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60-70

야습. (1)

밤늦게까지 물놀이를 한 데다, 벼락까지 써서 피로가 적잖게 쌓였다. 우진은 다음 날 정오가 될 때까지 숙면을 취했다.

천막 밖으로 나와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원정군은 아직도 강을 넘어가기 위해 노동하는 중이었다. 그새 엄청난 양의 나무를 벌목하여 진지 한쪽에 쌓아놓은 상태.

'원정군의 머릿수가 많아서 저런 작업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군.'

정확히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그 결과물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진은 잠시 병사들의 작업 모습을 구경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늑대들에게 어제 사냥한 뱀 마수의 내단을 먹일 생각이었다.

휘이익~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즉각 그 신호에 반응하여 달려온 늑대 네 마리. 우진이 녀석들을 한 번 훑어봤다.

늑대들의 털이 반질반질했다. 렉스의 목덜미에 걸린 나무 빗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수녀들이 빗질해 주고 있었구나.'

조율의 교단은 늑대를 신성하게 여긴다. 덕분에 늑대들은 줄곧 대접받으며 호의호식하는 중이었다. 털에 향유를 발라가며 빗질했는지 향긋한 꽃내음이 났다.

원정군은 온갖 고생을 하는 중이건만, 늑대들의 일상은 거의 귀족과 다름없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받아먹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구나. 누구한테서 배운 거야?"

우진이 그리 묻자, 세 늑대가 곁눈질해서 렉스를 보았다. 동족들의 시선을 외면하듯 딴청 피우는 렉스. 보우가 저 녀석만 집중적으로 갈군 이유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우진이 늑대들에게 한마디 했다.

"잘 대접받고 있으니, 그분들의 안전은 너희가 책임져야 한다. 밥값은 해야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늑대들. 우진은 짐가방을 뒤적여 주머니를 꺼냈다. 그 속에는 뱀 마수의 내단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션, 얀. 앞으로 나오거라."

잔뜩 신이 난 늑대 두 마리가 걸어 나왔다. 녀석들은 지난번 암흑 신관의 내단을 먹지 못했기에, 이번 내단들은 션과 얀의 몫이다.

물뱀들은 그리 강하지 않은 놈들이지만, 비교적 깊은 곳에 서식하는 마수들이라서 순도 높은 카르마를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인상 깊었는지, 션과 얀이 내단 하나를 렉스와 미샤에게 각각 양보해 줬다. 그것을 먹은 두 늑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단이 품은 힘이 예상을 웃돌아서 놀란 모양.

늑대들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강줄기 너머에 있을 사냥감이 기대된다는 듯···

'동기 부여가 된 것 같군.'

저 마음가짐이야말로 가장 큰 성과다.

* * *

이틀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우진이 벼락불로 강의 물귀신들을 처리했지만, 원정군은 이를 모르는 상태였기에. 강을 넘어가기 위한 작업은 계속 이어져 왔다.

강가에 잔뜩 쌓여있는 나무와 바윗덩어리들. 이로써 준비가 끝난 듯했다.

'번영의 교단.'

강가에 선 사제들을 응시했다. 사제복의 형태와 문양을 보아하니, 번영의 교단 소속의 사제들로 보였다. 그들의 선두에 선 사람이 우진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

여느 때처럼 녹색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사제. 그녀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를 따라 사제들이 줄지어 걷는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촤악.

성녀가 바구니에 담긴 뭔가를 흙바닥에 뿌렸다. 작고 둥그런 물체. 거리가 꽤 멀었지만, 우진의 시력은 그 정체를 파악했다.

'씨앗인가.'

성녀가 여러 종류의 씨앗들을 흙바닥에 뿌렸다. 직후, 사제들이 물뿌리개를 기울여 씨앗이 뿌려진 땅에 성수를 들이붓는다.

샤아아아—

지면에 녹색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 기운을 머금은 씨앗이 갈라지며 새싹이 돋아났다. 식물의 성장 속도가 비상식적일 만큼 빨랐다.

성녀가 지나간 곳마다 여러 식물들이 자라났다. 푸른 잔디와 소박한 들꽃, 금빛으로 익어가는 보리 이삭··· 그 식물들이 흙에 깊숙이 뿌리내리며 마경의 혼탁한 기운을 밀어냈다.

이를 본 롤랑이 중얼거렸다.

"땅을 축성하고 있군."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땅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번영의 첫걸음이지. 번영의 교단은 축성된 땅 위에 서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어."

먼 옛적의 인류는 수렵 생활을 하며 들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땅에 씨앗을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는 걸 계기로 인류의 번영이 시작되었다.

번영의 교단은 그 상징적인 의식을 통해 더 강한 성법을 발현할 수 있다.

투욱.

성녀가 보리 이삭들을 꺾었다. 그녀가 면사포를 살짝 들어서 보리 향기를 맡더니, 손으로 그 낱알을 훑어 첫 수확을 거두었다.

성녀가 보리 낱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으득, 으드득!

껍데기도 벗기지 않은 보리를 꼭꼭 씹어 삼키는 성녀. 그녀의 몸에 깃든 신성이 짙어졌다. 면사포 아래에서 녹색 안광이 빛을 발한다.

직후, 성녀가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드드득—!

흙덩이가 들썩이며, 녹색 식물 줄기가 여럿 자라났다. 손목처럼 굵직한 줄기. 그것들이 강가에 쌓인 나무와 바윗덩이를 휘감더니, 서로 얽히며 큰 구조물을 하나 만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식물을 밧줄 삼아, 돌과 나무들을 엮어 거대한 물건을 제작하는 듯한 광경. 그렇게 만들어진 건 다름 아닌···

'······돌다리.'

강에 다리가 하나 놓였다. 타라스크가 밟고 지나가도 될 만큼 크고 튼튼한 다리였다.

에드윈 공작이 힘껏 소리쳤다.

"성녀님께서 손수 길을 열어주셨으니, 병사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라!"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호응하듯 함성을 내질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물귀신에 의해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건만. 성녀가 행한 기적을 목격하여 사기가 잔뜩 고취되었다.

망설임 없이 다리 위로 진군하는 병사들. 우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리를 관찰했다.

'제법 튼튼해 보이네.'

다리를 엮은 식물의 줄기가 어느 순간 노랗게 변색되었다. 마치 햇볕에 바짝 말린 보리 줄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 보릿짚은 질기고 튼튼하여 밧줄처럼 쓰기 충분했다.

지금껏 신성력을 이용한 성법을 몇 번 구경하긴 했으나, 이런 부류의 능력은 처음 본다. 굉장히 쓸모 많고 강력한 기술.

'그렇지만 체력 소모가 심하다.'

성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애써 태연한 척 행동하고 있지만, 조금 전에 비해 걸음걸이가 크게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손에 쥔 지팡이에 의존하여 걸음을 옮겨가는 성녀. 저런 큰 기술은 시전자의 체력을 잔뜩 갉아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다리 하나를 얻었으니 남는 장사였다. 안정적인 보급을 위해선 이런 구조물이 하나쯤 있어야 할 테니까. 거기에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건 덤이었다.

고취된 분위기를 등에 업은 덕분일까. 원정군은 거침없는 진군을 이어갔다.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질 않는군.'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 마수의 관점에서 보면, 원정군은 반드시 피해야 할 재앙이었다. 엄청난 수의 병력이 눈에 띄는 생명체를 죄다 도륙하는 중이니까.

따라서, 이대로면 원정군은 큰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듯했으나···

'······슬슬 냄새를 맡았을 텐데.'

그 불안감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 * *

늦은 밤.

갑자기 눈이 뜨였다.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우진은 마체테를 챙긴 후 천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콰아앙!

먼 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직후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비명과 아우성.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이 다급히 놋쇠종을 두들겼다.

"일어나!! 적이 왔다—!"

다급한 고함 소리가 밤을 흔들었다. 자고 있던 병력들이 허둥지둥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 순간에도 영문 모를 폭음이 곳곳에서 터졌다.

도대체 뭘까.

늑대들에게 성가대 호위를 맡겨놓고, 가장 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리다···

이렇게 무작정 움직일 게 아니라, 전체 상황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진은 높다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후. 특이점을 찾아 주변을 두어 번 훑어봤다.

'······저것들은 뭐지?'

우진의 눈이 문득 먼 곳을 응시했다.

작은 바위산의 꼭대기. 그곳에 생명체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거리가 꽤 멀어서 놈들의 덩치는 손톱처럼 작아 보였다.

타앗.

마수 한 마리가 산꼭대기에서 도약했다. 저러면 산 아래로 떨어지게 될 텐데··· 그 추락이 느릿했다. 마치 날다람쥐처럼 활강하는 마수. 놈의 덩치가 매 순간 곱절로 커졌다.

손톱만큼 작던 게 동전만 해지고, 동전만 하던 게 어느 순간 손바닥 크기가 되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적습!! 하늘에서 온다—!"

다급히 소리쳤다. 직후, 마수가 조율의 교단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놈이 노리는 건 가장 크고 탐스러워 보이는 사냥감이었다.

꽈아아아앙!!

귀를 때리는 우렁찬 폭음. 위에서 급습해 온 괴물이 타라스크의 등을 밟아 뭉갰다. 운 나쁜 도마뱀이 핏물을 왈칵 토해냈다.

쿠웅.

흙바닥에 엎어진 타라스크. 그 시체 위에 선 괴물이 주변의 인간들을 둘러봤다.

박쥐와 인간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생명체. 놈의 살가죽은 창백한 잿빛이었고, 체격은 다 자란 불곰보다 컸다. 어깻죽지의 피막 날개가 펼쳐지자 그 덩치가 더욱 거대해 보였다.

'가고일.'

마경의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박쥐 마수. 이쪽 지역에선 볼 일이 없다시피 한 괴물이다.

가고일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풍족한 먹이.'

원정군이 큰 소리를 내며 북상하는 중이었다. 소음에 민감한 박쥐 마수들이 호기심을 느껴 남쪽으로 내려왔고, 수천 명의 인간을 발견하여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달콤한 피와 부드러운 살결을 지닌 먹이. 박쥐 마수들은 이를 지나칠 수 없었다.

"투창!!"

성기사가 소리쳤다. 명령에 응하여 병사들이 손에 쥔 투창을 힘껏 내던졌다.

가고일이 날개를 접어 몸을 가렸다.

캉, 까가강—!

투창들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가고일의 날개는 마치 쇠붙이처럼 단단했다.

빈틈을 노려, 롤랑이 가고일의 배후로 접근했다.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은밀한 걸음. 하지만 박쥐 마수의 청각이 그 존재를 눈치챘다.

가고일이 입을 쩍 열었다. 불온한 낌새를 읽은 성기사가 공격을 대비했다.

화륵, 화르륵!!

놈의 입에서 시퍼런 불덩이가 마구 뿜어졌다. 이를 본 롤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 흐하하핫—! 멋지군!!"

롤랑이 마구 웃어대며 불꽃을 피했다. 그가 시간을 끄는 동안, 진지로 다시 돌아온 우진이 마체테를 뽑아 들며 돌진했다.

가고일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꾸드득—

묘한 소리를 흘려내는 주먹. 그것이 우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걸 힘으로 받아내는 건 미련한 짓이기에, 구르듯이 몸을 날려 그 주먹을 피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아래로 내려쳐진 주먹이 흙바닥에 깊이 꽂혔다. 마치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한 공격이었다.

'중량화.'

경량화와 정반대인 능력이었다. 몸의 무게를 늘리는 재주. 가고일은 이 재주를 이용하여 타라스크를 밟아 터뜨렸다.

······줄곧 탐내왔던 능력 중 하나다.

'드디어 먹을만한 놈이 나왔군'

우진이 사납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1화

야습. (2)

힘자랑을 과하게 해선 안 된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이질적인 재주를 사용하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암흑 신관이라는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선··· 좀 사람답게 싸워야 했다.

화륵!

우진이 쥔 칼날에 검푸른 마나가 일렁거렸다. 마나 아츠. 비크람의 내단을 먹은 후, 마나 아츠를 더욱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눈속임으로 쓰기 좋은 능력이야.'

평소처럼 힘으로 적을 때려 부수더라도, 칼에 마나가 깃들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관점에선 마나 아츠를 이용한 기술처럼 보일 것이다. 개연성을 확보하기 좋은 능력이랄까.

우진이 그 칼날을 가고일을 향해 휘둘렀다. 가고일은 롤랑을 향해 불을 뿜어대며, 한쪽 날개를 접어서 쇄도해 온 칼날을 막았다.

강철로 만든 방패처럼 단단한 날개.

써어억!!

마체테가 단칼에 날개를 길게 갈랐다. 이에 화들짝 놀란 가고일이 뒤로 물러서며, 우진을 향해 힘껏 꼬리를 휘둘렀다.

마체테로 그 채찍질을 받아 흘리려 했다.

떠어어엉!!

강렬한 충격에 의해 우진이 멀리 튕겨 나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공격.

'꼬리 끝에 중량화를 쓴 건가.'

손목이 저릿했다. 채찍질을 받아 흘린 후 반격할 생각이었건만. 가고일은 제법 영악하게 재주를 활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쪽으로 기울었다.

"투창!!"

우진과 가고일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는 순간, 이를 기다렸다는 듯 성기사가 소리쳤다. 병사들이 손에 쥔 투창을 힘껏 집어 던졌다.

가고일은 앞서 했던 것처럼 날개를 접어 몸을 가렸다. 하지만 녀석의 한쪽 날개가 마체테에 당한 상태. 길게 갈라진 날개 피막이 찢어진 커튼처럼 너덜거렸다.

그 틈새로 투창 두 자루가 파고들었다.

퍼벅!!

"그워어억!"

성난 듯 울부짖는 가고일. 놈의 옆구리에 투창 두 자루가 꽂혔다. 깊게 꽂히진 않았지만, 신성이 깃든 창날은 마수에게 큰 고통을 준다.

가고일의 시선이 병사들에게 향했다. 놈이 불을 뿜어내기 위해 가슴을 부풀린다.

물론, 우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주변에 떨어진 방패를 하나 집어 들었다. 단검으로 방패 표면을 길게 그었다.

끼드드드득—!

칼끝이 강철 방패를 긁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가고일이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청각이 예민한 박쥐 마수들은 이런 소리를 듣는 걸 견디기 어려워했다.

