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형제. (2)

우진은 마체테를 말아 쥐고선 두 흉물을 노려봤다. 마치 사람 흉내를 내듯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흉물들.

옷이 찢어진 형태가 신경 쓰였다. 셔츠 단추들이 죄다 터진 걸 보아, 살찐 몸에 억지로 작은 옷을 입히려다 실패한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기분 나쁜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저놈들이 데릭과 세드릭인가.'

곁눈질하여 옆에 선 레이먼드를 살폈다. 그의 넋 나간 표정을 보는 순간, 우진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면 의뢰는 실패인 걸까.

걹, 거얽—

흉물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먹잇감을 찾아 연신 허공을 더듬거리는 손끝. 보아하니 천막 바깥에서 들린 소란의 주인들을 찾는 듯했다.

때마침 타라스크를 쫓아온 용병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흉물들을 보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씨벌, 뭐야 저 새끼들은."

두 흉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낸 용병은 흉물의 텅 빈 눈구멍과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철렁했다. 분명 눈알이 없는데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흉물들은 눈이 없지만 귀는 멀쩡했다. 놈들이 한바탕 울부짖은 후, 용병이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돌진했다. 이를 본 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고생 좀 하겠군.'

우진이 흉물들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두 흉물 중 한 놈의 덩치가 조금 더 컸다. 그만큼 달리는 속도가 더 느려서 살짝 뒤처진 상태.

둘 중에 덩치가 더 큰 놈이 형이고, 작은 놈이 동생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놈의 이름은 이제부터 데릭이다.

우진은 제멋대로 결론 내리며 마체테를 힘껏 휘둘렀다. 데릭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간 칼날. 직후 검붉은 핏물이 터지며 한쪽 다리가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데릭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잘린 다리를 앞으로 내뻗었다. 그대로 놈이 기울어졌다.

쿠우웅!!

흙바닥 위에 엎어진 데릭의 몸뚱어리. 우진은 놈의 등 위에 올라탄 후 마체테를 마구 내려찍었다. 곡괭이질 하듯 휘둘린 칼이 데릭의 몸통을 난자했다.

레이먼드도 놀고만 있진 않았다.

그는 세드릭을 상대로 칼춤을 추는 중이었다. 혼자 상대하긴 버거운 괴물이지만, 어느새 온 용병과 종기사들이 눈치껏 보조하여 세드릭을 몰아붙였다.

얼핏 보면 유리한 상황. 하지만 이 흉물이란 놈을 죽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뻐그덕—

흉물의 어깨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낌새를 느낀 우진은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직후 놈의 어깨 관절이 뽑히더니, 팔이 기형적으로 휘둘려 우진이 있던 곳을 후려쳤다.

엎어져 있던 데릭이 몸을 일으켰다. 놈의 온몸에 새겨진 칼자국. 하지만 놈의 살덩이가 흘러내리며 그 상처를 서서히 메꿨다. 앞서 잘라놨던 다리 또한 어느새 복구된 상태였다.

마치 커다란 진흙 인형을 상대하는 듯한 상황. 이래서 우진이 흉물을 상대하길 꺼린다. 저놈들은 단순히 베고 찔러선 죽일 수 없으므로.

'내단을 못 부쉈군.'

몸 어딘가에 있는 내단을 찾아내야 흉물을 죽일 수 있다. 사실상 운에 달린 일. 우진은 여러 차례 데릭의 몸통을 다졌으나 결국 내단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괜찮다. 운이 없으면, 그만큼 시간을 들이부으면 될 일이니까.

그워억!!

흉물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놈의 오른팔이 재차 채찍처럼 휘둘렸다. 이에 대응하여 우진은 칼을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듯 그었다.

잘려 나간 팔뚝이 흙바닥 위에 펄떡거렸다.

'오른팔은 아니고.'

푸슉—!

기묘한 바람 소리.

우진은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다. 흉물의 긴 혓바닥이 뱀처럼 팔을 휘감았다. 혀로 우진의 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흉물.

줄다리기라도 하자는 건가.

우진은 역으로 혓바닥을 잡아당기며, 동시에 발끝으로 흉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재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나약한 오른쪽 다리.

그로 인해 흉물의 몸뚱어리가 속절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를 마중하듯, 우진은 혓바닥이 감긴 주먹으로 흉물의 안면을 연신 갈겼다.

빡! 뻐억! 뻑!!

얻어터질 때마다 흉물의 얼굴이 빈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직후 우진은 놈의 입안에 손을 넣어서 혀뿌리를 붙잡더니, 그것을 있는 힘껏 밖으로 잡아당겼다.

푸확!!

피가 왈칵 터지며 혓바닥이 뽑혀 나왔다. 그에 뒤딸려 반쯤 뜯겨 나간 흉물의 대가리. 하지만 오래지 않아 놈의 머리가 점차 수복되었다.

'머리도 아니네.'

남은 건 왼쪽 팔다리. 앞으로 두어 번만 더 다지면 죽일 수 있다. 그리 견적을 잡은 우진이 흉물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그런데 흉물들도 지금의 상황이 불리하단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갑자기 데릭이 다가오는 우진을 피해 도망쳤다. 그와 동시에 성기사와 한창 맞붙던 세드릭 또한 물러났다.

이를 본 우진이 살짝 당황했다.

흉물이 도망치는 건 처음 봤다. 놈들은 힘과 재생력이 뛰어난 대신, 지능은 사리 분별이 안 될 만큼 낮았으니까.

이대로 상황이 끝나는 건가 했는데···

돌연 두 흉물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전력으로.

퍼어억!!

둔탁한 굉음과 함께 맞부딪힌 데릭과 세드릭. 놈들의 살덩이가 찰흙처럼 뒤섞이며 점차 하나의 존재로 거듭났다.

이 또한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뭐야··· 합체도 할 수 있어?'

우진이 감탄하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두 흉물이 원래 형제였기 때문에 저런 재주가 가능한 걸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 듯했다. 지금껏 흉물 사냥을 여럿 해봤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으니.

"그물 던져!!"

갑자기 조나단이 소리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병들이 힘껏 그물을 집어 던졌다. 끊어지지 않는 그물. 흑새치 용병단을 상징하는 귀물이었다.

한 덩어리가 된 흉물이 그물을 뒤집어썼다. 변신 중이거나 합체 중일 때는 기다려주는 게 강호의 도리라지만, 용병들은 늘 실리를 따지는 법.

'······가만.'

이 상황을 간단하게 끝낼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돌연 흉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우진. 그가 그물을 집어 들고선 흉물의 주변을 빠르게 몇 바퀴 돌았다.

그로 인해 흉물이 그물에 여러 차례 휘감겼다. 마치 미라를 만들 듯 흉물의 몸뚱어리 전체를 뒤덮은 그물.

이를 본 조나단이 난색을 표했다.

"이봐, 이러면 투창을 던질 수 없을 텐데."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진은 쌍끌이 그물의 밧줄 하나를 조나단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은 조나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뭐 어쩌려고?"

"그냥 제가 신호를 주면 힘껏 당기십시오. 사람을 여럿 모아야 할 겁니다."

"······알겠다."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 조나단은 바쁘게 주변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스무 명 정도의 사내가 밧줄 하나에 달라붙었다.

반면 우진은 혼자 맞은편 밧줄을 쥔 상태.

"당겨!"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스무 명의 사내가 힘껏 밧줄을 잡아당겼다. 때마침 합체가 끝났는지 흉물이 거친 울부짖음을 게워 냈다.

그워어어얽!!

두 개의 머리를 지닌 거대한 흉물. 놈이 그물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온몸에 휘감긴 그물은 단단히 조인 코르셋처럼 압박감이 강렬했다.

우진이 힘껏 밧줄을 잡아당겼다.

꽈드드득—!

휘감긴 그물이 더욱 강하게 흉물의 몸뚱어리를 짓눌렀다. 그물코 틈새로 불쑥 삐져나온 흉물의 살덩이. 그 모양새가 마치 와플 자국을 연상케 했다.

문제는, 우진의 무지막지한 힘에 용병들이 끌려갈 지경이었다. 안간힘을 짜내느라 얼굴이 시뻘게진 용병들. 조나단이 목청껏 소리쳤다.

"더 붙어! 더, 더!!"

주변에서 구경 중이던 사내들이 급히 밧줄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대략 마흔 명 정도의 사내가 힘겨루기에 나섰다.

우진은 손목을 돌려 팔뚝에 밧줄을 감은 후, 줄이 짧아진 만큼 다시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그물의 압력.

이에 당황한 흉물이 마구 포효하며 발버둥 쳤지만,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느낌이 왔다.

우진의 입꼬리가 씩 위로 들렸다.

"잘 가라."

있는 힘껏 밧줄을 잡아당겼다.

투화확!!

검붉은 핏물이 폭발하며, 그물에 눌린 흉물의 살덩이가 햄버거 패티처럼 갈렸다. 바닥에 온통 널브러진 고기 조각. 그와 동시에 용병들이 줄지어 나자빠졌다.

"······이게 뭔."

조나단이 새삼 경악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우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그물을 활용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

"정말로 안 끊어지는군요."

우진은 천연덕스레 대꾸한 후 그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물코 틈새로 삐져나온 고기 조각들을 들춰보는 우진. 그는 곧,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는 고기 한 덩이를 발견했다.

흉물이 어떻게든 재생을 시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덧없는 짓이었다. 놈의 몸뚱어리 전체가 갈려버려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였으니.

우진은 단검으로 고깃덩이를 갈랐다. 그 속에는 흉물의 내단이 박동하고 있었다.

처음 얻어보는 물건이다.

내단을 부수지 않고 흉물을 사냥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단을 한 번 살펴봤다.

'신기하게 생겼군,'

마치 눈사람처럼 생긴 형태.

원래 내단이란 건 호두 알맹이처럼 동그랗게 생겼는데··· 흉물 두 마리가 합체되어서 그런지, 내단 두 개가 교집합을 이루듯 겹쳐있었다.

'일단 챙겨두자.'

얇은 천으로 내단을 싸맨 후 그것을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해, 우진은 타라스크의 사체를 향해 걸어갔다.

우진이 딴짓하는 동안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레이먼드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성기사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바닥에 곱게 눕혀진 두 명의 성기사. 한 명은 아까 봤던 젊은 성기사였고, 나머지 한 명은 낯선 얼굴이었다. 아마 천막 안에서 대기하던 호위 인원 아니었을까.

말없이 손수건으로 후배들의 얼굴을 닦고 있는 레이먼드. 우진은 뭐라 얘기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될 게 분명했으므로.

'······내가 같이 갔으면 살릴 수 있었겠지.'

젊은 성기사의 뜻을 존중하여 물러난 결과가 이 꼴이다. 남의 의견을 무시해서라도 행동에 나서는 게 옳은 판단이었을까?

너무 결과론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때에 따라선 일단 들이박는 것도 좋을 듯했다. 우진은 그리 생각하며 타라스크를 향해 걸었다.

천막을 들추고, 내부를 살피자 온통 피바다였다. 우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흉물들이 타라스크의 등을 뜯어 먹었군.'

천막 바닥에서 검붉은 핏물이 샘솟았다. 이는 두 흉물이 타라스크의 등을 뜯어 먹은 흔적이었다. 타라스크가 갑자기 미쳐 날뛴 건, 그 격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던 듯했다.

작은 의문 하나가 풀렸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데릭과 세드릭 형제는 왜 갑자기 흉물로 변한 걸까···

'······이건 진짜 모르겠다.'

솔직히 감도 안 잡힌다.

천막 내부를 계속 들쑤셔봤으나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해야 사람이 괴물로 변한단 말인가? 그 방법이 상상조차 가질 않았다.

'내 지식으로는 해결 못 할 일이야.'

아무리 봐도 시간 낭비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에··· 우진은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금충의 두 아들이 죽었다.

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사람의 머리가 복잡해질 차례였다.

형제. (3)

용병단의 간부들이 회의를 위해 모였다.

우진 또한 자연스레 한 자리를 끼고 앉았다. 따지고 보면 부외자지만, 그에게 뭐라 면박을 줄 만큼 대담한 사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조나단이었다.

붉은 뿔 용병단과 무쇠 방패 용병단은 화물을 지키느라 줄곧 대기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조나단의 긴 설명이 끝나고 나자··· 주변 반응이 영 뒤숭숭했다.

"······씨벌,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붉은 뿔 용병단의 단장, 마커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황금충의 두 아들이 갑자기 괴물로 변했다고? 머리털 나고 들어본 소리 중 가장 개소리 같은데. 딜런, 넌 어떻게 생각하냐."

마커스가 좀 거들어달라는 듯, 옆자리에 앉은 딜런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딜런의 반응은 마냥 무덤덤했다.

"이 상황에 농담을 할 것 같지는 않군."

"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믿으려는 거냐?"

"그럼 달리 방법이 있나?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닌 데다, 물증도 있으니 믿는 수밖에. 괜히 불필요한 말다툼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야."

현시점 필요한 건 대책 마련이다.

딜런이 그리 딱 잘라 말하자, 마커스는 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굳이 대책을 마련할 필요 있어? 황금충의 두 아들이 죽었으니, 저 화물들이 전부 주인 없는 재산이 되었잖아. 그냥 우리끼리 나눠 먹으면 될 것 같은데."

구미가 당기는 제안.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충의 재산을 머릿수대로 나누기만 하면, 이곳의 모두가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듯했으므로.

하지만 조나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리하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다."

"좀 위험하더라도 감수할 만하지 않나? 은퇴 자금이 한 번에 생기는데···"

"이번 일에 성기사가 얽혔잖아. 교단 연맹이 분명 조사를 나올 거야. 자칫 잘못하면 우리 모가지가 전부 날아갈걸."

이번 의뢰에는 여러 세력이 얽혀 있었다.

교단 연맹, 개척단, 상단, 그리고 용병 길드까지. 여기서 저 돈을 먹고 날랐다간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들이닥칠 것이다.

조나단이 그리 설명하자, 조금 머쓱해졌는지 마커스가 목덜미를 벅벅 긁적였다. 듣고 보니 너무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교단 연맹에 가서 이 상황을 보고하는 게 최선일 것 같다. 달리 방법이 없어."

"그 깐깐한 새끼들이 우리 말을 믿어줄까? 의뢰 도중 고용주가 괴물로 변했다고 하면··· 좆 까는 소리하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

당장 마커스 본인만 하더라도 조나단의 말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흉물의 사체를 봤는데도 그랬다.

