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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적응 - (1)

"하여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상현이 아침부터 툴툴대며 어제 던전에서 얻은 오색영롱한 스킬북을 앞뒤로 훑어보고 있었다.

[대기만성형 모범생이 빨리 스킬북의 정체를 연구해보자며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합니다.]

"아니, 이 성좌는 매번 뭐만 나오면 흥미진진하대? 그렇게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능력에 대한 깨우침은 왜 이리 늦게 준 겁니까?"

[대기만성형 모범생이 그건 자신도 모르는 정답이었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건 됐고. 아티팩트는 가능해도 내가 스킬북까지 먹는 건 무리인 것 같은데. 이게 되려나?"

상현이 뒷머리를 긁었다.

스킬북을 먹는 것.

아직 도전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자 꼭 해내고 싶은 영역이기도 했다.

뭔가를 먹어서 그 안에 담긴 스탯과 스킬, 히든 옵션을 계승하는 것은 상현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말이 특기지 능력을 각성한 지 무려 25년이 지나서 깨우친 늦깎이 배움이기도 했다.

어쨌든 항상 아티팩트를 먹었을 때처럼 스킬북에 손을 얹었고, 여기에 마나를 동기화시켰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는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먹을 때와는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유독 예민했던 오늘.

나이 쉰이 넘어서야 자신의 주 능력을 뒤늦게 깨우쳤다는 상실감이 항상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였다.

그래서일까?

문득 화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차라리 회귀라도 했으면, 적어도 25년을 삽질만 하면서 살진 않았을 거 아냐. 왜! 나는 다른 놈들과 다르게 시작이 이렇게 한참을 늦었던 건데? 어?"

화를 참지 못해 내뱉은 말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먹는' 능력의 빛을 너무나도 늦게 본 상현의 박탈감은 오랜 시간 쌓인 해묵은 감정이었다.

그때.

프스스스!

갑자기 상현을 둘러싼 주변 모든 것들이 오븐 위 치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상현의 머리를 강타하면서, 상현의 의식이 빠르게 희미해져 갔다.

[대기만성형 모범생이 당신에게 그동안 연구했던 정수를 활용한 회귀를....]

자신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성좌의 말 끝자락을 살필 틈도 없이 가라앉아버린 정신.

상현은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제야 좀 선명해지네."

꼬박 사흘.

상현이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의 회귀를 수긍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예고조차 없었던 회귀.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뜬금없이 30년 전으로 돌아왔다.

55살의 몸은 사라지고, 2021년의 젊었던 25살의 시간으로 다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만족스러웠던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려 보낼 줄은 몰랐다고. 이게 가능은 한 거야?"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러니까 전생의 자신은 썩 대단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검술 외길 인생 30년이라서 검 하나는 수월하게 다룰 줄 알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검사 계열의 플레이어로 국내에서 Top 50의 위치 정도에 랭크되어 있던 것이 커리어의 최고.

국내에서 이 정도였으니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더 서열이 낮았다. 

검성이나 검신, 혹은 검귀나 검의 조율자와 같은 수식어로 이름을 날리던 플레이어도 태반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사실 검술도 정석대로 배운 것은 아니어서 무척 투박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쓸 만한 검술 스킬이 제대로 정립된 것도 플레이어가 된 지 무려 20년이 훨씬 지나서의 일!

그야말로 개고생의 연속이었다.

물론 잠재력이 없진 않았다.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2021년부터 갖고 있었던 특별한 능력이었다.

지금도 전생에 그랬었던 것처럼 똑같은 알림이 상현에게 플레이어의 특성을 어필하는 중이었다.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아티팩트를 먹는 것이 가능합니다.]

"먹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 그렇게 긴 시간을 삽질할 줄 알았나?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상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과거의 자신은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일찍 깨우치지 못했다.

처음 5년은 먹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보냈다.

아티팩트를 잘게 잘라서 먹어보거나, 물에 끓여 국물을 마셔보는 도전은 빙산의 일각.

가루로 만들어 음식에 뿌려 먹어보기도 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뻘짓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사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도 없어, 조언을 구할 루트도 전혀 없었다.

5년이면 알겠지.

10년이면 알아내겠지.

설마 15년째도 모르겠어?

이런 희망 고문 속에 수만 가지의 개고생을 하며 흘러간 시간이 무려 25년!

그렇게 젊었던 스물다섯의 몸이 쉰 살의 장년이 되어서 흰 머리가 무럭무럭 자라날 즈음. 

비로소 방법을 깨달았다.

마나 동기화.

그것도 아티팩트 등급마다 전혀 다른 값으로 교감을 해야, 무의식 세계에 형상화된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이제는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상현이 예고 없이 회귀했음에도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였다.

다만 어떤 이유로 과거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지는 짐작이 잘 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으로 미루어볼 때는 자신의 성좌였던 대기만성형 모범생의 안배일 수도 있었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읽은 것은 아니기에.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돌아왔고, 그럼 끝이지."

어쨌든 남들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하다는 점. 상현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식에 관심이나 좀 가질걸! 이쪽 지식은 전무하다시피 하네."

회귀한 자신에게 유일한 아쉬운 점이었다. 물론 돈을 버는 방법이 주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 * *

10분 후.

상현은 오늘로 예정된 던전 공략에 참여하기 위해, 팀이 모이는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작금의 플레이어는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된 세계에 끊임없이, 쉴 새 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바로 플레이어의 성장 밑거름이자 온갖 부산물과 아티팩트의 획득처인 [던전].

그리고 다른 차원 또는 미확인 지역과 연결되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개척과 탐험 정신을 자극하는 [게이트]였다.

몬스터를 처치하고 내부를 토벌하는 플레이어와 죽인 몬스터로부터 부산물을 챙기는 짐꾼.

그들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였지만 관계가 수평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연히 짐꾼이 소위, 아랫것 취급을 당했다. 이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오래된 일이었다.

그래서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비(非) 플레이어 짐꾼으로 참여했던 상현이 플레이어로 참여하겠다고 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애초에 플레이어들은 얼마 전까지 상현을 짐꾼이라며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사람들이었고.

짐꾼들 역시 경력이 길지 않은 상현에게 텃세를 부리며, 온갖 힘든 일만 몰아주곤 했다.

무시와 경멸.

이것이 상현을 바라보는 플레이어와 짐꾼들의 공통된 시선이었다. 쓸데없이 죽이 잘 맞았다.

각성을 해서 플레이어가 됐다고 한들 처음부터 잘 싸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대다수 플레이어는 잘 짜인 초기 교육 과정을 수료한 다음,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곤 했다.

그런 교육 과정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플레이어 아카데미.

이곳에서 보통 10레벨까지 교관들의 지도 아래, 안전하게 성장하며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하지만 상현이 과정을 생략하고 플레이어로 팀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반응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먹어두자.'

상현이 품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예전에 던전에서 우연히 얻은 아티팩트였다. 오래된 백골의 손아귀에서 꺼냈던 기억이 난다.

전생에는 이 단검을 먹는 방법을 알지 못해, 꽤 오랜 시간을 단순한 호신용 병기로만 썼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겨우 마나 동기화를 알아내서 처음으로 단검을 먹었을 때! 

상현은 생각지도 않았었던 히든 스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데몬 배쉬였다.

몬스터로 하여금 경직이라는 상태 이상을 유발하게 하는 스킬로 상현의 밥줄 스킬이 됐다.

보통 해당 아티팩트를 플레이어가 오랜 기간 사용했을 때 자연스럽게 봉인이 해제되는데.

그때 등장하는 것이 히든 스탯, 또는 히든 스킬이었다. 

그 기간이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에도 이르기 때문에 히든 스탯, 스킬의 존재를 보통 몰랐다.

하지만 상현의 흡수 능력은 이런 숨겨진 요소를 임의의 확률로 계승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꾸욱.

상현이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아이템 창에 곧바로 정보가 출력됐다. 딜레이 없는 빠른 연계였다.

「베나모스의 단검」

■ 아티팩트 등급 : 브론즈

■ 아티팩트 소개 : 호신용 단검으로 쉽게 무뎌지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 민첩 +10

"음."

상현이 좀 더 단검에 정신을 집중하며 마나 동기화를 진행하자, 아이템 정보 외의 추가 내용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흡수율을 측정합니다.]

[브론즈 등급의 기본 스탯 흡수율은 10%입니다.] 

[아티팩트 사용 기간이 소급 적용되어, 최종 판정 흡수율은 20%입니다.]

"예상했던 대로네."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수율이란, 아티팩트를 먹었을 때 계승될 스탯의 비율을 뜻한다.

민첩 스탯을 10 올려주는 아티팩트이므로 흡수를 끝내고 난다면 민첩 스탯 2가 오른다는 뜻이다.

누군가 이리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럴 거면 아티팩트를 들고 다니는 게 낫지 않냐고 말이다. 

하지만 중복 부위의 아티팩트는 공존할 수 없다. 또한 대검을 쓸 때는 단검의 혜택을 볼 수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먹어두는 것이 이득인 것이다.

특히 상현이 확정적으로 노리고 있는 데몬 배쉬 같은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강점도 있었다.

이는 아티팩트를 먹지 않는다면 절대 지금 얻을 수 없는, 스탯 몇 포인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특전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대검 위주로 쓸 거니까. 단검 쓸 일은 없다고 봐야지."

망설일 것 없이 상현이 바로 베나모스의 단검을 먹어치울 준비를 끝냈다.

마나 동기화 값에 맞춰 아티팩트와 교감을 이루자,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어느 새인가 상현은 황금빛의 근사한 원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앞에는 잘 차려진 닭고기 요리가 놓여 있었다.

단검의 형상화가 닭고기로 이뤄진 것이다. 

형상화에는 변수가 많아서 벌레 요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맛있게 먹어야만 한다.

"매번 이런 맛과 식감으로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상현이 끔찍했었던 다른 식사의 기억을 떠올리며 열심히 내용물을 비워갔다.

그리고 그릇에 넉넉히 담겨 있던 닭고기 요리를 마지막 살점까지 완벽히 비웠을 때.

[베나모스의 단검의 흡수가 끝났습니다.]

[민첩 스탯 2를 영구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스킬 데몬 배쉬를 획득하였습니다.]

[흡수가 완료된 베나모스의 단검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며 영원히 소멸합니다.]

아티팩트 '식사'가 끝났다.

손에 쥐고 있었던 단검의 소멸과 함께 이뤄진 스탯과 스킬의 변화였다.

스킬창에 새로 추가된 데몬 배쉬 스킬이 붉은 섬광을 뿜어내며, 첫 등장을 알렸다.

'레벨 1밖에 되지 않는 나 같은 플레이어에게는 과분한 스킬이지! 예전에는 650레벨에 얻었던가?'

전생과 비교하면 획득한 시점의 간극이 상당했다. 25년을 일찍 당겨 만들어낸 스킬인 셈이다.

『데몬 배쉬』

■ 스킬 레벨 : 1단계(0.0%)

■ 스킬 소개 : 몬스터 또는 공격에 노출된 플레이어에게 2.0초의 경직 상태를 유발합니다.

단, 경직 지속 시간과 성공 확률은 타격 대상의 스킬 저항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주 좋은 스킬이지!"

몬스터가 경직된 상태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선 채로 움직이지 않는 표적이 된다는 뜻!

같은 팀원 입장에서는 마음 놓고 적을 노릴 수 있는 타이밍이 제공되니 너무 좋을 수밖에 없다.

현재는 스킬 레벨이 1단계라서 지속 시간대가 2초에 불과하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기간도 길어질 터.

앞으로도 채워나갈 부분이 많은 만큼 기대가 됐다. 

부지런히 스킬을 사용하면 그만큼 연성도가 차곡차곡 쌓여 스킬 레벨이 오를 것이다. 

현재 1단계 옆에 0.0%로 표시된 것이 바로 연성도 수치다.

'일단 오늘 던전 공략에서 내가 생각했던 전리품은 꼭 챙겨 먹어야지. 반드시.'

상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늘 플레이어 팀에 어떻게든 참여하려고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던전 공략 중에 쓸 만한 아티팩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붉은 담석이라는 일종의 결석 결정체인데, 데몬 오크라는 중간 보스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었다.

담석의 아티팩트 효과 중에 [지연]이라는 효과가 있는데, 이것이 상현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아티팩트를 먹으면, 내재 된 효과를 취하는 과정에 원하는 스킬과 결합할 수 있어서다.

상현이 노리는 것은 지연 효과를 데몬 배쉬에 연계해서, 경직을 그 이상으로 연장하는 구조였다.

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신만 가능하므로 남들은 흉내나 응용조차 할 수 없다.

'재밌겠어.'

대검을 움켜쥔 상현의 양손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회귀로 다시 살게 된 삶!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그래서 더 신선한 충격이 된 삶이었다.

모든 기억을 가진 채 돌아온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최고의 위치와 경지에 올라보고 싶었다.

전에도 수없이 꿈꿨지만 단념해야 했던 욕심이자 꿈.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상현의 내면 깊숙한 곳에 담겨 있었던 욕망과 투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지겠지."

상현이 운전하는 차창 밖에 보이는 주변의 광경들을 살폈다.

각기 다른 색과 성질을 가진 던전과 게이트의 출입구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항상 플레이어와 짐꾼이 붐비고 있다. 마치 출퇴근 시간의 횡단보도처럼.

"플레이어로서 첫 출근이라 반응이 썩 좋을 것 같진 않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부우웅!

상현이 액셀을 힘껏 밟았다.

부지런히 성장해야 한다.

아직 자신의 레벨은 플레이어 시스템 가장 밑바닥인 레벨 1이기에. 갈 길이 멀었다.

* * *

"형님, 신상현 그 녀석 왜 받아주신 겁니까? 갑자기 플레이어가 됐다고 해도, 아카데미 수료도 안 했잖습니까. 짐만 된다고요."