자연히 가고일의 머리가 이쪽으로 향했다. 놈의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푸른 불꽃. 우진은 손에 쥔 방패에 잔뜩 마나를 불어넣은 후, 방패를 앞세운 채로 돌진했다.

화르르륵!

가고일의 입에서 불줄기가 뿜어졌다. 왼손에 든 방패로 그 불꽃을 막았다. 전진할수록 방패가 점차 뜨겁게 달구어졌다.

이대로면 몸이 익어버릴 상황. 하지만 우진이 생각 없이 들이박은 건 아니었다.

샤아아—

오른손으로 빙결 주문을 사용하여, 서늘한 냉기를 방패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숨 막히던 열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나름 버틸만하다.'

마나 아츠로 방패를 강화하고, 빙결 주문으로 열기를 식힌다. 무술과 마법을 결합한 기예. 처음 해보는 짓거리인데 왠지 될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저런 공격은 그냥 몸으로 때웠을 텐데··· 부득이하게 이곳 사람들의 전투 방식을 흉내 내서 그런지, 마나가 지닌 가능성과 활용법을 점점 깨우치고 있는 듯했다.

'······이게 깨달음인가?'

보우가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 깨달음이란 건 항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우진이 성큼성큼 앞으로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본 가고일이 적잖게 당황했다. 화염을 저런 식으로 버텨내는 건 처음 봤다.

상황이 좋지 않다. 도망쳐야 한다. 그리 판단한 가고일이 급히 몸을 돌리려던 찰나···

푸욱!

줄곧 빈틈을 노리던 롤랑이 가고일의 무릎 뒤쪽을 찌른 후,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둘러서 놈의 꼬리까지 잘라냈다.

"그와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가고일. 놈이 롤랑을 향해 팔을 내려찍었다. 육중한 무게감이 깃든 주먹이 지면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성기사는 이미 뒤로 물러난 상태. 롤랑이 조롱하듯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 앞이나 봐라!"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순 없겠지만···

불길한 직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가고일이 앞을 보았다. 어느새 서슬 퍼런 마체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써억!!

칼날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머리 없는 마수의 사체가 흙바닥 위에 엎어졌다.

가고일을 사냥했다.

······하지만 이 성과를 기뻐하긴 일렀다. 이곳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원정군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쉼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고일은 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다.'

대부분의 박쥐는 무리 생활을 한다. 가고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놈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롤랑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방이 난리로군! 몇 놈이 온 거지?!"

"적어도 일곱 마리는 넘습니다."

아까 나무에 올라가서 정찰해 보니, 가고일의 머릿수가 최소 일곱이 넘는 듯했다.

······여기까진 사소한 문제다.

"원정군이 약화되었으니,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수들이 죄다 몰려올 겁니다."

줄곧 숨죽이고 있던 마수들이 전부 튀어나올 것이다. 정어리 떼를 잡아먹기 위해 여러 포식자가 몰려오는 것처럼.

그 말에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심지어 롤랑 또한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좋지 않군. 자네 말대로면··· 주변 지원을 가는 것 자체가 어렵겠는데."

"네. 우리 기사들이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마수들이 이쪽 구역을 기습할 겁니다. 사실상 발이 묶인 상태입니다."

마수들은 영악하다.

다른 곳을 돕기 위해 롤랑과 성기사들이 움직일 경우. 그 빈자리를 눈치챈 마수들이 급습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성가대의 목숨이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을 전부 잃게 될 수도 있다. 마수들이 장벽 안쪽에서 온 음식들을 탐낼 게 분명하니까.

그리 설명하며 가고일의 흉부를 가른 후. 속에 든 내단을 밖으로 꺼냈다.

'간만에 좋은 내단을 얻었군.'

이것 하나로 끝내는 건 조금 아쉽다. 그렇기에 롤랑에게 따로 부탁했다.

"인근 구역만 한 번 둘러보고 올 테니, 그간 성가대를 잘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혼자 움직이려는 건가?"

"설마요."

그리 답한 우진이 성가대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겁에 질린 사제와 수녀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듯 선 네 마리의 늑대.

"렉스."

우두머리의 명에 응하여 렉스가 걸어 나왔다. 이 녀석이 사냥개 역할을 맡을 것이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찮군. 조심하게."

롤랑은 따라가겠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싸움에 거들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지만, 그는 현장에 남아서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었다.

우진이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자."

명에 응하여 렉스가 달린다. 사냥개의 후각이 가장 가까운 사냥감을 찾아내리라.

우진은 아까 챙겨놨던 내단을 꺼냈다.

까득, 까드득—

가고일의 내단을 씹어 삼켰다. 중량화 재주가 생기길 내심 기대했는데··· 문득 먹먹해진 귀가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고일의 청각.

'꽝이군.'

아쉽지만 괜찮다. 더 부지런히 사냥하면 될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던 중, 마수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지네. 놈이 미끄러지듯 지면 위를 기어서 사냥감을 쫓았다. 손쓸 겨를도 없이 병사 한 명이 놈에게 붙잡혔다. 지네가 똬리를 틀듯 병사의 몸을 몇 번이고 휘감았다.

콱, 콰과곽—!

지네의 다리 수십 개가 병사의 온몸을 마구 찔렀다. 그 다리 하나하나가 송곳처럼 뾰족한 데다 독까지 품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다면··· 저 사내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복수라도 해줘라."

우진이 그리 말하자, 렉스가 지네를 향해 돌진했다. 녀석의 등가죽이 갈라지며 네 개의 촉수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먹이를 뜯어 먹던 지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네가 급히 기어서 도망쳤다. 하지만 놈보다 렉스의 발이 훨씬 더 빨랐다.

퍽, 퍼벅!!

촉수들이 지네를 찌른 후, 힘을 줘서 몸통을 둘로 찢어버렸다.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내는 지네. 벌레라서 그런지 몸통이 두 토막 났는데도 희한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지네가 발작하듯 독니로 허공을 깨물었다. 렉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네의 몸통을 파헤쳐서 내단을 꺼내 먹었다.

"······재주가 생긴 것 같냐?"

그리 묻자 렉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녀석도 꽝인 모양이었다.

"이런 잔챙이들 말고, 가고일을 찾아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웍."

렉스가 알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렉스는 병사의 비명을 듣고, 도움을 주기 위해 이쪽으로 온 듯한데··· 의도는 훌륭하지만 이런 식이면 끝이 없다.

우진과 렉스의 몸뚱어리는 하나뿐이다. 이곳의 병사들을 한 명씩 전부 구해주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럴 시간에 가장 위험한 적, 가고일을 사냥하는 게 여러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현하는 건 어려웠다.

어딜 가건, 어느 방향을 보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우와아아악—!"

한 병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뛰었다. 곧 그의 주변에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덥썩!

거대한 까마귀가 병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로 날아가는 까마귀. 놈의 발톱에 잡힌 병사가 덩달아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아아아아악!!"

문득 비명 소리가 다시 커져갔다. 하늘에서 병사가 추락하고 있었다.

뻑!

병사의 몸이 홍시처럼 터졌다. 곧 지상으로 내려온 까마귀가 시체를 쪼아 먹었다. 놈은 미식가처럼 인간의 내장을 몇 개 골라 먹은 후, 또 다른 희생자를 찾기 위해 날아갔다.

슥, 스윽.

우진이 바쁘게 두 손을 움직였다. 마치 수화를 시도하는 듯한 손짓. 곧 그의 손바닥 위에 주홍색 불덩이가 일렁거린다.

그 불덩이가 까마귀를 향해 쏘아졌다.

퍼엉!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까마귀가 비명을 내지르며 지상을 향해 추락했다.

그 광경을 스쳐 지나가니···

또 다른 소란이 눈앞에 펼쳐진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병사들. 뒤이어 검은 황소 한 마리가 돌진하여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병사들이 황소의 발굽에 짓밟히거나, 볼링핀처럼 저 멀리 튕겨 나가 널브러졌다.

'······저놈은 내 마법으로 못 잡겠는데.'

지나치는 수밖에 없나.

우진이 그리 생각하던 중··· 갑자기 뭔가가 앞에 나타났다. 렉스의 촉수. 그 촉수 끝에는 길쭉한 투창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잘했다."

늑대의 영특함을 칭찬해준 후. 우진이 손에 쥔 투창을 힘껏 집어던졌다.

뻐어억!!

창날이 황소의 목덜미에 깊이 꽂혔다. 황소가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후로는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렉스는 내달리는 와중에도 촉수를 뻗어, 떨어져 있는 투창을 하나씩 챙겼고. 우진은 그것을 힘껏 집어던져서 눈에 띈 마수를 처리했다.

그렇게 질주하고 나니···

드디어 가고일이 눈에 들어왔다. 유독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마수. 하지만 굳이 긴장할 필요 없을 듯했다.

'······이미 죽었군.'

가고일이 흙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성기사들이 합공하여 마수의 목을 벤 모양.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겼는지, 성기사의 시체 세 구가 가고일 옆에 쓰러져 있었다.

우진이 발로 가고일의 사체를 밀어서 뒤집은 후. 단검으로 놈의 흉부를 길게 갈랐다. 그러자 원했던 물건이 눈에 띄었다.

가고일의 내단.

워낙 혼잡한 상황이기에, 기사들은 굳이 전리품을 챙기지 않고 이동했다. 덕분에 우진은 가고일의 내단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까드득—

망설임 없이 내단을 씹어 삼키는 우진. 그가 문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중량화.'

목표로 삼은 재주를 습득했다.

하지만 그 기쁨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우진이 급히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2화

야습. (3)

원정군의 천막들은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중요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치였다. 에드윈 공작과 콘라드 대주교가 죽을 경우, 이번 원정의 행방 자체가 묘연해질 테니까.

나무와 바위들을 피해, 작은 천막을 여럿 설치한 숙영지. 그 중심으로 갈수록 침소에 머무르는 사람의 직위가 높아지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예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숙영지의 바깥쪽으로 갈수록, 병사들의 수준이 점점 떨어진다는 뜻. 원정군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기에 현장 지휘관들을 여럿 배치해 놓았지만, 딱히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상황 통제가 안 되고 있어.'

병사들의 출신이 뒤죽박죽인 게 문제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에드윈 공작은 왕국 연맹에 도움을 청하였고. 좋은 선례를 남기기 위해 귀족들이 병력을 여럿 내주었다.

문제는 그렇게 모인 병력의 수준이 떨어지는 데다, 출신이 각양각색이라 소속감 자체도 높지 않다는 점이었다.

맞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는 싸움. 하지만 겁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친다. 갑작스러운 야습이 그들의 마음을 꺾어 놓았다.

"으아아아악!!"

"누가 좀 도와줘—!"

놀란 양 떼처럼 달아나는 병사들. 마수의 입장에선 연회와 같은 상황이었다.

마수들이 사냥감을 쫓는다.

······그와 동시에, 사냥꾼의 손에 들린 창날이 스산한 빛을 발하였다.

뻐어억!!

통렬한 타격음이 귀를 때렸다. 병사의 뒤를 쫓던 멧돼지가 투창에 당해 쓰러졌다. 직후, 붉은 늑대가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

스윽.

렉스가 촉수를 내밀었다. 촉수 끝에 멧돼지 마수의 내단이 들려 있었다. 아까 멧돼지 곁을 지나칠 때, 그 짧은 순간 촉수를 뻗어서 내단을 끄집어낸 모양.

'재주도 좋군.'

우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먹어라."

렉스가 굳이 사양하지 않고 내단을 씹어 먹었다. 직후, 녀석의 뒷다리에서 뼈 소리가 났다. 달리는 속도가 아까보다 더 빨라진다.

멧돼지 마수 특유의 돌진력. 그것을 손에 넣은 렉스가 신난 듯 울음소리를 흘렸다.

'이대로 외곽 지역을 돌아보며, 눈에 띄는 놈들을 전부 사냥해야겠어.'

조율의 교단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롤랑은 보기 드문 솜씨를 지닌 강자니까.

만약 성가대 쪽에 문제가 생길 경우, 늑대들이 크게 우짖어서 신호를 주기로 했다. 그렇기에 우진은 망설임 없이 사냥을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수들은 떡밥 냄새에 홀린 물고기처럼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다.

뻐어억!!

창으로 작살질하여 눈에 띈 마수를 처리하면, 렉스가 촉수로 창을 회수한 후 내단을 뽑아낸다. 이 모든 과정이 몇 호흡만에 이루어졌다. 놀랍도록 뛰어난 사냥 효율.

그렇게 마수들을 쓸어 담던 중, 가고일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와득, 와드득.

가고일이 지네 한 마리를 통째로 씹어먹고 있었다. 놈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지네의 녹색 피가 터져 나왔다.

줄곧 해왔듯, 투창을 힘껏 집어던졌다. 화들짝 놀란 가고일이 날개로 몸을 가렸다.

푸욱!!

창날이 날개 피막을 관통하여 파고들었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날개에 가로막혀 창날이 깊게 박히지 않은 데다가, 놈이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서 치명상을 피했다.

"그워어억!!"

고함을 내지르며, 날개에 박힌 투창을 잡아 뽑는 가고일. 청각이 예민한 놈이라 몰래 기습하는 건 어려운 짓이었다.

우진이 렉스의 등에서 내려왔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해보고 싶은 짓거리가 있다.

마체테를 역수로 뽑아 쥔 채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간격. 겁 없는 인간을 처리하기 위해 가고일이 힘껏 주먹을 내려쳤다.

궤적이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기에, 주먹질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건 눈속임이고, 진짜 공격은···'

꼬리.

예상대로, 가고일이 꼬리를 휘둘러 채찍질했다. 중량화 재주를 응용한 공격. 우진은 마체테를 들어서 그 채찍질을 막았다.

떠어엉!!

강렬한 충격이 몸을 떠밀었다.

하지만 우진은 제자리에 선 채로 버텼다. 약간의 미동조차 없는 모습. 그 대신, 그의 두 발이 지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역시 쓸만하군.'

중량화.

힘에 비해, 몸무게가 가벼워서 아쉬운 상황이 여럿 있었다. 그렇기에 줄곧 중량화 재주를 갖고 싶었지만 기회가 흔치 않았다.

가고일은 눈치가 빠른 데다가, 비행형 마수라 사냥하는 게 쉽지 않은 짓이었으니까.

