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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ACORPENMOO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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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낯선 세계

[반물질 미사일 도달까지 10분]

[궤도 의료기지 전 시스템 통제 불능]

[조속한 탈출을 권고합니다]

화면에 떠오른 문구를 본 유은하는 고개를 젖혀 먼 앞을 바라봤다.

궤도 의료기지의 창밖으로 보이는 우주는 장관 그 자체였다.

메가코퍼레이션 갤럭시 크라운이 지배하는 행성, 크라운. 그리고 왕관에 장식된 보석처럼 그 주변을 도는 열두 개 위성.

그것들이 새까만 우주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 실장."

"예. 도련님."

도련님이라는 말에 유은하는 피식 웃었다.

"실험실 쥐새끼한테 도련님은 무슨."

"...."

"아무튼. 강 실장 말은, 이 거대한 궤도 의료기지가 사실은 나를 가둔 시험관이었다는 거지?"

유은하는 아주 어렸을 때 불치병 때문에 크라운 행성을 떠나야 했다.

성인이 되고 병에 면역력이 생길 때까지 궤도 의료기지에 머무르면, 크라운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게 다 조작된 기억이었다니.

유은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하. 현실이 영화보다 더하네. 내가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되살리기 위한 실험체라니."

적대 메가코프의 공격으로 불탄 살점밖에 남지 않았다던 원본 유은하. 자신은 그 원본을 살리기 위한 실험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전 강 실장에게 전해 들은 자신의 정체였다.

"강 실장."

"예."

"내가 밉지 않아? 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유은하의 물음에 강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죽을 거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잖아. 아니, 애초에 난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 유은하도 아니고, 일개 실험체인데?"

자조적인 유은하의 말에 강 실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회장이 이 궤도 기지째 모든 걸 없애려는 이유를 아십니까?"

강 실장이 유은하에게 얇은 패드를 내밀었다.

"실험 결과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빼돌렸는데, 너무 늦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패드의 액정이 살짝 깨지고 모서리 부분에는 얼룩덜룩 피가 묻어 있었다.

"행동 적합도 99.98%. 원본과 다를 바 없는, 말 그대로 환생이라 해도 될 성과입니다."

"…그러면 나를 그냥 아들이라고 인정하면 되잖아."

속에서 불쑥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시 화를 쏟아내기에는 이미 십여 분 동안 난리를 치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다 타버린 재처럼 별로 힘이 나지 않았다.

"본사에서 새로 하나 제대로 키워보겠대? 이런 시험체 말고?"

"아닙니다.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원본 데이터와 비교해 여러 방면에서 잠재력 수치가 최대 1,000%에 달합니다. 다음 화면에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그 말에 유은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께서 아들 만든답시고 만든 게, 사실 괴물이었네?"

패드를 터치해 화면을 넘겼다. 잠재력 폭등의 원인으로 '세포 융합형 인공지능 아스트랄 유니온'일 거라는 추측이 적혀 있었다.

실험체를 유전자 단위까지 낱낱이 지켜보고 조정하기 위해 이식한 인공지능이 알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다는 추측이었다.

한동안 패드를 노려보며 고민하던 유은하는 그것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놨다.

이제 와서 고민해 본들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은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별이 반짝이는 우주를 바라봤다.

"그런데 강 실장."

"예."

"아직 대답 안 해줬어. 내가 밉지 않아?"

유은하의 물음에 강 실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물어보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궁금하잖아. 어차피 죽을 텐데, 나한테 왜 굳이 사실을 알려줬는지."

"...."

"그리고 강 실장 능력이면 나 버리고 본사 가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었잖아."

유은하의 끈질긴 물음에 강 실장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회피한 게 아니라, 크라운 행성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제 가족은 위성조차 아닌, 위성 관리를 위한 테라포밍 플랜트 출신 빈민이었습니다."

관리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기계 부품에 불과한 곳.

강 실장은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몸부림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그때는 플랜트 관리자가 제 한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관리자면, 7급 시민이었던가?"

"예. 9급에서 7급이 된 것도 정말 운이 좋아서였습니다만, 우연히 이 궤도 의료기지의 시설 관리자로 뽑히게 됐습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관리자 중 한 명일 뿐인데도 본사가 진행하는 거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6급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련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무뚝뚝하던 강 실장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여러 심부름을 하며 도련님께서는 흔한 로열패밀리나 상류층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걔들 성질이 지랄 맞긴 하지."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죽이는 건 예사. 아예 회사나 가족 단위로 몰살시키거나 노예로 부리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그게 금력이든 권력이든 무력이든.

"아무튼. 내가 그냥 사람다워서 밉지 않다는 거야?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는 이유로는 좀 약하지 않아?"

"이야기가 잠시 샜습니다만, 저는 도련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강 실장이 근육으로 터질 듯한 정장 안쪽에서 명찰을 꺼냈다.

개인 정보가 담겨 있는 명찰을 몇 번 터치하자, 강 실장의 등록 거주지가 나왔다.

크라운 행성의 D섹터. 4급 시민.

"도련님의 측근이 되고, 꾸준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가족 모두 위성 에메랄드를 거쳐 크라운까지 입성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무려 D섹터에."

강 실장의 시선이 잠시 창밖, 크라운 행성으로 향했다.

"그곳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저와 제 가족은 '인간답게' 산다는 게 뭔지 깨닫게 됐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저희에게 새 삶을 주신 분이십니다."

강 실장의 말에 유은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가족한테 가야지 왜 여기 있어?"

"제가 가족에게 가면 도련님 곁에는 누가 남습니까."

"가족이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죽어야 가족이 안전해집니다."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는 강 실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까지 버려 가며 자기 사람을 챙기는 모습이 아버지라는 작자와 딴판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아버지께 난 아들도 아니었겠지.'

유은하의 눈에 난장판이 된 방이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내지 말고 대화나 나누는 건데.'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그렇게 화를 냈을까.

[반물질 미사일 도달까지 1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강 실장.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 욕이든 뭐든 다 들어줄게."

"괜찮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로열패밀리 면전에 욕해보겠어? 해봐, 빨리. 시간 없어."

잠시 망설이던 강 실장은 저 멀리 희끄무레한 빛이 보이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에는 저도, 도련님도 지상을 밟고 살 수 있게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유은하가 김빠진다는 듯 피식거렸다.

"고상하게 돌려 까는 거야?"

"예?"

"강 실장은 땅 밟아 본 적이라도 있잖아. 시민 등록할 때 크라운에 가 봤으면서."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 그냥 부러워서 투덜거렸다고 생각해. 땅도 그렇고, 강 실장한테는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도 있잖아."

반면, 유은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갤럭시 크라운의 유 회장이 쓸모에 의해 내주었다가 이제 회수해 가는 것일 뿐.

'아니. 강 실장은 남았나.'

유일하게 '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는 사실에 묘한 감상을 느끼며 유은하의 시야가 청백색으로 물들었다.

반물질 미사일이 폭발하며 궤도 의료기지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

유은하는 생소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땅에 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까슬하고 오돌토돌한 감촉.

콧속으로 파고드는 흙 내음.

갈색 나뭇가지와 청록빛 나뭇잎을 뚫고 내리쬐는 쨍한 햇볕.

사방이 강철색과 깊은 검은색으로 가득하던 궤도 의료기지가 아니었다.

"…지상?"

유은하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흙을 더듬었다.

생소하면서도 생생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물질 미사일에 티끌 하나 남지 않고 소멸했어야 할 자신이 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눈을 뜬 걸까?

그런 의문도 잠시.

부스럭-

조금 떨어진 관목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 실장?"

유은하가 반사적으로 그를 불렀지만.

"거, 사람이오?"

수풀이 무성한 곳 저편에서 들려온 건 미지의 언어였다. 뒤이어 생전 처음 보는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튀어나왔다.

외모는 같은 인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해 서로 인간이 아니라는 오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게 달랐다.

"워매.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 길이라도 잃었나? 이 깊은 산중에?"

노인이 보기에 유은하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한 집 도련님이었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흰 피부.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같이 고운 손.

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도 두려움이나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앞서는 눈빛까지.

딱 봐도 세상에 널리고 널린 민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복색이 너무나 특이했다.

유은하에게는 평범한 정장과 코트였지만, 이곳 중원에는 그런 옷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근처에는 사람 흔적 하나 없었다.

저런 도련님이 산을 오르는데 호위와 시종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광증이 도진 놈을 버리고 간 건가?"

머리도, 옷도 너무 특이하다.

일행이 짐승에 당한 흔적도 없으니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상대가 낯선 건 유은하도 마찬가지였다.

"빈민?"

돈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노화를 막을 수 있게 된 게 1천 년도 전이다.

더 많은 돈이 있으면 죽음조차 미룰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았던 유은하에게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더군다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도 이상했다.

유은하는 크라운 행성계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알고 있었으니까.

"난 유은하라고 하는데, 혹시 크라운어 할 줄 알아?"

"이놈이 대체 뭐라는 겨?"

"…모르나 보네. 여기.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유은하는 최대한 손짓을 이용해 뜻을 전달하려 했지만.

"쯧쯧. 생긴 건 멀끔한데 해괴한 말이나 내뱉다니. 귀신이 들려서 버려진 건가?"

노인은 혀를 찰 뿐이었다.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지만, 혀를 차며 측은하게 바라보는 기색을 유은하가 모를 수는 없었다.

"후…."

유은하는 불쑥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대화를 시도했다.

평범한 로열패밀리 같은 성격이었다면 대번에 광인으로 오해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로 사람 부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니까.

혹은 노인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여기며 때려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유은하가 날뛰었다면 노인은 유은하를 미친놈 취급하며 버리고 갔겠지.

어쩌면 노인의 허리춤에 걸린 손도끼가 유은하의 머리를 내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유은하의 노력으로 노인은 유은하가 그저 언어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쯤 되니 유은하를 경계하던 노인의 마음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저 먼 서역에서 온 건가 보구나. 그냥 두고 가면 산짐승 먹이가 될 텐데. 에잉."

두고 가도 상관은 없다. 중원에서 사람 목숨이 가벼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유은하는 몰랐지만, 노인이 유은하를 고기로 만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 정도로 요지경인 세상이 바로 중원이라는 세상이었다.

"따라오너라."

노인이 손짓하며 등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건가?"

유은하도 용케 노인의 손짓을 알아들었다.

노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위험하지는 않을지. 당장 떠오르는 걱정도 있었지만, 유은하는 노인을 따라나섰다.

노인을 보내고 홀로 산속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게 노인을 따라가던 유은하는 산속 작은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름도 없는 마을, 그저 '유'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꽤 흘러 말을 배우게 된 후였다.

***

유은하가 중원 사천의 첩첩산중에 떨어진 지도 반년이 흘렀다.

그사이 유은하는 말과 '중원'이라는 세계에 대해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을 생활에도 완벽하게 적응했다.

"할배! 장작 다 팼어!"

"이 썩을 놈아! 그거 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으잉? 진짜네?"

유 노인이 소리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안에 끝내라고 준 일이 아니었다.

날이 추워서 딱히 할 일도 없다지만, 혼자 하면 족히 나흘은 걸릴 양이었으니까.

그런데 유은하는 그걸 한 시진 만에 끝내버린 것이었다.

"돼지처럼 처먹더니 밥값은 하는구나."

"밥값? 그거 다 내가 사냥해온 거였는데?"

"그런 널 주워 온 게 나다. 이놈아. 그리고 말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흐흐. 고마워. 할배."

"웃지 마! 사내놈이 징그럽게."

유은하가 웃자 유 노인은 툴툴거리며 유은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로서 이런 대접을 받은 건 15년 인생 중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생 몇 번 얼굴 본 적조차 없는 아버지, 갤럭시 크라운의 회장보다 유 노인이 더 가족처럼 느껴졌으니까.

덕분에 유은하의 기준으로는 미개하기 그지없는 중원 생활이 오히려 행복할 지경이었다.

산속 생활은 뭐든 자신의 손으로 해내야 했다.

유은하는 그런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주를 정복할 정도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충족감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유은하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하게 됐다. 바로 장사였다.

"지치진 않았느냐? 오늘 금천현으로 나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지치긴 무슨! 괜찮으니까 빨리 가자!"

"쯧쯔. 뭐가 그리 신난다고 망아지처럼 날뛰는지."

오늘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로 인근 현에 봇짐 장사를 나가는 날.

반년 동안 가득 모아둔 약초와 가죽 따위를 팔고 생필품과 식량을 사 오는 날이었다.

그렇게 유은하는 처음으로 중원의 도시로 향했다.

2화. 유전유죄

유은하와 유 노인은 꼬박 나흘을 부지런히 걸어 금천현 인근에 도착했다.

"음…."

산 아래로 펼쳐진 금천현을 보며 유은하가 묘한 소리를 냈다.

"이놈아. 놀랐느냐?"

"응."

유은하를 아무것도 모르는 야인(野人)이라 생각하던 유 노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고작 저걸 보고 놀라느냐? 사천 성도를 보면 아주 자빠지겠구나. 여긴 현 중에서도 그리 큰 곳이 아니야."

중원 전체로 따져도 질 좋은 금이 나기로 유명한 금천현.

하지만 그 명성과는 달리, 사천성 전체로 따지면 그다지 발달한 곳은 아니었다.

금이라는 게 나라에서 관리하는 귀물이다 보니 민간인이 손을 얹을 구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은하는 금천현의 규모를 보고 놀란 게 아니었다.

'조금 크다 싶은 것도 전부 목조건물이잖아?'

그것도 3층 이상 가는 건물이 없었다.

'이 세계의 문명은 우주 개척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게 확실해.'

도구로 석기나 간혹 철기를 쓰는 걸 보고 짐작하긴 했다. 문명 수준이 크라운 행성에 비하면 초고대라 칭해도 될 정도라고.

그래도 금천현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크라운 행성계 안에 이런 특이한 곳이 있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여긴 크라운 행성계가 아닌 게 확실했다.

"여기에 사람은 얼마나 있어?"

"사람? 그런 걸 내가 어찌 아누? 지현(知縣) 나리쯤 돼야 알지."

유은하의 눈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금천현이 산속 유씨 집성촌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현(縣)은 1만 호(戶) 이상이 모여야 하는 최소 지방 행정 단위.

고작 50호 남짓이 모인 유씨 집성촌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놈아. 그보다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아, 고막 헐겠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네놈 태도를 보아하니 또 말해야 쓰겠다."

유은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괜히 나서지 말아라.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은 조용히 사는 게 제일이야."

유은하는 자신이 살면서 이런 소리를 들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는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가 아니라 산사람 유은하인데.

'아니. 애초에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도 아니었지만.'

유은하가 딴생각하는 사이에도 유 노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억울해도 굽실거리면서 '예. 예.' 하면 큰 화는 면한다. 소란을 일으키면 큰일 나는 건 우리야."

"알아. 안다고. 아패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

"그래. 아패가 없으면 여기서는 가축이나 다름없어."

유은하는 유 노인의 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크라운이나 크라운의 열두 위성에서도 시민증이 없으면 짐승 취급당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도시 최하층이라는 빈민조차 10급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다.

설령 물리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DAN 스캔이나 생체 데이터 칩에는 정보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 정보조차 없다는 건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는 뜻. 법에서 정한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 클론이나 장기 배양용 인공체라는 뜻이었다.

물론 중원의 사정은 조금 다르긴 했다.

중원 천지의 인간이란 공기가 뭉쳐 자연발생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수히 쏟아지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천자가 보호해야 할 백성이란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 자들, 즉. 세금을 바치는 자들뿐이었다.

