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무리.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늑대 세 마리. 녀석들은 새로 전입 온 신병처럼 쭈뼛거렸다.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좀 당황스럽다. 우진은 턱을 긁적이며 늑대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렉스를 보았다.
렉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우진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왠지 모르게 경직된 태도. 이 능청스러운 늑대는 평소답지 않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늑대들을 무리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서열이 가장 높은 우두머리가 정할 일이니까.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렉스. 만약 저 녀석들이 사고를 치면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
그리 묻자 렉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저 다짐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일단 언질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진은 품속을 뒤적여 육포 주머니를 꺼냈다. 직후 주머니 속 육포를 늑대들에게 한 개씩 던져줬다. 늑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 의미를 아는 렉스는 화색이 되었다.
"먹어라."
우진이 명령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늑대들은 눈치껏 앞에 놓인 육포를 집어 먹었다. 이로써 간단한 환영식이 끝났다.
'먹여야 할 입이 셋이나 늘었군.'
이게 잘한 짓인가 싶다.
그래도 함께 움직이는 일행이 여럿 늘었으니, 여행길이 지루할 일은 없으리라.
* * *
늑대들과 함께 도시를 향해 걸었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나 조금 우려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늑대들은 알아서 주변 마수를 사냥하여 배를 채웠고, 그 마수가 품고 있던 내단을 자발적으로 우진에게 바쳤다.
툭.
렉스가 우진의 발치에 내단 하나를 내려놓은 후 뒤로 물러났다. 이렇듯 상납받은 내단이 벌써 세 개째. 슬슬 의아해졌다.
'이런 기특한 짓을 할 녀석이 아닌데···?'
예전 같았으면, 몰래 내단을 집어먹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을 터였다. 부하들이 생긴 이후로 렉스는 팔자에 없던 충견 노릇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부하들의 앞에선 서열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모양. 덕분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내단이 하나씩 굴러들어 왔다.
"자, 가져가라."
우진은 그 내단을 다시 렉스에게 돌려줬다.
가져온 성의를 봐서 두어 번 받아먹긴 했지만, 역시나 체감되는 변화가 전혀 없어서 렉스에게 양보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러자 렉스는 내단을 한 늑대에게만 계속 몰아주기 시작했다. 연회색 털을 지닌 예쁘장한 늑대. 무리의 유일한 암컷이었다.
'다른 놈들의 불만이 쌓이겠군.'
이러다가 암컷 혼자서 내단을 다 집어먹을 것 같아서, 이후의 내단은 우진이 직접 나머지 녀석들에게 나눠줬다. 덕분에 소외당하던 두 수컷 늑대가 우진을 더욱 받들어 모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이 또한 렉스가 의도한 그림으로 보였다.
포악한 웨어울프 밑에서 줄타기를 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렉스는 매우 자연스레 위계질서를 휘어잡았다. 덕분에 우진은 늑대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에게도 이름을 하나씩 지어줘야 할 텐데.'
사소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진은 작명 솜씨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장 렉스만 해도 그렇다. 이름을 짓기 귀찮다는 이유로, 늑대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붙였으니까.
이번에는 이름을 붙여줘야 할 녀석이 셋이나 된다. 늑대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할까. 이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3 개척 도시. 우진은 늑대들과 함께 그 입구로 걸음을 옮겨갔다.
'도시 안으로 늑대들을 데려가야 한다.'
우진은 그리 결론 내렸다.
렉스만 있을 때는 별걱정 없이 바깥에 놔두고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젠 늑대가 무려 네 마리다. 개척 도시 주변에 이 녀석들을 풀어놨다간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터질 듯했다.
게다가 도시에 갈 때마다 매번 늑대들과 헤어지고, 나중에 다시 합류하길 반복하는 것도 번거로운 짓. 이렇게 된 김에 한 번쯤 들이박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도시를 향해 걸어가자···
당연하게도, 입구에 선 위병들이 질겁하며 창날을 이쪽으로 겨누었다.
"당장 뒤로 물러나라!"
그리 호통치는 위병. 이에 늑대들이 흥분했는지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르르릉.
목을 떨며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흘려내는 늑대들. 놀란 위병들이 지원군을 부르려던 찰나··· 우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짧고 단호한 휘파람 소리.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늑대들이 입을 꾹 다물고선 자리에 얌전히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위병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순종적인 늑대들. 이런 게 가능하단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상황이 얼추 진정되었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품속을 뒤적여서 추천패를 꺼냈다.
"다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보우 장로님의 초대를 받아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이리 줘보시길."
위병 중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사내가 용기를 내어 우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추천패를 확인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새겨진 이름이··· 보우 장로님이 아닌데요?"
이에 우진도 추천패를 확인했다. 그것에 박힌 이름은 다름 아닌 대주교 콘라드.
'아, 하나를 더 받았지.'
줄곧 늑대들을 훈련시키느라 정신 팔려서 잊고 있었다. 머쓱해진 우진은 다시 품속을 뒤적여서 다른 추천패를 꺼냈다.
"이게 맞을 겁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공손해진 위병의 태도. 하지만 곧장 도시에 들어갈 순 없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늑대 무리를 도시로 들여보내는 건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교단 연맹에 보고를 먼저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추천패를 쥔 위병이 급히 도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진은 늑대들과 함께 육포를 씹으며 위병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가 지났다.
저 멀리 익숙한 노인 한 명이 위병의 안내를 받으며 이쪽으로 걸어 왔다. 우진은 씩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게 말일세.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줘서 고맙군. 그건 그렇고··· 자네는 참 눈에 띄는 짓은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구먼."
그러니 콘라드도 추천패를 줬겠지.
보우는 그리 중얼거리며 늑대들에게 다가갔다. 늑대들은 낯선 사내가 가까이 접근해 와도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에 보우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허, 어린 마수들 같은데도 인내심이 상당하군···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 이 녀석들이 확실히 길들여진 건지 확인해 봐도 되겠나?"
"상관없습니다."
우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보우가 냉큼 손을 뻗어서 늑대의 털을 몇 가닥 잡아 뽑았다. 순간 늑대가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녀석은 움직이지 않고 정자세를 유지했다.
콰악!
보우가 늑대의 꼬리 끝을 짓밟았다. 통증에 의해 파르르 떨리는 늑대의 몸뚱어리. 거기서 더 나아가, 보우는 산책을 하듯 왕복하며 늑대들의 꼬리를 번갈아 밟았다.
저 짓을 당하면 누군들 화를 낼 것 같은데···
늑대들은 용케 눈을 질끈 감고선 버텼다. 보는 사람이 신기해질 만큼의 인내심. 이에 보우도 인정했는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를 낼 기미가 전혀 없군. 좋아, 말 잘 듣는 강아지들은 상을 받아야지."
보우가 위병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뭔가를 손에 든 위병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굵직한 벨트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보우가 손수 그것을 늑대들의 목에 채웠다. 이렇게 보니, 벨트가 아니라 목걸이의 일종이었다. 교단 연맹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개목걸이.
"늑대 마수들이 길들여졌음을 공인하는 증표라네. 이 목걸이를 보여준다면, 늑대들이 어느 도시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걸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마워할 것까지야··· 어쨌건, 자네들도 이 얘기를 들었으니 길을 열어야겠지?"
보우가 그리 말하자, 입구에 모여 있던 위병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우진과 보우.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늑대 네 마리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갔다.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아랑곳 않고, 우진은 팔자 좋게 보우와 잡담을 나누었다.
"레이먼드 님이 안 보이는군요. 늑대 마수들을 보면 분명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요즘 전령 일을 하느라 바쁘다네. 낌새를 보아하니 슬슬 원정이 시작될 것 같은데··· 솔직히 실감이 안 되는군. 이 짓을 기어이 하게 될 줄이야."
보우는 그리 중얼거리다, 뭔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혹시 필요한 것 없나? 말만 하게.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여러 지원을 해주는 중이니까. 어려운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주겠네."
마침 우진이 원하는 게 있었다.
"가능하다면 마나 아츠를 제대로 익혀보고 싶은데, 혹시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말에 보우가 살짝 고민하다 답했다.
"원한다면 내가 좀 가르침을 줄 수는 있겠다만··· 상급 기예를 가르치는 건 어려울 것 같군.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로 유출되어선 안 되는 비기라."
"기초만 가르쳐주셔도 충분합니다."
"그럼 대련장으로 따라오게나."
말이 나온 김에 해보자.
성격 급한 보우는 곧바로 대련장으로 향했다. 우진도 내심 원하는 일이었기에 순순히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지난번처럼 대련장 한복판에 선 두 사내. 늑대들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로 그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마나를 느끼는 법은 알고 있는가?"
"그 정도는 익혀놨습니다."
"한 번 해보게."
우진은 선뜻 자리에 앉아, 클레어가 알려준 호흡법을 행하였다. 이를 본 보우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자네. 그 호흡법을 어디서 배운 겐가?"
"친한 마법사에게 배웠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워낙 고전적인 호흡법이라 좀 놀랐을 뿐이네. 익히기 어려워서 요즘 사람들은 꺼리는 방식인데··· 거 참 신기하군."
정수리로 마나를 받아들인다.
이 심상은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무 진입 장벽이 높아서 다들 기피하는 방식. 하지만 효율만 놓고 봤을 때는 이만한 게 없다.
"이러면 오늘 안에 기초를 다 가르칠 수 있겠어. 진, 자네는 혹시 심상 세계라는 단어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자주 들어봤죠."
심상 세계.
클레어와 마법 공부를 할 때 여러 번 들었던 단어다. 사람이 지닌 힘과 능력, 성향이 형상화되어 하나의 세계처럼 보이는 것.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심상 세계를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무예를 추구하는 자들의 심상 세계는 단순하다.
어떻게 해야 더 빠르고, 강하며, 효율적인 공격을 창출해 내는가.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민과 뼈를 깎는 수련. 그로 인해 심상 세계는 점점 예리하게 벼려진다.
"마나 아츠는 그런 심상 세계를 품고 있어야 빛을 발한다네. 무예를 익힌 자가 추구하는 심상을, 마나를 이용하여 현실로 끄집어내는 기예. 참고로 자네는 이걸 한 번 해본 적 있어."
"······제가요?"
우진이 의아해하자, 보우는 씩 미소 지으며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뼉을 치는 듯한 시늉. 그 모습을 보자 문득 감이 잡혔다.
지난날 이곳에서 두 사내의 손바닥이 격돌했다. 충격에 의해 우진은 손등이 찢어지고, 보우는 멀리 날아가서 벽에 처박혔다.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이 생길 뻔한 상황.
그때 당시의 우진은, 단순히 힘 조절을 실수하여 보우를 날려버린 거라 여겼는데···
"······제가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쓴 겁니까."
"그렇다네. 나의 공격 방식을 흉내내서 쓰더군. 덕분에 한 방 먹었지. 그때의 기억을 잘 되살리면 마나 아츠를 쓸 수 있을 거라네."
"어떻게 한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워낙 본능적으로 한 짓이라, 당시의 내가 뭘 어떻게 했던 건지 기억나는 게 없다. 그리 말하니 보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처럼 처맞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걸세."
늘 그렇듯, 몸으로 때워야 할 듯했다.
심상.
보우는 시련의 용, 브리트라를 섬기는 수도승 중 한 사람이다.
이 수도승들은 세상의 모든 시련들··· 예를 들자면 역병, 재해, 기근 같은 것들이 브리트라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철의 원석이며, 시련은 그 철을 단조하는 불꽃과 망치질.
브리트라는 시련을 통해 인간을 시험한다. 이를 견뎌낸 자는 더 굳건한 강철로 거듭날 것이고, 견뎌내지 못한 자는 부서지리라.
수도승들의 교리는 시련을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 주내용이었다. 혹독한 단련으로 육체를 더 강인하게 만들고, 명상을 통해 더 굳건한 심상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론.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도리어 브리트라를 실망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수도승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신성력을 쓸 수도 없다. 쉴 새 없이 단련하며 언젠가 찾아올 시련을 대비하고 있을 뿐.
'······이건 곤란하군.'
보우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현재 우진과 대련하며 가르침을 주는 중이었다.
스승은 때때로 제자에게 시련을 내려야 한다. 그 견디기 힘든 경험에 의해 제자는 성장하고, 깨우침을 얻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
'하지만··· 이놈은 너무 강해.'
시련이라 여겨지는 건 오히려 이쪽이다.
우진의 주먹이 내질러질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자칫 잘못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 반칙 같은 힘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보우가 지닌 심안을 쓰면 이 사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겠지만···
'······그리했다간 후회하게 될 것 같다.'
망원경이 있다고 한들, 그것으로 감히 태양을 보려고 해선 안 된다. 심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왠지 그런 부류의 불안감이 들었다.
이 괴물에게 무예를 가르쳐도 되는 걸까?
쩌엉!!
두 사내의 손바닥이 맞부딪히며 요란한 굉음을 울렸다. 드센 충격에 의해 우진과 보우가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괜찮으십니까?"
방금의 힘겨루기가 너무 거셌다고 여겼는지, 우진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태도에 묻어나는 건 뚜렷한 존중과 걱정스러움.
이에 보우는 안심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
굳이 심안을 쓰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눈앞에 마주 선 사내는 가진 힘을 함부로 휘두르는 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강하고, 재능 넘치며, 선하다. 마치 옛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영웅을 상대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보우는 우진을 가르치며 큰 보람을 느꼈다.
이는 우진이 지금껏 거쳐 간 스승들, 헥터와 클레어 또한 느낀 감정이리라.
"괜찮으니 좀 더 과감하게 덤벼보게나. 아직 몸도 제대로 안 풀렸으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다시 대련을 이어갔다.
* * *
좀 처맞다 보면 마나 아츠를 익힐 수 있게 될 것이다. 솔직히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내심 긴가민가했다.
'이게 정말로 될까?'
클레어에게서 처음 마법을 배울 때는 아주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그에 비하면 너무 모호한 방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이란 건 의외로 정밀한 법. 명상과 대련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우진은 그 과정 속에서 마나 아츠에 대한 요령을 하나씩 익혀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이게 되네?'
우진의 손에 들린 양손 망치가 빛을 머금었다. 마나를 이용하여 무기의 강도와 파괴력을 강화하는 기예, 마나 웨폰이었다.
이를 본 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익혔군. 그 무기를 한 번 휘둘러 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지 않나?"
"솔직히··· 그렇습니다."
"따라 나오게. 마침 도시 주변에 힘자랑하기 좋은 장소가 있으니까."