그 말에 조나단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말은 안 믿겠지. 하지만 교단 연맹 소속의 성기사가 한 명 살아남았잖아."

말이라는 건 누구의 입을 거치느냐에 따라 그 무게감이 달라지는 법.

성기사 레이먼드가 증언한다면 교단 연맹이 이번 일의 전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세 용병단이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리라.

그 말에 가만히 앉아 있던 딜런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합리적인 말이라 여긴 듯했다.

"그렇다면 성기사와 함께 제3 개척 도시로 가야겠군. 안 그래도 물자가 거의 바닥난 데다, 그곳에 교단 연맹의 지부가 있으니."

"그게 현재로선 최선이겠지."

제3 개척 도시가 멀지 않았다.

이제 이틀만 더 걸어가면 닿을 거리. 그곳에 도착한 다음, 교단 연맹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계획을 잡으면 될 듯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조나단이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봤다.

"혹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나?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다면 말해다오."

이견은 없었다.

아무래도 조나단이 상황 정리를 잘하여, 이곳에 모인 용병들은 그의 주장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결론을 내린 시점부터 굳이 회의를 더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곧 뿔뿔이 흩어지는 용병들.

말없이 앉아 있던 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숙영지로 향했다. 그 인기척을 들었는지, 불가에 드러누워 있던 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뒤이어 클레어 또한 이쪽을 바라봤다.

"일찍 오셨네요?"

"응. 회의가 금방 끝났어."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어차피 저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몇 없으니."

클레어는 회의 자리에 오지 않았다.

애초에 조나단은 클레어와 미리 상담한 후 도출해낸 결론을 회의에서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미리 다 알고 있으니 회의에 참석해도 따분할 뿐이다.

우진도 그 내용을 미리 들었지만, 용병들의 회의에 굳이 참석한 건 분위기를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고용주가 죽었는데도 분위기가 크게 나쁜 것 같진 않더라."

"몸이 가장 큰 재산이니까요. 다친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중요하죠."

사고가 난 것치곤 피해가 적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손해긴 해도, 용병 중에는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흉물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다들 굉장한 걸 봤다며 떠들던데, 저도 따라갈걸 그랬어요."

클레어는 살아있는 흉물을 눈으로 못 본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황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진이 그녀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줬기 때문이었다.

비록 본인은 적잖게 아쉬워하지만, 결과적으론 옳은 판단이었다.

"굳이 위험한 곳에 따라올 필요는 없지. 자칫 잘못하면 다쳤을지도 몰라."

"하긴, 사망자도 나왔으니까요. 레이먼드 님이 많이 힘들어하시던 것 같던데···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네요."

불가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두 사람.

그러던 중 우진이 늘어지라 하품했다. 흉물을 사냥하느라 큰 힘을 쓴 데다, 따뜻한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네."

"잘 자요."

클레어와 인사를 나눈 후 천막으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편히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 우진. 그가 문득 품을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흉물의 내단이었다.

'······이걸 먹자니 좀 께름칙한데.'

우진은 살짝 고민에 잠겼다.

데릭과 세드릭. 한때 사람이었던 괴물의 사체를 뒤적여서 얻은 물건이다. 이걸 먹는 건 사실상 식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짓 아닐까?

그렇지만 기껏 얻은 내단을 그냥 내다 버리기도 아까웠다.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도 아니었고. 우진은 결국 그 내단을 입속에 넣고 씹어 삼켰다.

'어우, 씨··· 엿같은 맛이네.'

한동안 용병들과 어울리며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오랜만에 먹는 내단의 맛은 꽤 역겨웠다. 우진은 수통에 담긴 물로 입안을 헹군 후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오래지 않아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 * *

······뭐지?

우진은 눈을 연신 끔뻑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마치 잉크 속에 가라앉은 듯한 풍경.

자려고 누웠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상한 곳에 와 있다. 꿈이라도 꾸는 중인 걸까?

당황하던 찰나··· 돌연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시커멓던 공간에 색깔이 덧씌워졌다.

허공에서 나타나는 목재 의자와 꽃병, 침대를 비롯한 가구들. 어느 순간 우진은 고급스러운 응접실에 서 있게 되었다.

그곳에 세 남자가 있었다.

펑퍼짐한 뱃살을 지닌 사내가 눈에 띄었다. 노인이라 하기엔 너무 젊고, 중년이라 하기엔 너무 나이 든 사내.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이상하리 짙었다.

'황금충 볼프.'

처음 보는 사람이건만, 우진은 어째서인지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젊은 사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왜 자꾸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지르시는 거예요!!"

데릭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의 손아귀에 들린 서류 뭉치가 파르르 떨렸다. 데릭은 그의 아버지가 몰래 마경 사업을 매각한 것 때문에 성난 상태였다.

이에 볼프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우리를 죽이려는 놈이 있다. 빨리 사업들을 정리한 후 이곳을 떠야 해."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요! 성기사들을 불러서 몇 번이고 조사했잖아요!"

"무능한 놈들이라 그렇겠지."

그리 답하며 볼프가 자리를 피했다. 다시 사무실에 틀어박히는 황금충. 이를 본 데릭이 연신 소리쳤다.

"제발!! 당신은 이런 겁쟁이가 아니었잖아!"

화가 주체 안 되는지 머리털을 마구 쥐어뜯는 데릭. 이에 곁에 선 남동생, 세드릭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형, 그러다가 대머리 되겠어."

"넌 답답하지도 않냐?"

"이미 끝난 일이니 성질부려도 바뀌는 건 없잖아. 그냥 밖에 나가서 기분 전환이나 좀 하자."

"······그럴까."

볼프는 두 아들에게 저택 바깥은 위험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하지만 혈기 넘치는 사내들은 그 말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편집증과 같은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 여겼다.

볼프는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틀렸다. 저택 바깥만 위험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외출을 마친 후 돌아온 두 아들이 맞닥뜨린 건, 거실에 엎어져 있는 아버지의 시체였다.

시커먼 고름이 잔뜩 들어찬 그 눈구멍을 본 순간··· 형제는 미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건 분명 거울 속 자신들의 행색을 뜻하는 것일 테니까.

'장벽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계획을 이어갔다. 용병들을 구하고, 교단 연맹에 도움을 청한다. 철저히 준비를 마친 후 데릭과 세드릭이 여행길에 올랐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목적지. 이에 두 아들의 불안감이 점차 수그러들 즈음···

"······끅?!"

술을 마시던 형제의 몸뚱어리가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천막 바닥에 엎어진 채로, 경련하듯 몸을 떨어대는 데릭과 세드릭. 그 모습을 본 성기사가 급히 달려왔다.

푸욱!

벼려진 단검이 성기사의 목을 들쑤셨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천막 바닥에 엎어지는 성기사. 데릭은 핏발 선 눈으로 그 단검의 주인을 보았다.

매춘부가 그를 보며 웃었다.

"아쉽네. 너희들이랑 셋이서 뒹구는 건 꽤 즐거웠는데··· 그 늙어 빠진 장사치와는 다르게."

그리 중얼거리며, 발바닥으로 데릭의 아랫도리를 꾹꾹 누르는 매춘부. 그녀는 곧 비릿하게 웃더니 발에 힘껏 체중을 실었다.

데릭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독에 당한 것인지, 몸뚱어리가 뻣뻣하게 굳은 탓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매춘부는 그 반응을 잠시 음미하듯 바라보다 발을 떼내었다.

"역시, 이대로 끝내는 건 아까워. 너희들도 한 번 기회를 줘봐야겠네. 운이 좋으면 나랑 계속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매춘부가 품속을 뒤적여서 물약 한 병을 꺼냈다. 불길한 빛깔의 검은 물약. 그 속에는 티끌처럼 작은 기생충들이 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매춘부는 작은 스포이트로 물약을 빨아들인 후 그것을 데릭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경직된 몸뚱어리는 그조차도 허용하질 않았다.

똑.

물약이 두 형제의 눈알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눈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 그로 인해 데릭과 세드릭이 몸을 마구 들썩였다. 얼굴에 돋아난 검은 핏줄이 점차 몸 전체로 번져 나갔다.

이를 본 매춘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에이, 둘 다 꽝이잖아?"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마녀가 그리 말하며 물러나는 순간··· 두 형제는 마침내 비명을 지를 수 있게 되었다.

"······거어어얽!!"

기이한 재주.

"······."

눈이 뜨였다.

말없이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익숙한 천장과 짐가방, 그리고 침구류들. 이를 본 순간 우진은 현실로 돌아왔음을 인지했다.

자연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건··· 도대체 뭐였지?'

꿈이라도 꾼 것일까.

하지만 그리 치부하기엔 너무 이질적이었다. 데릭과 세드릭. 두 형제가 품은 생각과 감정, 그리고 고통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빙의되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과 구분 짓기 어려울 만큼 생동감 넘치는 꿈. 이는 우진에게 있어선 익숙한 일이었다.

'매일 밤마다 질리도록 겪었으니까.'

지난 12년간 김우진은 잠들 때마다 두 세계를 오갔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성 또한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한민국의 공장 노동자와, 다크판타지 세계의 마수 사냥꾼.

하지만 최근 현실 세계의 우진은 죽어버렸다. 이를 계기로 우진은 이 다크판타지 세계의 주민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갑자기 왜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그 원인으로 짐작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흉물의 내단.'

한때 인간이었던 흉물, 데릭과 세드릭의 내단. 그것을 섭취한 걸 계기로 두 형제의 삶을 일부 체험한 게 아닐까?

그리 추측한 우진은 꿈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어봤다. 살해당한 두 형제와 붉은 머리칼의 마녀. 우진은 그 여자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지난번에 잠복했을 때 봤던 사람이다.'

며칠 전의 우진은 나무 위에 잠복한 채로 데릭과 세드릭 형제의 천막을 관찰했다.

그때,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요강을 갖고 나오던 여자 청소부. 그 사람의 생김새가 꿈에서 봤던 마녀와 똑 닮았다.

'이름이··· 아마 린다였지.'

린다. 타라스크의 폭주를 기점으로 실종된 사람. 용병들은 린다가 흉물에게 잡아먹혔다고 결론 내렸다.

이번 의뢰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매춘부 겸 간병인이었다.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두 형제의 말벗 노릇을 하고, 지저분해진 천막을 청소했으며, 때때로 사내들의 욕구를 풀 대상이 되었다.

우진은 꿈에서 봤던 린다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성기사의 측면으로 접근한 후, 갑옷 틈새로 정확히 칼을 찔러 넣는 기술. 그 칼날에는 검푸른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뛰어난 기량을 지닌 암살자. 우진은 그 사실이 내심 의아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 그 정도로 강해 보이진 않았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우진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그 생명체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분위기를 읽는다고 해야 할까. 몇 분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대충 견적이 잡힌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번에 잠복했을 때 봤던 린다의 모습은 힘이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암만 봐도 평범한 민간인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한 번 교차 검증을 해보자.

데릭과 세드릭 형제의 기억을 다시 들춰봤다. 린다의 몸을 훑던 추잡한 시선과 손길. 그 기억에 담긴 정보들을 하나씩 분석했다.

'몸이 마르긴 했지만, 근육이 없었지.'

아무리 봐도 단련의 흔적을 전혀 엿볼 수 없는 몸이다. 그리 생각하던 중···

'······잠깐.'

문득 위화감을 느낀 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형제의 기억을 더 세밀히 되짚어봤다.

기분 탓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린다의 몸이 단단해졌다. 눈에 띄는 변화는 거의 없지만, 손에 느껴지는 촉감이 전과 달랐다. 피부 아래에 꽉 들어찬 근육의 질감.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한 데릭과 세드릭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왠지 예전보다 더 고혹적인 린다의 미소. 이에 홀린 듯 두 형제가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탐했다···

'······이 여자는 린다가 아니다.'

여행 도중 사람이 바뀌었다.

하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녀는 린다와 똑같은 얼굴과 체형,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 감쪽같은 둔갑이 모두를 속여 넘겼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황금충도 이 능력에 속아 목숨을 잃게 되었으리라.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훔치는 능력··· 단순한 분장 같지는 않고. 마법을 쓴 건가?'

확신하긴 어려웠다.

우진은 이제 막 마법에 입문하여 아는 지식이 많지 않았으니까. 이쪽 방면에 능통한 사람에게 자문을 구해야 할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직후 마주한 건 짙은 그늘이 내려앉은 숙영지.

'······시간이 좀 이르네.'

아무래도 꿈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뜬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다시 잠을 청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꿈속에서 눈알이 뽑히는 듯한 고통을 겪어서 그런지 잠이 전혀 오질 않았다.

'아침밥을 미리 해둘까.'

심심풀이 삼아 요리를 시작했다.

냄비에 물과 말린 채소, 감자, 칠면조 고기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했다. 헥터의 오두막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스튜. 정말 간단하지만 이게 의외로 맛있는 요리였다.

'말린 채소에서 나오는 풍미가 기대 이상으로 좋단 말이지.'

우진이 팔팔 끓는 스튜를 바라봤다.

말린 토마토 덕분에 스튜의 색이 불그스름했고, 칠면조 고기에서 육즙이 우러나와 반질거리는 기름이 국물 표면에 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든든하게 배를 채우기 좋은 음식. 그런데 요리하는 소리가 좀 시끄러웠던 걸까. 천막에서 나온 클레어가 비척거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혹시 나 때문에 깬 거야?"

"음식 냄새를 맡으니 눈이 떠졌어요. 요즘 들어서 식탐이 좀 늘어난 것 같네요···"

입맛을 다시며 팔팔 끓는 스튜를 바라보는 클레어. 바닥에 가라앉은 재료가 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지, 그녀는 국자를 집어 들고선 냄비 속 내용물을 휘휘 저었다.

스튜가 다 끓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마침 우진에겐 질문거리가 하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득 든 생각인데."

"네, 뭔데요?"

"만약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는 마법 같은 게 있으면, 암살을 막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친한 사람으로 둔갑한 후 다가가서 한 번 쑤셔버리면 끝이잖아."

그리 말하자 클레어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로 빈 허공을 응시했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글쎄요. 그런 마법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만약 존재한다면 아주 어렵고 위계가 높은 주문일 거예요. 암살에 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봐야겠죠."

"그리 판단한 이유가 뭐야?"

