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MEGACORPENMOORIM / Chapter 2 - 10-20

Chapter 2 - 10-20

10화. 산사람

"아직 많이 남아 있었잖아. 목책 너머에. 그놈들도 다 죽이는 게 나았을 텐데."

유은하의 목소리에서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살기가 묻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유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아. 다 죽이긴 뭘 다 죽여?"

유 노인의 말에 유은하는 내심 놀랐다.

지난 반년 동안 생활한 결과, 이 세상은 도덕이랄 게 없었다.

행정구역도 있고 법도 있고 법을 집행할 관리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전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과 무력과 금력으로 우회할 수 있는, 그냥 형식.

그나마 백성들이 그 형식을 지키고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법을 무시할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잔뜩 모여 사는 곳이 그럴진대 매일이 생존을 위한 투쟁인 첩첩산중 집성촌에서는 어떻겠는가?

이곳은 도덕이 사치품과 다르지 않았다.

기술 발전이 과해 도덕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크라운 행성과 비슷할 정도로.

유은하가 살인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손톱보다 작은 칩에 저장된 데이터를 위해 수백, 수천 명이 우습게 죽어 나가는 곳에서 온 사람이 유은하다.

그 정점에서 본 사람 목숨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하찮았다.

단지, 손끝에 남은 미묘한 감각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불쾌함을 유발할 뿐.

그런데 유 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적어도 기본적인 인명 존중은 남아 있는 듯….

"사내새끼들이 다 뒈졌으니 나머지는 다 전리품이지. 그걸 썩둑썩둑 썰어버리려는 놈을 왜 안 말려?"

정정해야겠다.

인명 존중?

생존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래도 네 덕분에 올겨울은 식량이 풍족하니 그나마 챙길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식량이 부족했으면?"

"죽였겠지. 그리고 먹었겠지."

"할배. 그러면 안 된다니까."

"안 되는 게 어딨어?"

식인은 윤리의 문제라 설명해 봤자 들어먹을 사람은 없다.

넌 윤리나 퍼먹고 대가리를 살찌워라. 우리는 몸을 살찌우겠다.

이렇게 말하겠지.

차라리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식인으로 인한 병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통하진 않았지만.

"사람 먹으면 미친놈처럼 웃기만 하다가 죽는 병에 걸린다니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웃다 죽으면 그게 호상 아니냐."

"그게 왜 호상이야?"

"굶어 죽은 놈 본 적 있느냐?"

"...."

유 노인의 물음에 유은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유은하를 보면서 유 노인이 혀를 찼다.

"쯧쯧. 우리가 산에 산다고 아예 산짐승이 된 건 아니다. 우리도 사람 먹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

아는데,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잡아먹힐 판이었다."

"응. 그러려고 쳐들어왔겠지."

"그래. 그런 위기를 넘긴 것도 모자라 사람까지 늘었잖느냐. 산신께서 선물을 주신 게지."

유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네 몫 챙기러 간다 이놈아. 네가 제일 많이 쳐 죽였으니, 제일 많이 가져가야지."

"아니. 안 먹는다고."

"누가 네 입에 처넣을 거 가지러 간다고 했냐? 알아서 잘 골라올 테니 잠이나 자."

"아 맞다. 내 짐, 목책 근처에 두고 왔는데…."

"오냐. 내 가져오마."

유 노인은 화로에 장작을 더 쑤셔 넣은 뒤 밖으로 나섰다.

방이 고요해지자 수마가 밀려들었다. 한참 산을 타고 격한 전투까지 치렀으니 졸릴 수밖에.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유은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02%>

유은하의 시야 구석에 있던 텍스트가 변화했다.

그리고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끼익.

대충 끼워 맞춘 문이 열리며 낯선 그림자가 허름한 흙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가만히 선 그림자는 잠든 유은하를 계속해서 내려다보았다.

***

"어윽…."

유은하는 정신이 들자마자 온몸을 옥죄는 둔중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유 노인의 말은 딱 반만 맞았다.

골병이 든다거나 사경을 헤맬 정도로 열이 나진 않았다.

대신,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그마저도 몸이 더 튼튼해지는 과정이긴 했지만, 유은하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할배. 나 물…."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유은하가 겨우 상체를 세우며 손을 뻗는다. 곧 나무를 깎아 만든 잔이 유은하의 손에 잡혔다.

꿀꺽- 꿀꺽-

화로 근처에 있었는지 따뜻한 물이 정신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단순히 갈증이 가셨을 뿐인데도 몸에 활력이 도는 듯했다.

"고마워. 할…."

그렇게 유은하가 눈을 떴는데.

"배?"

눈앞에 처음 보는 여인이 있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고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 덜덜 떠는 여인.

숯불이 타오르는 화로에 바짝 붙어 온기를 쬐고 있던 듯했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네놈 몫이지."

문이 벌컥 열리며 유 노인이 들어온다.

"이것도 네놈 거다."

유 노인이 쇠로 된 도구들을 우르르 내려놓았다.

낫. 도끼. 호미. 쇠스랑. 그것들을 내려놓은 유 노인의 표정에 뿌듯함이 번진다.

산에 사는 이들에게 쇠로 만든 도구는 꽤 귀하니까.

물론 유 노인 몰래 돈을 잔뜩 벌고 있는 유은하에게는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것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낡은 천으로 된 옷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들은 뭔지 알겠는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네 거라니까? 이놈이 이틀 만에 일어나서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유 노인은 전리품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등을 돌렸다.

"잡아먹든 아내로 삼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해라. 네 거니까."

"...?"

"청결, 청결 매일 난리를 쳐서 좀 전에 눈으로 박박 씻겨 놨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정신이 혼란한 와중에도 유은하는 여인이 덜덜 떨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유삼삼이네 가서 내일 올 거다. 네놈 짐에 있던 당과는 마을 사람들한테 나눠주려고 가져온 거지? 내가 나눠주마."

그렇게 유 노인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쌩하니 흙집을 나섰다.

"...."

"...."

그렇게 남겨진 유은하는 멀거니 여인을 바라봤다.

'내 거라고?'

사람을 소유한다는 게 낯설진 않았다. 로열패밀리로서 유은하의 수발을 드는 사람은 많았으니까.

법적으로 노예만 아니었을 뿐, 로열패밀리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는 이들은 사실상 노예라고 칭해도 무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은하가 사람을 노예로 막 다룰 위인은 못 됐다.

강 실장이 유은하를 보며 도무지 로열패밀리 같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유은하는 유순한 편이었다.

"일단 이것 좀 덮고 있어."

유은하는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두꺼운 천 안에 거적을 넣어 부피를 키운 이불에서 서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

이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해? 덮으라니까 벗고 있네? 말이 안 통하나?"

"저를 취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나요?"

"뭐야. 말 통하잖아."

안도한 유은하가 서둘러 여인의 몸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취하긴 뭘 취해. 그럴 생각 없으니까 일단 몸부터 데워."

"하지만."

여인의 시선이 유은하에게 향했다. 피에 흠뻑 절어버린 옷을 벗어놓은 탓에 유은하는 알몸이었다.

그래서 여인이 오해한 것이었다.

"엇."

유은하도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옷을 꺼내 입었다.

덕분에 유은하는 여인의 아쉬워하는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은하는 장정 열이 달려들어도 다 쳐 죽일 만큼 힘이 장사다.

그런 남자를 모신다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생활이 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던 여인이었다.

"에휴. 할배도 진짜 막무가내라니까."

옷을 다 입은 유은하는 팔다리를 빙빙 돌리며 어디 이상이 있지는 않나 점검했다.

다행히도 뻐근한 근육통만 느껴질 뿐, 뼈나 인대가 상한 곳은 없었다.

오히려 힘이 한층 강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난 유은하. 넌 이름이 뭐야?"

"이름… 없어요."

"뭐? 이름이 왜 없어? 그럼 다른 사람들은 널 어떻게 불렀는데?"

"여우 사냥꾼네 둘째 딸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가 누군가와 결혼하면 누구누구네 아내, 누구누구네 어미. 그렇게 불리는 게 작디작은 산속 마을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그나마 유씨 집성촌은 50호가 넘어갈 정도로 규모가 상당하니 숫자라도 이용해 대충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유이구, 유삼삼 이렇게.

유은하는 새삼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성씨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이름 없는 건 아니었을 거 아냐."

"아버지는 장씨였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유은하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유은하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여기 오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음. 그렇구나."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괜히 다른 마을을 습격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겨울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는 더더욱.

당연히 유씨 마을을 습격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어쩌다가?"

여러 의미가 담긴 유은하의 물음이 여인에게 날아들었다.

유은하의 마음을 얻으면 좋을 거라는 계산인지. 아니면 그저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지.

여인은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모른 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 마을은 여기서 북서쪽 높은 봉우리를 두 개 지나면 있었어요."

"북서쪽? 산세가 더 험하긴 한데, 금천현이랑도 가깝지 않나?"

"네. 거리로만 따지면 여기보다는 금천현에 훨씬 가까워요. 맑은 날 봉우리 위에 서면 어렴풋이 금천현이 보일 정도예요."

그 정도면 상당히 가깝다.

세금을 내지 않고 숨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산세가 심각하게 험해서 약초꾼들조차 출입하지 않기에 마을이 들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엿새 전에,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쳤어요."

"병사? 관군?"

"관군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두꺼운 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들었다고 어른들이 그래서."

"겨울에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유은하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병사들은 시시때때로 산속 촌락을 약탈하려 든다고 유 노인에게 들었으니까.

물론 그러다가 된통 당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병사가 스물 정도만 모여도 마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돌도끼와 죽창 따위로 창칼을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게다가 병사 중에 돈 많은 놈이 활이라도 들고 온다면 짐승처럼 사냥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오히려 겨울에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궁핍한 게 산속 촌락이다. 습격해 봤자 뭐가 있겠는가?

병사들에게는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다.

차라리 사냥한 동물 가죽이 차곡차곡 쌓이는 때인 가을 무렵을 노려서 습격하는 게 낫지.

여하튼.

대체 왜 한겨울에 병사들이 지랄병이 걸려 마을을 습격했는지, 여인도 유은하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용케 도망쳤네."

"뱀 굴을 찾으러 나갔던 아저씨들이 먼저 병사들과 마주쳤다고 들었어요."

덕분에 일부는 병사들의 발을 붙잡을 수 있었고 일부는 마을에 위험을 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여인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챙겨 나온 식량마저 다 떨어진 엿새째, 유씨 집성촌을 발견해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습격하게 된 것이었다.

"왜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거야?"

"한번 들킨 마을은 버려야 한다고 어른들이…."

보통 촌락을 습격한 병사들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죽이지 않는다. 마을을 불태우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들을 쫓아내고 챙길 것만 챙겨 돌아간다. 그래야 다시 사람들이 돌아와 재물을 채워 넣을 테니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 겨울에 돌아가 봤자 제대로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고 그러느니 우연히 발견한 마을을 빼앗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50호가 넘어."

"네. 그래서 불을 지르자고 했어요."

"아."

목책을 태우던 불.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이 겨울에 산에 불 지르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

"...."

"에휴. 됐다."

유은하는 여인을 다그치려다 말았다.

여인이 불을 지르자 한 것도 아닐 테고, 막을 힘도 없었겠지.

여인의 마을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죽음뿐이라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쪽을 택하는 게 사람이니까.

마음을 진정시킨 유은하가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멀뚱히 유은하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유은하는 그녀의 눈에서 방황하는 기묘한 감정이 전해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타인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과 마을 사람을 잃은 슬픔.

하지만 그 감정이 죄책감과 슬픔인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 하고, 그것을 왜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는 눈빛이었다.

느낀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테고.

유은하는 치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여인에게 물었다.

"억울하지 않아?"

"뭐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되묻는 여인.

자신이 왜 이런 세상에 이렇게 태어났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다면 억울함이 흘러넘쳤을 텐데. 말로 흘러넘치든 눈물로 흘러넘치든.

하지만 여인은 오도카니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유은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듯한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여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스륵.

여인이 자신의 앞섶으로 손을 가져갔다.

11화. 산사람

"아니. 이번에는 왜?"

"빤히 바라보셔서…."

"그런 의미 아니야. 할배한테 무슨 소리 들었어도 잊고."

유은하는 여인의 몸을 손수 이불로 꽁꽁 싸매 주었다.

이불에 싸여 얼굴만 동동 뜬 모습이 되자, 유은하는 그제야 여인의 인상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하도 의연한 척하고 있어서 그저 몸집 작은 여인인 줄 알았는데, 잘 뜯어보니 소녀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몇 살이야?"

"내후년에 관례를 치러요."

"관례?"

유은하가 알기로 남자는 20살, 여자는 15살에 관례를 치른다고 했다.

"그럼, 넌 지금 13살이라는 거야?"

유은하 자신도 겨우 15살에 불과했지만, 나이를 알고 보니 눈앞의 소녀는 너무 작아 보였다.

몸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너무나 작아 보였다.

태어나고 13년 동안 이름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뿐인 삶이라니.

"일단 이름부터 정하자. 네 이름은 오늘부터 청화야."

"청화요?"

"입술이 파래서 청. 여자애니까 화."

이제 체온을 되찾은 소녀는 입술이 파랗지 않았다. 유은하가 딱히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소녀를 볼 때마다 답답함이 치밀어서, 유은하는 그런 짓궂은 이름을 지어줬다.

그런 대충 지은 이름은 싫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청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네. 좋아요."

"진짜로? 원하는 이름이라든가 그런 건 없었어?"

있어도 말할 수 없다.

소녀가 유은하를 처음 본 건 피를 뒤집어쓴 채 시체 더미 위에 악귀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모습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유은하가 준 이름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은하에게 이름을 받으면 그의 것이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장정 열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사내의 것이 된다. 야생과 다름없는 집성촌에서는 그것조차 신분 상승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그런 청화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유은하의 눈에 청화는 그저 주변에서 휘두르면 휘둘리는 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가슴의 답답함은 더 심해져만 갔다.

"후우…. 일단 조금 더 쉬고 있어."

"어디 가시게요?"

"마을 좀 둘러보고 오려고."

유은하는 청화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

마을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봉우리 저편으로 떨어지니,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찬 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전부 집에 처박혀 있는 게 당연한 일.

고요한 마을을 보니 지난 전투가 꿈같이 느껴졌다.

유은하는 마을을 가로질러 전투가 있었던 목책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유은하가 이틀을 내리 잠들어 있던 사이에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치운 것이었다.

불타 쓰러진 목책 잔해도 땔감으로 쓰기 위해 전부 해체되어 사라진 후였다.

'쯧. 다시 세워야겠네.'

그래도 목책이 제 역할은 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흙벽까지 올렸다면 훨씬 나았겠지만 말이다.

유은하는 새롭게 목책을 세워야겠다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청화의 마을 사람들은 병사들이 들이닥쳐서 도망쳤다고 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유씨 마을에도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혹은 북쪽 봉우리 너머나 남쪽 계곡 너머에 있다는 다른 마을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그러면 침략당할 때마다 누군가가 죽고 목책을 다시 세워야 하나?

유 노인이 '무림인'이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철죽파 놈들은 별거 아니었지만, 배호청 그놈은 위험했지.'

기습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유은하는 유전자 조작과 기초적인 신체 강화 시술을 받았으니까.

순수 스펙으로는 유은하를 이길 인간이 없는 데다가 아스트랄 유니온의 효과로 신체 능력이 점점 상승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데 배호청은 그런 자신마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했다.

이 세계의 기술력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초 의원에게 듣기로, 거대 문파에 일류 무인은 꽤 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무공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일 거야. 내공이라는 에너지도 중원 고유의 에너지인 것 같고.'

이토록 미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마구 휘두르거나 희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야 매일 악몽 속에서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아버지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았으니까.

"...."

그렇게 뒤죽박죽 엉켜 있던 답답함을 한 올 한 올 풀던 유은하는, 결국 '어떻게?'라는 의문에 도달했다.

어떻게 해야 모든 고민이 뒤엉킨 이 두루뭉술한 답답함을 풀 수 있을까?

그렇게 한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유은하는 자신이 아는, 자신이 겪은 유일한 답을 찾았다.

'아버지, 아니. 회장과 같은 거인이 되자.'

거대한 세력과 강한 힘을 일구어 꼭대기에 서면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으리라.

