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환각.

일단 생각할 시간부터 벌어야겠다.

"잠시 그 자리에서 대기해 봐라."

"알겠습니다."

철가면이 공손히 무릎 꿇었다. 놈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현 상황에 대한 견적을 잡았다.

'어떤 질문을 해볼까.'

우진의 주된 관심사는 정보였다. 질의응답을 통해 현시점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다.

할 말을 잘 골라야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질문하면 의심을 살 것이고, 지나치게 많은 질문을 해도 수상쩍어 보일 테니까.

사실, 질문을 그리 많이 할 필요도 없었다.

'이놈의 내단을 뽑아 먹으면, 생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계승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방법에 작은 문제가 있다.

'일단 잠들어야 기억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좀 걸릴 거란 말이지.'

우진은 오늘 싸움질을 여럿 한 데다, 불벼락까지 써서 피로가 쌓인 상태. 지금 잠들면 내일 정오는 넘어가야 눈을 뜰 듯했다.

정보라는 건 시시각각 가치가 변한다.

암흑 신관들은 개척 도시로 첩자를 여럿 보냈고, 이들이 전부 실종되어 연락이 끊긴다면 분명 대처에 나설 것이다. 기껏 얻어낸 정보가 빠르게 퇴색된다는 뜻.

'당장 써먹을 만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 판단한 우진이 질문했다.

"따로 데려온 병력은 없나?"

"예, 저희 다섯이 전부입니다. 첩보 임무라 많은 인원을 대동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동료를 더 데려오진 않은 듯하다. 그 말에 우진은 살짝 아쉬워했다.

'내단을 더 얻지는 못하겠군.'

병력이 더 있다면 도망치기 전에 찾아내서 죽일 생각이었건만··· 이 도시에 투입된 암흑 신관은 다섯 명이 전부였다.

그중 넷을 처리했으니, 남은 사냥감은 눈앞에 있는 철가면 한 사람뿐. 오늘 밤의 성과물을 더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우진은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이번 임무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지?"

"······이런 말을 하여 죄송하지만··· 저도 아직 정보를 넘겨받지 못했습니다."

그리 말한 철가면은 눈치를 보며,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마녀를 향해 손짓했다.

"저 셀키가 정보를 갖고 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

생각해 보니, 철가면과 마녀는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마녀가 접선 장소로 돌아온 직후. 우진이 미행을 들켜 곧바로 싸움질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셀키? 마녀의 이름인 건가.'

내심 신경 쓰이는 단어였으나, 이런 사소한 것에 질문을 낭비할 순 없다. 일단은 더 중요한 걸 질문해야 할 때.

"너희들의 접선지는 어디냐? 맡은 임무를 잘 해냈지만, 그 정보를 윗선으로 전달해야 이번 일이 마무리될 텐데."

"따로 정해진 접선지는 없습니다."

"없다고? 왜?"

우진이 재차 묻자, 철가면이 뜸 들이지 않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귀환령이 떨어졌습니다. 문지기들은 각자의 임무를 마친 후 성소로 복귀하게 될 예정입니다. 돌아가서 직접 구두 보고를 올리게 될 텐데··· 혹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철가면이 조심스레 뒷말을 붙였다.

놈의 태도를 보아하니, 설명하던 중 문득 의구심이 든 모양이었다. 우진이 한 질문은 암흑 신관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는 명령이기에.

고민하지 않고 대충 응답했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거의 확보한 것 같았으니까.

"처음 듣는다. 그쪽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확실히,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의 일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으시겠죠."

혼자 수긍한 듯 중얼거리는 철가면. 우진의 태도가 믿음이 가는 건지, 대충 던져본 말도 좋을 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였다.

'좀 멍청한 놈 같군.'

어쩌면 이놈을 잘 이용하면 정보원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철가면은 꽤 직위가 높은 놈이라, 에녹과 달리 정보를 누설해도 괴물로 변하는 일이 없었다.

우진은 턱을 긁적이며 철가면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너, 보우와는 어떤 관계냐? 싸우는 방식이 그와 비슷한 것 같은데."

"한때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입니다."

그 말에 우진은 살짝 당황했다.

'······뭐야. 보우의 제자라고?'

전투 방식과 능력이 비슷하단 생각은 줄곧 했으나, 설마 보우의 제자일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어쩌다 문지기가 된 거지?"

철가면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보우··· 그 위선자의 밑에 있을 가치가 없단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배울 게 없었죠. 그 증거로 제가 놈의 두 눈을 빼앗았습니다."

보우가 두 눈을 잃은 건 철가면의 작품이었다. 이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말이었다. 우진의 기억 속 보우는 위선자와 거리가 멀뿐더러, 이런 약골에게 당해 눈을 잃을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놈을 정보원으로 써선 안 된다.'

보우처럼 냉정한 사내조차도 이놈을 통제할 수 없었다. 스승의 등을 찌를 만큼 간사한 놈이니, 그냥 죽여 없애는 게 속이 편하리라.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랬지.'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이 걸음을 옮겨갔다. 마치 산책을 하듯 발걸음이 느긋했다. 철가면과 우진 사이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꿋꿋이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는 철가면. 우진이 그의 등 뒤에 섰다. 직후 손날을 휘둘러 놈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파악!

철가면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공격. 뒤통수에 눈알이 달린 것처럼 반응 속도가 빨랐다. 심안과 유사한 눈을 지녔기에 기습을 간파할 수 있었다.

철가면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먹을 쥔다. 이를 본 우진이 한마디 했다.

"감히 상관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가?"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한껏 목소리를 높이는 철가면. 놈의 몸뚱어리에 시뻘건 투기가 너울거렸다. 그에 대응하듯 우진 또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화륵—

우진의 두 주먹에 검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이를 본 철가면의 태도가 뒤집혔다. 비범한 눈이 기술에 담긴 흔적을 발견했다.

"······너, 보우의 기술을 익혔구나."

줄곧 증오해온 존재의 흔적. 이를 본 철가면 속에서 붉은 안광이 피어났다.

으득!

놈이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단순히 이를 악무는 것 같지 않았다. 이빨 사이에 끼워둔 알약 같은 걸 씹은 듯했다.

철가면이 대뜸 달려들었다.

우진은 적의 움직임을 끝까지 관찰했다. 상대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오른손 훅. 날아오는 순간 팔목을 잡아 부러뜨린다.

빠악!

그러나 날아온 건 정강이를 노린 발차기였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틀어, 종아리 앞쪽의 두꺼운 뼈로 공격을 받아냈다.

직후 반격을 위해 왼 주먹을 내질렀다. 허나 그보다 앞서 철가면은 머리를 뒤로 젖힌 상태. 우진의 주먹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방금의 공방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철가면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심안의 진짜 힘이다."

"······그래, 잘 알지."

마치 답지를 보고 싸우는 듯한 움직임. 보우와 대련할 때 자주 받았던 느낌이다. 철가면은 어떤 편법을 써서 그 기량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놈의 손등에 시커먼 핏줄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체 모를 알약과, 역량을 벗어난 재주를 사용하여 생긴 부작용으로 보였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죽겠군.'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

여유롭게 잡담이나 읊는 걸 보아, 철가면은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 듯했다.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게 된 능력은 진짜배기였다. 이에 우진은 호기심을 느꼈다. 저놈의 눈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나를 봐라."

우진이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을 더 가까이서 보라는 듯한 몸짓.

이에 철가면이 의문을 표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혹시 뭔가 보이는 거 없어?"

"헛소리!"

철가면이 재차 덤벼들었다.

놈의 두 주먹이 분열하듯 늘어났다.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물론 실제로 늘어난 건 아니었고. 물리력을 지닌 잔상을 여럿 만들어서 타격하는 기술이었다.

우진은 바쁘게 그 공격을 피하고, 받아 흘리다, 문득 오른발로 바닥을 찼다.

짜악!!

찰진 소리가 터졌다. 우진이 뻗은 로우킥이 상대의 허벅지를 한 방 후려쳤다.

"끄읍!"

철가면이 비명을 삼키며 몇 걸음 물러났다. 기껏 만들어낸 잔상이 신기루처럼 소멸했다. 이를 본 우진은 되려 의아해졌다.

"왜 피하지 못한 거냐? 심안을 쓰면 방금의 공격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닥쳐라!!"

놈이 목청껏 소리치며 다시 덤볐다.

쿵, 쿵, 쿠웅!

철가면이 걸음을 디딜 때마다 지면이 푹푹 패였다. 악감정이 잔뜩 실린 듯한 발걸음. 그 무게감은 고스란히 주먹에 투영되었다.

연타 기술로는 재미를 못 봤으니, 묵직한 공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듯한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터업!

비늘로 덮인 손아귀가 놈의 주먹을 간단히 잡아 붙들었다. 당황한 철가면이 힘껏 손을 빼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붙들린 시점에서 심안 따위는 의미가 없다. 우진은 남는 왼손으로 적의 몸통을 마구 갈겼다. 연거푸 터져 나오는 비명.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최대한 힘 조절을 했다.

"꺼어어억···"

가면 밑으로 시허연 게거품이 줄줄 흘러나왔다. 확실히 제압했다. 그리 판단한 우진이 암흑 신관의 가면을 벗겼다.

'······의외로 평범하게 생겼군.'

나이를 적잖게 먹은 사내였다. 약기운 때문에 혈색이 좋지 못했고, 이마에 칼로 새긴 듯한 문신이 하나 있었다. 눈을 형상화한 듯한 문신. 그걸 제외하면 특색이 없는 얼굴이었다.

놈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뭔가 보이는 거 없나?"

우진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이에 철가면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까부터! 자꾸 뭘 보라고 하는 거냐?!"

"나의 심상 세계. 너의 심안이 진짜라면 볼 수 있겠지··· 한번 증명해 봐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어서 그런 걸까. 어느 순간부터 철가면도 오기가 생겼다.

그래, 봐주마.

눈가에 힘을 불어넣었다. 마지막 집중력을 전부 짜내어 코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온통 시커멓다.

'뭐지?'

의문에 잠긴 철가면이 주변을 둘러봤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시커먼 암흑뿐. 마치 검은 잉크 속에 가라앉은 듯했다.

한창 주변을 둘러보던 중···

뜬금없이 작은 생명체 하나를 발견했다. 검지 손가락 크기의 녹색 벌레. 철가면은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마귀?'

작은 사마귀 한 마리.

사마귀는 오래 굶주린 듯 홀쭉한 몸을 갖고 있었다. 녀석이 연신 머리를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겁에 질린 듯했다.

도대체 무엇을 저리 두려워하는 걸까?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콰작!

어디선가 나타난 생쥐 한 마리가 사마귀를 물어뜯었다. 사마귀가 발악하듯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쥐가 이빨에 힘을 불어넣자, 사마귀의 몸통이 그대로 뚝 분질러졌다.

쥐가 사라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마귀가 나타난다.

조금 전에 봤던 녀석과 똑닮은 생김새. 사마귀가 바쁘게 달려 도망쳤다. 또다시 나타난 쥐가 그 뒤를 쫓았다. 도망치는 사마귀보다 쥐가 훨씬 더 빠르다.

콰작!

사마귀가 다시 잡아먹혔다.

그러고 나서, 또 사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의 일도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슬슬 지겨워진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광경을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던 찰나···

촤아악!

사마귀가 힘껏 날개를 부풀렸다.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로, 톱날 같은 앞발을 치켜든 사마귀. 이를 본 생쥐가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쥐의 갈등이 느껴진다.

이 작은 벌레를 만만히 여겼건만··· 내심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항이 거셌다.

······다른 먹잇감을 찾자.

쥐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녀석의 등 뒤에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 위화감을 느낀 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고양이가 쥐를 내려다본다. 녀석이 턱을 벌려 쥐의 머리를 힘껏 깨물었다.

찌이익!!

단말마. 그리고 쥐의 몸뚱어리가 축 늘어졌다. 사마귀는 줄곧 쥐를 두려워했지만, 놈 또한 약한 먹잇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고양이가 유유히 떠났다.

녀석이 떠난 빈자리에 남아 있는 건, 절반쯤 남은 쥐 사체. 허기를 느낀 사마귀가 몰래 다가가서 고기를 뜯어 먹었다.

그러자 녀석의 덩치가 조금 커졌다.

'더 많이 사냥할수록, 더 강해진다.'

이 규칙을 깨달은 순간부터, 사마귀의 두려움은 점차 갈증으로 바뀌어갔다. 힘을 쥐려면 더 많은 사냥감이 필요했다.

사마귀는 무수한 죽음을 통해 경험을 쌓아 올렸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므로···

철가면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언제 이만큼 커진 거야?'

거대한 사마귀가 곰을 뜯어먹는 중이었다. 그 힘없고 조그맣던 벌레가, 어느 순간부터 숲의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사마귀가 먹이를 모조리 씹어 삼킨 후. 앞다리 톱날에 붙은 고기 조각을 꼼꼼히 핥아먹었다. 하지만 식사를 마쳤음에도 놈의 허기는 아직 달래지지 않았다.

먹을 게 더 필요하다.

사마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철가면이 뒷걸음질 쳤다.

'······설마··· 아니겠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철가면의 몸뚱어리는 이미 허공에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사마귀가 앞발로 그를 잡아 들었다. 마치 줄곧 아껴놓은 간식을 꺼내서 먹는 듯한 태도였다.

사마귀의 턱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 속에 들어찬 이빨들이 암흑 신관을 맞이한다.

* * *

"······으어어어억!!"

돌연 철가면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진은 흠칫 놀라서 몸을 뒤로 빼내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는 걸까.

우진은 그 이유를 질문하려 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철가면의 머리가 옆으로 축 늘어졌다. 숨이 멈춘 걸 보아 죽은 듯했다.

'약기운을 못 버텼군.'

마약성 각성제를 쓴 이후. 철가면의 몸 상태는 줄곧 좋지 못했다. 약기운에 잠식되어 호흡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기에,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철가면의 대답을 못 들었지만···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어차피 약쟁이가 본 환각이었을 테니까.'

그럴 것이다.

신디의 복수.

과정에 여러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어찌저찌 사냥을 잘 끝마쳤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을 듯하다.

죽은 철가면의 내단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시체의 소지품을 한 번 살펴봤다.

철가면, 이상하게 생긴 피리 한 개, 금화가 잔뜩 담긴 주머니, 그리고 유리병에 든 검은 물약. 생긴 걸 보아하니··· 데릭과 세드릭의 눈에 들어갔던 것과 같은 안약이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우진은 물약을 자세히 관찰했다.

