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page01 - 프롤로그
<소설에 나오는 단체나 지명 등은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땅에 맡기고 이 몸을 쉬리니, 꾸밀 것 없이 내가 풍류로다."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킨 광현이 모든 힘을 쥐어짜 힘겹게 시 한 소절을 읊었다.
사세구(辭世句).
사세구는 죽음 직전 남기는 시가를 가리키는 말로, 불가에서는 임종게라고도 했다.
광현이 읊은 사세구는 일본 전국시대 영주 중 한 명인 카이의 호랑이(甲斐の虎) 다케다 신겐이 남긴 것으로, 신겐을 좋아했던 광현은 종종 속으로 이 사세구를 읊조렸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풍류로 칭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낭만 넘치는 사내인가.
'하지만 아무리 낭만이 넘쳐도 사세구는 유언일 뿐이지.'
그리고 그런 사세구를 소리 내 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죽음이 다가왔다는 말과 같았다.
"사세구라. 와, 우리 이사시 보좌님. 가실 때도 예술로 가시려고 그러시네."
피범벅이 된 광현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고 있던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실소를 흘렸다.
"왜? 그러면······ 안되나?"
"그럴 리가요. 어차피 마지막인데 안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남길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
광현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이제와 물어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
"형님이, 곧 은퇴하실 게 뻔한데 못할 짓 해서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십니다."
"큭, 웃기고 있네. X나 뱅뱅이다."
"아무튼 먼 길 편히 가십시요."
타앙~!
총성과 함께 광현은 왼쪽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총알?
아니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가슴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광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광현이 늘 걸고 있던 목걸이 펜던트.
서른 살쯤 사귀었던 여자가 준 것으로 안에는 조잡한 월신 츠쿠요미의 보석십자수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이 총알과 함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심장을 쐈는데 명치에 맞는 상대의 개 같은 사격 실력으로 인해서.
'이런 썅.'
2화
page02- 삶의 단상
이사시 고토.
한국명 정광현, 그는 재일교포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였다.
광현의 부모가 처음 만난 건 1980년대 초.
유학생이었던 어머니와 야쿠자 지망생(?)이었던 아버지의 짧고 강렬했던 불장난이 남긴 건.
여자는 남자 잘못 만나면 신세 조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문제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이 나고 대한해협을 건넌 어머니의 배 속에 광현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광현의 외가에서는 뒤집어졌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금지옥엽(金枝玉葉) 아끼던 막내딸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의 씨를 베어 왔으니.
집안 어른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광현의 외가는 결코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80년대 자식을, 그것도 막내딸을 유학 보낼 수 있는 집안이 평범할 리 없었다.
대대로 양반가에 지역유지, 현재도 B2B(기업 간 거래)를 주력으로 하는 사업체를 운영하며 준재벌 소리를 듣는 명문(名門).
그런데 그런 집안에서 미혼모가 나왔으니, 금지옥엽이 집안의 치부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미혼모는 죄인 아닌 죄인.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외가에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어머니와 광현을 지방에 유폐시켰다.
그 뒤로는 누구나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생각할 수 있는 막장이 벌어졌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제발 어디 가서 죽어 버리면 안 되겠니?'
그렇게 매일 같이 술에 절어 광현을 학대하던 모친은 광현이 열 살이 되던 해 여름, 끝내 욕실에서 손목을 그어 버렸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어린 광현이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기 전 사흘 간이나 그녀의 시신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넘쳐흐르던 물과 피.
지독한 냄새 그리고 벌레.
마치 절 입구를 지키고 선 사천왕상처럼 부풀어 오르던 어머니의 시신.
그 끔찍한 기억은 평생 광현을 따라다녔다.
'어미 잡아먹은 괴물.'
'재수 없는 사생아.'
외가 친척 누구도 광현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결국 외가에서는 광현의 아버지를 찾아 광현을 유기하듯 떠맡겼다.
어느새 어엿한(?) 야쿠자가 되어 있던 아버지에게 갑자기 나타난 광현의 존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게다가 광현의 아버지는 빈말로라도 좋은 아버지라 할 수 없었다.
야쿠자와 좋은 아버지가 양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행이라면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광현을 신체적으로 학대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광현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광현은, 철없던 시절 불장난이 남긴 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방임.
한국에서 일본으로 갑자기 바뀐 환경까지.
그런 상황에서 광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미쳐버리거나 삐뚤어지거나.
광현은 후자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됐냐고?
광현에게 일말의 정도 주지 않던 무책임한 아버지는 광현이 열아홉이 되던 해에 조직 간 항쟁에 나섰다가 눈먼 칼을 맞고 복막염에 걸려 죽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서른아홉.
평소 존경하던 재일교포 레슬러 역도산과 같은 나이, 같은 이유였다.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지.'
역도산을 죽인 건 통칭 삼 대 조직 중 하나인 스미무라카이의 하부 조직 대일본흥업의 조직원.
야쿠자란 말이다.
그것도 '발을 밟았다.' '밟지 않았다.'의 시답지 않은 다툼을 벌이다가···.
그런데 역도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야쿠자라니 모순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죽고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광현을 받아 준 것이 조직이었다.
그때 광현의 나이가 열아홉.
평범한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설 때.
광현은 조직의 카이쵸(회장)로부터 사카즈키고토(술잔을 주고받는 입단식)를 받고 정식 조직원 와가슈가 되었다.
이후 광현은 거침없이 질주했다.
서른에 조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서른일곱에 지부장, 마흔넷에 와카가시라 보좌가 되었다.
와카가시라 보좌는 부회장 와카가시라를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로 조직의 실세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광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영화의 대사처럼.
「잘난 놈 재끼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잽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그렇게 살았다.
야쿠자로서 광현은 가히 수라(修羅)의 길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영광.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마흔을 넘긴 이후 여기저기 삐걱거리던 육신은 쉰을 넘긴 순간, 본격적으로 고장 나기 시작했다.
술, 담배, 여자.
평상시 무절제한 삶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직속이라 할 만한 조직원의 숫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 조직 내 영향력도 대폭 감소.
죽기 직전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쉰둘.
8대 계승식에 참석했다가 배신자의 총에 맞아 죽었다.
한때 관서의 독한 호랑이(?西毒虎)라 불리던 이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허무했다.
'이런 게 주마등인가?'
주마등(走馬燈).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찰나이자 영원 속에서 살아온 모든 시간을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 광현에게 물었다.
「후회하나?」
후회라.
야쿠자의 삶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처구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가슴 속 한편 약간의 시린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참 많은 것을 움켜쥔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남은 것이 없었다.
가정?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쁜 놈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이성에 굶주려 본 적은 없었다.
'망할 아버지가 물려준 것 중에 유일하게 쓸 만한 게 세숫대야였으니까.'
거의 전부가 걸즈바나 캬바쿠라 패션헬스, 소프랜드 같은 곳에 출근하는 직업 여성들이었지만, 이쪽이 야쿠자인 이상 직업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만남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그가.
항상 그를 저주하던 어머니가.
언제나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조직 생활은?」
나름 잘나가긴 했지만, 자신 있게 잘했다고 말하기에는 뒷맛이 썼다.
애초에 야쿠자 짓을 잘했다고 말한다는 게 맞는 것인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보통 계승식이 끝나면 그동안 부두목인 와카가시라를 보필했던 보좌들은 직계 단체의 장들로 자리를 옮기기 마련이었다.
이는 산하 조직이지만 독자적인 세력의 장이 되어, 조직의 통제로부터 제한적이지만 자율권을 부여 받는 것을 말했다.
무릇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나은 법 아니겠는가?
개중에는 용의 몸통이나 꼬리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야쿠자라는 놈들 종특이 반골(叛骨)이라 어떻게든 대가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반면 광현은······.
'고문으로 물러날 예정이었지.'
고문은 회장의 조언자 정도의 역할로 실권이 거의 없는 명예직이었다.
이는 사실상의 은퇴라고 볼 수 있었다.
쉰둘,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고문같이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직계 단체를 결성하기에는 따르는 조직원의 수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현직에 남아 있기에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잘난 놈 재끼고 못난 놈 보내다 보니 주위에 남은 놈이 없더라.'
광현의 상황이 딱 그랬다.
인망(人望).
돌아보면 광현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무슨 범죄조직이 인망을 찾느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 야쿠자 세계는 이익만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번뇌'라는 이명을 가졌던 야쿠자 스가타니 마사X의 일대기다.
스가타니 마사X는 일본 최대 폭력 조직 야마모토구미의 하부 조직인 스가타니구미의 장으로 전통적인 야쿠자 산업 이외에도 금융, 재개발, 부동산 등등으로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며 야마모토구미의 은행장이라 불렸다.
1973년 일본 경시청이 발표한 그의 수익은 연간 20억 엔.
지금도 한화 200억에 가까운 거금이니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막강한 자금력 덕분에 그는 야마모토구미의 와카가시라 보좌의 자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금력을 과신한 나머지 점점 안하무인으로 행동했고, 조직 내 그의 인망은 빠르게 바닥을 쳤다.
급기야 그는 모종의 사건으로 야마모토구미로부터 절연(연을 끊는다.) 처분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의 행보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건재한 그의 조직 스가타니구미와 사업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달리 절연 처분 이후 스가타니구미의 조직원들은 곳곳에서 죽어 나갔고 사업체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끝내 목숨마저 위협받게 된 스가타니 마사X는 조직 해산과 함께 은퇴를 발표한 뒤 그 해 간암으로 병사 했다.
장례식은 소박했고 찾는 조문객도 많지 않았다.
생전 그는 넘치는 돈으로 국외 여행을 갔다 오면 산하 업소에 일하는 여성들에게까지 선물할 만큼 넉넉한 인심을 자랑했지만, 야마모토구미의 눈치를 본 대부분의 인사가 조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원래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법이지.'
그 외에도 최고의 인망을 자랑한 최후의 바쿠토(도박사) 하타니 모리나가, 무력으로 도호쿠 지방을 통일하고 도후쿠의 사자라 불린 안도 히데키 등등.
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이들의 말년은 다들 좋지 못했다.
하타니 모리나가는 파산 이후 자살, 안도 히데키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 종적이 묘연했다.
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부하들의 손에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돈, 권력, 인망.
야쿠자의 간부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갖춰야만 하는 자리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거군.」
'실패라,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야쿠자라는 게 인생 실패인데 그 와중에 또 무슨 실패를 논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
광현의 입가에 착잡한 고소가 물렸다.
그러다 문득.
'주마등이 말도 하나?'
