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습격
콰직! 으직!
유은하가 단숨에 뛰어들어 두 탈영병의 머리를 깨부쉈다.
화로의 숯불을 쬐며 멍하니 황금을 바라보던 놈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당했는지조차 모른 채 절명했다.
힘을 잃고 쓰러지는 시체를 옆으로 치우니, 말발굽 모양의 금덩이가 보였다.
10냥(약 375g)짜리 금원보 다섯 개.
은으로 따지면 무려 1,000냥, 쌀을 산다면 2,000석은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쌀 1석이란 성인 남성이 1년 동안 먹을 양이니.
장정 2,000명이 일 년을 먹을 쌀이 저 작은 상자 안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우."
그 가치를 아는 유은하도 순간 마음이 동했을 정도였다.
"그냥 이것만 들고 튀어도 될 것 같은데?"
청화가 부탁한 물건이나 약초들?
이 금덩이만 있으면 도시로 나가 싹 다 더 좋을 것들로 살 수 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유은하의 발걸음을 막았다.
'보통은 귀한 물건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아.'
죽어도 끌어안고 죽는 게 황금이다. 그건 크라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금을 다른 사람 손에 맡겨? 아무리 믿는 부하라도 말이 안 된다.
저들이 말한 '큰형님'이라는 자가 비밀리에 더 좋은 걸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말이다.
일부러 황금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은 이유도 간단했다.
'자신은 공정하다, 재물에 관심이 없다, 뭐 그런 인상을 심어주려 한 거겠지?'
부하가 황금을 들고 튈 수도 있겠지만, 단합을 위해 그 정도 리스크야 감수할 수 있었을 거다.
도망자 생활이라는 건 뭉치지 못하면 죽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유은하는 그렇게 순식간에 정답에 도달했다.
유은하는 자신이 이룬 것 하나 없이 갤럭시 크라운에서 무의미한 세월만 보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들려오는 정보 하나하나가 천금의 가치를 가진 것들뿐.
일상처럼 그런 정보를 접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의 크기가 점차 확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위험하다는 거네.'
적어도 큰형님이라는 자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을 것이다.
곁에 둔 부하들도 무리 중 뛰어난 놈들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는. 무슨 일이 있었으면 보고부터 하라니까."
밖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형님도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보나 마나 곰탱이 그 병신이 춥다고 불 피웠다가 다른 애들한테 얻어맞았을 게 뻔한데."
"나도 그럴 것 같긴 한데, 어쩌겠냐? 큰형님이 보고 오라잖아."
"에휴. 이런 보고는 구길이 놈이 눈치껏 잘했는데."
"그러게. 하필이면 돌에 머리가 깨져 죽을 게 뭐냐."
습격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듯,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살짝 기울어진 문 앞에 사람 그림자가 진 그 순간.
푸욱!
유은하가 내지른 창이 문과 함께 두 놈의 복부를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커헉!"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
머리를 내려쳐 즉사시킨 게 아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은하의 실수는 아니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집 크기를 생각하면 남은 적은 아무리 많아 봐야 여덟 미만.
그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저 멀리 우르르 튀어나오는 놈들의 수는 고작 다섯뿐이었다.
'청화 말대로 열다섯이 전부였나 보네.'
씨익 웃으며 창을 뽑고 달려 나가는 유은하.
습격자가 한 명이라는 걸 알아차린 놈들도 유은하를 향해 마주 달렸다. 그렇게 그들 사이의 거리가 5장까지 줄어든 그때.
후웅!
유은하가 한층 가속하며 날린 창이 선두에 선 적을 향해 날아갔다.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틀어박히는 창.
탈영병들은 적이 갑자기, 그것도 순간 인지를 뛰어넘을 정도로 가속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탓에 선두에 있는 놈이 가슴에 창을 달고 뒤로 끌려가듯이 날아갈 때에도 그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탈영병들에게 연이어 손도끼와 쇠낫이 날아들었다.
푹! 빠각! 콰직!
"컥!"
"아아아아악!"
머리에 도끼가 박힌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급하게 던지느라 머리가 아닌 늑골에 도끼가 틀어박힌 놈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쇠낫이 옆구리에 틀어박힌 놈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창으로 하나.
도끼로 둘.
그리고 쇠 낫으로 또 하나.
셋을 죽이고 하나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으니, 남은 건 한 명뿐.
유은하가 괜히 여섯이면 쉽다고 자신한 게 아니었다.
유은하의 초인적인 근력으로 던진 무기는 짐승조차 제대로 피하지 못했으니까.
"...."
남은 한 놈의 복장을 보아하니, 그가 큰형님인 듯했다.
그는 다른 놈들보다 훨씬 빛나고 고급스러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꽤 무거워 보이는데, 움직임은 다른 놈들과 다를 바 없어.'
무인의 구분법으로 분류하자면 이류 끝자락에서 간신히 일류에 발을 걸친 정도쯤 되는 걸까?
배호청보다는 약해 보였지만, 다른 병사들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특히 근력 하나는 배호청보다도 강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더 두껍고 묵직한 갑옷을 입은 채 긴 창을 들고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유은하가 놈을 살피는 동안, 놈 역시 유은하가 던진 쇠도끼와 낫의 파괴적인 힘에 놀란 듯 잔뜩 긴장한 채 유은하를 살폈다.
'외공 고수? 군에서 보낸 추적자인가!'
놈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군에서 보냈다면 필시 나를 생포하려 할 터! 과감하게 승부를 봐야 한다!'
자신은 살초를 쓸 수 있지만, 적은 그럴 수 없다고 착각하는 백호.
그러다가 삭풍이 몰아치며 눈발이 시야를 잠시 가린 그 순간.
탓!
놈은 삭풍에도 눈을 부릅뜬 채 창을 앞세워 유은하를 향해 돌진했다.
찌릿.
가슴께에 간질거리는 위기감이 깃들자 유은하는 그대로 땅을 굴렀다.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잘못 쟀다가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통이 꿰뚫릴 테니까.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감각과 속도 덕분에 유은하는 손쉽게 가속이 붙은 찌르기를 피할 수 있었다.
후웅!
유은하의 빠른 몸놀림에 놀란 듯 뒤늦게 창대가 회전하며 유은하를 후려치려 했지만.
텁.
어느새 다시 일어선 유은하는 손으로 창대를 휘어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
속수무책으로 딸려 오는 적.
설마 자신이 힘으로 밀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전투가 익숙한 듯 곧장 창을 놓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오히려 치고 나오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역시 백호가 될 실력이라며 감탄했을 테다.
하지만 유은하는 짐승의 움직임조차 눈으로 좇아 대처하는 인간. 그런 유은하에게 두꺼운 갑옷을 입은 적의 움직임은 훤히 보였고.
푸욱!
당기던 창대를 살짝 비틀어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훨씬 빠르게 적의 목을 찌를 수 있었다.
두꺼운 갑옷과 투구로 보호받지 못하는 작은 틈. 찰나의 순간에 그 틈에 정확한 일격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털썩.
창준(槍鐏, 창 뒷면에 달린 작은 창날)에 목이 꿰뚫린 놈은 검을 반도 뽑지 못한 채 쓰러졌다.
쓰러지는 놈의 눈에서는 '어째서?'라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유은하가 군에서 보낸 외공 고수라 생각한 것이었다.
"후우."
유은하가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새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하늘로 올라갔다.
"갑옷 때문에 둔한 게 아니었으면 힘 좀 써야 했겠어."
두꺼운 갑옷과 투구 그리고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외공은 그야말로 약자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무장이었다.
반면, 유은하는 이름 모를 백호보다 힘이 셌고 몸이 가벼웠으며 결정적으로.
<각성 물질 비활성화>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로 전환>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체내에 축적한 각성 물질을 활성화해 신체 능력과 집중력을 더 끌어 올린 상태였다.
"첫 사업을 제약으로 하길 잘했네."
놈이 배호청처럼 힘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날래고 기술이 뛰어난 무인이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없었으리라.
'생각할수록 무공을 배워야 할 이유는 늘어나는데… 내공이라는 게 도통 모이지가 않는단 말이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에 흩어진 시체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고는 전리품을 수확했다.
병사 열다섯 명이 입던 갑옷과 겨울옷, 무기가 생겼다. 그리고 무기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금덩이도 잘 챙겼다.
자잘한 공구와 동전, 약간의 육포도 챙겼다.
은자가 생긴 것도 좋았다. 아무래도 금으로 대뜸 거래하긴 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형님이라 불린 자의 품에서 특이한 것들을 발견했다.
작은 목함과 한 권의 책 그리고 손톱만 한 작은 자기 병이었다.
"?"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은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할배나 청화한테 물어봐야지."
두 사람도 모르면 금천현으로 내려가 초 의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다.
작별 인사를 하고 오긴 했지만, 또 찾아가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렇게 유은하는 쉬지도 않고 짐을 챙겼다.
집집마다 창고에 넣어 둔 말린 약초도 챙기고, 청화네 집에서 무두질에 사용하는 도구까지 챙기니 도무지 한 사람이 들 수 없을 정도로 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유은하에게는 힘을 조금 들이면 들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시체는 어떡하지?"
옛날에 강 실장과 봤던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테러 조직이 신원을 감추기 위해 ID 칩과 지문은 물론 홍채와 안면 피부까지 화학적으로 뭉개버렸다는 기사였다.
혹시 모를 추적자를 대비한다면 그처럼 얼굴을 완전히 갈아 놓고 땅에 묻어버리는 게 낫겠지. 아패는 가져가서 태우고.
하지만 아무리 유은하라도 시체 얼굴까지 훼손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가벼운 거지, 그걸 행하는 자신의 기분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으니까.
'이놈들이 여기서 버텼던 것도 가만히만 있으면 추적자가 못 찾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일 거야.'
추적자의 무서움을 자기가 어떻게 알겠나? 쫓기던 놈들이 더 잘 알겠지.
설령 추적자가 인근을 기웃거린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땅에 묻어두기만 하면 앞으로 내릴 눈이 흔적을 덮어줄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집요한 추적자가 땅에 묻힌 탈영병을 발견한다면?
그래 봤자 이미 떠나고 없을 자신까지 추적할 수는 없다.
'그럴 만한 기술력이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은하촌을 발견해봤자 모른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은하촌은 금천현에 속한 마을이니 이제는 당당해져도 된다.
유은하는 그렇게 확신하며 시체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전투 흔적을 대충 흩어 놓았다. 언뜻 보면 마을에서 도망친 이들의 흔적과 섞여 잘 알아볼 수 없게끔.
"으쌰."
뒤처리가 끝난 뒤, 유은하는 거대한 짐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유은하가 사라지고 얼마 후.
"여기서 연기가 났었는데?"
옥색 피풍의를 두른 여인, 당화령이 마을에 들어섰다.
유은하는 며칠이 지나 눈이 흔적을 덮어주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은하가 떠나고 얼마 안 지나 마을에 도착한 당화령은 어렵지 않게 땅이 뒤집힌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을 파 알몸으로 죽어 있는 탈영병들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어차피 죽여야 했던 자들이다. 문제는 회수해야 할 물건이 있었다는 것.
"금은? 영약은?"
비급과 작은 자기 병도 없었지만, 그것들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비급은 당가에서도 거의 익히지 않는 현천묵룡편법(俔天黙龍鞭法)의 비급.
그것도 사본에 불과하다.
작은 자기 병에 든 건 절정고수조차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절독이라 속인 흑초였다.
문제는 금과 영약이었다.
무려 50냥에 달하는 금원보와 당가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이에게만 주는 청옥단.
그것들을 회수하기 위해 직접 나온 것이건만.
"이씨! 이놈들은 대체 누구한테 당한 거야?"
당화령이 짜증 섞인 눈으로 동쪽을 바라봤다.
선명하고 깊게 찍힌 발자국이 동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이 찍힌 지 얼마 안 된 듯, 질척한 흙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 외에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렇다 할 흔적이 없었다.
"...."
혹시나 해서 당화령은 마을을 더 둘러봤지만, 몇몇 흙집에 핏자국이 진득하게 남아 있을 뿐,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흩어진 병사들을 외곽부터 암살했어. 그러다가 마을 중앙에서 여럿과 싸웠고. 흔적이 많이 남지 않을 걸로 봐서는 일방적인 전투였을 거야.'
암살 솜씨는 전문가의 그것이 아니다. 도끼나 그에 준하는 묵직한 무기로 단숨에 적을 쪼갠 듯, 주변으로 피가 많이 튀었다.
은자가 든 전낭이나 금원보, 비급이 사라진 것도 이해가 간다. 그것들은 충분히 챙길 가치가 있는 전리품이니까.
하지만 탈영병의 시체를 전부 벗겨 전리품을 수확한 건 어째서일까?
신분을 확인할 요량이었다면 아패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게다가 일류 무인이라면 병사들의 갑옷은 필요가 없다. 무공을 익힌 자들은 보통 날랜 몸놀림을 중시하니까.
무기는 더더욱 필요가 없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손에 익은 애병을 버리고 다른 무기를 주워 쓸 무인이 얼마나 될까?
옷가지도 그렇다. 굳이 가져가 봐야 짐만 늘어날 것을.
이 첩첩산중에서는 체력이 중요하니, 구태여 가져갈 정도로 비싼 옷도 아니었을 테다.
"알 수가 없네."
상대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의도를 읽을 수가 없으니 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특정할 수가 없고, 따라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구덩이로 돌아와서 시체를 살폈지만, 더욱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시체에 난 상처가 너무 투박했으니까. 마치 힘만으로 상대한 것처럼 말이다.
'일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정도 힘을 내려면 일류 수준의 내공이 필요할 텐데? 그게 아니라면 외공의 고수라거나.'
하지만 그런 사람이 남긴 흔적이 이렇게 투박하다는 게 말이 되나?
'그냥 산적인가?'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어차피 탈영병은 죽었으니 돌아가도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사천당문의 중대사가 걸린 일이었기에 당화령은 미지의 인물을 추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자가 이곳을 뜬 건 1각도 안 되어 보이니, 서둘러 뒤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21화. 습격
사천의 산은 중원이 찬양하는 오악에 들지 못한다.
험하지 않아서 오악에 못 드는 것인가?
오히려 반대다.
사람이 적당히 살고 유람이라도 다닐 수 있어야 보고 감탄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아주 사람이 지나다니지 말라고 절벽과 계곡으로 병풍을 쳐 놓은 곳이 사천의 산이다.
여름에는 덥고 습해 찌는 듯한 날이 이어지며, 겨울에도 특유의 습윤한 기운이 한기를 뼛속까지 전달한다.
그뿐인가? 영험한 약초로 유명한 사천이지만, 그만큼이나 독초와 독물도 많고 많다.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사람보다 독물에 찔려 죽은 사람이 훨씬 많을 정도.
그러니 사천의 산에서 산다는 건 반쯤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사천의 산에 사는 이들이 유독 우악스러운 건 땅과 하늘과 기운이 죄다 인간에게 불친절한 탓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헉. 허억. 이 미친. 미친놈은 대체 뭐야?"
당화령은 깊게 찍힌 발자국을 보며 자신이 사람을 쫓아가는 건지 짐승을 쫓아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전투의 흔적을 보건대 분명 고수는 아니었어.'
초식의 형(形)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가 고수는 무슨 고수?
탈영병들의 시체에 난 상처는 깊이가 제각각이고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얕잡아 볼 정도도 아니긴 했지.'
형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삼류무인 하나가 탈영병 열다섯을 사냥했다? 그것도 말이 되질 않는다.
한 가지 가능성은, 기술 따위는 필요 없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때려 눕혔다는 것.
사천성보다도 훨씬 서쪽, 서장 끝자락에 존재한다는 설인(雪人)이라도 되는 걸까?
당화령이 그렇게 생각하며 높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봤다.
7척(2.1m)은 되어 보이는 높이에 나뭇가지가 꺾인 흔적.
