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황금빛 계략
당화령은 웅묘객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잔도표국 표사라고 칭한 이들이 병사의 무공을 익혔다는 유은하의 말. 그 말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켕기는 게 있었으니까.
사실, 당문은 촉왕부의 병사를 꾀어내 무려 화약 300근을 밀수했다.
화창(火槍)으로 훈련을 했다고 보고하고는 빼돌리고.
상태가 안 좋은 화전(火箭)을 교체해야 한다고 빼돌리고.
그냥 빼돌리고.
촉왕부와 도지휘사사에 원한이 있는 군인을 매수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자는 이미 유은하의 도끼에 머리가 쪼개져 버려 누가 어떻게 화약을 유출했는지 영영 알 길이 없었지만.
여하튼 당화령이 웅묘객잔으로 돌아온 건, 표사로 위장한 병사들이 탈영병을 쫓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서였다.
저들이 산속 마을에 묻힌 탈영병을 발견하면 인근 마을은 죄다 불탈 게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은하촌이 습격이라도 당하면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존재가 노출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촉왕부의 압박을 받는 당가다. 세간의 인식은 당가를 우위로 두지만, 전면전이 발생하면 결국 패배하는 건 당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들의 목표가 탈영병이 아니라고 하니 다행….'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흡!"
순간 옆구리를 툭 치는 느낌에 당화령이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어, 어딜 그렇게 함부로!"
"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애초에 남녀가 이렇게 붙어 있는 게 안 돼요!"
당화령이 잔뜩 힘주어 소곤거렸다.
두 사람은 창고 구석에 거적을 뒤집어쓴 채 숨어 있는 상태였다.
"숨으려면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덕분에 저놈들이 표사가 아닌 것도 확인했고."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일단 저들의 시선이 분산되면 빨리 나가요."
"나가자고요? 어째섭니까?"
"우리랑 상관없는 일인 거 확인했잖아요!"
유은하가 웅묘객잔으로 돌아온 이유도 당화령과 같았다. 표사로 위장한 병사들이 산을 뒤질까 봐 걱정돼서였다.
로열패밀리인 유은하나.
은하촌 사람인 유은하나.
사람 목숨을 별로 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 노인과 청화에게 화가 미칠 수 있기에 굳이 살펴보러 온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금빛과 마주쳐버렸다.
"조금 있으면 황금이 온다잖습니까."
"그러니까 빨리 발을 빼야죠. 엮이면 절대 안 돼요."
"무슨 소립니까?"
유은하는 당화령을 정말 순진하다는 듯 바라봤다.
"저놈들도 정당하게 저 일을 하는 게 아닌데요?"
비자금 조성. 그건 로열패밀리도 자주 하는 짓이었다.
특히나 후계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이슈가 터져 나왔었다.
그걸 전부 보고 듣고 즐긴 게 유은하였으니, 그의 눈에는 표사로 위장한 이들의 미래가 훤했다.
"우리가 끼어들든 말든 저 사람들 어차피 죽습니다. 촉왕부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
"그러니까 우리가 황금이라도 가져가서 원한을 풀어줘야죠."
이건 대체 무슨 논리일까? 당화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유은하를 바라봤다.
"사실은 그냥 황금이 탐나는 거잖아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습니까? 촉왕의 주머니로 들어갈 저 황금도 정당하지 않은데."
부정한 재물은 눈먼 재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냥 주워가는 사람이 임자다.
아니. 빼앗지 못하는 게 바보고 손해 보는 짓이다. 그게 로열패밀리로서의 상식이었다.
"감당 못 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요."
"혹시 여기도 위성 감시 시스템이나 파동 기록 시스템 같은 게 있습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게 뭐죠? 무공인가요?"
"없잖습니까. 그럼 됐군요."
깔끔하긴 해도 중원의 시설은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유은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심지어 저 몽혼약, 자신이 만들어 지현에게 넘긴 게 분명했다.
"황금을 가져온 사람들이 잠들고, 저 사람들이 도망친 사이에 우리가 재빨리 황금을 가져가면 누구 짓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아주 특별한 장치가 없는 이상은 범인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당화령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객잔 자체가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가 어둠이 내려앉아 목격자도 없다. 애초에 일을 벌일 생각으로 적합한 객잔을 수배한 듯했다.
황금을 회수하는 촉왕부 병사들이 온다고 해도 약이 충분히 돌아야 하니 최소 1각 뒤에 올 터.
적당히 봇짐에 들어갈 만큼만 챙겨 달아나면 누구 짓인지 알 길이 없어진다.
하지만 자신들의 범행이 들키는 건 그렇다고 쳐도, 도의적인 면은 어떨까?
"그러면 저 사람들이 없는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어요."
"어차피 저 사람들은 촉왕부의 손에 죽을 운명입니다."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저 일에 협력한 대가로 촉왕부의 비호를 받을 거라고 고 표두가 말했… 하아."
당화령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그녀도 사천당가의 꼭대기에 있는 권력자 중 한 명. 아무리 협과 의를 행한다지만,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저 밑엣것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이류 언저리에 불과한 저 군인들이 죽음으로 입막음당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면 당 소저는 챙기지 마십쇼."
"옆에서 말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공범이거든요?"
"...."
유은하는 당화령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중원의 윤리관이 어떤지는 유 노인에게 충분히 보고 들었다. 그런데 당화령은 차곡차곡 쌓아가던 상식에서 벗어난 언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탈영병을 제거하러 온 걸 보면 마냥 착한 애는 아닌데….'
아직 무림이, 정확히는 정파가 행하는 '협'이라는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괴리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칼자루는 당화령이 쥐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정 싫으면 선반을 무너뜨린다든가 작은 소란이라도 일으키면 될 일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몸을 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화령이 정말 원했다면 유은하를 반쯤 협박할 수도 있었다.
당화령에게는 산속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쉽게 밀어버릴 힘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당화령은 투덜거리면서 유은하와 함께 창고에 계속 숨어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비급과 영약을 되찾았는데도 나한테 자꾸 뭔가를 확인하려고 했지.'
아마 그건 금원보의 존재였으리라. 금원보를 유은하가 가져갔는지, 혹은 탈영병들의 짐에서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걸 물으려던 거겠지.
'집단 간의 갈등에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되지. 촉왕부와 당문도 같을 거야.'
촉왕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비자금을 만들려는데, 당문이라고 자금이 안 쪼들릴까?
"사실은 당 소저도 필요한 거 아닙니까? 황금."
"...."
당화령의 얼굴이 붉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사정이 얽혀 탈영병 추적에 당가의 직계인 자신이 나섰다.
그리고 그 사정 중 하나가 50냥에 달하는 금원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당문 전체의 예산으로 보면 얼마 안 되는 돈일 수 있지만,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그런데 무려 일백 관에 달하는 황금? 절반만 어찌어찌 옮겨도 당가의 숨통이 확 트일 거다.
돈은 돈을 부르는 법이고, 당문은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당화령은 이것저것 따지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이었다.
"제가 곰도 어깨에 지고 산을 탔던 사람입니다. 황금 일백 관 정도는 짊어지고 달릴 수 있습니다."
"…사람 맞죠?"
일류 고수쯤 되면 전신에 내공을 돌려 어떻게든 곰을 들 수 있긴 할 테다. 그런데 그 상태로 산을 타?
그건 일류가 아니라 절정쯤은 돼야 한다. 아니. 절정은 그런 짓 안 한다.
절정 무인이 뭐가 아쉬워서 홀로 곰을 지고 산을 탄단 말인가?
"아무튼. 일백 관도 충분히 혼자서 옮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인심 써서 5대5로 나누겠습니다."
"…7대3. 당가가 7이에요."
"예? 제 덕에 이 기회도 포착한 거 아닙니까."
"그 많은 황금을 아무렇게나 가지고 거래하게요? 당가가 보관과 은자 환전까지 전부 맡아줄게요. 은하상단의 거래처도 주선해줄 수 있고요."
그 말에 유은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시스템이 미개해도 돈세탁이 쉬운 건 아니지. 특히 황금은 잘 쓰이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유은하는 자신에게 그 많은 황금을 지킬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3은 너무 적습니다. 4할은 받아야겠습니다."
"좋아요. 다만, 가주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요."
당화령은 임시 구두 약속이라는 걸 확실히 했다.
유은하도 별말 없이 수긍했다. 이렇게 순진한 아가씨가 전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다리가 저린 것도 참아가며 숨죽이고 있기를 한동안.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여긴가?"
"예. 지금은 안 쓰이는 창고입죠.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
고을찬이 직접 마차와 함께 창고로 온 것이었다.
"그래. 옮겨라."
"옙."
고을찬과 표사로 위장한 몇몇이 끙끙대며 성인 상체만 한 상자를 옮긴다.
그 수가 넷. 상자 하나에 황금 25관이 들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창고의 문이 닫힌다. 그리고 밖에서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난다.
"궂은 날씨에 고생 많으십니다."
"확실히 날씨가 지랄 맞긴 해. 이렇게 추운 적이 대체 몇 년 만인지."
"오늘도 구름이 잔뜩 낀 게, 곧 눈이나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요."
"그러게나 말이야. 하필이면 이런 날에 수송을. 크흠."
"여기. 술은 아니지만, 특별히 준비한 차입니다. 따뜻하게 덥혀 왔습니다."
창고 문틈으로 쪼로록 소리와 무언가를 벌컥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속이 따뜻해지니 한결 낫군."
"더 드릴까요?"
"아니. 2각 후에 교대할 건데, 차로 배를 채울 수는 없지."
"옙. 오늘은 아예 손님조차 받지 않아서 신선한 재료가 그득그득합니다! 교대하시면 때맞춰서 따뜻한 음식으로 새로 깔아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점소이로 위장했는지, 목소리가 아주 간드러졌다.
"소인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쇼!"
그렇게 밖이 조용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벽에 기대어 스르륵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몽혼약을 먹고 잠든 병사들 소리였다.
그리고 또 잠시 시간이 지나자 창고의 환기창 너머로 몇몇 그림자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우르르 몰려가면 너무 눈에 띄니 흩어진 뒤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한 고을찬과 병사들이었다.
'효과 확실하네.'
중원의 다른 약이면 모르겠지만, 유은하가 직접 약효를 뽑아 만든 몽혼약이다.
내공 고수가 아닌 이상, 저들은 앞으로 2각 동안 절대 깨지 못할 것이다.
"자, 그럼 들고 가볼까?"
"잠깐만요."
당화령이 상자를 만지려던 유은하를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보통 이런 귀한 물건에는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요."
그 말에 유은하는 이런 미개한 중원에도 위치추적기가 있나 하고 놀랐다.
하지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당화령이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댄 뒤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역시 추종향(追從香)이 묻혀 있네요. 고을찬에게 직접 옮기도록 한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추종향?"
"네. 특수한 무공을 익힌 이들이나 훈련을 거친 개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예요. 촉왕부에서 비밀 작전에 동원될 정도면 천리추종향은 될 거예요."
그 말에 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일천 리면 무려 400km다. 중원 특유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고작 향기 좀 묻혔다고 그 먼 거리를 추적할 수 있다니.
내공을 얻으며 불이 붙은 무공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진해지는 유은하였다.
"그럼 저걸 만지면 우리도 쫓기는 거 아닙니까?"
"추종향도 비싸요. 온갖 곳에 묻으면 오히려 추적을 방해하기도 하고요. 보통은 상자에만 조금 묻혀 놓죠. 아마 손잡이 부근에 묻혀 놨을 거예요."
"황금에는 묻혀 놨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적어요."
추종향이 남아돌아도 황금에는 묻히지 않는다. 상자야 태워 없앨 수라도 있지, 황금에 묻히면 향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혼동이 올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냥 상자를 부수면 돼요."
당화령이 창고 선반에 걸린 박도를 쥐고 내려쳤다.
상자가 부서지니, 그 안에서 누런 황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마다 금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일단 이걸 옮긴 뒤에, 산이든 냇가든 가서 옷을 갈아입고 지금 입은 옷은 태워버리죠."
감히 천자의 것인 황금을 빼돌리는 건 촉왕부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큰맘 먹고 벌인 짓인데, 중간에 황금을 탈취당했다? 아주 사천 전체를 뒤엎을 기세로 범인을 찾아다닐 테다.
"그러시죠. 거듭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당화령과 유은하가 서둘러 창고에 있던 광주리에 황금을 옮기던 그때.
"?"
쌓여 있던 금괴 밑으로 이상한 게 보였다.
"비단?"
금괴를 굳이 비단에 싸서 운반할 필요가 있나? 그런 의문이 들어 비단을 들치자 도자기가 나왔다.
비자금으로 쓰일 예술품이 아닌 평범한 도자기였다. 대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어서 도자기 입구를 연 그 순간.
"...."
당화령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모든 심력을 쏟아야만 했다.
도자기 안에 있는 흰 가루. 그건 초석을 가루로 낸 것, 달리 말하면 염초(焰硝)였기 때문이었다.
염초는 화약의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이, 이 미친 촉왕부! 반역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촉왕부는 황금을 빼돌리는 게 아니라 무려 염초를 빼돌리고 있었다!
그 사실에 당화령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어떤 미친놈이 황금 좀 훔치려다가 염초를 훔치게 된 상황이 올 줄 알았겠는가!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유은하가 고개를 불쑥 내민다.
"여, 염초. 염초예요. 화약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
당화령은 본능적으로 말했다. 유은하를 끌어들여야겠다는 심산은 아니었다.
그저 물에 빠진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걸 세간에서는 물귀신이라고도 하지만.
그런데 오히려 옆에는 물귀신보다 더한 게 있었다.
"오. 염초. 황금보다 비싸다고 들었는데, 잘됐네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유은하.
당화령은 그런 유은하의 위로 환상이 겹치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금귀(金鬼). 중원 대륙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금귀가 있었다.
그 금귀가 속삭였다.
"싹 다 챙기시죠."
그 말에 당화령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상자를 부수고 황금을 챙긴 시점에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으니.
31화. 황금빛 계략
조심조심 질풍처럼 빠르면서 은밀하게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신속하게.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싶지만, 당화령은 자신이 성도까지 달려온 궤적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이상 어울리는 말은 없었으니까!
당화령과 유은하는 반의반 각도 지나기 전에 황금과 염초를 전부 챙겨 창고를 빠져나왔다.
추적에 혼선을 주기 위해 창고에 있던 것들을 아예 다 때려 부수고 뒤섞어 놓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혹시 감시자가 있지는 않았을까, 추적자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몇 번이나 관도와 산을 오갔다.
냇가에서는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에 온몸을 담가 씻은 뒤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당연히 먼저 입었던 옷은 태웠다.
도중에 작은 마을에서 단지를 구해 초석을 옮겨 놓고 기존의 도자기를 전부 깨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산과 관도를 오간 결과.
"드디어…."
당화령과 유은하는 저 멀리 성도의 높다란 성벽이 희미하게 보이는 외곽에 닿을 수 있었다.
"피곤하군요."
당화령이 잔뜩 긴장해서인지 유은하 또한 덩달아 긴장했다. 동시에 그는 엄청난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이동해야만 했다.
그러니 제아무리 유은하라도 피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참아요."
"바로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밤에 들어갑니까?"
"통행금지 시간에 돌아다니면 더 수상하죠. 들키지만 않는다면 상관없긴 하지만."
"통금이라. 산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당화령은 유은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아무것도 없는 논밭 사이로 나아갔다.
주변에는 온통 황량한 논밭뿐이었기에 추적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논밭 한복판의 허름한 농막으로 들어간 당화령은 익숙한 손길로 곳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영광으로 아세요. 당가의 기관진식(機關陣式)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게 아니니까."
당화령은 농막에 있는 평범한 농기구들을 일정한 곳에 배치하고 큰 질그릇을 홈이 파인 곳에 배치했다. 그런 뒤 농막의 가장자리로 가서 내공을 모아 발을 구르니.
스륵.
신기루처럼 선반 너머의 벽이 사라지며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홀로그램? 아니. 벽은 분명 실체가 있는데… 나노봇으로 일부만 재구성하는 건가? 당문에 그 정도 기술력이 있나?"
"뭐 해요? 빨리 와요. 곧 원래대로 돌아가니까."
당화령이 앞장서자 유은하도 재빨리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한동안 걸어 나가니.
"화령 아씨?"
녹색 무복을 입을 일단의 무인들이 저편에서 나타났다.
"술(戌) 통로의 종이 흔들려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화령 아씨셨군요."
"옥호당주!"
당화령이 반갑게 인사한다. 어깨가 한순간에 낮아지는 게, 단숨에 긴장을 풀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만큼 저 남자를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강 실장 같은 위치인가? 나이는 30대? 무공을 익히면 노화가 느려진다고 했지. 그러면 40대려나?'
