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귀를 준비했다
나는 회귀를 하게 될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가문을 등지게 되었을 때, 불현듯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로 어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회귀하게 될 시점도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아직은 강호의 낭만을 품고 있던 그 시절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처지가 다소 곤궁해졌지만, 마음이 꺾이지 않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망상증에 시달린다고 여길 까닭은 없다.
때문에, 나의 회귀는 진실이라 할 것이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회귀 사실을 알게 되니 고민이 생겼다.
'무엇을 해야 할까?'
회귀가 예비되어 있다 하여 남은 생을 허투루 보낼 순 없는 법이다. 그러하다면 회귀 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어지리라.
회귀 이후의 부귀영화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건한 무공도 빼놓을 수 없겠다.
"흠."
저잣거리에 주저앉아 궁리하고 있는 내 앞에 마구간의 똥지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몰골이 비루하고 냄새가 지독하여 사람들은 얼른 그를 피해 섰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인가?"
가문에서 등졌음에도 내 몸에는 여전히 명가의 자태가 남아 있었으니, 마구간 똥지기는 무례함에 반발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낮에 이 일을 했기에, 밤에 제가 배를 곯지 않고 안온한 처소에서 몸을 누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군."
일상의 소소한 진리가 내게 다가왔다.
"답변 고맙네. 무례를 용서하시게."
"별말씀을요."
"사례일세."
수중에 남은 전 재산이던 은자 한 냥을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마구간 똥지기는 의례상의 사양도 없이 은자 한 냥을 받아 제 품속에 갈무리했다.
회귀 전에 무엇을 할지 결정했다.
남은 생은 마구간 똥지기의 낮처럼 살아가리라.
망해 버린 이번 생을 오롯이 투자하여 다음 생을 창대하게 열 것이다.
이는 오로지 회귀 예비자만의 특전일 것이니.
* * *
회귀가 예정되어 있는 나에게 있어 '정보'란 다음 생의 질을 결정하는 당락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강호 무림은 온갖 기연이 난무하는 세상인 바, 제대로 된 기연을 하나라도 획득하면 팔자를 피는 것이 가능한 까닭이다.
'어디가 좋을까.'
이왕 결심한 참이니, 최고가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개방 혹은 하오문이다.
'개방으로 가자.'
마구간 똥지기에게 큰 배움을 얻었기에 거지가 되겠다는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사도 계열인 하오문보다 정도 계열인 개방이 더 끌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순 없겠다.
"개방에 입방하기 위해 찾아왔소."
개방의 본타에 도착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스윽.
늙수레한 거지가 무심해 보이는 시선으로 내 면면을 살폈다.
비루한 외형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던 그의 형형한 안광이 인상적이다. 이 거지는 무공을 익힌 거지다. 그것도 꽤나 고강한.
무심한 척 늙은 거지의 허리춤에 묶인 매듭을 살폈다. 여섯 개의 매듭이 난잡하게 묶여 있다.
'육결개로군.'
역시나 예사 거지가 아니었음이다.
"단천가의 직계가 개방에 입방이라?"
역시 명불허전이라, 개방의 정보력은 얕볼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 성은 이미 버렸소."
"하기사. 이제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인가."
늙은 거지의 혼잣말과 같은 읊조림에 답을 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인가?"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이름을 묻는 저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답은 해야 했다. 아쉬운 쪽은 나였으니.
"명이오."
"자네가 단천가의 차남인 단천명이 맞는가?"
"그 성은 이미 버렸다 하였소."
"그렇구만. 늙으니 기억력이 가물가물한다네."
늙은 거지가 짓궂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단천명이. 따라오시게."
늙은 거지의 말을 정정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싶었다.
* * *
개방도가 된 지 오 년이 흘렀다.
내 방명은 '명개'가 되었다. 나를 받은 육결개, 취풍개의 작품이다.
그간의 내 삶을 축약하자면, 거지 같지만 순탄한 나날들이었다 평하겠다.
삼 년 만에 분타주와 동급인 삼결개가 되었으니 순탄했다 할 것이나, 그 삶 자체가 거지 같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하겠음이다.
'시벌, 인생....'
마구간 똥지기에게 배움을 얻지 않았다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인고의 세월이었다.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준비를 했다. 장차 찾아올 회귀를 위한 안배이니, 허투루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강호 무림에서 발견된 각종 영약들의 발견 장소, 발견 시기, 발견자, 연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강호 무림을 들끓게 만든 장보도의 표식지도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개방의 정보력을 백방 활용하여 진위여부를 판별했음은 물론이다.
강호인명록 일천선도 모조리 암기했다. 강호의 진정한 기연은 인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준비가 탄탄대로인 것 같지만, 개방에 들어오며 내가 계획한 것 중 아직 하나의 고리가 부족하다.
바로 무공이다.
정보를 들고 과거로 회귀하면 뭐하나. 힘이 없다면, 얻은 것들을 지켜 내지 못할 것을.
강호는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임을 안다.
거지가 된 이후로 하루를 사흘처럼 살았다. 그간 무공 수련도 등한시하지 않았기에 가까스로 절정지경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명문 무가에서 나고 자라 열일곱에 이미 일류지경에 닿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취다.
다만, 누군가는 '무려 절정'이라 칭할 그 경지가, 내 시선으로 보자면 '고작 절정'인 것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개방에 있으며 강호에 초절의 고수들이 얼마나 즐비한지 알게 된 까닭이라 하겠다.
"어떻게든...."
회귀 후의 내가 익힐 무공을 구해야 한다. 회귀를 하게 되면 열여덟일 것이니, 아직 기회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다다익선이니까...."
이왕이면 천하제일에 닿을 수 있는, 그런 무공이면 더 좋겠다.
* * *
십 년차 거지가 되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내 나이는 이립에 이르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오랜 시간을 투자한 끝에 마침내.
"이거다!"
나는 내가 원하던 것과 일치하는 묘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수한 거지들의 손때를 타 거뭇해진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약선심결(藥仙心結)이라."
전전대의 기인이자, 당시 천하제일에 근접했다 알려진 약선의 무공이다.
전인을 남기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기에 맥이 끊어졌다 생각한 그 약선의 무공이 개방 본타의 서고에 있다는 정보를 찾아낸 것이다.
책자에 담긴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정보였다.
-약선심결을 대성한다면 천하제일에 오를 것이다.
호사가들의 흰소리가 아니다. 무림맹의 총군사인 신기자의 호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약선심결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치적 역학 관계 때문에?
약선심결이 난해하기 때문에?
구결의 소실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아니다.
-다만, 약선심결을 온전히 익히기 위해선 천고의 행운을 타고났거나, 나라를 살 수 있는 금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였다.
다음 내용을 보니 납득이 되었다.
-약선심결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공청석유가 필요하다.
공청석유가 무엇인가.
천혜의 비처에서 백 년에 한 방울이 맺힌다는 희대의 영약이 아니던가. 돈으로 환산하기조차 힘든 보물이다.
그 공청석유가 대성도 아닌, 입문 조건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담담한 서체로 쓰여 있었다.
그 뒤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할지 상상조차 쉽지 않았다.
흥미가 동했다.
지금은 불가하지만, 회귀 후에는 공청석유를 구할 방도가 있는 까닭이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약선심결 - 보안등급 : 상(上)]
긴 세월 방치된 탓인지, 상승의 무공 치고는 보안등급이 많이 내려와 있었다.
부족한 정보는 약선심결을 직접 들여다보면 알 수 있으리라.
"쯧, 기별을 드려야 하나."
다행히 나에겐 상급 정보 정도는 구해다 줄 수 있는 인맥이 하나 있었다.
* * *
"단천명이 있느냐?"
늙은 거지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칠결에 올라 개방의 장로가 된 취풍개의 것이다.
"그 성은 버렸다 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참."
그가 무신경하게 대답하며 분타의 움막에 주저앉았다.
"벌써 구하셨습니까?"
그가 지금 나를 찾을 다른 까닭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 이놈아."
취풍개가 제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약선심결 필사본이다."
"고맙습니다."
"에헴, 상(上)급 정보이니라."
상급은 육결개 이상에게만 허용되는 정보다.
칠결개 취풍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삼결에 불과한 나로선 구할 수 없는 것.
쉽게 말해, 그는 지금 생색을 내는 중이다.
"항상 감사합니다."
"헹, 매번 말만 번지르르하구나."
성미 고약한 늙은이지만, 그가 내 뒤를 봐주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내가 한 제안은 생각을 좀 해보았느냐?"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건은 저번에 이미 거절했습니다만."
이번만은 염치없는 거지가 되어야겠다.
"쯧, 오성도 영민하고 기반도 튼튼한 놈이 왜 고집을 부린단 말이냐."
답답한 듯 취풍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개방의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사결을 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놈이 왜 고집을 부리느냐. 아닌 말로, 내 후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거지 놈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취풍개의 말이 옳다.
그는 일신의 무공만으로 개방의 장로에 올라선 인물 아닌가.
다만, 내 다음 생에는 거지의 삶을 살지 않을 생각이니, 개방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 것이 맞겠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렇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쯧, 아직도 가문의 무공에 미련을 못 버렸느냐."
"...."
취풍개는 저 좋을 대로 해석을 했고, 나는 이를 정정하지 않았다.
"네놈 알아서 해라. 망할 거지 놈아."
내 고집이 드세다는 것을 익히 아는 취풍개는 이번에도 한 수 접어 주었다.
그의 이런 마음이 고마웠다.
"떼잉."
용무가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키던 취풍개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단천가가 망했다는 소문이 들리더구나."
"...!"
취풍개는 소문이라 했지만, 이는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는 개방의 장로가 아닌가.
남궁가와 더불어 안휘성을 주름잡는 명문 무가인 단천가의 몰락이다. 경천동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강호에 나름 떠들썩하게 퍼질 소식이다.
그것이 아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는 건 개방 본타에 지급(至急)으로 도착한 정보라는 뜻이다. 명문 세가의 정보는 개방에서도 중히 다루는 것이니 말이다.
"왜 말이 없느냐?"
내 마음이 걱정되는지, 취풍개가 재차 물어왔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온을 가장하며 그리 답했다.
"괜찮으냐?"
"예. 이미 저와 갈라선 곳 아닙니까. 제 집은 개방입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취풍개가 손을 흔들었다.
"진짜 간다."
"들어가십쇼."
취풍개가 떠나고, 내 주먹으로 시선이 향했다.
핏기가 빠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거칠게 쥐었었나 보다.
괜찮다.
회귀를 하게 되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이미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어 버린 정보는 그 가치가 얕아지는 법이다. 정보의 가치는 독점에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단천가가 멸문한 정보는 삼결개에 불과한 나로서도 약간의 품을 들이니 소상히 알 수 있었다.
헌데, 수집된 정보를 정리하니 묘하다.
'이상한데?'
단천가의 멸문은 너무도 조용히, 아무런 소식이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정보는 단천가의 몰락 과정이 아닌, 몰락 이후에 집중되어 있었다. 떠들썩한 것치고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단천가라는 가문은, 증발되듯 사라져 버렸다.
개방의 안목을 피할 정도로 큰 세력의 음모인가?
아쉽지만, 당장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 사안은 일단 미뤄 두고....'
이미 멸문해 버린 가문보다는 눈앞의 약선심결이 내 관심을 더 끈다는 사실을 구태여 부정하기는 힘들겠다.
때문에 약선심결 필사본으로 내 시선이 향했다.
사락.
책장을 넘겼다.
필사본에 적힌 모든 글귀를 묵묵히 머릿속에 담았다.
회귀를 할 때 이 책자를 들고 갈 순 없는 법이니, 혹여 한 글자라도 놓칠까 싶어 신중하고 꼼꼼하게 읽고 외웠다.
* * *
"명개 님! 명개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일결개의 호들갑은 여상한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진짜 큰일이 났습니다요!"
"무슨 호들갑을 그리 크게 떠느냐? 전쟁이라도 났느냐?"
내 질문에 일결개가 멈칫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뭐가 말이냐?"
"전쟁 말입니다."
"...?"
내 어벙한 반응에 일결개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마대전이 일어났답니다."
"정마대전?"
"예."
"정마대전?"
"예."
"...정마대전?"
"뭐 잘못 드셨습니까?"
빡!
"이놈시키가."
내가 뚝딱거린 것은 인정하지만, 하극상이 괘씸해 일결개를 동냥박으로 한 대 후려갈겼다.
"여튼 전 전해 드렸습니다."
맞은 곳을 문지르며 일결개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급하다는 듯 얼른 자리를 떴다.
"정마대전이라."
머릿속을 간질이던 정보 하나가 맞물렸다.
"그거였구나."
단천가의 멸문은, 정마대전의 전조였던 것이다.
* * *
정마대전이 터지고, 나는 거취를 정했다.
"비각(秘閣)에 가겠습니다. 분골쇄신하여 정도 무림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명분을 만들었다.
"이놈아. 그곳은 사지(死地)다. 왜 구태여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려고 하느냐."
취풍개가 만류했지만.
"가겠습니다."
"...네놈 알아서 하거라."
결국 막아서진 못했다.
취풍개의 추천으로 무림맹의 정보 조직인 비각의 단원이 되었다.
