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
다대일(多對一)의 전투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장기전과 단기전을 별도로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장기전에서 일(一)에 위치한 이가 곤란을 겪는 까닭은 대개 체력과 내력, 정신력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여덟 이상의 다수가 한 명을 상대하게 되면 원하던 원치 않던 결국 차륜전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공격을 할 수 있는 방위(方位)에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필연적으로 다수에 속한 이들은 자신의 공격 차례가 끝나면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체력과 내력의 배분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또한 상대의 공격이 자신을 향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드니 긴장감과 정신적 피로도 덜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를 상대하는 일은 어떠한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상대의 공격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끊임없이 쳐 내야만 병장기가 제 몸속을 파고드는 불상사를 막는 법이니.
아무리 숙련된 검수라 하여도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쳐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또한 흔한 일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압도적인 역량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다대일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다대일 전투는 결국 단기전이 된다.
다대일의 단기전에 있어 일이 다를 상대하기 가장 힘든 연유 또한 '방위'다.
통상, 다가 일을 상대하는 합격진은 팔방(八方)을 상정한다. 사방(四方)과 사우(四隅)를 합쳐 팔방이다.
동, 서, 남, 북, 동북, 동남, 서북, 서남에서 동시에 공격이 치달으니 하나의 병장기로 이 모든 공격을 막아 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후방이라 할 수 있는 남, 동남, 서남의 공격로에 대부분의 무인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감이 뛰어나다 하여도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잣거리의 패싸움이라면 몰라도 문파를 이룰 정도의 숙련된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이 정도의 합격진은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은 그렇기에 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 파훼할 것인가.
가장 쉬운 해답은, 일이 수를 늘리면 된다는 것이다.
"춘백 형, 몸은 좀 풀리셨소?"
"이미 진즉에 풀고 왔네."
이춘백과 내가 몸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흑수문도들의 중앙으로 뛰어든 우리는 등을 맞대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하나가 둘이 되었을 뿐이지만, 이는 아주 유의미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었다.
신뢰하는 동료에게 등 뒤를 온전히 맡김으로써 가장 취약한 남, 동남, 서남 방위의 공격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죽어라!"
챙!
푹!
"크악!"
동쪽에서 치닫던 흑수문도가 내 검은 막았지만 거의 동시에 쏘아진 이춘백의 검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동과 서는 등을 맞대고 있는 나와 이춘백 모두의 검이 닿는 권역이니 사지(死地)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흑수문도들이 슬금슬금 옆 방위로 몸을 옮겼다.
다대일이 '다대이'로 변모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공격을 받는 방위가 팔방에서 삼방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를 합격의 마술이라 부를 것이며, 둘부터는 집단이라 말할 수 있는 연유다.
"힘을 아끼게."
"당연한 소리를."
내 대답에 이춘백이 피식 웃고 제 검에 집중했다.
검기나 검사는 만사형통의 필살기가 아니다. 내력과 체력의 소모가 극심한 까닭이다.
때문에 이춘백과 나는 오롯이 신체와 병장기의 힘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물론 우리 둘의 지닌 바 무위가 상대보다 월등하다 보니 적들은 하나둘 상처를 입고 몸을 빼내는 와중이다.
더구나....
챙캉!
검기를 입히지 않았음에도 내 단천검과 날을 맞댄 흑수문도의 검은 여지없이 부러져 버렸다.
과연 천공의 유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나와 이춘백의 분투에도 전투는 끊이지 않았다. 소문파라 하지만 하나의 문파를 온전히 상대하는 것이니 그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기선 제압을 통해 상대의 기를 꺾어 놓기는 했으나 예상대로 큰 효용은 없었다.
제 동료가 쓰러지는 것에 아랑곳 않고 흑수문도들이 독기 어린 눈빛으로 우리에게 재차 치달았기 때문이다.
"금공의 사용을 허한다!"
수장의 명이 떨어지자 분위기가 다시 한번 급변했다.
마유한이 그러했듯 흑수문도들의 몸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흑수문도들이 각자 제가 익히고 있는 마공을 발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마공(魔功)이라는 말 대신 금공(禁功)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흑수문이 백 년의 긴 세월 동안 비밀을 숨기며 터를 잡을 수 있었던 연유를 조금이나마 알겠다.
마유한이 모지리가 아니었다면. 아니, 내가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마교의 간자라는 사실을 결코 밝혀낼 수 없었으리라.
여하튼 지금, 그 비밀이 온전히 깨졌다. 흑수문 전체가 마교의 간자인 것이 들통난 이상 우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은 목숨과 같으니,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챙! 챙! 챙!
"죽어라!"
퍼억!
"조심하게."
내 빈틈을 노린 흑수문도의 검을 이춘백이 발길질로 막아 주었다.
"고맙소."
기실 약선심결 이 단공으로 도검불침에 이른 몸인지라 위기는 아니었으나 비밀은 언젠가 내 몸을 지켜 줄 구명절초가 되는 법이니.
이춘백 덕분에 내 목숨을 한 번 구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죽어라!"
챙! 챙!
여태껏 제 밑천을 숨기던 흑수문도들이 모든 것을 꺼내 들었으니, 전투의 양상이 훨씬 치열해졌다.
마공을 개방한 흑수문은 소문파의 저력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 예상한 바 아니겠는가.
"할 만한가?"
"아직은."
이춘백은 아직 여유가 넘쳤다.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을 경직시키던 긴장이 풀렸다.
"그럼 마저 힘내게."
"춘백 형도 힘내시오."
이춘백과 나는 차분하게 하나씩 대응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이 시작인 법이다. 다수를 상대로 이기는 방법은 눈앞에 보이는 적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임을 안다.
챙캉!
또 흑수문도 하나의 검을 부러뜨렸다.
"이제 좀 몸이 풀리는구나."
힘든 와중에 기세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챙!
"그런 말 할 시간이 있으면 칼질이나 한 번 더 하게."
카가각.
"춘백 형도 지금 입을 열지 않았소?"
퍼억!
"이건 다르지."
믿음직한 동료와 함께하니 그 길이 멀지 않게 느껴졌다.
* * *
통상 완숙한 무인이 무아(無我) 혹은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와 무공에 큰 성취를 이룬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 무아라는 녀석은 언제 찾아오는가. 혹은 어떻게 찾아가는가.
강호에 널리 알려진 방법은 두 가지였으니, 바로 운기행공과 치열한 생사결이다.
생사결 와중에 깨달음을 얻고 경지가 상승하는 무인의 이야기는 그저 그런 낭설이 아니라는 뜻이다.
챙! 챙!
난생처음 치르는 긴박한 생사결 속에서 나는 무아에 침잠하고 있었다.
이미 온전히 내 것이 된 단천검결의 묘리들이 검 끝에서 피어났다.
챙. 서걱. 팟. 퍼억. 휙.
검을 막고, 적을 베고, 검이 모자라면 발을 차고, 그 와중에도 몸을 틀어 적의 검을 피했다.
의식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무공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무공이 되어 있었다.
들썩이던 가슴팍이 평온해지고, 과격하게 움직이느라 삐걱거리던 관절들이 아프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지고, 내 마음이 닿은 곳으로 검이 향하니. 어쩌면 나는 지금에야 처음으로 온전한 심즉행(心卽行)에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무아에서 벗어난 내 눈에 보인 것은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수많은 흑수문도들이었다.
그리고....
"내 아들을 어찌했느냐?"
벌건 눈을 한 흑수문주가 있었다.
"죽였소."
담백하게 그리 답했다. 누차 말했듯, 그들에게 구태여 진실을 알릴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그럼 너도 함께 가자꾸나."
잠력을 격발한 듯 흑수문주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익힌 마공이 예사롭지 않은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진한 마기가 그의 몸에 넘실대는 것 또한 보였다.
"죽어라!"
흑수문주가 내게 노도와 같이 돌진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힘이 세지거나 내력이 증폭된다고 무공이 고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걱.
단천검이 흑수문주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무아의 편린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까닭에 지금 내 움직임은 초절정의 단천명보다 한 수 위라고 평할 수 있겠다.
"성불하시오."
털썩.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수문주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스릉.
단천검을 납검하며 심상을 가다듬었다. 깨달음의 단초를 놓칠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내 시선이 흑수문주의 시신을 향했다.
당신에게 억하심정은 없다.
하지만 마교의 간자를 용서할 수는 없다. 내 다시는 이 세상에 정마대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당신은 그냥 운이 나쁜 까닭에 조금 빨리 귀천했다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고생했네."
개운한 얼굴을 한 이춘백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더 이상 제 발로 땅에 서 있는 흑수문도는 없었다.
* * *
정보를 취합하는 것과 숨겨진 물건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숨겨 놓은 물건을 찾아내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역시나."
문주전에서 비밀 공간이 있을 법한 곳을 뒤지자 비밀 금고가 나타났다.
서걱.
검기를 입은 단천검으로 금고의 문을 잘라 내니 고급스러운 자태의 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귀중한 물건을 숨기는 사람의 심리는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니,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조금만 갖춘다면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딸깍.
함을 열어 보니 하수오의 향긋한 향내가 풍겨 왔다.
공청석유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았다. 내 비록 만년하수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것이 만년하수오가 확실하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함을 다시 닫고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게 무언가?"
뒤늦게 들어온 이춘백이 나에게 물었다.
"귀중한 것이오."
내 대답과 동시에 흑수문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때마침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이놈들! 꼼짝 마라!"
개방의 자오개가 무림맹 산서 지부의 무인들과 함께 흑수문에 들이닥쳤다.
* * *
"단둘이서 이 모두를 제압했단 말인가?"
육척에 이르는 대도(大刀)를 들쳐 멘 거한이 내게 물었다. 나는 이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무림맹 산서 지부의 총괄지부장, 막리도(莫利刀) 팽가헌이다.
산서는 예로부터 대문파가 터를 잡지 않은 곳이니 인접한 하북에서 무림맹 산서 지부에 요인을 파견한 것이다.
아무리 마교의 간자에 관련된 사안이라 하나 이런 거물이 불쑥 등장할 줄은 나도 몰랐음이다.
무림맹의 한 지부를 총괄한다는 것은 그가 곧 강호 명숙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팽가헌은 오대세가의 일좌인 하북팽가에서 자랑하는 조화경의 고수였다.
즉, 그는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제 이름을 당당히 올린 고수기에 내가 그를 모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팽가헌 대협을 뵙습니다. 강호 초출, 단천가의 명입니다."
포권을 취하며 그에게 알은체를 했다.
"호? 자네, 나를 아는가?"
"막리도의 위명이 중원에 널리 퍼져 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예로부터 강호 무림은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곳 아니겠는가. 저 자신을 알아보는 후기지수를 싫어할 무인은 없다 하겠다.
"허허, 단천가에서 자식을 아주 훌륭하게 키웠구만. 나도 단룡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윗배분 고수가 아랫배분의 고수를 먼저 알은체하는 경우는 잘 없다. 강호의 문화가 그러한 까닭도 있겠지만, 자존심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내가 그를 먼저 대접했으니 그 또한 나를 대우해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아주 좋은 관계의 시작이라 평할 것이다.
하지만....
"한데 왜 그랬는가?"
"예?"
"왜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을 먼저 쳤느냔 말일세."
그의 태도가 호의적이라 하여 방심할 순 없다.
팽가 특유의 호방한 외형을 지닌 팽가헌이지만, 방심해선 안 되는 인물이기에 그렇다.
팽가헌의 별칭이 '여우곰'임을 내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31화 사 단공 증폭 (1)
막리도 팽가헌.
기실 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하여 막리도(莫利刀)라 부른다지만, 이는 잘못된 별호라 할 것이다. 마구잡이로 도를 휘둘러 이를 수 있을 만큼 조화경은 만만한 경지가 아니니 말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편견조차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인물이었으니, 막리도라는 별호보다는 여우곰이라는 별칭이야말로 그를 대변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강호 무림을 위해 나서는 일을 어찌 미룰 수 있었겠습니까?"
취풍개, 아버지 단천강과 여백 당숙 등.
그들을 상대하며 배운 것이 있다.
초절에 닿은 고수들을 상대할 때는 어쭙잖은 꾀보다는 정공법이 훨씬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명가의 기상이 느껴지는구나."
팽가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하지만 경솔하지 않았는가?"
"예?"
"자네들 둘이서 섣부르게 나섰다가 이들이 눈치를 채고 도망을 쳤다면 어찌했을 거냐는 말일세."
"그건...."
반박을 하려 할 때, 팽가헌이 내 말을 자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저들이 도망갔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네. 어떻게든 무림맹의 역량으로 추살하면 되는 것이니. 하지만 만약 자네들이 당했으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 말한 팽가헌이 나를 눈에 담았다.
"단룡 단천명, 내 자네가 용봉회합에서 익히 제 역량을 증명했음을 알고 있네."
그리고 이춘백을 담았다.
"낭인 이춘백, 기실 세 번째 시험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면 용의 일좌는 자네의 것이었다지?"
놀랐다. 그가 우리를 이리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자네들은 강호 무림의 새 시대를 이끌어 갈 동량일세. 무모함과 자신감의 차이를 구분해야 할 것이네."
"...."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이 잠시 뜬 사이, 하루의 인연으로 형제가 된 개방의 자오개가 앞으로 나섰다.
"팽 대협, 여기 단룡은 이미 초절정지경에 닿은 고수요, 낭인 이춘백 또한 초절정에 도달한 신진 고수요. 초절정의 고수들에게 무모함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할 것이오."