유은하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당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지만, 잘됐네요. 아버지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가주님께서는 지금 원로원 분들과 회의를…."
"염초 건이에요. 원로원에도 알려야 하니, 바로 가죠."
"염초?! 지금 염초라고 하셨습니까?"
옥호당주, 당충영이란 남자가 눈을 부릅뜬다.
"유 소협. 그것 좀 내려주세요."
당화령의 말에 유은하가 당화령을 빤히 바라본다.
"떼먹지 않고 제대로 나눌 테니 걱정 마시고요."
"염초도 말입니까?"
"그건 유 소협한테는 그림의 떡이잖아요."
그제야 유은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등에 이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다.
"자세한 건 가주님께 먼저 보고드릴 건데, 황금과 염초가 담긴 항아리예요."
"세상에…."
"이걸 빨리 독왕전(毒王殿)으로 옮겨주세요."
"예. 알겠…."
당충영이 조심스럽게, 유은하가 이고 있던 짐을 들려다가 미간을 좁혔다. 엄청난 무게감 때문이었다.
당충영의 시선이 유은하에게로 향했다.
짐을 내려놓을 때 돌도 된 통로에는 작은 소음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이 무거운 짐의 무게를 완벽하게 통제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초절정인 자신의 기감에는 유은하에게서 기껏해야 이류보다 못한 정도에 불과한 내공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쪽은 유은하 단주예요. 은하상단을 운영하는 사람이고, 사정이 있어 저와 함께하게 되었어요."
"사정이라면…."
"저와 함께 자전마견을 척살했어요. 제 동료이자 은인이니 정중히 대접해 주세요."
"자전마견! 최근 무자대(戊子隊)에서 절정에 올랐다는 첩보를 입수한 마인 아닙니까!"
놀란 당충영이 곧장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대(大)당문의 옥호당(玉壺堂) 당주 당충영이라고 합니다. 화령 아씨의 은인을 뵙습니다."
"아씨의 은인을 뵙습니다."
당충영의 포권과 동시에 뒤에 있던 옥호당의 무인들도 일제히 유은하를 향해 포권했다.
"은인은 아니고 함께 싸운 동료죠.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은하도 마주 포권하며 인사했다.
"아씨. 은인분은 작약각(芍藥閣)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먹을 걸 좋아하니 식사에 신경을 써 주세요. 당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시비를 붙여 안내도 해주시고요."
자연스럽게 명령하는 당화령의 모습에 진짜 부잣집 아가씨이긴 하구나 생각하는 유은하였다.
솔직히 이곳으로 올 때까지 보여준 모습은 반쯤 정신 나간 사람 같았으니까.
'화약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
갤럭시 크라운 기준으로는 초고대에 사용했던 물질이지만, 이 중원에서는 전략물자 그 자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당화령은 당충영과 무인들을 따라 사라졌고 유은하는 옥호당 무인 한 명을 따라 작약각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작약은 꽃 중 재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리고 약재로도 널리 쓰이죠."
무인의 말에 유은하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 노인이 복통을 호소하는 마을 사람에게 작약과 감초로 약을 지어준 게 떠올라서였다.
"아름다우면서도 이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태상가주님께서 아씨가 태어나셨을 때 지은 건물입니다."
작약각 앞에 도착한 무인은 유은하가 놀라길 기다렸다.
직계가 태어난다고 방이 몇 개나 딸린 건물을 새로 지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가! 그런 감상을 보여주길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심드렁했다.
'건물…. 크라운에는 내 명의 건물이 없었지. 빌딩이든 공장이든.'
갤럭시 크라운에는 뭐 하나 유은하의 명의로 된 것이 없었다.
손짓 한 번으로 소구역을 밀어버릴 권력이 있지만, 정작 그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자신을 진짜 유은하라고 여기지 않았고.
'이곳에서 진짜 내 걸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러니 이 당문에서의 활동이 중요했다. 자본금으로 사용할 황금과 당문의 기반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은하상단의 시작이 달라질 테니.
유은하가 그렇게 생각하며 무표정하게 서 있자, 안내를 맡은 무인이 오히려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황은 이내 빠르게 수습됐다.
'뭘 모르면 감탄할 수도 없지.'
그렇게 생각한 무인은 유은하에게 방을 안내했다. 그러고는 씻을 따뜻한 물과 푸짐한 식사를 올리라 하인들에게 명하고는 사라졌다.
말끔히 씻고 깨끗한 옷도 입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유은하는 딱딱한 대나무 침대가 아닌 푹신한 침상에 반색하며 몸을 뉘었다.
당화령도 30근 정도 되는 무게를 짊어졌지만, 나머지는 전부 유은하의 몫이었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산과 관도, 계곡을 오가며 성도까지 빠르게 걸었으니 피로가 몰려오는 건 당연한 일.
'회의가 끝나려면 며칠이나 걸리려나?'
침대에 누운 유은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23%>
<신체 강화 중>
<내공 소진>
<강화 및 복구 프로세스 일시 중지>
<신에너지 '내공'의 수급 방법을 찾아보길 권고합니다>
잠든 유은하의 시야 한구석에 프록시마의 문자가 떠올랐다.
***
"...."
"...."
촉왕부의 심처.
도지휘사가 촉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기세는 누가 아래라 할 것 없이 흉흉했다.
"도지휘사. 여(余)가 섭섭하게 대한 거라도 있는가?"
"전하의 자비 아래 평온한 날을 보내고 있사온데, 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대체 왜, 어떻게 일어난 일인가?"
촉왕의 물음에 도지휘사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어찌 촉현왕의 핏줄에서 저런 견자(犬子)가 나왔단 말인가.'
전대 촉왕은 촉현왕의 시호를 받을 정도로 현명한 이였다.
그는 풍족한 사천의 물산을 활용해 사천 전역을 부흥시켰다. 특히나 금광과 초석 광산을 잘 이용했다.
황금과 초석은 국가에서도 엄격히 관리하는 것. 한 치의 허술함도 없이 전부 중앙에 보고하고도 모자라 정해진 양을 초과해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중원 각지에서 유명하다는 인물을 사천으로 데려왔다.
의원, 철장, 목수, 농부, 유자.
이미 청성파의 도사와 아미파의 비구니로 종교색이 짙던 사천 백성들에게 유가의 도리를 퍼뜨린 이도 촉현왕이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물론 사천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문에 상당한 기술 지원을 하게 되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만큼 잘한 일도 세상에 드물 것이다.
촉왕부가 데려온 이들의 기예를 당문에서 흡수하고, 당문은 그것을 사천 전체로 퍼뜨렸다.
특히나 당문은 본래도 독과 약, 그리고 철을 다루는 데 조예가 깊었는데, 그 경지가 한층 더 깊어졌다.
촉현왕 시절, 사천의 의원은 황성을 제외하고는 중원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죽하면 사천에서 나는 약초마저 값이 뛰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 안 죽자 인구가 늘어났고, 인구가 늘어나니 논밭도 늘어났다.
백성들이 풍족해지니 관의 곳간도 풍족해졌고 이는 선순환의 시작을 암시했다.
촉현왕이 30년만 더 버텼다면 분명 그 선순환이 지속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몸이 약했던 촉현왕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자였던 지금의 촉왕이 뒤를 이었다.
그게 딱 10년 전.
당시에는 촉현왕을 모시던 이들의 입김이 강했지만. 이제는 촉왕을 제어할 신하가 없다. 촉왕 본인이 스스로 잘라낸 탓이었다.
'최근에는 귀주에서 흘러들어온 사파 무리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저 말만 소문일 뿐, 도지휘사사에 올라온 정보는 구 할 정확도를 자랑한다.
얼마 전에는 자전마견이라는, 사파도 아니고 마인이라 알려진 놈이 촉왕부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도지휘사도 촉왕을 욕할 처지는 아니었다. 도지휘사가 촉왕을 욕하면서도 그의 명령을 따르는 건, 약점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도독의 자제를 살해하고 도주한 소수마후(素手魔后)를 그대가 어이없는 실수로 놓쳤지. 여는 그걸 숨겨주었고."
"...."
굳이 저 이야기를 입으로 내뱉을 건 뭐란 말인가.
'수련을 등한시해 일류에도 닿지 못한 반편이 왕 놈이.'
초절정 무인이기도 한 도지휘사는 분노와 동조해 부글부글 끓는 기를 애써 가라앉혀야 했다.
"그대는 그 보답으로 여의 작은 일을 도와준 걸 텐데…. 실망이야."
촉왕의 말에 도지휘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작은 일? 황금과 염초를 빼돌리는 게 작은 일?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일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건 성도는 물론 사천 전체를 말아먹을 놈이다.
진심이 아니라면, 꼬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이야기다.
과연 그 꼬리가 어디까지일지는 촉왕만이 알 터.
이번 일을 직접 수행한 병사들뿐일지. 병사들을 지휘한 도지휘첨사일지. 그도 아니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까지일지.
"다만, 여와 그대는 지금껏 서로 많은 걸 도운 동지이지 않나."
나도 네 약점을 쥐고 있고, 너도 내 약점을 쥐고 있다. 이게 까발려지면 서로 파멸을 면치 못한다.
그 말에 도지휘사가 속으로 안도했다.
"신에게 기회를 주소서. 전하의 일을 방해한 도적들을 찾아내어 직접 대령하겠나이다."
도지휘사가 납작 엎드리자 촉왕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큰일을 하는 분께서 찬 바닥에 그리 엎드리면 안 되네. 어서 일어나시게나."
촉왕이 직접 도지휘사의 팔을 잡고 일으킨다.
어쨌든 화해를 뜻하는 손길에 도지휘사는 잠시 안도했지만, 이어지는 촉왕의 목소리에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엎드리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게 다행일 정도로 도지휘사의 표정은 살벌했다.
"그런데 말일세. 우리 일을 방해한 도적을 잡기만 하는 거로는 부족하네. 우리 본래 목표가 뭐였는가?"
"…사라진 염초의 행방을 당문에 뒤집어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렇게 행방 자체가 묘연해서야, 우리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음이야."
이대로 당문에 뒤집어씌웠는데, 애먼 놈들이 자신들의 짓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오히려 촉왕부만 망신을 당한다.
염초도 지키지 못했으면서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갔다고 말이다.
"그러니 도적들을 잡아들이는 걸로는 부족하네. 연관된 것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전부 죽여서 철저하게 일을 은폐해야 해. 그래야 본래 계획대로 당문에 뒤집어씌울 게 아닌가?"
"...."
"믿겠네."
촉왕의 말에 도지휘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망할 놈!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도지휘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날렸다. 하지만 촉왕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살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할 테니까.
이들이 그토록 찾는 염초가 설마 유은하의 손에 의해 당문에 넘어갔을 줄은, 촉왕도 도지휘사도 꿈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32화. 사천제일명문. 사천제일세가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유은하가 잠에서 깼다.
상체를 일으키니, 슬쩍 열린 문틈 사이로 시비들이 우다다 달려 도망가는 게 보였다.
막내 아씨가 남자를 데려왔다는 소문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몰려든 이들이었다.
"…뭐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유은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켤 뿐이었다.
"피로가 싹 풀렸네."
영양가 높고 맛 좋은 식사와 푹신한 침대. 그리고 마지막 내공 한 방울까지 사용한 아스트랄 유니온.
그 조화 덕분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방에 풀렸다. 아니. 피로가 풀린 걸 넘어 몸이 한층 더 탄탄해졌다.
침상에서 일어난 유은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방으로 들어올 때는 피곤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난간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꽤 인상적이다.
고작 3층 높이였지만, 그 앞으로 고아한 목조 건물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유은하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정도가 사천제일이라는 거지?"
잠시 그렇게 밖을 구경하던 유은하는 앞으로가 기대된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갈 길이 머네."
그렇게 중얼거린 유은하는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산책이나 하다 아무나 붙잡고 밥때가 언제냐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
뒤편 공터에 한 노인이 쪼그려 앉아 땅을 파고 있는 게 아닌가.
약초꾼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노인. 당가에서 일하는 하인인가 싶었다.
어쩐지 유 노인이 생각나서 유은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거, 얼굴 하나는 반반하군."
"?"
유은하가 노인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노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말이었다.
"나?"
"그래. 여기 너 말고 사람이 더 있냐?"
"할배, 나 알아?"
아무리 봐도 자전마견이나 당충영 같은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 그냥 노인이었다.
주름이 깊고 피부가 햇볕에 탄 걸 보면 외모마저 영락없는 약초꾼 노인. 게다가 단 두 마디였지만, 말투가 고약한 것까지 유 노인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유은하의 입에서도 편한 말이 막 튀어나왔다.
"허허. 이 미친놈을 보게. 산에서 왔다더니 존댓말도 모르는 거냐."
노인이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손에 들린 호미가 시퍼런 빛을 흘린다.
"할배도 반말하잖아."
"내가 너보다 살아도 몇 곱절은 더 살았다. 그럼 이 나이에 시퍼렇게 어린놈한테 존대하리?"
"예의가 나이로 정해지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일반적이라는 게 있잖느냐."
"일반적으로는 대뜸 얼굴이 반반하다고 안 해."
"한 마디도 안 지는 거 보게. 대가리를 깨버릴 놈."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호미를 슬쩍 들었다. 그러자 유은하가 반사적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유은하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오히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더 놀랐다.
"잉?"
노인이 또 손목을 슬쩍 튕겨 호미를 드니.
스윽.
유은하가 흙 위에 짧은 선을 만들며 또 반보 물러났다.
"어떻게 한 거냐?"
"할배가 때리려고 했잖아. 어떻게는 무슨."
"아니. 보통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입만 열면 일반적으로는, 보통은 이러네."
"이 미친놈이. 허허허."
노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유은하에게 다가섰다.
"가만히 있어 봐라. 좀 보게."
그러면서 유은하의 팔과 어깨를 만져대기 시작했다.
"왜 이래?"
유은하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거, 가만히 있으래도."
"억?!"
노인의 손이 유은하의 몸을 찌르자 전신이 마비됐다.
<외부 에너지 침투 감지>
<내공의 한 종류로 판별>
<신체 마비 발생>
<분석 중>
<내공 흡수 개시>
눈앞에 알림이 주르륵 뜨자 유은하의 눈이 반짝였다.
자전마견에게서 흡수한 내공은 다 썼으니, 또다시 그 은빛 번개를 사용하려면 내공을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에러. 에러.>
<흡수율 저조. 아스트랄 유니온 과부하>
노인의 내공은 자전마견의 내공과 달랐다.
그냥 흡수하는 대로 딸려 왔던 자전마견의 내공과 달리, 노인의 내공은 철괴라도 되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그걸 본 유은하는.
"누구세요?"
노인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그런 유은하를 본 노인도.
"그러는 넌 누구냐?"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유은하를 바라봤다.
"전 유은하라고 합니다. 은하상단 단주이며 당화령 아가씨 초대를 받아서 왔습니다."
"그건 안다 이놈아. 대체 뭐 하는 놈인데 이런 몸을 갖고 있느냐 묻는 거야."
노인이 유은하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쿡쿡 찔렀다.
"어찌 이런 몸이…. 기억 잃은 신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군."
노인이 다시 몸을 툭툭 치자 마비가 풀렸다. 동시에 몸속에 들어왔던 내공도 사라졌다.
"주먹이나 휘둘러 봐라. 아니면 이거라도 쥐여줄까?"
노인이 호미를 내밀자 유은하는 냉큼 받아 들고는 노인을 향해 휘둘렀다.
노인은 손가락질 몇 번으로 자신을 제압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몇 번 겪었던 찌릿한 위기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은하는 노인이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감지 장비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뭔가 일어났다? 당연히 감지 장비의 성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노인공경?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상식? 그런 건 강자 앞에서 따질 게 못 됐다.
"허."
노인은 그 결단력을 보고 놀라고, 귓가에 울리는 강맹한 소리에 또 한 번 놀랐다.
부우웅!
호미 끝에서 거대한 철봉 휘두르는 소리가 난다.
툭.
"얼씨구."
슬쩍 손을 대 보니 소가 미는 듯한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졌다.
'이게 정녕 내공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몸에서 나온 힘이란 말인가!'
노인의 입가에 슬슬 미소가 지어진다.
'마혈(痲穴)이 제압당했을 때는 아예 내 내공을 흡수하려 했으렷다.'
콰앙!
빗나간 유은하의 호미가 화단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와?"
유은하는 유은하대로 놀랐다.
분명 노인이 호미의 목을 툭 치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휘두르는 힘에 비해서는 한 줌도 안 되는 힘이었다.
그렇다고 내공이 밀려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호미는 노렸던 노인의 어깨를 지나쳐 화단에 처박혔다.
"어떻게 한 겁니까?"