하지만 그의 의문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뒷덜미를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야, 이사시.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
"정신 안 차려!"
뒷덜미를 잡혀 내동댕이쳐진 광현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동댕이친 이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광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 크게 흔들렸다.
"태현 형님?"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갑자기 한국 이름은 왜 쳐 부르고 지랄이야."
태현이라 불린 사내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광현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태현 형님? 형님은 분명··· 죽었는데···."
"뭐?"
태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죽었다고? 와, 이 새끼가 야구방망이에 대가리가 날아갈 뻔한 걸 살려 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송장 취급하네."
"아니, 그게···."
"아, 됐고. 일단 저 양키(양아치) 새끼들부터 처리하고, 넌 나중에 보자."
3화
page02 - 삶의 단상
광현은 사내의 얼굴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하와이안 셔츠와 트랙 팬츠.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퐁파두루와 리젠트스타일이 섞인, 일본 양아치 대표 헤어스타일. 일명 찐빵 대가리.
그와는 대조적으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
그는 광현이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한국 이름 김태현.
일본 이름 마사오카 키리히데.
광현과 같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조직 생활 초기 광현이 조직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이였다.
워낙 넉살이 좋아 아래위 조직원 모두와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것은 물론 싸움 실력도 발군이라 서른도 되기 전에 조장으로 발탁, 다음 대 조직을 이끌어갈 에이스라 불렸다.
'하지만 태현 형님은······.'
조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마모토구미의 하부조직 주가이구미에게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임을 당했다.
차기 에이스를 잃은 광현의 조직 카와구치카이는 분노했고, 이는 곧 주가이구미가 소속되어 있던 야마모토구미와의 대규모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아마가사키 항쟁.
2000년대 서일본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단 항쟁 중 가장 큰 항쟁이라고 평가받는 아마가사키 항쟁은 양쪽 합의 사백여 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항쟁의 결과 항쟁의 시발점이었던 주가이구미는 괴멸.
야마모토구미는 아마가사키 시의 영업장 대부분을 카와구치카이에 양도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 보여준 전투력과 잔인한 일처리로, 광현은 관서의 독한 호랑이 관서독호(?西毒虎)란 별칭을 얻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태현 형님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았지.'
당시 아마가사키 시에 배치되어 있던 조직원들은 조직 내에서도 고르고 고른 최정예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마가사키는 야마모토구미의 본진인 고베시와 카와구치카이의 세력권인 오사카시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곳을 담당하던 조장, 그것도 태현 같은 이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주가이구미의 구미쵸를 잡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태현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었던 주가이구미의 구미쵸는, 광현이 야마모토구미의 지원군을 막고 있던 사이 카와구치카이 본진에서 파견한 복수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복수대를 이끌었던 이가.'
거기까지 생각한 광현의 얼굴이 굳었다.
'우오누마 우스이.'
광현은 천천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는 광현과 같은 와카가시라 보좌이자 최선임인 본부장(本部長)이었다.
또한 독고다이였던 광현과 달리 조직 내 최대 계파 중 하나인 우오누마 일가의 장(長)이기도 했다.
그리고······.
'계승식을 피로 물들인 배신자.'
순간 가슴 속에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광현은 그 불길을 잠재웠다.
'어차피 죽어버린 내가 뭘 할 수···.'
그런데 그때 미지근하고 텁텁한 바람이 광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난 분명 죽었는데."
광현은 손을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대기의 질감.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꿉꿉한 바람과 오색 단풍이 무색하게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황혼의 태양까지.
그것은 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분명 살아 있는 육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광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광현의 눈이 커졌다.
'여기는.'
그는 여기가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오사카부 최남단, 한난시의 이름없는 공터.
'거기다 이 상황은.'
기억대로라면 지금은 삼십여 년 전, 광현이 이제 막 조직원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태현과 함께 조직의 핵심 구역 중 하나인 한난시에서 열리는 가을 축제 경비를 맡았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축제의 마지막 날.
축제장에서 진상을 죽이던 양아치 몇 놈을 공터로 끌고 가 쥐어박던 참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듣고 모인 것인지 양아치 놈들의 동료가 몰려왔다.
이쪽은 태현과 광현을 포함 네 명, 저쪽은 십여 명.
게다가 누가 양아치 아니라고 할까 봐 손에는 야구 배트에 각목, 철근까지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물론 이쪽도 명색이 야쿠자인 만큼 칼 한 자루 정도는 차고 있었다.
야쿠자라 하면 한국인들 대부분은 통칭 회칼, 사시미 등으로 불리는 야나기바라를 들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한국 조폭들 이야기였다.
일단 야나기바라는 크기도 크기지만 유연성이 전혀 없어 잘 부러지기에 야쿠자들은 야나기바라 대신 사무라이 단검과 비슷한 형태의 칼집이 있는 겐사키 스타일의 키리츠케를 선호했다.
'이것도 회칼이라면 회칼이지.'
그러나 상대가 무슨 야쿠자도 아니고, 논두렁 밭두렁 양아치와 어설픈 폭주족들을 상대로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몇 놈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것을 보니 미성년자가 분명 했다.
'그래서 처음엔 태현 형님이 좋게 타이르려고 했지.'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이쪽이 곱게 나오자 상황을 오판한 놈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초장에 본보기로 몇 놈을 박살 내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이후에는 개싸움이 벌어졌고, 이기긴 했다.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쪽수 앞에 장사 없다고 싸움이 끝났을 때, 두 명의 조직원들은 물론이고 태현과 광현 역시 만신창이가 됐다.
심지어 조직원 한 명은 팔과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예로부터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했지.'
얼마만큼의 힘으로 어디를 때려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모르는 철부지들은 '맞고 뒈져라.' 식으로 둔기를 휘둘렀지만,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했던 광현과 조직원들은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한동안 양아치들에게 두들겨 맞은 한심한 놈들이라는 조롱을 받았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졌다.
그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달려들던 양아치 한 놈을 걷어차 버린 태현이 소리쳤다.
"어이, 이사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아."
다시 한번 짧은 탄식과 함께.
번뜩.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가정이 광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온 건가?'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다.
아니라면.
조금 전 광현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나비의 꿈'과 같이 찰나의 시간에 인생이라는 꿈을 꾼 것인지도 몰랐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눈앞의 양아치 새끼들부터 처리하고 봐야 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광현은 조직원을 향해 각목을 휘두르는 양아치에게로 달려들었다.
"죽어, 이 망할 새끼야!"
갑작스러운 광현의 난입에 당황한 양아치가 손에 든 각목을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나름 위협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관서의 독한 호랑이라 불리며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던 광현의 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런데 순간, 광현의 시야에 상대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은 그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상대에게 달려든 순간 광현은 느낄 수 있었다.
힘, 스피드, 반사 신경, 균형 감각, 동체 시력 등등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상승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단순히 술과 담배에 절어 있던 몸이 젊어지면서 느끼는 괴리감 따위가 아니었다.
단언하건대.
'전성기 시절에도 이런 몸은 아니었어.'
광현의 정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신체 능력에 당혹한 사이.
그림처럼 양아치의 가슴 안쪽을 파고든 광현의 주먹은 상대의 턱을 정확히 날려 버렸다.
퍽!
"크아아악!"
둔탁한 타격음과 처절한 단말마.
공장난 팝콘 기계에서 허공에 자신의 이빨을 뿜어낸 녀석은 수 미터를 날아가 쓰레기처럼 구겨졌다.
무슨 자동차에라도 들이받힌 듯, 눈동자를 까뒤집고 시뻘건 피 거품을 뿜어내며 경련하는 녀석의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순간 공터에는 거짓말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한 양아치들은 물론이고 태현을 비롯한 조직원들도 복잡한 표정으로 쓰러진 양아치와 광현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당혹스럽기는 광현도 마찬가지였다.
신체가 말도 안 되게 발달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지만 언제까지 당황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친피라(양아치)새끼들. 어디 계속해 볼까?"
"히익."
"빨리 안 꺼져? 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앞으로 나선 광현이 양아치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가 한창 관서의 독한 호랑이로 이름을 날릴 때는 웬만한 야쿠자 간부들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비록 육신이 젊어진 탓에, 그 시절만큼의 위압감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중이떠중이 양아치들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광현에게 덤빈 자신들의 동료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바캐모노다(괴물이다)!"
"니게로(도망쳐)!"
녀석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꽁지 빠지게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다행히 의리는 있었는지 쓰러진 동료까지 챙겨서.
태현은 물론이고 조직원들도 그런 그들을 지켜만 보았다.
애초부터 간단히 교육만 하려고 했었고, 이 이상으로 일이 커져 봐야 귀찮아지는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이, 손은 괜찮냐?"
녀석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태현이 광현에게 물었다.
보호 장비 없이 맨주먹으로 상대의 턱을 때리면, 때린 쪽 역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피부가 찢어지는 건 여반장에, 재수 없으면 손가락 뼈가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광현의 손은 멀쩡하다 못해 타격으로 인한 붉은 변색조차 없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그래? 와, 근데 너 펀치력 장난 아니다. 너 뭐 군대에서 특수 훈련 같은 거라도 받았냐?"
"그럴 리가요."
놀랍게도 광현은 군필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광현의 국적은 당연히 한국이었다.
하지만 청소년기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기에 재외동포법에 따라 37세까지 한 해에 6개월 이상을 한국에서 체류하지 않는다면 원칙적으로 입대할 필요는 없었다.
사단은 조직에 입단하고 얼마 후 한국에서 한 장의 소장이 날아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꽤 많은 유산을 광현 앞으로 상속한 것이 문제였다.
당신께서는 아픈 손가락인 외손자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겠지만, 친척들 입장에서는 더러운 사생아가 자기들 것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광현 역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제 것을 빼앗길 만큼 녹록한 인사는 아니었기에 조직의 지원을 받아 맞대응에 나섰다.
대부분이 그렇듯 법정 공방은 지루하게 이어졌고, 아차 하는 사이 체류 기간 6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결국 소송은 광현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병무청에서 발송한 입영통지서였다.
'참 많이 고민했지.'
제2의 스티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를 땐 국가의 아들, 다치면 느그 아들, 죽으면 누구세요가 될 것인가.
결국 광현은 나중을 위해 조직의 허락을 얻어 당시 유행하던 더-금광의 '2년 2개월 동안'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군에 입대했다.
4화
page02- 삶의 단상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거쳐 자대 배치를 받은 광현의 주특기 번호는 1122, 2012년 이후에는 111 104.
대한민국 군필 남성이라면 이 주특기 번호를 듣는 순간 애도를 표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122번 주특기의 무기는 헬중의 헬이라 불리는 90mm 무반동총이었기 때문이다.