꾸구국—

우진이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손을 강하게 쥘수록 주먹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지는 듯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

쿵, 쿠웅, 쿵!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깊숙한 발자국이 패였다.

그 광경을 본 가고일이 겁에 질린다. 놈이 도망치기 위해 날갯짓했다. 허나 그보다 앞서, 지면을 박찬 우진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뻐어어어엉!!

귀를 갈기는 폭음. 가고일의 머리가 물풍선처럼 터졌다. 덕분에 허전해진 몸뚱어리가 힘없이 흙바닥 위에 허물어졌다.

중량화가 깃든 주먹. 위력은 대단하지만 장단이 뚜렷한 기술이었다.

'어우··· 꽤 아프네.'

우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손목이 찌릿하다. 펀치 게임기를 잘못 때린 것 같은 느낌. 잠시 자리에 서서 손을 쥐락펴락거렸다.

'이래서 가고일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공격만 했던 거구나.'

우진은 그냥 힘으로 주먹을 들어 휘둘렀다. 반면 가고일은 매번 중량화의 무게를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공격했다. 이는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공격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효율은 좋지만 너무 단조로웠다. 매번 내려치는 공격만 하면 상대 입장에서 패턴을 읽기 쉬우니까.

'연구를 좀 해봐야겠군.'

이윽고 손목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우진의 뼈가 단단한 데다, 흉물의 재생력이 있기 때문에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단검으로 가고일의 흉부를 갈랐다. 그 내단을 뽑아내자··· 시선이 느껴졌다.

렉스가 이쪽을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먹고 싶냐?"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늑대. 아무래도 우진이 방금 한 공격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만약 렉스 녀석에게 중량화가 생긴다면··· 아주 쓸만할 것 같긴 하네.'

돌가죽과 촉수.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만든 돌채찍에, 중량화까지 더해진다면. 렉스의 촉수가 한 번 휘둘릴 때마다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진이 선뜻 내단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내단을 꼭꼭 씹어 삼키는 렉스.

"어때, 느낌이 와?"

"······."

렉스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무래도 재주를 습득하지 못한 듯했다.

내심 예상했던 일이다.

중량화는 유독 계승 받는 게 어려운 재주였다. 우진도 지금껏 마흔 마리가 넘는 가고일을 잡아먹었으나, 줄곧 허탕을 치다 간신히 그 재주를 손에 넣었다.

"가자. 서둘러서 움직이면 한 마리쯤 더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우진이 그리 말하며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동기 부여가 된 건지 렉스가 바쁘게 내달렸다. 녀석의 속도가 이전보다 한층 더 빨랐다.

비록 재주는 얻지 못했지만, 가고일의 내단을 먹은 덕분에 신체 능력이 올라간 듯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는 우진과 렉스.

······하지만 사냥은 여기까지였다.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군.'

상황 정리가 얼추 끝났는지, 숙영지 중앙에서 원정군의 정예들이 걸어 나왔다.

좌측은 지혜의 교단 소속의 병력. 우측은 레벤토르 공작 가문의 사병. 두 세력의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전진했다.

"1열, 격발."

투투투퉁—!

밀집 대형으로 선 병사들. 그중 1열이 쇠뇌를 발사했다. 축성된 은화살이 마수들을 향해 빗물처럼 쏟아졌다.

사격을 마친 1열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쇠뇌의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 늘렸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 있던 2열이 쇠뇌를 발사했다.

흔히 순차 사격이라 불리는 전술.

쇠뇌의 장전 시간 때문에 생기는 화력 공백을 최소화하는 전략이었다. 쉴 틈 없는 공격에 노출된 마수들이 마구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사냥을 더 하긴 어렵겠어.'

저 병력들이 이곳에 왔다는 건, 타라스크를 급습한 가고일들을 모두 처리했다는 뜻.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으니, 오래지 않아 소란이 정리되리라.

그리 생각하던 중···

문득 군대가 자리에 멈춰 섰다. 선뜻 쇠뇌를 발사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병사들. 우진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인질이 있군.'

영악한 원숭이 마수들이, 살아있는 병사를 방패 삼듯 앞으로 들이밀었다. 뒷목이 잡힌 병사가 숨을 헐떡대며 말했다.

"으윽··· 살, 살려줘···"

인질이 쏘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그 애처로운 광경에 병사들이 머뭇거렸다.

군대가 정체된 게 못마땅했던 걸까.

······상급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왜 멈춘 게야?"

백발의 노인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흰 독사 코넬리우스. 2차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노기사였다.

젊은 기사가 조심스레 설명했다.

"보다시피··· 인질이 잡힌 상황입니다."

"그렇군."

코넬리우스가 앞쪽을 대충 훑어보더니, 기사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쇠뇌."

"여기 있습니다."

젊은 기사가 눈치껏 들고 있던 쇠뇌를 넘겨줬다. 코넬리우스는 그것을 받은 후, 망설임 없이 격발 장치를 당겼다.

퍼억!

"꺽, 꺼으읍···"

인질의 목에 은화살이 꽂혔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 치는 인질. 오래지 않아 그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병사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심지어 인질을 잡고 있던 원숭이들까지 당황했다.

"뭣들 하나?"

코넬리우스가 그리 중얼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가 소리쳤다.

"······1열, 격발!"

명령이 떨어졌다. 직후 발사된 화살이 원숭이 마수들과, 놈들이 잡고 있던 인질들을 갈겼다. 남은 것이라곤 싸늘한 시체들뿐.

코넬리우스가 쇠뇌를 돌려줬다.

"내가 또 나서는 일 없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신병처럼 목청 높여 대답했다.

곧 정체되어 있던 군대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전보다 한층 더 엄격해진 분위기. 우진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소문대로 냉혹한 사람이군.'

판단은 자체는 옳았다. 저런 상황에서 협상을 시도하는 건 얼간이 짓이니까. 하지만 방금의 행동은, 코넬리우스 개인의 악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껏 격노한 노기사의 눈. 그 시선은 마수가 아닌, 사로잡힌 인질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야습을 당한 것과 별개로··· 병사들에 대한 분노가 더 커 보였어.'

마수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겁에 질린 병사들이 통제를 어기고 도망쳤다.

병사들이 도망친 곳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 그곳은 다름 아닌 정예군이 머무르고 있는 숙영지의 중심이었다.

문제는, 한 곳에 병사들이 잔뜩 밀려오니 통제가 안 되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해 사람들이 혼잡하게 뒤엉킨 상황. 이 혼란에 의해 본대가 긴 시간 발목을 붙잡혔다.

그로 인해 원정군이 큰 손실을 보게 되었으니, 총사령관인 코넬리우스는 지금의 상황이 마냥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병사들의 잘못은 아니지.'

원정군의 정예를 주둔지 중심에 몰아놓고, 비교적 약한 동맹군을 바깥쪽 외곽에 배치했다는 건··· 애초에 그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쓸 의도였다는 말이다.

그들이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을, 코넬리우스가 나무랄 자격이 있는가?

'······뭐라 품평하기 어렵군.'

사냥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만, 전쟁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진은 섣불리 이 상황을 평가할 수 없었다.

기사의 통솔 하에 군대가 숙영지를 한 바퀴 순회했다. 전황이 뒤바뀌었다고 생각했는지, 마수들이 미련 없이 사냥감을 두고 떠났다.

기나긴 밤이 끝을 고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3화

마경의 원주민.

이번 야습으로 입은 피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차 원정군의 수뇌부는 이를 인지하고 있지만,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고 숨기기 급급했다.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대충 견적을 잡아봤다.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이 최소한 육백 명은 될 테고··· 부상자는 그보다 더 많겠지.'

이 뒷수습을 해야 할 때다.

지난 야습으로 발생한 환자들을 치료하고, 어떤 물자가 소실되었는지 한 번 점검해야 하기에. 원정군은 잠시 북진을 멈추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병사들은 편히 휴식했다. 훈제된 고기로 만든 특식을 배급받은 후. 조율의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진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성이 깃든 노래.'

지난번 롤랑이 바이올린을 독주하여, 병사들의 투지를 끌어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부드럽고 섬세한 선율의 노래였다. 성가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희한하게도 그 노래가 모든 사람의 귀에 닿았다. 예술이 지친 마음들을 위로해 줬다.

땅에 떨어진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 에드윈 공작은 지난날 겪었던 악몽 같은 하룻밤을 없던 일로 무마하고 싶은 듯했다.

다시 북진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후로도 문제는 계속 생겼다.

마수들이 한 번 사람 고기를 맛본 데다가, 원정군의 결속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계속 주변을 맴돌며, 빈틈이 보일 때마다 병사들을 기습한 후 도망쳤다.

황소처럼 들이박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마수들. 덕분에 기껏 끌어올린 사기가 맥주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역시··· 원정군의 병력이 많더라도 이런 기습에는 답이 없군.'

원정군은 전쟁을 하러 왔지만, 마수들은 그저 사냥을 원할 뿐이었다. 굳이 정면에서 힘 싸움을 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

원정군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을 계속 갉아먹히며 전진해야 했다. 기습이 일어날 때마다 사상자가 몇 명 발생하더라도, 이는 원정군 전체 규모에 비하면 사소한 손실이었다.

탈영병이 속출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인데··· 도망치는 병사는 없었다.

'군대를 벗어나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마수의 송곳니를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

몸 성히 돌아가려면 원정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 막연한 절망 속에서 병사들이 걸음을 옮겨갔다.

······하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

"진 님.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수녀. 아일라가 질문했다. 이에 우진은 그녀가 만들어낸 작품을 한 번 살펴봤다.

병사가 입은 갑옷의 등 쪽 어깻죽지에, 큼지막한 눈알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부엉이의 것처럼 크고 인상적인 빛깔의 눈알.

"아주 잘 그리셨군요. 여유로울 때 나머지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심풀이 삼아서 해야겠네요."

조율의 여신, 에아의 신도들은 예술에 능통하다. 할 일이 없던 수녀들이 우진의 부탁을 받아 갑옷과 로브 등판에 눈 그림을 그려냈다.

곁에 있던 롤랑이 의문을 표했다.

"이 눈알 그림으로 병사의 생존율을 더 높일 수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네. 나름대로 효과가 쏠쏠합니다."

애벌레들을 보면, 엉덩이 쪽에 눈알처럼 생긴 무늬를 지닌 녀석들이 더러 있다.

이는 머리의 위치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한 의태. 맹수들은 등 뒤에서 몰래 기습하는 걸 선호하는데, 등에 그려둔 눈알 그림과 눈이 마주칠 경우 심적으로 위축되어 공격을 꺼린다.

그 설명을 들은 롤랑이 감탄했다.

"처음 들어보는 발상이지만, 설득력 있군··· 혹시 자네가 직접 고안했나?"

"다른 곳에서 배운 지식입니다."

인도에서 식인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자 고안된 대처법. 마수를 상대로도 나름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우진이 몸소 확인했다.

처음 꿈속 세계로 끌려왔을 때. 인터넷을 뒤적여서 온갖 생존 지식을 터득했고, 그걸 이용하여 재미를 볼 때가 자주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쪽 세계와 지구는 공통점이 많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조잡한 짓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잊고 살아왔는데··· 병사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생각났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지.'

성가대를 호위하는 김에, 우진은 주변 병사들의 목숨도 신경 써서 챙겼다. 이는 고스란히 결과에 반영되었다.

원정군 전체가 마수로 인해 고통받고 있건만, 이쪽으로 배정된 병사들은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 고무적인 상황에 병사들이 크게 감명받은 듯했다.

"조율의 교단으로 입교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병사들이 소속 변경을 청했다. 롤랑은 그 선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하! 진 자네 덕분에 좋은 일이 참 많이도 생기는군. 이번 원정이 끝나고 나면 한몫 두둑하게 챙겨주도록 하겠네."

"좋군요."

돈은 이미 넘치도록 많지만, 굳이 주겠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을 몸 성히 개척 도시로 돌려보낼 수 있으려나?'

목표 달성이 쉬울 것 같진 않았다. 원정군이 계속 삽질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 * *

여느 때처럼 북진하던 중. 원정군은 기이한 구조물을 하나 맞닥뜨렸다.

좁은 협곡 사이, 큼직한 바윗돌을 쌓아서 만든 돌벽이 하나 있었다. 마치 원시적인 형태의 관문을 보는 듯했다.

이를 본 롤랑이 호기심을 품었다.

"마치 사람이 만들어놓은 듯한 건물인데··· 진, 혹시 저게 뭔지 아는가?"

"······잘 알죠."

우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일이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롤랑. 원정군의 수뇌부를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갑자기?"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터질 겁니다."

어지간하면 깊게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걸 넘어갔다간 분명 문제가 생긴다. 그리 말하자 롤랑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라면 들어야지. 가세."

두 사내가 원정군 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이에 성기사들이 길을 막으려 했으나, 롤랑의 얼굴을 확인하곤 급히 물러났다.

우진이 혼자 왔으면 길을 열어주지 않았을 테지만, 롤랑은 교단 연맹 내부에서 널리 알려진 기사다. 비록 소속이 다르더라도 지혜의 교단은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우진은 콘라드와 에드윈, 그리고 코넬리우스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롤랑.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의외라는 듯 말을 걸어오는 콘라드. 이에 롤랑이 곁에 선 우진을 향해 가리켰다.

"콘라드 님도 이 사내를 알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진이라 불리는 마수 사냥꾼인데, 여러분에게 직언을 드리고 싶다 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우진은 뜸 들이지 않고 얘기를 꺼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건 예의에 어긋난 일이겠지만, 저 돌벽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대주교님. 혹시 저것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안 그래도 낯선 구조물이라 회의 중이었는데··· 아는 게 있는가?"

원정군의 입장에서는 모를 수밖에 없다. 마경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처음이므로.

그렇기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놀의 관문입니다."

놀.

인간처럼 두 발로 걷는 하이에나. 마경의 중부 지역에서 보이는 마물 중 하나였다.

지난번 원정군이 상대했던 코볼트처럼, 마경에는 인간처럼 거대한 공동체를 이룬 생명체들이 있다. 놀은 그런 놈들 중에서도 유독 강력하고 큰 세력을 지닌 마물이었다.

"저 관문을 통과하려면 놀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통행료로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마수와 협상하여 길을 열어달라고 청해야 한다는 겐가?"