역시나 개방은 나와 이춘백을 파악하고 있었음이라.
여하튼 자오개가 콧김을 킁 뿜으며 말을 이었다.
"강호를 이끌어 갈 새로운 동량이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 이를 칭찬하는 것이 선배로서의 책무 아니겠소? 팽 대협은 지금 이게 무슨 행태요? 산서 지부장이면 다요?"
삼결개에 불과한 자오개가 무림맹 산서 지부장을 들이박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한번 형제는 영원한 형제다.
의혈개방은 형제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의혈개방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도산검림을 능히 헤치고 나아가리라.
자오개. 그의 모습에서 취풍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래. 이것이 바로 개방이라 할 것인즉, 내 지난 생에 개방을 선택한 것은 천고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개방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 내가 과했네. 사과함세."
자오개가 나서니 팽가헌이 한발 물러섰다. 팽가헌, 그 또한 의혈개방을 존중하기에 그리한 것이겠다.
고맙다는 의미로 자오개를 살짝 바라보자 그가 허리춤에서 몰래 엄지를 세워 보였다.
"일단 이곳을 정리해야겠군."
그리 말하며 팽가헌이 나를 지나쳤다.
동시에 나는 팽가헌의 전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자네도 나름의 비밀이 있는 것이겠지?
그의 시선이 내 품에 갈무리되었지만, 볼록 튀어나온 함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겠다.
-이번에는 도움을 받은 입장이니 그냥 넘어감세. 하지만 조심하시게. 강호 무림이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라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앞으로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 더 꼼꼼하고 신중할 필요성을 느꼈다 할 것이다.
* * *
고급 주루에서도 큰돈을 지불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밀실.
그곳에서 나는 이춘백과 단둘이 대면했다.
"자네, 돈 많나?"
"많소."
하오문의 여월에게 판매한 공청석유의 대금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몸이니, 나는 부자가 맞다.
"그래.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나?"
"춘백 형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렇소."
"허,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무섭구나."
고급 주루의 밀실을 찾은 이유는 당연히 개방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함이다. 이 주루는 산서 지역의 하오문이 관리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개방의 이목을 완전히 피하기 위해선 하오문만 한 곳이 없지 않겠나.
꼴꼴꼴.
"일단 한잔합시다."
"좋지."
그와 고급 검남춘을 나누었다.
"캬-"
"크-"
주막에서 탁주를 입에 댈 때마다 윽 하며 움츠리던 이춘백이 환히 웃었다.
"잠시만 있어 보시오."
이곳은 개방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에 이곳에는 하오문의 눈과 귀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 또한 초절정에 달한지라 그들의 눈은 간파할 수 있겠으나, 귀는 미처 간파하기 힘든 법이니.
우우웅.
내력을 세밀하게 조정해서 이춘백과 나를 에워싸는 기막(氣膜)을 만들어 냈다. 이 또한 초절정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기예다.
"그래. 말해 보게."
다소 긴장한 나와 달리 이춘백은 여전히 평온했다.
"춘백 형, 영약에 관심 있으시오?"
내 질문에 이춘백이 피식 웃었다.
"강호 무림에서 영약에 관심 없는 무인이 어디 있겠나?"
그의 말이 옳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실 난생처음 진심으로 사귄 친우인 그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고 싶은 마음도 있거니와, 나도 모르게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 불신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품속에서 함을 꺼내 들었다.
딸깍.
함을 열어 이춘백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무언가?"
"만년하수오요."
"...!"
영약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처럼 대단한 이름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이춘백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하지만 수양이 얕지 않음인지 이춘백은 금세 신색을 회복했다.
"춘백 형도 짐작하다시피 흑수문에서 챙긴 것이오."
"...."
이춘백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그가 어찌 반응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춘백 형, 내 솔직히 말하리라. 내 이것이 꼭 필요하오. 대신에...."
그리 말하며 품속에 손을 넣던 차.
"가지게."
이춘백의 답을 곧바로 이해 못 한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그거, 자네 가지라고 하였네."
이춘백이 재차 확답을 주었다.
"아니, 춘백 형. 그리 쉽게 결정할...."
하지만 이 말조차 끝맺지 못했으니.
"내 만년하수오나 보답을 바라고 행한 일이 아닐세."
그의 눈빛에 확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겠다.
"내 단지 마교도를 척살하고 친우를 돕고 싶었을 따름이네."
밀실을 가득 채우던 긴장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실 대부분의 일은 자네가 처리하지 않았는가. 나는 힘을 조금 보탠 것뿐이니. 그것은 자네 것이 맞네."
가슴속에 무언가가 치고 올라와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목에서 막혀 버린지라 겨우 쥐어짜듯 한마디를 그에게 건넬 수 있었다.
"...고맙소."
이 말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솔직하고자 한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날 내 목숨을 빌려줄 수 있는 친우를 만든 것 같다.
* * *
"그래도 이건 춘백 형 가지시오."
품속에서 꺼낸 손톱만 한 유리병 하나를 이춘백에게 휙 던졌다.
함부로 던져선 아니 될 귀물이지만, 이 방편이 유리병을 이춘백의 손에 쥐어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그리한 것이다.
초절정에 달한 고수가 겨우 유리병을 못 잡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텁.
유리병을 잡아챈 이춘백이 이를 살피다 영문을 모르겠는지 내게 물었다.
"이게 무언가?"
"그거 공청석유요."
"미친."
만년하수오 앞에서 가까스로 평온을 유지하던 이춘백의 표정이 마침내 무너졌다. 그의 진면목을 본 참이니 나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명이 자네, 무슨 영약 창고라도 되는 겐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주었다.
"그래, 이것도 비밀이겠지."
"맞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제 나를 충분히 알 만큼 알아낸 참이다.
"이리 귀한 것을 받을 순 없네."
이춘백이라면 이리 말할 것이란 사실도 짐작했다.
유리병을 도로 내민 이춘백의 손을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내 원래 이것으로 만년하수오의 값을 갈음하려 했소."
"그것은 자네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 값을 치를 필요가 없네."
"춘백 형 말이 맞소."
맞는다고 답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뒤에 이을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한데 춘백 형이 만년하수오를 그냥 나에게 준다고 그러지 않았소? 그러니 나도 그것을 그냥 춘백 형에게 주어야겠소."
내 고집에 이춘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받을 수 없네."
그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받아 주시오."
"...."
"내 부탁이오."
"후-"
잠시 고민하던 이춘백은 내가 부탁이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공청석유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고맙네. 잘 쓰겠네."
내 그를 안다.
현재의 이춘백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날 정마대전에서 그가 낭왕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민초와 정파 무인들을 구하게 될지 또한 알고 있다.
비록 정마대전이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만들 것이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이춘백이든 이제는 없어질 정마대전의 영웅 낭왕이든.
그가 공청석유를 취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바람직한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확신한다는 뜻이다.
다만 그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겠다.
"그냥, 동생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 주시오."
"그래. 고맙네, 명 아우."
이춘백이 처음으로 나를 '명이 자네'가 아닌 '명 아우'라 불렀다.
"하하. 꼭 드시오. 돈으로 팔 생각일랑 말고."
"알겠네."
검남춘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말하고 보니 알겠다.
강호의 미래니, 정마대전에 대한 대비니.
내 머리는 그러했지만, 내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그냥, 이춘백에게 공청석유를 주고 싶었나 보다.
처음으로 마음을 온전히 준 내 친우에게 말이다.
"검남춘이나 한잔 더 합시다."
그냥 그뿐이었다.
* * *
약선심결 사 단공 증폭(增幅).
이것을 이루기 위한 만년하수오를 마침내 구했다.
마음 같아서야 공청석유를 취했을 때와 같이 곧바로 사 단공에 입공하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 없었다.
약선의 당부 때문이었다.
-사 단공 증폭을 이루면 정기신을 합치시켜 삼화취정에 이른다고 본 도는 일렀느니라.
다만 연자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느니. 사 단공은 앞선 단공과 다소 다른 기전을 가진다는 것이니라.
다른 기전.
이것이 내가 곧바로 사 단공에 입문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때문에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고민했다.
그리고 방금 막, 그 사람의 거처에 도착한 참이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잠입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다른 모든 이들의 눈을 피한 참이니 말이다.
그 사람의 얼굴이 보여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 인물은 내 얼굴을 보곤 잠시 멍하더니....
"당신!"
이리 소리쳤다.
여전하다 할 것이다.
검지를 코에 가져다 대어 수신호를 준 다음, 그녀가 조용해지자 경신법으로 살포시 곁에 내려섰다.
"오랜만이오."
"당신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죠?"
그녀의 의문을 이해한다. 내가 먼저 그녀를 찾은 것은 처음인 까닭이다.
"볼일이 생겨서 말이오."
"드디어 숙녀를 먼저 찾아오는 예를 배운 건가요?"
"그런 걸로 합시다."
바로 양가방의 차녀 양수린이었다.
32화 사 단공 증폭 (2)
-사 단공 증폭은 기실 만년의 영약이 품은 시간을 빌려 오는 단공이니라. 이는 삼화취정과 조화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느니라.
누차 말했듯, 사 단공 증폭을 이루면 조화경에 발을 딛게 된다 하였다. 다른 말로는 삼화취정이라 한다.
삼화취정.
이는 정기신이 합치되었을 때, 무인에게 일어나는 신묘한 변화로 말미암아 명명된 경지다.
정기신의 합치를 이룬 무인이 운기조식을 하면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니, 삼화취정은 추상의 영역이 아니라 실체의 영역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정기신의 합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武)를 궁구하고 도(道)를 수양하는 자라면 자연 의문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바로 '합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나태한 정(精).
미약한 기(氣).
그리고 비루한 신(神).
이 또한 합치라 생각하는 우둔한 이들이 있었다고 했다.
먼 옛날 고행자(苦行子)라 불린 이들로, 무인이나 수행자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그들은 섭식과 수면을 극도로 제한해 몸을 기아 상태까지 몰아붙였다.
섭식이 제한되면 근골이 줄어들고, 육체가 나약해진다.
수면을 제한하면 심신 또한 피폐해진다.
거기에 더해 육체적 수행을 일절 하지 않았으니, 나태한 정이 완성된다.
기는 정과도 긴밀한 연관을 지니는 바. 극도로 쇠약해진 정으로 인해 원정지기가 소진되니, 미약한 기 또한 손쉽게 이룰 수 있겠다.
육체가 망가지고, 기운이 미약해진 이가 어찌되겠나.
고행자들의 신은 시간과 함께 마모되고 망가져 버렸다.
고행자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비루한 신을 이룬 것이다.
이론적으로 생각한다면, 나태한 정만 이루어 내면 정기신의 합치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니, 수많은 고행자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삼화취정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이름이니, 이를 수동적 진보의 역설이라 할 것이다.
일견 도가의 무위(無爲)와 같다 할 것이나, 결국 정기신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었다고 평해야 옳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한 정기신의 절대량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였던 그들의 합치는 처참하게 실패해 버린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고행자들 중 제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를 피어 낸 이는 없었으니, 실로 참담한 결과였다.
사람은 시행착오를 통해 변화, 발전하는 존재다.
무인들은 고행자들의 사례를 통해 삼화취정에 이르기 위한 정기신의 절대량, 최소 요구량을 깨우쳤다.
삼화취정에 이르기 위해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정은 곧 심즉행을 이루어야 한다 할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함이니, 육체를 부단히 수련해야 닿을 수 있는 경지다.
통상, 강호 무림에선 절정지경을 심즉행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기는 갑자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몸속을 거닐던 내기가 물질세계에서 유형화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곧 갑자였으니, 기가 갑자에 닿지 못한 삼화취정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겠다.
통상 갑자의 내력 또한 절정지경의 시작이다.
무학이 창안되고 개량 발전된 지 기천 년이 지났다.
당시에는 갑자의 세월을 요하던 경지를 선택받은 누군가는 약관에 밟게 되었다.
정립된 초식과 묘리는 약관의 무인에게 심즉행을 허락했다.
신묘해진 심공과 영약의 도움은 약관의 무인에게 갑자의 내력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당금 무림에서 절정지경과 조화경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맞다.
정답은 바로 신(神)에 있다 할 것이다.
삼화취정에 이르기 위해서 신은 천지 만물과의 소통을 이루어야 한다. 신을 개화했다 혹은 영성을 깨우쳤다고 말하는 경지다.
절정지경의 고수에게는 검기가 허락된다.
검기란, 내 몸에 갈무리한 내력을 유형화시켜 세상에 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화경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검강은 무엇인가.
검강의 강은 곧 별 무리(罡)를 의미하니, 이는 곧 천지 만물과의 소통을 통해 세상의 힘을 내게 끌어와 유형화시킨 것이다.
결국, 신을 개화시켜 천지 만물과 소통해야만 삼화취정에 이를 것이며, 조화경의 증좌라는 검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통상, 신을 개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간과 깨달음이라 한다.
물론 하늘의 선택을 받은 극소수는 시간을 격하고 영성을 개화하지만, 이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말 그대로, 변덕스러운 하늘의 선택일 뿐이다.
마치 자연 영약을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에 실패한 것처럼 천혜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약관 내외로 절정에 드는 무인의 수가 그리 많아졌음에도, 대부분의 무인들이 불혹 이후에나 삼화취정에 이르는 까닭이다.
시간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영성을 개화시키는 것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약선이다.
-본 도는 만년의 영약이 지닌 영성과 약선심결을 조합해 그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시켰느니라.
통상 약관의 절정에 든 무인들 중 선택받은 소수만이 불혹 즈음에 삼화취정을 이룬다.