전장 135cm, 중량 17kg, 최대 사거리가 2100m에 달하는 무반동총은 한국군 대대급을 대표하는 대전차 화기였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건 이놈이 보병 화기라 행군 때마다 등에 지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군장에 개인화기까지 들고서······.'
한국군 완전군장의 평균 무게는 20kg 내외, 여기에 무반동총을 지고 소총까지 들면 근 40kg이라는 정신 나간 무게가 완성됐다.
그걸 둘러메고 20KM 행군에 나설 때면.
내가 걷는 것인지 요단강을 헤엄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곤 했다.
그 외에도 억울한 일이 참 많았다.
유격 세 번에, 제대 한 달을 남기고 끌려갔던 KCTC 훈련, 기타조선(일본에서 북한을 부르는 말)의 돼지 새끼가 발광하는 바람에 잘려버린 말년 휴가까지.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억울해서 다시는 군대 쪽으로 오줌도 안 싸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오십 줄을 넘긴 이후에는 이따금 다사다난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었던 것도 같았다.
"형님들,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오미코시(가마)가 거의 해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제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겁니다. "
"이런 젠장······."
상념은 깨우는 조직원의 외침에 광현은 저도 모르게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아슬아슬하겠는데."
한난시의 '야구라 축제'는 시를 대표하는 하타신사를 나온 오미코시(가마)가 오자키초에 있는 해안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후에는 뒤풀이로 불꽃놀이와 야시장이 서는데 경험상 이때가 가장 위험했다.
가시지 않은 축제의 열기에 불꽃을 안주 삼아 야시장을 즐기다 보면 피 끓는 청춘들의 객기가 고개를 들기 마련.
'객기는 시비를 부르고 시비는 싸움으로 번지지.'
재수 없으면 축제가 한순간에 아사리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 광현을 비롯한 조직원들의 해야 할 일이었다.
일견 멀쩡한 공무원과 경찰들을 놔두고 야쿠자가 축제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축제 마츠리와 야쿠자.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야쿠자의 계파를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현재 야쿠자는 크게 도박꾼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야쿠자 바쿠도계와 에도시대 행상인들이 자신들의 이권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조직한 자경단을 뿌리에 둔 데키야계로 나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바쿠도는 일반적인 조폭, 데키야는 조선 시대 보부상과 같은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종국에 하는 짓은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말이야.'
두 계파 중 축제와 연관이 있는 계파는 데키야.
광현이 속한 조직 카와구치카이 역시 데키야계 조직이었다.
이런 데키야계와 축제의 역사는 1700년대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에도막부에서는 일 년을 주기로 지방 영주가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는 산킨코타이(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실행했다.
주기적으로 많은 인원이 오가다 보니 참근교대 행렬이 지나는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마을과 도시가 형성.
그렇게 발전한 도시와 마을에는 신사가 생기고 그 신사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바로 오늘날 일본 전통 축제 '마츠리'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참근교대 행렬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도시들의 마츠리는 전통도 특색도 없었다.
이때 나서 도움을 준 이들이 참근교대 행렬을 따라다니며 물건을 사고팔던 행상인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뢰를 받은 행상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마다 특색 있는 축제를 구성 해주는 것은 물론 행사에 대한 전반적인 진행을 맡기도 했다.
일종의 아웃소싱(outsourcing)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특수한 관계가 한번 틀을 형성하면 웬만해서는 바꾸려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특성과 맞물려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관계도 흔들리고 있지.'
버블붕괴 이후 일본 정부가 폭력단대처법, 일명 폭대법을 통해 조직들의 숨통을 조이면서.
축제를 주관하는 신사와 지역 유지들 역시 조직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런 시기에는 최대한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는게 좋았다.
'기억대로라면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상황이란 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오가치초를 향해 달려가는 광현과 조직원들의 발걸음은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 * *
"고작 양키 몇 놈 처리하러 가서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은 거야."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나름 쓸 만한 루키들이라고 그래서 믿고 맡겼더니 이래서 어디 같이 일하겠어?"
"면목없습니다."
다행히 축제는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후 광현과 태현은 지부장 야야마 타츠마사의 매서운 질책을 들어야 했다.
"망할 영감쟁이 같으니."
한바탕 질책을 당하고, 사무실 밖으로 쫓겨난 태현이 계단에 쭈그려 앉기 무섭게 짜증을 냈다.
"사정이 있겠죠."
"사정? 무슨 사정? 그냥 저치는 우리가 재일이라서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급기야 태현은 사무실을 향해 주먹감자를 날렸다.
광현과 태현이 속한 카와구치카이는 데키야계 조직이라는 특수성 이외에도 수뇌부의 절반 이상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또 다른 특수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특수함은 종종 일본인 조직원들과 재일 교포 조직원들 간의 마찰을 발생시키곤 했다.
특히 소장파로 분류된 젊은 조직원들 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몇 년 후 큰 문제를 일으킨 것도 모자라.
종내에는······.
'파국을 불렀지.'
입가에 쓰디쓴 미소를 지은 광현은 아직도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태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까지 형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태현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원들 사이를 원만하게 조율, 불상사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반대로 더 막대한 피가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 듯 보면 더 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태현이었지만, 그 역시 본질은 야쿠자였기 때문이다.
잠시 태현의 주먹감자를 구경하고 있던 광현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게?"
"더 있어봐야 뭐 합니까.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축제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을 정산해서 본부로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지부가 해야할 일이다.
"내일 용돈 좀 나오겠지?"
"그러겠죠. 부수입도 꽤 괜찮았다고 하니까요."
참고로 말하자면, 카와구치카이는 축제운영위원회에서 받는 돈 이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여 적지 않은 부수입을 올렸다.
가끔 일본 축제를 구경하다 보면 식칼 대신 타코야키 바늘을 들고 신나게 타코야키를 조져대는 인상 험한 아저씨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 중 반수 정도는 데키야계 조직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야. 그러지 말고, 내일 용돈도 나오는데 오랜만에 소프나 가서 슉슉이나 하자. 요 앞에 물 좋더라."
소프, 정식 명칭 소프랜드는 한국의 안마시술소와 비슷한 퇴폐 업소였다.
원래 명칭은 토루코부로-터키목욕탕, 줄여서 터키탕.
당연히 이딴 곳에 자기 나라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한 터키 국민과 학자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소프랜드로 이름을 바꿨다.
예전 같았으면 두말없이 따라나섰을 테지만, 지금 광현의 머릿속에는 그런 곳이 들어올 리 없었다.
"형님이나 슉슉을 하던 쏙쏙 하든 마음대로 하시고 전 피곤해서 쉬어야겠습니다."
"얌마, 남자가 그게 피곤하면 관뚜껑에 못질해야 해."
"아 진짜!"
광현의 짜증에 태현이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너 오늘 유난히 이상한 거 알아? 아까는 싸우다가 정신을 놓더니, 이제는 별것도 아닌데 짜증까지 내네. 어디 아파?"
"···."
순간 광현은 말문이 막혔다.
평소와 다를 수밖에.
이 자리에 있는 건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똘똘 뭉쳐 생각 없이 좌충우돌하던 스무 살 애송이가 아니라 관서독호라 불리던 늙은 생강이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좀 피곤해서 짜증이 났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한번 고개를 갸웃거린 태현은 이내 광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이쪽 생활에 아직 적응도 제대로 못 했을 테니."
"감사합니다. 형님."
"그나저나 집으로 갈거지?"
"네."
"가는 길에 나 숙소에 좀 떨궈주라. 이왕이면 너희 집에서 재워주면 더 고맙고."
"···."
* * *
"크허, 커커커."
캔맥주 서너 개를 들고 발코니로 향하던 광현은 소파에 널브러져 이따금 이상한 숨소리를 내는 태현을 힐긋 바라보았다.
씻고 맥주 한캔 마시기 무섭게 곯아떨어진 걸로 봐선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도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광현은 이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캑 맥주 특유의 톡 쏘는 탄산과 함께 적당한 쌉쌀함과 청량감이 졸음을 밀어냈다.
맑아진 정신과 함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심란함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죽은 게 2034년 쉰둘의 가을, 지금이 2004년 스물둘의 가을'
삼십 년을 돌아왔다.
뿐인가.
한 방에 양아치를 날려 버린 이 말도 안 되는 신체 능력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같은 사례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애니메이션 아니면.
「퇴물 야쿠자였던 내가 젊어져서 열도 제패한 건에 대하여.」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클릭할 엄두가 나지 않는 제목의 라이트 노벨뿐이었다.
그도 아니면 딱 보기에도 수상한 종교 관련 사이트들이거나.
거기다.
'인터넷은 또 왜 이렇게 느려. 답답해 돌아가실 뻔했네.'
2004년 일본의 인터넷 속도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잃어버린 10년'의 여파로 후진국으로 떨어진 일본의 it 산업은 연이어 터진 닷컴버블의 붕괴에 휩쓸려 완전히 골로 가버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2001년 3월 총리실에서는 e-Japan 전략을 수립 인터넷 가입자를 늘리고 있었지만, 글자 그대로 가입자만 늘어났을 뿐 실제 인터넷 사용자와 속도는 여전히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스마트폰을 내놨다는 거지.'
벌써 손바닥에 착하고 감기던 네모난 물건의 감촉이 그리웠다.
순식간에 맥주 한 캔을 다 비운 그는 달빛을 안주 삼아 또 다른 맥주 한 캔을 땄다.
그런데 그 순간···.
두 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광현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달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가을밤, 온전한 자태를 드러낸 보름달이 따스하고 안온하게 광현을 감싸 안았다.
달빛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두근거림은 심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달과 얽힐 만한 것이라면···.
'팬던트.'
죽기 직전까지 광현 걸고 있던 물건.
그리고 펜던트 안에 있던 것은 보석 십자수로 수 놓인
월신(月神) 츠쿠요미노 미코토(月?命).
통칭 츠쿠요미라 불리는 달의 신.
그리고 츠쿠요미가 상징하는 또 다른 것은···.
세월과
'시간.'
5화
page03? 목표와 일상
일본신화에 의하자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에 의해 일본이 잉태된 이후.
삼귀자가 태어나는데.
첫째가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둘째가 달의 신 츠쿠요미노 미코토.
셋째가 바다와 태풍의 신 스사노오노 미코토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달.
정확히는 월 신 츠쿠요미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 광현은 사무실에 병가를 내고 지난 일주일간 도서관에 처박혀 삼귀자, 그중에서도 츠쿠요미에 관한 자료들을 미친 듯이 탐독했다.