"신기한 놈이 신기하다고 말하는 꼴이 신기하군. 끌끌."
노인이 웃기 무섭게 강력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무슨 일… 태상가주님?!"
어제 당화령과 함께 사라졌던 당충영이었다.
"옥호당주 당충영이 태상가주님을 뵙습니다!"
"활인비도(活人飛刀) 자네였구먼. 그새 더 강해졌어."
"과찬이십니다."
고개를 든 당충영의 시선이 유은하가 든 호미와 바닥에 파인 구덩이로 향했다.
다만, 당충영은 곧장 유은하를 탓하지 않았다. 유은하를 탓하기에는 노인의 괴팍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놈을 발견해서 장난 좀 치고 있었지."
"다행입니다. 이분은…."
"알고 있어. 령아가 데려온 놈이라며?"
"예. 아씨께서 유 소협과 함께 자전마견을 척살했다고 합니다."
"호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충영이 유은하에게 노인을 소개해주었다.
"유 소협. 이분은 태상가주로 당 자, 웅 자, 건 자를 쓰십니다. 무림 동도들에게는 일수천살이라는 별호로도 유명하십니다."
"당 소저 할아버지셨군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은하상단의 단주 유은하라고 합니다."
유은하가 공손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지만, 당충영은 순간 인식이 어긋남을 느꼈다.
물론 당화령의 할아버지인 건 맞다. 그런데 그보다 다른 걸 먼저 말해야 하지 않나?
사천제일세가 사천당가의 전대 가주라든가. 화경의 끝자락에 닿았다는 고수라든가. 사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그런 지식 말이다.
하지만 당웅건은 오히려 유은하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령아 할아버지 당웅건이다. 그냥 당 노야라고 부르거라."
"예. 당 노야."
"그런데 옥호당주는 무슨 일로 온 겐가?"
"아. 가주께서 유 소협을 찾으셨습니다. 태상가주께서도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당웅건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세가 일에서 손 뗀 지 오래거늘, 가주께서 이 늙은이를 찾는다고?"
그 말에 당충영이 고개를 숙여 입 모양까지 가리고는 당웅건에게 전음을 보냈다.
- 촉왕부에서 염초를 빼돌리는 걸 화령 아씨와 유 소협이 탈취해 왔습니다. 그 처리에 관해 논하고자 하십니다.
"…허."
당웅건의 시선이 유은하에게 향했다.
"이상한 놈인 줄만 알았는데, 단단히 미친놈이었구나."
당웅건은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대로 앞장서 가주가 머무는 독왕전으로 향했다.
유은하는 그런 당운건을 뒤따라 어딘가 양면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건물에 도착했다.
"오…."
규모나 기능 면에서는 앞으로 천 년이 지나도 크라운의 마천루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문화의 처음 보는 양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끌끌. 멋지지 않으냐? 이게 바로 천년 당가의 정수이니라. 자. 들어가자."
당웅건을 따라 들어가니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이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익숙한 당화령.
또 한 사람은 당화령보다 조금 나이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면에 앉은 중년인이 있었다.
청년에게서는 찌릿한 느낌이 느껴졌는데, 중년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 노야랑 똑같아.'
유은하가 조심스럽게 살피는 사이, 기다리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당웅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고작 2년밖에 안 됐다네. 가주."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이니, 편히 하시지요."
"저놈은?"
당웅건이 유은하를 가리켰다. 당충영은 어느새 문을 닫고 나간 후였다.
"…어쩌면, 평생 당가타에 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말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은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웃을 수 없었다. 저들이 정말로 원한다면 자신은 평생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은 그 정도로 힘의 격차가 나는 게 현실이었다.
"상단 하나 굴리기 힘드네."
나지막한 유은하의 한탄이 독왕전에 울려 퍼졌고.
"상단? 그 몸으로 상단? 설마 단주라는 소개가 진심이었느냐? 으하하하하! 하하핫!"
당웅건은 급기야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당웅건이 한번 시원하게 웃어서 그런지 딱딱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당웅건의 웃음이 그치자 중년인이 유은하에게 말했다.
"당가의 가주, 당문의 장문인이자 령아의 아버지인 당필웅일세. 이쪽은 령아의 오라비이자 소가주인 당무령."
당필웅의 소개에 당무령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먼저, 령아 아버지로서 감사를 전하겠네. 자네 덕분에 자전마견을 척살할 수 있었다지?"
유은하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당화령의 행동거지를 봤을 때, 겸손함 또한 평가가 좋을 확률이 높았다.
"그냥 붙잡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오히려 당 소저가 비수를 던져서 제가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공손한 대답이었으나 당필웅의 눈에는 유은하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훤했다.
전신으로 '다 제 공입니다'라는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으니까.
그건 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는 절대자의 위치에서 십수 년을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천성이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했지.'
당필웅은 딸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사악하거나 음흉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고귀한 외형과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자신감은 필시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당필웅과 당웅건이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인이다.'
유은하가 고강한 경지를 이룬 건 아니다. 살면서 엄청난 업적을 쌓은 것도, 쌓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자는 태어나기를 거인으로 태어나 자아가 형성될 동안 거인으로 자라왔다.
시대를 풍미한 두 화경 고수의 눈에는 유은하가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길러진 거인이 왜 사천 첩첩산중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상단을 경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가의 가훈을 들어본 적 있나?"
"예.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맞네. 자전마견 건이 됐든, 황금이 됐든 자네의 공로에는 마땅한 보답을 할 걸세. 당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유은하에게는 안심되는 말이었다.
거대 집단의 이미지가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거대한 돈과 노력이 드는지.
유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당필웅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사천 산의 높은 봉우리에 처음 올라 끝없이 펼쳐진 자연의 장엄한 경관을 목도한 것 같은 느낌.
광활한 대자연 속에 지극히 위험한 무언가가 도사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유은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당필웅의 팔꿈치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당필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팔꿈치에는 그를 칠절독왕이라 불리게 해준 절독 중 하나가 숨겨져 있었으니까.
훅.
순간 압박감이 사라지고.
"자전마견의 자전마공을 흡수했다지?"
유은하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당필웅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령아 말로는 은빛 번개를 만들었다던데."
"…내공이 다 떨어져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해져 있던 유은하가 뒤늦게 답했다.
"자전마공의 심법을 익힌 게 아니라 내공만 흡수한 거라고?"
당필웅은 믿기 힘들다는 듯 유은하를 바라봤지만.
"잠깐. 내가 한 번 보마."
당웅건이 나서서 유은하의 팔목을 붙잡았다.
"저항하지 말아라. 다친다."
당웅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기가 불쑥 팔을 타고 들어왔다.
33화. 사천제일명문 사천제일세가
<외부 내공 침입 감지>
<경로 추적 및 기록>
팔을 타고 들어온 기운이 유은하의 혈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스트랄 유니온은 그것을 감지하고 유은하의 시야에 보고 메시지를 띄웠다.
"자, 이제 아까처럼 해 보거라."
"?"
"내 점혈에 당하고 용을 쓰던 것처럼 말이야."
유은하는 마비당했던 걸 떠올리며 '점혈이라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스트랄 유니온을 이용해 몸 안을 흐느적 유영하는 당웅건의 내공을 흡수했다.
<내공 흡수 개시>
<흡수율 저조>
<아스트랄 유니온 과부하까지 잔여 처리 용량 40%>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43%>
당웅건이 최대한 통제를 풀었음에도 그의 내공을 흡수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흡수에 성공하자 단숨에 자가복구 진행률이 치솟았다. 심지어 그러고도 남은 묵직한 내공이 혈도 곳곳으로 퍼졌다.
"기이한 일이군. 제대로 된 단전도 없이 사지백해 혈도에 내공을…."
유은하의 몸 구석구석에 안착한 내공을 읽어 들인 당필웅이 감탄하던 찰나.
파직!
유은하는 오랜만에 은빛 번개를 튀겨 보았다.
"다시. 다시 해 보거라."
여전히 팔목을 붙잡은 당웅건의 말에 유은하가 다시 은빛 번개를 튀겼다.
파직!
그리고 당웅건이 읽어 들인 혈 자리를 당필웅에게 전음으로 은밀히 말해주자.
"자전마공은 아닙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군요."
비급을 먼저 살펴봤던 당필웅의 입에서 그런 선언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당화령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 때문에 마인이 탄생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애초에 자전마견이 지니고 있던 비급도 자전마공이 아니라 열화판이라고 봐야겠습니다만, 그것과도 다릅니다."
"그래. 색(色)은 곧 심상의 빛깔이라고 했다. 그 혼탁한 보랏빛과 이 맑은 은빛은 달라도 너무 달라."
의문인 건, 대체 어떻게 자전마견의 마기를 주입당한 뒤 이런 은빛 번개를 만들어냈느냐는 것.
하지만 그건 유은하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한 일이니까.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당웅건이 끅끅거리며 웃는다.
"중원 천지에 이런 걸작이 존재했다니."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건 본능의 영역이라는 뜻. 당필웅과 당웅건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실례했네. 유 소협. 우리 당문은 정파의 기둥으로서 마인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네."
"마인이 아니니 괜찮다는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괜찮을 뿐인가. 령아의 은인께 무례를 저지른 값까지 톡톡히 치르겠네."
값을 톡톡히 치른다는 말에 유은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저는 뭐가 무례인지도 모르니, 알아서 잘 쳐주실 거라 믿습니다."
"허허허!"
당필웅이 크게 웃었다. 유은하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었다.
당웅건 역시 유은하가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당필웅에게 말했다.
"자전마공 열화판, 그거 저놈한테 주자."
당웅건의 말에 당무령이 놀라 눈을 부릅뜬다.
열화 정도가 심해 태양 앞 등불이라, 자형마공(紫熒魔功)으로 이름 짓자는 말이 오가긴 했어도 마공은 마공이다.
아니. 저급한 마공이라서 더 위험하다. 위력은 자전마공보다 못한데 위험성은 빼다 박았으니까.
저 자형마공을 익히면 일류가 되기 전에 마성이 눈을 뜰 것이고, 절정이 되기 전에 마성이 골수에 치밀 거다.
그런 마물을 화령의 은인에게 주다니?
'아니. 하지만….'
당무령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유은하를 빤히 바라봤다.
'유 소협은 본능적으로 자전마기를 정화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으나 화경에 이른 아버지와 할아버님이 아무 말 없으시니, 문제가 있지는 않을 터.
그런 당무령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듯 당필웅이 유은하에게 물었다.
"유 소협.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익히면 반드시 척살해야 하는 마인이 된다 들었습니다만?"
유은하의 말에 당필웅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손도 안 댄 건가?"
"물론입니다."
유은하의 대답에 당화령이 그를 옹호하며 나섰다.
"심성은 착한 사람이라니까요? 그런 사람한테 마공을 익히게 하다뇨!"
당화령은 멈추지 않고 당웅건에게도 말했다.
"할아버님도 너무하세요. 유 소협이 자전마기를 정화한 건 사실이지만, 마공을 익히는 건 또 다르잖아요."
무림세가가 아무리 평범한 관료 집안보다 예의를 덜 따진다지만, 그래도 손녀가 태상가주에게 정면으로 할 말은 아니다.
하물며 그 태상가주가 아득히 윗줄에 놓인 화경의 고수임에야.
하지만 당운건은 흐뭇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소가주는 가문을 위해 사감을 접어둘 수 있는 넓은 안목을 지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손녀는 소가주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정의감을 지녔다.
그 모습을 봤으니 어찌 달갑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당웅건이 강렬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체내로 침투한 마기를 정화하는 건 절정만 되어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똑같은 수법으로 재현한다는 건. 내 듣도 보도 못했다."
무공의 형(形)이야 흉내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자전마공은 기운을, 그것도 강기를 다루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강기공의 한 종류다.
내공 쌓고 그것을 특별한 방법으로 다루는 게 무공의 구 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방법을 본능적으로 비틀어버린 놈이 나타났다.
"저 자전마공 열화판만 익히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당웅건이 유은하에게 물었다.
"내게 무공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처음부터 차근차근."
"...!"
그 말에는 당필웅도, 당무령도, 당화령도 놀라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현경에 오를 깨달음을 찾아 세상을 유람하던 당웅건이다. 그런 그가 제자를, 그것도 당씨가 아닌 자를 제자로 받다니!
하지만 유은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메가코프에서도 이런 일은 많았으니까.
가끔 특출난 인재를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할 때가 있었다. 앞에서는 온갖 달콤한 조건을 내밀고 뒤로는 족쇄를 준비하는.
악질적인 건, 그 족쇄가 족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 할아버지 제자가 되면 이곳에서 지내야겠지? 높은 사람 제자가 됐으니 자연스럽게 대우도 좋아질 거고.'
뒷배는 필요하나 족쇄는 차면 안 된다. 그게 유은하의 현 상황이었다.
당문에 묶여버리면 중원을 집어삼킬 상단의 꿈도 고작해야 사천에 묶여버릴 테니까.
유은하의 경험도 거절에 무게추를 실었다.
유은하는 제 손으로 이룬 것 없이 누리기만 하다가 별의 꼭대기에서 나락으로 추락했다. 회장의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이 날아가지 않았던가.
당웅건의 제자가 되는 건 갤럭시 크라운 시절의 유은하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자가 되어 누릴 수 있는 건 전부 당웅건의 것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 그것도 세상을 떠돌며 온갖 인간상을 봐 왔던 고수였다.
그런 당웅건에게 유은하의 마음은 손에 잡힐 듯 훤했다.
"상단을 만들고 싶다 했지?"
"네."
"내 제안을 꺼리는 걸 보면, 사천에 묶이기 싫다는 생각이렷다?"
당웅건의 말에 당무령은 '저건 무슨 미친 소리지?'라는 표정으로 유은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화령은 세상을 집어삼킬 상단을 세우겠다는 유은하의 목표를 떠올리고는 해괴한 표정이 되었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호랑이를 그리고자 하면 실패해도 고양이는 그리는 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포부가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그러나 유은하는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이 세상을 손에 넣을 거대한 상단을 세울 겁니다."
"끌끌. 이제 겨우 지학(志學, 15세)이나 됐을까 싶은 놈이."
다른 사람 같았다면 뭘 모르는 놈이 꿈만 크다고 했을 테다.
하지만 유은하에게서 풍기는 거인의 존재감은 그 말이 어쩌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무가 하늘에 닿아 어렴풋이 천기를 느낄 수 있게 된 당웅건과 당필웅은 도무지 유은하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널 당문에 묶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리고 무공은 물론 이 세상에서 상단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도 가르쳐 주마."
단순히 글자뿐만이 아니라 명나라의 관료 체계, 유교를 기반으로 한 법과 관습 등등. 필요한 건 많고 많았다.
"그뿐이랴? 내가 중원 명소는 가본 곳보다 안 가본 곳이 드물다. 내 이야기가 많은 도움이 될 터. 어떠냐?"
당웅건의 제안에 유은하는 잠시 고민하다 되물었다.
"그럼, 저는 그 대가로 뭘 드려야 합니까?"
유은하가 당문에 묶이지도 않는데 당웅건에게 무공을 배우고 당문을 뒷배로 쓸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
언제나 달콤한 제안 뒤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유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당문과 유은하의 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무방했다.
'이 정도면 일방적인 자비, 혹은 호기심이라 해도 될 정돈데….'
유은하가 그렇게 경계하니 당웅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벌써 상인 행세를 하려 드느냐. 끌끌."
미소 짓던 당웅건의 눈빛이 일순간 무기질적인 빛으로 돌변했다.
"염초에 관해 일절 발설하지 말 것. 아니. 아예 잊어라."
유은하의 주도로 탈취한 것이지만, 어쨌든 염초는 당문으로 흘러들어왔다.
한 세력의 명운을 좌우할 비밀을 영원히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 당웅건은 그 조건으로 유은하를 제자로 받아주겠다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비밀을 지켜준다면 당문은 너와 은하상단의 뒷배가 되어주마."
"...."
"하지만, 네 입에서 염초의 염 자라도 나오는 날에는… 이 당웅건이 맹세컨대 네 모든 걸 한 줌 독수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유은하는 당웅건의 제안이 일반적인 거래가 아니라 일종의 인재 영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호의가 듬뿍 섞인.
'하긴. 체급을 보면 동등한 거래는 말이 안 되지. 아쉽지만, 지금 내겐 선택권이 없어.'
유은하가 속으로 납득하자 당웅건이 재차 물었다.
"이 거래를 받아들이겠느냐?"
***
유은하가 나간 직후. 당웅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아들이자 가주인 당필웅에게 물었다.
"가주. 염초가 생겼다지? 이야기를 듣고 싶네만."
"저보다는 령아가 이야기해드리는 것이 더 생생할 듯합니다."