가만히 설명을 듣던 코넬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끝이 강한 놈들입니다."

거래, 그리고 복수.

놀은 이 두 가지를 저울질하는 걸 즐기는 생명체다. 거래 내용을 엄수하는 대신, 복수 또한 잊지 않는다. 따라서 놈들과 적대 관계에 놓이면 원정이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다.

거래를 하거나 협곡을 우회해야 한다. 그리 말하자 코넬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황당하군. 마수와 협상을 하자니, 우리가 지금 정복 전쟁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목적지까지 거리가 꽤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적을 피해 가야죠."

솔직히, 지금의 말이 괴상하게 들릴 거란 사실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경고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설명을 끝마치자··· 에드윈 공작과 콘라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고민하고 있군.'

방금 들었던 말을 비웃어야 할지, 아니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원정에 명운을 걸었다. 안 그래도 원정군이 곤경에 처한 상황. 우진이 워낙 단호한 어투로 설명하니, 방금 들었던 말을 그냥 농담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저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는 겁니까?"

상황을 관망하던 코넬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에 에드윈이 헛기침하며 대꾸했다.

"생각을 좀 해봤을 뿐이야. 믿긴 어렵지. 저 젊은 친구의 말이 옳다는 증거도 없고."

······증거라.

"그렇다면 직접 증명하겠습니다."

놀과 협상하는 것.

원정군은 이에 난색을 표했지만, 우진에게 있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진과 조율의 교단, 그리고 병사들이 놀의 관문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들이 맡게 된 역할은 선발대였다.

'놀과의 거래를 마친 후 관문을 통과한다.'

우진이 할 일은, 그가 한 말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후 원정군의 수뇌부가 협상 여부를 판단하리라.

물론, 상황이 좋게 흘러갈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성공하더라도··· 원정군이 협상을 시도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수뇌부가 이상적인 선택을 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우진은 굳이 선발대로 나섰다.

자칫 잘못하여 전투가 벌어질 경우,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역할. 이 위험을 자발적으로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니까.'

이 위험을 잘 넘기고 나면, 나중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원정대가 삽질을 하건 말건··· 장기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랄까.

선발대가 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을 들은 건지, 돌벽 위쪽에서 굵직한 밧줄 하나가 내려왔다. 두 발로 선 괴물이 이쪽을 내려다본다.

하이에나의 머리를 지닌 생명체.

놈의 키가 2m를 훌쩍 넘어갔다. 덥수룩한 갈색 털이 몸뚱어리 전체를 뒤덮고 있건만, 근육이 워낙 흉악하여 그 윤곽이 털을 비집고 삐져나오는 듯했다.

촤아아악—!

괴물이 한쪽 손으로 밧줄을 쥔 채로, 미끄러지듯 돌벽을 타고 내려왔다. 하반신에 둘러둔 표범 가죽이 마구 펄럭인다. 마치 검투사의 치마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쿠웅!

지상에 안착하는 놀. 그 모습을 본 롤랑이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진, 방금 봤나?"

롤랑이 왼팔을 들어 보였다.

"저놈의 거시기가 이만하더군."

"······굳이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하군요."

마경의 원주민과 협상할 시간이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4화

놀의 관문.

하이에나의 시선이 사람들을 훑었다. 우진은 그 눈빛에서 여러 감정을 엿보았다.

경계, 신중함, 그리고 호기심.

마경에서는 인간을 볼 기회가 없다시피 하다. 정보를 얻고 싶은지, 놀은 낯선 먹을거리를 발견한 들개처럼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롤랑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멈춰 세워둔 후. 혼자서 놀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자연히 놈의 시선이 우진에게 쏠렸다.

슥, 스윽.

가볍게 두 손을 움직였다.

에녹의 능력으로 주문을 시전하는 게 아니고, 이는 수화였다. 마경의 원주민들이 다른 생명체와 소통을 시도할 때 쓰는 수신호.

마물들이 대충 만들어낸 것이라, 인간의 수화처럼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다.

따라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한정적이었다. 흔히 쓰는 단어를 여럿 표현하고 나면, 맥락상 그 문장의 의미를 때려 맞춰야 한다.

—거래를 원한다.

그리 수신호를 보냈다.

놀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낯선 생명체가 익숙한 수화를 시도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두 존재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너는 어디서 왔나?

—저 너머. 그늘이 옅은 곳.

—흥미롭다.

그야말로 흔치 않은 조우. 흥미를 느꼈는지 놀이 여러 질문을 꺼내고 싶은 듯했지만···

조악한 수화로는 말을 제대로 주고받기 힘든 데다가, 뒤쪽에서 군대가 노려보고 있으니 잡담을 길게 나눌 순 없었다.

—거래를 원한다.

우진이 다시 제안했다. 그러자 놀의 시선이 저 뒤쪽에 선 원정군을 한 번 훑었다.

—네가 저 무리를 대표하는가?

—아니다. 거래를 원하는 건, 나와 이곳에 온 일행들뿐이다.

우진은 주변 사람들을 관문 안으로 들여보내길 원했다. 이후 원정군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놀이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눈치챘다.

—저 뒤쪽 무리는 우리의 적인가?

다소 민감한 질문. 이에 우진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너의 동족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면··· 너 또한 우리의 적일 수도 있겠군.

—아니다. 나는 거래를 어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 장담하는 근거가 있나?

우진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 후. 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거래는 신성한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가 아닌, 놀의 언어로 말했다. 개와 원숭이의 울음소리를 뒤섞어놓은 것 같은 목소리. 이에 놀이 당황했는지 눈을 끔뻑이다··· 곧 감명받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거래는 신성하다."

놀의 화답이 돌아왔다.

거래에 응하겠다는 뜻. 그리 판단한 우진이 챙겨온 짐가방을 내려두려던 순간, 놀이 고개를 돌려 관문을 향해 뭐라 소리쳤다.

끼드드득—!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진으로선 의아한 일이었다.

'아직 거래가 성사되기 전인데··· 왜 관문을 열어준 거지?'

그런 의미를 담은 수화를 하자, 놀이 선심 썼다는 듯한 어투로 대답해 줬다.

"네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너의 무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들여보내주마."

그 대신, 우진과 그의 일행들이 쥔 쇠붙이가 놀을 겨누어선 안 된다. 놀은 그리 강조하며 관문을 열어줬다.

열린 문틈 사이로 걸어 나오는 부하 놀 세 마리. 그들의 손에는 큼지막한 나무 바구니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우진도 일행을 불러와야 했다.

"다들 이리로 와주십시오."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줄곧 기다리고 있던 롤랑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잘 해결된 건가?"

"네. 이제 간단한 일만 남았습니다."

거래를 위해 식량과 마수 가죽을 잔뜩 챙겨 왔건만,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일이 해결되었다. 그리 얘기하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우진이 칼을 자기 머리에 가져다 댄다.

썩뚝!

우진의 회색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잘렸다. 이를 본 롤랑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갑자기 머리칼은 왜 자르는 건가? 쥐가 한 입 파먹은 것처럼 되었군."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그리 대꾸하며 머리카락을 놀에게 내밀었다. 놀은 머리카락을 매듭지어서 묶은 후, 그것을 얇은 가죽으로 둘둘 싸매었다.

툭.

놀이 빈 바구니 속에 머리카락을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바구니를 뒤적여 물건 하나를 밖으로 꺼냈다.

놀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 우진은 머리카락을 준 대가로 그 물건을 하나 받았다.

'관문을 통과했다는 증거품.'

이 목걸이를 차고 다니면 놀에게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앞서 머리카락을 지불한 건, 일종의 신분증을 제시한 것과 같았다.

놀은 비범한 후각을 갖고 있다. 머리카락에 담긴 사람의 체취와 화학적인 특징을 어렵지 않게 감지해낼 정도.

관문에서 건넨 머리카락은 놀의 공동체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놀들은 그 냄새와 맛을 기억하여 외부인의 신원을 교차 검증한다.

이는 목걸이가 양도되거나, 복제되는 걸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자, 한 사람씩 이리로 와주십시오."

주변을 향해 손짓했다. 금세 줄지어 선 사람들. 우진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서 놀에게 건네줬다. 늑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롤랑의 차례가 되었다.

"빨리 좀 오십시오."

우진이 연신 재촉했다. 롤랑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 기른 장발의 머리카락은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기에.

"······꼭 잘라야 하나?"

"거 참··· 수녀님들도 군말하지 않고 잘랐는데, 대장부가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우진이 슬쩍 사내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에 발끈했는지, 롤랑이 냉큼 단검을 받아 든 후 본인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냈다.

이로써 모든 절차가 끝났다.

목걸이를 찬 사람들과 늑대들, 그리고 타라스크 두 마리가 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관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롤랑 님. 먼저 일행들과 함께 협곡을 통과하십시오. 저는 상황을 좀 살피고 나서 뒤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롤랑은 침울하게 답하며, 병사들을 통솔하여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고개를 돌려 놀을 보았다.

놀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관문 위에 서 있었다. 저 존재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기에, 우진은 밧줄을 타고 올라가서 그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놀이 곁눈질하여 이쪽을 봤다.

"왜 다시 돌아온 거지?"

그리 질문하는 놀. 보는 눈이 없기에 우진은 마음 편히 놀의 언어로 대답했다.

"만약 저들이 거래에 나선다면, 내가 통역을 맡아야 할 것 같아서."

원정군은 아직 행동에 나서지 않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우진이 앞서 시도했던 기행이 정말로 성공하자, 이를 목격한 원정군의 수뇌부들이 다시 회의를 잡은 듯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터였기에···

습관적으로 육포를 꺼내 씹었다. 마치 껌을 씹듯이 잘근잘근. 그 향기가 좋았는지 곁에 선 놀이 호기심을 가졌다.

"······그 음식은 뭐냐?"

"말린 고기. 한 번 먹어봐라."

우진은 그리 대꾸하며, 육포를 쭉 찢어서 절반을 놀에게 내밀었다. 놀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것을 받아먹었다.

직후, 놀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육포의 맛이 너무 뛰어나서 놀란 듯했다.

"이건··· 무슨 짐승의 고기지?"

"양고기. 저 너머로 가면 구할 수 있어."

우진이 그리 말하며 지평선을 가리켰다. 이에 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저긴 일족의 영역 밖이다."

"그렇겠지. 요즘 너희 상황은 어때? 내가 꽤 오래 자리를 비워서, 이곳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네."

내부 사정에 대한 질문. 놀은 잠시 고민했지만, 음식값을 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금방 그 질문에 대답해 줬다.

"좋진 않아. 옛 존재들이 세력을 불리는 중이다. 덕분에 우리 영토가 꽤 줄어들었다."

"요즘도 거미들이 문제인가?"

"아니. 예전에는 골칫거리였지만··· 이젠 정반대다. 거미가 옛 존재들의 남하를 막고 있어.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그리 대화하던 중, 지금의 상황이 새삼 신기한지 놀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한하다··· 우리 말을 어디서 배운 거냐? 말하는 게 마치 동족처럼 자연스럽다."

"사실 특별한 사연은 없어."

현실에서 살아갈 때는, 간단한 영어 회화도 못 해서 쩔쩔맸건만. 희한하게 이쪽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어려움 없이 터득했다.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던 중···

"······슬슬 결론이 나온 것 같네."

우진이 문득 그리 말했다. 놀 또한 뒤늦게 현재 상황을 눈치챘다. 관문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는 은빛 군대. 그들의 손에 은화살이 걸린 쇠뇌가 들려 있었다.

협상은 없다.

우진이 원한 결론과는 정반대였지만··· 딱히 놀랍진 않았다. 2차 원정군의 얼간이 짓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내심 예상했던 상황.

"너의 일족과 싸우게 되어 유감이다."

놀이 그리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우진은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진이다. 넌 이름이 뭐냐?"

"로가르."

"좋은 이름이군."

간단히 통성명을 나누며···

스릉—

우진이 마체테를 뽑아 들었다. 이를 본 로가르가 한껏 노하여 송곳니를 드러냈다.

"거래를 어길 셈인가?!"

"아니··· 싸우는 시늉은 해야지. 군대가 보는 앞에서 사이좋게 헤어지면 좀 이상하잖아."

"······옳은 말이다."

원정군의 침략이 시작된 상황이니, 우진 또한 그 흉내를 낼 필요가 있었다.

머쓱한 듯 중얼거리는 로가르. 그래도 놀이 진심으로 성을 내서 분위기가 일순 험악했다. 상황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우진이 생각해둔 각본을 설명해 줬다.

"공격을 한 번씩 주고받은 후, 적당히 내 옆구리를 차서 관문 안쪽으로 떨궈라."

"그래도 되겠나?"

"괜찮아. 내 몸뚱어리는 튼튼하니까."

로가르는 굳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진이 보기 드문 강자라는 사실을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이 달려들었다. 그 손끝의 발톱이 일순 길쭉하게 자라났다. 예전에 본 웨어울프의 재주. 하지만 위력은 지난번과 궤를 달리했다.

까가가각!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돌바닥에 길쭉한 발톱 자국이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우진은 놀의 목을 향해 마체테를 휘둘렀다.

칼등으로 휘둘러서 맞아도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가르는 내심 당황하며 그 공격을 피했다. 예상보다 마체테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쐐액!!

미리 약속했던 대로 발차기가 날아온다. 우진은 옆구리에 한껏 마나를 끌어올렸다.

뻐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진의 몸뚱어리가 멀리 날아갔다. 겉보기엔 요란하지만, 놀의 발차기는 큰 타격이 없었다. 공격에 닿는 순간 우진이 스스로 발을 굴러서 몸을 날렸다.

직후, 놀이 사냥감을 쫓듯 도약하여 관문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우진과 로가르가 자연스레 낙법을 하여 지면에 안착했다.

관문의 돌벽 안쪽으로 떨어졌으니, 원정군은 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번거롭게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그런데···

퓨퓨퓨퓩—!

관문 바깥쪽에서 묘한 소리가 여럿 터졌다. 곧 반짝이는 것들이 돌벽을 넘어 쇄도해 왔다. 원정군이 쏜 은화살이었다.

이를 본 인간과 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곡 안쪽을 향하여 함께 내달린다.

파박, 파바박—!