생각해 보건대 상대는 몸집이 정말 어마어마한 자가 분명했다.
물론 이는 당화령의 착각이었다.
높은 곳의 나뭇가지가 꺾인 이유는 그저 유은하가 등에 짊어진 산더미처럼 솟은 봇짐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당화령은 점차 자신만의 추측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심지어 마을에 남은 흔적은 마치 탈영병들을 사냥한 듯한 흔적이었지. 암살이 아니라 사냥과 비슷했어.'
거기에 더해 탈영병들의 옷을 벗기고 소지품을 약탈하기까지.
어마어마한 힘과 체력에 영악한 지능까지 갖췄다는 뜻이다.
다시 고개를 내려 땅을 훑으니, 깊게 파인 발자국이 보였다.
테두리에 살짝 녹았던 눈은 어느새 꽝꽝 얼어붙어 선명한 발자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이곳을 지난 지 시간이 꽤 흘렀다는 뜻이었다. 추적을 시작했을 때보다 거리가 더욱 벌어졌다는 뜻이기도 했고.
"씨이…. 이대로 쫓아가는 게 맞나?"
입에서 단내가 피어오르니, 슬슬 후회되기 시작한 당화령이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달성했다.
직접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탈영병들의 입을 막긴 막았으니까. 죽음으로.
촉왕부 병사들이 추위로 미적거리며 탈영병을 찾아 나서지 않을 때 재빨리 나선 게 주효했다.
이제 그 탈영병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화약을 몰래 빼돌려 팔았는지는 영원토록 비밀에 묻힐 것이다.
지금 당화령이 유은하의 뒤를 쫓는 이유는 순전히 금원보 때문이었다.
현천묵룡편법은 당가에서도 거의 익히는 자가 없는 무공의 사본.
절독이라 속인 작은 도자기 병은 맹물.
영약도 귀하긴 하지만 당문의 무인에게 가끔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는 꾸준히 생산된다.
하지만 무려 50냥이나 되는 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촉왕부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어. 앞으로 2, 3년은 괜찮겠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서 나쁠 건 없지.'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은 서로 갈 길 가자는 무시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다.
서로 선을 넘지 않으면서 적당히 이익과 체면을 세워주자는 협약에 가깝다.
관(官)에 있어 무림이란 세상의 많고 많은 백성을 대신 적당히 다스리기도 하고 수를 조절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안 그래도 오랑캐들 때문에 여기저기 돈과 사람이 줄줄 새 나가는데, 국내라도 하청을 좀 돌려야지.
심지어 적당히 존중해 주면 저들끼리 정파니 사파니 아웅다웅하며 세력을 조절한다.
반대로, 무림도 관(官)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간다.
사람 사는 게 그냥 땅 위에 발 딛고 선다고 끝이 아니다. 쌀이며 소금이며 철이며 필요한 게 끝도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국가 주도로 대량생산되고 그 기술이 차츰 민간에 이양된다.
그걸 무림 문파나 세가가 처음부터 주도한다?
제자들은 무공 이전에 글과 행정과 기술을 익혀야 할 거다.
그럼 그게 무림인인가?
그냥 관료지.
무슨무슨 문(門) 대신 무슨무슨 국(國)을 써도 될 거다.
그런 면에서 당가가 직면한 상황은 명백히 이상했다.
관에서 무림을, 그것도 사천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당가를 핍박하다니?
관무불가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다.
당연히 이유가 있긴 할 터.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당화령도 몰랐다.
세가의 어르신들에게 여쭈어도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괜찮다는 말만 돌아올 뿐.
하지만 한 명의 무인으로서 가문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은 분명했다.
"칫."
결국 추적을 이어가기로 한 당화령.
하지만 상대가 심상치 않은 자임을 알았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당화령은 피풍의 아래에 입은 경장을 점검했다.
독단과 암기 그리고 요상약.
소지품을 확인한 당화령은 속도를 조금 늦추어 유은하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발자국을 쿵쿵 찍어대고 있으니, 추적은 쉽다.
그렇기에 당화령은 체력과 내력을 아끼며 상대의 정체부터 살필 요량이었다.
그렇게 당화령이 다시 출발한 후.
"쯧.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유은하와 당화령이 차례로 지나간 그 자리에 험악한 인상의 중년인이 등장했다.
"왕부라는 놈들이 탈영병도 못 잡아서 이 자전마검(紫電魔劍)을 부려 먹어?"
자칭 자전마검. 중원에서는 자전마견(紫電魔犬)으로 알려진 마인(魔人) 종칠각이었다.
"영약만 아니었으면 이딴 의뢰는 받지도 않는 건데."
종칠각의 투덜거림과 별개로, 촉왕부 역시 사파의 무인도 아닌 마인에게 의뢰를 넣기는 싫었다.
하지만 촉왕부의 절정과 초절정 전력은 전부 당문과의 갈등에 투입된 상황.
촉왕과 요인을 호위하거나, 촉왕부의 핵심 시설을 지키느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군사를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종칠각은 고개를 끄덕일 테다.
촉왕부가 당문보다 앞서는 게 병력의 규모였으니.
하지만 겨울에 군사를 움직이는 건 엄청난 소모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 민심도 곤두박질친다.
안 그래도 민심이 당문에 쏠리는 상황에서 촉왕부가 쉬이 군을 동원할 수는 없는 일.
더군다나 합당한 명분마저 '아직'은 없는 상황이니, 촉왕부로서는 때를 기다릴 수밖에.
그런 연유로 촉왕부는 종칠각이라는 마인에게까지 의뢰를 넣게 된 것이었다.
"쯧."
잠시 숨을 고르던 종칠각은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두드렸다.
있는 대로 영약을 주워 먹어 절정에 오르긴 했지만, 기혈이 뒤틀리고 말았다.
이대로 상태가 심각해지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터.
하루라도 빨리 내상을 다스리는 데 탁월한 영약을 섭취해야만 했다.
심마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신호인지, 그의 머릿속에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신교(神敎)에서 살아남을 재목이 아니다.'
'추하게 도망쳐서 죽은 듯 살아라.'
'벌레처럼 기어도 이승이 낫다.'
'자전마공을 퍼뜨리지만 않는다면 신교의 추적자와 마주칠 일은 없을 거다.'
'없는 듯 살아라. 너한테는 그게 어울린다.'
한심한 것을 보듯 내려다보는 그 눈빛.
가슴께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야! 이제 나는 이류 언저리에서 추방될 때의 내가 아니다! 절정에 이른 마인이란 말이다!'
이립이 지나 겨우 일류가 되었고, 또 불혹이 다 되어서야 편법으로 절정에 올랐지만.
어쨌든 절정에 오르긴 했다.
내상만 치료한 뒤 곧바로 신교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은 벌레가 아니라는 걸 그분에게 인정받으리라.
종칠각은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흔적을 뒤쫓았다.
어쨌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왕부의 의뢰를 끝마쳐야 하니까.
'어떤 놈이 탈영병을 다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흔적은 형편없었다.'
함께하던 동료인지, 그냥 산에 사는 짐승 같은 놈인지는 모른다.
탈영병이 가져갔다던 화약의 소재를 알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러니 일단 만나야지.
만나서 손가락 몇 개 자르면 아는 건 전부 나불댈 것이다.
화약에 대해 알면 왕부로 데려가면 되고, 모르면 그냥 죽이면 된다.
그 이후의 일은 알 바 아니다.
약속된 보수만 받으면 되니까.
그렇게 자전마견 또한 흔적을 뒤쫓아 쭉쭉 산을 타고 나아갔다.
***
"할배! 나 왔어!"
싱글벙글 험한 사천 산을 내달려 반나절 만에 집에 도달한 유은하.
나름 신경을 쓴다며 산봉우리를 너덧 개나 훌쩍 넘으며 빙 돌아왔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유은하의 외침을 듣고 울타리 밖으로 마중을 나온 유 노인과 청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여?"
"오라버니?"
청화가 생각한 건 기껏해야 큰 봇짐 정도나 들고 오는 유은하였다.
유 노인은 평소에 유은하의 힘을 봤으니 제 몸보다 조금 큰 짐이나 들고 오겠거니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는 건.
"허허. 미친놈이 탑을 들고 오네. 허허."
"오라버니! 허리 나가요! 빨리 내려놔요! 세상에! 뭘 그렇게 많이 가져오신 거예요?"
7장 높이로 솟은 엄청난 높이의 봇짐이었다.
기겁하는 청화의 손이 허공을 떠돈다.
저 짐을 어떻게든 받아줘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받을지 감이 안 잡힌다는 생각이 온몸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런 청화를 보며 웃은 유은하는 단숨에 짐을 내렸다.
"으쌰."
쿵!
발밑의 떨림만 봐도 유은하의 짐이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할배. 내가 거기서 뭘 가져왔는지 알아?"
유은하가 자랑하듯 으스대며 두꺼운 옷들을 꺼냈다.
두꺼운 면 옷 안쪽에 여러 얇은 옷감을 채워 넣은 두툼한 겨울옷이 열다섯 벌.
피가 많이 묻어 당장 사용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열 벌은 당장 사용해도 문제가 없어 보일 정도로 깔끔했다.
바닥에 가죽을 덧대고 위에는 천을 말아 보온성을 높인 신발도 있었다.
"아니, 이게 다…."
유 노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유은하가 펼쳐 놓은 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음으로는 청화가 부탁한 무두질 재료들이 나왔다.
나무껍질과 나무로 만든 도구들이었다.
"솥은 너무 커서 다음에 가져와야겠더라."
"천천히 다녀오셔도 돼요. 무두질할 장소를 따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나무껍질 등을 끓일 때 나는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 그리고 이거."
유은하가 청화에게 육포를 넘겼다.
"가지고 있다가 배고플 때 조금씩 꺼내 먹어."
"이, 이 귀한 걸…."
산속에서도 육포는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자주 만든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저장만을 위한 것이기에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아무런 맛도 없다.
하지만 탈영병들이 가지고 있던 육포는 제대로 양념을 한 고급품이었다.
큰 도시에서 사 왔는지, 가끔 금천현에서 사 오는 것과는 맛이 또 달랐다.
"오라버니 드세요."
"에이 됐어."
궤도 의료기지에서조차 천상의 진미만을 먹고 살아오던 유은하였다.
그러다가 중원 산속의 음식을 맛보니, 이제 뭘 먹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다.
'맛없다'가 아니라, '얘는 이런 맛이네'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 이건 할배 꺼."
유은하는 청화에게 준 것보다 곱절은 두둑한 주머니를 넘겼다.
"이놈아. 이것들이 대체 어디서 난 거냐?"
산속에 사는 이들의 살림이라고 해 봐야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다른 누군가에게서 얻은 게 분명하다.
유 노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묻던 그때.
쉬지 않고 짐을 풀던 유은하의 손에 모양이 잘 잡힌 검이 들려 나왔다.
"허억!"
유 노인은 그것을 보고는 기겁했다.
그리고 그제야 유은하의 몸에도 못 보던 도끼며 단검이며 하는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 뒤로도 유은하는 갑옷, 투구, 검 등등을 가득 꺼내 놓았다.
유 노인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지만, 유은하는 그것도 모르고 짐을 풀기 바빴다.
"이놈아."
유 노인이 심상찮은 목소리로 유은하를 부르자, 유은하는 그제야 짐을 푸는 걸 멈추고 돌아봤다.
"왜?"
"대체 거기 몇 명이나 있었던 게야?"
이쯤 되니 유 노인도 이것들이 전부 탈영병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청화 말대로 딱 열다섯이더라고."
"그 많은 걸 너 혼자서 상대했단 말이냐?"
"할배. 나 봐 봐."
걱정이 뚝뚝 묻어 나는 유 노인의 말에 유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상처 하나 없지?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
"이놈아. 대가리만 터져도 뒈지는 게 사람이다!"
그걸 왜 모를까. 대가리를 터뜨려 탈영병을 죽인 게 유은하인데.
그래도 유 노인의 걱정에 유은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옛날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도 같았다.
"에이. 괜찮다니까. 짐승을 사냥하는 것처럼 한 놈씩 덮쳤어. 놈들은 뭐에 죽었는지도 모를걸?"
"하아. 썩을.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질 않는구나.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유 노인은 화가 잔뜩 난 것처럼 소리쳤지만, 그래도 내심 안도했다.
지난번 유은하가 철죽파 왈패들을 상대할 때처럼 정면에서 들이받은 게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짐승을 사냥하는 건 산사람들의 특기이자 일상이기도 했고.
그렇게 유 노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찰나.
"아. 그런데 그놈들이 묘한 소리를 했어. 화약을 건드려서 도망쳤다나? 화약 넘기고 이런 걸 받은 모양이야."
유은하가 그런 말과 함께 목함과 비급을 꺼냈다.
"할배. 이것 봐라. 금덩이다? 이렇게 큰 금덩이 처음 보지?"
유은하가 내민 목함에 든 금원보를 본 유 노인이 눈을 까뒤집었다.
"끄르륵…."
"어어? 할배! 정신 차려!"
"이, 이 망할 놈의 새끼! 염라께서 우리 마을을 통째로 들어 바치라고 시키셨더냐! 아이고!"
22화. 손님
"이! 이 망할 놈의 새끼!"
유 노인의 지팡이가 유은하를 마구 때렸다.
평소에는 때리는 시늉만 할 때도 많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듯 실린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할배! 아파! 아프다고!"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다 큰 사내놈이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유은하도 화약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안다.
그 폭발력에 쇳조각이 섞이면 아무리 신체 개조를 한 자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또한, 화약이라는 게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냉병기가 가장 흔한 이 중원에서 화약을 사용한 무기 정도면 비대칭 전력이라 할 수 있겠지.
"괜찮아. 한 놈도 도망 못 쳤고, 시체도 제대로 처리했어."
하지만 유은하가 생각하는 무게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유 노인과 청화에게 화약이란 귀신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게 어디 보통 물건인 줄 아느냐? 역모로 엮일 수 있단 말이야!"
"역모는 관직을 가진 이조차 구족을 멸하는 벌을 받게 돼요!"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유 노인과 청화.
유은하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무려 반 시진이나 안전하다는 사실을 역설해야 했다.
추적자는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눈이 내리면 흔적이 죄다 지워질 거라는 말에 유 노인과 청화는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그래도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검과 창은 어찌할 거냐?"
"어디 대장간에서 샀다고 하면 안 되나?"
유은하의 말에 유 노인도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유은하가 가져온 검은 딱 봐도 동네 대장간에서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제법 큰 현에서도 이름난 대장간이나 부 정도는 돼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수실과 장식은 다 떼고 갈아버려라. 그러면 어디서 장물을 구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
고민을 거듭한 유 노인의 지시에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서 검을 손봤다.
그렇게 한창 뚝딱거리고 있을 때.
"오라버니. 황금이랑 비급은 어찌하실 생각이신가요?"
옆에서 유은하를 돕던 청화가 물었다.
"황금? 비급은 모르겠는데, 황금이 문제가 되나?"
"당연하죠. 이걸 도대체 어디서 구했다고 해요?"
청화의 말에 유은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금천현에서 약을 팔아 큰돈을 번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도 금원보를 받진 않았다.
금원보는 말 그대로 거액의 뇌물이나 귀물 등을 거래할 때나 등장하는 것.
누군가가 이 금원보의 출처를 추궁한다면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건 됐다."
하지만 유 노인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산삼이라도 캤다고 하면 될 게다."
"산삼?"
"그래.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산삼이 얼마나 비싼데."
아주 오래 묵은 산삼은 영약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무인에게는 금덩이보다도 귀할 수밖에.
"아니면 산삼을 캐서 유은하 네가 약을 만들어 팔았다고 해도 되고."
"하긴."
누군가 금원보에 대해 캐물어도 유은하가 일문환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 정도로 실력 있는 의원이 산삼으로 약을 만들어 팔았다면 금원보를 받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럼 남은 문제는."