회귀를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더라도 결국 정마대전은 터질 것 아니겠는가.
회귀 후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정마대전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마대전의 참상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무림맹 산하 창천대(蒼天隊)가 귀령신마와 조우, 치열한 격전 끝에 전멸.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정보를 내 눈에 직접 담았다.
"끔찍하구나...."
창창한 미래를 꿈꾸던 후기지수들이 노마두의 손아귀에 찢어발겨져 있었다.
-민가 구출 임무에 나선 현무대(玄武隊)를 숨어 있던 마교도들이 암습. 전멸 추정.
단 하나의 문장에 큰 슬픔도 담겨 있었다.
"...고생하셨소."
끝까지 민초들을 등 뒤에 두고 항전한 현무대원들은 민초들과 나란히 바닥에 스러져 있었다.
-청룡대(靑龍隊), 대력신마의 부대를 격파.
무림맹이라고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으니, 승전보도 울려왔다.
하지만.
"허망하구나."
그 승전보 속에는 기치를 떨치고 일어선 정파 무인들의 주검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것이... 전쟁인가."
전쟁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고민이 생겨났다.
정마대전, 이 끔찍한 지옥도를 회귀 후에 재현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아쉽게도,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나라고 피해 갈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푹!
"커헉."
품속에 든 책자를 관통하며 날카로운 날붙이가 내 몸속을 헤집었다.
"그 녀석이 마지막이냐?"
"예."
내게 칼침을 놓은 마인이 칼을 뽑으며 제 상관에게 공손하게 답했다.
"커흐흐...."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함께하던 비각단원들은 진즉에 명을 달리했다. 정보원들의 말살을 목적으로 한 마교의 타격대에 당한 것이다.
주섬주섬 품속에 든 것을 꺼내 들었다. 내 피를 머금어 제 기능을 상실한 책자는 약선심결의 필사본이었다.
마교 타격대 수장의 무정한 시선이 나를 담았다.
"유언이라도 있나? 최후까지 버틴 놈이니, 유언 정도는 남길 기회를 주마."
마도인치고는 자비로운 놈이라 하겠다.
유언이라.
나는 죽지만, 회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생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유언을 고민하다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었나.'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초들의 원통한 주검들이 떠올랐다.
기치를 떨치고 있어났지만, 끝내 찬 바닥에 몸을 누인 무인들의 시신들도 떠올랐다.
이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은 없던 일이 되어야 한다.
정마대전이라는 인세에 재현된 지옥은, 결코 하늘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음이라.
내게 안배된 회귀는, 그런 의미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덕분에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그래. 나는 무림맹주가 되어야겠다."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주가 될 것이다. 그 힘으로 정마대전을 막을 것이다.
회귀 후의 미래에는 이 참혹한 정마대전이라는 것이 없도록 말이다.
회귀와 약선심결.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가능하리라.
"미친놈이로군."
서걱.
섬뜩한 칼소리와 함께 눈앞이 암전되었다.
2화 가출을 준비했다
눈을 떴다.
항상 눈을 뜨던 거지 움막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마대전 이후 내 몸을 누이던 비각 숙소의 천장도 아니다.
낯설지만, 그럼에도 익숙한 천장이다.
'회귀했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내가 회귀할 것이란 사실은 진즉 알고 있지 않았던가.
목 어름을 스치던 칼날의 감각이 생생하여 나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쓸었다. 멀쩡하다.
몸을 일으켜 내 방에 있는 동경을 바라보았다.
닳고 닳은 거지인 명개는 사라지고 열여덟의 파릇한 청년 단천명이 보였다.
방을 둘러보았다.
안휘성을 주름잡는 명문 무가의 차남인 나, 단천명의 처소치고는 지극히 소탈하다.
마치 무가의 사용인 중에서도 급이 낮은 이들에게나 배정될 것 같은 황량한 처소라 할 것이다.
"돌아왔구나."
내 방이 맞다.
명문 무가의 차남.
모두가 부러워할 태생이었지만, 정작 나에겐 그러하지 못했다.
"단천명이 안에 있느냐?"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날로 돌아왔나.'
내가 어느 시점으로 회귀하게 될지 알게 된 이후로, 항상 그려 왔던 그 순간이 정확하게 찾아왔다.
"예, 있습니다."
끼익.
답변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뚜벅.
타인의 처소를 이리 당당하게 들어온 이는 내 어머니다. 정확하게는 호적상의 어머니라 할 것이다.
"그래, 생각은 좀 해보았느냐?"
여인, 백여해가 나에게 물었다.
흔한 문안 인사조차 없다. 마치 불결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나는 단천가주의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였지만, 가문의 체면을 위해 정실부인인 그녀에게 입적된 둘째 아들이었으니 말이다.
가주에게 향할 수 없었던 그녀의 미움이 나에게 향한 것은 필연이었으리라.
"어머니,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그, 그래."
내 살가운 태도가 낯선지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생각을 좀 해봤냐는 건 지난번에 말씀하신 제 약혼 건이겠지요?"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렇다고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둘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싫습니다."
"뭐?"
여인, 백여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 그 약혼 안 합니다."
이번 생은, 지난 생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 * *
"공자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를 본 가솔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동정과 경멸, 그 사이의 시선을 십 년 넘게 받아온 명개에게는 다소 어색한 상황이겠으나, 단천가의 차남 단천명에겐 일상이었다.
비록 사생아일지언정,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차남일지언정, 나는 단천가주의 아들이니 말이다.
"가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내 말투에 가솔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이를 숨겼다.
이유를 짐작한다.
다소 비틀렸지만, 여하튼 금줄을 쥐고 태어난 나다.
지난 생, 이 시절 내 말투에는 명문가 직계 특유의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가솔들에게 존대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방도가 되고 나서야 '인간의 귀천은 신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친 태도라 하겠다.
비록 이번 삶에 개방도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때 깨우친 배움을 구태여 버릴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가주님께 기별을 드려 주겠습니까?"
덕분에 가솔을 향한 내 존대에는 진심이 묻어날 수 있었다.
"가주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역시나. 어머니와 있었던 일이 이미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것이겠다.
"따라오시죠, 공자님."
"고맙습니다."
가솔의 인도를 받아 가주전에 들어섰다. 내 감사 인사가 생경한지 가솔이 연신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해 주었다.
가주전의 입구, 조금 어색해진 가법에 따라 기척을 냈다.
"가주님, 단천명입니다."
"들어오거라."
반갑게 느껴지는 근엄한 목소리를 들으며 가주전에 들어섰다.
사치스럽진 않지만 고고한 기풍이 느껴 단천가의 가주전.
그곳에 무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강건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당대 단천가의 가주이자,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절대 고수, 단천강이다.
그가 조용히 눈짓을 하자 가솔이 물러났다. '가솔을 물린다는 것'은 가주와의 면담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아들아."
"예, 아버지."
"무슨 용무로 들렀느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도 먼저 묻지 않고 의뭉을 떤다. 이런 모습은 취풍개를 닮았다 하겠다.
"아버지."
"그래."
그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강건한 그 눈빛에 나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지난 시절의 단천명은 저 눈빛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돈 좀 빌리러 왔습니다."
뭐, 그렇다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 * *
취풍개나 아버지 같은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생각 외로 쉽다. 상대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면 된다.
강자는 으레 여유가 있기 마련이니, 그 태도를 고깝게 바라보기보단 기껍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허헛."
지금 내 아버지처럼 말이다.
"돈 말이더냐?"
"예."
"갑자기 무슨 돈이 필요하더냐. 내 너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거늘."
아버지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켕기는 것이 있는 자들은 이렇게만 해도 자백한다는 것 또한 거지의 삶을 통해 배웠다.
"크흠. 물론 조금은 부족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앞으로 더 신경 쓰도록 하마."
단천가가 무엇이 부족해서 내 처소가 그토록 황량했겠는가. 가주 단천강이 부인 백여해의 눈치를 보느라 그리된 것이다.
내 존재 자체가 가주의 원죄이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다만 내 아버지는 충분히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죄책감, 이것이 내가 기댈 구석이었다.
"생활에 부족함은 없습니다. 다만 돈이 좀 필요합니다."
진심이냐는 듯,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유는?"
내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음인가, 그가 기색을 가다듬곤 진지한 태도로 되물었다.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뿐, 단천가의 가주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안다.
당장 회귀하기 전의 나라면, 가주전에서 이리 당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예상한 바다.
명개의 삶 동안에 수도 없이 궁구한 결과, 내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 돌파였다.
이것이 최선이라 확신한다.
"저도 이제 후계자 경합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눈동자에 빛이 잠시 스쳤다 사라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열여덟이니, 대략 이 년 후쯤으로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저도 지금부터는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이리 말할 줄 몰랐다는 듯, 그의 얼굴에 흥미가 동했다.
이 년 후, 내 나이 스물에 찾아올 후계자 경합. 장자계승이 아닌 적자계승을 가풍으로 삼는 단천가에서는 예정된 일과 같았다.
나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던 나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 있느냐?"
가주의 기색이 엄중해졌다.
"노력해야지요."
내가 이길 것이다.
"흐음...."
가주의 얼굴에 신중함이 들어섰다.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 특혜를 주어도 될지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형님과 나의 배경에는 아득한 격차가 존재하니, 이정도 도움은 주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짐작하고 있으니 말이 편하겠구나. 내 그래서 네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혼처를 알아봐 주지 않았더냐. 왜 거절했느냐?"
어머니 백여해가 가져온 혼처는 내 후계자 경합에 대한 준비의 일환으로 아버지가 안배한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란 뜻이다.
다만 그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내였고, 아들의 혼처는 어머니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내 어머니 백여해는 나를 싫어했고, 그녀가 구해 온 혼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지난 생, 나를 곤궁에 빠뜨리고 상처 입힌 사건의 단초가, 이런 사소한 맞물림의 결과였다는 것을 명개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곡절을 일일이 털어놓을 순 없는 일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겠습니다."
"뭐라?"
다부진 얼굴을 하고 가주 단천강을 바라보았다.
"단천의 이름을 지고 살아가는 자로서, 남의 힘에 기대어 무언가를 쟁취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이 단천의 이름이라면 더욱 말입니다."
가주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처음으로 가주의 위(位)에 뜻이 있다 표명한 것이니, 당연하리라.
"단천의 이름을 스스로의 손으로 쥐고 싶습니다. 다만, 아직은 제 기반이 부족하니 돈을 좀 빌려주십시오."
"그렇단 말이지."
가주가 제 손등을 턱에 괴었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나는 이 도박의 성패가 가늠되었다.
* * *
"허헛."
단천가의 가주 단천강은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를 오래도록 보좌해 온 가솔들은 저 웃음이 단천강의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명이가 저렇게 강단이 있는 녀석이었던가?"
흡사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
"가문의 홍복입니다."
호위대장 여백이 그 말을 받았다. 호위대장이라 함은 가주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자라 할 수 있겠다.
"모습을 드러내게."
단천강의 명이 있자 여백은 어느새 단천강의 앞에 부복해 있었다.
"이 사람아. 편하게 있으래도 그러는군."
"이게 편합니다."
단천강이 소가주가 되기 전부터 수신호위를 맡아 온 여백이니, 둘은 이미 막역지우와 같았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 질문에 여백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같은 사람이 분명한데, 다른 사람 같더군요."
"나와 생각이 같군."
지닌 바 재능과 오성에는 부족함이 없으나, 다소 주눅이 들어 있고 유약하다.
단천명을 지켜봐 온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단천명의 인물평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단천명은 사뭇 달랐다.
가주전에 들고서도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
후계자 경합을 가주의 앞에서 입에 담는 배짱.
그리고 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내겠다는 강단까지.
단천강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가주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간 발톱을 숨기고 있었는가? 허헛."
그리 되물으며 단천강이 기꺼워했다. 제 아들의 비범함을 엿본 아비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보게, 여백이."
"예, 가주님."
"당분간 명이를 좀 지켜봐 주겠는가?"
받아 간 돈을 어찌 사용하는가. 단천강은 그것이 궁금했다.
오늘의 비범함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과 함께였다.
"명을 받듭니다."
단천강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짐작하는 여백이기에 이유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여백의 신형은 홀연히 가주전에서 사라졌다.
단천강이 상념에 빠지길 잠시.
단천명을 지켜보러 떠났던 여백이 다시 나타났다.
"왜 벌써 왔는가?"
"그것이...."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여백이 서찰 하나를 단천강에게 내밀었다.
-칠주야 정도 집을 비우겠습니다. 찾지 말아 주십시오.
"허헛. 가출을 했다?"
"뜻을 세우고 나간 것 같으니, 가출보다는 출가가 맞지 않겠습니까."
"뭐가 다르겠나."
단천강이 피식 웃었다.
"제가 붙을 것도 예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서찰을 남겼겠지요."
"허헛. 이놈이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단천강이 이리 자주 웃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그 모습에 여백의 입꼬리도 자연스레 호선을 지었다.
"추적할까요?"
단천가의 호위대가 가진 정보력과 추종술이라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아닐세. 그냥 두도록 하지."
여백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단천강이 말을 이었다.
"때론 모르고 받는 선물이 더 기분 좋은 법 아니겠는가?"
"예."