중원 땅을 밟고 사는 것 중 세금을 바치지 않는 놈들은 백성이 아니다. 백성이 아니니 지켜줄 의무도 없다.

지켜줄 자가 없으니 함부로 대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주인 있는 짐승보다도 취급이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의 밭을 부쳐 먹는 소작농조차 아패가 없는 자들을 깔본다.

"알았느냐? 뭘 하려고 하지도 마라. 그냥 내 옆에 조용히 붙어 있어."

"내가 애야?"

"반년 전만 해도 말도 못 하던 놈이 그럼 애지, 어른이냐?"

"아니, 그건."

유은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닫았다.

유 노인에게 설명해 봤자 믿지 않을 테니까. 광증이 도졌다고 측은한 눈길을 보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유은하가 입을 다물었음에도 유 노인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아. 이번에는 특히나 위험해."

유 노인의 시선이 유은하가 짊어진 커다란 봇짐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유은하가 반년 동안 산을 뛰어다니며 수집한 어마어마한 양의 약초와 가죽이 들어 있었다.

"혹여나 우리가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아주 작정하고 달려들 거다."

거지는 강도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 가진 게 없는데 노리긴 뭘 노린단 말인가?

하지만 아패도 없는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놈들의 주머니가 두둑하다면?

버젓이 점포를 가진 놈들도 강도로 돌변할 거다.

"그래도 위조 아패는 있잖아. 나는 아직 약관이 안 돼서 아패가 안 나왔다고 하면 되고."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유 노인에게는 관인이 찍힌 아패를 갈아 새로 이름을 적은 위조 아패가 있었다.

덕분에 성문을 통과하는 것 정도야 문제없었다. 하지만 유 노인이 걱정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놈아! 내 말을 뭐로 들었어? 문제가 생기면 이 아패가 관에 기록된 것인지 확인을 한다고! 위조가 들키면 개작두에 네놈 허리가 끊길 거다!"

유 노인이 유은하를 다그쳤지만, 유은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문명 수준이 이런데 기록이 꼼꼼하게 관리가 될까?

우주를 정복한 크라운에서조차 작정한다면 시민증 데이터베이스를 조작할 수 있었는데, 여기라고 그런 일이 없을 리가.

'뭐. 할배 말대로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제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유 노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걸으니, 어느새 두 사람은 금천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오…."

유은하는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궤도 의료기지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볼 일이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모두 질서정연하게 움직여야 하는 대규모 행사였을 뿐.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며 사방에서 어지럽게 말소리가 들려오는 광경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유은하 입장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복색과 건물들이 즐비하니, 반사적으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놈아.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쓸데없이 많이 긁어모은 걸 오늘 다 팔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유 노인이 유은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유은하는 유 노인의 옆에서 저잣거리를 향해 걸었다.

그렇게 유은하와 유 노인이 도착한 곳은 제법 번듯한 약재상이었다.

"크흠. 주인장 있소?"

유 노인이 헛기침하며 문 앞을 기웃거리자, 안에서 염소수염을 단 사내가 나왔다.

"뭘 사시려고?"

"사려는 건 아니고, 팔 것들을 좀 가져왔소."

"음?"

염소수염 사내는 유 노인과 유은하를 한 번 훑어봤다.

유 노인은 제법 쓸 만한 약초를 가져올 것처럼 생겼지만, 유은하는 아니었다.

체격이 크고 피부가 희며 외모가 아주 반반하다.

봇짐을 짊어지고 물건을 팔러 다니기보다는 어디 대감집 귀공자 같은 외모였다.

"겨울이 다가오니, 쓸 만한 것들을 잔뜩 사야 할 시기 아니오?"

유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염소수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상한 물건으로 가격 후려칠 생각은 마시오. 우리도 계약을 맺은 약초꾼이 있으니."

"그야 물론이오. 얘야, 한 번 보여드려라."

유 노인의 말에 유은하는 입을 다문 채 봇짐을 풀러 안에 든 약초를 보여주었다.

대부분 잘 말린 약초였고 몇몇은 곱게 빻아 작은 옹기에 담은 것들이었다.

염소수염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이 꽤 많구려."

"대부분 나와 아들, 그리고 이 손주 놈 셋이서 캔 거요. 원래는 소금현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아들놈이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저런."

염소수염은 입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눈빛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염소수염은 유은하의 시선이 가게 구석, 책이 버젓이 놓인 곳에 향해 있는 걸 목격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

염소수염의 물음에 유은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쯧쯔. 글도 배우고 저런 책도 읽어야 험한 약초꾼 신세를 벗어날 텐데."

염소수염이 으스대듯 말했다.

"저게 바로 본초강목이라는 거다. 세상 모든 약초를 적어 놓은 것이지. 저게 있어야 손님들도 안심하고 약을 지을 게 아니냐. 요새 하도 돌팔이가 많으니. 쯧쯔."

그 말에 유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반에 꽂힌 책이 제법 많긴 했지만, 그래 봤자 100권도 안 됐다.

그런데 저 책에 세상 모든 약초의 효과가 적혀 있다고?

중원의 문명 수준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나중에 할배한테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유은하를 두고 유 노인과 염소수염은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그 가격은 너무한 거 아니오?"

"말하지 않았소? 우리도 양은 넉넉하다고."

"우리가 캐온 건 가까운 산 중턱에서 캔 것들과는 전혀 다르오. 깊은 산의 정기를 받아 약효가 아주 좋은 것들뿐이오."

"질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봤자 다른 것들과 큰 차이는 없잖소."

금천현에 약재상이 이곳 하나뿐인 건 아니었지만 유 노인은 이곳에서 약초 대부분을 털어내고 싶은 듯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유 노인과 염소수염은 은자 열다섯 냥에 합의를 봤다.

'생각보다 적네.'

은자 한 냥은 아껴 쓰면 한 명이 한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반년 동안 모은 약초들이 고작 열다섯 냥이라니.

'하긴. 뭐든 원재료는 완성품에 비하면 이익이 별로 안 남지.'

만약 약초로 약을 만들어 팔았다면 훨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은하는 어떤 약초에 어떤 작용을 하는 물질이 들어 있는지 전부 꿰고 있었다.

두 달 전에 재가동된 세포융합형 인공지능 아스트랄 유니온 덕분이었다.

유은하가 약초를 직접 섭취하면 그 안에 든 물질이 인체에 어떻게 흡수되고 작용하는지를 파악하는 식이었다.

유은하의 시선이 잠시 시야 구석으로 향했다.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01%>

유은하의 시야 구석에는 그런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진행률이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게 어디야?'

다만, 유은하의 몸과 여기 중원인의 몸이 같은지도 알아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이랍시고 만든 게 독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초강목이라는 책이 유은하에게는 필요했다.

"이놈아. 가자."

하지만 지금은 그걸 구할 방법이 없으니, 유 노인을 따라 약재상을 나올 수밖에.

약재상을 나온 유 노인과 유은하는 포목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유은하가 사냥한 동물 가죽으로 은화 서른 냥을 받을 수 있었다.

약재상에서 번 것보다는 많지만, 곰 가죽이 하나 끼어 있던 것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었다.

포목점에서 솜옷을 하나 사고 밖으로 나오자 빵빵했던 봇짐이 홀쭉해졌다.

"별일 없잖아 할배. 너무 걱정한 거 아니야? 밥이라도 좀 먹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유 노인은 밥을 먹자는 유은하의 말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염상에 들러 소금을 사고 대장간에 들러 도끼와 낫 등을 여러 개 샀다.

그러다 보니 벌어들였던 돈을 거의 다 사용하고 말았다.

어차피 겨울을 나기 위해 사용할 돈이긴 했지만, 반짝이는 은자가 손아귀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버리니 허무함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자꾸나."

"할배. 오늘도 노숙하게? 그러다가 진짜 골병 나."

하루라도 객잔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편히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 노인은 고집불통이었다.

"안 돼."

"벌써 해가 떨어지고 있다고. 이래서는 관도도 못 벗어난다고."

"그래도 안 돼."

유 노인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유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유은하는 유 노인이 하자는 대로 따르며 금천현을 나섰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 관도를 막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려던 순간.

"어이! 거기!"

뒤에서 남자 다섯이 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이후라 놈들이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유은하는 유 노인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저런 놈들을 피하려 발걸음을 서둘렀구나.

하지만 소용이 없었구나.

유은하는 봇짐에 숨겨 두었던 박도를 슬그머니 꺼내 쥐었다.

"이봐. 소형제."

하지만 유은하가 박도를 든 걸 봤으면서도 남자들은 다가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놈들의 손에도 박도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박도를 든 채 껄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왈패 놈들.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우리가 좀 나눠 들어줄까?"

"사양하면 우리 기분이 조금 나빠질 것 같은데."

박도를 까딱이는 손에 긴장감이 없는 걸 보니, 이런 일이 익숙한 노상강도가 분명했다.

유 노인의 손이 유은하의 옷소매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일단 물러나 있으라는 신호였다.

아무리 유은하에게 무기가 있어도, 저쪽 역시 마찬가지에다 수까지 다섯이니까.

하지만 유은하는 부드럽게 손을 털어 유 노인에게 잡힌 소매를 빼냈다.

그러고는 멈춰 선 왈패 놈들에게 이죽거렸다.

"너희 목 위에 얹혀 있는 게 더 무거워 보이는데?"

난데없는 도발에 유 노인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떴다.

3화. 유전유죄

"뭐?"

"어떻게, 내가 좀 도와줘?"

설마 유은하가 대놓고 받아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놈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모욕당했다는 걸 깨닫고는 각자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지만.

씨이잉!

호흡을 끊고 휘둘러진 유은하의 박도에 한 놈의 머리가 허공을 날고, 그 옆에 있던 다른 한 놈의 목에서는 피 분수가 솟구쳤다.

호흡을 끊으며 박도를 휘두른 건 순전히 유은하의 본능적인 행동.

"...!"

그 덕분에 남은 놈들은 반응이 반 박자씩 느려졌다.

반면, 유은하의 신체 능력은 홀로 곰도 사냥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중원인의 상식으로는 평범한 자가 가질 신체 능력이 절대 아니었다.

씨이잉!

다시 한번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이번에는 연달아 두 놈의 목이 떨어졌다.

"히이익! 고, 고수!"

남은 한 놈이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휘릭! 푹!

유은하가 던진 박도가 놈의 머리에 꽂히며 마지막 남은 놈까지 거꾸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일방적인 전투.

유 노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유은하를 바라봤다.

"할배. 내가 늑대 일곱 마리도 동시에 사냥한 사람이야. 이깟 쭉정이들한테 당하겠어?"

"니미럴. 그래. 잘났다. 잘났어."

유 노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는 게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다가 잠시 후.

"이놈아. 뭘 멀뚱히 서 있어?"

"일으켜달라고?"

"누굴 벌써 관짝에 들어갈 병신으로 알아! 저것들 치우고 쓸 만한 건 가져와야 할 거 아냐!"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어느새 유은하를 손자처럼 여기게 된 유 노인에게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철렁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덜거리며 유 노인이 시키는 대로 시체들을 관도 옆으로 치웠다.

그러곤 놈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놈들이 들고 있던 박도와 품에 넣어 다니던 단검. 동전이 들은 전낭. 그리고 육포가 들은 주머니가 나왔다.

그 외에는 기껏해야 놈들이 입고 있던 냄새 나는 옷가지밖에 없었다.

'쯧. 강도나 하고 다니는 놈들 수준이 원래 다 이렇… 응?'

시체를 뒤지던 유은하의 코가 살짝 쫑긋거렸다.

안쪽을 살펴보느라 살짝 풀어 헤쳤던 육포 주머니에서 알싸한 약초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

잠시 육포 주머니를 내려다보던 유은하는 쓸 만한 물건들을 회수한 후 유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배. 일어날 수 있어? 업어줄까?"

"됐다."

"에이. 고집부리지 말고."

유은하가 덥석 유 노인을 붙잡았다.

짐은 앞으로 메고 유 노인을 업었다.

짐 안쪽에 쑤셔 넣은 박도와 철기들이 절그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곰이 따로 없구나."

유 노인은 투덜거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모를 말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곰? 이렇게 희고 잘생긴 곰 봤어? 내가 잡은 놈은 까무잡잡한 놈이었는데."

"쯧. 있다, 있어. 웅묘(雄猫)라고, 눈두덩이만 시커먼 놈. 생긴 건 귀여운데 성질은 더럽지."

다른 이름으로는 판다라고 부르지만, 정작 유은하는 본 적이 없었다.

"걔도 먹을 수 있어?"

"세상에 먹고 뒈지려면 못 먹을 게 뭐가 있겠냐? 나무껍질도 잘근잘근 씹어 먹는 마당에. 그래도 넌 안 먹는 게 좋을 거다."

"왜?"

"늑대도 척척 사냥하는 놈이 뭐 그런 맛 없는 걸 먹으려 들어? 그리고 그놈들은 잡으면 높으신 분들한테 파는 게 더 이득이야."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뭐?"

"아니야. 아무것도."

크라운에서도 희귀하거나 귀엽고 멋진 것이라면 뭐든 수집하는 게 상류층의 취미였다.

문명 수준이 아무리 차이 나도 인간의 취향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걷기를 잠시.

유은하와 유 노인은 관도를 벗어나 산속으로 향하는 오솔길 깊숙한 곳까지 이르렀다.

"일단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자."

"그래. 그게 좋겠구나."

"잠깐만 기다려 봐."

유은하는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그러다가 돌을 충분히 달구고는 두꺼운 가죽 주머니에 돌을 밀어 넣었다.

뜨겁게 달궈진 돌이 하룻밤 동안 가죽을 따듯하게 덥혀 주리라.

그 주머니를 유 노인에게 준 뒤, 여기저기 찌그러진 냄비를 꺼내 육포와 물, 쌀과 약간의 향신료를 넣고 끓였다.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노숙하면서 먹기에는 그만인 고기죽이었다.

"참. 네놈이 오기 전에는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나도 옛날에는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

고기죽을 먹고 따뜻한 가죽 주머니를 끌어안은 유 노인은 긴장이 풀린 건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할배. 편하게 누워서 자."

"그래. 너도 이만 자라."

유 노인은 곧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

그것을 잠시 지켜보던 유은하는 천을 칭칭 감아 얼굴을 가린 뒤 모닥불을 꺼뜨렸다. 그러자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별빛과 달빛에만 의지해 간신히 사물의 형체만 구분할 수 있었겠지만, 유은하는 아니었다.

갤럭시 크라운의 황태자와 동일한 스펙으로 만들어진 그의 육체는 모든 면에서 보통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유은하가 달리기 시작하자 어둠을 가르며 그의 신형이 쭉쭉 나아가기 시작했다.

유 노인과 발을 맞춰 걸었을 때는 두 시진이나 걸렸던 거리를 불과 일다경 만에 주파한 유은하.

유은하는 성문 주변에서 일렁이는 화톳불의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으. 이제 점점 추워지나 본데."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올겨울은 엄청 추울 거라더군."

"춘부장께서? 얼마나?"

"눈이 펑펑 올 거라는데."

경비병들이 잡담을 나누며 성벽 위를 걸어 지나갔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니, 제자리에서 경계를 서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듯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거나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은하는 성벽의 돌 틈에 손가락을 박아 넣으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작은 현이라 그런지 성벽도 그리 높지 않아 유은하는 금세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응?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소리? 무슨 소리?"

"뭔가 떨어지는 것 같은…."

