."
"알았다."
우진은 그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배신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군요. 놀 일족은 거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거랍니다."
"그 말을 어떻게 증명하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냐고 물어봤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늙은 사제의 말을 다시 전달하자, 쟈카가 고개를 갸웃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좀 당황스럽네··· 약속을 했으면 충분하잖아. 도대체 뭘 증명하란 거야?"
"일부러 약속을 어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 불경한 짓을 한다고?"
놀 일족은 거래를 신성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사제의 요구가 마냥 괴상하게 들렸다.
쟈카가 사제를 보며 질문했다.
"너희 일족은 약속을 자주 어기는 건가?"
"무슨 뜻이지?"
우진이 번역해줬다.
"인간이 약속을 자주 어기는지 묻는군요."
"······부정하긴 어렵겠어."
늙은 사제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쟈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오히려 되묻고 싶군··· 거래를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뭘 믿고 그쪽과 손을 잡아야 하지? 너희가 일족을 배신하고 영토를 점령할 수도 있는 거잖아?"
쟈카가 그리 말하며, 본인의 목에 휘감겨 있는 쇠사슬을 툭툭 잡아당겼다.
"나는 이 개목걸이를 차고 싶지도 않다. 이게 너희들이 사절을 대하는 방식인가?"
"번역해 주게."
늙은 사제가 요구했다. 우진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쟈카의 발언이 적대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자 사제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그 눈빛이 우진의 속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어쩔 수 없군.'
방금 쟈카가 했던 말을 번역하여 전달했다. 직후 내려앉은 적막. 청중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이 말없이 쟈카를 바라보았다.
쟈카는 뭘 그리 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곧 늙은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 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늙은 사제. 그 발걸음 소리가 왠지 커다랗게 들렸다. 사제가 곧 성기사에게 뭔가를 요구하듯 손을 내밀었다.
눈치 빠른 기사가 손짓에 담긴 의도를 읽었다. 급히 허리춤에 걸려 있던 물건을 집어 드는 기사. 그것은 다름 아닌 열쇠 다발이었다.
"추기경님. 위험하니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얼른 넘기게나."
추기경이 반쯤 빼앗듯이 열쇠 다발을 받아냈다. 직후 그가 놀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철컥.
추기경이 손수 자물쇠를 풀었다. 쟈카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흘러내리며 요란한 금속음을 연신 울렸다.
자유의 몸이 된 놀 세 마리. 추기경이 그들의 앞에 무방비하게 마주 섰다.
"확실히··· 타국의 사절을 이렇게 대하는 건 옳지 않은 짓이지. 내 사과하겠네."
추기경이 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를 본 쟈카가 흡족한 듯 웃었다.
"낄낄낄! 내가 말싸움에서 이겼··· 어욱!"
로가르가 돌연 쟈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에 쟈카가 뭐라 욕지거리를 하려던 찰나, 로가르가 옆을 향해 턱짓했다.
쟈카가 고개를 돌렸다. 우진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나도 미안하다!"
쟈카가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이에 추기경이 의문을 표했다.
"저 동작은 무슨 뜻이지?"
"상대에게 존경을 표하는 자세입니다. 아무래도 추기경님의 인품에 감탄한 듯하군요."
"허··· 신기한 녀석들이군."
추기경이 놀랍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를 본 우진은 내심 안도했다.
'······급한 불은 껐다.'
추기경은 한 교단을 대표하는 존재.
그런 권력자를 상대로 쟈카가 눈치 없이 굴어서 식겁했는데, 다행히 로가르가 도중에 잘 틀어막았다.
우진은 추기경의 로브를 곁눈질했다. 투쟁의 교단을 상징하는 색깔과 무늬.
'투쟁의 추기경, 호레이스.'
투쟁의 교단은 현존하는 교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즉, 호레이스는 교황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성직자라는 뜻.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원탁 회담에 직위가 높은 사제들이 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추기경은 이런 자리에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 권력자였다.
우진이 이에 의아해하던 중. 추기경이 손에 쥔 보고서를 들어 보였다.
"우리 쪽 사제들이 자네가 만든 작품을 내 사무실에 들고 와서 들이밀더군··· 솔직히 흥미로웠어. 몽상가의 꿈 같은 소리로 가득한데, 희한하게 트집을 잡기 어려웠으니까."
사제들이 보고서를 읽은 후 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 호레이스 또한 보고서를 읽었고,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제안이야. 그러니 우리 쪽에서도 놀 일족에게 사절단을 보내야 할 것 같군. 그게 예의일 테니까."
호레이스가 이쪽을 바라본다.
"마수 사냥꾼 진··· 자네가 그 사절단의 자문관 역할을 맡아줄 수 있겠나?"
마다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 * *
원탁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우진은 이번 일에 힘을 실어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여러분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 말하자 보우가 피식 웃었다.
"고생하기는··· 우리는 달리 한 일이 없어. 감사 인사를 듣기도 민망할 지경이야."
보우와 롤랑, 세실리아는 따로 교단 연맹을 찾아가서 우진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짓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준비를 해온 것 같더군."
2차 원정군의 수뇌부에게 당한 전례가 있어서 그런지, 우진은 이번 일을 지나칠 만큼 신경 써서 준비했다. 하지만 교단 연맹은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반쯤 뒤집어진 상태였다.
지난날의 우진이 콘라드와 에드윈, 그리고 놀 대전사 브락나크의 거래를 입회했을 때. 당시 포로로 잡혀있던 성기사들이 우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를, 마수와의 협상을 통해 살려냈다. 그 업적 자체가 교단 연맹의 관심을 받기 충분했다.
"자네가 할 일이 많겠어."
"네··· 안 그래도 정신없이 바쁩니다."
자문관 일은 생각 이상으로 할 일이 많았다. 사절단을 보내기 앞서, 교단 연맹이 우진에게 쉼 없는 질문을 해대고 있으니까.
마경 생태계의 정보, 놀 일족의 문화, 소통 방법 등등. 이런 정보들을 일일이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넘겨주다 보니 쉴 틈이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가봐야겠군요."
우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롤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나? 술집으로 가서 맥주라도 한잔하려고 했더니."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 자문관 일을 가능한 빨리 마무리하고 싶군요."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그 뒷모습을 보며 롤랑이 의문을 표했다.
"선약이 있다고? 누구랑?"
우진은 이미 약속이 잡혀 있었다.
* * *
대략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밤낮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일하여, 우진의 업무가 남들보다 먼저 끝났다. 덕분에 사절단이 출발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오겠다.'
교단 연맹에게 그리 보고한 후 밖으로 나섰다.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이 시간 안에 여행을 마친 후 돌아올 생각이었다.
우진이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남쪽으로 가자."
그 요구에 렉스가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벽 도시 유르기스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시간 없다. 빨리."
우진이 늑대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명령에 응하여 렉스와 늑대들이 남쪽을 향해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늑대 마수의 달음박질 속도는 말보다 훨씬 빠른 데다, 쉽게 지치지도 않았다. 내단을 잔뜩 먹여놓은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
그렇게 반나절 정도를 질주하고 나니···
저 멀리, 커다란 도시와 그 중앙에 자리 잡은 탑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탑.'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주변 사람 중 한 명이 저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불과 어제 일처럼 그 목소리가 기억난다.
'······클레어.'
그녀를 만나러 간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3화
재회. (1)
마법사들의 탑.
이를 줄여서 마탑이라 부른다. 요란하지 않고 단순한 호칭. 그래서인지 마탑 주변에 자리 잡은 도시의 이름 또한 담백했다.
'마도시.'
늑대들과 함께 도시의 입구로 걸어갔다. 자연히 위병들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철컥, 철커덕—
늑대가 걸을 때마다 경쾌한 금속음이 났다. 이는 늑대들이 온몸에 강철 갑옷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갑옷은 일종의 외출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늑대 마수를 보면 겁먹을 수도 있으니. 전투마처럼 강철 갑옷을 입혀둬서, 늑대들이 잘 훈련된 사냥개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지하도록 만든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그게···"
위병대장이 선뜻 답하지 못했다.
늑대들을 도시로 들여보내는 건 이례적인 일. 하지만 이를 저지하기도 어려웠다. 우진의 왼쪽 가슴팍에는 방패 모양의 브로치가 하나 붙어 있었으니까.
은방패 훈장.
이는 큰 공훈을 세운 자에게만 주어지는 명예 훈장이다. 일개 위병대장이 막아 세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 그야말로 답 없는 이지선다에 걸린 상황이었다.
위병대장이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다른 선택지를 제안했다.
"늑대들을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어렵다면, 이곳에 맡겨두고 가겠습니다."
"······이 괴물을 제가 관리할 수 있을까요?"
"괜찮습니다. 아주 얌전한 녀석들이라."
조율의 교단과 함께 지낸 이후. 늑대들은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아예 사라졌다. 그러니 위병들에게 맡겨둬도 별문제는 없으리라.
"잘 부탁드리죠."
그리 말하며, 금화 두 닢을 위병대장의 손에 쥐여줬다. 이를 받아 든 위병대장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군요."
금화로 한 사람의 충정을 얻었다. 적잖은 돈이지만 우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렉스를 비롯한 늑대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가슴팍의 훈장을 떼어내고 나서, 그것을 품속 깊이 갈무리해뒀다.
훈장을 자랑하듯 붙이고 다닐 생각은 없다. 입구 검문이 귀찮아서 잠시 착용했을 뿐.
'늑대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지겨운 짓이었는데··· 이런 물건이 하나 생기니 편해졌어.'
굳이 긴 말을 할 필요 없이, 훈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입구 검문을 통과한다. 이렇듯 인류의 사회에선 명예가 주는 혜택이 적잖았다.
우진이 혼자서 도시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세련된 생김새의 건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잘 사는 동네처럼 보이네.'
마법사들이 제작한 아티팩트와 두루마리, 물약은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이를 거래하기 위해 여러 상인들이 왕래하기에. 도시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건물들이 번듯하고 도로는 모난 곳 없이 매끈하게 잘 닦여 있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이 많은지 마차가 여럿 눈에 띄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마차가 더 자주 보일 정도랄까.
'이래서 위병대장이 곤란해한 거구나.'
말들이 늑대 마수를 보면 겁에 질리게 될 테고,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나서 귀빈들이 다칠지도 모르는 일. 그렇기에 위병대장은 늑대의 출입을 선뜻 허락할 수 없었다.
대충 견적을 잡은 후,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갔다. 처음 와본 도시지만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목적지가 보였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은 마탑. 그것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오래지 않아 우진은 마탑에 발을 들였다.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접수대에 앉은 남자 마법사가 말을 걸어왔다. 우진은 곧장 용무를 밝혔다.
"친구를 만나러 왔습니다. 클레어라는 이름의 여자 마법사인데. 여기 있습니까?"
"클레어요?"
"네. 키는 이만하고, 머리카락은 갈색인···"
혹시나 동명이인이 있는 건 아닌가 하여, 우진은 인적 사항을 얼추 설명했다.
그런데 그리 말하자··· 왠지 모르게 마법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살짝 경계하는 듯한 눈빛. 우진은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마법사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겨가는 마법사. 우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클레어의 이름을 언급하자, 남자 마법사의 태도가 순간 묘해졌다. 혹시 클레어가 나쁜 상황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해 염려하던 중···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급히 내려오는 소리. 오래지 않아 그 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레어가 환히 웃었다.
"진!!"