시커먼 액체 속에서, 티끌처럼 작은 애벌레가 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장구벌레와 같은 수생 곤충의 일종으로 추측되었다.

좀 위험한 물건이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챙겨둬야 할 듯하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겠지.'

놈의 소지품들을 전부 갈무리한 후.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마녀도 잊지 않고 챙겼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다.

문제는··· 이 상태로는 개척 도시의 입구 검문을 통과할 수 없다. 몸 곳곳이 회색 비늘로 덮여있는 데다, 왼손에 기절한 마녀를 들고 있으니.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색이었다.

따라서 도시 밖으로 나올 때와 같은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방벽을 넘어야겠군.'

우진은 높게 도약하여 방벽에 들러붙은 후. 암벽 등반을 하듯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니, 위병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방벽 위에서 야간 경계를 하며 잡담을 나누는 중인 듯했다.

"도시에 표범이 들어왔다는 얘기가 돌더라."

"술 취한 새끼들 헛소리 아니야? 여기서 표범이 왜 나와. 토끼 한 마리 없구먼."

"그러게··· 빌어먹을, 잘 자고 있었는데."

위병들이 하품하며 투덜거렸다. 아까 우진이 나올 때보다 경계 인원이 늘었다. 아무래도 표범 마수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모양.

'한창 떠드느라 바빠 보이네.'

우진은 조용히 두 위병의 곁을 지나쳤다. 그들은 대화에 몰두하느라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곳도 별반 차이가 없었기에, 도시 내부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붕 위를 오갔다. 오래지 않아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황금충의 저택.'

황금충 볼프는 큰 개척 도시마다 저택을 하나씩 구매해 놓았다. 그 저택을 현재 우진과 신디가 숙소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문 앞에 선 우진은 품속을 뒤적여서 열쇠를 하나 꺼냈다. 미리 받아놨던 여분 열쇠. 그것을 써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안쪽 방에서 신디가 마중 나왔다. 직후 그녀는 우진이 붙잡아온 마녀를 보고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뭘 갖고 오신 거예요?"

"이게 마녀야. 포박해서 방에 가둬두고 싶은데, 혹시 적당한 장소 없어?"

"지하실을 쓰면 될 것 같네요."

두 사람이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의자를 하나 가져와서 마녀를 앉혀둔 후. 쇠사슬로 묶고 온몸에 족쇄를 여럿 채웠다. 강철로 만든 족쇄라 쉽게 부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면 탈출하지 못하겠군.'

지하실의 문도 막아놓을 예정이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갈 수 없다.

우진이 마녀의 생김새를 훑어봤다.

얼굴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개 가죽처럼 반질거리는 시허연 피부. 손가락 사이의 물갈퀴도 눈에 띄지만, 가장 인상 깊은 건···

"······다리가 없네요?"

"그러게."

다리를 대신하듯 물개의 꼬리가 붙어 있다. 마치 인어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 이를 본 신디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생명체는 동화책에서도 못 봤는데··· 혹시 뭔가 아는 것 없으셔요?"

"셀키라고 하더라. 그 외에 아는 게 없어."

"처음 듣는 단어네요."

신디도 딱히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단순하다.

"어차피 심문하려고 잡아 온 거야. 본인에게 한번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겠지."

마녀가 에드윈 공작에게 접근하여 얻어낸 정보. 이를 실토하게 만들 때, 본인의 정체와 둔갑술에 대한 설명도 겸사겸사 들으면 될 듯했다.

그렇게 심문이 끝나고 나면···

신디가 손수 마녀를 살해할 예정이다. 그렇게 복수하는 순간 두 사람은 각자의 목표를 이루게 될 테고, 이번 마녀사냥이 끝나게 되리라.

"······그런데 이거 살아있는 거 맞나요?"

신디가 문득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에 우진은 마녀의 입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 있어. 그런데 언제 깨어날진 모르겠네. 아마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바꿔 말하면···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죽어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요."

그 말에 우진 또한 표정이 묘해졌다.

'······너무 지졌나?'

철가면과 맞붙기 직전. 한창 싸움질을 하는 도중에 마녀가 깨어나면 일이 곤란해져서, 번갯불을 좀 많이 먹여두긴 했다.

표범 마수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둔갑술일 뿐. 어쩌면 마녀가 버틸 수 없는 타격을 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치를 보던 신디가 제안했다.

"포션이라도 한 병 먹여볼까요?"

"갖고 있어?"

"네. 상비약으로 두어 병 갖고 다녀요."

신디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값비싼 사슴 가죽으로 만든 아담한 가방.

그 속에서, 신디가 큼지막한 유리병을 하나 끄집어냈다. 마치 마술사가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진은 가방의 정체를 눈치챘다.

"혹시 귀물이야?"

"네. 아주 근사한 가방이죠?"

신디가 으스대듯 가방을 보여줬다. 공간 확장, 경량화 주문이 깃든 귀물. 우진의 짐가방보다 훨씬 우월한 명품이었다.

"부럽네··· 이런 귀물은 어디서 구해?"

귀물은 가격과 별개로 찾는 것 자체가 힘들다. 우진은 교단 연맹과 함께 일하며 목돈을 꽤 모아놨지만, 적당한 귀물을 찾지 못하여 돈을 계속 아껴놓는 중이었다.

이에 신디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괜찮은 귀물을 좀 모아놨어요.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몇 개 선물로 드릴게요."

"······그렇다면 더 서둘러야겠군."

근로 의욕이 생기는 말이었다. 우진은 곧장 포션을 넘겨받은 후, 그것을 마녀의 입에 조심히 부어 넣었다.

포션의 약발이 좋은 탓일까.

한 절반쯤 먹이고 나자 반응이 왔다. 순간 파르르 떨리는 마녀의 눈꺼풀. 이를 본 우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곧 깨어날 것 같다."

"좋네요. 바로 심문하면 되겠어요."

원래는 자고 일어난 다음에 일을 진행하려 했건만, 값비싼 포션을 사용하니 바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곧 마녀가 눈을 뜬다.

"······헤···"

마녀가 실없이 웃었다. 고문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모든 걸 체념한 듯했다.

우진이 곁에 선 신디에게 한마디 했다.

"넌 올라가 있어."

"이것만큼은 저도 볼래요."

신디가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마녀가 고통받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듯했다.

우진은 그 의지를 존중했다.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심문할 시간이다.

우진은 나무 의자를 하나 끌어와서 마녀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그 상태로 잠시 고민했다. 뭘 먼저 해볼까.

지난번 에녹을 고문했던 경험이 있어서 금방 견적이 잡혔다.

'일단 마음을 꺾어놔야 해.'

그리 해야 사람의 입이 가벼워진다. 우진이 손끝에 번갯불을 깃들이려던 찰나···

'······뭔가 이상한데.'

불현듯 위화감이 느껴졌다. 우진이 마주 앉아 있는 마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마녀가 헤벌쭉 웃고 있다. 그 입가에 흘러내린 침방울이 고드름처럼 턱에 맺혔다. 총기 없이 흐리멍덩한 눈동자.

신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예 맛이 간 것 같은데요···?"

"······."

마녀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 * *

어쩌면 이 영악한 마녀가, 미친 척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우진이 그런 의견을 제시했지만···

"좀 이상한데요."

신디가 마녀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마녀의 눈동자가 손끝을 좇아 움직인다. 그런데 초점이 안 맞는 건지, 오른쪽 눈동자가 계속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두 눈알이 따로 논다.

"······이걸 의도적으로 할 수 있어요?"

"따로 훈련하면 가능할지도···?"

우진은 그리 반박하긴 했으나, 자기 말에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마녀는 그냥 망가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신디가 다시 질문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진은 큰 고민 없이 답하였다.

"좀 쉬다가 제3 개척 도시로 가자. 보우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마녀가 날고 기어도 보우의 심안을 속일 순 없다. 제3 개척 도시로 돌아가서, 이 마녀가 어느 만큼 망가졌는지 진단해 볼 생각이었다.

견적을 잡아본 후. 답이 안 나오는 것 같으면 그냥 죽여야 한다. 정보가 아깝지만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인물이니까.

우진이 그리 말하자, 가만히 얘기를 듣던 신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마녀를 꼭 죽여야 하는 건가요?"

"복수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죽이는 건 너무 간단하게 끝나잖아요."

그리 말하며, 신디가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시커먼 가시덤불로 만든 목걸이. 왠지 께름칙한 느낌이 드는 생김새였다.

"이게 뭐야?"

"아주 오래된 유물 중 하나예요. 가문 대대로 물려져 온 보물인데, 마녀에게 쓰고 싶어서 따로 챙겨왔어요."

그 말을 들으니···

—가문의 원수에게 사용하라.

우진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두 형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저 물건의 용도가 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신디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좋아. 너의 뜻대로 해봐."

"감사해요."

신디가 악동처럼 웃으며, 목걸이에 돋아난 가시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끝이 살짝 찔리며 붉은 핏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직후 신디가 피를 목걸이의 보석에 가져다 댔다. 하얀 보석의 색이 붉게 물들었다.

철컹.

그 목걸이가 마녀의 목에 씌워졌다. 신디가 작게 시동어를 읊조렸다.

"시카트릭스, 스피네럼."

······파삭.

목걸이가 시커먼 연기를 내뿜더니, 곧 잿가루가 되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마녀의 목에 목걸이와 비슷하게 생긴 문신이 새겨졌다.

신디가 마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목을 붙잡는 듯한 손짓이었다.

꽈드드득—

"컥, 끄읍···"

가시덤불 문신이 마녀의 목을 졸랐다. 마녀의 입에서 힘겨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를 본 우진이 턱을 주억거렸다.

'저주가 성공했군.'

가시덤불이 남긴 흉터.

맹수를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귀물이다. 맹수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주인에게 악심을 품거나, 혹은 주인이 원할 때. 저 문신에 깃든 저주가 맹수의 목을 조른다.

강한 자의식을 지닌 존재에게는 저주가 걸리지 않는다. 평소의 마녀였다면 저주가 몸에 깃드는 것을 저항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신디는, 고문을 구경하며 마녀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불벼락에 의해 마녀가 망가졌다. 그로 인해 저주가 마녀의 영혼 깊숙이 뿌리내렸다.

이로써 신디의 복수가 끝났다.

"오랫동안 즐길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작되었다.

* * *

신디는 명령권을 선뜻 공유해줬다. 그렇기에 우진 또한 원할 때, 마녀에게 어떤 명령이든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말을 아예 못 알아듣네."

"그러게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마녀가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명령이 일단 떨어졌건만, 그에 전혀 응하질 못하니 마녀는 몇 번이고 목이 졸려야 했다.

"이름도 새롭게 붙여줘야겠어요. 계속 마녀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셀키라고 부르면 되려나."

"음··· 어감이 별로예요. 오늘 잠들기 전에 고민을 좀 해봐야겠네요."

그리 말하며 신디가 하품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연회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해가 저물었다. 이제 서너 시간만 더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러 가자․"

"내일 뵈어요."

두 사람이 각자의 침실로 향했다.

우진은 침대에 드러누운 후, 품속을 뒤적여 내단을 하나 꺼냈다. 철가면의 내단.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며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이걸 먹자니 좀 찝찝한데.'

철가면이 막판에 이상한 약을 씹은 채로 싸웠다. 그 기운이 내단에 남아있는 건 아닐지 살짝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우진은 어지간한 독에 내성을 갖고 있으므로.

까득—

철가면의 내단을 씹어 삼킨 후. 그늘진 천장을 보며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진은 철가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보우의 제자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길래 암흑 신관이 된 걸까?

'이제 알 수 있겠지.'

눈을 감자, 익숙한 어둠이 찾아왔다.

눈먼 자 비크람. (1)

시련의 용. 브리트라의 수도승들은 대부분 부모 없는 고아거나,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신세의 사람들이 모인 교단이다.

이는 수도승이 되는 과정이 너무나 혹독하기 때문이었다. 사원에 틀어박힌 채로, 밋밋한 음식을 먹으며, 하루 종일 단련만 하는 삶. 이렇듯 고된 삶을 스스로 택할 사람은 몇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떠난다. 수도승의 길을 택하는 자는, 어릴 때부터 사원에서 자라온 고아들뿐이었다.

비크람도 그런 고아 중 한 사람이다.

'······남들이 쓰러질 때까지 버텨야 해.'

일렬로 선 어린 동자승들이 기마 자세를 취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채로, 무릎을 굽혀 앉은 자세. 허벅지가 타오르는 듯 아프지만··· 이를 악문 채로 버텨야 했다.

엄격하고 두려운 스승이, 그들의 등 뒤에서 단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슬슬··· 자세가 불량해지는구나."

긴 작대기가 동자승들의 팔과 다리를 건드렸다. 단련 중 흐트러진 자세를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동자승들은 한껏 긴장하며 기마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 작대기가 비크람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다른 동자승과 달리, 그의 두 다리는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견고했다.

비크람이 곁눈질하여 주변을 봤다.

'다들 지쳤어.'

동자승들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파르르 떨리는 다리. 스승이 방금 전 자세가 불량하다 지적했건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금방 자세가 흐트러졌다.

털퍼덕—

곧 한 사람이 바닥에 엎어졌다. 유독 왜소한 체형을 지닌 동자승. 그 모습을 본 비크람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딘··· 저 낙오자 녀석.'

허약한 라딘.

단련을 할 때마다 라딘은 매번 첫 번째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가쁜 숨을 게워 내는 라딘. 찬물을 뒤집어쓴 생쥐처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같은 출발을 하더라도 저리 뒤처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라딘과 반대로, 비크람은 누구보다 앞서 달리는 수재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주변에 선 동자승들이 한둘씩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동자승들이 엎어졌다. 이를 본 비크람은 내심 만족했다.

'이제 쉬어도 되겠어.'

털썩.

비크람도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이로써 단련이 끝났다. 줄곧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스승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뒷짐을 지고 선 중년의 수도승. 맹금류처럼 매서운 눈매를 지닌 사내였다. 그의 시선이 제자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었다.

"다들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기대에는 조금 못 미치는구나. 아쉬운 일이지."

스승의 시선이 문득 이쪽으로 향했다.

"비크람··· 오늘도 네가 가장 뛰어났다. 아마 네 또래 중에는 적수가 없을 듯하군."

듣기 힘든 스승의 칭찬. 이에 비크람이 애써 미소를 참으며 대답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보우 님."

"그래야지."

보우의 눈이 비크람을 응시한다.

"부디 만족하지 말거라."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 *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비크람을 비롯한 어린 동자승들은 나이를 먹고 번듯한 성인으로 자랐다. 이는 둥지 밖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너희들은 이제 한 사람 몫을 하는 수도승이 되었다. 바깥 활동을 할 때, 교단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품행에 신경 쓰거라."

