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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두 세계.

잠들지 못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김우진은 육군에 복무하던 때에 그 사실을 처음 실감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이등병 시절, 불침번을 인수인계받을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특이 사항으로는··· 별 건 없고, 최병장님이 오늘도 잠을 설치시는 것 같더라."

최병장.

그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말년이었던 최병장은 금방 전역하여 부대를 떠났다. 김우진이 그를 본 시간은 고작 이주일 남짓에 불과했다.

우진이 최병장을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건, 그가 지닌 유감스러운 지병 때문이었다.

최병장은 허리 디스크가 터져 누울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 통증에 의해 모두가 잠든 늦새벽에도, 최병장은 홀로 잠들지 못하여 그늘진 복도를 떠돌았다.

피로에 사로잡혀 충혈된 눈과 비척대는 발걸음. 흡사 망령과도 같은 최병장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김우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저렇게 안 되도록 조심해야겠다, 하고···

'······그때가 몇 년 전이지?'

김우진은 속으로 달력을 헤아렸다.

얼추 셈해보니 14년 전인 듯했다. 우진의 현재 나이는 서른다섯. 군에 입대한 건 대학교 1학년을 마친 직후였다.

14년이면 적잖은 세월이다. 군대에서 겪었던 일 대부분이 잊혀질 시간. 우진은 왜 지금 최병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낸 걸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행색이, 그때 보았던 최병장의 모습과 닮아있으니까.

오늘날의 김우진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이제 12년째인가.'

다시 한번 가슴 속의 달력을 헤아렸다.

12년 전부터 김우진은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최병장처럼 어딘가 몸이 아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잠들 때마다 이상한 꿈을 꾼다.

현실과 구분 짓기 어려울 만큼 생동감 넘치는 꿈이었다. 오래 달리기라도 하면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저리는 데다,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찔한 통증까지 느껴진다.

이를 꿈이라 칭하는 게 옳은 건지 의문이 생길 만큼 생생한 꿈. 문제는 이 꿈이 지랄맞은 악몽이라는 점에서 기인된다.

검은 나무들이 늘어선 숲속.

흐르는 강물은 썩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고름처럼 질척했다. 그 물을 마시기 위해 몰려온 생명체들··· 놈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생김새를 지닌 괴물이었다.

이 꿈속 세계에서 김우진이 맡은 역할은 먹잇감이었다. 굶주린 괴물들을 피해 쉴 틈 없이 달렸다. 하지만 우진의 체력은 한정적이고, 영원히 달아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우진이 마주하게 되는 건 이빨 가득한 괴물의 아가리뿐이었다.

콰작!

잡아먹힌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난다. 이 짓거리를 잠들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매일 밤마다 죽음을 겪다 보니 우진의 정신은 급속도로 피폐해졌다. 잠이 부족하기에 평범한 일상생활 또한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끝없는 악순환이었다.

우진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부탁했다. 용하다는 무당도 몇 번 만났다.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증상입니다."

하지만 누굴 만나던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사실상 시한부 선고와 같은 결론.

김우진은 낙담에 잠겼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다. 매일 괴물들의 먹잇감이 되는 수밖에···

······그리 암울하게 살아가던 중.

'뭐지?'

어느 날, 우진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처럼 꿈속 괴물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런데 놈들이 도중에 사냥을 포기해버린 건지,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뒤를 쫓는 생명체가 없었다.

'설마··· 따돌린 건가?'

아무리 요령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숙달되기 마련.

수백, 수천 번이 넘도록 죽음의 술래잡기를 해온 덕분에, 김우진은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의 눈을 피하는 요령을 깨우쳤다.

그때부터 이 꿈속 세계가 조금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마냥 답이 없지는 않구나.'

지옥 같은 곳이라도 나름의 규율이 존재한다. 김우진은 생존에 필요한 지식들을 익혀갔다.

마주치면 위험한 생물, 상대할 만한 생물,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물을 구하는 방법···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꿈속에선 죽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선 생존 기술들도 좀 익혀놔야 할 것 같네.'

현실 세계의 기술은 꿈속 세계에도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잠에서 깨어 있을 때는 인터넷을 뒤적여 각종 생존 지식을 익혀갔다. 흔히 부시크래프트라 불리는 야생에서의 생존 기술.

거기서 더 나아가 각종 격투기와 검술, 궁술을 비롯한 무기술, 덫 놓는 방법도 틈틈이 익혔다. 괴물들을 상대로 매번 도망치기만 하는 것도 슬슬 질리기 때문이었다.

'당하고만 살 수는 없지.'

죽을 때 죽더라도 저놈들에게 칼침이라도 한 방 먹이면 만족스러울 듯했다. 그런 독심을 원동력 삼아 우진은 여러 기술을 터득하고, 꿈속에서 그 성과를 시험했다.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의 김우진은 여전히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꿈속 괴물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건 무모하기 그지없는 짓이므로.

하지만 그는 이제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다. 잠드는 건 힘겨운 일이지만, 적어도 예전과 같은 비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꿈속 세계에 너무 매몰되어 현실감을 점차 잃어가고 있단 점이다.

'거지꼴이 따로 없군.'

양치질을 하던 우진은 문득,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행색을 골똘히 살펴봤다.

머리칼은 손질하지 않아 엉망으로 뒤엉켰고, 턱을 매만지자 까슬한 턱수염이 손끝에 걸렸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여 충혈된 눈은 덤이었다.

그간 자기 관리에 너무 소홀했다. 이 모습을 보고 최병장을 떠올린 게 그분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속 이렇게 살아가면 안 될 텐데.'

줄곧 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살아왔다.

커리어라곤 전혀 없는 상황. 이대로 계속 나이만 먹어가면 현실 또한 꿈속 세계 못지않게 암울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일찍이 고된 일을 해온 덕분에 돈은 꽤 모아놨다. 이 자금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보는 건 어떨까.

'치킨집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당구장? 괜히 뭘 해보려다가 기껏 모아둔 돈까지 다 날려 먹을 것 같기도 하고···'

양치를 잊은 듯 김우진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당연하게도 사업을 구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고민해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러던 중 우진의 시선이 다시 거울로 향했다. 거뭇한 수염으로 뒤덮인 턱이 새삼 지저분해 보였다.

'······일단 면도부터 하자.'

어려운 일을 고민하지 말고, 당장 할 수 있는 쉬운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야겠다.

못다 한 양치질을 마친 후. 우진은 면도기로 수염을 쓱쓱 밀었다. 면도 거품이 걷어질 때마다 검은 턱수염이 때처럼 벗겨졌다. 세수를 하자 눈에 띄게 말끔해진 얼굴.

'흐, 이제야 좀 사람답네.'

김우진은 만족스레 웃으며 거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르륵—

돌연 시뻘건 코피가 흘러내린다.

당황한 우진은 급히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수도꼭지를 틀어둔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피. 코에 꽂아둔 휴지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 우진은 코끝을 꽉 짓눌러서 지혈을 시도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코피는 멎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핑 돈다. 우진은 비틀대며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벽에 기대듯 손을 짚을 때마다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쿵!

몸이 썩은 통나무처럼 기울어졌다. 우진은 뺨을 바닥에 처박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쉰다. 그 와중에도 끝없이 흘러나오는 핏물.

'······이야··· 이러다가 죽겠다.'

코피를 너무 흘려서 과다 출혈로 사망이라. 꿈속 세계에서조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망 사유였다.

죽음이 코앞인데도 우진은 이상하리 태연했다. 지금껏 악몽 속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겪어서 익숙한 걸까. 혹은, 지금의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현실감이 마비된 탓일까.

어쨌거나 김우진은 지금의 상황이 딱히 두렵지 않았다.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물밀듯 쏟아지는 졸음. 해소 못 한 갈증을 끝으로, 우진은 곧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흉물.

이른 새벽.

까마귀 우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부스스 일어난 김우진이 눈을 몇 번 끔뻑인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왠지 모르게 눈이 떠졌다.

여기가 어딜까.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한 사람이 들어가기도 버거울 만큼 좁은 바위틈. 우진은 그 틈새에 몸을 욱여넣은 채로 누워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침대 밑에 기어들어간 듯한 모양새였다.

팔을 슬쩍 움직이자, 몸 위에 쌓여있던 마른 낙엽 뭉치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익숙한 곰팡이 냄새.

"아, 제기랄."

한숨처럼 욕이 튀어나왔다. 이곳이 어딘지 대충 파악했다.

'여긴··· 내 악몽 속이잖아.

이곳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우진을 괴롭혀온 꿈의 세계다. 틀림없다. 이 바위틈은 우진이 최근 며칠간 애용해온 은신처였으니까.

꿈과 현실, 두 세계를 자유로이 오가기 위해선 안전히 잠들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했다.

잠은 두 세계를 이어놓는 징검다리다. 현실에서 잠을 자면 꿈의 세계에 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꿈속에서 잠을 자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우진은 지금껏 꿈속 세계에서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건 여러모로 불쾌한 짓이었으므로···

······그리 생각하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꿈속에서는 몇 번을 죽든 상관없다.

그저 잠에서 깰 뿐이니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만 하면 다시 꿈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런데 우진은 방금 현실 세계에서 쓰러졌다. 죽음을 확신할 정도의 출혈.

만약 현실의 몸뚱이가 이미 죽어버린 상태라면··· 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돌아갈 곳 없는 나의 정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느낌이 좋지 않은데.'

몸을 사리는 게 좋을 듯했다.

하지만 이 바위틈에 계속 처박혀 있는 것도 답은 아니었다. 생존하기 위해선 물자가 필요했다. 물과 식량, 땔감··· 이 척박한 땅에선 거저 얻을 수 없는 것들.

위험을 두려워하여 행동하기를 포기하는 건 도리어 더 큰 위험을 초래하는 법이었다.

'일단 움직여보자.'

우진은 몸 위에 덮여 있던 낙엽 뭉치들을 밀어 치웠다. 기듯이 바위틈 밖으로 빠져나온 후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하고도 싫증 나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늙은 노파의 손가락처럼 앙상하고 뒤틀린 나무들. 시커먼 곰팡이와 이끼들이 지면을 온통 뒤덮고 있고, 하늘은 이상할 만큼 먹구름이 자욱하여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앞은 보이는군.'

횃불 없이도 앞이 잘 보이면 한낮이다. 주변을 한 번 살펴본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겨갔다.

나침반이나 지도는 없다. 하지만 우진에겐 방향을 잡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그늘이 옅은 곳으로.'

이 숲의 깊은 곳으로 갈수록 먹구름들의 빛깔이 어두워지고, 지상에 드리운 그늘 또한 더욱 짙어졌다.

괴물들은 어둡고 그늘진 곳을 선호한다. 깊은 곳으로 갈수록 더 위협적인 괴물이 출몰했다. 놈들과 마주치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

그렇기에 우진은 꿈속 세계에 올 때마다 그늘이 옅은 곳을 향해 걸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죽게 되면, 다시 살아날 때는 과거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12년 전의 김우진이 처음으로 이 세계를 마주한 곳. 그 시작 지점은 이곳보다 훨씬 그늘이 짙은 곳이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지.'

숲의 안쪽에서 몸 성히 탈출하는 건 매우 어려운 짓이었다. 여러 행운과 끝없는 죽음으로 쌓아 올린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그곳에 비하면 이 외곽 지역은 평화롭다.

눈에 띄는 맹수들의 크기가 대체로 작고 소심하여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우진을 보는 순간 먼저 도망치는 녀석들도 수두룩했다.

다툼 없이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하지만 이 한적한 분위기 또한 행인의 목숨을 노리는 덫 중 하나였다.

후웅—

묘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우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아래로 낮췄다.

쉭!

뭔가가 우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검고 큼지막한 날개를 지닌 박쥐. 놈의 벼려진 발톱이 서슬 퍼런 빛을 발하였다.

'칼날 박쥐.'

우진은 저 괴물을 그리 불렀다.

칼날 박쥐는 기습의 명수였다. 나뭇가지에 붙은 채로 사냥감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때가 오면 활강하여 사냥감의 목을 발톱으로 긁어 도려낸다.

퍼득, 퍼드득—

바닥에 불시착한 박쥐가 뒤집어진 채로 날개를 마구 퍼덕였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한 모양새. 놈의 옆구리에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 단검은 우진의 것이었다.