"고위 주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마탑에서 입지가 높은 마법사일 텐데, 그런 권력자가 굳이 자기 손을 더럽혀가며 암살에 가담하려 할까요?"

게다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은 주문을 쓰는 행위 자체에 큰 자부심을 가진다.

그것은 마치 예술가들이 작품에 갖는 애착과도 같아서, 암살 같은 짓거리에 고위 주문을 낭비하는 마법사는 드물 것이다.

즉, 마녀의 둔갑술이 마법에서 비롯된 것일 확률은 희박하단 소리. 이에 우진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 아니라면··· 그 여자도 나처럼 마수의 내단을 집어먹은 건가.'

내단을 먹다 보면, 아주 드물게 그 마수의 재주를 계승할 때가 있다. 마녀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는 능력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 확률이 높을 듯했다.

그리 추측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데릭과 세드릭을 흉물로 변이시킨 검은 물약. 그건 얼핏 봐도 마경에서 비롯된 물건이었으니까.

'마경의 지식을 다룰 줄 안다면, 카르마 또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겠지.'

카르마와 둔갑 능력, 그리고 암살 솜씨. 여러모로 위험한 인물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날파리 새끼 한 마리가 자꾸 귓가에 맴도는 듯한 기분.

어떻게든 찾아서 죽여 없애야 꿈자리가 덜 뒤숭숭하려나? 느낌상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우진이 그리 고민하던 중···

"······진, 슬슬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이러다 감자가 다 뭉그러지겠어요."

곁에 앉은 클레어가 우려를 표했다. 이에 우진은 괜한 고민을 접고 국자를 집어 들었다. 밥은 늘 그렇듯 중대사항이었으니까.

* * *

이틀 후.

우진과 용병들은 제3 개척 도시에 입성했다. 황금충의 재산을 실은 타라스크들이 줄지어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시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행렬을 구경했다.

성기사 레이먼드는 줄곧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해 교단 연맹으로 떠났다. 용병들이 이번 의뢰를 계속 이어가느냐, 마느냐는 교단 연맹의 결정에 달린 일이 되었다.

이를 바꿔 말하면··· 그 결정이 떨어지기 전까지 용병들은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

'······할 일이 없네.'

클레어는 줄곧 해온 강행군 때문에 피곤했는지 낮잠을 즐기러 갔다.

오랜만에 혼자가 된 우진은 이 한적한 시간을 곱씹는 중이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채로, 한량처럼 팔자 좋게 하품해대는 우진.

나른하다.

뭔가 재미있는 거 없나?

그리 따분해하던 중··· 이런 느긋함에 적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장벽이 이제 정말 그리 멀지 않았다. 이는 곧, 마경에서 치고받고 뒹굴 일이 앞으로는 없단 뜻이었다.

우진은 교단 연맹의 지부에서 웨어울프의 현상금을 받았다. 그렇게 쌓인 돈이 금화 백 닢에 육박할 지경. 돈이 이만큼 많으니 장벽 안쪽에서 적어도 십 년은 놀고먹을 수 있다.

'노는 거 좋지.'

그런데 뭘 하고 놀아야 하나?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다. 우진으로선 이 도시의 놀거리는 밋밋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보아하니 용병들은 주로 도박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던데··· 땀 흘려 번 돈을 이런 식으로 날려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은 데다가.

'손장난질 치는 게 다 보인단 말이지.'

굳이 지적해서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를 모르는 척 호구처럼 당해주는 건 더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씩 배제하고 나니 할만한 게 정말 없다. 누군들 와서 아무 일이나 하나 던져줬으면 하는 기분···

······그 소망이 닿은 것일까.

"여보게, 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우진은 성기사 레이먼드를 마주했다.

"교단 연맹에 보고를 올리러 가신다더니, 벌써 일을 끝마치신 겁니까?"

"미리 보고서를 써둔 덕분이지. 그건 그렇고, 혹시 자네의 시간이 괜찮다면 나와 어딜 가줄 수 있겠나?"

"좋죠."

우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당황한 듯 레이먼드가 눈을 끔뻑였다.

"······이걸 곧바로 허락할 줄은 몰랐군.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자네를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네. 가능하다면 자네와 맨손 대련도 한번 해보고 싶다 하셨는데, 이에 응할 생각이 있는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갑시다."

"나야 좋은 일이지만··· 정말 한가했나 보군."

선뜻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교단 연맹의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 중앙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낡은 도복을 입고 있는 노인. 목에 찬 나무 염주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염주 알맹이의 크기가 거의 주먹만큼 굵직했기 때문이었다.

'무겁지도 않나?'

그리 생각하며, 목걸이에서 시선을 옮겨 그의 얼굴을 보았다. 직후 우진은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장님이잖아.'

눈 위를 가로지르는 칼자국. 노인의 두 눈동자는 백내장에 걸린 듯 총기 없고 흐릿했다.

대련 상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그 사실에 우진이 당황하던 찰나, 레이먼드가 장님에게 다가가 공손히 말을 걸었다.

"장로님. 제가 아까 말했던 사내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수고 많았네."

그리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 그가 우진을 향해 정확히 고개를 돌렸다.

"만나서 반갑구려··· 나는 보우라고 하네. 실례가 아니라면 자네의 이름을 알 수 있겠나?"

"진이라 불러 주십시오."

보우가 통성명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듯했기에, 우진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이름을 밝혔다.

노인의 손바닥은 마치 바윗돌을 만지는 것처럼 단단했다. 어떻게 단련한 건지 의아할 만큼 두꺼운 굳은살. 하지만 그보다 더 의문스러운 건 따로 있었으니···

"······혹시 제가 보이시는 겁니까?"

줄곧 느꼈던 위화감을 질문했다. 보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세 번째 눈을 뜨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네."

다소 모호한 대답. 하지만 이 노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우진이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이 사방을 둘러싼 채로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아무래도 흔치 않은 사내를 만난 것 같았다.

세 번째 눈.

우진과 보우.

그들은 서로가 지닌 힘에 호기심을 품었다. 긴말을 나누지도 않았건만,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대련장 한복판에 마주 선 두 사내.

이를 본 레이먼드가 우려를 표했다.

"장로님. 힘 조절을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조용."

보우가 말을 끊었다.

주변 잡음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은 모양. 그 단호한 태도에 레이먼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지켜봐야 했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우진은 마주 선 노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마치 돌부처처럼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보우. 그를 향해 슬슬 접근하며, 금방이라도 발차기를 할 듯 다리를 몇 번 들썩여봤다.

이에 보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이 멀어서 반응할 수 없는 걸까? 혹은, 우진이 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확인해 볼 방법은 하나뿐이다. 우진은 상대의 빈 옆구리를 향해 대뜸 발차기를 날렸다.

빠악!!

통렬한 타격음.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쪽은 우진이었다. 보우가 단단한 팔꿈치로 우진의 발등을 찍은 후, 미끄러지듯 거리를 좁혀와 손바닥을 내질렀다.

우진은 발차기를 날리느라 자세가 살짝 무너진 상태. 이를 바로 잡을 시간이 부족했기에, 급한 대로 디딤발을 세게 굴러서 몸을 뒤로 빼내었다. 보우의 손바닥은 닿지 않았다.

쩍!

하지만 우진이 한 방 얻어맞았다. 당황하여 서너 걸음 물러나는 우진. 그의 가슴팍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불에 그을린 듯 새겨져 있었다.

분명 닿지 않았는데도 공격이 적중했다.

"······방금 건 도대체 뭡니까."

"직접 알아내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겠나?"

보우가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날 배려하는 건 고맙지만, 힘을 너무 뺀 듯하군. 좀 더 제대로 덤벼보게."

"알겠습니다."

조언대로 우진은 조금 더 힘을 끌어올렸다.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며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그렇게 줄어든 간격은, 어느새 두 사내의 발가락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우진이 예고 없이 왼 주먹을 내뻗었다. 팔꿈치와 어깨의 탄성을 이용하여 뻗는 주먹. 흔히 잽이라 불리는 타격 기술이었다.

이에 보우는 간단히 반 보폭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의 움직임을 쫓아 우진은 뒷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상대 머리를 향해 오른 주먹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콱!

보우의 손이 쇄도해온 주먹을 정확히 잡아 붙들었다. 우진이 잡힌 주먹을 빼내기 위해 당기자, 자연스레 그 힘에 딸려온 보우가 다시 한번 손바닥을 내질렀다.

몸이 잡힌 상태라 피할 수 없다. 우진은 왼 주먹을 뻗어 보우의 손바닥과 맞부딪혔다.

떠엉!!

대련장을 가득 채우는 둔탁한 굉음.

노인의 손바닥과 젊은이의 주먹이 부딪혔건만··· 이상하게도 뒤로 밀려난 쪽은 우진이었다. 번갯불에 튀겨진 듯 찌릿거리는 팔꿈치.

'정말 까다로운 공격이군.'

보우의 손바닥은 형태 없는 충격파를 쏘아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격이 닿은 곳도 적잖게 아픈데, 그보다 더 큰 충격이 뒤쪽에서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배에 맞으면 등이 터지고, 갑옷을 타격하면 그 충격이 철판을 관통하여 몸을 때릴 것이다. 심지어 닿지 않아도 충격파의 잔재가 몸을 후려친다.

'저 공격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공세를 이어가기 위해 보우가 돌진해 왔다. 그의 몸뚱어리가 마치 금빛 돌개바람에 휘감긴 것처럼 보였다.

숨 돌릴 틈 없는 연타를 퍼붓는 보우. 그 속도가 상식을 벗어났다. 두 주먹과 발차기가 허공에 금빛 잔상을 여럿 남겨놨는데, 희한하게 그 잔상 또한 움직이며 우진을 공격하는 듯했다.

덕분에 우진은 발바닥에 불이 난 사람처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물러나고, 막고, 피하고···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어째 아까부터 계속 당하기만 하는 기분.

······슬슬 열이 뻗친다.

'한 방만 걸려봐라.'

수비를 포기하고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신명나게 연타를 퍼붓던 보우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느낌.

부웅—

우진의 주먹이 휘둘렸다. 낌새를 느낀 보우가 급히 몸을 수그려 주먹질을 피했다.

뻐어엉!!

빈 허공을 때렸는데도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보우가 만들어낸 잔상들이 그 충격에 휩쓸려 모조리 소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주먹을 말아 쥐는 우진.

이를 저지하고자 보우는 손바닥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이 본능적으로 주먹을 폈다. 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손바닥을 뻗는다.

쩌어어어억——!!

벼락치는 듯한 소리.

그 요란한 손뼉이 터지는 순간, 우진의 손등이 찢어지며 핏물이 왈칵 튀었다. 바닥에 길쭉한 브레이크 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려나는 우진.

하지만 보우는 상황이 더 좋지 못했다. 저 멀리 날아간 노인의 몸뚱어리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작살난 벽돌들이 와르르 허물어져 무덤처럼 쌓였다.

"오 맙소사, 장로님!!"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가는 레이먼드. 그 소리에 우진 또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런 제기랄.'

계속 처맞으니 성질이 나서 힘 조절을 실수했다. 우진도 급히 보우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보우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붙은 흙먼지를 손으로 쳐서 털어내는 보우. 그가 부서진 벽을 보며 못마땅한지 혀를 찼다.

"이러다가 다 때려 부수겠군··· 대련장을 왜 이리 약하게 만들어둔 게야?"

"장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그 대답을 듣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레이먼드가 주변을 돌며 보우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이에 보우는 귀찮은 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으로 레이먼드의 호들갑을 저지했다.

괜찮다는 건 허언이 아닌 모양. 벽에 꽂혔는데도 노인은 특별히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우진은 이에 안도하며 보우에게 말을 걸었다.

"대련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동감한다는 듯 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싸운 건 아니지만, 여기서 더 힘을 끌어올렸다간 둘 중 한 사람이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대련이 끝난 김에 궁금한 걸 질문했다.

"신기한 기술들을 쓰시던데, 뭡니까?"

"브리트라의 수도승들이 익히는 기예라네. 기를 이용한 기공술의 일종이지. 자네들의 표현에 따르면 마나 아츠라고 해야겠군."

마나 아츠.

클레어가 설명해줄 때는 되게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정말 골 때리는 기술이었다.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연구를 좀 해봐야 하리라.

놀란 건 보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절기를 사용했는데도, 우진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자 흐름이 단번에 뒤집혔으니.

"솔직히 충격적이군. 자네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네. 레이먼드가 호들갑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거늘··· 자네의 사부는 누구인가?"

보우가 그리 질문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강하니, 당연히 스승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 없다고 말하면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았기에 우진은 대충 둘러댔다.

"사냥꾼 헥터 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우진은 마경 견문록을 읽을 때,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헥터에게 질문했으니까. 겸사겸사 요리도 좀 배웠다.

중요한 뒷말을 빼놓고 말해서인지, 보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거 참 희한하군. 헥터 그 친구의 활 솜씨는 비범하지만, 이런 격투술을 가르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웨어울프의 현상금을 수령한 사람도 자네인가?"

"맞습니다."

웨어울프를 거론하는 걸 보아, 보우는 헥터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듯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보우. 그가 우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네. 혹시 교단 연맹에 들어올 생각 없나?"

예상치 못한 제안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저는 특별히 믿고 섬기는 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다네. 교단 연맹에는 무신론자도 적잖게 있으니.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믿음의 일종 아니겠는가."

교단 연맹은 여러 종교 단체가 묶여 만들어진 연합. 당연하게도 종교마다 교리는 제각각이라, 분쟁을 피하기 위해선 여러 형태의 믿음이 존중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말이야 쉽지, 이 존중이란 것이 처음부터 수월했던 건 아니다.

교단 연맹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는 많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연맹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적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교단 연맹은 마침내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연맹이 지닌 힘과 세력은 과거와 비할 수 없을 만큼 융성해졌다.

이 힘으로 행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마경에 침식당한 땅을 정화하여 인류의 고향을 되찾는 것. 개척 도시는 이를 위해 지어진 전초 기지에 불과하다.

"오래지 않아 본격적인 마경 개척이 시작될 걸세. 오염된 땅을 복원하고, 새로운 장벽을 지어 인류의 터전을 넓혀갈 예정이야. 이를 위해선 자네 같은 인재들이 꼭 필요하다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그리 대답하자, 보우가 호주머니를 뒤적여서 네모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자, 그럼 이걸 받아두게."