그리 소리치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클레어. 곧 일어날 일을 대비하여 두 팔을 벌렸다. 우진과 클레어가 힘껏 포옹을 나누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다··· 뒤늦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밀린 이야기는 밖에서 나눌까."
"좋죠!"
함께 마탑 밖으로 나섰다.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많다. 두 사람은 각자의 꿈을 쫓아 헤어졌고, 적잖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점심이라도 먹으며 느긋하게 대화하자. 혹시 근처에 좋은 식당 없어?"
"저기 괜찮아요. 제 단골집인데."
클레어가 손짓하여 골목 구석의 가게를 가리켰다. 살짝 허름하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건물. 전형적인 지역 맛집 같은 생김새였다.
저런 가게도 나쁘진 않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내가 살 테니."
우진은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고급스러운 식당이 눈에 띄었다.
"저긴 어때?"
"어··· 모르겠네요. 한 번도 안 가봐서."
"그럼 이번에 한 번 가보자."
클레어와 함께 식당 건물로 들어갔다. 직후 개인실을 하나 잡은 후, 그곳에 들어가 앉아 메뉴판을 살펴봤다.
고급 식당답게 메뉴의 가격대가 제법 살벌했다. 하지만 우진은 고민 없이 음식을 여럿 고르고 값비싼 포도주까지 주문했다. 이에 맞은편 자리에 앉은 클레어가 식겁한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내 돈이 아니니까."
"누구 돈인데요?"
"에드윈이라고 있어."
에드윈 공작이 2차 원정을 실패한 후. 그가 갖고 온 재산은 전부 놀들의 전리품이 되었고, 놀 대전사 브락나크가 그 보물 중 유독 값진 것들을 우진에게 공물로 바쳤다.
거기에, 교단 연맹이 대량의 금화를 포상금으로 지급한 데다, 신디가 아티팩트를 여럿 선물해 줘서 막대한 재산이 축적된 상태.
"이런 음식 정도는 몇 번이고 주문해도 상관없어. 어쩌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거든."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좋지.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클레어에게 금화 백 닢을 떠넘긴 후. 장벽 도시를 떠나, 마경으로 와서 지금껏 겪었던 일들. 하나씩 말하다 보니 그 내용이 자꾸 길어졌다.
거머리쥐, 늑대들, 조율의 교단, 거미굴, 대주교의 연회, 그리고 2차 원정까지···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야기 도중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클레어가 질문했다. 그로 인해 우진은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본인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다.
긴 이야기가 끝난 후. 클레어가 감명받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일들을 여럿 겪으셨네요. 진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실제 이야기에 비해 더 축소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우진이 되물었다.
"여기서 내 소문을 들었다고?"
"네. 자주 들었어요."
"그래? 그만큼 소문이 많이 돌았어?"
"당연하죠. 2차 원정군의 패망은 여러 사람의 가십거리였으니까요."
원정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콘라드가 큰 연회를 열었지만··· 정작 원정은 보기 좋게 망했다. 그로 인해 대주교와 공작의 명예가 사이좋게 땅에 처박힌 상황이었다.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두 유명인이 쇠락하자, 그 원정에 속해 있던 한 사내의 평판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우진은 놀과의 거래를 끌어내어 2차 원정군의 전멸을 막았다. 이에 대해 성녀 세실리아와 성기사들이 증언했고, 그 공로를 인정하여 교단 연맹이 은방패 훈장을 내렸다.
"최연소로 은방패 훈장을 받으셨잖아요. 이런 좋은 악상을 음유시인들이 놓칠 리 없죠."
뛰어난 인간이 큰 업적을 세우면, 그 이야기는 영웅담이라 불리기 마련. 우진이 행한 일은 노래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솔직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좀 민망하네."
"왜요? 전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너무 낯 간지러운 짓을 좋아해."
과거 용병들 사이에서 스컬크러셔라 불린 것도 흑역사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큰 건수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쨌거나···
"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슬슬 너의 이야기도 좀 듣자. 그동안 어땠어?"
"저야 잘 지냈죠. 마탑은 낙원 같은 곳이에요. 온갖 마법들을 익힐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 진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네요."
클레어가 그리 말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지금의 삶이 너무 만족스럽다는 태도.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아까 마탑의 접수대에서 본 마법사가 신경 쓰였다. 클레어에 대해 이야기하자, 경직된 표정을 짓던 사내.
"혹시 무슨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아?"
"으음···"
우진이 연신 캐묻듯이 질문했다. 이에 클레어가 약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작은 문제가 있긴 해요."
역시나,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이다.
"뭔데?"
"사실 마탑에 온 사람 중에는, 좀 문제가 있는 분들도 더러 있거든요."
금화 백 닢을 지불하면 마탑에 들어와서 마법과 연금슬을 익힐 수 있다.
문제는··· 그 비용이 워낙 값비싸다 보니, 마탑에 입학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부호의 자식이거나, 귀족 가문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마법사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하지 않고, 도시의 유흥에만 집중하는 부류가 있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마법에 재능을 지닌 건 아니다.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 마탑에 입학한 귀족들이, 힘든 공부를 포기하고 유흥에 빠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 유흥에서 연애가 빠질 수 없다.
"자꾸 저한테 들이대는 사람이 있었어요."
귀족 중 한 사람이 클레어에게 고백했다. 클레어는 이를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구애했다.
거절이 계속 반복되면 분노로 이어지는 법. 어느 날 귀족이 성질을 드러냈다.
"여럿이서 저를 벽에 몰아붙이고 막 뭐라 하더라고요. 신분이 어쩌니, 저쩌니··· 촌년이면 곱게 말을 들으라고 하지를 않나."
"······누구야?"
"아, 화내실 필요 없어요. 사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거든요···"
클레어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솔직히 그 상황이 되자 저도 성질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한 방 까버렸어요."
"거시기라도 찬 거야?"
"아이, 상스럽게! 그건 아니고요. 진이 잘하는 거 있잖아요. 이렇게 서서 발등으로."
클레어가 손으로 사람 흉내를 냈다. 우진은 눈치껏 그 의미를 짐작했다.
"로우킥?"
"아! 그거요. 예전에 진이 용병들과 싸울 때 하던 거.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그분한테 로우킥을 한 방 날렸는데···"
클레어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막, 다리를 절뚝거리더니···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너무 세게 걷어찼나봐요. 그거 때문에 입장이 살짝 난감해졌죠."
"왜?"
"그쪽 가문의 직위가 좀 높아요. 얼핏 듣기론 백작이라 했던가."
클레어는 작위가 높은 사람을 때려눕혔다. 그로 인해서 귀족의 명예가 땅에 처박힌 상황.
상대가 먼저 잘못했기에 별다른 처벌은 없었지만, 클레어와 친하게 지내던 마법사들이 어느 날부터 그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저와 어울리면 귀족에게 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야?"
"네··· 뭐, 그렇죠. 하지만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 오히려 좋아요."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안 좋아."
돌아가기 전에 시간을 내서, 클레어를 괴롭혔다는 그놈을 찾아 족쳐야겠다.
그리 생각하던 중···
"······그런데 클레어. 네가 로우킥 한방으로 성인 남자를 쓰러트렸다고?"
"네. 그랬죠."
"좀 이상한데··· 너 평소에 운동이랑 담쌓고 지내잖아. 재능이 있는 건가?"
호기심이 생긴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로우킥. 나한테 한 번 차봐."
"어··· 여기서요?"
"어차피 개인실이잖아."
"그렇긴 하죠."
클레어가 우진의 앞에 마주 섰다.
"찰게요?"
"응."
클레어가 살짝 머뭇거리다, 마주 선 우진의 허벅지를 힘껏 걷어찼다.
짜아악!!
"어때요?"
"······"
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프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4화
재회. (2)
재능이란 단어 하나만으론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이 더러 있다. 이 경우에도 그러했다.
'위력이 너무 센데?'
클레어의 로우킥은 이상할 만큼 매콤했다.
자칫 잘못하면 발차기를 날린 클레어가 되려 다칠 수도 있어서, 일부러 힘을 빼고 서 있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비상식적인 수준.
도대체 뭘까.
"한 번 살펴봐도 돼?"
"······."
클레어의 종아리를 가리키며 그리 물어봤다. 이에 쑥스러운 듯, 클레어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로브 밑단을 살짝 들추어봤다. 직후 드러난 클레어의 새하얀 다리. 엄지로 종아리를 꾹꾹 눌러보자, 보드라운 피부밑에 숨겨져 있던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마치 발레리나의 다리를 만지는 듯한 느낌. 그러고 보니··· 아까 클레어와 껴안았을 때도 살짝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시 포옹해도 될까?"
"갑자기 왜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번에는 클레어가 선뜻 허락했다.
"저야 좋죠."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았다. 직후 앞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 완전 돌덩이잖아?'
클레어의 체형은 큰 변화가 없지만, 가냘픈 몸에 근육을 압축하여 담아둔 듯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탑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거야? 공부하라고 보낸 건데, 왜 특전사가 되어 있어."
"그냥··· 연구만 했는데요."
"진짜로?"
"네. 전 운동을 싫어하잖아요."
대부분의 학자가 그렇듯, 클레어는 운동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용병 일을 한 것은 마탑에 들어갈 돈을 벌려고 했던 짓. 이 목적을 실현한 이후. 클레어는 가끔 하던 단련마저 손을 놓았다.
그 말에 우진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암만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남은 방법은 하나뿐.
"이 힘의 본질을 살펴봐도 될까?"
"어떻게 하는 건데요?"
"최근에 편법으로 능력 하나를 익혔어."
마음의 눈, 심안.
숙련도가 다소 미숙하여 제대로는 쓸 수 없지만, 현재 상황을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이었다.
그리 말하자···
클레어가 고민에 잠겼다. 아무래도 정체 모를 이능에 몸을 맡기는 게 꺼려지는 모양. 이를 본 우진은 선뜻 단념했다.
"점심이나 마저 먹자."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 줄곧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다. 클레어는 그리 말한 후 되려 부탁했다.
"한 번 봐주세요."
"알았어."
세 번째 눈을 뜨기 위해 두 눈을 감는다. 심안으로 그녀가 지닌 미지의 힘을 응시했다.
······그런데 왠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카르마?'
클레어는 마경의 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암흑 신관과 달리, 내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우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너, 마수의 내단을 먹은 거야?"
"설마요."
"그럼 왜 카르마를 품고 있어?"
클레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 얘기를 해드릴 생각이긴 했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네요."
"자세히 설명해 줘."
"그러려면 예전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진에게 호흡법을 가르쳐준 걸 기억하나요?"
"물론. 잊을 수 없지."
정수리로 호흡하라.
자연의 마나를 느끼기 위한 명상법. 워낙 난해한 방식이라, 우진은 이를 터득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진이 마나 입문을 너무 어려워하셔서··· 제가 주문을 써서 마나를 불어 넣었잖아요. 그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사마귀와 푸른 나비.
클레어는 의도치 않게 우진의 심상 세계를 엿보았고. 그녀가 지닌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일부 빼앗긴 대신, 카르마를 넘겨받았다.
본래 흉포하기 그지없는 마경의 힘. 하지만 우진이 넘겨준 카르마는 순한 양처럼 얌전하게 굴었다. 덕분에 클레어는 카르마를 품게 되었지만, 큰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최근까지는 그랬다.
"지난번 여러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협박당할 때. 좀 무서웠어요. 누군가가 저를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카르마가 깨어났다.
클레어가 그리 말하며,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더니 가볍게 힘을 줬다.
