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내가 악역이라고?
대륙 북부에 자리한 테일러 백작 가문의 별관.
햇살이 가득한 오전이었으나 주방에 모인 하녀들은 잔뜩 불안한 기색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중 얼굴이 유독 창백하게 질려있는 하녀가 손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진짜 어떡하죠? 이대로면 도련님께서 절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너무 무서워요. 쫓겨나진 않을까요?"
그녀가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게 된 원인은 하루 전에 벌어진 '사고' 때문이었다. 사실 그 '사고'란 별 게 아니었다.
실수로 찻잔을 하나 깨뜨렸을 뿐.
그러나 그 찻잔의 주인이 에반 테일러라면 조금 궤가 달랐다.
테일러 가문의 망나니.
미치광이 공자.
당장이라도 매질을 당해 내쫓기는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기에 찻잔을 깨뜨린 하녀는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게다가.
"정말 도련님과 손이 닿았어?"
손가락이 슬쩍 스쳤다는 게 뭐 그리 유별난 일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역시 그 대상이 에반 테일러라는 점이다. 익히 알려진 그의 성격이라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불결하다며 온갖 난리를 친 다음 향유를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을 것이다.
가장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미치광이 에반이 당사자인 하녀에게 어떤 해코지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 동안 방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은 채.
하녀로서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불안감이 곱절로 불어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벗어나는 순간, 난폭한 바람에 순식간 몸이 튕겨 나가지는 않을까.
"하루 동안 방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셨다고?"
"네, 네."
"그건 도련님이 뭔가 무시무시한 일을 계획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인데…"
고참의 중얼거림에 하녀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쩌면 에반이 방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진 매질이나 추방보다 더 엄청난 불행이 닥쳐올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고 보니…'
이전 플로리스 백작가 영애와의 약혼식 전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내 갑작스레 올라온 현기증에 하녀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려던 순간,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바로 잡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네! 가, 감사합니다."
하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190cm는 될 것 같은 장신.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거기에 이지적인 외모와 잘 어울리는 금테 안경까지.
그는 미치광이 에반과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유명한 일란성 쌍둥이 카일이었다.
"다행이군요. 에반은 아직도 방에 틀어박혀 있습니까?"
"네…"
"안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하녀는 달아오르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이내 에반의 방으로 안내했다. 카일은 에반과는 달리 본관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에반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길고 스산했다. 매번 느낀 거지만, 올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에반 도련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도에는 띄엄띄엄 기괴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조명에는 약간의 푸른 빛이 감돌았다. 도련님이 직접 이러한 인테리어를 지시했다던데. 이해하기 어려운 취향이었다.
한참이나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마침내 고풍스러운 방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내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부리나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일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
방 안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카일은 침대에 걸터앉은 에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신과 똑 닮은 외모였지만 안색은 초췌했고,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마른 용모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카일은 순간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형님'이라니. 지금껏 에반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호칭 아닌가. 네놈, 혹은 너 따위가 일반적이었다.
카일은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표정을 가다듬고선 입을 열었다.
"그래, 얘기 들었다. 하루 내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어디 몸이라도 아픈 것이냐?"
동생을 향한 걱정이 담긴 지극히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그것 때문에 오진 않았을 텐데."
한 번도 쓰지 않던 존대와 공손한 말투. 자신이 알던 에반이 맞나?
그러나 에반의 겉모습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핏 차가워 보일 정도로.
카일은 순간 치솟는 의심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성인식에는 플로리스 영애도 참석하기로 했다."
"사과라도 하라는 겁니까?"
귀찮다는 듯 에반이 되묻자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약혼식에서 저지른 무례를 기억하겠지? 덕분에 제대로 망쳐놨으니. 정중히 사과하거라. 아버지께서 직접 명하셨다. 따르지 않는다면…뭐, 너도 그쯤은 알겠지."
가문에서 추방당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중대한 징계를 받게 될 터였다.
이내 카일은 책상 위에 놓인 깨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음, 하녀들에게 들었다. 아끼던 기물이었다고. 심통이 난 게 이것 때문이냐?"
"별일 아닙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형님, 혹시 '이안 페이지'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
카일이 돌아간 뒤, 나는 하녀에게 차를 내오라 명했다. 차를 한 모금 훌쩍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껏 찻잔 건네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뭘 그리 벌벌 떨어대는 건지.
'환장하겠네.'
뭐, 이 녀석. 에반이 그간 쌓아온 악명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약혼녀라고?"
카일이 언급했던 플로리스 백작가의 영애. 그녀는 이 몸, 에반의 약혼녀였다. 기억을 쥐어 짜내려 골몰하자 언뜻 어느 여성의 희미한 이목구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은발, 희고 고운 피부. 청초한 인상이었지만,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대신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이 미친 망나니가 약혼식 당일에 술에 잔뜩 취해 참석했다는 것.
고약한 술 냄새를 풀풀 풍겨가며, 약혼식장에서 미치광이처럼 개진상을 떨었다.
- 아아, 엘린 양 왜 거꾸로 서 있소?
- 어째 살이 좀 통통하게 오른 것 같소? 푸하하하!
- 드레스가 영 안 어울리는구려. 옷 입은 꼬라지가 그게 뭐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한 일은 아닌데
내가 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고도 용케 약혼이 파기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이 약혼이 가문 간의 정치적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거겠지만….
'이 문제는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선은 이 빌어먹을 상황부터 똑바로 파악해야 하리라.
나는 곧바로 거울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거지?'
백금을 녹여 만든 듯한 머리칼, 붉은 보석처럼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 청년이 되어가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와 호리호리하고 마른 몸이 조금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빼어나게 잘생긴 용모였다.
에반 테일러.
이 몸이 된 직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황한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굶다 보면 배가 고파 깨어날 줄 알았고, 계속 자다 보면 지쳐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변하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제는 받아들이고 준비해야만 한다.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간 가문이고 제국이고 멸망해버릴 테고, 이 몸 역시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될 테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가문부터 집어삼켜야 하리라.
테일러 백작가.
제국에서 어지간한 공작가보다 그 권세가 강한 검술 명가.
문제라면 게임 원작이었다. 흐름대로라면 이 테일러 백작가는 나중에 악역 가문이 되어버린다.
이 녀석, 에반이 흑화하는 것은 물론이며, 방금 만났던 카일 테일러는 여러 흑막에 얽혀 있는 게임의 주요 악역이었다.
그렇다면 이 가문의 최후 역시 뻔하지 않겠나?
게임의 주인공에게 먼지 나게 얻어터지다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금은 원작의 시간보다 2년 이른 시점이라는 것. 이건 나와 카일이 성인식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카일은 '이안'의 존재도 모른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직 주인공 '이안'은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생존을 도모할 시간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셈.
당장 나, 아니. '에반 테일러'는 달라져야만 한다. 최소한 망나니, 미치광이라는 꼬리표는 떼어내야 했다. 그런 취급을 받아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실제로도 원작에서 에반은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2인자로 등장한다.
검술 명가의 차남이 되었다면 기왕 그에 어울리는 실력부터 갖추는 게 생존을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일 터.
그러나,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너무 귀찮아.'
변명하자면,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나는 거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건 게임에서 볼법한 UI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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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테일러]
『신분』
- 테일러 백작가의 차남.
『성격』
- 게으름
- 난폭함
- 권위의식
- 예민함
- 고도의 집중력
『특성』
- 검의 천재
- 궤적안
- 독해력
- 잔병치레
- 저질 체력
- 악당의 직감
『칭호』
- 망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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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여기 나와 있는 에반 테일러의 성격 때문이다.
이 상태창 때문에 빙의 직후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했다. 무슨 VR 게임 같은 걸 줄 알았지. 뭐, 사용법은 간단했다.
'게으름'이란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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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름」 -
- 등급 : B
- 설명 : 만사가 귀찮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싶고, 움직이기 싫습니다. 한계에 도달하면 특성 「나태」로 진화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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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상세한 설명이 튀어나온다.
한참이나 확인해 본 결과, 나는 의아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 몸, 에반에게 이전에 없던 특성이 하나 추가되었다는 점. 더군다나 원작에서는 미처 본 적 없던 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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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당의 직감」 -
- 등급 : EX
- 설명 : 악당은 악당을 알아보는 법! 악당이 될 가능성을 색으로 판별합니다. 위험등급에 가까워질수록 붉은색으로 표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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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 특성을 활용해야 할지 감이 왔다.
원작 게임의 주인공 '이안 페이지'에게는 이와 상당히 유사한, 마치 짝패 같은 특성이 존재했으니까.
「용사의 운명」.
「악당의 직감」이 가능성과 현재의 상태를 읽어내는 것이라면, 「용사의 운명」은 사람의 미래를 엿보는 힘이다.
'에반'으로 빙의한 이상, 원작의 용사인 '이안 페이지'는 내 생존에 가장 큰 위협 요소다.
그래도 용사인 만큼 미래만을 엿보고 검을 들이밀지는 않겠지만, 과연 '에반'의 미래가 어떻게 읽힐지는 불분명하니까.
그러므로.
'쓸모 있는 놈들을 미리미리 포섭해야 한다.'
혹시 모를 '이안 페이지'에 대항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원작의 재해 역시 대비해야 하므로.
다만, 묘하게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카일 테일러에게는 「악당의 직감」이 발동하지 않았는가.
놈은 원작의 주요 악역, 시간적으로도 이미 악당임이 분명한데, 나는 그에게서 어떤 색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추측해보자면, 특성마저도 속일 수 있는 무언가가 게임 속에 존재하며, 이를 카일이 지니고 있다는 것.
'무작정 신뢰해선 안 되겠군.'
「악당의 직감」에 허점이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주인공의 「용사의 운명」 또한, 파고들 만한 틈이 있다는 것 아닐까.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억지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자.'
나는 '에반 테일러'에 빙의했지만 동시에 이지훈이다.
「게으름」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침대에 엎어지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옷장을 열었다.
'젠장.'
하나 같이 값비싸 보이는 화려한 옷들뿐이었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이런 쓸데없이 걸리적대는 호화품이 아니라 실용적인 옷이었다.
별수 없이 밖에 대기 중인 시종을 불렀다.
"이봐!"
곧바로 남자 시종 한 명이 다급히 들어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음, 여기서 옷 좀 찾아주겠어? 이렇게 광대 같은 옷 말고. 운동하기 좋은 거."
"운동이요?"
순간 시종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지만, 녀석은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곧바로 옷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민무늬의 검은색 바지와 상의 한 세트를 찾아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왜 이래?"
"그, 그게 갈아입혀 드려야…"
아니 뭔.
귀족은 옷도 혼자서 못 입는 건가. 하지만 내 근원은 '현대인'이다. 굳이 남에게 알몸을 보여주면서 '입힘' 당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봐. 알아서 입을 거니까.
"네, 네?"
"아, 가기 전에 이 찻잔 조각도 좀 치워주고."
"그, 아끼시던 거라고. 계속 놔두신 거 아닙니까?
시종이 깨진 찻잔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조각들은 현실을 자각하려는 용도로 놔둔 거였다. 날카로운 파편들을 매만져보면 정신이 서늘해졌으니까.
하지만 이제 충분히 상황을 받아들였으니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입맛이 씁쓸해져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주,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 목숨만은!"
하아. 대체 평소에 어떤 짓거리를 벌여왔길래 인상 한번 구겼다고 살려달라 애원을 듣는 건지.
이럴 땐 부드럽게 웃어야…
"히, 히익! 살려주십쇼!"
"젠장, 됐어. 이거 치우고 나가봐."
"아, 알겠습니다!"