'회귀 전이었다면 두말없이 인터넷을 이용했겠지만.'
현재 인터넷은 속도부터 정보의 양과 질 등등 어느 것 하나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광현이 츠쿠요미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건 그냥 성질 더러운 개 백수 잔아."
츠쿠요미는 그리스로마신화로 치면 올림포스 12신.
이집트 신화라면 최고 신들인 엔네아드에 해당하는 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신이라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일본신화가 수록된 고사기는 물론 육 구 사라 불리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몬토쿠 천황 실록>, <삼대실록>등을 다 뒤져 봐도 츠쿠요미에 관한 기록은 극히 미미했다.
그렇다면 츠쿠요미의 형제자매들, 아마테라스와 스나노오읜 기록 역시 적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본 왕실의 왕조신인 아마테라스는 왕실의 역사와 함께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고, 스사노오는 신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재앙 덩어리였기에 여기저기 잘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면 츠쿠요미는 큰 행적이라고 해봐야.
아마테라스의 명을 받고 음식의 신을 만나러 갔다가 음식의 신이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음식을 꺼내놓자, 그것이 역겨워 음식의 신을 죽여 버린 뒤 아마테라스로부터 의절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이 행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츠쿠요미의 성격이 동생 스사노오 못지않게 더럽다는 것 정도.
이후 츠쿠요미에 관한 기록은 가끔 형제자매인 아마테라스나 스사노오의 일화에서 '그런 애가 있다.' 정도로 언급되는 것이 다였다.
츠쿠요미에 대한 자료를 더는 구할 수 없게 된 광현이 다음으로 집중 한 것은 그에게 펜던트를 건넸던 여자였다.
그런데 하필 그 기억만이······.'
'흐릿하다.'
지난 며칠간 도서관을 오가면서 알아차린 것 중 하나가 그의 변화는 단순히 회귀와 육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변화, 그것은 터무니없이 발달한 기억력이었다.
'이게 단순히 기억력이 좋아졌다. 수준이 아니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의 기억이 마치 사진 파일을 불러오는 것처럼 떠올랐다.
심지어 회귀 이전의 기억들까지.
'츠쿠요미는 시간의 신이자 세월의 신, 인간에게 세월이란 망각이지만, 신에게 망각이 있을 리 없지.'
그런데도 그에게 펜던트를 주었던 이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는 것은.
광현을 회귀시킨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서른 즈음을 전후해서 만나 꽤 오랜 시간 관계를 지속했던 것 같은데.'
딱 거기까지가 기억 전부였다.
그 외에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그녀에 대한 것들만을 지워 버린 것처럼.
이렇게 되자 더는 광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보통 범죄집단에 오래 몸담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술, 여자 등등.
방탕한 삶도 하루 이틀이지 이삼십 년을 그렇게 살다 보면 절로 넌덜머리가 나기 마련.
광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직을 나가고 싶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폭력단을 탈퇴하는 방법은 두 가지.
전자는 사고를 치고 처벌로 파문을 당하는 것.
야쿠자의 처벌은 반성<체벌<유비츠메(단지-손가락 자르기)<파문<절연<처단 순으로 이어지는데.
파문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의 사고를 쳐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턱대고 사고를 쳤다가 파문 대신 절연이나 처단을 받기라도 한다면 기껏 새롭게 시작한 인생이 비명횡사로 끝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파문의 처벌을 받는다 해도 손가락 한두 개는 내놔야겠지.'
모종의 목적을 가진 파문이 아니라면 처벌에 유비츠메(단지)는 필수 옵션이다.
'남은 건.'
정식으로 탈퇴를 신청하고 「재적확인증명서」를 받는 것.
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았다.
불치병이나 부모님의 마지막 소원 정도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허락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수 없으면 괘씸죄에 걸리면 손가락뿐만 아니라 아킬레스건까지 잘려나갈 수 있었다.
특히 광현에게는 후자가 전자보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받은 특혜가 좀 많았어야지.'
원래 조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준고세이인(準構成員)인 이라는 일종의 지망생(?) 단계를 거쳐야 한다.
참고로 광현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가 바로 이 준고세이인시절 이었다.
'보통은 몇 년간 준고세이인으로서 숙소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야쿠자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정식 조직원이 될 수 있지.'
그런데 광현은 이 과정 없이 바로 잔을 받고 정식 조직원이 됐다.
게다가 광현의 사카즈키코토는 그 자체로도 매우 특별했다.
보통은 특정한 날을 정해 신입 조직원 전체가 한 번에 잔을 받는 일반적인 사카즈키코토와 달리 광현은 오직 광현만을 위해 열린 사카즈키코토에서 단독으로 잔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광현의 사카즈키코토에는 카이쵸(회장) 이외에도 소사이(총재-주로 전대 회장), 사테이가시라(회장과 형제의 연을 맺은 간부)등등.
조직의 수뇌부 대부분이 총출동했었다.
'실상은 마침 할 일이 없었던 노인네들이 마실 나온 거였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덕분에 조직 내에서 광현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외에도 숙소 생활 제외에 외가와 법정 싸움 지원, 그리고 군대까지.
조직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광현에게 배려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런 광현이 조직을 나가겠다고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내일 아침은 와카야마만(태평양과 맞닿은 바다)용궁에서 먹게 되겠지. 탈퇴가 안된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복수.
하지만······.'
'이것도 당장은 힘들어'
계승식을 피바다로 물들인 배신자들의 주력은 조직 내 최대 계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우오누마 우스이와 그 일파.
그러나 지금 당장은 배신을 한 것도 아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배신할 때까지 기다려?'
최악은 삼십 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제정신으로 못 할 짓이다.
거기다 냉정하게 말해서 광현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우오누마와 그 일파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광현이 와카가시라보좌 일 때, 우오누마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본부장이었으니까.
그런 이의 배신이었기에 조직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이고.
'조직 내부에 있어 봤자 회귀 전의 재탕일 뿐이야. 조직과 척을 지지 않고 조직 외부로 나가서 배신자들에게 한 방 먹여줄 만한 방법이.'
순간 무엇인 가가 광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키쿄샤테이."
광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쿄샤테이(企業?弟).
기업사제는 한국의 반달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형식적인 파문을 통해 조직을 나온 기업사제는 조직의 기업들을 관리하고 조직이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세탁하는 업무를 주로 맞는다.
문서 상으로 확실하게 「재적확인증명서」를 받았기에 조직원이 아니지만, 실상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예전이었다면 키쿄샤테이 같은 건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서열상 기쿄샤테이는 조장급 간부지만, 조직을 나가 있기에 제대로 된 간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재수 없으면 돈세탁으로 딸려 들어가거나 꼬리 자르기를 당해 비명횡사 할 수도 있었다.
벌어들이는 돈도 개인 돈으로 딴 주머니를 차지 않는 이상 대부분을 조직에 상납.
일반 조장들보다 낫겠지만 그리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키쿄샤테이의 매력은 딱 하나.
일반인 코스프레가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키쿄샤테이의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문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거 하난 마음에 드네.'
외국인 중에는 야쿠자가 되면 반드시 이레즈미(일본 문신)을 해야 하고, 그 종류와 범위에 따라서 권위가 결정된다고 오해하는데.
'그건 극히 일부 조직, 주로 산요도나 규슈 쪽 촌놈들 이야기지.'
산요도는 주고쿠 지방 남쪽, 야마구치, 히로시마, 오카야마를 부르는 명칭이다.
'거긴 똘아이 천국이니까.'
말을 안 듣는다고 일반인한테 총질도 모자라 시의회 의장의 집에 수류탄을 까는 미친놈들이 있는 곳이다.
2010년대 총기를 가지고 부산에 은신해 있다 체포되어, 한국을 놀라게 한 야쿠자도 그쪽 출신이고.
'문신에 대한 것은 한 사람의 말로 정리가 가능하지.'
다오카 카미오.
야마모토구미의 삼대조장이자, 야마모토구미를 일본 최대 조직으로 만든 전설적인 보스.
그는 생전에 문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신 따위를 한다고 싸움을 잘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왜 조직원들이 문신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 몸에 내가 그리는 것도 아니고 남이 그려주는 그림 따위를 말이야.」
실제로도 그의 몸은 깨끗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지 않나.
'기쿄샤테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사업수완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시 그것뿐인가.'
데키야계 조직인 카와구치 카이의 주 수입원은 축제 관리.
하지만 그 이외에도 도박판, 유흥업소에서 받는 보호비, 파칭코 운영 같은 전통적인 수입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가장 각광 받는 수입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카이야(そうかいや).'
직역하면 총회꾼이 된다.
하는 일은 한국의 주총꾼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한국의 주총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한국의 주총꾼들은 나이 지극한 어르신들이 한두 주 주식을 들고 주주총회를 돌며 거마비를 받는 수준이다.
반면 소카이야(そうかいや)는 건실해 보이는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서 배당 이외의 커미션이나 빽마진을 요구하는 악질들이다.
안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일단 신사적으로 주주총회에 몸에 그림 좀 그리고 인상으로 먹어주는 애들을 보내서 진상을 죽이게 한다.
그게 어디가 신사적이냐고?
다시 말하지만 야쿠자다.
이 정도면 매우 신사적인 것이다.
비신사적인 예를 들자면.
몇 년 전 산요도 지방의 어느 조직이 어업협동조합의 권리를 얻어 조합에 별도의 수수료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합의 조합장은 그 어떤 압력과 협박에도 수수료를 주길 거부했고.
조합 회의가 있은 지 얼마 후 처참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었던 그의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꼴을 당했다.
그 일로 제대로 열받은 현경(현립경찰)이 조직의 우두머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사형선고를 받게 했지만.
'그런다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과 풍비박산이 난 집안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지.'
권선징악이고 자시고를 떠나 씁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6화
page03? 목표와 일상
따지고 보면, 조합장과 그 집안의 비극은 명백히 조직이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조직이 무리수를 둘 만큼 소카이야(そうかいや)가 조직에 이익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언뜻 보면 한국 조폭들이 하는 기업 사냥과 비슷해 보이지만 소카이야는 기업 사냥이 아니다.
한국 조폭들의 기업 사냥은 기존 경영진을 쫓아내 멀쩡한 기업을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소카이야는 타협 가능한 선에서 기존의 경영진들과 동거를 하는 것이다.
'거위를 달래서 지속적으로 황금알을 낳게 해야지, 거위가 할복을 하게 하면 어쩌잔 거야.'
