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프리 팀 - (2)
이길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이건 의지가 아니라 가능성과 확률의 문제였다.
상현은 신태리가 말한 것이 피를 보는 대결이 아니라 공수 전환을 보는 시험의 의미임을 알았다.
'다섯 수라....'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무려 15배 이상으로 차이가 날 레벨도 문제지만 직업적으로 상성 관계도 나빴다.
바람과 같은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자객은 묵직하게 대검을 쓰는 검사가 쫓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
"해보죠."
상현이 응했다.
김미소는 난색을 지었다.
단지 인사만 시켜 주려고 했었던 자리가 졸지에 시험대가 되어버려 당황한 기색도 있었다.
"언니. 너무 급발진 아니야?"
"상현 씨가 괜찮다잖아."
"그래도 초면에 무슨...."
"부담되시나요?"
"아뇨. 한 수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되네요."
김미소의 만류가 무색하게 이미 상현과 신태리 사이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상현에게는 잃는 게 없는 장사였다. 그녀에게 허를 찔리면 찔리는 대로, 대응하면 대응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생긴다.
좋은 스승에게서 이렇게 족집게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이것 참, 정말...."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쥐고 김미소가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상현과 신태리가 마주 보고 섰다.
특유의 살기를 머금은 신태리의 단검에서 시이잉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의 절규 같았다.
"후우."
상현이 심호흡을 하고는 곧바로 사이키델릭 스킬을 사용했다. 최대치의 전투력이 필요하기에.
프슷!
그때, 정면에서 지켜보던 신태리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걸까? 하고 생각하면 늦는다. 사라진 그 시점에 육체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알겠다.'
상현이 판단을 내리면서 동시에 대검을 우측 허리 뒤 방향을 향해 그대로 밀어냈다.
까앙!
그 순간에 기분 좋은 금속성이 들렸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하나. 예측이 맞았다는 뜻이라서다.
상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대검의 이동 경로를 차단한 신태리의 단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군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신태리의 말대로 알고 노렸지만, 상현은 겸손하게 말을 돌렸다. 으스댈 생각은 없었다.
상현이 보기에 첫 번째 수는 신태리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상현이 예상했던 그녀의 움직임보다 한참은 느렸다.
"아직 네 수가 남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파앗!
또다시 신태리가 사라졌다.
'자객(刺客)'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만큼 흔적도 안 남는 은신이었다.
사실 은신이라기보다는 시각으로 추적할 수 없는 초고속 이동에 가깝기는 했다.
그래서 자객 플레이어를 상대할 때는 시각 정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했다.
할 수 있다면 아예 0%로 만들어 두는 것이 나았다. 보고 대응하는 것은 늦기 때문이다.
수준급 자객 플레이어를 실전에서 상대하게 된다면, 눈이 겨우 흔적을 쫓았을 무렵에는 이미 목이 날아간 상태가 되고 만다.
'이번에는 전방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 지레 후방을 짐작하기 마련이나, 상현은 공기의 흐름을 읽었다.
후방에 의도적으로 남긴 신태리의 살기는 어느새 전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상현이 뒤를 돌아보려는 듯하다가 바로 정직하게 정면으로 검을 질렀다.
따앙!
이번에도 신태리의 단검과 맞부딪힌 대검에서 불꽃이 기분 좋게 튀었다.
"...."
상현을 응시하는 신태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현의 반응이 훨씬 빨랐다.
단순히 운에 맡기고 찍어 맞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동서남북 중에 하나를 골랐을 수는 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자신의 방향을 맞췄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히 어느 위치에 어떤 형태로 서 있을지 예상하고 검을 뻗은 것이다.
이는 직접 상현의 대검을 받아낸 신태리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우연에 기댄 찍기가 아니다.
'감각으로 읽는 거야.'
신태리는 확신했다.
감각의 영역은 시각의 영역보다 한 단계 더 올라선 상위의 영역. 아무나 깨우칠 수 없다.
하물며 신태리도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오른 경지였다.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스승' 밑에서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가며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력이 없던 상현의 감각적인 대응은 예상외였다.
휘이이!
이번에는 신태리의 모습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갈래로 나뉘며 흩어졌다. 잔상이 늘어났다.
"...."
상현이 가늘게 뜬 눈으로 신태리의 움직임을 쫓았다.
잔상은 대단히 미세한 차이지만 본래 몸의 모습을 뒤늦게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집중하고 살핀다면 유독 표정이 조금 다른 본래 몸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차이라는 것이 0.1, 0.2초와 같은 대단히 짧은 시간이나, 상현의 눈으로는 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위치를 감지해낸 상현이 바로 머리를 숙였다. 뒤에서 단검이 들어오고 있어서다.
"아."
신태리의 짧은 탄성이 들렸다.
당연히 상현을 공격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후방이 뚫렸다는 시그널을 줄 생각이었는데....
상현이 머리를 숙여 피해냄으로써 그 움직임도 읽힌 셈이 됐다.
"나쁘지 않았죠?"
"대단히 좋았어요."
겸손한 상현의 반응을 신태리가 격한 칭찬으로 돌려줬다.
'까탈스러운 태리 언니에게 대단히라는 표현을 끌어낼 정도라면 진짜 깔끔했다는 얘기야.'
김미소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곁에서 본 신태리는 칭찬을 하기 위한 기준점이 무척 높은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만족과 놀람으로는 대단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좋다는 표현도 마찬가지고.
그 순간, 김미소는 등골을 타고 전율이 쭉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 플레이어 세계의 중심으로서 공고하게 자리를 잡은 네임드들의 초창기를 봤을 때 느낀 바로 그 느낌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듯, 상현에게도 비슷한 느낌이 풍겼다.
이후, 신태리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기술로 상현을 노려봤지만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신태리를 상대로도 최소한 다섯 수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음을 현장으로 증명한 셈이었다.
기동과 회피라면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김미소도 최대의 기록이 네 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경이적인 결과였다.
상현은 김미소처럼 레벨 100을 훌쩍 뛰어넘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여전히 30대 근처에 머무르는 초심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태리가 살짝 구슬땀만 흘리고 있는 상현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좋은 배움이었습니다. 부족한 점을 일깨워주셨네요."
이번만큼은 겸손이 아닌 진심을 담아 상현이 말했다.
신태리를 상대로 다섯 수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육체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사이키델릭 효과가 있었기에 대응할 수 있었지, 없었다면 첫수에 이미 상황이 끝났을 터다.
레벨, 그리고 공고히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격차는 역시 쉽게 넘어설 수가 없었다.
상현은 실력자를 상대로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정도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미소의 입도 단단히 단속해두죠."
"그건 편하실 대로. 하하."
"언니!"
"오늘의 이 얘기는 기자에게 말하지 말고 아껴."
신태리가 김미소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상현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 춘의역 방면에서 걸어오기 시작한 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상현, 김미소와 함께 춘의역 게이트 탐사에 함께 할 플레이어 동료의 합류였다.
'미소가 재밌는 사람을 알아 왔네.'
점점 멀어져가던 신태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상현을 보았다. 짧았지만 인상 깊었던 만남. 빨리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다.
* * *
새로운 두 팀원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상현이 게이트를 다시 한번 살폈다.
▶ 120
▶ 4
게이트로 들어가는 입구 옆면에는 마치 문패처럼 숫자 두 개가 적혀 있는 상태였다.
최대 120레벨, 4인 제한.
이 게이트의 기본 특성이었다.
안에 네 명이 들어가는 순간 입구가 봉인 상태가 되기 때문에 추가 인원 투입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레벨이 제한보다 높으면 입구에서 강제 척력(斥力)이 발생하여 플레이어를 밀어냈다.
이를 무시하면서 억지로 들어갈 경우, '이물질' 취급을 받아 시스템에 의해서 강제로 분해가 됐다. 볼 것도 없이 즉사인 셈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동시에 도착한 두 남녀가 상현과 김미소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 두 사람은 상현도 아는 지식이 없었다. 아마도 과거에 그만큼 유명하지 않았거나, 혹은 외부 활동이 적은 플레이어였을 터다.
다만 김미소가 함께한 것을 보면 보통 실력은 아닐 듯했다. 그녀의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신상현입니다. 쟁쟁한 분들과 함께 되어서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신상현 님에 대한 기사를 방금까지도 정독하고 왔습니다. 자체적으로 상태 이상을 만들어내는 검사! 정말 부럽습니다."
"레벨 100 퀘스트 솔플에서 이미 검증은 끝났다고 봐요. 전 팀장님의 안목을 믿는답니다."
두 남녀의 시선이 김미소에게로 향하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개를 이어갔다.
"이분은 박태석 씨예요. 불 능력자죠. 마법계 플레이어로 분류되고 주특기는...."
"이그나이트Ignite."
"맞아요. 발화 능력이죠."
김미소가 미리 건네준 서류들을 한 글자도 남기지 않고 읽고 머리에 담아온 상현이었다.
그래서 팀원들의 면면이나 주특기, 장단점에 대해서는 이미 분석이 끝난 상태였다.
팀플레이의 시작은 던전에 대한 공부가 아닌 팀원에 대한 공부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함께 호흡을 맞출 팀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은 상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박태석과 악수를 나눴다. 노파심에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무척 공손한 남자였다.
바로 김미소가 다음 팀원을 소개했다.
"이분은 강주희 씨. 공간 능력자예요. 마법계 플레이어로 분류되고 주특기는 공간 연결이죠."
"공간 활용 능력을 이용해서 원거리의 적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저격이 가능하다고 했었죠?"
"맞아요. 변수 창출 능력이 뛰어나죠. 다만 강주희 씨 사용법을 모르면 고전할 수 있어요!"
강주희의 능력은 물리적으로 먼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공간의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1km의 직선이 있다고 치자.
그녀의 능력은 100m의 지점에 입구를 만들어내고 900m의 지점에 출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겨우 200m만 이동하게 만들어도 직선의 끝에 도달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에너지도 절약하고 그만큼 보내기 위한 스킬의 능력, 화력에 들어갈 마나도 절약할 수 있는 것.
전에 이런 공간 능력자와는 제법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었다.
전투 스타일이나 공간 창출 과정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결은 비슷할 것 같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빨리 강주희 씨의 페이스와 노림수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아니에요. 이건 제가 맞춰드려야죠. 적들의 공격은 최대한 멀리 걷어내고, 상현 씨의 공격은 최대한 가깝게 이어갈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났다.
조합도 좋았다.
근거리에서 검을 다루는 상현과 원거리에서 까다로운 요소들을 사전에 저격할 수 있는 김미소.
여기에 공간을 활용해서 변수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강주희와 불의 활용에 능한 박태석까지.
이 정도면 4인으로 꾸릴 수 있는 구성에서 힐러가 부족한 점을 제외하고, 가장 안정적인 구성이 될 듯했다.
꽤 만족스러운 조합이었다.
21화 프리 팀 - (3)
사전 정보 공유를 통해 숙지한 내용을 토대로 심층 브리핑을 하는 시간을 2시간 정도 가졌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일단 들어가고 보자! 라는 주의라서 사전 브리핑을 따분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현을 포함한 프리 팀의 구성원 셋은 모두가 신중한 스타일이었다. 상현과 그런 부분에서 궁합이 잘 맞았다.
필요에 따라 가상 상황을 산정하고 합을 맞춰보기도 했으며,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성향과 특징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었다.
상현은 브리핑 내내, 중간 보스 구역 이후의 내용에 대해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미리 알고 있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통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 나 회귀자인데...하는 얘기지만, 그런 설명이 통하기나 하겠는가?
그래서 일단 말을 아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가면서 적당한 이유를 찾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활력 물약 꼼꼼히 챙겨 드세요."
게이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김미소가 미리 준비해 온 활력 물약을 먼저 들이키며 말했다.
집중력을 높여주는 활력 물약은 필수 요소였다. 부작용이 없는 각성제와 같은 역할이기도 하고.
'일단 지옥의 케르베로스 구간까지 쭉 진행하자.'
본격적으로 신경 쓸 부분은 그다음부터이므로 상현이 생각을 잠시 미뤄뒀다.
그리고 등에 거치된 대검의 고정 상태를 재차 확인한 뒤, 한 손 장검을 움켜쥐었다.
김미소가 물었다.
"대검을 안 쓰시네요?"
"초반 구간에서는 대검을 쓰는 게 기동성 있는 전투를 함에 있어서 불리할 것 같아서요."
"확실히 속도전이 중요한 구간이기는 해요. 그런데 한 손 검 활용은 괜찮으시겠어요?"
"검사 플레이어분들도 보면 보통 무기 하나를 특화하더라고요. 투 핸드 아니면 원 핸드로."
뒤에 있던 박태석이 말을 더했다. 사실 저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자 실태이기도 했다.
각각의 검마다 힘을 조절해주는 방법과 응용 방식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다루려다 자신의 검술이 이도 저도 아닌 잡탕 검술이 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무기 스왑Swap도 진짜 엄청난 강점이에요."
"노력한 덕분인 듯합니다."
"타고나신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인정하면 너무 재수 없지 않을까요?"
"호호! 실력 있는 사람이 실력을 인정하는 것이 어때서요? 그럴 자격, 충분하시다고 생각해요."
"자주 쓸 일은 없겠지만 유사시에는 단검 활용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몸이 따라줘야겠지만."
상현이 자연스럽게 세 번째 옵션에 대해서도 밝혔다. 단검 응용법도 꽤 연구했었다. 회귀하기 전, 약 3년 동안의 일이었다.
그때.
크루우. 크루우.
전방에서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몬스터 무리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데몬 오우거였다.
전에 던전에서 본 적 있는 데몬 오크의 오우거 버전으로 좀 더 위협적인 외형을 가졌다.
우선 신장도 2m가 넘는 데다가 특히 가슴이 거의 강판(鋼板) 수준이라 잘 안 뚫리기로 유명했다.
"태석 오빠?"
"오케이."
이미 김미소와 박태석은 맞춰둔 합에 따라 공격을 준비했다. 김미소가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 끝에서 바로 푸른색 불길이 타올랐다.
'상황 좀 보고 말은 놓자 해야겠군. 언제까지 씨, 씨, 하는 것도 오글거리고.'
상현이 이미 서로 사이에 언니, 오빠, 동생이 되어있는 세 사람의 대화를 보며 생각했다.
좀 더 친해지는 과정에는 분명 말을 놓는 것이 중요하다.
"좋아, 그러면!"
강주희가 마치 표창을 날리듯이 손가락 끝에서 번쩍이는 보랏빛의 구체를 정면으로 휙 던졌다.
그러자 허공 한가운데에서 보랏빛 섬광이 번쩍이더니, 속이 들여다보이는 공간이 열렸다.
공간을 따라 보인 것은 정면에 있을 광경이 아니었다. 데몬 오우거의 정수리가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공격적이네.'