보우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이를 끝으로, 동자승들은 브리트라의 이름을 짊어진 수도승이 되었다. 이제 무엇을 해나갈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보우처럼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거나, 끝없이 단련하며 내면을 관조하는 구도자가 되거나, 혹은 구호 활동을 하며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자가 될 수도 있다.

이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하는 게 좋을까. 비크람은 큰 고민 없이 결정했다.

"구호 활동을 해보고 싶습니다."

브리트라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며, 어려움에 부닥친 약자들을 돕는다. 이를 위해 비크람은 사원 밖으로 나왔다.

직후 마주하게 된 세상은···

온갖 놀라운 것들로 가득했다. 크고 화려한 건물과 도로, 그리고 장식물들. 비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연신 주변을 살폈다.

'······장벽 도시, 유르기스.'

사원에서 고작 반나절 걸어 나왔을 뿐이건만, 이런 도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란 생각은 못 해봤다. 이곳에서 도대체 뭘 해나가야 할까?

다행히 그 막막함은 교단 연맹의 도움 덕분에 해결되었다. 연맹은 비크람에게 여러 일거리를 소개해 줬고, 덕분에 비크람은 수월히 구호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장벽 너머의 세계. 마경에서 마수 사냥을 하는 것도 그런 일거리 중 하나였다.

뻐어억!!

비크람의 주먹이 커다란 쥐 괴물의 골통을 깨부쉈다. 걸쭉한 핏물을 게워 내며 경련하는 쥐. 죽었다. 비크람은 두 손 모아 합장하며 그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누군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 마수 때문에 그간 얼마나 고생했던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군요. 알프레드 님."

행상인 알프레드.

장벽 도시와 마경을 오가며 많은 부를 쌓아 올린 행상인이었다. 그는 줄곧 애먹이던 쥐 마수를 토벌하여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

"비크람 님. 장벽 도시에 돌아가서 저녁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평소라면 거절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고되었다. 영악한 쥐 마수를 처리하느라, 마경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다. 한껏 굶주린 배가 음식을 원한다.

"······매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섭섭지 않게 대접하겠습니다."

두 사내가 유르기스로 돌아갔다.

난생처음 들어가 본 고급 식당. 식탁 위에 낯선 향기를 풍기는 음식들이 여럿 놓였다. 이를 마주한 비크람은 고뇌에 잠겼다.

'······내가 이런 음식을 먹어도 되는 건가?'

사과를 입에 물려서 구운 새끼 돼지, 잘 튀겨진 오리, 쪄서 익힌 후 이국적인 소스를 올린 생선 요리··· 얼핏 봐도 진귀한 음식들이었다.

브리트라의 교리는 절제를 추구하기에, 이런 사치스러운 음식을 가까이 해선 안 된다. 비크람이 수저를 드는 걸 망설이자, 그 모습을 본 알프레드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육식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채식만 해선 근육을 키울 수 없다. 육식 자체를 기피하는 수도승도 더러 있긴 했지만, 무예를 익힌 무승들은 양념하지 않은 닭고기를 자주 먹었다.

"수도승은 사치를 멀리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런 요리들을 입에 대기가 좀 망설여지는군요."

비크람이 갈등하며 말하자, 그 얘기를 들은 알프레드가 씩 미소 지었다.

"이런 음식들을 맛보는 것도 경험입니다. 비크람 님께선 젊으시니, 살아가며 이런 경험을 쌓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런가요."

"네. 이런 음식을 경험한 후, 인내하며 참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절제 아니겠습니까?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무턱대고 피하는 짓은··· 절제라기보단 두려움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더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여러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 비크람은 그 말에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알프레드가 웃으며 음식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 식기 전에 드셔보십시오."

"······알겠습니다."

비크람이 돼지고기를 한 입 씹었다.

파삭—

잘 구워진 껍데기가 바삭하게 씹혔다. 직후 터져 나오는 농후한 육즙. 그 폭력적인 맛에 비크람이 크게 놀랐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는 거였나?'

일평생 동안 이어져 온 금욕적인 삶. 그로 인해 마비되어 있던 미각이 깨어났다.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를 새로 배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안에 든 음식을 씹는 게 두렵다. 하지만 이 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크람은 반쯤 홀린 듯 눈앞의 요리를 먹어 없앴다.

향락, 그리고 배덕감.

그것들이 비크람의 일부가 되었다.

* * *

행자의 길을 걷더라도, 주기적으로 사원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비크람은 사원과 장벽 도시를 바쁘게 오가며 살아갔다.

7개월 후.

수도승들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한 공문이 내려왔다. 비크람 또한 그 벽보를 읽었다.

'대장로 오르덴이, 젊은 수도승 한 명에게 무예를 계승할 예정이다.'

오르덴은 평생 무예를 고민해 온 구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대장로는 말년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만, 너무 늙어서 그 깨달음이 담긴 기예를 완성하기 힘든 상태였다.

따라서 오르덴은 후계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젊고 재능 있는 수도승 한 명에게 자신의 무학을 계승하여,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한 기예를 마저 완성해 주길 원했다.

그 벽보를 읽은 비크람이 미소 지었다.

'이건··· 날 위한 기회다.'

대장로의 무학을 계승 받으면, 더욱 큰 힘을 손에 쥘 수 있게 되리라. 그렇기에 비크람은 고민하지 않고 후계자가 되기를 청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경쟁자가 적지 않네.'

기회는 외면하기 어렵다. 비크람 말고도 후계자가 되길 원하는 수도승들이 여럿 있었다. 이럴 때의 해결법은 간단했다.

'겨루기.'

후계자 자리를 놓고, 여덟 명의 젊은 수도승이 대련을 하게 되었다. 비크람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그는 늘 선두 자리를 지켜온 천재였으니까.

첫 상대와 마주 선 비크람은 내심 웃었다.

'라딘··· 이 녀석이 자기 분수를 잊었구나.'

간신히 수도승이 된 낙오자. 사실상 부전승과 다를 바 없는 상대였다.

대련이 시작되는 순간, 지면을 박찬 비크람이 상대를 향해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이에 라딘 또한 손바닥을 뻗어 맞대응했다.

떠어엉!!

굉음과 함께 라딘이 저 멀리 밀려났다. 놈의 수준은 예전과 다른 게 없었다.

'나보다 약하고, 더 느리다.'

쉼 없이 상대를 몰아붙였다. 라딘은 발바닥에 불이 난 사람처럼 급히 움직이며, 쏟아지는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막아냈다.

라딘의 기술은 여전히 어설펐다. 매 순간이 빈틈처럼 보이는 움직임. 비크람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적에게 달려들었다.

······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군."

문득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크람이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겠지만, 보우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어난 게냐."

"······스승님?"

"일어나려 하지 말고 누워 있어라."

"대련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미 끝났다."

뭐가 끝났다는 걸까.

비크람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이상하게도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있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죠?"

"그야, 졌으니까."

"제가 졌다고요? 누구에게요?"

"라딘."

귀를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난 걸까. 보우가 뜸 들이지 않고 부연 설명을 해줬다.

"너는 속임수에 속아서 덤볐다가, 턱에 한 방 맞고 기절했다. 라딘은 널 비롯한 수도승들을 전부 꺾고 대장로님의 수제자가 되었지."

잠깐의 방심이 첫 패배로 이어졌다. 이를 깨달은 비크람이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지?"

"스승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라딘보다 훨씬 더 뛰어나단 사실을!"

보우가 담담히 질문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제가 라딘보다 모든 면에서 앞섭니다. 힘과 속도, 기술. 전부 다! 제발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한껏 애걸하는 비크람. 하지만 보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앞서더라도··· 비크람. 지금의 너는 라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왜죠?!"

"너에겐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맹수보다 약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몸을 지키기 위한 무기와 전략을 고안했다.

무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약자들이 타고난 강자를 꺾기 위해 고안해낸 기술. 비크람이 힘을 믿고 맹수처럼 군림하는 동안, 라딘은 홀로 명상하며 무예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했다.

"석 달 전. 라딘은 줄곧 노력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고, 그 순간부터 너를 능가하는 무예를 손에 쥐었다."

"왜 제게··· 그런 깨달음이 중요하단 말을 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원망하듯 말하는 비크람. 이에 보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고 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비크람, 왜 그때 주저앉은 것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비크람이 되묻자, 스승이 딱한 눈으로 제자를 보았다.

"네가 동자승일 때부터··· 나는 너희들을 단련시킬 때마다,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지 기마 자세를 풀지 말라고 했다."

라딘은 매번 윗옷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버티다가 엎어졌다. 이는 단련을 할 때마다 벽을 넘어서려 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비크람은 단련할 때마다 곁눈질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른 동자승들이 모두 쓰러진 걸 확인한 순간, 단련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당시의 비크람에겐 단련을 이어갈 체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을 이겼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 그 너머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너에게 지적했다. 에둘러서 말해본 적도 있고, 작정하고 잔뜩 다그쳤던 날도 있지. 하지만 너는 매번 내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흘리더구나."

재능이 있기에, 교만했다.

그로 인해 먼 옛날 따돌렸다고 생각한 낙오자에게 선두를 내주게 되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풀 죽은 비크람이 질문했다. 이에 보우가 위로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라딘이 했던 것처럼 노력해야지. 너에겐 재능이 있다. 그러니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더 정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비크람이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시커먼 그늘이 자리 잡았다. 이 반칙 같은 역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인정할 수 없어.'

빼앗긴 선두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독기를 품은 비크람은 다시 수행에 집중했다. 구호 활동을 하는 걸 멈추고, 새로운 목표에 닿기 위하여 단련과 명상을 반복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2등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벅차다.'

비크람은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데다, 남들보다 기술을 터득하는 속도가 빨랐지만···

다른 동자승들의 성장 속도가 느리기에 두각을 보였을 뿐.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남들도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기 마련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고급 음식을 먹으며 안일하게 사는 동안, 다른 수도승들이 어느새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대로면 곧 추월당한다. 비크람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해.'

깨달음을 얻고자 명상했지만, 이 짓거리를 하는 건 전혀 진전이 없었다.

고민 끝에 비크람은 서고로 향했다. 고승들이 남긴 일기와 비급들이 있는 곳. 여러 책들을 읽고 분석하여, 이 난관에서 벗어날 방법을 물색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서고의 책들을 살펴보던 중··· 한 가지 기예가 비크람의 눈에 띄었다.

'······심안?'

이 발견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3화

눈먼 자 비크람. (2)

비크람은 심안에 대한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그 설명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 이를 터득하는 순간 시야의 사각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적의 공격을 모조리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이걸 익힌다면 라딘을 꺾을 수 있어.'

힘과 속도, 기술. 모든 게 앞선다. 여기서 심안만 더해진다면, 라딘을 갓난아기처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비크람은 심안을 터득하는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서고를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는 서적이 없었다.

'혼자서는 찾기 어렵겠군.'

이 많은 책들을 다 뒤져보는 것도 어려운 일. 따라서 비크람은 서고 관리를 맡고 있는 장로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로가 우려를 표했다.

"심안을 다룬 비급은 빌려줄 수 없다. 문제가 많은 기예라 금서고에 따로 빼놓았으니까."

"한 번 훑어보기만 할 생각입니다."

비크람이 여러 번 정중히 요청했다.

장로는 긴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그 책을 내놓았다. 부작용 때문에 금서고로 빼놓았을 뿐, 실제로 금서인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심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보우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 정도 신중함은 갖췄겠지?"

"예. 주의하겠습니다."

목표했던 서적을 손에 넣었다.

비크람은 남몰래 비급을 여러 번 읽은 후. 내용을 전부 숙지하고 나서 장로에게 그 책을 돌려줬다. 직후 그는 단련장에 홀로 앉아 심안을 터득하기 위한 수행을 시작했다.

'세 번째 눈을 뜨기 위해··· 두 눈을 감는다.'

심안을 처음 깨우친 수도승은 눈이 먼 맹인이었다. 그는 시력이 사라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단련을 이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눈이 없더라도 앞이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깨달음은 비급에 고스란히 담겨 후세에 전해졌다. 하지만 이를 익힌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안을 개안하는 건 위험한 시도기 때문이었다.

'······운이 나쁘면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심안은 영적인 눈을 뜨는 기예였다.

사실상 생명체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 이런 부류의 기예는 익히는 과정에서 여러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 그 가능성이 비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후유증이 발현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비크람에겐 재능이 있었다.

'나라면 가능하다.'

목표가 생긴 순간부터 삶에 활력이 깃들었다. 심안을 개안하기 위해 비크람은 쉼 없이 단련과 명상을 반복했다.

그 노력은 점차 성과를 보였다. 눈을 감아도 주변 사물이 느껴지는 듯했다. 가슴 속 마음의 눈이 점차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눈이 시큰거려.'

세 번째 눈을 뜨기 위해 두 눈을 감는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다. 비크람은 눈을 오래 뜰 수 없게 되었고, 뭔가를 집중해서 보려고 할 때마다 눈알 안쪽이 쑤셔댔다.

비급에서 언급된 드문 후유증. 운 나쁘게도 비크람에게 그 증상이 발현되었다. 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가슴 속에 두려움이 피어났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시력을 잃는다.'

두 눈을 잃은 대가로 심안을 개안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개안에 실패하면 이도 저도 아닌 장애인 신세가 되리라.

비크람은 심안을 단련하는 걸 멈췄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왠지 모르게 눈의 통증은 매일 더 심해지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조언이 필요하다. 겁에 질린 비크람은 스승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다. 분명 꾸지람을 듣게 되리라 예상했건만···

보우는 오히려 비크람을 칭찬했다.

"놀랍군. 그런 후유증이 발현된다는 건, 너의 수련에 성과가 있단 뜻이다. 쉼 없이 정진하면 남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 테지."

후유증이 발현되는 건 운 나쁜 사례지만, 어느 정도 성과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었다. 단련 자체는 순조롭다는 뜻.

이에 비크람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지만··· 이러다 잘못하면 눈을 잃게 될 텐데요. 치료법은 없는 겁니까?"

"심안을 터득할 때 생긴 후유증은 치료할 수 없다.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위험을 각오했기 때문에 단련을 시작한 것 아니었나?"

분명 그랬다. 지난날의 비크람은 이런 후유증을 각오하고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막상 각오했던 가능성이 현실로 들이닥치자, 다잡았던 마음이 유리 조각처럼 덧없이 부서지고 있다. 당시의 각오가 어린 날의 치기처럼 느껴졌다.