당필웅의 말에 당화령은 유은하와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탈영병을 쫓아간 것부터 은하촌에서 자전마견을 물리친 일과 금천현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성도로 돌아온 과정까지.
그 전부를 듣는 내내 당웅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가 끝나고부터는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두 번째 듣는 당필웅도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날 정도니, 처음 듣는 당웅건은 오죽하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웃던 당웅건은 눈물까지 훔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르칠 게 많은 놈이로고. 염초를 보자마자 돈이 되겠다 했다고?"
"…네."
당화령은 어째서인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닌데도 말이다.
"뭘 몰라서 두려움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흐음."
당무령의 말에 당웅건이 수염을 쓸었다.
유은하는 절대 멋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아니다. 자신이 건넨 제안에 냉정하게 대가를 따지는 모습만 봐도 그 심계를 알 수 있었다.
'그런 놈이 령아의 반응을 보고서도 싹 다 챙기자고 해?'
당화령을 무시하는 것 같진 않으니, 가능성은 하나다.
염초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면서도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은 것. 그리고, 당문은 그 돈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당문이 염초를 얻는다고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다.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물건임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놈. 탈영병과 당문이 얽힌 화약 일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당문이 어떻게든 염초를 처리해 줄 거라 확신한 게야.'
당웅건은 그렇게 추론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무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그 물음에 당필웅이 당무령을 바라봤다. 마치 시험하는 듯한 분위기에 오히려 당화령이 긴장할 정도였지만.
"영라대(影羅隊)를 보내 촉왕부와 도지휘사사 사이를 감시토록 하겠습니다. 그들이라면 염초가 사라진 것에 대해 머잖아 반응할 겁니다."
당무령의 입에서는 대답이 술술 나왔다.
"동시에 옥호당의 대규모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화령이가 사용했던 통로 인근의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금천현은?"
"괜히 당가 무인이 보이면 의심만 받을 테니, 지금은 가시를 세우고 웅크린 채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당무령의 대답을 들은 당필웅과 당웅건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 소가주인지 누구 손자인지. 인물도 훤하고 능력도 출중하고!"
"부, 부끄럽습니다."
"색시만 데려오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당웅건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당무령.
이내 당웅건의 시선이 당화령에게 향한다.
"그래. 그럼 령아는?"
"네?"
"네가 가져온 염초고 네가 데려온 사내다. 너도 뭔가 해야지."
"그으…. 뭘 하면 될까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눈치를 보는 당화령. 그런 그녀에게 당웅건이 말했다.
"별생각 없다면 그놈 데리고 우리 당가타 저잣거리라도 다녀와라. 잠깐 한 달 정도 폐관수련 했다는 소문도 퍼뜨리고."
"폐관수련이요?"
"그럼 네가 밖에 나돌아다녔다 소문이라도 낼까?"
"아."
"아쉽지만 자전마견에 관한 소문도 나중에 내야겠다. 그놈이 불쑥 거기 나타난 건 촉왕부와 관련이 있을 것 같구나."
당웅건은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집안일은 가주와 소가주가 사람들하고 잘 처리할 테니, 나는 저 짐승인지 신선인지 모를 놈 사람 만들 계획을 세워야지. 끌끌끌. 천년서고 좀 쓰마."
그 말을 남긴 당웅건이 쌩하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당웅건은 유은하에게 자랑할 산더미 같은 무공서를 들고 천년서고를 나섰다.
그 모습을 본 당문의 무인들 사이에 태상가주의 제자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34화. 사천제일명문 사천제일세가
요 며칠 당가의 시비들 사이에 한 인물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작약각이나 의서를 모아둔 서고에 가면 미공자를 볼 수 있다더라!
피부는 분을 칠한 것처럼 희고 키는 6척이 넘으며 어깨는 성도를 둘러싼 산처럼 넓다더라!
그런데 얼굴은 주먹만 하고 이목구비는 오밀조밀 그림처럼 모여 있다더라!
조금 연차가 쌓여 당가의 직계를 모시는 시비들이 덧붙였다.
태상가주께서 데려오신 공자님이라더라!
그렇다면 태상가주님의 제자인가? 혹은 막내 손녀이신 화령 아씨의 짝지?
약재와 의서만을 살피는 게, 무림인은 아닌 것 같더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점점 작약각을 기웃거리는 시비와 하인의 수가 늘어나는 동안.
<비파 열매 분석 완료>
<다량의 당류를 함유. 그 외 칼슘, 비타민 A, B, C, 철분, 인, 식이섬유 등이 감지됨>
<기관지와 위장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음>
<다량의 카로티노이드가 감지됨>
<항산화, 항염증 작용 확인>
"이것도 대충 맞네."
유은하는 약재를 하나하나 입에 넣어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단순히 분석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암기한 본초강목은 물론 당가의 서고에서 빌려온 갖가지 책까지 동원해 가며 자신만의 약학을 정립하는 중이었다.
유은하가 살펴보건대, 의원들이 달이는 탕약은 성분이 복합적이라 작용 원리가 불분명했다. 때로는 상반되는 효과를 지닌 성분들이 충돌하기도 했고.
하지만 단일성분만을 추출한다면 탕약과는 비교도 안 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미 아스트랄 유니온을 이용해 각종 성분의 추출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덕분에 일문환 때처럼 굳이 피를 뽑지 않아도 대량생산 가능한 추출법이 차근차근 완성되는 중이었다.
그렇게 당가에 도착한 지 닷새 되는 날, 당웅건이 높이 쌓은 책 꾸러미를 들고 유은하를 찾아왔다.
"이게 다 네놈이 익힐 수 있는 것들이다."
그가 쿵! 소리가 나도록 책을 내려놓았다.
"어디 한번 골라 보아라."
당웅건의 눈이 흥미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우리 당문은 네게 이 많은 것들을 쥐여줄 수 있다. 네가 이 무공들 앞에서도 상인을 하겠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감이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노야께서 가장 좋은 거로 하나 골라주시면 안 됩니까?"
"누가 염초 보고 눈 번득인 놈 아니랄까 봐. 욕심도 많구나."
당웅건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높은 건물을 그냥 막 짓는 줄 아느냐? 기둥을 깊게 박고 뼈대를 튼튼하게 올려야지."
"당연하죠."
"그리고 그 쓸모도 미리 정해둬야 내부를 알맞게 만들지 않겠느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듣고 보니 그랬다.
중원보다 훨씬 발전한 크라운의 건축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공장을 모듈형으로 지어 생산성을 극한으로 뽑아낼 것인지, 아니면 공간 낭비가 있더라도 보안을 중시할 것인지.
목적에 따라 설계는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유은하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당웅건이 말을 이었다.
"무공 또한 그렇다. 네가 어떤 길을 나아가고 싶은지를 알아야 방향을 잡아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자 유은하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상인 하기 좋은 무공은 없어요?"
"허허허."
무공 앞에서 한낱 황금을 논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유은하의 눈을 보니 이놈이 진심이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했다. 이놈은 대체 뭘 믿고 상인을 하겠다는 건지.
"혹시 이 무공을 팔아먹을 생각이냐? 저잣거리에 풀린 무공처럼?"
"당 소저에게 그건 사파도 안 할 짓이라 들었습니다."
당웅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말은, 이미 무공을 팔아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물어봤다는 뜻이니까.
아마 자전마견을 죽이고 얻은 비급을 팔 생각이지 않았을까?
"그래. 이미 널리 알려진 기초 무공이 아니라면 무공을 파는 건 사파도 안 할 짓이지. 그렇다면 대체 뭘 팔아서 돈을 벌려고 상인을 하겠다는 게야? 그 몸으로 무인이나 할 것이지."
"약. 지금은 약을 팔아 상단을 키우려 합니다."
유은하는 당웅건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숨기고 비장의 한 수로 쓰는 것도 차이가 어지간히 나야 가능한 일이지.
돈, 권력, 무력. 유은하는 어느 것 하나 당웅건의 발끝에 닿지 못한다.
그러느니 자신의 능력을 내보여 상대가 값을 제대로 치르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일전의 회의 때도 당웅건은 자신에게 큰 호의를 보이기도 했고.
"약? 의서를 찾아보고 약재도 직접 먹어본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흠."
당웅건이 하얀 수염을 쓸어내린다.
"그냥 산에서 약초나 캐서 팔겠다는 말은 아닌 듯하고. 뭔가 특별한 수가 있느냐?"
유은하라면 절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를 하리라 생각하는 당웅건. 그는 유은하를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저는 약재를 직접 먹어서 정확히 어떤 효능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어요."
"그건 의서에도 다 적혀 있지 않으냐."
"틀린 것도 있었습니다. 효능이 있긴 해도 미약하거나 작용 원리가 다른 것도 더러 있었고요."
저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본초강목만 해도 황궁의 태의까지 지낸 이시진이 무려 30년 노력 끝에 엮어낸 세기의 보물이다.
그 한 명의 노력뿐만 아니라 중원 각지의 명망 높은 의원과 선비들을 모아 토론을 반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의원들의 삼재검법 같은 책에 틀린 부분이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
당웅건이 어리둥절한 사이에도 유은하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약재에서 특별한 작용을 담당하는 약성을 분리해 녹여낼 수 있습니다."
어느새 비워진 유은하의 찻잔에는 그의 검지에서 스며 나온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버드나무 껍질로 만든 탕약에는 통증을 완화하고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반면, 약이 과하면 윗배 통증과 설사 같은 증상이 도지고요."
"그렇지. 잘도 외웠구나. 그런데 이 피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좋은 약효만 분리해낸 겁니다. 지금은 별다른 수가 없어 제 피에 녹여냈지만, 평범한 산약(散藥)이나 환약으로 만드는 방법도 차차 개발할 생각입니다."
유은하의 말에 당웅건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봤다.
버드나무 껍질의 약성을 아는 건 본초강목을 열심히 봐서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걸 직접 먹고 몸으로 약성을 뽑아내?
그것도 해로운 효과는 제거하고 이로운 효과만 남겨서?
말이 안 된다. 그게 그렇게 쉽다면 당가가 왜 온갖 약재를 섞어 부작용을 줄인 탕약과 환약을 만들려 노력하겠는가.
더군다나 약성을 뽑아낸다는 건 반대로 독성을 뽑아낸다는 의미와도 같다.
저 말이 사실이기만 하면 당가의 독공을 수십, 아니. 수백 년은 진보시킬 보배가 아닌가!
'독은 절정 이상만 되어도 효능이 급감한다는 무림의 관념을 뒤집을 인재일지도 모른다.'
물론 절정, 초절정을 넘어 무려 화경에게도 통하는 독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건 실험을 거듭하다 천운이 따라줘야 극미량을 만들 수 있는 극독이다.
하지만, 유은하가 말한 능력이 사실이라면?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이다.
"크흠."
당웅건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찻잔을 들었다.
"내,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당연하죠. 아, 이왕 시험해 보실 거라면."
유은하가 찻주전자 뚜껑에 피 여덟 방울을 더 떨어뜨렸다.
"마침 겨울이니 세가에 감기 걸린 사람도 있겠죠?"
"그야 말이라고. 올겨울은 유난히 더 추워서 환자도 많다."
"다른 약재 섞지 말고 물에 타서 아침 식사 후 한 방울씩 먹게 하십시오. 세 명분 사흘 치입니다."
피를 마시는 게 꺼림칙하면 다과에 섞든 알아서 하겠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당 소저에게 제가 이전에 개발한 일문환과 멸모환도 있으니, 그것도 가져가 실험해 보셔도 됩니다. 일전에 의약당에서 분석해 보겠다며 가져갔는데, 소식이 없군요."
"령아에게? 령아는 그런 말 없었는데?"
"염초 때문에 까먹은 것 같습니다."
"흠. 그래. 염초라면 그럴 수도 있지."
당웅건이 찻잔과 주전자 뚜껑을 재빨리 챙겼다. 그 모습을 본 유은하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일이 잘 풀리면 당가에서 은하상단에 지원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러고는 돌아서다가 문득 유은하를 찾아온 본론은 무공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차. 그것들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대충 훑어보아라."
당웅건이 가져온 비급의 양은 상당했다. 아주 기초적인 토납법부터 시작해 여러 분야의 기초 무공을 죄다 가져왔기 때문이다.
"특히 토납법과 무공총람은 먼저 봐 둬야 한다."
"네."
"난 경과를 직접 살펴보고 올 테니, 사흘 후에 보자."
"살펴 가십시오."
"에잉. 일 보러 왔다가 일을 얻어 가는구만."
당웅건은 젊은 놈이 늙은이를 귀찮게 한다면서도 아이처럼 두근거리는 표정을 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후. 의약당이 뒤집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촉왕부 지하 뇌옥. 극악한 범죄자들만이 들어온다는 그곳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웅묘객잔에서 유은하와 당화령을 내쫓았던 고을찬. 그리고 철창 너머에서 고을찬을 바라보는 도지휘첨사 정주호였다.
"고 총기. 이번 일만 잘 해줬으면 고작 50명을 거느린 총기가 아니라, 단계를 밟아 정천호가 될 수 있었어."
"...."
"그리고 도지휘사께서는 중앙으로 가시고, 나도 동지를 거쳐 도지휘사가 됐을지도 모르지. 촉왕 전하께서 그리 약조하셨으니까."
"...."
"그러니 지금이라도 말하게. 염초는 어디에 숨겼나? 그것만 말하면 자네를 다시 중용하는 건 물론이고 가족들도 화를 면하게 해주겠네."
정주호의 말에 고을찬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곪아 터지기 시작해 열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모릅니다…. 염초는 본 적도…. 우리는 황금만… 그 자리에…."
"...."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습니다…."
"쯧."
정주호는 두통이 도지는 걸 느끼며 혀를 찼다.
고을찬과 부하들을 붙잡고 이 지하 뇌옥으로 옮긴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아니. 붙잡았다고 하는 건 조금 이상한 표현이리라. 고을찬과 부하들은 제 발로 촉왕부에 들어왔다.
긴장한 고을찬의 표정을 보고 전부 뇌옥에 처넣긴 했지만.
'이놈들이 훔친 게 아니로군. 고 총기, 이놈은 그냥 눈치가 빠른 거였어.'
사라진 황금과 염초는 이들 짓이 아닌 게 분명했다.
고을찬은 그저 토사구팽당할 미래를 짐작했기에 긴장하던 것일 뿐.
그 사실을 알면서도 촉왕부에 발을 들인 건, 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이 아니면 대체 누가 어떻게 그 많은 황금과 염초를 훔쳤단 말인가!'
정주호도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도지휘사에게 얻어맞은 뺨이 괜히 시큰거렸다.
'무게로 따지면 일백 관쯤 되는 엄청난 짐이다. 부피도 상당하고.'
그러니 그걸 가지고 신속하게 옮길 정도라면 분명 상당한 규모의 집단일 수밖에 없다.
혹은 상당한 고수거나.
그래서 도지휘사사의 정보망을 총동원해 봤지만, 뭐 하나 확실히 의심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금천현 인근을 기웃거리던, 규모가 조금 된다는 일행들은 대부분 거래를 위해 온 상단이거나 배달을 온 표사였다.
그도 아니면 청성산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금천현에도 잠시 들른 유람객이거나.
잠시 행적이 묘연했던 절정 고수 이상의 명단도 추려 봤다. 하지만 그쪽은 더 의문이었다.
촉왕부와 당가 사이가 점점 험악해지는 시기인지라, 전부 제 영역에서 수련이나 하고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행적이 불분명한 이들 중 당가의 태상가주가 있긴 했다.
그가 화경의 벽을 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촉왕부에도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젊었을 적에는 일수천살(一手千殺)이라 불렸을 정도로 손속에 자비가 없던 고수.
그라면 염초와 황금을 탈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촉왕부도 당문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기에 귀환하는 태상가주가 빈손이었다는 건 이미 보고받았다.
그것이 연기든 아니든 증거가 없다면 건드릴 수 없다. 어디 작은 마을 이장도 아니고, 무려 당문의 태상가주다.
도지휘사조차 초절정인 마당에, 당웅건은 화경을 넘어 현경을 바라보는 절대고수이기도 했다.
아무런 증거 없이 찔러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자들이 절대 아니다.
'굳이 한 명 더 뽑자면, 당가의 막내 영애가 있긴 한데….'
한 달 정도 폐관수련을 하고 나왔다던 당화령. 큰 소득 없이 나왔다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겨우 일류에 오른 몸으로 그 거대한 짐을 옮겼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것도 고 총기와 부하들이 촉왕부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했다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흔적을 지우며 금천현에서 성도까지 왔는데, 맨몸으로 흩어졌다가 모인 병사들과 걸린 시간이 비슷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험한 산을 관도처럼 달릴 수 있는 짐말이 두세 필 정도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도지휘첨사 정주호는 이내 당화령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당문마저 의심에서 멀어지니, 남는 이름은 하나.