'맞았군.'

아까 놈이 스쳐 지나갈 때 단검을 투척해뒀다. 급히 한 짓이라 명중할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그것이 운 좋게 박쥐 몸통에 제대로 꽂혔다.

우진이 퍼덕거리는 박쥐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마체테 벌목도를 말아 쥐었다. 묘한 광택이 일렁거리는 검푸른 칼날.

"캬아아악!!"

박쥐가 드세게 울부짖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큰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쩍!

휘둘려진 칼날이 박쥐의 머리통을 예쁘게 쪼개놨다. 힘을 잃고 엎어지는 박쥐. 손목에 힘을 줘서 마체테를 뽑아내자 걸쭉한 핏물이 끈처럼 길게 늘어졌다.

박쥐의 숨을 끊었다.

'좋아··· 빨리 처리해야겠네.'

사실 박쥐를 죽이는 것보다 뒤처리를 하는 게 더 귀찮은 일이었다.

우진은 박쥐의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직후 단검으로 박쥐의 머리를 도려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 솜씨가 놀랍도록 빨랐다.

순식간에 손질 되어가는 박쥐의 사체.

그것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설 즈음, 문득 우진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거얽.

먼 곳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온다.

'오고 있군.'

우진의 손이 더욱 바빠졌다. 급히 손질을 마무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벌목도를 휘둘렀다.

곁에 있던 애꿎은 나무가 칼날에 두어 번 얻어맞았다. 갈라진 단면에서 시커먼 수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은 소나무 수액보다 독한 냄새를 풍겼다.

우진은 급히 피에 젖은 손과 무기들을 나무 수액으로 씻어냈다. 직후 수액을 묻힌 가죽으로 박쥐 고기를 싸매더니, 그것을 나무 아래의 낙엽 속에 깊이 파묻었다.

'이러면 괜찮겠지.'

순식간에 일을 마친 우진은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서 그것이 다가오는 걸 보았다. 두 발로 걷는 인간 형태의 살더미. 놈이 걸을 때마다 비대한 살덩이가 출렁거렸다. 뻥 뚫린 눈구멍에선 검은 진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흉물.

칼날박쥐 같은 경우는 짐승과 어느 정도 유사한 생김새를 지녔지만, 변형이 많이 일어난 괴물은 생명체의 범주를 아예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진은 이를 흉물이라 싸잡아 불렀다.

'제법 큰 놈이다.'

신장이 2m는 족히 넘을 듯했다. 펑퍼짐한 허리둘레는 아름드리 나무처럼 굵었다.

걹, 거얽—

기괴한 울음소리를 흘려내며 걸어오는 흉물. 걷는 내내 놈의 살찐 손가락이 뭔가를 찾듯 허공을 더듬거렸다.

저리 행동하는 이유는, 눈이 퇴화한 탓에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흉물들 중 대부분은 눈알이 썩어 짓물러지는 병을 앓는 듯했다.

킁킁.

흉물의 콧구멍이 쉴 새 없이 벌렁거렸다. 문득 흉물이 자리에 멈춰 섰다. 놈의 턱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쭉한 혀가 튀어나왔다.

뱀처럼 흙바닥 위를 기어가는 기다란 혓바닥. 그 혀끝이 바닥에 고인 박쥐 피와 내장을 핥아 먹었다.

당연하게도, 박쥐 내장만으론 저 거대한 덩치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흉물이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박쥐 고기와 그걸 가져간 존재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놈이 맡을 수 있는 건 독한 나무 수액 냄새뿐이었다.

그으읅···

한참을 서성거리던 흉물이 끝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점차 멀어져가는 놈의 뒷모습.

'······이제 안전하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바위 뒤에서 걸어 나왔다. 흉물은 이런 식으로 피해 가는 게 여러모로 이로운 짓이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완력이 센 데다, 맷집까지 뛰어나다. 사냥 난이도가 높은 괴물.

아마 이 근처의 맹수들이 소심하게 구는 것도 저 흉물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다툼이 길어진다면 그 소리를 듣고 흉물이 찾아올 테니.

'괜히 흉물과 맞부딪힐 필요는 없지.'

마음만 먹으면 아까 그 흉물도 죽일 수 있긴 하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사냥을 시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니까.

우진은 낙엽 아래에 감춰둔 박쥐 고기를 챙겼다. 직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살펴보았다.

'곧 해가 저물겠네.'

아까보다 하늘이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슬슬 밤을 대비해야 할 시간.

은신처로 쓸 곳은 아까 전에 미리 봐두었다. 줄기가 잘려 나간 나무둥치 아래, 적당한 크기의 땅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주변에 자리를 잡은 우진은 나뭇가지를 긁어모았다. 야영을 위한 땔감들이었다. 오래지 않아 적당한 크기의 모닥불이 하나 만들어졌다.

우진은 타오르는 장작 하나를 밖으로 끌러낸 후, 그것을 횃불 삼아 손에 쥐고선 땅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직후 횃불의 빛을 비추어 땅굴 속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빈집이군.'

입구의 거미줄과 흔적들을 보아하니, 이 땅굴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주인 없이 방치되어 온 듯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선객이 있다면 잡아 족칠 생각이었는데. 운 좋게도 그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진은 횃불로 입구의 거미줄을 그을려서 없앤 후 모닥불로 돌아갔다. 불가에 앉아 현재 소유한 병장기들을 한 번 점검했다.

단검 세 자루, 다재다능한 마체테, 테두리에 철판이 둘러진 둥그런 나무 방패.

'여유로울 때 손질을 좀 해둬야겠어.'

우진은 두꺼운 천으로 아까 사용했던 단검을 닦았다. 천을 문지르자 끈적한 나무 수액이 연신 묻어 나왔다.

그러던 중, 우진은 문득 손에 쥔 단검을 가만히 응시한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검면에 얼굴이 비쳐 보였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잿빛 머리칼. 그 아래에 있는 것은,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매번 기분이 묘하네.'

거울 속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 건 매번 낯선 일이었다.

우진은 꿈을 꿀 때마다 이 젊은 사내의 시점으로 눈을 떴다. 여러 서브컬쳐에서 흔히 '빙의'라고 표현하는 현상. 우진은 줄곧 이 사내의 몸으로 꿈속 세계를 살아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해온 몸뚱이.

하지만 김우진은 이 거울 속 사내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출신, 나이,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그래도 아는 게 딱 하나는 있나?'

문득 잊고 있던 물건 하나가 생각났다.

우진은 품속을 뒤적여서 둥그런 메달 모양의 쇳덩이를 하나 꺼냈다. 그것에는 낯선 생김새의 글귀가 한 줄 새겨져있었다.

어느 나라의 것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이질적인 문자였다. 하지만 우진은 왠지 모르게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 3급 용병 ]

이 용병패는 김우진이 꿈속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갖고 있던 물건. 그렇기에 우진은 이 몸뚱이의 원래 직업이 용병이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3급 용병··· 어감이 그리 좋지는 않네.'

어중간한 숫자다. 낮다고 폄하할 순 없지만, 딱히 잘난 것 같지도 않은 숫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높은 직급은 아닐 듯했다.

용병패에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점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잃어버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단 뜻이니까. 남들이 탐낼 만한 직급이면 분명 이름을 새겨놨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이 물건에 딱히 애정이 없다. 용병패를 대충 옆에 내버려둔 후, 새하얗게 타들어가는 모닥불 속 장작을 응시했다.

'······슬슬 확인해볼까.'

그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우진은 기다란 작대기로 모닥불의 장작을 밀어 치웠다. 직후 그 밑의 흙과 잿가루를 파헤치자, 땅속에서 둥그런 흙덩이 하나가 굴러 나왔다.

우진은 작대기로 흙덩이를 툭툭 때렸다. 곧 흙덩이의 겉이 깨지며 속에 담긴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잘 익은 박쥐고기였다.

땅속에 포장된 고기를 묻은 후, 그 위에 불을 지펴서 지열로 고기를 익히는 방식. 이렇게 하면 고기 굽는 냄새가 나지 않기에 주변 맹수들이 꼬일 가능성이 줄어든다.

우진은 잘 익혀진 박쥐 다리를 뜯어 먹었다. 그리고 만족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약간 질기긴 해도 먹을만하다.'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은 하루의 마무리였다.

조우.

다음날, 이른 새벽.

땅굴 속에서 잠들어 있던 사내가 문득 몸을 뒤척인다. 부스스 눈을 뜬 우진은 멍한 눈으로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잘 잤다.'

아무런 꿈 없이 편하게 자고 일어났다.

이런 숙면이 너무 오랜만이라 내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느낌.

지난 12년간 우진은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잠이란 건 꿈과 현실 두 세계를 오가는 수단일 뿐. 평소 같았으면 잠드는 순간, 우진은 곧바로 현실 세계에 돌아가서 출근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 현실 세계의 우진은 죽었다. 덕분에 그의 정신이 돌아갈 곳이 없어서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 듯하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사실상 사망 선고와도 같은 상황.

그렇지만 간만에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이 좋다. 이 윤택함의 대가로 현실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살짝 오묘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야지.'

대충 결론 내린 우진이 땅굴 밖을 향해 기었다. 손을 뻗어 입구를 막고 있던 방패를 앞으로 밀어 치웠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얼굴에 와닿았다.

밖으로 나온 우진은 방패 위에 펴 발라둔 진흙과 마른 이끼를 뜯어냈다.

땅굴은 다른 맹수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우진은 흙을 묻혀둔 방패로 입구를 막았다. 이러면 외부의 맹수들이 출입하는 걸 방지하고, 은신처의 입구가 주변 환경에 녹아들게끔 위장할 수 있었다.

우진은 머물렀던 흔적을 발길질하여 지운 후 짐가방을 짊었다.

'출발해 보자.'

늘 그래왔듯 그늘이 옅은 곳을 향해 무작정 나아갔다. 이곳보다 더 안전하고,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는 땅을 찾아서.

숙면을 취한 덕분에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지만, 불필요한 소음을 내는 건 좋지 못한 짓이니 자중했다.

그렇게 우진은 걷고 또 걸었다. 그가 떠나온 곳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좀 출출한데.'

빈속으로 한참을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자. 우진은 대충 흙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짐가방을 뒤적여 어제 먹다 남겨둔 음식을 꺼냈다. 구워진 박쥐의 날개. 우진은 그것을 한 입 뜯어먹었다.

'어제 먹었던 부위보다 더 질기군···'

박쥐의 날개 피막은 지독하리 질겼다.

씹히는 질감은 미역 줄기 같았고, 잔뼈가 많아서 먹기 매우 고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얻기 힘든 귀한 식량이다.

오독오독.

우진은 작은 뼛조각까지 버리지 않고 꼭꼭 씹어 삼켰다. 강아지 간식을 먹는 듯한 기분. 그래도 계속 씹으니 나름대로 고소한 맛이 있었다.

박쥐 날개와 한참 씨름하던 중, 문득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떤 놈이지?'

습관적으로 칼자루를 쥐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우진은 주변을 얼쩡거리던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온몸에 붉은 털이 자라난 대형견. 놈의 등에는 기다란 촉수 두 줄기가 자라나 있다. 촉수 끝에 돋아난 뼛조각은 멧돼지의 엄니처럼 크고 날카로웠다.

'뭔가 했더니, 들개였나.'

우진은 저런 짐승들을 그냥 들개라고 불렀다. 습성이나 행동이 평범한 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등에 촉수가 돋아나 있고, 일반적인 개보다는 조금 더 호전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귀여운 축에 속하는 짐승이었다.

'······배가 고픈 건가.'

들개의 두 눈이 우진의 손에 들린 박쥐 날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진은 저 시선을 무시하고 식사를 마저 이어갔겠지만, 오늘은 잠을 깊게 잔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일용할 양식을 기꺼이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자, 먹어라."

우진은 박쥐 날개를 쭉 찢어서 던져줬다. 들개는 고기에 코를 박고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직후 그것을 입에 넣고 몇 번 씹는다.

퉤.

들개가 박쥐 날개를 툭 뱉었다.

녀석은 흙바닥 위에 떨어진 고기를 잠시 쳐다보더니, 곧 외면하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딴 건 음식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저 개새끼가?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자리에서 일어난 들개가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우진은 멍한 눈으로 박쥐 날개를 내려다본다. 이걸 개도 거른다니··· 난 지금껏 개밥만도 못한 음식을 먹어온 건가?