급격히 발전한 정과 기를 신이 따라잡아 합치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소 이십 년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는 완전한 성공이라 할 수는 없음이니.
본 도는 최소 이십 년의 시간을 극적으로 줄이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시간을 완전히 격하고 영성을 개화하는 것에는 실패했음이라.
약선은 타고나길 영성을 개화한 천혜의 인간이었으니. 그가 완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 또한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사 단공 증폭을 이루기 위해서는 만년의 영약과 약선심결을 운용한다 하여도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라.
그럼에도 최소 이십 년의 시간을 한 달로 단축시켰으니. 이를 어찌 성공이라 평하지 않겠는가.
-다만 알아야 할 것이 있느니라. 사 단공에 입공하면 연자는 한 달의 시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질 것인즉, 만반의 대비를 한 후에야 사 단공에 입공할 것을 권하노라.
연자는 불평하지 말거라. 만년의 영약에 담긴 시간을 달포에 녹여 낸 것만으로 내 최선을 다한 것일지니. 약선심결의 위대함이 퇴색되지 않는다 할 것이니라.
그가 말한 '다른 기전'이 곧 이것을 의미한다.
입공에 아무런 부작용이 없던 삼 단공까지와는 달리, 사 단공에 이르기 위해선 한 달간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가사 상태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사 상태는 위험하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운기조식만 하여도 완전한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서 행하거나, 불가피하더라도 최소한의 호법은 세워 두고 행하는 것이 무림의 관례 아니던가.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지기 위해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나를 지켜 주고 돌봐 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신뢰할 수 있는 이라....'
누가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아쉽지만 이춘백은 안 된다.
그의 신분은 본디 낭인인 바, 정해진 거처가 없는 그에게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 수발만 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오문의 여월과 마속도 안 된다.
내 이미 그들과 교분과 신뢰를 쌓았지만, 내 신변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림맹주를 계획하는 몸이니 그들과의 관계는 항시 조심하는 까닭도 있다.
본가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편이겠지만, 이 또한 내키지 않았다.
단천가는 나에게 있어 쟁취의 대상인 바, 한 달간의 가사 상태라는 취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많은 선택지를 배제하니 한 명이 남았다. 사 단공에 이를 동안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이가 말이다.
그 선택지가 바로 양수린이었다.
'양수린이라.'
선택지가 남아 있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양수린이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제 눈에 담았다. 안휘오화라 불리는 자신에 비견해도 그다지 꿇리지 않을 외모를 가진 남자.
"오랜만이오."
단천명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분명 첫 만남 때는 그냥저냥 봐 줄 만한 외모였던 것 같은데, 그가 언제 저리 헌앙한 미남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매파들의 연서는 여전히 끊이질 않나?'
양수린은 그가 저리 잘나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구태여 연서에 대해선 물어보진 않았다. 그녀 또한 어디 가서 꿀리지 않게 중원 각지에서 연서가 날아드는 몸 아니던가.
"그래서 귀한 단천가의 차남께서 무슨 일로 양가방까지 걸음 하셨나요?"
새초롬하게 물었다. 단천명이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저 자신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는 단천명을 보니, 다시 기분이 별로가 되었다. 예전부터 저 사람은 무언가 자신의 속을 빤히 안다는 듯 행하는지라 그랬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를 좀 숨겨 주시오."
흠칫.
그 내용에 양수린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자신은 노련한 상인 아니겠는가. 얼른 표정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며 말이다.
"뭐야. 죄라도 지었어요?"
"아니, 그건 아니오."
다행이었다.
지금은 그와 아무 사이가 아니지만, 한때 약혼을 이야기하던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에게 곤궁한 일이 생겼다면 걱정이 될 뻔했다. 아주 살짝 말이다.
그때, 단천명 저놈의 얼굴에 약간은 심술궂은 표정이 맺혔다. 목석같던 저 인간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죄를 지었다고 해도 숨겨 줄 것이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표정이 흐트러졌지만 얼른 재차 가다듬었다. 누차 말했듯 자신은 노련한 상인 아니겠는가.
"죄의 경중과 득실을 따져 보아야겠죠. 숨겨 주는 게 이득이면 숨겨 드리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답변도 아주 유려했다고 스스로 평했다. 숙련된 상인다운 현명한 처세였다.
'하하' 하고 웃더니 그가 사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대강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요약하자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생겼는데 그때 생각난 것이 자신이라는 말이다.
"한 달이나요?"
질문이 이런 방식으로 나간 까닭은 그녀로서도 잘 모르겠다.
"부탁드리겠소."
단천명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뭐, 그 정도야 도와드리겠어요. 나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았다.
그 사실에, 양수린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뭐, 당신에겐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해서 구태여 이런 말도 덧붙였던 것 같다.
* * *
"고맙소."
역시나 계획대로 일은 잘 풀렸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역시나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도 들었고 말이다.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소?"
기실 그녀와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빌려준 일만 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녀가 양가방을 장악해 장차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거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양수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심이나 고심이라기보단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보이는 표정이었다.
"한 달이라고 하셨죠?"
"그렇소."
내 답변 후에 그녀의 표정에 걸린 것은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당신이 나올 때쯤이겠군요."
"뭐가 말이오?"
"제가 양가방의 소방주가 되어 있을 시기 말이죠."
"그렇군."
양수린은 언젠가 나를 찾아와 이 년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금이 그녀가 말한 이 년이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양가방의 소방주에 오를 예정이니.
언행일치와 신뢰를 아는 참 상인이라 평할 것이다.
"잘되었군. 축하하오."
양수린의 표정에 장난기가 서렸다. 지난 생을 통틀어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지난 생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이번 생엔 그녀와 거래 관계를 유지했을 뿐 가까이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하튼 내게 생경한 표정을 선보인 그녀가 이리 말했다.
"잘된 일이지만, 당신에겐 슬픈 소식이겠군요."
"...?"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소방주가 되면 이제 시집을 갈 일은 없어질 테니 말이죠."
소방주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차세대를 책임진다는 것인즉. 그녀는 이제 시집을 가는 입장이 아니라 장가를 들여야 하는 입장이 된다 할 것이다.
바보가 아니니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함의를 알았지만 구태여 답을 주지 않았다.
내 반응이 재미가 없었는지 그녀가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뭐, 당신이 양가방으로 장가를 올 거라고 하면 고민은 해 봐 줄 수 있어요."
뻔뻔함에 기가 찬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렇군. 아쉽게 되었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여하튼 한 달이다.
한 달 후, 나는 사 단공에 입공해 조화경에 달할 것이며.
내가 뿌린 씨앗이 발아해 양수린은 양가방의 소방주에 오를 것이다.
겹경사였다.
33화 조화경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무가는 폐관 수련동을 가지고 있다. 아, 이는 틀린 말일지도 모르겠다.
정정한다.
대부분의 명문 무가나 명문 문파는 폐관 수련동을 가지고 있다.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에게 있어 성장이란 육체보다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외부 환경을 차단하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수련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드넓은 자연이나 잘 정비된 연무장을 놓아두고 동혈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이유가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양가방은 상인의 가문 아니던가.
양가방 또한 많은 무인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수련을 쌓는 이들이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양가방에서는 그들에게 많은 금자를 지불하는 것이고, 양가방에는 폐관 수련동이 있을 연유가 없는 것이겠다.
더구나 그곳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가문 차녀의 처소라면 더더욱 말이다.
"정말 이 정도로 괜찮겠어요?"
"충분하오."
양수린이 내게 내어 준 곳은 그녀의 처소 귀퉁이에 있는 방이었다.
그녀의 처소라 했지만 남녀가 유별한 문제는 없었다.
자그마치 안휘 제일의 거부라는 양가방 아닌가. 그녀는 홀로 거대한 전각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귀하신 몸이었으니, 빈 방이야 넘치도록 많은 까닭이다.
나야 수련을 할 것이 아닌 가사 상태에 빠져 있을 예정이었으니, 폐관 수련동이 아니라 침실 하나면 충분하고 말이다.
"한 달간 잘 부탁하오."
약선심결을 삼 단공까지 이룬 내 몸은 칼침과 극독은 막아 주겠지만, 아사(餓死)를 막아 주진 못하는 법이니. 그녀의 도움이 필수라 할 것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사용인이 아니라 그녀에게 직접 수발을 부탁했다.
내기가 충만해 강건한 무인의 육체는 하루에 한 번의 섭식만으로도 만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 그녀에게 그리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약조를 지키는 것이 상인의 신용이니."
그리 말하곤 양수린이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무인이 아니라고는 하나 강호 무림에 발을 걸친 삶을 살아온 이였으니.
타인의 연공을 훔쳐보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잘 아는 까닭이다.
부스럭.
품속에서 만년하수오를 꺼냈다.
와작.
미련 없이 두툼한 뿌리를 씹어 삼켰다.
당과보다 달콤했던 공청석유나 사과보다 맛이 좋았던 주과에 비하면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와그작.
하지만 이 귀한 걸 남길 순 없는 노릇이니, 최선을 다해 꼭꼭 씹어 먹었다.
몸을 누였다.
처음으로 가부좌를 튼 상태가 아니라 와공(臥功)으로 단천심공을 운용했다. 초절정에 든 몸이라 그런지 처음임에도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약선심결을 더하니.
"으음...."
거부할 수 없는 수마가 나를 덮쳐 왔다. 천 근이 되어 버린 눈꺼풀이 저절로 닫혔다.
* * *
꿈을 꾸었다.
스스로가 가사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으니 자각몽이라 말하는 게 옳겠다.
다만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으니 자각몽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여백 당숙과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춘백 형과 강호를 주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덧 강호를 주름잡는 절세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마대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꿈속인 까닭인가.
분명 한 달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건만.
나는 꽤, 아니, 어쩌면 매우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음."
나는 스스로가 조화경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생했소. 그리고 고맙소."
곁을 지키고 있던 양수린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돌봄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한 달간의 가사 상태에도 불구하고 내 몸 상태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소방주님, 하고 불러 보세요."
그녀의 표정이 맑다.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졌음이라.
"축하할 일이군."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으며.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 * *
춘백 형과 보낸 시간이 보름 하고 조금 더, 그리고 양수린의 처소에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단천강과 약조한 두 달까지는 아직 칠 주야 정도가 남았지만, 내 걸음은 단천가로 향했다.
대부분의 강호 초출의 후기지수가 낭만을 품고 중원 각지를 유람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기연의 안배를 위해서 그리고 비각 단원으로서의 임무를 위해서 강호 각지를 주유한 인물이 바로 명개가 아니었던가.
기실 나는 강호의 낭만이라는 것을 그다지 품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강호행에서 이루고자 한 바를 모두 성취했으니 하릴없이 강호를 주유하는 것보다는 가문으로 돌아가 후계자 경합을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기도 했다.
후계자 경합을 준비한다 했지만, 사실 크게 준비할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에 가깝다 할 것이다.
이유인즉, 조화경이라는 경지가 내가 가진 정보와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은 까닭이다.
조화경에 들어 보니, 내가 명개 시절 후계자 경합의 대비랍시고 세운 계획들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조화경....'
그간 조화경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정보에 불과했다.
신을 개화하여 천지 만물과 소통하는 경지.
의념을 다루기 시작하는, 진정한 상승 고수로서의 경지.
검강이라는 절세의 무력을 손에 넣는 경지.
명문 무가라 불리는 단천가에서도 가주 단천강, 호위대장 방여백 그리고 원로원의 일장로 정도만 간신히 발을 디딘 경지라는 정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조화경에 들고 보니 진실로 알겠다.
어쭙잖은 대비나 정보 따위는 단박에 무너뜨릴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조화경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호 무림에서 제일로 치는 것이 결국 정보나 금력이 아닌 무공인 연유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다 할 것이다.
절정, 초절정과 조화경은 그 궤를 달리하는 법이니.
지금 내 처지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뜻도 된다.
이제와 보니, 사실 나는 불안했었던 것 같다.
회귀를 하였지만.
약선심결을 취했지만.
용봉의 별호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단천가의 소가주라는 자리는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겠다.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환상이 실체가 되어 제 세력을 부풀린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달라졌다.
조화경에 이르러 정기신이 합치되었듯이, 머릿속으로만 알던 정보가 지금 내가 가진 것들과 합치가 되니 모를 수가 없었다.
조화경을 이룬 지금, 단천가의 소가주라는 위치는 내가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안다.
이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겼다는 말이며, 불안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나는,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형님 단천학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사이 조화경에 발을 딛지 않았다면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인과와 같다고 하겠다.
단천학이 조화경에 벌써 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기실 이미 소가주라는 자리는 나에게 따 놓은 당상과 같은 의미라 할 것이다.
압도적인 역량 앞에 배경이나 정치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할 터이니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단천가의 정문을 지키는 위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이제는 가솔들도 내 존대를 여상하게 받아들인다. 이 또한 지난 이 년 동안의 변화라 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자님!"
한데 그의 태도가 지금까지와 조금 다르다.
"얼른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마치 강호의 영웅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와 같다 할 것이다.
"강호행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문 안으로 나를 안내하며 끊임없이 떠드는 그 덕분에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바로 강호 무림을 진동시킨 하나의 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강호 초출에 마교의 간자를 토벌한 후기지수.
강호 무림의 미래를 밝힐 새로운 신성.
내 별호는 나도 모르는 사이 단룡이 아닌, 단천신룡이라 불리고 있다고 했다.
자오개 그리고 산서 개방의 형제들이 활약한 결과임을 알겠다.