검과 창에 달린 장식을 모두 처리한 유은하의 시선이 남은 짐으로 향했다.
현천묵룡편법이라 적힌 비급 하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작은 자기병 하나. 그리고 또 효과를 알 수 없는 둥근 단환 하나까지.
"일단 비급은 외운 뒤 태워버릴까?"
"제법 두껍긴 하지만, 오라버니라면 외우는 건 문제가 아니겠죠. 그런데 굳이 태워야 하나요?"
"응. 대가를 받고 판 거라면 유출이 금지된 무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
무려 화약을 판 대가라는 게 문제다. 거래는 무게추가 맞아야 하는 거니까.
어쩌면 정말 강력하고 위험한, 유출이 금지된 무공일 수도 있다.
게다가 내용을 슬쩍 훑어보니, 지금 유은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가득했다.
글자를 모르는 게 아니라 혈도나 동작에 관한 비유가 너무 많았다. 상승무공은커녕 심법조차 익히지 못한 유은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유은하의 암기력을 아는 유 노인과 청화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이것들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단환과 액체.
유은하는 일단 자기병을 열고는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취.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슬쩍 들여다보니 색 역시 너무 투명했다.
무색무취의 액체.
구석에서 젓가락을 가져온 유은하는 그것을 콕 찍어 한 방울만 쇠도끼 위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깐만."
유은하는 다시 그것을 한 방울 찍어 마을 구석에 있는 닭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닭의 모가지를 잡고 강제로 액체를 목구멍 뒤로 넘겼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각 정도 기다려 결과를 확인한 유은하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맹물 같은데?"
마지막으로 유은하는 아스트랄 유니온을 이용해 손끝으로 액체를 분석했다.
그 결과, 맹물로 판단됐다.
"대체 맹물을 왜 이런 작은 자기병에 넣어 다니는 거지?"
실상은 당문이 탈영병들과 거래하며 자기병 안에 든 액체가 극독이라고 속인 것이었지만, 아무리 유은하라도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부적 같은 거 아닐까요? 영험한 호수나 우물에서 길러온 물이라든가."
청화의 말에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세계에서도 미신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단환은 어쩌면 영약일 수도 있겠어요. 옛날에 곳간지기 할아버지께 들은 말로는, 영약에서는 청아한 향이 난다고 했거든요."
청화의 말마따나 단환에서는 계속 은은하게 청아한 향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 향이 어느새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조금만 떼서 분석해 볼까?"
유은하가 청옥단의 겉면을 살살 긁어내 손끝으로 찍었다.
그렇게 아스트랄 유니온이 분석을 시작한 그때, 밖에서 유은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야! 이장님! 밖으로 좀 나와 보세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유이오가 부르는 듯했다.
"오늘은 공사도 쉬는 날이라 별일 없을 텐데, 무슨 일이지?"
"짐승이라도 내려온 거 아닐까요?"
"허이고. 그런 것쯤은 알아서들 처리할 것이지. 쯧."
아직 목책은 전부 복구되지 않았지만 그 뒤에 있는 함정은 복구했다.
게다가 마을에 장정만 몇인가. 늑대 서너 마리 정도는 쉽게 내쫓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유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승이 나타나서 자신을 불렀다기에는 목소리에 긴장감이 없었다.
그렇게 유은하가 밖으로 나가니.
"...."
비단에 모피를 덧댄 옥빛 피풍의를 입은 여인, 당화령이 유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는 사람인가요?"
유은하는 당화령의 시선이 자신의 전신을 훑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런데, 누구?"
"아이고. 이놈아. 귀하신 분 같은데 왜 그렇게 말이 짧아!"
뒤늦게 따라 나온 유 노인이 유은하의 등을 때렸다.
"쇤네는 이 은하촌 이장이고 이쪽은 제 손주와 손녀입니다요."
유 노인이 당화령을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청화도 함께 허리를 숙이자 유은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상대의 지위를 보는 눈은 유은하 자신보다 유 노인이 한 수 위였으니까.
유은하 자신이 아무리 잘난 곳 출신이면 뭐 하나? 지금은 뭣도 없는 산골짜기 사람일 뿐인데.
"은하촌. 예쁜 이름이네요. 저는 대 사천당문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사, 사사, 사…."
유 노인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온다.
옆에서 유은하가 유 노인을 진정시키는 사이, 청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천당문의 귀인께서는 어인 일로…."
"마을분께 듣자 하니, 조금 전에 저 남자가 밖을 나갔다 왔다던데요."
"...."
그 말을 들은 유은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화령이 자신을 쫓아왔음을 말이다.
청화와 유 노인 역시 반 박자 늦게 그 사실을 직감하고는 유은하를 흘끔거렸다.
'그래도 사천당문이라 다행인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민심이 때로는 허상에 불과하고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은하는 잘 안다.
'메가코퍼레이션이 얼마나 영악한 이들인데.'
언론을 이용한 여론 장악이나 반전 같은 건 늘 있는 일. 때로는 갈라치기를 통해 싸움과 무관심을 유도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흔들리는 민심을 보면 정말 덧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긴 그런 언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심을 얻은 이들이 있다면 믿어볼 만은 하겠지.'
당화령에게서 느껴지는 육체적인 스펙이 유은하 자신보다 한참 약하다는 것도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물론 그마저도 일반 장정보다는 강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조용한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유은하의 정중한 물음에 당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문의 직계, 가주의 막내딸이 아닌 그저 사천당문에서 나온 사람이라고만 소개한 것도 이야기가 퍼지는 걸 원치 않아서였으니까.
"목책 쪽으로 가시죠."
"이놈아. 그래도 당문에서 오신 귀한 분이신데, 안으로…."
"아뇨. 괜찮아요."
허름한 집을 보니 안이나 밖이나 대접이 그리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사방이 뚫려 누가 접근하지는 않는지 감시할 수 있는 목책 위가 편했다.
"...."
"...."
목책으로 향하면서 유은하와 당화령은 서로를 탐색했다.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지 않는 걸 보면 대화를 할 생각은 충분해 보이지만….'
그게 그냥 개인의 자비로움 때문인지, 혹은 정보 부족 때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금원보와 비급, 영약을 되찾으러 왔을 확률이 높아.'
자신이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유은하의 최대 관심사는 그 부분이었다.
반대로, 당화령의 최대 관심사는.
'진짜 산골짜기 마을 사람 맞나?'
유은하의 외모였다.
희고 고운 피부와 큰 키, 넓은 어깨와 미형의 얼굴까지. 도무지 산골짜기 마을 촌장의 손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라 하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더군다나 유은하의 몸짓에서는 자신도 흠칫거릴 정도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내공이 있는 것 같진 않아.'
일류에 접어든 당화령이 이 가까운 거리에서 감지할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다.
내공이 아닌 외공을 익힌 자라거나,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올라 내공을 감출 수 있다거나.
하지만 뭐 하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분명 탈영병들의 시체를 통해 확인했을 때는 무지막지한 힘을 지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외공을 익혔을 테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손에 흉터도 없고 굳은살도 적다. 절대 외공 고수의 손이 아니었다.
'외부에 조력자가 있는 건가? 하지만 마을에 들어올 때 들은 바로는 분명히 드나든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고 했는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알쏭달쏭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파악하며 목책 위에 당도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은하상단의 단주, 유은하라고 합니다."
유은하가 당화령을 향해 포권했다.
그 모습은 헌양한 공자 그 자체였기에, 당화령은 순간 조금 전과 다른 사람이 아닌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조금 전에는 가족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사천당문의 당화령이라고 해요."
당화령이 유은하를 향해 마주 포권했다.
당화령의 이름을 들은 유은하가 움찔했다.
아무리 유은하가 무림에 대해 모른다지만, 이곳은 사천이다. 툭하면 사천당문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 사천.
더군다나 약을 팔 계획을 세우며 사천당문과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 수집하기도 했다.
'당화령이라면, 가주의 막내딸 아닌가?'
당화령의 복장을 통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름의 급을 맞추기 위해 은하상단의 단주라는 이름을 댄 것이었고.
하지만 설마 가주의 직계일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마찬가지로, 유은하의 바뀐 모습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당화령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 이름이 은하촌이라고 했는데, 은하상단 단주 유은하?'
성도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긴 했지만, 한 마을을 장악하고 상단주 행세를 하는 이다.
더군다나 탈영병들을 죽인 이일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나아 보였다.
어쨌거나 이번 일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 나가면 위험한 건 사천당문일 테니까.
그렇게 내심 대화의 방향을 정한 당화령에게 유은하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탈영병 때문에 오신 것이지요?"
유은하의 물음에 당화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순순히 긍정하는 것과는 달리 표정이 무거웠다.
'화약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렇다면 이쪽은 어떻게든 그 화제를 피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한 채 놈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생각을 마친 유은하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도 처리하러 오신 겁니까?"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23화. 손님
"?"
당화령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든 것과 별개로, 유은하의 연기는 계속됐다.
"놈들이 당문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전투 중에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만, 저로서도 방도가 없었습니다."
유은하가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수심에 잠긴 유은하의 얼굴은 호소력이 짙다 못해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일 파괴력이 있었다.
"제가 마을에 흩어진 놈들을 암살하니 당문의 추적자가 벌써 왔느냐고 고함을 치더군요."
"그, 그랬나요?"
"예. 대체 왜 당문이 탈영병을 쫓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아마 이것 때문이겠지요?"
유은하가 품에서 현천묵룡편법과 영약을 꺼냈다.
"어, 음. 맞아요."
"역시. 당문의 금언은 알고 있습니다. 은혜는 두 배로, 원수는 열 배로."
유은하가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당문의 복수를 방해했으니, 책임을 지게 되겠군요."
"...."
당화령은 유은하의 오해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당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면에 얽힌 이야기는 복잡했지만, 유은하는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가 아는 거라고는 당문이 탈영병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뿐.
그걸 방해했다는 것만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대체 그는 사천당문은 얼마나 무도한 집단이라 생각하는 걸까?
당화령이 반박하려 했지만, 유은하가 한발 빨랐다.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점을 참작해 부디 마을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요?"
"예. 저쪽을 좀 봐주시길."
유은하가 목책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까맣게 그을린 목책이 서 있었다.
불에 타진 않았지만, 불에 가까이 있어 그을음이 잔뜩 묻은 것이었다.
"얼마 전, 다른 마을에서 우리 은하촌을 습격했습니다."
"산적도 아니고, 다른 마을에서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묻던 당화령의 머릿속에 지나왔던 마을이 떠올랐다.
사람이 한 명도 없던 황량한 마을. 과연 탈영병들이 아무도 없는 마을을 우연히 발견해 차지한 걸까?
'그럴 리가.'
분명 마을에 있던 이들을 내쫓았으리라.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이 동원됐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 겨울에 식량과 집이 있는 마을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굶어 죽기 전에 얼어 죽겠죠."
"예. 아주 미친 척 산불을 낼 게 아니라면 분명 얼어 죽을 겁니다."
유은하가 목책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들에 의해 쫓겨난 이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우리 마을로 왔습니다."
탈영병 때문에 겨울에 마을을 잃은 방랑자들.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과 그을음이 묻은 목책.
당화령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다행히 사상자는 적었습니다만,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유감이에요."
"그래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원인을 제거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당문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져간 물건을 회수하려 했을 뿐, 당문이 그들에게 큰 원한을 가진 건 아니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오히려 그들은 병사일 때도 민초들을 겁박하고 갈취한 자들이었기에 아예 처리할 생각이었죠. 그걸 대신해주신 거니, 딱히 원망하거나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어요."
당화령의 말에 유은하는 안도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자애로운 청년의 모습에 당화령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금원보는 없었냐고 어떻게 말을 꺼내!'
당화령이 힘으로 양민을 겁박하는 개차반 인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집을 뒤져보겠다고 막무가내로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은하가 들은 당화령의 소문은 하나같이 그녀가 친절하고 성실하며 선량하다는 소문뿐이었다.
'소문이 대부분 사실인가 보네.'
어느 가문의 누가 무슨 사고를 쳤다느니 하는 소문이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게 저잣거리의 백색소음이었다.
그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행으로 소문이 난 당화령이니, 유은하가 이런 수를 쓴 건 꽤나 성공 확률이 높았다고 할 수 있겠다.
'금원보는 소중한 자본금이 돼야 하니까.'
자본금에 따라서 시작점이 달라지고 시작점이 어딘가에 따라서 성장세가 달라진다.
유은하는 금원보라는 거금을 당화령에게 그냥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흠흠. 그런데 탈영병 수가 꽤 됐을 텐데, 유 단주 혼자서 전부 쓰러뜨린 건가요?"
"예. 말씀대로 열다섯이나 되긴 했습니다만, 마을에 흩어진 채 방심한 놈들이라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유은하가 허리춤에 찬 손도끼를 툭툭 쳤다.
"제가 사냥도 조금 하는지라."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치를 보던 당화령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혹시 놈들이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다른 말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금원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던 유은하는 내심 놀랐다.
탈영병은 이미 전부 죽은 놈들이라 입을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다.
유은하는 당화령이 당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넙죽 엎드렸다.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현천묵룡편법과 청옥단을 그냥 넘길 정도로.
그런데도 재차 확인하는 조심성이라니.
"제가 들은 말이라고는 놈들을 습격할 기회를 엿보며 들은 것뿐입니다."
"어떤 말을 했죠?"
"큰형님이라 부르는 자가 백호였다든가, 이대로 청해로 올라가 황하를 타고 도주할 거라든가.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혹시 자금이나 무기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자금이라면 금원보일 테고, 무기라면 화약과 관련된 이야기일 테다.
유은하는 침착하게 표정을 간수하며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쓸었다.
"큰형님이란 자가 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놈의 주머니에는 금자 두 냥과 은자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유은하가 슬쩍 당화령의 눈치를 봤다.
"혹시 그게 필요하시다면…."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혹시 놈들이 무얼 팔아 부자가 됐다든가 하는 말은 없었나요?"
"예? 그것들은 당문으로부터 훔쳐낸 게 아니었습니까?"
유은하의 시선이 현천묵룡편법과 청옥단으로 향했다.
유은하는 그것들과 금원보가 화약의 대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처음 들었다는 것처럼 놀란 눈으로 당화령을 바라봤다.
하지만 당화령도 아무런 대책 없이 묻기만 한 건 아니었다.
"훔친 게 아니라 사기를 친 거였어요."
"사천제일 사천당문에 사기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었군요."
유은하는 뭐 그런 놈들이 있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화령은 생각했다.
'다행이야. 아무것도 못 들었나 보네.'
당화령의 심성이 선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선(善)에는 선(線)이 명확했다. 당연히 기준은 사천당문이었다.
당문에 속했느냐 혹은 도움이 되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느냐.
당화령은 그런 자들에게 선하고 친절했다. 사실상 사천 성도의 거의 모든 이들에게 상냥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은하가 화약의 존재를 안다면, 그는 순식간에 사천당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당화령으로서는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당장 유은하를 제어할 만한 수단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유은하를 제거한 뒤 은하촌까지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고작 50호를 조금 넘는 규모의 마을을 처치해 화약과 관련한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봄이 되어 사천을 뜬 뒤 비급과 영약을 팔면 부자가 될 거라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은 금원보의 행방을 찾기 어렵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백호가 금원보를 독차지하고 혼자만 아는 장소에 보관해 뒀겠지.'
보물을 얻게 된 자들은 으레 그렇게 하니까.
나름대로 의리가 있어 보이는 백호였지만, 금원보 앞에서는 호형호제하던 이들마저 믿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 오해가 풀린 것 같네요. 당문의 일로 곤욕을 겪게 된 건 유감이에요."
"자비로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당화령이 의심의 시선을 거두고 분위기가 훈훈하게 풀렸다. 유은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첫인상도 좋게 박혔고 금원보도 얻었어. 한발 더 나아가도 될 거 같은데?'