'그럴 생각으로 약 장사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그저 마을을 보수할 돈을 모으고 아스트랄 유니온의 기능을 시험할 생각뿐이었다.

돈을 많이 모으면 지현에게 뇌물과 밀린 세금을 바치고 마을을 양성화할 계획도 세워 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중원에 강림한 메가코퍼레이션을 세운다.'

구파일방이라는 거대 정파 세력과 사도련이라는 사파 세력? 그리고 황실?

그조차 뛰어넘는, 중원에 강림한 메가코퍼레이션을 세울 것이다.

'이곳 말로는 상단이라고 했지?'

유은하의 시선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향했다.

"이름은… 은하상단. 은하상단이 좋겠어."

아직 이룬 건 하나도 없지만, 나아갈 길이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다.

물론 그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할 일이 많겠네."

돈을 모으면서 권력과 친해져야 했고 자체적인 무력도 길러야 했다.

'금천현 상황이 불안해서 지현과는 깊게 엮이고 싶지 않은데.'

가능하면 정파이면서 백성의 지지를 받고 무력으로도 강한 사천당문과 연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소문과 다른 집단은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모험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지.'

첩첩산중의 차가운 바람이 유은하를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

유은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

유은하가 돌아오자 꾸벅꾸벅 졸던 청화가 화들짝 놀라 깼다.

"그냥 편하게 자."

"네."

청화는 알겠다며 화로에서 가장 먼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며 벽에 기댔다.

"...?"

대체 뭘 하는가 싶어 지켜보던 유은하는 청화가 구석에 구겨진 자세 그대로 잠이 들려 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야. 뭐 하는 거야?"

"네헷?"

청화가 깜짝 놀라며 눈을 뜬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아예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걸 유은하가 붙잡았다.

"편하게 자라니까?"

유은하가 침상을 가리켰다.

"아. 아, 네. 네."

청화는 이해했다며 침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을 벗기 시작하려던 찰나, 유은하에게 저지당했다.

"또 왜 옷을 벗으려고 해? 얜 대체 누구한테 뭘 배운 거야?"

"침상으로 가라는 건…."

"그런 뜻 아니었거든?"

이쯤 되니 유은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청화가 생각하는 청화 자신의 처우와 유은하의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할배가 전리품이라 말했지만, 난 널 짐승처럼 대할 생각 없어."

그러자 청화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진다.

"아내로 삼아주시겠다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밝아진 듯한 청화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유은하가 속으로 갸웃거렸다.

'결혼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이 중원이라는 세계에서는 20살 전후로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형편에 따라 그보다 훨씬 일찍 할 수도 있고.

하지만 크라운 행성은 물론이고 다른 행성계의 로열패밀리는 보통 결혼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빈도로 따지면 100년에 한 쌍 탄생할까 말까 정도.

그것도 전부 200살이 넘어 결혼한 이들로, 정략적인 판단이 듬뿍 담긴 비즈니스기도 했다.

그러니 유은하에게 아내라는 건 완전히 별세계 이야기일 수밖에.

더군다나 청화의 입지는 극히 불안하다. 그냥 군식구도 아니고 패배한 침략자였으니까.

어떻게든 안정을 얻을 방법은 혈연으로 연결되는 것뿐이었다.

물론 유은하는 그런 상황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아니, 유은하의 생각은 단순했다.

유 노인이 유은하를 주워 가족으로 거두었듯 유은하도 청화를 거둔다.

그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길, 일개 실험체가 아닌 진짜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냥 가족이 되는 거지. 입 하나 늘어도 먹여 살리는 데는 문제 없어. 할배를 마을에 혼자 두는 것도 좀 불안했고."

"그게 아내로 삼겠다는 말 아닌가요?"

"아니. 가족이 아내밖에 없어? 동생. 그래. 동생 하자."

"…네."

동생보다는 아내가 나은데.

청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별수 없기도 했다.

유은하가 그렇게 하자니 따를 수밖에.

"오라버니."

"그건 무슨 말이야? 처음 듣는데."

"오빠를 더 예의 차려 부르는 말이라고, 곳간지기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저희 오빠도 그렇게 부르라고 했었고요."

유은하는 청화에게 오빠가 있었느냐고 묻지 못했다. 청화의 오빠가 안 보이는 거로 봐서는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눈치 빠른 청화는 유은하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감이 잡히는 듯했다.

"예전 오라버니도 아버지를 따라 나갔었어요."

유씨 마을에 쳐들어온 사람 중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음. 다행, 아니. 유감.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유은하 자신이 죽인 사람 중에 없는 건 다행이다. 하지만 병사에게 죽었다는데,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잖는가.

유감이라고 하면 자기 손으로 죽였어야 한다는 말로도 들릴 것 같고.

그렇게 유은하가 혼란스러워하자 청화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강 실장도 그렇게 말했는데."

"네?"

"아니야."

유은하가 고개를 젓자, 청화는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사실, 전 오라버니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가끔 제 음식을 빼앗았거든요."

"왜?"

"곳간지기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를 잘 기억한다고요. 여자가 재수 없다고 그랬어요."

"질투한 거구나."

"그래도 아예 굶기지 않은 건 다행이었죠. 자기가 구해 온 식량이니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나마 굶기지 않는 것만 해도 가족의 도리는 다한 거라고. 청화는 그렇게 말했다.

유은하도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적응하는 반년 동안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유은하가 오고 마을의 식량 사정은 꽤 좋아졌다.

뛰어난 감각으로 뱀이며 짐승이며 기가 막히게 찾아내 사냥해 왔으니까.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해 나무를 대량으로 해 온 덕을 보기도 했다.

장작 마련할 시간에 열매를 줍는 것만으로도 저장할 식량을 조금씩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는 육포나 쌀을 대량으로 사서 배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유은하에 대한 호의와 권력이 되었다.

"아. 배 안 고파?"

"...."

유은하의 물음에 청화가 눈치를 본다.

유은하는 호인이다. 평생 눈칫밥 먹으며 길러진 청화의 감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식량은 호인이든 악인이든 가리지 않는 중대 사항이다. 그래서 눈치를 봤지만.

"먼저 먹어도 뭐라 안 할 거야. 식량 많거든. 올겨울을 다 나고도 남을 만큼."

그 말에 청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깊은 산골짜기에 처박혀 사는 마을 중에 그렇게 부유한 곳이 있다니?

듣기로는 현 인근에 사는 사람들도 항상 겨울을 걱정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청화가 놀라거나 말거나. 유은하는 잠깐 기다리라며 밖으로 나갔다.

얼마 전, 금천현을 오가면서 운 좋게 사냥했던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할배한테 내가 나중에 처리할 테니 그냥 묻어만 달라고 했는데… 아. 저기 있네.'

흔적을 찾는 건 쉬웠다. 유난히 볼록 솟은 눈 뭉치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꺼내고 보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

"너무 꽝꽝 얼었는데?"

가죽도 못 벗긴 여우 사체가 나무토막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피는 빼놨을 테지만, 이래서야 해체도 못 한다.

아직 초겨울인데도 날씨가 이 모양이라니. 올겨울은 심상치 않다는 유 노인의 말이 정말 사실인가 보다.

"그냥 구우면 할배한테 한 소리 들을 텐데."

고민하는 유은하의 뒤에서 청화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꽁꽁 언 사체를 해체하는 게 어렵긴 하죠."

"왜 나왔어? 춥잖아."

"가족이잖아요. 같이 일해야 같이 먹죠."

가족의 정의가 그건 아닐 텐데. 하지만 무조건적인 애정을 들먹이기에는 산속 생활이 요지경이고.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그냥 뱀탕으로 만족해야겠다."

"아니요. 제가 해볼게요. 어제 할아버지께서 도끼를 잘 갈아 놓으셔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청화가 방에서 날이 시퍼렇게 갈린 손도끼를 가지고 나왔다.

"해체할 줄 알아?"

"사냥꾼의 딸이니까요. 가죽 벗기기랑 무두질을 자주 했어요. 조금이지만 글도 쓰고 읽을 줄 알고."

"글? 글을 알아?"

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마을에는 할 줄 아는 사람 없던데."

유 노인이 글을 조금 알긴 했지만, 몇 자 되지 않았다. 간신히 저잣거리에서 어느 가게가 뭐 하는 곳인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일 뿐.

그런데 설마 청화가 글을 알고 있었다니.

'초 의원이 조금 더 나를 신뢰하면 배우려 했는데, 그냥 청화한테 배워도 되겠네!'

청화도 중원의 많고 많은 글자를 전부 아는 건 아니겠지만, 모르는 거야 초 의원에게 배우면 된다.

글자를 아예 모르는 것과 글공부가 싫어 조금만 배운 건 천지 차이의 느낌일 테니까.

그러면 그 염소수염에서 빼앗은 본초강목도 더 빨리 읽을 수 있을 테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청화."

"네?"

"넌 오늘부터 우리 마을 글 선생이야."

마을을 발전시키고 거대한 상단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의 기초, 인재 육성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겨울에 별로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당장 시작하자. 월봉은 은자 넉 냥으로 하고. 괜찮지?"

"네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유은하.

청화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12화. 변화

유 노인은 말했던 것처럼 하룻밤이 지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를 청화에게 내준 채 벽에 기대어 자는 유은하를 본 유 노인은.

"…병신 같은 놈. 호구 새끼. 저런 반푼이를 어디다 쓸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욕을 내뱉었다.

유 노인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유은하는 졸지에 일어나자마자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으…. 왜 아침부터 욕이야, 할배. 응? 배고파?"

"이놈아! 내가 배고파서 이러는 줄 아느냐!"

유 노인이 밖에 기대 둔 지팡이를 가지러 다시 문을 열자, 유은하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노인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 할배. 좀 진정하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노예로 쓸 것도 아니고 아내로 삼을 것도 아니면 대체 뭐 하러 저년을 들여!"

유 노인이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재우면 저게 상전이지 뭐냐! 어!"

그러자 소란에 일어난 청화가 깜짝 놀라 유 노인을 바라본다.

유은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유 노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그리고 얜 동생 삼기로 했어."

"동생은 얼어 죽을! 밖에 나가면 너한테 형님 형님 하는 모지리들이 한둘이냐!"

유은하가 홀로 늑대 여럿을 사냥하고 온 뒤, 마을 사람들은 나이도 따지지 않고 유은하를 형님 취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가 아니잖은가.

유은하는 서둘러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얘, 글 안대!"

"글?"

글이라는 말에 유 노인이 멈칫했다.

"너, 글 배우고 싶으냐?"

"당연하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여기 앉아봐."

유은하는 유 노인을 숯불이 지펴진 화로 앞에 앉혔다.

"요즘 내가 금천현에서 돈 벌어 오는 거 알지?"

"쯧. 나무하러 간다 하고선 몰래 가는 거 말이냐? 안다. 알아."

유 노인은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연신 투덜거렸다.

"어찌 그리 날래게 다녀오는진 모르겠지만, 곰도 때려잡는 놈이니 그러려니 했지."

"내가 어떻게 돈 버는지는 안 궁금하고?"

"가죽이나 장작 파는가 싶었는데…."

유 노인의 눈매가 위로 확 치솟았다.

"설마 위험한 일을 하는 게야?!"

"거, 성질이 너무 급하잖아. 위험한 일 아니야. 의원 한 명이랑 약 만들어서 팔고 있어."

"약?"

화를 내려던 유 노인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약이라니? 약초도 아니고 그게 무슨 늑대 흙 파먹는 소리야?"

"내가 약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딱 보니까 할배 지금 잠 제대로 못 자서 머리 아프지?"

"그걸 아는 놈이 동생이니 뭐니 개소리를…!"

"진정하시고. 이거 한번 먹어봐."

유은하가 자신의 짐에서 작은 환약을 꺼내 내밀었다.

금천현에서 파는 종합감기약과는 다른, 진통 효과에 집중한 약이었다.

유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유은하가 준 약을 화로 위의 데운 물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엇?"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응. 이거랑은 좀 다른 약이지만, 금천현에서 아주 잘 팔리고 있어."

유은하는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유 노인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슬픔이 스쳤다.

"그래. 이런 재주가 있다면 도시에서 살아야지."

"할배?"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마."

"내가 언제 독립한대?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

이제는 되레 유은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약 판 돈으로 상단을 세울 거야."

"상단?"

"응. 나는 마을 사람들이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돕긴 뭘 도와? 평생 풀 캐고 사냥이나 하던 것들이."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애들도 몇 있잖아. 그리고 나를 잘만 도와주면 우리 마을도 리(里)가 될 수 있어. 세금 내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그 말에 유 노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 산 아래 사람들을 부러워만 했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게 글을 배우는 거야. 글을 배워야 제대로 일을 할 거 아냐?"

"난 무식해서 그런 거 모른다, 이놈아."

"아무튼. 그래서 청화를 동생 삼아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려 한 거야."

"청화? 허이구. 이름까지 예쁘장하게 지어줬어? 은하, 청화. 잘 어울린다. 잘 어울려."

비꼬는 듯한 유 노인의 말투였지만,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그러니까 할배도 청화한테 좀 잘해줘. 나도 산에서 주워 왔으면서, 청화한테 못 할 건 없잖아?"

유은하의 부탁에 유 노인은 대나무로 만든 침상에 웅크려 앉은 청화를 바라봤다.

"글은 얼마나 아느냐."

"곳간지기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옛날에 표국에서 총관으로 일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분께 배웠어요."

"허."

총관이라면 한 단체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직책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글을 배운 거나 다름없으니, 생활에 필요한 어지간한 글은 전부 알고 있으리라.

"그렇구나. 그럼."

유 노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유은하를 바라봤다.

"너 알아서 해라."

"응? 더 안 물어봐?"

어디서 뭘 어떻게 가르칠 거냐.

뭘 받을 거냐 아니면 뭘 줄 거냐.

언제까지 할 거냐.

앞으로 상단은 어떤 식으로 운영할 거냐.

여러 질문이 날아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유은하였다.

하지만 유 노인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관심을 꺼버렸다. 하지만 그건 무관심과는 달랐다.

"이놈아. 난 평생 산에서 약초 캐고 나무나 하면서 산 늙은이다. 상단의 상자도 모르는 내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이것저것 물어봐? 시간 아깝게."

"…그런가?"

"그리고 네놈이 해 놓은 것들을 봐라."

유 노인이 턱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 벽 너머에는 유씨 집성촌이 펼쳐져 있을 터였다.

"내 평생 올해처럼 따뜻하고 배부른 겨울은 경험한 적이 없다. 아니, 어느 절기건 네가 온 후보다 넉넉하고 편했던 적이 없어."

유 노인의 말에 청화의 눈빛이 반짝인다.

"어디 나뿐이냐? 마을 애들을 봐라. 하루 땅 파 먹고살기 힘든 애들이 몇 날 며칠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다는 걸 난 처음 알았다."

"...."

"우리라고 정이 없겠냐? 산사람은 뭐 사람 아니야? 다들 내일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지, 올해는 또 어떻게 넘길지 고민이라 서로 보듬을 여유조차 없던 거지."

유 노인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그런데, 네가 오고 나서 마을이 넉넉해졌다. 너 하나 덕분에 입에 들어가는 게 많아지고 추위가 가셨어. 그제야 서로 보듬을 수 있었고 겨우 사람답게 사는 게 무슨 맛인지 알게 됐어."

쌓인 게 많았는지 유 노인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늙은 놈은 평생 상상조차 못 한 일을 네가 해냈는데, 내가 뭐라고 너 하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겠느냐?"

"할배…."

"너 하고 싶은 거 눈치 보지 말고 다 해라."

분명 유은하가 마을을 넉넉하게 만든 건 사실이었다.

한가득 팬 장작을 나눠주거나 잔뜩 잡은 사냥감을 나눠주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생각해 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유은하는 굶어 죽거나 추워 죽은 이를 본 적도, 그럴 뻔한 상황에 처한 적도 없었으니까.

반대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유은하가 너무나 대범하고 자비로워 보였다.

너무나 쉽게, 아무 대가도 없이 장작과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은 평생 본 적이 없었기에.

"네가 번 돈을 지현에게 뇌물로 줘야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 우리 마을을 리로 만들면 널 안 따를 놈이 없을 거다. 상단이든 뭐든 네 뜻대로 할 수 있을 게야."

유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화톳불을 등지고 누웠다.