"아까 순찰조가 계단 내려가다 발이라도 헛디딘 거 아니야?"

"그런가?"

병사들은 움직이기도 귀찮은지 자리에 서서 쩍쩍 하품만 내뱉었다.

성벽을 뒤로한 유은하는 빠르게 내달려 오늘 들렀던 약재상으로 향했다.

"...."

나무 빗장으로 문이 잠겨 있었지만, 왈패의 시체에서 얻은 날카로운 단검으로 내려긋자 허무하게 잘려버렸다.

조용하게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서는 유은하.

잠시 멈춰 선 그는 허공에 코를 쫑긋거리더니 구석으로 향해 광주리를 들췄다.

그곳에는 왈패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육포와 같은 향의 육포들이 들어 있었다.

호초를 사용해 알싸한 향이 나지만, 다른 약재들의 향도 함께 섞인 오묘한 냄새의 육포.

이 냄새로 유은하는 왈패를 보낸 게 약재상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유은하가 가게 뒤편에 연결된 문으로 다가서니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인가?'

한동안 숨죽인 채 귀 기울여 봤지만, 다른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슬쩍 문을 열어 염소수염이 혼자라는 걸 재확인한 유은하는 안으로 들이치며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눈을 부릅뜨며 버둥거리는 염소수염. 놈의 입에 유은하가 천 뭉치를 쑤셔 넣었다.

"우웁! 우우웁!"

"조용."

유은하가 단검을 들이밀자 염소수염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유은하가 얼굴에 감았던 천을 풀자 염소수염의 어깨가 덜컥 내려앉는다.

"왈패들한테 다 들었어."

"읍! 으읍!"

조용해졌던 염소수염이 다시 몸을 뒤틀며 뭐라 소리치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은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변명할 기회는 줄게. 단, 소리치면 이게 네 목구멍을 막아버릴 거야."

달빛을 받은 단검의 반짝임이 염소수염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끄덕끄덕끄덕.

놈은 알았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은하는 그의 입에서 천을 빼주었다.

"자,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잘못인 줄 알면서 왜 그랬는데?"

"그 왈패들이 털어먹을 사람을 알려달라 했네! 그러지 않으면 장사 못 하게 다 엎어버린다고 겁박해서 어쩔 수 없었어!"

유은하가 염소수염에게 변명의 기회를 준 이유가 이것이었다.

대체 왜 이자는 자신과 유 노인을 털어먹어도 좋은 이들이라 판단한 걸까?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 봐?"

"고, 고작 노인과 소년 한 명이라고 생각했네. 거기다 산사람이지 않은가."

"산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고?"

"약초를 그만큼이나 모아서 팔러 온 사람들이 어디 흔한가? 대부분 막 캔 것들을 싱싱할 때 제값을 받고 팔러 오지."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별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씨 집성촌에서 금천현까지는 건장한 남성이 부지런히 걸어도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한다.

약초를 캘 때마다 그 거리를 오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면 반나절 만에 오갈 수도 있긴 하지만.'

그 시간에 사냥하는 게 이득이지, 쥐꼬리만 한 약초를 팔아 제값을 받으려고 그 거리를 왕복하는 건 오히려 손해였다.

"쯧. 산사람이라서 그냥 쓱싹 해버려도 문제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그렇다네. 무, 물론 내가 아니라 그 왈패 놈들이 그렇다는 거지!"

염소수염의 대답에 유은하는 유 노인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유 노인이 그렇게 서둘렀기에 자신들이 산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이가 염소수염뿐이었지, 금천현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를 머물렀다면?

더 많은 이들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다섯이 아니라 열다섯이 몰려왔을 수도 있었겠지.

유은하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염소수염이 더듬거리며 다시 변명을 주워섬겼다.

"게다가 꽤 많은 돈을 만지지 않았나."

"돈. 그렇지. 항상 그게 문제긴 하지."

유은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염소수염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힘없는 자가 귀물을 가지면 그것만으로 죄라네. 화를 자초하는 거야!"

"산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니, 오히려 우리 잘못이다?"

"눈치가 있으면 누구라도 자네들을 죽이고 돈을 빼앗으려 했을 거라네! 원래 그런 거라고!"

"누구라도… 말이지?"

"그래! 고작 산사람 아닌가!"

어처구니없는 염소수염의 말에 유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 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공자니 뭐니 도덕을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하긴. 로열패밀리 놈들도 뭐 세상에 도덕이 없어서 사람을 막 죽인 건 아니었지.'

그저 힘. 금력이든 권력이든 군사력이든 힘이 있는 자가 모든 걸 결정할 뿐이었다.

"여, 여기서 자네가 날 죽이면 병사들이 조사할 거네. 산사람이 범인인 게 알려지면 병사들이 자네 마을을 전부 태워버릴 거야!"

위협인지 애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내의 말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게 있다면.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언젠간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위험이 들이닥칠 거야.'

중원에 떨어진 지 고작 반년. 언제고 유씨 집성촌의 상황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홀로 떠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유은하는 어느새 유 노인이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유 노인이 유은하를 손자처럼 여기듯이.

그래서 약재상 놈의 말을 들으니 한숨이 나왔다.

적어도 마을이 정식으로 제도권에 편입되어야 뭐라도 할 텐데. 대체 어떻게 유씨 집성촌을 변화시켜야 할지 막막했다.

'빈민가 구역 하나를 양지화시키라는 거랑 다를 바가 없네.'

유은하의 시선이 슬쩍 시야 구석으로 향했다.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01%>

아스트랄 유니온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 중원이라는 세상을 알아야 했다.

"도, 돈을 주겠네. 원한다면 내가 물건을 염가에 공급해주기도 하겠네. 산으로 찾아가는 보부상들은 죄다 바가지를 씌우지 않나."

유은하가 고민하는 사이, 사내의 애원이 이어졌다.

"나는 목숨 부지해서 좋고, 자네 마을도 병사들을 피하고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원한은 잊고 서로 좋게 가는 게 어떻겠나?"

"서로 좋게 말이지."

"그래! 날 죽이면 너희도 좋을 게 없어!"

유은하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죽인대?"

유은하가 사내의 목에 들이밀었던 단검을 치웠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지만.

콱!

유은하는 사내의 입에 처넣었던 천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커헉!"

"넌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왈패들이 죽인 거지."

CCTV는커녕 수사 기법조차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곳이 중원이다. 범인이 유은하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사, 살…."

약재상은 바르르 떨다가 눈을 까뒤집었다.

유은하는 놈을 바닥에 널브러뜨린 뒤 왈패 놈에게서 가져온 박도를 심장 어림에 박아넣었다.

그러고는 강도가 든 것처럼 점포 안을 어지럽히며 물건들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기기 시작했다.

말린 약재. 약재상의 온갖 도구들. 은자. 육포.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겼다.

"아, 저것도 챙겨야지."

마지막으로 본초강목을 비롯해 잡다한 책까지, 알뜰하게 커다란 보따리에 쑤셔 넣은 유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하는 다시 은밀하게 성문을 넘어 유 노인이 잠든 산어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 이이, 이! 이 미친놈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주 죽으려고 작정을 했어! 병사들이 우릴 쫓아오면 어쩌려고!"

유은하는 유 노인의 고함과 함께 몇 번이나 등짝을 얻어맞고 엉덩이를 걷어차여야 했다.

하지만 유 노인이 걱정했던 추격은 없었고, 두 사람은 무사히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유은하는 중원에서의 첫 겨울을 맞이했다.

사천이 수십 년 만에 맞이하는, 눈이 펑펑 내려 쌓일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지만.

"할배! 나무하러 갔다 올게!"

"이놈아! 울타리 넘지 말고 문으로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냐!"

"올 때 뱀이라도 잡아 올게! 탕 끓여 먹자!"

"벌집 보이면 그거나 좀 가져와라! 아랫집 유삼삼이가 감기 들었단다!"

"알았어! 내 옷 따뜻하니까 그거 두르고 쉬고 있어!"

하루가 멀다고 산을 쏘다니는 유은하 덕분에 유씨 집성촌은 여느 겨울보다 따뜻하고 풍족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물론 유은하가 산만 쏘다니는 건 아니었다.

마을을 나선 유은하는 땅에 묻힌 멀끔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는 산길을 내달려 금천현으로 향했다.

4화. 유전유죄

염소수염 약재상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금천현은 잠시 소란스러웠다.

어느 정도 잠시였느냐면, 딱 사흘 정도.

유은하가 유씨 집성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시 금천현에 들렀을 때는 소란도 끝나고 조사도 끝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뒷골목 왈패의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결론이 났다지.'

유은하가 남기고 간 박도 덕분이었다.

그가 알아보진 못했지만, 박도에는 금천현 뒷골목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철죽파(鐵竹派)라는, 놈들의 어설픈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또 철죽파는 멀쩡하단 말이지.'

유은하의 상식으로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한 단체의 말단이 살인사건을 일으켰다. 그것도 무력을 다루는 단체의 말단이. 그렇다면 그 단체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관(官)에서 나온 하급 관리가 철죽파를 몇 번 드나드는가 싶더니 일이 흐지부지됐다.

정확히는, 그랬다는 소문을 들었다.

"흠."

"공자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객잔 앞에 서서 빛깔 좋게 튀겨내고 쪄낸 금은만두를 먹고 있던 유은하.

그런 유은하에게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 아니라니까?"

"아. 예."

유은하의 말에도 점소이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평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수려한 외모와 매끈하고 흰 피부. 어린 외모에도 큰 체구. 평범한 무명옷을 입고 있음에도 뿜어져 나오는 고귀한 분위기까지.

점소이는 분명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 몰래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거라 생각했다.

유은하도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진즉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부정은 형식상의 부정일 뿐, 오히려 점소이의 의심에 확신을 더해주는 조미료였다.

"아무튼. 궁금한 게 있는데."

"예에. 뭐가 궁금하십니까?"

"요 앞에서 당고를 사 먹다가 들었는데, 얼마 전에 약재상이 살해당했다며?"

"아이고. 그랬죠. 그놈이 돈독이 제대로 오른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약 쓰는 법은 나름 잘 알던 놈이었는데. 쯧쯔. 언젠가는 험한 꼴 당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요."

점소이의 말에 유은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금천현에 들러 소문에 귀 기울인 결과, 염소수염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범인이 철죽파라며?"

"에그!"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함부로 그런 말씀 하면 안 됩니다."

"왜?"

유은하의 물음에 점소이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놈들이 아직 잠잠하긴 하지만, 무려 오몽부와 오살부 사파 세력을 주름잡던 놈들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

부(府)라면 성부주현(省府州縣) 네 행정 단위 중 두 번째로 큰 단위다.

그런 곳에서 노는 놈들이 이 작은 금천현에 뭐 먹을 게 있어서 왔는지는 모르겠다는 점소이.

하지만 유은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관무불가침도 정도가 있지. 민간인이 죽었는데?"

"뭐. 그게 나라님들 말씀대로 딱딱 나뉘는 게 아니잖습니까. 무림인들만 이용하는 객잔이 따로 있답니까?"

점소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재상 그놈이 철죽파에 사기를 치다 걸려서 홧김에 죽이고 도주한 것 같다고 하니, 관에서도 쉬쉬하는 겁니다요."

"관의 권위가 그 정도밖에 안 돼?"

"공자님 눈에는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다 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점소이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전낭을 짤랑거렸다.

"여기 병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지현 나리 병사는 얼마 없습니다요. 대부분 금광이나 지키러 온 촉왕부 병사 나리들입죠."

"그러니 괜히 소란을 만드는 것보다는 적당히 받아먹고 넘어가는 게 이득이라는 말이네."

"아휴. 명석하십니다!"

과장되게 반응한 점소이가 유은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의 뜻을 아는 유은하는 전낭에서 동전 한 푼을 쥐어 그에게 튕겼다.

"감사합니다!"

"만두 맛있었어."

"다음에는 탕원도 드셔보시죠. 달달하니 아주 맛있습니다!"

"그래."

유은하는 손을 흔들며 객잔 앞을 벗어났다.

'철죽파….'

놈들이 실제로 일개 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놈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몇 번 금천현을 오가며 정보를 모은 결과, 무림 문파라는 놈들은 관과 비등한 힘을 가진 게 거의 확실했다.

'황실이라는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힘은 대부분 외적을 막는 데 사용되고 있다 들었다.

물론 황실이 외적을 막고 있다는 말 한마디로 전체적인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황실 쪽에 쏠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현 상황. 황실은 외적을 막아야 하고 무림이라는 내부의 또 다른 세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서로 봐주는 상황이라는 거지.'

관은 명분과 힘을 쥐고 있지만 일을 크게 벌이기에는 부담이 크다.

무림은 상대적으로 약세지만 관을 귀찮게 할 정도의 힘은 있다.

그 팽팽한 균형 속에서 지금과 같은 말단의 작은 사건은 언제든지 묻힐 수 있었다.

'좋네.'

유은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자고로 돈 벌기 가장 좋은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혼란의 시기지.

적어도 크라운의 역사에서는 그랬다. 중원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유은하는 금천현 저잣거리를 돌면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걸 한동안 유심히 관찰했다.

그게 요 며칠 동안 유은하의 일과였다.

나무를 한다며 쏜살같이 금천현으로 내려와 반나절 동안 사람들을 관찰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것.

나무야 한나절 바짝 해둔 것들을 동굴에 그득하게 쌓아 뒀으니 문제없다.

그렇게 한동안 사람들을 관찰하던 유은하는 약재상으로 향했다.

살해당한 염소수염이 운영하던 곳이 아닌, 깡마른 청년이 운영하는 작은 약재상이었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응. 이틀 만이야. 초 의원."

"의원은 무슨. 이렇게 작은 약재상이나 간신히 하는데."

안쪽에 앉아 있던 청년은 유은하를 슬쩍 보더니 대충 인사하고는 곱게 갈던 약재를 마저 갈기 시작했다.

"내가 준 약은 어땠어?"

"귀한 집에서 쓰는 것답게 효과가 아주 신통방통합디다."

"그래? 얼마쯤 받고 팔 수 있을 거 같아?"

유은하의 물음에 초 의원이라는 청년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용돈이 부족하면 부모님께 더 달라고 해야지, 몰래 물건 내빼다 파는 건 안 좋은 버릇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은하가 피식 웃었다.

"궁금해서 그래. 아주 좋은 약이라는데, 얼마나 좋은지 확실하게 알려면 돈으로 바꿔보는 게 가장 정확하지 않겠어?"

"어느 집 공자인진 몰라도 유자(儒者)는 못 되시겠군요."

초 의원은 작은 절굿공이를 놓고는 유은하를 빤히 바라봤다.

"얼마인지 모른다니 밖에서 사들인 건 아닐 테고, 가문의 비전으로 만든 약이라면 어르신들이 아주 경을 치실 텐데."

"그래서 일부러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온 거잖아. 그리고 소문이 나면 나는 매 좀 맞고 말지만, 그쪽은…."

"하이고. 겁박하는 법도 배웠으니 이제 저기 철죽파에만 가면 중역이 되실 겁니다."

초 의원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뒷문으로 향하며 유은하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뒷문을 통해 들어간 곳은 허름한 방이었다. 그곳에 한 소년이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심한 감기에 걸린 애인데, 공자가 준 약을 먹으니 순식간에 열도 내리고 숨도 고르게 변했습니다."

"다른 약으로는 이렇게 못 하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여기 지현 나리가 감기 걸렸을 때 쓰던 약도 이렇게 잘 듣진 않습니다."