시종이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워낙 단순하고 수수한 디자인이었기에 딱히 번거로운 점은 없었다.
매무새를 정리한 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방금 본 시종이 그대로 대기 중이었다.
"안내 좀 해줘, 연무장으로."
2화 검술 천재 망나니
나는 어린 시종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일단 망나니 신세라는 게 비관적이긴 했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이 녀석의 재능.
에반 테일러.
원작 게임에서는 뛰어난 스펙으로 플레이어들을 농락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즉, 검술과 마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닌 케이스.
등장할 때마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검강과 눈으로 좇기 힘든 화려한 검격에 초반 어그로에 물리면 자칫 그대로 끔살 당한다.
그만큼 우월한 능력을 자랑했지만, 에반 테일러에게는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했다. 바로 버티기만 하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는 것.
그래서인지 꽤 유명한 별명도 있었다. 그건 바로,
'X루'.
의문스러운 것은 이 녀석의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수련에 관한 장면이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연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따로 검술 교습을 받은 적도 없는 듯했다.
"이봐, 내가 마지막으로 연무장에 간 날이 언제였지?"
시종이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제, 제가 도련님을 담당한 뒤론 이번이 처음이십니다."
"으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그럼 내가 따로 검술 교습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어, 없으십니다."
"그렇단 말이지…"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을 해서 따로 검술을 익혔을 리는 만무하고.
'그냥 재능충이란 건가?'
뭐, 그게 지금 내 상태에도 적용이 될지는 모른다. 직접 검을 잡아보면 알겠지.
나는 벽에 걸린 기괴한 그림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뭐더라?"
"리, 릭입니다. 도련님."
"그래, 릭. 나중에 복도에 걸린 그림들 싹 다 치워버려. 이 새끼는 뭐 이딴 걸 걸어놨대?"
내 말에 릭의 얼굴이 아연함으로 물드는 게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연무장은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훈련에 집중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경직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니라 연무장에 찾아온 낯선 방문객 때문이었다. 백작가의 차남, 망나니 에반 테일러가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여긴 무슨 일로?'
기사들의 이러한 의문은 당연했는데, 에반 테일러가 검술을 수련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워낙 그동안의 행보가 막장이었기에 우려가 먼저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조용히 구석에서 우직하게 검만 휘두를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예상과 달리 묵묵히 검만 휘두르는 에반의 행동에 기사들 대부분이 관심을 끄고 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에반에게서 유독 눈길을 거두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테일러 백작가의 가장 강력한 검이라 불리는 '푸른 매 기사단'의 부단장 카론이었다.
'흐음, 애매하군. 하긴 범의 새끼가 꼭 범이라는 법은 없으니.'
카론이 보기에, 에반이 검을 잡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다른 기사들에게 눈을 돌리려던 찰나,
갑자기 연무장 구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작은 빛줄기가 에반의 검 끝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이내 그 빛은,
점차 주변을 훤히 밝힐 정도로 강렬해졌는데, 동시에 보석처럼 영롱하면서도 아름다운 파장으로 이지러지며 검날을 뒤덮었다.
"거, 검기?"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 검의(劍意)로 유형화된 마나.
놀라운 광경에 기사들은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망나니 에반이 검기를 만들었다고? 제대로 수련하는 꼴을 본 적도 없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평생 수련해도 불가능했고, 기재로 알려진 자들로 20년은 갈고 닦아야 겨우 닿을까 싶은 경지였다.
천재라 칭송받은 '카일'조차 10년이 걸린 경지다. 그런데 연무장에 처음 발을 디딘 망나니 '에반'이 검기를 피워내다니.
모든 기사가 에반의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익히 검술 명문으로 불리는 테일러 가문이라지만, 이리 말도 안 되는 재능은 한 번도 들어본 바 없었다. 아니, 더 나아가 제국 역사에서라면 이와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까?
없다.
단언컨대, 없다.
어느 신화나 전설이라면 모를까.
연무장의 모든 사람이 충격에 사로잡혀 입을 열지 못하던 그 순간,
"별것도 아니네."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린 에반이 검을 휙휙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쐐애액-!
검 끝에서 쏘아진 검기는 허공에 가느다란 궤적들을 별자리처럼 수놓더니 반짝이며 사그라들었다.
"검기 발출까지…?"
'혹 여태 남들 몰래 수련을 해온 건가? 에반 도련님은 사실 노력파였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 해도 처음으로 검을 잡은 지 몇 시간 만에 검기를 피우고, 쏘아 올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니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우스갯소리로도 치부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이 놀라운 광경을 만든 당사자 에반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언가 심통이라도 난 듯 검으로 바닥을 툭툭 찍으며 뭐라 중얼대는 것이었다.
"아, 씨. 뭐지? 어떻게 하는 거지? 얘는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한데…."
기사들로서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한 방? 무슨 검술의 비기 같은 거라도 고민하는 건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재능이었으니, 여러 방면으로 고심한다면 아예 허황된 일은 아닐 터. 다만, 그런 것까지 한 자리에서 뚝딱 해낼 수 있을 리는…
"아! 모르겠다. 일단 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내 에반은 다시 허공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꼴이 꽤 무리하는 듯했다.
다시 빛무리가 허공에 별자리처럼 궤적을 수놓기 시작했고,
얼기설기 엮인 검기의 그물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아…"
정확히 에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 바닥에는 거미줄 같은 상흔이 깊게 아로새겨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등줄기에 흐르는 소름을 느꼈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위협적인 기교 아닌가. 만약 적중당한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내 꽤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머금은 에반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가볍게 대련 어떤가?"
움찔.
기사는 크게 당황한 듯 말을 머뭇거렸다. 앞서 에반이 선보인 위용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크흠, 제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다, 다음에 하시죠."
"그래? 알겠어."
기사의 거절에 에반은 별말 없이 물러났다. 망나니라는 성품대로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이를 지켜보던 카론의 머릿속에서 '에반 테일러'에 대한 정보는 크게 수정되었다.
능력 없이 성격만 더러운 미치광이 망나니에서, 가히 헤아리기 어려운 재능을 지닌 검술 천재 망나니로.
**
연무장에 들어가면서도 나는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막연하기도 했다.
'검'이라니?
나는 그 흔한 검도 학원도 다녀보지 않았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받는 총검술도 배운 적이 없었다.
대체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무작정 쥐고 베기만 연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루를 잡는 순간, 손에 착 감기는 게 느낌이 달랐다. 허공을 베어 넘길 때마다 어색하던 자세가 알아서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마치 몸이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물론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빌어먹을 저질 체력…"
부정 특성이 발목을 잡았다. 검을 휘두른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호흡이 가빠졌고 땀이 한가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젠장할, X루 캐릭터."
에반 테일러, 이 녀석이 왜 등장할 때마다 강력한 기술들을 난사했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체력으로는 절대로 장시간의 전투를 이어나갈 수 없으니까.
나름 고육지책이었던 거다. 이 자식 성격상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을 거고.
"후."
한참 동작을 반복하던 나는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명한 근육과 파공음으로 가득한 연무장. 한창 수련에 몰두하는 기사들.
내 동작이 틀린 건 아닌가 싶어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가슴팍마다 심장을 감싸고 있는 푸른색 구체가 보이는 게 아닌가.
'저건 코어?'
이내 희뿌연 빛줄기 같은 게 구체 겉면을 휘돌며 회전하는 것이었다.
'마나'.
인게임에서 가끔 연출되던 장면이 내 두 눈으로 직접 생생히 들어오고 있었다.
한번 회전한 '마나'는 곧 기사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더니 검 끝에 다다랐다. 동시에 검이 연한 푸른 빛으로 물들어갔다.
'이게 그냥 아무한테나 보이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이 특성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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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적안(軌跡眼)」 -
- 등급 : EX
- 설명 : 세상 만물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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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줄뿐인 모호한 설명 때문에 대체 무슨 능력인가 했더니 이런 식이었군.
이건 단순히 마나의 흐름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눈에 힘을 준 채 주변을 바라보자 망막에 페인트통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세계가 알록달록 변해갔다.
나는 한창 대련 중이던 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들의 움직임에서 푸르고 붉은 선들이 여러 가닥 뻗어 나와 있었다.
'푸른 선은 허초, 아니면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 붉은 선은 치명적인 공격인 건가?'
대련을 계속 바라보니 눈과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마치 뇌에 정보의 과부하가 온 것처럼.
나는 생각을 달리해, 한 사람만 관찰하기로 했다.
그는 바로 푸른 매 기사단의 부단장 카론. 이 연무장에서 가장 순도 높은 마나와 뚜렷한 색채의 코어를 지닌 자.
나는 카론의 검과 심장 부근을 번갈아 유심히 바라보았다. 코어와 마나의 움직임, 그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희끄무레한 빛줄기가 푸른색 구체를 한 번씩 휘감으며 돌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회전을 거듭할 때마다 빛줄기는 점차 얇은 꼬리를 남기며 가느다랗게 변해갔다.
그 형체가 아예 육안에서 희미해지는 순간, 갑작스레 빛이 폭발하듯 온몸으로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회전, 가속, 압축, 전달… 인가?'
나는 몇 개의 단어로 마나의 움직임을 정리했다.
이 녀석, 에반의 몸에도 코어는 존재했다. 검술 명가의 차남답게 연공법 정도는 수련해 왔다는 걸까.
게다가 코어에 담긴 마력의 양은 카론과 비교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해내는 건 다른 문제란 말이지.'
원작의 설정상, 인체에 존재하는 마나 회로는 총 아홉 개.
모든 회로를 활성화해야만 검으로 마나를 형상화할 수 있다.
자칫 실수로 마나가 회로를 이탈한다면, 최악의 경우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고민 끝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육체를 관조하기 위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
귓가에 스치는 기사들의 기합과 대기를 가르는 검의 파공음.
그들이 잔뜩 흘린 땀의 냄새와 발길에 피어오른 흙먼지 냄새.
피부 솜털에는 가느다란 바람결의 흐름이 느껴졌다.
꿀꺽, 나는 감각에 집중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식도를 넘어 위장 속으로 떨어진 한 방울, 마치 파문처럼 꿈틀거리는 내부의 장기들과 끊임없이 박동하는 심장의 움직임.
꿈틀대는 맥박 사이로 희미하고도 부드러운 기운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마나구나.'
손끝, 팔, 목. 여러 혈맥을 지나다니는 기운의 흐름에 집중하자, 이내 마나의 종착지이자 시작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견고하면서도 막강한 에너지가 응집된 공간이었다.
코어.
이제 이걸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나는 마나의 흐름에 따라 코어에 집중했다. 그러나, 코어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뭐지? 뭐가 부족한 거지?
에반 테일러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이 녀석은 따로 코어를 발동시킨 적이 없었다. 처음 이걸 형성한 이후 무턱대고 무식하게 마나만 쌓아온 것이다.
나는 원작 게임을 떠올렸다. 주인공 '이안 페이지'가 코어를 발동시킬 당시의 연출을. 곧 찾게 된 장면이 있었다.
심상.
사람마다 코어의 형상과 마나 회로의 움직임이 다른 이유.
같은 연공법을 익히더라도 이를 다루는 방식은 제 나름의 심상 이미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이안 페이지의 경우, 그의 심상은 '달이 반사된 호수'. 아름다운 달무리가 구붓하게 떨어지는 수면.
그렇다면, 에반 테일러는?
아무래도 원작은 '이안 페이지'의 시점이었기에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에반 테일러이기에 먼저 현대인 '이지훈'은 어떤 이미지를 심상으로 삼을 것인가.