꾸득!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포크가 찰흙처럼 손쉽게 휘어졌다. 직후 클레어는 그 포크를 다시 펴서 반듯하게 만들었다.
"보다시피···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
우진은 멍한 눈으로 포크를 바라봤다. 뜻밖의 상황이라 머리가 안 굴러가는 상황.
"······이걸 어쩌지?"
"그러게요. 제게 넘어온 진의 힘을 어떻게든 돌려드려야 할 텐데···"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클레어에게 힘을 좀 빼앗긴 건 괜찮은 일이다. 어차피 카르마는 넘쳐날 만큼 많으니까. 다만 우진은 다른 걸 신경 쓰고 있었다.
"너의 재능을 돌려줄 방법이 없나?"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빼앗았다.
물론 재능의 일부라곤 하나, 클레어에게 있어서 적잖은 타격. 최상위권으로 갈수록 이런 손실이 크게 체감되는 법이다. 격투기로 치면 챔피언과 랭킹 1, 2위의 차이랄까.
이를 염려하자··· 클레어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웃으며 손사래쳤다.
"전 괜찮아요! 진을 안심하게 만들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오히려 더 높아졌으니까요."
"그래? 왜?"
"체력이 좋아졌잖아요. 예전에는 다섯 시간만 공부하면 힘들어서 쉬어야 했는데, 이제는 밤을 새더라도 별 지장이 없어요."
클레어는 용병 출신이라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종일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공부하면 허리와 목에 통증이 느껴지고, 눈이 침침해져서 책을 읽기 힘들어지는 법. 하지만 카르마를 넘겨받은 이후로 몸이 좋아져서 학습 효율이 더욱 올라갔다.
클레어는 그 증거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조금 있다가, 한적한 곳에 가서 제가 익힌 마법들을 보여줄게요."
"좋아. 구경 좀 해보자."
마무리 디저트를 마저 먹은 후. 우진과 클레어가 식당 밖으로 나섰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걷는 클레어. 시답잖은 대화를 좀 나누다‚ 우진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는 듯한 어조로 질문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그야 마도시 밖으로 가야죠. 여기서 공격 마법을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큰 마법을 거리에서 터뜨리는 건 민폐다. 그러니 밖에 나가서 잠시 주문을 시연한 후, 다시 도시 안으로 돌아오자.
우진은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마침 잘 되었네."
"왜요?"
"미행이 따라붙었어."
그 말에 클레어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야 모습을 숨기고 미행 중이니까. 정신을 잘 집중하면 발소리를 들을 수 있어."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지만, 클레어도 이제 마경의 힘이 깃든 상태. 조금 연습하고 나면 그녀도 눈치챌 수 있으리라.
"주변 소리를 하나씩 분리한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걷는 소리,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새들이 우는 소리··· 이런 걸 하나씩 인지하는 연습을 하면 감이 잡힐 거야."
"시도해볼게요."
정신을 집중하는 클레어.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어려운데요. 소리를 의식하고 나니 주변 잡음이 너무 크게 들려요."
"그 잡음을 잘 걸러내야지. 원래 요령을 익히려면 시간이 좀 걸려."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여럿 알려줬다.
클레어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우진의 마법 스승 역할을 해줬는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입장이 뒤집힌 듯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대화하며 걷자, 어느덧 도시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문득 인기척을 눈치챘다.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맞아. 이제 잘하네."
줄곧 미행하던 사람들이 접근해 온다. 아무래도 기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우진과 클레어가 도시 밖으로 나가려 하자 조바심이 난 모양이었다.
우르르 몰려온 사내들이 주변을 포위하듯 섰다. 우진은 그 얼굴들을 훑어봤다.
마법사 중 한 사람이 낯익었다.
'······접수대에 앉아 있던 놈이군.'
마탑에 들어가서 클레어 얘기를 했을 때, 경계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던 마법사. 보아하니 그가 앞잡이 노릇을 한 듯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씩씩대며 선두로 걸어 나왔다. 금발의 머리칼을 지닌 청년. 그의 시선이 우진과 클레어를 훑었다.
직후, 청년이 목소리 높여 소리쳤다.
"클레어! 그 새끼는 뭐야?!"
마침 이쪽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넌 누군데?"
"저한테 맞고 울었던 사람이에요."
곁에 서 있던 클레어가 대신 귀띔해줬다. 그 말을 들은 우진이 살짝 감탄했다.
"이야, 설마 아직도 질척대는 거야?"
"그러게요. 한동안 잠잠했는데 또 이러네요."
"나 같았으면 진작 고향으로 돌아갔을 텐데··· 저러는 것도 대단하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이에 얼굴이 시뻘게진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막스! 저 새끼 주둥아리부터 밟아!!"
"예."
명에 응하여 덩치 큰 기사가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이 감탄했다.
'꽤 세네.'
저런 철부지의 부하치곤 뛰어난 기량을 지닌 자였다. 마나 유저 특유의 서슬 퍼런 분위기. 저 기사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런데 왜일까.
'이놈도 좀 낯익은 것 같은데···'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기사 또한 우진을 알아봤는지 우뚝 멈춰 선 상태. 기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여럿 맺혔다.
······스윽.
자연스레 뒷걸음쳐서 물러나는 막스. 그 모습을 보던 중 뒤늦게 기억이 돌아왔다.
'2차 원정에 참여했던 용병 기사구나.'
야습 때 마수들에게 둘러싸여서 죽을 뻔했던 사내. 우진은 투창을 던져서 저 기사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줬다.
담대하고 기량이 뛰어난 자들만이 2차 원정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막스는 원정을 끝까지 버틴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에 취해야 할 답을 안다.
타타타탓—
막스가 몸을 돌려 도망쳤다. 멀어져가는 기사를 향해 청년이 목청껏 소리쳤다.
"막스? 야··· 막스!!"
기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내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벌, 이거 느낌이 싸한데."
용병은 눈치가 빠르다. 철부지 귀족의 의뢰를 받아 용돈벌이나 할 셈이었는데··· 기사가 대뜸 줄행랑을 쳐서 상황이 묘해졌다.
주변 눈치를 살피는 용병들. 그 모습을 본 청년이 한껏 성질을 냈다.
"너희들까지 도망칠 셈이냐? 이번 일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용병들은 이미 선금을 받았다.
실력 좋은 기사는 어딜 가더라도 대접받는 법이지만, 용병은 업계에서 한 번 찍히면 밥벌이를 하기 어렵다. 덕분에 용병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우진은 감흥 없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놈들과 싸우고 싶진 않네.'
아까 막스라 불린 그 사내가 제법 강해 보여서, 오랜만에 재미를 좀 보나 했건만··· 눈치 빠른 기사는 도망치고 떨거지만 남았다.
흥이 식어버린 상황. 굳이 땀을 흘리고 싶지 않기에, 품을 뒤적여 물건을 하나 꺼냈다. 새하얀 상아를 깎아서 만든 피리.
곁에 있던 클레어가 관심을 가졌다.
"신기하게 생긴 피리네요?"
"한 번 불어 봐."
클레어는 선뜻 그 피리를 받아 불었다. 하지만 소리가 잘 나질 않았다.
"······뭐예요 이거? 고장 났나."
"제대로 작동했어."
인간의 귀로는 듣기 힘든 소리다.
"개피리니까."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란. 은빛 갑옷을 두른 늑대 네 마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은 비명을, 클레어의 경우에는 기쁨에 겨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렉스!!"
잔뜩 신이 난 클레어가 꺄아아— 소리를 지르며 붉은 늑대에게 달려갔다. 렉스 또한 이 재회가 기쁜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떡 주무르듯 렉스의 얼굴을 쓰다듬는 클레어.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려서 용병들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 중앙에 선 귀족 청년을.
"어, 어어···"
눈이 마주친 청년이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클레어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쟤가 나 괴롭혔어!"
렉스가 즉시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를 본 우진이 덕담하듯 한마디 했다.
"팔다리 뜯어놓진 말고, 제압만 해라."
늑대 무리가 달려들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5화
각성.
상황 진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험 많은 용병이더라도, 저 거대한 늑대 마수와 맞서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까.
용병들이 빗자루질에 휩쓸린 낙엽처럼 급히 몸을 내뺐다. 귀족 청년 또한 그들과 함께 도망쳤다. 하지만 방탕한 마법사의 달음박질은 남들보다 훨씬 느렸다.
"어서 날 지켜··· 으억?!"
털퍼덕!
귀족이 나자빠졌다. 뭔가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한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당황한 귀족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발견한 건 발목을 휘감고 있는 촉수.
촤아아악—!
렉스가 촉수를 잡아당겼다. 귀족의 몸뚱어리가 흙바닥 위에 질질 끌려갔다.
"우와아아악! 살려줘!!"
애처롭게 울부짖으며, 멀어져가는 용병들을 향해 손짓하는 청년. 하지만 용병들은 낙오된 고용주를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
곧 귀족이 늑대 무리 앞으로 배송되었다. 놈을 둘러싼 채로 송곳니를 드러내는 늑대 네 마리. 이를 맞닥뜨린 귀족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푸쉬이이···
귀족의 바지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코를 찌르는 오줌 지린내. 우진은 연신 손부채질하여 그 냄새를 몰아냈다.
"······뭐라 할 말도 없네요."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본 광경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은 듯했다.
"어떻게 할까."
"그냥 이대로 두고 가죠. 저 사람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요."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끝맺음을 하긴 해야겠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우진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귀족을 둘러싼 늑대들이 좌우로 비켜 길을 열었다.
"이봐."
"······."
청년이 넋 나간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봤다. 그 표정이 제법 볼만했지만, 이 지저분한 놈을 오래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쥐 죽은 듯 숨어 지내라. 다시 내 눈에 띄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테니까."
"······."
"대답."
"알, 알겠습니다."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청년. 원래는 이놈을 몇 방 쥐어박을 생각이었는데···
워낙 허약한 놈이라 한 대 때리면 죽을 듯했다. 늑대들 또한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깨물거나 할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꺼져. 생각이 바뀌기 전에."
우진이 파리를 쫓듯 손짓했다. 귀족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반쯤 기어가듯 도망갔다.
툭, 투둑.
청년의 바지에서 싯누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이 웃거나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클레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유시인들의 악상이 하나 더 늘었군요."
"그건 좀 불쌍하네."
지난날 저 청년은 클레어에게 얻어맞고 울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줌까지 지렸으니, 사회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신세. 아마 오늘의 일은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갈 흑역사가 되리라.
'······그건 그렇고··· 저놈의 이름이 뭐지?'
이름을 묻는 걸 잊었다.
딱히 중요하진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름을 들었어도 금방 잊어버렸을 테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
"좋아요."
다시 걸음을 옮겨갔다.
* * *
뒤늦게 온 위병들에게 방금 있었던 소란에 대해 설명해줬다. 주변 목격자가 많은 데다가, 그 귀족의 평소 행실이 개차반이었는지 위병들은 선뜻 물러났다.
"마법을 선보이기 좋은 장소가 있어요."
도시 밖으로 나온 후. 클레어가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생각해둔 장소가 있는 모양.
늑대를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우진이 렉스를 향해 손짓했다. 녀석은 눈치껏 가까이 다가와서 몸을 낮췄다.
그 모습을 본 클레어가 감탄했다.
"와··· 전용 안장까지 생긴 건가요?"
"교단 연맹이 장만해 주더라."
"옛날 생각이 나네요."