좀 어지러웠다.

그래도 귀한 식량을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우진은 남은 박쥐 날개를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슬슬 움직여볼까.'

입맛이 없어서 대충 먹어치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가방을 둘러맨 우진이 다시 걸음을 떼었다.

산비탈이 꽤 가파르다. 거기에 바닥이 온통 낙엽과 이끼로 뒤덮여 있어서 넘어지기 좋은 환경. 덕분에 우진은 매 순간 신중히 발을 내디뎌야 했다.

그러던 중···

'뭐지 이건?'

불현듯 우진이 멈춰 섰다. 발을 내딛으려던 곳에 낙엽이 불룩하게 쌓여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우진은 발치에 놓여 있던 돌멩이 하나를 툭 차서 밀었다. 돌멩이가 굴러가며 쌓인 낙엽 무더기를 헤집는다.

콰악!

한 쌍의 톱날이 빈 허공을 깨물었다. 밟으면 작동하는 곰덫이었다.

'발목을 다칠 뻔했군.'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진은 흙바닥 위의 덫을 빤히 응시했다.

쇠로 만들어진 곰덫.

금속 특유의 광택이 선명했다. 겉에 녹이 슬거나 곰팡이가 자라나지도 않은, 꾸준히 관리 받아온 흔적이 엿보이는 물건.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른 생존자의 물건이다.'

우진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혹스러움과 전율이 뒤섞인 듯한 감정.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 흔적을 실제로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진은 고민에 잠겼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 자리를 떠나거나, 혹은 덫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거나.

후자의 경우 꽤 위험한 선택지였다.

아포칼립스 영화 같은 것들을 보면,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괴물 못지않게 흉악한 존재로 표현되곤 한다.

비록 창작물에 불과하지만 우진은 영화 속 표현이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인간다움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겠지.'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의 흔적. 이걸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지면을 비롯한 자연환경에 남아 있는 인간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온 사방에 덫을 깔아놨군.'

발자취를 쫓아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 빈도가 잦아졌다. 마치 지뢰밭에 들어온 듯한 기분. 숨어 있는 덫을 찾아내기 위해 우진의 시선이 절로 바빠졌다.

'많다, 많아··· 이거 손이 많이 갔겠어.'

덫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이끼와 곰팡이가 쌓이면 덫이 제 기능을 상실한다. 들짐승이 건드려서 망가트리는 경우도 잦고.

이토록 많은 덫을 설치해둔 이유가 뭘까?

적어도 사냥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눈에 띄는 덫들은 하나같이 미끼가 걸려 있지 않았고, 한 지역에 덫을 밀집하여 설치하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니까.

'어쩌면 나 같은 놈이 침입하는 걸 막으려고 덫을 깔아둔 걸지도 모르겠군.'

만약 그럴 의도로 덫들을 설치해둔 게 맞다면 실패라고 평할 수 있겠다.

다른 존재들을 쫓아내기 위해 설치한 덫이, 그냥 지나가려던 우진의 관심을 끌어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으니까.

낡은 오두막이 하나 보인다.

잿빛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은 벽돌집. 벽을 타고 자라나는 검회색 덩굴 식물들이 집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들개 가죽 몇 장이 거치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보아하니 무두질 된 가죽들을 건조 중인 것으로 보였다.

'······인기척이 들리질 않네.'

아무래도 오두막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거나 낮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우진은 무장을 갖추었다. 방패와 마체테를 두 손에 각각 말아쥔 후 오두막을 향해 접근한다. 직후 대문 앞에 선 그는 살짝 고민했다.

'노크라도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노크를 하든, 안 하든 상대방이 이쪽을 반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우진은 그냥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끼이이익—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오두막이 그리 넓지 않아서 내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없군.'

우진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라 그런지 내부도 그리 번듯하진 않았다. 바닥 곳곳 흙먼지가 널브러져 있고 천장은 구석마다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낡은 소파 위에 개어진 칙칙한 빛깔의 이불. 소파의 솜이 내려앉은 형태를 보아, 집주인은 이 물건을 침대 대용으로 사용해온 듯했다.

그 볼품없는 소파 머리맡에 놓여있는 물건이 우진의 이목을 끌었다.

'······책이잖아?'

거의 백과사전 분량은 될 만큼 두꺼운 책. 그것을 집어 든 김우진은 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 유르기스의 마경 견문록. ]

왠지 제목 속 마경이란 단어가 우진이 줄곧 살아왔던 이 환경을 의미하는 듯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우진의 눈이 책 표지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지금껏 악몽에 시달리며 품었던 수많은 의문들. 어쩌면 이 책 속에 그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이 책을 펼쳐 정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밖에 손님이 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진이 손님이고, 저 사람은 집주인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점이리라.

"나오너라. 어떤 놈인지 낯짝을 좀 보자."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요구에 응하여 우진은 책을 소파 위에 던져둔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에 활을 든 노인이 이쪽을 응시한다.

시허연 머리칼은 정돈되지 않아 엉망으로 뻗쳤고, 몸에 두른 옷은 짐승의 가죽을 대충 기워서 만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우진의 행색 또한 노인과 큰 차이가 없는 상태. 덕분에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모습은 산짐승 두 마리가 대치하고 선 듯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라. 말만 잘 들으면 사람 대접은 해주마."

노인이 그리 말하며 활을 겨누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이 스산하게 빛났다.

하지만 우진은 그 협박을 듣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이 세계에서 인간과 대화해보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신선하달까.

마주한 대화 상대의 얼굴을 골똘히 살펴봤다.

'얼굴색이 좋지 않네.'

노인의 안색이 왠지 창백해 보였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 모양.

"······어르신, 서로 좋게 갑시다. 보아하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신 것 같은데."

우진이 선심 쓰듯 말했다. 그 태도가 우스운지 노인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이거 참신한 놈일세. 이놈아, 지금 너의 목숨이 누구 손에 들려있는지 모르는 게냐?"

"내 명줄은 꽉 쥐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리 말한 우진은 보란 듯이 왼손의 방패를 들어 보였다. 활을 쏠 기미가 보이면 방패를 앞세운 채로 달려들 생각이었다.

노인이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러면 어쩌려고?"

키잉!

이명처럼 귀를 찌르는 소음. 그리고 화살촉이 달궈진 쇠처럼 붉게 빛난다.

"오···"

우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살촉을 관찰했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빛. 이쪽 세계의 인간은 저런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

크게 놀랍지는 않은 일이다.

'······남 얘기가 아니니까.'

김우진이 믿는 건 방패 따위가 아닌 그가 지닌 힘이었다.

다크판타지.

두 사내가 슬슬 옆으로 잰걸음 치며 서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우진은 번쩍이는 화살촉을 특히 눈여겨봤다. 스산한 빛이었다. 마치 먹잇감을 홀리는 아귀의 초롱불처럼.

'방패로는 못 막겠군.'

저 화살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지만 상관없다.

마체테를 말아 쥔 우진이 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기울인다. 대충 견적을 잡았으니 몸으로 직접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찰나···

돌연 화살촉에 맴돌던 빛이 꺼졌다. 노인이 활을 거두었다. 이를 본 우진은 의문을 표한다.

"······노인장. 갑자기 왜 활을 내려놓는 거요?"

"솔직히 부담스럽군. 이대로 끝까지 가면 나도 피를 봐야 할 것 같으니."

대화를 좀 해보세.

노인은 그리 제안하며 바닥에 앉았다.

보아하니 겁을 줘서 침입자를 쫓아내려 했는데, 우진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협상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한바탕 싸움질을 하게 될 듯하여 살짝 끓어오른 상태였건만. 상황은 의외로 싱겁게 무산되었다.

'뭐··· 오히려 좋다고 봐야겠지. 저 노인을 죽이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으니.'

우진은 이 세계에서 온갖 생명체를 도축했지만 살인은 아직 해본 적 없다.

정확히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흔치 않은 조우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질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헥터라고 하네."

노인이 대뜸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통성명을 하자는 듯했기에 우진은 선뜻 대답한다.

"제 이름은 김우진입니다."

"기무—진···? 꽤 특이한 이름이군. 발음하기도 어렵고."

헥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한국식 이름은 이 세계에서 이질적이게 들리는 모양.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간단히 '진'이라 부르겠네. 이봐 진. 흙 묻은 발로 오두막에 무단 침입을 한 건 그냥 넘어갈 테니, 순순히 내 영역에서 나가줄 수 있겠나?"

헥터는 낯선 불청객이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눈치였다. 오래 말을 섞기도 싫어하는 듯하니, 뜸 들이지 않고 목적을 밝혀야겠다.

우진은 손짓하여 등 뒤의 오두막을 가리켰다.

"저 안에 좋은 책이 한 권 있던데. 그걸 제게 판매하시면 군말하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마경 견문록을 말하는 겐가?"

"예."

"안 돼."

"······."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

우진의 표정이 떨떠름해지자, 이를 본 헥터는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여보게 진. 그 책은 내 것이 아니야. 빌려온 물건이라 함부로 양도해선 안 돼."

반환 의무가 있는 물건이라면 섣불리 넘길 수 없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우진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책을 잠시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용을 한 번 훑어본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학구열이 참 대단하군. 고작 책 하나 때문에 이리 귀찮게 굴다니··· 어쩔 수 없지."

푹 한숨을 내쉰 헥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두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문을 닫지 않고 열어둔 걸 보아 곧 돌아올 듯했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오두막 안쪽에서 노인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겐가?"

따라 들어오란 의도로 문을 열어놓은 거였나.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헥터는 방바닥에 앉아 화살을 다듬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하여 우진이 들어온 걸 확인하더니, 소파 머리맡에 놓인 책을 향해 턱짓했다.

"저기 앉아서 책이나 읽고 있게."

그리 말한 헥터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이 없고,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배짱이 대단하군.'

우진이 마음만 먹으면 마체테로 헥터의 머리를 찍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저리 태연한 걸 보면, 우진의 성품을 믿는 것이거나··· 혹은 이 상황에서 기습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단 뜻이겠지.

굳이 우진을 오두막 안으로 들인 것도, 책이 도난당하는 걸 막기 위해 근처에서 지켜보기 위함인 듯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이제 와서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다. 우진은 소파 머리맡의 책을 집어 들었다.

[ 유르기스의 마경 견문록. ]

아까 눈여겨 봐두었던 책. 우진은 낡은 의자에 앉은 채로 그것을 펼쳐 들었다.

[ 이 견문록은 교단 연맹의 성기사, 유르기스가 생전에 쓴 글과 입에 담았던 말들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마경에 발을 들이고 싶다면 이 책에 담긴 지식을 숙지하라. ]

첫 문장부터 낯선 단어들이 눈에 띈다.

'교단 연맹···?'

이게 뭘까.

턱을 긁적이던 우진은 슬쩍 곁눈질하여 헥터를 보았다. 헥터는 저만의 일을 하느라 한창 바쁜 듯했다.

'······질문은 나중에 해봐야겠네.'

마음 같아선 궁금한 것들을 바로 질문하고 싶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질문거리가 계속 생겨날 게 분명했다. 우진은 현재 배경지식이 없다시피 한 상태이므로.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질문을 해대면, 귀찮다는 이유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이 책을 한 번 완독해 봐야겠다.

낯선 단어더라도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에 부연 설명이 적혀 있기 마련.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맥락상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을 터였다.

'다행히 배경 설명이 아주 자세하군.'

우진은 책에 쓰여진 글귀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원래 이 세상은 꽤 풍요로운 곳이었던 듯하다. 공기 좋고, 볕 잘 들고, 물도 깨끗하고···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람의 욕망이 문제였다.

북부에 한 왕국이 있었다.

한때는 제국이라 불릴 만큼 융성한 세력을 지녔던 나라. 그러나 세대가 지날수록 그 힘과 영향력이 점차 쇠락했다.

약화된 국력은 영토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주요 영지와 곡창 지대를 모조리 잃고 대륙의 북쪽 끄트머리까지 밀려난 왕국.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면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국왕의 관심이 향한 곳은 북부의 고대 유적이었다.

잊혀진 시대의 유적.