현의 책임자인 지현이 쓰는 약이라면 이 금천현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가장 좋은 약을 쓸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런 평가라면.

'하이엔드가 아니라 오파츠급이라는 말이네.'

유은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갤럭시 크라운에서도 감기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난적이었다.

증상을 완화해 감기가 나을 때까지 몸을 편하게 해주는 대증요법이 일반적이었던 시대가 불과 300여 년 전.

당연히 이 중원에 감기 바이러스를, 그것도 단 한 알로 완벽하게 치료하는 약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약을 막 내줘도 되는 겁니까? 얼마 있지도 않을 텐데."

초 의원의 물음에 유은하는 태연하게 답했다.

"계속 만들 수는 있다고 하니, 한두 번 정도야 괜찮겠지. 애가 나을 때까지 계속 써."

초 의원에게 준 약은 유은하가 직접 약초를 섭취하고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약효를 응집시켜 피를 통해 뽑아내 만든 약이었다.

"부작용 같은 건 없고?"

"없습니다. 설령 있어도 어지간한 건 감수하고 쓸 정도로 약효가 뛰어납니다."

약초를 아무렇게나 사고팔고, 탕약을 달이는 것도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부작용이나 오남용에 관한 관리가 있을 리 없다.

'시작은 제약사업으로 가야겠네.'

그러다가 서서히 영역을 확장하면 될 듯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중원은 명백히 법 위에 권력이 있고 권력보다 칼이 가까이 있는 세계였다.

'무공이라는 걸 익혀야 할 텐데.'

염소수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힘없는 자가 귀물을 가지면 그것만으로도 죄라고.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방법이 없나 찾아봐야겠네.'

세상 온갖 것에 급이 있는데, 무공이라고 그런 게 없을까?

이왕 익힐 거라면 거쳐 가는 것도 급이 되는 걸로 익히는 게 나았다.

기술이든 학문이든 처음부터 제대로 다져 놔야 이후가 편한 법이니까.

"초 의원. 혹시 이 주변에서 괜찮은 무공을 가르쳐 주는…."

쾅! 우지끈!

유은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초서훈이!"

뒤이어 초 의원의 이름을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은 저 문으로 나가시지요. 뒷골목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금방 대로로 나갈 수 있습니다."

"방금 그건 무슨 소린데?"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면 내가 봐도 되겠네."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점포와 연결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낡은 문이 부서져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과 그 잔해를 밟고 선 건장한 남자 셋이 보였다.

놈들의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박도 손잡이에는 철죽파를 뜻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응? 뭐야? 이건?"

"손님이다. 그쪽도 손님인가?"

유은하가 당당하게 나서자 철죽파 놈들도 저들끼리 슬쩍 눈치를 교환했다.

유은하의 멀끔한 외관을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사람이 여기 있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참 예의가 없네. 철죽파는 이렇게 문을 다 부수고 다니나?"

"크흠. 소형제. 우리가 좀 바빠서 말이지. 볼일 다 봤으면 얌전히 나가는 게 좋을 거야."

허리춤에 맨 박도를 믿는 건지, 철죽파의 위세를 믿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 건지.

가장 앞에 있던 거한이 유은하를 위협하듯 앞으로 다가섰다.

"공자님. 저들 말대로 하시죠."

초 의원도 유은하가 걱정됐는지 뒤에서 조용히 말했지만.

"아니. 우리 가문으로 영입하려고 왔는데, 뭔 같잖은 놈들이 끼어들고 지랄이야?"

유은하는 철죽파 문도들을 향해 턱짓했다.

"야. 너희들 그 철죽파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지?"

"이 어린놈이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썩 꺼져!"

"하. 가욕조경유격장군 곽린정의 아들인 나한테, 뭐? 뒈지고 싶어 환장? 너희야말로 뒈지고 싶은 거냐?"

유은하는 소문으로 들었던 이름을 사칭하며 가장 앞에 있던 놈의 정강이를 찼다.

뻐걱!

"끄아아악!"

유은하의 발차기는 순식간에 거한의 정강이뼈를 박살 냈다.

놈이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으로 뺨을 후려쳤다.

뻐억!

마치 둔기로 후린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거한이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

"너희도 똑같이 만들어 줄까?"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공자님을 못 알아뵙고!"

"이런 허름한 곳에 귀하신 분의 핏줄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둘 남은 철죽파 문도는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얼어버렸다.

장군의 아들이라면 평민에 불과한 그들 따윈 쳐다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얽힐 일도 없겠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먼저 건드린 모양새가 아닌가.

잘못했다가는 금천현에 세운 철죽파 지부가 아니라, 저기 오살부에 있는 철죽파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관은 귀찮고 이득이 없어서 무림을 건드리지 않는 거지, 힘이 없어서 건드리지 않는 게 아니니까.

"쯧. 야. 거기 앉아 봐."

"예. 예."

"누가 평상에 앉으래? 무릎 꿇으라고. 이놈도 대충 옆으로 치우고."

"옙!"

순식간에 거한을 제압하는 힘과 자연스럽게 사람 부리는 모습 덕분에 철죽파 문도들은 유은하를 의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학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우락부락한 거한을 순식간에 기절시켰는데, 그게 장군의 아들이라는 증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철죽파 문도 둘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릎을 꿇은 철죽파 문도들을 노려보던 유은하가 물었다.

"우리가 서로 쉬쉬하는 관계인 건 알고 있는데,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언제부터 사파 새끼들이 이렇게 대놓고 양민을 핍박했지? 몰래 나온 거라 좀 찔리긴 하는데, 지현 얼굴 한 번 보러 갈까?"

지현과 장군은 관장하는 분야가 다르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품계였다.

그리고 그 품계보다도 중요한 게 힘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닙니다! 애초에 병사가 쫙 깔린 이곳에 저희가 뭐 할 게 있다고 발을 들이밀었겠습니까? 이게 다 지현 나리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그 말에 초 의원은 물론이고 유은하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파 파락호가 금천현에 대가리를 들이민 게, 한 현을 책임져야 할 지현이 시킨 일이라고?

놈들은 그저 책임을 피할 목적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유은하는 진한 호기심을 느꼈다.

"자세히 말해 봐. 지현이 대체 왜 너희를 불렀는지, 무슨 일을 시켰는지."

5화. 유전유죄

유은하가 관심을 보이자 철죽파 문도는 이때다 싶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래 저희는 오살부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사천은 정파가 꽉 잡고 있는데, 괜히 세력을 넓힌다고 설쳤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요?"

"그런데 여기 금천현 지현 나리께서 우리 철죽파에 직접 사람을 보내시지 않았겠습니까?"

무려 지현이 직접 사람을 보냈다? 지금까지 유은하가 수집한 관과 무림의 관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확실해?"

"...."

"확실하냐고."

유은하의 살벌한 눈빛에 놈들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 저희도 조장한테 이야기만 들은 거라…."

"쯧."

"그, 그래도 없는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을 겁니다! 조장이 말하기를, 장문인께서 철랑단주님을 불러 직접 말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조장은 그걸 또 철랑단주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들은 거고?"

"예! 여기 금천현 지부의 책임자가 바로 그 철랑단주님입니다!"

결국, 진위를 확인하려면 지현을 만나거나 철랑단주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분을 사칭하는 유은하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대체 뭘 하러 온 건데? 지현이 뭘 부탁했냐고."

"자세한 건 저희도 잘…. 저희가 받은 명령은 그저 원래 하던 대로 사업체나 늘리라는 거였습니다."

"사업체? 보호비 말하는 거야?"

"예에…."

멀쩡한 가게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걷는 것. 내지 못하겠다 하면 깽판을 놓는 것.

그게 사파 놈들이 주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업이었다.

세력이 좀 되고 구색이 갖춰진 놈들은 주루다 기루다 제법 번듯한 사업장도 운영하지만, 이제 막 금천현에 발을 들인 철죽파가 그런 걸 운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장사 잘되는 곳이나 갈 것이지, 다 쓰러져 가는 여기는 대체 왜 온 거야? 손 심심하니 물건 부수고 사람 좀 괴롭히려고 왔어?"

유은하가 으르렁거리자 두 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단주님이 조장을 통해 직접 내리신 명령 때문에…."

"그건 또 무슨 명령인데?"

"이 근처에서 약을 잘 다루는 놈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약?"

사파 놈들도 어찌 보면 칼밥 먹고 사는 놈들이니 의원이 필요하긴 할 테다.

하지만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금천현에 약재상이나 의원이 한두 곳도 아닌데, 일부러 이런 허름한 곳에 온 걸 보면 아예 납치하려 했나 보네?"

유은하의 말에 놈들이 움찔거렸다.

"현 꼴 잘 돌아간다. 얼마 전에는 약재상도 죽이더니. 설마 의원 납치하라고 시킨 것도 지현이냐?"

"자, 자자, 잘 모르겠습니다!"

"살려주십쇼! 저희는 정말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을 때까지 맞는단 말입니다!"

허리에 칼까지 찬 놈들이 울상을 지으며 싹싹 비는 모습은 비위가 상할 정도로 역한 광경이었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공자님! 제발!"

"알겠으니까 닥치라고!"

유은하가 소리치자 그제야 놈들은 입을 다물었다.

유은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짐짓 진지한 척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품계가 지현 따위보다 훨씬 높다곤 하지만, 여긴 여기만의 사정이 있겠지."

"...!"

"더군다나 담당 성까지 다르니, 너희가 굳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 또한 별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유은하의 말에 철죽파 문도 둘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건드리지 마."

"예! 절대! 절대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꺼져."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 오늘 일은 비밀로 하고. 나도 몰래 놀러 나온 거라. 혹여나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가장 먼저 너희부터 찾는다. 알겠어?"

"옙!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면 아주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낼 것들이었지만, 유은하는 믿는다는 듯 가 보라며 턱짓했다.

놈들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동료를 업고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귀하신 분인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장군님 아드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철죽파 왈패들이 나가자 초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인데?"

"예?"

"가욕관에 있는 장군 아들이 뭐 하러 이 먼 곳까지 놀러 와? 볼 것도 없는 금천현에. 당연히 거짓말이지."

"...."

초 의원은 아리송한 눈으로 유은하를 바라봤다.

외견을 보면 분명 있는 집 자제는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장군의 아들을 사칭한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장군의 아들을 사칭해도 될 정도로 높은 사람이거나, 그냥 미친 사람이거나.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예."

"저놈들, 무공 익힌 놈들이야?"

유은하의 물음에 초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놈들은 해 봤자 삼류도 안 되는 놈들입니다. 제대로 된 무공은 배우지 못했을 거고, 배워도 진득하게 수련할 리 없는 놈들입니다."

"철죽파는 오살부에서 꽤 알아주는 곳이라며?"

"사천에 사파가 몇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천당문, 청성파, 아미파가 꽉 잡은 곳에 어떻게 사파가 파고들겠습니까?"

초 의원이 코웃음을 쳤다.

"장문인이니 단주니 하는 것도 체면 때문에 하는 말이지, 저들끼리는 큰형님이라 부를 겁니다."

"…그냥 동네 파락호라는 말이었네."

지현이 불렀다고 하니 덩치가 꽤 되는 놈들인 줄 알았다.

크라운에서도 한 구역을 주름잡는 마피아를 이용해 사건을 일으키거나 덮는 일은 흔했으니까.

하지만, 알고 보니 그냥 구색만 그럴싸하게 갖춘 깡패들이었다.

"그러면 철랑단주 그놈은 어떤데?"

"소문으로는 일류라고 들었습니다."

"일류면 혼자서 곰도 잡을 수 있나?"

"…곰 말입니까?"

"응. 갑자기 궁금해져서."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은하는 일류가 얼마나 강한지 몰랐으니까.

"곰이라…. 일전에 웅담과 웅장(熊掌)을 구하느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류 무인이라면 홀로 곰을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초 의원은 피식 웃었다.

"물론 정면에서는 힘들겠죠. 곰의 무지막지한 힘을 버티거나 흘리려면 사량발천근 같은 기술을 연마한 고수여야 할 겁니다."

"그래?"

"예. 하지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잖습니까. 더군다나 일류 무인이라면 경신법으로 이리저리 도망칠 수 있을 테니, 사냥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유은하는 대충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내가 준 약 말인데."

"예."

"혹시 지현한테 팔 수 있겠어? 지현이 얼마 내놓는지 한번 찔러나 보게."

그 말에 초 의원이 잠시 유은하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 빤히 바라봤다.

"공자님. 혹시 지현이 철죽파를 통해 약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지현이 사파를 통해 구할 약이라면 어지간히 불법적인 물건일 테다. 이르면 마약 같은 것 말이다.

당연히 해열, 진통, 소염 성분이 섞인 감기약 같은 걸 구하진 않겠지.

"그래도 그걸 찔러 주면서 어떤 약을 구하고 있는지는 알아낼 수 있을 거 아냐."

"보통 약이라면 어림도 없을 테지만, 공자님께서 주신 약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마침 시기도 딱 추워지기 시작한 초겨울이다.

안 그래도 감기 환자가 급증하는 시기니, 효과를 보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닷새 후에 올 테니, 가능하겠어?"

"은혜를 입었으니 그 정도는 해드리는 게 도리겠지요."

은혜라는 말에 유은하는 문득 강 실장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닷새 후에 올게. 혹시 철죽파 놈들이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냥 도망쳐."

"공자님이 진짠지 사칭인지 알아볼 능력도 없는 놈들입니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중에 보자."

유은하는 손을 흔들어준 뒤 초 의원의 약재상을 나섰다.

그러고는 해가 지기 전까지 금천현을 돌아다니다가 마을로 돌아왔다.

"이 망할 놈아! 나무를 길러서 패 오냐! 그렇게 밖이 좋으면 밖에서 자! 들어오기만 해 봐라! 흠씬 두들겨 줄 테니까!"

"악! 할배! 아파! 아프다니까!"

울타리 밖에서 유은하가 언제 오나 기다리던 유 노인의 지팡이에 따끔하게 혼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닷새 후, 유은하는 다시 초 의원의 약재상을 찾았다.

끼이익.

분명 부서져서 새로 단 문일 텐데, 수십 년 묵은 것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문은 왜 저런 걸 달아 놨어?"

"돈이 없어서 직접 달았습니다."

"목수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목수였으면 지금보다 더 망했겠다."

유은하의 말에 초 의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긴 하군요. 의원이라서 다행입니다."

"아무튼. 약은 어떻게 됐어?"

"여기 관찰 결과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초 의원이 유은하에게 얇은 책을 내밀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보이는 글자는 다 외운 유은하였지만, 아직 기록물을 읽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이건 나중에 읽을 테니까, 짧게 설명이라도 해 봐."

"황제내경에 통달한 이가 만든 약도 이것보다 좋진 않을 겁니다. 가히 신선의 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신선은 무슨."

"정말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증상만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지켜보니 아예 병이 말끔히 나은 거였습니다. 이름난 영약도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유은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물건은 품질과 효과가 뛰어날수록 좋은 걸까?

아니다.

판매자에게 가장 좋은 물건은 현 시장에 퍼진 경쟁자보다 딱 한 걸음 앞선 물건이다.

그래야 우위를 유지하며 발전하는 데 무리가 없으니까.

'저가형과 고급형을 나눠야겠네.'

비상용 오파츠급은 아주 극소량만 생산하는 게 나을 듯했다.

직접 사용하든 권력자에게 뇌물로 쓰든 사용처는 극히 한정될 테니까.

널리 퍼져 봐야 좋을 것도 없고.