클레어가 웃으며 렉스의 등에 앉았다. 직후 그녀는 어서 타라는 듯, 자기 뒷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다.
늑대가 네 마리나 되건만···
이를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재촉에 부응하여 그 뒷자리에 올라탔다. 자연스레 클레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긴 것처럼, 우진의 가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어디로 가면 돼?"
"저쪽이요."
클레어가 지목한 방향으로 늑대들이 질주했다. 오래지 않아 커다란 호수와 그 주변을 둘러싼 나무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수의 물이 깨끗했다. 길게 자라난 나뭇가지가 호수 표면에 고스란히 비쳐 보일 정도. 물가에 온 수사슴 한 마리가 물을 마시다, 늑대들을 보고 식겁하여 급히 달아났다.
"운치 있는 풍경이네."
"네. 그리고 저희는 이걸 망칠 예정이죠."
이렇게 큰 호수는 주문을 연습하기 좋은 장소다. 깊은 물이 주문의 화력을 억눌러주기에. 그 여파로 발생하는 2차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군대에서 수류탄을 훈련할 때, 그 폭발물을 물에 던져넣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저부터 한번 해볼게요."
클레어는 악동처럼 웃으며 물가에 섰다. 그녀가 호수를 향해 오른손을 뻗는다.
"글래시어스, 사지타."
샤아아아—
클레어의 손바닥이 짙은 하늘색으로 물들었다. 직후 허공에 소용돌이치는 연푸른 빛 입자. 그것들은 곧 한데 뭉치며 뾰족한 얼음 화살의 형태를 조형해냈다.
파앙!
파공성과 함께 얼음 화살이 발사되었다. 힘차게 날아간 화살이 호수를 갈기자, 그 표면에 서리 같은 살얼음이 맺혔다.
이를 본 우진은 감탄했다.
"얼음 화살은 3위계 주문일 텐데··· 그걸 곧바로 캐스팅해서 날린 거야?"
"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클레어. 하지만 상당히 어려운 재주였다. 마법을 안정적으로 시전하기 위해선, 룬 문자와 도형으로 이루어진 술식을 미리 종이에 적어둬야 하니까.
흔히 메모라이즈라 불리는 밑준비. 마법사들이 항상 책을 안고 다니는 이유다.
클레어가 옆으로 비켜섰다.
"이번엔 진도 한 번 해보세요. 주문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하셨잖아요."
"너에 비하면 민망한 수준이야."
우진은 그리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클레어. 마치 교수가 보는 앞에서 문제 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좀 부담스럽네.'
본래 실력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 마음을 다잡은 후 주문을 준비했다.
슥, 스윽.
수화를 하듯,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자 우진의 두 손바닥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마치 주홍색 빛 구체를 빚어내는 듯한 모습.
그렇게 만들어진 2위계 화염 마법. 작열탄이 호수 중앙을 향해 쏘아졌다.
퍼엉!!
폭음과 함께 큼직한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곁에 선 클레어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 주문 방식인데··· 이런 건 어디서 배우셨어요?"
"어쩌다 보니 터득했어."
룬 문자를 형상화한 손동작으로 주문을 시전하는 방식. 마법사 에녹은 재능이 부족하기에 이런 꼼수에 자주 의존했다.
물론 예전 우진의 실력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진도 마법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마탑에 와서 공부하는 건 어떤가요?"
클레어가 이런 제안을 할 정도. 하지만 우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편법으로 얻은 능력이라··· 마탑에 들어가도 딱히 성과를 거두진 못할 거야."
암흑 신관의 내단을 취하여 얻은 재주. 남의 지식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에 불과하니, 마탑에 들어가는 순간 밑천이 드러나리라.
그런 이유로 거절했지만, 클레어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설령 편법으로 익혔더라도, 머릿속에 든 지식을 잘 조율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긴 하지."
확실히 옳은 말이지만··· 굳이 마탑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스럽다.
"클레어 네가 마법을 가르쳐주면 되는 것 아니야? 그러면 굳이 마탑에 들어갈 필요 없잖아."
훗날 여유로워지면, 예전처럼 클레어의 과외를 받으면 될 일이다. 우진이 그리 말하자 클레어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더 효율적이겠네요.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마법을 가르쳐드릴까요?"
"어··· 지금?"
"네. 이렇게 한적한 곳이 공부하기 좋잖아요. 마침 교재도 좀 갖고 왔어요."
클레어가 가방을 뒤적여서 마도서를 몇 권 꺼냈다. 이를 본 우진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까지 책을 가져올 줄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 열정을 예전에 몇 번이고 목격했기 때문에 금화 백 닢을 떠넘겼던 것 같다. 아무리 봐도 클레어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으니까.
우진이 선뜻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호숫가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마법을 논하는 두 사람.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문득 클레어가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왜 웃어?"
"그냥··· 꿈이 하나 이뤄진 것 같아서요. 이 호수를 처음 봤을 때, 여기서 진과 함께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마냥 해맑게 미소 짓는 클레어. 하지만 그녀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벌써부터 우울해할 필요 없어. 내 휴가는 아직 꽤 남아 있다고."
"그걸 위안 삼아야겠네요."
클레어가 그리 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내심 걱정했다.
'정신 상태가 좀 나빠 보이네.'
뛰어난 자는 질투를 받기 마련이다.
앞서 귀족 청년이 클레어를 귀찮게 굴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클레어의 재능을 질투하는 마법사가 여럿 있었다. 싫증 나는 인간관계로 인해 큰 스트레스가 누적된 상황.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잠시 일어나볼래?"
우진이 그리 말하며 손짓했다. 이에 클레어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뭘 하려고요?"
"평소에 힘 조절을 하느라 피곤하지 않아?"
"그렇긴 하죠."
클레어는 카르마를 품게 된 이후. 평상시 힘 조절에 각별히 신경 써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변 물건을 다 때려 부술 수도 있으니까.
우진의 경험상, 이렇듯 힘을 무작정 억누르고 다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짐가방에서 마수의 가죽을 꺼내 왼팔에 둘둘 말았다. 간단히 만들어진 샌드백. 우진은 그것을 든 채로 클레어의 앞에 마주 섰다.
"자, 주먹으로 이걸 때려봐."
"이게 저한테 도움이 된다고요?"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봐."
우진이 그리 재촉했다. 이에 클레어가 머뭇거리다 오른 주먹을 뻗었다.
투욱.
소심한 주먹질.
"더 대담하게 해봐. 로우킥을 찰 때처럼."
"이렇게요?"
퍼억!
"아까보단 좋아졌네. 더 세게."
뻐억!
"싫어하는 사람 얼굴이라 생각해."
콰아앙!!
"······어우, 야. 평소에 많이 참고 살았구나."
"너무 셌나요?"
"이 정도는 여유로워."
우진이 그리 답하자, 클레어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
"그러면 힘을 더 올려도 되겠네요?"
"어··· 방금 게 전력 아니었나?"
"더 강하게 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봐."
꽈아아앙!!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우진이 살짝 이를 악물었다. 공부하는 것보다 이게 더 빡센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얘가 렉스보다 더 센 거 같은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클레어의 주먹질을 한 번씩 맞아주며, 줄곧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다···
문득 내단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크람의 심안.'
비크람의 심안은 원래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두 눈을 잃었지만, 마음의 눈을 제대로 개안하지 못하여 이도 저도 아닌 상태.
그로 인해 젊은 수도승이 절망에 빠졌다. 모든 걸 자포자기한 채로 살아가던 비크람. 남은 삶을 패배자처럼 살아가게 될 상황에··· 암흑 신관이 나타나서 그에게 힘을 줬다.
'그 힘은 분명 카르마였어.'
카르마를 이용하여, 다른 존재가 지닌 힘을 더 뛰어나게 각성시키는 재주.
우진은 의도치 않게 이걸 해낸 듯하다.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군.'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6화
패배자.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진과 클레어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여 힘을 얻었고, 그렇기에 깊이가 부족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를 스승 삼아서 보충 학습을 하는 중이다.
'······머리 깨지겠네.'
마도서를 읽던 우진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다, 문득 고개를 돌려 클레어를 보았다. 저쪽도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스윽, 스으윽—
렉스가 촉수 끝에 달아놓은 표적을 좌우로 흔들었다. 불규칙한 움직임. 머뭇거리던 클레어가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오른손 훅. 하지만 그녀의 주먹질은 표적을 스치지도 못하고 빗나갔다.
"으앗!!"
클레어의 몸이 희한하게 휘청였다. 워낙 강하게 주먹을 날려, 그 힘에 의해 몸 전체가 딸려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보기 좋게 잔디밭 위에 엎어지는 클레어. 그녀가 부스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이 훈수를 둔다.
"주먹을 내뻗을 때, 발로 지면을 세게 밟아봐. 그러면 얼추 균형이 잡힐 거야."
"이론은 아까 들어서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클레어는 그리 푸념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몸치 기질이 좀 있어서 그런지, 이런 격투 기술을 익히는 게 어려운 모양.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나아졌군.'
실패했더라도 그 경험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각자 조금씩 진전하고 있었다.
성과가 있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재회했는데 종일 자기개발 시간만 가질 순 없는 노릇. 마침 클레어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슬 도시로 돌아갈까요?"
"좋지."
다시 마도시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도시 전체를 헤집고 다니며 여러 즐길거리들을 탐방했다.
함께 분수대에 앉아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듣고, 요즘 유행한다는 연극도 보고, 재미 삼아 도박장에 가서 카드도 좀 만져봤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니···
'······이제 돌아가야 하네.'
말 그대로 휴가가 삭제되었다.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나가서 좀 어리둥절할 정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몇 번 받아본 적 있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이런 느낌이었지.'
예나 지금이나 이 상황이 딱히 유쾌하진 않다. 클레어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음번에는 언제 오셔요?"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클레어. 그녀는 우진을 배웅하기 위해 걷는 중이었다.
우진은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놀과의 협상이 끝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게. 그때가 되면 좀 여유로워질 거야."
놀과의 휴전 협상을 잘 마치고 나면, 교단 연맹이 군대를 보내어 전초 기지를 하나 세울 것이다. 3차 원정을 시작하기 위한 밑준비.
3차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한 번쯤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클레어와 다시 만나서 좀 노닥거린 후. 먼 남쪽 도시에 자리 잡은 신디도 한 번 보러 가야 할 테니까.
이번에는 여유 시간이 너무 짧아서 신디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사절 일이 끝나고 나면 최소 한 달의 휴가를 낼 생각이었다.
"진은 아주 바쁘게 살고 계시네요."
"그러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량처럼 마냥 여유롭게 살았건만, 어느 순간부터 우진의 일상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훗날 3차 원정이 시작되고 나면, 클레어와 만나기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원정이 취소될 가능성은 없나요? 2차 원정의 피해가 크니, 아예 원정 자체를 취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클레어가 그리 중얼거렸다. 질문이라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까운 혼잣말.
우진은 약간 고민하다 대답했다.
"너의 말대로··· 교단 연맹 내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잠깐 나오긴 했지."
2차 원정이 말 그대로 박살 났다.
이는 교단 연맹의 입장에선 크게 나쁘진 않은 상황이었다. 마경에 대한 현장 정보를 얻은 데다가, 에드윈 공작이 망해버려서 왕국 연맹의 발언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대실패였다.
2차 원정군의 병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설령 원정이 실패해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 예상했는데, 마수에게 일방적으로 짓밟힌 후 간신히 숨만 붙어서 생환했다.
