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MEGACORPENMOORIM / Chapter 5 - 40-50

Chapter 5 - 40-50

40화. 함정

초 의원의 손을 잡아끌며 산길을 헤쳐 나가는 배호청. 그의 몸 이곳저곳에 감긴 붕대에서는 빨간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큭…!"

초 의원에게 치료를 받긴 했지만, 기력이 다한 탓에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허억! 배 단주. 잠시.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몸을 단련한 적 없는 초 의원도 당장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지만, 배호청은 멈출 수 없었다.

"안 된다."

"놈들 소리도 안 들리지 않습니까."

"흔적을 지울 틈도 없었으니 놈들은 곧 따라올 거야."

병사들이 빠르게 따라붙지 못하는 건 거대한 몸집 때문이다. 무려 수백 명이 대오를 유지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속도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느린 속도로도 배호청과 초 의원을 착실히 압박해 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지치면 후방과 교대를 통해 체력을 온존할 수 있었으니까.

"당장 규모를 보면 천호소 한 개가 몽땅 동원된 게 틀림없어."

"천호소라니."

병사 1천을 지휘하는 정천호는 지현보다도 품계가 높다. 초 의원은 그런 자가 직접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대체 그들이 왜 우리를 쫓는 겁니까?"

"그 몽혼약 때문이겠지."

몽혼약은 초 의원이 아니라 유은하가 만들었다. 심지어 배호청이 금천현의 지현에게 배달하는 과정에서 출처도 숨겼다.

조사하더라도 유은하나 초 의원이 아닌 영란파로 흔적이 이어지도록 해 놨으니,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쫓는다는 건….'

배호청이 핏기가 가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쫓는 병사들에게 이미 진실 따윈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마 몽혼약을 이용한 계획이 뭔가 어그러졌거나, 성공했다 하더라도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지목된 게 초 의원과 자신일 테고.

'이자도 내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포박되어 끌려갔겠지.'

배호청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걸음을 떼는 초 의원을 곁눈질했다.

병사들의 습격에서 겨우 몸을 빼낸 배호청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초 의원의 약방을 찾았다.

하지만 웬걸.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길로 초 의원을 데리고 도망쳤다. 처음에는 목적지도 없이 그저 무작정 도망쳤지만, 현을 나선 뒤 초 의원이 한 말 덕에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이봐. 초서훈. 진짜 이 길이 맞아?"

"예. 저도 약초 캐느라 산을 탄 경험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방향이 맞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런 산골짜기에 사실 줄은 몰랐는데."

신묘한 약을 개발하고 몽혼약까지 만들어 준 유은하라는 공자. 배호청은 지금 그 공자가 있는 은하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비밀리에 약을 만드는 마을이라 외진 곳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심하잖아."

배호청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입술을 짓씹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산길이 워낙 복잡하고 험한 탓에 병사들의 추격은 잠시 뿌리친 듯했다.

"얼마나 남았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대로 반나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럼 이쯤에서 흔적 좀 지워야겠군."

배호청은 초 의원에게 눈이 쌓이지 않은 바위 밑에서 쉬라고 한 뒤 주변을 돌아다니며 흔적을 지웠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지우고 남쪽으로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 마치 소금현 방향으로 내려가는 듯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더욱이 눈발 가득한 날이 이어지는 중이니 약간의 시간만 벌어도 자연이 알아서 흔적을 지워줄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며 흔적을 조작하는 배호청.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초 의원이 감탄했다.

"…능숙하시군요."

"사파 나부랭이들은 이런 거라도 잘해야 살아남지."

"흔적을 지우면 은하촌에 폐 끼칠 일도 없겠습니다."

"...."

배호청은 초 의원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작업을 마쳤다. 은하촌에 꼬리를 달고 가는 건 둘째 치고, 그 역시 병사들을 완전히 따돌리고 싶은 마음은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저 병사들이 보여준 행동거지를 생각한다면.

'흔적을 놓쳐도 포기하지 않을 놈들이다. 이 인근을 죄다 뒤집으면 뒤집었지 절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터.'

물론 그조차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입을 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기에 배호청은 초 의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 같은 놈들.'

병사들의 습격으로 본래 철랑단이었던 동생들은 물론이고 철죽파에서 덩치를 불려줄 목적으로 붙인 놈들까지 죄다 죽었다.

잡혀간 게 아니다. 그 자리에서 전부 죽었다. 마치 죄목은 자신들이 알아서 붙일 테니 죄인의 시체 역할이나 하라는 듯이.

으득-

배호청의 입에서 살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러운 세상.'

배운 거라고는 몸 쓰는 일뿐인데 가진 것 없고 인맥도 없던 배호청은 병사조차 되지 못했다.

병사는 어디 아무나 하나? 제 돈으로 갑옷과 무기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자들이나 하는 거지.

뒤늦게 무관에서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일류 고수가 되었지만, 그때도 군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일류 고수라면 백호나 못해도 총기 정도는 될 테지만, 그것도 다 인맥이 있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니까.

그래서 그냥 무림에 투신했다. 인근 유명한 사파인 철죽파에 들어가니 자신을 쓰레기 보듯 했던 병사들은 못 본 척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어찌나 통쾌하던지.

하지만 결국 사파는 사파, 가진 것 없는 평민 나부랭이는 그 근본을 바꿀 수 없었나 보다.

이제는 아예 몰이 사냥당하듯 병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걸 보면 말이다.

배호청은 우묵하게 파인 눈으로 저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멀리 작게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아하니 밥때는 지킬 요량인 듯했다.

"초 의원. 일어나라."

"조금만 더 쉬면 안 되겠습니까?"

"추위에 몸이 굳으면 더 힘들어진다. 놈들이 잠시 멈춰 선 지금 부지런히 도망쳐야 해."

"끄응."

초 의원이 신음하며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짚고 일어났다.

"저도 제법 산을 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무인에게는 안 되는군요."

"내공이 없으니까."

"무사히 도망치면 뭐라도 좀 배워야겠습니다."

어차피 스승님의 유지는 완수하지 못한 채 도망자가 되었으니, 의술이 아니라 무공을 공부해도 뭐라 할 자는 없으리라.

'그런데 유 공자께서도 무공은 잘 모르는 눈치셨는데.'

배호청에게 배워야 하나?

'어찌 됐든 유 공자님을 만나게 되면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초 의원은 유은하가 준 지도를 꽉 쥔 채 배호청을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고 그 위에 눈발이 소복하게 쌓인 후.

"쯧. 놓친 건가."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남자, 정주호의 저택을 드나들었던 정천호 왕죽겸이 자리에 나타났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자전마견의 흔적을 놓쳤으니 그 두 놈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왕죽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의원 하나에 일류 나부랭이뿐이니 분명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예."

"작은 마을은 보고할 것 없이 전부 뒤져라. 놈들을 발견하면 즉시 생포하고, 없다면 알아서 주머니 채워도 좋다. 작전에 지장 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알겠느냐?"

왕 정천호의 말에 부하들이 씨익 웃으며 고개 숙였다.

곧 1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인근을 샅샅이 뒤지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들은 금천현의 깃발이 펄럭이는 은하촌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

시간을 돌려, 초 의원과 배호청이 아직 산으로 도망치지 않은 시각. 이제 막 도지휘첨사 정주호가 저택으로 복귀한 그 야심한 때.

"제법 의젓한 줄 알았더니만 아주 망아지가 따로 없구나."

당가 태상가주 당웅건은 따뜻하게 불을 지펴 놓은 자신의 방에 유은하를 앉혀 놓고는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어찌 사내가 그리 가볍게 뛰어다니느냐. 빠르게 움직이더라도 눈빛만은 무겁고 진중해야 하는 게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노야."

"쓰읍! 이놈이!"

당웅건은 드디어 유은하가 혼원심결과 구천신공 중 결정을 내리고 자신을 찾아온 거라 생각했다.

당웅건이 둘 중 하나를 가르치기 시작하면, 이제 둘은 정식으로 사제지간이 되는 것이다.

유은하의 괴물 같은 재능을 눈여겨보던 당웅건에게는 요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지만.

"지금 도지휘첨사랑 주루에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유은하의 말에 당웅건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도지휘첨사와 주루에?"

이미 가주인 당필웅에게는 보고가 들어갔지만, 태상가주가 되며 가문 일에서 한발 물러난 당웅건에게는 아직 소식이 전달되지 않은 상황.

그래도 지난 며칠 사이 은하상단 주변에 촉왕부의 끄나풀들이 맴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손을 뻗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빠르군.'

심지어 그냥 하인을 시킨 것도 아니고 도지휘사사의 3인자라 할 수 있는 도지휘첨사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당웅건에게도 꽤나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당문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에게 납품하면 훨씬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거라더군요."

"허. 고작 그 이야기를 도지휘첨사가 직접 와서 했어?"

당웅건은 놀란 듯 그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지휘첨사면 무려 정3품 고위 관료다. 그런 자가 일개 상인을, 그것도 이제 막 지학이나 됐을까 싶은 소년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니.

내심 악질적인 음모가 얽힌 게 아닐까 의심한 당웅건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놈들이 정말로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당웅건은 당연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촉왕부가 빼돌리려다 유은하에게 탈취당한 염초 때문이리라.

중원 곳곳에 황제의 눈과 귀라는 감찰어사가 돌아다니니, 그들에게 들키기 전까지 어떻게든 당문을 거꾸러뜨려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도지휘첨사가 직접 행차했다는 건 조금 뜬금없다 싶었는데.

"도지휘첨사 막내아들이 성산으로 심한 포열을 이겨냈다며 찾아온 거긴 한데, 애초부터 그건 구실 같았습니다."

마침 유은하의 입에서 어찌 된 일인지 그 연유가 밝혀졌다.

"쯧. 딱 적당한 구실이긴 하구나. 그자가 자기 아들들은 끔찍이 아낀다고 하니."

"아들을 아낀다라…."

순간 유은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당운건은 못 본 척했다. 유은하와 만나고 지금까지 그의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자가 네게 배반을 종용할 이유라 함은…."

당웅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나마 민심을 돌리려는 게로구나."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그게 과연 효과가 있습니까?"

잠깐이라면 이슈로 대중의 눈을 가릴 수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얼마 가지 않는다.

대중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극적인 이슈를 터뜨리거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도지휘사사와 촉왕부에는 그 어느 쪽도 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 네 약을 받아 백성들의 환심을 산다 한들 얼마 가지 못할 게다. 당문은 민초 사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니."

"그렇다면 순전히 약의 효과만 보고 그것이 탐나서 제안한 겁니까?"

"아니. 그건 또 아닐… 근데 이놈아. 너는 상대가 왜 그런 제안을 한 건지도 모르고 넙죽 받아들인 뒤 내게 쪼르르 달려온 게야?"

당웅건의 물음에 유은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이걸 노야께 알려드리면 당문이 이득을 보지 않겠습니까? 위험을 피하든 반격을 하든 해서 말입니다."

"...."

마치 '진심이냐?'라고 묻는 듯 유은하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당웅건.

그는 이내 유은하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재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자란 녀석이라더니, 이놈도 예외는 아니군.'

분명 유은하와 당문이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호의에 기대어 도지휘첨사와의 일을 쪼르르 일러바치기에는 유은하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았다.

도지휘첨사와의 일이 사실이냐는 기본적인 의심부터 진짜로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을까 하는 떨어지지 않을 낙인까지.

훗날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게 된다면 오늘 일이 유은하의 발목을 두고두고 잡게 될 터였다.

'도지휘첨사 그놈도 이걸 아니까 이 아이에게 가볍게 접근한 걸 테고.'

하지만 유은하는 모든 게 상관없다는 듯 날이 밝기도 전에 당웅건에게 달려왔다.

'애정과 믿음이 고팠던 겐가.'

은혜는 두 배로 갚는다는 당문과 퍽 어울리는 인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저 성격이 발목을 잡을 게 분명했기에. 그 정도로 중원과 무림이라는 세상은 비정한 면이 있었기에.

'그 뜻을 안고 가려면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지.'

저쪽에서 신뢰를 보였는데 의심할 정도로 당문은, 당웅건은 속이 좁지 않았다.

"그래. 도지휘첨사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내 직접 알아보마."

당웅건이 수염을 쓸었다.

"아마 민심을 저들 쪽으로 잠깐 돌리려는 듯한데, 그때를 기점으로 무슨 일이든 벌이려는 거겠지."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요?"

"글쎄. 그것까지는 더 알아봐야 하겠구나. 하지만 당문이 쉽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곧장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냐. 그건 그렇고."

당웅건의 강렬한 눈빛이 유은하에게 향했다.

"슬슬 결정은 내렸느냐?"

"아, 예."

유은하가 품에서 혼원심결과 구천신공 비급을 꺼냈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41화. 함정

두 비급 중 유은하가 가리킨 건 혼원심결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개 다 익히고 싶지만…."

"머리 좋은 놈이 욕심도 많기는. 하나부터 제대로 익히고 다른 걸 익혀도 늦지 않다."

당웅건은 그 마음을 진즉 짐작했다는 듯 껄껄 웃었다.

"두 무공 모두 특별한 심상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지, 내공이나 신체를 급격히 바꾸는 건 아니니 얼마든지 함께 익힐 수 있을 게다."

"무공 중에는 함께 익힐 수 없는 게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이유는 무공에만 있는 게 아니지."

당웅건이 화로의 숯불을 뒤적였다.

"이 화로는 철만 40년을 만져 온 장인이 직접 내게 선물한 것이다. 어때 보이느냐?"

유은하의 시선에는 그저 튼튼해 보이는 화로였다. 하지만 은하촌 집에 있는 화로와 비교하니 문양이 지극히 화려하고 정교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튼튼해 보이는데 화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 수십 년 동안 철을 만져 온 그 친구는 겸사겸사 조각하는 법에도 통달하게 됐지. 하지만 바느질은 영 젬병인 놈이야."

당웅건은 재밌는 기억이 떠올랐는지 껄껄 웃었다.

"물론 평생을 바쳐도 명장은커녕 쓸 만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그 친구는 재능이 넘치니 그럴 수 있었던 게야."

그 말에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의 재능이 충분하면 여러 무공을 대성할 수 있지만, 보통은 힘들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뿐만이 아니라 무공도 서로 통하는 것들이 있다. 비슷한 묘리를 지녔다면 얼마든지 같이 익힐 수 있지만, 아예 지향하는 바가 다르면 익히기가 극히 난해하지."

물론 그조차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면 어느 정도 융화가 되긴 한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유은하에게 해줄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두 비급 모두 외웠을 테니, 하나라도 제대로 익힌 후에 여유가 된다면 다른 것도 익히거라."

"하지만 당문 소유 무공인데,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또 뭐냐? 네가 보여준 신뢰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거라."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유은하 쪽으로 비급을 밀었다.

"어차피 사본이니 그것들도 네가 갖고."

"…감사합니다."

"오냐."

고개를 끄덕인 당웅건이 잠시 창문을 열고 창밖을 확인했다. 이미 저 하늘 높이 걸려 있던 달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 쉬라 하고 싶지만… 너도 몸이 달았을 테지?"

다 안다는 듯한 당웅건의 말에 유은하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봐라. 이미 넌 내공을 능숙히 인도하고 전신 혈맥이 탄탄대로이니 진기를 이끄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공을 이끄는 것보다 혼원심결을 되뇌며 너만의 심상을 그려나가는 데 몰두하거라."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문명인 크라운에서 살다 온 유은하에게는 심상을 그리는 게 무엇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비급을 읽으며 작은 영감이 잡힐 듯 말 듯한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긴 했다.

유은하는 당웅건의 말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혼원심결에 적힌 그대로 내공을 순환시켰다.

당연히 내공을 움직이는 건 아스트랄 유니온의 몫. 그사이 유은하는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빠져들었다.

"...."

물론 단번에 거대한 심상이 완성된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내공이 혈맥을 따라 휘돌며 그 덩치를 점차 불려 나가는 게 신기할 뿐.

오히려 유은하의 의식은 명상이 아닌 내공에 점점 쏠려만 갔다.

'자전마공으로 내공 순환시켰을 때랑은 확실히 다르네.'

반쪽짜리 자전마공, 그것도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조로 부작용을 제거한 혈도를 통해 내공을 순환시켰을 때는 내공이 분명한 뇌속성을 품었다.