나는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평범했던 어린 시절부터…게임에 몰두하게 된 비교적 최근까지.
이내 잡을 수 있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격렬하게 피어나는 불꽃.'
과거의 내 취미였던 '도예'와도 관계된 일이었다. 빌어먹을 현실에 치여 머리를 식혀야 할 때마다 숯가마를 멍하니 들여다봤었으니 꽤 익숙한 이미지였다.
나는 조금씩 불길을 피워올리듯 마나와 코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불씨가 튀긴 듯한 마나의 흐름과 함께 코어가 조금씩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올 한올 불길을 휘어잡듯 마나를 코어로 향해 보내자, 빛의 고리가 만들어져 회전하기 시작했고.
가속도가 붙어 맹렬히 심장 부근을 휘돌던 마나의 줄기는 점차 궤적이 희미해져 가더니, 달궈진 코어의 신호와 함께 번갯불처럼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통로를 향해.
이어 손잡이를 다잡자, 검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백색의 작은 빛줄기가 피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자칫 실수할까 봐 등줄기에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린 듯했다.
하지만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태연하게, 여유 넘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야 했다.
"별것도 아니네."
검기 정도는 삼류 악역도 손쉽게 뿜어대길래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이 빠졌다. 그리고,
-거, 검기!?
-마, 말도 안 돼!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하고 있는 기사들.
'뭐, 이게 대단한 거긴 한가 보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밧! 쐐애액!
그런데 갑자기 제멋대로 검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거, 검기 발출까지!
나도 놀랐는데, 기사들은 나보다 더욱 놀란 얼굴이어서 괜히 민망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 무력으로는 주인공 '이안'은 물론, 쌍둥이 형인 '카일'조차 이길 수 없다.
뭔가 좀 더 제대로 된 타격기가 필요한데…
한참을 고민하자, 원작에서 에반 테일러가 등장할 때마다 보여주던 트레이드마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리는 검강.
근데 그게 꼭 검강일 필요가 있나? 검기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될까?'
나는 호흡을 고르며 다시 한번 코어에 마나를 회전시켰다. 곧바로 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한 검 끝.
하늘을 향해 그물망을 그려내듯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른 검기가 허공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엮이더니, 촘촘한 그물 모양으로 바닥에 낙하했다.
콰아앙-!
"이게 되네?"
겉으론 여유로운 척 말을 꺼냈지만, 머리가 띵했고 온몸에 탈력감이 밀려왔다. 당장은 한 번도 무리였다.
그나마 한 번이라도 해낸 건, 보유한 특성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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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의 천재」 -
- 등급 : S
- 설명 : 당신에게 검이란 본능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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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이 특성을 보유한 캐릭터는 주인공인 '이안'과 악역 '에반' 이 두 명뿐.
차이점이 있다면, 에반에게는 다른 부정 특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것.
주변을 둘러보니 입을 떡 벌린 기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나는 체력이나 마나가 한계라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게 '에반'의 명백한 한계다.
그러나, 지금 약점을 보인다면 후일 물어뜯길지도 모른다.
이 망나니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가문의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 가문을 손에 넣어 원작의 역사를 뒤틀어야만 하니까.
나는 허세를 부리며 가까이에 있는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봐. 가볍게 대련 어떤가?"
경악한 기사는 컨디션을 핑계로 대련을 거부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X 되는 줄 알았다.'
대련에 응하지 않을 걸 상정하고 한 말이지만, 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여유롭게 납검하고 방으로 도망치려던 중 릭이 다급하게 뛰어와 내게 말했다.
"도, 도련님. 플로리스 백작가의 엘린 영애가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3화 파혼의 조건(1)
'엘린 영애가 찾아왔다고?'
에반과 그녀의 약혼식은 무산되었지만, 파혼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따로 연락이 없었으니 개인적으로 방문한 듯한데, 대체 무슨 이유로?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릭의 안내에 따라 별관의 응접실로 향했다. 연무장과 거리가 꽤 멀었는데, 무리한 탓에 걸어가면서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카일의 말대로 사과부터 건네야 할까.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자 에반의 기억으론 희미하던 엘린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은색의 긴 머리칼, 얼핏 가련하게 보일 정도로 청초한 인상. 푸른 눈동자는 맑고도 차분해 언뜻 깊은 바닷속이 떠오른다.
"오랜만이네요."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여는 그녀. 이런 미인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니. 에반은 X자가 아니었을까.
"수련을 하다 와서 제 꼴이 좀 엉망입니다. 양해해주시길."
차분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놀란 건가?
"그새 사람처럼 말하는 법을 배우셨군요. 혀가 꽤 매끄러워지셨어요."
"…?"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청순한 인상과는 완벽하게 괴리된 그녀의 말투. 잠시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나도 모르게 발동한 궤적안에 의해, 그녀의 명치 부근에서 번쩍이는 세 개의 고리가 눈에 띄었다.
'마법사?'
뭐지? 플로리스 가문이 마법으로 유명했나? 그건 아니었는데.
정계의 중심부에 진출한 권세가이긴 했지만, 마법과는 딱히 연관이 없었다.
묘한 위화감이 들던 찰나, 그녀가 뜸을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말 수련이라도 했나 보군요. 뭐, 그보다 제가 왜 직접 찾아왔는지는 스스로 알고 계시겠죠?"
모른다. 사과 때문인가?
"먼저 지난날, 제 무례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영애."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가주의 명 때문이기도 했지만, 에반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됐어요. 제가 원하는 건 말뿐인 사과가 아니라 제대로 된 결과예요. 파혼 말이죠."
하긴 약혼식 당일, 에반의 짓거리는 파혼 사유로 타당했다. 당사자인 그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 파혼을 요청한다면 공식적으로 서한을 주고받은 뒤 양가의 입장을 조정하는 게 맞는 일 처리였다. 이렇게 홀로 찾아와 요청할 일은 아니란 거지.
그래서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귀 가문의 공식적인 입장입니까?"
"그건…"
설마 반문할 줄은 몰랐던 걸까. 말을 머뭇거리는 그녀였다. 뭐지? 내가 바로 승낙하리라고 생각한 건가? 대체 에반은 평소에 얼마나 X신이었던 걸까.
애초에 가문끼리 결정한 약혼이다. 귀족들 간의 혼사이니 당연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엮여있을 거고.
당장 망나니 신세긴 하지만, 괜히 가주의 눈길에서 더 벗어날 만한 빌미를 왜 내가 제공하겠나. 얌전히 말대로 따라야지.
"플로리스 가문의 의견이 아닌, 엘린 영애 개인의 입장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그건 가문의 의견이겠죠? 에반, 당신의 의견이 아닌."
엘린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혀를 찼다.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살짝 열이 올라왔지만,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영애, 모름지기 귀족이라면 책임 역시 감당해야 하는 법입니다."
"하, 당신에게 책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긴 할까요?"
"…."
이 녀석의 망나니짓을 떠올리면 딱히 대꾸할 말이 없긴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뉘앙스를 밝혔으나, 엘린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그쪽이 직접 약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면…."
"그건 영애도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 그건!"
그대로 무시한 채 돌아가려던 찰나, 그녀의 팔에 걸린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백금 팔찌로 보였지만, 내 눈에는 다른 게 들어왔다. 보석에 하늘빛이 서려 있는 것 아닌가.
'아티팩트?'
잠깐.
"혹시 그 팔찌, 어디서 난 겁니까?"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죠?"
확실했다.
눈 밑에 있는 눈물점과 손목의 아티팩트.
'마도 공학의 천재'
작중 이름만 등장했기에 바로 연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아티팩트는 원작에서 유명했고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주인공의 애병, '뇌광검(雷光劍) 아스트라'가 그녀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반과 관련 있을 줄이야.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생겼다.
"엘린 양, 당장 파혼하시죠."
원하시는 대로.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
마차에 올라탄 엘린 플로리스는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버린.
'여전히 망나니 같긴 한데…'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작자였으니 생소한 존대 따위는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기에 미묘하게 거슬린 것은,
'대화가 통했어.'
바로 이점이었다.
게다가 막무가내로 유명하던 에반이 무슨 일인지 논리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는 점,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까지.
마치 이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혹시 여태 망나니인 척 연기라도 해 온 걸까?'
제국의 전대 황제가 황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망나니를 연기했다는 꽤 유명한 고사도 있었으니.
그러나 엘린은 곧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약혼식에서 만취해 토사물을 쏟아내던 에반의 모습은 보통 광기로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호위 기사 미하엘이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음? 아가씨, 팔찌가?"
"줬어요. 에반에게."
엘린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미하엘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파혼을 위해 찾아왔는데 팔찌를 건넸다고? 이 뒤틀린 인과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그게, 알더라고요. 제가 만든 아티팩트라는 걸. 그러더니 파혼해 주겠다며, 달라더군요. 뭐 그 외에도 여러 조건이 붙긴 했지만…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봐야 할까요?"
나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린이었다.
그도 그럴 게, 보통 가문 간의 파혼에는 막대한 배상금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또한, 덕지덕지 붙인 조건들도 하나같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 아니던가.
예를 들어, 아티팩트 제작에 필요한 경비와 재료 지원. 차후 아카데미 마법부에 입학 시 장학금 등등.
뭐, 대체 무슨 의도인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빌어먹을 망나니 놈이 그걸 어떻게? 아가씨께서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건 가문 내에서도 비밀 아닙니까? 분명 뒷조사라도 한 게…"
"쉿! 조용히 하세요. 여긴 우리 가문이 아니라고요."
이내 정신을 차린 미하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원하시는 대로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파혼은 하기로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네요. 이게 잘된 건지…."
얼떨떨한 표정을 한 엘린이었다. 미하엘이 천만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분명 잘 된 겁니다. 자칫 결혼까지 하셨다면 평생 괴로우셨을 겁니다. 그는 절대로 구제가 불가한 망나니니까요."
"그렇겠죠? 근데 왜일까요? 오히려 찜찜한 기분이에요. 뭔가 속은 듯한 그런…"
미하엘은 에반이 머무르는 별관 건물을 노려보며 말했다.
"기분 탓일 겁니다. 뭔가 계략을 꾸밀 정도로 똑똑한 사내는 아니니까요."
**
엘린 영애의 방문 다음 날, 테일러 백작가의 하인들은 온종일 떠들썩했다.
대화의 주제는 에반 도련님과 엘린 영애.
단순한 만남이었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뜨거운 화제였다.
"릭! 뭐 들은 거 없어? 넌 전속 시종이니까 알고 있을 거 아냐?"
눈을 빛내며 묻는 하녀의 질문에 릭은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없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지 말고… 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알아? 응? 어떻게 된 거야? 약혼식 다시 하신대? 말 좀 해봐."
"맞아, 우리 사이에 그것도 못 알려줘?"
하녀들이 둘러싸자 릭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우리 사이가 뭔데!?
릭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근 이상하게 에반 도련님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지만, 언제 또다시 돌변할지 모른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소문의 출처가 자신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마 난 사지가 분해될 거야…'
릭이 입을 꾹 다물자 하녀들에게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재미없어. 실망이야 릭."
"우리 귀여운 릭이 누나들에게 이렇게 상처를 줄 줄이야…"
릭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한 눈으로 하녀들을 바라보고 있자,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적당한 간격의 구두 소리.
에반 도련님이 정장에 칠흑의 코트까지 차려입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몰려들 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도련님. 얘, 얘들아? 청소하러 가야지?"
"어, 얼른 가자."