1차 원정의 성공을 축하하던 인류에게 찬물을 끼얹은 상황. 자연히 교단 연맹 내부에서 원정을 중단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개척 도시를 성공적으로 정화했으니, 이쯤에서 원정을 멈추는 게 현명하다.'
이 의견에 두 교단이 동의했다.
지혜의 교단, 헌신의 교단.
콘라드 대주교의 실패로 인해, 지혜의 교단은 엄청난 손실을 봤다. 이 상황에 3차 원정을 시도하는 건 부담스러운 짓이었다.
헌신의 교단은 처음부터 원정을 반대했다. 이쪽 교단의 성직자들은 온화한 성정을 갖고 있기에, 위험한 전쟁을 시도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번영, 시련, 조율의 교단이 중립을 선언했다. 원정에 적극적으로 임하던 세 교단이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망하기 시작한 것.
투쟁의 교단은 이 분위기를 뒤집고 싶어 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내 보고서가 교단 연맹의 윗사람들에게 넘어갔다 하더라고."
우진이 손수 쓴 보고서. 그리고 그와 함께 교단 연맹으로 온 하이에나 마수들.
호레이스는 이걸 기회라 생각했다.
"······그 인간도 정상은 아니야."
"왜요?"
"너무 과감해. 황소처럼 들이박아서 일을 추진하는 재주가 있다고 해야 하려나."
호레이스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과감함에 당황했다. 원탁 회담에 뜬금없이 얼굴을 비추더니, 놀과 대화를 주고받던 과정에서 대뜸 고개를 숙여 사과했으니까.
호레이스가 지닌 사회적인 지위를 고려하면, 이는 매우 충격적인 행동.
하지만 그 덕분에 상황이 좋게 돌아갔다. 한 교단을 대표하는 추기경이 직접 놀들의 지위를 인정하여, 사람들이 놀 일족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결과만 놓고 보면 좋은 일이지만··· 당시에는 적잖게 당황했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회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랬을 거야."
"확실히, 특이하신 분 같긴 하네요."
클레어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결과가 좋았다는 건··· 추기경님이 그리 되도록 의도했다는 뜻이겠죠?"
"아마 그렇겠지."
합리적인 데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고, 과감한 판단력까지 지녔으니. 호레이스는 확실히 비범한 인물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여러 성직자들을 제치고 추기경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그만큼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할 테니까.
어쨌거나··· 결론은.
"진 덕분에 3차 원정이 시작될 거란 얘기네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놀과의 동맹이라는 새로운 변수로 인해, 교단 연맹은 3차 원정을 시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로 인해 클레어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원정이 재개된 것은 우진의 활약이 빚어낸 성과 중 하나지만, 덕분에 다시 긴 시간 동안 떨어져서 지내게 되었으니까.
우진은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
"금방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 다치지만 마세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마도시 밖으로 나와서 한참 동안 걸어 나온 상태였다. 뒤늦게 주변을 본 클레어는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도시 입구까지만 배웅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따라왔네요."
"그러게."
다시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알죠?"
클레어가 그리 말하며 슬쩍 두 팔을 벌렸다.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제스처. 우진은 눈치껏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줬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만날 때마다 포옹을 나누는 건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좀 진부해졌다는 뜻이다.
"······뭔가 이렇게 끝내기가 아쉽네요."
품속에서 그리 중얼거리는 클레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우진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에 응하여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
클레어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이쪽을 응시한다. 그 반응에 우진은 내심 당황했다.
'이게 아닌가?'
뭔가 출제자의 의도에 어긋난 답을 제출한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는 클레어.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치 렉스처럼 붉어진 안면.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클레어가 문득 꿈에서 깬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 나중에··· 다시 뵈어요."
그리 말한 후,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대며 걸어가는 클레어. 우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곁에 있는 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내가 실수한 건가?"
이에 렉스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직후 녀석이 암늑대 미샤에게 다가가서 몸을 기대었다. 사이좋게 걸어가는 두 늑대.
'······아주 염장을 지르는군.'
이래서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면 안 된다. 우진은 푹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겨갔다.
* * *
장벽 도시 유르기스로 돌아왔다.
우진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동안, 사절단을 보내기 위한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상태. 조만간 마경으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하다.
타라스크의 등에 실려 있는 물품들을 살펴보던 중,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진! 휴가는 잘 보내고 왔는가?"
팔자 좋은 한량처럼 와인병을 손에 쥔 롤랑.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의문을 표했다.
"롤랑. 조만간 개척 도시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롤랑은 제3 개척 도시의 지휘관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아직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롤랑이 서글픈 어투로 대답했다.
"2차 원정에 멋대로 참여했더니··· 직위를 아예 박탈당했어. 나보다 내 후임자가 일을 더 잘한다고 하더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야··· 말이 되죠."
롤랑은 평소에 서류 작업들을 부관에게 자주 떠넘기곤 했다. 덕분에 부관이 그 일에 숙달되어 롤랑보다 더 능숙해진 상태였다.
우진이 그 점을 지적하자, 롤랑이 한숨을 내쉬며 와인병의 코르크마개를 뽑았다.
"이봐 진. 남의 상처를 굳이 들쑤셔야 하는 건가? 이럴 때는 내 편을 들어야지."
"솔직히 인과응보 아닌가 해서요."
"······그렇긴 해. 빌어먹을!"
롤랑이 포도주를 병째 들이켰다. 직후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손에 쥔 포도주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우진은 선뜻 그것을 넘겨받은 후 포도주를 마셨다. 이를 본 롤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군?"
"뭘 보고 판단하신 겁니까?"
"지난번에 술을 마시자고 하니, 일해야 한다면서 단칼에 거절했지 않은가. 표정도 평소보다 죽상인 것 같고."
"······그냥 목이 말랐습니다."
대충 둘러대며 물품을 살폈다. 롤랑이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주변을 기웃거렸다.
"도박으로 좀 잃었나? 혹은 투자가 실패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자 문제?"
뭔가 낌새를 읽은 걸까. 이쪽의 표정을 응시하던 롤랑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 문제로군. 이야··· 의외인데. 평소에 희한할 만큼 여자에게 관심이 없더니."
"······좀 저리 사라지면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이런 술안줏거리는 흔치 않다고. 자, 더 마시게. 패배자들이 만났으니 술이라도 실컷 퍼마셔야지."
롤랑이 얼른 마시라는 듯 포도주를 내밀었다. 술을 다 비워야 사라질 듯했기에 우진은 남은 포도주를 단번에 비웠다.
그 모습을 본 롤랑이 한바탕 웃었다.
"하하! 그래, 가슴에 불이 났으면 술로 꺼야지. 많이 가져오길 잘했구먼."
롤랑이 옆구리에 찬 작은 가방을 뒤적여서 새 포도주를 두 병 꺼냈다. 공간 확장 주문이 깃든 짐가방이었다.
그 귀물을 본 우진이 의문을 표했다.
"언제 장만하신 겁니까? 2차 원정 당시에는 이런 물건이 없으셨는데."
"그야 돈 주고 샀지. 마경에 갈 때 이런 물건이 하나 있으면 좋을 듯하더군. 나도 자네와 함께 사절단으로 갈 예정이야."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롤랑의 무력은 성기사들 중에서도 유독 출중했으니.
롤랑이 새 술을 따며 말했다.
"자네 연인의 초상화라도 한 번 줘보게. 분명 하나쯤 그려놨을 텐데."
"······그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요즘 유행이잖아. 소중한 사람끼리 서로 초상화를 한 장씩 나눠 가지는 건."
이는 원정으로 인해 생긴 유행이었다. 병사들이 마경으로 떠나기 전, 가족이나 연인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챙겨갔다.
롤랑이 포도주 한 병을 우진에게 건네준 후. 재촉하듯 연신 손짓했다.
"이거 비싼 술이야. 야박하게 굴지 말고 줘보게. 내가 본다고 닳지도 않을 텐데."
"······."
안 그래도 잠시 휴식할 생각이긴 했다.
고민하던 우진이 펜던트를 꺼냈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큼지막한 펜던트. 그 속에 드레스를 입은 클레어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이는 큰 초상화에 축소 마법을 걸어서 작게 만든 물건이었다. 값이 비싼 대신, 그림의 완성도가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교하다.
초상화를 본 롤랑이 살짝 당황했다.
"······혹시 요정 혈통인가?"
"그게 뭡니까?"
"처음 들어보나? 유서 깊은 왕족이나 귀족 중에는 고대 종족의 피를 이은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들을 흔히 요정 혈통이라 부르지."
우진은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걸 물어본 적은 없는데··· 요정 혈통이란 걸 알아보는 기준은 뭡니까?"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고, 잘 늙지 않아."
"동화 같은 말이군요."
이에 롤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실존한다네. 현실 일이라는 건 때때로 허구를 능가하는 법이지."
"그렇더라도··· 클레어가 특별한 혈통을 지닌 것 같진 않군요. 느낌이 그렇습니다."
그리 답하며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롤랑이 펜던트를 돌려준 후, 새로운 포도주의 코르크마개를 뽑았다.
"이야기를 좀 들려주게. 이번 휴가 때 그 아가씨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가? 내가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도록 하지."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한번 얘기해 보자.'
비싼 포도주를 받았으니 그냥 넘어가기도 좀 애매했다. 고민하던 우진이 줄곧 있었던 일을 조금씩 이야기했다.
"휴가 때 있었던 일인데···"
롤랑이 팔짱을 낀 채로 설명을 경청했다. 평소보다 한층 근엄한 태도.
"······그래서, 제가 선을 넘었는지 클레어와 많이 어색하게 헤어졌습니다."
적당히 설명을 끝마쳤다. 왠지 모르게 롤랑이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술. 그거 이리 주게나."
우진은 손에 쥔 포도주를 넘겨줬다. 그것을 받은 롤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봐··· 내 술은 패배자를 위한 것이지, 자네 같은 기만자를 위한 게 아니야."
"무슨 뜻입니까?"
롤랑은 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에 술을 퍼부으며 멀어져 가는 롤랑. 우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도 내가 뭘 실수했나?'
영문 모를 일이 자꾸만 늘어난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7화
놀 일족. (1)
휴가를 다녀온 후. 오래지 않아 교단 연맹의 사절단이 출발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대표는 성녀 세실리아. 그녀는 2차 원정 이후로 놀 일족과 자주 소통하여, 성직자들 중 가장 뛰어난 수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기여도와 소통 능력만 놓고 보면, 우진이 사절단의 대표 역할을 맡는 게 옳겠지만···
이 동맹은 교단 연맹과 놀 일족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 우진은 교단 연맹에 속한 성직자가 아니기에, 사절단의 대표 역할을 맡는 건 다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
우진이 맡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문관이다. 그 이상의 임무를 맡는 건 꺼려졌다. 입지가 높아지면 그만큼 일거리가 더 많아질 테니까.
'롤랑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어.'
곁에서 걷는 이 사내를 보라.
직위가 높은 고위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행동력. 그로 인해 교단 연맹은 롤랑을 통제하는 걸 포기하고 방목해 뒀다.
성기사로서의 높은 입지와, 용병의 자유로움을 동시에 지닌 존재. 저런 노선을 추구하는 게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툭툭.
문득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우진은 고개를 돌려 그 손짓의 주인을 확인했다. 늘 그렇듯 연녹색 면사포를 뒤집어쓴 여사제.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세실리아가 수화로 답했다.
—제3 개척 도시에 들렀다가 갈까요?