우진은 보우와 함께 개척 도시 밖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잔뜩 신이 난 늑대들이 뒤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도시에 갇혀 지내서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개척 도시 인근에 위치한 혈석 채굴장.
여러 사내들이 바쁘게 곡괭이질 하여 혈석을 캐내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진과 보우는 채석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게 유독 단단해 보이는군."
보우가 바윗돌처럼 큼지막한 혈석을 툭툭 건드렸다. 이에 우진은 망치 자루를 단단히 말아 쥐며 앞으로 나섰다.
키잉—
검푸른 빛깔의 불티가 망치를 휘감았다. 자세를 잡는 우진. 보우와 늑대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곧 일어날 광경을 기다렸다.
망치가 휘둘렸다.
꽈아아앙!!
망치머리가 바위의 정중앙을 후려치며 폭음을 터뜨렸다. 그 충격의 여파로 거칠게 펄럭이는 옷자락. 작살난 바위 파편들이 우진의 발치에 흘러내리듯 쌓였다.
바윗돌이 한 방에 반파되었다. 그리고···
'······망치도 부서졌는데?'
우진은 황당한 눈으로 손에 쥔 망치를 봤다. 자루가 뚝 분질러졌다.
일부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망치를 가져왔건만··· 개시하자마자 부서져서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보우가 주변을 서성이더니, 지면 위에 떨어진 뭔가를 집어 들었다. 방금 부서져서 튕겨 나간 망치머리. 꽤 먼 곳까지 날아갔다.
"저의 솜씨가 아직 부족한 것 같군요."
우진은 부러진 망치머리를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마나로 강화시킨 무기치고는 너무 손쉽게 망가졌으니까.
이에 보우가 한마디 했다.
"마나 웨폰의 완성도와 별개로··· 자네의 힘이 참 무식하게 세구먼. 이런 싸구려 무기를 오래 쓰는 건 어려울 테지."
아무 대장간에 들어가서 집어 온 물건이라 그런지, 마나 웨폰을 쓰더라도 수명을 오래 늘릴 순 없는 모양이었다.
"교단 연맹에 부탁하여 더 좋은 무구가 있는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그리 해주셔도 되는 겁니까?"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네. 안 그래도 무기 정도는 장만해 줄 생각이었으니."
양손 망치 하나를 제물 삼아, 그보다 더 좋은 무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마나 웨폰을 연습하기 위해 기껏 채석장까지 왔건만, 한 방에 망치가 부서진 탓에 할 일이 없어졌다. 붕 떠버린 시간.
보우도 그리 여겼는지 떠날 채비를 했다.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도시로 가야겠군."
"저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늑대들을 데리고 산책을 좀 하다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게나. 난 이만 가보겠네."
보우가 먼저 도시로 돌아갔다.
덕분에 혼자가 된 우진. 그는 방금 박살낸 바윗돌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뭔가 애매하단 말이지.'
다시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바위 앞에 서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진의 주먹에 검푸른 불티가 휘감겼다. 마나를 이용하여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기예.
콰앙!!
주먹이 바윗돌을 힘껏 갈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갈라졌다. 그 깊이와 생김새를 살펴본 후 옆에 있는 또 다른 바위 앞에 섰다.
우진은 주먹에 깃들어 있던 불티를 꺼트렸다. 마나를 쓰지 않은 맨주먹. 이를 내질러서 바위를 한 방 갈겼다.
콰앙!!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쩍쩍 갈라진 바위 표면. 우진은 한 걸음 물러선 후, 부서진 두 바위를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어째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마나 아츠를 활용해서 뻗은 주먹과, 그냥 생각 없이 맨손으로 뻗은 주먹. 과정은 분명 달랐지만 결과물을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었다.
마나를 쓴 쪽의 바위가 좀 더 많이 부서지긴 했으나··· 자세히 보기 전까진 눈치채기 어려웠다. 음식에 소금을 살짝 뿌린 것 같은 정도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마나 아츠의 위력이 약했다.
'그 이유가 뭘까.'
보우의 가르침을 한 번 되새겨봤다. 그러다 보니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무예를 추구하는 자의 심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기예. 이를 마나 아츠라고 부른다.'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사냥과 생존에 초점을 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야. 무예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
물론 격투기를 익히긴 했다.
하지만 이걸 깊게 배우지는 않았다. 마경 깊은 곳의 괴물을 상대로 주짓수 같은 걸 시도할 순 없으니까. 우진은 복싱과 MMA를 일 년 정도만 배운 후 그만뒀다.
반면 보우는 긴 세월 동안 무예를 갈고 닦았다.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을 게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쌓아 올린 심상으로 인해, 그의 기술은 높은 위력을 품게 되었다.
반면 우진은 무예 자체에 큰 애정이 없었다. 마나 아츠도 필요하니까 익혔을 뿐. 그런 입문자가 기술을 쓰니 위력이 뒤처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 생각하던 중···
'······난 도대체 어떤 심상을 갖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예전에 클레어가 심상 세계를 설명해줄 때, 유독 강조했던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심상 세계는 위험하다고 했지.'
어쩌면 심상 속에 위험한 괴물이 하나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과 그것이 접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의아한 말이었다. 심지어 클레어 본인도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고, 정보가 너무 부족하여 확신은 이르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클레어는 허튼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다. 그때 당시의 그녀는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꺼낸 걸까?
'나중에 만나면 자세히 물어봐야겠네.'
훗날 재회했을 때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우진은 그리 생각하며,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 *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네."
보우가 문득 얘기를 꺼냈다. 느낌상 둘 중 어느 소식을 먼저 들을지 고르라는 듯했다.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습니다."
"자네가 쓸만한 무기를 하나 갖고 와봤네. 직접 확인해 보게나."
보우는 그리 말하며, 곁에 놓인 나무 상자를 발로 툭 쳤다. 고급스러운 빛깔이 감도는 마호가니 상자. 그 크기는 마치 관처럼 큼직했다.
뭐가 들어 있을까.
살짝 기대하며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직후 맞닥뜨린 건··· 거대한 양손 망치 한 자루였다. 그 생김새가 참으로 멋들어졌다.
다마스쿠스 강철처럼 무늬가 박혀 있는 망치머리. 그 무늬의 생김새가 창문에 들러붙은 서리 결정을 연상케 했고, 망치 자루는 마수의 뼈를 가공하여 만든 물건이었다.
우진이 연신 감탄하며 망치를 살펴보자, 보우는 생색낼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서리 강철로 만든 물건이니 아주 단단할 걸세. 북부에서 아주 드물게 생산되던 강철인데··· 북부가 마경에 잠식당한 이후로는 더 구할 수 없게 된 금속이지."
"······아주 근사하군요. 마치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진은 조심스레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 촉감이 손에 착 감기는 듯했다.
"이 무기에 이름이 있습니까?"
"아마 있긴 할 건데··· 급히 물건을 받아오느라 물어보질 않았군. 자네가 새 이름을 붙여주는 건 어떻겠나?"
새 이름이라···
늘 그렇듯 우진의 작명 솜씨는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남이 만들어낸 이름을 멋대로 가져와서 갖다 붙였다.
"스컬 크러셔라고 부르겠습니다."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로군."
너무 좋은 선물을 받아서 그런지, 이에 상응하는 나쁜 소식은 뭘지 벌써 우려스럽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열흘 뒤에 원정이 시작될 걸세. 그러니 자네가 지금처럼 팔자 좋게 식객 생활을 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
교단 연맹이 출정의 깃발을 손에 쥐었다.
덕분에 좋은 시절은 다 갔고, 이제 고생할 일만 남았다. 보우가 그리 얘기하자··· 우진의 입꼬리가 씩 위로 올라갔다.
"오히려 좋군요."
줄곧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조율의 교단.
남는 시간 동안, 우진은 늑대들과 함께 사냥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선 다시 장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했는데··· 보우가 해준 설명에 따르면 오히려 반대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원정군이 올 것이다.
개척 도시 주변에는 위험한 마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교단 연맹은 원정군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개척 도시를 전초 기지로 삼아 국지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공식적인 개척 도시는 총 여덟 개. 숫자가 붙지 않은 도시까지 합치면 개수가 더 많아진다.
도시들 주변의 균열핵을 파괴한 후 침식된 땅을 정화하여, 지역 전체를 수복하는 것이 1차 원정군이 맡은 역할이다.
'우리 쪽으로는 조율의 교단에 소속된 병력들이 올 예정이라고 했지.'
성기사 레이먼드가 속해 있는 세력. 보우와 친분이 깊은 교단이라 큰 갈등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 생각하던 중.
툭.
발치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내단을 갖고 온 늑대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션, 수고 많았다."
그 노고를 칭찬하며 늑대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다른 늑대들도 전리품을 하나씩 입에 물고선 이쪽으로 돌아왔다.
'션, 얀, 미샤.'
늑대들에게 그리 이름 붙였다.
짙은 갈색의 털을 지닌 늑대는 션, 허스키처럼 검은색과 회색이 뒤섞인 늑대는 얀, 그리고 유일한 암컷인 연회색 늑대의 이름은 미샤다.
늑대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그냥 문득 생각난 스포츠 선수들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다행히 늑대들은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우진은 녀석들에게 골고루 내단을 나눠준 후. 숲을 떠날 채비를 했다.
"슬슬 돌아가서 밥이나 먹자."
늑대들과 함께 도시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도시 입구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평원 쪽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은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응시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저 멀리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은빛 갑옷을 걸친 보병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철컥이는 강철 소리, 그리고 한 치의 어긋남 없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두에 선 기수가 깃발을 높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교단 연맹의 깃발. 원정의 선발대가 제3 개척 도시를 향해 다가왔다.
의아한 상황이었다.
'······시기가 좀 이른데?'
우진이 알기론, 1차 원정군이 오기로 예정된 날은 이틀 뒤다. 전령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 어떤 착오라도 발생한 것일까?
일단 얘기해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곧장 대련장으로 가서, 자리에 앉아 명상 중이던 보우에게 다가갔다.
"진, 무슨 일인가?"
"원정군이 도시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보우도 살짝 당황했다.
"······지금?"
"예. 이십 분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나가봐야겠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보우. 그가 문득 근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지휘관으로 와 줬으면 좋으련만. 이거 왠지 불길한데."
이에 우진은 의문을 표했다.
"미리 얘기가 된 것 아니었습니까? 이쪽으로 배정된 지휘관이 누구인지 사전에 고지하는 게 도리일 텐데요."
"원정의 첫 단추라 그런지, 교단 내부에서도 고민이 깊은 것 같더군. 후보가 서너 명으로 좁혀지긴 했지만··· 의견이 계속 갈려서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들었다네."
이번 원정은 역사에 기록될 사건.
따라서 1차 원정군의 지휘관이 된다는 건 엄청난 명예였다. 이를 손에 쥐고자 조율의 교단에서 여러 고위 기사가 나섰고, 그들 중 한 사람을 고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누가 지휘관으로 선택받았을까.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두 사내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갔다.
곧 원정군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진이 보우를 데려오는 동안, 원정군도 그새 도시에 부쩍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 선두에 있던 기사 중 한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래지 않아 보우의 앞에 마주 선 기사. 그가 헬멧을 벗자, 장발의 곱슬머리가 물결치듯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마흔 초중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미중년이었다.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보우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롤랑··· 반갑네. 상황을 보아하니 자네가 지휘관인 겐가. 이거 출세했군."
"하하! 이번 기회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지요. 그간 실력을 많이 키워왔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리 대화를 나누던 중, 롤랑의 시선이 뒤늦게 우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 젊은 사내는 누구입니까?"
"나중에 천천히 소개해주겠네. 일단 도시 안으로 들어와서 짐부터 풀게나. 자네의 부하들이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것 같아 보이는군."
"확실히, 그게 옳은 순서겠군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 병력들이 손가락만 빨며 기다려야 할 터였다. 보우가 그리 지적하자, 롤랑은 납득했는지 곧바로 원정군에게 돌아갔다.
멀어져가는 롤랑의 뒷모습을 보며, 보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 설마 롤랑이 지휘관으로 오다니."
"어떤 문제가 있는 분입니까?"
"강하고, 유능하긴 한데··· 솔직히 저놈은 안 왔으면 했다네. 통제가 안 돼. 미치광이 같은 짓을 좋아하는 놈이라."
그 말에 우진은 의문을 느꼈다.
유능한 사람이지만, 통제가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 관념이던가?
"말만 들어선 감이 안 잡히는군요."
"보면 알게 될 걸세."
보우는 그리 대꾸하며 원정군을 향해 걸어갔다. 기사들 중에 낯익은 얼굴, 레이먼드가 있었기에 대화를 한 번 나눠볼 생각인 듯했다.
그와 별개로···
보우는 치를 떨면서도 롤랑의 유능함을 인정했으니. 저 사내는 지휘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실력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까.'
조만간 이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 * *
이틀 후.
편히 휴식을 취한 병사와 기사들이 도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우진과 보우, 늑대들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롤랑 휘하의 병력은 보병 400에 성기사 14명, 종기사 30명, 그리고 사제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 중 60명은 두터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보병이었다.
원정군을 여덟 개로 쪼개어 각 개척 도시에 파견했단 점을 고려하면, 1차 원정에 투입된 병력의 총원은 3600명 정도라 추측된다.
얼핏 보기에는 머릿수가 적어 보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검증된 정예인 데다, 개척 도시 인근의 마수들이 약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할 정도로 많은 병력이었다.
"우리가 할 일이 많을 것 같지 않군요."
우진이 그리 말하자, 보우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경 초입이니 자네나 내가 힘을 쓸 일은 많지 않을 걸세. 고작 이런 곳에서 쩔쩔매면 원정을 때려치워야지."
"하긴··· 옳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애를 먹으면 원정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다. 마경 깊숙한 곳의 괴물이 한둘만 튀어나와도 군대가 괴멸할 테니까.
따라서 이번 사냥은 가만히 앉아 관망하며, 교단 연맹의 힘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 싶으면 이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불나방들과 함께 타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오래지 않아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바위산. 그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다. 마치 흰개미의 집을 엄청난 크기로 키워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바위산 주변에는 성인 남성의 절반만한 크기의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숭이와 쥐를 섞어놓은 듯한 생김새. 놈들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창이 들려 있었다.
'코볼트.'
약하지만, 지능이 높은 데다가 무리 생활을 하여 상대하기 귀찮은 마물이었다. 과연 교단 연맹은 저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할까···
"······조율의 여신님께 한 곡조 바쳐야겠군."