장검을 쥔 상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자신의 성향과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
보수적으로 공간을 연결하는 플레이어도 꽤 많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성향의 문제였다.
물론 공격적 성향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데몬 오우거가 역으로 공간을 이용하면, 즉시 눈앞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공간은 적이라고 해서 활용을 제한할 수는 없기에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갑니다!"
상현이 달렸다.
그 와중에 강주희는 벌써 여러 개의 공간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상현은 강주희가 첫 번째로 만든 통로에 들어가기 전까지 추가로 만들어진 공간을 모두 살폈다.
나중에 필요해져서 찾으면 늦는다. 미리 봐두고 필요에 따라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푸아악!
상현이 데몬 오우거의 머리 위에서 낙하하며 장검으로 정수리를 내려쳤다.
가슴은 강판 같을지 몰라도 머리까지 단단한 것은 아니니까. 머리뼈 정도는 문제없었다.
푸슈슈!
장검이 찍힌 순간부터 피가 쏟아져 나오며 데몬 오우거의 눈동자가 풀렸다.
몸은 무너져도 버틸 수 있지만, 머리가 무너지면 그 어느 누구도 버틸 수 없었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에 노출된 탓에 당연히 데몬 배쉬의 경직이 들어갔다.
스윽! 솨아아악!
상현이 더 볼 것도 없이 장검을 휘둘러 데몬 오우거의 목을 날려버렸다.
방어 능력을 상실한 데몬 오우거는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무장해제 수준이네, 진짜."
"그렇지, 주희야?"
"네, 언니. 데몬 오우거가 까다로운 게 하도 지랄발광을 해대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저렇게 경직이 걸려 버리면 비싼 아티팩트를 들고 있어도 소용없는 거잖아요?"
"심지어 연장도 돼."
강주희와 김미소가 상현의 전투 상황을 체크하며 감탄했다.
일반적인 상태 이상은 보통 찰나의 순간만 잠깐 나타나고 마는 현상일 때가 많았다.
혹은 스킬 저항도 또는 방어 기제에 의해 손쉽게 풀리거나 안 걸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상현이 만들어내는 상태 이상은 정말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해도 될 만큼 여유를 줬다.
반대로 생각하면 몬스터 입장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은 지옥에 빠진다는 뜻이다.
끄으으! 우으으!
그사이, 상현의 데몬 배쉬에 연달아 노출된 데몬 오우거 둘이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경직 상태에 빠졌을 때, 통제되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생기는 반응이었다.
"내게 있어 저 정도로 긴 상태 이상은 정말 환상의 조합이야."
김미소와 강주희의 옆에 자리 잡은 박태석이 무어라 주문을 외우며 발화 능력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약간의 텀을 두고 데몬 오우거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이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나가며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이었다.
"오빠, 확률 100%야?"
"아예 몬스터의 저항 단계가 경직 상태에서 막혀버리니까 무조건 100%가 될 수밖에 없어."
"...진짜 엄청나네."
김미소와 강주희가 경탄했다.
그간 박태석은 발화 능력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몬스터가 찰나의 상태 이상에 걸리는 때를 노렸다.
그 시간은 매우 짧고 발화 주문을 다 외우기도 전에 끝나기 때문에 실패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현이 시간을 확실하게 벌어주니 편하게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상 상현이 차려준 밥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환상의 조합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편 상현은 박태석에 의해 마무리가 끝난 데몬 오우거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김미소의 헤드샷을 맞고 비틀거리는 데몬 오우거의 빈틈을 노렸다.
『풀 차징』
상현이 바로 차징에 들어갔다.
몸을 살짝 숙인 채로 차징을 시작하자, 용솟음치는 듯한 기운이 몸과 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만화에서 보는 원기옥을 끌어모으는 느낌? 필살기가 될 힘을 한데 모으는 느낌이었다.
'데몬 오우거와 나 사이의 거리는 5m. 1초 정도 차징했으면 바로 타격이 가능하지.'
시간과 거리 계산은 정확했다.
전생에 데몬 배쉬만큼 밥 먹듯이 썼던 스킬. 그래서 시간을 예측할 필요도 없었다. 몸과 머리가 알아서 기억하기 때문이다.
'자세는 좀 웃기지만.'
필요한 화력만큼 차징이 끝나자 상현이 장검을 들지 않은 왼쪽 팔을 뒤로 쭉 뻗었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든 오른손의 장검에 풀 차징의 모든 힘을 실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가자!"
데몬 오우거를 지켜보던 상현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몸의 위치도 순식간에 변했다.
파앗!
잔상이 남을 틈도 없이 육체가 5m의 거리를 단숨에 이동해서 나타난 것이다. 마치 사람이 깜박이는 듯한 점멸의 느낌이었다.
푸화아아악!
장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 위로 붉은 피의 띠가 그려졌다. 그리고 바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비릿한 피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이동 스킬이야?"
"아냐. 데몬 오우거의 목을 날렸어."
"그럼 이동 공격 스킬인가?"
"깔끔하게 목을 날리는 것을 보면 단순 공격 스킬도 아니고 필살기 느낌인데?"
강주희가 열어 놓은 공간을 통해 상현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세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풀 차징 스킬은 상현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김미소도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못 본 새에 스킬이 새로 추가된 것이 분명했다. 저 정도 화력이면 퀘스트 던전에서 쓰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크워어어!
그 사이 박태석에 의해 몸 전체가 발화 상태에 빠진 오우거가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불길 때문에 오우거의 뒤에서 달려들고 있는 또 다른 오우거가 보이지 않았다.
파앗. 팟.
그때, 강주희가 적절하게 상현에게서 다른 오우거의 후방을 잇는 통로를 만들어냈다.
멀리서 더 폭넓게 시야를 가져갈 수 있었던 강주희의 센스 있는 안배였다.
피차 그 데몬 오우거도 불길에 가려져서 상현을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흐읍!"
기합을 넣으며 상현이 재차 풀 차징에 들어갔다. 이번은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더 버텼다.
고오오오! 크고고!
사방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매서운 떨림으로 상현의 검이 요동쳤다.
"상현 씨! 저 녀석은 그냥 데몬 오우거가 아니라 디펜더Defender예요!"
김미소가 소리쳤다.
살펴보니 전신이 두꺼운 겉가죽으로 한 겹 더 강화된 방어 특화 몬스터였던 것이다.
'신경 써 줘서 고맙지만 이미 다 알고 있던 부분이지.'
상현이 환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충분한 힘이 검에 모여드는 바로 그 순간.
"하앗!"
외침과 함께 힘이 잔뜩 실린 공격을 풀 차징으로 펼쳤다.
강주희가 열어뒀던 공간 통로로 바로 파고들면서, 단숨에 데몬 오우거 디펜더의 왼쪽 허리를 노리는 일격이었다.
정직한 직선거리는 70m쯤 됐지만, 공간 통로를 이용한 공격에서는 불과 12m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상현의 몸은 12m의 긴 거리를 풀 차징 한 번으로 단숨에 뛰어넘었다.
몸의 움직임에 제한이 생긴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동 기술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차징하는 시간만큼 힘을 응축시킬 수 있는 공격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무서운 사실은 무려 4.5초에 달하는 긴 시간을 꿋꿋이 버텼을 때 생긴 현상이었다.
푸화아아악!
"와...!"
"옆구리부터 복부 한가운데까지 단숨에 잘려져 나갔어...."
"무슨 도토리묵을 베는 것도 아니고, 방어에 특화된 디펜더의 몸이 저렇게 잘린단 말이야?"
김미소, 박태석, 강주희.
팀원 모두가 경악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상현의 풀 차징 공격에 허리 절반이 잘려 나간 디펜더의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 넷이 달려들어 집중 공격을 하거나, 지속적인 대미지를 넣어야 공략의 실마리가 풀리는 녀석.
하지만 상현이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기술로 디펜더의 허리를 반 토막 내버렸다.
끄우우우우.
구슬픈 비명과 함께 피사의 사탑처럼 옆으로 기울어지는 디펜더의 몸은 가관이었다.
세 사람은 확신했다.
그동안 참 많이도 갈아 치웠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던 실력파 검사를 만났다고 말이다.
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팀의 방향을 꾸려가는 주도적인 검사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았다.
22화 유니크 - (1)
게이트 내부의 절반 지점이면서 동시에 중간 보스 몬스터인 지옥의 케르베로스가 나오는 곳까지.
상현을 포함한 4인으로 구성된 프리 팀Free team은 파죽지세로 몬스터들을 무찌르며 나갔다.
계속 데몬 오우거가 나타났지만 상대하기에 그다지 까다로운 점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상현이 중심을 잘 잡아주는 것이 컸다.
김미소가 상현과 합을 맞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스킬을 하나하나 짚었다.
"경직은 이제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가장 놀라운 부분은 필살기 스킬이네요. 이름이 뭐였죠?"
"풀 차징 스킬입니다."
"아, 풀 차징! 그 스킬이 참 특이해요. 이동과 공격이 동시에 가능하고, 위력도 엄청나잖아요?"
"팀을 믿을 수 있다 보니, 좀 더 공격적으로 풀 차징을 쓸 수 있게 되네요."
"맞아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거든요. 상현 씨가 몬스터의 이목을 확실히 잡아주니, 놈들 뒤통수를 노리기가 너무 쉬운 거 있죠?"
짝짝짝!
김미소가 유쾌하게 박수까지 치며, 상현과의 만족스러운 호흡을 호평했다.
상현이 놓친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발생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현은 몬스터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덕분에 김미소는 화살 공격, 강주희는 공간 연결 창출, 박태석은 발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몬스터에 대해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전투에 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까 뭐였지? 사이키델릭 스킬이라고 하셨었나요? 그 스킬 쓰셨을 때는 진짜 무협 영화에서 나오는 검신 같았습니다."
박태석이 상현을 향해서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아, 생각해 보니 아직 검신 소형준은 폐관 수련이 끝나기 전이군. 올해 안으로는 녀석이 나타날 테고 대한민국의 플레이어 판도가 새로이 재편되겠지.'
상현이 박태석이 한 말을 듣고 떠오른 검신이라는 키워드에 눈썹을 씰룩였다.
검신 소형준. 검귀 도경수.
검성 정희선. 검마 독고윤.
검의 조율자 강보아.
앞으로 3년 안에 대한민국 검사 Top 5의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게 되는 플레이어들이다.
잠재적으로는 상현의 라이벌이자 뛰어넘어야 할 산이 될 인물들이기도 했다.
회귀하기 전, 상현에게 다섯 사람은 함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큰 산이었다. 사는 세계가 달랐고, 가진 재화와 아티팩트가 달랐고, 세상이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하지만 이제는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에는 점점 더 가속이 붙고 있다.
국내를 평정해야 그다음에 아시아권, 더 나아가서 세계를 넘보는 네임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지금의 성장과 보상들은 훗날을 생각하면 이제 겨우 걸음마 한 걸음일 뿐이었다. 갈 길이 멀었다.
"제 공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활용해주셔서 기뻐요!"
강주희도 상현의 세심한 관심과 환상적인 팀 파이트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때로는 즉흥적으로 혹은 그녀만의 노림수를 갖고 만든 통로들을 전부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몬스터를 유인하기도 했고, 뒤를 급습하거나 오우거 간의 동족상잔을 유도하기도 했다.
전투하는 내내 몬스터뿐만 아니라, 팀원의 움직임과 안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파악하는 것.
그것은 전생에 상현이 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누가 말하지 않아도 홀로 훈련해왔던 것이었다.
나만큼 팀원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팀의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제 빠른 호흡에 맞춰준 세 분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믿어주셔서 고맙기도 하고요."
상현도 진심으로 대답했다.
레벨에 대한 편견 없이 세 사람은 확실하게 자신을 믿어줬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속으로 의심을 했을지는 몰라도 전투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좋은 팀원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자 복이라고 했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정말 행운이 겹친 듯했다.
"다 온 것 같네요."
그사이, 상현 일행은 어느덧 중간 보스 구역까지 왔다.
게이트에 관련된 사전 정보 탐색과 브리핑에서 마지막 페이지인 곳이기도 했다.
중간 보스 몬스터, 지옥의 케르베로스 이후로는 상현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정보가 없었다.
'내 말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보스 몬스터인 그리즐리 빅 베어도 충분히 할 만해.'
상현은 확신이 있었다.
다만 혼자서는 절대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없기에 4인의 합이 매우 중요했다.
"케르베로스의 공략 시작 포인트를 어디부터 잡으면 좋을까요?"
"미친 듯이 날뛰는 놈이라 잡아두기가 쉽지 않을 텐데. 공간 통로를 먼저 좀 깔아둘까요?"
"차라리 선(先) 발화로 불맛부터 보여준 다음에 시작하는 건 어떻습니까? 시작을 발화로 하면 그건 100%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질문 혹은 의견을 제시하며 공략의 방향성을 잡았다. 브리핑 때도 나온 얘기였다.
하지만 상현에게는 이미 정답이 있었다. 정답인 것은 둘째치고 가장 쉬운 답이었다.
"잠깐 대기해주실 수 있습니까? 세 분이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요."
상현이 가리킨 위치는 가파른 비탈길을 옆에 둔 언덕으로 케르베로스가 잘 보이는 장소였다.
여긴 공격하기엔 멀고, 케르베로스를 살피기에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위치였다.
"케르베로스는 필드를 꽤 넓게 쓰는 몬스터예요. 여기는 동선을 잡기가 좋지 않은걸요?"
상현의 제안에 김미소가 반론을 제기했다. 옳은 답이었다. 전투를 전제로 한다면 그랬다.
"그냥 보고만 있으면 됩니다."
"보고만 있으라고요?"
"한 번 맡겨주시죠?"
상현이 자신과 케르베로스를 번갈아 가리키면서 일대일의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다.
브리핑에서 아무런 얘기도 들은 적 없는 세 사람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잠깐 든 생각이지만 상현이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상현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 특수 효과 – 개와 늑대의 시간
■ 효과 소개 – 달이 뜬 경우, 개 또는 늑대류 몬스터는 청월석을 소유한 플레이어를 상대로 절대 공격하지 않습니다.
청월석을 먹으면서 몸에 자연스럽게 흡수된 특수 효과인 개와 늑대의 시간 때문이었다.
약칭 개늑시.
이 효과에 걸맞게 현재 던전의 시간은 저녁이었다.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떠올랐지만 서쪽 하늘에 저녁의 태양도 공존했다.
사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광경이지만, 던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은 자연의 섭리를 뛰어 넘는 장관을 스스로 연출해냈다.
"다들 기다려요."
상현이 바로 비탈길을 따라 케르베로스를 향해 달렸다.
모래 연기까지 흩날리는 가운데 부산하게 소리를 내며 접근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케르베로스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일단 김미소, 강주희, 박태석이 있는 위치는 감지 범위가 아닌지 눈치도 못 챈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인 거지?"