그 지하 깊숙한 곳에 거대한 균열이 하나 있었다. 고집스러운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균열. 전승에 의하면 그건 일종의 문이었다.

이계의 문. 그 문틈 너머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만물을 아우르는 진리가 잠들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승이기에 이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몇 없었다. 국왕은 그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유적 연구를 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유적을 조사해 보니 값진 유물과 귀중품들이 여러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발견된 룬 문자를 번역한 결과 먼 옛적 소실되었던 고대 마법까지 복원해낸 것이다.

전승이 옳았다. 문을 열고, 그 너머의 힘을 손에 쥐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왕은 엄청난 돈을 유적 연구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국가 단위의 예산이 들어간 덕분에 연구 속도는 탄력이 붙었다. 오랜 시간 비밀리에 진행된 연구는 국왕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즈음 완성되었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재앙이 시작된다.

균열 너머에 있던 건 재와 곰팡이, 그리고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들뿐이었다.

놈들이 떼를 지어 우리의 세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 침범 속도가 이상하리 빨랐다. 마치 저 너머에서 문이 열려오기만을 줄곧 기다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고작 9년 만에 인류는 북부를 잃었다.

역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마경.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각국의 종교 수장들이 뜻을 합하여 '교단 연맹'을 창설했다.

남하하는 마경을 막기 위해, 교단 연맹의 주도하에 인류는 장벽을 쌓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시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합군은 간신히 마경으로부터 인류의 마지막 터전을 지켜냈다.

이는 방벽의 지리적 이점과, 마수들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균열에서 멀어질수록 마수들은 점차 힘을 잃고 약해진다. 그렇기에 강한 힘을 지닌 마수일수록 남하를 꺼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이구먼."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우진의 정신을 일깨웠다.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손에 뭔가를 쥔 헥터가 이쪽을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

"자, 받게."

헥터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우진은 엉겁결에 그걸 넘겨받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뜻한 온기.

그것은 나무 그릇에 담긴 스튜 한 사발이었다.

"······이걸 왜 주시는 겁니까?"

"손님을 굶길 순 없지."

헥터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는 대충 소파에 앉고선 스튜를 그릇째 들고 퍼먹었다.

우진은 손에 들린 스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걸쭉한 국물 위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채소와 고기 조각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연신 찔렀다.

'······일단 먹고 생각하자.'

우진은 나무 숟가락으로 스푼을 한 입 떠먹었다. 담백한 채소와 쫄깃하게 씹히는 고기. 냄새만큼 맛이 기막혔다.

감탄이 표정으로 새어 나간 걸까. 우진의 얼굴을 본 헥터가 피식 웃었다.

"남이 준 음식을 잘도 집어 먹는구나.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려고."

우진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복어 요리를 먹는 셈 치죠."

"복어? 그걸 먹는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얼핏 듣기론 맛이 아주 좋답니다."

우진도 복어를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다.

"신기하군. 독 생선을 먹는 놈들이 있다니···"

헥터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스튜를 한입 더 퍼먹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와 스튜 덕분에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졌다. 우진은 이 기회를 살려 헥터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궁금한 걸 몇 가지 질문해도 됩니까?"

"응답할지는 듣고 결정하지. 말해보게."

우진은 줄곧 읽었던 책을 향해 턱짓했다.

"이 책,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만 기록해둔 겁니까? 역사적인 사실이라 보기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요."

"내가 알기론 그렇다네. 그 책에 담긴 건 여러 번의 교차 검증을 거쳐서 신뢰할 만한 정보야. 교단 연맹이 직접 출간한 물건이라 고증에 각별히 신경 썼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헥터의 확언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우진은 생각에 잠겼다. 책의 내용이 예상하던 것보다 더 이질적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마법, 성기사, 제국···'

이질적이지만 낯설진 않다.

'······게임을 할 때 자주 듣던 단어들인데.'

젊은 시절의 김우진이 했던 RPG 게임에 이런 단어가 자주 쓰이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까 책을 읽을 때도 게임의 설정집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사서라곤 믿기 어려운 내용의 서적.

하지만 헥터는 이 책이 실제 있었던 역사를 다룬 물건이라 확언했다.

이 대답은 우진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 왜, 소설 같은 걸 보면 이런 상황이 종종 있지 않은가.

'내가 판타지 세계 속에 떨어진 건가?'

트럭에 치인 후 다시 눈을 떴더니, 다른 세계에 오게 되었다··· 라는 느낌의 전개.

게다가 이 세상은 평범한 판타지가 아니다.

검과 마법, 균열, 재앙적인 사고, 그로 인해 나타난 괴물들에게 밀려 쇠퇴해가는 인류. 이 모든 걸 합친 세계관을 흔히 칭하길···

'······다크판타지.'

늑대. (1)

"생각은 나중에 하게. 그러다 스튜가 다 식겠어."

헥터가 문득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우진이 한참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는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우진은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노인의 말대로 이 귀한 음식이 식는 건 아까운 일이었으니까. 숟가락으로 큼직한 고깃덩이 하나를 건져내어 잘근잘근 씹었다.

'역시 맛있군.'

새삼스레 감탄이 나오는 맛이었다. 우진은 스튜 속 고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건 무슨 고기죠? 맛이 좋네요."

"양고기라네. 정확히는 육포를 물에 불린 거야."

양고기 육포.

그 말에 우진은 의아함을 느꼈다.

"양고기를 어디서 구한 겁니까? 이 주변에 야생 양 같은 건 없던데."

"그야 돈 주고 샀지."

"돈이요?"

우진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헥터는 대답 대신 호주머니를 뒤적여 낡은 동전을 하나 꺼냈다.

팅!

헥터가 엄지로 동전을 튕겨 날렸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날아온 동전을 잡아챘다.

구리 동전의 한쪽 면에는 남자의 옆얼굴이, 반대쪽 면에는 장벽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연맹 주화라네. 장벽 내외로 흔히 쓰이지."

"제가 묻고자 한 건 돈의 생김새가 아니라··· 이런 쇳조각과 식량을 맞바꾸는 건 멍청한 짓 아닙니까? 여기선 식량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 텐데요."

"장벽과 마경을 오가는 행상인들이 제법 많다네. 벌이가 쏠쏠할 거야. 나 같은 사람이 웃돈을 줘서라도 물품을 구매해주니까."

따라서 돈만 있다면 식량을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네. 헥터가 그리 덧붙여 말했다.

우진은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시발, 지금껏 나 혼자만 개고생을 해온 거였어?'

식량은 우진의 주된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사냥에 실패하여 하루 종일 굶는 건 예삿일이고, 뭣도 모르고 독초를 집어 먹어서 끙끙 앓았던 적도 허다하다.

힘없는 인간이 살아가기엔 너무 혹독한 환경. 그렇기에 우진은 이 세계에 생존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극소수만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이렇듯 고된 삶을 살아온 게 자신뿐이란 사실을 알게 되니 적잖게 위가 쓰렸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나쁘지 않아.'

장르에 빗대어 표현하면, 우진은 줄곧 이 세계를 일종의 아포칼립스라 여겨왔다. 보이는 사람은 한 명 없고, 어딜 가든 흉측한 괴물들이 여럿 달려들곤 했으니.

그런데 알고 보니 다크판타지라고?

오히려 좋아.

아예 깡그리 망해버린 것보단, 조금씩 망해가는 중인 세계가 훨씬 낫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엿같은 박쥐 날개를 뜯어 먹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맛 좋은 스튜를 호사스럽게 퍼먹는 중이니까.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우진은 스튜를 싹싹 긁어먹은 후 뒤늦게나마 감사를 표했다.

헥터는 대꾸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진작에 식사를 마쳤는지 그릇을 치워두고 아까 하던 일을 재개한 상태였다.

김우진 또한 책을 집어 들었다. 몰두하여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늘이 짙어져 글자를 읽기 어려워졌다. 우진은 창밖을 살핀다. 벌써 해가 저물었는지 하늘이 온통 시커멓다.

'······아직 반의반도 못 읽었는데.'

책의 두께가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데다 글씨는 솜털처럼 작았다. 하루 안에는 절대 완독할 수 없는 분량.

"내일마저 읽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헥터는 큰 고민 없이 허락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 내심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우진은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헥터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밖으로 나가려는 겐가? 이 늦은 시간에?"

"예. 왜 그러십니까?"

"여기서 숙박할 거라 생각했네."

해가 저물고 나면 마경은 더욱 위험한 공간으로 거듭난다. 그렇기에 헥터는 우진이 오두막에서 밤을 보내기를 원할 거라 예상한 듯했다.

그 말에 우진은 가볍게 손사래 쳤다.

"괜찮습니다. 더 민폐를 끼칠 순 없죠."

책을 뺏어 읽고, 밥도 얻어먹는데, 여기서 잠을 잘 곳까지 내놓으라는 건 너무 양아치 같은 짓이었다.

낯선 사내를 방 안에 들이면 잠자리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건 서로 피곤한 짓인지라 우진은 짐가방을 챙겨 든 후 밖으로 나섰다. 등 뒤로 노인의 시선이 따라붙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숲의 음험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 설치된 덫들이 우진을 반겨줬다.

'굳이 먼 곳까지 갈 필요는 없겠군.'

대충 이 근처에서 야영하면 될 듯했다. 온사방에 덫이 깔려 있어서 주변 짐승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할 테니까.

우진은 긴 나뭇가지를 긁어모은 후, 그것들을 나무 덩굴로 엮어서 요령 좋게 움막을 만들었다. 빗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지붕에는 나뭇잎과 이끼를 덧댔다.

즉석에서 만든 잠자리치곤 꽤 훌륭한 모양새. 우진은 그 지붕 아래에 몸을 뉘었다.

'······왠지 잠이 안 오네.'

자려고 누워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정도가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와 아까 읽었던 책의 내용이 머릿속을 계속 어지럽혔다.

괜히 뒷목을 벅벅 긁적이는 우진. 그는 문득 호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아까 헥터가 던져줬던 동전 한 닢이었다.

'장벽 안쪽에서 쓰이는 화폐라고 했었지.'

연맹의 장벽.

교단 연맹은 남하하는 마수들을 저지하기 위해 거대한 장벽을 쌓았다.

여러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무너졌지만, 적어도 장벽 너머에는 인류의 문명이 아직 존속 중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장소. 우진은 줄곧 그런 장소를 찾아내길 꿈꿨다. 마치 메마른 사막 속 오아시스를 찾는 방랑자처럼···

그렇기에 우진의 마음은 급했다.

'······빨리 자자.'

잠들어야 내일이 온다.

* * *

다음 날 아침.

우진은 기지개를 켜서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컨디션은 그저 그랬다. 예상 못 한 변수로 인해 밤새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아··· 이 동네 짐승들은 잠도 없나?'

어수선한 마음을 겨우 정돈하고 눈을 붙이려던 찰나, 어디선가 들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댔다.

덕분에 잠귀가 밝은 우진은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두어 시간 간격으로 깼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장벽 너머로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두 발 뻗고 편히 좀 자보고 싶다. 사람들의 도시로 간다면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단추를 마저 끼우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가까운 곳에서 야영했기에 오래지 않아 시야에 오두막이 들어왔다.

때마침 헥터가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 기다란 활이 들려 있다.

"일찍 왔군. 엇갈릴 것 같아서 쪽지를 남겨두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어."

"사냥을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야지. 이곳에서 큰돈을 벌 방법은 마수 사냥뿐이니까."

헥터가 문을 향해 손짓했다.

"안에서 책을 읽고 있게나. 가볍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올 테니."

그리 말한 헥터는 숲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냥꾼이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우진은 오두막에 홀로 머무르게 되었다.

주변 사람이 없으면 독서에 몰두하기 쉬워지는 법. 오두막에 들어선 우진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그의 시선이 종잇장 위의 글귀들을 부지런히 훑었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걷는 소리, 뭔가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마른기침.

'······헥터가 돌아온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사냥꾼을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곧 헥터가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밧줄에 묶인 들개 한 마리의 시체가 질질 끌려왔다.

들개의 덩치가 제법 컸다. 2m는 가볍게 넘어갈 듯한 몸길이. 그만큼 무게도 무거운지 헥터의 윗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좀 도와줘야겠어.'

우진은 다가가서 밧줄을 함께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더욱 수월히 짐을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한숨 돌렸군. 고맙네."