불현듯 롤랑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등에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더니, 어떤 물건을 바깥으로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하얀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에 턱을 괸 채로, 혼자서 바위산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는 롤랑. 병사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휘관이 앞서가는 걸 구경했다.
'갑자기 뭔 짓을 하려는 거지?'
우진이 의아해하던 찰나···
즈이이잉—
자세를 잡은 롤랑이 활로 바이올린을 켰다. 울려 퍼지는 현의 울음. 롤랑이 걸어가며 바이올린을 마구 연주하기 시작했다.
톱질을 하듯 롤랑의 손이 거칠게 활을 움직였다. 그 마찰에 의해 터져 나온 격정적인 선율이 바위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당연하게도, 그 소리에 반응하여 코볼트가 쏟아져 나왔다. 수십 마리의 코볼트들이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 돌진해 왔다.
푸확!
돌연 코볼트의 몸뚱어리가 썰리며 피가 왈칵 튀었다. 어느새 롤랑의 주변을 둘러싼 성기사들이 다가오는 적들을 바쁘게 베어 죽인다.
이 와중에도 롤랑은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선 기타을 연주하듯 손가락으로 현을 뜯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두 손. 흔히 피치카토라 불리는 연주 기법이었다.
조율의 여신 에아는 선율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에아를 섬기는 사제와 성기사들 중에는, 기도가 아닌 노래와 연주를 통해 신성력을 발현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새하얀 빛을 뿜기 시작하는 롤랑의 갑옷. 한바탕 연주를 마친 롤랑은 바이올린을 종기사에게 건네준 후,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돌격."
롤랑이 작게 읊조렸다. 지휘관의 목소리는 현악기를 연주한 듯 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병사들의 귀에 닿았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한바탕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기이한 고양감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기세에 눌린 코볼트들이 한껏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보우는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롤랑과 얽히면 항상 이 꼴이란 말이지··· 기껏 연습한 진형과 전술을 다 무시하고 돌진만 하는데, 이래서야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도 사기 하나만큼은 대단하군요."
롤랑이 선발대를 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뛰어난 정예병이더라도, 정든 고향을 떠나 마경에 발을 들이면 심적으로 크게 위축되기 마련. 그러니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물론 보우의 말대로, 저런 방식이 마경 깊숙한 곳에서 통할 리는 없을 듯했지만···
'······재미는 있어 보이네.'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 생각하며 옆을 보자, 렉스와 늑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곁눈질하여 우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녀석들과 눈이 마주친 우진은 짐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직후 가방 속을 더듬어서 스컬 크러셔를 밖으로 꺼냈다.
"좀 놀다 오겠습니다."
"확실히··· 진 자네도 정상은 아니야."
어이가 없단 듯 웃어대는 보우를 뒤로 하고, 우진이 늑대들과 함께 내달렸다.
바위산의 마수.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기에 그만큼 속도를 끌어올렸다. 지면을 밀어 차며 달리는 우진. 그는 곧 앞서가던 보병들을 추월해 지나쳤다.
도망치는 코볼트들이 점차 가까워진다. 우진의 망치가 이름값을 할 때가 되었다.
뻐엉!!
코볼트의 머리가 뒤쪽부터 하나씩 터져 나갔다. 그 굉음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놈들 중 한 마리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보았다. 직후 마주한 건 피 묻은 망치를 든 사내.
"키에에엑!"
겁에 질린 코볼트가 몸을 웅크렸다. 눈을 질끈 감고선 곧 찾아올 고통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진은 놈에게 손대지 않고 지나쳤다.
코볼트는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살아남았다. 그 행운에 기뻐하려던 찰나, 늑대의 송곳니가 놈에게 들이닥쳤다.
이렇듯 조무래기들은 남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했다. 우진은 어느 순간부터 코볼트를 죽이는 걸 멈췄다. 혼자 신나서 날뛰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병사들도 실전을 겪어봐야지.'
원정군은 많은 훈련을 거친 정예 병력이었지만, 줄곧 장벽 안쪽에서 생활해 왔기에 마물 사냥은 익숙하지 않을 터. 이번 기회에 병사들도 경험을 쌓아놔야 했다.
코볼트들을 연신 지나치며 앞으로 내달리는 우진. 렉스와 늑대들도 눈치껏 사냥을 멈춘 후 그의 뒤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 저 선두에서 마물들을 도륙 중인 성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슬 속도를 줄여야겠군.'
성기사를 앞서가는 건 너무 눈에 튀는 짓이라 자중했다. 그렇게 성기사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코볼트들의 본거지가 코앞이었다. 땅굴이 잔뜩 뚫려 있는 바위산.
저 안쪽으로 늑대들을 데려가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밖에서 놀고 있거라."
우진은 그리 명령하여 늑대들을 떼어 놓은 후. 혼자 땅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코볼트의 발톱과 앞니는 쇠붙이처럼 단단하다. 놈들은 그걸 곡괭이처럼 활용하여, 바위산에 이런 땅굴을 뚫고 생활하길 즐겼다. 그 내부 구조가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
앞서 성기사들이 쓸고 지나가서 그런지 바닥은 온통 피바다였다. 우진은 느긋하게 발자취를 좇아 걸음을 옮겨갔다.
쐐액!
문득 들려온 바람 소리. 우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날아온 것을 잡아챘다. 돌멩이와 나무로 만든 원시적인 투창이었다.
시선을 옮겨 이 투창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좌측 통로에 서 있던 코볼트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듯 연신 눈을 끔뻑이는 코볼트. 놈은 급히 몸을 돌려서 달아났다.
잊고 간 물건이 있는 듯하여, 우진은 손에 든 투창을 놈에게 돌려줬다.
퍼어억!!
되돌아간 투창이 코볼트의 등을 관통했다. 놈은 가슴팍 앞으로 삐져나온 창날을 더듬거리다, 곧 힘없이 자리에 고꾸라졌다.
어째 약해빠진 놈들뿐이다.
'무리 생활을 하는 놈들이니, 정예 전투원이 따로 있을 텐데··· 보이질 않는군.'
개미 같은 벌레들도 일개미와 병정개미의 역할을 나눠둔다. 마수 또한 마찬가지다.
침입자가 본거지 내부를 침입했으니, 슬슬 무리의 정예가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낌새가 느껴지질 않았다.
'일단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자.'
우진은 산책하듯 땅굴 속을 헤집고 다녔다. 눈에 띄는 코볼트들을 잡아 족치고 나니, 문득 입구 쪽에서 번잡한 인기척이 여럿 들렸다.
아무래도 원정군이 밖의 코볼트를 모조리 정리한 후 바위산에 진입한 듯했다.
병사들이 산개하여 땅굴들을 점령해 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모든 구획을 정리하여 코볼트의 씨를 말렸다.
성공적인 소탕. 하지만 롤랑과 그의 성기사들은 이 상황이 내심 아쉬웠다.
"결국 균열핵은 찾아내지 못했군···"
롤랑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바위산 전체를 훑었지만 끝내 균열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사실상 절반의 성공. 기껏 위험 지역을 탐색한 게 허사가 되었다.
그래도 규모가 큰 마수 무리를 토벌한 건 유의미한 성과였다. 조금 아쉽지만 이에 만족하고 물러나야 할 듯했다.
그리 결론 내리려던 중···
'······아까부터 저 사내가 뭘 하는 거지?'
롤랑이 문득 의문을 품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우진이었다. 벽면에 바짝 귀를 붙이고 있는 우진. 그가 손등으로 벽을 두어 번 두들겼다.
딱, 딱.
돌멩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찬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금 했던 짓거리를 반복했다. 마치 호박이 잘 여물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습.
그러던 중···
벽을 두들기던 우진이 순간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롤랑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내.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건만, 롤랑은 즉시 걸음을 옮겨 우진에게 다가갔다.
우진이 다시 벽을 두들겼다.
퉁, 퉁.
묘한 소리가 났다. 그 의미를 눈치챈 롤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빈 공간이 있다.'
이를 확인한 롤랑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말없이 손짓하여 성기사들을 부르려는 롤랑. 허나 그보다 앞서, 망치를 말아 쥔 우진이 대뜸 벽을 걷어찼다.
콰작!!
발길질 한 방에 벽이 박살 나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그 순간, 벽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코볼트들이 창을 내뻗었다.
우진은 고갯짓으로 쇄도해온 창날을 피한 후 망치를 휘둘렀다. 정면을 휩쓸 듯 갈겨진 망치. 그 일격에 얻어터진 코볼트들이 통로의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벽 뒤에서 느껴지던 위협 요소를 없앴다. 우진은 이에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거 참 화끈한 방식이군. 마음에 들어."
롤랑은 너털웃음을 흘려낸 후, 우진이 방금 박살낸 벽을 확인했다.
나무판자에 흙과 돌멩이를 발라서 굳힌 가짜 벽이었다. 자세히 보더라도 돌벽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정교한 물건.
"마물들이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그건 그렇고, 이 비밀 문이 있단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코볼트의 덩치에 비해 땅굴이 너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코볼트의 덩치는 성인 남성의 절반 크기. 하지만 이 땅굴은 우진을 비롯한 사내들도 문제없이 왕래할 수 있는 넓이였다. 이는 코볼트의 덩치를 고려하면 불필요한 짓.
땅굴이 이렇듯 넓은 건, 우두머리 개체의 덩치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그리 답하자, 롤랑은 새삼스레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지면과 천장 사이의 간격이 3m가 족히 넘었다. 만약 우진의 추측이 옳다면···
"······엄청나게 큰놈이 있군."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기쁜지 롤랑의 입가에 도전적인 미소가 걸렸다.
"자, 제군들! 흥이 식기 전에 출발하자고."
롤랑이 벽 뒤에 감춰져 있던 통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를 쫓아 우진과 성기사, 그리고 병사들이 뒤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감춰져 있던 장소는 엄청나게 넓었다.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주변의 벽과 계단이 매끈한 석재 벽돌로 만들어진 데다, 곳곳에 벽화로 보이는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본 롤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우··· 마물들이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나?"
"······그럴 리가요."
놀란 건 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물의 투박한 솜씨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공간. 우진은 예전에도 이런 장소를 본 적 있었다.
'마경 깊숙한 곳에서 본 유적들과 닮았어.'
이게 왜 여기에도 있는 걸까.
생각은 일단 나중으로 미뤄야 할 듯했다. 우선은 사냥을 끝마쳐야 할 때니까.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공간을 마주했다. 줄지어 늘어선 모닥불과, 신하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코볼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바윗돌을 깎아서 만든 왕좌. 그것에 앉은 고릴라 한 마리가 불청객들을 응시했다. 놈의 털은 먹물에 적신 듯 시커멓고, 목에는 길쭉한 뱀 한 마리가 목걸이처럼 둘러져 있었다.
'빅풋.'
마경 견문록에서 언급된 생명체였다.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 마수. 마경의 중부 지역까지 가야 발견되는 놈이었다.
저런 놈이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균열핵이군.'
벽에 큼지막한 심장처럼 생긴 게 들러붙어 있었다. 시커먼 점액질에 뒤덮인 균열핵이 매 순간 박동했다. 아무래도 빅풋은 균열핵의 기운을 받아먹으며 왕 노릇을 해온 모양.
거대한 마수를 본 롤랑은 씩 미소 지었다.
"좋아··· 한 번 제대로 해볼까."
롤랑이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다시 바이올린을 꺼내려는 건가. 우진은 그 연주가 시작되는 것을 내심 기대했다.
롤랑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롤랑의 손에 들린 건 커다란 쇠뇌였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병사들도 어느새 쇠뇌를 쥐고 있었다.
"발사."
퓨퓨퓨퓩—!
쇠뇌가 발사되며 수백 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 화살에 얻어맞은 코볼트와 빅풋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축복받은 은으로 만든 은화살.
한 번 적중하고 나면 효능을 잃지만, 마경의 생명체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때로는 실리를 따져야지."
롤랑은 능청스레 말하며 은화살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병사들 또한 능숙한 솜씨로 쇠뇌를 장전했다. 다시 쏘아지는 화살. 마물들의 아우성이 메아리쳤다.
두 차례에 걸친 사격으로 인해 코볼트들이 전멸했다. 하지만 빅풋은 정말 괴상한 방법으로 빗발치는 화살을 막았다.
파앙!!
빅풋이 목에 두르고 있던 뱀의 꼬리를 잡아 휘둘렀다. 마치 채찍처럼 휘둘린 뱀이 날아온 화살들을 받아 쳐냈다.
이를 본 롤랑이 감탄했다.
"자기 애완동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놈이군. 그건 그렇고, 뱀의 몸뚱어리가 이상할 만큼 단단한 것 같은데?"
"돌가죽 살모사라 불리는 마수입니다. 이름처럼 가죽이 아주 튼튼하죠."
우진이 설명해 주자, 롤랑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렇다면 고전적인 방식을 택해야겠군."
앞으로 걸어 나가는 롤랑. 그에 동참하여 성기사들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깃든 신성이 새하얀 불꽃처럼 타올랐다.
빅풋은 당황한 눈으로 다가오는 성기사들을 살폈다. 놈은 적들을 겁주기 위해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겨 북 소리를 냈지만, 성기사들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확신한다.
'역시··· 내가 나설 기회는 없겠군.'
빅풋은 이 주변 지역에서 보기 드문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쨌건 놈은 현재 이곳에 있다.
이는 곧, 저놈이 본래 서식지의 먹이다툼에서 밀린 패배자라는 뜻.
저놈은 우진이 지난번 상대했던 웨어울프처럼, 변두리 지역에서 약한 놈들만 모아놓고 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경험상 이런 놈들은 대체로 나약하다.
반면 이곳에 모인 성기사는 교단 연맹에서 엄선된 강자들이었다.
쩍, 쩌억!
빅풋이 손에 쥔 뱀을 연거푸 휘둘렸다. 낌새를 읽은 성기사가 미리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채찍 자국이 지면에 흉터처럼 새겨졌다.
나머지 성기사들이 사냥감의 주변을 에워쌌다.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돌진하는 롤랑. 빅풋이 힘껏 발길질하여 그를 걷어찼다. 정확히는, 차려고 했다.
촤악!
어느새 등 뒤로 접근한 두 성기사가 양쪽에서 빅풋의 발목을 베었다. 휘청거리는 빅풋. 피 냄새를 맡은 성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놈을 베고, 찌르고, 도려냈다.
"구워어어억!!"