"왜 케르베로스가 상현 씨를 인식하지 않는 거죠?"
"은신인가? 아닌데? 심지어 케르베로스는 은신 간파까지 있잖아요. 절대 시야가 있어서."
다들 이유도 모르겠다는 표정.
상현은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일 것이 분명한 동료들의 반응을 즐기며 케르베로스에게 가까워졌다.
여전히 무(無)반응.
청월석의 효과를 갖고 있는 상현을 케르베로스는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동족의 개념을 넘어서 서열 위의 존재로 여겼다.
상현이 도착하자 세 갈래의 머리를 모두 푹 숙이고는 고개를 조아렸던 것이다. 복종이었다.
"후."
『풀 차징』
상현이 바로 풀 차징에 들어갔다. 매초 마나 1이 소모되는 차징이라 마나 부담도 없었다.
침묵하는 케르베로스.
바로 앞에서 상현이 주 무기를 대검으로 바꾼 상태에서 차징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중간 보스 몬스터가 저렇게 순해질 수가 있나?'
지켜보던 김미소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몬스터들은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심지어 동족도 심심찮게 공격해 죽이는 판국에 인간의 냄새에 과민반응하는 것은 오죽할까?
한데 케르베로스에게 상현은 그냥 없는 취급인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칭호의 효과인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어떤 칭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상현이 지금 부리는 능력은 칭호가 아닌 아티팩트 흡수로 얻은 효과였으니까.
그때.
쇄애액!
멀리서 보아도 뚜렷한 핏줄기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동시에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가 모두 잘렸다.
너무 깔끔하게 잘려나간 나머지 남은 목뼈와 살이 가지런히 다듬어진 고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역대급 공략이다, 이거."
"저는 생각도 못 했어요."
"생각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게 말이 되느냐의 문제인 것 같은데요?"
상현을 지켜보던 세 사람의 두 눈에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그 흔한 울음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죽어버린 케르베로스의 최후는 충격 그 자체였다.
팀원들이 놀라는 동안.
상현은 케르베로스를 죽인 순간 활성화된 칭호를 기분 좋게 확인하고 있었다.
워낙 초단기의 사망이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쓸모가 있는 칭호가 나타나서 더 최고였다.
[C급 칭호, [반감]이 주어집니다.]
[반감]
■ 칭호 등급 : C급
■ 칭호 소개 : 스킬 하나를 지정, 재사용 대기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건 리커버리지.'
상현이 곧바로 반감 칭호의 효과를 리커버리에 연계했다.
다수의 몬스터나 적수의 공격에 노출될 일이 많은 검사계 플레이어에게 상태 이상은 늘 골칫거리.
그렇기에 만능 해결사의 역할을 해줄 리커버리는 어떻게든 기간을 줄여야 했다.
『리커버리』
■ 스킬 레벨 : 1단계(69.1%)
■ 스킬 소개 : 즉시 자신에게 걸린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을 위해 30초의 대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깔끔하네.'
30초로 줄었다.
이제 좀 더 위험 요소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처가 가능하게 됐다. 변수 차단도 가능해졌고.
'남들이 가져가기 전에 내가 쏙 빼먹는 달달함이 이런 거네!'
속물 같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은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기분이 째진다는 표현이 정말 딱 어울렸다.
한편 죽은 케르베로스의 몸 위로는 마치 주먹만 한 크기의 얼음을 보는 듯한 뭔가가 있었다.
성좌인 행운의 여신과의 계약에 따르면, 중간 보스 몬스터를 제거할 경우에도 아티팩트 등장 확률은 100%다.
그렇기에 시야에 보이는 저것은 아티팩트가 확실했다.
"잠깐만요!"
부리나케 현장에 도착한 김미소가 상현을 불렀다. 그녀가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걸까?
지켜만 보고 뒤늦게 분배를 요구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말의 시작부터 기우임이 드러났다.
"지옥의 케르베로스는 상현 씨 혼자 처리하셨으니까 모든 부산물과 전리품을 양보할게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합의된 겁니까?"
상현이 흘깃 강주희와 박태석을 쳐다보자, 두 사람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산을 혼자 들어서 치워주신 느낌이라서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저도 주희의 생각과 같습니다. 아티팩트에는 관심이 없는데 상현 씨가 어떻게 지금 상황을 만들었는지 그게 궁금하네요."
다들 획득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밝혔다. 김미소는 그사이에 오간 모든 말을 녹음했다.
던전에서도 쓸 수 있게 개발된 마정석 녹음기였다.
"저희는 이런 얘기를 확실하게 증거로 남겨요. 빈말이 아니라는 거죠. 믿으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케르베로스 시체 위에 상현 씨 이름이 적힌 팻말을 세울게요. 짐꾼들이 수습할 때, 따로 분류해서 챙길 겁니다."
똑 부러지는 김미소의 일 처리에 상현도 만족했다.
"다들 전방 탐색 좀 할까요? 상현 씨가 아티팩트도 편하게 확인하실 겸요!"
김미소가 두 사람과 함께 바로 전방으로 나서자, 상현이 바로 아티팩트를 주워들었다.
확실한 배려를 받았으니, 그 시간을 알차게 쓸 참이었다.
빙결의 심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티팩트는 전에 봤던 붉은 담석 같은 아티팩트였다.
이런 생체 기반 아티팩트가 새로울 건 없었다. 다만 상현의 관심을 끈 것은.
「빙결의 심장」
■ 아티팩트 등급 : 골드
■ 아티팩트 소개 : 혹한 지옥에서 유래된 극한의 한기가 심장에 깃들어 세상을 얼리고자 합니다.
■ 회피 +10
■ 방어 +10
■ 특수 효과 – 빙결화
바로 특수 효과였다.
빙결(氷結)!
적이나 몬스터에게 상태 이상을 유발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에 대한 방향성이었다.
23화 유니크 - (2)
'골드 등급 흡수율은 30%. 회피 3, 방어 3 계승에 빙결 유발까지 가능해지겠네.'
상현이 바로 마나 동기화에 들어갔다. 아티팩트도 자기 소유로 인정받은 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윽고 상현의 앞으로 형상화된 음식은 치킨버거에 얼음 동동 띄운 콜라 한 잔이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도와.'
상현이 가장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조합이었다. 통통한 감자튀김이 없는 게 아쉽지만.
단숨에 식사를 끝냈다.
민트, 오이, 벌레. 이렇게 세 가지 키워드만 아니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참고 먹을 만은 하니까.
흡수로 회피, 방어 스탯을 챙긴 상현이 특수 효과인 빙결화를 획득했다.
필요하면 스킬에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체를 별도로 활용할 수도 있기는 했다.
'이건 풀 차징에 연결하자.'
상현은 자신의 주 스킬 중에 하나인 풀 차징에 빙결화를 결합하기로 했다.
데몬 배쉬가 경직에 지연, 연장이 들어간 조합이라면, 풀 차징에는 빙결화가 들어간 조합인 셈.
그러면 이동, 필살 공격을 동시에 하면서 타깃의 빙결 상태 이상까지 유발할 수 있다.
바로 결합을 마치고 나자.
『풀 차징』
■ 스킬 레벨 : 1단계(21.3%)
■ 스킬 소개 : (...중략.)
몬스터 또는 공격에 노출된 플레이어에게 0.5초의 빙결 상태를 유발한다.
단, 빙결 지속 시간과 성공 확률은 타격 대상의 스킬 저항도에 따라 달라진다.
빙결에 관한 내용이 추가됐다.
'조금 아쉬운데. 여기에서 Don't Touch Me 칭호로 얻은 스킬 강화를 쓰는 게 좋겠는데?'
빙결의 지속 시간이 아쉬웠다.
그래서 풀 차징의 시간도 줄일 겸, Don't Touch Me 칭호에서 얻은 스킬 강화를 쓰기로 했다.
[풀 차징의 스킬 강화가 이뤄집니다. 칭호에 포함되어 있던 추가 효과가 사라집니다.]
[빙결 상태 지속 시간이 0.5초에서 1.0초로 증가합니다.]
[풀 차징의 대기 시간이 기존의 39% 수준으로 감소합니다.]
'역시....'
상현이 감탄했다.
스킬 강화가 적용되면서 비약적으로 풀 차징의 활용 가치가 증가했다.
이제 상태 이상 옵션으로 경직과 결빙, 두 가지를 가지게 됐다.
둘은 각기 다른 취급을 받는 독립 개념이다.
경직에 걸린 몬스터에게는 15초 내로 같은 경직을 걸 수 없지만. 빙결은 걸 수 있다.
'아티팩트를 먹는 능력. 진즉에 이렇게 썼어야 해. 전생에도 그랬어야 했는데.... 참, 아쉽네.'
지나간 삶에 의미를 둬 무엇하겠냐마는 전생에 너무 늦게 능력 사용법을 깨달았던 게 아쉬웠다.
물론 그때의 아쉬움과 실패들이 있기에 지금의 급성장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풀 차징을 한 차례 강화한 상현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일행에 합류했다.
이제부터 상현이 아닌 3인에게는 미지의 구간. 상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부분부터는 우리 팀 전원에게 백지나 다름없어 공략법을 새로 세워야 할 듯한데요."
"맞아요. 사전 정보는 다 소진됐죠. 정찰대의 희생도 있었고... 만만치는 않겠어요."
김미소가 보스 몬스터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물론 자신감은 다들 충만해 보였다. 애초에 그들은 알려진 레벨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상현의 판단이었다. 그만큼 아티팩트 무장 상태가 좋았다.
양질의 아티팩트는 레벨을 수십에서 백 이상까지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략법이 백지인 상태라면, 제가 제안하는 택틱Tactic으로 해볼 수 있습니까?"
"괜찮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상현의 말에 세 사람 모두 귀를 쫑긋했다. 앞서 상현 덕분에 공략에 큰 이득을 본 덕분이었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자존심 때문에 대놓고 상현을 부러워하는 시선만 안 보냈을 뿐.
사실상 초고속 공략을 멱살 잡고 이끌어 낸 상현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많았다.
"제가 이 게이트 내부의 환경이나 돌아가는 흐름을 보고 생각한 바에 따르면...."
상현이 마치 깊은 숙고를 거쳐 도출한 결론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회귀했기에 알 수 있는 미래 지식을 모르는 체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팀원들은 편견 없이 상현의 의견을 수용했고, 이내 그것은 4인 팀의 첫 과제가 됐다.
어차피 첫 공략이라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아니던가? 열정 넘치는 그들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 * *
상현의 지시대로 준비는 신속하게 끝났다.
시야가 탁 트인 평원 위에 자리를 잡은 상현이 여기저기 쌓인 시체의 무덤을 보았다.
이전에 사냥한 몬스터의 시체에서 내장 부위만 골라내어 쌓아 올린 탑이었다.
적출과 분리, 한데 모으는 작업은 상현이 전담했다.
애초에 이 내장의 탑이 보스 몬스터인 '그리즐리 빅 베어'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와 살점들을 뒤집어쓰고, 맛 좋은(?) 냄새를 자신에게서도 풍기는 것이 중요했다.
"이 향나무를 내장 위에 포개어 놓고 불을 피우면 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예상 기대 효과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 향나무의 향은 달콤한 향기가 나지만 먹으면 마취 효과를 유발해요."
"아... 그러니까 보스 몬스터가 이 마취 효과가 있는 향나무 잿가루와 함께 내장을 먹게 한다는?"
"그런 셈이죠."
"이 향나무도 던전이나 게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처음 봤는데, 사용법까지 알고 있다니 신기해요!"
"원래 잡학다식이라 쓸데없이 아는 게 좀 많아요."
김미소의 말에 상현이 웃었다.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그리고 박태석이 발화 능력으로 향나무에 불을 붙이자 활활 타오르며, 내장도 익히기 시작했다.
당연히 썩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머지 셋은 강주희가 연 통로를 이용해 잠시 현장을 벗어나 있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으며, 시체밭이나 똥밭에서도 굴러본 상현에게 이 정도는 약과였다.
오히려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대검에 묻은 살점 찌꺼기를 몸에 쓱쓱 문지를 뿐이었다.
투득투득. 화르르륵. 화륵.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진한 냄새가 남풍을 타고 쭉쭉 퍼져 나갔다.
보스 몬스터를 플레이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게 만든다는 방식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세 사람은 상현의 계획을 믿고, 10분 동안 숨을 죽인 채 변화를 진득하게 기다렸다.
그때.
우오오오오!
강대한 포효와 함께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현이 기억한 대로 그리즐리 빅 베어였다. 약칭 빅 베어.
"주희 씨! 녀석이 먹잇감을 찾으면 바로 우리가 준비한 먹이 방향으로 공간을 열어주세요."
"알겠어요!"
"태석 씨는 상태 이상 걸릴 때만 발화 능력을 쓰면 됩니다. 평소에는 아껴요!"
"알겠습니다!"
"미소 씨는 계속 후방만 노리면 됩니다. 동선은 제가 책임지고 막을 테니, 믿고 쏴요. 알았죠?"
"네!"
역할 분배가 끝났다.
빅 베어는 우직하게, 끈질기게, 인내심 있게 체력을 깎아야 하는 가장 정직한 적이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토가 나올 정도로 엿 같지만, 어차피 또 그것이 검사 플레이어의 숙명인 것.
"이참에 스킬 연성도 노가다나 실컷 해야겠군!"
부담을 기대로 승화시킨 상현이 씨익 웃으며, 빅 베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됐다.
* * *
우와아앗!
어깨높이 2m, 몸길이 3m에 달하는 빅 베어의 몸놀림은 그 자체가 단단한 전차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듯 후려친 빅 베어의 앞발 치기를 대검으로 막아낸 순간.
퍼억!
"크헉!"
쿠웅! 쿵! 쿵!
상현의 몸이 한참을 날아가서는 흙더미를 뒤집어쓰며 바닥을 굴렀다. 상상 초월의 괴력이었다.
엄청난 힘에 떠밀려서 날아가는 바람에 브레이크 한번 없이, 몸이 지면과 충돌했다.
그래서인지 내장이 진탕하는 느낌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카악, 퉤."
내뱉은 가래침에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우호오! 우호오!
초장부터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빅 베어가 상현을 보고 득의양양하게 어깨를 펼쳤다.
네깟 놈이 감히 나를 건드릴 수나 있겠냐는 그런 도발적인 태도가 상현의 감정을 자극했다.
'내가 전생에 이름값은 없었어도 깡과 독기는 남부럽지 않았거든? 곰탱이 새끼, 아주 끝을 보여주겠어.'
바로 빅 베어에게 질주했다.
그리고 빅 베어의 앞발 치기가 날아드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힘껏 낮추면서 검술을 펼쳤다.
『데몬 배쉬』
포문은 데몬 배쉬로 열었다.