에반의 한 마디에 마치 썰물처럼 우르르 뛰쳐나가는 하녀들의 모습에 릭은 황당함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쌍년들…'
그러나, 에반의 전속 시종으로 살아온 세월이 무려 5년. 나름 숙련된 사용인이었기에 릭은 바로 감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에반은 지긋이 릭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살짝 깃들어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릭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이건 자신을 몰아붙인 하녀들에 대한 소심한 복수이기도 했다.
"그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아, 내가 엘린 양을 만난 거 말인가?"
"네, 넵. 다들 궁금해해서… 참고로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릭의 단언에 에반은 가볍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금발 머리칼을 한 차례 매만지며.
"뭐, 궁금할 수도 있겠지."
"…예?"
릭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평상시 에반의 성격대로라면,
'감히 천한 것들이…'
따위의 말이 튀어나왔어야 정상 아닌가.
'확실히 도련님은 변했다.'
그러나, 릭은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주인의 끼니를 여쭸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아침 식사를 준비할까요?"
에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눈을 빛냈다.
"아니, 됐어. 그나저나 아버지는 지금 본가에 계신가?"
"오늘 아침 들어오셨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네."
이내 걸음을 옮기는 에반의 옆으로 릭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도련님, 어, 어딜 가시려는?"
"아버지 만나러."
예?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릭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입꼬리를 작게 말고 있었다.
그 순간, 주인의 눈을 마주한 릭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슨 이유일까.
붉은 눈동자가 굉장히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4화 파혼의 조건(2)
테일러 가문의 본관은 내가 머무는 별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단순히 규모의 차원을 넘어, 미감 자체가 다르달까. 온갖 조경수로 이루어진 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 북부의 거대한 산맥을 등진 저택의 풍광은 그 자체로 예술에 가까웠다.
인게임에서 3D 그래픽으로나 보던 풍경을 실제 두 눈으로 마주하자, 그 감흥은 비할 수 없었다. 마치 외국의 관광지를 거니는 느낌.
한참 광경에 감탄하던 찰나, 내 귓가에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에, 에반 도련님? 본관에는 대체 왜?"
"모두 고개 숙여, 괜히 도련님 얼굴 쳐다보지 말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주춤대는 본관 사용인들의 모습.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젠장.
앞날이 막막했다. 평판이 이따위인데 내 말을 가주가 제대로 듣기나 할까.
아무리 논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지는 법이다.
'차라리 예전의 에반처럼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게 나을지도….'
그때, 옆에 있던 릭이 주뼛주뼛 말을 걸어왔다.
"저, 도련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뭐?"
"…그게 저번 약혼식 이후로 가주님께서 별관을 벗어나지 말라고 근신 명령을 내리시기도 했고."
"볼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이내 본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에반?"
마치 겨울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흑발, 도도한 인상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 나로서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릴리아 테일러.
테일러 가문의 장녀, 즉 에반의 누이. 그리고,
원작 네 번째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
검술 명가 테일러의 적통 중에서도 그녀는 조금 독특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먼저 검술에 재능이 전혀 없다는 점.
그럼에도 가문의 눈 밖에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령술에 소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마저도 뛰어난 재능은 아니었다.
나중 성장의 벽에 가로막힌 릴리아는 가문에서 배척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금단의 영역에 손을 뻗고 마는데, 이후 주인공 '이안'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언젠가 스테이지 보스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 몸의 누나일 뿐이니.
그러자 릴리아는 크게 굳은 얼굴로 멈칫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너, 너! 방금 뭐라 말했느냐?"
"인사를 건넸을 뿐입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릴리아를 관찰했다. 그녀의 몸 주위에서 푸른빛 아지랑이가 선연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게 「악당의 직감」이군.'
실제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카일에게선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붉은색에 가까워질수록 위험도가 증가한다고 했지. 지금은 괜찮다는 거군.
특성을 확인하고 있던 찰나, 릴리아가 뭐라 중얼거리다 나를 지긋이 노려봤다.
"…제정신인가? 아니, 아니다. 그래, 머저리 네놈이 본관에는 무슨 일이더냐."
"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그리 말하자, 릴리아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네가? 아버지를? 열은 없는데, 대체…? 제정신이더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어제 엘린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께 긴히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는지라."
릴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어딘가 수상하다는 듯한 뉘앙스였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응, 혼사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다름 아닌 네 혼약이니 그럴 수도. 하면, 약혼식부터 다시 치를 예정이더냐?"
"아, 그거.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릴리아는 약간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로구나. 바뀔 리가 없지. 네 놈은 여전히 미치광이 머저리로다."
**
가주의 집무실 앞.
나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머저리. 너도 알고 있겠지만, 괜히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도록.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릴리아가 남기고 간 충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 아들이니 정말 죽이겠냐 싶기도 했고.
그것보다는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워낙 거물이라서 말이지.
로웬 테일러.
검의 명가 테일러답게 가주는 제국의 5대 소드마스터다. 현존하는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
또한, 이 가문의 모든 실권을 한 손에 틀어쥔 권력자.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나는 가문의 중심에서 더더욱 멀어져 그대로 베드엔딩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심호흡과 함께 옷차림을 정돈한 다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에반."
이미 내 방문을 전해 들은 건가? 아니면 소드마스터에 오른 괴물이어서? 가주는 이미 내가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문을 열자, 곧바로 나를 향한 가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그저 눈빛일 뿐이었는데, 가주를 마주하자마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백금발에 적안. 날카로운 눈매는 에반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군살 하나 찾을 수 없는 탄탄한 몸. 그러나,
동시에 내 머릿속을 불쑥 등장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다르다.'
그가 따로 마나를 끌어 올리거나, 어떤 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범인과는 아득히 다른 차원에서 숨 쉬는 초월자의 분위기가.
무덤덤한 얼굴. 나직한 시선.
그럼에도, 분명한 기백.
이 사내는 바로, 제국에 다섯뿐인 소드마스터.
검의 끝에 도달했다는 초인.
하얀 사자. 로웬 테일러.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저릿한 소름이 올라왔다. 온몸이 투명한 시선에 샅샅이 꿰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최대한 긴장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버지."
턱을 괴고 있던 가주가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왼쪽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가 있었는데,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무슨 의미지? 의외라는 건가?
"그래…. 용무는?"
"어제 엘린 영애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명하신 대로 충분한 사과를 전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다면…"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심드렁한 얼굴의 가주가 이만 나가보라는 듯 나를 향해 손을 휘저으려던 찰나,
"엘린 영애와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했다.
"뭐라?"
그 순간, 가주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
가주, 로웬 테일러.
원작에서는 딱히 등장하지 않는 인물. 게다가 에반의 기억으로 파악하기에는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다. 마치 꿈결을 본 듯 선명하지 않은 구석이 빈번했다.
때문에 나는 릭을 비롯한 사용인들과 릴리아의 말을 통해 그의 성격을 최대한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과묵하다. 무섭다. 주변인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무뚝뚝하다. 등등.
워낙 짧은 시간이었기에 사실 내가 모은 정보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우선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로웬 테일러가 쓸데없는 사담을 즐기지 않으며 충분히 가치를 증명하는 자에게만 흥미를 보이는 성격임을 알아내는 데에는.
문제는…
…이미 인게임에서 접해 본 '소드마스터'의 위용을 내가 실제로는 겪어보지 못했다는 것.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던데, 이게 그냥 우스갯소리로 지나갈 설정이 아니었다니.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 진심으로.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내 온몸은 쉴 틈 없이 짓눌리고 있었으니까.
파혼 이야기에 가주가 미간을 구긴 순간, 사방에서 나를 향해 쏟아진 무형의 압력.
마치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등 위에 올라온 듯, 압박감에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크윽!"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끝을 깨물었다. 그때 가주가 나직한 어조로 되물었다.
"다시… 말하라. 무엇을 하겠다고?"
놀랍게도 집무실은 고요했다. 주변 집기에서는 작은 흔들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흘러들어온 바람결에 커튼이 슬쩍 나풀거렸을 뿐.
그러나, 내게 가해진 압력은 서서히 그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점차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양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나는 이를 악다물며 코어 주변의 마나를 회전시켰다. 전신으로 뻗어 나간 마나가 근섬유를 한올 한올 지탱했다. 뿌리처럼.
이내 신체의 근섬유에 빼곡하게 마나가 휘감겼을 때,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음?"
고개를 들었을 때 가주의 눈썹은 눈에 띄게 휘어져 있었다. 이건 예상 못 했으리라.
"후우…'마경' 그리고 '고립' 때문이지요."
거친 호흡과 함께 뱉은 몇 마디에 순식간,
"뭐라?"
나를 찍어누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북부에서 절대적인 위세를 자랑하는 본 가의 약점…"
테일러 백작가는 달리 북부의 패자, 수호신으로까지 불릴 만큼 대단한 위세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건 바로 '북부'입니다."
그게 역으로 발목을 잡고 있거든.
"계속 말해보거라."
여전히 무미건조 목소리였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가주는 권태에 잠겨있던 눈을 또렷하게 빛내고 있었다. 꽤 흥미롭다는 듯.
**
에반이 물러간 이후.
로웬 테일러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에반의 이야기가 꽤 인상적이었기에.
그의 말처럼 현 테일러 가의 난관은 역설적으로 '북부'의 패자라는 대단한 위세 때문이었다.
압도적으로 북부를 장악했기에 중앙 정계의 견제를 받게 된 것. 이는 근 몇 년간 물자 보급과 병력 충원에서 마찰이 빚어지며 수면 위로 드러났다.
또한, 로웬이 직접 움직여 해결하는 방향도 불가했다. 마경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으니까.
마경에서 제국을 지켜낸 가문이 마경으로 인해 고립된 상황이었다.
―플로리스 백작가와의 혼사로는 본가의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하여, 차라리 중앙 정계와의 연결을 위해 유서 깊은 관료 가문인 플로리스 백작가와 혼사를 주선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이 혼사는 본가가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건 이미 로웬도 고려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달리 대책이 없지 않은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테일러 백작가는 북부에서 고립된 채 말라버릴지도 모른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로웬이 불호령을 내리려던 순간, 에반은 품에서 웬 종이뭉치를 꺼내 책상에 펼쳤다.
―오늘 아침 발행된 신문입니다. 첫 면을 확인해주시죠.
<자애로운 로드릭 1황자 저하의 시찰>
간추리면 1황자가 수도 곳곳의 시설에 방문해 그들을 독려했다는 내용.
기사를 확인한 로웬은 이내 에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이 기사가 이 혼사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듯. 그러자,
―여깁니다.
에반은 마도구로 촬영된 1황자의 사진을 짚었다. 정확히는 1황자의 어깨너머를.
여러 귀족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중 엘린 플로리스를 비롯해 플로리스 백작 내외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몇 년 안, 플로리스 백작가는 쇠락할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반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입술을 열었다.
―그들이 지지하는 1황자는 절대로 황위에 오를 수 없으니까요.
그 순간, 로웬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빼닮은 붉은 눈동자가 불꽃처럼 일렁이며 빛난 것을.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주 요사스러웠다.
5화 명령서(1)
가주와의 독대, 그로부터 약 1개월 후.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 달간 반복해온 오전 일과였다.
원작 정보로 파악한 미래의 흐름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인게임에서 파악할 수 없던 세상의 기록이 필요했으니까.
역사와 문학을 비롯한 일반 학문부터 '마나'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도통 '마나'에 관한 이론만큼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마치 전파 원리를 접한 문과생처럼.