난도질당한 빅풋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본 롤랑은, 지면을 박차 도약하더니 놈의 입속으로 냅다 장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빅풋의 뒷목에서 피로 물든 칼끝이 삐져나왔다. 지면 위에 쓰러지는 마수.
확인 사살을 위해 성기사들이 빅풋의 온몸에 칼을 하나씩 찔러 넣었다. 그 모습이 바늘에 고정된 곤충 박제를 보는 듯했다.
다섯 번째 칼이 꽂힐 즈음 빅풋의 비명소리가 멎었다. 그 소리의 빈자리를 메우듯, 병사들이 힘껏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지하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귀가 다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롤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쏟아지는 갈채를 즐겼다. 저 분위기에 훼방을 놓을 순 없는 노릇.
우진은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빅풋의 사체 주변에 떨어져 있는 뱀을 살폈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네.'
채찍처럼 마구 휘둘린 데다, 은화살도 몇 방 맞아서 죽었을 거라 예상했건만··· 뱀은 용케 죽지 않고 버텨냈다. 이래서 확인 사살을 확실히 하는 버릇이 있어야 했다.
'죽여야겠군.'
우진은 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가죽 살모사는 단단한 비늘을 갖고 있으나, 가죽 아래의 뼈와 관절은 별개였다. 놈의 목뼈를 잡아 비틀면 간단히 숨을 끊을 수 있다.
그런데 살모사가 최후의 힘을 숨겨두고 있던 듯하다. 놈이 다가온 인간을 길동무 삼기 위해, 있는 힘껏 우진의 손을 깨물었다.
까드득!
돌멩이를 깨문 듯한 소리가 울렸다. 살모사가 당황했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피부가 이상할 만큼 단단하여 송곳니가 박히질 않았다.
······돌가죽.
"꽤 쓸만한 재주지··· 안 그래?"
우진이 웃으며 뱀을 붙잡았다.
우득!
뱀의 목을 비틀어 꺾었다. 놈에게 남아 있던 미력한 생명마저 사라졌다.
'이놈의 내단을 렉스에게 줘봐야겠어.'
운이 따라 준다면, 우진의 애완 늑대도 돌가죽을 얻을 수 있으리라.
정화.
비밀 통로를 찾은 공로를 인정받아, 뱀 사체는 우진의 전리품이 되었다. 지상으로 돌아온 우진은 곧장 그 내단을 렉스에게 줬다.
"이건 너 혼자서 먹어라. 다른 녀석한테 양보해 주지 말고."
그리 귀띔해 주자, 진귀한 내단이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렉스가 냉큼 받아먹었다.
와득, 와드득—
맛깔스레 내단을 먹는 렉스. 곧 녀석이 내단을 씹어 삼켰다. 이를 확인한 우진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 렉스의 옆구리를 한 번 꼬집었다.
"끼이잉?!"
화들짝 놀란 렉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반응을 본 우진은 살짝 실망했다.
'재주를 계승 받지 못했군.'
아쉽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내단을 취했을 때 재주를 계승 받을 확률은 아주 낮았으니까.
그래도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같은 재주를 지닌 마수의 내단을 취할수록, 그 재주를 계승 받을 확률이 점차 올라간다. 돌가죽을 지닌 마수를 계속 사냥하면 렉스도 이를 습득할 수 있게 되리라.
문제는, 돌가죽의 재주를 지닌 마수가 은근히 드물다는 것. 따라서 렉스와 늑대들이 그 재주를 얻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그리 생각하던 중···
'······잠깐만.'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우진은 늑대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녀석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마수로서의 격이 한층 올라간 듯한 느낌.
"너희들 나 없을 때 좋은 거라도 먹었냐?"
그 질문에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주변의 사체들을 한 번 둘러보게."
어느새 온 보우가 그리 말하며,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코볼트의 사체를 향해 턱짓했다. 이에 응하여 우진은 발끝으로 사체를 뒤집어봤다.
코볼트의 흉부 쪽에 파헤쳐진 자국이 있었다. 아무래도 늑대가 내단을 빼먹은 모양.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사체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늑대들은 바위산 주변을 맴돌며 병사들이 죽인 코볼트의 내단을 전부 취한 듯했다.
덕분에 늑대들이 성장한 건 기쁜 일이지만··· 살짝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다.
"이것도 교단 연맹의 전리품인데, 늑대들이 멋대로 빼먹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상관없다네. 어차피 저 사체들은 불로 태워서 처분할 예정이었어."
보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 많은 사체를 손질하여 전리품을 회수하고, 그걸 교단 연맹으로 운송하는 것 또한 번거로운 일. 원정군의 입장에서 저 코볼트의 사체는 애물단지 같은 물건이었다.
만약 사체를 그냥 내버릴 경우, 피 냄새를 맡은 마수가 와서 내단을 먹고 성장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원정군은 코볼트의 사체를 불로 태워서 폐기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버려질 폐기물이라 보우는 늑대가 사체를 건드는 걸 보고도 묵인했고, 덕분에 렉스를 비롯한 늑대들은 배가 터지도록 내단을 집어먹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이득이었다.
'이거 잘만 하면··· 단기간에 늑대들을 확 성장시킬 수 있겠는데?'
원정군은 약한 마수들의 사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로 인해 주인 없는 내단들이 대량으로 버려질 예정이었다.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버려진 내단만 주워 담아도 늑대들이 강해질 수 있다. 물론 코볼트처럼 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에 한정된 이야기라, 그럴 기회가 많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간에 이건 큰 기회였다.
"원정에 참여하길 잘한 것 같군요."
"자네가 원정에 도움이 된 만큼, 교단 연맹도 그에 응하는 보상을 해줄 뿐이네. 성기사들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원정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
균열핵의 위치를 찾아냈고, 숨겨진 지하 유적을 발견한 데다, 우두머리 마수까지 토벌했다. 기대를 한참 웃도는 성과. 이는 우진이 숨겨진 비밀문을 찾은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딱히 내색할 생각이 없었다. 특별히 한 일이 없는 듯했으니까.
"제가 없더라도 결국엔 그 비밀문을 찾아냈을 겁니다. 잘 만든 문이었지만, 보우 님의 심안을 속일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런 식으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네. 어쨌든 간에 일을 해낸 건 자네의 공로야."
말을 주고받던 중, 우진은 문득 비밀문 뒤에 있던 지하 유적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혹시 유적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십니까?"
"나는 자네들이 언급하는 그 유적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네. 이제 가봐야지."
보우는 줄곧 심안으로 인근 지역을 둘러보고 있었다. 또 다른 마수가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닌지 감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말 나온 김에 같이 가봅시다."
"나야 좋지."
우진과 보우는 바위산을 향해 걸었다. 오래지 않아 지하 유적으로 들어선 두 사람.
그곳에는 병사들이 빅풋의 부산물들을 들고 나르는 중이었다. 빅풋의 가죽은 무두질하여 말리고, 내장과 뼈, 내단은 투명한 용액에 절여서 장벽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내단을 보내는 건 조금 아깝군.'
듣자 하니, 마탑의 연구 재료로 쓰일 예정이라는데··· 저 내단을 그런 불확실한 시도로 낭비하는 건 조금 아까웠다. 늑대에게 먹이면 큰 성장을 끌어낼 수 있는 물건이므로.
하지만 저 내단까지 요구하는 건 염치 없는 짓이라 구경만 했다. 그런 와중, 보우가 현장을 지휘 중인 롤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롤랑.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는가."
"유적 내부를 탐색해 봤지만, 아쉽게도 유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책장 같은 것들도 텅 비어 있고요. 하지만 곳곳에 벽화가 남아 있어서 사제를 통해 뜻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롤랑이 주변 눈치를 한 번 살핀 후.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옛 암흑 신관의 신전인 것 같습니다."
교단 연맹은 눈에 띈 암흑 신관들을 모조리 태워 죽였다. 이를 피하고자, 암흑 신관들은 은밀한 곳에 지하 신전을 만들어 교리를 이어 나갔다. 이 유적 또한 그중 하나였다.
롤랑의 말을 듣고도 보우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의 정체를 내심 예상하고 있던 듯했다.
"원정이 시작된 게 엊그제 일인데, 벌써부터 귀찮은 게 발견되었군··· 혹시 사람의 흔적 같은 건 없던가?"
"예. 아주 오래전에 버려진 곳 같습니다. 어쩌면 교단 연맹이 비공식적으로 토벌한 신전일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조사도 끝났으니, 슬슬 저 균열핵을 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게."
보우의 동의가 떨어진 후. 롤랑은 유적 안에 있던 병사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이는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우진은 굳이 나가지 않고 보우의 곁에 서 있었다. 이런 구경거리는 흔치 않다. 자기 몸을 간수할 자신이 있으니, 균열핵이 정화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볼 생각이었다.
균열핵과 그 주변의 벽화를 훑어봤다.
눈을 감은 채로 두 팔 벌린 여자의 벽화. 그리고 검은 점액질에 뒤덮인 심장처럼 생긴 균열핵. 그것이 벽화 속 여자의 가슴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자 그림과 균열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마치 하나의 작품을 보는 것처럼···
이를 망치기 위해 롤랑과 사제들이 나섰다.
"······시작하겠습니다."
사제들이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서 균열핵에 성수를 뿌렸다. 축복이 담긴 성수가 검은 점액질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즈이이잉—
롤랑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그 선율은 지난번 연주할 때와 달리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맞춰 사제와 수녀들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조율의 성가대.
노래와 연주로 신성력을 발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 합창을 통해 더 큰 힘을 끌어낸다. 균열핵 주변에 새하얀 신성이 이슬처럼 맺혔다.
치이익···
새하얀 신성과 검은 점액질이 맞닿자,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점액질 속의 심장이 점차 잿빛으로 변해갔다.
우진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경 특유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다.'
신성을 이용한 공격은 균열핵의 근간을 뿌리째 뽑아내는 듯했다. 그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는 마경의 기운. 이 흐름을 몰아붙이듯 성가대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 합창했다.
검은 점액질이 타들어 가고, 마경의 심장은 점차 맥동이 멎어갔다. 그렇게 칙칙한 회색빛으로 물든 균열핵이 아래로 추락했다.
파삭.
지면과 맞부딪힌 심장이 산산조각 났다. 마치 눈덩이가 부서지는 것처럼 덧없는 모습. 이를 본 사람들이 기뻐하려던 찰나···
······끔뻑.
벽화 속의 여자가 눈을 떴다.
눈꺼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악의가 주변을 한 차례 훑어봤다. 눈알 속에 꽉 들어찬 수십 개의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한 성직자들이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돌연 모닥불과 횃불이 꺼졌다. 드리워진 그늘. 누군가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롤랑이 급히 소리쳤다.
"발검!!"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화르륵!
검에 맺힌 새하얀 신성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신의 은혜와도 같은 찬란한 빛. 이를 본 여자가 입김을 부는 시늉을 했다.
훅—
생일 케이크에 꽂은 양초처럼, 성기사들의 검에 깃든 빛이 모조리 꺼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당황한 기사들과 절망에 빠진 성직자들. 벽화 속 여자가 마구 웃어댔다.
격앙된 웃음소리가 마치 까마귀의 울음처럼 들린다. 끔찍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에서 비웃음 소리가 어지럽게 메아리친다.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소음···
콰아앙!!
돌연 요란한 폭발음이 터졌다.
거짓말처럼 뚝 멎은 웃음소리. 이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던 중··· 그늘 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우진이 마법으로 불을 피워냈다. 그 불꽃이 꺼진 모닥불에 옮겨붙자, 다시 지하 유적의 내부가 환히 밝혀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벽화 속 여자 머리에 망치가 하나 박혀 있었다.
"정신 사나워서 일단 때려 부쉈는데, 이거 나중에 문제가 되려나요?"
우진이 그리 중얼거렸다. 이에 제정신을 차린 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네. 자네다운 해결 방법이야."
"방금 건 도대체 뭡니까?"
"균열의 저주일세. 실제로 겪는 건 처음이군."
균열핵이 파괴될 때, 기괴한 저주를 단말마처럼 내뱉는 경우가 있다. 매우 드문 사례라 연맹의 기록에서도 자주 언급되진 않는 일.
"운이 나빴다는 얘기군요."
"자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 행운이라 여겨야겠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그 저주에 당하고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겐가?"
보우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하자, 우진은 큰 고민 없이 노하우를 알려줬다.
"그냥 익숙해지면 됩니다. 저런 방식의 공격을 하는 놈들이 더러 있어요."
"사실상 버티는 수밖에 없단 거군."
보우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수양이 깊은 편이라 자부하건만, 아까 전의 상황을 견뎌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안으로 본 광경을 복기했다.
균열핵이 부서지는 순간,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존재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감히 형언할 수 없이 불길하고 강대한 존재···
'······올드원.'
균열 너머에서 온 존재를 칭하는 단어였다.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아온 군주들. 교단 연맹이 계속 원정을 이어간다면 끝내 맞닥뜨리게 될 괴물이다.
순교자 유르기스는 올드원 중 하나를 사냥하여 전설이 되었다. 현세의 인간이 그 위업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던 보우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우진이 벽에 때려 박아둔 망치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석재 벽돌이 우르르 무너지며 벽화의 상반신이 날아갔다.
'······저 사내라면 가능할지도.'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늑대들의 시간.
막판에 불미스러운 사고가 하나 터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번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이야···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네?'
유적 밖으로 나온 우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마경의 곰팡이와 검은 나무들이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불이 번져가며 산과 들판을 잿가루로 만드는 듯한 광경. 균열핵이 정화 당하여 마경의 초목들이 힘을 잃어갔다.
'마경을 없애는 게 정말로 가능할 줄이야.'
말로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우진은 예전에 균열핵을 몇 번 부숴봤지만, 그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질 않았다. 그렇기에 균열핵을 부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했는데··· 이게 방식의 차이가 컸다.
균열핵을 단순히 힘으로 때려 부수는 건, 잡초의 이파리만 뽑아내는 수준의 작업이다. 뿌리가 남아 있으니 오래지 않아 균열핵이 복구된다.
반면, 성수와 기도를 통한 정화는 우물에 독을 풀어놓는 것과 비슷했다. 균열핵이 다시 재생하지 못하도록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마경까지 함께 정화한다.
균열핵의 침식 능력을 역으로 이용하는 정화. 교단 연맹은 이를 역침식이라 불렀다.