애초에 대가리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밖에 안 나는 조직원들이 바이오, 전자, 유통 등의 기업을 집어삼켜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야나기바(사시미)를 들고 반도체를 협박한다고 10나노짜리가 9나노, 8나노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소카이야를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기업의 선정이다.
근본적으로 소카이야는 일종의 주식 투자와 같다.
그것도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
그런데 그 기업이 비전이 없거나 막말로 닷컴버블 때처럼 거품이 낀 기업이라면, 조직은 앉은 자리에서 막대한 손해를 보게된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기껏 주식을 확보했는데, 경영진의 뒷배에 조직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였다.
몇 달 전에도 도쿄의 한 조직이 의류 유통 기업에 소카이야를 들어갔다가.
불벼락을 맞고 와카가시라 보좌 중 한 명과 그 계파가 단체로 콩밥을 먹는 일이 있었다.
이사 중 한 명의 외가 친척이 한국의 치안정감에 해당하는 경시감이었기 때문이다.
'기동대가 사무실들을 개박살냈다지, 아마.'
한국이었다면 아무리 조폭이라도 이런 과격한 진압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은 시민 사회가 야쿠자를 비국민(非國民)으로 바라보는 데다.
국영폭력단(??暴力?)이라 불리는 기동대가 나선 일이기에 사건은 한낮의 촌극 정도로 치부됐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카이야를 들어갔던 조직도 여러 뒷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법이 명백한 상항에서 꼭지가 돌아버린 경시감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그리고.
'날아간 주식에 경시감을 달래기 위해 이리저리 찔러줬을 뒷돈까지······.'
조직은 막심한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해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은.
'작전에 참여했던 조직원들 손가락들이 남아나지 않았겠군.'
얼마나 많은 유비츠메가 이루어졌을지는 감도 오지 않았다.
그만큼 소카이야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큰 이익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간부들도 선뜻 소카이야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광현은······.
앞으로 삼십 년 후까지 어떤 기업이 유망하고 안전한지 다 알고 있었다.
소카이야를 하기 너무나 좋은 조건.
'문제는 말단 조직원인 내가 소카이야를 하자고 했다가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건데···.'
궁하면 통하기 마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렇게 앞으로 목표를 정한 광현이 제일 처음 한 일은, 오사카에 있는 금융회사로 달려가 주식계좌를 개설하고 앞날이 유망한 기업 몇 곳의 주식을 사는 것이었다.
외가 친척들과 악전고투 끝에 지켜낸 외할머니의 유산이 있으니, 시드머니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 * *
소카이야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광현은 한동안 조직원으로서 일상에 집중했다.
대중에게 야쿠자 조직원들이 평소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매체에서 본대로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보호비나 갈취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나와바리(구역)를 순찰하거나 사무실을 청소하고, 구역 내 민원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복장 역시 단정하면서도 불량스럽게 보이지 않는 게 모토였다.
업무를 볼 때나 구역을 관리 할 때는 원활한 일처리를 위해 정장을 애용하는 편이지만 단정한 의상이라면 굳이 복장에 규정을 두지는 않았다.
적어도 평시에 시커먼 정장을 입고 바퀴벌레처럼 우르르 몰려다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주 가끔 하와이안 셔츠에 빽바지, 빵머리를 한.
태현 같은 만찢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사회든 별종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처맞으면서도 저 복장만큼은 포기 못 한다고 하니. 윗선에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차기 에이스라는 놈이 하와이안 셔츠를 벗느니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나오니 윗선도 속 꽤 썩었을 것이다.
그나마 겨울이 되면 얼어 죽기는 싫은지 하와이안 셔츠 대신 알록달록한 싸구려 패딩을 주워입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빌어먹을 물건도 흉물스럽기는 도긴개긴이지.'
광현은 겨울마다 태현이 꺼내입는 누더기 같은 패딩 생각에 넌덜머리를 냈다.
구역 내 민원이라고 하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십중팔구는 업소에서 진상을 죽이는 손놈들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처럼 경찰을 부르면 되지 않냐고?
그러면 보통 경찰이 오는 사이 손놈들은 다 도망가 버린다.
그냥 진상만 부렸다면 모를까.
맞은 종업원의 치료비와 부서진 집기로 인한 손해는 고스란히 업주의 몫이다.
잡아서 죄를 묻고 손해를 배상받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한국처럼 국가가 전 국민의 주민등록과 지문을 쥐고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일본은 국민들의 인적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기에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타 지역에서 친 소소한 사고 정도는 얼마든지 뭉개고 가는 것이 가능했다.
경찰도 수사할 마음이 없고.
게다가 이런 부분에서도 일본인 특유의 메이와쿠 문화가 발동돼서, 진상으로 인해 업소에 경찰이 출입하게 되면 진상도 잘못이지만 경찰을 출입하게 한 업소 역시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 업소의 매출이 떨어졌다.
그래서 업소들은 진상이 생기면 경찰 대신 빠르고 확실한 야쿠자들을 호출하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야 저렇지만, 그 속은······.'
저것들 이외에도 미군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야쿠자들과 업소 간의 유대, 경찰을 향한 인식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였다.
광현이 소속된 카와구치카이는 오사카시를 기반으로 한 사 대 조직 중 가장 큰 조직으로.
오사카시 남쪽을 본거지로 오사카부 남부 일대 대부분을 고정 구역으로 삼고 있었다.
일본의 행정구역을 가리켜 도도부현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첫 도는 수도인 도쿄.
두 번째 도는 훗카이도,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현은 경기도 충정도 같은 광역 행정단체.
부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인 오사카와 교토를 넓은 의미의 광역시로 취급해 근처 몇 개 시군구를 묶어서 관리한다고 보면 됐다.
즉, 오사카부 남부 대부분을 영역으로 한다는 말은 관리해야 하는 영역이 엄청나게 넓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카와구치카이의 영역에는 오사카를 대표하는 유흥가 신세카이와 일본 최대의 사창가 토비타 신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카 서부를 관리하는 조직 아오바카이와의 접경에는 일본 최악의 슬럼가 아이린 지구가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터졌다.
그래서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 멀쩡한 모습으로 출근했던 조직원들은 하루가 끝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걸레짝이 되어 있기 일쑤였다.
예전에는 광현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치기는커녕 힘이 넘쳤다.
"에이, 망할."
토비타신지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광현이 정수기에 목을 축이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태현이 짜증부터 부렸다.
언 듯 보기에도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퐁파드 머리가 오뉴월 망나니의 그것처럼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손톱에 할퀸 것 같은 상처가 가득 했다.
"아우, 미친년들 진짜."
"왜 저래?"
광현의 물음에 태현을 수행했던 하급 조직원 하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게, 신세카이에 있는 호스트바에서 여자들끼리 싸움이 났다고 해서 갔다가······."
나머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유흥가 싸움 중에 가장 골치아픈 게 여자들, 그중에서도 호스트들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다.
여자라 함부로 때릴 수도 없고, 본인들 입장에서는 철석같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웬만해서는 중재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태현 같으면 돈을 주고 가라고 해도 안갈 곳이었다.
물론 광현 역시도.
"거길 직접 갔다고?"
"네."
"웬일이래?"
"형님께서 본인의 매력으로 여자들을 뻑가게 해서 싸움을 말려 보시겠다고······."
"······."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물론 태현은 만찢남이다.
그러나 장르가 순정만화인 호스트들과 달리 태현의 장르는 아무리 봐도 범죄물 내지는 스릴러 물에 가까웠다.
'뻑이야 갔겠지.'
그게 기뻐서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
멀쩡한 비디오 테이프에서 사다코(공포영화 링의 귀신)가 기어나오면 공포에 뻑이 안 갈 사람은 없으니까.
"아우, 죽겠다. 야, 여기 파스좀 붙여봐라. 아무래도 잘못 맞았나 봐."
동이 터오는 시간.
야쿠자 사무실은 인력사무소 내지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취객의 싸움을 말리다가 찢어진 옷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놈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업주로부터 질책을 받고 세상 다산 표정으로 시무룩해 하고 있는 놈에 취객에게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놈까지.
'참 다양하다, 다양해.'
대중매체는 야쿠자 사무실을 허구한 날 '고노야로(이 자식)' 내지는 '시니타이노까(죽고 싶냐?)' 따위의 고성이 난무하고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무언가 음모가 꾸며지듯이 그려내지만.
실상은.
'그렇게 소리칠 기운도 없고, 그런 대가리도 안 돌아가.'
그나마 기력이 있는 지부장과 간부들은 기어이 싸움이 붙어 고방(파출소)이나 경찰서로 끌려간 조직원들을 빼 오기 위해 지금쯤 경찰들 앞에서 못생긴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을 터였다.
문신 좀 보여주고 인상 좀 쓰면 무서워서 설설 기던 야쿠자의 전성기는 다 옛말이다.
그리고 술이 꼭지까지 오른 취객들은 옛날에도 답이 없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일반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모두 출근했을 아홉 시.
시간을 확인한 광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 사 올까요?"
"아, 편의점 질리는데. 오늘은 덮밥 좀 먹으면 안됩니까?"
"야, 우리가 돈이 어디 있냐? 그냥 도시락이나 쳐먹어."
2000년대 일본 편의점 도시락은 300엔 내외.
덮밥, 즉 규동은 '보통 한 그릇'의 가격이 400엔 내외였다.
고작해야 100엔 차이.
하지만 대충 사무실 식구만 사오십 명에 달했기에 100엔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 봐야 몇천 엔인데······.'
대중 매체가 만들어 놓은 잘못된 환상 중에 하나가, 야쿠자는 모두 부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수익은 위로 올라가고 밑에 부하들은 중간중간 위선이 던져주는 몇푼 안되는 용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질리는데."
"거 새끼 말 많네."
말단 조직원 몇이 도시락을 사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광현이 그들의 앞을 막고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목구멍에 기름칠 좀 하자."
"네?"
모든 조직원이 광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데니X 쏜다."
"오오오오!"
조직원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7화
page03? 목표와 일상
구경거리라 할 만한 희한한 광경을 뜻하는 말로, 진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아침부터 패밀리 레스토랑을 점령한 수십 명의 깍두기들이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걸신들린 듯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모습은 가히 진풍경이라고 할만했다.
한국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은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는 식당이지만.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사전부터 '가족을 동반한 손님들을 위해 비교적 싸고 다양한 요리를 갖추고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정의는 한국인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일 것이다.
바로 김밥지옥.
그렇다.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김밥지옥의 상위 호환 버전.
광현은 좀 비싼 김밥지옥을 쏜 것이다.