하지만 '마나'는 이 세계관의 무력 근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책을 붙잡자, 정신에 고양감이 치솟으며 단어들이 하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
- 「독해력」 -
- 등급 : A
- 설명 : 문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차원의 개념일수록 해석에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
내게 주어진 특성 덕분이었다. 언급된 페널티란, 뇌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
일정 단락을 읽어내면 한동안 백치처럼 멍하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혹시, 「독해력」으로 마법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기초 마법서를 훑어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론 서적을 읽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눈앞이 이지러지고, 뇌는 타오르는 걸 넘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멍한 수준을 넘어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겨우, 기초 마법 '라이트'를 익히려 시도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나는 「독해력」의 작용 방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존에 쌓은 지식을 기반으로 상위의 개념을 해석하는 특성이었다.
'이건 잠시 미뤄둘까.'
가뜩이나 허약한 몸. 페널티를 버텨낼 리가. 당장은 어설프게 마법에 손대기보다 차라리 검술 교본이라도 더 읽는 게 나을 것이다.
오후에는 별관의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수련을 하던 기사들이 꽤 방문하던 곳이었으나, 내가 매일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텅텅 비어버렸다.
'악명이 도움이 된 건지.'
당장 내 목적은 검술이 아닌 체력 훈련. 괜히 헉헉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매일 홀로 수십 번 달리기와 맨몸 운동을 병행했다.
부정 특성 「저질체력」과 「잔병치레」를 제거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효율을 끌어올리려는 방안이기도 했다.
쉽게 설명하면 자동차 연비와 비슷하다.
이 몸 '에반 테일러'의 육체는 그 연비가 제로에 가깝게 수렴하는 수준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처참할 정도의 지구력과 근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어 수면시간을 제외하곤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하였다.
첫날에는 팔굽혀펴기 한 번이 힘들었고, 30초를 달리는 게 버거웠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띠링-!
[운동의 효과로, 특성 「저질 체력」이 일부 개선됩니다.]
[균형 잡힌 식습관으로, 특성 「잔병치레」가 완전히 개선됩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알림들, 나는 헐떡이며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이게 효과가 있긴 있구나. 아직 멀었지만."
부정 특성들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앞으로 더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다.
"후. 그럼 다시 해볼까."
**
테일러 백작의 집무실.
정적 속에서 로웬 테일러는 한 장의 서찰을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장벽 철암(鐵巖)에서 사령관 크로웰이 보고 드립니다...
서찰의 문구를 곱씹던 로웬 테일러가 혼잣말이라도 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버나드."
호명과 동시에 집무실 구석의 그림자에서 한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테일러 백작가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수석집사. 버나드는 마치 어둠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해 로웬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 가주님."
"철암(鐵巖)에 문제가 생겼군. 누가 좋겠나?"
"이전처럼 카일 공자를 보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흐음…"
로웬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가자, 주인의 심기를 눈치챈 버나드가 재차 다른 의견을 올렸다.
"그렇다면 릴리아 영애에게…"
말을 이어가던 버나드는 주인의 얼굴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이름을 언급했다.
"혹 에반 공자를."
이내 로웬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버나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묘하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로웬의 몇 마디에 버나드는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준비한 서류를 주인에게 전달했을 뿐.
[직계 인원 조사서]
=카일 테일러: 칠 일 전, 벨라시온 영지 방문. 마물 격퇴 후 귀환. 본관 대기 및 휴식 중….
=릴리아 테일러: 보름 전, 중급 뇌전의 정령 '카르스타'와 계약 성공. 본관 연구실에서 정령술 수련 중….
아무 말 없이 심드렁하게 서류를 넘기던 로웬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흥미롭다는 듯.
=에반 테일러: 한 달 전, 검기 발현. 엘린 플로리스 접객. 이후 도서관과 연무장에서 칩거. [특이사항]- 현재 해당 인물 주요 관찰 중.
이내 로웬 테일러가 비죽이며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저 비루먹은 망아지라고 생각했건만…."
그 낯선 광경에 버나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과거 카일 공자가 검기를 발현했을 때에도 고개만 끄덕이셨던 가주께서 웃으시다니?
소드마스터에 오른 뒤, 그 영향으로 로웬 테일러가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만사에 무덤덤하게 변해버린 일화는 유명했다.
초인은 지고의 경지에 달하며 평범한 인간과 격을 달리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잃고 만다고.
그런데….
믿기 어려웠지만, 이러한 변화는 분명 에반 공자와 관련이 있으리라.
버나드는 말없이 다짐했다. 수하로서 마땅히 알아내야만 한다고. 주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변수를.
대체 무슨 이유로 에반 테일러가 변화했는지를.
그렇게 생각하던 버나드에게 로웬의 명이 들려왔다. 웃음기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예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하나, 들판에 홀로 풀어두기에는 아직 이르다. 릴리아를 동행시키도록."
"분부대로 전달하겠습니다."
버나드는 다시 공손히 고개를 숙인 다음, 집무실의 문이 아닌 구석의 그림자로 걸음을 옮겼다.
곧 켜켜이 쌓인 어둠 속으로 그의 몸이 쑤욱 흘러 들어갔다.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다시 찾아온 고요 속, 로웬 테일러는 나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지지하는 1황자는 절대로 황위에 오를 수 없으니까요.
―....
―이 혼사가 아니더라도 제겐 방법이 있습니다. 보여드리죠. 반드시.
한 달 전, 요사스럽게 빛나던 그 붉은 눈동자가 과연 어떠한 결실로 돌아올지.
"꽤나…."
로웬은 다시 한번 가느다란 웃음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딱. 딱.
손끝에는 깨져버린 정적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실려 있었다.
**
"도, 도련님!!"
대체 무슨 급한 일인지.
헐레벌떡 내 방으로 찾아온 릭. 평소와 달리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시끄럽군. 조용."
내 눈초리에 릭은 흠칫 몸을 떨더니 상기된 얼굴로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치 대단한 귀중품이라도 진상하는 것처럼.
내려다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주름 하나 찾을 수 없이 곱게 닫혀 있는 서신 봉투.
"이게 뭔데, 난리를…"
"가, 가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녀석의 말 대로 겉면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칠흑색 방패 인장이 찍혀있었다.
젠장. 뭔가 느낌이 좋지는 않군.
나는 바로 봉투를 열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명령서>
: 다섯 번째 장벽 철암(鐵巖) 워프 게이트 보수의 건.
-에반 테일러를 해당 임무의 총 책임자로 임명함.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당분간 최대한 체력을 키우는 방향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가주의 눈에 띈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파혼이라는 늑대를 피하려다 웬 사자 아가리에 발을 집어넣은 격.
"젠장, 내 업보군."
하필 마경이 지척인 다섯 번째 장벽이라니. 내 예상보다 더 위험한 곳이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분명 마물과의 전투는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차피. 이 몸에 빙의한 이상 무언가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게임에서만 막무가내로 싸워봤지 실제로는 나는 주먹다짐을 해본 적도 드물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 자칫하다간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딱딱한 얼굴을 한 채 굳어 있자, 릭이 멀뚱멀뚱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딱 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빛내는 게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눈치가 없나?
"별 건 아니다. 워프 게이트 수리에 책임자로 임명된 것뿐."
속이 답답했지만, 귀찮은 마음에 적당히 알려줬다. 얼른 듣고 떨어지라고. 그런데 녀석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드, 드디어!"
갑자기 뜬금없이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 아닌가. 감격이라도 했다는 듯.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미친놈인가? 아니면 평소 내가 뒤지길 바랐던 건가?
"뭐냐? 왜 이러는…"
당황한 내가 되물었다. 녀석은 대답 대신 눈물을 훔치며 기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가주님께 인정받으셨군요!"
지금껏 카일과 릴리아가 임무를 맡을 때마다 에반은 기운 없이 방 안에 박히거나 평소보다 술주정을 더 심하게 부려왔다고 했다.
잔뜩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런가."
에반, 이 녀석이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나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릭의 말대로라면 이건 나쁘지 않은 기회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이 망나니의 평판을 뒤집을.
"이번 임무를 잘 해결하시면 본관으로 복귀하실 수도 있겠군요!"
릭이 방긋거리며 말했다. 아마 녀석도 카일이나 릴리아의 시종에 비해 대우를 박하게 받아왔을 것이다.
주인의 위상에 따라 하인의 체면 또한 갈리기 마련이니까.
"됐어. 짐이나 챙겨둬라. 급한 건이라 내일 당장 출발해야 한다는군."
"옙! 분부대로 합지요!"
녀석이 나간 뒤, 나는 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자욱한 밤하늘이었으나 그 사이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실크 자락처럼 부드럽게 번져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자그마한 풀벌레의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꽤 익숙해졌군.
처음 빙의되었을 땐 패닉에 빠져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는데 말이지.
나는 검을 뽑아 달빛에 검면을 비춰보았다. 부드럽게 반사된 달무리가 검 끝에서 예리하게 갈라졌다.
동시에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운 한기.
소름이 끼치는 감각.
"할 수 있나?"
글쎄, 아직 갈 길은 멀었으니까.
쉬이익.
휘두르자, 매끄러운 검명이 방 안 가득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목숨을 건 처절한 전투라 하더라도.
흉측한 아가리를 들이밀 마물에게서도.
"피할 수 없다."
할 수 있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겠다. 아니, 해내야만 한다.
해내야만 이 빌어먹을 망겜에서 살아남을 테니까.
반드시.
6화 명령서(2)
홍염(紅炎)기사단의 단원 '클리프'.
그는 테일러 백작가의 가신 가문 출신으로, 누구보다 고고한 자존심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였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코어를 생성하여 마나를 다루었고, 18세가 되던 해 테일러 백작가의 홍염기사단에 입단한.
소위 말하는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
현재 공석인 부단장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자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엘리트 의식에 취해 자기보다 약한 남자는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무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을 제외한 모든 것.
그러니까.
덕(悳), 지(智), 체(體) 세 가지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출세욕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아부는 결코 하지 않으며,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클리프는 그런 사내였다.
그런 의미에서 '에반 테일러'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상관 중 한 명이었다.
덕(悳)은 망나니라 불릴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었고, 지(智)는 제대로 된 교양서적조차 읽어 봤을지 의문이었으며, 체(體)는 검을 쥐어본 적조차 없을 것이었다.
'직계라지만 화가 나는군.'
아무리 존경하는 가주님의 지시라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거였다.
그게 워프게이트의 수리라는 단순한 임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설령 가는 길에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에반 테일러'가 직접 지휘한다? 클리프에게 있어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지휘관이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법!'
클리프는 다섯 번째 장벽 철암(鐵巖)으로 향하는 물자들을 점검하면서 생각했다.
에반이 나타나면 기세를 꺾어놓은 다음, 자신이 직접 병력을 지휘하겠노라고.
보는 시선에 따라 하극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저 기세로 압박하겠다는 것이니까.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가는 길에 마물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면, 자신이 직접 병력을 지휘하여 소탕한다.
썩 괜찮은 그림이었다.
동시에 부단장 후보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도 있을 터이고.
클리프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기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클리프 경, 자네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아닐세."
"웬만하면 그냥 좋게좋게 가자고. 최근 에반 도련님에 대한 소문도 있으니까."
소문이라면 클리프도 들었다.
갑자기 검기를 발현했다거나, 사람이 달라졌다거나 하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들.
허나, 클리프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검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테일러 가의 직계로 어렸을 때부터 코어에 마나를 방대하게 쌓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검기 발현은 기본적으로 '마나'에 대한 기교, 그리고 '심상'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구현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검에 마나를 씌울 수는 있을지언정, 검기의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지 않았던가.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었다.
그때, 짐을 싣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등을 돌려 경례 구호를 외쳤다.
-충!