"밥값은 해야죠."

우진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하며 사냥꾼의 전리품을 구경했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들개의 사체. 놈의 목덜미에 뚫린 바람구멍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격 솜씨가 대단한데.'

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급소를 이리 정확하게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단검을 쥔 헥터가 들개에게 다가간다. 직후 그는 조심스레 개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발목에 칼집을 넣은 후 넓적다리 안쪽으로 파고드는 검끝.

몇 번이고 해본 짓인지 헥터는 매우 능숙하게 개를 손질한다. 곁에서 구경하던 우진은 궁금한 걸 질문했다.

"이런 개가죽도 돈이 됩니까?"

"개가죽은 돈이 안 되지. 이건 늑대라네."

무심하게 대꾸하는 헥터. 그 말에 우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이게 늑대라고요?"

"오히려 되묻고 싶군. 자네 눈에는 이 커다란 놈이 개로 보이는 겐가?"

"좀 크고, 약간 사납긴 하지만··· 생김새가 암만 봐도 개 아닙니까?"

헥터가 피식 웃었다.

"크고, 사납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의 개를 우린 늑대라 부르기로 했네."

"······."

생각해보니 이게 사회적인 약속이긴 했다. 개와 늑대는 서로 형제뻘인 생명체니까.

말문이 막힌 우진은 자리에 앉아 헥터의 늑대 손질을 마저 구경했다. 늙은 사냥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늑대 가죽이 벗겨지고 검붉은 고깃덩이만이 남았다.

직후 헥터는 가죽에 들러붙은 살점과 지방을 단검으로 긁어냈다. 이렇게 손질하지 않으면 가죽이 금방 썩어버린다. 손이 참 많이 가는 작업.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무두질을 할 줄 아는 겐가?"

"예. 제가 입은 옷가지들도 직접 손질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 번 해보라는 듯 헥터가 뒤로 물러났다. 우진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든 후 늑대 가죽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면도를 하듯 매끄럽게 지방을 뜯어내는 칼날. 우진의 무두질 솜씨는 사냥꾼 못지않게 빠르고 정밀했다.

"······실력이 좋구먼. 믿고 맡겨도 되겠어."

헥터가 활을 고쳐 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두질이 끝나면 건조대에 가죽을 널어두게나. 나는 설치해둔 덫들을 한번 점검하고 오겠네."

"쉬지도 않고 바로 가시는 겁니까?"

"해가 저물기 전에 일을 끝내둬야 하니까. 배가 고프면 언제든 먼저 식사하게. 화덕 옆에 보존 식량을 따로 빼놨으니."

그 말을 끝으로 헥터가 다시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점차 멀어져가는 마른기침 소리.

'······역시, 어딘가 몸에 문제가 있는 건가.'

우진은 늙은 사냥꾼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헥터의 낯빛이 살짝 창백한 데다, 고된 일을 할 때마다 마른기침을 연신 해대었다.

아무래도 어떤 이유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듯한데··· 본인이 언급하길 꺼리는 듯하여 굳이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이런 배려를 하는 건 헥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적인 질문을 아예 안 하는군.'

헥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현시점의 우진은 매우 이질적인 인간이었다.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이나 상식이 아예 없다. 심지어 화폐의 가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

이토록 기이한 사람을 마주하면, 자연히 가슴 속에서 여러 의문이 싹트기 마련이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뭘까? 출신은?

이런 질문을 받는 순간 우진의 입장은 대략 난감해진다. 사실을 말했다간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려고 한들 배경지식이 아예 없으니 말을 지어낼 수도 없다.

'헥터가 내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챘기 때문에 사적인 질문을 참는 거겠지.'

그 배려의 대가로 우진 또한 늙은 사냥꾼을 우대했다. 이런 암묵적인 상호 존중에 의해, 두 사내의 공생 관계는 부실한 듯 단단하게 유지되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늑대. (2)

동트는 아침.

잠에서 깬 우진은 평소처럼 헥터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문을 두어 차례 두들겨 노크한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우진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헥터가 안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사냥을 나간 듯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책상머리에 앉아 견문록을 펼쳐 들었다. 며칠 동안 독서만 하니 싫증이 났지만, 다행히 이 지긋한 짓거리도 슬슬 끝이 보인다.

얼추 두 시간 후.

'······드디어 다 읽었다.'

독서를 마친 우진이 책을 덮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선명한 미소. 한동안 애먹이던 일을 끝내니 속이 후련하다.

예상하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진은 원래부터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 데다가, 틈틈이 헥터의 일을 도와주느라 적잖은 시간을 빼앗긴 탓이었다.

'헥터가 돌아오면 떠나야겠어.'

용무를 마쳤으니,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지난 열흘 동안 신세를 졌으니 작별 인사는 하고 떠나는 게 옳을 듯했다.

'주변이라도 한 번 둘러볼까.'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니 좀이 쑤셨다. 산책이라도 해볼 겸 오두막 밖으로 나온 우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갔다.

검은 숲속을 제집 안방처럼 누비는 우진. 그 발걸음이 멈춘 곳은, 푸르스레한 열매가 잔뜩 자라난 나무 앞이었다.

'마경 자두.'

견문록에 적혀 있던 이름이다. 마경에서 그나마 먹을 만한 열매 중 하나.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 되었다.

우진은 능숙하게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두 예닐곱 개를 땄다. 직후 지상으로 내려온 우진은 큼지막한 자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마경 자두의 맛은 쓰고 떫다. 하지만 그걸 참고 곱씹다 보면 감질나는 단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적포도주가 이런 맛이려나.'

포도를 껍질째 갈아 만든 적포도주는 탄닌 함량이 높아 떫은맛이 난다고 들었다.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어서 그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떫은 자두를 씹으며 포도주의 맛을 상상해볼 뿐.

'······왜 나는 포도주를 먹어본 적이 없을까.'

우진은 문득 의문에 잠겼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죽기 전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너무 많았다.

양고기, 복어, 포도주···

특출나게 비싼 음식도 아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인데, 그런 작은 사치조차 누릴 생각을 못 해본 것 같다.

'이번에는 좀 다채롭게 살아봐야겠어.'

남 부럽지 않게 먹고 즐기는 삶. 그걸 손에 쥐기 위해선 장벽 너머로 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수월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까. 우진은 자두를 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이루려면 계획이 필요하고,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지난 열흘의 시간 동안 읽었던 책과, 헥터와 틈틈이 나누었던 대화. 그 속에 담긴 정보들을 추려내어 계획에 뼈와 살을 덧대던 중···

'······뭔가 어수선한데.'

우진이 문득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까 전부터 들려오는 소란 소리가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보아하니 어디선가 싸움이 일어난 모양.

'헥터가 사냥 중인 건가?'

소리만 들어서는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우진은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 달리 할 일이 없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듯했으니.

바쁘게 걸음을 옮겨가는 우진. 그가 소란의 중심을 향해 전진했다.

······동시에 소란 또한 이쪽으로 다가왔다.

'온다.'

인기척을 느낀 우진이 주변의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곧 정면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가시덤불 사이를 헤집고 나온 헥터가 있는 힘껏 달음박질쳤다.

뒤이어 덤불을 뚫고 늑대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놈들의 송곳니가 노리는 건 헥터의 숨통.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가 뒤집혔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꼬인 모양이었다.

'좀 거들어야겠군.'

우진은 허리 벨트에 걸린 단검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늑대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다, 그 동선을 예측하여 단검들을 연이어 내던졌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두 줄기의 은색 빛살.

퍼벅!

선두에서 달리던 늑대 두 마리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놈들은 목덜미에 단검이 꽂힌 채로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마리.

저놈은 손수 처리하자. 그리 마음먹은 우진이 마체테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도망쳐!!"

헥터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직후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온 헥터가 우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우악스러운 손길. 우진은 엉겁결에 그 손아귀에 붙들린 채로 함께 내달렸다.

'아니··· 단검을 회수하지도 못했는데.'

오래 사용해 온 물건들이라 챙겨오고 싶었건만, 헥터의 태도가 워낙 조급하여 돌아가자는 말도 못 꺼내겠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그 의아함은 금세 해소되었다.

워우우우—!

늑대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왠지 불길한 느낌. 슬쩍 뒤를 돌아보자,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물밀듯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와우."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이 지랄이 나는 걸까. 우진은 쫓아오는 늑대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모습을 본 헥터가 재촉했다.

"구경할 시간에 더 빨리 뛰게! 자칫 잘못하면 휘말릴 수도 있어."

"아직 거리가 꽤 여유롭지 않습니까?"

"늑대들을 말한 게 아니네."

그럼 뭐에 휘말린다는 거지?

우진이 재차 질문하려던 순간, 굉음과 함께 저 뒤쪽부터 지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돌연 생겨난 구덩이 속으로 늑대들이 굴러떨어졌다. 땅 아래에 파묻혀 있던 뾰족한 나무 작살들이 늑대의 몸을 난도질했다.

특정 무게가 넘어가면 무너지도록 설계된 함정.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폭이 10m는 족히 넘어갈 듯했다.

하지만 폭에 비해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늑대들이 하나둘씩 구덩이 위로 기어 올라왔다.

'시간 끌기에 초점을 둔 함정이로군.'

이럴 때 거리를 벌려놔야 한다.

우진은 앞서가는 헥터를 쫓아 부지런히 달렸다. 그런데 지름길로 우회하여 돌아온 건지, 돌연 앞쪽에서 튀어나온 늑대 두 마리가 길을 가로막았다.

길을 뚫어야겠다.

우진이 다시 마체테를 뽑아 든 찰나, 자리에 멈춰 선 헥터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핑, 피잉!

화살이 연이어 쏘아졌다. 제대로 조준하고 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헥터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난사하듯 화살을 갈겼다.

그런데 그 화살이 귀신같이 늑대들의 급소만 골라 때렸다. 금세 피떡이 된 늑대들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

"가세!"

헥터가 다시 재촉하며 내달렸다.

할 일이 사라진 우진은 마체테를 칼집 속에 밀어 넣는다. 이런 일을 두어 번 정도 반복하고 나자, 두 사람은 오두막에 돌아올 수 있었다.

"컥, 콜록!"

바닥에 주저앉은 헥터가 연거푸 마른기침을 해대었다. 줄곧 쉼 없이 달려서 숨이 차는 모양. 우진은 늙은 사냥꾼의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후 질문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곧 놈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텐데요."

"······싸워야지."

헥터는 담담하게 대꾸하며 책상 위의 책, 마경 견문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진에게 건넸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 테니 책을 갖고 떠나게. 자네 솜씨라면 충분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 것 같군."

"양도할 수 없는 물건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헥터는 떠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살펴 가게 진. 만나서 반가웠네."

"······."

우진은 대답하는 대신, 마주 선 사내의 행색을 물끄러미 살폈다.

몸 곳곳에 새겨진 발톱과 이빨 자국.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상처들이다. 흘러내리는 핏물이 옷을 온통 붉게 물들여갔다.

안색이 창백했다. 안 그래도 지병을 앓고 있던 노인이었는데, 늑대와 대적하던 중 적잖은 부상까지 입었다.

'이대로면 곧 죽겠군.'

어떻게 해야 할까.

우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버텨보십시오. 금방 다녀올 테니."

"······뭘 하려는 겐가?"

굳이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오두막을 둘러싼 늑대 무리. 놈들의 머릿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듯했다.

늙은 사냥꾼이 손수 설치해둔 덫은 은밀하고 교활했다. 오두막 주변에 진법처럼 설치된 덫들. 우진 또한 집중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눈으로 대강 늑대들의 머릿수를 헤아렸다.

'얼추 서른 마리 정도인가.'

아직도 수가 꽤 많이 남았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늑대들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진은 늑대들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갔다.

문득 헥터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크고, 사납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의 개를 우린 늑대라 부르기로 했네.'

이곳 사람들은 이 짐승을 늑대라고 불렀다. 우진은 여전히 그 의견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우진과 눈이 마주친 늑대들이 불에 덴 듯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우진이 계속 걸어가고 있음에도 간격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후각이 뛰어난 늑대들은 마주한 인간에게서 불길한 노린내를 맡았다. 피와 죽음의 냄새. 이는 김우진이 지금껏 도살해온 마수들의 최후를 투영하는 체취였다.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늑대들이 하룻강아지처럼 눈치를 보았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우진의 입장에선 마냥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놈들이 왜 늑대라 불리는 걸까.'