"이게 뭡니까?"

"내가 인정한 자에게만 주는 추천패라네. 훗날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진다면, 교단 연맹에 와서 이 물건을 들이밀게나."

그리 말하며 추천패를 휙 던지는 보우. 우진은 엉겁결에 그것을 넘겨받았다.

대리석처럼 하얀 바윗돌을 깎아서 만든 물건이었다. 그 중앙에 새겨진 금색 문양이 시선을 끌었다. 마치 사람의 눈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 눈동자를 대신하듯 녹색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에메랄드인가?'

값진 물건처럼 보이니 챙겨놔서 나쁠 건 없을 듯했다. 우진은 그것을 품속 깊이 갈무리해 넣었다.

"용무가 더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게."

우진은 뜸 들이지 않고 대련장을 떠났다. 점차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

이를 지켜보던 레이먼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게 보이셨습니까?"

눈이 없기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보우는 두 눈을 잃은 후, 마주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을 개안했다. 브리트라의 수도승들은 이를 세 번째 눈. 혹은 심안이라 부른다.

그 질문에 보우는 고심하다 답했다.

"······심안을 쓰기 싫더군. 왠지 모르겠지만, 그 사내의 본질을 보면 위험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경우도 있습니까?"

"나도 처음 있는 일이라 좀 당황스럽다네."

심안을 쓰길 꺼려지는 상대.

그렇기에 보우는 대련을 통해 진의 정체를 가늠하려 했다.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평소보다 더 과격한 대련을 시도해본 결과···

'······죽을뻔했군.'

괜히 성질을 건드렸다가 크게 한 방 당했다. 마지막 격돌 이후 벽에 처박혔던 순간, 가해진 충격이 워낙 강하여 보우는 반쯤 혼절한 상태였다.

제때 기를 둘러서 몸을 보호한 덕분에 큰 부상은 간신히 면했지만··· 그 사내가 달려와서 후속타를 날렸다면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걸까.'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유르기스.

대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왠지 모르게 손등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선 손등을 살펴봤다.

찢어진 상처 단면이 들러붙고 있었다.

'······재생 속도가 빨라진 것 같은데?'

우진은 의아함을 느꼈다.

왠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있는 듯했다. 마수의 내단을 여럿 먹은 덕분에 치유력 또한 강화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빠른 속도.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우진은 줄곧 있었던 일을 복기하던 중, 최근 집어먹었던 흉물의 내단을 기억해냈다.

'흉물의 재생 능력을 일부 계승한 건가?'

확신하긴 어려웠다.

우진은 최근 몇 달 동안 피를 본 적이 없었다. 워낙 오랜만에 다쳐봐서, 이 능력이 정확히 언제 생긴 건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쨌건 좋은 일이다.

우진은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겨가며, 이 상처를 만든 사내. 보우와의 대련을 복기했다.

솔직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한 대련이었건만··· 마나를 활용한 기술들은 우진이 내심 예상했던 것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힘으로 부수는 것 말곤 방법을 모르겠군.'

게다가 이건 대련에서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을 다치게 만들 테니까. 방금 전만 하더라도 보우 장로를 벽에 처박아버려 내심 크게 식겁했었다.

바꿔 말하면, 서로 목숨을 건 대결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단 뜻이지만···

상대방을 몸 성히 제압하는 기술도 하나쯤 있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진은 현재 보유한 재주를 하나씩 점검하며 걸었다.

화르륵.

우진의 손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클레어가 가르쳐준 마법이었다.

샤아아—

손바닥의 불꽃이 돌연 서늘한 냉기로 바뀌었다. 이 또한 클레어가 가르쳐준 마법.

빠직!

일순 붉은 번갯불이 번쩍인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마수를 해치운 후, 내단을 취하여 계승 받은 잔재주. 그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우진은 이내 번갯불을 꺼트렸다.

'생각해 보니 이걸 제압용으로 쓸 순 없지.'

너무 위험한 재주기도 하고, 카르마에서 비롯된 능력을 남들 앞에서 쓰자니 좀 꺼려진다. 교단 연맹의 눈에 띄었다간 좋지 못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마나 아츠도 좀 배워야 하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배우는 것 자체도 어려울 테고, 가르쳐주는 사람 또한 드물 것이다. 애써 터득한 기술들을 선뜻 공유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

그리 생각하던 우진은 문득 보우를 떠올렸다. 교단 연맹에 들어간다면, 보우 같은 사내에게서 마나 아츠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우가 했던 말을 되짚어보자.

마경에 침식당한 땅을 정화하여 인류의 고향을 되찾는다. 그 말은, 교단 연맹이 조만간 원정군을 장벽 바깥으로 내보낼 예정이란 건데···

'······이거··· 사실상 입대하란 소리잖아.'

여기까지 와서 또 군생활을 하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인류의 고향이니 뭐니, 사명감을 들먹여도 우진으로선 시큰둥할 뿐이다. 그는 애초에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기에, 보험 삼아 추천패는 계속 보관해둘 예정이었다.

'천천히 고민하자.'

우진은 마냥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갔다.

* * *

이후의 일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다.

황금충의 두 아들이 죽었건만, 교단 연맹은 이를 질책하지 않고 용병들이 계속 의뢰를 이어가길 독려했다.

좋으면서도 의아한 일이었다.

용병단장들은 의뢰 계약을 박탈당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고용주가 도중에 사망한 건 두말할 것 없이 큰 사고였다.

우진은 그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교단 연맹이 원정을 준비하느라 바쁜가 보군.'

큰 목표를 앞에 두고 있으면 작은 사고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다.

용병단 셋을 대체할 만한 병력을 당장 구하기 어려우니, 성기사 몇 명만 감시 역할로 붙여둔 후 의뢰를 마저 진행시키려는 듯했다.

뭐, 속사정이 어떻든 돈만 벌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진은 용병들과 함께 화물을 호위하며, 머나먼 남쪽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청명한 하늘이 우진의 머리 위에 펼쳐졌다. 마경의 먹구름 따윈 찾아볼 수 없는 푸른 하늘. 이에 감명받고 나서 오래지 않아, 저 멀리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평선 전체를 채우고 있는 듯한 거대한 성벽. 흔히 연맹의 장벽이라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그 웅장한 자태를 본 우진은 연신 감탄했다.

'만리장성이 이런 느낌이려나.'

장벽의 높이가 정말 무식하리 높았다.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해질 지경.

물론 저렇게 큰 장벽을 국경선 전체에 걸쳐 짓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륙의 구조를 봤을 때 너비가 유독 협소한 지역이라 저런 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다.

지구로 따지면, 미국 대륙의 북미와 남미 사이에 놓인 파나마 같은 곳이랄까.

곧 타라스크들이 성문 앞에 멈춰 섰다. 인부들은 화물을 내린 후. 입구로 마중 나온 마차에 그것들을 조심히 옮겨 담았다.

겸사겸사 그 과정에서 운송 도중 누락된 품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작업이 끝났다.

이는 곧, 용병들이 맡은 의뢰 또한 끝났음을 의미했다. 돌아온 조나단이 씩 웃으며 금화가 든 주머니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이 새끼들아, 빨리 와서 돈 받아 가라!! 어우, 괜한 짓 하다가 허리 나갈 뻔했네."

"하하하!"

금화 주머니가 너무 무겁다는 듯, 조나단이 허리를 붙들며 앓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용병들이 한껏 소리내어 웃었다.

직후 줄을 서서 금화를 받는 용병들. 우진은 금화 여덟 닢을 배분받았다.

'이 정도면 짭짤하군.'

머릿수대로 나누느라 받은 돈이 극적으로 크진 않았지만, 적당히 일한 것치곤 많은 돈을 벌었다. 함께 금화를 받은 클레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진!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나야 좋지."

클레어와 잡담을 나누며, 용병들과 함께 장벽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르릉."

렉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붉은 늑대. 우진은 왠지 모르게 그 눈빛에 서린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클레어가 의문을 표했다.

"어··· 렉스가 왜 저러는 거죠?"

"먼저 들어가. 잠시 산책을 하고 올게."

일행을 먼저 보내놓은 후. 우진은 붉은 늑대와 함께 걸음을 옮겨갔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이제 떠나려는 거냐?"

우진이 문득 질문했다. 그에 대꾸하듯 렉스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사람이 큰 도시로 향하듯, 마수는 마경에서 살아가길 원할 테니까. 그렇기에 녀석은 장벽 안으로 갈 생각이 없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원정이 시작되면 이 주변은 위험해질 테니."

잘 가라.

우진이 그리 작별 인사를 하는 순간, 렉스가 깊은 숲속을 향해 바람같이 내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붉은 늑대. 그러던 중 녀석이 문득 고개를 돌려 이쪽을 흘겨봤다.

툭툭.

렉스가 촉수 끝으로 굵직한 나무를 건드리더니, 직후 나무를 힘껏 긁어서 길쭉한 발톱 자국을 하나 남겨놨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

이에 의아해진 우진은 뭐라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새 붉은 늑대는 숲의 그늘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저 나무에 뭔가 있는 건가?'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봤다. 하지만 나무를 몇 번 둘러봐도 눈에 띄는 건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렉스의 발톱 자국뿐이었다.

어째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우진은 그리 생각하며, 장벽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클레어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우진과 그의 주변을 훑었다.

"······렉스는 잘 떠났나요?"

"응. 너도 예상하고 있었어?"

"그 녀석은 늑대잖아요. 개가 아니라··· 그래도 당장 떠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렉스가 떠난 게 섭섭한지 클레어가 연신 마경을 훑어봤다. 딱히 보이는 것은 없다. 그녀는 낙심한 듯했지만, 애써 밝게 이야기했다.

"기회가 되면 또 볼 일이 있겠죠."

"그렇겠지."

그리 얘기하며 장벽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직후 그들이 맞이한 건 장벽 못지않게 큰 대도시였다.

장벽 도시, 유르기스.

유르기스는 교단 연맹을 상징하는 영웅의 이름이었다. 우진이 읽은 마경 견문록을 쓴 사람. 이 도시가 유르기스라 불리는 건 그의 업적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거대한 대성당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연맹에 소속된 교단들은 각기 다른 신을 섬기고 있기에, 자존심 싸움을 하듯 너도나도 큰 성당을 지은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다 망해가더라도 성당 하나만큼은 크게 지어놔야 하는 건가.'

솔직히 저리 큰 건물을 지어놓는 건 비생산적인 짓 같았지만··· 적어도 보기에는 좋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구경거리가 많아, 마치 관광을 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 말하자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그 목적으로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니었나요? 안전한 도시에서 유유자적 놀면서 살고 싶다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막상 오고 나니까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렴 어때요. 이럴 때 안 즐기면 손해죠."

가이드를 하듯, 클레어는 도시의 상징물들을 하나씩 설명해줬다. 우진은 그 얘기를 경청하며 걸음을 옮겨갔다.

유르기스는 규모가 큰 만큼 볼거리가 많았다. 놀거리, 먹을거리 또한 많았고, 마침 우진의 호주머니 속 금화 또한 많았다.

이 안전하고 풍족한 도시는 우진이 지금껏 해온 노고에 대한 보상 아닐까?

······그 생각은 딱 2주일 정도 이어졌다.

처음 봤을 때 놀랍고 새로웠던 풍경이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 광채가 놀랍도록 퇴색되기 마련이니까.

'할 일이 없다.'

침대에 드러누운 우진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도시를 구경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슬슬 신물이 났다.

할 일이 없으니 침대에서 일어날 이유가 없지만···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것도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우진이 곧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자, 여관 1층에서 독서 중인 클레어가 눈에 들어왔다.

"진.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셨네요."

"뭔가 재미있는 거 없어?"

"마법 공부는 어떠신가요?"

당연하게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우진은 새삼 신기하단 듯한 눈으로 클레어를 봤다. 공부를 하는 게 질리지도 않는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그야··· 마탑에 못 들어갔으니, 그만큼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죠.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결국엔 도태되겠지만요."

마탑들은 중급, 상급 마법을 다루는 주문서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므로, 외부자는 4위계 이상의 마법은 익힐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클레어는 마탑에 갈 돈이 없어서 용병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옛 마법서를 하나 얻을 수 있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책에 적힌 주문을 연구하고 있다.

"그 마법책은 어디서 찾았어?"

"헌책방에서 발견했어요. 운이 좋았죠. 마법서가 갖고 싶어서 온갖 곳을 다 뒤지고 다녔거든요. 마탑 쓰레기통도 뒤지고. 그때는 진짜 힘들었는데··· 이 책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담담하게 말하는 클레어.

운이 좋았다기보단, 운을 찾아다녔다는 게 옳은 표현 아닌가 싶다. 마법서를 갖고 싶어서 책이 있을 만한 물건은 다 살펴봤단 뜻이니까.

어쩌면 클레어가 우진에게 아낌없이 마법을 가르쳐주는 건, 이런 부류의 서글픔을 먼저 겪어봐서 그런 것 아닐까.

그리 생각하던 중···

"······여보게, 진."

왠지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는 우진. 직후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반가운 손님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야,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자칭 제자가 따라주는 술 한 잔은 마셔봐야지. 내 이름을 참 많이도 팔아먹었더군."

그리 답하며, 사냥꾼 헥터가 씩 웃었다.

사냥꾼.

오랜만에 만난 헥터를 대접하기 위해 좋은 식당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따라오지 않았다. 본인이 식사 자리에 끼면 두 사내가 마음 편히 대화하기 어려울 거라 여긴 듯했다.

우진이 값비싼 술과 음식을 주문하자, 흡족한 듯 헥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만에 잘 얻어먹겠군. 혹시 너무 무리해서 돈을 쓰는 건 아닌가?"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벌이가 좋은 편이라."

"대충 그럴 것 같긴 했다네. 그새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옷도 좋아 보이고. 고운 처자와 함께 오손도손 잘 사는 것 같아서 보기 좋구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는 두 사람. 그러던 중 헥터가 문득 질문했다.

"그래서, 자네의 꿈을 이룬 기분이 어떻나?"

기분이 어떻냐니···

좋다. 라는 말이 바로 나와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우진은 말문이 막힌 듯 목덜미를 연신 긁적이다, 결국 솔직히 속내를 토로했다.

"······잘 모르겠군요.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요즘 들어서 마냥 무료합니다."

장벽 안으로 가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

이 목적 하나로 여기까지 왔건만··· 최근 들어서 자꾸 의문이 들었다. 이게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이 맞는 걸까.