굳이 한국의 김밥지옥과의 차이점을 찾자면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카페 같은 분위기가 있어 학생과 직장인들이 시험 공부나 간단한 업무를 보기 위해 자주 찾는다는 것 정도였다.
"저, 이사시 형님, 멜론 소다 하나 먹어도 됩니까?"
"어, 시켜."
"저도 오므라이스······."
"먹고 싶은 만큼 먹어. 형 눈치 보지 말고 오늘은 양껏 먹어도 돼. 야, 이 함박스테이크 죽인다. 이것도 먹어봐라."
연장 하나 쥐여 주면 지금이라도 사람 한둘 담그는 건 일도 아니게 생각하는 녀석들이지만.
고슴도치도 재 새끼는 귀엽다고, 무서운 속도로 음식을 먹어 치우는 녀석들의 모습이 광현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왜 그러고 살았냐?'
회귀 전 이 시기를 생각하면 광현은 꽤 인색했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 덕에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밑에 애들에게 패밀리 레스토랑은 고사하고, 편의점 도시락 한번 제대로 사준 적이 없었지.'
뿐인가.
조직원들에게 살가운 말 한번 붙여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음식을 먹으면서 광현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인망은 무슨······.'
광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준고세이인 시절을 겪지 않아 동기들이랑 유대도 없고, 숙소 생활을 하지 않아 아래위로 친분도 부족해. 그러면서 친해지려 노력도 안 해.'
아무리 남는 것이라곤 피비린내뿐인 살풍경의 조직 생활이라지만, 이 정도면 등 뒤에서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싸움 실력과 독기.
하지만 그것도 몸이 받쳐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회귀 전, 그의 말년이 그토록 외롭고 비참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야,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태현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르보나라를 네 그릇이나 잡수시고, 아케비 디저트까지 시키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형님."
오늘 광현이 조직원을 데리고 온 곳은 데니X.
일본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 중 아침 식사와 디저트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평균 요리 하나당 가격은 세금 포함 600엔에서 800엔.
반면 태현이 네 그릇이나 시켜 먹은 생(生)햄과 베이컨, 4종의 치즈가 올라간 카르보나라의 가격은 무려 930엔에 달했다.
한 그릇에 만 원.
거기다 아케비 디저트까지.
아케비는 일본 가을에만 나오는 과일로, 조선 바나나라 불리는 으름을 보라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은 과일이다.
정해진 기간에 소량만 나오고 유통도 까다롭다.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다.
2020년대 백화점에서 봤던 가격이 주먹만 한 것 한 개에 600엔.
까놓고 말해서.
'비싼 돈 주고 저걸 왜 처먹는지 모르겠다.'
다분히 가시가 돋아난 광현의 대답에 태현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작게 한숨을 내쉰 광현은 입을 가리고 말했다.
마치 태현만 들으라는 듯.
하지만 주위에 있는 조직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주식으로 재미 좀 봤으니까."
"주식? 너 그런 것도 해? 얼마나 봤는데."
"애들 밥 사 먹일 정도는 돼요."
"그래? 야, 그럼 나 치즈케이크 하나 더 시킨다."
"예, 마음껏 시키십시오."
이제 오늘 하루가 가기 전에 태현이 주식으로 재미를 봤다는 소식은 조직 전체에 짜하게 퍼질 것이고.
이는 곧 조장이나 본부장 같은 간부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한국인은 누가 주식으로 재미를 봤다고 하면 너도나도 알려달라 달려드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아, 그렇구나.
이걸로 끝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그런 경향이 더했다.
국민 80%가 재테크를 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2020년대에도 재테크 비율이 20% 초중반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도 전 총리 아베 신이치가 실행한 아베 노믹스의 효과로 경기가 부양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사한 것이니.
버블붕괴로 전 국민의 투자금이 한순간에 휴짓조각이 되는 경험을 한 지금의 세대에게 주식 투자 같은 건 패가망신과 같은 말이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광현이 투자로 얼마를 벌었건, 일반 조직원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투자금을 금고 안에 쌓아 놓고 있는 수뇌부는 다르지.'
조직의 수뇌부는 오래전부터 소카이야(そうかいや)를 할 만한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투자처란 쉽게 찾기 어려운 법.
그런 그들의 귀에 지속적으로 광현이 투자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간다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노친네들이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이 회식 자리는 그것을 위한 첫 번째 포석이었다.
어떤 이는 이런 복잡한 수에 답답함을 느끼고.
투자로 돈 많이 벌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광고해서 바로 수뇌부가 알게 하는 것이 빠르고 편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재수 없으면.
'내가 제2의 번뇌, 스가타니 마사X가 될지도 모르지.'
다시 말하지만, 그는 전성기 시절 외국 여행을 갔다 오면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역 내에서 일하는 업소의 아가씨들에게까지 선물을 사다 줄 만큼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통 크네, 곳간 인심이 후하다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스가타X의 행동은 명백히 일본인의 정체성, 와(和)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와(和).
흔히 일본인은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며(메이와쿠), 속마음을 바로 내세우지 않는다(혼모노 다테마에)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인들의 행동 저변에는 정체성으로서 일본인들의 집단 의식을 지배하는 와(和)가 있었다.
물론 스가타니 마사X의 몰락은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팠다 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와(和) 문화를 거슬러 미운털이 박힌 부분도 적지 않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와(和)를 쉽게 풀어보자면 모난 돌은 반드시 정을 맞는다는 것이다.
'스가타니처럼.'
게다가 광현이 몸담은 곳은 일본에서 모나고 비뚤어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놈들이 모여 있는 야쿠자 조직.
지금 당장 광현이 사주는 밥을 먹고 있는 놈 중에서도.
'제가 뭔데 밥을 사고 지랄이야. 마음에 안 드네.'
같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고 회로를 가진 놈들이 있을 수 있었다.
'때가 될 때까지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기다려야 해. 최대한 튀지 않게.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된 덕천가강(?川家康)처럼 말이야.'
덕천가강.
우리에게는 도쿠가와 이이에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전국 3영걸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승자라 불리며, 260년간 일본을 지배한 에도 막부의 시조였다.
어떤 이는 그를 비열한 기회주의자라 평했지만, 회귀 전 전국시대에 관한 대하소설과 영화 등을 즐겨 보았던 광현은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버틴 그의 인내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 내가 인내나 기다림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에게 끌렸는지 모르지.'
후식으로 나온 레몬 소다의 얼음을 씹는 광현의 눈동자가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 * *
그 이후부터 광현은 조직원들에게 돈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돈 지랄을 하지는 않았다.
종종 밥을 사주거나, 옷이 낡았다는 핑계로 옷을 사주거나, 경조사에 두둑한 헌금을 찔러주는 식으로, 상대가 확실히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상하거나 부담을 가지지 않는 선을 철저히 지켰다.
물론 은근히 주식 투자가 잘되고 있다는 말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돈 주는 일이 이렇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일 줄이야.'
덕분에 뜻하지 않은 성과도 있었다.
비록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행동이었지만,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조직원 몇이 광현을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 절반 이상이 떡고물을 바라고 모여든 것이었지만.
평생 독고다이.
직계 조직원이라고는 본단에서 보내준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던 전생과 비교하면, 따르는 조직원이 생겼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광현이 조직 내 평판을 착실히 올려 가고 있을 때, 찬바람과 함께 사건이 터졌다.
"이사시, 마사오카. 들어와 봐."
오늘도 평소와 같이 구역을 순찰하고 쉬고 있던 광현과 태현은 갑작스러운 지부장의 부름을 받고 지부장실로 들어갔다.
광현과 태현이 속한 지부의 관리 영역에는 토비타신치와 신세카이같이 조직의 알토란 같은 자금줄이 있었기에, 지부를 담당하는 지부장 역시 보통 인사가 아니었다.
이름은 타츠 마츠요리.
아버지가 현 6대 조장과 형제의 의를 맺은 샤테이 중 한 명이었기에.
다음 대 와카가시라 보좌 중 한 명이 될 것이 유력시되는 인사였다.
'결국 되지 못했지만.'
간이 작살나서 조만간 병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규슈 출신도 아닌데 문신을 좋아해서 온몸을 문신으로 두른 것이 문제였다.
그는 전통방식인 대나무 침으로 문신을 새기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 방식은 오직 사람의 감각만으로 바늘을 찌르기 때문에 종종 안료가 모공까지 파고드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보면 모공이 막히고.
노폐물 배출이 안 되니.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간이 떠안게 되지.'
그리고 누가 야쿠자 아니랄까 봐 술은 어찌나 그리 잘 먹는지 말술도 그런 말술이 없었다.
'무슨 철인도 아니고, 그 상황에서 간이 어떻게 버텨.'
손바닥이 붉은 걸 보니 그의 간 질환은 초기를 지나 중기에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본인도 모르지 않으면서 술을 줄일 생각은 없으니.'
그야말로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문제는 사 자가 말씀 사(辭)가 아니라 죽을 사(死)라는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위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술 먹고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끊어내지 못하는데.
"너희, 리츠카 마담 알지?"
"네."
리츠카 마담은 토비타신치의 159개 점포 중 서른 개가 넘는 점포를 전통 유곽 방식으로 운영하는 토비타신치의 큰손.
'포주 중에서도 대가리지.'
당연하겠지만 보호비 역시 많이 내 조직으로서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VIP 고객이었다.
"애들 몇이 사라졌단다."
"에이, 난 또."
태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시누케 한 거 아닙니까?"
이시누케는 유녀가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던 광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라진 애들 중에 가장 높은 등급이 뭡니까?"
"보나 마나 죠로나, 잘해야 하시타급이겠지."
죠로는 하급, 하시타는 중급이다.
그리고 그런 등급 유녀가 도망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부장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타유급이다."
"예?"
"사라진 애들 중의 하나가 타유급이란 말이다."
유녀의 등급을 확인한 태현의 얼굴이 굳었다.
8화
page04 ? 21세기의 오이란
죠로, 하시타 같이 유녀의 등급을 나누는 풍습은 에도시대 때부터 수백년을 내려온 것이다.
유녀의 등급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코우시, 요비다시 등등 여러 용어로 불렸지만, 마담 리츠카가 운영하는 토비타신치의 전통 유곽에서는.
하급 유녀를 죠로.
중급을 하시타, 츠보네, 지시키.
상급을 츄산, 산차, 타유로 나눴다.
이번에 사라진 유녀의 등급인 타유는 상급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등급으로, 토비타신치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유녀였다.
그녀와 같은 타유 등급은 이백에 가까운 유녀들 중에서도 그녀를 포함 단 세 명에 불과했다.