느닷없는 당화령의 등장에 긴장하긴 했지만, 달리 말하면 이건 기회였다.
무려 당가의 직계와 안면을 틀 기회. 어쩌면 상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초 의원이 일문환은 당가에도 없는 약이라고 극찬했으니까.'
더군다나 일문환은 당화령의 성향과도 궁합이 좋았다.
심성이 선한 당화령이라면 아주 싼값에 민초들을 보듬을 수 있는 일문환에 큰 매력을 느끼리라.
'로열패밀리로서도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고.'
당가의 직계라면 중원판 로열패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런 자들은 아랫것들 하나하나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어도 인구 전체에는 관심이 많다.
늘어나는 인구는 지지기반이자 시장 자체의 파이를 키워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하여 이런 구석진 자리로 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방으로 모실 걸 그랬습니다. 무척 좁긴 하지만요."
"이런 마을에 괜히 큰 집이 왜 필요하겠어요? 오히려 검소함의 상징이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분이 오실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해서, 이거라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유은하가 품에서 약첩을 꺼냈다.
"일문환과 멸모환(滅冒丸)입니다."
"일문환과 멸모환?"
당화령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과 독으로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 사천, 그 사천에서도 제일가는 사천당문의 당화령이다.
어지간한 약초나 약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일문환과 멸모환이라는 이름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은하상단에서 개발한 약입니다. 저 아래 금천현에서 시험적으로 판매를 했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판로를 개척할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으음."
일단 주는 것이니 받긴 했다. 하지만 당화령의 눈빛에서는 다시 의심의 빛이 피어올랐다.
혹시나 독이나 이상한 수작은 아닐지. 진짜 약이라도 그 효능은 어떨지. 순식간에 여러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었다.
"일문환은 기존 탕약보다 조금 더 나은 효과를 지닌 평범한 약입니다. 감모(감기)에 좋고 가벼운 열이나 두통에도 효과가 있죠."
유은하는 당화령과 함께 목책을 내려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동 1문밖에 안 합니다. 이제 가난한 민초들도 감기로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겁니다."
그 말에 당화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동 1문이라고요? 그런데도 기존 탕약보다 효과가 좋고?"
"예."
"믿을 수 없어요."
당화령은 독공(毒功)을 익힌 무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의학을 익힌 의원이기도 했다. 독과 약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존 탕약의 효과를 상회하면서 가격이 동 1문밖에 안 되는 약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화타와 편작이 살아 돌아와도 그런 약을 개발할 수 없어요."
"믿기 힘들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유은하의 시선이 당화령이 든 약첩으로 향했다.
"맨 위의 약첩 세 개는 멸모환입니다. 일문환의 약효를 지극히 끌어 올린 것으로 단 한 알로도 감기를 낫게 합니다."
"내공을 북돋아 온갖 독과 노폐물을 내보내는 영약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은…."
"그러니 직접 시험해보시고 해체해 분석해 보셔도 됩니다."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천당문을 향해 이런 광오한 말이라니.
유은하의 말에는 약효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사천당문은 약을 복제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 또한 깃들어 있었다.
"도전인가요?"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은하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당문에서 복제에 성공한다면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사천 백성들에게는 흥복이 되겠지요. 어찌 됐든 이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딜 방도가 생기는 것이니."
"...."
당화령은 유은하의 진심을 파헤치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은하의 안쪽에는 자신이 봐 왔던 그 어떤 촉망받는 후기지수보다 단단한 자아가 깃들어 있다는 것 외에는.
그녀가 칠절독왕이나 일수천살과 같은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면 그 자아 너머에 새겨진 상처도 읽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아직 미숙했다.
"좋아요. 약속하죠. 이 약이 정말 유 단주가 말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면, 제 이름으로 은하상단과의 거래를 주선하겠다고. 이걸 원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구태여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사양할 필요는 없었기에 유은하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을을 가로질러 유은하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
유은하가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
"낯간지럽게, 그냥 당 소저라 부르세요."
"예. 당 소저. 혹시 호위를 데리고 오셨습니까?"
"호위요? 아뇨. 저 혼자 왔는데요?"
당가의 직계가 홀로 돌아다녔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목소리의 고저와 떨림으로 유추하건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투에서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의문이 짙게 느껴졌다.
"나이는 중년 정도에 정돈되지 않은 수염, 거친 인상, 귀밑에서 턱까지 이어진 흉터. 정말 아는 바가 없는 자입니까?"
반복되는 물음에도 당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인상인 듯한데,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천천히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유은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놈이 울타리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 울타리 너머에 있는 청화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유은하의 손이 허리춤의 손도끼로 향했다.
24화. 손님
손도끼를 쥔 유은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던졌다.
씨이이잉!
손도끼가 날아가는데 마치 화살 같은 소리가 울렸고.
깡!
"큭?!"
울타리의 그림자 밑에서 쇳소리와 동시에 억눌린 비명이 튀어나왔다.
난데없는 그 소리에 밖에 나와 유은하를 기다리던 유 노인과 청화가 화들짝 놀랐다.
정체불명의 중년인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비틀거리길 잠시, 이내 청화를 향해 덮쳐들었다.
"할배! 청화 데리고 들어가! 아니. 도망쳐!"
유은하는 그렇게 소리치며 다시 힘껏 도끼를 던졌다.
제대로 된 훈련 한번 없이도 언제나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힌 투척이었지만.
퍽!
이번에는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애꿎은 땅에 박혀버렸다. 조준이 빗나간 게 아니라 적이 엄청난 몸놀림으로 피해버린 것이었다.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와중에 갈지자(之)로 방향을 꺾는 모습은 유은하의 눈을 의심케 했다.
마치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유 노인과 청화를 쫓지 못했다.
놈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오른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망할. 무슨 힘이…."
"자전마견 종칠각!"
뒤이어 유은하를 쫓아온 당화령이 놀라 외쳤다. 그리고 질세라 종칠각 역시 소리쳤다.
"자전마검이다 이 멍청하게 생긴 계집년아!"
당화령이 이를 악물며 검을 뽑는다. 그러면서 왼손은 슬쩍 허리춤 뒤에 숨겨 대침(大鍼)과 비수(匕首)를 움켜쥔다.
"이 흉악한 마인(魔人)이 어떻게 이곳에…!"
휘익!
당화령이 물어볼 틈도 없이 유은하가 종칠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당화령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중원 천지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런 산속 집성촌에 고수가 살지는 않을 테다.
특히 잠시뿐이지만 유은하를 관찰할 수 있었던 당화령은 유은하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최근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자전마견 종칠각은 일류의 끝자락에 닿았다고 알려진 마인.
어쩌면 절정에 오른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 실력자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재능이 없어 스승인 자전마군(紫電魔君)으로부터 십수 년도 전에 버려졌다지만, 지금 당장은 홀로 이 마을을 몰살시킬 수 있는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일이 너무 꼬였어!'
그저 탈영병을 죽여 입막음하고 영약과 금원보를 되찾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대체 무슨 조화로 자전마견까지 마주치게 된 건지.
당화령은 전신에 내공을 돌리며 눈을 부릅뜬 채 유은하와 자전마견을 주시했다.
이제 갓 일류에 발을 내디딘 당화령과 십수 년도 전에 일류 끄트머리에 선 자전마견.
아니. 이상하게 들쭉날쭉한 놈의 기세를 보건대 어쩌면 정말 절정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마인.
그 차이는 분명 상당하다.
다만, 유은하가 목숨을 대가로 자전마견의 검을 한순간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이 기습으로 자전마견을 중독시킬 수만 있다면.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이길 수 있어.'
물론 그건 유은하에게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홀로 탈영병을 사냥한 유은하라도 내공 한 줌 없는 일반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전마견을 죽이지 못하면 어차피 모두 죽어.'
당화령의 눈이 작은 깜박임도 없이 유은하와 종칠각을 좇았다.
달려가며 도끼를 주운 유은하가 종칠각의 지척에서 도끼를 휘두른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당화령이 있는 곳까지도 들린다.
하지만 그 강맹한 도끼질을 종칠각은 반보 물러나며 몸을 비틀어 어렵지 않게 피했다.
속도는 빨랐으나 투로나 너무 정직한 탓이었다.
그렇게 공격을 피한 종칠각은 좌수에 쥔 검을 유은하의 심장을 향해….
'잠깐. 좌수?'
자전마견이 좌수검을 사용한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순간 든 의문이 당화령의 집중력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악!
유은하의 가슴께가 갈라지며 허공으로 피가 솟구쳤다.
'아차!'
너무나 초보적인 실수로 암기를 던져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뒤늦게라도 비수를 던져야 하나 갈등하던 그 순간.
퍼억!
유은하의 주먹이 자전마견의 가슴께를 때리며 서로가 서너 발자국씩 물러났다.
'진짜 죽을 뻔했네!'
유은하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화끈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중상 감지. 국소마취 성분 활성화.>
<회복 촉진 프로세스 돌입.>
<각성 물질 분비.>
<현 상태가 지속될 경우 강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
왜 아니겠는가. 마취와 각성을 동시에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 중에 가장 빨라. 궤도도 예측이 안 되고.'
찌릿한 감각으로 자전마견이라는 놈이 가슴께를 노릴 거라는 건 진즉 예상했다.
놈의 팔과 검 길이에 맞춰 허리를 젖히면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다는 계산도 마쳤다.
예상치 못한 점이 있다면,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것.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의 움직임으로 미세하게 검의 궤도가 비틀렸다는 것이었다.
불혹은 되어 보이는 놈의 움직임이 뭐 이리도 빠른지. 결국 가슴을 길게 베이고 말았다.
'당화령은….'
물러나며 곁눈질하니, 이쪽을 도울 생각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서서 위험을 온전히 감수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를 미끼로 일격을 노리는 건가? 하긴, 사천당문은 독으로 유명하니.'
덕분에 종칠각의 시선도 계속 유은하와 당화령을 오가는 중이었다. 당화령이 언제 공격해 들어올지 경계하는 것이리라.
"크으."
종칠각은 유은하에게 얻어맞은 가슴께가 불편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일반인 같았으면 가슴뼈가 부러졌을 텐데.'
유은하는 둔해지는 가슴 통증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화령이 저렇게 놀란 걸 보면 적어도 당화령보다는 강할 거야.'
느껴지는 기세나 조금 전 움직임만 봐도 그랬다. 놈은 최소 일류 상위권, 어쩌면 그 윗줄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마인이라고 했지.'
사파보다 더하다는 악종(惡種). 그런 놈이 도망친다면 한동안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유은하는 아스트랄 유니온에 국소마취 활성화를 중단하라 명령했다. 그러고는 종칠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속도는 내가 조금 더 빨라!'
힘도 유은하가 더 강하다. 하지만 종칠각은 유은하가 도끼를 휘두르는 궤적을 미리 읽고 한발 먼저 움직였다.
움직임 또한 기민하고 절묘해서, 놈은 어렵지 않게 유은하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다.
'저게 보법이라는… 큭!'
카앙!
유은하도 종칠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지만, 놈의 검을 가까스로 막는 게 고작이었다.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유은하가 물러나면 적이 도망칠 수도 있거니와, 당화령과 얽혀 싸울 수도 없었으니까.
"네놈이 탈영병들을 죽인 놈이구나."
"...."
"어이! 당가 계집!"
종칠각이 검을 크게 휘두르며 유은하가 물러나도록 유도했다.
유은하는 더욱 달라붙으려 했지만, 연속되는 검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난 다른 건 관심 없다. 이놈만 넘기면 물러가도록 하지. 어떠냐."
종칠각의 말에 당화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유은하가 의외로 몇 수나 버텨주고 있지만, 종칠각은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는 상황. 이대로는 빈틈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모두 달성했으니 물러나도 문제는 없지만.
"정파의 기둥인 당문은 마인과 협상하지 않아요!"
당화령에게는 안전이나 목숨보다 명예가 더 중요했다.
그녀가 무림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명예를 중시하는 당문의 교육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당화령이 물러서지 않은 건 유은하에겐 지극히 다행이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유은하는 종칠각이 혀를 차는 사이 다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황소가 돌진하는 듯한 우악스러운 기세. 종칠각은 감히 맞설 생각도 못 한 채 다시 보법을 밟아 유은하의 공격을 회피해야 했다.
씨이잉!
유은하가 휘두른 손도끼가 종칠각의 옆을 지나치며 섬뜩한 바람 소리를 뿜어냈다.
상당해 여유롭게 피했을진대 손도끼를 뒤따르는 바람 때문에 볼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세단 말이냐!'
긴 소매로 감추고 있지만, 퉁퉁 부은 오른팔에서는 시큰거리는 고통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다.
유은하가 처음 손도끼를 던졌을 때, 고작 산사람이라 생각하며 내공도 주입하지 않고 검으로 쳐내려다가 입은 부상이었다.
순간 자신이 쳐낸 게 도끼가 아니라 곰의 앞발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슴팍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상으로 시큰거림이 멈추지 않는 와중에 둔기에 맞은 듯한 충격이 가해지니, 호흡이 뚝뚝 끊길 지경이었다.
"도망만 치는 거 보니, 개가 맞네!"
자전마견이라는 모멸적인 별호를 비웃으며 손도끼를 휘두르는 유은하.
"놈!"
고통과 모욕에 종칠각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공격을 받아칠 수는 없었다.
좌수에 쥔 검으로는 당화령을 견제해야 하니까.
'이놈이 조금이라도 지치면 기회는 온다. 당가의 계집도 나와 사생결단을 내려 하지는 않을 터.'
종칠각은 유은하를 제압한 뒤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유은하와 종칠각이 서로를 향해 다시 격돌했다.
부우웅!
손도끼의 소리가 조금 전과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종칠각은 손도끼에 실린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식하게 힘만 잔뜩 들여 손도끼를 연신 휘둘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렇게 확신한 종칠각이 보법으로 크게 한 걸음 이동하자, 종칠각과 유은하 그리고 당화령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됐다.
당화령도 종칠각의 사각을 찾아 계속 이동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 가속한 종칠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
당화령이 급히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종칠각의 좌수가 움직였다.
그가 노린 건 유은하의 팔.
팔을 다치면 전력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을 테고, 당화령도 다시 한번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때 대치 상태를 유지하면서 유은하를 끌고 도망칠 심산이었다.
쉬아악!
종칠각의 검이 뱀 같은 움직임으로 유은하의 팔꿈치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유은하는 순간 그가 검을 사용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허?'
종칠각이 유은하의 눈동자에서 읽어낸 감정은 당혹스러움이 아니었다.
그건 노리던 기회를 포착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푹!
소름 끼치는 고통과 함께 유은하의 옆구리를 관통하는 종칠각의 검.
유은하가 일부러 놈의 검극에 몸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칠각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유은하의 손도끼.
"!!!"
종칠각은 대경실색하며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났지만.
촤아악!
손도끼 끝이 그의 어깨부터 이두까지를 훑고 지나갔다.
푸확!
두꺼운 장포의 소매가 갈라지고 그 위로 피가 튀었다.
팔을 다치면 싸울 수 없다는 걸 노린 건 종칠각만이 아니었다. 종칠각과 마찬가지로, 유은하 역시 놈의 팔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은하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공 고수의 반응속도였다.
'얕았어!'
유은하는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거의 없다는 걸 느끼고는 표정을 와락 찌푸렸다.
옷 위로 튀는 피는 많아도 피부만 갈랐을 뿐, 근육을 상하게 하진 못한 것이었다.
"이, 이깟 놈마저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내공 한 줌 없는 일반인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는지, 종칠각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내상으로 조금씩만 끌어 사용하던 내공을 전신으로 퍼뜨렸다.
"미친!"
종칠각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순간 가속만 빠른 게 아니었나?!'
종칠각은 유은하가 간신히 반응했던 순간 가속 속도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익숙하지 않은 좌수검으로 당화령을 견제하는 동시에 유은하를 공격하는 종칠각.