'자전마견. 그놈이 가장 의심스러워.'
놈은 반쪽이지만 절정에 올라 황금과 염초를 훔칠 능력이 충분했다.
내상을 치유하기 위한 영약을 구해야 하니, 황금을 훔칠 동기도 있다.
'일단 그놈부터 잡고 봐야겠어.'
도지휘첨사가 의자에서 일어나 뇌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털썩.
의자에 겨우 걸터앉아 있던 고을찬의 몸이 모로 쓰러지며 싸늘한 돌바닥과 충돌했다.
35화. 성산
사흘 후 찾아온 당웅건의 표정은 흥분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화경에 오른 후 이렇게 흥분한 적이 또 있을까 스스로도 반문할 정도였다.
"우리 당문 약으로 아침 점심 저녁으로 탕약을 달여 먹고 이틀은 지나서야 약효가 나는 게 보통이었는데!"
당웅건은 침을 튀기며 유은하가 준 약을 극찬했다.
"특히 그 멸모환! 그걸 먹은 아이는 불과 1각도 안 돼서 열이 내리고 숨이 평온해졌다! 그런데 그리 강한 약이 부작용은 전혀 없어!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게야!"
"말씀드렸잖아요. 병에 듣는 성분만 추출했다고. 그리고 부작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그래. 물조차 과하게 마시면 탈이 나지. 세상에 부작용 없는 약이 어딨겠느냐. 하지만 당장은 어떤 부작용도 없었다!"
표본이 하나뿐이었다면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기에 걸린 세 명에게 똑같은 효과를 보였다. 그것도 한 명은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강한 약을 써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중증이던 아이였다.
당웅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당가가 지원을 약속하면, 그걸 얼마나 생산할 수 있겠느냐?"
"멸모환은 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제 능력을 보이기 위한 약이었죠. 저는 새로운 약을 만들어 팔 겁니다."
"새로운 약?"
당웅건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껏 잘 듣는 명약을 만들어 놓고는 왜 다른 걸 파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에게 빼앗길까 봐 그러느냐? 우리 당문이 뒷배인데?"
"아닙니다. 그저 지금은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당문의 직계 분들에게는 몇 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단호한 말에 당웅건은 잠시 유은하를 구슬려볼까 싶었지만.
'아니다. 이놈 눈빛을 보니 제 손이 잘려도 아닌 건 아니라 할 놈이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필요가 있겠는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이놈은 제 능력을 차차 보일 것이다. 주머니 속 날카로운 송곳이 언젠가는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래. 그래도 뭘 얼마나 만들 수 있는지 알아야 지원을 해줄 게 아니냐."
당웅건은 화경에 오르고 나서 마음이 이렇게 달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반면, 유은하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당문의 지원이라면 이름뿐인 은하상단을 단숨에 반석 위에 올릴 수 있을 테니까.
숨길까.
지를까.
짧은 고민을 마친 유은하의 입이 열렸다.
"이 작약각 정도의 건물에 의약당에 있던 기구와 인력을 배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금은 달에 황금 50냥 정도 필요합니다."
"배포도 크구나. 그러면 어찌 되는데?"
"올겨울은 물론이고 봄이 지나서까지도 성도에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당웅건은 잠시 유은하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이놈…. 허세는 아니로군. 끌끌.'
유은하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금천현에서 일문환이라는 약을 정말 동 1문에 팔았다지?'
당웅건은 약을 건네받으며 당화령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유은하가 저리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저 어마어마하게 낮은 생산 단가와 판매가도 한몫하리라.
성도 인구가 약 25만 호에 육박한다.
한 호당 평균 8명이 살고 있으니, 인당 한 첩씩만 사도 6백만 알이 팔린다.
하물며 약이 그렇게 싸다면, 누가 한 번만 사겠는가? 두 번, 세 번, 네 번. 병에 걸릴 때마다 사 먹겠지.
병이 나을 때까지 닷새 정도 먹는다 치면 3천만 알. 그 가격은 동 3천만 문.
은자로 치면 15만 냥이다. 황금으로 따져도 무려 7,500냥이고.
"허. 허허."
당웅건도 젊어서는 당가를 경영했던 가주였다. 그만한 돈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촉현왕 그 친구가 있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터.'
약이 없어 죽는 이들이 급감하면 고스란히 인구 증가로 이어진다. 그들이 아프면 또다시 약을 사 먹겠지.
그 끝없는 순환은 끝없는 황금으로 이어질 것이다.
심지어 그것조차 끝이 아니다.
명의의 이름은 중원 전체로 퍼져나간다. 명주는 사방팔방으로 팔려나간다.
명약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나? 당장 유명 문파 영약만 해도 중원 전체가 탐내는데.
그런 당웅건의 생각을 읽은 유은하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중원 천지에 은하상단의 이름이 퍼질 겁니다."
"놈. 지원이 아니라 투자를 하라 협박하는구나! 으허허헛!"
소리치는 당웅건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의약당에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 걸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비법을 전부 알려줘도 되겠느냐?"
"감히 당 노야께 무공을 배우는 제 비법을 빼갈 자가 당문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추후 당문에 훨씬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는데요?"
"하하! 없지! 없다마다!"
유은하는 당웅건의 눈에 깃든 호의와 열망을 읽었다. 그 눈빛은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짜릿했다.
아무 가치도 없이 버려진 유은하가 아닌, 이 중원의 유은하로. 비로소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절 도와주시면 앞으로 만들 약도 당문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혹은 당문이 원하는 약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요."
말을 마친 유은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당웅건이 돌변해 자신을 감금하고 노예로 부린다면?
저항할 수단 따윈 없다.
기껏해야 이 악물고 정보를 넘기지 않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건,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 자신을 압도하는 세력과 강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건 지난 며칠 동안의 공부로 알 수 있었으니까.
무공총람에 적힌 세력들만 해도 두 손 두 발로 다 셀 수 없었다. 기회를 잡고 단숨에 몸집을 키워 비법을 지킬 힘을 길러야 했다.
이건 그를 위한 협상이며 모험이다.
"눈치가 좋은 건지. 그냥 무모한 건지. 쯧쯧."
당웅건 역시 유은하의 생각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라 촉왕 앞에서 그 말을 했으면, 넌 지하 뇌옥에서 비법을 뱉어낼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했을 거다."
"당 노야께서는 그러시지 않으리라 믿었을 뿐입니다."
"그리 확신하지 말아라. 당가를 위해서라면 난 못할 게 없으니. 하지만."
당웅건이 품에서 인장을 꺼냈다.
"옆에서 두고두고 덕을 보는 게 더 이득일 것 같구나."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비밀 유지와 수익 배분, 의무 등에 관해 간략하게 적은 임시 계약서였다.
"그런데, 새로 만들 약은 무슨 약이냐? 약 이름은 지었느냐?"
"아주 어린 아이들도 먹으려면 가루약이 나을 테니, 성산(星散)이라 지을 예정입니다."
"별 가루약? 거, 이름도 은하고 상단도 은하상단이라 지은 놈 아니랄까 봐 천문을 좋아하는구나."
이름도 유은하.
상단도 은하상단.
상품은 성산.
당웅건은 어쩐지 눈앞의 훤칠한 소년이 중원 하늘을 뒤덮을 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것들은 적어서 의약당에 보내 놓을게요."
"그래. 최대한 빨리 갖춰 두라 말을 전해 두지. 잘 부탁함세, 유 단주."
당웅건의 장난기 섞인 말에 유은하가 움찔 떨었다. 두려움이나 놀람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첫발이지만, 제대로 한 걸음 나아갔다는 환희에 몸이 제멋대로 떨린 것이다.
초 의원과 함께 골목 약방에서 약을 팔았을 때와는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자. 이제 일단락됐으니 다음 이야기를 해 봐야지."
"다음? 무슨 다음 말씀이십니까?"
"요놈아. 무공 말이다, 무공. 중원을 삼킬 상인이 되겠다는 놈이 무공이 약해서야 되겠느냐?"
상인은 악독해서 미움을 많이 받는다. 악독하지 않더라도 일단 이름을 떨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생긴다.
그러니 상인은 돈을 아주 잔뜩 벌어서 식객을 벌 떼처럼 모아 자신을 지킨다.
하지만 유은하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늘이 내린 몸이 있는데 뭐 하러 식객을 부린단 말인가? 본인이 무공을 수련하면 되지.
"그래. 그새 토납법은 제대로 익힌 모양이로고."
"네. 무공총람과 다른 것도 다 외워 뒀습니다."
그 말에 당웅건이 고개를 갸웃한다.
"다 읽었다고?"
"다 읽기도 했고, 다 외웠습니다."
"잉? 그 많은 걸?"
솔직히 사흘이면 토납법을 익히기는커녕 비급 하나 외우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무공 비급은 그냥 외운다고 끝이 아니다.
아주 철저하게, 자다가도 쿡 찌르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외워야 한다. 중간에 한 자라도 잘못 외웠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런데 사흘 만에 그 많은 걸 다 외웠다고?
당웅건의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비급이 왜 비급인가. 중요하고. 유출해서는 안 되고. 아무튼 그런 책이라서 비급이다.
그런데 그가 가져왔던 그 많은 비급이 물리적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홀라당 한 사람의 머릿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 크흠."
당웅건은 헛기침으로 당황을 감추며 말했다.
"무공 구결은 한 자 한 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대충 외워서는 절대 안 돼."
그러자 유은하의 입에서 수사보(水蛇步)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물에 떠밀리듯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순간 빠르게 가속하는 것이 특징인 보법.
수준으로 따지면 이류 무공 정도지만, 부드러운 움직임을 위한 동작이 많아 구결도 길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유은하는 수사보의 구결을 암송했다.
"거꾸로도 가능합니다."
"…그, 그딴 짓은 하지 마라."
어떤 미친놈이 무공 구결을 거꾸로 암송해? 당웅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성도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었구나."
난감하지만 어쩌겠는가? 머릿속을 열어 암기한 것들을 꺼내 갈 수도 없는데.
더군다나 당웅건은 유은하를 진짜 제자로 반쯤 여기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유은하의 오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그래. 외우긴 다 외웠다니까, 이것부터 익히자."
당웅건이 골라든 보법은 뇌명보(雷鳴步)였다.
"당가의 보법은 둘 중 하나다. 은밀하거나 빠르거나. 그중 빠르기로는 손에 꼽히는 보법이 뇌명보다."
단점이라면 이동 거리가 짧고 방향을 바꾸기 힘든, 딱 이류 정도에 어울리는 보법이라는 점뿐.
그래도 기초로는 나쁘지 않은 보법이었다.
"네 몸이라면 익히고도 남겠지. 뇌속성으로 바꾼 내공과도 합이 잘 맞고."
유은하의 표정에 기대감이 서렸다.
발을 구를 때마다 천둥소리가 울리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보법!
그 멋진 보법을 익힌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유은하였다.
"끌끌. 이제야 그 나이대 애들 같은 표정이군."
본래라면 내공심법과 무기술을 마저 골라야 했지만.
"나오너라. 내공은 빌려줄 테니 형이라도 좀 익혀보자꾸나."
당웅건의 말에 유은하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유은하의 모습에 당웅건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공을 익히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오늘은 줄창 바닥에 발자국만 찍다가 끝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작약각 뒤뜰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
당웅건은 심각한 표정으로 후원에 선 유은하를 관찰했다.
한 걸음 내디딘 유은하의 전신에서 은빛 번갯불이 튀며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콰릉!
그리고 유은하의 몸이 순식간에 작약각 후원을 가로질렀다. 그 거리가 족히 3장은 넘어 보였다.
'넘겨준 내공에 약간 장난을 쳐 놨건만, 순식간에 저리 순수한 뇌속성으로 바뀌다니. 게다가 뇌명보는 저리 멀리 이동하는 보법이 아닐진대.'
뇌명보는 두세 걸음을 한 박자 정도 빨리 이동하게 해주는 보법이다.
속도가 빠르고 시전자가 있던 자리에서 뇌명이 울리므로 약간의 교란 효과도 있지만, 그 외 다른 묘리는 없다.
이류 보법으로 분류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유은하가 사용한 기술은 과연 뇌명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이동 거리를 자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은하가 지나간 자리에는 은은한 뇌기가 남아 방전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야 저놈이 내공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모르니 저 정도에 그친 걸 테지만….'
유은하가 내공을 내뿜어 파괴적인 위력을 낼 수 있게 된다면?
저 뇌명보는 유은하보다 약한 이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유은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번개가 될 테니까.
'자전마공의 마기도 멋대로 바꾼 놈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세상에 천재는 많고 많다지만, 불과 며칠 만에 비급을 몽땅 외우고 직접 개량해 시연하는 놈은 당웅건조차 처음 봤다.
"그만. 됐다."
당웅건은 연신 뇌성을 울리며 보법을 밟던 유은하를 멈춰 세웠다. 보법의 방향이 이상한 곳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뇌명보는 오로지 정면과 사선으로만 나아가는 보법이다. 애써 옆으로 움직이려면 오히려 발이 꼬이고 말 게야."
"좀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서라. 옆이나 뒤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면 뇌명보는 능히 일류 보법이라 불렸을 게다."
당웅건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유은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뇌명보의 구결에 따른 내공 수발이나 발을 뻗는 순서를 보면 전진하는 데 특화된 보법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내공 흐름을 분석해 보니, 옆이나 뒤로 이동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했다. 그러니 결국 발걸음만 맞게 바꿔주면 되는 일 아닌가.
'뭐. 더 좋은 보법이 있다면 뇌명보를 비틀어 사용하는 게 비효율적이긴 하겠지.'
유은하가 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때, 당웅건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단번에 뇌명보를 익히다니. 처음에는 그저 몸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머리도 비상하구나."
"감사합니다."
"무공에만 집중하면 능히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재능이거늘, 왜 상인을 하려는 게냐?"
당웅건의 물음에 유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당웅건은 물론이고 이 세상 누구도 유은하의 사정을 모르니까.
'갤럭시 크라운의 이야기를 한다면 미쳤다고 오해할 확률이 10할인데… 어쩐다?'
36화. 성산
유은하는 갤럭시 크라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 자신의 사정을 밝힐 수 없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그 평생을 궤도 의료기지에서만 보냈으니까.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거짓말을 하면….'
눈앞의 노인은 그 사실을 곧장 알아차릴 거다.
"지금 말씀드리면, 믿기 힘드실 겁니다."
"내가 중원 천지에 안 가본 곳이 드문 사람인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뭐라는 게야?"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쯧."
무작정 숨기겠다는 것도 거짓말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은 믿기 힘들 테니 나중에 말하겠다는 유은하.
당웅건도 그런 유은하를 닦달할 정도로 그의 저의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기인이사가 별처럼 많은데, 어디 무공보다 상인이 좋다는 이가 없을까?
"아무튼. 내 잠시 살펴본 바로는 저잣거리의 삼재심법과 삼재검법을 익힌 것 같은데, 맞느냐?"
"예."
"그런데 또 내공은 제멋대로 굴리고 있고."
당웅건이 제멋대로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 속뜻을 살펴보면 '자유롭다'라는 것에 가까웠다.
도무지 삼재심법만 익힌 자의 내공 흐름이 아니었다.
'혈도 가닥가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내공을 인도하고 내뿜으니, 차라리 저 혈도에 용이 산다 해도 믿을 지경이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내공을 다루는 혈도는 갓 태어난 핏덩이처럼 깨끗한 데다 노회한 고수처럼 탄탄하기까지 했다.
"아예 처음부터 상승 심법을 익히는 게 나을 것 같구나."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유은하는 무공총람이라는, 무림 백과사전에 가까운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무공총람에는 토납법으로 기를 느끼고 기초 내공심법으로 큰길을 닦은 뒤, 상승 심법을 익힘과 동시에 조화로운 무공으로 경지를 올리는 것이 정석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범부라면 그 길을 따르는 게 정석이겠지."
당웅건은 코웃음을 쳤다. 잔혹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재능의 차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니까.
"기재라면 그 길을 걷는 기간이 단축될 테고, 천재라면 중간 다리 한두 개쯤 건너뛰어도 된다. 그런데 넌 그조차도 넘어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야."
"제가 말입니까?"
"그래. 구태여 느린 길로 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아닙니다. 빨리 갈 수 있다면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세상에는 빠르고도 안전한 길이 존재한다. 유은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거라."
그렇게 말한 당웅건은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려 사라져버렸다.
"!"
유은하의 동체시력으로도 당웅건이 빠르게 달려 사라졌다는 것만 뒤늦게 눈치챌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아마 일류에 이른 무인이 아니라면 당웅건이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느낄 게 분명했다.
'우주전 강화복을 입은 것과 비등한 속도라니.'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문명인지. 이 중원이라는 곳은 알면 알수록 아리송할 따름이다.