그들을 쫓듯, 방금 내달려서 지나친 곳에 은화살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바쁘게 뛴 덕분에 타격 반경으로부터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쿠와아아악!!"

로가르가 울부짖었다. 그 신호에 일찍이 빠져 있던 부하들이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관문을 내주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적들의 머릿수가 워낙 많기에 어쩔 수 없다. 놀 두 마리가 불로 봉화를 피워 올렸다.

저 봉화는 연기보다는 향기에 초점을 뒀다. 독특한 향을 내는 식물을 잔뜩 태워서, 그 냄새로 인해 주변 지역의 놀들이 상황을 인지한다.

관문 함락.

······그리고 복수.

"나의 일족에게 돌아가야겠다. 진, 조만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우진과 그의 무리는 인정을 받았다. 그렇기에 놀의 송곳니가 이들에게 향할 일은 없으리라. 로가르는 그리 설명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우진이 작은 희망 사항을 말해봤다.

"저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진 않았으면 좋겠군. 뭣도 모르고 끌려온 사람들이 태반이라."

허나 로가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기 어렵다. 알량한 자비를 베풀다가 내 일족들이 다칠 수도 있어. 전쟁이란 건 원래 매정한 것이다."

"그렇겠지···"

우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더 부탁하는 것도 염치가 없는 짓이다. 애초에 침략자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므로.

로가르와 그 부하들이 떠났다.

······저들은 군대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5화

몰이.

사고를 낸 당사자가 되려 성질을 내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롤랑··· 마수를 전부 놓쳐버린 겁니까?"

놀의 사체가 눈에 띄질 않았다.

이를 지적하듯, 뒤늦게 관문으로 온 콘라드가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롤랑은 마냥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의 발이 아주 잽싸더군요. 저희가 손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

콘라드는 뭐라 대답하지도 않고 가버렸다. 눈에 띄게 격노한 걸음걸이. 롤랑은 그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놈도 슬슬 가식을 벗어던지는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겁니까?"

곁에 선 우진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숨겨진 내막이 있는 듯했기에.

롤랑이 선뜻 대답했다.

"나에게 따로 찾아와서 밀명을 내렸다네. 만약 교전 상황이 벌어지면, 관문 안쪽에서 놀들을 다 죽이라고 하더군."

상황이 얼추 이해가 갔다.

롤랑과 그 휘하의 성기사들은 출중한 기량을 지녔다. 그러니 원정군이 관문 바깥에서 압박을 가하고, 이에 호응하여 롤랑이 관문 안쪽을 정리해 주길 바란 듯했다.

하지만 롤랑은 밀명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놀들이 전부 도망쳤으니, 원정군에게 큰 후환이 남게 되었다.

콘라드는 그리 생각하는 듯한데···

"되려 남 탓을 하니 같잖군요. 애초에 무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놀들은 얼간이가 아니다.

로가르는 원정군의 군대를 확인한 후. 처음부터 퇴각을 염두에 두고 부하들을 뒤로 물린 상태였다. 그러니 이들을 전부 몰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그게 가능했더라도 의미가 없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놀들이 봉화를 이용하여 곧바로 적습을 알릴 테니까.

"제가 이런 것들을 미리 경고했었는데, 혹시 설명이 좀 부족했던 걸까요?"

원정군의 수뇌부에게 미리 언질을 줬던 이야기다. 이를 다 감안하고 타격을 가한 줄 알았건만, 콘라드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우진이 그리 묻자, 롤랑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본인 의견을 밝혔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대주교는 자네 의견을 수용하려 한 듯하군. 하지만 에드윈 공작과 코넬리우스 경이 반대한 것 같아."

수뇌부들의 주장이 갈렸다. 선발대가 관문 안으로 들어간 후. 원정군의 본대가 한참 대기했던 건 이 때문이리라.

다소 뜻밖의 주장이었다.

"그리 추측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두 사람의 입장을 잘 생각해 봐."

콘라드 대주교와 에드윈 공작.

두 사내가 지향하는 목적은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다.

콘라드는 업적을 쌓는 게 목표였다.

공작에게 조력하여 2차 원정을 성황리에 마쳤다는 업적. 이를 달성하면 왕국 연맹을 비롯한 여러 귀족의 지지를 받을 테고, 콘라드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높아지게 되리라.

반면, 에드윈은 왕이 되길 원했다.

옛 왕국의 영토를 수복하여, 새로운 왕좌에 앉아 군림하며 살아가겠다는 야망. 하지만 그 땅에는 먼저 자리를 잡은 원주민들이 있었다.

이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건 원치 않는 일. 지금 놀들을 처리해야 한다. 원정이 끝나고 나면, 콘라드는 교단의 병력과 함께 개척 도시로 돌아갈 테니까.

거기에, 코넬리우스는 처음부터 마수와 협상하는 걸 반대했다. 의견이 기울었으니 놀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롤랑에게 밀명을 내린 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나.'

관문의 놀들을 전부 몰살하면 후폭풍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콘라드는 마지막 보험 삼아서 롤랑에게 미리 명령을 하달해뒀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여 눈에 띄게 감정이 격양된 상태였다.

"······상황이 제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군요."

전쟁, 그리고 정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영역의 문제들. 확실히 이쪽 방면으로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뇌부들 사이에 이런 갈등이 있으리란 생각은 못 해봤으니까.

그리 얘기하자, 롤랑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도 나처럼 사고를 많이 치면, 윗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될 거야. 쫓겨나지 않으려면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법이지."

일을 저지르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우진은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 * *

원정군은 순조롭게 진군을 이어 나갔다.

마수들이 습격하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변화의 원인은 명료했다. 원정군이 놀의 영토 안으로 발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습격이 시작될 것 같나?"

롤랑이 그리 질문했다. 줄곧 생각하고 있던 주제였기에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마 열흘 안에는 올 것 같은데··· 두고 봐야죠. 어쩌면 큰 분쟁 없이 이번 일이 마무리될 수도 있습니다."

변수가 많다.

원정군의 수뇌부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듯, 놀 또한 서열이 높은 암컷들이 모여서 현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결론 내릴 것이다.

설명을 들은 롤랑이 흥미로워했다.

"정말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군··· 그건 그렇고, 놀은 암컷의 직위가 더 높은 건가?"

"어지간하면 그렇습니다."

놀은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하이에나라는 종이 지닌 특징이었다.

희한하게도, 하이에나의 암컷은 수컷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흔히 남성 호르몬이라 알려진 테스토스테론이 암컷에게 더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었다.

놀 수컷도 뛰어난 무력을 지닌 건 마찬가지. 경험이 많은 노련한 수컷이 암컷들을 꺾고, 높은 서열에 올라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즉, 이를 요약하자면···

"일족 전체가 전사입니다."

"······아주 곤란하군."

롤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보다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 성기사. 2차 원정군이 처한 상황을 뒤늦게 눈치챈 것 같았다.

강력한 힘과 호승심, 그리고 지능을 갖춘 세력. 그 송곳니가 원정군을 노린다.

······사흘 후, 한밤.

불길한 직감이 우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묘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즉시 천막 밖으로 기어 나가서 주변 정찰에 나섰다.

저 멀리 평원에서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우진은 금세 그 정체를 파악했다.

'황소 마수.'

지난번 봤던 검은색 황소 마수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떼를 지어서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는 들소들.

덩치 큰 놀들이 들소 떼 옆에서 함께 달렸다. 연신 흉악한 울음소리를 터뜨려서 들소들을 겁주는 놀. 마치 사자 무리가 협력하여 소몰이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놀들이 마수 떼를 몰아왔다. 경계 중이던 병사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야습!! 야습이다—!"

지난날 병사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은 그 단어. 하지만 원정군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잠에서 깬 병사들이 급히 대응 태세에 나섰다.

"격발!!"

퓨퓨퓨퓩—!

원정군이 쏘아낸 은화살이 하늘을 뒤덮는다. 이를 본 놀들은 미련 없이 뒤로 빠졌고, 들소 떼는 관성에 등 떠밀려 돌진을 이어갔다.

퍽, 퍼버벅!

"꾸워어억!!"

은화살에 맞은 들소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마구 게워냈다. 하지만 황소 마수는 우직하다. 놈들은 화살에 마구 얻어맞는 와중에도 쉼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이대로 들소 떼가 밀고 들어오면 진형이 박살 난다. 마수들을 저지하기 위해, 지혜의 교단 소속의 사제들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우진은 사제들의 손에 들린 물건을 살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깃펜이었다.

'봉헌의 깃펜.'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필기구. 희한하게도 지혜의 신 탈로스의 사제들은 저 깃펜을 이용하여 신성력을 발현한다.

삭, 사가각···

사제들이 깃펜을 움직이자, 신기하게도 그 펜촉이 허공에 빛나는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마치 마법과 비슷한 광경이지만 엄밀히 다르다.

'지혜의 봉헌.'

봉헌이라는 건 신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지혜의 사제들은 학습한 지식을 신에게 바쳐, 그 대가로 일시적인 신성을 얻는다. 이때 가치가 높거나 터득하기 어려운 지식을 봉헌할수록 더 큰 신성력을 발현한다.

키이이잉—!

사제가 쓴 글귀들이 뭉치며 시퍼런 빛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앞으로 쏘아지며 돌진해 온 황소들을 갈긴다.

퍼퍼펑!!

푸르스레한 폭발이 여럿 터지며 황소들이 흙바닥 위에 엎어졌다. 직후 다시 한번 쏘아지는 은화살. 황소들이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곧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놈들을 해치웠다!!"

"와아아아아—!"

큰 피해 없이 야습을 저지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제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봉헌에 쓰인 지식이 사라진다.'

강한 신성을 발현해낸 대가로, 사제들은 앞서 글귀에 담아낸 지식을 잊어버렸다. 봉헌된 지식은 다시 공부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제약이 있기에 사제들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쉼 없이 학습해야 했다.

문제는, 야습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깊은 밤이 찾아오면, 놀들은 어디선가 몰아온 마수 떼를 원정군에게 보냈다. 그 종류가 다양했다. 들소, 사슴, 멧돼지, 토끼···

우진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천천히 먹어라. 많다."

"웍!"

잔뜩 신이 난 늑대들이 꼬리를 흔들었다. 원정군이 마수 떼를 사냥할 때마다, 우진은 몰래 그 내단을 뽑아내어 늑대들에게 갖고 왔다.

덕분에 늑대들은 원정이 시작되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상태. 하지만 재주를 얻진 못했다. 놀들이 보낸 마수들은 이렇다 할 재주가 없는 밋밋한 놈들뿐이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강력한 마수 떼를 원정군에게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약한 마수들이라 원정군이 잘 막아내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군.'

늑대들은 이 상황이 마냥 즐거웠지만, 야습으로 인해 원정군이 매일 밤마다 잠을 설쳐야 했다. 점차 쌓여가는 피로는 병사들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여기까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영역이라 치자.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물자가 너무 빠르게 소비되고 있어.'

밤이 될 때마다 은화살과 투창, 사제의 신성을 마구 퍼붓다 보니··· 가지고 온 전투 물자가 슬슬 바닥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후발대로 보급 부대가 올 예정이긴 했다. 하지만 보급대가 올 때까지 버틸 여력이 없는 데다가, 설령 그들이 일찍 출발하더라도 이곳까지 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분명 놀들이 후발대를 끊어 먹겠지.'

보급 부대의 병력은 본대만큼 많지 않다. 놀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을 터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원정군은 물자를 아끼기 위해 은화살을 회수하여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투신의 신성으로 축성된 무기는 소모품이다. 몇 번 사용하면 신성을 잃어버려 평범한 쇠붙이와 다를 게 없어진다.

탁, 따닥—!

은화살이 멧돼지 마수의 몸을 두들긴 후 튕겨 나갔다. 놈을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율의 교단 소속의 성기사들이 나서야 했다.

화르륵!

푸르스레한 빛에 휘감긴 성기사들의 칼날. 저건 신성이 아니라 마나 아츠였다.

기사들은 평소 단련하기 바빠서 지식을 쌓을 여유가 없다. 따라서 지혜의 성기사들은 호칭과 달리 대부분 마나 유저다.

우진은 멀찍이 서서 전투를 구경했다.

'비록 신성은 못 쓰지만, 나름 잘 싸우네.'

기사들이 돌진해온 멧돼지와 맞섰다. 마수의 머릿수가 많아 일일이 숨통을 끊을 여유가 없기에, 다리 힘줄을 베어 약화시킨 후 마무리는 병사에게 넘기는 식이었다.

병사들이 장창을 내뻗어서 멧돼지를 찔렀다. 사실상 첫 백병전이 일어난 상황.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마구 터졌다.

우진은 전장을 한 번 훑어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서 숲을 응시했다.

음침한 그늘이 내려앉은 숲속. 그곳에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여럿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광이 누구의 것인지는 안 봐도 뻔하다.

'놀들이 원정군의 전투법을 학습 중이군.'

예정된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6화

최선의 길.

힘겹고 싫증나는 짓이더라도, 그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야습이다—!"

경계병들이 힘껏 소리쳤다. 익숙한 종소리가 귀를 때렸다. 잠을 자던 병사들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천막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짙은 그늘이 드리운 밤. 평소처럼 하이에나들이 마수 떼를 몰아왔다.

"오늘도 황소인가."

"빌어먹을··· 잠은 다 잤군."

잡담을 나누며 밀집 대형으로 선 병사들. 그들의 손에 들린 창날이 스산하게 빛났다.

은화살은 쓸 수 없다.

잔량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훗날을 대비하여 아껴놔야 했다. 강한 마수를 맞닥뜨렸을 때 화살이 없으면 곤란해질 테니까.

"투창!!"

기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응하여 병사들이 손에 쥔 투창을 힘껏 투척했다.

퍼버벅—!

황소의 몸에 창날이 여럿 꽂혔다. 비록 깊게 박히진 않았어도 유의미한 타격. 황소들의 돌진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직후 기사들이 전진하며 황소를 베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마나가 깃든 칼날이 찬란한 궤적을 여럿 그려냈다.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예였다.

하지만 특별히 큰 감흥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 짓거리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마치 수확철 보리 줄기를 잘라내는 농부처럼.

쿠웅!

거대한 황소 한 마리가 주저앉았다. 이를 본 기사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놈을 사냥하러 가볼까.'

황소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콰득!