하지만 스킬 저항도 때문에 먹혀들지 않았고, 빅 베어가 유연하게 허리를 돌리며 상현을 노렸다.
『풀 차징』
상현이 짧은 차징을 준비했다.
지금은 공격이 아니라 즉각적인 이동 회피를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몸을 날려서 바닥을 구르기에는 각도가 나빴다.
후웅!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바람 소리가 상현의 귀를 때렸다.
파앗!
"와!"
"예측하지 못한 각도로 상현 씨가 빠져나갔어요!"
상현이 풀 차징 스킬을 짧게 끊으며 직각에 가까운 회피 기동을 하자 팀원들이 놀랐다.
아예 각도를 완벽하게 틀어 빠져나갔기에 빅 베어도 제대로 상현의 위치를 쫓지 못했다.
푸욱!
쿼어어억!
그사이에 날아든 김미소의 화살이 빅 베어의 뒷덜미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박혔다.
한 번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야 어렵지만, 빅 베어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데에는 좋았다.
파앗!
상현이 다시 풀 차징을 이었다.
빠르게 연속 사용을 하게 되면 몸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지만, 지금은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서걱!
으커어!
깔끔하게 빅 베어의 허리로 들어간 풀 차징의 대검 공격이 타격과 동시에 빙결을 유발했다.
"곰탱이 새끼, 너 딱 걸렸어."
상태 이상 스킬의 무서운 점은 다른 성질의 것을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빙결이 끝나기 전에 경직을 추가로 넣을 수 있었다.
보통 플레이어가 여러 개의 상태 이상 스킬을 갖는 경우가 드물어 잘 벌어지지 않는 현상.
하지만 상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화르르륵!
동시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온 박태석의 발화가 빅 베어의 옆구리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다들 칼 연계 좋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팀플레이는 무릇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 법이거늘 전생에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치칭. 치잉. 칭칭.
이내 빙결이 풀리면서 빅 베어의 몸이 자유로워지기 바로 직전.
『데몬 배쉬』
상현이 데몬 배쉬를 이었다.
그러자 확정으로 경직이 들어가며 다 풀려가던 빅 베어의 몸뚱이가 멈췄다.
상현은 첫 경직이 유지되는 2.4초 중, 2초를 풀 차징 상태로 대기한 뒤, 단번에 대검을 질렀다.
푸화아악!
뻗어져 나가는 빅 베어의 핏줄기가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원점으로 돌아온 상현이 풀려가던 경직을 확정 지연시켰다.
선 채로 한참 허수아비 신세가 된 빅 베어는 그 시간 동안 참담한 꼴을 당해야 했다.
이마에만 김미소가 전력으로 날린 화살 네 대가 꽂혔고, 등과 배 그리고 옆구리에서 연속적으로 발화가 일어난 것이다.
일방적인 유린에 독기가 올랐지만, 문제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체력이었다.
킁킁. 킁킁킁.
때마침 맛있는 냄새가 났다.
생체든 사체든 씹어먹고 소화하면 원래의 기력을 되찾는 빅 베어에게 참을 수 없는 유혹.
우오오!
이윽고 빅 베어가 포효하며, 자신에게 걸린 상현의 경직을 강제로 풀어내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탐식(貪食) 상태에 빠졌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즉각적인 상태 이상의 해제다.
쿵쿵쿵! 쿵쿵!
"만찬의 시간이야!"
강주희의 외침과 함께 팟, 하고 빅 베어의 바로 앞에 공간 통로가 열렸다. 미끼 앞으로 여는 고속도로였다.
우걱우걱!
후릅후릅!
그리고 빅 베어가 마취 효과를 잔뜩 머금은 몬스터의 내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흡사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즐기는 최후의 만찬과도 같았다.
24화 유니크 - (3)
노가다의 반복이었다.
예전의 삶에서 플레이어들은 이걸 두고 곰탕 노가다라고 불렀다.
빅 베어를 진득하게 죽어갈 때까지 끓어오르게 하는(?) 용도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곰탕 노가다를 계속 반복하면, 점점 빅 베어의 움직임이 굼떠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말이 쉬울 뿐이지 생각보다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의 시간을 버텨야 해서다.
그 몫은 오롯이 상현의 몫이었다. 때로는 광기에 차 공격을 퍼붓기도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팀원을 노리려고도 하는 만큼.
몬스터를 한 위치에 지속적으로 붙잡아두는 위치 고정은 매우 중요했다.
사실 이 작업이 제대로 되는 검사가 흔치 않았다. 김미소도 항상 그게 불만이었던 상황.
"깨끗해, 깨끗해."
"언니. 저희 셋이 이렇게 지켜보듯이 전투를 치러 본 경험이 거의 처음이지 않아요?"
"레벨 제한이 걸린 게이트나 던전에선 처음이지. 진호 오빠나 태리 언니 버스 탈 때는 안 그랬지만, 그건 레벨 차이 때문이니까!"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지금의 모습에 세 사람 모두 진심으로 기쁨에 찬 박수를 쳤다.
편했다.
오로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어준 상현의 실력에 경의를 표하게 됐다.
여전히 상현의 레벨은 40을 채 달성하지 못한 상황. 이건 상현의 대단함을 단적으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루루루! 쿠루루!
점점 침을 질질 흘려가며 흐느적거리는 빅 베어의 모습에서 상현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얼큰하게 마취 기운에 빠져버린 빅 베어는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웃고 있었다.
나른하게 몸이 풀어지는 느낌이 쾌감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마취 약에 뿅 가는 변태 같은 기질이라도 있는 건가. 하긴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나른함이겠군.'
처억!
상현이 바로 들고 있던 장검을 대검으로 교체했다.
『풀 차징』
곧바로 풀 차징에 들어갔다.
대놓고 준비에 들어갔지만, 빅 베어는 엿가락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적당히 힘이 모이자, 상현이 더 볼 것도 없이 비틀거리던 빅 베어의 복부를 그대로 찔렀다.
푸욱!
크워어어어!
동시에 들어간 빙결!
이제부터 지옥의 시작이었다.
빙결 유지 1초.
첫 번째 경직 2.4초.
확정 두 번째 경직 2.4초.
90%, 60% 확률로 연타로 들어간 두 번의 2.4초 추가 경직까지!
무려 10초가 넘는 시간 동안 빅 베어는 발톱 하나 까딱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맞았다.
앞서 같은 상황에서는 체력 회복을 위한 강제적인 상태 이상 해제 패턴이 나와서 극복을 했지만.
마취 효과에 깊이 빠진 이번만큼은 그 패턴이 발동하지 않았다. 무의식에서 지워진 것이다.
화르륵! 화륵! 화르륵!
푸욱! 푸슉! 푸슈슉!
그사이에 발화로 치솟은 불길이 여섯 군데가 넘었고, 김미소의 화살은 빅 베어의 뒤통수만 골라서 맞췄다. 강주희의 공간 활용 능력과 연계된 한 방이었다.
흐어. 크어. 으어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빅 베어가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댔다.
상현은 전력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의 힘을 풀 차징으로 모았다.
바로 앞에서 정말 발톱 한 번만 휘둘러도 될 거리에 있었지만, 빅 베어는 인사불성이었다.
애초에 빅 베어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한 상현의 움직임. 배짱이나 넘겨짚기가 아니었다.
"즐거웠다, 곰탱이."
상현이 씩 웃으며 대검에 맺힌 강렬한 기운을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면으로 쏟아냈다.
푸화아악!
깔끔했다.
마치 흔적도 남지 않게 대나무를 벤 것처럼 빅 베어의 모습에는 변동이 없었다.
다만 상현의 위치가 빅 베어의 전방에서 후방으로 변했고, 대검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릴 뿐.
우우...?
분명 자신의 허리춤을 뭔가 훑고 지나간 것 같은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느낌.
시종일관 자신을 괴롭히던 상현이었기에 빅 베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 일격에도 별일 없는 것을 보면 역시 곰의 왕인 자신에게 영험한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난 곰의 왕이다.
하찮은 미물 따위는 이번에야말로 한 번에 거대한 앞발로 찍어눌러 그 끝을....
티잉.
그 순간, 빅 베어는 느꼈다.
놀라우리만치 완벽히 균형을 이루고 있던 몸이 비스듬하게 어긋나는 것을.
그리고 배의 중간에 붉은 선이 하나 생겨나더니, 마치 미끄럼틀을 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체가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질주가 시작됐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주인을 잃고 삐져나온 오장육부들이 늘어지고 터지며 몸이 분해됐다.
저항할 수도, 돌이킬 수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도 없었다.
워어어어!
마지막 외침. 빅 베어가 내지른 통한의 절규가 사방으로 메아리치며 퍼져나갔고, 그게 끝이었다.
쿠웅. 쿵. 쿵.
완벽하게 분리된 상반신과 하반신이 반대 방향으로 고꾸라지면서 빅 베어의 최후를 알렸다.
"와!"
동시에 미친 듯이 쏟아지는 레벨업 메시지에 상현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번 전투 전까지 레벨 35였던 상현의 레벨이 단숨에 50까지 수직 상승했다.
애초에 그만큼 수준 높은 게이트였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상상 이상의 폭등이었다.
대미지 기여도부터 시작해서 중추 역할을 한 상현에게 다량의 경험치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벨이 무려 한 번에 열다섯 단계가 뛰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회귀한 지 보름도 안 돼서 2년 고생했던 윤대경 조장보다 레벨이 더 높아지는 거야?'
상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인생인 건가?
많은 것을 알고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이기에 가능해진 그림인 걸까? 실로 감동적이었다.
이런 성장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전생에 못 했던 게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C급 칭호, [영리한 사냥꾼]이 주어집니다.]
[영리한 사냥꾼]
■ 칭호 등급 : C급
■ 칭호 소개 : 소형 이상 몬스터를 하나 처치할 때마다, 선혈을 포식하여 체력을 1 회복합니다.
'예전에 들었을 때 칭호 얘기는 없었는데? 이거 빨리 잡아서 특전이 더 주어진 건가?'
전생에 춘의역 게이트에 대해서 훗날 정보 편람을 보았을 때 칭호 얘기는 없었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획득할 방법도 없는 만큼, 경험자들이 증언을 남기기 마련인데.
이 칭호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던 칭호였다. 게다가 상현만 얻어낸 칭호이기도 했다.
'소형 몬스터를 처치하면 체력 1 회복? 피흡 검사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네.'
힐러 플레이어를 구하기가 힘든 현실에서 정말 알토란같은 칭호를 얻은 셈이었다.
체력을 채울 수단이 많다는 건, 그만큼 좀 더 공격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음을 뜻한다.
보통 체력 관리 문제로 인해 던전 또는 게이트 공략에서 차질을 빚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서다.
'거기다 피흡 검사라는 콘셉트는 검마 독고윤의 시그니처 콘셉트잖아? 내가 선점하겠는데?'
지금으로부터 얼마 후, 독고윤은 피를 마시는 검이라는 특이한 에픽 등급 아티팩트를 손에 넣는다.
그 아티팩트에 달려 있는 옵션 중에 하나가 몬스터를 처치할 때, 체력 2를 회복하는 옵션이었다.
상현은 그에 비하면 수치가 1 낮지만, 중요한 사실은 에픽 등급 아티팩트는 평균 호가가 1300억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즉, 이번에 얻은 영리한 사냥꾼 칭호의 값어치는 못 해도, 절반인 650억 원은 하는 셈이었다.
샤아아. 샤아아.
그리고 죽은 그리즐리 빅 베어의 몸 위에서 무지개색 빛깔의 광원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티팩트 획득과 이어지는 특이한 광원이다. 저것을 만지면 시스템으로부터 다이렉트로 보상을 받는 특별한 창이 활성화된다.
"상현 씨! 정말 고생하셨어요! 이렇게 깔끔한 옷과 몸 상태로 게이트 공략한 건 처음이에요! 와!"
한달음에 달려온 김미소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공략의 기쁨을 만끽했다.
늘 그랬듯이 긴장을 많이 했던 게이트 도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쉽게 끝난 도전이었다.
모든 미확인 게이트들을 이렇게 쉽게 탐사할 수만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던전이 아닌 게이트 탐사를 떠나는 플레이어들의 생환율은 90%.
항상 어디선가 들어간 10명 중 1명은 죽는다는 뜻이다. 다만 오늘과 같은 공략만 가능하다면 영원히 죽을 일은 없을 듯했다.
"상현 씨가 없었으면 빅 베어를 공략하는 택틱의 시작조차 만들지 못했을 듯합니다. 솔직히 보스 몬스터를 잡는데, 걱정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박태석이 허리가 폴더폰처럼 접히듯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였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플레이어 세계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매너 좋은 플레이어.
박태석의 감사에 상현도 다시 한번 공략의 뿌듯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할게요. 미소 언니랑 태석 오빠만 괜찮으면 상현 씨랑 계속 같이 가고 싶어요. 분배도 양보하라면 양보할게요."
셋 중에 강주희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공간 활용 능력을 100% 이상으로 활용해준 상현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지금껏 화려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복잡한 공간 통로만 깐다느니 하는 무시도 당했던 그녀였다.
김미소나 박태석이 아닌 외부인이 참여할 때마다 꼭 그런 불상사가 터지곤 했었다.
하지만 상현은 오히려 강주희의 안배를 파인 플레이Fine Play라고 칭찬했고, 십분 활용했다. 그러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일단 모두들 광원을 잡으시죠. 어차피 인원에 맞춰서 활성화되는 광원이라 꼬이진 않을 겁니다."
상현이 힘차게 광원을 움켜쥐었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얻은 꿀맛 같은 결과물을 쟁취할 시간이다.
[플레이어 '신상현'에게 유니크 등급의 아티팩트가 주어집니다.]
[이하의 아티팩트 목록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유니크...!'
상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은 당연히 했지만, 유니크 등급이 주는 무게감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평균 호가 250억 원에 달하는 유니크 등급의 아티팩트는 당연히 쉽게 얻기 힘든 아티팩트였다.
"대검"
상현이 다양한 무기 목록 중에서 처음부터 시선을 두고 있던 분류를 확인했다.
장검, 단검을 비롯한 검 종류의 무기는 모두 쓸 줄 알지만 그래도 상현에게 익숙한 건 대검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드디어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라며 기뻐합니다.]
'맞아! 유니크 아티팩트는!'
갑자기 나타난 성좌의 메시지에 상현이 그에 관련된 계약 내용을 확인했다.
- 둘째. 유니크 등급 이상 아티팩트를 먹을 경우 반드시 히든 효과가 개방되어 계승됩니다.
히든 효과 개방의 특전.
행운의 여신과 계약하면서 얻은 네 가지의 특이점 중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상현이 바로 대검을 선택했다.
그러자 연보랏빛의 섬광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상현의 양손에 대검이 쥐어졌다.