'이 짓을 몇 번만 더 하면, 개척 도시 주변의 땅은 금방 수복할 수 있겠는데···'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균열핵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도 일인 데다가, 값비싼 성수를 왕창 들이부어야 했고,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사제도 여럿 필요하니까.
그중 가장 중요한 사제들이 저주에 당한 건 간과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금방 벽화를 때려 부순 덕분에 피해가 적긴 했지만, 성가대의 인원들은 아직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최소 2주 정도는 편히 요양해야 할 듯했다.
'잠시 원정이 중지되겠군.'
롤랑과 보우, 성기사들은 저주를 잘 견뎌내어 전력의 손실이 거의 없지만···
사제들의 공백은 원정군의 사기에 영향을 줄 터였다. 그렇기에 롤랑과 병사들은 당분간 휴식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자, 출발!"
롤랑이 그리 소리쳤다. 명령에 응하여 병사들이 개척 도시를 향해 전진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죽은 곰팡이가 신발 밑창에 잔뜩 들러붙었다. 소복이 쌓인 눈밭을 연상케 하는 느낌.
늑대들은 발에 닿는 감촉이 어색한지, 다소 어정쩡하게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마치 억지로 신발을 신은 강아지가 걷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우진은 피식 웃었다.
'저놈들을 보는 게 의외로 재미있단 말이지.'
원정이 잠시 멈추더라도 지루할 틈은 없을 듯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하다, 심심할 때마다 녀석들과 함께 사냥하러 가면 될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늑대들과 함께 걸었다.
* * *
열흘의 시간이 흘러갔다.
우진은 그동안 팔자 좋게 시간을 보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심심풀이 삼아 병사들과 노름도 좀 했다. 원정군에 속한 사람들과 친목을 다져놓는 것도 좋을 듯했으므로.
병사들의 주된 일과는 벌목이었다.
마경의 검은 나무들을 베어내는 일. 이는 기껏 정화한 땅이 마경에 잠식당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우진의 일과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슬슬 출발해 보자."
늑대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이 안전히 벌목할 수 있도록 주변을 순찰하며, 눈에 띄는 마수를 토벌한다. 산책 삼아 시간을 때우기 좋은 임무였다.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가던 중···
마수의 냄새를 맡았는지, 문득 코끝을 굼실거리는 렉스. 늑대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태도였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직후 녀석들이 쏜살같이 깊숙한 숲속을 향해 달렸다.
"······뿌에에엑!!"
그리고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 그 목소리의 정체를 구경하기 위해, 우진은 늑대들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겨갔다.
늑대 네 마리가 토끼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늑대들을 공격했던 마수 무리. 서로를 알아본 건지, 토끼들 또한 신경질적으로 울며 이빨을 드러냈다.
삐드득—
토끼들의 송곳니가 길쭉하게 자라났다. 어지간한 맹수보다 더 포악한 이빨. 한 번이라도 물리면 살점이 크게 찢어진다.
우진은 놈들의 머릿수를 세어봤다. 얼추 서른··· 아니, 헤아리는 중에도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소 쉰 마리가 훌쩍 넘었다.
'지난번보다 무리가 더 커졌군.'
그렇기에 토끼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늑대는 고작 네 마리뿐이다. 지난번에 놓쳤던 사냥감이 자기 발로 돌아온 상황.
우진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팝콘 대신 씹을 육포를 품속에서 꺼냈다.
'구경이나 해볼까.'
머릿수가 밀려도 상관없다.
그동안 토끼 무리가 커졌지만, 늑대들은 불합리한 수준의 성장을 거친 상태였으니까. 녀석들은 코볼트의 내단을 왕창 집어먹은 덕분에 지난번보다 곱절은 더 강해졌다.
콱, 콰득!
갈색 늑대. 션의 머리가 순간 흐릿해지더니, 좌우에서 덤벼들던 토끼 두 마리의 목을 거의 동시에 물어 뜯어냈다.
딱히 재주를 익힌 건 아니다.
그저, 신체 능력이 월등해진 덕분에 저런 움직임이 가능해졌을 뿐. 갈색 늑대가 한바탕 울부짖으며 토끼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를 본 우두머리 토끼가 당황했다. 지난번에 상대했던 늑대와 같은 놈이라 믿기 어려운 힘. 심지어 다른 늑대 또한 저놈 못지않게 강해진 상태였다.
지난날의 분풀이를 하듯 날뛰어대는 늑대 두 마리. 션과 얀이 정면에서 토끼 마수를 솜인형 마냥 찢어발겼다. 시간 끌기조차 안 될 만큼 격의 차이가 극심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 토끼 무리의 우두머리가 힘껏 울음소리를 흘렸다.
"삐에엑!"
신호에 응하여, 토끼들이 급히 달아났다.
퍽, 퍼버벅!
두 줄기의 촉수가 달아나는 토끼들을 줄지어 꿰뚫었다. 어느새 퇴로를 막은 렉스가 도망치는 토끼를 마구 찔러 죽이기 시작했다.
앞뒤로 갈려 나가는 토끼 무리.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몸을 빼내야 한다. 그리 판단한 우두머리 토끼는, 부하들을 미끼로 던져놓은 후 도망치려 했으나···
타앗!
미샤가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렉스의 등을 구름판 삼아 도약하는 암늑대. 그 서슬 퍼런 송곳니가 우두머리에게 들이닥쳤다.
'끝났군.'
우진은 육포 자투리를 입에 던져넣은 후. 늑대들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작은 언덕처럼 쌓인 토끼 사체 위에서, 늑대 네 마리가 각자 근엄하게 자세를 잡고 있었다.
우진은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누가 보면 용이라도 잡은 줄 알겠네.'
토끼 몇 마리 잡아놓고선 왜 저렇게 폼을 잡는 걸까. 입이 근질거렸지만··· 굳이 그 얘기를 해서 늑대들의 기를 죽이진 않았다.
보우의 말에 따르면, 렉스를 포함한 늑대들의 나이는 상당히 어린 편이었다. 한창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러니 가끔 분위기를 잡더라도 존중해 줘야겠지.
"오늘도 수고 많았다."
우진은 녀석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준 후. 단검으로 토끼의 배를 갈라서 속에 든 내단을 하나씩 추려냈다.
그 모습을 본 늑대들도 토끼 사체를 뒤적여서 내단을 뽑아냈다. 오래지 않아 수북하게 쌓인 내단. 우진은 그것을 늑대들에게 번갈아 가며 한 개씩 먹였다.
그러던 중···
"끅, 케헥!"
내단을 받아먹던 션이 갑자기 헛기침했다.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몸뚱어리.
삐드득—
돌연 늑대의 두 송곳니가 길쭉하게 자라났다. 마치 검치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모습. 당황한 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송곳니가 길어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에 우진이 조언했다.
"윗턱의 힘을 빼봐. 뭘 씹으려 하지 말고."
녀석을 자리에 앉힌 후 진정시키자, 송곳니의 길이가 조금씩 줄어들며 원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이를 본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첫 재주를 얻었구나."
송곳니가 길어지는 재주.
전투를 하거나 질긴 고기를 먹을 때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사소하지만 활용하기에 따라 여러 상황에 도움이 된다.
다른 늑대들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우진은 남아있는 내단의 개수를 찬찬히 헤아렸다. 총 열여섯 개.
'션은 재주를 얻었으니 더 먹일 필요가 없고··· 운이 따라 준다면 나머지 녀석들도 이 재주를 얻을 수 있겠어.'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토끼처럼 나약한 마수의 내단은 먹더라도 효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 션에게 재주가 계승된 건 아주 운 좋은 사례였다.
우진은 내단 하나를 집어서 렉스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녀석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등의 촉수를 과시하듯 앞으로 내밀었다.
촉수가 있으니 송곳니가 길어지는 재주는 없어도 된다는 듯한 태도. 아무래도 나머지 내단을 친구들에게 양보하려나 보다.
'기특한 녀석.'
우진은 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얀과 미샤에게 번갈아 가며 내단을 한 번씩 먹였다. 그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삐드득—
얀이 송곳니가 길어지는 재주를 습득했다. 허나 미샤는 나머지 내단을 전부 먹었음에도, 끝내 재주를 얻지 못하여 잔뜩 풀이 죽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우진은 그리 위로하며··· 늑대들과 함께 제3 개척 도시로 돌아왔다.
직후 눈에 띈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서 값비싼 훈제 돼지고기를 잔뜩 구매했다. 이는 션과 얀이 재주를 얻은 걸 축하하고, 미샤의 실패를 위로하기 위한 특식이었다.
늑대들은 게눈 감추듯 고기를 먹어 없앤 후 쩍쩍 하품해 대더니, 곧 방구석에 둥글게 뭉친 채로 잠을 청했다.
서로의 몸을 베개 삼아서 머리를 기댄 늑대들. 그 모습이 썩 우애가 좋아 보였다.
'······시간이 좀 남는군.'
밖에 나가서 도시를 한 번 산책해 볼까. 우진이 그리 생각하던 중···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보우가 온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곧 문고리를 잡아 비틀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사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진 님이 맞으십니까?"
"······제가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저는 전령입니다. 진 님에게 운송해야 할 편지가 하나 있어서 갖고 왔지요."
사내가 옆구리에 찬 가방을 뒤적여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우진은 그 편지를 선뜻 넘겨받았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봉투. 그런데 발송인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 겁니까?"
"익명으로 보내진 편지입니다. 혹시 수령을 원치 않으신다면 반송 조치하겠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자니 봉투 속 내용물이 궁금했다. 우진이 편지를 받아 가자, 역할을 마친 전령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떠났다.
굳이 뜸 들이지 않고 봉투에 눌어붙은 밀랍을 부러뜨렸다. 그러고 나서 속에 든 편지를 꺼내 한 번 읽어봤다.
그 내용은 미사여구 없이 담백했다.
우진과 한 번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으니, 언제가 되었든 편지에 적혀 있는 장소로 한 번 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 이에 우진은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누가 보낸 편지일까.'
편지의 필기체가 꽤 멋있었다.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정갈한 느낌.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는 상황이니, 이 글귀를 쓴 사람을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겨갔다. 우진은 오래지 않아 편지 속 언급된 장소에 도달했다.
'······좋은 저택이로군.'
멋들어진 생김새의 저택. 비록 그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값비싼 석재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벽을 타고 자라난 덩굴 식물도 장식물의 일종처럼 보였다.
그 대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노크했다.
드르륵—
문의 위쪽 부분이 열리며 작은 틈새가 생겼다.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뚫린 엿보기 창문이었다.
곧 안쪽에서 젊은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용무로 온 거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진이 그리 말하며 편지를 들어 보이자, 사내는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안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빗장에 겹겹이 걸린 잠금을 해제하는 소리.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우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내는 다시 잠금장치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자물쇠들은 구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해괴한 생김새를 지녔다.
이를 통해 집주인의 특징을 추측해 보면··· 개척 도시의 저택을 살 만큼 돈이 많고,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내게 편지를 보낸 걸까.'
이는 직접 대면하면 알 수 있으리라.
"제 뒤를 따라오십시오."
사내가 앞서 걸어갔다. 우진은 그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곧 사무실 문 앞에 선 사내가 공손히 노크하며 말했다.
"상단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문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음색이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누구지?'
우진이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보다, 사내가 문을 열어젖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한 여자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내심 예상한 것보다 더 어린 여자였다. 기껏해야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부스스한 금발의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진은 저 여자의 이름과 정체를 알고 있다.
'신디.'
······황금충의 막내딸.
후계자.
황금충 볼프의 막내딸, 신디에 대한 평판은 매우 부정적인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공교로웠으니까. 볼프가 돌연 급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릭과 세드릭 또한 동시에 살해당했다.
가장과 장남, 차남이 한꺼번에 죽은 데다가, 볼프는 십여 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기에··· 신디는 황금충의 막대한 재산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 호사가들은 이 모든 게 신디의 계략이라 떠들어댔다.
데릭과 세드릭이 마경에서 상단의 간부 노릇을 하는 동안, 신디는 장벽 안쪽에서 홀로 살아왔다. 이는 볼프가 그녀에게 상단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
차별에 불만을 느낀 막내딸이, 어느 날 독한 마음을 먹고 가족들을 살해했다···
"선뜻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제 이름은 신시아라고 해요."
그 소문의 주인공이 말을 걸어왔다.
'가명을 쓰는 건가.'
신디는 대외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라, 가명을 쓰면 손쉽게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우진을 속일 순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데릭과 세드릭 형제의 기억이 일부 남아있으니까.
"만나서 반갑군요, 신시아 양. 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 묻자, 신디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모험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 모험 속의 주인공은 더더욱 좋아하고요! 진 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모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큰 기쁨이 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신디가 능청스럽게 철없는 소녀 흉내를 냈다. 전형적인 부잣집 막내 아가씨 느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대화를 주도하려는 듯했다.
일단은 어울려주는 게 좋으리라.
"저야 좋지요.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감사해요! 오늘도 제 자랑거리가 하나 더 늘었네요. 진 님의 마음이 바뀌시기 전에 전채 요리라도 내어 드려야겠어요."
활기차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신디. 우진은 그녀와 함께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둥근 식탁에 마주 앉자, 오래지 않아 전채 요리와 함께 값비싼 술이 나왔다.
"저는 이 주스를 마셔야겠네요. 아쉽지만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신디는 그리 말하며 포도 주스를 홀짝였다. 우진도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살짝 높군.'
향과 맛이 풍부한 혼합주. 손님을 기분 좋게 취하도록 만들기 좋은 술이었다. 적당한 알코올은 사람의 입을 가벼워지도록 만들기 마련.
우진은 한껏 방심한 사내처럼 술을 들이켰다. 그리 해야 신디가 숨기고 있는 진짜 목적을 알아내기 편할 듯했으니까.
"어떤 이야기부터 들려드릴까요?"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덩치 큰 괴물이 나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우진이 겪은 일화를 하나 이야기할 때마다, 신디는 그 내용이 너무나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맞장구쳤다.
······솔직히, 서로 번거로운 짓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정작 그 내용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속내를 숨긴 채로 무의미한 대화만 계속 이어가고 있달까.
물론 이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는 건 우진뿐이다. 신디는 본인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처세술은 안 속아 넘어가는 게 이상할 만큼 뛰어났으니.
그렇기에 슬슬 본심이 나올 때가 되었다.
"······아주 유명한 상인의 재산을 운송하는 일도 맡으셨다 들었는데요."
신디가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황금충 볼프를 말하시는 겁니까?"