우진은 근처에 있던 늑대의 뒷목을 잡아 붙들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짓에 도망치려던 늑대가 속절없이 딸려 왔다.

'암만 봐도 진돗개 같은데···'

우진은 늑대의 목을 밟아 누른 후 생김새를 관찰했다. 이것이 빈틈이라 여긴 것일까. 늑대 한 마리가 측면에서 달려들었다.

어딜 가던 눈치 없는 놈들이 꼭 한둘씩 있기 마련. 우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마체테를 휘둘렀다. 윗턱이 날아간 늑대 시체가 흙바닥 위를 나뒹군다.

'일단 하던 일부터 마저 끝내야겠어.'

그리 다짐한 우진이 힘껏 발을 굴렸다. 발 아래 밟혀 있던 늑대의 목이 뚝 분질러지고, 동시에 우진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방패를 앞세운 돌진.

우진은 눈이 먼 황소처럼 밀고 들어갔다. 이를 맞닥뜨린 늑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얼타는 놈, 겁에 질린 놈, 덤비려는 놈···

앞뒤 가리지 않고 대책 없이 검을 휘둘러댔다. 투박하지만 매서운 힘이 담긴 칼부림. 그에 휩쓸린 늑대들의 몸뚱어리가 마구 잘리고 찢어졌다.

이런 개싸움은 기세가 반은 먹고 들어간다. 머릿수는 늑대가 훨씬 많지만‚ 놈들은 심적으로 위축되어 진즉 꼬리를 내린 상황.

오래지 않아 늑대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워어억——!!

돌연 숲속에서 흉포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늑대들이 얼어붙었다.

'왔군.'

우진이 숲의 그늘을 응시했다. 기이한 생명체가 하나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는 털북숭이 괴물. 놈의 상반신은 늙은 학자처럼 구부정하여 머리가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그 머리의 형태가 늑대를 닮았다.

'웨어울프.'

마경 견문록에 적힌 저 괴물의 이름이었다. 두 발로 걷는 늑대. 놈은 여러 마리의 늑대들을 부하처럼 거느린다.

놈의 왼쪽 눈에는 부러진 화살이 한 대 꽂혀 있었다. 보아하니 헥터의 작품인 듯했다.

'제대로 약이 올랐네.'

눈알을 잃어버린 탓에 웨어울프는 한껏 격노한 상태. 놈은 도망치려는 부하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웨어울프가 늑대 한 마리를 붙잡고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늑대가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뿌드득!

웨어울프가 힘으로 늑대를 잡아 찢는다. 둘로 쪼개진 살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와 창자. 그 잔혹한 본보기를 본 늑대들은 다시 우진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우진은 씩 웃으며 검을 고쳐 쥔다.

'이래서 저놈들을 늑대라 부르기 싫단 말이지.'

길들여진 늑대를 우린 개라 부른다.

늑대. (3)

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진다.

늑대들은 선뜻 공격에 나서지 않고 망설였다. 성난 웨어울프에게 등 떠밀려 우진을 포위하긴 했지만, 이쪽도 답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공격하면 죽고 도망쳐도 죽는다. 이지선다에 걸린 늑대들은 우진과 웨어울프 사이에 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윗사람을 잘못 만나면 이렇듯 삶이 고달파진다. 하지만 어딜 가든 잔머리 좋은 중간 관리자가 하나쯤 있기 마련.

'······저놈, 왠지 낯이 익은데.'

우진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포위망 속에 낯익은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유독 큰 덩치를 지닌 붉은 털의 늑대. 다른 놈들과 달리 등에 길쭉한 촉수가 두 줄기 자라나 있다. 더 많은 변이를 겪은 상위종이었다.

어디서 저놈을 봤을까. 잠시 생각하던 우진은 곧 기억을 되살려냈다.

'지난번에 봤던 놈이구나.'

박쥐 날개를 뜯어 먹던 중 발견했던 들개. 선심 써서 나눠줬던 식량을 뱉어버린 놈이다.

우진이 붉은 늑대를 지긋이 응시하자, 주변의 다른 늑대들이 놈을 보호하듯 주변을 에워쌌다. 아무래도 무리의 중간 관리자쯤 되는 역할인 모양.

'저놈부터 잡아 족쳐야겠군.'

무리의 통솔권을 지닌 놈을 죽여 없애야 일이 편해진다. 그리 판단한 우진이 한 발짝 앞으로 전진하는 순간···

파바박—!

살기를 느낀 붉은 늑대가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발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 웨어울프와 늑대들은 벙찐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이가 없는 상황인지라 우진은 피식 웃었다.

'웃긴 놈이네 이거··· 영악하기도 하고.'

붉은 늑대는 우진의 표적이 되는 것보다, 당장 도망치는 게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옳은 판단이었다.

웨어울프의 몸은 하나뿐이다. 무리의 이탈자를 전부 잡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

나머지 늑대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술렁거리는 분위기. 웨어울프는 다시 기강을 잡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늑대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잔뜩 성난 웨어울프가 늑대들을 쫓았다. 운 나쁜 늑대 몇 마리가 그 흉악한 손아귀에 잡혀 찢어졌다.

'이거 완전 개판이구만.'

우진이 실실 웃으며 상황을 관망했다.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이 개짓거리는 웨어울프가 홀로 남을 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리는지 웨어울프가 한바탕 울부짖더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한다.

아무래도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한 모양.

놈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뒤이어 그 안광이 길쭉하게 잡아 늘여졌다.

쿵, 쿵, 쿵!

놈이 돌진해왔다. 땅을 연신 밀어 차며 가속이 붙는 웨어울프의 몸뚱이. 놈이 돌연 발을 굴러서 도약했다.

곰처럼 큼지막한 몸뚱이가 허공에 높이 뜬다. 우진을 중심으로 드리운 죽음의 그늘.

우진은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웨어울프가 땅에 착지하며 주먹을 내려찍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움푹 패어 들어간 지면. 가까스로 공격에서 벗어난 우진은 입에 들어간 흙먼지를 혀로 긁어 뱉었다.

'빠르고, 힘도 좋군.'

생명체의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완력. 마경에서 오래 생존한 마수들은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경의 다른 생명체를 사냥하여 숨통을 끊고, 그 피와 살점을 취할 때마다 새로운 힘이 생긴다. 이전보다 더 뛰어난 근력, 더 잽싼 발,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웨어울프는 이 지역의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며 수많은 마수들을 도살했다. 그렇게 긴 세월 축적해온 힘과 재주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쉭—

섬뜩한 바람 소리.

우진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갑자기 길쭉해진 웨어울프의 발톱이 방패를 긁고 지나갔다.

쩌적!

농담처럼 방패가 발톱 자국 형태로 쪼개졌다. 나무 방패인 걸 감안해도 엄청난 위력.

웨어울프가 재차 달려든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진은 연신 뒷걸음질 치며 적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쉼 없이 휘둘리는 발톱이 우진의 곁을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갔다.

일방적인 공격을 이어가는 웨어울프. 그러던 중 우진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위기감이 아닌 의혹이었다.

'······이놈, 설마 다른 재주가 없나?'

웨어울프의 태도가 워낙 당당하여 이 지역의 우두머리일 것이라 예상했다.

마경의 생태계에서 그 정도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선 여러 재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이놈이 사용하는 건 고작 발톱이 길어지는 잔재주 하나뿐.

웨어울프가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건지, 혹은 그냥 무능한 건지 좀 긴가민가하다.

'한번 시험해 볼까.'

우진은 마체테를 단단히 말아 쥐었다. 마치 즙을 짜낼 기세로 칼자루를 쥔 다섯 손가락. 그대로 검을 휘둘러, 이번에는 놈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받아 쳐냈다.

쩡!!

칼날과 손톱이 맞부딪히며 폭발적인 불티가 튀었다. 힘에서 밀린 쪽은 다름 아닌 웨어울프. 놈은 몇 걸음 물러선 채로 눈을 부릅떴다.

아무래도 정면 힘 싸움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운 듯한데···

사실 이건 조금도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힘만 놓고 보면 당연히 내가 더 세야지.'

마경의 생명체를 사냥하면 힘을 얻는다. 이는 우진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지난날의 우진은 마경 깊숙한 곳에서 온갖 사선을 넘어왔다. 여러 강적을 사냥하고 그 피와 살점을 취하여 힘을 축적했다. 기연이라 할 만한 일도 몇 번 겪었다.

변두리 지역에서 대장 놀이나 하던 웨어울프가, 마경 깊숙한 곳에서 기어 나온 사내를 힘으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필요 이상으로 신중했던 것 같군.'

견적을 잡은 우진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웨어울프가 발톱을 휘두른다. 지금껏 질리도록 봤던 움직임이었다.

마체테로 발톱을 받아 흘리며 우측으로 잰걸음 쳤다. 한쪽 눈알이 없는 웨어울프의 입장에선 우진이 돌연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소리를 듣고 반응해야 할 상황이건만, 놈은 눈알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런 노련미가 없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우진이 마체테를 휘두른다. 칼날이 웨어울프의 왼 무릎을 도려냈다.

"크와아악!!"

웨어울프가 마구 고함을 내지르며 팔로 왼쪽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 우진은 이미 놈의 등 뒤로 이동한 상태. 다시 칼을 휘둘러 이번엔 놈의 오른 무릎 뒤쪽을 그었다.

두 무릎을 잃은 웨어울프의 몸뚱이가 앞으로 허물어졌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주저앉은 채로 가쁜 숨을 게워 내는 웨어울프.

놈이 고개를 들어 마주한 인간을 올려다봤다. 우진의 표정은 마냥 무심했다. 마치 돼지머리가 잘 삶아졌는지 확인하러 온 듯한 태도였다.

비로소 웨어울프는 자신이 그저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써억!

마체테가 웨어울프의 목을 훑었다. 머리 없는 늑대의 시체가 힘없이 흙바닥에 엎어졌다.

우진은 발로 슬슬 밀어서 웨어울프의 시체를 뒤집었다. 직후 단검으로 시체의 흉부를 갈랐다. 웨어울프의 갈비뼈 밑으로 손을 집어넣는 우진. 그는 뭔가를 찾아 손을 더듬거렸다.

'······여기 있군.'

우진이 다시 손을 밖으로 빼냈다. 그가 끄집어낸 것은 붉은 호두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모양새가 동그랗고 겉면이 우둘투둘했다.

이 기이한 물체는 매 순간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웨어울프의 내단.

긴 세월을 살아온 마수는 내단을 품고 있다. 마경의 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정체.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으득, 으드득—

우진이 내단을 씹어 먹었다. 이로써 웨어울프가 생전에 지니고 있던 힘의 일부가 우진에게 깃든다.

특별히 맛이 좋진 않았다. 비릿한 데다 고무처럼 질긴 연골을 씹는 듯한 느낌.

곧 식사를 마친 우진은 몸 곳곳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직후 그의 시선이 오두막집에 머물렀다.

'헥터가 아직 살아있으려나?'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오두막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초췌한 사냥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감은 헥터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우진은 손가락을 튕겨 딱딱 소리를 냈다. 소리에 반응하여 헥터의 눈가가 연신 움찔거렸다.

'용케 숨이 붙어있군.'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약병과 붕대를 보아하니, 헥터는 급히 응급처치를 하던 중 기력이 쇠하여 쓰러진 듯하다.

'포션의 부작용이 꽤 심하다고 했었지.'

상처를 치료하는 물약.

게임 아이템처럼 마냥 편리한 물건은 아니다. 포션을 쓰면 상처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격렬한 통증과 어지러움을 동반한다고 들었다.

우진은 실제로 써본 적이 없어서 그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상상만 해볼 뿐이다.

'구내염에 알보7을 바른 느낌이려나.'

경험 많은 사냥꾼을 쓰러지게 만들 정도면 최소 그 정도는 되어야 할 듯했다.

그런 약물 한 병을 통째로 비운 걸 보아 헥터의 마음이 아주 급했던 모양.

아마 우진이 밖에서 늑대들과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빨리 합류하기 위해 무리해서 포션을 쭉 들이켰다가 뻗어버린 듯했다.