두 달의 강호행.
나는 단순히 조화경을 이루어 낸 것만이 아니었다.
후계자 경합까지 남은 시일은 칠 주야.
내적으로 조화경을 이루었고, 외적으로 신성의 명예를 얻었으니.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할 것이다.
* * *
단천가의 원로원.
명문 단천검가의 근간을 이루는 세 축 중 하나다.
여타의 명문 세가들과 차이점이라면, 단천가의 원로원에는 단천의 성을 쓰는 이가 전무하다는 사실 정도일 터다.
적자계승의 가풍을 지닌 단천가에서는 후계자 경합에 패한 다른 남아들을 모두 가문 밖으로 내보냈으니, 단천가에서 단천의 성이 허락된 것은 오롯이 가주와 그 직계 비속들뿐인 까닭이다.
때문에 원로원의 구성 성분은 둘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방여백처럼 단천의 성을 가지지 않은 방계 출신의 무인 혹은 식객으로 오랫동안 단천가를 보좌하여 그 공을 인정받고 원로원에 입성한 무인이다.
단천가를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무인의 연배가 갑자를 넘어 강호 무림의 일선에서 은퇴하면 제 몸을 거하는 곳이 바로 원로원이다.
그 원로원을 단천가의 안주인 백여해가 남몰래 찾았다.
"괜찮겠죠?"
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 할 것이다.
"허어. 부인, 뭐가 그리 불안하시오?"
단천가의 일장로 천일산.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백여해의 말을 받았다.
그들은 진즉에 한배를 탄 동료인 까닭이다. 이미 한배를 탄 지 십 년이 훌쩍 넘었으니, 사뭇 다른 배경에도 그들이 서로를 대함에 있어 불편함은 없었다.
"당연히 소가주 경합 때문이죠. 칠 주야 후에 가주님께서 돌아오시면 경합이 시작되지 않겠어요?"
현재 가주 단천강은 가문을 비운 상태였다. 백여해는 그것이 후계자 경합에 관한 사항을 조율하기 위해서라 판단했다. 단천강이 향한 곳이 무림맹인 까닭이다.
"그렇겠지요."
기실 백여해만의 짐작이 아니다. 곧 단천가에서 후계자 경합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짐작하고 있다 할 것이다. 무릇 전통이란 반복과 예측 가능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부인, 학 공자가 벌써 초절정에 이르렀소이다. 스물둘에 초절정이니 실로 가문의 홍복 아니겠소?"
"당연하죠. 누구 아들인데요."
단천학의 칭찬이 나오자 백여해의 표정에 흡족함이 서렸다.
팔불출이라 하기도 애매한 것이, 스물둘에 초절정이라는 경지는 실로 대단한 것인 까닭이다.
가문의 지존인 단천강조차 이립에 닿은 경지가 초절정 아니던가.
"그런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란 말이오?"
다시 백여해의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단천명. 그 아이가 불안해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백여해가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을 알아요. 어쩌면 학이보다 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그녀의 속내다.
가문 내에서 단천명을 가장 싫어하는 이가 백여해겠지만, 동시에 단천명을 가장 많이 지켜본 이 또한 백여해다.
그녀가 단천명을 꺼리게 된 것은 자신의 밑으로 입적된 사생아라서가 아니었다.
우연히 혹은 필연히 그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적자계승의 가풍을 가진 단천가에서 제 아들의 입지를 위협할 만큼 말이다.
"그래도 전 학이를 가주로 만들 거예요. 아니, 애초에 가주는 학이의 것이었어요."
결연한 표정으로 백여해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미의 마음이었다.
34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삼장로가 단천명을 처음 가르치던 시절. 당시 단천명의 나이가 딱 열이었으니, 십 년쯤 된 이야기다.
-후웅!
-삼장로님, 이렇게 하는 건가요?
-...그렇게 하거라.
하나를 가르치면 제 스스로 궁구하여 둘을 깨우치니, 삼장로는 단천명에게서 범상치 않은 무재를 보았다.
-부인, 이 공자 수련 때 한번 와 보시오.
-제가 굳이 가야 하나요?
-...중요한 일이오.
-한번 가 보도록 하죠.
처음으로 행차한 차남의 수련.
그날, 백여해는 천재의 편린을 보았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의 안목으로도 곧바로 알아볼 정도로, 단천명의 자질은 특출 났다 할 것이다.
-삼장로님, 부탁드려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가주께서 아시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희소식일지 모르겠다만, 그녀의 안목은 틀림이 없었다.
특별히 부탁받은 삼장로의 조악한 수련 속에서도 차남은 열일곱의 나이로 일류지경에 발을 디뎠으니.
그 재능은 찬란하다 말해도 부족하지 않았음이라.
-차남을 쳐 낼 생각을 하셔야 할 것 같소.
어느 날, 삼장로가 백여해에게 건넨 말이었다. 일장로도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무어라 답을 했던가.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그리 답했던 것 같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녀는 차남을 쳐 내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차남이 빛나는 재능을 발했지만 다행히도 장남이 훨씬 월등한 성취를 이뤄 낸 까닭이었다.
* * *
"그래서 내 진즉 차남을 가문에서 쳐 내야 한다고 말했음이오."
기시감이 느껴지는 삼장로의 발언을 백여해는 묵묵히 들어 주었다.
일장로가 눈짓을 하자 삼장로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가주의 위는 우리 학이의 것이 되어야 해요. 적통을 이은 장남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잖아요?"
"부인 말이 맞소."
"하지만 불안해요. 아니, 불안해졌어요. 방 대장이 명이의 편에 섰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제가 온갖 공을 들여도 꼼짝도 않던 망부석 같은 인간이 명이 편을 들었다고요."
대화를 나누는 중이지만, 백여해는 흡사 혼잣말을 하듯 말을 계속 이었다. 마치 주문을 되뇌는 사람처럼 보였다.
"방여백!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잠시 분노하는 듯하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용의 별호를 쟁취했어요. 쉬쉬하지만 모두들 그래요. 학이도 용의 별호를 얻었지만 명이가 가진 것이 더 위에 있지 않냐구요."
귀를 닫은 척했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 아이가 단천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었어요. 첫 강호행에서 마교의 간자들을 무찔렀대요."
그 말까지 이어지자 일장로 천일산의 표정이 살짝 움찔했다.
단천학도 직전에 강호행을 다녀왔다.
강호 초출답게 다양한 협행을 행했으나, 마교의 간자를 찾아내고 제거한 단천명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럼에도 가주께선 명이가 아닌 학이가 소가주에 적격이라 생각해 줄까요?"
고백과도 같은 백여해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여인 백여해의 말은 넋두리와 같다 할 것이다.
가슴속에 쌓은 불안과 응어리를 동료인 일장로에게 말함으로써 풀어내는 과정이다.
하지만 일장로는 생각이 사뭇 달랐으니.
"어떠시오, 부인. 지금이라도 내가 나서길 원하시오?"
그 말에 백여해는 답을 하지 않았다.
"가주가 부재중인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오. 신중하게 고민하시오."
일장로 천일산이 나선다. 백여해는 그 말 속에 숨겨진 함의를 충분히 알고 있음이니.
-부인, 아직도 결정을 못 하시었소?
-...그냥 놔두죠. 학이에게 위협은 안 될 것 같아요.
익숙한 과거의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안 될 것 같아요. 그 아이도 제...."
백여해는 말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다만 재차 확인을 하듯 천일산의 눈을 바라보았다.
천일산은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부인, 이 상황이 되어서도 고민하시오?"
백여해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 일은 못 들은 셈 쳐주세요. 학이는, 내 아들은 잘할 거예요."
여인 백여해.
아들 단천학을 위해 모진 인간이 되었지만, 차마 악독한 인간은 되지 못한, 평범한 여인이 이곳에 있었다.
"가 볼게요. 배웅은 괜찮아요."
그리 말한 백여해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백여해가 떠났다 하여 원로원에서의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삼장로, 그대 생각은 어떻소?"
"저는 예전부터 차남을 가문에서 쳐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스승이란 자리로 누구보다 단천명과 가까워야 할 그였으나, 누구보다 단천명의 배제를 주장해 온 이가 바로 삼장로였다.
삼장로의 단호한 대답을 뒤로하고 일장로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학 공자,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백여해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기둥의 뒤.
그곳에는 기둥에 등을 기댄 단천학이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
단천학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개의치 않는 듯, 흡사 혼잣말처럼 일장로가 말을 이었다.
"차남이 너무 커 버렸소. 그냥 쳐 내긴 어려울 것 같고...."
잠시 뜸을 들인 일장로 천일산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뭔가 더 수를 써야 할 것이오."
허허 하고 웃더니.
"가주의 위를 결정짓는 일이니, 만사 불여튼튼이어야 하지 않겠소?"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음모를 꾸미면서도 여상한 일상과 같이 받아들이니, 이 또한 긴 세월을 강호 무림에서 살아남은 노강호의 일면이었다.
사생아라 하나 가주의 직계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혹여 새어 나간다면 원로원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삼장로는 일장로의 수족과 같은 이였고, 단천학은 일장로가 제 손으로 평생을 키워 낸 제자였기 때문이다.
삼장로가 은근한 목소리로 일장로에게 물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내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비장의 한 수쯤은 품고 있는 것, 그것 또한 노강호의 일면 아니겠는가.
"...."
단천학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 *
단천가 외곽의 소연무장.
여백 당숙과 함께하던 그곳에 나는 홀로 있었다.
"후우-"
가문으로 돌아온 뒤 아버지 단천강도, 여백 당숙도 보지 못했다. 아버지 단천강이 무림맹에 간 까닭이다.
이는 지난 생에도 있었던 일이다.
명가의 승계는 단순히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아버지는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조율하고 올 것이다.
가주 단천강이 원로를 떠남에 있어 호위대장인 여백 방여백이 함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 또한 볼 수 없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연무장의 중앙.
나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기실 육체를 단련해야 할 경지는 여백 당숙과 함께하며 진즉 그 끝에 도달했다 할 것이다.
운기행공을 통한 축기 또한 이제 와 무용해졌다.
일 단공에서부터 내기의 부족함을 느낀 기억은 잘 없다. 전신세맥에까지 흘러들어 간 공청석유 덕분이다.
거기에 만년하수오의 내력이 더해졌으니, 내력만 놓고 보자면 절대지경에 오른 고수들과도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연무장에 나와 있다. 수련을 하고 있다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심상 수련'이다.
물론, 명개의 삶까지 포함하여도 내가 생전에 심상 수련을 배운 적은 없다.
다만 사 단공에 들 때 꾼 기나긴 꿈이 내게 심상 수련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하겠다.
그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둘렀다.
심상 속에서 깎여 나간 것은 검로(劍路)가 아니라 번뇌와 미망이니.
신(神)의 개화라 할 것이다.
기실 나는 지금 심상 수련을 통해 정기신의 합치라는 새로운 지평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중인 것이다.
뚜벅.
심상 수련에 집중한 탓인가.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주변의 기척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한참 멀리서 다가오던 기척 하나가 마침내 내게 닿은 사실을 알았다.
"예까지 무슨 일이시오, 형님?"
눈을 뜨지 않았지만 예민한 기감과 심상만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게 다가온 이는 단천학이었다.
내 비록 그와 사이가 좋다 할 순 없지만, 객이 왔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비례라는 사실은 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단천학을 마주했다.
"너, 또 변했구나."
"그렇소?"
이 단공에 이르러 진즉 반박귀진을 이룬 몸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내 변화를 단천학은 참으로 귀신처럼 알아보는 것 같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소?"
지난 생, 백여해와 단천학을 그다지 마주할 일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싫으냐?"
"뭐, 딱히 좋진 않소."
"나도 그렇다."
단천학이 피식 웃었다.
바로 '너 따위가'가 나왔을 옛날을 생각하면 그도 참 많이 변한 것이리라.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소?"
용무가 없이 찾을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니 용무가 있으리라.
잠시 뜸을 들이던 단천학이 말했다.
"도망쳐라."
그의 말이 참으로 놀라웠는데,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 또한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
올곧은 눈으로 단천학을 바라보았다. 단천학의 눈동자는 부표를 잃은 나룻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누군가 네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영영 도망가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아버지가 부재중이신 칠 주야간만 어디 몸을 피해 있어라.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왜일까.
누군가 내게 위해를 끼치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지금, 도리어 기꺼운 마음이 드는 까닭은 말이다.
"일장로가 음모를 꾸미고 있소?"
"...!"
"내 말이 맞소?"
구태여 '누군가'라는 표현으로 진실을 숨기던 단천학은 눈을 살짝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놀랍진 않았다.
지난 생에는 없었던 일이기에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소가주의 유력 후보가 된 지금 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했기 때문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일장로가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주는 이유가 뭐요?"
내 의문은, 단천학이 왜 내게 쪼르르 달려와 이런 말을 실토하느냐는 것이다.
내 여상한 태도 때문일까. 흔들리던 단천학의 눈동자가 멎었다.
그곳엔 다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명가의 대공자가 자리했다.
"오해하지 마라. 너를 동생으로 여긴다거나 하는 뜻은 아니니."
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단천학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이었다.
"단천가에서 이런 비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조할 수 없었을 뿐이다."
스륵, 하고 단천학의 주먹에 들어갔던 힘이 다시 풀렸다.
"다만... 아직 내가 그것을 막을 용기가 없을 뿐이다."
자책이라. 단천학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인물인 줄 알았거늘 말이다.
내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형님은 할 만큼 했소."