때 늦은 방황을 하는 중이다.

그리 말하자 헥터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마치 우진의 정신 상태를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어떻게 알아차리신 겁니까?"

"대충 감이 온다네. 나도 젊을 때 자네와 똑같은 고민을 했으니까."

고기를 썰던 우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려울 것 없지. 이걸 뭐라 설명하는 게 좋을까··· 진, 자네는 혹시 내가 웨어울프를 사냥하러 간 이유를 알고 있나?"

"복수하기 위해서라 들었습니다."

이는 웨어울프를 사냥한 후 헥터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업계의 지인들이 웨어울프에게 여럿 살해당하여, 그 복수를 위해 마경으로 왔다고···

"그거, 사실 거짓말일세."

"······예?"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런 우진을 위해 헥터가 재차 확언해 줬다.

"거짓말이라고. 물론 웨어울프 때문에 내 지인들이 여럿 죽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허울 좋은 명분일 뿐. 내가 그놈을 사냥하려고 했던 건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네."

"그럼 진짜 이유는 뭡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 강적을 맞닥뜨린 순간의 전율, 그리고 사냥했을 때의 희열··· 현상금과 명성 따위는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에 불과해."

웨어울프의 악명이 높아질수록 헥터의 피가 들끓었다. 그 강적을 사냥하여 젊은 날의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헥터는 늙고 병들었다.

그를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일탈을 위해 사냥을 떠난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헥터는 복수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마경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한다면, 모두가 날 미친 늙은이 취급을 하겠지··· 하지만 자네만큼은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와 똑같은 갈증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리 말한 헥터가 동의하냐는 듯, 이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솔직히 동조하고 싶진 않은 의견이었다. 자신이 싸움에 굶주린 미치광이라 인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하지만 달리 반박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말없이 고민하던 우진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수를 사냥하는 건 재미있죠."

"그렇지? 재미를 쫓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그런 의미에서, 이 밋밋한 온실은 자네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야."

마경으로 돌아가는 건 어떻겠나?

헥터가 스테이크를 씹으며 그리 조언했다. 우진의 입장에선 의아한 말이었다.

"기껏 안전한 도시로 들어왔는데··· 다시 마경으로 가는 건 너무 아까운 짓 아닙니까?"

"그것도 웃긴 말이지.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왜 안전한 도시를 찾아다니는 겐가? 어딜 가던 목숨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다시피 할 텐데."

"······."

오늘따라 여러 번 말문이 막힌다.

우진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자, 헥터가 씩 웃으며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그냥 다 늙은 노인네의 헛소리니 대충 흘려듣게나. 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그냥 술기운에 막 지껄여보는 소리니."

"······아닙니다. 생각이 정리되는군요."

우진은 포도주를 홀짝이며, 헥터가 앞서 했던 말들을 술안주 삼아 한참 곱씹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 듯했다.

생각하던 우진이 문득 다른 얘기를 꺼냈다.

"곧 원정이 시작된답니다. 알고 계십니까?"

"보우에게서 들었다네. 나보고 자문관으로 들어올 생각이 있나 묻던데, 거절했지."

"거절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이번 원정은 역사에 남을 만한 시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 헥터의 성향을 고려하면 당연히 자문관 역할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건만··· 뜻밖에도 그는 거절을 택했다.

이유를 묻자, 옅은 한숨을 내쉬는 헥터.

왠지 대답하길 꺼리는 듯했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니 머뭇거리던 헥터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 자네에게 잘난 척 설교한 후, 이런 말을 하여 부끄럽지만··· 죽을 위기에 내몰리니 가족들을 소홀히 대한 게 후회되더군. 남은 여생은 이곳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왔다네. 나도 늙은 게지."

"잘하셨습니다. 슬슬 노후도 생각하셔야죠."

오히려 은퇴 시기가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보통 늙거나, 몸이 망가지면 일을 그만둘 텐데. 헥터의 경우 이 두 가지 모두 해당했으니까.

적당히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잘 얻어먹었다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헥터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우진이 숙소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다.

'······전생의 나는 참 밋밋하게 살았지만···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진은 공장의 현장 노동자로 살아갈 때도 삶에 큰 불만이 없었다.

어딘가 여행을 간 적 없고, 좋은 음식을 사 먹지도 않았다. 기분 전환이 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안 했다. 출퇴근만 반복하는 일상.

지난날의 우진은 이에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리 메마른 삶을 살아간 걸까. 이번에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즐기면서 살자. 이를 위해 오늘날의 우진은 장벽 도시 유르기스로 왔다···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

이 도시에는 즐길거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관점에선 그러했다. 이를 깨닫자, 우진은 예전의 삶이 불행하지 않았던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나는 줄곧 즐기면서 살아왔던 거였어.'

꿈을 꿀 때마다 괴물들과 싸워왔다. 항상 그 꿈을 악몽이라 여겼지만, 이젠 아니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오래지 않아 숙소로 돌아온 우진. 그가 클레어의 방에 노크했다.

"클레어. 잠시 들어가도 될까?"

"네, 잠시만요···"

클레어가 금방 문을 열어줬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간 우진은 대뜸 본론을 꺼냈다.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이야."

"어··· 갑자기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원정에 참여하려고."

마경으로 돌아간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클레어.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바로잡았다. 평소에도 우진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원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밌을 테니까요. 언제 출발하나요?"

"널 데려갈 수는 없어."

"······네?"

클레어가 이쪽을 바라봤다.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 이에 우진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넌 마탑에 들어가는 게 꿈이라 했잖아."

작은 짐가방 하나를 내려놨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에 놓인 가방. 그 속에 번쩍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금화 백 닢이야. 이 정도면 마탑에 들어가기 충분한 돈이겠지?"

"진,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순 없어요!"

놀란 클레어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우진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클레어. 나는 이 돈을 한 달 만에 벌었어. 너도 옆에서 같이 봤잖아? 그리 큰돈도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마."

"암만 그래도 이걸 이렇게··· 전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으니 갖고 가세요."

"내가 안 괜찮아. 했던 말 다시 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받아 가. 안 가져가면 그냥 도박장에 들고 가서 전부 날려버릴 거야."

"그러시던가요!"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

한창 얘기를 하던 중 우진은 문득 말을 멈췄다. 왠지 클레어가 코를 먹는 빈도가 늘었다. 눈가에 맺힌 촉촉한 물기.

"······야, 우는 건 반칙이지."

"안 울어요!"

우진의 경험상, 저리 말하는 사람 중 안 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클레어가 돌아섰다.

이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다.

"진짜? 안 우는 거 확실해?"

그리 얄밉게 말하며, 우진이 슬쩍 옆으로 가서 클레어의 얼굴을 봤다. 그러자 다시 몸을 뒤로 돌리는 클레어.

우진은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덕분에 클레어 또한 쉼 없이 제자리에서 돌아야 했다.

빙글빙글—

그렇게 춤추듯 돌고, 돌다···

우진이 문득 자리에 우뚝 멈췄다. 습관처럼 돌던 클레어는 그대로 우진과 마주 섰다.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기 전에 잡아 붙들었다.

"사랑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뭐냐 이게."

"······흣, 흐흐흐."

결국 클레어도 웃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좀 어이없는 모양.

클레어는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고, 우진은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서로 잘못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화해한 후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대화가 느긋했다. 어차피 이 지루한 도시에서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기에.

* * *

우진이 장벽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입고, 묵직한 짐가방을 등에 짊어졌다.

눈이 팅팅 부은 클레어가 배웅하러 나왔다.

"······진."

클레어가 문득 불렀다.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보자, 클레어는 아무 말 없이 두 팔을 벌렸다. 그 의도를 읽은 우진이 가까이 다가가서 힘껏 포옹을 나누었다.

"원정이 안정화되면 마탑으로 갈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서로의 귓가에 그리 중얼거린 후.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클레어가 애써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진은 뒷걸음질 치며 손을 마주 흔들다, 거리가 좀 멀어진 듯하여 몸을 돌렸다.

작별에는 항상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인연은 아니기에 슬프진 않았다.

······마경에도 그런 인연이 있다.

깊은 숲속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대충 십여 분 정도를 걸어가니, 익숙한 게 눈에 띄었다. 늑대의 발톱 자국이 새겨진 나무 한 그루.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발톱 자국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휘이익—

우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반응하여, 숲의 음험한 그늘 속에서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붉은 털을 지닌 늑대. 렉스였다.

"내가 마경으로 돌아올 거라 예상했냐?"

그리 묻자 렉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의 렉스가 나무에 발톱 자국을 남겨놓은 건, 이 나무 근처에 머무르고 있겠다는 의미로 표식을 남긴 것이었다.

늑대는 우진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진즉 눈치챘던 모양.

그리 생각한 건 렉스뿐만이 아니었다. 헥터도, 클레어도··· 주변 사람들 모두 일이 이렇게 되리라 내심 예상하고 있던 듯했다.

'줄곧 나만 몰랐구나.'

파랑새는 먼 곳에 있지 않다고 했던가. 참 머나먼 길을 돌아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마경을 바라봤다.

지평선에 걸려 있는 먹구름. 짙은 그늘. 까마귀들의 울음소리. 장벽에서 멀어질수록 잔디들이 점차 시커멓게 물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그 쿰쿰한 곰팡이 냄새를 맡으니···

마치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가자."

사냥꾼 김우진이 마경으로 향했다.

부자가 되는 법.

마경에 들어온 후.

휴식기가 길어서 그런 걸까. 몸풀기 삼아 사냥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우진은 일부러 인적 드문 길을 택해 걸었다.

하지만 그리했음에도 눈에 띄는 마수가 없었다. 원정에 앞서, 실전 훈련을 위해 성기사들이 주변 마수들을 여럿 토벌했다. 그로 인해 마수들은 장벽 인근 지역에 오는 것을 꺼렸다.

'······운이 안 따라주는군.'

어쩔 수 없이 안전한 여행을 이어가는 우진. 그렇게 닷새 정도를 걷고 나니, 저 멀리 커다란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1 개척 도시.

마경에 최초로 세워진 개척 도시이자, 가장 큰 규모를 지닌 대도시. 하지만 우진은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크긴 한데··· 인상적이지는 않네.'

훨씬 크고 멋들어진 도시를 한 번 둘러봐서 그런지, 저토록 큰 개척 도시를 보더라도 딱히 놀랍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렉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늘 그렇듯 렉스를 숲에 풀어놓은 후. 우진은 혼자 개척 도시에 걸어 들어갔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단순했다.

'돈 벌어야지.'

우진은 갖고 있던 금화 대부분을 클레어에게 강제로 떠넘겼다. 그러고 남은 돈으로 야영 물자를 구매하고 나니,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

이곳에서 의뢰로 목돈을 번 후. 제3 개척 도시로 가서 보우를 찾아뵐 생각이었다.

'어느 의뢰가 좋으려나···'

우진의 시선이 게시판에 붙은 의뢰 벽보들을 훑어봤다. 그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 거머리쥐를 사냥한 후, 그 증거로 꼬리를 잘라서 가져올 것. 꼬리 하나당 은화 세 닢을 보상금으로 지급하겠다. ]

거머리쥐.

마경 견문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마수. 이는 최근 발견된 신종일 가능성이 높단 뜻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꽤 흥미가 가는데, 더 신경 쓰이는 건 뒷부분의 내용이었다.

[ 많은 실종자를 만든 의뢰니 주의하라. ]

의뢰를 받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실종되었고,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내용을 읽은 우진은 호기심을 느꼈다.

다른 의뢰에는 이런 경고 문구가 안 적혀있는 걸 봐선, 게시판에 붙은 의뢰들 중 가장 난이도가 높다고 봐야 했다. 고작 쥐 사냥인데도.

'그 정도로 위험한 마수인가?'

그래봤자 결국 쥐새끼일 텐데··· 희생자가 여럿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희한했다.

교단 연맹 또한 그리 생각하는지, 사람들이 실종되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덧붙여 적어놨다. 어쩌면 쥐 말고도 다른 위협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도대체 어떤 내막이 있는 걸까. 이게 신경 쓰여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재미 삼아서 시도해 보자.'

우진은 결국 그 의뢰를 택했다.

* * *

낯선 장소로 향한다는 건 나름의 설렘이 있지만,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마경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더욱 심했다.

'더 비싼 지도를 살 걸 그랬나?'

지도를 들춰보던 우진이 뒷목을 긁적였다. 낡은 지도라서 그런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풍경과, 표기된 정보 사이의 차이가 적잖았다.

마경의 환경은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다. 길이 없어지고 새로 생겨나는 것쯤은 예삿일. 우진은 추리하듯 주변 풍경을 살피며, 험준한 산속을 여러 군데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헤매자··· 산 중턱에 뚫린 조그만 동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우 찾았군.'

우진은 지도를 말아 짐가방 속에 갈무리했다. 그러고 나서 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저 안에 들어가 볼래?"

이에 렉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의미는 두말할 것 없는 거절.

눈치 빠른 렉스가 들어가길 꺼린다는 건, 저 동굴 속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일 터였다.

동굴 속을 다시 들여다봤다.

햇빛이 닿지 않기에 동굴 내부의 그늘이 짙었다.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운 어둠. 저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마치 맹수의 목구멍처럼 보였다.

화르륵—

우진의 손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그 불꽃을 왼손에 든 횃불에 옮겨붙인 후. 망설임 없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좀 걷자, 문득 뭔가가 급히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던졌다.

끼에엑!

직후 들려온 나지막한 비명. 명중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새빨간 눈알을 지닌 쥐 한 마리가 바닥에서 몸을 비틀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평범한 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질적인 특색이 눈에 띄었다.

'입이 신기하게 생겼네.'

마치 문어 빨판처럼 생긴 주둥이. 그 속에 뾰족한 이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머리쥐는 이 주둥이를 이용하여 사람의 몸에 들러붙은 후 피를 빨아 먹는다.

푹.

우진은 단검으로 놈의 숨통을 끊고 꼬리를 잘라서 챙겨놨다. 그 가치는 은화 세 닢. 쥐새끼 한 마리를 잡은 것치곤 큰돈이었다.

샤샤샥—

앞쪽에서 쥐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그 기척을 쫓아 우진이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단검을 한 번 던질 때마다 어김없이 쥐 한 마리가 잡혔다.