그런 감상을 느끼며 기다리길 잠시. 유은하의 앞에 다시 당웅건이 나타났다.
"네놈이 당씨 성을 받는 건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내가 가진 것 중 그나마 쓸 만한 걸 가져와 봤다."
당웅건이 꺼낸 비급은 두 권으로, 한 권은 혼원심결(混元心訣)이었고 또 한 권은 구천신공(九天神功)이었다.
"현재 당문에서는 익히지 않는 무공이다. 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익히기 어려워 사장되어가던 무공이지. 덕분에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위력은 확실한가 보군요."
"그거야 네놈이 얼마나 익히고 어찌 활용하는가에 달린 게 아니겠느냐."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며 유은하에게 비급 두 권을 전부 넘겼다.
"한번 읽어보고 끌리는 걸 익히는 것으로 하자꾸나."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제가 다 외워버리면 어쩌시려고…."
"끌끌. 괜히 사람들이 익히지 않는 무공이 아니다. 그걸 익힐 인재 찾는 게 쉬운 줄 아느냐?"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달리 따질 건 없는 겁니까? 체질이라든가."
"자잘하게 따져서 뭐 하겠느냐? 그런 건 못난 놈들이나 하는 게야."
당웅건은 끌끌거리며 웃더니 또 한 권의 비급을 건넸다.
"그리고 이건 조금 전에 네 보법을 보고 생각나서 가져왔다."
유성비(流星匕)라는 이름의 비급이었다.
"별다른 묘리는 없는, 그저 강한 힘으로 빠르게 던지는 게 전부인 암기술이지만, 네놈과는 궁합이 잘 맞을 게야."
"감사…."
"이건 연습하면서 쓰도록 하고."
비급을 받아 든 유은하에게 당웅건은 이어서 비수 열 자루가 꽂힌 혁대를 주었다.
손때가 타 낡은 혁대였지만,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그 질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지런히 꽂힌 비수 역시 잘 제련된 철을 사용한 듯 날이 시퍼렇게 선 모습이었다.
"옛날에 잠시 사용하던 것인데, 이제는 안 쓰는 것이니 네가 가지거라."
그 모습이 마치 손자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할아버지 같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챙겨주시지 않아도…."
"이놈아. 우리 당문을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만들 셈이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령아와 함께 싸운 것에 보답도 제대로 못 했다. 염초와 황금 건도 사안이 워낙 중해서 시간이 더 필요해."
"그 건은 제가 당 노야께 무공을 배우고 당문에서 은하상단을 도와주기로 한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심지어 그 조건에 유은하를 당문에 묶지 않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은하로서는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냈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당웅건은 턱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직 멀었다 이놈아. 당문과 은원을 맺는다는 게 어떤 건지, 이참에 제대로 느껴 보거라."
그렇게 말한 당웅건은 유은하의 손에 혁대와 비수를 억지로 떠넘겼다.
"혼원심결과 구천신공 모두 여느 대문파의 신공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그래도 신공쯤 되면 사람을 가리기도 하니, 신중하게 선택해라."
"…예. 거듭 감사드립니다."
"고민하다 머리 아프면 뇌명보와 유성비도 틈틈이 수련하고. 마음을 정하면 찾아오거라."
당웅건은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곧장 등을 돌려 작약각 후원을 떠났다.
"끌끌. 헛걸음을 이리 반복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처음에는 유은하에게 당가의 무공을 소개하고 자랑하려 했다. 그런데 놈의 이상한 능력과 멸모환이라는 약을 알게 된 탓에, 그것들을 시험하기 위해 돌아서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무공을 소개하고 기초를 다지려 했는데, 이게 웬걸? 이놈은 몸뿐만 아니라 오성마저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이었다.
그래서 기초부터 다지겠다는 기존 계획을 때려치우고 대뜸 신공이라 불려 마땅한 것들을 그놈에게 떠넘겼다.
"어려운 시기에 아주 귀한 보물이 굴러 들어왔어."
유은하의 눈을 보니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이였지.
손녀딸인 당화령에게 듣기론 저 어린 나이에 마을까지 책임지고 있다 하니, 그 됨됨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진솔한 호의와 애정을 받는 게 낯설어 보이긴 했지만, 절대 그걸 배신할 아이는 아니었다.
추후 유은하가 상인으로든 무인으로든 대성했을 때, 분명 당문을 잊지 않을 터.
'가주와 원로원에 말해 만류귀원신공(萬流歸元神功) 좀 풀어달라 해볼까? 겸사겸사 다른 비전 무공도.'
대대로 당문의 직계 중에서도 재능이 출중한 극소수만이 익힐 수 있는 신공인 만류귀원신공.
원로원의 동의가 있더라도 만류귀원신공을 익히려면 유은하는 당문의 일원이 되어야 할 테지만.
'나이도 딱 령아와 어울리고. 책임감과 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인이 많이 꼬일 것 같은 외모가 문제긴 하지만, 우리 령아라면 꽉 잡을 수 있겠지.'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당웅건도 당사자들의 동의 없는 몽글몽글한 미래를 그리며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독공이야 우리 당문을 위해서라도 놈에게 익히게 해야 할 터.'
그렇게 생각하며 거처로 향하던 당웅건이 우뚝 멈춰 섰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유은하의 재능을 보고 정신 팔린 나머지 그와의 계약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당웅건은 그길로 뒤돌아 의약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부로 의약당 사람들이 대거 차출되어 태상가주 거처로 차출되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유은하가 당웅건에게 비급을 받고 닷새째 되는 날. 성도에 도착한 지는 딱 열흘째 되는 날이 밝았다.
'저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무시무시하네.'
유은하는 초 의원의 약방에서 일일이 손으로 약을 빚던 걸 봐 왔다. 심지어 그땐 약효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유은하의 피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추출법을 알려주더라도 제대로 된 약을 양산하려면 최소 보름, 어쩌면 한 달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뒤엎고, 당문은 의약당과 약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을 동원해 단 닷새 만에 무려 10만 첩에 달하는 성산을 만들어냈다.
"대단하군요. 순식간에 설비와 인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그대로 생산까지 이어지다니."
유은하의 감탄에 옥호당 부당주 당길수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상가주님 명이신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진정 대단한 건 유 단주님이십니다."
당길수는 당문의 내부를 경영하고 조율하는 옥호당의 부당주이지만, 동시에 의학과 독공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힌 무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유은하가 알려준 약효 추출법과 배합법은 생전 처음 들어봤다.
더 놀라운 건, 생전 처음 보는 그 방법이 상당한 수준으로 체계가 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대문파의 개파조사들이 처음 창안한 무공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전무후무한데도 건들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무언가. 당길수는 유은하가 알려준 제약법으로부터 그런 감상을 느꼈다.
"게다가 이런 귀한 기술로 만든 약을 단돈 동 1냥에 팔다니. 곧 온 성도가 유 단주님을 상찬할 겁니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다 제 이득을 보고 책정한 가격인데요."
성산의 효능은 분명 일문환보다 뛰어나고 약이 듣는 범위도 넓다. 유은하의 피를 뽑아 만든 것도 아니니, 생산 한계량이 일문환보다 훨씬 많기도 했다.
그러니 최대한 가격을 낮게 책정해 더 많이, 더 멀리 파는 게 이득이라 동 1냥으로 가격을 책정한 것일 뿐.
더군다나 성도 백성들의 사정은 금천현보다 훨씬 낫다. 동 1냥에 팔아도 살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라는 당화령의 보증도 있었다.
'일이 술술 풀리네.'
딱 하나 막힌 부분이 있다면 혼원심결과 구천신공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
그 이유는 간단했다.
'뭐 하나 놓치기 싫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야.'
유은하가 제대로 아는 무공이라고는 삼재심법과 삼재검법, 그리고 뇌명보가 전부다.
다른 몇 가지 무공은 외워 두긴 했어도 직접 시연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혼원심결과 구천신공은 비급을 읽는 순간 느낌이 왔다.
이것들이 상단을 지킬 수 있는 무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당웅건이나 당필웅은 몰라도, 고수인 옥호당주와 같은 실력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더 고민이었다.
'구천신공은 그 자전마공이라는 것과 같은 강기공이야. 위력 하나는 보장된 무공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반면, 혼원심결은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내면의 우주를 형상화하는 무공이라니.'
중원의 문명은 하늘 너머 우주라는 공간을 구체화하지 못했다. 천문을 관측하고 절기를 구체화하는 정도가 고작.
심지어 무공에서의 '우주'란 유은하가 아는 우주 공간과 조금 달랐다.
인체를 소우주라 칭하고 그 완결된 세계를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해 가는 것. 그게 무공에서 우주를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당 노야께서 비슷한 수준의 무공이라 했으니 혼원심결로도 강기를 만들 수는 있을 테지만….'
대놓고 위력적인 구천신공에 비해 조금 약할 것 같다는 게 유은하의 감상이었다.
그러면 구천신공을 고르면 되지 왜 혼원심결을 두고 고민하고 있느냐면, 혼원심결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낸 곳이 우주라서 그런 건가?'
유은하의 유년 시절 기억은 전부 조작된 것. 실제로 그는 우주의 궤도 의료기지에서 탄생한 실험체였다.
그렇기에 혼원심결에 끌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슬슬 정해야 하는데….'
"유 단주님?"
그렇게 유은하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당길수가 유은하를 불렀다.
"다 왔습니다."
유은하가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그는 성도 중앙 저잣거리의 커다란 점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 다른 멀끔한 점포보다 한층 더 깨끗하고 커다란 건물. 문 앞에는 당문을 뜻하는 당(唐)과 은하상단을 뜻하는 은하(銀河)라는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곳이 바로 유은하가 당문의 지원을 받아 장사를 시작하게 될 장소였다.
뒤늦게 정신 차린 유은하가 내부를 둘러봤지만,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당문의 하인들은 이미 물건 진열을 마친 채 유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하죠."
유은하의 말에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점포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가장 목청 좋은 하인이 저잣거리를 향해 외쳤다.
"당가가 보증한 은하상단의 명약! 성산 판매를 개시합니다!"
37화. 성산
하인의 외침에 흘끔흘끔 눈치를 보던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차례를 지키시오!"
"약은 오늘부터 꾸준히 판매될 거요!"
"물량은 넉넉하니 급할 것 없소!"
당문 무인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몰려든 이들 사이에 질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리. 약이 동 1냥밖에 안 하는 게 사실입니까?"
"한 첩에 1냥이오. 그리고 이곳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은하상단의 단주, 유은하 공자이시오."
당가의 무인이 유은하를 가리켰다. 초 의원의 약방에서보다 열 배는 많이 몰려든 사람들의 기세에 잠시 당황했던 유은하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은하상단의 주인, 유은하다."
오연하지만 가볍지 않은 태도에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이 유은하에게 향했다. 그중에는 성도의 유력 가문과 촉왕부에서 나온 이도 있었다.
'일수천살이 데려온 소년.'
'소문에는 그에게 무공까지 배우고 있다던데.'
'외문제자? 아니면 데릴사위? 그런데 상단을 맡긴 이유는 뭐지?'
'당문에서 개발한 새로운 약을 이립도 안 된 공자에게 맡긴 이유는 뭘까?'
눈알이 굴러가고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는 소리가 유은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경쟁사 견학은 기본이지.'
물론 그 경쟁이라는 게 상단으로서의 경쟁이 아니라 무림, 혹은 관으로서의 것이긴 했지만.
유은하에게는 그것조차 기분 좋았다. 은하상단이 비상하면 할수록 저들의 시선은 자신에게 향할 것이기에.
'나, 관심받는 거 좋아했구나?'
로열패밀리였을 때의 버릇이 남은 걸까. 아니면 그냥 천성이 이런 걸까.
유은하는 약을 사 가는 이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과 말도 안 되게 싼 가격, 그리고 당문이라는 신뢰. 여러 요소가 맞물려 무려 십만 첩이나 되는 약이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던 그때.
"나리! 나리!"
두툼한 보자기를 안은 남자가 인파를 헤치며 애타게 유은하를 불렀다.
"질서를 지키시오!"
당가의 무사가 제지하려 했지만, 유은하가 막았다.
인간을 초월한 청력에 쇳소리 섞인 날카로운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근원은 남자가 안고 있는 보자기였다.
유은하가 손짓하자 인파가 순식간에 갈라졌다.
"돈이 없는 건 아닌 듯하고. 약이 급한 건가?"
"예. 예에. 나리. 아이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제발 이 어린것을 가엽게 여겨…."
남자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피곤과 슬픔에 찌든 모습은 그 누구라도 마음이 아려올 만큼 처절했다.
'…할아버지께 들은 대로라면, 그냥 상인은 절대 약을 내주지 않겠지.'
가엽다며 약을 내주었다가는 각자 사정을 들이밀며 약을 사 가려는 이들로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아무리 막아도 소란은 가라앉지 않을 테고, 무력을 동원하면 은하상단을 욕하는 자들만 늘어나겠지.
욕하는 이들 중에는 은하상단을 견제하려는 상인이나 의원도 있을 것이다.
상인의 악독함과 바닥에 처박힌 중원의 도덕. 그 둘은 흙탕물처럼 뒤섞인 탓에 누구 탓이라 할 수가 없다.
상단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줄을 서서 기다리라 말하는 게 옳다.
매정하다는 말이 나돌겠지만, 상인이란 원래 그런 존재. 중원에서는 그게 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은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할배랑 표정이 똑같아.'
탈영병에게 쫓겨 유씨 마을에 쳐들어왔던 청화네 마을 사람들. 그들을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본 유 노인의 표정과 남자의 표정이 비슷했다.
유은하가 생각에 잠기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유은하의 선택에 집중한 모두가 숨을 죽인 것이었다.
"...."
유은하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사정이 급한 듯한데, 양보해줄 사람 있습니까?"
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성산은 이번이 첫 판매임에도 이미 성도 저잣거리에 명성을 떨치는 약이 되어 있었으니까.
금천현에서 했던 것처럼, 유은하가 당문 사람들을 이용해 미리 당가타에 소문을 낸 결과였다.
심지어 가격도 불과 동 1냥. 당가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기꾼이라 욕했으리라.
그렇기에 이 자리에 나온 이들은 모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아프다든가. 자식이나 부모가 아프다든가. 혹은 친척이나 이웃이라도.
그도 아니라면 앞으로 경쟁자가 될 이의 물건을 살피고자 온 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양보는 어려웠다.
"나리…. 제발…!"
아무도 나서지 않자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품에 아이가 없었다면 한기가 올라오는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을 것이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고, 점포 앞에 늘어선 줄은 굽이치며 점포를 두어 바퀴나 휘감고 있었다.
절박한 남자의 시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애써 당당하려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흥미롭게 지켜보는 극히 일부의 시선.
그 시선을 느끼며 유은하는 자신 앞에 갈림길이 놓인 듯한 환상을 보았다.
'내가, 은하상단이 갈 길인가?'
철저히 기계적으로 나갈지. 인정을 베풀지.
어차피 사람 목숨 중하지 않은 건 크라운 행성이나 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택은 오로지 유은하의 마음이 가는 길에 달렸을 뿐이었다.
유은하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던 당길수에게 말했다.
"이 사람 끌어내."
"나리! 나리!"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도 질서는 지켜야지."
매정한 유은하의 말이 떨어지자, 당길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남자는 어떻게든 몸부림치려 했지만, 일류 무인인 당길수의 손에 제압당해 허무하게 끌려 인파 너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역시 상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금귀라는 이야기가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유은하가 말했다.
"지금부터 성산 가격은 은자 1냥이다."
"뭐, 뭡니까! 분명 동 1냥이라고…!"
사람들이 항의했지만, 유은하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은자 1냥에 살 사람은 다시 여기에 줄을 서시오."
그러자 유은하의 앞에 새로운 줄이 생겨났다. 대부분 번듯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사이 돌아온 당길수를 향해 유은하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저 사람들한테는 팔지 마. 나머지는 다시 질서를 지켜 줄을 서라 하고."
그렇게 말한 유은하가 돌아서자 순식간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잠시만! 이러는 게 어딨소!"
"그래! 은자 1냥에 살 사람만 줄을 서라고 해서 섰더니 안 팔겠다니!"
"당문을 등에 업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하지만 은자 1냥에 팔겠다고 했을 때보다 떠드는 이가 훨씬 적었다.
지금 불만을 가진 자는 오직 따로 줄을 선 자들뿐이었으니까.
"당장 은자 1냥이 있으면 용한 의원한테 가서 좋은 탕약이나 지어 먹어. 없는 사람들 약 뺏어 먹으려 하지 말고."
그 말에 점포 앞에 몰려들었던 이들의 눈꼬리가 휙 치솟았다.