"만약··· 눈을 포기하고도 심안을 개안하지 못하면.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여야지. 비록 심안을 익히지 못하더라도, 그 상실에서 비롯된 시련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다."

브리트라의 수도승은 잃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더욱 큰 시련과 맞서야 하는 법.

보우가 웃으며 제자를 독려했다.

"잘 정진하고 있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그 말을 듣자···

비크람은 문득 눈앞의 사내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일평생 동안 봐온 스승. 그렇기에 보우의 생각과 사상, 마음가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착각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눈앞의 사내는 깨달음에 미친 광인이었다.

* * *

단련을 이어갔으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눈은 나날이 빛을 잃어갔고, 심안이 개안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떠나자.'

낙담한 비크람은 유르기스로 향했다. 잠시라도 사원을 떠나, 눈이 멀고 있다는 두려움을 잊고 싶었다.

'비크람··· 왜 그때 주저앉은 것이냐?'

이 와중에도 스승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비크람은 되묻고 싶었다.

"왜 다들 멈추지 않는 거야?!"

10년이 넘도록 모진 단련을 하며 고생해 왔다. 그의 스승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따지고 보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단련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그걸 당연하다는 듯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결승선 없는 달리기 승부에 참여한 것 같았다. 비크람은 10년이 넘도록 선두 자리를 지켜왔고, 이제는 그 보상을 받고 싶었다.

'······눈을 잃기 전까지 즐기자.'

바깥 활동을 하며 적잖은 금화를 모아놨다. 도시로 온 비크람은 술과 값진 요리를 먹으며, 밤새도록 여자들을 여럿 품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의 통증은 점차 더 심해지고 있었으니까.

절박한 사람일수록 흔들리기 쉽다.

"비크람 님. 눈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데···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행상인 알프레드가 그런 말을 꺼냈다. 비크람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한 사람이 찾아왔다. 비크람은 놀란 눈으로 상대방의 행색을 살폈다.

'뭐야 이놈은?'

시커먼 로브를 두른 사람이었다.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로브가 펑퍼짐해서 체형이 보이질 않았고, 눌러쓴 후드의 그늘이 이상할 만큼 짙었다.

기묘한 목소리가 그늘 속에서 새어 나왔다.

"가슴 속에 눈을 품고 있군요··· 원한다면 그것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드리죠."

"······한 번 해보십시오."

비크람이 선뜻 허락했다. 그 정체 모를 존재가 미끄러지듯 걸어와서 손을 뻗었다.

툭.

손끝이 비크람의 이마를 건드렸다. 일순 느껴지는 격렬한 두통. 비크람이 와락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시력이 돌아왔다.'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앞이 보인다. 막 붓칠한 그림처럼 생동감 넘치는 풍경. 비크람이 한껏 감격하여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너무 좋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방금 건 임시 처방에 불과하니. 열흘이 지나고 나면 심안이 다시 닫히게 될 겁니다."

심안은 잠시 눈을 떴을 뿐. 오래지 않아 다시 빛을 잃을 것이다. 그 말이 벅찬 감정을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비크람은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눈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눈을 고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 도움을 받으려면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셔야 할 테니."

상대방이 되려 질문했다.

"당신은 절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갈등하던 비크람이 끝내 고개를 숙인다.

"······뭐든 하겠습니다."

"좋군요."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 * *

야심한 밤.

비크람이 그늘진 숲속을 내달렸다. 바삐 달리느라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의 손에는 낡은 가죽 장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대종사 솔라스의 장갑.'

브리트라의 교단을 상징하는 성유물 중 하나였다. 비크람은 간신히 이 물건을 빼돌린 후. 수도승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이는 심안과, 새로운 스승에게서 받은 아티팩트들. 그리고 비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긴 세월 함께해 온 수도승들은 그의 배신을 예상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비크람!!"

벼락같은 외침이 귀를 때렸다. 놀란 비크람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의 옛 스승. 보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게냐!"

보우가 사납게 질문했다. 그의 목소리는 성난 맹수가 그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저렇게까지 진노한 모습은 처음 본다.

비크람은 이 상황이 내심 두려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냥 보내주실 순 없습니까? 보우 님에게 손찌검하고 싶지 않군요."

"헛소리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라··· 도대체 왜 이런 짓거리를 벌인 게지? 몸 성히 돌아가고 싶다면 설명을 잘해야 할 거다."

비크람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서 더 배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우 님도 저의 적수가 아니니까요."

"어리석음이 너의 눈을 멀게 만들었구나!"

보우가 일갈하며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몸에 깃드는 금빛 휘광. 이에 대응하여 비크람이 훔친 장갑을 손에 착용했다.

제자와 스승이 맞부딪혔다. 두 사내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처럼 서로 닮았다.

'심안, 그리고 성유물.'

심안으로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성유물로 힘을 보충한다. 이 두 가지 무기를 이용하면 어떤 적이든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계획과 현실은 늘 엇나가는 법. 팽팽해 보였던 균형은 곧 무너졌다.

퍼벅, 퍼버버벅—

보우의 매타작이 제자를 마구 갈겼다. 편법에 의존하는 자의 한계는 명확하다. 비크람은 쉼 없이 얻어터진 후 바닥에 엎어졌다.

보우가 쓰러진 제자에게 한마디 했다.

"네가 그 모양이라 아직도 깨달음이 없는 거다. 돌아가서 정신 교육부터 다시 해주마."

"······제발···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눈을 고치기 위해선 이 유물이 필요합니다."

비크람이 장갑을 쥔 채로 애걸했다. 이에 보우가 어이가 없단 듯 코웃음쳤다.

"너의 눈이 그리도 소중하단 말이냐? 지금껏 해온 모든 걸 등지고 도망칠 만큼?"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비크람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제자의 핏발 선 눈동자가 스승을 응시했다.

"희생을 감수하라니, 뭐니··· 보우! 당신의 눈에 문제가 생겨도, 그리 덤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보우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라고 대답을 해야 할 상황이지만···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정작 보우 자신도 눈 없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위선자입니다!"

비틀거리며 선 비크람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시커먼 빛에 휘감긴 단검들이 보우를 향해 쏘아졌다.

보우가 급히 물러나며 날아온 단검들을 받아 쳐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 중에는 방울이 여럿 달린 지팡이를 손에 쥔 존재가 있었다.

이를 본 비크람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직접 오신 겁니까."

"저 호랑이 같은 사내를 네가 감당하긴 어려울 것 같더구나. 수고 많았다."

비크람의 심안이 눈을 뜰 수 있도록 이끌어준 존재. 그가 손수 제자를 잡아 일으켰다.

"제자여··· 우리의 성소로 가자꾸나."

"예, 스승님."

비크람이 새 스승의 뒤를 따랐다.

보우는 그 발걸음을 막으려 했다. 떠나가는 제자를 붙잡기 위해 수도승이 내달렸지만,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옛 제자에게 닿는 건 외침뿐이었다.

"비크람! 돌아와라—!"

"거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변절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4화

보우.

잠에서 깬 우진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생각을 정리했다.

암흑 신관 비크람.

'······염치가 없는 놈이군.'

자기보다 더 노력한 사람보다 뒤처지기 싫다. 그리 생각하는 것 자체가 괘씸하지만···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었다. 선두 자리를 지켜온 건 비크람의 자부심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선을 넘었다.

심안을 무리해서 익히다가 두 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유물을 도둑질한 후 피해자 행세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낯짝이 두껍다.

'그래도 쓸만한 정보들을 여럿 얻었어.'

암흑 신관에 대한 정보.

막 자다 일어나서 머리가 잘 굴러가진 않으니··· 천천히 그 정보들을 추려내어 정리한 후, 불필요한 기억은 대충 잊어버리면 될 듯했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창밖을 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우진이 침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직후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신디와 마녀가 식탁에 마주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신디가 말을 걸어왔다.

"깨어나셨네요. 오래 잠들어 계셨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

"얼추 열다섯 시간 정도 잠들어 계셨던 것 같은데요?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어요."

그리 말한 신디는 마녀를 바라봤다.

"레이첼. 물컵이랑 그릇 좀 가져와."

"으응···"

마녀가 입안의 음식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난번 연회장에서 봤던 코르티잔으로 둔갑한 상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새 말을 가르쳐놨어?"

"네. 진 님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심심풀이로 해봤는데··· 금방 배우더라고요. 정신이 망가졌지만 언어 능력은 좀 남아 있나 봐요."

신디가 그리 얘기하는 동안, 주방에서 돌아온 마녀. 일명 레이첼이 자연스레 물컵과 그릇을 우진의 앞에 내려놨다.

쪼르륵—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도, 레이첼이 눈치껏 물을 따라 우진의 앞에 놔두었다. 왠지 기분이 묘해지는 광경이었다.

'정신이 좀 회복된 것 같은데··· 기억도 어느 정도 돌아온 건가?'

마녀의 상태가 궁금했다. 마침 우진에게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재주가 하나 있었다.

'심안.'

세 번째 눈을 뜨기 위해 두 눈을 감는다.

하지만 숙련도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이 능력을 지니고 있던 비크람 또한, 온갖 편법을 써서 심안을 개안했기에 능력의 이해도가 낮은 듯했다.

따라서 보이는 정보가 단편적이었다. 사실상 직감에 가까운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 직감이 마녀가 무해한 존재라고 귀띔해 줬다.

'나름대로 쓸모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심상 세계를 엿볼 정도는 아니군.'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우진은 아직 본인의 심상 세계조차 관조할 수 없으니까.

다시 눈을 뜬 우진은 조심스레 물컵을 집어 들었다. 힘 조절을 실수하여 부숴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창 스튜를 떠먹던 신디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거··· 아직도 남아있네요?"

신디가 우진의 손을 가리켰다. 회색 비늘로 뒤덮인 손등. 비늘의 크기가 좀 작아졌지만 아직 눈에 띄었다.

"완전히 사라지려면 하루 정도 더 걸릴 거야."

"바깥 외출을 할 때 조심해야겠네요."

적잖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우진은 평상시 힘과 오감, 재주를 억눌러놓는 버릇이 있다. 이 능력들은 일상생활에 여러모로 지장이 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능력은 한 번 끄집어내고 나면, 다시 퇴화시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네가 본 걸 비밀로 해줄 수 있겠니?"

우진이 신디에게 그리 부탁했다. 이런 능력은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일 테니까.

이에 신디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마침 저도 하고 싶었던 부탁이에요."

신디가 손짓하여 레이첼의 목을 가리켰다. 마치 목걸이처럼 목을 둘러싼 문신.

생각해 보니··· 신디가 마녀에게 저주를 건 것도 떳떳한 짓거리는 아니었다. 교단 연맹의 눈에 띈다면 엄벌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서로 비밀이 하나씩 있으니, 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겠네."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이 건배를 나눴다.

* * *

사소한 고민거리가 하나 남아 있다.

'이 내단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우진은 턱을 매만지며 책상 위에 놓인 내단 두 개를 살폈다. 이는 각각 돌가죽, 사슬낫이 품고 있던 내단이었다.

입이 여러 개 달려 있던 남자의 내단은 챙겨오진 못했다. 당시의 상황이 워낙 급하게 흘러가서 챙길 여유가 없었고, 불벼락으로 놈을 지졌으니 내단 또한 시커멓게 타버렸을 것이다.

'애초에 그놈··· 재주가 좀 기묘했어. 인간이라 하기 어려운 능력이었으니까.'

마수가 사람 흉내를 내고 있거나, 사람의 몸에 여러 마수가 기생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놈이 품고 있었던 내단은 큰 가치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의 손에 길들여진 마녀. 레이첼 또한 비슷했다.

'사람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이야.'

마치 인어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 레이첼 또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즉, 마녀를 죽이고 내단을 뽑아 먹더라도. 그녀의 머릿속에 든 기억을 계승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우진은 오직 인간의 내단에 담긴 기억만을 엿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가능하다면, 심문을 통해 마녀가 지닌 정보를 뽑아내는 게 옳다.'

마녀를 건드리는 건 보류. 따라서 현재 두 개의 내단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내단들을 먹더라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긴 어려울 것 같아.'

마녀와 입 많은 남자는 임무를 위해 지원 받은 인원들이지만, 사슬낫과 돌가죽은 비크람의 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직속 수하였다.

두 사람이 아는 것은 비크람보다 적다. 그러니 이 내단들을 취해도 특별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없을 테고, 두 사람의 재주는 이미 갖고 있어서 딱히 탐나지도 않았다.

'늑대들에게 먹여야겠군.'

돌가죽은 렉스, 사슬낫은 미샤에게 줘야겠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침대에 편히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정오.

우진과 신디, 레이첼이 도시를 떠났다. 제3 개척 도시로 가서 보우에게 도움을 청한 후, 마녀에 대한 견적을 잡아볼 생각이었다.

"다시 먼 길을 떠날 때가 되었네요···"

신디가 팔자 좋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하릴없이 걷기만 하는 게 지겨운 모양이었다. 우진 또한 그 의견에 동감했다.

원정이 시작된 걸 계기로, 도시 인근의 마경은 시시한 장소로 변했다. 여러 번의 토벌이 이뤄져서 마수가 아예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편히 잡담을 나누었다.

"탈 것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타라스크는 너무 느리잖아요? 오히려 더 늦게 도착할 것 같은데요."

"늑대를 타면 빠르지."

"그래요? 좀 궁금하긴 하네요."

팔자 좋게 대화를 나누던 중···

꾸득, 꾸드드득—

돌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레이첼이 둔갑술을 사용했다. 마녀의 몸이 마구 부풀며 걸치고 있던 겉옷들이 찢어졌다. 곧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흑표범 한 마리.

이를 맞닥뜨린 신디가 기절할 듯 놀랐다.

"흐억, 어어엇···?"

"내 뒤로 와."

우진이 마체테를 말아쥔 채로 신디의 앞에 섰다. 흑표범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스윽.

표범이 우아하게 자세를 낮춰 등을 보였다. 마치 등에 타라는 듯한 몸짓.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탈 것이 필요하단 얘기를 들었나 봐. 마녀가 표범으로 둔갑해줬네."

"이 녀석이 레이첼이라고요?"

"너도 방금 봤잖아. 그리고 흑표범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미리 귀띔해 줬던 것 같은데."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크잖아요."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신디.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겁에 질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목줄을 쥔 사람이 맹수를 두려워해선 안 되니까.

신디가 용기를 내어 표범에게 다가갔다. 저주 때문인지 표범은 매우 순종적이었다.

"······표범을 타고 다닐 수 있나요?"

"물론. 안장이 있으면 편할 텐데, 그냥 타야지. 내 앞에 앉으면 안전할 거야."