사실상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그리 위험한 놈들 같진 않은데, 앞서 이곳을 방문한 사냥꾼들은 왜 실종된 걸까.

그 이유를 추측하던 중··· 또다시 정면에서 쥐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미리 도망치질 않는 거지?'

우진이 의아함을 품었다.

그의 손에 횃불이 들려 있는 데다가, 쥐들을 사냥하느라 큰 소리를 여러 번 냈다.

쥐처럼 민감한 생명체들은 진작에 멀리 도망쳐야 했을 상황. 그런데 이 녀석들은 우진이 다가오길 기다리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야 비로소 도망쳤다. 마치 우진을 유인하는 것처럼.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뭘까?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어차피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듯했으니까. 우진은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눈에 띄는 쥐들을 모조리 사냥했다.

그렇게 제법 오랫동안 걷고 나니···

'······뭔가 쎄한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우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 불현듯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 전체를 빽빽이 뒤덮고 있는 거머리쥐들. 놈들은 사냥감이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길 숨죽여 기다리는 중이었다.

"······함정이었나?"

우진이 그리 중얼거리는 순간, 대답이라도 하듯 거머리쥐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천장에 물결치듯 번져가는 안광. 그 시뻘건 빛들이 우진을 향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온 사방이 적이다. 우진은 손에 든 횃불을 빗자루질하듯 휘둘러 주변을 쓸었다.

퍽, 퍼버벅!

횃불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예닐곱 마리의 쥐가 튕겨 나갔다. 정신없이 휘둘리며 주변을 비추는 횃불. 그럴 때마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쥐들의 모습이 일순 드러났다.

······그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일이 때려죽여서는 끝이 없는 상황. 우진은 힐끔 곁눈질하여 왔던 길을 확인했다.

'역시, 퇴로가 막혔어.'

쥐 떼가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을 진즉 가로막은 상태였다. 전술적인 사냥 방식. 이에 당해 수많은 사냥꾼들이 의뢰 도중 실종되었으리라.

설상가상으로 횃불을 계속 휘둘러서 그런지 불이 점차 꺼져갔다. 이를 본 쥐들은 승리를 확신했는지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으나···

사실 횃불이 없더라도 보일 건 다 보인다. 우진의 밤눈은 올빼미처럼 밝았으니까.

우진이 굳이 횃불을 챙겨온 건, 평범한 사람의 시점에서 이놈들을 한 번 상대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 해야 거머리쥐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슬슬 견적이 잡히는군.'

우진은 미련 없이 횃불을 집어던진 후,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손뼉을 쳤다.

쩌어어억!!

요란한 박수 소리.

그 소리가 동굴 속에서 터지니 귀를 갈기는 폭음이 되었다. 사람이 듣기에도 큰 소리인데 조그만 쥐들이 받은 충격은 오죽하랴. 주변에 있던 쥐들이 몸을 파르르 떨며 엎어졌다.

이 틈을 타서 우진이 내달렸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우진.

······그런데 그 방향이 퇴로와는 정반대였다.

우진은 오히려 동굴의 안쪽을 향해 질주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거머리쥐들이 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왠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놈들의 움직임.

그 반응을 본 순간, 우진은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더욱 속도를 끌어 올렸다. 오래지 않아 우진이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 거대한 쥐가 한 마리 있었다.

'찾았다.'

무리를 지배하는 우두머리 개체다.

거의 멧돼지와 비슷한 덩치를 지닌 쥐.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새끼를 낳아대고 있었다. 마치 여왕개미가 알을 산란하듯이.

우진은 곧장 여왕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유독 덩치가 큰 거머리쥐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여왕을 지키는 정예들인 모양.

물론 그래봤자 쥐새끼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그 경로에 있던 쥐들은 우진이 대충 휘두른 팔에 맞아 죽거나, 발길질에 채여 볼링핀 마냥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를 본 여왕이 겁에 질렸다.

"키이익!!"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는 여왕. 하지만 우진은 이미 도착했다. 그의 손에 들린 마체테가 서슬 퍼런 빛을 발하였다.

써억!

칼을 휘둘러 목을 베었다. 힘을 잃고 엎어지는 여왕의 몸뚱어리. 우진은 잘린 머리를 붙잡은 후 쥐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이로써 상황은 종료되었다.

우두머리가 죽은 게 확인되면, 그 부하들과의 주종 관계는 즉시 깨지게 되어 있다. 남은 거머리쥐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지게 되리라.

······그래야만 하는데.

키야아악!!

어째서인지 쥐들의 눈이 뒤집혔다. 한껏 격노하여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는 거머리쥐들. 계산 밖의 반응이라 우진은 살짝 당황했다.

'이놈들이 왜 이러지?'

덤벼드는 놈들을 바쁘게 토막 내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여왕과 거머리쥐들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얽힌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곧, 이곳의 쥐를 다 죽일 때까지 지저분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단 뜻이었다.

"······아, 제기랄."

한숨처럼 욕이 새어 나왔다.

* * *

렉스가 팔자 좋게 하품해댔다. 볕 좋은 곳에 앉아 뒷발로 머리를 긁어대는 늑대.

······철퍽, 철퍽.

문득 동굴 안쪽에서 질척한 소리가 들린다.

렉스가 코끝을 굼실거렸다. 역겨운 피 냄새. 오래지 않아 그 냄새의 주인공이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김우진이 걸어 나왔다.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온몸에 쥐의 피와 내장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그 행색이 보기 초췌했다.

옷과 머리카락, 짐가방이 핏물에 흠뻑 젖어서, 걸음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시뻘건 피가 흙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

이를 본 렉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누가 봐도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얄미운 표정에 우진이 뭐라 한마디 하려 했지만, 결국 한숨만 내쉬었다. 이번 일은 사실상 자초한 일이었기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재미 좀 보려다가 된통 고생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벌었군.'

의도치 않게 다시 부자가 되었다. 그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았다.

잔업.

우진은 강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몸 곳곳에 묻은 쥐 내장을 대충 쓸어내자, 그것을 받아먹기 위해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마수도 한 마리 왔다. 강가를 맴돌다가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온 모양.

"잡아 와라."

우진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렉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수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두 마수가 뒤엉키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우진은 그 소란 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빨래를 이어갔다. 아까 벗어놨던 옷을 물로 헹군 후 힘껏 잡아 비틀었다.

주르륵—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걸레를 짜낼 때처럼 이를 여러 번 반복하자, 옷에 스며든 핏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진이 핏물을 짜낸 옷을 살폈다. 피 냄새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 대신 옷 전체가 잔뜩 구겨져서 영 볼품없었다.

'아쉬운 대로 입는 수밖에.'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 여분 옷을 챙겨오긴 했지만, 짐가방이 피에 흠뻑 젖어서 그 속의 내용물들도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이를 확인한 우진은 미련 없이 가방 속 내용물을 전부 버린 후. 그만큼 빈 공간에 쥐 꼬리를 잔뜩 담아왔다. 정확히 몇 개인지는 모른다. 개수가 워낙 많아서 셀 엄두도 안 났다.

우진은 곧 빨래를 끝마쳤다. 두 마수의 싸움 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그새 끝났군.'

목이 찢어진 마수가 흙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오소리 마수. 렉스가 놈의 시체를 끌어와서 우진의 앞에 내려놨다.

현상금이 걸린 마수 같진 않았다. 의뢰 벽보에서 이런 놈을 본 기억이 없으므로.

'내단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려야겠어.'

우진은 오소리의 배를 갈라 내단을 꺼냈다.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내단을 쳐다보는 렉스.

"옜다."

큰 고민 없이 내단을 렉스에게 던져줬다. 날아온 내단을 냉큼 받아먹는 늑대.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 고개를 돌려 짐가방과 여왕 쥐의 사체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여왕 쥐는 의뢰에 언급되지 않은 마수라 몸값이 어떻게 책정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체를 챙기긴 했다. 우진은 왼손에 여왕 쥐의 머리를 든 후, 남은 몸통을 발길질하여 렉스 쪽으로 떠밀었다.

"이건 네가 들어라."

내단을 먹였으니 밥값을 해야 할 때였다. 렉스 또한 그리 생각했는지, 순순히 그 요구에 응하여 쥐의 몸통을 깨물었다.

늑대와 사냥꾼이 도시를 향해 걷는다.

* * *

이후의 일은 뭐···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도시의 입구 검문에서 붙들렸다. 강물로 몸을 씻긴 했지만 그럼에도 피 냄새가 너무 짙기 때문이었다.

어찌저찌 검문을 마친 이후에도,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새 옷을 한 벌 사야 할 듯했지만··· 돈이 얼마 없고, 피곤한 데다, 이 지긋한 쥐 꼬리들을 빨리 처분하고 싶어서 곧장 교단 연맹으로 향했다.

쿵!

우진이 짐가방과 여왕 쥐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현상금 지급을 담당하는 사제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 이게 다 거머리쥐의 꼬리입니까?"

"예. 여기 멀쩡한 사체도 하나 있으니 보고 비교해 보십시오."

우진은 가방의 옆주머니를 뒤적여 거머리쥐의 시체를 하나 꺼냈다. 목을 졸라서 죽였기에 상처 없이 온전해 보이는 시체였다.

사제는 짐가방을 뒤적여 쥐 꼬리를 하나 꺼낸 후, 확대경으로 그것과 거머리쥐의 꼬리를 번갈아 가며 관찰했다.

"확실히 생김새가 똑같네요. 그리고 짐가방 옆에 놓여있는 커다란 놈은···?"

"쥐들의 우두머리입니다. 무리에서 여왕벌 같은 역할을 맡고 있더군요."

설명을 듣던 사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건 제 선에서 보상을 지급하기엔 너무 큰 건수 같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상급자를 데리고 올 생각인 듯했다. 덕분에 혼자가 된 우진은 자리에 앉아 죽치고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중장년의 사내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정히 빗질 된 머리칼과 수수한 사제복.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만나 뵈어 반갑군요. 제 이름은 콘라드라 합니다. 형제님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진이라 불러주십시오."

우진이 그리 답하자, 콘라드가 흥미롭다는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근 큰 명성을 떨치신 분이군요. 앞으로도 자주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우진에 대한 소문은 아직도 개척 도시 내부를 떠돌고 있는 모양.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병들은 술자리에서 입이 가벼워지고, 우진이 행한 짓거리는 소문이 안 돌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콘라드의 시선은 진이 챙겨온 물건들로 향했다.

"전리품의 양이 얼핏 봐도 엄청난데··· 혹시 그 동굴의 끝을 보신 겁니까?"

"예. 우두머리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더군요."

그리 답하자, 콘라드가 품속을 뒤적여 양피지를 한 장 꺼냈다. 양피지의 중앙에는 그림 삽화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콘라드가 양피지를 내밀었다.

"혹시 동굴에서 이걸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진은 그 양피지를 넘겨받은 후 그림을 확인했다. 바위벽에 붙어있는 괴상한 물체. 마치 거대한 심장 하나가 거미줄에 걸려 있는 듯한 생김새였다.

우진은 이것의 이름을 알고 있다. 마경 견문록에서 자주 언급된 물체이기 때문이었다.

'균열핵.'

균열핵은 마경을 퍼뜨리는 씨앗 같은 물체다. 마치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균열핵이 생겨난 곳 주변은 점차 마경으로 변해간다.

마경에 침식당한 지역을 정화하기 위해선 균열핵을 반드시 파괴해야 했다. 그렇기에 이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교단 연맹의 주된 임무 중 하나.

"동굴 안에 균열핵은 없었습니다."

우진이 그리 확언하자, 콘라드는 아쉽다는 듯 탄식 소리를 흘렸다.

"아깝게 되었군요. 그 동굴 안에 균열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건만··· 그래도 그곳에 균열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큰 수확입니다."

균열핵을 찾아내기 위해선 여러 위험 지역을 탐색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거머리쥐의 동굴은, 원정이 시작되고 나면 언젠가 한 번은 들쑤셔야 할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우진이 발 벗고 나서준 덕분에 교단 연맹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콘라드는 이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었다.

"금화 이백 닢으로 사례하겠습니다."

"······너무 큰 금액 아닙니까?"

우진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심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금액. 이에 콘라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고작 이백 닢인 겁니다. 숙련된 성기사들을 여럿 투입해야 하는 임무인 데다, 자칫 잘못하면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들어가는 물자와 인적 재산, 그리고 위험을 따지면 금화 이백 닢 정도는 지불하는 게 옳다.

"하지만 우선 진위 확인부터 해야겠죠. 이런 말을 꺼내기가 좀 실례인 것 같지만··· 혹시 내일 거머리쥐의 동굴로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내부를 살피고 나서 섭섭지 않게 보상금을 챙겨 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우진이 균열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사대를 보내서 교차 검증을 한 후, 만약 균열핵이 발견된다면 금화 백 닢을 더 얹어주겠다.

합리적인 말이었기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언급된 돈의 액수가 너무 커서 지금의 상황이 현실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랑 괜히 싸웠네.'

불과 며칠 전 금화 백 닢 가지고 옥신각신 다퉜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우진은 여관에서 대충 식사를 때운 후 교단 연맹으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성당 건물 앞에 콘라드가 서 있었다.

"자, 안내해 주시길."

"······직접 가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콘라드가 직접 따라오려는 듯했다. 동굴 탐색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우진이 우려를 표했다.

이에 콘라드가 웃으며 등 뒤를 가리켰다.

"저의 형제님들이 동행할 테니 괜찮습니다."

덩치 큰 성기사 두 명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출중한 기량을 지닌 자들이었다. 레이먼드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 실력을 비교하는 게 실례라 생각될 정도.

이를 본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과 동행하면 사고 날 일이 없다시피 할 듯했다.

도시 밖으로 나와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그러던 중, 문득 콘라드가 궁금한 게 생겼다는 듯 질문을 꺼냈다.

"혹시 늑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문에 따르면, 스컬크러셔는 늑대 마수를 사냥개처럼 부린다고 하던데."

동행하는 사람이 많아서 굳이 렉스를 부를 생각은 없었으나, 콘라드가 소문 속의 늑대를 구경하길 원하는 눈치였다.

고용주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다.

'이렇게 된 김에 아침밥을 챙겨줘야겠군.'

우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붉은 늑대가 머뭇거리며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가방에서 꺼낸 칠면조 반 마리를 녀석에게 건네줬다.