유은하는 간신히 급소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만 피할 뿐, 계속해서 몸에 상처가 늘어만 갔다.
당화령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일류라고 생각했던 종칠각이 완전한 절정 고수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승부수를 던져야 하나?'
당화령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유은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당화령은 유은하가 그녀를 말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집중하라는 듯한 눈빛.
당화령은 그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수에 내공을 집중했다.
"네놈은 절대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종칠각이 노성을 터뜨리며 아예 유은하의 팔을 잘라낼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유은하가 가까스로 검로에 손도끼를 밀어 넣는 데 성공했지만.
끼기긱-
놀랍게도 얇은 검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쇠도끼의 날을 가르며 유은하의 어깨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악으로 치떠진 유은하의 눈에 검 위로 덮인 자줏빛 아지랑이가 보였다. 절정 고수의 상징, 검기였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당화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 단주가 당하면 손쓸 수 없어!'
그렇게 판단한 당화령이 대치 중인 두 사람을 향해 달려 나가며 비수를 던진 그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종칠각의 오른팔이 움직이며 자줏빛 내공이 담긴 단검을 날렸다.
따앙!
허공에서 격돌하며 궤도가 크게 비틀리는 단검과 비수.
당화령이 이를 악물며 검을 뽑아 든 순간.
"?!"
난데없이 종칠각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유은하는.
'진짜 뒈질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면서 왼손을 뻗어 놈의 손 위로 검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25화. 손님
'독? 어느새?'
반쯤 풀린 종칠각의 시선이 저 뒤편의 당화령에게 향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에 힘이 자꾸만 풀리는 이 감각은 몽혼약의 증상이 분명했다.
'당가의 계집 실력이 이리 뛰어날 리 없는데?'
종칠각이 당화령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지나 특기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화령은 이제 갓 일류에 올라 대외활동을 시작한 당가의 직계. 특기는 독기가 담긴 내공을 암기에 실어 날리는 것이었다.
절정이 아닌데도 암기에 내공을 고스란히 실어 날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한동안 성도 저잣거리에서 당화령의 재능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종칠각이 보기에는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용독술이라니?
'큭!'
마치 수혈을 짚인 것처럼 정신이 자꾸만 멀어져 가는 증상이 점점 심해진다.
내공을 돌려 어떻게든 독을 억제하려 했지만, 유은하가 왼손을 덥석 잡고 힘겨루기를 하는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 짐승 같은 놈…!"
내상으로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내공, 방심으로 크게 다친 오른팔, 곰 같은 힘을 지닌 소년, 그리고 정체불명의 독까지.
종칠각은 일단 후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쨌든 탈영병을 처치한 놈을 알아냈으니, 촉왕부로 가 사실을 알리면 되겠지.
당가의 계집까지 함께 있었으니, 사사건건 당문의 트집을 잡으려는 촉왕은 오히려 좋아하리라.
하지만 유은하에게 왼손이 붙잡힌 순간, 종칠각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놈의 손톱이 팔목을 파고들고 그곳을 통해 몇 방울의 피가 스며들자 독의 효과가 아찔할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무식하게 힘만 세고 내공은 한 줌도 안 느껴져서 외공만 수련한 호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은밀하게 독을 사용한 게 당화령이 아니라 이 소년이었다니!
종칠각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반면, 유은하의 눈동자는 승리의 확신이 깃들었다.
'마취 성분이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됐어.'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마취 대신 각성 성분을 과분비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결했다.
대신, 상처로 향해야 할 마취 성분은 날숨으로 내보내는 한편 오른손의 손톱 밑에도 핏방울을 쥐어짜 굳혀 두었다.
종칠각이 느닷없이 휘청인 건, 유은하가 날숨으로 내뱉은 마취 성분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
그리고 지금은 아예 유은하의 손톱이 놈의 팔목을 파고들어 마취 성분을 직접 주입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잡아채기 위해 유은하가 입은 부상도 만만찮았기에 그의 시야도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흐릿해지고 있었다.
만일 자전마견이 내상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검기를 발현했다면 유은하는 당해낼 수 없었으리라.
"이놈…! 놓아라!"
"놓으란다고 놓는 병신이 있겠냐?"
자전마견은 듯 눈을 부릅뜨며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 했다. 전신에 휘도는 내공이 순간적으로 마취 성분을 억누르는가 싶었지만.
"커헉!"
내상이 깊어지며 오히려 목구멍을 타고 피가 역류했다.
그 틈을 타 유은하의 왼손이 손도끼를 굳세게 쥔 채 떨어져 내렸다. 종칠각의 골통을 쪼개기 위해서.
여전히 유은하의 오른손은 종칠각의 왼쪽 손목을 단단히 붙든 상태였다.
'아무리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지만, 어떻게 이런 신력(神力)이!'
턱!
종칠각은 경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오른손으로 유은하의 왼팔을 붙잡았다.
"끄으으으으!"
괴상한 비명이 놈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어긋나 있던 오른 손목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고통이 되어 머리를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종칠각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조금씩 머리를 향해 내려가는 도끼.
당화령은 기회를 포착했지만, 대침을 날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붙은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유은하가 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대침의 사거리는 비수보다 짧기도 했고.
대신, 당화령은 사선으로 달리며 종칠각을 향해 접근했다. 거리를 좁힌 뒤 놈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대침을 쏘아 보낼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당화령을 주시하던 종칠각 역시 그 움직임을 눈치챘다.
"이 젓갈을 담가 먹을 애송이 새끼가!"
찌릿!
전신을 찌릿하게 관통하는 무언가에 유은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위기를 경고하는 감각과 비슷하지만, 정확히 어디라고 특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파지지직!
종칠각의 전신에서 보랏빛 일렁임이 일더니, 점점 유은하를 향해 번지기 시작했다.
'에너지 필드?'
단순히 방어막의 효능만 있는 건지. 혹은 닿는 모든 걸 고출력 에너지로 지져버리는 효과까지 있는 건지.
조금 전, 손도끼를 가르던 그 보랏빛 기운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공을 잘 모르는 유은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판단할 수 없었고, 흉악한 자전마공의 기운이 유은하의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미확인 고출력 생체 에너지 감지>
<에너지 침투 경로 추적>
<추적 완료. 신경 및 뇌세포로 향하는 에너지 차단 완료.>
<통각 억제>
<에너지 흡수 개시>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13%>
<긴급 프로토콜 E-159447에 따른 판단 요구>
<1. 에너지 흡수>
<2. 에너지 차단>
<*주의 : 출처 미상의 에너지원입니다. 추가 흡수 시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야 구석에 메시지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이 강력한 에너지가 사람이 만들어낸 거라니!
크라운 행성에도 인체 개조를 통해 몸에 에너지 코어를 박아 넣는 놈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설마 내공이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일 줄은 몰랐다.
'이 내공을 흡수하면 나도 심법을 익힐 수 있을까?'
어차피 내공은 이미 물밀듯 밀려오는 상황. 이제 와서 차단해 봤자 늦었을지도 모른다.
'부작용 정도야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더군다나 아스트랄 유니온의 복구율이 단숨에 치솟은 걸 보면, 내공을 흡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커 보였다.
'전부 흡수해!'
유은하가 흡수를 결정하자, 종칠각에게서 자전마기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산불에 갇혀 죽은 짐승처럼 바싹 태워주마!"
종칠각은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유은하를 태워 죽인 뒤 어떻게든 도망치리라.
아니. 도망치지 못하더라도 이놈만큼은 길동무로 삼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
놈은 곧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자전마기에 당한 적은 피부에 번갯불 같은 화상자국이 생긴다.
피부와 근육이 타버리며 신경이 눌어붙는 고통에 기절하거나 아예 죽어버리는 놈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유은하는 자전마기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종칠각은 자신의 기운이 그대로 유은하에게 흡수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흡성대법(吸星大法)이나 가능한 짓이니까. 그저 유은하의 몸이 산 짐승처럼 튼튼하다고 여길 뿐.
"몸 하나는 튼튼하구나! 그럼 이것도 버텨 봐라!"
그래서 아예 자전마기를 유은하의 몸에 흘려보내며 역으로 소주천시켰다.
절정의 고수가 진기도인을 할 때도 작고 부드러운 기운으로 심혈을 기울인다.
아예 혈도를 찢어 사람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도가나 불문의 안정적인 기운으로도 하지 않는 미친 짓을 종칠각은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은하의 몸에 한 줌의 내기조차 없기에 가능한 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유은하의 몸 안으로 들어온 자전마기는.
<에너지 침투 경로 변화>
<분석 완료>
<인체에 치명적 손상이 예상됨>
<흡수 가속>
<아스트랄 유니온 출력 부족. 대체 경로 탐색>
<탐색 완료. 에너지 유인 시작>
오히려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유은하의 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컥…!"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는 유은하.
"흐흐!"
유은하의 손에 힘이 풀리자 종칠각의 얼굴에 잔악한 미소가 깃들었다.
'놈은 이제 죽은 목숨! 이대로 도망치면 살아남은 내 승리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감각을 둔화시키는 독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어떻게든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됐다.
절정에 오르기 위해 무작정 처먹었던 영약의 남은 약 기운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
"?!"
종칠각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자전마기가 유은하의 몸에 이끌리듯 흡수되며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였다. 아니. 이와 같은 무공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바로 전설의 마공, 흡성대법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전설에서나….'
푸욱!
경악하는 종칠각의 등에 대침이 꽂혔다.
유은하에게 급격히 흡수되는 자전마기 때문에 대침에서부터 스며드는 독을 방어하지도 못하는 종칠각.
순식간에 독이 돌며 자전마견의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그러자 유은하에게 쏟아지던 기운도 뚝 끊겼고.
"엇?"
정신을 차린 유은하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종칠각의 머리통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퍼억!
허무하게 쪼개지는 종칠각의 골통.
편법으로나마 절정에 오른 마인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오히려 당화령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일방적으로 기를 주입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건 일류의 경지로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 유은하의 몸에 마기를 주입해 죽이려던 종칠각의 경지는 절정이라 보는 게 옳았다.
당연히 절정 고수라면 내기로 독이 퍼지는 걸 억제할 수 있다. 그사이 일류인 자신을 손쉽게 죽일 수도 있고.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종칠각은 유은하와 근접전을 펼치더니 저 혼자 휘청거리고 피를 토했다.
그러다가 마기를 뿜어내고는 허무하게 당화령의 공격을 허용하며 죽어버렸다.
당화령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털썩!
유은하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놈아!"
울타리 너머에서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유 노인과 청화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아니. 할배. 도망치라니까 왜 여기 있어?"
"네 몸이나 걱정해라 망할 놈아! 대체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당연하잖아. 내 가족은 내가 지켜."
유은하의 말에 유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뒤따라오던 청화도 복잡한 시선으로 유은하를 바라봤다.
"청화야. 나 좀 방으로 옮겨줘. 좀 어지러워서. 별거 아니니 걱정은 말고."
"이게 어떻게 별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여우한테 베였을 때보다 상처가 깊은데!"
청화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깊게 베이긴 했다.
하지만 뼈가 상하진 않았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있으니 회복도 빠를 테고 덧나지도 않을 것이다.
"봐 봐. 벌써 피도 멎었잖아."
"이놈아! 피가 멎은 게 아니라 상처가 언 거다!"
"얼었으면 엄청 큰일인데, 내가 이러고 있겠어? 그냥 멎은 거 맞아."
"아이고. 그래도 혹시 모른다. 빨리 들어가자. 약초 좀 빻아 올 테니까 청화 너는 천으로 상처 좀 싸매라."
유 노인이 헐레벌떡 집 뒤편 창고로 향하려 했다. 그리고 그런 유 노인을 당화령이 막았다.
"제게 금창약이 있어요."
"아이고. 선녀님.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서, 선녀 같은 거 아니고요. 당… 아니. 일단 빨리 들어가요."
당화령 유은하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유은하가 가진 힘은 어딘가 수상했지만, 지금은 함께 마인에 맞서 싸운 동료였으니까.
더군다나 노인과 여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악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정파의 기둥을 자처하는 당가의 사람으로서 일단 치료는 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내민 것이었는데.
"아. 괜찮아."
유은하는 잠시 고개를 털더니 제 발로 일어나 흙집으로 향했다.
당화령은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뼈가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허공으로 피가 솟구칠 정도로 깊은 상처다. 가슴 근육이 쩍 갈라진 게 보일 정도란 말이다.
더군다나 종칠각과 근접전을 벌이면서 온몸에 절상이 가득했다.
그런데 아픈 소리 하나 없이 벌떡 일어나서 제 발로 걷다니?
아스트랄 유니온의 각성 효과로 통각이 둔화된 덕분이었지만, 당화령의 눈에는 상남자도 저런 상남자가 없어 보였다.
거친 산사람 아니랄까 봐, 쿵쿵거리며 걷는 모습이 지켜보는 사람 심장을 철렁이게 한다.
얼굴은 영락없는 미공자인데 행동거지는 왜 저 모양인지.
"얌전히 좀 걸어요! 상처 벌어져요!"
생각보다 유은하의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한 당화령이 그를 타박했다. 그의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았더라도 강제로 부축했으리라.
"아."
당화령의 타박에 유은하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당화령은 뒤에서 제대로 지원도 못 한 주제에 부상을 입은 환자한테 너무 소리쳤나 싶어 움찔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당화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약효가 떨어졌…. 요새 약초 보충을 못 하긴 했…."
털썩!
유은하가 뭐라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은하야!"
"오라버니!"
앞서 방으로 들어가 불을 때고 침상을 펴던 유 노인과 청화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당화령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유은하에게 달려갔다.
'몸이 펄펄 끓고 있어!'
더군다나 그의 몸 안에서는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내공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종칠각이 유은하를 죽이기 위해 주입했던 파괴적인 기운, 자전마기였다.
26화. 내공
당화령은 서둘러 유은하를 자리에 눕힌 뒤 상처를 살폈다.
"출혈이…."
피가 멎었던 가슴팍은 쓰러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다시 피가 몽글몽글 샘솟고 있었다.
당화령은 서둘러 품에서 금창약을 꺼냈다.
"깨끗한 천을 길게 찢어서 붕대로 만들어 주세요. 따뜻한 물도 준비해 주시고요."
청화에게 지시한 당화령은 넝마가 된 유은하의 겉옷을 벗겼다.
"...."
순간 드러난 유은하의 상반신에 당화령의 눈빛이 살짝 풀어졌다.
당문의 금지옥엽인 당화령이지만, 당문도 엄연한 무림의 일원. 남정네가 웃통을 벗고 수련하는 것쯤은 자주 봤다.
특히 사천의 여름은 아주 찌는 듯한 더위로 악명이 높았으니, 상의를 탈의한 것 정도야 별일도 아니다.
물론 글공부하는 유자라면 질색할 테지만.
여하튼. 당화령이 정신을 빼앗긴 건 단순히 유은하의 나신을 본 탓이 아니었다.
완벽한 비율로 오밀조밀 모인 근육과 희고 고운 피부. 그러면서도 단단함이 내비치는 음영까지.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불쑥 당화령의 머릿속을 지배한 탓이었다.
"아가씨?"
당화령을 깨운 건 옆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붕대를 준비하던 청화의 목소리였다.
"아, 아. 네."
당화령은 서둘러 천을 따뜻한 물에 적셔 환부를 닦았다. 그런 뒤 금창약을 바르고는 상처 위에 두툼하게 천을 덧댔다.
그 위로 다시 붕대를 묶는 것까지, 당화령은 순식간에 처치를 마쳤다.
"역시 당문…!"
옆에서 청화가 당화령의 손놀림에 놀란 듯 감탄을 흘렸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날뛰는 내공을 진정시켜야 해.'
몸에 열이 펄펄 끓는 것도 문제였다. 이 상태로라면 무슨 조치를 해도 몸이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다.