우진은 그리 말하며, 신디를 번쩍 들어서 표범의 등에 태웠다. 엉겁결에 표범의 등에 올라탄 신디가 한껏 긴장했다.

"타, 타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그럼 걸어가게?"

"······안전을 생각하면 그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다 요령이 있어. 곧 추워질 테니 겉옷을 하나 더 껴입는 게 좋을 거야."

신디와 잡담을 나누며, 밧줄을 이용하여 표범의 몸에 고삐를 하나 만들었다. 도중에 줄이 풀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매듭지었다.

우진은 뒷자리에 앉은 후. 남은 밧줄을 이용하여 신디에게 안전벨트를 만들어줬다. 그로 인해 신디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긴 것처럼, 우진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어 앉게 되었다.

이러면 자칫 사고가 생겨 낙마하더라도 신디가 다칠 일은 없다. 우진의 몸뚱어리로 에어백 역할을 대신할 예정이니까.

"자, 준비됐으니··· 출발."

타앙!!

표범이 지면을 밀어 차며 달렸다. 가속이 터질 때마다 점차 올라가는 속도. 주변 풍경이 마치 길쭉하게 잡아 늘여진 듯했다.

"꺄아아아악!!"

당연하게도, 신디는 비명을 내질렀다.

* * *

목적지에 도착했다.

신디가 흑표범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떨며 걸었다.

"다시, 다시는··· 저거 안 할 거예요."

몇 번이고 엄포를 놓는 신디. 여행은 짧았지만 심적으로 지친 듯했다.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레이첼이 연신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신디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레이첼이랑 집에 가서 휴식해. 보우 어르신은 내일 찾아뵙는 게 좋을 것 같네."

"지금 가도 괜찮은데요?"

"그냥 쉬어. 급한 일도 아니니까."

"······알았어요."

신디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이를 본 레이첼이 급히 다가가더니, 혹여나 소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잡아 붙들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면··· 두 사람은 그저 사이좋은 자매 같았다.

'참 희한하게 일이 끝났군.'

마녀사냥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우진은 물끄러미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단련장으로 들어섰다. 늘 그렇듯 보우가 자리에 앉아 명상 중이었다.

"······진, 해야 할 일은 잘 끝냈는가?"

"네. 연회 구경도 꽤 재밌더군요."

"이번에도 잘 해냈나 보군. 늑대들은 지금 롤랑에게 가 있다네. 간식을 자주 챙겨줘서 그런지 좀 친해진 것 같아."

평소처럼 덤덤히 말을 늘어놓는 보우. 그가 문득 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겐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 같은데."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됩니까?"

"해보게."

보우에게 비크람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것이다. 옛 제자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저 사내는 분명 슬퍼할 테니까.

다만, 궁금한 게 있었다.

"보우 님이 심안을 뜨게 된 계기가 뭡니까."

"······어려운 질문이로군. 평소에는 일부러 그 이야기 자체를 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보우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었어.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려운데··· 그냥 모든 게 싫증이 났다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지. 너무 큰 시련이 내게 찾아와서, 더 큰 시련으로 그걸 잊고자 했다네."

그리하여 보우는 자신의 두 눈을 베었다. 무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더군. 사실상 자포자기와도 같은 짓거리였지. 심마에 빠져 매일 명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망상을 하게 되었다네."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난 항상 그걸 눈치채는 게 서툴렀으니까."

이룰 수 없는 소망을 가슴에 품은 순간. 보우는 세 번째 눈, 심안을 뜨게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이야기라 설명이 좀 익숙지 않은데."

"예. 잘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긴 이야기를 해서 슬슬 피곤해지니, 이만 가보게나."

축객령이 떨어졌다. 이에 우진은 군말하지 않고 대련장 밖으로 물러났다.

보우는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옛일을 이야기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긴 세월 가슴에 품고 있었던 짐을 하나 내려놓은 듯한 기분.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군.'

오랜만에 밤잠을 설치지 않을 듯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5화

왕국 연맹.

새벽닭 우는 소리가 우진의 잠을 깨웠다. 흔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젠 닭도 키우나?'

개척 도시에서 가축을 키우는 건 힘든 짓이었다. 마경의 환경이 가축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공들여 키우더라도 오래지 않아 가축들이 픽픽 죽어 나간다.

허나 최근 이 지역의 균열핵을 정화하여 탁한 기운이 사그라졌다. 그 덕분에 문제없이 가축들을 사육하는 게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우진이 못다 한 잠을 마저 청하려고 돌아눕는 순간, 수탉이 다시 우짖었다.

'······더 자기 글렀군.'

눈을 뜬 우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정오가 될 때까지 팔자 좋게 자보려고 했건만··· 이놈의 수탉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거리로 나와 걸음을 옮겨갔다.

'저쪽인가.'

우진의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작은 닭장이 딸린 식당. 주인장이 개시를 준비 중인지 빗자루로 가게 주변을 쓸고 있었다.

우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장사 합니까?"

"네, 물론이죠!"

우진이 고개를 돌려 닭장을 보았다. 때마침 큰 수탉 한 마리가 눈치 없이 우짖었다.

"저놈으로 잡아 주십시오."

그렇게 메뉴 선택을 마친 후···

안쪽 자리에 앉아서 좀 기다리자, 닭으로 만든 요리 세 개가 식탁 위에 놓였다.

닭의 내장을 볶은 요리, 화톳불에 구운 닭고기, 먹음직스러운 스튜와 밀빵. 닭 한 마리를 알뜰하게 손질해서 여러 요리를 만든 듯했다.

'맛집이네.'

단골이 될 만한 식당을 하나 찾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온 우진은 한량처럼 느긋이 걸음을 옮겨갔다.

다음 목적지는 미리 정해놨다.

'보우 어르신을 뵈러 가야겠군.'

새벽잠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쯤 단련장에 와서 명상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을 확인해 볼 겸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한다.

'······저 녀석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보우. 그가 보는 앞에서 늑대들이 바쁘게 내달리고 있었다. 뜻밖의 조합이라 우진은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자네가 없으니 늑대들이 너무 게을러지더군. 좀 굴리는 중이라네."

보우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얘기를 들은 후 녀석들을 다시 살펴보자··· 발목에 찬 큼지막한 모래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늑대들이 단련을 받고 있었다.

우진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발상. 내심 감탄하며 늑대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보우 님의 단련을 용케 따르는군요."

"그럴 수밖에. 내 말을 무시하거나, 몰래 요령을 피우는 놈들은 따로 체벌을 가했으니까."

보우가 그리 말하며 턱짓했다.

구석에 처박힌 붉은 늑대. 렉스가 썰매견처럼 수레를 끄는 중이었다. 수레에 묵직한 모래 포대가 잔뜩 실려 있어서, 렉스는 매 순간 죽을힘을 짜내어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끼이잉···"

렉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쪽을 보았다. 마치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

이를 본 우진은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이 임자를 잘못 만났군.'

렉스가 평소 요령을 피우더라도, 우진은 그냥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러니 단련을 받을 때도 렉스의 나쁜 버릇이 나왔을 텐데··· 보우는 그런 걸 절대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수도승이 영악한 늑대에게 버거운 체벌을 가했다. 그 본보기를 본 나머지 녀석들은 바짝 군기가 든 채로 단련을 이어갔다.

"단련의 효과는 있습니까?"

"최근 시작한 짓이라 가늠하기 어렵군."

"그럼 당분간 이 녀석들을 계속 굴려야겠네요.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우진이 그리 말하자, 늑대들이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힘든 단련을 말려줄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던 모양.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녀석들도 밥값을 하게 만들어야지.'

표범을 타고 나니 역체감된다.

늑대들이 전부 덤벼도 표범의 상대조차 될 수 없다. 그나마 렉스는 좀 버티겠지만, 나머지 세 녀석은 한 방에 찢어질 게 분명하다.

실력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법. 여유가 있을 때, 이런 단련이라도 해서 체력을 키워두는 게 좋으리라. 우진이 계속 보모처럼 녀석들을 보살필 순 없는 노릇이니까.

늑대들이 단련 받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우에게 방문 목적을 이야기했다.

"심안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지고 온 건가?"

"네. 일이 좀 기묘하게 흘러갔는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우진이 줄곧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연회, 에드윈 공작, 마녀··· 가만히 얘기를 듣던 보우가 문득 말허리를 끊었다.

"잠깐, 에드윈과 콘라드가 붙어먹었다고?"

"정황상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콘라드 그 작자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거지?"

보우가 생각에 잠겼다. 높은 직위에 오른 사제가, 귀족과 사적인 친분을 드러내는 건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더 아는 것 없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가늠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정보가 마녀의 머릿속에 들어있습니다."

"바로 확인해 보러 가야겠군."

보우가 즉시 늑대들의 단련을 중단시켰다. 아무래도 마음이 급해 보이는 모습. 우진은 그와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신디가 선뜻 문을 열어줬다.

"일찍 오셨네요?"

"어쩌다 보니 좀 급하게 왔네. 레이첼은 지금 어디에 있어?"

"거실에 있어요."

신디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는 마녀. 손님의 인기척을 느낀 건지, 레이첼이 입가의 침방울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를 본 보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말 희한한 걸 주워 왔군."

"뭐가 보이십니까?"

"대충 느낌만 설명해 주겠네. 나도 처음 보는 존재라 자세히 답해주긴 어렵겠어."

보우가 그리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첼의 시선이 손끝을 쫓았다. 늘 그렇듯 마녀의 두 눈동자는 각각 따로 움직였다.

"이 여자는 지금 두 인격이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라네. 흑표범과 마녀. 아마 몸의 주도권을 놓고 인격들이 싸웠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겠지만 둘 다 삶을 포기해버렸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라네. 정신적인 자살을 택했다는 뜻이지.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마녀가 둔갑술을 사용하는 순간. 그녀의 인격은 표범과 마녀 둘로 나누어졌다.

두 가지 인격이 육체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싸우던 중, 우진의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 고통이 워낙 무지막지했기에··· 두 인격은 육체를 갖는 걸 포기하고 스스로 파괴되길 택했다.

그렇게 부서진 두 인격의 잔해들이 합쳐지며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마녀도, 표범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워낙 불안정한 상태라 고문 같은 걸 하긴 어렵겠어. 과한 통증을 가했다간 인격이 다시 부서질 듯하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진이 우려를 표하자, 보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교단 연맹은 바보가 아니라네. 콘라드가 대놓고 일을 저질렀으니, 지금쯤 뒷조사를 거의 끝내놨을 테지."

콘라드 대주교와 에드윈 공작이 함께 연회를 열었다. 누가 봐도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니, 교단 연맹은 두 사람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콘라드가 교단 연맹에 미리 보고를 올려놨을 가능성도 높았다.

"콘라드는 간이 작은 사내야. 몰래 일을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군. 조만간 연맹의 전령이 와서 상황을 설명해줄 걸세."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교단 연맹 측에서 정보를 공유해줄 것이다. 그러니 불완전한 마녀를 굳이 심문할 필요는 없다.

우진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 마녀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여러 안전장치가 있긴 하지만, 그냥 죽여 없애는 게 가장 속 편할 듯하다. 그리 얘기하자 보우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살려두게. 그게 이로울 거야."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보우 님이라면 분명 죽이자고 할 줄 알았는데요. 그리 판단하신 이유가 뭡니까?"

"언젠가 필요해질 날이 올 것 같군. 흔치 않은 전승의 후예 같은데··· 살려놔도 후회할 일은 없을 걸세."

심안을 이용하여 마녀를 살펴본 후 내린 고찰. 이에 우진은 레이첼을 죽일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마녀는 신뢰할 수 없지만, 보우의 판단력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늙은 수도승의 통찰력은 매번 뛰어났다.

그 증거로 엿새 후, 보우의 예상대로 교단 연맹의 전령이 제3 개척 도시를 찾아왔다.

"한 번 읽어보게."

보우는 눈이 멀었기에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렇기에 보우는 전령이 막 들고 온 편지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우진은 그 편지를 건네받은 후, 봉투에 붙어 있는 인장 밀랍을 뜯어냈다. 그의 시선이 교단 연맹의 편지를 한 번 훑었다.

······다소 뜻밖의 소식이 담겨 있었다.

"2차 원정이 곧 시작될 예정이랍니다."

보우가 귀를 의심했다.

"원정이 재개된다고? 그럴 리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텐데."

시기가 맞지 않다.

아직도 1차 원정의 뒷수습이 덜 끝난 데다가, 새로운 장벽이 축조되기도 전이다. 이런 상황에 무슨 수로 원정이 재개된단 말인가?

편지에 그 답이 적혀 있었다.

"교단 연맹의 군대가 아닌, 에드윈 공작의 개인 사병으로 이루어진 원정군입니다."

교단 연맹은 원정을 주도하며 인류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있다. 에드윈 공작은 이 상황에 내심 반감을 품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날 개척 도시들이 위치한 지역이, 에드윈 공작의 선조가 지배하던 나라. 레벤토르 왕국의 영토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개척 도시의 토지들은 에드윈 공작의 것이다. 하지만 대뜸 그 소유권을 논하는 건 너무 뻔뻔한 짓이었다.

마경을 개척하고, 새로운 도시를 세운 건 오롯이 교단 연맹의 업적. 이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면 교황의 진노를 사게 될 게 분명했다.

따라서 에드윈은 더 큰 목표를 잡았다.

"본인이 직접 꾸린 원정군으로, 잃어버린 왕국의 옛 수도를 되찾겠다고 하는군요. 땅을 직접 점령한 후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인 듯합니다."

몰락한 왕국의 재건. 얼핏 듣기엔 근사한 목표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균열핵은 무슨 수로 정화하려고?"

교단 연맹의 도움 없이는 영토를 수복하는 게 불가능했다. 균열핵을 정화하기 위해선 많은 성기사와 사제가 필요했으니까.

따라서 에드윈은 세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교단 연맹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첫째. 레벤토르 공작령은 교단 연맹에게 엄청난 기부금을 지불해왔다. 그러니 연맹 또한 공작의 대업을 마땅히 도와야 할 것이다.

둘째. 다섯 왕국과 교단 연맹은 군사 동맹을 맺었다. 과거 마경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왕국이 병력을 내줬으니, 이제 교단 연맹이 왕국 재건에 도움을 줄 차례다.

셋째. 공작의 원정이 성공하면 모두에게 득이 된다. 수복한 땅을 전초기지로 삼으면 이후의 마경 정벌이 더욱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교단 연맹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보우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병력이 이탈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선례를 하나 남기는 순간부터, 귀족들이 너도나도 제 잇속을 챙기려 할 텐데···"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에드윈 공작은 교단 연맹을 압박하기 위해, 뜻이 맞는 귀족들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왕국 연맹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네요."