으득, 으드득—

렉스가 자리 잡고 앉아서 칠면조를 뜯어먹는다. 이를 본 콘라드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정말로 늑대 마수를 길들이다니. 조율의 교단이 부러워할 일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늑대는 여신 에아의 상징물 중 하나기 때문이죠. 그런 이유로 조율의 교단은 늑대 마수를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레이먼드 또한 조율의 여신을 섬기던 신도였다.

'어쩐지. 늑대 마수를 길들이는 방법에 집착한 이유가 있었구나.'

틈이 날 때마다 우진에게 찾아왔던 것은, 레이먼드가 교단을 위해 노력하는 방식 중 하나였던 듯했다.

이후로도 콘라드는 교단에 얽힌 여러 상식들을 알려줬다. 그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어느새 거머리쥐의 동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심히 따라오세요. 동굴이 습해서 바닥이 조금 미끄러울 겁니다."

우진은 그리 조언한 후, 렉스와 함께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횃불을 든 콘라드와 두 성기사가 그 뒤를 따라왔다. 동굴 깊숙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는 네 사람.

······그런데 먼저 온 선객들이 있었다.

"퀴이이익!!"

큼지막한 오소리 세 마리가 이쪽을 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놈들의 발톱은 쇠스랑처럼 길쭉했고, 입가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어제 렉스가 사냥한 놈과 같은 종류였다.

'이름이 아마 갈퀴 오소리였던가?'

특별히 강한 놈은 아니지만, 매우 저돌적이었다. 오소리라는 생물이 원래 그렇다. 지구에서 가장 겁대가리 없는 짐승으로 기네스북에 선정될 정도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우진이 어제 버려둔 쥐 사체를 먹기 위해 모여든 듯했다.

"이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체테를 뽑아 들며 말했다. 고작 저런 놈들을 상대로 고용주가 나서게 만들 순 없는 노릇. 큰돈을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 한다.

성기사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한 사람이 마수 셋을 상대하도록 지켜보는 건 명예롭지 못한 짓이었다. 그리 판단한 두 성기사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걸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콘라드가 이들을 멈춰 세웠다.

"놔두게. 혼자서 하겠다잖아."

이렇게 된 김에 실력을 좀 보자.

제1 개척 도시의 지배자, 대주교 콘라드가 그리 말하며 우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영입 제안.

때때로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의 코를 깨문다. 이런 대담한 공격은 지는 싸움도 이기게 만들어줄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오늘은 아니다.

"퀴야아악—!"

갈퀴 오소리가 지면을 박찼다.

마치 포옹하려는 듯 앞발을 좌우로 쩍 벌린 오소리. 흔히 베어 허그라 불리는 방식의 공격이었다. 송곳니로 적의 목을 깨물고, 앞발로는 등을 할퀴어 척추뼈를 뜯어낸다.

갈퀴 오소리는 이 저돌적인 공격으로 많은 인간을 사냥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대담함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뻐억!!

손바닥을 뻗어 오소리의 가슴팍을 쳤다. 굉음과 함께 오소리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드러누운 채로 피거품을 게워 내는 오소리. 손짓 한 방에 갈비뼈가 작살났는지, 놈의 명치가 깊숙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이 광경에 다른 오소리들이 당황했다. 지켜보던 성기사들 또한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우진은 마냥 불만족스러웠다.

'이런 느낌이 아닌데.'

보우의 손바닥 치기를 틈틈이 흉내 내고 있지만 큰 성과가 없다. 그때 그 느낌을 재현하는 건 쉽지 않은 짓이었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 감이 잡힐 듯했다.

······무술 연구는 나중에 마저 하고, 지금은 남은 마수들을 처리해야 할 때.

두 오소리가 이쪽을 향해 돌진해 왔다.

앞서 달리던 놈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하더니, 돌연 자리에 멈추고선 자세를 바짝 낮췄다. 그와 동시에 뒤따르던 놈이 힘껏 발을 굴렀다.

타악!

뒷놈이 도약하여 앞의 동료를 뛰어넘는다. 그 가속을 등에 업은 오소리가 앞발을 휘둘렀다. 앞서 자세를 낮춘 놈 또한 우진의 발목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위와 아래. 두 곳에서 동시에 행하여지는 마수들의 공격. 그에 대응하여, 우진은 칼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쥐고선 장작을 패듯 내리그었다.

썩, 쩌억!

뭔가 잘리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휘둘려진 칼날이 다가오는 앞발을 베어낸 후, 그대로 밑에 있던 오소리의 두개골까지 쪼갰다.

쿵.

놈이 바닥에 엎어졌다. 죽음을 부정하듯 몇 차례 경련하는 몸뚱어리. 허나 오래지 않아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앞서 도약했던 오소리는 흙바닥 위를 나뒹굴며 멀리 굴러갔다. 놈은 비교적 운이 좋았다. 비록 앞발 하나를 잃었지만, 다른 놈들과 달리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으니까.

"퀵, 쿠익···"

마지막 오소리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절뚝대며 동굴 속으로 달아났다. 승산이 없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

휘이익~

우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에 응하여 렉스가 사냥감을 쫓았다. 오소리는 다급히 도망쳤으나, 앞발이 하나 없기에 금방 따라잡혔다.

늑대가 오소리의 뒷목을 깨문 후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터져 나오는 애처로운 비명. 곧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갑시다."

우진이 콘라드 일행을 부른 후, 다시 동굴 속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콘라드와 성기사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콘라드가 문득 성기사들에게 질문했다.

"······너무 간단하게 사냥이 끝난 것 같은데. 방금 그 마수들이 약해서 가능했던 일인가?"

우진은 사실상 손짓, 칼질 한 번으로 세 마수를 제압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쉽게 정리된 상황. 콘라드는 근접 전투에 일가견이 없어서 방금 본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기사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갈퀴 오소리는 약한 마수지만, 워낙 사나워서 상대하기 쉬운 놈은 아닙니다. 그리고 흔적을 보아하니··· 저 사내 혼자서 이 동굴의 쥐들을 몰살시킨 듯합니다."

"그 말은?"

"······엄청난 강자입니다."

성기사가 그리 답하자, 흡족해진 콘라드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소속 없는 인재를 찾았군."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

* * *

거머리쥐의 동굴에서 균열핵이 발견되어, 금화 백 닢을 더 받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런 행운이 따르진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균열핵이 갑자기 생겨나진 않을 테니까. 우진은 지난날 이 동굴을 꼼꼼하게 살펴봤고, 쥐를 제외하면 특별히 눈여겨 볼 게 없다고 진즉 결론을 내렸다.

콘라드 또한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쉽게도 균열핵은 없군요. 도시로 돌아간 후 약속했던 보상을 지급하겠습니다."

그리 공손히 말하는 콘라드. 우진은 그와 함께 개척 도시로 돌아갔다.

직후 콘라드는 사무실로 우진을 안내했다.

"보상금이 곧 올 겁니다. 잠시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듯하군요."

콘라드가 그리 말하며 손짓하자, 수녀가 다가와서 차와 비스킷를 책상 위에 차려놓았다. 귀빈이 왔을 때 내오는 값비싼 다과들이었다.

이 접대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뭔가를 요구하고 싶은 건가.'

보상금만 받고 뜰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얘기를 좀 들어야 할 것 같다. 우진은 비스킷을 하나 씹으며 콘라드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진, 혹시 교단 연맹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다.

"안 그래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보우 님께서 제게 추천패를 하나 주셨지요."

우진은 그리 답하며, 품속을 뒤적여서 보우의 추천패를 꺼내 보였다. 이를 본 콘라드는 살짝 당황했다.

"······역시, 보우 장로의 안목은 매번 대단하군요. 이러면 조금 복잡해질 것 같은데··· 혹시 그쪽에 합류하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당시의 우진은 결정을 유예했다. 그렇기에 보우는 추천패를 주며,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교단 연맹으로 합류하란 제안을 했다.

그 말에 콘라드는 미소를 되찾았다.

"그렇다면 제게도 기회가 있단 뜻이군요. 혹시 이 도시에서 일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최고의 대우를 해드릴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제1 개척 도시는 마경에 존재하는 도시들 중 가장 크고, 부유하다. 거기에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 하나 있다.

"여긴 장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도시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원정이 시작될 때 가장 먼저 정화될 땅이라는 뜻이죠. 머지않아 이 도시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돈이 몰리는 장소가 될 겁니다."

정화가 이뤄지는 순간부터 이곳은 개척 도시가 아니라, 연맹이 직접 공인한 대도시가 된다. 인류가 처음으로 되찾은 영토. 그 상징성은 엄청난 관심과 돈을 불러오게 될 게 자명했다.

사실상 약속된 부흥.

우진은 딱 좋은 때에 이곳으로 왔다.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에 정착한다면, 이 찬란한 성공을 함께 공유받게 되리라.

콘라드가 그리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하품을 참던 우진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잘하는군.'

확실히 좋은 제안이긴 했다.

교단 연맹은 이번 원정에 사활을 걸었고, 제1 개척 도시는 그 단물을 가장 먼저 마시게 될 테니까. 잠시 몸을 담았다가 나오더라도 적잖은 돈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우진이 살짝 고민하던 중···

종기사 한 명이 금화가 잔뜩 들어있는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이를 본 콘라드는 품속을 뒤적여서 추천패를 하나 꺼냈다.

툭.

자신의 추천패를 주머니 속 금화 무더기 위에 얹어둔 후. 콘라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우진에게 내밀었다.

"천천히 고민한 후 결정해 주십시오. 개척 도시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금화 주머니에 든 추천패만 따로 빼내는 건 무례한 짓일 듯하여, 우진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함께 받아 챙겨야만 했다.

졸지에 가진 추천패가 둘로 늘어났다.

'상황이 참 희한하게 돌아가는군.'

선택지가 늘어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긴 했다. 원정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며칠 내로 고민을 끝낸 후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겠다.

밖으로 나온 우진은 짐가방 속 금화들을 살폈다. 금화 이백 하고도 마흔 닢.

약속했던 금액보다 금화 마흔 닢이 더 많았다. 이는 거머리쥐의 동굴로 길 안내를 한 데다, 오소리 마수 세 마리를 토벌했다는 이유로 추가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통이 큰 사내란 말이지···'

콘라드의 밑에 들어가면 이런 수혜는 꾸준히 누릴 수 있을 듯했다. 우진은 금화 위에 놓인 추천패를 한 번 살펴봤다. 그것에는 콘라드의 이름과 신분이 적혀 있었다.

'······대주교였군.'

소속은 지혜의 교단.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었다.

우진이 알기론, 각 교단마다 대주교는 고작 두 명뿐이다. 이는 콘라드가 지혜의 교단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란 뜻.

그 추천패를 집어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제안의 승낙 여부와 별개로, 높은 사람의 추천패라 분실하면 뒷일이 귀찮아질 듯했으니.

어째 머리 아픈 일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밥이나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으니, 이 성과를 자축할 겸 비싼 음식을 사 먹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식당을 찾기 위해 주변을 연신 둘러봤다. 규모가 큰 개척 도시답게 온갖 가게들이 있었다. 지하 도박장과 술집, 전당포, 대장간···

······문득 그것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귀물 상점도 있네.'

귀물.

주문이나 축복이 깃든 보물을 칭하는 단어. 대부분 마법사의 손에서 제작되는 물건이지만, 매우 드물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장벽 도시 유르기스에도 귀물 상점이 두어 개 있었다. 우진은 거리를 오고 갈 때마다 그 유리 전시관에 든 물건과 가격을 구경하곤 했다.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지.'

당시의 우진은 금화를 백 닢 넘게 들고 있었으나, 귀물을 사는 건 너무 아까운 짓이란 생각이 들어 자중했었다. 마법이 부여된 물건들은 사실상 재벌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다. 생활비로 쓰기엔 지나치게 많은 금화. 이걸 현금으로 갖고 다니기 번거로울 만큼 무게가 적잖았다.

'적당한 귀물을 하나 구매한다면, 앞으로의 마수 사냥에 큰 도움이 될 거다.'

흑새치 용병단만 하더라도 '끊어지지 않는 그물' 하나로 여러 마수를 사냥했다. 우진은 예전부터 그런 물건을 하나 구매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왔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될 일이니, 저 가게로 들어가서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은 우진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중년의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나와 손님을 반겼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주인장. 우진은 가게 내부를 한 번 둘러보다, 천장 곳곳에 친 거미줄들을 발견했다.

'······장사가 잘 안되나?'

심지어 파리도 안 날리는 듯했다. 거미줄에 시허연 먼지가 잔뜩 내려앉았고, 얄상한 거미들은 굶어 죽었는지 천장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말없이 가게를 살펴보는 우진. 그 모습에 주인장이 초조한지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귀물을 한 번 둘러본 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구매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건은 어떠신지요."

주인장이 진열장에 걸린 물건 하나를 갖고 왔다. 붉은 루비 보석이 박힌 반지. 그것을 손가락에 끼운 후, 마술사 흉내를 내듯 과장되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외치는 시동어.

"이그니스!"

화륵—

주인장의 손바닥에서 조그만 불꽃이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살짝 감탄했다.

"잘 작동하는군요."

"그야 물론이죠! 이 불꽃의 반지는 1분 동안 불을 피워낼 수 있고, 한나절을 기다리면 다시 충전됩니다!"

"이 반지의 가격은 얼마죠?"

"금화 스무 닢입니다."

그 말에 우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해야 성냥불 정도의 화력인데··· 이걸 금화 스무 닢이나 받고 파는 건가?'

심지어 지속 시간도 고작 1분뿐이다.

우진의 반응이 영 시큰둥해지자, 주인장이 급히 그 반지를 치운 후 다른 물건을 가져왔다. 흰색 보석이 박힌 팔찌. 주인장이 그것을 손목에 찬 후 뭐라 주문을 읊조렸다.

샤아아—

허공에 맺히는 흰색 빛 알갱이들. 그것들이 곧 한데 모여서 사람의 손 같은 형태를 빚어냈다. 우진은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봤다.

"고양이 손 주문입니까?"

"맞습니다! 마법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하루에 한 번, 10분 동안 이 손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 손.

상황이 급할 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에서 따온 주문이다. 허공에 손 하나를 만들어내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마법.

'클레어가 저 마법을 요긴하게 썼지.'

우진은 저 주문을 내심 부러워했지만, 난이도가 꽤 높은 마법이라 습득할 수 없었다.

"이 팔찌는 얼마죠?"