"뭐, 잘못되어도 상현이 녀석이 뒈지는 거지, 우리가 죽는 건 아니잖냐?"

"그래도 피를 보는 게 유쾌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복잡하게 생각 마! 아카데미도 제치고 온 하룻강아지가 겁에 질려 똥 지리는 꼴이나 보자고."

"푸핫! 생각해보니 그런 그림도 나쁘지는 않겠는데요?"

"그거 볼 생각에 부른 거다. 킬킬."

아직 상현이 도착하지 않은 시간. 던전 앞에 모인 플레이어들이 상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기존 팀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상현이 오만하고, 거만하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불과 사흘 전까지 같은 직업군의 동료였던 '짐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장. 아카데미 수료 전까지는 플레이어가 됐어도 보통 짐꾼으로 참여하는 게 국룰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다. 쯧."

짐꾼 조장 신호영이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 플레이어가 됐으면,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지 못할 애송이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신호영이 기억하는 상현의 모습은 몬스터 발소리만 들려도 벌벌 떨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플레이어로 참여해서 몬스터를 사냥한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낚시하는 방법도 모르는 초짜가 물고기를 잡겠다고 설치는 꼴인 셈이다.

"안녕하세요!"

상현이 환한 웃음과 함께 현장의 플레이어, 짐꾼들에게 고루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시선이 싸늘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예상한 반응이었으니까.

플레이어 팀의 조장인 윤대경이 가늘게 뜬 눈으로 상현에게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대검은 뭐냐? 검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게 대검인데?"

"조장님. 제 앞가림은 할 테니, 참여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정말 자신 있는 거야?"

"팀에 민폐가 되진 않을 겁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아카데미도 패스하고 던전을... 알았다. 다들 출발!"

윤대경이 더 말을 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구성원 전원에게 소리쳤다.

플레이어로 각성했다고 으스대다가 요단강을 건너는 멍청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윤대경은 상현의 오만함이 결국 던전에서 쓴맛을 보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운 좋게 각성한 짐꾼 출신의 플레이어.

안 봐도 미래는 뻔했다.

2화 적응 - (2)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시작된 오크들과의 전투에서 상현은 의도적으로 힘을 조절했다.

단계적으로 검의 활용도를 끌어올리며 지금의 몸에 어느 정도 부하가 걸리는지 측정한 것이다.

결론은 빨리 나왔다.

'아직은 많이 약해.'

당장의 체력과 근력으로는 1분 이상의 장기전은 어려울 듯했다.

구사할 수 있는 검술의 완성도와 기대치는 높지만, 몸 상태가 영 꽝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스탯도 플레이어 레벨 1에 맞춰 주어진 기본 수치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여기 몬스터 수준이나 플레이어 수준이나 솔직하게 말하면 한심스러울 정도지만.'

7인으로 이루어진 플레이어 팀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윤대경이 50레벨이었다.

오크 던전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경지이긴 했지만, 상현의 눈에는 어린아이 수준.

회귀하기 직전에 자신이 달성했던 레벨이 850레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50레벨은? 개구리 올챙이 적, 아니 수정되기 전쯤이라고 해도 될 터다.

"야, 신상현! 그리 깨작깨작 싸울 거면 꼴에 어울리지도 않은 대검은 왜 가지고 왔냐?"

팀원 중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상현을 타박하자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소극적으로 보이는 상현의 공격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처음부터 상현을 달갑게 봐주지 않았던 선입견도 크게 한몫을 했다.

"제가 전방에 나서도 될까요?"

"입으로만 나설 거냐? 아가리만 털지 말고, 실력으로 보여주란 말이다!"

날 선 반응에 탐색전이 너무 길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나섰다.

마침 오크 무리 일곱이 기세등등하게 용맹함을 뽐내며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데몬 배쉬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반드시 오크의 급소나 약점을 노려야 했다.

전생에 수만 마리는 족히 넘는 오크를 잡았던 것이 자신이다. 경험이야 차고 넘치게 많다. 

다시 이 녀석들의 약점을 복습하듯이 노리는 것은 애초에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데몬 배쉬』

『마나를 1 소모합니다.』

상현이 바로 스킬을 전개했다.

쉬이이익! 서걱!

이윽고 첫 번째 일격이 오크의 왼쪽 어깨를 깊게 가르면서 내리그어지는 순간!

취엑?

선공에 노출됐지만 개의치 않고 오른손에 든 도끼를 이용해, 반격하려던 오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경직이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솨아아악!

취...!

참수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순간적으로 데몬 배쉬에 의해서 경직이 걸려버린 오크는 손도 못 쓰고 제자리에서 머리를 잃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취엑! 키엑! 크에에에에!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상현의 검이 무심하게 한 번 훑고 지나갈 때마다 오크의 움직임이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경직 유발? 저건 고급 상태 이상인데, 어떻게 저 녀석이 만들어내는... 거지?"

눈썰미가 좋은 윤대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팀의 동료이자 동생인 플레이어들도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형님,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속도 엄청 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0.1초나 0.2초의 초단기 경직이 아니에요!"

"와, 2초! 오크들이 무려 2초나 멈춰있어! 이거 완전히 미쳤는데? 스킬 실화야?"

경악의 탄성과 외침이 터져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불과 사흘 전에 각성한 레벨 1의 초보 플레이어가 절대 아니었다.

"괴물...."

팀원 중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상현의 현란한 경직 유발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레벨 2, 30대 구간을 지나는 자신들의 수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물이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스킬인 거지?'

윤대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격당한 몬스터가 잠시 정신을 잃는 [스턴] 상태나 몸이 굳는 [경직] 상태는 예전부터 봐왔다.

하지만 기간이 너무 길었다.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짧은 상태 이상만을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나름 네임드라고 불리는 플레이어도 1초에서 1.5초 정도의 상태 이상 유발이 최대치였다.

그 정도만 되어도, 모두 칭송하고 찬양하며 감탄할 정도다.

그런데 상현은 2초였다. 

무려 2초나 안심하고 자유롭게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반격에 대한 걱정 없이.

상현이 레벨 400, 500대의 고레벨 플레이어였더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100도 아니고 10도 아니고, 사흘 전에 각성해서 처음 던전을 온 레벨 1짜리 플레이어가?'

윤대경의 눈에 상현은 이제 갓난아기 수준인 레벨 1이었다. 스킬을 가지고 있는 자체도 말이 안 됐다.

비유하자면 야구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걸출한 타격 기술을 가진 것과 같았다.

끄어어어.

상현의 공격에 노출된 오크들은 하나 같이 얼음이 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신음만 토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나빴다. 상현이 미련 없이 목을 날렸으니까.

투박하지만 날이 바짝 선 대검 앞에서 오크의 목은 잘 썰리는 스테이크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오크 디펜더도....'

윤대경은 상현이 방어에 특화된 오크 디펜더까지 압살하자 아연실색한 표정이 됐다.

일반 오크보다도 방어력이 서너 배는 족히 높은 오크 디펜더는 최소 2인 1조 사냥을 해야 해서다.

하지만 상현은 녀석들에게도 공평하게 경직을 만들어냈고 깔끔하게 목을 날렸다.

투둑. 툭. 투둑.

가을바람에 밤송이가 떨어지듯 오크들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숨이 끊어진 오크들의 얼굴에는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호전적인 몬스터로도 유명한 오크에게 일방적인 압살은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

"미쳤나 봐, 쟤."

"저게 어떻게 레벨 1 짜리 플레이어냐고.... 아티팩트에다가 죄다 돈 지랄한 거 아니야?"

"개소리지! 짐꾼으로 겨우 연명하던 녀석이 돈이 어딨겠냐? 대검이나 사고 끝났을 건데."

팀원들의 반응은 놀람 그 자체였다. 솔직히 두렵기까지 했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신들은 일대일로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그간 짐꾼으로 궂은일을 도맡았던 상현을 깔보며 함부로 대해왔던 것도 사실. 원죄가 있다 보니, 누구도 상현을 향해 시선을 두지 못하고 고개를 흘깃 돌렸다.

"후우."

상현이 뜨거운 숨을 토하며, 한바탕 전투가 끝난 현장을 봤다.

만족스러웠다.

레벨 1의 비루한 몸을 가지고, 한 대도 맞지 않고 일방적인 학살을 마무리했잖은가?

단시간에 과부하가 걸린 탓인지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후련하기도 했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F급 칭호, [겁을 상실한 하룻강아지]가 주어집니다.]

'레벨 업은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 치고, 칭호는 좀 의외인데?'

상현이 기분 좋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칭호를 확인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보상이었다.

보통 칭호는 플레이어가 특별한 업적을 이뤄냈을 때 주어진다.

물론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칭호를 무한정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량에 제한이 있어서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칭호에 3천 명 제한이 있고, 전 세계 플레이어 3천 명이 칭호를 획득하면?

다시는 그 칭호를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호는 다른 플레이어와 실력을 확실히 구분하는 차별화의 지표로서 상당히 의미가 컸다.

칭호로 주어질 만한 특별한 이슈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뜻이니까.

[겁을 상실한 하룻강아지]

■ 칭호 등급 : F급

■ 칭호 소개 : 회피 +5

'좋은데?'

상현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회피 스탯은 상대의 공격이 빗나갈 확률을 높여주는 스탯이다. 

무의식적으로 육체의 회피 기전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피하는 그림인 셈.

레벨 1을 올릴 때마다 보너스 포인트가 하나 주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레벨 5를 올린 가치에 해당하는 스탯을 칭호로 얻은 셈이었다.

'앞으로 모든 보너스 포인트는 행운에. 이건 무조건이지.'

상현이 레벨업으로 얻은 포인트를 바로 행운에 투자했다.

[행운 11]

행운 스탯은 크리티컬 대미지가 발생할 확률을 높이고 아티팩트의 드롭율을 높인다.

그리고 아티팩트를 먹었을 경우 히든 스탯, 스킬이 계승될 확률도 대폭 높인다.

앞서 데몬 배쉬처럼 쓸 만한 스킬을 얻는 경우가 많아 행운 스탯의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어차피 다른 스탯들은 아티팩트를 먹는 것으로도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아티팩트에 옵션으로 붙어서 나오는 경우가 드문 행운 스탯은 직접 올려주는 것이 좋았다. 스탯 수급 루트가 매우 제한적이라서다.

'육성에 대한 생각이 확실하니, 부담도 한결 덜어지네.'

상현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는 회귀지만, 자신에게는 부족했던 과거의 삶을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된 듯싶었다.

고블린과 눈만 마주쳐도 두 다리를 벌벌 떨었던 예전의 자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이 던전에 자신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조장인 윤대경이라도 말이다.

* * *

"이렇게 긴 경직 유발은 본 적이 없어! 스킬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얻은 거냐?"

"플레이어로 각성하니까 갑자기 주던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말이 되죠. 제가 지금 그런 스킬을 쓰고 있잖습니까?"

공략 내내, 상현은 귀찮게 자신의 스킬 출처를 묻는 윤대경의 물음에 꼬박 대꾸를 해야 했다.

물론 정확히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운 좋게 다이아몬드급 이상의 아티팩트를 어디서 얻은 건 아니고?"

"운이 좋아도 평균가 50억 원이 넘는 아티팩트를 어떻게 얻겠습니까? 대검을 보실래요? 아이템 창에서 정보를 보실 수 있을 테니."

상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윤대경에게 대검을 건넸다.

스킬을 얻는 방법에는 반복 수련 말고도 아티팩트 자체에 탑재된 '내장 스킬'을 쓰는 것도 있다.

물론 조건부다.

아티팩트를 잃어버리거나 더 이상 착용하지 않으면, 내장 스킬은 비활성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윤대경은 상현이 아티팩트의 내장 스킬을 쓰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직접 확인해보니 아니었다.

"그럼 정말 네가 만든 스킬이란 말이야?"

"네, 맞습니다."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던전 짬밥이 2년인 나도 그런 대단한 스킬이 없는데...."

"형님. 원래 인생이라는 게 다 운빨 아닙니까! 상현이 저 녀석이 운이 억수로 좋은 거죠."

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팀원들의 반응에 상현이 피식 웃고는 말았다. 

상대적인 박탈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전생에 자신도 훨씬 뛰어난 플레이어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못난 게 아니라 저 녀석들이 운이 좋아서 앞서나가게 된 것이라고.

"드디어 중간 보스다!"

"데몬 오크라고 했던가?"

팀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상현이 만남을 고대한 중간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동하는 동안 야금야금 오크를 사냥한 덕에 레벨은 3이었다. 경험치 바도 중간 정도 채워졌다.

'전생에 우리 팀은 실패했지.'

펼쳐질 미래를 안다.

원래대로면 윤대경의 팀은 공략에 실패하게 되고, 당연히 전리품도 못 챙긴다. 

그리고 다음에 들어온 팀이 데몬 오크 사냥에 성공한다.

그 팀의 조장이 붉은 담석을 얻었다며, 지연 능력에 대해 자랑을 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예전의 그림대로면 또 탐색전만 치러보고 공략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기에 상현이 얼른 운을 뗐다.

"조장님."

"왜?"

"혹시 데몬 오크를 잡고 떨어지는 아티팩트가 있으면 제가 가져도 됩니까?"

3화 적응 - (3)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야, 신상현!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잡는다고 해도 왜 그 아티팩트가 네 거냐?"

나오지도 않은 아티팩트를 가지고 욕심 가득한 동료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윤대경이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경직도 잘 안 걸릴 거야. 애초에 쉬운 녀석이 아니라고!"

"만약에 제가 잡으면요."

"그럴 일은 없다고, 인마! 우리가 정 못 잡으면 그때, 네가 혼자 잡고 가져가든가. 어떠냐? 이러면 좀 합리적이냐?"