'청옥단은 날뛰는 내공 때문에 쓸 수 없고, 약초가 있다면 탕약을 달여 보겠지만….'
과연 탕약이 효과를 낼 때까지 유은하의 몸이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열을 내리는 건 내공을 해소하기 위해 선결해야 하는 과제일 뿐이니까.
'뾰족한 수가… 아.'
당화령이 피풍의를 젖히자 허리춤에 달린 약첩이 드러났다. 유은하가 선물이라며 줬던 약첩이었다.
'감기는 물론이고 열을 내리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지.'
유은하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다.
당화령은 서둘러 멸모환이라는 약을 물에 개어 유은하의 목구멍으로 넘겼다.
"...!"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체온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당화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쉴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남은 일은 유은하의 안에서 날뛰는 내공을 해소하는 것. 일류에 불과한 그녀로서는 부담이 큰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유은하는 그녀를 대신해 자전마견과 정면에서 싸운, 어찌 보면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당화령이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유은하의 단전에 손을 올린 그 순간.
"???"
당화령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열이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유은하의 안에서 날뛰던 내공이 실시간으로 진정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유은하의 새카만 시야 구석에는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고가 떠오르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출처 미상의 화합물 흡수 감지. 분자구조 분석 시작>
<인체 적용 시뮬레이션 시작>
<항염 작용 및 항균 효과 감지>
<흡수한 약효와 결합하여 회복 촉진>
<각성 부작용 완화>
<대체 경로를 따라 에너지 흡수 재시작. 진행률 87%>
정신을 차린 유은하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지만, 덕분에 내공이라는 에너지를 얻게 됐으니까.
반물질 미사일을 한 번 맞아 본 탓에 간덩이가 땡땡 붓다 못해 소멸해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게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고를 전부 읽은 유은하가 눈을 떴다.
"아! 정신이 들어요?"
"예. 당 소저."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한데…."
당화령은 대체 어떻게 유은하가 눈을 뜬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끙."
유은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 노인과 청화가 화들짝 놀랐다.
"이놈아! 그냥 누워 있어!"
"맞아요!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다고요!"
하지만 유은하는 두 사람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당 소저. 잠시 나가시죠."
"나가긴 어딜 나간다는 거예요? 쓰러진 지 일각도 안 된 사람이!"
"놈이 혼자인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만에 하나라도 동료가 있었다면 놈을 찾으러 오지 않겠습니까?"
"자전마견은 홀로 활동하는 마인이긴 한데…."
동료가 없다는 거지, 부하를 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류 정도 되는 잔챙이가 습격해 와도 유은하와 당화령이 없으면 마을은 큰 곤욕을 치를 테다.
"그리고 저도 살가죽만 조금 베인 거지,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가슴이 그렇게 갈라졌… 어?"
유은하가 붕대를 풀자 벌써 붉게 딱지가 지며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보였다.
"저게 대체 어떻게…."
열이 내린 것도, 날뛰던 내공이 잠잠해진 것도. 그리고 이제는 길게 베인 상처까지.
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나을 수 있는 건지 당화령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할배하고 청화는 안에 있어."
"이놈아! 아무리 네가 튼튼하다 해도…!"
"그리고 힘들게 싸웠는데 손님한테 식사는 대접해야지. 청화. 부탁할게."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유 노인 못지않게 유은하의 고집도 셌다.
청화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로 향했다.
"일단 자전마견 그놈 시체부터 좀 살펴보죠."
밖으로 나온 유은하는 당화령과 함께 마당에 쓰러진 시체로 다가갔다.
"6대 4까지는 양보하겠습니다. 제가 6."
"네?"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당화령.
하지만 이내 탈영병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유은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가 있는지부터 보고요."
당화령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전마견 종칠각의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붉은 피와 눈, 흙이 뒤섞인 웅덩이에 엎어진 자전마견의 시체를 천천히 살폈다.
놈의 시체는 골통이 쪼개져 처참한 모습이었다.
"응?"
그런데 느슨해진 무복 옷깃 사이로, 가슴께에 이상한 상처가 보였다.
당화령이 옷깃을 풀어 헤치자 상처가 전부 드러났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슴까지 올라온 자글자글한 상처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진물이 섞인 딱지가 앉아 있어.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라는 건데….'
특히 불룩 튀어나온 곳도 있었다.
임맥(任脈)에 분포한 천돌혈과 전중혈이 있는 자리였다.
분명 절정에 이르러 임동양맥이 대로처럼 탄탄해야 할 자전마견의 혈도다. 그런데 혈도에 이런 상처가 나 있었다니.
'전력을 내지 않는 것 같더라니. 역시 정상이 아니었구나. 우리와 싸우기 전에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거야.'
조금 더 살피자 오른 손목이 덜렁거리는 게 보였다. 손목이 탈구된 것이었다.
'운이 좋았어.'
당화령은 이번 전투를 그렇게 분석했다.
종칠각이 내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가 처음부터 검기를 마구 뽑아낼 수 있었더라면 제대로 반항할 틈도 없었을 테니까.
'시체는 통째로 챙겨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독과 의학, 무공을 동시에 연구하는 당문에 있어서 절정 고수의 시체는 그야말로 금덩이와도 같았다.
하물며 자전마견 종칠각은 천하오대마공 중 하나인 자전마공을 익혔다고 알려져 있다.
'그게 진실인지는 말이 분분하지만….'
발달한 혈 자리만 파악해도 마공의 특성을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파훼법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하지만 혼자서 시체를 이고 성도까지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날씨가 추워서 다행이야.'
일단은 눈 속에 파묻어 놓고 당가에 도착해서 사람을 보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당화령의 옆에서, 유은하가 자전마견의 품을 뒤졌다.
놈의 품에서는 잡다한 일에 쓰이는 낡은 단도와 주머니가 나왔다. 주머니에는 은자도 아니고 동전 몇 푼밖에 없었다.
'제법 강한 무인인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역시 비급은 없….'
비급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유은하가 막 일어서려던 그때.
복대가 스르륵 풀리며 그 안쪽에 덧대져 있던 책 세 권이 떨어졌다.
공서잠행술(蚣鼠潛行術)이라는, 지네와 쥐의 움직임을 모방한 사파의 잠행술이 하나.
비사혈풍검(飛砂血風劍)이라는 사파의 검술이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전마공?!"
제목을 읽은 당화령이 경악하며 외쳤다.
진위는 가문으로 가져가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겉면에는 분명 자전마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 진짠가?"
원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전마견이 외운 내용을 직접 옮겨 적은 비급이라면, 사본이라도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아니. 진짜더라도 이게 어떻게…."
당화령은 혼란스러웠다.
자전마군은 마교의 거물이다. 그런 자전마군의 성명절기인 자전마공을 익혔는데 버려졌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마교는 약육강식을 숭상하는 마인이 모인 집단이니까.
떠도는 소문에 자전마견은 이립이 지나도록 이류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니, 그런 그의 성취가 부끄럽다며 내치는 것도 마인다운 일일 테다.
하지만 그렇게 버릴 거라면 보통은 목숨까지 빼앗는다. 목숨을 살려주더라도 최소한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과 혀를 자른다.
자전마견이 중원 무림에 나가 자전마공을 퍼뜨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지금 당화령이 들고 있는 것처럼.
그런 위험이 있는데도 종칠각이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건, 자전마군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자전마공이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마견을 살려둘 이유가 따로 있다는 뜻일 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전마견이 자전마군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아니. 어쩌면 자전마견이 익힌 자전마공이 완전한 게 아닐 수도 있어.'
핵심이 빠진 열화판이라면 상관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
어찌 됐든 돌아가 비급의 진위를 확인하면 될 일. 당화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전마공 비급을 챙기려는데.
"잠시."
유은하가 당화령의 손을 막았다.
"…유 단주. 이건 함부로 손댈 물건이 아니에요. 이 마을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고요."
"보아하니 놈이 익힌, 자줏빛 전기를 일으키는 무공인 것 같습니다만."
"전기? 뇌전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요."
당화령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품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무려 천하오대마공이라고까지 불리는 위험한 무공이에요."
그 말에는 유은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하오대마공이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한 물건이 어디 흔하겠는가?
때마침 아스트랄 유니온의 에너지 흡수 진행률이 100%에 달했다.
몸 안쪽에서 간질거리는 기묘한 감각.
'이게 내공인가?'
아직 당화령과 대화가 끝나지 않았지만, 유은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 기운을 아스트랄 유니온이 알려준 경로대로 이끌었고.
파직!
유은하의 손끝에 은백색 번개가 튀어 올랐다.
"다, 다다, 당신! 그게 뭐죠!"
당화령은 당연히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유은하도 자신의 손으로 번개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당화령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었다.
유은하는 다시 손끝으로 에너지를 방출해 보았다.
파직!
유은하의 손에서 은백색 번개가 튀어 올랐고.
"???"
당화령은 자신이 본 게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전마공은 연공 방법부터가 끔찍한 저주받을 마공이다.
서열을 세우고 구분 짓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말하길, 천하오대마공.
수백 년도 전에는 천하십대마공이기도 했지만, 정파와 관의 합작으로 꾸준히 그 수를 줄인 결과였다.
달리 말하자면, 세상이 달려들어 죽이려 들어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마공이 천하오대마공이기도 했다.
자전마공(紫電魔功)
소수마공(素手魔功)
흑살마장(黑殺魔掌)
수라마검(修羅魔劍).
그리고 천마신공(天魔神功)
하나는 신공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그런데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공이라고는 한 줌도 없던 사람이 자전마공의 번갯불을 튀기다니!
당화령은 어찌나 놀랐는지 어느새 반사적으로 비수를 뽑아 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그걸 휘두르지 않은 건 유은하의 손에서 튀어 오른 번갯불의 색 때문이었다.
자전마공 특유의 탁한 자색이 아니라 맑고 청명한 은백색. 그 차이가 당화령의 머릿속 가득 의문을 채워 넣고 있었다.
"당신. 원래 무공을 익혔나요?"
"아닙니다. 무공을 익혔다면 자전마견에게 그렇게 고전했겠습니까?"
"아니. 하. 참."
유은하가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탈영병들의 시체를 봤을 때도 그렇고, 자전마견과의 싸움도 그렇고. 유은하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유은하의 손에서 빛나는 번갯불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외부로 보일 만큼의 기를 사용하려면 최소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할 텐데!
'나를 속인 건가? 사실은 이미 절정지경의 무인이고?'
유은하를 보는 당화령의 시선에 의심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27화. 내공
유은하가 은빛 번갯불을 방출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몸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유은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세포 융합형 인공지능 아스트랄 유니온이 탑재되어 몸에 티끌만 한 불순물도 쌓이지 않았다.
더욱이 궤도 의료기지라는 최첨단 시설에서 면밀한 관리를 받기도 했다.
즉. 유은하의 몸은 내공이 쌓이면 쌓이는 대로 발출 가능한, 무인들에게는 꿈의 신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파직. 파직.
유은하가 연신 손끝으로 은빛 번개를 만들자 당화령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정제되지 않은,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 무의미한 내공의 방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유은하의 눈에 새겨진 진한 호기심.
저 반응을 보면 정말 내공의 내 자도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다.
하다못해 저잣거리의 백성들도 내공을 번쩍이며 검이나 주먹에 싣는 무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그걸 알아봐야 화를 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첩첩산중, 아니. 사천의 첩첩첩산중에 살아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새하얀 종이처럼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을까? 은하상단의 단주라는 직함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리고 그 비수는 좀 집어넣으면 안 되겠습니까? 할배랑 청화가 무서워합니다만."
"...."
당화령이 흘끔 뒤를 돌아보자, 집 안쪽에서 문틈으로 빼꼼 내민 시선이 보였다.
당화령은 잠시 유은하를 바라보다가 비수를 집어넣었다.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뒤죽박죽될 지경이다.
"일단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그건 조금 전까지 우리가 싸웠던 사람의 기술이라 그랬어요."
"자전마견이라고 했죠. 확실히 그의 몸에서 자줏빛 번개를 보긴 했습니다."
"네. 바로 그 기술이요. 아주 사악한 기술이에요. 그걸 익힌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로요."
"어…."
그러자 그제야 유은하가 당화령의 눈치를 본다.
당화령은 속으로 안도했다. 사악한 걸 멀리하는 심성이든 죽는 걸 두려워하든. 당장은 그를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저는 유 단주에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대체 어떻게 한 건가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스트랄 유니온의 작용이긴 했지만, 그 기저까지 유은하가 아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공이 몸으로 막 밀려 들어와서, 이대로는 죽겠다 싶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수십 번은 더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잘 흡수하고 돌렸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정말 그게 끝입니다."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은 그게 말이 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 저더러 믿으라고요? 차라리 유 단주가 처음부터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말이 신빙성 있겠어요."
유은하는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은하도 그 이상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을.
"일단은 그거 멈추세요."
당화령이 여전히 빛나는 유은하의 손끝을 가리켰다.
"멈추라고요? 어째섭니까?"
혹시나 무공을 사용하는 것마저 통제하나 싶었던 유은하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화령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자전마공이 괜히 천하오대마공이 아니에요. 수련법 자체도 사악하지만, 사용할수록 사용자의 정신을 포악하게 만들어요."
그 말을 들은 유은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사용하겠다는 동의의 표현이 아니었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파악한 뇌세포 손상의 정체가 그거였구나?'
그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것뿐이었다. 전두엽의 손상은 포악성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유은하가 얌전히 은빛 번개를 거두자 당화령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회복되면 함께 당문으로 가주셔야겠어요."
"자전마공 때문에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저는 자전마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그럴 생각이었다면 은혜를 갚는다고 초청하고 방심을 유도한 뒤 뒤에서 찔렀어요."
"하긴. 그편이 효율적이긴 합니다."
순순히 동의하는 유은하의 모습에 당화령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정파가 뭔지도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완전 시골 사람이나 다름없어. 상단주라는 이름도 그냥 직함뿐이겠지? 상단이라고 이름만 걸어 놓고는, 그냥 시골 점포나 다름없는 곳일 거야.'
은하상단이 이제 막 창단되어 아무런 실적도 없는 상단이라는 사실을 들어도 당화령은 전혀 놀라지 않으리라.
물론 그와 별개로 멸모환의 효능은 정말 놀라웠지만 말이다.
"정식으로 유 공자를 초청하는 거예요."
어느새 당화령이 유은하를 부르는 호칭도 단주에서 공자로 바뀌어 있었다.
"일단은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저 혼자서는 자전마견을 이기지 못했겠죠."
"그 점은 저도 감사드립니다. 놈이 소저를 상당히 견제하더군요."
유은하가 고맙다며 밝게 웃는데, 그 모습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리고 유 공자가 되찾아 준 비급과 영약에 관해 이야기도 나눠야 하고요. 은혜를 입은 주제에 본래 저희 것이었다고 강탈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말에 유은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힘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억지는 억지도 아니게 되는 게 세상일이다.
당문의 비급과 영약이라면 돌려주는 게 당연할진대 그에 관해 보답을 하겠다니.
'금원보도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유은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답을 한다고 해도 되찾은 물건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은빛 번개를 튀기는 유 공자의 상태가 궁금하기도 해요."
"제 상태 말입니까?"
"네. 자전마공과는 색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쓰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부작용도 없다.
은빛 번개는 아스트랄 유니온이 신체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내공의 흐름을 조정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그 과정에서 흉포한 마기가 정화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화경의 절대고수이신 가주님께 보여드리면 뭔가를 아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유은하는 당화령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며 그녀를 향해 포권했다.
은빛 번개와 내공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뭐가 중요한가? 당가의 가주이자 당문의 장문인과 안면을 틀 기회인데.
"그렇다면 이 기회에 일문환과 멸모환을 잔뜩 가져가야겠군요."