어찌 이제야 알았을까. 단천학은 내 적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걱정 말고 이제 나한테 맡기시오."
이제는 내가, 잘못된 것들을 되돌려야 할 시간이다.
"형님."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단천학을 불렀다.
"왜 부르느냐."
'너 따위가 나를 형님이라 부르지 마라'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단천학은 한 번도 내게 그리 말한 적이 없다. 과거에도, 현재도 말이다.
"잠시만 나랑 손을 잡지 않겠소?"
단천학의 표정에 서린 것은 의문이었다.
"내가 왜?"
"가문을 위한 일이오."
'그리고 형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오.'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하시겠소?"
그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이번엔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 차례일 것이다.
35화 일천살 (1)
명개가 취풍개에게 약선심결을 받던 그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의 미래에는 단천가가 없다. 몰락했기 때문이다.
취풍개에게 전해 들었고, 내가 직접 조사한 바가 그러했다.
화무십일홍 또한 세상의 진리라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체로 이 말이 틀리지 않은 진실이니, 대부분의 명가는 쇠락할지언정 한순간에 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명가의 저력이다.
하지만....
내가 단천가와 연을 끊은 지 고작 십 년. 그사이에 단천가는 안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완벽한 몰락이었다.
망군(亡君)은 십 년이면 나라 하나를 쓰러뜨린다는 말이 있으니, 단천가 또한 그런 경우였을까?
기실 정답을 알고 있음이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역대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단천가의 가주로 부족함이 없다는 평을 듣던 아버지 단천강.
그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호위대장이자 조화경의 고수인 방여백.
용의 별호를 쟁취한, 강호 무림에서 촉망받는 소가주 단천학.
탄탄대로라 평함이 옳지, 명가를 십 년 안에 스러지게 만들 면면은 아니라 할 것이다.
내 단천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가 부족하지 않은 인물임을 안다. 그 시절, 그는 부족했기보단 나에게 벽과 같은 인물이었으니.
물론 당시의 상황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할 것이다.
맞다.
내 이미 명개 시절 하나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바로 단천가의 몰락은 정마대전의 전조였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이는 그리 두루뭉술하게 넘겨선 아니 될 것이다.
정보 속에 숨겨진, 조금 더 세밀한 진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 단천가의 멸망은 정마대전의 전조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야 할 것은, 그 전조가 가문 내에서는 어떻게 일어났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 버렸는지.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누구였는지가 정보 수집의 방향이 될 것이다.
아쉽게도, 명개 시절 그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정마대전의 포화 속에서 가문의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단천가 멸문에 대한 진실은 묻혀 버렸다. 지난 생, 내가 유일하게 풀지 못한 고리였다.
하지만 이번 생, 그 비밀을 밝힐 시간이 다가왔으니.
이번엔 놓치지 않을 것이다.
* * *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완벽한 비밀이란 잘 없다. 개방에서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생각이다.
대다수의 비밀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내 비록 단천가 멸문의 진실을 모른다 하였지만, 단서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보게, 명개.
-왜 그러나?
-이것 좀 보시게.
비각.
천마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무림맹의 정보 조직이다.
전 무림의 정보력을 그러모은 조직이 곧 비각이니, 그들의 역량은 개방에 못지않다 하겠다.
비각의 단원들 면면 또한 각지의 정보 문파에서 한가락 하던 이들이다.
무슨 뜻이냐면, 비각 단원들 대부분은 내가 단천가 출생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비각대원이 내게 용모파기를 하나 내밀었다. 버릇처럼 용모파기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되물었다.
-이게 뭔가?
-일천살의 용모파기네.
-일천살?
흥미가 동했다.
일천살.
근래 산동에 기라성처럼 등장한 극마지경의 마교도다.
극마(極魔)지경이란, 통상 조화경에 갈음되는 마공의 경지다.
조화경의 경지에 마교도 특유의 악랄한 손속이 더해지니, 극마의 고수는 재해와 같다고 했다.
다행히 그 수는 많지 않다. 마공을 익혀선 신(神)을 개화하기 힘든 까닭이다.
한데 얼마 전, 산동에 연고 없이 나타나 악랄한 무용을 뽐내는 고수가 바로 일천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걸 왜 내게 보여 주는 겐가?
-자네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네만, 내가 한때 단천가를 전담하는 정보원이었네.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진작 알고 있었음이다. 나 또한 한가락 하는 정보원이었으니 말이다.
-그게 무어 대수라고.
나 또한 모용가, 팽가, 황보가의 전담 정보원을 해 본 입장이니, 그가 단천가를 전담했다 해서 억하심정은 없었다.
비각대원이 내게 몸을 살짝 기울였다.
-이건 가설이네만.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씀하시게.
정보원들의 가설만큼 재밌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원래 부족한 정보량은 상상력으로 채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훌륭한 정보원이란, 비어 있는 정보의 연결 고리를 추론과 상상력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이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비각대원의 손가락이 용모파기를 향했다.
-이 일천살 말일세. 낯이 익지 않은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근거는 없네만, 내 계속 그를 단천가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네. 뭐, 느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일세. 단천가 출신인 자네라면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은근히 말하는 그이지만 나름의 확증이 있어 보였다.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고도로 발달한 정보원의 느낌이란 때때로 미궁의 실마리를 푸는 단초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용모파기를 다시 샅샅이 살폈다.
일천살은 극마의 고수다.
단천가에서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인물은 셋밖에 없을 것이니.
-일천살이라....
다소 달라진 외양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 *
"그래서 나와 손을 잡자는 뜻이 무엇이냐? 이제 와 내가 일장로와 척을 지고 그를 발고하길 바란다는 것이더냐?"
단천학은 표정으로 마뜩잖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이해한다.
군사부일체라 하였다.
부모를 부정하는 자식은 없다.
임금을 배반하는 신하는 없다.
스승을 공격하는 제자는 없다.
이 모두 천고의 패륜이다.
단천학은 철이 들기 전의 어린 시절부터 일장로의 밑에서 수학한 인물이니, 일장로와 척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강호 무림의 정서가 그러하다.
명문은 대체로 규범과 위계로 만들어진다. 개방같이 위아래가 잘 없는 놈들 말고는 대체로 그렇다.
그 명문의 규범과 위계를 가장 잘 학습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단천학일 것이다.
그럼에도 단천학은 나에게로 와 일장로의 비위(非違)를 알렸다.
혈육의 정 때문인지 혹은 명가의 대공자라는 스스로의 자부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다소 부족할지언정 그릇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군사부를 함부로 거스르는 것은 천고의 패륜이라 했다.
하지만 말이다.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 왕이었다면, 그를 배반한 신하는 역적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
내 부모가 아님을 알았다면, 그를 떠나 새로운 일가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이 마교도인 사실을 알았더라면.
"형님."
"왜 계속 부르느냐."
단천학의 마음을 확인해 보면 알 것이다.
"만약에 말이오."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작금의 사태에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자원일 터이니 말이다.
"일장로 천일산이 마교의 간자라면 어쩌시겠소?"
"...!"
단천학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었다.
"너, 미친놈이로구나."
단천학은 그리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괜찮다.
충분한 씨앗을 심었음이니.
그가 제때 발아할 것이라 믿으면 될 문제였음이다.
그리고 단천학의 언질은 역시나 진실이었으니.
"오랜만이로구나."
다음날이 되자마자 그들이 행동을 시작한 것 같다.
"예, 오랜만입니다. 삼장로님."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 * *
"들어오거라."
원로원 외곽에 위치한 삼장로의 처소에 들었다.
내 나이 열 살 때부터 일류지경에 든 열일곱까지 그에게 수련을 받았음에도 처음 와 본 곳이었다.
"편히 앉거라."
"예, 삼장로님."
"우리 사이에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느니."
삼장로가 안 하던 짓을 한다.
어색한 몸짓에 말투. 그가 열심히 무언가를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다만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심계가 깊다는 뜻이 아니고, 연기가 영 어색하다는 뜻이다. 연희패에 들었으면 평생을 빌어먹고 살았을 실력이라 평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삼장로님."
그럼에도 일단 장단은 맞춰 주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응당 인내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말끝마다 삼장로님이라 붙이지 않아도 된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네 스승 아니겠느냐."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셨습니다."
그가 직접 했던 말이다. 그는 혹여 장남의 눈에서 벗어날까, 나를 가르치면서도 선을 확실히 그은 인물이었다.
"뭐?"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그가 내 시선을 외면했다.
"크흠. 내가 그랬었느냐? 늙어서 그런가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기시감이 드는 말이었는데, 다가오는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역시 말이라는 것은 발화자가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도 한잔하겠느냐?"
"예, 주신다면."
강호 무림에서 섭식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까다로운 문제다.
독이 만연한 곳이 바로 강호 무림이고, 상대를 중독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음식을 활용하는 방법인 까닭이다.
비록 이곳이 가문 안이지만 그럼에도 적지(敵地)라고 함이 타당한 바, 노련한 강호인이라면 절대 쉽사리 음식을 입에 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경험이 일천한 후기지수에 불과하고....
"그래, 금방 내오마."
삼장로 또한 나를 그리 여긴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탁.
미리 준비라도 되어 있었는지 차가 금세 나왔다.
"무슨 용무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차를 입에 대지 않고 삼장로에게 물었다.
"무얼, 그냥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한번 보자고 한 것이다."
제대로 된 핑계조차 생각지 않다니, 한심하다 할 것이다. 이런 이가 어찌 단천가의 삼장로까지 올랐는지 모르겠음이다.
"용무가 없으시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에헤이, 섭섭하게 왜 그러느냐."
그런 나를 삼장로가 얼른 막아섰다.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이니, 일단 차를 한잔하거라."
기실 차에 독이 들었을 확률은 반반이라 짐작했다. 가장 보편적인 수이면서도 동시에 너무 조악한 수인 까닭이다.
한데 삼장로의 반응을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이 차에는 독이 들었다. 꼭 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수작질을 부렸음에는 확실하다.
단천학이 내게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모를까,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자리에 앉은 내가 차를 마시지 않고 삼장로를 빤히 바라보니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뭣이냐. 내가 너를 수련시킴에 있어 모자란 것이 있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말이다. 또 그 뭣이냐. 앞으로 후계자 경합도 있을 것인데 네가 혹시 내게 섭섭한 감정이 있거들랑...."
호록.
두서없는 그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차를 마셨다. 그의 표정에 화색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뭐, 얼굴을 보았으니 되었다. 돌아가 보거라."
그의 말이 급히 마무리 지어졌다. 진짜 웃긴 인간이라 평하는 게 옳겠다.
"왜요? 벌써 목적이라도 이루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의 검미가 구겨졌다.
그 가당찮은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뭐, 이 차에 독이라도 들었다거나?"
내 말에 놀랐음인가, 그의 표정이 급격히 흐트러졌다.
"내 말이 맞소?"
참으로 투명한 인간이라 평할 것이다.
36화 일천살 (2)
삼 단공은 불침이라 한다.
신체에 해악을 끼치는 모든 것을 무위로 만드는 바, 불침의 효용은 무궁하다 할 것이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불침이 곧 무감(無感)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침이 되었다 하여 독이 내 몸을 침범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반푼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에 독에 들어왔음을 알지만 얼마든지 의지에 따라 효용을 없앨 수도, 몰아낼 수도 있음이니.
그것이 곧 불침이다.
얼마 전에 사 단공에 들어 조화경의 경지에 발을 디뎠으니,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내 몸을 관조하는 것은 여반장과 같았다.
차에 섞인 기운이 대주천을 하는 것처럼 내 몸을 돌더니 혈맥 곳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불침을 이루지 못했거나, 조화경에 이르지 못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은밀함과 함께였다.
그르륵. 그르륵.
들리지 않을 환청이 귀를 울렸다. 놈이 벌써 작용을 시작한 것이다.
'비혈독(沸穴毒)인가.'
독에는 조예가 없지만 작용 기전을 보니 무엇인지 짐작하겠다.
비혈독은 산공독의 일종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종류의 독은 아니다.
다만 급격하거나 무리하게 내기를 운용하면 혈맥이 들끓게 만들어 제 역량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매우 희귀한 독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만, 후계자 경합의 중요한 순간에 당락을 결정지을 만큼은 된다 할 것이다.
약선심결을 운용했다.
동시에 백회의 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혈독사의 독을 배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몸에 자리 잡은 비혈독을 뽑아낸 것이다. 산공독이라 하여도 불침을 이겨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참고로 저 시각 효과는 삼장로를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드러낸 것이다.
"후우-"
심호흡을 뱉자 입을 통해서 독의 잔향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독한 녀석인 탓이다.
"삼장로, 그대는 방금 독을 썼군."
"뭐라?"
담담한 목소리로 사실 적시를 하니 삼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단천가의 안에서 직계에게 독이라...."
이는 매우 큰 사안이니....
"내 그대를 징치해야겠소만."
내가 다소 과하게 손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불만 있으시오?"
삼장로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이놈!"
삼장로가 일갈했다.
"뭐라? 징치? 네가 나를 징치를 해? 하! 기가 막히는구나."
옛 선현들께서 방귀 뀐 놈이 성낸다 하셨거늘, 이를 실증하는 광경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스... 가문의 큰 어른께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놈!"
그 와중에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스스로를 스승이라 말하지 않은 그를 칭찬한다.
"그래서 내가 독을 썼다는 증좌라도 있느냐?"
역정을 내며 시간을 번 탓인가. 삼장로가 처음으로 나름 논리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수준이란 것이 너무 뻔하지 않은가.