"······갈수록 태산이군."

흘러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보우가 읽지도 않은 편지의 뒷내용을 유추했다.

"이걸 위해서 콘라드와 붙어먹은 겐가?"

"네. 콘라드가 자문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대주교와 귀족들이 공작을 비호하고 있는 데다가, 명분 자체는 그럴싸해서 요구를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랍니다."

에드윈 공작의 야망이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지난번의 연회는 그 시작을 예고하기 위한 신호탄이었다.

"다들 합심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밥그릇부터 챙길 생각만 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이 마냥 못마땅한지‚ 보우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보우가 문득 질문했다. 우진은 머릿속의 생각을 대강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결과가 딱히 좋을 것 같진 않군요."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공작과 대주교가 마경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요.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무슨 맡겨놓은 돈을 찾으러 가는 듯한 태도인데···"

이런 놈들이 잘되는 꼴을 못 봤다.

"······아마 망할 겁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6화

사춘기.

큰 성공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지난 원정이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그런지, 콘라드와 에드윈은 이 상황을 그저 땅따먹기와 비슷한 장난질로 여기는 듯했다.

'그렇지만···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아. 두 사람은 나름대로 머리를 쓸 줄 안다.'

에드윈은 교단 연맹의 지원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마경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교단 연맹의 두둑한 지원을 받고, 유능한 총사령관이 군대를 통솔하여, 원정을 치밀하게 끌어 나간다면. 공작의 야망을 이루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따라서 원정의 실패를 단정 짓는 건, 너무 이른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왠지 저렇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우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단련장 구석. 렉스가 큼지막한 모래 포대들을 끌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녀석은 오늘도 몰래 요령을 피우다가, 보우에게 걸려서 더 혹독한 단련을 받는 중이었다.

저렇게 잔머리에 의존하는 놈들은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에드윈과 콘라드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단련의 성과가 있긴 하네.'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2차 원정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예정이다. 달리 할 일이 없기에 늑대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굴려졌고, 그 혹독한 단련에 의해 힘과 체력이 조금 늘어났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 하지만 늑대들은 이 상황이 마냥 우울한 듯했다.

이는 개척 도시 주변의 마수들이 싹 토벌되어 사냥을 나갈 수 없는 데다, 매일 고된 단련을 받아와서 심적으로 지친 탓이었다.

'슬슬 보상이 필요한 때로군.'

오늘의 단련을 마무리한 후. 우진은 늑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품속을 뒤적여서 내단 두 개를 꺼냈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내단들은 막 도축된 고기처럼 신선해 보였다.

"렉스, 미샤. 와서 한 개씩 받아 가라."

호명을 받은 두 늑대가 걸어 나왔다. 나머지 두 늑대, 션과 얀이 부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이쪽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나중에 따로 챙겨주마."

우진은 그리 약속해서 두 늑대를 다독여준 후. 렉스와 미샤에게 내단을 한 개씩 먹였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돌가죽은 렉스에게, 사슬낫은 미샤에게 줬다.

귀한 내단이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두 늑대가 신중하게 내단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 내심 기대했던 현상이 일어났다.

우두둑—

미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뼈마디가 벌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다리들이 눈에 띄게 길쭉해졌다. 한층 날렵해진 체형.

그 변화로 인해 미샤가 잔뜩 신났다. 겅중겅중 뛰며 주변을 맴도는 늑대. 움직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가벼웠다.

'사슬낫의 재주를 계승 받았군.'

잽싼 몸놀림.

발이 빨라지고 몸은 가벼워지는 재주였다. 순간 가속처럼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는 없지만, 안정성 하나만큼은 더 뛰어난 능력.

미샤가 무사히 재주를 계승 받았다. 그와 반대로, 렉스에겐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없었다. 녀석이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실패했나?'

우진이 내심 아쉬워하던 찰나.

하아암—

렉스가 문득 하품했다. 잠이 오는지 연신 머리를 꾸벅거리는 렉스. 이를 본 우진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눈치챘다.

"푹 자고 일어나거라."

렉스는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인 후, 단련장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곧 녀석이 깊은 잠에 빠졌다. 잠든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늑대들이 그 주변에 자리 잡고 앉았다.

우진 또한 단련장에서 숙식하며, 렉스의 몸 상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

틱, 티딕—

렉스의 몸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화 중인 새가 알껍데기를 두들기는 듯한 소리. 곧 녀석의 살가죽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쩍쩍 금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늑대들이 한껏 당황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우진은 웃으며 녀석들을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말고, 지켜봐라. 너희들도 언젠가 거쳐야 할 일이니까."

내단을 여럿 섭취한 마수들은 더 강력한 존재로 거듭난다. 렉스는 원래부터 다른 늑대들보다 강했기에, 그 시기가 더 일찍 찾아왔다.

쩍!

잿빛으로 물든 등가죽이 길게 갈라졌다. 직후, 그 속에서 붉은 늑대가 몸을 빼내었다. 마치 탈피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렉스가 위풍당당하게 섰다. 이전보다 더 크고 강력해진 붉은 늑대.

우진은 렉스의 모습을 한 번 훑어봤다.

'확실히 격이 높아졌군.'

덩치는 큰 차이가 없지만, 녀석이 두른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틀 전과 같은 녀석이라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촉수는 어디로 간 거냐?"

렉스가 갖고 있던 촉수가 없어졌다. 우진이 그걸 언급하자, 렉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살짝 웅크렸다.

투확!

렉스의 등에서 촉수 네 줄기가 튀어나왔다. 촉수의 개수가 늘어난 데다, 그걸 원할 때마다 넣고 꺼낼 수 있도록 진화한 모양.

거기에, 렉스는 새로운 재주도 터득했다.

꽈드드득—!

갈색 바위가 촉수를 뒤덮기 시작했다. 지난번 상대했던 암흑 신관이 갖고 있던 재주. 우진은 손을 뻗어서 촉수를 한 번 만져봤다.

'아주 단단하고, 유연하군.'

위력은 어떨까.

우진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바닥이 곧 회색 비늘로 뒤덮였다.

"한 번 때려봐라."

그리 명령하자, 렉스가 선뜻 촉수를 휘둘러서 우진의 손바닥을 한 방 갈겼다.

파아앙!!

귀를 때리는 굉음. 우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비늘이 깨지진 않았지만, 촉수의 타격감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매콤했다.

'간단히 돌채찍이라 불러야겠군.'

기대 이상의 수확이다.

우진이 흡족하게 웃으며 렉스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렉스의 수준을 인정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늑대들이 렉스에게 부러운 눈빛을 보낸다.

덕분에 렉스의 기분은 더욱 들떴다. 빳빳하게 고개를 치드는 붉은 늑대. 지금 이 순간의 렉스는 누구보다 영예로운 승리자였다.

······때마침 일을 마친 보우가 돌아왔다.

"렉스가 잠에서 깨어난 겐가?"

"네. 아주 강해졌습니다."

우진이 자랑하듯 말하자, 보우가 심안을 이용하여 렉스를 한 번 살펴봤다.

"확실히, 못 알아볼 만큼 변했군. 이젠 어딜 가더라도 밥값은 하겠어."

늙은 수도승이 봐도 인상적인 변화였다. 보우가 드물게 칭찬하며 렉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려는 듯했다.

타악!

렉스가 촉수로 다가오는 손길을 쳐냈다. 보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크게 당황했다.

'······이 녀석이 겁을 상실했나?'

보우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허허허··· 그새 자립심이 강해졌군."

너털웃음을 흘려내는 보우. 하지만 수도승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늑대를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렉스가 당돌하게 보우를 노려봤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단련의 뒤끝이 남아있는 건가.'

렉스가 계속 요령을 피웠기에, 보우는 본보기 삼아 체벌을 가했다. 이는 렉스의 입장에서 힘겹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다른 늑대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잔뜩 구겼으니까.

새로운 재주를 얻은 렉스가 지난날의 모멸감을 갚길 원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다소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보우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했군.'

생각해 보니 렉스는 보우에게 제대로 맞아본 적 없다. 돌가죽을 터득했으니 늙은 수도승 한 명쯤은 간단히 이길 줄 아는 모양.

보우가 이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렉스를 좀 교육해도 되겠나?"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 답한 후. 렉스에게도 한마디 했다.

"한 번 마음껏 싸워봐라."

"크릉!"

렉스가 힘껏 콧김을 내뿜었다. 녀석이 새로 익힌 재주를 끌어올렸다.

꽈드드득—!

렉스의 온몸이 갈색 바위로 뒤덮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늑대 조각상을 보는 듯한 모습. 거기에 네 개의 돌채찍까지 더해지니 그 분위기가 제법 살벌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늙은 수도승이 큰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깽, 깨갱!"

오래지 않아 개 잡는 소리가 연거푸 터졌다. 보우의 손바닥에 맞을 때마다, 화들짝 놀란 렉스가 마구 비명을 내질렀다.

보우의 공격은 겉을 관통하여 속을 타격한다. 따라서 돌가죽을 두르더라도 저 손바닥을 막을 수 없는 데다가··· 애초에 보우가 작정하고 힘을 쓰면 돌가죽도 금방 깨부술 수 있다.

'도대체 왜 개긴 걸까.'

우진은 그 일방적인 훈육을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렉스는 원래 눈치가 빨라서 이런 실수는 거의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힘에 취해서 자기 분수를 잊은 듯하군.'

그 증거로, 렉스는 얻어맞고 있는데도 연신 송곳니를 드러냈다. 사실상 매를 버는 짓거리였다.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면 보우가 매타작하는 걸 진즉 멈췄을 테니까.

아무래도 갑자기 큰 힘을 얻어서 교만해진 모양. 이는 좋지 못한 일이었다. 렉스의 가장 큰 무기는 돌채찍이 아니라 영악함이므로.

'확실히 고쳐둬야겠어.'

보우도 그리 생각한 듯하다.

쩍, 쩌엉!!

보우의 손바닥이 렉스를 연신 후려쳤다. 몸을 웅크린 채로 앓는 소리를 흘려내는 렉스. 결국 녀석이 꼬리를 말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매타작을 마친 후. 보우가 이쪽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렉스 녀석이 사춘기가 온 것 같군. 시기적으로 그럴 때지."

렉스를 비롯한 늑대 마수들은 나이가 어렸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 어린 나이에 힘이 생기니 호승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쁜 버릇이 생기기 전에 교정해야겠군요."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

"적당한 가정교사가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곧장 그 사람을 대련장에 데려왔다. 직후 우진이 밑밥을 깔았다.

"렉스."

손짓하여 렉스를 불렀다. 렉스가 뚱한 표정을 지은 채로 다가왔다. 보우에게 한바탕 얻어맞아서 잔뜩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반길 만한 제안을 꺼냈다.

"저길 봐."

우진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렉스가 고개를 돌린다. 가냘픈 체형의 여자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걸 이기면, 너는 더 이상 단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 보우 님에게 따로 얘기해 두마."

"······크르릉!"

렉스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건 질 수가 없다. 우진이 지목한 여자는 약해 보이는 데다 마냥 어수룩한 분위기를 풍겼다.

렉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를 본 우진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한마디 했다.

"신디."

"네."

신디가 명령했다.

"레이첼. 표범으로 둔갑해."

꾸드드득—

렉스의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돌연 거대한 흑표범으로 변했다. 팔자 좋게 하품하는 표범. 그 맹수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렉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본 흑표범이 느긋하게 걸어서 붉은 늑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할짝.

흑표범이 렉스의 얼굴을 한 번 핥았다. 점 찍어둔 간식에 침을 바르는 듯한 행동이지만, 이는 표범 나름의 애정 표시였다.

그 와중에도 렉스는 가만히 서 있었다. 감히 시비를 걸 엄두조차 못 내는 모습.

집 나간 정신머리가 돌아온 것 같았기에··· 우진은 손짓하여 표범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으므로.

"아직 갈 길이 머니, 교만하게 굴지 말거라."

"끼이잉···"

렉스의 사춘기는 짧았다.

* * *

대진운이 다소 안 좋았을 뿐. 렉스는 충분히 강해졌다. 이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늑대들에게 값비싼 소고기를 잔뜩 사 먹였다.

렉스가 너무 의기소침해진 듯하여, 일부러 계속 칭찬해서 치켜세워줬다.

"쓸만한 재주를 한두 개만 더 익히면, 그 표범을 상대로도 할 만해질 거다."

우진의 말을 들은 렉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앞발로 명상 중인 보우를 가리켰다. 그때쯤 보우를 이길 수 있는지 궁금한 모양.

"힘들지. 또 얻어터지기 싫으면 자중해라."

"끼잉."

렉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 수도승을 한 번쯤 이겨보고 싶은데···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 막 깨달은 듯했다.

그래도 이 상황 자체는 긍정적이었다. 시선이 다른 강자들에게 향한다는 건, 그만큼 렉스가 성장했다는 증거이므로.

'······2차 원정에 참여하는 게 좋으려나.'

렉스가 진화해서 그런지 좀 욕심이 났다. 원정에 참여하여 내단을 주워 먹이면, 늑대들을 아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2차 원정이 구멍 난 배일 가능성이 높단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침몰할 배. 적당할 때 몸을 빼내지 못하면 곤란해진다. 그런 배 위에 올라타는 게 옳은 짓일까?

보우에게 한 번 자문을 구해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 묻자, 보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무의미한 고민 같구먼."

"왜죠?"

"자네는 지금 명분을 찾고 있을 뿐이야. 지루한 도시를 떠나, 마수 사냥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상태 아닌가?"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7화

손님맞이.

원정에 참여하기 앞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정보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보우의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교단 연맹의 전령이 계속 편지를 들고 와줬으니까.

'2차 원정이 곧 시작된다.'

이는 에드윈 공작이 교단 연맹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의미였다.

지혜의 신, 탈로스의 교단이 병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대주교 콘라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2차 원정에 나선다.

사실상 공작과 한 배에 타겠다는 선언이었다. 지혜의 교단이 거느린 전체 병력 중 절반을 이번 원정에 보낼 예정이라, 원정이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콘라드가 이리 과감한 수를 던진 건··· 교단 연맹의 압박 때문일 수도 있다.'

에드윈 공작과 손을 잡았기에, 콘라드는 교단 연맹에게 밉보였다. 이를 만회하려면 남들보다 더 큰 위험을 짊어져야 했다.