"······어, 어어?"

기사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대로 흙바닥 위에 엎어지는 기사. 그가 황망한 눈으로 본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한쪽 발목이 뜯겨 나갔다.

'왜?'

통증보다 먼저 찾아온 의문. 쓰러진 기사가 물 위에 건져진 생선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시선을 옮겨 방금 쓰러트린 황소를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황소의 배 아래에 붙어 있는 하이에나. 그 모습이 침대 밑에 몸을 숨긴 도둑 같았다. 놈이 비웃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기사의 잘린 발목을 씹어 삼키는 중이었다.

영악한 놀들이, 황소의 몸통 밑에 들러붙은 채로 적진에 잠입했다. 밤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군대가 그 존재를 뒤늦게 눈치챘다.

"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들이 지나가는 기사의 발목을 물어뜯은 후, 황소의 사체를 밀어 치우며 일어났다.

놀들의 머릿수는 대략 마흔. 원정군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다. 하지만 놈들 하나하나가 옛이야기 속 장수처럼 날뛰며, 마주 선 병사들을 순식간에 찢어발겼다.

하이에나들이 진형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놈들이 노리는 대상은 명확했다.

"사제들을 보호하라!!"

코넬리우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근처에 있던 기사가 놀에게 달려들었다. 마나가 깃든 칼날이 적의 목을 향해 휘둘렸다.

콰작!

놀이 쇄도해온 칼날을 씹어 부쉈다. 그 광경을 본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말도 안— 어억!"

놀의 발톱이 기사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갑옷이 찢어지며 시뻘건 핏물이 왈칵 터졌다. 직후, 힘껏 지면을 박차 도약하는 하이에나. 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꼬리를 휘둘렀다.

투화확!!

꼬리에서 시커먼 가시가 여럿 쏘아졌다. 마치 창날처럼 예리한 가시. 도망치던 사제들이 그 가시에 얻어맞고 우르르 쓰러졌다.

인간들 사이에도 비범한 자가 있듯, 놀 또한 마찬가지다. 높은 서열의 선봉장은 평범한 기사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코넬리우스가 아껴 왔던 칼을 뽑았다.

"보에몽. 저 짐승들을 도살해라."

거인 기사 보에몽이 나섰다.

3m가 넘어가는 키와 우람한 체격을 지닌 사내. 보에몽이 걸음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적과의 간격이 크게 좁혀졌다.

놀 선봉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한 인간이다. 호승심이 생기는 적수. 하지만 저런 강자와 결투하는 건 선봉장이 맡은 임무가 아니었다.

타앗!

놀 선봉장이 보에몽을 피해 몸을 빼냈다. 놈이 노리는 건 사제들. 위협이 될 만한 적들을 피해 도망치며, 편식하듯 연약한 인간들만 찾아내어 골라 죽였다.

그러나 영원토록 도망칠 순 없다. 보에몽과 고위 기사들이 어느새 턱밑까지 쫓아왔다.

부우웅—!

흉흉한 바람 소리. 보에몽이 손에 쥔 양손 망치를 휘두른다. 성인 남자의 몸통만 한 쇳덩이가 놀 선봉장을 노렸다.

선봉장이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꽈아아앙!!

폭음과 함께 지면을 작살내는 망치. 이를 신호탄 삼듯, 고위 기사들이 각자 적에게 달려들었다. 놀 선봉대와 기사들이 마구 뒤엉키며 요란한 싸움질이 시작되었다.

고위 기사들의 기량은 특출났다. 그들의 정교한 검 솜씨가 놀들을 몰아붙인다. 연신 터져 나오는 하이에나의 비명.

곧 놈들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선봉대는 이미 임무를 끝마쳤다.

둥! 둥! 두웅!

전쟁 북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누군가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귀를 찔렀다.

"코뿔소다!!"

거대한 코뿔소 마수 일곱 마리. 놈들이 눈에 띄는 모든 걸 짓밟으며 돌진해 왔다.

은화살과 사제들의 성법으로 저지해야 할 상황이건만, 앞서 놀 선봉대가 진형을 마구 헤집어놔서 제때 대처가 안 되었다.

"우와아아아악—!"

"모두 도망쳐!!"

패닉에 사로잡힌 병사들이 겁먹은 양 떼처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명령을 내려야 할 기사와 지휘관들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전투 코뿔소.

놀랍게도 이 마수는 놀에게 길들여진 가축 중 하나였다. 코뿔소의 등에 탄 놀들이 웃음소리를 흘리며, 뼈로 만든 투창을 던져서 도망치는 인간을 한 명씩 사냥했다.

코뿔소가 밀고 들어가자, 뒤이어 놀 타격대가 그 균열을 비집고 돌파했다. 마치 불에 달궈진 칼날이 버터를 가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반격해라!! 눈 뜨고 당할 셈이냐?!"

코넬리우스가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만 사령관의 통솔로는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없다. 원정군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런 제기랄!"

코넬리우스가 뒤늦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금세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여럿 들렸다.

"끼끽!"

"끼끼끼끽—!"

그리고 들려오는 하이에나들의 웃음소리. 놀들이 노기사를 쫓았다. 한껏 다급해진 코넬리우스가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막아라!! 어서—!"

늙은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젊은 기사가 여럿 나섰다. 하지만 놀들이 무시하고 코넬리우스만 쫓았다. 가장 직위가 높은 인물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코넬리우스가 숨을 헐떡였다. 삐걱거리는 무릎.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뛰었으나, 오래지 않아 늙은 기사는 놀에게 사로잡혔다.

"사령관님!"

젊은 기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손에 쥔 쇠뇌를 겨누는 기사. 하이에나가 웃으며 코넬리우스를 방패 삼듯 내밀었다.

총사령관이 인질로 잡혔다. 화살을 섣불리 쏠 수 없는 상황. 젊은 기사가 머뭇거리자, 코넬리우스가 그에게 호통쳤다.

"뭣들 하나?!"

"이, 이걸 어떻게···"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어서!!"

목청껏 소리치는 코넬리우스. 사령관의 핏발 선 눈동자가 부하를 응시했다. 이에 젊은 기사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난날, 첫 야습이 일어났을 때···

병사들이 원숭이 마수에게 인질로 잡혔고, 그때도 젊은 기사는 당황하여 군대를 멈춰 세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코넬리우스는 손수 그 답을 알려줬다.

'······인질 협상은 없다.'

마수에게 잡히면 사실상 죽은 목숨이다. 인질의 숨을 끊어서 고통이라도 줄여줘야 했다.

처억.

기사가 망설임 없이 쇠뇌를 겨누었다. 이를 본 코넬리우스가 웃으며 소리쳤다.

"그거야! 어서 날 구해— 억!"

화살이 코넬리우스의 이마에 꽂혔다.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축 늘어지는 노기사. 기사는 내심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이게 아닌가?'

코넬리우스가 알려준 대로 했을 뿐인데,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젊은 기사가 답을 구하는 듯한 눈으로 놀을 바라보았다. 하이에나는 이 상황이 황당한지 그를 마주 보다··· 문득 송곳니를 드러냈다.

"우와아악!!"

젊은 기사가 쇠뇌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놀이 그의 뒤를 쫓으려던 찰나, 최근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진 않았으면 좋겠군. 뭣도 모르고 끌려온 사람들이 태반이라.'

관문에서 만난 사내가 했던 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흥이 식는군.'

로가르는 도망치는 겁쟁이를 놔줬다. 맞수가 될 만한 강자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른 놀들 또한 사냥감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하이에나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오래지 않아 놈의 후각이 주변 인간을 찾아냈다.

저 멀리 목표물이 보인다. 잔뜩 겁에 질린 인간 한 무리.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놀들이 돌진하던 순간···

"거래를 어기려는 건가?"

우진이 하이에나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질문했다. 이에 놀들이 잠시 당황하다, 뒤늦게 수녀들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발견했다.

거래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건 크나큰 실수였다. 놀들이 급히 고개를 숙인다.

"사죄하겠다. 거래는 신성한 것이니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우진이 불쾌하단 듯 턱짓했다.

"대전사에게 나를 안내해라.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 것 같으니."

"그럴 수는···"

"말뿐인 사과를 하려는 건가?"

도중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가대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상황. 놀들은 사실상 거래를 어긴 것과 다름없다.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진이 그리 따지자, 잔뜩 풀죽은 놀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사에게 너를 안내하겠다."

"그래야지."

놀들이 앞서 걸음을 옮겨갔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이제 이 녀석들을 따라가면 됩니다."

"뭘 어떻게 하려고?"

롤랑이 질문했다.

원정군이 말 그대로 박살 났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개죽음당할 상황. 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된다.

우진은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거래해야죠."

놀에게도 현장 지휘를 맡은 사령관이 있다. 흔히 대전사라 불리는 존재. 그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협상을 제안해야 한다.

"이놈들이 낚여서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우진은 수녀들에게 미끼 역할을 부탁했고, 순진한 놀들이 그 미끼를 냉큼 물었다.

거래를 어기는 건 금기다.

단순히 놀 개인의 실수로 끝날 게 아니라, 일족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 이 상황을 이용하면 더 수월히 협상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이 협상을 잘 풀어간다면, 원정군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겠죠."

"그래서 자네가 줄곧 전투를 피한 거였군."

"네. 맞습니다."

처음부터 휴전 협상이 목표였기에, 우진은 줄곧 놀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우진과 롤랑이 원정군을 도와 전투에 임했다면, 놀들의 기습을 몇 번 정도는 막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했다간 놀들이 더 큰 규모의 군대를 끌고 돌아올 게 분명했다.

우진이 날고 기어도 몸뚱어리는 하나뿐이다. 놀과의 갈등이 더 심화되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이게 최선이야.'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

원정은 이미 실패했다. 휴전 협상이라도 잘해야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으리라.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7화

윗사람.

놀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전장의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살폈다.

'원정군의 잔당이 저항 중이군.'

병사들이 놀란 양 떼처럼 도망치고 있지만, 용케 그들을 통솔하여 반격에 나선 사령관이 더러 보였다. 나름대로 고무적인 성과. 그러나 전망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코뿔소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케이크를 자르듯 원정군을 여러 개로 토막낸 상태. 분열된 군대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예정되어 있던 결과다.

'도대체 왜 전면전을 택한 걸까.'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

옛 인류는 장벽을 쌓아 안전한 영토를 확보하고, 그 온실 속에서 수백 년 동안 평온하게 살아왔다. 이는 마경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괴한 식물, 마수, 그리고 인류가 올드원이라 부르는 옛 전승 속 존재들···

이 열악하고도 위험한 환경에서, 놀들은 큰 세력을 이룰 만큼 번성했다. 지닌 무력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뜻.

그 당연한 사실을 미리 귀띔해 줬건만, 수뇌부는 기어이 선제 타격을 명령했다. 이렇듯 윗사람을 잘못 두면 여러 부하가 고통받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놀들의 지휘관은 누구일까.'

놀들을 통제하고 있는 대전사. 우진은 그 존재가 말이 통하는 부류이길 원했다.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겨가자, 전투 코뿔소 한 마리와 놀 전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중앙에 유독 덩치가 큰 놀이 서 있었다.

'대전사 브락나크.'

검은색 털을 지닌 거대한 하이에나. 놈의 체격은 거인 기사 보에몽이 판금 갑옷을 걸쳤을 때와 맞먹는다. 그 손에 들린 양손 망치는 코뿔소의 머리뼈로 만든 것이었다.

브락나크가 이쪽을 응시했다.

"······저놈들은 뭐냐?"

그르렁대며 질문하는 놀 대전사. 안내자 역할을 맡은 놀들이 쭈뼛거리며, 방금 일어났던 일을 간략히 보고했다. 이에 성이 났는지 브락나크가 와락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 미숙한 놈들이 그새 사고를 치다니···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 문제에 대해선 나와 이야기해야지."

곁에 선 우진이 놀의 언어로 말했다. 브락나크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가르에게 들은 그대로군. 우리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뜸 들이지 않고 본론을 밝힌다.

"나는 신성한 거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족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약속을 어기려 하더군. 이에 대한 배상을 원한다."

"실제로 거래를 어긴 건 아니잖나?"

"내가 나서서 지적하지 않았다면, 너의 수하들이 나의 무리에게 공격을 가했겠지. 이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

거래의 신성함을 해치는 행위.

우진이 그리 주장하자, 브락나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그 대가로 뭘 원하지?"

"전쟁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휴전 협상을 진행하고 싶다. 동족들의 목숨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도록."

원정군 측의 패배를 인정하고, 병력을 회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그 말을 들은 브락나크가 팔짱을 꼈다. 어떻게 처신할지 고민하는 모습. 하지만 대전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적이었다.

"······너희들의 군대는 너무 위험하다. 전투 코뿔소를 둘이나 잃었어. 이상한 힘을 쓰는 존재들이 큰 피해를 주더군."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깨문다.

놀들이 원정군을 몰아붙이자, 기사와 사제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힘을 불살랐다. 그로 인해서 놀 군대의 피해 또한 적잖은 상황이었다.

"우리의 전략이 노출되었으니, 다음번에는 이렇듯 쉽게 이길 수 없겠지."

놀 선봉대가 황소 밑에 들러붙은 채로 잠입하여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한 번 노출된 시점부터 힘을 잃는다.

원정군이 놀의 전술을 인지했다. 보급을 통해 물자를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놀들 또한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할 터였다.

"후환을 남겨놔선 안 된다."

휴전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땅을 침입한 적들은 모두 죽게 되리라.

그 말에 우진이 반박했다.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너의 선택이 오히려 더 큰 후환을 불러오게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너희들이 상대한 건 선발대에 불과하다."

2차 원정군은 에드윈 공작의 사병과, 콘라드 대주교 휘하의 병력. 그리고 왕국 연맹의 지원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머릿수가 무려 팔천. 하지만 교단 연맹의 본 병력에 비교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너희들이 2차 원정군을 모두 죽이면, 교황이 직접 토벌령을 내릴 거다. 관문을 넘기 전에 전령을 보내놓은 상태야."

2차 원정군에는 각 교단의 지원군이 함께하고 있다. 이들의 죽음은 교단 연맹을 자극할 거고, 일곱 교단이 직접 선발한 정예 병력들이 이곳으로 오게 되리라.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

교단 연맹의 분노가 이 땅에 찾아올 것이다. 놀이 멸족당하고, 토벌 과정에서 교단 연맹 또한 적잖은 피해를 입게 된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암흑 신관들만 좋은 일이었다.