"아! 맞아요. 그분이 남긴 재산을 장벽으로 옮길 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들었어요. 갑자기 두 남자분이 괴물로 변했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이에 우진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의뢰 도중 황금충의 두 아들이 괴물로 변했습니다."
"그런가요."
우진이 확답하자, 신디가 잠시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질문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우진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대꾸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의뢰 도중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몇 번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좀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신디가 냉큼 떡밥을 받아 물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곤 있지만,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어서 안달난 듯한 태도. 이를 본 순간 짐작했던 가설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신디가 이런 접대를 하는 건, 당시 현장에 있던 우진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역시··· 신디는 이번 일에 연관되지 않았어.'
호사가들은 황금충과 두 아들이 살해당한 게 막내딸의 짓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신디는 가족들을 살해할 이유가 없다.
'황금충이 직접 내정한 후계자니까.'
볼프는 진즉 막내딸이 품은 재능을 알아봤다. 그렇기에 위험하고 힘든 현장의 일을 두 아들에게 맡기고, 신디는 장벽 안쪽에서 상단을 물려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릭과 세드릭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재능이 여동생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아들은 상단을 위해, 큰 미련 없이 신디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했다.
이렇듯 황금충의 가족들은 우애가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신디가 마경으로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복수.'
황금충의 후계자는 가족들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다.
'이걸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자연히 생각이 길어진다. 우진이 한참 동안 말없이 술만 홀짝거리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신디가 입을 열었다.
"술이 더 필요하신가요? 마침 지하실에 좋은 와인이 몇 병 있는데."
"그건 됐고··· 다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시오. 그리한다면 저의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서로 손패를 보여주자.
그 말에 신디는 잠시 머뭇거리다 미소 지었다. 표정 관리가 한 박자 늦은 모습.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네요."
내심 예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신디가 이런 번거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모으는 건, 가족들의 죽음을 통해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더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교훈.
황금충의 막내딸이 이곳에 있다. 그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순간, 신디는 가족들과 같은 방식으로 암살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는 협상을 이어갈 수 없다.
"슬슬 돌아가야겠군요."
우진이 떠날 채비를 했다. 당황한 신디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어딜 가시려는 건가요?"
"속이 좀 더부룩하네요. 굳이 디저트까지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능청스레 대꾸하며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문지기 노릇을 하던 젊은 사내가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을 잡아 세워둘 명분이 없기에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다가 뒤따라 나온 신디가 눈치를 줬는지 급히 문을 열었다.
"훗날 생각이 바뀌면 다시 연락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저택 밖으로 나온 우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갔다. 신디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지 뒤통수가 조금 따가웠다.
'다른 방법이 없다.'
한참 고민한 끝에 결론 내리기를···
도와줄 거면 확실히 도와줘야 하고, 그렇지 않을 거면 아무 도움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만 대충 넘겨주고 발을 빼버렸다간 일이 더 번거로워질 듯했으니까.
'그 마녀는 너무 위험해.'
다른 사람의 생김새를 흉내 내는 재주. 거기에 암살자로서의 기량까지 출중했다.
신디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괜히 정보를 넘겨주면 신디 혼자서 그 마녀를 쫓게 될 텐데.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복수는 커녕, 도리어 살해당할 듯했다.
저 아이가 죽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오늘 처음 본 타인이지만. 데릭과 세드릭 형제의 기억을 일부 계승 받아서 그런지, 생판 남 같지가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죽어버리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은 느낌.
그런 의미에서···
우진이 신디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한 건.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걸 넘어, 내부 사정을 아는 조력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날 경계하게 만든 것 같은데··· 뭐, 기다리면 언젠가 연락이 오겠지.'
현시점 우진 말고는 정보를 지닌 사람이 없다. 그러니 신디가 이쪽을 수상쩍게 여기더라도, 결국 도움을 청하게 되리라.
'마녀사냥.'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냥이다.
그 마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신중히 고민하며 견적을 잡아봐야 할 듯했다.
* * *
1차 원정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잘 훈련된 병사와 기사들이 나서니 어지간한 마수는 금방 정리되었다.
"······왠지 마수들이 약해진 것 같은데."
보우가 문득 그리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우진이 의문을 표하였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라네. 몇 년 전에 비해 마수들이 확실히 약해졌어. 기분 탓이 아니야."
보우는 심안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본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들여다본 마수들의 힘은 전체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그럼 좋은 일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이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면 더 수월히 마경을 정벌해나갈 수 있지 않겠나.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안 가는군."
이 정체 모를 현상에 대한 단서가 없다. 그러니 백날 고민해도 답을 얻진 못하리라.
마수들의 힘이 과거에 비해 약해져서 그런지, 1차 원정은 교단 연맹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골칫거리는 늘 생겨나기 마련.
"제4 개척 도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롤랑이 전령을 통해 들은 소식을 가져왔다. 이에 보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긴 모리안의 신도들이 맡은 구역일 텐데··· 왜 문제가 생긴 거지? 그쪽 교단의 병력들은 우리보다 더 강하잖아."
"지형이 문제라 하더군요. 거미 마수들이 동굴 속에 자리를 잡았는데, 거미줄을 워낙 쳐놔서 진입할 수가 없답니다."
"······얘기만 들어도 골치 아파지는군."
거미 마수는 피해 가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놈들이 자리 잡은 동굴은 균열핵이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장소. 마경을 정화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곳을 뚫어야 한다.
"이봐 진, 혹시 좋은 방법이 없는가?"
보우가 곁에 선 우진에게 물어봤다. 이에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눈으로 직접 봐야 가늠이 될 것 같군요. 내일 그쪽 도시로 가보도록 하죠."
"자네를 너무 귀찮게 만드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가해서."
마녀사냥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나름의 숙성 기간이 필요하달까.
그전까지 달리 할 일이 없고, 약해빠진 마수를 상대로 힘 자랑을 하는 것도 슬슬 지겨웠다. 기분 전환 삼아서 다른 도시를 한 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음날, 이른 아침.
우진은 전령과 함께 도시를 떠날 채비를 했다. 그 전령의 얼굴이 익숙했다.
"레이먼드. 꽤 오랜만에 뵈는군요."
"그러게 말이야."
레이먼드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줄곧 전령 일을 하느라 고생하는 중이었다.
이는 사실상 징계였다.
레이먼드는 큰 임무를 실패했다. 데릭과 세드릭 형제가 살해당한 것. 그로 인해 레이먼드는 다른 성기사들이 꺼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또 발에 땀나도록 걸어야겠구먼···"
한숨을 내쉬며 짐가방을 둘러매는 레이먼드. 이에 우진은 씩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늑대들이 달려왔다. 우진은 손짓하여 갈색 늑대, 션을 가까이 불러 세웠다.
"이 녀석의 등에 타십시오."
"······오, 여신이시여."
한 사내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불꽃.
생각해 보니 꽤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나왔다. 잔뜩 신이 난 늑대들은 쉼 없이 지면을 밀어 차며 내달렸다.
연신 두 뺨을 훑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 그 속도감을 사흘 정도 즐기고 나니, 이번 외출의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4 개척 도시.
"후딱 일 처리를 마친 후 돌아가죠. 원정군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우진이 그리 묻자, 레이먼드는 선뜻 손을 들어서 방향을 지목했다. 최근 오고 갔던 곳이라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 좌측 숲속에 작전지가 있어. 균열핵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위험 지역이지."
"바로 가봅시다."
굳이 도시를 거치지 않고, 현장으로 가서 원정군과 합류한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그리 행동하는 게 좋을 듯했다.
작전지 쪽에서 연기가 여럿 올라왔다. 아무래도 점심 식사 준비를 하는 모양. 계속 걸음을 옮겨가자, 저 멀리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은 병사들과 막사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 자네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병사들이 늑대를 보면 당황할 거야. 내가 먼저 가서 언질을 준 후 다시 돌아오겠네."
"그러는 편이 현명하겠군요."
투신 모리안의 신도들은 마수를 싫어한다. 늑대들의 목에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긴 하지만, 아무런 예고 없이 대뜸 늑대를 데려가면 원정군의 반응이 좋지 못할 것이다.
이런 특이사항을 전하는 게 전령의 역할.
레이먼드가 홀로 주둔지에 걸어 들어갔다. 우진은 늑대들과 함께 육포를 씹으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레이먼드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전신 갑옷을 입은 성기사 세 명.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과 눈썹, 그리고 눈동자를 지닌 중년의 사내. 그의 옆구리에는 펜싱칼처럼 생긴 장검, 레이피어가 매어져 있다.
'붉은 말벌, 알베르.'
제4 원정군의 지휘관.
붉은 말벌이란 별명은 그의 특출난 칼 솜씨와 엄격한 성정에서 비롯되었다.
"알베르 님, 제가 아까 말했던 마수 사냥꾼이 바로 이 사내입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는 꽤 조심스러운 태도로 우진을 소개했다.
알베르는 무심한 눈으로 우진의 행색을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늑대들을 한 번 훑어봤다. 녀석들은 바닥에 배를 붙인 채로 육포를 잘근잘근 씹어먹고 있었다.
"사냥개치곤 너무 크고 강하군. 저런 놈들을 정말 통제할 수 있는 건가?"
알베르가 다시 이쪽을 보며 질문했다. 우진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녀석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한 말을 증명할 수 있겠나?"
"어렵지 않죠."
우진은 렉스를 향해 손짓했다. 씹던 육포를 삼킨 후 이쪽으로 다가오는 붉은 늑대. 녀석의 윗턱을 잡아 벌리자, 주둥이 속에 꽉 들어찬 이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냐면···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봤던 악어 서커스를 한 번 재현해볼 생각이었다.
스윽.
우진은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깊게 들이밀었다. 보는 사람이 아찔해질 만큼 위험한 짓거리. 하지만 렉스는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배짱이 대단하군."
알베르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우진은 바깥으로 머리를 빼낸 후. 렉스의 입속에 육포를 하나 더 던져줬다.
입국 절차와 같은 일이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
"마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오게."
알베르와 성기사들이 앞서 걸음을 옮겨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우진. 오래지 않아 큼지막한 동굴과, 그 주변에 쌓여 있는 거미의 사체 열댓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선 거미 사체를 살펴봤다. 사람 몸통만큼 커다란 거미. 놈의 시커먼 이빨에 이슬처럼 독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우진은 손을 내밀어 독을 만지작거리더니, 맛을 보듯 혀끝에 가져다 댔다.
'독은 약하네.'
피부에 닿거나, 먹더라도 별 상관없고. 상처에 침투되어 피와 섞여야 중독되는 독 같았다. 이런 독은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편이었다.
문제는 다른 쪽인데···
단검으로 배를 가르자 시허연 거미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늘날 성기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골칫거리.
"여기 이놈들은 어떻게 잡은 겁니까?"
우진이 그리 묻자, 알베르가 거미 사체 주변에 떨어져 있는 긴 나무 작대기를 가리켰다.
"저 막대기로 거미줄을 쳐서 유인했지. 먹이가 잡힌 줄 알고 거미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더군. 그런데 이 짓을 여러 번 반복하니 저쪽에서 눈치를 챈 것 같다."
거미줄로 가득한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원정군은 거미를 동굴 밖으로 끄집어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작대기를 이용한 낚시질도 그중 하나였다.
거미는 거미줄의 진동을 통해 사냥감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 특성을 활용하여 원정군은 거미를 몇 번 유인해 사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거미들도 그 수법을 눈치챈 듯했다. 거미줄을 흔들더라도 놈들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얘기를 듣던 레이먼드가 의견을 말했다.
″불을 질러서 거미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어떻습니까? 연기를 동굴 속으로 흘려보내면 놈들도 기어 나올 것 같은데요."
"자네가 없는 동안 시도해 봤지만, 그 방법도 큰 성과는 없었다."
이는 토끼처럼 작게 땅굴을 파고 생활하는 짐승에게만 통하는 사냥 방식이었다.
연기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동굴을 막고 불을 지피더라도, 그 연기는 동굴의 입구 주변에만 머무를 뿐.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질 않았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우진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학습 능력이 높은 데다가, 무리 생활을 하는 거미 마수. 흔치 않은 사례로군.'
거미들은 대부분 단독 생활을 추구한다.
동족 포식을 꺼리지 않는 놈들이라 그렇다. 수컷이 짝짓기를 하러 오더라도, 구애를 무시하고 잡아먹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수의 본성을 거스르듯 무리를 형성하는 경우. 이런 경우는 대체로···
'······아주 강력한 우두머리 개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고작 이런 곳에 그 정도로 위험한 마수가 있다고?'
이를 확인하려면 저 동굴 속으로 내려가 봐야 하리라. 견적을 잡기 위해 우진은 동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동굴의 내벽 전체를 감싸듯, 터널처럼 생긴 거미줄 형태. 주로 깔때기거미가 이런 형태의 집을 짓는다.
'오랜만에 한 번 해볼까.'
우진이 돌연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이를 본 레이먼드가 의문을 표했다.
"뭘 하려는 건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 뭉뚱그려 대꾸한 후. 맨발이 된 우진은 동굴 속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이 지면에 뒤덮인 거미줄에 닿았다.
이를 본 성기사들은, 우진이 곧 거미줄에 얽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리라 예상했지만···
희한하게 우진의 발은 거미줄에 걸리질 않았다. 동굴 내부를 산책하듯 둘러보는 우진. 이를 본 성기사들은 내심 당황했다.
"이봐! 어떻게 한 건가?"
알베르가 소리쳐 질문했다. 이에 답하기 위해 우진이 동굴 입구로 돌아왔다.
"요령이 있습니다. 발을 자세히 보십시오."
다시 거미줄 위에서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암만 봐도 평범히 움직이는 것 같았기에, 성기사들은 재차 의아함에 잠겼지만···
"······미세하게 발뒤꿈치가 들려 있군."
알베르가 문득 그리 중얼거렸다. 그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발 전체를 디디면 거미줄에 걸리게 되니, 발끝만 써서 걸음을 옮겨가는 겁니다. 이러면 줄에 닿는 면적이 적어서 발을 쉽게 떼낼 수 있죠."
거미가 줄에 걸리지 않는 건, 입으로 발에 기름칠을 하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는데···
이건 사실 틀린 말이다.
거미를 해부해 봐도 기름을 만드는 신체 기관은 발견할 수 없다. 거미가 줄에 걸리지 않는 건, 발끝만 이용하여 줄에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기 때문이다. 마치 숙련된 발레리나처럼.
"그리고 거미줄이 전부 끈적거리는 건 아닙니다. 디뎌도 안전한 곳이 있어요."