그 답을 끝으로 여백의 신형이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 * *
출가를 한 지 벌써 사흘이 흘렀다.
아버지에게 빌린 돈이 있었기에 배를 곯지 않고, 천장이 있는 곳에서 눈을 붙이며 평안한 여정을 할 수 있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거지 시절에 비하면 지금도 충분히 호사를 즐기고 있다 하겠다.
탓.
내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경공을 펼쳐 부지런히 이동했다.
지금 내 경지는 일류지경이다. 절정에 접어들었던 명개 시절에 비하자면 부족하지만, 지금 내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뛰어난 성취다.
일류지경에 들면 발출과 형상화가 힘들 뿐 내기의 순환과 운영은 자연스러워지는 법이니, 내 발에 지르밟힌 풀줄기는 그 몸을 누이지 않았다. 이른바 초상비(草上飛)다.
"후우."
한참을 내달리고서야 숨을 돌렸다. 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까닭이다.
운기조식으로 내력을 회복하기엔 호법을 서줄 이가 마땅치 않으니 걷기 시작했다.
잔잔한 걸음과 함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죽음 후에 회귀.
약혼 거절.
아버지와의 담판.
그리고 가출까지.
모두 예비해 두지 않았다면 결코 수월하게 해내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래. 나는 무림맹주가 되어야겠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죽기 직전의 그 말이 떠올랐다. 체감상 며칠 되지 않은 일이니, 기억이 생생할 수밖에 없겠다.
무림맹주가 되겠다니. 거지의 유언치고는 참 거창했구나 싶다.
당시의 마음을 돌이켜 보았다.
죽음 직전의 치기가 객기였는가?
아니다. 나는 분명 진심이었다.
정마대전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지난 정마대전이 족히 이백 년은 지났으니, 지금의 나는 정마대전의 참혹함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인세의 지옥이었다.
무림맹주가 되겠다는 생각은 그 처참함을 막기 위한 결심이었다.
다만.
"가능하겠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마대전은 내 나이 서른에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열여덟이니, 십이 년이 남았다.
회귀를 하기 전에 무수한 안배를 해두었으니 십이 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라 하겠다.
다만, 무림맹주나 천하제일인이 그냥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나에게도 무기는 있다.
"약선심결...."
명개 시절,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암기한 내용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약선심결과 함께라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겠다.
상념과 함께 부지런히 움직이던 내 걸음이 멈추었다.
"여기군."
그 시절과 다소 다른 모양새지만, 익숙한 길목이 드디어 내 눈에 담겼다.
맞다.
나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다.
이 순간을 기약하며 명개가 미리 답사한 지역인 것이다.
내가 사흘에 걸쳐 발을 들인 이곳은 하남성의 천중산(天中山).
삼 년 후, 공청석유가 발견될 지역이었다.
3화 약선심결에 입공했다
공청석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약은 천혜의 비처에서 난다.
천혜(天惠).
오행의 조화를 통해 극도로 정순한 자연지기가 중첩되는 곳에서야 공청석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인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은혜가 더해져야만, 그곳에 공청석유가 맺힌다.
무수한 연단가들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인간은 제 힘으로 공청석유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비처(秘處)'다.
인간의 손이 쉽사리 닿을 수 없는 은밀한 곳이어야만 공청석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
설에 따르면 백 년에 한 방울이니, 족히 수백 년은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것인즉. 인간은 공청석유와 같은 진귀한 보물을 몇백 년 동안 묵혀 둘 인내심이 없는 족속인 까닭이다.
둘 중 내게 중요한 정보는 '천혜'보다는 '비처'라 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비처는 비처가 된 연유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하남의 천중산(天中山).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이 산에는 온갖 기암절벽과 드높은 봉우리들이 대지를 수놓고 있었다. 중원 오악(五嶽)에 비견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모양새다.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인간이 오갈 수 있는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날개가 없는 생명체의 접근을 불허하는 이곳에서, 나는 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흐아-"
피가 몰려 시뻘게진 손을 털며 절벽 중간에 생긴 조그만 틈새에 걸터앉았다.
산을 오르는데 발보다 손을 더 많이 쓴 것 같다. 도저히 발만 사용해서는 올라갈 수 없는 가파른 절벽인 까닭이다.
휘이잉.
"으."
아래를 보니 지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찔한 기분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경공을 펼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가 펼쳐진 단애에서 일류지경의 조악한 경공술을 펼칠 정도로 내 담은 크지 못했다.
"아니, 그 영감탱이는 여기를 왜 온 거지?"
지금 찾으러 가는 공청석유는 이곳에서 경공술을 수련하던 소림의 고승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 정도면 그 영감이 그대로 미끄러져 죽었더라도 자연사라 평해야 한다.
"저기는 맞겠지?"
벌써 다섯 번째 봉우리다. 저곳에 공청석유가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봉우리를 올라야 할 터였다.
"제발, 이번에는 있어라!"
세 시진 후.
중천에 있던 해가 산허리 너머로 사라지고, 달이 뜨고 나서야.
턱.
"끄아아아."
나는 일곱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있다!"
지고의 영약, 공청석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고아한 향을 내는 상서로운 액체가 납작 바위의 홈에 맺혀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모양새 자체가 영롱하고 진귀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맞다. 공청석유다.
일 적(滴).
한 방울이라는 뜻으로, 통상 공청석유를 계량하는 단위다. 일반적으로 일 적만 섭취해도 공청석유는 효용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생각보다 많은데?"
내가 마주한 공청석유의 양은 대략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될 듯싶다. 대강 헤아려 봐도 스무 적은 될 것이다.
"그 영감탱이, 역시 땡중이 맞았나."
공청석유를 주웠다 자랑하던 고승의 우쭐한 얼굴이 떠올랐다. 불가의 해탈은 개나 주라는 표정으로 기억한다.
무림맹에 보고된 발견 당시 공청석유의 양이 십 적이었으니, 그 고승이 절반을 날름 삼켰거나 소림이 빼돌렸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횡재했구나."
여하튼 기분이 좋아졌다. 보물을 발견했는데 그 양이 예상치의 두 배인 상황 아닌가.
마침 작은 동혈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 가부좌를 틀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바로 해볼까?"
지체할 것 뭐 있겠나.
공청석유를 발견했으니, 지금이 바로 약선심결에 입공할 때 아니겠는가.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은 이전 생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다.
* * *
약선심결의 서두는 웅혼한 필체가 인상적인 전언(傳言)으로 시작된다. 약선이 후인을 위해 친히 남긴 것이었다.
-약선심결을 집어든 이여, 그대가 바로 연자(緣子)로다.
연자. 모든 무림인의 웅심을 자극하는 단어라 할 것이다.
-약선심결을 대성한다면 능히 삼재검법(三才劍法)으로도 천하제일에 닿을 것이라 본 도는 자부하느니라.
'천하제일?'
약선은 천하제일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확고부동한 천하제일인은 아니었다. 허풍이 과한 영감이라는 생각은 이어지는 내용 덕에 해소되었다.
-본 도는 비록 대성에 이르지 못하여 천하제일에 닿지 못하였으나 이는 본 도의 부족함일 뿐, 약선심결의 모자람은 아닐지니.
달리 해석하자면 약선은 심결의 대성에 이르지 못하고도 당대 천하제일인들과 자웅을 겨루었다는 뜻이다.
-본 도의 꿈을 후일 이 약선심결을 접할 연자에게 전하노라.
연자여, 그대는 약선심결의 대성을 이루어 천하제일에 도달하길 바라노라.
능히 천하제일을 이루어 본 도가 창안한 이 무공을 강호 무림의 정상에 우뚝 세워 주길 바라노라.
전언의 뒤에는 약선심결의 핵심 요결과 해설이 서술되어 있었다.
과거 신기자가 친히 구결을 해석하고, 진실임을 천명한 그 내용 말이다.
지금 나는 그 첫 단계를 시행하는 중이다.
일 단공 개체(改體).
공청석유를 사용하여 기경팔맥을 튼튼히 단련하고 임독맥을 타동, 혈맥과 몸속에 쌓인 불순물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 단계였다.
기실, 환골탈태와 같은 기전이라 할 것이다.
조화경에 도달한 무인들이나 경험한다는 환골탈태를 입문 단계에서 완성해 내는 것이니, 공청석유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할 것이다.
-공청석유는 많이 품을수록 좋을 것이니라. 본 도는 비록 삼 적의 공청석유 밖에 취할 수 없었으나....
집을 세울 때 기반 공사를 하는 것과 같다. 터를 넓게, 단단하게 잡을수록 더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꿀꺽.
이왕지사 천하제일을 목표로 삼은 참이다. 나는 과감하게 절반의 공청석유를 한입에 삼켰다. 그 양이 대략 십 적 이니, 약선의 세 배가 넘는 양이다.
그럼에도 십 적에 달하는 공청석유가 남았으니, 아쉬움은 생각보다 적었다.
입에 들어간 공청석유는 당과보다 부드럽게 녹아 식도를 넘어갔다. 생각보다 맛있다.
"해볼까."
가부좌를 틀고 나를 일류지경으로 이끌어 준 단천심공을 운용했다.
심공을 운용한다는 것은 내 몸속을 관조한다는 것과 같은 즉, 배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청석유에 녹아 있던 힘이다.
십여 년 동안 축기한, 일류에 달한 내 내공이 좁쌀로 보일 만큼 거대한, 미증유의 기운이었다.
'지금이다.'
단천심공에 약선심결의 구결을 더했다. 내가 오성이 뛰어나 두 무공을 합친 것이 아니고, 약선심결의 묘리가 원래 그러했다.
심결이라 이름 붙은 이유가 애초에 모든 심공과의 호환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라 약선은 전했다.
-구우우우웅.
귓가에 처음 듣는 소리가 울려왔다. 약선심결에 반응하여 내 힘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던 공청석유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느리게 움직이던 기운이 차츰 탄력을 받으며 혈맥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청석유의 기운이 심공을 따라 내 혈맥을 대주천하고 임맥과 독맥에 도착했을 때.
-퍼석.
다소 허무한 소리가 들려왔다.
통상 임독양맥이 타동될 때는 천둥이 치는 것보다 더 큰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흔히들 호사가들은 그 소리를 '쾅!'으로 묘사하곤 했고, 실제 임독맥을 타동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와 비슷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공청석유 십 적의 힘 앞에서 내 임독양맥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저 '퍼석'이다.
'오오.'
임맥과 독맥을 타동하는 동시에 평생 동안 느껴보지 못한 내기의 순환이 느껴졌다. 마침내 심공의 대주천이 완벽한 길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이다.'
십 적을 취했기 때문인지 아직도 공청석유의 기운이 강맹하게 혈맥을 돌았다.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약선심결을 끊임없이 운용했다.
화륵.
살아오며 몸과 혈맥에 쌓인 탁기를 불사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통상 급격한 무공의 증진이 있을 때처럼 탁기가 몸 밖으로 배출되어 지독한 악취가 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공청석유와 약선심결이 합쳐져 모든 불순물을 태워 버리니, 내 몸은 한없이 정순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스르륵.
제 할 일을 마친, 혈맥을 휘돌던 공청석유의 기운들이 전신세맥으로 스며들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약선심결을 운용하던 내 몸이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내 몸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극도의 고양감이 그런 환상을 심어 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감은 눈으로 푸른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는 모습을 선명하게 목격했다.
일 단공 개체의 완성을 알려 주는 징조, 노화순청(爐火純靑)이다.
눈을 뜨자 정광이 번뜩였다.
개체(改體)가 완성되었다.
* * *
남은 공청석유를 챙겨 온 유리병에 조심스레 담았다. 영약의 부패와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제작된 기물이니, 공청석유를 보관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기실, 아버지에게 받은 돈의 대부분을 이 비싼 유리병을 사기 위해 투자했다 할 것이다.
돈을 많이 썼으면 어떠한가. 품속에 들어온 십 적의 공청석유를 생각하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개체라."
말 그대로였다. 내 몸이되, 내 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변화가 내 몸에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내 몸을 관조하거나,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변화를 체감할 필요도 없었다.
임독맥이 타동되어 내기의 수발이 원활해졌음은 물론, 전신세맥에 스며든 잔여 공청석유가 내게 끊임없는 활력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드높은 무(武)에 도달한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절정에 달했던 명개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하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단애라 할 수 있는 절벽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올라올 때 혹여 발을 헛딛을까, 혹여 손에 그러쥔 돌이 바스러져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단천명은 이제 없다.
"이게 일 단공이란 말이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단애 밑으로 몸을 던졌다.
탓!
가벼운 몸놀림과 함께 내 발끝이 경쾌하게 절벽을 차며 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니, 이곳에서 경공술을 수련하던 땡중도 그렇게 미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다.'
일 단공의 변화를 겪은 결론은, 천하제일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 * *
단천검가가 있는 안휘에서 하남의 천중산까지 사흘.
천중산에서 공청석유를 찾는 데 하루.
그리고 다시 단천검가로 돌아오는 데 사흘.
이렇게 총 칠주야를 계획한 내 외유는 엿새 만에 막을 내렸다.
이유인즉, 일 단공을 완성한 몸이 내 계획을 한참 벗어나 버린 까닭이었다.
'지치질 않아?'