병력 지원을 콘라드가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상황. 따라서 나머지 교단들은 성의 표시를 하듯, 전술적인 도움이 될 만한 물자와 인력들만 보내줄 예정이었다.

투쟁의 교단이 군수품 지원을 약속했다. 신성력이 담긴 병장기들. 이를 이용해 더 수월히 마수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헌신의 교단이 성기사단 하나와 사제들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전력은 아니었고, 의료 지원이었다. 이들은 전선 후방에서 다친 병력들을 보살필 것이다.

시련의 교단은 수도승 다섯 명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지원이 적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련의 교단은 소수 정예라 머릿수가 많지 않았다.

용맹의 교단은··· 화끈하게 지원 자체를 거절했다. 바바리안 전사들로 구성된 이 교단은 평소 지혜의 교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번영의 여신. 티타니아의 교단은 이례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성녀가 파견될 거라 했지.'

초목의 성녀.

콘라드 못지않게 이름값이 높은 성직자였다. 성녀가 이번 원정에 동행하게 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불확실한 추측만이 무성할 뿐.

'어떤 이해관계가 맞았겠지.'

대충 그렇게 넘겨짚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율의 교단. 이들은 뛰어난 사제들로 구성된 성가대 하나를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일곱 교단이 지원해 줄 예정이라고 하더라. 생각보다 규모가 커."

우진은 접시 위의 고기를 썰며 그리 얘기해줬다. 줄곧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람. 신디가 그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여섯 아닌가요? 아까 용맹의 교단이 빠졌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지."

옳은 지적이었다. 우진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막 잘라낸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좋은 고기라서 씹는 재미가 있었다.

신디의 저택에서 얻어먹는 밥은 매번 맛있다. 값비싼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만든 음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신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2차 원정군이 곧 온다고 했죠? 그럼 이곳의 성가대가 그쪽으로 합류하는 건가요?"

"응. 그렇다더라."

1차 원정을 위해 파견된 조율의 성가대가 현재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균열핵을 정화한 경험이 있는 사제들과 수녀들. 이들이 2차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중간 합류를 위해 원정군이 제3 개척 도시로 올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진 님도 성가대와 함께 2차 원정군에 합류하겠네요."

주스를 홀짝거리던 신디가 문득 중얼거렸다. 우진은 살짝 당황했다. 원정에 참여한다는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한 번 찔러본 건데요."

······유도신문에 걸렸다.

"진짜 원정에 참여하시는 거예요?"

재차 질문하는 신디. 이에 우진은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원정에 참여할 거란 얘기를 곧 꺼낼 생각이었으니까.

"여행 삼아서 한 번 다녀오려고. 원정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한번 살펴보고 싶네."

"그렇겠죠···"

신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위험한 원정에 따라간다니 걱정이 되는 모양.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규모가 큰 군대와 동행할 예정이니 다칠 일 없을 테니까."

"······그냥 안 가면 안 되나요?"

"이미 정한 일이야."

우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디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 님이 결정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죠. 혹시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귀물을 좀 구하고 싶은데."

손패는 많을수록 좋다. 특수한 힘이 깃든 귀물을 갖고 다니면, 원정 중 일어나는 여러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편해질 테니까.

그 말에 신디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저를 따라오세요."

"갑자기 어딜 가려고?"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몇 분이면 될 일이니 후딱 다녀오죠."

신디가 그리 얼버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남은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려는 듯했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호기심을 느낀 우진은 순순히 수저를 놓고 따라갔다.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가는 신디. 그렇게 두 사람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불 좀 붙여주세요."

신디가 그리 말하며 촛대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우진이 가볍게 한 번 손짓했다.

화륵—

촛대에 맺힌 불꽃이 지하실의 그늘을 몰아냈다. 직후 드러난 건, 나무 선반에 걸려 있는 여러 종류의 포도주. 그것들을 지나치며 더욱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니···

큼지막한 유리 진열장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진열장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종류의 장신구들. 우진은 금세 그 정체를 눈치챘다.

"혹시··· 이것들 전부 아티팩트야?"

"맞아요. 취미 삼아서 사 모으던 물건들인데, 이제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러니 진 님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원한다면 전부 가져가도 된다.

통 크게 제안하는 신디. 그 말에 순간 욕심을 느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어린애 물건을 다 가져갈 순 없지.'

마음에 드는 것 두어 개만 챙기자.

우진의 시선이 진열장 내부를 한 번 훑었다. 생긴 것만 봐서는 그 용도를 알 수가 없으니, 신디에게 여러 번 질문해야 했다.

"이 물통처럼 생긴 건 뭐야?"

"실제로 물통이에요. 정화의 샘이라 불리는 귀물인데, 오염된 물을 담고 한 시간을 기다리면 깨끗한 물이 되죠."

"굉장한데?"

처음부터 좋아 보이는 물건을 찾았다. 우진이 탐내는 듯하자, 신디는 큰 고민도 없이 그 귀물을 꺼내서 넘겨줬다.

"가져가면 좋을 것 같네요."

"비싼 거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 이 반지도 꽤 재미난 물건인데, 원정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신디가 그리 얘기하며 온갖 물건들을 한 번씩 꺼냈다. 오히려 본인이 더 신난 듯한 모습. 어느 시점부터 이쪽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물건을 냅다 넘겨줬다.

'······양손 두둑이 돌아가겠군.'

우진으로선 마냥 좋은 일이었다.

* * *

예정된 날이 되었다.

우진과 보우, 그리고 롤랑을 비롯한 성기사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나왔다.

저 멀리··· 원정군이 도시를 향해 걸어온다. 빛나는 갑옷. 그것을 두른 군대가 지평선 너머에서 끝없이 걸어 올라왔다. 마치 은빛 물결이 천천히 밀려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도마뱀 마수. 타라스크가 원정군과 함께 줄지어 걸어왔다. 화물 운송 겸, 전투용으로 개량된 놈인지 꼬리 끝이 철퇴처럼 두꺼웠다.

2차 원정군.

그 병력의 머릿수는 무려 8천이다.

터무니없을 만큼 병력이 많았다. 1차 원정 때 교단 연맹이 투입했던 병력의 2배 이상. 이는 왕국 연맹의 귀족들이 병력을 일부 지원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머릿수였다.

'······진지를 설치하기 시작했군.'

도시에서 멀찍이 멈춰 선 병사들이 천막을 여럿 설치했다. 아무래도 개척 도시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숙영하는 듯했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병력이 워낙 많아서 도시의 수용 한계를 아득히 웃돌았기에, 저들 중 2할만 들어와도 도시 전체가 마비될 테니.

따라서 직위가 높은 사람들만 도시로 들어와서 휴식할 수 있었다. 기사와 사제들. 그들의 머릿수만 해도 수백 명이다.

이 모든 것들을 대표하듯···

다섯 사람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중 두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에드윈 공작, 콘라드 대주교.'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보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갔다.

"여기서 두 분을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설마 원정을 직접 이끄시는 겁니까?"

에드윈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보우 님,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영지에서 손가락만 빨며 소식을 기다릴 순 없지요."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겨둘 수 없다는 얘기군요. 대장부다운 생각입니다."

보우가 능청스레 상대 얼굴에 금칠을 해줬다.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드윈의 얼굴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기분이 좋아진 에드윈이 자발적으로 주변 사람을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원정의 총사령관, 코넬리우스 경입니다. 제가 누구보다 믿고 신뢰하는 기사죠."

흰 독사 코넬리우스.

보우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나이가 여든 살이 족히 넘어가는 노기사. 하지만 그 눈빛은 젊은이의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이분은, 성녀 세실리아 님이십니다. 이번 원정의 심장과도 같은 분이죠."

초목의 성녀 세실리아.

연녹색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손에는 나무줄기를 꼬아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지팡이 곳곳에 꽃들이 여럿 피어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평범한 사제 같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라는 호칭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여기 이 젊은 친구는 보에몽이라 불리는 기사입니다. 거인 기사. 다들 한 번쯤 그 별명을 들어봤을 테죠."

거인 기사 보에몽.

우진은 처음 듣는 별명이지만,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기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가 3m는 되겠군.'

엄청나게 큰 데다 근육질이었다. 마치 거대한 바윗돌을 이어 붙여서 만든 듯한 사내. 거기에 두꺼운 철판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강렬한 위압감을 풍겼다.

경험 많은 노기사 코넬리우스가 지휘를 맡고, 젊고 축복받은 육체를 지닌 보에몽이 적을 분쇄하는 조합.

'인선만 놓고 보면 준비를 잘 해왔어.'

보급이 안 끊기고, 이상적인 전략을 구사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던 중···

"······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콘라드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쪽의 얼굴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모양.

우진은 대충 무난한 말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가을 철새처럼 훌쩍 떠나셨지요. 참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콘라드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젠 진 님이 아쉬워질 듯하군요. 그때 제 휘하로 왔으면, 원정의 성공을 온전히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신은 큰 기회를 놓쳤다.

그리 말한 콘라드는 앞서가는 일행들을 쫓아 걸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준 추천패를 거절하고, 보우의 밑으로 들어간 것에 뒤끝을 품은 모양.

우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군.'

예나 지금이나···

그때의 결정을 후회할 일은 없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8화

동지.

이른 아침.

떠나기 전 보우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특별한 것 없었다.

"슬슬 가보겠습니다."

"좀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구먼."

보우는 마냥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진이 먼 길을 떠나게 되었지만, 수도승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원정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도중에 사고가 터져도 어지간하면 수습이 될 테고, 정말 답 없는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우진은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살펴 가게."

보우와 악수를 나눈 후. 우진은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오래지 않아 그 발걸음은 고급스러운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신디가 깨어 있으려나?'

시간이 좀 이르니, 지금쯤 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자는 사람을 깨우지 말고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면 서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에 조심스레 노크하자, 오래지 않아 하녀가 문을 열어줬다.

끽, 끼드득—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이상한 소음. 흔들의자가 내는 소리였다. 의자에 몸을 맡긴 신디가 하염없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왠지 그 소리가 듣기 거슬렸기에, 우진은 가까이 다가가서 흔들의자를 멈춰 세웠다.

"······일찍 오셨네요."

신디가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그녀의 안색을 한 번 살폈다. 퀭한 눈동자와 눈 아래에 드리운 다크서클, 부스스한 금색 머리칼.

어째 상태가 나빠 보였다.

"밤잠을 설쳤어?"

"네··· 조금."

신디가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진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자, 신디는 뭔가 무마하려는 듯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상단 일 때문에 고민하다가 밤을 지새웠을 뿐이니."

"요즘 할 만한 사업이 없다면서?"

"일이 없으니 더더욱 고민해야죠."

"그러냐."

영양가 없는 소리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금방 침묵이 찾아왔다.

우진의 시선이 문득 흔들의자로 향했다.

"······잠시 일어나 봐라."

"뭘 하시려고요?"

신디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진은 가방을 뒤적여서 기름병을 하나 꺼냈다. 손수건의 귀퉁이를 기름에 적신 후, 흔들의자의 회전축에 기름칠했다.

그런 다음 의자를 흔들어봤다.

슥, 스윽—

거슬리던 소리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한결 나아졌네."

"저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던 건데요···"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소리야."

그리 대꾸하며,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앉아봐."

신디가 선뜻 흔들의자에 앉았다. 우진은 그 뒤에 서서 의자를 밀어줬다. 손짓에 등 떠밀린 신디는 천천히, 느긋하게 흔들린다.

"······진 님을 보면 제 오빠들이 생각나요."

신디가 두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우진의 입장에선 의아한 말이었다.

"그래? 큰 공통점은 없는 것 같은데."

"저를 대하는 방식이 비슷해요. 당장 지금도 그렇죠. 제가 그네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오빠들이 와서 그네를 밀어주곤 했어요."

분위기와 말투, 태도.

우진과 대화하고 있으면 죽은 오빠들이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심적인 위로가 되었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민폐겠죠."

"왜?"

"저만의 욕심이잖아요. 진 님이 죽은 오빠들의 빈 자리를 대신해 주길 바라는 거니."

우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디가 앞서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 행동이 데릭, 세드릭과 비슷했나?'

긴가민가하다.

우진은 평소 별생각 없이 신디를 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의도적으로 죽은 가족의 흉내를 내본 적은 없다. 그건 너무 음습한 짓거리니까.

어쩌면 두 형제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에 투영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금방 그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럴 가능성은 너무 희박한 듯했으므로.

'내단의 기억들은 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어.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였으면, 내가 진작 눈치챘을 거야.'

죽은 사람들의 기억은 일부러 끄집어내지 않는 한 의식 아래에 잠들어 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김우진의 평소 버릇과 생각, 정체성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럼에도, 신디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우진이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디는 그 말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나도 너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란 얘기지."

우진이 잠시 망설이다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한때는 여동생이 있었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신디는 가족들을 모두 잃었다. 이는 우진 또한 마찬가지. 같은 아픔을 나누고 있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너를 여동생처럼 대했던 것 같아.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신디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소녀가 궁금하단 듯 질문했다.

"진 님의 여동생은 어떤 분이었나요?"

"키는 너보다 약간 더 컸지. 그리고··· 음,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억나는 것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주고받던 중.

"······저기요."

하녀가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분위기에 초를 쳐서 죄송하지만, 슬슬 출발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밖에서 늑대들이 문을 마구 긁어대고 있어요."

"아, 그랬지."

일부러 이른 시간에 나왔건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이 상황이 아쉬운지 뚱한 표정을 짓는 신디.

우진은 웃으며 짐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해야겠구나."

"어쩔 수 없네요···"

저택 밖으로 나섰다. 떠나는 우진을 배웅하기 위해 신디가 따라 나왔다.

"여행을 마친 후 찾아가마."

"네, 다음에 뵈어요."

걸음을 옮겨갔다. 점차 멀어져가는 우진의 뒷모습. 늑대들이 그를 호위하듯 주변을 에워싼 채로 함께 걸었다.

신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진 오빠."

우진이 뒤를 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신디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상황이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오빠! 다치지 말고, 잘 돌아와야 해!"

신디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우진은 손을 마주 흔들어준 후. 그 열렬한 배웅을 뒤로 한 채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렇게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 * *

원정군이 머나먼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지상에 드리운 그늘이 점차 짙어지고, 익숙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우진은 성가대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율의 교단이 보낸 지원군은 사제 6명에 수녀 8명, 수사 4명, 그리고 성기사 8명이다. 사제와 수녀, 수사들은 성가대의 일원.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성기사들이 함께 파견되었다.

'호위 임무 자체는 쉬울 듯하군.'

성가대는 전술적인 가치가 높다.