계속 북쪽을 향해 걸어서 그런지, 어느새 제3 개척 도시 주변에 도달했다. 그 질문에 우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물자가 아직 넉넉하니, 그냥 지나칩시다."
오랜만에 보우 어르신을 찾아뵙고 싶었지만, 사적인 감정에 얽매여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옳지 못한 짓이었다.
세실리아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사절단의 선두로 돌아갔다.
문득 이 상황에 위화감이 들었다.
'······말이 좋아서 자문관이지, 이러면 사실상 현장 지휘까지 내가 맡은 것 같은데.'
앞서 롤랑을 본받자고 다짐한 게 몇 초 전이건만, 생각 없이 일거리를 더 늘렸다. 왠지 최근 들어서 오지랖이 넓어진 듯한 느낌.
왜 이렇게 된 건가 생각해 보니···
2차 원정 때 고생하여 성향이 좀 변한 것 같았다. 문제를 수습하는 것보다 방지하는 게 쉽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일단 이번 일까지만 잘 끝내보자.'
놀과의 동맹이 성사되면 자문관이 불필요해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고생하고, 그 이후에는 휴직을 선언한 후 마도시로 가야겠다.
우진은 그리 다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개척 도시 인근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이 지역은 이미 균열핵을 정화하여 마경을 몰아낸 상태이므로.
곁에서 걷던 롤랑이 한마디 했다.
"이야··· 진. 저것 좀 보게."
롤랑이 지목한 곳을 보았다. 그곳엔 잡초 몇 가닥과 이름 모를 들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한때 마경이었던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 그 빛깔은 짙은 녹색이었다.
나름 기념비적인 광경이었다.
"균열핵을 정화한 후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자연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일세."
롤랑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벽 안쪽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광경이지만, 이곳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은 저 시시한 잡초 몇 포기가 인상 깊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몇 년만 더 지나면 토지가 완전히 회복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리라.
"······만약 교단 연맹의 북벌이 성공하여, 마경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경우··· 놀 일족과 자네의 늑대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롤랑이 문득 중얼거렸다.
우진도 그 결과가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현시점 누구도 저 질문의 답을 알지 못하리라. 가능한 것이라곤 추측뿐.
"글쎄요··· 어쩌면 카르마를 모조리 잃고 평범한 생명체가 될지도 모르죠."
"만약 그리된다면, 놀 일족이 우리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너무 먼 미래긴 해도 그런 일이 생기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질문에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놀들도 마경을 몰아내길 원할 겁니다."
"왜 그리 생각하나?"
"힘을 잃는 것보다, 당장의 생존이 더 중요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옛 존재들.
마경 깊숙한 곳에서 살아가던 괴물들의 활동이 잦아졌다. 그로 인해 놀 일족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결국 저들의 영토를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올드원 하나가 그 상과에 만족하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교단 연맹이 3차 원정을 진행하려면, 그 올드원이 거느린 세력을 처리해야 한다.'
혹은, 원정군이 이쪽 지역을 포기하거나.
여기서 둘 중 어느 쪽을 택해도 가시밭길이었다. 원정군이 놀 일족의 영토를 경유하는 걸 포기하고 다른 경로를 택할시, 그쪽 지역에 자리를 잡은 마수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사절단은 두 가지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첫 번째 임무는 놀 일족과의 휴전을 확정 짓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임무는, 교단 연맹이 장차 상대해야 할 존재. 올드원과 놈의 지배하에 놓인 세력을 조사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상황이 현실성 없군. 올드원이란 건 낡은 동화에서나 듣던 단어인데."
"요정과 비슷한 거라 생각하십시오."
현실 일이라는 건 때때로 허구를 능가한다. 최근 롤랑에게서 들었던 말. 우진은 그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줬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제2 장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경으로부터 개척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벽. 지난번 봤을 때보다 그 높이가 더 높아졌다.
"개문!"
장벽 주둔군을 통솔하는 기사가 그리 소리쳤다. 오래지 않아 성문이 열리며, 익숙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연신 찔렀다.
'······제법 오랜만이군.'
우진이 그의 사냥터로 돌아왔다.
* * *
사절단과 함께 북쪽으로 나아갔다. 지난번보다 그 과정이 훨씬 수월했다.
2차 원정군은 대략 8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큰 군대였지만, 병력의 수준이 들쑥날쑥이라 허점 또한 많았다. 마수의 관점에서 보면 정어리 떼처럼 탐스러운 먹잇감들.
하지만 사절단의 경우, 머릿수가 80명에 불과하나 이들 모두가 숙련된 정예였다. 거기에 놀 세 마리가 동행하고 있으니 마수들이 선뜻 덤벼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강인한 힘과 자신감을 동시에 지닌 마수도 더러 있기 마련.
"크르르륵!"
거대한 흑곰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꽤 강한 놈이로군.'
놈의 존재는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숲 곳곳에 선명한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곰의 영역임을 알리는 표식.
사절단 또한 이를 확인했지만, 큰 고민 없이 숲으로 들어왔고. 곰 마수가 낯선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웬 떡이냐.'
안 그래도 따분했는데 간만에 재미를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 생각하며, 마체테를 향해 손을 가져가던 찰나···
"적을 제압하라."
성기사들이 즉시 대응에 나섰다. 붉은 휘광을 두른 칼날. 이는 투쟁의 교단에 속한 고위 기사들이 피워낸 신성이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이를 맞닥뜨린 흑곰이 성난 듯 울부짖으며 앞발을 휘둘렀다.
콰아앙!!
앞발이 애꿎은 흙바닥을 때려 부쉈다. 곰의 동작을 읽은 성기사들은, 흐르는 시냇물이 바윗돌을 만난 것처럼 자연스레 좌우로 갈라졌다.
그로 인해 생겨난 빈 여백에 곰이 앞발을 내려찍은 상황. 성기사들이 공격을 피한 후 놈의 주변을 포위했다. 그리고 붉은 칼날들이 마구 휘둘리며 곰 마수를 사방에서 도륙했다.
'유르기스의 연격술.'
지난날 롤랑과 그의 수하들이 빅풋에게 쓴 기술이다. 교단 연맹을 상징하는 영웅, 유르기스가 고안해낸 기예.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강력한 마수를 꺾기 어렵다. 우진 같은 예외가 그리 흔치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유르기스는 여러 기사들이 상호 협력하여 적을 꺾는 기술을 고안해 냈다.
쉼 없이 두들겨 맞으며 애처롭게 비명을 내지르는 흑곰.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진 듯했기에 우진은 그 상황을 관망했다.
쿠웅!
오래지 않아 흑곰이 흙바닥 위에 엎어졌다. 우진은 그 사체로 다가가서 내단을 뽑아냈다.
'이 내단은 누구에게 줄까···'
잠시 고민하다, 늑대 얀에게 던져줬다. 녀석의 부족한 완력을 보충하기 좋을 듯했기에. 나머지 세 늑대가 부럽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봤다.
먹여야 할 입이 넷이나 되니 이런 상황이 될 때마다 애매했다.
'이럴 때 카르마를 나눠주는 재주를 쓸 수 있다면 공평하고 좋을 텐데.'
클레어를 각성시킨 능력.
우진은 그 방법을 나름 고심해봤지만 특별히 성과가 없었다. 솔직히 이걸 어떻게 해내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되었으니까.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단을 뽑아 먹어서 그 기억을 엿본다.'
비크람의 심안을 일깨워준 암흑 신관.
놈을 찾아내어 잡아먹으면 그 능력을 계승 받을 수 있을 테지만, 비크람의 기억을 들춰봐도 놈의 위치를 도통 유추할 수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겨갔다.
이후로도 마수와 맞닥뜨릴 기회가 생기길 소망했으나, 흑곰이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교전이었다.
며칠 후.
사절단은 큰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좁은 협곡 사이, 큼직한 바윗돌을 쌓아서 만든 돌벽. 눈에 익은 구조물이었다.
놀의 관문.
오래지 않아 그 문이 활짝 열렸다. 우진과 사절단이 관문을 통과하여, 놀 일족의 영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우리의 도시로 안내하겠다."
로가르와 쟈카, 브로툴이 앞장서서 사절단을 이끈다. 그렇게 녀석들과 함께 북동쪽으로 한참 걸음을 옮겨가고 나니···
저 멀리 도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검푸른 진흙을 벽돌처럼 굳혀서 쌓아 올리고, 마수의 뼈와 나뭇가지를 지붕으로 덧댄 집들. 창문을 대신하듯 벽면에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다.
다소 원시적인 형태의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 이를 본 쟈카가 문득 중얼거렸다.
"······좀 부끄럽네··· 솔직히 인간들의 도시에 비하면 많이 후진 것 같아."
로가르와 브로툴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일족에 대한 자부심과 별개로, 생활 환경만 놓고 보면 놀 측이 훨씬 열등해 보였으니까.
우진은 도시를 한 번 둘러보다··· 도시 중앙에 놓인 큼지막한 건물을 발견했다.
"저곳이 너희 족장의 처소인가?"
"맞아. 바로 안내해 주마."
쟈카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뒤이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인간 사절단. 곳곳의 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방인들을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사절단이 족장의 처소에 도착했다. 손님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쟈카와 브로툴이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오래지 않아 밖으로 나와서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와라."
"벌써 보고가 끝난 거냐?"
"브락나크가 미리 얘기를 해뒀는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어."
뜸 들이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직후 사절단은 거대한 놀 한 마리를 맞닥뜨렸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하이에나. 그 덩치는 지난번 봤던 브락나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덩치. 커다란 사자 가죽을 치마처럼 허리에 둘러놨다.
꽤 나이를 먹었는지, 털의 색깔이 늙은 노인의 머리칼처럼 시허옇다. 하지만 송곳니와 근육은 젊은이의 것보다 더 흉악했다.
'크나르타쉬.'
일족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족장. 놀의 안광이 사절단을 한 번 훑었다.
그 시선이 우진의 얼굴에 머물렀다.
"······우리 구면인가?"
크나르타쉬가 그리 질문했다. 뭔가 긴가민가하단 듯한 어투. 이에 우진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족장. 꽤 수척해졌군."
"누가 할 소리를··· 수호자. 겉모습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 브락나크와 쟈카가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못 알아봤을 거야."
크나르타쉬가 한껏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덩치가 큰 만큼 보폭이 넓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놀 족장.
덥석.
놀이 한 손으로 우진을 집어 들었다. 신기한 보물을 발견한 듯한 눈으로, 우진의 몸 곳곳을 훑어보는 크나르타쉬.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내려놔라.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생긴 게 변해도 성격은 여전하군."
크나르타쉬가 급히 우진을 내려놨다. 직후 녀석이 다시 돌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일순 하반신에 둘러둔 사자 가죽이 한 차례 펄럭였다.
그 모습을 보던 롤랑이 문득 질문했다.
"······분명 여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렇다면 내가 방금 뭔가를 잘못 봤군. 엄청난 대물을 본 것 같았는데."
그리 중얼거리는 롤랑. 이에 우진은 잠시 고민하다 한 가지 귀띔해 줬다.
"······제대로 본 게 맞습니다."
"어··· 어어?"
"하이에나는 암컷도 그게 붙어 있어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암컷에게 더 많이 분비되기에. 심지어 더 크고 우람하다.
"참고로 로가르도 암컷입니다."
"······여신이시여."
롤랑은 현기증을 느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8화
놀 일족. (2)
인종이 같더라도, 타국의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문화 차이를 느끼게 되기 마련. 놀 일족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종족 자체가 다르니까.'