유은하의 말에 당화령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인이었다면 칠절독왕과 만난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어 어쩔 줄 몰랐을 테다. 하지만 유은하는 인맥을 트고 물건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단에 진심이신가 보네요?"
"예. 이 세상을 집어삼킬 거대한 상단을 만들 겁니다."
아이 같은 포부에 당화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화령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말이었다. 역사에 그런 상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유은하의 역사에는 존재했다. 도시를 지배하고 행성을 나누어 먹은 초거대 기업, 메가코퍼레이션들이 말이다.
당화령은 유은하의 말이 꿈 많은 청년의 당찬 포부 정도로 이해했다.
'그래도 약효가 엄청난 건 사실이니까, 의약당주님께 소개는 해드려야지.'
***
이틀 동안 마을 주변을 꼼꼼히 살펴본 유은하는 자전마견에게 동료가 없다고 확신했다.
유은하가 마을의 안전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당화령은 유은하를 데리고 유씨 집성촌을 나설 수 있었다.
"이놈아. 아기씨 말 잘 듣고. 뭐 시키면, 예. 알겠습니다. 그 말만 하고."
"아니. 내가 하인이야?"
"하인이라도 되라는 소리야!"
유 노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거대한 기회로 보였다.
이 산에서 평생을 지내는 것보다 당가의 하인이 되는 게 백배 천배는 잘 살 수 있다.
최근에는 유은하가 상단이니 뭐니 했지만, 유 노인에게 당문이란 평생 꿈도 꿀 수 없었던 별세계 그 자체였다.
"하인은 무슨. 내가 꼭 약 많이 팔아서 돈 잔뜩 벌어 돌아올게."
"다 들리거든요? 당문이 아무 약이나 다 팔아주는 줄 알아요?"
"들리라고 한 소립니다. 효과는 제가 몸으로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당문의 의약당에서 제대로 뜯어볼 거니, 그전까지는 어림도 없어요."
"바라던 바입니다."
당문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리라는 자신감이 담긴 말에 당화령은 유은하를 쏘아봤다.
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어지고 만다.
그사이 유은하는 다시 유 노인에게 돌아섰다.
"할배나 잘 있어. 옷 두껍게 잘 입고. 장작은 아직 넉넉하고 식량도 많으니까 괜히 뭐 구한다고 나가지 말고. 알았지?"
"이놈이 누굴 걱정하는 게야? 내가 여기서 산 것만 삼십 년이 넘는다."
유 노인이 턱도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유은하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청화 너한테는 미안하네. 혼자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텐데."
"아니요. 그…. 무사히 돌아오시기만 해도, 아니. 돌아오지 않으셔도. 아, 이상한 뜻이 아니라."
청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횡설수설했다. 그녀도 유은하에게 천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무려 당문이다. 사천 백성에게 촉왕부의 촉왕이 있다면, 사천 무림인에게는 사천당문의 독왕이 있다는 그 사천당문.
그러니 유은하가 당문 소속이 되는 건 질투할 엄두도 나지 않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하지만 유은하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올 때 뭐라도 사 올까? 뭐 필요한 거 없어?"
"예끼 이놈아! 돌아올 생각 말라니까!"
"아니, 할배는 왜 자꾸 그래? 여기가 은하촌이고 내가 유은하인데, 내가 여길 버리고 어딜 가?"
물론 은하촌과 당문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하지만 갤럭시 크라운의 A구역과 비교하면 은하촌이나 당문이나 매한가지일 터. 그러니 유은하에게는 자신을 거둬 준 유 노인이 있는 곳이 더 소중했다.
"잡소리 말고 썩 꺼져! 아기씨 기다리신다!"
"언제 봤다고 아기씨래?"
"이놈이 맞아야 말을 듣지!"
유 노인이 지팡이를 치켜들자 그제야 유은하는 몸을 쓱 피하며 당화령을 따라 마을을 나섰다.
마을을 나선 당화령이 유은하를 이끌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쪽이 금천현 방향 맞죠?"
"예. 맞긴 한데, 성도는 동쪽 아닙니까?"
"계속 산을 타는 것보다는 금천현에서 관도를 타고 가는 게 훨씬 빨라요."
유은하가 있던 곳은 성도의 서쪽 깊은 산속이었다.
성도까지는 직선거리로만 430리(약 170km)가 넘는 거리. 당연히 관도를 따라 산을 돌아가면 그보다 곱절은 긴 거리가 나온다.
하지만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타는 것보다야 훨씬 빠르고 편하다.
"그렇습니까?"
"설마 관도도 본 적 없어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관도를 타나 산을 타나 비슷할 것 같아서."
"...."
당화령의 표정이 멍해졌다. 당가의 금지옥엽이라기에는 꽤나 거칠게 자란 당화령이었지만, 설마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이 사람의 흔적을 추적할 때,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지.'
오히려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거리가 벌어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 느꼈던 분함과 호승심이 당화령의 내면에서 피어올랐다.
"달리기가 상당히 빠른 듯한데, 그럼 달려서 가도 되죠?"
"빨리 가면 저야 좋습니다."
유은하의 동의를 얻은 당화령은 곧장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당가의 경공(經功)인 추혼비행(追魂飛行)이 펼쳐지자 당화령의 몸이 산을 타고 휙휙 나아갔다.
유은하는 그냥 달리기로 성큼성큼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호흡에는 여유가 있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진짜 어떻게 돼먹은 몸이야?'
뒤를 슬쩍 확인한 당화령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당가의 경공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온통 험한 산뿐인 사천에서 단순히 빠른 경공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체력과 내력을 아껴 더 먼 거리를 오래 안정적으로 달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경공을 펼치는 장소가 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나 험한 산을 달릴 때는 청성파의 세류표(細柳飄)와도 견줄 수 있다고 자부한다.
모두 사천의 험한 산에서 발달한 경공이니 비슷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마는.
어쨌든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한들 민간인이 훅훅 따라올 정도로 만만한 경공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이류도 아니고 몸에 기를 능숙하게 두를 수 있는 일류 무인인 당화령이 사용하는 경공이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유은하는 당연히 따라오지 못해야 정상이건만.
"아, 저런 데에 여우 굴이 있었네. 나중에 사냥해야지."
유은하는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여우 굴을 확인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그 모습을 본 당화령은 어째서인지 미약한 짜증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무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탓이기도 했고, 가슴에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도무지 사양이라는 걸 모르는 환자에 대한 울화이기도 했다.
"여유가 있나 본데 속도를 더 올릴게요."
"저야 괜찮은데."
너는 괜찮겠어? 그런 눈빛을 보내오는 유은하. 당연히 당화령은 더욱 짜증이 샘솟았다.
당장 안 괜찮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걸까? 아픈데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게?
그렇다면 그 입에서 잠깐 쉬자는 말이 나오게 해주겠어!
대충 그런 생각을 거친 당화령이 속도를 올렸다.
"...!"
그 놀라운 속도에 유은하의 눈이 잠시 커졌지만.
씨익.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은 유은하는 지난 이틀 동안 연구했던 내공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각성 물질이 분비된 듯한 고양감과 함께 자리를 박차는 유은하의 발밑으로 깊은 발자국이 찍혔다.
28화. 내공
유은하의 몸 안을 휘도는 내공은 그저 아주 기초적인 경로를 따라 이동할 뿐이었다. 유은하가 익히려다 실패했던 삼재심법의 경로를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움직이면서 심법을 운용하는 건 자살행위였을 테지만, 유은하는 아니었다.
그를 대신해 아스트랄 유니온이 내공을 컨트롤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부에서 내공이 휘돌며 활력을 뿜어내자 유은하의 발걸음에 점점 힘이 실렸다.
당연히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아가는 거리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화령은 유은하의 소리가 계속해서 가까워짐을 느꼈다.
"...!"
뒤를 흘끔 보고는 잠시 벌어졌던 거리가 다시 좁혀진다는 사실에 이를 악무는 당화령.
그녀가 조금 더 속도를 높이자 유은하도 또 속도를 높였다. 당화령은 승부욕에 제대로 불이 붙었지만, 그때 유은하는.
'이게 되네?'
기운을 단순히 다리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더 강하게 땅을 박찰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었다.
경공 혹은 보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굳이 따지자면 내공을 이용한 신체 강화에 불과한 기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당화령을 따라가기에는 충분했다.
당화령도 내공을 총동원하고 추혼비행의 묘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어떻게든 유은하보다 빨리 달리려 몸부림쳤다.
'더 빨리! 더 가볍게!'
오죽하면 달리는 동안 추혼비행의 성취가 늘어나는 것 같다는 기분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아니.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당화령의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지며 눈밭 위에 찍히는 그림자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었다.
반면, 한 걸음마다 나아가는 거리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신기한 걸음걸이네. 저건 보법이 아니라 경신법인가?'
유은하는 앞서가는 당화령의 움직임을 분석하며 그녀를 따라 해 보았다.
추혼비행 특유의 내공 운용을 몰랐기에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얻는 게 없진 않았다.
강하게 땅을 박차기만 했던 유은하의 달리기가 말 그대로 표홀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
그 변화를 알아차린 당화령은 속으로 경악했다.
'지금 내 움직임을 보고 배운 건가?'
비전을 강탈했다며 유은하를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움직임은 기초적인 경공만 배워도 익힐 수 있는 기본적인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본적인 변화가 그의 우월한 신체와 만나며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당화령은 한 시진 정도가 지난 후에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기초적인 체력에서 유은하를 따라갈 자는 이 중원에 없었으니까.
"하아. 하아. 제가, 제가 초반에 체력 안배만 조금 더 잘했으면 하아. 이겼을. 하아…."
"후우…."
곧 숨이 넘어갈 듯 몰아쉬는 당화령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차분히 숨을 고르는 유은하.
누가 승자인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중간중간 충분히 쉬었다가 가시죠."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건데요!"
"더 빨리 달리자고 한 건 당 소저입니다만."
"먼저 천천히 가자고 말하면 좋았잖아요! 환자가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당화령이 쏟아내듯 말을 퍼부었다.
"제 경공을 따라 하신 건가요?"
"아, 무공은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된다고 듣긴 했는데, 혹시 달리는 법도 마찬가지입니까?"
"보고 따라 하는 것 정도로 유출이라 말하지는 않아요. 진짜 요체는 내공의 흐름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당화령의 시선이 유은하의 몸을 훑었다. 자전마견 종칠각에게 베여 상처가 났던 곳들이었다.
"혹여나 발이 꼬여 넘어졌으면 어쩌려 그랬어요? 이 험한 산에서 그렇게 빨리 달리다 넘어지면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요!"
대체 이건 걱정해주는 걸까, 화를 내는 걸까?
쏘아붙이면서도 눈으로는 자신의 몸을 살피는 모습이 황당했지만, 유은하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당화령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이 환자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무인 아니셨습니까?"
"무인이면서 의원이기도 하거든요? 당신은 그런 사람 앞에서 몸을 혹사한 거고요!"
당화령이 그렇게 말하며 획 고개를 돌려버린다. 화가 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은하가 언뜻 보니 점차 땀이 식으면서 몸을 잘게 떠는 게 보였다.
경쟁심 때문인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무림인이 튼튼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겨울에 감기에 걸리면 크게 고생할 건 뻔한 일. 더욱이 당화령은 당문의 막내딸이다.
당화령이 감기에 걸리면 가문 사람들이 함께 온 유은하를 곱게 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거 걸치십쇼."
유은하는 자신의 봇짐에서 긴 코트를 꺼내 내밀었다.
"장포?"
옷을 받아 든 당화령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생긴 건 장포랑 비슷한데, 조금 더 두껍고 뻣뻣하며 소매가 좁았다.
"입고 있으면 따뜻할 겁니다."
"괜한 걱정이에요. 저도 일류 무인이거든요?"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일류 무인은 감기에 안 걸립니까?"
순수하기 그지없는 유은하의 물음에 당화령이 슬쩍 눈을 돌렸다.
"걸리긴… 걸리죠."
"그러면 입고 계십쇼. 저는 땀도 안 났습니다."
"그거참 잘나셨네요. 흥."
당화령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코트를 걸친다.
유 노인의 말대로, 수십 년 만에 사천에 발생한 기록적인 한파는 일류 무인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엇?"
코트를 걸친 당화령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코트가 어깨를 감싸자마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뭐죠?"
"세상에 하나뿐인 옷입니다. 잘 쓰고 돌려주십시오."
크라운 궤도 의료기지에 있을 때는 옷장에 많고 많은 일상복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조차 도시, 아니. 행성 전체로 따져도 초고가임은 분명했다. 한 벌에 십억 크레딧이 넘는 코트였으니까.
체온 조절 기능 정도야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에요?"
당화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유은하는 절대 산사람이 아닌 것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미공자 같은 생김새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산에 살면 필연적으로 살이 타고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손은 온통 굳은살에 상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데 유은하의 몸에는 그런 흔적이 하나도 없다. 겉으로만 보면 산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다.
한데 또 묘한 것이, 행동거지는 거칠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산사람 그 자체다.
예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듯 거침없는 말투와 행동, 도끼를 제 손처럼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이며 사방을 훑으며 연신 사냥감을 찾는 눈까지.
하지만 또 마냥 산골짜기 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당문의 막내딸인 자신조차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들을 지니고 있다.
일문환과 멸모환, 정체불명의 직물로 만든 장포, 심지어 자전마기를 흡수해 은빛 내공을 만든 건 기사 그 자체였다.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 묘한 어긋남이 당화령의 궁금증을 부채질했다.
"그냥 은하촌 사람입니다. 은하상단의 단주이기도 하고요."
"거짓말 마세요. 어떻게 산사람이 그런 외모에 이런 귀한 옷을 가지고 있어요?"
당화령은 어느새 축축하게 등허리를 적시던 땀이 뽀송하게 말라 있는 걸 느꼈다.
두껍고 질긴데 가벼우며 눈비가 스며들지 않는다. 게다가 단순히 걸친 것만으로도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마치 신선이나 선녀들이 입는 옷이 이럴까 싶을 정도다.
"떠드는 거 보니까 숨은 다 골랐나 봅니다. 다시 출발하시죠."
"말 돌리지 말고요!"
"말 돌리는 줄 알면 그냥 안 묻는 게 예의 아닐까요?"
"당신 입에서 예의라는 말이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만난 그 순간부터 유은하가 지킨 예의는 단 하나, '존대'뿐이었다.
그 외에 눈빛을 비롯한 모든 행동거지에서 눈곱만큼도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유은하의 입에서 '예의'라니!
청성파 도사의 입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듣는다면 기분이 이럴까?
이는 유은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지위,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였던 탓이었지만, 당화령은 그걸 알 리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당화령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유은하는 이미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저만치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숨기는 게 있어.'
그게 부정적인 요소는 아닐 테다. 당화령은 그렇게 확신했다.
유은하와 그녀의 만남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당화령이 유은하를 찾아갔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더군다나 유은하는 자전마견 종칠각으로부터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그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그를 전열로 이용했던 당화령에게 한 점 원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분명 선한 사람은 맞아. 하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것도 사실. 당화령의 눈이 이미 저 앞으로 걸어가는 유은하의 등을 좇았다.
***
금천현(金川縣)은 질 좋은 금이 나기로 유명한 동네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동네는 아니다.
천하의 모든 물산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금은 저 멀리 북경에 계신다는 황제 폐하의 것.
조금 더 가까이 보자면 촉왕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금천현에는 상당한 수의 관군이 주둔하고 있다.
금은 엄격한 관리 아래에 생산되어 촉왕부로 보내지고 또 북경으로 보내질 뿐. 민간에 곧장 풀릴 일은 결코 없다.
그나마 주둔하는 병사들 덕분에 그럭저럭 장사가 잘되기는 하지만, 그 이상 재미를 볼 여지도 없는 곳이다.
적어도 무림 문파에게는 말이다.
심지어 금천현과 성도 사이에는 청성산을 비롯한 높다란 산이 겹겹이 솟아올라 있어 교통도 썩 좋지 않다.