"그럼 저는 데몬 오크 공략에서 빠집니까?"

"괜히 나중에 지분 운운하면서, 분배로 진흙탕 싸움이 되는 걸 막으려면 이번에는 그래야지."

윤대경이 합리적인 체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뭐라도 나오면 자신이 독식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윤대경의 팀은 철저하게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현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그들에게 상현은 짐꾼 출신의 외인(外人)이었다.

"그럼 조장님과 형님들이 못 잡으시면 제가 잡겠습니다."

"흥, 그러던지. 물론 그럴 일은 절대 없겠다만! 모두 데몬 오크 사냥을 시작한다!"

윤대경이 코웃음을 치면서 다른 팀원들을 이끌고 데몬 오크 사냥에 나섰다.

얼마 후.

상현이 팔짱을 낀 채로 윤대경과 5인이 펼치는 전투를 살펴보고 있었다.

농구공 두 개는 족히 들어갈 법한 이두근과 삼두근을 가진 데몬 오크의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데몬 오크가 묵직하게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플레이어들이 기함하며 쓰러지고 날아갔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됐다.

윤대경과 팀원들은 데몬 오크의 약점을 파악해 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힘으로만 밀어붙였다.

정교하게 빈틈을 노려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무식한 돌격이 먹힐 리 만무했다.

2019년 이후, 플레이어의 시대가 열린 지 이제 겨우 2년.

아직은 체계화된 공략법이 없는 지금,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략은 여전히 대세였다. 한심한 일이다.

"으아아!"

"이런 놈이 어떻게 중간 보스냐고! 빈틈이 있기는 한 거야? 쪽팔리게 여섯이서 뭐 하는 짓이냐?"

비명이 터져 나오고.

윤대경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힘 싸움으로는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런 놈을 잡을 수 있다며 전리품을 욕심낸 상현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상현의 실력이라면 전투와 동시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자신과 다른 팀원들처럼 살짝 다치거나 물러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윤대경이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이 정도면 됐다! 다들 안전지역으로 물러서라! 어차피 중간 보스는 꼭 잡을 필요도 없잖아!"

"힘이 장난이 아니에요! 답도 없어요. 아휴.... 이 녀석은 우리가 못 잡는 게 정상인 듯합니다."

"원래 최종 보스보다 중간 보스가 더 빡센 경우도 많잖아? 너무 미련들 두지 말자고!"

전의를 상실한 팀원들이 윤대경의 말에 반색하며, 빠르게 안전지역까지 물러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의 정신 승리 멘트를 서로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켜본 상현의 입장에서는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패배자는 입이 무거워야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열심히 패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상현이 두 발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진 기억대로 흘러갔지만, 이제는 아니다.

"제가 갑니다?"

"안 돼, 너 혼자로는. 움직임이 기민해.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죽어도 괜찮다면요?"

"가라. 미친놈을 어떻게 말리겠냐. 죽어도 원망 마. 난 분명히 말렸다."

윤대경이 손을 휘휘 젓고는 흙바닥에 나자빠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섯이 무릎 한 번 꿇리지 못한 녀석을 어떻게 한 명의 플레이어가 끝장내겠는가?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걱정도 안 되는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크오오오!

데몬 오크가 붉은 눈빛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손에 든 대형 도끼를 위협적으로 돌렸다.

'무한 경직! 내가 꿈꾸는 환상적인 연계의 시작을 위해서 오늘 너는 꼭 내가 잡는다.'

상현이 의지를 불태웠다.

붉은 담석을 먹으면 지연 능력뿐만 아니라 안에 붙어 있는 스탯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콰아!

데몬 오크가 괴성을 내지르면서 상현을 향해 위력적인 첫 공격을 시작했다.

앞뒤 잴 것 없이 상현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릴 생각으로 내리치는 일격이었다.

"신상현! 위험해!"

뒤에서 걱정하는 윤대경의 외침이 들렸지만, 상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원래 이놈은 무식했지.'

검사로서 가장 상대하기가 쉬운 적은 자신의 힘만 믿고,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적이다.

공격이 막혔을 때,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까앙!

상현이 몸을 옆으로 살짝 비껴가듯 움직이며 감각적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데몬 오크의 도끼가 상현의 대검 옆을 스쳐 가며 큰 불꽃을 일으켰다.

손끝이 얼얼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버틸 만했다. 동시에 데몬 오크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심하게 쏠리는 것이 보였다.

'힘만 센 무식한 몬스터는 이래서 편하다니까?'

달리 고민할 것도 없이 데몬 오크의 약점이 선명히 드러났다. 상현에게는 보였다.

물론 등 뒤에서 멍하니 지켜볼 수준 낮은 플레이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빈틈이겠지만.

『데몬 배쉬』

바로 스킬을 펼쳤다.

약점을 찾아냈으니 집요하게 그 틈을 공략할 차례다.

퍼억!

쿠웨엑!

상현이 펼친 데몬 배쉬가 정확하게 데몬 오크의 치명적인 약점인 옆구리를 힘껏 강타했다.

"중간 보스인 데몬 오크도 경직이 걸린다고? 무슨 치트키도 아니고 이게 말이 돼?"

"...아니, 이건 너무 사기잖아."

"멈춰버렸어!"

"도끼! 데몬 오크가 들고 있던 도끼가 떨어졌다!"

지켜보던 모든 팀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섯이 달려들어도 쉴 새 없이 날뛰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데몬 오크가 바로 무력화된 것이다.

끄그그. 끄그그.

놀란 것은 졸지에 멈춘 과녁 신세가 되어버린 당사자, 데몬 오크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손쉽게 제압해버린 상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저승사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데몬 오크가 이내 육체의 활동성을 끌어올리며, 지속 시간이 아직 남은 경직을 풀어냈다.

이른바 자가 회복 능력.

전투가 계산했던 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만드는 변수다. 그렇기에 중간 보스 몬스터이기도 하고.

"경직이 풀렸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칫, 제법이군."

상현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한 번 경직 상태를 경험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똑같은 경직이 들어가지 않는 기간이 생긴다.

간격은 약 15초. 그때까지는 다른 변수 없이 정직한 전투가 필요했다.

'이래서 지연이 필요한 거지!'

붉은 담석의 지연 효과는 경직이 끝나기 전에 같은 상태 이상을 연장할 수 있다.

꼭 데몬 오크를 잡아야 할 이유기도 한 것이다. 데몬 배쉬와 시너지가 그만큼 좋기에.

'녀석은 항상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쏟아서 공격을 하는 타입이야. 즉, 끌어들이고 치면 돼.'

이미 데몬 오크에 대한 성향 파악은 됐다. 아까 여섯의 선발대가 삽질을 해준 덕분이다.

카오오!

상현에게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데몬 오크가 살기를 쏟으며 달려들었다.

퍼억!

"아앗!"

쉬이이익!

"아으으!"

세상을 반으로 쪼갤 듯한 도끼질이 이어질 때마다,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자기였으면 영락없이 죽었을 공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섯이서 교전을 벌였던 아까보다 훨씬 더 움직임이 빨라졌다.

하지만 상현은 아슬아슬하게 정타를 허용하지 않으며,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해냈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회피가 반복되자 실력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아도, 열 번, 스무 번을 아무 문제 없이 계속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점점 더 데몬 오크의 공세가 높아지려던 바로 그때.

'지금이다!'

인내하고 버티면서 기회를 노리던 상현에게 드디어 데몬 오크의 약점이 드러났다.

푸욱!

상현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힘껏 대검을 내질러, 옴짝달싹 못 하는 데몬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정확히 빈틈을 파고드는 예리한 일격이었다.

그 순간, 모두가 놀랐다.

난공불락이었던 데몬 오크에게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상징하는 뜨거운 피였다.

크어!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진 데몬 오크가 고꾸라졌다. 명백한 즉사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데몬 오크를 혼자 죽여...?"

앞선 전투에서 전력을 다하고도 도망쳐야만 했던 윤대경과 그 무리가 병풍이 되어버렸다.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E급 칭호, [데몬 헌터]가 주어집니다.]

'역시 솔로 플레이의 힘인가?'

단숨에 뛰어오른 레벨 두 단계와 또다시 등장한 칭호의 향연에 상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생에 자신은 칭호와는 참 인연이 없던 삶을 살았다.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도 변변찮은 스킬이나 기술을 갖지 못한 탓에 성장이 더뎠던 것이다.

칭호는 남들의 평균값과 비슷한 실력을 가져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뛰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 보상 같은 것이니까.

보통 평균적으로 플레이어가 레벨 100당, 칭호 한 개를 겨우 갖는다는 통계에 비춰본다면.

상현은 벌써 레벨 200대 플레이어가 가질 만한 개수의 칭호를 획득한 셈이었다.

보너스 포인트를 전부 다 행운 스탯에 투자하자 스탯 값이 14가 됐다.

당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가능성 높을 미래로 바뀌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데몬 헌터]

■ 칭호 등급 : E급

■ 칭호 소개 : 중간 보스 몬스터급 이상의 적을 상대할 경우에 조건부로 체력 회복력 5배 증가합니다.

'높으신 분 전용 칭호네. 좀 더 악바리처럼 싸울 수 있게 해주는 칭호구만?'

체력 회복은 매우 중요하다.

교전을 하다 보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집중력과 인내심도 함께 무너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데몬 헌터 칭호는 그런 탈진 현상을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보조 수단이었다.

투욱!

이윽고 숨이 끊어진 데몬 오크의 몸에서 붉은 담석이 솟아오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담낭에 생긴 결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영롱한 빛을 가진 결정체였다.

"크흠."

상현이 뒤를 쓱 돌아보자, 윤대경이 헛기침 소리를 내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앞서 호언장담하듯 약속한 것이 있어, 언감생심 붉은 담석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거니와.

사실 상현이 보인 유려한 검술 실력에 반쯤 넋도 나가 있었다.

데몬 오크를 상대로 상현이 보인 회피, 반격, 그리고 경직 유발 능력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전투만 놓고 본다면, 최소 레벨 150 이상의 플레이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들 쉬었으면 보스 몬스터 사냥 준비해! 지나간 일에 미련 두지 말고! 짐꾼들은 데몬 오크 시체를 차질 없이 회수한다!"

윤대경이 소리쳤다.

사실 미련을 둔 사람은 본인이었지만, 차마 대놓고 말하긴 부끄러웠던 모양.

"훗."

상현이 얕은 웃음과 함께 바로 데몬 오크에게서 얻은 붉은 담석의 확인에 들어갔다.

「붉은 담석」

■ 아티팩트 등급 : 실버

■ 아티팩트 소개 : 데몬 오크에게서 희귀하게 얻을 수 있는 결석으로 강인한 힘과 끈기, 투지가 담겨 있는 결정체입니다.

■ 근력 +10

■ 체력 +10

■ 특수 효과 – 지연

'실버 등급이면 흡수율이 좀 더 높겠네. 방금 처음 나온 아티팩트니까 흡수율 추가는 따로 없겠고.'

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흡수율을 빠르게 체크했다.

[실버 등급의 기본 스탯 흡수율은 20%입니다.] 

20%.

근력, 체력 스탯 2를 영구적으로 이어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데몬 배쉬에 반드시 연계하겠노라고 마음먹었던 특수 효과인 지연은 확정적으로 계승될 터.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베나모스의 단검을 먹었을 때처럼 붉은 담석도 나름의 요리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새콤달콤한 향기를 물씬 풍기는 비빔냉면이었다. 상현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였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네.'

식탁 위 젓가락을 집어 든 상현의 손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4화 적응 - (4)

식사의 종료와 함께 아티팩트의 흡수가 끝났다.

근력, 체력은 예상한 대로 2가 추가됐고 특수 효과도 흡수됐다.

[흡수로 획득한 '지연'의 효과를 스킬에 결합할 수 있습니다.]

'데몬 배쉬에 결합.'

상현은 앞으로도 아티팩트를 흡수하며 얻는 특수 효과를 스킬에 연동하거나 전략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버리는 것 없이 말이다.

그래야 스탯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먹어 치운 의미가 확실히 생기니까.

[데몬 배쉬에 지연 효과가 추가되었습니다.]

[첫 번째의 경직 상태가 끝나기 전에 데몬 배쉬를 사용하면, 확정적으로 두 번째 경직 상태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90%, 네 번째 60%, 다섯 번째 30%의 확률로 경직 상태의 연장이 가능합니다.]

무조건 4초 경직!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변화지만 막상 직접 경험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는 이론적인 부분으로만 생각했던 결합.

하지만 회귀하고, 전에 얻지 못했던 붉은 담석을 얻은 덕에 지금 같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4초 경직이면, 거의 레벨 500 이상급 플레이어 수준은 되는 것 아닌가?'

나름의 추측도 됐다.

몬스터를 공략함에 있어서 무려 4초에 달하는 프리딜 타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

앞으로 혼자서 던전을 공략하든 팀플레이를 하든 간에 그 가치가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크 버서커다!"

"전원 전투 준비!"

드디어 이 던전의 최종장인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버서커.

근육질의 몸은 물론이거니와 폭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지는 까다로운 녀석이다.

"상현아, 너도 힘 보탤 거지?"

"경직이 있어야 이 녀석이 수월할 것 같은데?"

앞서 데몬 오크 전투에서 상현의 활약이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박혔는지, 다들 은근한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상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상현은 눈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다시 안 볼 사람들이니까.

'오크 버서커는 데몬 오크보다 훨씬 스킬에 대한 저항도가 낮아. 데몬 배쉬가 더 잘 먹힐 거야.'

차분히 계산했다.

행운 스탯도 착실히 올리고 있는 만큼, 여차하면 크리티컬 대미지가 터질 수도 있다.

크리티컬 대미지는 기존의 최소 100%, 최대 500% 화력을 내는 구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효과다.

"바로 따라붙으세요!"