유은하는 그 속성이 빠르고 파괴적이지만 사방으로 뻗어 나가려는 성질 때문에 먼 거리까지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운 성질이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혼원심결로 다듬어지는 내공은 그야말로 아리송함의 극치였다.

'진짜 우주 같아.'

불규칙함과 무질서의 집합체인 것 같은 우주.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 안에도 명백한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크라운에서는 그 질서를 연구하여 행성과 항성계를 넘어 마침내 은하계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내공에도 그런 질서가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무리 집중해 살펴봐도 혼돈 그 자체밖에 보이지 않는다.

혼원이라는 것이 본래 혼돈과 질서의 집합체라 비급은 말하고 있지만, 질서만 온데간데없다.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그런 불안감이 불쑥 치솟으며 내공이 불안정하게 출렁인 그때.

"끌끌. 잘하고 있으니 흔들리지 말거라."

당웅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가 비슷해서일까? 신기하게도 그 목소리는 은하촌에서 기다리고 있을 할아버지의 목소리와도 겹치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유은하를 스치고 지나가자, 신기하게도 흔들리던 내공이 안정되었다.

아스트랄 유니온은 그 어떤 보고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유은하는 안정된 내공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별을 볼 수 있었다.

혼돈 속에서 홀로 중심 잡은 채 기준이 되는 별 하나. 유은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 바로 서야 하는 것. 자기 자신이라는 중심이었다.

'나는….'

실험체로 태어나 거짓된 삶을 살아온 끝에 궤도 의료기지째로 폐기되어야만 했던 유은하. 그 껍데기는 사라지고 자신은 중원에서 비로소 스스로 인연을 맺고 끊을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

유 노인과 함께 지내며 마을을 돌본 것도, 청화를 동생으로 들인 것도, 당문과 연을 맺은 것도, 도지휘첨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당 노야와의 의리를 지킨 것도.

처음에는 당문에 종속되기 싫다며 제자가 되길 거절했음에도 이렇게 인정에 이끌려 당 노야에게 무공을 배우게 된 것까지.

전부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이었으며 저 별은 그 상징이자 오롯한 자신이다.

유은하가 눈을 뜨자 눈을 통해 한 줄기 별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허. 허허. 허허허. 이 미친놈을 보게. 허허허허."

그 앞에서 당웅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느냐면.

"너, 내 양자로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당가의 족보가 개족보가 될 만한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꺼내 들 정도였다.

물론 잠시 후에 그 말을 철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유은하는 그렇게 혼원심결에 입문한 지 한 시진 만에 1성에 도달했다.

"당분간은 몸을 단련하며 심결을 계속 수련하거라. 이거, 네놈에게 알맞은 무공을 찾으려면 서고를 탈탈 털어야겠구나."

"일전에 보여주신 무공은 안 익히는 겁니까?"

"그 난해하다는 혼원심결마저 단번에 익히는 놈한테 이류 무공들이 무슨 소용이냐? 그건 네 알아서 심심풀이로 익히고, 제대로 익힐 건 따로 찾아봐야지."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금이 새벽이라는 사실도 잊은 듯 당문의 비술이 모여 있는 천년서고로 뛰쳐나갔다.

"이거 다른 곳에까지 손을 벌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일단 수공은 무조건 우리 당문의 것으로…."

차디찬 새벽 공기를 뚫고 저편으로 사라지는 당웅건의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남아 울려 퍼졌다.

"거참. 성격 급한 건 우리 할아버지랑 똑같으시네."

유은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작약각 숙소로 복귀했다.

'할배 보고 싶네.'

당화령과 함께 은하촌을 떠난 지 이제 스무날 정도 됐다. 겨울도 점점 깊어만 가는데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청화도 있으니 홀로 적적하진 않으시겠지.'

식량과 장작도 넘칠 만큼 있고 약도 종류별로 남겨두고 왔다. 일문환 같은 저급한 약이 아니라 죄다 멸모환 같은, 중원 문명 수준에는 오파츠라 불러도 손색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혼원심결을 익힌 후, 뒤늦게 당웅건에게 구배지례를 올리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비급을 받는 등 여러 일이 있었다.

하지만 유은하의 일상은 무공에만 치중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유은하는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보다 은하상단 점포에 나가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성산 판매량은 이제 안정됐네."

판매량 기록을 보며 유은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산은 하루에 5천 첩이나 팔리는 은하상단의 주력 품목이 되었다.

가격이 워낙 싼 탓에 큰 매출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원가를 고려하면 그마저도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산을 비롯한 여러 약의 소문을 들은 다른 상단이 접근해 물건을 대량으로 팔아달라 사정하는 중이기도 했다.

'아직 은하상단은 자체적으로 상행을 나설 규모가 아니라는 게 아쉽네.'

한 지역에 터를 잡고 물건을 파는 것도 좋지만, 다른 지역에 물건을 운송해 판매하지 못하면 상단은 성장하기 힘들다.

그게 다른 사람이 생산한 물건을 떼다 팔든, 자체적으로 생산한 물건을 운송해 팔든 말이다.

'스승님께 당문의 무사를 빌려달라 하면 흔쾌히 빌려주시긴 하겠지만….'

현재 성도의 상황이 심상치 않기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저께도 당문을 감시하는 병사들이 여럿 발견됐다고 했지.'

감히 사천에서, 그것도 당가타 한복판에서 당문을 감시하는 병사가 나왔다는 건 사태가 극으로 치닫고 있음을 의미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촉왕부든 도지휘사사든 움직일 터. 당문을 감시하는 건 그때를 위함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상단 확장은 어떤 식으로든 결판 난 후에 해야겠네.'

돈이라면 충분히 벌어들이고 있고 촉왕부와 당가 사이의 갈등이 사그라든다면 탈취해 온 황금에 대한 정산도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이면 된다.

'그러고 보니 도지휘첨사가 장원이라는 말을 했었지.'

현재 유은하는 당문에 식객처럼 얹혀사는 처지다. 하는 일도 있고 당웅건에게 무공도 배우니 완전히 식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자신만의 거처가 없는 건 사실이다.

'은하촌을 거점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많긴 해.'

은하촌에만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성도의 밀집한 인구와 발달한 교통을 체감하니 그 차이가 확연했다.

사천 역시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지형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천 안에서라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게 아닌가.

성도에 이어 인근의 부에도 은하상단의 물건을 퍼뜨리고, 뒤이어 금천현 같은 작은 현 구석구석까지 나아갈 생각을 하니 의욕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약 말고 무인을 대상으로 한 약도 슬슬 연구해 봐야 할 텐데.'

유은하가 그렇게 생각하며 장부를 작성하던 그때.

"공자님. 소작농 박 씨가 왔습니다."

밖에서 하인이 그렇게 알려 왔다.

"응? 일단 들어와."

유은하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 씨. 그는 일전에 포열에 걸린 아이를 안고 온 남자로, 유은하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점포에 들러 이런저런 소문을 전해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안색은 평소보다 나빴다. 무언가를 잔뜩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또 아이가 아파?"

유은하의 물음에 박 씨는 손사래를 쳤다.

"아유. 아닙니다! 그날 이후로 아주 건강합니다."

아이 이야기에 잠시나마 표정이 핀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공자께서 주신 돈으로 성산도 여섯 첩씩이나 사놨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래?"

유은하의 물음에 박 씨가 곧장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일전에… 금천현 인근 산에 은하촌이라는 마을을 이야기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응.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나왔었지."

"그, 공자께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떤지 저어됩니다만….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 무슨 조심?"

유은하의 물음에 박 씨가 목소리를 낮췄다. 고개를 잠시 두리번거리는 게, 누가 듣지 않을까 바짝 긴장한 모양새였다.

"제가 소작 부치는 땅이 도지휘첨사님의 땅 아니겠습니까?"

물론 유은하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냥 소작농이라고 하니 누군가의 땅을 부쳐 먹고 사나 했을 뿐.

"도지휘첨사 대인네 막내 도련님도 포열을 앓아 쇤네가 마님께 성산을 써 보시라 말씀드렸죠."

그렇지 않아도 도지휘첨사쯤이나 되는 사람이 어떻게 성산을 사서 쓸 생각을 했나 싶었는데, 설마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래서 도련님 병이 나아 고맙다며 제게 은자를 내려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받고 밖으로 나오는데."

박 씨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왕죽겸 천호장이 첨사 나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청성산 너머로 병사를 보내 무슨 마인을 찾는다는데, 겸사겸사 화전민 마을 약탈도 허락한다는 말이었습죠."

그 말에 유은하의 몸이 덜컥 멈췄다.

"그게 정말이야?"

"물론입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게 거의 엿새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천호장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나 봅니다."

유은하는 숨조차 죽인 채 박 씨 이야기에 집중했다.

"마인의 행적은 놓쳤는데, 철죽파인지 뭔지 하는 사파 끄나풀을 쫓고 있다 합니다. 그놈과 의원 하나가 은하촌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할까 여쭙는 보고였습니다."

은하촌이라는 말에 유은하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거, 정확해?"

"제가 마당을 쓸면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박 씨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으로 유은하에게 말했다.

하지만 박 씨의 말은 유은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병사들이 마을을 약탈하려 든다는 이야기만이 뇌리에 맴돌 뿐.

유은하는 박 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콰릉!

유은하가 달려간 자리에는 벽력이 내려친 듯한 소리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유은하를 보러 온 당화령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

"유 소협!"

당화령이 유은하를 불렀지만, 유은하는 벌써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진 후였다.

전력으로 달려간 유은하는 성도를 빠져나가 청성산 방향으로 사라졌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은하가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는 당화령.

하지만 이내 점포 밖으로 나온 박 씨의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할아버님부터, 아니. 하다못해 나부터 찾았어야지!'

섭섭함이 밀려들었지만, 유은하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마을과 유 노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당화령이 직접 봤으니까.

'천호가 얼마나 많은 병사를 이끌고 갔는지도 몰랐겠지.'

박 씨도 천호가 병사를 이끌고 산을 뒤지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습격이 기정사실인 것도 아니다. 은하촌은 외진 곳에 있긴 해도 엄연히 금천현에 속한 마을. 그 상징인 깃발까지 꽂힌 곳이다.

당가의 무사들을 빌려 데려가는 것보다 홀로 빨리 달려가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을 테다.

빨리 도착하면 병사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을 수도 있다. 성도에 은하상단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퍼지고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논의 정도는 해도 될 텐데!'

당화령은 급히 당웅건을 찾아 태상가주가 머무는 독선전(毒仙殿)으로 달렸다.

하지만 독선전에서는 당웅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왕전에도 당필웅과 당웅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42화. 함정

은하촌 구석에 있는 유은하의 집. 유 노인과 청화뿐이던 그 집에 손님이 둘이나 생겼다.

흔적을 지우며 은하촌에 도착한 초 의원과 배호청이었다.

"고생한 사람들을 쉬게 해주고 싶네만, 이 노인네가 궁금한 건 못 참겠으니 이해해 주게."

"아닙니다. 어르신. 곧장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초 의원이 고개 저으며 유 노인에게 그간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병사들의 습격부터 도망까지 전부.

그 이야기를 들은 유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본 초 의원과 배호청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추적은 따돌렸으니 병사들도 설마 우리가 이곳에 왔는지 모를 겁니다."

"유 공자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분께서 저희를 거절하신다면 두말없이 마을을 떠나겠습니다."

초 의원과 배호청이 유 노인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하지만 현재 유은하는 마을에 없는 상황. 언제 돌아올지, 아니. 돌아오기는 할지조차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병사들이 산을 들쑤시고 있다니. 유 노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은 이 옆을 쓰면 되니, 일단 푹 쉬고 난 후 이야기하세."

지난번 청화네 마을 사람들을 흡수한 탓에 급히 지은 통나무집이 몇 채 남았다. 유 노인은 초 의원과 배호청에게 그 집을 내어주었다.

화로에 숯불을 받아 들고 넘어간 두 사람은 마른풀을 넣어 만든 이불을 덮고 뒤통수를 딱딱한 목침에 대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두 사람을 내보낸 유 노인은 숯불이 발갛게 타오르는 화로를 한동안 바라봤다.

"할아버지.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

청화가 볶은 콩을 간식거리로 가져다 유 노인 앞에 놓으며 물었다. 하지만 유 노인은 한동안 입을 닫은 채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숯불이 약해질 때쯤. 청화가 부지깽이로 숯불을 뒤적일 때가 되어서야 유 노인은 입을 열었다.

"청화야."

"네. 할아버지."

"넌 이 마을이 좋으냐?"

유 노인의 물음에 청화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 마을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요?"

유은하 덕분에 먹을 것과 땔감이 풍족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검술과 글까지 익히게 하니, 모두 제 일에 몰두하느라 하루가 가는 줄 모른다.

겨울임에도 마을에 이렇게 활력이 돌 수 있다는 걸 청화는 처음 알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시는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뭐든 같이 고민하면 낫잖아요."

"글쎄다."

유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고민을 나눈다기보단 한탄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저 둘을 쫓는다는 병사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듣지 않았느냐."

"금천현에서도 막 장원을 습격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대로에서도 검을 휘둘렀다고 했죠."

"그래. 무려 금천현에서도 그런 짓거리를 하는 자들이다. 이런 산골짜기 마을이 무사할 것 같으냐?"

"하지만 우리 마을에는 깃발이…."

청화는 말을 하다 말았다.

분명 깃발이 있긴 하다. 저 깃발은 은하촌이 산속에 흩어진 수많은 작은 마을과는 다르다는 증거다.

금천현에 속한, 제도권 안에 들어 병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정작 마을을 보호해야 할 병사들이 금천현을 휘젓고 다녔다. 초 의원과 배호청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그들이, 이 작은 마을을 그냥 내버려 둘까?

저 둘이 이 마을 안에 숨었든 그저 스쳐 갔든, 일단 뒤엎고 볼 게 분명했다. 겸사겸사 사리사욕도 채우면서.

지현마저 막지 못한 병사들의 광폭한 행보를 대체 누가 막겠는가.

그나마 금천현에 가까운 마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곳은 첩첩산중 산골짜기.

아예 살인멸구를 하려 들 수도 있다는 건 산사람의 피해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중원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당장 초 의원과 배호청을 마을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유 노인이 먼저 나섰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청화는 유 노인이 저토록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저들이 은하촌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아니. 이 깊은 산속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은하촌은 병사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흔적을 지웠다 하니,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들 이야기를 듣지 못했느냐? 놈들은 죄를 뒤집어씌울 제물을 원하고 있다. 필시 이곳까지 들이닥칠 게야."

유 노인의 한숨이 짙어졌다. 산골짜기에 은밀히 자리 잡은 마을. 범죄자들의 은거지라 하기에 딱 좋지 않은가?

"어떻게든 병사들을 달래고 넘어가야 할 텐데, 그 방법을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유 노인의 한숨에는 60년 넘게 살았으면서 이럴 때 필요한 지혜조차 꺼내지 못하는 모자란 놈이라는 회한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청화도 고민해 봤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한겨울로 접어든 이 혹독한 날씨에 마을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저항할 수도 없다. 상대는 무려 정천호가 직접 지휘하는 병사들이니까.

청화의 시선이 벽 너머, 초 의원과 배호청이 곯아떨어진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저 두 사람을 내준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그들은 희생양을 찾고 있다. 배호청과 함께하던 사람들도 다 죽었다지 않는가.

놈들은 이 은하촌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일 게 분명했다. 그러고는 산적 소굴이었다느니 죄인과 야합한 놈들이었다느니 이유를 가져다 붙이겠지.

"끄응."

유 노인은 눈이 뻑뻑한지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끔벅거렸다. 그제야 밤이 깊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화는 서둘러 유 노인의 침상에 이불을 폈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주무세요."

"지금 잠이 오게 생겼느냐."

"오라버니가 말씀하시길,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몸도 머리도 잘 돌아간다고 했어요."

"쯧."

유은하 이야기가 나오자 유 노인은 마지못해 청화가 펴 놓은 이불 위에 누웠다.

"너도 어서 가서 자거라."

"네."

청화는 숯불을 화로에 고루 편 뒤 유은하가 사용하던 침상으로 올라갔다.

'이래서 오라버니께서 무공을 원하신 걸까?'