방금까지 썼던 투박한 옛 대검이 아닌 새롭게 획득하는 유니크 등급의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상현의 눈을 곧바로 사로잡은 것은 등급도, 스탯도 아닌 대검의 추가된 히든 효과였다.
■ 특수 효과 – 넉백 버스트
'경직에 빙결로 모자라 이제 넉백이라고?'
히든 효과가 개방되면서 상현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길이 열렸다.
[행운의 여신이 진심을 담아서 누나라고 한번 불러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히든 효과 중에 기가 막히게 맞춤형으로 나온 옵션.
"여신 누나...!"
이건 참을 수 없었다.
25화 유니크 - (4)
다들 주어진 아티팩트 보상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상현의 외침을 눈치채지 못했다.
「투혼의 대검」
■ 아티팩트 등급 : 유니크
■ 아티팩트 소개 : 투사의 투혼을 상징하는 이 대검에는 강대한 힘은 물론 바람의 가호가 보이지 않게 숨어있습니다.
투혼의 신이 내린 축복과 바람의 가호가 만들어낸 오오라 속에서 소유자는 10%의 회복력 상승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근력 +150
■ 민첩 +50
■ 특수 효과 – 넉백 버스트
'스탯 미쳤네.'
딱 필요한 스탯만 집중됐다.
힘을 상징하는 근력은 검사에게 말해야 입만 아픈 스탯이고, 민첩도 상현에게는 중요했다.
풀 차징 같은 이동 스킬의 활용에서도 그렇지만, 상현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움직임이 많아서다.
신속한 회피 기동과 반격을 즐기는 상현에게 민첩의 상승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과 같았다.
'넉백 버스트. 진짜 이게 대박이네.'
상현이 히든 효과로 열린 넉백 버스트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 특수 효과 – 넉백 버스트
■ 효과 소개 – 마나 27을 사용해 상대를 뒤로 밀쳐냅니다. 대상의 스킬 저항도에 따라 성공 유무와 넉백 거리가 달라집니다.
최대치인 마나 108까지 활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성공 가능성이 올라가고 거리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나처럼 풀 차징과 유사한 기술을 쓰는 몬스터도 있고 정신 집중이 필요한 몬스터도 있지. 넉백은 그런 부분에서 유용해.'
상현이 채워가길 원했었던 상태 이상 분류 중에 하나였다.
넉백! 그것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태산 같은 적수도 때때로 뒤로 밀려날 수 있게 만들었다.
[근력 250]
'이건 정말....'
대검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폭 오른 근력 스탯을 보니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이제 레벨 50이다. 보통 이 레벨대에 위치한 부유한 플레이어면 근력은 아무리 높아야 130선이다.
상현은 여기에서 무려 100이나 더 차이가 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레벨로 바꾸면 최소 120레벨 정도 되는 경지라고 봐도 됐다.
가진 스탯과 레벨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상현의 성장이 폭발적이라는 뜻이 됐다.
심지어 지금까지 레벨업으로 얻은 보너스 포인트는 모조리 행운 스탯에만 넣지 않았던가?
아티팩트를 먹거나 갖는 것만으로 올린 스탯이라 더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분배되지 않은 포인트를 모두 행운 스탯에 밀어 넣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행운 213]
'좀 더 상위 아티팩트를 획득하거나 아니면 아티팩트 자체를 얻을 확률이 한 번 더 뛰겠네.'
행운 스탯을 전혀 투자하지 않은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20% 정도의 확률 우위를 가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들과의 격차를 벌려나갈 요소가 더 확실하게 늘어난 셈이다.
■ 크리티컬 히트의 범위
■ 최소 120%에서 최대 600%
기존에 100%, 500%였던 최소와 최대의 한계도 달라졌다.
크리티컬 히트가 최대값으로 터진다면? 단순 공격 한 번이 상대방에게는 목숨을 앗아가는 일격이 될 수도 있음이다.
"이걸 어떻게 감사를...."
"하아. 생각한 이상의 보상이에요. 너무 과분한걸요?"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
상현은 자신만큼이나 함께 합을 맞춘 동료들이 있어 얻은 보상이기에 그들의 아티팩트에는 욕심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혼자 왔으면 케르베로스는 몰라도 그리즐리 빅 베어를 잡는 것은 무리였기도 했다.
그렇다고 솔플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그 사이 누군가가 먼저 공략했을 터다.
실제로 전생에도 춘의역 게이트 초회 공략의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보름 정도의 차이로 멀지 않았다.
"빅 베어의 시체와 나온 마정석에 다른 부산물들까지. 전부 상현 씨에게 양보하고 싶어요."
"아티팩트 값도 치러야 하지 않을까요? 플래티넘 등급의 아티팩트는 정말 생각도 못 한...."
김미소와 강주희가 번갈아 의견을 피력했다.
상현은 아티팩트를 제외한 다른 것들에 대한 양보는 흔쾌히 받기로 마음먹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자의 직업용으로 특화되어 획득한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양보하기로 했다.
애초에 팀 분배 규정이 있기도 하고, 오히려 확실하게 양보를 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신세를 진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속물 같지만 사람 사이의 마음가짐이라는 게, 결국 이런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현이 취한 유니크 등급 획득의 특전과 달리 나머지 셋은 플래티넘 등급 아티팩트였다.
플래티넘 등급 아티팩트도 평균 거래가가 10억을 상회하나, 어쨌든 아주 비싼 것까진 아니었다.
왜냐하면 춘의역 게이트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얻은 대부분의 전리품을 상현이 양보받아서다.
눈대중으로 계산해둔 것이기는 하지만, 정산하면 최소 15억 원은 벌 수 있을 듯했다.
지옥의 케르베로스나 그리즐리 빅 베어의 시체만 팔아도 최소 6억 원 이상은 확보되니까.
그래서 확실하게 세 사람의 마음을 사두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들과의 인맥은 두고두고 도움이 될 듯했다. 적어도 자신이 그들의 레벨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나머지 양보는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다만 빅 베어에게서 얻은 아티팩트는 넣어 두세요."
상현이 환한 미소와 함께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매번 플레이어 팀의 골칫거리가 분배에 관련된 분쟁이지만 상현의 팀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 * *
"쉬었다 가시게요?"
"네. 너무 피를 많이 뒤집어썼더니 게이트 밖의 선선한 공기가 너무 반갑네요."
"고생하셨어요. 상현 씨, 괜찮은 게이트 건이 잡히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다들 생각 똑같죠?"
"저는 상현 씨가 온다고 한다면 길드 레이드를 하다가도 달려오겠습니다! 약속!"
"저는 그냥 시간을 항상 비워 놓을게요!"
김미소의 말에 박태석과 강주희가 차례대로 상현을 향한 충성 맹세(?)를 마쳤다.
짐꾼들의 전리품 회수와 내용물 감정, 판매, 분배가 모두 끝났다.
총액 16억 원.
상현이 분배받은 금액이었다.
여기에 유니크 등급의 대검까지 챙겼으니, 총평가액이 무려 270억 원에 달하는 셈이다.
"곧 연락드릴게요!"
김미소가 양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자, 상현이 마침 생각난 말을 잽싸게 건넸다.
"다음에 볼 때는 전부 말 놓기로 하죠. 긴박한 상황에는 존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
"그래요! 아니, 그냥 지금 놓으셔도 돼요! 오빠, 형, 야, 뭐 나이에 맞게 맞추면 되죠!"
"그래, 미소야. 조심해서 가. 태석 형도 다음에 봐."
"어어? 어, 그래. 간다!"
"좋아, 상현 오빠!"
상현의 쿨한 말 놓기에 바로 분위기가 잡혔다.
확실히 위급 상황이나 짧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때에 존대를 하는 것은 불필요하긴 했다.
어쨌든 함께했던 팀원들의 고마움이 담긴 인사를 듬뿍 받은 상현이 게이트 앞에서 쉬었다.
다들 떠나고 조용해진 자리에서 상현이 아까부터 점멸을 반복하던 메시지를 열었다.
성좌에 관련된 내용이기에 혼자 있을 때, 진득하게 확인을 해보고 싶었던 탓이다.
[사자왕이 당신의 검술에 깊은 흥미를 가집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플레이어라고 감탄합니다.]
[암흑 사냥꾼이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당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습니다. 태생을 의심합니다.]
[미염의 소유자가 거대한 벽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당신의 투지에 열렬한 응원을 보냅니다.]
[행운의 여신이 이번에는 꽤 괜찮은 성좌들이 나타났다며, 상현 코인이 떡상했다고 말합니다.]
"떡상 같은 표현은 어디서...."
행운의 여신이 내뱉은 생각지도 않았던 현실 드립에 상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왕이나 미염의 소유자는 지구에 존재한 인물이 바탕이 된 성좌다. 당연히 격이 높았다.
두 성좌는 무인(武人)에게 주로 접근하는데 자신들의 기준에 차는 무인들만 관심을 표현했다.
즉, 두 성좌는 자신에게서 높은 가능성을 봤다는 뜻이다. 짧은 활동 기간이나 낮은 레벨에 전혀 관계없이 말이다.
'암흑 사냥꾼. 저놈이 문제지.'
성좌, 암흑 사냥꾼.
그는 플레이어 시스템의 오류로 과한 특혜를 받거나, 다른 성좌의 불법적인 플레이어 계약을 파헤치고 다니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상현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플레이어 시스템에는 자체적인 자정(自淨) 기능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회귀자인 자신을 암흑 사냥꾼이 관심을 갖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불쾌했다.
'이 정도 추세면 더 많은 성좌가 내게 관심을 가질 거고. 그러면 신좌도 언젠가 나타날 거야.'
상현이 노리는 대상은 성좌보다 그 위의 존재인 신좌(神座)였다.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 100명만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대상인 신좌.
상현은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혹은 행운의 여신처럼 중복의 계약이 가능한 다른 성좌가 나타나거나.
[행운의 여신이 번호표 뽑고 돌아가라고 말하겠냐고 묻습니다.]
"네. 지금은 성좌보다는 신좌에 관심이 많다고 전해주세요."
[사자왕이 네깟 놈이 뭔데 신좌를 욕심내냐며 호통을 칩니다.]
[미염의 소유자가 그 정도 패기면 신좌와의 만남에 감히 도전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암흑 사냥꾼이 신좌를 원하는 당신의 오만함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피곤하구만, 피곤해."
암흑 사냥꾼이 앞으로 귀찮게만 달라붙지 않으면 딱 좋겠는데, 마음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하는 동안 상현은 오늘 번 돈으로 어떤 아티팩트를 사면 좋을까 생각에 잠겼다.
값싼 아티팩트면 먹는 것이 낫지만, 투혼의 대검처럼 등급이 높으면 끼고 있는 것도 답이라서다.
생각이 떠오르는 후보군은 많았다. 문제는 돈일 뿐. 돈만 많으면 사고 싶은 목록은 A4 용지 한 장에 빼곡하게 적을 자신도 있었다.
팀 의존도를 낮추고 팀플레이에서의 적극성을 높이려면 역시 상태 이상 스킬이 좋다.
물론 상태 이상 효과가 옵션으로 붙은 아티팩트는 부르는 게 값이다. 정말 돈 지랄인 셈이다.
그때.
기분 전환용으로 틀어두었던 라디오에서 단신(短信)이 나왔다.
- 간추린 뉴스입니다. 오늘 오후 4시, 청계천에서 원인 미상의 이유로 물에서 극심한 악취가 발생, 당국이 조사에 나섰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평범한 단신이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지나쳤을 내용.
하지만 이 보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청계천과 악취. 두 개의 키워드와 함께 오늘 있었던 큰 사건 하나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부평역 균열이 오늘이구나."
바로 균열이었다.
균열이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 갑자기 갈라지며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후에 균열이 일어났던 공간은 던전으로 변하는데 인명의 피해만 없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반길 일이었다.
그만큼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무대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균열과 함께 나왔던 놈들이 코볼트. 노멀 코볼트부터 해서 코볼트 킹까지 내 수준에 딱 맞지."
균열 당시 처음 등장하는 몬스터는 시스템에 의한 데이터의 복제가 아닌, 실제 몬스터다.
그래서 다른 경우보다 경험치의 획득량도 높으며 몬스터들이 가진 도구 자체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즉, 가진 모든 것들이 아티팩트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가졌느냐에 따라 등급은 달라지겠지만.
"내가 코볼트 킹을 잡으면...."
코볼트 킹은 예전에 싸운 경험이 있는 고블린 로드처럼 상태 이상 [위압]에 특화된 보스 몬스터.
그렇다면 녀석이 치렁치렁 두르고 있는 목걸이나 다른 도구에 위압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얻기만 한다면 먹어서 스킬이나 몸 그 자체에 연계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기회다. 미래를 아는 사람이기에 선점할 수 있는 기회!"
끼이익!
상현이 집으로 가던 차의 방향을 틀어, 바로 부평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만이 아는 특별한 미래!
알고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미래를 아는 존재의 특권이 바로 독식 아니던가?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은 반드시 '내 것'이어야만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꼭 말이다.
26화 신속 개입 - (1)
갑작스런 균열이 일어났을 때, 모든 플레이어는 상황과 관계없이 전투에 참여할 권한을 갖는다.
예를 들어서 균열이 일어났는데 다수의 몬스터를 죽이고 부산물을 취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사후에 플레이어 협회가 소유를 주장하거나 분쟁 등으로 몰고 가는 속 시끄러운 일도 없었다.
사실 당연한 룰이었다.
만약 사후 소유권을 주장한다거나 허가 없는 개입으로 처벌한다면 아무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
전투 능력이 없는 일반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플레이어가 나서는 것은 오히려 찬사를 받을 일이다.
'독식도 중요하지만, 이왕 아는 사고를 막을 수 있게 됐으니까 인명 피해를 막아야 해.'
상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퍼 히어로에는 관심 없지만, 눈앞의 재난을 보고도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 비행기 사고가 벌어질 것도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문득 상현이 세 살이었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상현을 외할머니에게 맡겨둔 부모님이 업무 차 일본으로 다녀오는 길에 추락 사고가 난 것이다.
그렇게 고아가 되었고, 열 살이 되던 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지막 혈육과의 이별이었다.
어쨌든 회귀를 하면서 미래라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 지식의 소중함이 깊게 느껴졌다.
'이런 말, 의미 없는 건 알지만. 제가 부모님 몫까지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보겠습니다.'
상현이 힘주어 다짐했다.
예전의 삶에서도 똑같은 다짐을 했었지만, 노력에 비해 세상의 빛을 썩 많이 보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더 빠르게 자신은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상현은 부평역 인근에 도착해서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예상 재난 지점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서 투혼의 대검을 꺼내자마자 효과의 재설정에 들어갔다.
바로 기존의 투박한 대검에 걸린 [경량화] 효과를 푼 다음,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인 투혼의 대검에 다시 거는 일이었다.