저들은 양보해도 비싼 탕약을 지어 먹을 돈이 있는 이들. 그런데 고작 동 1냥짜리 약을 사겠다고 자식 살리겠다는 아비에게 양보조차 안 해?
모두의 마음에 깃들었던 부끄러움은 적의가 되어 밖으로 솟아났다.
나는 절박하니 괜찮아.
나는 가난하니 괜찮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그런데 저놈들은 아니잖아?
여기서 약을 못 사면 탕약 지어 먹으면 되는 놈들인데?
우리만큼이나 절박한 놈들도 아닌데, 그걸 양보 못 해?
정말 사람이 못돼먹었군!
유은하에게 향할 뻔했던 비난과 증오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새롭게 줄을 섰던 이들은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채고 얼굴을 가렸다.
중원 천지의 도덕이 요지경이라지만, 그렇기에 더 체면을 중시했다.
관료는 청렴해야 하고 부자는 베풀어야 하며 선비는 지조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자에게 공격당하고 물어뜯긴다.
민초의 시선? 그딴 건 알 바 아니다. 다만, 소문으로 말미암아 체면 상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
새롭게 줄을 섰던 이들은 성산을 구경도 못 하고 흩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점포로 들어간 유은하는.
"나, 나리…?"
품에 보자기를 안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다가가 보자기를 빼앗아 들었다.
남자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상황을 깨닫고는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제발…!"
"알았으니까 조용히."
유은하의 말에 남자가 흙 묻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덮는다.
'부자 손님 몇 잃는다고 타격 입지는 않아.'
어차피 성산의 매출 전략은 일문환과 마찬가지로 박리다매니까.
다만, 앞으로 은하상단이 취급하는 모든 품목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고급화 전략을 사용한 것도 나오겠지. 그때는 부자들에게 물건을 팔아야 한다.
'조금 전 사건 정도로 부자들이 거래를 꺼리진 않을 거야.'
하지만 부자들 사이에서 은하상단 이미지가 좋지 않아진 건 사실.
아이를 살려 이미지를 개선해야 한다. 부자들은 미담에 빠르게 반응하니까.
그렇게 자신의 선택에 이유를 가져다 붙인 유은하는 약 한 첩을 풀어 물에 가루를 풀었다.
그러고는 쇳소리 숨을 내쉬는 아이에게 먹이려는데.
"단주님. 잠시만."
당길수가 유은하를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 아이, 그냥 감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은하는 중원의 질병을 잘 모른다. 본초강목은 줄줄이 외우고 있으나 실제 진료 경험이 없는 탓이다.
반면, 당길수는 독공과 함께 의술도 익힌 이. 의원으로 활동하는 건 아니나 평범한 감기와 다른 질병을 구분할 정도는 된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당길수가 아이의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보자기를 걷고 상태를 살폈다.
"손과 발에 작은 물집이 잡혔고 입안이 헐었습니다. 폐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고."
당길수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남자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갔다.
"성산은 아이에게도 부작용이 없는 게 확실합니까?"
당길수의 말에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유은하가 만든 약은 크라운의 역사를 바꿨다는 말이 나오는 약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한때는 만병통치약과 버금가는 위치였을 정도로 성산은 안정성도 뛰어났다.
"네.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먹이는 게 낫겠군요. 열을 내려야 하니."
그제야 유은하는 아이에게 약을 푼 물을 먹일 수 있었다.
약을 갠 물이 아이의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유은하가 물었다.
"그런데 감기가 아니면 무슨 병이죠?"
"포열(疱熱)이라는 병입니다. 열이나 기침, 담 등은 감기와 비슷하지만, 작은 물집이 생기고 장기에 열이 오르는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입니까?"
"아이들이 주로 걸리는 병인데 치료가 쉽지는 않습니다. 튼튼한 아이들은 걸려도 가볍게 앓고 끝납니다만."
당길수의 시선이 깨끗한 보자기로 옮겨가는 아이에게 향한다. 유은하는 당길수의 눈빛에 숨은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튼튼하지 못한 아이들은 걸리면 아주 크게 앓는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강한 약을 쓸 수 없으니 치료는 더욱 어렵다.
"자연치유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까?"
"있긴 있습니다."
당길수가 아직도 바닥에 엎드린 남자를 흘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유은하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말했다.
"여러 탕약과 침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고수가 내공으로 원기를 북돋아 준다면…."
"준다면?"
"5할 확률로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노력을 들이고도 생존 확률은 반반이라니.
"그래도 높은 열이 가장 문제라고 알려져 있으니, 어쩌면 성산도 효과가 있을지 모릅니다."
당길수의 말에 남자의 표정에 안도와 환희가 깃든다.
"다만, 전염성이 있으니 다른 아이가 있다면 멀리 따로 두시고 어른도 주의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아, 돈! 돈을…."
"잠시만. 돈은 조금 있다가 받을 테니 진정하게."
유은하는 남자를 제지하고는 여전히 괴로운 듯 숨을 몰아쉬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이제 겨우 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은 작은 아이.
성도에 사는데도 집이 넉넉하진 않았는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건지, 유난히 몸집이 작았다.
유은하가 아이의 몸에 난 수포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전염성이 있다고 했지?'
<병원성 박테리아 감지>
수포에서 흐르는 진물에 손을 대자 아스트랄 유니온이 즉각 반응한다.
'등록된 데이터 중 효과 있는 약성을 추려.'
유은하의 명령에 아스트랄 유니온이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시뮬레이션 진행>
<예상 소요 시간 15분>
그간 당가에서 약재를 직접 먹어가며 등록한 데이터는 약 300여 종.
아스트랄 유니온의 기능이 10%만 멀쩡했어도 0.1초 만에 시뮬레이션을 끝냈을 텐데.
유은하는 그런 아쉬움을 느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아스트랄 유니온을 복제 이식하면 완치할 수 있나?'
<아스트랄 유니온 복구율이 심각하게 낮습니다>
<이식 성공률 0.0007%>
<실패 시 99% 확률로 이식된 아스트랄 유니온이 정지합니다>
<실패 시 1% 확률로 아스트랄 유니온이 폭주, 전체 자가포식을 시작하여 숙주가 사망합니다>
세포융합형 인공지능인 아스트랄 유니온은 세포를 하나하나 컨트롤할 수 있다. 암 같은 건 물론 외부 바이러스조차 손쉽게 차단, 박멸이 가능하다. 제대로 기능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나리?"
남자는 유은하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자,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은하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고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병과 약에 관심이 많아."
"예에."
"가장 흔한 병이 감기니 성산을 만든 건데, 포열에도 효과가 있는지 지켜봐야겠어."
유은하가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아, 안 됩니다!"
하지만 오해한 남자는 기겁하며 고개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아들만 둘에 겨우 얻은 딸입니다! 부디 이 천한 것을 가엽게 여겨 혈육의 연을 끊는 것만은…!"
유은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당길수가 나섰다.
"단주님. 돈으로 아이를 사시려는 겁니까?"
38화. 함정
"그게 무슨 소립니까?"
유은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있는 사람들 다 데려오고 며칠 여기서 묵으라 하려던 겁니다. 포열은 전염성이 있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유은하의 대답에 당길수가 아이의 아비에게 말했다.
"그러시단다. 그러니 어서 가서 가족들을 데려오너라. 혹시 포열이 옮은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
오해가 풀리자 남자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유은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우리가 잘 살피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당길수의 말을 들은 남자는 가족을 데리러 부리나케 달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사이 아이는 서서히 열이 내리며 숨이 차분해져 갔다. 당길수가 맥을 잡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도 한결 나아졌습니다. 미음이라도 먹여야겠군요."
당길수는 미음을 구하기 위해 점포에서 일하는 하인을 호출했다.
때마침 아스트랄 유니온의 분석 결과도 나왔다.
<병명 '포열'에 효과를 보이는 항생물질 리스트 업로드>
다행히도 성산에 포함된 물질 중 포열에 효과를 보이는 게 있었다.
'이 정도면 전용 약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겠네.'
전용 약을 만들면 포열 치료는 한결 쉬워지겠지만, 평범한 백성들이 여러 약을 갖춰 놓고 골라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성산 생산에 집중하며 포열에도 효과가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게 나았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가라앉고, 유은하는 끝없이 팔려나가는 성산과 약첩을 나르는 하인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당길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왜 그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당길수도 의식하고 유은하를 빤히 바라본 건 아니었다. 그저 유은하라는 인물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간 것뿐이었다.
당길수는 봤다. 유은하가 자신에게 남자를 끌어내라 했을 때 은밀히 보냈던 수신호를.
사전에 약속된 신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와 아이를 조용히 안으로 들여보내라는 뜻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유은하는 아이에게 약을 주었다. 그리고 포열에 전염성이 있다는 말을 듣자 남자의 가족까지 불렀다.
"혹시, 제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은하의 물음에 당길수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세상은 상인이 모두 악독하다 떠들지만, 세상에 어찌 악한 자들뿐이겠습니까?"
당연히 올바름을 추구하는 상인도 있다.
"오히려 단주님이 걸어갈 길을 미리 본 듯해 기뻤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하지만 이번 일이 소문 난다면 분명 귀찮아질 겁니다."
"그 정도야 별거 아닙니다. 이 성도에서 당문에 수작질을 부릴 파렴치한 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입니다만. 아."
"왜 그러십니까?"
"혹시 감기나 포열 말고도 다양한 병에 걸린 환자를 볼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 포열에 걸린 아이의 진물을 통해 약효가 있는 물질을 선별했듯, 다른 병들 역시 데이터를 모을 생각이었다.
"그런 거라면 당문에서 운영하는 의원으로 가시면 됩니다만, 의원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당길수는 옥호당주에게서 유은하가 태상가주에게 무공을 배우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사람이 왜 무공이 아니라 의학에 관심을 갖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당문의 서고에 있는 의학서를 살펴봐도 될 텐데 말이다.
유은하의 계획을 모르는 당길수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약을 만들려면 먼저 병을 알아야죠. 성산 하나로 백성들의 모든 병을 보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하잖습니까."
"공자께서는 그야말로 큰 뜻을 품은 대인이시군요."
"그냥 좋은 물건을 많이 팔려는 상인일 뿐입니다."
유은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미 당길수는 감동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당길수 덕분에 유은하는 인근 의원에 방문해 환자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태상가주의 거처에 마련된 시설에서는 매일 새로운 생산라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당문의 의원들과 독공을 익힌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간혹 깨달음을 얻는 이까지 나왔지만.
"드나들기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놈은 대체 언제 오는 게냐?"
당웅건은 하염없이 유은하를 기다릴 뿐이었다.
"설마… 무공에 관심이 없나?"
***
도지휘첨사 정주호는 실로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가 포열에 걸렸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돌아온 것이었다.
아직 네 살에 불과한 데다가 몸이 약하기도 한 터라 돌아오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당문의 지원을 받는 은하상단이라는 곳의 약을 쓰자 아이의 병이 순식간에 나았다고 한다.
'성산(星散)이라.'
정주호는 약의 이름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약이 고작 동 1냥이라기에 처음에는 돌팔이 의원이나 상인이 사기를 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무려 당문이 보증한 상단이다. 그 이름이 약이나 독에 얽히면 그 신뢰도는 두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약을 먹은 막내는 이미 건강을 되찾았다.
'이게 천운이라는 건가?'
정주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막내의 병으로 시름하던 부인에게 소작을 부치는 평민이 말했단다. 자기네도 막내가 포열에 시달려 죽기 직전이었는데, 은하상단의 단주가 준 성산을 먹고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정주호의 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직접 약을 사 돌아왔다. 성도의 의원들은 독한 약을 써야 한다 주장하는 이밖에 없었으니까.
포열이 심해지면 독한 약을 쓰고도 죽는 아이가 반이다. 살아난 반 중에서도 절반은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기도 한다. 혹은 천치가 되거나.
심한 화기가 머리로 치솟은 후유증이라는데, 어떤 부모가 그걸 두고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필 당문이라니.'
정주호는 입맛이 썼다. 전대 촉왕, 촉현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의 치세일 때는 당문과 도지휘사사가 충돌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촉왕부와 당문의 갈등 때문에 도지휘사사도 당문과 불편한 관계가 됐다.
'옛날 같았으면 탈영병 추적도 당문에 맡겨 진즉 해결했을 텐데.'
사천의 산을 앞마당처럼 뛰어다니는 당문의 무인들이라면 벌써 탈영병을 잡고도 남았음이라.
신생 상단을 지원해 불과 열흘 만에 도합 100만 첩이라는 어마어마한 약 판매량을 달성한 걸 보면 당가의 저력은 여전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은하상단은 백성들이 자주 걸리는 병에 잘 듣는 약을 차례로 내놓았다. 심지어 누구라도 구할 수 있는 염가인 탓에, 이제 성도 저잣거리에서 은하상단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쯧. 도대체 촉왕은 왜 당문과 척을 지고 자전마견 같은 놈을 끌어들여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건지.'
정주호의 입에서 연신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정주호가 간만의 휴식을 취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촉왕의 독촉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심하던 그때.
"나리. 왕 정천호(正千戶)가 찾아왔습니다."
"왕죽겸이?"
정주호는 즉시 들라 말한 뒤 주변 하인들을 물렸다. 왕죽겸에게 자전마견과 관련한 조사를 명했었기 때문이다.
"도지휘첨사를 뵙습니다."
부리부리한 인상의 왕죽겸이 들어서자 정주호가 서둘러 물었다.
"인사는 됐네. 뭔가 찾았나?"
"자전마견은 청성산 너머로 간 것 같습니다. 도강언과 소금현에서 목격담을 확보했습니다."
"청성산 너머? 탈영병들이 거기까지 갔다는 말이군."
"예. 청성파 때문에 인근에는 화전민이 많은데, 그걸 노린 듯합니다."
탈영병들 생각이야 뻔했다. 화전민 마을을 약탈해 식량과 쉼터를 확보하고 추적이 잠잠해질 때까지 웅크려 있을 요량이었겠지.
자전마견은 그런 탈영병들의 흔적을 쫓아 산으로 들어간 걸 테고.
"그런데 왜 자전마견 그놈은 소식이 없어?"
"자전마견을 봤다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때가 초겨울이었다고 하니,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역으로 당해 죽었거나, 도망쳤거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마인이 고작 탈영병들에게 당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냥 도주한 걸까? 하지만 왜? 촉왕부에서 약속한 보상도 못 받았는데?
'촉왕부의 보상보다 가치 있는 걸 찾았다면 말이 된다.'
만에 하나라도 자전마견이 금천현에 있던 황금과 염초를 도둑질해 간 범인이라면?
결국, 마인 따위를 쓴 촉왕의 잘못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면 촉왕은 인정하지 않겠지.
"쯧. 일단 산을 뒤지는 시늉이라도 해야겠군."
"병사들 불만이 말이 아닐 텐데요."
"화전민 놈들이라도 약탈하게 해주면 어느 정도는 사그라들겠지. 자네가 좀 더 고생해 주게. 여름에는 편의를 봐주겠네."
사천의 여름은 가히 찜통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화전민 마을 약탈로 재미 보면서 여름 훈련도 몇 번 빠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
"예. 날랜 놈들로만 추려서 재빨리 움직이겠습니다."
"자전마견 추적이 주 임무라는 것만 잊지 말게. 뭐든 좋으니 놈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져와야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왕죽겸이 고개를 숙이고는 정주호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왕죽겸과 함께 발 빠르고 체력 좋은 병사 삼백이 청성산 너머를 향해 떠났다.
그렇게 왕죽겸을 보낸 후, 정주호는 한동안 방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단 말이지."
어차피 도지휘사사와 촉왕부는 동맹이다. 그 동맹이 서로의 약점을 잡아 이루어진 관계라는 게 웃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명제국의 지방 군조직 중 가장 거대한 도지휘사사와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왕의 호칭과 권한을 인정받은 왕부. 이 둘이 뭉치면 중앙에서조차 바짝 긴장하고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두 집단이 뭉쳤음에도 당문과의 갈등에 고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을 꼽자면 민심일 것이다.
백성들은 당대 촉왕의 폭정에 신음하며 전대 촉왕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탓에 민심은 자연스레 당문으로 쏠렸다. 그들은 전대 촉왕과 많은 일을 함께했으며, 여전히 그 유지를 이어받았다고 떠들고 있으니까.
'아니. 그냥 입으로만 떠드는 게 아니지.'
당문은 병자들에게 염가에 약을 풀고 병사들을 대신해 산적과 위험한 맹수를 토벌하며 인근 마을에 경조사가 생기면 작게나마 돈을 모으거나 사람을 보내 돕는다.
그런 일들이 모여 백성들은 당문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고, 그건 고스란히 당문의 지배력이 되었다.