"밤새워 뒤척였더니 졸리다. 난 한숨 잘 테니 너희들끼리 글공부를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누워버리는 유 노인.

유은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할배. 지금 부끄러워서 자는 척하는 거야? 매일 내 엉덩이만 걷어차더니,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루라도 안 맞으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는 게냐! 입 다물고 있을 거 아니면 썩 나가!"

유 노인이 벌떡 일어나 다시 지팡이를 쥐려 하자, 유은하는 크게 웃으며 청화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뭐가?"

"할아버지 화나신 것 같은데."

"평소에도 저러시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유은하는 청화를 데리고 창고로 들어갔다.

"일단 살림부터 소개해 줄게."

창고 앞쪽에는 유은하가 평소 쓰는 도구가 잘 정리돼 있었다.

도끼, 박도, 단검, 망태기 등등. 유은하는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쓸 일 있으면 마음껏 써도 되지만, 조심해. 날을 잘 갈아 놔서 위험하거든."

"네. 저도 아버지 따라 가죽 손질 해보고 무두질도 해 봐서, 단검 정도는 잘 다뤄요."

"좋네. 아, 장작은 여기 쌓여 있는 거 먼저 사용해. 집 뒤편에 더 있긴 한데, 그건 곧 눈 쌓이면 축축할 거라더라고."

"네. 여기 있는 걸 쓰고 밖에 있는 걸 들여놓으면 되는 거죠?"

"응. 그리고 이쪽은 식량."

유은하가 옹기를 들추자 안에 밀가루가 잔뜩 든 것이 보였다.

"...!"

청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유 노인이 한 말은 당연히 청화도 들었다.

유은하 덕분에 마을이 풍족해졌다는 이야기에 자신도 어쩌면 매일 두 끼를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옹기에 가득 든 밀가루를 보며 간신히 겨울을 나는 정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쪽은 쌀."

거적을 들치자 가마니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저, 저게 다 쌀인가요?"

"응. 내가 마을 사람들한테 목책을 새로 세워야 한다 했었거든. 일을 시키는 대신 매일 한 번씩 죽을 끓여주고 있어."

그냥 창고 벽에 거적을 둘러놓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쪽 벽이 온통 쌀가마니였다.

마을 사람들이 겨우내 먹고도 남아 봄까지 날 수 있을 듯했다.

"이쪽은 말린 약초, 그리고 이쪽은 육포 광주리. 죽 끓일 때 이것들 넣고 끓여. 아, 물론 끓이는 건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청화가 굳이 할 필요는 없어."

유은하는 그냥 입이 심심할 때 한두 개씩 집어 먹으라며 광주리 덮개를 닫았다.

"육포가 꽝꽝 언 것 같아도, 화로에 살짝 구워 먹으면 꽤 맛있거든."

그렇게 한동안 창고를 소개하던 유은하가 마지막으로 소개한 건 염소수염 약재상에게서 빼앗아 온 책들이었다.

"이건 내가 우연히 얻게 된 책들인데, 내가 글을 잘 몰라서 읽을 수 없었어. 본초강목이라더라."

"제가 읽고 설명해 드리면 되나요?"

"아니? 나한테 먼저 글을 가르쳐 줘야지."

"어…."

청화가 조심스럽게 유은하의 눈치를 살폈다.

"글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한데요? 제가 읽고 설명해 드리는 게 더 빠를 거예요."

"괜찮아. 나 배우는 거 빨라. 그리고 내가 글을 알아야 나중에 다른 책도 보고 일도 할 거 아냐."

유은하의 말에 청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부터 할까요?"

"배워야 할 글자가 몇 개 정도 돼?"

"뭘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천자문과 자치통감 정도만 해도 1천 자 내외예요."

"본초강목은?"

"제가 알기로 본초강목은 전권이 50권 넘는다고 하던데…."

청화가 선반에 놓인 책들을 바라봤다. 가득 쌓인 걸 대충 세어 보니 정말로 50권이 넘는 듯했다.

"저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곳간지기 할아버지께서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3천 자 정도는 배워야 한다고 하셨어요."

표정을 살피니 청화도 그 정도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아는 글자만 가르쳐 줘. 나머지는 초 의원한테 배우지 뭐. 내가 배우고 와서 너한테도 가르쳐줄게."

그렇게 말한 유은하는 창고를 쓱쓱 치우기 시작했다.

밀가루가 든 옹기들을 구석으로 몰고, 쌀가마니도 더 높게 쌓고, 도구들도 차곡차곡 정리해 벽에 걸고.

"...."

그 모습에 청화가 다시 한번 입을 헤 벌리며 놀랐다.

쌀가마니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서, 남자들도 둘이서 하나를 힘겹게 옮기는 게 보통이다.

쌀가마니 옮기는 일을 한나절 하면 삯이 꽤 될 정도로 고된 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유은하는 홀로 두세 개씩 휙휙 들어 옮기는 게 아닌가.

부피가 커서 두세 개가 끝인 거지, 표정은 전혀 힘들지 않아 보였다.

"이래도 좀 좁긴 하네. 창고를 늘려야 하나?"

정리를 마치고 손을 툭툭 턴 유은하가 작은 막대 하나를 가져와 청화에게 쥐여줬다.

"바닥에 네가 아는 글 좀 써줄래? 뜻이랑 읽는 법도 말해주면서."

"판자에 목탄으로 써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시간이 없어서."

이틀을 내리 자고 또 하루가 지났다. 약방을 초 의원에게 맡기고 온 지 사흘이 지난 셈이다.

오늘 당장 출발하는 것도 힘들 테니, 금천현에 돌아가는 건 나흘이나 닷새째가 될 터.

그사이 언제 판자를 다듬고 목판에 쓴단 말인가?

더군다나 마을 사람들이 공부할 걸 생각하면 아예 판자에 글씨를 새기는 게 나았다.

그러려면 자신이 배워서 새기는 게 청화가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를 테고 말이다.

"네에. 일단은 한번 써 볼게요."

하지만 그런 유은하의 생각을 모르는 청화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며 뜻과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음. 대충 알겠네."

바닥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지운 유은하는 자신이 직접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그걸 본 청화의 눈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13화. 변화

"잠깐만요. 오라버니."

"왜? 틀렸어? 맞을 텐데?"

"아뇨. 지금까지 전부 맞긴 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청화가 유은하를 말린 건 바닥에 새겨진 단어가 600자를 넘어설 즈음이었다.

"원래부터 글을 알고 계셨나요?"

"그랬으면 왜 너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겠어? 내가 마을 사람들 가르쳤지."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것마저 넘어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곳간지기 할아버지가 청화에게만 글을 가르친 건 아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알아야 이 산속을 탈출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며 한 맺힌 것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루에 반 시진씩 시간을 쪼개 글을 배우던 아이 중 오직 청화만이 제대로 글을 깨쳤다.

나머지는 먹고사는 게 바빠서, 머리가 좋지 않아서 끝까지 배우지 못했다.

혹은 배우는 도중 겨울에 얼어 죽거나 사냥 나갔다가 맹수에게 물려 죽는 이들도 있었고.

여하튼. 청화는 3년 동안 땅을 종이 삼아 글을 배웠다.

가죽을 해체하다 손이 아프면 잠깐, 무두질에 쓰일 나무껍질을 삶다가 시간 나면 잠깐.

그렇게 매일같이 열심히 글을 쓰고 외웠다.

그런데 그 긴긴 시간 동안 배운 것들을, 유은하는 단 한 번 보고 듣는 것만으로 전부 외워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조금 전 삐뚤거리던 청화의 필체와는 달리 유은하의 필체는 곧고 절도 있었다.

유은하야 컴퓨터 문서의 글씨체가 익숙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반듯한 글씨가 나온 것뿐이었으나 청화가 보기엔 놀라울 따름이었다.

곳간지기 할아버지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길, 글씨체는 사람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외워요? 곳간지기 할아버지도 저 정도면 엄청 빠르게 배우는 편이라고 했는데, 저도 3년이나 걸렸어요."

"음. 그건, 그냥 내가 똑똑해서 그런 거 아닐까?"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은하가 있던 곳은 행성계를 정복한 기술력이 있는 세계다.

사람 몸에 기계를 이식하거나 유전자 조작으로 병을 없애는 것도 평범한 시술에 속할 정도.

그런 곳의 정상에 선 메가코퍼레이션이 갤럭시 크라운이었고, 유은하는 그 갤럭시 크라운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계자의 부활을 위한 실험체로서.

집중력을 끌어 올리면 하루 이틀 정도 보고 듣는 모든 걸 기억하는 건 일도 아니다.

완전기억능력 같은 건 오히려 인지 리소스 낭비이기에 생체 데이터칩으로 대체되었지만.

'이런 걸 말하는 순간 대단한 사람에서 정신병자로 인상이 바뀌겠지.'

유은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힘이 보통 사람이랑은 많이 다르잖아?"

"그렇긴 하죠."

"머리도 그런 건가 봐."

그렇게 청화의 놀람을 가볍게 넘긴 유은하는 계속해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이윽고 글자가 2천 자에 가까워졌을 때.

"다 됐지?"

"네. 제가 미처 기억하지 못한 글자가 있을 수도 있긴 한데…."

"그건 그때그때 물어보고 배우면 되지."

유은하는 싱글벙글 웃으며 지팡이로 바닥에 쓴 글자를 지웠다.

청화의 눈에는 그 반듯한 글자를 지우는 게 무척이나 아까웠다.

하지만 유은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본초강목을 집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읽어볼까?"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본초강목을 읽으려던 유은하는 청화의 손이 희게 질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유은하의 몸은 폭염이나 한파에도 너끈히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청화는 아니다.

더군다나 병사들에게 마을이 습격당하고 도망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다고 들었다.

어찌나 고단했으면 유은하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겠는가.

유은하의 배려로 배불리 먹고 한숨 자긴 했지만, 피로가 남아 있을 수밖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일래?"

"아뇨. 저도 같이 읽을래요. 오라버니가 만드실 상단은 약을 판다고 했잖아요?"

"뭐. 나중에는 이것저것 다 팔긴 할 텐데, 지금은 약이 우선이지."

"도움이 되려면 저도 배워야죠."

청화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유은하에게도 좋은 일이다.

일단 현재 마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고급 인력은 청화뿐이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 봐."

유은하는 창고를 나가더니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곧 검은 코트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장포? 그런데 모양이…."

흔히 입는 장포보다 훨씬 두껍고 품이 좁은 옷. 바로 유은하가 중원에 떨어졌을 때 입고 있던 코트였다.

"두르고 있어."

"네."

모양이 생소하긴 했지만 걸치지 않은 것보다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청화가 코트를 걸친 순간.

"어?"

추위가 씻은 듯이 가셨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을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유은하의 자비로움에, 힘에, 똑똑함에. 그리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물에.

이 정도면 이곳이 신선이 사는 마을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이게 뭐죠? 왜 추위가…."

"따뜻하지? 좋은 옷이거든."

"좋다고 할 수준이 아닌데요?"

두툼한 솜옷도 이렇게 단번에 추위를 막아 주진 못한다.

매끄러운 비단을 덧댄 옷도 이처럼 가볍고 부드럽진 않을 것이다.

"이제 좀 나아졌으면 여기 앉아."

유은하는 청화의 옆에 붙어 앉은 채 곧장 책을 펼쳤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청화는 유은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그저 유은하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

'너무 신 냈나?'

유은하는 금천현으로 향하면서 속으로 청화에게 사과했다.

본초강목을 다 읽을 때까지 불과 한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너무 빨리 읽어버려서 청화는 제대로 볼 틈도 없었다. 집중하느라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도 너무 늦었다.

'돌아갈 때 당과라도 사 가자.'

그 후에 책 내용을 설명해 주면 되겠지.

이제 글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에도 지식을 얻을 방법이 생겼다.

'마을 사람들이 글 배울 때 사용할 책도 사고….'

가장 중요한 건 무공.

초 의원에게 언뜻 듣기로, 상승무공이라 하는 것들은 각 문파의 최고 기밀이라고 했다.

책으로 만들어져 보관되어 있긴 하지만, 시행착오 없이 제대로 배우려면 스승으로부터 구결을 들어야 한다나?

구결을 들으면 글만 읽었을 때 느끼거나 깨달을 수 없는 무언가를 얻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신기해. 특정 주파수나 암시 같은 걸 활용한 걸까? 아니면, 그 내공이라는 에너지의 특수한 작용이라거나?'

특히나 내공이라는 에너지에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지 만물에 퍼져 있다는 기(氣)를 몸에 받아들여 특별한 방법으로 가공한 에너지, 내공.

어쩌면 그 에너지가 아스트랄 유니온 복구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반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자가 복구율이 갑자기 상승한 원인도 궁금했고.

'가능성은 둘 중 하나야.'

첫째는 워낙 손상이 컸던 탓에 반년에 0.0001%가 복구될 정도로 수복이 느렸다는 것.

그 타이밍이 우연히 며칠 전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혹은 격한 전투로 인해 손상된 신체를 감지한 아스트랄 유니온이 자극받아 더욱 활성화됐을 수도 있다.

물론 그 활성화에 필요한 에너지가 어디에서 왔느냐는 의문이 남긴 하지만, 그거야 기가 있지 않은가.

유전자 강화나 기계 이식도 없이 인간이 맨몸으로 바위를 쪼개고 바람을 가르게 해준다는 신비한 에너지.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네.'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철죽파 놈들에게서 아무거나 배웠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스트랄 유니온이 복구되면 할 것도 많고.'

지금은 일단 감기약만 만들었다. 유 노인과 함께 다니면서 분석한 약초 중 감기에 효과 있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기약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외상 연고, 여기서는 금창약이라 하던가? 그것도 만들어야 하고, 흉터약도 만들어야지.'

여인의 미용은 고금은 물론, 세계를 막론하고 돈이 되는 사업이다.

'파상풍 약 같은 것도 만들면 잘 팔릴 것 같고. 영양제도 필요하겠지?'

이것저것 청사진을 그리며 달리기를 한동안.

유은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천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천현 성벽이 보이고 나서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았지만, 전투를 벌이고 기절하듯 잠들었던 며칠 전보다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호흡도 더 안정적이었고.

당연히 유은하의 몸도 영양 섭취 없이 가만히 있으면 근육이 빠지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붙는다.

하지만, 힘든 전투 한 번으로 확연히 알 수 있는 변화가 생길 정도는 아니다.

유은하의 몸은 이미 생활에 최적화된 상태로 발달이 끝난 몸이었으니까.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트랄 유니온 복구율이 상승한 덕인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의 특별한 작용?'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유은하에게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무력은 이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며 나아가니 어느새 초 의원의 약방이 보였다.

"응?"

이상한 건, 한창 약을 팔아야 할 시간에 문이 닫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

유은하는 잠시 골목길에 몸을 숨긴 채 약방 앞을 관찰했다.

혹시나 안 좋은 일로 문을 닫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어서였다. 그렇다면 약을 만든 유은하도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한동안 지켜봐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약방이 있는 골목길 분위기도 그렇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렇고, 바닥이나 벽 등에 전투 흔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뭐지?'

유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목을 돌았다. 약방 문이 아닌, 환자가 드나드는 뒷문으로 향한 것이었다.

"엇, 공자님?"

마침 말린 약초가 든 광주리를 들고 가던 초 의원이 유은하가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응. 나 왔어. 그런데 장사 안 해?"

"다 팔렸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초 의원이 유은하를 데리고 약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약을 담아 두던 궤짝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한구석에 은자가 쌓여 있었다.

"은? 보부상들이 쓸어 간 거야?"

"아닙니다. 이틀 정도는 보부상들이 많이 오긴 했습니다만, 엊그제부터는 촉왕부 병사들이 몰려왔습니다."

"촉왕부?"

의외였다. 소문이 퍼지길 기대한 건 사실이지만, 설마 촉왕부에서까지 오다니.

유은하는 촉왕부에서 온다 해도 적어도 한 달은 지난 후일 거라 생각했었다.

혹은 지현을 통해 먼저 접촉하기 전까지는 만날 일이 없거나.

하지만 초 의원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병사들이 사비로 장비 마련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

거기까지는 몰랐기에 유은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금창약이나 붕대도 알아서 준비해야 하니, 싸고 좋은 약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초 의원은 약을 만들기 위해 정신없는지 유은하의 어정쩡한 반응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급을 개인이 조달한다고?'