이럴 경우 페널티가 존재한다.
1g의 경량화가 10g으로 기준이 올라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종의 다운그레이드가 적용되는 셈이다.
'그래도 투혼의 대검을 쓰는 게 나으니까. 이건 손익 계산을 골몰히 할 필요도 없지.'
[대검에 걸린 경량화 효과를 해제하시겠습니까? 재결합 시, 기존 효과와 다를 수 있습니다.]
바로 해제했다.
지금까지 고생해 준 대검 녀석은 이제 집에 고이 모셔두고 푹 쉬게 해줄 참이다.
[경량화 효과를 새로운 대상에 결합하시겠습니까? 경량화 적용은 10g으로 가능합니다.]
'10g면 무난하지. 100g, 1kg까지도 괜찮아. 너무 자주 바꾸지만 않으면 되겠군.'
상현이 경량화를 진행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양손으로 힘주어 들고 있어야 했던 투혼의 대검이 아주 가벼워졌다.
마치 장난감용으로 출시된 플라스틱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이게 경량화의 매력이다.
시스템을 통해 물리학을 부정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시스템은 참 신비한 구조였다.
물론 본인이 느끼는 무게만 조정될 뿐, 가진 위력과 파괴력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시스템 보정의 힘인 셈이다.
* * *
뚜벅뚜벅, 부평역 1번 출구 방면으로 걸어가면서 상현이 주변을 살폈다.
황사에 미세먼지까지 쌍끌이로 한반도에 상륙한 날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게릴라성 돌풍과 우박이 함께 예고된 것도 한몫했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인 날이었다.
'침묵. 에어 본. 일시 실명. 위치 고정. 격리. 제압....'
상현이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른 다양한 상태 이상 옵션을 중얼거렸다. 점점 욕심이 나고 있다.
현재 스킬이나 특수 효과로 갖게 된 상태 이상은 경직, 빙결 그리고 이번의 넉백.
필요하지 않은 것이 어딨겠냐마는 가장 탐이 나는 건, 바로 침묵이었다.
'침묵에 걸리면 스킬 사용이 그 기간 동안 봉인되니까. 가위바위보 싸움에서 너무 좋아.'
침묵에 노출된 상대는 시스템에 의해, 스킬 발동 매커니즘이 일시적으로 먹통이 된다.
그래서 스킬의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마법계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침묵은 쥐약 수준이었다.
육체적 전투 능력이 크게 떨어지기에 침묵이 걸리면 그냥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런 이유로 침묵에 대한 선호도는 높았다. 당연하게도 관련되어 있는 아티팩트 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일런트 그라운드 던전. 여기를 내가 갈 수만 있으면, 그게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일 듯한데?'
사일런트 그라운드Silent Ground. 침묵의 땅이다. 모든 몬스터들이 침묵을 밥 먹듯이 거는 악명 높은 곳이기도 하다.
회피와 방어에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 24시간 스킬 봉인 상태라고 해도 될 만한 곳이었다.
'일단 부평역 건부터 끝내자.'
관심을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끊임없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회귀한 존재로서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 될 듯했다.
욕심이 자꾸 나다 보니, 뭐 하나 꽂히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기분 좋은 고민이다.
부평역 1번 출구 앞에 선 상현이 우선 스마트폰 화면 위에 플레이어 협회의 번호를 띄웠다.
긴급 신고 번호인 181. 여기로 전화하면, 가장 가까운 협회의 건물로 전화가 간다.
위급 상황 혹은 특수 상황에 신고를 하는 번호이기에 근거리 배정이 되는 형태인 셈.
"시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쪽 하늘로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면서, 붉은 노을이 이글거렸다.
황사에 미세먼지 때문인지 오늘따라 노을이 세상을 집어삼킬 악마의 새빨간 눈빛처럼 보였다.
"지금이면 되겠다."
상현이 기억하는 예전의 기록에 따르면, 첫 균열이 시작된 시점은 서쪽 하늘에 해가 반쯤 걸렸을 때라고 했다.
지금이 딱 그 시점이었다.
뚜우우. 뚜우우.
<네, 플레이어 협회 부평역 관할 담당 안내원 이병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1번 출구 근처에 주인이 분실한 것 같은 골드 등급의 아티팩트가 하나 있습니다."
<아, 습득하신 겁니까?>
"네. 저는 일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신속하게 직원분을 보내주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신고를 끝냈다.
아마 협회의 파견 직원이 도착할 때면 균열이 막 발생한 직후일 터. 수습에는 문제없을 것이다.
신고 이유는 꾸며낸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재난을 미리 대비하는 셈이 될 테니 문제는 안 될 터다.
"후우."
심호흡을 한 상현이 균열 예상 지점 근처에 서서, 자리를 잡았다.
확실히 사람이 별로 없다. 다행이었다. 죄 없는 희생자가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풀 차징』
신속히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풀 차징은 차징을 오래 하면 할수록 힘이 더 모이는 구조다.
물론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시스템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원 없이 힘을 모을 수 있다.
'장비도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좋아졌지. 첫 번째 일격은 솔직히 기대가 많이 되네.'
상현이 샐쭉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균열을 비집고 나타날 코볼트 무리에 대한 통쾌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우우우우웅!
마치 청소기를 돌릴 때 모터에서 날 법한 굉음이 나더니,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졌다.
깨진 유리창을 보는 것처럼 공간이 깨져버린 형상. 그것을 플레이어들은 균열이라고 불렀다.
곧바로 이글거리는 연녹색 빛의 포탈이 만들어지며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제 다른 차원 어딘가로 연결된 내부에서 코볼트 무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와쿠우! 우콰아!
도끼를 든 코볼트 무리가 나타났다. 선발대. 전혀 파악되지 않은 외부 환경을 살피기 위해 보내지는 희생양이다.
코볼트 킹의 입장에서는 희생용 제물이지만, 균열을 맞이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위기인 셈.
"...."
상현이 숨을 죽였다.
풀 차징으로 모은 힘을 쓰기에는 인원이 부족했다. 고개를 내밀고 나온 것은 겨우 일곱. 아깝다.
와쿠! 와쿠!
조용히 타이밍을 기다리자 추가로 코볼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덧 스무 마리쯤 됐다.
저마다 균열 바깥 풍경이 신기한지, 코를 날름대며 사냥감을 찾는 모습이었다.
"으아악! 몬스터다!"
그때,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당황해 소리쳤다. 당황했기에 당연한 반응.
그러자 코볼트 선발대의 집중이 남자에게 쏠리며, 녀석들의 두 눈에서 살기가 빛났다.
'지금이다!'
상현이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쌓아두고 있던 괴력을 단숨에 방출했다.
쿠와아앙!
상현도, 코볼트도, 주변의 행인도 동시에 들었다. 마치 소닉붐을 듣는 것 같은 굉음을.
와쿠우?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한 코볼트 무리가 상현이 있었던 방향을 쳐다보는 순간.
솨아아아악!
2열 횡대로 자리 잡고 있던 코볼트들의 허리 라인을 따라, 선명한 선 하나가 그어졌다.
헥? 후익?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코볼트는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주 본 동족의 몸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는 순간, 모두가 느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후두두둑. 후두둑.
"우오오오!"
"와! 저, 저게 뭐야?"
균열의 생성에 아연실색하던 행인들의 표정이 상현의 활약에 순식간에 180도 바뀌었다.
상현이 대검으로 거칠게 베며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반 토막 난 코볼트 20마리의 시체였다.
조각의 수로만 보면, 정확히 40조각이 되어버린 고(故) 코볼트의 시체인 셈이다.
[미염의 소유자가 일당백도 무섭지 않을 것 같은 당신의 패기와 무력에 깊이 감탄합니다.]
[타락한 차원의 청소부가 역시 피의 맛을 아는 놈이라며, 당신을 잊지 못하고 찾아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저 사이코패스 성좌는 또 왔네. 꼭 한 번에 몬스터를 여럿 때려잡으면 저러더만.'
상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미염공의 관심은 늘 기분 좋은 일이라 뿌듯하지만 말이다.
상현이 포탈 앞에 자리를 잡았다. 포탈 너비는 코볼트 두 마리가 딱 붙어서 나올 수 있는 길이.
그래서 소수의 인원으로도 다수의 적을 상대해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보통 균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위치를 선점하기 전에 몬스터들이 몰려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입구를 틀어막고서 자리를 잡아버리면, 되레 밀고 나오려는 쪽이 골치 아파진다.
'일단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꿀 좀 빨아보실까?'
당장 균열 안으로 들어가면, 시간차를 두고 나올 수도 있는 코볼트를 저지할 수 없다.
그래서 상현은 협회 직원, 혹은 주변에서 플레이어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움직이기로 했다.
아직은 조짐이 없어, 진득하게 입구를 지키면서 기세등등하게 나올 코볼트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와쿠! 와쿠!
바깥 실정을 전혀 모르는 코볼트 두 마리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포탈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서걱!
기다리고 있던 상현이 대검으로 깔끔하게 코볼트 둘의 목을 말끔히 베어냈다.
"네깟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고 기세등등하다고 한들, 목 없이도 살 수 있겠냐?"
당연히 그런 것이 가능한 코볼트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때부터 상현에 의해서 일방적인 코볼트 학살이 시작됐다. 포탈 앞자리를 어이없게 빼앗긴 코볼트 무리가 맞이할 불행한 미래였다.
27화 신속 개입 - (2)
"뭐야, 저거...."
"균열 생긴 거 맞아? 몬스터 한 마리도 새어 나온 녀석이 없잖아?"
"협회 직원인가?"
시간이 흐르며 긴급 재난 문자를 받은 플레이어 몇몇이 부평역 1번 출구에 도착했다.
우연히 주변을 지나가다가 헐레벌떡 뛰어온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플레이어 협회의 부평 쪽 관리 직원 둘도 현장에 도착했다.
이정, 이현. 형제 직원인 둘은 균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학살의 현장에 혀를 내둘렀다.
통상적으로 코볼트라고 그냥 불리는 평범한 녀석들은 이미 주변에 시체의 탑이 쌓여 있었다.
와쿠우! 와쿠!
다만 이정과 이현이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코볼트 어태커'라고 불리는 듬직한 덩치를 가진 녀석이었다.
단순 비교로는 키 187cm인 상현보다 15cm는 족히 더 큰 거구라서 상대가 까다로워 보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넉백 버스트』
상현이 곧바로 코볼트 어태커에게 넉백을 넣은 것이다. 마나 27을 활용한 기본 넉백 버스트.
하지만 스킬 저항도가 크게 떨어지는 코볼트 어태커는 넉백 버스트에 속수무책이었다.
쿠워우!
넉백 버스트와 함께 들어온 상현의 대검 공격을 맞은 코볼트 어태커가 뒤로 쭉 밀려났다.
마치 빙판 위에서 쭉 미끄러지듯이 코볼트 어태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진 넉백이었다.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됐다.
치이이익! 치익! 화르르륵!
끄워어어!
예상치 않은 경로로 뒤로 밀려난 코볼트 어태커가 순식간에 초록 불길에 휩싸이며 산화했다.
그것은 연녹색 빛깔의 포탈 전체에 몸이 잠기면서 벌어지는 생체 발화 현상이었다.
이글거리고 있는 포탈의 기운이 몸 전체를 휘감게 되면, 그 즉시 산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래서 넉백이 좋다니까.'
노림수가 먹혔다.
넉백은 어지간한 물리력으로 밀쳐낼 수 없는 적수를 넉백 고유의 힘으로 밀려나게 만든다.
그게 설령 태산 같은 크기의 적수라도 말이다. 성공 확률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성공하면 무조건 밀려나는 것이 특징이다.
"형, 저거 넉백 아냐?"
"잠깐만. 그것보다 저 사람. 왠지 눈에 익지 않냐? 얼마 전에 더 플레이어 지에... 아! 신상현!"
이정과 이현이 각각 스킬의 효과, 상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코볼트 어태커와의 어려운 승부를 예상한 이정은 산산 조각 난 추측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현은 레벨도 썩 높지 않은 상현이 단번에 까다로운 적을 불태워 없앴다는 사실에 놀랐다.
처음부터 계산이 끝난 노림수였다는 것을 그는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포탈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상현이 협회 명찰을 단 두 사람을 발견하고 외쳤다.
"선발대는 전부 처치했고, 일단 선발대의 대장격이었던 녀석도 잡은 듯합니다! 뒤를 부탁합니다!"
뒷수습을 잘해 줄 협회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안심이었다.
저들이 갑자기 도망가지라도 않는 이상, 부평역의 균열로 일반인 희생자가 나올 일은 없을 터다.
홱!
상현이 숨이 끊어진 채로 축 늘어져 있던 코볼트 한 마리를 잡아 끌며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뜬금없이 죽은 시체를 끌고 간 이유는 간단했다. 내부의 환경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이다.
끼리릭! 끼릭! 끼릭!
역시나 들어가자마자 상현이 예상한 대로 2차 진입을 준비하던 코볼트 궁수들과 마주쳤다.
마침 화살을 장전하고 있던 녀석들은 곧바로 상현을 향해서 화살을 날렸다.
"이럴 줄 알았지!"
푸푹! 푹! 푹! 푹!
상현이 적절하게 앞에 코볼트의 시체를 세워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하여간 너희들은 너무 쉬워."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 할 만했던 화살 공격이 단번에 헛수고가 되자 코볼트 궁수들이 당황했다.
상현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코볼트 궁수에게 들고 있던 단검을 날렸다.
휘리리릭! 푹!
키엑!
이마 가운데에 꽂힌 단검에 코볼트의 숨이 끊어졌다.
동시에 상현이 짧게 풀 차징의 기운을 모은 다음, 근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놈들을 노렸다.
쇄애애액!
신속한 몸의 이동과 함께 묵직하게 공간을 가르는 대검의 강인한 힘이 질긴 살점을 찢었다.
그래도 제법 두툼한 몸집과 근육을 가진 코볼트 궁수였지만, 상현의 대검 앞에서는 모두의 운명이 평등했다.
쿠잇! 우쿠잇! 쿠잇!
볏짚처럼 쓸려 나가는 동족을 보며 다급하게 화살을 장전하던 코볼트 궁수.
앞서 동족들이 줄줄이 죽어 나갈 동안 그래도 가장 많은 시간이 주어졌던 녀석이었지만....
"좀 빨랐지?"
활시위에 이제 겨우 화살을 매겼을 때 상현은 이미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푸확!
미래는 없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배 위까지 대검에 그대로 반으로 쪼개진 코볼트 궁수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음?"
상현이 유독 이 녀석만 다른 신발의 모습에 눈빛을 반짝였다.
몬스터라도 이런 균열에 갇히기 전에는 어디선가 살아가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거기서 인간이나 혹은 어느 누군가에게서 얻은 특별한 물품을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전부 지구와 연결되는 순간 아티팩트가 된다. 아마도 시스템의 영향일 터.