힘이 없으니 위기가 닥쳐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무력감에 청화는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

.

.

그렇게 청화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새벽 일찍 창술을 수련하기 위해 마을을 나섰던 유삼삼이, 저 멀리 우르르 움직이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에그! 저게 뭐야!"

수백 명은 족히 됨직한 자들이 번쩍거리는 창칼로 무장한 채 마을로 향하는 모습.

보고만 있어도 살 떨리는 그 광경에 유삼삼은 그대로 등을 돌려 은하촌을 향해 달렸다. 유삼삼이 물어온 소식에 마을에는 비상이 걸렸다.

"놈들은 어디쯤 있더냐?"

유 노인의 담담한 물음에 유삼삼이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삿갓 봉우리 너머에서 올라오는 걸 봤으니, 아마 오늘 저녁쯤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빠르게 이동해도 세 시진은 걸리는 거리. 병사들이 행군한다면 족히 대여섯 시진은 걸리리라.

하지만 한 마을이 피난길에 오르기에는 그것조차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겁먹을 필요 있소? 우린 이제 금천현에 속한 리(里)인데."

유이오의 말에 유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기 두 사람 알지?"

유 노인이 죄인처럼 고개 숙인 초 의원과 배호청을 가리켰다.

"그야 당연히 알지요. 은하 손님이라고 했잖수."

"저들이 흉흉한 소식을 들고 왔다. 병사들은 지금 금천현에서 일어난 난리를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는 놈들이야."

유 노인의 말에 자리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패도 없는, 짐승 취급받는 산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니 '희생양을 찾는 병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글쎄…."

유 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먹구름 낀 하늘을 바라봤다. 곧 눈이 펑펑 내릴 듯한 궂은 날씨였다.

"아패가 있으니 소금현 방향으로 내려가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면 되지 않겠수?"

"그럼, 저 병사들이 순순히 우릴 놔주겠느냐?"

유 노인의 말에 유이오는 입을 닫았다. 병사들이 작정하고 왔다면 자신들은 다른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냥당할 게 뻔했다.

삼삼오오 흩어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게 최선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도망치면….'

'뭐가 남지?'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건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만 가득했던 시절. 미래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이 짐승처럼 먹을 것과 땔감을 찾아 산을 돌아다니던 시절.

꽤 오래전인 것 같지만, 그건 고작 반년 전에 불과했다. 유은하가 마을에 온 뒤 하루하루가 너무 풍족하고 행복하여 그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뿐.

그리고, 절대 돌아가기 싫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했다.

모두가 그런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떠날 사람은 떠나거라."

유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난 여기서 싸우련다."

"할배요. 은하가 알면…."

"청화 넌 은하 손님들과 함께 성도로 가서 은하를 찾아. 그리고 절대 찾아올 생각일랑 말라고 단단히 일러둬라."

"할아버지!"

"다들 마찬가지야. 흩어진 뒤에 어떻게든 성도로 가. 은하가 아닌 척해도 정 많은 아이니 어떻게든 너희를 거둬줄 거다."

마을 하나를 뒤바꿔 놨는데, 도망쳐 살아남은 몇몇을 못 거둘까.

마을 사람 중 몇이나 살아서 성도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 노인은 분명 유은하가 남은 이들을 거두어 줄 거라 여겼다.

"은하 발목이나 잡는 이 늙은이는 여기서 뒈지는 게 맞아."

유 노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60년 넘게 무언가를 버려 삶을 연명해온 노인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자신이 버려진다는 게 지금까지의 선택과 다를 뿐.

"청화야. 그놈 옆에 딱 붙어 있어라. 괜한 짓 말게. 그게 네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청화를 위하는 말인 것 같았지만, 동시에 유은하를 위한 말이기도 했다.

상대는 촉왕부 병사. 제아무리 유은하가 당가의 아가씨와 친해졌다 하더라도 섣불리 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아닌 척해도 책임감이 강한 유은하라면 청화를 보호하기 위해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아예 잊으라 해라. 이 노인네랑 산골짜기 마을일랑 영영 잊고 큰물에서 놀라고. 그리고 청화 너도 마찬가지야. 넌 이런 곳에서 썩을 아이가 아니야."

유 노인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돌아서다가 잠시 멈춰 섰다.

"창고 구석에 은하 주려고 잘 갈아 놓은 도끼 하나 있다. 그거 가지고 썩 꺼져."

유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목책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

유 노인의 집 앞에 모여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도망치느냐.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느냐.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에라이."

유삼삼이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창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형인 유삼이에게 말했다.

"형은 애 데리고 도망가슈."

"뭐?"

"난 무릎이 성치 않아 멀리 못 가니, 여기 있어야지. 별수 있겠수?"

"...."

"거, 조카 머리 꽤 좋더만. 청화 선생한테 육포도 두 번이나 얻어먹고. 잘 키우쇼."

유삼삼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 노인을 뒤따라 목책으로 향했다.

"...."

"...."

초 의원은 마을 사람들 틈에 섞이지도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의도한 바가 절대 아니었으나, 자신 때문에 멀쩡한 마을 하나가 사라지게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산을 헤매다 얼어 죽는 게 나았으리라.

"배 단주. 차라리 지금이라도 떠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배호청이 고개 저었다.

"순진한 생각 마라. 병사들이 이 마을을 그냥 둘 것 같아?"

"그들도 병사 아닙니까?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창칼을 든 병사!"

"퍽이나."

그렇게 망연자실해 있는 초 의원과 입술을 짓씹던 배호청에게 청화가 다가갔다.

청화의 손에는 큰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유 노인 말에 따라 함께 성도로 떠나려는가 싶었지만, 청화는 보따리를 배호청에게 넘긴 채 한 걸음 물러났다.

"두 분께서는 성도로 가주세요."

"소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와 배 단주가 마을을 떠나면…."

초 의원의 말에 청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여기 남을 거예요. 성도는 두 분만 가주세요."

살아서 성도까지 간다면 분명 유은하와 만날 수 있을 거다. 유은하와 만난다면 그가 어떻게든 의식주를 책임져 주겠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화가 파악한 유은하라는 사람은 자기 울타리 안에 들어온 이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살아서 성도에 도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초 의원과 배호청 발목이나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느니 두 사람만 따로 보내 유은하에게 말을 전하는 게 백배 나았다.

"어서요. 식량과 은자를 넉넉히 넣었으니, 어서 가세요."

"소저. 맞서 싸우는 건 개죽음이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남겠다는 겁니까?"

배호청의 물음에 청화는 뭔가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청화의 심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억울함'이었다.

유은하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눕고 칼이 날아드는 대로 쓰러지는 그런 삶을 살았을 테다. 그저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게 뭔지 한 번 겪어보니, 그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은 정말로 짐승의 삶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영영 사람의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다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그런 삶이 자신의 영혼에 낙인처럼 새겨질 것만 같은 직감이.

그래서 청화는 유 노인의 말도 무시한 채 스스로 무기를 들었다. 유은하가 쓰라고 준 단검이 청화의 손에서 시퍼런 빛을 흘렸다.

"오라버니께 전해주세요.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流離之子)니, 절대로. 절대로 다른 생각 마시고 당문에 꼭 붙어 있으시라고."

청화는 유은하와 함께 마을 사람들 가르칠 준비를 하며 읽었던 시경의 구절을 내뱉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건…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이다.

유은하라는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 후에야 객지라는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발붙이고 등 누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다 고향이 아니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고 지킬 힘이 없다면 두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이곳조차 객지다.

그동안 꿈조차 꾸지 못했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평생 몰랐을 그 기분을 알려준 유은하가 고마웠다. 죽는 건 무섭지만, 이대로 도망치고 싶지 않다. 청화는 그 심상을 문장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럼. 부디 무사하시길."

청화가 짧게 고개 숙이고는 두꺼운 솜옷을 챙긴 채 목책으로 향했다.

43화. 저항

"저건…?"

깊은 계곡을 건너고 험난한 봉우리를 올라 은하촌에 도착한 왕죽겸 부대는 흉흉함이 감도는 목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 키보다 조금 높게 세워진 목책. 앞으로는 해자를 파고 뒤로는 흙을 두껍게 쌓아 어지간한 맹수는 감히 범접조차 못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저 목책에 감도는 흉흉함은 비단 목책의 높이나 두께 때문이 아니었다.

목책 위에서 병사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그들의 눈은 두려움조차 극복한 결의와 증오가 삐져나오며 흉흉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흉흉함의 근원은 바로 그 눈빛이었다.

"짐승들이 미쳤군. 아니, 아니지. 애초에 염초를 훔친 역적들이니 당연한 일인가."

누가 들어도 억지였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억지를 부리려 온 것이었으니까.

그런 억지에 동참해야 떡고물이 떨어지는 것이기도 했으니 모두 한마음 한뜻이기도 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장군."

강 부천호의 말에 왕죽겸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봤다. 연이은 산행으로 병사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산을 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천의 병사라면 험한 산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성도에서 금천현까지 자전마견의 흔적을 되짚어 수색하고, 철랑단이 머무는 장원을 습격해 전투를 치른 뒤 곧장 이 깊은 산속까지 추적을 속행했다.

그런 험난한 일정에 더해 쌓인 눈조차 꽁꽁 얼어버리는, 대체 이곳이 사천이 맞나 싶은 혹독한 날씨까지.

'목책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마을 규모를 보아하니 50호 정도 되겠군.'

많이 쳐서 반절 정도 싸우러 나왔다 해도 200여 명. 그중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성인 남성은 70명을 간신히 넘길 테다.

반면 이곳에 모인 왕죽겸의 병사는 총 600명. 약 아홉 배나 차이가 나니, 병사들이 칼만 휘두를 수 있어도 숫자로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여차하면 도망칠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왕죽겸은 병사들의 상태를 무시하고 조금 더 욕심내기로 했다.

"허 백호. 장 백호. 후 백호.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을 포위하라."

"충!"

백호 셋이 총 300명을 데리고 마을을 넓게 포위했다.

"강 부천호."

"예. 장군."

"단숨에 짓밟아 버려라.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도망친 의원과 사파 놈을 사로잡는 것이다. 흔적을 지운다고 애쓴 것 같지만, 뛰어봤자 벼룩이지."

"명 받잡겠습니다!"

강 부천호가 공수하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창을 든 채 도열한 병사들의 선두로 가 섰다.

"감히 황제 폐하의 염초를 탐한 대역죄인들이다! 전부 멸하라!"

북을 두드리거나 나팔을 불지는 않았다. 고작 3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지휘하는 데 그런 거창한 행위는 필요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전진!"

선두에서 앞서나가는 강 부천호와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 그 모습을 보며 목책 위에서 배호청이 낮게 조소했다.

"분명 깃발을 봤을 텐데 대화하려 하지도 않는군. 과연 관군이야. 백성들을 등쳐먹는 썩어빠진 관군."

"사감이 잔뜩 들어간 감상이군요."

"초 의원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아뇨. 이번만큼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하."

긴장을 털어보려 애써 웃는 초 의원이었지만, 창을 쥔 손은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 노인이 혀를 찼다.

"쯧. 은하 그놈은 어디서 저 같은 것들만 사귀어서는. 고집도 아주 지랄 맞구나. 썩 꺼지라니까 왜 목책으로 기어 올라와?"

"그렇게 따지면 마을 사람들 고집도 장난 아닙니다. 노야."

초 의원의 반격에 유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어려 싸울 수 없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마을 사람 전부가 목책 위에 자리 잡은 채 저 멀리서 다가오는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을을 향해 전진하는 병사 300명과 목책 위에서 무기를 꼭 쥔 민간인 500여 명.

언뜻 보면 이길 가망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마을을 포위한 병사 300이 더 있으니까.

심지어 은하촌 사람들은 무공다운 무공을 배우지도 못했다. 병사들은 모두 군부의 외공을 익혔는데 말이다.

중간 지휘관인 백호들은 모두 일류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게다가 배호청과 잠시 검을 맞댔던 부천호는 시종일관 그를 압도했다.

'분명 일류 끝자락에 도달한 놈이겠지.'

부천호가 그런 자라면, 저기 펄럭이는 대장기 밑에 선 정천호는 절정 수준의 무인일 터. 애초에 은하촌이 이길 가망이란 없는 전투다.

하지만, 배호청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목책에 올랐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철랑단 부하들도 다 죽었는데 그렇게 도망쳐 살아 무엇을 하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늘 도망 다니기만 한 인생이었지.'

군에 들어가 출세할 인맥이 없다는 이유로 사파 파락호가 됐다.

작은 마을에선 동생들과 먹고살 길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철죽파에 투신했다.

그리고 철죽파 내부 분위기와 견제에 질려 지파 창설 임무를 맡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선택의 순간에 편한 길만을 찾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끝에 도달한 곳이 이런 곳이라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유 공자도 가욕조경유격장군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아들은 아니었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긴 했다.

유은하라면 자신이 속아 넘어가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 초 의원을 보호하고 장사를 계속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배호청이 지난날을 후회하는 사이, 어느새 병사들은 목책 앞 10장 거리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배호청은 손에 든 돌팔매를 들어 올리며 힘껏 소리쳤다.

"던져!"

배호청의 외침과 함께 겨울의 칼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돌팔매.

"방패 들어!"

그에 맞서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텅! 터덩!

고요했던 사천의 깊은 산골짜기에 전투 개시를 알리는 폭력적인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두개골도 깨뜨리는 돌팔매질이었지만, 나무와 가죽을 겹쳐 쇠로 테두리를 두른 방패를 뚫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괜히 이 험한 산에 방패를 이고 온 게 아니다. 산 마을을 습격할 때 가장 위험한 게 돌팔매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텅! 터엉!

방패를 때린 돌멩이가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우수수 쏟아지는 돌팔매질을 막아내느라 팔이 아플 법도 하건만 군부 무공을 익힌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앞으로 있을 약탈을 기대하며 눈빛을 번들거렸다.

저 은하촌이 지현에게 뇌물을 바치고 깃발을 얻어간 곳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은 탓이었다.

그런 일은 마을이 보통 넉넉해서 되는 게 아니다. 집마다 은자 몇 냥 정도는 비상금으로 마련할 정도는 되어야 마을 단위로 뇌물을 마련할 수 있지.

곧 그 돈이 자신들의 주머니로 들어온다 생각하니, 피로로 축 처져 있던 병사들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방패만 잘 들고 있으면 돼.'

어차피 목책 넘는 건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이 할 역할이다. 방패병이 앞서서 길을 뚫고 발판이 되면, 뒤따라오는 검수와 창병들이 목책을 점령하는 것.

'이제 곧….'

방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좁은 보폭으로 50보를 걸었으니 해자와 목책이 코앞일 터.

곧 정지 명령이 내려지고 발판 역할을 하면 전투는 반쯤 끝난 거나 다름없다.

앞선 방패병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푹.

"어?"

한 병사의 몸이 밑으로 푹 꺼지며 반사적으로 멍한 소리를 냈다. 그런 광경은 여기저기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끄아아아아아아악!"

"꺼헉!"

"끄르르…."

비명이 난무하고 폐에서 숨 빠지는 소리와 피 끓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 아래에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도 날카롭게 끝을 세운 말뚝 박힌 함정들이.

강 부천호는 운 좋게도 함정이 있는 곳을 피해 갔지만, 양옆에서 방패로 가려주던 병사들은 전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이다! 던져라!"

전열이 무너지는 걸 본 유 노인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목책에서 돌멩이가 아닌 돌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돌팔매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정이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돌덩이가 날아든다.

쿵! 퍽!

목책 위에서 던져진 수십 근 돌덩이들이 방패를 때렸다. 그 충격은 제아무리 외공을 익힌 병사들이라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커헉!"

"아아악!"

운 좋은 이들은 그대로 쓰러지거나 팔이 부러지는 정도였지만, 운 나쁜 이들은 돌덩이가 방패를 밀치며 머리와 부딪치기도 했다.

아예 목뼈가 꺾여 절명한 병사도 있었다.

"...."

배호청은 정신없이 돌덩이를 나르고 던지는 은하촌 사람들 사이에서 손도끼를 쥔 채 강 부천호를 노려봤다.

이미 한 번 검을 맞댄 적이 있기에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놈을 죽여 봤자 이길 가망은 없겠지만….'