황실의 법도에도 현행범에겐 증좌를 요구하지 않는 바, 칼과 피가 난무하는 강호 무림에선 오죽하겠는가 이 말이다.
"삼장로, 내가 병신으로 보이시오?"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수련 받던 시절의 나는 혹시라도 눈 밖에 날까 매사에 조심스러운 유약한 아이였으니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삼장로를 살폈다.
깡마른 데다 눈매가 사나워 강퍅한 인상이라 평하겠다. 역정을 내니 그의 볼품없는 인상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관상학이란 학문이 진즉 정비되었으니, 이 또한 관상학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단천명은 이런 그가 무서워 조심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아니라 할 것이다.
"그만 나불대고 덤비시오. 아니면 순순히 추포를 당하시던지. 내 이미 당신을 가문의 직계를 해하려 한 혐의자로 대하고 있으니."
"뭐라?"
덤비라는 표시로 손을 까딱거렸다.
"오시오, 영감."
"갈!"
영감이라는 호칭이 그의 마지막 인내심을 앗아 갔음인가. 삼장로가 사나운 표정으로 신형을 날렸다. 장로의 자리를 노름으로 딴 것은 아니었는지, 꽤나 그럴듯한 어기충소의 수법이 펼쳐졌다.
"내 너에게 가문의 큰 어른으로서 가르침을 내리겠노라!"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경신공인지 모르겠으나 여백 당숙의 표홀한 답운보에 비견하니 조악한 데다 허술하고 느린 보법이라 평하겠다.
그 의도와 진행 방향이 모조리 내 안법에 읽혔다는 뜻이다.
단천가에는 조화경의 고수가 셋이 있다. 아, 정정한다. 나를 포함하면 넷이다.
여하튼 공식적으로 알려진 조화경의 고수는 가주 단천강, 호위대장 방여백 그리고 일장로 천일산이다.
즉,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삼장로는 잘 쳐 줘야 초절정에 불과한 무인이라는 뜻이다.
초절정이라는 경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만, 조화경과 비견하자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놈!"
이는 구태여 검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콰직.
"켁."
구태여 고절한 묘리를 활용할 필요도 없음이라.
내 쾌속한 금나수가 삼장로의 울대를 그러쥐니, 전신을 제압당한 그는 버둥거리지도 못했다. 도리어 내가 당황할 정도로 삼장로는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했다.
"영감, 수련을 게을리 하셨소."
일선에서 물러나 무공 수련과 실전을 등한시한 인물이니 이리 쉽게 제압을 당한 것이다.
나를 약관의 애송이로 보고 경시한 것 또한 한몫을 했으리라.
"그륵."
삼장로가 무언가 소리를 외치려 했으나, 울대가 잡힌 까닭에 언어가 되지 못하고 스러졌다.
"어찌한다."
손가락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는 절명할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남아 단천가의 원로원에 입성한 노강호의 최후치고는 덧없다 할 것이다.
다만 그를 단박에 죽여서야 내 스스로가 하나의 패를 없애는 꼴이니, 곧바로 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이 공자, 거기까지 하시지요."
기척 없이 내 뒤를 점한 존재가 말했다.
놀라지 않았다.
진즉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평온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 일장로 아니시오? 반갑소."
진정한 흑막이 모습을 드러냈음이니, 월척이었다.
* * *
"이 공자, 이게 무슨 행태요?"
여전히 삼장로의 울대를 그러쥔 나를 향해 일장로가 물었다.
"아. 가문의 죄인을 징치하는 중이었소."
"쯧."
일장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명가에는 법도와 규율, 절차가 있는 법이오. 내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규명할 것이니 일단 그를 놓아 주시오."
퍽이나 그러겠다.
일장로의 말을 무시하고 그러쥔 울대를 통해 삼장로에게 거칠게 내기를 밀어 넣었다.
"케헥."
부르르 몸을 떤 삼장로가 혼절하니.
털썩.
그제야 나는 삼장로를 일장로에게 집어 던졌다. 의식이 없음에도 몸을 부들부들 떠는 삼장로의 모양새가 볼품없었다.
"놓아주었소."
세 가지 연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수족을 핍박하여 분노한 일장로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첫째요.
초절정의 무인을 내력으로 제압하는 내 신위를 간접적으로나마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 둘째.
만약의 상황에 삼장로가 일장로에 합세하여 나를 합공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셋째라 할 것이다.
"호? 이 공자, 경지가 어떻게 되시오?"
그중 일장로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것은 두 번째인 것 같지만 말이다.
"절정이오만."
어깨를 으쓱하며 답해 주었다.
내 그에게 진실을 알릴 까닭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시오?"
가문의 직계라 하나 소가주조차 되지 못한 몸 아닌가. 원로원의 수장을 대하는 태도치고 퍽 예의가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없을 것임을 안다. 내 그가 마교의 간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조화경에 닿은 지금, 마침내 그 병폐를 가문에서 축출할 때가 온 것이다.
누차 말했듯, 마교의 간자를 색출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그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제 정체를 숨긴 극마의 고수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울 뿐, 불가능하지는 않음이니. 나는 한 가지 방도를 마련해 두었다는 말이 되겠다.
일장로가 잠시 고심하며 제 백염을 쓰다듬었다.
"흠. 삼장로에게 위해를 가한 이 공자를 이대로 둘 순 없겠구려. 일단 제압을 해야겠소."
평온한 표정으로 일장로가 그리 말했으나,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날카로운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신을 개화한 몸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살기가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허, 무슨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가문의 직계에게 살심을 품겠소?"
"역시 일천살의 은밀한 살기는 명불허전이라 해야겠습니다.
"허헛. 말도 안 되는 소릴."
내 말을 웃어넘기던 일장로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금 뭐라 하시었소?"
삼장로가 혼절할 때조차 미동이 없던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천마신교 이 위계(二 位階) 간자 일천살. 어떻게, 임무는 잘 진행되고 있으시오?"
"...!"
자, 이제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도록 할 차례다.
이것이 내가 마련한 방도였다.
* * *
허장성세(虛張聲勢).
노름판의 선수들 혹은 저자에서 시비가 붙은 삼류 낭인들의 큰 목소리 정도가 떠오르는 단어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허장성세를 가장 잘 사용하는 이들은 바로 정보꾼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 허장성세 혹은 혼이 담긴 구라라는 것은 약간의 진실을 첨가해야 그 효력을 더하는 법이니, 정보꾼들이야말로 진정 허장성세의 상승 고수라 평할 수 있겠다.
맞다.
지금 나는 정보꾼 명개의 경험을 살려 일장로에게 허장성세를 펼치는 중이다. 기실 내가 일장로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다는 뜻과 같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이라곤 후일 일천살이라 불릴 산동 극마의 고수가 천일산과 동일 인물이라는 확고한 심증뿐이다. 당연히 증좌는 없다.
하지만 이 약간의 진실을 정보꾼이 쥐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 지극히 단편적인 정보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를 합쳐 추론을 하면, 허장성세의 틀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교 간자의 이름은 그가 중원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부여 받는다.
그들의 신앙인 천마에게 하사받은 이름이기에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 천일산이 진실로 후에 나타날 일천살이 맞는다면, 그는 지금도 일천살이라는 뜻이다.
명문 무가에 잠입해 활동하는 간자들의 위계가 통상 '이 위계'라는 정보도 알고 있다.
참고로 민초들에게 녹아든 흑수문 같은 이들이 사 위계 간자 그리고 무림맹의 청요직에 숨어든 간자들이 대개 일 위계 간자다.
즉, '천일산이 미래의 일천살이다.'라는 심증 하나로 나는 '천마신교 이 위계 간자 일천살'이라는 문장을 완성시켰음이니.
나의 이 시도가 허장성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이다. 정보원들의 허장성세가 노름꾼들의 허풍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단편적인 진실에 상상과 추론을 더한 결론은 때론 진실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는 까닭일 것이다.
"...너,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냐?"
천일산이 물었다.
"뭐, 단천가의 일장로가 알고 보니 마교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 정도밖에 모르오만."
그리고 잠시 찾아온 침묵.
으득.
"어떻게 안 것이지?"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천일산의 눈매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비밀이오."
계획이 성공했기에 흡족함을 담아 그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37화 누가 감히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리 말하는 일장로, 아니, 천마신교 이 위계 간자 일천살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그가 멍청한 것이 아니다.
내가 제시한 정보가 구체적이었으니, 그로서는 내가 허장성세를 펴는 것이라 여기긴 어려웠을 것이고.
그의 멍청함이 아니라 내 책략의 승리라 평함이 옳을 것이다.
"허...."
일장로의 허망한 한숨이 공간을 수놓았다.
수십 년을 바친 대계가 어그러지고 있는 상황이니 그의 허탈함을 짐작한다.
하지만 잠시 후.
일장로의 눈가에 깃든 것은 자포자기의 체념이 아니라 결심과 살심이었다.
명가를 무너뜨렸던 유능한 간자답게 그 행동은 신속했다.
콰득.
일장로의 발이 삼장로의 목을 지르밟았다.
"컥."
단말마를 남기고 삼장로가 삼도천을 건넜다. 실로 덧없는 최후였다.
더러운 것을 치우듯 일장로가 발을 툭툭 털었다.
"이렇게 합시다."
나른해 보이는 그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이 공자와 삼장로가 사소한 시비 끝에 동귀어진을 한 것이오."
그리 말하는 일장로 눈동자는 무저갱처럼 고요했다. 평생을 숨겨 온, 마교도의 진면목이리라.
"꽤 괜찮은 계획 아니오?"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오."
내가 그였더라도 그런 계획을 세웠을 것 같으니, 최선의 계획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말이오."
쉽게 당해 줄 생각은 당연히 없음이다.
"오시오."
내가 기수식을 취하니.
쿠오오.
일장로의 살기가 폭증했다.
"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손아귀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전에 조화경에 발을 디딘 일장로의 살기를 오롯이 받아 내니 간담이 살짝 서늘해진 까닭이다.
원로원에 들고 안온함에 몸을 맞긴 삼장로와 평생을 절치부심하며 활약해 온 일장로가 근본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했다 할 것이다.
이 정도는 되는 인물이니 조화경에 이르렀을 것이고, 단천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으리라.
스릉.
"일장로, 기세가 사납소."
평온을 가장하며 말을 꺼냈지만 내 몸은 그러하지 못했다.
삼장로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시작부터 단천검을 빼 든 내 행동이 이를 증명했다.
"이 공자, 경지가 어떻게 되시오?"
그의 정체가 탄로 나기 전에도 한 번 했던 질문이다. 한데, 상황이 변하니 질문도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신을 개화한 탓인가, 일장로가 내 반박귀진을 뚫고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알아내 보시오."
그렇다고 순순히 답해 줄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스팟!
까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쾌속하게 쏘아진 일장로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중요한 사실은, 그의 검에도 나의 검에도 별 무리를 닮은 강매한 기운이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기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것, 바로 조화경의 상징인 검강(劍罡)이었다.
"허어."
살기로 번들거리던 그의 눈가에 맺힌 것은 감탄인 것 같다.
"약관에 조화경이라."
천고의 재능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취임을 안다.
"너는... 반드시 죽여야겠구나."
탄식을 하듯 일천살이 말했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이다."
마교도의 눈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덕분에 잘 알 수 있었다.
* * *
강호 무림에는 절정 초입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은 완숙한 절정이다.
삼류에서 일류지경까지는 없던 초입과 완숙의 개념이 있는 이유가 있다.
절정지경부터는 같은 경지라 하여도 그 편차가 꽤나 큰 까닭이다.
용봉회합만 하더라도 모두 절정의 무인들이 모였으나 그 역량은 천차만별이지 않았던가.
통상 완숙한 절정의 고수는 절정 초입의 고수를 셋까지 감당할 수 있다 알려져 있으니, 경시할 수 없는 차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절정지경이다. 검사(劍絲)에 이르러 초절정에 닿기가 얼마나 지난한지 알려 주는 증좌라 할 것이다.
절정지경조차 같은 경지 내에서 이리 편차가 심하거늘, 조화경은 어떠하겠는가.
조화경은 절정지경보다 조금 더 세밀하게 구분하곤 한다. 초입과 숙련 그리고 완숙이다.
조화경의 초입은 신을 개화하여 삼화취정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사 단공 증폭에 이른 내가 발을 디딘 경지다.
삼화취정을 이루었다는 것만으로 초절정의 무인과는 격이 다른 무위를 뽐내게 되니, 조화경이라는 칭호가 아깝진 않다 할 것이다.
다음을 통상 조화경 숙련기라 부른다. 삼화취정의 심즉행이라 부를 것이다. 삼화취정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 그들의 신위는 조화경 초입의 무인들을 간단히 제압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완숙한 조화경은 의념을 실체화시키기 시작하는 경지다.
기실 지고의 경지라 말하는 현경의 초입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절정을 초입과 완숙으로 구분하듯, 조화경을 초입과 숙련 그리고 완숙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 사이도 같은 조화경으로 묶기엔 다소 큰 격차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부분은 일장로 천일산이 세간의 평과는 다르게 조화경의 숙련에 진즉에 진입한 무인이라는 사실일 터다.
까강!
"크윽."
검강이 서린 천일산의 날카로운 검격이 연신 내 허점을 노리고 찔러 왔다.
여백 당숙과 함께한 지옥 같던 수련이 아니었다면, 진즉 몸에 구멍 두어 개는 생겨났을 것 같다.
"거 살살 좀 합시다."