임독양맥을 타동한 영향이던가, 혹은 전신세맥에 스며든 공청석유 덕분이던가, 혹은 그 둘 다이던가.
경공을 펼쳐 내달리는 속도는 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내기의 순환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긴 시간을 쉬지 않고 내달려 배가 고프지만 않았더라면 하루 안에 단천가에 도착했을 것이다.
소비한 내력도 밥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니 금세 회복되었다. 따로 운기조식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여하튼 나는 무사히 단천검가에 도착했다.
"명 공자님 맞으십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정문을 지키는 위사가 나를 알아보았기에 별 무리 없이 단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내 인사에 그가 생경한 표정을 지었을 따름이다.
내 처소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은 좀 편하게 쉬어야겠구나.'
거지의 삶보다야 평안한 여정이라 하겠으나, 엿새에 걸친 여정에 정신적인 피로를 풀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어딜 갔다 이제야 오느냐!"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두드렸다.
"어머니. 어쩐 일이십니까?"
여인, 백여해가 내 처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으리라 예상은 했다만, 이리 빠르게 움직여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가 다시 나를 찾은 이유가 내 시선에 담겼다.
"저와의 약혼을 거절하셨다구요?"
다소 앙칼진 표정을 지은 미녀가 백여해의 옆에 서 있었다.
"그렇소만."
그녀가 누군지 안다.
회귀 이전의 삶에서 나와 약혼을 한 인물이니 말이다.
회귀 이전의 생에 내게 상처를 준 그녀가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성질머리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래.
너라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4화 양수린
안휘성 양가방의 차녀 양수린.
이전 생의 약혼녀이자, 나에게 비참한 기억을 안겨 준 여인.
나를 매몰차게 버리고 떠나간 그녀가 잔뜩 부루퉁한 표정을 취한 채,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저와의 약혼을 거절하셨다구요?"
미간을 구겨도 그녀의 미모는 사그라지지 않았으니, 안휘오화라는 명성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외모라 평할 것이다.
그에 비해 나의 외모는 어떤가.
썩 못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준수하지도 않다.
얼굴에 검댕이를 묻히고 머리만 부스스하게 만들었음에도 거지 무리에 위화감 없이 섞여 들었으니, 나 단천명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이봐요. 제 말이 안 들려요?"
"그렇소. 약혼을 거절했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 시절에야 그녀의 미모에 혹해 쩔쩔매기 바빴으나 지금은 다르다.
거지 생활을 하다 보니 얼굴 거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거니와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아는 나로선 더 이상 그녀에게 휘둘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릇, 인간이란 화려한 거죽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와 나는 애초에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더러운 사생아가 감히 나와 맺어지려는 꿈을 꾸었나요?
지난 생의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었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냉정한 시선이 기억에 선연하다.
저 날카로운 말을 무기로 쥐고, 그녀는 후계자 경합에 패한 직후의 망연자실한 나를 다시 한번 쓰러뜨렸다.
그녀는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빌미로 약혼을 무효로 만들었다.
물론 그녀의 말은 거짓이라 하겠다.
내, 그녀에게 처지를 숨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린 매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나? 우리는 약혼을 한 사이잖아.
그녀를 붙잡기 위한 질문에 그녀가 이렇게 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그쪽, 제 취향이 아니에요.
그 말을 하며 그녀가 지은 미소는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밝은 미소였다.
"왜죠?"
다시 찾아온 현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가 뭐가 부족해서 약혼을 거절한 거죠?"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답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그쪽, 내 취향이 아니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 * *
양수린의 멍한 표정이 보인다.
살아생전 그런 말을 들어볼 것이라 짐작하지 못한 듯, 잠시 말을 잃었던 그녀의 표정에 깃든 것은 수치와 분노였다.
그녀의 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안휘성을 주름잡는 양가방의 차녀가 아니던가. 심지어 외모도 빼어난 미녀다.
안휘성의 대표 격인 남궁세가와 그 뒤를 바짝 쫓는 단천가에 비하자면 다소 모자라다는 평이 있지만, 상단으로 시작하여 안휘성에서 세 번째로 손꼽히는 가문으로 우뚝 선 양가방의 자부심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재력만 놓고 보자면 안휘성 제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가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당신,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양가방의 차녀 아니시오?"
"그런 저를 박대한다구요?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을?"
아마도 옆에 어머니 백여해가 없었더라면 '감히 단천가의 차남 따위가?'라는 말이 말미에 붙었으리라. 내 그녀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다.
뿔이 난 양수린과 시선을 맞췄다.
"나와 약혼을 하고 싶으시오?"
"그럴 생각이 있으니 찾아왔겠죠?"
"왜 하고 싶으시오?"
"...."
따지려 들던 그녀의 입술이 잠시 답을 찾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녀가 나와 약혼을 고려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단천가의 차남이기 때문이다.
양가방의 직계지만 승계권이 애매한 '차녀'가 지닌 선택지 중, 단천가 '차남'의 아내라는 자리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고고한 자존심을 지닌 그녀가 그리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때문에 그녀는 조금 다른 방식의 답변을 선택했다.
"사실 당신과 약혼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오셨소?"
"제 얼굴을 보지도 않고 약혼을 거절했다는 게 분해서 따지러 온 것이죠."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약혼을 승낙하는 것은 정상이오?"
"명문가의 약혼이라는 것이 대게 그렇지 않나요?"
그리 답하는 양수린의 얼굴에 조소가 맺혔다. 그녀는 표정으로 나를 세상물정도 모르는 애송이라 부르고 있었다.
"설마,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겠다는 풋내 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뒷말은 하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이득이었을 것을....
역시 어리다. 이해는 한다. 그녀는 이제 고작 열여섯 아닌가. 아직 덜 여물었음이라.
다만 저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녀는 내게 반격의 명분을 주었으니, 나로선 만족스러운 상황이라 하겠다.
"그럼 이제는 문제가 없겠구려. 오늘 보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그쪽, 내 취향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양수린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어림도 없다 이것아. 열여덟의 순진한 단천명이라면 몰라도, 이립의 명개를 네가 무슨 수로 이기려 하느냐.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양수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 와중에도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모양새가 가상하다.
"단천가의 차남께서는 눈높이가 하늘에 닿아 계시는군요."
"본인이 좀 주제를 모르는 편이오."
그녀는 지금 내 태도를 세상물정 모르는 명문가 차남의 오만 정도로 생각하리라.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무슨 시간 말이오?"
"명 공자께서는 저를 겪어 보지 못하셨으니, 서로를 알아갈 시간 말이에요."
상대가 이리 굽히고 들어오면 받아 주는 것도 대인배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도록 합시다."
"고맙군요."
"별말씀을."
그제야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양수린의 얼굴에 진짜 미소가 맺혔다.
그 표정을 마주보며 나도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목적이 달성될 일은 없을 것이다.
* * *
아무리 내가 단천가의 차남이라고 해도, 고고한 자존심을 지닌 양수린이 이리 굽히고 들어올 이유는 없다. 그녀 또한 양가방의 차녀가 아닌가.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녀가 저리 행동하는 연유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오 년은 지나야 알게 될 진실 덕분이다.
오 년 후, 양수린은 양가방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
승계권이 애매하던 차녀가 양가방이라는 명문가의 후계자로 도약한 사건이니, 개방에서도 관련 정보를 조사했다.
당시만 해도 '내가 후계자 경합에서 이겼더라면 그녀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따위의 허튼 생각을 품고 있던 삼결거지 명개가 양가방의 정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우리의 약혼에 끼어들어 있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여해와 양수린이 거래 관계였다는 사실 말이다.
거래 조건은 단순했다.
양수린은 단천명과 약혼을 하되, 그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을 것.
혹시라도 만약에 단천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단천가의 가주가 된다면 그녀는 단천가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요, 단천가의 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약혼을 취소하고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 주는 계약이었다.
어쩐지 그녀가 너무 쉽게 파혼을 통보했다고 생각했더니, 모두 어머니 백여해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백여해. 그녀는 내가 철저히 고립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혹여 단천명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장남 단천학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할까 두려워했음이라.
하여튼 백여해와 양수린의 이해는 완벽하게 합치되었다.
진취적인 여성인 양수린은 자기 자신조차 거래 매물로 내놓을 수 있는 상인이었으니, 그녀에게 이보다 좋은 조건의 계약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혼이라는 약간의 오욕만 감수한다면, 아무런 노력을 투사하지 않고 무조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거래였으니 말이다.
이것이 내 무례한 태도에도 양수린이 굽히고 들어온 전말이다.
그녀는 백여해와의 거래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에게 나와의 약혼은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니 말이다.
'나쁜 년.'
명개 시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나는 잠깐 복수심이라는 것을 가졌더랬다. 회귀를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복수심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시간의 풍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녀가 나에게 큰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좇았을 뿐이다. 실제로 그녀가 나에게 위해를 가한 적도 없고 말이다.
때문에 복수 따윈 잊고, 그냥 회귀 후에는 그녀와 연을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말이다.
백여해의 돈을 지원받았다고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양가방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그녀의 능력이 아깝지 않은가?
빚 하나 정도는 지워 놔도 괜찮을 것 같다, 이 말이다.
'쓸 만하단 말이지.'
아직은 어리지만 그녀는 안휘의 유력자로 성장할 것이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이리 생각하면 그녀 또한 저점매수 전략의 유효한 대상 아니겠나.
이번 생에는, 내가 그녀를 조금 이용해 보고자 한다.
* * *
"다음에 찾아오도록 하겠어요."
나쁜 계집애인 것을 알지만, 웃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혹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시오. 배웅은 않겠소."
그렇게 양수린을 보낸 나는 가주전으로 향했다.
어머니 백여해가 잠시 보자는 것을 가주전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물리친 참이다.
가주전으로 향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약선심결의 일 단공을 완성했으니, 마저 계획한 것들을 실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계획들을 실행하기 위해선 가주의 윤허가 필수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무림맹주가 되어 정마대전을 막는다. 이왕이면 천하제일인도 되어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라 할 것이다.
당장에 가까운 목표도 많다.
일단 영약들을 구해야 한다.
약선심결의 화후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일 단공이 아닌가.
후계자 경합에서도 이겨야 한다.
명문가의 가주쯤은 되어야 무림맹주에 출사표라도 던져 볼 것 아닌가. 천하제일인이 된다 하여도 명문가 가주 정도 되는 배경이 없다면 무림맹주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정마대전의 첫 희생양 중 하나가 단천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문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는 내가 가주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리라.
기승전 '무공'이다.
나는 지금 무공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약선은 심결의 대성에 이른다면 삼재검법으로도 천하제일에 닿을 것이라 했지만, 심결의 완성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는가.
지금부터 무공을 부지런히 갈고닦아야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일 단공을 완성하여 터를 다져 놓았으니, 지금이야말로 적기라 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담판이 필요하다.
"가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천가의 모든 정보는 가주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 역시 아버지는 내 복귀 소식을 알고 계셨다.
"따라오시지요."
"고맙습니다."
가솔의 인도에 따라 가주전에 들어섰다.
"그래. 가출은 잘 다녀왔느냐."
"예.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내 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까닭인지, 그간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기에 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강호를 유람하고 왔노라 답할 것이기에, 구태여 말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강호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그의 안목에는 일 단공을 이룬 내 성취가 엿보일까 궁금했지만, 이 또한 묻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천가주가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 이번엔 무슨 부탁을 하러 왔느냐?"
아버지가 내 속내를 꿰뚫듯 물어 왔다.
예전엔 그의 저런 모습이 어렵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도리어 고맙다.
내가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공을 좀 수련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미 단천검결의 전반부를 수련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아버지는 무슨 말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백 당숙 좀 빌려주십시오."
지금 내가 취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호위대장 여백을 내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그 녀석은 아무나 가르치지 않는다."
"제가 아무나가 아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주에게 무공을 전수받으려면 소가주로 확정이 되어야 한다. 그 전에 누군가에게 배운다면 여백 당숙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리라 나는 확신한다.
그야말로 단천검결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검수였으니 말이다.
"자신 있느냐?"
"예."
나는 약선심결의 힘으로, 단천검결 또한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만들 것이다.
5화 방여백
가주 단천강의 호위대장 방여백.
그는 절반이지만 단천가의 피를 이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이니, 나에게는 당숙 되는 분이라 하겠다.
적자계승의 가풍을 지닌 단천가에서 그가 여전히 가문의 중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의 특출난 안목과 과감한 결단력 덕분이라 할 것이다.
대략 삼십여 년 전. 단천가의 삼남이었던 단천강과 방여백의 첫 만남 당시, 방여백은 이리 말했다.
-당신이 차기 가주가 될 것 같습니다. 저를 수신호위로 삼아 주십시오.
소가주가 되기도 전의 단천강에게 한 말이었다.
결과를 보자면, 방여백의 안목은 옳았다.
그의 안목을 증명하듯 단천강은 형들을 제치고 단천가의 가주가 되었고, 방여백은 가주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단천가의 실질적 이인자가 되었다.
방여백 안목과 통찰은 단순히 사람의 그릇을 파악하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는 가주 단천강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가전무공인 단천검결을 대성한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는 삼결 이상의 개방도 이외에는 열람할 수 없는 강호인명록 일천선에나 기재되어 있는 정보다. 방여백은 어지간해선 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짐작컨대, 가주 단천강을 제외하면 방여백의 진면목을 아는 이는 단천가 내에서도 몇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 또한 명개가 되기 이전엔 위의 사실들을 전혀 몰랐던 까닭이다.