아무래도 '에반 테일러'가 온 모양이었다. 클리프 역시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
저벅- 저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190cm에 가까운 장신에, 깔끔해 보이는 제복, 그 위에 칠흑의 코트를 걸쳐 입은 에반 테일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클리프는 에반을 올려다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에반의 심유해 보이는 적안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얼핏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전과 다르게 떡 벌어진 어깨와 옷 밖으로도 느껴지는 선명한 근육들은 '카일 테일러'와 비교해도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그러나 속단하기는 일렀다.
그저 겉모습만 변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경례 정도는 해야 했다.
그건 규율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손도 입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래서야 압박을 가하기는커녕, 오히려 압박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아닌가.
그때, 에반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렇군."
에반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자신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제야, 몸과 정신이 자유로워지며 미지의 압박감에서 풀려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방금 겪었던 느낌이 마치 꿈처럼 싱숭생숭했지만, 강렬했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
·
·
어느 가문의 기사단이든 흔히 말하는 '라인'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리고 홍염(紅炎)기사단은 카일 테일러의 수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기사들과 마찰이 있을 거라곤 어제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가주의 시험이었겠지.'
나는 코어를 활성화하여 클리프를 가볍게 압박했다.
긴장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했다. 아마 「권위의식」같은 성격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에반 테일러'의 성격과 행동에 어느 정도 동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귀족의 예법이 의외로 익숙했고, 아랫사람을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저리, 아침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어째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구나."
"아닙니다. 누님."
"뭐,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그나저나 네 녀석의 누님 소리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구나. 머저리, 인사하거라. 이쪽은 4위계 마법사 레이나라고 한다."
릴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같이 온 마법사를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에반 테일러라고 합니다."
"레, 레이나라고 해요…"
내가 건넨 손을 맞잡으며, 레이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상당히 소심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만.
레이나의 주위로 「악당의 직감」에 의해 푸른 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흠…'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아는 레이나는 단 한 명뿐이었다.
'광기의 불꽃'이라는 이명을 지닌 대마법사. 허나, 지금 눈앞의 레이나는 그저 소심해 보이는 한 명의 마법사일 뿐이었다.
'차차 생각해보아야겠군.'
릴리아가 그렇듯, 푸른색의 아지랑이는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니까.
현재로선 그저 예의주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통성명이 끝나고, 다시 침묵이 찾아오려 할 때쯤.
릴리아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오른쪽 귀 뒤로 넘기며 내게 말했다.
"어째 지난 한 달간 네게 많은 일이 있었던 듯하구나. 몸도 제법 좋아진 듯하고."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릴리아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정령술사인 그녀는 에반과 클리프 간에 기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전해 들었다.
'머저리 놈이…'
릴리아가 기억하는 에반이란,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이딴 것을 처먹으라고 만들어 온 것이냐?
-이딴 걸 입으라고? 하여간 천박한 놈들이라 미적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구나.
-누, 누님. 제,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저, 저 멍청한 놈들이…
볼품없고, 궁색하며, 허영심에 찌든 머저리.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에겐 감히 말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강약약강(强弱弱强)의 전형.
그게 에반이었거늘.
'…달라졌다.'
에반에 대한 소문은 릴리아 역시 전해 들었다. 매일 같이 도서관과 연무장을 오가며 스스로 단련 중이라고.
당연히 믿지 않았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걸 무마하기 위해 잠시 연기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에반을 보고 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진중해 보이는 표정, 그 모습은 일견 고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뜻 그 모습에서 아버지가 겹쳐 보인다고도 생각했었다.
'허어… 설마 소가주 자리에 욕심이라도 생긴 것이더냐?'
충분히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테일러의 소가주는 자격만 증명한다면 언제든 될 수 있기에.
이번 임무 하나만으로 에반의 평판이 뒤집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이러한 행보를 보인다면 그때도 과연 에반에 대한 평가가 지금과 같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와중, 조용히 있던 레이나가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릴리아님…? 혹시 고민거리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세요."
그제야 릴리아는 자신이 지나치게 생각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가볍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곤 레이나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 잠시 고민할 게 있어서 그랬답니다. 혹시 마차가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아… 저는 괜찮아요."
릴리아는 소심한 목소리로 답하는 레이나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혹시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네? 어떤 거요?"
"음…. 에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지라 레이나의 갈색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제가 잘 알지는 못하는데요. 무, 무서워 보이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레이나는 소심하지만, 거짓말을 할 만한 위인은 못되었다. 아마 이게 에반을 처음 보는 이의 솔직한 평가일 것이었다.
"그렇군요. 솔직하게 답해 주셔서 고마워요."
릴리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덜컥-!
마차가 멈췄다.
**
…제국의 북부 끝에는 마경과의 경계를 나누는 대장벽이 길게 늘어서 있으며, 전략적 요충지마다 요새와 함께 워프게이트가 건설되어 있다.
또한, 워프게이트가 마족들에게 점령당할 것을 우려하여, 오로지 일방통행으로만 이용할 수 있으며, 한 번 가동될 때마다 소요 비용은 천문학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철암(鐵巖)으로 향하는 이동 수단은 도보일 수밖에 없었다.
파견 병력의 구성은 테일러가의 정예 병사 한 개 소대. 또한 기사 둘을 포함하여 마법사와 정령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마차의 옆면에는 테일러 백작가를 상징하는 칠흑의 방패가 그려져 있었고, 가장 선두와 후미에는 기수들이 테일러가의 행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어디 소속인지 밝히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었다.
우선 철암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설치된 관문을 별다른 절차 없이 지나갈 수 있으며, 습격과 같은 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테일러 백작가를 건드릴 만큼 간 큰 놈들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마수라니….'
숲 안쪽에서 낮은 괴성과 함께 고약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나는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다 왼손을 들어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모두 잠시 대기하도록!"
그러자 옆에 있던 클리프가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답하려는 순간,
-크르르…
마수의 괴성이 낮게 울려 퍼졌다.
7화 습격(1)
서늘한 바람결에 숲의 나무들이 바르르 떨었다.
마수의 낮은 괴성과 악취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고, 숲 안쪽에는 불길한 보랏빛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궤적안」의 발현이었다.
"…마수다."
"마수… 말입니까?"
우선 마족은 아니었다.
마족이란 사실상 인간과 비슷한 존재.
이따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거나, 짐승 같은 울음을 흘리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흡사 지성이라도 갖춘 듯 숲 안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아마 우두머리쯤 되는 개체가 존재하거나, 통솔하는 흑마법사가 있단 뜻이었다.
그때, 어느덧 마차에서 내린 릴리아와 레이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방금 얘기는 들었느니라. 저 숲에 마수가 있는 것 같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릴리아는 두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온몸에 뇌전을 감은 늑대 한 마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늑대는 나를 한 번 바라보곤 갸웃거리더니 릴리아를 향해 머리를 비비적대었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구나. 숲 안쪽에 마수는 물론, 흑마법사도 있다고 하는데… 확실친 않다."
릴리아의 말에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쥐고 있는 병장기가 서로 부딪히며 불길한 소음이 일어났다.
-마, 마수라니...
마수는 그 종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하급 개체라 할지라도 성벽도 없이 일반 병사가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테일러의 정예병력. 처음 접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 집단 전에선 크게 밀리진 않을 것이다.
사기만 되찾는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었다.
그때 바스락거리며 기척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전투 준비"
**
긴장감 속에서 병사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짧지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숲의 끝에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의 살점이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곳곳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시각적으로도, 후각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몰골이었다.
'언데드로군.'
게임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놈들이지만, 실제로 두 눈으로 보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외형만으로 압도당하는 느낌.
허나, 이곳에 모인 병력은 모두 테일러가의 정예들. 공포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지만, 결코 물러서는 이는 없었다.
클리프는 말에 탄 채 병사들 앞에서 검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은빛의 갑주와 마나를 머금어 새하얀 광휘를 뿜어내는 검.
그야말로 기사의 전형.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에는 충분했다.
"위대한 테일러 백작가의 광영(光榮)을 위하여!"
클리프의 외침과 함께 마수들과 테일러가의 병력이 일제히 충돌했다.
콰앙-!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지독한 괴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시야가 걷히자 전황이 눈에 들어왔다. 마수들은 넝마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피해는 방패가 약간 찌그러지는 것에 그쳤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느낀 모양인지, 병사들은 평소 훈련받은 대로 철저하게 2인 1조로 움직이며 마수들을 상대했다.
특히 기사의 활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일 검에 한 마리씩.
마나를 머금은 기사의 검에 언데드 마수의 끈적한 핏방울과, 썩은 살점들이 폭우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기엔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이들은 언데드니까.
게임에서는 재생 속도가 빠른 정도에서 그쳤지만, 그게 만약 현실이 되면 어떠할지.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불쾌하군.'
언데드의 재생을 직관한 나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살점들과 피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뭉쳤다. 마치 새로 반죽을 빚듯 팔이 뻗어 나오고, 다리가 형성되었다.
이윽고 머리까지 완전히 재생된 마수가 괴성을 토해냈다.
-크르륵...
물론 언데드라 할지언정 한계는 존재했다. 몇 번이고 파괴되고, 또 파괴되다 보면 재생이 불가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걸 알고 있다고 한들, 당장 눈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세상이 하얘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포는 쉽게 번지지.'
역시나 언데드의 재생을 직관한 병사들은 표정이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움직임이 굳어갔다.
재생을 방지하기 위해선 불꽃으로 시체를 태워버리거나, 신성력의 힘이 필요했다.
-파지지직!
이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릴리아의 중급 정령 '카르스타'는 벼락을 동원해 정화하고 있었다.
허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레이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법은 준비되었나?"
"주, 준비되었어요."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 레이나가 언데드가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4위계
현상개변(現像改變)
전장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일정한 기류로 레이나에게 몰려들었다.
[크림슨 플레어(Crimson flare)]
마수의 시체에서부터 조금씩 튀어 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이내 전신을 휘감으며 하늘로 용솟음쳤다.
일시적으로 주위의 풍경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언데드를 정화하는 화염.
매캐한 탄내와 함께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체는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압도적인 마법의 위용 앞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인게임 3D 그래픽으로만 바라보던 마법을 실제로 바라본 감상은 뭐랄까.
'낭만'이 있었다.
레이나의 크림슨 플레어는 오로지 '마수'만을 겨냥하여 아군에겐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은 채 정화해나갔다.
그 순간, 숲 안쪽에서 불길한 보랏빛의 마나가 한점으로 응집되고 있는 게 보였다.
'흑마법사?'
마수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니 직접 전장에 개입할 생각으로 보였다.
'아마 목표는…'
레이나겠지.
레이나는 크림슨 플레어를 발현시킨 반동 때문인지, 반쯤 탈진해서 쓰러진 상태였으며 기사들은 남은 언데드들을 소탕 중이었다. 릴리아 역시 기력이 빠진 상태.
이대로 두면 반드시 죽을 것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레이나가 죽는다면 미래의 '재해' 중 하나가 소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과연 마법을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을 떠나서.
'레이나'라는 카드를 버리는 것은 꽤 아쉬운 일이다. 목숨을 구해 빚을 달아두고, 인연을 맺어 둔다면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이윽고,
거대한 하나의 보랏빛의 창이 숲에서부터 레이나를 향해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
레이나 에일로버.
그녀는 18세의 나이에 4위계에 오른 아카데미 마법부의 촉망 받는 인재 중 한 명이었다.
특기는 원소계 마법 '화염'
그런 그녀가 워프 게이트 수리를 위해 파견된 것은, 순전히 테일러 백작가가 후원하는 학생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요청은 합리적이었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워프게이트의 마력석을 교체하고 술식만 새로 그려 넣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다섯 번째 장벽 철암(鐵巖)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타난 언데드 마수.