거미집은 세로줄인 방사실과, 가로줄인 나선실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방사실은 점성이 없어서 밟아도 들러붙질 않는다.
설명을 들은 성기사들이 거미집을 확인했다.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보니 거미줄의 종류가 구분되는 것 같긴 했지만···
"······이것만 골라 밟을 수 있다고?"
레이먼드가 의문을 표했다.
거미줄이 매우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줄을 구분하여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듯했다. 일단 발을 디디면 가로, 세로 구분 없이 거미줄을 왕창 밟게 될 테니까.
이에 우진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발끝만 써야죠."
"아···"
"제게 한 번 배워보겠습니까?"
레이먼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거미줄을 골라 밟는 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네만 할 수 있는 짓이야."
"요령을 터득하는 게 어렵긴 하죠."
그 거절에 우진은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지금껏 줄곧 남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뭔가를 가르쳐줄 기회가 생겨서 조금 들떴는데··· 성기사들의 입장에선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기술이었다.
문제는, 이번 일이 우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저 안의 균열핵을 정화해야 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동굴 속으로 사제와 성기사들이 들어가야 균열핵을 정화할 수 있다.
우진이 저 안의 마수들을 모조리 사냥한 후. 가마라도 하나 구해서 사람들을 손수 실어 날라야 하는 걸까?
이에 알베르가 대답했다.
"······그보다는 쉬운 방법이 있다."
* * *
투신 모리안을 섬기는 신도들은 무기에 축복을 불어넣을 수 있다. 지난번 롤랑과 병사들이 쓴 은화살은 그리 제작된 물건 중 하나다.
해가 높이 뜬 정오.
······의식이 시작된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사제들이 긴 시간 동안 축성한 무구를 알베르에게 건넸다.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창. 그것을 집어 든 알베르가 창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알베르를 향해, 성기사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화륵—
선두에서 걷던 성기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붉은 신성. 그것을 손에 쥔 기사가 노래하듯 구절을 읊조린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듯···"
그리 말한 성기사가 칼을 내뻗었다.
카앙!
성기사의 칼과 알베르의 창이 부딪혔다. 직후 칼날에 깃들어 있던 신성이 창날로 옮겨붙었다. 한층 더 선명한 붉은 빛을 품게 된 창날.
신성을 건넨 성기사가 옆으로 물러났다. 뒤따라온 다른 성기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화륵—
"평화로울 때가 있으면,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성기사가 앞서 들었던 구절의 뒷내용을 이어 읊조리더니, 그 또한 칼을 내뻗었다.
카앙!
또 한 번 신성이 옮겨졌다. 그로 인해 알베르의 손에 들린 창날이 한층 더 붉어졌다.
투쟁의 교단은, 저들의 신성력이 투신 모리안이 내린 불꽃이라 여겼다.
작은 불씨가 모여 큰 화염으로 거듭난다. 여러 사람이 경전의 구절을 이어 읊조리고, 신성을 건네는 것으로 더 큰 힘을 품게 된다.
성기사들의 읊조림과 함께···
묘한 운율 속에서 두 쇠붙이가 연거푸 맞부딪힌다. 마치 대장장이들이 달궈진 쇠를 때리며 부르는 노래 같았다.
"그분께서 나의 손을 가리키며, 검을 쥐라 명하셨고."
카앙!
"나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하시길···"
카앙!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워라."
카앙!
"강하고, 담대하여라."
카앙!
"그리한다면, 불꽃이 함께할 테니···"
카앙!
마지막 성기사가 검을 부딪친 후 물러났다.
여러 사람의 신성을 넘겨받은 창날이 더욱 붉게 빛났다. 홀로 남은 알베르가 손에 쥔 창을 하늘 높이 들었다. 마치 달궈진 창끝으로 태양을 찌르려고 하는 듯했다.
알베르가 마지막 구절을 소리쳤다.
"믿음으로, 악을 섬멸하라!"
화르륵!!
일순 태양의 불꽃이 창날에 옮겨붙은 듯한 느낌이 든 건 눈의 착각일까?
우진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석양처럼 붉고 눈부신 휘광이 넘실거리는 창. 알베르가 그것을 내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의 과업을 그대에게 떠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군··· 마수 사냥꾼 진. 이 창으로 균열핵을 정화해줄 수 있겠나?"
우진이 웃으며 창을 받아 들었다.
"까짓거, 한번 해보죠."
거미굴. (1)
이번 임무는 단순했다.
거미들의 동굴에 잠입한 후. 그곳에 균열핵이 있을 시, 모리안의 신도들이 축성한 창을 꽂아서 정화하는 것.
아쉽게도 창은 사용할 때마다 품고 있는 신성이 줄어든다. 따라서 이 멋진 무기를 마지막 순간, 딱 한 번만 써야 했다.
'마수를 상대로 이걸 쓸 수 없다니··· 아쉽네.'
분명 손맛이 기가 막힐 것 같지만 자중해야 했다. 괜히 신성을 낭비하여 균열핵을 정화할 힘이 부족해진다면, 똑같은 일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우진은 미련 없이 창을 붕대로 칭칭 감았다. 빛을 내뿜는 창날이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붕대로 몇 번 휘감고 나니, 창이 내뿜는 빛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면 동굴로 잠입해도 거미 마수의 관심을 끌 일이 없으리라.
우진의 귀물. 축소 주문이 깃든 짐가방을 쓰면 이런 수고를 들일 필요 없겠지만···
강력한 신성이 담긴 무기를 귀물과 가까이 둘 경우, 귀물에 깃든 주문이 파괴될 수도 있다고 하여 다소 번거로운 방식을 택했다.
우진이 창을 등걸이 고리에 걸었다. 안정적으로 등에 수납된 장창.
······이제 출발할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도열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한마디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그럴싸한 말이 생각나질 않는 데다가, 이런 걸로 폼 잡는 것도 낯 간지러운 일이라서 그냥 생략했다.
익숙한 그늘 속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네.'
입구 주변에는 마수가 한 마리도 없었다. 아마 원정군을 의식하여 거미들이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좀 내려가다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절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목구멍처럼 둥그렇게 뚫린 낭떠러지.
우진은 슬쩍 고개를 숙여 아래를 살펴봤다. 곳곳에 자리한 거미집과, 그 위를 기어다니는 크고 작은 거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밑으로 내려가야겠군.'
우진이 두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으로는 체중을 지탱하고, 튀어나온 암반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암벽 등반은 익숙하기에 딱히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밑쪽에서 묘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몸을 틀어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미 한 마리가 절벽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덩치가 거의 멧돼지와 맞먹을 만큼 커다랗다.
'날 봤나?'
우진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한 치의 미동조차 없이 경직된 모습.
거미가 절벽을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발을 뻗으면 놈의 머리를 걷어찰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 시커먼 단추 같은 눈들이 이쪽을 응시했다.
곧, 놈의 앞다리가 다가온다···
······콰악!
거미의 발톱이 우진의 어깨를 힘껏 짚었다. 직후 거미는 발판 삼듯 체중을 싣더니, 그대로 몸을 끌어올려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
거미가 우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저 위쪽에 어떤 용무가 있는 모양.
'역시··· 눈이 어둡다.'
거미들은 대부분 시력이 나쁜 편이다.
그렇기에 거미 마수는 가만히 있는 우진의 몸뚱어리를, 절벽에 튀어나온 암반이라 생각했는지 한 번 즈려밟고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거미들을 흘려보내며 안으로 잠입하면 되겠어.'
우진이 절벽을 마저 내려갔다.
그런데 직후 맞닥뜨린 지하 공간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다. 절벽 위에서 본 풍경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거대한 개미굴을 연상케 하는 땅굴들. 이렇듯 공간이 넓은 만큼, 거미들의 머릿수도 많았다. 당장 눈에 띄는 거미만 해도 스무 마리가 족히 넘어갈 정도였다.
'아까 그 거미를 안 죽이길 잘했군.'
만약 거미를 사냥하여 소란을 냈다면, 이곳의 모든 거미들이 우진에게 달려들었을 테고··· 지난번 거머리쥐의 동굴에서 겪었던 것 이상의 고생을 하게 되었으리라.
이 동굴 속 거미들의 머릿수는 부자연스럽다 생각될 만큼 많았다.
'큰 세력을 유지하려면 많은 식량이 필요할 텐데··· 그걸 어디서 조달하는 거지?'
거미는 정적인 사냥 방식을 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놈들은 사냥꾼이라기보단, 낚시꾼에 더 가까운 놈들이었다.
이 낚시라는 건 자리가 중요하다.
아무리 솜씨 좋은 낚시꾼이더라도 자리가 안 좋으면 허탕을 치기 마련. 그런 의미에서 이 동굴은 최악의 장소였다.
한눈에 봐도 먹이가 될 만한 생명체가 적다. 이런 지하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 몇이나 되겠나. 기껏해야 박쥐 같은 놈들뿐인데, 그 작은 짐승으론 거미의 허기를 달랠 수 없다.
동족상잔이라도 하며 버티는 건가?
'일단 정보를 모아보자.'
지면에 안착한 후 앞으로 나아갔다. 거미줄이 양탄자처럼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기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적잖게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이 짓거리도 익숙한 일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진은 거미 마수와 인연이 깊은 편이기 때문이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네.'
마경 깊숙한 곳에서 활동할 때, 아주 강력한 거미 괴물을 상대해본 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거미들을 부하로 거느린 여왕.
거미 여왕은 우진을 거미줄에 박제하길 원했고, 우진은 여왕을 사냥하려 했지만···
박터지게 싸운 끝에 결과는 서로 좋지 못한 방향으로 끝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도 내심 못마땅한 경험이었다.
'지금 상대하면 이길 수 있으려나?'
확신하긴 어려웠다. 우진이 강해진 만큼 여왕 또한 착실히 힘을 쌓아놨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때 당시에는 성과를 보지 못했던 수행이 오늘날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가는 우진. 거미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방심해선 안 된다.
문득 멈춰 선 우진이 바윗돌 뒤에 모습을 숨겼다. 그의 시선이 저 앞쪽, 돌기둥 위에 선 작은 거미 마수를 응시했다.
큼지막한 눈알을 지닌 거미. 흔히 깡충거미라 불리는 종류의 거미다. 놈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묘한 안광을 발하였다.
'저렇게 생긴 놈들은 시력이 좋았지.'
마치 경계병 노릇을 하듯 깡충거미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놈들의 눈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이를 고심하던 중···
아까 절벽에서 봤던 놈처럼 큼지막한 거미가 보였다. 놈이 땅굴 속으로 향한다. 우진은 자연스레 거미에게 다가가, 그 덩치 뒤에 모습을 숨긴 채로 함께 걸음을 옮겨갔다.
직후 우진의 시야에 들어온 건··· 드넓은 방과 거미줄에 휘감긴 고치들. 그것들이 열매처럼 벽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저 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바로 확인에 나섰다.
부우욱!
주변 눈치를 보다, 거미가 없을 때 고치 하나를 잡아 찢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건 다름 아닌 토끼 마수였다.
'아직 살아있군.'
토끼의 눈이 풀리긴 했으나 미약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독으로 마비시켜 숨만 붙여놓은 듯했다.
이곳의 정체는 식량 창고. 우진의 예상과 달리 거미들은 풍족한 식량을 갖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데···'
여러모로 이치를 벗어난 상황이다. 이 위화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이런 생각은 나중에 마저 하고. 우선 균열핵부터 찾아 처리하자.'
개인적인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보단, 임무의 완수가 더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 결론을 내린 시점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작정하고 탐색에 나서자···
생각보다 일찍 목표물이 발견되었다. 여기까진 좋은 일이나, 그 위치가 문제였다.
'이거 골 때리네.'
우진은 위를 보며 한숨을 참았다.
천장과 가까운 곳. 엄청나게 큰 거미집 중심에 균열핵이 놓여 있었다. 사실상 허공에 높이 떠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할까.
아까 절벽을 내려올 때, 저 거미줄을 보고 형태가 좀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장난질을 쳐놨을 줄이야.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가야 하려나.'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중. 위로 이어지는 거미줄들을 찾아냈다.
거미집이 만들어지려면, 기틀이 되는 거미줄이 주변 지형과 연결되어야 하기 마련. 그것 중 하나를 골라잡고선 줄 위에 발을 걸쳤다.
우진이 요령 좋게 거미줄 위를 걸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를 보는 듯했다.
이 짓도 예전에 워낙 자주 해봐서 금방 적응이 되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저 밑에서 경계병 놀이를 하는 깡충거미들인데···
'다행히 이쪽은 안 보는군.'
침입자가 거미줄을 이용할 거란 생각은 못 해봤는지, 깡충거미는 위쪽으로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안심하며 외줄타기를 이어갔다.
좀 높은 곳까지 올라가자, 여러 가닥의 거미줄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우진은 그중 적당해 보이는 것들을 골라 밟으며 걸었다.
그렇게 목표물을 향해 나아가던 중···
'······뭐냐 이 상황은.'
의문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미집에 먼저 온 선객이 있었으니까.
균열핵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왜소한 몸에 걸쳐진 시커먼 로브. 그것에 붙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데다, 황동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가면에 감춰진 시선이 느껴졌다. 우진 또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넌 정체가 뭐냐?"
그리 질문하자···
남자가 말없이 손을 움직였다.
슥, 스윽.
바쁘게 움직이는 두 손.
모양새가 마치 수화를 하는 듯했다. 우진은 당연히 그 뜻을 알아먹을 수 없기에, 다시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키이잉—!
돌연 남자의 두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직후 쏘아지는 주홍색 빛 구체. 이를 본 우진은 급히 상반신을 숙였다.
퍼엉!!
빗나간 작열탄이 동굴의 벽을 갈겼다.
'희한한 기술을 갖고 있군.'
손동작이 왠지 수상한 것 같아서 끝까지 보고 있길 잘했다. 손짓으로 주문을 발현하는 능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입장이 좀 난처해졌다.
놈을 때려 죽이기엔 거리가 너무 먼 데다··· 우진은 아직 거미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얇은 거미줄 한 가닥 위에서 요령껏 외줄타기를 하는 중인 상황.
한 방이라도 맞으면 저 밑으로 추락한다.
쓱, 스슥.
마법사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놈의 태도가 왠지 불순했다. 낌새를 느낀 우진이 몸을 날려 다른 거미줄로 갈아탔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가 손날을 휘둘렀다.
쐐애액!