"지현한테는 팔았고?"

"예. 마침 지현이 가벼운 감기를 앓고 있다 하여 팔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실력이 있나 봐? 바로 판 걸 보면."

"제가 이문은 잘 못 남겨서 그렇지 실력은 있습니다."

초 의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은하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솔직히 처음 파는 게 아니었다면 그 곱절 아니, 세 곱절은 받았을 겁니다."

"얼만데?"

"금 다섯 냥을 받았습니다."

"금?"

금 한 냥은 은으로 스무 냥이다. 그러니 은으로 따지면 백 냥을 벌었다는 말이었다.

"주신 것 중 하나는 그냥 지현에게 줘 효능을 체감케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아홉 개를 판 겁니다."

"고작 그거로 백 냥을 줬다고?"

"솔직히 그것도 싼 가격이라 생각합니다. 지현도 그걸 자기가 전부 쓸 생각은 아닐 테죠.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듯 초 의원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최근 지현의 씀씀이가 헤퍼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치 어디에서 큰돈 들어올 게 예정된 것처럼요."

"철죽파랑 관련이 있나?"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사파가 뇌물을 바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 쳐도 씀씀이가 지나치게 늘어난 듯합니다."

"그럼 '약'이랑 관련이 있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초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현이 몽혼약을 찾고 있더군요."

유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몽혼약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 의원은 유은하의 몸짓을 '지현이 그딴 걸 왜?'라는 표현으로 알아들었다.

"사파가 몽혼약을 찾으면 어디 더러운 일에나 쓰려는 건가 싶겠지만, 지현이 찾는 건 정말 이상합니다."

"크흠. 혹시 짐작 가는 건 없고?"

"글쎄요. 심지어 효과가 한 식경 정도인 미묘한 물건을 찾으니…. 불면증에 시달리는 거라면 차라리 수면에 도움 되는 약초가 나을 텐데요."

그 말에 유은하는 몽혼약이 사람을 강제로 재우거나 기절시키는 약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암살하려고 한다거나?"

"지현이 그럴 일이 어딨겠습니까?"

초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더군다나 사파를 끌어들였다는 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새어 나갈 각오를 했다는 겁니다."

"하긴. 비밀을 지킬 놈들은 아니지."

"예. 암살 같은 일이 일어나면 대번에 의심을 살 겁니다. 더군다나 여기 금천현에는 촉왕부 병사들까지 와 있으니, 아무리 지현이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지만, 현재로서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쯧. 괜히 답도 없는 일 가지고 고민해 봐야 머리만 아프지. 자."

유은하가 전낭에서 은자를 꺼내 건넸다.

무려 은자 열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이건 왜…?"

"수고비. 그리고 입막음."

"그래도 너무 많습니다."

"요새 환자 많다며."

유은하의 예민한 귀에는 허름한 문 저편에 누워 있는 환자들의 숨소리가 낱낱이 들려오고 있었다.

"가게 꼴을 보니 없는 사람들한테는 돈도 안 받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지현에게 더 팔아 봐."

유은하는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일전에 주었던 약이 서른 알이나 들어 있었다.

"꼬리 밟히는 건 조심하고. 누가 그러는데, 힘없는 사람이 귀물을 가진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더라."

"무서운 말이군요. 조심하겠습니다. 정 위험하면 녹색 장포를 팔면 되겠죠."

"녹색 장포를 판다고?"

"당문의 이름을 잠시 빌리겠다는 말입니다. 약과 독으로는 중원 제일인 사천당문 아닙니까."

"뭐. 그건 알아서 하고."

유은하는 또다시 전낭에서 은자를 꺼냈다. 이번에는 서른 냥이었다.

"이건 또 왜…?"

"이 가게 옆 칸도 네 거였지?"

"예.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만."

"거기 좀 말끔하게 치워 놔. 그리고 내가 말하는 약초 좀 채워 넣고. 네 가게에 있는 것도 상관없어. 없는 것만 다른 데서 사와."

유은하는 흔히 쓰이는 약재를 열 가지 정도 읊었다.

겨울이라 약초 가격이 많이 뛰긴 했을 테지만, 모두 흔한 것들이라 은자 서른 냥이면 꽤 많은 양을 모을 수 있을 터였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약 만들어서 팔게. 값싸고 좋은, 감기약."

약재상에게 자리를 빌려 약을 판다는 말에 초 의원은 기가 막혔지만.

"내 밑에서 일하면 매월 꼬박꼬박 은자 세 냥. 의원 일은 개입 안 할 테니 알아서 하고. 어때?"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 말에 초 의원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 믿음직스러운 뒤통수를 보며 유은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정도 기술 격차면 시장 장악은 쉽지.'

6화. 박리다매

여름과 가을에는 산을 쏘다니기만 해도 할 일이 넘쳤다.

한 걸음 걸으면 나물이, 또 한 걸음 걸으면 약초가, 또다시 한 걸음 걸으면 먹이를 찾는 뱀이.

사방이 주워 담을 것 천지였다.

그렇다면 겨울에는 할 일이 없을까?

없다.

정확히는, 작년까지는 그랬다. 유은하가 없었던 유씨 마을의 겨울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중원의 겨울이란 본래 서로 하나가 되어 버텨야만 하는 계절이다.

그러다가 봄이 왔을 때 겨우 밖으로 나가보면, 사람이 줄어 있기 일쑤다.

얼어 죽은 이들은 봄 햇빛을 볼 수 없으니까. 굶어 죽은 이도 마찬가지였고.

혹은 누군가를 굶어 죽지 않게 했던, 다른 이들의 위장에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된 이들도.

그렇게 혹독하고 끔찍한 계절이 겨울일진대 미쳤다고 밖에 나가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유씨 마을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밖에 나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우 이거, 벌써 땅이 얼기 시작해 괭이가 안 박히는데?"

"목책만 세우고 앞에 해자 파는 건 나중에 해야겠어."

"나중에 언제? 앞으로 더 추워질 텐데?"

"봄 다 되면 해야지."

사람들은 그간 허술하게 세워 뒀던 마을 주변 목책을 손보고 있었다.

썩어가는 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통나무를 세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니 그럴듯한 태가 났다.

"아이고. 보름을 해서 겨우 마을 한 바퀴 둘렀네."

"한 바퀴는 무슨. 뒤엔 절벽이라 반 바퀴 한 거지."

"어쨌든 마을을 감쌌으니 한 바퀴 아닌감."

삐뚤빼뚤하지만 키보다 높게 세워진 목책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은 표정에는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참 먹고 해요!"

해가 높이 떠오르자 마을 안쪽에서 여인들이 김이 솟는 광주리를 들고 다가왔다.

"아이, 추워라. 불 좀 더 지펴 봐요."

"이 사람이 장작 아까운 줄 모르고. 회화나무 장작은 많지도 않아. 추우면 이리 바짝 서."

광주리 안에는 육포와 쌀, 그리고 나물로 뻑뻑하게 끓인 죽사발이 들어 있었다.

"은하 고것이 아주 복덩이여. 복덩이."

"야, 씨. 은하가 네 친구냐? 은하 나리라고 불러라!"

"끌끌. 그렇지. 겨울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지내게 해주는데, 저 금천현 지현 나리보다 은하 나리가 우리한텐 더 나리지!"

아무렇게나 해대는 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행복이 느껴졌다.

"목책도 말이여, 원래는 진즉 해야 했는데."

"그렇지. 그동안 늑대가 대체 몇 마리나 드나들었는지 모르겠어."

"그걸 이렇게 밥도 주고 장작도 주면서 시키니 그 은혜를 모르면 아주 짐승이지. 짐승이야."

마을 사람들은 불을 쬐며 느긋하게 참을 해치웠다.

"그런데 은하는 또 내려간 건가?"

"은하는 그럴 만하지. 그게 어디 산사람 얼굴인가?"

"하긴. 은하 처음 온 날, 나는 그 노인네가 신선 모시는 동자라도 납치한 줄 알았다니까."

"…진짜 그런 거 아녀?"

누군가 불쑥 꺼낸 말에 마을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어? 진짠가?' 하는 의문에 저절로 입이 닫힌 것이었다.

"맨손으로 곰도 잡을 정도로 힘이 센데, 나갔다 하면 귀한 약초든 뭐든 턱턱 집어 오고."

"일이야 시키지만, 어디 이게 은하 좋으라고 하는 일인가? 마을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그러면서 밥도 꼬박꼬박 주고."

사람들의 표정에 조금씩 놀람이 서리던 그때.

"하이고! 배부르니 잡생각 나지? 말도 지지리 안 들어 처먹는 그놈이 신선 모시는 동자는 무슨."

유 노인의 성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놈이 범상치 않은 놈인 건 맞지만, 절대 동자 같은 게 아니야! 하늘에서 지랄지랄하다 벌 받아 내려온 원숭이 새끼일 거다!"

"거, 잘생긴 손주가 자기 두고 만날 싸돌아다닌다 삐지신 거 보게."

"삐, 삐져?! 누가! 대체 누가 삐져!"

"자자. 다들 일어납시다! 목책 앞에 해자 파고 흙 쌓아 올리려면 더 추워지기 전에 움직여야지!"

"아이고. 할아버지. 은하가 사준 옷은 만날 입고 다니면서 말은 대체 왜 그렇게 한대? 자자. 추우니까 들어가요."

남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일하러 가고, 여인들은 유 노인을 데리고 다시 마을로 향했다.

이전까지는 겨울이 오면 삭막하기 그지없던 마을이었지만, 올겨울은 하루하루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은하 그놈 돌아오기만 해 봐라. 지팡이로 흠씬 두들겨…."

"알았으니까 빨리 들어가세요. 감기라도 걸리면 우리가 은하한테 혼난다고요."

"맞아요. 저번에도 밖에서 기다리는 거 안 말렸다고 옆집인 우리한테만 당과 하나씩 덜 줬다니까요?"

그렇게 사천 깊은 산골짜기 마을의 오후가 시작될 무렵.

"하아. 하아."

저 멀리 높은 봉우리 너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목격했다.

연기가 적게 나기로 유명한 회화나무였지만, 거리가 가까우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법.

"…연기. 마을이다."

허름한 옷을 칭칭 감아 두른 이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내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연기가 보인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금천현의 지현은 생각보다 욕심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약을 전부 샀다고? 이번 건 저번보다 약효가 떨어지는 거라고 제대로 설명했어?"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전부 샀다고?"

"예. 눈치를 보아하니 몇 개만 비상용으로 두고 촉왕부에 뇌물로 뿌리려는 듯했습니다."

"이야. 그동안 징그럽게 해 먹었나 보네."

놈이 보름에 걸쳐 사들인 약값은 총 금 오십 냥. 금원보 한 개 값이었다.

은으로 따지면 무려 일만 냥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지현이 알뜰살뜰 아끼고 좋은 투자처에 투자해 그 돈을 모았을 리는 없을 터.

"금광인가?"

"그 외에 딱히 돈 벌 수단이 없긴 합니다."

금광에서 나는 금을 슬쩍 빼돌리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의 부를 축적하기는 힘들다.

물론 지현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겠지. 금천현의 사족(士族)과 촉왕부에서 파견 나온 관리도 전부 얽혀 있을 것이다.

"금광 현장 책임자가 종5품이라고?"

"예. 정7품인 지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자입니다."

"그런데 지현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약을 샀다는 건, 그게 금보다 뇌물로 더 잘 통한다는 말 아니야?"

"예. 최근 촉왕부가 당문과 갈등을 빚고 있는 터라 금은보다도 약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천당문 혹은 사천당가로 불리는 무림 집단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건 유은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왕부와 갈등을 빚으면서 곤란하게 만들 정도라고? 심지어 그 때문에 돈보다 약이 더 뇌물로 잘 먹혀?

유은하는 내심 용병기업 혹은 마피아 정도로 생각했던 무림 문파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사실상 이중 정부 상태라 봐도 무방하겠어. 관무불가침이라더니.'

유은하는 점소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라님들이 정해놓은 대로 딱딱 나뉘는 게 아니라던 점소이.

아무래도 이 중원이라는 세계는 생각보다 더 개판인 곳 같았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촉왕부가 당문에 밀리나?"

"군사 규모로만 따지면 당연히 촉왕부가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화포도 있고요."

"음. 화포 말이지."

화약으로 무언가를 발사하거나 터뜨리는 무기. 크라운에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고대의 무기였다.

"하지만 고수는 당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고수라면, 그 철랑단주인가 하는 일류 무인 같은 놈들을 말하는 거 맞지?"

"일류뿐이겠습니까? 일류는 고수에 한 발 걸친 애매한 경지입니다. 진짜 고수는 절정부터죠."

초 의원은 당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절정을 넘어 일기당천인 초절정 고수는 촉왕부에 단둘뿐입니다. 하지만 당가에는 무려 넷이나 있습니다."

홀로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는 무인.

그것이 과장인지 아닌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중원의 비대칭 전력이라 생각하면 촉왕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무(武)가 하늘에 닿았다는 화경도 당문에 무려 두 분이나 계시잖습니까. 가주이신 칠절독왕(七節毒王) 당필웅 대협과 태상가주이신 일수천살(一手千殺) 당웅건 대협!"

"허."

초 의원의 이야기에 유은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분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만으로 왕의 칭호를 받다니? 한 수에 천 번의 죽음을 내린다는 칭호는 또 뭐고?

"결정적으로 말입니다. 당문에는 민심이 있습니다."

"민심?"

"예. 전대 촉왕께서는 덕현왕이라는 시호가 붙을 정도로 어질고 현명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시행하신 제도 덕에 사천성은 수십 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지요."

"그러면 오히려 민심은 촉왕부 편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걸 당대 촉왕이 다 말아먹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당문은 전대 촉왕을 따르며 개혁에 앞장섰기에 그 후광을 그대로 가져가는 중이고요."

"진짜 관무불가침은 개나 줘 버렸네."

유은하가 피식거리며 웃자, 초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사천이, 특히나 성도가 유독 특이한 겁니다. 당문은 당가라고도 불린다는 건 알고 계시죠?"

"응. 사천당문, 사천당가 이렇게 섞어 부르던데?"

"예. 그곳은 특이하게도 문파이면서 세가의 성격도 짙습니다. 그 일대가 당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당가타라서 그렇죠."

"…거기 모여 사는 사람들이 전부 당 씨야?"

"전부는 아닙니다만, 두어 다리만 건너도 아는 가족이 나올 정도라 들었습니다. 당가타 역사도 천년이나 됐다더군요."

중원 특유의 과장이 섞인 말이겠지만, 역사가 깊고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문이 정파였지? 사파가 발 디딜 틈 없다는 말이 이해되네."

"예. 백성들이 당문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힘과 민심을 꽉 잡고 있으니 촉왕부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겁니다."

"흐음."

유은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약과 독, 그리고 암기를 다루는 무공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천당문.

제약 사업이 커지면 반드시 어떻게든 마주칠 일이 생길 터였다.

유은하가 직접 사업을 해본 적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이번에 초 의원과 손잡고 시작한 창고 약방이 첫 사업.

하지만 궤도 의료기지에서 언젠가 갤럭시 크라운을 잇기 위해 공부하던 것들이 어디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도전자야. 압도적인 기술력이 있지만, 양산 체제를 갖추진 못했어. 그걸 지킬 힘도 없고.'

더군다나 유씨 마을도 지켜야 한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유 노인에게는 큰 은혜를 입었고, 유 노인은 마을을 무척 소중히 생각하니까.