'죽진 않을 것 같네.'

비록 기절하긴 했지만 포션의 약발이 좋긴 좋아 보였다. 헥터 호흡이 안정적이었다. 이대로 잘 쉬고 나면 일어날 수 있으리라.

우진은 헥터를 반듯하게 눕혀둔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까 죽였던 늑대들의 시체를 치워놔야지.'

시체들이 썩고 부패하면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데다, 근방에 서식하는 다른 마수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진은 분주히 움직였다.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늑대 시체는 가죽을 벗기고, 상품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들은 멀리 갖다 버렸다. 죽은 늑대가 한둘이 아닌지라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대략 두 시간 정도가 흐른 후.

일이 절반쯤 끝났을 무렵,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으로 걸어 나온 헥터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이게 무슨?"

황망히 중얼거리는 헥터. 곧 늙은 사냥꾼의 시선이 우진에게로 향한다.

"이 많은 늑대를··· 자네 혼자서 다 죽인 겐가?"

"엄밀히 따지자면 서로 싸우다 자멸한 겁니다. 웨어울프가 대장 노릇에 영 소질이 없더군요."

"그놈은 어떻게 되었나? 눈알을 날려 먹었으니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을 텐데."

"저기 잘 널어놨습니다."

우진은 건조대를 향해 턱짓했다. 그곳엔 거대한 웨어울프의 가죽이 걸려 있었다.

이를 본 헥터가 몇 번이고 눈을 끔뻑였다. 마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모습. 말없이 건조대에 다가간 헥터는 웨어울프의 가죽을 손으로 매만졌다.

"······어이가 없구먼. 설마 나의 복수가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될 줄이야."

"이놈과 무슨 악연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특별한 것 없는 이야기네. 이놈이 잡아먹은 사람들 중에 내 지인이 몇 명 있었을 뿐이니. 요즘 같은 세상엔 흔한 일이지."

헥터는 담백하게 설명한 후 입을 다물었다. 굳이 사연 팔이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이 상황에 달리 할 이야기가 없는 건 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이제 뭘 하실 겁니까?"

"글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늙은 사냥꾼은 복수를 마친 이후의 목표는 정해두지 않은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헥터가 되묻는다.

"자네의 목표는 뭔가?"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고민했던 주제라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좀 즐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하게."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로군."

"그렇습니까?"

다크판타지 세계에서 마음 편히 살겠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 않나 했는데. 뜻밖에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우진이 의아해하는 듯하자, 헥터는 건조대에 걸린 웨어울프의 가죽을 향해 턱짓했다.

"이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금화 마흔 닢이 넘는다네. 적어도 육칠 년은 편히 놀고먹어도 될 돈이지."

"어··· 예?"

······고작 이런 놈이?

개척단.

사흘 후.

묵직한 짐가방을 둘러맨 우진이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한바탕 늑대 사냥을 하느라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제가 가도 괜찮겠습니까?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요."

"걱정할 필요 없네. 비록 내가 퇴물이긴 해도 이런 곳에서 객사할 일은 없으니."

배웅을 나온 헥터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저리 말하니 굳이 두 번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럼, 장벽 너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살펴 가게."

간략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우진이 숲의 그늘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오늘따라 짐가방이 유독 무거웠다. 헥터가 여러 물자를 잔뜩 담아준 데다, 웨어울프의 가죽을 군장 침낭처럼 말아서 짐가방 위에 따로 묶어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볍다.

정처 없이 방황하기만 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우진에겐 명확한 목적지가 있으므로.

헥터가 준 지도를 꺼내 보았다. 지도 곳곳에 크고 작은 마을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었다.

'개척단의 마을이라고 했던가.'

모든 인류가 장벽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경에 집어삼켜진 옛 고향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 이들을 흔히 개척단이라 부른다.

우진은 이 개척단의 마을 중 한 곳을 다음 목적지로 삼았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걸어가면 이틀 정도는 걸릴 거리였다. 우진은 느긋하게 여행할 생각이 없었다.

'······속도를 올려야겠군.'

발걸음에 탄력이 붙었다. 거의 달리기에 가까운 걸음걸이. 너무 신나게 뛰면 도중에 뻗을 수도 있으니 적정 속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

저물어가는 해가 하늘의 먹구름을 살짝 벌겋게 물들여놓을 즈음, 저 멀리 마을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이야··· 나무로 방벽까지 세워놨네?'

마을 주변에 목책을 세워놨다. 아무래도 마수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벽인 모양.

높은 목책에 가려져 있어서 마을의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책 안쪽에서 밥 짓는 연기가 여럿 올라오고 있어서, 사람이 있는 마을이란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우진이 목책을 향해 걸었다. 입구에 선 사내 두 명이 이쪽을 응시한다.

"거기, 그 자리에 멈추시오."

문지기들이 창을 겨누며 명령했다. 우진은 선뜻 그에 응하여 멈췄다.

"소속과 방문 목적이 뭐요?"

"딱히 소속이랄 건 없고, 마을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서 왔습니다."

"개척단의 일원이 아니면 요금을 지불해야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소. 인당 은화 한 닢이오."

우진은 호주머니를 뒤적여 은화 반 닢을 두 개 꺼냈다. 반 닢은 절반 크기의 동전을 뜻한다.

이를 건네받은 문지기들이 좌우로 물러나서 길을 터줬다.

"안에서 사고 치지 마시오."

우진은 대강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마을 안으로 입성했다.

직후 마주한 풍경은···

뭐, 크게 극적이진 않았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생김새가 볼품없었다. 낡고 망가진 건물에 지붕만 새로 씌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척박한 곳에 으리으리한 건물을 세우는 얼간이가 어디 있겠나.

그래도 곳곳에 사람 웃음소리가 들렸다. 활력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선 헥터가 맡긴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오두막을 떠나기 전 헥터가 부탁을 하나 했다.

우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겨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마을에서 가장 많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장소였다.

그 장소는 당연하게도 술집이었다.

'이 마을에 술집은 딱 하나만 있다고 했지.'

마을의 모든 시설과 가게들은 개척단이 직접 운영한다. 그중에서 술집은 유독 철저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술에 만취하여 사고를 치는 인간은 한둘이 아니니까.

술집답게 입구부터 쌉싸름한 알코올 향기가 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우진이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행상인 제이콥.'

이곳에서 찾아야 할 사람. 제이콥은 헥터와 주기적으로 거래를 해온 행상인이었다.

헥터의 오두막집과 마을 사이의 거리는 적잖게 멀다. 필요한 게 생길 때마다 마을에 방문하는 건 여러모로 번거로운 짓.

그렇기에 헥터는 행상인에게 물자 운송을 자주 의뢰했다. 필요한 물자를 받고, 그 대가로 마수의 가죽을 지불하는 거래였다.

하지만 사흘 전 웨어울프가 죽었다.

복수를 마친 헥터는 물자 거래를 더 이어갈 필요가 없다. 우진은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제이콥을 찾는 중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라고 했으니, 이곳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겠지.'

설령 제이콥이 없더라도, 어디서 그를 봤다는 목격담 정도는 들을 수 있으리라.

일행을 찾듯 자연스레 테이블 곳곳을 둘러보는 우진. 문득 그의 시선이 한 사람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의 남성. 그의 한쪽 뺨에 사선으로 길게 그어진 칼자국이 있었다. 흉터를 가리기 위해 턱수염을 기른 듯하지만 그럼에도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인가.'

헥터가 해준 설명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사람. 확인을 위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제이콥 님이십니까?"

"그게 내 이름이 맞긴 한데··· 뉘신지?"

제이콥이 살짝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일행들 또한 경계심 어린 눈으로 우진의 행색을 훑었다.

아무래도 낯선 사내가 대뜸 말을 걸어서 다들 당황한 모양. 우진은 뜸 들이지 않고 용무를 밝혔다.

"헥터의 말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 이거 내가 실례했군. 설마 헥터 어르신의 지인이었을 줄이야."

헥터의 이름값이 높은 편인지 분위기가 쉽게 뒤집혔다. 덕분에 우진은 마음 편히 설명을 이어갔다.

"헥터가 말하길, 이제 사냥이 끝났으니 더 이상 물자를 발주하지 않겠답니다. 그간 좋은 거래를 해주셔서 고마웠다고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잠깐, 사냥이 끝났다고? 그 말은···"

뭔가 말하려던 제이콥이 말꼬리를 흐린다. 그의 시선이 우진의 짐가방에 매어져 있는 가죽에 머물렀다. 흔한 늑대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크고 두꺼운 가죽.

눈치 빠른 행상인은 그 정체를 눈치챈 듯했다. 주변의 듣는 귀를 의식했는지 제이콥이 들릴 듯 말듯 조그맣게 속삭인다.

"······헥터 그 노인네가 정말로 웨어울프를 사냥했군. 놀라워. 그런데 이걸 왜 자네에게 맡긴 건가?"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우진은 대충 뭉뚱그려 말했다. 초면인 사람에게 줄곧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건 불필요한 짓이라 생각되었으므로.

솔직히 좀 귀찮기도 했다.

그런 속내를 제이콥도 눈치챈 것인지 같은 질문을 두 번 반복하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조언해 줬다.

"값진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간수하게. 탐낼 사람이 많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제이콥은 다시 일행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관심을 끊은 것처럼 보였다.

'귀찮게 굴지 않아서 좋군.'

용무를 마쳤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우진이 술집 밖으로 나섰다.

이제 뭘 할까.

술집에서 제이콥을 운 좋게 찾아내어,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심부름을 끝마쳤다. 덕분에 붕 떠버린 시간.

우진이 턱을 긁적이며 한량처럼 걸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소란 소리가 들렸다.

"채석꾼들이 돌아온다!"

누군가가 버럭 소리쳤다. 그에 호응하듯 마을의 입구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마침 할 일이 없기에 우진도 따라가봤다.

저 멀리 산비탈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들은 덩치 큰 마수 두 마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를 지닌 도마뱀. 놈들의 덩치는 황소보다 컸고, 등은 거북이처럼 널찍했다. 이를 활용하듯 도마뱀들의 등에는 큼지막한 바구니가 하나씩 실려 있었다.

'저게 타라스크인가.'

타라스크.

인류에게 길들여진 몇 안 되는 마수 중 하나.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저 녀석들은 초식을 선호한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우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타라스크를 구경했다. 마경 견문록에 의하면 저 마수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길들인 생물이다.

말은 생각보다 예민한 동물이다. 편식이 심하고 감성적이며, 쉽게 다친다. 이렇다 보니 말들은 척박한 마경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픽픽 죽어나갔다.

이를 본 교단 연맹은 평범한 말을 마경에 적응시키는 것보다, 마수를 길들이는 편이 더 쉬울 듯하다고 판단했다. 오늘날 타라스크는 그 판단의 좋은 선례가 되었다.

와그르르—

마을 안으로 들어온 타라스크가 힘껏 옆으로 드러누웠다. 바구니 속에 담긴 내용물을 바닥에 엎질러졌다. 붉은색 바위를 쪼개놓은 듯한 파편들이 줄지어 굴러 나왔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삽을 들고 달려들었다.

"제기랄, 좀 쉬나 했더니 또 일이 산더미군."

"수레 가져와!"

사내들이 붉은 돌멩이들을 퍼서 어딘가로 실어 날랐다. 우진은 그 모습을 구경하다, 발치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걸 혈석이라 불렀던가.'

혈석.

마경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광물. 수요가 많은 물건이라 항상 공급량이 부족하다. 개척단은 이 혈석을 채굴하여 큰돈을 벌어들인다.

'돈, 좋지.'

허울 좋은 대의만으론 세력이 유지될 수 없다. 개척단이 존재하는 건 위험에 상응하는 돈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마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천금을 모으더라도 쓰지 못하고 죽으면 헛짓거리다. 전생의 우진이 그러했다.

'······이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거야.'

새삼스레 다짐하며 손에 든 혈석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혈석이 짐수레 속에 정확히 떨어졌다.

* * *

다음날, 이른 새벽.

평소처럼 잠에서 깬 우진이 마을 밖으로 나섰다. 오늘부터 도시를 향해 최단 루트로 쭉 직진할 생각이었다.

'아침을 미리 먹어두는 게 좋겠어.'