손날에서 쏘아진 바람의 칼날. 방금 전까지 우진이 서 있었던 거미줄이 뚝 끊어졌다. 발판을 제거하여 추락시키려 한 듯했다.
'······서둘러야겠어.'
영악한 적을 맞닥뜨린 데다, 거미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저 아래의 땅굴 속에서 끝 모를 숫자의 거미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 일 처리를 마친 후 이곳을 떠야 한다.
우진이 거미줄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를 본 마법사가 두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파직, 파지직!
손바닥이 비벼질 때마다 푸른 번갯불이 마구 튀었다. 마치 정전기를 모으는 듯한 행동. 직후 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쩌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퍼런 전류가 이쪽을 향해 쏘아졌다. 우진은 아까 했던 것처럼 옆쪽 거미줄로 갈아타며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문이 한 방으로 끝나질 않았다.
쩍, 쩌정!
마법사가 우진을 향해 연거푸 손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시퍼런 전류. 보아하니 충전해둔 힘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 주문을 쏴댈 수 있는 듯했다.
덕분에 우진은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
몸을 날렸다. 손을 뻗어서 눈에 띈 거미줄을 잡아챈 후, 손목의 힘을 이용하여 또다시 몸을 날렸다. 마치 날랜 원숭이가 나뭇가지 위를 오가는 듯한 모습.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우진은 공격을 피하면서 마법사를 향해 전진했다.
'목 씻고 기다려라.'
거미집이 코앞이었다. 저곳까지 가면 안정적으로 설 수 있는 발판이 확보되고, 짜증나는 마법사를 손수 잡아 족칠 수 있게 되리라.
따악!
마법사가 힘껏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를 들은 우진은 주문을 피할 준비를 했지만···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방금 저놈이 뭘 한 거지?'
그리 의아해하던 찰나.
스르르륵—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 그곳에서 엄청나게 큰 거미 두 마리가 줄을 타고 내려왔다. 놈들의 덩치는 다 자란 황소보다 컸다.
거미 무리의 우두머리 개체들. 놈들이 마법사의 양옆에 자리 잡았다.
'······이것 봐라?'
우진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거미굴. (2)
'저놈의 정체가 뭘까.'
답을 얻지 못했던 의문이 재차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에 대해서 다시 질문해 보고 싶지만, 그 당사자가 도통 협조해 주질 않았다.
슥, 스슥.
마법사가 악단을 지휘하듯,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화를 나눌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 우진으로선 아쉬운 일이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생포한 후 심문하면 되겠지?'
물론 말이 좋아서 심문이지, 저놈을 붙잡고 나서 고문해야 한다는 뜻인데···
당연하게도 우진은 그런 짓거리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일단 시도해본다는 점에 의미를 둬야 하리라.
놈들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마법사는 현재 큰 주문을 준비 중이라 무방비한 상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우두머리 거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거미의 생김새는 똑같지만 몸통의 색깔이 각각 달랐다. 한 놈의 몸통은 녹색이었고, 나머지 한 놈의 몸통은 붉은색이었다.
두 거미가 꽁무니로 이쪽을 겨누었다.
투확!
직후 쏘아지는 끈적한 거미줄. 두 거미가 번갈아 가며 거미줄 뭉치를 갈겼다.
하지만 그 투사체의 속도는 그닥 빠르지 않았다. 궤적을 보고 반응해도, 우진의 움직임은 항상 적의 공격보다 한 걸음 앞섰다.
불규칙하게 좌우로 잰걸음 치며 전진하는 우진. 거미줄 뭉치는 매번 반 박자 늦게 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쭉 전진해서, 놈들을 무시하고 균열핵에 창을 꽂아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지난번 일이 있으니 좀 신중해야겠군.'
지난번 롤랑 일행과 함께 균열핵을 정화했던 순간이 기억났다. 움직이는 벽화와 웃음소리. 그런 변수에 대비하려면, 주변의 위협 요소들을 먼저 제거해야 할 듯했다.
'일단 저놈부터.'
우진이 녹색 거미를 노렸다. 슬며시 속도를 끌어올려 놈을 향해 달린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좁혀진 간격. 이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건지, 두 거미가 대뜸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뭔가 하려는 건가.'
낌새를 느낀 우진이 질주하는 걸 멈췄다. 동시에 녹색 거미가 숨결을 내뱉었다.
푸후우우—!
녹색 독 안개가 놈의 입에서 잔뜩 뿜어져 나왔다. 마치 먹구름처럼 정면에 드리운 독 안개. 뒤이어 붉은 거미도 숨결을 내뱉는다.
화르륵!
붉은 거미가 시뻘건 화염을 게워냈다. 그런데 그 불꽃과, 앞서 녹색 거미가 내뿜은 독 안개가 뒤섞이며 위협적인 빛을 발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우진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직후 불꽃과 독 안개가 격렬한 상호작용을 일으켰으니까.
펑, 퍼버버벙!
크고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마치 수십 개의 불꽃놀이를 좁은 방 안에서 터뜨린 듯한 광경. 그 화력이 상당하여, 일찍 몸을 빼냈는데도 머리칼이 살짝 그을렸다.
하지만 우진은 몸 상태보다 다른 걸 신경 썼다. 폭발이 일어난 곳의 바닥. 강한 화력이 가해졌지만, 거미줄은 큰 손상 없이 멀쩡해 보였다.
'아주 튼튼하군.'
거미줄은 원래 열에 약하다. 마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내열성이 너무 뛰어났다. 아마 균열핵의 기운에 의해 강화된 듯했다.
어쩌면 이 특성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그리 견적을 잡은 후, 우진이 재차 두 거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녹색 거미가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푸후우우—!
거미의 입에서 내뿜어진 독 안개가 정면을 가득 채웠다. 직후, 붉은 거미가 불을 내뿜어 폭발을 점화하려던 순간···
안개 속에서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독을 무시하고 돌진해온 우진. 당황한 녹색 거미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쩌어억!!
휘둘려진 마체테가 녹색 거미의 머리통을 예쁘게 쪼개놨다. 우진은 연거푸 칼을 휘둘러 거미의 머리를 수박처럼 조각낸 후, 온몸에 묻은 독 가루를 대충 손으로 털어냈다.
'역시, 독이 그리 강하지 않군.'
입구에서 봤던 거미 사체와, 녹색 거미의 생김새는 큰 차이가 없었다. 우진은 그때 거미의 독이 강하지 않단 사실을 미리 확인했다.
"키이이익!!"
짝을 잃은 붉은 거미가 한껏 격노한 듯 울부짖더니, 불을 내뿜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퍼억!
우진이 던진 단검이 그 입속에 틀어박혔다. 붉은 거미가 컥컥대며 뒷걸음쳤다. 놈이 기침할 때마다 작은 불씨가 덧없이 새어 나왔다.
불을 게워내는 재주가 봉쇄되었다.
칼자루를 쥔 우진이 놈을 마무리하고자 걸음을 옮겨갔다. 하지만 이 상황에도 붉은 거미는 투지를 잃지 않은 듯했다. 놈이 네 개의 다리를 꽁무니 쪽에 가져다 댔다.
꾸득, 꾸드득—
실뜨기를 하듯, 바쁘게 거미줄을 발끝에 엮어내는 거미. 직후 놈이 네 개의 다리를 쫙 펼쳤다. 그러자 발끝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그물처럼 넓게 늘어났다.
붉은 거미가 달려들었다. 앞발에 든 그물로 적을 손수 포박하려는 듯했다.
이 와중에 우진은 한눈을 팔았다. 아래쪽을 살폈다. 우두머리들과 싸우는 동안 거미 떼가 꽤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왔다.
'시간을 더 낭비할 순 없지.'
대충 거미의 그물질을 피한 후 마체테를 몇 번 휘둘렀다. 칼이 휘둘릴 때마다 토막 나는 붉은 거미. 놈을 사냥한다기보단, 자살을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거미를 도살한 후. 우진은 고개를 돌려 마법사를 보았다. 가면을 쓴 사내가 벌벌 떨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이야, 아직 안 도망쳤네?'
놈의 뒤를 쫓아가서 잡아 족칠 생각이었건만. 왠지 모르게 마법사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는 용기가 대단한 것이거나, 혹은··· 거미 두 마리로 우진을 죽일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멍청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어쨌든 간에 일이 쉬워졌다.
'심문을 하다가 실패하면, 저놈의 신변을 기사에게 인계하면 되겠지.'
남은 문제는, 밑에서 올라오는 거미들인데··· 이놈을 인질로 삼으면 저 거미들도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한번 확인해 보자.'
마법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놈이 움찔거리며 두 손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오지 마!"
마법사가 그리 소리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어린 목소리. 줄곧 벙어리처럼 말없이 손짓만 해대더니, 상황이 급해지니까 저 마법사도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협상을 하자!"
마법사가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두 손에 보라색 빛 알갱이가 일렁거렸다. 거미 마수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큰 주문을 하나 준비해둔 듯했다. 그런데 마법사는 섣불리 그걸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 속셈인가.'
주문 한 방으로는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
그러니 이제 와서 대화를 시도하며, 거미 마수들이 올라올 때까지 버티려는 모양. 속 보이는 수작에 우진은 웃으며 걸음을 옮겨갔다.
"멈춰! 쏜다니까?! 쏜···"
마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 우진이 힘껏 발을 굴렀다. 거칠게 출렁이는 거미줄. 그 탄성을 이용하여 몸을 날렸다.
탄환처럼 거리를 좁힌 우진. 이에 화들짝 놀란 마법사는 주문을 쏘려 했지만···
써억!
"끄아아악!!"
그보다 앞서 마체테가 마법사의 손목을 훑고 지나갔다. 두 손을 잃은 마법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러다가 과다 출혈로 죽으면 곤란하다.
우진은 거미 사체에서 거미줄을 끄집어낸 후, 그것을 마법사의 상처 단면에 펴 발라서 대충 지혈했다. 겸사겸사 거미줄로 발목을 묶어 도망칠 수 없도록 포박했다.
'······아, 얼굴도 확인해 봐야지.'
마법사의 황동 가면을 벗겼다.
겁에 질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소리를 들을 때 눈치챈 거지만,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이십 대 중후반 정도 아닐까.
그건 그렇고, 가면을 벗긴 김에 입도 막아놓는 게 좋을 듯했다. 우진은 품속에서 꺼낸 붕대로 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던 중···
사샥, 사샤샤샥—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이곳까지 올라온 거미 마수들. 놈들은 사로잡힌 마법사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확신했다.
'역시, 이놈이 최상위 명령권자다.'
적당히 심문한 후. 이놈을 인질 삼아서 움직이면 손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듯했다.
"끽, 키이익!"
그런데 마법사가 돌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입을 몇 겹으로 막아놨는데도, 희한하게 천을 뚫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
이에 우진이 의아해하던 찰나··· 주변을 둘러싼 거미들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뭘 한 거냐?"
그리 질문하자, 마법사가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독기가 서린 눈동자. 보아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 명령을 내린 듯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끌려 나가면 높은 확률로 화형당할 테니까. 운 좋게 살더라도, 두 손을 잃은 시점에서 남은 삶이 그리 윤택할 것 같진 않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꼬인단 말이지···'
절로 한숨이 나온다.
거미가 사방에서 물밀듯 밀려왔다. 감히 수를 헤아릴 엄두가 안 날 만큼 많은 머릿수. 이놈들을 손수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군."
그리 중얼거린 우진이, 돌연 마법사를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날아가는 놈의 몸뚱어리. 그는 붕대로 입이 막혀 있어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5초.'
상승 시간을 포함하여, 대충 5초 뒤 저놈이 거미줄에 떨어진다.
'그 전에 끝낸다.'
우진이 두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빠지지직—!
흉악한 소음과 함께, 두 손바닥에 시뻘건 번갯불이 마구 번쩍였다. 주변의 거미들이 불나방처럼 그 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진은 번갯불이 깃든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 손이 향하는 곳은 바닥의 거미줄.
······번쩍.
순간 소리가 사라지는 듯하더니··· 시뻘건 빛이 동굴 전체를 훤히 밝혔다.
붉은 벼락이 거미줄을 타고 내달리며 주변을 휩쓸었다. 번갯불이 눈에 띄는 모든 걸 한바탕 지져버린 후, 그러고도 힘이 남아도는지 거미줄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거미줄과 연결되어 있던 또 다른 거미집들이 벼락에 태워진다. 이 연쇄적인 작열이 멈추지 않고 몇 번이나 반복되니···
위에서부터 시작된 불벼락이 아래로, 더 아래로. 거미줄을 전도체 삼아 끝없이 번져 나갔다. 그 위에 선 거미들이 번갯불에 바싹 튀겨지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쩌적— 쩌저저정!!
뒤늦게 천둥소리가 터지고, 지하 동굴에 다시 어둠이 드리웠다. 직후 아래로 낙하한 마법사의 몸뚱어리가 거미집 위에 안착했다.
퍽, 퍼버벅···
밑쪽에서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줄을 타고 올라오던 거미들이 타죽으며 아래로 추락하는 듯했다. 우진의 근처에 있던 놈들은 아예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탔다.
코를 찌르는 오징어 타는 냄새.
"······컥, 콜록!"
우진이 연거푸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시커먼 연기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몸살 확정이군.'
불벼락을 부르는 재주.
이 짓거리를 하면 며칠 동안 몸 상태가 아작난다. 위력이 무식하게 센 만큼, 엄청난 반동이 따르는 능력. 그렇기에 우진은 평소 이 재주를 쓰는 걸 꺼린다.
거미들의 경우, 줄로 거미집들을 전부 이어놔서 재미를 볼 수 있었지만··· 이런 특성을 지닌 마수는 흔치 않았다. 다른 상황에서 쓰기엔 너무 대가가 크고 비효율적인 재주.
'빨리 일 처리를 마친 후 돌아가자.'
아드레날린이 확 돌아서 그런지, 당장은 문제없이 몸뚱어리가 움직였다.
마법사의 상태를 확인했다. 놈은 경악에 사로잡힌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높이 던져놨던 덕분에, 마법사는 벼락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탄성 좋은 거미줄 위에 떨어져서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의도했던 대로 인질의 목숨을 살렸다.
'이놈에게 뭘 물어볼까.'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마법사가 순순히 답해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방금 우진이 한 짓을 보고도 입을 꾹 다물고 있을까?
이놈의 경우, 그렇게 용기 있는 사내가 아닐 듯했다. 암만 봐도 멍청한 놈 같으니.
기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