그리고 초 의원의 이야기를 들은 유은하는 생각했다. 개판 같긴 하지만, 어쨌든 장사하기엔 좋을 것 같다고.

단번에 큰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또 군납만 한 것이 드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내 생각은 또 다른 사건에 닿았다.

'청화네 마을이 병사들한테 습격당했다고 했었는데?'

***

금천현에는 촉왕부 병사들이 머무른다.

군부용 무공을 익히고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정예 병사들.

대부분 이류 정도는 되는 데다가 병사 100명을 이끄는 말단 무관직 백호(百戶)는 일류에도 발을 걸친 강자.

그런 전력이 금천현에 주둔하는 이유는 당연히 금광을 지키고 금을 호송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세간에 알려진 사실일 뿐,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초석 광산. 최중요 전략 물자인 화약을 만드는 데 핵심 재료가 되는 초석을 캐내는 광산이 금천현 인근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이. 별일 없고?"

광산을 둘러싼 목책을 경계하던 병사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돌아봤다.

"있겠습니까? 짐승 몇 마리 보인 게 답니다."

"엊그제 약초꾼 다섯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며."

"당연히 다 죽였습니다."

병사는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노역하는 죄수들도 주기적으로 갈아치우는 마당에, 약초꾼 몇 정도야."

"그렇긴 한데, 너 이 새끼. 왜 이렇게 까칠해져 있어?"

"아, 다들 저만 빼고 그 일문환(一文丸) 사 오지 않았습니까? 대신 좀 사 달라 했는데도 저들 것만 가득 쌓아 놓고는 나눠주지도 않고."

요 며칠 금천현에 소문이 자자한, 동 1문이면 살 수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일문환.

감기는 물론이고 가벼운 두통이나 열 같은 것에는 아주 그만이라는 신통한 약을 동료들만 사 와서 뿔이 난 것이었다.

"어쩌겠냐? 네가 재수 없게 딱 어제 근무였는데."

"오늘도 다 팔렸답니다."

"대신 내일은 갈 수 있잖아. 매일 엄청나게 판다더라. 보부상도 앞에 줄을 쫙 섰대."

"그렇게나 많이 팝니까?"

마음이 상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던 병사는 어느새 제발 그렇다 말해달라는 듯 선임병을 바라봤다.

"응. 하루에 못 해도 수천 개는 판다는 것 같은데?"

"동 1문이라도 그 정도면 하루에 은자 몇 냥은 벌겠군요."

"뭐. 약값 따지면 본전이나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거야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선임병은 그렇게 말하며 병사에게 은자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내일 갈 때 내 것도 좀…."

"아, 진짜! 장 형님도 내 것 안 사왔잖습니까!"

"어허. 이놈이. 밖에서는 형 동생 사이지만 여기선 선임이야."

"내가 더러워서 진짜, 하루빨리 경지를 올려 승진이라도 해야지."

"흐흐. 그러다가 당문 감시하는 곳으로 차출되면 어쩌려고? 우리가 이류 언저리니까 여기서 이렇게 경계나 서는 거지, 일류에 오르면 얄짤없다."

"쩝. 하긴. 그렇습니다."

병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선임병을 향해 대충 경례를 올렸다.

"그럼, 수고하십쇼."

"그래. 너도 내일 마을 잘 다녀오고."

"옙."

그렇게 금천현에서는 오직 지현과 그 보좌관인 현승만이 아는 초석 광산의 일상이 돌아갈 무렵.

"당문, 그 무도한 것들을 찍어 누르려면 화약과 명분이 필요하다. 도지휘첨사. 준비한 대계를 시작해라."

촉왕부에서는 촉왕이 황제에게 향할 초석에 손을 댈 계획을, 들통나면 역모로 엮여도 할 말이 없는 계획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14화. 변화

청화네 마을은 병사들에게 습격당했다.

정확히는, 일부 사람들이 마을로 향하는 병사들의 발목을 잡고 일부는 마을을 탈출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 봐야 병사에게 죽거나 텅텅 빈 마을에서 굶어 죽을 뿐. 그도 아니라면 노예로 팔려나갈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겨울에 산을 넘었다. 그리고 유씨 집성촌을 발견해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습격했다.

미리 세워 둔 목책과 유은하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막을 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큰일이긴 했다.

"초 의원."

유은하가 심상찮은 목소리로 부르자 초 의원이 약초를 빻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뭔가 물으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병사들 말이야. 그냥 소문을 듣고 온 건가?"

"아마 그럴 겁니다. 일문환, 아. 동 1문에 살 수 있어서 사람들이 이 약을 일문환이라고 부릅니다."

"귀에 쏙쏙 박히긴 하네. 아무튼?"

"이 일문환은 벌써 요 옆 단파현과 소금현, 흑수현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보부상들이 거기까지 가져가 판 모양이더군요."

초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서 사박거리는 종이를 가져왔다.

"친분 있는 의원들이 일문환 소문을 듣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읽어보라는 듯 초 의원이 서신을 건넸다.

이제 글을 읽을 줄 아는 유은하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아주 점잖게 돌려 말하네. 일문환에 관심 가득하다고 말이야."

"의원의 비법을 묻는 건 무척 실례되는 일입니다. 대장장이에게 기술을, 무인에게 무공 비법을 묻는 것과 같죠."

"그래서 돌려 말한 거다?"

"예. 공자님이 원하신다면 저들 약방에서도 일문환을 만들어 팔 수 있을 겁니다. 이치들이 이럴 정도니, 금천현에 머무르는 병사들도 당연히 소문을 듣고 온 거겠지요."

다른 현의 약방에서 일문환을 파는 건 대리점 같은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상단을 만들기로 한 유은하에게는 필요 없는 일이었다.

유씨 마을에서 만들어 은하상단 이름으로 직접 가져가 팔면 되니까.

"내가 물으려던 건 이런 게 아니라, 병사들이 약 사가는 일이 자주 있는 건가? 그러니까, 뭔가 전투가 일어난 직후나 직전이 아닌 평소에 말이야."

"음, 아무래도 평소에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올겨울은 유난히 춥지 않습니까."

초 의원이 약방의 수많은 서랍에 보관된 약재들을 가리켰다.

"병사들이 봉급을 받긴 하나, 약을 마음대로 쓸 정도로 넉넉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물품을 이것저것 구하고 나면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는 이들도 있고요."

"봉급이 많진 않나 보네?"

"수준에 따라 다르지요. 그런데 마침 무척 싸고 좋은 약이 나왔으니, 당연히 사 둬야지 않겠습니까?"

즉. 딱히 전투 때문에 약을 사간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애초에 외상에 사용하는 약도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무슨 전투가 있었다거나 그런 소문은 없고?"

"전투요?"

"응. 병사들이 산속 마을을 습격해 털어먹었다든가 하는 거."

"가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초 의원은 확신한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유 노인에게 들었던 것과도 비슷한 말이었다.

가을에는 산속 마을에도 식량 같은 것들이 비교적 많다. 겨울은 나야 하니까.

일부는 봄, 여름, 가을에 모아둔 가죽을 어떻게든 산 밑 마을에 팔아 식량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니 재산을 노리는 거라면 가을이 적기다.

"겨울에는 그런 경우가 아예 없나?"

"음…. 예외가 있다면 정식 토벌일 텐데, 규모가 큰 산적도 아니고 일개 마을을 굳이 나서서 토벌할 이유는 없지요."

그렇게 말하던 초 의원은 방금 막 떠올랐다는 듯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어쩌면 탈영병일 수도 있겠습니다."

"탈영병?"

"예. 얼마 전에 성도 소식을 들었는데, 촉왕부 병사 중 몇몇이 탈영을 했다지 뭡니까? 마침 성도 서쪽으로 도망쳤다는데, 거리가 좀 멀긴 해도 방향이 이쪽이긴 하지요."

초 의원은 안타깝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겨울에 구태여 산속 마을을 습격하는 자들이 있다면 탈영병뿐일 겁니다. 어딘가에 틀어박힐 넉넉한 돈이 없다면야 산속 마을이 들킬 염려가 없는 곳들이니까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을 습격한 이들이 가진 무기라고 해 봐야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같은 게 전부였다. 원거리 무기는 돌팔매가 끝이었고.

반면, 탈영병들은 군문의 무공을 익힌 이들이지 않은가. 투구, 갑옷, 방패, 창 등으로 무장까지 했으니, 수가 어지간히 많지 않고서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놈들 말이야, 이곳저곳 털고 다니기도 하나?"

유은하의 최대 관심사는 그것이었다.

만약 탈영병들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다면 당장이라도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목책을 최대한 빨리 다시 세우라 말하고 온 참이긴 했지만, 타버린 부분을 다시 세우려면 족히 사나흘을 걸릴 테다.

함정을 다시 설치하고 해자를 판 뒤 목책 주변으로 두텁게 쌓는 것까지 생각하면 보름으로도 모자라다.

적어도 그동안은 유은하가 마을에 머물러야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초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탈영병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마을 하나를 차지하고 눌러앉으면 겨울은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겨울에 이곳저곳 들쑤시는 것도 그놈들에겐 부담일 겁니다."

"저들이 다칠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산속 사람들은 사람 아니랍니까?"

"...."

설마 현에 사는 사람에게서, 그것도 당당히 중인이라 할 수 있는 의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유은하가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초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도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겠지요. 그러면 소문나는 것도 순식간일 테고요."

"그렇지. 탈영병의 지상과제는 어떻게든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것일 테니까."

"수배령 내려진 곳에서야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고, 하물며 겨울이 와서 함부로 이동하기 힘들기에 산속 마을을 차지했을 뿐일 겁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한 후에 움직이거나, 식량이나 장작이 떨어진 후에 움직일 거라는 말이네."

그렇다면 안심이다.

청화의 마을은 유씨 마을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규모가 있었던 듯했으니까.

아마 탈영병들은 겨우내 그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숨죽일 테지.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화근을 제거하는 건데….'

무공을 익힌 병사들을 상대로 기습을 한다면 몇 명까지 처리할 수 있을까?

유은하가 본 무인이라고 해 봐야 철죽파 삼류 파락호들이 전부. 그나마 일류라는 배호청이 있긴 했지만, 무위를 직접 견식한 적은 없다.

'내가 직접 처리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놈들이 피해 갈 수 있게 해야 할 텐데.'

유은하는 은자가 쌓인 궤짝을 바라보며 초 의원에게 물었다.

"초 의원. 지현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패를 만들 수 있을까?"

"아패… 말입니까?"

초 의원이 의외라는 듯 유은하를 바라봤다.

그걸 만들어서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자네에게 준 비법 약, 내가 만든 거긴 하지만 재료는 한 산속 마을에서 난 거거든."

"아아. 그래서 탈영병 이야기를 하신 거군요."

"응. 그곳도 습격당한다면 비법 약재료를 한동안 수급하기 힘들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지만, 유씨 마을이 습격당한다면 유은하도 금천현에 올 정신이 없을 테니 약을 조달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아패 한두 개가 아니라 마을 전체를 양성화해야 할 텐데…."

초 의원이 잠시 입을 닫고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유은하처럼 은자가 담긴 궤짝을 바라봤다.

"처음 지현에게 판 약과 그다음으로 판 약은 약효 차이가 났었죠?"

"그렇지. 처음 약은 한 알만 먹어도 감기가 씻은 듯이 낫는 약이었으면, 그다음은 사흘은 꾸준히 먹어야 하는 거였지."

그렇다고 기존에 지현이 쓰던 약보다 효과가 떨어지는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탕약이라 해 봐야 약초의 성분을 찌거나 끓여 잡다하게 추출한 것.

그런 거로 감기가 나을 때까지 대증요법을 시행하려면 열흘은 약을 써야 한다.

그것과 비슷한 약이 바로 일문환이었다. 효과가 조금 더 좋고 값은 훨씬 싸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지현에게 말을 꺼내 보려면 첫 번째로 팔았던 약이 필요할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예. 아마 지현도 그걸 이곳저곳에 뿌리긴 했겠지만, 정작 촉왕부 수뇌부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겠지요. 수량이 너무 적었으니."

초 의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유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해. 약의 효과를 알게 된 촉왕부 고위직이 너나 나한테 직접 개입할 수도 있어."

"...."

초 의원이 유은하를 빤히 바라봤다.

이쯤 되니 초 의원도 유은하가 그저 있는 집 도련님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예 밝힐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신분이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거나.

그 눈빛에 얽힌 기색을 알아차린 유은하가 히죽 웃었다.

"왜, 불안해?"

"하아. 어쩌다가 이런 분께 얽혀서는."

유은하의 신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만든 약은 진짜다.

요 며칠은 그가 준 돈 덕분에 돈 없는 민초들을 염가에 더 많이 치료해 줄 수도 있었고.

결국, 초 의원은 유은하에 관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는 그의 물음에 마저 답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주신 약을 꾸준히 공급해 주겠다고 지현에게 약속해야 할 듯합니다."

"계약을 맺자는 거구나? 상등품 약을 꾸준히 공급해 줄 테니, 그 대가로 마을을 양성화하고 아패를 발급해 달라고."

"예. 그 약이라면 뇌물은 물론이고 밀린 세금까지 갈음할 수 있겠죠."

그 정도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기존 탕약보다 서너 배 효과가 좋긴 하지만, 금은보화도 아니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높으신 분들이 수고를 자처할 리는 없으니까.

유은하에게 그 약을 만드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유일한 걱정이라면 지현이 으름장 놓으면서 마을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만…."

"그런 낌새가 보이면 바로 여길 뜨지 뭐."

"예?"

"나야 아쉬운 것 없으니까. 다른 현에서 거래하면 그만이고, 여차하면 당가로 가져가도 될 것 같은데?"

태연한 유은하의 말에 초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초 의원한테도 약이랑 돈은 다 필요하잖아."

유은하는 힘내라며 초 의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그리고 내가 본초강목이라는 걸 읽었는데 말이야."

"책까지 찾아 읽으시다니. 생각보다 관심이 지대하시군요."

"응. 그런데 모르는 약초가 많더라고. 좀 설명해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여기 황제내경도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본초강목보다 위 단계 책이라고 했나? 들어본 것 같은데."

"맞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꽤 있긴 합니다만, 분야가 더 세세하고 심화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관심 있으시면 가져오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그렇게 유은하는 그날 하루 동안 초 의원에게서 본초강목과 황제내경을 배웠다.

유은하의 암기력에 초 의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다음 날, 유은하는 지현에게 뇌물로 줄 약을 만들어 왔고, 초 의원은 그것을 가지고 지현에게 향했다.

장사는 초 의원이 고용한 이들과 유은하가 대신 맡고 있었는데.

"공자님!"

밖에서 허튼짓하는 놈 없나 눈을 부라리던 두식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왜? 무슨 일인데?"

"그, 단주께서 오셨습니다. 도련님과 초 의원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초 의원은 지금 없는데? 뭐. 일단 들어오라고 해."

유은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식은 배호청을 약방 뒷문으로 안내했다.

유은하는 이전과는 달리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서 배호청을 맞이했다.

"나랑 초 의원을 만나러 왔다고?"

"예. 공자님."

유은하가 슬쩍 약첩을 꺼냈다. 하지만 배호청의 시선은 잠시 약첩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뇌물을 더 원하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정말로 용건이 있어서 왔다는 뜻이다.

"보다시피 조금 바빠서 말이야. 내 집도 아니라 대접할 게 마땅치가 않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거라도 받아."

유은하가 약첩을 내밀자 배호청이 고개 숙이며 공손히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무튼. 무슨 일로 온 거야?"

"초 의원에게 의뢰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몽혼약?"

"예."

배호청은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초 의원 말고 다른 사람을 이미 구한 거 아니었나?"

"구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자가 제대로 된 약을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배호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중에 사람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는 건 실례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지현이 저희를 통해 몽혼약을 구하려는 건 이미 알고 계셨으니, 시원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현이 요구한 조건의 몽혼약을 만들 실력자가 초 의원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엮이기 싫었던 일이 제 발로 찾아와버렸다.

15화. 철수

"일단 이것부터 묻지. 대체 지현은 몽혼약으로 뭘 하려는 거야? 엮여서 좋을 일 하나 없을 것 같은데."