상현이 힘주어 외치며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회귀하고 난 후, 다시금 멋지게 시작한 플레이어로서의 새 인생이 아니던가?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수준 낮은 몬스터는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장애물도 될 수 없을 거라고.

후웅! 후웅!

대검을 휘두르며 식어가던 몸을 재차 예열한 상현의 결의와 투지가 눈빛을 따라 빛났다.

취에에엑!

겁도 없이 달려드는 인간을 마주한 오크 버서커의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렸다.

쿠우우!

오크 버서커가 양손에 각각 든, 철심 잔뜩 박힌 나무 방망이와 철퇴가 상현의 머리를 노렸다.

상현도 묵묵하게 대검을 움켜쥔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푸화악!

한 점에서 교차한 상현과 오크 버서커의 실루엣 사이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누가 쏟은 피 분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 몸이 성할 리 없는 규모의 과다 출혈이었다.

"설마...?"

팀원들이 한 점에서 마주쳤다가, 이내 스쳐 지나간 상현과 오크 버서커를 고루 살폈다.

제아무리 경직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들 오크 버서커는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보스 전이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일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리가 없... 헐.'

애써 상현의 활약을 깎아내리려던 윤대경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커어어어.

왼쪽 옆구리를 움켜쥔 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신음을 토한 것은 다름 아닌 오크 버서커였다.

상현의 몸은 가을 하늘처럼, 한 점의 티끌 없이 깨끗했다.

즉, 완전무결(完全無缺)했다.

* * *

윤대경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아주 잠깐도 주눅 들지 않는 상현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리고 용맹한 장수처럼 필마단기로 달려드는 모습에 감탄했고, 결과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자괴감. 결론은 그 감정이었다.

어느새 팀원들은 자신보다 상현의 움직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중간에 풀릴 일도 없으니, 4초 동안 마음 놓고 공격을 퍼부으면 됩니다!"

어느덧 팀의 메인 오더를 상현이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윤대경 자신마저도 그것에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편했다.

데몬 오크보다 더 힘든 공방전을 생각했던 윤대경으로서는 너무 쉬운 전투였다.

특히 상현이 기적에 가까운 현장을 만들어낼 때는 더 그랬다.

무려 4초의 경직.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오크 버서커의 몸은 꼬박 4초를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 사이, 각양각색 스킬이 신나게 오크 버서커의 몸을 찜질했다.

앞서 상현이 첫 번째 공격에서 오크 버서커의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 치명적이었다.

이 부분을 집중 공략당한 오크 버서커는 빠르게 체력을 잃어가며 쇼크 상태에 빠졌다.

최소 1시간을 예상한 보스전이 겨우 5분을 넘기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단기전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끄어어어....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쓰러진 오크 버서커의 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와! 정말 쉽게 잡았다!"

"이거 개꿀인데?"

"경직 최고다, 진짜! 세상에.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도대체 몇 초나 허수아비로 만든 거야?"

"앞으로는 상현이랑 같이 다녀야겠는데? 같이 팀만 해도 레벨업이 달달하겠어!"

원 리더인 윤대경의 존재를 새하얗게 지워버린 팀원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더 확실한 반응이었다. 더 강한 힘에 이끌리는 것은 플레이어의 본능이니까.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상현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팀원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김칫국은 비단 그들만 마시지는 않았다.

"전속 짐꾼으로 줄 서야 하나?"

"상현이 녀석을 따라다니면, 일당도 짭짤하게 더 챙길 수 있겠는데요?"

짐꾼들도 당연히 상현이 자신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완벽한 착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D급 칭호, [압도적인 힘으로!]가 주어집니다.]

'칭호 풍년이네, 진짜.'

레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활약 덕분인지 칭호가 또다시 활성화됐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몇 개월이 넘게 칭호 알림이 무채색의 비활성화 상태로 있기 마련.

하지만 상현은 오늘만 무려 세 번째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 칭호 등급 : D급

■ 칭호 소개 : 상태 이상 효과의 지속 시간이 10% 증가합니다.

'그럼 이제 경직을 확정적으로 4.4초까지는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네. 스킬 저항도가 낮은 타깃이 일단 걸리기만 하면?'

오크 버서커를 죽이고 얻은 칭호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사실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다.

0.1초, 0.2초 정도의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딱히 감흥 없는 수준일 수 있다.

0.11초, 0.22초는 어찌 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니까. 하지만 상현에게는 아니었다.

시간이 무려 0.4초가 늘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세 번째부터는 확률이긴 하지만, 일단 세 번째까지 연계되면 기존의 6초가 6.6초가 된다.

눈에 띄게 보이고 실감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효과인 셈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죽고 싶겠지.

'이 정도는 검귀 도경수쯤 돼야 만들 수 있는 이슈일 거야. 괜히 칭호 컬렉터가 아니었으니.' 

상현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검귀 도경수.

플레이어의 시대가 열린 지 불과 2년밖에 안 됐지만 벌써 레벨 500을 달성한 인물이다.

방금 막 레벨 7을 달성한 상현의 현재를 생각하면 아득한 편차가 있는 네임드 플레이어였다.

이때부터 도경수는 상현이 회귀하기 직전인 2051년도까지 단 한 번도 국내 Top 10의 평가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특히 검에 있어서만큼은 완전체로 불리기도 했다. 상현은 라이벌 수준으로도 취급되지 않을 만큼.

'까짓거. 따라 잡아주지! 이제 나도 시작부터 풀 액셀 밟고 달리는데 못 따라 잡을 것 있어?'

상현이 결의를 불태웠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달까?

그때.

"신상현."

"예?"

잠시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있던 상현을 윤대경이 깨웠다.

시종일관 자신에게 부정적이었던 사람이라 어떤 말이 나올까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슥슥.

그가 오크 버서커에게서 떨어진 작은 반지를 보여주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꺼냈다.

"다들 너무 쉽게 버스를 탄 덕인지 다른 부산물은 몰라도 이건 네게 양보하고 싶다는군. 나도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욕심 많은 윤대경이 양보를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소화하기 힘든 옵션이라 선심 쓰듯 던져주는 것일지도.

"사양 않겠습니다."

"옵션은 평범해. 브론즈급 아티팩트라 딱히 비쌀 것 같지도 않아서 선심 쓰는 거다."

"너무 솔직한 것 아닙니까?"

"알면 됐다."

윤대경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과 앞으로 어울릴 일은 없겠지.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다른 녀석이 됐으니까.'

냉정한 판단이었다.

레벨은 고려할 부분이 전혀 아니었다. 이미 숫자는 의미가 없음을 상현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플레이어 짬밥이 무려 2년이나 되는 윤대경이었다.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앞으로 상현을 찾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질 거라고. 오늘의 인연은 추억의 단편이 될 거라고 말이다.

얼마 후.

"...."

상현이 먼저 떠나고.

남은 팀원도 분배를 모두 끝내고 저마다 집으로 떠난 자리에 한 남자가 남아 있었다.

공략 초반부에는 상현을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져 갔던 플레이어였다.

"이건... X발, 불공평하다고."

말아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지도 올해로 2년이지만, 그는 보기에도 조악한 마법 몇 개를 쓰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위력도 강하지 않았기에 찾는 팀도 적었고, 사실상 윤대경의 팀에 빌붙은 형태였다.

그런데 오늘, 3일 전에 각성했다며 나타난 상현이 보인 실력은 수준급의 플레이어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부러웠지만, 중간에는 시샘의 감정이 치솟았고, 끝에는 깊은 분노가 됐다.

2년의 고생을 쉽게 짓밟는 능력을 운 좋게 얻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그는 상현에 대해 생각할수록 아니꼽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신상현 새끼.... 어디 한번 당해봐라. 너같이 잘난 척하는 새끼는 뒤치기 당해도 싸. 겸손할 줄 모르는 새끼는 죽어도 싸다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며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알음알음 알고 지냈던 '질 나쁜' 형님에게 거는 전화였다. 그 형님이라면 믿을 만했다.

* * *

집으로 돌아온 후.

"크... 짭짤하네, 짭짤해. 이래서 백날 짐꾼 하는 것보다 하루를 플레이어로 사는 게 낫다니까."

상현이 앞서 자신의 계좌로 입금됐었던 600만 원의 분배금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짐꾼은 하루 일당이 많아야 20만 원이고, 그중 절반은 보통 부대비용 지출이었다. 

심지어 고된 노동 강도 때문에 다녀오면 다음 하루는 꼬박 쉬어야 했다.

게다가 플레이어로서도 저 레벨 단계서는 재미를 보기 힘들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중구난방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은 탓에 시체 훼손이 심해서다.

당연히 수습한 시체들을 판다고 해도 좋은 값을 받을 리 없다.

하지만 이번 공략에서 상현의 손길이 닿은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깔끔하게 죽었다.

기껏해야 심장부에 작은 자상이 생기거나, 목만 깨끗하게 잃은 정도가 된 것이 고작.

그렇기에 몬스터 시체의 품질이 좋아서 판매에서도 꽤 높은 값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레벨 2, 30대 구간 플레이어 7인이 공략한 던전 분배금이 100만 원 선이라는 점을 보면.

최소 다섯 배 이상의 이득을 본 셈이었다. 

그것은 함께했던 플레이어들이 더 잘 알았기에 헤어지는 순간까지 상현에게 찬사를 보냈다.

다시 만나자. 보고 싶을 거다. 넌 떡잎부터 다른 인재다. 등등!

듣고 있을수록 손발이 오글거리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다양한 찬사였다.

"슬슬 먹어보실까?"

상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대경에게 넘겨받은 반지로 향했다.

브론즈급 아티팩트.

총 9단계로 이루어진 아티팩트 등급 체계에서 가장 아래지만, 그래도 항상 기본 호가 천만 원은 하는 귀하신 분이었다.

5화 행운 - (1)

「버서커 링」

■ 아티팩트 등급 : 브론즈

■ 아티팩트 소개 : 오크 버서커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반지로 혈기를 끓어올리는 반지입니다.

■ 근력 +10

■ 특수 효과 – 경량화

"경량화? 특수 효과가 있는데도 나한테 양보를 한 건가? 그 욕심 많은 양반이 그럴 리 없는데?"

상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수 효과가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할 텐데, 왜 선뜻 양보를 한 걸까?

의문은 경량화 효과에 대한 소개를 보는 순간 바로 풀렸다.

■ 특수 효과 – 경량화

■ 효과 소개 – 1초 단위로 마나 1을 소모, 착용한 모든 아티팩트의 무게를 1g으로 만듭니다.

"마나 때문이었네."

이해가 갔다.

현재 상현의 마나 스탯은 10.

경량화 효과를 본다고 한들, 10초면 끝나고 만다. 괜히 마나만 잡아먹는 하마가 되는 셈.

윤대경이 자기 수준에 마나 소비가 감당될 리 없으니, 자신에게 던져주고 선심을 쓴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상현이 씨익 웃었다.

아티팩트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시선이 전혀 다른 상현에게는 생각지도 않은 호재였다!

전생에 쉰 살이 되어서야 아티팩트를 먹는 능력에 대해 깨우친 상현.

뒤늦은 시작이었기에 더 치열하게 연구에 임했고, 수많은 실험을 하며 많은 지식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상현이 흥미로웠던 것은 아티팩트를 먹고 특수 효과를 계승했을 때 일어나는 변화였다.

"먹고 나면 해당 효과에 대해서 과도한 양의 별도의 코스트Cost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는 것."

쉽게 말해, 앞서 경량화 효과도 1초에 마나 1을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운용 방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신 얻어낸 효과를 스킬이나 다른 아티팩트에 결합해야 하므로 신중한 판단도 필수였다.

물론 결합 효과를 약간의 페널티를 받고 해제한 뒤, 다시 대상을 정하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그렇게 될 경우, 1g의 경량화가 10g으로 기준이 올라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종의 다운그레이드가 적용된다.

"먹는 게 남는 거지."

바로 동기화에 들어갔다.

아직 근력, 체력 측면에서 성장이 더딘 몸을 보조하기 위해 대검에 경량화를 걸 생각이었다.

물론 상현의 입장에서만 대검이 가볍게 느껴질 뿐, 상대에게는 여전히 묵직한 공격이 된다. 다른 부분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다.

"아...."

동기화가 끝나고 음식으로 형상화된 버서커 링을 마주한 상현이 탄식을 터뜨렸다.

"걸려도 오이냉국이 걸리냐."

오이라면 향기가 나는 비누부터 시작해서 그 어떤 조합 형태도 싫어하는 상현이었다.

심지어 햄버거를 먹더라도 오이 피클은 빼고 먹는 상현에게 최악의 음식이 나타난 것이다.

"오크 버서커보다 더 최종 보스 같은 놈이 나타났네."

사람 얼굴 하나는 족히 들어갈 법한 거대한 대접에 담긴 오이냉국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미신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공교롭게도 음식을 맛있게 먹었을 때 히든 스탯이나 스킬이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상현이 긴 탄식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상현의 입에서 선명한 헛구역질 소리가 쉬지 않고 새어 나왔다.

* * *

그로부터 30분 후.

상현은 자신이 사는 단칸방 근처에 위치한 야산의 중턱쯤에 올라 있었다.

"훈련에는 딱이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 상현이 챙겨온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이곳은 언제부터인가 몇몇 플레이어들이 전투용 목각을 두고 훈련하는 훈련장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통 큰 투자를 한 것이다.

고맙게도 플레이어 자격증만 있으면 누구든 와서 무료로 목각을 두들길 수 있었다.

다만 당장에라도 비가 추적추적 쏟아질 듯한 오후라서 그런지, 훈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망할 오이. 욱."

상현이 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들고 있던 대검을 꽉 움켜쥐었다.

경량화를 적용한 대검은 종이로 된 것을 들고 있는 것처럼 한없이 가벼웠다. 깃털 같았다.