물론 타유 등급 위에 유녀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이란이 있기는 했지만, 현재 토비타신치의 오이란은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였다.
"하, 쓸만한 애들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웬 애송이들이 왔어."
붉은 기모노 위에 금박으로 꽃장식이 수놓인 화려한 우치카케(예복)를 걸치고 옆으로 누워 풍만한 가슴과 매끈한 다리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장죽을 물고 있던 여인은, 견습 유녀들의 안내를 받아 내실로 들어온 광현과 태현을 보며 고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여인이 뿜어내는 염기(艶氣)에 입을 벌리고 있던 태현이 발끈해서 나섰다.
"어이, 바바(할머니). 애송이라는 말, 우리를 가리켜 한 말이야? 유명하다고 그래서 영계들 분 냄새 좀 맡나 했더니, 어디서 이런 바바가 누구보고 애송이라는 거야?"
바바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폭언에 당사자인 여인뿐만 아니라 광현마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억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태현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순간.
광현은 본능적으로 태현의 입을 막고 그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안 그랬다가는 사건 해결은 고사하고 둘의 손가락이 남아 나지 안을 터였다.
"오이란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한 놈은 영 눈치가 없더니 넌 좀 쓸만하구나. 그런데 너, 내가 오이란인 것은 어떻게 알았지?"
"문 앞에서 산마이바 게타를 봤습니다."
"호?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구나."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풍만하다 못해 쏟아질 것 같은 가슴의 골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광현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광현에게 입이 막혀 있던 태현은 조금 전 자신이 그녀에게 바바라는 말도 안 되는 폭언을 했다는 것도 잊고 헤벌쭉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기 바빴다.
산마이바 게타는 높은 굽이 세 개로 이어진 동양판 하이힐로, 오이란의 상징과 같은 신발이다.
산마이바 게타가 있다는 것은 오이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오이란께서 저희에게 의뢰를 주신 마담이시기도 하시죠."
"호오, 점점 더 날 놀라게 하는구나."
눈앞의 오이란, 그녀가 바로 마담 리츠카였던 것이다.
더 이상 유녀로서 일을 하지 않는 오이란. 그것이 토비타신치의 오이란이 있으면서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광현과 마담의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급이 낮다고 해도 토비타신치를 순찰하는 광현이 마담 리츠카를 처음 본 것처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광현은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그녀를 먼발치에서 몇 번 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화장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광현이 그녀를 봤을 때마다 그녀는 일본의 전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TV이나 인터넷을 통해 봤을 것이다.
얼굴을 무슨 찹쌀떡처럼 허옇게 만들고, 눈썹은 점 두 개만 남기는······.
일본의 전통화장은 한국인의 미적 기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이빨을 검게 칠하는 오하구로까지 하고 나면.
'전통 문화라니까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아무리 미인이라도 얼굴에 그 지랄을 하면 하나같이 꿈에 볼까 무서운 세숫대야가 되기 마련이다.
즉, 그녀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 이 자리가 초면 아닌 초면인 것이다.
"의뢰하신 건에서 듣고 오긴 했지만, 타유급의 유녀가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실종된 타유급 유녀의 이름은 시이나 히비키.
애칭은 히비안.
그리고 실종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죠로급 두 명, 하시타급 한 명.
타유급에 더해 지난 석달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리츠카의 유곽에서 사라진 유녀만 넷.
유녀가 도망가면, 보통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죠로급이나 하시타급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타유급은······.'
토비타신치만큼의 대우를 해주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비타신치에서 타유급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한화로 100만 엔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한화로 천만 원.
광현이 회귀하던 2030년대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100만 엔의 가치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서······.
'타유급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중급 최상인 지시키만 돼도 손님을 가려 받는데, 상급, 그중에서도 최상급인 타유라면 그녀의 하룻밤은 돈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타유급이 옮겨갈 곳이라면.
"답 나왔네."
불퉁한 표정으로 광현과 리치카마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현이 말했다.
"타유급이 옮겨갈 곳이라고 해봐야 같은 신치지.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뭘 말입니까?"
"뒤집어 엎어야지."
"어디를요?"
"어디겠어."
광현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매만졌다.
'그래서 그랬구나.'
유녀들이 실종됐던 사건.
이 사건은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그때는 태현 형님이 혼자 사건을 맡아 온갖 깽판을 쳐댔지.'
그런데 이번에는 광현에게도 일이 들어왔다.
'부하들을 거두고 먹인 보람이 있군.'
지부장이 일을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 내에서 광현의 입지가 올라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아주 잠깐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던 광현은 이내 생각에 빠져들었다.
'형님은 이 사건을 해결하긴 했지. 오사카의 밤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에야.'
그렇다고 태현이 예상한 대로 다른 신치에 범인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형님이 뒤집어엎은 덕에 다른 신치에서도 유녀들이 실종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지.'
그 이후에는 이쪽과 그쪽에서 실종된 유녀들의 공통점을 꼬리로 그 위를 타고 올라가서 사건을 해결.
아무리 좋게 봐줘도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너무나 과격했다는 것.
오사카에서는 토비타신치를 제외하고도 네 개의 신치가 더 있고, 각 신치들마다 관리하는 조직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실종된 유녀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불문곡직 모든 신치를 다 뒤집어 놓았으니.
자다가 뺨을 맞은 다른 조직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사정을 모르는 다른 조직들은 카와구치카이와의 영역 접경에 조직원들을 집합시키면서 한동안 카와구치카이의 손발이 묶이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유녀들을 구하러 가는 시간이 늦어졌고, 몇몇 유녀들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
그래서 한동안 조직의 수뇌부들이 열받은 타 조직들과 리츠카 마담을 달래기 위해 꽤 많은 진땀을 흘렸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번에는 그런 잡음 없이 깨끗이 일을 처리해야 해.'
그러려면 타 조직의 신치를 뒤집어 놓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안 그러고도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생각을 끝낸 광현이 리츠카 마담을 향해 말했다.
"마담, 괜찮다면 사라진 유녀들과 친했던 이들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쉬는 날 같이 뭉쳐 다니거나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다닌 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에 대한 조사라면 우리 쪽에서 끝냈어. 별달리······."
"불러주십시오. 시이나 상을 찾는 데 꼭 필요합니다."
리츠카의 말을 끊어낸 광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광현을 바라보던 리츠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없겠지만, 필요하다면 불러줘야지."
그녀는 이윽고 자신의 수발을 드는 이를 호출해 무엇인가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우치카케를 입은 유녀 여럿과 수수한 복장을 입은 여인들, 그리고 젊은 사내 몇과 앳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들 몇이 방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저 사내들은 반, 그리고 유녀가 아닌 여자들은 반토나 츠카이테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신조로군.'
반은 유곽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는 남자 종업원, 반토와 츠카이테는 은퇴한 유녀들로 중간 관리자.
마지막 신조는 아직 견습 유녀들을 칭했다.
"이들이 시이나 상과 친했던 이들입니까."
"그래."
방안에 모인 이들을 쓱 훑어본 광현은, 그들의 맞은편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
"여러분이 자주 보시는 재일이 아니라 한국군을 나온 오리지날 한국인입니다."
"에?"
"한국군을 나온 한국인이라고?"
모두가 신기한 표정으로 광현을 바라보았다.
십여 년만 지나도 일본은 싸고 가까운 여행지로 각광받아 거리마다 한국인이 넘쳐난다.
하지만 작금 2004년의 한국은 IMF를 막 벗어난 상황.
해외여행을 가도 일본보다는 비교적 물가가 저렴한 동남아를 선호하는 추세였다.
거기다 아직까지 일본 여행은 온천 관광이 대세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온천물에 몸 좀 풀고 장어 또는 자라 정식(고급 요리다)으로 보양한 후 도쿄의 쇼핑가를 둘러보는 패키지 여행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즉, 토비타신치같이 폐쇄성이 짙은 곳에 사는 이들이 한국인, 그것도 군대를 다녀온 한국인을 마주할 기회는 지금 시대에는 없다 시피 하다는 말이었다.
'한국인 무비자 제도가 실행된 게 2006년이었지. 그때 일 차로 몰려올 한국 여행객들만 잡아도 제법 돈벌이가 될 거야.'
그리고 은밀한 패키지로 마담의 유곽과 연계를 한다면.
'한국의 돈 많은 VIP들을 끌어와서······ 일본 놈들만 기생 관광 가라는 법은 없잖아.'
광현이 회귀 이후 좋아진 머리로 사업 아이템을 정리하는 사이.
유녀들은 광현을 두고 자기들 끼리 씹고 뜯고 맛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마담까지 흥미를 보였다.
"호오,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다 했더니 한국인이었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광현의 아버지가 광현에게 물려준 것 중 유일하게 쓸만한 것이 준수한 낯짝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반응은 단순히 그가 한국인이고 잘생겼다는 것만으로 나오기엔 과한 것이었다.
이내 광현은 그들의 작은 소근거림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아, 겨울연X.'
일 년 전인 2003년 일본을 강타하고 1차 한류 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드라마.
겨울연X는 방영 20여 년이 지난 이후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도 한국 드라마 부분 1위를 할 만큼 일본에서 가히 신드롬급의 인기를 자랑했다.
오죽하면 주인공들에게 사마와 히메라는 존칭이 붙었겠는가.
그리고.
'한국 남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줬지.'
덕분에 한국에 서식하는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들이 일본에 가면 자신들도 인어 왕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일본행을 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오징어 꼴뚜기 중에 한 마리는 이십 년 후에 웹소설을 쓰게 된다나 어쨌다나.
짝.
"자, 자. 그만."
박수를 쳐 소란을 잠재운 광현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한국군에서도 아주 특수한 보직인 헌병을 나왔습니다."
"······."
"헌병은 한국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를 수사하는 일종의 수사관입니다."
"그럼 경찰 같은 건가요?"
"예, 일종의 군사경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도 기동대와 같은."
국영폭력단이라 불리는 기동대의 이미지가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9화
page04 ? 21세기의 오이란
헌병은 무슨.
광현은 알보병, 땅개, 그것도 헬보직 중에 헬보직이라는 무반동총 주특기 였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수사 헌병 같은 특수한 병과가 아니라면 일반 헌병은 훈련병 중에서 신체 조건이 좋은 이들 중에서 차출하는 방식으로 선발했기에 사건 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광현이 거짓말을 한 것은 유녀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범인들은 먹잇감 옆에 끄나풀을 심어 놨지.'
즉, 범인의 끄나풀은 시이나 히비키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곽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유녀의 주위 사람이라면, 몇 없는 가족이나 유곽의 직원들뿐.