상현이 죽은 코볼트 궁수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냈다. 모양이 좀 빠지긴 하나,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쾌속 이동의 장화」
■ 아티팩트 등급 : 플래티넘
■ 아티팩트 소개 : 빠르게 달리고 싶었던 어쌔신의 투지가 담긴 장화입니다.
대지 정령의 축복이 담겨 있어, 포장되지 않은 흙으로 된 지면 위에서는 이동력이 3배 향상됩니다.
평상시에는 기존 이동 속도보다 2배 향상된 기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데?"
검사에게는 기동력도 중요하다.
단단함과 강인함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플레이어도 있지만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영리한 몬스터 마법사만 만나도 정말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것이 움직임이 굼뜬 검사다.
상현은 이미 예전 삶에서 시행착오를 확실하게 겪었기에 너무나도 잘 아는 진리였다.
"횡재했다. 보통 잔챙이 몬스터들은 가진 게 없는데."
상현이 복권 당첨된 것 같은 기쁨으로 기분 좋게 균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동선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코볼트들은 열린 출구를 따라, 균열 밖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이 녀석들은 현장에 속속 도착할 협회 직원들과 소집된 플레이어들이 담당할 터.
상현은 이제 간부급 이상 코볼트가 아니면, 철저히 패싱Passing할 생각이었다.
괜스레 시간을 질질 끌었다가는 후발대에 따로 잡혀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코볼트 녀석이 무좀은 없었겠지?"
상현이 신고 있던 오래된 컨버스화를 벗어던지고, 바로 쾌속 이동의 장화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코볼트 킹.
한 놈만을 노리고 미친 듯이 달리는 상현의 질주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 * *
1시간 후.
"아니, 메인 루트 따라 줄줄이 시체만 쌓여 있는 거 뭐야?"
"정아. 신상현 플레이어의 레벨 정보. 예측 추정치 이거 맞아? 극단적인 최대치도 40 안팎인 거?"
"더 플레이어 지와 인터뷰한 부분도 있고. 플레이어 각성한 시점 생각하면 저게 최대야."
나름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치를 추산하는 플레이어 협회의 계산도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현재 상현의 레벨은 균열 개입 직후에 오른 것까지 포함해서 52였다.
이현은 극단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상현의 존재는 극단을 뛰어넘는 특이한 것이기에 이런 일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 외곽 수습을 뒤이어 도착한 협회에 맡긴 이정과 이현은 균열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앞서 마주친 코볼트 무리의 수준을 봤을 때 이곳은 진입할 플레이어 레벨이 50은 돼야 했다.
코볼트가 최하급 몬스터 수준이 아니라, 데몬 오크 정도의 전투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런데 그 레벨에 미치지 못하는 상현이 죄다 격파하며 나가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
"너무 빠르잖아, 이건."
"아니, 우리도 딱 필요한 녀석들만 자르면서 뒤를 쫓고 있는데 꽁무니를 못 볼 정도라니."
이현이 혀를 찼다.
보이는 것은 그저 상현이 남기고 간 발자국과 코볼트가 죽으면서 남긴 핏자국과 시체가 전부.
심지어 지평선 끝자락으로도 상현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대검을 들고 있는 플레이어였는데, 이 정도로 고속 기동을 해도 지치지 않는 듯했다.
"너무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
"이미 균열을 예측하고 있었던 플레이어야. 그러면 당연히 전리품에도 욕심이 나겠지."
"하지만 코볼트 족의 왕이면... 볼 필요도 없이 코볼트 킹일 것이고. 레벨 150 판정을 받는 코볼트 킹이 일대일이 될까?"
"모르겠다. 난 속단하지 않을까 해. 일단 계속 추적하자. 영웅의 희생은 막아야지."
"내가 선두에 설게, 형!"
각각 레벨 90, 110인 동생 이정과 형 이현이 상현의 뒤를 쫓았다.
상현이 사실상 균열 초기 대응부터 시작해서 신고까지 밥숟가락을 다 차려 준 마당이 아니던가?
여기서 만약에 상현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듯했다.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균열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인명피해는 늘 있어 왔다.
그 '악순환'이 끊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끝을 보기 위해 질주하고 있는 상현만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 * *
"실버 등급 단검 두 자루를 포함해서 총 다섯의 실버 등급 아티팩트. 여기에 골드 등급 아티팩트 4개까지. 도합 10억인가?"
부지런히 이정, 이현 형제가 상현의 뒤를 쫓아가는 동안, 상현은 앞선 전투의 결과를 보고 있었다.
평가액 6억 원어치의 아티팩트.
코볼트 킹은 아직 상대도 하지 않았고, 장화 가치도 제외한 상태의 수익이 무려 10억 원이었다.
단지 균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먼저 대처한 것만으로, 이만큼 밑천을 크게 잡은 것이다.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어지간한 잔챙이들은 전부 무시하고, 앞을 가로막는 놈은 바로 머리를 날려가며 온 자리.
이 균열 안에서 그동안 제왕이었을 코볼트 킹이 오연히 상현이 있는 위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성향에 따라서 코볼트 킹이라고 해도 무장하는 무기가 다른데, 이 녀석은 들고 있는 무기가 활이다.
날쌔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몬스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상현의 입장에선 껄끄러운 상대였다.
'리커버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30초지만, 기억이 맞다면 이 녀석의 위압 포효가 더 짧을 거야.'
만병통치약처럼 쓸 수 있는 리커버리보다 코볼트 킹의 위압 스킬이 더 쿨이 빨리 돈다.
그래서 별도의 대응법이 필요했고, 방법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다만 문제는 스스로에게 유리한 고점을 미리 잡아 둔 코볼트 킹의 눈빛이 꽤 매섭다는 점이었다.
전략적 우위를 처음부터 확실히 가져가는 안배는 높은 지성을 가진 몬스터라 가능한 대응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날쌘 움직임이 필요해졌네. 방심했다간 나라고 이마 한가운데에 화살이 꽂히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테니.'
상현이 아직은 다행히도 아무런 느낌 없는 이마를 살살 어루만지며 코볼트 킹을 노려보았다.
녀석을 잡아야 한 단계 더 완벽한 검사로 거듭날 수 있는 지름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려고 온 던전이기에 긴장은 될지언정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28화 신속 개입 - (3)
"30년을 질리도록 검만 잡고 있던 또라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마!"
안정적으로 대검을 든 상태에서 방어 자세를 취한 상현이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언제든 순간적으로 코볼트 킹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무게 중심의 이동이었다.
와투우우!
코볼트 킹이 포효했다.
보통 보스 몬스터가 지르는 포효는 100%라고 해도 될 만큼, 상태 이상을 유발한다. 하나의 시그니처라고 봐도 될 정도.
◎ 위압
◎ 전의를 빠르게 상실하며, 무의식 속의 공포 기전이 급격히 활성화됩니다.
역시 위압이 걸렸다.
상현이 곧바로 리커버리로 풀긴 했지만, 그 잠깐 사이에 부정적인 생각이 쉴 새 없이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도 공포 영화에서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듯이 위압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적으로 난 두렵지 않다라고 외쳐도, 몸이 떨리거나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다.
피핑! 핑! 핑!
'씨... 빠른데?'
리커버리로 위압을 푸는 순간에 이미 코볼트 킹이 연속으로 날린 화살 세 개가 상현을 덮쳤다.
위압 상태에 빠질 것으로 판단을 하고 곧바로 날린 화살 세 대인 듯했다.
까강! 깡! 깡!
대검을 사선으로 비틀며 엇박자로 날아든 화살을 가볍게 막았다.
방어 자체는 깔끔했지만, 생각보다 아슬아슬했던 상황.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화살이군."
바닥에 떨어진 화살촉 끝에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검은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신경독(神經毒).
한 번의 피격은 얼얼한 느낌에서 끝나지만, 두 번 노출되면 바로 사지가 마비되는 독이었다.
타타탓! 탓! 탓!
몸이 풀린 상현이 코볼트 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립 : 코볼트 킹.]
진검승부 칭호의 효과인 고립은 일찌감치 발동되어 있었다. 신체 능력은 이미 향상된 상태다.
[데몬 헌터]
■ 칭호 등급 : E급
■ 칭호 소개 : 중간 보스 몬스터급 이상의 적을 상대할 경우에 조건부로 체력 회복력이 5배 증가 합니다.
이에 데몬 헌터 칭호의 효과도 늘 그랬듯이 상시 발동 중이었다.
첫 번째의 화살까지는 신경독의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받아낼 만한 피해라는 계산이 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가짐을 가진 검사는 까짓거 맞아도 돼, 라는 마인드의 검사지.'
코볼트 킹에게 달려가는 상현이 생각이 딱 그랬다. 한 대까지는 시원하게 맞아줄 수 있다는 생각!
끼리릭!
'확실히 침착하군.'
움찔할 법도 하련만 코볼트 킹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상태에서 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여전히 고점을 차지했다는 유리한 부분은 변함이 없기에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프스스!
상현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면서 몸을 확 숙인 뒤, 질주하던 추진력을 이용해 낙엽 위를 쭉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오르막길이라 긴 거리를 미끄러질 수는 없었지만,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풀 차징』
미끄러지는 동안, 따로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는 점을 이용해 상현이 풀 차징을 준비했다.
창의적인 연계였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상현의 머리 위를 코볼트 킹의 화살이 지나갔고, 그동안에 힘의 응축이 끝났다.
퍼엉!
상현의 발에서 굉음이 일며, 순식간에 위치가 코볼트 킹의 앞까지 이동했다. 차징의 힘이었다.
쇄애액!
와쿠아아!
노림수가 먹혔다.
풀 차징 공격이 다급히 회피하던 코볼트 킹의 왼쪽 대퇴부를 베면서 지나갔다.
녀석도 나름 기민하게 반응했지만, 그만큼 상현의 공격이 빨랐기에 일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상현의 접근과 공격을 허용해버린 코볼트 킹의 평정심이 무너졌다.
상현은 화살통에서 제대로 화살을 꺼내지 못한 코볼트 킹이 어리바리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후, 작정하고 내지른 풀 차징 공격만 무려 다섯 차례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와중에 상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코볼트 킹의 회피도 빨랐고, 완벽한 정타는 없었다.
다만 앞서의 것까지 총 여섯 차례 풀 차징 스킬 공격이 들어갔음에도 빙결은 한 번도 안 걸렸다.
'이 코볼트 킹 자식, 화염 속성이 내재된 녀석인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불과 물은 서로 잡고 잡아먹히는 상극의 관계. 속성이 가진 고유의 힘으로 빙결의 힘을 버티고 있을 공산이 컸다.
'확실히 상태 이상 옵션 두세 개로도 부족해. 아예 종류별로 갖고 있어야 다양한 응용이 되니까.'
다른 상태 이상 옵션에 대한 갈증이 커져 가는 상현이었다.
쉬이익!
한편 그 와중에 변칙으로 몸을 비튼 코볼트 킹이 화살을 날렸다.
상현의 쉴 새 없는 공격에 육신이 너덜너덜해진 와중에도 이성을 붙잡고 날린 일격이었다.
『새크리파이스』
때마침 떨어져 가던 체력을 새크리파이스를 이용해 복부로 막아내며 회복했다.
와쿠...?
코볼트 킹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름 기습적인 노림수를 담아서 날린 공격이 상현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해서다.
오히려 지쳐가던 상현의 얼굴에 혈색이 돌더니, 더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사이키델릭』
"넌 시간을 주면 안 되겠다!"
상현이 사이키델릭 스킬과 함께 각성 상태에 접어들며, 붉게 빛나는 눈으로 코볼트 킹을 응시했다.
코볼트 킹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지형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며, 현실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두 개가 있었다.
코볼트 킹의 육체, 그리고 녀석을 어떻게든 밀어붙여야 할 후방의 비탈길이었다.
지금은 코볼트 킹이 상현의 행동 패턴을 읽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상현은 알았다. 이런 지성을 가진 몬스터들은 생각보다도 빨리 상대의 습관을 읽는다는 걸.
거리를 확 좁히는 기술, 그러니까 대쉬 기술이 상현에게 풀 차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풀 차징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거리를 벌리면서 집요하게 화살 견제만 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상현이라고 해도 순간이동 능력이 없는 이상,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쭉. 계속 밀어내자. 녀석이 뒤를 돌아볼 틈조차 생기지 않게 계속 밀어붙여야 해.'
상현이 대검을 좀 더 꽉 움켜쥐었다. 1초의 반, 아니 그 반의반이라도 여유를 주면 안 된다.
코볼트 킹이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에 유리한 전세는 손바닥처럼 뒤집힐 테니까.
* * *
그로부터 5분 후.
"형, 방금 봤어?"
"위압 포효를 풀어낸 거?"
"아니! 그건 15초 전의 얘기고. 방금 위압 포효가 한 번 더 나왔는데 움직임에 변화가 없잖아?"
가까스로 상현의 뒤를 추적하는 데 성공한 이현과 이정이 상현과 코볼트 킹의 전투를 보고 있었다.
눈썰미 좋은 동생 이정은 벌써 상현의 대응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상태 이상을 즉각 해제하는 리커버리는 이미 앞서 몇 번을 봐서 감탄할 것도 없었다.
이정이 놀란 부분은 리커버리가 없을 때 상현이 위압 포효에 대응한 방식이었다.
마치 시간을 잰 것처럼 포효가 나올 때, 칼같이 고개와 몸을 돌려 피했던 것이다.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위압 효과를 대폭 반감시키는 고난도 대응이었다.
제법 실전 투입이 많은 이정도 여전히 타이밍을 전혀 맞추지 못하는 노하우인 것이다.
미리 뒤쪽을 돌아본다거나, 눈을 감은 채 앞을 보는 형태의 꼼수는 당연히 안 통했다.
오히려 그럴 경우는 '공포' 추가 페널티가 적용되어 위압의 효과가 더 길게 걸렸다.
"코볼트 킹이 밀리는데?"
"위압이 예상한 것보다 덜 걸리니까 계속 계산이 어긋나는 거지. 그리고 30초 간격으로는 아예 풀어버리고."
"그러니까 말이야. 형, 우리 협회 부평역 라인에서 저런 검사 본 적 있어?"
"있으면 내가 놀라고 있겠냐?"
"중간에 틈틈이 경직 유발도 시도하면서, 일단 걸리기만 하면 바로 넉백 기술도 연계하네."
"저거 뒤에 뭐가 있나 본데. 진짜 뒤를 볼 시간도 안 주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거 보면."
"비탈길이 있어. 그것도 생각보다 가파르게 보여."
"어어?"
바로 그때.
발악하듯 반격하던 코볼트 킹의 무게 중심이 무너지는 것을 본 이현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한 번에 무려 다섯 대에 달하는 화살을 코앞에서 날린 코볼트 킹의 노림수가 완전히 빗나가면서부터 시작된 참사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상현이 기민하게 대응했다.