"미리 나와 있었구나."
"당연히 나와 있어야죠."
늘 아버지의 곁을 지키기에 그다지 마주할 일 없는 그가 단천가의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나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예, 당숙."
"흐음."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방여백이 나를 관찰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 같기도 해서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나를 관찰하는 방여백.
"뭐, 그 나이대의 남아들은 성큼 크기도 하는 건가."
그는 이리 결론을 내린 듯, 한결 편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하문하십시오."
"왜 나지?"
"예?"
"왜 하필 나에게 무공 수련을 받고 싶다 청했느냐 이 말이다."
내가 단천가의 소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과 친해지는 것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렇게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말이 잠시 뜨자 방여백이 말을 이었다.
"단천가의 장로님들도 있지 않느냐. 학 공자도 일장로님에게 무공을 사사하고 있을 터인데?"
맞다. 단천가의 세 축 중 하나인 원로원. 소가주가 되기 전의 직계는 보통 단천가의 장로 중 한 명에게 무공을 배운다.
원래라면 나도 쭉 그리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 형 단천학의 전폭적인 지원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가문의 정치에는 문외한인 마냥,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숙이 제일 셀 것 같아서요."
"뭐?"
호위대장이 장로보다 세다. 상황에 따라서 위험할 수도 있는 말임을 안다. 특히 단천가의 현재 정치 상황을 안다면 더욱 그렇다.
"가주님조차 지키시는 분이시니, 단천가에서 당숙이 제일 세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적당히 어린아이의 짧은 생각인 양 거리낌 없이 표했다. 어차피 이곳엔 우리 둘뿐이지 않은가.
"이왕이면 제일 센 사람에게 무공을 배우면 좋겠지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방여백이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좋구나. 나도 재밌을 것 같으니."
"감사합니다."
그의 승낙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우려와 달리 일이 쉽게 풀리는 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명 공자가 지금 일류지경인가?"
"예."
"그럼 기본기는 되었을 것이고."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일류지경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참고로 나를 일류지경까지 단련시켜 준 이는 단천가의 삼장로였다.
"그렇다면 명 공자가 내 삼 수(三手)를 막아 내면 직접 지도를 해 주도록 하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
방여백이 내 시야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오싹.
목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검의 예기.
"명 공자, 방금 한 번 죽었네. 일 수도 막아 내지 못했군."
"그렇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 * *
무공 수련이란 본디 홀로 하는 것이다.
무공을 성취함에 있어 배움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결국 스스로가 갈고닦아야 상승 경지로의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횡 베기의 요체를 배우는 데는 일다경이 걸리지 않지만, 그 횡 베기를 내 몸에 온전히 녹여 내는 데는 평생이 부족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무공 아니던가.
그럼에도 스승이 중요한 것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익히 아는 나는 방여백이 사라진 연무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검을 그러쥐었다.
후웅!
지금 내가 익히고 있는 단천검결의 전반부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스팟!
상상으로 가상의 적을 만들고, 그들을 끊임없이 베어 넘겼다.
심결의 일 단공에 들었기 때문인가, 절정에 들었던 명개 시절보다 지금 내 검 놀림이 더 마음에 든다.
무당검의 본질이라는 면면부절(綿綿不絕)이 단천검결의 형을 타고 내 손끝에서 피어났다.
명개 시절, 나는 절정지경에 들었다.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절정이 멀지 않았다.'
그 경지에 오 년 이르게 들어설 것이다.
이미 한번 밟아 본 길인 데다, 약선심결 일 단공의 성취가 지난한 수련 시간을 삭제시켜 준 것이다.
스스로의 움직임을 느끼며, 수도 없이 펼쳐 본 단천검결의 전반부를 다듬었다.
"후."
한 시진 가량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납검을 했다. 그리고 휑하게 비어 있는 연무장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나는 떠나 버린 방여백이 기척을 숨기고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당신에게 단천검결의 후반부를 배울 것이다.
* * *
사흘 후, 양수린이 나를 찾아왔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오."
연무장에서 방여백과의 수련을 마치고 내 처소에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방여백과의 수련'이라고 말하긴 조금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그의 일 수를 막아 내지 못했고, 홀로 단천검결 전반부를 수련하다 돌아오는 길이니 말이다.
무슨 호위대장이라는 인간이 살수보다 표홀한 까닭이다.
"무슨 일로 오셨소?"
예의상 질문을 던진 후, 땀에 젖은 무복 상의를 훌렁 벗어던졌다.
그런 내 태도에 잠시 놀란 눈을 하던 양수린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홀로 등목을 하려 왼손을 땅에 대고 오른손으로 물을 담은 두레박을 쥐었다.
어느새 내게 다가온 양수린이 두레박을 뺏어 들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같이 시간을 보내러 왔어요."
촤악.
그녀가 내 등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항상 홀로 하던 등목이다. 누군가 등에 물을 뿌려 주니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고맙소."
"별말씀을."
물을 닦아 낸 나는 새 무복을 입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마치 기다림이 익숙한 사람처럼, 그녀는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녀도 이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수린과 눈을 맞추었다.
"나는 단천가주의 사생아요."
"알고 있어요."
양수린이 지체 없이 답했다.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죠?"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오."
의미가 없어진 과거를 흘려보냈다.
"그래. 소저도 이미 알다시피 나는 단천가주의 사생아요. 지금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지."
"그게 왜요?"
"양가방의 차녀가 약혼을 고려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신분이라는 뜻이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 상인이에요."
"알고 있소."
양가방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모두 상인으로 성장한다. 양수린은 그중에서도 단연 군계일학이었으리라.
"상인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에요. 상인의 본질은 물건의 가치를 파악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죠."
"그대가 보기엔 내 가치가 어느 정도요?"
"제가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그렇군."
언감생심 약혼을 꿈꾸던 사생아 따위에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격상되었다. 역시 회귀가 좋다.
하지만 그녀와 이리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법이다.
"혹시 돈이 필요하시오?"
"돈은 많을수록 좋지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그녀가 웃는다.
"그래. 양가방의 후계 싸움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겠지."
그녀의 표정이 변하기도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어머니께는 얼마를 약조 받으셨소?"
내 말이 끝나니,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금자 오천 냥쯤 되는가?"
"...!"
그리고 마지막 말에서, 그녀는 마침내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먹구름이 낀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금자 오천 냥'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했으니, 내가 모든 전말을 알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어떻게 알았나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싱긋 웃어 주기만 했다. 애매한 답을 주는 것보다 이리 의뭉을 떠는 것이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들기 위해선 그녀가 혼란스러울수록 좋다.
까득.
양수린이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 어머니 백여해 쪽에서 정보가 샜다고 짐작하고 있으리라.
지금이 기회다.
"그 돈 말이오. 어머니 대신 내가 투자를 좀 해 볼까 하는데."
"상인은 신용이 생명이랍니다."
이 와중에도 나에게 지기 싫은 것인지, 그녀는 얼른 미소라는 가면을 착용하고는 내 말을 받았다.
"두 배 정도 투자를 한다면 어떻소?"
그녀의 가면이 재차 흔들렸다.
두 배면 금자 일만 냥이다.
그 돈이면 상단을 새로 세우는 것도 가능한 돈이다.
다만, 내가 아는 양수린이라면 이 돈으로 새로운 상단을 세워 시장을 개척하는 것보다 양가방의 후계자가 되어 양가방을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 말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내가 제시한 금액이 신용을 운운하며 거부하기엔 너무 큰돈이라는 사실이다.
"조건이나 한번 들어 볼까요?"
능숙한 상인답게 미끼가 함정인지 기회인지 면밀히 살핀다. 나로서도 흡족한 태도라 할 것이다.
"나중에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되오."
양수린이 고개를 저었다.
"상인은 그런 불확실한 계약을 하지 않아요. 나중에 어떤 부탁을 하실 줄 알구요?"
그녀가 나에게 잔인한 사람이었을지언정, 참된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알겠다.
"소저가 양심적으로 판단하건데, 들어 줄 수 없는 부탁은 거절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는다면 어떻소?"
양수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 냥이라는 큰돈을 투자하는 조건치고는 말이 안 될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인 까닭이리라.
"만약 제 계획이 실패하면 원금인 일만 냥을 한 푼도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죠?"
"그대는 성공할 것이오."
금자 오천 냥으로 양가방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그녀다. 그보다 이 년은 이른 시기에 일만 냥이라는 돈을 얻었으니, 그녀가 차기 양가방주가 되리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내 말이 덕담으로 들렸음인가. 그녀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시겠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답했다.
"돈은 지금 어디 있죠?"
"지금은 없소."
내 당당한 답변에 그녀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난 생에는 그녀가 이리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사람인지 몰랐던 까닭이다.
"하지만 곧 생길 예정이오."
내 바지춤에는 공청석유 십 적이 잠들어 있다.
이미 명개의 삶 속에서, 나는 이 공청석유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두었으니.
"금자 일만 냥, 칠 주야 이내에 드리겠소."
내 확신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6화 하오문과 접선했다 (1)
개방에서 가장 공을 들여 정보를 수집하는 집단이 어딘지 아는가.
같은 정도 계열인 구파나 오대세가, 혹은 무림맹?
무림맹의 대척점에 있는 사파들의 연합체 사도맹?
중원 무림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마도의 수장 천마신교?
모두 아니다.
정답은 바로 하오문이다.
개방과 더불어 정보 문파의 양대 거두로 군림하는 그곳 말이다.
모든 문파는 자신의 경쟁자를 파악하는데 가장 큰 품을 들이는 법이니, 개방이라 하여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인즉, 개방에서 십 년을 굴러먹은 내가 하오문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들을 숙지하고 있는 것은 필연이라는 뜻과 같다.
의기와 협의를 상징하는 개방.
협잡과 술수를 상징하는 하오문.
너무도 다른 두 문파가 실은 꽤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또한 만류귀종이라 하겠다.
지난 생에 나에게 필요한 것이 개방이었다면, 이번 생에 필요한 것은 하오문이다.
이번 생에는 알아내야 할 것보다 숨겨야 할 것이 많은 까닭에, 하오문의 협잡과 술수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과 너무 긴밀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장차 무림맹주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나는 하오문을 통해 내가 가진 것과 가지게 될 것들을 최대한 숨길 것이다.
개방에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하오문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개방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단이 바로 하오문인 까닭이다.
"어서 오십시오."
화월루(花月樓).
단천가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 고급 주루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 주루의 사용인이 격식 있는 태도로 접객을 해 왔다.
팅.
"가장 비싼 곳으로."
이리 말하며 금자 하나를 허공에 튕겼다. 이 정도면 오만함이 가득 찬 명문 무가의 자제로서 손색이 없는 태도라 하겠다.
사용인이 금자를 낚아채 제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곤 넙죽 고개를 숙였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좋군."
사용인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만개한 미소를 지었다.
일견 허세로 보이는 이 과정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파했다.
저 사용인, 무공을 익혔다.
그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이곳의 진짜 정체는 안휘성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하오문 안휘 지부니 말이다.
* * *
의혈개방에서는 사람에게 귀천이 없다 가르치지만, 재력과 무력 그리고 신분으로 귀천이 나뉘는 곳이 강호 무림이라는 사실을 안다.
"가장 자신 있는 걸로."
이 한마디에 온갖 산해진미와 명주가 내 자리 앞에 놓였다.
사용인에게 던져 준 금자 한 냥의 힘도 있겠지만, 저들이 내 신분을 알고 있는 까닭이 더 클 것이다.
"괜찮군."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지난 생의 단천명은 고급 주루에 가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이 스물에 후계자 경합에서 패하고 가문을 등진 몸이다 보니, 미처 기회가 없었다.
명개 시절도 마찬가지다.
거지가 고급 주루에 갈 일이 어디 있겠나.
아, 있긴 했다.
명개에게 고급 주루란 백의개 시절에 먹거리를 동냥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가는 곳이었다.
버리는 음식이 많은 고급 주루에서는 '저놈의 거지자식이 또 왔네'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못이기는 척 음식을 내다 주긴 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곳이 최후의 수단인 까닭이 있다.
대부분의 고급 주루는 하오문과 연이 닿아 있기에, 개방도의 자존심상 그곳에서 구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첫 번째요, 까딱 잘못하면 성격 이상한 놈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을 수 있다는 이유가 두 번째였다.
하지만 안휘성을 주름잡는 명문 무가의 차남인 나 단천명이 이곳에 걸음 하는 것은 외인들이 보기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명문 무가의 차남이라 하면 응당 어려서부터 고급 주루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
꼴꼴꼴.
꼴깍.
"키야."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냈다.
명개 시절에 곧잘 마시던 잡탕 탁주와 비교하자면, 백주의 왕도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검남춘의 향과 맛이 탁월한 까닭이다. 역시 돈이 좋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대낮부터 술을 처마시는구나."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향해 내 시선이 움직였다.
이곳은 화월루에서도 상층이니, 나름 제 재력과 신분에 자신이 있는 이들이나 출입하는 곳이다.