굳이 기어들어 올 가치가 없는 한적한 도시가 바로 금천현이다. 불과 얼마 전, 유은하가 머물던 때까지도 그랬었다.
"이상하게 시끌벅적합니다?"
"그러게요?"
금천현 저잣거리에 도착한 유은하와 당화령의 감상이었다.
금천현이 어떤 곳인지 아는 유은하와 당화령의 눈에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물론 궁금하기만 할 뿐. 뭔가를 알아보며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당화령은 유은하를 이끌고 구석진 허름한 객잔으로 향했다.
"탈영병 일 잊지 않았죠? 괜히 소란에 얽혀 좋을 일 없으니, 하루만 쉬고 관도를 타고 성도로 가죠."
그렇게 웅묘객잔(熊猫客棧)이라는 허름한 객잔에 들어섰는데.
"...."
객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보통 병사들은 금광과 인근 제련시설에 상주한다. 이런 숙박시설은 상인들이나 이용하는 곳일 텐데.
'박도?'
객잔에 앉은 이들은 모두 식탁 옆에 박도를 기대어 놓고 있었다.
박도는 보병이 사용하던 무기에서 시작해 민간에 널리 풀린 무기다.
그러니 박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 앉아 있는 이들이 모두 병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특히 사천은 빽빽한 나무나 넝쿨이 많아서 산을 오르는 일반 백성들도 박도를 지닌 경우가 많다.
문제는 객잔에 둘러앉아 입구를 주시하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분명 훈련받은 이들의 눈빛이야.'
꺼내 놓은 박도에 흠집이 많다. 기로 검을 강화할 수 없다는 뜻이니 대부분 삼류나 이류 정도일 터.
'하지만 수가 스물셋이나 돼. 위층에 더 있을지도 모르고.'
당화령이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긴장하고 있던 그때.
"누추한 곳이라 귀하게 생긴 소저께서 오실 만한 곳이 아닌데."
옆쪽에 앉아 있던 남성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의 뉘시오?"
미약한 적의와 탐색이 섞인 눈빛. 하지만 당화령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즉. 저들이 병사라 하더라도 촉왕부의 정예병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적어도 촉왕부의 정예병들은 당가 요인들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그저 성도로 돌아가는 여행객일 뿐이에요."
"무복을 입은 여행객이라. 드문 건 아니지만 이 시기에 너무 공교롭군."
"이 시기가 무슨 뜻이죠? 천하를 여행하는데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시기가 따로 있나요?"
"아니. 혼잣말이었소. 이쪽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다만, 이곳에는 남는 방이 없으니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남자의 말에 당화령이 미간을 좁혔다.
1층 식당을 가득 채운 남자들. 그들은 설령 방이 있다더라도 올려 보내주지 않을 기세였다.
이대로 물러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다.
결국, 당화령이 물러서려던 그 순간.
"아기씨. 이놈들, 손님이 아니라 강도 같습니다."
낮게 깔린 유은하의 목소리가 객잔 1층에 울려 퍼졌다.
"뭐?"
당화령의 앞에 선 남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우리가 강도라고?"
"점소이도 나오지도 않고, 식탁 위에는 음식과 차 대신 무기가 올려져 있고, 그렇다고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풍기지도 않고. 더 말해줘야 하나?"
유은하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뒤에 있던 자들도 슬금슬금 무기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쯧!"
남자가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자신의 박도를 바닥에 텅! 소리가 나게 박았다.
"눈치가 빠른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싸우게?"
유은하가 씨익 웃으며 당화령의 앞으로 나선다. 어느새 유은하의 손에는 박도와 도끼가 들려 있었다.
'좋은 목적으로 객잔을 차지한 놈들은 아닌 것 같고, 내공을 이용해 싸워 볼 기회야.'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신에 내공을 돌렸다.
29화. 황금빛 계략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객잔 내부.
객잔을 차지한 이들은 언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유은하 역시 언제라도 튀어 나가 무기를 휘두를 수 있도록 전신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남자는 유은하와 당화령을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은하의 기세에 밀린 것이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소."
남자는 포권하며 유은하와 당화령에게 인사했다.
"잔도표국(棧道鏢局)의 표두 고을찬이라 하오. 고 표두라고 불러주시오."
"표국?"
표국이란 운송업체와 심부름업체가 결합한 듯한 곳이었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보다는 사업체의 성격이 짙은 곳.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었다.
"표국 사람들이 왜 이러고 있어?"
"잠깐. 유 단주. 물러나세요."
당화령은 유은하의 말투가 사달을 일으킬 것 같다는 불안감에 그를 잡아끌었다.
그 와중에 유은하를 단주라고 칭한 건 세력의 크기를 보여 상대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본인이 은하상단을 만들었다고 하니, 딱히 단주라 불러도 거짓말도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 정체를 밝히지 못함을 이해해주세요. 그래도 광원(廣元)의 잔도표국이라면 익히 들었어요. 성도에까지 위명이 자자한 고 표두와 표사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당화령의 말에 고을찬의 눈이 빛났다. 표사는 점소이 못지않게 눈치가 중요한 직업이다.
손님을 알아보는 눈.
적을 알아보는 눈.
소란을 피해 가는 눈.
그리고 허세를 간파하는 눈.
그런 고을찬의 눈에 당화령은 귀한 가문의 배운 여식임과 동시에 강한 무인으로 보였다.
"기회가 되면 잔도표국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 보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먼 광원의 잔도표국에서 이 금천까지는 무슨 일이시죠?"
당화령의 물음에 고을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객잔의 주인이 십전상단(十錢商團)에 금전을 빌리고는 갚지 않았습니다. 그놈에게 돈을 받아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왔습니다."
표국이 이런 일을 하는 게 드문 건 아니다. 하지만 이곳 금천현은 잔도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광원현 인근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
괜히 소란스러워지길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 마음을 반영하듯 고을찬의 말투는 훨씬 정중해져 있었다.
"이렇게 지키고 있는다고 주인이 돌아오나요?"
"안 돌아와도 상관없습니다. 십전상단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곧 그들이 와서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팔아버릴 겁니다."
"그렇군요.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무례했던 걸 사과드려야지요."
당화령은 고을찬과 인사를 나누고는 웅묘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서둘러 인근의 다른 객잔을 잡은 뒤.
"사람이 대체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는 거예요? 딱 보면 위험하다는 걸 몰라요? 왜 거기서 갑자기 나서는 건데요!"
유은하를 앞에 앉혀 두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은하도 지지 않고 당화령의 물음에 당당히 대답했다.
"별 이상한 놈들이 이상한 이유로 우릴 쫓아내려 했잖습니까. 당연히 항의해야죠."
"그것도 상황을 보고 해야죠! 그들이 사파 무리였으면 어쩔 뻔했어요?"
"싸워도 될 것 같았는데."
물론 당화령도 싸워서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상대가 많아도 포위당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이류 무인들이 절묘한 합격술이나 진법을 펼칠 리 없기도 했고.
"그래도 경솔했어요. 쓸데없이 싸우는 건 하책이라고요."
"사천제일당가 아닙니까?"
"...."
"이름만 밝혔어도 해결됐을 일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당가라는 이름을 밝혔다면 잔도표국 표사들은 땅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옳은 소리도 아니었다.
"유 공자."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다."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건 아니잖아요."
중원의 예법은 어지간히 친하지 않은 이상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는다. 유은하도 그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당문의 이름은 약자를 핍박하고 제 편의대로 쓰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방금은 저희가 핍박받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우리에겐 힘이 있잖아요. 유 공자 말대로 우린 싸워도 이길 만한 힘이 있었어요. 조용히 물러난 건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
유은하도 당화령의 말에 동의했다.
내공을 사용해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흥분해 나섰을 뿐, 최선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뭘요. 유 공자가 나선 덕에 저들이 물러난 것도 있으니, 이번 일은 여기까지 해죠."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된 후,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다.
고기가 조금 들어간 소면 두 그릇과 만두였다.
"이게 전붑니까? 차라리 산에서 먹는 게 더 나았겠는데."
소면을 뒤적이며 고기가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는 유은하. 그 모습에 당화령은 한숨을 내쉬며 유은하를 달랬다.
"당가로 가면 그때 맛있는 걸 먹도록 해요."
어른스럽게 말하는 당화령이었지만, 그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유은하의 집에서 맛봤던 고기죽이 고기도 훨씬 많고 향과 맛도 뛰어났으니까.
'처음 맛보던 향신료 배합이었는데, 나중에 가르쳐 달라고 해볼까?'
소면을 씹어 삼킨 당화령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유은하에게 물었다.
"그런데 객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보통 객잔이나 주루에 가면 점소이가 달려오지 않습니까? 특히 귀한 차림의 사람이 가면 아주 쏜살같이 달려오죠."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었어요?"
"할배, 아니. 할아버지가 당 소저를 아주 극진히 모시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하셨습니다."
"...."
"비싼 걸 시켜야 체면이 안 상한다고도 하셨고요."
유은하는 마치 보란 듯 멀건 소면을 휘적였다.
"성도로 가면 대접해 드린다니까요. 아무튼. 그래서요?"
"점소이가 오면 바로 제일 비싼 거 내오라고 하려는데, 웬 이상한 놈들만 우리를 쳐다보고 기다리는 점소이는 코빼기도 안 보이잖습니까."
그래서 이상함을 눈치챘다는 이야기였다.
"이걸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지. 그냥 운이 좋다고 해야 할… 응?"
말하던 당화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리깐다.
"유 공자. 제 만두는 어디 갔죠?"
"?"
"모르는 척 마시고요!"
당화령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만두가 네 개 있으면 두 개씩 나눠 먹는 게 상식이잖아요!"
"안 먹고 있길래 제가 먹었습니다만."
"우리 방금까지 대화 나누고 있었거든요? 대체 언제 먹은 거예요?"
주먹만 한 만두는 그냥 둥글고 두툼한 밀가루빵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한입에 먹기도 힘들 텐데.
당화령이 시선을 돌려 유은하의 그릇을 바라봤다. 국물과 소면이 가득 차 있던 그릇도 어느샌가 말끔히 비어 있었다.
"…점소이."
당화령은 한숨을 내쉬며 점소이를 불러 만두와 소면을 더 시켜주었다.
자신도 소면 한 그릇으로는 배가 차지 않고, 유은하도 한참 배고파 보였으니까.
"아, 맞다. 그런데 말입니다."
"비싼 건 안 돼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까 그 잔도표국인지 하던 사람들."
유은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벽력탄을 투하했다.
"탈영병들하고 같은 무공을 익힌 것 같았습니다. 군대에 보급된 무공과 표사들이 익히는 게 같습니까?"
이제 막 한 젓가락 집어 든 당화령의 소면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
"발달한 근육이나 검을 쥐는 법이 전부 같았습니다만. 모르셨습니까?"
***
당화령과 유은하가 떠난 웅묘객잔.
그곳에 있던 무인들은 뻥 뚫린 문에 큰 판자를 기대 막았다. 주렴(珠簾)까지도 걷어버려 아예 사람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뿜어댔다.
"죽림미가(竹林美家)의 여식일까요?"
"단장이라는 자의 얼굴을 보니 그 피가 섞인 것 같기도 합니다."
"성도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으니, 미검산장(眉劍山莊)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곳의 여식이 아름답다는 소문도 들은 적 있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본 사람이 당화령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에 고을찬이 고개를 저었다.
"잡소리 그만하고 모여라.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한다."
고을찬의 명령에 시시껄렁하게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께서 약조하셨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촉왕부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애초에 촉왕부의 요청으로 시작된 작전이었다. 금천에서 생산된 금을 탈취해 촉왕부로 옮기겠다는 작전.
어차피 촉왕부로 갈 건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당연히 장부에 없는 돈, 비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디에 쓰일지는 고을찬도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걸 아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테니.
"잠시 후 신시(申時) 초에 황금을 실은 마차가 도착한다. 호위병이 평소보다 2할 적지만, 그래도 60명이 넘어."
그 많은 수를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금광을 지키고 금을 호송하는 이들은 질 좋은 장비로 무장한 병사들이니까.
일개 위소의 병사인 자신들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차에 몽혼약은 제대로 타 놨지?"
"예. 이미 실험도 마쳤습니다."
"놈들이 석반을 주문할 때 함께 깔아 놔라. 따뜻하게 데워 놓으면 차부터 들이켤 거다."
"주방에서 뜨끈하게 데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호위병들이 일제히 식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는 식사를, 일부는 황금을 지킬 게 분명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밖에서 황금을 지키는 놈들한테도 데운 차를 가져다줘."
"그 자리에서 마시는 것까지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이곳 지현께서 도지휘첨사의 명을 받고 직접 구한 몽혼약이다. 효과는 확실할 거야. 놈들이 잠들면 황금을 옮긴다."
이번에 성도로 옮겨지는 황금은 무려 일백 관(貫). 냥으로 따지면 일만 냥이다.
유은하에게 익숙한 단위로 따지면 약 375kg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른에 달하는 무인들이 짊어지고 옮기기 어려운 양도 아니다.
그리 멀리 옮길 필요도 없다. 이 웅묘객잔의 뒤뜰, 장(醬)을 보관하는 창고에 제대로 숨겨 놓기만 하면 된다.
"황금을 옮긴 뒤에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다."
그러면 1각 후 약속된 자들이 나타나 기존에 있던 병사들을 조용히 죽일 것이다. 그리고 금을 회수해 조용히 촉왕의 거처로 옮길 것이다.
"일을 마치면 곧장 성도로 간다. 촉왕부로 가면 도지휘첨사의 사람이 우리를 맞이해줄 거다."
고을찬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찾아왔다. 촉왕부에서 익힐 무공과 승진길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을찬의 상상은 암울했다.
고을찬은 아직 총기(總旗, 병사 50명을 지휘하는 직위)에 불과하다.
그래도 추후 백호(百戶)를 넘어 부천호(副千戶)까지도 승진할 인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석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런 그였기에 자신과 부하들이 무사히 촉왕부에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작전이 터무니없이 허술했으니까.
언뜻 보면 몽혼약까지 동원한 그럴싸한 작전 같긴 하지만, 후처리가 문제다.
병사들의 죽음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사라진 황금에 대한 책임은?
전부 없던 일로 덮어버리기에는 이번 일을 아는, 알게 될 사람이 너무 많다.
'전부 죽여 입막음하더라도, 누구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울… 잠깐. 뒤집어씌운다고?'
고을찬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몽혼약. 지현이 구했다고만 들었는데, 대체 어디서 난 거지?'
몽혼약이라고 다 같은 몽혼약이 아니다. 고급품은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의원마다 비전의 방식으로 제조하기도 한다.
역으로 말하면, 몽혼약으로 이 사건의 흉수를 지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번 일의 경우에는 조작일 가능성이 농후할 테지만.
고을찬은 근래 당가와 촉왕부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우연히 백호를 따라 참석한 위지휘동지(衛指揮同知)의 생신 연회에서 들었던 소문이니 반쯤 확실할 터.
'촉왕부가 당가를 쳐내려 명분을 만드는 건가? 아니면 단순한 견제?'
아마 견제일 거다. 고작 몽혼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흉수를 당가로 지목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강한 압박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자신들만 불쌍할 뿐이지.
'망할. 청성파 속가제자의 문파에라도 들어갈걸.'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군문에 투신했는지.
점점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고을찬은 도망칠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치면 가족까지도 위험해지니까.
'그래. 왕부와 당가의 싸움에 휘말렸는데 나 하나 죽는 거면 별일 아니지.'
운이 나쁘면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일.
고을찬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고을찬과 병사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배를 든든히 채운 뒤 객잔 뒤편 창고에 숨어든 유은하와 당화령이었다.
'황금?'
황금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유은하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지만, 당화령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음모에 촉왕부와 도지휘사사가 얽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으니까.
30화. 황금빛 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