"교단 연맹은 너희들이 베푼 자비를 기억할 거다. 그러니 휴전을 맺어, 저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

브락나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군대를 처리하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아까보다 오래 고민하는 대전사. 우진은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금 필요한 건, 자비가 아니라 경고다. 우리의 땅을 침범하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란 경고. 저 군대를 본보기로 삼겠다."

대전사가 끝내 휴전 협정을 거절했다.

우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제대로 들어먹는 놈이 없었다.

슬슬 이 상황에 싫증이 난다.

"이봐, 브락나크."

"갑자기 왜 부르지?"

"혹시 눈치가 느리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나? 자주 들었을 것 같은데."

브락나크가 설핏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그리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우득—

우진의 손바닥에 회색 비늘이 돋아났다. 이를 본 브락나크가 눈을 부릅뜬다.

"······."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놀 대전사. 브락나크는 곧 제정신을 차렸다.

지금이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브락나크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찰나, 낌새를 읽은 우진이 급히 손짓하여 제지했다.

"아서라, 보는 눈이 많다."

여기서 대화하는 건 곤란하다.

"둘이서 이야기를 좀 하자. 따라와."

우진이 그리 말하며 숲을 가리켰다. 브락나크가 급히 곁에 선 놀에게 명령했다.

"퇴각 신호를 보내라."

"대전사.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

"길게 설명할 시간 없다. 다녀올 테니, 포로와 전리품을 잘 확보해두도록."

그렇게 명령을 내린 후.

앞서 걷는 우진의 뒤를 쫓아, 브락나크가 부리나케 걸음을 옮겨갔다. 곁에 있던 성가대와 놀들은 이 상황이 마냥 의아할 뿐이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선 순간. 브락나크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일족의 수호자를 뵙습니다."

놀 대전사가 뒤늦은 예를 표했다. 우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브락. 못 본 사이 출세했구나. 그새 대전사가 되었을 줄은 몰랐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브락나크가 조심히 말을 이었다.

"그동안 분위기가 좀 달라지셨군요···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죄송합니다."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우진의 지금 모습은 그때와 사뭇 달랐으니까.

회색 비늘.

사실 이건 재주가 아니었다. 마경에서 오랜 세월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겨난 신체의 일부 같은 것. 우진은 일부러 오감과 신체 일부를 퇴화시킨 채로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느 순간부터 몸뚱어리가 인간보다 마수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 맞춰 성격도 조금씩 변해가는 듯했기에···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현실 세계에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지.'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불면증이 더 심해졌다. 우진은 신체를 퇴화시킨 후. 그늘이 옅은 곳을 향하여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놀 무리는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하기 전에 가까이 지냈던 일족 중 하나였다.

"이제 저희 일족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브락나크가 기대감 서린 어투로 말했다. 우진은 괜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래서 숨기려고 했던 건데.'

예전에 떠난 직장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놀 일족과 어울릴 때도 나쁘진 않았지만, 인간들의 도시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우진은 마수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했으니까.

장벽 도시 유르기스에 정착하려 했던 건 그 일환 중 하나였다. 마경에서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기 위한 시도. 하지만 결국 따분함을 견뎌내지 못하여 마수 사냥꾼의 삶을 택했다.

인간과 마수, 그 중간 지점에 놓여있는 삶. 우진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동족들을 찾았다. 이젠 너희들과 함께할 수 없어."

"그렇다면··· 동족의 군대와 함께, 저희의 땅을 짓밟으러 오신 겁니까?!"

브락나크가 책망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오해할 만도 하다. 인간의 군대와 함께 놀들을 침공하려 온 듯한 모양새니까.

우진으로선 억울할 뿐이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너희들이 왜 이곳까지 내려와 있는 거냐? 놀의 영토는 이곳보다 더 북쪽에 있었을 텐데."

이곳은 놀의 영토가 아니었다.

우진이 자리를 비운 동안 놀의 영토가 남쪽으로 내려왔다. 2차 원정에서 이 녀석들을 맞닥뜨린 건 계산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리 얘기하자, 브락나크가 뒤늦게 이 상황을 이해했는지 겸연쩍게 답했다.

"옛 존재들의 활동이 너무 잦아져서··· 어쩔 수 없이 남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족의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군."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수호자께서 떠나신 이후, 줄곧 숨죽이고 있던 옛 존재들이 저희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더군요."

브락나크가 원정군을 몰살하려 했던 건, 자비를 베풀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휴전 협정이라는 건 마음 먹기에 따라 손바닥처럼 뒤집히는 것. 경험이 쌓인 군대가 다시 북진하여 올라오면 일족이 곤란해진다. 놀 대전사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사정을 들은 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입장도 많이 곤란하겠어··· 하지만 아까 내가 했던 말은 거짓 없는 사실이다. 저들을 몰살하면 더 큰 군대가 올 거야. 그러니 휴전 협정을 하는 게 최선일 테지."

"수호자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브락나크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일족을 몇 번이고 도와준 수호자였기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궁금했다.

"왜 동족들의 편에 서지 않으신 겁니까? 수호자님께서 마음만 먹으셨다면, 이번 전쟁을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텐데요."

우진이 전투에 나서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다. 브락나크가 그리 질문하자, 우진은 살짝 고민하다 그 질문에 응답했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

우진의 기준에서 보면··· 놀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정이 있고, 소통이 가능한 존재. 이들에게 선뜻 칼을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놀과의 거래. 하지만 원정군의 수뇌부는 거래를 거부하고 전면전을 택했다. 에드윈은 왕국을 재건하겠다는 야망에 눈이 먼 상태였으니까.

'내가 참전하면 전쟁을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과 놀 양쪽 세력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다.'

그리 판단한 시점부터 우진은 줄곧 방관자처럼 행동해왔다. 이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믿었으니까.

"휴전 협정이 깨지지 않도록, 내 선에서 최대한 노력해보마. 잘만 하면 교단 연맹이 너희 일족의 땅을 침공하지 않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얘기를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일어나라. 슬슬 돌아가야겠어."

우진이 그리 말하며 걸음을 옮겨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놀 대전사. 브락나크가 앞서 걷는 존재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호자.'

비록 동족과 함께 살아가길 택했지만, 저 사내는 여전히 일족의 수호자였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8화

언약.

사로잡힌 포로들을 한 번 둘러봤다. 그들 중에는 꽤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콘라드, 그리고 에드윈.

중요 인물이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놀들은 두 사내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다.

우진은 그들의 행색을 살펴봤다. 팔다리에 감긴 밧줄과 입에 물려진 재갈. 콘라드와 에드윈이 이쪽을 보며 눈을 부릅뜬다.

"읍, 읍읍—!"

굼벵이처럼 몸을 들썩대며, 두 사내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냈다. 우진은 손수 그들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벗겨냈다.

"어서 도와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두 사내. 대충 예상했던 말이지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얘기입니까?"

"우리를 이곳에서 구출해라! 자네와 롤랑이 함께 있으니 가능할 것 아닌가?"

콘라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우진과 롤랑, 그리고 조율의 성기사들이 있으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여긴 듯했다.

이에 우진은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그야··· 회군해서 도시로 돌아가야지."

"저 친구들이 가만히 지켜볼 것 같습니까?"

우진이 손짓하여 배후에 선 놀들을 가리켰다. 놀의 후각은 늑대보다 더 뛰어났다. 몰래 회군하여 도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놀들이 우리를 그냥 보내주더라도 도시까지 돌아가는 건 무리입니다."

놀들은 전리품 확보를 잊지 않았다. 화물 운송을 담당하던 타라스크를 대부분 노획당했기에, 은화살을 비롯한 전투 물자와 식량까지 전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를 담담하게 설명해 주자,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는지 두 사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저 녀석들과 거래해야죠."

휴전 협상을 체결해야 한다.

"관문에서 거래했다면 서로 동등한 입장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겠지만··· 두 분이 한 헛짓거리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으니. 사실상 항복 선언이라 하는 게 옳겠죠."

2차 원정군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과 다르지 않은 신세다. 그럼에도 휴전 협상이 맺어질 수 있는 건, 놀들이 교단 연맹과 척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저들을 설득하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제부터라도 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우진이 으르렁대듯 말하자, 찔끔 놀란 콘라드와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두 사내가 바람직한 자세를 갖췄다.

우진이 곁에 선 놀을 향해 수화했다. 그러자 놀이 어딘가를 향해 목청껏 울부짖었다.

"쿠왁, 키야아악—!"

그 소리에 놀란 콘라드가 질문한다.

"왜 저러는 건가?"

"저들의 지휘관을 부른 겁니다. 휴전 협상을 진행하려면 윗사람이 와야 하니까요."

들려오는 둔중한 발걸음.

저 멀리서, 거대한 코뿔소 마수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왔다. 그 목덜미에 앉아 있는 검은색 하이에나 한 마리. 코뿔소에 걸맞은 덩치를 지닌 놀 대전사였다.

쿠우웅!!

브락나크가 지면에 내려왔다. 직후 놈의 시선이 포로들을 훑었다. 콘라드와 에드윈이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우진은 거래 상대를 소개해 줬다.

"브락나크라 불리는 놀 대전사입니다. 일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죠."

"이런 괴물이··· 다섯이나 있다고?"

"더한 놈도 있습니다."

족장, 그리고 네 명의 대전사.

가장 뛰어난 힘을 지닌 존재는 일족을 대표하는 족장이 되고, 그 뒤를 따르는 네 명의 강자들만이 대전사의 호칭을 갖게 된다.

"브락나크의 서열은 4위라 하더군요."

"······."

콘라드와 에드윈이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건지 뒤늦게 실감한 듯했다.

"원하시는 걸 말하세요."

"······뭘 말하라고?"

"정신 좀 차리십시오. 휴전 협상을 맺으려면 서로 합의해야 할 것 아닙니까."

원하는 조건을 주고받아야 한다. 우진이 그리 말하자, 콘라드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두 번 다시 이곳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 그냥 우리들을 보내달라고 해주게."

우진이 콘라드의 말을 수화로 표현했다. 이에 뭐라 대꾸하며, 한쪽 손으로 손짓하는 브락나크. 우진은 그 뜻을 번역했다.

"몸 성히 보내줄 수는 없다고 하는군요."

"무, 무슨 뜻인가 그게?"

"아무래도 두 분의 왼팔이나, 다리 한쪽을 잘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땅을 침범했으니, 그 대가로 지워지지 않는 교훈을 몸에 새겨야 한다.

"잠깐만!! 거래를 하자고 제안하게나! 우리가 갖고 온 현물이 많지 않은가?!"

에드윈 공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병사들의 목숨은 체스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더니··· 본인이 불구가 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우진이 수화하여 거래를 제안하자, 브락나크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 의미를 다시 번역해 줬다.

"포로에게 몸값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고, 몸을 자르는 건 별개의 문제라 하는군요. 말뿐인 약속은 믿을 수 없답니다."

"그, 그런!!"

아연실색하는 두 사내.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 그들에게 조언해 줬다.

"······다리보단 팔을 자르는 게 좋을 듯하군요. 다리를 잃으면 거동이 힘들어집니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 그건 좀 곤란하죠."

"제발, 진!! 저 괴물을 좀 설득해 주게!"

콘라드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우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브락나크를 향해 손짓했다.

그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고민하는 척해라.

—알겠습니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각본이었다. 이들은 우진과 브락나크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한동안 토론 흉내를 내다···

"······다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뭔가?!"

"놀 일족은 거래를 신성하게 여깁니다. 이들의 옛 선조가, 위대한 존재와 거래하여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놀 일족에게 있어, 거래는 일종의 종교였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그렇기에 놀 대전사는 두 사내와의 거래를 내심 불신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두 분께서 각자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주십시오. 놀 일족과의 평화 협정을 잘 이뤄낼 수 있도록, 각자 최선을 다하겠다고."

콘라드 대주교는 교단 연맹, 에드윈 공작은 왕국 연맹을 상대로. 인류가 놀 일족과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조력한다.

신의 이름에 대고 그리 맹세한다면, 팔을 자르지 않고 이번 일을 넘어가겠다.

그리 말하자···

콘라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맹세까지 해야 한다고···? 어차피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 내가 대충 주절거릴 테니 자네가 잘 지어내서 얘기해주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거짓 맹세를 해도 브락나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콘라드가 쥐새끼처럼 머리를 굴렸다.

······우진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쿠와아악!!"

돌연 브락나크가 성난 듯 울부짖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콘라드가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겐가?!"

"콘라드. 이 친구도 눈치가 있습니다. 대주교님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 같으니, 그냥 때려죽이겠다고 하는군요."

브락나크가 코뿔소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놀 대전사가 안장에 걸려 있던 뼈망치를 뽑아 들었다. 코뿔소의 머리뼈로 만든 양손 망치.

그 흉악한 무기를 손에 쥔 채로, 브락나크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이를 본 콘라드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맹세하겠다!! 맹세!! 제발—!"

우진이 급히 손짓하여 브락나크를 멈춰 세웠다. 설득하는 듯 분주히 수화하는 두 손. 이에 놀 대전사가 고민하다 망치를 내려놨다.

우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왜 자꾸 헛짓거리를 해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겁니까? 저도 좋아서 이 짓을 하는 게 아닙니다. 슬슬 회의감이 드는군요."

"······미안하다."

"두 번은 막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제대로 맹세하십시오."

그리 다그치자, 대주교 콘라드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맹세문을 읊기 시작했다.

"지혜의 신 탈로스에게 맹세하길··· 놀 일족과 교단 연맹 사이의 평화 협정이 성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샤아아아—

콘라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에서 푸른색 빛이 일순 일렁였다.

신성 언약.

성직자의 맹세는 남들보다 더 무겁다.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기에, 이를 어길 시 신성을 박탈당하고 끝없는 불운이 뒤따른다.

'이런 제약이 있으니 콘라드가 맹세하는 걸 그토록 꺼렸던 거겠지.'

고개를 돌려 에드윈 공작을 보았다. 앞서 콘라드의 추태를 봐서 그런지, 에드윈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맹세문을 읊기 시작했다.