낭패감을 숨기고 너스레를 떨었다. 와중에 내 두뇌는 맹렬히 움직였다.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내 비록 조화경 초입이지만, 여타 무인들과 같지는 않은 까닭이었다.
일 단공에 다져 놓은 터가 삼화취정에 이르러 반석에 오르는 중이며.
검강을 온전히 막을 순 없겠지만, 금체를 이루었으니 쉽사리 치명상을 입지 않거니와.
불침이 피로를 째깍 해소해 주니 늦지 않게 일장로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고.
증폭으로 단전을 가득 채운 내공이 사고의 속도로 임독맥을 흐르니, 내공 또한 쉬이 마르지 않아 끊임없이 합을 나눌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저 노회한 노강호를 상대로 피해 없이 승리할 방도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여 신체의 결손이라도 생긴다면 장차 대계에 큰 지장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 대화를 좀 해 볼 생각은 없소?"
시간을 조금 더 벌어 볼 요량이었으나....
"이제 그만 죽으시오."
유리한 상황에서도 일절 방심을 하지 않으니, 일장로는 철저한 인물이라 평하겠다.
고오오오.
일장로의 검에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 또한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리라.
"쯧."
좋지 않다.
지속력 싸움으로는 그와 얼마든지 견줄 수 있으나, 아무래도 경지의 차이가 있는 탓에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힘은 다소 부족한 까닭이다.
하나, 방법이 있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막아야 한다.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면 죽는다. 그것이 곧 생사결 아니겠는가.
일촉즉발의,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끈과 같은 긴장감이 공간을 지배하길 잠시.
탓!
일장로가 거력을 품을 검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최대한 힘을 그러모아 방비했다. 여하튼 이곳은 단천가의 안이다. 시간은 나의 편일 것이니, 일단 버티는 것에 집중을 할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흠칫.
나를 향해 쇄도하던 일장로가 순식간에 몸을 틀어 뒤를 돌았다.
누군가 일장로의 뒤를 급습한 까닭이다.
까강!
일장로가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내니, 그 인물은 그대로 일장로의 곁을 훌쩍 지나쳐 내 곁에 발을 놓았다.
"거참. 형님, 계속 숨어 있지 왜 나오셨소?"
"닥쳐라. 누가 숨어 있었더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단천학이었다.
* * *
"학 공자."
일장로가 단천학을 불렀다.
"예."
"스승에게 이게 무슨 짓이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천일산의 목소리에는 추상같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천학이 일장로에게 무릎을 꿇더니 절을 했다.
흡사 하산을 명 받은 제자가 제 스승에게 그간의 감사를 표하듯, 그의 행실에 경건함이 담겼다.
몸을 일으킨 단천학은 과거의 인연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제 사제지간의 연이 다했으니 덤비시오, 마교도 영감."
진중한 모양새건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쯧."
일장로가 혀를 찼다. 그 단호함에서 회유가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망해 버렸는가."
단천학까지 등장한 마당이다.
이미 그의 계획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음이라.
"후계자 둘의 수급 정도는 받아 가야 셈이 맞겠구나."
평생을 들인 공을 우리 둘의 수급으로 갈음하다니, 나름 우리를 후하게 평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누가 준다고 하였소?"
내 답변과.
"그만 나불대시오, 영감."
단천학의 답변이었다.
기실 단천학은 애초에 일장로에게 억하심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태였다.
"갈!"
일장로가 우리에게 쇄도했다.
"몸을 사리시오."
"네놈이나 잘하거라."
우리는 이를 맞이했다.
쩌엉!
내가 일장로의 검을 막고.
스팟!
단천학이 일장로의 빈틈을 찌르고.
휙!
일장로가 가뿐하게 피했다.
쐐액!
그런 일장로의 빈틈을 내가 재차 노리고.
챙!
내 검조차 쳐 낸 일장로의 검날이 다시 단천학을 향하고.
까강!
내가 그 검을 막아서니.
쩌엉!
단천학의 검격이 다시 일장로의 검과 맞부딪쳤다.
그런 공방이 족히 반각은 지속되었다.
우스운 일이다만, 단천학과 내 합은 썩 잘 어울렸다. 오래간 합을 맞춰 온 동료처럼 나는 그의 검로를 읽었고, 그는 나의 행동을 읽었다.
단천학 또한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초절정지경에 이른 무재를 지닌 바, 그의 임기응변은 결코 나에게 부족하지 않았다 할 것이다.
다만....
"허억. 허억."
아무리 무재가 뛰어나다 하여도 초절정의 무인이 조화경 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같이 노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실 일장로의 검격 대다수를 내가 막아 내고 있음에도 단천학은 빠르게 지쳐 갔다.
매 초의 교환이 그에겐 죽음의 문턱일 것이니, 이리 빠르게 체력이 고갈되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겠다.
으득.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 때문일까, 단천학이 거칠게 이를 갈았다.
힐끗 쳐다보니 검파를 쥔 단천학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강격은 모두 내가 막아 냈다 해도 단천학의 검이 일장로의 검강과 맞댈 일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형님, 이제 그만...."
"닥쳐라."
내 말을 단천학이 끊었다.
"가문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어찌 발을 빼겠느냐."
그리 말하며 단천학이 기수식을 다잡았다. 그의 의지가 신체조차 지배했는지, 덜덜 떨리던 그의 손이 고요하게 멎어 있었다.
초인적인 의지라 평할 것이니, 명가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면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쯧."
우리의 모습에 혀를 찬 일장로의 몸 주변으로 검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공의 흔적은 남기지 않으려 했건만."
일찍이 흑수문의 문주에게서 보았던 것과 비교를 불허했으니, 과연 이 위계 간자라 평하겠다.
"이제 진짜 죽으시게."
마공의 효용인가, 그리 말하는 천일산의 눈동자는 광증이 돋은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휘이이잉.
기척 없던 원로원에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왔으니, 내 긴장은 삽시간에 풀려 버렸다.
터벅.
그가 걸음을 내디디니 바람조차 멎으며 사위가 침묵에 쌓였다.
"누가 감히."
그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이 침묵을 깰 자격이 있다 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 바람조차 의념으로 잠재우는 완숙한 조화경의 고수가 등장했음이니.
"단천가에서 내 아들들의 목숨을 노리는가."
단천가의 절대 고수, 단천강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38화 제가(齊家)의 의미 (1)
"일장로,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하네만."
단천강의 냉담한 시선이 일장로에게 향했다.
"가능하겠는가?"
평온한 일상 같은 말이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좌중을 아우르는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명문 무가 단천가의 가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라 평하겠다.
일장로의 몸에서 여전히 검은색 증기가 일렁거리며 마공의 증좌를 발현하고 있으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저리 물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가주의 무게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일장로의 입은 걸쇠라도 걸어 놓은 듯 열릴 기색이 없었다.
"흠. 내 오랜 시간 가문에 충정을 바친 그대에게 변명을 할 시간이라도 주려 했네만, 말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겠지."
뒷짐을 쥐고 있던 단천강이 오른손을 꺼내 검을 그러쥐었다.
기수식이라 칭하기에도 모호한 자세였거늘, 좌중을 압박하는 무형의 지기가 공간을 점했다.
"크윽."
일장로는 나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듯, 그 표정에 절망이 서렸다.
내 진즉 평하기를 일장로가 조화경 숙련의 경지라 하였다. 나보다 한발 앞서 있는 경지였다.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 단천강은 조화경 숙련을 넘어 완숙의 경지에 닿아 있는 초절의 무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십 년 후의 미래에 일천살이 단천강이라는 절대 고수를 어찌 제거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지금은 어림도 없다 할 것이다.
"젠장."
일장로 또한 이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인가.
그는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제 몸을 빼내려 용천혈에 내기를 그러모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음이니.
초절에 달한 표홀한 신법이 시작되기도 전의 그 찰나.
석둑.
가벼운 절삭음과 함께 일장로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피가 터지지 않았지만 얼굴과 몸이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일장로 본인조차 말이다.
"...."
임종을 직감한 그는 처음으로 평생을 숨겨 온 제 정체성을 입에 담았다.
"천마... 재림...."
툭.
유언조차 끝맺지 못하고 미래에 산동을 혼란에 빠뜨릴 극마 고수의 목숨이 덧없이 스러졌다.
데굴데굴.
떨어진 목이 한 인물의 발치에 닿았다.
"어딜 도망가려 하시나."
단천강의 그림자, 방여백이었다. 방여백의 허를 찌르는 표홀함에 일장로는 제대로 반응조차 못 했던 것이다.
"흠. 아쉽게 되었구나."
단천강의 무감한 감상평이 뒤따랐다.
"후-."
그제야 모든 긴장감이 풀린 내가 한숨을 내쉬고.
털썩.
모든 기력이 쇠하였는지, 형님 단천학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생했구나."
그런 우리 둘을 바라보는 단천강의 시선에는 인자한 아버지의 온기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여백 당숙이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가주전의 앞.
"용서해 주세요."
여인 백여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평소의 정갈하던 모습은 없고, 머리조차 죄인처럼 풀어헤친 그녀였다.
단천가의 가솔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였으나 감히 나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가주님,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그리 말하며 그녀가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족히 반나절은 지속된 읍소였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끊임없이 사죄를 청하니, 그녀의 기력이 쇠하여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용서해 주세요."
백여해의 석고대죄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주전 안에서는 그녀에게 어떠한 기별도 내려 주지 않았다.
고요한 폭력과도 같은 상황은 시간이 지남에도 그 끝을 알리지 않았다.
원로원을 책임지는 일장로가 마교의 간자였다는 기함할 소식이다.
아무리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다 하여도 가문 내에서까지 비밀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내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는 뜻이다.
더불어 가내의 모두가 알았다.
지금 가주전 앞에서 읍소를 하고 있는 단천가의 안주인 백여해와 마교의 간자였던 일장로가 누구보다 긴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백여해는 장남 단천학을 가주로 만들고, 일장로는 호위대장 방여백을 견제한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그들의 동고동락이 근 십 년을 이어 왔다는 사실은 가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백씨세가의 여식인 백여해와 단천가의 식객으로 시작해 원로원에 입성한 일장로는 단천가에서 연을 맺은 사이라는 사실이다. 백여해의 근본 또한 마교의 간자일 것이라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백여해는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인 백여해의 죄는 무엇인가.
무지는 대부분의 경우 무죄라 할 것이나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많은 것을 가진 이들에게 무지와 무능은 때론 큰 죄가 되는 법인 것이다.
가문의 안주인이자 후계자의 보호자인 그녀다. 실로 가내에 그녀의 권위는 막강했으니, 가솔들 중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할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던 그녀의 무지는 무죄로 퉁치고 넘어가기엔 심히 중대한 사안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누군가는 백여해가 피해자라 안쓰럽다고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그래도 백여해가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았겠냐고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본디 진실이 판별되지 않은 정보란 스스로 덩치를 키워 나가는 법인 까닭이다.
간자가 아닐 것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쉬이 의심을 떨칠 수 없는 이들은 계속 생겨났다.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의문 앞에서 그녀의 이런 읍소는 결국 필연이었다.
죄를 사하고, 가내에서 다시 인정을 받아 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광경이 참으로 잔인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용서해 주세요."
버석 마른 입술로, 기력이 쇠해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서도 백여해는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차마 이 광경을 외면할 수 없는 이가 있었으니.
털썩.
백여해는 누군가 자신의 옆에 무릎을 꿇는 기척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에 제 목숨을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인물이 담겼다.
"네가 왜 여기를 왔느냐!"
가냘프게 읍소하던 백여해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가주전을 울렸다.
기력이 쇠했음이 확실한 모습에도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찼으니, 단천학이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차지하는 의미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겠다.
"어머니."
단천학이 조용히 제 어미를 불렀다.
"제 일입니다."
그리 말한 단천학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곤 외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단천학이 취한 행동은 백여해의 그것과 같았다.
석고대죄.
단천학이 스스로 제 죄를 청했다.
"이게 무슨 짓이더냐! 너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 가라! 가라고!"
퍽. 퍽.
백여해의 가냘픈 주먹이 단천학의 어깨를 때렸다. 그녀 생에 처음으로 아들에게 매질을 가한 것이다.
쇠약하기 그지없는 주먹이건만 단천학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용서해 주십시오!"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그녀의 주먹 따위 단천학은 손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지만 묵묵히 맞으며, 용서를 청하며 바닥에 엎드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매질을 포기한 백여해의 손길이 단천학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학아, 늦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거라. 이 일이 네게 흠이 될 수 없음이니, 이 어미가 그리 만들 것이다."
후계자 경합이 코앞인 시점이다. 지금 이 행동 자체가 흠이 되어 혹여나 단천학이 가주의 위를 받지 못하지 않을까, 그것이 백여해의 걱정이었다.
애초에 백여해가 이토록 처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제 아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너는 제발 빠지거라. 응?"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호행 이후로 깊어진 단천학의 눈빛이 제 어미를 담았다.
"어머니."
"가라고!"
백여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사나움이 단천학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는 더 이상 품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저는 단천가를 이을 몸이란 말입니다. 제 문제는 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지막하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처음으로 사내가 되어 제 어미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 * *
"쯧."
남몰래 숨어 그 모든 광경을 내 눈에 담았다.
어쩌면 유쾌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던 그 과정들은 내 마음속에 돌덩이를 하나 얹어 놓았다 평하겠다.
나는 여인 백여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항상 마뜩잖은 시선을 보낸 까닭이다.