"금화 구십 닢입니다."

······저 돈을 지불할 바엔, 조금 더 보태서 마탑에 들어가는 게 현명한 짓 아닌가 싶다.

귀물의 값이 너무 비싼 데다가, 깃든 주문도 어째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그리 생각한 우진은 줄곧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혹시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없습니까? 불화살을 쏜다거나, 벽을 만들어서 적의 공격을 막는다거나."

"······하아."

그 말에 주인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르게 서글픈 듯한 표정.

"다들 그런 걸 기대하며 가게로 오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티팩트는 효율이 개똥 같은 물건입니다. 손님이 원하시는 귀물은 드문 데다가 값도 엄청나게 비싸요."

"그렇습니까?"

"네. 만약 그런 귀물이 흔하면, 돈 많은 부호들이 마법사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다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장신구를 계속 바꿔 끼우면 주문을 쉼 없이 쏴댈 수 있을 테니까요."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주인장의 설명을 듣고 나자, 의식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데릭과 세드릭 형제도 귀물에 큰 관심이 없었지.'

이걸 살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게 더 현명한 짓이다. 그토록 많은 돈을 지닌 황금충의 자식조차 귀물을 사는 건 불필요한 사치라 여겼다.

'내가 쓸 만한 물건은 없겠군.'

그래도 온 김에 가게를 한 번 둘러보자.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겨가던 중···

"······저건 뭡니까?"

한 물건이 우진의 눈길을 끌었다.

귀물.

우진이 가게 구석에 놓인 물건을 가리키자, 주인장의 시선 또한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짐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치 군장 배낭처럼 각진 생김새의 물건. 우진은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서 겉면에 쌓인 먼지를 쓸어 털어냈다.

가방 표면에 묘한 광택이 흘렀다. 그 재질은 정체 모를 뱀의 가죽. 손끝에 느껴지는 비늘의 감촉이 쇠붙이처럼 단단했다.

'······역시, 마수의 가죽이로군.'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우진은 그 정체를 가늠하기 위해 주인장에게 질문했다.

"이 가방은 뭡니까?"

"제가 알기론, 이 가방은 제법 옛적에 만들어진 귀물인데··· 실패작입니다."

"얼핏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요."

우진은 그리 말하며 짐가방을 한 번 둘러봤다. 만듦새가 썩 나쁘지 않았다. 먼지만 좀 쌓였을 뿐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곳이 없었다.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

하지만 이 가방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주인장은 그리 말하며, 업무용 책상을 뒤적여 뭔가를 가져왔다. 구리 동전이 잔뜩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직접 체험해 봐야 이해하기 편할 겁니다. 자, 이걸 손으로 들어보시지요."

의도를 알기 어려운 요구였지만 우진은 선뜻 그에 응했다. 오른손으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동전이 가득 담겨 있어서 무게가 꽤 묵직했다.

주인장이 가방을 열었다.

"이제 동전 주머니를 가방에 넣어 보십시오."

요구대로 주머니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가방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주머니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마치 기이한 착시현상을 보는 듯한 느낌.

놀란 우진이 가방 속을 응시하자, 주인장이 씩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축소 마법이 부여된 짐가방입니다. 이 가방 속으로 물건을 넣으면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빼내면 원래 크기로 돌아오죠. 아, 참고로 생명체에겐 적용되지 않습니다."

들어온 물건의 부피를 절반으로 줄이는 가방. 물건의 크기가 줄어든 만큼 가방 속 여유 공간이 확보되니, 이 짐가방은 다른 가방보다 2배 더 많은 물건을 넣고 다닐 수 있다.

세상 누구라도 탐낼 만한 물건. 그런데 이게 왜 실패작이라 불리는 걸까?

"가방을 들어보면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곧바로 가방을 들어봤다. 그런데··· 가방의 무게가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주인장이 곧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물건의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무게는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이 청개구리 같은 부작용 때문에 짐을 많이 넣어둘 수 없어요."

많은 물건을 수납 가능하지만, 내용물의 무게가 늘어나기에 짐가방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장점을 찍어 누르는 부작용. 그로 인해 이 귀물은 줄곧 외면 당해왔다.

······오늘날 우진이 발견하기 전까지.

"이 가방, 얼마입니까?"

그 질문에 주인장이 고민했다.

"글쎄요. 가격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부작용이 있더라도 이런 부류의 귀물은 워낙 귀해서, 적어도 금화 150닢은 받아야겠죠."

"사겠습니다."

"어··· 예?"

귀를 의심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인장. 우진은 등에 짊어진 짐가방을 내려놓은 후, 그 속에 든 금화 주머니를 책상 위에 얹어놨다.

금화 무더기를 마주하여 놀란 주인장. 큰 기쁨에 사로잡힌 상인의 입꼬리가 위로 씰룩거렸다. 어금니 자리에 박힌 금니가 드러나며 영롱한 빛을 발하였다.

"······감사합니다, 손님!"

서로 만족하는 거래가 성사되었다.

악성 재고를 처리하여 기쁜지, 주인장은 이쪽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새로운 짐가방을 짊어진 우진은 가게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 또한 기분이 좋은 건 매한가지였다.

'이 안에 뭘 담고 다녀볼까.'

우진이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아까 지나쳤던 대장간.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진열된 무기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길쭉한 양손 망치가 눈에 띄었다.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손잡이까지 강철로 된 물건이었다. 마수 사냥을 위해 만들어진 무식한 무기.

예전에는 대형 무기를 사는 걸 망설였다. 부피가 워낙 커서 들고 다니는 게 일이니까.

"저거 세 개 주십시오. 벽에 걸린 방패도."

우진은 고민 없이 망치를 세 자루와 방패 하나를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길쭉한 양손 망치를 짐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망치의 길이가 마술처럼 점차 줄어들었다.

망치의 길이가 가방의 깊이보다 훨씬 더 긴데도 손쉽게 수납할 수 있다. 마치 뱀이 큰 먹이를 집어삼키는 듯한 광경.

'갖고 다닐 수 있는 물자의 양이 두 배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가방보다 더 큰 물건도 넣고 다닐 수 있어. 이 휴대성을 생각하면 무게가 늘어나는 것쯤은 사소한 부작용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물건의 무게가 두 배로 늘어나는 건 엄청난 단점이었다.

이 짐가방은 다른 가방보다 두 배 더 많은 양의 짐을 수납 가능하다. 즉, 이 가방을 꽉 채운다면 짐가방 네 개와 같은 무게가 된단 뜻이다.

어지간한 용병도 견디기 힘든 무게. 하지만 우진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딱 좋은 무게감이로군.'

운동도 되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 * *

짐가방을 마저 채운 후 도시를 떠났다.

콘라드가 했던 제안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돈 좀 벌겠다고 한 도시에 정착하는 건 내키지 않은 일인 데다가, 제1 개척 도시는 장벽에 가까워서 마수가 출현하는 빈도가 낮았다.

한곳에 정착하여 마수의 씨를 말리는 것보단, 여러 도시를 오가며 토벌 의뢰를 받는 것이 더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콘라드의 자신감은 너무 과해.'

원정은 아직 시작조차 안 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자신의 성공을 운명처럼 여기고 있었다. 저리 방심하다 엎어지면 코가 깨지기 마련. 그런 사고에 휘말릴 경우 우진 또한 덩달아 피해를 본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게 옳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제3 개척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느긋하게 여행하던 중.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볼 기회도 더러 있었다.

구워어억—!

기괴한 울부짖음과 함께, 덩치 큰 수사슴 하나가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놈의 머리에서 좌우로 자라난 뿔은 방패처럼 크고 넓적했고, 콧대에는 길쭉한 소라고동 같은 원뿔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코뿔 사슴.'

특별히 강하진 않은 놈이다. 하지만 성격이 유독 더럽기로 유명했다. 지난번 상대했던 멧돼지처럼 영역 의식이 강한 놈이라서 그렇다.

놈이 이쪽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짐가방을 뒤적여 양손 망치를 꺼냈고, 이후로 일어난 일은 뭐··· 굳이 긴 설명을 할 필요 없을 듯하다.

콰아앙!!

수사슴의 골통이 터졌다.

밧줄을 꺼낸 우진은 사슴 사체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다. 사슴의 가죽을 벗긴 후 고기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슴의 고기가 제법 먹을만하단 말이지.'

가죽도 상품성이 있어서 좋은 가격에 판매된다. 좀 손이 가더라도 작업을 할 가치가 있는 마수. 우진은 사슴의 배를 갈라 내장과 내단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렉스가 슬며시 다가와서 곁에 앉았다.

"너 요즘 밥값을 못하는 것 같은데?"

그리 말하자, 찔리는 게 있는지 렉스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녀석은 짐가방이 무겁다는 이유로 우진을 등에 태우길 거부해 왔기 때문이었다.

"옜다."

우진은 피식 웃으며 내단을 던져줬다.

워낙 많은 내단을 먹어온 탓에, 이런 잔챙이의 내단은 먹더라도 체감되는 게 없어서 매번 양보하는 편이었다.

가죽을 대충 무두질하여 널어둔 후. 모닥불 위에 고기 꼬치를 걸어놨다. 사슴 고기가 익어가며 구수한 향기를 물씬 풍겼다.

그러고 나서 우진은 망치를 확인했다.

'또 휘어졌네.'

망치를 휘두를 때의 손맛은 기가 막혔지만, 한방 갈길 때마다 망치 자루가 휘어졌다. 아무래도 충격량이 워낙 강하여 버티질 못하는 모양.

오는 길에 망치를 하나 해먹어서 이제 두 자루 남았다. 잘 아껴서 써야 한다. 우진은 신경 써서 휘어진 망치 자루를 평평하게 폈다.

'역시··· 내 마체테만큼 좋은 무기가 없어.'

다른 무기를 몇 번 쓰고 나니, 마체테를 예전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애병. 우진은 칼을 뽑아낸 후 손수건으로 도신을 문질러 닦았다.

왠지 모르게 이 마체테는 힘껏 우진이 휘둘러도 부서지질 않았다. 굳이 숫돌에 갈지 않아도 그 예리함을 유지하는 칼날.

'어느 날부터 이 칼날의 색깔이 변했지.'

칼날을 모닥불에 비추자 검푸른 광택이 맴돌았다. 이게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마경 깊숙한 곳에서 마수를 사냥하고, 마체테로 그 시체를 토막 내서 손질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칼날에 신기한 광택이 깃들었다.

우진이 내단을 취하여 힘과 능력을 손에 쥐었듯, 칼 또한 마수의 피를 몇 번이고 뒤집어쓴 끝에 변화가 일어난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마체테 또한 일종의 귀물이라 부르는 게 옳을 듯했다.

'비슷한 사례도 더러 있으니까.'

명성 높은 성기사들이 남긴 무구들은 기이한 힘을 품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 그들 또한 마수를 여럿 토벌한 끝에 기물을 탄생시킨 것이리라.

이런 기물들은 흔히 성유물로 분류된다. 교단 연맹이 철저하게 관리하는 무구들. 탐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그런 기물을 구하는 건 어려울 일이니··· 마나 아츠를 익혀두는 게 장기적으로 좋긴 하겠어.'

우진의 힘을 견뎌낼 수 있는 무구는 흔치 않다. 그러니 마나, 또는 신성력을 써서 무기를 강화하는 기예도 익혀놔야 할 듯했다.

지난번에 헥터와 만났을 때 마나 아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당시의 우진은 여러 잡념에 사로잡힌 상태라 이를 물어보지 못했다. 장벽에 처박혀서 유유자적 살아 가느냐, 혹은 원정에 참여하여 사냥꾼 노릇을 이어가느냐를 고민하던 때였으니까.

'슬슬 고기가 다 익었겠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우진은 고기 꼬치를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마수 특유의 씁쓰레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지만 씹다 보면 고기 감칠맛이 났다.

그렇게 끼니를 때우던 중···

'······뭔가 소란스러운데.'

갑자기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떼거리로.

가만히 들어보니 어디선가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마수들이 무리 사냥을 할 때 나는 소란. 우진은 그 소리에 호기심을 느꼈다. 이는 렉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경하러 가볼까?"

그리 묻자 렉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 구경은 늘 재미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늑대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남은 고기를 대충 입에 밀어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우진과 렉스가 바쁘게 걸음을 옮겨갔다.

오래지 않아 소란의 근원지가 눈에 들어왔다. 토끼 무리가 뭔가를 둘러싼 채로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에 당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 마수 세 마리였다.

'토끼에게 사냥당하는 늑대라.'

먹이사슬이 뒤집힌 듯한 광경. 하지만 마경에서는 크게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르릉···"

곁에 있던 렉스가 불쾌한지 목을 떨며 울었다. 아무래도 동족들이 사냥당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

"도와주고 싶냐?"

그리 묻자, 렉스는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봤다.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

렉스 혼자서 상대하기엔 토끼 마수의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저 늑대들을 구하려면 우진도 한손 거들어야 할 듯했다.

하지만 마수 무리를 상대로 매번 치고받고 싸우는 건 번거로운 짓이다. 뒤처리도 귀찮고. 우진은 거머리쥐와 싸울 때 이를 새삼 실감했다.

이번에는 좀 쉽게 가보자.

"한 번 울부짖어봐. 가능한 크게."

우진이 그리 말하자, 눈치 빠른 렉스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워우우우우—

힘껏 울부짖는 렉스. 이는 늑대가 무리를 부르는 소리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토끼들의 귀가 쫑긋 곤두섰다.

토끼 마수들은 대체로 신중하다. 놈들은 이기는 싸움만 하려 하기에, 자칫 위험해질 수 있는 변수가 생기면 우선 도망치고 본다. 힘없는 초식동물들 특유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

워우우우우—

사냥당하던 늑대들도 길게 울부짖은 후. 도리어 토끼 마수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곧 지원군이 올 거라 판단한 모양.

그 기세에 억눌린 토끼들은 결국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 비록 속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지금 물러나지 않았다면 우진이 나서서 저놈들을 손수 도축했을 테니까.

렉스가 살아남은 늑대를 향해 달려갔다. 뭐라 대화를 나누듯 울음소리를 주고받는 늑대들. 우진은 육포를 씹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서로 안부 인사라도 나누는 건가.'

그리 생각하던 중···

렉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녀석의 뒤를 쫓듯 늑대 세 마리가 딸려 왔다.

······졸지에 식구가 늘었다.

늑대 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