보통의 플레이어였다면 이 무게를 유지하는 내내, 1초에 마나 1을 계속 소모해야 했을 터.

하지만 상현에게는 그러한 비용 지출이 필요 없었다. 이것이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는 상현의 능력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었다.

"다음 던전 공략 전까지 양손검 수련 스킬을 좀 만들어놓고 갈 필요가 있겠어."

상현이 전방에 우뚝 솟은 목각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양손검 수련 스킬.

이것이 있어야 지금처럼 대검을 다루는 과정 중에 더 절제되고 신속하게 펼치는 공격이 가능하다.

앞서 오크 던전에서의 전투에서 상현은 자신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연신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건 너무 당연했던 반응이라 감흥도 없었다.

하지만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가 봤다면 이런저런 지적을 하기에는 충분했을 투박한 검술이었다.

그리고 양손검 수련은 그런 상현의 불만족스러움을 성공적으로 메꿔줄 수 있는 좋은 선택지였다.

"제대로 한 번 살펴보자."

상현이 회귀 후에 처음, 완전한 형태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전반적인 점검을 위해서였다.

<플레이어 - 신상현>

■ 레벨 : 7

■ 칭호 : 3개

■ 성좌 : 없음

■ 스탯 현황

[근력 13 / 체력 12 / 민첩 12 / 마나 10 / 행운 16 / 회피 15 / 방어 10]

[분배되지 않은 포인트 : 0]

플레이어로서 각성을 시작했을 당시 기본 스탯은 전부 10이었다.

아티팩트를 먹는 과정에서 근력 3, 체력 2, 민첩 2가 오른 상태. 또한 칭호 효과로 회피 스탯이 5가 오른 상태였다.

행운 스탯만이 직접 보너스 포인트를 투자해서, 올린 수치인 셈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니까."

다른 플레이어보다 몇 걸음 앞서가는 행보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상현은 상태창에서 유일하게 없음으로 표시된 성좌 관련 정보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티팩트의 히든 스탯, 스킬 획득에 특화된 육성을 하기로 했으니 행운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칭호는 말할 것 없고, 성좌 역시 행운 스탯에 상당한 영향을 줄 존재가 필요하다. 반드시.

전생에는 행운의 중요성을 무려 25년이 지나 알았기에 그만큼 시간과 포인트의 투자도 늦었다.

하지만 회귀한 지금은 다르다.

시작부터 착실하게 행운 스탯을 극한까지 키울 수 있는 준비가 갖춰져 있는 것이다.

"성좌의 관심을 끌어야겠어."

방법은 잘 알고 있다.

전생에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플레이어들로부터 알음알음 들어둔 얘기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 성좌가 두 명의 플레이어와 중복된 계약을 할 수는 없다. 1플레이어-1성좌인 셈.

즉, 방법을 알린다고 해서 다른 플레이어가 성좌를 빼앗아 올 방법은 없는 것이다. 

물론 회귀해서 선수를 치는 것은 예외지만 누가 그런 비현실적인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말을 했겠는가?

심지어 상현도 회귀하기 전까지 과거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간만에 사서 고생 좀 하겠네."

상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행운의 성좌는 등장하는 조건이 까다롭다 못해 변태적이기까지 하다. 어떻게 알아냈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 성좌가 있어야 앞으로 육성이 수월해지는 만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쇠뿔은 단김에 빼는 게 가장 좋다.

* * *

이틀 후.

『양손 검 수련』

■ 스킬 레벨 : 1단계(0.0%)

■ 스킬 소개 : 단검, 한 손 장검류를 제외한 모든 검에 대한 적응성을 높입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꼬박 수련한 끝에 상현은 양손 검 수련 스킬을 만들었다.

스킬 연성도 100%를 달성하지 못하면 99%여도 절대 스킬이 만들어지지 않아 고된 여정이었다.

"역시 서울이 아니라 한산하네."

어느덧 도착한 던전 입구.

그 근처에는 전라북도 전주시까지 5km 정도가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었다.

잠실에서 꼬박 세 시간 달려 찾아온 솔로 플레이용 던전이었다.

행운과 관련된 성좌, 칭호를 얻기 위한 던전을 알아보던 차에 마침 던전 하나가 배정된 것이다.

길드 같은 뒷배가 없으면 개인 던전 신청은 몇 달씩 지연되는 일이 잦은 곳이 바로 서울.

각오는 했었던 상태지만 배정된 던전이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사실 몰래 던전에서 뒷치기 하려는 것만 아니면 딱히 안전에 문제 될 게 없긴 한데."

상현은 플레이어 협회Player Union의 관리 감독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남부 지방으로 와 있었기에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어설픈 실력으로 뒤를 들이박았다가는 어떤 놈들이든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저놈들이 아까부터 계속 눈에 밟힌단 말이지....'

상현은 자신과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로 서 있는 세단을 흘깃 살폈다.

처음에는 못 느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같은 경로로 자신의 뒤를 밟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미행을 한 느낌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누군가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아니구나. 윤대경과 함께한 던전에서 날 고깝게 본 놈이 있었을지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듯한 상상이 떠올랐다. 전생에도 이런 놈들은 꼭 있었으니까.

아마 윤대경이 그랬을 수도 있고, 다른 5인의 플레이어 중의 한 명이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앞에서야 웃었지만, 뒤돌아서서 비수를 꽂을 생각을 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꼬운 신참 플레이어에게 세상의 쓴맛을 보여주고 싶은 쓰레기 하나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 사주의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걱정하진 않았다.

까다로운 상대처럼 보였다면 조심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살기도 없었다.

살기(殺氣). 죽음의 기운.

그것은 전생에 오랜 시간을 수많은 던전과 전장에서 피를 묻히며 살아온 자신만의 직감이었다.

몬스터를 죽이거나 혹은 자신을 죽이려는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득됐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됐다.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두려움을 유발하는 자들은 이 정도 거리에서도 위협적인 기운을 방출하기 마련이다. 

'몰랐더라도 당할 일은 없었겠지만, 알게 된 이상 눈 뜨고는 당연히 안 당해주지.'

상현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상비품은 충분했다.

체력 물약, 마나 물약도 충분히 사뒀고 활력 물약도 구비했다.

활력 물약은 집중도를 높여주는 물약인데 검술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짧은 교전을 추구하는 상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보조 물약인 셈이다.

'일단 들어가서 기다릴까. 피차 한 번 싸울 거라면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던전이 낫겠지.'

상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꿔 생각하면 상대 입장에서도 던전에 들어간 자신의 뒤를 노리고 싶어 할 것이다.

던전에는 CCTV가 없기에,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촬영되거나 알려질 일이 없다.

"정의구현은 내 전문이지."

상현이 바로 뒷좌석에서 대검을 챙겼다. 이미 보이지 않는 싸움은 시작된 듯했다.

남은 것은 누가 더 깔끔하게 낚싯대를 드리우는가 하는 것이다.

* * *

15분 후.

던전 초입에 놓인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상현이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네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들 반가워?"

생각지도 않았던 상현의 인사에 동시에 넷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나름 기척을 숨기고 뒤를 쫓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쓸데없이 눈치가 좋구나?"

"그래 봤자 뒈질 녀석이잖아?"

"어이, 젊은 친구. 이런 곳에서 뒈지면 어지간해서는 흔적도 잘 안 남는 거 알지?"

총 네 명.

그중 한 녀석만이 활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는 저마다 쓸 만한 검을 쥐고 있었다.

플레이어 아카데미에서 수련과 훈련을 권장하는 직업군이 검사와 마법사다.

그래서 검을 쓰는 놈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익숙했다. 상현 역시 전생에 그런 이유로 검을 잡았다.

"누구 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불철주야 뺑이 치느라 다들 고생이 많네! 그런데 한 사람 잡으려고 넷이나 움직이면 쪽팔리지 않냐?"

상현이 소리쳤다.

사실 도발에 가까웠다.

"겁 없는 새끼네, 저거."

"밖에 세워 둔 거 보니 완전 똥차더만? 똥차 몰고 다니면서 가오는 더럽게 잡네?"

"원래 대검 쓰는 새끼들 다 그래. 지가 무슨 게임이나 소설 속 전사라도 되는 줄 알더라고."

"허세 쩌는 새끼구만."

상현의 도발이 무색하게, 4인조 패거리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상현을 보았다.

아무리 검소한 플레이어라도 절대 타고 다니지 않을 수준의 고물차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진즉에 불이 나고 안 터진 게 용할 정도였다.

'나도 참 닳긴 닳았네. 이 와중에 뭘 먹는 게 좋을지 행복한 고민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상현은 자신도 모르게 앞뒤로 자리 잡은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아니라 그들의 아티팩트를 살피고 있었다.

분명 위험한 상황인 건 맞는데.

왠지 뭐부터 집어 먹어야 할지 심히 고민되는 뷔페를 찾아온 느낌이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입에 잔뜩 고이는 침은 덤이었다. 

만찬의 시간이 왔다.

6화 행운 - (2)

서로 거리를 두고 탐색하는 잠깐의 적막이 감도는 동안.

'결국은 내 장기를 노리는 거겠지.'

상현은 저들의 최종 목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했을 사주는 단지 이유에 불과하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혹사를 반복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럴 경우 심장이나 간, 폐 등에 무리가 가, 나중에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았다.

중요한 사실은 플레이어와 함께 마정석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의학에도 새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대표적인 것이 마정석의 각인을 이용한 장기 이식술이었다.

일반인의 장기 이식은 보통 사후 면역 억제제의 투여를 기본으로 하지만, 플레이어의 경우는 마정석을 장기에 각인시킨 뒤에 생체화 과정을 거치면 면역 억제제가 필요하지 않았다.

쉽게 장기를 갈아 끼울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장기의 수요도 늘었다. 당연히 불법적인 경로로도 수요가 대폭 생겨났다.

'여기서 지면 각막은 서울, 폐는 대전, 간은 부산... 아주 전국을 순회하겠군.'

상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위험할 것 같았으면, 이놈들을 도발하는 일조차 시작하지 않았을 테니까.

피잉!

그 사이, 은근슬쩍 측면으로 빠져 있던 궁수가 활시위를 당겼다가 화살을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생에 자신과 같은 검사계 플레이어를 집요하게 노리는 활쟁이들과 숱하게 싸워본 상현이었다.

플레이어와 플레이어 사이의 분쟁과 전쟁! 그것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진 2040년 이후로 흔했던 일이었다.

'이쯤이군.'

사아악!

상현은 화살이 아닌 전방의 검사들에게 오롯이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으로 휘두른 대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화살이 잘렸다.

심지어 마나가 잔뜩 담긴 나름의 일격이었음에도 기세가 무색하게 화살이 무력화됐다.

"내가 처리해주지!"

검사 셋 중에 한쪽 눈에 유독 상처가 심한 플레이어 하나가 패기 좋게 상현에게 맞섰다.

"전부 다 오는 게 좋을 텐데?"

"시간이 아깝지 새끼야!"

"그래?"

상현이 웃으며 그대로 '애꾸눈'에게 쇄도했다. 그는 한 손 장검을 든 검사였다.

'형편 없구만?'

애꾸눈은 너무 정직하게 들어오는 상현의 경로에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뎌도 너무 무뎠다.

애초에 대검을 든 플레이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우직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하는 것 말이다.

'살짝 빠지면서 옆만 찔러 들어가도 만사형통이겠군.'

나름의 계산도 끝났다.

그리고 상현이 우직하게 파고들자 계획했던 대로 살짝 회피하며 곧장 상현의 옆을 치려고 했다.

"...?"

그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앞으로 쏠려 있던 상현의 무게중심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대검의 경로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긴 대검. 이를 상현이 오른손으로만 쥔 상태에서 경쾌하게 옆을 친 것이다.

완벽한 기만. 예측하기 힘든 경로로 검을 훅 뻗어내는 변칙적인 검술이었다!

쇄애액!

"크아악!"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대검의 날끝이 긋고 지나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으으?"

몸이 굳었다.

마치 잠을 자다가 저항할 수 없는 가위에 심하게 눌린 것처럼 몸이 멈춰버렸다. 순간 환상이나 환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야! 가만히 서서 뭐 해?"

아무것도 못 하고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것을 본 다른 동료의 외침 때문이었다.

"전부 오는 게 좋다고 했잖아."

"으으으!"

애꾸눈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애꾸눈은 앞서서 상현이 왜 그런 경고를 했는지, 완벽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대가는 값비쌌다.

깨달음이 끝날 무렵. 

상현의 대검에 깔끔하게 잘린 목이 청명한 던전의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웅!

목이 날아간 방향과 반대로 고꾸라진 몸뚱이는 잠시 팔딱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준태가 죽었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남은 셋이 패닉에 빠졌다.

전혀 계산에 없던 죽음이었다.

상현에 대한 사전 정보는 충분히 입수한 상태였고, 당연히 무모하게 달려든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상현이 스킬로 경직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의 훈련은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검술의 교차에서 바로 승패가 갈려버린 것이다. 이건 예상에 없었다.

게다가 방금 목이 날아간 김준태는 4인조 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였다.

레벨 100. 아주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투 초장에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그런 실력자였다.

그런데 상현에게 작은 상처 한 번 못 내고, 선 채로 목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음은 누구냐?"

"...!"

상현의 말이 살벌하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미 가장 실력 좋은 플레이어가 죽은 마당이라, 남은 3인조의 전의가 꺾여버렸다.

물론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상현의 생각대로 그들은 값비싼 장기를 노리고 있었기에.

오히려 입이 하나 줄었으니, 잘만 처리하면 분배가 늘어날 수 있겠다는 행복 회로도 돌렸다.

"뒈져버려!"

피이잉! 피이잉!

그 사이, 상현의 뒤쪽 방향으로 이동한 궁수가 두 대의 화살을 추가로 날렸다.