역시나. 그곳엔 고급진 비단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불콰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사고는 저렇게 애매하게 성공한 놈들이 치는 것이다.
"형장. 그 말, 나에게 한 것이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헹. 왜?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느냐?"
저는 이미 진즉 만취한 녀석이 이제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나에게 왜 시비를 터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뭐, 상관없다.
저 녀석이 훌륭한 명분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뭐? 한판 붙자는 거냐?"
내가 그를 향해 다가서니 중년 남성이 자세를 취했다. 꼴에 무언가 무공을 익히긴 한 듯, 나름 자연스러운 기수식이다.
하지만.
"손님, 거기까지 하시지요."
기척 없이 나타난 화월루의 사용인이 중년인의 뒤를 점했다.
"뭐라? 네놈은 이곳의 단골인 내가 아니라 저 핏덩이 놈의 편을 든단 말이냐? 내가 이곳에 부은 돈이 얼만지나 아느냐!"
중년인의 역정이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사용인을 향했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도 사용인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분은 단천검가의 차남이십니다."
"뭐?"
그 말과 동시에 중년인의 몸이 굳었다.
거듭 말하지만 단천가는 안휘성을 주름잡는 명문 무가다.
그 유명한 남궁놈들도 우리 가문을 저 중년인처럼 안하무인으로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니, 중년인의 불콰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사용인이 중년 남성을 깔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일개 사용인의 태가 아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말로 사용인은 화룡점정을 찍었다.
"커흠."
대답은 않고 갑자기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이곳의 음식이 예전만 하지 못하군. 내 앞으로는 이곳에 찾아올 일이 없을 것이오."
그리 말한 중년인이 휑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용인은 예의 그 기분 좋은 미소를 잊지 않고 나에게 사죄를 해 왔다.
"괜찮소."
아깝다. 저 녀석과 대거리를 한다면 그 핑계로 손쉽게 루주를 엮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이곳의 루주를 대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루주를 좀 뵙고 싶은데."
정면 돌파라는 좋은 수가 있지 않은가. 나는 단천가의 차남이니 말이다.
"그건 좀 곤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어지간한 고급 주루의 루주라면 단천가의 이름만으로도 버선발로 마중 나왔을 것이나, 이곳의 루주는 엉덩이가 무거웠다.
이해한다.
화월루의 루주, 여월(麗月).
그녀는 차기 하오문주를 노릴 정도로 명망 있는 세력가니 말이다.
애당초 그녀가 있다는 정보를 몰랐다면 내가 구태여 이곳으로 걸음 했겠는가. 단천가 주변에 널린 것이 고급 주루인데 말이다.
"방금 전 손님의 무례에 대해서는 제가 다시 사죄하겠습니다. 오늘 음식에 대한 비용을 받지 않을 테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그는 내가 루주를 찾는 이유가 불만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 한 듯하다. 그리고 그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그의 입으로 직접 언급했듯 내가 단천가의 차남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를 풀 필요가 있겠다.
"화월루주에게 검비각의 정보를 넘기러 왔소."
"예?"
"그리 전해 주기만 하면 될 것이오."
그리 말하고 자리로 돌아간 나는 검남춘을 재차 홀짝였다.
"캬."
아, 맛나다.
* * *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쪽입니다."
외인의 출입이 금지 된 화월루의 최상층.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니, 나는 마침내 화월루주와 독대를 할 수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구요?"
"반갑소."
면사에 가려 외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녀가 꽤나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단천가의 차남께서 저를 어쩐 일로?"
역시 하오문의 것들은 음험하다. 내 입으로 직접 검비각을 언급했음에도 저리 시치미를 떼니 말이다. 가끔은 앞과 뒤가 똑같이 싸가지 없던 거지 놈들이 그립다.
여튼 중요한 것은, 이런 판에서는 제 패를 먼저 까는 놈이 밑지고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내게 궁금한 것 없으시오?"
운을 띄웠다.
"저를 먼저 찾은 것은 공자 아닌가요?"
루주가 말을 받았다.
"잘못 찾아왔나 보군."
그리 말하고 냉큼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잠시."
그 말로 나를 멈춰 세운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요. 제가 졌어요. 무례를 사과하죠."
그녀를 등지고 있는 내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럴 수밖에. 내 그녀가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먹음직한 미끼를 던졌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녀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단지 나를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경험 없는 애송이라 판단하여 떠본 것이겠지만, 어림도 없었을 뿐이다.
그녀의 항복 선언을 듣고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의미 없는 기 싸움 말고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오."
오늘의 대화는 참으로 생산적일 것이다. 서로에게 말이다.
"단천가의 차남께서 어찌 이리 하오문의 정보에 해박한지는 묻지 않겠어요."
"그러셔야지."
정보 제공원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모든 정보 문파의 불문율이다. 제 밑천이 드러난 정보원은 오래 살 수 없는 까닭이다.
"검비각의 정보를 넘기겠다 하셨다구요?"
"그랬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하오문의 소문주는 다섯.
차기 문주로 가장 유력한 이가 바로 여월과 검비각이었으니, 나는 그중 여월을 찾아온 것이다.
이유인 즉, 명개 시절에 그녀가 다음 대의 하오문주로 올라선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가 크게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의 성공에 한 발을 담그고 싶을 뿐이다. 양수린이 그러하고 여월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 또한 무림맹주를 향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겸사겸사 현재의 내게 필요한 것들도 얻어 내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로선 자신의 경쟁자에 대한 정보를 허투루 넘길 순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 아마도 차기 문주 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하는 시기일 것이니 말이다.
"검비각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시겠어요? 알려 주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리도록 하지요."
정보의 가치는 가변적이다. 그녀는 내가 가져온 정보의 현재 가치를 판가름 하겠다는 듯 말했다.
하오문의 소문주가 상응하는 대가를 이야기 했으니, 괜찮은 정보라면 그 가치가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없소."
"예?"
"농담이었소. 내가 검비각에 대한 정보를 어찌 알겠소."
면사 뒤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누군지 알고 이런 장난을 치시는 건가요?"
"알고 있소."
면사 뒤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화월루주 아니시오."
너무 뻔한 대답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본명은 여월."
그녀의 웃음이 멈추고.
"하오문의 다섯 소문주 중 하나."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검비각의 경쟁자이자, 다음 하오문주 자리를 쟁취할 자."
마침내 그녀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음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되었소?"
그에 대비해 내 표정은 밝아졌다. 이것이 주도권을 쥔 자의 여유일 것이니.
"하오문의 소문주 여월. 나와 거래 하나 하지 않겠소?"
판이 깔렸다.
"내 그대가 하오문주가 되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말이오."
면사에 가려진 여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7화 하오문과 접선했다 (2)
차기 하오문주의 유력 후보였던 검비각에 대한 정보는 나도 잘 모른다.
하오문의 승계 다툼에 대해서는 백방으로 소문해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이 있다.
칠 년 후, 화월루주 여월이 검비각을 꺾고 차대 하오문주로 취임한다는 사실 말이다.
강호 무림의 역사는 승자가 써 나가는 법이니, 하오문주가 된 여월에 대한 것은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거래 대상으로 적격이라 할 것이다.
"저와 무엇을 거래할 생각이죠?"
기색을 회복한 여월이 내게 물었다.
장막에 가려진 자신에 대한 정보를 이리도 소상하게 꿰고 있으니, 일단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이리라.
계획대로다.
"잠시."
나는 검비각의 정보를 모른다. 그렇다 하여 내가 손에 쥔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을 꺼내려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때.
"거기까지 하시지요."
분명 나를 여월에게 안내하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한 화월루의 사용인이 기척 없이 내 뒤를 점하고 있었다. 그가 내 목울대에 들이댄 칼날의 기운이 섬뜩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었던가.
하오문주 여월의 그림자라 불리던 하오문의 초상승 고수, 추혼탈명 마속이 바로 화월루의 사용인이었던 것 같다.
"여긴 손님 대접이 영 엉망이군."
담담한 척 미소 지으며 품에서 천천히 손을 꺼냈다.
평온을 가장했지만 속이 조금 쓰렸다.
여백 당숙도 그렇고 추혼탈명 마속도 그렇다. 약선심결의 일 단공을 이루어냈지만 나는 그들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무공 수위와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강호 무림에 온갖 기인이사가 난무하는 탓도 있겠다.
"그리 의심스러우면 그대가 내 품속에 있는 것을 꺼내 주시겠소?"
옷의 앞섶이 열리게 팔을 살짝 벌려 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마속이 내 품에 손을 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는 검지 한 마디 정도의 크기가 되는 작은 유리병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신묘한 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를 극독이라 생각했는지, 마속이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살피길 잠시.
"그거, 공청석유요."
"...!"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여월도 마속도 우둔한 이가 아닌 까닭이다.
특히, 마속에게서 내 목에 들이민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살기가 분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공청석유는 지고의 영약 혹은 절세의 영약이라 불린다.
중요한 사실은, 이 '지고'나 '절세'라는 명칭이 붙은 녀석들은 어지간해선 돈으로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수요가 공급을 아득하게 앞서니,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가 있겠다.
본인이 천운을 타고나서 그것을 직접 발견하던가, 혹은 상대를 살인멸구하여 빼앗던가.
나는 마속과 여월이 두 번째 선택을 하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혹시 나를 죽일 생각이 들진 않았겠지요?"
잠시간의 정적.
"당연하죠."
여월이 태연함을 가장하고 답했지만 내 질문과 그녀의 답변 사이에 생긴 공백을 숨길 순 없는 법이다.
"저희를 그런 무뢰배로 보시나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커흠."
여월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이 정도로 넘어가 주도록 하자. 나는 거래를 하러 온 것이니 말이다.
"잊지 마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단천가의 차남이오."
허울뿐인 위치였던 그것이 지금 나를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되었다. 단천가의 누구도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모르지만, 그녀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저희는 그렇게 경솔하지 않답니다."
그리 말하며 여월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마속이 칼을 거두었다.
아닌 척하지만 여월은 지금 머릿속으로 맹렬히 계산을 돌리는 중일 것이다.
공청석유를 꿀꺽하는 것과 단천가와 척을 지는 것.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일지 말이다.
그러니 내가 그 무게 추를 살짝 건드려 줄 필요가 있겠다.
"그거, 이리 줘 보시오."
내가 마속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얼떨결에 유리병 두 개를 모두 내게 넘겼다.
"여기 공청석유 이 적이 있소."
한 병에 일 적의 공청석유가 담겨 있다.
그중 한 병을 여월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선물이오."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면사에 가린 여월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호응하듯, 나는 남은 한 병의 공청석유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남은 한 병은 팔고자 하오. 그대가 사도 좋고,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서 그 돈을 내게 주어도 좋소."
그녀로서는 무조건 공청석유 한 병을 얻는 것이니, 밑질 것이 전혀 없는 거래 조건이라 할 것이다.
"큼. 얼마를 원하죠?"
그 짧은 사이에 목이 바짝 말랐는지, 여월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금자 십만 냥이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금자 십만 냥은 매우 큰돈이다. 하지만 이 거래에 있어 불합리한 금액을 제시했냐면, 그렇지도 않다.
거래의 신용과 안전만 보장된다면, 금자 십만 냥을 지불하고서라도 공청석유를 사고자 하는 사람 여럿의 명단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을 테니 말이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러시오."
생각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 * *
여월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첫 번째는 선물이라 말했지만 수수료 격인 공청석유 한 병을 차지하고 나머지 한 병은 거래 중개만 하는 방법이다.
그녀는 약간의 품을 들여 공청석유 한 병을 얻을 수 있고, 유력자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 누가 되었건, 그에게 공청석유를 팔겠다고 제안하는 것 자체가 곧 은혜를 베푸는 일과 같기에 그렇다.
두 번째는 선물로 공청석유 한 병을 얻고, 나머지 한 병을 자신의 돈으로 매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공청석유를 이 적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대계(大計)는 날개를 달게 되리라.
위의 두 조건 그 어떤 것이든, 단천명을 죽여 단천가와 척을 지는 것보다는 명확히 우위에 있는 선택지라 할 것이다.
견물생심이라 하였으니 그녀의 마음은 두 번째 선택지로 기울고 있었다. 공청석유는 타인에게 넘기기엔 너무나 탐나는 물건이라 그렇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하오문의 소문주에 화월루의 주인이라 하여도 금전 십만 냥을 당장 융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십만 냥은 그 정도로 큰돈이니 말이다.
그때, 단천명이 그녀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대가 산다면 오만 냥에 넘길 의향도 있소. 분할납부도 가능하오. 이만 냥을 선금으로 받고 매년 일만 냥씩 삼 년에 걸쳐서 받겠소."
이 정도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대신 조건이 붙겠죠?"
모든 호의에는 이유가 있다. 협잡과 술수로 가득 찬 하오문에서 살아남아 소문주까지 올라온 그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조건이 몇 개 있소."
말해 보라는 듯 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내가 그대에게 공청석유를 넘긴 사실을 철저한 비밀로 부쳐야 할 것이오."
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거구요. 다른 건요?"
이런 거래에 있어 비밀 엄수는 하오문에게 철칙과 같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건은 철저히 비밀로 남겨야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도와주시오."
"그것도 당연하구요."