인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움직임은 절대 평범한 몸으로 가능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가위바위보 싸움에서 졌어. 레벨이 높아도 세 배는 가까이 높을 코볼트 킹이 말도 안 되게...."
이현이 혀를 내둘렀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상현은 넉백 버스트를 이용해 코볼트 킹을 밀쳐내고 있었다.
두 다리로 균형을 전혀 못 잡는 코볼트 킹은 기본적인 방어 자세마저 제대로 잡지 못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상현의 넉백에 당하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를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바로 활.
무기를 잃은 코볼트 킹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주먹으로 대책 없이 앞만 막는 일뿐.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데몬 배쉬의 경직.
넉백 버스트의 넉백.
두 가지 상태 이상이 마치 지그재그 놀이를 하듯이 서로 간격을 맞춰 코볼트 킹을 강타했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몸이 굳었다가, 그 상태로 뒤로 쭉 밀려났다가, 다시 몸이 굳었다가, 또 밀려나는 지옥의 반복.
점점 휑해져만 가는 뒤통수 어딘가의 기분을 느끼면서도 코볼트 킹은 눈조차 돌릴 수 없었다.
"끝내자! 지겹다! 하아아압!"
상현이 전력을 다해 기합을 내지르며, 마나를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끌어 모아 넉백 버스트로 코볼트 킹을 후려쳤다.
퍼엉!
풍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바로 앞에 있던 상현뿐만 아니라 떡 벌어진 입으로 상현을 지켜보던 두 형제도 또렷하게 들었다.
우칵! 와칵! 우카칵!
속절없이 날아간 코볼트 킹의 몸뚱이가 볼썽사납게 비탈길을 휩쓸며 초라하게 바닥을 굴렀다.
제동을 걸 수 있는 장비도, 그럴 만한 체력도 없었다.
상현의 거침없는 맹공격을 이를 악물고 피해내야 했던 코볼트 킹은 이미 탈진 상태였다.
투둥! 퉁! 퉁!
그리고 고무공처럼 한참을 비탈길 아래로 굴러가던 코볼트 킹이.
와쿠우우!
뭔가를 보고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가 상현에게 들릴 즈음에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퍼억!
무더운 여름날에 쪼갠 수박처럼 바위에 정면으로 충돌해버린 코볼트 킹의 머리가 '터졌다'.
혹시라는 가정을 붙일 필요조차 없는 완벽한 즉사였다. 머리에 남아난 부위가 없었다.
"오!"
순식간에 폭등한 레벨에 상현이 탄성을 터뜨렸다. 플레이어 레벨이 57까지 훌쩍 올라간 것이다.
물론 보상은 이제 시작이었다.
[C급 칭호, [술이 식기 전에]가 주어집니다.]
[술이 식기 전에]
■ 칭호 등급 : C급
■ 칭호 소개 : 미염의 소유자가 공들여 만든 칭호로 자신의 옛 기억을 되새겨 만든 칭호입니다.
균열에 진입하고, 120분 이내로 보스 몬스터를 잡은 경우만 칭호 획득 자격이 주어집니다.
던전에 진입한 후, 2시간 동안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플레이어가 위압에 걸리지 않는 위압 면역 상태가 됩니다.
"팀 버프잖아?"
얻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귀한 스킬이 바로 힐 스킬과 버퍼 스킬이 아니던가?
그런데 상현에게 요긴하게 팀을 위해 사용할 버프 스킬이 생겼다.
예전의 삶처럼 검술만 우직하게 쓰는 검사 나부랭이가 아닌, 전천후 검사로의 확장성이 추가되면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29화 검귀 도경수 - (1)
[미염의 소유자가 자신이 소싯적에는 정말 술이 식기 전에 적의 수급을 베어 왔노라 자랑합니다.]
"암요. 잘 알고 있죠. 저도 그런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염의 소유자가 당신에게 깊은 흥미를 느끼지만, 당신의 원대한 포부를 알기에 계약을 제안하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시는 신좌에게 당신을 알릴 가치가 있는지 냉정하게 살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야 환영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파악해 주십쇼. 현미경 검증, 좋아합니다."
추가된 칭호를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버프는 이유 불문하고 많은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형태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 외로 플러스 알파의 요소를 만들어주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손해를 볼 일이 전혀 없는 형태라는 강점이 있다.
즉각적인 상태 이상보다 지속적인 감정 변화를 유도하는 위압 효과는 생각보다 던전에 많다.
중간 보스 몬스터 혹은 일반 몬스터의 대장격 되는 녀석들도 위압 포효를 종종 달고 나온다.
그러니 [술이 식기 전에] 칭호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팀에 큰 도움이 될 계산이 섰다.
"일단 좀 벗길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멘트.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한다.
죽으면 자연스럽게 육신의 위로 드롭된 아티팩트가 솟아오르는 형태의 시스템 몬스터와 다르게.
이 녀석처럼 균열에서 잡은 '진짜' 몬스터는 직접 아티팩트를 회수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입거나 낀 것을 벗겨야 하는 셈이다. 그것이 설령 속옷이면, 그 역시 당연히 벗겨야 한다.
"음. 직원이 붙었네."
상현이 흘깃 저 멀리서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봤다.
아까 균열 입구에서 한 번 시선을 마주치고, 뒤를 맡겼던 직원들. 그들이 여기로 오고 있었다.
아마 뒤를 칠 생각은 아니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온 듯했다. 물론 상황은 이미 끝났다.
상현이 코볼트 킹의 품에서 꺼낸 아티팩트를 살폈다.
「절망의 부적」
■ 아티팩트 등급 : 골드
■ 아티팩트 소개 : 아카투스 코볼트 족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는 그들의 한이 서려 있습니다.
전력으로 내지르는 함성에 노출된 적은 그들의 한에 잠식되어 빠르게 전의를 잃어갑니다.
■ 특수 효과 – 위압
직사각형의 작은 돌처럼 만들어진 절망의 부적이었다.
어차피 위압은 단 한 번에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수단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상대의 정신을 갉아먹는 형태고 별도의 시간 간격도 필요 없다.
경직은 한 번 걸렸다가 풀린 이후 15초 동안은 완전 면역이 되지만, 위압은 그런 것이 없다. 한 번에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대신, 지속 누적이 가능했다.
"데몬 배쉬에 결합하자."
상현이 바로 절망의 부적을 먹는 작업에 들어갔다. 결합할 스킬은 바로 데몬 배쉬.
곧바로 마나 동기화가 끝난 절망의 부적이 탁자 위에 잘 올려진 양송이 수프로 나타났다.
갓 구운 빵과 함께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는 수프!
상현이 기분 좋게 양송이 수프를 먹었다. 코볼트 킹의 아티팩트라서 악취가 잔뜩 나는 벌레 만찬을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데몬 배쉬』
■ 스킬 레벨 : 2단계(41.6%)
■ 스킬 소개 : 몬스터 또는 공격에 노출된 플레이어에게 2.2초의 경직 상태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17.2%의 위압 수치를 증가시킵니다. 위압 수치가 100%가 달성될 경우, 10초간 절망 상태에 빠집니다.
'좋아. 마음에 들어!'
상현이 쾌재를 불렀다.
스킬에 붙은 소개 내용은 길어질수록 좋다. 그만큼 상대에게 다양한 마이너스의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스킬 소개를 살피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한 번 공격에 적에게 가할 수 있는 위압 수치가 높았다.
데몬 배쉬 경직이 걸리지 않더라도, 공격 자체만 유효하게 여섯 번 들어가면 된다는 얘기다.
절망 상태에 빠지면, 모든 능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하고 스킬 발현 과정도 더뎌진다.
상대방 입장에선 때리기 딱 좋은 샌드백이 되는 셈이다.
이어서 상현이 눈에 띈 코볼트 킹의 목걸이도 바로 벗겨냈다.
「탐색의 목걸이」
■ 아티팩트 등급 : 골드
■ 아티팩트 소개 : 적성 세력의 정체를 최대한 빨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코볼트 킹은 살기를 감지할 수 있는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목걸이는 반경 100m 안에 위치한 적의 존재를 붉은 광원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줍니다.
"탐지 장치네."
상현이 바로 목걸이를 꼈다.
일단 이 녀석을 대체할 목걸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굳이 먹을 필요가 없을 듯했다.
파팟. 팟.
마침 100m 남짓한 거리로 막 접어든 이정, 이현 형제의 모습이 붉은 광원으로 나타났다.
상현이 완전히 신뢰하는 존재는 아니기에 목걸이는 그들에게 느껴진 기운을 살기로 탐지한 모양.
대놓고 봐도 상관은 없지만, 쪼그려 앉아 아티팩트를 먹고 하는 광경이 썩 멋있지는 않을 테기에.
상현이 이제 마지막 남은 아티팩트를 움켜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볼트 킹의 신발이었다.
「회피의 장화」
■ 아티팩트 등급 : 골드
■ 아티팩트 소개 : 신속한 회피에 특화된 장화입니다. 앞보다는 뒤로 가는 것이 익숙합니다.
■ 특수 스킬 – 백 스텝
'이거, 좋은데?'
코볼트 킹과 싸우는 내내, 통통 튀듯이 뒤로 쭉 몸을 날리는 녀석 때문에 고전했던 상현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장화에 스킬이 있었다. 아티팩트에 내장된 스킬인 셈이다.
이 장화는 얼른 먹어 치우고, 새크리파이스처럼 몸에 체화된 스킬로 갖고 있으면 될 듯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룬 마나 동기화! 상현이 탁자 위에 형상화된 음식을 마주했다.
코볼트 킹이 즐겨 먹던 별미.
음습한 곳의 푹 썩은 나무에서만 자랄 주황 나방의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다.
굵기는 엄지만 하고 길이도 엄지는 족히 넘길 법한 장성한(?) 녀석들이었다.
"...망할."
[행운의 여신이 세상 모든 일에서 행복할 수는 없다며, 당신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보냅니다.]
행운의 여신이 매사 자신을 돌봐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후, 자체적인 깊은 절망 상태에 빠진 상현은 어둠이 짙게 드리운 표정으로 식사에 들어갔다.
콧물을 잔뜩 뭉쳐 질긴 고무호스 안에 채워 넣은 다음 그것을 질겅질겅 씹어 먹는 느낌이랄까.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끔찍한 애벌레의 맛에 상현은 한동안 혀의 모든 감각을 잃었다.
* * *
"정말 대단하시네요. 내심 뒤를 추적하면서도 신상현 씨가 사망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습니다만...."
"이번 균열의 코볼트 킹은 추정 레벨이 150쯤 됩니다. 레벨 차이가 큰데, 두려움은 없으셨던 겁니까?"
"그게... 우욱. 잠시만요."
다가온 이정, 이현 형제를 만난 상현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다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이해합니다. 과도한 체력 방전 상태가 되면, 저도 구역질이 밀려 올라오더군요."
"그만큼 고생하셨다는 거지."
상현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둘이 저마다 그럴듯하게 넘겨짚으며 상현을 이해해(?)줬다.
물론 체력 고갈의 문제도 없지는 않았다.
전투 막바지에 사이키델릭 스킬까지 써 가면서 코볼트 킹과 싸웠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대미지도 누적됐기에 그 후폭풍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이 과하게 늘어진 구석도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배 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기억조차 지워버린 상현이 숨을 골랐다.
"후. 이제 괜찮습니다."
"정말 의인이십니다! 대균열과 함께 시작된 플레이어의 시대가 2년 전의 일입니다. 그 후, 2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균열 중 이번 균열이 유일하게 피해가 없습니다!"
"사전에 미리 제보를 해 주신 정황이 있는데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사유는 균열이 아니라 아티팩트 건이었습니다만. 미리 균열 앞에서 대기를 하셨잖아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수도권에는 역 부근마다 CCTV가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어, 협회 직원인 그들이 자신을 못 봤을 리 없었다.
상현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대답을 바로 꺼냈다.
"이 근처를 지나가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느낌만으로 신고할 수는 없으니, 그럴듯한 이유를 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허위 신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대로 처벌받으려고 했습니다. 모험이라면 표현이 맞을까요?"
"확실하게 협회 직원을 보낼 수 있게 만들 방법을 생각하신 거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조 현상도 없는 균열이 일어난다고 말해봤자 믿을 리 없을 테니,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
이미 상현이 인명 피해를 막아낸 다음, 균열 내부까지 토벌한 것을 확인한 마당이다.
상현에 대한 이정과 이현의 신뢰는 100%, 그 이상이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터.
"정말 대단하십니다! 심지어 방금의 전투도 너무 깔끔하고 멋졌습니다. 경직, 넉백... 거기에 각성 스킬과 회피 기동까지."
"완벽하더군요."
두 사람이 상현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어 보였다.
자신들보다 낮은 레벨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상현이 보여준 전투의 격이 높았다.
아마 레벨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최소한 레벨 250대의 플레이어로 봤을 것이다.
그만큼 깔끔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억지로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그럴 부분이 없을 만큼.
"제가 지나오면서 잡은 모든 몬스터들의 시체는 기증하겠습니다. 코볼트 킹도 마찬가지로요."
상현이 선심을 쓰는 체했다.
사실 금전적 가치가 없는 이유가 컸지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아니던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현 님 덕분에 인명 피해가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감사해할 겁니다."
"사후 협회 차원에서 감사패 전달과 또, 상부의 연락이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저 플레이어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상현이 웃으며 답했다.
플레이어 협회의 호감을 얻어두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이를테면 협회 소유의 던전이나 게이트 공략 권한 발급에 있어 플러스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일은 상현이 원치 않더라도 소위 '윗선'이라 부르는 자들의 귀에 들어갈 터.
그것까지 다 염두에 둔 말을 한 셈이다.
"이제 나가실까요?"
상현이 화제를 돌렸다.
챙길 건 꼼꼼하게 다 챙겼다.
처음부터 기대하고 고대했던 위압 효과를 챙긴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점이었다.
얼마 후.
이정, 이현과 함께 균열 밖으로 나온 상현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신상현 플레이어님! 특종이 나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또 활약을 하셨다고요?"
기자 박정민.
일전에 진행한 상현과의 인터뷰를 특종으로 실어서 상현을 스타덤에 올려준 장본인이었다.
따로 그에게 연락한 적이 없음에도 현장에 나타난 것을 보면 협회에도 커넥션이 제법 있는 모양.
상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자, 박정민이 뒤에 같이 있던 관계자들과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맨과 더불어 어느덧 밤이 된 현장을 환하게 밝힐 조명과 다른 소도구까지.
'설마...?'
"바로 생방 인터뷰 한 번 하실까요? 플튜브의 저희 더 플레이어 채널에서 속보로 나갑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30화 검귀 도경수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