"일곱 신들에게 맹세하길··· 놀 일족과 왕국 연맹 사이의 평화 협정이 성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번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에드윈이 신성을 품지 않은 일반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에드윈은 이 언약을 가급적 지키려고 할 것이다. 신의 이름에 대고 한 맹세를 어기는 건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으니까.

두 사내의 언약을 받아냈다. 직후 브락나크가 망치 자루로 바닥을 찍었다.

쿵!

그 소리에 응하여, 주변의 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콘라드와 에드윈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낸 후. 바닥에 마른 장작이 잔뜩 쌓였다.

놀 주술사가 장작에 입김을 불었다.

화르륵—!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장작에 불을 지폈다. 놀 주술사가 뭐라 중얼거리며, 나무 그릇에 담긴 시커먼 가루를 불꽃에 뿌려 넣었다.

파앙!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한 번 터졌다. 모닥불의 화력이 더욱 강해지며, 불꽃의 색깔이 유황불 같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 스산한 빛깔에 콘라드와 에드윈이 위축되었다. 멍한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는 두 사내. 도대체 뭘 태운 건진 모르겠지만, 박하를 태운 것처럼 알싸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우진은 그들에게 단검을 한 자루씩 건넸다. 그것을 받은 콘라드가 질문했다.

"이건 왜 주는 건가?"

"머리카락을 자르십시오."

우진은 그리 말하며, 단검으로 본인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냈다. 브락나크 또한 발톱으로 옆구리의 털을 뜯었다. 분위기에 위축된 두 사내가 선뜻 그 요구에 응하였다.

놀 대전사가 털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화륵!

털을 집어삼킨 불꽃이 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우진은 두 사내를 향해 턱짓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콘라드와 에드윈은 눈치껏 할 일을 파악했다. 두 사내가 머리카락을 모닥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화륵!

더 흉흉하게 타오르는 녹색 불꽃. 우진이 그 불꽃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수호자가 이 거래를 입회하였다."

머리카락을 던져 넣었다.

화륵!

녹색 불꽃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다. 그 화력이 워낙 강해서인지, 장작들이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타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불이 꺼졌다. 녹색 불꽃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속으로 들어간 머리카락과 나무 장작들 또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남은 것이라곤 불꽃이 피워내던 알싸한 향기뿐.

놀들이 거래의 향기를 기억했다. 의식을 통해 네 존재의 언약이 일족에게 알려진다.

'······어찌저찌 일을 잘 끝냈군.'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콘라드와 에드윈을 그냥 이곳에 버려두고 싶지만···

교단 연맹과 놀 일족 사이의 평화 협정은 쉽게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진에겐 정치적인 힘이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교단 연맹이 내 말을 무시할지도 모르니까. 2차 원정군의 수뇌부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그렇게 흘러가면, 오늘 하루간 일어났던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평화 협정을 필히 성사시켜야 하는데. 문제는, 이번 전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교단 연맹이 놀 일족과의 평화 협정을 께름칙하게 여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번 원정군을 이끈 두 대표자. 콘라드와 에드윈이 놀 일족과 거래하여, 협정을 주도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권력자들이 놀 일족과의 휴전을 받아들였으니, 교단 연맹도 이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기 어려워질 거야.'

이번 실패로 인해, 콘라드와 에드윈은 정계에 발 들일 수 없는 퇴물이 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발언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원정군의 수뇌부가 놀 일족과의 평화 협정을 지지한다. 이 뒷배경이 있으면 더 수월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도시로 돌아가자.'

2차 원정이 막을 내렸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9화

도전.

언약을 마친 후. 놀 일족은 사로잡은 포로들과 노획한 타라스크의 절반을 돌려줬다.

타라스크의 절반을 빼앗긴 것은 큰 손실이지만··· 콘라드와 에드윈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원정군의 잔당을 재규합하여 떠날 채비를 했다.

우진은 그 생존자들을 한 번 둘러봤다.

'······다행히 성녀가 살아있군.'

흙바닥을 뒤덮은 덩굴들이 눈에 띄었다.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가 키워낸 식물. 이 덩굴로 놀들의 발목을 붙들어서 시간을 끈 듯했다.

성녀가 생존한 건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세실리아가 죽었다면, 번영의 교단과 큰 갈등이 생길 테니까.

'보에몽도 용케 살아남았고, 수뇌부 중 죽은 사람은 코넬리우스 한 명뿐인가?'

늙은 독사가 죽은 건 의외였다. 진작 후퇴하여 몸을 빼냈거나, 혹은 포로가 되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왜 죽은 걸까?

그 이유가 조금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내려 하진 않았다. 큰 관심이 없는 데다가, 애도할 생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다.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그리 묻자, 브락나크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인간과의 접촉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놀 일족은 인간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인간들 또한 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러니 놀 사절단을 장벽 도시로 보내어, 두 종족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확실히 괜찮은 제안.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건 일족의 금기 중 하나인데. 그래도 되겠나?"

놀 일족을 비롯한 마경의 원주민들은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는 걸 금기로 여긴다. 이에 대해서 지적하자, 브락나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기는 이미 깨졌습니다. 옛 존재에게 영토를 잃은 후 일족 전체가 남하했으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올드원의 행동반경이 예전보다 더 넓어졌다. 이는 반길 만한 소식이 아니었다.

"다른 일족들의 상황도 비슷한 건가?"

"뱀들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것 같던데, 나머지는 상황을 잘 모르겠군요. 워낙 괴팍한 놈들뿐이라 오래전 연락이 끊겼습니다."

브락나크도 딱히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정보를 더 얻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들 또한 국경만 넘어가도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하물며 마경의 원주민들은 종 자체가 다른 상황. 이런 차이로 인해 일족 사이의 왕래가 흔치 않았다.

브락나크가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놀 세 마리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이 셋을 사절로 보낼 생각입니다."

"제법 강한 녀석들이군."

"예. 일족을 대표해야 하니까요."

브락나크가 사절단을 한 명씩 소개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쟈카입니다.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 역할을 맡겼습니다."

선봉장 쟈카.

날렵한 체격을 지닌 전사였다. 지난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운 선봉장. 황소 마수를 이용하여 잠입한 후, 가시를 쏘아내는 재주로 사제들을 타격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브로툴입니다. 유용한 재주를 여럿 지녔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주술사 브로툴.

콘라드와 에드윈과 거래할 때, 언약 의식을 주관했던 주술사였다. 여러 상황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도록 동행시킨 모양.

"마지막으로··· 이 녀석은 로가르입니다. 남쪽 관문을 관리하던 전사죠."

관문지기 로가르.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 로가르가 이쪽을 보며 씩 웃었다.

"진,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로가르. 수호자님에게 예를 표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을 텐데?"

브락나크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에 로가르가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좀 봐달라고 대장. 우리는 예를 표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아."

"솔직히, 그렇긴 하지."

쟈카가 하품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놀 전사들은 명령에 복종하지만, 족장이 아닌 자에게는 예를 표하지 않는다. 서로가 넘어야 할 경쟁 상대여서 그렇다.

높은 서열에 올라가기 위해선 상급자를 꺾어야 한다. 그렇기에 놀 전사들은 호승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브락나크가 안절부절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이 좀 어린 편이라···"

"괜찮아. 유쾌하고 좋네."

너무 격식을 따지는 것도 번거로운 짓이다. 우진도 웃으며 녀석들을 마주 봤다.

'돌아가는 길이 지루하진 않겠군.'

오히려 좋다.

* * *

"족장에게 내 안부를 전해다오."

"예,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브락나크와 이별했다. 놀 사절단과 함께 원정군으로 돌아온 우진. 이를 본 콘라드가 아연실색했다.

"설마··· 저 괴물들도 동행하는 건가?"

"화친을 위한 사절단이라 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콘라드는 뭐라 뒷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앞서 뱉어놓은 맹세가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신성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

우진은 마저 해보라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예, 그래서?"

"······별것 아닐세."

콘라드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지금의 상황이 마냥 못마땅했다. 그런데 말을 함부로 꺼낼 수도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원정군에 소속된 사람들 대부분이 놀의 합류를 반기지 않을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존재들이니까.

"그렇지만, 놀이 합류한 것은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외교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큰 장점이 있죠."

마수들은 놀과 엮이는 걸 기피한다. 놀 일족에게 밉보이면, 놀들이 숲에 들이닥쳐서 눈에 띄는 모든 걸 뒤엎어놓기 때문이었다.

원정군은 지난 교전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 그러니 회군 과정에서 여러 번 습격을 당할 예정이었는데, 놀들이 동행하여 그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이 사실을 공표해서, 병사들이 놀의 합류를 꺼리지 않도록 만들어주십시오."

"그건··· 알겠네."

콘라드가 뭐라 말대답을 하려다가, 맹세를 떠올렸는지 이내 수긍했다. 신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가볍지 않다. 대주교는 이번 일에 최대한 협조해야 할 것이다.

원정이 실패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잃어버린 상황. 여기서 맹세를 어겨 신성까지 날려 먹으면, 콘라드는 지혜의 교단에서 퇴출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밑바닥에 처박힌다.

콘라드를 필두로, 지혜의 교단 소속의 사제들이 원정군에게 이 사실을 공표했다.

병사들은 미심쩍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 야습이 일어나질 않자 놀과의 동행을 점차 받아들였다.

'모두가 지쳤어.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 자체를 꺼릴 정도로···'

놀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은 드물었다. 병사와 기사 구분 없이, 그냥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만을 품고 있으니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비교적 쉬웠다. 남쪽을 향해 원정군이 걸음을 옮겨갔다.

"······따분하군."

로가르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아무런 분쟁 없이 걷기만 하니 지루한 모양.

"이봐 진. 달리 할 일도 없고 한적한데, 나의 도전을 받아주지 않겠나?"

"나는 바쁘다."

우진은 그리 대답하며, 깃펜을 쥔 채로 종이를 응시했다. 그는 교단 연맹에게 올릴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는 중이었다.

콘라드와 롤랑이 따로 보고서를 올릴 예정이라고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다. 가진 지식을 가능한 동원하여 휴전 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할 생각이었다.

"렉스. 네가 좀 상대하고 와라."

"······웍?"

돌연 호명된 렉스가 흠칫 놀랐다. 귀를 의심하는 표정. 붉은 늑대가 우진의 얼굴과, 덩치 큰 놀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보고 저 괴물과 싸우라고?

그리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에 우진은 피식 웃으며 로가르에게 한마디 했다.

"이 늑대를 제압하면 너와 놀아주마."

"어렵지 않은 요구로군."

로가르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위축된 듯 렉스가 꼬리를 내리자··· 우진이 녀석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소심하게 굴지 마. 할만할 테니."

그리 말하며, 늑대의 몸을 강제로 떠밀어서 놀 전사의 앞에 마주 세워놨다.

우진이 다시 깃펜을 집어 들었다.

꽈드드득—!

뒤쪽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 보고서를 쓰는 중이라 그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렉스가 촉수들을 꺼낸 후 돌가죽까지 두른 듯했다.

돌채찍 소리가 귀를 때렸다.

쩌어엉!!

마치 천둥을 연상케 하는 굉음이 터졌다. 뭔가 쩍 쪼개지더니, 뒤이어 나무 한 그루가 기울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늑대치곤 너무 강하잖아."

로가르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 그 공격을 행한 렉스 또한 놀랐는지 눈을 끔뻑였다.

우진은 깃펜을 휘갈기며 한마디 했다.

"그 정도는 해야지. 네가 지금껏 받아먹은 내단의 개수를 생각해 봐라."

원정이 이루어지는 내내, 원정군은 수없이 많은 마수를 사냥했고. 우진은 남몰래 그 사체들을 도축하여 내단을 빼 왔다. 그렇게 얻은 내단들은 모두 늑대들의 몫이 되었다.

렉스는 다른 늑대들보다 더 많은 내단을 받아먹은 데다, 가고일의 내단까지 따로 챙겨줬기에. 녀석은 어딜 가더라도 1인분은 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경험이 부족해.'

우진이 준 내단을 받아먹으며 성장했기에, 렉스는 놀 전사와의 수싸움에서 밀려 쩔쩔매는 중이었다. 반면 로가르는 늑대의 돌채찍을 뚫지 못하여 정체된 상태.

서로 제압하는 게 어렵다고 여긴 걸까?

늑대와 하이에나가 한참 동안 치고받고 싸우다, 휴전을 선언하듯 각자 뒤로 물러났다. 로가르가 이쪽으로 와서 투덜거린다.

"저 늑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하지?"

네 개의 돌채찍을 뚫고 타격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로가르가 그 해답을 구하자, 우진은 큰 고민 없이 대꾸했다.

"더 분발해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저 늑대를 제압할 수 있는 건가?"

의문을 표하는 로가르. 이에 우진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주먹의 검지와 엄지를 펴서 권총 모양을 만든다.

"빵."

털퍼덕—

우진이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렉스가 그대로 흙바닥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본 로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술인가?"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우진은 그리 대꾸하며, 품속을 뒤적여서 육포를 하나 꺼냈다. 렉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서 육포를 받아먹었다.

잘 훈련된 사냥개와도 같은 모습. 이를 반칙이라 여겼는지 로가르가 불만을 표했다.

"이건 힘으로 제압한 게 아니잖아."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보자.

우진은 그대로 팔을 움직여서, 곁에 선 로가르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빵."

"······."

로가르가 말없이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 모욕을 당했다고 여겼는지 놀의 표정이 점차 분노로 바뀌었다.

"이봐, 지금 장난할 기분이···"

로가르가 말꼬리를 흐렸다. 고개를 든 순간 맞닥뜨린 시선.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치자, 말이 목구멍에 덜컥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위험하다. 놀 전사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양이 앞의 쥐가 된 듯한 기분. 본능이 적신호를 보내지만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오답일 것 같았다.

고뇌하던 로가르는 불현듯, 앞서 보았던 렉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흙바닥에 드러눕던 붉은 늑대. 그 행동을 따라 해야 한다.

로가르가 자세를 낮추려던 순간···

"······좋아, 여기까지."

우진이 씩 웃으며 로가르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덕분에 놀 전사가 엉거주춤 섰다.

"잘 버티네. 확실히 네겐 재능이 있어··· 하지만 너무 서두르진 말라고. 브락나크가 내게 도전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겠지?"

로가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확인했습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70화

돌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