최소한 철랑단 부하들의 넋을 달랠 수는 있으리라. 배호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렸다.

"뭣들 하는 게냐! 고작 함정에 당황해서는! 그러고도 너희가 사천도사 최정예 중강천호소의 병사들이냐! 그 명예에 먹칠하는 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강 부천호. 안 그래도 왕죽겸이 지켜보는데 고작 산에 사는 짐승 같은 놈들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강 부천호가 악을 쓴 게 효과가 있었는지, 정신 차린 부하들은 다시 방패를 들고 목책에 바짝 다가서기 시작했다.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파 놓은 것 마냥 흉악스러운 함정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함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 차린 병사들이 어느새 목책에 바짝 다가서자, 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넘어라!"

"죽여!"

방패를 밟고 뛰어오른 병사들이 목책 위에서 돌을 던지던 은하촌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다.

은하촌 사람들도 돌을 내려놓고 각자 무기를 들었다. 도끼며 도리깨 쇠스랑, 낫 등등. 유은하가 사온 철제 농기구가 대부분이었다.

이윽고 좁은 목책 위에서 사람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한 병사는 목책에서 뛰어오르다 은하촌 사람이 내지른 목창에 옆구리가 꿰뚫렸다.

병사는 죽기 직전 반사적으로 목창을 잡았고, 떨어지는 몸을 따라 목창과 그것을 쥔 은하촌 사람도 그대로 목책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은하촌 사람 위로 병사들의 무자비한 검날과 창끝이 날아들었다.

목책 위로 무사히 뛰어오른 병사는 그대로 박도를 휘둘러 돌을 나르던 여인의 가슴께를 갈랐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그 뒤에서 한 아이가 핏발 선 눈으로 돌팔매질했다.

우연인지, 날아간 돌은 병사의 눈에 틀어박혔다. 그 병사는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뎌 그대로 목책 밖으로 넘어가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아이는 급히 쓰러진 여인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지만, 뒤이어 목책을 올라온 병사의 창에 나란히 가슴이 꿰뚫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병사는 창을 그대로 놓은 채 허리춤의 박도를 빼 들고 주변을 향해 휘둘렀지만, 좁은 목책 위에서 연이어 날아드는 목창을 피하지 못하고 허벅지를 찔렸다.

"에이잇! 비켜라!"

그때, 뒤에서 강 부천호가 뛰어오르며 병사를 앞으로 밀쳤다.

"끄악!"

병사의 허벅지에서 피가 왈칵 뿜어지며 두꺼운 솜옷을 적셨다. 그 고통에 병사는 중심을 가누지 못했고, 자신을 찌른 은하촌 사람과 함께 마을 안쪽으로 추락했다.

그렇게 두 사람분의 자리를 확보한 강 부천호는 목책 위에 올라서자마자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주변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중강천호소의 부천호 강욕진이다! 무기를 놓고 고개를 조아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소리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창끝에 걸린 은하촌 사람 둘의 목숨이 스러졌다.

하지만 물러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목숨 살려준다는 저 말을 믿을 정도로 순탄한 삶을 살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이 역적 놈들! 원한다면 전부 죽여주마!"

일류 끝자락에 이른 무인과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일반인 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존재한다.

힘이면 힘. 반응속도면 반응속도. 거기에 갈고닦은 기술과 실전 경험까지.

강욕진은 그야말로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목책 위를 휘젓고 다녔다.

그나마 자리가 좁다는 점을 이용해 은하촌 사람들이 돌팔매질해댔지만, 그마저도 창을 붕붕 돌리며 전부 튕겨냈다.

그렇게 강욕진이 공간을 확보하자 몇몇 병사들이 추가로 올라왔다.

강욕진은 그들에게 등을 맡긴 채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강욕진의 창끝엔 연신 돌팔매질하는 청화가 있었다.

"얘야!"

유 노인이 기겁해서 소리친 순간, 청화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창끝은 청화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소저!"

창끝이 청화의 심장 어림을 꿰뚫기 직전, 청화의 옆에 있던 초 의원이 청화의 옷자락을 붙잡고 와락 끌어당겼다.

촤악!

덕분에 창끝은 넘어지는 청화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강욕진은 일류 끝자락에 도달한 무인.

한 번은 우연히 피했더라도, 초 의원과 청화로서는 다음 공격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네놈! 찾았다!"

강욕진은 초 의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얼굴 가리고 숨어 있을 것이지, 계집 하나 구하려 목숨을 내다 버리는구나!"

초 의원과 청화의 다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강욕진의 창. 창날에 베이면 다리째 날아갈 것이고, 창대에 맞아도 뼈가 부러질 것이다.

그 끔찍한 뒷일을 예감하며 초 의원과 청화의 눈이 반사적으로 질끈 감겼다.

카아앙! 푸욱!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 대신, 쇠 부딪치는 소리와 살가죽을 뚫고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화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강욕진의 왼팔에 단검이 박힌 게 보였다.

그다음으로 자신을 등지고 선 배호청의 등이 보였다.

강욕진을 단번에 제거하려 기회를 노리던 배호청이었지만, 초 의원과 청화의 위기를 보고는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배호청은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느꼈다.

'창이 휘둘러진 후 기습하면 치명상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왜 한 박자 먼저 끼어든 걸까?

은하촌을 등진 채 도망치지 않고 목책에 오른 것도 그렇고, 오늘은 정말 자기 마음조차 알 수 없는 날이다.

'죽을 때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오늘이 그날인가.'

배호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들어 강욕진을 향해 겨눴다.

"큭! 사파 놈! 네놈도 있었구나!"

강욕진은 창을 놓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비록 왼팔이 다쳤지만, 배호청 정도는 제압할 자신이 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초 의원. 소저와 노야를 데리고 물러나. 목책을 내려가면 곧장 그걸 시작해."

"배 단주는!"

"어서!"

소리친 배호청은 이를 악물고 강욕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캉!

곧 두 일류 무인의 살벌한 싸움이 시작되며 말 그대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44화. 저항

먼저 달려든 배호청의 검이 강욕진의 왼쪽 어깨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강욕진은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휘둘러 쉽게 받아쳤다.

"쌍사검(雙蛇劍)으로 일류에 오른 건 칭찬할 만하지만, 그래 봤자 이류 무공. 감히 그딴 무공으로 군문 무공에 대적하려 하느냐!"

강욕진의 외침에 배호청이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희 돼지들은 항상 혀가 길어."

철랑단 장원에서 이미 한 번 검을 나눴기에 그가 쌍사검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걸 언급해서 속을 긁어야 할까.

쌍사검은 배호청이 자신의 재능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검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성장을 가로막는 애증의 검술이기도 했다.

이류 무공을 아무리 연마해 봐야 기연이 없다면 절정에 이를 수 없으니까.

쉬익!

배호청은 검 끝을 흔들며 뱀이 쏘아지듯 빠르게 강욕진의 오른팔을 찔러 들어갔다.

움직이기 힘든 왼팔을 노릴 거라 짐작할 강욕진의 심리를 한 번 더 뒤튼 기습이었다.

강욕진은 순간 배호청의 심리전에 속아 넘어갔지만, 빠르게 검을 되돌려 대응했다.

카가가각!

"쯧!"

배호청이 혀를 차며 검을 회수해 물러난다.

군문 무공은 기세가 강맹하고 파괴적이다. 검을 오래 맞대서 좋을 게 없다.

더군다나 강욕진도 부천호라는 관직에 걸맞게 상당한 단련을 거듭한 사내.

출세욕에 눈이 멀어 일류에 그쳤지만, 여태껏 그가 쌓아온 무공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틈이 없다.'

배호청은 한겨울에도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강욕진이 사용하는 검술은 보국검(報國劍). 군문에 들어 일류에 이르면 배우는 검술이라 들은 적이 있다.

그 검술을 연마하면 절정지경에도 닿을 수 있지만, 지금 배호청에게 중요한 건 보국검이 방어에 치중한 검술이라는 점이었다.

멧돼지처럼 날뛰는 강욕진조차 틈이 없게 해주는 검술이라니. 자신이 저런 검술을 익혔더라면 훨씬 잘 사용했을 텐데.

그런 상념이 배호청의 머릿속을 파고든 순간.

"잡생각이 많구나!"

후우웅!

강욕진의 검이 배호청의 왼쪽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충충전행(充忠前行)이라는, 가득한 충심으로 나아간다는 뜻의 웃기지도 않는 초식이었지만 위력만은 확실했다.

"큭!"

까아앙!

가까스로 방어 초식을 전개해 강욕진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으나, 배호청은 두 걸음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고도 속이 아릿한 게 충격을 완전히 흘리지 못한 듯했다.

'빌어먹을 내공.'

군문 무공을 익힌 이보다도 내공이 뒤처지다니. 배호청은 자신의 저열한 내공을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후웅!

그러자 배호청의 턱 끝으로 강욕진의 검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지나쳤다.

강욕진이라면 기세를 타 연격을 날릴 것이라는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배호청은 강욕진의 검이 지나간 그 자리에 그대로 검을 찔렀다.

쌍사검의 밥줄이라 부르는 초식 쌍사출두(雙蛇出頭).

이름처럼 동시에 찌르는 기술은 아니었다. 환검의 묘리로 허초를 섞어 착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검면에 반사된 빛으로 두 갈래 검으로 보이게 만드는 얕은 술수.

"흥!"

강욕진은 당황하지 않고 배호청의 검을 걷어냈다.

"두 번 통할 성싶으냐!"

"칫!"

이미 철랑단 장원에서 배호청은 강욕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쌍사출두를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강욕진 성격에 기술이 아니라 우연이라 생각하지 싶었는데, 설마 제대로 대비하고 있을 줄이야.

이는 배호청을 놓친 탓에 강욕진이 왕 정천호에게 호된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실수가 두 번 일어나면 출셋길에 암운이 드리울 게 뻔했으니까.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게 목숨을 건지는 길이다."

"무관 나리가 개소리도 잘할 줄은 몰랐는데."

배호청이 피식 웃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실력이 부족하니 기세마저 넘기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쉬익!

다시금 왼쪽 어깨를 노리고 들어가는 찌르기. 강욕진은 얼굴을 붉히며 배호청의 검을 강하게 받아쳤다.

"사파 버러지가 대명제국 관리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 대명제국 백성들을 죄다 죽이려는 게 관리의 일이냐! 이 개새끼야!"

배호청도 지지 않고 강욕진의 말을 받아치며 검을 회수해 다시 찔렀다.

강욕진은 피하지 않고 공격을 일일이 받아치며 배호청을 압박했다.

"비천한 놈답게 입도 더럽구나!"

"네가 똥을 처먹어도 네놈 인성보다는 깨끗할 거다!"

내공이 충만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팽팽한 싸움이 이어지는가 싶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기충검(於氣充劍)이라 하여 검 혹은 도구에 내공을 불어넣어 보다 단단하고 질기게 만드는 기예. 일류의 증거와도 같은 기술이지만, 일류 안에서도 급을 나누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수십 합을 나누고 안색이 파리해진 배호청과 아직 멀쩡한 강욕진을 보면 둘 사이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우욱…."

촤악!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싸움은 배호청이 비틀거린 순간을 노린 강욕진의 일격에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배호청은 방어와 회피에 온 정신을 쏟았지만, 강욕진의 공격이 이어질수록 전신에 상처가 늘어만 갔다.

"혼자 도망친 놈답게 피하는 것 하나는 아주 날래구나!"

승리가 손에 들어왔다 확신한 강욕진은 분풀이하듯 배호청의 몸에 상처를 새겼다.

어차피 사로잡아 촉왕부로 압송해야 할 놈이니,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합리화한 것이다.

하지만, 배호청은 항복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르르!

갑작스레 목책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자, 성난 늑대처럼 날뛰던 강욕진이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배호청은 기다리던 게 드디어 왔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 이 미친놈들! 다 같이 죽자고 이딴 짓거리를!"

"우리만 죽기는 억울하거든!"

촤악!

강욕진의 집중이 깨진 틈을 타, 배호청의 검이 강욕진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첫 기습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강욕진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미친놈! 이 불길에 넌 무사할 성싶으냐!"

"그럼 오늘이 내 죽는 날인가 보지."

배호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강욕진이 도망치지 못하게,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한 공세였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치솟는 불길 때문인지, 아니면 배호청의 광기 때문인지. 강욕진은 알 수 없었다.

***

목책 위를 점령한 병사가 점점 많아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왕죽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를 조금 잃긴 했지만, 다 끝났군."

돌격한 300명 병사 중 50여 명 정도가 죽은 듯 보였다. 하지만 왕죽겸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병사가 상했다는 이유로 이곳이 역적들의 은신처라 주장하면 될 일이니까.

작전을 명한 도지휘첨사 정주호와 촉왕부도 그걸 바랄 테고.

"마을을 포위한 나머지 병사들도 전부 진격…."

왕죽겸이 도주를 염려해 빼 둔 나머지 병사들까지 전부 투입하려던 그때.

화르르!

목책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은하촌 사람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스스로 목책에 불을 놓은 것이었다.

멀리서 강욕진과 배호청이 불길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본 왕죽겸은 이를 갈았다.

"이 저능한 산짐승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아무리 겨울에도 습도가 제법 높은 사천이지만, 올겨울은 다르다.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습기는 무슨 습기란 말인가.

이 날씨에 불이 산으로 옮겨붙으면 어디까지 번질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마을 뒤편은 높이 솟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나 안심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불씨조차 바싹 마른 나무를 활활 태워버릴 수 있는 게 겨울 산불이니까.

"허 백호, 장 백호, 후 백호에게 전하라! 전부 눈과 흙을 그러모아 불을 끄라고!"

"예!"

왕죽겸을 호위하던 병사 셋이 허겁지겁 백호들을 향해 달려갔다.

"쯧. 강 부천호 저놈도 문제야. 궁지에 몰리면 생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여지를 줘야지."

제법 오래 본 사이임에도 왕죽겸은 불길에 모습이 가려진 강 부천호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책임을 뒤집어씌울 생각만 할 뿐.

'부천호가 전사할 정도의 적을 토벌했으니, 죄는 그놈에게 뒤집어씌우면 오히려 내 공은 더 커지겠지.'

세 백호와 그 병사들이 진즉 목책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으니 어찌어찌 불을 제압할 수는 있으리라.

게다가 목책 앞은 해자와 함정이 있고, 시야를 터놓으려는 것이었는지 그 너머 30장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불씨가 날아들어도 옮겨붙을 곳이 마땅치 않다.

'감히 날 놀라게 하다니. 두어 놈은 내 손으로 직접 심문을….'

심문을 가장한 고문. 이미 답을 정해 놓고 가학적 욕구를 채울 끔찍한 행위를 상상한 왕죽겸이 입꼬리를 비틀던 그때.

"?!"

왕죽겸은 강렬한 기운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부우우우웅!

카가가가각!

투구를 거칠게 훑고 지나간 작은 손도끼가 왕죽겸의 앞을 가리고 서 있던 병사의 뒤통수에 틀어박혔다.

퍼억!

아니. 틀어박힌 게 아니라 아예 투구째 머리를 터뜨려버렸다.

"...!"

왕죽겸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정예 중 정예였지만 사람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는 광경은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 뼛조각과 물컹한 살점, 그리고 새빨갛고 하얀 액체가 섞인 선분홍빛 무언가가 얼굴에 튀자 모두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한 줄기 벽력이 날아들었다.

콰릉!

반짝이는 은빛이 새하얀 눈밭과 부딪쳐 산란하며 순간 왕죽겸의 시야를 가렸다.

"큭!"

그때까지도 왕죽겸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투구를 긁고 지나간 손도끼로 인해 뇌가 흔들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절정 경지에 오른 무인. 허둥대는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 왕죽겸은 다급히 내공을 끌어 올리고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손끝에 뭔가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지만, 무척이나 얕았다.

퍼버버벅! 콰직! 서걱!

뒤이어 네 곳에서 가벼운 충격음이, 한 곳에서는 무거운 파육음이, 그리고 한 곳에서는 무언가 잘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죽겸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는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전부 죽어 있는 걸 목격하게 됐다.

넷은 비수에 목이 꿰뚫렸고, 하나는 심장 어림에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목이 떨어진 채 습격자의 발밑에 쓰러져 있었다.