까앙! 타앙!

하지만 상현은 이번에는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화살을 쳐냈다.

"X발."

활을 든 플레이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노룩 디펜스! 세상에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검으로 너희들 실력을 증명해 봐."

"X까, 새끼야!"

상현의 도발에 넘어간 애꾸눈의 동료, 반삭 머리의 플레이어가 상현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왜 한 번에 둘이 달려들지 않는 걸까?

상현의 의문은 이내 곧 풀렸다. 애초에 움직임 자체가 팀플레이에 특화된 타입이 아니었다.

보통 플레이어는 차이를 인지하기 어렵겠지만, 전장에서 뼈가 굵었던 상현에게는 잘 보였다.

반삭은 애꾸눈보다 검의 움직임은 빠르지만, 지나치게 어깨 쪽이 빨리 열리는 스타일이었다.

'얘는 데몬 배쉬도 필요 없네.'

스킬을 쓸 가치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한심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사실 반삭 역시 레벨 80의 제법 실력 좋은 플레이어였지만, 상현의 눈에는 아기 수준이었다.

"흣차!"

상현이 감각적으로 반걸음 뒤로 뒷걸음질 쳤다.

후웅!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상현이 있던 위치를 반삭의 검이 횡으로 그으며 지나갔다.

중요한 턴을 먼저 소비해버렸으니 등가교환은 물 건너간 셈.

파앗!

곧바로 상현이 뒷발을 주축으로 몸을 앞으로 튕겨내며, 꽉 움켜쥔 대검으로 목을 갈랐다.

반삭의 입장에서 막을 생각, 아니 그럴 계산조차 나오지 않는 치밀한 반격이었다.

투퉁. 퉁. 퉁.

바닥으로 떨어진 반삭의 머리가 갈라지고 흙 고랑 사이를 처량하게 굴렀다.

슈아아!

그 순간 등 뒤에서 이번에는 제법 강렬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또 한 번 날아들었다.

'보나마나 차징샷이겠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자신의 플레이어 짬밥은 무려 30년이 아니던가?

상현은 달라진 바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쉽게 궁수 플레이어의 노림수를 눈치챘다.

'이건 어떨까?'

순간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상현이 전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오른손 위로 고쳐 잡은 검을 마치 투창을 하듯이 궁수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대검 자체에 추진력을 좀 더 부여하기 위해 데몬 배쉬 스킬도 함께 곁들였다.

검 자체에 약간의 추력을 실어주는 기능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안배였다.

스아아악!

"아니...."

이어진 광경에 궁수가 절망했다.

상현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날린 대검이 순식간에 화살을 토막 내더니 자신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너무 빨랐다.

게다가 묵직한 대검이 폭주하듯이 날아드는 모습은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애초에 대검을 이런 식으로 원거리 공격으로 활용하는 상대를 여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푸확!

"크헉."

몸이 채 반응하기 전에 대검이 얼굴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활을 든 채로 절명한 궁수의 뒤통수 사이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참담한 최후였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유일하게 남은 4인조, 아니 이제는 혼자가 되어버린 플레이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오늘은 지금껏 매번 성공을 거듭해온 그들만의 약탈 공식을 따른 기습이었다.

동행이 아닌 혼자인 플레이어를 노렸고, 실력도 충분히 제압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경직 유발 능력을 염두에 두고 사전 연습과 설계를 다 하고 온 상황!

하지만 된통 당해버렸고 대가는 너무나도 비쌌다.

그가 잠시 넋 놓은 사이. 상현은 어느새 유일한 생존자의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한 놈 남았네."

상현의 맺음말.

그 이후, 플레이어의 기억은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았기에.

* * *

"이번 생에도 성자(聖者)를 성좌(星座)로 둘 일은 없겠네. 업보가 이렇게 쌓여서야."

상현이 대검에 잔뜩 묻은 피를 근처의 시냇가에서 씻어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독 살생을 혐오하는 성좌들이 있다. 그런 성좌와 계약한 플레이어는 보통 힐러 플레이어다.

치유에만 전념하면 몬스터를 직접 죽일 일은 없기 때문이다. 적대 플레이어도 마찬가지.

성자들 중에는 유명한 성좌들이 많지만 어쨌든 자신과 인연을 맺을 일은 없을 듯했다.

상현이 숨이 끊어진 네 명의 플레이어들로부터 차근차근 아티팩트를 챙기기 시작했다.

궁수가 갖고 있었던 활부터 다른 셋의 검까지. 그리고 장신구. 도합 총 여덟 개의 실버 등급 아티팩트였다.

처분하면 각각 최소 4천만 원 이상은 너끈히 받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딱히 팔 생각은 없었다.

각각 민첩, 근력에 특화된 스탯을 갖고 있는 만큼 먹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돈은 벌면 그만이지만 한 번 판매한 아티팩트는 다시 사지 않는 이상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어?"

그때, 상현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반삭 플레이어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였다.

푸른 바다 색깔을 쏙 빼닮은 영롱한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심상치 않아 보였다.

「리커버리 링」

■ 아티팩트 등급 : 실버

■ 아티팩트 소개 : 마나 10을 사용해, 즉시 자신에게 걸린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1분 내에 다시 사용하게 될 경우, 소모하는 마나량이 직전의 2배로 증가합니다.

■ 특수 효과 – 리커버리

"상태 이상 해제 반지를 여기서 얻을 줄이야. 주인을 잘못 만났네. 하긴 경직을 걸 가치도 못 느껴서 바로 목을 날려버렸으니."

뒤를 돌아보자, 눈을 감지 못한 반삭 플레이어의 머리가 처량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물론 감흥은 없었다.

"이건 못 참지."

바로 동기화에 들어갔다.

몸으로 때울 일이 많을 검사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즉각적인 상태 이상 해제는 매우 중요하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반동, 경직도 전부 다 상태 이상이라서다.

이를 즉각적으로 풀어줄 수 있다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샤아아.

이윽고 무의식 속에서 음식으로 형상화된 반지가 찬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냄새는 치킨인데 소스가 왜 이러지?"

상현이 마주한 음식은 생각지도 않았던 끔찍한 혼종이었다. 잘 튀겨진 치킨에 에메랄드빛의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코끝을 강타하는 싸한 내음.

바로 민트 초코 치킨이었다.

지옥문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열렸다.

7화 행운 - (3)

"후우. 하아. 후우."

식사를 마친 상현이 숨을 쉴 때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양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하루종일 양치를 한 것만 같은 이 느낌이 상현은 싫었다.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지만 확실한 것은 본인은 존중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식사는 잘 끝냈다.

상현이 아티팩트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흡수된 리커버리 효과에 대해 바로 확인했다. 

경량화처럼 다른 곳에 적용하지 않아, 별도로 스킬화가 끝난 상태였다.

『리커버리』

■ 스킬 레벨 : 1단계(0.0%)

■ 스킬 소개 : 즉시 자신에게 걸린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을 위해 60초의 대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역시나 흡수되면서 맞춤형으로 다시 설계됐네."

기존에 아티팩트에 있던 내용들 중에서 마나를 소모하는 전제들이 사라졌다. 그 대신 재사용 대기로 바뀌었다. 부담 없이 사용하는 대신, 시간제한이 걸린 셈.

"이 정도도 충분해."

상현은 만족했다.

스킬 소개를 한 번 더 클릭해서 세부 내용까지 살펴보니, 리커버리 스킬은 즉시 발현이 가능한 구조였다.

즉, 얼어붙어 버리거나 기절 혹은 경직 상태가 되더라도, 리커버리 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수 창출이 가능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상태 이상을 걸어서 우세를 잡았다고 확신했을 때, 곧바로 되받아칠 수 있어서다.

"벌써 스킬이 몇 개지? 칭호도 그렇고...."

지난 삶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니 감개무량했다.

그때, 첫 번째 스킬이랍시고 발검 스킬이 생긴 것이 플레이어가 된 지 1달째의 일이었다.

전투에 응용하기에는 버거웠지만 그래도 스킬을 활용하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가?

스킬을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때였다. 덕분에 플레이어로 각성하고도 1년은 짐꾼으로 활동했었기도 하고 말이다.

한데 지금은 홀로 던전을 누비고 다니며 전투를 펼치고 있으니 정말 꿈만 같았다.

"할 수 있어."

의지가 샘솟는다.

생각지도 않았던 회귀를 하고.

사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바뀐 현실에 적응하면서 상현이 내렸던 결론은 딱 하나였다.

다시 잡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는 것.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꼭 최고가 되자는 것이었다.

단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왔다.

이 좋은 조건을 두고, 예전과 똑같이 그렇고 그런 플레이어로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제는 그만한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자만에 빠져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그럼 이제 남은 아티팩트도 전부 먹어볼까?"

상현이 자신의 앞에 펼쳐 놓은 아티팩트를 다시 살폈다.

죽은 녀석들에게서 회수한 무기들이었다.

활이야 쓸 일 없으니 당연히 먹어야겠고, 다른 검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가볍거나 예리한 것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하기에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곧바로 식사가 시작됐다.

행운에 관련된 칭호를 얻고, 성좌를 불러내기에 앞서서 꼼꼼하게 진행하는 스탯 업그레이드였다.

[소이드 명궁의 흡수가 끝났습니다.]

[민첩 스탯 8을 영구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스탯, 민첩 스탯 8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흡수가 완료된 소이드 명궁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며 영원히 소멸합니다.]

[...(중략)]

"녀석의 손을 오래 탄 덕분인지 흡수율도 40%라서 놀랐는데 거기에 히든 스탯까지 먹는다고? 운 좋네. 회귀하면서 운도 바뀌었나? 전생에는 운이랑은 담쌓고 지냈는데 말이야."

참을 수 없는 기쁨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궁수의 활을 먹은 것만으로 민첩 스탯이 16이 올랐다.

레벨로 따지면 무려 16을 올린 가치다. 

무엇보다 검사계 플레이어가 어지간해서는 민첩에 포인트를 투자할 일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른 동류의 플레이어들과 벌써 차별화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검사라고 해서, 민첩 스탯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탯은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그리고 기민하고 움직임이 빠른 검사가 지나치게 묵직하고 느릿한 검사보다 나은 것도 사실이고.

얼마 후.

도합 여덟의 무기, 장신구 아티팩트를 먹어 치운 상현이 이번 포식으로 올라간 스탯을 체크했다.

[스탯 상승 현황]

[기간 설정 : 최근 1시간]

[근력 +24 / 체력 +08 / 민첩 +16 / 마나 +10 / 행운 +00 / 회피 +05 / 방어 +10]

"미쳤네."

하나하나 먹을 땐 감흥이 없었는데, 다 먹고 나서 총합을 보니 입이 뜨악하고 벌어졌다.

일단 행운을 제외한 모든 스탯에서 골고루 덕을 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수치가 높았다.

애초에 기습한 4인조가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었던 시간이 길어, 흡수율이 높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가치를 레벨로 환산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오른 스탯만 봐도 레벨 50대 이상의 플레이어 수준은 충분히 되니까.

앞서 함께 던전을 공략한 팀의 조장이었던 윤대경보다도 높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좋은 능력을 전생에는 25년이나 묵히다가 나중에 깨달았으니.... 나 참."

예전에는 몇 년에 걸쳐 이뤘던 성장을 지금은 단 며칠 만에 이뤄내고 있는 중이다.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예전에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었던 긴 시간들이 참 아깝게 느껴졌다. 안쓰럽기도 했고.

"이젠 많은 것이 달라질 거야."

상현은 확신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억이 가득한 자신에게 실패보다는 성공이 압도적으로 더 많을 것이기에.

* * *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후우."

한숨을 힘껏 토해낸 상현이 미리 준비해 온 두꺼운 안대를 눈 위에 착용했다.

비는 곳 없이 완벽하게 눈에 밀착하게 되어있어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형태였다.

"그놈의 행운이 뭔지. 참 얻기 힘들다."

상현이 볼멘소리를 내며 대검을 움켜쥐었다.

행운에 관련된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상현이 선택한 칭호 레시피는 대상을 보지 않고 감각만으로 몬스터를 잡는 조건이었다.

초소형, 소형 몬스터를 제외한 동류의 몬스터 500마리를 시각을 차단하고 제거하면 '운수 좋은 날'이라는 칭호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상대하기 편한 고블린이 있는 전주의 던전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고블린 자체는 상대가 안 된다. 다만 시각 차단은 핸디캡이 확실히 크기는 했다.

'물론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지만.'

전생에 자신에게 다양한 형태로 모래주머니를 채워주며 극한의 환경에서 훈련했던 상현이었다.

시각 차단. 한 손 전투. 감각 마비. 시각 정보 왜곡 등등. 일부러 부정적인 요소를 만들었다.

전장은 늘 최상의 환경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 훈련이었다.

어떤 특수한 던전이나, 다른 차원과 일시적으로 연결되는 게이트(Gate)의 경우에는 이런 악조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그래서 상현은 시각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 훈련을 늘 끊임없이 해왔고, 오늘도 그 연장선이었다.

"고블린 정도의 수준은 바람의 흐름과 소리만 들어도 충분하지."

상현이 대검을 든 채로 자신 있게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키헤헤! 케케!

그러자 던전 여기저기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고블린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꼬나쥐고는 슬쩍 나섰다.

웬 미친놈이 나타난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저 정도로 눈을 가렸으면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이잉!

그때, 고블린 궁수 하나가 힘껏 당긴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상현에게 날아들었다.

휘이. 휘이이. 휘이이이!

화살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순차적으로 커진다. 상현은 그 차이를 정확히 알았다.

솨아악! 

투둑.

대쪽같이 공간을 베어낸 상현의 대검이 깔끔하게 화살을 반 토막으로 만들어버렸다.

"인사는 잘 받았다!"