소통이 가능하지만, 종족 특유의 성질이 다르기에 여러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오해들이 쌓이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될 테고, 그 혼란은 두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선 서로의 차이점을 인지해야 한다.
"먼 곳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이들과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군."
크나르타쉬가 그리 중얼거렸다. 여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놀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커다란 나무 식탁 하나를 가져왔다.
식탁에 둘러앉게 된 인류 측 사절단과 놀 여왕. 곧 음식이 각자의 앞에 놓였다.
직후 사절단이 크게 당황했다.
"······진, 이게 무슨 의미지?"
롤랑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식탁 위에 놓인 건 기다란 뼈다귀. 그 생김새가 닭의 목뼈를 연상케 했고, 두께는 어른 팔뚝처럼 굵직했다.
먹다가 남긴 쓰레기를 내온 듯한 상황. 하지만 이건 놀 나름의 대접이었다.
"오리 마수의 목뼈를 말린 겁니다. 놀 일족이 별미라 여기는 음식이죠."
마수 고기는 대부분 맛이 없다. 쓰고, 질긴 데다가, 역하다. 그렇기에 놀 일족은 마수의 뼈를 더 좋은 식재료라 여겼다.
오리 마수의 목뼈를 잘 말리면 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구하기도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일족의 축젯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별미였다.
그리 설명해 주자 사절단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게 되어도 이 상황이 난감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지?"
롤랑이 커다란 뼈다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크나르타쉬가 오리 목뼈를 깨물었다.
빠자작—!
놀의 송곳니가 간단하게 오리 목뼈를 한입 베어 먹었다. 우적거리며 뼛조각을 씹어 삼키는 크나르타쉬. 비스킷을 입안 가득히 넣고 씹는 듯한 소리가 연거푸 났다.
그 모습을 본 사절단의 대표. 성녀 세실리아가 용기를 내어 목뼈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레 면사포를 들춘 후 뼈다귀를 깨문다.
까득!
"······히잉···"
면사포 아래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딱딱한 뼈다귀를 씹어서 이빨이 아픈 모양.
하이에나의 강인한 턱은 뼈다귀를 손쉽게 씹어 부술 수 있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실리아가 꿋꿋이 오리 뼈를 씹어 먹으려 했다.
대접받은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러다가 이빨 깨지겠다.'
보다 못한 우진이 성녀의 손에 들린 오리 목뼈를 빼앗았다. 이에 크나르타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인간은 이가 약해서 뼈다귀를 씹을 수 없다. 접대는 고맙지만 이건 힘들겠어."
"그래? 뜻밖이군. 오리 뼈는 일족의 어린아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놀은 어릴 때부터 턱이 억세니까."
성심껏 식사를 접대하더라도, 각자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생긴다. 마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처럼.
두루미는 넓은 접시에 담긴 수프를 핥아먹을 수 없고, 여우는 좁은 병 속에 담긴 음식을 꺼내먹을 수 없듯이. 이런 식사 자리에 앉을 때도 두 종족의 차이를 인지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 기념비적인 식사를 이대로 망칠 순 없는 노릇. 우진이 제안했다.
"놀의 음식을 대접받았으니,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음식을 내놓도록 하지."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 같아서, 사절단에게 음식을 준비하라 미리 언질을 해뒀다.
크나르타쉬 또한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놀 여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우진이 성녀에게 눈짓을 주자, 세실리아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성직자들이 인류 측 음식을 갖고 왔다.
훈제된 돼지고기를 모닥불에 구운 요리. 그 폭력적인 생김새와 향기로 인해 크나르타쉬가 반쯤 넋이 나갔다.
"방금 구워서 뜨거울 거다."
우진이 그리 경고해 줬다. 하지만 크나르타쉬는 이미 나무 그릇에 놓인 돼지고기를 맨손으로 집어 든 상태였다.
놀 여왕이 인류의 음식을 한입 씹었다.
콰삭—
불에 그을린 돼지 껍데기가 바삭하게 씹혔다. 직후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육즙. 그 온도가 엄청나게 뜨거웠으나 크나르타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먹어 치웠다.
도중에 멈출 수 없는 맛이었다.
인류에게 돼지고기는 돈만 지불하면 구할 수 있는 식재료지만, 놀의 관점에서 이 고기는 신의 주방에서 내려온 듯한 음식이다.
"······충격적이군. 이런 맛을 경험하는 건 처음이다. 너희가 우리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를 알겠어."
크나르타쉬가 그리 중얼거렸다. 우진은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환경이 중요한 법이지. 인간들은 뼈다귀를 아예 음식으로 취급하질 않아."
그리 말하며, 오리 목뼈를 렉스에게 내밀었다. 턱이 강인한 늑대에게 좋은 간식이었다.
킁킁.
렉스가 뼈다귀의 냄새를 맡았다.
······홱.
렉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딴 건 음식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그 모습을 본 크나르타쉬가 황당한지 헛웃음을 흘렸다.
"사냥개도 거르는 음식을, 우리 일족은 줄곧 특식 취급하며 먹어온 건가···"
"이 녀석의 입맛이 유독 까다로워서 그래. 솔직히 오리 목뼈는 나름 먹을만하다고."
우진은 그리 대꾸하며 오리 목뼈를 한 입 씹어 먹었다. 좀 단단하긴 해도 계속 곱씹다 보면 고소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장벽 안쪽에서 온 식재료와 비교선상에 놓는 건 무리였다.
"인간과 동맹하면 이런 음식을 주기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거야."
달콤한 제안. 하지만 크나르타쉬는 고민이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음식을 맛보고 나면, 우리 일족의 전사들도 편식하게 될 거다. 동맹의 취지는 좋지만 그 이후가 걱정되는군."
놀 일족은 대식가인 데다 머릿수도 적잖다.
인간이 공급해 주는 식량만으로는 모두가 배를 채우기 힘들 텐데, 이런 음식을 경험하면 일족의 마음가짐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인류 문명과 접하는 순간부터 긴 세월 이어져 온 전통이 뒤틀린다. 원시 부족의 우두머리는 그 변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해봤는데··· 확실히 너의 입장에선 고민이 될 만한 일이겠어."
우진도 팔짱을 낀 채로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이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 해봤으니까.
한동안 고심하다 말을 꺼냈다.
"······이런 조언을 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겠지만··· 때때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지?"
"오래된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변하지 않는다는 건 정체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시대에 뒤처져서 도태될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변치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 또한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우진이 그리 말하자, 크나르타쉬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낡고 오래된 것들이 우리를 위협할 때가 있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어. 그리해야만 우리보다 더 오래된 존재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올드원. 옛 존재의 활동이 잦아졌다. 그 낡은 것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선 지원군의 존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크나르타쉬의 고민은 짧았다.
"언약 의식을 준비하라."
놀들의 여왕이 동맹을 받아들였다.
언약을 맺기 위해, 브로툴을 비롯한 놀 주술사들이 큼지막한 황동 화로를 가지고 왔다. 접이식 다리를 지닌 이동식 화로. 이는 놀들이 2차 원정군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다.
화르륵—!
브로툴이 장작에 불을 지폈다. 직후 주술사들이 시커먼 가루를 뿌리자, 불꽃의 색이 유황불 같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 불꽃 앞에 세 존재가 섰다. 놀 일족의 우두머리 크나르타쉬, 사절단의 대표 세실리아, 그리고 입회자 우진.
크나르카쉬가 털을 한 움큼 뽑아 던졌다.
화륵!
털을 집어삼킨 불꽃이 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직후 세실리아가 조심스레 단검으로 머리칼을 자른 후, 그것을 면사포 밖으로 꺼냈다.
머리카락의 색깔이 특이했다.
마치 갓 따낸 풀잎처럼 싱그러운 녹색. 그 머리칼을 불꽃에 던져 넣자, 희한하게도 쑥을 절구로 짓이긴 듯한 냄새가 났다.
'이제 내 차례로군.'
우진이 단검으로 머리칼을 한 움큼 잘라낸 후, 그것을 불꽃에 던져 넣었다.
화륵!
세 존재의 머리칼이 타들어가며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의식을 통해 언약이 성사되었다. 놀들의 기민한 후각은 이 향기를 기억하리라.
사절단의 첫 번째 목표를 완수했다. 이로써 인류와 놀은 한배를 탄 사이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만 잘 해결하면 되겠어.'
두 세력의 동맹이 성사되었으니, 남은 일은 함께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우진은 뜸 들이지 않고 질문했다.
"어떤 놈이 너희를 공격하고 있는 거지? 상황을 좀 구체적으로 알려다오."
"네가 흉물이라 부르던 괴물과 싸우고 있다."
놀 일족은 흉물들에게 당해, 어쩔 수 없이 영토를 포기하고 남하해야 했다.
그 말에 우진은 의문을 표했다.
"좀 뜻밖이로군··· 놀 전사들의 힘이면 흉물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텐데?"
"평범한 흉물이 아니야. 놈들에게서 옛 존재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놈들의 힘이 더 강력하고, 더 괴상해졌어."
옛 존재의 힘이 깃든 흉물.
우진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든 암흑 신관들의 기억을 되짚어보기 위함이었다.
'······감이 안 잡히는군.'
흉물은 지능이 거의 없고,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암흑 신관들도 흉물을 통제할 수 없었다.
실패작.
암흑 신관들은 흉물들을 그저 실패작이라 불렀다. 세례를 내리는 과정에서 흉물이 될 기미가 보이면, 즉시 그 사람의 몸뚱어리를 지하 깊은 곳 폐기물 처리장에 던져 넣었다.
'옛 존재들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견적을 잡으려면 눈으로 직접 봐야 할 듯하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나온 김에 북부 전선으로 가보자."
"좋지."
크나르타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자···
왠지 모르게 놀들이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머릿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의 놀들이 몰려온 듯한 모습.
우진이 곁에 선 놀 여왕에게 질문했다.
"왜 이렇게 모인 거야? 축제라도 하나?"
"글쎄··· 모르겠는데."
영문을 알 수 없다. 크나르타쉬 또한 이 상황이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눈에 띈 놀 한 마리에게 질문했다.
"다들 내 처소 주변에서 뭘 하는 거냐?"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놀들이 그리 말하며 군침을 삼켰다. 그제야 우진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돼지고기 냄새를 맡았구나.'
놀 여왕과 행한 언약 의식보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더 강렬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놀들이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 부하들의 애달픈 시선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기 힘들었는지···
크나르타쉬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혹시··· 아까 그 고기. 좀 남아 있나?"
"없어도 만들어내야 할 상황 같네."
출발하기 전에 배식부터 해야 할 듯했다.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9화
새로운 위협.
돼지고기가 그리 넉넉하진 않았으나, 놀들이 한 번씩 맛볼 정도의 양은 되었다.
그런데 음식이란 건 아예 맛을 안 보는 것보다, 감질나게 한 입만 먹은 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법. 고기의 맛을 본 놀들은 양이 적어서 아쉬운지 연신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고심에 잠겼다.
'육포라도 줘야 하나?'
하지만 보존 식품까지 내줬다간 사절단이 먹을 식량도 부족해진다.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우진이 그리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
촤악.
세실리아가 씨앗들을 바닥에 흩뿌렸다. 직후 성녀가 손수 물뿌리개를 기울여, 씨앗이 뿌려진 땅에 성수를 들이붓는다.