비슷한 일이라 함은 영약의 판매를 뜻함이니, 이는 오히려 그녀가 부탁해도 모자랄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 말에 여월은 긴장했다. 이번에 나오는 조건이야 말로 진짜 용건일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공청석유 일 적을 내어 줄 정도의 조건이라니, 그녀는 짐작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허탈감을 느꼈다.
"언제고 기회가 될 때,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오."
여월이 뭐라 말하기 전에 단천명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대가 판단하기에 오만 냥 이상의 가치를 지닌 부탁이라면 거절해도 무방하오."
여월의 고개가 갸웃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까닭이다.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죠?"
응당 따를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말했지 않소. 나는 그대가 하오문주의 자리를 쟁취할 것이라 생각하오. 미리 인연을 만들어 두는 셈 칩시다."
단천명의 확신에 여월이 도리어 아리송해졌다. 현재 여월은 검비각에게 다소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 그렇다.
"뭐,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여월은 그리 답했지만 단천명은 확신에 차 보였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그녀의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 * *
나는 여월이 하오문주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다. 겪어 본 미래 아니던가.
공청석유 이 적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여월에게 하오문주는 따 놓은 당상과 같으리라.
이 정도 호의로 차대 하오문주와 깊은 연을 맺는다면, 나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거래라 하겠다.
"혹시나 이것이 거짓이라면, 아시겠지요?"
여월이 공청석유가 든 병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 이 마속이 나를 죽이러 오겠지."
이번엔 마속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추혼탈명 마속이 유명해진 것은 여월이 하오문주에 등극한 이후였으니, 내가 본인의 이름까지 알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당신, 진짜 신기하고 재밌군요."
여월이 면사 뒤에서 웃었다.
"그런 소리 종종 듣소."
지금은 아니고, 명개 시절에 말이다.
"마속. 그걸 가지고 오세요."
"예."
읍(揖)을 하고 사라진 마속은 몇 호흡이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났다. 저 인간, 여백 당숙만큼이나 신출귀몰하다.
"천하전장의 전표 이만 냥이에요. 하오문에서 직접 세탁한 추적 불가능한 돈이니 안심하셔도 될 거예요."
"고맙소."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소?"
"말해 보세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향한 호의가 느껴졌다.
"청린액을 좀 구해 주시오. 양은 한 말(斗 :약 18L) 정도면 좋겠소."
그녀는 이 부탁도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요. 그 정도는 잔금 삼만 냥에 대한 이자인 셈치고 그냥 해 드리죠."
까닭을 묻지 않으니, 훌륭한 협상 태도라 할 것이다.
"고맙소."
돈도 마련했고, 청린액도 구했다.
"그쪽과는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여월이 그리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앞으로 잘 부탁해요."
무림인이 포권이 아니라 악수를 청한다는 것은 친우가 되자 말하는 것과 같다. 신뢰의 표시인 것이다.
"나도 잘 부탁하오."
나는 망설임 없이 여월의 손을 맞잡았다.
* * *
"마속."
"예, 아가씨."
"어떤 것 같아요?"
목적어를 생략한 질문이지만, 마속은 여월의 질문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하지만 마속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매사에 확신에 차 있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여월과 마속이 부녀지간처럼 마주 보고 웃었다. 면사를 벗은 여월의 얼굴이 참으로 맑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언할 수 있습니다."
"뭔가요?"
"그는 분명 제 검을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 말에 여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추혼탈명 마속은 하오문의 숨겨진 검이다. 그가 여월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여월은 애초에 하오문주를 꿈꾸지 않았을 터다.
그런 마속의 검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여월은 그럴 수 있는 이가 하오문 내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강한가요?"
단천가가 비밀리에 괴물을 키워 내고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마속은 고개를 저였다.
"고강하진 않습니다. 아니,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이렇게까지 헷갈리게 하다니, 신기하군요."
그는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창 밖으로 시선이 향하자 신난 걸음으로 화월루에서 멀어지는 단천명의 등이 보였다.
"앞으로 재밌어질 것 같네요."
그녀로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8화 일 수를 막아 냈다
여백 당숙은 삼 수를 막아 내면 내게 무공 지도를 해 주겠노라 약조하였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물론 그가 나에게 거짓부렁을 일삼았다는 뜻은 아니고, 그의 삼 수를 막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금의 과정 자체가 곧 수련이라는 뜻이다.
목숨을 걸지 않고 초상승 고수의 공격에 맞서는 경험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나는 이미 여백 당숙에게 큰 배움을 얻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직 단 일 수도 막아 내지 못해 큰 진척은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여백 당숙에게 무공 수련을 청한 지 열흘이 지났고, 십 수의 공격을 받았으며, 열 번을 죽었다.
'쉽지 않네.'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공청석유를 자그마치 십 적이나 복용하여 약선심결 일 단공에 입공한 몸 아닌가.
조금씩이지만 분명 그의 공격을 따라잡고 있다.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정보와 사실에 기인한 판단이라 할 것이다.
"오늘도 미리 나와 있었구나."
"배움을 청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지요."
미미하게 그의 입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내 태도가 흡족한 것이리라.
"준비가 되었느냐?"
"예. 오늘은 조금 다를 것입니다."
"그 말도 벌써 열 번째 듣는구나."
여백 당숙이 허허 웃었다.
부지불식간에 당해 버린 첫날을 제외하고는 매번 한 말이니, 이번이 정확하게 열 번째가 맞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그가 내 수련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겠다.
"이번엔 일 수라도 막아 내길 기대하마."
그 말과 동시에 인자한 분위기의 당숙은 사라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한 명의 검수가 내 앞에 자리했다.
꿀꺽.
긴장감에 침을 삼킴과 동시에.
스슷.
여백 당숙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지 않았음에도 놓쳤다. 그야말로 신출귀몰이라 표현할 신법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의 공격을 따라잡아 가고 있다고.
보이지 않으니 대충 뒤라고 찍어서는 결코 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음을 안다.
타동 된 임독양맥으로 찰나간 내기를 순환시켰다. 확장된 기감 덕분에 그의 종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위!'
"오? 찾았느냐?"
해를 등지고 여백 당숙이 검을 내려쳐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상단을 막았다.
카가각.
닿았다.
드디어 내 검이 방여백의 검에 닿은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수직으로 그의 검을 받아 내 '챙' 소리가 났다면 더 완벽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큭."
검의 발출 속도가 늦어 여백 당숙의 검을 사선으로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저 카가각이라는 둔탁한 소리가 난 것이며.
"오늘도 죽었구나."
내 검면을 타고 내려온 여백 당숙의 검날이 정확하게 내 목울대를 노리고 있다는 결과를 마주했다.
"감사합니다."
납검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짧디 짧은 수련이지만, 이 경험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안다.
"그래."
방여백이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표홀한 신법에 고저가 없는 성격이 더해지니, 추혼탈명 마속보다 여백 당숙이 더 살수 같은 느낌이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거라."
그리 말하며 여백 당숙은 연무장에서 표홀히 사라졌다.
"에휴."
수련을 해야겠다.
청린액을 취해 약선심결의 이 단공에 닿기 전에 그의 일 수를 막아 내고 말 것이다.
* * *
연무장에서 표홀히 신형을 감춘 방여백의 시선이 연무장을 담았다.
자신이 떠났음에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단천검결의 전반부를 수련하는 조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몰래 지켜보지 말고 그냥 나오시지요."
"알고 있었는가?"
"매번 모르는 척해 드리는 것도 힘듭니다."
방여백이 그리 핀잔을 주었지만 단천강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방여백의 옆에 나란히 섰다.
"자네, 그새 녹슨 것인가?"
단천명이 고작 열흘 만에 방여백의 신형을 추적해 낸 것을 말함이다.
"그렇게 보이셨습니까?"
방여백은 담담하게 되물었고.
"허헛."
단천강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래, 명이는 쓸 만하던가?"
단천강의 질문에 여백은 조금 다른 방식의 답변을 내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가 말인가?"
"명 공자가 제 삼 수를 막아 내는 데 걸릴 시간 말입니다."
방여백의 안목이 얼마나 출중한지 단천강은 익히 알고 있다. 본인이 바로 산 증인 아니던가.
"그 정도란 말인가?"
경탄이 담긴 질문에 방여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도 쉽게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흐음."
단천강은 말없이 수련 중인 차남을 제 눈에 담았다.
* * *
"당신!"
양수린이 또 나를 찾아왔다.
회귀 후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지난 생에는 약혼을 하고서야 그녀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었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버린 내가 그녀의 얼굴을 세 번을 보는데 일 년이 넘게 걸렸던 기억이 있다. 격세지감이라 할 것이다.
"진짜 이러기예요?"
"뭐가 말이오?"
다만, 나를 보자마자 뿔이 나 있는 연유를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회귀를 하였다 하여 여인의 감정에까지 능통해지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하긴 삼결거지 명개가 여인에게 능통해질 기회가 어디 있었겠는가.
"뭐가 말이오?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내 무던한 반응에 양수린이 쌍심지를 켰다. 그럼에도 내가 이해를 못 한 듯하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 제가 이곳을 찾아왔죠?"
"그랬었지."
어머니 백여해와 나란히 서 있는 그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도 제가 이곳을 찾아왔죠?"
"그랬소."
그 만남은 득이 많은 만남이었다. 백여해와 양수린의 동맹에 균열을 만든 날이었으니.
"그런데 왜 또 제가 찾아와야 하죠?"
"음?"
공평하지 못한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부정했다. 내가 구태여 양수린을 찾아갈 일이 없는 까닭이다.
"내게 볼일이 있는 것은 당신 아니오?"
돈은 원래 빌리는 사람이 오는 게 맞다. 내가 거지로 십 년을 살았지만 그 정도는 안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양수린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 번이나 숙녀가 직접 찾아왔으면, 한 번 정도는 직접 저를 보러 와 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아니, 하다못해 연통이라도 넣어야죠!"
"왜 그래야 하오?"
내 대답에 양수린이 어이가 없어 한다. 어이가 없는 쪽은 이쪽이다. 이 여자, 설마 아직도 나와의 약혼을 고려하고 있는 것인가?
"칠 주야 안에 일만 냥을 구해다 주기로 했고, 오늘이 딱 칠 주야가 되는 날이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약조를 지키러 왔으니 된 것 아니오?"
"아니!"
무언가 답답한지 양수린은 저리 말하며 제 가슴을 쳤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건 내 말이 맞다. 확실하다.
"제 말 좀 들어봐요."
화를 내려던 그녀가 갑자기 기색을 바꾸었다. 성난 들소 같던 기색이 갑자기 여염집 규수로 변모했다. 이미 볼 장을 다 봐 놓고 이제 와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양수린이 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시간을 좀 가져 보기로 했잖아요."
"무슨 시간 말이오?"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요."
"그 건은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소?"
"누구 마음대로 끝내요?"
그토록 얻고자 했던 마음이다. 그리고 끝내 얻어 내지 못했던 마음이다.
하지만 도리어 밀어내니 다가오다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뭐, 좋을 대로 하시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과 맺어질 마음이 없다.
다행히 나에겐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낼 방법이 있었다.
"일만 냥이오."
소문주 여월에게 받은 천하전장의 전표를 양수린에게 건넸다.
"진짜였어요?"
일만 냥의 전표를 받아들고도 그녀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위조전표 아니죠? 천하전장의 전표는 함부로 위조했다가는 경을 칠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상인 아닌가. 명백한 실물을 보고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거짓을 말할 까닭이 어디 있소?"
이제 그녀를 만난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그 돈으로 뜻을 펼쳐 보시오."
씨앗을 심었으니, 언젠가는 수확할 수 있으리라.
"누차 말했듯, 그대는 성공할 것이오."
십 년을 묵혀 둘 것이다.
내가 무림맹주가 될 때, 양가방이 내 손을 들어줄 수 있도록 말이다.
* * *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데 유독 가뿐하고 개운한 날. 왠지 기분과 기운이 모두 좋은 그런 날 말이다.
보통 이런 날은 동냥박이 평소보다 푸짐하게 차거나, 원하던 정보가 내 귀에 쏙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왠지, 여백 당숙의 검을 막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일찍 나왔구나."
단천검결 전반부를 연마하고 있으니 여백 당숙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결을 중단하기엔 무언가 아쉬워 눈으로만 인사를 한 후, 남은 검결을 자연스레 풀어 냈다.
여백 당숙은 잠자코 내 검로를 눈에 담았다.
"후-"
납검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나오시기에 시간이 조금 이른 듯하여."
"아니다. 내가 일찍 나온 것이니."
그리 답한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학 공자보다 낫더구나."
"...감사합니다!"
'장로님들보다 당숙이 더 강하니까요'의 답변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준비되었느냐?"
그리 말하며 여백 당숙이 애검을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그의 검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은 다를 겁니다."
매번 한 말이지만, 오늘은 진짜 무언가 다르다.
그도 이를 느꼈음인가, 당숙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스슷.
여느 때와 같이 표홀한 신법. 내 앞에 서 있던 당숙의 신형의 사라졌다.
'오른쪽.'
나의 시선이 그의 종적을 쫓았다.