유은하의 물음에 배호청은 다시 한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지현이 그걸 말해줄 리 없잖습니까."

"그건 그런데, 그런 식이면 이쪽도 협조가 힘들지."

"그래도 공자님께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초 의원이 몽혼약을 만들었다는 증거도 없을 테고, 저희가 뒷골목을 통해 몇 번 돌려 지현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배호청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 듣는 귀가 있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지시한 게, 지현이 아니라 촉왕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러면 더 위험한 거 아닌가?"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지현이 사용할 방법이라고 해 봐야 현에 소속된 병사 몇을 동원하는 게 전부다.

그 정도야 어떻게든 뿌리칠 수 있다. 하지만 촉왕부는?

아예 군대 단위를 동원할 수도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마는.

혹은 일류 이상의, 절정이나 초절정 고수를 동원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더군다나 촉왕부가 나서면 몽혼약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기까지 말하던 유은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가 당문일 수도 있겠구나?"

"예?"

배호청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반응을 보니 그는 그 가능성에 관해 전혀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요즘 촉왕부랑 당문이랑 사이가 험악하다며?"

"…예. 험악하다. 딱 그 말이 맞을 정도로 안 좋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왕부는 왕부잖아. 몽혼약 하나 만들 의원을 못 구하겠어?"

"괜히 꼬리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지현에게 떠넘긴 거 아니겠습니까? 지현은 다시 우리 철죽파에 넘긴 거라고 봅니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외주는 기밀 유지에 좋지 않아."

가장 좋은 건 충성스러운 내부자들만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

설마 촉왕부에 그런 의원 한 명 없겠는가? 왕을 보필하는 의원이?

당문이 아무리 강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한들, 내부 의원을 쓰는 게 당문의 손에서 기밀을 지키기도 쉬울 텐데?

"...."

유은하의 설명을 들은 배호청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수심이 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예 꼬리를 자를 생각이었겠군요.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렇지. 애초에 꼬리를 자르고 그걸로 뭔가를 요리하려 했던 거야. 그리고 자넨 그 지독한 일에 얽힌 거지."

유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당장 손 떼고 어떻게든 도망갈 구멍을 찾겠어."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촉왕부에 속한 절정 고수만 파견돼도 제 철랑단은 떼죽음입니다."

"당문에 기대를 걸어 봐야지. 그들이 촉왕부를 거세게 압박한다면, 그런 고수를 파견할 여유가 없을 테니까."

"하아…."

배호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어. 촉왕부가 여력이 없어서 단순히 외주를 돌린 것뿐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여기 지현은 그래도 꽤 신임받는 사람이라며?"

초 의원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금천현에는 금광이 있고 촉왕부의 병사들이 주둔하기에 촉왕부와 끈이 있는 지현이 오랫동안 임기를 맡는다고.

그러니 어찌 보면 금천현의 지현 역시 촉왕부가 믿는 수하라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러했다면 지현이 직접 비밀리에 의원을 알아봤을 겁니다."

배호청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파에, 그것도 어중간한 규모인 우리 철죽파에 접근했다는 건 언제든지 치워버릴 생각이라는 말이겠지요."

"철죽파 통째로?"

"최근 촉왕부가 민심을 잃고 있으니, 사파 한둘 정도는 깨끗하게 청소해야 목소리라도 내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배호청의 말에 유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도 왜 계속 사파에 머무르는 건데?"

"…저마다 사정이 있을 수밖에요."

배호청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하기 꺼린다는 티를 냈다.

"뭐.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독한 일에 이미 얽혀 버렸네. 자네뿐만이 아니라, 나랑 초 의원도."

여기서 배호청의 요청을 거절하면 촉왕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가?

그건 확신이 없다.

초 의원이 용의선상에 오를 수는 있어도 별거 아닌 사건이라면 큰 곤욕을 치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촉왕부가 비밀리에 지현까지 부려 가며 계획한 사건이 별거 아닐 리 없다.

'오히려 큰 사건일 확률이 더 높지.'

그렇다면 단순히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갤럭시 크라운과 중원은 수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만큼은 비슷했으니까.

힘없고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가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 그건 정말 쉽고 효율적인 일 처리다.

'그러니 배호청도 철죽파 자체가 촉왕부의 표적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걸 테고.'

죄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보다 죄가 없음을 입증하는 게 몇 배로 힘들다.

진실 공방은 진실이 아닌 권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고, 여론은 권력이 가리키는 곳으로 끓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최선은….'

권력자의 억지조차 무의미하도록 확실한 범인을 만드는 것. 그렇게 시선을 돌려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유은하는 생각을 마친 뒤 배호청에게 물었다.

"혹시 사천에 철죽파 말고 다른 사파는 없나? 약이나 독으로 유명한."

"운남 오독문의 지부에서 갈라져 나온 문파가 하나 있긴 합니다. 영란파라고."

영란. 다른 말로는 은방울꽃이라고 부르며 맹독을 지닌 식물이었다.

본초강목을 통해 그 사실을 배운 유은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 잘 쓰게 생긴 이름이긴 하네."

"예. 저 아래 목리현에 있는 자들이긴 합니다만, 오히려 철죽파 본파와는 가깝기에 수를 쓰긴 좋을 겁니다."

"지현이 요구한 몽혼약은 뭔데? 조건이 있을 거 아냐. 막 닷새를 재울 수 있는 강력한 약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딱 2각 정도만 유지되는 몽혼약을 구하려 하더군요."

2각이면 30분 남짓이다.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의료 시술이 목적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오히려 유은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 정도면 당장 약방에 있는 약재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식은? 마신다거나, 음식에 섞어 넣는다거나, 향이라거나."

"되도록 음용이 가능한 것으로 요구했습니다. 색과 향이 튀지 않으면 더 좋지만, 아니라도 효과만 확실하면 된다더군요."

"음용에 색과 향이 튀지 않도록…. 그럼 술과 섞어 마시는 쪽으로 괜찮은 게 있긴 한데."

유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시야 한구석을 곁눈질했다.

이미 약방에 있는 약재들은 직접 먹어보고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성분 분석까지 끝마쳤다.

'현재 확보한 데이터로 음용 가능한 마취제 생성 시뮬레이션 시작. 효과 지속 시간 30분 내외.'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단. 마취제 생성 시뮬레이션 시작. 예상 소요 시간 : 3시간>

이미 감기약을 만들 때 몇 번이고 봤던, 유은하만 볼 수 있는 아스트랄 유니온의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아스트랄 유니온은 별문제 없이 결과물을 뱉어내리라.

아스트랄 유니온이 작동하는 걸 확인한 유은하는 배호청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 자네도 살고 싶으면 출처를 영란파에 뒤집어씌울 방법을 생각해 봐."

"...!"

"제대로 된 방법을 가져오면 약을 넘겨주지."

"알겠습니다."

배호청은 고개를 숙인 뒤 약방을 나섰다.

그가 정말로 제대로 된 방법을 가져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촉왕부에게 필요한 건 진짜 범인이 아닐 테니.

적당히 죄를 뒤집어씌우고 칼을 휘둘러 위엄을 보일 상대겠지.

그렇게 유은하가 가만히 아스트랄 유니온의 시뮬레이션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다녀왔습니다."

초 의원이 돌아왔다.

보따리에 지현이 써 준 문서와 직인만 찍힌 아패를 잔뜩 들고서.

***

초 의원의 약방을 나온 배호청은 즉시 짐을 꾸렸다.

'안 그래도 본파에 한 번 갈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잘됐다.'

유은하에게서 받은 약을 뇌물로 뿌리려면 어쨌든 본파에 들러야 했다.

그러면서 돌아올 때 겸사겸사 영란파가 있는 곳을 경유하면 될 것이다.

되도록 주변에 떠들썩하게 알릴 수 있도록 부하 몇을 더 데려가면 좋을 테고.

하지만.

"쯧."

짐을 꾸리던 배호청의 손이 잠시 멈췄다.

죄를 다른 놈들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배호청 자신이 몽혼약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현의 명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몽혼약을 구해오라 명한 지현과 그 약으로 죄를 저지를 놈들에게 있겠지.

사파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배호청은 양심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철죽파와 지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놈들은 명백히 나를 버리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금천현 같은 곳에 지파를 세우나 싶었다.

촉왕부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에 사파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천 남쪽은 운남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놈들 때문에 막혔고, 북동쪽은 성도의 촉왕부와 사천당문으로 인해 아주 꽉꽉 막혔다.

그렇다고 철죽파의 앞마당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인근에 아미파가 있어서 수시로 비구니들이 인근 현을 돌며 순례객을 수호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남은 곳은 금천현 같은 북서쪽 작은 현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금천현이 구석진 곳에 자리해서 그렇지, 조금만 더 동쪽에 있었다면 청성파의 세력권에 들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쪽도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겠지.

그렇게 어찌 됐든 납득은 가능한 수준의 확장이라서 부하들을 이끌고 지파의 기반을 다지러 왔던 건데.

뿌득.

배호청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애초에 제대로 된 놈들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가족이라 했으면서 어찌 이렇게 쉽게.'

사파가 으레 하는 말이지만, 그들은 형제다.

도덕과 규율 대신 이익과 의리로 뭉친 그들이기에 오히려 그 점을 강조했다.

어쨌든 단체가 유지되려면 조금이라도 신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 신뢰가 깨졌다.

'철랑단이 본래 철죽파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개새끼들.'

배호청과 철랑단은 본래 구룡현의 뒷골목에서 활동하던 파락호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그럴싸한 이름만 걸어둔 채 무공이랍시고 아무렇게나 칼이나 휘두르던 파락호.

그랬던 그들은 동네 무관에서 무공을 배워 일류의 경지에 오른 배호청을 중심으로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철죽파가 그들을 영입한 것이었다.

'그때는 나도 큰물에서 더 좋은 무공을 익힐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배호청의 입술을 비집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멍청하기 그지없는 기대였다.

뒷골목 파락호와 사파 놈들이 다른 건 가진 힘밖에 없다. 사파 놈들이 더 강하고 거대하다는 것뿐.

기본적으로 신용할 수 없는 놈들이라는 건 똑같다는 말이었다.

'분명 놈들만 촉왕부나 지현에게서 뭔가 받기로 했겠지.'

기대한다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던 장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기대는 배호청이 지파를 제대로 세울 거라는 기대가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부터 굴러 들어올 떡고물에 대한 기대였지.

'반면 그 공자는.'

초 의원과 동업을 하고는 있다지만, 혼자 손을 털려면 쉽게 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려 가욕관에 있는 장수의 아들이라지 않은가.

무림과는 전혀 연이 없더라도, 촉왕부에 언질을 넣을 권력은 있는 사람일 테다.

그런데도 초 의원을 챙기려 했었다.

'초 의원까지 함께 빼내지 못한 건 몰래 외유를 나와서 그런 건가? 그 공자도 별난 사람이군.'

배호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하들을 통해 그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얌전히 집에서 수련만 하면 무관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을 텐데.

약에 정말 관심이 많은 건지 이 험한 사천까지 와서는 의원과 어울리다니.

그래서 더 철죽파와 비교가 되기도 했다.

홀로 몸을 뺄 힘이 충분하면서도 자신의 사람을 챙기느라 계책을 쥐어짜는 사람.

가족이라며 앞에서는 웃는 낯으로 대하고, 뒤로는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부하를 내팽개치는 사람.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전부 때려치우고 유은하를 따르고 싶을 정도였다.

'뭐. 그런 귀하신 분이 나 같은 놈을 받아 주실 리 없지만.'

초 의원은 약값을 손해 보면서까지 아픈 이들을 치료해주던 의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반면 자신은? 빈말로라도 선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없었다.

파락호 시절부터 돈을 벌기 위해 양민을 핍박하는 건 물론이고 간혹 보부상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니까.

지금 상황을 굳이 표현하자면, 끼리끼리 모인 놈들 사이에서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하지만 나라고 뒤통수를 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짐을 마저 꾸리기 시작한 배호청의 눈빛이 독기로 물들었다.

영란파랑 철죽파가 사이좋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16화. 철수

배호청에게 돌파구를 만들라 지시하긴 했지만, 상황을 낙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겐 통제력이 부족하니까.'

배호청이 최선을 다해 몽혼약을 영란파의 소행으로 만들더라도, 촉왕부가 무시한다면?

더군다나 배호청 역시 사파의 일원이다. 그가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무래도 금천현에서는 손 털어야겠어.'

그리고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자체적인 힘을 갖춰야 한다. 적어도 마을은 건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그것이 무력이든 권력이든 금력이든 말이다.

'다음 약은 다른 곳에서 파는 거로 하자.'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초 의원을 맞이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린 모양인데, 표정은 왜 그래?"

"그게… 잘 풀리긴 했습니다만, 또 복잡한 일이 생겼습니다."

"음?"

"일단은 이것부터 받으시죠."

초 의원이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지현이 써준 문서와 직인이 찍힌 투박한 나무토막들이 있었다.

"마을 이름은 임시로 '은하촌'이라고 했습니다. 추후 변경도 가능합니다."

"아냐. 마음에 들어."

유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문서를 펼쳐 들었다. 문서에는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란에 호 단위로 마을 사람들 정보를 적으시면 됩니다. 산속 마을이면 100호는 안 될 테니, 빈 부분은 지현이 알아서 채워 넣을 겁니다. 아, 이장호에는 공자님의 이름을 적으셔야 합니다."

초 의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사실 이 문서라는 게 아주 개판입니다. 관청에 있는 문서가 실제와 일치하는 건 1할도 안 될 겁니다."

"뭐. 그렇겠지."

일일이 수기로 기록을 관리해야 하는 데다가 위조 여부를 판별하기도 극히 어렵다.

유 노인도 아패를 위조해 금천현을 드나들지 않았던가.

유 노인이 걱정한 건 누군가 아패를 보고 위조를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복식을 보고 산사람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아패란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유 노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아패를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패가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제도권에 편입됐는지 아닌지에 관한 상징.

아마 은하촌도 두어 세대를 거듭하면 문서와 아패 사이에 차이가 벌어질 테지만.

'내 마을은 내가 관리할 거니까, 상관없어.'

오히려 지금 이렇게 아패가 생겼다는 사실이 다행일 뿐이다.

"깃발은?"

"받아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현에 모여 사는 건 아니다. 현 주변에도 작은 규모의 마을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럼 그들이 전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야인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꼬박꼬박 세금을 바치는 마을에는 그 증표로 지현이나 지부대인이 내리는 깃발이 펄럭인다.

그 깃발을 보고 병사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마을인지를 판단하고, 산적들은 습격해도 뒤탈이 없는지를 판단한다.

"여기 있습니다."

초 의원이 봇짐에서 잘 개어진 깃발을 꺼냈다.

펼쳐 보니, 금천(金川)이라 적힌 글씨가 보였다. 금천현에 속하는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유은하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걸로 혹여나 탈영병들이 마을을 습격할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이판사판인 놈들이 산골짜기 소규모 마을에 깃발 하나 꽂혀 있다고 그냥 지나치리라는 건 지나친 낙관이니까.

그러니 유은하는 직접 청화의 마을이었던 곳으로 가서 놈들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탈영병이라는 변수를 제외하고서라도, 이 깃발만으로 마을이 꽤나 안전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마을에 꽤 정이 드셨나 봅니다."

유은하가 웃는 모습을 보며 초 의원이 말했다.

"내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정도입니까?"

"응.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 큰 도움을 받았어."

유은하의 감사에 초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거라곤 공자님께서 주신 것들로 지현과 협상을 한 것뿐이지요. 오히려 제가 공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초 의원이 약방 내부를 둘러봤다.

"공자님 덕분에 낡아빠진 약방도 깔끔하게 청소하고, 보수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돈이 남아 못 사는 이들에게 약을 나눠줄 수 있게 됐습니다."

"초 의원도 이곳에 애착이 있나 봐? 여기 금천현 출신이야?"

"아닙니다."

"그럼?"

"음, 어디 출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스승님께 팔려 왔다는 것만 알아서."

초 의원은 어릴 적 한 의원의 제자로 팔려 온 소년이었다.

"팔렸다고? 노예처럼? 양민이었는데?"