처음 머리 터진 호위병까지 합하면 정확히 일곱.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쉴 그 짧은 순간에 호위병이 전부 죽은 것이다.

'....'

왕죽겸은 자세를 낮추며 유은하를 향해 겸을 겨누었다.

길게 찢어진 유은하의 팔뚝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왕죽겸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면서 낸 상처였다.

'병사들을 일순간에 죽인 걸 보면, 최소 일류다. 하지만… 내공이 거의 안 느껴져.'

애초부터 군문의 외공 대신 내공을 익혀 절정지경에 이른 왕죽겸.

상대가 똑같은 절정 무인이라 하더라도 그 내공의 편린 정도는 느껴져야 하건만. 지금 유은하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은 이제 갓 입문한 애송이 무인처럼 보잘것없었다.

'기이하군.'

순식간에 호위병을 몰살시킨 소년이라면 분명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별다른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암살 무공을 익힌 건가?'

왕죽겸의 시선이 병사들의 목에 틀어박힌 비수로 향했다. 비수는 암살자, 혹은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무림 문파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예를 들면, 당문 같은.'

그러고 보니 놈이 기습할 때 뇌성이 울린 걸 들었다.

'뇌명보?'

뇌명보는 당문 문도만 익히는 무공이 아니다. 저잣거리에 널린 삼재검법 같은 급은 아니나, 사천에 이름 좀 날린다는 무관과 문파들은 뇌명보 비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뇌명보에 비수를 이용하는 무인이 습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이놈을 사로잡으면 종4품이 아니라 정4품 승진도 꿈이 아니다!'

뇌명보에 비수를 이용하는 무인. 딱 당문에 뒤집어씌우기 좋지 않은가? 촉왕이 들으면 좋다고 자리에서 박수칠 게 뻔했다.

왕죽겸이 속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사이, 숨을 고른 유은하가 비수 두 자루를 투척하며 달려들었다.

성도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오느라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숨이 차올랐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저 멀리 타오르는 목책처럼 유은하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왕죽겸을 첫수에 기습해 죽이는 데 실패한 뒤, 임기응변으로 호위병들을 먼저 죽인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한다.

왕죽겸을 호위하는 이들은 모두 이류 끝자락이거나 일류에 이른 이들.

그런 자들이 정신 차리고 협공했다면 제아무리 유은하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이놈만 잡는다면…!'

지휘관을 사로잡는다면, 아니. 최소한 죽일 수만 있다면 적들의 사기를 꺾고 도주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유은하는 박도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45화. 저항

비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왕죽겸의 명치, 허벅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카앙!

왕죽겸의 검이 순식간에 비수 두 자루를 쳐냈다.

"음?"

비수를 쳐낸 왕죽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빠르고 직선적인 투척. 게다가 이 정도 힘이라면, 유성비인가?'

유은하에게서 당문의 흔적이 보일수록 왕죽겸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유은하의 속은 뒤집혔다.

콰릉!

뇌성이 울리며 유은하가 순식간에 왕죽겸의 코앞으로 쇄도한다. 동시에 겨울 칼바람을 가른 박도가 왕죽겸의 어깨를 노렸다.

"흡!"

왕죽겸은 검을 사선으로 올려쳐 박도를 튕겨내려 했다.

그가 익힌 검술은 무거운 갑옷과 복잡한 전장에 특화된 군문의 검술, 진충검(盡忠劍).

육중한 무게와 강한 힘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쳐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이루는 검술이었다.

절정에 이르러 정5품 정천호가 된 후에야 오호도독부의 사범으로부터 사사한 상승 검술.

왕죽겸은 상승 검술과 전신에 휘도는 내공이 유은하의 박도를 튕겨내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콰앙!

"큭?!"

"끅!"

하지만 폭음이 울린 후, 왕죽겸과 유은하 두 사람은 모두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해야만 했다.

유은하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정면에서 막힌 걸 경험했다.

자전마견조차 어쩌지 못했던 힘이었는데, 내공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절정 무인은 이토록 강해질 수 있나 충격적일 정도였다.

반면, 왕죽겸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검기를 발현하진 않았지만, 전신에 내공이 충만하게 휘돌고 있었다. 그 내공은 단련된 근육과 뼈에 스며들어 범인은 절대 낼 수 없는 힘을 내게 해준다.

맹수와 힘 싸움을 해도 이길 수 있는, 그야말로 종의 한계를 벗어나는 힘. 그런데 그 힘이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에게 막힌 것이다.

유은하와 왕죽겸은 시큰거리는 손목을 황급히 붙잡으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아니. 한 걸음씩 물러나는가 싶었지만, 유은하는 물러나는 뒷발을 박차며 다시 왕죽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은하는 절박했다. 일 초라도 빨리 눈앞의 장수를 죽이고 은하촌으로 달려가 유 노인과 청화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척에서 비수 두 자루가 왕죽겸의 허벅지를 노렸다. 동시에 유은하의 박도가 왕죽겸의 옆구리를 노렸다.

날아드는 비수와 박도의 경로가 절묘하게 삼각형을 이루며 어느 쪽을 방어해도 최소 하나는 맞을 수밖에 없는 위치를 점했다.

하지만 왕죽겸은 기를 사물에 담아 방출할 수 있는 절정지경 고수.

무림인이라면 주로 무기에 기를 담지만, 군문 군인들에게는 다른 활용법이 있었다.

카앙!

"...!"

왕죽겸의 두꺼운 철갑 위로 푸르스름한 기가 서리더니 날아드는 비수 두 자루를 전부 튕겨냈다.

뒤이어 왕죽겸의 검에도 검기가 서렸고, 유은하는 본능적으로 저것과 박도를 맞대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휙! 카앙!

유은하는 곧장 박도를 손에서 놓았다. 직후, 검기 서린 왕죽겸의 검과 충돌한 박도는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박도를 잃은 유은하와 여전히 검을 쥔 왕죽겸. 누가 유리한지는 열 명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검을 놓은 찰나의 순간, 유은하는 왕죽겸에게 달려들었고, 왕죽겸은 설마 무림인이 검을 놓을 줄 몰랐다는 듯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쿵!

어깨로 가슴을 들이받자 제아무리 왕죽겸이라도 뒤로 크게 밀리며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유은하는 그 틈을 타 왕죽겸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이 애송이가!"

왕죽겸도 그 의도를 알기에 잡힌 오른손을 뿌리치며 빈 왼팔로 주먹을 날렸다.

군문에서 흔히 익히는 박투술, 삼보연환권(三保連環拳)이었지만 내공이 실린 주먹은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퍼억!

왕죽겸의 주먹이 유은하의 옆구리에 틀어박히자, 유은하는 생전 처음으로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역류하는 걸 느꼈다.

푸학!

강제로 빠져나가는 숨에 섞여 입 밖으로 튀는 핏물. 절로 정신이 아득해지고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지만.

으득!

유은하는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줬다. 여기서 검을 놓치면 죽는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내공 침입 감지>

아스트랄 유니온이 부상과 함께 옆구리를 통해 내공이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흘러들어온 내공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유은하는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내공이 고갈된 상태였으니까.

퍼억!

유은하가 왕죽겸의 내공을 흡수하는 사이, 그가 다시 한번 유은하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이번에는 유은하도 오른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였지만.

우둑!

더욱 강해진 권격에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른팔 균열골절 감지>

다행히 완전히 부러진 건 아니고, 금이 간 정도. 유은하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버텨냈다.

"끈질긴 놈!"

왕죽겸은 이번에야말로 떨쳐내겠다는 듯 주먹에 내공을 한가득 담았다. 주먹이 노리는 곳도 옆구리가 아닌 얼굴.

유은하는 아예 왕죽겸을 향해 달려들며 뇌명보를 밟았다.

콰릉!

빠른 속도는 곧 힘. 지근거리에서 왕죽겸을 들이박은 유은하는 그와 함께 눈밭을 나뒹굴었다.

구르는 사이에도 왕죽겸은 검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으득!

유은하가 그의 팔을 꺾으며 깔아뭉갠 탓에, 결국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힘이냐!'

왕죽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의 소년은 분명 절정 무인이 아니다. 느껴지는 내공을 보면 절정은커녕 이류도 못 미친 수준.

뇌명보나 유성비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박도를 놓아버리는 등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전투 방식은 풋내가 진동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애송이가 힘 하나는 장사다. 아니,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움직임을 쫓아오는 속도 역시 발군.

맷집은 또 어떤가? 삼보연환권은 군문에서 익히는 권법이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보일 권법도 아니다.

군인이 주먹을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백병전 중, 무기를 놓친 절체절명의 순간에나 주먹을 들지.

그런 상황을 대비한 권법이니만큼, 파괴력 하나는 발군이다.

그런 주먹을, 게다가 무려 절정의 내공이 담긴 주먹을 두 번이나 맞고도 멀쩡히 힘을 쓸 수 있다니.

'금강불괴라도 익혔단 말이냐!'

왕죽겸은 온몸을 비틀며 유은하와 눈밭을 굴렀다.

오른 팔목은 아예 부러진 듯 덜렁거리며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통증에 굴복해 정신을 놓는다면 남은 건 죽음뿐.

뒤엉켜 구르는 와중에도 왕죽겸이 왼손을 뻗어 유은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유은하가 바닥으로 향한 순간 강하게 내리눌렀다.

상위(上位)를 점해 일방적으로 공격할 셈이었지만.

퍼억!

돌연 유은하의 무릎이 올라오며 상체를 세우지 못한 왕죽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커헉!"

숨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는 왕죽겸. 뒤이어 유은하의 발이 올라와 왕죽겸의 목을 뒤로 끌어 내리려 했지만.

퍽!

"끅!"

왕죽겸의 팔꿈치가 유은하의 허벅지 안쪽을 때리며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렇게 왕죽겸과 뒤엉켜 한 대씩 치고받는 개싸움을 하는 유은하.

퍽! 퍼억!

콰직! 빠아악!

빠르고 정교하던 두 사람의 공격은 점점 흔들리고 느려져 갔다.

눈과 목 같은 급소를 노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필사적으로 급소만은 방어했다.

반대로 말하면, 급소를 제외한 모든 곳이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난타전을 벌였다는 말.

"후욱. 후욱. 너, 너는 절대 편히 죽지 못하게… 큭!"

비틀거리며 먼저 일어난 왕죽겸에게 쓰러지듯 태클을 거는 유은하.

무거운 갑옷 때문에 왕죽겸의 숨은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거칠어졌지만, 그 덕에 유은하보다 부상이 덜했다.

심지어 유은하는 애초부터 멀고 먼 거리를 달려온 상태. 기습이 아니었다면 왕죽겸과의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걸 오기와 독기로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유은하였지만,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파….'

왕죽겸의 주먹이 옆구리를 때리자, 유은하의 주먹이 반사적으로 상대 명치를 가격한다.

비틀거리며 반보 물러났던 왕죽겸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며 유은하의 얼굴 정중앙을 향해 왼 주먹을 뻗었다.

간신히 고개를 기울여 피했지만, 내공이 담긴 강맹한 기세가 남아 뇌를 뒤흔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왕죽겸의 주먹이 머리에 스친 탓인지, 아니면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정신이 멍하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저 반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눈앞의 적을 공격할 뿐.

퍽! 퍼벅!

빠악!

급기야 두 사람은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주먹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나는. 나는 궤도 의료기지에서. 푹신한 침대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편하게 살고 있었는데.'

한순간 중원의, 그것도 사천의 오지에 떨어졌다. 삶의 질은 말 그대로 우주에서 흙바닥에 처박혀버렸다.

그 생활이 대체 뭐라고 이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아등바등 싸우는 걸까.

'어쩌면… 다 꿈일지도 모르잖아.'

퍼억!

왕죽겸의 주먹이 흔들리며 유은하의 머리가 아닌 어깨에 꽂혔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면, 궤도 의료기지 내 방에서 눈을 뜨겠지. 내가 실험체였다는 것도, 반물질 미사일에 모든 게 사라졌던 것도. 전부 다 꿈일 거야.'

몸에서 힘이 빠지듯, 유은하의 눈 너머에서 빛나던 별빛이 점멸하며 죽어갔다.

털썩!

유은하의 몸이 뒤로 넘어가 차디찬 눈밭에 파묻혔다.

"질긴 놈."

유은하의 눈에서 점점 생기가 사라지자, 왕죽겸은 팔을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말도 안 되는 맷집으로 그의 주먹을 수십 번이나 견딘 건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갑옷과 내공, 이중으로 보호받는 왕죽겸과 주먹다짐을 해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저놈이 박투술을 조금이라도 익혔더라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왕죽겸의 등허리에 소름이 내달렸다.

'아니. 그래도 이… 내가 졌을 리 없다. 이런 애송이한테!'

갑옷과 무구를 제대로 갖춘다면 같은 절정지경에게는, 특히 무림인에게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내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찮은 경지의 애송이에게 패할 리 있겠는가?

"퉷!"

왕죽겸은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낸 뒤 분노를 가득 담아 으르렁거렸다.

"필시, 저 마을을 지키려 온 것이렷다. 네놈이 보는 앞에서 전부 죽여주지. 저 마을에 살아 있는 건 노인이건 계집이건 돼지 한 마리건. 그 무엇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목책에 붙은 불로 난리 난 것도 거의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왕죽겸을 호위하기 위해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괘씸함을 넘어 살심이 일 정도였지만 말이다.

"퉷!"

왕죽겸이 입에 고인 핏물을 뱉고 직접 호각을 불어 백호를 호출하려던 그때.

"하. 버러지만도 못한 미개한 놈이."

등 뒤에서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광오한 절대자의 음성. 신년하례식 때 들었던 촉왕의 목소리조차 저렇지는 않았다.

만백성의 아버지, 하늘의 아들, 중원 천지의 주인. 상상만 하던 천자의 목소리가 저럴까?

왕죽겸이 황급히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한층 빛나는 눈빛을 흩뿌리는 유은하가 서 있었다.

전신이 넝마처럼 너덜너덜했지만, 왕죽겸은 감히 다가설 생각조차 못 했다.

조금 전 꺼져가던 그 희미한 눈빛이 아니었다. 유은하의 눈 안쪽에는 별빛 두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당웅건이 봤다면 '혼원심결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2성에 이르렀냐'며 기함할 광경이었다.

"내 사람들이야. 네까짓 게 뭔데 내 걸 빼앗아?"

"이놈! 기어코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

콰릉!

왕죽겸은 순간 유은하의 신형을 놓쳤다.

뇌성이 울리고 그의 앞에 남은 건 한 줄기 선으로 남은 은빛 물결. 그것이 번쩍이는 번개인지, 언젠가 밤하늘에서 보았던 은하수인지 알 길은 없었다.

"...."

숨이 빠져나와 목소리를 내야 할 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왕죽겸의 등 뒤에 나타난 유은하의 몸에서는 수십 번을 맞으며 차곡차곡 흡수한 내공이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혼원심결 1성이 '나'라는 별을 깨달아 우주의 중심에 자아를 띄우는 것이라면, 2성은 자신의 별 주변에 다른 별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자각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유은하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그 별들을 밝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깨달음을 갈무리할 시간은 없었다.

"흐으읍."

엉망인 몸을 겨우 움직이며 유은하가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 돌아온 감각에 전신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빠르게 통증이 사라졌다.

아스트랄 유니온에서 진통 물질을 분비한 게 아니었다. 그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몸이 엉망이 됐을 뿐.

그런데도 유은하는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유은하는 곧 눈밭에 굴러떨어진 왕죽겸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소리쳤다.

"네놈들 대장은! 나 유은하의 손에 죽었다! 살고 싶다면 무기를 버려라!"

간절함을 실은 외침이 이제 막 불을 진압하고 목책을 넘는 병사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46화. 저항

"네놈들 대장은! 나 유은하의 손에 죽었다! 살고 싶다면 무기를 버려라!"

유은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췄다.

병사들은 저게 무슨 소리냐는 듯 뒤를 돌아봤다. 열이나 되는 호위병은 차치하고서라도, 왕죽겸은 절정지경에 오른 무관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살해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 일도 없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목책을 넘다 말고 뒤를 돌아본 것이었다.

타오르는 목책 너머에서 똘똘 뭉쳐 항전을 준비하던 은하촌 사람들도 우뚝 멈춰 선 건 마찬가지였다.