그들을 쓰다 버리는 도구처럼 여긴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갤럭시 크라운의 유 회장과 같은 태도로 마을 사람들을 대하면 유은하 자신은 뭐가 되겠는가?

마을 사람들을 도구로 보는 순간, 유은하는 자신을 일개 실험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에서도 강 실장과 같은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내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인연을.

"초 의원."

"예. 공자님."

"혹시 우리가 이 약을 팔기 시작하면 당문에서도 찾아올까?"

"여기서 성도까지 소문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직접 가지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당장 내가 성도까지 가기는 좀 그래. 그렇다고 초 의원이 갈 수도 없잖아."

"그렇긴 하군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해도 당문에서 관심을 가질지 확실치 않고."

초 의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약이 당문을 걱정할 정도로 엄청납니까?"

"저번에 내가 준 약 써봤잖아."

"그것보다 효과가 훨씬 못 미치는 약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지금 유은하가 초 의원을 시켜 만든 약들은 효능이 상당히 낮아진 약이었다.

감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유효 성분을 0.1%로 줄이고 증상을 완화하는 성분으로 대체한 것들.

굳이 비교하자면 중원의 탕약보다 효과가 조금 좋은 정도에 불과했다.

"응. 효과는 그렇지. 하지만 개당 가격이 동 1문이라면?"

"예?"

초 의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물 거래도 심심찮게 일어난다지만, 그건 논외로 치고.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돈 중 가장 작은 단위가 동 1푼이다.

그리고 10푼이 모이면 1문이 된다. 그 1문이면 홀로 그럭저럭 배를 채울 만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 가격을 받고 약을 팔겠다니?

"공자님. 저도 간혹 약값을 받지 않긴 합니다만, 그 가격은…."

"초 의원. 이거 한 알 만드는 데 얼마 들었어? 사람 부린 것까지 합해서."

"한 알당 5푼입니다. 그런데 그건 핵심 재료를 따지지 않았을 때 이야기잖습니다."

초 의원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함을 꺼내왔다.

"밀가루 조금에 향이 강한 천궁 가루를 소량 뭉친 것밖에 없습니다. 이래서는 약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효능은 저번 약의 1할이라니까?"

"그래서 더 의아한 겁니다. 그 정도 효과를 내려 해도 필시 많은 약재를 비전으로 조합하고 추출했을 텐데, 고작 1문을 받겠다니요?"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이문이 남아."

그 이유는, 약효를 담당하는 게 희석한 유은하의 피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스트랄 유니온이 약초에서 약 성분을 추출한 유은하의 피였으니까.

"그래도 이문이 남는다고요?"

"응."

"말이 되는 소리를…. 아니, 설령 이문이 남더라도 개당 몇 푼에 불과할 텐데 그걸 남겨서 대체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의원이라서 그런지 장사는 잘 모르네. 박리다매라고 들어 봤어?"

"예?"

"일하러 온 애들한테 서너 개씩 쥐여주라고 한 건 안 잊었지?"

"아, 예. 시키신 대로 하긴 했습니다만."

초 의원의 대답에 유은하는 굳게 닫혀 있던 창고 문으로 다가갔다.

"적게 남으면 그만큼 많이 팔면 되는 거거든."

어차피 중원 천지에 남는 게 사람이라지 않았던가.

유은하가 그렇게 생각하며 창고 문을 열자.

"열렸다!"

"여기서 동 1문에 약을 살 수 있다는 게 정말이오?"

"거, 안 살 거면 일단 비키쇼. 나부터 세 첩만 주시오!"

허름한 골목이 부산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몰려 있었다.

며칠 동안 약을 만들며 시제품을 받아 간 이들이 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이, 이게 대체?"

"뭐 해?"

"예?"

당황하는 초 의원을 향해 유은하가 턱짓했다.

"장사 시작해야지."

7화. 박리다매

"자자. 한 사람씩 줄을 서시오. 한 첩에 세 알 들었고, 그게 하루치요."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는 유은하.

외모는 이제 지학도 안 된 소년이었지만, 사람들은 얌전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유은하의 모습은 어딜 봐도 잘사는 집안 자제 같았으니까.

어차피 살 약이고, 뒤편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게 보이니 괜히 유은하의 말에 거슬러 좋을 게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기도 했다.

"한 첩에 동 3문. 낱개로도 파니 정말 효과가 있나 시험해 볼 요량이면 한 개만 사도 되오."

유은하의 말에도 몰려든 이들은 대부분 서너 첩씩 약을 사 갔다.

초 의원이 뿌린 약을 통해 이미 효과를 보고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사기 아닐까 의심하던 이들도 주변 사람들이 몇 첩씩 사 가니 속는 셈 치고 전낭을 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순식간에 손에 약을 든 채 집으로 향했다.

사천의 따뜻한 기후에 익숙한 이들에게 올겨울은 밖에 잠시라도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웠으니까.

아마 급증하는 감기 환자가 아니었다면 손님이 반도 없었을 것이다.

곧 유은하의 옆에 놓인 커다란 궤짝에는 동전이 수북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동전. 전부 모아 봤자 지현에게 약을 한 번 더 파는 것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약을 사서 사라지자 초 의원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거로 제 월봉은 나옵니까?"

"부족하면 지현한테 판 약 한 번 더 만들어 줄 테니까 걱정 마."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전이 든 궤짝을 툭툭 쳤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이미 사 갈 사람은 대부분 사 간 것 같습니다만."

초 의원의 시선이 뒤에 수북하게 쌓인 재고로 향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라 약이 상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겨울 가기 전에 다 팔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무슨 소리야? 저만큼 또 만들어야 하는데."

"예?"

"곧 없어서 못 팔게 될걸?"

유 노인도 그렇고, 날씨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열이면 아홉 혹독한 겨울을 예고했다.

사천의 겨울은 따뜻하다. 얼마나 따뜻하냐면, 눈을 보기 드물 정도로 따뜻하다.

그마저도 가진 거 없는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춥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겨울이 시작된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물이 얼기 시작했다는 사실.

'위생도 안 좋고, 겨울이라 다들 옹기종기 모여 있을 테니 엄청난 속도로 감기가 퍼질 거야.'

사정이 넉넉한 이들은 평소 하던 대로 준비한 약초를 달여 먹거나 의원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 정도로 넉넉한 이들이 많을까?

의원에 가서 진맥을 받고 약을 사는 데에는 적어도 동 수십 문이 필요하다.

가끔 바가지를 씌우거나 병이 심해 비싼 약재가 들어가면 은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동 1문에 살 수 있는 값싼 약이 나왔다면? 그것도 먹어본 이들이 너도나도 효과가 있다 말하고 다닌다면?

초 의원의 약방 주변은 물론이고 금천현 끄트머리에 있는 집에서도 약을 사기 위해 찾아오리라.

"흐음."

물론 초 의원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본디 장사에 관심도 없었거니와 유은하의 행동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의 호연지기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받기로 한 월봉은 못 받아도 상관없다. 이미 지현에게 판 약에서 은자를 뚝 떼어 받았으니까.

약을 더 만드는 것도 괜찮았다. 겨울이라 일이 없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돈을 쥐여줄 수 있으니, 그 또한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약이 싸구려나 부작용이 심한 가짜인가?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실력 좋은 초 의원이 달이는 탕약보다 효과가 좋다.

사천이 당문 덕분에 의원 수준이 상향평준화 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중원 전체에서는 충분히 중상급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약이다.

"아, 그리고."

유은하가 동전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말했다.

"금천현에도 정파가 있나?"

"정파라기보다는, 그냥 무관이 두 곳 있습니다."

"거기 사람들 고용하면 철죽파 놈들이 강도질하려 해도 보호해 줄 수 있어?"

"그건…."

초 의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이 삼류도 안 되는 파락호지만, 수가 제법 됩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지키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병사들 올 때까지 버티는 것도 못 해?"

"그 정도야 가능할 겁니다. 문제는 철죽파와 지현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초 의원은 약을 팔기 위해 지현을 몇 번이나 만났다. 그러면서 지현이 철죽문을 통해 몽혼약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게 꽤 있었나 보다.

"철죽파라면 미리 기름칠해 둘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초 의원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들은 이제 이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굳이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 금천현에서 사파는 그놈들밖에 없잖아. 그놈들을 막을 수 있으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어?"

"하긴.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뒷골목 양아치들이죠."

"그런데 쉽지 않다니, 어쩔 수 없지. 철죽파는 어디로 가면 돼?"

유은하는 약을 몇 첩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초 의원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죽파에 가시려는 겁니까?"

"응."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지현과 안면을 터놨으니, 함께 가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마워. 출장비는 따로 쳐줄게."

"예?"

"아, 여긴 그런 거 없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은하는 이내 초 의원과 가게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왔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답게 어느새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빨리 가자."

유은하는 초 의원과 함께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철죽파가 사용한다는 작은 장원으로 향했다.

"어? 저놈들, 맞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우연히도 대문을 지키고 선 놈들은 지난번 약방 문을 부수고 들어왔던 두 놈이었다.

"어이."

"고, 공자님?!"

화톳불에 바짝 붙어 경계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놈들이 유은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저희,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예! 그날 이후로 약방 근처는 얼씬도 안 했습니다!"

"알아."

유은하가 웃으면서 두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의리 있는 놈들이야. 안 그래? 초 의원."

"아… 예."

대체 유은하가 철죽파 놈들에게 왜 웃어 주는진 모르겠지만, 초 의원은 일단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약속 잘 지켰으니까 이거로 동료들하고 술이나 한잔해."

유은하가 은자 한 냥을 튕겨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금에 두 놈의 얼굴이 풀어지던 그때.

"아, 나한테 맞은 그놈은?"

"그으… 요양 중입니다. 정강이랑 턱뼈가 완전히 아작 나서…."

"저런. 그러게 사람 잘 보고 덤볐어야지. 누군 은자를 얻는데, 누군 병신이 됐어. 참 안타까워. 보는 눈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거지. 안 그래?"

은근히 압박하는 유은하의 눈빛에 두 사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내가 여기 온 건 너희 그… 철랑단주? 그 사람 좀 만나러 왔어."

"저희 단주님은 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는 두 놈. 그 모습에 유은하가 피식 웃었다.

"우리 초 의원이 저번에 지현에게 좋은 약을 하나 팔았는데, 거기서 철죽문 이야기를 들었다지 뭐야? 우리가 시작은 좀 이상했어도, 끝까지 이상하라는 법은 없잖아?"

유은하가 허리춤에 달린 약첩을 가볍게 건드렸다.

"지현이 무슨 약을 샀는지는 들었지? 감기든 뭐든 한 알만 먹어도 싹 낫는 아주 기가 막힌 약이라고. 지현은 그걸 촉왕부에 뿌리려고 한다더라."

꿀꺽.

두 놈은 마른침을 삼키며 유은하가 건드린 약첩을 흘끔거렸다.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보자는 의미도 있고, 겸사겸사 의뢰할 것도 있어서 선물을 가져왔지. 그런데."

유은하의 눈빛이 돌연 사나워졌다.

"내가 이런 것까지 너희들한테 다 말해야 철랑단주인지 짤랑단주인지를 만날 수 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오셨는지 궁금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한 놈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단주에게 향했고, 한 놈은 남아 유은하를 장원 안으로 안내했다.

장원 안쪽은 의외로 깔끔했는데, 자세히 보니 정리를 잘한 게 아니라 갖춘 게 없이 휑한 모습이었다.

초 의원도 그렇게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떠날 것처럼 아무것도 없군요."

"그러게. 뭐, 이놈들이 금천현에서 발을 빼준다면 우리야 나쁠 게 없긴 한데."

유은하는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이 풍경은 마치 궤도 의료기지가 반물질 미사일에 소멸하기 전의 풍경과 비슷했다.

최중요 인력이나 시설을 점검 핑계로 본사로 불러들였던, 그 황량한 풍경 말이다.

그렇게 잠시 안쪽을 둘러보고 있자니,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걸어 나왔다.

덩치는 조금 전 철죽파 문도보다 훨씬 작았다. 인상이 사납거나 더러워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걸 느꼈다.

마치 늑대나 곰을 앞에 둔 것처럼 몸이 본능적으로 사내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군의 핏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자. 철죽파 철랑단 단주 배호청이라 합니다."

공손한 몸짓으로 포권을 해 보이는 배호청. 하지만 그의 눈빛은 유은하를 조심스레 훑고 있었다.

과연 이 소년이 진짜 가욕관 곽 장군의 아들이 맞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물론 살피기만 해서 진위를 알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

철랑단주 배호청의 인사가 끝났음에도 유은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몸짓에서 느껴지는 힘이나 속도 면에서는 자신이 우위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뭔가 다른 게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은하의 정신을 깨운 건 뒤에 서 있던 초 의원이었다.

"공자님?"

"아, 아아. 미안. 고수라기에 잠시 넋을 놓고 봤네."

"부끄럽습니다. 고작 일류가 고수라니요."

"고작 일류라니. 금천현에서 촉왕부 무사나 무관 관주를 제외하면 최고수인데."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이놈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배호청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유은하가 그를 관찰한 것처럼, 배호청 역시 유은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알 수가 없군.'

유은하에게서 내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손이 검을 향해 내려가려 해서 그걸 참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장문인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공이나 무의 격차로 인한 압박감은 철죽파 장문인이 훨씬 강했다. 그는 절정 초입에 이른 무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은하에게는 그보다 근본적인 뭔가가 있는 듯했다. 마치 사람 자체가 다른 것처럼.

'지현에게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건만. 이게 진짜 신분 차이라는 건가?'

장군의 아들이면 귀족일 테니, 일류 무인이라 하더라도 평민에 불과한 자신과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겠지.

배호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은하를 안으로 안내했다.

"손님이 오실 거라고 생각지 못해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니야. 해도 다 져 가는데 급하게 찾아온 내 잘못이지. 일단 이거나 받아."

유은하가 약첩을 건넸다.

"지현이 귀한 약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예. 지현이 직접 자랑하더군요. 여기 초 의원에게서 구했다고."

"맞아. 세 첩 중 가장 위에 있는 게 그 약이야. 외상에는 별 효과 없지만, 감기 같은 병에는 세상 그 어떤 약보다도 좋을 거야."

일류 고수는 감기에 걸릴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약의 사용처는 직접 쓰는 데만 있지 않다.

'장문인 아들이 이제 다섯 살이니, 장문인께 드리면 좋아하시겠군. 이걸 명분으로 이 깡촌을 잠시 벗어날 수도 있겠고.'

배호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공손히 고개 숙였다.

"그리고 그 아래 두 첩은 오늘부터 팔기 시작한 평범한 약. 그냥 여기 애들 나눠 줘도 돼. 날씨가 부쩍 추워졌잖아."

"공자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자비는 무슨. 나도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건데."

유은하가 살짝 고개를 돌려 초 의원을 눈짓했다.

"얼마 전에 여기 애들이 초 의원을 납치하려 했더라고."

"죄송합니다. 저희도 지현의 부탁을 받은 일이었는데, 설마 공자님께서 점찍은 사람인지는 몰랐습니다."

"탓하려고 온 건 아니야. 아직도 의원 구해?"

"아닙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초 의원 대신 납치된 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유은하가 신경 쓸 일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괜히 초 의원 건드릴 일은 없다는 거지?"

"설령 있다 해도 공자님이 계시는데 저희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없다는 소리로 알아들을 테니까, 한동안 애들 몇 시켜서 초 의원이랑 약방 좀 지켜줘."

그 말에 배호청은 잠시 멈칫거렸다.