"입이 궁해지면 가장 어린아이를 파는 것쯤이야, 기근이 들 때면 평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초 의원의 표정에서는 우울한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스승님께서는 한눈팔지 않고 자신의 의술을 이을 제자가 필요했을 뿐, 진짜 노예가 필요한 건 아니셨습니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

"예. 덕분에 전 글도 배우고 의술도 배웠지요. 이 금천현은 스승님의 고향이자 작고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애착이 가는 거야? 스승님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곳이라서?"

유은하에게는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누군가가 눈을 감은 장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유은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유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초 의원은 이번에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곳에 애착이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응? 그럼?"

"오히려 싫어하는 편입니다."

초 의원의 말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그는 매일 새벽에 약방 앞 골목을 쓸었고, 찾아오는 손님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병든 빈민에게는 약값을 최소한으로만 받았다.

사람 자체가 선한 것도 있겠지만, 이 금천현에 애착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초 의원은 왜 마을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말하는 걸까?

"제 스승님께서는 이곳 빈민들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뭐?"

"여름 감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빈민들이 약을 달라고 떼쓰더군요. 스승님께서는 적은 돈이나마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건 그냥 강도잖아."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소 스승님께서 원가만 받고 약을 지어주셨습니다만, 그들에게는 그것마저 이문이 남는다고 보였던 거겠죠."

초 의원은 실소를 흘렸다.

"사실 적자는 지현이나 사족들에게서 메꾸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것도 스승님이 하는 거랑 비슷하잖아."

"이건 스승님의 유언입니다. 한 번만 더 그런 배은망덕한 자들이 나오면, 금천현을 떠나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

"저는 빈민들에게 얕잡아 보이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겁니다. 언젠가 그들은 또 본성을 드러낼 테고, 그러면 저는 이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날 수 있겠죠."

유은하는 초 의원의 목소리에서 그가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은, 일문환을 계속 팔다 보면 누구든 나서서 약방을 털 줄 알았습니다."

"그건 철죽파를 고용해서 막았잖아."

"파락호들이 괜히 파락호들이겠습니까?"

초 의원이 창고 방향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곳에서는 초 의원이 고용한 이들이 철죽파 문도들의 감시 아래 약을 만들고 있었다.

"눈앞의 이익에 뒷일을 생각도 안 하니 파락호인 것이지요."

유은하는 염소수염과 그가 고용했던 철죽파 문도들을 떠올렸다.

"그렇긴 해."

"그래서 일부러 감독도 느슨하게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공자님 때문에 영 입질이 안 옵니다."

그 말은 진심인 듯 초 의원의 눈빛에 아쉬움이 흘렀다.

"마냥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하하. 세상에 마냥 착한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그건 그래."

유은하는 이미 첫날 네 차례나 강도가 들뻔했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함께 있던 초 의원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초 의원의 진심은 오직 초 의원만이 알 테다.

"아무튼. 스승님의 유언을 완수할 때까지는 여길 뜰 생각이 없는 거야?"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오늘 배호청이 왔다 갔거든."

유은하는 배호청이 와서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초 의원에게 말했다.

배호청이 몽혼약을 만들기 위해 초 의원을 다시 찾았다는 것부터 뒤에 촉왕부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죄를 영란파에게 뒤집어씌울 계획이라는 것도.

"그렇군요. 저도 지현에게서 비슷한 부탁을 받긴 했습니다."

"지현이 직접 몽혼약을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고?"

"예. 눈치를 보아하니, 시일이 촉박한 듯했습니다."

"하긴. 그러니까 배호청을 닦달해 그가 찾아온 거겠지."

배호청은 유은하가 정체를 숨긴 채 외유를 즐기는 도련님인 줄 안다.

그런데도 유은하가 부리는 초 의원에게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었을 테다.

"받아들인 건 아니지?"

"예. 일단 조건은 들어 봤습니다만, 까다롭더군요. 저 혼자서는 만들 수 없을 듯하여 거절했습니다."

혼자서는 안 된다면, 옆에서 도울 사람이 있다면 된다는 건가? 아니면 자금이나 재료가 부족하다는 건가?

어찌 됐든 초 의원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건 확실했다.

"아무래도 곧 금천현에서 손 떼야겠어."

"…그렇군요."

"초 의원도 같이 가자. 내겐 아직 세상에 보여주지 않은 약이 많아. 단 한 알로 감기를 낫게 한 약은 별거 아닐 정도로."

"그래서 제게 금천현을 뜰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신 거군요."

초 의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덕분에 요 며칠 잘 지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는 스승님의 유언을 완수해야 하는지라."

"그래?"

"잠깐이라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뭘 당장 떠나는 사람처럼 그래? 혹시라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천천히 말해."

초 의원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유은하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공자님께서 떠나시고 일문환을 팔지 못하면, 어쩌면 그때서야 제가 바라는 일이 일어나겠지요.'

초 의원의 스승이 살해당한 때와도 상황이 비슷했다.

그의 스승은 점점 늙어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약도 점점 줄어만 갔다.

주변 빈민들에게 꽤 넉넉하게 돌아가던 약이 줄어드니, 뿔이 난 것이다. 누군가는 늙은 의원이 사욕을 챙기느라 사람 돌보기를 게을리한다고 욕하기까지 했다.

일문환 공급이 끊기면?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흉한 자들의 손에는 대개 흉흉한 날붙이가 들려 있기 마련이니까.

초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

일문환으로 인해 지루하던 초석 광산 경비대에도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돌던 것도 잠시.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병사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왕 십호. 그 이야기 들었어?"

"아, 고 십호. 어서 와. 금광 쪽하고 순환 근무를 돌린다는 이야기 말이지?"

"닷새 후에 지원자를 뽑는다던데, 자네랑 자네 애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글쎄."

왕 십호라 불린 이가 덥수룩한 턱수염을 쓸었다.

"솔직히 여기가 답답하고 심심하긴 해도, 봉급은 최고잖아? 별일 없으니 근무 시간만 지나면 수련에 매진할 수도 있고."

초석 광산은 산속 깊은 곳에 있다. 일부러 주변을 개발하지 않았을뿐더러 도로조차 내지 않았다.

길이 있다면 초석을 운반하며 어쩔 수 없이 생긴 작은 샛길 하나가 전부.

그러니 주변이 고요할 수밖에 없고, 주변이 고요하니 수련에 용이할 수밖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시기가 시기잖은가. 덜컥 일류라도 돼 봐."

"성도로 끌려가서 당문과 대치하게 될 거라는 말이지?"

"그렇지. 여기 백호나 교관 중에 남은 자리도 없잖은가."

초석 광산을 지키는 이들 중에도 당연히 일류 고수는 있다.

백 명의 병사를 이끄는 백호나 병사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들이 바로 일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초석 광산에 주둔한 부대에는 백호와 교관 중 비는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일류에 오르는 순간 바로 성도로 차출될 게 뻔하다.

"당문과 대치라니."

고 십호가 진저리를 쳤다.

"난 그건 싫네. 절대로 싫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몇 년 전 같았으면 금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걸?"

금광을 지키는 이들도 촉왕부에서 실력 있고 충성심이 높은 병사들이다.

하지만 극비인 초석 광산을 지키는 이들은 그보다 한층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같은 계급에 비해 봉급도 더 높거니와 초석 광산 경비에 차출된 이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도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평소라면 금광 경비와 교대는 코웃음 치며 거절했을 이들이었을 테지만, 당문과의 대치는 그보다도 끔찍했다.

"더군다나 우리 교관이 보통 사람인가?"

"수련을 대충 하는 낌새가 보이면 그냥 성도로 보내버릴 위인이지."

"그래. 그러니까 잠시 금광 쪽으로 피신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그렇게 말한 고 십호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더군다나 당문에 일수천살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있네. 성도로 휴가를 다녀온 내 부하 놈이 말해준 거야."

"태상가주가? 현경의 실마리를 잡겠다며 대륙을 주유하는 기인이 갑자기 돌아와?"

"촉왕부와 갈등이 심해지니,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솔직히, 그분까지 돌아오시면 어디 싸움이나 되겠나?"

"하긴."

당문은 사천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뿌리는 가문이다.

그 영향력은 분명 민심에서 나오는 것도 있겠지만, 절대고수의 존재감에서 나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촉왕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화경의 고수. 그 고수가 당문에는 둘이나 존재한다.

가주인 칠절독왕과 태상가주인 일수천살.

그들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거나 은거하지 않는 한 촉왕부가 단독으로 당문과의 갈등에서 우위를 점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혹은 아주 거대한 사고나 사건이, 예를 들면 역모에 준하는 사건이 터져서 군단 단위의 병사와 고수들이 출병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17화. 철수

유은하는 배호청이 의뢰한 몽혼약을 만들기 위해 아스트랄 유니온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주로 강력한 마취나 수면 유도 효과를 지닌 약성에 관한 데이터였다.

'대부분 향이 강렬해서 함정으로는 못 쓰겠지만, 약으로 쓸 수 있는 게 어디야?'

외과 수술은 정확한 진단도 중요하지만 수술 중 환자가 쇼크로 죽지 않게 하는 마취도 중요하다.

'추가로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성분도 확보했고.'

진통제는 대증요법 외에도 쓰임이 많다.

대표적인 쓰임새로 전쟁이 있다. 고통을 억누르고 공격성을 증가시킨다든가, 혹은 부작용을 극대화해 아예 적진에 살포해버린다든가.

이 중원의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하지만 유은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내공으로 독을 몰아내고 중독까지 치료한다는 게 말이 돼?'

대체 그 내공이라는 에너지가 뭔데 마약성 진통제나 마취제의 약효까지 몰아낸단 말인가?

세포 융합형 인공지능인 아스트랄 유니온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중원의 기술력은 그 발끝조차 못 따라오는 상황이다.

그래서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기라는 에너지 때문에 발전이 이상한 방향으로 치중된 건가?'

그러니 무공에 관한 관심과 흥미가 폭발적으로 치솟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 공자님."

유은하가 혹여나 고수를 만나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철죽파 말단인 두식이가 유은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왜?"

"배 단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제야 왔네. 아무리 본파에 다녀온다고 해도 열흘이나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그래도 일전에 공자님께서 시키신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셨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아. 그래?"

유은하는 평상에서 일어나 약방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첩 몇 개를 꺼냈다.

"배 단주한테 수고했다고 전해줘. 이건 선물. 일문환보다 조금 좋은 것들이고, 맨 위에는 저번에 배 단주가 불면증이라고 말하기에 만들어 본 약이야."

"불면증 말씀이십니까?"

두식은 '단주께 그런 게 있었나?'라는 표정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가 뭔가를 캐물을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야."

"예. 공자님.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배 단주한테 너랑 애들 회식이라도 시켜 주라고 말해볼게."

"감사합니다!"

"먼저 가봐."

유은하가 손을 휘휘 젓자 두식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응. 어차피 요 며칠 별일도 없었고, 여길 지키는 것보다 내 심부름이 더 중요해. 이대로 곧장 배 단주한테 선물 전해주고, 넌 알아서 쉬든가 해."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두식은 허리를 넙죽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약방을 뛰쳐나갔다.

혈기 왕성한 사파 파락호들에게 반나절 동안 가만히 서서 약방을 지키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으니까.

간단한 심부름을 대가로 곧장 퇴근이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표정에 마음이 훤히 비치는군요."

"단순해서 좋지."

초 의원의 감상에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책방에 가려는데, 같이 갈래?"

"좋습니다. 장사야 맡겨 놓아도 별문제는 없으니, 모시겠습니다."

주인이 가게를 떠나는 건 대놓고 한탕 해 먹으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주인이 없는 곳에서 물건을 슬쩍한다든가 매출을 속여 딴 주머니를 찬다든가 하는 일은 중원에서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물론 그걸 걸리면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것도 평범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초 의원은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초 의원은 유은하와 함께 금천현의 책방으로 향했다.

"으잉? 초서훈이 아니냐. 오랜만이네."

책방을 지키던 노인이 초 의원을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뭐 필요한 게 있어서 왔느냐?"

"예전에 황제내경을 주문했을 때 그렇게 면박을 주시더니. 웬일이십니까?"

"아 그거야 내가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성도까지 가야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그래서 값은 두둑하게 쳐드렸지 않습니까."

"흐흐. 그래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지. 요즘에 일문환으로 돈을 쓸어 담는다며?"

"제 돈 아닙니다."

초 의원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유은하를 소개했다.

"먼 곳에서 온 공자님이십니다."

"어이구. 귀하신 분이 의원이랑 약방에서 어울리는 걸 보면 보통 괴짜가 아닌 것 같은데. 흘흘."

책방지기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굽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여기 금천현에서 평생 책방을 보고 있는 노인넵니다.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지만, 편히 둘러보시지요."

중원의 예법에 관해서는 유은하도 잘 몰랐지만, 그래도 태도에서 정중함이 묻어났다.

"고맙네."

유은하는 점잖은 척을 하며 책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책방지기는 유은하를 초 의원에게 맡겨 놓고는 구석으로 가서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책을 쓰는 건가?"

"필사를 하는 겁니다."

중원에 저작권이나 특허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책방에서 필요한 책은 그때그때 필사해서 팔거나 서가에 꽂아두는 것이었다.

'이건 유의해야겠네.'

상품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없으니, 누가 뭘 베껴 들고 가도 이상하지 않다.

심지어 그렇게 탄생한 것들로 부작용이 일어났을 때 그 오명이나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정보지 사업도 생각해 봤는데, 힘과 인맥이 갖춰질 때까지는 보류.'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고를 둘러봤다.

청화가 말했던 천자문과 명심보감, 소학 외에도 글공부에 필요한 책들이 다양하게 꽂혀 있었다.

"초 의원. 혹시 소학 다음으로 배우는 게 뭐야?"

"소학 다음으로는 보통 십팔사략을 배우긴 합니다만, 문인으로 관원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초 의원이 의아하다는 듯 유은하를 바라봤다.

초 의원이 지켜보길, 유은하는 외공 고수였다. 홀로 수십 근짜리 궤짝을 너끈히 나르고 손날로 장작까지 패는 모습도 봤으니까.

처음 만난 날, 철죽파 문도 하나를 순식간에 곤죽으로 만든 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더군다나 어디서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없던 뛰어난 약을 만들어 오지 않았는가.

무인으로 나가도 대성하고, 의원이 돼도 대성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글공부에 관심을 보일까?

그런 초 의원의 의문에 유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 사람들한테 글이나 좀 가르쳐보려고."

"음…."

"왜? 쓸데없는 일 같아?"

"아랫것들은 아랫것들의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유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시야와 지식의 차이였다.

"아무튼. 십팔사략 다음에는?"

"논어, 맹자, 중용, 예기 등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대로 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래?"

제대로 된 스승이 있고 없고는 배움에 큰 차이가 난다.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크라운 행성에서도 그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일단 가르쳐 놔야지.'

유은하는 초 의원이 말해준 책들을 전부 집어 들었다.

"산경십서? 이건 뭐지?"

그러다가 특이한 이름의 서책을 발견했다.

"아, 그건 산학을 다루는 책입니다."

산학, 다른 말로는 수학이었다.

팔락. 팔락.

책장을 넘기며 살펴보자, 기초 교육으로는 충분히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스트랄 유니온의 메모리가 언제 복구될지도 알 수 없어.'

그 메모리만 복구되면 몇십 년이 걸리든 컴퓨터를 비롯한 정밀 기계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자가복구 진행률이 0.0002%에 불과하니, 죽기 전까지 10%는 복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

그러니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열 편에 달하는 산경십서까지 챙긴 유은하는 다음 서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무공들이 꽂혀 있었다.

"오. 무공."

"관심이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이미 익히신 무공은 어쩌고요?"

"나 무공 안 익혔는데?"

"예?"

초 의원이 이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유은하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냥 단련 좀 한 거야. 무공은 무슨."

"외공의 고수가 아니셨던 겁니까?"

"응. 그런데 외공이 내공보다 좋아? 외공으로 분류된 책이 훨씬 많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유은하의 말에 초 의원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만, 고수들은 백이면 백 내공을 익힙니다."

"그래?"

"예. 외공은 익히기 쉽고 일정 경지까지는 발전이 빨라서 주로 병사나 사파의 말단이 익힙니다."

"아, 그럼 내공 관련 책이 적은 이유는 귀해서 그런 거구나?"

"그렇습니다. 그나마 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초 의원이 잠시 책방지기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싸구려나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구시대의 것이 된 무공뿐입니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어."