"은하?"

"오라버니?"

"유 공자?"

유은하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이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지었다.

"대체, 대체 뭐 하러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뭐 하러!"

유 노인은 쓸린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는 채 화를 냈다.

반면, 청화와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유은하 혼자서 저 많은 병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직접 몸을 던졌을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유은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은하촌 사람들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간신히 불길 속을 빠져나와 쓰러진 배호청을 살피던 초 의원은.

"지금 대장을 죽였다고…."

유은하의 목소리를 듣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집 지붕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이미 반쯤 불타 쓰러진 목책과 쏟아진 흙더미 너머로 희미하게 유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유은하가 들고 있는 둥그런 물체도.

"진짜, 진짜다!"

그 말에 고통에 헐떡이던 배호청이 눈을 떴다.

사파에 몸담았던 배호청답게 적의 사기를 꺾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배호청은 마지막 숨을 쥐어짜듯 바락바락 소리치기 시작했다.

"유 공자께서 도적놈의 수괴를 죽였다! 유 공자께서 도적놈의 수괴를 죽였다!"

지휘관의 죽음에 이어 도적 떼라는 불명예까지 덮치자 병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초 의원까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곧 당문의 지원이 올 겁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당문에서 저 도적 떼를 쓸어버리기 위해 오는 중입니다!"

유은하가 당문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낸 초 의원이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다.

왕 정천호를 죽인 실력자가 이 깊은 산골짜기에 그냥 튀어나왔을까? 당문이 보낸 지원의 선봉이다. 곧 본대가 도착하면 너희는 전부 죽은 목숨이다.

병사들에게는 초 의원의 외침이 그렇게 들렸다.

심지어 죽어버린 왕죽겸을 대신해 지휘를 맡아야 할 강욕진 부천호조차 정상이 아니었다.

간신히 배호청을 떨쳐내고 목책에서 뛰어내리긴 했지만, 이미 강한 불길로 인해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어, 어쩌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망설인다.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할 백호들마저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분명 왕 정천호는 이 은하촌이 염초를 훔쳐 간 대역죄인들의 은신처라 했다.

그런 자들과의 싸움에서 패퇴한다? 복귀하는 즉시 목이 달아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싸울 수도 없다. 왕 정천호는 절정지경에 이른 군인. 그런 자가 패배해 죽었다면, 상대 역시 최소한 절정지경이라는 말이다.

일류 무인 열이 모여 봤자 절정지경 무인 하나를 이기기 힘들다. 서른 이상이 목숨을 버려가며 차륜전을 펼쳐야 겨우 가능성이라도 보이겠지.

문제는 지금 살아남은 백호와 병사들을 박박 긁어모아도 일류 무인은 열다섯뿐이라는 점.

그나마 가까이 있던 백호 몇이 급히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도망, 아니. 후퇴하는 게 낫지 않겠소?"

"왕 정천호님 시신은 어쩌고 말이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도망치면 우리라고 무사할 것 같소?"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저 괴한이 정천호 머리를 들고 있는데! 설마 저자를 쓰러뜨리고 시신을 되찾자는 거요?"

"저놈도 정상은 아닐 거요. 왕 정천호께서도 절정 무인이었소. 병사들을 물리고 후퇴하면서 일제히 덮치면 시신 빼낼 틈 정도는 있지 않겠소?"

병사들을 쏟아부어 물량 공세를 펼치는 틈을 타, 시신을 회수하자는 이야기였다.

"이쪽은 아직 500이 넘소.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 뭉쳐서 이동하는 게 적 본대를 마주쳐도 살 확률이 높을 거요."

그 말에 다른 백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 무인들과 마주치더라도 500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면 충돌을 피할 수 있다.

당문이 저 작은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무인이 설마 수백 단위일 리는 없을 테니까.

기껏해야 저기서 왕죽겸의 머리를 들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고수처럼 소수정예를 보냈겠지.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머릿수 많은 게 더 시간을 벌 수 있다.'

'그사이 어떻게든 도망치면 될 일.'

백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후퇴를 명하는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이-

아주 긴 호각 소리가 울리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목책을 내려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도열한 병사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유은하 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왕 정천호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

"놈은 크게 다치고 지쳤다! 일제히 돌격하라!"

몇몇 백호들은 명령을 내렸고 몇몇은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병사들이 유은하의 발목을 붙잡는 사이 왕죽겸의 시신을 회수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나오는 게 낫지."

유은하는 눈밭에 꽂힌 왕죽겸의 검을 뽑았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신체 부상을 감지하고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유은하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

체력과 내공은 진즉 바닥났고 정신조차 희미해져만 간다. 저 멀리 달려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뚝뚝 끊겨 보일 지경이다.

그림 낱장이 어설프게 이어지는 듯 정신이 잠시 끊어졌다 돌아올 때마다 병사들의 모습을 훌쩍 다가온다.

분명 저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을 테다. 지휘관도 전사했고 남은 이들이 필사적으로 임무를 이어 나갈 사명감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 손에 든 머리통을 놓고 물러난다면, 놈들도 자신을 쫓지 않고 후퇴할 가능성이 크다.

유은하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이성적으로는 물러나는 게 옳다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유은하는 물러나지 않았다.

달려오는 저들의 검에 묻은 피와 갑옷에 묻은 그을음. 산속에 울려 퍼지던 비명. 그 대가를 묻지 않고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었다.

'강 실장이 봤으면 어이없어했겠네.'

과학을 쌓아 올려 우주까지 정복한 크라운 출신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하지만 유은하는 지금의 자신이 훨씬 인간답다고 생각, 아니. 인간답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멋들어진 검술 하나는 익혀놓을 걸 그랬나?'

장사와 약 개발로 바빠 뇌명보와 유성비 정도만 익힌 게 못내 아까웠다.

당웅건이 보여준 무공 비급 중 검술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류 혹은 간신히 일류에 이른 것들이기에 굳이 익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후우…."

어느새 서로의 표정이 생생히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온 병사들. 유은하는 숨을 고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백호 한둘 정도는.'

유은하의 눈에는 병사들 사이에 섞여 왕죽겸의 시신을 노리는 백호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일반 병사들과 갑옷과 움직임부터 달랐으니까.

그렇게 지척에 이른 병사와 유은하가 충돌하기 직전.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지며 유은하와 병사 사이를 갈랐다.

"처음 볼 때부터 알아봤다. 아주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유은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게냐?"

당웅건의 물음에 유은하가 입을 열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슨 말과 조건으로 당웅건을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차라리 자신의 재능이 아까우면 알아서 따라오겠지 생각했다고.

그리고 그걸 깨달은 것조차 성도를 뛰쳐나와 산을 두 개나 넘은 후였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탓에 한계를 넘어선 육신이 굳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쯧쯔. 저 꼴이 되어서도 서 있는 게 용하다 용해. 살면서 안 해본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체 입에 영약 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서 당웅건이 손가락을 튕기자, 말을 하기 위해 벌어져 있던 유은하의 입으로 단환 한 알이 쏙 들어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녹아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걱정 말거라. 저 도적 떼는 내가 전부 붙잡아 죗값을 치르게 할 터이니."

당웅건의 말이 겨울 칼바람을 타고 병사들의 귓가를 스쳤다.

당웅건이 등장하며 병사들을 향해 흩뿌린 까마득한 내공. 귀하디귀한 옥빛 장포에 새겨진 당문의 상징과 하얗게 센 수염.

당연히 병사들은 당웅건을 알아봤다. 아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힐 듯한 내공으로 병사 오백여 명을 제압할 실력자는, 오직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뿐이었으니까.

"거, 거짓말…."

"어, 어떻게 일수천살이…."

덜덜 떨리는 턱 때문에 병사들의 발음은 엉망진창이었다.

일수천살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그 전설을 모르는 이는 사천 무인 중 아무도 없었다.

"보아하니 일수도 버티지 못할 놈들이로고. 고작 이런 놈들 때문에…."

당웅건의 눈에서 짙은 녹빛이 줄줄 흘러내렸다. 독기를 품은 내공이 분노에 따라 일렁이며 표출된 것이었다.

"내 제자가 죽을 뻔했다니."

그 한마디에 병사들은 천 길 낭떠러지에 추락하는 듯한 환영을 봤다.

일수천살 당웅건의 제자라면 그들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당문에 나타난 의문의 미공자 말이다.

은하상단 단주라며 점포를 열어 성산과 여러 약을 판다고 하여 제자라는 소문은 사그라들었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었다니.

병사들은 외치고 싶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저 공자가 당웅건의 제자인지도 몰랐고, 저 마을과 모종의 관계였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이 모든 게 죽은 왕죽겸과 그에게 명령을 내린 도지휘첨사 정주호 탓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병사도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

"!!"

외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아무리 용을 써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차디찬 겨울바람과 눅눅하고 무거운 갑옷, 산행과 전투로 혹사당한 탓에 찾아온 둔중한 근육통은 그대로 느껴지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병사들은 눈밭에 흩날리는 하얀 무언가가 눈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천지신명께 내 제자가 잘못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게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이 자리에는 오백 구 병마용이 생겨날 테니까."

죽을 때까지, 어쩌면 죽어서조차 묻히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영원히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웅건은 힘이 풀린 듯 쓰러지는 유은하를 안아 들고 불타버린 목책을 향해 달렸다.

"오라버니!"

군데군데 찢어져 옷이 피로 물든 청화가 달려왔다. 그 뒤로는 절뚝거리는 유 노인이 힘겹게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따뜻한 곳이 필요하다. 집으로 안내하거라."

"네! 이쪽, 이쪽으로!"

청화가 당웅건을 이끌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천만다행으로 은하촌의 가옥 중 불길에 상한 곳은 없었다. 유은하와 유 노인이 살던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

좁은 방을 둘러본 당웅건은 청화가 침상 위에 이불을 펼치자 그 위로 조심스럽게 유은하를 눕혔다.

"이거… 오라버니께서 할아버지와 저 쓰라고 두고 간 약이에요. 상처 치료하는 데 세상 어떤 약보다 좋을 거라고…."

청화가 방을 뒤져 작은 옹기에 담긴 고약을 찾아 건넸다. 하지만 당웅건은 그것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곧 당문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돌보거라."

"하지만…."

"이 아이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은하가 눈을 떴을 때, 동생과 할아버지 몸에 상처가 있다면, 과연 이놈이 좋아하겠느냐?"

당웅건의 일갈에 청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유은하가 와줄 줄은, 와서는 그대로 적 수괴의 목을 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에야, 유은하가 어떤 마음으로 성도에서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을까 생각할 수 있었다.

"…네. 감사드립니다."

"네가 청화지?"

"예. 그…."

"당 노야라 부르거라."

"네. 당 노야."

"은하 요놈과 령이가 말한 대로 똑 부러지는 아이구나. 은하는 내가 살릴 테니, 너는 마을 사람들을 살리거라."

"예."

"왕존장께도 잘 말씀드리고. 은하는 당문의 태상가주, 이 당웅건이가 반드시 살릴 테니 걱정 마시라고."

그렇게 말한 당웅건은 곧장 등을 돌려 소매에서 여러 도구를 꺼냈다.

약이 담긴 자기병과 쓰임이 다양할 것 같은 침들이 침상 앞에 주르륵 펼쳐졌다.

명백한 축객령에 청화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는 방에서 나왔다.

"이제 갓 무에 입문한 놈이 절정고수와 싸워 이겼다 하면 사람들이 내게 노망들었다 할 게다. 그러니 네가 일어나서 직접 말하거라."

당웅건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한동안 방 안은 질식할 정도로 짙은 내공으로 가득 차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47화. 저항

코끝에 맴도는 독한 냄새에 유은하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동시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은하촌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반쯤 이성을 잃고 성도를 뛰쳐나갔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 불과 하루 하고도 반나절 만에 은하촌에 도착했고 온몸이 과열된 상태로 적 지휘관과 싸웠다.

검과 갑옷, 손에서 푸르스름한 기를 뿜어대는 무서운 실력자였다. 서로 뒤엉키는 개싸움 끝에 겨우 놈의 목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이후 기억이 모호했다. 마치 꿈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달려든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나타나 구해준 것 같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야 옳기도 하고.

'꿈인가.'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냄새 자체는 낯설었지만, 지금 코끝에 맴도는 냄새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정기검진 받을 때 의료캡슐 안을 채운 액체에서는 으레 독한 냄새가 났으니까.

몽롱한 정신도 마취가 풀리며 나타난 증상이라면 이상할 게 없다.

'생생한 꿈이네.'

출생 비밀과 반물질 미사일로 인한 죽음. 중원이라는 또 다른 세계와 새로운 인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꿈을 꾼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생생하고도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즐거운 꿈이었다.

'병을 치료하고 크라운으로 내려가면 아버지께 말해 작은 회사를 키워보겠다 해볼까?'

초 의원의 작은 약방과 당문이 내준 점포를 운영한 기억이 생생하다. 물건 사 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비어가는 상자, 불어나는 동전과 두꺼워져 가는 장부까지.

그 모든 경험이 궤도 의료기지의 무료한 일상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무공도 신비로웠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천둥소리가 울리고 단순히 내던진 단검이 유성처럼 선명한 빛을 내며 내리꽂히는, 그야말로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내공이라는 게 있을 리 없지만… 응?'

유은하는 아쉬움에 꿈속에서 했던 것처럼 내공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온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마자 소주천이라니. 끌끌, 역시 네놈은 상인보다 무인이 어울린다."

그러자 옆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 노야?"

"이놈아, 노야라니. 절까지 올린 스승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환자만 아니었으면 이마에 혹을 달아버렸을 텐데. 쯧쯔."

당웅건이 혀를 찬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꿈이 아니었…."

"꿈은 무슨. 아니, 이제 갓 무공 배운 놈이 절정고수한테 달려들어 이긴 것이니, 꿈이라 여길 만하지. 그래."

당웅건의 말에 그제야 유은하는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아!"

유은하가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당웅건의 손가락에 이마를 짓눌려 저지당했다.

"왕존장께서는 무사하시다. 발목을 삐끗하셨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쉽게 낫지는 않겠지만 심각한 정도도 아니야. 네 동생도 여기저기 긁히긴 했어도 네놈이 준 약으로 흉터 하나 안 남았어."

당웅건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다 말했다면 유은하는 오히려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주니, 그제야 유은하는 상체에 힘을 풀고 자리에 누웠다.

"마을 사람들은 어찌 됐습니까?"

"많이 다치고 상했다."

"...."

"하지만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야. 더 억세게 뿌리 내리고 뭉쳐,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게다."

당웅건의 말에 유은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웅건은 웃으며 유은하의 몸에 꽂혀 있던 침을 차례차례 빼냈다. 자신의 몸에서 기다란 침이 빠져나오자 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는 침이 박혀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만년한철도 죽어라 두드리면 깨진다. 네 몸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 지경으로 굴리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

"네 눈으로 한 번 봐라. 몸이 어떤 꼴인지."

당웅건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이게 사람 몸인지 썩은 시체를 기워 놓은 것인지 모를 넝마가 목 아래로 펼쳐졌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괴사한 부분을 세포 자가포식으로 말끔히 없애지 못했다면 살과 근육을 뭉텅이로 잘라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은 정양해야 할 게다."

시야 구석에 떠오른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고서도 당웅건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신체 완전 회복까지 예상 소요 시간 : 37일>

인간을 초월한 회복력으로도 전치 4주 넘는 부상이라니.

잠시 고민하던 유은하가 시선을 돌려 당웅건을 바라봤다.

"스승님. 염치없지만…."

"마을 사람들 말이지?"

"…예."

"안 그래도 다 함께 성도로 가려 했다. 그러니 빨리 낫기나 해라."

그 말에 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당웅건에게 부탁하려 한 건 마을 사람들이 회복할 때까지만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조금 더 욕심부리자면 타버린 목책을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 정도.

하지만 당웅건은 아예 은하촌 사람들을 성도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당문이 보유한 땅 중 일부를 내주마. 새로운 은하촌을 만들거라."

"...."

"대 당가의 태상가주가 제자에게 이 정도도 못 해주겠느냐마는, 네놈 성격에 편히 받진 못하겠지. 자."

당웅건이 읽어보라는 듯 종이를 건넸다. 종이에는 마치 상단끼리 계약하듯 여러 조항이 쓰여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조항은 은하촌에서 생산되는 약을 당문에 정기적으로 공급한다는 내용.