"저희에게 호위 의뢰를 하시는 겁니까?"

"응. 너희는 지현이랑도 친하잖아. 괜히 끈도 없는 무관에 의뢰하는 것보단 낫겠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유은하를 보며 배호청은 유은하가 확실히 무림과 엮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사파에 호위 의뢰를 하다니.

"매일 밤낮으로 다섯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돈은 얼마나 필요해?"

"사흘에 은자 다섯 냥은 주셔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엄두도 안 날 바가지 금액. 유은하가 귀족이라는 생각에 던진 금액이었다.

하지만 은자보다 훨씬 귀한 게 옆에 있어서인지, 배호청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약첩으로 향했다.

그걸 본 유은하가 씨익 웃었다.

"지현이 그걸 얼마에 샀는지 알아?"

"…예. 한 알을 금 두 냥에 샀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훨씬 비싸지. 나도 인맥 트려고 염가에 판 거니까."

"…그렇군요."

"여기서는 배 단주한테도 선택권을 주는 게 낫겠지. 선금과 잔금 나눠서 돈으로 받을래, 일 다 끝나고 약으로 받을래?"

"약이라면, 이 맨 위의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배호청이 약첩에 손을 올렸다.

"응. 요새 촉왕부에서도 좋은 약을 구하는 데 혈안이라 하더라고. 나야 거기까지 얽힐 일은 없으니 별 관심 없긴 한데."

"예. 촉왕부와 당문의 갈등 때문이라죠."

"겨우내 지켜주는 값으로 약 세 알. 어때? 훨씬 남는 장사 아니야?"

지현이 약을 산 값으로 따지면 무려 금자 여섯 냥. 은자로 치면 백이십 냥이다.

반면, 겨우내 의뢰비를 은자로 받으면 백오십 냥. 돈으로 받는 게 더 이득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돈보다는 약이 비자금으로 만들기 쉽다는 거지. 여기 돈은 너무 무거워.'

그런 유은하의 생각이 적중한 듯, 배호청이 즉답했다.

"약으로 받겠습니다."

"좋아. 잠시 아버지를 뵙고 와야 했는데, 그사이 별일 없게 잘 지켜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자."

유은하는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호청이 술상을 봐오겠다 했지만,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며 거절하고는 다시 약방으로 돌아왔다.

약방으로 돌아올 때는 철죽파 문도 다섯과 함께였다.

"초 의원은 내가 준 것들로 약 만들어서 계속 팔고. 알았지?"

"예."

"너희도 잘 지키고 있어. 돌아오면 의뢰금이랑 별도로 주머니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예! 공자님!"

철죽파 문도들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유은하.

그가 약방을 나서려 문을 연 그 순간.

"…거, 행동 참 빠르네."

분명 약방은 장사 시간이 끝났는데도 문 앞에는 허름한 복면을 두른 남자 넷이 서 있었다.

"자시 넘어서나 오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해 떨어지자마자 와?"

유은하를 배웅하기 위해 뒤따라 나오던 초 의원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의원 생활 십 년 만에 강도는 처음입니다."

뒤에 흉흉한 얼굴로 박도를 들고 선 철죽파가 있어서 그런지, 겁을 먹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8화. 박리다매

"이게, 이게 말이 됩니까?"

초 의원은 퀭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밤사이 강도가 네 번이나 들 수 있습니까?"

"이상하긴 하네."

진즉 약이 좋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고 그 약이 고작 동 1문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직접 확인했다.

그러니 겁 없는 누군가가 손을 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강도가 네 번이나 들다니.

유은하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두식아."

"예. 공자님!"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철죽파 문도가 유은하의 부름을 듣고 다가왔다.

"내가 사파에 대해 편견은 없는데 말이야. 너희 때문에 치안이 나빠진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저희가 그, 보호비를 좀 걷긴 했지만, 오히려 양아치도 못 되는 놈들은 싹 정리하고 다녔습니다!"

두식이라는 사내의 말에 유은하는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하는 궤도 의료기지에만 머무느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마피아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놈들은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로지 형제, 혹은 적만 있을 뿐.

'더군다나 철죽파는 금천현에 발 들인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으니.'

철죽파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그냥 금천현 치안이 엉망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했다.

하지만 또 그렇다기에는.

"이건 이상합니다. 정말로."

초 의원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금천현 치안이 원래 안 좋은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물론 다른 곳보다 치안이 빼어나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하룻밤 사이에 강도가 몇 번이나 들 정도로 개판은 아니었습니다."

초 의원의 표정을 보면 이 또한 사실인 듯했다.

"비록 상업이나 농업이 발달한 동네는 아닙니다만, 이 금천현에는 금광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금광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촉왕부 병사만 일천이 넘습니다. 그들이 간간이 현 곳곳을 순찰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 병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 근근이 먹고살 정도는 되니 강도질을 할 백성도 별로 없습니다."

말만 들으면 그럴싸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장 약방이 하룻밤 사이에 네 번이나 강도를 맞이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고민하던 유은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 의원."

"예. 공자님."

"촉왕부 병사들이 순찰을 돈다고?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근래 좀 뜸해지긴 했습니다."

유은하가 금천현을 들락날락한 지도 벌써 보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촉왕부 병사들은 본 적이 없었다.

딱 잘라 말해서, 날씨가 좀 추워지니 병사들이 순찰을 게을리한다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유은하의 물음에 두식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철죽파가 활동하기 좋게 병사들도 적당히 할 거라는 말은 듣긴 했습니다만, 이거랑 관련이 있는지는 잘…."

지현의 부탁으로 금천현에 발을 들인 철죽파. 그리고 의원을 납치해 몽혼약을 만들려던 철죽파와 의도적으로 순찰을 방기하는 촉왕부 병사들.

"쯧."

아무래도 처음 잡은 터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해. 우리한테 영향이 올지 안 올지는 확실치 않지만….'

재수가 없으면 엮일 수도 있다.

지현과 철랑단주에게 약을 팔았으니까.

단순히 효과 좋은 감기약이라 해도 그들이 벌이는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충분히 얽힐 수도 있다.

"촉왕부까지 얽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날 텐데요."

초 의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식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파를 세우러 파견 나온 곳에서조차 말단인 두식이 뭘 어쩌겠는가?

"뭐. 일단은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으면서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유은하는 기지개를 켜며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들며 답답하던 공기를 몰아냈다.

"두식이는 교대조 오면 저 강도 놈들 관청에 넘기고 돌아가."

"예. 공자님."

"초 의원은 장사 준비하고. 약 만드는 애들은 언제 와?"

"날 밝으면 오기로 했으니, 곧 올 겁니다."

"그래. 마지막 처리만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초 의원이 신경 써 줘."

"예."

창고에는 유은하의 피가 희석된 자기병이 여러 개 있었다.

그게 약효의 핵심이니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럼. 장사 시작하자."

유은하가 문을 여니, 골목 가득히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

"엇?"

당황한 듯 초 의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약방에 이렇게 사람이 몰릴 일이 없었다. 사람 서넛이 줄 설 정도면 장사가 잘되는 편이다.

그야, 약방은 대체로 적은 양을 비싸게 파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약방 앞에 모인 이들은 딱 봐도 수십 단위를 넘어 백 단위도 족히 되어 보였다.

"어, 어떻게…."

"소문이 빨리 퍼지긴 하네. 어제 왔던 사람들도 있고."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에게 줄을 서라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약방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이후로 유은하와 초 의원은 정신없이 약을 팔았다.

"아니. 이게 이렇게 잘 팔리는 게 말이 됩니까?"

"직접 팔고 있으면서 말이 되냐는 건 무슨 소리야?"

뒤편에서 약첩을 궤짝째로 꺼내오던 유은하가 피식 웃었다.

"값싸지, 효과 좋지, 간편하지. 안 살 이유가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초 의원은 계속 '이럴 수가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약초가 아니라 제대로 지은 약은 평민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는 게 그의 상식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 의원이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음 손님을 맞이한 그때.

"크흠."

커다란 봇짐을 짊어진 이가 나타났다.

"금 한 냥이오."

그자는 대뜸 금자를 들이밀었다.

"예?"

초 의원이 누런 금과 봇짐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금 한 냥이면 은으로 스무 냥이다. 은 한 냥은 동으로 이백 문이니, 도합 사천 문.

봇짐 사내는 무려 사천 개에 달하는 약을 사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보시오. 우리 물건 떼다가 다른 곳에서 비싸게 팔 생각인 것 같은데, 안…."

"잠깐."

초 의원이 거절하려던 찰나, 유은하가 나섰다.

"이봐."

"예. 공자님."

"자네가 그렇게 많이 사 가서 파는 건 상관없는데, 손해 보지 않을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요. 저잣거리 싸구려 약도 동 10문은 받는 마당에, 이것들로 이문 못 보면 장사 접고 농사나 지어야죠."

봇짐 사내의 거침없는 발언에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

반대로 말하면 10문에 팔아도 될 걸 멍청하게 1문 받고 팔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은하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데 저기 다른 이들도 생각은 비슷한 것 같은데?"

유은하가 뒤편을 턱짓했다.

길게 늘어선 줄 사이사이 봇짐이나 궤짝을 든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천 개고 만 개고 한 알에 1문만 받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

"쯧. 모르면 됐어. 가격은 얼마를 받든 상관 안 할 테니, 약을 바꿔치기하거나 효능을 과장하지 마. 이건 그냥 기침과 열을 내리고 약한 진통 효과가 있는 약일 뿐이니까."

유은하는 일부러 주변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알아서 먼 곳까지 팔아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가격은 얼마를 받든 문제가 안 된다. 이 약이 초 의원의 약방에서는 고작 1문에 팔린다는 소문은 곧 금천현 전체를 뒤덮을 테니까.

봇짐장수가 바가지를 씌우면 누군가가 나서서 약을 떼 간 후 그보다 더 싼 가격에 팔 테지.

정 이미지가 나빠지면 직접 사람을 부려도 되고.

"내 충고를 무시하면, 밤길 조심해야 할 거야."

"예에…."

유은하가 뒤쪽을 턱짓하자, 눈치 좋게 두식이가 박도를 매만지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물론 봇짐 사내가 유은하의 충고를 따를지 안 따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날 건 분명했다.

"아, 그리고. 아쉽게도 그렇게 많이는 못 줘. 다른 사람들도 사야지. 1천 개가 최대야."

유은하가 뒤편에서 궤짝을 가볍게 들어 옮겼다.

이렇게 대량으로 살 사람이 나올 줄 알고 미리 100개, 1,000개 단위로 나눠 둔 것이었다.

"동 1천 문. 은자로는 다섯 냥."

"여기 있습니다요."

봇짐 사내는 궤짝을 받아 들고는 낑낑거리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공자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뭔데?"

"저자가 약을 팔기 시작하면 손님이 줄어들 겁니다."

"저자가 파는 약은 우리 약 아닌가?"

"그야…."

당연하다고 말하려던 초 의원이 잠시 멈칫했다.

이 이름도 없는 약은 오직 유은하만이 만들 수 있다.

그럼 누가 사 가든 시중에 풀린 것들에 대한 대가는 전부 유은하의 주머니로 들어오게 된다.

봇짐장수가 1천 개를 사 가든 1천 명이 한 개씩 사 가든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박리다매라는 게 원래 이런 거야. 우린 유통 마진도 없이 물량을 해치운 거라고."

초 의원은 유통 마진이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알 수 있었다.

만드는 족족 팔아치우는 데는 문제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사람 팍팍 써서 보관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만들어. 알았지?"

"예."

그렇게 많이 만들면 언제 다 파나 하는 걱정은 이제 들지 않았다.

'아예 사람을 더 고용해야겠어.'

어차피 핵심 처리는 유은하가 준 병에 든 액체를 한 방울씩 섞기만 하면 된다.

어려운 일도, 시간이 필요한 일도 아니니 알약을 뭉칠 사람을 더 고용하면 그대로 생산량이 증가한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오시가 지났을 무렵, 창고에 궤짝 단위로 쌓여 있던 약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더 많이 만들어 놓을 테니, 내일 또 봅시다."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약방 문을 닫아버렸다.

당연히 밖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애초에 약이란 게 구하기 힘든 것이라는 인식도 있었거니와, 하루에 수천 개를 단돈 1문에 팔아 치우는 모습마저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

아무리 아쉽다고 한들 내일도 약방은 문을 열 텐데, 그 앞에 대고 욕을 해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이는 많지 않았다.

지체 높은 공자를 연기하는 유은하와 허름해도 의원을 운영하는 초서훈 앞에서 욕을 할 미친놈은 더더욱 없었고.

약방 문을 닫은 유은하는 동전이 가득 쌓인 궤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쌓아 두고 보니까 많긴 한데, 대부분 동이라 얼마 안 되긴 하네."

"그래도 하루 장사로는 정말 많이 번 겁니다. 평범한 의원은 높은 분이 오시지 않는 한 이 절반도 못 법니다."

초 의원은 놀라기도 지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하루 만에 번 게 은자로 80냥이라니.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중 원가가 절반이잖아."

"그래도 무려 40냥이 남지 않습니까."

"지현한테 판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유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은자를 집었다.

"재료도 충분히 있고, 사람 부릴 돈도 아직 많이 남았지?"

"처음 주신 양이 원체 많아서, 올겨울 내내 써도 될 겁니다."

"그럼, 절반만 먼저 가져간다. 나머지는 초 의원 가져."

"예?"

유은하의 말에 초 의원은 물론 옆에 있던 철죽파 문도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으로 잘하라고 주는 거야. 초 의원이 흥청망청 쓸 것 같지도 않고. 저 뒷방이나 깨끗하게 청소하고 다른 약재 구하는 데 보태 써."

"아니, 공자님. 잠…."

유은하는 초 의원이 뭐라 말하는 것도 듣지 않고 곧장 약방을 나섰다.

'할배가 걱정하겠네.'

장사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하루 묵고 올 수도 있다 말은 해 뒀다. 하지만 유 노인 성격이 그런가 보다 하고 편히 잘 성격인가?

밤새워 뒤척이며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유은하는 금천현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유 노인에게 줄 두툼한 솜옷과 겉에 입을 비단 조끼를 샀다.

다음에는 금천현 말고 딴 곳으로 가서 있는 집안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아패야 초 의원을 통해 지현에게 약 몇 알 더 찔러 주면 적당히 위조 가능할 것 같았고.

"간식도 사야지."

목책은 거의 다 세워졌고 이제 두껍게 황토를 바르는 일만 남았다.

그 작업이 끝나면 깊은 밤 짐승이 마을로 들이닥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고생을 한 마을 사람들에게 줄 당과도 넉넉하게 샀다.

육포와 쌀을 한가득 사서 배불리 먹이고는 있지만, 달콤한 간식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그 외에도 필요할 것 같은 자잘한 물건을 구매하고 나니 짐이 한 보따리나 되었다.

약방에서 들고나온 은자도 대부분 써버렸고 간밤에 내린 눈으로 신발도 질척해졌지만, 전혀 수고스럽지 않았다.

'이런 거로 나를 따르게 만들면 남는 장사지.'

절대적인 충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유은하가 유씨 집성촌에 발을 디딘 건 이제 고작 반년, 본격적으로 장사를 준비한 건 고작 보름이니 말이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분명 유은하에게도 심복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짐을 한 아름 짊어진 유은하가 금천현을 나와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얼마 걷지도 않아 다리가 후들거릴 텐데, 유은하는 바람이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비탈길을 올랐다.