이중 가족은 사라진 다른 유녀들과 접점이 없으니.
'끄나풀은 이 자리에 있는 유곽의 식구 중 하나란 거지.'
세계 최고의 비언어 커뮤니케이터이자 행동 분석 전문가.
25년간 FBI 요원으로 활동하며, 인간 거짓말 탐지기라 불린 존 내이버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용의자들은 본능적으로 불편한 자리를 어떻게든 '회피'하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광현은 헌병이라는 거짓말로 누군가가 이 자리를 불편한 자리로 느끼게 만든 것이다.
야쿠자였던 광현이 FBI의 심문 기법과 비언어적인 관찰 기법을 알고 있는 것에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사관이 아니면서 수사 기관의 수사 기법에 가장 관심이 많은 종자들이 누굴까?'
누군가 광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광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범죄자 새끼들.'
누구는 범죄자의 머릿속엔 두 가지뿐이라고 말했다.
어떤 범죄를 저지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안 잡힐까.
야쿠자인 광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귀 전 광현의 소셜미디어 재생목록은 범죄 관련 프로그램으로 가득했고, 서랍에는 수사 기법에 관한 책들이 빼곡했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 존 내이버스가 쓴 책은 물론이고 프로파일링의 교과서라 불리는 존 더글로스의 저서들까지.
게다가 말년에 광현은 그다지 할 일도 없었다.
'독서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취미지.'
하지만 누구나 책을 읽는다고 다 광현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를 하면서 얻게 된 말도 안 되는 육체 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영혼에 아로새겨진 경험과 노련함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 자리가 피할 수 없는 자리, 예를 들어 심문실 같은 곳이라면 '차단' 반응을 보인다고 했지.'
광현이 다시 한번 장내를 훑었다.
그리고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 한 유녀가 걸렸다.
중급 유녀.
하지만 그리 등급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중하급인 하시타이거나 잘해야 중중인 츠보네.
'차단은 인지된 위협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돌아서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라, 의식적으로 제어하기가 쉽지 않지.'
그녀는 최대한 광현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고, 계속해서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 이 자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범인의 끄나풀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현은 일단 다른 유녀들과 유곽의 관계자들을 향해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이나 상을 마지막에 본 것은 언제냐?
마지막에 봤을 때 특의한 것은 없었냐?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유녀의 차례가 왔을 때.
조금 색다른 질문을 던졌다.
"쉬실 때 주로 다니시는 호스트바는 어딥니까?"
"예?"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광현이 다른 유녀들과 대화하는 동안 수백 번 수십 번 답을 준비했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제가 알기론 이런 곳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보통 호스트 같은 곳에 가서 푼다고 하던데······."
유흥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가 다른 유흥업소를 찾는 것이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가긴 하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때를 노리고 있던 광현이 그녀의 말끝을 재빨리 잡아챘다.
"그럼 혹시, 시이나 상과 같은 업소를 다니셨나요?"
"예? 아. 예."
"그렇다면 사라진 미도카 상이나 유라 상과도 같은 업소를 다녔겠네요."
첫 번째 질문은 시이나와 그녀가 같은 업소를 다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미끼.
두 번째는 미도카와 유라가 시이나와 같은 업소를 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투로 상대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덫.
"예, 그런데······."
"그렇다면 라라 상도 같이 했겠네요. 같이 어울렸으니까."
"그, 그렇죠."
세번째는 쐐기.
이로써 그녀가 사라진 유녀들 모두와 같은 업소를 다녔다는 것이 증명됐다.
'접점의 완성이자 심문의 정석, 서류철 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건 쌍팔년도에나 하던 짓이지.'
어떤 비난도 하지 않으면서 질문과 호흡의 조절만으로 우아하게 상대를 압박한다.
그것이 인간 거짓말 탐지기 존 내이버스의 심문 기법.
광현이 입가에 물린 미소가 한 순간 짙어졌다 사라졌다.
다시 몇 개의 질문으로 그녀가 빠져 나갈 구멍을 모두 막아 버린 광현은 질문의 속도를 늦췄다.
몰아치던 초반과 달리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이윽고.
"혹시 지금 저를 의심하고 계신건 가요? 그런거 라면 불쾌하네요."
고개를 숙이고 마른침을 삼키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약간 높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반응을 지켜본 석현의 내면에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차단에 실패하고 계속해서 몰리다가 생각할 틈이 생기면, 용의자들은 상대를 공격하기 마련이지.'
공격은 최선의 방어.
이는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향해 달려드는 것과 같다.
존 내이버리는 이를 '투쟁'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것은 회피.
투쟁과 회피에 반복.
'거기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과 입마름······.'
모두 그녀가 이 상황을 극도로 불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광현은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의심이라. 전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
"한국 속담에 이런 말들이 있지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방귀 낀 놈이 성낸다. 뜻은 굳이 안 알려줘도 알겠지요?"
특히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일본에서도 종종 쓰이는 관용구다.
이어서 광현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라라, 유라, 미도카 상과는 등급이 비슷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타유급인 시이나 상과 당신의 접점은 뭘까요? 이제 나는 알겠는데, 당신의 입으로 확인해 줬으니까."
"······."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광현이 한 자 한 자 끊어내듯 말했다.
"호. 스. 트."
"······."
"같은 호스트에 다니던 유녀들이 모두 사라지고 당신만 남았네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야!"
그녀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전형적인 거짓말 반응.
심증은 굳어졌다.
이제 광현이 선택해야 할 차례였다.
회귀 전, 책에 읽었던 대로 이대로 압박을 지속해 자백을 받아 내든가.
'우리 식대로 가든가.'
광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콱.
"꺄악!"
먹잇감을 노리는 한 마리 범처럼 유녀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으로 처박은 광현은 품속에서 꺼낸 키리츠케를 그녀의 얼굴 옆 다다미에 박아 넣었다.
얼마나 닦았는지 거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반짝이는 칼 면 위에 비친 눈동자가 당혹감과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말해."
"뭐, 뭘?"
"너하고 다른 유녀들이 다녔던 호스트바, 그리고 너한테 유녀들 꾀어내라고 한 호스트 새끼가 누군지 말하라고."
"그, 그런 거 없어, 이 미친 야쿠자 새끼야!"
"그래, 그렇구나."
관서독호.
어느새 광현의 얼굴은 그 시절 관서의 모든 야쿠자들을 벌벌 떨게 했던 독한 호랑이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끼긱.
바닥에 박힌 칼을 돌려 날을 유녀의 얼굴 쪽으로 향하게 한 광현은 칼날을 서서히 내렸다.
마치 작두처럼.
이윽고 시퍼런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그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에 유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내리거나, 그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칼빵 난 얼굴로 유녀 짓은 무리겠지?"
"아니라니까!"
"호오, 그래? 그럼 내가 알려줄게."
광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돈 없지?"
"뭐?"
"중급 유녀 정도 되면 3~4백만 엔 정도는 우스울 거야. 그런데 넌 어떨까. 선불금은 제대로 까고 있어? 방세는?"
광현의 시선이 리츠카 마담에게로 향했다.
마담은 이마를 감싸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광현의 예상대로 선불금과 방세를 제대로 못 내고 있다는 뜻이다.
유녀는 크게 네 가지에서 돈이 들어간다.
첫 번째는 몸값, 한국에서는 마이킹이라고 부르는 선불금.
하지만 유녀의 선불금은 고작 일이천만 원 수준인 한국 유흥업소의 마이킹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본 1000만 엔(1억)은 깔고 시작하니까.'
두 번째가 견습 유녀의 부양비, 중급 이상의 유녀는 대부분 견습 유녀를 두고 가게와 반반 정도 부양비를 부담한다.
이유?
노후를 위한 투자다.
유녀의 수명은 잘해야 서른 살 전후.
그때까지 착실히 벌거나 돈 많은 호구를 물어 인생 펴면 다행이지만 십중팔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견습 유녀를 키우는 것이다.
그렇게 키운 견습 유녀가 정식 유녀가 돼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부양비를 댄 유녀는 자신이 키운 유녀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정 금액을 나눠 받는다.
유곽의 중간 관리자 반토신조가 바로 이런 유녀들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그녀의 반토신조도 있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채로.
나머지는 유곽에서 빌리는 방세, 그리고 치장 비용.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에 삼사천만 원을 버는 유녀가 선불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작 몇십만 엔인 방세 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벌어들인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중에 불치병 걸린 사람이라도 있어?"
"걔, 가족 없어."
대답은 이번에도 리츠카 마담이 대신 해줬다.
'상처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
하지만 왜 가족이 없는지 그 사정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딱 봐도 투자같은 거 할 관상은 아니고."
"······."
잠시 숨을 고른 광현이 말을 이었다.
"보나마나 웃음 팔고 몸팔아 힘들게 번 돈, 고스란히 호스트 아가리에 털어 넣었겠지."
상황은 뻔했다.
유곽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호스트를 찾은 그녀에게 한 호스트가 다가온다.
그 호스트는 입안의 혀처럼 그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줬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던 어느 날 호스트가 그녀에게 제안한다.
'나에게 넌 특별하니까, 가게에 와서 아까운 돈 쓰지 말고 밖에서 만나자고.'
그렇게 한 석 달, 길면 반년.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이 되어, 늘 동경해 오던 그 나이대 평범한 커플처럼, 특별할 것 없지만 특별한 시간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녀를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호스트의 계략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에 폭 빠졌다는 것을 확인한 호스트는 그녀와 서서히 연락을 끊는다.
초조해진 그녀는 호스트를 만나기 위해 가게를 찾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이가 다른 여자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는 것을 목도.
"눈에서 불똥이 튀었을 테지."
다음은 광현이 아닌 리츠카 마담이 말했다.
"그래서 그 호스트 놈이 원하는 대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바쳤을 거고. 더 이상 줄 돈이 없어졌을 때 그놈이 말했겠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리츠카 마담의 몸에서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기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이란.
유녀들의 정점에 선 여왕.
그녀의 분노가 거침없이 장내를 휩쓸었다.
"다른 유녀들을 넘기면 큰돈을 쥘 수 있다고!"
"오, 오이란······."
광현에게 목덜미가 잡힌 유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리츠카 마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츠카 마담이 한손을 들었다.
그러자 방 한쪽에 펼쳐져 있던 화려한 일본식 병풍 뒤에서 냉막한 인상의 사내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확인하자마자 품속에서 키리츠케를 꺼낸 태현이 광현 옆으로 붙었다.
사내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현은 그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시로베에(四?兵衛)!'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