그녀가 한 번도 나에게 어머니의 자애롭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 주지 않은 까닭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녀가 내게 냉담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알지만, 그럼에도 야속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 야속함이 미움이 되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이 말이다.
어린 나이.
갈구했던 것을 얻지 못한 아이가 그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회귀를 한 지금, 나는 또 다른 사실도 알고 있다.
기실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정하고 있던 정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여인 백여해는 내게 그리 큰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없다는 것은 아니고, 크지 않다는 것이다.
명개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통상 사생아라 불리는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지 말이다.
당장 남궁탄의 사생아 백장삼만 하더라도 가문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가 아니던가.
그 아이는 제 존재를 부정당한 채 남궁가의 머슴으로 자라고 있지 않던가, 이 말이다.
남궁의 경우도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하는 것임을 개방에서 십 년을 지낸 나는 알고 있다.
다른 명가의 사생아들이 어떤 멸시와 핍박 속에서 사는지 아는 지금, 나는 내 삶이 처절하게 불우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안다.
여인 백여해.
그녀는 나를 싫어했음이 분명하다. 경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녀는 내가 지원 받는 것을 경계했으며, 성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내가 가문에서 오롯이 서는 것을 경계했다.
그녀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차남이 아니라 장남의 경쟁자였음이라.
하지만 그녀에게 위해를 당한 적 있냐는 물음에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가장 적극적인 행보였던 양수린과의 약혼 건조차도, 그녀의 흉계가 지극히 수동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이전 생, 백여해와 양수린의 계약 조건은 내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지원을 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직접 나서 가장 적극적으로 내게 행했던 작전은, 용의 별호를 얻은 나를 명가에 장가보내려는 수작질 정도가 되겠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여인 백여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혹은 좋아하는가?
절로 고개가 흔들렸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녀가 싫다. 나를 경계하고, 걸림돌로만 생각하던 그녀가 좋을 순 없다. 솔직히 이제 와 그녀를 어머니라 진심으로 부를 순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안다.
하지만....
-가문을 떠날 생각이더냐?
-후계자 경합에서 패했으니 가문을 떠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백여해.
-...몸 성히 지내거라.
쥐어 짜내듯 그녀가 겨우 건넨 한마디의 말.
왜 지금, 지난 생 그녀와 했던 마지막 대면이 생각나는지는 모르겠다.
"후-"
개방에 있으면서 그리고 정마대전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추악한 면모를 누구보다 많이 보아 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보다 사람이 지닌 가능성 또한 많이 봐 왔음을 부정할 순 없겠다.
나와 이춘백이 친우가 되었듯.
단천학이라는 얌생이가 저리 반듯한 어른이 되었듯.
어쩌면 백여해도 이번 생에는....
터벅.
생각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내 신형은 어느새 단천학의 옆에 서 있었다.
놀란 듯 보이는 단천학의 눈동자와 '네가 왜 여기에?'라고 묻는 듯한 백여해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 모양새가 백여해와 단천학과 같아졌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목소리가 가주전을 울렸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39화 제가(齊家)의 의미 (2)
실랑이는 없었다.
백여해와 단천학은 내가 함께 무릎을 꿇은 연유를 묻지 않았고, 나 또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모양새로 가주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읍소를 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십시오!"
백여해도, 단천학도 그리고 나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가주전 앞에서 속죄를 빌었다.
나와 단천학이 시발점이 된 것인가. 이제껏 눈치만 보던 가솔 수십이 우르르 백여해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엄정한 군율이 담긴 듯 일체된 몸짓으로 넙죽 엎드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관이었다.
이리 많은 이들이 그녀 한 명의 탄원을 위해 제 몸을 엎드렸으니, 가문의 안주인 백여해가 쌓아 온 덕이 적지는 않다는 뜻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길 한참.
"그만."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으니, 가주전에서 단천강이 그 무거운 걸음을 옮긴 것이다.
무겁게 등장한 단천강의 시선이 우리 모두를 담았다.
백여해를 가볍게 지나친 그의 시선이 나와 단천학을 향했다.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더냐?"
"...."
나와 단천학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용서를 구한 것이더냐?"
"가주..."
앞으로 나서려는 백여해를 제지하곤 단천학이 나섰다.
"아버지."
"말하거라."
내 평생에 단천학의 저리 긴장한 표정을 처음 본 것 같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단천학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일장로와 손을 잡은 것은 모두 저를 위해서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원인은 저에게 있는 것이니, 어머니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단천학이 넙죽 엎드렸다.
"아니! 아닙니다. 가주님! 제가 죄인이에요! 학이는 죄가 없어요!"
혹여 단천학에게 흠이 될까, 백여해가 얼른 단천학을 제치고 그 앞에 엎드렸다.
"학이는 죄가 없어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흡사 절규라도 하듯, 엎드렸음에도 백여해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바로 옆에서 그 모든 행실을 지켜본 내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저런 모자의 모습이 조금은 부러웠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다.
가주 단천강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너는 왜 거기 있는 것이냐?"
기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 계획도 없이 이곳에 자리한 것은 아니었으니. 생각한 바를 읊었다.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입이 열리자, 가주를 비롯한 모든 가솔들이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단천학과 백여해마저 말이다.
* * *
용서를 구하던 놈이 거래를 입에 담으니 가주 단천강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흥미가 떠올랐다.
"거래라 했느냐?"
그의 질문에 답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일장로가 마교의 간자임을 발견한 것은 저입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교의 간자를 제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도 저입니다."
비록 여백 당숙이 그 목을 베었으나 내 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제 와 이런 사실을 열거하는 것은 생색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런 제가 판단하건데, 어머니는 간자가 아닙니다."
백여해는 단천가의 몰락과 함께 명을 달리한 인물이니, 그녀가 마교의 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단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나.
"그래서 거래입니다."
단천강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눈을 맞추었다.
"가문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니 가주께 청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과를 공으로 덮겠다?"
"그렇습니다."
내 제안이 의외였음인가. 단천강의 냉담한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지금 네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있느냐?"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죄가 사해진다면 내 공도 사라질 것이다. 상계(相計)한다는 뜻이다.
달리 해석하자면, 백여해를 위해 내가 희생을 한다는 뜻이며, 후계자 경합에서 한발 앞설 절호의 기회를, 그녀를 위해 버리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가내에서 여인 백여해와 내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의 표정에 서린 것은 당혹감과 의문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곧이어 답이 나왔다.
"...그리하라."
그리 선언한 단천강의 표정은 참으로 묘했다.
누구보다 안목이 좋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지금 단천강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대견함인지 실망인지는 모르겠다.
"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모든 가솔들은 그리 알거라."
그리 말한 단천강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주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그가 선언했으니 모든 일은 끝났음이라. 백여해의 죄가 사해진 것이다.
백여해가 나에게 다가왔다. 비척비척한 그 걸음이 기력이 쇠했기 때문인지, 어색함 때문이지 잘 모르겠다.
눈을 마주치니,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혼란이었다. 도저히 내 행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녀를 이해한다.
나조차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거늘, 타인인 그녀가 어찌 나를 이해하겠는가.
그녀의 속에서 많은 말들이 생겨났다 스러졌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리고 마침내....
스러지고 스러진 후에도 남아 있는 한마디가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일단은 고맙다고 해 두마."
참으로 여인 백여해다운 말이었다.
한데 그 말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예."
고개를 드니 하늘이 맑았다.
여하튼 단천가의 미래에 암운이 걷히고 평화가 찾아왔음이라.
지금은 이것이면 되었다.
* * *
돌이켜 보면 그렇다.
회귀를 한 이후 내가 처음 세운 목표는 소가주 경합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회귀 이전의 삶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었던 그 물줄기의 방향을 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명개의 삶에 큰 불만은 없었으나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었음이라.
어쩌면 내게 주어졌을지도 모를 그것들을 쟁취하고 싶었음이라.
무림맹주가 되어 정마대전을 막아 낸다던가, 약선심결의 대성을 이루어 천하제일이 된다는 창대한 목표도 있었지만, 첫 번째 목표가 소가주 경합의 승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연유를 생각해 보자면 이렇다.
형님 단천학이 소가주가 되고, 장차 가주가 된다면 무림맹주가 되어 정마대전을 막고자 하는 내 행보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천학이 많이 변했음을 안다. 아니, 어쩌면 단천학은 원래 저런 모습이었는데 과거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회귀 시점에 내가 생각하던 단천학과 지금 내가 인지하는 단천학이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단천학이 소가주가 된 미래가 다시 찾아온다면, 그가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 것인가?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겠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말할 수도 있다.
단천학은 그 나름의 정의와 명가의 후계자다운 품격을 지닌 인물임을 알게 되어 그렇다.
소가주가 되고 싶었던 다른 이유를 구태여 찾자면.
십 년 후에 찾아올, 단천가를 몰락의 암운에서 건져 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하겠다.
기실 작금의 내 마음이 복잡해진 까닭이다.
정마대전이 벌어진다면 전화 속에서 건재할 가문이 많지 않겠지만, 그 정마대전은 내가 막을 것이다. 없던 일로 만들 것이다.
가문의 멸문을 주도할 일천살 또한 진즉에 제거되었으니, 이제 단천가에 드리웠던 암운은 완전히 거두어졌다고 판단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회귀를 한 지금, 나는 왜 소가주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 그 전에....
나는 진실로 단천가의 소가주가 되고 싶은가?
소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다.
약선은 말했다.
약선심결 사 단공 증폭을 이루면, 이것이 곧 제가(齊家)라고 말이다.
때문에 생각했었다.
사 단공 증폭으로 내 일신의 경지에 제가를 이루었으니.
이 경지를 발판 삼아 소가주의 자리를 쟁취해 낸다면, 진정 제가를 완성할 것이라고 말이다.
약선이 말한 제가가 결코 소가주의 자리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리 해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맞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단지 이전 생의 결핍을 해소하고 싶었음이라.
회귀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려 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부족했던 결핍을 채우려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조화경에 들고 신이 확장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지금 내가 이룬 경지로 소가주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과거에 채우지 못했던 결핍을 채울 수 있을까?
"...."
아닐 것이다.
마음이 그리 알려 주었다.
조화경에 이르러 개화한 신(神)이 알려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약관의 단천명이 아니라 무림맹주가 될 결심을 했던 명개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많은 경험을 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오성과 안목을 자랑했던 명개의 시각으로 지금 내 현황을 바라보았다.
소가주가 되는 것.
그리고 되지 않는 것.
무엇이 내 대계에 이득일 것인가.
진정한 이해득실을 따질 시점이 온 것이다.
명개의 삶을 떠올리자 답은 생각보다 쉽사리 나와 버렸다.
"소가주 경합에서 사퇴하겠습니다."
"뭐라?"
"저는 단천가의 가주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대뜸 가주전을 찾은 것은, 이러한 사고 과정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 * *
현재 나는 대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가전무공인 단천검결을 후반부까지 모두 익혔고, 약선심결의 사 단공에 들었다.
강호 무림의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조화경의 초입과 숙련 사이의 어디 즈음에 자리해 있다 평할 것이다.
약관에 이루기에는 지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경지라 하겠으나, 강호 무림 전체를 놓고 보자면 그렇지도 않은 경지.
강호 인명록 일천선을 모두 꿰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여전히 미욱한 경지라 평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나 이상의 고수가 기백이다. 기인이사, 은거고인, 신비문파 그리고 천마신교의 숨은 고수들을 모두 포함시킨다면 일천선의 명단에 발을 들이기도 어려운 경지고.
배경이나 성장 가능성을 배제하고 현재의 무력만 측정하자면 그렇다. 강호 무림은 이토록 광활한 세상인 것이다.
단천가는 훌륭한 가문이니 그 가주 위는 분명 훌륭한 자리다.
하지만 동시에, 가주의 자리가 내 무공을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며.
천하제일에 도달하는 방법은 단천가의 소가주가 되고, 미래에는 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선심결을 대성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약선심결 오 단공이 있다.
약선이 이룩한 경지이며, 당대의 천하제일들과 자웅을 다투던 경지이다.
다만 내가 수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판단하건대 당금의 강호 무림에서 약선심결 오 단공으로 천하제일을 다투기는 힘들 것 같다. 시간과 함께 강호인들의 무공 또한 발전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까닭이다.
천하십대고수의 말석 정도는 어떻게 차지할지 모르겠으나, 천하제일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는 무림맹주에 오르고, 정마대전을 막아 내기엔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때문에 나는 약선심결 육 단공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약선조차 도달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에 발을 들이고, 천하제일의 이름을 쟁취할 것이다.
진즉 모든 계획을 안배해 놓은 나는, 소가주의 위에 오른 이후에 약선심결의 오 단공과 육 단공에 닿을 수 있는 길을 설계해 두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면 그렇다.
가문에 묶일 소가주보다야 자유로운 가문의 차남 신분이 약선심결의 대성에 이르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 단공과 육 단공을 이루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천하를 주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문을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맡기고, 나는 육 단공을 이루어 천하제일을 이룩한다.
그 힘으로 가문을 천하제일가로 만들고, 무림맹주가 된다.
그 힘으로 정마대전을 막아 낸다.
참으로 합리적인 계획 아니겠는가?
때문에, 가주전에서 당당히 선언하는 내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소가주 경합에서 사퇴하겠습니다."
"뭐라?"
"저는 단천가의 가주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단천강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구태여 따지자면 후련한 쪽이 조금 더 큰 것 같으니, 후회 없는 선택이라 생각한다.
잠시 후, 가주 단천강이 입을 열었다.
"불가."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에 처음으로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가주에게 내 존재가 인정받은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40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