따라서 언제든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 성가대가 배치된 데다, 우진과 함께 파견된 기사도 적지 않으니. 이번 임무는 큰 어려움 없이 끝마칠 수 있을 듯하다.

성가대는 타라스크 두 마리의 등에 나누어 탄 상태. 우진과 늑대, 성기사들은 타라스크를 포위하듯 둘러싼 채로 걸었다.

'지난번처럼 암살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변 사람들도 잘 확인해야겠어.'

지난번 암살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여 황금충의 두 아들이 죽었다.

한 번 했던 실수는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기에. 우진은 주변 사람들을 살펴본 후, 그 특징을 머릿속에 얼추 기억해 놓았다.

그러던 중···

'······뭐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하나, 둘, 셋···'

우진이 성기사의 수를 헤아렸다. 성가대를 밀착 호위하기 위해, 성기사들이 한 명씩 타라스크의 등에 탑승한 상태.

팔 빼기 이는 육. 그러니 지상의 성기사는 총 여섯 명이어야 하는데···

'일곱.'

몇 번을 세어봐도 숫자가 하나 더 많았다. 좀 의아한 일이었다. 성기사들이 이런 기초적인 걸 확인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한 번 살펴보자.'

심안.

연습 삼아서 사용해 봤다. 아직 수준이 부족하여 제대로는 볼 수 없지만, 그 감각 속에 담긴 정보는 나름 유의미했다.

성기사들 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유독 강렬한 기운을 뿜는 존재. 다시 눈을 뜬 우진이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했다.

'강하다.'

한 성기사가 독보적인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기척을 숨기는 솜씨 또한 뛰어나서, 그 수준을 파악하는 게 조금 늦었다.

'······왠지 느낌이 묘한데.'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듯 낯선 이 느낌.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눈여겨 본 성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봐요."

"진 님, 무슨 일이십니까?"

예의 있게 대답하는 성기사. 투구의 안면 가리개 때문에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얼굴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

우진은 손짓하여 안면 가리개를 올리는 듯한 시늉을 했다. 눈에 띄게 경직되는 성기사의 태도. 확실히 뭔가 켕기는 게 있다.

느낌을 받은 우진이 재촉했다.

"빨리. 서로 좋게 갑시다."

"······후."

투구 안쪽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성기사가 두 손으로 헬멧을 잡아 벗었다.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장발의 곱슬머리.

직후 드러난 얼굴은···

'······롤랑?'

당황한 우진이 눈을 끔뻑였다. 이 양반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생각을 그대로 질문했다.

"지휘관님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개척 도시에서 원정군을 통솔하셔야죠."

"이봐 진, 도시에 눌러앉은 군대를 원정군이라 할 수 있겠나? 나는 마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고, 그걸 위해서 이곳에 왔을 뿐이네."

태연하게 변명하는 롤랑. 주변 성기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수하들이 반대했지만 강제로 밀어붙인 듯했다.

그와 별개로···

"보우 님의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괜찮을 걸세. 면죄부가 좀 남아 있으니."

몰래 도망쳤다는 얘기다. 용케 보우의 심안을 피해서 몸을 빼낸 모양.

무모한 짓거리였지만, 후임자를 정해놓고 지휘관 역할을 승계해 둬서 롤랑의 빈자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일이 잘못 돌아가도 면죄부가 있으니 뒤탈은 없으리라.

롤랑은 그리 생각하는 듯한데···

"······눈도 안 보이는 장님에게 면죄부를 들이민다고 통하겠습니까? 보우 님의 성격상 지휘관님을 반 죽여놓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설마."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롤랑이 너털웃음을 흘리다··· 문득 심각해졌다. 곱씹어 생각해 보니 가능성 높은 일인 듯했으므로.

"······만약 상황이 좋지 못하게 흘러가면, 자네가 보우 어르신을 설득해 줄 거라 믿네."

"일 없습니다."

"이거 슬프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날 이해할 거라 믿었건만!"

롤랑이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우진의 입장에선 마냥 의아할 뿐이었다.

"뭘 이해하란 겁니까?"

"모르는 척하기는··· 따뜻한 집과 음식, 아끼는 사람들. 자네는 스스로 이 모든 걸 등지고 마경에 오길 택했잖아. 그 이유가 뭔가?"

뭐라 답해야 할까.

할 말을 생각하던 중, 흥분한 롤랑이 본인 질문에 대답하듯 입을 열었다.

"피와 영광, 전투! 그리고 마수 사냥! 이걸 위해서 자네도 정든 곳을 떠나온 것 아닌가?"

"······비슷하죠."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나의 동지야. 진 자네도 전장에 눈이 먼 미치광이니까. 뜻 맞는 동지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그렇나?"

너무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 롤랑. 면전에 대고 그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논리적으로 이 광인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고민하던 우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을 듯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59화

퇴마.

머릿수가 많다고 해서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원정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병력이 진군하다 보니 그 속도가 답답할 만큼 느렸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경의 환경 자체가 워낙 위험하고 척박하여, 병사들이 전진할 때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가 자꾸 발견되기 때문이었다.

독을 품은 가시덤불,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사람도 잡아먹는 거대한 식충 식물···

이런 것들이 나오면 선두의 병력들이 장애물을 처리하거나, 혹은 원정군 전체가 우회하여 다른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자연히 진군 속도가 느려졌다.

롤랑은 이 상황이 마냥 못마땅했다.

"앞사람 뒤통수만 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군. 이러다가 따분해 죽을 지경이야."

여느 때처럼 투덜거리는 롤랑.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름대로 근엄한 사내였는데··· 2차 원정에 참여한 이후. 롤랑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상태였다.

성기사들은 그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게 롤랑의 원래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지휘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체면을 차리느라 무게를 잡았을 뿐. 직책을 벗어던진 시점부터 롤랑은 줄곧 참아왔던 본성을 드러냈다.

"이봐 진, 언제쯤 우리가 나설 수 있을까? 자네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군.

"글쎄요···"

쉽게 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우진도 이렇게 많은 인원과 함께 이동해본 적이 없다. 마경의 생명체들 또한 이런 인간들을 처음 볼 텐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고민한 끝에 답했다.

"······아마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겁니다. 약한 놈들은 진즉 도망쳤을 거고, 강한 놈들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1차 원정 때와 큰 차이가 없단 얘기인가. 어쩌면 이번 임무가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어."

롤랑이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마수들이 계속 소심하게 굴고 있으니, 이대로면 큰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닿을 듯했으니까.

하지만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요."

"적절한 때?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 건가."

"그야 유리할 때죠. 원정군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더 좋은 장소, 더 좋은 시간이 될 때쯤. 마수들이 사냥에 나설 겁니다."

예언가가 아니기에,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마수들은 사냥을 시도하리라. 이 많은 먹잇감을 그냥 지나치긴 아쉬울 테니.

설명을 들은 롤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진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듯한 태도.

"그러니까, 자네 말은··· 마수가 사람처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 정도로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다고?"

"롤랑. 마수는 사람보다 더 영악합니다."

우진이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언젠가 공감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 *

열흘 후.

원정군의 발이 묶였다. 진군 도중에 제법 굵직한 강줄기를 맞닥뜨린 탓이었다.

롤랑이 지도를 한 번 살펴봤다.

"지도상으로는 강이 없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이쪽 지형 전체가 뒤바뀐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군요."

마경의 환경은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이 지역의 지도와 실제 현실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차가 존재했다. 따라서 원정군은 정찰병들을 보내어 주변 지리를 새롭게 익혀가는 중이었다.

'1차 원정 때는 미리 닦아놓은 길을 이용해서 편했지만, 여기서부턴 쉽지 않겠지.'

마치 어둠 속을 더듬듯 전진해야 하는 상황. 2차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선, 이런 변수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곧 우회 명령이 하달되었다. 원정군이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걸으니, 비교적 물이 얕은 하천이 보였다.

'건너갈 수 있을까?'

우진은 내심 우려했다. 저런 쉬워 보이는 길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원정군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새로 발견한 길을 시험하기 위해, 용감한 기사 한 명이 강물에 들어갔다.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기사. 물이 얕아서 하반신만 적실 정도였고, 물살도 약해서 걸음을 내딛기 수월했다.

기사가 큰 어려움 없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오래지 않아 명령이 떨어졌다.

"도하!"

선두의 병사들이 강물에 걸어 들어갔다. 강을 건너는 것 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이었다.

물속에선 빨리 걸을 수 없다.

강줄기의 폭이 넓은 데다가, 병사들의 머릿수는 수천 명에 육박했다. 이들 모두가 건너가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벌써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맞은편으로 넘어간 병력은 고작 3할 정도.

"해가 저물기 전에 전부 도하해야 한다! 적당히 속도를 내며 걷도록!"

현장을 통솔하던 기사가 그리 명령했다. 이에 부응하여 병사들이 속도를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런 일은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다.

첨벙!!

급히 걷다가 미끄러운 이끼를 밟았는지, 병사가 엎어지며 물속으로 빠졌다. 곁에서 걷던 다른 병사가 그 모습을 비웃었다.

'저 요령 없는 놈.'

등에 짊어진 군장을 물에 빠트렸으니, 여분 옷과 물품들이 전부 젖었을 것이다. 당분간 고생할 게 분명한 상황. 녀석이 일어나면 그 어설픔을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넘어진 병사가 일어나질 않았다. 계속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을 뿐.

'뭐지?'

병사가 의아해하던 찰나, 발목이 화끈거렸다. 뭔가가 그의 다리를 잡아챘다. 또 다른 희생양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줄지어 사라지는 병사들. 원정군이 뒤늦게 현 상황을 깨달았다.

"물속에 뭔가 있다!!"

"우와아아악—!"

도하 중이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내달렸다. 뒤쪽부터 한 명씩, 비명소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열댓 명이 넘는 병사가 사라졌다. 무기를 쥔 원정군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수면을 응시했다. 병사들을 집어삼킨 괴물이 곧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하지만 강줄기는 잔잔한 물소리를 내며 흘러갈 뿐이었다. 괴물은 커녕, 약간의 핏방울조차 수면 위에 올라오질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던 듯했다.

그 사실이 병사들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 * *

누구도 물속에 들어가길 원치 않았지만, 3할의 병력이 저 너머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나머지 병사들도 강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도하를 명령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이기에. 이전보다 더 안전한 방법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주변 나무를 벌목하라!"

에드윈 공작의 기사들이 그리 소리쳤다. 명령에 응하여, 병사들이 톱과 도끼를 배분받은 후 마경의 나무들을 베어 넘겼다.

우진은 그 모습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뗏목이라도 만들려는 건가?'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저 짓거리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우진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물귀신.'

원정군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 그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서 강변을 서성였다.

우진은 병사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참 동안 지켜봐도 별일 없길래, 그냥 늑대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건만··· 하필 그사이에 사고가 터졌다.

'한 번 재미를 봤으니,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데. 이놈을 어떻게 꾀어낼까.'

우진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한창 벌목 중이던 병사들이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물귀신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이 강에 다가가는 걸 꺼리는 상황. 이 와중에 혼자 물가를 어슬렁거리니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듯했다.

'해가 저문 이후에 와야겠군.'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병사들이 줄곧 강을 건너느라 긴 시간이 걸렸기에, 반 시간만 지나도 해가 완전히 저물 것이다.

롤랑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찾아온 밤.

우진은 다른 사람들 몰래 진지를 벗어났다. 강가에 가서 신발과 윗옷을 벗은 후, 그것을 잘 개어 바윗돌 위에 얹어놨다.

준비가 끝났다. 우진은 본인 몸뚱어리를 미끼 삼아서 물귀신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야밤의 물놀이라.'

나름대로 운치 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서 폐에 공기를 가득 채운 후, 강물 속으로 잠수했다. 마수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헤엄쳐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병사의 투구였다.

'녹슬지 않은 걸 봐선, 오늘 죽은 병사가 입고 있었던 물건 같네.'

투구가 떨어져 있으니 이 근처에 흔적이 더 있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주변을 훑어봤지만, 어째서인지 눈에 띄는 게 전혀 없었다.

이는 꽤 드문 일이었다.

마수의 식사 방식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을 뜯어먹고 나면 겉을 둘러싼 갑옷 또한 마구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갑옷 파편이 곳곳에 널려 있어야 하거늘, 어째서인지 보이는 게 없다.

'그러고 보니··· 병사들이 물속에 가라앉았지만, 피가 수면에 뜨질 않았다고 했지.'

대충 견적이 잡힌다.

남은 일은 물귀신을 불러내는 것. 우진은 놈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맥질했다. 하지만 그 짓거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도 효과는 없었다.

'아주 신중하군.'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정군이 한참 동안 도하했지만, 반응하지 않고 인내하다 겨우 사냥에 나섰으니까.

'양념을 좀 쳐야겠어.'

그리 마음먹은 우진은 유독 깊은 곳을 향하여 헤엄쳤다.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곧 단검 한 자루가 그의 오른손에 잡혔다.

쓱쓱—

단검의 칼날을 손바닥 위에 얹은 후, 톱질하듯 칼날을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두꺼운 살가죽이 베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와라.'

우진은 손을 쥐락펴락하며 피를 짜내었다. 강물 속에 번져가는 피 냄새. 달콤한 향기가 자고 있던 물귀신들을 깨웠다.

놈들이 떼를 지어 헤엄쳐온다.

장어처럼 길쭉한 몸을 지닌 생명체들. 우진의 추측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역시··· 물뱀 마수였군.'

병사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유는 간단했다. 뱀 마수가 독니로 물어 죽인 후, 물속에서 통째로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마술이란 건 속임수를 알고 나면 시시해지는 법.

하지만 그리 깎아내리기엔 물뱀 마수의 덩치가 제법 컸다. 아나콘다를 연상케 하는 크기. 그 숫자가 스무 마리는 될 듯했다.

콱, 콰득!

뱀들이 경쟁하듯 우진에게 독니를 꽂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놈들이 우진의 온몸을 힘껏 휘감아 조였다. 사냥감을 질식시키고 뼈를 바스러뜨리는 공격이었다.

그렇게 우진은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번쩍—

······붉은 번갯불이 터졌다.

물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 고요한 폭발. 일순간 강바닥이 훤히 밝혀진 후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첨벙.

우진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니 긴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우··· 숨넘어갈 뻔했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자···

뱀 마수들이 뒤늦게 수면 위에 떠올랐다. 놈들은 번갯불에 지져져서 혼절한 상태. 내단과 가죽이 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했다.

이를 본 우진이 만족한 듯 웃었다.

'물귀신, 퇴마 완료.'

오랜만에 한 건 했다.

마수 사냥꾼이 살아가는 법 60화

야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