썩어서 흘러내리는 살점과 구더기 탓에, 제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으으...."
레이나는 속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레이나님! 어서 후방으로!"
심지어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마수를 막아내며 보호해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언데드를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들은 역천(逆天)의 존재이자, 불멸을 꿈꾸는 자들의 마수이기에.
완전히 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마력만 공급된다면 언제든 부활이 가능한 족속들이었다.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이곳에서 마법사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레이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그러모아 언데드를 불태워버릴 화염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을 완성했을 때, 에반 테일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마법은?"
"주, 준비되었어요."
이윽고, 마법이 발현되자, 그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타오르는 언데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고고해 보였고, 눈빛은 무가치한 것들을 바라보는 듯 깊었다.
마치 이 격전의 결말을 알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잠시 후 불꽃이 사그라들고, 마력 탈진으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에반 테일러의 웅혼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해라."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보랏빛의 마창(魔槍)이 선명하게 보였다.
"흑암의 창?!"
병사들이 방패를 든 채 자신의 앞을 일제히 가로막았다.
척-!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었음에도, 눈을 질끈 감은 채 방패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일반 병사들로는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이는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을 자초할 것이었다.
6위계 마법인 흑암의 창은 온전히 물리력만으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아, 안돼! 피해야...!'
그렇게 외쳐야 하는데 공포에 몸이 굳어버린 탓인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에반 테일러가 도약하여 병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
고오오오오-!
주변의 공기가 에반을 중심으로 진동하듯 부르르 떨었다. 마력의 흐름이 에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흐드러지고.
순백의 색으로 찬연하게 검기가 솟아올랐다.
에반은 한 손으로 검을 늘어뜨린 채 날아오는 흑암의 창을 고고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기의 다발이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엮이며 그물의 형상으로 날아온 마법을 감싸 안았고,
카각—! 카가가각—!
검기에 마법이 가로막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창은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점차 그 빛이 희미해졌다.
실로 압도적인 무위.
그건 검에 관해 무지한 레이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닌지,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던 클리프의 표정 역시 믿기 힘든 듯 눈을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에반은 천천히 한 호흡을 내쉰 다음, 레이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에반은 레이나의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네."
"다행이군요. 누님과 함께 뒷정리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어디 가시나요?"
"흑마법사를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반은 등을 돌렸다. 넓고 듬직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위태로워 보였다.
6위계 마법사는 자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괴물이기에, 에반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찰 것이었다.
잠깐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정리하고, 말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아...."
이미 에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8화 습격(2)
헤르만 페겔라인.
그는 본격적으로 고위 마법사라 불리는 6위계의 흑마법사이자, 불멸학파(不滅學派)의 간부였다.
'놀랍군. 흑암의 창을 아무 피해도 없이 정면에서 막아낼 줄이야.'
평범한 기사였다면 결코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과연 검술 명가라 불리는 테일러 가문의 직계다운 실력이었다.
만약 헤르만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더라면,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헌데... 이상하군.'
보고 받은 바에 따르면, 저 검사는 테일러 가의 장남 '카일 테일러'임에 분명했다. 검으로 마법을 막아내는 기예를 보이기 위해선 '검기'가 우선되어야 하니까.
그의 신중한 성격상 최대한 정면 승부는 피하고 후퇴하여 지원을 기다릴 줄 알았거늘, 그대로 들이받는 바람에 애꿎은 언데드만 잃었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했으니....'
비록 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으나, 그건 후일을 도모해도 될 일.
자신이 해야 할 임무는 그저 워프 게이트의 수리를 지연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이 임무만 훌륭히 해낸다면 불멸학의 원류에 대해 기록되어있는 '네크로노미콘'을 건네받기로 약속받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마법은 이 지긋지긋한 정체기를 거쳐 한 단계 더 진보할 터.
헤르만은 기분 좋은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없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전장에서 가공할 무위를 보여주던 검사.
카일 테일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콰득—! 콰드드득—!
혹시 모를 위협에 펼쳐두었던 마법 방어막이 짓이겨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허리 부근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졌다.
헤르만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다잡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살피니,
청년이라기엔 아직은 조금 앳된 얼굴의 소년.
카일 테일러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
**
레이나를 구하기 전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는 다짐과 달리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에반 테일러'의 성격이 무모한 행위에 거부하는 듯했지만, 나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날아오는 흑암의 창에 정면으로 맞섰다.
막을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나,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이는 내가 '에반 테일러'가 아닌 '이지훈'이라는 증명이며, 0과 1의 숫자 따위로 이루어진 코드의 성격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오기이기도 했으며.
이 임무의 키(Key)가 '레이나'라는 속물적인 이유와 빚을 달아둬야겠다는 생각까지 겹쳐진 결과였다.
내가 던진 배팅은 스스로의 목숨.
다시 생각해도 과감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숲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붉은 아지랑이를 보고 진입했다.
「악당의 직감」은 악역의 현 상태를 색으로 판별하는 것.
녀석에게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소름 끼치도록 선연한 붉은색이었다. 단순히 '붉다'라는 색상 값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재해'라는 단어가 마치 실체화된 듯한 기분.
릴리아도, 레이나도 푸른색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태로 오롯이 악역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하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에반'의 행보가 바뀌며 새롭게 등장한 악역이거나, 주인공의 서사가 시작되기 전에 퇴장할.
이른바 프리퀄 속의 악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으나, 내버려 두면 후일 큰 후환이 되거나 거대한 재해가 되어 닥쳐올 것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안 페이지는 아직 등장도 하기 전이니....'
결국, 내가 막아야만 했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흑마법사가 말을 걸어왔다.
"소문과 많이 다르군."
"…무슨 뜻이지?"
"알려진 것에 비해 신중하지 못하고…"
그 말과 함께 놈으로부터 검은색의 기류가 바람과 함께 모여들었다.
"멍청하군."
마법 발현의 전조.
레이나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빠른 영창이었으나.
「궤적안」을 발현시켜 마법이 노리는 위치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몸을 뒤틀어 피한 후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까드드득—!
검이 방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반탄력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저렸다.
'처음엔 그저 운이었군.'
아마 여기까지 내가 찾아오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역시, 6위계 마법사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냉정을 되찾았다.
레이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기력을 소모했고, 기습을 위해 무리해서 움직였다.
거리를 벌린 채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마법사와 기사의 전투.
게임에서도 이 둘의 전투는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5위계 이하의 마법사와 검기를 다루는 기사가 맞붙는다면 보통 기사에게 유리하지만, 이게 역전되는 구간이 있었다.
6위계.
이때부터 마법사는 마안(魔眼)이라고 불리는 눈을 개안하여, 마법의 구현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또한, 단순한 검기만으로는 그들의 방벽을 쉽사리 가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쓰러트릴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로브 자락이 거칠게 펄럭이며, 막대한 양의 마력이 집중되었다.
피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격.
나는 「궤적안」을 극도로 발현시켰다.
세계에 다시 한번 색채가 입혀지고, 이지러진다. 본질적으로 「궤적안」은 세상 만물을 흐름과 결을 읽어내는 것.
그건 마법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마법이란 곧 술식에 의해 재구성된 마력의 집합체.
결국, 핵심이 되는 부분만 갈라낼 수 있다면,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었다.
과도한 집중 탓에 두 눈에서 뜨끈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코피가 흘러내렸다.
불길해 보이는 검은 불꽃이 세상을 불태울 듯 몸집을 불려 나갔다.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과 미세한 마력의 파편들이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경고! 궤적안(軌跡眼)을 계속해서 유지할 경우, 치명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
과부화된 뇌와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나, 감지 않았으며,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선은 보아야 했다.
그래야만 마법을 갈라낼 수 있을 터이니.
[세계의 근원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특성 '독해력(讀解力)'이 발동합니다.]
[특성 '궤적안(軌跡眼)'을 '독해력(讀解力)'이 보조합니다.]
[사용자의 재능이 초기 설정값에 비해 뛰어납니다.]
[특성 '독해력(讀解力)'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
- 「독해력(讀解力)」 -
- 등급 : A+
- 설명 :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차원의 개념일수록 해석에 패널티가 부여됩니다.
================================
어느덧 흑마법사가 구현시킨 검은 불꽃이 코앞이었다.
동요하지 않았다.
뚝뚝.
흘러내리던 핏방울들은 모두 증발하였고.
검은 불꽃을 이루고 있는 술식의 '코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극도로 압축시킨 검기를 '코어'를 향해 찔러 넣었다.
꽈드드드득-!
조금 저항하는 듯했으나, 결국 흑마법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코어를 꿰뚫었다. 불꽃이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날렸다.
'후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검으로 마법을 막아내는 것이 아닌 갈라버리는 기예를 선보이자, 흑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며 노성을 토해냈다.
"무, 무슨!"
놈이 당황한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나는 코어를 가속 시키며 다시 한번 짓쳐 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고, 마나가 전신으로 뻗어 나가자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는 흑마법사에게 접근함과 동시에 극도로 압축된 마나를 검에 불어넣었다.
검기가 백색을 넘어 화염의 형상으로 타올랐다.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체력 소진 속도가 빨라집니다.]
'...'
이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끝내야겠군.'
사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마치, 불꽃과도 같이 이글거리는 검기가 흑마법사의 마법 방어막을 거칠게 뜯어냈고.
까드드득―!
녀석의 왼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크아아악!!"
녀석의 비명이 숲속에 메아리치며 되돌아왔다. 나는 일그러진 마법사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말했다.
"묻겠다. 누가 시킨 짓이지?"
"멍청하군. 내가 그걸..."
시간이 촉박했기에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이번에는 오른쪽 팔을 잘라냈다.
서걱-!
숲에 다시 한번 녀석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말 말할 생각이 없나?"
녀석은 대답 대신 광소를 내뱉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언뜻 귀기마저 느껴졌다.
"크… 크하하하! 카일 테일러, 생각보다 더 대단하고, 또 섬뜩한 놈이었군."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살해.'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손이라도 덜덜 떨릴 줄 알았으나 오히려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
애당초 무리해서라도 숲에 들어온 것은 흑마법사를 여기서 제거할 생각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녀석의 웃음이 뚝 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뭐?"
화악-!
그 말과 함께 녀석이 차고 있던 목걸이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솟아올랐다.
이내, 놈의 형상이 입자 단위처럼 잘게 쪼개지며 흐릿해졌다.
"!!!"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으나, 애꿎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베지 못했나?'
그건 아니었다.
분명 손끝에 걸린 감각이 있었다.
검에도 끈적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흑마법사이자, 반쯤 언데드에 가까워 보이는 육체.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흑마법사는 나를 카일로 착각하고 있었다.
'흠….'
일이 좀 이상하게 흘러갔다.
'뭐, 상관없겠지.'
흑마법사가 품고 돌아간 원한의 대상이 내가 아닌 카일이라면. 그로 인해 양패구상(兩敗俱傷)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군.'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바닥에 쓰러져 눈이 감겨오는 와중 멀리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발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죽겠군....'
[무리한 전투로 인해 탈진 상태에 빠져듭니다.]
[경고 : 충분한 휴식이 없을 시 부정 특성 「저질체력」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업적 : 검으로 마법을 가르는 기예를 선보였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새로운 특성 : 불완전한 화열검(火熱劍)이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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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화열검(火熱劍)」 -
- 등급 : B
- 설명 : 마력이 극도로 압축되어 검기에 불꽃의 속성이 부여되었다. 부정한 것들에 대하여 상성 우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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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언데드 마수의 잔당 소탕이 끝나자 릴리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패트릭, 그대는 부상자를 수습하거라, 또한 부상이 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모두 따라오도록. 혹시 레이나 양도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네?"