유은하가 서가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책들에는 구결 같은 거 없지?"

유은하가 뽑아 든 얇은 책에는 삼재심법(三才心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구결이야 무공이라면 대부분 갖추고 있습니다."

"응? 상승무공은 구결로만 전해지는 뭔가가 있다며."

"저도 무림인이 아니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구결이라는 게 그 의미가 꽤 넓습니다."

초 의원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선 구석진 곳으로 향해 책 몇 권을 들고 왔다.

"혈도와 침법에 관한 책입니다."

"이건 왜?"

"내공은 혈도를 통해 순환되고 쌓이는 힘입니다. 내공을 이용하는 무공은 당연히 혈도를 알아야 하고요."

"아, 고마워."

유은하는 순순히 초 의원이 주는 책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거랑 구결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상승무공은 더 깊은 뜻을 담거나 유출에 대비하기 위해 내공이 지나는 혈도와 그 흐름을 여러 비유를 통해 풀어냅니다."

"그걸 구결이라 말하는 건가?"

"예. 따로 해례본이 없다면 스승이 가르쳐 줘야 합니다."

"스승이 없으면?"

"유추와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가야지요. 실제로 상승무공 중에서는 그렇게 실전된 무공이 제법 된다고 들었습니다."

"저런."

그 무슨 비효율적인 관리 방식인가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중원의 방식이라는데.

"게다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구결을 입으로 읊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고저와 강약을 고려하면 진짜 무공은 이런 책방에 나오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해석, 아니. 해례본이 없는 이상은 말이지?"

"예. 하지만 무림인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런 건 세상에 나올 일이 없겠지요."

초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대에서 무공이 끊길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알고 익히는 싸구려가 되는 걸 원하는 이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지식의 공유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특이점이 발생한다. 유은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특이점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걸 가르쳐 주거나 유도할 생각은 없었다.

"뭐. 상승무공이야 당연히 기대도 안 했어. 익히기 쉽거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없어?"

"방금 집어 드신 삼재심법과 삼재검법만 해도 충분할 겁니다. 창법은 이화창이 유명합니다. 군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홀로 수련해도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고요."

"방패를 사용하는 무공은 없나?"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은하는 초 의원과 한동안 책방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책들을 집어 들었다.

그중에는 소설 같은 것들도 있었다.

'상품을 개발하는 건 내가 하면 되지만, 문화 예술 분야는 지금부터 차곡차곡 준비해 놔야지.'

아쉽게도 야금술이나 무두질, 직조 같은 기술과 관련된 책은 없었다.

그렇게 유은하가 서가에서 그러모은 책만 70여 권.

책값이 보통이 아닌 탓에 그동안 일문환으로 번 돈을 대부분 써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상관없어. 이제는 금천현에서 손 털어야 하니까.'

배호청에게 몽혼약을 넘겼으니 곧 어디선가 사건이 터질 것이다.

그 사건이 뭐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고위직 암살에 직접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중요한 재산을 지키는 곳의 병사를 재우고 물건을 훔칠 수도 있다.

'금광이 가장 유력하긴 한데….'

주로 거래에 사용되는 화폐는 은이다.

그렇다고 금의 가치가 떨어지냐면, 그건 아니었다.

금은 귀금속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으며 생산 자체는 오직 나라에서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니까.

이 중원에 풀린 금은 둘 중 하나였다. 나라에서 캔 것이거나, 불법으로 사금을 채취한 것이거나.

그런데 금을 탈취하기 위해 몽혼약을 사용한다?

그건 단순한 도적질보다는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그런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금천현을 떠나는 게 옳았다.

"초 의원."

"예. 공자님."

책방을 나선 유은하는 초 의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지현과 배호청이 요구한 몽혼약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맞아. 어쩌면 그 몽혼약으로 금을 탈취하려는 걸지도 몰라."

초 의원은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진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저는 스승님의 유언을 지켜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제 아버지와도 같았으니까요."

"아버지라…."

유은하의 머릿속에 갤럭시 크라운의 유 회장이 떠올랐다.

"사이가 좋았나 보네."

"엄하긴 하셨지만, 좋은 분이셨습니다."

"부럽네. 부러워. 그래도 혹시나 피할 곳이 필요하면 여기로 와."

유은하는 미리 만들어 둔 은하촌으로 가는 지도를 건넸다.

"…지금 떠나시려는 거군요."

"응. 일문환에 들어가는 비약은 넉넉하게 줬으니까, 조절만 잘하면 두어 달은 더 쓸 수 있을 거야. 번 돈은 초 의원 다 가져."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초 의원이 유은하를 향해 공손히 공수하며 허리를 숙였다.

"뭘. 아무것도 안 묻고 믿어준 초 의원이 더 고맙지. 몸조심하고, 인연이 있다면 나중에 또 봐."

18화. 습격

금천현에서의 장사를 접고 마을로 돌아온 유은하는 마을의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아휴. 직접 안 나서도 되는데."

"답답해서 못 보겠잖아요. 이렇게! 좀 빨리빨리 하자고요."

유은하가 괭이로 땅을 찍을 때마다 언 흙이 뭉텅이로 부서져 나갔다.

"아휴. 이장님! 은하 좀 말려보세요! 우리 이러다가 다 골병들어요!"

"맞아요! 은하 속도를 대체 어떻게 따라갑니까!"

유이오를 비롯한 남자들이 유 노인을 불렀지만, 멀리서 지켜보던 유 노인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은하가 하라면 해! 이놈들아!"

그렇게 소리치는 유 노인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여기가 어디여! 은하촌이여! 은하촌! 은하 말 잘 따르라고!"

"아, 우리가 언제 안 따른다나?"

"그러면 빨리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것들아!"

"예이! 예이!"

유이오는 못 말린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대충 대답했다. 다른 이들도 웃으며 유이오를 따라 괭이를 들고 언 땅을 팠다.

그들의 표정에는 한 점 불만이나 불쾌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 이름이 생겼고 목책 위에는 깃발이 휘날리며 그들에게는 집집마다 아패가 생겼으니까.

세금이 걱정이긴 하지만, 유은하는 자신의 말만 잘 따라 준다면 세금은 문제가 안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배불리 먹여주고 겨우내 따뜻할 수 있게 장작도 주고, 이제는 마을을 안전하게 만들어 준 유은하의 말을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이득이 아니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유은하를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인정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보여줬던 초인적인 힘과 의지 때문이었다.

유 노인이 소리치기 전까지는 피를 뒤집어쓰고도 멈추지 않았던 그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유은하라면 따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진짜. 우리 마을 사람들 더 팍팍 먹여야겠어. 왜 이렇게 힘을 못 쓰지?"

"오라버니가 특별한 거예요."

청화가 참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유은하를 나무랐다.

"제가 3년 넘게 배운 글자를 한 시진도 안 돼서 전부 외운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청화 말이 맞아. 글이라는 게 도통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했긴? 은하니까 한 거겠지. 우리가 은하 따라 하려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걸?"

"황새가 뱁새 따라 하는 것처럼?"

"반대야, 이 사람아."

청화를 뒤따라 바구니를 들고 오던 이들이 또 재잘재잘 떠드니, 은하촌 목책 앞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청화 넌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유은하는 청화가 주는 죽 그릇을 받아 들며 말했지만, 청화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밤에 책 읽느라고 고생하잖아."

"그게 어디 고생인가요? 재밌어서 하는 거지. 그리고 오라버니도 밤에 같이 공부하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공부는 아니었다. 이미 유은하는 책방에서 사 온 책들을 전부 외웠으니까.

밤에 유은하가 하는 일은 단단한 목판을 만들어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다.

종이와 먹만 있다면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동시에 목활자를 만들기도 했다. 소설 같은 문화 산업을 은하촌에 시범적으로 행해 볼 생각이었다.

'의료진한테 검사를 받을 때 가만히 누워서 영화를 보는 것만큼 괜찮은 시간 때우기도 없었지.'

중원에 영화가 있을 리는 없지만, 소설이라면 그 빈 자리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유은하에게 죽 그릇을 건넨 청화도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유이팔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청화 선생님."

"선생님이라뇨. 그런 거 아니니까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니지요. 글 가르쳐 주면 선생님이죠. 안 그래요? 이장님?"

유이팔의 말에 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청화가 선생님이지."

은하야 원체 지난 반년 동안 마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낸 탓에 여전히 가깝게 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 합류하게 된 청화는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글을 안다는 것도 능력이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마을의 권력자가 된 유 노인과 유은하의 가족이 되었으니까.

"아무튼. 오늘 상은 뭡니까?"

"아, 상이요?"

청화와 유은하는 매일 저녁 마을 사람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가벼운 시험을 보며 성적이 좋은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식으로 공부를 독려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오랜만에?"

"당과요."

"당과!"

산속에서 단 음식은 좀처럼 먹기 힘든 것이었다.

이제는 아패가 생겨 자유롭게 어디든 들러 물건을 살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아직 은하촌 사람들에게는 돈이 별로 없다는 것.

과일이 풍성하게 열리는 시기도 아니니, 달콤한 간식은 유은하가 가끔 나눠주는 것 외에는 맛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당과라는 말에 사람들 표정이 의욕으로 가득 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씨. 어제 복습하고 자는 건데!"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지금이라도 좀 떠올려 봐!"

"그러는 임자는 기억나?"

"내가 기억이 안 나니까 떠올려 보라는 거지!"

여기저기서 가족 단위로 모여 눈밭에 글자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청화가 나섰다.

"어제 가르쳐 드린 것들, 여기 적어 둘게요."

하루에 10자씩 100일이면 1천 자를 뗄 수 있으니,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천자문을 전부 가르치는 게 청화의 목표였다.

봄이 오고 바빠지기 시작하면 공부할 시간이 많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참을 먹고 쉬는 시간이 순식간에 보충 수업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유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공부에 대한 거부감은 적네.'

공부는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아무래도 포상의 효과가 꽤 좋은 듯했다.

'천자문을 익힌 후에는 기초적인 산학을 가르치면 되겠어.'

초기에는 유은하 혼자서 상단을 운영해도 괜찮다. 상품 개발부터 재투자까지, 유은하를 따라갈 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단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소소한 잡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때 유은하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이들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무공도 익혀야 하고.'

유은하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무공을 익혀야 했다. 상단이라고 힘이 없다면 무슨 수로 상품과 돈을 지키겠는가?

중원은 강력한 법과 공권력이 평범한 이들을 수호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우며 주먹은 그보다 훨씬 가까운 세계. 그것이 중원이었다.

'그런데 이 내공이라는 게 도통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목책을 보수하고 글을 가르치던 지난 며칠 동안 유은하는 먼저 삼재심법을 익혀보려 했다.

하지만 서론에 적힌 토납법을 아무리 반복해도 기라는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무공에 재능이 없는 건가? 아니면 중원인과 신체가 다른 건가?'

기를 받아들여 내공으로 바꾸고 쌓는 기관, 단전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은 같은 사람이지만, 유은하는 출신부터가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청성이나 당문을 찾아가 봐야겠어.'

모든 걸 버리고 본산제자로 들어갈 수는 없어도 기부금을 바치면 속가제자라는 건 될 수 있다고 들었으니.

'일단은 검법과 창법이나 제대로 익혀야지.'

물론 유은하가 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은하촌 사람들에게도 무공을 금지할 생각은 없었다.

유은하가 먼저 무공을 익히려 했던 건 사람들에게 원활하게 가르치려 했던 것뿐.

그게 불가능하니, 차선책으로 각자 알아서 익히라고 할 수밖에.

다행히 삼재심법과 삼재검법은 천자문만 떼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일이라면….'

목책 보수, 공부, 무공. 그 외에 남은 일을 하나뿐이었다.

'약 개발이지.'

일문환을 계속 만들 수는 있지만, 괜한 소란을 피하려 철수한 게 아니던가.

적어도 한차례 소란이 일고 가라앉을 때까지는 일문환을 다시 생산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다른 현에서 다른 약을 팔 생각은 있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남은 약초가 별로 없어.'

아무리 약초를 많이 캐 왔다고 하더라도, 유은하가 직접 몸으로 뽑아내는 약효의 정수가 효율적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은하촌에서 수급할 수 있는 약초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화네 마을 사람들을 흡수하기 전까지는 고작 50호에 불과한, 산속 마을치고는 크지만, 일반적으로 따지면 작은 마을이었으니까.

"오라버니?"

그때, 청화가 유은하를 불렀다. 그가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왜 그러셔요?"

"약초를 좀 구해야 하는데, 지금 약초를 구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아서."

벌써 12월이 다 가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유독 들뜬 분위기는 은하촌이 맞는 첫 새해라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 간다는 건 약초를 구하기 어렵다는 뜻과도 같았다.

이 추운 날씨에 멀쩡한 약초가 있을 리 없고, 마을이나 도시에서 구하자니 그 값이 보통 때보다 훌쩍 뛴 탓이다.

특히나 올겨울은 추위가 심상치 않기에 모든 약초의 값이 예년보다 3할은 비싸졌다는 초 의원의 말도 있었다.

독감이라도 유행하면 2배, 3배 비싸지는 건 일도 아니리라.

"약초요?"

"응. 새 약을 만들어 팔아야 돈을 벌지."

마을 사람들의 수입이 안정될 때까지 은하촌이 내야 할 세금은 유은하가 책임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유 노인과 유은하의 집을 이장호로 지정해 문서에 박아 넣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도시로 가서 약초를 사도 되긴 해. 하지만 그러자면 돈이 꽤 들 것 같거든."

어차피 유은하가 만드는 약은 기존의 것들보다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굳이 가격을 내리지 않더라도 살 사람은 많다.

하지만 단기간에 큰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효능과 싼 가격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은하상단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면, 이후에는 더 쉽게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을 테니까.

"음…."

함께 고민하던 청화는 미묘한 표정으로 유은하를 흘끔거렸다.

"왜?"

"방법이 있긴 한데…. 위험해서요."

"정 위험하면 안 하면 되지. 무슨 방법인지 들어나 보자."

하지만 유은하의 말에도 청화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유 노인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것이었다.

"어지간히도 위험한 방법인 게로구나."

유 노인의 말에 청화가 움찔거렸다.

"할배. 어차피 위험하면 안 하면 되는 일이잖아. 듣고 화내기 없기. 알았지?"

"쯧. 내가 아무 때나 버럭버럭 화만 내는 늙은이인 줄 아느냐?"

"아닌가?"

"이놈이!"

딱!

유 노인의 지팡이가 유은하의 어깨를 때렸다. 그래도 유은하는 실실 웃으며 청화를 재촉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네. 예전에 제가 살던 마을에 약초가 많이 있어요. 여기 은하촌에 비축돼 있던 것보다 많았어요."

유은하 덕분에 짐승이면 짐승, 장작이면 장작, 약초면 약초를 가득 쌓아 놓을 수 있었던 은하촌이다.

그런데 그런 은하촌보다 약초가 많다니.

"저희 마을은 산세가 무척 험해서, 주변에 약초가 많이 자랐거든요."

"하긴. 그쪽은 약초꾼들도 가기 꺼리는 곳이긴 했지. 그 정도로 험한 곳이니까 금천현에 가까워도 여태 들키지 않았던 걸 테고."

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약초를 팔아서 겨울을 난 모양이구나."

"네. 저희 집은 무두질을 주로 했지만요."

"무두질을 할 줄 아느냐?"

당연한 말이지만, 그냥 가죽을 벗겨 파는 것보다 무두질해서 파는 게 이문이 많이 남는다.

"아, 그런 말도 했었지."

"이놈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걸 왜 까먹어!"

딱!

유 노인의 지팡이가 다시 한번 유은하의 어깨를 때렸다.

"마을에 병사들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랬어요. 여긴 무두질 도구도 없고요."

"음. 아마 병사들은 그대로 있을 거야."

청화와 유 노인이 유은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뜻이었다.

"초 의원이랑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인데, 그놈들 어쩌면 탈영병일 수도 있대."

"아. 그래서 수가 적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청화는 당시 병사들이 쳐들어온다고 알린 이가 전해준 병사의 수는 15명 정도라고 말했다.

"15명이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내쫓을 만하지 않나?"

유은하도 산에 사는 이들이 병사를 이기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안다.

병사들은 전투를 위해 단련된 기술은 물론 날이 선 검과 창, 단단한 방패와 투구로 무장했으니까.