우진은 가방을 뒤적여 육포를 꺼냈다.

마을에서 보존 식량을 잔뜩 구매해둔 덕분에 그 양이 여유로웠다. 앞으로 밥이 없어서 굶을 일은 없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중, 문득 인기척이 들려왔다.

"······뭐야?"

고개를 돌린 우진은 당황하여 혼잣말했다. 붉은 털의 늑대. 놈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능청스레 하품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그놈이다.

'이 새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던 건가?'

도대체 왜?

의문에 사로잡힌 우진이 연신 눈을 끔뻑였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반면 늑대는 눈싸움하듯 한 곳만 보고 있었다.

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우진의 손에 들린 육포. 이를 눈치챈 우진이 피식 웃었다. 실로 뻔뻔한 놈이었다.

"인마, 넌 얻어먹을 생각하면 안 되지. 지난번에 네가 한 짓이 있는데."

이놈은 선심 써서 나눠준 식량을 뱉어버린 전례가 있다. 그때의 뒤끝이 남아있는지, 우진은 늑대를 약 올리듯 손에 든 육포를 흔들었다.

"먹고 싶냐?"

어림도 없다.

라고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당황하여 말을 절었다.

'······설마 내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기분 탓이라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이름.

우진은 늑대에게 몇 번 더 말을 걸어봤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뒷발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늑대.

'그냥 우연이었나?'

긴가민가하다.

우진은 늑대의 움직임을 한참 예의주시하다, 문득 의욕이 사라져서 들고 있던 육포를 그냥 던져줬다. 늑대가 날아온 육포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짭짭—

늑대가 육포를 맛깔나게 씹었다.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 육포를 먹어 치운 후 다시 이쪽을 쳐다본다. 더 먹고 싶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늑대.

'하나 더 줘볼까.'

그리 마음먹은 우진이 육포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갑자기 늑대의 귀가 쫑긋 곤두섰다. 녀석이 머리를 높이 치켜든 채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우진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뒤쪽에서 번잡한 인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다.'

늑대도 그리 견적을 잡은 것일까. 녀석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근처에 있는 나무 덤불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체격 좋은 사내 다섯이 건들거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뒤로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와 뺨에 그어진 칼자국.

"제이콥. 여긴 어쩐 일이요?"

우진이 아는 체했다. 제이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자네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다네. 설마 그새 웨어울프의 가죽을 잃어버리진 않았겠지?"

"보다시피."

가죽은 여전히 짐가방에 잘 매어져 있다.

이를 확인한 제이콥은 더욱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뺨에 찍힌 칼자국이 더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 가죽을 이리 넘기게. 순순히 응한다면 내 친구들이 자네의 멱을 따지 못하도록 말려주지."

얄팍한 협박. 우진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했다.

"너, 처음부터 이럴 셈으로 헥터와 거래를 해온 거였군."

헥터가 사냥에 성공하면 그 성과물을 빼앗는다. 이를 위해 제이콥은 긴 세월 동안 거래하며 헥터의 환심을 샀다.

우진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자, 뭔가 정정하고 싶다는 듯 제이콥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난 투자를 했을 뿐이네. 헥터의 영역은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물자를 운송하면 오히려 적자였어. 줄곧 쌓인 손해를 메꾸기 위해선 그 가죽을 받아야 해."

"그래서 이게 정당한 짓이라는 건가?"

"그렇지. 내 친구들에게 좀 처맞고 나면 자네도 공감할 수 있게 될 거야."

제이콥이 손짓했다. 사내들이 실실 웃으며 우진의 주변을 포위했다.

놈들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남들보다 덩치가 큰 데다, 어째서인지 윗옷을 입지 않아 맨몸이기 때문이었다.

그 꼴을 본 우진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노출증 걸린 병신도 니 친구냐? 쟤는 왜 남들보다 차갑게 살고 있어?"

제이콥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 이제 자네를 살려주고 싶어도 어렵겠군. 설마 겁도 없이 바바리안을 모욕하다니···"

"바바리안? 저놈이?"

"그래. '쌍도끼의 렉스'라는 친구일세. 자네를 찢어 죽일 사내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렉스라고 불린 사내가 손도끼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렉스의 얼굴이 잘 익은 문어처럼 시뻘겋다. 우진이 아까 한 조롱에 제대로 긁힌 듯했다. 양손에 도끼를 쥔 채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전사.

렉스가 나무 덤불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장난처럼 말했다.

"물어."

덤불 속에서 붉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늑대가 렉스의 목을 콱 깨문다.

"컥, 꺼어억!!"

렉스가 마구 비명을 내지르며 흙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늑대가 머리를 힘껏 좌우로 털었다. 렉스의 목덜미가 길게 찢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우진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니까 갑옷 같은 걸 입고 다녀야지. 실력도 같잖은 놈이···"

사실상 자연사라 봐도 무방하다.

어쨌거나 한 놈 처리했고, 이제 넷 남았다. 우진은 콧등을 긁적이며 제이콥과 똘마니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봤다.

뜻밖의 전개에 당황했는지 놈들은 병신처럼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우진은 마체테를 뽑아 들며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퍼억!

사내들이 제이콥을 밀어 넘어트리고 도망쳤다. 미리 약속이라도 해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억, 이 망할 새끼들아! 돌아와!!"

고용주를 제물 삼아 도망치는 용병들. 제이콥이 몇 번이고 소리쳤지만 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저놈들은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

우진이 그리 생각하며 제이콥에게 다가갔다. 홀로 남은 장사치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하하, 우리 대화를 좀 해보세."

"대화 좋지."

솔직히 좀 고민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아직 사람은 죽여본 적 없는데.'

우진은 자기 손으로 살인해본 적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 세계에서 사람을 볼 기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죽여야 할까, 살려둬야 할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섣불리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

우진이 고민하는 와중에도 제이콥은 혼자 뭘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내가 행상인 일을 하며 얻은 보물들이 꽤 많아. 나름 인맥도 넓고. 뭐든 해주겠네. 원한다면 지금 당장 계약서를 쓸 수도 있어. 어떤가? 날 보내주는 게 서로 좋지 않겠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가 찼다.

"가진 돈이 그렇게 많아?"

"그렇다네! 못 믿겠다면 증명해주지. 잠시 기다려보게. 여기 어딘가에 지갑이···"

제이콥이 품을 뒤적거리다, 돌연 단검을 꺼내 찔렀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하, 하하."

팔목을 붙들린 제이콥이 비굴하게 웃었다. 놈의 이마에 땀줄기가 여럿 흘러내렸다.

"······이봐 친구, 나 좀 살려주면 안 되냐?"

"참 병신같네."

"한 번만 봐줘. 나 같은 병신을 죽이더라도 득 될 게 없잖아. 응? 안 그래?"

"너한테 한 말 아니야."

"그럼···?"

우진은 피식 웃으며 단검을 빼앗았다.

"줄곧 고민했던 내가 병신 같아서."

푸욱!

단검이 제이콥의 목을 관통했다. 지면에 왈칵 쏟아진 붉은 핏물. 기우뚱거리던 제이콥의 몸이 곧 뒤로 넘어갔다.

우진은 시체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완 좋은 상인답게 제이콥은 여러 값진 장신구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에 손을 대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가자.'

길을 나섰다.

* * *

어째서인지 늑대는 계속 우진의 곁에 머물렀다.

우진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 붉은 늑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 영특했지만, 암만 그래도 사람처럼 말하는 재주는 없었으니까.

보다 보니 나름대로 정이 갔기에, 우진도 결국 늑대를 일행으로 받아들였다.

'이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줘야겠군.'

우진은 고민했다. 이름을 짓는 건 은근히 어려운 일이다. 예로부터 우진의 작명 솜씨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렉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렉스다."

그렇기에 우진은 늑대에게 죽은 놈의 이름을 물려주려 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늑대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그럼 제이콥이라 부를까?"

"······."

늑대는 렉스라 불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우진은 녀석의 기분을 달래줄 겸 육포를 하나 던져줬다. 식량 주머니가 한층 더 가벼워졌다.

'슬슬 식량을 보충해야겠군.'

입이 둘로 늘어나서 식량도 그만큼 더 빨리 소진되었다. 이대로면 오래지 않아 식량이 고갈될 터. 마침 이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서 식량을 구매해올 생각이었다.

우진과 렉스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걸음을 옮겨갔다. 곧 그들의 시야에 큰 마을 하나가 들어왔다.

'지난번의 마을보다 훨씬 더 크네.'

제5 개척 도시.

도시라고 하기엔 민망한 규모지만, 마을치곤 상당히 큰 편이었다. 숫자가 붙은 개척 도시는 개척단이 각별히 신경 쓰는 주요 거점이다.

······당연하게도 저런 장소에 늑대 마수를 데리고 갈 순 없었다.

"넌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라. 사람들이 오면 눈치껏 피해 다니고."

"웍."

알겠다는 듯 렉스가 울음소리를 냈다. 녀석을 뒤로 한 우진이 마을을 향해 걸었다.

목책 앞에 선 문지기들이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통행세를 요구하려는 듯했다. 우진은 주머니를 뒤적여서 미리 준비해둔 은화 한 닢을 꺼내 건넨다.

"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지기들이 돈을 거절했다. 그 반응에 우진은 의아함을 느꼈다.

"요금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 도시에선 마수 사냥꾼들에게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냥 들어가십시오."

문지기들이 선뜻 옆으로 비켜서 길을 열어줬다. 아무래도 우진의 행색을 보고 직업을 짐작한 모양. 덕분에 우진은 동전 한 푼 쓰지 않고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마을은 활력이 넘쳤다.

어떤 일거리가 있는지 분주하게 짐수레를 끄는 사람들. 줄지어 늘어선 가게에서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특히, 길거리 노점들이 판매하는 음식 냄새가 기막혔다. 우진은 홀린 듯이 한 노점 앞에 멈춰 섰다.

여자 노점상이 바쁘게 고기 조각을 꼬치에 꿰고 있었다. 장작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 꼬치들. 이건 참기 어렵다.

"한 개에 얼마입니까?"

"개당 동화 여덟 닢이에요."

"두 개만 주십시오."

우진은 은화 반 닢을 지불하고 동화 네 닢을 거슬러 받았다. 은화 반 닢은 동화 스무 닢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으적.

우진은 막 구워져 뜨끈뜨끈한 고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바싹하게 구워진 껍질과 쫄깃한 살코기, 간혹 씹히는 큼직한 소금 알갱이의 짠맛.

좀 당황스러울 만큼 맛이 좋았다.

"······무슨 고기길래 이렇게 맛있지?"

우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에 꼬치를 굽던 여자가 웃으며 귀띔해 줬다.

"훈제된 칠면조예요. 육포보다 비싸고 보존 기간도 짧지만, 맛은 이만한 게 없죠."

"장벽 안쪽에서 온 물건입니까?"

"네. 여기서 파는 음식들은 다 그렇죠. 마경에서 식재료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마경에서 도시 단위의 인구가 자급자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수의 고기는 맛이 없고, 땅은 척박하여 동식물이 잘 자라나지 않으니까.

뛰어난 물자 운송력을 지닌 마수. 타라스크가 있기에 개척 도시가 유지될 수 있다.

"마수 사냥꾼이신가요?"

이번에는 여자가 질문했다. 우진은 입에 든 고기를 씹느라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번 마수 토벌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던데, 좋은 성과를 거두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입의 음식을 삼킨 후 되물었다. 얘기를 꺼낸 여자가 살짝 당황했다.

"어··· 모르시는 건가요? 요즘 채석장의 마수 때문에 도시 전체가 난리잖아요."

"처음 듣는군요. 애초에 이 지역에 처음 와봐서."

호기심이 고개를 치든다.

"혹시 그 마수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오고 가며 이름만 얼핏 들었어요. 매드스톤··· 이라고 했었나? 뭔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매드스컬?"

"아, 네! 그거였던 것 같아요."

매드스컬.

몇 번 맞닥뜨린 경험이 있는 놈이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머리뼈와, 미치광이 같은 공격성을 동시에 지닌 마수.

"그놈을 잡는 건 어려울 텐데."

"아, 그래요? 현상금이 왜 그리 높게 걸렸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군요."

"현상금이 얼마죠?"

"금화 칠십 닢이에요."

······외면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채석장의 마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