상현의 가려진 눈 아래로 드러난 붉은 입술에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전투가 시작됐다.

피 분수를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현의 갑작스러운 공세에 당황한 고블린들이 움찔하는 사이, 상현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목을 베었다.

솨아아악! 쇄액!

키이이이! 으에에에!

기세 좋게 상현을 덮쳤던 고블린들은 참수 대행진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지 못함에도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처럼 동족을 도륙하는 학살자를 맞이한 탓.

상현은 자신의 주변에서 들리는 발소리와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고블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고블린만이 가진 특유의 악취와 고유의 살기는 2% 부족한 정보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경량화 효과 덕분에 대검을 휘두르는 상현의 팔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으며, 그만큼 고블린들의 목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다.

'예전이면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할 전장이 이젠 놀이터 같네. 너무 쉽다. 하품이 날 정도야.' 

상현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애초에 일직선으로 뻗은 형태의 던전이라 이동 경로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겁 없이 달려든 고블린은 남김없이 저승으로 떠났고, 눈치가 빠른 놈은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다.

초반에 기세 좋게 화살을 쏘아대던 고블린 궁수도 자취를 감췄다. 상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키헤에에!

그 와중에도 용기 있는 놈은 하나 있었는지 고함을 지르며 상현에게 달려들었지만.

"하나. 둘. 셋!"

후우웅! 

푸슈슈!

상현이 정확히 셋을 세고 휘두른 대검에 깔끔하게 목을 잃고 말았다.

과분할 정도의 크리티컬 대미지까지 터지는 바람에 더 굴욕스러운 죽음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D급 칭호, [운수 좋은 날]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15로 오름과 동시에 칭호까지 한 번에 주어졌다.

상현이 노린 레시피에 맞게 등장한 칭호였다. 

보지 않는 상태로 동류의 몬스터를 500마리나 잡아야 하는 만큼 결코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아마 앞으로 십수 년간은 이 칭호의 레시피가 잘 살아 있을 것이다.

[운수 좋은 날]

■ 칭호 등급 : D급

■ 칭호 소개 : 행운 +20

■ 추가 조건 : 획득 이후로 동류의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사냥할 때마다 0.1의 행운 스탯이 추가됩니다. 최대 10까지 추가 스탯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최대치까지 쭉쭉 빨아야지. 시간 끌 것 있나?"

상현이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미뤄 좋을 게 없다. 스탯은 빨리 올릴 수 있으면 올리는 게 맞다.

스탯 하나에 생사가 갈리고, 아티팩트를 얻지 못할 불행이 생각지 않은 행운으로 바뀌기도 한다.

단 1의 스탯이라도 낭비하거나 가볍게 무시하고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티끌 모아 태산. 속담이 나오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 *

"운수 좋은 날 하나만으로 행운을 30이나 올렸네? 행운 30 올리는 아티팩트를 사려면 최소한 플래티넘 등급은 되어야 하는데."

추가 고블린 학살(?)을 마치고, 행운 스탯을 열 단계 더 끌어올린 상현이 미소를 지었다.

플래티넘 등급의 아티팩트는 평균 거래가가 무려 10억에 달한다.

희소성 때문에 비싼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칭호 하나로 그만큼의 현금 가치를 대신한 것이다.

새삼 느끼는 칭호의 힘이었다.

그래서 칭호를 쓸어 담을수록! 

시간이 흘러가면서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보다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게 된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현이 생각하는 그림이기도 했다. 이른바 칭호 콜렉터, 혹은 칭호 독식자.

그때.

[행운의 여신이 당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밉니다.]

[대우주를 떠도는 순례자가 당신의 신묘함에 감탄하며 대화를 요청합니다.]

[타락한 차원의 청소부가 행운보다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재주에 관심이 없는지 묻습니다.]

"드디어!"

이 던전에 온 가장 큰 목적이었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좌였다.

8화 행운 - (4)

성좌란 플레이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로 인생 전반을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레이어가 스탯을 육성하는 방향성이나 강화될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서다.

과거의 삶에서 상현은 [대기만성형 모범생]이라는 특이한 성좌와 계약을 했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성좌와 접점이 처음 생긴 것도 플레이어가 된 지 10년째의 일이었다.

'대기만성형 모범생'은 어느 차원계에 자리를 잡은 연구자로, 상현에게 이런 특전을 줬었다.

■ 성좌 : 대기만성형 모범생

■ 효과 : 레벨 850 이후, 보유한 모든 아티팩트와 칭호의 스탯 효과가 2배로 적용됩니다.

레벨 900 이후, 동일한 분야에서 효과가 3배로 적용됩니다. 레벨 950 이후... (중략)

미래를 생각한 최고의 안배라고 생각해서 성좌를 선택했지만 결과는?

레벨 850이 된 그 날에 회귀를 해버렸다. 성좌의 덕을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못 본 셈이다.

"정황상 대기만성형 모범생이 날 회귀시켰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러면 고마워해야 하나?"

대답도 들을 수 없을 생각을 하며, 상현이 앞에서 점멸하는 성좌에 대한 알림을 살폈다.

지금 바로 성좌를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성좌의 효과를 최대한 많이 보려면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게다가 상현이 원한 성좌도 나타났고, 말이다. 바로 행운의 여신.

"눈 감고 재롱잔치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셨나 보네요?"

[행운의 여신이 세상에서 그렇게 운 좋은 검사는 처음 봤다며 신기해합니다.]

행운의 여신은 앞서 상현이 눈을 가린 채로 고블린들을 벤 것을 실력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처럼, 운 좋게 칼춤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던전에 오기 전에 괜히 그녀를 변태적인 등장 조건을 가진 성좌라고 평가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딱 이러한 케이스에서만 후견이 될 성좌로 나타난다. 

전생에 기적의 사수라고 불렸던 플레이어 하시모토에게 들은 얘기다. 그가 이 성좌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기본기도 잡혀있지 않은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 허영심만 많고. 그런 놈 거는 좀 빼앗아가도 괜찮아.'

상현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원래 맛있는 음식은 보기 좋은 그릇에 담아야 더 맛이 나는 법! 상현은 자기 자신이 그런 그릇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갑자기 성좌가 세 분이나 나타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흔치 않은 일이기는 했다.

보통 성좌 하나가 먼저 관심을 갖고, 이후에 하나씩 새로이 등장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가 하나 있기는 했다.

저 행운의 여신의 존재다.

성좌가 존재한다는 차원단에서도 행운의 여신은 제법 먹어주는 인싸라고 했다.

여기저기 오지랖 넓게 돌아다니다 보니, 적대, 중립, 우호 할 것 없이 여러 성좌에 인맥이 있었다.

같이 나타난 성좌도 그녀의 말에 휘말려 나타났을 터.

[행운의 여신이 말하기를 자신은 독점욕이 없기에 선택하더라도 다른 성좌와 또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맞아. 이게 하시모토가 말했던 행운의 여신의 장점. 성좌와 일대일 계약 관계가 성립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행운의 여신과 함께 나타난 두 성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순례자는 성자에 가까워서 피를 수시로 봐야 하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고, 청소부는 그냥 쓰레기였다.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확실하게 가진 미치광이 성좌였다.

'일단 행운의 여신과 계약을 맺자. 좀 시끄러운 성좌이긴 하지만 뭐, 덕분에 입이나 귀가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

상현이 달리 고민할 것 없이 행운의 여신과 연결된 하늘색 빛의 링크를 클릭했다.

[성좌 '행운의 여신'과 계약하시겠습니까?] 

[한 번 맺은 계약은 플레이어가 사망해도, 30년 이후까지 소멸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됩니다.]

"계약하겠어."

바로 그녀를 선택했다.

앞으로 아티팩트를 먹는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행운 스탯의 영향력이 큰 만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선택하더라도 나중에 또 다른 성좌를 선택할 수도 있고 말이다. 손해 볼 게 없다.

밑져도 본전인 장사라면 당연히 못 먹어도 고다.

[행운의 여신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차원단에서 플레이어 신상현과 행운의 여신이 맺은 계약을 유심히 지켜보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우호적인 성좌 열다섯이 진심으로 계약을 축하하며, 당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적대적인 성좌 셋이 자신의 후견 플레이어로 하여금, 당신의 성장을 방해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여간 성좌도 허언증 걸린 놈들 많아.'

제법 위협적인 메시지가 보였지만 상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뤄진 계약을 살폈다.

■ 성좌 : 행운의 여신

■ 효과 : [소원을 말해봐]

첫째. 모든 공격 행위 시, 반드시 크리티컬 히트가 발동됩니다. 

둘째. 유니크 등급 이상 아티팩트를 먹을 경우 반드시 히든 효과가 개방되어 계승됩니다.

셋째. 중간 보스 몬스터, 보스 몬스터를 제거할 경우, 등급이 낮더라도 100% 확률로 아티팩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넷째. 레벨 업으로 얻은 포인트를 행운에 투자할 경우, 1포인트로 스탯 2를 올릴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투자한 보너스 포인트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됩니다.

"그래, 이거지!"

상현이 환호했다.

전생에 정말 인연이라고는 더럽게 없었던 성좌를 한 번에 셋이나 만나지 않았던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원했던 성좌를 불러내어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자신이 호감을 가진 이성이 되레 수줍게 먼저 고백을 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짜릿했다.

반드시 크리티컬 히트가 발동된다는 것은 대미지 기대치의 두 배가 항상 구현된다는 뜻이다.

접근전과 난타전에 특화된 검사인 상현에게 너무 좋은 효과였다.

그리고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 다음 단계인 유니크 등급부터 이기는 하지만....

아티팩트를 먹을 경우 확정으로 히든 효과를 얻게 된다는 점 역시 대단한 특전이었다.

그 정도 등급의 아티팩트면 숨어 있는 효과의 파괴력과 확장성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확정 아티팩트 드롭도 정말 매력적이고. 브론즈급 아티팩트도 최소 1000만 원은 하니까.'

거를 타선 하나 없는 성좌의 효과에 상현은 보이지 않는 마음 속에서 쾌재를 불렀다.

너무 대놓고 좋아하면, 저 오지랖 넓은 행운의 여신이 괜히 득의양양할지도 모를 테니까.

[행운의 여신이 다른 성좌를 소개해 줘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고민을 좀 해보려고요. 제게 어떤 귀하신 분이 또 가장 잘 어울릴지."

[행운의 여신이 자기 주관이 강한 모습이 꽤 매력적이라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박수까지야."

상현이 웃으며 대검을 쥐었다.

안대도 이제는 필요 없었다.

목적은 다 이루었고, 남은 것은 보스 구역에서 불청객을 기다리는 고블린 로드를 사냥하는 것뿐.

[대우주를 떠도는 순례자가 번호표를 뽑고 가겠다며, 다음 만남을 기약합니다.]

[타락한 차원의 청소부가 언젠가 당신의 머리를 가져가도록 하겠다며 긴장하라고 말합니다.]

"순례자님은 다시 뵙도록 하고. 청소부 너는 입만 털지 말고 실천을 해라, 좀."

청소부는 원래부터 저런 성좌라는 것을 알기에 상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 * *

대망의 보스전.

크오오오!

고블린 로드가 양손 도끼를 패기롭게 휘두르며, 붉은 눈빛과 함께 강렬한 포효를 뿜어냈다.

다양한 상태 이상 효과 중에 위압 효과를 유발하는 포효였다.

경직이 몸을 굳게 만들고, 스턴이 일시로 정신을 잃게 만든다면, 위압은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자신 있게 치고 나가야 할 상황에서 몸이나 정신이 수비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위압의 무서운 점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에 몸과 정신이 잠식된다는 점이었다.

『리커버리』

상현은 위압이 걸리는 순간, 감정에 휘말릴 틈도 없이 바로 리커버리로 상태 이상을 걷어냈다.

그를 상대하는 고블린 로드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위압을 걸어둔 다음, 전의를 잃은 불청객을 극한까지 휘몰아쳐 죽이는 것이 자신의 밥줄인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상현의 리커버리 쿨타임과 똑같은 고블린 로드의 포효는 가위바위보 싸움에서 무조건 질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대로 잘 안 되지?"

상현은 여유로웠다.

오죽하면 고블린 로드를 상대로 단 한 대의 피격도 허용하지 않는 자체적인 조건까지 만들었을까?

'녀석을 상대로 내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정도면, 현재 내 실력이 레벨 100대 플레이어는 확실히 된다는 얘기야.'

상현은 이렇게 자신의 전투력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그래야 눈높이에 맞춰서 분수에 맞게, 가장 최적화된 던전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실력으로 레벨 50대 미만의 플레이어들이 오는 고블린 던전은 완전히 재능 낭비였다.

지금보다 수준을 두 배는 높여도 됐다. 최소 100레벨 플레이어 권장의 던전 말이다.

허억. 헤엑. 후엑.

침을 질질 흘리며 지칠 대로 지친 고블린 로드가 좌우로 흐느적거렸다.

회피 원 패턴으로 갖고 논 상현의 페이스에 휘말려 대부분의 체력을 소진한 탓이었다.

"내 운을 한 번 시험해볼까?"

『데몬 배쉬』

푸욱!

첫 번째 데몬 배쉬가 들어갔다.

고블린 로드의 약점인 하복부를 대검이 찌르는 순간, 바로 고블린 로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우우!

자그맣게 활성화된 고블린 로드의 원형 아이콘 모양에서 푸른 테두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2초.'

상현이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테두리의 푸른색이 회전하는 속도만 봐도, 지속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어어....

물론 2초 동안, 고블린 로드는 육신을 발라내는 상현의 칼부림에 정육점 고기처럼 썰려 나갔다.

두 눈 부릅뜨고 자신의 몸이 육회가 되는 광경을 봤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연장하면 딱 맞겠군.'

푸른색 테두리가 딱 손톱 반 마디만큼 남아, 해제를 눈앞에 뒀을 무렵.