이전처럼 그의 종적을 놓친 후, 기감을 확장시켜 간신히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시선이 처음부터 그의 흐릿한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지만, 의례 겪어온 일인 마냥 자연스러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으로 직접 살피니 그의 신법이 얼마나 고절한지 잘 알겠다.
내게 일 수가 닿기까지, 찰나라고 생각한 그 짧은 시간 사이. 당숙의 신법은 총 세 번의 변화를 시전하며 나에게 도달했다.
'정면.'
당숙의 검이 정면으로 내 명치를 찔러왔다. 닿기 전에 멈춰 주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정면으로 찔러오는 공격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
방법은 둘.
그의 검을 내려쳐 궤적을 틀거나, 내가 몸을 피해야 한다.
판단은 신속했다.
그의 검을 내려치는데 내 일 수를 낭비하는 것은 하책이다. 오늘의 나는 단순히 그의 일 수를 막아 내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 없는 까닭이다.
휙!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돌렸다. 명치를 찔러 오던 당숙의 검이 내 앞섶을 살짝 베어 냈다.
동시에 나는 검을 치켜 올렸다.
물리도록 연마해 온 초식, 단천검결 전반부의 제 일식 단천낙뢰였다.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초식이 펼쳐졌다.
동시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웅.
흐릿한 검명(劍鳴)과 함께 내 검에 옅지만 푸르스름한 기운이 덧씌워졌다.
강호에 널리 알려진 절정지경의 증거, 검기였다. 열여덟의 나이에 절정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소회는 나중에 풀어도 늦지 않다.
"합!"
나는 망설임 없이 당숙을 향해 검을 쏘아 냈다.
그리고.
쾅!
"컥."
영문도 모른 채 내 몸이 튕겨 나갔다.
"이런."
덤덤한 목소리로 여백 당숙이 감상을 표했다.
그의 검에는 내 조악한 검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검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명백한 조화경의 증거라 할 것이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검강에 치인 반탄력 때문에 빠르게 답을 할 수 없었지만, 진짜로 나는 괜찮았다. 기분이 매우 좋은 까닭이다.
그저 기분이 좋은 날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늘은, 일 단공 개체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든 날이었다.
9화 이 단공 금체(金體)
늦은 밤.
"오랜만입니다, 공자."
단천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내 처소를 찾아 온 이는 하오문의 마속이었다.
내 처소가 있는 곳은 중요성이 낮기에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하다 하나, 단천가의 담장을 들키지 않고 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은잠술이 경지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겠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로?"
"청린액을 구했으니, 전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속이 예의 그 주루 사용인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런 범상한 외양을 하고 단천가의 방비를 손쉽게 무위로 만들다니, 강호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항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공자에게 감사를 표할 일도 있구요."
그의 기도가 묘하게 다르다.
개방 거지들 중에서도 안목이 좋기로 정평이 난 이가 바로 명개 아니었던가.
지닌 바 경지가 낮아 확실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마속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지 그가 은연중에 기도를 드러낸 까닭도 있으리라.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그가 공청석유를 취해 경지의 상승을 이루어 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공자 덕분입니다."
다만, 마속의 호의가 왜 나를 향하는지는 모를 까닭이다.
"그게 어디 제 덕이겠습니까. 루주께서 큰마음을 품으신 것이죠."
공청석유를 마속에게 내린 것은 화월루주 여월이니 말이다.
공청석유 이 적을 취했다 하나, 그중 하나를 수하에게 내리다니.
여월과 마속의 관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끈끈했거나, 여월의 배포가 알려진 바보다 훨씬 크다는 방증이리라.
"여기 청린액입니다. 특별히 고르고 고른, 순도 높은 녀석들입니다."
"고맙습니다."
한 말에 달하는 양인지라 받고 보니 묵직하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공자."
그리 말하며 작별을 고하던 마속이 뒤를 돌아보았다.
"혹,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길."
그리 말한 마속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오문과, 특히 여월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 평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의 청린액을 구했다는 사실을 마속과 여월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니 말이다.
* * *
약선심결의 초반부는 몸을 만드는 것에 의미를 둔다. 장차 천하제일에 닿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천하제일은 무공이 아니라 사람에 있는 것이니라. 본 도가 삼재검법으로도 천하제일에 닿을 수 있다 말한 진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약선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
일 단공 개체는 공청석유의 힘으로 무공에 입문하는 이의 혈맥을 강화하고 탁기를 불사르며 임독양맥을 타동한다. 흡사 환골탈태와 같은 기전으로 내부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공은 금체(金體)라 불리는 단계다.
일 단공에서 내부를 정비했으니, 이 단공은 외부를 개변한다. '금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유명한 소림의 금강불괴(金剛不壞)에 비견할 수 있겠다.
약선은 이 단공에 이르면 도검불침의 신체와 어지간한 상처는 빠르게 치유하는 회복력을 지니게 될 것이니, 강호 무림에서 눈 먼 칼에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 호언했다.
으레 상승고수는 내외공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한 것이니, 금체까지 이룬다면 신체 능력의 비약적인 상승을 이룰 것이라는 첨언과 함께였다.
이 단공 금체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청린액(靑燐液)'이다.
청린액이 영약이냐고 묻는다면, 조금 애매하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까닭이다.
청린액을 구하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가치를 비견하자면 공청석유의 티끌보다 못하다 할 것이다.
시중에 대놓고 유통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흑시(黑市)의 초입에만 가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독물이 바로 청린액인 까닭이다.
맞다.
청린액은 바로 '독물(毒物)'의 일종이다. 나름 치명적인 극독이라 할 것이다.
청린액이 몸에 닿으면 지독한 고통을 느끼고, 열 호흡에 이르기 전에 이지를 상실한다 알려져 있다. 미량만 섭취하여도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독의 조종이라 불리는 사천당가에서도 약과 독은 그 경계가 모호한, 사실상 같은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영약을 연구했지만, 금체(金體)를 이루기엔 청린액만 한 것이 없음이니라.
약선도 이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증명해 냈다.
약선은 독물 청린액을 여타 절세 영약들과 같은 선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바로 약선심결을 통해서 말이다.
마속이 전해 준 청린액을 조심스럽게 욕조에 풀었다.
내가 독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도가 높고 청명하다는 사실은 알겠다.
흑시의 초입에서도 구할 수 있는 저질 청린액이 아니라 최고 상등품의 청린액을 구해 준 것이리라.
이 단공에 입공하기 위해서는, 폭포수를 맞으며 내가기공을 수련하는 고행자인 양, 청린액에 몸을 담가야 했다.
고작 한 말의 청린액에 성인 남성인 내가 몸을 푹 담글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물을 섞어 양을 불렸다.
어차피 약선심결의 운공을 통해 한 말의 청린액은 모두 내 몸에 흡수될 것인 바, 물에 섞여 효능이 희석될 걱정은 없다 하였다.
"후- 해볼까."
극독에 몸을 담그려 하니 새삼 긴장이 된다. 약선심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
찰방.
"윽."
발끝이 청린액에 닿자마자 찌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십분지 일로 희석된 청린액에도 이 정도의 고통이라니, 청린액 열 말을 구해 그대로 몸을 담갔다면 약선심결을 운용 할 새도 없이 까무러쳤을지도 모르겠다.
풍덩.
기왕지사 청린액이 닿은 몸이다. 발을 꺼내는 대신 청린액 속으로 몸을 던졌다. 눈을 감고 얼굴까지 푹.
'커헉.'
부글 부그르르.
지독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잇새로 호흡을 크게 흘렸다.
'정신 차리자.'
마음을 다잡고 청린액 속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벌써 다섯 호흡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제 집의 욕조에서 독물에 빠져 죽은 희대의 얼간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보글.
단천심공을 운용하며 동시에 약선심결을 그 위에 얹었다.
임독양맥이 타동된 덕인지 내 의지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약선심결이 내 몸을 돌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감각이 사라졌다.
청린액의 고통을 자양분 삼기라도 한 듯, 나는 무아(無我)로 침잠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무아에 빠졌기 때문인지 혹은 약선심결의 효용인지, 청린액 속에서 매우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꾸준한 단련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해도 인간인 이상 호흡 없이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일 각의 시간을 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아직 질식하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가.
"푸하."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키며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눈을 뜨니, 물은 원래의 맑은 빛깔로 되돌아와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청린액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특유의 시큼텁텁한 향도 없어졌다.
약선심결의 공능을 통해 내 피부로 스며들었음이라.
찰박.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바닥이 물에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훨씬 중요한 것이 있는 까닭이다.
궁금증에 챙겨 온, 욕조 옆에 놓여 있던 단도를 쥐었다.
눈을 질끈 감고 날카로운 단도의 날로 내 팔목을 그었다.
"오."
베어지지 않는다.
조악한 단도지만, 날을 잔뜩 벼려 놓은 검이 내 피부를 베지 못하고 있었다.
"이래도?"
단도에 살짝 검기를 실었다. 자해에는 취미가 없으니,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팅!
검기란 발현된 내력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근력을 초월한 그 기예는 어지간한 바위조차 두부처럼 잘라 버린다.
헌데 내 피부에 닿은 단도가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피부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살짝 불그스름해지긴 했지만, 상처가 생기진 않았다.
"조금만 더?"
이 단공 금체의 효능은 도검불침에서 끝나지 않는다.
강력한 회복력 또한 금체의 효용인 바,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내 몸에 상처를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우웅.
검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로 뽑아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흡!"
내 팔을 향해 단도를 내질렀다.
푹!
강한 반발력과 함께 단도의 끝이 내 피부를 조금 뚫어 냈다.
"윽."
역시 칼침은 아프다.
곧바로 단도를 회수하고 상처 부위를 살폈다.
피가 조금 흐른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가지 않았다.
스르륵.
다섯 호흡이 채 지나기 전에, 상처 부위가 아물었다.
찰박.
상처 부위에 물을 끼얹으니, 이미 상처가 봉합되어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난 아닌데, 이거."
그야말로 도검불침이라 할 것이다.
검강에는 허무하게 뚫려 버리겠지만, 그렇다고 도검불침의 몸을 얕잡아 볼 것은 아니다.
동수의 고수와 생사결을 다툰다면 이 작은 차이가 당락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다.
내 피부를 만져 보았다.
분명 검기마저 튕겨 낸 몸이거늘, 촉감에 있어 별 다른 차이를 모르겠다.
욕실에 있는 동경으로 내 모습을 살폈다. 여전히 변함없는 내가 동경에 담겼다.
통상 금강불괴를 이룬 소림의 나한승이 목각 같은 피부와 불쑥 솟은 태양혈을 가지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이 단공 금체의 특성, 반박귀진 덕분이라 하겠다.
* * *
"이공자님, 저희를 따라오셔야겠습니다."
난데없이 장한 셋이 내 처소를 들이닥쳤다. 아는 얼굴들이다.
"내가 왜?"
이곳은 단천가 안이고, 나는 그 단천가의 차남이다. 가솔에 불과한 이들이 나를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문의 법도가 그러하다.
"따르지 않으시면, 제압해서 데려와도 무방하다 하셨습니다."
물론, 이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말이다.
"단천가 안에서 직계를 건드리려 한다고?"
"실례하겠습니다."
장한들의 대장 격인 자가 고개를 숙이더니 명령하듯 말했다.
"모셔라."
"예."
대답과 동시에 장한 둘이 우악스러운 손길을 내게 뻗었다.
이들이 이토록 자신 있는 연유를 안다.
셋 모두 절정에 이른 무인들이었으니, 약관에 이르지도 못한 나에게 긴장을 할 연유는 없는 까닭이다.
나에게 손을 댄 죗값이야, 이를 사주한 사람이 무마해 줄 것이고 말이다.
-이 단공 금체의 효능을 단순히 도검불침으로 생각해선 곤란할 것이니라.
신체 내외가 모두 준비되었으니, 연자에게는 상승 고수로의 길이 열린 것인 즉, 이를 심즉행(心卽行)이라 할 것이다.
심즉행.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무공이다.
단순하고 우악스러워 보이는 저들의 손길에 고절한 금나수의 묘리가 숨어 있음을 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겠는가. 여백 당숙의 검조차 쫓게 된 내 시선에 그들의 손길이 모두 간파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을.
턱.
장한 한 명의 손을 무릎을 들어 막고.
쩍!
다른 장한의 손길은 팔꿈치로 찍어 내렸다.
"무공 단련 좀 열심히 하셔야겠소."
웃음을 지으며 이리 말해 주는 것은 덤이라 할 것이다.
"이익!"
챙!
팔꿈치에 손이 찍힌 이가 분개했는지 검을 빼들었다.
"장산, 그만하게."
물론 이는 대장 격인 이에게 제지당했다.
나를 제압하는 것과 나에게 검을 빼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검을 빼든 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도 제 목숨이 소중한 모양이다.
음, 아쉽다.
저 검을 상대로 권각술을 펼쳤다면 도검불침의 참 효능을 시험해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이공자님. 순순히 따라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대장 격인 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방금 한 수에서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행실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나에 대한 존중이 엿보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저들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형님에게는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니, 그리 전하게."
모두 내 형님의 문제인 것을.
"...실례했습니다."
이 단공 금체도 이루었겠다.
이제 형님을 한 번쯤 만나 볼 때가 되긴 했다.
10화 삼 수를 막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