봉우리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며 남들은 며칠이나 걸릴 거리를 순식간에 쭉쭉 나아가는 유은하.

누가 보면 무공 고수가 뛰어난 경공을 구사해 달려가는 줄 알았을 테다.

'무공에는 빨리 달리는 법도 있다던데, 그걸 배우면 반 시진 만에 금천현까지 갈 수 있으려나?'

정작 당사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마을까지 봉우리 한 개만을 남겨둔 그때.

"...?"

마을 쪽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번 겨울은 유은하 덕에 장작이 풍부해 불 때는 연기가 자주 올라오긴 했다.

하지만 외부에 마을 위치가 노출돼서 좋을 게 없기에 낮에는 회화나무나 싸리나무같이 연기가 잘 안 나는 장작을 사용한다.

밤에는 낮에 달궈 놓은 숯불을 화로에 넣어 사용하기에 연기가 날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연기는 평소에 보던 것과 그 크기가 사뭇 달랐다.

마치 누군가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할배!"

불길한 예감이 유은하의 등을 떠밀었다.

9화. 산사람

타닷!

수북하게 쌓인 눈에 깊은 발자국을 찍으며 유은하의 몸이 바람처럼 쏘아졌다.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몸을 스쳤지만, 유은하는 전차처럼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전부 박살 내버렸다.

그렇게 몇 분 만에 산길 수백 장을 주파한 유은하.

마을에 거의 도달한 그의 눈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목책이 보였다.

불과 연기로 가려진 측면에는 목책을 넘으려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했다.

저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다른 집성촌 사람이든 아니면 그냥 산적이든 마을에 쳐들어와 불을 질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할배!"

유은하는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목책 앞에 몰려든 놈들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그대로 달려 키만 한 목책을 훌쩍 뛰어넘었다.

목책을 넘으니 익숙한 얼굴들이 농기구와 죽창을 들고 있었다.

"유은하!"

"은하다! 은하가 왔어!"

마을 사람들은 은하를 보며 반색했다.

"할배! 우리 할배 어딨어!"

"집에 모시고 들어갔어! 무사해!"

어차피 노인은 공격하지 않는다. 노인을 공경해서도, 윤리 의식이 투철해서도 아니다.

노인을 때려죽일 시간에 장정 하나를 더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니까.

반항할 힘이 없는 노인은 노예로 부리든 고기로 삼든 뭘 해도 어렵지 않은 탓이었다.

유 노인이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유은하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불부터 꺼!"

산불은 무섭다. 하물며 겨울의 산불이야 말해 무얼 하겠는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마을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안다.

목책을 넘으려는 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유은하의 명령에 다들 불부터 끄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은하는 짐을 내팽개치듯 던져둔 채 도끼를 들고 목책 앞에 섰다.

이제 막 목책을 넘어서던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움찔거렸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너무나 당당한 그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그냥 돌아가. 그러면 쫓지는 않는다."

이미 목책을 넘다가 함정에 빠져 죽은 이들이 보인다. 곰이나 늑대 같은 맹수를 막기 위해 설치한 함정에 사람이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은하의 경고에도 적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휘익!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돌팔매질. 잘못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머리에라도 맞았다가는 단숨에 절명할 정도로 흉흉한 공격이었지만.

터억!

유은하의 손에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다.

으드득-

유은하가 손을 강하게 움켜쥐니, 주먹만 한 돌이 으스러졌다.

"!!!"

작은 알갱이가 뭉쳐 잘 바스러지는 서벅돌이었지만, 어쨌든 돌은 돌. 맨손으로 돌을 바스러뜨리는 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꺼져."

유은하는 적들이 물러나길 바랐다. 싸우면 마을 사람 중에서도 다치고 죽는 이가 나올 테니까.

하지만 이제 겨울이 막 시작되는 시기. 추위를 뚫고 다른 마을까지 온 이들에게도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물러나면 얼어 죽고 굶어 죽는다. 싸움에 져도 죽는다. 살 방법은 오직 이기는 것뿐.

"으아아아아아아!"

누군가의 비명 같은 함성을 시작으로 적들이 다시 밀려들었다.

목책 중 비교적 낮은 곳을 넘던 남자의 몸이 아래로 푹 꺼진다.

"끄아아악!"

땅을 파고 뾰족한 말뚝을 박아 놓은 함정에 빠져 팔다리가 꿰뚫린 것이었다.

뒤이어 목책을 넘은 놈이 함정을 피해 훌쩍 뛰어내렸지만.

뻐억!

유은하의 돌팔매질에 머리가 깨져 뒤로 넘어갔다.

놈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비명 지르는 놈 위로 엎어진다.

푸욱!

폐부를 찔린 건지, 가래 끓는 소리와 얇은 숨이 새어 나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연이어 목책을 넘는 놈들의 악다구니에 가려 사라졌다.

퍽! 퍼억!

목책 쪽에서도 돌멩이가 날아들어 유은하의 온몸을 때렸다.

목책에 상체를 걸친 상태로 던진 것들이라 힘이 그리 많이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유은하를 노리고 날아드는 돌멩이가 열 개를 넘어가니, 일일이 다 피할 수 없었다.

빠악!

눈먼 돌멩이 하나가 유은하의 이마를 때렸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충격. 화끈한 고통과 뜨뜻한 감각이 얼굴을 적셨다.

살이 찢어져 피가 주륵 흘러내리면서 시야가 질척한 붉은색으로 변하는 듯했다.

"맞혔다!"

유은하가 휘청거리자 산적 놈들이 더욱 기세를 끌어 올린다.

"빨리 넘어가!"

목책 너머에 함정이 있다는 정보조차 뒤로 전달하지 않는 오합지졸들.

덕분에 몇 번이나 더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하나둘 목책을 넘어 땅에 발을 디디는 자들이 늘어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유은하가 날아드는 돌덩이를 잡아채 다시 던졌지만, 그래 봐야 한둘이 쓰러질 뿐.

어느새 서른이 넘는 적들이 목책 너머로 내려섰다.

손에 든 것들이 대부분 돌도끼에 나무 몽둥이인 걸 보면 산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행색이 딱 마을 잃고 떠도는 부랑자들이었다.

하지만 산적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유은하는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유 노인 걱정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심장이 쿵쿵 뛴다.

그 위로 산적이든 부랑자든 아무튼 개새끼들인 놈들의 비명이 기름을 퍼붓는다.

마지막으로 또다시 머리를 때린 돌멩이가 부싯돌처럼 불꽃을 튀기자.

"으아아아아!"

여태껏 응어리져 있던 유은하의 분노가 폭발했다.

몇 년만 있으면 궤도 의료기지를 떠나 갤럭시 크라운의 후계자가 될 거라 기대했는데, 돌아온 건 모든 걸 지워버릴 반물질 미사일이었다.

절대적인 힘 앞에 유은하는 자신의 존재 의의조차 유린당했다. 실험체로 탄생해 궤도 의료기지라는 시험관에서 살아온 삶에 의의는 무슨 의의란 말인가?

기적이 일어나 중원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당도하고 이제야 사람으로 살아보나 했다.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가문도 없다. 유은하에게 마음 둘 공간이라고는 유씨 집성촌이 최초이며 유일한 곳일진대 감히 그것마저 빼앗아 가려 하다니.

"뒈져! 개새끼들아!"

유은하가 던진 도끼에 산적의 골통이 쪼개진다.

치솟는 피 분수 사이로 방울진 투명한 뇌수가 흩날려 섞이며 선홍빛으로 물든다.

찌릿.

옆구리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내달려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자.

휙!

끝이 뾰족하게 선 목창이 옆구리가 있던 자리를 스친다.

유은하가 팔로 목창을 휘감아 당기자, 산적이 맥없이 달려온다.

뿌득!

유은하가 내려친 주먹에 목뼈가 부러진 산적은 혀를 내빼고 쓰러진다.

쓰러지는 산적 뒤로 녹이 잔뜩 슬어 우둘투둘한 낫을 든 놈이 달려드는 게 보인다.

옆구리에 낀 목창을 거꾸로 내질러 낫을 든 놈의 복부를 찌르자.

빠각!

"끄아아아아악!"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달려들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유은하는 발치로 굴러들어온 녹슨 낫을 들었다.

그대로 목책 위에서 돌팔매질하던 놈을 향해 던지니 대가리에 푹 박혔다.

대신, 대가리에 낫이 박히기 전에 놈이 던진 돌이 유은하의 머리를 다시 한번 맞췄다.

또다시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유은하는 피범벅이 된 돌멩이를 들었다.

마침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놈이 있어서 몽둥이를 피하고 놈의 아가리에 돌을 처넣어 주었다.

누런 이빨이 새빨간 핏물과 함께 우수수 흩날리며 놈이 눈을 까뒤집었다.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힘을 보여주는 유은하.

그 모습에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산적 놈들은 계속해서 막무가내로 유은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쳐 봤자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진해 봤자 그 앞에 있는 것도 죽음이라는 건 매한가지였다.

찌릿.

등판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내달려 유은하가 몸을 비틀었다.

뻐억!

두꺼운 몽둥이가 유은하의 어깨를 때린다. 등판에 맞았다면 숨이 죄다 빠져나갔을 법한 위력.

어깨로 받아냈다고 딱히 덜 아픈 건 아니었으나 과분비된 아드레날린이 통각을 마비시켰다.

<부상 감지. 자가복구를 중단. 각성 호르몬 분비 촉진.>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고가 시야 구석에서 반짝였지만, 유은하는 그것을 무시한 채 반 바퀴 회전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주먹에 몽둥이를 휘두른 놈의 턱이 걸리며 허공으로 누런 이빨이 흩날린다.

찌릿.

또다시 등판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내달렸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주먹을 크게 휘두른 관성 때문이었다.

퍼억!

묵직한 충격이 등을 때리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비틀거린다.

유은하가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묵직한 무게가 그를 덮쳤다. 산적 놈들이 아예 몸을 날려 유은하에게 매달린 것이었다.

유은하는 등에 매달린 놈의 팔을 붙잡고 바닥에 매쳤다.

하지만 그 위로 다시 산적 놈들이 달려들었다.

등. 팔. 다리. 붙잡을 수 있는 건 전부 붙잡은 채 늘어지는 산적 놈들.

이윽고 유은하의 모습은 넝마를 껴입은 산적들의 아래에 깔려 사라졌다.

유은하를 도울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불을 끄기 위해 흙을 나르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이들은 이미 밀려드는 산적과 싸우고 있었다.

홀로 열 명도 넘는 산적을 쓰러뜨린 유은하가 쓰러지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흙을 퍼 나르는 이들을 데려와도 숫자는 겨우 동수. 그 상태로 싸우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다.

이런 산속 싸움에서 항복이라는 건 자진해서 식량이 되겠다는 말과 다름없으니까.

그러느니 죽어도 같이 죽어 사이좋게 짐승 똥이나 되자.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눈에 독기가 서리던 그때.

들썩-

유은하를 짓누르던 인간 둔덕이 들썩였다.

"어어?"

사람은 생각보다 무겁다. 겹겹이 쌓인 사람 아래에 깔리면 가슴이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해 죽을 정도로 무겁다.

그런데 열다섯은 족히 뭉친 인간 둔덕이 들썩이더니.

"씨바아아아아알!"

유은하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이 개새끼들아! 다 뒈져! 뒈지라고!"

중원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크라운 행성 언어로 미친 듯이 소리치는 유은하.

이미 그의 바로 위에 있던 놈들은 저들끼리 짓눌려 질식사했다.

유은하가 그중 축 늘어진 시체 하나를 붙잡아 철퇴처럼 휘둘렀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일어서던 놈들이 휘말려 우당탕 쓰러진다.

주먹으로 얼굴을 뭉개고 몽둥이를 빼앗아 대가리를 깨고.

도중에 어깨에 찌릿한 느낌이 들어 슬쩍 물러나니 쇠도끼가 스쳐 지나가며 다른 산적 놈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도끼를 휘두른 놈에게 몽둥이를 선물하자 자라처럼 목이 쏙 들어간다.

유은하는 주인을 잃은 쇠도끼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아무렇게나 휘두르니 마침 달려들던 놈의 가슴에 박힌다.

쩌억!

가슴뼈를 비틀며 빼내니 피 분수가 솟구친다. 그 쇠도끼를 또 정면에서 달려드는 놈을 향해 내려쳤다.

놈의 모가지가 쫘악 하고 갈라진다. 그것을 빼내니 또 피 분수가 촤악 하고 솟구친다.

찍으니 쫘악.

빼내면 촤악.

겁도 없이 달려드는 놈을 또 찍고 도끼를 또 빼내고.

온몸으로 돌과 몽둥이를 맞으면서도 찍고 빼내고.

찌릿한 느낌이 들면 잠시 피했다가 다시 도끼를 휘두른다.

그렇게 얼마나 반복했을까.

"후욱. 후욱. 후욱."

피를 흠뻑 뒤집어쓴 유은하의 앞에는 더 이상 서 있는 사람이 남지 않았다.

과한 흥분으로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매캐한 연기. 질척이는 흙. 줄기줄기 흐르는 피. 부러진 몽둥이. 피 묻은 죽창.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시체.

쓰러진 유삼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유이오.

피투성이가 된 발을 부여잡은 채 덜덜 떠는 유사사.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 붙여진 이들이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이름 순서가 아닌가 보다.

유은하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변을 훑는다. 때마침 불길이 잡히고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불타 쓰러진 목책 너머로 사람들이 보인다.

마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적일 것이다.

도끼를 쥔 유은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켜야 한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내 사람이야.'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유은하가 목책을 넘으려던 순간.

"유은하 이놈!"

뒤에서 유 노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 끝났다 이놈아! 그만해!"

***

전투가 끝나고.

유 노인은 유은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에 절어버린 옷을 벗기고 눈을 뭉쳐 박박 씻긴 후에야 드러나는 상처들. 그 상처를 보며 유 노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는 게 소원인 놈처럼 싸우더니만. 쯧쯧. 오래 살긴 글렀다."

온몸에 피멍이 들고 살이 찢긴 부위에서는 피가 몽글몽글 맺히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어디 두어 군데 부러지기도 했을 터.

곧 몸에 열이 잔뜩 오를 것이다.

안 그래도 곧 겨울이 깊어지며 더더욱 추워질 시기에 몸 상태가 이래서야.

어쩌면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유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은하는 아니었다.

"나 괜찮아. 할배."

"지랄 말고 누워. 곧 온몸이 아플 거여."

"괜찮다니까? 나 튼튼해."

"네가 무슨 무림인이라도 돼? 튼튼해 봤자 몽둥이찜질 당하면 훅 가는 거 한순간이여!"

"내가 무림인보다 강하니까 괜찮다고. 무림인도 별거 아닌 것 같더만."

"지랄. 무서운 놈들이니 혹여나 얽힐 생각은 추호도 말어."

유 노인이 억지로 유은하를 자리에 눕혔다.

그러고는 숯불이 은은히 타오르던 난로에 방이 후끈해질 정도로 장작을 밀어 넣었다.

"진짜 괜찮은데."

"한 번만 더 괜찮다고 해 봐라. 저 뻘건 숯을 아가리에 쑤셔 넣을 테니."

"…어우."

유 노인의 말투가 유난히 거칠었다.

"...."

한동안 유은하와 유 노인은 입을 다문 채 장작 타는 소리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유은하가 유 노인을 불렀다.

"그런데 할배."

"또 왜."

"나 왜 말렸어?"

유은하의 눈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분노가 섬뜩한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10화. 산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