『데몬 배쉬』

『첫 번째 지연 효과가 적용되어 확정적으로 경직 상태가 연장됩니다.』

상현이 지연을 연장시켰다.

그오옥...?

고블린 로드가 경악했다.

이제 몸에 걸린 속박이 풀리는가 싶었는데, 손 쓸 틈도 없이 바로 연장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죽음은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대로 느끼는 현장이다.

지금 딱 고블린 로드의 상황이 그랬다. 

사악! 사악! 푸욱! 푸욱!

끄으으으!

대검이 묵직하게 가슴팍을 가를 때마다 피분수가 사방으로 튀면서 깊은 창상(創傷)이 생겨났다.

이내 대흉근이 찢겨 나가며, 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갈비뼈도 절단됐다.

"다시 한 번!"

『데몬 배쉬』

『두 번째 지연 효과가 적용되어 경직 상태가 연장됩니다.』

상현이 막 끝나려던 지연을 또 한 번 연장했다. 90%의 확률이었고, 결과는 확률을 정확히 따랐다.

끄워어어어어!

고블린 로드가 절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푸욱!

상현이 힘껏 지른 대검에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당한 고블린 로드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차례도 상현을 때려보지 못하고 절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고블린 로드에게서 방패 하나가 드롭됨과 동시에 생각지도 않았던 칭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D급 칭호, [Don't Touch Me]가 주어집니다.]

"이거 행운, 회피 스탯 보조에 스킬 강화까지 해주는 완전 꿀 칭호잖아?"

메시지에 표시된 칭호의 이름을 살피는 상현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행운의 여신이 확실히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모양이다.

9화 관심 - (1)

고블린 로드에게서 떨어진 방패도 방패지만, 생각지도 않은 칭호의 등장이었기에 바로 살폈다.

[Don't Touch Me]

■ 칭호 등급 : D급

■ 칭호 소개 : 행운 +30. 회피 +10

■ 추가 효과 : 지정한 스킬을 한 차례 강화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시스템에 맞게 설계된 계수에 따른 상승이 일어납니다.

"행운 30, 회피 10. 행운의 여신도 그렇고.... 내가 운이 좋아서 안 맞은 거라고 생각하나?"

[행운의 여신이 이 정도로 맞지 않는 것은 보통 운이 좋아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실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까?"

[행운의 여신이 운이 좋은 것도 실력이라며 당신이 행운이 따라다니는 플레이어라고 기뻐합니다.]

"일방통행이네, 이 말은."

상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필요한 스탯을 얻었다.

회피 스탯도 야금야금 올라가고 있는 중이라, 점점 기대치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

회피 스탯이 100을 넘게 되면, 10% 확률로 상대의 공격을 확정 회피하는 기전이 활성화된다.

플레이어가 의식하건 그러지 않았건 간에 다양한 보정이 일어나며 회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격자 입장에서는 회심의 일격이라고 믿었는데 빗나가는 상황이 생겨버리는 셈.

그렇기에 회피 스탯이 높은 플레이어를 상대할 때는 변수가 발생하는 상황이 참 많았다.

몬스터든 플레이어든 근접 거리에서 타격을 주고받을 확률이 높은 것은 역시 검사 플레이어다.

그래서 회피 스탯 상승은 상현에게 무조건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좋은 효과였다.

행운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일단 스킬 강화는 나중에 괜찮은 녀석을 찾아서 결합하기로 하고. 데몬 배쉬에는 좀 아쉬우니."

상현이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고는 바로 상태창을 살폈다.

<플레이어 - 신상현>

■ 레벨 : 17

■ 칭호 : 5개

■ 성좌 : 행운의 여신

■ 스탯 현황

[근력 37 / 체력 20 / 민첩 28 / 마나 20 / 행운 102 / 회피 30 / 방어 20]

[분배되지 않은 포인트 : 0]

"방금 고블린 로드를 잡으면서 레벨업으로 얻은 스탯까지 행운에 투자하니 바로 100이 넘네?"

상현이 17이라는 낮은 레벨 수준에 맞지 않게 단숨에 100을 돌파한 행운 스탯에 깜짝 놀랐다.

스탯이야 행동해온 대로 오르기 마련이니, 자주 전체 상태를 살피진 않기 때문이다.

스탯 수치와 확률의 상관관계를 다룬 리포트를 봤던 것에 따르면, 행운 스탯 역시 회피처럼 100 이상을 달성하는 시점에 10%의 증가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행운 스탯이 아예 없는 플레이어의 획득률이 0%라면, 100인 경우 10%쯤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확률 상승 곡선은 스탯이 오르면서 점점 꺾이지만, 어쨌든 입증된 결과는 그랬다.

"핵심은 나는 성좌 덕분에 확정적으로 아티팩트를 얻는다는 사실이고. 즉, 아티팩트가 나올 경우 등급이 높을 확률이 올라간다."

이것 역시 다수의 표본을 조사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입증된 상관관계였다.

아예 전제가 0%인 것. 그리고 5%, 10%인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이가 극명해진다.

어느 시점부터는 고(高)등급의 아티팩트를 획득하기 시작하고 그만큼 격차가 벌어지게 되니까.

상현의 스탯 투자는 단기가 아닌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투자였다. 그것도 효과가 확실한 투자.

행운을 작정하고 올리는 콘셉트인 '로또 플레이어'들도 행운 100 달성은 빨라야 레벨 70쯤 된다.

그런 점에 비교해 본다면, 상현이 레벨 17에 이뤄낸 지금 성과는 보통 지름길이 아닌 셈이다.

"식사 시간이군."

상현이 고블린 로드의 시신 옆에서 들어 올린 방패를 살폈다.

고블린 족 투사 중 하나인 쿠드니스라는 전사가 남겼다는 방패.

방어력 20을 올려주고, 새크리파이스Sacrifice라는 특수한 효과를 가진 아티팩트였다.

■ 아티팩트 소개 : 마나를 사용해서 방패의 힘을 강화하고, 입은 피해만큼 치유력으로 전환합니다. 단, 모든 과정에 마나가 등가 교환으로 소모됩니다.

■ 특수 효과 : 새크리파이스

"이놈도 마나 잡아먹는 괴물이라, 아티팩트 그대로 쓰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어."

애초부터 먹는 것을 염두에 둔 상현에게는 걱정될 것이 없었다.

아마 흡수하고 나면, 마나를 쓰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다른 방식으로 대체될 테니까.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실버 등급의 아티팩트라 흡수율은 20%였고, 방어력 4를 계승하는 가운데 새크리파이스라는 쓸만한 효과를 건질 수 있었다.

형상화는 무난하게 흰쌀밥에 김치 몇 조각으로 이뤄졌다. 기쁘게 먹어줄 수 있는 최고의 메뉴였다.

* * *

부우우웅.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 안에서 상현이 힘껏 액셀을 밟으며, 생각에 잠겼다.

왜앵. 애애앵. 왜앵.

"차부터 바꿔야 하나?"

그래도 나름 정이 든 중고차인데, 죽지 못해 겨우 안간힘을 내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당장에 펑, 하고 터져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백미러로 뒤를 보니,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겁이 날 정도로.

"집도 바꾸긴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차는 새 차를 뽑되, 적당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빌 수 있는 RV 정도면 좋을 듯했다.

집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강력한 치안과 더불어 플레이어에게 특화된 주거 시설이 꽤 많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타운'이라고도 불리는 지역으로 별도의 경비 업체는 물론 보안 시설까지 완비된 곳이었다.

가격은 거주 아파트의 등급마다 다르지만, 가장 낮은 단계가 보증금 1억 원, 월세 500만 원이었다.

지금보다 벌이만 조금 더 나아지면 월세는 전혀 부담될 것이 없기는 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플레이어에게 돈은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는 요소라서다. 일확천금의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 궤도에 오를 때까지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가 죽거나 다쳐서 문제이기는 하다.

"일단 스탯과 특수 효과를 가장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아티팩트를 닥치는 대로 먹는 건데."

상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아티팩트를 사려면 돈이 필요하지. 거기에 흡수율을 높여 이득을 더 보려면, 값싼 아티팩트 중에 오래 사용된 녀석을 사야 해."

아티팩트의 흡수율은 등급을 따른다. 예를 들면 브론즈 10%, 실버 20%, 골드 30%, 이렇게 흘러가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흡수율을 더 높이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사용한 플레이어와의 친화도다.

즉, 사람의 손때가 많이, 또 오래 묻었을수록 흡수율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방금 드롭된 아티팩트보다 누군가 사용하던 중고 아티팩트를 먹는 게 효율 측면에서는 훨씬 좋았다.

그래서 좋은 후보가 떠올랐다.

잘 알면서도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람. 바로 윤대경.

권장 레벨 50 미만의 던전들을 착실하게 공략하면서, 2년간 부단히 노력해온 플레이어.

그라면 등급이 낮은 아티팩트를 꽤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얻은 것만 십수 개는 되니까.

각 아티팩트의 스탯은 부족할지 몰라도, 보유 기간과 활용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 흡수율이 높을 가능성이 컸다.

"돈을 좀 확실하게 당겨 놓은 다음에 윤대경 조장을 만나서 거래를 해보는 게 좋겠네."

나름 자존심 있는 양반이라 마냥 호의적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돈 앞에는 장사 없는 법 아닌가?

상현은 충분히 그에게도 자본주의 논리가 통할 것이라 여겼다.

* * *

2시간 후.

상현은 잠실역 10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퀘스트 에어리어에 도착해 있었다. 

딱히 피곤하지 않았기에 무의미하게 집에 가기보다는 일을 하나 더 하고 갈 생각으로 온 것이다.

퀘스트 에어리어는 플레이어 시스템이 활성화한 퀘스트를 연동시켜주는 장소였다.

이 작업을 도맡아서 하고 있는 것은 한국 플레이어 협회. 

대량의 마정석과 함께 전환 장치가 필요하다 보니, 개인 단위로는 진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퀘스트 스톤Quest Stone이라고 불리는 희귀 광석까지 있어야 퀘스트 수령과 연계가 가능한데,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퀘스트 스톤이 내가 알기로 아티팩트 취급을 받는다 들었는데. 먹을 수 있으면 자체적인 해결도 될 텐데... 아쉽군.'

상현이 입맛을 다시며, 10번 출구 주변에 배치된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송파구청 뒤편으로 폭넓게 자리 잡은 장소가 바로 퀘스트 에어리어였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상현이 이동하는 동안, 앞서 식사를 끝낸 쿠드니스의 방패의 변화를 체크했다.

육체와 동기화가 끝난 새크리파이스는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 특수 효과 – 새크리파이스

■ 효과 소개 – 지정된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해, 가해지는 모든 대미지를 치유력으로 전환합니다.

발동 후, 재발동 과정에 30초가 소요됩니다.

'적당하게 절충점이 맞춰진 효과네. 하여간 시스템이 이런 조정은 기가 막히게 한다니까.'

파팟.

동시에 상현의 앞에 작은 창 하나가 활성화됐다. 신체 어떤 부위를 특정할지 묻는 창이었다.

우선 후방 부위를 살폈다.

전방은 검이 있고, 유사시 방패를 활용할 수도 있으니 방어가 쉽지만, 후방은 얘기가 다르다.

'하긴. 후방을 다 커버할 수 있는 특수 효과였으면, 현실이 아니라 소설 속 얘기겠지.'

선명하게 보이는 부위의 구분에 상현이 웃었다. 등 부위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둔 것이다.

이래서야 원하는 부위만 골라서 맞는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방 부위로 관심을 돌렸다.

'차라리 복부가 낫겠네.'

상현이 복근 부위 쪽에 해당하는 위치를 선택했다.

복부는 공방전 중에 전략적으로 포기하기 어려운 부위. 하지만 새크리파이스가 있으면, 의도적으로 빈틈을 노출하는 묘수를 만들 수도 있을 그림이 그려졌다.

'이러다가 금강불괴 되는 것 아닌가 몰라?'

허황된 생각은 아닐 듯했다. 새크리파이스와 유사한 효과는 다른 아티팩트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기에는 값이 비싸고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돈만 있다면.

어느새 에어리어 앞. 

여기서부터는 꼼꼼한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플레이어 스캔. 말 그대로 플레이어의 레벨을 확인하는 일이다.

"잠시 서 주시겠어요?"

"네."

현장 협회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상현이 지정된 자리에 서자마자 한 줄기의 빛이 스쳤다.

- 플레이어 레벨은 17입니다.

부지런하게 다른 직원이 장치에서 들린 숫자를 적은 다음 그것을 상현의 왼쪽 가슴 위에 붙여줬다.

절대 떼어선 안 되는 표식으로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무리해서 수행하다 죽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플레이어께서는 가급적이면 권장 레벨 20 미만의 퀘스트를 수행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잔소리 같은 말도 이어졌다.

하지만 상현은 직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권장 레벨 100이 적힌 구역으로 이동했다.

앞서 던전에서도 느꼈듯, 두 자릿수 레벨 대의 던전으로는 아무 감흥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전투를 치를 실력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수준을 자체적으로 낮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기요, 잠깐만요."

역시 직원 하나가 앞길을 막아섰다. 레벨이라는 숫자를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 자신은 그저 돈 욕심에 눈이 멀어, 무리한 퀘스트를 수령하려는 민폐 플레이어일 터.

하지만 진즉 레벨의 틀을 깬 상현에게 그들의 권유는 고리타분한 외침일 뿐이었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 생각이 있어서 진행하는 겁니다."

"죄송하지만 재고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최근 사망 사례가 많고 심지어 자살 정황까지 확인이 되는지라...."

눈이 잔뜩 충혈된 직원의 눈빛을 보니 정말 많이들 죽어 나가는 모양이었다.

자기 분수를 몰라서 말이다.

10화 관심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