"아무래도 머저리 놈이 걱정되는군요."
"아, 네. 넵!"
릴리아의 요청에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 역시 홀로 숲으로 들어간 에반이 걱정되던 차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있었을 테니까.
아무리 에반 테일러가 뛰어난 검사라 할지라도 상대는 고위 마법사였다.
단순히 마법을 한 번 막아내는 게 아닌, 정면승부라면 에반 테일러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법에 결국은 쓰러지고 말 테니까.
레이나 역시 마법사였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발...'
큰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레이나는 일행들과 함께 숲으로 진입했다.
사악한 마력의 잔향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흑마법에 적중당해 검게 죽어 있는 나무들과 검기에 의해 난자되어있는 바위들이 보였다.
격전의 흔적을 살펴보다 레이나의 두 눈이 점점 커지다 마지막엔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정확하게 어떤 마법인지 알아낼 순 없지만, 남아 있는 마력의 흔적만으로도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했다.
고위 마법이 시전 되었으리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지만.
'마법을... 파괴했어?'
분명 완성되었던 마법이 파괴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건 복잡한 술식의 가장 핵심을 파악해서 정확하게 그 지점을 꿰뚫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이 날아오는 찰나의 순간에 그걸 파악한다고?
이론상으로나 가능하지,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충격에 휩싸여 있는 사이, 정령과 대화를 나누던 릴리아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100m 지점만 더 들어가면 될 것 같구나."
일행들은 혹시 모를 언데드 마수의 출현을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의 소음. 그리고 발소리만이 적막한 숲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3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반 테일러가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릴리아가 다급히 달려가 에반의 상태를 살폈다.
항상 진중해 보이던 릴리아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머저리! 머저리! 눈을 떠보거라! 괘, 괜찮은 것이냐?"
"진정하십시오. 상태를 살피겠습니다."
클리프가 흥분한 릴리아를 떼어낸 뒤, 에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잠시 후.
클리프가 안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신 건 아닙니다. 다만, 무리한 모양인지 탈진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릴리아는 호들갑을 떨었던 게 무안했던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한 다음, 아까와 같은 침착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물었다.
"에반과 싸운 흑마법사의 시체는 찾지 못했느냐?"
"근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쓰러져 있던 에반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9화 이이제이[以夷制夷(1)]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리자, 뭔가 부드러운 게 잡혔다.
"...!!"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흑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잠시 후 눈에 들어오는 얼굴.
릴리아였다.
"일어났느냐?"
"...누님?"
"머저리, 계속 누워있거라. 꽤 무리한 듯하니."
"아닙니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니, 구토감과 함께 탈력감이 몰려왔다.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고, 텅 비어버린 코어 때문인지 무기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마차의 벽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이틀간 눈을 뜨지 않았느니라."
"이틀."
"클리프 경의 말에 의하면 탈진이라더구나. 영지로 보내려다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머저리 네 녀석에게 처음으로 맡긴 임무가 아니더냐."
"아... 감사합니다."
"가만히 있어 보거라."
릴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말끝마다 '머저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 치곤 제법 따뜻했고,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미열이 있는 것 같구나."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부상자는 없습니까?"
내 말에 릴리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다. 패트릭 경이 부상자를 수습해서 영지로 귀환했느니라. 다행히 중상자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확실히 중상자가 없다는 건 다행이었으나, 흑마법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에 대한 정보도 없고, 지금 이 시기에 갑작스레 습격이 일어난 것도 왠지 석연치 않았다.
어쩌면 철암(鐵巖)에서 일어난 일이, 우연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6위계의 고위 마법사라 할지라도, 감히 혼자서 테일러 백작가를 적대하는 무리수를 두진 않았을 테니까.
아마 흑마법사의 뒤엔 어떤 조직이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짐작 가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확신이 아닌 의심에 불과했다.
'놓친 게 아쉽군.'
놈이 원한을 가진 채 도망쳤다.
다행히 그 원한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카일 테일러.
이 세계에 빙의하여, 카일 테일러를 처음 보았던 날을 되짚어 보았다. 그땐 분명 「악당의 직감」에 아무런 표식이 뜨지 않았었다.
단련된 기사이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특성조차 속일 만큼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이유일 수도 있었다.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카일' 만의 '특별한 특성' 따위가 존재할 수도.
하지만 원작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나는 알고 있다.
쌍둥이 형.
카일 테일러가 얼마나 여우 같은 놈인지를.
겉으로는 겸손한 명문가의 자제를 연기하지만, 그 본질은 탐욕에 가득 찬 인간.
인간을 갈아 넣은 영약을 먹으며 힘을 키우고, 음지에서 키운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다.
어떤 의미로는 마경의 마족들보다 골치 아픈 놈이 '카일 테일러'다.
그러니, 흑마법사와 카일이 서로 충돌하여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은 더없이 좋은 그림이었다.
비록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이제이(以夷制夷)인가....'
그렇게 생각을 잠시 정리하자, 가만히 있던 레이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지독히 내향적인 성격인 모양이었다.
정말 이 어린 마법사가 '재앙'이 될만한 이가 맞는 건지.
그렇다기엔 너무 순박해 보이지 않는가.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구한 것은 순전히 '스스로를 위해서였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분명 나의 선택은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기보단,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허나, 나는 필요를 감추고 오로지 선의만을 내세웠다. 그래야만 내가 레이나에게 빚을 지워둘 수 있을 터이니.
물론 조금 양심에 찔리기는 했다.
그런 생각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뭔가 불안한 듯 손톱을 짓씹고 있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따로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아... 이건 확실하진 않은데요."
"...?"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 마탑에서 지명수배가 내려왔어요. 아무래도 습격한 흑마법사는 그 사람이 아닐까 해서....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요."
"혹시 그자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헤, 헤르만 페겔라인이요."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네임드급 악역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던 추측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흑마법사는 원작의 프리퀄에서 언급된 '첫 번째 재해'와 관련된 악역이 아닐까.
"그렇군요. 혹시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더 있습니까?"
"불멸학파의 흑마법사라는 것과... 원래는 마탑에서 키메라를 연구했다고 들었어요."
레이나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릴리아도 거들었다.
"내 생각 역시 레이나 양과 같단다. 나름 유명한 녀석이다. 그쪽 업계에선 미치광이라고도 불렸고. 하긴, 그런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감히 우리 가문을 적대하겠느냐?"
"...확실히."
불멸학파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이름은 제법 거창하지만, 결국 흑마법사들의 집단이었다.
그릇된 영생을 꿈꾸는 자들.
아직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인 듯싶지만, 이들은 추후 북부를 위협하는 오악(五惡) 중 하나로 성장한다.
카일 테일러가 물밑에서 일어나는 위협이라면, 이들은 표면에 드러나는 위협.
'헤르만, 헤르만이라... 역시 주의할 필요가 있겠군.'
**
제도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사교 회장 '아슬란의 성'
서로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기 위해 안달인 이곳에서, 카일 테일러는 단연 주인공이었다.
검술 명가 테일러 백작가의 장남일 뿐만 아니라, 성격과 외모. 그리고 본신의 능력까지 모두 갖춘 인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카일 테일러의 주변에는 귀족 영애들이 끊이질 않았다. 다들 어떻게든 말 한 번, 아니 시선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중 금발 벽안에 새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의 행동에 일부는 인상을 찡그리며 나름의 불만을 토로했지만, 직접적으로 뭐라 말을 하지는 못하고 길을 터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애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카일 공자님."
"아, 반갑습니다. 에일린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일의 인사에 에일린은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절 기억해 주시는군요."
"어떻게 에일린 영애처럼 아름다운 분을 잊겠습니까. 저야말로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간 평안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번 추천해 주신 「아슬란 전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답니다. 생(生)을 바쳐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기사라니. 너무 낭만적이었어요. 책을 읽고 나니 이 장소도 색다르게 느껴지네요."
카일은 자신의 금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고쳐 올리곤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하하,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군요. 혹시나 취향에 안 맞는다면 어쩌나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고, 따뜻했답니다. 혹시 또 추천할만한 문학 작품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카일은 귀족 영애와 대화하는 것이 무료하고, 따분해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 무의미할 것 같은 시간 역시, 추후 자신의 평판으로 돌아오리라는 걸 잘 아는 사내였으니까.
귀족들의 사교계란 그런 것이었다.
철저하게 가면을 쓴 채, 필요한 인맥을 만들고 친목을 도모하는 곳.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 일레시아 공작가의 에일린 영애 역시, 그러한 의도가 깔려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동생분께서 플로리스 백작가와 약혼식을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그게...."
카일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에반과의 파혼 절차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카일이 난처한 듯한 표정을 보이자, 에일린 영애는 굳이 더 캐묻지 않고 대화 화제를 돌렸다.
"곤란하다면 굳이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사실, 그보다 전 카일님에게 관심이 많으니까요. 혹시 카일님은 생각 없으세요?"
하고 싶은 말은 감추긴 했으나, 상당히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카일은 늘 짓던 미소와 함께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저는 혼인을 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고요."
"어머, 역시 거절인가요? 좀 아쉽네요. 나름대로 용기 내어 물어본 건데."
카일이 살짝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자, 에일린은 말을 이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것 같네요. 이러다간 다른 영애분들께 미운털이 잔뜩 박힐 텐데.... 우리 다음에 또 뵈어요. 아! 그리고."
에일린 영애는 고혹적으로 웃고선, 카일의 귀에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기혼단(氣魂團) 같은 것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건 사람의 정신을 망가트리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에일린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무수한 귀족들이 카일에게 말을 걸어왔다.
- 카일님, '검기 발현'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비결 같은 게 있습니까?
-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 폴른 가문의 레이츠라고 합니다. 언제 한 번 대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단순한 아부부터.
주제도 모른 채 감히 대련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카일의 귀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에일린 영애가 마지막에 했던 말만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자신이 기혼단을 복용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신의 심복과 거래처. 그 외엔 없었으므로, 도무지 의심 가는 이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괜히 귀족들의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팠다.
환기가 필요하다고 느낀 카일은, 주변에 몰려와 있는 귀족들에게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홀의 2층에 올라 테라스로 나가자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켜곤 품속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들이켜고,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죽여야 하나?'
아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암살을 시도라도 하기 위해선 6위계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필요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를 보낸다고 할지라도, 혼자서 제국의 마도 명가인 일레시아 공작가의 보안을 뚫을 순 없을 테니까.
머릿속에 마법사와 뛰어난 암살자 리스트들이 떠다녔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성공 확률이 낮은 도박에 투자하는 건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암살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었다.
'후...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기혼단(氣魂團)을 복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에게 남겨진 건 파멸뿐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재료로 하여 가공된 영약이니까.
그러한 리스크가 있음에도 지금까지 꾸준히 복용해 왔던 것은, 부족한 자신의 성취를 채워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굳이 공공연하게 알리지 않고, 귓속말로 조용히 말한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우선은 대화를 다시 해보아야 했다.
약점을 쥔 채 꼭두각시처럼 다루려는 수작일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일지도 모르니.
예를 들면 아까 말을 꺼냈던 혼인이라던가.
'혹시 모르니 미리 암살자를 포섭 정도는 해놔야겠군.'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 전 마탑에서 지명수배가 내려왔다던 6위계 마법사, 헤르만 페겔라인을 떠올렸다.
'후후, 에일린 영애. 당신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달빛이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카일이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0화 이이제이[以夷制夷(2)]