"네가 가족을 위해 남겨둔 약을 봤다. 성산은 '따위'로 만들어버릴, 하나같이 멸모환과 비견될 만한 것들이더구나."

"...."

"네 밑천이라는 거 안다. 홀라당 빼앗아 갈 생각 없으니, 비상용으로 비축해 둘 정도로만 공급해 주거라. 그만하면 괜찮은 거래 아니더냐?"

유은하가 유 노인과 청화를 위해 두고 간 약은 중원 천지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약이다.

황궁의 천자조차 사용한 적 없는, 중원 문명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오파츠 그 자체.

비록 내공 증진에 효과 있는 영약은 아니지만, 무인에게는 외상을 다스리는 약 또한 중요하다. 그런 약을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으니 분명 합당한 거래이긴 했다.

유은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웅건의 배려에서 유 노인의 걱정과는 다른 차원의 따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탐이 나는 사람들이기도 하더구나."

"예?"

당웅건은 당가의 태상가주이자 당문의 단둘뿐인 화경 고수다.

당문뿐만 아니라 사천, 더 나아가 중원 천지의 온갖 인재들을 봐 왔을 텐데 고작 산골짜기 사람들을 보고 탐이 난다니.

유은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당웅건이 껄껄 웃었다.

"이놈아. 화경에 이른 나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너는 벌써 그걸 얻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하촌 사람 중 도망친 사람은 없었다고 하더구나."

산적으로 돌변한 탈영병도 아니고 무려 제대로 된 군기를 지닌 천호소 병사들이다.

그들로부터 도망친다고 한들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쪽을 향해 기울기 마련.

이유를 가져다 붙이자면 얼마든지 도망칠 이유를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은하촌 사람들은 유은하의 도움으로 이룩한 은하촌을 버리지 않았다.

죽어도 은하촌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으로 항전한 결과 유은하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용감하고 의리 있는 자들을 당문이 품을 기회를 놓친다면 내가 아무리 태상가주더라도 가주께 한 소리 들을 게다."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푹 쉬고 빨리 낫기나 해라. 정신 멀쩡한 걸 봤으니 나도 좀 쉬어야겠다."

"아.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제야 감사하다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끌끌."

뒤늦은 인사였지만 당웅건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몸이 망가지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변을 먼저 챙긴 유은하의 심성이 기꺼울 뿐이었다.

한번 좋게 본 사람의 행실은 어떻게 봐도 좋은, 흔히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혼원심결이 그새 2성으로 올랐더구나. 축하한다."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은 당웅건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당문의 품으로 용이 날아들었구나! 허헛!'

이제 갓 무공에 입문한 몸으로 절정고수와 싸워 이긴 업적은 그야말로 불가해라 칭할 만했다.

더군다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되살아난 유은하의 몸은 이전보다 단단해지고 질겨졌으며 또 유연해졌다.

그 회복을 직접 유도하고 지켜본 당웅건은 알 수 있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절정고수조차 유은하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물론 세상에 그렇게 싸울 머저리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유은하 역시 차근차근 내공을 쌓아가는 몸 아니던가.

'10년, 아니. 5년 내로 절정고수와도 견줄 수 있을 게야.'

자질이 뛰어난 명문자제가 영약의 도움까지 얻는다면 이립이 되기 전에 절정에 이르기도 한다.

아주 간혹 약관에 이른 지 몇 년 안 되어 절정에 닿는 천재들도 있지만, 그들은 중원 전체를 뒤져봐도 몇 없다.

그런 자들이 바로 3년마다 열리는 용봉지회에서 용과 봉의 별호를 얻어가는 이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유은하는? 영약은커녕 지학이 다 되어 무공을 익혔다. 그런데도 약관쯤에 절정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다다음 용봉지회에서는 당문에서 용과 봉이 동시에 나오겠어.'

물론 유은하가 당씨 성을 갖게 된 건 아니지만, 이제 당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러니 유은하가 용봉지회에서 활약한다면 전 중원에 또다시 당문의 이름이 울려 퍼지리라.

그렇게 당웅건이 밝은 미래를 그리며 낡은 방에서 나온 그때.

"태상가주님."

옥호당주 당충영이 다가왔다.

"그래. 알아냈는가?"

"예. 예상한 대로 촉왕부 짓이 확실합니다."

유은하와 은하촌이 회복하는 동안, 당충영은 강욕진 부천호를 심문했다.

강욕진은 얼마간 버티며 입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당문의 고문법을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도지휘첨사 정주호에게서 받은 명령을 전부 털어놓았다.

"도지휘첨사 정주호가 왕죽겸 정천호에게 자전마견의 행적을 알아내라 지시했다고 합니다."

"자전마견이라…. 촉왕이 기어이 마인까지 끌어들인 건가."

당웅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대 촉왕의 아버지인 전대 촉왕과 당웅건은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막역한 사이라고까지는 못 하지만, 사천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은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전대 촉왕의 아들이라는 자가 사천에 사파의 진입을 허용하고 심지어 마인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촉현왕이 지하에서 통곡을 하겠군."

"...."

"아무튼. 자전마견을 쫓던 놈들이 대체 은하촌에는 왜 온 것이야?"

"그."

당충영이 목소리를 낮춰 주변을 살폈다. 그걸 본 당웅건이 기막을 펼쳤다.

당웅건과 당충영의 기감을 속이고 다가온 누군가가 있더라도 기막까지 뚫고 소리를 엿들을 수는 없으리라.

"유 공자께서 아가씨와 함께 가져온 염초 때문이었습니다."

"흠."

당웅건은 어찌 된 일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염초 탈취라는 자작극을 펼쳐 촉왕부에 화약을 비축함과 동시에 당문에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촉왕부다.

그런데 그 염초가 갑자기 증발해 버렸으니 당문이고 뭐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 아니겠는가.

"자전마견이 염초를 훔쳐 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여긴 듯합니다. 그리고 자전마견을 찾지 못한다면 죄를 뒤집어씌울 자를 찾는 임무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금천현 지현에게 초 의원과 배호청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을 범인으로 몰아갈 계획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강욕진은 실토했다.

"영란파와 철죽파를 정리해 민심을 얻고, 그 민심을 토대로 당문까지 압박한다. 아주 헛된 계획은 아니야."

보통 일이었다면 충분히 해명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릴 시간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 이번 건은 무려 염초가 걸린 건이며 촉왕부가 작정하고 당문을 꺾으려 준비한 음모.

당연히 촉왕부는 당문이 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역모로 몰아 대군과 화포로 휘몰아칠 생각이었을 테다.

"그래도 촉왕부라는 이름이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됐기에 가만두고 있었더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구나."

당웅건의 목소리에 스산함이 깃들었다.

이제 칼자루는 당문의 손에 들어왔으니, 그걸 어떻게 휘두를지는 당문이 결정할 몫.

잠시 고민하던 당웅건은 칼을 어떻게 휘두를지 결정을 내렸다.

"병사들은 전부 본가로 압송해라."

"그 말씀은…."

"단, 은하가 충분히 회복한 후에. 놈들의 처벌은 은하에게 맡길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섬서성과 하남성의 감찰어사를 불러와라."

"...."

사천성의 관료들을 관리, 감독해야 할 사천성 감찰어사는 촉왕에게 매수된 지 오래다. 그러니 촉왕이 그리 과감하게 염초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섬서성과 하남성의 감찰어사는 촉왕의 손이 닿지 않는 자들이다.

특히 하남성은 북경이 있는 하북과 지척인 곳. 그곳의 감찰어사라면 촉왕부와 염초라는 이야기에 달려오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필요한 장기라도 썩어 문드러졌다면 과감히 잘라낼 줄 알아야 하는 법."

당웅건의 싸늘한 중얼거림이 사천 산속에 울려 퍼졌다.

48화. 당가은랑

하늘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

중원의 지배자라 하여 황제.

세상 만물의 어버이이자 주인인 그의 앞에, 도찰원의 수장 좌도어사가 엎드려 있었다.

"죽여주시옵소서!"

머리를 바닥에 내리치며 간절하게 외치는 좌도어사. 권력의 핵심 중 하나인 그가 이런 꼴이 되리라 대체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좌우에 도열한 대신들은 함부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짐을 대신하여 중원 곳곳을 살펴야 할 감찰어사가 촉왕부의 뇌물을 받고 죄를 눈감아줬다라…."

늙은 황제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으나 그 너머에 도사린 위엄과 관록은 대신들의 어깨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바닥에 엎드린 좌도어사는 스스로 머리를 깨버릴 정도로 거세게 바닥에 고개를 처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좌도어사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볼과 목에 번질 무렵.

"그만."

황제의 말에 좌도어사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가 스스로 멈춘 게 아니었다. 금의위 도독, 벌써 수십 년 전에 화경에 이르렀다는 절대고수의 손짓에 좌도어사의 몸이 강제로 멈춘 것이었다.

"우도어사."

"예! 폐하!"

황제의 부름에 우도어사도 냉큼 앞으로 나와 엎드렸다.

사천성에서 활동하는 감찰어사는 좌도어사의 줄을 탄 놈이었지만, 어찌 됐든 우도어사 역시 도찰원을 책임지는 이.

당연히 그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섬서와 하남의 감찰어사들이 보내온 정보가 사실인가?"

지금 우도어사가 좌도어사 옆에서 머리를 찧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단 하나, 섬서와 하남의 감찰어사들이 우도어사의 심복이기 때문이다.

금의위 정보력으로 도찰원 내의 권력 구도를 아는 황제는 일부러 좌도어사와 우도어사의 처우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제의 물음에 우도어사가 칼같이 답했다.

"우첨도어사와 경력(經歷)이 함께 사천으로 향해 확인했나이다. 초, 촉…."

말을 하던 우도어사가 목소리를 떨었다. 황제도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만, 지금부터 입 밖으로 내야 하는 보고는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참담했기 때문이다.

"촉왕은 사사로이 병사를 부려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것이 무려 수십 회였으며, 그 탓에 민심이 흉흉해져 사천에 사파와 도적들이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나이다! 또한, 황금을 착복한 정황까지 확인했나이다."

"…촉현왕 치세에는 산적이 없어 병사들이 실전 경험을 염려해야 했던 낙원이 저 사천 땅이거늘."

황제의 무거운 음성이 대전을 짓눌렀다.

"또, 또한 백성들을 보듬고자 하는 사천당문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으며, 촉왕부는 사천당문을 징치하고자… 징치하고자…."

우도어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금의위 도독이 그를 노려보았다.

"금천현에서 나는 황금과 염초를 고의로 망실하여 그 죄를 당문에 뒤집어씌우려 했나이다! 그 과정에서 사파 두 곳을 멸절시키고 당문의 태상가주 일수천살 당 노(老)의 제자가 있는 마을을 습격해 백성을 상하게 했나이다!"

눈을 질끈 감고 말을 토해낸 우도어사가 숨을 헐떡였다. 반대로, 대전에 있던 대신들은 헛숨을 삼키고는 감히 내뱉지 못했다.

황제의 것인 황금을 착복한 죄.

전략자산인 염초를 고의로 망실한 죄.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 천자의 자식인 백성을 상하게 한 죄.

전부 합하면 역모로 다스려도 부족할 정도의 중죄였다. 제아무리 왕의 칭호를 물려받은 이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좌도어사."

"예. 폐하! 죄인 사성문 여기 있나이다!"

"당문의 무고일 가능성은? 짐은 촉현왕의 치세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의 아들이 그런 일을 벌이다니, 믿기 힘들다."

황제의 물음에 좌도어사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말은 촉왕의 편을 드는 말이 아니라 보고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직접 사천으로 행차하겠다는 협박이었다.

다만, 지금 좌도어사가 걱정하는 건 거짓 보고가 아니었다. 좌도어사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사천으로 좌첨도어사와 가문의 심복을 열이나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사천과 촉왕부를 조사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건 촉왕부의 치부뿐이었다.

그 거대한 치부를 자신의 입으로 보고해야만 하다니. 분명 땅에 엎드려 있을진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고개 숙인 좌도어사를 보며 대신들을 생각했다. 저자는 이제 끝이구나 하고.

그런 대신들 머리 위로 황제의 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짐은 관무불가침을 깨뜨리라 명한 적이 없다."

"...."

"대명의 충용무쌍한 병사는 지평선을 뒤덮을 정도로 많으나 북으로는 북적이, 서로는 서융이, 남으로는 남만과 왜구가 호시탐탐 풍요로운 중원을 노리고 있다."

그나마 동쪽으로 고요한 은자의 나라가 있으나, 그들도 불과 수백 년 전까지는 중원의 패권을 위협하던 위험한 민족이었다.

그들을 복속시키려던 중원 왕조가 역으로 무너졌을 정도로 말이다.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이런 상황에는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그리하여 짐은 드넓은 중원 곳곳에 관리를 보내는 한편, 협의지사들에게도 천하의 안정을 명했다."

성주부현(省州部縣)으로 체계를 나누고 각 성에는 승선포정사사와 제형안찰사사 그리고 도지휘사사를 설치했다.

민생과 사법, 군사를 나누어 권력이 집중되는 걸 방지하였으며 각 사사는 중앙의 육부(六部)에서 각기 지휘토록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드넓은 중원 천지를 다스리기 부족했다. 곳곳에 왕부를 두어 인재를 모으고 발전의 중심이 되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무림인이라 칭하는 이들도 이용했다. 정파니 사파니 관계없이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으니까.

특히 정파 중 일부 세력은 관직에 진출하거나 군을 도와 변방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그것도 왕부에서 이런 참람한 일을 벌이다니. 이것이 과인이 이 나라를 다스리기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면 뭐겠는가."

황제의 말에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태자, 주원휘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 엎드렸다.

"폐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폐하가 아니시라면 그 누가 이 나라를 이끌겠사옵니까!"

"폐하를 보필하지 못한 소신들의 죄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 엎드리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황제는 비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욕심만 그득한 것들이 죽여달라 외치는 꼴이라니.'

작정하고 칼을 휘두르면 도찰원부터 도지휘사사를 지휘해야 할 병부까지 전부 날려버릴 수 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황제의 사람이 될 테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썩어빠진 황궁을 정화할 수 없다.

제국이 외적의 침입을 순탄히 막아내고 유지되어온 건 좋은 일이나, 동시에 대신들의 힘도 점점 커져만 갔으니까.

외적으로 인한 거대한 위기가 생기든, 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미친놈이 생기든 둘 중 한 사건이 일어나 황제가 권력을 거리낌 없이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명제국의 제23대 황제 경덕제는 지금이야말로 그 명분이 손에 들어왔음을 느꼈다.

'하지만, 급해서는 안 된다.'

경덕제의 시선이 잠시 바닥에 엎드린 태자에게로 향했다.

'혼란은 휘(翬)의 치세 전에 끝내야 하나, 섣부르게 움직이면 오히려 짐을 떠넘기게 될 뿐이리라.'

앞으로 10년 혹은 15년 정도. 차근차근 명분과 실리를 하나씩 빼앗아 오며 썩어빠진 자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인재를 황궁으로 들여야 한다.

'세상에 유자라 자청하는 이가 별처럼 많을진대 짐과 휘를 위해 일할 자가 없겠는가!'

경덕제는 엎드린 대신들을 보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병부상서."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섬서성과 하남성에서 각기 정예 3만을 차출하여 촉왕부로 향하라."

그 말에 대신들의 어깨가 떨리며 파랑이 일렁이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경덕제의 말은 촉왕을 반역자 취급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또한 사천도지휘사와 도지휘동지를 소환하고 빈자리는 병부좌시랑을 보내 잠시 대신토록 하라."

"명 받잡겠나이다!"

"우도어사."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금의위 오백을 내어줄 터이니 우부도어사와 함께 직접 촉왕부와 사천도지휘사사로 향하라. 그곳에서 잘한 일과 못한 일을 조사하여 사소한 것 하나 남기지 말고 짐 앞으로 가져와라. 반항하는 자는 직위를 막론하고 베어도 좋다."

무려 병부의 일인자와 도찰원의 일인자가 황제의 명을 받고 직접 북경을 나서는 일.