하지만 떼로 달려든다면 마을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청화네 마을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냅다 도망을 친 건 아니었다.

"수가 너무 적어서, 어른들은 척후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러니 그렇게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쳤겠지. 쯧쯔."

유 노인이 안타깝다며 혀를 찼다.

병사 15명조차 산속 마을 사람들로는 대항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게 척후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혼이 쏙 빠져 도망칠 수밖에.

"하긴. 탈영병이라는 것도 일단은 추측이니까."

하지만 확인할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탈영병이 아니라면?

병사들은 이미 마을을 털고 철수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약탈할 물건이야 주로 돈이 되는 가죽이나 농기구 같은 것이지 말린 약초를 가져가진 않았을 테니, 그냥 가서 주워 오면 된다.

혹여나 놈들이 진짜 탈영병이고 청화네 마을에 눌러앉아 있다면?

'일단 숫자부터 확인하고, 처리하는 편이 낫겠지.'

열 명 이상과 한꺼번에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유은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감히 내 은하촌의 평화를 깬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어.'

금천현 관아에 신고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청화네 마을 사람들에게 아패가 없었다. 병사들이 은하촌에 들르기라도 한다면 청화네 마을 사람들이 위험하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을 장비도 탐나고.'

분명 군문의 장비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을 거다.

마을 대장간에서도 도끼 같은 공구류를 새로 구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검이나 창 같은 것들은 하나에 은자 단위로 가격이 뛰기도 한다.

무려 열다섯 명이 단단히 무장하고 있을 테니, 싸워 이길 자신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놈들을 처리하는 게 좋아.'

청화네 마을 사람들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인구가 불어나긴 했지만, 사이가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습격으로 은하촌 사람 중 부상자가 발생했고, 청화네 마을 사람 중에서는 죽은 사람도 많았으니까.

아무리 죽음에 익숙한 산사람들이라 해도, 앙금까지 없을 수는 없다.

이 앙금을 빠르게 해결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은하촌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훗날 파벌이 생겨 서로 반목할 가능성도 크다.

그러니 사태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 원망할 대상을 지목해야 한다. 그들을 처리해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준다면 더 좋고.

'그냥 이대로 산속에서 살 거라면 탈영병들을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유은하의 목표는 고작 은하촌 안에서만 떵떵거리며 사는 게 아니었다.

"할배."

유은하의 부름에 유 노인은 표정을 와락 찌푸렸다. 유은하가 결심을 세웠다는 걸 눈빛만 보고도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쯧. 말린다고 들을 놈도 아니니."

"잘 아네. 다녀올게!"

"조심하거라. 아닌 거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아와."

"알았어."

"네 어깨에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달렸다. 가볍게 생각 말아."

"물론이지."

유은하는 자신 있게 답하며 날이 잘 갈린 도끼와 박도를 챙겼다.

19화. 습격

유은하는 눈이 가득 쌓인 겨울 산길을 마치 날 듯이 뛰어갔다.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비탈길도 겁 없이 휙휙 지나칠 수 있는 건, 유은하의 신체 능력이 월등하다는 증명 그 자체였다.

"저긴가?"

유은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험한 산길을 두 시진도 안 되어 주파했다.

금천현까지 가는 것보다 오히려 직선거리는 짧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멀리서 내려다보니 신기할 정도로 마을은 멀쩡했다.

습격자가 휩쓸고 지나간 특유의 어수선함과 난장이 전혀 없었다.

"뭐지?"

청화가 탈영병들의 습격을 직접 본 건 아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비롯해 마을 남자들이 겨울잠 자는 동물이라도 찾기 위해 마을을 나섰다가 놈들을 마주쳤다고 했다.

그러니 먼저 도망칠 수 있었고, 탈영병들은 어렵지 않게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겠지.

그 후에는 당연히 마을에서 쓸 만한 것들을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집 주변이 어질러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나마 어질러진 것들도 급히 도망치면서 남은 흔적으로 보였다.

찌릿.

불길한 예감이 유은하의 뒷덜미를 간질였다. 함부로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늑대 굴을 발견했을 때랑 느낌이 비슷한데, 이거."

유은하가 허리춤의 손도끼를 매만졌다.

"...."

숨을 죽인 채 멀리서 청화네 마을이었던 곳을 관찰하기를 한동안.

비교적 괜찮게 지어진 흙집에서 무언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옷을 아주 두껍게 입은 사내였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다.

"역시 탈영병 맞네."

마을 사람들이 비축한 장작이 그새 다 떨어졌을 리 없다. 설령 떨어졌다고 해도 저런 장정이 장작 하나 구할 힘이 없을 리 없고.

그런데도 저렇게 덜덜 떨면서 불도 피우지 않는 건, 어떻게든 외부에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일 테다.

유은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저렇게 덜덜 떨면서도 마을에 눌러앉은 걸 보니, 겨울을 나기 전까지는 절대 떠날 생각이 없을 터.

더군다나 한곳에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명씩 나누어 집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아마 다수의 적에게 한 번에 기습당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일 테지만.

'나야 오히려 좋지. 하나씩 암살해 버리면 그만이야.'

유은하의 손이 자연스럽게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사박. 사박. 뽀드득.

몸을 바짝 낮춘 유은하가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내려갔다. 목표는 조금 전 밖으로 나온 남자.

사내는 측간에 가려는 듯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목책 밖으로 나왔다.

설마 근처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는 듯, 사내는 오로지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한껏 웅크린 채 주변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다.

그렇게 사내가 판자로 덮어 놓은 측간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

후웅! 뻐걱!

살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손도끼가 사내의 머리에 박혔다.

털썩.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졌다.

유은하는 재빨리 다가가 그의 몸이 굳기 전에 갑옷을 벗겼다.

군문에서 사용하는 갑옷을 노획해 그대로 사용해도 될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사용하지 못하면 그냥 팔아 치우거나 해체해 재사용하면 그만이지.

갑옷을 벗기자 그 아래에는 두꺼운 겨울옷이 드러났다.

두껍게 기운 무명천에 솜이 가득 들어간 옷은 가격이 꽤나 나가 보이는 고급품이었다.

"와. 두꺼운 거 봐. 마을 사람들 주면 좋아하겠네."

지현에게 뇌물을 주고 식량을 사는 데 돈이 꽤 많이 들어가서,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질 좋은 겨울옷을 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얇은 옷을 되는대로 껴입는 게 전부. 그나마 장작이 넉넉해서 따뜻한 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싹 다 챙겨가야지."

탈영병이 열다섯 정도라고 했나?

그 옷만 다 챙겨가도 앞으로 조직할 자경단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유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책 바로 밑에 바짝 숨어 봇짐에 옷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탈영병이 허리춤에 찬 검도 한 번 뽑아 살펴봤지만.

"...?"

날카로운 검날이 멋지다는 것 말고는 별 느낌이 없었다.

유은하에게 익숙한 건 지난 반년 동안 써 왔던 몽둥이나 도끼나 낫 같은 공구류였으니까.

그나마 칼의 형태를 한 것이라면, 박도가 훨씬 익숙하고 유용했다.

그래도 팔면 비쌀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쁘긴 했다.

그렇게 전리품을 챙긴 유은하는 손도끼와 낫 그리고 검을 챙긴 뒤 나머지 짐은 눈 속에 파묻었다.

'탈영병이 열다섯 정도라고 했지.'

오차가 제법 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청화 급히 도망치느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유은하는 걱정하지 않았다.

유은하 자신도 이 중원에 와서 처음 깨달은 거지만, 웅크린 짐승을 사냥하는 건 제법 적성에 맞았다.

목책에 바짝 기댄 유은하의 눈이 마을 안쪽을 훑는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흙이 뒤섞인 흔적.

유은하의 머릿속에 마치 영상이 재생되듯 어느 집으로 사람이 들어갔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몇 명인지까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난 반년 동안 산을 뛰어다니며 짐승을 사냥한 경험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씨익.

유은하가 천천히 목책 바로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안쪽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막내라고 나한테만 경계를 맡겨? 얼어 죽으라는 거야 뭐야?"

불만을 토로하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정말로 춥긴 한 모양이었다.

"눈이 이렇게 펑펑 온 것도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딱딱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사천성은 한겨울에도 기온이 떨어져 봐야 3도 안팎이다. 그저 습해서 한기가 뼛속까지 치밀 뿐.

하지만 어째서인지 올해는 초겨울부터 눈이 펑펑 오더니, 새해가 다가온 지금은 영하 10도에 근접했다.

심지어 그런 날씨가 며칠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화로는 죄다 가져가고. 으으. 추워. 젠장. 빨리 밤이라도 됐으면 좋겠네."

밤의 어둠은 연기를 가려준다.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잘 관리한다면 은은한 숯불을 얻을 수 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든 견디려 했지만.

"망할. 못 참겠다. 이러다가 진짜 뒈지지."

곧 방 안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뽀얀 연기가 엉성한 흙집 뒤편으로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친다.

"어흐…."

흐리고 온기에 온몸과 긴장이 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벌컥!

엉성하게 나무를 끼워 맞춘 문을 열고 들어간 유은하의 도끼가 탈영병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빠각!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재빨리 도끼를 뽑은 유은하는 남자를 나무 침상 위에 눕혔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 쪽은 땅을 조금 파 놓아 핏물이 문으로 퍼지지 않게 했다.

그러고는 문 옆에 바짝 붙어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잠시 후.

"미친 새끼야! 뭐 하는 거야! 불 꺼!"

누군가가 이쪽으로 향해 달려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발소리는 단둘.

문이 열리고 들어온 두 병사는 침상에 누워 있는 놈을 보고 뭐라 뭐라 소리치려 했다.

아마 불을 피우고 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채 소리치기도 전에.

뻐걱! 빠각!

유은하의 쌍도끼가 그들의 머리를 쪼갰다.

유은하는 시체를 눕힌 뒤 집 안의 흙을 그러모아 불을 껐다.

그러자 하늘로 솟구치던 연기도 사라졌다.

시체의 품을 뒤진 유은하는 도축용 단도와 손도끼를 발견했다.

"와."

손도끼를 쥔 유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유 노인이 손수 갈아 준 손도끼도 잘 들긴 하지만, 탈영병의 시체에 있던 건 철의 빛깔부터가 달랐으니까.

이게 민간과 군용의 차이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문득 손도끼에 감탄하는 자신이 재밌어져 웃음을 터뜨렸다.

"가우스 소총 한 자루만 있었으면 다 끝인데."

아니. 굳이 가우스 소총까지 안 가도 된다. 저급한 에너지 배터리를 사용하는 호신용 권총만 있었어도 충분하다.

'그런 걸 만들면 세계 정복도 가능하려나?'

물론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아스트랄 유니온에 관련 데이터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아스트랄 유니온은 여전히 자가복구 중이었으니까.

<아스트랄 유니온 자가복구 중. 진행률 0.0003%>

수치가 변하긴 했지만, 왜 변했는지 모르겠다.

안다고 해도 0.0001%에 불과한 진행률로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차."

유은하는 딴 길로 빠지려던 생각을 급히 다잡고 흙집을 나섰다.

허리춤에 쇠 낫과 도축용 단검, 손도끼 두 개가 단단히 매여 있다.

그리고 왼손에는 조금 전에 얻은 새로운 손도끼가, 오른손에는 벽에 기대져 있던 창이 들려 있었다.

원래는 더 길었던 것이, 산에 들어오며 중간을 뚝 부러뜨린 듯 5척(약 1.5m)으로 짧아진 상태였다.

스스스.

조심스럽게 발을 끌며 울타리나 흙집 그림자에 숨어 나아가는 유은하.

제법 커다란 흙집에 다가갈수록 안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미친 곰탱이 자식. 왜 불을 피우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얌전히 경계나 설 것이지."

"지만 춥나? 우리도 다 추운데 혹시 모를 추적자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목소리는 셋. 조금 전 흙집에 있던 탈영병보다 목소리에 떨림이 적다.

아마 화로에 숯불을 지펴 놓고 둘러앉아 있는 듯했다.

조금 전 죽인 놈들까지 합하면 총 여섯.

저놈들을 다 죽여도 대략 열 명 정도 되는 탈영병들이 남았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은 이 작은 마을의 중앙, 가장 바람이 잔잔하고 따뜻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게 뻔했다.

그곳 외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눈이 쓸린 자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숫자를 조금만 더 줄이면 좋을 것 같은데.'

열 명은 부담스럽다.

여섯은 쉽다.

여덟 정도면 해볼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은하가 흙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늦었네. 그 곰탱이 새끼가 뭐…."

누군가가 유은하에게 채 묻기도 전에.

빠각!

골통이 박살 났다.

긴장감이랄 게 없는 건지, 동료가 쓰러지는 순간에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들썩이기만 하는 탈영병들.

애초에 옷을 두껍게 껴입은 상태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으니, 민첩하게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은하는 창으로 한 놈의 목을 꿰뚫고 나머지 한 놈의 머리에 다시 도끼를 박아 넣으려다가.

우뚝.

"아 맞다."

잠시 멈췄다.

"으. 으어…."

시퍼렇게 빛나는 도끼날이 놈의 눈 바로 앞에서 우뚝 멈췄다.

정예병은 아니었는지, 남은 놈은 습격을 알리는 대신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놈의 사타구니 밑으로 축축하고 지린내 나는 그림자가 번졌다.

유은하가 쉿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렸다.

탈영병은 용케도 그 의미를 알아들으며 덜덜 고개만 끄덕였다.

"마을 중앙에 나머지 놈들이 다 모여 있지?"

도리도리.

"다른 곳에도 있다고?"

끄덕끄덕

"어디에?"

"...."

"작게 말해."

"요, 요 반대편 끝자락, 울타리가 어깨까지 오는 집에…."

"울타리가 어깨까지 오는 집?"

청화에게 들었던 청화네 집 특징이었다. 무두질할 때 고약한 냄새가 나서 마을 구석에 집이 있다고.

심지어 주변에는 다른 집도 없다고 했었다.

"왜 거기까지 간 거야?"

"빨랫줄에 두자(兜子)가…."

두자는 가슴가리개를 뜻한다는 걸 아는 유은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병신들."

탈영병 주제에 여유도 많다.

한겨울에 불도 제대로 때지 못하고 숨어 있는 주제에 아랫도리 휘두를 생각은 있나 보다.

"몇 명이나 있어?"

"살려주…."

"싫어."

푸욱.

유은하의 빈손을 보고 잠시 방심하던 탈영병의 목에 도축용 단검이 틀어박혔다.

그륵거리는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탈영병.

어차피 그가 순순히 정보를 불었어도 유은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염두에 두기만 할 뿐.

정보의 신뢰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출처라는 건 유은하에게 기초적인 상식이었다.

시체를 정리한 유은하는 아예 목책 밖으로 나와 마을 외곽을 빙 돌았다.

그렇게 청화가 살던 집에 도착하니.

청화의 말대로 주변에 묘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추위가 조금만 가시길 기다리자고. 청해로 올라가서 황하를 타고 산동까지 가면 아무리 당가라도 포기하겠지."

"하아. 화약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금덩이 받을 때는 좋아 죽으려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그래?"

"아, 지금 그 금덩이가 무슨 소용이냐고! 먹지도 못하고 태우지도 못하는 건데!"

금덩이라는 말에 유은하의 귀가 쫑긋거렸다.

'화약? 저놈들, 군문에서 사용하는 화약을 팔아먹고 도망친 건가?'

정말로 간 큰 놈들이다.

"그래도 큰형님이 우리를 믿어서 맡긴 거잖아."

"하긴…. 곰탱이 새끼는 아예 경계나 서라고 보냈지."

"그래. 게다가 무려 백호(百戶)까지 지내셨던 분이잖냐. 아니었으면 우리가 살면서 금덩이를 만져볼 수나 있었겠어?"

집 안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라도 보면서 기분 풀자고."

"하아. 이 요망한 것. 어떻게 먹지도 못하는 게 보고만 있으면 배가 부를까?"

"미친놈. 방금 먹지도 태우지도 못한다고 성내던 놈 맞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고프고 춥다며 투덜거리던 이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바뀐다.

유은하는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마력(魔力)이 있는 게 돈이니까.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진 마물은 항상 화를 불러온다.

콰직!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놈들이 돌아보기도 전에 시퍼런 도끼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20화. 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