샤아아아—
지면에 일렁거리는 녹색 기운. 뒤이어 흙바닥에 떨어진 씨앗들이 갈라지며 새싹이 여럿 돋아났다. 겨울철 유리창에 서리가 번져가듯, 녹색 풀잎들이 곰팡이를 비집고 자라났다.
가지를 뻗고, 꽃이 떨어진 후, 열매가 맺힌다. 마치 식물이 자라나는 중간 과정을 수십 배로 배속해둔 듯한 모습.
오래지 않아 라즈베리와 블랙베리 덤불이 각각 다섯 그루씩 자라났다.
—간식을 좀 마련해 봤어요.
세실리아가 소심하게 손짓하여 의사 표현을 했다.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몰려서 쑥스러운 모양. 주변에 서 있던 크나르타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불들을 살폈다.
"이 희한한 빛깔의 식물은 뭐냐?"
놀 여왕이 그리 질문했다.
생각해 보니, 놀 일족은 녹색 이파리가 달린 식물을 보는 게 처음일 터였다. 이들은 줄곧 마경에서 나고 자란 존재들이기에.
"이 열매를 뜯어내서 먹는 거다. 이파리와 나뭇가지는 망가트리지 말고."
"간단하군."
크나르타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녀석의 손가락이 열매를 붙잡는다.
뿌득!
그대로 라즈베리가 터졌다. 놀 여왕의 손아귀 힘이 워낙 강하여 생긴 일이었다.
이를 본 우진이 피식 웃었다.
"간단하다더니?"
"······이게 생각보다 연약하구나."
크나르타쉬가 머쓱한 듯 변명했다. 직후 킁킁대며 손에 묻은 과즙 냄새를 맡는 놀 여왕. 녀석이 손가락을 한 번 핥았다.
직후 크나르타쉬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눈을 끔뻑였다. 성녀의 신성으로 축성된 열매는 혀가 아릿해질 만큼 달콤했으니까.
"이 열매도 굉장한 맛이 나는데. 지평선 너머의 땅은 이런 것들로 가득한 건가?"
"심심치 않게 보이지."
"풍요로운 땅이로군··· 우리 일족이 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인 게 아쉬워질 정도야."
마경의 일족들은 남쪽으로 가는 걸 꺼린다.
남쪽으로 갈수록 마수들의 수준이 점점 약해지고, 그런 나약한 사냥감들을 잡아먹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할 경우. 세대가 지날수록 일족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남하를 시도한 일족들은 대부분 오래 지나지 않아 멸족했다. 안전한 땅에 머무를 때 생겨나는 태만함이, 어느 무엇보다 큰 위험으로 작용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빨리 우리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
크나르타쉬가 과일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놀 여왕은 선조로부터 물려져 온 영토를 내준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에 대해 우진도 할 말이 있다.
"슬슬 출발하자. 이러다가 해 떨어지겠다."
북쪽 전선으로 가서 전황을 살필 생각이었건만, 놀들에게 음식을 배급하느라 정신 팔려서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크나르타쉬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부하에게 명을 내린다.
"코뿔소를 데려와라."
탈것 정도는 제공해 줄 생각인 듯했다.
* * *
북쪽을 향해 코뿔소 마수 세 마리가 질주했다. 각 코뿔소의 등에는 놀 전사, 크나르타쉬, 그리고 롤랑과 성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우진의 경우, 여느 때처럼 붉은 늑대의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늑대 마수 네 마리가 코뿔소의 곁에서 나란히 달린다.
세실리아도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성녀가 떠나면 베리 덤불들이 열매를 맺질 않았다. 놀들이 아쉬워하는 눈으로 성녀를 보았고, 세실리아는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어서 도시에 남아 신성을 불어넣기 바빴다.
'참 부러운 능력이란 말이지···'
저런 식으로 뚝딱 식량을 만들어내는 건 귀중한 재주였다. 우진은 그 능력이 탐났지만, 교단 연맹 내부에서도 저렇게 고강한 힘을 지닌 인물은 흔치 않다고 들었다.
이제 와서 성직자 흉내를 내더라도 저런 능력을 가질 순 없다는 뜻. 그렇기에 우진은 금세 마음을 접고 임무에 집중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지?"
"곧 도착한다."
크나르타쉬가 선뜻 대꾸했다. 그 말대로 오래지 않아, 저 멀리 돌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쪽에 있던 놀의 관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규모가 컸다.
비록 인간이 쌓아 올린 연맹의 장벽보다는 높이가 낮았지만, 저 정도 높이만 되어도 전술적인 이점은 충분히 확보해둔 셈.
놀의 장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코뿔소들이 다가오는 걸 주시하고 있었는지, 현장 통솔을 맡은 놀 지휘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얼굴이 익숙했다.
'브락나크.'
지난날 인류의 2차 원정군을 무너뜨린 놀 대전사. 녀석이 다가와서 예를 표했다.
"족장님과 수호자님을 뵙습니다."
"오늘도 수고가 많다."
크나르타쉬는 대전사의 노고를 격려하며,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봤다.
"울조그는 어디에 있나?"
"부상을 입어 휴식하는 중입니다. 작은 상처라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울조그는 서열 3위의 대전사. 그가 작은 부상을 입어 요양하는 중이기에, 브락나크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고 있었다.
크나르타쉬가 방문 목적을 밝힌다.
"동맹군에게 전황을 공유할 생각이다."
"환영할 만한 일이군요."
브락나크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류와 놀 일족의 동맹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안도한 모양.
전황을 살피기 위해선 장벽 위로 올라가야 한다. 브락나크가 뭐라 소리치자, 장벽 위에서 굵직한 밧줄이 여럿 내려왔다.
브락나크가 밧줄 두 개를 양손으로 쥔 후. 신호를 주듯 두어 번 당겼다. 그러자 장벽 위쪽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지, 브락나크의 몸뚱어리가 알아서 위로 끌려 올라갔다.
이를 본 롤랑이 감탄했다.
"이야, 밧줄이 아주 튼튼한데? 저 거구의 무게를 버틸 정도라니···"
"마수의 힘줄을 첨가하여 만든 물건입니다."
놀 일족의 문명은 인류에 비해 열등하지만, 마수의 부산물을 이용한 몇몇 물품들은 인류의 것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갖고 있다.
우진과 롤랑, 성기사들이 밧줄을 붙잡았다. 그것을 쥔 채로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으니 금방 장벽 위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크나르타쉬는 밧줄을 쓰지 않았다.
떠어엉!!
놀 여왕이 힘껏 두 다리를 굴렀다. 억눌려 있던 용수철처럼, 놀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탄력적으로 하늘 높이 도약했다.
쿠웅!
가뿐히 장벽 위에 안착한 크나르타쉬.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경외감을 느꼈다.
"······그야말로 괴물이군."
"한 일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니까요."
사람들 중에 출중한 재능을 지닌 천재가 있듯이, 마경의 생명체들 중에도 그런 비범함을 타고난 존재가 더러 있다.
놀 여왕 크나르타쉬는 태생적으로 비범한 힘을 지닌 변종이었다. 옛 존재와 맞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전사. 이를 제압하려면 교단 연맹도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하리라.
'하지만··· 그런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놀 여왕은 영토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견적을 잡기 위해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기괴한 생명체가 몇 마리 눈에 띄었다.
흘러내리는 살덩이로 형태를 빚어낸 듯한 존재. 두 눈알이 썩어 문드러져 시커먼 피고름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흉물.
마경에서 활동하다 보면 적잖게 눈에 띄는 생명체다. 지금껏 몇 번이고 도축해온 괴물. 그렇기에 우진은 흉물을 보더라도 놀랄 일이 없다시피 했는데···
이놈들의 경우 낯설었다.
저 멀리 거대한 흉물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살덩이. 놈의 머리 위쪽으로 기다란 뿔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생김새가 수사슴을 닮았다. 우진의 입장에선 의아한 일이었다.
'······사람 형태가 아니잖아.'
우진이 지금껏 봐온 흉물들은, 전부 인간의 생김새를 본떠서 만들어낸 듯한 형태였다. 그런데 이 흉물들은 각기 다른 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다. 황소, 사슴, 멧돼지, 곰···
그렇게 둘러보던 중, 익숙한 형태의 괴물이 눈에 띄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하이에나. 이를 본 우진은 눈을 부릅떴다.
'놀 형태의 흉물?'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우진이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브락나크를 보았다. 이에 놀 대전사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저놈은 원래 일족의 전사였습니다."
저 흉물들은 원래 마경의 생명체였다. 경험 많은 우진조차 듣도 보도 못한 사례.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지?"
"흉물에게 잠식당하면 저런 변이가 일어납니다. 원래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죽은 자들이 흉물로 변하더군요."
교전이 길어질수록 놀의 희생자가 많아지고, 적의 병력은 그에 상응하여 많아진다. 답이 없는 상황. 놀 일족은 줄곧 지켜온 영토를 포기하고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일어난 걸까. 이에 대한 단서는 현재 하나뿐이었다.
"저놈들에게서 옛 존재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했지··· 확실한 건가?"
"네, 그렇습니다."
놀들의 기민한 후각이 흉물에게 서린 옛 존재의 향기를 감지했다. 여러모로 흔치 않은 상황. 우진은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튀어나온 거지?'
우진이 경험해 본 올드원들은 흉물과 딱히 관련이 없는 놈들뿐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지, 영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리 생각하던 중···
흉물들이 생명체의 존재를 눈치챘다. 놈들이 돌연 이쪽을 보며 고성을 내질렀다.
"거어어얽—!"
흉물 너덧 마리가 돌진해 온다. 하지만 딱히 대처할 필요 없었다.
우진이 장벽 아래쪽을 보았다. 해자가 장벽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깊숙이 땅을 파낸 후 날카로운 말뚝과 뼛조각을 여럿 박아놓은 해자.
기세 좋게 달려오던 흉물들이 해자 함정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놈들이 말뚝에 의해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로 버둥거린다.
이윽고, 밧줄로 몸을 묶은 놀 주술사 두 녀석이 장벽 아래로 강하해 내려갔다.
화르륵—!
놀 주술사가 화염을 내뿜어 흉물들을 불태웠다. 흉물들이 발악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방법이 없다. 오래지 않아 놈들은 시커먼 잿가루가 되어 해자 아래에 쌓였다.
흉물을 처리했다. 장벽 위쪽의 놀 전사들이 밧줄을 당겨 주술사를 위로 끌어올린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이 감탄했다.
"정말 잘 만든 요새로군··· 놀의 손재주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우진이 그리 중얼거리자, 크나르타쉬가 겸연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가 설계한 게 아니다. 먼 옛적에 버려진 요새를 뜯어고쳤을 뿐이야."
먼 과거, 마경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고대 요새. 이 장벽과 해자는 옛 인류의 발악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말에 우진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레벤토르 왕국.'
에드윈 공작은 멸망한 옛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따라서 우진이 현재 서 있는 곳은, 2차 원정군의 최종 목적지인 레벤토르 왕국의 수도 성벽이었다.
적을 피해 남하하던 놀 일족은 이 버려진 땅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로 인해 2차 원정군과의 갈등이 발생했다.
'에드윈 공작의 야망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구나.'
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더 위험하고 많은 적들과 대면하게 되었으리라.
당장 눈에 띄는 흉물은 너덧 마리뿐이다. 하지만 대량의 흉물들이 인근 지역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우진이 그리 짐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걹, 거얽—
흉물 특유의 울음이 연거푸 메아리쳤다. 마치 비 오는 여름날,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의 울음소리처럼.
'······골치 아프군.'
대책이 필요하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80화
재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