하지만 누구도 과하다 지적하지 않았다. 이 난리를 일으킨 게 바로 왕부이며 심지어 염초가 얽혀 있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에게 일을 맡겼다는 건 촉왕부만 제대로 털어버리면 병부와 도찰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사천도지휘사사와 성도감찰어사에게는 피바람이 불어닥칠 테지만, 조직 전체에 피바람이 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지만 경덕제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천이 그럴진대 다른 곳이라고 다르겠는가. 앞으로 금의위에 암찰사를 설치해 휘하에 중전후좌우 다섯 소를 둘 것이며 그곳의 암찰무사들로 하여금 감찰어사를 돕도록 할 것이다."

당연히 평소였다면 반발이 심했을 일이다. 황제가 도찰원의 말단을 직접 감시하여 손안에 넣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황제를 막을 수 없었다. 감찰어사가 촉왕부에 매수되어 염초를 빼돌리는 걸 눈감은 일이, 그야말로 역모로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리고 그 일로 병부와 도찰원을 뒤엎을 수 있음에도 황제가 먼저 한발 양보했으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병부상서와 좌도어사의 목을 날리는 게 나았을지도.'

몇몇 대신들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미 황제의 입을 떠난 명령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결국, 대신들은 황제의 명령에 고개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천에서 시작된 촉왕부의 일탈은 북경으로 이어지며 이내 격변의 불씨가 되었다.

그 불씨가 언제 어떤 형태로 유은하의 앞에 당도하게 될지. 지금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한겨울임에도 은하촌 이주는 빠르게 진행됐다. 마침 황제가 당문에 전답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명분은 촉왕부의 무도한 행위에 맞서 백성을 지킨 걸 치하한다는 것.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도로 진격하는 병사들이 촉왕부를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당부가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섬서와 하남의 정예병 6만과 금의위 무사 5백이라. 촉왕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구나."

당웅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기에 유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촉왕부와 당문은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습니까?"

"지금이야 그렇지."

"그렇다면 촉왕부가 사라지는 건 당문에 좋은 일일 텐데, 별로 기쁘지 않아 보입니다."

유은하의 물음에 당웅건의 입가에 자리한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본디 무림과 관은 불가침이나 어찌 칼로 자른 것처럼 나눌 수 있겠느냐? 그 근본이 모두 민초에 있을진대."

천하고 가난하고 흔하고 미력한 민초.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지만, 누구도 천하를 떠받치는 근본이 백성임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오죽하면 천자조차 만백성의 아버지라 자청하겠는가.

"촉왕부가 사라지면 성도로 향하려는 중원 인재도 적어질 테지.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받지 않겠느냐."

당웅건의 말에 유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큰 집단, 더 유능한 집단에서 일하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였으니까.

"당문이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우리는 무림 문파이며 세가다. 백성들을 다독이는 것까지는 할 수 있어도, 정치나 군사적인 영역에 개입해서는 안 돼."

"흠."

유은하는 중원의 이 미묘한 역학관계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라운 행성에서는 갤럭시 크라운이 정부 역할까지 전부 담당했으니까.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니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존재하고 지방정부가 그 권위를 대신하니, 당문이 나서는 건 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겠네.'

크라운 행성의 역사나 다른 은하계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과도기적인 시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유은하가 속으로 납득하고 있을 때, 당웅건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아무튼. 결정은 했느냐?"

"아, 예."

유은하가 무겁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직 은하촌이 완성되지 않았다. 의지할 네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좋을 텐데, 아쉽지는 않고?"

"제가 천년만년 마을에 붙어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유은하의 눈에 불길이 일렁였다.

"복수는 제 손으로 직접 하고 싶습니다. 준비하던 것도 때마침 완성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래야 내 제자지."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당웅건은 그렇게 말하며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당당한 척 허세 부리고 있지만, 이미 촉왕부 내부는 쑥대밭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틀어졌음을 짐작한 촉왕과 도지휘사, 도지휘동지와 도지휘첨사까지 전부 칩거를 핑계로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었으니까.

물론 다가올 처벌과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모습을 감춘 채 심복들과 함께 은밀히 성도를 빠져나갔을 뿐.

그리고 당문은 그들이 성도를 빠져나가게 내버려 뒀다. 그들이 사천을 거의 빠져나갔을 때를 노려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성도에서 그들을 붙잡는다면 몸 성히 살려서 병부상서와 우도어사에게 넘겨야 하니, 제대로 복수를 못 하지 않겠는가.

"다녀오면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게야. 다른 걱정일랑 말고 네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당문이 함께할 테니."

49화. 당가은랑

촉왕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드넓은 천하에 황제 다음으로 존귀하다는 왕. 태자가 아니라면 황족조차 왕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허름하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복장을 한 채 두 발로 산속을 헤매야 한다니.

꼬르륵.

배에서 올라오는 허기도 지독하리만치 낯설었다. 당장 손짓 한 번이면 저 운남의 달콤한 과일도 상 위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육포라도 좀 드시지요."

함께 도주한 도지휘사가 보다못해 촉왕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그들은 이제 중원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게 됐다. 서장 너머 인도로 향하든 청해를 넘어 신장으로 간 뒤, 아예 서역으로 가든 대명제국을 벗어나야 살 수 있는 처지.

그러니 촉왕이며 도지휘사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깟 관직과 품계 따윈 급히 가져온 보석이나 일신의 무위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촉왕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도지휘사의 말을 거절했다.

"됐소."

"먹어야 힘이 납니다. 힘을 내야 무사히 사천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사천을 빠져나간다라…."

촉왕이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사천에서 도망쳐야만 하는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다.

'대체… 내 처지가 어쩌다 이리됐단 말인가.'

처음에는 자신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천을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백성들이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는 걸 들을 때면 자신 또한 그 뒤를 이어 가겠노라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린 왕은 아직 미숙했다. 전대 촉왕과 함께하던 신하들이 그를 보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촉왕이 그런 눈빛에 유달리 민감했던 것.

촉왕을 보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노신들의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

그 두 가지가 얽히며 촉왕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불행이라면 그 틈을 타 접근한 이들의 감언이설이 촉왕을 뒤흔들어 놨다는 것. 그리고 촉왕에게 접근한 이들의 정체가 바로 혈교(血敎)라는 점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물. 물은 없나?"

"조금 전에 개울에서 목을 축이고 수통도 갈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다 마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촉왕은 자신이 느끼는 게 허기인지 갈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일단 이거라도…."

옆에서 눈치를 보던 도지휘첨사 정주호가 끼어들었다.

"...."

이번 일을 명한 건 촉왕과 도지휘사지만,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일을 망친 건 정주호였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죽고 없는 왕죽겸을 탓할 수는 없으니까.

잠시 정주호를 노려보던 촉왕은 그의 손에서 대나무 수통을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수통을 통째로 비워도 갈증과 허기는 심해지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흙탕물을 마신 듯한 느낌에 입안이 텁텁하고 비릿하기까지 했다.

"아."

그때, 옆에서 정주호가 반사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흘렸다. 설마 호의로 건넨 물을 촉왕이 홀라당 다 마셔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껏 예민해져 있던 촉왕에게는 그보다 거슬리는 소리가 없었다.

"뭐냐. 이깟 물이 아까운 거냐! 네놈도 날 병신으로 보는구나! 이 내가! 촉왕이! 물 한 병도 마음대로 못 먹는단 말이냐!"

갑자기 발작하는 촉왕을 보며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말리기 시작했다.

"전하! 진정, 진정하십시오!"

"도첨사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잖습니까."

"일단 목소리를 낮추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말릴수록 촉왕의 난동은 심해져만 갔다. 마치 때맞춰 먹어야 할 약을 먹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켜라! 내 당장 성도로 돌아갈 것이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감히 날 버리고 당문에 붙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황실은 내게 반역자라 한단 말인가! 반역은 저 당문과 그들에게 붙은 천것들이 한 것이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한 촉왕의 모습. 그 모습에 그를 말리는 이들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어찌 됐든 촉왕을 데리고 사천을 빠져나가야 한다. 낙오된 촉왕이 붙잡히면 자신들의 경로가 노출되고, 그러면 도주로 또한 특정 당할 확률이 높으니까.

"쯧."

함께 도주한 무관들이 촉왕의 난동에 쩔쩔매자, 도지휘사가 나서서 촉왕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촉왕의 무위는 고작 일류 턱걸이일 뿐이었다. 반면, 도지휘사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이기에 제압 정도는 손쉬운 일이었다.

'이제 와서 촉왕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지.'

도지휘사의 차가운 눈빛이 기절한 촉왕을 내려다봤다.

수혈을 찌르지 않은 것도 약간의 내공이 아까울 정도로 촉왕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에 눕혀라. 날이 밝으면 다시 출발할 것이다."

"예. 대인."

"고단하겠지만, 절대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도지휘사는 당문이 자신들을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어떤 놈들인데.'

사천당문은 정파 중에서도 한없이 사파에 가까운 이들이다. 아니, 백성을 보듬는다는 대의가 없었더라면, 그 잔혹한 손속으로 진즉 사파로 분류됐겠지.

성도를 탈출한 것조차 기적일진대 그들이 추적조차 포기했으리라 기대하는 건 희망이 아니라 망상이다.

"불침번은…."

도지휘사가 심복들에게 명령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제기랄. 도움도 안 되는 머저리 자식이, 가만히 있기라도 할 것이지."

도지휘사의 반응에 심복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지금은 비록 반역도로 몰려 도망자 신세가 됐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사천도사의 최정예 무관들.

하지만, 그들이 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마치 연기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끌끌. 오랜만일세, 임생문이."

"…일수천살."

"아. 나도 첩중검(疊重劍)이라 불러줄 걸 그랬나?"

당웅건이 모습을 드러내자 도지휘사의 심복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그러면서 일제히 호흡을 조절하며 내공으로 전신을 보호하는 게 여간 정예한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당웅건은 허허 웃기만 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나? 응?"

"사실대로 말하면 놔줄 거요?"

"미안하네만 그건 안 된다네. 자네들은 역적이지 않은가."

"제기랄."

도지휘사 임생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멍청한 촉왕에게 약점을 잡히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추락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거래는 어떻소?"

임생문이 뒤편의 동굴을 눈짓했다.

"저 안에 촉왕이 있소. 촉왕을 넘길 테니 우리를 보내주시오."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자네? 못 본 사이에 능청이 늘었구먼."

"추가로 촉왕의 비자금이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려주겠소. 그간 착복한 황금은 물론이고 음과 양으로 구한 무공이며 영약이 가득할 거요."

그 말에는 당웅건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머저리 같다고 욕했지만 촉왕부는 촉왕부고 촉왕은 촉왕이다. 그가 모은 비자금은 천하의 당문이라 하더라도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웅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만 그걸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말일세."

"...?"

당가의 태상가주가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면, 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일까? 설마 이 자리에 중앙 고위 관료가 함께 온 건가?

그런 생각에 임생문이 중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앞으로 나선 이는 관록이 엿보이는 관료도, 위엄 서린 장수도 아니었다.

당웅건의 옆으로 나선 이는 길거리에서 보았다면 감탄했을 정도로 훤칠한 미공자, 유은하였다.

"어떻게 하겠느냐?"

"이대로 저들을 놓아준다면, 병부상서와 우도어사라는 자가 당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까?"

유은하의 물음에 당웅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을 없을 게다. 이놈들이 촉왕을 버리고 진즉 도주했다 하면 그들도 더 캐물을 수 없겠지. 설마 정2품이나 되는 도지휘사가 탈영병마냥 도주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으려고?"

그 말에 임생문을 비롯한 무관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비록 역도가 되어 도망자 신세라고는 하나, 도지휘사 임생문과 심복들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도지휘사와 도지휘동지 둘은 모두 초절정에 올랐고 도지휘첨사 정주호를 비롯해 여러 심복도 하나같이 절정이거나 일류 끝자락에 닿은 실력자들이다.

그 수가 총 오십이나 되니, 어지간한 중소 문파 하나는 하룻밤 사이에 지워버릴 수도 있는 전력.

일수천살 당웅건의 위명이 두렵긴 하나, 초절정 셋이 합공한다면 어떻게든 길을 뚫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려 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당문의 무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 활인비도…."

활인비도라는 별호를 지닌 옥호당주 당충영을 시작으로 당문의 실력자들이 당웅건과 유은하의 옆에 늘어서며 도망자들을 포위했다.

"흑사풍, 유엽독수, 불면화…."

"초절정만 넷이라니."

"당문에 있는 초절정 무인이 전부 나섰다고?"

도지휘사를 따라온 무관들의 마음이 술렁였다. 가만있으면 역도로 몰려 처형당할 게 뻔하니 일말의 희망을 품고 도지휘사를 따라 도주하기로 한 그들이다.

어지간한 추격은 힘으로 떨쳐낼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설마 당문이 전력을 다해 자신들을 쫓을 줄이야.

심지어 초절정 고수 넷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절정 고수는 벌써 스물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길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무관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도주로를 살폈지만.

뽀드득.

눈이 쌓인 나무와 바위 위에서도 당문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절정 혹은 일류에 이른 실력자들이었다.

그 수가 어느새 총 일백을 넘어가니, 도망칠 가망조차 없음이 확실했다.

어느새 무관들은 유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은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

"촉왕이 남몰래 축적한 보물이라니. 탐나긴 합니다."

"그러냐?"

"예. 그런데 그걸 꼭 평화롭게 들을 필요는 없죠. 피와 비명과 함께 들어도 듣기만 하면 그만 아닙니까."

임생문은 당웅건을 견제하다가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는 유은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쪽이 일수천살의 제자인가 보군. 왕 정천호를 죽였다던."

"정천호인지는 모르겠고, 감히 마을을 침략한 도적의 수괴를 죽인 적은 있지. 그런데 듣자 하니 그놈이 역도였다더라고. 마침,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생겨먹긴 했네."

"...."

까득.

임생문은 화를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평소였다면 단번에 검을 휘둘렀을 정도로 유은하의 말은 모욕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사실관계를 떠나, 검을 휘둘렀다가는 곧장 전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문의 위명을 도지휘사인 내가 모를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당문은 도지휘사인 자신을 오래 구금할 수 없다. 성도로 오고 있는 병부상서와 우도어사에게 넘겨야 하니까.

물론 그들의 손에 넘어간다고 해서 좋은 꼴을 볼 수 있을 리는 없겠으나 당문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 아닌가.

"촉왕과 자주 독대하다 보니 이것저것 들은 것이 있소. 서장에서 들어온 신공절학 비급도 갖춰 놨다더군. 이는 당문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소?"

물론 두말하면 귀 아픈 말이다. 신공절학 하나를 연구해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그걸 모르면 무림인이 아니다.

하지만 유은하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입을 열지 않겠다? 그건 그쪽에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내 의지를 모욕하는 거라면…."

"네 의지가 강할지, 당문의 의지가 강할지는 직접 실험해 보면 알겠지."

어차피 죽어도 무방한 자라면 유은하에게는 입을 열게 할 방법이 많았다.

휘청.

"어?"

임생문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현기증에 두 눈을 부릅떴다.

"독…!"

임생문의 시선이 당웅건에게 향했다. 하지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웅건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자신은 호흡을 최소한으로 조절하고 내공을 돌려 중독에 대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안에는 귀하다는 피독주까지 물고 있는 상태.

그런데 그 모든 방비를 뚫고 들어와 초절정 무인을 중독시키는 무색무취 독이라니!

"이 비겁한…."

임생문은 한층 거세게 내공을 끌어 올리며 몸속에 들어온 독을 태워 없애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혈맥을 따라 내공을 휘돌려도 독이 빠져나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독이란 말이냐!'

사천의 군사를 책임지는 도지휘사인 임생문이기에 당연히 사천의 온갖 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절독이 있음은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설마, 현경…."

당웅건이 현경에 올라 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건가 싶었지만.

"아쉽게도 노부는 아직 그 지고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네. 그 독, 아니. 약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건 내 제자가 자네들에게 주는 선물일세."

당웅건이 껄껄 웃으며 유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웅건이 일부러 나서서 임생문과 대화하며 시간을 끈 건 유은하의 요청 때문이었다.

유은하가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스릉.

유은하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 의미를 이해한 임생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고작 이류나 간신히 될까 한 애송이가 검을 뽑아 들고는 자신의 앞으로 나선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50화. 당가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