'이번 은하상단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동 1냥에 판매하는 기가 막히는 효과의 약들. 백성들은 그걸 당문이 이문을 남기지 않은 채 백성들을 위해 파는 약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것들을 빼 올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민심을 돌리는 것도 가능할 텐데.'
어차피 백성들은 개돼지다. 당장 눈앞에 먹을 것을 흔들면 꼬리를 흔드는 개돼지.
폭정이니 뭐니 해도 두어 해만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는 머저리들이니, 당장 기울어진 무게추만 맞추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왕죽겸이라면 자전마견과 염초의 정보를 물어올 테고, 그걸 이용해 당문을 궁지에 모는 건 손쉬운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은하상단의 단주라는 그 어린놈은 일수천살이 제자 삼으려 데려왔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어린놈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에게서 약의 비법을 빼 올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정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소문은 소문일 뿐. 은하상단을 엿보러 갔던 부하들이 말하길, 유은하에게서 딱히 무공을 익힌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더군다나 태상가주가 제자로 삼기 위해 데려왔다면 얌전히 당문에서 수련이나 하고 있어야지 않겠는가.
'그 좋은 약들을 당문의 이름이 아닌 은하상단 이름으로 파는 것도 이상해.'
당문의 이름으로 팔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은하상단과 공로를 나누지 않아도 될 것을, 구태여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만에 하나라도 그 약이 은하상단, 유 단주의 것이고 당문은 단순히 뒷배가 되어 그 이익을 공유하는 계약 관계라면….'
이쪽에도 그를 영입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 시도라도 해야 한다.
염초가 사라진 지금, 한시라도 급한 쪽은 당문이 아니라 촉왕부와 도지휘사사니까.
정주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밖에 호위를 선 무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첨사 나리."
"은하상단 점포로 갈 것이다. 그곳 단주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든든한 녀석들로 채비하거라."
정주호의 말을 알아들은 무사는 곧장 일류 이상의 무사들을 호출했다. 그 수가 서른이나 되었다.
그렇게 칼을 찬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가니, 저잣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혹여나 눈이 마주칠세라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이곳입니다."
정주호가 상단 앞에 서자, 안쪽에서 푸른 장포를 두른 무인들이 나왔다.
"공사다망하신 도지휘첨사 대인께서 이 누추한 곳에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유은하와 함께 점포에 나와 있던 옥호당 부당주 당길수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당길수가 당문에서도 알아주는 중책이지만, 무려 정3품인 도지휘첨사와 대거리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닐세. 내 개인적인 일로 은하상단 유 단주를 보러 왔을 뿐일세. 내 홀로 간다 했는데도 부하들이 워낙 극성이라서 말이야. 미안하네."
도지휘첨사쯤 되면 반말이 아니라 손짓으로 당길수를 부려도 할 말이 없는데, 정주호는 적당히 예의를 차렸다. 그 모습이 당길수를 오히려 불안하게 했다.
"유 단주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막내아들이 포열로 크게 고생했는데, 용한 의원들도 독한 약을 쓰는 게 아니라면 답이 없다고 하질 않는가 말이야. 그때 성산 소문을 듣고 약을 쓴 덕에 이제는 말끔히 나았네."
"참으로 다행입니다."
"고맙네. 그래서 내 감사 인사라도 해야지 싶어 찾아왔네.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는가."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예 자리를 비켜달라는 정주호의 말에 당길수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는 당문과 대립각을 세우는 촉왕부를 돕는 도지휘사 인물이다. 유은하를 그런 인물과 독대시키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
하지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상대를, 그것도 정3품이나 되는 관리를 문전박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디 공자께서 잘 대처하시길 바랄 수밖에 없나.'
당길수는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감사 인사하는데 어찌 아무 대접도 없이 하겠나. 오호루에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 그곳까지 내 함께 걸으며 이야기라도 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재고를 점검하던 유은하는 끌려 나오다시피 점포를 나와 정주호와 함께 오호루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39화. 함정
오호루는 성도에서도 손꼽히는 주루로 총 다섯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누각이었다.
1층부터 5층까지 각기 오호상장의 상징이 붙은 이름을 썼으며, 그중 가장 비싼 곳이 현재 정주호와 유은하가 있는 5층, 미염각(美髥閣)이었다.
내부는 비단과 금실로 꾸며졌고 가구도 어느 것 하나 황금 한 냥보다 싼 것이 없었다.
그런 휘황찬란한 방에 들어서며 정주호는 유은하를 곁눈질했다.
'…당황하질 않는군. 적어도 당문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건 사실이라는 건가.'
아마 유은하는 북경의 황궁에 가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궤도 의료기지에 살던 이가 지상 건물을 보고 놀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정주호는 내심 유은하의 위치를 상향 조정했다.
"앉게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내가 더 고맙지."
정주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으나 유은하는 그 미소를 믿지 않았다.
'오는 길에 한마디도 않더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단순히 아비로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온 건 절대 아닐 테다. 그건 당문과 촉왕부의 갈등에 관해 자세히 모르는 유은하조차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백성들을 위해 아주 싼 값에 약을 팔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내 비록 성의 내정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지는 않지만, 폐하의 은덕 아래 이 사천성의 군을 책임지는 지휘사 대인을 보좌하고 있으니 어찌 감사를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나 소인은 단지 제 이득을 위해 판 것일 뿐이니, 대인께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소인이라니, 그런 말 말게. 올겨울이 어찌나 혹독한지 단련한 병사 중에도 환자가 속출할 정도야. 그런데 자네의 약이 민초들의 큰 힘이 되고 있으니, 소인이 아니라 소협이라 불러 마땅할 걸세."
계속되는 금칠에 유은하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술상과 함께 주루의 지배인과 청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도지휘첨사 대인께서 왕림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 아이들은…."
"지배인. 환영해 주어서 고맙네만, 오늘은 여기 유 소협과 내 긴히 할 말이 있다네."
정주호가 지배인의 말을 자르자, 그는 곧 기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러고는 자신도 깊게 고개 숙인 후 자리를 피했다.
"이곳 지배인은 눈치가 아주 빨라. 그래서 나와 부하들은 이곳을 애용하지."
"그래 보입니다."
"일단 들게."
정주호가 직접 유은하의 잔을 채워주었다. 정주호가 미리 부하에게 말해 주문한 검남춘이 잔에 가득 채워졌다.
곧 도수 60도가 넘는 독주가 유은하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내 취향은 아니네.'
유은하는 단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실험체였으니까.
중원에 온 후로도 술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문에서 대접받은 음료도 향이 아주 깔끔한 차뿐이었고.
하지만 정주호는 술을 꽤 좋아하는지 연신 유은하에게 술을 권했다.
유은하는 따라주는 술을 계속 마시며 정주호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나를 취하게 하려는 건가?'
유은하가 세 잔을 마시면 정주호는 반 잔을 홀짝였다. 그러면서 계속 유은하의 눈을 관찰하는 게, 확실한 의도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유은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다량의 알코올 감지>
<흡수 지연 및 해독 프로세스 개시>
아스트랄 유니온이 알아서 취하는 걸 막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자도 취할 기미가 안 보이네. 저게 내공으로 취기를 억누른다는 건가?'
그렇게 정주호와 유은하가 말없이 술만 마시기를 한동안.
"크흠."
정주호가 먼저 헛기침을 하며 술병을 놓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듯하고 밤도 깊어 가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세."
"예. 대인.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그대의 의기와 상재를 높이 산다네. 그대가 좀 더 넓은 세상에서 큰 뜻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말에 유은하는 잠시 멈칫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문을 버리고 촉왕부에 붙으라는 말씀인지요."
"젊어서 그런지 직설적이군. 굳이 그렇게 흑백을 가를 필요가 있겠나? 자네는 자네 상단을 운영하는 거지. 단지 우리 또한 자네의 뒤를 봐주는 거고."
"...."
유은하는 잠시 생각하는 척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도지휘첨사라고 했나? 저자도 나와 당문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는 못할 거야.'
염초와 황금으로 시작된 관계를 알았다면 유은하를 데려온 곳은 오호루가 아니라 지하 뇌옥이었을 것이다.
'당 노야의 제자가 될 거라는 소문도 잠시 퍼졌을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 대놓고 접근했다는 건….'
그 소문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은하상단이라는 이름으로 약을 팔고 있어서 그런가 보네.'
외견은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겉만 보고 속사정을 알아내는 능력이 없으니까.
만약 유은하가 당문의 이름만을 걸고 장사를 시작했다면, 정주호는 유은하를 당문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유은하는 은하상단이라는 독립적인 단체를 경영하길 원했다. 당문에 종속되길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주호의 판단과 유사한 면이 있긴 했으나.
'이쪽이 생각보다 깊은 관계라는 걸 모르고 있어.'
생각을 마친 유은하가 잔을 내려놓았다.
"대인.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제 약에 자부심이 있고 제 상단을 아주 크게 키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해하네. 사내가 되어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지."
"그런 점에서 당문이 가장 좋은 뒷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촉왕부보다 당문이 현재 성도에서 더 잘 나가지 않느냐는 도발이 담긴 말.
하지만 정주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은 있군."
도지휘사와 촉왕부는 협력 관계이지만, 완전히 한 몸은 아니다. 유은하가 촉왕부를 당문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한들, 정주호는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주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문과 협력했던 전대 촉왕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개판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는 이였기에.
"설마 도지휘첨사 대인께서 제게 이런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이 어리석은 머리로는 어떤 이득이 있을지 감히 상상이 안 됩니다."
"나 역시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닐세. 확실히 약과 관련해서는 당문의 손을 잡는 게 이득이겠지."
정주호가 술로 입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보다 길게 본다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과연 당문이 자네의 약을 그냥 두고 보겠는가? 그들은 약과 독의 전문가라네. 어떻게든 자네의 약을 해체해 분석하고 더 나은 물건을 만들겠지."
"…그건 배신이 아닙니까?"
"이보게. 유 소협. 당문은 무림 문파라네. 강박적으로 더 높은 경지를 꿈꾸는 무인들이 모인 문파. 그들에게 계약은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해."
무림 문파 놈들에게는 신뢰가 없다고 이간질하는 정주호.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사파에게는 잘 들어맞는 말이었고, 가끔 거대한 이득 앞에서는 정파조차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있었으니까.
"반면, 촉왕부와 도지휘사는 황제 폐하의 은덕 아래 이 대명제국을 경영하는 거대한 기둥이라네. 우리에겐 형식과 신뢰가 아주 중요하지."
물론 이 또한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정확히는, 이득이 되는 신뢰만이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관직조차 뇌물로 사고파는 작태가 만연한 게 중원 천지라는 곳이라는 사실은 이제 유은하도 잘 안다.
"그뿐인가? 자네의 약은 우리 병사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될 걸세. 저잣거리 가게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물량을 우리는 소화할 수 있다네."
그 말에 유은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누가 봐도 거대한 이득에 군침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지금보다 적당히 이득을 붙여 납품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걸세. 자, 생각해 보게나."
정주호의 손가락이 상을 두드렸다.
"이 사천성 도지휘사 휘하 위소에 소속된 병사만 대략 8만이네. 내가 힘을 쓰면 그 많은 병사에게 돌아갈 약을 꾸준히 납품할 수 있어."
성도에 많은 백성이 산다지만 그들이 전부 은하상단의 점포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반면, 단번에 8만이나 되는 규모의 고객을 확보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닐세. 자네의 약이 오죽 대단한가? 소문을 들은 귀주, 감숙, 섬서, 청해 등등 주변에서 자네에게 약을 팔아달라 아우성을 치겠지. 자네가 원한다면 다른 성의 도지휘첨사와 자리를 마련해줄 수도 있고. 자네를 그냥 돕겠다는 것도 아니라네. 이건 내 아들을 살려준 것에 대한 보은이니, 부담 가질 것도 없지 않나."
정주호는 유은하에게 '내가 이렇게 너를 밀어줄 수 있다.'라는 것을 내세웠다.
'군납은 돈이 되지. 그건 확실해.'
정주호의 이야기를 들은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를 잡는다면 은하상단이 중원을 집어삼킬 날이 몇 년은 빨라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법보다 돈이, 돈보다 칼이 가까운 세계야.'
도지휘첨사 정주호에게서는 당필웅이 기세를 드러냈을 때 느꼈던 그 초월적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기세로 추측하건대 자전마견보다는 확실히 우위, 옥호당주 당충영보다는 조금 아랫줄에 놓인 듯했다.
당연히 저들은 유은하가 원하는 힘을 채워줄 수 없으리라.
'힘으로 날 겁박하면 몰라도.'
게다가 친근하게 이것저것 챙겨주던 당웅건을 떠올리니 그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무위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렇게 배신해서 중원을 집어삼킬 상단을 세운들 갤럭시 크라운의 유 회장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유은하는 유 회장과 같은 높이에 올라 그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만든 건지 알고 싶을 뿐, 그와 같은 인간이 될 생각은 없었다.
"대인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제가 가진 건 오로지 약을 만드는 비법뿐, 다른 모든 건 당문이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당문을 등지고 대인께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유은하의 말에 정주호는 그가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조만간 당문은 큰 화를 당하게 될 테니."
"...?"
"멸문까진 아니지만, 한동안 봉문해야 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걸세. 그러니 걱정 말고 그 비법을 넘기게나."
정주호의 눈빛에는 탐욕과 기대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촉왕부 인맥을 이용해 자네에게 번듯한 장원을 내어주겠네. 그곳에서 하인과 의원을 고용해 약을 만들게나."
"혹여나 당문의 무인들이 절 찾아온다면…."
"걱정 말래도. 당장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자네에게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을 걸세."
유은하는 저자가 대체 뭘 믿고 저러나 싶었다. 자신이 당장이라도 당문으로 달려가 오늘 일을 일러바친다면 당문도 미지의 위험에 대해 대비할 테니까.
'아니.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 건가?'
진정으로 유은하가 당문의 수뇌부와 긴밀한 관계라 여겼다면 이렇게 가볍게 배반을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유은하가 당문과 단순한 계약 관계라 여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지학이나 됐을까 싶은 소년이, 당씨도 아니면서 당가의 중핵과 긴밀한 관계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나마 태상가주의 제자가 될지 모른다는 소문도 지난 며칠 동안 유은하가 점포만 드나든 탓에 다들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해해 주면 나야 오히려 좋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대인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했네. 사내가 한번 일을 시작했으면 큰 뜻을 품고 나아가야지. 일이 잘 풀린다면 내 관직에도 추천해 줌세."
"영광입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는 신뢰는 있어야겠지."
정주호는 문밖에 대기하던 무사를 시켜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유은하와 계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장원이 준비되면 사람을 보내겠네. 그때 자네는 약의 비법을 내게 넘기는 걸세."
"비밀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렴. 관직에 오른 자가 어찌 장사를 할 수 있겠나. 그저 신뢰의 증거로 비법을 보관만 할 뿐일세. 생산과 판매는 오로지 자네의 권한이야."
정주호는 껄껄 웃으며 종이 하단에 수결했다. 유은하도 그 옆에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글을 매우 잘 쓰는군. 언제 한 번 우리 막내아들 공부를 봐 달라 맡기고 싶을 정도야."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아. 그러면 당문이 의심할 게 아닌가. 내 마음이 급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만, 오늘 만남을 두고도 뒷말이 나올 거야. 그러니 내가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는 자중하게. 알겠나?"
"예. 대인."
정주호는 유은하가 당웅건이나 당필웅에게 달려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만에 하나 유은하가 배신한다 해도 이미 계약서까지 적은 상황이니, 당문이 유은하를 곱게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 번 배신한 자에게 찍히는 낙인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더군다나 생각이 있는 자라면 당장은 당문이 성도의 민심을 견인하고 있더라도 체급으로 촉왕부와 도지휘사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체급 차이를 단번에 뒤집을 만한 사고가 터지지 않는다면야 말이다.
"살펴 가시게."
"예. 대인. 대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오호루를 나온 정주호는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도 거리의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허리를 숙인 채 그를 배웅한 유은하는 사방이 고요에 잠기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곧장 당문으로 돌아가.
"노야아아아아!"
곧장 태상가주전으로 향했다.
"이 밤중에 무슨 소란이냐 이 녀석아!"
"지금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유은하가 도지휘첨사와 있었던 일을 죄다 일러바치고 며칠 후.
"초 의원! 더 빨리 달려야 한다!"
"허억! 허억! 압니다! 안다고요!"
초 의원과 배호청이 하얀 입김을 토하며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초 의원의 손에는 유은하가 그려준 은하촌으로 향하는 지도가 꼭 쥐여 있었고.
"반드시 잡아야 한다!"
"살려만 두면 된다! 반항하면 팔이든 다리든 잘라버려라!"
저 아래쪽에서는 병사들이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40화.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